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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쉬운 거 같은데. 아니, 어려운 건가?'

난이도가 높게 책정된 이유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 놓은 게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확실한 사실은 아니다.

일단은 정보 수집이 먼저다.

"내가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거 전부 다 말해 봐."

-으음, 그러니까 그게....

김현준은 기억을 더듬으며 자신이 겪은 일들을 설명했다.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내던 도중 정신을 차려 보니 이곳이었고, 갑자기 웬 검은 거적때기를 두른 놈이 나타나서 여러 가지 정보를 알려 주더니 늑대가 나타나 공격했다.

전형적인 이세계물의 도입부.

전후 사정은 전부 이해했지만 아직 몇 가지 질문이 더 남아 있었다.

"너 한국 사람이야?"

-그럼 김현준이라는 이름을 쓰는데 중국이나 일본 사람이겠습니까?

"네가 이 세계에 오기 전의 날짜가 어떻게 되지?"

-2033년 1월 18일입니다.

"...혹시 10년 전쯤, 정확히 말하면 2023년 3월 7일 경에 지구에 엄청난 사건 같은 거 터지지 않았어?"

-2023년요? 딱히 이상한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져 본 결과, 유성은 김현준이 살던 지구와 자신이 살던 지구가 아예 다른 세계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커다란 역사는 같을지 몰라도 김현준의 지구에서는 전염병이 유행한 적도 없고 몬스터가 등장한 적도 없다.

물론 김현준의 출신이 어떻든 딱히 달라질 건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제 남은 건 하나.'

심호흡을 한 유성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철 단검(E)을 꺼내기 위해 500 카르마 포인트를 지불합니다.]

"하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유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마신교. 최후의 순간]을 수행하는 당시 의뢰인이었던 해천경은 동기화를 멋대로 중지하고 몸의 통제권을 내주거나 다시 가져가는 등 고글의 기능에 간섭하는 능력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이 세계를 만들어 낸 신들이라는 존재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해천경보다 아래는 아닐 터, 유저로서의 능력을 사용하는 순간 이상함을 알아차리고 제제를 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무사히 넘어간 듯 싶었다.

'아니,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지.'

겨우 가시덩굴과 단검이라 알아차리지 못한 거지, 그 이상의 물건을 꺼낸다면 이상함을 알아차릴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가능성이 아니라 확실하게 그럴 것이다.

만약 그런 제약이 없다면 당장 소총과 수류탄 같은 현대 병기와 스킬들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전부 쓸어 버리는 식으로 퀘스트를 쉽게 클리어할 수 있는데, 그런 식으로 클리어할 수 있다면 B+라는 난이도가 책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유저로서의 능력은 가능한 사용하지 않고, 재도전을 하더라도 신들의 기억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한 번에 끝내야 한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애초에 가능성이 없었더라면 이 퀘스트를 고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내려가도 될 것 같은데요?

생각에 잠겨 있던 유성은 김현준의 말에 늑대가 사라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곳곳에 널브러진 인간들의 시체와 코를 찌르는 혈향에 눈살을 찌푸리며 떠나려던 유성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불현듯 걸음을 멈췄다.

"...시작부터 운이 따라 주는데?"

* * *

"잿빛 늑대 가죽 55실버, 어금니 35실버. 총합 90실버입니다."

손바닥에 놓이는 작은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은색의 동전들을 확인한 유성은 조심스레 주머니를 품에 갈무리하고는 건물에서 나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편의 시설이 위치한 중앙 구역.

시작하자마자 사람 두 명을 죽일 정도로 불친절한 세계라 간신히 구색만 갖춰 놨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여관, 대장간, 스킬숍, 잡화점 등 있어야 할 건 다 있었다.

김현준의 설명에 따르자면 신들을 즐겁게 만들기 위한 장난감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은 본 무대라는 세계에 간 이후의 일.

이곳은 장난감에 어울리는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만드는 준비 단계에 불과한 만큼, 벌써부터 열악한 상황을 조성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분위기는 우울한 편이네.'

-갑자기 낯선 세계로 납치당해서 신들의 장난감이 됐다는 말을 듣고 늑대한테 쫓기다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분위기가 좋을 리 있겠습니까?

'분위기 좋은 사람 있는 것 같은데?'

유성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잔뜩 흥분한 채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거나,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연신 상태 창, 혹은 스킬 창 따위를 외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 사람들은 극히 일부입니다.

'극히 일부라고 하기에는 수가 꽤 많아 보이는데....'

-흠흠, 아무튼 그건 됐고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허공에서 단검을 꺼내고 손에서 가시덩굴을 만들어 내시던데 그 능력으로 몬스터들을 사냥하실 겁니까? 아니면 늑대들을 팔아서 번 90실버가 있으니 이걸로 아이템이나 스킬을 사실 겁니까?

'둘 다 아니야.'

-예?

유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을 한편에 위치한 수련장을 향해 다가갔다.

입구에 있는 진열대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수많은 무기가 걸려 있었고, 안에는 NPC의 지도에 따라 고른 무기들을 이용해 허수아비나 목각 인형 따위를 공격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진열대 앞에 멈춰선 유성은 침착하게 무기들을 훑어봤다.

종류를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무기들 가운데 유성이 끝내 고른 무기는 권갑이 아닌 활이었다.

무기술을 처음부터 익힐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 이왕 올라운더의 길을 걷기로 한 만큼 새로운 무기에 익숙해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플라즈마 도끼를 생각하면 도끼술도 조금 끌리기는 하지만....'

이미 권법을 익히고 있는데 여기서 도끼술을 익히면 밸런스적으로 그리 좋지 않다.

지금 자신에게 부족한 건 원거리 공격 능력.

물론 순수하게 효율만 따져 보면 활을 익히기보다는 소피아에게 레일 건이나 레이저 건 같은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게 낫겠지만, 퀘스트에서 함부로 활용하기 어려운 첨단 병기와 달리 활은 어느 세계에서든 마음껏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호흡, 자세, 침착함 모두 중요하지만 활쏘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집중력이다. 시위를 놓는 순간까지 집중을 풀면 안 된다."

팍!

처음에는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던 화살이지만 얼마 있지 않아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정확도가 향상되기 시작했다.

딱히 유성의 습득력이나 김현준의 재능이 뛰어났다기보다는 이 수련장 안에 특별한 규칙이 적용되고 있는 듯 다른 사람들의 실력 역시 짧은 기간 안에 확실히 성장하고 있었다.

[궁술(E)을 습득하셨습니다.]

유성은 궁술을 습득했다는 메시지가 떠오르자마자 수련장에서 나와 잡화점에서 가방을 구입하고는 아까 빠져나왔던 숲으로 다시 들어갔다.

간간이 등장하는 늑대들을 향해 시위를 당기고, 일격에 끝내지 못한 놈들은 단검으로 처리하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김현준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 이런 식으로 해도 괜찮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유성 님의 능력을 사용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목제 장비로 사냥할 때 90실버로 강한 장비를 구입해서 더 강한 몬스터를 사냥하는 게 더 효율적 아닙니까?

"확실히 그렇긴 하지."

-그런데 왜 여기서 늑대를 잡고 계시는 겁니까? 이래서야 다른 사람이랑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숲에는 유성 이외에도 늑대를 사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들보다 앞서가는 것이 목표였던 김현준으로서는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유성은 흥분한 김현준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효율적으로 성장한다고 천 명 중 열 명, 상위 1% 안에 드는 것이 가능할까?"

김현준의 말문이 막힌 사이 유성은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아까 설명했다시피 나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곤란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야. 그리고 그 문제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알아낼 수 있는 모종의 수단이 있지."

-제 문제는 얼마나 어렵습니까?

"B+. 내가 지금까지 해결한 가장 어려운 문제보다 두 단계 이상 더 어렵지. 그래서 나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어."

첫 번째는 전반적인 환경 자체가 매우 불친절하고 적대적으로 설계되어 있을 가능성.

의식주가 보장되지 않는 것은 기본에 사막이나 정글, 북극 같이 인간이 생존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땅에 떨어져, 폭풍이나 해일, 화산 폭발과 같은 재해와 호시탐탐 목숨을 노리는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는 그런 환경 정도면 대충 B+ 등급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었다.

"아니, 그걸로도 좀 부족한가? 거기에 더해서 달성하지 않으면 죽는 임무가 매일 내려오고 참가자들은 데스 게임을 벌이는 상황 정도는 추가해야 균형이 맞을 것 같네."

-서, 설마 그 정도까지 극한 상황이 존재하겠습니까?

"소설 읽었다면서? 네가 읽은 소설 중에 이 정도로 극한 상황을 묘사한 게 하나쯤은 있었을 텐데?"

-....

"아무튼 나는 그런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식량, 의류, 의약품, 무기 같은 걸 준비했었어. 그런데 중앙 구역을 보고 나서 이 예측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문제는 바로 이 부분이야."

환경은 문제가 없는 정도를 넘어서 사람들에게 친화적이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이 퀘스트가 B+ 등급을 받을 이유는 한 가지밖에 남지 않는다.

"그냥 순수하게 1% 안에 드는 게 욕 나올 정도로 어렵다는 의미지."

상위 1%와 그 이하의 사람들 사이에는 하늘과 땅보다도 더 큰 차이가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그 정도의 차이를 신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제한한 유저의 능력과 90실버어치의 장비로 따라잡겠다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효율적인 성장으로는 부족해. 효율을 넘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준 정도는 돼야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니. 어떻게 말입니까?

"보면 알 거야."

가치 있는 가죽과 이빨을 채취하기 위한 도구도 없고 전리품을 팔기 위해 여러 번 마을을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유성은 가방이 있었기 때문에 더 효율적인 사냥이 가능했다.

"잿빛 늑대 가죽 19골드 65실버, 어금니 9골드 75실버. 총합 28골드 40실버입니다."

한 번에 28골드.

두 번 왕복해서 총 56골드라는 거금을 손에 쥐었다.

첫날, 그것도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시간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믿을 수 없는 성과.

서두른다면 한 번 더 사냥을 나가는 것도 가능했지만 유성은 그 대신 몇 시간 동안 어슬렁어슬렁 마을을 돌아다니기만 했다.

김현준이 중간에 다시 한번 타박을 했지만 그에 대한 유성의 답은 간단했다.

'정보 수집 중이야.'

김현준이 볼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사람들을 따라 멍하니 걸으며 농땡이를 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은 유성이었으니 불평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물론 유성이 진짜로 농땡이를 치는 것은 아니었다.

'역시 모두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건 아니군.'

제아무리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여 주며 협박했다 하더라도 평화로운 세계에서 살다 온 지 아직 채 하루도 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무기를 나눠 주고 싸우는 기술을 알려 준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된 이후라면 모를까, 바로 안전한 지역에서 나가서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적과 싸울 수 있을 만한 담력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한층 더 음울해 보이는 사람들을 골라내기를 얼마나 했을까, 저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시선을 돌린 유성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성을 토해 냈다.

푸른색의 고블린 사체를 등에 멘 채 걸어오는 남자.

처음으로 늑대 이외의 몬스터가 잡힌 순간이었다.

이런 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날이 저물자 다른 몬스터를 짊어지고 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

그리고 유성은 이날, 늑대 이외의 몬스터를 사냥하는 데 성공한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했다.

이거 게임 아님

111화 일 하나만 같이하자

"후우...."

생각보다 뜨거운 물의 온도에 눈썹을 찡그렸던 남자는 이내 전신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탄성을 터트렸다.

혹한 지대를 오가고 고블린과 싸우면서 쌓였던 피로가 전부 다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기분 좋은 노곤함과 탈력감에 미소 짓던 남자는 얼마 가지 않아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육체적 피로는 풀렸지만, 정신적 피로도는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납치, 정체불명의 인물, 비현실적인 능력, 신들의 장난감, 살인, 늑대, 도주.

하나만 해도 충격적인 일들을 불과 한나절만에 전부 몰아서 겪었으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피로를 느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

남자는 오늘 하루 자신의 행적을 떠올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마을에 들어오자마자 정보를 모으고 수련장에서 무기를 다루는 법을 익히자마자 몬스터를 사냥하러 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사람이 할 법한 일들이 아니었다.

진짜 평범한 사람이었더라면 지금 창밖으로 보이는 이들처럼 아직까지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을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것이다.

사실 남자라고 완벽하게 이 현실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저 평소에 읽던 소설의 내용을 떠올리고 현재 상황에 가장 적절한 행동을 취한 것뿐,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아아...."

다시 한번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 낸 남자는 얼른 샤워를 마쳤다.

내일은 오늘보다 훨씬 더 바쁜 하루가 될 것이다.

쓸데없는 고민을 할 시간에 잠이라도 한숨 더 자서 피로를 푸는 게 효율적인 선택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샤워실에서 나온 남자는 방 안의 광경을 보는 순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오래 기다리게 하는군."

검은색의 로브와 모자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정체불명의 인물.

자신을 이곳으로 납치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아니, 다른 사람이다.'

낮에 봤던 사람은 가면을 걸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다.

자세히 보니 목소리도, 체형도, 로브와 모자의 생김새도 전부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 사람과 동일인이 아닐 뿐, 비슷한 복장을 걸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동료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름이 뭐지?"

"...하서준이라고 합니다."

"제대로 찾아온 게 맞군."

"당신은 누구십니까?"

"크루거.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너를 죽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기 위해 온 것이니."

죽인다는 말에 마른침을 삼켰던 하서준은 이어지는 내용에 무심코 되물었다.

"잘 살던 사람들 납치해서 죽이고, 늑대 먹이로 던져 주더니 이제 와서 갑자기 웬 도움입니까?"

"나에게 따져도 별수 없다. 그 녀석은 이 세계로 사람들을 데려오는 역할을 맡고 있고 나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을 맡고 있으니, 우리들은 역할에 충실한 것뿐이다."

기껏 한다는 말이 역할에 충실했다는 말이라니.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던 하서준은 크루거의 손끝에서 꿈틀거리는 가시덩굴을 보고 분노를 가라앉혔다.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자도 가면남의 동료인 만큼 최소한 그에 준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여기서 덤벼 봤자 개죽음을 당할 뿐, 하서준은 대신 좀 더 건설적인 선택지를 고르기로 했다.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위대하신 분들은 고만고만한 장난감 여러 개보다는 강력한 장난감 하나를 더 좋아하신다. 그래서 본 무대로 들어가기 전, 강력한 장난감이 될 만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골라 비밀리에 도움을 주는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가능성이 가능성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는 거지."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혜.

소설에서 질리도록 많이 본 상황이다.

하서준은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확히 어떤 형태로 도움을 주는 겁니까? 아이템이나 돈을 주는 겁니까?"

"공평성을 이유로 소수의 인물들에게만 특혜를 주는 것에 반대하는 분들이 계시기에 그런 직접적인 도움은 주는 것은 힘들다. 대신 간접적인 도움을 주지."

"간접적인 도움?"

"축복이다. 너는 남들보다 더 빠르게 성장할 것이며 더 많은 아이템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강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강해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하는 척하던 하서준은 이 정도면 충분히 시간을 끌었다고 생각하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도움을 받겠습니다."

"축복은 내려졌다.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만약 이를 어긴다면 네게 내려진 축복은 사라질 것이다."

그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가려던 크루거는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깜빡 잊고 있었는데 직접적인 도움을 아예 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대가를 받고 세 개의 아이템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지금 바로 가능합니까? 전리품으로 얻은 창이 있는데...."

"가능하지만, 추천하지는 않는다. 강화를 받은 아이템은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한다. 노말 등급은 매직 등급이, 매직 등급은 레어 등급이 되는데 정말로 지금 강화를 할 건가?"

하서준은 크루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고블린을 잡고 얻은 창은 고작 매직 등급.

효율을 생각한다면 더 높은 등급의 아이템을 강화하는 것이 옳았다.

"열흘 후 다시 찾아오지."

크루거가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히자 하서준은 침대에 몸을 던지며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입을 틀어막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의 빛이 어려 있었다.

'내게도 이런 기회가 오는구나!'

평소 즐겨 읽던 소설 속의 인물이 된 것 같은 기분.

지구에서의 삶과 가족, 지인들에 대한 걱정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이세계에서 새롭게 시작될 삶에 대한 흥분과 기대감이었다.

"만약 이게 소설이라면 나는 분명 주인공일 거야."

* * *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유성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나름대로 감춘다고 감춘 모양이었지만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감출 수 없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인간들 중 가장 쉬운 상대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김현준이 질린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상점에서 검은 로브와 모자를 사고 붕대를 얼굴에 감길래 뭘 하나 했는데, 설마 관리자를 사칭하면서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 성격이 좀 특이해서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마다 매번 어떻게 하면 주인공을 엿 먹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상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거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아이디어가 떠오르더라고.'

-아이디어는 그렇다 치고 무섭지도 않으셨습니까?

'무서울 게 뭐 있어? 앞으로는 몰라도 오늘 하루에 한해서는 내가 랭킹 1위인데.'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럼 뭔데?'

-...됐습니다.

유성과 자신의 사고방식에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김현준은 유성을 이해하려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정말로 이래도 되는 겁니까? 나중에 문제가 되기라도 한다면....

'그 관리자라는 놈이 사기 치지 말라는 말은 안 했다면서? 그리고 이게 진짜 문제가 될 일이었다면 처음 사기를 치려는 순간 말리러 왔겠지.'

태연하게 답하고 있었지만 사실 유성도 속으로는 긴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보통 따로 경고하지 않은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게 일반적인 경우였지만,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조금 잘나간다 싶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고 있는 만큼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지금까지 친 사기를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없는 이상 이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 목표는 불타는 사자를 잡아 온 궁수였던가? 나이가 꽤 있어 보이던데, 방금 전처럼 쉽게 되지는 않겠네."

물론 쉽지 않다는 것이지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어차피 사기를 치는 것, 넘어오지 않는다 싶으면 나중에 지구로 돌아갈 기회를 주겠다느니, 소원을 들어주겠다느니 하는 식으로 공수표를 남발하면 그만이었다.

중요한 것은 축복을 받았다는 생각을 심어 두는 것.

실상은 순수한 본인의 힘과 재능만으로 강해진 것이었지만, 축복을 받은 덕분에 이렇게 강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언제나 자신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열흘 후, 거금과 함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 중 가장 값지고 귀한 것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건네주겠지.'

마음 같아서는 모든 아이템을 벗겨 먹고 싶었지만, 그 정도까지 가면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힘들다는 말에 모순이 생기게 된다.

아쉽지만 세 개 정도가 제일 적당하다.

