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한의 세균술사
프롤로그
각성의 시대가 열리고, 바야흐로 세상에 대격변이 일어났다.
이어 세계 각지에 열린 게이트들.
이미 70억 인구를 넘어 포화 상태에 도달하던 인류는 그것을 희망으로 생각하고 대대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실제로, 게이트 너머 던전들은 엘도라도였다.
그곳에서는 지구에서는 본 적도 없던 물질들이 있었고, 그걸로 현재까지의 과학으로 극복할 수 없던 영역들이 극복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마정석이다.
처음 게이트에서 마정석이 나왔을 때, 마법 계통 각성자들은 그것으로 마법 물품 등을 만들 수 있는 정도의 물건이라고 했다.
그런데 과학자들의 조사 결과, 마정석이 마나를 보유하고 있는 동안에는 상온에서 초전도성을 유지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니까, 마정석이 그 유명한 상온초전도체였다.
그건 과학계를 강타한 1차 대혁명이었다.
석유 가격에 전전긍긍하던 인류에게 무한한 전력의 원천, 상온 핵융합 기술을 선사하였으며, 온갖 전자 전기 분야에 혁신이 일어났다.
그 외에도 몬스터 부산물 중 일부는 현존하는 재료공학으로도 합성할 수 없는 신소재였으며, 화학공학으로 구현할 수 없는 신물질이었다.
심지어 던전은 지구의 생태계처럼 남획으로 인한 멸종 따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토벌 후에 약간만 시간이 지나면, 몬스터들이 리젠(Regeneration)되어 다시 던전을 메웠다.
그래서 귀한 재료들로 구성된 몬스터들이 나오는 던전들은 국가 차원에서 관리되었다.
다수의 게이트를 보유한 국가들은 과거의 산유국보다도 더 많은 이득을 챙겼다.
문제는, 이런 황금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오직 인간의 맨몸과 게이트 너머에서 습득한 아이템뿐이라는 것.
던전에 들어가 마정석이나 몬스터 부산물을 습득할 수 있는 각성자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솟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른바, 헌터 전성시대가 열렸다.
**
통계상 각성자의 비율은 인구의 1% 정도이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각성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셈이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 각성으로 얻을 수 있는 지식이나 능력은 완전 랜덤이었다.
쓰레기 능력도 부지기수여서, 제대로 게이트에서 활약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채 각성에 성공하는 케이스는 각성자의 10%도 채 되지 않았다.
인구의 0.1%만이 헌터가 될 수 있다는 거다.
헌터가 귀족 소리 들으며 살 수 있는 결정적 이유였다.
심지어 태어나서 각성은 한 번뿐.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안 깐 복권은 희망이라도 있지만, 까버린 낙첨 복권은 휴지 조각이다.
차라리 비각성자의 삶이 나았다.
언제가 1%의 확률로 각성에 성공하고, 거기서 10%의 확률로 제대로 된 능력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안고라도 살 수 있으니까.
그러나 쓰레기 능력을 각성한 각성자는?
헌터들의 세상에서 일말의 희망도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거다.
그게 내 이야기였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내 능력의 진가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각성(1)
한 달 전.
[당신은 각성하셨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상태창을 열어 확인해주세요.]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자취방 방구석에 누워있다가, 눈앞에 떠오른 이 시스템 메시지를 보았을 때는 그야말로 희열에 가득 찼다.
일단 1%에 해당하게 되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동시에 불안감도 스멀스멀 차올랐다.
여기서 다시 10%의 확률의 뽑기를 성공해야 던전에 들어갈 수 있다.
"제발! 제발!"
'제발'을 몇십 번을 외치면서 상태창을 열었다.
그리고 눈앞에 떠오르는 상태창.
[이름] : 김세균
[레벨] : 1
[계통] : 마법
[클래스] : 네크로맨서
[특성] : 무한의 군단장(EX)
이름은 뭐 내 이름이고.
위에서부터 천천히 읽어볼까.
레벨은 막 각성을 마친 참이니 1이 정상이다.
그리고 계통... 마법이라고?
이 시점에서 가슴이 콩닥거렸다.
마법이면 일단 꽝일 확률은 그다지 많지 않다.
전투 마법이 아니라도 쓸만한 마법만 들고 있으면 던전에 들어갈 수도 있고, 던전에 못 들어가더라도 밖에서 쓸모있는 마법이면 그걸로 밥벌이가 되니까.
두근거림을 안고 클래스 창을 보았을 때, 목소리가 떨렸다.
"네, 네크로맨서?"
대박! 미친 로또잖아!
네크로맨서라니!
프랑스의 GDP 10%를 혼자 책임진다는 세계 최강의 헌터, 아흐마드 트리아인의 직업이 바로 네크로맨서였다.
이전에도 네크로맨서라는 직업군은 인기가 많았지만, 아흐마드 트리아인이 현존하는 최고 난이도 던전인 57단계 던전을 단기로 쓸어버린 이후에는 그 인기가 하늘을 뚫었다.
아무리 그래도 개인이 어떻게 일국의 GDP를 10%나 책임지냐고?
그 던전에서 나오는 몬스터의 부산물을 가공하면, 엘릭시르(Elixir)라는 성분을 추출할 수 있었는데, 그걸 가지고 고위 연금술사가 만지작거리면 튀어나오는 게 엘릭서다.
장복하는 것만으로 수명이 2배로 늘어나고 만병이 통치되는 마법의 영약.
그게 유일하게 나오는 곳이 그 던전이었고, 거기서 유일하게 활약할 수 있는 게 저 작자였으니 프랑스 같은 대국의 GDP 10%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면 나도 이제 아흐마드 같은 네크로맨서가...
"김세균 미친놈아, 정신 차려라."
이제 레벨 1인 막 각성한 놈이 무슨 놈의 아흐마드냐.
게다가 네크로맨서는 특성이나 스킬 빨을 많이 타는 편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특성이...
[무한의 군단장 (EX)]
설명 : 모든 소환 계통 스킬에 개체수 제약이 사라진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짧은 텍스트가 강력하다고.
강력했다.
그것도 존나게 강력했다.
"미치이이이이인─!!!"
이거 참아?
이 대목에서는 설레발을 안 떨 수가 없었다.
그대로 밤잠을 설치다가, 아침 8시에 되자마자 강남에 있는 각성자 등급 판정센터를 향했다.
어중이떠중이가 던전에 들어갔다가 죽으면 안 되니까, 그 어중이떠중이를 걸러내기 위해 만든 센터였다.
아무리 인구에 1%라지만, 그래도 50만 명이다.
적어도 하루에 몇십 명씩은 각성자랍시고 찾아오는 센터였기에, 접수를 받는 직원이 상기된 채 앞에 선 나를 향해 심드렁히 말했다.
"등급 판정받으려고 오신 거 맞죠?"
"네."
"레벨은 1이실 테고. 클래스는요?"
"네, 네크로맨서입니다."
움찔.
직원이 움찔거리는 모습에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뒤에 있던 대기자들 역시 웅성거렸다.
이야, 이게 각성의 맛인가.
"잠시만요, 제 5 판정시험장으로 모실게요."
그녀의 뒤를 따라 5 판정시험장으로 가자, 거기에는 각종 동물의 시체들이 있었다.
"으..."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광경이었지만, 이제 나도 네크로맨서다.
익숙해져야 하는 광경이었다.
시체와 익숙해져야 한다니, 끔찍한 일이었지만 그건 헌터가 되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일.
마음의 준비 정도는 되었다.
시험장 안에 들어서자, 한쪽에 달린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아아, 들리시죠? 거기 있는 시체들 중에 아무거나 되살릴 수 있으면 합격입니다.
허들 낮은데?
원래 이게 이렇게 쉬운 게 아닐 텐데.
다른 클래스들은 적어도 1단계 던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전투 능력은 입증해야 할 텐데.
이 '무한의 군단장' 특성 보유 네크로맨서를 무시하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있자니, 그걸 눈치챘는지 스피커에서 머쓱해하며 말이 이어졌다.
─네크로맨서 클래스 분들은 아시겠지만 초반 육성이 어려워서요. 일단 언데드 라이즈 스킬만 입증되시면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서 육성해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짜 버스까지 확정이라는 거네.
김세균 인생, 한 방에 풀리는구나.
─자, 그러면 언데드 라이즈, 부탁드릴게요.
"예."
차분히 답하고, 눈앞에 있는 오크 시체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언데드 라이즈."
동시에 떠오르는 메시지.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
이게 대체 뭔 소리지.
시체잖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스피커 저편에서도 당황한 듯 말했다.
─스킬... 사용하신 거죠?
"예, 그게..."
오크는 안 되는 거 같으니, 그 옆에 있는 고블린이라도.
"언데드 라이즈."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그러면 하다못해 그 옆의 소라도...
"언데드 라이즈."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이어서 돼지, 개, 닭, 고양이까지.
전부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고 나왔다.
─지금 장난하나! 저 사람 끌어내!
마이크 너머에서도 화가 났는지, 으르렁대는 외침과 함께 직원들이 들어왔다.
"자, 잠깐만요.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대상이라고..."
"바빠 죽겠는데 어디서 사기를 쳐!"
"경찰서 가고 싶어!"
"나, 나 네크로맨서 맞아요! 상태창을 보여줄 수도 없고!"
"언데드 하나 못 일으키는 그딴 네크로맨서가 어디 있어! 꺼져!"
언데드 하나 못 일으키는 네크로맨서.
센터에서 반강제로 내쫓기면서 마지막에 들은 말이 한동안 뇌리에 남았다.
맞다. 언데드 하나 못 일으키는데 무슨 놈의 네크로맨서.
절망한 채 센터 근처 공원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가 문제인 거지.
"스킬 일람."
