#44화. 좋은 주인
#44화.
나는 앞에 놓인 영약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뜻밖의 대단한 횡재였다. 이런 행운이 또 있을까.
저런 훌륭한 영약이, 그것도 넝쿨째로 굴러 들어오다니.
하지만 어째서인지 도통 저 영약들로 손이 가질 않았다. 속는 셈 치고 팔을 조금 내뻗기만 한다면 저 귀한것들을 모두 수중에 넣을 수 있음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경계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상선과 갈등이 있던 케아드로 시 의원을 암살한 공적이 있긴 하지만, 상선의 소속으로 스카웃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만한 양의 영약들을 곧바로 내어준다라.
심지어 당가와 척을 진 것을 알면서도 나를 굳이?
상선은 발두르에서 대기업이나 다름없는 집단이다. 이렇게까지 선물 공세를 퍼부어가며 영업해야 할 만큼 인재가 부족할 리는 없었다. 상선에 소속되어 일하고 싶은 실력자들이 시티에 한 트럭일 것이다.
그저 반나절 뒤에 떠나는 화물 운송용 캐리어로 밀항만 시켜준다면, 그대로 깔끔하게 마무리되었을 일이다.
그러니 이것은 단지 통이 큰 걸 넘어서 다른 노림수가 있다고 판단하는게 옳을 듯했다.
또한 성가신 일을 빨리 치워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행동하는 저 사내, 칼스의 기이한 태도가 눈에 계속 밟혔다.
나는 불현듯, 저자가 언제까지 저런 무뚝뚝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그렇기에 한번 미친 척 당차게 물었다. 다만 나름대로 정중한 어투이긴 했다.
"네 개는 너무 적은데. 더 못 줍니까?"
그러자 그는 쥐고있던 펜을 탁, 내려놓고는 안경을 벗었다. 업무가 과중한지 내내 피곤한 표정의 그가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리며 냉막하게 말했다.
"얼마나 필요한데? 주면 흡수는 할 수 있고?"
"······."
설마설마 했는데. 조금 놀랐다. 아니, 많이 놀랐다.
더 달라는 이유조차 묻지 않고 금방 내어줄 기세다.
이미 저 네 개의 목함만 따져봐도 엄청난 가치가 있다. 그런데 저런 영약들을 정말로 더 내어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고작 말 몇 마디에?
역시나 이상하다.
그렇기에 나는, 못 받아도 상관없다는 심정으로 통 크게 질렀다.
"한 여덟 개 정도면—"
"갖다줘."
숨 돌릴 틈도 없는 승낙.
딸칵-
실제로 그의 비서는 즉각 네 개의 목함을 추가로 들고 와선 능숙하게 열어 보였다.
이번에도 호두알 크기의 영약들에서 청량한 향이 사방팔방으로 솟구치며 나의 욕심을 부추겼다. 의도야 어찌 되었건 목구멍에 침이 마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제 내 앞에 놓인 목함은 총 여덟 개.
'미쳤군.'
세 달간 정크타운 밑바닥에서 개처럼 구르며 얻은 에센스를 전부 합쳐봐야 이 영약 두 알을 먹는 것만도 못 할 텐데, 그런 영약이 무려 여덟 알.
그러나.
내게 이 정도로 큰 호의를 베풀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저 칼스라는 자는 못해도 상선의 핵심 임원급은 되어 보이는데, 그가 무슨 이유로 나를 불렀는가 하는 의문은 아직 풀릴 기미가 없었다.
"여덟 개다. 더는 없어."
저 피곤해보이는 인상으로 보아하니, 더 이상 나와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다 무릅쓰고서라도 입 안에서만 맴돌던 말을 밖으로 꺼냈다.
"제가 이걸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한 의문이었다.
"안 받겠다라······?"
"예."
"아무래도, 너는 내 말의 행간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군."
"······."
그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친씨아를 조용히 바라봤으나, 그녀는 어색하게 눈을 피할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슬슬 재수없는 일에 휘말릴 것 같은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우두둑-
직장인이라면 고질병 하나쯤은 달고 사는 목과 허리 관절에서 시원한 소리가 울려펴졌다. 그제야 조금 살만하다는 듯, 숨을 깊게 내쉰 칼스의 입이 나지막이 열렸다.
"내가 하라고 하면, 너는 그냥 '예' 하고 따르면 되는 거야."
"······."
"발할라로 갈지, 상선에서 일할지 네게 결정을 맡긴다는 뜻이 아니었다는 말이지."
일말의 여지도 없는 완벽한 협박.
하지만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누가 보면 커피라도 한잔 같이 마시러 나가자는 줄 알았을 것이다. 피곤에 찌든 그의 입에서 나지막이 나온 협박과 평온한 낯빛은 서로 어우러지지 않아 상당한 이질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거 가져가서 너 다 먹어. 네가 곧 힘 써줘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
아.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 여덟 알의 영약들은 독을 가득 뿌린 성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 얘기로군.
나를 발할라로 밀항시켜주는 선택지는 저들의 머릿속에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아마 나를 어떻게든 상선의 사냥개로써 써먹을 계획을 진작에 세워놓은 듯했다.
이 훌륭한 영약들을 죄다 처먹고 나면 다음번엔 과연 누구를 죽여야 할까. 시의원이 아니라 시장이라도 죽이라고 할 셈인가.
'씨발놈들. 도대체 적당히를 모르는군.'
부아가 치밀었다. 당장 검을 뽑아 친씨아를 베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이것은 흡사 돈까스를 먹으러 가자고 해놓고선 치과로 데리고 온 격이기에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듣기로, 네 가지 조건을 걸었다던데."
그쯤 칼스는 다시금 입을 열더니, 내가 친씨아에게 했던 요구들을 조목조목 짚어나갔다.
"첫째, 발할라로 보내줄 것. 둘째 중급의 영약을 내어줄 것. 셋째 연방군의 무기들을 가져다줄 것. 마지막으로 토사구팽하지 말 것. 여기서 첫째를 빼고는 나머지는 모두 지켜졌다. 그리고 첫째 요구 조건에서 발할라행의 기한을 따로 명시하지 않았으니, 상선이 네게 어긴 것은 아직 단 하나도 없지. 내 말에 틀린 부분이 있나?"
궤변이다.
어지간한 놈이 내 앞에서 저 지랄을 떨었으면 망설임없이 주먹부터 날렸을 것이다. 그러나 힘 있는 자가 펼치는 궤변은, 궤변이라 할지라도 힘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힘 없는 소시민인 내가 궤변이라고 아무리 말해봐야 입만 아플 것이다.
"언제까지 다 망해서 쓰러진 오너 일가의 영애를 케어할 생각인가? 베이비 시터야? 그만한 실력이 있으면 걸맞는 대우를 받아야지. 마침 우리는 대우를 해줄 수 있는 입장이고."
달리 말하면, 뽑아 먹을 만큼 뽑아먹겠다는 얘기.
사람을 죽이는 재주가 있는 놈이 갈 곳도 없으니 영약을 먹여 소 잡는 칼로 제대로 한 번 써보겠다는 뜻이다.
다시 펜을 집어든 그가 단호히 축객령을 내렸다.
"영약들 가지고 내려가서 안내받아. 앞으로 네가 지낼 곳은 40층이다. 어지간해선 나를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 이만 가 봐."
칼스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안경을 쓰고 서류정리에 몰두했다. 커다란 사무실에는 종이가 사락사락 넘어가는 소리와 파일철이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곧, 그의 비서가 너무도 당연하단듯 다가와 목함 여덟 개를 능숙하게 챙겨들었다. 내가 몸을 돌려 나가는 것을 기다리는 듯 보였다.
"레반."
이제는 친씨아까지 합세해 어깨에 손을 얹고는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어색하게 눈웃음을 치더니, 짐짓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냥 일이 이렇게 됐어. 어차피 우리 서로 피차 숨기는 게 많았잖아? 상선에 들어와. 신분도 새로 하나 구해줄 테니까. 당가로부터 지켜주는건 장담 못 해도 네 능력이면 돈은 얼마든 벌 수 있어. 상행에 따라 나서면 비행도 얼마든 하고 다른 시티도 원하는 대로 갈 수 있을걸?"
가관이 따로 없었다.
저게 사실이라고 쳐도, 나중이 되면 또 말을 바꿔먹겠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연신 벌어지는 나의 입매 사이로, 헛웃음이 피식 새어나왔다.
"막말로 레반 정도면 우리 상선에서도 꽤 높은 곳까지 갈 수 있어. 칼스 말대로 언제까지 그 여자를 상전처럼 모시고 다닐 거야? 솔직해지자. 대체 뭐하러 어렵게 가려고······."
친씨아가 뭐라 주절대며 말을 더 늘어놓았지만, 더 이상 귀담아듣지는 않았다.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 늘어놓는 개소리인 것은 둘째 치고, 지금까지 그럭저럭 잘 참아오던 나의 인내심이 동나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귀를 닫고 우두커니 서서 저 칼스라는 사내와 내 격차를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명확히 답이 나왔는데, 저놈을 어찌저찌 때려눕힌다고 해도 이 빌딩에서 말짱히 걸어 나갈 수는 없을 듯했다. 이곳은 상선 소유의 빌딩이었다.
후회가 막심했다. 아힘사를 여기에 데리고 들어왔어야했다. 정 안되면 방패막이로 쓸 루돌프놈이라도 데리고 들어왔어야 했다.
"하—"
이제는 언 선생의 부적도, 아힘사도 없고 뷔에탕의 마력을 더 내보이는 것도 육신에 부담이 가중되어 무리다. 차, 포 다 떼고 얼마나 깽판을 칠 수 있을까.
이런저런 걱정을 하다보니 슬슬 정신이 불안정해질 조짐이 찾아왔다. 한쪽 눈이 제멋대로 마구 껌뻑이며 세상이 까맣게 점멸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의 오랜 경험상 정신병이 단단히 도질 전조 증상이 확실했다. 제정신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마 여기서 조금 더 지나면 필시 병세가 도질 것이다. 다짜고짜 사람을 마구 썰어버릴 수도 있고, 갑자기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는 기행을 벌일지도 모른다. 정신병이 도졌을 때의 나는, 평소처럼 넉넉한 사내가 아니기에.
그래서 나는 정신병자의 등신같은 발악으로 생을 끝내느니, 그나마 정신이 멀쩡할 때 칼을 휘두르기로 했다.
스르릉—
결단을 내리자마자 검을 뽑았다. 공교롭게도 친씨아가 구해다 준 10만 크레딧짜리 검이었는데, 친씨아는 뽑혀 나온 검을 보자마자 무언가 예감을 했는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레반, 진정해. 이런다고 아무것도 안 달라지는 거 알지?"
저 양복쟁이 칼스놈을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친씨아의 목 정도는 베고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선천진기라도 다 뽑아쓰면 뭐 어떻게든 굴러가지 않겠나.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이 기맥과 혈도를 타고 용솟음쳤다.
탓-
단숨에 땅을 박차고 신형을 쏘아냈다. 그리고 눈 한 번 깜빡할 새, 나의 검 끝은 친씨아의 목덜미를 짓누르고 있었다. 선혈이 길게 흘러나왔다.
그렇게, 그년의 목을 베어버리려던 그때였다.
쫘악—쫘악—
저편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칼스가 대뜸 들고있던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더니, 들고있던 펜까지 멀리 집어 던졌다. 그는 뒤이어 장식품인 줄로만 알았던 테이블의 고풍스러운 유선 전화기에 손을 얹었다.
그 유선 전화기는 첫 번째 생의 한국에서도 거의 못 보던 고전적인 물건이었는데, 그는 전화기의 다이얼을 끼릭끼릭 조작하더니, 돌연 누군가와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 공 이사님. 저 칼스입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
— 아닙니다. 대 사천당가를 저같은 놈이 걱정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반 바이오의 일로 본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그저 일의 진척이 궁금해 큰 결례를 무릅쓰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사천당가.
친씨아의 피부를 베고 들어가던 검이 그대로 멈추었다.
— 아, 여즉 도망치고 있답니까? 관련해 듣기로는 장부를 조작해서 억 단위 크레딧을 빼돌렸다는 얘기까지 돌던데······화를 자초하는군요. 나중에 어찌 감당을 하려고.
— 예, 아무튼 조만간 모임에서 뵙겠습니다.
철커덕.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사천당가의 누군가와 통화를 끝낸 칼스가 눈짓하자, 그의 비서가 다가와 내려놓았던 목함 절반을 다시 수거해갔다.
청량한 향을 뿜어내고 있던 목함은 여덟 개에서 단숨에 그 절반인 네 개가 되었다.
칼스가 콧잔등 끝까지 내려온 안경을 고쳐 쓰자, 안경의 렌즈가 사무실의 조명을 받아 번쩍거렸다. 그는 또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게 줄 때 받으라고 했잖아."
이윽고, 칼스가 비서를 향해 명령했다.
"밑에 있는 그 꼬맹이, 이리로 올려."
저 입에서 나온 그 꼬맹이는 밑에서 대기하고 있을 레나를 말함이었다. 뭐 레나를 여기로 데리고 와서 고문이라도 할 셈인가. 아니면 당가의 손에 넘기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헌데 그게 뭐 어떻다고?
"그래. 너 멋대로 하렴. 이제 나도 멋대로 하련다."
"!"
나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당장 친씨아를 죽여버릴 생각으로 검을 쥔 손에 힘을 더 실었다. 이제 저자와 대화로 무언가를 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구구궁—
사무실의 거대한 문이 육중한 소음을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
저 문 밖에 있는 자는 칼스의 초대를 받지 않은 손님인지, 그조차도 의아한 얼굴로 문쪽을 바라봤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커다란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칠흑같은 정장을 입은 큰 키의 중년이었다.
손목과 손가락에 탑재된 군용 펄스건과 각종 사출무기. 그리고 일곱 개의 별 마크와 홀로그램으로 띄워져있는 공무원증.
그는 놀랍게도 내가 일전에 한 번 보았던 자였다.
연방 집행관, 유크 루베르겐.
반 바이오가 당가의 공세에 무너지던 그날, 레나의 집무실을 찾아와 내게 단전에 내공을 쌓는 취미가 있냐고 물었던 그 거물.
"집행관님? 아니······."
시종일관 냉막하고 고압적이던 칼스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벌떡 일어나더니, 급히 와이셔츠의 옷매무새와 흘러내린 머리를 가다듬었다.
육중한 문이 천천히 닫히고 나자.
무겁고도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나와 목이 잘릴 위기의 친씨아, 그리고 칼스는 지금 벌어진 상황을 살피기에 바빴다. 저기 들어온 연방 집행관은 사전에 합의 되지 않은 방문자임에 틀림 없었다.
'뭐지?'
아무튼 칼스와 집행관의 사이에서 내가 친씨아의 목에 칼을 대고 끼어있는 모양새가 되었는데, 그 상황이 상당히 묘했다.
칼스는 영문을 몰라 쩔쩔매고 있었고, 연방 집행관은 아무런 말 없이 궐련만 뻑뻑 태우고 있었다. 표정이 없는 인간이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레반!"
"······?"
그런데 거기서 더욱 놀라운 것은, 연방 집행관의 커다란 등짝 뒤에서 레나의 얼굴이 쏘옥 튀어나온 것이었다.
내가 당황한 듯 보이자 레나가 종종걸음으로 걸어오더니, 친씨아의 목에 붙어있던 검을 붙잡아 조심히 내렸다. 그리곤 자기 쪽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가.
결국 나는 레나의 손길에 이끌려 연방 집행관의 뒤쪽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사태 속에서, 제일 먼저 정신줄을 붙잡고 말문을 튼 이는 칼스였다. 나를 상대할 때와는 달리 굽실대는 행동거지가 실로 일품이었다.
"루베르겐 집행관님께서 여기까지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그러자 집행관이 궐련의 연기를 후욱 내뿜으며 답했다. 그 조용한 목소리에는 항거할 수 없는 위압이 담겨있었다.
"칼스."
"···예, 집행관님."
"불과 몇 달 전에 나를 보지 않았었나."
"예, 발두르행 '오딘 스테이션' 에서 우연히 뵀었죠. 그때가 아마 반 바이오 컴퍼니에 연방법원 판결문을 통지하러 가시던 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어쩐 일로 이곳에 걸음하셨는지요. 무슨 문제라도······"
그때, 공손한 칼스의 대답은 안중에도 없는 눈치의 집행관이 뒤를 돌아보고 섰다.
그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곧, 허리를 반쯤 굽힌 집행관의 어두컴컴한 눈동자가 나를 찬찬히 꿰뚫어 보았다.
집행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무형의 위압감이 육신을 강하게 짓눌렀다. 호흡이 가빠지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 마치 송곳 수백 개가 폐부를 찔러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 시종 주제에, 좋은 주인을 두었군. ]
집행관의 전음이 정신을 비집고 들어왔다.
적대적인 기색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어째서 이런 거물이 내 앞에 있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저 집행관의 뒤에 망부석처럼 선 채,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45화. 진정한 사내
#45화.
반 바이오 컴퍼니가 당가의 습격을 받기 전.
— 커흑.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이 떠나던 발걸음을 돌려 반 회장의 집무실로 다시 돌아왔을 때, 반 회장은 이미 죽을 각오를 마친 뒤였다. 분수에 맞지 않는 고등급 에센스를 무작정 들이킨 덕에 마나 회로가 폭주할 조짐을 보였다.
반 회장은 되돌아온 루베르겐 집행관을 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 하하, 제가 들었던 소문이 아주 틀리진 않았나 봅니다.
"······."
반 회장의 말대로였다.
연방 집행관 유크 루베르겐은, 어떠한 이유로 거액의 크레딧이 필요했다. 연방 은행에서도 이미 크레딧을 빌릴 만큼 빌려 3억 크레딧이 넘는 천문학적인 빚이 유크 루베르겐의 앞으로 잡혀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루베르겐이 필요로 하는 크레딧에는 크게 못미쳤다.
— 다행이군요. 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나마 지킬 수 있어서.
눈에 실핏줄이 다 터진 반 회장은, 체내에서 날뛰는 마력을 힘겹게 누르며 유크 루베르겐의 발치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하나는 '블러디 에센스' 였고 또 다른 하나는 암호화된 은행 계좌 칩이었다. 보통 흔히 쓰이는 연방 은행이 아닌 발할라 소재 마법계 은행의 계좌 칩.
알게 모르게 마법계 기업 인사들의 비자금 창구로 쓰이는 은행이었는데, 그 계좌에는 당가와 소송을 벌이던 반 회장이 예기치 않은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빼돌려둔 거액의 크레딧이 고이 잠들어있었다.
— 1억 크레딧······조금 넘겠죠. 계좌를 여는 암호는 제 딸들이 알고 있고, 레나는 지금 이 본사의 집무실에 있을 겁니다. 오늘 반 바이오의 횡령범인 반 회장은 여기서 죽습니다. 그러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반 회장의 마지막 유언과 더불어 에센스와 계좌 칩을 챙겨넣은 루베르겐이 반 회장의 차녀가 있다는 집무실로 향하자, 잠이 부족한 듯 퀭한 눈을 가지고 있는 앳된 여인과 그 여인의 시종이 눈에 들어왔다.
여인 쪽이 반 회장의 여식이었다.
헌데, 여인의 옆에 있는 시종에게서 무엇인가 미세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는 금세 여인의 시종이 내공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비록 그 내공의 양은 보잘것 없었으나, 마법계 기업의 시종이 단전에 내공을 쌓는다는 것은 실로 수상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루베르겐이 넌지시 물었다.
"저 아가씨 시종인가? 언제부터?"
— 올해로 10년째입니다.
"그렇군."
—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여인의 시종은 루베르겐이 기세를 흘리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평범하게 수발을 드는 시종 따위가 아님이 자명했다. 아마도 어떤 목적이 있는 자들이 오래 전부터 곁에 심어둔 간자인 듯했다.
그리고 '목적이 있는 자들' 의 실체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그 윤곽이 명확했다.
사천당가 코퍼레이션. 지금 반 바이오 컴퍼니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쪽으로 오는 자들이 마침 무림계의 메가콥이니, 지금의 상황이 넉넉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이놈이 당가의 끄나풀이라면, 바로는 못 데려가겠군.'
그 시종을 당가에서 심어둔 끄나풀로 치부한 루베르겐이 지체없이 몸을 돌렸다.
그래도 반 회장이 부탁한 여식의 얼굴은 확인했으니, 이제부터 벌어질 사태가 끝나고 나면 혼란을 틈타 저 레나라는 여인을 빼 올 생각으로.
"당가도 참 지독하군. 도착하면 적당히들 하라고 전해주시게."
그리하여 루베르겐이 떠나고 한 시간 뒤.
