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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한밤중에

1화. 한밤중에

“아가씨, 그분들이 왔어요……. 황자님께서 오셨습니다.”

시녀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레아는 긴장해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이제 막 자신을 확인하러 들어온 어머니를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머니, 저는…….”

레아는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부여잡았다.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지난 며칠간 충분히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때가 되니 여전한 공포와 불안감이 굳은 결심을 무너뜨릴 듯 뒤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단다, 얘야.”

레아를 끌어안아 안심시켜 주는 어머니의 눈에도 근심이 가득했다.

“걱정하지 마, 할 수 있어.”

그녀는 레아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네가 해내야 하는 이유를 잊지 말렴, 레아…….”

어머니는 레아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어머니가 걱정을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레아는 어머니의 마음속에 가득할 불안과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레아가 심호흡을 했다.

“네, 어머니.”

그녀는 어머니에게 억지로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저는 할 수 있어요.”

“착한 우리 딸…….”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팔을 둘러 레아를 안아 주고 나서, 잠시 후 시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손님들을 맞이할 테니, 너는 준비를 마치렴.”

어머니는 레아에게 그렇게 말하고 마지막 응원의 미소를 보낸 후, 결국 방에서 나갔다.

레아가 눈을 감자 곧바로 하녀가 다가와 분주하게 움직였다. 레아는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최선을 다하며 괜찮을 거라고, 다 괜찮을 거라고 속으로 혼잣말을 삼켰다.

시녀가 마침내 입을 열자, 결심을 굳히는 데 매우 집중하고 있었던 그녀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정말 아름다우셔요, 아가씨.”

레아는 눈을 돌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살폈다. 머리는 무척 근사하게 꾸며져 있었고, 얼굴에는 본연의 청순한 외모를 돋보이게 할 정도로만 화장이 되어 있었다.

레아는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날이 마침내 오고야 말았구나.’

이날은 그녀의 결혼식 날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에 자신의 결혼식을 상상하면서, 꿈꾸던 남자와의 결혼이 얼마나 마법 같고 근사할지 상상의 날개를 펼쳐 보고는 했었다. 상상 속의 자신은 몹시도 행복하고 신나고 기뻐하면서 식장에서 꿈꾸던 신랑을 향해 행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환상은 현실이 되지 못할 것이었다. 지금 그녀의 가슴속엔 설렘과 기쁨 대신 두려움과 불안만이 가득했다. 이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권력의 최상층에 있는 여인들이 으레 그러하듯, 레아도 결혼 상대를 직접 고를 수 없었을 뿐이었다.

허나 그녀는 적어도 황녀가 아니니까 그런 관습에서 안전할지도 모른다고, 어리석고 바보 같은 착각을 했었다. 하지만 제국 전체에서 가장 지체 높은 귀족가의 영애인 그녀도 결국에는 이런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레아는 자신이 주변 모든 사람보다, 어쩌면 이 세상 그 어떤 제국의 황녀보다도 더 안 좋은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적어도 황녀들은 이웃 제국 황제나 고위급 군 장교와 결혼을 했으니 말이다.

물론 그녀의 결혼 상대 역시 황자였으나…… 다른 황녀들의 경우와 달리 그녀의 남편 될 사람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뱀파이어로, 뱀파이어는 인간의 적, 그것도 철저한 숙적이었다.

“때가 되었어요, 아가씨.”

시녀의 목소리를 들은 레아는 다시 한번 펄쩍 뛰듯이 놀랐다. 레아는 한 번 더 길고도 깊은 한숨을 내쉰 후, 고개를 치켜들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 같은 귀족 여성은 불만이 있어도 말로 표현해선 안 되었다.

현관은 그녀를 맞이하듯 열려 있었다. 그녀는 우아하게 문턱을 넘어 의연히 통로를 따라 나아갔다.

* * *

레아는 몇 번인지 셀 수 없을 만큼 심호흡을 하며 여러 문을 지나쳐 걸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문들이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마지막 한 발을 내딛자, 그녀는 마침내 식장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이중문 바로 앞에 설 수 있었다.

‘마음 굳게 먹어, 레아. 네 가족과 온 제국을 위해서.’

레아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향해 몇 번이나 중얼거린 뒤, 어깨를 펴고 다시 고개를 든 채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달과 별이 그녀 위로 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상상 속 그녀의 결혼식은 언제나 햇볕이 화창한 날, 바람 따라 춤추며 흩날리는 꽃잎들에 에워싸여 치러졌다. 그런데 그녀가 한밤중에 어둠의 피조물과 식을 올리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하늘은 청명했고 고요했으며 평온했다. 반짝이는 별빛들이 그녀를 비추었지만, 이토록 고요한 하늘도 그녀의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심장이 마구 날뛰어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다시, 또다시 심호흡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을 가만히 놓아두는 것에도 온 힘을 다 쏟아야 했다.

* * *

그녀가 도착했다는 발표와 함께, 마침내 행진이 시작되었다.

레아가 걸어 들어간 결혼식장은 호화찬란하기 그지없어서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했지만, 공간을 가득 메운 아름답고 장엄한 치장과 대조적으로 장중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으면서도 팽팽하게 긴장된 채였다.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뱀파이어와 인간이 한 지붕 아래 있을 일은 극도로 드물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럴 일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이번에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고 들지 않는다는 점이 달랐다. 이 결혼식 때문에 뱀파이어와 인간은 사상 최초의 휴전에 동의했다.

