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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72화

23장 선택과 집중

난장판이 겨우 정리된 다음 날 오후.

"...그러니 탈리스만 백작도 마찬가지야. 전에 별궁에서 날 습격한 것도, 하수도에서 르갈과 함께 싸운 것도 전부 이런 괴물이었지."

사람들을 저택 응접실에 모아 놓은 다음, 감추고 있던 정보를 몇 개 공개하며 톨라리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그리고 여기서 후원자라는 녀석이 등장해. 톨라리? 설명해줘. 여기서 후원자를 직접 만난 건 너뿐이니까."

"알았어 황자님."

톨라리는 며칠 전보다 더 퀭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봤자 정체는 잘 모르지만. 일단 외모는 온몸을 붕대로 감고 있는 남자야. 마법이 막혀서 힘들어 할 때 불쑥 나타나서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어."

"...소원이라니, 무슨 소원 말입니까?"

마주보고 서 있던 다비가 물었다. 톨라리는 양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며 대답했다.

"더블 매직."

"더블 매직?"

"양손으로 동시에 마법 쓰는 거. 그것도 템페스트 급 이상. 두뇌를 양분해서 연산을 가속하면 가능한데 그땐 쉽지 않았어."

"흠, 흐음...."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 암튼 소원을 빌었더니 바늘 같은 걸 내 몸에 꽂았고. 그 뒤에 더블 매직을 쓸 수 있게 됐어."

"마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만, 그게 그냥 단숨에 되는 일입니까? 바늘 한번 몸에 꽂혔다고?"

"그러게 말이야. 탈리스만 백작도 어제 말했어. 자기도 후원자한테 선물 받았다고. 소원 빌었다는 이야기는 없었지만 그게 그거겠지? 그러니 이거 다 후원자 짓. 확실해."

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다비는 거의 찌를 것처럼 예리한 눈으로 톨라리를 노려보았다.

"그러니 그 소원인지 선물인지, 아무튼 바늘에 찔려 뭔가를 주입당하면 육체가 괴물로 변한다는 겁니까?"

"글쎄?"

톨라리는 머리를 긁적였다.

"꼭 그런 건 아니려나? 난 첫 소원을 빌었을 때 이상 없었어. 지금도 괜찮고. 서로 종류가 다른 듯?"

"너무 희망적인 관측 아닙니까? 혹시 당신도 갑자기 괴물로 변하는 건 아니겠죠?"

"그럴지도?"

엥? 그럴지도?

"네?"

"괜찮다고 확신 못해. 혹시 나중에라도 그렇게 되면 빨리 죽여줘. 최대한 빨리."

"흐음...."

다비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톨라리는 문득 내 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황자님은 내 은인이야. 진짜 고마워."

"아니, 오히려 실착이지."

"실착? 나 구한 거?"

"아니. 저런 괴물이 저택으로 노리고 올 거라 예측을 못한 거."

"그걸 세상에 누가 예측함? 그리고 어제 나 구해줘서 말 꺼낸 거 아냐. 물론 그것도 고맙긴 했지만.

"그럼?"

"그 전에, 마탑에서 후원자에게 받은 선물 못 쓰게 막아준 거."

톨라리는 자신의 팔에 주사를 놓는 시늉을 하며 몸서리쳤다.

"그때 황자님 안 왔으면 나 어떻게 됐을지 몰라. 머리 홱 돌아서 그거 맞고 괴물 되었을지도? 탈리스만 백작처럼. 그래서 고마워. 충성충성."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이며 절을 하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표정이 조금 풀어진 다비가 내 쪽을 보며 물었다.

"황자님. 이번 탈리스만 백작과 그때의 섭정 전하, 그리고 나이트 파이렌이 괴물이 되었던 것 모두가 같은 일이라고 보십니까? 배후에 후원자가 움직여서?"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하수도에 괴물이 득시글거렸던 것도 따지고 보면 죽은 둘째 형님이 원인이고."

"인간을 괴물로 바꿔버리는 존재라니.... 무시무시한 이야기군요. 게다가 아크 위저드의 이야기로는 사람의 심리적인 약점을 파고들어 선택을 강요하는 것 같습니다."

"탈리스만 백작도 복수심 때문에 소원을 빌었겠지. 날 죽일 힘을 달라고. 당한 게 많으니까."

그래. 결론이 이렇게 정리가 되는구만.

톨라리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인 게 천만다행이다. 덕분에 인류의 배신자들이 어떤 식으로 힘을 얻게 되는지를 알게 됐으니까.

문제는 지금까지 총 아홉 번의 회귀 동안, 인류의 배신자들이 이계의 괴물로 직접 변신했던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

아니지. 톨라리의 경우엔 인간성을 잃고 사람을 학살하는 정신적인 괴물이 되었으니 비슷한 경우라고 봐야 할까?

"그렇게 따지면 나중에 발작을 일으키는 이 종족 연합도...."

"네? 황자님?"

"응? 아니. 잠깐 딴생각이 나서. 아무튼 여기 중에는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 사람도 있을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응접실에 모인 사람들을 하나씩 살폈다. 다들 긴장했겠지? 엄청 무거운 이야기였으니까?

"...."

"...."

하지만 메르데스와 디디는 평소처럼 얼굴에 아무 표정도 없었다.

아니, 얘들은 무슨 안면 근육이 마비됐나?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저렇게 침착할 수 있지?

반면 카일과 리넨은 당황한 얼굴로 연신 입을 뻐끔거렸다.

"아니 그게...."

"으.... 저는 당최...."

그리고 호위신관의 대표로 참석한 트리멈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시간을 둔 다음 머릿속에 정리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우린 그 후원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녀석의 목표가 무엇인지 전혀 몰라."

물론 거짓말이지만.

후원자의 목표라고 해봤자 너무도 뻔하다.

바로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하기 전에 이쪽 세상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

하지만 지금 당장 이계의 침략이라는 정해진 미래를 공개하는 건 곤란하다.

너무 절망적인 이야기니까.

아무리 시계바늘을 빨리 돌리기로 했어도 그것만큼은 최대한 연착륙을 시켜야 한다. 4회 차쯤이던가? 이걸 너무 일찍 미래를 밝혔다가 역효과가 난 적이 있거든.

"일단 내가 정보를 수집해 볼게. 문제가 있을 법한 사람들도 몰래 뒷조사하고."

"황자님께서 직접 말씀입니까?"

"응. 물론 너희도 뭔가 묘한 이야기가 들리면 바로 알려줘. 특히 카일?"

"네. 황자님."

"구스프 상회의 힘을 동원해서 정보를 수집해. 이번에 무슨 귀족님이 성격이 이상하게 변했다더라, 이번에 어떤 기사님이 갑자기 강해졌더라.... 갑자기 이런 소문이 들리는지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쪽도 준비를 해야 해. 설사 어떤 괴물이 새롭게 몰려오더라도 막아낼 수 있도록."

"하, 하지만 저희가 어떻게 말입니까?"

그러자 잠자코 있던 털북숭이 소년. 리넨이 손을 번쩍 들며 반문했다.

"그 괴물은 아크 위저드님조차 해치우지 못할 만큼 무시무시한 존재 아닙니까? 그런 괴물을 상대로 저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단장님이나 신관님들은 도움이 되겠지만...."

"그래서?"

"네, 네?"

"그래서 나보고 혼자 다 하라고?"

"네? 아, 아닙니다! 제 말 뜻은 그런 게 아니라...."

리넨이 기겁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야. 암튼 벌써부터 너무 기죽을 필요는 없어. 적이 괴물만 있는 것도 아니고."

"네?"

"당장 이번만 해도 그렇잖아? 보고서 읽었어. 네가 활약해서 동쪽 숲으로 오는 적을 괴멸시켰다던데?"