반 바이오의 본사 사옥으로 어두운 그림자들이 길게 드리워졌다. 이내 미혼산이 살포되고 강맹한 기운을 지닌 당가의 무인들이 속속 반 바이오 본사로 진입해 들어갔다.
그때 루베르겐 집행관은 반 바이오 본사 근처의 카페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당가의 행사가 적당히 멎을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주위가 조용해졌다.
예민하게 날이 선 루베르겐의 기감이 카페 앞 거리에 세워진 차량으로 향했다. 그러자 뒷자리의 차창이 느긋하게 내려가더니, 왼쪽 눈을 의안으로 대체한 이가 그 얼굴을 훤히 드러냈다.
의안을 한 그는 사천당가 코퍼레이션의 당녹운(唐綠雲)이라는 사람으로, 이 발두르에 있는 사천당가 지부를 총괄하는 당문의 노고수이자 무림계의 명숙이었다. 드넓고 시끄럽던 거리는 음소거라도 한 듯 조용했고, 당녹운은 정중하게 동행을 권했다.
— 당가의 일로 연방의 영웅을 먼 길 오시게 했습니다. 제가 모시지요.
당녹운의 권유는 단지 오딘에서 발두르까지 반 바이오의 끝을 통보하러 찾아온 연방 집행관에 대한 예의였으나, 하필 때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루베르겐은 굉음이 들려오는 반 바이오 컴퍼니의 본사를 한 번 보고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리 거절할 명분이 떠오르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반 회장의 유언을 지킬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과 며칠 뒤.
오너 일가인 한 여인과 그 시종이 당가의 행사중에 탈출했다는 소식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당가의 미혼산이 가득한 그곳에서 무슨 재간으로 빠져나갔는지 루베르겐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날을 기점으로 반 회장의 여식을 찾기위해 발두르에 머물렀으나, 발두르 시티의 1억 가까운 사람 중 도망친 그 여인만을 골라 찾아낼 재주까지는 없었다. 암호를 알아낼 방도가 사라졌으니, 거액이 들어있는 발할라 은행의 계좌도 그의 주머니 속에서만 잠들어 있었다.
이후 하릴없이 시간은 흘러, 석 달이 훌쩍 지난 어느 날이었다.
발두르 중심업무지구와 가까운 구역에서 꽤 강한 마법사가 난동을 피우는 사태가 벌어졌다.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루베르겐 집행관이 현장에 당도했을 때, 사태는 이미 끝이 나 있었다. 그곳에는 혼이 나간 7레벨의 마법사 하나와 기이하고 강대한 마력, 심후한 법력의 기운들이 제멋대로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루베르겐은, 그 마법사로부터 뜻하지 않은 소득을 얻었다.
— ······제가 모시는 케아드로 시 의원께서 이 괴한들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추적 중에 힘을 과하게 썼고, 이건 그 흉수들의 인상착의입니다.
그자가 흉수들의 인상착의라며 건넨 것은, 놀랍게도 그간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여식의 그 시종이 분명했다.
집행관은 즉각 마력의 잔향을 따라 움직였다.
비정상적으로 기이하고 강대한 그 마력은 시티의 서쪽 외곽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내 루베르겐은 마력의 잔향을 쫓아간 장소에서 반 회장의 여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 작달막한 총포상의 앞에서 검은 밴에 오른 반가 여식의 무리는, 발두르 시티 스테이션을 지나 화물 선적항에 이르러서야 멈추어 섰다.
반 회장의 여식, 레나가 상선이 소유한 빌딩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루베르겐 집행관은 곧장 뒤를 따라 들어가 마침내 그 여인과 마주할 수 있었다.
— 누, 누구세요? 어허, 함부로 다가오지 마십쇼. 그러다 크게 다쳐 이 양반아.
여인의 곁을 지키는 시종은 집행관이 아는 시종이 아닌, 다른 이로 바뀌어있었다. 이전의 그 시종보다 눈빛이 흐릿하고 멍청해 보이는, 콧잔등에 빨갛고 이상한 문신을 해놓은 사내였다.
[ 죽은 반 회장이 보냈으니 따르면 된다. 발할라에 너희 자매의 처지를 돌봐줄 자를 내가 알고 있다. 그곳으로 보내주마. ]
어찌 되었건 전음으로 짧게 상황을 설명한 루베르겐이 귀찮게 들러붙는 시종을 걷어낸 뒤 반 회장의 여식을 끌고 빌딩을 빠져나가려는데, 갑자기 그 여식이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며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닌가.
빼애애액-
— 안 돼요-! 무슨 얘기인지는 알겠는데 저 혼자는 못 가요!! 위에 레반이 남아 있다구요!!!
"······."
— 내려줘요! 안 가도 되니까 그냥 내려주세요!! 어차피 여기서 발할라로 보내주기로 했단 말예요!!! 아니면 레반도 같이—!!!
그러면서 그 이전의 시종을 꼭 데려가야 한다고 우겨대는데, 천하의 루베르겐도 그 난리통에 도저히 고집을 꺾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루베르겐 집행관은 레나와 함께 최상층으로 가는 승강기에 올랐다. 그가 지끈대는 머리를 저으며 두꺼운 궐련을 빼어 물었다.
* * *
[ 시종 주제에, 좋은 주인을 두었군. ]
그리고, 그 결과가 당금의 상황이었다.
집행관이 생각했던 것과 최상층의 상황은 많이 달랐다. 반 회장 여식의 전 시종, 그러니까 레반이라는 이름의 사내가 칼을 들고 길길이 날뛰며 흉흉한 살기를 내비치고 있었는데, 조금 늦게 도착했다면 사달이 났을 것이었다.
'이상하군. 저자가 그때 그 시종이 맞는가?'
그런데 레반이라는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어딘가 괴상한 면이 있었다. 이전에 반 바이오 본사에서 보았을 때와는 얼굴만 비슷하지, 아예 다른 인간이 서 있었다.
어떻게 고작 석 달만에 저런 힘을 얻었는지 호기심이 들었으나, 일단은 뒤로 미룬 루베르겐 집행관이 레반에게서 등을 돌려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칼스와 마주보았다.
"집행관님이 어쩐 일이신지······."
칼스의 무력은 레반이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반열이었으나, 그런 그도 집행관의 앞에서는 목소리가 바닥으로 기어들어갔다.
레반의 앞에서 당당했던 그 상선의 임원은 이제 여기에 없었다.
왜냐하면, 연방 집행관은 그 연방의 장군들과도 견줄 수 있는 힘을 보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장벽 밖의 시체를 상대하느냐, 아니면 장벽 안의 인간을 상대하느냐에 따라 갈렸는데 연방의 집행관은 인간, 그중에서도 기업인에게 철퇴를 내리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인간과의 전투에 특화된 이들이었고, 이 발두르 시티 전체로 따져도 집행관과 일대일로 맞설 수 있는 인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더해서 연방 집행관은 연방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사법권을 부여받는데, 기업인에게 잘못이 있다면 설사 죽인다고 해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제아무리 상선의 임원이라도 집행관의 앞에 서면 순한 양이 되기 마련이었다.
'대체 저 인간이 여길 왜 찾아왔지···?'
칼스는 집행관의 행동이 평소와 달리 어딘가 심상치 않은듯 하자, 이미 근육이 뻣뻣이 굳어 있었다. 연방 집행관은 기업인에게 저승사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때, 궐련을 피우던 집행관의 입이 열렸다.
"헌데 이 영약들은 왜 이리 꺼내 놓았나?"
"아 집행관님. 그건······."
우적-
루베르겐 집행관은 순식간에 목함들의 앞으로 가더니, 열려있는 목함에서 영약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던져넣었다. 당황한 칼스가 채 말릴 새도 없었다.
그런데 그 영약을 몇 번 우물우물 씹어대던 집행관이 돌연, 입 안에서 자그마하고 불그스름한 애벌레 한 마리를 뱉어냈다.
쌀알보다도 작은 크기의 애벌레.
그것은 고독(蠱毒)이라 불리는 벌레의 유충이었는데, 한 번 몸속에 들어가면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고 내장을 야금야금 갉아 먹다가 결국에는 숙주의 장을 다 파먹어 죽게 만드는 당문의 독충이었다.
집행관이 사색이 된 칼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꽤 재미있는 장난을 치고 있었군."
"······."
그리고 그 황당한 광경을 뒤에서 목도한 레반의 표정은, 트럭에 밟힌 메주떡마냥 형편없이 찌그러지고 구겨지는 중이었다.
상선은 영약 속에 숨겨넣은 저 고독을 통해 자신을 휘하에 두고 부리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저런 처죽일 놈들, 지겹다 이제.'
레반도 당가의 고독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고독이 한 번 몸에 들어가면 당가의 해독을 받든지, 아니면 재주껏 알아서 잘 살아남아 보던지 둘 중 하나.
하지만 고독에 당한 후 당가의 해독없이 알아서 잘 살아남는 이가 몇이나 되겠나? 천 명중 한 명이 나올까 말까였다. 그러니 그 수법이 실로 음험하고 악랄하다 하여 중원에서는 거의 마공과도 비슷한 취급을 받는 게 바로 당문의 고독.
만약 저 영약들을 좋다고 덥썩 받아 처먹었으면 뱃속에 들어찰 고독이 자그마치 여덟 마리였다는 뜻 아닌가?
그때 문득 케아드로 의원의 분신에게 죽었던 두 명의 암살자가 레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마 그들의 뱃속을 파헤쳐보면 꾸물대는 저 고독이 숨어있을 것이다.
전뇌 컨트롤 칩을 박아 넣어 사람을 조종하는 세상이기에 고독 정도는 있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 없다지만, 설마 그걸 영약에 넣어 숨겨두었을 줄이야. 레반은 상선의 치가 떨리는 꼼수에 질려 이제 더 놀라기를 그만두었다.
"저, 그런데 집행관님."
칼스는 이제 누구보다 공손한 자세가 되었다.
그의 직감으로 보아 루베르겐 집행관은 당가로부터 도망치는 저 레반이라는 놈과 무슨 연관이 있어보였다. 그렇기에 감히 레반을 상선의 사냥개로 써먹겠다는 마음은 싹 사라지고 약간의 의문만이 남은 상태였다.
곧, 그의 입이 조심스레 열렸다.
"실례가 아니라면 저들과 어떤 관계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 순간이었다.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집행관의 전신에서 서릿발같은 기세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막대한 냉기가 장내에 휘몰아치며 집행관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러자 혼비백산한 칼스가 고양이 앞의 시궁쥐처럼 바짝 몸을 움츠렸다.
"시, 실언이었나 봅니다."
곧, 들고있는 고독의 유충을 두 손가락으로 눌러 터뜨린 집행관이 칼스에게 넌지시 물었다.
"요즘도 당가와 가까이 지내나?"
"······예."
"너무 가까이 두고 지내지는 말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상선의 화물 운송선을 통해 이들을 발할라로 보내주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그 말이 맞나?"
집행관의 질문에 칼스가 의아한 얼굴을 하려다가 금방 의문을 접고 대답을 내놓았다.
"맞습니다."
"나도 타야겠군. 마침 발할라에 일이 있으니."
"······루베르겐 집행관님께서 저희 화물 운송선에 말입니까?"
"왜, 싫은가?"
"······."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칼스의 의문은 끝까지 풀리지 않았으나, 감히 집행관의 말에 더 토를 달지는 못했다.
* * *
연방 집행관이 모습을 드러낸 이후, 반나절이 쏜살처럼 지나갔다.
레나로부터 그 사정을 전해 들은 나는 천운이 따랐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한술 더 떠서 그 대단한 연방 집행관이 발할라 시티로 가는 길까지 동행을 하겠단다.
이제 내가 상선의 눈치를 보는게 아니라, 상선이 이쪽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구구궁—
뒤를 돌아보자, 화물용 컨테이너들을 옮기던 중장비들이 작업을 끝마치고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이 거대한 화물 운송용 캐리어가 이제 이륙할 준비를 마쳤다는 뜻. 연신 벼락치는 굉음이 하늘을 때리며 발두르의 땅을 벗어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광활한 발두르의 화물 선적장 위에서.
"너같은 년은 또 보기 힘들거다."
"······."
나는 눈앞에 나무토막처럼 서 있는 친씨아와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내가 칼로 내리눌렀던 그 목에는 이제 어렴풋한 흉터만이 남아있었다. 그 흉터를 슬쩍 어루어만지자 친씨아가 신경질적으로 내 손을 치며 뒤로 물러섰다.
어이가 없었다. 뒤통수 친 년이 도리어 성낸다더니.
그래도 연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는 실로 무지막지한 년이지만, 진정한 사내는 원수를 용서하는 법을 알고 있다."
"······."
"잘 살아라."
친씨아는 표정을 돌처럼 굳힌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 마음에 단단히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친씨아의 앞에서 보란듯이 박장대소를 터뜨린 뒤, 상선의 화물용 캐리어에 올랐다. 이미 레나와 루돌프, 아힘사와 집행관까지 탑승해 있었고 내가 이 캐리어에 오르는 마지막 손님이었다.
우르르릉—
이윽고, 후끈한 열기와 함께 화물 운송선의 육중한 거체가 지면에서 들고 일어났다. 폭풍과도 같은 바람과 함께 천지가 우르릉 흔들리며 주변의 건물들이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선의 빌딩 꼭대기가 눈 앞에 보일 때쯤인가.
무언가 손가락에 '툭툭'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꽈드득!
나는 그 순간, 와이어에 마력을 불어넣어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저 아래의 땅에서 이륙하는 화물선을 노려보던 어떤 여인의 목이 피분수를 뿜으며 떨어졌다.
고개를 슬쩍 내리자.
내 손가락 사이에는 가느다란 한 줄의 와이어가 화물선의 이륙 조명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찻집에서 묘령의 여인이 암살에 쓰던 그것이었다.
나는 그 실보다도 얇은 단분자 와이어를 허공으로 던져버리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정한 사내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하군.
조용히 앉아 명상을 하고 있자니 어느덧 드높고 고고하게 솟아있던 마천루들이 발밑에 구름처럼 내리깔렸다. 발두르 시티를 밝히는 불빛이 점점 작아지며 바늘과도 같은 크기로 변해갔다.
이 화물 운송선의 목적지는 마법사와 기사들의 땅.
발할라 시티였다.
#46화. 좋은 주인, 나쁜 주인
#46화.
발할라 시티행 화물 운송선.
그곳에서 우리가 각자 배정받은 2평 크기의 내실에는 침대, 탁자 하나와 접이식 의자, 작은 조명과 넷 단말기 충전용 콘센트뿐이었고 흔한 창문도 하나 없었다. 천장이 낮아 다 일어서면 고개를 펼 수도 없었다.
화물을 최대한 많이 싣기 위해 방의 크기를 줄인 설계.
심히 답답하고 운신이 불편했으며, 육중한 기체가 시도 때도 없이 덜컹대는 바람에 대가리가 천장과 혼연일체가 되어버리는 등, 오프로드용 지프보다도 탑승감이 별로였다.
레나는 그 엿같은 탑승감 덕에 불면증이 더욱 심해져 고생했지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가족인 루벤카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비행 첫날부터 지금까지 꽤 들떠있는 상태였다.
오늘은 이 화물 운송선이 발두르 시티에서 이륙한지 사흘째였는데, 평소처럼 내 방으로 찾아와 침대 위에 걸터앉은 레나가 괜히 걱정하는 얼굴로 말했다.
"레반, 혹시나 발할라에 도착했을 때······."
"루벤카가 진짜 팻말이라도 들고 나와 있을까봐 그러나?"
"만약 그렇더라도 걱정하지 마! 내가 나서서 잘 설득해볼게. 레반이 예전보다 많이 바뀌긴 했어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잖아. 그렇지?"
사흘간 가까이서 지켜보니, 레나는 지금도 내게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 유대감의 정도는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끈끈했다.
사실 그때 상선의 건물에서 그길로 나를 버리고 루베르겐 집행관과 먼 길을 떠났다 해도, 나는 어렵지 않게 현실을 받아 들였을텐데.
레나에게 레반이라는 존재는 열 살이라는 나이에 처음으로 얻은 시종이자 일종의 친구였다. 그렇기에 저러는 것인가. 아니면 그리 믿고 싶은 것인가.
나는 칼과 마법을 곁에 두고 산 덕에 여인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레나가 나에 대해 무슨 생각과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레반, 대답 안 해줄 거야?"
"그래. 뭐든 네 말이 맞다."
아무튼 그 유치한 물음에 짧게 대답해주자, 레나는 그제서야 헤헤거리며 모자란 사람처럼 웃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곧, 찌뿌둥한 몸을 풀며 복도로 나왔다. 복도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꽤 넓은 장소가 있었는데, 푹신한 의자에 앉아 투명한 창밖으로 외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루베르겐 집행관이 미리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이 여유로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허파부터 기가 찼다.
지금까지 저 인간은 방에만 처박혀있던 내 기감을 하루 종일 찔러대며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나는 심히 불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같은 시종놈을 왜 자꾸 부르십니까."
"얼굴 한 번 보기 힘들군."
이렇게나 거대한 화물 운송선을, 그것도 백 대 이상을 운용하는 상선의 임원을 말 몇 마디로 짓눌러버린 저 거물은, 수상한점 투성이인 나를 순순히 내버려 둘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륙한 뒤 이틀 정도는 전투 후의 내상을 수습해야 한다는 핑계로 어찌저찌 버텼지만, 언제까지고 그 변명이 통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여기는 피할 곳도 도망칠 곳도 없었다. 수천 미터 상공에 떠있는 화물 운송 캐리어 아니던가.
그렇기에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뭐가 그리 궁금하십니까?"
곧.
루베르겐 집행관은 허접한 내공만 겨우 가지고 있던 내가 단시간에 이만한 힘을 어떻게 얻었는지를 차근차근 물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뷔에탕의 마력과 언 선생의 법부적에 관련한 물음도 있었다. 비록 그 물음에 악의는 없어보였으나, 쉬이 대답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골치가 아팠다.
그런데 나를 그 질문의 늪에서 구해준 것은, 륭의 인격 메모리칩이었다.
머릿속으로 온갖 변명을 떠올리던 나는 말없이 주머니속에 있던 륭의 인격 메모리칩을 꺼내어 내밀었다. 다행히도 그것이 통했는지, 루베르겐 집행관은 이 메모리칩을 보자마자 흥미를 잃은 얼굴로 눈을 돌리더니 관심을 뚝 끊고는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너무도 기꺼웠다.
덜컥.
그때, 누군가 저편에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콧수염을 턱 밑까지 기르고 팔에 털이 숭숭 난 덩치의 사내였다.
"불편한 점은 따로 없으십니까?"
저 덩치는 이 화물 운송 캐리어의 책임자로, 다른 승무원들은 그를 함장이라고 불렀다. 가진 무력도 출중해서 적어도 완숙한 6레벨급은 되었다. 규격 외의 존재인 연방 집행관을 제외하면 이 운송 캐리어에서 가장 힘있는 자였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제게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함장은 수시로 루베르겐 집행관을 찾아와 불편함이 없는지를 직접 살폈다.
애초에 사람을 운송하는 게 아닌, 화물 운송용 캐리어인지라 내실의 상태가 열악했고 그것이 못내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집행관급의 거물이라면 늘 호화스러운 공무용 캐리어를 타고 다녔을 테니까.
함장은 집행관의 답이 없자, 잠시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비행 일정 말씀드리겠습니다."
집행관을 찾아온 함장은 외형에 어울리지 않는, 기상캐스터 수준의 정확한 발음으로 오늘의 비행 일정을 줄줄 읊었다.
"오늘 예정되어 있던 항로에 갑자기 돌풍이 들어서는 바람에 안전하게 로키 시티의 장벽 근방으로 우회해서 기동할 계획입니다. 로키 시티의 근방을 경유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최단 항로니 집행관님의 발할라 일정에 큰 차질은 없을 겁니다."
그러자 의자에 기대어있던 집행관은 고개만 가볍게 끄덕거렸다. 함장은 곧바로 머리를 꾸벅 숙여보이곤 이내 함실의 바깥으로 조용히 빠져나갔다.
나도 그를 따라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내가 향한 곳은, 캐리어의 상층 갑판이었다.
상층 갑판으로 나오면 어두운 하늘과 발밑으로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광활한 대지를 볼 수 있었는데, 저 광활한 대지는 인간이 표류하다 죽기 딱 좋은 땅이었다.
내가 갑판의 가장자리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자, 개미보다도 작은 점들이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점들은 죄다 좀비로 보였는데 이만한 높이에서 저렇게 보일 정도라면, 실제 크기가 인간보다 배는 클 것이었다.
눈에 마력을 집중하자, 시야에 들어온 놈들 가운데 가장 덩치가 큰 놈의 형체를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황소보다 다섯 배는 큰 몸집에 가느다란 팔 여섯 개로 몸을 지탱하며 땅을 짚어가며 기어다니는 좀비였다.
