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5

153

악마 살해자(1)

위태롭게 버티던 건물들이 거리를 향해 와르르 무너진다.

밀려오는 잔해와 치솟는 불길 한가운데, 1왕자파의 원로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왼팔이 잘려나간 고통 때문은 아니다. 그의 재생력이라면 적당한 재생 포션 한 병으로 없는 팔도 자라나게 할 수 있었다.

그보다는 이 도끼를 날린 장본인. 그 정체가 예상 밖이었기 때문.

'크레이그의 지인이라더니.'

완전히 속았다.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야 알아챘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 북방 야만인 같은 근육질의 거체.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칼은 분명 그 전사의 인상착의와 동일했다.

거기다 허리춤의 성검과 손도끼를 날리는 전투 방식까지.

놈은 분명히 그 전사였다.

3왕자파와 5왕자파의 원로를 죽이고, 칼카스 소환의 대계를 망가뜨린 소문의 장본인.

'백금패 용병 댈런.'

슈화아악―!

상념을 뚫고 난데없는 돌풍이 불어닥친다. 연기와 불꽃이 단숨에 날아가며 탁 트인 시야. 그 너머에서 잿빛 창이 찔러들어왔다.

카아앙!

원로는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걷어냈다. 정면으로 막은 게 아니라, 창날을 쳐 튕겨냈음에도 손아귀가 저릿했다.

"무슨, 힘이···!"

혈통 때문에 태생적으로 힘이 강한 그였다. 거기에 악신의 힘을 받아 신체능력 전반이 향상되었다.

일반적인 인간을 아득히 넘어선 육체는, 2미터에 가까운 거검을 한 손으로 무리 없이 휘두를 정도.

그런 그가 근력에서 확연하게 밀렸다.

간을 보기 위한 찌르기였는지, 창끝을 회수한 남자가 눈썹을 슬쩍 들고 물었다.

"잘 버티는데. 원로급인가?"

"1왕자파의 원로, 파파샤 카리모프다."

"잘 기억나지 않는군. 내가 모든 NPC들 얼굴이랑 이름을 외우고 다닌 건 아니어서."

의미를 모를 단어를 섞어가며 하는 말.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들어올린 그가 다시금 달려들었다.

콰가가각!

눈 깜빡할 사이에 몇 번이고 부딪히며 얽히는 창과 대검.

대담하게 베어들어가고, 어긋맞춰 튕겨내며, 현란한 견제와 속임을 섞은 끝에 서로의 목줄을 노린다.

실력의 격차는 1분도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무슨···신체능력이···!"

창술 자체의 숙련도는 높지 못하다. 익힌 지 얼마 안 된 게 눈에 보일 정도.

허나 사내의 힘과 빠르기, 기량과 감각은 그 모든 걸 찍어누르고도 남았다.

단순히 기존의 창술을 소화하고 모방해내는 걸 넘어서서, 원본 이상의 것을 빚어낼 조짐까지 보일 정도로.

콰아아앙!

창대에 가슴팍을 얻어맞은 원로가 붕 떠서 날아갔다. 가까스로 균형을 되찾고 몸을 뒤집어, 마치 야수처럼 두 손과 두 발로 내려앉았다.

"커헉···!"

거멓게 죽은 피가 울컥 치솟는다. 원로는 입가를 훔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전사를 올려다봤다.

"단단하군. 쑴의 축복을 받기 이전에도 평범한 인간은 아니었겠어. 균형을 잃었을 때 습관적으로 나오는 자세나 짧게 몰아치는 검로를 보아하니···늑대인간인가?"

무감정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말. 그 내용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일까.

'엿 같이 꼬였군.'

원로의 머릿속에 턱을 긁적이는 눈앞의 사내에 대한 정보가 줄줄이 스쳐지나갔다.

전 대륙을 뒤져봐도 그리 많지 않은 백금패 용병. 허나 그 뒤에 감춰진 위명은 단순한 용병의 신분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악마들을 죽이고 성기사단의 반란을 막았으며, 마녀를 처단하고 진룡의 목을 떨어뜨렸다.

성기사단과 차르국 특무대에게 은인으로 대접받음은 물론, 금강궁과도 물밑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영역을 이룬지 몇 달 안 되어 3위계의 벽을 넘어섰다던가. 일신의 능력은 이미 4위계 초입을 벗어났다는 이야기까지도 돌았다.

'이길 수 있을까.'

사내의 여유로 만들어진 짧은 순간. 원로는 자문했다.

부러진 갈비뼈가 벌써 붙을 정도의 재생력에, 늑대인간의 형태로 변하면 지금보다 반 배는 더 강해지는 신체능력.

차리나의 직속 호위대에게도 밀리지 않을 검술과 4위계에 닿은 지 오래인 심상.

어지간한 하급 악마에게도 쉽게 밀리지 않을 거라 자신했건만, 눈앞의 사내 앞에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원로는 맹세를 떠올렸다.

에클라힘 궁전에서 쫓겨난 1왕자. 본디 정당한 왕홀의 주인으로 왕좌에 앉아야 할 존재.

그를 지키기 위해 원로는 모든 걸 다 바치기로 맹세했다. 자신의 몸과 영혼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차르국 백성의 절반이라도.

'설령 내 영혼이 지옥에 저당잡히고, 이 땅이 악마의 나라가 된다 하더라도, 온전한 왕위는 되찾아져야만 한다.'

뿌드득! 콰직!

결단과 동시에 몸의 형태가 변하기 시작한다. 팔다리의 골격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지고, 근육이 부풀어오르며 날카로운 털이 전신에 돋아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바친 원로의 눈에서는 검붉은 불길이 귀화처럼 타올랐다.

'이길 수 있다. 적어도 붙잡아두는 건 가능하다!'

아우우우―

일대를 포위한 정예병들에게 긴 울음소리로 신호를 보내고, 늑대인간의 형태를 취한 원로는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간이 이질적으로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

"늑대인간이 맞군."

검을 꼬나쥐고 달려드는 늑대인간을 바라보며, 댈런은 사납게 웃었다.

거의 3미터에 달하는 신장. 금속이나 다름없는 강도의 잿빛 털.

이 세계에 떨어진 지 3년이 다되어가지만, 제대로 된 늑대인간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늑대이간 특유의 남성미 넘치는 자태는 모니터 너머에서 볼때마다 감탄하곤 했었지. 쓸데없는 과거를 회상하면서도, 댈런의 두뇌는 자연스레 상대에게 적절한 수십 가지 전략을 구상해냈다.

자연스레 심상을 이끌어내면서 창을 뻗어낸다. 증폭된 놈의 힘을 재단해보는 게 첫걸음이었다.

콰아앙!

검과 창이 부딪힌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격돌이었다.

댈런이 힘으로 찍어누르고 원로가 기교로 흘려내던 형태에서, 이제는 얼핏 비등한 충격력을 교환하며 서로를 짓누른다.

'늑대인간의 힘. 거기에 악신에게 영혼을 팔아넘겼나. 쑴의 지옥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육체 능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지.'

증폭된 건 근력만이 아니었다. 재생력과 민첩함, 반응속도, 감각 모두 방금 전보다 월등하게 향상되었다.

특히나 재생력은 용혈 그 자체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 일부 인자만을 가졌던 과거의 댈런을 상회하는 수준.

촤작! 콰득!

가죽이 찢기고 뼈가 어긋나는 것 정도는 금방 수복해버리고, 손도끼의 폭발에 잘려나간 왼팔마저 손쉽게 재생해낸다.

"크아아! 너는! 왕홀의 주인을! 막을 수! 없다!"

놈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 포효에 주변 공간이 눈에 띄게 일렁였다.

댈런과 늑대인간을 가둬 격리시키듯,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자리잡은 것.

무슨 현상인지는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악신에게 영혼을 바치며 얻은 힘으로 말미암아, 놈이 불완전하게나마 영역을 개방한 것이었다.

「영역 개방 : 뒤틀린 충성심의 마지막 결투」

구우웅―

넓은 거리가 놈의 영역권 안에 들어온다. 반사적으로 화염 화살을 뽑아내 쏘아봤지만,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히며 소멸됐다.

힘과 힘의 충돌이라기보다, 개념적으로 공간 자체가 격리된 듯한 현상.

그 모습을 지켜보던 늑대인간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말했다.

"크르르, 내 영역이 담은 심상은 숙적과의 결투! 너는! 나와만 싸운다!"

놈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괴하게 뒤틀린 병사들이 골목에서 튀어나와 회관을 둘러쌌다.

반쯤 일체화된 듯한 갑주를 몸에 두르고, 두꺼운 뿔이며 단단한 껍질들이 몸 곳곳에 돋아난 병사들.

톱날 달린 무기들을 꼬나쥔 놈들은, 비요른과 아카샤를 포함해 서른쯤 되는 생존자들을 포위망에 가두고 좁혀들어갔다.

거기다 놈들 사이사이에 흑마법사도 몇 섞여있는지, 지옥문이 열리고 거대 마물들이 공간의 틈을 비집고 기어나왔다.

아무리 비요른과 아카샤라도 생존자들을 전부 지켜내는 동시에 삼백이 넘는 괴인에 마물까지 상대하는 건 힘든 일.

늑대인간은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웃음을 흘렸다.

"네 동료와 더러운 차리나의 끄나풀들은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야!"

길쭉한 입을 벌려 킬킬거리는 말에 답해줄 이유는 없다.

대런은 창대에서 왼손을 잠시 물려 허공에 수인을 맺어낸다.

싸움의 대상을 한정짓는 개념의 영역은 물론 신박했으나, 반대로 말하자면 신박하다는 감상이 전부.

덩굴의 마녀나 천변만화의 얼굴, 하다못해 일시적으로나마 스스로가 개방했던 영역에 비해서 그 능력이나 범위 모두 형편없었다.

그만큼 편협한 심상이었고, 얻어낼 자격이 없는 힘이라는 이야기.

"널 죽이면 해결된다는 이야기군."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손을 휘저어, 마력의 바람을 비틀어낸다.

「빙정(氷晶)」

시작은 언제나와 같은 얼음꽃.

허나 그 위에 새로운 술식을 얹는다.

「살아 움직이는 뿌리」

필로폰에게서 받은 식목계 마법 개론을 공부해 익힌 주문이 발아하고, 심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결로 섞여들어간다.

「백향근(百向根)」

촤자자자자작―!

백색 결정의 뿌리가 순식간에 지면을 뒤덮는다.

넓은 거리를 채운 것도 모자라, 격리된 공간의 벽을 기어올라가는 뿌리 가닥들.

벽을 넘어 천장까지 가득 메우며, 거대한 돔 형태로 두 사람을 가둔 백색 감옥에 늑대인간의 입이 떡 벌어졌다.

"가장 위험한 적인 나를 격리한다는 판단은 좋았지만, 확신에 찬 판단일수록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았어야지."

원래라면 저 뒤에 있는 생존자들이 휘말릴 걸 염려해 사용하지 못했을 광역 마법.

허나 영역을 개방해 공간 자체를 단절시킨 이상, 그런 제약에 묶일 필요 없이 원하는 대로 술식을 전개할 수 있다.

늑대인간은 뒤늦게 강적을 상대로 오래 버티기 위해 펼쳐놓은 덫이, 도리어 스스로를 가두고 패배를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걸 깨달았지만.

분초를 다투는 싸움에서 그릇된 판단은 겉잡을 수 없는 파장을 남기는 법.

"묶어라."

영창도, 수인도 아닌 간단한 언령에 사방을 점한 뿌리가 춤추기 시작한다.

전후좌우는 물론 땅과 하늘에서까지 화살처럼 쏘아지는 백색 뿌리들.

"크아아아아아!"

늑대인간은 두 눈에 귀화를 일렁이며 저항했지만, 휘감아오는 뿌리를 떨쳐낼 때마다 전신에 상처가 누적되어간다.

가죽을 긁어대는 날카로운 결정. 피부 안쪽을 파고들어 몸을 굼뜨게 만드는 냉기.

끓어넘치는 힘에도 불구하고 정교하던 늑대인간의 검술이, 점차 마구 휘두르는 괴인의 그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스륵―

그 사각을 파고드는 댈런의 신형.

창촉에 냉기를 싣고, 창대를 길게 빼내어 잡은 채.

늑대인간을 노리는 뿌리들 사이에서 휘어들어가듯 찌른다.

촤악―!

"크아아악!"

수십 갈래로 짓쳐오는 공격 사이, 위장된 일격을 구분해 반응하기란 불가능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옆구리를 움켜쥘 틈도 없이, 늑대인간은 쉴새없는 공세에 다시금 거검을 휘둘러냈다.

푸욱!

배후에서 들어와 등을 꿰뚫는 다음 일격. 이번에도 막거나 피할 수 없었다.

댈런은 살아 움직이는 결정의 뿌리들 사이를 누비며 놈의 사각을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몇 번의 공격을 허용하고 나자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주요 급소들에 단단한 껍질을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하는 늑대인간.

허나 온몸에 그런 걸 두를 수는 없었고, 도리어 굼떠진 몸은 더 많은 상처들을 허용한다.

쿵.

머지않아 걸레짝이나 다름없어진 늑대인간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크륵, 그르르······."

주체가 완벽하게 무력화되자 이내 스르르 녹아내리는 공간의 벽.

벽 위를 하얗게 수놓았던 뿌리들 역시 기댈 곳을 잃고 함께 무너졌다.

늑대인간은 탁 트인 시야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힘겹게 웃었다.

"크흐, 그래도···네 동료들은 이미 신의 축복을 받은 정예병과 마물들에게······."

끌어올렸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놈의 예상과 전혀 달랐기 때문.

생존자들과 댈런의 일행을 마을 회관으로 몰아넣어 포위한 것까지는 좋았다.

아무리 요새화된 회관이라도 기껏해야 변두리 마을 수준이기에, 거대 마물의 힘이라면 손쉽게 부수는 게 가능했으니까.

그러나 반쯤 마물이나 다름없어진 정예병들과 거대 마물들은 모두 회관이 아닌 반대편 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어둠이 짙게 깔린 밤거리 위, 강렬하게 빛을 뿜어내는 수십 명의 성기사 무리를.

"마물들에게 뭐?"

댈런이 피식 웃었다. 그는 성기사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가장 선두에 선 금발의 성기사가 그 손짓에 잠시 흠칫하는 듯했으나, 그녀는 이내 자세를 가다듬고 검을 들어올렸다.

"형제들이여―"

신성력으로 증폭되어 마을을 쩌렁쩌렁 울리는 심문관의 목소리에, 마물들이 본능적으로 위축되며 뒷걸음질치기 시작하고.

"눈앞의 악을 말살하라!"

단 한 마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가 담긴 명령과 함께, 성기사들이 말에 박차를 가했다.

두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에 지면이 울린다.

신성력의 빛도 함께 거세졌다.

마갑과 전신갑주로 중무장한 중기병대는, 그 질량과 속도만으로도 파괴적인 이 시대의 전략 병기.

거기에 강력한 신성력을 더해낸 성기사단의 돌격은, 모든 그림자를 지워버리는 빛의 파도나 다름없었다.

캬악! 크에에에!

그워어억―

마을 회관을 포위하던 어둠이 쓸려나간다. 반란군과 마물들 모두 고깃덩이가 되어 말발굽 아래에 짓밟혔다.

눈앞에서 작전이 물거품이 된 걸 목도한 늑대인간이 비명에 가까운 울부짖음을 내뱉고.

"크르륵, 아, 안 돼! 정당한 차르의···!"

"자기 백성을 쳐죽이면서 정당하긴 지랄."

그 말이 끝맺어지기도 전에, 은빛 창이 놈의 목이 떨어뜨렸다.

154

악마 살해자(2)

진눈깨비가 몰아치는 거리.

건물들을 집어삼키며 타오르던 불길이 주춤하는 가운데, 마을 회관 주변은 마물의 피와 살로 진창이 되어있었다.

댈런은 회관 안에서 투박한 나무잔을 기울이며 그 광경을 내려다봤다. 옅은 씁쓸함이 혀 위에서 맴돌다 목구멍으로 사라져간다.

이제는 생산할 수 없게 되어버린, 본디 이 마을의 특산품인 독주였다.

"순찰 결과 마을의 생존자는 총 마흔 네 명이었습니다. 부상자들은 포션과 신성력으로 치료해두었고, 회관 주변의 사악한 마력도 충분히 정화했으니 하룻밤 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겁니다."

테이블 반대편에서 꿀물로 목을 축인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이 외딴 마을에 성기사단을 이끌고 나타난 건 다름아닌 그녀였다.

변방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보인다는 소식을 보고받은 차리나가, 곧바로 성기사단에 지원 요청을 보낸 것.

'머리를 잘 썼고, 상황까지 적절하게 들어맞았군.'

서리고원 너머에서 집결중인 악마들의 군대로 인해, 북쪽 전선에 집중된 군대를 뒤로 물리는 건 불가능했다.

상황을 파악한 차리나는 자존심이고 뭐고 필요없다는 듯, 즉시 국고의 일부를 털어 성기사단에 헌금했다고 한다.

'차르국의 보물과 성기사단 지부에 대한 세금 감면, 그리고 자유로운 군사 활동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 이 나라의 간악한 사교도들을 퇴치해주세요.'

헌금과 함께 들어온 그녀의 요청. 악마 토벌에 진심인 기사단이 이를 거부할 리는 만무했다.

때마침 성기사단 병력 일부가 도시연합 북부에서 악마 숭배자들을 토벌중이었고, 이들은 본단의 명령을 전해받은 즉시 북진했다.

"밤 사이에 대략 마을 건물의 8할 정도는 전소될 것 같습니다. 밤이 늦고 불길이 다 잦아들지도 않았으니, 일단 오늘은 다들 쉬게 하고 아침에 챙길 수 있는 물건들을 챙겨서 피난을 떠나게 할 예정입니다."

"고생했소. 그쪽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

댈런의 말에 루시아가 지친 웃음을 지어보였다.

충분히 힘들 법한 일정이었다. 듣자하니 도시연합 북부에서의 작전만 해도 몇 주나 이어져왔고, 그게 어느 정도 마무리되려는 차에 곧바로 이곳 차르국까지 원정을 온 것이었으니까.

무리한 이동과 전투, 거기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수색과 구조 작업까지.

아무리 신성문신의 힘을 입은 성기사들이라도, 인간인 이상 지치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 한 마디 없이 마을 주민들을 돌보는 모습이야말로, 이들의 굳건한 사명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지 않을까.

"아닙니다. 댈런이 여기 계시지 않았다면,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생존자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을 겁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음에도 한 발 늦었군요."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정체불명의 야만인 용병보다 성기사단의 비호에 더 안심할 거요. 나도 누굴 간호하는 데는 별로 소질이 없고."

댈런이 술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독주를 벌컥이는 그 모습에 루시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평안한 밤 되시라는 인사를 남기고 회의실을 나서자, 방에 남은 건 두 사람이었다.

상부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중인 특무대 요원 크레이그와, 그 앞에서 나무잔을 치우고 아예 병나발을 불기 시작한 댈런.

"후우, 정신을 붙잡아두기 힘든 하루군요."

크레이그가 깃펜을 놓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댈런은 병나발을 불면서 그의 보고서를 슬쩍 곁눈질했다.

방금 전 루시아가 전달한 내용을 요약하고, 거기에 보고자의 소견과 차리나의 현명한 판단에 대한 찬사까지 덧붙인 내용.

"······."

하수도 청소부였던 페니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안정성이고 나발이고를 떠나 공무원은 그와 맞지 않았다.

"그래도 평생 잊지 못할 하루이기도 했습니다. 용살자에 이어 악마 살해자까지 두 눈으로 보게 됐으니까요."

"악마 살해자?"

병을 내려놓은 댈런이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루시아가 저번에 낮은 거리에서 악마 하나를 잡긴 했었지만, 악마 살해자라는 이명이 곧바로 붙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무대 같은 정보기관 요원이 이름 대신 이명을 주워섬길 정도는 더더욱 아닐 테고.

댈런의 반응을 눈치챈 요원이 의외라는 듯 질문했다.

"전쟁신의 가장 날카로운 백색 검, 악마 살해자 루시아 카스타챌드. 들어본 적 없으십니까?"

"없소."

그냥 악마 살해자도 아니고 뭐가 더 주렁주렁 붙었군. 수준급의 영웅인 루시아에게 수많은 이명이 따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너무 급작스러운 면은 없잖아 있었다.

대체 어느 수준의 공을 세워야···.

"심문관 루시아 카스타챌드는 근 몇 주간 진행된 성기사단의 사교도 토벌에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검증된 정보로만 다섯 마리가 넘는 악마를 퇴치했다고 합니다."

"···다섯 마리?"

술병을 들어올리던 손이 멈칫한다. 입을 멍하게 벌린 그를 향해 크레이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믿을 수가 없어서 자료를 몇 번이나 대조했습니다. 그만한 악마와 흑마법사가 이 대륙에 숨어있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그걸 이 짧은 시간에 찾아내서 쓰러뜨렸다는 건···."

"놀라운 일이지. 아주 많이."

댈런이 지금껏 처치한 악마의 수가 다섯이 채 안 되었다.

물론 용 역시 넓은 범주에서는 악마에 속한다고 볼 수 있었고, 마녀를 포함해 그가 쓰러뜨린 실력자들 중에도 악마에 필적하는 이들이 있기는 했다.

어찌됐건 고작 몇 주만에 다섯이나 되는 악마를 처치한 업적은, 기나긴 성기사단의 역사 속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애당초 음지에 암약한 흑마법사들과 악마들을 찾아내는 것 자체가 고난이도일 터.

수백 회차의 지식을 가진 댈런이라도, 여기저기 거점을 옮겨대는 흑마법사들을 일일이 추적하는 건 비효율적이라 시도조차 안 하지 않았던가.

'성기사단이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닐 테고······. 설마 그 능력을 벌써 개발한 건가?'

루시아가 악마 살해자라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많은 악마를 쓰러뜨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애초에 이름 날린 용병이라도 평생 한 번을 마주치기 어려운 존재가 악마.