미련을 털어 낸 유성은 문틈 사이로 가시덩굴을 밀어 넣어 잠금을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중년인을 향해 유성은 완전히 입에 붙은 대사를 내뱉었다.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너를 죽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기 위해 온 것이니."

* * *

2일 차.

사람들 사이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차이가 생겼다.

수련장에서 허수아비나 두들겼던 사람들은 목제 무기 하나만 들고 있었고, 늑대를 사냥했던 사람들은 철제 무기와 간단한 방어구를 갖추고 있었으며, 몬스터를 사냥했던 사람들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무기와 제대로 된 방어구를 걸치고 있었다.

'하루로 이 정도의 차이. 시간이 지나면 더 차이가 벌어지겠군.'

고작해야 한 단계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었다.

한 번 벌어진 거리를 좁히려면 배 이상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데 앞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놀고 있는 것도 아니다.

획기적인 계기가 있지 않는 이상, 한 번 처진 자가 앞선 자를 따라잡는 것은 요원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성은 사냥을 나가는 대신 마을 안을 돌아다니며 목제 무기를 든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역시 있군.'

어제 점찍어 둔 사람들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마을에 남아 있었다.

밖으로 나가려 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의 계획을 짜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자리에 앉아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성은 사람들이 뜸해진 틈을 타 한 소년을 향해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여기서 뭐 해?"

"보면 몰라요? 가만히 있잖아요."

퉁명스럽지만 힘이 많이 빠진 목소리.

거의 하루 가까이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테니 힘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아니, 내 말은 왜 사냥을 안 나가고 여기에 있냐는 말이야. 보니까 많이 지쳐 보이는데 뭐라도 사 먹으려면 사냥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할 거 아니야."

"...."

소년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더니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평화로운 세계에 살다 온 사람이 맹수와 괴물들과 싸운다는 것이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없었다.

하물며 사람 두 명이 죽는 모습을 보고 늑대에게 쫓기기까지 한 상황.

아예 투쟁을 포기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유성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나하고 일 하나 같이하자."

이거 게임 아님

112화 돈 벌 방법은 많아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퀘스트들은 다른 퀘스트들과 차별화된 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판타지, 무협, 퓨전, 고대, 현대, SF, 스팀 펑크 등 세계관의 숫자만 수십 개에 생존, 살인, 탈출, 추리, 재난, 재해 등 해결해야 하는 사건의 종류는 수백 개가 넘어가기 때문에 의뢰인이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모든 퀘스트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주인공이 아닌 것 같은데] 퀘스트 역시 다른 퀘스트들과 다른 특징이 존재했다.

이세계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이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 다른 차원으로 끌려간다는 상황이 바로 그것이었다.

유성이 B+라는 등급에도 불구하고 이 퀘스트를 고른 이유가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장르 소설 좀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눈 감고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뻔한 상황. 물론 현실과 소설이 같을 리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참고는 할 수 있겠지.'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상황과 전개를 대략적으로나마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이점이었다.

어떤 식으로 퀘스트를 진행할지 미리 계획을 세우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상과 다른 부분이 있어서 계획의 절반은 폐기해야겠지만... 나머지 절반으로도 충분해.'

관리자를 사칭한 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했다.

유성은 잡화점에서 옷 한 벌과 가죽 신발, 그리고 몇 가지 물건을 샀다.

현대적인 옷이 아닌 중세 유럽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투박한 옷과 투박한 가죽 신발.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몰래 건물 뒤로 빠져나온 유성은 방금 전에 산 물건들을 땅에 떨어뜨리고는 발로 마구 밟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

하지만 유성은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힘을 주어 옷과 신발을 잡아 뜯기까지 했다.

멀쩡한 옷이 걸레짝이 되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옷은 이 정도면 된 것 같고...."

입고 있던 옷을 벗고 걸레짝이 된 옷으로 갈아입은 유성은 이어서 위장을 시작했다.

말끔했던 머리를 엉망진창으로 헝클어뜨리고, 잡화점에서 구입한 물건들을 이용해 얼굴에 커다란 가짜 흉터를 만들거나 눈가나 피부에 접착제를 발라 피부가 일그러지도록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몸 곳곳에 검댕을 묻히고 바닥에 몇 바퀴 구르자 훌륭한 거지가 탄생했다.

정교한 위장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잠깐 속여 넘기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충분했다.

'자, 이제 가 볼까?'

인적이 없는 틈을 타 건물에서 빠져나온 유성은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느릿하게 거리를 걸었다.

"뭐야, 저건?"

"옷 입은 거 보면 주민 같은데.... 근데 저런 주민도 있었나? 어제는 못 본 것 같은데?"

사람들은 유성을 마을의 일원으로 간주했다.

고작해야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마을에 뭐가 있는지 전부 파악한 사람이 없기도 했고, 아직까지 현대적인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과 달리 유성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을 사람들처럼 중세 유럽 사람들이나 입을 법한 투박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성은 자신을 향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척 일정한 속도로 마을을 배회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장 많은 위치를 지나가는 순간 유성은 약속했던 신호를 보냈다.

"...저기요."

앞을 가로막은 소년.

유성은 본래 목소리를 짐작할 수 없게 잔뜩 내리깐 목소리로 말했다.

"뭐냐?"

"도움이 필요해 보여서 불렀어요. 얼마 안 되지만 이걸로 식사라도 하세요."

주변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소년이 꺼낸 것이 황금색의 동전이었기 때문이다.

1골드.

많은 액수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거지에게 줄 만한 돈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더 충격적이었다.

"흥! 이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

쨍그랑!

유성은 소년이 건넨 동전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엉뚱한 곳으로 튕겨 나간 동전의 소유권을 두고 작은 소란이 일어났지만 누구도 그 싸움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1골드를 적선하는 소년도 놀라웠지만 그 돈을 버리는 거지도 놀라웠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유성을 바라보던 소년은 주머니에서 더 많은 동전을 꺼냈다.

"3골드면 충분하죠?"

쨍그랑!

"5골드?"

쨍그랑!

"...10골드."

"간신히 입에 풀칠할 정도는 되겠군. 보답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하나 알려 주지."

유성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없도록 소년의 귀에 대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나는 분명히 알려 줬다. 얻고 못 얻고는 네가 하기에 달렸다."

유성은 그 말만을 남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떠나가 버렸다.

-정말 이걸로 괜찮은 겁니까?

'어, 이걸로 충분해.'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유성은 얼른 분장을 지우고 본래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마을에서 빠져나왔다.

잠깐의 연극을 위해 상당한 시간과 수고, 상당한 돈을 써야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수십, 수백 배로 돌아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유성은 2일 차에도 늑대를 사냥했다.

몬스터를 잡으려면 잡을 수 있기는 했지만 그러면 마을에서 멀어져야만 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유성은 사냥 중간중간 마을에 들러 사람들의 분위기를 살펴보고 적절하게 개입했다.

개입이라고 해도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거지와 소년의 이야기에서 화제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가지 않도록 계속해서 사건을 상기해 주고 이야기를 조금씩 부풀리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맞이한 3일 차.

세심히 보살핀 효과가 있었는지 유성이 뿌린 씨앗은 훌륭하게 발아했다.

"너, 너, 그거 뭐야?"

"보면 몰라요? 이건 검, 이건 방패, 이건...."

"누굴 바보로 알아? 그거 말고! 그 장비들 대체 어디서 얻었어?"

하루 전만 하더라도 목제 무기만 들고 있었던 소년이 완전무장을 갖추고 있다.

싸구려라면 어찌어찌 이해라도 하겠는데 그것도 아니다.

은은한 푸른빛이 도는 검, 불꽃 문양이 새겨진 철판을 덧댄 방패, 검은빛의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가죽 갑옷.

현재 선두를 달리고 있는 이들 중에서도 이 정도의 장비를 갖춘 사람은 드물었으니 사람들의 충격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음, 알려 줄까 말까."

한참 뜸을 들던 소년은 사람들의 강렬한 시선에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제 있었던 일, 기억하시죠?"

"어제 있었던 일이라면... 설마 그 거지를 말하는 거냐?"

"예. 그 거지가 알려 준 거예요. 해가 가장 높이 떴을 때 세 개의 나무가 만나는 곳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말이었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저도 처음에는 웬 헛소리를 하나 싶었어요. 그래도 10골드가 아까워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을 주변을 돌아보다가 우연히 거지가 말한 곳을 찾았어요."

나무 세 개의 그림자가 겹치는 지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땅을 팠더니 금화가 잔뜩 담겨 있는 주머니를 발견했다는 소년의 말에 사람들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눈앞에 산증인이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 이게 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

현재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비교한다면 보물이 있는 곳을 알려 주는 거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왜, 히든 피스니 기연이니 하는 식으로 소설이나 만화에서도 많이 나오는 상황 아닌가?

사람들은 거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됐다.

그리고 사람들의 흥분에 극에 달해 폭발하기 직전 그토록 찾던 거지가 나타났다.

"흠흠. 얼마 안 되지만 받아 주십시오."

얌전해 보이는 청년이 선수를 쳤다.

주머니의 내용물을 확인한 유성은 청년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늑대들이 머무르는 숲에서 세 번째로 큰 바위 아래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

순도 100%의 헛소리였다.

애초에 보물이고 자시고 숲에서 세 번째로 큰 바위를 찾는다는 것부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청년은 엄청난 비밀이라도 들은 것처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물러났고, 바로 그 뒤를 이어 안경을 낀 중년인이 금화 주머니를 내밀었다.

'이거 완전 돈 놓고 돈 먹기네.'

소년의 장비를 맞추는 데 전 재산을 투자한 것이 전혀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고작해야 100골드.

원금을 회수하는 데에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유성은 아직 만족할 수 없었다.

10골드는 어디까지나 최저 금액.

하나의 계기만 있다면 순식간에 수십 배 이상의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계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찾아왔다.

"너무 막연한데 좀 더 자세히 알려 줄 수는 없나요?"

"고작해야 10골드로 너무 많은 걸 바라는군."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또 하나의 금화 주머니를 건넸고 유성은 방금 전 말해 줬던 것보다 조금 더 세밀한 정보를 알려 줬다.

물론 정보 자체가 거짓인 만큼 세밀하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여대생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10골드만 내고 물러날 리 없었다.

기본이 두 배에, 심하면 열 배 이상의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 정도의 자금이 있을 리 없으니 선두권을 달리고 있는 사람들까지 유성의 사기에 휩쓸렸다는 뜻이었다.

"더 자세히."

박서준이 내민 주머니를 받아 든 유성은 풀어지려는 표정을 필사적으로 다잡으며 단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북쪽 구역을 상상하며 그럴듯한 말을 지껄였다.

그 결과 유성은 3일 차에 총 2만 골드의 수익을 거뒀고 이어지는 4일 차에서는 오히려 전날보다도 더 많은 3만 골드에 달하는 수익을 거뒀다.

보물을 찾지 못했던 이들이 더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다음 날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하며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이쯤에서 접어야겠군.'

하루라면 모를까, 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틀 동안 이곳저곳을 뒤집고 다녔는데 하나의 보물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미끼로 썼던 소년처럼 몇몇 사람들에게 적당한 돈을 쥐여 주고 보물을 찾은 것처럼 꾸미는 방법도 생각해 보기는 했지만, 비밀을 아는 사람이 많아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그만두기로 했다.

"이거 말고도 돈 벌 방법은 많은데 괜히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모든 조각을 모으면 엄청난 등급의 아이템이 나타난다는 소문을 내고 겉모습만 그럴듯한 아이템의 조각을 흩뿌릴 수도 있고, 아이템들을 매점매석해서 시세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도 있다.

'최대한 많은 돈을 모아야 해.'

단순히 비싼 아이템과 스킬들을 구입하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자신의 주머니가 두둑해진다는 건 곧 경쟁자들의 주머니가 가벼워진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구매력도 떨어질 테니 성장 가능성 또한 크게 떨어진다.

"위로 올라갈 수 없다면 위에 있는 사람들을 아래로 끌어내리면 그만이지."

유성은 창밖을 내려다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찾기 위해 핏발이 선 눈으로 마을을 돌아다니는 사람들.

예비 무대의 종료까지는 아직도 열흘이 넘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과연 그동안 자신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다른 사람들은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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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너도 알고 있는 사람일걸?

길게 숨을 내쉬며 정신을 집중한다.

느려지는 세상.

세상이 느려졌다는 것은 비유도 뭣도 아닌 문자 그대로의 의미다.

세차게 흩날리던 진눈깨비는 숫자를 셀 수 있을 정도로 느려졌고 피부에 닿는 공기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이 명확하게 느껴졌다.

깊은 수양을 쌓거나 극한의 집중력을 가진 이들만이 순간적으로 진입할 수 있는 영역이었지만, 유성은 수라감각도의 구결을 되뇌는 것만으로 너무나 쉽게 그 영역에 들어갈 수 있었다.

끼익.

시위를 너무 세게 잡아당긴 탓이었을까.

한껏 휘어진 활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미동조차 하지 않던 타깃의 몸이 떨리는 것을 목격한 유성은 망설이지 않고 시위를 놓았다.

'빗나갔다.'

일격에 죽었어야 할 놈이 살아서 몸부림치고 있다.

짧게 혀를 찬 유성은 곧바로 시위에 두 번째 화살을 타깃을 향해 쏘아 보냈다.

이번에는 타깃도 얌전히 맞아 주지 않았다.

가볍게 고개를 젖히는 것으로 화살을 피해 낸 타깃은 유성이 있는 장소를 바라보며 날개를 펼쳤다.

끼애애애애액!

괴조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속도를 내며 유성을 향해 날아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가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유성은 당황하지 않고 새로운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었다.

세 번째 화살.

괴조는 속도를 줄이지 않기 위해 살짝만 몸을 틀어 화살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내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틀린 선택이었다.

유성이 이번에 쏘아 보낸 화살은 앞서 사용한 암살용 화살이 아닌 폭발을 일으키는 폭시(暴矢)였으니 말이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에 휩쓸린 괴조가 추락하기 시작하자 유성은 들고 있던 저격용 활을 던져 버리고 연사용 활을 잡았다.

끼애애애액!

폭발, 빙결, 뇌전, 독무, 돌풍, 파동, 분해, 저주.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한 종류의 능력에 휩쓸린 괴조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지면으로 추락했다.

몇 개의 화살을 더 날린 유성은 괴조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비싼 값을 하는구만."

방금 전 사용한 화살들의 가격은 개당 최소 100골드 이상.

화살들의 개수를 생각한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수천 골드에 달하는 돈을 허공에 뿌린 셈이었지만 유성은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수천 골드.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본다면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액수였다.

산기슭에서 내려온 유성은 곧바로 괴조의 도축을 시작했다.

강철 같은 강도를 가지고 있는 깃털을 특수 제작된 미스릴제 도축용 단검을 이용해 부드럽게 잘라 낸 유성은 괴조의 사체에서 몇몇 부위만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 될 만한 부위가 아직 많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기회비용 측면으로 보자면 이 이상 도축을 할 바에는 다른 몬스터를 잡는 것이 더 이득이었다.

"그냥 돈으로 다 해결할 수 있게 만들면 편했을 텐데."

어지간한 물건들은 상점에서 돈을 주고 살 수 있지만, 능력치는 오직 몬스터와의 싸움을 통해서만 성장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몬스터들은 상점에서는 팔지 않는 특별한 아이템이나 스킬들을 드롭하는 만큼 사냥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할 수 있었다.

끼애애애액!

끼익!

멀리서 들려오는 괴조들의 울음소리.

후드를 눌러쓰자 유성의 모습이 주변의 사물에 녹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능력치는 얼마 올려 주지 않지만, 은신 능력에 한해서는 이것만 한 물건이 없었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라 한다면 3만 골드라는 살인적인 가격 정도?

물론 유성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유성은 죽은 괴조를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거의 다 왔어.'

중앙 구역을 제외한 네 개의 구역에는 보스 몬스터가 존재한다.

보스 몬스터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은 우연한 사고 때문이었다.

남쪽 구역에서 사냥을 하던 한 무리의 파티원들이 우연히 끝을 알 수 없는 절벽을 발견한 일이 있었다.

그냥 넘어갔더라면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겠지만 파티원 중 한 명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뜬금없이 절벽 아래를 향해 마법을 발사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절벽 아래에서 거대한 웜(worm) 한 마리가 나타나 파티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 파티는 간신히 도망친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멸해 버리고 말았다.

평범한 몬스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강함에 사람들은 그 웜을 보스 몬스터라 불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구역에서도 보스 몬스터가 있을 거라 짐작되는 장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제는 보스 몬스터가 너무나 강력해서 도저히 잡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예비 무대 막바지까지 힘을 키우고 상위권의 실력자들이 파티를 맺어야만 간신히 잡을 수 있을까 말까 한 정도.

사람들은 보스 몬스터를 계륵으로 여기거나 훗날을 기약했지만 유성의 생각은 달랐다.

"보스 몬스터 잡으러 가자."

-...저랑 같은 이야기 들은 거 맞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겁니까?

"너 장르 소설 많이 봤다며. 적이 너무 강하다고 주인공이 포기하는 소설 본 적 있냐?"

-그건 주인공이라서 가능한 일 아닙니까?

"자기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이라는 말도 있지."

단순한 충동이나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세밀한 조사와 계산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상점에서는 다양한 능력을 가진 특수 화살이라는 아이템을 팔고 있었다.

최소 100골드를 호가하는 가격과 일회용이라는 치명적인 단점 때문에 평범한 궁수들은 살 엄두도 내지 못하거나 비상시에 대비해 한두 개 정도만 들고 다니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유성은 달랐다.

한두 발?

수천 발도 문제없었다.

"소문대로라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잡을 수 있어."

보스 몬스터는 장식용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저 당장 잡을 수 없다는 것뿐이지 예비 무대 마지막 날쯤에 파티를 맺고 덤비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정도.

유성이 생각하기에 특수 화살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자신의 화력은 최종 성장한 상위권 실력자들이 낼 수 있는 화력에 결코 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저기군.'

얼어붙은 거대한 호수 위에 세워진 얼음 궁전.

안까지 들어가 본 사람은 없었지만, 북쪽 구역에 보스 몬스터가 있을 법한 곳은 이 얼음 궁전이 유일했다.

유성은 저격용 활에 관통력을 극대화한 특수 화살을 재우고 시야를 확대하는 호크 아이 스킬을 발동했다.

"응?"

