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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지구 전선(2)

"넌 뭐야?"

드르륵!

배불뚝이 7구역 경비대장이 의자를 끌며 일어섰다. 갑옷 틈 사이로 뱃살이 출렁거렸다.

어이구, 많이도 해먹으셨나 보네.

댈런이 뚱한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자, 배불뚝이는 두꺼운 눈썹을 사납게 치켜세우며 다시 말했다.

"어디서 온 놈이냐? 보니까 경비단 소속도 아닌 것 같은데, 어디 용병 나부랭이가 경비대장들의 회의에 들어온 거지?"

"내가 모셔왔소이다, 7구역 경비대장."

침묵중대장, 가웨인이 입을 열었다.

"텔리아 상회를 제압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용병이시오. 이분이 없었다면 이미 청동 구역 곳곳이 사교도의 손에 넘어갔을 터. 회의에 참석할 자격은 충분하다고 보오."

배불뚝이는 순간 놀란 듯, 두툼한 턱살을 파르르 떨었다. 그는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래, 역시 침묵중대장이시군. 항상 특별한 사건만 쫓아다니셔서 그런지, 발상도 아주 특별해지셨소? 지휘관도 아닌 저런 용병에게 도움까지···."

"경비대장 양반."

댈런이 끼어들었다.

그는 피곤한 눈으로 관자놀이를 잠시 문지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테이블을 다시 두드리기 시작했다.

툭. 툭툭.

'이걸 그냥 도끼로 찍어버려?'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충동.

정상적인 지구인이라면 하지 못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땅에 떨어지고 어떤 갈등이든 해결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자, 이런 충동은 종종 그를 찾아오곤 했다.

마치 허리띠에 꽂힌 도끼가, 자신을 날려달라고 애타게 부르는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건 해결책이 아니다.'

툭툭. 툭툭.

초인적인 자제력으로 참아낸다.

게임이었다면 한 번쯤 찍어봐도 상관없겠으나, 여긴 현실이었다.

인간이고 마물이고 다 썰어죽이며 화를 풀다가, 무덤덤하게 새 게임을 클릭하는 게 불가능한 현실.

칼을 뽑아야 할 때와, 혀를 놀려야 할 때를 구분해야 했다.

댈런이 입을 열었다.

"7구역에는 유서 깊은 철광이 많이 있지."

"······!"

부릅뜬 배불뚝이의 눈이 순간 커졌다.

마치 뒤에 이어질 말을 예상이라도 한 듯한 눈빛. 회의장의 웅성거림 역시 잦아들었다.

댈런은 말을 이었다.

"다들 50년, 60년 이상 된 철광들이고, 지금까지도 꾸준한 품질을 보장하는 신뢰도 높은 광산이라고 알고 있소."

톡. 톡.

검지가 규칙적으로 원탁을 두드린다.

"하지만 요새는 벌이가 좀 좋지 못해졌다지. 10년쯤 전부터인가, 8구역에서 양질의 철을 생산해내기 시작했으니까 말이야."

"네, 네가 어떻게 그런 걸······."

"귀관의 고향도 마침 7구역이라고 알고 있소. 친척들 중에 큰 광산을 하나씩 맡은 광산장도 여럿 있다고 하던데. 요즘 8구역이 번창하면서 다들 가세가 기울었다더군."

"······."

배불뚝이 경비대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늘어진 턱살이 다시 한 번 파르르 떨렸다.

댈런은 턱을 괴었던 팔을 내려놓고, 두 손을 테이블 위에 모아쥐었다.

"오면서 본 그쪽 병사들은 모두 무기와 갑주에서 빛이 났소. 흔치 않은 일이지. 청동 경비단은 예산이 늘 부족하니까. 헌데 귀관의 7구역은, 예산 분배를 굉장히 잘 하신 모양이오."

배불뚝이 경비대장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댈런은 그걸 보며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병사들을 봤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댈런이 방어선에 도착한 건 고작 몇 분 전.

오자마자 회의장으로 향했기에, 7구역 경비대원들을 찾아볼 틈은 어디에도 없었다.

때문에 그가 지금 말하고 있는 건, 다 게임에서 익혔던 배경 설정들.

하지만 이미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온 이상, 정보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큰 상관이 없었다.

"아직까지 그 예산 분배 능력이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한데. 이번 기회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귀관의 능력을 알게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군."

"이, 이익!"

부들부들 떠는 배불뚝이 경비대장과, 입꼬리를 올린 채 그걸 지켜보는 댈런.

7구역 경비대장이 광산장들에게 많은 뒷돈을 받고 있다는 건, 사실 경비단 안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외부인, 그것도 소문을 퍼뜨리기 가장 적합한 직업군인 용병의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온다는 건.

그 용병이 마음먹기에 따라, 이 공공연한 비밀은 곧 날개 달린 말처럼 청동 구역 전역으로 퍼져나갈 수 있다는 뜻.

쉬운 말로 그냥 협박이었다.

내가 당신의 약점를 쥐고 있고.

당신이 내 눈밖에 나는 순간, 그 약점은 온 도시에 퍼져나갈 것이라는 협박.

"···미안하게 됐소."

부들거리는 목소리로, 배불뚝이 경비대장은 간신히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댈런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괜찮소. 부디 이번 작전이 민간인들의 큰 피해 없이 끝나, 8구역의 고품질 철광업에 7구역도 긍정적인 자극을 받았으면 하는군."

"······사려가 참으로 깊으시구려."

배불뚝이는 그 말을 끝으로 막사를 나갔다.

지휘관 몇 명이 그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가며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막사에는 곧 정적이 내려앉았다.

톡톡. 톡톡. 톡.

그리고 댈런은 테이블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보시다시피, 내가 아는 게 좀 많소."

끼이익.

댈런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가볍게 웃었다.

"좋은 정보상을 곁에 뒀거든."

옆에서 가웨인의 표정이 살짝 굳는 게 보였다. 댈런은 신경 껐다.

지금 그쪽 친구네 가게 무료로 광고해주는 거다, 이 양반아.

막사 안. 지휘관들의 집중된 시선을 받으며, 댈런은 다시금 천천히 운을 띄웠다.

"이번에 사교도들의 거처 습격 작전에 참여했던 지휘관이라면 알 것이오. 놈들이 어떻게 괴인을 만들어내고, 그 괴인의 전투력은 얼마나 되는지."

몇몇이 고개를 끄덕인다. 침음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대충 모인 인원의 삼분의 일쯤 되는 숫자.

댈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놈들은 거리의 걸인과 부랑자들을 잡아다가, 괴인화 시술을 거쳐 병기로 만들고 있소."

침음을 흘리는 머릿수가 좀 더 늘었다. 이 사실을 처음 안 지휘관들이겠지.

이런 중세풍 군대에서 촌각을 다투는 정보 공유는 어려운 법이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요. 역행의 사도들이 지금 잠잠해 보이는 것은, 괴인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증거. 머지않아 8구역 시민의 절반은 괴인이 될 거요. 나머지는 그 괴인들의 식량이 될 거고."

댈런은 고개를 돌렸다. 천막 입구는 겨울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흔들리는 횃불빛 사이로, 거리를 두고 경계를 선 경비병들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하나 둘.

그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지휘관이 늘어났다.

"밖에 있는 병사들 중에는 8구역의 경비병들도 있겠지."

댈런은 그 시선들을 의식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가족과 집을 빼앗기고, 불안에 떨고 있을 테요."

빠드득. 누군가 이를 갈았다. 이를 악문 사람이 누군지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마도 가장 많은 것을 빼앗긴, 눈 밑에 그늘이 짙은 8구역의 젊은 경비대장이리라.

"귀관들의 심정은 이해하오. 비록 내가 용병 나부랭이라 하지만, 그렇기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더 잘 알고 있소."

이 년.

댈런이 용병 생활을 해온 시간.

안락하고 평화로운 현대인의 삶을 빼앗기고, 칼과 주먹이 곧 법인 세계에서 적응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아무리 초인적인 육신을 지녔다고 해도, 그 속은 치킨에 캔맥주를 좋아하던 서른 먹은 아저씨였으니까.

"한 번의 잘못된 결정이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지. 그것도 내 목숨만이 아니라, 내 동료들, 부하들, 내 친구들의 목숨까지도."

댈런은 첫 의뢰에서 동료를 잃었다.

칼질 한 방으로 도적을 두 동강으로 토막낸 직후였다.

내장을 쏟아내는 시체를 보고 되레 겁을 먹어, 전장 구석으로 도망가 무기마저 던지고 벌벌 떨었던 것이다.

'신참! 야 이 좆 같은 신참 새끼야, 일어나! 안 일어나면 뒈진다고! 얼른 이 칼 잡고 도적 새끼들을 썰어버리란 말이다!'

한순간에 용병에서 덩치 큰 어린애가 된 그를, 동료 용병은 끝까지 격려해 일으키려 했다.

그리고 결국, 적의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후우.

댈런은 낮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말을 이었다.

"설령 귀관들이 선제 공격을 반대하더라도, 순은 구역의 지원만을 기다리자고 주장하더라도 이해하오. 나 역시 잃는 게 두려워 물러나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얼굴에 튄 동료의 핏방울.

스르르 무너져가는 육체의 무게.

자신을 향한 불신과 책망을 담은 채, 식어가던 동료의 눈빛.

동료들이 모두 목숨을 잃고 나서야, 그는 칼을 다시 집어들었다.

모두가 죽었더라도, 자신만큼은 살아남고 싶어서.

그날 첫 의뢰를 완수했다.

"하지만 그 끝에 얻은 교훈은 하나였소. 잃는 게 두려워서 물러나는 순간, 더 쉽게 잃을 뿐이라는 것."

휘이이―

바람이 천막 입구를 들썩인다. 횃불이 흔들리며 지휘관들의 얼굴에 다채로운 음영을 자아냈다.

"비록 8구역 경비대는 패퇴했지만, 잃어버린 집과 가족을 자신의 손으로 다시 한 번 지켜낼 기회는 아직까지 남아 있소이다. 그 기회를 줄 수 있는 건 귀관들이오."

끼이익.

댈런은 다시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가 할 말은 이제 끝이었다.

막사 안에는 한동안 깊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얼마 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시오?"

가만히 침묵을 지키던 가웨인이 입을 열었다.

"사흘."

댈런은 확답했다.

"사흘 안에 공격해야 될 거요."

***

회의는 머지않아 마무리됐다.

선제 공격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자, 경험 많은 지휘관들이 순식간에 작전을 고안해낸 것이다.

그 골자는 이랬다.

사교도들의 세가 불어나기 전에, 방어선을 좁히며 놈들을 압박해 들어가는 게 첫 번째.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사흘째 되는 날, 놈들의 본거지에 총 공격을 가하자는 것.

몇몇 지휘관을 제외한 전원이 이 작전에 찬성하자, 넓은 방어선은 밤중부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훈련된 경비병들은 한밤중에 떨어진 소집령에도, 침낭에서 벌떡 일어나 무장을 갖추고 대기에 들어갔다.

준비는 신속했고, 동시에 철저했다.

다음날 새벽, 방어선을 지킬 절반을 남겨둔 채, 나머지 절반의 병력이 방어선 안쪽으로 들어섰다.

댈런은 8구역 경비대와 동행했다.

한 번 패퇴했기에 가장 약세라고 판단되는 이들에게, 댈런이라는 조커를 붙여 균형을 맞춘 것.

저벅. 저벅.

이백에 달하는 경비병들이 거리를 따라 걸었다.

사분의 삼은 이미 한 차례 패배를 겪고 위축된 8구역 경비병들.

그리고 나머지 사분의 일은, 댈런과 함께 경비대를 지원하기 위해 합류한 침묵중대원들이었다.

새벽 안개가 거리를 낮게 뒤덮고 있었다. 댈런은 감각을 넓게 퍼뜨리며 선두에서 걸었다.