"그, 그거라면 사실 저보다는 다른 분들이 마무리를 잘 해줘서...."

리넨은 말을 흐리며 카일과 디디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한쪽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남 눈치 볼 거 없어. 물론 공을 세운 건 카일과 디디지. 하지만 너 없이는 처음부터 성립이 불가능한 작전이잖아?"

"그것은...."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 너희 모두 지금보다 더 빠르게. 더 체계적으로 강해진다면 어떤 적을 상대로도 전선을 맡길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황자님."

그러자 이번엔 카일이 몸을 앞으로 내밀며 질문했다.

"일단 이 모든 사실을 황제 폐하께, 그러니까 제국에 정식으로 알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제국에?"

"네. 사태가 너무 심각해졌습니다. 앞으로는 저희들의 힘만으로 대처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사실을 밝히자고? 탈리스만 백작이 나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정체불명의 후원자에게 정체불명의 약물을 투여받고 괴물이 되어서 공격해왔다고? 그리고 죽였더니 시체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갔다고?"

"그것은...."

"그리고 돌아가신 둘째 형님과 죽은 파이렌도 같은 케이스로 괴물이 되었고? 심지어 둘째 형님을 죽인 건 나고, 그 시체를 불로 태워 버린 것도 나라고 고백하라 이 말이지?"

"그것이...."

"당장은 안 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간 제국이 뒤집어질 테니까. 그랬다간 모두가 모두를 의심하는 상황이 펼쳐질 거야. 아니, 차라리 그렇게 되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다행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증거가 없잖아? 당장 괴물을 목격한 인간이 셋밖에 없어. 나, 다비, 그리고 톨라리."

"저와 르갈도 보았습니다."

그러자 디디가 손을 들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들이 최초 목격자였지?

"그럼 인간 넷에 짐승 하나. 아무튼 전부 내 사람들이라 객관성이 부족해. 아무 증거 없이 이런 소릴 했다간 미쳤냐는 소리부터 나올걸?"

"하지만 제국의 황자와 나이트 마스터와 아크 위저드의 증언이 더해지면...."

카일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고개를 저으며 내 생각에 동조했다.

"아닙니다. 모두에게 인정받으려면 역시 물증이란 게 중요하겠죠. 아니면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다수의 증언이 있던가."

"내 말이 그 말이야. 하필 그놈들과 싸운 장소가 항상 외진 곳이라 목격자가 전혀 없어. 덕분에 피해가 더 커지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장은 넘어가더라고 영원히 감출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결국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 오겠지."

그때가 되면 거대한 충격이 제국 전체를 강타할 것이다.

엠퍼로드 시가지 한복판에 이계의 괴물이 딱 하고 등장한다던가 하면, 무슨 수로 그 사실을 감출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동안 내가 세웠던 대부분의 계획과 테크트리가 박살나게 된다!

휴....

이거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오는구만. 이러다가 이계의 침략도 더 빠르게 당겨지는 거 아냐?

그런데 바로 그때.

"황자님. 혹시 황자님은 이런 사태를 미리 예견하신 것 아닙니까?"

경호신관인 트리멈이 뜬금없이 질문을 날렸다.

뭐? 방금 나보고 이런 미래를 미리 알고 있었냐고 물어본 거야? 혹시 내가 회귀자라는 걸 눈치챘나?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시치미 뚝 떼고 되묻자, 트리멈은 경건한 표정으로 양손을 모으며 말했다.

"황자님께서는 다섯 신의 축복을 받으신 성자이십니다. 물론 저 같은 평범한 신관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혹시 축복과 함께 신의 예지도 함께 받으신 게 아닙니까? 이런 공포의 괴물들이 세상을 어지럽힐 날이 올 테니, 그것에 대비하라고?"

휴, 난 또 뭐라고.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그래. 신관이라면 당연히 이런 의문을 품을 만도 하지.

실제로 내가 예견한 것은 이런 질문이 언젠가 올 거란 사실이었다. 그래서 대응법도 미리 만들어 놨다 이 말씀.

"...어느 정도는."

"역시, 계시가 있었던 거군요!"

"확실한 건 아니야. 대비하라. 준비하라. 멀지 않은 미래에 그날이 올 것이다. 뭐 그런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었어."

"오오.... 다섯 신께서는 역시 항상 저희를 굽어살피고 계셨던 거군요."

트리멈은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손사래를 치며 별거 아닌 듯 말했다.

"말했잖아? 어렴풋이 들었다고. 딱 부러지게 명확한 이야기는 아니야. 내가 신성마법을 쓸 수 있게 된 순간, 그런 느낌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친 정도?"

"목소리라니. 아아, 신이시여...."

엑, 이거 오히려 역효과가 났나?

트리멈은 즉시 눈을 감으며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나는 얼떨결에 자세를 따라하는 리넨의 모습에 헛웃음을 지었다.

뭐 어쩌겠냐. 설명하기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이것뿐인데.

"그렇다고 다들 감격하진 마. 아직까진 정확히 말해줄게 별로 없으니까. 혹시 나중에 더 명확한 계시를 받으면 이야기해 줄게. 확실한 건 기존의 방식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적이 나타나고 있는 건 사실이야. 그렇지?"

"그렇습니다."

모두가 동시에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감염 군주 같은 건 물리적으로 잡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도 했어. 그러니 미리 대책을 세워 놔야지."

"감염 군주? 방금 감염 군주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다비가 처음 듣는 단어인 듯 되물었다. 그야 당연히 처음 듣겠지? 회귀 전이건 지금이건 내가 만들어 낸 이름이니까.

"백작이 변한 괴물 말이야. 촉수를 뿜어 주변의 부하들을 다 감염시켜서 부려먹었다며?"

"네. 그렇습니다."

실제로 그 장면을 목격한 디디가 대답했다. 동시에 톨라리도 눈을 크게 뜨며 박수를 쳤다.

"맞아! 그때 내가 잠깐 정신 차리고 한마디 했지? 괴물이 재생한다고. 고작 그거 한마디 듣고 회복마법을 퍼부어서 과재생으로 괴물을 폭발시킨 거야?"

아니야.

감염 군주 공략법은 내가 무수한 시행착오와 고통스런 전투를 통해 자력으로 알아낸 자랑스러운 결과물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잠자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이렇게 내 진짜 고생과 노력이 아무도 몰라준 채 사라져 버리는구나. 흑흑.

"황자님 진짜 천재야.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어? 그 짧은 순간에?"

"아니, 그렇다고 그거 듣자마자 바로 회복마법 쓴 건 아니고."

"아니야?"

"나도 그놈 상대로 한참 고생했어. 그러다 결국 아이디어를 떠올린 거고."

실제로는 거의 10초 만에 순삭했지만.

어차피 목격자도 없으니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겠지?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73화

23장 선택과 집중

"그러는 너야말로 괜찮아? 아까부터 얼굴이 이상해. 어째 좌우 근육이 따로 노는 것 같은데...."

"응. 아직도 얼얼해."

톨라리는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강하게 휘저었다.

"그래도 처음보단 많이 좋아졌어. 영약 네 병을 동시에 마신 후유증이겠지?"

"무모하긴. 네 병 아니라 다섯 병이었으면 죽었을지도 몰라. 아니면 식물인간 되었거나."

"인정. 암튼 트리플 매직은 맘에 들었어. 백작에겐 안 통했지만, 아무튼 성공하니 기분은 좋더라."

그 와중에 기분이 좋다고? 과연 마법 덕후는 생각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구만.

그런데 트리플 매직이라.

대략적인 설명은 이미 본인에게 들었다.

두뇌를 인위적으로 두 개의 영역으로 나누고, (여기까지는 더블 매직이다) 그것을 각기 고속으로 연산시킴으로 새로운 제3의 영역을 발생시킨다.