[현재 보유 스킬] : 언데드 라이즈(고유) / 역소환
심플했지만, 언데드 라이즈 하나만 가지고도 밥벌이할 수 있는 게 네크로맨서였다.
다른 스킬은 비싸지만 돈 벌어서 스킬북으로 배우면 되니까.
"언데드 라이즈, 스킬 설명."
[언데드 라이즈(고유)]
설명 : 전설적인 네크로맨서 아비센나의 방식으로 변형된 언데드 라이즈 스킬이다. 일정 크기의 개체에만 사용 가능하다. 스킬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더 작고 다양한 개체를 일으킬 수 있다. (현재 개체수 제한이 특성으로 인해 해제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는 언데드 라이즈 설명이랑 달랐다.
분명, 저것도 앞서 말했던 짧은 텍스트는 강하다.의 범주에 들어가는 스킬이었다.
유튜브에서 봤던 건 분명...
[언데드 라이즈]
설명 : 언데드를 일으킨다. 숙련도에 따라 더 많은 개체수와 더 강하고 다양한 개체를 일으킬 수 있다.
이거였는데.
휴대폰으로 검색을 이어간 끝에 내가 가진 건 고유 스킬이라는 걸 알아냈다.
기본 스킬과는 다른, 특유의 효과를 가지거나 훨씬 강력한 스킬들.
이것도 로또의 일종이었다.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최상위 단계를 누비는 최고 랭크 헌터들은, 거의 대부분이 기본 스킬이 아니라 이 고유 스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따지면 좋은 거여야 하는데.
"왜 나는... 나는...!! 하필이면...! 으아아아아악!"
스킬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더 작은 개체를 일으킬 수 있다니.
이게 무슨 개소리야.
숙련도가 높아지면 더 큰 개체를 일으켜야지, 작은 개체를 일으키는 게 말이나 되냐고!
뭐, 고작 곤충이나 되살리라고?
"곤충...?"
설마 정말 곤충 정도 크기는 되살릴 수 있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지나가는 개미 하나를 밟아 죽였다.
"언데드 라이즈."
개미 하나에게 스킬을 쓰는 꼴이 진짜 우스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용해보았다.
하지만.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개씨발."
곤충에도 못 쓰면, 대체 어느 정도 사이즈에 사용하라는 거야?
**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삼일천하도 아니고 반나절 천하가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끝나고, 나는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네크로맨서 같은 헛꿈은 집어치우기로 했다.
혹시나 해서 직장에 사표 휙 던지고 나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이제 그냥 비각성자인 것처럼 살 거다.
"세균아."
보람찬...
아니, 개같은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퇴근하려고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있자니, 옆에서 컴퓨터를 두드리던 과장이 불렀다.
이럴 때마다 좋게 끝날 때가 없던데.
"네, 과장님."
"이제 퇴근하냐?"
"네, 그런데요."
"퇴근해서 뭐 하는 건 없고?"
"집에 가서 쉬겠죠?"
"그럼 한 타임 더 뛰그라."
"네?"
아니나 다를까다.
과장 이놈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이 몇 시인 줄 아세요? 벌써 11시에요. 아침 8시에 나와서 세탕 뛰었는데, 네탕 하라고요?"
"어쩌겠냐. 거래처에서 당장 오라는데."
"아, 미치겠네."
"그래도 어려운 건은 아니야. 화성에 성광바이오 연구소 건."
"그나마 낫긴 하네요."
"갔다 와."
반쯤 강제로 잔업이 추가되었다.
그래서 내 직업이 뭐냐 하면, 쓰레기 수거반이다.
물론, 그냥 재활용 쓰레기나 일반쓰레기는 아니었고, 던전 부산 폐기물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업체의 3년 차 사원이었다.
특히 바이오 연구소들의 외주를 주로 맡았다.
그 말은, 괴물들 시체 가지고 연구소의 미친 과학자 놈들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남은 다 썩어가는 몬스터 시체들을 처리하는 일이 우리 몫이라는 뜻이었다.
3D 업종, 어렵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한(Dangerous) 일을 일컬어서 부르는 말이었는데, 그 셋 모두에 해당되었다.
잘못하다가 유독성의 사체라도 만지면 뒈질 수도 있었으니 각종 몬스터들을 조각조각 썰린 시체 상태로도 구별할 능력이 필요했으니, 어려운 일이었고, 당연히 위험했다. 더러운 건 말해 뭐해.
"그나마 성광바이오 연구소는 좀 낫긴 한데."
무슨 연구를 하는지, 거기서 나오는 폐기물은 대부분이 톱밥 같은 모양의 가루다.
물론 그 가루 포대 숫자가 장난이 아니긴 하지만, 톱밥은 위험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으니까.
일이 빡센 건 어쩔 수 없고.
탑차를 끌고 감겨오는 눈을 부비며 간신히 화성의 성광바이오 연구소에 도착했다.
늘 보던 경비에게 손을 흔들자, 경비가 차단기를 열어주며 출입증을 건넸다.
건네는 출입증을 받으며 경비에게 넌지시 물었다.
"뭔 일이길래 이 시간에 찾는데요?"
"자세히는 모르는데, 내일 그룹 회장님이 연구소에 오나 봐. 회장님 오시는데 너저분한 쓰레기가 있으면 안 되니까 급히 부른 것 같은데?"
"아..."
옘병.
그렇다고 이 시간에 불러?
벌써 자정이었으니 오늘 안에 퇴근하는 건 물 건너갔다.
갑이 까라면 까야 하는 게 을의 설움이라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에휴. 어쩌겠냐."
때려치울 수도 없고.
요즘 같은 시국에 이 정도면 그래도 나쁘지 않은 직장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연구소 안에 들어가니 프론트 야간 당직 직원이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월급 루팡이 따로 없구만.
누가 와서 그냥 들어가도 모르겠네.
"저기요."
드르렁.
"저기요!!"
목소리 높여 외치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직원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한영시스템에서 나왔습니다. 수거할 폐기물들이 있다고 해서요."
"아..."
내부 직원이 아니라 하청이라는 것에 안심했는지 안도의 숨을 한 번 내쉬고서, 그가 손가락을 뒤쪽으로 까딱거렸다.
"저쪽 엘리베이터로 2층 올라가셔서 2001호부터 들어가서 정리하시면 돼요."
이건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지.
"수거장이 아니라요?"
원래 보통은 수거장에 쌓여 있는 쓰레기를 정리하는 게 업무였다.
그런데 연구실에 직접 들어가서 정리하라고?
"아직 수거장으로 옮기는 프로세스 전에 급하게 정리하라는 오더가 떨어져서요."
"아니, 이러면 일 못하죠. 그걸 어떻게 혼자서 하나하나 연구실에서 회수합니까?"
"저도 그냥 그렇게 말하라고 지시받은 거예요."
나한테 따져도 소용없어요~ 하는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거리는 직원.
개새끼들이 진짜.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정말 이 직원과 실랑이를 벌여봐야 아무런 득 될 것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터덜터덜 2층을 향했다.
똑똑, 2001호부터 노크하고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연구실.
이거 보안 괜찮은 거야 여기?
다행히도 폐기물들은 포대자루에 잘 포장되어 있었다.
아무렴 청소까지 하라고 하진 않겠지.
방을 돌면서 포대자루들을 몇 개씩 들쳐업고 차로 향했다.
원래 수거장에 차를 대놓고 한 번에 다 실으면 되는걸, 직접 차까지 계속 왔다갔다하며 수거하려니 한세월이었다.
땀을 뻘뻘 쏟으며 두 시간이나 차를 오가고, 마침내 마지막 연구실만 남았다.
너무 피곤해서, 슬슬 잠이 쏟아졌다.
얼른 끝내고 가야지, 하면서 포대자루를 들어 올리는 순간, 잠기운에 취했는지 조금 휘청거렸다.
바로 그 순간.
쨍그랑. 무언가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작은 샬레 하나가 바닥에 나뒹굴어 깨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슬아슬하게 책상 위에 있던 것을 내가 자루로 건드린 모양이었다.
"씨바..."
조졌다.
이거 무슨 병원균 같은 건 아니겠지.
아니면... 좀비 바이러스 같은 거?
영화에도 이런 사고로 꼭 좀비 바이러스가 세상에 풀리던데.
떨리는 손으로 샬레 잔해를 건드리니, 깨진 유리에 아슬아슬하게 붙은 견출지가 보였다.
[Perpetuus Exomodulus : 절대혐기성(obligate anaerobic), 공기 접촉 절대 금지]
절대혐기성이라는 말에 일단 안심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도 읊는다고, 이런 연구소를 드나든 세월이 벌써 몇 년째이니 저 정도 단어는 알고 있었다.
공기와 닿으면 즉시 죽어버리는 세균을 의미했다.
막 내게 무슨 병원균이 감염되어서 세계로 퍼져나갈 위험은 없는 셈이었다.
아니, 안심할 게 아니잖아.
절대혐기성이면 저게 다 뒈졌단 소리...
연구소에서 연구하던 세균을 실수로 다 죽여버렸다고?
"아, 씨바... 좆됐다. 어쩌지."
깨진 샬레만 5분은 넘게 바라보았다.
진짜 어쩌지.
그렇다고 죽은 세균을 살릴 수도 없는...
[언데드 라이즈 스킬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대상 : Perpetuus Exomodulus 균주 사체 28억 8971만 6653개.]
눈앞에 다시는 볼 일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 것이 바로 그 찰나였다.
각성(2)
"..."
지금까지 몇 번이나 언데드 라이즈 스킬을 사용하려고 애를 썼는지 몰랐다.
그러나 아주 작은 곤충부터 큰 동물이나 몬스터에 이르기까지.