그의 곁에는 8구역 경비대장이 따라 걷고 있었다. 밤사이 더 헬쓱해진 얼굴이었다.

"걱정되시오?"

댈런이 물었다. 젊은 경비대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가 그리 걱정이시오."

"그 괴인들, 단순히 저희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니었습니다."

경비대장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부하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팔다리가 잘려도, 배에 창이 박혀도 달려들더군요. 거기다 가면 쓴 사교도들은 베이고 찔린 상처를 순식간에 회복했습니다."

"흠."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미완성의 재생 기술을 사교도 전원에게 시술한 모양이었다.

하긴, 놈들 입장에서도 똥줄이 탈 테지.

며칠 만에 은가면 사도 절반 이상이 죽어나질 않나, 난데없이 경비단이 대대적인 습격을 가하질 않나.

한숨을 푹푹 쉬어대는 젊은 지휘관의 생각과 달리, 전황은 명백하게 유리한 쪽이었다.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승산이 있을지······."

"이길 거요. 귀관의 대원들 또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고."

"후우, 그러면 정말 좋겠습니다만. 지원군이 있다면 좀 더 마음이 편했을 텐데······."

이 새끼가. 니 옆에 있는 사람은 지원군 아니냐?

잠시 턱을 긁적이던 손이 멈칫했지만, 댈런은 심신미약 상태의 경비대장을 위해 여상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순은 구역에서 올 지원군을 기다리는 거라면, 곧 올 거요."

"정말입니까? 어떻게···지휘부에서도 아직 답이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지휘부가 요청한 지원은 아니요.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 있거든."

모두가 분주하게 작전을 준비하던 어젯밤, 댈런은 가웨인을 통해 순은 구역으로 파발을 한 명 보냈다.

가장 말을 잘 타는 중대원으로 선별해서 보냈다고 하니, 그 파발은 지금쯤 목적지에 도달하고도 남았을 터.

댈런은 확신했다.

빠르면 오늘, 늦어도 내일 안에 지원군은 도착할 것이라고.

"하, 하지만 어떻게 고작···아니, 아닙니다."

"어떻게 고작 은패 용병이 순은 구역에서 지원군을 불러올 수 있냐고?"

젊은 경비대장은 본인이 말하고도 민망한 듯,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댈런은 낮게 웃었다. 그러다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도끼를 뽑아들었다.

그가 말했다.

"정지."

"···정지! 전원 정지!"

기침하던 경비대장이 손을 들어올렸다. 부대 전체가 자리에 멈춰섰다.

8구역 경비대장은 댈런을 힐끔거렸다.

덥수룩한 머리를 한데 묶은 용병은, 안개 너머를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봤지만, 보이는 건 짙은 겨울 안개뿐.

그 너머에서는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

대체 뭘 보고 있는 건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이 들 때쯤.

"장난치지 말고 나와, 새끼야."

댈런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대답이 돌아왔다.

"키히히, 감이 좋잖아?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한 야만인 전사라고 생각했는데."

스르르.

안개가 걷힌다.

마치 무대의 장막을 걷어내듯이, 거리를 뒤덮고 있던 안개의 일부가 환영처럼 걷혀나갔다.

안개가 걷히고 드러난 건, 기백은 되어보이는 괴인 무리와, 수십 명의 사교도.

그리고 그 선두에 선, 작은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은가면 사도였다.

"마법에도 소양이 있을 줄은 몰랐네. 급해서 대충 설치하기는 했지만, 경비단 중에라면 몰라도 너 같은 칼잡이가 내 은폐 마법진을 간파해낼 거라곤 생각 못했는걸?"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었다.

오른손의 지팡이. 카랑카랑한 목소리. 얇은 손발에 새겨진 주술적인 문신들.

이 여자는 은가면 사도들 중에서도 드물게 그를 죽인 적 없는, 진법과 불 마법이 주특기인 은가면 마법사였다.

쉽게 말해서, 그냥 지나가는 보스몹.

그가 말했다.

"말 많은 주문쟁이군."

"어머, 그런 투박한 단어로 부르면 섭섭하다고. 그런 말은 델릭 같은 반푼이에게나 어울리는 거지, 깔깔깔!"

주문쟁이 은가면은 깔깔 웃으며 양 팔을 활짝 펼쳤다.

그녀가 잡은 지팡이의 수정이 불길한 빛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손의 주술 문신도 불길하게 빛났다.

스으으―

마치 의지를 가진 듯, 스멀스멀 움직이는 일대의 안개 사이에서 그녀가 외쳤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역행의 사도들 중 일원이자, 대사도에게 은가면을 하사받은 유일한 마법사! 볼카누스 대마탑의 제자이자 안개의 술법을 몸에 새긴―!"

주문쟁이의 고개가 팍 꺾였다.

그녀는 마치 누가 등 뒤에서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이, 뒤로 붕 떴다가 석재 도로에 우당탕 널브러졌다.

8구역 경비대장은 눈이 휘둥그레 떴다. 넘어간 마법사는 이마 한가운데 도끼가 박혀 있었다.

너무 깊숙히 박혀, 아예 머리가 반쯤 쪼개진 거나 다름없게 된 채 움찔대는 마법사의 몸.

옆에서 댈런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말 존나 많은 거 빼곤 똑같네."

스릉―

댈런은 검을 뽑았다. 방패도 끌러내려 왼손에 들었다.

정적이 내려앉은 괴인과 사교도의 군세 앞에서, 그가 말했다.

"어서 덤벼라, 머저리들아."

동부 지구 전선(3)

먼저 달려든 건 괴인들이었다.

크아아아!

캬아아!

가면 쓴 사교도들은 은가면 사도가 한 방에 쓰러진 걸 보고 오히려 겁을 집어먹고 주춤했으나.

이성을 제거당한 괴인들에게는, 그런 종류의 공포심 자체가 없었다.

오히려 지금껏 그들을 묶어두었던 족쇄가 풀린 셈이었다.

괴인들이 안개 속에서 얌전했던 건, 은가면 주문쟁이가 그들을 제어하고 있었기 때문이니까.

크아아아―!

끼에에!

파도가 덮쳐든다.

살과 근육, 발톱, 이빨로 이루어진 파도가.

댈런은 그 파도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어깨를 휘휘 풀었다.

그의 뒤로,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튀어나온 침묵중대원들이 대형을 이뤘다.

"쐐기진― 펼쳐!"

침묵중대장, 가웨인이 외쳤다.

선두의 댈런을 꼭짓점으로 두고, 양쪽 뒤로 날개처럼 펼쳐진 쐐기 형태의 방어선.

그 방어선이 구성된 직후.

캬아아―!

크에에에!

발톱과 이빨의 파도가, 방어선의 첨단을 덮쳐들었다.

캬아―칵!

콰직!

댈런의 검이 번쩍였다. 덤벼들던 괴인이 두 동강 난 채 뒤로 넘어간다.

창자를 흩뿌리는 놈의 상반신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댈런의 검이 세 번 더 번쩍였다.

콰지지직!

세로로 쪼개진 머리 하나.

깔끔하게 잘린 목 하나.

허공을 수놓는 우악스런 손아귀의 팔이 셋이었고, 쩍 갈라져 내장을 줄줄 흘리는 허리가 둘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선두의 괴인들을 죄다 갈아버린 댈런.

다만 발톱과 이빨의 파도는, 댈런만을 향해 덮쳐오지 않았다.

더 많은 숫자가 그의 양옆으로, 거리를 가득 메우고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물론 당연하게도.

"침묵중대! 제자리에―"

괴인들의 발톱이 눈앞에서 번쩍이는 정도로, 침묵중대가 물러서지는 않았다.

"방패― 올려!"

철컥!

강철 방패가 올라간다. 날카로운 창검이 목표를 겨눈다.

후열의 인원들은 방패를 앞 사람의 등에 대고, 이어질 충격에 버틸 수 있도록 받쳐주었다.

그리고.

"버텨―!"

남루한 로브와 번쩍이는 판금갑주로 이루어진 방파제에, 살덩이의 파도가 부딪혔다.

꽈광! 쾅! 콰직!

캬아아아!

스각! 후두둑―

크엑! 크에엑!

"으아, 으아아!"

비명과 괴성. 찢기고 베어내는 파육음.

잘려나간 팔다리가 땅을 구르고, 방패에 메달려 괴인들이 몸부림친다.

검붉은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살점과 내장이 치덕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캬아―!

창날에 머리 반쪽이 날아간 괴인이, 단말마의 괴성을 지르면서 침묵중대원의 목을 물어뜯었다.

"커흑! 크흐······."

목이 뜯긴 중대원은, 눈을 부릅뜨고 절명해가는 순간에도, 마지막 남은 힘으로 동료의 방패를 붙잡은 괴인의 목을 잘라버렸다.

첫 격돌만으로 순식간에 스물에 가까운 괴인과, 침묵중대원 두엇이 쓰러졌다.

하지만 방파제는 파도를 버텨냈다.

그리고 그건 곧, 반격의 신호였다.

"침묵중대! 전진―"

땅에 뿌리박은 듯 단단하게 고정되었던 전열이, 한 걸음씩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몰아치는 파도는 여전히 거셌으나, 첫 돌진만큼의 충격은 주지 못했다.

거리를 쐐기꼴로 막아선 침묵중대의 전열은, 마치 칼날 달린 전차가 보병들을 짓밟듯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선두에 있는 건, 무심한 표정으로 괴인들을 도살하는 댈런이었다.

키에에―칵!

벌린 아가리를 폼멜로 찍어버린다.

크르륵! 컥!

자세를 낮추고 돌격하는 놈을, 방패를 휘둘러 으스러뜨린다.

별 감흥 없이 손발을 움직이는 대로, 목이 떨어지고 몸뚱이가 동강나고 머리통이 으스러졌다.

댈런은 뚱한 얼굴로 그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뭔가 이상하다.'

전황은 유리했다.

댈런을 위시로 한 침묵중대는, 괴인과 사교도들을 추풍낙엽처럼 쓸어버리고 있었다.

후방에서 따라오는 8구역 경비대 역시, 뒤로 새어나간 괴인들을 잘 마무리해주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분명 유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적들의 대응을 지켜보는 내내 기이한 위화감이 사라지질 않는다.

'애당초 어떻게 우리의 습격을 알아챈 걸까.'

정찰을 보냈다기엔 경비단의 준비가 너무나 신속하고 은밀했다.

밤늦게 작전 회의가 끝나고서, 새벽에 기습적으로 출진할 때까지의 간격은 기껏해야 몇 시간.

이렇게 안개를 활용한 은폐 마법까지 준비할 정도면, 적어도 출진 세 시간 전에는 놈들이 낌새를 눈치챘다는 소리다.

짧은 상념이 끝을 맺은 건, 모든 적들이 땅에 쓰러질 무렵.

결론은 하나였다.

'첩자가 있다.'

콰득!

"컥, 커헉···!"

마지막 사교도의 배에 검을 박아넣으며, 댈런은 생각했다.

쫘좍!

옆구리를 가르고 빠져나온 검이, 그 출구로 우르르 내장을 끌고 나왔다.

댈런은 고통에 눈이 뒤집힌 사교도의 머리를 툭 잘라주었다.

데굴데굴 굴러가던 머리통은 꿈틀대는 몸 곁에서 멈췄다.

품이 넓은 로브에 덮인, 호리호리한 체형의 꿈틀거리는 몸뚱이.

손도끼에 얼굴이 이등분된 은가면 주문쟁이를, 댈런은 뚱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아직도 안 뒈졌냐."

"킥! 키힛, 사도는 쉬, 쉽게 죽지 않···지!"

주문쟁이는 반으로 갈린 입술로 피를 칵칵 토해내며 웃었다.

댈런은 그녀의 목 위에 발을 얹었다. 그리고 지그시 누르려다가, 멈췄다.

위화감.

첩자의 존재 하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위화감이 그를 막은 것이다.

"왜 웃지?"

