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Winner Team8!!
-끝났으니까 접고 모여라.
선생이 집합을 알려왔다.
이미 정리 작업이 시작됐는지 우리들이 있던 구역을 제외하곤 수업 진행 도우미들이 바삐 돌아다니고 있었다.
-…깜짝 놀랐어요. 저게 떨어졌으면 우린 다 죽었겠죠?
"설마. 널 포함해서 한 셋쯤은 살지 않았을까."
비주얼로는 압도적이었지만, 사실 대응하지 못할 공격은 아니었다.
더구나 다수를 대상으로 한 공격이었으니, 한 번쯤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바튼. 끝났데."
-나도 안다.
꽤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여태 멈춰있던 바튼은 내 말에 정신을 차리고 이능을 갈무리했다.
아머 슈트를 뚫고 들어오려던 냉기도 사라졌다.
"오늘 처음으로 이겼네."
-솔직히 질 줄은 몰랐다.
"마지막에 네 팀원들을 못 잡았으면 우리가 졌을 거야."
종합 점수를 확인했다.
내 팀이 이긴 것은 팀원의 대다수가 생존해서였다.
생존자의 숫자에 따라 점수가 큰 폭으로 차이나니 바튼의 팀에 생존자가 한 두 명만 더 있었어도 위험할 뻔했다.
수업을 마치곤 셔틀을 이용해 숙소로 돌아왔다.
이동 중, 대항전에 있었던 상황을 리뷰하는 시간이 있었다.
내 전술은 당연히 호평을 받았다.
"다, 다음에도 같이 했으면 좋겠다."
"RTA 전술학 성적이라고 해봤자 별 의미 없을 줄 알았는데. 너 정말 꽤 하잖아?"
셔틀에서 내렸다.
아머 슈트를 벗고 맨얼굴이 되어서인지 다시 수줍음을 타는 윤지혜와 기분이 업 된 로버트가 다가왔다.
"상황이 잘 맞아떨어졌어. 또 하라고 하면 못 할 거야. 네가 같은 편이어서 가능한 전술이었으니까."
"겸손은. 어쨌든 즐거웠다."
로버트는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하곤 멀어졌다.
남은 건 윤지혜.
그러고 보니 얘하곤 그동안 계속 접점이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수업을 같이 듣기도 하고, RTA 전술학 토론회를 한다면서 날 초청하기도 했다.
지나칠 때마다 꾸준히 먼저 인사를 해온 것도 그렇다.
할 말이 있나 싶어 기다리는데 우물쭈물 거리기만 한다.
그래서 내가 먼저 할 말을 했다.
"수업도 대부분 같으니까 다시 팀 짤 일이 있겠지. 그럼 난 가볼게. 아침 스케쥴을 생략해서 좀 바쁘네."
"…저, 저기!"
"응?"
"식사라도 같이...."
그러고 보면 식사시간이기도 하다.
아침도 안 먹은 터라 또 끼니를 굶을 수는 없다.
난 옆에 서 있는 바튼을 쳐다봤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
"좋아. 가자."
윤지혜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얘도 참 용감하다.
내 일행을 보고 여태 식사를 같이하자고 말해 온 사람은 몇 없었는데 말이다.
윤지혜까지 낀 우리 일행은 빨리 걸어서 식당에 도착했다.
우리들의 지정석이나 다름없는 자리에는 벌써 접시 쌓기를 시작한 로제와 벌써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는 메르디가 있었다.
"사힘은?"
"훈련한다고 먼저 갔어. 그런데 옆에는 누구?"
"나, 난 윤지혜라고 해. 같은 1년차 생도고. 잘 부탁해."
"흐응…?"
메르디가 흥미롭다는 눈길로 윤지혜를 빤히 바라보았다.
식사자리에 까지 온 것은 여태껏 몇 명 있었다.
하지만 1학기 초부터 아카데미 공인 건드리지 말아야 할 인물 1순위에 꼽히고 있는 메르디의 관심이 지속되면 견디지 못하고 알아서 사라진다.
실제로 지금 저렇게 이능을 피워대며 쏘아보면 정말 무섭다.
'나도 꽤 무서웠지.'
지금에야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정말 부담스러웠다.
어쨌든, 겁이 많아 보이던 윤지혜가 의외로 그 눈길을 견디고 자리에 합류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변한 메르디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는 게 눈에 확 띄었지만, 그럼에도 자리를 벗어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어제 그렇게 마셨는데 수업에는 잘 들어갔어?"
"응. 그 정도야!"
일상적인 대화가 돌았다.
어제 모처럼 파티를 해서인지 아직까지 기분이 좋아 보인다.
말을 하다 보니 오전 수업과 대항전에 관한 것도 나왔다.
"아머 슈트 기동훈련 했어? 그거 정말 재밌는데."
"난 싫어해."
"에이, 잘만 하면서."
"쓸데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잖아."
메르디가 정색하며 말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어지간한 생도들 보다 더 숙련도가 높다.
그녀의 무투술도 상당한 수준이란 것은 다른 사람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반면에 로제는....'
수업을 몇 번이나 진행했다고 벌써 대쉬를 최고레벨까지 클리어 했다.
같은 몸을 가진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머 슈트를 자유자재로 다룬다.
영상을 확인해 봤는데 정말 자유로워 보일 정도였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잠깐, 이것만 먹고."
로제가 마지막 접시를 들고 입안에 음식물을 쏟아 부었다.
나도 식기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옆을 보니 윤지혜도 어느 사이엔가 접시를 몇 개나 쌓아두고 있었다.
'생각보다 잘 먹네.'
윤지혜가 내 시선을 알아차리곤 움찔 한다.
그리곤 일어나면서 인사를 했다.
"자, 잘 먹었어."
"어, 뭘."
"…다음에도 같이 먹어도 돼?"
"식사 시간이 같으면? 원하는 대로 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싫어하는 사람도 아니고 거부할 이유가 없다.
윤지혜는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곤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쟨 뭐야?"
메르디가 물었다.
별로 심기가 안 좋아 보인다.
그렇지만 어차피 그녀가 기분 나빠 보이는 날이 열 중 아홉 이상이라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너희들이랑 친해지고 싶은가보지 뭐."
"싸움은 좀 해?"
"나보다 나을 걸."
"오오…!"
로제가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수긍했다.
다음에 만나면 대련이라도 하자고 말을 걸지 모른다.
그렇게 식당을 나왔다.
오후 수업이 있는 바튼과 메르디는 빠지고 나와 로제만 대련실로 향했다.
매일 있는 수련 시간이다.
일단 1시간 정도 지도 대련 겸 땀을 뺀 후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내가 물었다.
"로제류에는 무기술이 없는 거야?"
내가 설정한 로제는 특별한 무기를 다루지는 않는다.
상황에 따라서 필요하면 쓰는 경우도 있지만, 주로 육체만을 이용하는 면이 컸다.
특히, 코어 웨폰을 얻고 난 이후에는 무기의 존재가 필수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로제는 내 말에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당연히 있지."
"그런데 안 가르쳐주는 거야?"
"레몬은 아직 무기술을 배울 때가 아니야. 그리고 음…몸 다루는 거 하나만으로도 벅찬 걸."
갑자기 뼈를 때려온다.
맞는 말이긴 하다.
내 재능은 일반인과 비교하면 천재적인 수준이지만, 로제의 눈높이로 볼 때는 한참 모자랐다.
내가 특별난 것은 이능 때문.
로제의 표현으론 남들보다 한계치가 훨씬 높다고 했다.
싸우는 법은 얼마든 몸에 때려 박아 각인시킬 수 있는 반면 육체는 그렇지 않다나.
그래서 나의 경우 궁극의 육체를 완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게 날 로제류에 입문시킨 이유이기도 하고.
"일단 몸 쓰는 법부터 익혀. 레몬은 강인한 육체를 가지게 될 테니까 어설픈 무기술 따위는 배우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럼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뭐야. 창을 잘 쓰는 상대는 위험하니까 피하라든지 날붙이는 상대할 생각하지 말라든지."
나는 어쨌든 무투가다.
무투가는 싸우는 법을 익힌 자.
결국 싸워야 한다.
하지만 충고하는 걸 다 듣고 보면 온통 싸우지 말라는 이야기뿐이다.
"레몬은 지금 노랑띠지?"
"어."
갑자기 내 띠 색깔을 이야기해 온다.
흰 띠는 어떻게든 벗어났지만, 노랑 띠도 부끄럽긴 마찬가지다.
다른 무투파였으면 이미 초록 띠나 빨강 띠 정도는 맸을 텐데.
"음...이걸 봐봐."
잠시 고민하던 로제가 일어서서 자세를 잡았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고요해진다.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지 눈은 감겨있었고 숨은 깊어졌다.
그런데 조금 지나자 이상한 게 보였다.
육체 위로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오른다.
옅은 무언가가 육체를 한 꺼풀 감싸고 있는 것 같다.
로제는 그 상태로 설명을 이어서 했다.
"저번에 설명했을 거야. 이능을 쓰는 사람들과 우리들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이기[異氣]론의 연장선상에 있는 얘기다.
원작자인 나도 이론만은 통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이고.
"…그러니까 이능에 사용되는 에너지는 우리들의 몸에 일정한 형태로 존재하게 돼. 그걸 훈련을 통해 다룰 수 있다면 이런 식으로 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형태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
"그게 외기[外技]야?"
"응. 레몬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짜낸 거야. 보통은 낭비지. 이러지 않아도 육체를 돌면서 알아서 기능하고."
저걸 실제 눈으로 본 건 나도 처음이다.
원작의 내용 중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문구가 있다.
'천재가 50년을 수련하면 육체를 뜻대로 다루는 사범이 될 수 있고, 그 사범이 다시 50년을 수련하면 육체가 완성되며 기가 강성해지는 대가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또 대가가 50년을 간 수련을 하면 육체의 흐름에 통달하게 되어 내외기[內外氣]를 마음껏 구분하고 다룰 수 있는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당시에는 좀 있어 보일 겸, 설정을 묘사하기 위해서 썼던 문장이다.
로제가 지금 보여준 것을 생각하면 천재가 최소 150년 수련에 집중해야 다다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레몬에게 바라는 게 이런 건 아니야. 빨강 띠. 그러니까…육체를 단련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기운이 왕성해지는 단계가 있거든. 그때가 되면 맨손으로도 단단한 걸 마음껏 치고 때릴 수 있어."
무투가,
그러니까 초인으로 분류될 정도의 능력자는 외기의 힘이 강하다.
이 외기는 몸속을 떠돌며 훈련 여하에 따라서 의지에 자동 반응한다.
무협지와는 전혀 다르다.
내공처럼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협지와 비슷한 것은 이능 사용자 쪽이다.
어쨌든,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이 외기는 인간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훈련을 통해 일정한 경지에 다다르면 외기가 강해지며 외부의 공격에 강한 반응성을 지니게 된다.
그걸 이용하면 빔이나 에너지 형태의 공격, 이능은 물론 물리적인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것이다.
'그게 빨강 띠의 자격이라는 건가.'
솔직히 몰랐던 내용이 꽤 섞여있다.
'원작의 주인공이 이능 사용이기 때문인가?'
주인공을 설정할 때는 화려한 묘사에 편리한 쪽이 끌렸다.
실제로 이름을 날린 초인 중 대다수가 이능력자이기도 하고.
순수 무투파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는 로제가 매우 특이한 케이스다.
또한 빨강 띠 수준의 무투파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은 코어 웨폰을 얻는 순간 누구나 다 얻을 수 있었다.
이때, 무투파가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이능 쪽에 비해서 현저히 높을 뿐이지.
"알겠지? 그러니까 빨강 띠가 되기 전까진 툭 하면 죽을 수 있으니까 몸을 사려야 해."
반쯤은 원작의 지식으로 꿰어서 억지로 이해했지만, 알아들었다는 표시는 확실히 했다.
로제는 자신이 설명을 잘했다고 생각했는지 기분이 좋아 보인다.
'역시 사람은 모든 걸 가질 수 없어.'
로제가 보는 세상은 보통의 사람과는 다르다.
익히는 과정도 그렇고 성장의 방법도 그렇다.
나에게 해주는 설명도 매우 장황하고 말이 길어서 원작에 대한 이해가 없었으면 못 알아들을 뻔했다.
그래도 노력했으니 한 마디는 해줘야지.
"덕분에 이해했어. 사부한테 허락받기 전까지는 조심할게."
"흠흠, 좋아! 휴식시간이…끝나긴 했는데 조금 더 쉴까?"
"오늘은 아직 디저트를 안 먹었잖아. 싸온 게 있는데 좀 줄까?"
"정말?!"
간식을 가지러 가는데 졸졸 따라온다.
이번에 준비한 건 양갱이다.
내가 알기로 이건 호불호가 갈려서 싫어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역시나 가리는 것 없이 맛있게 먹는다.
로제는 10개입 한 봉지를 금세 해치우고는 아쉬운 눈초리로 날 살폈다.
# 28
"더 없어?"
"훈련 끝나고 메르디랑 휴게실 가기로 했다면서."
"...그래도 너무 맛있단 말이야. 이런 건 어디서 구하는 거야? 맨날 먹던 거하고 다르게 신기하면서도 맛있어."
"이게 마지막 남은 거야."
결국 내가 먹으려고 남겨두었던 걸 주었다.
"흐히! 고마워."
짧은 휴식을 마치곤 다시 훈련에 들어갔다.
로제와 함께하는 훈련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대련 형식으로 진행되며 로제가 원하는 반응이나 동작이 나올 때까지 계속 얻어맞는다.
그러다 보면 교정이 되고 새로운 걸 때려 박는 식으로 반복.
'머리를 쓸 시간이 없어.'
이 훈련은 다 좋은데 내가 자동으로 움직이는 전투기계가 되는 느낌이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해야 하냐고 물으니까 답변을 못했을 때는 정말 암담했지.'
난처하게 웃는 표정만 보여줬었다.
지금은 뭐 다 포기하고 하는 중이다.
그렇게 저녁시간이 될 까지 진행된 훈련이 끝났다.
같이 식사를 하고 나는 외부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숙소로 돌아왔다.
통신을 활성화하니 외부로부터 연락 요청이 온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우선도가 높은 것은 폰타나 운테의 것.
짐을 정리하며 성간 통신을 연결했다.
자리에 있었는지 통신은 금방 연결되었다.
"폰타나 씨. 시간 괜찮아요?"
-사장님이 전화하시는데 나야 언제든 괜찮아야지.
"하하, 흰소리하지 말고요. 할 얘기가 있다면서요?"
입체 영상으로 보이는 폰타나의 모습은 처음 대면했을 때와는 달리 깔끔했다.
살도 꽤 빠진데다가 수염도 싹 밀어서인지 50년은 젊어보였다.
-이번에 아틀란스 행성에서 실시한 7차 테스트에서 합격점을 받았어. 개선 사항을 적용한 War Spider 모델이 특히 인기가 높았지.
"전투 효율은 저희가 원하는 만큼 나왔나요?"
-지형에 따라서 기존 대비 5.24%~9.92% 성능이 향상됐음이 입증됐어.
"수고하셨어요."
예상보다 성능 향상 속도가 빠르다.
이번 7차 테스트는 전격적인 도입을 앞두고 실시한 분수령 격의 테스트였던 만큼, 주문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 틀림없었다.
이미 시험적으로 운영 중인 지역에서는 이득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한다.
-뭘, 다 사장님 덕분이지.
"폰타나 씨가 없었다면 이렇게 빠르게 결과를 내지는 못했을 거예요."
-푸흐흐! 당연한 말을 집어 치우고 이 얘길 해보자.
폰타나가 다음 주 연구 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자동 전투기계에 대한 것은 이미 궤도에 올라섰다.
새로운 모델 개발을 시작하면 폰타나가 다시 주도권을 쥐겠지만, 연구소를 총괄하는 자리에 있는 이상 다른 쪽에도 신경을 써주어야 한다.
"수익 창출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정말?
그리고 지금 나와 폰타나의 의견이 엇갈리는 것은 이 부문이다.
수익.
돈에 한 번 크게 데인 적이 있는 폰타나는 수익적인 면을 아주 꼼꼼히 챙긴다.
더구나 지금 연구 과제로 주어진 것 중, 돈만 본다면 우선순위가 확 올라올 연구 과제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전투기계는 네 의견에 따라서 마진을 최소화했기 때문에 사실상 적자야. 지금 같은 기세로 물량이 나간다고 해도 최소한 3년은 있어야 이득이 나는 구조라고.
"무슨 소린지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은 돈만 볼 때가 아니에요. 하나라도 더 공급해야 할 때지. 혹시나 4차 방위 라인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미래의 시장이 무너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맞는 소리긴 한데…. 넌 가끔 보면 자선사업을 하는 것 같단 말이야.
