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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베주미예 (1)

* * *

약속 당일, 약속한 장소에서 김수경과 그의 용병단 소속 일원을 만났다.

김수경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용병은 복면을 쓰고 있었고, 그것은 강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김수경은 애초에 외부로도 얼굴이 많이 팔린 사람이라 굳이 가릴 이유를 못 느낀 것이다.

확실히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단의 냄새가 풍겼다.

강후가 보기에도 용병들의 무장 상태가 정말 좋았고, 무엇보다 사라지지 않는 피 냄새가 느껴졌다.

피로 얼룩진 전장에 푹 빠져 살다 보면, 마치 피부에 밴 것처럼 피 냄새가 없어지지 않곤 한다.

반지하의 습기 많은 집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에게 특유의 눅눅함이 느껴지듯이 말이다.

김수경이 강후를 보자마자 바로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김수경입니다."

"정선규입니다."

"다른 용병과의 인사는 생략하실까요?"

"아뇨. 어쨌든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함께 할 분들인데 인사는 나눠야죠."

쓸모없는 겉치레를 싫어하는 강후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공통의 타깃인 전종두를 노리고 모인 사람들이다.

김수경 용병단 내 구성원도 있고, 자신처럼 외부에서 섭외한 용병도 있다.

서로가 살아온 배경이나 환경은 다르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서만큼은 일회성이라도 동료였다.

강후는 철저하게 이 '동료'들을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로를 활용하는 가운데, 끝에는 전종두를 손에 넣는 것이 목적인 셈이다.

김수경의 안내를 따라, 각 용병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복면에 적힌 가명으로 자신을 소개했고, 강후도 하나하나 이름을 외웠다.

누가, 어떤 분야에 탁월한 재주가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도 거쳤다. 분야가 정말 다양했다.

그다음.

전종두에 대한 브리핑이 시작됐다.

광전사 계열의 헌터로 레벨은 350대. 이미 많은 범죄 혐의점을 술술 달고 있는 인간쓰레기였다.

증거 영상도 있었다.

세간에 제법 이름이 알려진 국내의 유망주 헌터를 러시아에 팔아넘기는 영상이 다수 나왔다.

거기에 곁들여서 일반인 여성의 인신매매도 같이 진행하는 모습까지 확인됐다.

핵폐기물 급의 쓰레기라는 표현이 전혀 아깝지 않을, 지저분하고 추악한 행보였다.

강후는 이번 의뢰를 선과 악의 대결 같은 속 편한 구도로 보지는 않았다.

밝은 미래와 어두운 미래의 구도로 생각했다.

정의구현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 강후라지만, 저런 식으로 인재를 잃어 좋을 것은 없었다.

국내 측면에서도 손실이고, 헌터 전체의 측면으로 봐도 대단히 큰 손해다.

한편으로는.

이번에 김수경 용병단과 공조하면서 김수경과의 인맥을 쌓아두려는 목적도 있었다.

김수경은 앞으로 강원도 동부권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사람이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길드나 용병단의 범죄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즉,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정화 길드와도 대립각을 세울 가능성이 컸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정화 길드의 악행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김수경은 절대 정화 길드에 좋은 감정을 갖지 않게 될 터다.

어쨌든 전종두에 대한 브리핑은 자세하게 이루어졌다.

전장이 될 곳은 전종두 일당이 비밀스런 회합 장소로 자주 쓰는 폐공장이라고 했다.

그리고 김수경이 전체적인 상황 지시를 담당하기는 하지만, 강후는 재량을 많이 부여받았다.

외부 용병이다 보니, 과도한 복종이나 협력을 요구하진 않는 모양새였다.

물론 강후는 김수경의 말을 무시하거나 용병단과의 협력을 무의미하게 여기진 않을 생각이었다.

단, 전략적으로 필요하다면, 그리고 승부수를 던질만하다면 혼자 활동할 계획을 세웠다.

사실 그게 편했다.

큰 틀에서는 팀이지만, 작은 틀에서는 결국 1인으로 움직이는 그림이 좋았다.

정말 호흡이 잘 맞는 동료가 아니라면, 보통 옆에서 부대끼는 존재는 걸리적거린다.

1시간 후.

최종 정비를 마친 일행이 폐공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해도 진 시간이라 전체적으로 길이 어두웠다.

강후는 야시를 활용해 평소와 다름없이 시야를 확보하면서 먼저 나아갔다.

출발하기 전에 김수경에게 미리 길 뚫기를 자원했던 만큼, 보초나 경계가 없는지 살피는 중이었다.

'역시.'

주변 경계를 서는 녀석들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녹슨 컨테이너와 어지럽게 쌓인 나무 상자 때문에 보이는 게 없었던 상황.

하지만 마나의 흐름과 함께, 성좌 탐색 능력을 활용하니 숨어 있는 두 존재가 감지됐다.

제법 실력 좋게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은 맞지만, 어쨌든 들켰으니 미래는 뻔했다.

스으윽.

횡 이동으로 은신 상태에 들어간 강후가 무영까지 활용하며, 소리소문없이 그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불청객의 등장을 경계하고 있던 두 보초를.

푸욱! 푸욱!

순식간에 제압했다.

단숨에 목 뒤에 꽂아 넣은 단검은 두 헌터로 하여금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즉사하게 했다.

만약을 대비해 대참수 스킬까지 넉넉히 쓴 상황이라 일격을 버텨낼 재간도 없었다.

아마 당사자들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터다.

눈 떠보니 저승이 코앞인 그림이겠지. 어찌 보면 축복받은 죽음이다. 고통 없이 죽었으니까.

결국 무전이나 경계 신호 한 번 보낼 틈도 없이 죽은 보초는 임무를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다.

강후가 앞장을 선 덕분에 김수경이 이끄는 1팀은 진입로가 순탄하게 열렸다.

반면 2팀은 중간에 한 번 발각될 뻔한 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다시 폐공장 측면로를 우회하는 계획을 세우겠다고 연락이 왔다.

구구절절 말이 길어지기는 했지만 결국 진입이 지연됐다는 뜻이다. 꼬였다는 얘기다.

반면 강후는 소리 없이 보초 여섯을 차례대로 제압했고.

더 나아가 은밀하게 지면에 깔린 형태로 매립되어 있던 경계용 결계도 확인했다.

이 결계는 공격 기능은 없지만, 조명탄 효과가 있어 적의 침입을 알려주는 성능을 가졌다.

그런데 강후가 결계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덕분에 1팀은 아무도 결계를 밟지 않을 수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도 더 감각이 좋고. 무엇보다 활용 가능한 능력이 많은 것 같다.'

김수경은 강후의 능숙한 대응과 이동, 그리고 최단 루트 개척까지 두 눈으로 보면서 이예린이 왜 그를 자신 있게 추천했는지 이해했다.

이예린이 전했던 말대로 레벨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강후의 레벨이 아직까지 100도 안 됐다는 사실이 무섭게 느껴졌다.

지금도 자신이 감탄할 수준이라면, 여기서 더 성장하면 그 이상일 테니까.

'암살자 교본이라고 해도 무방하겠군. 은밀하게 죽이는 모든 과정에 특화되어 있어.'

첫 만남에서 느꼈던 대로, 강후는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인물이었다.

전장에서 본 암살자의 수는 덤프트럭 몇 대에 채워도 모자랄 만큼 차고 넘쳤다.

하지만 그렇게 보아온 많은 암살자 중에서 강후의 움직임이 일품이었다.

깔끔했다.

암살자 헌터에게 '깔끔하다'라는 말은 검과 마법을 다루는 헌터에게 강력하다는 표현과 같다.

해당 직업군에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중의 하나인 것이다.

김수경은 강후에게 망설임 없이 그런 수식어를 붙여주고 싶었다. 전장에서 뼈가 굵은 솜씨다.

폐공장으로 가장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비탈길 형태의 샛길에 막 1팀이 접근했을 무렵.

퍼어어엉!

반대편에서 폭발이 일었다.

1팀의 완벽한 접근이 무색하게 2팀에서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침입자다!"

"북쪽이야! 북쪽!"

왜애애앵!

경보 사이렌과 더불어, 앞다퉈 폐공장 밖으로 나오는 오쇼 용병단원이 보였다.

전종두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2팀의 사고로 인해서 이미 은밀한 침입의 의미는 사라졌다. 이제는 속도전이다.

김수경이 소리쳤다.

"덮쳐! 전종두를 찾아! 앞을 가로막는 놈은 다 죽여버리고! 단순하게 간다!"

어느새 굵어진 빗줄기를 헤치며 용병들이 폐공장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강후는 바로 비탈길 아래로 보이는 출입구가 아닌, 살짝 우회해서 가야 보이는 쪽문을 봤다.

보통 정문, 그러니까 큼지막한 대문에는 경계 시설이 제법 설치되어 있을뿐더러.

적의 화력도 집중될 수 있는 위험 요소가 있다.

물론 김수경이 그걸 모르고 용병들을 진격시킨 것은 아니었다.

방어에 특화된 능력을 가진 용병 다수를 전면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버틸 자신이 있는 것이다.

다만 강후는 처음부터 전종두가 목적이었기에 소모적인 교전에 힘을 싣고 싶진 않았다.

개인의 책임과 판단 하의 단독 행동은 김수경도 허락한 부분이므로 더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쪽문으로 진입하면 훨씬 수월할 것 같았던 예상과 달리.

콰앙!

쪽문이 통째로 날아가는 광경이 펼쳐지는 순간, 강후는 계획이 살짝 꼬였음을 직감했다.

"베주미예가 여기서 나오나."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베주미예.

러시아어로 '광기'를 뜻하는 단어다. 즉, 러시아에서 넘어온 녀석이라는 뜻이다.

거인형 헌터 병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헌터는 맞는데 사고하는 능력은 없고, 오로지 기계적으로 살인만 하는 존재다.

이클립스에서 다루는 추적자보다 훨씬 더 강력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헌터 육성 단계부터 꾸준히 약물을 주입해서 덩치와 키를 키우는 데다가.

꽤 효율이 좋은 아이템으로 무장을 해 주기 때문이다. 추적자처럼 쓰고 버리는 개념이 아니다.

베주미예의 특징은 한 명의 적을 타깃으로 삼으면, 죽을 때까지 공격한다는 점이다.

스스로의 숨통이 끊어지지 않는 한, 타깃을 끝까지 노린다.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베주미예의 '주인'만이 명령으로 방향성을 바꿀 수 있다.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이 베주미예의 주인은 볼 것도 없이 전종두일 듯했다.

"생긴 것 봐라."

강후는 자세를 낮추고.

혈루를 힘껏 움켜쥐었다.

프랑켄슈타인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외모를 가진 베주미예는 마주 보는 것도 불쾌했다.

"어쨌든 쉽지 않겠군."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베주미예는 자신과 비교하면 양극단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다.

베주미예는 거인에 돌격형이고, 무력형이다. 몸으로 모든 것을 때우는 타입에 가깝다.

반면에 강후는 치고빠지는 기동형이고 민첩, 회피형이면서 스타일리시한 것이 특징.

찍어누르려는 자와 그것을 피하며 교묘하게 역습을 가하는 자의 싸움인 것이다.

강후가 슬쩍 뒤를 보자, 베주미예와 마주친 것을 확인한 다른 용병이 지원을 오려는 듯 움직였다.

하지만 눈치 빠른 김수경이 강후와 마주친 눈빛에 담긴 속내를 읽고는 용병을 제지했다.

"저쪽은 선규 씨에게 맡겨. 네가 가면 오히려 본인이 짜놓은 판이 어그러질 거다."

'센스 있네.'

말을 하진 못했지만, 강후가 김수경을 향해 검지와 엄지를 말아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일대일의 상황이다.

베주미예를 뚫어야 그다음이 있다.

강후는 정문이 아닌 쪽문 쪽에 베주미예를 배치해 둔 이유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아마 접근해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있거나, 숨기고 싶은 장소가 있는 거겠지.

이제 러시아산 거대 인간 장벽과 마주칠 시간이다.

한 대만 맞아도 골로 갈 수 있는 만큼 신중해야 한다. 반드시.

85화 베주미예 (2)

* * *

'이런 무식한 놈이 성좌 계약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베주미예와 탐색전을 치르는 동안, 강후는 베주미예가 성좌 없이 이만한 화력을 내는 것이 대단하다 여겼다.

성좌가 베주미예와 계약하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애초에 베주미예가 어떤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성이라는 것이 거세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성좌가 미쳤다고 전장에 죽으라고 내던지는 인간 병기와 계약할 리 없기 때문이다.

베주미예는 확실히 '탱킹'을 목적으로 설계된 병기라서 그런지 아이템 구성이 좋았다.

어느 정도냐면 강후가 작정하고 날린 전광비도의 일격을 맞고도 멀쩡했다.

피가 철철 흘러내리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허벅지에 박힌 단검도 베주미예의 기동력에 타격을 입히진 못했다. 고통을 못 느끼는 듯했다.

'어쨌든 이런 녀석도 처치할 수 있어야 성좌들에게 어필하는 바도 크겠지.'

성좌 강탈이나 아이템 탈취 같은 물리적인 보상만 떠올리고 있지는 않았다.

레벨 100이 코앞이다.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성좌들에게 꾸준히 어필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주시'까지 하고 있는 대재앙 – 어둠에게는 더 많은 모습을 어필할 필요가 있다.

바꿔 생각하면 베주미예는 좋은 샌드백이었다. 잘 패면 아주 멋진 그림이 될 것이다.

"쿠아아아!"

"그래. 감질 맛나지?"

베주미예가 돌격해 왔다.

이유가 있었다.

강후가 탐색전을 핑계 삼아, 계속 치고빠지기를 반복하며 베주미예에게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다.

원하는 그림이었다.

암살자 입장에서는 상대에게 접근하는 것이 가장 까다로운 과정이다.

그런데 먼저 찾아와주는 서비스를 해 준다면야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다.

[환각]

일부러 거리를 좁히도록 기다리고 있던 강후가 베주미예에게 환각을 걸었다.

저런 인간 병기의 가장 큰 약점은 정신 공격에 약하다는 것이다.

환각도 정신을 왜곡시켜 엉뚱한 것을 보게 하는 만큼, 당연히 정신계 공격의 범주에 들어간다.

"와아악!"

역시 보기 좋게 환각에 걸린 베주미예가 환각으로 만들어진 강후를 보고는 허공에 주먹을 날렸다.

강후가 있던 자리보다 두 걸음 정도 앞의 허공을 때리는 무의미한 공격이었다.

물론 베주미예에게 무의미한 것이고, 강후에게는 의미가 컸다.

'아까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는데, 이젠 확실해졌네.'

강후는 탐색전에서 베주미예가 주먹을 뻗는 끝 동작에서 미세하게 흔들림이 있는 것을 느꼈었다.

마치 불편한 부위가 있는 것처럼 끝에 가서 어깨를 살짝 비트는 행동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

베주미예의 주먹이 허공을 가를 무렵, 강후가 정조준 스킬을 이용해 시야를 확대했다.

그러자 선명하게 드러난 겨드랑이 안쪽으로 고름 같은 것이 잔뜩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어두운 주변 환경과 맞물려 잘 보이지 않던 것이 확대되어 드러난 상황이다.

인간 병기에게 육체적인 문제가 생기는 것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었다.

아무 곳에서나 잠을 재우고, 위생적이지 못한 환경에 자주 노출되다 보니 저런 식으로 몸 여기저기에 문제가 생기는 빈도가 잦았다.

게다가 자기 스스로 아프고 힘든 부분을 호소할 줄 모르기에 더욱 문제가 많이 생겼다.

애완동물의 경우.

사랑을 듬뿍 주는 주인을 만나면 어딘가 아파도 방치될 일이 없다.

하지만 전투를 위한 살인 병기로 이용되는 존재에게 과연 누가 사랑을 듬뿍 주겠는가?

결국 베주미예의 겨드랑이는 보이지 않는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이 없었다.

강후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전광비도]

앞서 허벅지에 날린 전광비도는 별 타격을 주지 못하고 끝났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날렸다.

물론 이번의 타깃 지점은 베주미예의 겨드랑이였다.

후우우웅! 푸슈슉!

"크아아아!"

"거긴 처음이지?"

투척용 단검의 날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숙하게 박혔다.

연한 속살을 파고들었으니, 아마 어깨 근육이 있는 지점까지 손상을 입혔을 터다.

그간 계속 곪다가 아물기를 반복했던 부위라 그런지, 강후가 생각한 것보다 출혈이 더 심했다.

그뿐만 아니라, 심하게 고통스러워하면서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베주미예 스스로 전략적인 불리함을 감추고자, 강후와 거리를 두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일단 거리를 둬야 정비를 할 수 있고, 다시 힘 있게 반격의 고삐를 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베주미예의 의도를 바로 읽은 강후는 여유를 주지 않았다.

[납치]

멀어져도 언제든 강제로 끌어올 수 있는 납치 스킬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최고의 선택지였다.

베주미예의 육중한 거구를 생각하면 접근전을 꺼리게 되지만.

지금은 달랐다.

녀석이 거리를 벌리기를 원하는데 그것을 막는 것이다. 전략적으로 선공권을 가져간다는 얘기다.

"크와악!"

납치에 이렇다 할 반항조차 하지 못한 베주미예가 포물선을 그리며 강후에게 쭉 끌려왔다.

무거운 몸이라고 해도, 납치 스킬에 끌려오는 속도는 가벼운 몸과 같았다.

물론 납치로 끌려온 베주미예를 정직하게 정면에서 노리는 멍청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베주미예가 강후의 자리에 도착할 무렵, 이미 강후는 횡 이동으로 녀석의 뒤에 위치하고 있었다.

솨아악!

"끄어어!"

강후가 무심하게 그어낸 부위는 목 뒤쪽의 움푹 파인, 부드러운 곳이었다.

우리가 뒷골이 쑤시다고 할 때의, 그 부위보다 조금 아래에 위치한 곳이다.

같은 힘으로 타격해도 가장 깊은 상처와 출혈을 유도할 수 있는 좋은 부위였다.

하지만 베주미예는 인간 병기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그 와중에도 몸을 회전시켜 강후를 노렸다.

반응이 반 박자씩 늦고, 고통에 잠식되었다고 한들 대응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인간 병기의 무서운 점이다. 고통에 신음하는 중에도 차분하게 다음을 노린다.

여기서 자신의 공격이 성공했다는 사실에 기뻐하거나, 자만에 빠진 헌터가 당하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베주미예가 죽인 헌터의 수가 제법 됐다. 이 녀석은 앞서 학습된 경험이 있었다.

다만 녀석이 놓친 것은.

강후는 절대 어떤 상황에도 방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려는 상대의 노림수를 또 한 번 이용해서 역공을 노렸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베주미예가 신음을 토해내는 와중에 더 격렬하게 몸을 비틀어 후방에 있는 강후를 노린 순간!

"여기다."

강후는 또다시 베주미예의 뒤로 이동해 있었다. 녀석의 반격을 읽고, 횡 이동을 또 한 것이다.

그 바람에 베주미예의 노림수가 담긴 힘 있는 주먹 한 방이 다시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노림수는 한 번 간파당했을 때보다 두 번 간파당했을 때의 타격이 훨씬 크다.

두 번은 안 당하지, 하는 생각으로 보통 승부수를 던지기 때문이다. 지금의 베주미예도 그랬다.

강후가 이미 자신의 수를 읽고, 먼저 대응을 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결국.

푸욱! 푸욱! 푸욱! 푸욱!

"끄으으으...!"

비싸게 대가를 치렀다.

단지 혈루에 찔린 부분을 또 찔렸단 것만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베주미예가 감당해야 할 폭풍의 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했다.

문제는 방금의 공방전으로 순식간에 대폭 누적된 강후의 공격 대미지였다.

베주미예가 계산 없이 철철 쏟아낸 핏값을 정산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강후의 스킬에 대해 알지 못하는 베주미예는 다가올 폭풍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혈화]

퍼퍼퍼펑! 퍼펑! 펑!

피를 누가 흘렸는가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고통을 선사하는 최악의 지옥이 찾아왔다.

베주미예는 그제야 느꼈다.

앞서 자신이 몸뚱이로 무식하게 받아낸 공격의 상처가 거대한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목 뒤와 겨드랑이, 그리고 허벅지에서 피를 매개로 한 폭발이 연달아 터졌다.

누가 봐도 강후가 베주미예에게 카운터 펀치를 세게 먹히는 통쾌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지켜보던 김수경조차 강후의 일방적인 승리라고 생각하며 감탄하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

촤아악!

일순간에 진흙과 흙탕물이 뒤로 비산하더니, 비틀거리던 베주미예가 강후에게 돌진했다.

그 와중에 강후에게 반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살인 병기다운 집념이었다.

"아."

김수경이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히려 강후가 카운터 펀치를 맞을 판이었다.

강후는 승리를 자축하듯이 베주미예를 등지고 서서는 피가 잔뜩 묻은 혈루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강후의 등 뒤에서 마치 야차(夜叉)처럼 피를 뒤집어쓴 베주미예가 나타났다.

베주미예의 거대한 양손은 이내 강후의 머리를 붙잡으며 걸레 짜듯 비틀어버릴 준비를 마쳤다.

강후의 죽음이 코앞이었다.

제아무리 솜씨 좋은 헌터여도, 목이 비틀어지고 부러진 상태에서 살아날 수는 없다. 절대로.

한데 바로 그때.

프스슷...!

최후의 일격을 확신하고 강후의 머리를 붙잡고 비틀던 베주미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강후의 머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주미예의 손이 닿은 것은 강후를 빼닮은 '환영'이었다.

"오!"

김수경이 탄성을 질렀다.

강한 빗줄기와 더불어 베주미예의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겨 강후의 움직임을 잠시 놓친 사이.

이미 강후는 환영술을 이용해서 가짜를 만들어 뒀던 것이다.

그리고 환영으로 보란 듯이 승리를 자축하면서 지켜보던 모두를 기만했다.

눈썰미 좋기로 소문난 김수경도 깜빡 속았을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베주미예에게 한 방을 먹이면서 바로 강후가 환영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강후는 두 번의 역공이 성공해도, 베주미예가 또 반격을 할 것을 간파한 것이다.

"...기가 막히군."

김수경이 혀를 내둘렀다.

수준 높은 수 싸움을 눈앞에서 직접 관전한 터라, 가슴이 떨리는 구석도 있었다.

게다가 수 싸움의 승리자가 아군인 강후라는 사실이 더욱 그를 기쁘게 만들었다.

한편.

또 한 번의 공격 실패에 방황하던 베주미예의 시야가 그 순간부터 완전히 검게 바뀌었다.

이유인즉.

푸욱! 푸우욱!

베주미예의 후방에서 어깨 위로 올라탄 강후가 양손에 든 단검으로 안구를 휘저었기 때문이었다.

"크아아아!"