유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들의 증언대로라면 얼음 궁전의 성벽 위에는 24시간 쉬지 않고 사방을 감시하며 가까이 접근하는 이들에게 얼음 화살을 쏘아 대는 아이스 골렘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아이스 골렘은커녕 그 비슷한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호수를 한 바퀴 돌아 봤지만, 아이스 골렘은 단 한 마리도 발견할 수 없었다.

고민하던 유성은 얼음 궁전을 향해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대문 앞까지 가는 동안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았고, 아무런 몬스터도 나오지 않았다.

끼익!

궁 안의 모습은 처참했다.

보기 흉하게 녹아내린 얼음 장식들과 폭격이라도 맞은 듯 산산이 무너져 내린 벽과 기둥, 처참하게 부서진 아이스 골렘에 이르기까지 멀쩡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광경은 더욱 처참해졌다.

그리고 궁 최심부에 도달한 순간, 유성은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설마, 저게 보스 몬스터입니까?

"아마도."

화려한 옥좌 위.

얼음으로 만들어진 순백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고 팔 하나는 잘려 나갔으며 몸 이곳저곳이 녹아 있는 모습.

놀랍게도 북쪽 구역의 보스 몬스터는 이미 잡힌 후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지금 보스 몬스터를 잡을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랭킹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모인다면.... 아니, 그건 불가능해.'

랭킹 10위권 안에 들어갈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들은 모두 별도의 감시를 붙여 두고 있었다.

두세 명이라면 모를까, 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보스 몬스터를 사냥하러 가는데,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잠깐."

어떤 가능성을 떠올린 유성은 망치로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허무맹랑한 가능성이었지만 분명히 퀘스트를 시작하기 전 생각했던 가능성이기도 했다.

'얼음 계열의 몬스터를 잡았다면 아마 다음 타깃은....'

궁에서 나온 유성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는 한 방향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몬스터와 마주쳤지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지금은 시간 낭비 할 때가 아니었다.

최소한의 휴식만을 취하며 달린 유성은 마침내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화산

서쪽 구역의 보스 몬스터가 있는 곳이었다.

쾅! 쾅! 쾅!

화산의 분화구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자연적인 폭발음보다 훨씬 더 작고 불규칙한 소리.

부지런히 산을 올라 분화구에 도착한 순간, 유성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물러나세요!"

"괜찮네! 아직 좀 더 버틸 수...."

콰아아앙!

"커헉!"

"물러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미, 미안하네!"

"지아야! 회복 스킬 아저씨한테 집중해! 아저씨가 회복할 때까지 내가 탱커! 중석이가 딜러다!"

분화구 안에는 용암 괴물과 한 파티의 싸움이 진행되고 있었다.

보스 몬스터를 상대로 대등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 파티.

그리고 그 파티원들 중 유성의 기억에 있는 얼굴은 단 하나도 없었다.

'보스 몬스터를 잡을 만큼 강력한 사람들을 내가 몰랐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유성은 첫날부터 지금까지 조금이라도 두각을 드러낸 사람들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남김없이 기억했다.

이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들을 자신이 모르고 있었다는 건 실력을 철저히 감췄다는 것 이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쩡! 쩌엉!

그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건 보스 몬스터와 정면에서 싸우고 있는 청년이었다.

보스 몬스터를 상대로 우세한 싸움을 하고 있다.

그냥 잘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검술, 전투 센스, 실전 경험, 임기응변 등 모든 면에서 흠잡을 곳이 없었다.

비록 검술은 익히지 않았어도 수준급의 무공과 격투술을 익힌 유성은 청년의 노련한 움직임에서 오랜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콰직!

청년의 검에 핵을 꿰뚫린 보스 몬스터가 형체를 잃고 무너져 내리자 유성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만약 상대가 자신이 생각하는 그 존재라면 근처를 어슬렁거려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저, 저 사람은 대체 뭡니까?

김현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른하늘의 날벼락도 아니고 랭킹 10위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보다도 한 단계... 아니, 몇 단계 이상 강한 실력자가 갑자기 나타났으니 당황할 만도 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유성은 산에서 완전히 내려와서야 입을 열었다.

"아마 너도 알고 있는 사람일걸?"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인데요?

"이름을 들으면 바로 알 거다."

힐끔 고개를 돌려 산을 바라본 유성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회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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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이이제이

이 세계의 배경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전형적인 이세계물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세세한 부분에서는 이 세계만의 고유한 특징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평화로운 세계에 살던 사람들이 초월적인 존재들에 의해 다른 세계로 끌려가 싸우게 된다'는 큰 줄기만큼은 이세계물의 도입부와 정확히 일치했고, 유성은 이 사실을 바탕으로 이 퀘스트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어떤 식으로 공략할지 미리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성좌물, 미션물, 탑등반물.... 또 뭐가 있지?'

전체적인 배경은 물론 의뢰인의 상태, 난이도, 주변 환경, 히든 피스의 유무 등 모든 가능성을 검토했다.

그리고 그 가능성 중에는 이세계물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회귀자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회귀자.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존재지만 이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유저도 있는 마당에 과거로 돌아온 회귀자가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어쩐지 너무 쉽더라니."

유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B-급 퀘스트였던 [비틀린 세계]조차도 진행하는 내내 온갖 고생을 했고 마지막에 가서는 오스왈드라는 난관 때문에 퀘스트가 실패로 돌아갈 뻔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난 주인공이 아닌 것 같은데]는 B+라는 등급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쉬웠다.

9일 차에 다다랐는데도 불구하고 처음 퀘스트를 시작한 순간 마주쳤던 늑대를 제외하면 위기다운 위기를 겪어 본 적이 없었을 정도.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설마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회, 회귀자? 확실합니까?

"그놈 싸우는 거 봤지? 21세기 지구, 그것도 대한민국이라는 평화로운 나라에서 살다 온 사람이 고작 며칠 지났다고 저렇게 강해지는 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검술이나 무술의 천재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과는 달라. 저놈의 강함은 천재의 번뜩임이 아니라 오랜 세월 누적된 시간에서 오는 강함이야."

-지구에서 무술을 익히다 온 건....

"너희 지구에 몬스터를 상대로 하는 무술을 가르치는 곳도 있냐?"

-...….

유성의 지구라면 모를까, 김현준의 지구는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은 평화로운 지구다.

전생에 몬스터가 있는 세계에서 살다 지구에 환생했거나,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에 몬스터가 존재하는 다른 이세계에 갔다 온 것이 아닌 이상 회귀자라는 것 이외에 다른 설명은 불가능했다.

'회귀자에 대비한 계획들도 준비해 두기는 했지만....'

그 계획들이 미리 싹을 자르든가, 유용성을 어필해 동료로 들어가는 등 초반을 상정하고 세워진 것들이라는 게 문제였다.

성장을 마친 회귀자를 상정한 계획은 단 하나도 준비하지 않았다.

회귀자가 얼마나 강해질지, 어떤 사실들을 알고 있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그에 대비한 계획 같은 것을 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동료들도 범상치 않아 보이던데. 하긴, 회귀자가 고른 동료들이 평범할 리 없겠지. 미래에 엄청난 거물로 성장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재능을 가진 이들이 분명해.'

유성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회귀자와 동료들의 숫자는 총 다섯.

아주 잠깐의 싸움이었지만 회귀자의 강함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통틀어도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동료들 역시 랭킹 10위권 이내의 사람들과 비견될 정도의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긴급 사태였다.

이 퀘스트의 클리어 조건은 예비 무대가 종료될 때까지 랭킹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것.

돈, 사냥, 아이템, 스킬, 전리품 등 모든 요소를 반영한다고 하지만 어느 부분이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지 모르는 이상, 자칫하면 랭킹 10위권 밖으로 밀려나는 참사가 일어날지도 몰랐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유성은 어느덧 마을 근처까지 왔다는 것을 깨닫고 입고 있던 장비를 벗고 아공간에서 꺼낸 새로운 장비로 갈아입었다.

"남쪽 구역으로 사냥하러 가실 탱커 두 분 구합니다! 중간까지 갈 거예요!"

"부러진 장검 검자루 삽니다! 검신은 다 모았어요! 검자루만 사는 거예요!"

"지도 팝니다! 비밀 던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지도입니다!"

마을 안의 분위기는 매우 활발했다.

쥐 죽은 듯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던 첫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

그러나 그 활발함은 어딘가 엇나가 있었다.

"이 새끼! 감히 나한테 사기를 쳐? 돈 내놔! 내 돈 내놓으라고!"

"아, 그게 가짜인지 누가 알았겠냐고. 그리고 난 분명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는데도 당신이 알겠다면서 샀잖아. 왜 이제 와서 지랄이야? 어쭈? 한 대 치게? 돈 많으면 쳐 봐."

"치라면 못 칠 줄 알고!"

퍽!

"이거 진짜 맞다니까? 여기 봐 봐. 불 대니까 숨겨진 문양이 나오잖아. 가짜 지도 중에 이런 거 있는 거 봤어?"

"그래? 그러면 거기 적힌 곳까지 같이 갈 수 있겠지? 입구만 확인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돈 줄게."

"내, 내가 여기 적힌 곳까지 갈 만한 실력이 안 돼서...."

"가는 길은 우리 파티가 보호해 줄 테니까 걱정 마."

"...오는 길은?"

"그건 입구를 발견하고 나서 결정하지."

고성과 욕설이 울려 퍼지고, 주먹다짐이 오가며, 물건 하나를 두고 은근한 신경전이 벌어진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사람들이 이렇게 된 건 전부 유성 때문이었다.

처음 벌였던 NPC 사칭을 시작으로 유성은 사람들 사이에 분쟁과 불화를 일으킬 수많은 계획을 진행했다.

평범한 검을 부순 다음 전설의 검의 파편이라며 비싸게 팔아먹었고, 비밀 던전의 위치가 적혀 있다며 대충 그린 지도를 고급 아이템과 교환했으며, 돈을 불려 주는 아이템을 얻었다며 사람들을 끌어모은 후 목돈을 챙겨 도망쳤다.

물론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기에 이런 사기들에 계속해서 속아 넘어갈 리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불행하게도 유성은 완전히 사기만 치고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완전한 거짓말보다는 약간의 진실이 포함된 거짓말이 더 효과적이지."

유성은 모은 돈 중 일부를 자신이 한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재투자했다.

상점에서 산 진짜 유니크급의 아이템을 조각내 팔았고 교묘하게 숨겨진 장소에 돈과 아이템을 가져다 놓았으며, 일부 사람들은 원금 이상의 돈을 벌 수 있도록 해 줬다.

간간이 등장하는 진짜 히든 피스들은 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일확천금에 눈이 멀어 귀중한 돈과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사람들.

이 혼란은 예비 무대가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이어질 것이다.

"어이, 거기 잠깐 멈춰."

여관 주인에게 열쇠를 받아 계단으로 올라가려던 유성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저요?"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나 알지? 말로 할 때 내놔."

한눈에 봐도 불량해 보이는 무리.

유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품에서 골드가 담긴 주머니를 꺼내 금발 양아치에게 내밀었다.

"...47, 48, 49, 50. 맞네. 가 봐."

이들을 때려눕히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서 좋을 게 없었기에 얌전히 삥을 뜯기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여도 사람들은 의외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누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어제는 누구와 파티를 맺었는지, 어떤 몬스터를 처리하고 어느 정도의 돈을 벌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는 전부 다 알고 있다.

좁은 마을에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 그 정도는 알기 싫어도 자연스럽게 알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회귀자의 등장으로 복잡해진 유성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놈들은 어떻게 지금까지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거지?"

보스 몬스터를 잡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이들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세계는 생각보다 좁은 편이다.

자신처럼 중간 단계를 전부 건너뛰고 아무도 들어간 적이 없는 미지의 지역으로 진입하는 경우라면 모를까.

평범한 사람들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며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아무리 본인이 감추려 한들 대략적인 실력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1일 차에는 마을 근처, 2일 차에는 숲, 3일 차에는 사대 구역 근처, 4일 차에는 사대 구역 외각 같은 식으로 언제 어디에서 사냥을 했는지 다 알려지기 때문이다.

유성이 사람들에게 매긴 랭킹도 바로 이런 데이터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남들이 늑대를 잡을 때 고블린을 잡고, 고블린을 잡을 때는 오크를 잡는 식으로 앞서 나가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조차도 서로가, 서로를 감시했기에 알려질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회귀자를 포함해 5명이나 되는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알려진 사람이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회귀자 한 명뿐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그 실력을 생각한다면 남들이 한두 발을 앞서갈 때 회귀자는 네다섯 발 이상 앞서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회귀자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은 다르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회귀자가 도와준다 하더라도 당장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기에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야 하고, 당연히 그 모든 과정은 사람들에게 목격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건....

"비밀 던전 같은 곳에서 실력을 기른 건가?"

이 세계에는 자신이 뿌린 가짜 히든 피스 이외에도 진짜 히든 피스가 존재한다.

공식으로 알려지지 않은 비밀 던전도 그중 하나.

그러나 지금 유성에게 있어 중요한 건 그들이 어떻게 실력을 쌓았냐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얼핏 생각하면 그리 대단치 않아 보이는 정보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잠깐 놀라거나 신기하게 생각할 뿐, 그 이외의 반응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당장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데 남이 비밀리에 실력을 쌓든 말든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유성의 생각은 달랐다.

끼익.

유성은 여관에서 나와 마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분위기, 소소한 대화, 화젯거리 등 평소에는 신경 쓰지 않던 사소한 것들.

반나절에 걸쳐 마을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고 방으로 돌아온 유성은 무심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렸다.

"이거 잘하면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뭘 말입니까?

"회귀자와 그 동료들이 비밀리에 실력을 키웠다는 사실 말이야."

-...그걸 어떻게 이용합니까?

김현준이 멍청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분명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들었는데 대체 유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유성은 단 한 단어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유성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번졌다.

이거 게임 아님

115화 회귀자

"오빠! 조심해요!"

청년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해 줬는데도 몬스터와 싸우러 갈 때마다 매번 조심하라는 말을 한다.

물론 진짜로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입꼬리가 올라가지는 않았을 테니.

쉬익!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흐릿하게 일렁이는 바람의 칼날들이 나타났다.

순식간에 주변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범위 공격.

그러나 청년은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바람의 칼날들을 향해 몸을 던졌다.

까가가가강!

검과 바람의 칼날이 부딪힐 때마다 불똥과 함께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칼날의 숫자와 날아드는 속도는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과 비교하면 이제는 거의 2배에 가깝게 늘어나 있었지만, 청년은 산들바람이라도 쐬는 듯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명색이 폭주 정령이면서 설마 이게 전력은 아니겠지?"

쏴아아아!

이제는 숫제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다.

하지만 그중 어느 것 하나도 청년의 몸에 상처를 입히기는커녕 옷자락을 베어 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람의 기세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정령이 악을 쓰자 다시 강해지기는 했지만, 일시적인 현상일 뿐.

날카로운 폭풍이 살랑이는 미풍으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후웅!

"어딜 도망가려고?"

청년은 등을 보인 정령을 향해 들고 있던 검을 던졌다.

정령에게 피해를 입히려면 특별한 무기가 필요하지만, 마력을 싣는다면 평범한 검으로 얼마든지 충격을 줄 수 있다.

펑!

희미한 빛에 휩싸인 검이 정령의 핵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청년은 한 줄기 바람이 되어 흩어지는 정령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정령이 떨어트린 물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녹색 빛으로 빛나는 퍼즐 조각.

조각을 품에 갈무리한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 관리를 하며 몸을 돌렸다.

"오빠! 어디 다친 데는 없으세요?!"

"생채기 하나 안 생겼어. 내가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잖아."

"그렇게 위험하게 싸우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

청년, 한상진은 유지아의 뒤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은 찢어진 데다 몸 곳곳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남녀들.

한상진의 웃음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중년인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네."

"아뇨, 아주 큰 도움이 됐습니다. 여러분들이 호위병을 붙잡아 줬기 때문에 보스 몬스터를 잡을 수 있었던 거지, 저 혼자서는 절대로 보스 몬스터를 잡을 수 없었을 겁니다."

"흠흠. 빈말이라도 고맙군."

빈말이 맞기는 했다.

그럴 마음만 먹었더라면 보스 몬스터는 물론 호위병들까지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상진은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중년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끄응. 고맙네."

"뭘 이런 걸 가지고."

중년인이 미래에 어떤 존재로 성장하는지 알고 있는 한상진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한상진이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중년인뿐만이 아니었다.

"너희들도 모두 도움이 됐어. 고맙다."

"진짜요? 이번에는 진짜 도움이 된 거 맞죠?"

"도움은 무슨, 방해나 안 됐으면 다행이지."

"아 좀!"

"어딜 누나한테 눈을 부라려? 눈 안 깔아?"

티격태격대는 쌍둥이 남매.

이 순진해 보이는 남매가 나중에 대륙의 정보를 장악하는 그림자의 왕과 어둠의 여왕이 된다니.

회귀자인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 오직 나만이 가능한 일이지.'

한상진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회귀.

처음에는 죽기 직전의 주마등을 같은 것이라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상진은 이것이 틀림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믿을 수 없게도 자신은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그 돌 때문인가?'

죽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리던 한상진은 고개를 저었다.

미래... 아니, 과거의 일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현재.

첫 번째 삶은 실패했지만 두 번째 삶은 다를 것이다.

"자자, 싸움은 마을에 돌아가서 하자."

"어라? 정말 마을로 가는 거예요?"

"오늘 간다고 말했잖아?"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죠. 며칠 전부터 그렇게 마을로 돌아가자고 말했는데 들은 척도 안 했는데 갑자기 오늘 돌아가겠다라. 흠."

"싫어? 그러면 며칠 더 있다 돌아갈까?"

"아뇨!"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던 소녀를 능글맞은 대꾸로 함락시킨 한상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본격적으로 추궁했으면 귀찮아질 뻔했는데 오랜만에 마을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기뻐서 그런지 다행히 소녀가 선선히 물러났다.

'예비 무대에 업적이 숨겨져 있다는 걸 설명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본 무대에 진입해서 잠겨져 있던 인터페이스 시스템이 해방되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업적들이 있었다.

네 마리의 보스 몬스터를 모두 잡는 [튜토리얼 마스터], 일곱 개의 히든 피스를 찾아내는 [럭키 세븐], 백만 골드 이상을 모으는 [거부].

지금 도전하고 있는 것은 마을로 돌아가지 않고 야외에서 일주일 이상을 지내는 [서바이벌 마스터] 업적이다.