"...하하."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폰타나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솔직히 그렇게 말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 내 입장이다.
기술 개발에 들어가는 것과 공장을 확장하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예산까지 계산하면 아직도 들어오는 돈이 거의 없었다.
"일단 제가 정한 우선순위를 따라주세요."
-계속 이렇게 가자고?
"예…. 하지만 꼭 이렇게만 가자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나는 미리 생각해 둔 바를 떠올렸다.
여태까지는 연구소의 기밀 유지와 기술 관리를 위해서 인력 충원을 엄격히 해왔다.
이건 나파엘의 사태에서 느낀 바가 있어서 앞으로도 바꾸지 않을 작정이고.
대신 생각을 좀 전환해 봤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저희가 전부 다 할 필요는 없겠더라고요."
-설마 외부에 연구 과제를 나눠 줄 생각이냐? 그건 미리 이야기했다시피....
"하하, 그래서 말했잖아요. 전부 다 할 필요는 없겠다고. 필요한 부분만 한 차례 걸러서 주는 거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내 이능에 대한 사항은 최고 기밀로 취급되는 사항이다.
그러므로 내가 마구 작성한 '쌩 정보'를 그대로 반출할 수는 없다.
대신 폰타나가 가능성이 있겠다고 여긴 정보를 분석, 가공해서 연구원들에게 준 다음 한 번 정도 더 거르면 유출을 최소한으로 할 수 있다고 봤다.
-…흠. 괜찮긴 한데. 그래도 여전히 신경 써야 할 게 많아.
"처음부터 전격적으로 할 필요는 없어요. 일단 저희가 신경써줘야 할 곳은 모나크와 모하임 두 곳 뿐이니까요."
폰타나도 내 이야길 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소가 꾸려지고 지난 몇 달 동안 두 곳의 서포트는 아주 지극정성이었다.
특히, 모나크 가문에서 아주 약간이지만 모하임 왕가보다 큰 지분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서포트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쯤 되면 잘 했다고 먹잇감을 하나씩 던져줄 때도 됐다고 생각할 만큼 말이다.
-협상은 어떻게 할 거냐. 설마 나한테 맡기지는 않겠지.
"제가 얘기해야죠. 폰타나 씨가 했다간 하루 이틀에 끝나진 않을 거예요."
-다행이네. 앞으로도 나한테 그런 일은 맡기지 말라고. 도망 가버릴 테니까 말이야.
"그럼 제가 또 찾아다 자리에 도로 앉혀드려야죠."
우리는 서로 웃었다.
그리고 외부로 반출해도 될 만한 과제들을 추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능으로 에일리언에게서 뽑아낼 수 있는 정보는 단순한 유전 검사나 조직 검사 등으로도 밝혀낼 수 없는 정보들이 한 가득이다.
갈퀴의 것으로 예를 들어 보자면 이런 게 있다.
바로 화장품.
갈퀴가 다양한 환경에서 뛰어난 적응력을 보여주는 정보를 분석하다 뽑아낸 것인데, 잘만 하면 어떤 외부 환경에서도 제 역할을 다하고 효능까지 뛰어난 화장품을 개발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개조 시술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먹힐 제품이지.'
인류의 생체 공학기술은 우주 시대에도 계속해서 발전해 왔다.
실재 200살이 되어 죽을 때까지 젊은 육체를 가질 수 있었다.
그만큼 대체 장기에 대한 연구도 잘 되어있는 상황이다.
마음만 먹으면 로봇 부럽지 않은 힘을 가질 수도 있고, 생체 컴퓨터를 이식해서 생각만으로 조작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러한 기술 발전을 반기지는 않았다.
태어난 그대로의 육체가 가장 좋다고 여기는 네츄럴 휴먼들.
그들은 어지간해서는 외부의 간섭에 의한 육체의 변화에 거부감을 느낀다.
이런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에 따라 전부 기술 수용도가 다른데, 아무리 그런 이들이라도 바르는 화장품을 싫어하는 경우는 얼마 없다.
'진짜 돈 되는 건 이런 제품이지.'
화장품은 예나 지금이나 잘 팔린다.
미용에 관한 관심은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좋은 제품은 많은 관심과 높은 수익을 보장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 하죠."
-좋아. 그건 그렇고. 다음 자료는 언제 줄 거야.
"아...그거요?"
지금까지 완성해서 보낸 것은 갈퀴의 것과 숨 지렁이의 것 두 가지다.
그에 비해 정보량이 10배는 더 차이나는 칼날 벌의 것은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전부 써내지 못했다.
비교하자면 수십 권짜리 백과사전을 고대로 베껴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
덕분에 칼날 벌의 정보 완성도는 아직도 50%정도였다.
'이제 뭐가 필요 없는 정보인지 조금씩 감이 오긴 하는데.'
공부의 효과는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워낙 많은 것을 넓고 깊게 배워야하다 보니 원하는 수준까지는 아직도 멀어 보인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 빼고 적었다가 거기서 대박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면 도무지 빼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작업은 내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재미없고 변화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한 파트 거의 다 작성되어 가네요. 이번 주 내로 드릴게요."
-서둘러주라. 나도 그것 때문에 많이 시달린다. 다 너만 기다리고 앉아서 목만 빼고 있잖냐.
"폰타나 씨가 보고 싶은 것은 아니고요?"
-당연히 나도 봐야지!
잠깐 잡담을 나누다가 통신을 종료했다.
그리고 다른 쪽 일을 전부 처리한 후, 자동 전투기계에 대해 내게 올라온 보고서를 살폈다.
복잡한 수치와 전문용어로 꽉 찬 보고서는 머리를 쓰게 만들었지만, 고무적인 내용을 적고 있었다.
'전체 사례에서 감소된 사상자는 동 상황 대비 평균 26.2%. 인류 연합군의 재정 부담이 31.7%상승했음을 감안해도 자동 전투기계의 도입은 단기적인 군 전력 향상 및 중장기적인 군의 전력 유지에 있어서 매우 바람직함.'
가장 내 눈에 띄는 것은 26.2%라는 숫자였다.
만약, 자동 전투기계가 전격적으로 도입될 경우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현재 에일리언과의 백병전 시 발생하는 군 전체의 사상자 수가 한 달에 350만 명에 달한다고 것을 생각하면, 단순히 생각해도 917,000명이 덜 다치고 죽는다는 말과 똑같았다.
1년이면 1,100만 명에 달하는 어마무시한 숫자다.
'앞으로 확전될 거란 점까지 생각하면....'
인류 운명의 향방을 좌지우지 할 성과였다.
게다가 그 때문인지 요즘 군 관계자로부터의 접근이 매우 활발했다.
모나크 가문과 모하임 왕가 둘이 배후로 있지 않았다면 귀찮은 수준에서 그치지 않았을 정도.
이쯤 되면 다르모사에게 한 마디 부탁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쯤 쉴 시간인데. 한 번 연락해 볼까.'
생각난 김에 통신을 연결을 시도했다.
연락이 닿으면 좋겠지만, 안 닿아도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된다.
하지만 통신은 비서실과 보안 검사를 거쳐서 결국 다르모사에게 연결되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동생. 아직 일과시간인데.
"그래서 일 이야기를 들고 왔어요."
-아아…실망인걸. 우리는 영혼의 동반자인 줄 알았건만.
"일 이야기가 끝나면 약속한 곳에 자료를 업로드 할게요. 그동안 모은 컬렉션인데 꽤 괜찮은 걸 구했거든요."
-정말이지?
"보장하죠."
입체 영상의 다르모사가 눈을 반짝였다.
일과가 끝나기 바로 전이라 보나마나 땡땡이를 치고 있었을 인간이다.
난 부담 없이 용건을 꺼냈다.
-그 이야기야? 안 그래도 지금 한창 떠들썩한 소식이지.
"이렇게 말하면 청탁하는 것 같아서 조금 그렇네요. 그래도 가능하면 조치를 취해주었으면 해서요."
이미 초저가로 공급중인 물건이다.
아무리 규모의 경제를 부르짖어도 남는 게 없는 사업.
승냥이들이 날뛰어도 물려줄 뼈다귀조차 없었다.
-잠깐만 체크해볼게.
나는 다르모사에게 사정을 아주 자세히 설명했다.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남는 거 없다고 징징대는 사업자의 이야기를 들어줄까 의심되기는 했지만, 업무 모드에 들어간 그는 상당히 진지하고 치밀했다.
내가 보내 준 자료까지 엄청난 양의 자료를 중복 검토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뭐야, 이거?
"왜요?"
-너 땅 파서 장사 하냐?
그런데 다르모사의 반응이 예상보다 극적이다.
-아니, 뭐 이렇게 싸게 공급해. 망하고 싶어서 환장했어? 너희 투자자들은 아무런 말도 안하냐?
"음.... 연구소의 권한은 제가 꽉 잡고 있거든요."
-그래도 그렇지. 경쟁자도 없는 순수 독점 사업에 수익률을 이렇게 잡는다고? 너 정체가 뭐냐?
"하하."
오히려 날 책망하는 모습.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다.
'어차피 군 관계자들에겐 좋은 일일 텐데.'
특히, 다르모사의 경우 자동 전투기계가 부활한 것은 쌍수를 들고 찬성해야 할 일이다.
군의 재정적인 부담이 늘어도 인류의 승리 가능성은 높아지는 길이니까.
# 29
생존 테스트.
- ...아무튼 이 건은 내가 좀 더 파봐야겠다. 이건 그렇다 치고. 너 오늘 아침에 올린 보고서 있지?
"보고서요? 혹시 RTA 전술학 수업에서 쓴 거 말이에요?"
-그래. 이건 도대체 왜 쓴 거냐?
다르모사가 내게 의도를 물어온다.
나는 다르모사씩이나 되는 인물이 그 보고서를 벌써 봤다는 것에 놀랐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에일리언에 대해서 파다 보니까 생각난 이야길 쓴 거예요."
-네가? ...뭐, 그렇다 치자.
"그… 형님."
이 호칭도 오랜만에 쓰려니까 어색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러봤다.
-더 할 말 있어?
"혹시 그 보고서 관심 있으세요?"
-개인적으로 보고 있는 중이야. 터무니없긴 한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까.
"하하, 그렇죠? 본 김에 한 번 자세히 검토해 주세요. 제 전술 보고서를 무려 초인단 단장이 봐주니까 기분이 좋네요."
다르모사가 잠시 말없이 날 주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신경 써주겠다는 표현일 것이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최소한의 목표는 달성했다는 생각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할 이야기 없으면 끊는다. 드라마 방영할 시간이야. 그리고 여기다 숟가락 올리려는 멍청한 인사들은 전부 내가 컷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예. 고마워요."
-그래.
이게 바로 든든한 빽을 둔 직장인의 마음이려나.
통신이 종료되며 다르모사의 영상이 사라졌다.
난 잠시 머리를 긁다가 에일리언 정보 작성을 시작했다.
밀린 작업을 끝내고 공부까지 하려면 시간이 부족했다.
*
세상을 살다 보면 가끔 놀랄 때가 있다.
평범했던 사람이 혁신적인 리더의 자질을 보이거나,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 이기주의자가 자신을 희생해 남을 구하는 등.
여태까지의 행동으로는 알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사람의 행동은 그만큼 쉽사리 예측할 수 없는 분야였다.
13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오며 다양한 인간군상을 대면해 온 다르모사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오늘 다시 그 느낌을 받고 있었다.
"정말 뭐하는 놈이지?"
처음엔 그냥 얘기가 잘 통하는 상대이겠거니 했다.
취미와 관심사가 비슷하고 성격도 잘 맞다보니 술기운을 빌려 형 동생 하는 사이까지 발전했다.
그래서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하는 행동들이 점점 예측을 빗나갔다.
자동 전투기계가 부활한 건도 그렇다.
자동 전투기계는 한 때 인류 전력의 일각을 담당했다.
그러던 것이 신경 기생체의 진화로 인해, 오히려 인간에게 총구를 돌리는 일이 일어나며 전장에서 모습을 감췄다.
다르모사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가 아팠다.
유리했던 전황은 뒤집어졌고 사상자의 수는 껑충 뛰었다.
제때 대처하지 못해서 에일리언에게 완전히 오염당한 행성의 숫자도 상당수.
그로부터 한참 동안 전장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고생해야만 했었다.
"어. 그놈 연결해. 그래. 연합 본부의 군수 보급 담당하는 소장 놈 있잖아."
그래서 폰타나 운테가 신기술을 들고 등장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환호성을 내질렀을 정도다.
왜?
은퇴계획에 청신호가 들어왔으니까.
그런데 이게 웬일.
정확한 보고를 받는 중, 폰타나 운테는 레오나르드 모나크가 주도적으로 세운 연구소 소속이며 새로운 자동 전투기계의 개발 또한 레오나르드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와 서였다.
그에게 박힌 레오나르드의 이미지는 기껏해야 전술적인 역량이 뛰어난 아카데미 생도.
다르모사는 솔직히 레오나르드를 높이 평가하진 않았다.
놀라운 전술에 의한 승리는 가끔 나온다.
레오나르드가 특히 유명해진 것은 COH 아카데미의 생도이며, 전공 또한 대단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전술적 승리를 통해서 이득을 취하는 일반 군 장교도 해도 충분했다.
결국, 차기 초인단 단장으로 평가받는 4인의 기대주와 비교하면 평범한 재능을 가진 생도일 뿐이었다.
'그런데....'
게다가 그게 마지막도 아니었다.
방금 전 연락을 받아서 잠깐 확인한 자료들을 확인하면서 더욱 기가 참을 느꼈다.
'절대 제 살을 깎아먹으면서까지 인류의 존속을 위해 사명감을 불태울 녀석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확신할 수 있다.
레오나르드와 다르모사 자신은 같은 과라고.
자신의 안위가 가장 중요하고 적당한 물욕을 가지고 있으며 명예욕도 소심하게 챙기는, 그런 널리고 널린 소시민 타입의 인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자료만 보면 자선사업가가 따로 없네.'
.
직접 자료를 확인하지 않았으면 담당자에게 갈취 수준으로 대우를 박하게 받은 결과라고 오해할 수준이다.
그래서 처음엔 감정이 격해지기도 했다.
이런 보물을 들고 왔으면 아껴줘도 모자랄 판에 괴롭힌다는 생각에.
하지만 다방면으로 확인해 본 결과, 역시 공급가액은 레오나르드가 산정한 것이 맞았다.
"그래. 확실하지? 알았어. 그 자료는 전부 나한테 보내고."
통신을 종료했다.
역시 담당자는 딱히 잘못이 없다.
예상가보다 한참 못되는 가격에 공급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인 것뿐이란다.
오히려 성능에 문제가 생길까봐 몇 번이나 확인을 했음에도 상대가 그 가격을 밀어붙여서 체결된 계약이었다.
덕분에 전방 보급이 예상보다 2배는 빠르게 이루어질 거라나.
다음 분기에 특진이 확실시 되는 담당자는 목소리에서 기쁨이 확연히 묻어나왔었다.
여기에 아침에 읽은 뜬금없는 보고서 또한 그렇다.
이런 오지랖을 떨 성격 또한 아닌데.
다르모사는 레오나르드의 성격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혹시 내 앞에서 한 행동이 전부 연기였나? ...그럴 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이상한 놈이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이해되지 않는 인물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앉은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다르모사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올라온 자료를 검토하고 얽혀있는 상황에 대해서 파악했다.
그 과정에서 그의 밝은 은퇴 전망을 방해하는 멍청이들을 한 번 싹 다 털어주었다.
연합 본부가 갑작스러운 내리갈굼으로 시끄러워졌지만 그가 알 바는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
레오나르드가 그리고 있는 미래는 과연 어떤 형태일까.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다.
다르모사는 자신의 어린 친구가 앞으로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해졌다.
*
교장실에 다녀왔다.
전 생도를 대상으로 한 면담이 내 차례가 되었던 것이다.
교장은 여전한 능글맞음으로 나와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즐거워 보였던 것은 그가 가진 살몬 연구소의 주식 때문일 것이다.
벌써 액면가 대비 100배 가까운 가격에 팔아달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 기뻐할 만하다.
어쨌든 교장은 고마워하며 새로운 에일리언을 생포해 놨음을 알려주었다.
그것도 위험 2급에 쉽게 볼 술 없는 개체란다.
"정말? 같이 가자!"
"안 그래도 그 말 하려고 했어."
새롭게 적응할 특성이 없어서 한동안 따라다니지 않던 로제 신나서 소리를 질렀다.
나도 도움을 받아야 할 테니 이렇게 나와 주면 고마울 뿐이다.
우리 둘은 오후 수업까지 마치고 바로 격리 구역으로 향했다.