"크히! 대계는, 쿨럭! 완성···될 것이다! 누구도, 키히히,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피 섞인 기침과 어눌한 말투가 거슬렸다.

그는 허리를 굽혀, 주문쟁이의 머리에 박힌 도끼를 뽑아들었다.

쩌적―

"끄아아―악!"

도끼가 빠져나가며 주문쟁이가 새된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녀는 곧 다시 킬킬거리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뭉클거리는 진액이 잘린 뇌를 서서히 이어붙이는 걸 확인하고, 댈런은 다시 물었다.

"예상하지 못한 방법?"

"키힛, 너희는 대사도님의 그림자조차 따라가지 못해! 그분은 이미 계획을 완성하셨다. 제물도 준비되었고! 이제 남은 건···꺄아아아!"

주문쟁이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우드득. 무언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댈런이 발을 들어, 그녀의 얇은 손을 손가락 끝에서부터 천천히 즈려밟은 것.

손끝에서 손목까지를 잘 다져진 고깃덩이로 만든 댈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점만."

"으흐, 으흐흑. 아, 알았어······."

주문쟁이는 피눈물을 흘리며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번에는 어눌하게 말하지도, 과하게 수식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기습적인 출진에 대비할 수 있었고, 이 습격의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해.

전말을 전부 들은 댈런은 핏물 들어간 코를 흥 풀었다.

"끄···어억."

우드득!

그리고 덜덜 떨고 있는 주문쟁이의 목을 즈려밟아, 길었던 고통을 끝내주었다.

그즈음 병력을 수습한 가웨인과 경비대장이 그에게 다가왔다. 경비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침묵중대 사망자 셋, 8구역 경비대 사망자 둘입니다. 나머지는 경상자들입니다."

"심문은 끝나셨습니까?"

가웨인은 그렇게 말하며 주문쟁이를 슬쩍 내려다봤다.

한쪽 팔이 다져진 고깃덩이가 되고, 반으로 쪼개진 채 바닥을 구르는 머리통에서는 진액이 줄줄 새어나오는 광경.

그저 심문이라기엔 과할 정도로 잔혹한 광경을 만든 장본인은, 무심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없이 천천히 턱을 쓰다듬으며, 주문쟁이가 토해낸 내용을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누가 배신했는지.

대사도는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결론은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다.

"···썩을."

아무래도 이놈들, 같이 죽기로 작정을 한 것 같다.

***

그 시각. 다른 부대들 역시 비슷한 습격을 받았다.

백여 마리의 괴인과 사교도 수십으로 구성된 적들의 기습적인 공격.

몇몇 부대는 큰 타격을 받기도 했으나, 다행히도 패주한 부대는 전무했다.

덕분에 작전했던 바와 같이, 경비단은 좀 더 나아간 곳에 전진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사교도들이 자리잡은 광산을 중심으로, 원래보다 절반 이상 줄어든 포위망.

그렇게 새 방어선이 구축되고 난 이후, 후방에서 기존의 방어선을 지키던 부대들 역시 천천히 합류했다.

이들은 몇 안 남은 사교도의 잔당을 처리하고, 건물마다 숨어있는 민간인들을 구출해냈다.

"아브아! 으아아앙―"

"으흑, 여보!"

"이제 살았어!"

사교도들에게서 피해 숨어있다가, 구출되자마자 긴장이 탁 풀리며 울음을 터뜨리는 생존자들.

재회한 가족과 부둥켜안고 오열하는 몇몇 8구역 경비대원들.

살아남은 이들의 울음 섞인 환호는, 경비단의 사기를 크게 끌어올렸다.

그렇게 노랫소리와 함께 해가 저물어갈 무렵.

예상 밖의 손님이 경비단을 방문했다.

구웅―

해질녘의 불그스름한 색조가 뒤덮은 거리 위.

울퉁불퉁한 석재가 촘촘하게 박힌 도로를 따라, 기이한 울림이 퍼져나갔다.

구웅―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던 병사들마저 화들짝 놀라 막사 밖으로 달려나왔다.

몇몇은 그 짧은 사이에 무기와 갑옷까지 갖춰입은 채였다.

구웅―

거리의 자갈들이 우르르 튀어오른다. 지진이 난 것도 아닌데 땅이 들썩이는 것만 같았다.

해질녘의 노을을 등진 채 대로를 따라 걸어오는 건, 흙빛의 로브를 뒤집어쓴 일단의 무리.

그들의 곁, 말을 타고 따라오던 침묵중대원이 소리 높여 무리의 정체를 밝혔다.

"순은 구역의 엘가이아 마탑에서 보낸 지원군이오!"

구웅―

한 걸음.

땅이 울린다.

땅과 교감하는 대지술사들의 행진은, 그 자체로 주변을 압도하는 기세를 발했다.

몰려나왔던 경비병들이 우르르 몰려나며 길을 텄다. 당황 섞인 웅성임이 경비병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마법사?"

"엘가이아 마탑이래."

"순은 거리에서 지원군을···?"

소란은 길지 않았다. 머지않아 경비대의 지휘관들이 마법사들을 맞이하러 나온 것이다.

가장 앞에서 걸어오던 마법사가, 그 모습을 보고 머리를 깊이 덮고 있던 두건을 걷어올렸다.

갈색으로 길게 길러 묶은 수염과, 기이하게 번뜩이는 갈색 눈동자.

엘가이아 마탑의 원로 마법사 펠버 발렌티노는, 지휘관들 사이에서 삐딱하게 서 있는 댈런을 보며 웃었다.

"오랜만일세, 댈런."

"오랜만이오, 노인장."

댈런은 대충 고개를 숙였다. 그 건성의 인사를 받은 노인은 느닷없이 껄껄 웃어젖혔다.

"으하하! 으하! 내 오래 살기를 잘했어. 원로 마법사가 되어 용병에게 노인장 소리도 들어보다니!"

"불편하면 다른 호칭을 써드리겠소."

"끌끌, 아닐세. 아니야. 그래서 자네가 마음에 더 드는 것이니까."

웃음기 머금은 노인의 눈이, 순간적으로 이채를 발했다.

"그 사이 주문에도 한 발을 담궜구먼. 그래, 자네는 대체 어디까지 올라갈 생각인가?"

"글쎄."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시체야 뭐, 주울 수 있는 대로 최대한 주워먹어야지.

그의 짧은 대답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원로 마법사는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자네의 잠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내 꼭 확인해보고 싶네만···이 자리는 적절하지 않은 듯 하군.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합세. 그나저나, 여기 책임자가 누구인가?"

저벅.

펠버의 말에, 댈런의 곁에 있던 가웨인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왔다.

"원로께서도 알다시피, 청동 경비단은 순은 기사단과 다르게 지휘권이 철저하게 분산되어 있소. 나는 임시 대표일 뿐이고. 그와 별개로, 엘가이아 마탑에서 따로 지원군을 보낸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소만······."

"내 저기 있는 젊은 친구와 약조한 게 있어서 말일세. 개인적인 보상을 거절하고, 도시를 위해 마탑의 도움을 청할 기회를 택한 친구지."

"···그렇소이까?"

하수도에서 금발의 젊은 마법사를 구해낸 다음날.

댈런을 만난 원로 마법사는 감사의 의미로 추가 보상을 제안했다.

원래는 한 다스가 넘는 마탑제 재생 포션이었던 추가 보상.

하지만 댈런의 혈관에 용혈의 재생 인자가 흐르는 걸 간파한 마법사는, 그 대신 다른 보상을 제안했다.

'도시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네가 요청한다면 내 최선을 다해 한 번은 도와주도록 하지. 그 위기가 크던 작던, 어디에서 일어나건 상관없이 말이야.'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개 용병에게 건넨다기에는, 뭔가 굉장히 이상한 어감의 제안.

댈런은 잠시 고민하다가, 포션 가방 대신에 그 약조를 받아내기로 했다.

그 결과는 바로 지금 이 광경이었다.

경비단의 요청에도 묵묵부답이던 순은 구역의 지원군을, 단 한 명의 목소리로 불러낸 것.

"결과적으로는 자네 덕에 맺어진 인연 아니겠나? 자네의 공도 없진 않다네."

펠버는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 댈런은 뒤늦게 확답을 얻은 셈이 됐다.

저 노인장이 나한테 지명의뢰를 맡긴 거, 침묵중대장의 추천 때문이 맞았다는 거지.

"어찌됐건 환영하오. 마탑의 지원은 언제나 환영이지. 미리 연락을 받지 못해, 순은 구역의 손님들에게 어울리는 잠자리는 갖추지 못했소. 양해 부탁드리오."

"끌끌, 아닐세. 우리야 등을 받쳐줄 넉넉한 대지의 품만 있다면, 어디서든 쉬고 눈을 붙일 수 있네."

"배려에 감사드리오."

가웨인은 몇몇 경비병들에게 마법사들을 숙소로 안내하도록 했다.

서른 명쯤 되어보이는 마법사의 무리는, 그 안내를 따라 새로 구축된 방어선 근처의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 등장할 때와는 달리, 그들의 발걸음은 더이상 압도적인 기세를 뿜어대지 않았다.

'하여간 겉멋만 잔뜩 들어서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댈런은 불편한 얼굴로 눈썹을 까딱거렸다.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그는 이상하게 주문쟁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밤이 깊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됨에 따라, 새로 구축된 방어선의 분위기는 한창 달아올라 있었다.

이대로 사교도들의 본거지인 광산까지 밀고 들어가, 놈들을 일망타진하자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올 정도.

중대원들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은 가웨인은, 약간 피곤해진 얼굴로 진영의 외곽지대에 발걸음을 들였다.

인적 없는 진영의 외곽.

보름달이 휘황찬란하게 내리쬐는 빛 한가운데, 오늘 작전의 일등 공신이 멘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언제나 뚱한 표정이었던 평소와는 달리, 어딘가 약간 들뜬 듯한 얼굴을 한 채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오셨군."

크으. 작게 내뱉는 숨에서 고소하면서 씁쓸한 향이 퍼져나간다.

그 향취는 희미했지만, 가웨인의 예민한 감각은 이를 맡아낼 수 있었다.

다시보니 댈런은 수통을 끌러 연신 그 내용물을 마시고 있었다. 가웨인이 물었다.

"술이오?"

"술만큼이나, 아니 대륙에서는 희귀한 편이니 어떤 의미로는 술보다 더 좋은 거지."

가웨인은 살짝 멍한 얼굴이 되었다.

흔히 술보다 더 희귀하고 좋다고 하면, 뭘 의미하는가?

'설마, 마···약······?'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웅이라고 칭송받아도 모자람이 없는 용병이, 치열한 전장 한가운데서 약쟁이 짓을 한다고?

당장 오늘만 해도 은가면 사도 하나를 반 죽여놓은 뒤, 심문해서 적들의 정보를 캐낸 장본인이었다.

깊은 밤중에 이런 으슥한 곳으로 불러냈기에, 그 정보에 대해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커피일세. 이상하게 이 친구가 커피를 좋아하더군. 까마귀 둥지에 물어보니, 다도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고 하던데."

후두둑.

발밑에서 자갈과 흙먼지를 굴리며, 원로 마법사 펠버 발렌티노가 나타났다.

"······!"

가웨인은 순간이지만 등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청동 경비단에서 한 손에 꼽는 실력자인 그마저, 순간적으로나마 기척을 놓쳤다.

미궁의 입구가 있는 순은 구역에 괴물 같은 실력자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피부로 직접 겪는 건 다른 법.

가웨인이 펠버로 인해 기이한 경쟁심과 향상심을 느끼고 있을 무렵, 댈런은 못내 아쉬운 듯 수통의 뚜껑을 닫았다.

"다 모였으니 이제 이야기해도 되겠군."

댈런은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그가 말했다.

"침묵중대장께선 알고 있겠지만, 오늘 은가면 사도가 하나 더 죽었소."

"다행이군. 놈들의 악행은 나도 익히 들었네."