아무리 방어에 특화되었다고 해도, 질 좋은 아이템을 착용했다고 해도 눈알을 지킬 수는 없다.

베주미예는 뒤에서 달려든 강후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고, 두 눈을 허무하게 잃었다.

'베주미예가 무식하게 대응하지 않아서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노림수가 제대로 먹혔군.'

강후가 의미 없이 허공에 주먹질하는 베주미예를 보며, 전투를 총평했다.

적당히 머리를 쓸 줄 알아서 오히려 독이 된 케이스랄까.

우직하게 보이는 대로만 움직였더라면 강후의 입장에서도 계산이 복잡해졌을 것이다.

이제 마무리 단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움직이면서 베주미예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릴 타이밍을 찾았다.

시각을 잃은 베주미예는 강후가 어디에 있는지 특정하지도 못하고 계속 허공을 휘저었다.

이는 인간 병기의 한계점이기도 하다. 결국 인간의 감각을 활용하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맹점.

휘리리릭! 척!

혈루를 손가락 사이로 움직이며 호흡을 다듬던 강후가 이내 자세를 낮추고 역수로 움켜쥐었다.

베주미예를 죽여야 그다음이 있다.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에는 지금부터가 전투의 시작이다.

"간다."

짧은 강후의 한마디.

빗줄기와 더불어 어둠이 짙게 깔린 폐공장의 으슥한 공간에서.

촤아아악!

선혈이 하늘 높이 솟구치고.

쿠우웅!

거구의 몸이 통나무처럼 빳빳하게 뒤로 나자빠졌다.

동시에 강후는 검은 그림자가 나자빠진 거구의 목과 가슴 언저리를 차분하게 찔렀다.

확실한 죽음으로의 인도였다.

86화 전종두 (1)

* * *

베주미예와 멋들어지게 싸움을 벌인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따뜻한 물결'의 성좌 전원이 당신에게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그들이 십시일반 모은 성력을 소모하여 당신에게 상당한 버프를 후원합니다.]

[10초당, 체력 1% 회복.]

'오호.'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온건한 성좌들의 모임인 따뜻한 물결이었다.

지난 성좌 시험 때도 제법 많은 후원을 해 줬는데, 이번에는 다른 형태의 버프를 후원했다.

10초에 체력 1% 회복.

결코 적은 양은 아니다.

회복 수단이 아쉬울 경우엔 이것도 아주 큰 도움이 된다.

게다가 자는 동안에도 계속 적용이 되기에 수면과 연계하면 특히 효과가 좋았다.

자고 일어나면 대부분의 체력이 회복된다고 말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셈이다.

[대재앙 – 어둠이 베주미예에게 선사한 완벽한 죽음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당신의 잠재력이 훨씬 더 높은 것 같다고 평가합니다.]

'아무렴. 당연히 그래야지.'

대재앙 – 어둠의 칭찬도 더해지니,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황야의 전략가도 비슷한 칭찬으로 강후의 기분을 더 좋게 했다.

다만 평소 같았으면 참지 못하고 한마디 거들었을 차원 강탈자가 웬일인지 조용했다.

질투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걸까? 조용하니 괜시리 다른 생각이 들었다.

"쪽문 쪽으로 빠져나온 베주미예를 잘랐다! 좀 더 강하게 밀어붙여! 정문도 해 볼 만하다!"

한편, 강후가 멋지게 베주미예를 제압한 것을 확인한 김수경이 좀 더 공격적인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일부 전력을 강후가 돌파한 쪽문으로 돌릴까 하다가, 이내 생각을 접었다.

정면에서의 교전이 생각 이상으로 치열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쪽문 방어가 거의 안 되고 있음을 뜻했다. 적 전력이 정문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니까.

이 상황에서 핵심 전력이 쪽문 쪽으로 빠지면, 괜히 그쪽이 포커싱될 가능성이 컸다.

김수경은 베주미예를 일대일로 제압한 강후의 실력을 믿고, 쪽문 루트를 맡길 생각이었다.

안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강후는 능숙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그때.

"트랩이다!"

김수경 용병단의 단원 중 하나가 깊숙하게 안으로 접근하려다가 다급히 소리쳤다.

쪽문으로 들어가려던 강후도 그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트랩이 있다는 것은 곧 폭발이 일어날 것을 의미한다. 과연 희생을 막을 수 있을까?

지이잉!

그 순간, 가장 최전방으로 이동한 김수경이 양손을 공중에 뻗으며 스킬을 전개했다.

강후는 쪽문에서 흘러나올 후폭풍을 버텨내기 위해, 곧바로 보호 방벽을 전개했다.

그리고.

쿠콰콰콰쾅!

트랩의 폭발이 일어났다.

화력이 상당했다.

이 정도 화력이라면 근거리에서 노출된 헌터는 부상을 면할 수 없을 상황.

투웅! 투웅! 터엉!

하지만 김수경이 펼친 거대하고도 길쭉한 방어벽은 완벽하게 폭발을 받아냈다.

희생자? 없었다.

심지어 부상을 입은 용병단원도 없었다. 깔끔하게 트랩의 폭발을 막아낸 것이다.

'저건 탐나네.'

강후의 눈빛이 빛났다.

김수경도 괜히 네임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어에 있어서만큼은 특화된 헌터가 맞다.

아마 김수경과 일대일을 하면.

김수경이 자신을 죽이지는 못해도, 방어 능력은 확실해서 그가 죽을 일은 영원히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앙! 타앙!

한편 그간 들리지 않던 총성이 폐공장 안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총성인 것을 보니, 마탄 저격수가 최소 두 명은 있는 모양이었다.

"저격에 노출 안 되게 조심해! 그리고...."

김수경이 부하들에게 신속히 명령을 내리며, 강후에게 추가 요청을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강후는 쪽문 안으로 진입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빠르군.'

알아서 상황을 판단하고.

리더의 시야로 상황을 공감하고 자신이 할 일을 빠르게 찾는 듯한 느낌.

그런 느낌이 강후에게 물씬 들었다. 굳이 뭔가를 부탁하지 않아도, 강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잠시 후 정문 쪽에서 내부를 보고 있기에 볼 수 있는 몇 개의 구역이 김수경의 눈에 들어왔다.

폐공장을 지키고 있는 오쇼 용병단에게는 사각지대인 곳이다.

강후는 어느새 2층으로 올라가서는 빛이 잘 닿지 않는 경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노리고 있는 타깃은 2층에 자리를 잡은 마탄 저격수였다.

마탄 저격수의 장점은 일방적으로 고점을 선점하고 상대를 노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점은 저격에 집중하기 위해 자신의 위치에 대한 집중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애초에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스스로 노출될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확신이 있으니, 자신만의 저격 포인트로 삼는 것이다. 그것이 맹점이다.

'정말 빠르군.'

김수경은 방금 2층의 초입에 막 들어선 듯했던 강후의 위치가 순식간에 바뀐 것을 보았다.

도약, 가속류 스킬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스킬을 가진 것 자체야 이상할 것이 없지만, 강후의 레벨을 생각하면 대단히 이상한 것이 맞았다.

아무리 냉정하게 생각해도, 강후의 스킬 구성과 화력은 레벨과 괴리가 너무 심했다.

사실 너무라는 단어로도 표현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 차라리 말이 안 된다는 표현이 맞겠지.

그때.

푸욱. 푸욱.

딱 두 번의 공격이 있었다.

그리고 목 뒤로 붉은 피를 철철 쏟아내며, 저격수 둘이 덧없이 2층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깔끔한 제압이었다.

강후의 존재를 아예 인지하지도 못한 저격수 둘은 손도 못 쓰고 목숨을 잃었다.

강후가 무영 스킬에 기교의 장막까지 더해가면서 기척과 모습을 철저하게 숨겼던 상황.

저격에 집중하고 있었던 저격수의 맹점까지 맞물려, 둘은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대상을 죽이고, '고독한 명상가'와의 계약을 탈취하였습니다.]

[대상을 죽이고, '게으른 천재'와의 계약을 탈취하였습니다.]

'수입이 짭짤하네.'

강후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고독한 명상가는 정신 집중력을 10% 증가시키는 버프를 제공하는 성좌였다.

정신 집중력의 증가는 곧 스킬 캐스팅 속도의 향상을 뜻한다.

극적인 체감을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분명히 필요한 절대 시간을 줄여준다는 장점은 있었다.

게으른 천재는 마나의 회복력을 2배 증가시키는 버프를 제공하는 성좌였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과의 시너지를 생각하면, 달리는 말에 날개를 단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이런 이유로 강후가 폐공장 안으로 진입하자마자 두 저격수를 노렸던 것이기도 했다.

어차피 적이고 죽여야 하는 존재라면, 쓸만한 성좌를 강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휘리릭! 푹!

시간차를 두고 전광비도로 날린 연습용 단검이 1층에 있던 오쇼 용병단원의 뒤통수를 뚫었다.

동시에 1층으로 떨어진 저격수의 시신이 눈앞에 보이자, 오쇼 용병단원들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저격수가 있던 위가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불안감이 순식간에 증폭된 탓인지 폐공장 내의 공기가 갑자기 확 바뀌었다.

"밀어붙여!"

김수경이 그 흐름을 귀신같이 읽고는 좀 더 공격적으로 용병단에 주문했다.

게다가 뒤늦게 합류한 2팀이 후문 루트를 뚫으면서, 기세가 확실히 뒤집혔다.

'전종두 이놈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다만 강후는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감에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전종두의 행방이 궁금했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바뀌긴 했어도, 여전히 오쇼 용병단은 호각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종두가 냅다 도망친 것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김수경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것이다.

전종두의 도주를 예상하고 폐공장 주변의 모든 루트에 보초를 깔아뒀기 때문이다.

전종두는 강후 같은 암살자 계열이 아니기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도망친 게 아니라면.

호각세라고 하더라도 언제 전황이 바뀔지 모르는 이곳에서 전종두의 등장이 늦는 것이 이상하다.

'이건 이유가 하나밖에 없는데.'

짚이는 바가 있었다.

급박한 상황에도 전장으로 나오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

그것은 전투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반드시 시간이 필요할 경우다.

원작에서 나온 수많은 설정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무협식 표현을 빌리자면 흡성대법 같은?

전종두가 헌터나 몬스터의 육신으로부터 힘을 얻는 구조의 광전사라면 예측이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지금쯤 예상하지 못한 김수경 용병단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을 터.

폐공장 안의 어딘가에 전종두가 몸을 숨기고 있을 만한 공간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집중해서 살폈다.

빨리 찾을수록 좋다.

광전사 계열은 대외적으로 알려진 레벨이나 전투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위력을 낼 때가 많다.

그것이 광전사 직업군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종합적으로 보면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변수를 줄일 필요가 있다.

'보인다.'

그때, 2층 구석 쪽에 잡동사니와 집기가 잔뜩 쌓여 있는 공간 사이로 옅은 불빛이 보였다.

언뜻 보면 주변 조명에 뒤섞여, 다른 빛이 있는지 쉽게 감지하기 힘든 위치였다.

하지만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에서 차분하게 살피니, 약간의 틈이 보였다.

쿠콰콰쾅! 콰콰쾅!

"크윽."

계속 트랩이 발동되고 있다.

오쇼 용병단원들이 구축한 방어선을 뒤로 물리면서, 트랩이 김수경 용병단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어가는 흐름이다. 전종두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 분명하다.

"...."

강후가 다시 기교의 장막을 활용하며,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은신 상태에 들어갔다.

빠르게 틈 앞까지 접근하니, 마치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이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불빛은 은은하게 있었지만.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미세한 온기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럴 줄 알았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결계가 촘촘하게 구축되어 있었다.

어떤 반응 형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침입자를 대비한 공격형 결계일 가능성이 컸다.

마나를 응축시켜 폭발을 일으키거나, 혹은 고열을 발생시켜 화상을 유도하는 식이다.

유지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도 이 공간에 구축해 둔 것을 보면 중요한 곳임은 확실했다.

꾸욱.

강후가 혈루를 조금 더 짧게 움켜쥐었다.

전투 상황 발생 시, 빠르게 전종두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경로를 최대한 짧게 잡아야 한다.

'광전사 계열과 제대로 싸워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군.'

예전에 조영재와 싸운 것이 광전사 헌터와의 첫 전투이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치긴 애매했다.

녀석은 전종두와 비교하면 새 발의 피, 아니 발톱의 때만도 못한 실력을 가진 헌터였기 때문이다.

반면 전종두는 광전사 계열이고 동시에 잡기 능력에 특화된 존재.

앞서 싸운 베주미예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덩치와 말도 안 되게 두꺼운 팔뚝을 가진 '괴물'이었다.

그래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전종두에게는 일단 붙잡히면 다음이 없다.

정해진 결말이 있기는 하다.

허리든 목이든 어디든 폴더폰처럼 접혀서, 다시 펴지지 않는 채로 맞이하는 죽음 말이다.

한마디로 이승 하직이라는 뜻이다.

87화 전종두 (2)

침입자를 감지하기 위한 결계의 유일한 약점은 그물처럼 촘촘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 경우, 결계에 구축된 각각의 선이 영향을 주면서 접촉 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 하나가 옆으로 들어갈 만한 틈과 면적 정도가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그렇게 구축돼도 큰 문제가 없긴 했다.

결계에 연계된 마나 흐름을 정확히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탐색할 수 있는 장비가 있기는 하나, 부피가 크고 사용이 까다로워 이런 전투에는 맞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나는 복 받았지.'

다만 선천성 마나 과민증은 복잡한 절차나 과정들을 '감각'으로 극복할 수 있게 해 줬다.

남들에게는 없는 특혜였다.

반대급부로 과도한 마나 사용에 대한 대가를 몸으로 톡톡히 치르게 만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결계나 트랩 같은 함정을 미리 감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점은 큰 강점이었다.

스윽.

강후가 간단히 결계의 틈 사이로 몸을 밀어 넣어 접촉 없이 사이를 지나갔다.

호리호리한 몸뚱이에 딱 달라붙게 입은 옷이 시너지를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찾는다, 전종두.'

눈에 불을 켜고, 어딘가에 숨어 있을 전종두를 찾기 시작했다.

그놈에게 거액의 의뢰 보상금이 걸려 있다. 포기할 수 없다.

주머니 속에 고이 모셔져 있는 매드 솔라키움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오랜만에 녀석을 씹을 때가 된 듯하다.

* * *

같은 시각, 전종두는 이를 박박 갈고 있었다.

"빌어먹을.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원만하게 흘러갈 그림을.... X미."

분함을 참을 수 없었다.

김수경 용병단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부터 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대담하게, 그리고 갑자기 공장을 공격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안전 불감증이기도 할 것이다.

적대 세력이나 다름없는 김수경 용병단이 움직이더라도 오늘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했으니.

팔딱. 팔딱.

한편 전종두의 발밑에 있는 헌터의 '시체'가 일정한 박자를 두고 꿈틀대고 있었다.

이유인즉, 전종두에게 '생기'를 흡수당하고 있어서였다.

전종두는 광전사이면서, 동시에 생명체의 생기를 빨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성좌의 능력이다.

이 능력은 체력 회복으로도 쓰이고, 체력이 최대치일 때는 전투력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이를테면 근력 증가, 스킬 화력 증가를 도모하게 되는 식이다.

지금의 경우 체력 회복은 진즉에 끝났고, 전투력 상승을 준비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아직 원하는 만큼의 향상이 이뤄지지 않았다. 최대치의 40% 수준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더 필요한 상황인데, 돌아가는 흐름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

전종두가 CCTV 속의 화면들을 다시 살폈다.

1층과 2층이 아닌, 지하 1층과 2층에 가둬놓은 헌터가 제법 있었다.

내일 러시아에서 오는 화물선에 실어 보낼 헌터들이었다. 판매 상품인 것이다.

사전 판매 예약가만 도합 500억 원에 육박할 정도의 나름 양질의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이래서는 거래 성사는커녕, 보관 창고가 통째로 날아갈 판이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그 정도가 아니라 오쇼 용병단의 운명이 통째로 날아가기 직전이다.

"X발!"

결국 성미 급한 전종두가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퍼억!

이미 죽은 시체에 발길질로 괜한 화풀이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다운 반응이었다.

"더 기다리다가는 나 빼고는 다 죽겠군."

전종두는 마탄 저격수들이 전투 초반에 일찍 제거된 것이 가장 분했다.

나름 위치도 잘 잡고 있던 녀석인데 웬 헌터 하나에게 소리소문없이 암살을 당해 버렸다.

내부 CCTV로는 얼굴을 정확하게 볼 수가 없어 답답한 상황.

하지만 어떤 녀석인지는 몰라도 잡으면 허리부터 접어 끝장을 내주고 싶었다.

꾸드드득. 꾸드드득.

생기를 제법 머금은 팔뚝이 타이어보다도 더 두꺼운 굵기로 팽창했다.

전장에 나서기 전에 보통 주섬주섬 자신의 무기나 공격용 아이템을 장착하는 헌터와 달리.

전종두는 맨손을 까딱이고 마디마디를 풀어주고 있었다. 그는 몸이 무기인 사람이기에.

바로 그때.

"흠."

전종두는 아주 작은, 미세한 먼지지만 뭔가가 안으로 휙 흘러들어오는 것을 확인했다.

'비밀 구역'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전종두 말고는 절대 들어올 수 없다.

정확히는 들어올 권한이 없다.

게다가 침입자 감지를 위한 결계가 있어, 소리소문없이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불청객이 있는 것이다.

길목에 설치한 CCTV에도 잡힌 게 없었는데, 누가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걸까.

"네가 그 쥐새끼냐."

전종두는 불청객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이 녀석이 마탄 저격수를 죽인 놈이다. 현장에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던 놈 말이다.

쪽문에 의도적으로 배치한 베주미예의 소식도 없는 걸 보면, 베주미예 역시 제거한 게 분명하다.

가까이 있는 게 틀림없는데, 상대는 말이 없다.

전종두가 가장 싫어하는 직업군이 바로 암살자 부류다. 음침함과 은밀함을 즐기는 것을 혐오했다.

그때.

휘리릭!

어둠 속에서 강후의 모습이 드러나며, 동시에 투척용 단검 하나가 날아들었다.

전광비도를 곁들여 날린 강력한 단검 투척이었다.

와작!

이어서 강후가 매드 솔라키움을 씹었다. 전종두와의 전투를 '부스터' 없이 할 수는 없을 듯하기에.

푸욱!

이윽고 날아간 단검이 전종두의 굵은 팔뚝에 꽂혔다.

애초에 피하는 선택지는 생각에도 없었던 듯이 전종두의 대응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좀 아프군."

전종두가 팔뚝 안까지 깊숙하게 박힌 단검을 쓱 내려보고는 그것을 손으로 직접 잡아 빼냈다.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전종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팔뚝이 그렇게 두꺼워서야, 팔뚝 뒤에 연고라도 제대로 바를 수 있겠어?"

강후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두껍고 육중한 전종두의 몸을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전종두는 강후 몸의 두 배는 될 듯한 두께와 크기를 갖고 있었다.

질문이 대꾸할 가치도 없다 여겼는지, 전종두는 대답 대신 이야기의 방향을 돌렸다.

"어디서 온 놈이냐? 김수경 용병단 소속이냐?"

"알고 싶으면, 직접 쓰러뜨리고 나서 물어봐."

강후가 손끝을 까딱이며 전종두를 도발했다. 그러자 전종두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쓰러뜨리긴 무슨. 접을 건데."

지금까지 들어봤던 멘트 중에서 가장 소름이 끼치는 멘트였다.

상황이 상상이 돼서일까?

꿀꺽.

강후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 * *

전투에 돌입하기에 앞서 전종두에 대한 성좌 정보를 스캔한 이후로는 생각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전종두를 생포할 수 있도록 판을 크게 짜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래야 의뢰 보상에서 300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여기로 들어온 것을 김수경이 본 만큼, 곧 지원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어쨌든 생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이 맞으면, 300억에 준하는 보상은 확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의뢰의 주체가 김수경인 만큼, 본인 스스로에게 보상금을 주지는 않을 테고 말이다.

들어오기 전까지는 분명 생포라는 키워드를 두고 접근한 것이 맞았다.

하지만.

전종두를 직접 보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전종두와 계약하고 있는 성좌는 총 다섯.

[무정한 탐식가]

[전장의 개]

[인내의 구도자]

[바람의 인도자]

[야바위의 달인]

이 중에서 가장 관심이 가게 만든 성좌는 바로 무정한 탐식가였다.

[무정한 탐식가]

[중립 성향의 성좌입니다.]

[몬스터 또는 헌터로부터 생기를 흡수하여 체력을 회복하거나 전투력을 높일 수 있게 합니다.]

예상이 맞았다.

체력 회복은 혜택 중에 일부고, 전투력을 향상하는 효과까지 덩달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다른 네 성좌의 효과도 강후에게는 시너지가 좋은 것들이었다.

이런 그림으로는 전종두를 생포하고 300억 보상을 얻는 것보다.

차라리 죽이고 100억을 얻는 그림이 나았다.

그를 죽이면 강탈할 수 있는 성좌 계약만 봐도 200억 이상의 가치는 충분히 하기 때문이다.

야바위의 달인 같은 성좌는 의외성이 높지만 대박 날 확률도 있는 복권 같은 특전도 있었다.

'무정한 탐식가는 솔로 플레이를 지향하는 내 방향성에 가장 잘 맞는 성좌이기도 하고.'

무정한 탐식가까지 얻을 수 있게 되면, 더 이상 강후에게 힐러 같은 존재는 필요가 없어진다.

체력 물약? 필요 없다.

그저 잠깐의 시간만 주어지면, 언제 어디서든 회복을 도모할 수 있다. 과정이 단순해진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저런 성좌 능력이라면 전종두의 손에 붙잡히는 순간, 내용물을 다 빨린 팩 음료 신세가 되겠군.'

전종두와의 전투에서 극도로 경계해야 할 위치가 떠올랐다는 것이었다.

몸의 어딘가를 붙잡히고, 그 상태로 흡수당해서 바람 빠진 풍선처럼 되어버리는 광경!

그것이 영화나 소설 속 장면이 아니라, 현실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전종두는 상대를 어떻게든 잡아서 체술로 조져버리는 육체파이기 때문에.

한 번 붙잡히면 거기서 삶이 끝난다고 봐도 무방했다. 장담할 수 있었다. 바로 죽는다.

극한의 아웃복서 스타일로 상대해야 하는 적이었다.

'내가 전종두도 뛰어넘지 못하면, 강동현 선에서 정리될 거야. 아니, 거기까지도 못 간다.'

강후는 전종두와의 전투를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어야 다음이 있다.

지금 전종두와의 전투를 포기하고 밖으로 나갈 수도 있다. 적만큼이나 아군도 많으니까.

하지만 앞으로도 언제나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지진 않을 것이다. 적의 수준도 그렇고.