내 스킬이 적용되는 대상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게 세균이었다고?
멍해져 있다가, 일단 스킬부터 사용해 보기로 했다.
"언데드 라이즈."
번쩍, 푸른 빛을 내뿜으며 샬레가 살짝 빛났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건가 싶은 때쯤이었다.
[Perpetuus Exomodulus 균주 사체 28억 8971만 6653개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충실한 수하가 되어 따를 것입니다.]
[언데드 라이즈(고유)를 최초로 사용하셨습니다.]
[보상으로 클래스가 '네크로맨서'에서 고유 클래스, '미시세계를 지배하는 네크로맨서'로 변경됩니다.]
[위대한 업적! 당신은 인류 최초로 10만의 언데드를 일으켰습니다!]
[보상으로 '군단을 이끄는 네크로맨서' 칭호가 주어집니다.]
['군단을 이끄는 네크로맨서' 칭호 획득 효과로 통제력이 15% 증가합니다.]
[전설적인 업적! 당신은 인류 최초로 100만의 언데드를 일으켰습니다!]
[보상으로 '백만대군을 이끄는 네크로맨서' 칭호가 주어집니다.]
['백만대군을 이끄는 네크로맨서' 칭호 획득 효과로 통제력이 35% 증가합니다.]
[신적인 업적! 당신은 인류 최초로 1000만의 언데드를 일으켰습니다!]
[보상으로 '세상을 언데드로 덮는 자' 칭호가 주어집니다.]
['세상을 언데드로 덮는 자' 칭호 획득 효과로 통제력이 50% 증가합니다.]
.
.
.
[위대한 업적! 당신의 언데드 통제력이 100%를 넘어섰습니다.]
[보상으로 '완벽한 지배자' 칭호가 주어집니다.]
['완벽한 지배자' 칭호 획득 효과로 통제력이 5% 증가합니다.]
얼마나 많은 시스템 메시지가 일시에 떠올랐는지, 중간에 뜬 메시지들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내 능력이 아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쓰레기는 아니었다는 것.
"사, 상태창."
떨리는 목소리로 상태창을 다시 열어보았다.
한 달만의 일이었다.
[이름] : 김세균
[레벨] : 1
[계통] : 마법
[클래스] : 미시세계를 지배하는 네크로맨서
[특성] : 무한의 군단장(EX)
[통제력] : 195%
일단 클래스 이름이 바뀌었다.
미시세계를 지배하는 네크로맨서라...
그나저나 미시세계가 뭐지.
미시들이 사는 세계...? 동탄?
"... 그럴 리가 없잖아."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맨눈으로 볼 수 없는 물질들의 세계라고 나왔다.
그제야 왜 지금까지 언데드 라이즈를 사용할 수 없었는지 조금 이해가 됐다.
애초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 같은 것을 대상으로만 사용할 수 있었던 거였다.
통제력은 또 뭐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일단 여기서 할 일은 아니었다.
"일단 가자... 집으로..."
그러면서 움직이자, 땅에 떨어져 있던 세균의 검은 군집 역시 꿈틀거리며 내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균이 내 말을 듣는다고?
아니, 그래도 이러면 곤란한데.
이대로 쟤들을 다 데리고 나가면 바로 산업스파이 전업이다.
주변을 흘끗 바라보다가 빈 샬레를 발견하고는 같은 위치에 올려두었다.
깨진 샬레는 잘 쓸어 담아 폐기물 포대에 넣었다.
"너넨 얌전히 저기 들어가 있어."
세균들이 천천히 꾸물렁 움직이며 샬레 안으로 들어갔다.
휴, 이제야 조금 안심이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금은 들고 가볼까.
명색이 네크로맨서로서 처음으로 얻은 언데드(?)인데, 그냥 두고 가는 게 마음에 조금 걸렸다.
29억 마리에 가까우니 1억 마리 정도 들고 간다고 해도 티도 안 나겠지.
"1억 마리만 여기 들어와."
검은 군집에서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적은 군집이 떨어져 나와서 포대 자루 안에 들어왔다.
됐다. 이제 빨리 튀어야지.
뒤도 안 돌아보고 그대로 연구소를 빠져나왔다.
**
집에 돌아오자마자 일단 잠부터 잤다.
두근거리는 심장에 잠을 청하기 어려웠지만, 억지로라도 잤다.
더 도파민이 터졌다가는 정말로 못 잘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한숨 자고 아침에 일어났다.
자정까지 야근했으니, 회사는 오후에나 나가면 돼서 조금 여유가 있었다.
한숨 자고 나면 조금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포기했던 꿈이 한 달 만에 현실로 다가왔으니 흥분하지 않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이전과 같은 실수를 범할 생각이 없었다.
어떤 능력인지, 어떤 스킬인지도 알아보지 않고서 갔다가 개쪽당하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우선 네크로맨서 통제력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 보니, 네크로맨서들의 커뮤니티가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인 글의 제목이 이거였다.
제목: 초보 네크 질문. 통제력 17%에서 어떻게 올리냐?
"17%...? 나는 195%인데?"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글 목록을 내리다가, 밑에 있는 글을 눌러보았다.
제목 : 네크로맨서에게 가장 중요한 스탯은 통제력이다.
─초보 네크들이 보통 마나통 적다고 징징대는데, 그건 마나통이 적은 게 아니라 네 통제력이 낮아서 그런 거다. 통제력이 올라가면 어떻게 되느냐? 일단 언데드들이 강화된다. 내구력이나 힘, 특성 같은 게 강해진다. 그리고 개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마나 효율이 극한으로 좋아진다. 그렇다면 통제력은 어떻게 올리느냐? 일단 많이 소환해 보는 수밖에 없다. 운 좋아서 업적 보상에서 칭호 같은 거 얻는 게 베스트인데, 그건 진짜 하늘에 별 따기니까 너네는 기대하지 마라.
업적!
그게 이유였다.
뭔가 주르륵 달성한 게 업적이었고, 그 보상이 칭호였다.
운이 좋게도 엄청난 업적들을 달성한 덕택에 좋은 보상을 얻고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 지금 나는...? 상세 상태창."
[마나 현황]
─현재 자연 마나 회복 속도는 초당 1%입니다.
─현재 개체수를 유지하기 위해 초당 0.304%(기본 28.89%, 통제력 195% 효과 적용)의 마나를 사용 중입니다.
[현재 유지 중인 언데드]
(1) Perpetuus Exomodulus(퍼페투스 엑소모듈러스)
─개체수 : 2,889,716,653 개
─설명 : 주식회사 성광바이오테크 연구소에서 개발 중인 박테리아의 일종이다. 유기물과 무기물을 가리지 않고 섭식하는 성질이 있다. 절대혐기성으로 산소와 닿을 시 절멸하나, 언데드화 되어 약점이 극복되었다.
─능력 : 1억 개체당 초당 4.75kg(기본 50g, 통제력 195% 효과 적용)의 무/유기물을 분해한다.
언데드 세균 군단이라니!
얼마나 대단할지 감이 잘 안 왔지만, 일단 통제력의 효과는 역시나 대단했다.
마나 소모가 기본 초당 29%에 육박했다.
일단 내가 레벨이 낮아서 마나통이 적기도 했으니 당연한 일.
그런데 그게 초당 0.3% 수준으로 줄어들어서 29억에 가까운 세균 군단을 언데드로 유지하는데 드는 마나가 없었다.
자연 마나 회복 속도가 초당 1%니까 그 이하면 마나 소비가 없는 셈이었다.
거기에 능력 강화는 덤이었다.
초당 50g을 분해할 수 있는 능력이 4.75kg으로 늘어나 있었다.
"한번 실험해 볼까."
그런데 뭘 처리하지.
두리번거리다가 눈에 들어온 건 버리려고 모아둔 음식물쓰레기 통이었다.
"음... 쓰레기를 먹으라고 하긴 좀 그런가."
그냥 세균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런 가책도 없겠지만, 명색이 내가 부리는 언데드라고 생각하니 조금 꺼려지긴 했다.
그래도, 당장 실험할 게 저것밖에 없으니까.
"일단 저걸 먹어볼래?"
빈 500ml 페트병에 넣어두었던 세균 군집이 스멀거리며 흘러나오더니, 대기 중에 퍽 흩뿌려졌다. 그렇게 음식물 쓰레기통을 향해 날아간 세균 군집들이, 그걸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헐."
아니, 시작했다. 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음식물 쓰레기는 순식간에 없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1억의 군집이 초당 분해 가능한 양이 4.5kg이니까 저 정도 쓰레기는 1초도 채 되지 않아 사라질 터였다.
"무기물도 가능하다고 했지?"
다음으로 시선이 간 곳은 종량제 일반쓰레기 봉지였다.
그것 역시도 1초도 되지 않아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라진 자리에는 톱밥 같은 형태의 잔해만이 약간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성광바이오 연구소에서 나오던 톱밥 폐기물이 이거였구나."
그제야 정체 모를 톱밥의 비밀이 풀렸다.
다시 세균들을 페트병 안으로 돌아오게 하니, 메시지가 떠올랐다.
[명령 수행 과정에서 사멸한 개체 : 3,041,615개]
[명령 수행 과정에서 새로 분열한 개체 : 5,094,497개]
[현재 총 개체 : 2,891,769,535개]
"조금 늘어났네?"
플러스 500만에 마이너스 300만이었으니, 약 200만 마리 정도 분열되어 늘어났다.
스스로 분열하여 늘어나는 언데드라니.
"잠깐만, 이거 굉장한 거 아닌가?"
네크로맨서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언데드로 일으킬 사체를 확보하는 일이 가장 까다로운 것이라는 정도는 기본이잖아.
'시체 없는 네크로맨서'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사체 없이 네크로맨서는 극히 무력했다.