원로 마법사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다행이지. 그리고 그냥 죽인 게 아니고, 죽이기 전에 심문을 좀 했소. 회의를 열지 않고 이렇게 두 분을 따로 모신 건 그 내용 때문이오."

"설마 첩자가 있는 것이오?"

가웨인이 끼어들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그리고 그보다 심각한 사실도 하나 알게 되었고."

후. 댈런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놈들의 대사도가 악마를 소환하려 하고 있소."

침묵의 밤(1)

'대사도께서는···악마를 소환하려 하신다. 지옥의 문을 열고 마물의 군대를 불러오실 거야.'

팔 한쪽이 뼈까지 으스러진 채, 은가면 주문쟁이는 그렇게 말했다.

'제물이 없을 텐데.'

댈런은 반박했다.

'최하급 악마를 소환하는 데에도 600명분의 인간이 필요하지. 놈에게 복종하는 마물들까지 소환하려면 그보다 더 필요하고.'

'어, 어떻게 그런 것까지···?'

'내가 질문을 하랬나?'

댈런의 발이 슬쩍 올라갔다. 주문쟁이는 곧바로 턱을 덜덜 떨며 대답했다.

'그, 그분의 육신이, 곧 600명의 인간과 맞먹는다.'

'···그렇군.'

그렇게까지 나오겠다는 건가.

댈런은 속으로 온갖 쌍욕을 하면서, 은가면 주문쟁이의 목을 끊어버렸다.

여기까지가, 오늘 낮에 있었던 이야기.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이곳은 살아있는 세계다.

모든 존재가 각각 지성과 감정을 가지고, 게임 속 알고리즘이 아닌 온전한 자신의 판단으로 움직이는 세상이다.

그렇기에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어뜯듯이, 대사도 역시 극단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겠지.

그 극단적인 선택이, 자기희생을 각오하면서까지 지옥문을 여는 결정이라는 건 예상 밖이었지만.

'그래서 그렇게까지 병력이 돌입하는 걸 막으려 했던 건가.'

턱살을 출렁이던 배불뚝이 지휘관을 떠올리며,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7구역의 경비대장이 배신자 중 하나인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애당초 게임에서도 놈은 밥 먹듯이 뒤통수를 치곤 했었으니까. 흔한 엑스트라 배신자 중 하나였다.

어쨌든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제물이 많이 필요할 뿐, 지옥의 문을 여는 의식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으니까.

최하급 악마를 소환하는 것 정도라면, 하루이틀 사이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여기서 조금만 지체되어도, 지옥에서 기어나온 마물들은 승기에 취해 무방비해진 아군 병력을 덮칠 것이다.

공격은 최대한 빨라야 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누구를 공격에 가담시키느냐.'

은가면 주문쟁이에게 들은 바로, 청동 구역의 지휘관들 중 몇몇은 이미 사교도들에게 포섭된 상황이었다.

그게 누구냐가 문제였다.

드넓은 청동 구역에서, 수백 명의 병력을 통솔하는 지휘관만 수십이 넘어가는 바.

당장 지금 진영에 모인 경비단 병력만 봐도, 지휘관의 숫자가 서른 남짓 되는 판이다.

아무리 댈런이라도 그 중에 누가 배신자인지 일일이 선별하는 건 불가능했다.

머릿속에 무슨 모든 NPC의 명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세계가 현실이 되면서 원래라면 등장하지 않던 이름 없는 NPC들마저 이름을 얻게 된 상황이니까.

이렇게 된 이상, 병력 전체를 동원하는 건 불가능했다.

필요한 건 사교도들뿐 아니라, 혹시 모를 마물의 무리에도 대적할 수 있는 소수의 전투원들.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을 수 있는, 은밀하게 움직이는 게 가능한 정예병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결과 불러모은 것이, 바로 침묵중대장과 원로 마법사였다.

***

"···그리 된 게로군."

심문의 전말을 들은 원로 마법사 펠버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가 들은 전말은 원래의 게임이 어떻고, NPC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제외하고 한 이야기였다.

"사교도들이 악마를 불러낸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봤네만, 그걸 이 도시에서 보게 될 줄이야."

"당장 중대원들을 준비시키겠소."

가웨인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펠버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나와 함께 온 친구들을 데려오도록 하지. 얼마 안 걸릴 걸세."

댈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헐렁하게 풀어두었던 갑옷 끈을 조이고 내려놓았던 손도끼와 검, 방패를 장비했다. 그가 말했다.

"나는 그동안 8구역 경비대장에게 사정을 말해두도록 하지. 두 분 모두, 한 시간 뒤에 다시 보겠소."

***

준비는 금세 끝났다.

침묵중대는 언제든 전투에 투입될 준비를 마쳐놓는 정예들이었고, 마법사들은 몸만 오면 될 뿐 준비랄 게 딱히 없었으니까.

새벽 3시.

경계를 서는 불침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병력이 전투력 보존을 위해 침소에 들었을 시각.

끼이이―

임시로 구축한 간이 목책 문을 열고, 일흔 명쯤 되는 인원이 방어선을 빠져나왔다.

먼저 침묵중대가, 그 다음으로 엘가이아 마탑의 지원군이.

가장 마지막으로 나와 목책 문을 닫으며, 댈런은 안쪽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젊은 지휘관에게 감사를 표했다.

"배려해주어 고맙소."

댈런을 위해 몰래 문을 열어준 8구역 경비대장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8구역 경비대, 아니 8구역의 모든 시민들이 당신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닙니다."

댈런은 목덜미를 긁적였다. 이렇게 대놓고 들으니 좀 낯간지러운데.

낮 동안 이루어진 구출작전으로, 8구역에서 구출된 시민은 천여 명 이상.

이 젊은 지휘관 역시 가족과 극적인 재회를 이루었다. 그의 눈시울은 아직까지도 살짝 붉어져 있었다.

댈런은 짧게 인사했다.

"다녀오겠소."

"저는 그동안 첩자들이 부대 내에서 분열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경계하겠습니다. 사교도들을 부탁드립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돌아 어둠 속으로 걸어나갔다.

횃불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길.

앞서간 침묵중대와 마법사들은 이미 어둠 속에 묻혀있었지만, 야간 시야 스킬의 보정을 받은 댈런은 저 멀리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인적 하나 없는 도로를 따라 걸으며, 불빛이 일렁이는 방어선에서 점점 멀어진다.

그리고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될 때쯤.

탓―

댈런은 뛰기 시작했다.

'대사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간을 끌려고 한다.'

놈은 은가면 사도와 수많은 병력들을, 그저 부대를 저지하는 용도로 내보냈다.

모든 병력을 모아 광산에서 결전을 벌였다면, 낮에 있었던 전투보다 더 나은 결과를 예상해볼 법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악마들 중 누굴 소환할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의 생각에 시간 벌이용으로 희생한 병력들보다 가치 있는 카드라는 거지.'

댈런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적당한 제물로 소환할 만한 악마가 뭐가 있을까.

'리스트? 아냐, 이런 데 낄 성격은 아니지. 벨자이붑? 놈이 요구하는 제물은 지금의 대사도가 감당할 수 없을 텐데. 아니면···클라카로스?'

떠오르는 건 많았다. 후보가 하나가 아닌 게 문제였다.

애당초 네임드 악마만 수백 마리가 넘어가는 게임이다. 이름 없는 악마는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끝없이 떠오르는 이름들. 댈런은 고개를 저어 생각을 끊어냈다.

'당장 중요한 건 어떤 악마를 상대하냐가 아니다. 지옥문을 여는 의식을 저지하는 게 최우선 순위야.'

어느새 그의 신형은 앞서가던 침묵중대와 마법사들을 따라잡고 있었다.

댈런이 가까이 다가오자, 다른 일행들 또한 보조를 맞췄다.

"중대 전원, 속보로 이동한다."

"엘르, 테힐탈라―"

갑주를 걸친 병사들이 달리기 시작한다. 대지술사들은 주문으로 발밑의 모래흙과 자갈을 움직여 속도를 높였다.

일반적인 경비단 병력의 행군 속도보다 배 이상 빠른 이동.

사교도들의 본거지가 있는 광산까지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광산 앞.

"여기인 듯 하오."

살짝 가빠진 숨을 천천히 내쉬며, 가웨인이 말했다.

그들의 앞에는 거대한 절벽이 솟아 있었다.

마치 산의 일부를 칼로 썰어다가 옮겨놓은 듯한, 기이한 모양의 절벽.

그 절벽 아래쪽에는 인공적으로 입구를 다듬은 동굴이 있었다.

끊어진 철로. 말라붙은 핏자국. 여기저기 넘어진 광산차들.

마치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의 입구는, 오래된 폐광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그 음산함은 그저 기분때문만은 아니었다. 댈런은 감각 끄트머리에 걸리는 어떤 불길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일반적인 오감과, 그 오감이 초인의 영역에 들어서며 느끼게 된 육감.

그 둘 모두와도 전혀 다른, 마력을 느끼는 또 하나의 감각.

흔히 기감이라, 혹은 마력 감응력이라 부르는 마법사들의 감각이었다.

"맞는 것 같네. 불길한 마력이 느껴져."

펠버는 천천히 수인을 맺으며 말했다. 다른 마법사들도 비슷한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즉시 주문을 사용할 수 있게 미리 준비해두는 모습이었다.

침묵중대 역시 전원이 무기를 뽑아들고 자세를 낮췄다.

긴장감 내려앉은 분위기. 적막 속에서 들리는 호흡들.

댈런은 그 사이에서 가만히 광산 입구를 바라보다가, 그냥 혼자서 천천히 걸어나갔다.

"댈런?"

스윽.

도끼를 뽑아들었다. 하지만 던지지는 않았다.

그는 도끼를 천천히 던졌다 받았다 하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서 있었다.

"댈런? 지금 뭘······."

찰박.

그리고 발소리가 들렸다.

뭔가 축축한 바닥을 내딛는 것 같은, 습기 가득한 발소리가.

댈런은 고개를 슬쩍 기울인 채 광산 입구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 끝, 주 갱도의 지지대가 달빛을 가려 만들어진 그림자 속에서 한 인영이 걸어나왔다.

찰박···. 찰박···.

진액이 질퍽하게 묻어나는 발걸음. 온몸에 긁히고 찢어진 상처 사이로, 왈칵이며 새어나오는 진액과 핏줄기들.

겉으로 드러나는 피부가 거진 다 벗겨져 알아보기 힘든 얼굴이었지만, 댈런은 남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다 뜯겨나간 갑옷 사이로 출렁이는 뱃살과, 갈기갈기 찢어져 살점이 대롱대롱 매달린 이중턱에서.

원래 붉던 얼굴은 이제 피범벅이 되어 새빨개져 있었다.

댈런은 끔찍한 몰골이 된 7구역 경비대장을 보고, 씁쓸한 기분이 들어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그때 그나마 멀쩡한 한쪽 눈으로 댈런을 발견한 경비대장이, 두 팔을 앞으로 뻗으며 소리쳤다.

"으어, 으어어. 살려줘. 배, 배신, 놈들이―어억!"

콰직!

그리고 말을 끝맺기도 전에, 가슴팍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며 그는 눈을 까뒤집었다.

"역겹군. 배신자 새끼가 배신을 운운하다니."

"커억, 어으으······."

경비대장의 가슴팍을 관통한, 두툼하고 굵직한 팔뚝.

손과 팔 전체를 덮은 매끈한 파충류의 비늘이, 피에 젖은 채 달빛을 반사해 광택을 흘려댔다.

"그 어디에도 쓸 데 없는 버러지 같은 네놈의 생명이지만."

그와 똑같이 생긴 두꺼운 손이, 천천히 경비대장의 머리를 잡아채고.

"걱정 말도록. 제물로서 분에 넘치는 영광을 누렸으니."

짐승의 것처럼 그르렁대는 굵고 낮은 목소리가 말을 맺는 순간, 우악스런 손아귀 안에서 경비대장의 머리가 폭발했다.