그렇다면 어렵고 힘들어 보이는 그림이라도 이겨내는 것이 꼭 필요할 듯했다.

30분.

매드 솔라키움의 약효가 떨어지기 전에 전투를 끝내야 한다. 다음은 없다.

"뒈져, 새끼야...!"

전종두가 성난 물소처럼 강후를 향해 돌진했다.

애초에 기동 반경이 그리 큰 공간은 아니었다. 집으로 따지면 34평형 정도 되는 면적이다.

덜커덕. 덜컹덜컹.

게다가 전종두가 돌진하기 전에 책상 위에 있던 버튼을 누른 터라 퇴로도 자연스럽게 막혔다.

열린 형태의 공간인 줄 알았는데, 개폐 장치가 있었던 모양. 강후가 놓친 부분이었다.

강제적으로 일대일 구도가 만들어졌다. 퇴로가 막혔으니, 이제는 임전무퇴일 뿐이다.

[그림자 걸음]

파앗!

접촉을 피하기 위해, 강후가 그림자 걸음으로 공간 이동의 선택지를 다양화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여차하면.

죽기 직전까지 가게 되면, 순간 이동을 활용해 현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있다고.

심리적 안정감을 줄 수 있는 보험을 떠올린 것이다.

믿는 구석이 생기면, 그만큼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고, 과감성이 더해지게 되니까.

세컨드 플랜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한 번 더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패기가 필요할 듯했다.

성난 황소를 잡으려면, 그 소보다 더 날뛰지 않고는 끝을 볼 수 없으니까.

그렇게 사냥이 시작됐다.

88화 전종두 (3)

* * *

"얄팍한 개수작 부리지 마, 이 새끼야!"

폭주 기관차처럼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른 전종두가 강후의 그림자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하나고 그림자는 여럿이기에 강후의 입장에서 피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전종두에게서 가장 먼 그림자를 선택해 이동을 마쳤다. 늘 그랬듯 완벽한 기동이었다.

하지만.

후웅!

그 순간에 강후는 선명하게 굉음을 들을 수 있었다. 묵직한 무언가가 날아갈 때 들리는 소리다.

"망할."

상황을 살피니, 반대편에 있던 전종두가 방금보다 더 가속된 상태로 돌진하고 있었다.

상상한 것 이상으로 너무 빨라서 강후도 재차 스킬을 쓸 여지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크하하하!"

공포 영화처럼 가까워지며 큼지막해지는 전종두의 얼굴이 시야에 꽉 차게 들어왔다.

쿠웅!

그리고 충돌이 일어났다.

강후가 보호 결계를 펼치며 전종두의 돌격을 막았지만, 피해 없이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크윽!"

몸이 붕 떴다.

동시에 충돌 시작점인 팔꿈치에서부터 시작된 고통의 파도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정신 나간 새끼다.'

강후의 기준으로 '극찬'에 가까운 욕이 나왔다. 전종두. 녀석은 명성대로 힘이 장사였다.

공중에 뜬 몸이 벽으로 날아가는 동안, 전종두가 양팔을 앞으로 뻗으며 자세를 취했다.

잡기 자세다.

튕겨 나오거나, 혹은 벽을 타고 떨어질 강후를 붙잡고 그 자리에서 끝을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강후의 정신이 말짱하고, 타격을 입긴 했지만 부상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기교의 장막]

[도약]

그래서 기교의 장막을 깔며, 은신에 돌입한 상태에서 도약 스킬로 벽을 딛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다음 대응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어 있었기에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바로 붙잡혀 죽을 뻔했다.

"실력이 제법이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가는 옵션을 꽤 가지고 있는 모양인데."

"입꼬리 내려, 새끼야."

느닷없이 여유를 부리며 자신에게 엄지를 치켜세워 보이는 전종두에게 강후가 욕을 날렸다.

자신을 보며 활짝 웃고 있는 것이 상당히 기분 나빴다. 살짝 자존심 상하는 면도 있었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투가 재밌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종두 같은 콘셉트의 캐릭터가 강후에게는 가장 까다로운 적이기 때문이다.

암살이란, 모름지기 일격필살로 상대에게 중상을 입히거나 목숨을 끊을 수 있어야 한다.

한데 무지막지한 덩치와 완력을 가진 이런 부류의 헌터들은 쉽게 숨이 끊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한두 번의 유효 공격을 당하더라도 다음이 있는 다른 직업군에 비해서.

전종두 같은 녀석에게는 붙잡히면 죽음이었다.

이런 녀석들은 적을 잡게 되는 상황이 일격필살의 시작점이다. 방금 노렸던 상황 말이다.

[도약]

파앗!

강후가 전종두에게 돌진했다.

소극적이면서 방어적인 전투로는 전종두에게 빈틈을 만들어내는 것이 어렵다.

설령 만들어내더라도, 접근하기 전에 자세와 전열을 정비해서 대비할 공산이 크다.

결국 적극적으로 파고들면서 반응을 유도해야, 능동적으로 빈틈을 만들 수 있었다.

그것이 광전사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상상 이상의 힘을 내기에 위력적이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빈틈을 노출하기 때문이다.

광전사 스스로도 놀랄 만큼, 몸이 일반적인 상식과 통제를 벗어나 신속하게 움직여서다.

"훗."

정직하게 정면에서 치고 들어오는 강후를 보며 전종두가 웃었다.

암살자 직업군의 헌터도 꽤 많이 상대했던 자신이다. 이런 정석적인 패턴은 차고 넘치게 봤다.

아마 들어오는 척하다 뒤로 물러서거나, 아니면 아까 같은 이동 스킬을 쓰려는 거겠지.

어지간한 단검 공격에는 감흥조차 없는 전종두가 팔을 쭉 뻗었다. 대놓고 잡겠다는 뜻이었다.

바로 그때.

[귀요미!]

강후는 그간 한 번도 쓴 적 없는 스킬을 썼다.

전투는 다양한 스킬 옵션의 싸움 아닌가?

이 스킬은 나름의 가치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름부터 거부감이 들어서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또잉! 뚜잉!

이내 전종두의 전방에 만들어진 사람 크기만 한 중형 슬라임이 시야를 꽉 채웠다.

강후가 무슨 짓을 해도 일단 잡겠다는 생각으로 뻗었던 전종두의 팔이 슬라임의 몸으로 들어갔다.

"X발!"

생각보다 쫀득쫀득(?)한 슬라임의 몸은 걸쭉한 코딱지처럼 전종두의 팔을 쉽게 놔주지 않았다.

그 사이, 슬라임을 만들면서 녀석을 타깃으로 횡 이동을 성공시킨 강후는 전종두의 뒤에 있었다.

어찌 보면 뻔한 후방 이동의 공식이지만.

중간 과정에서 슬라임 생성이라는 새로운 옵션을 집어넣으니, 뻔하지 않은 변수가 됐다.

'아냐. 여기까지도 뻔해.'

하지만 강후는 자만하지 않고, 한 번 더 상황을 비틀기로 했다.

슬라임에게 꼬인 시점에서 전종두는 당연히 자신이 뒤에 자리 잡을 것을 예상했을 것이다.

[얕은 혼돈]

그래서 조용히 얕은 혼돈을 전종두에게 걸었다.

방향 감각 상실.

주변 시야 왜곡.

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몸을 이용해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녀석에게 꽤 좋은 선택지였다.

"X미!"

퍼어엉!

전종두가 슬라임을 패대기쳤다.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 슬라임이 통째로 터져, 하늘에서 젤리 같은 방울이 쏟아져 내릴 정도였다.

본체에 달린 똘망똘망한 슬라임의 눈은 바로 X자가 되어, 안타까운 죽음을 알렸다.

여기까진 좋았다.

전종두가 바로 시선을 돌려 뒤쪽, 정확하게는 측면 후방에 있는 강후의 존재를 인지했다.

어차피 암살자 직업군이 '뒤를 잡는' 상황이야 셀 수 없이 경험해 봤으니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우악스럽게 팔을 뻗었다. 거리가 가까우니 잡는 것은 금방이다.

바로 그때.

휘잉!

"...?"

전종두는 또렷하게 보이던 강후의 모습이 손이 닿자마자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였는데, 보인 것이 아니었다.

설마 환각인가?

아니면 감각 교란?

이런 방식으로 왜곡을 유도하는 정신 스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암살자가 이런 스킬을 쓴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바가 없었다.

광전사 계열인 자신이 마법 스킬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말이다. 연계성이 없는 것이다.

그 순간.

촤아아악!

"크아아아악!"

전종두는 자신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위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고통을 느꼈다.

바로 사타구니였다.

처음에는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났고, 이어서 뜨거운 불길과 같은 고통이 상처에 덧씌워졌다.

극심하게 느낀 고통 덕분에 역설적으로 방금 전종두에게 걸렸었던 얕은 혼돈의 방해가 풀렸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벌어진 후였다.

전종두는 묵묵히 거구의 몸뚱이를 지탱해왔던 하체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단순 사고로 치부하기에는 사타구니를 공격당하면서 입은 피해가 컸다.

'계속. 더.'

한편, 강후는 더욱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대참수 스킬이 제대로 먹힌 덕분에 방금의 일격은 매우 성공적으로 들어갔다.

제아무리 단단한 몸이라고는 해도, 몸 전체가 강철 같은 단단함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연한' 부위는 존재한다. 강후는 처음부터 그런 부위에 노림수를 두고 있었다.

[시야 강탈]

바로 전종두에게서 시각을 빼앗았다.

평소 같으면 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스킬.

하지만 지금은 하체에서 올라오는 극심한 고통에 정신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황일 터.

이럴 때는 정신계 공격이 훨씬 더 잘 먹혀들어 간다.

전종두가 육체적으로는 완성된 헌터일지 모르겠지만, 정신적으로는 분명 빈틈이 있었다.

"이 새끼가...!"

후웅! 화앙!

독기가 잔뜩 오른 전종두가 신경질적으로 주변을 휘저었다.

뭐라도 하나 잡히기만 하면, 찢어발기겠다는 분노가 담긴 공격이었다.

하지만 되도 않는 허우적거림에 당할 강후가 아니었다.

강후는 숨을 죽인 채로 전종두를 살폈다.

상황이 유리해 보이기는 해도.

자칫 잘못해서 전종두에게 붙잡히면, 생기를 모조리 빨리고 회복을 돕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역전 한판승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상황이 완전히 뒤집히게 된다.

그때.

"덤비라고! 덤벼!"

우악스럽게 손을 뻗으며 여기저기를 움켜쥐려던 전종두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하체가 지탱하는 능력이 평소와 다르다 보니, 상체의 움직임을 쫓아가지 못한 모양새였다.

몸의 무게 중심이 흔들렸을 때.

재빠르게 수습하면 이내 중심을 찾지만, 그렇지 못하면 몸은 운동 방향을 그대로 따라가게 된다.

지금의 전종두는 후자였다.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상대적으로 얼굴을 앞으로 내민 그림이 되었다.

[납치]

강후가 승부수를 던졌다.

붙잡히면 죽는 전종두에게 가장 신중하게 써야 하는 스킬이지만, 지금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

"허억!"

암살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스킬의 연속에 전종두가 또 한 번 당황했다.

당황한 것만으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육중한 몸이 통째로 들려서 강후에게 향하는 중이었다.

시야 강탈의 시야 차단은 아직 풀리지 않았고, 전종두의 시각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강후가 몸을 낮췄다.

그리고 자신의 앞으로 소환당한 전종두를 올려다보았다.

'턱.'

일격으로 노릴 지점이 보인다.

혈루를 꽉 움켜쥔 강후가 대참수 스킬과 연계하며, 그대로 단검을 위로 뻗으며 일어섰다.

푸우우우욱!

뼈와 근육, 살을 뚫고 들어가는 묵직한 느낌과 함께 혈루가 전종두의 혀와 입천장을 관통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거대한 몸을 가진 전종두지만, 모든 부위가 단단한 것은 아니었다.

"끄르르륵...!"

이윽고 시야 강탈의 효과가 사라진 전종두가 강후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혈루가 얼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아직 전종두는 죽지 않았다.

바람만 불어도 터질 것처럼 전종두의 눈알이 팽창했다.

어떻게든 강후를 붙잡아서 죽이겠다는 독기가 덧씌워진 전종두는 야차 같았다.

터업!

"망할."

전종두에게 양팔을 잡혔다.

단검이 얼굴 안을 꿰뚫은 와중에도 전종두는 본래의 괴력을 잃지 않았다.

스으으으으읍!

이내 몸의 피가 한쪽으로 쏠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기운이 쫙 빠지기 시작했다.

전종두의 성좌 능력 중 하나.

생기 흡수가 시작된 듯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기뿐만 아니라, 몸의 마나까지 통째로 빨리는 느낌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후의 양팔을 붙잡은 전종두가 그 상태로 하늘 높이 강후를 들어 올렸다.

인간 놀이기구가 있더라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몸이 붕 떴다.

어지간한 헌터였으면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에 전종두는 버티고 있었다.

오히려 반격을 당할 판이었다.

이 상태로 전종두의 괴력이 더해진 내려치기가 시작되면, 말린 북어 신세가 될 가능성이 크다.

몸이 앞뒤로 곱게 잘 다져진 고기처럼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남아나는 게 없을 것이다.

"미친 새끼."

강후가 혀를 내두르며, 괴력을 뽐내고 있는 전종두에게 욕을 내뱉었다.

조금의 시간만 더 줘도, 강후도 덩달아 부상을 입을 판이었다. 아니, 부상이면 차라리 다행이다.

그래서.

[혈화]

마무리 스킬을 썼다.

전투 초반에는 이렇다 할 상처를 내지 못해 쓸 수 없는 스킬이었지만.

지금은 사타구니와 아래턱에 깊은 상처와 다량의 출혈을 유도한 상황이라 '재료'는 충분했다.

퍼펑! 퍼펑! 퍼퍼퍼펑!

대폭발이 일어났다.

다만 전종두에게서 벌어진 피의 폭발에서 이번만큼은 강후도 자유롭지 못했다.

늘 멀찍이서 멋지게 끝을 보던 혈화의 전개와 달리.

이번에는 타깃이 될 대상과 한 곳에 뒤섞여서, 피와 살점의 폭발을 경험해야 했던 것이다.

앞서 내뱉었던 '미친 새끼'라는 표현에는.

끝까지 쉽게 끝나지 않도록 만든 전종두의 무지막지함에 질린 감정도 함께 담겨 있었다.

'며칠 푹 쉬어야겠군.'

폭발에 휘말려 같이 만신창이가 될 몸을 예견한 강후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89화 전종두 (4)

* * *

"와. 잠깐 기절했었나?"

강후가 눈을 뜬 것은 폭발에 휘말리고 나서 약 1분 정도가 흐른 후였다.

물론 대책 없이 눈을 감았던 것은 아니고, 전종두의 죽음을 정확하게 확인하기는 했다.

그래서 긴장이 쭉 풀리는 과정에서 눈을 감았는데, 그새 선잠이 들었던 것이다.

전종두가 죽으면서, 그와 계약되어 있던 다섯 성좌가 우르르 강후에게 넘어왔다.

가장 탐냈었던 무정한 탐식가야 말해 입이 아플 정도로 만족스러운 구성이었고.

남은 네 성좌도 기대치가 충분히 높은 성좌들이었다.

[전장의 개]

[체력이 1% 떨어질수록, 근력 보정 수치가 1% 증가합니다.]

'결국 근력이 화력이랑 연계가 되는 거니까, 나한테도 시너지가 좋은 성좌지.'

강후가 전장의 개 성좌에 대한 총평을 내렸다.

물론 암살자가 체력을 잃을 상황이 생기지 않는 게 좋지만, 생겨도 믿을 구석이 있다는 얘기다.

[인내의 구도자]

[고통을 50% 경감시킵니다.]

"어쩐지. 통각을 아예 없애버린 건 아닌가 싶더라니."

고통은 적당히 느낄수록 좋다.

아예 느끼지 못한다면 위험하겠지만, 인내의 구도자는 딱 알맞은 만큼만 줄여주는 듯했다.

[바람의 인도자]

[기동력이 25% 상승합니다.]

[야바위의 달인]

[레벨 100 단위로 임의 보상을 활성화하는 돌림판이 생겨납니다. 꽝 혹은 나쁜 보상은 없습니다.]

"오호."

바람의 인도자야 직관적이니 그렇다 치고, 야바위의 달인은 강후도 처음 보는 성좌였다.

원작에서도 임의성이 짙다고 판단했기에 핵심 캐릭터에게 붙여준 적은 없는 설정이었다.

물론 구상 과정에서 몇 번이고 떠올린 적은 있는 콘셉트였다. 그래서 구현이 된 모양이다.

레벨 100단위로 보상이 활성화된다면, 지금 강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기다.

현재 레벨이 95이기 때문이다.

5만 더 올리면, 야바위의 달인 성좌가 돌림판을 활성화해주는 듯했다.

강후가 다시금 무정한 탐식자에 대한 내용을 살폈다.

그러자 '생기 흡수'라는 별도의 능력이 활성화된 것이 보였다.

손이 닿는 대로 상대에게서 생기를 흡수할 수 있는 능력.

자의로 활성화, 비활성화가 가능했다. 게다가 생기 흡수를 진행하려면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전종두와는 궁합이 아주 잘 맞지만, 난 전투 중에는 조금 쓰기 어렵겠네."

얼추 쓰임새와 활용하는 그림을 떠올린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휴식하고 있는 상황이거나, 적을 제압한 이후에는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시험 삼아 죽은 전종두의 몸에 손을 얹어보았다.

[생기 흡수를 활성화합니다.]

그리고 비활성화해 두었던 생기 흡수를 활성화하자.

스으으으읍!

"...!"

전종두의 몸에서 생동감 넘치는 기운이 강후의 손을 따라 쭉 빨려 들어왔다.

방금 전투로 상당히 떨어져 있던 체력이 빠르게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바로 흡수되는 체력 포션을 들이킨 느낌이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특징은 또 있었다.

생기 흡수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억제됐다.

정확히 말하면,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발동되지 않았다. 마나 회복이 더뎌졌던 것이다.

'상호 작용이 아니라, 반대 작용의 기전이 있는 건가?'

물음표가 찍힌다.

어떤 이유로 생기 흡수와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반대 작용을 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직접 체감할 수 있었고, 일단 기억해 둬야 할 단서 하나는 수집한 느낌이었다.

아마 이렇게 알게 된 지식을 나중에 써먹을 일이 있을 터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에 관련되어서는 아주 작은 단서라도 있으면 좋다. 연구에 도움이 될 테니까.

수습은 빠르게 진행됐다.

여전히 폐공장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진행 중이었다.

폭음이 심심찮게 들리고.

비명이 뒤섞이는 것으로 봐서는 어느 한쪽의 완벽한 우세는 아닌 듯했다.

물론 수적 우위는 처음부터 김수경 용병단에 있었으니까 유리한 쪽은 아군일 것이다.

강후는 전종두에게서 모든 아이템을 싹 벗겨냈다.

그중에 바꿔 착용하거나 대체하기 어려운 아이템을 별도로 분류해서 챙겼다.

예상 기대 가치는 200억 원.

전종두를 생포하지 않고 제거하면서 떨어진 보상금만큼을 그대로 채워 주는 가치였다.

그리고 착용해도 괜찮을 4등급의 반지 두 개를 꼈다.

'세트 효과'가 있는 아이템을 착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칼립스 (좌) - 반지]

[등급 : 4등급]

[근력 + 100]

[근력 + 25 (칼립스의 의지)]

[칼립스 (우) - 반지]

[등급 : 4등급]

[근력 + 100]

[근력 + 25 (칼립스의 의지)]

'칼립스의 의지'라는 세트 효과의 활성화 덕분에 근력 50을 추가로 얻었다.

아직까지 세트 효과가 있는 아이템을 착용한 적은 없지만.

중장기적으로 보면 이런 계열의 아이템을 집중적으로 찾아 착용하는 것이 좋았다.

장시환 같은 경우는 착용한 열 개의 반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세트 효과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 버프가 무지막지하게 들어간 녀석이다 보니, 아이템 구성에도 사기성이 짙다.

장시환이 강후의 최종 목표이기도 한 만큼.... 이제는 차근차근 세트 효과를 신경 쓸 때가 됐다.

'레벨 100이 되고, 기본 스킬을 추가하고 나면 그때는 꼭 적요석을 쓰는 게 좋겠다.'

현재 소유하고 있는 적요석 개수는 총 5개.

스킬 업그레이드에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값비싼 물품인 만큼 아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아끼다 똥 된다는 말은 헌터의 세계에서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나중에 쓴답시고 아꼈다가, 비명횡사를 하고 영원히 못 쓰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적요석 5개를 활용할 방향성을 정하지 못해 그동안 살짝 뒤로 미뤄온 부분이 있었지만.

이제는 생각이 명확해졌다.

더 빠른 기동과 회피.

암살자의 특징을 극대화해줄 수 있는 스킬에 적요석을 투자해야만 한다.

그래야 전종두 같이 자신과 상극인 캐릭터를 만났을 때, 좀 더 능숙하게 대응할 수 있다.

이번 전종두와의 전투는 녀석의 약점이 뚜렷했기에, 이 정도 수준에서 매듭이 지어진 것이다.

지금보다 전종두의 레벨이 50 정도만 높았어도, 반응이 조금만 빨랐어도 결과는 달라졌겠지.

"무조건 100."

강후가 몸을 일으켰다.

이번 의뢰가 끝나는 대로, 모든 의뢰 수행을 중단하고 레벨업에만 매진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자. 전종두. 바깥 구경할 시간이야."

전종두의 시체.

그 머리채를 움켜쥔 강후가 그를 질질 끌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 시작했다.

듬직한 용병대장, 전종두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전력으로 싸우고 있을 오쇼 용병단원들에게.

그의 시체로 가장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할 때가 된 듯했다. 사기와 전의를 꺾을 시간이다.

* * *

"...."

"아...."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던 폐공장 전체의 시간이 멈춰버린 것은 그로부터 1분 후였다.

폐공장 2층의 한쪽 난간에서 들려온 요란한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을 때.

눈을 돌린 헌터 모두가 볼 수 있었다.

턱 아래가 흔적도 없이 터져 없어지고, 사타구니 사이가 넝마가 되어버린 전종두의 시체를.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전종두의 얼굴을 짓밟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강후의 발이었다.

"X발, 대장이...."

"저렇게 쉽게 죽었다고?"

"저 새끼는 또 누구야."

가장 먼저 경악한 것은 오쇼 용병단 소속의 헌터들이었다.

전종두는 그들이 '신'이라고 생각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인물이었다.

쇠파이프나 알루미늄 배트 따위는 심심풀이로 찌그러뜨리고 접어댔던 것이 전종두다.