그래서 네크로맨서의 기본은 스노우볼(Snowball)이었다.
작은 눈덩이를 굴려 크게 만들듯이, 적은 언데드를 어떻게든 똥꼬쇼로 굴려서 거대한 군단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네크로맨서의 소양이자 기본이었다.
그런데 언데드 자체가 스스로 분열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소체를 구하기 위해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뜻 아닌가.
"이쯤이면 정말 다시 헌터... 도전해봐도 되겠지?"
한 달 전, 인생 최악의 흑역사만을 남긴 채 끝났던 그 장소.
강남 판정센터에 다시 갈 시간이었다.
판정(1)
일단 오후 반차를 내고 강남으로 향했다.
갑자기 반차를 낸다는 말에 한 바가지 욕을 배부를 정도로 퍼먹긴 했지만, 어쩌라고.
갑자기 새벽까지 야근 시키는 건 되고, 반차는 갑자기 내면 안 돼?
"아 씨..."
그런데 영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흑역사도 어지간히 흑역사였어야지.
잠시 서성이며 고민하다가, 과감히 발걸음을 뗐다.
이제는 그때의 김세균과는 다르다고.
더 뉴 네오 마크 투 김세균 정도 될까.
"저, 판정 받으러 왔습니다."
"네, 신분증... 응?"
하필이면 접수받는 사람이 똑같았다.
"한 달 전에 여기서 난동 부렸던 사람 아니에요?"
"아, 그게..."
"신분증 줘보세요."
빼앗듯 내가 어설프게 들고 있던 신분증을 낚아채 간 접수처 직원이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맞네, 김세균. 그 사람."
"그땐 죄송했습니다. 제가 제 스킬을 제대로 모르고 와서."
"여기 장난치는 곳 아니거든요? 가세요."
"... 가라고요?"
"또 장난치러 온 거잖아요. 경찰 부르기 전에 가세요."
"아니 이번엔 진짜라니까요."
"아 진짜. 가시라니까."
접수처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뒤에 있던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고 끌어냈다.
"거 알 만한 양반이 왜 이러실까. 여기 장난치는 곳 아닌데."
내 힘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거력에 거의 질질 끌려 나갔다.
이 새끼, 헌터다.
끌려 나가는 통에 제대로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허리춤에 달고 다니는 검이 끌려가는 와중에도 보였다.
"자, 잠깐만요! 이거 놓고! 놓고 좀!"
"놓으면 얌전히 나갈 거예요?"
"일단 좀 놔봐요!"
"에이, 아직 정신 못 차렸네."
"아니, 여기서 보여줄게요. 능력 보여주면 되잖아요! 한 번만 믿어달라고요!"
진짜 폐부에서 올라오는 답답함까지 가득 담아서 진심으로 외치자, 그게 통했는지 그제야 끌려가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보여준다고요? 뭘요?"
"내 능력요. 여기서 보여주면 판정 검사 받을 수 있게 해 주실 겁니까?"
"..."
내 어깨를 붙잡고 있는 남자는 고민하는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던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나를 놓아주었다.
"뭐, 좋아요. 보여줘 봐요. 대신, 안 되면 깔끔히 포기하고 나가야 합니다."
"당신 검집."
"예?"
"검집을 봐요."
허리춤에 있던 검집을 흘끗 바라본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분명 검을 감싸는 검집이 있어야 할 자리에 검집은 다 으스러져서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고, 남은 건 검뿐이었다.
"이게... 대체 언제...?"
내 의지에 따라 품에서 나온 세균이 순식간에 검집을 분해한 것이었다.
"검까지도 분해할 수 있었는데, 검 값 물기는 싫어서."
검집 정도는 그렇게 비싸지 않았지만, 제대로 된 헌터들이 사용하는 검 값은 상상초월이니까.
능력 하나 보여주자고 그걸 분해해 버릴 수는 없었다.
"하하..."
순식간에 자신의 애병(愛兵)을 잃을 뻔한 헌터 남자가 한동안 검을 바라보더니, 이내 나를 향해 머쓱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미안하게 됐네요. 흔한 진상인 줄 알았는데, 진짜 각성자였을 줄이야. 나 류현수입니다."
류현수?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이름인데.
머릿속의 기억을 뒤적이면서, 일단 내미는 그의 마주 손을 잡고 물었다.
"약속은 지켜주실 거죠?"
"물론이죠. 이 사람 각성자 맞아요. 시험장 보내주세요."
그의 말에, 조금 전까지 화만 내던 접수처 직원의 태도 자체가 변했다.
"저, 저기... 죄송해요."
진짜 각성자를 박대하고 내쫓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시말서 감이었다.
공무원이니까 내가 민원이라도 넣으면 효과는 더 확실할 테지.
그 대상이 한 달 전에 진상 부리면서 내쫓겼던 사람이었다는 건 전혀 도움 되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각성자를 내쫓았다는 결과는 다르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공무원이랑 굳이 각을 세울 필요는 없다.
"아뇨, 제가 지난번에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서 바보 같은 짓을 했던 게 잘못이죠."
"아, 아녜요. 접수증 주시면 바로 처리해 드릴게요."
미리 작성했던 접수증을 내밀었다.
클래스는 네크로맨서 대신에 그냥 마법사라고 썼다.
괜히 네크로맨서라고 쓰면 다시 5판정장에 보낼 테고, 그러면 거기서 언데드 라이즈 스킬을 쓸 수 없으니 다시 탈락일 테니까.
그렇다고 거기서 세균 살리는 걸 보여줄 수는 없잖아.
"마법사, 전투계열 맞나요?"
"네."
"1판정장으로 가세요."
판정장으로 가려다가,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뒤를 돌아 물었다.
"아, 그런데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뭐, 뭐죠?"
"저 류현수라는 사람. 헌터 맞죠?"
"... 류현수씨 모르세요?"
"유명한 사람이에요? 요즘 기억이 좀 가물가물하네요."
"제피로스 류현수 몰라요?"
제피로스 류현수?
설마...
"그 1세대 각성자 제피로스 말하는 거 맞아요?"
"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요?"
"와, 나 어렸을 때 그 사람 진짜 팬이었는데. 어쩐지 낯익더라."
제피로스 류현수는 청풍검법(淸風劍法)을 사용하는 검수로, 10년 전 각성의 시대가 열린 초창기에 한국에서 최고 랭커를 다투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2년 전에 은퇴하고서 안 보여서 몰랐죠. 그런 사람이 여기서 뭐 해요?"
"스카우터요. 이제 은퇴하고 본인이 지분 가진 던전개발회사 스카우터에요. 여기도 자주 오시고요."
막 각성한 신인을 가장 찾기 좋은 곳이 어디겠는가.
당연히 판정 센터였다.
그래서 판정 센터에 신규 각성자만큼이나 많이 있는 이들이 스카우터였다.
"스카우터였구나..."
게이트와 던전의 시대 아니겠는가.
회사, 조합, 길드.
이름은 가지각색이었지만, 던전 개발을 목적으로 모인 단체들은 넘쳐났다.
그런 단체들의 스카우터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호시탐탐 눈을 빛내며 판정장의 결과를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 그들이 많이 몰린 곳은 1판정장.
1판정장 앞에 가니, 접수처에서는 볼 수 없었던 스카우터들이 바글거렸다.
"5판정장에는 저렇게까지 스카우터가 없었던 거 같은데."
판정 심사 줄을 서면서 중얼거리고 있을 때,
"네크로맨서들은 팀플레이에 약한 편이라서 그래요."
뒤에서 누군가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 잠시 실랑이를 벌였던 제피로스 류현수, 그가 어느새 거기 있었다.
"제피로스!"
"하하, 은퇴 헌터를 던전 네임으로 부르시면 안 되죠."
"제 마음속에는 영원한 제피로스입니다."
"그런 것치고는 못 알아보시던데요?"
"며, 면목 없네요. 어릴 땐 진짜 팬이었는데. 현생에 바쁘다 보니. 근황을 몰랐어요."
회사에 취직한 이후에는 던전 영상 같은 걸 볼 여유조차 없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집에 가자마자 기절하는 생활.
주말에는 잠만 퍼질러 잤다.
"아, 검집은 죄송합니다. 변상할 수 있는 선에서는..."
"별말씀을. 그렇게 따지면 애먼 사람 잡은 제 잘못이죠. 그건 그냥 서로 넘어갈까요 우리?"
"그래 주시면 고맙죠."
"하하, 아무튼 하던 말을 이어 하자면, 네크로맨서들은 어차피 국가 차원에서 육성하고 있기도 하고, 파티 플레이보다는 솔플 성향이 짙은 직업이라 회사에서 신규 각성부터 적극적으로 노리는 대상은 아니에요. 차라리 어느 정도 경력과 레벨이 쌓인 네크로맨서들을 노리죠. 잘 큰 네크로맨서 한 명으로 파티 하나 이상의 위력을 낼 수도 있으니까요."
"아하."
"그러고 보니, 제 이름만 말한 것 같은데요?"
"아, 저는 김세균입니다."
제피로스 류현수가,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서 건넸다.
RHS 던전개발유한회사
수석 스카우터
류 현 수
뒷면의 전화번호까지 확인하니 묘한 기분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우상이었던 제피로스의 휴대폰 번호를 알게 되다니.
아직 제대로 헌터 업계에 입문한 것도 아니었지만, 괜히 진짜 업계에 들어온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예, 세균 씨, 판정 잘 받으시고 혹시나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주저 말고 연락 주세요."
"감사합니다."
제피로스와 이야기를 마치고 보니, 내 차례가 거의 다가와 있었다.
1판정장 안으로 들어서자, 5판정장과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소총을 맨 군인이 내게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동의서 작성해 주십시오."