자주 봐서 이제는 꽤 친해진 관리자와 인사를 하며 내부로 들어갔다.
"넓어졌네요."
"이번에 들여온 개체가 좀 특이한 놈이라 내부 공간을 조금 개조했습니다."
"저 놈인가요?"
"예."
격리 공간의 벽에 신기하게 생긴 개체가 붙어있었다.
넓적한 판에 다리 네 개가 붙어있는 개체.
그 네 개의 다리를 쭉 펴고 평평한 격리공간의 벽에 딱 붙어있는 모습이 불가사리를 연상케 했다.
"거머리 의사[Doctor Leeches]네요.
거머리 의사는 커다란 에일리언 종에게 붙어 사는 개체다.
주로 하는 일은 상처 입은 부위에서 독소를 빨아들이고 치료를 돕는 영양분과 재생액을 내뿜는 것.
집체만한 상처도 순식간에 치료할 정도로 능력이 좋다.
때문에 거머리 의사는 몇 마리만 있어도 대형 개체의 공략이 아주 골치 아파지기 때문에 발견 시 최우선 제거 대상이 된다.
"저걸 어떻게 구하셨지? 정말 보기 힘든 놈들인데."
"하하, 그렇죠? 교장님이 힘쓰셨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말한 대로 보기 어려운 개체다.
주로 위험 6급 이상은 되어야 드문드문 발견되는 놈들이라 일반적인 전장에서 구경조차 할 수 없다.
또한 6급 이상의 대형종의 경우, 주로 화력을 집중하는 식으로 상대한다.
그런 후에 사체를 확인하면 거머리 의사는 화력에 휩쓸려 흔적조차 남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 놈도 아니네요."
"여기에 있는 건 총 셋입니다. 발견 당시 미성숙 개체였던 탓에 온전히 포획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아, 레오나르드 생도님이라면 알고 계시겠네요. 후른샤이아 행성에 나타난 랜드 크라울러를 잡고 수색 과정에서 발견한 놈들이 저놈들입니다."
"군에서는 탐내지 않던가요? 연구 소재로 꽤 각광받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에 있는 건 셋뿐이지만, 실제론 그보다 많은 수를 포획했다고 하더군요."
"아아."
내가 한 일이 이렇게 또 영향을 끼치게 됐다.
나는 옹기종기 모여서 이쪽을 경계하는 거머리 의사들을 주시했다.
다른 개체에 비해서 전투적인 능력은 현저히 떨어지지만 무시할 정도는 아니다.
특히 배 쪽에 숨겨진 바늘은 거대종의 두껍고 단단한 외피를 뚫고 들어가야 해서 매우 날카롭고 위협적이다.
"귀엽게 생겼다."
"저게? 그건 아닐걸."
뒤집어 놔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겉은 보호색을 띄기 때문에 에일리언 치고 얌전해 보이지만, 안쪽은 징그러움 그 자체다.
"그러면 일 보세요. 이번에도 하루 이상 걸릴까요?"
"예.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끝날 때까지 제가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을 테니 언제든 상황이 발생하면 연락 주세요."
관리자가 퇴장했다.
로제는 그 사이에 벌써 격리 공간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거머리 의사들이 극도의 경계심을 보이며 로제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고 했다.
"이리와."
어째 에일리언이 불쌍해 보인다.
사방이 막혀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간격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자 거머리 의사 중 하나가 이상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끼엑!!
"레몬. 얘들 화났나봐."
배에서 기다란 침을 빼내 자신들이 들러붙어 있던 벽을 마구 찔러댄다.
격리 공간을 감싸는 외벽은 분명, 거머리 의사의 능력을 감안해 설계되어서 단단할 텐데도 놈들이 같은 곳을 계속해서 찌르자 조금씩 찌그러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괜찮아도 계속 놔두면 결국 뚫리고 말 것이다.
'그걸 뚫어도 탈출할 수는 없겠지만....'
이 격리 구역은 에일리언을 가두기 위한 목적을 생각해 3, 4중의 보안 설계가 되어있었다.
결국 저걸 뚫고 나와도 또 갇히게 될 뿐.
그래도 나 하나 때문에 지어진 시설이 저렇게 훼손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았다.
"로제, 적당히 얌전하게 만들어 줄래?"
"알았어!"
나도 격리 공간 안에 들어서며 로제에게 부탁했다.
신이 난 로제가 한 마리를 금세 벽에서 떼어내선 바닥에 쳐 박았다.
혼쭐이 난 거머리 의사가 도망치려는데 다리를 툭툭 때리며 다시 넘어뜨렸다.
하지만 연체동물에 가까워 전과 같이 뼈만 부러뜨려서 못 움직이게 만들 수는 없다.
"흠...."
약간 고심하던 로제가 손날을 세웠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덤벼오는 거머리 의사를 피해 다리 4개를 각각 한 번씩 찔러 주었다.
그러자 거머리 의사가 폭삭 주저앉아 꿈틀거린다.
"됐다!"
자신이 한 일이 만족스러웠는지 웃으며 손을 털었다.
그리곤 거머리 의사를 차서 뒤집었다가 대번에 인상을 찡그러뜨리며 물러났다.
"징그러워!"
"그렇지? 거머리 의사는 안쪽 피부가 모두 빨판이나 마찬가지야. 오징어 같은 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다리 안쪽도 붙어야 할 때는 살이 벌어지며 내피가 노출된다.
로제는 그 광경을 보고 거리를 조금 더 벌렸다.
나중에 초인으로 활동하게 되면 이런 징그러운 외형을 가진 개체는 수도 없이 만나게 되겠지만, 지금은 딱 나이다운 반응이다.
# 30
"저것들은 내가 정리할게."
여전히 벽을 두드리고 있는 남은 두 마리에게 다가갔다.
바로 밑까지 접근하자 갑자기 뚝 떨어져 내리며 공격해 온다.
나는 그걸 가볍게 피하며 다리를 묵사발 수준으로 때려서 박살내 놨다.
로제 같은 능력이 없는 이상 이게 최선이다.
엉망이 된 거머리 의사 3마리가 바닥에 널브러져 꿈틀댔다.
로제는 징그러움에 익숙해졌는지 다시 왕성한 호기심으로 툭툭 쳐가며 육체구조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런 구조구나. 확실히 생존에는 뛰어날 것 같아."
"자가재생력도 좋아. 웬만한 상처는 금방 회복할 걸."
혹시나 하는 마음에 로제에게 처치를 부탁했다.
그러자 밖에서 쇠꼬챙이 같은 걸 가져와 거머리 의사의 상처를 관통해 전신을 꼬치처럼 꿰매어 버렸다.
"...허."
워낙 무식한 처리라서 반항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듯하다.
나는 얼른 한 마리를 붙들고 접속을 시작했다.
총 정보량은 5,000.
칼날 벌의 1.5배 수준이다.
그래도 저번보다 배에 가까운 속도에 의해 더 빠르게 분석을 마칠 수 있었다.
정보량이 많아서일까 특성의 개수도 상당하다.
[치료액 분비]
-침샘을 통해 높은 영양소가 함유된 치료액을 분비한다. 치료액은 독소를 해독하고 상처 치료를 도우며 원기 회복에 도움을 준다.
[카모플라쥬]
-외부의 환경에 대응해서 피부의 색소를 변화시켜 위장한다.
[흡혈 송곳니]
-송곳니를 통해 대상의 체액을 빨아들인다. 송곳니의 여과기능을 통해서 원하는 종류의 액체만을 빨아들일 수 있다.
그 중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위의 3가지다.
여기에 있는 거머리 의사가 3마리인 점을 감안하면 이번엔 굳이 고를 필요도 없이 전부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치료액 분비부터.'
차례로 특성을 빼냈다.
연구용으로 쓸 정보 단말도 가져와 기억해두었다.
3마리 모두 아주 쌩생한 상태였기에 단번에 온전한 특성을 빼낼 수 있었다.
치료액 분비[104]
흡혈 송곳니[17]
카모플라쥬[6]
문제는 치료액 분비의 정보량이 여태껏 내게 적용한 모든 에일리언 인자의 정보량보다 높다는 점.
무턱대고 육체에 적용했다가는 예전의 그 사태가 일어나기 십상이다.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다.
정보량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특성의 수준도 높다는 의미.
일단 얻기만 하면 확실한 효능을 보여줄 것이다.
"레몬. 다 했어?"
"응. 그런데 아쉽게도 로제가 쓸 만 한건 없을 것 같네."
"상관없어. 나름 유익한 시간이었거든."
로제의 표정이 의외로 자신만만해 보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로제를 먼저 보냈다.
이번엔 전과 달리 로제가 도와줄 부분이 없었기에 그녀도 순순히 응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써먹지.'
괜찮은 특성이긴 한데, 써먹기에는 좀 애매하다.
어디 손으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죄다 입을 통해서 발현되는 특성이다.
함부로 쓰기엔 좀 민망하지 않을까 예상된다.
'손으로 찍어서 발라 줘야 하려나…? 뭐, 때가 되면 어떻게든 써먹게 되겠지.'
쓸데없는 고민은 그만두기로 했다.
특성 셋을 합한 정보량이 127.
오늘부터 최소 3, 4일간은 이곳에 갇혀있어야 한다.
'아, 관리자님에게 우선 말해야겠다.'
몇 번 하다 보니 점점 요령이 는다.
적당량을 나눠서 하는 식으로 하면 정신을 잃지 않고 빠르게 작업을 마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번에 시험해 볼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관리자에게 사정을 미리 설명했다.
오랜만에 특성 적용이 시작됐다.
*
"끄응...!"
드디어 격리 구역을 나섰다.
특성 적용은 결국 나흘을 꼬박 채우고서야 끝났다.
그동안 밀려있을 일거리가 걱정되었지만, 당장은 이 뿌듯함을 헤칠 수는 없었다.
"수고하셨어요. 4일 동안이나 자리를 지켜주시다니."
"뭘요. 저는 교대해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보다 레오나르드 생도님은 원하는 일을 다 마치셨습니까?"
"네. 기대 이상이에요."
"다행입니다."
소독을 꼼꼼히 받고 숙소로 향했다.
죽은 거머리 의사의 사체는 수거되어 군 산하의 연구소로 옮겨질 것이다.
비록 죽은 후 4일이 경과해서 부패가 한창 진행 중임을 감안해도 가치가 워낙 높기 때문이다.
'역시 집이 최고다.'
숙소에 도착해서 소파에 반쯤 기대어 누웠다.
4일 동안은 아주 힘들었다.
열이 오르는 가운데 잠도 못자고 집중해서 특성 적용 작업을 진행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지금도 아주 피곤한 상태다.
'그래도 이건 확인해 봐야지.'
오른손을 펼쳤다.
그리고 그 오른손을 천연가죽으로 만들어진 소파위에 올리고 카모플라쥬를 발현했다.
처음 겪는 감각에 버벅거림도 잠시.
곧 변화가 일어났다.
"와...."
물이 가득 든 컵에 떨어진 갈색 물감 한 방이 천천히 번져나가는 것 같았다.
조금 더 기다리자 내 손은 소파와 같은 색으로 변했다.
'괜찮네.'
위장 속도가 빠르지는 않다.
빛을 산란시켜 투명해지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색깔을 숨기고 온도를 일부 동화시키는 아주 기초적인 수준의 위장.
그러나 가볍게 써먹기에는 나쁘지 않다.
어느 정도 거리에서 무심코 보는 정도라면 충분히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는 수준이다.
특히 어둠 속에서는 효과가 배가될 것이다.
나는 손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이번엔 치료액을 시험해 볼 차례다.
이건 당장 남에게 해볼 수 없으니 내 몸을 이용해 봐야한다.
나는 부엌에 가서 요리용 칼을 꺼내 팔을 길게 그었다.
일부러 조금 깊게 그었다.
피가 터지듯 세어 나와 하수구로 주르륵 흘러내린다.
숨 지렁이의 특성 '급격한 세포분열' 덕분에 출혈량은 빠르게 줄어가는 중.
"으, 씨...!"
혼자서 하려고 해도 조금 민망하다.
그래도 피까지 봐놓고 안 해볼 수 없다.
나는 치료액 분비했다.
이것도 조금 새로운 감각이다.
약간 허한 느낌과 함께 원하는 만큼의 치료액이 분비되었다.
나는 그 치료액을 혀에 적셔서 내밀고 상처부위를 핥았다.
치료액이 상처 부위에 골고루 스며들도록 천천히.
상처는 놀랍게도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아물었다.
꽤 깊었던 자상이 완치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분여.
급속한 세포분열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속도다.
'이거 생각보다 더 좋은데?'
이 정도 효능이라면 외상의 경우 의료 처치를 받지 않아도 되겠다.
어지간한 외상은 스스로 치료하는 편이 더 빠르고 간편할 테니 말이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팔에 남은 혈흔을 꼼꼼히 씻어냈다.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았지만, 이건 도저히 시험해 보지 못하겠다.
'내가 흡혈귀도 아니고.'
'흡혈 송곳니'
솔직히 이건 쓸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버리기 아까워서 가져온 거지.
치료액 분비 특성 하나만으로도 거머리 의사에게서 얻을 건 다 얻었다고 생각했기에 불만은 없었다.
특성 확인을 다 마치곤 수면용 캡슐에 누웠다.
바로 옆에 있는 침대는 사용한지 오래되어 이젠 캡슐이 더 익숙할 정도.
나는 특성들의 목록을 확인하며 잠에 들었다.
또 이렇게 보람찬 하루가 갔다.
'아, 2시간 있다가 또 일어나야 하지.'
어쨌든, 수확이 있는 날이었다.
*
기말이 성큼 다가왔다.
2학기를 끝마칠 즈음이 되자 생도들의 분위기도 조금씩 익어가는 느낌이다.
각자 밀도 있는 시간을 보냈다는 증거다.
특히 RTA 전술학은 한 학기 내내 이슈였다.
RTA 전술학을 통해 알아 본 지휘관 적성은 생도마다 천지차이로 갈렸다.
그래도 전장의 실상은 누구나 명확히 마주할 수 있게 되며 특별한 의미로 남게 되었다.
"벌써 2학기가 끝나가네."
"아쉽나?"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나는 사힘의 말에 담담히 대답했다.
좀 더 정신을 차렸다면 지금보다 더 낫지 않았을까.
지난 11개월 동안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은데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흘렀다.
'아, 사실 8개월이지.'
레몬이 소비한 학기 초의 3개월가량은 빼고 생각하자.
어쨌든, 아쉬움을 금할 수는 없었다.
"너는 어때?"
"나 말인가?"
내 질문에 사힘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나는 언제나 시간이 짧다고 느낀다. 하지만 아쉽다고 생각한 적은 없군."
"아쉬운 적이 없다고?"
"항상 최선을 다했다. 그거면 되지 않을까?"
왕족은 왕족인가.
대답을 하면서 풍기는 기품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다만, 그대에 대해서 좀 더 빨리 알지 못했던 것은 오점으로 남을 것 같다. 내 사람 보는 눈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깨기였었지. 그래서 요즘은 사람을 속단하지 않는 습관을 기르고 있는 중이라네."
그러면서 하하 웃는 사힘의 얼굴이 눈부셨다.
'난 절대 저렇게는 못 될 거야.'
사힘은 일행 중 성격적으로 가장 본받을 만한 사람이다다.
동시에 의지가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곳은 참 배울 게 많아. 특히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나 볼 수도 있고. 특히 레몬, 너에게 배운 게 많은 편이지."
"나? 설마."
"자신을 비하하지 말게, 친구. 자네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일세."
이번 말은 조금 더 충격이 컸다.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혹시 다른 사람이 들었을까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메르디와 로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얘는 도대체 매번 이렇게 기척이 없을 수가 있는 걸까.
"흐응~. 둘이 뭐해?"
"레몬 안녕! 사힘 안녕!"
"하하, 안녕...."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둘을 반겼다.
반면 사힘은 전혀 당황스러운 기색 없이 입을 열었다.
"시험 준비는 잘들 했나? 나는 레몬과 이번 한해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네."
"맞아. 이번 시험만 끝나면 올해도 다 가지. 올해는 최고로 즐거운 해였어!"
로제가 우릴 둘러보며 말했다.
기분이 정말 좋아 보인다.
메르디는 그걸 보고 심술이 났는지 대뜸 묻는다.
"너 이론 테스트 점수 어떻게 나왔니?"
"…힝. 망했어."
로제의 2학기 기말 이론 테스트 점수는 1학기와 같이 최저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괜찮다.
COH 아카데미에서 생도에게 요구하는 것은 보다 실전적인 능력이다.
장차 일선에서 뛸 초인에게 이론이란 최소한만 갖춰줘도 충분한 항목이었다.
"실기에서 만회하면 되잖아. 걱정 마."
"그렇지?"