콰지직!

후두둑 떨어지는 하얗고 붉은 조각들.

댈런은 머리를 잃고 쓰러지는 시체 뒤, 산만 한 덩치의 은가면 사도를 가만히 쳐다봤다.

놈은 세로로 죽 찢어진 눈을 번뜩이며, 마법사와 침묵중대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때맞춰 손님들이 오셨군. 늦지 않게 대접해드릴 수 있게 됐어."

쿠웅―

놈의 뒤.

묵직한 울림이 갱도 입구를 메아리쳤다.

쿠웅―

댈런만큼이나 큰 사도의 덩치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그림자가 광산의 입구를 비집고 나타난다.

쿠웅―

달빛 아래에 모습을 드러낸 건, 수십 인간의 육신이 한데 붙어 만들어진 듯한 괴생명체.

긴 꼬리를 뒤쪽으로 늘어뜨리고, 아름드리 나무만큼이나 굵은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한 괴물은.

끼에에에에에에―!!

수십 개의 입으로 동시에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지, 지옥의 마물!"

그 담력 강한 침묵중대마저 움츠러든다.

인간 수십의 팔과 다리, 머리, 몸통이 역겨운 형태로 한데 뒤섞인 괴물은 충분히 그럴 정도의 위압감을 뿜어댔다.

침묵중대장 가웨인마저 이를 악물고 놈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앞에서 평소와 별 달라지지 않은 건, 댈런 한 명뿐이었다.

휘릭, 툭. 휘릭, 툭.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도끼를 들었다, 받았다 하는 그의 손.

마지막 남은 은가면 사도는 그걸 보더니 낮게 클클거렸다.

"역시 대사도께서 경계하시는 전사답군. 여유로워. 대체 그 머리통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꺼내보고 싶을 정도야."

댈런은 별 대답 없이 은가면 사도를 힐끗 보고는, 다시 괴물을 올려다봤다. 도끼를 던졌다 받았다 하는 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게 그 유명한 손도끼군. 우리 은가면 사도들 중 절반 이상을 죽인 그 도끼 말이야."

"아닌데."

"···무슨 소리지?"

"이거 그 도끼 아니라고, 부숴먹었거든."

가면 너머, 세로로 길쭉하게 찢어진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아니다. 최근에 만난 주문쟁이는 이걸로 죽인게 맞군. 내가 잘못 생각했다."

"뭘 말하고 싶은 거냐?"

"말하긴 뭘 말해."

댈런의 손이 흐릿해졌다. 패래랙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약간 늦게 들렸다.

은가면 사도가 황급히 몸을 틀며 팔을 들어올렸지만, 도끼를 피해내기엔 너무 늦은 동작.

퍼억―!

날붙이로 두툼한 가죽을 찍어내는 소리와 함께, 놈은 가면 파편을 흩날리며 버려진 광산차 안에 처박혔다.

댈런은 휘휘 손을 풀며 말했따.

"그냥 블러핑 좀 한 거지. 고지식하기는."

그는 한 걸음을 내딛었다. 오랜만에 힘을 좀 써도 될 것 같았다.

저번 레벨업으로 얻은 능력치를 체력에 투자했고, 상회에서의 전투 이후로 용혈의 재생 인자도 숙련도가 많이 오른 상태.

몸 풀기로 저 시체괴물 정도면 딱 적당했다.

키에에에에에―!!!

은가면 사도가 쓰러지자 괴성을 질러대는 시체괴물.

언제라도 달려들 듯이, 놈이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침묵중대! 돌격―"

"엘르···."

마물의 비명 앞에서, 숙련된 전투원들은 신속하게 대응했다.

가웨인이 돌격을 외치고, 마법사들의 입술이 달싹이는 건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

그리고 그보다 반 박자쯤 앞서서.

콰아앙!

댈런이 서 있던 자리에서 폭발하듯이 흙더미가 튀어올랐다.

그리고.

뻐어어엉―!

울부짖던 시체괴물의 아래턱이, 바위로 찰흙덩이를 내려친 듯 터져나갔다.

끼에에에에―

댈런은 덜렁거리며 남아있는 위턱에 매달린 채, 오른손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그가 웃었다.

"어디, 처음 만나는 지옥 마물은 얼마나 경험치를 주는지 확인해 보자고."

그건 사납게 입꼬리를 말아올린, 포식자의 웃음이었다.

침묵의 밤(2)

끄에에에에―!

아래턱 떨어진 시체괴물이 비명을 질렀다.

아래턱이 박살나며 목 부분까지 일부 떨어졌음에도, 그 비명에는 변함이 없었다.

놈이 비명을 내지르는 방식은, 일반적인 동물처럼 목구멍으로 내지르는 게 아니었기 때문.

흐에에에에에―

놈의 몸뚱이를 구성하고 있는 수십 개의 몸통과 팔다리 사이사이로, 눈을 하얗게 뜬 채 고개를 내민 수많은 머리들.

허어어―

꺄아아아아!

흰 머리칼 노인의 머리, 검은 피부에 코가 오똑한 여자의 머리.

으아아아아!

우어, 우어어어!

입술 절반이 뜯겨나간 청년의 머리, 눈과 코와 귀가 뭉개진 머리.

지옥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을 증명하듯, 인종과 성별이 뒤섞인 얼굴들이 제각기 비명을 질러댄다.

놈이 질러대는 괴성은, 그 다채로운 비명들의 합주곡이었다.

"···지랄을 하네, 진짜."

댈런은 시체괴물의 위쪽 턱에 매달린 채 얼굴을 찌푸렸다.

코앞에서 수십 명이 떼창을 질러대니, 말 그대로 귀청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는 찌푸린 얼굴 그대로 검을 올려그었다.

콰지지직―!

검끝에 내장과 살덩이가 엉겨붙는다. 뼈마디 수십 개가 한 번의 검격에 쪼개졌다.

덜렁대던 머리 윗부분이 그 일격에 몸에서 끊어져 떨어졌다.

콱!

댈런은 떨어지는 시체 덩어리를 걷어차고, 그 반동으로 괴물의 몸통 위에 올라섰다.

끼에에에에!!

머리가 끊어졌음에도, 시체괴물은 여전히 비명을 질러댄다.

애당초 평범한 칼질로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놈은 수십 구의 시체가 지옥의 마력으로 한데 뭉쳐진 마물.

그 마력의 핵을 찾아 파괴하는 것이, 가장 정석적인 사냥법이었다.

콰직!

댈런은 놈의 등판에 검을 박아넣었다.

그의 검끝에 비쩍 마른 남자의 몸뚱이가 꿰뚫렸다. 얽혀 있던 팔다리도 몇 개쯤 잘려나갔다.

흔들리는 괴물의 등판 위. 댈런은 떨어지지 않게 검을 꽉 잡은 채 감각을 넓혀갔다.

평범한 오감이나, 초인의 육감이 아닌 마법사의 마력 감응력.

그건 마력 수치가 10을 돌파할 때부터 어렴풋이 느껴지다가, 주문을 사용하며 확실하게 깨닫게 된 감각이었다.

스으으―

눈을 감고 집중한다. 괴물의 몸속에 휘도는 불길한 마력의 흐름을 읽어낸다.

수십 구의 시체를 붙들어 메고, 이미 죽은 그 몸뚱이들에 고통으로 가득한 내생을 부여하는 지옥의 마력.

높은 지능 수치로 그 흐름을 역산해, 마력이 뻗어나오는 중심부를 찾아낸다.

'저기군.'

댈런은 눈을 떴다. 그는 깊이 박힌 검을 오른손으로 잡아채고, 빈 왼손을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한 번 거하게 불장난을 쳐 본 이상, 주문을 사용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공기중에 흘러다니는 마력의 바람을 엮어내, 불꽃의 심상을 투영하며 구체화한다.

"이그넬 로트."

화륵!

영창으로 그 실체를 물질계 위에 빚어내고.

꽈악―

불꽃의 화살을 주먹 안에 말아쥔 후, 댈런은 그 주먹으로 괴물의 등판을 내려찍었다.

뻐어어엉!

살가죽이 터져나가는, 북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

숙련도 70퍼센트를 넘어선 데하만의 갑주격투와, 댈런의 비상식적인 근력이 만나 괴물의 등판에 깊은 구멍을 뚫어버렸다.

그 구멍의 끝, 검붉은 색조로 일렁이는 마력의 구체.

'빙고.'

댈런은 그 중심을 향해, 손아귀에 잡아두었던 불꽃의 화살을 쏘아보냈다.

화르르르!

마력을 연료 삼아 타오르는 화염이, 괴물의 핵을 향해 쏘아진다.

평소에는 뼈와 근육, 살덩이의 갑주에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는 마력의 핵.

몸 가장 깊은 곳에 감춰져 있다는 건, 곧 괴물의 가장 큰 약점이라는 걸 의미한다.

쩡―!

불꽃의 화살이 마력핵에 충돌하는 순간, 쩌적 하며 뭔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고.

끄에에에에―!

놈을 구성하는 모든 시체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른 직후, 거대한 몸뚱이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한다.

쿠르르르―

폭포처럼 쏟아지는 살덩이와 뼛조각, 팔과 다리, 내장의 향연.

뒤틀린 시체의 조각들이 사방팔방으로 굴러간다.

"우읍···!"

대열을 갖추고 서 있던 침묵중대원들 중, 몇몇의 안색이 노랗게 질린다.

비위가 약한 마법사 중 두엇은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구토를 해댔다.

한편 쏟아진 시체의 언덕 위에서, 댈런은 여상한 태도로 어깨에 붙은 내장조각을 툭툭 털어내고 있었다.

그의 고개가 문득 광산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그 시선의 끝.

갱도 안쪽에 처박혀 박살난 카트가 덜컹거리더니, 은가면 사도가 천천히 일어나는 게 보였다.

***

"과연 대단한 전사로군. 망자 골렘을 홀로 쓰러뜨리다니."

은가면 사도, 라크티는 온몸에서 진액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전사의 도끼는 그의 팔뚝에 박혀 있었다.

피하지는 못했으나, 찰나의 순간에 팔로 막아내는 데는 성공한 것.

원래라면 팔이 잘려나간 후, 이마에 도끼가 박혔어야 할 터.

그러나 비록 혼혈이긴 해도, 리자드맨 혈통의 가죽이 굉장한 방어력을 자랑하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오는 손도끼를 막고도, 팔이 잘려나가지 않았으니 말 다한 셈.

그 충격으로 카트에 처박힌 채 광산 벽에 내던져진 꼴이 됐지만, 대사도가 내려준 재생력은 이 정도 타박상쯤은 거뜬하게 치유할 수 있는 기적이었다.

촤악!

라크티는 팔에 박힌 도끼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눈앞의 전사에게 던졌다.

휘리리릭!

단숨에 상대방의 머리를 쪼갤 듯 날아가는 손도끼.

그는 확신했다.

설령 피하거나 막는다 해도, 이 공격으로 말미암아 전사의 자세에 틈이 생기리라고.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틈은, 내 공세의 첫 주춧돌이 되어줄······!'

휘리릭― 착!

거구의 전사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도끼를 잡아내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전사가 말했다.

"고맙다. 돌려줘서."

라크티는 멍청한 표정이 되어 전사의 손에 잡힌 도끼를 쳐다봤다. 그가 중얼거렸다.

"···과연, 나 혼자 상대할 수 있는 전사가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겠군."

라크티는 등 뒤에서 커다란 양날도끼를 끌러내렸다.

도끼머리가 평범한 사람의 몸통만 한, 들고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이는 전투도끼.

그런 물건을 가볍게 그러쥔 채, 그는 세로로 죽 찢어진 눈을 빛내며 말했다.

"허나 홀로 상대할 필요 없지. 지옥의 문은 열렸고, 네놈의 살점을 탐하는 마물들이 이미 달려오고 있으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광산 저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낮고 선명한 울림.