대충 읽어보니, 사망이나 부상에 책임지지 않는다는 상투적인 내용이었다.
인터넷에서 이미 검색해서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슥슥 사인해서 돌려주었다.
"입장 전에 짧게 설명하겠습니다. 이곳은 1단계 게이트입니다. 비교적 위험하지 않은 비선공 몬스터들로 구성되어 있고, 판정관이 함께 입장하긴 하지만 그래도 게이트이니 언제든 돌발적인 위협이 출몰할 수 있다는 점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1판정장의 판정 시험 내용은 1단계 게이트의 클리어였다.
강남 한복판에 게이트라니, 좀 신기하기도 했지만, 애초에 게이트가 있는 곳에 판정센터가 만들어진 것이겠지.
이른바 튜토리얼 게이트라고도 불리는, 거의 위험하지 않은 던전으로 구성된 최저 난도의 게이트였다.
그렇다고 해도 재수 없으면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법.
1단계 게이트에서 방심하다 죽은 헌터들도 부지기수였다.
"준비되셨으면 앞에 계신 판정관님과 파티를 맺고 게이트에 입장하십시오."
"네. 파티 신청합니다."
"수락합니다."
피곤 가득한 표정으로 하품까지 하면서 파티를 수락하는 판정관.
그가 먼저 게이트에 입장하고, 나도 뒤따라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1단계 게이트, '삼눈토끼의 들판'에 입장합니다.]
"후우."
난생처음 입장한 게이트 내부는 놀랍게도 토끼가 뛰어노는 푸른 들판이었다.
던전이라고 하면 가지는 선입견과는 완전 다른 평화로운 광경.
강남 판정센터 튜토리얼 던전은 후기를 워낙 많이 봐서일까,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삼눈토끼 열 마리를 최대한 빨리 잡는 것으로 판정합니다. 시간제한은 10분이고, 10분 초과하면 탈락입니다."
저게 그냥 토끼처럼 보이지만, 명색이 몬스터였다.
일격에 제대로 죽이지 못하고 반격이라도 시작하면 골치 아파진다고 했지 아마.
"카운트는 언제부터 시작이죠?"
"원하실 때 시작하시면 됩니다. 하아암..."
그렇다는 거지?
품속의 페트병에서 아무도 모르게, 스멀스멀 세균 군집이 빠져나왔다.
이어 군집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억 단위로 모이면 그나마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괜히 미시세계를 지배하는 네크로맨서겠는가.
작은 단위로 흩어지자, 세균은 눈에 보이지조차 않았다.
그렇게, 살랑이는 바람을 타고 흩어진 세균들이 삼눈토끼들 머리에 안착했다
보이지 않으니, 죽음의 암살자가 머리 위에 올라탔다는 것을 전혀 모를 수밖에 없을 터.
토끼들은 태연히 풀을 뜯으며 뛰어다녔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열 마리의 토끼들에게 충분히 세균이 퍼진 걸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내 시작 사인에 판정관이 미처 시간을 재기도 전에.
프스스스스!
열 마리 토끼의 머리통이 그대로 분해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끝났습니다."
시작에서 끝을 선언하기까지 불과 1초.
어안이 벙벙해진 판정관이 눈을 비비며 들판을 다시 바라보았다.
"지금..."
"예."
나는 저 미시영역(微示營域)의 일억 암살자를 다시 품속으로 회수하면서.
"끝났습니다."
판정관을 향해 단언했다.
판정(2)
판정관이 어안이 벙벙해져서 어버버거리고 있을 때, 눈앞에 메시지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1단계 게이트, '삼눈토끼의 들판'에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가 토벌되었습니다.]
[던전이 클리어되어 60초 후 던전 밖으로 방출됩니다.]
"모든 몬스터...?"
게이트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한 게이트를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통상 게이트가 있고, 입장할 때마다 아예 내부의 던전 자체가 초기화되는 게이트도 있었다.
이걸 인스턴스 던전, 줄여서 인던 방식의 게이트라고 불렀다.
이곳, 강남 판정장의 1단계 게이트는 바로 그 인던 방식이었다.
인던 방식의 게이트는 게이트 내부의 모든 몬스터가 죽는 것으로 클리어 판정이 된다.
즉, 내가 이 게이트 안의 모든 몬스터를 잡았다는 건데.
음, 그러고 보니...
세균에게 토끼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지, 얼마나 잡으라고는 안 했네.
열 마리만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퍼져서 들판 전체에 퍼진 토끼들을 다 잡은 모양이었다.
이게 생물병기의 무서움인가.
앞으로는 제대로 범위 지정을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빛무리에 휘말려 던전 밖으로 방출되었다.
동시에 떠오르는 메시지.
[위대한 업적! 당신은 역대 최단 시간으로 '삼눈토끼의 들판'을 클리어했습니다.]
[보상으로 'C급 무작위 가디언 소환권'이 주어집니다.]
가디언 소환권이라...
이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도 잘 모르겠네.
[당신의 클래스 마스터, 성좌 아비센나가 보상에 개입합니다!]
[보상이 '아비센나가 제작한 블러드골드 골렘'으로 대체됩니다.]
"엥?"
클래스 마스터? 보상이 대체도 돼?
어떤 보상일까 확인해보고 싶은데.
하지만 확인은 미룰 수밖에 없게 되었다.
걷힌 빛무리 너머에서, 판정장 내부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해 온통 쏠려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의 눈에 담긴 지배적인 감정은... '경악' 하나였다.
**
실실 웃으며 걸어오는 류현수에게 한 여자가 따라붙으며 말을 걸었다.
"선배, 무슨 일 있었어요? 표정이 좋네?"
"있었지."
류현수는 검집도 없이 검만 덩그러니 남은 자신의 허리춤을 툭툭 두드렸다.
"검집은 어디다 팔아먹고 왔는데요?"
"새로운 시대에 걸고 왔다!"
"그거 만화 대사죠? 그러니까 만화 좀 그만 보시라고요."
세간에서는 잘 모르지만, 만화나 애니메이션 보는 게 취미인 류현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크흠. 아까 앞에서 실랑이가 있었어."
류현수가 조금 전 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자,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선배도 모르게, 검집을 분해했다고요?"
"그래. 그것도 이제 판정 받으러 온 루키가. 신기하지?"
자신의 오러를 극한으로 발현해도 저 정도로 흔적도 없이 무언가를 분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더 황당한 건, 그 정도의 위력인데도 마나를 유동하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무언가 수작을 부렸다면 그의 감각이 포착했어야 했는데, 전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막 게이트로 입장을 준비하고 있는 김세균의 등을, 류현수가 뚫어지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튼, 최근에 본 루키 중에 제일 기대가 된다고 해야 하나."
"바로 저점매수 들어가시죠? 지금 융통 가능한 계약금부터 체크..."
휴대폰을 꺼내어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만류하면서, 류현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긴 싫어."
"그런 식이 어떤 식인데요."
"너무 자본주의적으로? 낭만이 없잖아, 낭만이."
"그놈의 낭만 찾던 사람들 다 죽고 이제 업계에 선배 혼자만 남았거든요? 선배가 낭만 타령하다가 날린 루키가 몇 명인 줄 알아요?"
"내가 날리면 네가 잘 잡아서 포장까지 해서 오겠지. 그리고... 내 팬이었다잖아. 어떻게 다짜고짜 계약 얘기부터 꺼내냐?"
"그러라고 선배한테 회사가 지분도 주고 수석 스카우터 자리에도 앉힌 거 아니에요?"
후배의 촌철살인에 류현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말이다. 이 일도 못 해먹을 짓이다."
"이제 루키 게이트 들어가네요. 얼마나 걸릴까요?"
"마법사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그러면 3분 컷?"
"5분. 마법사가 그 정도면 SSS급이지."
"기대가 크신 것 같길래."
기본적으로 마법사는 대기만성형 클래스였다.
초반부터 꽤 위력을 발휘하는 전사 계통과는 달랐다.
전사들이야 재능 있는 루키일 경우 빠르면 1분에서 2분 안에도 10마리를 잡아낼 수 있지만, 마법사는 5분도 충분히 빠른 편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입장하고 3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응?"
황금색 빛무리가 게이트 입구에 나타났다.
"뭐, 뭐야. 클리어 판정?"
두 사람이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주변에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게이트에서 퇴장할 때는 저런 빛무리가 없었다.
오직 게이트를 완전히 클리어하고 강제 퇴장될 때만 나타나는 빛이었다.
"게이트에 다른 사람 들어간 거 있어?"
"아, 아뇨. 방금 김세균 시험자 들어간 게 유일한데요."
"그런데 클리어 판정은 또 뭐야?"
"모르겠습니다."
강남 센터의 공무원들이 화들짝 놀라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그들의 궁금증에 답해 줄 유이한 두 사람.
판정관과 김세균 두 사람이 황금빛의 빛무리를 헤치며 걸어 나왔다.
"판정관! 판정관!"
입까지 벌린 채 어안이 벙벙해진 판정관이 사람들의 외침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예? 예...!"
지금은 그냥 판정관으로 일하고 있지만, 그도 명색이 과거 헌터 업계에서 일하며 꽤 높은 층까지 공략했던 은퇴 헌터.
그런 그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사람들의 궁금증이 극에 달했다.
"안에서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클리어는 판정관이 한 거예요?"
"아, 아닙니다. 시험자가..."
웅성웅성.
이 정도 시간 안에 10마리를 잡았다고 해도 최상급 루키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클리어 판정이라니.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고작해야 1단계 던전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었다.
사실 판정센터의 판정이라는 것이 헌터 자격의 합/불 여부만 판정하는 요식행위에 가깝기는 했다.
그래도 루키의 최초 데뷔 무대라는 의미에서 꽤 영향력은 컸다.