그 꼴이 징그러워 곧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캐리어의 갑판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괴상하게 생긴 날개가 달려있는 비행형의 좀비가 이따금씩 나타나는 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놈들은 캐리어가 비행하는 고도까지는 올라오지 못했지만, 그래도 꽤나 높이 날았다.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만큼 올라왔다 싶으면, 그 순간 캐리어의 옆면에 달린 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콰앙-!
대부분은 그 굉음을 듣고 멀리 도망쳤고, 재수없이 기관포에 적중당한 놈들은 폭죽 터지듯 산산조각나며 땅으로 추락했다.
캐리어는 그렇게 허공을 고고히 미끄러져 갔다.
이제 발할라 시티에 도착하기까지 나흘만을 남겨두었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듯했다. 어디까지나 무난한 비행이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로키 시티의 거대한 장벽이 저 멀리, 아주 어렴풋이 보이던 때.
우리가 타고 있는, 허공을 고고히 미끄러지며 비행하던 이 화물 캐리어에 무엇인가 커다란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구우우웅—
항로를 따라 멀쩡히 비행하던 캐리어의 고도가 갑자기 낮아지며 옆으로 크게 기울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캐리어 내에 선적해둔 화물 컨테이너들이 한쪽으로 우르르 쏠리며 상황이 순식간에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캐리어에 탑승한 모든 이들은 상층 갑판으로 나와 있었는데, 함장은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승무원들에게 마구 윽박을 질러대며 지금의 사태를 파악하려 동분서주하는 중이었다.
— 고도 계속 낮아지잖아! 땅바닥에 처박아서 다 끝장나기 전에 출력 최대로 올려!
— 추, 출력은 이미 최대치입니다. 몇 분 전부터 계속 최대였습니다.
— 뭐? 근데 왜 이래?
— 모, 모르겠습니다. 여기는 바람이 강하지도 않은데 대체······.
— 야이 씨발, 모르면 인생 끝나?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이후로 캐리어의 승무원들도 분주하게 갑판 위를 뛰어다녔지만 해결할 방법은 물론이고 원인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다들 하나같이 당황스러운 낯빛을 하고 있었는데, 상행 경험이 많은 그들도 처음 겪어보는 돌발사태가 분명했다.
와중에 비행 고도는 갈수록 더 낮아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점처럼 보였던 좀비들의 이목구비가 어느덧 뚜렷하게 보일 정도까지 낮아졌다. 이 기세라면 못해도 3분쯤 뒤에는 지상으로 고꾸라져 수많은 좀비들의 밥으로 전락할 것이 자명했다.
와중에, 나는 그런 광경의 한 발 뒤에서—
[ 어 디 가? ]
[ 나 보 러 오 는 거 아 니 었 어? ]
정신의 경계를 침범해 넘어오려는 뷔에탕의 진득한 마력을, 식은 땀을 뻘뻘 흘려가며 막아내는 중이었다. 등판에 새겨진 문신들이 인두로 지진듯 뜨거운 열기를 내며 타올랐다.
레나처럼 좋은 주인이 있으면, 이 년처럼 나쁜 주인도 있는 법.
"······."
저 승무원들이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운송용 캐리어 자체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니까.
이 캐리어는 지금 '끌려내려' 가는 중이라고 얘기하는게 정확하리라. 어떤 외력이 작용해 항공모함만큼 거대한 이 화물 운송용 캐리어를 지상쪽으로 끌어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 외력의 주인은 바로, 카스트라 뷔에탕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로키 시티의 장벽이 보일 때부터였나.
가슴이 막힌듯 심히 답답하고 뷔에탕의 문신이 있던 뒤통수와 등이 돌연 미친 듯이 간지러웠다. 나중에는 등과 뒤통수의 문신에서 뷔에탕의 마력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나더니, 내 정신을 어지러이 흔들어 놓을 정도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쯤 되면 눈치를 못 채기가 더 힘들었다.
마피아의 근거지인 로키 시티, 카스트라 뷔에탕, 그리고 뷔에탕의 저주 마법에 걸려있는 나.
그러니까.
로키 시티의 장벽 안, 어딘가에 있을 뷔에탕이 장난을 치고 있는 거다.
그런데 설마하니, 5km도 족히 넘어가는 장거리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외력의 행사가 가능할 줄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내 시야에는 저 멀리 로키 시티의 장벽 위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형체가 보였다.
그 형체는 팔다리를 흐느적 거리며 춤과도 비슷한 동작을 선보이는 중이었는데, 그 몸동작에서 시작된 기묘한 마력의 파장이 여기까지 전해져 왔다. 이 운송용 캐리어의 고도가 낮아지는 이유는, 아무래도 저 괴이한 형체와 연관이 있는듯 싶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여기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
아무것도 없었던 상층 갑판의 허공에서 루베르겐 집행관이 새하얀 연기를 후욱- 내뿜으며 유령처럼 나타났다.
철컥.
곧이어 루베르겐 집행관의 오른팔이 아힘사의 그것처럼 변환되더니, 손바닥 중간에서 그의 멀대같은 키보다도 기다란 포신이 곧게 솟아올랐다.
동시에 집행관은 피우던 궐련을 손에 쥐었다. 그러자 집행관의 전신에서 일어난 정순한 청록빛의 마력이 궐련으로 스며들었고, 청록빛을 내는 궐련이 돌연 포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윽고 잘게 진동하는 주변의 대기.
사아아아—
막대한 양의 기운이 포신의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다 한순간, 포신의 극단에서 번갯불과도 같이 밝은 전광이 솟구치며 청록색의 빛무리가 사출되었는데, 그로 인해 발생한 화염과 충격파가 캐리어의 단단한 중장갑을 찌그러뜨릴 정도였다.
청록색의 화염 꼬리를 단, 조금 전만 해도 '궐련이었던' 발사체가 대기를 정직하게 찢어발기며 가느다랗고 긴 일직선의 잔상을 남겼다.
그 발사체는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장벽 위에서 흐느적대며 춤추던 놈을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기이한 마력을 뿜어내던 놈은, 5km가 넘는 거리를 우습게 구겨버린 청록빛 궐련과 함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럼에도 끝이 아니었다.
루베르겐 집행관의 기다란 포신이 재차 꾸득거리며 변환되더니, 주변의 기운을 한꺼번에 잡아먹으며 거대하고 길다란 대검의 형상을 갖추었다.
그때.
팟-
찰나간, 집행관이 자리에서 증발하듯 사라졌다.
다음으로 그의 신형이 나타난 곳은 운송선의 후미였다.
눈이 멀어버릴 정도의 빛을 내는 집행관의 대검은 이미 누군가의 심장을 관통하고 있었는데, 얼굴을 뒤덮은 마나 문신만 아니었다면 필시 훤칠하게 생겼을 사내였다. 놈은 심장이 대검에 꿰뚫린 상태에서도 히죽 웃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흐. 음. ]
서걱.
놈은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집행관의 대검은 기다림이 없었다. 그는 괴상한 음성을 뱉는 놈을 가차없이 반으로 갈라버리곤 갑판 아래로 집어던져버렸다. 반쪽으로 잘려 떨어지는 놈의 아래로 피냄새를 맡은 좀비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었다.
동시에 뷔에탕의 마력을 버텨내고 있던 내 몸에 힘이 쭈욱 빠지며 뒤로 넘어갔다.
쿵-
"······."
잠시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집행관은 뷔에탕의 마력에 진탕 당해 쓰러진 나를 잠시 안쓰럽게 쳐다보나 싶다가, 별 말없이 갑판을 내려갔다.
상황 종료였다.
캐리어는 그 놈들이 뒈져버린 뒤로 무난하게 떠오르며 원래의 고도를 찾았다. 육안으로도 보이던 로키 시티의 장벽도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조금 뒤 정신을 부여잡고 일어난 나는, 저 밑에서 갈기갈기 찢겨 뜯어먹히는 그 놈을 보며 육포를 씹었다. 하지만 더럽게 짜기만 하지 맛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씹던 육포를 그냥 내던지고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발할라 시티에 도착하면, 저주 마법에 통달한 마법사부터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47화. 시티 발할라
#47화.
"보인다···!"
레나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빌어먹을 뷔에탕이 있는 로키 시티의 근방을 루베르겐 집행관의 힘으로 벗어난 이후에는 다행히 캐리어의 비행은 순탄했고, 나흘이라는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하여 현재.
정면의 기다란 지평선 너머로, 장대한 산맥 줄기가 서서히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야, 존나게 멋있긴 하네요. 제가 살다살다 발할라 시티를 다 와볼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호들갑 떠는 루돌프놈을 가볍게 무시한 채 멀리 있는 지평선을 바라봤다.
어둡고 광활한 대지 위. 천공을 찌를만큼 대단히 드높고, 지평선조차 가려버릴 만큼 거대한 산맥이 두 눈을 사로잡는다.
그것은 '세상의 지붕' 이라 불리우는 발할라 산맥이었다.
그리고 저 산맥의 밑둥에 장벽을 둘러쳐 만들어낸 도시이자 천혜의 요새가 바로 발할라 시티. 산맥이 워낙 거대해 발할라의 면적은 발두르의 열 배는 족히 되며, 저 곳에서 살아가는 인구만 8억 명 이상이었다.
루돌프놈은 도시에 올라온 촌놈처럼 연신 감탄을 머금었다.
"와 형님, 이거 발두르 시티랑은 비교가 안 되는데요? 진짜 말도 안 되게 넓네요."
그야, 발두르 시티는 발할라에 비하면 촌구석이니까.
내가 십 년간 살았던 인구 1억의 발두르 시티는 연방의 일곱 거대 도시 중 규모가 제일 작은 편이었다. 심지어 강력한 군벌과 세력들이 춘추전국시대처럼 실시간으로 땅따먹기 놀이를 하는 로키 시티보다도 도시 면적이 좁았다.
그에 비한다면 저 발할라는 대해(大海)와도 같다.
저 인구 8억짜리 거대 도시 안에, 발할라 산맥의 드높은 위용에 걸맞은 강자들이 대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나는 물끄러미 발할라 산맥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인구의 대부분이 몰려 살아갈 발할라 산맥의 아랫쪽 평탄면은 온갖 색의 빛깔들이 무지개처럼 뒤섞여 환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 위로, 해발 만 미터를 훌쩍 넘기는 산봉우리들은 마치 고고한 학처럼 만년설과 빙하의 줄기들로 새하얗게 뒤덮여있었다. 그 새하얀 만년설과 빙하들이 도시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반사하는 탓에, 산맥 전체에서 광이 나는듯한 착시를 불러 일으켰다.
저것은 흡사 어두운 망망대해에 솟아있는 등대 같았다. 드높은 발할라 산맥의 봉우리들은 장벽 안과 바깥의 세계를 가르는 하나의 등대였다.
실로 장관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상선의 캐리어는 부지런히 움직여 발할라 시티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크긴 크군."
거리가 좁혀질수록 끝을 모르고 높아지며 시야 전체를 가득 채워가는 산맥의 풍경.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이 내 발밑에 있는데도, 산맥의 봉우리 꼭대기는 이보다 한참 더 위에 있었다. 캐리어 상층 갑판에 있는 내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구우우웅—
어느 순간, 캐리어가 공중에 멈춰섰다.
내가 탄 상선 캐리어의 근처에는 발두르뿐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캐리어들이 꽤 많았다. 그들은 모두 발할라 시티 장벽을 보호하는 광역 마법진이 해제되길 기다리는 중으로 보였다.
발할라 시티의 광역 보호 마법진은 하루에 두 번, 한 시간가량 일부분 해제되어 다른 도시에서 온 캐리어들을 시티 안으로 들인다.
그 마법진이 해제될 때까지 화물 운송선과 작은 캐리어들이 속속 도착해 발할라 장벽 근방의 상공을 빽빽하게 메웠다.
약속된 시각이 되자, 장벽의 상공을 기점으로 보호 마법진 일부분이 해제되었다. 발할라 상공에 떠있던 캐리어들은 도착한 순서대로 발할라의 장벽 안으로 진입해 착륙했다.
— 게에에엑!
커다란 캐리어들이 착륙할 때 굉음이 여러 번 울렸는데, 아마도 그 때문인지 발할라 산맥의 어디선가 나타난 좀비들이 장벽 근처로 몰려들었다.
그 수가 못해도 수천 마리는 족히 되어 보였는데 소란이 점점 더 커지자 좀비들의 세력이 순식간에 불어났다. 시티의 장벽 바깥은 금세 좀비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어이구, 오늘은 좀 많이 몰렸네?"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그 흉흉한 광경에도 상선의 승무원들은 흔히 있었던 일이라는듯, 심드렁하게 코를 후비적거렸다. 사실 그리 강력한 좀비는 없었기에 내가 보아도 딱히 문제될 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쯤.
발할라의 장벽 안에서 허공을 날아오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풍기는 마력으로 볼 때 한명 한명이 7레벨급의 강력한 마법사들로 보였다. 이윽고 그들이 허공을 부유하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발할라의 상공이 마력의 파장으로 일렁였다.
화아아악—!
곧, 거대한 불길이 하늘에서부터 떨어지며 땅바닥을 해일처럼 덮쳤다. 위력을 보아하니 5위계 마법은 되어 보였는데, 축제 인파처럼 몰려들었던 좀비들은 거뭇한 잿더미가 되어 생을 마감했다.
당연하게도, 저레벨급의 좀비들은 감히 7레벨 마법사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여긴 7레벨 마법사들이 문지기를 하는군.'
그렇게 캐리어의 갑판에서 바싹 구워지는 좀비놈들을 구경하던 나는,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저리 허접한 놈들이야 어렵잖게 막는다지만, 이렇게 보호 마법진이 풀렸을 때에 강력한 좀비가 작정하고 처들어온다면 과연 막아낼 수가 있을까 하며.
마침 옆에 장벽 밖에서 백 년 가까운 시간을 방랑한 아힘사가 서 있었기에 내가 물었다.
"아힘사."
"네."
"밖에서 돌아다닐 때, 강력한 시체를 본 적도 있나? 예를 들면 저 7레벨 마법사들도 찜쪄먹을 정도로 강력한 놈들 말이야."
그러자 아힘사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힘을 가늠할 수 없는 시체를 마주친 적은 많았습니다. 개중 가장 강력한 개체는 7년전 어디선가 마주한 산보다 거대한 크기의 시체였습니다. 그 시체는 짐승의 형상을 한 시체군단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시체군단이 얼마 가지 않아 자리를 피했습니다. 도망쳤던 시체군단의 지휘관급 개체 몇 마리만 와도 저 마법사들은 상대가 되지 못할 겁니다."
"그래?"
"네."
나는 아힘사가 줄줄 늘어놓은 얘기를 듣고는 꽤 놀랐다.
생전 처음 듣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방금 전, 아힘사의 입에서 나온 그놈들은 연방에서도 고위험으로 분류해두었기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네임드 개체들이다.
산보다 거대한 놈이라면 분명 '파루무치' 일테고 강력한 짐승형 시체군단을 이끌고 다니는 놈이라면 아마 '악부' 겠지. 연방 정부에서 최소 9레벨 이상으로 분류해둔 네임드 개체. 그런데 그 둘이 전투를 벌였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만약 전투를 벌인 사실을 알았다면 기자들이 그런 뉴스를 놓칠 리가 없겠지. 그러니 이건 오로지 장벽 밖의 방랑자였던 아힘사만이 알고 있는 내용인 듯했다.
하기야 뭐···내가 그걸 안다고 해서 뭐 크게 달라지는 건 없지만.
아무튼 한 시간 뒤, 차례가 다가온 상선의 캐리어가 마침내 발할라 시티 안쪽로 진입했다. 우리는 무사히 착륙까지 마친 뒤 캐리어에서 하선했다. 도시의 고도가 높아 발두르보다 날씨가 서늘했다.
곧이어 선글라스를 쓴 로브 차림의 사내가 다가와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검역이 있겠습니다. 전부 가진 무기 내려놓고 격리 구역으로 이동하세요."
그는 가슴에 발할라 시티 관청의 마크를 달고 있는 6레벨급 마법사였다. 함장과 승무원들은 그의 말에 따라 익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나와 내 일행이 제자리에 멀뚱히 서있자 관청 마법사는 인상을 팍 구기며 위압적으로 다가왔는데, 아쉽게도 그 태도가 오래 가지는 못했다.
"!"
화물 캐리어에서 뒤늦게 내려선 루베르겐 집행관이 그 관청 마법사를 지그시 바라보자, 녀석은 눈에 띄게 당황하더니 금방 다른 선임 마법사를 불러왔다. 아까 전에 좀비들을 바싹 구워버리던 7레벨 마법사중 하나였다.
그 7레벨의 선임 마법사는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의 공무원증을 확인하자, 겸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 원래는 검역과 더불어 신분 확인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하나, 집행관님께서는 일행분들과 함께 곧장 통과해 나가셔도 됩니다.
결국 우리는 발할라 시티 입성의 필수 관문인 검역도 없이 발할라의 선적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연방 집행관이라는 명함의 후광은 실로 대단했다.
그렇게 선적장에서 아무일 없이 빠져나온 우리는, 앞서가는 집행관을 따라 근방의 소도시에 들어섰다.
루베르겐 집행관은 연방 정부 소속이지만 마법사이기도 하여, 그와 접점이 있는 발할라 시티의 마법계 인사에게 레나를 부탁할 계획이라는 말을 했다. 지금 우리는 그 마법계 인사가 있다는 곳으로 향하기 전, 하루 묵을 곳을 찾는 중이었다.
나는 그를 따라 이동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꼴을 보니 여기는 시티의 하류층들이 사는 구역이었다.
장벽 근처, 산맥 밑둥에 사는 발할라의 하층민들은 발두르의 외곽 주민들과 사실 별 다를 바 없었다. 술과 마약에 취해있는 이들은 물론이고 길거리에서 호객하는 섹스토이들도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발두르 시티보다 더욱 많았다.
원래 발할라 시티는 계층의 분간이 발두르보다도 뚜렷하여, 산맥의 아래쪽에 살수록 하층민이고 산맥의 위쪽에 살 수록 지위나 명망이 높은 고위급의 마법사, 혹은 가문이 좋거나 재산이 많은 자였다. 어지간한 업무지구나 중산층 이상의 거주지도 최소 해발고도 3천 미터 이상인 산맥의 중턱 부근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 발할라 시티의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산맥 위로 통하는 도로는 아무나 쓸 수 없다는 거였다.
관청의 허락받은 이들이나 신원이 확실한 기업의 사람들만 발할라의 산맥 위로 통하는 도로를 쓸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무인 택시에 오른 손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할라 시티는 산맥 위에 세워진 탓에 도로를 제외하면 경사가 가파른 산이나 절벽이었다. 그런데 잘 닦인 도로를 쓰지 않으면 저 깎아지른 듯한 경사를 어떻게 기어 올라가겠나.
그렇게 되니 산맥 밑둥에서 사는 주민들은 더더욱 위로 올라갈 일이 없었고, 평범한 이들이나 하류층은 평생토록 산맥의 중턱조차도 구경하지 못한다고 했다.
발두르는 적어도 택시를 타면 어디든 갈 수 있었는데 말이다.
어쩌면 정크타운 슬럼가에 처박혀있는 주민들보다도 더 불쌍한 이들이 발할라의 하층민들일지도 모르겠군.
잠시 뒤.
우리는 그나마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객점을 찾아 들어갔다. 거기서 크레딧을 적당히 지불하고 방 두 개를 얻었다. 1층이 음식점이고 2층이 모텔인 형태였는데, 우리는 1층에서 대충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 설산목 잎 달팽이들이랑 청수 도롱뇽이요.
곧, 내 앞에 꾸덕하고 징그러운 요리와 맥주가 놓였다.
이 객점의 주인은 이 음식물 쓰레기가 발할라의 전통요리라고 소개하며 자랑스레 내놓았다. 발할라 산맥의 달팽이와 도롱뇽은 개체수가 워낙 많아 아무리 많이 잡아먹어도 줄지 않는다던가?
어쨌든 그 맛은 예상했던대로 상당히 별로였다. 이런걸 더 처먹다간 필시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내가 식사를 그만 두었을 때, 루베르겐 집행관은 잠시 다녀와야 할 곳이 있다며 홀연히 사라졌다.
그 뒤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식사를 대충 마친 레나와 루돌프, 아힘사는 2층으로 올라갔고 나는 혼자 1층에 앉아 목구멍에 맥주를 부어 넣으며 주린 배를 채우고 있었다.
딸랑-
그때, 객점의 문이 열리고 찬바람과 함께 루베르겐 집행관이 돌아왔다. 아까전 집행관은 분명 단신으로 나갔으나 돌아온 지금은 단신이 아니었다.