'의심을 사지 않고 자연스럽게 바깥에서 일주일을 머무르도록 만들기 위한 동선을 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비밀 던전을 시작으로 특별한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만날 수 있는 스페셜 몬스터, 교묘하게 숨겨진 보물, 보스 몬스터 사냥 등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전부 긁어내서 간신히 조건을 맞출 수 있었다.

그림자 여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소녀는 중간부터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것 같았지만 다행히 연이어 등장하는 히든 피스가 적절한 연막이 되어 주었다.

'조금만 더 고생하자.'

이 자리에 있는 네 명은 모두 미래에 엄청난 거물로 성장하지만 본 무대가 시작되면 모두 다른 곳에 떨어지니 지금이 아니면 당분간 친분을 쌓을 기회가 없다.

이제 11일 차.

열흘간 이어진 강행군과 일주일간의 노숙 생활로 인해 분위기가 상당히 가라앉았다.

다행히 노렸던 히든 피스는 전부 얻는 데 성공했으니 앞으로 남은 4일간은 적당히 모험하는 기분으로 돌아다니면서 어색해진 관계를 회복하면 될 듯싶었다.

"자, 모두 이동!"

한상진의 입가에 다시 한번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성녀, 수호자, 그림자의 왕, 어둠의 여왕.

대륙을 뒤흔든 영웅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았다.

물론 아직은 유망한 신인에 불과하지만 자신이 키우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들은 과거보다 더 빨리 예전의 힘과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을로 돌아가면 뭘 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그치지 않는군. 자네는 마을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뭘 할 건가?"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 싶군요."

"오!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만! 같이 한잔하겠나?"

"저야 좋죠. 지아도 같이 마실래?"

"술은 별로 안 좋아하지만 한 잔이라면...."

"저도 마실...아아아!"

"미성년자가 어딜. 넌 물이나 마셔."

티격태격대는 남매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던 한상진은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고 주먹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수신호였지만 일주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우며 전투 감각을 갈고 닦은 파티원들은 순식간에 무기를 뽑아 들고 사방을 경계했다.

"...몬스터인가?"

"아뇨, 그게 아니라...."

잠시 머뭇거리던 한상진은 검을 고쳐 잡고 조심스레 주변을 경계하며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평원 한복판에 떨어져 있는 무언가.

그것은 한 벌의 장비와 한 자루의 창이었다.

땅에 장비품이 떨어져 있는 건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비 무대에서 사람이 죽으면 시체는 빛으로 변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아이템들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 아이템은 평범한 아이템들과는 약간 달랐다.

"...이거 굉장히 비싸 보이는데요?"

날이 일렁이는 불꽃으로 이루어진 장창.

은은한 은빛의 광채를 발하고 있는 풀 플레이트 메일.

풀 플레이트 메일과 세트로 보이는 장갑 한 켤레.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물건들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감정을 해 봤지만 추측이 확신으로 변할 뿐이었다.

"갑옷과 장갑은 레어 세트 아이템, 이 창은 유니크 아이템이군."

"횡재했다...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하죠?"

한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템을 떨어진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런 건 굳이 주워 갈 가치가 없을 정도로 싸구려 장비들에 한한 일이지 이 정도로 값비싼 아이템이 떨어져 있다면 진작에 누군가가 주워 갔어야 했다.

'혼자서 사냥을 나왔다가 봉변을 당한 건가? 아니, 이 정도의 장비를 입고 있는 사람이 여기서 나오는 몬스터들에게 당한다는 건 말이 안 돼. 누군가 원한을 가지고 살해한 건가? 그러면 장비를 남겨 놨을 리 없을 텐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다.

"버리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이렇게 비싼 아이템을 버리고 가자니. 제정신인가?"

"비싼 아이템이라서 버리고 가는 거예요. 이런 아이템이 여기에 떨어져 있다는 게 정상적이라고 생각해요? 딱 봐도 찜찜하잖아요."

"으음. 그래도 너무 아까운데...."

"오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야...."

한상진은 대륙에서 수십 년을 살아가며 온갖 사건을 겪고 수많은 소문을 들었다.

그 경험에 의거해 판단하자면 여기서는 소녀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맞았다.

이런 출저가 불분명한 물건들과 얽히면 대체로 뒷일이 좋지 않게 끝난다.

그러나 한상진은 안 된다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왜 눈앞에 보물이 있는데 포기해야 하지?'

가늘고 길게 살아가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지난 삶이었더라면 이런 물건 따위는 시선도 주지 않고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자신은 새롭게 태어났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으면 부수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남의 것이라도 망설임 없이 빼앗고, 모든 것을 손에 넣는 그런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여기서 과거의 자신이 고를 법한 나약한 선택지를 고르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그때는 힘이 없었지만 지금은 힘이 있다. 설령 문제가 생겨도 강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힘으로 해결하면 그만이야.'

"가지고 간다."

"오빠?"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고 있어. 하지만 혹시 모를 가능성 때문에 이런 아이템들을 포기한다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죠. 돈으로 따지면 가져가는 게 효율적이겠지만 안전으로 따지면 버리고 가는 게 효율적이에요."

"안전? 우리를 위험하게 만들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그건...."

소녀의 말문이 막혔다.

맞는 말이다.

일주일 전의 자신들과 지금의 자신들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달라졌다.

정확한 비교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잡는 몬스터의 종류를 통해 추측해 보자면 다른 사람들과 자신들의 실력은 최소한 다섯 단계 이상이다.

다섯 단계 이상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 네 명.

거기에 그런 자신들이 모여도 당해 낼 수 없는 한상진까지 있다.

"...하아."

소녀가 한숨을 쉬며 물러나자 한상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템들을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가방에 집어넣었다.

"가자."

잠깐 의견 충돌이 생기기는 했지만 일행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온화했다.

한 개의 유니크 아이템과 두 개의 레어 아이템을 공짜로 얻었는데 당연히 분위기가 침울할 리 없었다.

반대했던 소녀조차도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을 정도.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의 분위기는 다시 한번 바뀌고 말았다.

"...대체 뭐지?"

또 다른 아이템이 일행의 앞에 나타났다.

이거 게임 아님

116화 도망가 봐라

단검 두 자루와 신발 한 켤레.

따로 감정해 보지 않아도 앞서 주운 아이템에 비해 결코 모자람이 없는 아이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이상한데요."

"난 오히려 안심이야. 아까는 전사용 장비에 이번에는 도적용 장비. 동기는 모르겠지만 도적이 전사에게 먼저 기습을 가해서 치명상을 입혔고, 전사 역시 반격을 날려서 도적에게 치명상을 입혀서 양패구상했다면 이 상황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어."

"두 아이템이 떨어진 장소에 거리가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하실 거죠?"

"둘 다 바로 안 죽고 잠깐은 살아 있었던 거지. 서로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도망치던 중 죽어서 아이템 사이에 거리가 있었던 거야. 어때?"

"..."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상진의 추측에 납득했기 때문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한상진의 주장은 추측조차 아니었다.

그저 이 아이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가져가도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끼워 맞춘 망상이다.

이런 뻔히 보이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소녀가 한상진의 주장에 반박하지 않은 건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이 상태가 된 오빠는 무슨 말을 해도 들으려 하지 않아.'

한상진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라고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으니 현실과 타협하는 사람들과 달리 한상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절대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마치 미래라도 보고 온 듯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틀리고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확신하고, 결과적으로도 한상진의 결정은 언제나 옳은 것으로 드러난다.

초기에는 토론을 나누며 주장에 반박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한상진이 옳은 판단만을 내리는 일이 반복되자 소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오빠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럼 이것도 가져가는 걸로?"

"당연하지. 네가 가진 단검보다 이게 더 좋아 보이는데 바꿀래?"

현재 자신이 들고 있는 무기는 한상진이 찾아낸 히든 피스다.

그런 무기보다 더 강한 무기가 이런 곳에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위화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그래 왔듯 한상진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그럼 저야 고맙죠."

작은 위화감은 한상진이 던진 단검을 받아 든 순간,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다시 시작된 이동.

잠시 후,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세 번째 아이템이 나타났다.

"두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다퉜던 것 같네."

한상진은 새로운 추측을 내놓았고 모두가 동의했다.

이번에 나온 아이템은 스태프와 사제복, 베일이었고 사제인 유지아에게 딱 맞는 아이템이었기에 본래 착용하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성능을 가지고 있는 베일을 착용했다.

그 이후는 같은 패턴의 반복이었다.

아이템을 발견하고, 추측은 바뀌고, 장비는 교체된다.

가방이 가득 차서 직접 들고 다닐 정도가 되자 소녀 이외의 다른 사람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한상진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좋아. 이거면 [거부] 업적을 달성할 수 있겠어! 아니, 업적만이 아니지. 이 아이템들을 팔아서 얻은 돈이면 내 구상을 최소 1년 이상 앞당길 수 있다!'

한상진은 단 두 가지 생각뿐이었다.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할 리 없다.

자신의 선택은 모두 올바르며, 문제가 생기더라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는 미래에 대해 알고 있는 회귀자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상진은 두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하나는 미래는 변한다는 것.

회귀자가 회귀하기 전의 과거와 완벽히 똑같은 행적을 밟지 않는 이상, 회귀자가 일으킨 변화로 인해 미래는 바뀌게 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상치 못한 불청객의 존재였다.

탓.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발소리.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어도 몸은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한상진의 손이 번뜩인 순간 반월형의 검기가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날아갔다.

"으윽!"

잘려 나가는 나뭇가지들이 지면에 떨어지는 소리 사이로 희미한 신음성이 들렸다.

너무 과한 대응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이 세계에서는 모자란 것보다는 과한 것이 나았다.

'모습을 드러내면 치료해 주고 도망가면 그대로 보낸다.'

불청객의 선택은 둘 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파앗!

저편에서 희미한 빛이 허공으로 솟아오르더니 이내 조명탄처럼 찬란한 빛을 뿜어내며 천천히 낙하하기 시작했다.

"경계!"

조명탄의 용도는 단 두 가지뿐이다.

어둠을 밝히는 것과 신호를 보내는 것.

어느 쪽이든 자신들에게 있어 그다지 긍정적인 상황은 아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했던 대로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야밤을 틈타 사람들을 공격하는 몬스터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한상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저벅저벅.

발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수많은 사람.

그중 몇몇은 한상진의 기억 속에도 있는 얼굴들이었다.

'왼쪽의 남자는 스피어 마스터 하서준에 그 옆에 있는 건 빙결의 마도사 유석원. 설마 저건 특급 살수 강철현인가? 그 외에도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는데 대체 무슨 일이지? 과거에는 이런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자신이 고른 이들보다는 못해도 한 지역이나 도시에서 이름을 떨칠 정도로는 성장하는 사람들이 어째서 이런 숲 한가운데에, 수많은 사람을 데리고 나타난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당연히 볼일이 있고말고. 지금 너희들이 입고 있는 그 장비 어디서 난 거지?"

"길에 떨어져 있는 걸 주운 거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길에서 주워? 하!"

한상진은 으르렁거리는 듯한 하서준의 추궁에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힘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규모 전투라도 일어났었나 보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발견했던 아이템들은 패배한 사람들이 떨어트린 것들이고, 이들은 승리했지만 피해가 커서 잠시 후퇴했다가 이제야 전리품을 수거하러 온 거고? 화가 난 이유는 자신들의 것이라 생각한 아이템들을 우리가 가져갔기 때문인가? 어처구니가 없군.'

자신과 일행들이 입고 있는 장비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람들의 모습에 추리를 끝낸 한상진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웃어?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하서준이 등에 맨 창을 회전시키며 한상진의 급소를 향해 찌르기를 펼쳤다.

하지만 하서준의 창이 한상진의 몸에 닿는 것보다, 한상진이 하서준의 안으로 교묘하게 파고 들어가 검 손잡이로 가슴을 가격하는 것이 먼저였다.

쾅!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하서준의 신형이 십수 미터 뒤로 날아갔다.

먼저 가한 공격보다 나중에 가한 공격이 먼저 닿는 후발 선제의 묘리.

거기에 마지막 순간 뿜어낸 살기까지.

여기 있는 이들 정도면 방금 전 자신이 펼친 한 수를 틀림없이 알아봤을 게 분명하다.

아무리 아이템이 탐이 나도 이 정도의 실력 차를 보여 준다면 더 이상 덤빌 엄두도 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저 새끼... 아니, 저 새끼들 전부 죽여 버려!"

"이 도둑 놈의 새끼가!"

그러나 사람들의 선택은 한상진의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입으로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무기를 뽑아 들고 당장이라도 덤빌 듯이 흉흉한 살기를 피워 댔다.

'뭐야. 다들 왜 이래? 이상한 약이라도 한 건가?'

뭔가 이상하다.

대륙으로 떨어지고 몇 개월 정도 신나게 구른 이후라면 모를까.

열흘이라는 시간은 평화로운 세계에서 살던 사람이 죽음마저 불사한 전투를 치를 전사로 다시 태어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

"..."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살기를 뿌려 대지만 거기까지가 마지노선이었다.

아직이라면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지만, 피를 보고 목숨을 빼앗는다면 그때부터는 양측은 서로 넘어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싸우는 것이 이득인가, 싸우지 않는 것이 이득인가.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핏!

그 순간 갑자기 날아든 화살 한 발이 유지아의 미간을 향해 날아갔다.

부지불식간에 이뤄진 기습.

한상진은 어렵지 않게 화살을 쳐 냈지만 일반 화살이 아닌 특수 화살은 충격을 받자 화려한 폭발을 일으키며 양측의 주의를 잠깐이나마 흐트려 놓았고, 그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낯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아이템 내놔, 이 개새끼야!"

그 말이 도화선이 됐다.

망설이던 사람들은 아이템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이를 악물고 한상진 파티를 향해 덤벼들기 시작했다.

까가가강!

한상진은 어렵지 않게 상위 랭커들의 공격을 막아 냈다.

이는 한상진과 랭커들의 기본적인 실력 차이도 있었지만 아이템의 성능 차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온갖 희귀 아이템으로 몸을 감싸고 방금 전 우연히 주운 장비들 중 더 나은 성능의 장비들을 착용해 전력이 급상승한 한상진.

그리고 모종의 사정으로 인해 주요 장비 중 3개를 잃어버려 전력이 급감한 랭커들.

한상진은 다수의 상위 랭커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다만 다른 쪽의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깡! 까강!

"큭!"

"잠깐만 기다리세요! 지금 치료해 드릴... 꺄약!"

"지아 언니!"

개개의 전력으로 따지자면 한상진의 파티원들 역시 일반 랭커들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맞았지만 그들이 가진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들은 한상진처럼 수십 년 동안 검술을 갈고닦지도 않았고, 대인전에 익숙한 것도 아니며, 많은 전투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압도적인 숫적 열세 앞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들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은 확연한 스펙 차이 때문.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한상진은 이를 악물었다.

혼자서 싸우는 것은 별문제가 아니지만 그 사이에 기껏 모은 동료들이 죽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그 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훗날 대륙을 뒤흔들 영웅들로 성장하는 이들.

단 한 사람도 잃을 수 없었다.

까가가가강!

한상진은 순간적으로 검기를 만들어 내 날아오는 공격들을 전부 쳐 내고 파티를 위협하고 있는 랭커들을 뒤에서 마구잡이로 썰어 넘기기 시작했다.

상위 랭커들도 막지 못한 회귀자를 평범한 랭커들이 막아 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순식간에 유혈과 비명이 난무하며 포위망 일각이 무너졌다.

"오빠!"

긴장이 풀린 순간 생겨난 빈틈.

빈틈이 생긴 순간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기에 빈틈을 인지하고 노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빈틈을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퉁!

시위가 튕기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특수 제작된 암살용 화살이 일행 중 한 명을 향해 날아갔다.

화살이 쏘아지는 순간 한상진과 중년인이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몸을 날렸지만, 그들의 대처는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푸욱!

목 줄기에 깊숙이 박힌 화살 한 발.

유지아는 멍한 얼굴로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거리다 곧 피거품을 토해 내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안 돼애애애애!"

"오빠! 이럴 때가 아니에요! 어서 도망가요!"

"지금이다! 포위해!"

경악하는 한상진과 일행들.

그리고 유일하게 제정신을 차리고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 도주를 재촉하는 소녀.

그러나 포위망이 완성되기 직전 방해가 들어왔다.

"더, 덩굴?!"

"뭐야, 이건? 누가 이것 좀 해제해 봐!"

덩굴들이 랭커들의 발목을 붙잡으며 시간을 끄는 사이 소녀의 재촉에 정신을 차린 한상진은 빛으로 변해 가는 유지아를 한 번 바라본 후,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일행들을 데리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반대쪽에서 활을 든 유성이 그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래, 어디 한번 도망가 봐라."

이거 게임 아님

117화 상잔

같은 재료를 사용해 음식을 만들더라도 요리사의 실력에 따라 천차만별의 맛이 나오는 것처럼 같은 패가 있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오기 마련이다.

유성이 가지고 있는 패는 두 가지.

하나는 관리자를 사칭해 랭커들에게 받기로 한 세 개의 아이템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짜 히든 피스로 인해 악화된 분위기였다.

유성이 본래 세웠던 계획은 랭커들에게 받은 아이템을 무작위의 랭커와 비랭커들에게 뿌려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다만 이 계획에는 한 가지 문제,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쉬운 점이 있었다.

'아무리 불을 붙이고 바람을 불어넣어도 싸움의 규모가 일정 이상 커지지는 않을 거야. 잘해 봐야 하루 이틀 싸우고 말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개개인의 다툼으로 끝날 수도 있겠지.'

이세계에 떨어지고 몇 년이 흐르며 가치관이 변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익숙해진 것도 아니다.

몇몇 특이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사람에게 고작해야 아이템 몇 개는 목숨을 걸고 싸울 만한 동기가 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이 계획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몬스터 사냥에 쏟을 시간을 엉뚱한 곳에 낭비하게 만드는 것이지,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회귀자라는 새로운 패가 추가된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죽고 죽이는 싸움. 잘하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아이템 몇 개는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엉터리 정보 판매, 가짜 히든 피스 유통, 각종 사기와 그 외에 지금까지 자신이 벌였던 일들을 전부 동원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모든 일이 어떤 사람들의 계획하에 일어난 일이라면, 그리고 그 어떤 사람들이 겨우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소수에 불과하다면, 과연 그때도 사람들은 싸움을 피하려 들까?

'기회는 있다.'

이 계획은 회귀자가 마을에 없어야만 진행할 수 있다.