우스갯소리로 오쇼 용병단 전원이 그에게 달라붙어도, 모두 접혀 죽고 말 것이라고 했었다.

그만큼 대장 전종두를 믿었고, 그가 가진 힘의 파괴력을 믿었다. 너무 당연한 신뢰였다.

하지만 다수의 적도 아니고, 일개 헌터에게 전종두가 죽음을 맞이한 것은 충격이었다.

그것도 한 곳에 치명상을 입고 죽은 그림이 아닌.

얼굴과 하체의 중심이 걸레짝이 되어버린, 정말 괴기스러운 죽음이었다.

강후의 스킬인 '혈화'의 존재와 그 위력을 알지 못하는 헌터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강후가 암살계가 아닌, 전혀 다른 계열의 헌터로 보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그랬으니까.

"너희 대가리가 뒈졌어. 그래도 열심히 싸워야 하는지는 잘 생각해 봐."

투욱!

강후가 무심히 한마디를 던지고는 전종두의 시체를 발로 툭 밀쳐냈다.

그러자 난간 아래로 떨어진 전종두의 시체가 볼썽사납게 얼굴부터 바닥에 꽂혔다.

와드드득!

코와 이마에서 부러지는 소리가 났지만, 어차피 죽은 터라 아무도 신경 쓰진 않았다.

"하...."

오쇼 용병단의 헌터 중 한 명이 터뜨린 탄성에 모든 구성원이 느낀 상실감이 담겨 있었다.

전종두의 등장만을 믿으며 버티고 버텼던 그들이었다.

처음부터 약속이 된 기다림이기도 했다. 전종두가 전투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나오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다림의 대가는 희망이 아닌 절망이었다.

이제는 타이밍의 문제가 됐다. 언제 상대에게 항복하느냐의 문제 말이다.

'전개가 이렇게 극적으로 갈 줄은 몰랐군.'

한편 놀란 것은 김수경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히는 김수경 용병단 전체가 놀랐다.

강후가 전종두를 찾아서 도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안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전종두를 죽여서 끝을 볼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를 꾀어서 밖으로 나온 다음, 용병단과 협력하는 그림을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김수경의 바로 뒤에 있는 헌터들이 유사시에 강후를 지원하기 위해 편성된 정예 전력이었다.

한데 계획이 무색하게 강후는 홀로 전종두를 끝장내 버렸다.

전종두를 쉽게 도모하기가 힘든 탓에 판을 크게 짜고, 외부 용병까지 끌어온 것인데....

거창하게 세운 제거 계획이 헌터 한 명의 활약으로 끝나 버리니 어안이 벙벙했다.

'레벨 100도 안 되는 헌터가 레벨 350을 잡아먹는 그림이 가능한가?'

김수경은 생각이 열린 사람이었다. 레벨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늘 변수는 있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레벨 100이 350을 상대로 무승부도 아닌 완승을 거둔 것은 그 이상의 영역이었다.

이예린이 강후를 레벨 하나만으로 재단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강조하기는 했었다.

그때는 강후에 대한 신뢰가 담긴 어느 정도의 립서비스가 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아니었다.

이예린은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해 준 것이었다. 김수경 본인이 왜곡해서 들었을 뿐.

일단 감탄은 여기까지다.

강후가 성공적인 승리를 위해서 멋지게 판을 짜놓은 만큼, 신속하게 수습할 필요가 있다.

김수경이 소리쳤다.

"너희 대장은 뒈졌다! 무의미하게 저항하지 말고 투항해라!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다면!"

쩌렁쩌렁 울리는 김수경의 목소리가 폐공장 전체를 뒤덮었다.

사자후 스킬이 따로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강후는 2층 난간에서 투척을 위한 연습용 단검 하나를 쥔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차해서 다시 전투가 시작된다면, 성좌 강탈에 욕심이 나는 헌터가 여럿 있어서였다.

그 녀석들을 노릴 참이었다.

하지만 용병단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버팀목이자 대들보였던 전종두가 죽은 마당에.

곧바로 저승에 직행할 것이 뻔한 객기를 부릴 헌터는 없었다.

"전 항복하겠습니다."

"저도 항복하겠습니다!"

"공격하지 마쇼! 제발!"

"무기를 내려놓겠소!"

오쇼 용병단은 그날부로 해체됐다. 전종두의 죽음으로 허무하게 맞이하게 된 끝이었다.

그리고 이 전투의 시작과 끝에는 강후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누구도 크나큰 기여와 공에 대해 반박할 수 없을, 강후의 완벽한 활약이었다.

90화 Lv. 100 (1)

* * *

한나절 후.

한 남자가 잔에 가득 채운 보드카를 단번에 들이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시선은 아까부터 계속 모니터를 통해 출력되는 CCTV 화면에 멈춰 있었다.

해당 영상의 출처는 바로 전종두의 오쇼 용병단이 비밀 회합 장소로 이용하던 폐공장.

오늘 그곳에서 김수경 용병단과의 교전이 일어났고, 전종두가 죽은 상황이었다.

"변변찮은 놈들. 그동안 번 돈을 도대체 어디에 쓴 건지 모르겠군. 나름 투자도 많이 했는데."

남자가 허공에 손을 휘휘 저었다. 실망이 잔뜩 묻어나는 제스처였다.

그의 이름은 니콜라이 스트라크. 러시아의 까쉬마르 길드를 운영하고 있는 마스터였다.

까쉬마르는 러시아어로 '악몽'을 뜻하는데, 그가 하고 있는 일을 생각하면 꽤 의미가 맞았다.

까쉬마르 길드는 해외에서 쓸만한 헌터를 납치해 데려온 뒤, 인간 병기화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폐공장에 있었던 베주미예도 까쉬마르 길드의 작품이었다.

워낙 극악무도한 방법으로 만드는 공정이라 인권은 둘째치고, 방식이 정말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인내와 수고가 꽤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라 공급이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언제 어디서나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인간 병기에 대한 수요는 전세계에 존재했다.

특히 뒤가 구린 길드나 조직일수록 더 많이 선호했고, 정화 길드도 구매 건이 있을 정도.

어쨌든 까쉬마르 길드가 헌터를 외부로부터 공급받는 주요 거래처 중 하나가 오쇼 용병단이었는데.

이번에 김수경 용병단에게 완전히 공중분해 당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어지간해서는 죽을 것 같지 않았던 전종두가 죽어버렸다.

그만 살아 있어도, 용병단의 세를 다시 불려주는 것은 일도 아닌 부분이었지만.

뿌리가 뽑혀버렸으니, 위에 달린 줄기로 살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덕분에 한국 쪽의 헌터 공급 루트가 끊겨버렸다. 적어도 대체자를 찾기 전까지는 말이다.

"도대체 누구지?"

스트라크는 화면 속에서 포커싱한 강후의 모습을 반복해서 살피고 있었다.

2층에 있던 전종두의 비밀 장소에도 내부 CCTV가 있었는데, 그 장면을 확보한 것이다.

외부인은 볼 수 없지만, 전종두가 스트라크의 명령은 절대적으로 따랐기에 열람 권한이 있었다.

전종두에게 한 방 먹었음에도 능숙하게 대응한 강후의 움직임이 놀라웠다.

보이는 외형만으로도 충분히 전종두에게 압도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후는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정석적인 역공의 패턴을 한 번 더 꼬아서 허를 찌르는 묘수도 있었고.

더 나아가 정신계 스킬을 활용한 정황도 포착됐다. 암살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스킬이다.

전종두를 죽였다는 사실에 대한 분함보다, 강후에 대한 관심이 더 갔다.

누구일까.

확보된 화면을 토대로 길드 내부에서 개발한 서치봇을 돌려봤지만,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실력만 봐서는 한국의 헌터 관련 방송이나 기사에 사진 한 번쯤은 실렸을 실력자 같은데.

서치봇은 그에 대한 정보를 단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유사한 인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저런 녀석이라면 전종두의 대안으로는 충분하다. 오히려 그 이상일 수도."

스트라크는 한국에서의 '재료' 공급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한국에서 넘어온 헌터들은 판매 가치도 높고, 실험이나 약물에 대한 순응도도 높다.

여러모로 개조가 쉽고 통제하기 수월한 면이 있어 투자 단가도 훨씬 쌌다.

한국에서의 매입 루트를 포기한다는 건, 값싼 원산지와의 계약을 끊는 것과 같았다.

"사람을 좀 보내봐야겠군."

한국이 아닌 러시아 땅에서 백날 고민해 봤자, 강후에 대한 정보를 더 얻을 수는 없다.

스트라크는 강후와 직접 접선할 수 있는 루트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사람이야 찾으면, 어떻게든 결국은 찾아진다.

특히 이번 일로 김수경 용병단과 접점이 생겼을 테니, 연결고리는 만들 수 있을 터.

스트라크는 이미 머릿속에서 강후를 전종두 다음의 후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정작 떡 줄 놈은 생각조차 않고 있는데 말이다.

* * *

그 무렵.

"400억 원. 입금됐습니다. 확인해 보시죠. 거액이라 조금 시간이 걸렸네요."

"빠른 처리 감사합니다."

강후는 김수경에게서 정산받은 400억 원의 입금을 막 확인하고 있었다.

잔고가 366억 원에서 766억 원으로 훌쩍 뛰었다.

여기에는 김수경에게서 받은 의뢰 보상금 100억 원과 전종두의 아이템을 판매한 200억 원.

또 일전에 얻은 주황색 마석을 처분한 100억 원까지 합쳐진 금액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추가 입금은 개인적인 감사입니다. 덕분에 일찍 전투가 끝나, 피해가 크게 줄었습니다."

이어 김수경이 별도로 50억 원을 추가 송금했다. 강후의 활약에 대한 감사 표시였다.

덕분에 816억 원의 잔고가 만들어졌다. 이제 1,000억 원이 가시권에 들어온 것이다.

돈.

작정하고 모으려고 하면 참 벌기 어려운 것이 돈이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일에만 전념하며 모으다 보니 어느새 이만한 금액이 모였다.

물론 이제 시작일 뿐이다.

더 값지고 가치 있는 아이템을 사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상한선이 없는 것이다.

강후가 처음으로 찍어보는 800억 원대 잔고를 보며, 제법 오래 흡족해하고 있는 사이.

김수경이 슬쩍 제안을 꺼냈다.

"우리 용병단과 함께 할 생각은 없습니까?"

"어디에 소속되는 것을 가장 싫어해서요. 눈치 보기도 싫고, 신경 쓸 식구가 늘어나는 것도 싫습니다."

그의 얘기를 듣자마자, 칼같이 답을 들려주었다. 예전부터 늘 하고 있었던 생각이라서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후는 모든 상황에서 오롯이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싶었다. 그래도 살아남기 힘든 세상 아닌가.

"역시."

김수경이 웃었다.

예상한 대답이라 당황스럽지는 않았는데, 너무 빨라서 단호하게 느껴졌다.

강후의 속마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용병단이 그렇게 매력 없나 싶기도 했다.

어쨌든 제안은 결렬.

하지만 김수경은 강후와 연결될 수 있는 다른 방식의 '끈'을 꺼내 들었다.

"그럼, 의뢰꾼은 어떻습니까?"

"그건 좋죠. 저야 부담이 없는걸요. 선택할 수 있는 권한도 제게 있고."

변형 형태로 꺼낸 김수경의 제안은 강후도 받아들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김수경과 그의 용병단이 계속 우상향의 곡선을 그리며 성장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는 아웅다웅하는 적대 세력이었던 오쇼 용병단도 사라졌으니 가속이 붙을 터다.

그렇다면 김수경과는 어떤 식으로든 연결고리를 만들어두는 것이 좋았다. 무조건 이득이다.

'이제 강원도 쪽으로도 의뢰길이 뚫리겠군. 전보다 더 자주, 많이 말이야.'

이예린이 물어오는 의뢰도 지역 배분이 제법 되어 있는 편이기는 하지만.

강원도 쪽의 의뢰는 지금껏 늘 적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아마도 김수경 용병단과의 관계 때문에 일부 조심하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덕분에 의뢰에서 확장성이 생겼다.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될 듯했다.

* * *

그 무렵.

"...뭐가 이리 바쁜 거지."

흑골단 대장 신준호의 의뢰로 강후를 쫓고 있는 해결사는 대전역 일대를 서성이고 있었다.

이곳에 강후의 흔적이 있었다. 제법 많이. 그렇지만 거점으로 삼았다고 하기에는 양이 적었다.

강후의 흐름을 추적하면서 느낀 것은 위치가 한 곳으로 쉽게 특정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헌터들은 보통 자신이 안전하다고 여기면서, 중추적으로 활동하는 거점 지역이 존재하는데.

강후에게는 그런 곳이 전혀 없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대전역이 들른 횟수가 좀 있다, 정도랄까?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이런 녀석은 비밀이 진짜 많단 말이지."

해결사가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그가 다시 천천히 걸으며 두 눈을 감았다.

마나의 흔적들과 교감하는 것이다. 영적 능력과도 결합되어 있어 금방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그때.

"짙다."

멀지 않은 곳에서 강후의 흔적이 꽤 남아 있는 사람의 등장이 느껴졌다.

강후 본인은 아니지만, 관련자임은 틀림없어 보이는 흔적을 지닌 사람이었다.

해결사의 눈에 보인 것은 기다란 대검을 들고 대전역 앞을 활보하고 있는 한 여자였다.

'연결고리를 찾았군.'

해결사가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강후와 연결된 끈의 시작점을 찾았다. 이제 추적에 속도를 낼 차례다.

* * *

쏴아아아.

태풍의 북상으로 예정된 장대비가 쏟아지는 밤.

차를 운전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날씨기에 강후는 김수경의 배려로 제공받은 안전 호텔에서 쉬었다.

김수경 용병단에서 직접 운영하는 호텔이므로 안전에 대해서 걱정할 것은 없었다.

도청이나 불법 촬영이 있진 않을까 싶었지만, 확인한 결과 별도의 장치는 없었다. 기우였다.

방으로 들어온 강후는 널찍하게 마련된 직사각형의 수영장에 뜨거운 물을 잔뜩 채웠다.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누워 쉬면서 기다리니 또 금방 갔다.

이윽고 수영장에 열이 모락모락 풍기는 뜨거운 물을 잔뜩 채운 강후가 몸을 깊숙이 담갔다.

아예 머리까지 통째로 잠길 만큼의 잠수였다.

강후가 수영장 바닥까지 쭉 내려가서는 침잠의 세계에 빠졌다.

생각을 정리하고 다듬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레벨 100을 최대한 빨리 찍으려면 던전을 가야 하는데. 빌어먹을 용병의 단점이 던전 출입이 자유롭지 않다는 거지.'

혼자 다 해 먹는 용병.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딱 한 가지 문제가 바로, 소속이 없어 던전의 연결고리가 적다는 점이다.

길드 소속이면 길드 소유의 던전 공략에 쉽게 배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라이센스 확보 및 공략 일정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길드 차원에서 다 해결이 된다.

하지만 용병들은 오픈형 던전을 가는 것 외에는 쉽게 던전에 접근할 방법이 없다.

'이현석 찬스를 쓰기는 너무 아깝고. 아직은 아냐.'

쉬운 길이 없지는 않다.

이현석이 민수현 구출과 관련해서 자신에게 신세를 졌으니, 던전 라이센스를 요구할 수는 있을 터.

하지만 그가 소유한 던전의 가치와 난이도를 생각하면, 지금 써먹기는 너무 아까웠다.

나중에 레벨이 좀 더 올랐을 때 도전하면 유용할 던전이 많다. 지금은 많이 아쉽다.

'전세혁도 있잖아?'

이현석을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그의 친구인 전세혁이 생각났다.

그는 독자적인 힘을 갖추고 있는 용병이라, 자기 소유의 던전도 몇 개 있을 것이다.

고민은 짧게, 행동은 빠르게.

강후가 전세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이 잘 풀리려는지, 신호가 한 번을 끝까지 울리기도 전에 바로 그가 전화를 받았다.

- 네, 신강후 님.

한서연과 더불어 유이하게 자신의 본명을 아는 그다.

항상 정선규라고 불리다가 본명이 불리니, 아이러니하게도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잘 지내셨나요?"

- 본론부터 말씀하시지요. 어설픈 안부 인사나 미사여구를 싫어하는 성격인 것은 압니다.

척하면 딱이라더니.

이러면 말이 더 편해진다.

피차 요구할 내용이 확실하다면 굳이 돌려 말할 필요는 없다.

강후가 운을 뗐다.

"혹시 공략에 쓸만한 던전이 있습니까? 경험치 파밍만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전리품은 됐습니다."

모든 전리품 포기.

전세혁에게 남는 던전이 있다면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이었다.

91화 Lv. 100 (2)

전화기 너머에서 전세혁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후가 별다른 반응 없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전세혁이 이내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 공교롭게도 세영이에게도 같은 연락이 와서 말입니다. 안 그래도 쓸만한 곳을 구하던 참이라.

"여유가 될 때만 맞춰 주십시오. 무리하실 필요는 없고요."

자신은 요청을 하는 입장이었기에 강후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전세혁에게 말을 건넸다.

지금은 그가 배려를 해 준다면 호의를 베푸는 것이지, 당연한 것을 받는 것은 아니다.

전세혁이 신세 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과 그 사이의 관계는 동등했다.

- 아닙니다. 마침 제 소유의 던전 중에 여유가 있는 던전이 있어요. 다만.

"다만?"

- 이 던전은 세영이 혼자서는 못 가는 던전입니다. 어차피 파티원을 구할 생각이었어요.

"그건 마침 잘됐네요."

- 차명으로 던전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 외부 데이터베이스로 검색하시면 이상할 겁니다.

"그거야 뭐 흔한 일이니까요."

강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차명 소유, 대여는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던전 소유에 세금이 매겨지기 때문이다.

헌터 치안청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도 하나 없는 판국에 세금을 내고 싶은 헌터가 있을까?

그래서 1인당 던전 2개 소유까지는 세금이 면제되는 점을 악용한 꼼수가 판을 쳤다.

아니, 꼼수를 안 쓰는 놈이 머저리 취급을 받았다. 헌터 치안청은 깊게 단속하지도 않았다.

- 일단 부산으로 좀 내려오셔야겠습니다.

"불청객은 아닌 겁니까?"

- 오시면 세영이는 엄청 좋아할 것 같군요. 일단 내려오시죠. 전리품 양보는 됐습니다.

"나름의 값은 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 와 주시는 게 값을 치르는 겁니다. 왜 그런지는 와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부산역으로 KTX 타고 출발할 때 다시 연락드리죠."

- 오늘이시죠?

"네. 출발 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 좋습니다. 곧 뵙죠.

통화가 끝났다.

물 흐르듯 잘 풀린 느낌이었다.

어떤 던전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오는 것만으로도 값을 치른다고 말한 것을 보면....

최소 인원 제한이 1인이 아닌 던전인 모양이다. 반드시 둘이나 셋이 있어야 하는 그런 곳.

어쨌든 잘 됐지 싶었다.

레벨 100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최대한 서둘러 목표를 달성하고 싶었다.

* * *

부산역으로 가는 KTX 안.

강후는 창밖으로 계속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며, 전종두와의 전투를 떠올렸다.

그와의 전투는 복기하면 할수록 곱씹을 게 많은 전투였다. 의미가 큰 사건이기도 하고.

전종두의 죽음을 확인하기 무섭게 오쇼 용병단 전원이 항복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레벨 350의 헌터를 제압한다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전종두는 목숨을 거두기에 가장 까다로운 성향인 육체파 헌터였다.

보통 이런 헌터는 버티기에 능하므로, 죽이기가 쉽지 않아 놓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강후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 버렸으니, 모두가 강후를 전종두보다 훨씬 위로 본 것이다.

그래야 설명이 돼서다.

'물론 전종두를 이겼다고 해서, 다른 레벨 350의 헌터를 무조건 이기는 건 아니지.'

강후는 자만하지 않았다.

레벨은 '참고 지표'가 될 수는 있어도, '절대 지표'는 되지 못한다. 변수라는 것이 있으니까.

전종두는 성격이 급했고, 자신의 집요함을 인내로 버텨낼 지혜가 없었다.

만약 전종두가 조금 더 똑똑했다면, 생각을 깊게 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도 내가 이 몸뚱이를 한계 그 이상으로 잘 활용하고 있는 것도 맞지.'

자만은 경계했지만.

강후는 자신에게 칭찬을 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단한 일을 대단치 않다고 할 필요는 없다.

한편으로는 신강후의 몸에 빙의한 것이 참 잘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전종두나 다른 빌런의 몸에 빙의했다면, 이후 설계가 무척 복잡해졌을 것이다.

단점이 너무 극명해서, 가진 지식으로도 풀어가기 어려운 캐릭터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신강후'라는 캐릭터는 완성형이자 동시에 급성장형의 캐릭터였다.

게다가 '선천성 마나 과민증'은 큰 핸디캡이면서 잠재력을 무한대로 끌어올리는 최고의 도구였다.

'레벨 100을 찍고 나면. 정유리를 통해서 마스터 K를 꼭 만나봐야겠어.'

마스터 K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많아 그를 만나보고 싶은 것도 있고.

동시에 정유리라는 좋은 가교가 생겼기에 자리를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어느새 보유량이 2개까지 줄어든 매드 솔라키움의 보충에 대한 문제도 있었다.

북한 쪽에 매드 솔라키움이 있는 몇 군데를 알기는 하나, 접근 권한이 없어 과정이 복잡했다.

지금의 북한 땅은 임의로 아무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허가가 필요했다.

물론 허가 없이 북한 땅을 활보하는 헌터가 제법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국제법상의 보호도 받을 수가 없고, 불이익을 당해도 호소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목숨을 내어놓고 다니는 것과 같아, 무단 월북을 하는 것은 권장되진 않았다.

강후가 정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열 번 갔음에도 받지 않아 막 끊으려는 찰나에 그녀가 부스스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우웅?

"자는 중이었나 보네."

- 괘, 괜찮아. 그냥 눈 좀 감고 있었어.

"흘리던 침이나 닦고 거짓말을 하지 그래."

- 츄릅.

정유리의 순진한 반응에 강후가 피식 웃었다.

딱히 그녀가 웃긴다거나 재미있는 것은 아닌데, 미소를 짓게 만드는 일이 종종 있다.

아마 그녀만이 가진 순수하고도 깨끗한 영혼의 기운이 보이지 않게 영향을 미치는 거겠지.

- 무슨 일이야?

"혹시 괜찮으면 할아버님을 뵐 수 있을까? 사고 싶은 물품도 있고, 나누고 싶은 말도 있는데."

- 할아버지?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내가 데려오는 사람이면 할아버지도 좋아하실걸?

"손녀사위인 줄 알고?"

- 아니이! 그게 아니고! 할아버지도 핑계 삼아 손녀 얼굴 한 번 보면 좋아하실 거라는 거지!