"이번 실기 테스트에 대한 정보는 들은 거 있어?"
다들 고개를 저었다.
실기 테스트에 대한 정보는 나도 모른다.
원작이면 몰라도 이런 사소한 것까지 내가 묘사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 같으면 1학기 때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었다.
"군인들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이번엔 지휘와는 관련이 없는 것 같다."
"RTA 전술학이 있으니 딱히 더 볼 필요가 없다는 거겠지. 그것보다 이번엔 좀 더 전투적인 내용을 보지 않을까?"
"나도 화끈하게 싸우는 게 좋아!"
서로가 희망사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실기 테스트는 그들이 원하는 내용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하아...."
메르디가 짜증을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실기 테스트의 주제는 생존.
무려 1주일 간 테스트가 이뤄지는 구역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테스트 구역에는 '위험 생물'들이 분포될 예정이었다.
위험 생물은 우주 개척을 하면서 발견되거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화한 생물, 또는 유전자 변이 실험 중 탄생하는 것들 중에서 공격성이 강하고 위험한 종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생물은 에일리언이 아니라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예전 지구에 있었던 육식 공룡보다 강하고 큰 종류도 많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위 위험종으로 구분되는 특별한 위험 생물은 예비 초인들도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함을 자랑한다.
테스트 구역에는 이 상위 위험종들도 지역마다 하나씩 배치될 예정이라니, 결국 위험을 피해 극한의 환경에서 얼마나 잘 적응할 것인지를 보는 시험인 것이다.
"다 부숴버릴까."
1학기 테스트에서 3일간 치러졌던 테스트에도 스트레스를 받았던 메르디에게는 이보다 더 나쁠 순 없었다.
메르디는 울컥 했는지 말을 막 내뱉었다.
그래도 예전과는 다르게 감정에 따라 이능이 폭주하지는 않았다.
이능 제어력이 많이 좋아졌다는 증거다.
어쨌든 이번 시험에서 그녀는 인내력의 한계를 시험받을 것 같았다.
# 31
나는 짜증내는 메르디를 보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해줄 수는 없지.'
실기 테스트에 앞서 주어진 보급품을 살폈다.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은 앞서 수업에서도 사용법을 배운 생존 키트와 간단한 응급치료 도구, 비상용 식량 하루치가 다였다.
정말 최소한도의 보급품.
관리자는 정말로 우리들에게 극한의 상황에 밀어 넣고 싶은 것 같았다.
"하루치? 일주일 동안 뭘 먹으라고?"
"알아서 구해야지. 생존 수업에서 배운 대로만 하면 될 거야. 생존 키트에 포함된 중화제와 해독제를 사용하면 야생에서도 충분히 먹을 걸 구할 수 있을 테니까."
"나 그 수업 잘 안 들었는데...."
로제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메르디나 로제나 상태가 안 좋긴 마찬가지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잘 들어."
로제에겐 실기 테스트가 시작되기 전의 짧은 시간을 이용해서 생존 키트의 사용법을 짧게 알려주었다.
얼마나 기억할지는 몰라도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다 기억했어?"
"…아니."
"모르겠으면 여기 키트 내부에 적혀있는 사용법을 읽어 봐. 기본적인 설명은 되어 있으니까 도움이 될 거야."
"응."
"그리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테스트 구역 가장 중앙으로 와."
"중앙?"
"어."
"…알았어."
로제가 조금 힘이 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메르디도. 협동이 금지라는 이야기는 한 적이 없으니 모여서 활동해도 상관은 없을 거야."
"신경 꺼."
메르디는 아직도 신경이 날카로웠다.
지금 건드렸다가는 정말 사단이 일어날 수 있었기에 더 이상의 충고는 접기로 했다.
바튼은 이야기에 별로 관심이 없는지 룰북[Rule Book]만 읽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도 1학기 때와 마찬가지로 1등을 할 생각일 것이다.
'이번 테스트도 바튼 쪽이 좀 더 유리할 것 같은데.'
겉으로만 보면 생존이 주목표다.
하지만 바튼과 사힘 정도 수준의 생도에겐 조금 달랐다.
이들에겐 상위 위험종이라 해봐야 공략 가능한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사냥이 추가 점수를 준다고 명시되어 있는 이상, 들의 목표는 생존이 아닌 사냥이 될 것이다.
물론, 1주일간 별다른 보급 없이 생존해야 한다는 것은 같은 조건이었지만, 우등생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들이기에 여전히 해당사항이 없다.
곧 테스트 지점으로의 이동이 시작됐다.
우리는 모두 떨어져서 각자의 스타팅 포인트에 떨궈졌다.
이번에는 구역 간 따로 이동 통제를 하지 않았다.
'열대우림 지형인가?'
바닥이 질퍽하다.
바로 근처에는 늪이 자리해 있었다.
온도는 후덥지근했으며 공기 중에 습기가 가득했다.
여러모로 악조건이다.
나는 일단 근처에서 가장 높은 나무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동쪽과 서쪽은 지평선 끝까지 나무숲만 보이는 상태.
북쪽으로는 산이 하나 있기는 한데, 테스트 구역을 벗어나 있었다.
'대충 저쪽이 중앙이겠네.'
대충 30km쯤 떨어진 곳에 호수가 보였다.
호수는 생존에 있어서 필수적인 물을 보충할 수 있는 지역이다.
언뜻 본 것대로라면 맑아 보인다.
하지만 에일리언 오염 현상이 전 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했으니 혹시 모르는 상황.
어쨌든, 시간이 지날수록 좋을 건 없어 보였기에 호수를 거쳐 이동하기로 했다.
설사 오염되었다고 해도 괜찮다.
옅은 오염 정도는 생존 키트를 이용해 중화가 가능하다.
그리고 자연물을 이용해 몇 차례의 정재를 거치면 생도들은 그냥 음용이 가능한 수준까지 정화할 수 있다.
또한 내 육체는 에일리언 오염에 대한 저항력이 다른 생도들보다 훨씬 강하다.
이건 내 이능에 숨겨진 어드밴티지라고 할 수 있다.
'먹을 만 한 것도 전부 챙기고....'
더운 지형이라 그런지 먹거리는 꽤 풍부하다.
대부분 숲에 대한 지식이 깊어야 이용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기는 하지만, 딱 봐도 구분이 가능한 과일까지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나는 과일을 채취하다 중간에 발견한 것을 따 바닥에 버렸다.
'이건 아니고….'
몽고 베리[Mongo Berry]
사과 모양에 청색 점이 다닥다닥 박혀있는 열매다.
맛은 좋다.
달고 과즙이 풍부해서 하나만 먹어도 배를 채울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만 보이는 수작이다.
몽고 베리는 탈수증상을 유발하는 성분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얕은 중독성까지 있어 하나를 먹으면 또 찾게 만든다.
그렇게 먹으면 먹을수록 목이 마르게 되고 계속 먹게 되면 나중에는 탈수 증상을 일으키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소화에도 좋지 않기 때문에 몸이 엉망이 된다.
그래서 향간에는 이걸 먹고 환상을 봤다며 신기루 열매라고 부르기도 한다.
꾸르륵! 꾸륵!
호수에 다 와 갈 때쯤 갑작스러운 소리에 몸을 숨겼다.
카모플라쥬가 발동하며 그늘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소리의 정체는 처음 보는 종류의 위험 생물.
타조를 닮긴 했는데 전체적으로 조금 더 육중한 느낌이다.
멧돼지처럼 보인다고 할까.
아무튼 성격도 꽤 흉포할 것 같았다.
'먹을 수 있으려나.'
하지만 내 관심사는 하나.
식용이 가능할 것인가.
위험 생물은 에일리언과는 다르다.
위험성 때문에 경계할 뿐이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동식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한 마디로 에일리언 오염만 없으면 웬만한 개체는 식용이 가능하다는 것.
나는 일단 사냥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꾸륵?
카모플라쥬 상태로 접근했다.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주위를 둘러본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자 다시 긴 목을 앞뒤로 흔들며 내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더, 더.'
사정거리까지 근접한 순간, 순식간에 튀어나가 목을 끊어 쳤다.
위험 생물이 비명을 지르더니 날개를 퍼덕이며 날뛰다 도망가려 한다.
하지만 타격이 컸는지 중심을 잡지 못하는 상태.
덕분에 마무리는 쉬웠다.
"음...."
처음 해본 위험 생물 사냥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에일리언 위험 등급으로 따지면 1.5등급 정도.
하지만 에일리언을 상대하면 항상 받는 맹목적인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좀 더 쉬운 느낌이다.
게다가 오염된 개체도 아니다.
나는 도축을 고민해 봤다.
무게는 약 200kg.
충분히 이대로 들고 갈 만하다.
하지만 날씨가 덥고 습기차다는 것을 생각하면 부패가 빠르게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미리 작업을 해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생존 수업에서 배운 바를 떠올리며 생존 키트에서 작은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이것만 잘 챙겨도 테스트 동안 식량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곧 도축이 끝났다.
나는 잎이 널은 풀로 고기를 감싸 멨다.
목적지는 실기 테스트가 이뤄지는 구역의 중앙.
도착할 때까지는 쉴 생각이 없었다.
*
"배고파...."
로제는 꾸르륵 소리를 내는 배를 오른손으로 감쌌다.
오늘은 벌써 실기 테스트가 시작한지 3일째 되는 날.
첫 끼에 비상식량을 모두 처치했으니 이틀이나 굶은 셈이다.
그동안 식량을 구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해봤다.
하지만 위험 생물은 잡는 것마다 오염된 개체에 야생에서 구할 수 있는 먹거리는 온통 독성이 가득했다.
그거라도 먹어보려 했지만, 테스트 바로 전에 레몬에게서 받은 충고가 생각나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서 몸을 더 움직였다.
혹시 1학기의 기말 실기 테스트처럼 뭔가를 해내면 주변에 먹을 게 있을까 싶어 상위 위험종을 노리고 열심히 움직이다가 하루라는 시간을 까먹고 말았다.
덕분에 배만 더 고파진 상태.
"으으, 이걸 어떻게 먹으라고."
로제는 불만을 내뱉었다.
그녀가 발로 툭툭 차대는 것이 바로, 방금 사냥에 성공한 상위 위험종이다.
몸의 대부분이 땅속에 파묻혀 있음에도 드러난 부분만 코끼리만 했다.
문제는 잡고 나니 에일리언에 오염이 된 상태라는 것.
이것도 역시 중화제가 먹힐 수준이 아니다.
"쓰읍…꿀꺽!"
아무튼 이건 안 된다.
로제는 잠시 주저앉아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집어넣고 배고픔을 참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참으면 참을수록 강해지는 허기 탓에 곧바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잠깐…!'
그때 레몬이 마지막에 한 말이 생각이 났다.
'중앙으로 오라고 했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지금까지는 앞의 충고에 정신이 팔려있었는데 이제야 기억난다.
로제는 옆의 나무를 차고 올라가, 꼭대기에서 높이 점프했다.
고도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주변을 한눈에 담았다.
'저쯤인가?'
그녀가 있는 지역은 중앙에서 약간 남쪽에 자리한 곳이었다.
상위 위험종을 잡기 위해서 움직이다 운 좋게도 가까운 장소에 도달한 셈이다.
최고점에 도달한 육체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감속을 위해 아무런 행도도 하지 않던 로제는, 오히려 추락하는 속도 그대로 이용해 하늘에서 본 방향으로 튕겨나갔다.
'배고프다.'
열량소모가 너무 심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굶은 적은 스승님을 만났던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곤 처음.
때문에 로제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결국 반쯤 정신 나간 상태로 목표라고 생각한 지점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다.
중간에 길을 가로막는 것은 모조리 부쉈다.
그게 바위나 나무 같은 지형지물이든, 위험 생물이든 상관없었다.
"밥!"
엄청난 소음과 함께 일직선의 길이 만들어졌다.
결국, 주변에 자리하고 있던 모든 생명체들의 시선을 끈 일주가 시작되었다.
*
지글지글.
고기가 구워진다.
이름 모를 생명체의 고기는 정말 맛있었다.
미리 준비한 소금만 조금 뿌려서 먹어도 진미가 따로 없을 정도.
"레오나르드. 더 안 먹어?"
"응. 밖을 좀 보고 있을게."
2일째에 합류한 윤지혜가 잘 구워진 고기를 나무를 깎아 만든 접시 위에 옮기며 나를 불렀다.
그녀를 만난 건 우연이었다.
중앙 쪽으로 가던 중 퍼지는 소음을 정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된 것.
아쉽게도 그녀가 잡은 위험 생물은 에일리언 오염이 꽤 진행된 탓에 식용으로 써먹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동안 식사 시간을 함께 하며 꽤 친해진 터라 동행을 제의하고 보금자리까지 만들 수 있었다.
"뭐 좀 보여?"
"딱히."
이곳은 테스트 구역 중앙의 지형 중 가장 주변을 확인하기 좋은 산등성이에 위치한 동굴이었다.
험한 지형에 위치한 탓에 위험으로부터 안전했으며, 안쪽으로 꽤 깊게 뚫려있어서 지내기도 편했다.
'평소보다 오히려 더 편해.'
여기에 커다란 나뭇잎을 이용해 만든 침상은 숙면까지 보장한다.
평소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나로서는 오히려 휴가를 온 기분이었다.
여기서 1주일간 잘 쉬다 나가면 따로 휴가를 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런데 그때, 공기를 타고 옅은 진동이 감지된다.
진동이 일어나고 있을 장소와의 거리를 생각하면 엄청난 소음일 것이다.
'...저건?'
안력을 최대한 집중했다.
저 멀리 먼지구름 사이에서 선홍색 머리카락이 눈에 띈다.
아카데미 생도 중 저런 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로제다.
그녀는 굉장한 속도로 숲을 돌파해나가고 있었다.
나무고 뭐고 다 때려부수는 것 같다.
'왜 저러지?'
소음을 듣고 나타난 위험 생물들조차 예외는 없다.
그녀는 일직선으로 나아가며 거치적거리는 것들은 불도저마냥 모두 치워버렸다.
어딜 저렇게 가는 걸까.
나는 그녀의 행선지를 유추해 봤다.
어디서 멈출지는 모르겠지만, 내 보금자리가 있는 산 밑을 지나쳐가게 생겼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레몬?"
"잠깐만 갔다 올게."
"어, 어…?"
윤지혜의 의문을 뒤로 하고 산을 내려갔다.
진행경로는 바로 앞이다.
도착해서 조금 기다리자 저 앞에서 큰소리와 함께 무언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곧바로 로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제!"
반응이 없다.
뭔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인 것 같다.
마침 옆에서 튀어나온 코끼리만한 크기의 위험 생물을 몸통박치기 한 방에 박살내놓고 그대로 달려왔다.
"어...."
바로 앞에 모습을 드러냈는데도 알아보는 기색이 아니다.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걸까.
나도 함부로 가로막았다간 같은 꼴이 돼버릴 것 같다.
하지만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로제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살펴 적당한 크기의 바위를 들어 로제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 로제가 그걸 박치기로 부수려는 타이밍에 전력을 다해서 디딤발을 향해 태클을 했다.
반격 받을 것을 감안한 필사의 태클.
"어엇!"
그런데 정신없고 시야가 가려진 와중에도 피해냈다.
바위를 박살내며 뛰어오른 로제가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며 날 뛰어넘어 착지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 32
"어...?"
"로제."
"레몬?"
다행이다.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다.
로제는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나를 보고도 눈만 꿈뻑였다.
난 개의치 않고 말을 걸었다.
"뭐하는 중이었어? 바쁘지 않으면 고기 좀 먹고 갈래?"
"고기?"
갑자기 눈에 생기가 돈다.
나는 멍하니 침을 삼키는 로제를 데리고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우리가 자리를 떠나자마자 몰려들기 시작한 위험 생물들은 일단 무시했다.
"맛있다!"
로제는 비축해 놓은 고기를 반이나 소모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더 구워줄까요?"
"어…아니, 이젠 배불러."
나를 제외한 일행들에겐 여전히 존댓말을 하는 윤지혜가 로제의 먹방을 보조했다.
무려 한 시간이나 먹어댔는데도 얼굴 하나 안 찌푸렸다.
그저 어머니 미소로 바라볼 뿐.
"덕분에 잘 먹었어."
"아, 아니에요. 전 한 게 별로 없는걸요. 먹을 걸 구해오는 거나 보금자리를 꾸미는 것도 레몬이 거의 다 하고 있어요."
"보금자리? 여기가 보금자리야? 와. 여기 좋다."
그제야 안을 둘러봤는지 로제가 탄성을 흘렸다.
나름 고생에 대해 뿌듯함을 느끼게 해주는 반응이다.
나는 밖의 상황을 보러 나가면서 짧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로제가 쓸 침상도 하나 더 만들어야겠구나.'