단상으로 걸어가면서 레아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드레스를 꽉 움켜쥐었는데, 다행히 풍성한 치맛주름에 손이 파묻혀서 하객들의 눈에 띄지는 않았다. 레아의 얼굴은 앞을 향했지만, 눈은 꾸준히 1.5미터 정도 앞의 바닥 한 지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전쟁터에서 맞부딪쳐 서로 죽고 죽이려는 뱀파이어군과 인간군 사이의 좁고 가느다란 길 위를 걷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 발로 도살장에 죽으러 들어가는 작고 무지한 새끼 양이 된 것만 같았다. 이런 그녀에게 남편이 될 뱀파이어와 다른 뱀파이어들이 자신을 절대 해치지 않겠다고 약조했다는 사실은 별로 위로가 되지 못했다.

레아는 장중의 분위기가 너무나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어서 지금이라도 당장 뒤돌아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지금 그녀는 쿵쿵 울려대는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두려운 나머지 눈을 들어 신랑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뱀파이어들과 만날 때마다 그녀는 항상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다행히 그녀가 뱀파이어를 많이 만나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5년 전에 포로로 잡혀가던 뱀파이어와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뱀파이어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자신을 가둔 자들을 향해 경멸과 분노를 담아 으르렁거린 것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번득이는 눈에서 보이는 피처럼 붉은 빛깔이, 지나치게 창백한 피부와 대조되어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레아는 그 모습을 보고 공포에 질렸었다.

1년 전에 뱀파이어들이 그녀가 탄 마차를 공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인간들 모두는 뱀파이어를 두려워한다. 레아 또한 모든 뱀파이어가 두려웠다. 뱀파이어들은 여인들이 아이에게 겁을 줄 때면 항상 등장하는 사악한 괴물이었다.

그리고 레아는 지금 그들 중 하나와 혼인하기 직전이었다.

레아는 두려워서 정신이 없는 나머지 단상 앞에 다다른 줄도 모르고 있다가, 시야에 들어온 누군가의 손을 보자마자 현실을 실감하고는 놀라서 발을 헛디딜 뻔했다. 그 손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킨 그녀는 그것이 자신과 결혼할 뱀파이어 황자의 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레아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에서 출발해 팔꿈치로 향한 눈길은 배를 지나 가슴에서 멈추었다. 그녀가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켠 후 계속해서 시선을 옮기니 마침내 그의 얼굴에 다다랐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레아는 잠시 심장이 멎은 것만 같았다.

눈앞의 남자는 레아가 예상했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눈은 피처럼 붉지 않았고,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지도 않았다. 사실은 송곳니가 아예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피부가 전에 만났던 뱀파이어들처럼 창백하지도 않았다. 인간들에 비하면 여전히 창백한 편이긴 했지만, 지금까지 봤던 다른 모든 뱀파이어들의 소름끼치는 흰색과는 달랐다. 그리고 너무나 놀랍게도…… 그는 숨이 막히게 아름다웠다.

레아는 정신이 몽롱해졌지만, 누군가가 목청을 가다듬는 소리를 들으니 곧바로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그녀는 서서히 손을 내밀어 그가 뻗은 손을 맞잡을 동안 그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눈은 밝은 달을 닮은 은빛 회색이었고, 속에서 수많은 별들이 소용돌이치는 것처럼 생기가 넘쳤다. 그리고 속눈썹은…… 남자치고는 너무 길고 숱이 많았다. 그녀는 입술, 턱, 코……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살피며 말을 잃었다. 이토록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을 한 인간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는 애초에 인간이 아니었다.

레아는 눈을 돌리라고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어째서인지 그럴 수가 없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자신을 어떻게 해 버린 것 같았다.

손과 손이 닿자, 레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심장이 훨씬 크게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자기 바로 옆에 서도록 이끈 후 손을 놓아주었다. 손이 놓이자 그의 손이 닿았던 자리에 찬바람이 스쳤고, 그제야 그녀는 그의 살결이 차갑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일찍이 병사들에게 뱀파이어들은 피부가 마치 시체처럼 차가운 냉혈동물 같다고 들은 바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전혀 차갑지 않았다.

왜였을까? 어떻게 손이 따뜻할 수 있을까? 자신이 착각했을 리는 없는데 말이다!

그러나 레아는 이 수수께끼에 대해 고민할 틈이 없었다. 지체 없이 결혼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곳에 있는 모두가 결혼식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터였다. 참석한 인간들은 뱀파이어들이 어서 이곳을 떠나 그들의 제국으로 돌아가 주기를 바라고 있었고, 방문한 뱀파이어들 역시 인간들의 소원대로 이곳을 떠나 자신들의 제국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게 확실했다. 이는 인간들과 뱀파이어들의 바람이 맞아떨어진 희귀한 경우였다.

그래서인지 모두의 바람대로 결혼식은 급히 끝이 났다.

황녀들과 귀족들의 결혼식에 참석해 본 적 있었던 레아는 무척이나 특별한 행사여야 했을 자신의 결혼식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마무리되는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짓고 싶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애초에 아무도 이 결혼을 원치 않았으니 말이다. 이건 신랑, 신부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이 강제로 참여한 결혼식이었다.

모두가 재빨리 움직여 흩어지기 시작하자, 레아의 입술 사이로 낮고 조용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식장이 얼마나 빨리 비는지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때 그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물론 레아는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뱀파이어들의 땅인 북부 제국에 가기로 되어 있어 미리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해 두었기에,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살짝 떨면서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갠 레아는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눈물을 보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레아는 뱀파이어 황자에게 이끌려 문을 향해 가면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선 채로 조용히 흐느껴 울고 있었다. 레아는 어머니를 따라 울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고개를 돌려 나아갈 앞길에 집중했다. 하지만 남편과 함께 문에 다다라서는 잠깐 멈춰 서서 마지막으로 한 번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남편의 손을 꽉 쥐었다가, 다시 그를 보며 마침내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이건 레아가 지금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녀는 한 걸음씩 용감하게 미래를 향해 걸어가면서, 운명이 자신의 앞길에 무엇을 준비해 두었는지 알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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