하루종일 기다려도 도통 보이지 않는 회귀자 일행의 모습에 혹시나 싶어 남쪽 구역으로 향한 유성은, 보스 몬스터를 잡은 회귀자 일행과 곧바로 유일하게 보스 몬스터가 남아 있는 동쪽 구역으로 향하는 그들의 모습에 곧바로 행동에 착수했다.

"그거 들었냐? 누군가 북쪽 구역에서 거지를 봤다고 하던데?"

"거지? 무슨 거지?"

"그 있잖아. 셋째 날과 넷째 날에 나타난 그 거지."

"뭐? 그 새끼가 나타났다고? 진짜야?"

"나도 소문으로 들은 거라 몰라. 그런데 특이한 게 혼자가 아니라 일행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저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뿐.

사람들은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 누군가가 악의를 가지고 벌인 일이라는 사실 자체는 알고 있었으며, 눈에 불을 켜고 범인을 찾고 있었다.

유성은 그런 사람들에게 범인의 정보, 즉 회귀자의 정보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본래대로라면 실체가 없는 소문은 그리 큰 호응을 얻지 못했겠지만, 지금까지 그래 왔듯 유성은 거짓에 진실을 교묘하게 섞어 버렸다.

"북쪽 구역의 보스 몬스터가 잡혔다고?"

"진짜야. 내 눈으로 보고 왔어."

"말도 안 돼. 상위 랭커들도 잡을 엄두를 못 내는 괴물을 누가 잡았다는 거야?"

"그 사기꾼들이라면 잡을 수도 있지. 지금까지 발생한 사기 피해액을 최대한 보수적으로 잡아도 2백만 골드야. 그 돈을 전부 스킬과 아이템에 투자했으면 보스 몬스터야 뭐...."

정체를 알 수 없는 사기꾼과 갑자기 나타난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파티.

이 두 가지 사실을 종합할 때 나오는 결론은 단 하나였다.

"그 새끼들이 사기꾼이구만!"

사람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격렬했다.

그리고 유성은 폭발하기 직전의 분위기에 마지막 쐐기를 박아 넣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

"왜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뭔가 묻고 싶은 거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요즘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저도 모르게 그만.... 흠흠, 아이템을 강화해 주러 오신 겁니까?"

"그렇다. 오직 세 개의 아이템만 가능하다."

"이것들을 강화하고 싶습니다."

"강화는 관리자만 출입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강화가 끝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도록."

너무 많이 속았기 때문일까.

가끔 머뭇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설마하니 관리자를 사칭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듯 랭커들은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전부 아이템을 건네줬다.

그 이후의 일은 간단했다.

회귀자 일행은 아이템을 미끼로 삼고, 분노한 사람들은 전신에 붕대를 두른 사람이 도망치는 것을 봤다는 이야기를 퍼트려 임의의 장소로 끌어들여 두 집단 간에 싸움을 붙였다.

푸욱!

"안 돼애애애애!"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쉬워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너무나 강했던 회귀자 일행은 맥 빠질 정도로 쉽게 미끼를 물었고, 분노로 눈이 돌아간 사람들은 선동에 간단히 속아 넘어갔다.

'최대한 피해를 키워야 한다.'

상위권의 랭킹을 노리는 유성으로서는 어느 한쪽이 쉽게 이겨서는 곤란했다.

첫 전투에서 가시덩굴을 이용해 발을 묶은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유성은 회귀자 일행이 우세해진다 싶으면 랭커들을 도와주고, 랭커들이 우세해진다 싶으면 회귀자 일행을 도와주는 식으로 밸런스를 조절했고, 그 결과 양측의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지금 하고 있는 행동 역시 밸런스 조절의 일환이었다.

"잠깐, 저기 저거 설마 아이템인가?"

"뭔 헛소리를.... 어?"

친구로 보이는 두 명의 남자가 바닥에 떨어진 아이템을 발견하고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겉모습만 그럴듯한 싸구려 아이템이 아니라 상당한 고성능의 아이템.

본래 그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치열한 전투에 식겁해 그만 마을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이템이 아깝기는 해도 목숨을 걸고 싸울 정도는 아니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포기했던 아이템을 얻게 되자 약간 생각이 바뀌었다.

'원래 쓰던 것과 비슷한 성능이야. 두 개만 더 얻는다면 피해를 복구할 수 있어.'

'굳이 싸우지 않아도 이런 식으로 떨어진 아이템을 주울 수 있다면....'

갑옷과 부츠를 나눠 가진 두 남자는 잠시 묘한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유성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활을 내렸다.

아이템만 홀랑 주워 먹고 마을로 돌아가려 했으면 화살이라도 한 발 날려 주려 했는데, 눈치 빠른 친구들 덕분에 다행히 유혈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유성은 여기저기 쏘다니며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전투 의욕을 고취시켰다.

'오늘 밤에 끝낸다.'

예비 무대의 제한 시간은 보름이지만 정확히 언제 끝나는지는 알 수 없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보름으로 날짜가 넘어가자마자 예비 무대가 끝날 수도 있으니, 14일 차인 오늘이 끝나기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회귀자 일행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니, 사실 찾을 필요도 없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회귀자 일행이 있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회귀자라 한들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지는 재주라도 있는 게 아닌 이상, 수백에 달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도망치거나 숨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위장은 아예 포기했군.'

처음에는 나무 위나 바위틈처럼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지만, 사흘 밤낮에 걸친 추격전 끝에 그런 노력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회귀자 일행은 언젠가부터 그냥 적당한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숫자는 총 셋.

회귀자인 청년과 남매로 보이는 소년소녀였다.

탱커 역할을 맡고 있던 중년인은 특출난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많은 랭커의 공격에 누적된 피해를 버티지 못하고 오늘 아침에 쓰러지고 말았다.

'처음에 사제를 죽이길 잘했어.'

사제를 잃은 순간, 회귀자 파티의 전투 지속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이쪽은 숫자가 많기에 교대로 휴식을 취하고 쌓인 피로를 풀 수 있지만 회귀자들은 숫자가 적기 때문에 제대로 휴식을 취할 틈조차 없었다.

회귀자인 청년은 아직 체력이 조금 남아 있는 듯 보였지만 남매 쪽은 눈가가 퀭한 것이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끼익.

유성은 회귀자 일행을 향해 화살을 겨눴다.

회귀자는 노리지 않았다.

동물보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 놈한테 어설픈 기습을 해 봤자 화살만 낭비할 뿐이다.

자연스럽게 남는 것은 남매 쪽.

소년과 소녀를 번갈아 바라보던 유성은 이내 목표를 정하고 시위를 놓았다.

쨍!

소년의 심장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을 쳐 낸 소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그 미소가 바뀌는 데는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튕겨 낸 화살이 터져 나가며 주변에 자욱한 안개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쐐새새새색!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특수 화살이 안개를 뚫고 날아들었다.

안개 때문에 정확히 노리지는 못했지만 약간의 오차 정도야 특수 화살이 가진 능력들로 충분히 커버가 가능한 수준.

"꺄아아아악!"

"지금이다!"

"모두 비켜! 내가 먼저야!"

소녀의 비명이 울려 퍼지자 하이에나처럼 기회를 노리고 있던 사람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거대한 창을 들고 있는 하서준이었다.

"죽어어어!"

흉흉한 외침과 함께 날아드는 창.

그 속도와 기세는 며칠 전의 그것과는 격을 달리했다.

회귀자 일행을 쓰러트리고 얻은 아이템들로 어느 정도 실력을 회복했기 때문이었다.

까앙!

안개 속에서 한 자루 검이 튀어나와 날아드는 창을 막아 냈다.

한상진이 휘두르는 검의 속도와 기세 역시 며칠 전의 그것과는 격을 달리했다.

다만 하서준과 달리 안 좋은 쪽으로 격을 달리했다.

사흘 밤낮에 걸친 추격전과 거듭된 전투로 인해 체력이 거의 바닥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많이 지쳤나 봐? 창에 무슨 파리가 앉은 줄 알았네."

하서준의 조롱에도 한상진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말할 힘이 있으면 그 힘을 아껴서 검이라도 한 번 더 휘두르는 것이 이득이었다.

하서준의 뒤를 이어 도착한 랭커들이 한상진을 상대로 침착하게 합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보였지만 아무도 방심하지 않았다.

그동안 한상진이 믿을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해 포위망을 몇 번이나 돌파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으음."

회귀자와 랭커들의 목숨을 건 사투를 바라보는 유성은 둘 중 어느 쪽을 도와야 할지 작은 고민에 빠졌다.

'회귀자가 열세에 몰리기는 했지만 숨겨진 패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아. 섣불리 도와줬다가 랭커들이 쓸려 나가고 회귀자가 전력을 온존하면 뒷일이 귀찮아져. 그렇다고 랭커들을 도와줬다가는 살아남은 사람의 숫자가 너무 많아진다. 가장 좋은 결과는 양쪽이 공멸하는 거지만 일이 그렇게 순순히 풀릴 가능성은 없고. 일단 상황을 지켜보는 쪽으로....'

탁.

자그마한 발소리.

유성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어둠 너머 익숙한 얼굴의 소녀가 나타났다.

"...여기에 있었군요."

이거 게임 아님

118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저 멀리 있어야 할 소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유성의 표정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사람을 착각한 것 같은데, 난 그냥 평범한 궁수...."

"발뺌하지 마세요. 여기서 화살이 날아온 걸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으니까. 이번 기습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날아온 화살들, 그리고 첫날 지아 언니를 죽인 화살도 전부 당신이 날린 게 맞죠?"

'함정이었군. 어쩐지 너무 쉽게 당하는 것 같더라니.'

천천히 뒤로 물러나던 유성은 정확히 자신이 물러난 만큼 다가오는 소녀의 모습에 혀를 차며 걸음을 멈췄다.

소녀의 실력은 최상급 랭커에 필적하는 수준.

계속된 연전으로 지치기는 했어도 방심해도 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응? 잠깐. 뭔가 이상한데?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것도 암살자가 이렇게 허술하게 접근한다고?'

소녀가 마음만 먹었더라면 무방비한 등에 얼마든지 칼을 꽂아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소녀는 그러지 않고 일부러 발소리를 내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

하나는 기척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지쳤을 경우, 그리고 다른 하나는....

챙!

유성의 눈동자가 희미한 황금빛으로 빛나는 순간, 화살이 날아오리라 생각한 소녀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거리가 떨어져 있다면 모를까, 이 정도의 거리라면 화살을 재장전할 틈이 없을 테니 일단 화살을 막아 낸 이후 공격에 나서기로 판단한 것이다.

소녀의 판단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화살을 재장전할 틈이 없는 것은 맞았지만 유성이 노리는 것은 소녀가 아닌 다른 쪽이었다.

"자, 잠깐!"

자신이 아니라 엉뚱한 방향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는 유성의 모습을 본 소녀가 비명에 가까운 절규를 터트렸다.

그러나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뒤였다.

"아아아악!"

화살이 근처에 있던 그림자에 꽂히는 것과 동시에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며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색이 된 소녀가 소년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이번에도 유성이 한 발 더 빨랐다.

소년의 목을 팔로 단단히 휘감은 유성은 망부석처럼 굳어 버린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기 버려."

"...."

"두 번 말 안 한다. 무기 버려."

"으아아악!"

남은 한쪽 팔로 옆구리에 꽂힌 화살을 건드리자 소년의 입에서 다시 한번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망설이던 소녀는 소년의 비명을 듣는 순간, 양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장비도 다 벗어서 이쪽을 향해 던져."

"그 전에 동생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지금 네가 그런 조건을 걸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해?"

점점 하얗게 질려 가는 소년의 안색에 소녀는 입술을 깨물며 입고 있던 장비를 하나하나 벗어서 던지기 시작했다.

'위험할 뻔했어.'

유성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소녀와 같이 다니는 소년의 존재를 떠올리지 못했더라면 다 된 밥에 재를 떨어트리는 꼴이 됐을 것이다.

소녀의 장비 해제가 끝나자, 유성은 이어서 소년의 장비 역시 전부 해제했다.

잠시 후 얇은 옷 한 장만을 걸친 소녀가 입을 열었다.

"저희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글쎄. 안전을 생각하면 그냥 이대로 죽여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살려 주세요. 아니, 전 죽여도 좋으니 동생만이라도 살려 주세요."

"아, 아니에요! 절 죽이고 누나를 살려 주세요!"

-흠흠, 얘들은 살려 주는 게 어떻습니까?

무심한 눈으로 남매를 바라보던 유성은 뜬금없는 김현준의 요구에 눈썹을 씰룩였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아직 애들이지 않습니까.

'고등학생은 돼 보이는데 애는 무슨. 그리고 얘들만 살려 주면 지금까지 죽은 사람들은 뭐가 되는데?'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애는 조금 아닌 것 같습니다.

김현준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이지 서로 죽고 죽이는 이 미친 세계에서 통용되는 상식은 아니다.

만약 이 자리에 있는 게 자신이었더라면 미성년자라고 해서 자비를 베푸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건 자신이 아닌 의뢰인이다.

결국 유성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의뢰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에는 좀 아까운데.'

인질 때문에 허무하게 제압당하기는 했지만, 소녀는 상위 랭커들 중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 최상급 암살자였다.

어떤 식으로 소녀를 이용할지 고민하던 유성은 거대한 폭발음을 듣고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절정으로 치닫는 회귀자와 랭커들의 전투.

그 전투를 바라보던 유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름이 뭐지?"

"...이하은이에요."

"좋아. 이하은. 한 가지 일만 해 주면 동생의 목숨을 살려 주지."

"무슨 일이죠?"

"별거 아니야. 그러니까...."

* * *

이렇게 힘든 싸움은 처음이다.

머리에서는 누군가가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고, 눈꺼풀은 시도 때도 없이 내려앉으며 몸은 물을 머금은 솜처럼 무겁다.

수십 년간 온갖 전장을 구르며 단련된 정신력과 각종 히든 피스로 인해 강화된 육체 덕분에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이지 둘 중 하나라도 없었더라면 진작에 쓰러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까앙!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눈앞까지 날아온 검을 쳐 낸 한상진은 스스로에게 몇 번째인지 모를 질문을 던졌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이들을 동료로 끌어들였고, 회귀자만이 알 수 있는 정보로 온갖 히든 피스를 얻었으며, 자신을 비롯한 파티원 모두가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 냈다.

그러나 보스 몬스터를 잡고 마을로 돌아갈 때부터 뭔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아이템들을 줍지 말았어야 했나?'

잠시 고민하던 한상진은 고개를 저었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내릴 것이다.

아이템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아이템을 떨어트린 존재였다.

'그건 누군가 나를 노리고 판 함정이었어. 그때 그 아이템들을 무시하고 마을로 돌아갔더라도 그 누군가는 다른 방법으로 나를 노렸을 거다. 그 누군가가 대체 누구지?'

과거로 회귀한 이후 파티원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와도 인연을 맺지 않았다.

선연이든 악연이든 아예 인연을 맺은 사람 자체가 없으니 누군가의 정체에 대해 짐작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다만 목적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누군가는 자신과 랭커들의 공멸을 노리고 있다.

어느 한쪽으로 승기가 기운다 싶으면 반드시 누군가가 개입해 승부의 추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나 같은 회귀자인가? 하지만 회귀자가 어째서 나를 노리는 거지? 미래에 경쟁자가 될 거라 생각해서 지금 제거하려는 건가? 아니면....'

한상진은 머리를 흔들었다.

점점 심해지는 두통으로 인해 도저히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그 누군가를 잡으러 간 남매가 돌아올 때까지 버티는 것뿐이었다.

"하아, 하아."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였다.

체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지금까지 버틸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압도적인 기량 또한 랭커들의 성장에 따라 서서히 좁혀지고 있었다.

쩡!

거친 쇳소리와 함께 한상진과 하서준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했다.

엉뚱한 방향으로 튕겨 나간 검.

찰나지만 드러난 미세한 빈틈을 향해 하서준의 창이 쏘아졌다.

절체절명의 위기.

그 순간 누구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퍽!

살을 파고드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바닥에 쓰러졌다.

"...어?"

뒤통수에 화살이 박힌 채 빛으로 변해 사라지는 하서준의 모습에 한상진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동료가 있다! 모두 주변을...."

퍽!

정신을 차린 누군가가 명령을 내리려 했지만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그의 목 줄기를 꿰뚫어 버렸다.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사람들은 각자 무기를 치켜들고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화살을 경계했지만, 다음 공격은 위가 아닌 아래에서 날아왔다.

스륵.

풀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땅에서 솟아오른 가시덩굴들이 사람들의 발목을 낚아채기 시작했다.

가시덩굴로 상위 랭커의 발을 묶을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몇 초 남짓에 불과했다.

몇 초.

승패가 갈리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시간이었다.

한상진이 휘두른 검에 머리가 날아가고, 산 저편에서 날아든 화살이 급소를 꿰뚫는다.

간신히 가시덩굴로부터 빠져나온 사람들은 전세가 기운 것을 깨닫고 달아나려 했지만, 단 한 사람도 보내지 않겠다는 듯 그들의 등을 향해 수많은 화살이 날아들었다.

콰과과과과광!

끊임없이 이어지는 폭발과 굉음.

무한한 것만 같았던 화살 세례가 그쳤을 때 남아 있는 건 수많은 구덩이와 그 안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장비들뿐이었다.

혼자 남은 한상진은 기뻐하는 대신 근처의 나무에 몸을 숨긴 채 날카로운 눈으로 화살이 날아온 장소를 바라봤다.

'공격이 날아왔다는 건 하은이가 실패했다는 거군. 갑자기 날 살려 주기로 생각이 바뀌었을 리는 없을 테고.... 더 이상 상잔시키지 않아도 혼자서 잡을 수 있을 만큼 약해졌다고 판단한 건가?'

으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간 한상진은 검을 고쳐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상을 초월한 분노가 한계에 다다른 육신을 억지로 움직였다.

'나 혼자서는 억울해서 못 죽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승길 동무로 데려가고 만다.'

"오빠! 오빠!"

생명력을 불태우려던 한상진은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무심코 나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하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하던 한상진은 재차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거기 멈춰! 그 이상 다가오지 마!"

"오, 오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말해!"

언제나 붙어 다니던 동생은 보이지 않고 보란 듯이 모습을 드러냈는데도 이하은을 향해 한 발의 화살도 날아들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던 한상진은 이어지는 이하은의 설명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을 인질로 잡았다고?"

"예. 하준이가 완벽하게 제압하고 있어요."

"그런 아까 그 공격은...."

"오빠가 위험해 보여서 힘 좀 보태라고 했죠."