그러려면 일단 저 앞에 있는 무리부터 정리할 필요성이 느껴진다.
소란을 듣고 모여든 위험 생물들이 더 큰 소란을 만들어 내는 덕분에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저런 허접한 놈들이 아니라 지역을 지배하는 상위 위험종까지 나타날 것 같다.
"레몬!"
내가 올라와 있는 나무 밑으로 로제가 다가왔다.
배를 가득 채워서인지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인다.
그녀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나무를 타고 내 옆에 도착했다.
그리곤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우와. 너 그거 뭐야?"
카모플라쥬 상태인 것을 잊고 있었다.
로제에게 이걸 보여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놀랄 만도 하다.
짧게 설명하자 내 피부를 손가락으로 꾹꾹 건드리면서 탄성을 내뱉었다.
"신기하다. 먼저 기척을 듣지 않았으면 여기 있는 줄 전혀 몰랐을 것 같아."
"그 정도까진 아닐걸."
내가 속일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시각적인 면 일부에 한한다.
그리고 체온을 조금 조정할 수 있는 정도?
겨우 그 정도로 초월적인 인지력을 가진 로제에게서 숨을 수 있을 거라곤 여겨지지 않았다.
"저것들을 정리해야겠어. 너무 소란스러워서 상위 위험종이 나타날 것 같거든."
"상위 위험종?"
"어. 저 남쪽 지역에 하나가 있는데...."
"저쪽에 있는 거면 내가 사냥했어."
"…정말?"
겨우 테스트 3일차인데 그걸 잡았다고?
상위 위험종의 경우 에일리언으로 따지면 위험 4급 이상에 해당한다.
게다가 보금자리를 틀 때 주변을 확인하면서 확인한 결과 놈은 에일리언 오염이 심하게 진행된 개체였다.
보통 에일리언에 오염되면 변형이 일어나 수명이 짧아지는 대신 더 강력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대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뭐, 로제니까....'
하지만 로제라는 사실에 쉽게 납득하고 말았다.
그녀라면 위험 4급은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 다행이네. 그래도 쟤들은 좀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 식용으로 쓸 만한 것들이 있는지도 확인해봐야 할 것 같고."
"나도 도와줄게!"
"저, 저도…."
우리들의 대화를 들었는지 어느새 동굴에서 나온 윤지혜가 나무 밑에서 말하고 있었다.
"그럼 셋이서 함께 가자."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먹은 건 조금 후에 정리하기로 하고 위험 생물들이 밀집한 곳으로 향했다.
다시 오고 보니 숫자가 정말 많다.
내가 처음 사냥했던 그놈보다 훨씬 강한 개체들이 바글바글했다.
"너희가 해봐."
"우리 둘이?"
"응. 둘이서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걸?"
윤지혜는 싸우라는 소리에 몸을 움찔 떨었다.
망설이는 기색이 확 느껴진다.
반면에 나는 이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었다.
이 정도 실전 기회를 잡기는 어렵지 않을까.
"좋아."
"레, 레몬?"
"너도 할 수 있어. 일단 내가 먼저 갈 테니까 준비가 끝나면 와."
먼저 나섰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위험 생물에게 다가가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심장을 박동시킨다.
체온이 오르면서 몸에서 열기가 솟았다.
산소가 풍부히 공급되며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렇게 전투준비가 완료되었을 때.
나는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얘들이 끝이야?"
"이 정도면 근방에 있는 놈들은 싹 다 정리한 것 같아."
고전했다.
위험 생물들은 하나같이 맷집이 좋은데다가 매우 공격적이었다.
특히 에일리언 오염이 진행 중인 개체들의 숫자가 대부분이라 더 힘들었다.
나는 윤지혜를 살폈다.
'휘유'
윤지혜는 내가 먼저 싸우기 시작한 이후, 조금 지난 후에야 참전했다.
그러고도 처음엔 꽤 소극적이었다.
덤벼오는 위험 생물을 방어적으로 상대했다.
그러나 싸움이 지속될수록 태도가 달라졌다.
이능의 사용에는 망설임이 없어졌으며 전투적으로 움직였다.
지금 보이는 게 그 결과다.
그녀의 주변엔 내가 해치운 것보다 많은 수의 사체가 쌓여있었다.
그 대부분이 신체 곳곳이 터진 끔찍한 상태.
"헤에…."
로제도 윤지혜를 유심히 관찰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위험 생물들의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
"아, 아앗…!"
그때 윤지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정신을 차린 것이다.
여전사로서의 카리스마가 순식간에 사라진 그녀는 허둥거림마저 보여주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얼굴의 핏기가 싹 말랐다.
그리곤 그 상태로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주변에 쌓인 사체를 피해가며 빠져나왔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응. 레오나르드는 괜찮아?"
"나야 물론."
나도 열심히 싸우긴 했다.
하지만 윤지혜에 비하면 성과가 반도 못 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잘 보니 윤지혜가 왼쪽 팔뚝을 다른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 밑으로 피가 방울져 떨어져 내리고 있다.
"그보다 너 팔 좀 봐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다친 것 같은데? 피 나잖아."
"난 괜찮…!"
도망치려는 윤지혜의 팔뚝을 잡고 옆으로 돌아가 상처를 확인했다.
팔 뒤쪽에 꽤 깊은 상처가 나 보인다.
언뜻 뼈가 보일 정도.
피부 주변이 약간 검게 변색된 것을 보면 에일리언 오염까지 된 상처다.
"이건 치료해야겠는데?"
"내, 내가 혼자서 해도 충분해."
"가만히 있어 봐. 여긴 손이 안 닿아. 그리고 혼자서는 제대로 치료도 못 할 테고."
몸부림치며 빠져나가려는 것을 달래서 제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생존 키트에서 응급치료 도구를 꺼냈다.
'좀 부실한데.'
응급치료 도구는 확실히 부실했다.
잔 상처 정도면 몰라도 저 정도로 큰 상처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럼 이대로 나둬야 할까.
안 된다.
겨우 3일 차인 지금 상처를 그대로 둔다면 계속해서 악화될 뿐이다.
더구나 오염이 뼛속까지 번질 경우 실격 처리가 될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중화제를 이용해 소독을 하곤 마취용액을 전부 뿌렸다.
입 안에서 몰래 치료액을 다량 만들어 냈다.
그리고 아픈지 부들부들 덜고 있는 윤지혜에게 말했다.
"잠깐 가만히 있어봐. 움직이면 안 돼."
"어, 어...꺅?!"
마취가 조금 됐다 싶을 때 입을 가져다 댔다.
흡혈 송곳니를 길게 빼내서 오염된 혈액을 빨아들이고 멀쩡한 혈액은 다시 재치료액과 섞어 주입했다.
"퉷! 아직 안 끝났어."
윤지혜는 이미 굳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
나는 이왕 시작한 것 얼굴에 철판을 깔고 끝까지 섬세하게 치료를 마쳤다.
그리고 붕대를 두껍게 감아서 매듭을 지어주었다.
"다 됐다. 나을 때까지 왼손은 최대한 조심해서 써."
"으으으으으!"
나도 좀 민망하긴 한데, 저렇게까지 반응하니 더 민망한 기분이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윤지혜를 남겨 두고 일어섰다.
로제는 궁금증을 다 풀었는지, 에일리언 오염을 확인하며 식용 가능한 걸 찾고 있었다.
"찾았어?"
"응. 이거랑 저거."
"하나만 해도 충분할 거야. 어차피 남은 고기도 있으니까 그만 찾아도 돼."
"그래!"
가까운 개울물의 위치를 알려주며 씻으라고 알려준 후 위험 생물들의 사체를 살폈다.
'역시 안 되나....'
이능을 발휘해 봤다.
그런데 오류 난 파일을 열어 본 것처럼 상태가 불량하다.
겨우 들여다 본 정보 또한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있었다.
이대로는 써먹을 수가 없다.
나는 결국 포기하고 보금자리로 돌아가 상처를 치료했다.
'치료액이 좋긴 좋아.'
큰 상처는 없었지만, 잔 상처를 비롯한 부상은 지혜보다 많이 입었다.
그럼에도 멀쩡한 것은 특성 덕분.
싸우는 중간 중간 치료액을 이용해 문제가 될 법한 부상을 치료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얼마나 편한가.
침 좀 퍼 바르면 치료가 끝나는데.
치료액의 해독 성분 덕분에 감염은 걱정할 것도 없고 흉터 또한 남지 않았다.
더구나 타박상에도 즉효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위험 생물에게 받혀서 뼈까지 시려오는 옆구리에 흥건할 정도로 치료액을 가져다 발랐다.
치료액이 금방 스며들면서 시원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치료는 끝났고.'
그렇게 치료를 마치고 적당히 씻었는데도 둘이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기다리기 보단 로제가 합류하며 추가적으로 필요해진 물품을 준비해두기로 했다.
'침상이나 만들어 놔야겠다.'
보금자리를 나섰다.
어차피 이 주변 구역은 이제 한동안 안전하다.
상위 위험종까지 제거됐으니 남은 테스트 기간 동안은 별 일 없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보금자리 꾸미기에 몰두할 수 있었다.
*
시험 6일 째.
보금자리 생활은 완전히 안정되었다.
식용이 가능한 채소나 과일, 뿌리식물까지 채집해서 식사는 더욱 풍족해졌다.
안전은 더욱 확실해졌다.
3일 전 주변에서 모여든 위험 생물을 모두 처리하면서 가끔 발견되는 것은 잔챙이 뿐이었다.
결국, 3교대로 경계를 서는 것을 빼고는 이렇다 할 일도 없이 시간만 죽치는 상황.
"심심해."
로제가 참다못해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할 게 없다.
아침저녁으로 하는 수련까지 모두 챙겨서 했음에도 남는 시간이 넘쳐났다.
"레몬."
"왜?"
나는 그제 몇 번의 실패 끝에 만든 그물 침대에 누워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너무 편안하다.
나중에 나이를 먹게 되면 꼭 이렇게 생활해야겠다.
"할 거 없을까? 나 심심해."
"음...."
그냥 고개를 끄덕이려다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성의 없게 대답했다간 꼭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지혜. 너도 심심해?"
"나? ...조금?"
윤지혜가 로제의 눈치를 살짝 보면서 대답했다.
이 생활에 불만 있어 보이는 사람은 로제 하나인 것 같지만, 동료의 문제를 마냥 무시하고 있을 순 없다.
나는 그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긴 했는데 막상 무언가를 해보려 하니 딱히 대단한 게 없다.
어쩔 수 없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적당한 크기의 돌을 주워서 공기놀이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10분을 못가 멈추었다.
"너무 쉬워. 재미없어."
"나도...."
둘 다 너무 잘했다.
모양도 일정치 않은 돌을 가지고 하는데도 별의 별 묘기를 다 부려가며 한다.
이게 이렇게 화려한 놀이였나 싶을 정도.
어떻게 된 게 실패를 한 번도 하지 않는다.
잠시 생각하다 이번에는 알까기를 말해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게임 진행에 문제가 있었다.
"그걸 부수면 어떻게 해?"
"미, 미안해…!"
"앗, 레몬. 이거 또 부서졌어."
처음 두어 번은 잘 하는가 싶던 알까기는 곧 폭력의 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로제가 때린 돌멩이가 주변을 비산하며 보금자리 안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깃든 힘이 얼마나 강한지 부스러기가 동굴 벽을 파고 들 정도다.
윤지혜는 더했다.
그녀는 이능을 써먹어 보려다가 알은 물론 판까지도 아예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난생 처음 목격하는 과격한 판 엎기다.
"…안 되겠다."
이 처자들에게 힘쓰고 몸 쓰는 게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 뭐가 좋을까.
나는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아."
마침내 알맞은 게 생각났다.
바로 빙고.
별다른 준비물 필요 없이, 셋이서 아주 평화롭고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빙고! 나 벌써 빙고 한 줄이야!"
"와, 축하해요!"
종이가 없어서 넓적한 돌에 힘으로 숫자를 새기는 방식으로 대신해야 했지만, 일행에게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재밌다! 친구들하곤 이런 게임도 할 수 있구나."
특히 로제가 아주 열정적이었다.
연신 친구들과 이런 식으로 놀아본 건 처음이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때문에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로제의 과거가 어떻게 됐었더라?'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정확히 아는 것은 없었다.
원작에도 따로 묘사한 적이 없다.
# 33
원작자인 나도 로제의 과거에 대해서는 깜깜했다.
'하긴....'
원작에서 기적의 세대는 과거의 인물이다.
이들은 각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중심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극중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신비주의적으로 서술한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주인공과 관련되지 않는 한 배경 묘사는 최소한으로 그쳤다.
로제에 대한 내용도 그렇다.
그녀는 친 가족이 없다.
대신, 기억나지 않을 어릴 적부터 어떤 무투가의 손에서 자랐다고만 되어 있었다.
윤지혜도 궁금한 점이 생겼는지 로제에게 질문한다.
"다른 친구들하곤 뭘 하고 놀았어요?"
"친구? 난 여기 와서 처음 친구를 사귀어봤어."
"아...."
대답을 듣곤 마음 약한 윤지혜가 금세 미안한 얼굴을 했다.
괜히 눈물을 찔끔 한다.
'그러고 보면 레몬은 친구가…있긴 있구나. 다 쓰레기라서 그렇지.'
로제처럼 아주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레몬의 인간관계는 써먹을 데가 전혀 없는 쓰레기였다.
"나 신경써주는 거야? 그럴 필요 없어. 난 할아버지랑 둘이서 굉장히 즐겁게 살았거든."
로제가 티 하나 없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저 말에 거짓은 없을 것이다.
'유추하는 것은 쉽다.'
로제가 아무리 인류 역사에 다시없을 천재라고 해도 나이에 비해 도달한 수준은 과하다.
무투는 이능과 달리 공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점을 고려하면 그녀는 어릴 적부터 쉬지 않고 무투술을 연마해 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실재로 그녀와 여태껏 나눈 대화를 반추해 보면 그녀의 삶은 무투로 점철되어 있었다.
무투술을 배우면서 놀고 땀 흘리고 성장에 기뻐했던 기억을 내게 들려주었다.
그러니 일반인과 다른 삶이라고 해서 동정을 보일 여지는 전혀 없다.
"빙고 재밌다. 레몬, 이런 거 또 없을까?"
"빙고 같은 게임? 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
또 뭐가 있으려나.
바둑이나 체스 따위가 떠올랐다가 바로 사라졌다.
머리 쓰는 게임을 로제가 즐거워할 리가 없다.
그런 거 말고 좀 더 간단하면서 힘쓰지 않아도 되는 게임을 생각해본다.
쿠광!!!
"뭐야?"
그때 갑자기 시야가 익숙한 빛으로 물들었다.
엄청난 이능의 발현.
넘쳐나는 백색 전류가 허공을 타고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메르디야!"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로제가 말했다.
맞다.
그녀의 말대로 메르디가 아니고서야 저 정도 이능을 보여줄 순 없다.
문제는 이능이 발현되는 형태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
평소 로제와 대련하는 모습을 몇 번 봐온 적이 있던 나는, 메르디의 상태가 절대 정상일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무슨 일 있나?'
발작하듯 주기적으로 방출되는 전류가 무작위로 주변을 휩쓴다.
정확한 목표 없이 낭비나 마찬가지인 이능 사용이다.
폭주나 마찬가지랄까.
"일단 가보자!"
"그래."
"나도…."
"지혜는 보금자리를 좀 지켜줘!"
"…으응!"
그렇게 멀지 않다.
대략 15km 정도.
빠르게 달리면 10분 내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먼저 갈게."
"어."
로제는 그 시간마저 걱정되는지 앞서가기 시작했다.
며칠 전 무아지경 상태로 돌진하던 때보다 더 빠른 속도다.
발을 박찰 때마다 주변의 지형지물이 터져나가는데, 그때마다 몸이 자석에 끌려가는 것처럼 앞으로 쑥쑥 쏘아졌다.
나는 무리하지 않았다.
그 자국을 따라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움직였다.
그렇게 9분여가 지나고서 도착한 장소는 생각보다 더 엉망이었다.
'이게 다 뭐야.'
탄내가 진동을 한다.
정도 이상의 전류에 휩쓸린 나무와 흙 등이 타서 까맣게 변색되어 있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하늘에선 상태가 나쁜 생도를 구조하기 위해서 의료용 드론이 바쁘게 날아다니는 중이다.
'크게 다친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위험 생물, 생도 구별할 것 없이 모두 횡액을 당했다.
그나마 아직 사망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마비된 근육 때문에 부들부들 떨며 입에서 거품을 게워내긴 하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다.
하지만 저 안쪽까지 그럴까.
더구나 폭주는 로제가 도착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4~5분 전까지 계속해서 이어졌었다.