세상이 개판이 되어가면서 악마의 활동이 급증하고 있긴 하나, 아직까지 대륙 중부는 비교적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암약하던 악마와 흑마법사들을 이만큼이나 빠르게 색출해냈다는 건, 그녀의 재능이 몇 년을 앞당겨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는 소리겠지.

'그 능력을 개발했다면, 영역 역시 일궈냈을 게 분명하다.'

서부 지구의 싸움에서 어떤 깨달음이라도 얻었던 걸까.

겉으로 느껴지는 기운이 미묘하게 달라졌다고는 생각했는데, 루시아의 성장은 그의 예상을 몇 번이고 뛰어넘고 있었다.

'펠버와 시에나에 이어···루시아까지.'

원래라면 묻혀버렸을 가능성이 꽃을 피우고, 몇 년은 뒤늦게 되찾아야 할 능력을 한참 전에 제 것으로 취해낸다.

앞당겨지는 건 악신들의 행보와 종말의 시기만이 아니었다.

마치 세상을 재는 정교한 저울이라도 존재하는 듯, 종말에 대항하는 세력과 영웅들 역시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었다.

끼이익.

딱딱한 나무 의자에 몸을 깊이 묻은 채, 댈런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창밖을 가만히 바라봤다.

종이에 펜이 스치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그는 계속 그 자세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

다음날.

마을 주민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불타고 남은 폐허를 돌아다녔다.

고작 마흔 명 남짓한 생존자들로 마을을 재건하는 건 불가능한 일.

잿더미 속에서 그나마 건질 수 있는 것들을 건진 뒤, 주민들은 크레이그와 함께 먼 피난길에 올랐다.

"큰길만 골라 다니되, 다른 마을이 나온다면 눈에 띄지 않게 돌아서 가십시오. 아직 반란군의 편에 붙은 마을들이 다 드러나지 않았으니, 안전을 위해 발틴그라드까지는 최대한 다른 마을과 접촉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이런 말씀 정말 죄송하지만, 성기사단의 호위는 부탁드리기 힘든 겁니까?"

"여러분을 호위해드릴 수 있다면 저야말로 마음이 놓일 것 같아요. 하지만 다른 마을에도 여러분과 같이 무고한 피해자들이 있답니다."

마을 주민들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하룻밤동안 자신들의 방패가 되어준 성기사들을 비난하는 이는 없었다.

한편 혼자서 마흔이 넘는 인원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이었는지, 크레이그는 댈런에게도 동일한 부탁을 했다.

"나에게는 의뢰가 먼저요. 윗선에서 내 행방에 대해 묻거든, 서리고원 너머의 악마를 상대할 무기를 찾으러 간다고 보고해두시오."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부디 차르국의 앞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주시기를."

피난민과 성기사들을 차례로 떠나보내고 난 뒤, 댈런과 일행 역시 원래의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동일한 목적지에 동일한 여로. 이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일행이 한 명 더 늘어났다는 점일까.

"···그런데 그쪽은 왜 여기 붙으셨소? 그쪽이 아까 그 성기사들의 지휘관 아니었나?"

댈런의 물음에 루시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세계의 이빨 산맥으로 가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소만."

"하이 오크가 지배하는 땅이군요. 강력한 괴물들이 도사리는 곳이죠. 심문관이라는 특수한 지위 때문에 명령권이 주어졌을 뿐, 이번 파견에서의 제 임무는 대륙에 숨어든 악마를 포함해 강대한 악들을 말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댈런을 따라가다보면 못해도 상급 악마나 그에 준하는 마녀쯤은 나오는 법이니까요. 지금까지 언제나 그래왔으니, 이번에도 기대해보려고 합니다."

"······."

네가 가는 곳마다 악마든 뭐든 튀어나오면서 일이 비정상적으로 꼬이곤 했으니, 오히려 이번에는 임무를 위해 따라가겠다 이건가.

싱긋 지어내는 예쁜 미소와는 별개로, 어딘가 찝찝한 내용의 대답이었다.

[주인님, 혹시 주인님의 정체가 액운을 부르는 인형 같은···.]

'닥쳐.'

[으읍! 으아악!]

아공간의 악마가 후속타를 넣으려다, 자연스레 품속에 넣은 손으로 물 흐르듯 두들겨맞았다.

[진실에 가까울수록 말을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사실을 말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지 않겠느냐, 기억 잃은 나무여.]

'···그쪽까지 그러기요?'

[내가 무슨 말 했느냐?]

다만 심상 속의 진룡이 반죽이 된 악마를 달래며 그 바톤을 이어받을 줄은, 댈런조차 예상하지 못한 바.

"으하하하! 이 친구랑 있으면 싸움이 끊일 줄을 모르기는 하지! 끝없이 몰려오는 대적자들. 쉼이라곤 주어지지 않는 투쟁의 인생! 그거야말로 영웅의 길 아니겠나!"

"함께할 수 있어 기쁩니다, 어머니."

"어머니라니? 아직 이름을 못 들은 것 같은데···."

"아카샤···아니 뿌까입니다."

"······어머."

맞장구치며 웃어젖히는 드워프와 난데없이 숨겨진 자식 선언을 하는 소년 사이에서, 댈런은 간만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성기사에 악마, 용과 난쟁이, 거기다 용병까지. 괜찮은 조합이구나.]

심상 너머 설산의 절벽 위, 고룡이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댈런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의 속도를 높였다.

아무래도 이번 여정은 순탄하지 않을 것 같았다.

***

일행은 동쪽으로 향하며 세 개의 크고 작은 마을을 더 거쳤다.

다행히 분위기가 삭막한 곳은 있어도, 먼젓번과 같은 민란의 조짐을 보이는 마을은 없었다.

'국경에 가까워질수록 철혈군대의 영향력이 강해지기 때문이겠지.'

대부분의 병력이 북부 전선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국경들을 텅 비워둔 것은 아니다.

특히나 세계의 이빨 산맥은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하이 오크의 영토. 남쪽 도시연합이나 서부의 길드 연맹과의 국경보다 더 경계하는 게 당연했다.

순찰대와 마주치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그렇게 불타버린 마을을 떠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일행은 세계의 이빨 산맥 초입에 접어들 수 있었다.

155

하이 오크(1)

"잉가아아아안!"

반쯤 헐벗은 오크가 달려들었다.

어지간한 장정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키와 덩치.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초록색 피부.

놈은 투박한 검을 높이 들고 내리찍었다. 말 그대로 바위라도 쪼갤 듯한 기세였다.

그 앞에서.

"죽이고 먹는다! 잉간 꼬기 맛있다!"

"염병."

댈런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창을 휘둘렀다.

콰장창!

굵고 넓은 오크의 대검이 산산조각난다. 동시에 놈의 손목과 허리에 얇은 실선이 그어졌다.

철퍽!

부서진 검 파편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함께 지면으로 떨어지는 오크의 두 손과 상반신.

"잉간···꼬기······."

허리 아래가 날아가 주르륵 내장을 흘리는 신세임에도, 붉게 충혈된 시선은 먹잇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손 잃은 손목이 연신 허공을 휘젓고, 송곳니 사이로 피와 침이 주르르 흐른다.

댈런은 창을 한 번 더 휘둘러 목을 잘랐다. 오크는 그제서야 허우적대기를 멈췄다.

지척에 깔린 수십 구의 오크 시체 중 마지막이었다.

"휴우. 오늘만 벌써 네 번째네요. 어디서 이렇게 계속 튀어나오는 건지."

루시아가 검에 엉겨붙은 피를 닦아내며 다가왔다. 그녀의 갑옷과 머리칼은 이미 피와 살점으로 범벅이었다.

나머지 일행의 몰골 역시 딱히 다를 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출발한 이후로, 그들이 쓰러뜨린 오크의 머릿수가 거의 삼백에 달했으니까.

더 놀라온 점은 아직 해가 머리 위에 오지도 않았다는 것.

지난 며칠 동안의 경험에 의하면, 앞으로 잠이 들때까지 대여섯 번은 더 습격이 있으리라.

"말을 잃은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났네. 우리가 잘 가고 있는 게 맞나?"

비요른이 수염에서 핏방울을 탈탈 털어내며 물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회차에서 세계의 이빨 산맥을 방문하는 건 그도 처음이었으나, 다른 곳들과 달리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비록 산맥의 크기가 게임에서보다 수십 배는 거대해졌음에도, 길을 찾아가는 방식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으니까.

"오크들의 체격이 갈수록 커지고 있지 않소. 제대로 가고 있다는 증거요."

"이해가 안 되네.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세계의 이빨 산맥은 오크들이 번성한 땅이오. 깊이 들어갈수록 오크들의 덩치가 커지고, 동시에 하이 오크 부족들의 영토에 가까워지지."

"잠깐. 그럼 지금 설마 우리 목적지가···."

난쟁이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하이 오크들의 영토 안에 있지. 출발 전에 말하지 않았소?"

"다,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네. 하이 오크라니, 그 싸움광들은 기를 쓰고 피해 다녀도 모자랄 족속들 아닌가!"

거 참 호들갑은. 숲이 무섭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이상한 부분에서 겁이 많은 난쟁이였다.

그러면서 코앞에서 수제 폭약을 뻥뻥 터뜨려대는 건 아랑곳하지 않는다니.

비범함과 반쯤 미친 건 한끝 차이라는 생각을 하며, 댈런은 창을 휘휘 털고 걸어나갔다.

***

일행은 자연스럽게 전장을 떠나 움직였다. 오크의 거듭된 습격에 말을 잃은 뒤로, 이동수단은 다시 튼튼한 두 다리가 되었다.

사실 속도 자체는 큰 차이가 없었다. 산맥의 지형이 워낙 험준한 터라, 훈련받은 군마라 해도 반쯤 짐짝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 정도로 악한 종족입니까?"

계속 궁금증이 남아있었던 걸까. 한참을 걷던 중 아카샤가 난쟁이에게 슬쩍 속삭였다.

"악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네만···적어도 위협적인 종족은 맞다네. 덩치나 힘이 보통 오크보다 월등한 건 물론이고, 본성 자체가 극도로 호전적인 족속이야."

"호전적이라···한입 거리 삼기 적당하겠군요."

"엉···?"

왠지 등골이 서늘해진 비요른이 고개를 돌렸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건 호기심과 식탐이 동시에 번뜩이는 눈동자였다.

"아, 별 건 아닙니다. 대부께서 저를 교육하실 때 소나 돼지 수준의 비지성체, 그중에도 특히나 악한 개체라면 마음껏 먹어도 된다고 하셨거든요."

"······."

순수하게 끔뻑거리는 소년의 눈. 난쟁이는 그제야 질문의 저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종족의 규격 자체가 다른 탓에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던 의미.

새끼용의 물음은 처음부터 '위험하고 악한 놈들? 혹시 먹어도 되는 종류인가요?'라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아마 저 교육을 해준 장본인은 지금쯤 까마귀 둥지에서 열심히 술잔을 닦고 있을 바텐더겠지.

오랜만에 유전자 레벨에서 각인된 두려움을 느낀 난쟁이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사이, 곁에서 함께 걷고 있던 루시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카샤. 하이 오크는 다른 오크들보다 지성도 뛰어나고, 말도 훨씬 잘 통하는 종족이야. 스파타 왕국과 무역 관계에 있기도 하고."

"그럼 아인종 수준의 지성체라고 보면 되는 겁니까?"

"그렇지. 싸움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점이 독특하긴 하지만. 아무튼 대부라는 분도 하이 오크를 먹잇감으로 생각하시진 않으셨을 거야."

"아쉽군요. 새로운 종류의 음식을 맛볼 수 있나 했는데···. 그래도 괜찮습니다. 어머니의 요리는 용신의 식탁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진미가 분명하니까요."

"···어휴. 누굴 닮았는지 말은 번드르르하게 잘해요."

해맑게 웃으며 아부를 떠는 소년과,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그 머리를 쓰다듬는 루시아.

댈런은 일련의 대화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선두에서 길을 찾아갔다.

오크의 체격 변화가 제대로 가고 있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이긴 했으나, 오직 거기에만 의존해서 길을 찾고 있는 건 아니었다.

험준하게 뒤틀린 산자락 저 멀리, 뾰족하게 솟은 산봉우리들이 역시 또 하나의 이정표였기에.

[하이 오크들의 성소로 가는 것이냐?]

심중에서 피어오르는 진룡의 물음.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짐작도 빠른 것일까.

적창의 말대로, 그의 목적지는 저 산봉우리들 사이에 있는 하이 오크들의 성소였다.

하이 오크들 사이에서는 선조들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알려진 성지이자, 동시에 모든 오크들의 지배자인 대족장이 머무르는 처소.

댈런이 처음으로 극후반까지 살아남아 악신의 대대적인 침공을 목도했던 회차의 결말은, 바로 그곳에 잠들어 있었다.

'그래도 이번 시체는 좀 쉽게 얻을 수 있겠군.'

오가는 길이 험악하고, 자격을 얻어내기 위한 능력의 허들이 높은 게 문제일 뿐.

충분한 능력만 있다면 성소의 시체는 그리 얻기 힘든 종류가 아니었다.

루시아의 말대로 하이 오크들은 말이 통하는 지성체. 물론 싸움광에 생각이 단순하다기는 했지만, 그건 반대로 악에 물들 가능성이 적다는 뜻이기도 했다.

흑마법사들의 온갖 궤계를 물리친 끝에야 회수할 수 있었던 다른 시체들과 달리, 성소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하이 오크들에게 자격만 인정받으면 되는 바.

지금의 댈런이 가진 무력이라면, 적당하게 대련 몇 번쯤 어울려주는 것으로 자격을 따낼 수 있을 테였다.

거기다 그는 초반에 하이 오크에게 호감을 사는 방법까지도 알고 있었으니···.

바스락.

"정지."

그때 먼발치에서 풀숲이 흔들렸다. 댈런은 제자리에 멈춰서서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매복이 들킨 걸 알아챈 오크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풀숲 사이에서 나타났다.

"크흐흐흐, 들켰다! 싸운다!"

"여기까지 온 잉간 강하다! 강한 꼬기 맛있다!"

"싸움! 꼬기! 싸운다! 먹는다!"

"구와아아아아!"

어눌한 발음의 함성과 고함들. 뒤쪽을 돌아보니 어느새 놈들은 일행이 지나온 길까지 둘러싸고 포위한 상태였다.

"아까보다 조금 더 많군요. 대략 백 마리 정도입니다."

루시아가 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긴장감이나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습격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것도 있었고, 애당초 일행의 수준에서 저런 어설픈 매복을 눈치채지 못할 리도 없었으니까.

일일이 피해 다니며 갈 길을 꼬아대는 것보다, 한 번 부딪힐 때 화끈하게 쓸어버리고 직진하는 게 시간이 절약된다는 판단이었을 뿐.

스으으···.

그녀의 검신을 따라 신성력을 피어오르고, 곁에서 비요른이 둥근 수류탄 다발을 꺼내 허리에 둘렀다.

소년의 검은 눈이 노랗게 뒤바뀌면서, 주위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는 순간이었다.

[공격하라.]

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동시에 어디선가 날아온 투창의 비가 일행을 포위한 오크들의 진형을 강타했다.

퍼버버버벅!

"그아악! 그억!"

"넘들이 왔다! 그림 그린 넘들이다!"

"도망, 도망쳐···!"

순식간에 두 자릿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오크들은 단번에 혼이 빠진 듯 달아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아무리 많이 죽어나가도 끄떡하지 않던 놈들이, 고작 투창 세례 한 번에 사기가 꺾이는 기이한 현상.

'예상대로군.'

그 광경을 바라보던 댈런은, 허리띠에 손을 가볍게 얹은 채 감각을 한층 더 곤두세웠다.

사실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주변의 기척을 낱낱이 훑어내고 있었다.

적들이 튀어나온 즉시 응수하지 않은 것 역시도, 이 투창 세례를 반쯤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

사방에서 좁혀들어오는 열댓 개의 기척들은, 분명 백에 달하는 오크들 정도야 가볍게 학살할 수 있었으니까.

"하나도 살려 보내지 마라! 사냥의 시간이다!"

외침과 함께 튀어나온 거구의 사냥꾼들.

일견 다른 오크들과 비슷한 외견이었으나, 무려 3미터에 달하는 전신에는 다른 오크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흰색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사, 살려, 그어억!"

"이대로 꼬기가 될 수는···크아악!"

녹색 물결 안으로 뛰어든 하이 오크들이, 순식간에 자신들보다 몇 배나 많은 오크들을 썰어버리기 시작했다.

2미터에 달하는 거검을 가볍게 휘두를 때마다, 녹색 물결이 으깨지며 피와 내장이 비산한다.

일방적인 전투는 금세 끝을 맺었다.

피 냄새가 짙게 밴 공기 아래.

살아있는 건 열댓쯤 되는 하이 오크들과, 댈런의 일행 네 명뿐이었다.

"······."

정적 속에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3미터짜리 거인들이 피칠갑을 하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면 으레 만들어질 분위기였다.

다른 오크들과 달리 대화가 통한다는 걸 알고 있어도, 섣불리 나서기는 꺼려지는 상황.

댈런은 허리띠에서 손을 떼고 성큼 걸어나갔다.

"잉간, 무슨 일인가."

하이 오크들 중 하나가 말했다. 가장 덩치가 크고 문신이 많은 놈이었다.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무심하게 말했다.

"밥 좀 얻어먹자."

"댈런?"

루시아가 무슨 소리냐는 듯 그에게 되물었고, 비요른은 아예 쌍심지를 켠 채 수류탄 핀으로 손을 가져갔다.

소년만이 갸웃거리며 이 대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뿐.

그 앞에서 하이 오크 대장은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댈런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 좋다! 밥 먹고 가라!"

호쾌한 대답에 일행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검문 통과였다.

***

[신기하구나. 하이 오크들은 필멸자들 사이에서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종족일 텐데.]

심상 속, 적창이 조용히 감탄했다.

[밥을 먹자는 말이 일종의 열쇠인 건가. 어떻게 했는지는 나로서도 모르겠지만, 너는 이전에 이들의 문화를 경험해본 적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런 셈이지.'

[그래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이 종족은 인사 대신 투창을 날린다는 농담도 있었으니···아, 그래서 말이 통하는 건가?]

···이 용가리는 또 뭐라는 거야.

나름 극적인 조우와 협상을 뒤로 한 채, 일행은 학살의 현장을 떠나 하이 오크의 부락으로 향하고 있었다.

피바다를 만들어버리며 등장한 첫인상과는 상반되게, 하이 오크들은 꽤나 말이 잘 통하는 상대였다.

"밥은 중요하다. 밥을 먹어야 근육도 머리도 힘을 쓴다!"

"하이 오크들은 밥 잘 먹어서 머리가 좋다. 비실이와 땅딸보는 머리가 안 좋은 모양이다!"

"여기 이 전사 칭구를 봐라! 이 칭구도 머리가 좋게 생겼지 않나!"

더불어 은근히 수다쟁이이기도 했고.

"대체 내가 왜 머리가 좋지 않다는 거지?"

"근육이 부실하면 머리에 피가 안 가는 법이다!"

"뭐라? 근육이 부실해? 지금 드워프의 육체를 모독하는 건가!"

"난쟁이는 키가 작다! 키가 작으면 심장도 작다! 심장도 근육이다! 근육이 부실하면 머리에 피가 안 간다!"

"···이럴 수가."

뭔가 전후가 뒤섞인 주장임에도 설득되어버린 비요른이, 침울한 표정이 되어 일행의 후미로 축 뒤처졌다.

"칭구는 몸이 튼튼하다! 근육이 돌 같다!"

"아니다, 강철 같다! 분명 머리도 강철 같이 좋을 거다!"

"이 꼬마는 아들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닌 것 같군! 아비를 닮아 훌륭한 전사가 될 거다!"

한편 댈런의 곁에서 동행하는 하이 오크들은, 그에게 쉴 새 없이 칭찬을 퍼붓는 중이었다.

등 뒤에서 난쟁이의 억울한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근육질에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야말로, 하이 오크 문화권에서 극도의 호감상으로 통하는 외형이었으니까.

거기다 하이 오크들은 전부 먹을 것과 싸움에 환장하는 이들이었으니, 싸우자 혹은 밥 먹자라는 인사가 굉장한 호의로 인식되는 편이었고.

말하자면 그들 눈에 댈런은 미남인 데다 센스까지 갖추고, 능력까지 출중한 완벽한 남자라는 이야기였다.

만난 지 하루도 안 됐음에도 앞다퉈 친해지고 싶을 정도로.

'은근히 순박한 면모가 많은 종족이라니까.'

워낙 대륙의 구석진 지역에 살아서 잘 알려지지 않은 것뿐.

하이 오크는 어떤 면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여타 아인종들보다 나은 구석도 있는 이들이었다.

기본적으로 악마에게 극한 반감을 가졌다는 점 때문에, 실제로 많은 회차에서 이들에게 도움을 받은 전례도 있었고.

"다 왔다. 우리 부족이 사는 부락이다."

일행은 두어 시간쯤 걸은 끝에 하이 오크의 거주지에 도착했다.

그리 높진 않지만 마을 전체를 둘러싼 돌벽과, 중간중간 4미터 정도의 높이로 솟아오른 감시탑들.

중무장한 하이 오크 전사 두 명이 정문을 가로막고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전사가 물었다.

"웬 잉간인가?"

"손님이다! 밥 먹고 간다고 했다!"

"좋군. 잘 먹여줘라! 통과!"

이번에도 프리패스였다.

156

하이 오크(2)

정문을 통과해 돌벽 안쪽으로 들어가니 석재 건물들로 이루어진 마을이 일행을 반겼다.

"흐하핫! 잡아 봐라!"

"키도 작은 자식이! 잡히면 너는 고블린이다!"

집과 집 사이를 뛰어노는 어린 하이 오크들.

머리 위에 물동이를 이고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고블린.

우렁찬 박장대소가 집 밖까지 들려오고, 병장기를 손질하는 소음과 고기 굽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뒤섞인다.

저 멀리 절벽 위에는 족장의 집으로 보이는 2층짜리 석재 건물이 굴뚝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덩치가 크고 피부색이 다를 뿐, 인간의 마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정경.

루시아는 신기한 눈으로 그 풍경을 감상하며 중얼거렸다.