"그럼 만남을 주선해 줘."

- 응, 알았어! 그런데 지금 뭐 하는 중이야?

"부산에 가는 중이야."

- 부산은 왜?

"놀러."

-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거짓말을 하네.

"그러게."

- 아무튼 알았어! 할아버지랑 연락해 보고 다시 말해 줄게!

"부탁해."

일이 수월하게 풀려가는 그림이다. 마스터 K에게는 알아보고 들어보고 싶은 것이 많다.

투두둑. 투둑. 투두두둑.

어느새 더 굵어진 빗줄기가 열차의 창문을 거칠게 두드리며, 시야를 가렸다.

승객도 별로 없는 객실 안.

강후가 의자를 살짝 뒤로 눕히고는 눈을 붙였다. 부산에 도착하면 정신없이 시간이 흐를 테니까.

* * *

강후와의 통화가 끝난 후.

정유리는 곧바로 마스터 K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지간해서는 통화가 안 되기로 악명이 높은 마스터 K지만, 손녀인 정유리에게는 예외였다.

그랬다. 전화를 가려 받았다.

- 그래. 율아.

율. 율이.

손녀 정유리를 부르는 마스터 K의 애칭이었다. 정유리도 그렇게 불러주는 것을 더 좋아했다.

"할아버지!"

- 응. 그래. 밥은 잘 챙겨 먹었고?

"이제 먹을 거예요! 오늘은 피자나 시켜 먹을까 봐요!"

- 어제도 피자 먹더니만.... 몸에 좋은 것도 챙겨 먹고 그래. 너무 편식이다.

"헷, 알았어요. 할아버지! 아! 다름이 아니라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릴 게 있어 연락드렸어요!"

- 뭔데?

"정선규 씨 아시죠? 선규 오빠요."

- 네가 그라운드 제로에 틀어박혀서 방황하며 지내던 것을 끄집어내 줬다는 그 남자 말이냐?

"음.... 너무 뼈 때리는 말이긴 한데, 어쨌든 맞아요!"

정유리가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그라운드 제로에서 나오고 싶지 않다고 했을 때, 마스터 K는 말리지 않았다.

선택도 책임도 오롯이 자신의 몫이라고 했다. 그리고 강제로 손녀의 껍데기만 데리고 나오고 싶지 않다는 말도 했다.

사실 그도 그렇고, 할머니 역시 모든 결정의 권한을 정유리에게 줬다.

자기 운명은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고, 책임 역시 무한하게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신념이었기에.

다만 속으로는 손녀의 칩거 생활이 일찍 끝나길 바랐는데,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계기는 바로 강후였다.

- 그래서 그 남자가 왜?

"오빠가 할아버지를 뵙고 싶어해요. 사고 싶은 것도 있고, 여쭙고 싶은 것도 있다고 해요."

- 나를?

"네. 꼭 뵙고 싶다고 했어요."

- 혹시 손녀사위로 맞이해 달라고 데려오려는 거냐?

"아앗! 그런 거 아니에요!"

정유리가 얼굴을 붉혔다.

그것과 별개로 정유리가 강후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것은 맞았다.

청춘남녀가 외모와 성격에 이끌려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 네 눈에는 그 남자아이가 어떻게 보이더냐?

"숨겨진 사연이 많은 사람 같아요. 눈빛이 깊고 슬퍼요. 세상 고통을 다 끌어안은 사람처럼요."

- 환자냐? 약쟁이가 보통 그런 표정을 많이 짓던데.

"...할아버지."

솔라키움을 위시한 진정류 식물이나 마약류 식물을 많이 다루는 마스터 K의 흔한 반응이었다.

- 알았다. 손녀가 냉정하게 보고 소개하려는 사람이니, 기본적인 믿음은 있어야겠지.

"겉으로 볼 때는 조금 재수 없으실 수 있어요. 하지만 제게 정말 많은 힘이 돼준 사람이에요."

- 그래. 그거면 됐다. 오기 전에 연락하거라. 6시간 전쯤에 전화하면 만남은 문제없을 게다.

"와! 감사해요, 할아버지!"

- 용돈 부족하면 얘기하고. 던전도 필요하면 얘기하고. 끊는다. 손님 왔다.

"네!"

전화를 끊은 정유리가 왠지 할아버지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한 스마트폰에 연신 입을 맞췄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렇듯, 항상 자신을 응원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고마운 분이었다.

정유리는 그런 두 분의 기대를 더 이상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헌터로서 다시금 성장의 고삐를 당기는 것. 그것이 정유리가 지금 꿈꾸는 목표이자 열정이었다.

사실상 프리패스에 가까운 허락을 할아버지에게 받았다.

남은 건 강후의 시간이 될 때, 그라운드 제로로 찾아가는 일뿐이다. 그거면 됐다.

* * *

한편 그 시각.

KTX 김천 구미역을 막 통과하고 있을 무렵에 강후는 시끌벅적한 느낌에 잠에서 깼다.

객실 안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강후에게만 출력되는 메시지창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성좌들의 경쟁이 막 붙은 참이었기 때문이다.

메시지창을 쭉 위로 올려보니, 시끄러움의 발단이 된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 있었다.

차원 강탈자의 말이었다.

[너희들이 아무리 메인 성좌를 꿈꾼다고 해도, 이 자리에는 격이라는 것이 있다. 모르느냐?]

[계약자가 메인 성좌를 바꾸는 건 자유 의지지. 함부로 네 질펀한 엉덩이를 깔아뭉개고 오래 앉아 있을 자리는 아니란 말이다.]

맞받아친 것은 성좌, 황야의 전략가였다. 두 성좌의 충돌은 예전부터 예고되었던 바이기도 했다.

바로 그때.

[남의 부스러기나 훔쳐먹는 년이나. 되도 않는 망상을 전략이라고 포장하는 년이나. 둘 다 한심한 것들이다.]

대재앙 – 어둠이 이 전쟁에 '참전'한 흔적이 있었다.

생각보다 성좌들 사이의 다툼은 꽤 가열되어 있었다.

92화 Lv. 100 (3)

'메인 성좌'의 가치는 지금까지 차원 강탈자가 보여준 것처럼 매우 크다.

우선 계약자로 하여금 성좌가 가진 성좌 특전을 모두 누릴 수 있게 해 준다.

지금 강후가 스킬을 강탈하고, 모든 스킬의 숙련도를 최대로 유지하며, 죽인 헌터의 성좌를 강탈할 수 있는 이유다.

지정한 포인트로 순간 이동하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

만약 차원 강탈자가 메인 성좌가 아닌 일반 서브 후원 성좌가 된다면?

위와 같은 특전을 누릴 수 없게 된다. 특전을 누린다는 것은 메인 성좌만이 가능한 것이라서다.

계약자, 그러니까 계약한 헌터는 메인 성좌를 바꾸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교체 자체의 선택권은 헌터에게 있었다.

성좌와의 계약까지 파기할 순 없어도, 계약의 격을 메인에서 서브로 내리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다만 문제는 한 번 그렇게 계약의 격을 떨어뜨린 성좌는 다시 자리를 되돌릴 수가 없다는 점이다.

감정적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헌터의 시스템을 구성하는 구조의 문제였다.

게다가 메인에서 서브로 계약의 격이 떨어진 성좌는 계약자와 손실 없는 계약 해지가 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메인 성좌의 교체는 상당히 신중해야 하는 작업이고, 흔치 않았다.

물론 실력 있는 헌터의 세계에서는 빈번한 일이기도 했다.

더 많은 능력과 특전을 누리게 해 주겠다는 성좌가 줄을 서기 때문이다. 그러니 경쟁에 불이 붙는다.

그리고 지금.

강후가 바로 그것과 유사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솔직히 차원 강탈자가 주는 특전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아. 그녀는 분명 매력 있는 성좌지.'

강후가 이 세계에서의 첫 성좌이자 메인 성좌로 차원 강탈자를 정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장기적인 방향성과 노림수를 모두 고려한 결정으로 절대 충동적이지 않았다.

그녀와 경쟁이 붙은 황야의 전략가는 메인 성좌로서는 줄 수 있는 특전의 질이 다소 떨어진다.

주로 정신 쪽에 특화되어 있는데 강후의 직업군과 시너지가 좋다고 볼 수는 없다.

대재앙 – 어둠은 가공할 만한 강력함을 제공하는 것이 특징.

하지만 그 대가로 계약자의 생명력과 보이지 않는 일종의 영력을 요구한다.

알게 모르게 힘을 빼앗기는 셈인데.... 강후는 그 막연함이 마음에 걸렸다.

어차피 결정은 자신이 한다.

그래서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굳이 여기서 차원 강탈자의 위치를 못 박아 줄 필요도 없다.

여지가 있다 여겨야, 앞으로도 성좌들이 티격태격하면서 자신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까.

황야의 전략가가 남긴 메시지가 보였다.

[계약자여. 나는 네게 첫 번째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저 내 특전을 누리게 해 주고 싶을 뿐.]

파격적인 말이었다.

메인 성좌의 자리는 원하지 않지만 자기의 힘이라도 누려보라는 제안이었다.

공짜로 물건을 주겠다는 얘기와 같다. 물건을 받는 입장에서 손해 볼 것은 전혀 없는 얘기.

하지만 이를 차원 강탈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문제가 있다.

그때, 대재앙 – 어둠도 자신의 생각을 남겼다.

[나는 내 격에 걸맞은 자리를 원하고, 당연히 다른 하찮은 성좌와 겸상은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계약자, 네가 탐난다. 그리고 난 너에게 무한한 힘과 영광을 줄 수 있는 존재다.]

'3파전인가. 재밌네.'

강후가 웃었다.

나중에 차원 강탈자와는 별도의 채널을 열어서 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황야의 전략가가 제안한 내용에 변함이 없다면, 그녀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메인 성좌인 차원 강탈자가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조율은 자신의 몫이다.

그때.

우우우웅.

스마트폰의 진동이 울렸다.

누군가 싶었는데 윤상미였다.

지난번 클럽 하데스에서 강후가 신세를 진 일에 대한 대가로 그녀가 받아 간 번호.

그래서인지 그녀의 연락이 반가웠다. 시시콜콜한 일로 연락을 할 사람은 또 아니기에.

"응."

- 기차예요?

"맞아."

- 어쩐지. 평소보다도 목소리를 더 낮게 까는 것을 보니, 집에 있는 건 아니겠다 싶었는데.

"무슨 일이지?"

- 던전 라이센스 대여를 하나 받았는데 같이 갈래요? 같이 한 번 놀기로 했잖아요?

좋은 제안이었다.

레벨업이 필요한 상황이라 던전을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부산까지 내려가고 있는 판국이다.

그녀가 자신의 레벨에 맞게 물어온 던전이라면, 강후가 원하는 수준에도 부합할 터.

여러모로 시기 좋은 제안이다.

반세영, 전세혁과의 만남을 진행한 이후에 그녀를 만나는 루트면 그림이 딱 좋을 듯했다.

"내일 늦게나 모레 연락해도 괜찮을까?"

- 그럼요. 급하진 않아요. 딱히 다른 파트너를 생각한 던전도 아니고 해서.

"기분 좋은 얘기군."

- 뭘 새삼스럽게 그래요. 오빠 잘하잖아. 실력을 믿는 거죠.

"그럼 조금만 기다려줘."

- 알았어요. 연락 기다릴게요.

"응."

짧지만 유익한 통화가 끝났다.

반세영과 함께 가게 될 던전의 규모와 보상이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설령 거기서 조금 성장이 부족하더라도 확실히 메꿀 만한 세컨드 플랜이 생긴 느낌이었다.

* * *

도착한 부산역은 비가 일찌감치 그친 상태였다.

서울 다음가는 헌터의 메카답게 부산역 일대는 헌터들이 엄청 붐볐다.

인산인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차고 넘쳤다.

역 앞에 마련된 길드, 용병 부스만 놓고 보면 오히려 서울이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에서는 용병 모집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화 길드가 독점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서울에서 다른 길드의 영업 활동은 금지된다.

물론 비공식적인 얘기다.

공식 자리에서 정화 길드는 다른 길드와의 '상생'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3초면 탄로 날 개소리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은데.'

근데 원래 붐비는 곳이라는 것을 고려해도 사람이 너무 많았다.

특히 정화 길드와 해영 길드의 견장을 달고 있는 헌터의 수가 상당히 많았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좀 더 살펴보니, 역 앞에서 큰 행사가 있었다.

해영 길드의 마스터 '홍해창'과 정화 길드의 서열 3위 헌터인 '신태석'의 만남이었다.

'원작에서 안영호가 복수하려고 함께 폭사한 헌터가 신태석이었지. 갱생 안 될 폐기물이기도 하고.'

강후가 가늘게 눈을 떴다.

장시환이 사람 좋아 보이는 쓰레기고, 채관형이 두 얼굴을 가진 쓰레기라면.

신태석은 그냥 태생부터 겉으로 드러난 모든 것이 쓰레기인 녀석이다. 재활용도 안 되는 수준.

지금 정화 길드에서 대외비적인 궂은일을 맡고 있는 것이 바로 신태석이기도 했다.

장시환과 채관형이 지시를 주로 하는 편이고, 실제 수행은 신태석이 거의 도맡아 하는 식이다.

그때.

부산역 앞에 설치되어있던 대형 전광판을 통해, 오늘 그들의 만남의 이유가 밝혀졌다.

[금일 해영 길드는 정화 길드와 상호 전면 교류를 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부산과 서울에서 명실상부한 1위 길드인 두 세력의 연합은 향후 국내 판도에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됩니다.]

'바뀌었다.'

원작과 흐름이 달라졌다.

원작에서는 장시환이 해영 길드를 혐오하다시피 싫어했었다.

부역자 엔딩을 생각하면... 그 생각 자체가 망상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강후는 원작에서 부역자 엔딩으로 끝나기 전까지의 모든 내용이 '꿈'일 가능성도 고려했다.

즉, 자신이 쓴 원작의 내용 대부분이 지금 이 세계를 살고 있는 장시환의 '상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부역자 엔딩의 개연성도 함께 맞춰진다.

그렇잖은가?

원작에서 장시환이 자신을 정의 그 자체라고 믿으며 행동하고 움직였던 것들이 실제가 아니라면?

지금 빌런이 될 준비를 착실하게 하고 있는 장시환의 행보가 깔끔하게 설명이 된다.

어쨌든 더러운 놈들끼리 양손을 제대로 잡는 모양새라 강후의 입장에서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이러면 전광판의 방송대로 향후 국내 판도가 복잡해진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스마트폰을 확인하자, 이제 막 도착해서 주차 중이라 조금 늦는다는 전세혁의 메시지가 있었다.

강후가 두 사람을 기다리며, 전광판을 통해 이어지는 헌터 관련 뉴스를 좀 더 살폈다.

[정화 길드가 금일 오전 8시를 기해 오산 권역의 토벌을 진행한다고 밝혔습니다.]

[오산에서 인신매매, 마약 밀매, 성폭행과 같은 강력 범죄에 연루되어있는 평정, 바스타드 길드가 척살 대상임을 밝혔습니다.]

[해당 세력은 이미 지명수배자와 범죄 혐의가 있는 헌터가 다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도 빠르네.'

장시환의 오산 권역 토벌은 원작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대외적인 명분이야 토벌이니 정의구현이니 하는 개소리를 늘어대고 있기는 하다.

헌터 치안청과 협력을 하는 구조라서 포장하기에 수월한 부분이 많았다.

어쨌든.

장시환이 오산 쪽을 탐내는 이유는 간단했다. 알짜배기 던전이 많기 때문이다.

길드 차원에서도 육성에 도움이 되고 개인적으로 공략하고자 하는 던전도 많은 곳.

그래서 언젠가는 먹겠지 싶었는데, 그 시기가 원작보다 훨씬 빨랐다. 1년 이상 빠르다.

'평정이랑 바스타드가 쉽게 토벌될 길드는 아냐. 애초에 게릴라전에 능한 놈들이기도 하고.'

강후는 정화 길드의 오산 토벌이 길어지는 그림을 보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그랬다.

그렇다면.

'황금 고블린의 광산 쪽도 경계가 느슨해질 가능성이 있어.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딱인데.'

그간 평정과 바스타드의 전면전으로 엄두조차 내 볼 수 없던 던전의 진입도 욕심내 볼 수 있다.

황금 고블린의 광산.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이 내부에 보상으로 챙길 '먹거리'가 매우 많은 곳이고.

동시에 강후만이 알고 있는 별도의 특수 공간도 있는 던전이다. 챙길 것이 많다는 뜻이다.

일이 재밌게 흘러간다.

이제 어떤 부분에서는 원작보다 시기가 빠르거나, 아예 결이 다른 부분도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이야기의 큰 흐름을 생각하면 영향을 크게 미칠 만한 요소가 생긴 것은 전혀 아니다.

여전히 강후가 알고 있는 수많은 원작의 지식은 언제든 써먹을 수 있는 가치 높은 정보들이었다.

* * *

그로부터 5분 후.

부산역 앞에서 살짝 밖으로 나온 번화가에서 강후가 전세혁과 반세영을 만났다.

전세혁은 전에 봤을 때와 달리 가면을 쓰고 나왔다.

확실히 가면으로 흉터를 가리니 시원한 눈매만 보기 좋게 드러나서 훨씬 더 잘생겨 보였고.

반세영은 던전 안에서 착용하던 특수 고글을 벗고, 풀 메이크업을 하고 나온 덕분인지 상당히 예뻐 보였다. 잘나가는 뷰티 크리에이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미모였다.

반갑게 강후와 인사를 나눈 전세혁이 바로 역 근처에 있는 빌딩 하나를 가리켰다.

"가실까요?"

"빌딩에 뭐가 있습니까?"

"있죠. 정확히는 제 사무실입니다만."

"이 빌딩 전체가 오빠의 사무실이야. 꼭대기 층은 사실상 펜트하우스나 다름없고."

전세혁의 말 대신 반세영이 설명을 덧붙였다.

빌딩 전체를 개인 공간으로 쓰는 헌터라. 이상하지는 않다. 돈만 있으면 다 되니까.

다만 강후의 생각을 복잡해지게 만든 것은 그 직후에 전세혁이 강후에게 건넨 질문 때문이었다.

"혹시 러시아 국적의 까쉬마르 길드에 대해 아십니까?"

93화 Lv. 100 (4)

"압니다."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까쉬마르 길드는 전종두의 오쇼 용병단을 막후에서 조종했던 길드다. 사실상 수족처럼 부렸다.

까쉬마르 길드의 마스터 니콜라이 스트라크가 전종두의 상위 호환 형태였기 때문에.

전종두가 자신의 스승으로 받들어 모신 이력이 존재했다. 성향이 거의 같아서 가능한 얘기였다.

다만 갑작스럽게 까쉬마르 길드에 대한 얘기가 나온 이유가 궁금했다.

차라리 같이 전투에 임했던 김수경이 물어봤으면 이유를 이해라도 하겠는데.

전혀 관련이 없는 전세혁이 오쇼 용병단과 연관된 길드를 얘기하니 흠칫했던 것이다.

전세혁이 앞뒤 맥락 없이 얘기가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언급의 이유를 덧붙였다.

"다름이 아니라 말입니다. 원래 저희와 함께하던 파트너가 그 길드에 납치되어 있어섭니다."

"까쉬마르 길드에요?"

"네, 그렇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함께 갈 던전은 반드시 3인이 합을 맞춰야 하는데, 공백이 생긴 거죠."

3인이 호흡을 맞춰야 하는 던전인데 2인 밖에 없으니, 자신의 빈자리가 생긴 것은 당연했다.

까쉬마르 길드는 오쇼 용병단보다 더 질이 나쁜 놈들이다.

오쇼 용병단이 동네 양아치 같은 느낌이라면, 그놈들은 잘 짜인 하나의 거대한 범죄 조직이다.

게다가 대외적으로도 포장이 잘 되어 있어, 정화 길드만큼 이미지가 좋았다.

특히 러시아 정치권과 줄이 확실히 닿아 있는 탓에 러시아 내에서는 아예 평가가 찬양 일색이었다.

강후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납치되었다는 헌터의 생사가 궁금했다.

"생존은 확인하신 겁니까?"

"네. 어제 연락했습니다. 그쪽에서 요구하는 돈도 보내줬고, 일단 살려는 뒀어요."

전세혁의 표현이 정확하다.

살려는 뒀다.

왜냐면 까쉬마르 길드에 보내준 돈만큼이 목숨으로 치환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돈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까쉬마르 길드는 인질을 매매하거나 실험체로 쓴다.

베주미예 같은 인간 헌터 병기가 되어 나타나는 것도 매우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강후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자, 전세혁이 말을 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찾아가서 다 박살을 내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요."

"이현석 님을 통해서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까?"

강후의 질문은 이현석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인 전세혁에게는 의미 있는 질문이었다.

실제로 이현석은 국내보다 국외에 더 친분 있는 세력이나 길드가 많았다. 러시아 쪽도 마찬가지고.

"현석이에게 부탁하는 것은 너무 면목 없는 문제라 비밀로 하고 있었죠."

"보고 싶어, 동재 오빠...."

그때.

반세영이 살짝 눈시울을 붉히며 납치된 헌터의 이름을 언급했다.

동재. 당연히 누구로 특정할 수는 없는 이름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흔한 이름도 아니었다.

원작의 내용을 꿰뚫고 있는 강후에게 기억나는 이름이 있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동재 오빠라는 분이 박동재 님입니까? 버프계 스킬에 특화되어 있는."

"오! 맞습니다. 동재를 알고 계신 겁니까?"

"알음알음 헌터들 사이에 소문이 돌던 분이라."

전세혁의 놀란 반응에 적절하게 이유를 섞어 둘러댔다. 실제로 흔한 일이기도 하고.

아닌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맞다고 해서 강후도 살짝 당황했다.

박동재.

광란의 지휘자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매우 실력이 뛰어난 버퍼다.

원작에서는 신강후와 박동재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길 뻔했던 것을 장시환이 차단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는 박동재의 스승인 복형석을 장시환이 죽였기 때문이었다.

악인 단죄, 정의 구현이라는 이유가 붙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승자의 주장일 뿐이었다.

어쨌든 장시환의 입장에서는 악인의 제자고, 스승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박동재가 눈엣가시였다.

게다가 그런 박동재가 장시환의 호적수로 신강후가 떠오르면서 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장시환이 위협을 느끼고 죽여버렸던 것이다. 길드의 정예 다수가 동원된 암살이었다.

'박동재는 옆에 두면 무조건 플러스야. 평범한 더하기도 아니고, 거의 곱하기 수준이지.'

지금까지 강후가 반세영이나 정유리 같은 인물의 능력에 매력을 느끼긴 했지만.

박동재를 옆에 놓고서 비교한다면, 말할 정도도 못 됐다.