그런 내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끄으으으...."
조금 더 안쪽.
메르디가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지점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상태가 위중해 보이는 생도 한 명을 발견했다.
'상태가 너무 나빠.'
얼른 다가가 확인해 보았다.
어떻게든 견디려 했는지 몸을 만 상태로 탄 흙이 몸을 반쯤 덮고 있었다.
그럼에도 등 쪽 피부가 전부 타버렸고 숨은 곧 끊길 것처럼 미약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중한 상황.
이 정도면 의료용 드론이 있어도 잘못하면 사망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수통을 꺼냈다.
그리고 녹아서 붙어버린 입을 억지로 벌려 수통에 든 액체를 천천히 흘려 넣었다.
얼마 전 윤지혜에게 처치하며 치료액의 사용이 생각 이상으로 번거로웠다는 점에 착한해서 만든 '치료수'다.
내용물은 물과 치료액 두 가지.
물과 섞어 두면 시간이 지날수록 효능이 약해지고 중화되는 만큼 더 그렇겠지만, 간편하게 먹일 수가 있었다.
'가만. 이 녀석 그놈 아니야?'
상태가 엉망이긴 한데 눈에 익다.
바로 옆에 떨어진 기계창을 보면 더욱 확실하다.
저번에 내게 시비를 걸었던 류룬쉰이라는 놈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놔둘 수도 없고.'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데 무시할 순 없다.
대충 이 정도면 죽지는 않겠지 하는 선까지만 치료수를 먹였다.
'이 정도면 죽지는 않겠지.'
잠깐 의식을 확인해 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으…너...!"
"잠이나 자라."
조금 정신이 드는지 뭐라 말하려는 룬쉰에게 말했다.
상태가 저래선 내가 제대로 보이는지도 알 수 없었다.
때마침 의료용 드론이 내려왔다.
나는 룬쉰을 들어 의료용 드론이 안내하는 데로 회복용액에 그를 통째로 담가 호흡장치를 연결했다.
그러자 의료용 드론이 등을 밀폐하고 이륙해서 빠르게 날아갔다.
마지막까지 날 바라보던 눈이 기억난다.
그렇게 잠시 생각하던 중 앞에서 인기척과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레몬!"
로제다.
그녀는 정신을 잃은 메르디를 양팔에 안아 들고는 다가왔다.
목소리 가득 걱정이 느껴진다.
얼른 다가가 메르디의 상태를 확인했다.
피부가 푸석푸석하고 살짝 말라 있었다.
몸에 상처가 있기는 하지만, 잔 상처 수준.
그 외에는 딱히 이상이 없어 보인다.
난 로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빠르게 입을 열었다.
"심한 탈수증상이 있어. 그 외에는 특별한 이상은 없고."
"정말? 그럼 물. 물을 먹여야지!"
"잠깐만 기다려봐."
잠깐 메르디의 상세를 더 살폈다.
단순히 물을 못 먹어선 이 상태까지 되진 않는다.
분명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건 몽고 베리?"
"이게 왜? 나빠?"
메르디의 포켓 안에는 잘 익은 몽고 베리가 몇 개 들어있었다.
그 중 하나는 얼마 전에 먹었는지 입 자국이 나있는 상태다.
"이래서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라고 한 건데."
몽고 베리 때문에 난 사고인 듯 보인다.
한 번 먹으면 멈출 수도 없고, 너무 한 번에 많은 양을 먹으면 가벼운 환각 상태를 겪을 수도 있다.
이건 단순히 물을 준다고 될 일이 아니다.
아직 몽고 베리의 성분이 체내에 잔존해 있는 상태라 수분 흡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다시 수통을 열었다.
내가 기대하는 건 치료액의 해독작용 뿐이다.
치료수에는 영양 성분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빠르게 기운을 차리겠지.
"정신이 없는데도 잘 받아 마신다."
레몬의 말대로 본능은 살아있는지 목울대가 절로 움직인다.
수통을 전부 비우고서도 더 마시고 싶은지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 보니까 이거....'
치료를 위함이기는 한데 내 침이 섞인 걸 대량으로 먹인 거나 다름이 없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더욱이 아까는 남자 놈한테도 먹였다.
나는 뭐라고 하지 못할 기분을 느꼈다.
'어쩔 수 없지. 후....'
당사자만 모르면 된다.
당사자만 모르면.
"내가 들게."
"어? 왜?"
"내가 몸이 커서 더 편안하게 받쳐줄 수 있잖아. 대신 누가 다가오지 못하게 막아 줘."
"그래!"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치료액보다 효능이 뛰어난 약은 없다.
'그보다 이거 테스트 실격처리 되는 건 아닌가?'
메르디는 확실히 테스트 속행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정신을 잃었으니 이대로 수거해 가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잠잠하다.
혹시 로제가 때려눕혀서 그런 걸까.
아니면 우리를 동료로 판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일단은 신경을 끄기로 했다.
나는 보금자리로 복귀하면서 양팔에 들고 있는 메르디의 상세를 다시 확인했다.
지난 6일간 고생이 꽤 심했는지 꼴이 엉망이었다.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던 화려한 장식들은 전부 찢기거나 뜯겨져 나갔고 얼굴은 씻지 못해서 땟물이 껴 있었다.
묶어 올렸던 머리는 반쯤 풀어헤쳐져선 까치집 저리 가라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난 그 모습을 보다가 무심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렇게 못 생겨 보이긴 처음이네."
"어...정말?"
로제가 내 말을 듣고는 와서 메르디를 살폈다.
그러더니 숨죽여 웃는다.
걱정이 좀 가신 모양이다.
그래도 농담이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상대는 메르디.
아마 지금 내 발언을 들었을 경우 나는 아까 룬쉰이 부러울 꼴이 될 수도 있다.
돌아가는 길은 조금 오래 걸렸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들고 가려다 보니 보금자리에 도착할 즈음엔 6시간이 흐른 후였다.
나는 보금자리에 도착한 후 우선 메르디를 침상에 뉘여 놓았다.
윤지혜가 메르디의 꼴을 보고 크게 놀라면서도 재빨리 움직여 간호를 시작했다.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아. 잔 상처가 좀 있긴 한데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
"언제 일어날까?"
"모르지. 오늘 아니면 내일 쯤?"
메르디를 데려오면서 부족해진 것들을 보충하고 번갈아 간호에 들어갔다.
치료수의 효능 덕분에 몸은 거의 정상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동안 꽤 시달렸는지 날이 지날 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직 안 일어났나?'
다음 날 아침이 되어 다시 상세를 살폈다.
얼굴은 어제보다 훨씬 나아 보인다.
엉망이던 옷도 윤지혜가 어떻게 처치를 한 모양인지 봐 줄만 했다.
그렇게 살펴보던 중.
나는 문득 메르디가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메르디가 입을 열었다.
"...뭐야?"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탓인지 목소리가 갈라진다.
"아, 일어났어?"
눈을 돌려 주변을 살핀다.
그러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자신의 차림새가 바뀐 것을 알아차렸는지 눈이 살짝 찌그러진다.
"...너."
"어제 정신을 잃은 널 로제와 발견했어. 네 옷은 지혜가 챙겨줬고."
표정이 심상치 않아 미리 말을 쏟아냈다.
그리곤 바로 일어났다.
나는 개인적으로 메르디의 성격을 잘 안다고 자부한다.
그녀가 가진 프라이드는 그 누구보다 드높다.
자신이 최고라 생각하며 그렇게 자부할 만큼 대단한 힘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
자존심에 굉장히 반하는 일일 것이다.
메르디에게 있어 남에게 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봉사'지 '도움'이 될 수는 없다.
'굳이 내가 직접 구구절절 떠들면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 필요는 없지.'
이럴 때는 혼자 두는 것이 상책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나름대로의 행동 방침을 정하도록 시간을 준다.
내가 여기 앉아서 계속 버팅기고 있어봤자 절대 좋은 꼴은 절대 못 본다.
나는 메르디가 더 말을 걸기 전에 그대로 보금자리를 나섰다.
그런데 나가기 전 메르디의 목소리가 붙잡는다.
"야."
"어, 어? 왜?"
"너.... 아니야. 됐어."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인상을 쓰는 것을 보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는 모양인데 아직 사태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얼른 나가야지.'
정신을 차리고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산을 오르내리며 수련 중이던 로제가 메르디의 기상 소식에 기뻐하며 바로 뛰어가려다 내 만류에 겨우 멈췄다.
"헤, 다행이다."
"딱히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지금이 아니었더라도 금방 깨어났을 거야."
"맞아요. 피곤이 누적되었기 때문에 조금 오랜 걸렸을 뿐일 거예요."
특히 걱정이 컸던 로제가 안도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메르디가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들러붙으려는 로제를 밀어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떨어져."
"어디 괜찮나 보자. 배는 안 고파?"
"난 멀쩡해."
"며칠 동안 별 다른 걸 못 먹었을 거라고 레몬이 그러던데? 우리 먹을 거 많아. 같이 먹자."
"...."
로제가 달라붙어서 끌자 모르는 척 끌려간다.
덕분에 이른 점심이 시작되었다.
# 34
에너지 베슬.
고기가 구워지고 기름진 냄새가 보금자리 내부를 채우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것도 계속 먹으니까 좀 물리는 느낌이다.
나는 벌써 7일째다.
별다른 양념이나 조리법의 변화 없이 매끼 생고기만 구워먹은 시간.
내 숙소에 잠들어 있을 고추장이 간절하다.
"그래서 말이야...."
대화는 다행히 내가 주도할 필요는 없었다.
천천히 하지만 쉼 없이 먹고 있는 메르디의 옆에서 로제가 테스트 동안 있었던 스토리를 모조리 쏟아내고 있었으니까.
그러다 어제의 일까지 모두 듣고 나서는 우리들을 쳐다봤다.
"날 치료한 게 너라고?"
나는 어께만 으쓱였다.
치료액을 이용했다는 사실은 발설할 수 없다.
특히 그 정체가 내 침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비밀이다.
"잘했어."
"응?"
메르디의 입에서 뜻밖의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녀에게서 어떤 반대급부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덕에 살짝 놀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메르디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윤지혜에게 고개를 돌렸다.
"넌 내 옷을 만졌다고?"
"어, 어?"
"할 거면 좀 잘 하지 이게 뭐니. 누더기도 아니고."
윤지혜가 울상을 되었다.
내가 보기엔 쓰레기 수준이던 옷을 짧은 시간 만에 그 정도로 수선한 게 대단해 보였는데 말이다.
다행이 마무리는 이번에도 괜찮았다.
"다음엔 좀 더 잘 해봐. 그럴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 아뇨. 다시 기회가 오면 더 잘 할게요!"
윤지혜는 쓸데없이 파이팅이 넘쳤다.
잘해봤자 별 보상 받지도 못할 텐데.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도 한 차례 난리 칠 것도 감수할 생각이었던 것과는 반대로 흐뭇한 마무리다.
오히려 메르디가 걱정될 정도.
이번 일이 꽤 충격이었는지 목소리 톤 한 번 올라가지 않았다.
혹시 저 메르디가 침울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럴 리가.'
로제는 계속 메르디의 옆에 붙어있었다.
실기 테스트가 끝날 때까지 그러고 있으니 본래 모습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다.
1학기 때처럼 마지막에 급박한 임무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우리는 숙소로 편히 돌아갈 수 있었다.
*
"흐아아아! 길었다...."
로제가 기지개를 피면서 심경을 토로했다.
셔틀에서 내리자마자 그녀가 향한 곳은 식당이었다.
한 차례 폭풍 같은 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정신이 드는 듯 의자에 등을 기댔다.
"테스트는 다들 잘 봤어?"
"결과를 봐야 알 것 같다."
뒤늦게 합류한 바튼이 아이스크림을 파먹으며 대답했다.
로제가 한창 식사중일 때 한 얘기에 따르면, 바튼은 상위 위험종을 셋이나 사냥했다고 한다.
상위 위험종이 있는 구역 간의 거리를 생각해 보면 정말 부지런히 움직였을 것이다.
특히, 위치도 직접 찾아야 했을 테니 편히 지낸 나와는 다르게 고생이 분명했겠지.
"1등은 할 수 있을 것 같아?"
"잘 모르겠어. 이동에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다. 안개 때문에 시야도 불편했고."
서쪽도 악조건이었던 듯하다.
북쪽의 늪지대, 남쪽의 반사막 지형과 비교해 봐도 만만치 않다.
'아, 그나마 중앙 구역이 나은 것이었나.'
테스트 시작 전 해둔 이야기가 있어서 중앙으로 움직인 것이긴 하지만, 운이 좋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나는 바튼의 말에 동조했다.
어쨌든. 그런 악조건에도 상위 위험종을 셋이나 처리했다는 건 확실히 대단한 실적이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윤지혜가 입을 열었다.
"모래부터는 또 외출 기간이네요."
"아, 맞아. 이번엔 좀 길지?"
"1학기에는 외출이었지만 이번에는 방학이라는 말이 맞을 것 같은데."
"방학이라니. 다시 고등학생이 된 것만 같아요."
1년이 마무리되는 짝수 학기 후에는 외출 기간이 좀 긴 편이다.
성적이 아무리 나빠도 2주에서 성적이 높을 경우엔 한 달까지.
일반적으론 보통은 3주 정도 주어진다고 보면 된다.
이 정도 기간이면 COH아카데미에서 어지간한 곳은 왕복으로 모두 다녀올 수 있다.
"지혜야. 넌 외출동안 뭐할 거야?"
"저요? 집에 가야죠. 가족들을 보고 싶어요."
"…아, 가족."
가족에 대해서 별 달리 할 말이 없었던 로제는 끝말을 흐렸다.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가족과 좋은 관계인 인물은 윤지혜 하나.
메르디는 가족에게 버림받았고(스스로는 자기가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로제는 할아버지라는 무투술 스승만이 유일한 지인이다.
여기에 바튼의 집안사람들은 다들 바튼과 성격이 비슷하다.
냉기를 다루는 이능 때문이라고 짐작은 하는데, 그 중 이능이 가장 강한 바튼보다는 못하지만 다들 꽤 냉랭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교류 또한 적었다.
혈육이라기 보단 사업 상대를 대하는 것 같다고 할까.
'그래도 속은 나쁘지 않은데.'
사실, 겉으로 보기에만 그렇다는 거다.
그동안 바튼과 지내본 내 입장에선 표현방식의 문제로 보였다.
원작에 쓰인 바튼의 집안 사정은 로제만큼이나 드러난 게 없는 인물이기에 정확이 알 방법은 없었다.
어쨌든, 바튼도 집안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가 아예 없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도 마찬가지.
근래 들어서 호조를 보이곤 있지만, 학기 초부터 내가 본가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어.... 제가 뭘 잘못 말했나요?"
윤지혜가 분위기를 느꼈는지 몸을 살짝 움츠리며 말했다.
나는 그냥 둘 수 없을 것 같아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아니야. 그보단 나도 외출 동안 뭘 할 건지 생각해보고 있었어."
"레몬은 뭐 할 건데?"
"나야 뭐. 그보다 넌 이번에는 도장 깨기 같은 건 안 해?"
로제가 그 질문에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재미없더라. 작은 데는 별 거 없고 좀 유명한 곳은 상대를 안 해주던걸?"
"그래서 그렇게 다 때려 부쉈니?"
"그 사람들이 먼저 떼거지로 덤볐단 말이야. 치사하게."
억울한 목소리로 툴툴댔다.
덤비는 족족 메르디와 둘이서 다 부수고 다닌 걸 알고 있는 나로선 웃음만 나올 소리지만.
"그래서 이번엔 혼자 수련이나 하다 올 생각이야."
"혼자서?"
"응. 좀 간질간질한 게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
나는 속으로 기함했다.
벌써 그럴 시기가 다가왔나?
내가 보기엔 지금 수준만으로도 코어 웨폰만 얻으면 다 씹어 먹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같이 생활했기 때문에 실감하지 못했을 뿐이지 일행들은 항상 발전하고 있었다.
바튼이나 사힘, 메르디까지.
모두가 그렇다.
나도 많이 늘었다고 생각하는데 격차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벌어지고 있는 느낌이랄까.
'것 참....'
이제 20살.
숨 쉬면서 밥만 먹어도 성장할 나이긴 하다.
앞으로 1년 더 지나면 이들은 어디에 도달해 있을까.
"바튼은?"
"상행을 따라가 볼 생각이다."
"가업 때문에?"
"아니. 난 과업을 이을 수 없다. 단순히 경험을 위해서야."
"…아, 그렇지?"
초인이라고 겸직이 금지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럴 시간이 없을 뿐.
초인은 군 소속은 아니지만, 인류 연합 산하에 존재하는 초인단에 모조리 배속되어 군인이나 다름없이 취급 받는다.