"성기사단의 기록에 의하면 하이 오크들은 천막 생활을 한다던데···역시 문헌과 현실은 다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그랬다. 하지만 천막만 치면 춥다. 추우면 힘이 빨리 빠진다. 우리 힘은 싸울 때를 위해 아껴둬야 한다."

하이 오크 전사장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나머지 전사들이 하나둘씩 본인의 처소로 흩어진 뒤에도, 전사장은 안내를 위해 일행의 곁에 남아있는 중이었다.

"신기하군요. 언제 이렇게 바뀐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대족장이 바꿔놓았다. 대족장은 하이 오크가 자유롭게 싸우는 종족이라고 말했다."

"자유롭게 싸우는 종족이라. 대족장이라는 분은 분명 고결한 신념을 가지신···아니, 강하고 멋진 분이시군요."

"···그래. 그랬었지."

전사장이 말끝을 흐렸다. 선 굵직한 얼굴에 흐릿하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물론 그것도 잠시뿐. 그는 금방 고개를 털고 잰걸음으로 안내를 이어갔다.

비요른과 아카샤가 거의 뛰어가듯 따라가기를 잠시, 일행은 머지않아 널찍하게 지어진 돌집 앞에 도착했다.

전사장은 맨들거리는 정수리를 긁적이며 집 문을 열어주었다. 그가 말했다.

"여기가 손님 집이다. 밥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먼저 온 손님들도 있으니 친하게 지내라."

"먼저 온 손님?"

"근육은 많이 없지만 똑똑한 마법사다. 밥 되면 부르겠다!"

전사장은 그 말만 남기고는 휘적휘적 자리를 떴다.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이 산간오지의 하이 오크 부락에 찾아온 사람이 또 있다고?

"누굴까요?"

"글쎄."

느껴지는 기척은 둘. 그중 하나는 기척이 반쯤 흐릿했다.

댈런의 기감이 전사로서나 마법사로서나 수준급에 달한다는 걸 생각했을 때, 저 흐릿한 기척의 정체는 그마저 넘어서는 실력자라는 이야기.

자연스레 허리띠에 손을 끼운 댈런은, 일행의 선두에서 집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이런 첩첩산중의 골짜기까지 왔다는 건, 그 능력이나 목적 모두 일반적이지 않다는 이야기일 터.

그 목적이 그의 여정에 걸림돌이 될 지 아닐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알아내기 위해서는, 우선 면대면으로 부딪혀봐야겠지.

약간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좁은 복도를 지나 거실로 접어들었을 때, 댈런의 그런 생각은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나쁜 쪽이 아닌, 좋은 방향으로.

"댈런? 여긴 또 어쩐 일인가!"

거실에서 두꺼운 장서를 넘기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엘가이아 마탑의 탑주.

대영역을 이룬 대마법사이자, 사경을 헤메던 중 댈런의 권속으로 되살아난 노인.

펠버 발렌티노와 그의 제자 토미였으니까.

***

두꺼운 장서들이 수백 권씩 쌓여있는 거실.

일행이 휴식을 취하며 여독을 푸는 사이, 댈런은 펠버와 헤어진 이후의 근황을 나눴다.

커피잔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던 김은 이미 식어버린 뒤. 갈색 눈을 빛내며 댈런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펠버는 끝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 덩굴의 마녀라니. 정말로 끝이 다가온다는 게 실감이 나는구만. 에낙사구스야 원래부터 사람들을 숱하게 유혹해온 악신이라지만···라필렘과 쑴까지 전면에 나설 줄은 몰랐네."

"세계의 이빨 산맥에 온 것도 그 이유요."

"그 이유라니?"

"하이 오크의 성소에 쑴의 악마 군대를 상대할 힘을 얻을 방법이 있거든."

댈런은 반쯤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아직까지 일행에게는 정확한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지만, 권속인 펠버에게까지 비밀로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펠버는 대영역의 권능으로 댈런의 지난 회차들을 일부 엿본 전례가 있었으니까.

진룡과의 싸움에서 남은 삶을 불사른 끝에 권속의 계약을 맺게 된 것 역시, 그 과정에서 댈런을 회귀자라 생각했기 때문이고.

'하이 오크의 성소로 가겠다고 하면 비요른 그 양반은 바로 질겁하겠지.'

물론 하이 오크 부족과 접선한다는 일차적인 목표를 완수했으니, 슬슬 이야기를 꺼낼 시점이긴 했다.

"그나저나 노인장은 여기 무슨 일이오?"

"나야 요양차 방문했지. 여기만큼 물 좋고 공기 좋은 곳도 없거든! 생각이 조금 단순하긴 하지만, 그래도 친절한 친구들도 있고 말일세."

그러고보니 르비바흐에서 약초술의 도움을 받은 뒤, 북쪽 산지를 돌아다니며 요양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지.

생각해보면 그 소식을 전해준 비요른 역시 갈리오스 상단주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상단주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져가는군.'

르비바흐와 엘가이아 마탑, 필로폰의 과수원에 이어 이제는 성기사단까지 거래처를 넓힌 볼크마 갈리오스.

일신의 무력이 좀 떨어질 뿐, 곳곳에 미치는 영향력과 그 성장세만 놓고 본다면 영웅이라 불려도 과언이 아니었다.

도박장에서 탕진한 돈을 메꾸기 위해 상단 호위 의뢰를 받았던 인연이, 이렇게까지 흘러올 줄 누가 알았을까.

펠버와 마찬가지로 그쪽 역시 지금까지의 회차에서 발아한 적 없던 초유의 가능성이었다.

"더불어 이 높은 산자락에서 연구를 계속하다보니, 예상 외의 소소한 깨달음도 얻을 수 있었네."

"왜 기척이 달라졌나 했더니 그래서였군."

"허허,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주문 한 줄 모르는 용병이었던 그대가, 1년도 지나지 않아 완숙한 4위계에 올라 있다니.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었을 걸세."

댈런은 말없이 웃으며 커피잔을 들어올렸다.

미궁도시에 첫발을 들인 뒤로 벌써 1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 있었다.

낡은 갑옷에 손도끼와 검 하나씩 달랑 걸치고 청동 성문을 통과하던 게 엊그제 같건만.

사교도 집단을 무너뜨리고 성기사단을 포함한 굵직굵직한 의뢰를 수행하는 사이, 어느새 초월자의 자리를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처음과는 비교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높이 올라왔다.

모니터 너머에서 지나간 수백 회차 중 어디에서도 지금 만큼의 속도로 강해진 적은 없을 정도.

그럼에도 여전히 초월자의 위계는 닿을 듯 말 듯 손에 잡히지 않았고.

그들조차 뛰어넘은 악신의 힘 앞에서는, 처음과 비할 바 없이 무력한 신세일 뿐이었다.

"······."

허나 포기하지 않는다.

이제 와서 나아가기 망설일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이 길을 선택하지조차 않았다.

완력 좋고 싸움 좀 하는 용병 정도로 살아갈 기회는,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첫 순간부터 그의 앞에 놓여 있지 않았나.

그걸 걷어차고 숱한 사선을 넘어선 끝에, 강해지기 위한 끝없는 노력으로 거머쥔 자리가 바로 이곳이다.

여전히 아득하게만 보이는 미답의 목적지.

허나 처음보다 가까워진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지금 해야할 일은 드넓은 영역 속의 설산을, 수많은 가능성들로 채워가 5위계의 단초를 열어가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쉬지 않고 해왔던 것처럼, 수백에 달하는 과거의 잔재를 찾아내 새로운 가능성들을 얻어내야 하겠지.

하이 오크의 성소에서 회수할 시체는, 그 잔재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뛰어난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진 것 같네. 그럴 법도 하지."

푸근한 할아버지 같은 웃음을 지으며, 펠버가 수염을 슬슬 쓰다듬었다.

"항거할 수 없는 듯한 강대한 악 앞에서, 수백에 달하는 실패를 딛고 일어나는 일이 쉬울 리가. 자네는 그 어떤 초월자도 하지 못할 일을 해내고 있는 걸세. 나였으면 그 무한한 굴레 속에서 진작에 미쳐버렸을 게야."

"글쎄. 어쩌면 이번이 정말 마지막일 지도 모르지."

"그래. 그럴 지도 모르네. 그러니 자네의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이 더 심한 것이겠지. 허나 이렇게 머리가 복잡해질 때 가장 중요한 일이 뭔지 아는가?"

"···뭐요?"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되물었다. 그 앞에서 펠버는 싱긋 웃으며 잔에 남은 커피를 싹 비웠다.

그리고 말했다.

"좋은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과 나눌 좋은 음식."

쾅쾅쾅!

"손님들! 밥 다 됐다! 나와라!"

문밖에서 전사장의 외침이 들려왔다.

밥 먹을 시간이었다.

***

일행은 족장의 집으로 안내받았다.

처음 방문한 손님에게는 성대한 만찬을 대접하는 게 하이 오크들의 관례라나.

완만한 산길을 돌아 탁 트인 절벽 위에 지어진 족장의 집에 도착하니, 식사는 이미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식탁 앞에 앉아 기다리던 족장은, 일행이 보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 벌려 맞이했다.

"밥손님! 어서 와라! 나는 족장 타룸이다! 절벽골짝 부족에 온 걸 환영한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자기 소개는 나중에 하도록! 밥 식기 전에 먹어야 한다!"

"······."

"어서 앉아라! 성기사 칭구!"

잠시 넋을 놓고 몸이 굳어버린 루시아.

댈런이 그녀를 거의 들다시피 해서 앉히고서야, 루시아는 얼굴이 새빨게진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끌끌끌, 좋을 때구만. 좋을 때야."

"맞다! 밥 먹을 때는 좋은 때다!"

"그렇지. 족장이 뭘 좀 아는구만!"

"고맙다, 마법사! 역시 똑똑하다!"

하이 오크 문화에 완전히 적응해버린 대마법사가 족장과 담소를 나누는 사이, 일행이 전부 자리에 앉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식사는 문자 그대로 만찬이었다.

야외에 넓게 깔린 돌 테이블 위, 수십 개의 나무 그릇들에 담긴 가지각색의 음식들.

기본적으로 고기 위주의 식단이긴 했지만, 곡물과 채소 요리는 물론 과일로 만든 타르트 느낌의 디저트까지 놓여 있었다.

"맛있다! 역시 밥이 최고다!"

"많이 먹어라, 손님들!"

"배터지게 먹고 죽은 오크는 근육도 빵빵하다고 그랬다!"

하이 오크들의 걸쭉한 전통 술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은 전사장들은 순식간에 음식을 헤치워갔다.

식사를 시작하고 얼마 가지도 않아, 곳곳에 빈 그릇이 생겨날 지경.

다만 음식이 떨어질 일은 없었다. 테이블 주변에서 뛰어다니는 고블린들이, 빈 그릇이 생겨나는 족족 가져가고 새 음식을 올려두었기 때문.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고블린 여러 마리가 돼지를 통째로 꿰어 불 위에서 돌리고 있었고.

족장의 집 옆에 딸린 단칸짜리 부엌에서도, 끊임없이 달그락거리며 뭔가가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큼큼, 굉장한 진미들이군. 실례지만 혹시 이걸 다 직접 한 건가?"

이것저것 집어먹어보던 비요른이 감탄한 얼굴로 물었다.

하이 오크 족장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사냥만 한다! 고블린들이 요리한다! 우리 부족 고블린 손재주 좋기로 유명하다!"

"허어, 어지간한 요리사들보다 낫군."

"많이 먹어라! 난쟁이라도 많이 먹으면 혹시 키가 클지도 모른다! 머리가 좋으면 몸을 덜 축내고도 더 많이 싸울 수 있다!"

"······."

만찬은 두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던 해가 산봉오리들 너머로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

차디찬 만년설의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흘러가는 가운데, 짙은 남색의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파르르 떨며 지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들도 추운가 봅니다."

태어난 지 몇 달도 안 된 어린 용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동심 가득한 말을 흘리고.

"잘 먹고 간다, 족장!"

"다음에 새 밥손님 왔을 때 찾아오겠다!"

"그전에 사냥이라도 한 번 같이 가자!"

돌탁자 위의 음식이 네 번쯤 갈아치워졌을 무렵, 전사장들 역시 하나씩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끌벅적한 녹색 거인들이 떠난 돌탁자에는 은은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닥불 타닥거리는 소리와, 부엌에서 식기들을 설거지하는 소음만이 배경처럼 깔린 가운데.

작은 오크통 크기의 술잔을 들어올리던 족장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잉간. 여기는 왜 왔나?"

157

하이 오크(3)

"잉간. 여기는 왜 왔나?"

밥을 다 먹어서일까. 아니면 부하들이 집으로 돌아가서일까.

족장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우렁찬 함성에서도 느낄 수 없던 강한 힘이 묻어났다.

댈런은 족장의 수준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못해도 완숙한 4위계. 어쩌면 그보다도 더 위.

아직 완전히 제것이라 할 수 없는 적창의 힘을 배제한다면, 족장 타룸은 그와 동격을 이루고도 남을 실력자였다.

"머리 좋은 전사는 대접받아야 한다. 그래서 밥부터 먹었다. 하지만 보통 잉간은 여기까지 잘 오지 않는다. 온다면 주로 두 가지 이유지."

어둠 속.

모닥불의 일렁임을 머금은 검은 눈이, 찰나의 순간 자줏빛으로 번뜩였다.

"반짝이. 아니면 싸움."

"무역이나 오크 사냥을 위해서라는 거군."

"그렇다. 하지만 너는 반짝이 때문에 온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너를 의심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겠지."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 오크의 가죽은 귀족들, 특히나 아인종 멸시 풍조가 있는 제국 귀족들 사이에서 고가에 거래되는 물건이었다.

별도의 가공이 없어도 매우 질기고 단단하며, 수십 년이 지나도 좀처럼 변형이 되지 않는 하이 오크의 가죽.

어지간한 마물 가죽을 능가하는 좋은 원재료였지만, 사치스러운 장식품으로서의 가치는 그보다 훨씬 높았다.

'하이 오크의 워 페인트 때문이지.'

하이 오크와 일반적인 오크를 가르는 가장 큰 기준점, 워 페인트.

하이 오크들의 피부 위에 자연적으로 새겨지는 흰색 문신은, 제국 귀족들의 뒤틀린 심미안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형태를 보존해서 벗긴 가죽을 벽에 걸어 장식하거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여러 장을 자르고 묶어 깔개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지.

그런 맥락에서 족장의 경계심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머나먼 북부의 산골짜기의 아인종들이라 할지라도, 귀족들의 탐욕스런 손길에서 완전하게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기에.

"모지리 오크들을 사냥하는 건 상관 없다. 하지만 하이 오크를 사냥하려는 놈들은 찢어 죽인다. 반짝이. 아니면 싸움. 너는 어느 쪽이냐, 잉간?"

"둘 다 아니다."

댈런은 접시에 남은 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성소를 방문하러 왔다."

"···성소?"

"그래. 너희 대족장이 지키는 곳. 높은 산봉우리들 사이에 숨겨진 선조들의 무덤."

"흐음······."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타룸이 깊은 침음을 흘렸다. 그는 잔에 남은 술을 죄다 들이킨 뒤, 뒷목을 긁적이며 이야기했다.

"오해해서 미안하다, 잉간. 그런데 안타깝지만 성소를 방문하는 건 쉽지 않을 거다."

"어째서지? 자격을 증명할 준비는 됐다만."

댈런이 물었다. 타룸은 씁쓸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

"자격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도 성소에 들어가지 못한 지 벌써 두 달이 됐으니까."

"두 달?"

내가 아는 대족장이라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하이 오크들 중에서도 가장 현명하고, 가장 강한 개체만이 대족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특히나 현 대족장은 댈런도 지난 회차들에서 몇 번이나 함께했던 뛰어난 전사.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종족을 지킨다는 의무를 위해 목숨을 바치던, 완성된 영웅 NPC들 중 하나였는데.

'썩을.'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불길한 예감.

이 땅에 떨어진 뒤로 몇 차례나 겪었던 은근한 직감의 경고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너는 하이 오크에 대해 잘 아는 것 같다. 성소나 대족장에 관해서도. 그렇기에 우리만큼이나 혼란스럽겠지."

타룸은 무슨 생각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큼직한 손 안에서 나무 술잔이 으직 하고 으깨졌다.

"대족장 쓰툼파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다."

***

"자네가 온 걸 보니 뭔가 일이 생기려나 싶었는데···역시 이번에도 피해가지 않은 모양이군."

점토를 주무르며 껄껄 웃는 펠버를 보고, 댈런은 미묘하게 눈꼬리를 비틀었다.

"노인장까지 그러기요? 요즘 들어 왜 다들 나를 저주 인형 취급하는지 모르겠군."

"끌끌, 하지만 사실 아닌가? 자네는 가는 곳마다 상식을 뛰어넘는 영웅적인 행보를 보이지. 그 말인즉, 상식을 뛰어넘는 대적자가 가는 곳마다 자네의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뜻도 된다네."

예로부터 영웅의 길은 험난한 법이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점토인형의 모양을 대략 잡은 펠버가, 어깨에 둘러멘 가방에서 작은 조각칼을 꺼내들었다.

삭삭삭삭―

노인의 얇은 손가락 사이로 곡예에 가까운 조각이 이어졌다.

댈런은 문득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하이 오크 족장과의 저녁 만찬 이후로 사흘이 지났다. 그날 밤, 족장 타룸은 무거운 표정으로 선언했다.

'족장 회의를 소집하겠다.'

세계의 이빨 산맥의 하이 오크 족장들이 전부 모이는 대회의.

본디 일 년에 한 번만 열리는 회의였으나, 비상시라면 긴급하게 소집하는 것도 가능하긴 했다.

물론 그럴 경우 회의의 주최자는 상당한 정치적인 부담을 떠안게 되겠지.

'언젠가는 했어야 할 일이다, 잉간. 지금 같은 상황에 네가 성소를 찾아왔다는 건···우리에게 닥친 위기를 깨닫게 하기 위해 선조들이 개입한 걸지도 모른다.'

생각이 많아 보이던 타룸의 옅은 한숨.

댈런은 고개를 털었다. 애당초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하이 오크의 내부 정치에 개입하려는 게 아니었으니까.

"······우와."

그때 소년의 모습을 한 아카샤가 댈런의 무릎 위에 털푸덕 엎드렸다.

펠버의 손에서 조각이 만들어지는 광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소년.

조막만 한 입이 살짝 벌어지고, 검은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거린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소년이 수많은 회차에서 대륙 남부를 초토화시켰던 진룡이라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하겠지.

"끌끌끌."

그 순수한 모습에 펠버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한층 부지런히 놀려갔다.

삭삭삭―

점토인형을 잡은 손이 인형에 끊임없이 마력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날카로운 조각칼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점토 조각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조각칼이 닿는 순간 자르기 적당하게 물러지고, 칼날이 지나가자마자 단단하게 형체를 굳혀내는 점토.

경지에 오른 대지술사의 완숙함이 손 안에서 가감 없이 펼쳐지면서, 뭉툭하던 형상에 점차 생기를 불어넣는다.

'반쯤 농담조로 요양이라고 표현은 했지만···이곳에서의 생활이 정말 도움이 되긴 하나보군.'

공예라는 섬세한 작업을 저토록 기민하게 해낸다는 건, 펠버의 육체능력이 상당한 경지에 올랐다는 증거.

5위계에 올라 더 위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마법사인 그가, 심상 속의 막대한 힘을 감당해낼 만한 육신을 갖춰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5위계라.'

영역의 일부분을 현실에 덮어씌울 수 있는 경지.

그건 타고난 종의 한계를 벗어던진 초월자를 가려내는 기준이었다.

댈런은 천변만화의 얼굴과 덩굴의 마녀가 격돌했을 당시, 그 미답의 길에 닿았던 짧은 순간을 떠올려봤다.

'한 번만 더 해보면 완전히 감을 잡을 것 같은데.'

확신할 수 있었다. 그에게 남은 건 능력이 아닌 심상의 문제라는 걸.

이미 최소한의 조건은 달성한 지 오래.

기억 속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당시의 잔향을 되새겨낸다.

시간선에 직접 개입할 정도로 뛰어난 오성을 가진 마법사의 마력 조작을 보고 있으면, 그때의 그 감각을 다시금 되살릴 수 있을 것 같기도―

"자. 여기 있다."

―툭.

무릎 위에 던져진 조각상과 함께 흩어지는 심상. 소년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그럼. 늙은이의 선물이라 생각하거라."

"선물···감사합니다!"

뛸 듯이 기뻐하며 점토 조각상을 낚아채는 아카샤. 소년은 루시아에게 자랑하려는지 조각상을 들고 방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펠버는 그 뒷모습을 흐뭇한 눈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조급해하지 말게."

노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소년이 사라진 복도이지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구분하기 어렵지 않다.

"처음 봤을 때부터 자네의 그릇은 남달랐지. 까마득히 높은 곳을 바라보고, 범접하기 힘든 초월자들을 상대하면서도, 깊은 곳의 평정심은 흔들리지 않았네."

"···또 어려운 소리군."

"말 그대로, 이제 와서 조급해하지 말라는 이야기일세. 심상을 현실에 덧씌우는 일 따위야, 자네에게는 그저 거쳐 가야 할 과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까."

펠버의 눈살이 자글자글 주름을 만들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네를 받아들이게. 소영역을 이루는 것이 지나간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빚어지는 돌파구라면, 개방의 단계에 접어든 대영역은 지금의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비롯되는 힘일세."

"······."

끼이익.

대답하는 대신, 댈런은 입을 일자로 다문 채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탄성 좋은 원목이 비명을 지르면서도 그의 체중을 온전하게 받아냈다.

조급함이라. 언제부턴가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에야 종말의 요소들을 한발 앞서 박살낸다는 성취감에 젖어있었지만, 악신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자 입장이 반대가 됐다.

놈들의 파상공세를 막아서기 위해, 혼자서 대륙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게 된 꼴.

애당초 그걸 끊어내고자 이번 여정을 떠난 게 아니던가.

차르국으로 몰려오는 공세를 완벽하게 막아내는 것도 중요했지만, 댈런의 초점은 그보다는 스스로의 힘을 쌓아올리는 데 있었다.