그것으로 템페스트를 동시에 세 발을 날리면, 그게 바로 트리플 매직.

말로 하면 간단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그야말로 천재 중의 천재인 톨라리니까 가능한 발상이다. 물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뇌가속 영약 네 병을 원샷 하긴 했지만.

"이번엔 상성이 나빴어. 만약 바람이 아니라 불이었다면 그거 한방에 끝장나지 않았을까?"

"그랬을까? 아무튼 결과가 안 좋아서 우울해. 어째 건강 버려가면서 뻘짓 한 거 같고."

뻘짓이라고?

아니지. 그건 결코 아니다.

더블 매직을 넘어, 트리플 매직이라는 게 가능하다는 발상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내게 엄청난 도움이 됐으니까.

왜냐고?

나도 뇌가속 영약 퍼마시면서 트리플 매직 쓸 거냐고?

물론 그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고생 끝에 따로 만들지 않아도, 이미 내 머릿속에는 제3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

바로 리치의 마력 결정.

지금까지는 이것을 일종의 마력 저장고처럼 사용했는데....

하지만 여기에 이번 톨라리의 경우를 적용시키면?

빙고!

물론 실제로 써본 건 아니지만, 이미 어지간하면 될 것 같다는 확신이 온다.

그런데 이걸 어쩌지?

내 안에는 마력결정이 하나도 아니고 3개나 있는데?

만약 이것들을 한꺼번에 작동시키면....

트리플 매직이 아니라 쿼드러플(4) 매직.

혹은 퀸터플(5) 매직도 가능하지 않을까?

"왜 그래 황자님? 갑자기 말도 안 하고. 내 건강 걱정해 주는 거야?"

어째 미안한 듯하면서도 기뻐 보이는 얼굴이구만. 난 굳이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도 좋지만 건강 좀 챙겨. 너무 무모한 짓 하지 말고."

"헤헤. 괜찮아. 말은 그렇게 했어도 후유증 별로 없어. 오히려 새로운 재주가 생겼는걸?"

"재주?"

"이거 봐. 얼굴이 완전히 따로 움직인다?"

그리고는 양쪽 눈썹을 시간차를 두고 서로 다르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음....

그것 참 뭐랄까,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해지는 기묘한 개인기구만.

사람 얼굴이란 게 저렇게 좌우가 완전히 분리되어 움직일 수 있나? 후유증 없는 게 아니라 저게 바로 후유증 아냐?

...여하튼.

내가 잠시 생각에 빠졌던 것은, 미안하지만 톨라리의 후유증 걱정 때문이 아니다.

만약 템페스트 다섯 발을 동시에 날리면 대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화력이 발생할 것인가?

덕분에 아무리 급해도 당장은 절대 시작할 수 없었던 테크트리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바로 '불의 정령왕'루트.

그러게? 이거 잘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겠는데?

* * *

그 전에 먼저 계획한 것은 '나무 정령' 루트와 '아크 위저드 트롬본' 루트였다.

먼저 나무 정령 루트는, 대놓고 엘프를 찾아가 녀석들의 '시험'을 받고 인정을 받는 쪽으로 전개된다.

기존의 선물과 술을 통해 드워프와의 관계를 개선한 다음, 녀석들을 통해 엘프와의 접점을 만드는 방식에 비교하면, 이것은 대단히 급진적이고 위험한 계획이다.

하지만 시계바늘을 빠르게 돌리기로 한 이상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수밖에.

일단 성공만 하면 곧바로 '나무 정령 드라이어드'를 정령마법에 추가할 수 있다.

추가로 영원의 숲 너머로 영역을 확장, 새로운 고대종인 '에이션트 베어'의 코어를 노려볼 수도 있는데....

일단 기각.

정확히는 기각이 아니라 순서를 뒤로 미룬다.

당장 어떤 이계의 괴물이 쏟아져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래서 전력 강화가 시급한데, 나무 정령은 화력만 보면 바위 정령에 비해 오히려 떨어진다는 게 문제.

물론 나무 정령은 그 나름대로 중요한 가치가 있지만, 아무튼 당장 강력한 정령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게 우선 아니겠어?

그럼 다음으로 계획한 '아크 위저드 트롬본' 루트.

제국에 존재하는 네 명의 아크 위저드 중 지금껏 단 한 번도 인류를 배신하지 않은 유일한 아크 위저드가 바로 트롬본이다.

덕분에 마지막 이계와의 전쟁 때마다 항상 활약해 주던 든든한 동료였고.

그런데 이 트롬본이, 회귀 초반에는 행방이 묘연해서 관계를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

최소 5년은 지나야 처음으로 얼굴을 볼 수 있고, 본격적으로 함께 싸울 관계가 되는 것은 대략 8년 차부터.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급박한 만큼 편법을 써서 빠르게 동료로 얻을 새로운 루트를 계획했는데....

하지만 이것도 패스.

아무리 편법을 알고 있다 해도, 당장 행방불명인 트롬본을 찾아내기 위해선 최소 보름 이상 대륙을 헤매야 한다.

물론 당장은 화염을 다루는 그 아저씨의 실력이 그립긴 하다. 이계의 괴물을 상대로 그나마 잘 통하는 게 바로 불속성이니까.

하지만 같은 불 속성이라면, 당연히 불의 정령왕을 먼저 손에 넣는 게 좋겠지? 그렇다고 트롬본을 포기할 것도 아니고.

그래. 이건 기회비용의 문제가 아니다.

결국 시간을 들이면 전부 다 얻을 수 있는 것들의 순서를 정할 뿐.

"맞아. 일단 내가 강해지는 게 우선이니까."

"...황자님?"

"오늘부터 사흘 동안 자리를 비울 거야. 길면 나흘 정도. 그동안 모두 저택에 남아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톨라리와 다비가 함께 있으면 어지간한 적은 커버가 가능하겠지?"

두 사람을 동시에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크 위저드와 나이트 마스터라니,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조합이구만.

"응. 맡겨줘 황자님. 이번엔 자신 있어."

"혹시 북방에 가시려는 겁니까? 하지만 계획대로 드워프와 접선을 하려면...."

"북방 아니야."

난 다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종족연합은 나중에 처리해야겠어. 그 전에 얻어야 할 정령이 있거든."

"정령이라니, 전에 언급하신 나무 정령 말씀입니까? 하지만 그건 엘프의 허락을 받아야 하니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

"그거 말고 다른 정령. 룩카르 알지? 걔가 귀띔해줬어. 지금 상황이라면 나무 정령보다 빨리 계약할 수 있는 다른 정령이 있다고. 자기가 선을 놓아 주겠대."

"룩카르라면 황자님이 소환하시는 바위 정령 말씀이군요. 과연.... 정령간의 커넥션이라."

다비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대충 꾸며낸 거짓말이지만.

"아무래도 그런가 봐. 그동안 저택을 부탁할게. 단원들 훈련도 그렇고."

"훈련이라면 보다 실전적인 느낌으로 강화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백기사단의 소환이 걱정되는군요."

"그쪽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무시해. 급하면 지들이 와서 해결하던가. 그럼 한시가 급하니까...."

목표를 정했으니 지체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몸을 일으키며 모두에게 한 가지씩 미션을 나눠주었다.

"떠나기 전에 부탁할 게 있어. 우선 톨라리?"

"응. 황자님."

"루네 알지?"

"응. 알아. 저택 3층에 사는 조그만 여자애."

"걔도 마법사야. 이제 막 수중식 통과한. 나 없는 동안 별일 없으면 걔 좀 지도해줘."

"마법 가르치라고? 나 그쪽으론 소질 없는데."