그는 전신을 로브자락으로 꽁꽁 싸맨 여인 둘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 중 백금발의 긴 머리를 한 여인이 대뜸 내 옆으로 와서 앉더니, 뜨겁게 덥힌 맥주를 주문했다.
이윽고 그 백금발의 여인은, 내쪽으로 의자를 돌려 앉으며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미소가 실로 아름다운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시티 방송국의 얼굴마담을 해도 될 정도로, 그리고 어디가서 쉬이 보기 힘들 만큼 아름답고 매력적인 외형의 여인.
"······."
놀랍게도 그 여인은 내가 아주 잘 아는 얼굴이었다.
유일하게 남은 레나의 혈육, 잉그리드 반 루벤카.
그 흉악하고 악독한 년이, 루베르겐 집행관과 함께 들어와서는 내 앞에서 활짝 웃고 있었던 것이다.
"야, 되게 오랜만이다?"
#48화. 발할라 산맥의 마탑
#48화.
잉그리드 반 루벤카.
죽은 반 회장의 장녀이자,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
세간에 알려져 있기로는 6레벨 마법사이나, 실상은 벌써 7레벨의 벽을 돌파할 정도로 재능이 출중한 마법사. 그리고 자신의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자 동생인 레나를 집착하다시피 아끼고 사랑하지만, 나를 상대로는 유난히 성격이 악독하고 더러워지는 여인.
그런 루벤카는 지금, 매우 오랜만에 만난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루벤카를 데려온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은 또 어디론가 금세 사라져버렸기에, 나는 1층에 홀로 남아 루벤카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견뎌내야만 했다.
나는 조용히 맥주를 퍼마셨다. 그녀는 분명히 궁금한 게 많을 텐데도 당장은 별다른 물음이 없었고, 그저 옆에서 싱글생글 웃고만 있었다.
— 뜨거운 맥주를 시키는 사람은 또 난생처음이네.
그사이 루벤카가 주문한 맥주가 나왔는데, 김이 펄펄 나는 괴상한 맥주였다. 객점의 주인은 질린 얼굴로 맥주잔만 내려놓고 주방 안으로 사라졌다.
꿀꺽. 꿀꺽.
김 나는 맥주 한 병을 단숨에 들이켠 루벤카는 캬, 소리를 내며 입가를 닦더니, 이번에는 가느다란 검지 손가락으로 내 볼을 꾹 누르며 재차 입을 열었다.
꾸욱-
"야, 반갑다니까?"
"······."
루벤카의 미소는 쓸데없이 아름다웠다. 악독하기 그지없는 성정을 가진 저 여인에게는 실로 과분한 외모라고 생각하며, 나는 대답 없이 눈 앞의 맥주만 연신 들이켰다.
"만나니까 부끄러워? 영상으로는 말만 잘 하더니."
그러자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본 듯한 표정의 루벤카가 내 볼을 연신 꾹꾹 찔러댔다. 그녀의 팔을 덮고 있던 로브가 잠시 흘러내리자, 복잡한 마나 문신을 가득 채워둔 팔이 보였다.
도깨비의 얼굴처럼 생긴 문신과 잉어 문신이 인상적이었다.
"야, 야. 레반."
"······."
"야, 얘야. 맥주 아직 덜 마셨니? 안 들려?"
꾹-꾹-
루벤카는 내가 입을 열 때까지 찔러댈 기세였다.
그러다 보니, 지난 10년간 루반카에게 자행당한 일들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저 여자가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는 얼마나 행복했던 나날을 보냈는지 모른다.
"대답해."
그렇기에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꾸욱- 꾸욱-
"대답. 대답."
"······."
이 태생부터 못된 년을 어찌해야 하나.
별거 아닌 듯 해도 내겐 꽤 중대한 문제였다.
딱 봐도 시비를 걸지 못해 안달이 나있는데, 설렁설렁 넘겨보려 했다간 앞으로 더 귀찮게 굴 것이 눈에 훤했다.
"많이 컸네. 대답도 안하고."
아직 저 루벤카에게 레반이라는 놈은, 10년이나 레나의 수발을 들던 한낱 시종일 뿐인 듯했다. 감히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레나와 딱 붙어 지내는 덕에 괴롭히며 가지고 놀기 적당한 시종.
그때, 찰나간 머릿속에 들어온 마구니가 분탕질을 쳤다.
『 씨발, 칼로 담가버려. 솔직히 못 할 것도 없잖아. 』
『 실패하더라도 취해서 손이 미끄러졌다고 하면 봐줄지도 모르잖아. 여태까지 네가 저년한테 받았던 수치를 떠올려봐. 사내로서 그냥 눈감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인가 그게? 』
그래, 확실히 썅년이긴 하지.
나는 순간, 볼을 찔러대며 웃는 루벤카를 상선의 친씨아처럼 '용서' 해버릴까도 싶었다. 하지만 반 루벤카는 7레벨의 마법사. 주둥이가 험하고 행동이 싸가지가 없는데다 가벼워 보여서 그렇지, 내가 쉽게 때려눕힐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칼을 뽑는다면 우리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데, 아마 죽어 나가는 쪽은 십중팔구 내가 될 것이다.
나는 조용히 맥주를 들이키며 돌아가는 상황을 관망했다. 이 객점은 음식 맛은 더럽게 별로였지만 맥주맛은 나쁘지 않았다.
"오~멋있는 권총도 가지고 다니네~"
루벤카는 아무래도 내 반응이 시원치 않은듯 하자, 내 허리춤의 테크리볼버를 멋대로 뽑아 구경했다. 곧 차가운 총구가 내 관자놀이에 닿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걸 당기면······팡! 하고 나가는 거야? 궁금하다."
생글거리며 말하는 루벤카의 검지가 리볼버의 방아쇠에 들어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당겨버릴 듯 팽팽히 조여지는 손가락.
나는 루벤카 앞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궁금하면 한번 당겨 보든지."
"뭐야, 목소리 깔면서 분위기도 잡을 줄 알고. 옛날보다 확실히 멋있어졌네. 근데 옛날이 더 나았던 것 같은데?"
그 순간.
철컥.
옅은 진동이 리볼버의 총구를 통해 전해져왔다.
루벤카는 쏴보라는 내 말에 진짜로 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겨버린 것이다. 만약 내가 약실을 비워놓지 않았다면 필시 격발되었겠지.
"에이, 안 나가는데? 나는 이런걸 써 본적이 없어서 잘 몰라."
"······."
실망한 얼굴의 루벤카는 테크리볼버를 테이블에 대충 던져놓고 뜨거운 맥주를 다시 주문했다. 술기운이 오르면 이 지랄이 더욱 심해질 것을 알기에 나는 결국, 루벤카를 마주볼 수밖에 없었다.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해라. 지랄염병 그만 떨고."
"엇, 레반 너 화났어? 무섭게 왜 그래."
지금 루벤카는 일부러 능청스럽게 굴면서도 몰래 마력을 일으켜 내 몸 구석구석을 파악하고 있었다. 흡사 지렁이 수십 마리가 피부를 기어다니는 기분이었다.
곧, 루벤카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레반,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대답해줄래?"
"?"
"당가 새끼들 표적은 나랑 레나인데, 넌 대체 뭘 하겠답시고 아직도 여기 붙어 있는 거야? 발할라까지 잘 도망왔으면 이제 꺼져도 되지 않냐는 말이야. 혹시 집행관님이나 나한테 기대하는 거라도 있어?"
뜬금없이 허를 찌르는 루벤카의 질문.
나는 별 내색을 하지 않고 그 질문을 무시한 채 돌연 몸을 빙글 돌려 앉았다. 거기에는 루벤카만큼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 꼿꼿한 자세로 서있었다.
"반갑다 메리. 그간 나 없이도 잘 지냈나?"
"······."
메리는 무시당한 루벤카의 눈치를 보면서도 나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가끔 쓸데없이 외설적인 농담을 던져대서 그렇지, 실상 모든 면에서 루벤카보다 월등히 나은 녀석이었다.
메리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레반,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고맙다."
내가 눈을 옆으로 슬쩍 돌리자.
개무시당한 루벤카의 표정이 굳어가는 것이 보였다.
'슬슬 못 참고 지랄할 때가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덜컥!
루반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객점의 천장에서 환기를 위해 작동하던 실링팬이 털털대며 멈추었다. 동시에 본색을 드러낸 무형의 마력이 내 목덜미를 겨누었다.
그러고는 한다는 말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레반, 술 다 마셨으면 같이 나가서 밤 산책좀 하고 올까?"
밤 산책.
서로 관심이 있는 남녀의 대화라면 간질간질하고 설레지 아니할 수 없는 말이지만, 루벤카의 발언은 그것과 결이 달랐다. 이제 도살당하러 갈까? 정도로 들렸다.
당장 나를 어찌하지 못해 근질근질 거리는 얼굴이군.
그 의도가 빤히 보였다.
얼마간 대화를 나누며 탐색을 마친게 분명했다. 손 봐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겠지. 실제로 내가 아직 루벤카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그리고 내가 레나를 돌봐주긴 했지만, 아무래도 믿기 힘든 놈이라고 여길 테니 겁을 줘서 쫓아내면 좋고 정 수틀리면 죽여버릴 생각까지 하고 있을 것이다. 레나처럼 넉넉하지 않고, 매사에 의심이 많은 여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루벤카와 내가 단 둘이 산책을 나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
왜냐하면 마침 2층에서 나를 찾아 내려오던 레나가 루벤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레나는 곧바로 우당탕거리며 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레나···!"
레나를 본 루벤카가 황급히 내 목에 겨눈 마력의 칼날을 거두고, 눈시울이 붉어져 달려오는 레나를 끌어 안았다. 뒤이어 눈물겨운 자매들의 상봉이 벌어졌는데, 나는 그 틈을 타 무사히 악독한 년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
하루가 지났다.
다음날.
다시 홀연히 나타난 루베르겐 집행관이 어디선가 빌려온 공무용 차량에 나눠탄 우리는, 산맥의 도로를 타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집행관은 우리에게 어딜 간다든가 하는 별다른 언질도 주지 않고 조용히 침묵을 유지했다.
"······."
차량 안에서 나와 눈이 마주친 루벤카는 눈을 무섭게 치켜떴는데, 굉장히 불편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이미 나를 반 죽여놓은 다음 캐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겠지. 다만 레나와 집행관이 옆에 붙어있는 바람에 어제 못다한 얘기를 할 새는 없었다.
공무용 차량은 끝도 없는 산맥의 도로를 올라가고 있었다.
몇 시간이나 꽤 빠른 속도로 이동했음에도 아직도 산맥의 중턱 부근을 달리는 중이었다. 도로의 바로 옆길은 낭떠러지였는데, 삐끗하면 바로 떨어져 죽기 좋았다.
그렇게 장장 반나절 이상을 달린 공무용 차량은, 어느새 구름이 아득히 펼쳐져 있는 산맥의 중턱을 넘어 산맥의 드높은 봉우리가 어렴풋이 보이는 곳까지 올라왔다. 차창에 성에가 끼며 밖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달칵-
내가 창을 내리자,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눈과 나무뿐이었다.
저 나무의 명칭은 설산목(雪産木)이었는데, 설산목은 햇빛을 받지 않아도 산맥에 뿌리내릴 곳만 있다면 알아서 쑥쑥 자라고 비가 많이 오는 날은 하루에 1미터 이상도 자라는 발할라 산맥의 고유한 종이었다.
성장이 빠른 이유는, 산맥 꼭대기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빙하들이 마나의 기운을 운반해와 산맥 전체에 퍼뜨리기 때문이라던가.
하여간 설산목은 발할라 산맥 상층부의 대부분을 덮고 있는 나무 종이었는데, 지금 우리의 전방에는 유달리 거대한 설산목들이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차량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우거진 밀림을 형성하고 있었다.
발할라 시티가 익숙할 루벤카도 이런 곳은 처음인지, 도통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집행관은 아무렇지 않게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내려서 걷지."
그렇게 집행관의 말대로 차량에서 내려 10분쯤을 걷자, 설산목들의 뒤로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났다. 사방은 어느새 새하얀 만년설로 덮여있었으며, 눈보라와 추위로 인해 호흡이 심히 힘들어졌다. 바닥은 단단히 결빙되어 한 걸음조차 제대로 내딛기가 힘들었다.
콰앙-!
심지어 저 절벽 위, 산맥 봉우리 꼭대기에서부터 커다란 낙석과 두꺼운 얼음이 쾅쾅 떨어지며 땅을 울렸다. 곧 절벽 근처에서 동굴이 튀어나오고 그 안에 대단한 영약이나 절세비급이 있으면 딱 적당할, 그런 극한의 환경이었다.
그런데.
루베르겐 집행관이 어느 절벽의 근처에 이르러 마력을 흘리자, 웬 청록빛의 유리궁전처럼 생긴 건물이 허공에 신기루처럼 드러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루벤카가 우뚝 멈춰섰다.
"!!!"
이제서야 우리가 가는 곳을 눈치챈 듯한 루벤카는, 표정관리가 힘든지 놀란 기색을 그대로 내비쳤다. 그녀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루베르겐 집행관을 바라봤다.
"지금 설마······마탑으로 온 건가요?"
발할라의 다섯 마탑.
발할라 산맥에는 해발고도 만 미터가 넘는 산봉우리들이 여섯 개가 존재했다. 가장 높은 봉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봉우리에 자신들만의 땅을 얻어 각각 다스리는 특이 세력이 존재했는데, 그것이 바로 마탑이라 불리우는 세력이었다.
각 마탑의 주인이자 관리자는 최소 9레벨 이상의 경지를 달성한 마법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 마탑의 이름은 곧 마탑 주인의 이름이므로, 마탑주가 바뀌면 마탑의 이름도 같이 바뀌는 특이한 형식이었다.
발할라의 다섯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은 그 지위와 명성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폐쇄적이기로 유명한 마탑들은 구성원을 잘 늘리려 하지 않았다. 시티에서 위명을 떨치는 대단한 마법사라도 마탑에 소속되어있지 않는 한 그 위치조차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이전 생인 라아기스 대륙에도 왕국 마탑들이 있었지만, 발할라의 마탑이 가지는 개념은 그것과 조금 달랐다.
라아기스 왕국들이 세운 마탑들은 왕실 소속의 마법사를 양성하는 학교의 느낌이 강했다면, 이 발할라의 마탑들은 연방 정부의 입김도, 발할라 관청이나 정치권의 입김도 어지간해서는 닿지 않는 곳이다.
마탑의 구성원은 마법계 기업의 회장일 수도 있고, 장벽 밖에서 시체를 때려잡는 마법사일 수도 있다. 또는 마법을 배워 익힌 이족일 수도 있고, 연방 소속의 군인이나 흉악한 범죄자일 수도 있다. 누구를 마탑의 구성원으로 받든, 그것은 오로지 마탑 주인의 마음에 달려있다.
여기서 마탑주는 신이나 다름없다.
전통적으로 다섯 마탑의 주인만이 권한을 가지고 다스리는 땅.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은 그런 곳에 우리를 데려온 것이었다.
알고 있다는 마법계 인사가 마탑과 관련된 인물이었나.
사아아—
루베르겐 집행관이 청록빛의 유리궁전에 자신의 마력을 계속 흘려넣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새하얀 만년설과 설산목들이 일거에 사라지며 세상이 새로 열렸다.
이윽고.
눈보라가 몰아치고, 산소가 희박해 호흡조차 힘들었던 발할라 산맥의 산봉우리는 어디가고 봄처럼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커다란 대지가 눈 앞에 펼쳐졌다.
잔디처럼 푸른 풀들이 가지런히 깔려있었고, 그 위로는 중세 시대의 성처럼 생긴 고풍스러운 건축물이 하나 보였다.
그리고 그림처럼 그려진 하늘에는 주먹만 한 태양이 떠 있었는데, 평범하게 생긴 마법사 둘이 허공을 부유하며 그 태양에 자신의 마력을 주입하고 있었다. 그 둘은 모두 루벤카보다 강한 마력을 지닌 마법사들이었다.
"따라와라."
루베르겐 집행관은 이런 광경이 익숙한 듯, 대지를 가로질러 성처럼 생긴 건축물로 향했다.
#49화. 발할라 산맥의 마탑 2
#49화.
성처럼 생긴 건축물 앞에 선 루베르겐 집행관이 또 한번 마력을 불어넣었다.
쿠우웅!
그러자 마력에 반응한 성문이 천천히 열리며 안쪽의 광경이 드러났다.
사아아—
동시에 성 안쪽에서 천천히 날아온 마나의 덩어리가 내 손목에 들러 붙었다. 이내 그 마나의 덩어리는 꾸물꾸물 움직이며 팔찌의 형상을 만들었다.
루베르겐 집행관의 손목에는 네 개의 팔찌가 감겼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는 모두 한 개였다.
"방문자는 한 개. 중요한 방문자는 두 개. 마탑에 소속된 구성원은 세 개. 마탑주의 인정을 받은 구성원은 네 개다."
끄덕끄덕!
집행관이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설명하자, 초롱초롱한 눈빛의 레나가 알아들었다는 듯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우우웅—
그때, 손목에 채워진 팔찌에서 격 높은 마력이 일어나나 싶더니 자욱한 안개가 생겨나며 안면의 대부분을 가렸다. 시야에 문제는 없었으나 루벤카나 레나를 바라봐도 누가 누군지 구별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는 아무래도 마탑주의 안배인 듯했는데, 이렇게 되면 마탑의 구성원들끼리도 굳이 신분을 밝히지 않는 이상은 식별이 어려울 듯했다.
"가지."
성의 내부는 적막했다.
위쪽으로 올라갈 수 있게 설치된 나선형의 계단과 천장을 장식하는 샹들리에만이 전부였다. 바깥에서 보았던 웅장한 외형에 비하면 심히 썰렁할 정도였는데, 예상하기로는 이곳 역시 다른 장소로 이어지는 하나의 통로일 듯했다.
나는 마탑의 복잡한 진입 절차에 혀를 내둘렀다.
'이러니까 마법사들도 마탑의 위치를 모르지.'
그래도 확실히 안전하기야 하겠군.
발할라 산맥의 드높은 봉우리까지 올라온 뒤 눈보라 속에서 제대로 된 길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은데, 무슨 양파마냥 진입로가 이중 삼중으로 숨겨져 있기까지 하다. 덕분에 암살자와 같은 불청객이 몰래 숨어 들어오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집행관은 나선형의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뒤.
"여기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레나의 탄성이 들렸다.
나선형의 계단을 다 올라오자마자 우주선의 내부처럼 인공적으로 생긴, 높고 거대한 공간이 사방으로 펼쳐진 것이다.
창백한 네온빛의 바다가 두 눈을 어지럽혔다. 봉우리 절벽에 있던 신기루나 성 건축물과는 어딘가 결이 다른 것이, 드디어 제대로된 마탑의 내부가 나온 듯했다.
지이이잉—
아니나 다를까, 어디선가 홀로그램 레이저들이 승리의 팡파레처럼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자그마한 환영 문구를 고화질로 그려냈다.
" 나의 마탑에 온 여러분을 환영한다 - 일레힌 포이체카 "
백만방도 포털을 통해 알고 있던 이름이다.
성정이 불같기로 유명한 괴짜 마법사, 일레힌 포이체카.
발할라 산맥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봉우리' 의 마탑주.
본래 여섯 번째 봉우리의 마탑을 관장하던 이전 마탑주가 7년 전 사망하고 새로이 마탑주의 위를 이어받은 이가 9레벨의 마법사 일레힌 포이체카이며, 교체된지 얼마 안 된 탓에 현재 다섯 마탑 중에서 역사가 짧고 세가 제일 약한 마탑이 이곳이다.
9레벨은 그 안에서도 수준이 극명하게 나뉜다.
일레힌 포이체카는 9레벨의 반열에 오른지 아직 십 년도 채 되지 않은 마법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9레벨이라는 초월의 영역의 들어섰기에 발할라 마탑의 주인이 될 자격은 갖추고 있었다.
다만 그는 4년 전쯤 네임드 시체 '우르드' 토벌전에서 그 대단한 신위를 마지막으로 드러낸 이후, 현재까지도 마탑 밖으로 나오지 않고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때문에 마법계에서는 일레힌 포이체카가 거의 죽기 직전이라는 말이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 들여지는 중이었다.
아무튼 나는 잡생각들을 지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들어선 공간은 거대하며 탁 트여있었고, 상선의 화물 운송선보다도 훨씬 길었다. 커다란 화물 운송선을 몇 개나 합쳐놓은 듯한 규모였는데, 아무도 없던 바깥과는 다르게 여기는 그래도 사람냄새가 났다.