하이 오크의 성소에 잠들어있을, 일격으로 언덕을 무너뜨리는 권사의 시체를 회수함으로써.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라.'

펠버가 남긴 화두 역시, 그런 여정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터.

자신은 왜 이 여정을 떠났는가. 그 끝에 무얼 얻고자 하는가.

그 시작점에서부터 새겨졌던 원초적인 이유와 갈망은, 가슴 깊은 곳에 지금도 여전히 잠들어 있을 테였다.

잠시 흐트러졌던 마음을 바로잡고 나자, 펠버가 점토 덩이를 하나 더 꺼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마법사가 말했다.

"자네도 하나 가지겠나? 특별히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주겠네."

"그래준다면 고맙지."

삭삭삭삭―

낮게 웃고 조각칼을 놀리기 시작하는 마법사. 댈런은 그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다가, 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밖에서 그를 부르러 온 하이 오크 전사장의 기척이 느껴졌다.

사흘이 지나 마침내 족장들이 전부 모인 것이었다.

***

사흘 만에 방문한 족장의 집.

돌로 쌓아올린 저택의 1층에는 성인 장정 수십 명을 수용하고도 남을 커다란 회의실이 있었다.

물론 그만큼 커다란 회의실이라도, 하이 오크들이 스물 남짓 들어서자 미묘하게 좁아 보였다.

밥손님 자격으로 일행을 대표해 참가한 댈런은, 탁자 위의 육포를 씹으며 각 부족의 족장들을 둘러봤다.

감정에 솔직한 하이 오크들인지라 속내를 파악하기는 쉬웠다.

절반 정도는 무덤덤하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심기가 불편한 얼굴.

개중 몇몇은 어찌나 화가 났는지, 넓은 돌탁자 위에 간식으로 쌓아올린 각종 음식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갑자기 웬 족장 회의냐. 족장 타룸."

쩝쩝거리는 소리가 적당히 잦아들 무렵, 돌탁자에 둘러앉은 하이 오크 족장들 중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 표정이 일그러져 있던 놈이었다. 이유 역시 짐작할 만했다.

"다음 족장 회의까지는 반 년이 넘게 남았지 않았나. 대족장의 허락은 받고 연 건가? 설마 대족장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건 아니겠지?"

"대족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족장 챈챈발라."

타룸이 말했다.

"내 스승인 대족장과 싸울 생각은 없다. 너희들과 마찬가지로 초대장을 보냈지만, 사흘이 지난 지금까지도 응답이 없을 뿐이다."

"그럼 거절이군. 대족장이 없는 족장 회의는 처음이다. 대체 뭐가 그렇게도 급한 사안인 건지 어디 한 번 말해봐라, 족장 타룸."

족창 챈챈발라라 불린 하이 오크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타룸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어갔다.

"이번 회의는 두 가지 안건 때문에 열렸다. 하나는 내 옆에 앉아있는 이 칭구의 요청이지. 우리 하이 오크들의 성소를 방문하고 싶다고 한다."

"그건 어렵지 않다! 선조들의 율법에도 기록되어 있다! 같이 밥을 먹고, 족장 셋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대족장의 허락을 받으면 된다!"

족장 중 하나가 소다리를 뜯다 말고 벌떡 일어섰다. 우렁찬 외침. 무덤덤한 표정을 짓던 쪽이었다.

"고맙다, 족장 울두캅. 하지만 알다시피 대족장은 족장 회의에도 참여를 거부하고 있다. 초대장에 이 칭구에 대한 이야기도 적었지만 마찬가지로 답이 없었지."

"그래서 뭘 이야기하고 싶은 거냐, 족장 타룸?"

챈챈발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툭 튀어나온 송곳니 때문에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이, 원래보다 배는 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타룸은 진중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말했다.

"나는 대족장의 안위에 문제가 생겼다고 본다."

"말도 안 된다!"

쿠당탕!

챈챈발라를 비롯해 족장 몇 명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댈런은 육포를 씹다 말고 반사적으로 도끼를 던질 뻔했다.

'썩을.'

이 자리에 있는 하이 오크 족장들은 전원이 영역을 이룬 강자들.

눈대중으로 봤을 때 그를 넘어서는 실력자는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머릿수가 스물이 넘어가는 만큼 그도 약간은 긴장해야 했다.

하이 오크들의 생각은 외지인인 그마저도 밥 먹자는 말 하나로 친구가 될 정도로 단순했다.

그 말인즉 지금처럼 머리 아픈 회의를 할 때는,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갈 수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고.

"다들 진정해라. 나도 너희들만큼이나 대족장을 따른다. 하지만 대족장이라고 해서 무적은 아니다. 선조들도 죽어서 흙과 바람으로 돌아가지 않았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차기 대족장 후보인 너의 말을 들어보겠다."

당장에라도 무기를 뽑을 듯 으르렁대던 하이 오크들이, 침착한 타룸의 말에 서서히 기세를 가라앉힌다.

그저 단순한 종족이기에 그런 것은 아니겠지.

타룸이라는 하이 오크 족장의 권위와 신뢰도가, 족장들 사이에서도 높게 평가받고 있다는 이야기일 테였다.

"고맙다, 족장 챈챈발라."

"하지만 네 말에 동의할 수는 없다. 지금 대족장은 늙어 죽기에는 젊다. 그리고 대족장이 성소에 있는 한, 성소 수호자들이 대족장을 지킨다. 어떻게 대족장이 위험할 수 있나?"

"그건···."

뭔가 말하려던 타룸이 입을 닫았다. 그리고 댈런 역시 육포 씹기를 한 번 더 멈췄다.

"······."

피부 위에 오소소 돋아나는 위기감.

경종을 울리며 사선을 경고하는 육감.

콰지지직!

인지한 순간 돌벽을 뚫고 십수 자루의 투창이 날아들고 있었다. 몇몇 족장들이 능숙하게 무기를 뽑아 쳐냈지만, 다른 몇몇은 그러지 못했다.

"크아악!"

"습격이다! 싸움이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하이 오크 족장들. 댈런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오롯이 감각에 집중했다.

허리춤에 걸쳐진 손. 던져달라는 듯 진동하는 도끼.

첨예하게 돋아난 기감이 넓은 돌저택을 포함해 일대의 정보를 뇌리 안에 때려박고.

신비를 꿰뚫는 파영의 마안이 번뜩이는 안채를 발하며, 극에 달한 지능 수치와 함께 그 모든 정보들을 낱낱이 분석해낸다.

영역을 이룬 전사 수십 명의 경계를 뚫고 들어왔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있을 수 없는 일.

호흡 한 줌, 심박 한 번까지 놓치지 않는 이들의 감각을 속였다는 건 둘 중 하나다.

그 모든 기척을 감추고도 남을 정도로, 압도적인 역량을 가진 5위계 이상의 실력자이거나―

'혹은 생명체로서 감춰야 할 기척이 흐릿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술식으로 재구성된 무생물에 가까운 존재이거나.'

콰르르르―

천장이 무너진다. 그 사이로 거뭇한 인영이 떨어졌다.

눈앞에 또렷하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흐릿한 기척.

가장 기초적인 생명력조차 느껴지지 않아, 달아오른 전사의 감각에도 사실상 돌덩이나 시체와 다름없었다.

쿵―

돌탁자 위에 내려앉은 거무튀튀한 거체에, 회의장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순간.

쉬익― 콰직!

매끈하게 마감된 도끼 손잡이가 그 미간에 돋아남과 동시에, 놈이 마치 꼭두각시의 줄을 당긴 것처럼 뒤로 넘어갔다.

쿠궁!

돌탁자를 부수고 쓰러진 거체.

3미터가 훌쩍 넘어서는 거대한 덩치에, 하이 오크와 쏙 빼닮은 형상.

까맣게 착색된 피부 위, 흔적만이 남아있는 빼곡한 문신을 확인한 족장들이 눈을 부릅떴다.

타룸이 검을 뽑아들고 소리쳤다.

"···성소 수호자다! 대족장이 우리를 공격했다!"

158

하이 오크(4)

성소 수호자.

하이 오크들의 성소를 지키며, 성소의 당대 관리자인 대족장을 호위하는 존재.

성소 수호자들은 오직 대족장의 명령밖에 듣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이 족장 회의를 공격했다는 건 둘 중 하나.

대족장의 신변과 성소의 기능 자체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거나.

'아니면 대족장이 모종의 이유로, 직접 족장들을 추살할 것을 지시했거나.'

물론 눈앞에 들이닥친 창칼 앞에서, 그런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따지고 있으면 하이 오크가 아니겠지.

싸움에 미친 그들에게 있어, 칼을 들이미는 존재를 규정짓는 단어는 하나뿐이었으니까.

"적이다!"

"수호자들이 적이다!"

"싸워라! 주겨라!"

"구아아아아아!"

성인 남자보다 커다란 도끼며 쇠몽둥이, 철퇴, 대검 수십 자루가 동시에 번쩍인다. 하이 오크 족장들은 앞뒤 잴 것 없이 문과 벽을 부수고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카강! 쾅! 으지직!

머지않아 병장기들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돌저택 주변을 둘러싼 수호자들과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다.

댈런은 조금 늦게 성검을 뽑아들었다. 당장의 싸움에 휘말리기보다, 손님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일행의 안전을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대마법사인 펠버도 있고 다들 제 한 몸 지킬 정도는 되긴 하지만, 그래도 확인할 건 확인해야지.'

상념을 흘려내며 자연스럽게 허리를 뒤로 젖힌다.

패래랙―!

직후 번쩍이는 원반이 방금까지 머리가 있던 공간을 스치고 지나갔다.

콰과광!

한쪽 벽에 커다란 구멍을 뚫으며 사라지는 손도끼.

중심을 잡고 고개를 돌리자, 이마에 구멍 뚫린 검은 오크가 한쪽 팔을 앞으로 뻗은 어정쩡한 자세로 서있었다.

[호오.]

심상 너머의 진룡이 그 모습을 보고 나직하게 감탄했다.

[강인한 육체를 기반으로 삼은 언데드라. 하지만 사령술이라 칭하기는 어렵겠구나. 테모므론의 힘을 빌리지 않은 순수한 주술의 결정체인 데다, 영혼이 없이 육체의 기능만을 되살린 것이니.]

남의 몸속에 갇혀있어도 고룡은 고룡인가.

한 번 보는 것만으로 성소 수호자의 원리까지 간파해내는 걸 보면, 수천 년을 살아온 진룡의 안목은 확실히 대단했다.

평소에는 죽은 듯 성소를 지키며, 대족장의 명령에 충성하는 수호자들.

이들의 정체는 사실 하이 오크 전사들의 시체, 그것도 이전의 대족장들을 비롯해 가장 강력하다고 알려진 전사들의 시체였다.

'선조의 영혼을 떠나보낸 뒤, 특수한 주술로 재처리를 거쳐서 몸의 기능만을 되살려낸 것이랬지.'

때문에 사령술사들이 일으키는 일반적인 언데드와 달리, 이놈들의 능력은 생전의 전사가 가진 것 그대로였다.

영혼에 담긴 심상과, 그 심상으로 빚어낸 영역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단순한 육체 능력이나 감각, 익혀낸 기술과 전투 센스는 원본이 가진 것 그대로의 힘.

대대로 대족장은 초월자와 동격의 위계를 이뤘으니, 눈앞의 수호자는 적어도 육체능력에 한해서는 5위계에 다다른 존재였다.

후욱―

부서진 돌탁자를 배경으로 검은 신형이 달려든다.

뻗어져오는 수호자의 검은 손아귀. 검을 휘둘러 쳐냈다.

투웅―

잘리지 않는다.

질기디질긴 마물의 가죽보다도 단단한 피부.

무를 갈고닦아 5위계에 도달한 초월자의 육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종의 한계를 까마득히 뛰어넘어 있었다.

한쪽 손을 쳐내자마자 반대쪽 손아귀가 목을 노려온다. 검을 회수하는 것보다 놈의 손이 닿는 게 더 빨랐다.

팅―

댈런은 슬쩍 웃으며 검을 놓아버렸다.

「술식갑주(術式甲冑)」

「화염갑(火焰甲)」

화염을 갑옷처럼 둘러싼 어깨를 비틀어 손아귀를 흘려보내고, 비어버린 수호자의 복부를 향해 무릎을 올려차 응수한다.

뻐어엉―

북 두드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찍어올린 무릎에서 화염이 폭발했다.

콰과광!

폭발을 가슴팍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수호자가 지붕을 박살내며 하늘 높이 날아가고.

자리를 박차고 뛰어오른 댈런이, 붉은 염열의 갑옷을 두른 팔다리로 놈을 사정없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뻐버버버버벅―

매 공격마다 폭죽 터지는 소리를 수십 배 키운 듯한 타격음이 울려퍼진다.

갑옷은 방어수단만이 아니라 공격수단도 될 수 있다는 것이 데하만의 갑주격투의 묘리.

주문이라는 범용적인 매개를 통해 이를 새롭게 재해석해내고, 술식과 무투의 장점을 뒤섞어 위력을 배가시킨다.

후웅―

답보로 허공을 디딤발 삼아 수호자의 머리 위로 떠오른다.

「화염갑 : 홍류섭(紅流燮)」

직후 수십 번의 공세를 받아낸 수호자의 거체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리찍는 일격.

뻐어엉―!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의 발차기.

그 뒤를 따라 터져나오는 불꽃의 범람.

족장의 돌저택을 향해 다시금 추락하는 수호자의 모습은, 마치 쏟아지는 화염 폭포에 쓸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콰르르르···!

검은 거체가 떨어진 자리. 불꽃의 세례가 용암처럼 그 위에 끼얹어져 주변까지 휩쓸어버린다.

댈런은 반쯤 폐허에 가깝게 변한 저택 위로 내려앉았다. 열기에 녹아내려 움푹 패인 구덩이 위에 성소 수호자가 가까스로 서 있었다.

단단한 몸뚱이 곳곳이 우그러지고, 찢긴 상처마다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몰골.

허나 여전히 죽지 않았다. 동력원이자 중추가 되는 주술핵만큼은 보존해낸 것이었다.

"흐으으······."

입을 열자 새하얀 김이 토해지듯 흘러나왔다. 동시에 거무튀튀한 동공 너머로 번뜩이는 자줏빛 안채.

그 안광을 본 적창은 한 번 더 흥미를 표했다.

[재미있구나. 사령술과도 맞닿은 면이 있어. 술자와 독립적으로 작동하면서도, 여타 소환술과 달리 직접적인 의지의 개입이 가능하게끔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말이야.]

이번에도 정확한 안목이었다.

악신의 힘을 받은 사령술사는 하수인을 단순히 부릴 뿐만 아니라, 그 육신에 직접적으로 개입해 의식을 투영시키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성소 수호자의 제작 방식은 사령술과는 동떨어져 있었지만, 하수인의 육신에 주인이 개입할 수 있다는 기능 자체는 동일하게 가지고 있었다.

언데드의 주인이 사령술사라면, 성소 수호자의 주인은 다름 아닌 현 대족장.

댈런이 노리는 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어째서 힘을 조절하는가 의문이었거늘, 벌써 거기까지 생각한 건가.]

'···눈치가 빠르군.'

[너는 언제나 날 즐겁게 하는구나. 앞으로도 기대해보도록 하마.]

댈런의 계획을 반 박자 앞서 눈치챈 진룡이, 나직하게 웃음을 흘리며 존재감을 지워갔다. 댈런은 어깨를 슬쩍 풀고는 다시 수호자에게 집중했다.

놈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육체에 새겨진 싸움의 기억에 의한다면, 이대로 치고받아 봐야 승률이 희박하다는 것을 인지했겠지.

허나 주인의 공격 명령이 떨어진 한, 원래라면 승패에 상관없이 달려들어야 정상이다.

그렇다면 왜 덤비지 않는 것인가.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대족장."

던져놓은 성검을 천천히 주워들며, 댈런은 수호자의 눈을 보고 말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자줏빛 안광이 번뜩였던 눈은 어느새 다시 칙칙한 묵빛으로 돌아가 있었다.

"대족장. 네 부하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여전한 침묵. 저 멀리서부터 치고받는 소음이 아스라이 들려온다.

족장들이 성소 수호자들의 손에서 부락을 지키고자, 싸움의 장소를 부락 밖으로 이끌어낸 것.

영역을 이룬 전사들의 싸움은 한참 떨어진 이곳의 지면까지도 진동시켰다.

양손으로 쥔 성검을 땅에 꽂아넣은 채로, 댈런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습격의 배후에 정말로 대족장이 있다면.

그리고 악마에게 타락했든 어쨌든, 그 안에 그가 아는 대족장의 일부라도 아직 남아있다면.

지금 꺼낼 말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대족장. 머리에 문제라도 생긴 건가?"

"······."

"문제가 있으면 맞아야지. 보통 맞으면 고쳐진다."

씩 웃으며 머리를 통통 두드리는 시늉을 하자, 거무튀튀한 수호자의 눈에 자줏빛 이채가 선명하게 내려앉았다.

[내 스승, 전대 대족장이 나에게만 남긴 말이군.]

후우웅···.

수호자를 중심으로 훅 밀려나는 공기. 거기에 떠밀려 쓸려가는 먼지와 잔해들.

초월자의 존재감이 박살난 돌저택 가운데 무겁게 내려앉았다.

수호자의 몸을 빌린 대족장은, 눈꼬리를 기괴하게 비틀며 입을 열었다.

[너는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

"전대 대족장이라는 하이 오크, 상당히 괴팍한 노인네라고 들었지."

댈런은 검끝으로 땅을 쿡쿡 찍어대며 말했다. 검은 하이 오크의 얼굴이 한층 더 뒤틀렸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헛소리는 그만두도록.]

"참 나, 어떻게 알았겠냐. 네가 말해줬는데."

[···표정에 미동도 없이 거짓말을 일삼는군. 초월의 벽을 눈앞에 둔 놈이라 기대했는데, 순전히 사기꾼이었나.]

시시하다는 듯 한숨을 픽 내쉬는 수호자. 놈은 무너진 저택의 벽 너머로 눈을 들어, 수호자들과 족장들의 싸움이 이어지고 있는 산자락을 응시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내 관심을 끌 속셈이었다면 절반은 성공했다, 인간. 내가 저쪽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발을 묶을 심산이었나?]

"글쎄. 너부터 먼저 대답하면 말해주지. 악마는 어쩌다 받아들인 거냐?"

[···헛소리. 악마라니.]

자줏빛 안광이 다시금 번뜩였다.

[태곳적부터 악마와 투쟁해온 우리 하이 오크를 모욕하지 말아라. 숱한 분열과 투쟁을 거쳐 여기까지 왔지만, 하이 오크는 악마에게 머리를 굽히지 않아.]

"하이 오크가 거짓말 못하는 건 유명하지."

[뭐?]

"남의 얼굴을 빌려 말하면서도 거짓말하는 게 티가 팍팍 나는군. 대족장이라도 그건 다를 바가 없나 봐. 시체늪의 대공, 즈탄크에게 기만술도 요구하지 그랬나?"

[네가 어떻게 그걸···!]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던 수호자가 말을 멈춘다. 자신의 방금 반응이, 결정적인 확답이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

"어떻게 알긴. 대충 찍은 건데. 진짜 거짓말 더럽게 못하네."

[이 새끼가! 사지를 찢어발겨 주겠다!]

뒤늦게 농락당한 걸 깨닫고 괴성을 토해내며 달려드는 검은 하이 오크.

방금까지 서있던 자리의 지면이 쩍 갈라지고, 마치 고무줄을 늘여낸 듯한 착시와 함께 놈의 형체가 지척까지 다가온다.

댈런은 그 속도에 맞춰 뒤로 물러나며 신호를 보냈다.

바로 아공간 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예열 중이던 악마에게.

'이 정도 기다려줬으면 충분하겠지.'

[···옙! 준비되었습니다!]

얼마든지 손쉽게 싸움을 마무리할 수 있음에도, 굳이 문답을 이어온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놈을 떠봄으로써 악신 쑴 수하의 상급 악마, 시체늪의 대공이 개입되어 있다는 걸 확인한 건 부차적인 소득일 뿐.

진짜 이유는 악마가 힘을 끌어올리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어주는 데 있었다.

악마 칼카스의 정수를 흡수한 끝에 얻어낸 힘.

원래 세계수의 권능 중 하나였다는 그 힘의 진정한 잠재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바로 갑니다···!]

일대의 공간이 꿀렁이며 곳곳에서 아공간의 입구가 열리고.

동시에 시퍼런 냉기를 품은 수십 가닥의 굵은 사슬이, 성소 수호자를 향해 일순간에 쏘아진다.

촤르르르르···!

[이런 잡기술을! 크으윽!]

손을 휘둘러 사슬을 떨쳐내려 하지만 쉽지 않다.

아무리 5위계에 닿았던 초월자의 육신이라도, 영혼이 떠나간 이상 알맹이가 없는 빈껍데기나 다름없는 법.

패래래랙―!

손가락을 까딱이자 저 멀리 나가떨어졌던 손도끼가 손에 돌아와 잡히고.

쐐― 퍼억!

다음 순간 수호자의 어깨에서 다시 한 번 돋아난 도끼자루가 웅웅 떨리기 시작한다.

[이러···!]

투콰아아아앙!

황금빛 폭발이 놈의 말을 가로막고 빛의 기둥을 세웠다.

그 안으로 끊임없이 짓쳐들어가는 냉기 품은 사슬 가닥들.

황금빛 기둥이 사라지고 난 자리. 팔 한 짝이 떨어진 수호자의 몸뚱이는, 온몸이 푸른 사슬로 꽁꽁 결박된 채였다.

[···칼카스의 사슬이군. 흑마법사였나?]

패배가 확정되었음에도 눈동자의 자줏빛은 꺼지지 않는다.

놈이 원해서 남은 게 아니었다.

공간을 넘어 물질과 비물질을 가리지 않고 얼려버리는 냉기가, 대족장의 의식 일부를 떠나지 못하게 육신과 함께 동결시킨 것.

"잘 지키고 있으면 나중에 악마 정수 하나쯤 더 구해다 주겠다."