"재주껏 해봐. 미래의 아크 위저드 지망생이니까. 어떻게든 강하게 키워야 해. 본격적으로 훈련 좀 시켜줘."

"알았어. 나 조그만 아이들 좋아하니까. 기쁜 마음으로 마구 굴려볼게."

"...그렇다고 너무 굴리진 말고. 다음으로 카일?"

"네. 황자님."

카일이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 녀석, 뭔가 대단한 훈련을 기대하나 본데.... 미안하다. 이번에 넌 훈련이 아니야.

"이번에 북방에 가져가려다 다시 돌아온 술 알지?"

"술? 전에 대량으로 구입한 고급술 말씀입니까?"

"그걸 상회에 맡겨서 계획대로 다시 올려 보내. 어떻게든 드워프와 접촉해서 선물이라고 하면서 넘겨 벼려. 특별히 요구할 건 없고. 그냥 클로드 황자가 주는 선물이라고만 해."

"...알겠습니다."

카일은 살짝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쩌겠니. 여기서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는 게 너뿐인걸.

"그리고 전에 말한 육성의 영약 재료 구입도 서둘러줘. 시녀장 말로는 벌써 재료가 부족하대."

"벌써 말씀입니까? 넘겨드린 1차분도 엄청난 분량인데...."

"우리 시녀들 실력 알잖아? 완성된 영약 배포하는 것도 직접 맡아서 진행해줘. 베리트 영지에서도 가장 낙후되고 지력이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선별 작업은 이미 끝났습니다. 당분간은 영지를 자주 다녀와야겠군요."

"부탁할게. 그리고 디디?"

"네. 황자님."

"지금처럼 밤 산책 계속 부탁해. 그리고 르갈한테 말해줘. 혹시 뭔 일 생겨도 이번처럼 나 쫓아오면 안 된다고. 이번에는 바다를 건너가거든."

"바다, 말씀입니까?"

오늘 처음으로 디디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다. 그렇다고 다른 대륙으로 넘어가거나 하는 건 아니고."

"...알겠습니다. 만약 르갈의 판단으로, 황자님 없이는 해결 못할 적이 나타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 며칠 사이에 또 그런 일이 벌어지진 않을 것 같지만.... 그럼 도망쳐."

"...."

"르갈은 감이 좋으니까 결정을 맡길게. 그 녀석이 이번 감염 군주보다 더 무시무시한 뭔가가 온다고 판단하면, 아예 모두에게 알려서 싸우지 말고 도망치라고 해. 저택을 버려도 좋으니 최대한 먼 곳으로. 모두 알겠지?"

"네. 황자님."

"좋아. 그럼 다음으로 리넨."

"네, 넵. 황자님."

턱수염 가득한 리넨이 잔뜩 긴장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난 아직도 얘가 나보다 연하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니까?

"홀리 랜스 말이야. 물론 지금도 충분히 좋은데, 혹시 위력을 더 높일 수 있는지 연구해봐."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은 그냥 피폭된 적들이 마비될 뿐이잖아? 혹시 여러 개를 동시에 던진다든가, 연속으로 던진다든가 해서 마비가 중첩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연구해 보라고. 그리고 트리멈?"

"네. 황자님. 지금까지는 바리스에게 전담해서 리넨 군의 보조를 맡겼습니다만, 이제는 여러 명을 동원해서 홀리 랜스의 위력을 더 증폭시킬 수 있는지 테스트 해보겠습니다. 실드 오브 라이트를 다중첩으로 활용하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테니까요."

"어... 그래."

내가 시키려던 게 정확히 이것이었다. 이거 오래 본 사이도 아닌데 척 하면 척이구만.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메르데스...."

"황자님. 말씀 전에 죄송합니다."

그러자 시작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없던 메르데스가 먼저 나서며 입을 열었다.

"큰 무례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하지만 떠나시기 전에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응? 뭔데?"

"혹시 정령빙의라는 걸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는 평소보다 더 무표정한 얼굴로, 아니지. 대단히 심각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근데 뭐라고? 정령빙의?

"처음 듣는 것 같은데? 정령빙의라니, 그게 뭔데?"

* * *

"좋아. 흐흐. 완벽해."

코끝이 빨갛게 된 중년의 남자가 술잔을 비우며 웃었다.

얼핏 보면 시골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농사꾼 같은 남자였지만, 그가 바로 제국의 4대 아크 위저드 중 한 명인 트롬본이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은 마법사가 아닌 양조가였다.

"이건 앞으로 세계의 술판을 바꿔 놓을 거야. 후후. 아하하하!"

술병에 가득 차 있는 황금색 액체가 그의 마음을 풍족하게 만들었다.

이것의 정체는 밀로 만든 독한 증류주.

하지만 기존의 증류주가 가지고 있던 단점을 해결한 물건이다.

무향, 무취, 여기에 높은 도수가 가져다주는 특유의 역한 씁쓸함.

하지만 이것을 빈 포도주 통에 넣고 수년간 숙성시키면?

"크, 길게 숙성시키면 더 좋아질 거야. 고작 6년 숙성시켰는데 이 정도라면...."

비록 제작 과정이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지만, 결과물이 이렇게 좋다면 그 정도 수고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술꾼이라면.

자신처럼 진정으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마시기 위해 평소보다 몇 배의 돈을 아끼지 않겠지.

"이봐 양조가 양반! 아침에 술통 땄다는 소문이 있던데 어떻게 됐나!"

그때 문이 열리며 나이 지긋한 노인이 들어왔다. 트롬본은 노인을 향해 손을 들며 소리쳤다.

"성공이오! 맛이 기가 막힙니다!"

"정말인가? 지하실에 6년을 숙성한 보람이 있구만. 오, 나도 한 잔 주는 겐가?

노인은 활짝 웃으며 트롬본이 치켜든 술잔을 건네받았다.

이곳은 알비어스 왕국 구석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

알비어스는 제국의 서쪽 국경을 이루고 있는 자이루트 산맥 너머에 있는 왕국이다.

교류가 활발하진 않지만 그나마 접점이 있는 몇 안 되는 국가로, 이곳에서 트롬본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양조가 로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은 마을의 촌장으로, 트롬본이 집을 비울 때 마다 대신 술통을 관리해준 은인이었다.

"오, 이것 참...."

술을 마신 노인이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트롬본은 행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어때, 끝내주지요?"

"끝내주는구만. 그 맹맹하고 독하던 술이 이렇게 향기롭게 변할 줄이야."

"이게 다 술통 관리해 준 촌장님 덕분이지. 내 사례는 두둑이 하리다."

"사례는 무슨. 이 한 모금에 모든 시름이 다 사라지는 것 같구만. 다 필요 없으니 이거나 몇 병 주게. 내 죽을 때까지 고맙게 마시도록 하지."

"몇 병 가지고 되겠소? 아예 술통 하나를 넘겨줄 테니... 응?"

그런데 그 순간.

"컥...."

노인이 갑자기 눈을 하얗게 뒤집으며 쓰러졌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74화

23장 선택과 집중

"촌장! 촌장! 이런, 술이 너무 독했나?"

트롬본이 급하게 일어나 노인의 몸을 살폈다. 그런데 노인의 뒷목에 작은 상처와 검은 피 몇 방울이 흐르는 것을 발견한 순간.

"...죄송합니다."

처음 듣는 목소리와 함께 뒷목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큭!"

트롬본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그곳을 향해 화염 마법을 쏟아냈다.

"누구냐!"

푸화아아아아아아악!

맹렬한 불꽃이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목표로 삼은 남자의 몸은 더할 나위 없이 멀쩡했다.

"이건...."

트롬본의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졌다.

작열하는 화염 속에서 그을림 하나 없는 새하얀 붕대로 몸을 감고 있는 남자.

트롬본은 녀석의 눈을 노려보며 천천히 주저앉았다.