라크티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웃어젖혔다.

갱도 안쪽을 지그시 바라보는 저 전사는, 분명 어둠을 꿰뚫어볼 수 있는 시야의 소유자겠지.

그렇다면 놈은 볼 수 있을 것이다.

수백에 달하는 마물의 군대가, 갱도를 우르르 진동시키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광경을.

라크티가 말했다.

"허나 나 뿐만 아니라, 수백 마물의 군대와 악마의 힘을 얻은 대사도님을, 과연 네 혼자 힘으로 상대할 수 있겠는가?"

"나도 솔플 아니거든."

"···뭐라?"

라크티는 처음 듣는 단어에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걸 본 전사가 픽 웃었다.

"솔플로 보스전 뛰러 온 거 아니라고, 새꺄."

전사는 손도끼를 허리띠에 꽂아넣고, 방패를 끌러내려 왼손에 들었다.

그리고 그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침묵중대! 앞으로―"

"아티움―메룬!"

함께 온 마법사와 병사들이, 광산 입구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

"일자진― 펼쳐!"

가웨인의 명령에, 침묵중대가 진형을 해체하고 우르르 달려나온다.

갱도 입구에서 신속하게 일자 대형을 재구축한 뒤, 방패와 무기를 앞세워 방어선을 가다듬는 중대원들.

널부러진 시체에 비위가 상하건 말건, 훈련으로 연단된 동작은 칼 같이 정확하고 빨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번쩍!

펠버가 시전한 주문으로, 수박만 한 빛의 구 십여 개가 빛을 뿜으며 광산 안을 향헤 날아들었다.

눈이 시릴 정도로 강렬한 빛을 뿜어대며, 갱도 저 깊은 곳까지 환하게 밝히는 구체들.

그 빛 아래, 갱도 안쪽에서부터 달려나오는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끼에에에에―!

끄에에에!

가장 앞장서서 내달리는 건 뒤틀린 인간의 형상이었다.

사람을 꺾고, 일그러뜨리고, 접붙여서 만든 듯한 괴인들.

저마다 팔다리를 세 개나 다섯 개, 혹은 열 개 가까이 단 흉측한 몰골이었다.

심지어 머리가 둘이거나, 아예 반쪽밖에 없는 놈도 있었다.

쿠웅―

그리고 그 뒤에서 천천히 기어나오는, 댈런이 잡은 것과 비슷한 형태의 거대한 망자 골렘들.

수백 괴인과 열에 가까운 망자 골렘의 돌격은, 침묵 중대의 방어진이라 해도 짓밟아버릴 수 있는 질량이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방어선의 뒤쪽.

엘가이아 마탑의 마법사들이, 두 번째 주문의 수인을 막 맺은 참이었으니까.

"엘르―발라둠!"

"엘르 로트!"

꽈과과광―!

돌화살이 비처럼 쏟아진다. 갱도 내부에서 거대한 종유석들이 돋아났다.

그 날카롭고 단단한 첨단이 노리는 건, 비명을 지르며 기어오는 망자 골렘.

콰직! 으지직!

끄에에에에―!

옆구리를 파고드는 뾰족한 대지의 창에, 골렘들은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무슨!"

후두둑 빗발치는 돌화살을 도끼로 쳐내며, 은가면 악어인간은 당혹스런 목소리로 외쳤다.

댈런은 놈을 향해 픽 웃으며 말했다.

"솔플 아니라고 했잖냐."

"그게 무슨 마―크윽!"

퍼버벅!

놈의 어깨와 허벅지를 찢어놓는 돌덩이 화살.

말이 화살이지 돌로 만들어진 창이나 다름없기에, 빗겨맞았음에도 가죽이 찢어질 정도였다.

진액 섞인 피를 후두둑 흘리는 악어인간을 보며, 가웨인이 이 악문 소리로 말했다.

"댈런. 저 놈은 내가 상대하겠소."

그러고보니, 침묵중대장은 저 악어인간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지.

댈런은 무의식적으로 게임 속의 자잘한 설정들 중 하나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경험치는 살짝 아쉽긴 하지만,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의 전투는 크게 불리하지 않았으나, 어찌됐건 악마가 소환되고 지옥문이 열린 상황이다.

악마를 불러내는 게 극도로 어려울 뿐, 마물의 소환은 그렇게까지 힘든 일이 아닌 바.

마물들은 기본적으로 악마에게 이끌리기에, 그들을 이끄는 악마가 물질계에 현현해있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더 많은 숫자가 넘어올 수 있었다.

'지옥문의 안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정 주기가 지나면 지금과 비슷한 숫자 정도는 소환될 확률이 높겠지.'

그걸 막는 길은 단 두 가지였다.

마력이나 신성력을 때려부어서 악마가 연 지옥문을 닫거나.

'아니면 소환된 악마를 두들겨 지옥문과 함께 역소환시키거나.'

첫 번째 선택지는 지금의 능력으로는 고를 수 없었고, 가능한 건 두 번째.

제 시간 안에 악마를 두들겨 패기 위해서는, 여기서 시간을 끌면 안 되었다.

마물과 사도는 동료들에게 맡겨두고, 댈런은 대사도와 악마를 상대하러 가야 한다.

다행히 경험 많은 침묵중대장과 원로 마법사는, 그런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노인장, 잘 부탁하겠소."

"걱정 마시게."

끝없이 수인을 맺으면서도 씩 웃어보이는 펠버를 보며, 댈런은 다시 한 번 과거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댈런은 슬슬 다리를 풀었다. 침묵중대는 이미 선두의 괴인들과 맞붙어 싸우고 있었다.

마법사들의 끊임없는 지원으로, 마물의 돌격은 이미 현저하게 약화된 상태.

빗발치는 마법의 세례를 뚫고 운좋게 도달한 놈들을 상대로, 침묵중대의 방어선이 밀릴 일은 없을 것이다.

쨍! 쨍! 쾅!

"네놈이 죽인 내 가족들! 기억하나?"

"네 어미의 야들야들한 살점이 인상깊었지! 넝마쟁이의 아들이 또 넝마쟁이를 할 줄은 몰랐지만!"

가웨인 역시 악어인간과 공방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의 약점과 원한이 지독하게 얽힌, 언젠가는 극복했어야 할 싸움.

이 전투로 인해 그의 능력과 영웅적인 면모는 한층 더 성장할 테다.

'이제 나만 잘하면 되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린 댈런은, 다리에 힘을 주고 땅을 밀어찼다.

콰아앙!

포탄처럼 쏘아지는 그의 신형.

가로로 돋아난 거대한 종유석을 딛고, 다시 한 번 도약한다.

콰과광!

순식간에 주변 풍경이 늘어지듯 스쳐 지나간다. 속도가 줄어들려 하면 종유석을 밟고 다시 도약했다.

망자 골렘의 등판이나, 갱도 벽의 구조물 역시 좋은 발판이었다.

그렇게 수십 번의 도약으로 마물의 군대를 훌쩍 넘어간 그는, 땅을 딛고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타다닥―

댈런은 거침없이 달렸다.

수백 회차의 플레이 중에서, 사교도들이 이 광산을 본거지로 삼은 적도 몇 번쯤은 있었다.

그렇기에 대사도가 어디에 있을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제 다시금 중요해진 건, 놈이 어떤 악마를 소환했느냐.

'어찌됐건 악신을 섬기는 놈이니, 궁지에 몰렸다 해도 아예 다른 진영의 악마를 소환하지는 않았을 테다.'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교도의 본거지가 광산 저 깊은 곳에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

한 버려진 갱도의 끝.

댈런은 막장에 쌓인 바윗더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원래라면 정해진 사교도들의 주문을 암호 삼아, 바위가 움직이며 샛길이 드러나는 구조.

콰르르르!

댈런은 그냥 힘으로 바윗더미를 무너뜨리고, 그 뒤에 숨겨진 샛길을 따라 계속 뛰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장정 두 명이 지나갈 법한 넓이였던 샛길이, 탁 트인 공간으로 접어들었다.

후우웅―

넓은 공동 안에 바람이 휘돌며, 댈런의 덥수룩한 머리칼을 흩날린다.

정중앙에 악신을 위한 거대한 제단이 위치한, 예의 하수도 공동만큼이나 커다란 공간.

제단 주변에는 오백여 구에 가까운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고, 하나같이 살가죽이 벗겨지거나 배가 갈라져 내장을 흘리는 채였다.

끔찍한 고문 끝에 맞게 되는 죽음.

그 과정에서의 비명과 저주를 제물 삼아 열어낸 지옥의 문.

제단 위, 검붉은 빛으로 일렁이는 타원형의 차원문 앞에서.

등 뒤에 수십 가닥의 촉수를 늘어뜨린 동색 가면의 대사도가, 댈런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서 오라."

놈이 말했다.

"신들이 주목하는 대전사, 다가올 수많은 멸망의 샛길을 피하고자 하는 영웅이여―억!"

퍼억!

댈런의 도끼가 놈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댈런은 손을 슬슬 털었다.

평소보다 좀 더 강하게 던져서 그런지, 방금은 댈런 자신마저도 쫓아가기 힘든 속도였다.

얼굴에 도끼를 꽂은 채 쓰러진 대사도를 보며, 댈런은 무심한 얼굴로 검을 뽑아들었다.

"한 방에 안 죽은 거 다 안다."

그가 말했다.

"그러니 지랄 말고 일어나."

"흐흐, 감이 좋군."

대사도가 촉수로 몸을 지탱하며 일어섰다. 놈은 도끼에 맞아 쩍 갈라진 얼굴로 웃음을 흘려댔다.

그리고 댈런은 볼 수 있었다.

놈의 머리 위, 주르륵 나열되는 글자들을.

[여섯 번째 은가면 사도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사로잡힌 대전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그건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두 개의 메시지가 나란히 떠 있는 광경이었다.

침묵의 밤(3)

수백 회차의 플레이동안, 댈런이 꼭 게임 클리어에 목숨을 걸었던 건 아니다.

가끔씩 그도 소위 말하는 '즐겜'을 하기도 했으며.

그중 몇 번은, 그동안 쌓였던 분노를 터뜨리기 위해 아예 멸망의 주동자들 측에 가담하기도 했었다.

'역행의 사도들이 첫 번째였지.'

플레이 초반, 아직까지 게임에 적응하지 못했던 시절.

대계를 일으켰다 하면 청동 구역의 반 이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사교도들에 질려, 아예 자신이 사교도가 되기로 마음먹은 적이 었었다.

사람을 괴인으로 만들고, 악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놈들의 행위는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뭐 어떠랴.

그저 게임이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가볍게 즐기는 정도였으니까. 이 세계가 현실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그리고 당시의 댈런이 예상하지 못했던 게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대사도는 말 그대로 미친 놈이었다는 것.

악신의 광기에 오염된 놈은, 대계의 끝에 은가면 사도들마저 제물로 바쳐 청동 구역을 완전히 전소시켰다.

팔다리가 잘린 채 제단에서 제물로 바쳐진 댈런의 은가면 사도 캐릭터.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댈런은 펄떡이는 심장을 들고 광기에 물든 미소를 짓던 대사도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쩌적―

대사도가 촉수를 움직여 얼굴에 박혀있던 도끼를 뽑아냈다.

놈은 도끼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흥미를 잃었다는 듯 시체더미 곁에 툭 던져놓았다.

"주문이 새겨진 물건은 아니군. 순수하게 힘으로 던졌을 리는 없으니, 어떤 비기를 사용한 건가."

두 갈래로 쪼개져있던 놈의 얼굴은, 거미줄 같은 진득한 액체가 좌좌좍 이어지더니 순식간에 붙어버렸다.

그 어디에도 뭉클거리는 진액은 없었다. 사교도들의 기술과는 완전히 다른, 악마의 힘이라는 이야기.