[옙!]

악마를 아공간에서 꺼내 대족장의 의식 일부가 묶인 수호자를 지키게 해두고, 댈런은 저택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포로 겸 증인도 하나 확보했으니, 이제 이곳에서의 싸움을 일단락할 시간이었다.

'이쪽 일행의 안전을 확인한 뒤, 족장들을 도와 나머지 수호자들을 처리하면 되겠군.'

판단을 마친 댈런의 신형이 절벽 위를 훌쩍 날아올랐다. 그는 허공을 딛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수호자들의 습격으로 곳곳이 불타기 시작한 부락 안쪽, 펠버와 일행이 하이 오크들과 함께 수호자들에게 맞서는 광경이 보였다.

습―

짧게 숨을 들이쉬고, 성검을 들어올린다.

습격으로 곳곳이 무너진 마을 외벽과 돌집들 위에, 먹구름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우기 시작했다.

가볍게 몸을 뒤집어 허공을 박차고, 지상을 향해 벼락같이 내달린 끝에.

꽈르릉···.

하늘과 성검이 함께 울음을 토했다.

159

선조들의 무덤(1)

싸움은 머지않아 끝났다.

성소 수호자 하나가 붙잡히자마자, 대족장은 성소 수호자들을 즉시 물려 후퇴시켰다.

기습으로서의 효용은 이미 다했고, 더 이상 전투를 이어가봐야 큰 이득 없는 소모전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혹은 댈런과 펠버가 본격적으로 싸움에 개입하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얻어낸 이득을 역으로 토해내야 할 상황이 될 거라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오늘, 족장 일곱이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 오크들의 피해는 막심했다.

세계의 이빨 산맥에 자리 잡은 하이 오크는 모두 스물세 부족.

그중 삼분의 일에 달하는 숫자가, 하루아침에 각 부족 최강의 전사이자 지도자인 족장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칭구들을 기억할 거다."

족장들과 여타 전사들의 시체를 수습한 자리에서, 타룸은 그렇게 선언했다.

댈런은 살짝 떨리는 타룸의 눈동자를 보며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족장 회의를 습격한 성소 수호자는 도합 서른 남짓이었다.

하나하나가 5위계, 혹은 5위계에 근접한 전사들의 시체로 만들어진 주술의 집합체.

비록 영역의 힘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생전의 완력과 기술뿐 아니라 언데드로서의 이점까지 더해진 게 성소 수호자였다.

일체의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주술핵이 파괴되기 전에는 죽지 않는 존재들.

아무리 족장들이 영역을 이룬 강자들이라 해도, 수적 열세인 상황에서 그런 괴물을 상대로 선전하기란 힘들었다.

거기다 기습이라는 점 역시 큰 패널티로 작용했고. 아무리 싸움에 미친 족속이라 하더라도, 족장 회의에서 칼부림이 날 걸 예상하고 대비한 이는 없었으니까.

"고맙다, 댈런. 덕분에 부락의 피해가 크지 않았다."

어느새 장례를 마치고 다가온 타룸이, 솥뚜껑보다도 큼직한 손을 내밀어 감사를 표했다.

"무너진 돌집은 쌓아올리면 되고, 불탄 밭은 다시 심으면 된다. 족장 칭구들은 싸움의 의무를 다하다 죽었지만, 우리 부락 하이 오크들은 거의 죽지 않았다. 전부 너와 네 칭구들 덕분이다."

"고마워할 것 없다. 친구끼리 돕고 사는 거지. 밥도 얻어먹지 않았냐."

"···역시 넌 똑똑한 전사다. 좋은 잉간이다."

"울지 말고. 이런 거에 감동해서 울면 전사가 아니다."

"울지 않았다! 눈알에 뭐가 들어가서 그렇다!"

타룸이 눈물을 글썽이며 버럭 소리쳤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타룸의 말대로 부락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전사 몇이 죽긴 했으나, 대부분의 피해는 재산적인 부분에서 그쳤다.

적들이 대부분의 전력을 족장들에게 집중하기도 했고, 일행들의 무력 역시 성소 수호자 몇 정도 막기에는 전혀 모자람이 없었기 때문.

펠버와 루시아를 비롯한 일행은 지금도 피해를 수습하고, 마을의 손상된 부분을 복구하는 작업에서 눈부시게 활약하는 중이었다.

"엘르― 마이아린."

"멋지다! 돌이 혼자 움직인다!"

"눈 감았다가 뜨니 돌집 한 채가 지어졌다! 늙은 마법사 똑똑하다! 어린 마법사 칭구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대지술사인 펠버와 토미가 토목 작업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건 당연한 일.

"온몸에서 힘이 솟는다!"

"우어어! 날아갈 것 같다!"

더불어 루시아 역시 전투 기도로 하이 오크들의 컨디션을 끌어올리며, 고된 작업 현장을 수월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덕분에 큼직한 피해들은 하룻밤이면 다 복구할 것 같다. 그러니 이제···가장 어려운 일만 남았다."

심호흡과 함께 깊은 한숨을 내쉰 타룸은, 절벽으로 이어지는 언덕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댈런은 말없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아르보르의 사슬로 사로잡았던 성소 수호자.

족장의 의식 일부분을 묶어둔 포로를 심문하러 갈 시간이었다.

***

[손님을 모셔놓고 오래 기다리게 하는군.]

절벽 위, 폐허나 다름없이 박살난 타룸의 돌저택.

푸른 사슬에 결박된 성소 수호자는 살아남은 족장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까드득.

살기로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들. 꽉 다문 입에서는 어금니 갈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새어 나온다.

그 여과 없는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수호자에게 의식을 투영한 대족장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목 축일 술은커녕 앉을 의자도 없어. 내가 너희들을 그렇게 가르쳤나?]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대족장."

쿵.

무너진 돌무더기를 짓밟고 온몸에 문신 가득한 하이 오크가 나타났다. 박살난 저택의 집주인인 족장 타룸이었다.

"오늘 너는 손님이 아니라 포로다.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우리에게 잘 대답해야 할 거다."

[이런 짓이라···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대족장에게는 반역을 꾀하는 족장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 않았나?]

"반역이라니. 억지도 정도껏이다. 그러면 악마는 왜 성소에 불러들인 거냐?"

[내가 왜 악마와 결탁했다고 여기는 거지?]

묵빛의 하이 오크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댈런이 서 있는 방향을 고갯짓했다.

[저 북방 야만인이 그러던가? 내가 악마와 손을 잡았다고?]

"그렇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는군. 하이 오크 대족장이 악마와 손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나 봤나? 오히려 이쪽이 묻고 싶은데. 대대로 쑴의 악마들과 결탁해온 족속이 누구지? 돌아오지도 않을 자기들의 신만을 기다리던 서리고원 너머의 야만족들 아닌가?]

대족장의 말에 몇몇 족장들이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댈런은 미동도 없는 표정으로 수호자를 응시할 뿐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첫 대면 때부터 그런 느낌이 들긴 했다.

분명 대족장의 기억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왠지 그가 아는 대족장과는 뭔가 다른 느낌.

직접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게 아닌, 모니터 너머에서 선택지를 골라 가며 말을 섞은 게 전부인 만큼 그저 기분 탓이겠거니 했는데.

'···이 새끼가 왜 이렇게 뻔뻔하게 말을 잘해?'

이제야 그 간질거리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대족장의 자리에 오른 만큼 굳건한 신념을 가졌다뿐이지, 원래 이놈도 굉장히 단순무식한 놈팽이었는데?

[마침 나를 묶은 이 사슬도 에낙사구스의 하수인인 칼카스의 권능이로군. 저 떡덩이 같이 생긴 악마로 칼카스의 힘을 빌리거나 했겠지. 아닌가, 악마 숭배자 북방인?]

[떠, 떡덩이라니···!]

무너진 저택 한구석에서 사슬의 힘을 유지 중이던 아르보르가 발끈했다. 대족장은 거봐라는 듯 피식 웃었다.

악마를 걸고 넘어지자 족장들의 시선도 하나둘씩 댈런을 향했다. 작은 웅성거림은 그들이 대족장의 말에 조금이나마 동요되고 있다는 걸 의미할 터.

댈런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내 노예인데, 문제라도 있나?"

[크하하하! 노예라니! 인간 따위가 악마를 노예로 삼는다고? 지나가던 고블린이 웃겠구나!]

미친 듯이 폭소하던 대족장은 어느 순간 웃음을 뚝 멈췄다.

놈은 구멍 뚫린 이마에 옅게 주름을 잡으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족장의 자리를 걸고 다시 족장 회의를 열겠다. 이 자리에 있는 족장들은 전부 참석하도록.]

다시 한 번 술렁임이 일어난다. 이전보다 더 큰 동요였다.

다짜고짜 기습을 가하고 족장들을 죽인 대족장을 향한 분노와, 천 년이 훌쩍 넘도록 대족장의 자리가 가진 권위 사이에서 갈팡질팡 갈등하는 것.

그때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던 타룸이 몸을 일으켰다. 대족장이 고개를 돌렸다.

[할 말이 있는가, 족장 타룸?]

"그렇다."

[좋다. 다만 명심해라. 너는 내 후계자다. 차기 족장 후보로서 네 발언이 가질 무게를 생각해도록 해라. 내 가르침을 잘 배웠다고 믿는다.]

"알고 있다, 대족장. 네 가르침은 언제나 나를 이끌어왔지."

타룸은 고개를 끄덕이며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등 뒤에 매달린 거대한 양날 도끼가 그 걸음에 덜컥거리며 흔들렸다.

"그리고 나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기억한다."

[···뭐지?]

"문제가 있으면 맞아야 한다고. 맞으면 고쳐진다고."

덜컥.

3미터가 넘는 문신투성이 거체가 검은 오크 앞에 멈춰 섰다. 검은 오크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뒤틀렸다.

초조함. 당혹감. 약간의 불안.

빈껍데기 시체만 아니었다면 한 줄기 식은땀이 더해졌을 터. 그러나 대족장은 떨림을 억누른 목소리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문제라는 게 대체 뭔지 모르겠군. 내 가르침을 잘 이해한 게 맞···.]

"너는 너무 말을 잘한다. 마치 악마 놈들처럼."

후웅―

거친 손동작으로 뽑혀든 도끼.

수십 킬로그램이 훌쩍 넘는 철덩어리가 세차게 공기를 가른다.

"대족장, 아직 들을 수 있다면 조금만 더 버텨라! 악마가 네게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반드시 고쳐주겠다!"

타룸의 검은 눈동자가 순간 자줏빛으로 번뜩이고.

콰지지직―!

사슬로 꽁꽁 묶인 성소 수호자의 몸뚱이가 정확히 반으로 쪼개졌다.

쨍그랑.

반으로 깨진 채 툭 떨어진 주술핵. 동력을 잃고 천천히 부스러져 흩어지는 검은 육체.

하늘을 향해 김 서린 한숨을 깊이 뱉어낸 족장 타룸은, 도끼를 땅에 콱 꽂고 입을 열었다.

"대족장의 후계자로서 명령한다."

저택 폐허를 낮게 울리는 목소리.

"내일. 우리는 성소를 공격한다."

***

원정은 빠르게 준비되었다.

각 부락으로 족장들을 돌려보낸 다음날, 해질녘에 맞춰 하이 오크 군대가 약속된 골짜기에 집결했다.

"이번 일로 족장을 잃은 부족은 원정에서 제외했다. 최고의 전사를 잃었으니···한동안은 스스로 지킬 힘을 길러야 할 거다."

"잘했군."

"너무 아쉽다! 너 같은 똑똑한 전사에게 하이 오크의 힘을 다 보여주지 못해서!"

타룸이 분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댈런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슬쩍 골짜기를 내려다봤다.

"밥! 사냥! 밥! 사냥!"

"싸움! 싸움! 근데 우리 어디로 가냐?"

"성소로 간다! 대족장이 배신했다고 한다!"

"배신? 배신이 뭐냐!"

"뒤통수쳤단 말이다!"

골짜기 한가득 드글거리는 흰 무늬의 녹색 물결.

하이 오크의 성량 좋은 외침들이 골짜기의 두 절벽 사이를 쩌렁쩌렁 울려댄다.

"···지금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랍다. 더 보여줄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그런가? 다행이다! 똑똑한 너라면 알아줄 거라 믿었다!"

짧은 감탄에 타룸이 반색하며 뛸 듯이 기뻐했다. 물론 마냥 위로를 위한 말은 아니었다.

비록 일곱 부족이 원정에서 제외되었지만, 골짜기에 모인 하이 오크 무리는 여전히 작은 왕국 하나 정도는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전력이었으니까.

각 부락 별로 백 명씩, 총 천육백에 달하는 대군.

만약 모든 부족이 모였다면 골짜기에 수용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대단하군요. 징발과 지휘권 규합을 위해 따로 정해진 절차조차 없어, 고작 하루 만에 이 정도의 규모의 병력이 모이다니."

루시아 역시 감탄한 눈빛으로 골짜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기사단에서 오랫동안 지내온 그녀이기에, 눈앞의 광경이 더 인상 깊은 게 당연했다.

하나의 신념과 규율 아래 행동하는 성기사단이라도, 천 단위를 넘어가기 시작하는 부대 통솔은 마냥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룻밤 사이에 산골 각지에 흩어진 부락에서 병력을 차출해, 한 곳으로 집결시키는 난이도는 이루 말할 것도 없었고.

"참, 그런데 보급은 어떻게 합니까?"

루시아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이 오크는 싸움만큼이나 밥에 미친 종족.

일반적인 군대 운영도 보급 문제가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인데, 먹을 것에 환장한 이들이라면 분명 그 무게가 더 막중할 테였다.

"성소까지 사흘 안에 도달하실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보급선을 구축하기에는 촉박한 시간이고, 따로 식량을 챙기신 분은 보이지 않는데···뭔가 다른 수가 있는 겁니까?"

미간을 살짝 좁힌 채, 푸른 두 눈이 반짝이며 흥미를 표한다.

그건 그녀가 단지 한 명의 강력한 전사일 뿐 아니라, 훌륭한 지휘관의 자질까지 가졌기 때문이겠지.

실제로 많은 회차에서 루시아는 종말에 맞서 최후까지 성기사단의 잔여 병력을 이끌고 항전하곤 했다.

타룸은 그녀의 질문에 심각한 표정이 되더니, 그답지 않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보급이 뭐냐?"

"예?"

"어려운 말 잘 못 한다."

"아니, 그, 싸우려면 적어도 먹을 건 있어야 하잖습니까."

"아, 밥 말인가! 밥이라면 얼마든지 있다! 우리 부락에 올 때 많이 마주치지 않았나? 이 산맥에는 먹을 거, 특히나 모지리 오크들이 끝없이 쌓여있다!"

당당하게 외치는 대족장 후계자. 루시아의 얼굴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그, 모지리 오크라면···."

"맞다! 문신 없는 오크들! 모지리들은 우리 동족이 아니다! 고기도 좀 질기긴 하지만 괜찮다! 고블린들이 잘 요리해줄 거다!"

"······."

이날 루시아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전사 하나하나가 장정 열 명 이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이 종족이, 왜 천 년이 넘도록 산맥 밖으로 세력을 넓힐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지를.

160

선조들의 무덤(2)

다행스럽게도 일행이 오크 고기를 먹을 일은 없었다.

댈런이 악마 아르보르의 아공간에 비상식량을 넉넉히 넣어두고 다닌 덕분.

하이 오크들이 사냥의 전리품을 쩝쩝거리는 사이, 일행은 악마의 마법으로 신선하게 보존된 재료들을 스튜로 만들어 먹었다.

물론 루시아의 요리 실력으로도 비위가 상하는 걸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체격과 문신 유뮤만 다를 뿐 겉보기에 비슷해 보이는 종족의 팔다리를 뜯어먹는 모습은, 그 자체로 상당히 밥맛 떨어지는 광경이었으니까.

"모지리 오크들 고기 질기다! 맛없다!"

"그래도 먹어라! 영양가 있는 고기다!"

"이 정도면 고블린들이 요리 잘 한 거다! 나 때는 먹고 토하고 다시 먹었다!"

"우웁! 우웨엑!"

원정 경험이 없는 젊은 오크들이 밥 먹다 말고 피자를 구워대는 건 덤.

"아···씨발 토할 거 같아."

"끌끌끌. 가끔씩은 책으로 읽는 게 나은 경험도 있다네, 심문관."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던 옛 욕쟁이 성기사의 모습이, 그 광경을 보며 다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한편 원정 첫날 오크를 사냥해 먹은 뒤, 하이 오크들의 행군 속도는 날이 갈수록 빨라졌다.

오크 고기가 하이 오크들에게 영양가 있는 식량이라는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는 것처럼.

'아니면 역겨운 오크 고기를 하루라도 더 먹기 싫다는 의지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어찌됐건 결과적으로 닷새길이라 여겨졌던 여정은 나흘로, 그리고 이내 사흘로 단축되었다.

그렇게 각자의 부락을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밤.

천칠백 명의 하이 오크 군대는, 성소의 유일한 입구인 무덤 골짜기에 들어설 수 있었다.

***

무덤 골짜기.

모든 하이 오크들이 죽으면 묻히는 장소.

무덤 골짜기는 깊고 넓은 중심부의 골짜기를 중심으로, 좁은 골짜기들과 크고 작은 동굴들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는 지형이다.

그리고 뻗어나간 동굴과 골짜기들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하이 오크들의 시신이 안치되는 장소.

생전에 많은 명성을 쌓은 전사일수록, 선조들이 잠든 성소와 가까운 곳에 묻힐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명성의 기준은 잘 먹고 잘 싸우는 것이었고.

구구구구···.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떨리는 땅.

성소의 유일한 입구이자 통로인 무덤 골짜기가, 당장에라도 무너져 붕괴될 듯이 진동했다.

하이 오크들 사이에서 당황 섞인 웅성거림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지금껏 가족이나 친구를 숱하게 매장해왔지만, 이런 진동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현상이었기 때문.

"대족장···정녕 우리를 배신한 건가."

"스툼파는 더이상 대족장이 아니다. 그는 하이 오크의 적이다. 싸우고 죽여야 할 적."

다만 대족장들은 당혹감 대신 깊은 회한 섞인 한숨을 흘렸다.

그들은 이 현상의 원인과, 그게 나타내는 의미를 알고 있었으니까.

'성소의 결계를 발동시켰군.'

댈런은 허리춤의 도끼머리에 가볍게 손을 올린 채 생각했다.

하이 오크의 선조들이 묻힌 성소는, 사실 단순히 무덤이라는 목적만으로 세워진 시설이 아니다.

오래 전 초대 대족장의 예언에 따라, 언젠가 있을 대혼란을 대비하여 만들어진 요새가 바로 성소.

댈런이 악신과의 대전쟁을 목도한 첫 회차가, 다름아닌 이곳 하이 오크들의 성소였던 건 바로 그런 이유였다.

'인간이 쌓아올린 왕국과 제국들이 몰락하고 무너지는 와중에도, 하이 오크의 성소는 최후까지 버텨냈으니까.'

쿠륵! 꽈드득!

골짜기 곳곳에서 거대한 짐승이 이빨을 가는 듯한 굉음이 메아리친다.

외세의 침략에서 성소를 지켜내는 결계가, 하이 오크의 군대를 대상으로 발동된 것이었다.

기이이이잉―

주술 문양으로 가득한 흐릿한 결계가, 성소로 이어지는 골짜기를 빈틈없이 틀어막으며 침입자를 차단하고.

이내 골짜기 양쪽으로 솟아오른 절벽의 일부분이 뚝뚝 떨어지고, 바윗덩이 째로 낙하하면서 앞뒤를 완전히 가로막았다.

쿠웅― 콰과과과······.

거대한 질량이 지면에 충돌하며 흙먼지가 수 미터 높이까지 치솟는다.

"골렘이다!"

곧이어 먼지가 밀려나고 드러난 건, 신장이 20미터가 훌쩍 넘어가는 바위 골렘들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모습.

"하이 오크 전사들이여! 골렘을 공격해라!"

"덜격! 적을 쓰러뜨려라!"

"골렘을 무너뜨려라!"

"싸운다! 이긴다! 구와아아아아!"

타룸의 명령에 함성으로 화답한 하이 오크 전사들이, 제각각 다양한 무기를 뽑아들고 골렘을 향해 돌진했다.

우아아아아!

구와아아아아!

해일처럼 몰아치는 녹색 물결.

개개인이 백 미터를 숨 몇 번 몰아쉴 동안 주파하고, 완력만으로 절벽을 움켜쥐며 몸을 날리는 곡예를 선보인다.

골렘이 미처 형체를 갖추기도 전에, 개미떼처럼 놈의 전신을 뒤덮은 하이 오크들이 일제히 놈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

주먹질로 바위도 깨뜨리는 괴력의 행사에, 거대한 골렘 하나가 저항도 못 하고 우르르 무너졌다.

하지만 전투는 이제 시작이었다.

위이이이이―!

온전히 형체를 갖춘 골렘들이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바윗덩이 머리통 한가운데 뻥 뚫린 구멍에서, 마력이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광선의 형태로 쏘아져 나왔다.

콰과광!

콰지지지지―!

광선이 훑고 지나간 자리마다 주술의 마력이 불기둥처럼 폭발한다.

오크의 단단한 가죽과 근육마저 어렵지 않게 꿰뚫고, 스치기만 해도 산 채로 피부를 불태워버리는 주술 광선.

앞뒤에서 퍼붓는 수십 줄기의 폭격으로 인해, 득달같이 달려들던 오크들의 전선이 흐트러진 순간이었다.

"엘르― 메멘토 엘레구스."

오크들의 진형 한가운데.

황금빛 파동이 터져나온다.

연달아 동심원을 그리며 골짜기를 가득 매우는 눈부신 빛의 잔영.

「영역 개방 : 태엽을 되감는 대지의 손」

각각의 존재 자체를 땅으로 삼아, 그 시간선을 읽어내고 개입하는 대마법사의 영역이 힘을 드러낸다.

"엘르― 메멘토 카시볼그."

복잡한 수인과 함께 맺어내는 주문.