"으.... 이건...."

"그나저나 엄청난 화력이군요. 이렇게 커다란 집의 절반을 한순간에 날려버리다니."

남자는 뻥 뚫린 뒤쪽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템페스트도 아닌데 이 정도 화력을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역시 불꽃의 마도사. 트롬본이란 이름에 걸맞은 실력입니다."

"네놈은 대체...."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후원자라 합니다."

붕대의 남자는 몸을 기울이며 우아한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래는 이런 과격한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저희 쪽 규정대로라면 써서도 안 되고 말이죠."

"으.... 내 몸에 무슨 짓을...."

"아, 걱정 마십시오. 단순한 마비독이니까요. 하지만 눈은 강제로 뜨게 만드는 재밌는 물건입니다."

"독...."

"위급한 상황이라 비밀리에 실례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트롬본 님은 경계심이 너무 부족하시군요."

후원자는 아직 절반이 남아 있는 커다란 통나무집을 돌아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크 위저드란 분이 이런 대충 지은 집에 살고 계시다니. 그 톨라리 님과는 완전 정반대군요."

"토... 톨라리?"

"네. 당신과 같은 아크 위저드인 톨라리 님 말입니다. 그분은 황무지에 지은 마탑에 살면서 주변을 경계하셨죠. 몰래 숨어드는데 애 좀 먹었습니다. 그래도 결국 들키곤 했지만요."

"톨라리... 설마 그 어린 아가씨를...."

"죽였냐고요? 그럴 리가요."

후원자는 과장스러울 만큼 고개를 크게 저었다.

"오히려 이쪽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일이 잘 풀리진 않았지만요. 아,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톨라리 님은 이제 어린 아가씨가 아닙니다. 당신이 매직길드에 있을 때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어엿한 스물넷의 성인이지요."

"으...."

"아무튼 톨라리 님을 끌어들이는 데 실패한 바람에 윗분들이 크게 실망하셨습니다. 저로선 최대한 빠르게 대체재를 마련해야 할 형편이죠. 그래서 아크 위저드 중 유일하게 손길을 뻗지 않은 당신을 주목했는데...."

후원자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쓰러진 트롬본의 얼굴을 가볍게 혀로 핥았다.

"음.... 역시 담백해. 향만큼이나 맛도 담백하군요."

"너, 너 이 자식...."

"사람 마음에 뒤틀림이 이렇게까지 없을 수가 있나?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올곧음이군요. 대체 자신의 삶에 얼마만큼 만족하시는 겁니까?"

"으...."

"이건 정말이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양쪽 차원을 통틀어, 당신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가 당신만큼 뒤틀리지 않고 순수하게 만족하며 사는 것도 극히 드문 일입니다."

"양... 양쪽 차원?"

"그렇습니다."

바로 그 순간, 트롬본이 날려버린 집의 반대편에 강한 일렁임과 함께 공간이 열리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당신을 또 다른 차원으로 안내해 드리죠."

우우우우우웅!

한밤중의 어둠보다 더 캄캄한 암흑.

하지만 그 암흑 너머로 희미한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후원자는 쓰러진 트롬본을 부축해 일으킨 다음, 자신이 열어버린 공간 너머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 어서 오시지요. 제가 태어난 고향으로."

"으.... 으윽...."

어떻게든 저항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몸이 마비된 순간, 마력의 흐름이 뚝 끊기며 그 어떤 마법의 연산도 불가능했다.

"좋아. 옳지.... 됐습니다. 휴. 겨우 넘어왔군요."

그렇게 반대편으로 넘어온 후원자는, 뒤쪽에 열린 공간을 빠르게 닫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원을 넘나드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라 해도 말이죠."

"넌.... 대체...."

"저에 관한 것이라면 곧 알게 되실 겁니다. 그보다 어떻습니까? 당신을 위해 준비한 무기고의 모습이?"

"무기...고?"

트롬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정체불명의 빛이 사방에서 반짝거리는 걸 제외하면, 사방이 칠흑처럼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후원자가 손가락을 튕긴 순간.

탁!

갑자기 높은 천장에 불이 켜지며, 끝도 없이 넓은 공간이 한순간에 시야를 꽉 채웠다.

"아...."

무기고?

이것이 무기고라고?

온갖 처음 보는 끔찍한 괴물들이 가득 찬 만마전과 같은 이곳이?

"으으.... 으으으...."

트롬본은 몸을 움츠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어둠속에서 보았던 반짝거리던 빛의 정체. 그것은 온 사방에 가득한 끔찍한 괴물의 눈동자였다.

"오, 아크 위저드도 겁이란 걸 먹나 보군요. 참 다행입니다. 확실히 이런 걸 처음 보면 그런 마음이 들게 마련이죠."

후원자는 맨 앞에 우뚝 서 있던 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것은 종말의 짐승입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5차 침공 때 처음으로 그쪽 차원에 넘겨 보낼 생물병기죠."

"으...."

괴물의 외형이 너무도 끔찍한 나머지, 트롬본은 어떻게든 시선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온몸이 마비된 탓에 목을 돌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 와중에 경직된 눈꺼풀은 맘대로 닫을 수조차 없었고.

"정식 명칭은 '카메이라'입니다. 켄로드 차원을 멸망시킨 핵심이죠."

높이가 5미터쯤 되는 괴물의 전면엔, 서로 다른 수십 마리 짐승의 머리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다.

그 기괴함과 불합리함이 트롬본의 마음에 공포를 일으켰다.

심지어 강해보이는 짐승의 머리가 주변의 다른 작은 머리를 뜯어 먹는데, 먹힌 머리는 곧장 새로 돋아나며 고통스런 신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메에에에에에에에엑!

캬악! 캬륵!

우워어어어어어어!

"제, 제발.... 저걸 치워 줘...."

"카메이라의 힘은 막강합니다. 잠재력을 깨우지 못한 차원이라면 이 녀석 한 마리만 가지고도 정리가 가능하죠. 아, 방금 뭔가 말씀하셨습니까?"

"으.... 흐윽...."

"특히 전면부에 빽빽하게 달린 이 수십 개의 머리가 걸작이지 않습니까? 이 녀석의 특기는 소리입니다. 템페스트 따위는 '소리방벽'을 펼쳐 가볍게 막아내죠. 당신 같은 아크 위저드 서너 명이 동시에 덤벼도 상대가 불가능하단 말씀입니다."

"마... 말도 안 돼...."

"여기에 다양한 소리를 공명시켜 주변의 적들을 청각적으로 파멸시키는 재주도 가지고 있죠. 자, 종말1호? 여기 계신 트롬본 님께 네 재주를 한번 보여주렴?"

후원자의 명령이 떨어진 순간, 괴물의 얼굴에 달린 수십 개의 머리가 동시에 소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끼기기기기기기기기기기긱!

"으아아아악!"

동시에 트롬본도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후원자는 트롬본의 귀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런, 아무래도 고막이 파열되신 모양이군요."

"으, 으윽, 으아아아아아악!"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이 녀석의 공격은 상대의 고막이 터져도 계속 효과를 발휘하니까요."

"으아아악! 멈춰! 이걸 멈춰줘어!"

"목표는 본능입니다. 생물이라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두려움. 그 본능적인 공포심을 뒤흔드는 효과를 가지고 있죠."

"제, 제발 멈춰!"

"직접 체험해 보니 어떤가요? 위력적이지 않습니까? 몸이 무너지기 전에 마음이 먼저 굴복당한다고 해야 할까요?"

후원자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괴물은 지르던 소리를 멈춘 채, 또다시 서로의 머리를 뜯어 먹는 생지옥을 펼치기 시작했다.

캬악! 캬악!

까드드득! 찌직!

크어어! 쿠에에엑!