"파, 판정 기록은?"
"10마리 기록은 1초... 클리어 기록은... 20초가 조금 안 됐던 거 같습니다."
원래 10마리 기록만 세면 그 이후는 굳이 집계하지 않았다.
애초에 10마리를 잡는 게 시험 내용이었고, 클리어한다고 따로 추가 보상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10마리를 잡고 퇴장하기도 전에 클리어가 자연스럽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정확히 측정한 클리어 기록은 아니었지만, 여기 있는 이들도 대부분이 헌터이거나 헌터 출신이었다.
대충 실 클리어 시간 정도 계산은 가능했다.
"게이트에 입장하는 딜레이랑 클리어시 자동 퇴장 딜레이까지 합하면... 정말 입장해서 30초 남짓밖에 안 걸렸다고 해야 맞겠는데. 준비 시간까지 고려하면 뭐..."
판정관의 이야기를 멀찌감치서 들은 류현수의 판단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후배가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말했다.
"말리지 마세요. 저 말려도 컨택하러 갈 거예요."
"말릴 생각은 없긴 한데..."
거의 땅에 떨어진 금덩이라도 보듯 탐욕스레 눈을 빛내는 주변의 스카우터들을 턱짓하면서, 류현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점매수는 이미 물 건너간 거 같은데?"
**
당연하게도 합격이었다.
일사천리로 헌터 면허증까지 받고서 판정장을 빠져나오는 내게, 수많은 인파들이 다가왔다.
"알제이 매니지먼트입니다! 저희 매니지먼트에 오시면...!"
"스타피시 매니지먼트입니다! 여기 명함 좀 받으시고!"
헌터 매니지먼트들도.
"대현그룹 자원개발실입니다!"
"세경그룹에서 나왔습니다!"
회사들도.
"새바람 길드입니다! 저희 길드에서는..."
"미국 1위, 휘닉스 길드 한국지부입니다!"
길드까지.
심지어 한 곳은 외국계였다.
수많은 스카우터들이 나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아니, 단순히 관심이라는 단어 정도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열광하고 있었다.
어느새 명함으로 가득 찬 손.
더 받기도 힘들 지경이 되었을 때, 누군가 뒤쪽에서 내게 다가왔다.
"아 죄송합니다. 받을 손이 없어서."
"이걸 써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 제피로스?"
"이제 류현수라니까. 하하."
웃으면서 류현수 씨가 내게 건넨 건, 허리에 맬 수 있는 작은 손가방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잠깐 쓰고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냥 가져요, 그거 회사 가면 기념품으로 주려고 찍어낸 거 창고에 쌓여 있거든요. RHS 로고 박혀 있는 거 보이죠?"
"아, 그러네요."
"팁 하나 줄까요?"
"팁이요?"
"절대 인터넷 검색해서 회사 고르지 마세요. 요즘 인터넷은 바이럴 천국이야. 내가 스카우터 하면서 그것 때문에 손해 보고 이상한 곳 들어가는 신인들 많이 봤어요."
"아...!"
뭔가 찔린다.
집에 가자마자 명함 준 업체들부터 인터넷으로 찾아보려고 했는데.
"요즘 친구들은 그렇게 인터넷으로 뭐든 결정하려고 하더라고. 꼰대의 라떼라고 생각해도 되는데, 우리 때는 업체 하나하나 다 미팅하고, 현장 실사까지 하고서 업체 결정했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우리 회사로 올래요?"
"네? 어, 그게..."
어, 어쩌지.
물론 제피로스의 회사라면 나쁜 곳은 아니겠지만...
"푸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내가 방금 말한 건 어디다 팔아먹고 벌써 고민해요. 그럴 때는 이렇게 말하면 돼요."
"어, 어떻게요?"
그가 나를 마주 보면서 악동 같은 미소를 입가에 히죽 띄우고는, 나직이 말했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 네?"
"자길 잘 팔아먹는 능력도 헌터의 덕목이에요. 200의 능력으로 150을 받는 사람이나, 100의 능력으로 150을 받는 사람이나, 업계에서 평가는 대동소이해요. 내가 그걸 잘 못해서 이러고 사는 거예요. 세균 씨는 그렇게 안 살면 좋겠네요."
툭툭, 이윽고 그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나를 스쳐 지나가며 작게 중얼거렸다.
"물론, 가장 좋은 건 갈아 끼울 수 있는 부품 대신에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는 거지만요. 월드 탑 랭커들처럼. 그러면 세일즈 같은 건 할 필요도 없어지니까."
월드 탑 랭커.
그야말로 부르는 게 몸값이며, 1인 글로벌 기업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최강의 헌터들.
이 양반.
지금 막 헌터 입문한 나보고, 월드 탑 랭커가 되라고 말하는 건가.
덕담치고는 너무 과분한 말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 과분함을 이루고 싶어졌다.
사업(1)
"후우."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 먼저 누웠다.
그런데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아서 벌떡 일어났다.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제대로 복기조차 힘들 지경이었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이제 인생이 바뀌었다는 것 말이다.
흘끗, RHS의 로고가 그려져 있는 손가방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 가득 담겨 있는 것이 모두 명함이었고, 얼핏 들었지만 그중 가장 안 좋은 조건이 연봉 1억이었다.
여러 가지 조건이 붙긴 했지만, 5억까지도 제시받았다.
지금 다니는 직장 연봉이 2500이니까, 1년 5억만 딱 받고 퇴물이 되어도 거의 20년에 가까운 연봉을 받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5억짜리 제안을 받는 게 맞나?
하지만, 장기적으로 생각해 보면 5억 제안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게이트 내부에서의 성과 분배 비율이 턱없이 낮으며, 회사 쪽에 유리한 연장 조건까지 붙어 있었다.
회사나 길드들이 바보여서 5억이라는 거금을 신인에게 베팅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 능력이 진짜 초반 던전에나 먹히는 반짝 능력이어서 1년 만에 퇴물이 된다면 모를까, 추후 성장성까지 고려하면 5억 제안은 바보짓에 가까웠다.
"그냥 제피로스네 회사로 가?"
단순히 제피로스가 날 잠시 도와줬다고, 그리고 어릴 적 좋아하던 헌터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RHS는 객관적으로 봐도 업계에서도 최고 수준의 업체였다.
적어도 제안쯤은 무조건 들어봐야 할 회사였다.
"그런데 그분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자신의 회사에 오는 걸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는가.
직장인에게 흔히 있는 자사 혐오증 같은 건가?
뭐, 나만 해도 우리 회사에 누가 들어오고 싶다고 하면 도시락 싸들고다니면서 말리고 싶을 테니까.
그런데 우리 회사 같은 블랙기업이 아니고 RHS잖아?
괜히 혼란스러워졌다.
잠시 고민했지만, 혼란스러운 걸 계속 억지로 붙잡고 있는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정도는 알 나이였다.
일단 다른 것부터 처리하자.
"자, 그러면... 일단 보상부터 확인해 볼까."
분명 보상이... 블러드골드 골렘인가 그거였지.
근데 보상을 어디서 수령하지?
아, 맞다. 인벤토리.
그제야 각성자에게는 인벤토리가 열린다는 게 기억이 났다.
나 인벤토리도 있는데 굳이 페트병을 힘들게 품에 넣고 다녔던 거야?
"인벤토리."
난생 처음으로 열어보는 인벤토리에 조금 당황했지만, 사용법은 가방 쓰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다만 가방 입구가 허공에서 열리고, 내부 공간이 조금 클 뿐이었다.
안을 바라보니, 아무것도 넣지 않은 빈 인벤토리 한쪽 구석에 집중하지 않으면 찾기도 힘든 반지 하나가 있었다.
붉은 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금반지에, 안쪽에 기하학적인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설마 이게 골렘이라는 건 아니지? 아이템 정보."
[아비센나가 제작한 블러드골드 골렘]
[품격] : 성좌의 유산
[설명] : 성좌 아비센나의 인간 시절 그의 곁을 충실히 지켰던 가디언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형체를 구성하는 혈금이 유실되어 제대로 된 형태를 유지할 수 없는 상태다.
[내용] : 착용 후 마나를 주입하여 골렘을 소환할 수 있다. 구성 물질이 유실되어 보충이 필요한 상태. <현재 잔여 구성 물질 : 0.01%>
0.01%라니.
"무슨 골렘이 목욕탕에서 때 밀고 지나갔냐?"
보충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혈금이 어떤 물질인지도 모른다.
인터넷에 검색해도 안 나오는 걸 보니 되게 희귀한 물질인 것 같은데.
약간 실망스러웠지만, 처음 얻은 아이템이니 기념할 겸 착용했다.
어느 손가락에 낄지 고민했는데, 명색이 아이템이라는 걸 어필이라도 하려는지, 오른손 검지에 정확히 딱 들어맞게 크기가 조정되었다.
그렇게 착용함과 동시에.
[위대한 업적! 최초로 성좌의 유산을 착용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마나의 흐름에 더욱 익숙해집니다.]
[아이템, '아비센나가 제작한 블러드골드 골렘'의 효과로 스킬, '가디언 소환'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런 것도 업적이 되는구나."
이러나저러나 업적 달성은 좋다.
공짜로 보상을 얻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런데 가디언 소환이 가능하다고?
꼴랑 0.01%짜리 골렘은 대체 뭘까.
궁금한 건 또 못 참지.
"가디언 소환."
[블러드골드 골렘이 소환됩니다.]
스킬 발동과 동시에, 착용하고 있던 반지가 일순간에 녹아내리더니 땅에 후두둑 떨어졌다.
이윽고 이리저리 꿈틀거리더니, 인간의 형상이 나타났다.