단 한 번의 공격에 극대화된 위력을 담는 강후에게 버퍼의 지원 여부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박동재는 진정한 의미로 강후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헌터였다.

'구했으면 좋겠는데. 이런 일이 있어서 원작에서 등장 시점이 엄청 늦어졌던 거군.'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 나니까 원작에서 신강후와의 접점이 늦게 생긴 이유가 이해가 갔다.

분명히 박동재는 활용할 가치가 큰 헌터다. 강후는 어떻게든 그와 인연을 엮고 싶었다.

본능적 직감이기도 했고, 동시에 이성적으로 자신에게 잘 맞는 헌터임을 인지해서이기도 했다.

전세혁에게 바람을 좀 넣어보기로 했다. 자신이 직접 나서는 건, 앞뒤가 너무 안 맞는 일이다.

"이현석 님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고 생각됩니다. 파트너의 운명을 외면할 순 없으니까요."

"정말 심각하게 고민 중이긴 합니다."

"필요하다면 제 힘도 보태드리죠."

돈이 엮이지 않으면 좀처럼 나서지 않는 강후의 자발적인 의사였다.

전세혁은 의뢰꾼인 강후가 단순히 선의로 힘을 보태겠다고 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악의가 있을 리는 없을 터. 그러면 사람이 선한 걸까? 전세혁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 * *

이후. 박동재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던전 관련 브리핑이 신속하게 진행됐다.

이미 공략 경험이 있는 전세혁과 반세영이 서로 번갈아 가며, 내용을 풀어냈다.

"일단 던전의 수준은 3인의 레벨 평균으로 결정됩니다."

"문제없습니다."

전세혁의 말에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전세혁, 반세영의 평균점으로 잡히면 약 250 수준일 터.

원하는 난이도와 수준에 딱 맞았다. 그 정도는 이제 충분히 할 만했다.

반세영이 설명을 이어갔다.

"던전 구조는 폐쇄 미로형. 다음 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앞방에 헌터가 있어야 해."

"문이 닫히는 모양이군."

"응, 맞아."

"그러면 앞방이 아니라, 공략을 진행할 방에 헌터가 한 명인 경우는?"

"그때는 방이 활성화가 되지 않아. 즉, 앞방 한 명, 도전하는 두 명이 필수야."

"물건이나 기계 꼼수는?"

"여러 가지를 시도했지만, 지금까지 된 적은 아무것도 없었어."

그렇다면 한 명은 사실상 구경꾼인 셈이다. 머릿수를 채워주는 용도라는 표현이 딱 맞겠지.

아니나 다를까, 전세혁이 강후의 생각을 확인시켜 주었다.

"제가 통로 유지 역할을 할 겁니다. 세영이와 미로 던전 공략에 집중해 주시면 됩니다."

"사촌 동생을 위해 가주시는군요. 경험치 측면에서는 아예 소득이 없으실 텐데."

"뭐. 가끔은 저도 쉴 때가 있어야죠. 세영이 실력도 점검하면서, 겸사겸사 쉬는 겁니다."

"네, 이해했습니다."

"보스 몬스터도 3인 연계 체제라서 호흡을 좀 맞출 필요는 있습니다. 이동하실까요?"

"훈련장이 있으신 모양이죠?"

"네. 거기서 각자 기본 방향성 정도만 점검하면 될 것 같습니다. 포지션이 겹치지 않으니까요."

실력이 우수한 헌터일수록 서로 호흡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높다 보니, 타인과의 연계에 무관심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6층 빌딩을 개인 사무실로 소유하고 있는 전세혁. 그의 훈련장은 또 어느 정도의 규모일까.

강후가 그의 재력에 대한 기대와 함께, 훈련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이후, 처음으로 가 보는 정식 훈련장이기도 했다.

* * *

'역시.'

예상대로 전세혁은 훈련장 건물 하나를 통째로 쓰고 있었다.

보아하니 땅도 사고, 거기에 건물도 직접 올린 듯했다.

바로 옆에는 해영 길드의 제5 훈련장이 있었다.

들어가기 전 해영 길드 소속의 헌터들과 눈이 마주쳤는데, 모두 전세혁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물론 전세혁의 옆에 있는 강후에 대해선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알려진 얼굴이 아니기에.

어쨌든 내부에 들어가니, 온갖 비싼 훈련 시설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시뮬레이션 시설도 있었는데, 가상 던전 환경까지 구현하는 고가의 장비였다.

게다가 고감도의 센서가 장착된 고가의 훈련복도 10벌 가까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훈련장 하나를 세우는데, 수백억 원은 거뜬히 썼을 법한 최상의 장비의 향연이었다.

"훈련복으로 갈아입으시고. 훈련 레벨은 300으로 맞춰서 해 보겠습니다. 낮은 것보단 높은 게 좋으니."

"그러시죠."

전세혁의 제안을 받았다.

훈련은 결국 그 자체로 실전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어서 긴장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마련.

그래서 의도적으로 수준을 한두 단계 더 높여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얼마 후.

훈련이 진행됐다.

가상 훈련의 콘셉트는 '회피'와 '저격'으로 잡혔다.

원거리 공격이 많다는 미로 던전의 구성상, 회피가 최우선 과제가 될 일이 많아 필수였고.

저격의 경우는 반세영이 확실하게 강후를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한 사전 점검 차원이라 꼭 필요했다.

휴식 시간 없이, 약 5시간의 집중 훈련이 진행됐다.

전세혁이 한 말에 따르면, 이렇게 긴 시간을 훈련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과거에 박동재와 같이 훈련을 했을 때도, 보통 3시간 정도면 지쳐 나가떨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후는 훈련 내내 작은 신음 한 번 내지 않았고, 묵묵히 구슬땀을 흘리며 집중했다.

그렇게 훈련이 끝나고.

강후가 별도의 샤워실에서 땀에 범벅이 된 몸을 씻어내는 동안, 남은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의 주제는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강후였다.

"오빠. 봤어? 클린 히트, 제로 대미지. 결과 분석표에 나온 선규 오빠의 훈련이야."

"봤다. 대단하군."

"대단하군, 으로 끝날 상황이야 이게? 훈련인데도 단 한 번을 피격도 안 당했다구."

"다른 사람이면 더 놀라서 말을 했겠지. 하지만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정선규 씨는 충분히 인정받을 실력을 가진 암살자라고."

"게다가 단검 투척도 총 스물아홉 번을 했는데, 빗나간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실력과 기본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

전세혁은 처음부터 강후가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동현의 사냥개, 차소희를 일대일로 제압한 남자다. 3배에 가까운 레벨 차를 극복하고 말이다.

이미 떡잎부터 다른 헌터였기에 그가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는 것이 역설적으로 놀랍지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박동재의 대체자로 강후를 미련 없이 생각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검증된 실력을 가져서다.

'세영이가 더 성장하려면, 신강후처럼 앞에서 뛰어놀 수 있는 판을 만들어줄 실력자가 필요해.'

전세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촌 동생의 성장을 위한 탄탄대로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강후와의 관계는 매우 중요했다.

박동재를 나중에 구해서 데려올 수 있게 된다면, 그 역시 강후의 곁에 있게 하고 싶었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으면서 헌터를 보는 눈이 트이게 된 전세혁의 확신이었다.

강후에게 부족한 것은 레벨뿐이다. 잠재력과 실력은 이미 예전에 다 갖췄다.

그런 인재를 두고도 외면한다는 것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자체로 큰 손해이기 때문이다.

94화 가치 증명 (1)

* * *

던전 공략이 시작됐다.

던전 정식 명칭이 따로 있기는 했지만, 세 사람은 별칭으로 '미로 던전'이라고 불렀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마주하게 되는 던전은 이런 방식으로 복잡하게 꼬아놓는 형태가 많기에 감회가 남달랐다.

사실 원작자의 의중이 대폭 반영된 던전 콘셉트이기 때문이다.

미로형 던전으로 만들어두면 난이도를 높이기 좋아서, 쓰는 입장에서는 참 재밌었다.

하지만.

'도전하는 입장이 되니 거지 같군.'

직접 체험하는 입장이 되니,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상시 긴장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음."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포인트를 선점하고 자리를 잡은 저격수 셋이 보였다.

던전 입구를 지키는 보초다. 실력이 뛰어나진 않지만, 저격수다 보니 안심할 수는 없다.

약속된 합에 맞춰, 강후가 바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녀석이 강후의 타깃이다.

[도약]

[가속]

[도약]

가장 기본적인 스킬을 조합해서 연계했다. 지금으로서는 타깃과의 거리를 빠르게 좁히는 것이 우선.

순간적으로 몸에 과부하가 걸리기는 하지만, 가속과 도약의 단순 조합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타앙!

먼저 반세영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삼각 형태로 자리를 잡고 있던 저격수 중 하나가 반세영의 저격에 오른쪽 어깨를 맞았다.

그리고 전세혁은 자신의 주특기인 화살 공격을 보류하고는 오히려 저격수의 공격을 유도했다.

우측 뒤편의 저격수를 노리려는 척하다가, 두 걸음 뒤로 물러선 것이다.

다음 순간.

타앙! 퍼석!

방금까지 그가 발을 딛고 있던 자리에서 불꽃이 튀며, 빗나간 마탄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전세혁은 공격 대신 유도를 선택했고, 노림수는 성공이었다.

이제 강후의 차례였다.

시이잉!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저격수의 총이 정조준되었을 때의 느낌이 났다.

마탄을 유도하는 마나의 흐름이 한 점에 집중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아주 미세한 통증이다.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어지간한 헌터도 절대 느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선천성 마나 과민증으로 감각이 발달해있는 강후에게는 쉽게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그림자 걸음]

스파앙!

그 순간에 강후의 그림자가 세 갈래로 흩어졌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당황한 저격수의 총구가 흔들렸다. '진짜' 강후를 노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내 그림자는 가짜고, 진짜 강후의 모습은 그대로 제자리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강후는 때마침 이동 경로에 있었던 나무 뒤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우우웅!

저격수가 마나 출력을 높였다.

작정하고 나무 뒤에 숨었으니, 나무 기둥까지 통째로 강후의 머리와 날릴 참이었다.

표적인 강후는 여전히 제자리였고, 저격수는 회심의 미소와 함께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퍼서석!

고출력의 마탄답게 나무가 통째로 터져 나갔다. 당연히 뒤에 숨어 있을 강후의 머리야 운명이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

저격수는 당연하게 흩날려야 할 강후의 살점과 피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방금까지 그림자로 보이던 형체 하나가 강후의 모습으로 뒤바뀌는 것이 목격됐다.

이미 그 시점에 강후는 저격수를 향해, 혈루를 던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전광비도]

쿠와아아!

워낙 가까운 거리인 데다가, 강후가 완력까지 힘껏 실은 탓에 단검에서 굉음이 들렸다.

순식간에 공간을 가르며 날아간 혈루는 저격수가 손을 쓸 틈도 없이 양미간에 박혀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강후의 접근을 인지하고서 전세혁이 아닌 강후를 노리려던 저격수 역시.

푸우욱!

동료를 따라 즉사했다.

전세혁이 공격 대신 공격 유도로 저격수의 공격을 한 턴 빼냈을 때.

이미 강후는 연계를 짜둔 상태였다. 전세혁이 선공하지 않았음을 알고, 다음 생각을 해 뒀었다.

전세혁이 담당하기로 했으니 그가 처리하겠지, 하고 넘겨짚지 않았다는 얘기다.

"와우."

"깔끔하다, 오빠. 그치?"

"그러게 말이다. 보통 암살자들이 실력 위주로 커버하는 경우가 많은데. 선규 씨는 그 안에 수 싸움을 반드시 넣는 편이야."

"머리 싸움하는 거, 되게 부담되지 않아? 상대가 똑똑하면 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잖아?"

"세영아, 바꿔 생각해 봐. 내가 똑똑하다는 확신이 있으면, 머리싸움만큼 재밌는 게 없어."

"난 영 젬병이라...."

"네가 삼국지의 제갈량이 되었다고 생각해 봐. 멍청한 놈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할걸?"

전세혁이 반세영의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해 주었다.

그녀는 분명 머리보다는 몸으로, 본능적으로 싸우는 타입이기는 했다. 물론 그게 또 장점이다.

어쨌든 그렇게 입구 장애물(?) 처리가 끝났다.

예전에 박동재와 왔을 때는 원거리 즉시 저격이 가능한 사람이 반세영밖에 없었기 때문에.

저격수 하나는 잡아도, 두 저격수는 시간을 두고 공략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전세혁이 활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기는 하나, 마탄처럼 화살을 신속하게 날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공략에서는 강후가 놈들 사이를 휘저은 덕분에 너무 쉽게 길이 뚫려 버렸다.

"제대로 된 암살자와 합을 맞춰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 떨리네."

반세영은 자신도 모르게, 이미 강후를 '제대로 된 암살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헌터와 팀플레이를 해온 그녀지만, 늘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은 한두 개는 있었다.

하지만 강후는 아니었다.

뭔가를 불만처럼 생각할 부분이 떠오르기 전에 이미 그 행동을 먼저 하고 있었다.

방금도 마찬가지.

강후가 전담했던 저격수를 처치한 시점에 이미 다음 공격이 전세혁을 노리던 저격수에게 갔다.

다른 헌터였다면.

반세영이 지원 화력을 더해주거나, 아니면 타이밍이라고 외쳐주기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척하면 딱의 개념은 어지간하게 호흡을 맞춰본 사이가 아니면 성립하기 힘들어서다.

"잘해 봐. 좋은 파트너가 될 것이라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있을 때, 최선을 다하도록 해."

전세혁이 웃으며 말했다.

강후를 본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헌터의 실력과 기본기는 잠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강후는 암살자로서의 기본기는 당연히 잡혀 있고, 확장성까지 뛰어난 헌터였다.

그에게 '암살자'라는 하나로 통일된 직업명을 붙여주는 게 맞을까 싶을 정도다.

만약 비공식적인 명칭을 붙여도 된다면.... 듀얼 클래스, 트리플 클래스 같은 명칭은 어떨까 했다.

가지고 있는 스킬이 암살 계열과는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가진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제부터 전세혁은 경험치 획득이 아니라, 방을 열어주는 역할에만 집중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약속이 됐다.

나중에 보스 몬스터 공략 시에는 힘을 보태겠지만, 그때도 메인이 아닌 서브의 개념이다.

이 3인 팀의 메인 리딩과 오더를 맡은 사람은 가장 레벨이 '낮은' 강후였다.

밖에서 보면 웃기지만.

직접 팀원으로서 안에서 본다면 절대로 웃을 수 없는 당연한 구성이었다.

* * *

"첫 번째 방을 빠르게 클리어하면, 지름길로 이동 경로가 열린다고 했지."

"맞아. 브리핑 때도 얘기했었지만, 던전이 빨리 공략될수록 보상이 좋기도 하고."

"그럼 도핑을 좀 해야겠군."

카득! 카드득!

강후가 솔라키움을 꺼내어 힘껏 씹었다.

마음 같아서는 매드 솔라키움을 먹고, 원 없이 마나를 펑펑 쓰면서 싸우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매드 솔라키움이 너무 귀했다. 무한대로 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마스터 K를 만나려는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이 매드 솔라키움에 엮인 문제였다.

돈만 있다고 무조건 구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닌지라, 그의 조언을 구하고 싶은 것이다.

"그건 뭐야?"

"솔라키움."

"진정 효과 말고는 딱히 뭐 없지 않아? 통증 억제도 썩 잘 되는 편은 아니던데."

"뭐, 루틴처럼 껌을 씹는 개념 정도라고 해 두지."

"하긴. 취향은 존중!"

강후의 특수한 몸 상태를 알지 못하는 반세영은 솔라키움이 강후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모를 수밖에 없다.

강후는 확신했다.

솔라키움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마음 놓고 성장해 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심한 핸디캡이 될 수도 있었던 '선천성 마나 과민증'을 메리트로 바꿔준 것이 이 녀석이다.

"두 분. 준비되면 손을 들어주세요.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던전의 카운트가 시작될 겁니다."

전세혁이 친절하게 안내했다.

그가 홀로 '출발의 방'에 남게 되면, 바로 다음 방이 열리게 된다.

통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직전 방에 반드시 한 사람은 있어야 하므로.

그는 끝까지 이 역할을 하게 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아주 위태로울 때, 강후 또는 반세영의 요청에 따라 원거리 공격을 지원할 예정이었다.

그전까지는 요청이 없다면 아무리 위급해 보이는 상황이어도, 절대 힘을 보태지 않기로 했다.

실력 향상을 위해, 쉽게 갈 수 있는 도움은 지양하고 싶은 강후와 반세영의 공통된 의지였다.

출발 전.

강후가 반세영에게 말했다.

"뒤 안 볼 거야. 믿고 달릴 테니까, 지원해 줘. 그럼 밥값은 내가 2인분 이상은 꼭 하지."

"믿어본다?"

"안 믿을 수 없을 거야."

자신 있게 말하는 강후의 말에 반세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그런 강후의 자신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늘, 강후는 본인의 자신감에 대한 이유를 스스로 증명해 왔다. 그래서 불신은 없었다.

드드드득.

문이 열리는 순간.

파앗!

강후의 모습이 반세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미 가속, 도약을 연달아 전개하면서 방의 중앙부까지 순식간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끝자락에서는 그림자 걸음까지 쓰면서, 더 깊은 곳에 그림자를 밀어 넣고 위치를 바꿨다.

덕분에 강후는 문이 전부 다 열리기도 전에 이미 방의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는 방 안에서도 가장 몬스터가 많은 곳이었다.

몬스터 타입은 '각성형 오크'로 맷집이 좋지는 않았다. 대신 공격 자체의 화력은 높았다.

타앙!

꾸웨에엑! 웨엑! 뀌엑!

불을 뿜은 반세영의 마탄이 한 방에 오크 넷의 머리를 통으로 날려 버렸다.

맷집이 약하고, 밀집도가 높다 보니 한 번의 공격으로도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컸다.

이 방의 공략 포인트는 이런 힘자랑이 아니라, 최대한 빨리 모든 몬스터를 전멸시키는 것이다.

강후가 바로 판을 짰다.

[풍뢰진]

보란 듯이 풍뢰진을 깔았다.

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온갖 전류와 칼바람의 공격을 받게 되는 그야말로 죽음의 공간.

풍뢰진의 중심에 자리한 강후는 만약을 대비해 바로 보호 결계를 스스로에게 걸었다.

곧 이곳이 죽음의 지대로 바뀔 참이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이 미끼가 되지 않으면 몬스터도 모여들지 않을 것을 알기에 일부러 미끼가 된 것이다.

어차피 풍뢰진에 자신이 죽지는 않을 것을 알기에 던져볼 수 있는 노림수이기도 했다.

'전략에는 이렇게 내 일부를 희생시키면서, 적의 목숨을 통째로 가져가는 방법도 있기 마련이지.'

강후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전략과 머리싸움에는 정말 끝이 없다.

그리고 멍청한 놈들을 꾀어내어 단번에 몰살시키는 쾌감은... 가장 짜릿한 것이었다.

어떤 쾌감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어쩌면 성적(性的)인 것보다 더한 쾌감일지도 모른다.

95화 가치 증명 (2)

* * *

"저렇다니까. 노림수가 확실해."

팔짱을 끼고, 첫 번째 방에서의 전투를 지켜보던 전세혁이 강후에 대한 감탄이 담긴 말을 내뱉었다.

자신이 미끼가 된 강후는 풍뢰진을 깔아놓고, 그 안에서 몰려드는 몬스터를 모조리 잡았다.

전투력이 향상된 각성형 오크라고 해서 맷집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바람과 전류의 힘으로 할퀴어대는 풍뢰진은 전세혁이 봤을 때도, 오래 버티기는 힘든 스킬이었다.

광역 스킬인 데다가, 그 안에서 휘몰아치는 공격의 빈도가 많아서 치명적이었다.

끄웨에에에!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각성형 오크들이 사방에서 넝마가 되어 쓰러져 갔다.

그리고 강후가 전광비도로 단검을 날릴 때면, 오크 네댓 마리가 줄줄이 머리가 관통당해 죽었다.

단검이 화력 자체가 엄청난 탓에 머리를 부수고, 또 다음 오크의 머리를 부쉈던 것이다.

한편.

강후도 만족스럽게 자신의 화력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이번에 전종두에게 빼앗은 칼립스 반지 세트가 효과가 탁월하네. 근력 250의 체감이 확실히 되는데?'

대폭 오른 근력은 그 값어치를 톡톡히 해 줬다.

근력 스탯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암살자의 특성상 당연한 결과다.

'생기 흡수가 있으니 체력 부담도 없고.'

강후는 널브러진 각성형 오크의 시체를 보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 체력에는 문제가 없지만, 설령 문제가 생긴다 해도 대안이 있으니 걱정이 없었다.

힐러나 포션이 없을 경우, 체력 관리를 강제 받는 다른 헌터를 생각하면 큰 걱정을 지운 셈이다.

'빨리.'

강후가 더 속력을 냈다.

각성형 오크는 복잡하게 머리를 굴려야 하는 몬스터가 아니다.

전투력과 지능 측정은 끝났다. 결론은 빠르게, 신속하게 두들겨 패면 된다는 것. 간단했다.

[환영술]

오크들 사이로 아예 보란 듯이 환영술로 만든 분신을 적극적으로 날려 보냈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통찰력이 떨어지는 녀석들은 일단은 가까이 보이는 것부터 쳤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사이.

얕은 혼돈과 시야 강탈을 마음껏 오크들 사이에 뿌려둔 강후가 그 안에서 칼춤을 췄다.

애초에 이런 정신계 스킬에 저항할 스탯 자체가 없는 오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서 동족의 머리를 치거나, 엉뚱한 곳에 가서 몸을 들이박았다.

강후는 그렇게 삽질을 하는 오크들의 뒤로 가서, 경추에 단검을 쑤셔 넣고 꺾으면 그만이었다.

타앙! 타앙! 타앙! 타앙!

"진짜 편하네. 밥상이야?"

포인트를 잡고 엎드린 반세영이 흐뭇한 표정으로 손쉽게 방아쇠만 딱딱 당겼다.

강후가 몬스터들의 주의를 전부 끌고 있는 탓에 자신 쪽으로는 아예 오크들이 오지도 않았다.

얼마나 여유가 있는지, 그녀가 중간중간 고개를 돌려서 전세혁을 쳐다보기도 할 정도였다.

예전에 박동재와 왔을 때는 그녀가 최전선 공격 포지션이었다.

전세혁은 도움을 주되 관망하는 존재고, 박동재는 버퍼라서 전투는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박동재가 아닌 다른 근거리 딜러 계열의 헌터와 왔을 때도 반세영의 전투는 쉽지 않았다.

지금의 강후처럼 깔끔하게 주의를 돌려주는 센스 있는 헌터가 많지 않을뿐더러.