수준 높은 기운을 풍기는 마법사들이 몇 명씩 무리를 이루어 돌아다녔고, 커피와 쿠키를 판매하는 카페도 있었다. 몇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마탑은 내가 생각했던 딱딱한 분위기가 아닌, 개성있고 자유분방한 느낌이었다.
마치 네온사인이 가득한 백화점 같다고 해야 할까.
곧, 지나가는 이들의 수군대는 말소리가 들렸다. 손목에 팔찌 세 개를 차고 있는 이들이었다.
— 그러니까 이번 녹빛 언데드 토벌전에 참가하면 연방군에 지원할 자격을 준다고? 그거 참 구미가 하나도 안당기는 제안이네.
— 그러게. 누가 연방군에 자기 발로 들어가겠어.
— 발두르 시티에도 실력자는 많아. 괜히 그런 거 지원하러 갔다가 아까운 목숨 버리지 마.
— 그런데 저들은 누구길래 여기까지 들어온 거지?
— 신경 끄시게. 팔찌 네 개가 인솔 중이니.
그리 수군대던 마법사들은 웬 마법진 위에 모여들어 마력을 풀어냈다. 이윽고 그들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저 높은 위층 난간에 나타났다.
'전송진도 있군.'
이런 곳이 발할라 산맥 봉우리 위에 세워져 있는 건축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언 선생이 펼쳐낸 진법처럼 공간을 왜곡하는 마법이 작동하고 있는 듯 했는데, 이만한 크기의 공간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과연 얼마나 마력을 때려 부어야할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진짜로 마탑이라니."
옆의 루벤카는 유례없이 긴장한 기색이었다.
그녀는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 출신이니, 거기서 학장을 비롯해 강력한 마법사들을 질릴 만큼 보았을 텐데도 마탑은 또 다르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하기야 발할라의 마탑이 어떤 곳인가.
자본의 논리에 크게 얽매이지도 않으며 상업과는 일절 관련이 없어 기업들과의 다툼도 일어날 리 없는. 심지어 물리적으로도 발할라 산맥 꼭대기에 꼭꼭 숨겨져 있는 신역(神域)과도 같은 곳 아니던가.
설령 사천당가가 마탑에서 도망자들을 받아 숨겨준 사실을 알아낸다고 해도 마탑이라면 크게 문제 삼기는 힘들 것이다. 마탑은 마탑주만이 다스리는 고유의 영역인 데다, 9레벨의 반열에 오른 마법사라면 그 자체로도 막대한 전력이다.
게다가 마탑주들이 으레 그렇듯, 일레힌 포이체카도 한 마탑의 주인이 되는 동시에 소속되어 있었던 마법계 기업인 '일레힌 그룹' 에서의 공식적인 직위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일레힌의 가문이나 기업을 통한 압박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루베르겐 집행관이 마탑주로부터 기거를 허락받기만 한다면, 당가로부터 쫓기는 중인 레나와 루벤카가 몸을 의탁할 수 있는 곳들 중에는 마탑이 첫 번째로 안전할 장소가 아닐까 싶었다.
우리는 집행관을 따라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몇 분쯤 마탑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서서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는데······평범한 마탑의 구성원들과는 조금 다른 이였다.
— 크르륵.
길을 떡하니 가로막고 앉아있는 거대한 괴물.
세세하게 갈라진 근육질에 청록빛을 내는 몸체.
매끈한 계란처럼 생긴 얼굴에 주둥이만 존재했는데, 주둥이가 귀까지 찢어져 상어같은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괴물이었다.
그리고 그 괴물의 다리를 의자삼아 웬 서책을 읽고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서책의 표지를 언뜻 확인하니 웬 심법에 관한 무공서인 듯 했는데, 겉표지만 보고는 무엇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손목에는 루베르겐 집행관처럼 마탑주의 인정을 받은 구성원임을 뜻하는 팔찌 네 개를 차고 있었으며, 여인인지 사내인지 눈대중으로는 알 수 없는 중성적인 외형이었다.
"아, 키가 큰 걸 보니까 공사다망한 집행관님이 오셨나?"
괴물에 앉아있던 이는 우리를 발견하자 고개를 까딱거리며 입을 열었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아 누군지는 몰라도, 느낌상 성격이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윽고, 그자의 비아냥이 들려왔다.
"집행관님께서는 그깟 크레딧이 뭐라고 마탑까지 저런 것들을 끌고 들어 오십니까? 모리 무라타의 심득을 흡수하지 못하겠으면 그냥 다른 집행관한테 넘기고 언데드 사냥이나 다니시지."
그 '저런 것들' 이라는 말에 가만히 듣고있던 루벤카의 눈섭이 꿈틀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루베르겐 집행관도 가만히 있는데 그녀가 나설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후우—
집행관은 삐딱하게 궐련을 꺼내 물고 태웠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대치했다.
하지만 저들의 근처에서 미세한 마력이 일어나는 걸 보면, 우리가 알 수 없게 무슨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흥."
잠시 뒤, 그 괴물의 다리에 앉아있던 자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석상처럼 이빨만 드러낸 채 굳어있던 괴물도 슬금슬금 움직이더니, 무거운 거체를 일으켜 그자의 뒤를 따라갔다.
그자가 사라지자, 루베르겐 집행관은 궐련을 비벼 끄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집행관과 우리는 이 공간의 가장 끝에 있는 벽면에 당도했다.
거기에는 입을 쩍 벌린 조각상과 자그마한 종이 달려 있었는데, 집행관은 뷔에탕의 꼭두각시를 죽일 때 보였던 대검을 꺼내어 조각상의 입에 찔러넣고는 강하게 돌렸다.
그러자 곧, 자그마한 종소리가 들렸다.
댕. 댕. 댕.
종소리는 작았으나 모두의 귓전에 명확히 울렸다. 종이 세 번 울리자 마탑의 내부를 밝히던 모든 조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훅 꺼졌다.
다시 불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누군가의 서재 안에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그리고 내가 서재를 다 인식하기도 전에 강대한 마력이 전신을 장악해왔다. 그 마력은 거부하거나 벗어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뻑뻑한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오래된 종이의 향이 배어있는 거대한 서재.
삼면으로 커다랗고 높은 책장에 빼곡히 꽂혀있는 책들이 우리를 먼저 반겼고, 하늘에는 아까 성 밖에서 보았던 주먹만 한 빛의 구체가 열 개 이상 떠있었다. 그리고 그 책장들의 중심에, 두 눈을 감은 채 둥둥 떠있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그는 서재 안으로 들어온 우리를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압도적인 존재감은, 저 둥둥 떠있는 이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 정도의 마력이라면 저자가 누군지 분명했다.
9레벨 마법사이자 이 마탑의 주인, 일레힌 포이체카.
그런데.
세간의 소문대로, 마탑주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스아아아—
서재 천장에 떠있는 주먹만한 빛의 구체에서 정순한 마력이 조금씩 흘러나와 일레힌 포이체카의 전신을 적시며 스며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 스며든 마력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빠져나왔는데, 나는 그 상태를 보고 곧바로 직감했다.
'마나 회로가 터져서 겨우 연명만 하고 있군.'
어떤 이유로 마나 회로가 크게 훼손된 것이다.
심장을 중심으로 대회전하는 마나 회로는 마법사들에게 곧 심장과도 다름없다.
마나 회로가 하나 두 개일 때야 조금 망가져도 그 충격이 심대하지 않아 어찌어찌 살아갈 수 있지만, 저 일레힌 포이체카는 9레벨이니 마나 회로가 7개였을 테지.
9레벨쯤 되면 이미 심장과 마나 회로가 일체 수준인지라, 마나 회로가 크게 손상 되었다는 말인 즉 목숨 역시 위태하다는 얘기였다.
전생에 운석에 대가리가 터지기 전 내 몸이 딱 저랬었다.
그리고 저렇게 조치해놓은 것도 그저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이고, 다른 방법을 구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마탑주께 올릴 청이 있습니다."
그 시점, 루베르겐 집행관이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짧은 말이었으나 여태까지 들어본 집행관의 어투중 가장 깍듯했다. 루베르겐 집행관은 고개를 몇 분간이나 숙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몇 분이 지난 뒤, 집행관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우우우웅—
"!"
루벤카와 레나의 손목에 있던 팔찌가 순식간에 늘어 두 개가 되었다. 마탑주의 허락을 얻어 마탑의 방문자에서 중요한 방문자로 격상한 것이었다.
그쯤에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내가 발할라에 도착했음에도 꾸역꾸역 레나와 집행관 옆에 붙어있었던 이유는, 상선의 캐리어 위에서 뷔에탕의 마력에 진탕 당한 덕분에 사정이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적당히 강한 마법사와 선을 만들어 저주 마법을 풀 방도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당가를 상대로 방패막이가 되어줄 정도라면, 분명히 힘 있는 세력일 것 아니겠나.
'빌어먹을 년.'
원래는 계속 에센스를 먹여가며 뷔에탕의 저주를 미룰 수 있었다. 뷔에탕은 마력의 시한이 반 년이라고 했으나, 나는 못해도 2년 이상은 버틸 수 있으리라 여겼다. 륭과의 사건으로 그에 필요한 에센스도 넉넉히 얻었다.
그러나 이번에 로키 상공에서의 사건으로 뷔에탕의 저주는, 처음보다도 더욱 강건한 마력의 주박이 되어 정신을 파고들었다. 화물 캐리어의 위에서 정신의 경계를 침범하려던 뷔에탕의 마력이 그대로 몸속에 남아버린 것이다.
집행관의 안쓰러운 시선이 아직도 기억난다.
십이제에도 이름을 올렸었던 9레벨 상위권의 괴물을, 내가 너무 안일히 생각한듯했다.
결국, 처음보다 배는 강해진 뷔에탕의 마력이 내 육신을 실시간으로 갉아먹는 중이었다.
그것이 내가 발할라에 도착하자마자 저주에 통달한 마법사를 찾겠다고 다짐한 이유였다.
나는 비록 맨 손이지만 전생의 대륙에서 얻어온 수백 개의 고유 마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경지가 되는 마법사를 만나면 그 지식들을 거래 품목으로 사용해 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서재에 들어오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눈 앞에서 저러고 있는 일레힌 포이체카를 보고는 다른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나는 생각이 끝나자마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마탑주님의 상태에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
'아니, 이게 무슨 미친···!'
울그락불그락해진 루벤카의 안면.
상상도 못한 일에 욕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루베르겐 집행관이 어떻게 만들어준 기회인데!
'저, 저 미친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무슨 도움을 드려!'
자신들에게 빈대처럼 붙어 따라온 저 정체 모를 시종이, 기어이 사달을 내고야 말았다.
일레힌 포이체카의 몸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은 마법계에 공공연히 떠도는 말이었다. 자신이 보아도 그는 절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긴 했다.
어떤 일로 마나 회로가 폭주했는지는 몰라도, 외부에서 주입되는 마력조차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줄줄 흘리는 상태.
강력한 마법사의 근간이 되는 마나 회로가 터졌다는 말은, 죽음이 머지 않았다는 말과도 같다. 지금의 마탑주는 마탑의 구성원들이 주입해둔 마력으로 연명만 겨우 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볼때 이미 저기까지 가버린 상태라면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꾸준히 마력과 에센스를 퍼부어 생명을 유지시킨 다음, 몸이 정말 기적적으로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는.
그런데 레반 저 개새끼가, 그런 마탑주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뱉어버린 것이다. 마탑에서 제발 머무르게 해달라고 설설 기어도 모자랄 판에!
—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마탑주님, 혹시 용이 되어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드래곤 하트를 지닌 용 말입니다.
레반의 알 수 없는 헛소리가 서재에 울려 퍼졌다.
루벤카는 기절초풍하며 그 즉시 레반의 입을 틀어 막으려 했다. 하지만 레반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마탑주의 감겨있던 두 눈이 번쩍 뜨임과 동시에 서재가 점멸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려보니, 방금 말을 꺼냈던 레반을 제외한 모두가 서재 바깥으로 이동해있었다. 그 말은 마탑주가 레반의 헛소리에 일말의 기대라도 품고 있다는 뜻.
"······."
이제 마탑주의 서재 안에는 레반만이 남아있었다.
이윽고.
털썩!
서재에서 튕겨져 나온 루벤카가 헛숨을 내뱉으며 주저앉았다.
당연하게도 저 개자식은 마탑주를 살릴 방법 따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고, 가진 성정이 불같은데다 괴짜로 유명한 일레힌 마탑주가 레반의 헛소리에 분노라도 한다면 자신들에게도 피해가 올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좆됐다······.'
루벤카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50화. 발할라 산맥의 마탑 3
#50화.
순식간이었다.
마치 비디오를 되감기 하듯.
내 입을 막기 위해 달려들던 루벤카의 형체가 멀어진다.
청록빛의 마나 덩어리로 변한 팔찌가 번쩍이며, 루벤카를 마탑주의 서재 밖으로 끌고 나갔다. 루베르겐 집행관을 포함한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나를 제외한 모두가 마탑주의 서재 바깥으로 밀려났다.
쿵.
뒤이어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니, 서재 공간에는 나와 일레힌 포이체카만이 남아 있었다. 사라진 이들의 자리에 적막함이 대신 들어차며 장내를 새로이 메웠다.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방금 전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내보인 그는, 지금도 허공을 부유하며 존재감을 사방팔방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전신을 옥죄어오는 압박감과 이 막연한 두려움.
발할라의 거물중 하나인 9레벨을, 그것도 이리도 가까운 거리에서 독대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마나 회로가 훼손되었다고 해도 확실히 9레벨은 어딘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공에 가만히 선 일레힌 포이체카가 움직였다.
이제 두 눈을 뜬 그가 돌연 옆으로 팔을 뻗자, 큼지막한 유리병이 날아와 손에 잡혔다. 유리병 안에는 곤색의 액체가 수은처럼 찰랑거리고 있었는데, 꽤 농도가 짙은 에센스로 보였다
일레힌 포이체카는 마치 지겹다는 듯, 찡그린 얼굴로 에센스를 단숨에 마셔넘겼다. 그는 저리 값비싼 에센스를 물처럼 마시면서도 별다른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가 호흡을 고르는 동안 가만히 서서 기다리자, 이내 머릿속으로 하나의 음성이 울렸다. 이제 막 청년기에 접어든 듯한 사내의 음성이었다.
[ 말해봐라. ]
동시에 비수처럼 꽂혀드는 지긋한 시선.
전신을 옥죄는 압박감이 한층 더 맹렬하게 다가왔다.
"······."
나는 일레힌 포이체카의 말에 잠깐 망설이는 모습을 내비치다가, 송구스럽다는 얼굴로 입을 열 준비를 했다. 아직 저 일레힌의 진의를 다 파악할 수 없으니, 뭔가를 말하란다고 하여 술술 불어버릴 생각은 없었다.
또, 당장은 내 말에 관심을 크게 기울이는 것이 확실하다. 구태여 저자세로 빌빌 기어 다닐 필요까지는 없으리라.
"마탑주께서는 저주 마법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까?"
촤라락—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서재 어딘가에서 낡은 서책들이 드르륵 뽑혀 나오더니, 허공에 떡하니 자리했다.
유심히 보니 저주 마법에 관한 마법서였는데 내가 원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나는 뷔에탕의 저주 마법을 해결해줄 수 있냐는 의도를 담아 물은 것이다. 그도 분명 눈치채고 있을 테지.
헌데 그때, 굳게 닫혀있던 그의 입이 열렸다.
"특이하군."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하는 것이 아닌 실제 일레힌 포이체카의 목소리. 가뭄이 든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고 듣기 힘든 쇳소리가 나는, 다 죽어가는 자의 음성이었다.
"첫 회로가 만들어진지 반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보이는데 세 개. 심지어 첫 회로 두 개는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졌군. 몸에 기이한 마력이 파고든 건, 그다음의 일이니."
그 말은 나를 충분히 황당하게 만들었다.
저거 지금 내 회로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아무리 9레벨 경지의 마법사라지만, 더해서 이 서재 전체가 일레힌 포이체카의 권역이라고는 해도 잠시 몸을 훑어본 것으로 그런 것까지 세세히 알 수 있단 말인가?
고유의 마법인지는 몰라도 꽤 놀라운 일이었다.
쿨럭-
말을 다 마친 일레힌 포이체카는 몇 번이나 쿨럭거리더니, 다시 머릿속 음성으로 말을 전해왔다.
[ 각설하고, 용이 된다는 것은 단전을 말함인가? ]
결국, 네가 먼저 털어놓으란 거다.
아무래도 뷔에탕의 저주에 관해 얘기를 나누는 것은 일레힌의 궁금증을 풀어준 다음이 되겠군.
그나저나 단전을 집어 얘기 하는 것을 보면-
그도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과 굴곡이 보통이 아닌지라, 내가 아까 에둘러 말한 것을 곧바로 알아챈 듯했다. 나는 일레힌 포이체카의 말대로 단전을 만들 것을 권유할 생각이었다.
일단 하단전을 만들어 줄줄 흘러 나가는 마력을 옮겨 담은 뒤, 후에 마나 회로를 고쳐 후일을 도모하는 법. 내가 전생에서 제국의 대마법사에게 죽었을 때도, 회로와 단전이 같이 망가지지 않고 멀쩡했다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예. 마나를 담을 그릇이 깨져 줄줄 새어나가니, 새로 만들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세상에 통용되는 법칙을 한 꺼풀 벗어던진 존재가 9레벨이라지만, 그마저도 완벽히 부술 수는 없는 법.
편법으로 저렇게 수명을 늘리곤 있지만 오래는 못 간다.
마탑주는 지금,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가며 현상 유지만을 지속하는 중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독의 구멍이 넓어져 물을 부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 일이 생긴 토벌전이 4년 전이었으니 그때부터 이렇게 버텨온 것 같았는데, 아직 살아있는 것 자체도 감탄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일레힌 포이체카는 몸을 빙글 돌리며 말했다.
[ 역시나······예상했던 대로 시시한 얘기로군. ]
내 대답에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
서재를 채운 마력이 파도처럼 격하게 일렁였다.
그러면서 일레힌 포이체카의 면면이 조금 더 정확히 보였는데, 머리가 하얗게 센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 청년이 신경질적으로 일갈하자 서재가 우르릉 흔들렸다.
[ 이 내가, 그깟 방법조차 알아내지 못해 이러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
"······."
마지막에 가서는 자제했지만, 그의 음성에 담긴 마력의 파동만으로도 가진 성정이 여간내기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9레벨 마법사의 분노가 서재 안에 해무처럼 짙게 깔렸다. 여기서 말 한마디라도 잘못 했다간 산맥 봉우리에서 만 미터 절벽 아래로 내던져질 듯했다.
이윽고.
[ 봐라. ]
삼면을 드높이 채운 책장들에서 거칠게 뽑혀 나온 심법서들이 내 눈앞으로 촤르륵- 펼쳐졌다. 그 수가 장장 오십 권을 넘어갔는데, 마탑주가 칩거에 들어간 시점이 4년이니 고작 4년 동안 이만한 양을 모았다는 뜻이 된다. 서책이 아닌 데이터 칩으로까지 모아두었다면 보이는 이것들보다 더욱 많을 것이다.
나는 짐짓 놀란 얼굴로 그 심법서들에 시선을 가져갔다.
"많군요. 이걸 다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그러면서도 속내는 달랐다.
'쓰레기군.'
내 눈으로 보기에 쓸만한 심법서는 없었다.
개중에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것은 청공진결(淸空進訣)이라는 심법이었는데, 저것마저도 일류 심법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
척 봐도 가진바 한계가 명확한 심법들이다. 잘 쳐주면 무림계 중견 기업들의 비전(祕傳)심법 정도는 될지 몰라도, 절세라 일컫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 무인(武人)들처럼 단전을 만들어 그릇을 새로 짜고 그 속에 흐르는 마나를 옮겨 담으라는 조언을 하려는 거라면, 한 번은 넘어가줄 터이니 다시는 내 마탑에 얼씬거리지 마라. ]
그런가.
마탑주는 진즉 자신의 활로를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마나 회로와 단전을 같이 만드는 자들이 없다시피하기에 도움이 되리라 여기고 말을 꺼낸 것인데 방법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군.
그런데 마탑주의 일갈을 듣고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까 그 괴물을 다루는 자가 읽고 있던 심법서와 저 수많은 심법서들.
내 생각일 뿐이지만, 팔찌가 네 개였던 그자도 일레힌 포이체카의 몸 상태를 호전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지 않나 싶었다.
무인들처럼 단전을 만들어낸 뒤 아주 정순한 마력을 담을 그릇을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조금 늦더라도 재기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리하려면 문제가 하나 있는데, 어지간한 심공으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는 것이다. 자그마치 9레벨 마법사의 기운을 담아낼 그릇을 허접한 심공으로 때워 제작할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나.