잠시 망설이던 한상진은 조심스레 나무 뒤에서 나왔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화살이 날아들지 않는 것을 확인한 한상진은 간신히 긴장이 풀렸는지 근처의 나무에 몸을 기대며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어디 다쳤어요?"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온 것뿐이야. 잠깐 쉬면 나아질 거야."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괜찮아."

"에이, 혼자 일어나기도 버거워 보이는데 잠깐만 기대세요."

"아니, 진짜로 괜찮다니까?"

그냥 앉아서 쉬면 되는데 무슨 놈의 부축이란 말인가?

그러나 계속된 이하은의 요청에 한상진은 결국 못 이기는 척 손을 내밀었다.

꽈악.

'땀?'

손바닥을 마주 잡는 순간 느껴지는 축축한 느낌과 희미하게 떨리는 손.

오랜 세월 단련된 생존 본능이 지금 당장 이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나라고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체력이 약간만 더 남아 있었더라면, 긴장을 풀지 않았더라면, 본능이 발하는 경고에 따라 몸을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상진의 체력은 바닥을 드러냈고, 한 번 긴장이 풀려 늘어진 몸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푸욱!

"커헉...."

심장을 뚫고 등 뒤로 빠져나온 단검.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거리던 한상진은 가장 먼저 죽은 유지아가 그랬던 것처럼 피거품을 게워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마지막 순간 한상진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단 하나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이거 게임 아님

119화 버는 건 어려운데 쓰는 건 순식간

이 세계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시체가 남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치 게임처럼 죽은 사람은 빛으로 변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 전부 떨어진다.

이게 가장 큰 장점인 이유는 사람이 진짜로 죽은 건지, 아니면 죽은 척을 하고 있는 건지 한눈에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죽었군."

유성은 멍하니 서 있는 이하은과 그녀의 앞에 쌓인 아이템들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으니 회귀자가 아니라 회귀자 할아버지라도 살아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시킨 대로 했어요. 이제 그쪽이 약속을 지킬 차례예요."

이하은은 남자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한상진을 죽이면 살려 주겠다는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약속이 지켜질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상진을 죽인 건 그 극히 낮은 가능성에 거는 것 이외에는 동생의 목숨을 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약속을 강제로 이행할 힘도, 협상을 할 만한 카드도 없다.

오직 기댈 수 있는 건 상대의 양심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동생의 목을 휘감고 있던 남자의 팔이 풀렸다.

"...누, 누나."

"하준아!"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고 있던 이하은은 풀려난 동생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고,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을 죽이려 들고 가족을 인질로 잡아 동료를 배신하도록 종용한 상대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게 어색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래도 이하은은 최대한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동생 데리고 마을로 돌아가. 여기 있는 아이템들은 전부 내 거니까 동전 하나도 건드리지 말고."

이곳저곳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고급 아이템들.

아깝기는 했지만 그깟 아이템이 목숨보다 중요할 리 없었다.

동생을 부축한 이하은은 남자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떨어져 있는 아이템들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멀어지는 남매를 바라보던 유성은 갑자기 들려오는 김현준의 목소리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나중에 쟤들이 동료의 원수를 갚는다고 복수하러 올 때 왜 죽이지 않았냐고 원망이나 하지 마."

-...서, 설마요.

그런 가능성은 생각하지 못했는지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미 남매는 사라진 후였다.

"뭐, 그건 네가 나중에 알아서 할 일이고 지금은 아이템부터 수거하자."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날이 저물고 꽤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자정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아이템들을 가져가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도, 공간도 없었기에 최대한 비싸 보이는 것부터 우선적으로 챙기기 시작했다.

"누가 회귀자 아니랄까 봐 이것저것 많이도 가지고 있네."

회귀자가 떨어트린 아이템은 다른 사람들이 떨어트린 아이템보다 배 이상 많았고 등급 또한 상당한 차이가 났다.

상위 랭커들도 간신히 한 개 정도나 가지고 있을 법한 아이템이 수십 개가 넘게 쌓여 있는 모습을 보며 휘파람을 불던 유성은 아이템의 산 사이에 떨어진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뭐야, 이건?"

녹색빛의 작은 퍼즐 조각.

언뜻 보기에는 쓸모없는 잡템 같아 보이지만 정말로 쓸모없는 물건이었다면 회귀자가 가지고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바람의 조각>

-등급 : B-

-종류 : 재료

-강력한 바람의 기운을 품고 있는 조각. 어딘가에 끼울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런 옵션도 없고 설명도 부실하기 그지없지만 등급이 그 모든 단점을 커버했다.

아무런 장비도 저장하지 않은 순정 상태의 천수가 B+등급인데 손가락만 한 조각이 무려 B-등급이나 한다.

혹시나 싶어 아이템의 산을 뒤적이자 색깔과 형태가 다른 3개의 조각을 추가로 찾아낼 수 있었다.

"조립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어디에 끼우는 것 같은데...."

용도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정도 등급의 아이템을 버린다는 건 있을 수 없을 일이다.

조각을 챙긴 유성은 근처를 돌아다니며 종류를 가리지 않고 등급이 높은 아이템을 골라 마구잡이로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아공간이 거의 다 찰 때쯤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갑자기 바뀐 환경에 당황하던 유성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김현준 님의 공적치는 9,264,200로 랭킹 1위를 달성하셨습니다.

-랭킹 1위 달성에 의한 공적치 3,000,000이 추가 지급됩니다.

-본무대로 진입하기 전 공적치를 이용해 다양한 아이템을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평소에 보던 것과는 다른 형식의 메시지.

잠시 기다리자 익숙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 '아무리 생각해도 난 주인공이 아닌 것 같은데'를 클리어하셨습니다.]

[클리어 과정을 분석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운명 개변률 215%, 이차원 스킬 사용률 52%, 이차원 아티팩트 사용률 1%.]

[최종 평가 SSS랭크]

[놀랍습니다! 한유성 님은 강력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기본 클리어 보상 : 10,000,000카르마, 아공간 10×10m, 능력치 상승의 비약×100, 성장 촉진 물약×3, 스킬 등급 상승의 비약×1, B급 스킬 무료 선택권×1, B급 아티팩트 무료 선택권×1]

[추가 조건 클리어 보상 : 90,000,000카르마, 능력치 상승의 비약×180, 최상급 마력석×90, 오리할콘 주괴×180, 아다만타이트 주괴×180]

[SSS랭크 클리어 추가 보상 : 40,000,000카르마]

[잠시 후 본래 세계로 귀환을 시작합니다.]

입이 떡 벌어지는 보상.

그러나 유성은 감탄하는 대신 급하게 몸을 날렸다.

'아이템을 구입할 수 있다고?'

일종의 튜토리얼을 위해 만들어 낸 세계라 그런지 이번 퀘스트에서 얻은 아이템들의 등급은 대체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조각을 제외한 가장 높은 등급의 아이템이 겨우 C-등급이길래 스킬들만 가져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기, 방어구, 액세서리, 잡화 등 빽빽하게 진열되어 있는 아이템들을 둘러보던 유성의 눈이 문득 한 곳에서 고정됐다.

다른 아이템들과 달리 고풍스러운 진열장 안에 들어 있는 무기들.

종류는 다양했지만 모든 무기들에는 어디서 본 듯한 홈이 파여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시간이 없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이템을 낚아채는 순간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프로그램 기동.]

[아리아드네의 실 추적 완료.]

[영자 이동을 실시합니다.]

* * *

다양한 보석과 예술품들로 장식된 거대한 방.

드래고니아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유성은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세계에서 보낸 것과 거의 동일한 시간이 흘러 있었다.

퀘스트를 진행하는 내내 다시 한번 극악한 시간 배율에 걸리는 것은 아닌지 은연중에 걱정하고 있던 유성은 가슴을 누르던 돌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퀘스트 클리어를 축하드립니다!]

[한유성 님의 등급이 '전문 해결사'에서 '일류 해결사'로 상승합니다.]

['카르마 상점'에 새로운 상품이 추가됩니다.]

"하아, 드디어 올랐구나."

[구원을 바라는 소녀] 퀘스트 이후로 정체됐던 등급이 이제야 상승했다.

자신의 성장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른 유저들과 엄청난 격차가 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는데 이번 성장으로 그 차이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을 듯싶었다.

[보유 카르마 : 183,440,000]

[상품 목록]

-불완전한 엘레멘탈 보우(B-) : 5,000,000

-불의 조각(B-) : 5,000,000

-물의 조각(B-) : 5,000,000

-땅의 조각(B-) : 5,000,000

-바람의 조각(B-) : 5,000,000

-근력 상승(C) : 100,000

(해당 스킬을 구입할 때마다 근력 포인트가 1 상승합니다.)

(해당 스킬로 성장시킬 수 있는 근력은 최대 699포인트입니다.)

-....

-....

-....

유성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상품 목록 최상단에 위치한 순백의 대궁이었다.

평범한 활보다 반 배는 더 큰 활을 바라보던 유성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구입 버튼을 눌렀다.

<불완전한 엘레멘탈 보우>

-등급 : B-

-종류 : 활

-네 가지 속성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활. 핵심적인 부분이 빠진 미완성품이지만 활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다.

-마력의 조절을 통한 활의 장력 조절 가능.

-화살에 마력을 담는 마력시 사용 가능.

-명중 확률 +30%

-민첩 +100

-마력 +200

'불완전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치고는 꽤 괜찮은 활이었다.

물론 유성은 꽤 괜찮은 활 정도로 만족하려고 이 활을 구입한 것이 아니었다.

이어서 불의 조각을 구입한 유성은 장식처럼 보이는 음각된 홈에 조각을 끼워 넣었다.

우웅!

물에 물감이 번져 나가듯 순백의 활은 순식간에 적색으로 물들었다.

조각을 끼워 넣을 때마다 다른 색으로 물들던 활은 모든 조각을 집어넣자 네 가지 색이 섞이며 다시 본래의 순백의 활로 돌아왔다.

<엘레멘탈 보우>

-등급 : A-

-종류 : 활

-네 가지 속성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활. 사대 속성인 화수지풍(火水地風)의 힘을 끌어내 화살에 담을 수 있으며, 네 가지 기운의 조화를 통해 다섯 번째 속성인 에테르의 힘을 끌어낼 수 있다.

-마력의 조절을 통한 활의 장력 조절 가능.

-화살에 마력을 담는 마력시 사용 가능.

-순수한 기운으로 이뤄진 무형시 생성 가능.

-하루에 다섯 번, 극한의 속성의 힘을 담은 속성시 생성 가능.

-명중 확률 +60%

-근력 +200

-민첩 +300

-마력 +300

"고맙다. 그... 아무튼 잘 쓸게."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남겨 준 회귀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내려던 유성은 자신이 회귀자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리고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당장이라도 이 아름다운 활을 쏴 보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지만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세상에, 능력치 하나 올리는 데 10만 포인트?"

E등급의 능력치 상승권이 1천 포인트였고 D등급의 능력치 상승권이 1만 포인트였으니 등급이 오를 때마다 정확히 10배씩 가격이 뛰는 셈이다.

금단의 지식 덕분에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지혜와 정신을 제외한 나머지 능력치들의 수치는 299포인트.

699포인트까지 상승시키려면 능력치 하나당 4천만 포인트가 소모되는데, 올려야 하는 능력치는 최근에 새롭게 얻은 영력까지 포함하면 총 6개다.

남은 카르마는 1억 6천만 포인트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

3개의 능력치를 한계까지 올리고 하나의 능력치를 추가로 올릴 수 있는 양이다.

'근력은 타이런트의 양팔이 있으니 당장 올리지 않아도 되고, 민첩은 수라감각도로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하니....'

잠시 고민하던 유성은 내공과 마력, 영력 세 가지 능력치를 699포인트까지 올리고 체력을 어느 정도까지 올린 뒤 남은 자투리 포인트로 궁술을 비롯한 몇 가지 스킬들을 구입했다.

"...버는 건 어려운데 쓰는 건 순식간이구만."

5분도 안 돼서 바닥을 드러낸 카르마 포인트를 바라보던 유성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카르마 상점을 종료시켰다.

이거 게임 아님

120화 밖에 나가 보고 싶어요

남은 능력치를 올리는 데 필요한 카르마는 1억가량.

문자 그대로 억 소리 나오는 단위다.

갑작스럽게 달라진 단위에 잠시 당황하기는 했지만 유성은 이 사실을 마냥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음에도 가격이 10배로 뛴다면 능력치 하나를 올리는 데 100만 카르마가 들어가고 그다음에는 무려 1,000만 카르마가 들어간다. 거의 모든 퀘스트를 고랭크로 클리어하며 카르마를 쌓아 온 나조차도 카르마가 부족해 곤란해하고 있는데 다른 유저라고 상황이 다를 리 없겠지.'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성장 속도가 더뎌지는 구조.

이런 구조라면 후발 주자라도 충분히 선발 주자를 따라잡을 수 있다.

물론 시간의 차이가 있는 만큼 따라잡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일단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아쉬움과 안도감이 공존하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글을 벗은 유성은 이어서 퀘스트 보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B급 스킬 및 아티팩트 무료 선택권은 나중에 쓰고 금속 주괴랑 마력석은 드래고니아의 수리에 쓰면 되는데...."

<능력치 상승의 비약>

-등급 : B

-종류 : 소모품

-복용 시 무작위로 1개의 능력치를 1~3포인트만큼 상승시키는 신비한 비약.

-능력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비약의 효과가 발휘될 가능성이 낮아집니다.

<스킬 등급 상승의 비약>

-등급 : A

-종류 : 소모품

-복용 시 선택한 1개의 스킬 등급을 상승시키는 신비한 비약.

-스킬 등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비약의 효과가 발휘될 가능성이 낮아집니다.

<성장 촉진의 물약>

-등급 : B

-종류 : 소모품

-복용 시 30일 동안 성장 속도를 향상시키는 신비한 비약.

유성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포션을 바라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능력치 상승의 비약.

첫 번째 줄만 보면 괜찮은 아이템인데 두 번째 줄에 적혀 있는 문구가 문제였다.

능력치가 높을 때 먹으면 엄청난 효율을 발휘할 수 있지만 그만큼 효과가 나올 가능성이 낮아지고, 반대로 능력치가 낮을 때 먹자니 효과가 나올 가능성은 올라가지만 효율 면에서 손해를 보게 된다.

당장 먹기도, 나중에 먹기도 애매하다.

스킬 등급 상승의 비약 역시 비슷했다.

낮은 등급의 스킬을 고르자니 아깝고, 높은 등급의 스킬을 고르자니 효과가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마음에 걸린다.

한참을 고민하던 유성은 일단 이번에 얻은 아공간에 비약들을 보관하기로 결정했다.

'당장 비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힘이 부족한 상황은 아니야. 나중에 곤란한 상황이 닥치면 쓰자.'

꼭 자신이 먹으라는 법도 없다.

[비틀린 세계]에서 영약인 청목단의 힘을 이용해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난 것처럼, 추후 퀘스트를 진행할 때 의뢰인을 강화시켜 퀘스트를 쉽게 진행하는 데 쓰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성장 촉진의 물약만큼은 달랐다.

아무런 페널티가 없이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성장 속도를 향상시킨다.

이 성장이라는 게 정확히 어디까지 적용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금단의 지식을 이용해 올라가는 지혜와 정신 스텟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야말로 대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좋아. 아주 만족스러워."

시간 배율, 난이도, 보상.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다.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유성은 소피아가 만들어 준 통신장치를 꺼내 귀에 꽂았다.

"아아, 소피아? 내 목소리 들려?"

-...유성 씨?

"응, 나야. 그동안 별일 없었지?"

-글쎄요. 여기서는 알 수 있는 정보가 커뮤니티에 적힌 내용들뿐이라.... 자잘한 사건 몇 개가 터진 것 같기는 한데 큰 문제는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것보다 지금 만날 수 있을까요?

"지금? 옥상으로 가면 되지?"

-예.

익숙한 길을 따라 옥상에 도착한 유성은 드래고니아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전과 비교해 크게 달라진 곳은 없었지만 드론과 로봇, 그리고 다양한 기계들이 마법 문명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드래고니아를 돌아다니는 광경은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뭐가 그리 바쁜지 한시도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로봇들을 구경하던 유성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봤다.

콰아아아!

SF 영화에 나올 법한 강철 슈트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다.

급가속과 급정지, 급선회 등 묘기 비행을 선보이던 슈트는 더 이상 보여 줄 것이 없는지 피라미드를 향해 날아오더니 유성의 앞에 착지했다.

"어떤가요?"

"소피아?"

"흐흠, 놀라는 걸 보니 열심히 만든 보람이 있네요."

드론과 마찬가지로 무인 병기의 일종이라 생각했던 유성은 슈트 안에서 나오는 소피아의 모습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런 성능의 슈트를 만들 수 있으면 왜...."

"아,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이건 최근에야 간신히 만들 수 있게 된 물건이에요."

이런 고성능의 슈트를 왜 지금까지 감추고 있었냐고 추궁하려던 유성은 곧바로 이어지는 소피아의 설명에 간신히 침착함을 되찾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성 씨에게 99식 마력 기관을 얻은 이후에 만들 수 있게 됐죠."

"99식 마력 기관이라면... 전기를 마력으로 변환하는 그거?"

"예.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이 슈트가 생각보다 에너지를 엄청나게 잡아먹거든요. 여기에 장착 가능한 크기의 동력원으로는 구동 시간이 30분도 안 돼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력석을 이용해 보려 했는데.... 아무래도 이게 워낙에 섬세한 물건이다 보니 전기와 마력의 반발 현상 때문에 안정성이 떨어져서 도저히 실전에서는 못 써먹을 물건이 나오더라구요."

"거기에 99식 마력 기관이 들어가서 안정성이 높아졌다?"

"예. 전기에서 마력, 마력에서 전기. 자유롭게 에너지를 전환할 수 있게 되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됐어요. 이것 말고도 동력 문제 때문에 사용하기 곤란한 물건들이 있었는데 그것들도 이제 전부 사용할 수 있게 됐죠."

미국 국방비의 1년 치 이상의 거금이 들어가는 가이노이드를 제작해 주는 대가로 겨우 마력을 전기로 변환하는 기관을 받아 가는 것이 뭔가 이상하다 했는데 이제야 이해가 됐다.

기껏 이런 멋진 물건을 만들 수 있는데 동력원 문제로 사용하지 못한다니.