제자인 토미는 스승의 곁에서 끊임없이 영창과 수인을 거듭해가며 보조한다.

사제가 엮어낸 주문에 의해 펠버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황금빛 정광이, 파동 위에 몸을 싣고서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위이이···치지직. 지직.

은은한 황금빛 광채가 골렘들을 뒤덮자, 주술 포격이 힘을 잃고 맥없이 사그라들었다.

골렘들에게 부여된 파괴 주술의 시간대를, 결계 발동 이전으로 되돌려 아예 고정시켜버린 것.

물론 수십이나 되는 골렘들의 동력 그 자체를 무효화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거대한 덩치에서 말미암은 파괴력은 그대로라는 뜻.

그러나 포격만 멈춘다면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할 싸움광들이 수백이 넘게 있으니, 그런 자잘한 문제는 상관없었다.

"놈들이 눈에서 빛살을 못 뽑는다!"

"뜨거운 빛줄기가 사라졌다! 돌덩이 부술 수 있다!"

"덜격! 하이 오크는 덜격한다!"

포격에서 자유로워진 하이 오크들이 눈이 뒤집혀서 골렘에게 달려들었다.

팔다리에 매달리는 걸 시작으로 몸통과 머리까지 기어올라, 마치 광부가 암석을 쪼개듯 커다란 무기로 내려치며 돌조각을 깎아내려가는 전사들.

그우우우웅···!

쿠궁! 쿵!

골렘들이 발로 차고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이리저리 날아가 나동그라졌지만, 어지간한 치명상이 아니고서야 다시 벌떡 일어나 달려들기를 반복한다.

"먼저 들어가게. 여기는 나와 토미가 이 싸움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맡을 테니."

수인을 멈추지 않은 채 펠버가 말했다. 싱긋 웃는 그의 얼굴에서는 이전과 달리 식은땀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발밑에서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황금빛 파동이 뿜어지며, 추가적으로 튀어나오는 바위 골렘들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있었다.

진룡의 진체를 과거 시간대로 돌려버리는 것보다야 훨씬 쉽더라도, 엄연히 시간선에 직접 손을 대는 고난이도의 작업.

그런 일을 손쉽게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몇 달간의 노력 끝에 그의 육체가 한 단계 높은 격으로 상승했다는 증거였다.

"마법사 칭구가 우리를 돕는다! 족장들은 나를 따라와라!"

타룸이 외치자 족장들과 일부 전사장들이 함성을 지르며 골렘들 사이를 돌파했다. 몰려갔다. 댈런과 나머지 일행도 함께했다.

"보이지 않는 벽이 길을 막고 있다! 어떻게 하나, 족장 타룸!"

"나와 봐라."

쐐애애액―!

골짜기를 가로막은 결계 장막에 곧장 암월의 주문살해자를 꽂아버린다.

비검의 힘으로 그 능력을 폭주시키자, 미친 듯이 떨리던 단검이 그대로 폭발하며 결계를 깨뜨렸다.

"결계를 부쉈다! 역시 똑똑한 전사 칭구다!"

"이름 댈런이라고 했다! 똑똑한 전사 칭구 댈런이다!"

성능 좋은 단검을 하나 잃었지만 그런 걸 따질 때는 아니었다.

펠버와 하이 오크 전사들에게 바위 골렘들을 맡겨두고 침투한 상황이니만큼, 지금부터의 작전은 사실상 시간 싸움.

어차피 마법 역시 어지간한 주문쟁이들을 압도할 정도로 성장했으니 그리 큰 손해가 아니기도 했고.

댈런은 타룸과 함께 환호하는 족장들을 이끌고 결계 안쪽을 질주했다.

다리가 짧아 계속 뒤쳐지는 비요른은, 아카샤가 진체로 변신해 뒷덜미를 들고 날아버리는 걸로 해결.

"놔, 놔라! 으아악!"

[다리도 짧으시면서 자존심 부리지 마십시오. 저 같으면 놓으라고 말 할 시간에 꽉 잡겠습니다.]

"자, 자존심이 아니라 너무 빠르으아아악!"

질겁하는 비명을 가볍게 무시하고 속도를 높이는 새끼 청린용.

언제 저렇게까지 성장했는지, 그 크기가 못해도 체장 2미터는 훌쩍 넘어보였다.

그렇게 얼마쯤을 더 달렸을까. 어느 순간 시계가 확 트이면서, 절벽에 둘러싸인 거대한 분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성소다!"

"다 왔다!"

그런 환호도 잠시.

쐐애애애액!

수십 자루의 투창이 연달아 날아들어 대열을 사방에서 강타한다.

"크아악!"

"기습이다!"

이미 족장 회의 당시 한 차례 겪어봤던 투창 세례. 하나하나가 소리에 가까운 속도로 쏘아지는 거대한 작살이나 다름없다.

순식간에 하이 오크의 전사장들이 우수수 쓰러지고, 전열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거뭇한 인영이 사방에서 나타나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성소 수호자다!"

"조심해라! 수호자들은 옛 대족장들만큼 강하다!"

족장들이 경고했으나, 이미 삼분의 일에 달하는 전사장들이 수호자들의 칼에 쓰러진 이후.

영역의 사용을 망설이는 족장들을 향해, 타룸이 마력을 가득 실어 일갈했다.

"싸워라! 아끼지 말고 영역의 힘을 사용하라!"

"하지만 족장 타룸, 그러면 대족장과 싸울 때는···."

"그렇다고 우리의 전사들을 희생시킬 건가! 이곳에서 이기지 못하면 다음은 없다!"

전장을 휩쓰는 포효에 방어적이던 족장들의 태세가 돌변한다.

아껴두었던 심상의 힘을 하나둘씩 풀어내자, 일대의 마력풍이 뒤틀리며 거대한 와류를 형성했다.

화르르륵― 촤자작!

거대한 도끼에서 쏟아지는 화염. 발걸음마다 폭풍처럼 흩뿌려지는 바람의 칼날.

구어어어어!

함성을 토해내며 몸체를 원래의 두 배가 넘게 불려내는 족장과, 그 곁에서 땅에 손을 얹고 그에 비견되는 크기의 골렘을 일으키는 주술사까지.

"전사장들은 족장들을 보조해 수호자를 견제해라! 결정타는 족장들이 날릴 테니 위험하다 싶으면 빠져라!"

타룸의 지시에 따라 족장들과 전사장들이 십수 개의 조로 나뉘어 수호자들을 상대했다.

루시아와 아카샤, 비요른도 한 조를 이뤄 수호자 두 명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심상으로 현실을 비트는 이적이 사방에서 터져나오고, 5위계에 닿았던 강인한 육체가 그에 맞서며 무의 극을 펼쳐낸다.

고작 백 명이 좀 넘는 숫자가 격돌했음에도, 수천 단위의 군대가 치고받는 걸 아득히 넘어서는 파괴의 현장.

막 수호자 하나의 목을 비틀고, 성검으로 흉곽 안쪽의 주술핵을 깨부순 댈런에게 타룸이 다가왔다.

"댈런. 대족장을 맡기겠다."

"···괜찮겠나?"

댈런이 되물었다.

결연한 의지가 맺힌 타룸의 눈동자는 자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 자줏빛 안채는 대족장에게 대대로 전수된다는 힘의 흔적.

악마에게 사로잡힌 대족장에게 안식을 선물해주는 건, 후계자로서 당연하게 취해야 할 권리이자 의무였다.

전대 대족장이자 스승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지 않을 텐데, 선뜻 그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어지는 타룸의 고백은 그 결심의 무게를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혼자 대족장을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너는 가능하지. 내 욕심대로 우리 둘 모두 자리를 비우면 족장과 전사장들이 많이 죽을 거다. 차라리 내가 여기에서 수호자들을 막고, 네가 들어가서 대족장을 상대하는 게 옳다. 내 의무는 전사들을 이끄는 것이지, 내 욕심을 채우는 게 아니니까."

"···숭고하군. 알았다."

"어려운 말은 모르지만 칭찬인 것 같군. 고맙다."

그 말을 끝으로 타룸은 다시 멀어졌다. 그는 전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수호자에게 밀리는 족장들에게 합세해 돕기 시작했다.

스읍―

댈런은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다리에 마력을 한껏 불어넣고 땅을 박찼다.

꽈아아앙―!

밟고 있던 지면을 박살내며, 소리보다 빠른 속도로 전장을 벗어나는 그의 신형.

흐릿한 잔영처럼 보이는 그 궤적이 향하는 곳은, 거대한 분지의 중앙에 있는 성소 입구였다.

보스몹 경험치는 언제나 환영인 법이었다.

161

선조들의 무덤(3)

쿠르릉···.

어두운 복도.

석재 벽면이 흔들리며 오래된 먼지가 푸스스 쏟아졌다.

족장들이 싸우는 전장에서 이곳 성소까지의 거리는 족히 수 킬로미터. 그럼에도 전투의 여파는 지면을 타고 뚜렷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

댈런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가, 이내 고개를 털고 다시 걸어나갔다.

영역을 이룬 초인들 십수 명이 동시에 전력을 투사하는 상황이다.

거기서 발산되는 힘의 총량은 지형마저도 족히 바꿀 수 있겠지.

그 전장 한복판에 있는 일행들의 걱정이 잠시 발목을 붙잡았지만, 감정에 치우쳐 판단을 그르칠 여유는 없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빠르고 확실하게,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을 처리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쪽이 합리적이었으니까.

우르르······──.

불규칙적으로 들려오던 진동이 불현듯 뚝 멎는다.

동시에 예민하게 돋아난 기감이 어떤 막을 통과했음을 느꼈다.

성소의 지하 깊은 곳, 하이 오크 선조들의 유해를 안치해둔 전당 구역에 진입한 것이었다.

화륵!

복도에 설치된 횃대에서 푸른 불길이 타오른다.

일정 거리마다 배치된 횃불이 방문자의 걸음에 맞춰 밝게 타올랐다가, 그가 완전히 지나치고 나서야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마치 전당 자체가 깨어나 손님을 맞이하는 듯한 모습.

댈런은 이전과 같은 속도로 걸어가며, 그 일렁이는 횃불의 빛에 드러난 벽면의 조각들을 무심하게 관찰했다.

평화롭게 산맥을 다스리는 하이 오크.

그 영토를 침범한 마물들.

소규모의 국지전. 부족 단위의 싸움. 강림한 악마에 맞서는 부족 연합체. 그리고 종족 전체의 전쟁까지.

기나긴 복도를 따라 그려진 조각은 하이 오크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자락은 하이 오크들만이 아닌, 수많은 종족들이 뒤섞여 악신의 군세에 저항하는 정경이었다.

수천 년 전 대륙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다는, 모니터 너머에서도 설정상으로만 들어봤던 대전쟁의 일면.

댈런은 복도 끝의 거대한 석문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석문에는 연합군의 필두에서 달려나가는 하이 오크 전사의 뒷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첫 번째 대족장. 우리들의 대선조.]

전사의 머리 위, 거친 필체로 휘갈겨진 고대 오크어를 적창이 읽어내려갔다.

'고대 오크어도 읽을 줄 알았소?'

[나도 꽤 오래 살았느니라. 지금 이런 신세라 해서 그 시간을 허송세월했다고 생각하면 억울하다만.]

심상 너머, 고룡이 입꼬리를 조금 끌어올렸다.

나직한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댈런은 가던 길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대선조가 조각된 석문에 손을 얹자, 석문이 거친 마찰음을 내며 저 혼자 옆으로 밀려났다.

기기기긱···쿵.

열린 문 안쪽은 드넓은 원형 전당이었다.

수십 개의 석관들은 원형 전당을 둘러싸듯 자리했고, 완만한 돔형 천장의 구멍에서는 한 줄기 빛이 뻗어나와 전당의 중앙으로 흘려내린다.

빛줄기가 내리쬐는 전당의 중심부에는 다른 관들보다 두 배는 커다란 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누구의 관인지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기나긴 복도에 이어지던 조각들을 떠올려보면, 저 관에 묻힌 이는 분명 대미의 석문에 새겨진 장본인일 테니까.

그리고 그 추측을 긍정이라도 하듯, 관 위에 걸터앉아있던 하이 오크가 입을 열었다.

"최초의 대족장이었던 대선조를 비롯해, 모든 대족장들이 온전한 죽음을 맞이한 건 아니다."

위에서부터 내리쬐는 빛 때문에 그림자 진 얼굴.

낮고 굵은 목소리가 전당을 울린다.

"육신을 온존하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어금니 한 조각만을 간신히 남긴 이들도 있었지. 그들은 성소를 지키는 수호자가 되는 대신, 생전에 모든 걸 바쳐 동족을 지켜낸 공으로 이곳에 안치되었다."

쿵.

훌쩍 관 아래로 뛰어내린 하이 오크. 바로 선 자세가 되자 놈의 체격이 보다 명확하게 와닿는다.

신장은 어림잡아 4미터를 넘어섰고, 덩치와 근육 역시 그에 걸맞게 비대했다.

다른 하이 오크 족장들보다도 한참 큰 키와 덩치는, 족히 댈런의 두 배는 될 법했다.

더불어 진녹색의 피부 위를 빼곡하게 덮은 흰 문신은, 그가 이 산맥에서 가장 강한 하이 오크라는 증거.

"하이 오크에게 이곳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선조들의 무덤이다. 하지만 나로서는···가증스러운 원수에 불과하지."

꽈악.

수박만 한 주먹을 쥐어 들어올리고.

파앙―

가볍게 뒤로 털어낸다.

콰과과광!

그 단순한 손짓 한 번에, 전당 중앙에서 존재감을 뽐내던 거대한 석관이 수백 개의 파편으로 산산조각났다.

천장에서부터 내리쬐는 빛줄기 아래, 대족장의 모습을 가리고 연막처럼 뿌옇게 차오르는 먼지구름.

댈런은 그 먼지구름을 바라보며 말했다.

"연기는 집어치우기로 한 거냐?"

"크흐흐흐, 그래. 멍청한 전투광 종족이니 우두머리만 집어삼키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난데없는 불청객이 끼어들 줄은 몰랐단 말이지."

"······."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한 번쯤은 겪었어야 할 잡음이지. 너를 죽이고 대족장 후계자인 타룸의 몸을 집어삼킨 뒤, 내 충실한 하수인들로 족장 자리를 채우면 될 뿐."

천천히 흐려져가는 목소리. 가라앉는 먼지구름 너머, 거구의 하이 오크는 이미 모습을 감추고 없었다.

[나, 시체늪의 대공이 어떻게 대족장의 의지를 꺾었는지 궁금하겠지. 간단했다. 미래의 편린을 엿보는 것은 초월자의 자리를 거머쥘 수 있는 자격인 동시에 대가. 멍청한 녹색 종족의 일원이지만, 대족장 놈도 5위계에 오르며 스스로의 운명을 깨달은 것이지.]

어디선가 들려오는 악마의 목소리.

댈런은 무시하고서 가만히 고개를 꺾어 빛이 내리쬐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이번에도 꽤나 머리 아프게 꼬인 상황이었다.

시체늪의 대공, 즈탄크가 개입했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진작에 예상하고 있었다.

싸움에 미친 하이 오크의 감성을 긁어줄 수 있는 건, 마찬가지로 싸움에 모든 걸 건 쑴 휘하의 악마들 뿐.

그리고 쌈박질과 유혈사태밖에 모르는 머저리들 중에서 즈탄크는 그나마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었다.

쑴 휘하에서 가장 싸움을 잘 한다는 여섯 대공에 속하면서도, 두들겨 패서 굴복시키는 대신 교묘한 감언이설을 늘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놈은 이전 회차들 중에도 몇 번쯤 하이 오크를 회유하려고 수작을 부린 적이 있었다.

물론 그게 진짜 통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기다 단순히 계약을 맺은 걸 넘어서서, 아예 대족장의 몸을 점거해 버릴 거라고는 댈런도 예상하지 못했었고.

[···정해진 운명의 자각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의 종착지에는 무력감이 기다리는 법. 나는 그에게 거래를 제시했을 뿐이다. 모든 걸 바치는 대가로, 하이 오크 종족을 구해주겠다고.]

"······."

후우.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고 화가 치밀어오른다.

대체 어째서일까.

실타래를 애써 풀면 풀수록, 되려 점점 꼬여만 가는 듯한 이 상황들은.

일 년도 지나기 전에 악마를 몇 마리나 죽였고, 진룡의 목도 썰었다.

미궁도시의 곡창이 홀라당 불탈 뻔한 걸 막거나 성기사단의 반란을 저지한 건, 원래라면 몇 년은 더 지나서 수행해야 할 퀘스트였다.

이 정도면 족하지 않나? 대체 언제까지 더 이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계속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상념들을 머릿속에 스쳐보내면서, 댈런은 번개같이 도끼를 뽑아 왼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가슴 속의 응어리를 죄다 담아내듯, 전력을 다해 도끼를 내리쳤다.

쩌━━━━

바닥이 쪼개진다.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달려들던 대족장도 거의 쪼개질 뻔했다.

놈은 두 손으로 잡은 대검으로 도끼를 받아내 간신히 버텨냈다.

흐릿하던 놈의 몸뚱이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자줏빛 이채를 띈 검은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검을 막았음에도 쇄골부터 옆구리까지가 길게 갈라져 피를 주르륵 흘리는 대족장. 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어, 어떻게. 분명 너는 4위계일 텐데!"

놈이 이를 악물고 버티려 하자, 도끼와 맞닿은 부분의 이가 나가고 미세한 실금이 그어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놈의 팔. 댈런은 조금 더 힘을 줬다. 검과 도끼 사이에서 카가각 불똥이 튀며 대족장의 자세가 조금씩 더 낮아졌다.

두 배 차이 나던 눈높이가 이내 평행선을 이뤘다. 검은 눈이 검은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놈의 위계고 지랄이고."

카득!

검과 도끼 사이, 불꽃이 한 번 더 거칠게 튀어오르고.

"니가 껴입은 대족장 몸뚱이보다 내가 힘이 더 세다고. 그거 근력캐가 아니라 민첩캐야, 씹새야."

푸른 전격을 둘러낸 무릎을 들어올려, 대족장의 옆구리를 찍어버린다.

「술식갑주 : 청뢰갑(靑雷甲)」

「청륜(靑輪)」

콰지지지직―!

전당의 바닥을 짓이기며 대족장의 몸뚱이가 엎어진 채 미끄러진다.

사방으로 튀어나간 작은 전격의 원반들에 석관이 부서지며 파편과 내용물이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바닥에 길게 흔적을 남긴 대족장이 처박힌 곳은, 원래 그가 앉아있던 거대한 석관의 잔해 더미.

곧이어 작은 집채만 한 돌더미가 쾅 하고 폭발하며, 대족장의 신형이 천장에 가까울 정도로 높이 치솟았다.

"크하하하! 굉장하구나! 과연 에낙사구스가 괜히 너를 주시하는 게 아니었던가!"

공세가 막히고 일방적으로 반격에 얻어맞았음에도, 눈동자에 번들거리는 투지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순간적인 당혹감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자줏빛 안광을 번뜩이며 광기에 가까운 호승심을 불태울 뿐.

비단 폭력과 화염의 악신이라는 쑴 휘하의 악마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깐 당황하긴 했지만, 여전히 놈이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기 때문일 터.

길게 베여 피를 울컥이던 상처와, 무릎에 찍혀 터져버린 옆구리를 순식간에 회복해낸 재생력이야말로 그 자신감의 근원이겠지.

거기다 놈이 들고 있는 검 역시 실금이며 이 나간 부분이 완전히 수복되어 있었다.

"하지만 달라질 건 없다! 여전히 승패는 정해져 있으니!"

이제는 완연하게 자주색이 되어버린 눈동자.

놈의 전신에서 마력이 일렁이며, 눈동자와 같은 색의 기운을 뿜어댔다.

일정한 파동의 형태를 이루며, 성소의 전당 전체를 뒤덮는 마력의 파도.

"수천 년 투쟁의 역사가 담긴 이 몸뚱이가 가진 힘을 바라보아라! 신의 주시를 받는 전사여!"

보랏빛 파동이 석관이 배치된 자리를 지나갈 때마다, 마력의 잔영이 뚜렷한 그림자의 형태를 구축해가고.

이내 수십 개의 석관이 놓여 있던 자리에는, 수십 명의 하이 오크가 영체의 형태로 서 있었다.

「영역 개방 : 선조들의 발자취」

영체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었다.

지팡이가 화염을 쏟아내고, 소리 없는 주문에 바윗덩이가 일어나 골렘으로 빚어진다.

던져지자마자 수십 갈래로 쪼개져 공간을 제압하는 투창 세례와, 폭풍을 휘감고서 내리찍는 2미터 길이의 양날도끼.

쏟아지는 공세의 한복판에서, 댈런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후우.

느려진 시간감각.

살벌하게 목숨을 노리는 공격들에 하나하나 대응해낸다.

패래랙―콰아아아!

손도끼를 위로 내던지며 유물무기의 능력을 발동, 황금빛 폭발로 투창의 화망을 깨뜨리고.

「빙정(氷晶)」

「소류지(素流枝)」

손바닥에서 띄워올린 하얀 얼음 결정이, 수십 장의 꽃잎을 펼쳐내는 즉시 수십 갈래의 냉기로 전환되어 쏟아지는 불꽃을 집어삼킨다.

「염사(炎巳)」

혼자서 뽑혀나온 단창이 화염을 머금은 뱀의 형상으로 주변 일대를 휘젓고.

「말원(抹原)」

치지지직―!

성검에 부딪힌 폭풍이 되려 찢겨나가듯 지워지며, 양날도끼와 함께 영체가 반으로 갈려 소멸했다.

"······!"

대족장의 표정이 다시 한 번 뒤틀렸다. 그 감정이 반영됐는지 영체들의 공격이 점점 거세졌지만 상관없었다.

「파영의 마안」

눈동자에서 번뜩이는 마력이 오감을 속이는 주술들을 간파하고, 실체와 물리력을 가진 환상은 암월의 환상살해자가 날아들어 깨부순다.

왼손에 수인을 맺어 일으킨 필즈의 바람 결계가 자잘한 투사체를 막아내는 한편, 염사의 화염을 뚫고 만신창이가 된 채 달려드는 전사 영체들을 하나씩 성검으로 처리한다.