그러니까.
'방법은 이미 알되, 맞는 심공을 찾지 못했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림계 메가콥이나 대기업들이 일레힌 마탑주에게 자신들의 심법을 내어줄 리가 없으니까. 당장 같은 무림계에도 풀지 않는 심법을 마법계의 인사, 그것도 마법계를 대표하다시피 하는 마탑주에게 덜컥 내어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렇다 해서 성정이 불같은 이 마법계의 거물이, 수백 년 앙숙인 무림계 명숙들의 앞에 고개를 숙인채 심법을 구걸할 리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정당한 거래라면 또 몰라도.
그렇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마탑주님. 이런 말씀 드리기는 좀 죄송한데, 어째 심법서의 수준이 죄다 쓰레기같군요."
[ ······. ]
일레힌 포이체카의 적당히 벙찐 얼굴을 보아하니, 그도 내가 말한 사실을 알고 있는듯 보였다. 하기야 이류나 겨우 될 법한 심법서들인데 그 사실을 왜 모르겠는가.
나는 더 뜸 들일 것 없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방법을 알고 계신다 하니 대화가 더 편하겠습니다. 제가 마탑주님께 맞는 훌륭한 심법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 지금 그걸 나더러- ]
"저따위 하류들이 아닌, 구파일방급의 무림계 기업들도 탐낼만한 심법이라면 어떻습니까."
나는 첫 마디를 마치기가 무섭게 재차 말을 이었다. 중간마다 성질 급한 일레힌의 차가운 음성이 내 말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걱정하시는 것처럼 기운의 길이 들어맞지 않아 마나 회로와 충돌해 공멸하지도 않을 것이고, 정순치 못한 탁기가 쌓이지도 않을 것이며, 감히 무당의 양의무극신공(兩儀無極神功)이나 소림의 대승반야선공(大乘般若禪功)과 비견해도 뒤처지지 않을 것입니다."
[ ······. ]
마탑주가 걱정하고 있는 바를 나도 알고 있었다.
애써 익힌 심법이 회로와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것.
아무거나 주워 익혔다가 탈이 더 크게 나면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될 테니까.
물론 내가 익힌 무선대지신공은 마나 회로와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생의 기억과 지금 생의 경험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을 모르는 마탑주로써는 어떤 심공을 익혀야 하는지 알 방도가 없어 답답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수준이 높은 심공을 찾고 있었을 테지.
무림계에 고개를 숙여 구걸한다는 선택지에 비하면, 나라는 선택지는 꽤 먹음직스러운 편이다. 정체는 그렇지 않으나 명목상으로는 망해서 도망친 마법계 회사의 시종이지 않은가.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도 머리를 굴릴 만큼 굴리고 알아볼 만큼 알아보겠지만, 나중에 가서는 필시 나 이외의 선택지는 없으리라.
그리고 그런 내 말에······
[ 허. ]
허공을 천천히 날아다니며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일레힌 포이체카가 보였다.
잠시 뒤.
생각을 다 정리한 듯한 그가 아까보다는 부드러운 태도로 물어왔다.
[ 그래, 만에 하나 네게 그리 대단한 심법이 있다고 해도······나의 회로와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증명하지? ]
"제가 익히고 있습니다. 원한다면 확인해 보십시오."
사아악—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서재를 가득 채우고 있던 마력이 내 전신을 파헤칠 것처럼 일점으로 몰려들더니, 내 숨구멍으로 들어와 기맥에 섞여 흘렀다. 실로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그렇게 약 오 분가량의 시간이 흐른 뒤.
서서히 물러가는 마력의 기운을 느끼며 내가 말했다. 경악과 복잡한 감정이 뒤섞이며 표정 관리에 실패한 일레힌 포이체카를 향해서였다. 위아래로 슬쩍 벌어진 입은 금세 닫힐 기미가 없었다.
그를 납득시킬 생각이 없는 나는, 도리어 당당하게 말했다.
"장벽 바깥에는 돌연변이 200억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는데, 거기에 저 하나 더 보탠다고 대수겠습니까?"
그제야 일레힌 포이체카가 고개를 몇 번 털며 정신을 차리더니, 흡족한 듯 흔쾌히 웃었다.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머릿속을 웅웅 울렸다.
[ 하하하! 그래! 그래! 세상은 돌연변이에 변수 덩어리지. 과거의 삼존(三尊)중 한 명이 변절한 것도, 모리 무라타라는 전설적인 연방 집행관이 시티에 숨어든 무명의 언데드 따위에 참살당한 것도. 그렇게 따지면 네 말이 맞구나. ]
후우우우—
그리 말한 일레힌 포이체카가 가볍게 손짓하자, 서재의 바닥이 투명해지며 그 밑의 까마득한 경관이 드러났다. 산봉우리 밑 일만 미터. 도시의 빛을 내는 광원들이 아득히도 밑에 있다.
만약 여기서 떨어진다면 그대로 즉사겠군.
그가 또다시 손짓하자 이번에는 어두웠던 천장이 천천히 투명해지며 밤하늘이 드러났다. 나는 그 하늘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 세상에도 저리 수많은 별이 있는 줄은 몰랐기에.
천공을 그득히 채운 별들을 구경하고 있자니, 조금도 기다리기 힘들다는 듯한 일레힌 포이체카의 재촉이 들려왔다.
[ 그 기이한 저주는 반드시 풀어주마. 내가 기운을 되찾는다면 그깟 저주 따위가 대수겠느냐? 다만 지금의 내 육신은 세상의 탁한 기운을 걸러내지 못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어진다. 그만큼 정순한 마나를 담을 완벽한 그릇이 필요해. 정말 장담할 수 있겠나? ]
나는 잠시 대답을 미루었다.
일단 내게 당장 필요한 것을 생각해보자면.
첫째는 뷔에탕의 저주를 풀어 마력을 몸 속에서 끄집어내는 것이고 둘째는······그래, 에센스인가.
돈 많은 재벌집 출신의 마탑주님이라 구할 수 있는 에센스는 차고 넘치는 데다 9레벨의 경지를 밟은 만큼 배움의 속도 역시 남다를 것이었다. 내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얼마 가지 않아 저주를 풀 정도의 기운 정도는 되찾을 것이다.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무선대지신공이라는 나의 독문심법이 다른 이에게 넘어간다는 건데, 어차피 마탑주가 마나 회로 재건에 성공하면 무림계의 심법 따위 쳐다도 보지 않을 것이었다. 일가를 이룬 9레벨 마법사의 자존심이 있지, 무림계의 심법에 의지할 리는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렇더라도 안전장치를 하나 더 걸어두고 싶었다.
"예. 다만 제가 신뢰할 수 있게 마나의 맹약을 해주십시오."
일레힌 포이체카가 즉시 되물었다.
[ 맹약이라? ]
"예."
솔직히 나는, 그가 거절하리라 생각했다.
9레벨의 마탑주.
인정한다. 지금의 내가 올려다보기조차 송구스러운 존재니까. 더해서 마법사 특유의 자존심과 대그룹 출신의 거만함이 만나면 그만큼 까탈스럽고 불편한 것이 없다. 일레한 포이체카의 마탑에 평생 눌러앉아 편히 살지는 못해도,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며 얻어먹을 건 얻어먹어볼 생각이었다.
그래도 무선대지신공을 익히는 동안은 대기업 회장보다 더 극진히 대접받을 테니까.
그런데.
[ 받아들이마. ]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맹약이라는 조건을 간단히 받아들였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저리도 급한 것을 보면, 일레힌 포이체카는 그렇지 않은척 했어도 속으로는 독이 바짝 올라있었던 것이다.
그간 얼마나 많은 방법을 찾아 다녔겠나. 초월적인 경지를 밟았어도 죽음 앞에 초연한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처럼 죽어 나자빠져도 다음 생이 기다리는 게 아닌 이상에야.
내가 그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 전신의 감각이 누군가의 마력을 통해 새로이 깨어났다.
[ 운공해 보아라. 내 지금 당장 확인해 볼 터. ]
그것은 내가 전생에 일정한 경지를 뛰어넘을 때 얻었던 감각이었으며, 지금은 누군가의 외력이 작용해 강제로 일체되는 감각이었다.
내가 조용히 가부좌를 틀자, 허공에 떠 있던 그도 가부좌를 틀었다.
이윽고 서재의 허공에 떠 있던 빛의 구체들에서, 정순한 마나들이 그야말로 별무리처럼 쏟아져 내리며 일레힌 포이체카의 육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 * *
딱. 딱.
애꿎은 손톱을 물어뜯는 소리.
걸레짝이 되어버린 손톱을 끊임없이 물어뜯고 있는 여인은 반 루벤카였다. 감추고 싶어도 도저히 감춰지지 않는 불안감의 표출 방식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튕겨져 나온 마탑주의 서재 쪽을 몇 시간째 주시하고 있었다. 아까는 쩍 벌려져 있던 조각상의 주둥이는 굳게 닫혀버린지 오래였다.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 역시 사라진지 오래였는데, 그는 마탑주의 서재에서 밀려나자마자 짐작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떠나갔다.
— 마탑주도 방법을 모르는게 아닌 것을.
떠나가면서 나지막이 뱉은 루베르겐 집행관의 그 말이, 기다리던 루벤카의 불안감을 한계까지 부추겼다.
그런데 그 순간.
—!
청록색의 마나가 혜성처럼 빛나며 서재의 문이 열렸다.
이윽고, 마탑주 서재의 열린 틈새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레반이 보였다.
그런데.
걸어 나오는 레반의 손목에, 영롱한 빛을 뿜는 네 개의 마나 팔찌가 감겨져 있다.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과 똑같은 갯수, 똑같은 생김새의 팔찌였다.
"······?"
뭐지?
곧, 루벤카의 얼굴이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물들었다.
#51화. 발할라 산맥의 마탑 4
#51화.
이제 굳게 닫힌 마탑주 서재의 앞에서.
사아아—
내가 의지를 담아 마력을 풀어내자, 하나뿐이었던 아힘사의 마나 팔찌가 두 개가 되었다. 똑같이 한 개를 두르고 있던 메리, 루돌프놈도 마찬가지로 두 개가 되었다.
원래 팔찌 네 개의 구성원도 감히 마탑주의 허락 없이 타인의 팔찌 갯수를 늘려줄 수 없었으나, 나는 조금 전에 마탑주로부터 직접 허락을 받고 나온 참이니 상관이 없었다.
지금 자신의 서재 안에서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는 일레힌 포이체카는, 무선대지신공의 공능을 똑똑히 체험하곤 그전보다 성정이 몇 배는 유해져 내 어지간한 부탁은 전부 들어주겠노라 단언했다.
그래도 적절한 기준을 세워 처신해야겠지만, 적어도 무선대지신공을 전부 배워 익힐 때까지는 일레힌 마탑주의 넉넉한 호의가 지속될 듯했다.
루돌프놈의 호들갑이 정적을 깨고 들려왔다.
"캬, 저는 형님만 믿고 있었습니다. 근데 이제 바깥으로 안 쫓겨나는 거 맞나요? 팔찌 한 개로는 여기에 며칠 못 있는다던데요."
"돌프야, 너는 아직도 안 기어나가고 붙어있었니."
"······네."
"나가고 싶다면 언제든지 나가도 좋다. 마침 발할라 산맥에는 녹림(綠林)의 산채도 없다더구나. 산적들도 추워서 여기서는 못 산대."
"아닙니다. 곧 죽어도 형님과 꼭 함께하고 싶습니다. 제겐 형님도 모르시는 큰 꿈이 있어요."
"그러니."
"예!"
"그래라 그럼."
"감사합니다."
몸이 단단해 총알받이로 쓰이기 좋은 것을 제외하면 별 쓸모가 없는 루돌프놈도 일단은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의 중요한 손님이 되었다. 저놈이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몰라도, 한 개의 팔찌로는 마탑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는 말 역시 사실이었다.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의 규율 중 하나라던가.
만약 루베르겐 집행관을 통해 마탑주와 엮이지 못했더라면, 레나의 간절한 부탁이 있었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마탑 바깥으로 쫓겨났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갑자기 루베르겐 집행관을 불러다놓고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상선의 캐리어를 타고 발할라 시티로 올 때, 루베르겐 집행관과 줄이 닿은 마법사가 저주마법에 고절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이길 간절히 바랐었다. 그런데 그냥 레벨 높은 마법사도 아니고 무려 마탑주를 해먹는 거물과 인연이 있었다니.
역시 시티 주민들의 민생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연방의 공무원 답군.
"······."
이윽고 짧게 상념을 끝낸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루벤카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메리의 팔목에 걸려있던 팔찌가 실시간으로 두 개로 바뀐 것을 확인하곤 믿을 수 없다는 듯 실소만 연신 흘리는 중이었다.
"하하······뭐야 진짜? 갑자기 팔찌 네 개를 차고 나온다고? 마탑주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거잖아. 대체······."
갈피를 못 잡고 심히 혼란스러워하는 표정.
나를 향한 루벤카의 불신과 경계심은 이제 그 끝을 모르고 높아질 듯했다.
하지만 마탑주나 루베르겐의 경우와는 달리, 나는 이제 루벤카를 납득시킬 필요조차 없어졌다.
이곳은 마탑이고, 나는 마탑주에게 누구보다 필요한 사내이기에.
보무당당히 루벤카의 앞에 선 사내의 입이 열렸다.
"그걸 안다고 해서 네가 무얼 할 수 있지? 네가 뭘 어쩔 건데."
"······뭐라고?"
"이 악독하고 성깔 더러운 년아. 애초에 레나를 누가 살려서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여즉 주접을 떨고 있어. 손찌검을 한 번 해야겠나 내가?"
그 가벼운 폭언에.
화르르륵—
루벤카의 전신에서 마력이 들불처럼 일어날 기미를 보이자, 나는 그녀의 눈앞에서 슬쩍 손목을 들어 올려 보였다. 내 손목에는, 네 개의 마나 팔찌가 보석처럼 영롱한 빛을 내고 있었다.
"······."
그러자 제정신을 부여잡고 금세 마력을 죽인 루벤카는 고개를 떨구며 조용히 분을 삭였다. 콧김이 얼마나 강한지 여기서도 보일 정도였다.
"마탑에서 속옷바람으로 쫓겨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라. 한 시간이면 얼어 뒈질 텐데."
"······."
"앞으로는 잘하자. 내가 천성이 유약한 편이라 협박하고 뭐 그런 거 안 좋아해."
루벤카의 말문이 턱하고 막히는 게 보였다.
하기야 여기서 무슨 대답을 해도 등신이 될 텐데.
사실 루벤카도 마탑주가 직접 대면하고 두 개의 팔찌를 채워준지라, 당연히 내 독단으로 쫓아낼 수야 없다. 그런데 저년이 일레힌 포이체카의 서재에 들어가서 직접 물어볼 수 있는게 아니니 뭐.
나는 그런 루벤카를 흘겨보며 말했다.
"가서 커피나 한잔 뽑아와봐. 메리 시키지 말고."
푹.
그 말과 동시에 신속히 움직인 내 손가락이 루벤카의 뺨을 찰흙 찌르듯 눌렀다. 청수도룡뇽을 팔던 발할라 밑바닥 객점에서의 상황과는 정확히 반대였다.
원래대로라면 이쯤에서 슬슬 불타는 숯덩이가 되어 세상을 하직했겠으나, 이곳은 루벤카도 감히 힘을 쓸 수 없는 마탑주의 절대 권역. 마탑이었다.
"······."
수치심에 구겨진 얼굴을 붉은빛으로 물들이며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는 루벤카. 조금 더 열이 오르면 거의 졸도하기 직전으로 보였는데, 다 뜯어진 손톱을 꽉 쥐고는 분노를 씹어 삼키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루벤카는 이내, 카페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속도가 너무 느려터져서 저렇게 가면 언제 커피를 뽑아오나 싶었다. 어차피 뽑아와도 다 식었을 테니, 마시지는 말아야겠군.
역시···
남의 권세를 방패 삼아 떵떵거리는 것만큼 세상에 즐거운 일이 없다. 이래서 간신배들이 나중에 목이 뎅강 잘려나갈지언정, 권력자의 옆에 딱 붙어 유세 떠는 짓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구나 싶었다.
이 짓거리······자의로는 쉽게 멈출 수 없겠군.
"루, 루벤카님······."
곧, 안절부절못하는 메리가 내 눈에 들어왔다.
"메리."
"?"
나는 발을 동동 구르는 메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반 바이오 컴퍼니에서 일이 생기기 전, 시종의 숙소에서 농락당했던 메리와의 대화들이 문득 생각이 났기에.
"지금 저 루벤카라면 너랑 몸을 섞는다 해도 허락해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지?"
"······."
그때는 능청맞았던 메리도, 오늘은 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
이튿날.
마탑 상층의 침실에서 깨어난 나는, 꽤 오랜만에 청수처럼 맑아진 정신을 만끽했다.
두 발 쭉 뻗고 기절하듯 잠들어본게 대체 얼마만이던가. 상선의 캐리어 위에서도 이 정도로 편히 자지는 못했는데, 마탑이라는 공간이 주는 안정감이 있는듯 하다.
살짝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넷 연결이 심히 불안하고 자주 끊긴다는 것 정도. 해발고도가 너무나 높은 탓에 그런 건지, 혹은 양파처럼 쌓여있는 마탑의 특이한 환경 때문인 건지는 모르겠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마탑주의 서재에 들렀다.
조각상 주둥이에 칼을 꽂고 돌리자 종소리가 청아하게 울리며 삼면으로 가로막힌 거대한 책장들이 나를 맞이했다.
오늘도 허공을 부유하고 있는 마탑주는, 어제보다 한결 편안한 표정이었다.
"몸 상태는 좀 어떠십니까?"
이것은 그저 빈말이다.
어제는 일레힌 포이체카의 마력과 일체되어 무선대지신공의 공능만 잠시 펼쳐 보여 주었을 뿐, 하루 사이에 그다지 큰 변화는 없었을 테니까.
[ 괜히 처세 한답시고 뜸 들일 것 없다. 바로 시작하지. ]
"예, 그러시죠."
일레힌 포이체카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지체없이 가부좌를 틀고 음성을 보내왔다.
이윽고 그의 머리 위로, 어제와도 같은 마력의 별무리가 쏟아졌다.
나는 그 뒤로 매일같이 마탑주의 서재로 찾아가 무선대지신공의 구결을 전수했다.
일레힌 포이체카는 마나 회로를 과도하게 운용한 탓에 회로가 터져나갔지만, 대마법사와 전투를 벌였던 내 전생의 상태보다는 상황이 조금 나았다.
그러니 단전을 만들고 정순한 기운만을 무선대지신공으로 걸러 운용할 수만 있다면 목숨을 건지는 것은 물론이고 손상된 회로까지 충분히 재건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게다가 9레벨의 육신을 가지고 있어 평범한 이들보다도 회복력이 월등히 빠를 것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 그런지, 일레힌 포이체카는 순간마다 맹렬히 집중하여 빠르게 심법의 구결을 습득하고 있었다. 급하고 불같은 성정이 배움에 있어서도 적용되는 듯했다.
그렇게 며칠.
마탑주가 단시간에 이룩한 성취는 눈부셨다.
'벌써 삼 성인가.'
무선대지신공에서 신공은 괜히 신공이라 불리는 게 아닌지라 고작 며칠 만에 뚝딱 배워 익힐 수 있는게 아닌데도, 이대로만 간다면 시간마저 괴물 같은 마탑주의 습득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듯했다.
나는 일레힌 포이체카의 전신에서 청량하게 뿜어져 나오는 마나 줄기를 보며 생각했다.
'아무리 마력으로 길을 이끌어 준다고 해도 그렇지, 이대로 익히면 극성까지 전부 익힌다 쳐도 얼마 안 걸리겠군.'
보통 몇 년은 내리 산속에 처박혀 익히는 것을, 실로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무공의 무자도 모르던 이가 익히는 속도 치고는 빨라도 너무 빠르니 대견한 마음보다는 하루하루가 경탄의 나날이었다. 재능있는 제자를 보는 스승의 마음이 이런 건가 싶었다.
뭐, 저만한 경지를 밟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이 자질과 재능일 테니까. 더해서 마탑 구성원들이 주입해둔 정순한 마력과 농도 높은 에센스까지 아낌없이 몸에 퍼붓고 있으니 이리도 놀랄 일은 아닌가.
그간 마탑주의 입으로 들어가는 에센스들을 보자면, 정크타운에서 벌어들였던 크레딧이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수백만 크레딧은 족히 호가할 에센스들을 물처럼 마셔대는 수준이라 보고 있던 나까지 금전 감각이 마비되어버릴 지경이다.