그리고 전선에 배치될 경우 온갖 임무에 동원되어 눈코 뜰 세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한다.
그런 와중에 다른 일을 병행한다?
취미 수준이 아니라면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나도 갈수록 더 신경 쓰기 어려워지겠지.'
바튼의 가업은 그가 일찍 은퇴하지 않는 한, 그의 형제 중 한 명이 맡게 될 것이다.
"아깝지 않아?"
"돈 말인가? 걱정 없다. 네 덕분에 꽤 편이거든."
"하하."
"레몬이 왜요?"
"어, 그런 게 있어. 그럼, 다음은...."
메르디를 바라봤다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얘한텐 굳이 물어볼 필요 없겠지.
"나는 안 물어봐?"
그런데 또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대뜸 말한다.
"…나부터 말하려고 했지."
"내 말부터 들어."
"어, 얼마든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메르디의 경우엔 아카데미 내부에 머물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면 테라 행성으로 쇼핑이나 가거나.
평소에도 치장하기 위한 액세서리나 옷 따위를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들여오는 그녀이기에 가능한 예상이다.
그런데 들어보니 생각보다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난 유마하에 다녀올 거야."
"…유마하? 아! 네 고향 행성?"
로제가 박수치며 반응했다.
유마하 행성.
현재 인류 문명의 최 외곽을 형성하고 있는 4차 방위라인에 속한 행성 중 하나로 알고 있다.
"맞아. 내 땅에 벌레들이 들끓고 있다고 전해 들었거든. 그래서 청소 좀 하려고."
"잡것? 그게 뭐야?"
"너는 몰라도 된다."
메르디는 로제의 물음에 요사스런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로제가 고개를 갸우뚱 하며 되물어도 말해 주지 않았다.
'벌레가 그 벌레를 말하는 게 아니겠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메르디는 유마하 행성에서 왕이나 다름없다.
재력이나 정치력 같은 게 아닌 공포로 군림하는 왕.
로제의 이능에 겁먹어 알아서 모시는 거다.
유마하 같은 시골 행성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대단한 일인 건 확실하다.
"치. 말해주기 싫으면 하지 마. 레몬은 어쩔 거야?"
"나는...."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해야 할 일들이 떠오른다.
기간이 두 배나 늘었음에도 해야 할 일은 넘쳐났다.
'그래도 1학기 때와는 달라.'
무력과 영향력 그리고 재력까지.
많은 것이 달라졌다.
특히 재력.
내가 끌어다 쓸 수 있는 돈은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1학기 때는 겨우 있는 집 자제가 쓰는 용돈에 불과한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인류 연합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연구소를 실 소유 중인 사장님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 또한 돈으로 굴러가는 세계.
조금만 고민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끝도 없이 늘어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부터 하나씩 챙긴다.'
이번 외출도 정신없을 것이다.
*
학기가 끝났다.
오늘이 바로 외출이 허가된 첫 날.
"오랜만이다. 잘 있었지?"
나는 여전히 미려한 몸매를 자랑하는 자가용 셔틀에 손을 올리고 라인을 따라 천천히 쓰다듬어 봤다.
차체는 보관 업체에 의해 관리된 덕분에 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은 상태.
심장이 쿵쾅거린다.
문을 열고 조종석에 앉았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시트의 감촉과 냄새가 허파 깊숙이 스며든다.
앉아서 시스템 점검을 하고 이륙 허가를 요청하길 잠시.
관제 센터에서 통신이 왔다.
-이륙을 허가합니다.
익숙해진 절차를 마치고 이륙했다.
힘차게 박동하기 시작한 엔진이 위성의 중력으로부터 셔틀을 탈출시켰다.
'자, 일단....'
가장 먼저 들려야 할 곳은 테라 행성이다
아카데미 생도인 내 신분을 고려하여 살몬 연구소 또한 테라 행성에 자리하고 있었다.
도착까지는 3시간.
한 차례 즐거운 비행을 마치고 난 후였다.
연구소는 영상으로 확인한 모습 그대로였다.
돔 형태의 커다란 건물인데 내부 정보 유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선택한 모델이었다.
건설비용이 비싸긴 하지만 안전하다고 들었다.
더구나 살몬 연구소는 자체적으로 자동 전투기계를 생산하는 무기 연구소다.
외부 침입에 대비해 철저히 대비한 덕에 어지간한 전력으론 뚫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전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1년이고 2년이고 입구를 봉쇄한 채 버틸 수 있을 만큼 내부 환경에 공을 들였다.
'돈 참 많이 깨졌지.'
어쨌든, 외부에서 보는 살몬 연구소의 정체성은 자동 전투기계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군사무기 연구소였다.
아무래도 폰타나 운테의 존재와 결과물이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실재 살몬 연구소가 주로 하는 일은 다르다.
자동 전투기계는 폰타나 소장을 비롯한 소수의 연구진이 맡고 있을 뿐, 그 외 대부분은 폰타나 운테가 한 번 걸러 준 '정보'를 다시 거르고 해석, 조합하는 일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마중 나온 것은 로봇이었다.
군납중인 전쟁거미[War Spider] 모델의 전투기계를 일반인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데포르메'화해 외형에 변화를 준 것.
디자이너가 누군지는 몰라도 꽤 귀여운 생김새였다.
"예약이 되어 있을 텐데."
-확인하겠습니다.
"여기."
-확인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레오나르드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제 개체명은 R3D3입니다. 편하신 대로 불러주십시오.
R3D3?
어디서 많이 듣던 명칭이다.
폰타나 씨가 직접 네이밍 하지 않았나 싶다.
아마도 저번에 내가 떠들었던 영화를 보곤 지었겠지.
나는 R3D3를 따라가며 로비를 가로질렀다.
로비는 넓었는데 북적임이 느껴질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아, 그 일에 관련된 사람들인가?'
보고 중, 요즘 공장이 계속 증설되면서 일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저들 대부분이 그 일에 관련된 사람들일 것이다.
앞으로 공장의 규모가 커지는 대로 납품의 단위도 계속 달라질 것이 분명하니 이렇게 모이는 것도 이해가 간다.
# 35
경쟁도 치열한 것 같았다.
"블랙 메탈류의 채굴량이 요즘 너무 부족해요. 그래도 시간만 주시면…!"
"아니, 봐봐. 우리가 가장 싸게 공급할 수 있다니까!"
일부는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지 목소리가 높았다.
안내 봇을 붙들고 행패를 부리다가 쫓겨나는 경우마저 있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구경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날 알아보는 사람은 없나?'
현재, 외부에 알려진 연구소의 실세는 폰타나 소장이다.
그 외에는 모하임 왕가와 모나크 가문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진 정도?
실재로 그가 모든 일을 진행했고 내 이름이 필요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러니 폰타나가 실세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덕분에 나도 귀찮은 일 없이 로비를 가로지를 수 있고.
그런데 중간에 유독 신경 쓰이는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끄흐흐흑...!"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남성.
고생이 많았는지 얼굴이 말이 아니다.
그가 나온 곳이 미팅실 중 한 곳임을 생각하면 일이 틀어졌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곧 남성의 동료로 보이는 몇 사람이 다가가 위로한다.
"김씨. 너무 실망 마."
"그래도 돈은 받았잖아. 그걸로 다시 시작하면 되지 뭐."
그 말에 남성이 눈물을 쓱 닦더니 냅다 소리친다.
"뭐, 돈? 이런 헐값이? 겨우 이게 우리가 30년간이나 피땀 흘려 지켜온 기술에 대한 보상이라고?!"
"아니, 그게...."
"뭐라고 말들 좀 해 보라니까? 안 그래?"
"맞는 말이긴 한데…."
일행 모두가 답답한 얼굴로 한숨만 쉬어댔다.
김씨라 불린 남성은 다시 기운이 빠졌는지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방법밖에 없는 건가...."
"자동 전투기계가 아닌 이상 어차피 묻힐 기술이었잖은가. 이해하게."
"맞아. 가문이고 왕가고. 그놈들이 하는 짓이 언제나 그렇지 뭐."
"폰타나 소장을 만날 수만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텐데."
R3D3를 따라가던 내 발걸음이 멈추었다.
간과할 수 없는 단어를 들어서다.
'가문이나 왕가 소리가 여기서 왜 나오는 거야.'
연구소는 지어진 지 반년도 되지 못했다.
그야말로 신생아나 다름없는 상태.
몸집만 크지 부족한 게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서 외부 계약과 공장 관련된 일은 모하임 왕가와 모나크 가문에서 지원받은 실무 인력들에 의해 돌아가는 실정이었다.
저 소리가 나올 분야가 한정되어 있다는 소리다.
나는 감정을 추스르고 떠나려던 남성과 일행들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폰타나 소장님만 만나면 달라질 거라고 하셨죠?"
"네? 누구...."
머리 아프게 해결할 필요는 없다.
난 사장이니까.
나는 밝은 미소로 대답해 주었다.
"연구소 관계자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죠."
*
R3D3를 따라 도착한 연구소 최심부에 들어섰다.
복잡한 보안 절차가 구역을 지날 때마다 반복되었지만, 모두 이상 없이 통과했다.
나는 그 과정이 지겹지 않게 느껴졌다.
'와....'
이것이 미래 최첨단을 달리는 연구소의 내부 광경이란 것일까.
온갖 신기한 것들이 주변 가득하다.
한쪽에는 산업용 오토봇이 바쁘게 움직이며 자재를 날랐고,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자동 전투기계의 성능시험이 한창 진행되는 중이었다.
"오옷!"
말 그대로 로봇 파이트.
생물 간의 싸움에서 보기 어려운 박진감과 화려함이 눈을 어지럽혔다.
에일리언을 효과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장착된 소형 미사일이 발사되고, 그걸 또 바로 앞에서 레이저를 조사해 폭파시켰다.
그러고도 남은 충격은 자세 제어를 이용한 뒤구르기와 동시에 미량의 베리어 소자를 기체 밖으로 발산하는 방식으로 털어낸다.
섬세한 교전.
전투 인공지능이 얼마나 잘 설계되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너도 쟤들 이길 수 있어?"
-본 모델은 전투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전투력은 30%를 밑돌 것입니다.
"30%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데."
-가용한 전투 자원을 모두 확충할 경우 102,400%까지 전투력 향상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102,400%면 1024배??"
-그렇습니다.
"내가 대단하신 분을 몰라봤네."
나는 R3D3를 다시금 살폈다.
데포르메 때문에 조금 둔한 모습이 되긴 했어도 베이스는 어디까지나 전투기계다.
특히 전쟁거미 모델은 다양한 상황에서 가장 평균적인 전투력을 기대할 수 있는 모델.
그런데 이 크기에 그런 전투력이 나온다니.
그 정도면 코어 웨폰과 같은 하이퍼 테크놀로지의 산물이다.
'그래도 이런 말도 안 되는 뻥튀기는 어떻게 해야 나오는 거지.'
아마도 이 모델은 확장성을 염두에 두고 특별히 설계한 게 아닐까 싶었다.
잘 보니 재질도 양산용에 쓰이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R3D3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건드릴 때마다 삐빅거리며 반응한다.
왠지 괴롭히고 싶은 생각이 났지만 참았다.
나중에 파워업해서 복수하겠다고 나오면 곤란하다.
"언제 도착해?"
-목적지까지 약 38초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내부로 들어갈수록 장소가 조금씩 협소해졌다.
구조는 똑같지만, 이전과 달리 투명한 창으로 꾸민 것이 아니라 그렇다.
주변을 돌아다니는 연구원의 숫자도 급감했다.
일정 간격마다 R3D3같은 모델이 아니라 진짜 살벌한 모습을 갖춘 자동 전투기계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것도 일반 양산용과는 다른 고급 모델들이다.
'어지간한 병력 가지곤 내부는 구경도 못하겠네.'
이런 내부에서 보기 힘든 중형 모델도 드문드문 보인다.
모두 제각각의 모습을 하고 있는 로봇들.
보는 맛이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아, 고마워."
R3D3가 어느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드러난 내부는 예전 폰타나를 찾아 외딴 행성에 갔을 때 구경했던 그의 연구실을 연상케 했다.
탁자가 자리한 위치라든지 기기들 배치 등.
깔끔하다는 것을 빼면 그때와 거의 똑같았다.
"여긴 일부러 이렇게 꾸며놓은 건가요?"
"오, 사장님. 오셨나?"
폰타나가 나를 크게 반겼다.
"완전히 깔끔쟁이 다 됐네요. 처음 봤을 때하곤 너무 달라요."
"상대해야 할 사람들이 워낙 대단한사람들 뿐이잖아? 게다가 지금은 나 혼자도 아니고. 밑에 애들 컨트롤 해줘야지, 사장님 비위도 맞춰야 하지. 할 게 참 많아."
그러면서 눈을 찡긋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반걸음 떨어지며 연구실 안을 둘러보았다.
"어쨌든 다행이네요. 전 폰타나가 전투기계 분야만 맡아줘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처음엔 그랬지."
내 구상은 폰타나 씨를 어떻게든 내가 차린 연구소에 데려다 놓는 것까지였다.
자동 전투기계만 무려 100년 넘게 파고든 인간이라 다른 분야는 신경 써주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잘 풀렸다.
"여태까진 요 고철덩어리 만지는 일이 가장 재밌었거든. 그런데 아니야. 널 만나고 나서 내가 너무 좁은 세상에 몰두해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
아무리 한쪽 분야에 몰두했다곤 하지만 폰타나가 가진 지식의 스펙트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과학은 진보할수록 통합된다고 하지 않던가.
폰타나가 그 단적인 예다.
그의 지식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나는 지식의 보고를 내 눈으로 목도하고야 말았지."
"…하하."
폰타나가 강렬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눈빛이다.
"그걸 보고 나니까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더라고. 마치 미미르의 샘을 알게 된 오딘의 심정이랄까."
"그 정도는...."
"아니야, 아니야. 사장님. 당신도 정확히 알아야 해."
폰타나가 상체를 반쯤 숙이면서 강조하듯 말한다.
역시 한 분야에서 전설적인 위치에 오른 사람들을 보면 남들에게선 발견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
나도 그 아우라에 밀려 어느새 입을 닫고 말았다.
"네가 적어낸 정보는 인류가 여태까지 쌓아온 지식과는 그 체계가 달라. 비교우위를 말하는 게 아니야. 말 그대로 갑자기 빵! 하고 생겨난 것처럼 새롭다는 말이지."
"여태까지 몇 번 들었던 이야기죠."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니까 반복하는 거 아냐."
이해는 하고 있다.
제대로 실감하질 못할 뿐이지.
폰타나는 내가 가진 방대한 정보가 모두 대단한 과학적 지식이나 다름없음을 설파하고 있었다.
"나는 이걸 보면 볼수록 뇌의 온갖 곳에서 폭죽이 터지는 기분이야. 알아? 빵빵!!"
자신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올리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온몸으로 표현했다.
"이게 몇 개라도 유출된다면 에일리언이 인류 연합에서 만들어낸 재앙이라며 인류 연합 최대의 자작극이라고 떠드는 멍청이들의 입이 싹 다물어질 걸? 이렇게 명백한 증거를 들이 미는데 어쩌겠어? 아니지. 애초에 에일리언(외계인)이라고 명칭을 정해놔도 믿지 못하던 놈들이니 어떻게든 또 떠들려나?"
입술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알겠어? 네 머릿속에든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예. 알죠."
"그래 안다고 치고. 그런데 문제는 네가 정보를 토해내는 속도가 너무 느려. 사장님이라 어떻게 감금해 놓을 수도 없고! 내 밑의 연구원이었으면 가둬놓고 24시간 입력만 하게 만들었을 텐데."
"하하…."
"그래서 준비한 게 있지. 이리로 따라와."
폰타나는 속삭이듯 말하며 내 팔을 잡고 안쪽으로 날 이끌었다.
안쪽으로 난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여긴 공간이 더 넓다.
실재로 실험이 진행되는 공간인지 대형 기기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폰타나가 날 데려간 곳은 그런 대형 기기들 한쪽에 놓여 있는 이상한 모양의 머신 앞이었다.
"자, 어때?"
"어쩌고 자시고...."
선이 수백 개는 연결된 머리에 쓰는 장치.
여기에 팔다리를 구속하는 고정의자와 바닥에 살짝 묻어있는 피까지.
나는 순간 여기가 함정인 줄 알았다.
"아아, 저 피? 저건 내가 직접 시험 가동을 하다가 출력이 생각보다 강해서 사고가 생긴 흔적이야."
"사고요?"
"그럼. 사고지. 암 사고고 말고. 아무런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다 시험해 봤다니깐?"
전혀 믿기지 않는다.
외형부터 너무너무 위험해 보인다.