자기 편하겠답시고, 은근히 역할 분담을 요구하는 헌터도 꽤 많았기 때문이다.

혼자 고생하기 싫어하는 마음이야 이해하기는 했다.

하지만 조준, 저격, 위치 선정이 중요한 거너에게 잦은 이동은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

이런 부분에서 고생을 한 경험이 많은 반세영은 지금 이 순간이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거너가, 거너로서, 팀원만 믿고, 조준과 사격만을 반복하면 된다는 이 사실!

레벨 250이 될 지금까지 거너 생활을 하면서 거의 경험해 본 적 없는 '신세계'였다.

'정말 안 믿을 수가 없잖아!'

반세영이 환하게 웃었다.

전투 돌입 직전.

자신 있게 말했던 강후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헛소리가 아닌 현실 그 자체였다.

확실히 편했다.

동시에 공략 속도도 극적이라고 할 정도로 빨라졌다.

반세영의 마탄 저격이 보통 강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따금 각성형 오크 예닐곱 마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가는 광경을 볼 때면, 강후도 놀랄 정도.

어쨌든 일부 오크가 반세영에게 관심을 갖는 것 같으면, 그 역시도 강후가 방향을 돌렸다.

그림자 걸음처럼 시야를 어지럽히고, 상황에 따라서 위치를 바꿀 수 있는 스킬까지 있다 보니.

멀리 있는 반세영에게 마음 놓고 접근할 수 있는 각성형 오크는 한 마리도 없었다.

그나마 일부는 접근하는 과정에 그녀의 마탄에 목숨을 잃었고 말이다.

결국 강후와의 강제된 전투에서 오크들은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완벽한 속도전!

수백 마리 오크를 상대해야 했던 방에서의 전투는 수월하게, 몇 분 만에 끝이 났다.

그리고 시스템의 채점이 시작됐다.

* * *

"고생했어."

"내가 고생은 무슨. 오빠가 다 했는데."

채점 결과를 보기 위해 강후가 반세영의 옆으로 왔다.

각자의 상태창에 표시되기는 하지만, 결과의 기쁨이나 슬픔은 가까이서 공유하는 게 좋으니까.

[임의로 선별한 유사 던전의 데이터 1만 개를 수치화하여, 이번 공략에 대한 평가를 진행합니다.]

시스템의 안내 메시지가 동시에 출력됐다. 강후와 반세영, 전세혁 모두 같은 시기였다.

세계는 넓다.

이번에 공략한 형태와 같은 방을 공략한 헌터의 수는 당연히 전세계에 차고 넘칠 것이다.

그래서 데이터 1만 개를 수치화한다는 시스템의 안내가 허무맹랑하게 들리진 않았다.

"예전 최고 기록은?"

"A. 각성제 풀도핑 하고, 비싼 아이템까지 대여해와서 작정하고 밀어봤는데 A가 최대였어."

반세영의 실력과 전투가 불가능한 박동재의 상황을 고려해서 B 정도를 예상했는데.

박동재의 버프 효과가 좋긴 좋은 모양이었다. 예상보다 한 등급이 더 높았다.

어쨌든 그건 그거고.

이번 판정 결과가 궁금했다.

꽤 빠르게 공략한 것 같기는 한데, 비교할 지표가 마땅치 않으니 예상이 안 된다.

바로 그때.

[공략 시간과 몬스터가 입은 분당 평균 대미지를 합산하여 채점한 결과. S+ 판정을 받았습니다.]

[S+ 판정에 대해 시스템이 부여하는 특전에 따라, 해당 던전의 '지름길' 루트가 열립니다.]

[S+ 판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신속하게 던전을 공략할 경우, 적요석 두 개를 '확정' 보상합니다.]

"와, 이거 실화야? 미쳤네?"

반세영이 화들짝 놀라서는 몇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고글을 벗고 몇 번을 눈을 비볐다.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후가 분명 깔끔하게 판을 짜준 것은 맞으니, 아주 높게 잡아서 S를 생각했던 그녀였다.

전세혁의 생각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좀 더 보수적이라 A+를 예상했었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최상의 판정을 받은 것이다.

그만큼 공략이 빨리 됐고, 동시에 모든 몬스터에게 강력한 위력의 공격이 들어갔다는 뜻이었다.

우연이 겹쳐서 몬스터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화력 집중이 됐다는 얘기다.

"적요석을 확정한다라...."

"오빠, 진짜 미쳤나 봐!"

퍼억!

반세영이 강후의 어깨를 쳤다.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다행이지, 아무 생각 없었으면 어깨가 휙 돌아갔을 한 방이었다.

그만큼 반세영은 놀라 있었다.

강후 역시 이 속도를 잘 유지해서 끝까지 간다면, 적요석을 얻을 수 있다는 보상에 눈길이 갔다.

스킬 업그레이드에 필수인 적요석은 돈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희귀 물품이기 때문이다.

돈이 차고 넘치게 있어도 못 산다. 구하기가 어려워서다. 누구도 팔려고 하지 않고 말이다.

그래서 시장에서 통용되는 가격은 실제 거래가가 아니었다.

친구 또는 가족 사이에 거래가 이뤄진, 지극히 개인적인 거래의 공식 기록일 뿐.

[특히 해당 도전자의 경우, 가장 낮은 레벨에도 불구하고 몬스터의 급소를 정확히 노렸습니다.]

[수집된 던전 데이터 상, 가장 레벨과 간극이 큰 실력을 보여준 멋진 도전자입니다.]

"시스템이 칭찬도 해 줘...?"

이어진 시스템의 칭찬과 강후의 모습을 담은 사진 출력에 반세영이 입을 떡 벌렸다. 생전 처음 보는 메시지여서다.

"훗."

강후가 피식 웃었다.

미로 던전 계열은 이런 식으로 도전하는 헌터에 대해서 자체 평가를 하고.

실력이 매우 우수한 헌터에게는 메시지로 그의 능력을 칭찬한다. 원작의 설정이다.

그래서 생소하지 않았지만 반세영은 첫 경험인 모양이었다. 전세혁도 그녀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던전 카운트에 합산되지 않는 5분의 휴식 시간이 주어집니다.]

[재정비를 마치고, 다음 방으로의 입장을 준비해주세요.]

짧은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강후가 회수하지 못한 투척용의 연습 단검을 각성형 오크의 시체 사이에서 뽑아 들었다.

그리고 반세영은 과열된 총구를 특수 장비로 냉각시키며, 강후를 향해 엄지를 세워 보였다.

"오빠. 나 버스 탄다?"

버스.

레벨이 한참은 높은 그녀가 자신에게 할 말인가 싶었지만....

상황은 정말 그랬다.

판을 짜고 흘러가게 만드는 원동력은 분명히 강후에게 있었다. 강후의 생각대로였다.

* * *

다음.

강후 일행이 입장한 다음 미로 던전은 '팽창의 방'이었다.

앞서 미친 듯이 전투만 해야 했던 콘셉트를 생각하면, 팽창의 방은 구성이 간단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멀어져가는 던전 끝 지점, 작은 제단 위에 있는 골드 버튼을 누르면 됐다.

그 즉시, 공략이 종료되는 것이다.

물론 던전의 팽창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해서, 공략에 실패하는 것은 아니었다.

최대 정점을 찍은 팽창의 방은 다시 수축하게 설계되어 있고, 그때 버튼을 누르면 됐다.

문제는 그때까지는 사방의 리젠 포인트에서 몰려드는 몬스터를 상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처음 세팅된 몬스터를 제외하고, 리젠 몬스터는 경험치를 주지 않기에 장기전은 절대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몬스터들이 살상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죽으면 끝이었다. 다음이 없다는 얘기다.

입구.

진입 전의 30초가 대기 시간이었다. 던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견적을 가늠한다.

강후는 나름의 생각을 끝낸 상태였다. 그때, 반세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오빠, 예전에 내가 봐둔 포인트가 있어. 거기만 지키면 일당백도 가능해."

"버티기로 가자?"

"좋은 생각 있어?"

"내가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어서 말하지 못했는데. 이거, 될 것 같다."

"뭐가 된다는 얘기야?"

"골드 버튼, 내가 누를 수 있을 것 같다고."

"뭔 소리야, 안 돼. 내가 동재 오빠한테 가속 버프를 한계치까지 받고 해도 새 발의 피도 안 됐어."

"쉽게 생각하자. 일당백 포인트는 네가 지키고 있어. 나는 버튼을 쫓을게."

"오빠. 그러다 꼬이면, 돌아오는 길에 몬스터 지옥이야! 앞방이랑 몰린 개념이 다르다구!"

"내기하자. 만약에 내가 골드 버튼을 쫓아가서 못 누르면, 그때는 나중에 적요석 하나를 양보하지."

"...오?"

생각지도 않은 제안에 반세영의 귀가 쫑긋했다. 적요석의 유혹은 그만큼 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강후가 빠르다고 한들 급속도로 팽창하는 끝을 쫓을지 의문이었다.

입장하자마자 골드 버튼이 코앞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소형 던전 구성 요건에 맞춰, 500m 이상 떨어진 곳에 제단과 버튼이 있다.

그리고 1초에 수십 미터씩 멀어지는 끝을 쫓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럼 그 이상의 속도로 쫓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중간에 몬스터의 방해도 있고 말이다.

반세영이 솔깃한 표정만 짓고는 별다른 말이 없자, 강후가 그녀에게 채근했다.

"서로 적요석 하나 걸고. 한다, 못한다. 어때? 무료한 던전 공략에 이런 재미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어느새 강후는 이 던전을 즐기는 중이었다.

반세영과 전세혁만이 진지하고 심각하게 임하고 있을 뿐이었다.

강후의 입가에 좀처럼 보기 힘든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신의 몸이 도전할 수 있는 한계, 그 끝을 시험하는 재미가 있을 듯했다.

96화 가치 증명 (3)

"콜!"

반세영의 호응과 더불어 거래가 성사됐다. 적요석이라는 희귀 재료가 걸린 큰 베팅이 된 셈.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강후의 제안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팽창의 방은 반세영이 예전에도 몇 번이나 전세혁, 박동재와 왔던 방이었다.

스탯이 압도적으로 좋은 전세혁도 이 방은 팽창 속도의 절반도 따라가지 못했다.

온갖 가속 버프와 민첩 아이템을 둘러도 안 되는 건 안 됐던 것이다.

특히 데이터로 만들어 기록하기를 좋아했던 박동재는 이런 최종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 레벨 500이 넘어가는 전문 암살자 계열의 헌터가 특화 스킬 정도를 써 줘야 가능하다.

견적이 이렇게 나와 있던 상황이었기에 반세영은 박동재의 안목을 믿었다.

그는 틀린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틀릴 것 같으면 애초에 말도 꺼내지 않았으니까.

[시작합니다.]

스르륵.

이내 팽창의 방으로의 진입 경로를 가로막고 있던 결계가 허물어졌다.

파팟!

동시에 반세영은 앞서 말해 두었던 일당백 포인트로 향했다.

그곳만 선점해 두면 팽창의 방에서의 디펜스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버티기만 하면 된다.

한편 강후는 가속 상태에 돌입하면서 바로 도약을 전개했다.

그리고 도약의 12m 이동이 끝날 즈음에 바로 그림자 걸음을 써서 다음을 연계했다.

그림자 걸음은 사용하는 순간, 세 개의 그림자가 강후의 몸을 중심으로 앞으로 뻗어져 나간다.

그 자체가 일종의 도약 효과가 있었다. 전방 8m 정도의 지점까지 그림자가 한 번에 쭉 방출되듯 나오는 구조라서다.

도약을 연달아 두 번 쓰면 몸에 엄청난 과부하가 걸린다.

하지만 도약, 그림자 걸음, 도약 이런 식으로 연계하면 상대적으로 과부하가 덜 걸린다.

예를 들어 전자의 과부하 수치를 10으로 한다면, 후자는 5 정도만 걸리는 식이다.

강후가 연속적으로 가속 스킬을 스킬과 스킬 사이의 텀마다 밀어 넣었다.

평소 같으면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가속 스킬의 장점은 한계 없이 무한대로 가속이 가능하다는 점이지만, 반대로 단점이기도 했다.

육신이 버텨낼 수 있는 한계를 무시하고, 기계적으로 가속을 걸어 주기 때문이다.

즉, 아무 생각 없이 가속을 썼다가는 몸이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질 수도 있었다.

부러지면 차라리 다행이고, 재수 없으면 터지거나 갈가리 찢어져 죽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슬슬 오는군.'

가속을 다섯 번 정도 사용한 시점에 이르자, 몸에서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이 정도에서 그만하라고. 더 하면 몸에 문제가 생긴다고. 적당히 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한 번의 실수에도 목숨이 오가는 세상에서 '적당히'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적당하게 살아서는 적당하게 성장하다가 적당히 죽는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빌어먹을 디스토피아 같은 세상은 한계까지 자신을 밀어 넣어야만 살만하도록 만들어졌다.

원작자가 굳은 의지가 담긴 어둡고 축축한 세계관이다.

그렇기에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성장할 수 있고 한 단계 뛰어넘을 수 있다.

같은 시각.

"뭔데, 저 오빠? 무서워...."

반세영은 어느 정도 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슬슬 움직임에 잔상이 생기는 강후의 모습을 봤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강후의 뒤에 마치 혜성처럼 꼬리가 생겨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빠르다, 진짜 빠르다, 정도의 생각이었던 감상이 지금은 저게 가능해? 로 바뀌었다.

그랬다.

강후는 인체, 아니 헌터의 육신으로서도 감당할 수 있을 수준을 넘은 경지에 도달한 듯했다.

뒤를 돌아보니, 전세혁 역시도 최대한 허용되는 위치까지 앞으로 나와 현장을 살피고 있었다.

몸이 버티는 것은 둘째치고, 과연 스킬의 압박을 정신이 버텨낼 수 있을까 싶었다.

아무리 봐도 강후가 스킬을 쉴 새 없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킬은 항상 정신의 집중을 필요로 하는 만큼, 저렇게 계속 사용하면 머리가 버틸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반세영에게 보이는 강후의 뒷모습에는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은밀하게 먹잇감을 쫓는 맹수처럼 강후는 조용히 멀어지는 제단을 쫓고 있었다.

"...."

이런 식의 공략 방법을 수도 없이 생각했고, 테스트도 해 봤던 그녀다.

당연하게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었다. 적어도 자신이 경험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파르르르.

손끝이 떨렸다.

이제 몬스터들이 막 나오고 있는 참이고, 녀석들이 반세영에게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 녀석들이야 잡고 있는 포인트에서 한 놈씩 차례대로 잡으면 그만이었다.

타앙! 타앙!

반세영이 기계적으로 방아쇠를 당기며, 계속 시선을 강후에게 뒀다.

어느 시점엔가 강후의 몸 주변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더 빨라진 것이다.

반세영은 헌터가 된 이후, 처음으로 다른 헌터를 보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레벨 250이 될 때까지 성장해 오면서, 실력 좋은 헌터들을 많이 봐왔지만.

그들의 능력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헌터이기 때문이다.

헌터이기에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고, 능력 또한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했다.

한데 강후의 능력은 예외였다.

레벨 100도 되지 않은 헌터가 보일 수 있는 능력이라고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이제 걸음마를 뗀 어린 아기가 100m를 9초대에 달리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말이 안 되잖은가?

그런 일이 강후에게서 벌어지고 있었다.

* * *

'나도 어지간히 미친 모양이군.'

그 무렵, 강후는 웃고 있었다.

한계에 일찌감치 돌입한 몸뚱이는 한참 전부터 살려달라는 무언의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몸 전체가 뜨거운 열기 속에서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이 된 느낌이었다.

물론 가속으로 인해 증폭된 공기와의 마찰은 보호 결계로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보호 결계가 모든 압박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경감 효과랄까.

몸이 느끼는 부담도 부담이나, 사실 더 큰 문제는 스킬의 연속 사용에서 오는 고통이었다.

시야가 온통 검게 변하는 블랙 아웃이 계속 일어났고, 뇌가 터져나갈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으읍."

쿨럭, 하고 나올 뻔했던 기침을 강후가 속으로 삼켰다. 사소한 기침도 지금은 큰 방해가 된다.

몸과 정신에 걸리는 압박이 커질수록 역설적으로 무아지경에 접어드는 느낌도 들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나의 과도한 사용으로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발동하고, 체력이 급강하하고 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정신은 멀쩡했다.

고통이 커지고 뚜렷해질수록, 세상의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던 것이다.

'터질 것 같고, 쓰러질 것 같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확신이 들었다.

몸과 정신이 지금 같은 혹독함을 즐기는 것 같았다. 참을 수 없는 희열이 느껴진달까.

'미친놈.'

강후가 스스로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을 떠올리며 웃었다.

이쯤 되자, 성좌들이 앞을 다투어 메시지를 쏟아내는 것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용을 보진 않았지만,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자신에 대한 찬사나 놀람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멀어지기만 하던 제단이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방의 팽창 속도를 따라잡은 수준을 지나, 역전한 것이다.

우직하게 쫓았다.

목표 하나만 보고 있으니, 다른 것에는 아무 관심도 가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몸에도.

그렇게 얼마나 쫓았을까?

순식간에 가까워진 제단이 마치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왔고.

타악!

강후가 제단 위에 있던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던전의 모든 것이 멈췄다.

방의 끝없는 팽창도, 그리고 반세영에게 몰려들던 몬스터의 흐름도.

모든 것은 한 줌의 재가 됐고, 그것은 고스란히 이 방에 있는 두 사람의 결과가 됐다.

[해당 던전의 공략에 소요된 시간을 계산한 결과, S+ 판정을 받았습니다.]

"후우...."

강후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동시에 사라진 모든 몬스터의 경험치가 일괄적으로 정산되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단숨에 레벨이 96으로 뛰었다.

방 하나만 공략했는데도 불구하고 레벨이 즉시 한 계단을 올라가 버린 것이다.

보통 레벨 100을 앞둔 시점이 되면, 던전 하나에서 레벨 1을 올리는 것도 어려웠다.

괜히 헌터들이 레벨업에 목숨을 거는 게 아닌 것이다. 정말 어렵고 오래 걸리는 인고의 길이다.

"하면... 되긴 하는군."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몸과 정신을 극한, 아니 극한보다 더한 수준까지 밀어붙인 대가를 치르는 중이었다.

분명 주저앉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강후의 시선은 하늘로 향해 있었다.

버틸 힘이 조금도 없는 몸뚱이가 중력의 흐름에 순응한 모양이다.

늘상 하던 체력 포인트 투자를 마친 강후가 오랜만에 상태를 살폈다. 중간 점검의 시간이다.

[신강후 Lv. 96]

[클래스 : 암살자]

[고유 재능 : 제법 우수한 주력 / 대단히 뛰어난 동체 시력]

[근력 470] [민첩 85]

[체력 532] [마력 20]

[항마 170] [맷집 395]

'누가 이 스탯을 레벨 100도 안 된 암살자의 스탯이라고 보겠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간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 덕분에 마나에 스탯을 투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성장 동력을 체력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현재의 체력은 체력 스탯을 '주 스탯'으로 삼는 같은 레벨 대의 탱커형 검사보다도 훨씬 높았다.

같은 레벨의 전문 탱커보다 더 탱킹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항마나 맷집도 마찬가지.

주목할 점은 강후는 탱커형 검사도 아니고, 방어에 특화된 헌터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 스탯이 전부 높은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스킬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평범한 헌터였다면 마력 20이라는 수치가 참 형편없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선천성 마나 과민증은 총량이 낮은 마력을 패널티가 아닌 이득으로 바꿔버렸다.

[야만의 시대]

[스킬 숙련도 : Lv Max]

[학습자의 마나 스탯이 50 미만인 경우, 모든 스킬의 마나 사용 값이 50% 감소합니다.]

꼼수로 학습한 광전사 전용 스킬인 야만의 시대는 화룡점정이었다. 누가 이런 조합을 갖겠는가?

"적요석 하나... 확보했군."

강후가 혈루를 꼭 움켜쥔 채로, 두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반세영과의 내기는 진심이었다.

적요석 하나로 스킬을 업그레이드하고 안 하고는 차이가 정말 크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 스킬 하나 때문에 생사가 갈린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다.

물론 반세영도 자신이 이 말도 안 되는 내기에서 질 리는 없다고 확신하고 대뜸 받은 것이겠지만.

잠시 던전의 바람을 느꼈다.

무아지경에 빠져서 달리고 있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산들바람 속의 꽃향기가 느껴졌다.

그래, 민들레꽃 향기였다.

코끝을 간질이는 것이 너무나도 기분 좋은 향기.

하지만 선혈과 살점이 난무하는 던전에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 평화로운 향기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미친 오빠! 진짜 미쳤어! 아무리 적요석을 걸어도 그렇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

"일단 총은 좀 치우지."

눈을 뜬 강후는 거꾸로 보이는 반세영의 얼굴과 코앞에 닿아 있는 총구를 보고는 흠칫 놀랐다.

반세영이 떨리는 두 눈과 손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래.

믿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97화 가치 증명 (4)

* * *

공략에 속도가 붙었다.

미로 던전은 모든 방의 콘셉트가 빨리 공략할수록 보상인 경험치가 증폭되는 구조라서다.

속도감을 요구받기 때문에 무리하다가 죽는 케이스도 꽤 많았다. 부상을 입는 것이야 부지기수고.

기록에 대한 욕심은 바꿔 말하면 죽음의 유혹도 되기에 여간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반세영도 강후와 던전에 가기로 했을 때, 기록에 대한 욕심을 내진 않았다.

버퍼인 박동재가 있어도 힘들었던 '속도전'이 강후의 존재로 달라질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강후를 향한 무한대에 가까운 믿음이 있었고, 오히려 도전해 보고 싶었다.

다음으로 입장한 방은 '증식의 방'이었다.

보스 몬스터는 공략 시작과 동시에 던전 중앙에 나타나는데, 이름은 데스 나이트였다.

우리가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에서 흔히 보는 데스나이트, 그 녀석이 맞았다.

그런데 왜 증식의 방이라는 이름이 붙는가 하면....

입장하자마자 마주치게 되는 스무 마리의 소형 몬스터, '데글린'의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도마뱀 형태의 녀석들은 시간이 지나면 무조건 두 개로 분열하는 특징이 있었다.

그리고 이 방의 공략을 종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데스 나이트를 죽여야만 했다.

즉, 데스 나이트를 죽이지 못하면 데글린이 계속 분열을 거듭하며 수를 늘리는 것이다.

정공법은 최대치까지 분열을 유도하고 모조리 잡는 방법이었다.

말이 좋아 정공법이지, 데스 나이트를 처치할 수가 없어 만들어낸 고육지책이었다.

심지어 분열로 만들어진 데글린은 경험치가 제공되지 않기에, 사실상 '개고생'이기도 했고.