그우우우―

그동안 주술사들이 힘을 모아 키워낸 바위 골렘이, 집채만 한 손아귀를 뻗어 댈런을 움켜쥐려 했지만.

「홍염주(紅炎柱)」

짧은 수인과 함께 바닥을 뚫고 터져나온 화염의 기둥이, 골렘의 손아귀부터 상반신의 절반을 휘감고 살라버렸다.

"말도 안 된다! 인간이, 한낱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다채로운 힘을 영역에 가질 수 있단 말이냐!"

염사의 호위를 받으며 합투권으로 주술사들을 두들기고 있자, 참다 못한 대족장이 소리를 질렀다.

그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들은 댈런은, 처음 골렘을 일으켰던 주술사 영체의 머리통을 부수고서야 자세를 바로 잡았다.

어느새 놈이 소환했던 영체의 반수 이상이 소멸됐다.

석관이 있던 자리에서 은은하게 자줏빛이 피어나는 걸 보니 다시 소환될 것 같긴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대족장과 함께 이 성소에서 악신의 군세에 맞서 항전했던 무투가 캐릭터의 기억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대족장의 힘은 그 근원과 한계, 파훼법까지 이미 완벽하게 꿰고 있었고.

"꼬우면 너도 직접 잡캐로 키우던가. 남의 키워놓은 캐릭터 뺏어서 쓰지 말고."

악마의 절규에 비웃음으로 대답해주며, 댈런은 가볍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쿠웅.

가벼운 동작과 상반되는 육중한 울림.

발밑에서부터 무채색의 파동이 퍼져나간다.

댈런을 중심으로 자잘한 돌조각들이 서서히 지면에서 떠오르기 시작하고.

"여, 영역···!"

눈이 휘둥그레진 악마의 면전에서, 두 번째 발걸음이 땅에 맞닿았다.

그리고.

「영역 개방 : 거꾸로 솟아오르는 폭포」

무채색의 파동이 성소 전체를 덮쳤다.

162

선조들의 무덤(4)

우르르 성소가 진동하고, 부서진 석관의 파편들이 허공에 둥둥 떠오르기 시작한다.

댈런의 손에 박살 났던 자줏빛 영체들은, 어느새 처음 나타났던 장소에서 다시금 형체를 갖춰가는 중이었다.

'대족장의 영역이 사기이긴 해.'

소환되자마자 수인을 맺기 시작하는 주술사 영체를 보며 댈런은 생각했다.

하이 오크 대족장의 영역은 대대로 단 한 가지 심상과 능력만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떠나간 선조들의 힘을 되살려내는 것.

고대의 대전쟁 이후 백 명이 훌쩍 넘는 하이 오크들이 대족장의 자리에 머물다 떠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차기 대족장 후보에게 영역을 전수해줄 때, 자신의 힘 일부를 떼어내 담아주는 관례를 따랐다.

그렇게 수천 년간 대대로 계승되어온 대족장의 영역은, 선조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채로운 가능성과 능력을 품어낸 심상이었다.

원래의 위력 그대로라면 댈런이 저항조차 하기 힘들었을 정도로.

물론 악마가 그 몸을 점거한 지금은, 그저 반쪽짜리 영역일 뿐이었지만.

"···과연 재주가 좋구나! 허나 승패는 변하지 않는다! 네놈이 이 장소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이미 내 승리는 확정되었으니!"

경악으로 물들었던 표정을 수습하며 악마가 말했다. 댈런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놈이 노리는 바를 모르는 건 아니다.

수십의 선조들이 묻힌 이곳 성소의 지하 전당.

대족장이 가진 영역의 힘이 가장 극대화되는 이 장소를, 최대한 이용하며 시간을 끌 심산이겠지.

애당초 수천 년간 하이 오크 선조들이 유업으로 쌓아올린 이적을, 대족장의 몸을 점거한 몇 달 사이에 완전히 강탈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영체들의 행동이 미묘하게 허점투성이고, 주술이나 검격의 위력 역시 원래의 반조차 내지 못하는 게 그 증거.

시체늪의 대공 역시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기에, 이 장소를 전장으로 선택한 게 아니었나.

이곳은 과거 회차에서 악신들의 대대적인 침공 당시, 대족장이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최후의 보루.

당대의 대족장에게 악마 본체에 필적하는 재생력과, 쓰러뜨려도 끝없이 재소환되는 영체들을 선물하는 장소다.

놈은 설령 영역의 힘이 온전하게 발휘되지 않더라도, 성소의 신비와 영역의 힘의 조화로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을 테였다.

그리고 사실상 틀린 판단이 아니기도 했고.

'이미 본인에게 유리하도록 판을 깔고 들어간 싸움이었겠지. 수틀리면 장기전으로 끌고 가서 내 체력을 갉아먹을 심산이었던 거다.'

시체늪의 대공, 창백한 불의 기만자 즈탄크.

과연 쌈박질밖에 모르는 쑴의 악마들 중에서라도, 그나마 머리를 쓸 줄 아는 놈이라는 건가.

족장 회의를 기습해 사상자를 낳고, 하이 오크들의 복수심을 부추긴 끝에 이곳으로 수뇌부 전원을 끌어들인 것부터가 놈의 계략이었다.

댈런에게 붙잡힐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그마저도 스스로의 정체를 일부 드러내면서까지 안배로 삼았던 것이겠지.

죽은 족장들의 복수를 위해, 그리고 악마에게 사로잡힌 대족장을 구하기 위해 부족한 병력이라도 긁어모아 출정하도록.

"후우."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다시금 속에서 뭉근한 무언가가 치솟는 게 느껴진다.

발밑에서 울려오는 진동을 느껴내며, 댈런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싸움을 시작하며 맺혔던 가슴 속 응어리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만하면 족하지 않은가.

지금까지의 개고생을 대체 언제까지 더 해야 한단 말인가.

그건 생존과 귀환이라는 뚜렷한 목표 하에 끊임없이 외면해왔던, 그의 깊은 곳에서부터 토해지는 고함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네를 받아들이게.'

문득 떠오르는 펠버의 조언.

노인장이 그 말을 남긴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처음부터 자격 자체는 손에 거머쥐고 있었던 거군.'

기존의 심상을 극한까지 비틀어내는 능력이 대영역의 첫 번째 조건이라면.

악마 놈이 은연중에 흘린 것처럼, 미래의 편린을 엿보는 것이 그 두 번째 자격.

모니터 너머에서 목도해왔던, 이제는 그게 정말로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워진 수백 번의 결말들은 이미 충분한 자격을 부여해주었다.

천변만화의 얼굴과 마녀가 싸우는 광경을 보고, 곧바로 영역을 개방해냈던 게 결코 우연은 아닌 셈.

'가장 간단한 마지막 퍼즐을···여태껏 놓치고 있었나.'

대영역을 이룬 5위계의 초월자.

이미 실존하는 현실 위에, 자신만의 세상을 덧씌우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이겠는가.

기존의 심상을 비틀어 수용할 정도로 확장된 영역의 힘과, 시간선을 엿봄으로 확장된 지식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다.

그보다 앞서 필요한 건, 자신이 주장하는 심상에 대한 확신.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가 이 현실을 덮어버릴 정도로 옳다는 확언을 스스로가 할 수 없다면.

대체 그 누가 그 확언을 대신해줄 수 있겠는가.

스으···

발을 들어올린다.

그것만으로도 일대의 마력이 무채색의 파동을 뿜어댔다.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어떤 장면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찬바람이 들이치는 설산의 오두막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수습 용병의 나무패를 받고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

처음 만난 동료의 시체가 식어가는 걸 무력하게 지켜보던 때와, 닳고 닳았음에도 과거를 그리워하며 짐마차 안에서 스스로에게 편지를 적던 때.

살아남아야 하기에 쌓아놓아야만 했던 울분을, 전부 그러모아 토해내듯이 다음 걸음을 내딛는다.

쿠우우웅―!

세 번째 발걸음.

땅속 깊은 곳에서 전해지던 떨림이 걷잡을 수 없이 거세진다.

내면으로 돌린 시선의 일부분은, 한참 전부터 심상 너머 설산의 한 부분을 주시하고 있었다.

[도약(E)]

- 한 번의 발디딤으로 몸을 높게 띄워올리는 기술. 단순한 동작이지만, 그 안에 힘과 기교의 총체적인 응용이 담겨있다.

- 숙련도 100%

미궁도시에서 은가면 사도 중 하나를 쓰러뜨리고 회수했던 스킬을 기원으로 삼고.

[답보(고유)]

- 용을 떨어뜨린 전사가 창안해낸 기술. 마력으로 디딜 수 없는 곳을 딛고 서는 기예다. 첫 발디딤의 순간에 방출되는 마력의 일부분을 완력으로 전환할 수 있다.

늪지의 원혼들을 상대로 고유 스킬로 전환되며, 한층 더 높은 기동력과 활용도를 가져다주었던 심상.

설산 구석진 곳의 암벽에 걸쳐 흐르며, 중력을 무시하듯 하늘로 솟구치는 돌과 자갈의 폭포를 바라보면서.

마치 중력이 뒤집히기라도 한 듯한 그 현상을, 눈앞의 현실 위에 그대로 끄집어낸다.

「거꾸로 솟아오르는 폭포」

「반전(反轉)」

쩌적―

천장이 기이하게 뒤틀린다. 전당의 벽과 바닥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남아있던 석관들이 모조리 뽑혀 천장으로 날아가 부딪히고, 석재 바닥 밑에 있던 흙더미들이 샘물처럼 터져나왔다.

"지형을···뒤엎는다고? 완전 개방도 아닐진대, 무슨 심상의 크기가 이 정도로···!"

둥실 몸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소리치는 악마.

[호오···상대방에게 유리하도록 이미 판이 깔렸으니, 그 판 자체를 엎어버리는 건가.]

그리고 심상의 진동에 눈을 뜬 고룡의 중얼거림을 흘려넘기며, 댈런은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쩌저적! 콰지직! 콰직!

밀려 올라가다 못해 조각조각 찢어지기 시작하는 돔형 천장.

마치 새가 알껍질을 깨고 나가듯, 새하얀 빛의 실금이 쩍쩍 갈라지며 틈을 드러낸다.

그 끝에.

콰과과과―!

전당 전체가 상공으로 뜯겨져나가며, 하늘의 청명함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

시야를 가득 채우는 새빨간 피보라.

숨이 턱 막히는 느낌과 함께, 타룸은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악!"

울컥이며 치솟는 지독한 혈향. 짜고 비린 맛.

대족장의 후계자이자 뛰어난 전사인 타룸에게는 익숙한 냄새와 맛이었다.

하지만 원래라면 고개를 돌려야만 볼 수 있을 큼직한 어깨와 상박 근육이, 눈앞에서 펄떡거리는 장면까지 익숙하지는 않았다.

타룸이 비틀거리며 물러난 사이, 그의 왼팔을 잡아 꺾어 잘라내버린 수호자는 잘려나간 팔을 쓰레기처럼 던져버렸다.

"크흐, 흐으···."

숨을 헐떡거리며 검을 바로 세운다. 후들후들 떨리는 검날 너머로 덩치 크고 거무튀튀한 하이 오크가 보였다.

저게 아마 구십 몇 대 대족장인가 그랬지.

지금보다 젊을 적에 공부했던 가물가물한 역사를 되짚어보면, 산속에 숨어든 악마 하나를 맨손으로 두들긴 전사였나 그랬을 것이다.

살아있을 때 뛰어났던 전사는 죽어서도 대족장을 지키는 수호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수호자는 언젠가 타룸이 대족장이 되면 그를 지키게 됐을 테였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였다. 저 전사는 이미 족장 둘을 죽였고, 이제는 그들을 구하려던 차기 대족장을 죽이려 들고 있었다.

다름 아닌 현 대족장, 정확히는 현 대족장의 몸을 장악한 악마의 명령에 의해서.

쐐애애애―!

수호자가 검을 내리쳤다. 타룸은 훌쩍 뒤로 물러났다.

수호자의 검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그를 따라붙었다. 어떤 주술이나 이능도 없이, 그저 육체능력만으로 휘두름에도 그랬다.

막기 위해 하나 남은 팔로 검을 휘둘렀지만, 수호자의 검은 막히는 대신 그의 검을 반토막 냈다.

촤아악!

무기를 동강 내고도 힘이 남아 어깨를 깊게 찢어버린 수호자의 검.

그 검이 다시 한 번 들이닥쳤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는 궤적과 속도였다.

타룸은 눈을 부릅뜨고 다가오는 검을 직시했다. 진짜 전사라면 죽음의 순간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무···"

그가 입을 열었다. 유언이라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영역의 힘을 전수받을 때, 전대 대족장이 그에게 해줬던 말.

동시에 첫 번째 대족장, 하이 오크들의 대선조가 후손들에게 남겼다는 문장.

"무너지지 마라! 끝까지 맞서라! 하이 오크는 자유롭게 싸운다!"

폐에 남았던 공기를 탁 내뱉자 팔다리에서 힘이 훅 빠졌다. 훈련받은 대로 마지막까지 아껴뒀던 숨과 힘을 다 뱉은 것이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검날. 번뜩이는 첨단이 목을 찌···

─────!

눈앞이 뒤집어졌다.

타룸은 본능적으로 몇 바퀴 구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나뿐인 손에는 누구 건지 모를 창이 들려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잡히는 대로 주워든 모양.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콰과과과과과······!!

먹먹해진 귀가 빠르게 회복되면서 굉음이 고막을 때렸다. 마력을 끌어올려 보호하기도 전에, 타룸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넋을 잃고 말았다.

절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분지. 그 중앙에 자리한 하이 오크의 성소.

이천 년도 전에 지어졌다는 거대한 석재 건축물이,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조각조각 부서진 채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이게 무슨···?'

성소에 숨겨져 있던 방어 기능인가? 아니면 대족장의 몸을 집어삼킨 악마의 힘?

하지만 전자라면 성소 자체를 박살 냈으니 말이 안 되는 일이고, 후자라면 이미 손에 넣은 대족장의 권한과 힘을 되려 망치는 일이었다.

그때 박살 나 떠오르는 파편들 사이에서 두 인영이 치솟았다.

하나는 하얀 문신이 빼곡한 하이 오크. 다른 하나는 군데군데 갑옷이 찢겨나간 인간이었다.

하이 오크는 둥둥 떠오르는 파편들 사이를 뛰어넘어가며 인간을 피했고, 인간은 허공에 파문을 남기며 도약해 불과 얼음을 흩뿌려댔다.

'대족장···그리고 댈런 칭구?'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저 둘이 누군지는 분명했다. 그리고 싸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허공을 걷어차며 대족장에게 따라붙은 댈런이, 흰 문신 가득한 가슴팍에 성검을 꽂아넣은 것.

동시에 마른하늘에서 한 줄기 섬광이 내리꽂히며, 성검에 찔린 대족장의 가슴팍에 커다란 구멍을 뻥 뚫어버렸다.

꽈르르르···.

"······."

뒤늦게 들려오는 우렛소리. 그 나직한 울음에 부서진 성소와 죽은 대족장, 쓰러져나간 동족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휙휙 지나갔다.

타룸은 뭔지 모를 감정들이 교차한 끝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을 죽이려고 하던 수호자를 돌아봤다.

"······."

성소가 부서지며 수호자는 이미 기능이 정지한 상태였다. 시체를 보존하는 주술만이 남아있어, 아직까지 형체를 잃지 않았을 뿐.

근원적인 공급처가 파괴되었으니, 머지않아 주술의 동력이 다하면 저 형체마저도 바스라질 테였다.

성소 수호자는 하이 오크에게 큰 전력이니만큼, 임시로라도 성소를 만들고 주술사들을 불러 되살려야 하겠지.

전대 대족장이 죽어버린 탓에, 갑작스럽게 현 대족장이 된 입장인 타룸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일단 잘린 팔부터 회복해야지. 부상당한 동료들도 수습하고. 나머지는 그 뒤에 생각할 일이었다.

그 순간.

화륵!

난데없이 허공에서 시퍼런 불이 튀어나오더니, 기능 잃은 수호자의 시체를 집어삼켰다.

163

선조들의 무덤(5)

"시발."

댈런은 입안의 핏물을 모아 뱉었다. 붉은 액체가 중력을 거스르듯 둥실 떠올랐다.

무중력 공간에서는 액체가 둥글게 구를 이룬댔나? 오래전 유튜브에서 봤던 우주정거장 실험 영상이 연상되는 장면이었다.

물론 지금 그가 떠 있는 이 공간은 단순한 무중력이 아니라, 수많은 힘의 기류들이 모여 위쪽으로 휘몰아치는 현상.

때문에 부유하는 듯 보였던 핏물은 그대로 어떤 기류에 휘말려 휘리릭 흩어져갔다.

"······."

그 흩어짐을 잠시 지켜보던 댈런은, 다시 대족장의 시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는 대족장의 뻥 뚫린 가슴팍에서 흘러나오는 은청색의 기묘한 기운을.

"너네 족속들은 좀처럼 뒈질 생각들을 안 하는군."

[흐흐흐···삶과 죽음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을 긋는 건 필멸자들의 저급한 세계관이지.]

은청색 기운이 말했다. 혀도 입도 없는데 또렷한 육성이었다.

뭐지, 진동으로 소리를 내나? 수은처럼 흘러내리는가 하면 불 붙은 기름처럼 타오르는 기운은, 그 구성 물질조차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물론 댈런에게 저 물질의 구성 따위는 신경 쓸 바가 아니긴 했다. 중요한 건 저게 대족장에게 깃들었던 악마의 일부라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하는 꼴을 보아하니, 내버려 두면 분명 더 큰 뭔가로 변신할 작정인 듯했다.

악마 놈들 한두 번 상대해 본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럼 보스 경험치가 두 배군.'

댈런은 상태창을 슬쩍 확인했다. 레벨은 어느새 30을 넘겨있었다.

미궁도시를 떠난 후 산맥에 들어와 오크들을 학살하면서 하나, 그리고 성소 수호자에 이어 대족장까지 처리하며 하나 더 오른 것.

슬슬 빌어먹게 안 오르는 레벨이지만 악마까지 쓰러뜨리면 하나쯤은 더 얻을 수 있겠지.

당장에라도 불꽃으로 태우든 전격으로 지져버리든 할 수 있음에도, 댈런이 저 꾸물거리는 은청색 물질을 내버려 두는 이유였다.

'최소한 화신체. 거기다 높은 확률로 마물 한 다스는 덤. 정말 제대로 붙어볼 생각이면 본체가 직접 현현할지도.'

그럼 오히려 더 좋았다. 놈도 상급 악마인 만큼 정수 자체는 지옥에 두고 왔겠지만, 3할 정도의 힘이라도 깎아낼 수 있으면 차후에 큰 도움이 될 터였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은청빛 기운은 서서히 댈런에게 멀어지며, 어떤 분명한 형체를 이뤄내기 시작했다.

[크흐흐, 방심했구나 전사야. 내가 정말 이대로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느냐?]

악마가 말했다. 놈은 이제 부정형의 기운이 아닌, 앙상하게 마른 시체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방심하다니. 기다려준 건데."

[···웃기는군. 오만에도 도가 있는 법이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덤벼라. 영원히 기다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손가락을 까딱이자 어디선가 도끼가 날아와 손아귀 안에 안착했다. 댈런은 도끼를 허리춤에 꽂고는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마치 뭔가 숨겨놓은 수가 있으면 얼른 써보라는 듯한 행동.

성소가 박살나면서 결계는 물론이고, 수호자와 골렘들까지도 전부 무력화된 상태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시간에 쫓기듯이 싸울 필요가 없었다.

그런 여유가 눈에 거슬렸던 걸까. 창백한 시체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후회하게 해주마. 필멸자의 한계를 경험하게 만들어주지. 수만 구의 시체들 사이에서 썩어가다 보면, 너 스스로도 별다를 것 없는 필멸자였다는 걸 자각하게 될 것이다.]

놈이 손을 들어올렸다.

손바닥 안에서 화륵 타오르는 푸른 불꽃.

댈런은 놈에게서 눈을 돌려 저 아래의 분지를 내려다봤다. 족장들과 일행이 성소 수호자와 전투를 벌이던 곳이었다.

[내가 왜 이곳을 탐했는지 아느냐?]

악마가 물음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전장의 시체들이 불붙어 타오르기 시작한다.

창백한 화염은 거무튀튀한 수호자들의 몸뚱이를 먼저 집어삼키고, 이내 방금 숨이 끊어진 족장들과 대전사들의 시체에까지 옮겨붙었다.

불타는 시체들 사이로 족장 타룸과 루시아, 비요른과 아카샤가 보였다. 타룸은 왼팔이 없어졌지만, 일단 넷 다 무사했다.

걱정할 건 없겠군. 댈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이 오크는 미개하지. 인간 왕국쯤은 손쉽게 무너뜨릴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륙 변방의 산골짜기에 틀어박혀서 인간들의 방파제 노릇이나 하고 있···억!]

악마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손도끼가 머리를 쪼개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머리통이 반으로 갈라진 채 축 늘어진 앙상한 몸뚱이.

직후 하늘이 쩍 갈라지며, 지독한 시취가 물씬 풍겨왔다.

***

화르르르―!

열기 없는 불꽃이 치솟는다. 수호자들의 몸뚱이에서 시작된 불꽃은 어느새 분지를 넘어 골짜기까지 옮겨붙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메마른 골짜기에, 들불처럼 번져가는 푸른 불길.

그건 수천 년 동안 죽어나간 하이 오크들의 시체를, 모조리 태워버리는 악마의 제사 의식이었다.

'이것까지 노린 건가.'

댈런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원래라면 성소의 주술로 보호되어야 할 하이 오크의 시체들이, 성소가 무너지며 악마의 마력에 고스란히 노출된 상황.

대족장의 몸뚱이와 성소의 능력을 사용한 걸 넘어서서, 악마는 자신이 깔아놓은 판이 뒤집힐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쑴이 아니라 에낙사구스의 악마라 해도 모자라지 않을 계책이었다.