그리고 트롬본은, 그 모든 끔찍한 광경으로부터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으.... 으윽...."

"멋집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군요. 켄로드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걸 다 만들 생각을 했을까요? 물론 저희들이 뒤에서 적절하게 펌프질을 해 줬지만 말이죠."

"제발... 제발...."

"저런, 이제 슬슬 질리시나 보군요. 그럼 다른 걸 관람하러 이동해 볼까요?"

후원자는 애원하는 트롬본의 몸을 부축한 채, 이번엔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커다란 덩어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 녀석은 감염 군주라고 합니다. 부풀어 오른 살덩이가 보기 무척 흉하지요?"

"으.... 제, 제발.... 이런 걸 보여주지 마...."

"흠. 반응이 어째 평범하군요. 이 녀석은 몸에서 촉수를 뿜어, 목표의 신체를 감염시켜 자신의 새로운 숙주로 이용합니다. 자, 감염1호? 여기 계신 손님께 네 힘을 보여주렴. 그렇다고 진짜 감염시키진 말고."

촤악!

순간 흉측한 살덩이가 날카로운 촉수를 방출, 꼼짝도 할 수 없던 트롬본의 목덜미를 단숨에 파고들었다.

"컥, 크악! 빼, 빼! 이거 빼줘!"

"이 상태로 감염 군주가 자신의 감염체를 주입하게 됩니다. 그럼 목표의 뇌는 한순간 파괴되고, 중추신경을 점령해서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게 되죠."

"으, 으으...."

"표정을 보니 충분히 이해하신 것 같군요. 감염1호? 그만 촉수를 뽑아내렴."

푸확!

"자, 그럼 새로운 관람을 위해 옆으로 계속 움직이죠. 오호, 이건 또 어떻습니까? 온몸이 해파리처럼 갈라진 새로운 녀석이군요."

후원자가 멈춰선 곳에는, 마치 심해의 공포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연체동물이 웅크리고 있었다.

"이 녀석은 공포 군주입니다. 이름이 거창하죠? 백문이 불여일견. 자, 공포1호? 여기 계신 손님께 네 힘을 보여주... 아, 잠깐."

후원자는 순간 뭔가를 떠올린 듯, 시원하게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지. 혹시 파이렌이란 분을 알고 계십니까?"

"파이렌.... 나이트 마스터?"

"오! 알고 계시는군요. 여기 있는 공포1호가 바로 그분입니다."

"...뭐?"

"머리만 남은 그분의 육체를 이렇게 다시 재구성했습니다. 덕분에 기존의 공포 군주에서 좀 더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생물병기가 완성되었죠. 어떤가요? 멋지지 않습니까? 물론 트롬본 님이 보시기엔 조금 징그럽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조금 징그러운 게 아니라 꿈에 볼까 두려운 끔찍한 형상이었다. 트롬본은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괴물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 이게... 파이렌이라고?"

"그렇습니다. 혹시 생전에 아시던 분인가요? 아니지, 아직 살아 계시는 분에게 생전이란 표현은 맞지 않겠군요."

"어, 어떻게... 어떻게 인간을 이런 끔찍한 괴물로...."

"끔찍하다는 건 상대적인 관점입니다. 당하는 쪽은 괴롭겠지만, 활용하는 쪽에서는 이보다 더 편리한 것도 없지요."

"활용하다니.... 이런 걸 대체 어디에...."

"공포 군주는 보편적으로 아주 강력한 생물병기입니다. 여기에 주변에 공포를 일으키는 가스까지 분출하죠. 방금 보았던 카메이라의 음파 공격과 연계하면 효과가 끝내줍니다. 아, 그러고 보니."

후원자는 대뜸 트롬본의 얼굴을 다시 핥으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 짧은 사이에 꽤나 멋진 뒤틀림이 생겼군요? 아주 좋아요. 매우 긍정적인 일입니다."

"으...."

"절망. 이거야말로 마음을 가장 극심하게 뒤틀어 버리는 감정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당신의 세계가 처할 진실을 하나 알려드리죠."

"진실?"

"앞으로 9년 뒤, 저희들은 이곳에 쌓아둔 모든 무기, 아니 그 이상을 가지고 여러분의 세계를 침략할 겁니다."

순간 트롬본의 눈이 튀어나올 듯 돌출되었다.

"뭐, 뭐라고?"

"목표는 승리가 아닙니다. 오직 파괴와 절멸이죠. 저희가 바라는 건 여러분들의 세계에 있는 모든 생물의 소멸입니다."

"어... 어째서?"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일 겁니다. 그리고 세계와 자연 자체를 파괴할 겁니다. 행여 목숨을 건진 자들조차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릴 수 있도록 말이죠."

"...."

트롬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공포가 번졌다. 후원자는 그제야 만족한 듯 웃으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9년이 아니라 더 빨리 시작할 수도 있겠군요. 어떻습니까? 기대되지 않습니까? 그럼 지금부터 이곳에 있는 다른 무기도 전부 관람하도록 하죠. 저희들에겐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요."

"제, 제발...."

"전부 관람하는 데 두 시간쯤 걸릴까요? 끝까지 다 보고난 다음에 당신의 마음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기대가 되는군요."

후원자는 품속에서 가느다란 주사기를 꺼내 들며 미소를 지었다.

"이것을 놓는 건 그 다음으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방아쇠입니다."

"방아...쇠?"

"그쪽 차원에는 익숙하지 않은 표현일까요? 어쨌든 마음의 뒤틀림을 양분 삼아 육체를 새롭게 바꿔버리는 물건입니다. 좀 전에 보았던 파이렌 님처럼 말이죠."

"아, 안 돼...."

"물론 됩니다. 그걸 위해 이 고생을 시작한걸요."

후원자는 웃었고, 트롬본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계의 무기고 유람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트롬본은 닫히지 않는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보며 절규를 반복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절규가 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

모두의 칭송을 받던 불꽃의 마도사는 어느새 사라져 버렸고.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살던 양조가의 모습도, 더는 그곳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75화

24장 불의 여왕

멀리 게이트 너머로 괴물이 포효한다.

이미 격전을 치른 다비가 내 쪽을 보며 웃는다. 그리고는 금이 간 검을 세워 들고 괴물을 향해 질주한다.

안 돼. 가지 마.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움직여 보려 하지만 소용이 없다.

그 사이 다비는 이미 죽어 버렸고.

머리가 여러 개 달린 그 괴물은, 이내 죽은 다비의 몸을 게걸스럽게 뜯으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으.... 으음?"

그때 잠에서 깨어났다.

이건 또 뭔 놈의 악몽이냐!

꿈이면 꿈답게 현실에서 벌어졌던 일에 변형이 가해져야 하는 거 아냐? 왜 경험했던 일을 그대로 보여주고 지랄이래?

그런데 여긴 어디지? 눈앞이 온통 새파란데....

아, 바다.

눈앞에 드넓은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고, 나는 그 바다 한복판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추락 중이었다.

나는 하나도 당황하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바다와 충돌 직전 비행마법을 발동시키며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휴.

좋아. 아무도 못 봤으면 됐어. 그나저나 방금 수면에 충돌했으면 즉사했을지도 모른다. 진짜 높이 날고 있었거든.

그러다 졸았지만.

만약 순수하게 내 정신만 가지고 비행마법을 사용했다면, 이런 식으로 졸다가 추락하는 일 따윈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테스트도 할 겸, 내 머리를 전혀 쓰지 않고 오직 리치의 영혼결정만 가지고 비행마법을 발동시켰다.

"덕분에 졸다가 괴상한 꿈도 다 꾸고...."

하필이면 꿈에서 볼까 무서운 이계의 괴물 꿈이라니.

그것도 4차 웨이브 때 튀어나온 최악의 괴물 중 하나.