"오빠, 데글린은 나한테 맡겨."

"뒤는 안 볼게."

"응. 오빠 옆에 붙는 데글린은 한 마리도 없을 거야."

"위치 선정은 괜찮겠어?"

"여긴 생각보다 고점으로 잡을 포인트가 많아. 걱정 마. 위험해질 일은 없어."

듬직한(?) 반세영의 말에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세영의 명중률은 강후가 그녀에 대해 판단했던 것보다도 훨씬 높았다.

난전 중이라면 몰라도, 자리 잡고 쏜 마탄 중에서 빗나간 경우는 거의 보기 드물었다.

명중률 75%만 넘어가도 명사수 취급을 받는 헌터의 세계를 생각하면, 그녀는 그 이상이었다.

스르르륵.

파앗!

결계 해제와 동시에 강후가 데스 나이트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팽창의 방 공략을 마치고 충분히 휴식을 취한 덕분인지 몸 상태는 괜찮았다.

여차해서 몸이 못 버티겠다 싶으면 남은 매드 솔라키움 하나를 씹을 생각이었다.

방법은 다 있다.

끼이익! 키이익!

강후의 존재를 인지한 데글린들이 걸쭉한 침을 흘리며, 양 뒷발에 힘을 싣기 시작했다.

모시는 주인, 데스 나이트를 위협하려고 하는 침입자를 어떻게든 차단하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그때부터 반세영에 대한 강후의 믿음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타앙! 타앙! 타앙!

반세영의 총구가 푸른빛을 뿜으며, 데글린을 저격했다.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날아든 마탄은 데글린 셋의 머리를 날렸다.

데글린 세 마리가 일렬로 서 있던 상황을 완벽하게 노린 반세영의 깔끔한 한 방이었다.

단순히 저격으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꾸드드득.

최종점에서 한 차례 더 폭발을 일으킨 마탄은 강후의 주변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마탄-마법 스킬이군.'

마탄-마법이라고 불리는 이 스킬은 저격이 성공한 직후에 현장에 마법을 구현해낸다.

마탄의 살상 행위가 끝난 후에 마법이 발동되어야 하므로 상당한 숙련도를 요구했는데.

반세영은 가능한 모양이었다.

강후만큼은 아니지만 그녀도 레벨에 맞지 않는 상당한 실력을 가진 능력자는 맞았다.

'역시 내 안목이 맞았군.'

강후가 미소를 지었다.

서포트 역할로 제격이겠다는 자신의 첫인상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엄호 및 지원에 특화된 거너다. 사용 가치가 매우 높다.

'그렇다면.'

강후가 1% 정도 남아 있던 그녀에 대한 불신을 모두 벗어던지고 전력 질주했다.

무조건 데스 나이트만 볼 참이었다.

다만 껄끄러운 부분이 딱 한 가지 있다면.

"...."

정면에 장승처럼 떡하니 서 있는 데스 나이트의 빈틈이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데스 나이트의 약점은 투구 안이다. 즉, 투구를 벗겨야 전투가 수월해진다.

온몸은 두꺼운 갑주로 보호되고 있기에, 이를 뚫고 빈틈을 만들기는 어려웠다.

확실히 쉬운 놈은 아니다.

하지만 잡아야 할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녀석이 보스로서 갖고 있는 패시브 스킬 때문이다.

[강탈이 활성화된 대상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스킬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령(死靈)의 침묵]

바로 이 스킬이다.

앞으로 자주 마주치게 될 던전의 다양한 콘셉트를 생각하면 꼭 필요한 스킬이기도 했다.

"어디 한 번...."

까앙!

"크윽!"

프스스스슷!

탐색전 차원에서 데스 나이트에게 정면에서 달려든 강후가 신음과 함께 뒤로 쭉 밀려났다.

데스 나이트가 휘두르는 대검의 힘은 엄청났다.

버텨서 다행이지, 조금만 악력이 약했어도 혈루를 손에서 놓쳤을 뻔한 공격이었다.

파앗!

다시 달려들었다.

전신이 움직이는 하나의 요새와도 같은 데스 나이트의 빈틈을 만드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움직임을 최대한 많이 유도하는 것이다. 움직여야, 그만큼의 빈틈이 생겨난다.

그렇지 않으면 철옹성처럼 우뚝 솟아 있는 요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후웅!

까아아앙!

"후우."

또다시 뒤로 밀려난 강후가 살짝 답답함이 담긴 한숨을 쉬었다.

녀석은 최소한의 동작으로 최대한의 방어를 해냈다. 완성형의 탱킹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타앙! 타앙!

그사이, 중간중간 이어진 반세영의 지원 사격에 강후에게 달려오던 데글린들이 죽었다.

강후는 반세영을 믿었기에 뒤로는 시선도 두지 않았다.

'왜 사전 브리핑에서 정공법으로 공략을 하자고 했는지는 알 것 같군.'

전세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런저런 꼼수를 시도해도 절대 안 통하는 놈이니, 장기전으로 가자고 말이다.

최대치까지 분열한 데글린을 전부 쓸어 담고, 원거리에서 데스 나이트를 반세영이 저격하는 식.

정공법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게 맞나 싶지만,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 전략이기도 했다.

하지만 엉덩이가 무겁게 앉아만 있는 것이 전략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뚫지 못할 방패처럼 보이는 적일수록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나마 던전은 안 될 것 같아서 포기할 수도 있다고 치자.

나중에 상대하기 어려운, 까다로운 적을 만나도 포기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강후가 전략을 바꿨다.

정면승부는 의미가 없고, 뒤를 노리는 전술은 데스 나이트의 중무장 덕분에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변수를 창출, 정석적인 흐름에 변주를 만들어내는 것이 낫다. 상식을 깨는 것이다.

'인내가 좀 필요하겠군.'

강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상식을 깨는 전술이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그전까지는 지극히 상식적인 방법으로 상황을 끌어가야 한다.

강후는 데스 나이트가 자신의 뻔한 공격 패턴에 익숙해지기까지 반복해서 덤빌 생각이었다.

녀석이 공격 패턴을 학습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다분히 의도적인 전략이었다.

* * *

5분을 그렇게 싸웠다.

워낙 완력이 좋은 데스 나이트이다 보니, 거듭된 공방전에서 강후는 급격한 체력 손실을 경험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데스 나이트의 대검 공격을 막을 때마다, 팔꿈치와 어깨가 시큰거렸다.

그나마 막아내고 있으니 이 정도지, 대검이 스치기만 해도 몸이 깨끗하게 잘려나갈 판이었다.

실제로 강후가 중간중간 방어의 용도로 이용해 먹은 바위 몇 개는 깨끗하게 절단되어 있었다.

이것들을 한데 모아 돌로 성을 만들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잘린 단면이 깔끔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데스 나이트의 움직임에는 전보다 더 많은 여유가 생기고 있었다.

심지어 중간중간 대검을 내리거나, 고개를 까딱이는 식으로 강후를 도발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강후는 겉으로는 잔뜩 화난 체를 했다. 완벽하진 않지만 나름 실감나는 메소드 연기였다.

그때.

이제는 강후의 패턴이 뻔하다고 여겼는지, 데스 나이트가 공세를 취하며 접근했다.

앞서 강후는 이럴 때마다 뒤로 빠졌다가, 반 박자 느리게 받아치는 패턴을 고수했었다.

데스 나이트도 자연스럽게 패턴이 학습됐고, 강후의 대응을 미리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뒤로 몸을 움찔하는 듯했던 강후가 도약과 함께, 거꾸로 앞으로 돌진했다.

"...?"

흠칫 놀란 데스 나이트의 몸이 어색하게 멈춰버린 사이.

순식간에 데스 나이트의 하체로 파고든 강후가 전력으로 데스 나이트의 발목을 밀어냈다.

축구에서 말하는 슬라이딩 태클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깔끔한 다리 걸기였다.

"...!"

노림수가 성공했다.

제대로 발이 걸린 데스 나이트가 양팔을 허우적대다 쓰러졌다.

불가항력이었다.

공중제비나 백 덤블링을 할 수 있는 스킬이라도 있지 않은 이상, 대응할 방법은 없었다.

당연히 묵직한 움직임이 장점이면서 주 무기인 데스 나이트에게는 없는 방법이기도 했고.

쿠웅!

차가운 지면 위에 누워버린 데스 나이트가 양팔을 휘저어댔다.

순간적으로 놓쳐버린 대검을 잡기 위함이었는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눈앞에 있었다.

아니, 이미 눈앞에서 눈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푸우우욱!

"...!"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얼굴 전체를 보호하고 있는 투구의 시야 확보를 위해 만들어둔 틈새로 단검이 들어온 것이다.

방어할 새도 없이 데스 나이트의 양쪽 눈 뼈가 강후의 혈루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박살이 났다.

푸슈슈슛!

투구 안쪽에서 솟구친 정체불명의 검은 액체가 순식간에 강후의 얼굴 전체를 적셨다.

강후는 이에 아랑곳 않고, 대검을 막 움켜쥐려던 데스 나이트의 손목을 내리쳤다.

비록 갑주로 보호되고 있긴 해도, 모든 압박에서 완벽하게 지켜주는 것은 아니었다.

까강!

이내 놓쳐버린 대검이 데스 나이트의 손에서 멀어졌다.

강후는 그 상태로 데스 나이트의 투구 위쪽을 움켜쥐고, 우악스럽게 그것을 벗겨냈다.

데스 나이트는 벗길수록(?) 약점이 드러나기에 당연한 과정이었다.

"크이이이익...."

흉물스러운 데스 나이트의 얼굴 전체가 드러났다.

썩어가는 회백색 빛의 해골 사이사이로 수많은 구더기와 정체불명의 애벌레들이 가득했다.

그때.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한 강후가 공격을 이어가려던 동작을 중단하고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다음 순간.

정말, 아주 간발의 차이로 강후가 있던 자리를 데스 나이트의 양손이 훑고 지나갔다.

그 와중에 데스 나이트가 강후의 몸을 잡으려고 한 것이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물론 강후의 멋진 대응 덕분에 데스 나이트는 자신의 공격 턴을 잃고 말았다.

이제 강후의 턴이었다.

화악!

데스 나이트의 가슴 위로 착지한 강후가 혈루를 힘껏 치켜들었다.

타앙!

동시에 반세영의 시기적절한 지원 사격이 이어졌다.

그녀는 누운 데스 나이트의 오른쪽 겨드랑이를 조준했고, 마탄은 정확히 타깃을 맞췄다.

덕분에 다시 대검을 움켜쥐려던 데스 나이트의 시도는 또 무위로 돌아갔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물론.

"마이 턴."

강후에게는 최상의 상황이었다.

98화 가치 증명 (5)

* * *

한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강후 일행은 어느덧 마지막 방을 앞두고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앞서 증식의 방에서 강후가 상대했던 데스 나이트는 한 번 쓰러진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강후가 목뼈를 집중적으로 공략한 다음, 혈화로 깔끔하게 마무리를 해 버렸기 때문이다.

숙련도 최대의 수준을 뛰어넘은 그 이상의 경지. Ultimate 스킬인 만큼, 위력은 강력했다.

속도전은 통했다.

덕분에 강후는 마지막 방을 앞두고 레벨을 무려 98까지 올릴 수 있었다.

들어오기 전만 해도 97을 찍으면 정말 많이 올린 거겠다 싶었던 예상이었는데.

신속한 공략으로 풍족하게 들어온 경험치 덕분에 걱정을 덜었다.

이 정도면 마지막 방을 공략했을 때, 99도 가능할 듯했다.

미로 던전 공략 후에 윤상미를 만나 던전을 한 차례 더 간다면 레벨 100은 확정이 된다.

[사령의 침묵]

[스킬 숙련도 : Lv Max]

[초당 마나 10을 소모해, 언데드로 위장합니다. 그들 고유의 기운을 풍기므로 들키지 않습니다.]

[단, 성스러운 기운을 보유한 존재는 사령의 침묵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사용하지 못할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겠군.'

강후가 데스 나이트로부터 강탈한 스킬, '사령의 침묵'에 관련된 툴팁을 읽고는 웃었다.

성스러운 기운이란, 보통 신성력을 일컫는다. 줄여서 성력이라고도 한다.

이를테면 네임드 중에 잘 알려진 구원의 성녀, 엘리자베스가 성력을 주로 쓰는 헌터다.

'동시에 열세 개의 별이기도 하지.'

성력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보다가 자연스레 떠오른 엘리자베스.

생각해 보니, 그녀 역시 열세 개의 별이다. 아마 이 무렵부터 열세 개의 별의 일원이 됐을 터.

하지만 대외적으로 그녀가 열세 개의 별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5년 후다.

그녀가 완벽하게 자신의 정체를 위장하고, 사람들이 찬양하는 '성녀' 행세를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99.9%의 헌터는 마력을 기반으로 싸우지만, 엘리자베스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암흑기.'

하나 더 떠오른 것은 암흑기였다.

신성력이 빛을 상징하는 힘이라면, 암흑기는 어둠을 상징하는 힘이다.

데스 나이트의 스킬이었던 사령의 침묵은 바로 암흑기를 간접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스킬이었다.

사령의 침묵은 마나를 이용해서 언데드로 위장을 하게 하지만.

암흑기는 태생이 언데드의 기운이다. 즉, 사령의 침묵이 맛보기를 시켜주는 셈이다.

'원작에서 암흑기는 그림의 떡이었지. 강탈 능력을 가진 존재도 없었으니까.'

세계관 설정 속에 암흑기 콘셉트는 존재한다.

특화 던전 또는 지금보다 높은 수준의 던전을 가면, 암흑기 전용 스킬도 종종 등장한다.

그 스킬을 강탈한다면 암흑기를 기반으로 하는 스킬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차원 강탈자라는 성좌를 보유하고 있는 강후이기에 가능한 선택지이기도 하다.

즉, 다른 헌터는 암흑기 스킬이 있음을 알아도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마력을 암흑기로 바꿔주는 스킬도 존재할 거야. 내가 떠올렸던 스킬이니까.'

강후는 무의식을 믿고 있었다.

원작자로서 이 세계에 남긴 무의식은 많은 요소를 구성하고 있다.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암흑기 전환 스킬을 손에 넣는다면.... 그땐 헌터로서의 정체성도 달라질 터다.

'내 글솜씨가 썩 괜찮았단 말이지. 쓸만한 설정이 많아. 개연성도 제법 있고.'

강후가 반쯤 자뻑(?) 섞인 미소를 지으며, 혈루에 아직 묻어있는 피를 닦아냈다.

"하아아암...."

그때.

직전 방에서 한숨 자고 있는 전세혁의 하품 소리가 들렸다.

30분의 휴식 시간 동안 무엇을 하려나 싶었는데,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잠을 선택한 모양.

그사이.

마력 회복과 무기 정비를 마친 반세영이 강후의 옆으로 슬쩍 와서는 말을 걸었다.

"오빠."

"응."

"어떻게 그리 공격이 깔끔해? 모든 상황에서 전부 자로 잰 듯이 공격을 하니까 신기해."

"평정심을 유지한 결과지."

강후가 솔직하게 답했다.

지금까지 전투에 임하면서 평정심을 잃은 적은 거의 없었다.

물론 긴장은 항상 했다. 언제든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도 분명 했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마음이 편안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은 아직까진 살아있다는 뜻이니까.

아마 평정심의 이유를 풀어 설명해 줬다면, 반세영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미쳤다고 했을 터다.

"팽창의 방이나 증식의 방도 놀라웠지만. 한계의 방이랑, 억제의 방에서도 오빠가 거의 다 했어."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나도 나댈 수 있는 거지."

공을 반세영에게 돌렸다.

그녀의 지원을 믿었기에 신나게 뛰논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말 좋은 파트너였다.

무엇보다 극한의 근거리, 원거리 공격을 선호하는 직업군이기에 동선이 거의 겹치지 않는다.

따로 움직이나, 전장을 놓고 보면 한 몸으로 움직이는 것과 같기도 했다.

"솔직히 좀 무서워. 오빠 같은 사람이 레벨에 아이템까지 받쳐주면, 그때는 호칭이 바뀌거든."

"뭐라고?"

"네임드."

그녀가 고글을 닦으며 말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반세영은 강후가 두려웠다.

마치 비밀을 잔뜩 가진 남자가 힘을 숨기고 지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오죽했으면 전세혁에게 강후의 성좌가 혹시 레벨 정보를 '왜곡'하는 성좌가 아니냐고 물었을까?

"멀었다. 레벨 100도 안 됐고."

"그래서 무섭다는 거야. 레벨 100도 안 됐는데, 전투력은 레벨 300, 400을 뺨치잖아."

"사촌 오빠 앞에서 그런 말하면 실례다."

"오빠도 인정했는데?"

"아무튼 종종 호흡을 맞추자고. 너나 나나, 우리는 선수필승, 선공차단이 승리 방정식이니까."

"말 돌리긴, 쳇. 어쨌든 오빠가 멋지다는 얘기야. 나, 아무한테나 칭찬 안 한다구."

"감사히 듣지."

강후가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극한의 솔로 플레이를 추구하는 자신이기는 하지만.

반세영처럼 호흡이 맞는 파트너라면 팀플레이도 얼마든지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재밌었다.

말동무도 있고 하니, 덜 심심한 것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파트너가 좋다고 해도, 딱 한 가지 걸리는 것만큼은 외면할 수 없었다.

바로 전리품 문제.

독식을 항상 원하는 강후로서는 파트너의 존재가 마냥 반가울 수는 없는 부분이었다.

상대가 일방적으로 양보를 해 준다면 모를까. 물론 그것은 미덕이 아니다.

* * *

마지막 방 공략도 변수 없이 끝났다.

물론 마지막 방이라는 상징성에 걸맞게 공략 시간은 제법 걸렸다. 머리를 써야 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최소 3인이 강제되는 방이기도 했다.

모든 지역이 안전지대인 상태로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나며 위험지대가 늘어나는 구조였다.

도전자들이 가장 오래 밟고 있는 위치가 위험지대가 되는 형태이다 보니.

그 유도는 반세영이 전담했다.

방 외곽에서부터 위험지대로 바꿔야 내부 동선이 편해져서다.

그래서 강후와 전세혁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특정 지역을 오래 밟지 않도록 했다.

보스 몬스터 디루드.

이 녀석의 공략이 생각보다 일찍 끝난 것은 바로 강후가 가진 '사령의 침묵' 스킬 덕분이었다.

언데드 몬스터인 디루드는 사령의 침묵으로 위장한 강후를 동족으로 인식했다.

그 덕분에 가볍게 횡 이동으로 디루드의 뒤를 잡은 강후가 녀석에게 쉽게 치명상을 입혔다.

보스 몬스터 전투치고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마무리였지만, 결코 의미가 가볍지는 않았다.

애초에 언데드로 위장할 수 있는 스킬을 가졌다는 자체가 희소성이 높은 것이기 때문이다.

끝까지 강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디루드의 모습을 보면서, 전세혁과 반세영은 놀랐다.

자신들의 움직임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쫓는 디루드가 강후의 움직임은 신경도 안 썼다.

그것이 강후를 '언데드 취급'해서 그렇다는 것은 둘 다 잘 알았다. 그래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흑마법사라던가, 위장에 관련된 스킬을 가진 버퍼 직업군이라면 이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강후는 암살자다.

게다가 단순하게 외형을 바꾸는 위장도 아니고, 아예 기운을 언데드로 바꾸지 않았던가?

도대체 어떤 스킬을, 어떻게 얻어서, 이렇게 깔끔하게 위장에 성공했는지 의문이었다.

질문해도 알려줄 리 없고, 질문하지 않자니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황이 됐다.

어쨌든 그렇게 레벨 99 달성에 성공했다.

반세영은 약속한 대로 강후에게 적요석을 건넸고, 덕분에 강후의 적요석은 총 7개가 됐다.

레벨 100을 찍는 대로, 스킬 업그레이드와 함께 사라질 재료들이지만.

하나를 구하기도 힘든 적요석을 일곱 개나 가졌다는 것으로도 매우 큰 자산이었다.

억만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것이 적요석이니까. 그만큼 이 녀석은 귀하다.

[던전 전체의 공략 과정을 꼼꼼하게 채점한 결과. S+ 판정을 받았습니다.]

[최종 판정과 더불어 지름길 루트 공략에 성공한 대가로 주황색 마석 10개를 제공합니다.]

"와...!"

"와우. 1,000억 원이야?"

앞서 지급된 적요석을 포함, 최종 보상이 확정되는 순간 반세영과 전세혁이 탄성을 터뜨렸다.

지금껏 보상을 최대치로 받았던 것이 주황색 마석 2개였다.

시가로 따지면 200억 원의 가치.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충분히 한탕이라고 할 만했다.

그런데 이번 공략에서는 최대치를 가뿐히 갱신하고, 무려 5배의 보상을 얻어낸 것이다.

강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많이 준 건가?"

알고도 모른 척한 것이 아니라, 정확히 감이 안 와서 물어본 쪽에 가까웠다.

보상이 섭섭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면 정말 크게 퍼주는 셈이었다.

"일단 밖에서 뵙죠!"

전세혁이 바로 던전 밖으로 향하는 출구로 들어갔다.

그는 처음에 말했던 대로 던전의 공략 과정 및 보상에 욕심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괜히 껄끄러워지지 않도록 눈치껏 자리를 비워준 것이다. 그 다운 매너였다.

이윽고 강후가 마석 열 개의 분배에 대해서 운을 띄우려는 순간.

"오빠, 난 하나만 가져갈게."

반세영이 먼저 선수를 쳤다.

눈치 싸움이 될 것 같았던 분배가 1초 만에 끝났다.

* * *

호의는 거절하지 말랬던가?

하지만 강후는 반세영에게 주황색 마석 하나를 더 얹어주고는 자신이 여덟 개를 갖고 끝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반세영의 호의대로 주황색 마석을 아홉 개 갖고, 배를 충분히 채울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에게 받은 호의를 또 한 번의 호의로 돌려주고, 원하는 바를 더 얻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좀처럼 던전 공략 기회를 얻기 힘든 강후가 그녀에게 해 두는 투자였다.

전세혁을 통해 던전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만큼, 일종의 '뇌물'을 건넨 셈이다.

100억 원어치 마석 하나를 주고, 앞으로 던전 공략 기회를 몇 차례고 얻을 수 있다면?

돈값은 차고 넘치게 하는 셈이다. 강후는 그렇게 좀 더 큰 그림을 그렸다.

한편.

미로 던전에서 얻은 주황색 마석은 전세혁을 통해 그가 잘 아는 마켓에서 전부 처분을 마쳤다.

그러고 나니 잔고가 폭등했다.

2등급 무기 아이템을 어렵지 않게 바꿀 수 있을 견적이 서게 된 것이다.

99화 가치 증명 (6)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