댈런은 천천히 놈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하급 악마 아라크네인가. 제물의 부담을 줄이고자 소환자와 한몸을 이루는 편법을 썼군."

"호오, 악마학에도 조예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대사도는 음험한 마력이 번쩍이는 눈으로 댈런을 응시했다.

악마의 피에 오염되어 보랏빛이 된 혀가, 마찬가지로 보랏빛으로 물든 입술을 핥았다.

"하긴, 뭘 알아도 이상할 게 없지. 그대만큼이나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영웅도 많이 없으니. 어디서 솟았는지 모를 은패 용병이, 거인의 힘과 짐승적인 감각, 제국의 격투술에 그 모든 걸 담아내는 지혜의 그릇까지 가지고 있다니."

뭐라 씨부리는 거여.

댈런은 말없이 계속 걸었다.

공동은 넓었고, 도끼를 던진 이상 남은 원거리 공격 수단은 불꽃 화살뿐이었다.

하지만 악마를 몸에 받아들인 대사도씩이나 되는 놈이, 고작 주문 하나에 당하지는 않을 터.

대사도 역시 기본적으로 원거리 공격에 능한 마법사이기에, 댈런은 어떻게든 이 싸움을 육탄전으로 끌고 가야만 했다.

저렇게 혼자 떠들어준다면야, 그 입장에서는 고마울 따름.

"거기에 엉덩이 무겁기로 유명한 엘가이아 마탑의 지원을 이끌어내고, 낮은 거리와 하수도 전역에 눈과 귀를 심어둔 까마귀 마녀의 도움을 받는 데다, 넝마쟁이들이 맹목적인 추종을 바치기까지."

대사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댈런은 계속 다가갔다.

그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찰박. 찰박.

제물로 바쳐진 시체의 언덕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의 발 아래 찰박거리며 튀어오른다.

피와 살점으로 만찬을 벌이던 쥐들이, 그의 발걸음에 후다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대사도 역시 눈치가 없는 건 아닌지라, 놈의 등에서 자라난 촉수들이 허공에 천천히 수인을 맺어갔다.

놈이 비릿하게 웃었다.

"허나 그 영웅의 여정도 여기까지겠군. 역행의 질서가 발아하는 이―"

콰아앙!

흙더미가 폭발했다.

그 폭발 속에서, 댈런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찰나의 순간, 석궁에서 쏘아낸 화살의 속도로 날아가는 댈런의 몸.

대사도는 촉수와 손을 앞으로 뻗어내며 주문을 외었다.

"에낙사―오브!"

터엉―!

보이지 않는 힘이 댈런을 측면에서 후려친다. 방패로 막았음에도 밀려난다.

대사도가 시전하는 악마의 주문은, 과연 범상치 않은 위력이었다.

콰지직!

제단 근처에 쌓인 시체더미 중 하나에 처박힌다. 댈런은 주저하지 않았다.

갈기갈기 찢긴 육편들 사이에서, 그의 발이 다시 한 번 바닥을 디딘다.

그리고.

퍼버버벙―!

시체더미가 폭발하며, 댈런의 몸이 다시 쏘아졌다.

"놀랍구나! 도약 그 자체가 비기였던 건가!"

대사도가 수인을 맺으며 외쳤다. 댈런은 충격파가 쏘아지기 전, 땅에 발을 딛고 내달렸다.

후웅!

밀려나는 공기는 곧 충격파의 전조. 피부를 두드리는 그 흐름을 읽어내며, 방패를 비스듬하게 들어올린다.

텅―

굳이 정면에서 받아낼 필요 없었다.

방패로 주문을 받아낸 직후, 슬쩍 방향을 틀며 충격량을 흘려낸다. 다리로 땅을 굳세게 디딘다.

우웅―

악마의 주문으로 빚어진 충격파가 피부를 훑으며 지나가고.

콰광!

댈런의 뒤에 있던 시체 더미가 꽝―하고 터져나갔다.

"···호오."

댈런은 다시 달렸다.

바닥을 미끄러지며 불덩이를 피한다. 쏟아지는 용암을 훌쩍 뛰어넘고, 촉수가 토해내는 산성 용액을 방패를 휘둘러 받아낸다.

주문의 전조를 예민한 감각으로 잡아내고, 주문마다 묻어나는 살기를 육감으로 읽어낸다.

초인적인 지능과 반사신경이, 모든 동작 하나하나를 계산해 회피와 동시에 전진하게 만들었다.

대사도는 열 번째 주문을 채 외우지 못했다.

"에낙사―"

주문을 외우려는 그의 눈앞에, 댈런의 검이 들이닥쳤기 때문.

콰직―

촉수 두어 개가 잘려나간다. 댈런은 숨을 깊이 들이켰다.

짧은 순간, 그의 검이 현란한 곡선과 직선을 그려내고.

쫘좌좌좍―!

그 경로에 있던 가죽과 살점들이 후두둑 찢겨나간다.

"끄아아악!"

대사도가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놈에게 덧입혀진 악마는, 비명 지를 시간에 다른 길을 택했다.

촉수 열 개쯤이 순식간에 잘려나가자, 악마의 일부분인 촉수가 주문으로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꽝! 꽈광!

촉수가 다시 댈런의 검에 맞선다.

이번에는 강철만큼이나 단단해진 촉수였다.

쩌정―

댈런의 검이 번쩍였다. 그의 등을 노리던 촉수가 반으로 쪼개졌다.

터어엉!

날카롭게 쏘아드는 뾰족한 촉수들이, 방패에 튕겨나며 저들끼리 충돌한다.

촉수들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댈런의 검을 붙잡고 휘감으려 했다.

댈런은 신경쓰지 않았다. 힘에서는 그가 우위였다.

하급 악마라고는 하지만, 이 촉수들은 놈의 파편일 뿐.

완전한 소환이 아니라, 소환자의 몸을 빌어 현현한 존재들이다.

본신의 힘을 채 1할도 내지 못하는 것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댈런은 지옥문을 슬쩍 바라봤다. 문제는 놈의 재생력이었다.

잘려나가도 금방 돋아나는 강철 같은 촉수들. 본체마저도 약점이 아니었다.

악마의 재생력은 대사도의 본신에도 적용되어, 검끝에 찢겨나간 놈의 팔은 어느새 다시 자라나 있었다.

치이이이―!

댈런의 육신 역시 용혈의 재생 인자로 끊임없이 회복되고 있긴 했다. 그러나 그가 불리했다.

용혈은 그의 체력을 잡아먹는 데 비해, 악마의 힘은 열려있는 지옥문에서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고 있었으니까.

꽈광!

내리친 검을 촉수가 몇 겹으로 겹쳐져 막아낸다. 검이 반으로 뚝 부러지고, 남은 부분을 놈들이 뱀처럼 휘감았다.

쉬익―!

죽 늘어난 놈이 댈런의 등을 노리고 달려든다.

휘감긴 것들을 떨쳐내고 반쪽짜리 검을 휘두르기에는, 이미 너무 깊이 들어왔다.

상관없었다. 댈런은 검을 놓아버렸다.

콰직!

주먹에 맞은 촉수가 으깨진다. 강철마저 우그러뜨릴 힘의 발현이었다.

댈런은 방패마저 던져버리곤, 맨손과 맨발로 촉수의 파도를 쳐내기 시작했다.

쩌정! 쾅! 꽈광!

더 빠른 속도로 촉수들이 터져나간다. 그리고 더 빠른 속도로 재생되었다.

댈런의 팔다리 역시 끊임없이 증기를 뿜어대며, 무리한 충격으로 손상된 피부와 근육 조직을 회복시켰다.

달인의 경지에 접어든 데하만의 갑주격투가, 그의 몸을 마치 하나의 살육기계처럼 움직였다.

보병을 학살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사의 격투술이, 악마의 파편을 찢어발기는 데 사용될 줄 그 창시자라도 예상했을까.

허나 그 수많은 촉수들을 으깨고 부수면서도, 댈런은 직감했다.

이대로 가다간, 저 괴물보다 자신이 먼저 지쳐 쓰러질 게 분명하다고.

'대전사의 시체도 힘이 부족했던 게 아니다. 회복력이 문제였어.'

대사도가 제물로 바쳐 죽인 두 번째 시체, '사로잡힌 대전사'.

저건 의외로 댈런이 게임에 완숙해졌을 때 만든 캐릭터였다.

힘 위주의 초기 능력치 배분. 높은 숙련도의 양손검술 스킬과 흑철 판금으로 만든 갑옷.

정석적인 전사 빌드로 성장한 캐릭터에, 댈런은 이미 역행의 사도들을 수십 번씩 쓸어버렸던 경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 밖의 난관에 부딪힌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 회차에서도 대사도가 악마를 소환했었으니까.'

악마들 특유의 가공할 재생력은, 대전사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무리 캐릭터 빌드를 착실하게 쌓았어도, 당시 댈런의 대전사는 기본 캐릭터에서 출발한 바.

한계가 명확한 육체로 악마와 맞서는 건, 컨트롤이나 기술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네 시간동안 보스전만 하다 죽었지.'

댈런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개 같은 게임.

다행히 그 이후 악마를 소환한 대사도와 맞붙는 일은 없었다.

어찌보면, 지금이야말로 그때의 패배를 만회할 기회.

그렇게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넘치는 힘의 육신을 입게 된 이후, 이상하게 늘어난 호승심이 댈런의 몸을 끓어오르게 한다.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으면서도, 댈런의 근육은 꿈틀거리며 제 힘을 쥐어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괜찮겠지.'

능력치는 당시보다 확연한 우위다.

26에 달하는 근력은, 기본 캐릭터라면 게임의 중반부 이후에 접어들어서야 얻을 수 있는 수치.

육체에 돌아오는 반동만 걱정할 필요 없다면, 댈런의 승산은 충분히 점쳐볼 만했다.

'필요한 건, 한 번의 공격.'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게임의 최후반부에 다다르면, 악마를 사냥하는 게 일상이 되는 시점이 온다.

그리고 끝없는 재생력에 대한 해답은, 언제나 그 재생력을 압도하는 일격이었다.

별 수 없었다.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체력 수치와, 숙련도가 40퍼센트에 가까워진 용혈의 재생 인자를 믿어보는 수밖에.

후우.

숨을 그러모은다. 깊게 들이쉰 숨이, 온몸으로 뻗어나가며 새 활력을 불어넣는다.

맥동하는 심장이 뜨겁게 달궈진 혈액을 전신으로 운반하고.

증기를 줄기줄기 흘려대는 근육이, 이 땅에 발을 디딘 이후 처음으로 온 힘을 다해낸다.

쉬이이익―!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대사도가, 촉수를 그러모아 벽을 세운다.

몇몇은 댈런의 정면에서 쏘아지며, 빈틈을 노려 저지하려 했다.

댈런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온 신경을, 말아쥔 주먹 하나에 집중할 뿐이었다.

쏘아진 촉수의 날카로운 끝이, 그의 흉터투성이 피부에 닿기 직전.

쉭―

댈런이 주먹을 뻗었다.

그리고 잠시 후.

꽈르르르릉―!

거대한 천둥소리가 공동을 뒤흔들어놓았다.

침묵의 밤(4)

대사도에게 이름은 없었다.

사도들은 그를 대사도님이라 칭했다. 하위 사교도들이나 건달들은 감히 그를 부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정적들이 좀 다채롭게 부르긴 했으나, 저주 섞인 그 호칭들 사이에도 그의 이름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는 이름이 없었으니까.

이십 년 전, 대사도는 힘을 얻기 위해 악신에게 자신의 이름을 바쳤다.

'이십 년이 흘렀음에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순간이지.'

잊을 수 없었다.

스스로의 전부를 바치는 의식의 현장.

존재감이 잿빛으로 탈색되는 듯한 영혼의 고통은, 그가 겪어본 그 어떤 것보다도 끔찍했으니까.

하지만 그날을 잊을 수 없는 건, 비단 그 고통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 다른 이유는 궁금증이었다.