[조심해라, 전사야. 아무래도 놈이 완전한 진체로 직접 강림하려는 것 같구나.]

"단단히 빡쳤나 보군."

[그러게 적당히 입을 놀리지 그랬느냐.]

고룡의 핀잔에 어깨를 으쓱이고, 고개를 꺾어 갈라진 하늘을 올려다본다.

백 미터가 넘는 길이로 갈라진 균열은, 악취에 이어 기괴한 덩어리를 드문드문 뱉어내고 있었다.

눈과 혀, 잘려나간 코, 절단된 사지의 조각들이 뭉친 덩어리들.

우박처럼 쏟아지는 역겨운 덩어리들의 사이로, 다른 것들보다 수백 배는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으으으으으―

어우어어―

망자들의 비명이 절벽 사이를 메아리친다.

지옥의 마물인 시체 거인 수십 구를 뭉치면 저런 모양일까.

피부가 벗겨지고 불에 타 바싹 말라버린 몸뚱이, 사지가 뒤틀리거나 물에 퉁퉁 불어터진 익사체까지.

천 단위의 시체를 찰흙처럼 뭉쳐서 만든 듯한 거인은, 네 개의 팔과 네 개의 다리를 휘적이며 균열에서 떨어졌다.

쿠구구구구···.

상승기류에 휘청이던 악마가 금새 균형을 되찾았다. 놈의 몸 곳곳에 달린 입이 동시에 열렸다.

[이 땅에 진체를 강림시키는 건···참으로 오랜만이로구나. 곧 나의 일부가 될 네 시체가 충분한 값어치이기를 바라마.]

시체늪의 대공, 창백한 불의 기만자 즈탄크가 말했다.

댈런은 사납게 웃으며 성검을 고쳐 쥐었다. 상급 악마의 진체를 상대하는 건 칼카스 이후로 처음이었다.

놈은 수많은 제물을 희생하고, 상급 악마 수준의 주문을 이용해 정수의 힘을 완전히 끌어다 강림한 상태.

그 말인즉 이곳에서 놈을 죽이면, 동력원을 잃은 놈의 지옥 역시 소멸된다는 뜻이었다.

저벅.

그때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 외의 기척은 없었다. 심박이나 호흡도 마찬가지.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가슴팍에 구멍이 뻥 뚫린 대족장이 허공을 밟고 서있었다.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어올리며 말했다.

"죽은 거 아니었나?"

"이 몸뚱이는 이미 죽었다. 하지만 전사의 영혼은 쉽게 죽지 않는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내 심장이 사라지기 전에 선조들의 힘이 내 몸에 들어왔다. 그 힘이 내 영혼을 죽은 육체 안에 붙들어두고 있다."

대충 영역의 힘으로 버티고 있다는 말인가.

하이 오크 선조들 중에서는 성소 수호자를 만들어낸 이도 있을 테니,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닐 듯했다.

불타오르는 자줏빛 눈동자와, 녹색 피부 위에 자줏빛 마력으로 돋아난 혈관들이 그 증거이기도 했고.

대족장은 핏기 잃은 입술을 움직였다.

"악마의 속임수에서 구해줘서 고맙다, 잉간. 이제 내게 두 번째 기회를 줘라. 내가 저 악마를 썰어버리겠다."

댈런은 잠시 침묵했다. 도움이라면 환영이지만, 경험치를 포기하기는 아까운데.

"막타는 내 거다."

"···어려운 말 하지 마라. 칭구는 어렵게 말하는 거 아니다."

"저놈에게 마지막 일격을 먹이는 건 나라는 소리다."

"알겠다. 그럼 내가 힘을 꺾어놓을 테니, 너가 마무리를 해라."

댈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걸음 물러섰다. 막타로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면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대족장은 허공을 성큼성큼 걸어 악마에게 향했다.

신비를 꿰뚫는 댈런의 눈에, 그의 등 뒤로 백이 넘는 하이 오크들의 그림자가 비쳤다.

[호오.]

악마는 흥미로운 눈길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놈의 몸뚱이에 붙어있는 수천 개의 눈동자가 대족장을 향한 것이었다.

[왜 제물로 바쳐지지 않는가 했는데, 아직 영혼이 육신을 떠나지 않아서였군.]

"악마."

[뭐냐?]

"죽을 준비나 해라."

수많은 입술들이 히죽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 몸으로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심장과 폐는 으깨져서 흔적도 없고, 내장도 절반 가까이가 날아갔구나. 주술로 움직이는 인형 따위가···.]

"하이―오크는! 자유롭게 싸운다!"

대족장의 신형이 사라지고, 악마의 입이 다물어졌다.

뻐어어엉―!

북 두드리는 소리가 먼저.

다음 순간 악마의 몸이 휘청하며 네 개의 팔 중 하나가 터져나갔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피보라와 살점 조각들.

검붉게 피칠갑을 한 대족장의 신형은, 악마의 반대쪽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이, 무슨, 간신히 움직이는 시체 따위가!]

대답은 없었다. 그저 온 힘을 다해 악마의 몸통과 팔 사이 접합부를 내리칠 뿐.

화륵!

다섯 선조에게서 나온 오색의 불꽃이, 주먹을 감싸고 폭발력을 잔뜩 축적해내며.

후우웅―

주술사들의 바람이 회오리처럼 몸을 휘감은 채, 앞에서는 권로를 닦아내고 뒤에서는 추진력을 더해간다.

일순간 대족장의 몸뚱이가 세 배쯤 커졌다. 그 몸뚱이를 뒤덮은 수십 명의 자줏빛 그림자가 순간 번쩍이며 힘을 뿜어냈다.

떠어━━━━

북 치는 소리가 한 번 더 난 뒤, 악마의 팔과 함께 몸통의 일부분이 사라졌다.

[크아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남은 팔다리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악마.

잘려나간 두 팔이 빠르게 재생되는 동시에, 남아있던 팔다리가 갈래갈래 찢어지며 수백 가닥의 채찍처럼 변한다.

악마의 몸뚱이는 이제 수많은 촉수가 달린 둥근 공 같은 형태였다. 각각이 수십 구의 시체로 이루어져, 날카로운 뼛조각을 드러내고 있는 촉수들.

거대한 덩치에서 비롯된 힘은 단숨에 절벽도 무너뜨릴 괴력이었지만, 대족장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움직이며 그 공격을 모조리 피해내고 있었다.

'대단하군. 게임에서도 이렇게 강했던 적은 없었는데.'

단순한 동작에 수십 개의 묘리가 얽혀들고, 악마의 진체마저 으깨버리는 위력을 만들어낸다.

아무리 대족장이라 하더라도, 원래의 몸뚱이를 입고서는 해낼 수 없는 이적.

허나 지금 그의 육체는 그저 그릇이자 도구일 뿐, 생명체라는 개념조차 상실한 채였다.

이미 끊어진 숨을 억지로 붙여놓았기에, 오히려 스스로의 손실을 걱정하지 않고 영역의 힘을 펼쳐낼 수 있는 건가.

수많은 힘을 한 몸에 담아내는 대족장의 전투 방식은, 마찬가지로 수십 가지 힘을 한 영역에 담고 있는 댈런에게 더할 나위 없는 영감의 보고였다.

'마음 같아서는 한참 보고 싶지만.'

스스로의 존재를 태워 빚은 마지막 불꽃이,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할 터.

그렇게 생각한 댈런은 성검을 놓고 단창을 손에 쥐었다. 그 모습에 적창이 물었다.

[혼자서 할 수 있겠느냐?]

댈런은 피식 웃었다.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눈치 하나는 빠르구나. 지금 내가 네 몸을 빌리게 되면, 기껏 이식한 용심장의 주도권이 내게로 넘어올 것이다.]

'용심장이 당신의 육체가 된다는 건가?'

[맞다. 그러면 네가 싸울 때마다 나도 함께 나서는 꼴이 되겠지. 기껏 이 한 몸 편하자고 거래를 했는데, 그런 고생은 사양이다.]

그러니 알아서 해보거라. 나직한 고룡의 웃음을 뒤로하고, 댈런은 허공을 박찼다.

콰아아앙!

발밑에서 폭발하는 검붉은 화염. 솟구치는 신형이 불꽃 같은 잔영을 남겨낸다.

거칠게 요동치는 심장. 허나 이전과는 달리 전신의 혈관은 용혈의 열기를 넉넉히 감당해냈다.

칼카스의 진체와 싸울 당시, 적창이 몸을 빌렸을 때의 감각을 되새겨본다.

용혈의 원래 주인이 손수 보여줬던 무용은 여전히 한참 멀었지만, 그럼에도 그때만큼 까마득한 건 아니다.

화르르륵!

불꽃이 창을 감싸고.

휙―

악마의 몸뚱이를 향해 내리긋는다.

대족장에게 시선이 뺏긴 악마가 이상함을 눈치챘을 땐, 이미 끝없는 열기가 놈의 몸뚱이를 가르고 있었다.

[커···어···!]

뒤따라 덮쳐드는 화염에 비명을 지르려던 입술들이 죄다 녹아버린다.

마치 용의 숨결과도 같은 화염의 파도가, 악마의 전신을 집어삼키고도 모자라 지면에 폭포같이 쏟아졌다.

콰과과과―!

순식간에 암반이 녹아 화산 지대처럼 변해버린 일대.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용암의 호수 위에, 반으로 잘린 거대한 시체 덩이가 추락했다.

164

선조들의 무덤(6)

쿠구궁! 쿠궁···!

영역이 해제되자 집채만 한 돌덩이들이 비처럼 쏟아진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땅속으로 대피하는 개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광경이었다.

낙석의 비에서 벗어난 댈런은 곧장 부글거리는 용암 호수로 다가갔다.

수면 위로 손을 뻗자 화륵 하고 타오르는 검붉은 불꽃.

용의 꼬리처럼 길쭉하게 뻗어나간 화염 줄기는, 용암 호수 안을 뒤적이더니 청백색의 큼직한 구슬 하나를 건져올렸다.

'시체늪의 대공, 즈탄크의 정수.'

진체로 강림한 악마는 정수를 남기고 완전히 소멸했다.

힘의 근원을 잃어버린 놈의 지옥 역시, 얼마 가지 않아 무너져내릴 것이었다.

레벨업을 하고도 중간쯤 차오른 경험치 바를 한쪽에 띄워두고 곁눈질하며, 댈런은 즐거운 눈빛으로 악마의 정수를 회수했다.

그리고 바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뭔 썩은 내가 이렇게······."

지옥문을 열 때부터 악취가 장난 아니더니, 죽고 남긴 정수에서까지 시체 썩는 냄새가 물씬 악취가 풍겨온다.

이 세계에서 구를 대로 구른 터라, 어지간한 자극에는 눈 하나 깜빡 않는다고 자부했건만.

콧속을 넘어 폐부까지 더럽히는 감각에, 댈런은 황급히 아공간을 열어 정수를 집어넣었다.

[끄아아아악! 이···이게 뭡니까 주인님!]

난데없는 악취 테러에 입주민이 질겁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악마 정수다. 칼카스의 정수처럼 네가 잃어버린 힘의 조각일 수도 있지 않겠냐?"

댈런은 검붉은 화염을 일으켜 손에 남은 냄새를 털어내며 말했다.

한때 별나무라 불렸다던 불사의 악마 아르보르.

천변만화의 얼굴 에버론 라크탈라의 말에 따르면, 지금의 몸뚱이는 예전의 권능을 대부분 잃어버리고 영락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잃어버린 힘 중 하나인 칼카스의 정수를 흡수한 끝에 그 권능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다루게 되지 않았던가.

마녀와의 전투와 성소 수호자의 포획 모두 그 권능이 없었다면 상당히 귀찮아졌을 과정이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제가 이런 악취덩어리를 남겼을 리가 없잖습니까!]

"일단 먹어보고 말해. 원래 몸에 좋은 약이 쓴 거다."

[그게 대체 무슨 논리···그럼 독초도 몸에 좋다는 겁니···우으읍! 커흡!]

아공간에 손을 넣어 직접 악마의 입속에 정수를 쑤셔 넣어주고 난 뒤, 댈런은 손을 휘휘 털며 용암 웅덩이에서 돌아섰다.

분지의 한가운데, 성소가 있던 자리는 방금 전의 싸움으로 초토화된 상태였다.

웅장하던 고대 건축물은 어디 가고, 그 자리를 대신한 건 마구잡이로 쌓아올린 돌무덤 같은 폐허.

댈런은 그 경계선 바깥까지 굴러나온 돌덩이 중 하나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대족장의 몸뚱이가 힘없이 기대어져 있었다.

"죽었나?"

"···아직이다."

대족장이 클클 웃으며 대답했다.

가슴팍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으니 호흡과 심박은 이미 멈춘 지 오래다.

영역의 힘을 통한 선조들의 주술과, 스스로의 마력제어 능력만으로 몸을 움직이는 셈.

그마저도 이제 한계인지, 두 눈에서 번뜩이던 자색 불꽃이 천천히 사그라드는 중이었다.

"상급 악마를 상대로 활약이 대단하더군. 덕분에 편하게 싸움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댈런은 근처의 바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이야기했다.

실제로 그가 내지른 마지막 일격은, 대족장이 악마를 붙잡아두지 않았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용심장을 얻어 몸에 가해지는 부하를 극적으로 줄이고, 그로 인해 적창이 보여줬던 무위를 어설프게나마 재현해내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용혈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이제야 감을 잡았을 뿐, 숨 쉬듯이 자유롭게 힘을 다루던 적창에게 비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반대로 대족장이 풀어낸 영역의 힘은, 하나하나의 위력은 용혈에 비해 볼품없음에도 그 조화와 능숙함의 측면에서 독보적이었다.

단순히 악마의 시선을 끄는 걸 넘어서서, 수십 종류의 주술로 진체를 결박하는 동시에 촉수 사이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놈의 몸뚱이를 착실하게 깎아내린 무투의 정수.

그건 용혈을 배제한 댈런의 싸움 방식과도 얼핏 비슷했고, 이번 싸움의 가장 큰 소득은 경험치가 아닌 그 싸움을 관찰하는 데 있을지도 몰랐다.

5위계의 초월자가 수십 가지 힘을 뒤섞어가며 사용하는 건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멍청했다."

그때 한동안 침묵하던 대족장이 입을 열었다.

"초월의 격을 쥘 때부터 멸망이 다가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내다본 미래와는 달리, 모든 게 예정보다 너무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

"적응력 좋은 인간들은 어떻게 버텨내고 있는 것 같았지. 하지만 하이 오크는 아니다. 이대로는 하이 오크답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끝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고 말았지."

회한 섞인 목소리. 입꼬리가 쓴웃음을 지어낸다.

댈런은 대답할 수 없었다. 괜찮다는 위로의 말이나, 이겨낼 거라는 격려도 불가능했다.

종말은 실제로 앞당겨지고 있었고, 그 원인의 일부분은 댈런 자신의 몫이었으니까.

정해진 멸망의 길을 빗겨나가는 중이라는 결과론적인 이야기를, 종족을 위하려다 오히려 악마에게 이용당한 이에게 어떻게 건넬 수 있을까.

용암 호수가 부글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적막함 사이로, 또 다른 인기척이 다가왔다.

"대족장 쓰툼파."

"···족장 타룸. 아니, 이제는 대족장 타룸이군."

비척이는 발걸음으로 다가온 건 타룸이었다.

왼팔은 상박부터 잘려나갔고, 몸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한 모습.

자줏빛이 희미해져가는 눈으로 그 전신의 부상을 훑어본 대족장은, 입을 우물거리다가 한 마디를 더 내뱉었다.

"미안하다."

"아니다. 오면서 다 들었다. 너는 너가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렇지···하지만 멍청했던 건 사실 아닌가?"

"그건 맞긴 하다. 그래도 이제 똑똑해졌으니 됐다."

타룸의 대답에 대족장이 낮게 웃었다. 생기가 사라져가는 웃음이었다.

"족장 타룸."

"뭐냐?"

"대선조가 남긴 말을 기억해라. 하이 오크는 자유롭게 싸운다. 나는 싸우는 것보다 자유가 중요하다는 걸 몰랐고, 그게 내가 실수한 원인이었다. 너는 같은 실수를 하지 마라."

"진짜 죽을 때가 됐나 보군. 너무 어렵게 말한다."

"···됐다. 넌 똑똑하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말을 마친 대족장은 바위에 머리를 툭 기댔다.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산맥의 해는 빨리 저물었다.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 부글대는 용암 호수의 붉은빛은 마치 자신의 세상이 다가온다는 듯 하늘로 기운을 뻗어내고 있었다.

악마가 남긴 시취와 탄내 사이, 바람이 실어온 먼지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댈런은 코를 슥슥 비볐다. 그리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 없나?"

"···고기가 먹고 싶군."

곁에 있던 타룸이 픽 웃었다. 과연 하이 오크다운 대답이었다.

"걱정 마라. 대선조의 하늘 성소에서 실컷 맛볼 수 있을 거다."

타룸의 말에 대선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검은 눈동자는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댈런은 무릎에 손을 얹고 몸을 일으켰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

며칠이 흘렀다.

원정에 나섰던 하이 오크들은 각자의 부락으로 돌아갔지만, 일행은 성소에서 가장 가까운 부족으로 거처를 옮겨왔다.

새로 대족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 타룸의 부탁 때문이었다.

전대 대족장 쓰툼파를 떠나보내는 자리에, 일행이 함께해줬으면 좋겠다고 그가 말했던 것.

물론 사상자를 수습하고 원정의 여파를 정리하는 게 먼저였고, 그리고 나서도 장례를 준비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덕분에 일행은 본의 아니게 며칠이나 푹 쉬게 되었다.

일행의 활약상을 들은 하이 오크들이 매일 밤마다 만찬을 대접하겠다며 자기 집으로 초청해대는 통에, 좀 다른 의미로 정신없는 나날이기는 했지만.

"···그래서 결국 어제 만찬의 팔씨름 대회 우승자는 나, 비요른 칼라드라쿰이었다는 거지! 누구도 난쟁이를 힘으로 이길 순 없다네! 설령 하이 오크나 용이라 해도 말이야! 으하하하!"

[논리에 오류가 있군요. 그 자리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안 계셨습니다. 이 부락의 족장이 두 분을 따로 초청한 것만 아니었으면, 당신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드릴 수 있었을 텐데요.]

"원래 패배자는 말이 많은 법이지! 이해하네, 어찌 나라고 평생 승리만 거듭해왔겠나! 으하하···아아악!"

[제가 조금만 더 성장했으면 발가락 하나로도 당신을 이길 수 있었을 겁니다. 자꾸 그러면 탈모로 만들어버리겠습니다, 난쟁이 영감님.]

"아악! 머리 쥐어뜯지 말라고! 이 요망한 도마뱀 녀석이!"

댈런은 낮게 웃으며 나무잔을 들어올렸다.

자기 덩치만 한 새끼용을 정수리 위에 얹은 채, 머리털이 뜯겨나가며 비명을 지르는 난쟁이는 꽤 진귀한 광경이었다.

보다 못한 루시아가 둘 사이를 뜯어말리는 동안, 그 모습을 관람하며 술을 홀짝이는 그에게 펠버가 말을 붙여왔다.

"그러고 보니 축하가 늦었군. 초월자의 자격을 얻은 걸 축하하네. 소감이 어떤가?"

"소감이랄 것까진 없고···그때 노인장이 해준 이야기에 감사드리오."

"끌끌, 내 말이 없었더라도 언제든 가능했을 걸세. 자네는 이미 모든 자격을 거머쥐고서, 아주 얇은 벽만을 남겨두고 있었으니까."

펠버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잔을 들어올렸다. 그의 잔에는 독한 술 대신 뜨끈한 차가 우려져 있었다.

"소영역을 이뤄낸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5위계라니. 세상이 놀랄 일이군. 심지어 멀리서도 느낄 수 있었네. 자네가 가진 심상의 크기가, 다른 초월자들을 아득하게 넘어선다는 걸."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술잔을 기울이며 상태창을 슬쩍 바라봤다.

――――――――

이름 : 댈런

레벨 : 32

[근력 : 45] [기량 : 40] [체력 : 36]

[감각 : 37] [지능 : 36] [마력 : 39]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도약(E), 불꽃 화살(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검붉은 용의 피(A), 지옥문의 열쇠(C), 아커만의 작도법(C), 필즈의 바람 결계(C), 화영창술(D), 살아 움직이는 뿌리(D)

*고유 스킬(11)

――――――――

미궁도시를 떠나기 전과 비교했을 때, 레벨이 오른 것 외에도 대영역을 이루면서 모든 능력치가 상승했다.

사실 그밖에는 수치와 내용에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5위계에 닿았다는 건, 스스로 빚어낸 영역의 일부분으로 이 세상을 덮어씌울 수 있다는 의미.

현실 자체를 멋대로 개변하는 초월자의 힘은, 단순히 상태창으로 보이는 능력치나 스킬의 숫자로 표현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고유 스킬 역시 하나의 줄기에서 수십 가지 갈래로 뻗어나가며, 표기되는 숫자 이상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힘이었고.

'그 무투가의 시체를 회수하면 어떻게 될까.'

소영역을 이뤘을 때와 마찬가지로, 캐릭터가 대영역을 이룰 때 역시 알림창이 작게 지나가곤 했었다.

모니터 너머에서는 무작위적 요소 중 하나일 뿐이라, 공략에서 크게 비중을 두고 있지 않았던 부분.

허나 돌이켜보면 최후의 최후까지 버텨냈던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대영역을 이뤘던 전적이 있었다.

댈런이 세계의 이빨 산맥을 방문한 근본적인 이유인, 무투가 캐릭터 역시 대영역의 소유자였고.

'예상이 가지 않는군. 게임에서는 무작위 이펙트 몇 번 튀어나오고 데미지 들어가는 게 끝이었으니까.'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이어가는 대신, 댈런은 술잔을 쭉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쿵쿵쿵.

때마침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족장 타룸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두건을 깊게 눌러쓴 채 문앞에 선 그는, 일행이 전부 모여있는 걸 보고 말했다.

"마침 다 있군. 출발하자. 대족장을 흙과 바람으로 돌려주러 갈 시간이다."

165

회백의 투사(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