일레힌 포이체카는 마탑주의 위를 이어받으며 일레힌 그룹과 공식적으로는 연을 끊었다지만, 곁에서 지내보니 일레힌 그룹에서 뒷구멍으로 지원해주는 자금이 보통이 아닌 듯했다. 저 에센스들도 그렇고.
하기야 가문에서 9레벨의 전력을 배출한 것도 이미 눈부실 정도로 명예로운데, 발할라의 마탑주까지 해 먹으면 대체 얼마나 자랑스럽겠나. 그룹도 알게 모르게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라는 훌륭한 배경을 잘 써먹고 다니겠지.
아무튼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고.
스아아아—
이제 일레힌 포이체카의 전신으로 하릴없이 새던 기운들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못해도 절반쯤 줄어든 것 같았다. 깨진 독의 구멍을 벌써 절반 쯤은 막았다는 소리다.
그는 이제 몇 주일만 더 흐른다면, 나의 도움 없이도 무선대지신공의 공능을 전부 끌어낼 수 있을 듯했다.
내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꽤 순조로운 듯합니다."
[ ······그래, 이건 놀랍구나. ]
마탑주의 단전은 이미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고 무선대지신공으로 여과시킨 에센스의 기운들과 깨진 회로에서 줄줄 흘러나오던 마력이 줄기를 틀어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충만한 마력의 기운을 단전으로 받아들이며 입을 열었다. 쩍쩍 갈라지던 목소리도 이전보다는 훨씬 들어줄만 했다.
"고생했다. 가지고 나가라."
곧이어 허공을 부유하며 다가오는 하나의 주머니.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것은, 중급 정도의 에센스일 것이다.
나는 그간 마탑주와의 맹약에 따라 넉넉한 에센스를 배급받았다.
마탑주가 부어대는 양에 비하면 콩고물 수준이지만, 그 콩고물이 너무 거대해 가슴이 벅찰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 몫으로 받은 에센스는 조금만 섭취하고 대부분 아껴둘 수밖에 없었는데, 에센스를 먹자마자 뷔에탕의 마력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에센스의 기운을 처먹고 몸집을 불려버리는 기적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괴물 같은 년.'
실로 개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어 혀를 내둘렀다.
만약 일레힌 포이체카와 이리 잘 풀리지 못했다면 진짜 카스트라 뷔에탕 그년과 독대하러 갈 뻔했잖은가.
내가 살아온 다섯 번의 생을 다 합친 만큼 이 세계에서 살아왔을 거대 범죄조직 보스와의 동침이라니, 나는 절대 사절이다.
뷔에탕이 아무리 대단한 힘을 가졌대도 연방의 공적이기에 마탑까지 처들어올 일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나는 마탑주의 서재에서 나와 걸음을 옮겼다.
한바탕 마탑주와의 일체 운공과 무선대지신공의 전수가 끝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시간을 얼마든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팔찌 네 개는 생각보다도 더 유용했다.
일단 마탑의 어느 공간이든 나는 드나들 수 있었다. 팔찌 세 개만 해도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꽤 되어 만족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는데, 나는 마탑주의 서재를 포함해 거의 모든 공간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마탑 곳곳에 있는 전송진을 이용해 마탑주의 마력이 지배하는 마탑 내부 어디든 갈 수 있었는데, 성 건축물은 물론이고 마탑의 각층, 그리고 발할라 산맥의 장대하고 아득한 정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외부까지도 이동할 수 있었다.
그 외부는 절벽 위에 세워진 암자 같은 곳이었는데, 숨이 차고 날씨가 더럽게 추워서 그렇지 기(氣)가 무지막지하게 충만한 곳이었다.
그냥 장소 자체에 에센스를 녹여 풀어놓은 듯한 기운이 존재했다. 극한의 추위와 폭풍보다 더한 눈보라만 버텨낼 수 있다면 수련할 맛이 나는 곳이었다.
정크타운, 그 쓰레기만도 못한 대기질에서 꾸역꾸역 기를 뽑아 내공을 토납하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과장 조금 보태, 들이쉰 호흡이 곧 나의 내공이 되어 단전에 쌓일 정도.
나는 살을 에는 산맥 정상의 눈보라를 맞으며, 안주머니에 조심스레 손을 넣었다. 곧 작은 병 하나가 빠져나왔다.
찰랑—
비추어 보는 각도에 따라 빛깔이 달리 보이는 신비한 액체. 작은 향수병보다도 더 작은 유리병에 아주 소량만이 들어차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 존재감을 사방으로 발산하는 액체가 보였다.
마나의 맹약을 맺은 날,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가 호탕히 웃으며 말하길.
[ 9레벨 언데드 '우르드' 에서 뽑아낸 에센스다. 토벌전에서 내 몫으로 받아온 것의 일부지. 양은 적긴 해도 나의 목숨값 정도는 충분히 하지 않겠느냐? ]
예.
충분하고 말고요.
당장은 뷔에탕의 빌어먹을 저주가 신경 쓰여 감히 마실 수 없겠으나···조만간 막대한 기를 꽉꽉 눌러 담고있는 이 에센스는, 나와 한 몸이 될 것이다.
다만 아직 이곳에서 에센스를 마신 뒤 운공하는 것은 무리였다. 때가 오면 다시 오겠노라 굳게 마음먹은 뒤, 발걸음을 돌렸다.
#52화. 발할라 산맥의 마탑 5
#52화.
마탑에서 한 달이 더 흘렀다.
쿨럭-
운공을 끝내자 입에서 옅은 기침이 터져나왔다.
나는 곧, 얼얼해진 가슴을 부여잡고는 날뛰는 기운을 적당히 갈무리했다. 이것은 뷔에탕의 마력 때문인데, 요즘 들어 제멋대로 끓어오르려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나는 그 기이한 마력이 끓어오르려 할 때마다 이제는 직접 힘을 써가며 가라앉혀야했다.
내가 끓어오르는 뷔에탕의 마력을 가라앉히고 있을 때, 일레힌 포이체카의 흡족한 어투가 들려왔다.
[ 이제 팔 성인가? ]
"예."
[ 고생했다. ]
그는 오늘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렇듯 마탑주와 감각이 일체된 채로 무선대지신공의 구결을 통해 운공을 마치고 나면, 그의 정신이 한껏 고양되는 시점이 있었다.
서재 공간에 들어찬 마탑주의 마력과 나의 의식이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그 시점은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점에 마탑주에게 무언가에 관해 물어보면 웬만해서는 귀찮다며 대답을 흘리는 법이 없었기에, 나는 그때가 되면 궁금한 것을 슬쩍 흘리는 식으로 말문을 열었다.
9레벨의 마탑주라면 세상이 돌아가는 중심축에 나보다 열 배는 가까이 있는 거물. 그런 자와 독대하며 질의응답 시간을 가질 수 있다니. 이런 기회는 앞으로도 쉽사리 오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일레힌 포이체카는 불과 몇 년 전까지도 마법계 재벌그룹에서 근무했던 만큼 세상 돌아가는 데에 아는 것이 워낙 많아 넷에서도 잘 찾아보기 힘든,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에 대해서도 꽤나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많은 정보를 얻었고.
내 출신에 대한 것도, 그가 해준 이야깃거리중 하나였다.
[ 현재 바이오 기업들의 배양 인큐베이터에서 '배양' 되는 인간이 연방에 몇 명이나 될 것 같나? ]
[ 그들은 태초부터 전뇌 컨트롤 칩이 박힌 채 배양되어 장벽 밖 전장에 투입된다. 만약 자라면서 근골이 약하거나 무언가 하자가 있으면 시종이나 성 노리개 쪽으로 빠져 생산된다고 들었다. ]
그래, 그렇군.
그렇다면 내 육신에 하자가 있었다는 얘긴가?
생각해보면 근골이 쓰레기에 몸뚱이 자체가 연약하긴 했지. 마법계 기업에 시종으로 들어간 게 최악인 줄 알았더니, 더욱 최악들이 있었다. 강제로 연방군에 징병당해서 좀비들 상대로 고기 방패로 쓰이다 마지막에는 처참하게 죽거나 아니면 성 노리개가 되거나.
차라리 시종 쪽으로 빠진 것이 천만다행이군.
뭐, 그것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간 일이니 이 다음 질문이 중요하다.
"마탑주님, 그럼 연방의 일곱 거대도시는 언제까지 버티겠습니까?"
[ 음. ]
그는 여태까지 금세 대답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나름 진중하게 생각해보는 듯했다. 고심하며 허공을 부유하던 일레힌 포이체카의 미간이 좁혀졌다 펴졌다를 반복했다.
그러던 마탑주는 도리어 내게 질문을 해왔다.
[ 삼존(三尊), 칠좌(七座), 십이제(十二帝), 연방 대장군, 내가 아닌 다른 마탑주나 무림계의 거목들, 하다못해 기사들의 정점인 검주(劍主)들의 힘을 한 번이라도 견식해 본 적이 있나? ]
당연히 그래본 적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한낱 기업의 시종 따위가 연방의 최정점에 서 있는 거물들의 힘을 무슨 수로 견식해보겠나? 끽해야 퇴출된 십이제, 카스트라 뷔에탕의 꼭두각시를 건드렸다가 진탕 당하긴 했지.
아, 그래도 연방의 장군은 얼마 전에 봤군.
"연방의 대장군까지는 아니더라도, 장군은 어쩌다 본 적이 있습니다. 별이 하나더군요."
[ 그렇다면 준장이군. 어떻던가? ]
연방의 격리 시설에서 보았던 장군은, 좀비로 변절한 6레벨의 마법사를 가볍게 잡아 목을 부러뜨렸다. 나는 그를 보고 느낀 대로 대답했다.
"실로 강했습니다."
[ 강하겠지. 하지만 삼존, 칠좌, 십이제, 대장군, 마탑주, 검주······그들은 연방군의 준장 열 명이 붙어도 어찌할 수 없는 괴물들이다. 그러니 그들이 변절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이 연방은 백 년도 너끈히 버텨낼 것이다. ]
"그렇다면 백 년, 버티겠습니까?"
그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나 싶더니.
[ 30년도 못 버틴다. ]
"······."
연방이 길어봐야 삼십 년도 못 버틴다는 말을, 일레힌 포이체카라는 거물이 그리 어렵지 않게 꺼낸 것이다.
"그들중 누군가 변절하리라 보시는군요."
내 물음에 서재를 채운 그의 마력이 동요했다. 잠시 조용하던 일레힌 포이체카는 언뜻 자조적인 음성을 보내왔다.
[ 인간의 몸으로 감히 오를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자들이다. 힘만 보고 살아온 이들에게 더 큰 힘을 얻을 기회가 있는데 무엇인들 못 할까? ]
"그렇습니까."
전생의 나는 초절정 경지의 무인이었으며, 6위계를 코 앞에둔 마법사였다. 그렇기에 일레힌 포이체카의 자조적인 대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평생을 경지에 오르기 위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칼처럼 갈고 닦아온 초월자. 그들의 앞에 비교적 쉽고 빠르게 경지를 상승시킬 수 있는 변절이라는 또 다른 선택지가 생겨난 이상, 무슨 일이 언제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치 않았다.
이미 역사적 선례들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내 머릿속으로, 일레힌 포이체카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 그리고, 9레벨의 언데드 '우르드' 토벌전에서 파리 목숨처럼 쓰러져나가는 연방군의 병력을 보고 확신했지. 인류가 장벽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한, 연방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
기억을 떠올리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는 듯, 그는 한탄하듯 말했다. 청년의 외형을 가진 이가 늙은이의 말투로 내뱉으니 여간 이상한 게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잠시 뒤, 또 하나의 의문을 그의 앞에 풀어놓았다.
"그렇다면, 연방은 이때까지 어떻게 버티고 있었던 겁니까?"
[ ······. ]
헌데 그 물음에 일레힌 포이체카는 이제 귀찮다는 듯, 조용히 입을 닫고 눈을 감았다. 보통 저리되면 무언가를 더 물어봐도 그의 심기만 건드리는 꼴이라, 나는 곧장 고개를 숙여 보이곤 서재 바깥으로 나왔다.
*
마탑에는 별별 이상한 종자들이 많았다.
온종일 마법 연구를 마치고 초췌한 얼굴로 기어 나와서는 진한 에스프레소를 한 컵씩이나 꽉 채워 받아가는 자도 있었고, 연무장 같은 마탑의 공간 내에서 실전 같은 대련을 하는 마법사들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매일 벤치에 멍하니 앉아 수다만 떠는 마법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내게 호의적이었다.
자신이 소속된 기업을 은연중에 알리며 접근해오는 마법사들도 간간히 있었는데, 아마도 내 손목에 걸려있는 네 개의 팔찌가 주된 이유인 듯했다. 마탑이라도 사람 사는 곳이라 군상들이 비슷했다.
— 안녕하십니까. 저는······.
들어보면 반 바이오보다 작은 기업이 없었다.
내가 반 바이오 컴퍼니의 시종 출신 도망자인 걸 알면, 마탑 바깥에서는 사람 취급도 해주지 않을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긴장을 불어 넣는 존재도 있었다.
— 크륵.
바로 저번의 그 괴물을 다루던 마법사였다.
어느 날은 그가 다루는 청록빛의 괴물이 앞을 떡하니 막아섰는데, 하도 놀란 탓에 피가 섞인 기침이 연신 나왔다.
쿨럭! 쿨럭!
"흠, 너는 저번에 집행관이 데려온······팔찌가 네 개라?"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 루베르겐 집행관이 데려온 놈이라며 날 대번에 찍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공격적인 기색이 없었다.
저자는 괴물 말고도 마법공학으로 제작한 병사들을 다루기도 했는데, 매일 마탑주의 서재 앞에 앉아 그 마공학 병사끼리 싸움을 붙이고 구경하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그러던 그는, 어느 날부터 뜬금없이 마공학 병사를 시켜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법을 써봐야 내 낮은 수준만 드러내는 꼴이라 검을 뽑아 검기로 썰어버렸더니, 놈은 매우 놀라며 장난 섞인 감탄을 머금었다.
"이야, 마탑에서 검기를 쓰는 사람은 또 처음보네. 취미로 배운 거야? 보통이 아니긴 한데······갑자기 내 병사들은 왜 죽인대? 거 웃기는 놈이네."
저것도 보통 미친놈이 아니었다.
저런 흉흉한 것들로 나를 공격하려 해놓고 왜 죽이냐니.
그런데 마탑주의 안배가 있음에도 저리 행동해도 되는 건가. 루베르겐을 상대로도 꽤 개기던 걸 보면 아무리 못해도 7레벨의 끝자락에서 8레벨급은 될 텐데···원래 성격이 저리 안하무인인가.
하기야 그럴 만도 하지. 팔찌 네 개를 받은 자가 저런 병사들에 위협당할 만큼 약하리라 생각조차 하지 못할 테니까.
병사를 베어낸 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조금 조심합시다. 조심."
"참 나, 뭐라냐? 정신 나간놈."
나는 그 싸가지 없는 놈을 지나 마탑주의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매일 마탑주의 서재 앞에 앉아 마공학 병사로 나를 공격하며 장난질을 쳤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가차없이 검을 꺼내 썰어버렸다.
거의 일주일 가량을 유치하게 기싸움을 걸어오던 놈은, 언제부터인가 다시는 마탑주의 서재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괴물을 다루는 놈이 사라진 시점과 비슷하게······
[ 정신 차리고 구결을 똑바로 읊어라! ]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가 어딘가 조금 이상해졌다.
내 질문에 답을 피하는 일이 부쩍 늘었고 이제 나를 서재로 부르는 일도 점점 적어졌다. 마탑주가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마탑주가 이상해진 사실을 명확히 알게 된 날은, 무선대지신공의 전수가 거의 마무리되었을 즈음이었다. 마탑주가 익힌 심공이 십일 성의 궤도에 완벽히 오르자, 태도가 급변하여 나를 다그치는 일이 잦았다.
[ 이제 서둘러야겠구나. 시간이 없다. ]
[ 쯧, 마나의 맹약만 하지 않았어도. ]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것이 마탑주가 숨기고 있던 본성이었다.
저번 연방이 어찌 좀비들로부터 버티고 있냐는 내 질문에 답을 회피할 때부터 이상하더라니.
아무리 성정이 불같고 급하다 들었으나, 심공의 전수가 끝나기 무섭게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이에게 이빨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그 황당한 태도에 나는 마탑주와는 이제 아무런 대화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내 신공을 다 전수받으면 이렇게 될 일이었다지만, 괘씸한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일레힌 마탑주는 마나 회로 재건에 들어간다는 핑계로 나와의 교류를 아예 끊어버렸다.
그는 먼저 자신의 서재부터 완벽히 폐했다.
거의 한 궤짝 분량의 농도 높은 에센스와 마력을 잔뜩 주입한 빛의 구체 수백 개를 서재 안에 들여놓은 뒤, 자신이 서재를 직접 열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은 것이다.
누군가 해코지를 할까,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그 뒤로, 마탑에서의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갔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으며.
두 달이 넘어갔다.
"씨발."
그 동안 내 몸은 하루가 다르게 죽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몸을 단련해도 근육과 살이 빠져 빼빼 말랐으며, 간헐적으로 사지 말단을 절어댔고 기침과 두통을 달고 살았다. 이제 수상함을 넘어서 확신이 들었다.
아무래도, 마탑주의 마력과 일체되어 무선대지신공을 다 전수하고 난 이후부터인 듯 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간 멀쩡했던 몸이 갑자기 이럴 리가 있겠는가.
'씨발. 마탑주를 믿는게 아니었는데.'
나는 등신같이 또 속아 넘어갔구나.
이럴 거면, 그때 로키 시티로 갔어야했군.
곰곰이 생각해보면, 카스트라 뷔에탕은 나를 죽이려고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로키 시티로 자신을 찾아오라고만 말했지.
젠장할. 선택을 잘못했다.
나는 그 뒤에도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강건했던 육체가 마탑주의 수작으로 먼저 무너지니 뒤이어 정신도 시름시름 앓을 기미를 보였다.
쿨럭! 쿨럭!
이렇게 된 이상, 에센스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에센스를 함부로 마셨다가 뷔에탕의 마력이 더욱 세를 불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크게 들어 복용하기가 심히 꺼려졌다. 그렇기에 에센스를 침실 구석에 모두 처박아 봉해두고 다시는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급격히 무너지는 몸 상태로 인해 불면증에 시달리고 괴상한 환청이 때때로 들렸으며 자주 헛것을 보았다. 청각과 시각을 시작으로 오감이 교란되기 시작했고, 어느날은 격렬하게 마탑을 뛰쳐나가 로키 시티로 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때부터 아무와도 일절 말을 섞지않고 마탑의 침실에서만 지냈다. 나 역시 마탑주처럼 폐관에 들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루돌프놈이나 아힘사조차 만나지 않았다.
누군가 문 안으로 들여놓은 음식이나 음료는 혹여 독을 타두었을까 어지간하면 입조차 대지 않았으며, 레나가 이틀에 한 번쯤 안전한 음식과 콜라를 들고 왔을 때만 허겁지겁 뱃속에 밀어 넣었다.
레나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레나도 어디선가 협박이라도 당하는지 점점 내 침실에 방문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아마도 루벤카 그 악독한년이겠지. 이미 마탑과 한통속일 가능성도 있다.
"후우."
그래도 나는 온종일 명상과 운공을 번갈아하며 이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렇게 세 달쯤 되었을 때.
반복되는 일상속에서 어느 날, 마탑주가 나를 호출했다. 몸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드디어 뷔에탕의 저주를 건드려볼 수 있게 되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필시 변명일 터.
오늘이 돼지를 잡는 날이구나. 빌어먹을 새끼.
덜컥!
— 따라오라니까! 안 들려? 귀가 먹었나.
일레힌 포이체카는 마탑에 온 첫날 보았던 괴물을 다루는 마법사를 시켜 나를 불러냈다. 팔찌의 운무 효과로 인해 괴물을 다루는 놈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으나, 실실 웃어대는 게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어보였다. 어쩐지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쿨럭!
이쯤 되니 나도 미룰 수 없이 선택을 해야했다.
'어떻게든 도망쳐야겠군.'
하지만 이 마탑 밖으로 도망친다 해도 해발고도 일만 미터의 봉우리가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성질 포악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마탑주를 어떤 방법으로 설득해야 하는가.
나는 일단, 초주검이 된 몸을 이끌고 어쩔 수 없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괴물을 다루는 놈의 뒤를 따라갔다. 내가 칼을 뽑아 조각상의 주둥이에 넣고 돌리자, 서재의 문이 열렸다.
마탑주의 서재는, 내가 짐작한 그대로였다.
— 레반!