'나는 누구였는가.'

고통과 함께 그의 존재가 바쳐지며, 의식 이전의 기억은 불타 재로 휘날리듯 사라졌다.

왜 이리도 이 도시를 증오하게 됐는지.

어떤 과거의 치욕과 아픔이 있었는지.

그를 구석으로 몰아 악신과 계약까지 하게 만들었던, 치 떨리는 기억은 전부 사라졌다.

남은 건 팔시온의 일곱 성벽을 향한, 그리고 금강궁을 향한 맹목적인 증오와 분노뿐이었다.

'운명을 엮는 난쟁이'의 대사도.

그를 이룬 정체성은 단 하나였다.

'···만약 그때의 청동 구역에, 이런 전사가 있었다면.'

대사도는 문득 생각했다.

다채로운 이름을 지닌 다른 필멸자들의 삶이, 부러워질 때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만약 눈앞의 대전사가 그의 과거에도 존재했다면, 그의 삶은 지금과 달랐을 것인가.

이십 년이 지나서도 머릿속을 좀먹는 망각의 고통은, 그의 유일한 선택지가 아닐 수도 있었을까.

'뭐, 이제 와서는 다 상관없는 일이다.'

난세에 영웅이 준비된다던가.

신의 대사도인 그가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품게 할 정도로, 눈앞의 대전사는 영웅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존재였다.

홑몸으로 은가면 사도를 전부 죽이고, 십 년이 넘도록 준비한 그의 대계를 철저하게 짓밟았다.

초인적인 육체와 달인의 격투술을 익혔으며, 근원을 알 수 없는 비밀의 지식들과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예지에 가까운 판단력마저 지녔다.

신들이 그를 주목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은 영웅의 편이 아니지. 이 대전사의 길도 이곳에서 끝나는구나.'

대사도는 아스라이 흩어지는 감정 속에서, 무감각한 눈으로 전사를 바라봤다.

쩌정―

휘둘러진 주먹에, 촉수가 으스러진다.

콰광!

전사의 발이 촉수를 짓밟고 끊어낸다.

순식간에 몇 개의 촉수가 무력화됐으나, 그 뒤에는 수십 개가 더 되는 강철 촉수가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부서지고 깨진 그 몇 개마저도, 전사가 다른 것들을 두들기는 사이 회복되어 다시 달려들었다.

후우.

전사의 숨소리가 거칠다.

그는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눈에 선하게 보이는 그 결말에, 대사도는 고개를 흔들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음?'

불현듯 공기가 바뀌었다.

스으으―

지옥문을 중심으로 흐르던 마력의 흐름이, 전사의 주변에서 기이한 굴절을 만들어낸다.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어떤 압이 그 공간을 내리누르는 듯.

일그러지는 흐름을 관측한 대사도의 눈이, 이내 전사의 몸을 꿰뚫어보았다.

두근.

심장이 거세게 맥동한다.

용의 인자가 담긴 끓어오르는 피가, 사지 육신의 근육을 빈틈없이 채워간다.

겉으로 보이는 전사의 모습은 정적이었다.

마치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듯, 대지에 뿌리박은 바위와도 같은 기세.

'···이런.'

그러나 대사도는 감지할 수 있었다.

그 정적인 공기는, 어떤 거대한 폭발의 전조라는 것을.

'악마의 육신이시여, 나를 지켜주소서!'

황급히 공세를 멈추고, 아라크네의 촉수를 전부 불러모았다.

악마의 육신이 몇 겹으로 방벽을 쌓아올리고, 남는 대여섯 개는 빈틈을 노려 전사를 향해 찔러들어갔다.

그러나 부족했다.

본능이 그렇게 외쳤다.

"에낙사―오브!"

대사도는 황급히 수인을 맺으며 마지막 주문을 외워냈다.

바로 그때.

쉭―

바위 같이 서 있던 전사가 주먹을 내뻗었다.

어떤 마력의 폭발이나 신성력의 파도가 아닌, 그저 한 번의 권격.

그리고 잠시 후.

꽈르르르릉―!

천둥이 신전을 뒤흔들었다.

콰과과과과―

파도처럼 몰려오는 압력에, 마탑의 주문도 막아낼 악마의 육신이 갈갈이 찢어져 비산했다.

강철 같은 육편의 폭풍이 충격파를 집어삼키고, 대사도의 육신을 한 줌의 핏물과 고깃조각으로 찢어발겼다.

그 폭풍의 발원지.

북부에서 온 듯한 큰 키와 덩치, 덥수룩한 머리털의 전사는.

제 힘을 못이겨 뒤틀린 팔을 내뻗은 채,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폭풍 속 대사도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한낱 인간의 힘으로······!"

콰직!

그리고 강철 촉수의 파편이 대사도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

"······후우."

댈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슬쩍 눈을 돌려 내뻗은 오른팔을 내려다봤다.

치이이이―

으스러진 뼈. 위치를 이탈한 근육들.

왈칵이며 쏟아지는 피는 증기를 마구 내뿜어대고, 바깥으로 밀려난 혈관과 신경들은 이어졌다 끊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시발. 존나 아프네.

근육과 뼈가 우드득거리며 제 위치를 잡아간다.

댈런은 주먹을 내뻗은 자세 그대로 한동안 서 있었다.

뭔가 만화 속 주인공이 악당을 처치한 후, 분위기를 잡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광경.

"······썩을."

허나 실상은 그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고통이 배가 되기 때문이었다.

치이이이······.

이윽고 바스라졌던 뼈가 다시 중심을 잡았다.

근육들도 제 자리를 찾았다.

댈런은 거친 피부가 그 위를 덮는 걸 보고서야, 후들거리던 팔을 내릴 수 있었다.

"···후우."

짧은 한숨을 한 번 더 내쉬었다. 그 한숨에 증기가 무슨 기관차 뺨칠 정도로 새어나온다.

당연하겠지만, 탈이 난 건 팔뿐만이 아니었다.

내장도 이미 진탕이 될 대로 되어, 속에서 울렁거리며 회복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도박이었군.'

댈런은 객관적으로 방금 전의 싸움을 복기해봤다.

용혈의 재생 인자의 숙련도가 어느 정도 올라가지 않았다면.

혹은 최소한의 체력 수치가 이를 뒷받침해주지 않았더라면.

댈런은 주먹을 내뻗은 순간,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쿨럭!"

한 움큼 피를 토해내며, 댈런은 다시금 마음먹었다.

어떻게든 체력 수치를 올려 몸의 균형을 맞춰야겠다고.

저벅.

댈런은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마무리를 할 차례였다.

용혈도 괴물 같은 회복력을 자랑하긴 했지만, 악마의 회복력은 그보다 더했다.

거의 산산조각나다시피 한 대사도의 육신은, 심장과 몇몇 중요 기관끼리 이어붙으며 다시금 재생하고 있었다.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펄떡이며 뜨거운 피를 내뿜어대는 심장.

저것만 짓밟아 뭉게면, 이 싸움은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댈런은 심장 위에 발을 올렸다. 가죽신 다 찢어진 맨발 아래 뜨겁고 물컹한 촉감이 느껴졌다.

그대로 내리누르려는데,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왜, 왜 우리들 중 최하계급이···검은 가면을 쓰는 지 아나?"

댈런은 잠시 멈췄다. 그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난 방향을 살펴보았다.

산산조각 난 촉수 파편 사이, 대사도의 머리가 남아있었다.

온전한 머리라고는 할 수 없었다.

두 눈을 포함해 코 위쪽으로는 바스라진 얼굴에, 삼분의 일쯤 날아가버린 뇌와 두개골.

기도에 연결된 폐도 반쪽밖에 남지 않았다.

놈이 바람 새는 소리로라도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건, 그저 악마의 피가 머금은 마력 때문이리라.

"검은 가면은···금강궁을 뜻하지. 가장 높은 궁전이 가장 낮은 곳 되고, 가장 낮은 청동이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그것이 우리가 신의 뜻 아래 새로이 세워가는 역행의 질서임이야."

댈런은 심장에서 발을 슬쩍 내렸다. 그는 뚱한 표정으로 이빨 다 날아간 입을 바라봤다.

대사도가 뒈져가면서 유언을 남기는 건,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컷씬이었기 때문. 뭐라도 얻어갈 정보가 있겠지.

"내 마지막 유언을 들어주고 있으니···내 특별히 신께 전해들은 진리를 하나 말해주겠다. 검은 가면이 금강궁을 뜻하는 것은, 사실 금강석이 흑필과 다르지 않음에서이니."

대사도는 뭉개진 입술을 우물거리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가장 고귀한 것이, 사실은 가장 천한 잿더미와 다르지 않다는 게 얼마나 모순적인가. 허나 세상은 그만큼 모순적이며, 운명 역시 그렇게 정해진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는 걸 알아두도록 하거라. 대전사···네 운명 역시 말이야."

"지랄. 그게 왜 모순적이냐."

댈런은 코를 흥 풀었다. 비강에 고였던 핏물이 쫙 빠져나갔다.

"다이아몬드나 흑연이나 결국 둘 다 탄소결합물 아니냐. 거기서 왜 운명이고 자시고가 나와."

"···뭐?"

대사도의 입이 바람빠진 소리를 냈다.

댈런은 머리를 긁적였다. 손끝에 피딱지가 묻어나왔다.

피와 악마의 체엑이 굳은 게 온몸에 튀어 있었다. 찝찝했다.

"둘 다 탄소라는 원소로 구성되어, 미세한 구조만 다른 거잖냐. 흑연은 뭐 원자가 무슨 판처럼 쌓여 있고, 다이아몬드는 단단하게 얽혀 있다던가. 아무리 악신이라도 신이라 불리는 새낀데, 그런 것도 안 알려주던?"

"······."

터진 입술은 이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댈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러니 이 세계가 막장인 거지. 마법으로 산도 날리고 강도 뒤엎고 하면 뭐해. 과학이 없는데.

"모순적인 운명이고 자시고. 니가 말한 건 다 물리라고, 물리. 정해진 운명이니 뭐니 하는 건 개소리라는 거야."

댈런은 찝찝한 머리를 털었다.

처음 보는 장면이라 뭐라도 얻어갈 게 있을까 싶어 지켜봤는데, 결국 그런 건 없었다.

그는 발을 다시 올렸다. 심장은 펄떡이며 이 순간까지도 대사도의 머리통에 혈액을 공급하고 있었다.

마지막 한 마디 정도는 괜찮겠지. 댈런은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창조주가 인간에게 준 건 자유의지다. 운명 따위에 예속된 삶이 아니라. 네 운명은 네가 선택한 거야. 금강궁에서 쫓겨난 자, 대사도 탈레비노 사이칼."

"내, 내 이름을 어떻게···!"

콰직!

답은 없었다. 댈런의 발끝에서 대사도의 심장이 터져나갔다.

경련하듯 열리던 입술은, 그대로 덜덜 떨더니 혀를 빼물고 축 늘어졌다.

댈런은 괜스레 머리를 한 번 더 긁적였다.

'게임 사이드 설정에서 본 NPC 이름 한 번 읊어줬다고, 저런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괜히 저승길 가는 놈한테 충격을 줬나. 거기다 개똥 철학까지 한 숟갈 올려버려서 그런지 괜히 찝찝했다.

까놓고 말해 그가 창조주도 아니고, 인간에게 뭘 줬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어쨌든 이걸로 하나 끝났군."

댈런은 괜히 입밖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왜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큰 시련을 이겨내면 혼잣말이 많아지는지 이해가 됐다.

스스로 한 일에 인정을 주고 싶은 것이다.

멸망의 한 줄기를 이겨냈다고.

수만 명이 학살당하는 미래를, 자신의 힘으로 막아냈다고.

"쯧."

댈런은 혀를 한 번 차고 걸음을 옮겼다.

괜히 존재하지도 않는 독자가 보면서, 왜 혼자 중얼거리냐고 악플을 달 것만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