내가 생각하던 골렘의 모습이 아니라, 정말 온연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약간 문제가 있다면.
"자, 작네."
잘 쳐줘봐야 15cm?
피규어 정도 되는 크기였다.
바로 그때였다.
─쓰리사이즈를 키울까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뇌리에 울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녹아내릴 듯한 젊은 여성의 목소리.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이 한 몸 뉘이기도 모자란 이 좁디좁은 자취방에 여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
자연스럽게 시선이, 한참 밑에 있는 작은 인간 형태의 모습을 향했다.
대충 봤는데, 자세히 보니 여자, 그것도 완전히 홀딱 벗은 나신(裸身)이 거기에 있었다.
너무 작아서 무슨 음란한 생각 같은 건 전혀 안 들었지만, 그래도 확실히 아름다운...
"잠깐, 설마 너야?"
─그렇습니다. 외형은 소환사님의 취향에 따라 변경하실 수 있습니다.
"아니, 작다는 게 그런 뜻이 아니라..."
─참고로 지금 외형은 창조주님의 취향에 따라 정해진 것으로...
"이전 주인의 개취같은 거 듣기 싫거든..."
외형부터 전남친 작품 같잖아.
후우,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주방에서 안 쓴 행주를 꺼내서 피규어... 아니 골렘을 감쌌다.
아무래도 피규어 사이즈라고 해도 알몸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절대 내가 모쏠이라 그런 건 아니고.
─의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환사님. 하지만, 원하신다면 의복을 입은 형상으로 구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건 빨리 말해주면 좋잖니."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고."
가디언이랍시고 나온 게 말하는 피규어라니, 환장하겠네.
잠깐 안에서 꿈틀거리더니, 골렘의 형상이 갑옷 차림으로 바뀌었다.
물론 갑옷을 구현하기 위해 소재를 사용해서 그런지, 키는 오히려 더 작아져 있었다.
"이제 눈 둘 곳이 좀 생겼네. 그나저나 이름은 뭐야? 그냥 골렘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창조주께서는 아테나(Athena)라고 부르셨습니다. 다른 이름을 부여하시겠습니까?
"아테나? 괜찮은 거 같네. 그렇게 부를게."
사실 이름 짓기도 귀찮기도 하고.
─예, 소환사님.
"그런데 가디언이면 역할이 뭐야?"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소환사님을 지킵니다. 심지어 인형(人形) 상태로 소환되지 않더라도, 위기 상황에서 자의적으로 소환사님을 향하는 위험을 방어합니다.
"지킨다고...?"
네가? 나를?
─네, 때에 따라서는 선제적 방어를 수행하기도 합니다.
"선제적 방어?"
─적의 사전 말살이 방어하는 것보다 효율적이라면, 그렇게 움직일 겁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소환사님의 안위가 최우선 순위입니다.
"그, 그래."
지금 저 정도 사이즈로 무슨 도움이 되겠냐마는...
그래도 다행인 건, 저게 고작 0.01%라는 것이었다.
"혈금이 보충되면 더 커질 수 있는 거지?"
─물론입니다. 현재 상태는 제대로 된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부적합합니다.
"혈금은 어떻게 얻을 수 있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최고 등위의 연금학으로 제련하는 희귀 마법 재료로 알고 있습니다.
"겁나 비싸겠네."
척 봐도 비쌀 것 같기는 했다.
일단 '금(金)'자 들어간 것 중에 안 비싼 게 어디 있겠는가.
연금학에 마법 재료까지 언급되면, 그냥 비싼 수준을 넘어서 버린다.
'연금'이나 '마법'은 이를테면 각성 세대 이전의 프랑스 명품 같은 거였다.
최고 등위 연금학 재료 중에 그 유명한 게 엘릭시르와 그걸로 만들어진 완성품 엘릭서가 아니겠는가.
"혹시 100%로 다시 채우려면 그 혈금이라는 게 얼마나 필요한데?"
─이곳의 단위로 1톤 정도가 필요합니다.
"... 뭐?"
보통 금 1톤만 해도 가격이 천억이 넘는다.
그런데 혈금이 뭔지는 몰라도 최고 등위 연금학이 들어가는 마법 재료란다.
그냥 금도 아니고 명품 금인 거다.
그게 1톤이면 얼마일지 감도 안 잡혔다.
가격이 일반 금의 2배만 되어도 2천억이고, 10배면 조 단위가 넘는다.
생각하긴 싫지만 100배면 10조다.
"그, 그래... 그건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보자."
생각은 무슨, 깔끔히 포기다.
"그러면 일단 다시 반지 형태로 돌아갈래?"
─알겠습니다.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아테나는 다시금 녹아내리더니, 내 검지에 빨려들 듯이 중력을 거스르고 올라와 반지 형태가 되었다.
"휴, 이제 좀 쉬어야지."
너무 많은 사건이 있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제 진짜 자야지.
지끈거리는 미간을 부여잡고 다시금 침대에 몸을 뉘였을 때였다.
우우우웅!
울리는 휴대폰 진동에 한숨부터 나왔다.
발신자를 보니 최동민 부장.
아, 진짜. 설마. 구라치지마.
오늘 반차라고.
설마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 이 새끼야!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야! 네 멋대로 반차 쓰고 그럴 거면 그냥 때려치워!
다짜고짜 욕부터 들었는데 왜 웃음이 나지.
"... 네? 감사합니다!"
─뭐 임마?
"때려치라면서요."
와, 부장님 천사인가?
어떻게 때려친다는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진짜 잘됐네.
히죽히죽, 입가에 미소가 절로 걸리는 기분이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이번 달 월급은 오늘까지 일할로 해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고요."
─기, 김세균이! 너 미쳤어? 아니면... 설마...!
"예, 그 설마가 뭐든 그게 맞을 겁니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마시죠."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정말 각성한 거야?
"그렇게 됐네요."
한동안 반대편에서 말이 없다가, 십 년쯤 늙은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진짜 사람이 없어서 퇴사는...
"때려치라고 해서 때려치우는 데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요? 아마 녹음도 됐을 텐데..."
자동녹음기능은 회사원의 필수지.
전화로 지시해놓고서 불리해지면 그런 일 없다고 발뺌하는 놈들이 한둘이 아녔어서.
"아무튼, 끊겠습니다."
─자, 잠깐잠깐잠깐! 퇴사 처리 해 주마, 해줄게! 그래도 이런 식으로는 아니지! 이건 경우가 아니다!
"부장님."
─으응?
"휴가 쓴 직원한테 다짜고짜 전화해서 이 새끼 저 새끼 하시는 건 경우입니까?"
다시금 말문이 막혔는지 씩씩대는 숨소리만 들렸다.
─그, 그래... 미안하다. 미안하게 됐다.
"아무튼, 됐습니다. 끊겠습니다. 회사는 내일 퇴사하러 찾아가겠습니다."
─아니, 그게... 휴우... 그러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
부탁?
아니, 그런 거 들어주고 싶은 생각 없는데.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려던 차였다.
─어제 갔던 성광 연구소, 거기서 갑자기 대규모로 처리해야 할 게 나왔단다. 벌써 몇 명 현장에 가있는데, 일손이 너무 부족해서. 하루만 부탁하마. 하루만.
"성광 연구소요?"
성광 연구소라면...
[현재 다수의 개체가 술자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휴면 상태에 있습니다.]
어쩌면, 거기에 두고 온 내 귀중한 28억 군단(軍團)을 회수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사업(2)
"민철이 형."
"어, 왔어?"
화성의 성광바이오 연구소에 다시 도착했을 때.
입사 동기이자 나이는 두 살 많은 민철이 형이 먼저 현장에 와서 작업 준비 중이었다.
부장이 퇴사 얘기나 각성 얘기는 따로 안 했던 건지, 민철이 형은 늘 그랬듯 나를 대했다.
"안에 또 누구 있어?"
"신 과장."
"뭐야, 그 양반이 왔어?"
"너 아주 죽여버린다는데?"
코웃음을 치며 넘겼다.
빼빼 마른 과장 따위, 무섭지도 않다.
각성한 지금은 더 그렇고.
그나저나 일손 없다더니, 진짜 없긴 없나 보네. 뺀질이 과장이 현장까지 나오고.
"그런데 무슨 일이야? 어제는 성광그룹 회장 온다고 그런 거였다고 치고. 오늘은 뭐, 부회장이라도 온대?"
"경비아저씨 이야기 들으니까 어제 난리도 아니었대. 대충 듣기로는 성광 회장 앞에서 브리핑 완전히 조졌나 봐. 그래서 성광 회장이 머리끝까지 화나서 당장 때려치우라고 엄명."
"설마 이게 그 '때려치우는' 과정이야?"
"그 성광 왕회장님 명인데 오죽하겠냐. 때려치우는 척이라도 해야지. 담당 연구원은 그 자리에서 잘렸다는데? 회장이 바로 업체 불러서 정리하라고 했대."
"그 연구원은 재수도 없네."
하필 회장 앞에서 시연하는 자리에서 실수할 건 또 뭐람.
"그러게, 슬슬 들어갈까?"
들어가서 정리하면서, 몰래 밖에서 세균을 회수할 생각이었다.
도둑질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죽은 세균을 되살린 거니까 내가 회수하지 않고 역소환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진다.
역소환해서 쓰레기로 만드느니, 이른바 재활용을 하겠다는 거지.
"그래서 정리할 구역은 어디야?"
"2029호."
"엥?"
2029호면...
분명 내가 세균을 얻었던 마지막 연구실인데.
"거길 정리한다고?"
"응. 싹 정리. 왜, 문제 있어?"
"아, 아니... 문제는 무슨."
말은 그렇게 했는데...
이거, 문제... 있는 거 같은데?
**
고작 하루 조금 넘어서 2029호에 다시 도착했다.