키메라.

이름을 그렇게 붙였을 뿐, 내가 전에 알던 전형적인 키메라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몸통은 사자를 연상시키고, 등에 커다란 날개가 달린 것 까지는 비슷한데....

문제는 머리.

머리가 달려 있어야 할 곳에 수십 개의 짐승 대가리가 덕지덕지 돋아있다. 보통 큰 걸로 세 개쯤 달려 있는 게 정석 아닌가?

심지어 서로를 물어뜯으며 먹어치우는데... 그때마다 뜯겨나간 머리가 다시 재생한다.

여기에 특정 머리가 쏟아내는 지독한 독, 그리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고막을 파괴해 버리는 기묘한 포효까지.

암만 봐도 자연적으로 탄생한 괴물은 아니다.

만약 저런 괴물을 인위적으로 만든 미친 과학자가 있다면, 당장 빛도 안 드는 골방에 처넣고 굶어 죽을 때까지 물 한 모금도 주지 말아야 한다!

암튼 그놈 하나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다 불태우고, 수많은 부하들이 목숨을 잃고, 결국 가까스로 한 마리 잡았더니 그 뒤로 다섯 마리가 더 튀어나왔던 게 바로 어제 일만 같구만.

왜냐고?

이게 다 바로 직전인 9회 차 때 벌어진 일이니까.

결국 남은 키메라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채, 나는 함께 쏟아진 이계의 군대에 휩쓸려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나 혼자 남아 도망치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해...."

그래봤자 이번이 마지막이기도 하지만, 아끼는 부하와 동료들을 잃는 기분은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러니 이번엔 더 빨리 강해지자. 적들도 뭔가 기존에 없던 짓을 하기 시작했고.... 에베베베베! 지금 내가 뭐 하는 거지?"

오랫동안 망망대해를 날고 있자니 혼잣말이 절로 나온다. 이거 좋지 않은 신호니까 빨리 생각을 전환해야지.

이곳은 제국의 남쪽으로 약 400km쯤 떨어진 바다 한복판.

어째서 이런 곳을 날고 있냐 하면, 목표로 삼은 정령이 대륙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화산섬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불의 정령왕 이그니스.

속칭 '불의 여왕'이라 불리는 고고한 존재로, 지난 9회 차 때 처음으로 계약에 성공했을 정도로 까다로운 여왕님이다.

하지만 성공만 하면 대박 그 자체.

9회 차 때 처음으로 4차 웨이브를 돌파한 것도 불의 여왕 덕분이었고.

여왕은 템페스트급의 불덩어리를 공놀이 하듯 마구 집어 던진다. 그러니 게이트가 열릴 예상 지점에 미리 풀어 놓으면 쏟아져 나오는 적들을 한순간에 초토화시킬 수 있다는 말씀.

그런데 당장 불의 정령왕과 계약하는 일에 앞서, 먼저 해결하고 넘어갈 문제가 있었다.

"룩카르? 당장 소환할 건 아닌데 이야기 좀 하자. 내 목소리 들려?"

그러자 곧장 룩카르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들린다. 계약자여.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정령빙의."

-정령빙의?

"왜 그 수많은 순간 동안 한 번도 정령빙의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어?"

그것이 내 머릿속을 꽉 채운 의문이었다.

"지금까지 널 포함해서 대체 얼마나 많은 정령과 계약을.... 아니. 암튼 우리 계약한 지 꽤 됐잖아? 근데 왜 한 번도 정령빙의 이야기를 안 꺼냈어?"

저택을 떠나기 전, 나는 메르데스를 통해 정령빙의란 개념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이게 말이 되나?

그토록 많은 회귀를 반복하면서 수많은 정령과 계약을 했는데.

그놈들 전부 단 한 번도 나한테 정령빙의의 빙자도 안 꺼냈다!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뭐?"

메르데스는 저택 앞마당에서 자신의 정령과 빙의, 마갑 없이도 중급 마갑을 착용한 리넨을 완전 농락하는 움직임을 시연해 보였다.

그런데 이게 의미가 없다고?

마갑을 착용하지 않고도 그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는데?

어쩌면 이걸로 앞으로의 전투 판도를 완전히 바꿔 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 나와 정령빙의를 하면 넌 죽는다.

"응? 죽어?"

-그래. 죽는다. 특히 나와 처음 계약했을 때 네 육체는 최악이었다. 손끝으로 건드려도 부서질 정도로.

"그야 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나 같은 건 간단하게 부서지겠지."

-그래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정령빙의는 계약자의 육체에 강한 부담을 안긴다. 근육을 파괴하고 심장을 정지시킬 정도로.

"하지만 메르데스는 간단히 해내던데?"

-그것은 대상이 나의 충실한 수하인 조약돌 정령이기 때문이다. 조약돌이 가진 힘은 내가 가진 것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 그리고 조약돌과 계약을 맺은 여자의 육체는 너와 반대였다. 네가 가진 기본이 인간 중에 최악이었다면, 그 여자의 기본은 인간 중에 최강이다.

"그건 그렇긴 한데...."

-심지어 그 여자는 강도 높은 훈련으로 더 강한 육체의 안정성을 확보했다. 그래서 조약돌과의 빙의를 문제없이 치러 낼 수 있었던 거다.

"음.... 훈련이라면 나도 꽤 했는데."

-네가 한 훈련과 그 여자가 한 훈련은 격이 다르다.

"아니, 그래도 나 몸 꽤 좋아지지 않았나? 특히 코어 먹고 난 뒤로는 완전 다시 태어난 수준인데?"

-물론이다.

룩카르는 몇 초 정도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면 나와 빙의하고 20초, 아니 30초 정도는 죽지 않고 버틸 것이다.

"거봐! 그런데 왜 말 안 했...."

-하지만 결국 죽을 것이다. 빙의가 끝나면.

"...결국 죽는구나."

-그래도 30초나 안 죽고 버틸 수 있게 된 것은 엄청난 발전이다. 만약 계약 당시였다면 넌 빙의하자마자 1초도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그래봤자 죽는 건 똑같잖아? 이거 뭔가 안 죽고 빙의할 방법 없나?

"그럼 30초 말고 15초, 아니 10초만 빙의하면?"

-그럼 안 죽는다. 대신 죽을 만큼의 고통에 며칠 동안 시달리겠지.

"안 죽으면 그게 어디야. 근데 10초는 너무 짧은데. 좀 더 길게 빙의하면서 안 죽는 방법 없어?"

마갑 없이도 기사의 힘을 낼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엄청난 메리트.

왜냐하면 마갑은 그 자체로 무게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마갑으로 인해 상승한 운동능력의 절반 이상이 그 무게를 버티며 움직이는데 소모될 정도로.

물론 그렇게 무거운 갑옷이 기사에게 강력한 방어력을 제공하긴 하지만....

-방법은 간단하다. 네가 육체를 더 단련하면 된다. 그 여자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메르데스보다 더? 그거 참 간단하네."

정말이지 입에서 욕 나올 정도로 간단하구만. 메르데스는 이번에 나이트 커맨더를 칼로 쪼개버렸다고 하던데.

-아무튼 답이 되었나? 이것이 네게 정령빙의를 알려주지 않은 이유다.

"에휴...."

결국 과거 수많은 정령들이 단 한 번도 정령빙의를 언급하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마다 내 육체가 개판이었으니까.

그나마 5회 차 때는 나름 빡세게 단련하긴 했는데, 정작 그때는 내가 정령마법을 다루지 않던 시기다. 하필 타이밍이 안 좋았구만.

"암튼 그런 게 있는지 꿈에도 몰랐어."

-아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먼저 고지하지 않는 이상.