나는 앉으라고 손짓하는 폰타나에게 고개를 저었다.
"사양할게요."
"어째서. 이것만 있으면 네 정보 입력 속도가 배는 향상될 거야. 익숙해지면 10배 20배도 문제가 아니라고."
"이거 결국 MC(Mind Connector)잖아요. 예전에 실패했던 거요. 저 같은 경우는 그냥 손으로 입력하는 편이 훨씬 빠르고요."
저게 뭔지는 알고 있다.
일종의 생각만으로 기계에 명령을 내리는 장치다.
한때는 꽤 유명했던 장치.
처음 개발되었을 때보다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쓰이는 분야는 한정되어 있었다.
'복잡한 생각일수록 오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것마저 실수해 다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정확하지 않은 생각을 읽어 실제 명령으로 변환하는 MC의 경우 잘못 사용하면 큰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
물론, 그 편리성과 효용을 무시할 수 없어 일각에선 활용중이기도 하다.
바로 '훈련된' 인력을 이용하는 식으로 말이다.
나도 이걸 사용해보려고 한 적은 있다.
떠오르는 걸 생각만하면 그대로 적어주는 기계가 말만으로도 얼마나 편한가.
내 입장에서는 더없는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시도했고, 실패했다.
속도는 확실히 빨랐다.
처음 사용하는 것임에도 손으로 쓰는 것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적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잘못 적혀진 게 너무나 많았다.
MC는 복잡한 수식과 지문으로 점철된 '정보'를 정확하게 인식해내지 못했다.
결국, 그걸 확인하고 수정하고 다시 적고 하는 시간을 따져보니 그냥 손으로 하는 것이 훨씬 이득인 결과로 나타났다.
게다가 MC는 장시간 하고 있으면 두통까지 유발한다.
정신을 쥐어 짜낸 것처럼 불쾌한 기분이 느껴지며 장시간 이용할 경우 구토가 일수도 있었다.
그래서 몇 번 사용해본 뒤로는 쳐다보지도 않은 물건이다.
하지만 폰타나는 여전히 자신이 있는지 내게 한 번 써보기를 강권했다.
"나도 알지. 그래서 이걸 만들었다는 거 아냐."
"결국 MC잖아요. 별 다를 게 없을 텐데요."
폰타나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내가 만든 건 다르다니깐. 이건 사장님 맞춤용이라고. 몇 번 사용하지 않아도 익숙해질 거야. 그리고 익숙해질수록 정확도도 극적으로 향상될 테고. 어때?"
"후유증은요?"
"어…. 그건 조금 더 나빠질 수도 있는데, 사장님이 조금만 감수하면...?"
그럼 그렇지.
난 여지를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개선해서 가져와요. 그럼 써볼 테니까. 아, 디자인도 좀 어떻게 해서요. 저런 모양이면 누가 무서워서 쓰겠어요? 실험당하는 줄 알지."
"할 일도 많은데."
"사장님이라면서요?"
"아, 그렇지. 망할 사장 같으니라고…."
폰타나가 끙끙 알았다.
# 36
"사장 소리 하니까 기억나네. 오면서 사고하나 쳤다며?"
"사고라뇨. 그래서 무슨 일인지 알아 봤어요?"
"그래. 뭐, 별 다른 건 아니야."
딱히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전투기계 산업은 갑작스런 악제로 큰 타격을 겪게 되었지만, 모두가 망한 것은 아니다.
좁아진 시장에서 그나마 뛰어난 실력으로 근근이 먹고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로비에서 본 김 씨라는 남성과 그 일행들이 그렇다.
아마 이번 변화는 그들에게 빛으로 보였을 것이다.
살몬 연구소의 기술을 적용만 한다면 자신들이 만든 전투기계 또한 군납의 대상이 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새로운 기술은 오히려 예전과 달리 완전한 독점이었다.
핵심 기술을 가진 것은 살몬 연구소 하나.
신경 기생체에 감염되지 않을 수 있는 이 제어기술이 없으면 아무리 대단한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말짱 무소용이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에일리언이 아닌 다른 쪽의 수요도 살몬 연구소에 몰려버렸다.
결국, 절대적인 독점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그렇게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기술을 헐값에 사들이고 있다는 건가.'
내가 볼 때 사업가로서 잘못된 결정은 아니다.
어쨌든 보장된 이득인데, 이걸 나누어주는 것은 호구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사업상 효율적인 결정이었다고 해도 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욕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알고 있었어요?"
"굳이 신경 쓸 필요 있나. 이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는데."
폰타나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민이 된다.
관건은 신경 기생충의 오염을 방지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단순히 재료공학[Material Engineering]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경칩 설계와 프로그래밍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이걸 전체 공정에 영향을 끼치는 정도를 생각해본다면 적어도 70%이상.
나머지를 모두 외부에 푼다고 해도 얼마 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쪽에선 억울하겠지만 별 수 없어. 기껏 해줄 수 있는 건 돈이나 좀 더 쥐어주는 건데 그래봤자 불만이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을 테고."
"흠...."
나도 동의한다.
그래도 이쪽에서 독식할 필요도 없다.
폰타나 소장은 나머지 30%를 풀어주면 서로 맞춰가면서 하는 일이 늘어날 것을 걱정하고 있지만, 그 정도 귀찮음은 감수할 만하다.
"할 수 있는 부분까지는 역할을 나눠보도록 하죠."
"진짜? 귀찮아질 텐데...."
"그럼 이렇게 하죠."
"응?"
이럴 경우 사실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규모를 키우는 거다.
물론 지켜야할 비밀이 있으니 무작정 연구원을 받아들인다거나 하는 식은 안 된다.
"지분을 일부 인수하는 조건으로 산하 연구소로 받아들이는 거죠."
"산하 연구소?"
"예"
"산하 연구소라. 괜찮겠어? 기술 유출의 위험성을 계속 강조했잖아. 이건 스스로 열어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산하 연구소.
즉 종속된 연구소를 두기 위해서는 단순한 지원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선 기술적 협력이 뒤따라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공되지 않은 '정보'가 빠져나갈 우려도 충분히 있었다.
아무래도 일정 이상의 정보 접근 권한도 주어져야 할 테고, 그러다보면 '정보'에 관한 것도 어떤 식으로든 흘러나가기 마찬가지니까.
이건 곧 살몬 연구소를 폐쇄적으로 운영한 이유를 스스로 흐리는 결과다.
그렇지만 난 자신이 있었다.
"이제 그 정도의 위험쯤은 감수할 수 있어요. 살몬 연구소도 영향력을 가지기 시작했으니까요."
여차하면 다르모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
그는 내가 하는 일은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지금 상태가 지속되길 바라는 사람이니까.
더구나 지난번의 일로 한 차례 소란이 일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인류 연합의 상부 인사들은 살몬 연구소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으며, 알아서 조심하는 중이다.
어지간한 의심.
어지간한 욕심.
가볍게 들이밀기에 살몬 연구소의 덩치는 너무 빠르게 커지는 중이다.
"요즘 귀찮게 하는 사람이 줄었지 않아요?"
"아, 그러고 보니…한두 달 전부터 좀 조용해지긴 했다."
"멋모르는 치들을 전부 상대해 줄 필요는 없어요. 적당히 실무진 측에서 쳐내세요. 그래도 별다른 짓은 못 할 겁니다."
"그래."
산하 연구소와의 협력 형태는 계속 생각해보기로 했다.
지금 당장 결정해야 될 일도 아니라 추이를 살피면서 행동해도 된다.
"그리고 그 아저씨들은 직접 만나봐 줘요."
"꼭 만나야 해?"
"약속했단 말이에요. 얼마나 눈물을 짜대던지.... 사실 소장님하고 별 다를 바 없는 사람들 아니에요?"
"나랑 다를 바 없다니?"
"실력은 있는데 시기를 잘못 타서 빛을 못 보는 과학자. 그 아저씨들 기술 보니까 꽤 대단하던데요."
"빛을 못 보다니. 난 언제나 빛났어. 내가 앞으로 나서지 않았을 뿐이지."
"알았으니까요. 네?"
"...끙, 사장님이 말씀하시는데 안 들을 수도 없고. 알겠습니다~."
폰타나가 귀찮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빅팬인 것 같던데. 뭐, 알아서 잘 하겠지?'
실력이 있단 소리는 거짓말은 아니다.
연구 결과물들을 살펴보면 확실히 이렇게 사정이 안 좋은 가운데에서도 수십 년 간이나 실낱같은 명줄을 붙들고 살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가 어쩌다 본 사람들이 이 정도인데 더 찾아보면 어떻게 될까.
'자본은 충분해. 그러니까 최대한 우수한 인력을 가져다 갈아 넣을수록 결과가 더 잘 나올 거야.'
오징어는 씹어야 제 맛이고 공돌이를 갈아야 제 역할을 한다.
인류 역사가 증명해 온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어... 너 뭔가 야비한 얼굴인데?"
"제가요? 어딜 봐서요. 이래봬도 생도들 사이에서도 꽤 상위권인데요."
"네가? 에이, 넌 잘 생긴 것 보다는...잘 생긴 거 맞긴 하네.""
"그렇죠? 하하."
육체의 주인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육체 자체만 놓고 보면 어디서도 꿀리지 않는다.
위에도 밑에도.
역시 개조인간이 짱인 거시다.
"가문 좋고 돈 많고 능력 좋고 얼굴도 뭐. 에잉. 재수 없네."
"재수 없다니요. 그래도 명색이 사장인데."
"사장은 임마 연구소에 공헌을 해야지. 아, 이렇게 된 거 공헌 좀 해라. 너 아직 시간 있지?"
"예. 오늘까지는 연구소에서 머물 생각이에요."
폰타나 소장을 따라 다시 바깥 구역 쪽으로 이동했다.
따라가 보니 성능 시험장이다.
아까 성능 시험을 하던 전투기계들은 이미 폐기처리 되어 한쪽 구석에 쌓여있었다.
"저보고 이걸 도우라고요?"
"어. 실전 테스트 자료가 부족하거든."
거짓말은.
나는 음흉하게 웃는 폰타나 소장을 노려보며 진실을 촉구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능글맞은 말투로 당위성을 연설한다.
"대 에일리언 전의 데이터는 부족하지 않지. 그런데 꼭 에일리언만 상대하란 법은 없잖아? 요즘엔 개인 경호용으로도 주문이 많이 들어온다고. 그걸 위해선 무투가를 대상으로 한 데이터가 꼭 필요한데...."
"제가 알기로 사범까지 초청해서 시험을 해본다고 들었는데요?"
"그렇긴 한데, 데이터는 많을수록 좋잖아. 안 그래?"
맞는 말이라고 다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호기심이 있었던 터라 응해주기로 했다.
나는 상세한 데이터 수집을 위해 제작된 복장으로 갈아입고 시험 구역 내부로 들어갔다.
여긴 대련실과 비슷하다.
단단한 소제로 내벽이 도배되었고, 그 위로를 베리어가 덮었다.
"먼저 상대해 볼 건 인간형의 전투기계야. 주 무기는 고정형 소드와 미들 쉴드고."
"경호용인가요?"
"어. 부셔도 되니까 마음대로 상대해 봐."
곧 바닥이 열리더니 배틀로이드 하나가 튀어나왔다.
나도 처음 보는 모델이다.
방패를 앞세우고 천천히 다가오는데 꽤 단단해 보인다.
'일단 두드려 볼까.'
먼저 다가갔다.
성큼 걸어가는 속도로 확 거리를 좁히자, 바로 반걸음 물러나며 방패를 상체에 더 밀착시킨다.
경호용이라더니 알맞은 대응이다.
그래서 이번엔 주먹을 내뻗어봤다.
한 번 쳐 볼 생각.
그런데 그러자마자 출력을 급격하게 상승시키는 것 같더니 왼손의 소드로 팔을 공격해 온다.
'이렇게 반응한다고…?'
아마도 내가 적수공권이라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쉽게 가볼까 하다가 성능을 더 보자는 생각에 공수를 가볍게 교환했다.
나쁘진 않다.
적당히 묵직하고 안정적이다.
하지만 이게 끝이라면 실망할 것 같았다.
그러던 순간, 변화가 생겼다.
"엇?"
적당히 소드를 쳐내던 순간 방패가 내려간다 싶더니 돌연 레이저가 발사되었다.
정확히 눈을 노린 공격.
반사적으로 피하자 이번엔 섬광탄을 터뜨리듯 막대한 광량[光量]을 연속적으로 폭사시켰다.
결국, 오감 중 눈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의 꼴이 됐다.
"어떠냐? 이 사장 놈아!"
게다가 이런 형태의 치사한 공격은 하나로 멈추지 않았다.
언제 방출했는데 지독한 냄새의 독가스가 내부를 메우고 있었다.
신체의 리듬을 마구잡이로 흩트리는 저질스러운 종류의 신경독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도 깊은 허파의 효능과 치료액의 효능이 있어 이것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바로 뒤이어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소음은 정말 참고만 있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냥 소음도 아니다.
칠판 긁는 소리 같이 인간이 가장 불쾌해 하는 종류의 모아 둔 소리.
날 짜증나게 하려는 거라면 성공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 인간이 진짜!"
더 이상 간 볼 때가 아니다.
바로 공격적으로 달려들어 전투기계를 부수려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방패를 내게 휙 던져온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쳐내지 않고 피하자, 가장 접근한 거리에서 폭발했다.
"큭...!"
몸을 최대한 말면서 거리를 벌렸다.
머리가 약간 어지럽고 파편이 왼쪽 상체 부분에 다수 날아와 박혔지만, 큰 상처는 아니다.
"하, 여기도 독을 발라놨네. 지독하구만 정말."
"푸흐흐흣…!"
잔해를 뽑으며 손가락으로 침을 찍어다 상처 부위에 발랐다.
방패가 사라진 전투기계는 여전히 오감상실 공격을 지속하고 있는 중이다.
"확실히 사람이 상대라면 효과적이겠네요. 아머 슈트 한 벌만 입어도 대부분 무력화 될 종류의 공격이겠지만."
"그치?"
"뭘 더 숨겨놨어요?"
"이젠 없어."
전혀 믿기지 않는다.
나는 접근하는 대신 선 자리에서 몸에서 뽑아낸 잔해를 투척했다.
전투기계가 소드로 잔해를 쳐내는 사이 사각으로 돌아가 다시 하나를 더 투척.
손에 있는 게 떨어지고 나서는 바닥에 떨어진 잔해까지 주워가며 전부 투척했다.
날렵한 기동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30%는 놓칠 수밖에 없었고, 곧 잔해가 온몸에 박혀 기능이 정지되었다.
"여기 환기 좀 시켜줘요."
손을 탁탁 털면서 요구했다.
그러자 폰타나가 약간 허무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해온다.
"그걸 그렇게 끝장내면 어떻게 하냐."
"빨리 치워줘요. 뭘 더 장치해놨을지는 알고 싶지 않으니까."
"알았어, 알았어."
부서진 장갑 사이고 뭔가 끈적해 보이는 액체가 흘러나오는 중이다.
접근전을 했으면 분명 또 곤란해졌겠지.
"이거 저 골탕 먹이려고 준비한 게 다에요? 그럼 저 스트레스 때문에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아아, 잠깐만!"
꺼지지 않은 통신 너머로 폰타나가 이것저것 지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두 번째부터는 좀 제대로 된 걸 상대해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래도 이건 진짜 지독하네.'
만약 이런 전투기계를 한 번에 다수 상대해야 했다면 못 이기지 않았을까.
확실히 인간은 약점이 많다는 걸 느낀 전투였다.
나는 다음 상대로 올라오는 전쟁거미 모델의 전투거미를 보며 몸을 풀었다.
다시 몸으로 느껴 볼 시간이다.
*
연구소에서는 하루 더해서 이틀을 보냈다.
정말 바빴다.
밀렸던 일을 처리하고 연구진들과 안면도 익히고.
여기에 파견된 실무진과는 내 경영방침에 대해서 주지시키고 고생에 대한 치하의 시간도 가져야 했다.
덕분에 짧은 시간이지만, 붕 떠 있는 것 같았던 살몬 연구소의 분위기를 다잡을 수 있었다.
'지금은 이 정도로 됐나.'
살몬 연구소는 내 본진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갈수록 시간이 부족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필요하다.
능력 좋고 꼼꼼하고 충성심까지 아주 강한 사람.
'그런 사람이 존재하긴 하려나.'
쉬울 리 없다.
더구나 내가 가진 비밀은 인류 연합 전체를 들었다 놓을 수 있을 정도 아닌가.
나는 언제나와 같이 급하게 가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는 나타날 것이다.
그보단 지금 향하고 있는 목적지에 대한 것이 머리를 채웠다.
이번 외출에 있어서 가장 중히 처리해야 할 일로 꼽히는 게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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