루벤카와 레나가 포박당한 채 무릎 꿇려져 있었고, 지팡이 같은 것을 들고 있는 마탑주의 옆에 녹의를 입은 당문의 유명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웃고 떠들던 그들은 서재로 들어온 나를 바라보며 뭐라뭐라 했는데, 와중에 나를 잡아 오라는 말만큼은 똑똑히 들었다. 내 귀가 얼마나 좋은데.
내가 무릎꿇고 있는 레나를 허탈히 바라보자, 전신을 속박해오는 강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 빌어먹을 놈들, 내 이럴 줄 알았지."
스르릉—
나는 그 즉시 검을 뽑아 들고 도망칠 준비를 했다. 그와 동시에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다리가 움직이며 마탑주의 서재 밖으로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푸욱!
"!?"
그런데 검을 쥐고있던 내 손이 돌연, 검로를 홱 꺾더니 잘 뛰던 다리를 찔렀다. 나의 무의식속 어딘가에 있는 힘이 갑자기 작용한 것인데, 손이 저절로 검날을 마구 비틀며 허벅지의 근육과 뼈를 파고들었다. 새빨간 선혈이 튀고 끔찍한 격통이 찾아오자 나는 뜀박질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주르륵-
금세 온 하체가 피로 물들었다.
이 상황에 분노하며 고개를 들자, 비열하게 웃음 짓고있는 일레힌 포이체카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뾰족한 지팡이를 들고와 내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서늘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쿨럭-
나는 다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입에서는 절규와도 비슷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아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일레힌 포이체카의 신형 뒤로 흉흉한 독기를 내뿜는 당문의 인사들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성정이 급한 일레힌 포이체카는 그들이 당도하기도 전에 그 서늘한 지팡이를 강하게 휘둘렀다. 지팡이의 뾰족한 부분은 반전없이 내 목을 찔렀다.
푸욱-
그 지팡이 끝이 내 목을 깊숙이 파고 들자.
화아아악—!
순간, 거대한 마력이 치달리며 다 죽어가던 내 몸속을 마구 헤집었다. 그 마력에 정신이 번쩍 드나 싶더니, 지팡이를 들고 있던 일레힌 포이체카의 비열한 미소가 서서히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바뀌어갔다.
그는 익숙치 않은듯, 잠시 입술을 오물대다가 제대로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마나 회로의 재건이 오래 걸리더구나."
평소처럼 머릿속으로 보내는 음성이 아닌, 완전한 청년의 목소리를 되찾은 일레힌 포이체카의 진짜 음성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아아—
나를 잡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오던 당문의 인사들과 묶여있던 레나의 모습이 사막 속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부스스 부서져나가는 그 신기루 속에서.
촤악!
나는 내 허벅지 한짝을 걸레로 만들어버린 검을 뽑아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자, 푸석푸석하고 하얗게 셌던 일레힌 포이체카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설산목의 풀처럼 윤기나는 연녹색을 하고 있었다.
일레힌 포이체카는 활짝 웃어보이며 말했다.
"한때는 무려 십이제였던 괴물의 저주 마법이다. 세 달간 어찌, 버틸만 하더냐?"
버틸만 하긴 무슨.
나는 몰려오는 격통을 참아내며 마주 웃었다.
"아뇨. 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래도 조금 더 버텨내야 할 것이다."
곧, 서재의 허공에 둥둥 떠있던 빛의 구체 수십 개에서 마력이 별무리처럼 흘러나오며 나의 육신을 감쌌다.
일레힌 포이체카의 정순하디 정순한 마력은 나의 기맥으로 거칠게 파고들며 정신을 잠식하려던 뷔에탕의 기이한 마력을 단숨에 찾아내더니, 곧장 맞불을 놓기 시작했다.
#53화. 발할라 산맥의 마탑 6
#53화.
—쩌저적!
무언가 깨지고 찢어지는 소음이 귓전을 울렸다.
현재 나의 기맥을 타고 들어온 마탑주의 정순한 마력은, 뷔에탕의 마력을 찾아내자마자 강공을 펼치고 있었다.
쿨럭!
초월자들의 마력이 몸속에서 한바탕 푸닥거리를 벌이니, 매초마다 끔찍한 격통이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입과 코에서는 연신 진득한 피가 흘러나왔다. 거의 한 바가지는 될 듯했다. 하지만 환청 환시에 종일 시달릴 때보다야 몸이 더럽게 아픈 쪽이 차라리 나아서 그나마 참아낼 수 있었다. 피가 부족해 어지러움이 몰려오는 것만 뺀다면 말이다.
폭행에 이골이 난 스승으로부터 물리적인 고통쯤은 충분히 단련해 왔기에, 사실 이것보다 조금 더 심해도 웃으며 참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부르르-
목을 뚫고 들어온 지팡이의 끝이 떨렸다.
"······."
나는 일레힌 포이체카의 말대로 계속 고통을 버텨내고 있었고, 두 눈을 지그시 감은 그는 말없이 마력 운용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언 선생이 수술칼을 다루는 솜씨보다도 더욱 정교하게, 지팡이를 통해 건너온 일레힌 포이체카의 마력은 전신 구석 구석에 암처럼 퍼져있는 뷔에탕의 기운을 자르고 토막내며 몸의 한쪽 구석으로 몰아갔다. 줄행랑을 치던 뷔에탕의 마력은 기맥을 타고 내 뒷목 부근에 몰려들었다.
쿨럭-
그러자, 잠시간 기침과 잡생각이 극히 심해지며 어떠한 어지럼증이 나를 덮쳐왔다. 혼이 머리 위로 쑤욱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며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뭐지? 이거 이러다가 잘못되는 거 아니야?
이제 정말로 생각을 잘 해봐야한다.
'마탑주, 진짜 믿을 수 있는 건가.'
고통이 생각보다 크다. 이러다간 자칫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데. 회로가 훼손된 마탑주가 내 몸을 차지하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닐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진기를 뽑아 절초를 사용하면 마탑주라도 벨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전례없이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형검의 절초는 8위계 대마법사조차 고전하게 만든 검이다. 마탑주를 베고. 청록빛 괴물을 다루는 놈만 따돌리면 무서울게 무에 있나!
아포칼립스에서, 중원 무림에서, 또 제국과의 국경선에서 칼을 곁에 두고 몇십 년을 살아왔던가! 어차피 뒈진 다음에는 또 어떤 세상이든 기다리고—
푸우욱!
"음."
질린다. 질려.
나는 걸레짝이 된 허벅지에서 빼냈던 칼을 이제 다른쪽 허벅지에도 천천히 찔러 넣고 발골하듯 이리저리 쑤셨다. 격통과 함께 근맥이 잘려 나가며 방금까지 힘이 빳빳이 들어가있던 팔다리가 부질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내가 본래 정신머리가 반쯤 나가있는 사내라 적응을 빠르게 했기에 망정이지, 애초부터 정신이 멀쩡하고 건강한 사내였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겠군. 이건 정말로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만 같지 않은가?
내가 주저앉은 사이, 일레힌 포이체카의 서재를 채운 장대한 마력들은 내 기맥 속 어느 한 점으로 몰려들어 끝장을 볼 기세였다. 초원의 양 떼처럼 한 곳으로 몰이를 당한 뷔에탕의 마력이 발악을 해보았으나, 오래는 가지 못할 것 같았다.
헌데, 바로 그 순간.
등판과 뒤통수가 열기에 녹아내리는 느낌과 함께, 내장이 모두 입 밖으로 딸려나오는 듯한 기괴한 느낌이 들었다. 그에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번뜩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일이 상당히 진행되어 어떤 여인의 요염한 음성이 서재 안에 울려퍼지는 중이었다. 일레힌 포이체카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 최근에 바뀌었다던 여섯 번째 마탑의 새 주인이구나. 일레힌 가문이라지? ]
나는 음성이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레힌 포이체카가 들고있던 지팡이의 끝에는, 뷔에탕의 것으로 추정되는 마력의 구체가 피와 살덩이를 갑옷처럼 두른채, 심지어 검은 불길까지 사방으로 내뱉으며 아른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 마력의 구체는 포탄처럼 지팡이 끝에서 튀어나오며 서재의 허공을 차지했다.
그것은 아무런 방해도 없이 피와 살덩이를 징그럽게 꿈틀거리며 변환을 거듭하더니, 어느덧 여인의 신체를 본딴 형상으로 바뀌었다. 그 형상이 완성되자, 거기서 흘러나오는 기이한 기운이 곱절이 되었다.
아마도 카스트라 뷔에탕이 주입해둔 마력이 내 몸에서 피와 살점을 뜯어 빠져나온 뒤, 형체를 이루어 이 자리에 현현한 듯 했다. 뷔에탕이 만들어낸 형상은 내가 억지로 증폭시켰을 때와 비슷한 힘을, 그 살기등등한 존재감을 사방팔방에 풍기는 중이었다.
'저런 것도 가능했나? 고작 마력 조금으로?'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거부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곳은 발할라의 마탑. 오로지 마탑주만이 지배할 수 있는 공간이자 마탑주의 절대권역이었다.
제아무리 십이제였던 강자라도 일레힌 포이체카를 마력의 편린만으로 어찌해볼 수는 없으리라. 단순한 힘의 편린만으로 마탑의 주인을, 그것도 마탑에서 도모한다는 것은 삼존 칠좌급의 격외 초월자가 아닌 이상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레힌 가문. 맞습니다."
일레힌 포이체카는 역시 덤덤한 기색이었다.
그는 피, 살덩이와 마력으로 결합되어 이루어진 뷔에탕의 형상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다 재차 입을 열었다.
"나는 발할라의 여섯 번째 산봉우리를 지키고 있는, 일레힌 포이체카라고 합니다."
적당한 존대.
그의 연녹빛 머리칼은, 여인의 형상이 내뿜는 기운의 파동에 반응하며 이지러이 흔들렸다.
[ 일레힌 포이체카, 그 젊은 마법사가 벌써 많이 자랐구나. ]
너무도 평이한 말투.
여인의 형상은 마탑주를 신경도 쓰지 않고 엉덩이를 씰룩이며 어딘가로 날아가더니 높은 책장 위에 발을 딛고 섰다. 일레힌 포이체카가 그 광경을 보고 미간을 크게 찌푸렸다.
[ 그런데 일레힌의 핏줄이 어째서 나를 신경 쓰이게 할까. 재미있네? 일레힌 그룹. ]
"······."
조금이라도 말을 높이던 일레힌 포이체카는, 그때부터 말을 낮춰 차갑게 평대하기 시작했다.
"일레힌 그룹과 여섯 번째 마탑은 연관이 없다. 강제로 소멸시키기 전에 마력을 흩어내고 사라져라. 마지막 예의다."
[ 멀쩡한. 상태도. 아니면서. 누굴 소멸시켜? ]
일레힌의 일갈에 진노한 음성이 마력을 내뿜었다.
스아아아—
점점 더 흉폭한 살기를 풍기는 여인의 형상.
강대한 마력에 서재 안의 공기가 일그러진다.
일레힌 포이체카의 공간에서도 사나운 기세를 가감없이 내뿜는 저 기괴한 존재를 보아하니, 저주 마법에 통달한 마법사를 찾았다고 하여 저걸 풀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괜히 십이제까지 해먹었던 9레벨의 인형사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촤아아악!
여인의 형상에서 길쭉하게 살덩이가 뽑혀 나왔다.
단단한 밧줄같이 꼬아진 살덩이들은 서재 허공에 떠있던 빛의 구체들에 순식간에 달라붙으며 마력을 쭉쭉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서재 안의 공기가 일렁이며 뷔에탕의 존재감이 급격하게 거대해졌다.
'······.'
어째서 일레힌 포이체카는 저것을 저지하지 않는가 생각하던 내가, 그 역겨운 광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응."
저 뒤쪽에서 빠져있던,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마법사가 이제 되었다는 듯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가 내내 끌고 다니던 상어 아가리의 괴물을 향해서였다.
"이제 먹어도 돼. 아주 잘 익었다."
그자의 말과 동시에.
콰아아아아—!
마치 총알처럼 쏘아진 청록빛 거체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꼬리를 사용해 풍선처럼 부풀던 여인의 형상을 찢어버리더니, 그대로 한움큼을 잡아 입으로 가져갔다.
콰자작.
상어같이 촘촘한 이빨들이 그것을 순식간에 입에 넣고 씹어 삼켜버리자, 찢겨나간 여인의 형상이 질색하며 흉험한 기운을 뿜어냈다.
[ 알 헤임달의 짐승 부스러기 주제에······. ]
그러나 흉험한 기운을 뿜어내는 것이 끝이었다.
청록빛의 괴물은 아무렇지 않은듯 식사를 즐겼다.
짐승처럼 뷔에탕의 마력을 탐하고 살덩이를 갈가리 찢어 입에 넣는다. 오직 그뿐. 덕분에 뷔에탕의 마력이 살기 등등하게 흘려내던 기운은 점점 줄어만갔다.
곧이어.
풍선처럼 덩치를 키우던 여인의 형상은 결국 펑! 터지며 쪼그라들고 쭈글거리는 가죽처럼 바뀌어 사방팔방 떨어졌다. 기이한 마력과 살덩이의 결합체는 서재 바닥에 떨어져 여름철 아이스크림처럼 질퍽하게 녹아내렸다.
두 다리가 병신이 되어 앉은뱅이처럼 서재 바닥에 앉아있던 내 앞에도, 한 조각의 살덩이가 철퍽! 하고 떨어졌다.
살기짙은 뷔에탕의 음성이 그 살덩이에서 흘러나왔다.
[ 아~인형이 너무 많아서 신경 쓰지 못했는데······문신이 정신을 파먹기 전에 찾아오라고 일러주었던 아이구나. 이미 나의 아이가 되었어야 했는데 어째서······. ]
나른하면서도 귀를 간지럽히는, 소름돋는 말투.
나는 뷔에탕의 마력을 담은 살덩이를 앞에 둔 채 허벅지에서 검을 뽑았다. 이미 다른 살덩이와 마력은 저 청록빛의 괴물이 잡아먹은 상태였고, 서재에는 오직 이 살덩이만이 남아있었다.
[ 말을 듣지 않았으니······너는 혼나야겠네. ]
와중에도 그 경직된 살덩이는 뷔에탕의 음성을 전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검을 힘겹게, 높이 들어 올리고는 한 마디만을 내뱉었다.
"좆이나 까시고, 앞으로는 나잇값을 좀 하세요 아줌마. 예?"
[ 아······줌마? ]
콰앙!
허벅지에서 빼낸 검은 망치처럼 떨어져 살덩이를 으깨버렸다.
통쾌하게 수백 갈래로 터져 나가는 살덩이.
나는 그 더러운 살덩이를 툭툭 털어내곤 납검했다.
아, 내 몸에서 나왔을 테니 더러운 것은 아닌가.
아무튼 못해도 일백 살은 넘게 먹었을 노괴가, 그래도 여인이랍시고 아줌마라는 말에는 극렬하게 반응하는군.
— 크르륵!
어느새 내가 부순 살덩이 앞까지 다가온 괴물은 바닥에 흩어진 살점들을 꼬리로 훑어내 삼켜버렸다. 청록빛 괴물의 배가 미친듯이 불룩불룩 거리더니 금세 조용해졌다.
마침내 카스트라 뷔에탕의 빌어먹을 마력이 소멸한 것이다.
그렇게 고요해진 일레힌 포이체카의 서재 안에서.
청록빛의 상어입 괴물을 다루던 마법사가 한껏 심퉁난 목소리로 툴툴댔다. 그는 일을 마친 괴물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고 있었다.
"대충 만든 마공학 병사라도 핵이 들어있어서 꽤 비싼 건데, 그때 네 칼질 때문에 몇 기나 망가졌는지 알아? 망할 정신병자놈."
아.
마공학 병사들이 먼저 나를 공격한 게 아니었던 건가.
언제부터 정신이 오락가락했는지 자세히는 모르겠다.
그래도 진정한 사내라면 사과도 할 줄 알아야 하는 법.
"내가 정신력이 약한 편이 아닌데, 피곤해서 그랬나 보군.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러자, 힘겨운 기색의 일레힌 포이체카가 그 마법사 대신 입을 열었다.
"정신력의 문제가 아니다. 두세 달이면 진즉 죽어 몸이 녹아내려야 할 저주를 넉 달이나 버텨냈으니."
"어쩐지 많이 아프더군요."
나의 여상스런 대답에, 일레힌 포이체카는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살아오면서 본 돌연변이 중 네가 첫 번째로 특이하다. 둘둘 말고 있는 악연들만 없었다면, 본가에 소개해주고 싶을 정도로군. 설마하니 카스트라 뷔에탕이 제약까지 감수하고 꼭두각시의 살덩이를 뜯어 현현할 줄이야."
그것이 무슨 제약인지는 몰라도······.
이제 뷔에탕의 저주는 감쪽같이 사라져 기하학적인 문신이 자취를 감췄고, 빼빼 마르고 여기저기 박살이 난 몸뚱이만이 남았다. 잘린 팔도 붙여버리는 6세대 나노로봇이 열심히 수복하고 있겠으나, 이번에는 아무래도 시간이 꽤 걸릴 듯했다.
아까부터 피곤한 기색을 보이던 일레힌 포이체카는 내 박살난 허벅지에 마력의 구체 두 개를 붙여주고는, 지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회로 재건이 전부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맹약에 따라 저주를 지웠으니, 한시름 덜었군. 이제 마지막 회로가 재건될 때까지 다시 서재를 폐할 것이다. 이만 나가 봐라."
간단한 축객령.
나는 그 말과 함께 서재에서 밀려나 땅을 딛고 섰다.
허벅지는 분명 병신이 되어있는 상태였는데, 빛나는 마력의 구체들이 마력을 조금씩 주입해주자 꽤 걸을만은 해졌다.
그렇게 안전한 서재 밖으로 밀려나니, 침실 구석에 봉해놓은 에센스가 어렴풋이 기억났다.
곧 침실로 돌아온 내 눈에, 끔찍한 광경이 들어왔다.
여기저기 피가 낭자해있고, 딱딱하게 굳은 핏덩이들이 바닥 곳곳에 있었다. 고약한 비린내가 코를 찔렀으며 털갈이라도 한 듯 검은 머리칼들이 뭉텅이씩 빠져있었다. 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바닥과 침실 사이에는 오래된 발바닥 자국이 있었는데, 발가락이 한 개나 두 개씩 없었다.
내가 몇 달간 이런 곳에서 살았던가.
그래도 깨끗이 치운줄 알았는데 나는.
레나마저 찾아오지 않는 이유가 있었군.
"흐음······."
나는 침음을 흘리며 곧장 에센스를 찾았다.
에센스는 침실 구석 서랍장에 정말 꼭꼭 숨겨져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꽤 강력한 마력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내가 무슨 힘이 남았다고 이리 봉해두었던가?
서랍장에는 긁힌 자국들이 가득했으며 근처 바닥에는 무언가 하얀게 많이 떨어져 있었다. 갈라지고 깨진 누군가의 손톱들이었다. 그 광경에 내 손바닥을 뒤집어 펴보자, 손가락들은 상처없이 멀쩡했는데 손톱이 모두 갈려나가 하나도 없었다.
음.
아무리 대단한 나노 로봇이라도, 빠진 손톱까지는 재생해주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그것이 괜히 웃겨 크게 웃었다.
하하하—
하지만 몸이 욱씬거려 박수까지 치며 웃을 수는 없었다. 나는 웃기를 그만두고 서랍장을 잡아 당겼다. 이상하게도 서랍장은 굳게 닫혀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의문을 가지자마자, 차고있던 네 개의 마나 팔찌에서 마력이 빠져나오며 그 서랍장의 문을 열어젖혔다.
다행히도, 에센스들은 넣어둔 그대로 잘 있었다.
그리고 에센스가 들어있는 유리병에는 피딱지들이 굳어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내 손가락의 지문과 일치했다. 아무래도 언젠가, 저 유리병을 꽉 쥐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마탑주에게 받은 그 에센스들을 모두 꺼내어 늘어놓았다.
9레벨의 좀비 우르드에서 뽑아냈다는 에센스를 비롯해 정크타운에선 그림자조차 구경하지 못한, 중급 이상의 에센스가 들어있는 유리병이 스무 개가 넘었다. 전부 한곳에 모으면 몇 리터는 될 듯했다.
에센스를 꺼내 주욱 늘어놓은 나는, 침실의 유리창에 비치는 몰골을 바라봤다.
비쩍 마른 몸에 다 죽어가는, 곧 송장을 치를듯한 얼굴.
그렇기에 고민은 길지 않았다.
퐁!
나는 힘겨운 숨을 한번 크게 내신 뒤, 우르드의 에센스를 제외한 에센스병의 뚜껑을 모두 따놓고는 하나씩 빠르게 입에 들이부었다.
스무 병이나 되는 중급의 에센스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파도처럼 목구멍 안으로 밀려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