"너희 정령들은 입 꽉 닫았다고 치더라도.... 내가 정령마법이라면 진짜 오만 기록을 다 찾아 읽었거든. 근데 정령빙의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없더라."

-당연히 그럴 것이다. 정령과 계약하려는 인간은 육체를 단련하기보다는 정신을 단련하는 축에 속하니까.

어....

생각해보니 그렇긴 하네.

정령에 관심 있는 녀석들은 대부분 마법에 관심 있는 샌님이었을 것이다. 빡세게 훈련하는 기사가 무슨 바람이 불어 정령과 계약하러 온 천지를 싸돌아다닐까?

"그럼 널 다루려면 대체 얼마나 강해져야 하는데? 메르데스만큼 강해지라는 건 기준이 애매하잖아? 적어도 나이트 익스퍼트는 찍어야 하나? 아니면 나이트 커맨더?"

-인간의 기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다만 정령빙의는 정령에 따라 중점적으로 필요한 능력이 따로 있다.

"예를 들면?"

-대지 계열의 정령. 그러니 나 같은 바위 정령은 힘이 필요하다.

"힘?"

-그렇다. 순수한 근력이 강해질수록 빙의 시간을 길게 가져가며 죽지 않고 버틸 수 있다. 빙의 후에 후유증도 그만큼 적어지고.

힘, 힘이라.

그렇다면 리넨이 잘 다루겠구만. 그 녀석 나이에 비해 힘 하나는 진짜 장사니까.

"근데 나는 힘쓰는 게 젤 쥐약인데.... 그럼 불의 정령은?"

-화염 계열의 정령은 마력이 필요하다.

"마력? 야, 야, 잠깐 기다려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럼 지금까지 내가 얻었던 모든 불의 정령들은 뭔데?

내가 아크 위저드 급의 마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 녀석들 정령빙의 이야기는 입도 뻥끗 안 했다고!

"어..., 그럼 아무튼 불의 정령이랑 빙의하는 건 괜찮은 거네? 나 마력 엄청 강하잖아?"

-핵심 요소가 그렇다는 것뿐이다. 결국 근력이나 속도, 내구력, 체력 등의 다른 능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쳇, 그런 거였어?

"그럼 예를 들어.... 그래. 불의 여왕과 정령빙의 하려면 얼마나 강해져야 해? 내가 마력 하나는 최고잖아? 그러니 다른 쪽으로 필요한 능력을 좀 커버할 수 있지 않을까?"

-불의 여왕?

"응. 불의 여왕."

-설마 불의 정령왕 이그니스를 말하는 건가?

"맞아. 지금 그 불의 정령왕이랑 계약하러 가는 길이거든."

-풉.

응?

풉? 방금 이놈이 풉이라고 한 거야?

"여보세요? 룩카르 씨? 당신 지금 나 비웃은 거야?"

-푸흡.... 음? 이것이 비웃음인가? 내가 세상에 존재한 이후로 이런 행동을 한 건 처음이군. 방금은 그만큼 가소로운 이야기였다.

이 자식 말하는 거 보게? 사람 메기는 솜씨가 완전 제법인데?

-네가 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분과 계약을 맺으려는지 모르겠다만. 만에 하나 계약을 맺었다 해도 그분과 빙의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길 바란다.

"왜? 불의 정령과 빙의하는 핵심 능력은 마력이라며?"

-핵심이고 뭐고 내 말 잘 들어라. 넌 그분과 빙의하는 순간 잿더미가 되어 사라진다.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잊어버릴 만큼 흔적도 없이 빠르게.

표현 한번 무시무시하구만. 나는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언 명심할게. 솔직히 기분 나쁘긴 하지만."

-잘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 가는 곳이 불의 정점. 화산섬의 심장인가?

"맞아. 그 안에 불의 여왕이 있다는 기록을 읽어서."

-그 기록을 남긴 인간이 어떻게 살아 돌아갔는지 의문이군.

그야 애초에 그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지금 정령빙의가 문제가 아니다. 그분과 계약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니까. 계약자여.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는 게 어떤가?

룩카르의 목소리에서 긴장이 느껴졌다. 하긴, 얘가 이렇게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불의 정령왕과의 계약.

이거 하나를 위해 수년간 공을 들이고, 그렇게 모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화산섬을 찾아간다 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이쪽엔 결정적인 비책이 있다.

정령왕과 계약하는 방법엔 크게 두 가가 있다.

하나는 해당 정령왕의 하위정령과 먼저 계약한 다음, 정령의 추천을 받아서 정령왕을 알현하는 것.

이것이 정석이다. 이때 정령왕은 특별한 미션을 하나 내리는데, 그것을 해결함으로써 계약이 가능하게 된다.

이렇게만 말하면 꽤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지난 9회 차 때, 실제로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불의 여왕과 계약할 때까지 장장 4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 하위 정령과 친해지는데 시간이 필요하고.

또 그 정령이 추천을 해 주는데도 시간이 필요하고.

여기에 정령왕의 미션을 해결하는 데는 시간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걸어야 하고.

그렇다면 이미 꽤 친해진 것 같은 바위 정령의 상위 버전, 바로 대지의 정령왕을 얻는 게 순서가 아닐까 싶은데....

그건 안 된다.

정령 중에서 가장 얻기 쉬운 게 바위 정령 룩카르인데 반해, 그 위에 있는 대지의 정령왕은 성공이 불가능할 정도로 괴악한 미션을 내린다.

그래서 지금껏 대지의 정령왕은 한 번도 계약한 적이 없고.

반대로 불의 정령왕의 미션은... 그나마 도전 자체는 해볼 만한 수준이랄까?

그렇다고 쉬운 건 절대 아니다. 거의 목숨을 반쯤 내놓고 도전해도 될까 말까 할 정도.

그리고 그런 문제를 다 떠나, 애초에 불의 정령왕에게 다리를 놓아줄 하위정령조차 얻지 않은 상황이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여기서 바로 두 번째 방법이 나온다.

배틀.

아주 심플하게, 그냥 싸워서 이기면 녀석과 계약이 가능하다!

물론 미친 짓이지만.

정확히는 정령왕의 테스트를 이겨내면 가능한데 결국 그게 그거다.

일단 싸워야 하는 건 같고, 싸움이 시작된 순간 무더기로 쏟아지는 템페스트급 불덩어리에 잿더미가 될 테니까.

그래서 이쪽으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는데....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톨라리에게 얻은 아이디어 덕분에 충분한 승산이 생겼다는 말씀.

-그리고 네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 정령왕과 계약을 맺기 위해서는, 그분들의 아래 있는 나 같은 하위 정령의 추천이 필요하다.

"응. 알아."

-안다고? 그럼 알면서 왜 이러는 거지? 막무가내로 찾아가 봤자 그분의 화만 살 뿐이다.

"걱정 마. 계획이 있으니까. 그보다 룩카르? 혹시 너 직경이 대충 10미터쯤 되는 얼음을 움직일 수 있어?"

-얼음?

"응. 얼음이건 뭐간 일단 커다란 덩어리가 될 텐데.... 며칠 전에 싸웠던 괴물 기억하지?"

-살점 괴물 말인가? 네가 감염 군주라고 부른?

"대충 그 녀석 정도 되는 덩치를 밀어서 움직일 수 있을까?"

-엄청나게 무겁겠군. 얼마나 많이 움직여야 하지?

"조금만 움직여도 돼. 아주 살짝."

-그렇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걸....

그때 멀리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섬들이 눈에 들어왔다.

불의 군도.

1년에도 수차례씩 용암을 분출하는 활화산들 집합체. 그중에도 내가 가야 할 곳은 가장 큰 분화구를 가진 중심부의 섬이었다.

불의 정점.

바로 정령왕 이그니스가 살고 있는 거대한 화산섬이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76화

24장 불의 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