자신이 소피아의 입장이었더라도 거래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내 것도 하나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지구에서는 만들 수 없는 부품들이 들어가서 당장은 힘들고 나중에 만들어 드릴게요. 아, 이건 공짜 아닌 거 알죠?"

"가격은 얼마가 되든 상관없어."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닐 수 있는 슈트의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었다.

황홀한 눈으로 슈트를 바라보던 유성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소피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설마 이거 자랑하려고 부른 건 아니지?"

"그러려고 부른 거 맞는데요."

"...."

"...농담이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가이노이드의 개량 버전이 완성돼서 간단하게 테스트할 겸 부른 거예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근처에 있던 케이스가 열리며 아리스와 꼭 닮은 외형의 가이노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봤을 때에는 세세한 부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는데 한 차례 피드백을 거치고 나자 이제는 진짜 아리스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완성도를 가지게 됐다.

"지난번에 수집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평상시에는 AI가 몸을 움직이지만 새로운 명령이 내려오면 AI는 움직임을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죠. 해킹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 지난번처럼 고장 나는 일은 없을 거예요."

"한번 빙의시켜 봐도 될까?"

"애초에 그러려고 부른 거예요."

소피아의 허락이 떨어지자 유성은 품에서 영혼석을 꺼내 들고 비술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우웅!

'어?'

비술이 시전되는 속도가 지난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아니,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안정적이기까지 하다.

처음 비술을 시전할 때는 진리의 마안까지 사용해서 세밀한 에너지의 흐름까지 조절해야 했었지만 이번에는 마치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듯 너무나도 쉽게 아리스의 영혼을 깃들일 수 있었다.

정신력의 부담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건 덤이었다.

'영력 때문인가.'

내공이나 마력과 달리 영혼에서 비롯되는 힘.

어떤 효능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사용해야 하는 지 모든 것이 미지수였는데 방금 전 비술의 시전을 통해 영력이란 힘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움직인다!"

"오오!"

한 걸음도 걷지 못하고 넘어졌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위태롭게 휘청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느린 걸음은 빠른 걸음으로, 빠른 걸음은 이내 달리기로 변했는데, 아리스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는지 점프와 회전 등 다양한 움직임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갈수록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지는 것 같은데?"

"학습형 프로그램이니까요. 데이터가 쌓이면 쌓일수록 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가능해질 거예요."

"그 말은...."

"가능한 한 오래 빙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죠. 퀘스트 중에는 어쩔 수 없지만 지구에 있을 때는 시간 날 때마다 빙의시켜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으음."

'그럼 앞으로 지구에 있을 때는 계속 아리스를 데리고 다녀야 하는 건가? 누구랑 같이 다니는 건 좀 그런데....'

가족이 죽은 이후로... 아니, 가족이 있을 때도 유성은 혼자 있는 게 익숙했다.

딱히 가족 간에 불화가 있거나 사교성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태생적으로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것뿐.

퀘스트를 할 때 의뢰인과 같이 있기는 하지만 단순히 목소리만 전할 수 있는 사람과, 실체를 가지고 현실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다르다.

"응?"

생각에 잠겨 있던 유성은 어느 새 다가와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리스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아아."

"마, 말했다?"

"어? 대화 관련 프로그램은 아직 안 만들었는데?"

단조로운 기계음이지만 분명히 말을 했다.

당황한 유성과 그 이상으로 경악에 빠진 소피아가 허둥지둥하고 있는 사이 아리스는 걷는 것에 익숙해졌던 것처럼, 다양한 말을 내뱉으며 점점 말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모습을 보여 줬다.

'진리의 마안을 쓴 건가?'

희미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아리스의 눈동자.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몰라도 아마 모든 에너지를 보고 제어할 수 있는 진리의 마안의 힘을 이용해 가이노이드의 몸을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유성 님?"

"어, 불렀어?"

유성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아리스를 바라봤다.

실체가 없거나 인형 안에 있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생전의 모습 그대로 말을 걸자 느껴지는 부담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왜? 어디 불편한 데 있어?"

"아니요.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부탁? 아, 노트북?"

비술의 개량을 위해 빙의할 때마다 언제나 노트북을 붙잡고 웹 서핑과 뉴튜브 감상에 열중하던 아리스를 떠올린 유성은 약간 긴장이 풀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리스의 부탁은 유성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저 밖에 나가 보고 싶어요."

"...뭐?"

이거 게임 아님

121화 너무 잘 보이잖아

유성이 향한 곳은 광화문이었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외국인... 아니, 이세계인에게 적합한 관광지가 어딜까 생각하다가 무심코 떠오른 곳이 경복궁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별생각 없이 적당히 내린 결정은 결과적으로 최고의 선택이 됐다.

"와아!"

아리스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감탄성을 터트렸다.

깔끔하고 세련된 옷을 걸치고 거리를 걸어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

잘 정비된 거대한 도로를 달리는 수많은 마차들.

생애에서 처음 보는 이국적인 양식으로 지어진 거대한 성문과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거대한 건물들.

모든 것이 놀랍고 새롭기만 했다.

그런 감정은 아리스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지구에 있는 게 맞나?'

자신이 알던 광화문과는 너무나 다르다.

성인 남성만 한 크기의 무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과 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화려한 갑옷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신호를 기다리기 싫어 점프로 도로를 뛰어넘거나 하늘을 날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길이 막혀서 차에서 내려 두 발로 뛰어가는 사람도 있다.

건물의 전광판에는 길드의 홍보 영상이 흘러나오고 거리에는 몬스터와 관련된 물건을 사고파는 보따리상이 즐비하다.

게임이나 영화를 보는 것만 같은 초현실적인 풍경이다.

'미국에 갔을 때는 몬스터 잡느라 바빠서 몰랐는데 엄청 바뀌었구나.'

웹서핑을 통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꾸준히 확인하기는 했지만 액정 너머의 영상을 통해 단편적으로 접했을 뿐. 이렇게 바깥에 나와 직접 확인한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유성이 느낀 충격은 아리스가 느낀 충격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적당히 관광이나 시켜 주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유성은 아리스와 마찬가지로 이것저것 구경하는 재미에 푹 빠져 버렸다.

"유성 님! 저것 보세요! 엄청나게 거대한 마차가 움직이고 있어요!"

버스를 바라보며 호들갑을 떨던 아리스는 이내 더 흥미를 끄는 것을 발견했는지 유성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총을 메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치는 계약자에 정신이 팔렸던 유성은 자신의 손을 잡아끄는 아리스를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리스.

기념할 만한 첫 퀘스트의 의뢰인.

한 왕국을 단신으로 멸망시킨 대마녀의 클론.

최첨단 과학기술의 힘을 빌어 이세계인 지구에서 가이노이드의 몸으로 부활한 소녀.

그녀의 몸을 직접 움직인 경험까지 있었으니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온 세상을 통틀어 그녀에 대해 자신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밖에 나가 보고 싶다고?'

'유성 님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지, 제 세계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요!'

'음, 아무래도 그건 좀 곤란하지 않을까? 새 몸을 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무슨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는데. 일단 몸에 익숙해진 이후에 바깥에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말할게요! 그동안 갇혀 있느라 너무 답답했단 말이에요.'

하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현실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실체를 얻어 능동적인 참여자가 된 아리스는 현실에 영향을 끼칠 수 없던 수동적인 관찰자일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줬다.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아리스는 정해진 코드에 따라 움직이는 NPC가 아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었으니 말이다.

상황이 바뀌면 생각도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행동도 바뀐다.

분명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언제나 순종적일 것만 같던 아리스가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며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모습은 바뀐 도시를 직접 확인하는 것만큼이나 놀라웠다.

"...."

쉬지 않고 조잘대던 아리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린 유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떡볶이, 튀김, 닭꼬치 같은 길거리 음식을 팔고 있는 포장마차.

기능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멍하니 있던 아리스는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주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먹고 싶어?"

"아니요. 괜찮아요."

"괜찮기는 무슨. 침이 흘러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던데."

"...먹고 싶어요. 그런데 이 몸으로는 불가능하잖아요."

소피아가 만든 가이노이드에게 음식물을 섭취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지, 있다 하더라도 가이노이드가 맛을 느낄 수 있는지, 느끼더라도 과연 미각이 아리스에게 피드백 될지 모든 것이 미지수였다.

가이노이드에 대해서는 몰라도 골렘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던 아리스는 이 몸으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 한번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정말요?"

"아직 몸을 얻은 지 하루도 안 됐잖아? 개량할 여지는 충분하지. 소피아에게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해 달라고 부탁하고 비술도 수정해 볼게."

"유성 님...."

"부담스러우니까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라."

달라붙는 아리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밀친 유성은 자신의 행동을 뒤돌아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예전의 자신이었더라면, 고글을 얻기 전의 자신이었더라면 절대로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자신은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이건 긍정적인 변화인가, 부정적인 변화인가?'

잠시 고민하던 유성은 이 변화를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타인의 감정을 어느 정도 느끼고, 공감하며, 이해하게 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장 바로 전에 수행했던 [아무리 생각해도 난 주인공이 아닌 것 같은데] 퀘스트만 봐도 감정을 느끼는데도 예전처럼 온갖 지독한 방법을 떠올리고 아무 문제 없이 실행할 수 있었다.

이 정도의 변화라면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

"영상으로 볼 때도 느낀 거지만 유성 님의 세계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이렇게 많은 건물들과 사람들이 있는 도시라니. 이런 광경은 꿈에서도 상상해 본 적이 없어요."

"너희 세계에는 이런 도시가 없었어?"

"글쎄요. 소문으로는 제국의 수도가 신들의 도시라 불릴 만큼 아름답다고 하기는 했는데 제가 본 적이 없어서...."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걸어가던 유성은 방금 전 아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유성의 시선을 따라간 아리스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필요한 장비라도 있으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신기해서.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세계에는 저런 광경을 볼 수 없었거든."

"아, 그러고 보니 원래 유성 님의 세계는 몬스터가 없는 평화로운 세계라고 했죠?"

"몬스터가 없기는 했지만 평화롭지는 않았지. 하지만 저런 물건들을 길에서 사고팔 정도로 위험한 세계는 아니었어. 최소한 이 나라에서는 말이지. 잠깐 구경하러 가도 될까?"

"물론이죠."

다양한 무기들과 방어구, 그리고 온갖 잡화들이 진열되어 있는 좌판.

누가 물건을 훔쳐가지 않을까 매의 눈으로 감시하던 주인은 다가오는 유성, 정확히는 아리스를 보고 흠칫 놀랐다.

회색빛 머리카락과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소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남자는 영업용 미소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 나오는 미소를 지으며 손님을 접대했다.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있습니까?"

"그냥 구경이나 좀 하려구요."

"구경 좋죠. 얼마든지 구경하십쇼. 하하."

유성은 묘하게 친절한 주인을 뒤로하고 진열된 물건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평범한 소재로 만든 물건이 있는가 하면 몬스터의 소재로 만들어진 물건도 있었고, 두 가지 소재가 합쳐진 물건도 있었다.

'평범한 소재로 만든 물건은 이쪽 수준이 높고, 몬스터 소재로 만들 물건은 이세계 수준이 더 높다. 2개가 섞인 건 이도저도 아니군.'

한 가지 확실한 건 자신이 관심을 가질 만한 등급의 물건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장 높은 등급의 물건은 몬스터의 이빨을 갈아 날로 삼은 D-등급의 도 한 자루.

다른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유저인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역시 지구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이 정도가 한계인가.'

지구에서 쓸 만한 물건은 현대 병기뿐, 무기나 아티팩트는 이세계의 것이 훨씬 낫다.

물건들을 훑어보던 유성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특별할 것도 없는 푸른색 꽃 모양의 평범한 머리핀.

아리스와 머리핀을 번갈아 바라보던 유성은 주인을 향해 말했다.

"이건 얼마인가요?"

"5천원입니다."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주인에게 내민 유성은 색깔만 다르고 똑같이 생긴 머리핀을 집어 들고 아리스를 향해 내밀었다.

"이걸 왜 저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어...."

적청의 머리핀.

한참을 머리핀을 내려다보던 아리스는 언제나 짓던 헤실헤실한 미소 대신 드물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겨우 만 원짜린데."

"가격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유성 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게 중요한 거죠. 아니, 머리핀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저에게 해 준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드리고 싶어요."

"...갑자기 왜 분위기를 잡고 그래?"

"갑자기가 아니에요. 오히려 너무 늦었죠. 그동안 유성 님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는 안 됐어요."

괴물로부터 구해 주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해 줬으며, 몸을 노리는 미친 마녀를 물리쳤고, 자신이 살아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하나만 해도 갚을 수 없는 커다란 은혜를 몇 번이나 입은 것이다.

이런 사실을 왜 이제야 깨달았는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저도 염치라는 게 있는 사람이에요. 뭐든지 시켜만 주세요. 그동안 받은 은혜를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

유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동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무렴 자신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도와줬겠는가.

이미 한참 전부터 아리스를 드래곤 하트를 이용한 결전 병기의 파츠로 써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유성은 그동안은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할 생각이 없었다는 듯한 아리스의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유성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리스의 시선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뭐, 딱히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도와준다면야 나야 고맙지. 앞으로 잘 부탁한다."

"예!"

한 점 티 없는 순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리스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준 유성은 좌판에 진열된 물건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라도 빨리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 생각이었다.

'하나하나 감정하려면 시간이 걸리니 진리의 마안을 이용해서....'

감정만큼 정확하지는 않지만 진리의 마안을 이용한다면 물건이 품고 있는 에너지의 질과 양을 파악해 대략적인 등급을 추산할 수 있다.

"읏!"

"유성 님?"

"누, 눈이...."

"눈이요? 눈이 왜요?"

당황한 아리스가 옆으로 다가와 부축했지만 유성은 자세를 잡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충격을 받은 상황이었다.

진리의 마안을 사용한 순간 눈이 멀어 버릴 정도로 강렬한 빛이 번쩍였기 때문이다.

태양을 직접 바라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눈을 부여잡고 희미한 신음을 흘리던 유성은 곧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영력.'

진리의 마안은 영력을 동력으로 삼는다.

그런데 그 영력이 순식간에 수십 배로 뛰어 버렸으니 그와 관련된 진리의 마안이라고 멀쩡할 리 없었다.

"...너무 잘 보이잖아."

눈을 뜬 유성은 찬란하게 빛나는 세상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거 게임 아님

122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기존의 진리의 마안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로 범위였다.

한 가지 대상이나 한정된 범위를 관찰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관찰 대상이 여럿이거나 범위가 늘어날 때는 해상도가 떨어지는 영상을 재생한 것처럼 에너지의 흐름이 흐릿하게 보이거나, 심하면 그냥 빛나는 덩어리로만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그동안 전투에서 진리의 마안을 잘 사용하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진천무가의 막내제자] 퀘스트처럼 한 명을 상대할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다수를 상대할 때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넘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전부 보인다.'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의 에너지 흐름이 손에 잡힐 듯 훤히 보인다.

유성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동안 사용했던 진리의 마안은 최소한의 에너지만을 이용하는 절전 모드라고 할 수 있었다.

최소한의 에너지만으로 발동될 수 있지만 발휘할 수 있는 성능도 그만큼 낮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는 동력인 영력이 늘어난 탓에 더 이상 절전 모드가 아닌 일반 모드를 유지할 수 있게 됐고, 그에 따라 자연히 성능도 올라가게 된 것이다.

"유, 유성 님? 괜찮으세요? 어디 아픈 거 아니죠?"

"괜찮으니까 진정해."

눈으로 가는 영력을 조절해 시야를 조정한 유성은 가늘게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밝기는 하지만 아까처럼 눈을 뜨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와우."

유성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무심코 감탄성을 터트렸다.

밤하늘의 은하수를 땅으로 옮겨다 놓은 것만 같다.

사람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빛을 뿜어내고 있으며 그 형태 또한 제각각이었다.

누군가의 에너지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전신을 순환하고 있었고, 누군가의 에너지는 심장에 오롯이 모여 있었으며, 누누군가의 에너지는 머리를 중심으로 뿌리를 내린 형태를 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일정 이상의 응집도를 가진 에너지만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적은 양의 에너지도 당연한 듯이 볼 수 있었다.

아마 영력의 조절에 따라 지금보다도 훨씬 더 미세한 에너지까지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리지널 아리스가 어떻게 몇 년 만에 나라 하나를 멸망시킬 정도로 강해졌나 했더니....'

진리의 마안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은 몰랐다.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진리의 마안을 해제하려던 유성은 알 수 없는 느낌에 멈칫했다.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이상하다.

조금 더 진리의 마안을 유지시키며 사람들을 관찰하던 유성은 이상한 느낌의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사람은 뭐야?'

남자의 에너지 형태는 굉장히 특이했다.

단전이나 심장, 머리에 에너지가 몰려 있지 않고 전신에 에너지가 퍼져 있다.

계약자는 많으니 전신에 에너지가 퍼져 있는 계약자가 있다는 것 자체는 딱히 이상하지 않은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유성이 남자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것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뭔가 이상한데."

"예? 뭐가요?"

"저기 저 사람과 다른 사람들을 비교해 봐."

유성의 가리킨 사람과 다른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아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사람들보다 에너지 보유량이 더 많아 보이는데요?"

"그렇지?"

능력의 종류나 운용 방식에 따라 위력이나 유지력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어도 기본적으로 모든 계약자들이 가진 에너지의 총량은 거의 동일했다.

그러나 남자의 에너지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많았다.

1.4배.... 아니, 1.5배는 되어 보인다.

게다가 그런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한 명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스무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많은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들이 가진 에너지의 색도 전부 동일했다.

유성은 이질적인 존재들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고 그 덕분에 그 누구보다 빨리 이변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우웅!

남자의 기운이 급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자가 검집에서 칼을 뽑아 들어 주변을 향해 휘두르려 하자 유성은 진열대에 놓여 있는 단검을 집어 던졌다.

쨍!

단검은 남자가 내려치려던 검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일류 곡예사의 투척술 덕분이었다.

"어...."

갑자기 울려 퍼진 날카로운 쇳소리에 고개를 돌린 사람들은 검을 뽑아 든 남자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계약자들에게 무기 소지가 허가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아무 때나 무기를 사용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몬스터와 싸울 때 뿐, 공공장소에 들고 다닐 때는 반드시 안전장치를 걸어 둬야만 한다.

그런데 지금 공공장소 한복판에 안전장치가 풀린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

"아, 아아...."

"꺄아아아악!"

"사, 살인! 살인이다!"

남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전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무기를 휘두른 것은 남자 하나만이 아니었다.

수십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무기를 뽑아 들고 근처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평화로웠던 광화문은 순식간에 미치광이 살인마들과 도망자들로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으아아아!"

"...."

유성에 의해 공격을 저지당한 남자가 도망치는 사람들을 향해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려 했다.

까앙!

아까와는 약간 다른 둔탁한 쇳소리.

이번에 검을 막아 낸 것은 회색빛 머리카락의 소녀였다.

"저, 저기...."

"죽어라."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아 보이는 소녀가 맨손으로 검을 잡아 낸 것에 놀란 것도 잠시, 남자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방해를 받았다.

그대로 손을 잘라 내기 위해 검을 잡아당긴 남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검날에 잠시 당황하더니 검을 놓고 아리스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세 번째 공격 또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넌 뭐냐!"

"지나가던 사람."

콰직!

남자의 가슴팍을 걷어차 저 멀리 날려 보낸 유성은 아리스를 바라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아직 완성된 것도 아닌데 함부로 나서면 안 되지. 손은 어때?"

"죄, 죄송해요. 그만 무심코. 손은 괜찮은 것 같아요."

"괜찮기는 무슨. 안이 그대로 보이는데.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면 귀찮아지니까 주먹을 쥐든, 옷으로 동여매든 안 보이게 감춰."

"예. 유성 님은 괜찮으세요?"

"그런 주먹 따위에 다칠 리가. 그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벌건 대낮.

도심 한가운데서 갑자기 일어난 살육극.

한 명이라면 정신 이상자의 소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수십 명이 동시에 일을 벌인다는 건 어떠한 목적을 가진 단체라는 것이 확실했다.

"꺄아아아악!"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과 흩날리는 선혈.

도망치는 수천 명의 사람들로 인해 한 치 앞도 파악하기 힘든 상황에 눈을 찌푸리던 유성은 곧 품에서 천수를 꺼내 착용하고 그대로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쿵!

수십 미터 위로 치솟은 유성이 착지한 곳은 근처에 있던 광화문의 지붕 위였다.

아리스를 옆에 내려놓은 유성은 아공간에서 엘레멘탈 보우를 꺼냈다.

피아를 구분하기 힘든 상황이다.

무기를 들고 휘두르는 사람이 드문드문 보이기는 했지만 전부 누군가와 싸우고 있다.

아마도 살육극을 막기 위해 계약자가 나선 것 같았지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신체 능력과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초인들이 싸우면서 혼란이 한층 더 커져 버렸다.

계약자의 수가 훨씬 더 많으니 금방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양쪽 모두 안전장치가 해제된 무기를 들고 있고, 몸 곳곳에 피가 묻어 있어 어느 쪽이 살인마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유성은 주저 없이 사람들을 향해 활을 겨누고 시위를 당겼다.

화륵!

빈 시위에 생겨난 붉은빛의 화살을 흘깃 바라본 유성은 다시 정면을 향해 눈을 돌렸다.

'평균 이상의 에너지를 가진 놈들.'

모든 살인마들이 평균 이상의 에너지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봤던 살인마들은 전부 평균 이상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수라감각도를 사용해 체감 시감을 늘린 유성은 목표를 조준한 뒤 그대로 시위에서 손가락을 놓았다.

퉁!

"크아아악!"

마치 레이저처럼 붉은 궤적을 남기며 날아간 무형시는 순식간에 한 남자의 허벅지를 꿰뚫어 버렸다.

이어서 날아간 푸른빛의 화살은 도망치는 사람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려던 여성의 어깨를, 녹색빛의 화살은 총기를 난사하려던 청년의 손을, 갈색빛의 화살은 사람의 등을 꿰뚫었다.

한 발 한 발 화살을 날리는 속도는 느렸지만 신중하게 조준하고 엘레멘탈 보우의 명중률 +60%의 옵션에 의해 보정된 화살은 단 한 발도 빗나가지 않았다.

궤적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소란은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고 누군가의 외침을 기점으로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됐다.

"슈팅 스타, 슈팅 스타 한유성이다!"

영웅.

전 세계를 통틀어도 몇 명 되지 않으며 평범한 계약자는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진 존재.

영웅이 있다는 사실을 퍼져 나가자 사람들은 순식간에 침착함을 되찾았고 유성의 이름과 칭호를 외쳤다.

'미국에서는 별 느낌 없었는데 한국에서 들으니까 이상하게 수치심이 느껴지네.'

물론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시위를 당기는 데만 열중했다.

"유성 님!"

다급한 아리스의 목소리.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유성은 부릅 눈을 떴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먼 빌딩의 옥상에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막대한 에너지의 응집체이며,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유성은 본능적으로 활을 들어 올렸다.

'저게 터지면 여기는 쑥대밭이 된다!'

방어는 불가능.

회피도 불가능하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요격뿐.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 최대한 장력을 강화한다.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이걸로는 부족할 것 같아 내공까지 전부 때려 넣었다.

두 가지 에너지로 강화된 시위는 어지간한 힘으로는 잡아당기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단단해졌지만, 타이런트의 괴완 모드를 발동시킨 유성은 어렵지 않게 시위를 잡아당길 수 있었다.

그그그긍!

'무형시로는 안 돼.'

활대에 박혀 있는 네 개의 조각들로부터 흘러나온 기운이 한곳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적청녹황.

네 가지 색깔의 기운은 이리 섞이고 저리 섞이더니 이내 영롱한 황금빛의 화살로 변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빛이 번뜩이자 유성은 망설이지 않고 시위를 놓아 버렸다.

콰아아앙!

시위가 튕겨지는 순간,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순간 자세가 휘청거릴 정도의 후폭풍이 주위를 휩쓸었다.

화살을 쏜 게 아니라 숫제 레일건이라도 쏜 것 같다.

시위를 떠난 황금빛의 화살은 순식간에 수백 미터의 거리를 격하고, 미지의 기운을 꿰뚫었고 곧 눈이 멀 듯한 빛과 함께 앞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후폭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

너무나 커서 오히려 들리지 않는 폭발음.

빛이 멎고 후폭풍이 그치자 간신히 눈을 뜬 사람들은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건물들과 자동차의 유리창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산산이 깨져 있었고, 폭심지 근처의 자동차는 뒤집혀 있었으며 일부 사람들의 눈과 귀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울부짖었고, 누군가는 공황 상태에 빠진 듯 미친 듯이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환호성을 질렀다.

방금 전 죽을 뻔한 위기에서 살아났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모두가 살아났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한유성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나 유성은 사람들의 환호에 호응해 주는 대신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거 게임 아님

123화 생각지도 못한....

한국 계약자 협회 본사 최상층에 위치한 회의실.

드래고니아 토벌과 소피아의 일로 몇 번 들른 적이 있는 곳이다.

텅 빈 방 안을 둘러보던 유성은 벽 한쪽에 걸린 거대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사상 초유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오후 1시 경 광화문 광장에서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테러를 일으킨 범인들은 전원 계약자로....

-이들은 인터넷에서 만나 테러를 계획했으며, 범행 동기는 위대한 존재들에게 선택 받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몬스터와 싸우고 있을 때, 선택 받지 못한 이들이 안전한 곳에서 구경하고 있는 현실에 분개해....

-다행히 테러 현장 근처에 있던 영웅, 슈팅 스타 한유성 씨의 빠른 대응으로 피해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한유성 영웅은 혼란한 상황 속에서 정확하게 테러범을 제압해 인명 피해를 최소화했으며, 뒤이어 강력한 에너지체를 요격해 수천 명의 사람을....

-최근 늘어나는 계약자 범죄로 시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국회에서는 계약자로 이루어진 새로운 치안 유지 부대의 창설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시민들은 더 강한 대책을 요구하며....

삑.

음소거 버튼을 눌러 소리를 끈 강창석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이 지나도 강창석의 입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유성이 먼저 운을 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짧지만 핵심적인 질문.

말해 줄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을 지은 채 턱을 매만지던 강창석은 이내 생각을 정리했는지 입을 열었다.

"얼마 전부터 계약자들에 의한 범죄가 늘어나기 시작했어."

"그런 건 원래 그러지 않았어?"

계약자.

아무런 노력도, 이유도 없이 그저 운이 좋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하루아침에 강력한 힘을 얻은 평범한 사람들.

힘에 취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몬스터라는, 인류라는 종의 생존을 위협하는 이세계의 침략자들 때문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을 뿐, 계약자 범죄는 언제 어디에서나 일어났고 시간이 지날수록 몬스터에 의한 위험이 줄어듦에 따라 범죄 건수 역시 점점 늘어 가고 있었다.

"아니, 그것과는 좀 달라. 단순히 범죄 건수만 늘어난 게 아니라 질이 급격하게 안 좋아졌어. 이번만 해도 그래. 다수의 계약자에 의한 무차별적인 테러? 그것도 도심 한복판에서? 이게 한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유성은 무심코 고개를 저었다.

퀘스트에 정신이 팔려 있기는 했지만 최소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강창석은 모니터에 여러 자료를 띄우고 설명을 이어 갔다.

"근 한 달 동안 일어난 사건들이야. 보면 알겠지만 절도나 강도 같은 귀여운 수준이 아니라 계약자에 의한 테러나 증오 범죄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지."

"뒤에 누군가 있군. 유저인가?"

"...그건 어떻게 알았어?"

"마지막에 날아온 에너지체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잖아. 그만한 공격을 날릴 수 있는 건 유저밖에 없겠지."

"아."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질문을 했는지 깨달은 강창석은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유성의 말에는 진심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범인들의 공통점도 있지. 평범한 계약자들보다도 더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고 성질도 동일하던데.... 계약자의 수준을 높이지는 않겠다고 네가 직접 말했으니 계약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힘을 키웠다는 건데 당연히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은 유저밖에 없지. 틀려?"

"...."

강창석의 눈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한 계약자와 범죄율의 증가에 이상함을 느끼고 주선자라는 직업의 특권을 이용해 간신히 알아낸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다.

퀘스트를 끝내고 돌아온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마지막 공격을 요격한 그 화살. 단순 위력만 따지자면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의 공격력과 맞먹는 수준이야. 이게 말이 되나?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유저가 벌써 이렇게 성장한다는 게....'

생각을 이어 가던 강창석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유성의 시선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맞아. 범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런 능력도 없는 일반인이었어. 조사 결과, 누군가에게 힘을 얻었다고 하더군."

"어떤 유저가 이런 일을 벌인 거지?"

"그게, 아직 유저가 범인이라고 확정된 건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이런 게 가능한 존재가 유저 말고 있을 리가 없잖아?"

"능력은 있지만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어. 당장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데 왜 한국에 테러를 일으키겠어? 게다가 알리바이도 다들 확실해."

"유저쯤 되면 알리바이를 조작하는 건 일도 아닐 텐데."

"뭐,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한데....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유저들 중 이런 이상한 일을 벌일 만한 놈은 없어."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닌 경험과 감에 의존한 판단.

그러나 오랫동안 유저들을 보아온 사람이 내린 판단인 만큼 무턱대고 부정하기도 뭐했다.

"그럼 네가 생각하는 배후는 누군데?"

"둘 중 하나. 유저, 아니면 몬스터."

유성의 미간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방금 전까지 유저가 범인일 리 없다고 할 때는 언제고 다시 유저를 배후로 지목한 것도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몬스터? 몬스터가 어떻게...."

단순한 테러라면 몬스터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을 능력자로 만들고 범죄를 저지르도록 사주해 사회에 혼란을 일으키는 건 멍청한 몬스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강창석의 말을 부정하려던 유성은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말끝을 흐렸다.

모든 몬스터가 멍청한 건 아니다.

흔한 몬스터인 오크만 하더라도 언어로 대화를 나누며 도구를 만들고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지성과 이성을 가지고 있고, 그 외에도 마법을 사용하거나 계획을 짜 인간을 습격하는 등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몬스터는 수두룩했다.

당장 자신도 그런 몬스터를 만나 본 적이 있었다.

'드래곤과 리자드맨.'

드래곤을 몬스터로 분류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드래곤은 차원 간 항행이 가능한 대규모 도시를 만들어 낼 정도의 문명을 이뤘고, 리자드맨은 드래곤들을 배신하고 드래고니아를 이용해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지성과 야심을 보여 줬다.

처음 커뮤니티에 들어갔을 때 유저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차원 간의 전쟁. 새로운 안식처를 찾기 위해 공간을 포류하던 패배자들.'

몬스터라는 단어에 속으면 안 됐다.

그들 가운데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인간과 맞먹거나, 그 이상의 지성과 이성을 가진 존재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어떤 몬스터지?"

"그건 아직 몰라. 다만 체포된 범인들이 신성력 계열의 힘을 사용한 걸 볼 때, 천사 계열의 몬스터로 추측하고 있어."

"천사라."

"이미지에 속지 마. 천사라고 해서 모두 착한 건 아니야. 오히려 악마보다도 더 악해질 수 있는 존재가 천사지."

"그냥 천사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에 놀란 것뿐이야. 하긴 엘프도 있고 드워프고 있고 드래곤도 있는 마당에 천사라고 없을 리가 없겠지. 그럼 유저는 뭐야?"

강창석의 이마에 힘줄이 솟아났다.

"인...."

"인?"

한참을 입술을 달싹이던 강창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단어를 입에 올렸다.

그 단어는 유성의 기억 속에 있는 단어였다.

"인생은한방."

"...."

유성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인생은한방.

VR기기로 속여서 고글을 떠넘기고 사라진 전대 유저.

물론 그때 고글을 받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겠지만, 그것이 인생은한방을 용서할 이유는 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고글을 준 건 선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주지도 않은 탓에 999번의 죽음이라는, 상상하기도 힘든 끔찍한 경험을 했다.

"인생은한방이라는 게 아니라 일수도 있다는 거야.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들을 뽑다 보니 후보에 넣은 거야."

유저의 상징인 고글을 양도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인생은한방이 평범한 사람이 됐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더 이상 차원을 넘나들 수 없을 뿐.

이세계에서 가져온 스킬과 아티팩트, 그리고 힘은 그대로 남아 있다.

"어쨌든 그놈일 수도 있다는 거잖아?"

"그렇긴 하지."

"오케이. 그거면 충분해. 그 새끼 지금 어딨어?"

"...진정해. 만약 진짜 범인이 인생은한방이라면 네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너는 가만히 있어."

"인생은한방이 얼마나 강한데?"

과거 강창석이 보내 준 자료에는 현 유저들의 정보만 적혀 있을 뿐, 전대 유저인 인생은한방에 관한 정보는 들어 있지 않았다.

다만 대략적인 실력을 추측할 수 있는 단서는 있었다.

'삼강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고글을 포기하고 숨었을 리가 없었겠지. 기껏해야 삼중, 잘하면 삼약 수준일 수도 있다.'

유성의 추측은 거의 일치했다.

"삼약이라기에는 강하고 삼중이라고 하기에는 약한 수준. 삼약과 삼중 사이 정도일 거야."

"삼약과 삼중 사이라. 그게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나는 모르지만 너는 알고 있겠지. 네가 볼 때 내가 인생은한방을 당해 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야...."

당연히 그렇다고 말하려던 강창석은 앞서 유성이 그랬던 것처럼 말끝을 흐렸다.

하루 전에 이런 질문을 들었더라면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광화문 광장의 영상을 보고 나자 생각이 바뀌었다.

'다른 건 몰라도 공격력 하나만큼은 확실해. 연사가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한 발이라도 그런 공격을 날릴 수 있다면 상대가 인생은한방이더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본래 강창석은 이번 일에 유성을 끌어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번 일의 배후가 몬스터인지, 유저인지는 몰라도 유성이 상대하기에 버거운 수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유저의 힘을 빌려 비밀리에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잠시 고민하던 강창석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방에 나서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작전에 끼워 주지."

"원래 그럴 생각이었어."

유저에게 정면으로 덤빈다는 판단을 내릴 정도로 유성은 어리석지 않았다.

애초에 엘레멘탈 보우라는 장거리 공격 수단을 얻지 못했더라면 이런 요구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성의 확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강창석은 곧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 그런데 그 전에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말이야."

유성은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개할 만한 사람은 뻔했기 때문이다.

'보나마나 유저겠지.'

강창석, 카심, 소피아에 이은 네 번째 유저와의 만남.

과연 어떤 유저가 나타날지 생각하던 유성은 강창석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를 듣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무신! 나와도 돼!"

이거 게임 아님

124화 보인다

그 남자는 갑자기 나타났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회의실 한가운데 자연스럽게 서 있는 남자.

남자의 존재를 인지한 순간, 유성의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아무런 전조도, 기척도 없었다.

만약 남자가 자신을 노리는 적이었더라면 어떻게 죽는지조차 모르고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아직 갈 길이 멀군.'

삼약 정도는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겨우 삼약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삼약 위에는 삼중이 있고, 그 위에는 또다시 삼강이 있다.

유저 전체를 놓고 보자면 자신은 아직 약자에 불과했다.

해결사 등급이 상승하며 생겼던 자신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유성은 새롭게 나타난 남자를 응시했다.

'이 사람이 무신?'

생각했던 것과 다른 이미지다.

무신(武神)이라고 하기에 백발과 수염을 늘어트린 선풍도골의 노인이나 신체 건장한 동양인 남성을 생각했는데, 실제로 본 무신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2m는 될 법한 거대한 체구와 기다란 팔다리.

어두운 구릿빛의 피부와 짧게 잘랐지만 곱슬기가 남아 있는 머리.

무신의 정체는 놀랍게도 흑인이었다.

"커뮤니티라면 모를까, 현실에서 무신이라고 불리는 건 좀 그렇군. 만나서 반갑다. 방구석한량. 브루스다."

원래 말투가 이런 건지, 바벨의 힘에 의해 번역되는 도중 바뀐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고풍스럽기도 하고, 딱딱하기도 한 종잡을 수 없는 말투다.

"저야말로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리고 저도 현실에서 방구석한량이라고 불리는 건 좀 그렇군요. 한유성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한유성. 기억했다. 나에게 불만이 많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갑작스러운 브루스의 말에 유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의미를 깨닫고 두 눈을 부릅떴다.

'강창석, 이 미친 새끼! 무신에게 따지겠다고 하더니 설마 진짜로 말한 거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브루스와 그 뒤에서 재밌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창석을 번갈아 바라보던 유성은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강창석의 말로는 시간을 낭비했다고 심하게 따졌다고 하던데. 그럼 강창석이 거짓말을 한 건가?"

"분명히 그런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심하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강창석이 약간 과장을 한 것 같군요."

"아무튼 불만이 있다는 건 사실이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