깡마른 몸으로 이것저것 정리 중이던 과장이 우릴 발견하고서는 하이톤으로 외쳤다.
"일찍일찍 다녀! 일찍일찍!"
"예예, 죄송합니데이~"
가볍게 웃어 보이는 민철 형과는 다르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정상적인 연구실이었던 공간이,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으니까.
한 번 잘못했다고 이렇게 되는 게 정상인가?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 실수가 왠지 내 책임인 거 같다는 거였다.
씨발, 이거 어쩌지?
반쯤 패닉 상태가 되어 멍해진 나를 향해 과장이 외쳤다.
"김세균! 거기서 그냥 서 있을 거야?! 일 안 해?"
후우, 그래... 일단 할 것부터 하고 수습해 보자.
그렇게 폐기물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아, 이건 소각용. 조심해. 밀봉 상태이긴 한데 아직 활성화된 세균이라고 들었어. 통째로 소각하면 된대."
민철 형이 건넨 샬레.
거기 담겨 있는 세균들이 나를 향해 반갑게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세균을 움직여 샬레에 작은 구멍을 뚫고 손안으로 회수했다.
빈 샬레는 소각용 통에 넣었다.
"인벤토리."
이어 작게 연 인벤토리 구멍 안에 세균들을 보관했다.
28억 세균 군단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회수되었는데, 별로 기쁘지 않았다.
그렇게 한두 시간 더 지나고, 완전히 정리된 연구실 내의 폐기물들.
"나 먼저 간다. 너네 마무리하고 와라."
과장이 먼저 나가고, 민철이 형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고생했다."
"응, 형도."
"순대국이나 먹고 갈래?"
"다음에. 오늘 좀 바빠서."
"엉, 그래. 내일 보자."
내일부터는 퇴사긴 하지만.
작별 인사를 할 정신도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안 그래도 걱정되긴 했는데, 그 스노우볼이 이 정도로 구를 줄은 몰랐지.
민철이 형을 보내고, 한동안 연구실 안에서 고민에 잠겼다.
어떻게 수습하지.
이게 수습할 수는 있는 일인가?
내 잘못이었다고 말해야 하나?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지?
고민을 이어가고 있을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민철이 형, 아직 안 갔... 아?"
거기에는, 큰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한 여자가 있었다.
160cm가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키.
마치 토끼나 햄스터같은 소동물을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눈을 마주친 여자가 당황하며 말했다.
"어, 저..."
"누구시죠?"
"여기... 연구원... 아니, 연구원이었던 사람요. 벌써 정리를... 다 했네..."
연구원이었던 사람...
이 사람이구나.
"자, 잠깐 두고 간 짐만 조금 챙길게요..."
"저기..."
"네?"
"짐 다 챙기시고 저랑 잠깐 얘기 좀 하실 수 있을까요?"
"네?"
"제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아서요."
결국, 사실대로 말하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겠다.
수습할 수 있는 수준이면 좋겠네.
"그러니까, 어제... 제가 실수로 여기 있던 걸 떨어트려서 깨트린 거 같거든요."
"... 네?"
각성이랑 능력까지 밝힐 필요는 없을 테니, 간단하게 사실만 말했다.
"바로 주워 담아서 다른 샬레에 넣어두긴 했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싶어서..."
"아, 아뇨. 그럴 리가 없는데요."
내 사과에, 그녀가 오히려 큰 눈에 맺힌 눈물을 소매로 닦으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박테리아는 절대혐기성이에요. 공기와 닿는 즉시 사멸해야 돼요. 그런데 그 세균은... 분명 살아있었어요. 죽었다면 제가 다른 개체를 가져와서 시연했겠죠."
그렇게 된 건가...
그러니까, 아예 죽었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을, 내가 괜히 언데드 상태로 살려두었던 탓에 살아있는 줄 알고 그걸 들고 시연했다는 거다.
이러면 더 내 책임이 되잖아.
어쩌지.
능력을 밝혀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체념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다가 설령 그랬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예?"
"상식적으로 아무리 그룹 회장님한테 하는 시연이었다고 해도 시연 한 번 망쳤다고 이렇게 프로젝트가 드랍되고 잘리지는 않아요. 다른 균주 가져와서 재시연하고, 시말서 몇 번 쓰면 될 일이죠."
그게 이상하기는 했다.
그래서 뭔가 큰 실수라도 저지른 줄 알았지.
아니, 큰 실수 맞긴 한데...
"이 프로젝트, 벌써 5년째 진전이 없거든요. 제가 포길 못하니까 이 기회에 트집 잡아서 날린 거예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아저씨 책임 아니니까."
이런 말을 들으니 뭔가 마음은 편해졌다.
다만 직장을 잃고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한 그녀를 보자니, 동시에 불편해지기도 했다.
"그래도 혹시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도 있으면..."
"네네."
대답은 했지만, 그다지 내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내가 생각해도, 갑자기 노가다 폐기물 수거꾼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해도 그냥 무시할 것 같긴 했다.
그래도, 지금의 나는 달랐다.
각성자로서, 도울 일이 분명히 있을 듯했다.
생각하고 있자니, 한 아름 자신의 짐을 챙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짐 자체도 적지 않았는데, 원래 작은 체구인지라 더 많게 보였다.
"제가 들어드릴게요."
"아뇨, 안 무거워요."
"최소한 이거라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 그러세요."
그녀의 짐을 대신 들었을 때, 눈에 가장 위에 있는 서류철이 들어왔다.
'Perpetuus Exomodulus 박테리아 균주를 활용한 던전 폐기물 활용 극대화에 관한 연구'
던전 폐기물을 활용한다고?
현직... 아니 이제 전직이 될 테지만, 던전 폐기물 처리 업체 직원으로서 절로 호기심이 가는 제목이었다.
"그 세균이, 던전 폐기물을 처리하거나 하는 용도였던 모양이죠?"
"예? 그걸 어떻게?"
"보이네요."
턱짓으로 맨 위에 보이는 서류를 가리키자, 깜짝 놀랐던 그녀가 이내 헛웃음을 지으며 피식 웃었다.
"네, 맞아요. 그런 용도로 개발하고 있었죠."
"신기하네요,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도 궁금하고요."
"궁금하세요?!"
내 말에, 그녀가 눈을 번쩍 빛내면서 사무실 한쪽으로 와다다 달려갔다.
"여기 있을 텐데... 여기 있네요. 이게 뭔 줄 아세요?"
"뭘까요?"
낯이 익었다.
보기에는 그냥 개똥처럼 생겼는데.
갈색 무언가를 뭉쳐놓은 모양새가 딱 그거였는데, 우울해 있다가 갑자기 잔뜩 신이 난 그녀에게 찬물을 끼얹을 수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 유명한 엘릭시르를 추출하는 원재료예요, 이게."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게 그 엘릭시르 원료라고?
프랑스 57단계 던전에서 아흐마드 트리아인이 몬스터 잡고 나오는 부산물?
"네? 그러면..."
"네, 프랑스에서 직수입해온 물건이었죠."
"엄청 비싼 거 아니에요? 이렇게 아무렇게나 방치해도... 되는 거예요?"
"아아, 안에 있는 엘릭시르 성분은 당연히 다 추출했고요, 이건 찌꺼기 같은 거예요."
에이, 그럼 그렇지.
"아, 그렇구나. 그런데 이걸 왜..."
"이 안에, 엘릭시르 성분이 아직 많이 남아 있거든요. 다만 현대 과학으로는 추출할 수 없을 뿐이죠."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많이 남아 있다뇨?"
저 개똥, 어쩐지 낯이 익은 걸 보니, 우리 회사에서도 잔뜩 수거해다가 폐기하는 물건인 거 같은데.
저 안에 엘릭시르가 들었으면 우리 회사에까지 올 리가 없잖아.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이런 상태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품에서 꺼낸 수첩에 원 두 개를 가운데가 겹치게 그린 뒤에, 그녀가 설명을 이어갔다.
"이쪽이 엘릭시르 성분이고, 이쪽이 몬스터의 세포에요. 그러면 이 가운데는?"
"엘릭시르와 몬스터의 세포가 합쳐져 있는 겁니까?"
"맞아요! 그런데 현재 기술로는 이 두 개를 분리해낼 방법이 없으니, 순수한 엘릭시르만 꺼내서 사용하고 나머지는 버려지고 있는 거죠."
"그러면 연구원님이 연구하던 건... 세균으로 저 두 개의 결합을 분리하는 거였나 보군요."
"바로 맞췄어요!"
잔뜩 신을 내며 설명하던 그녀가, 순간 너무 흥분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해요. 요즘 제 연구에 관심 가져 준 사람이 없었어서..."
"아뇨,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실패한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일단 절대혐기성이라는 게 문제예요. 공기만 닿으면 죽으니까요. 그렇다고 다른 박테리아를 쓰자니... 유기물이나 무기물을 분해하는 효과를 지닌 다른 박테리아는 일부 있지만, 이 정도로 미세하게 결합구조를 끊어버리는 박테리아는 없거든요."
미세하게 결합구조를 끊어버린다.
음, 그렇긴 하지.
이놈이 뭐든 싹 다 갈아버리는 건 이미 경험해서 알고 있는 이야기다.
"사실 두 번째 문제가 더 크죠. 절대혐기성이야 진공 상태를 유지하면 해결되는 문제니, 작은 문제에 불과해요. 하지만 두 번째 문제는..."
"그게 뭔가요?"
"지금 기술 수준에서는 통제할 수 없다는 거예요. 특정 결합구조만 끊어내게 해야 되는데, 모든 분자 결합구조를 다 끊어버리니까 그게 쉽지 않네요. 5년째 답보 중이에요."
통제할 수 없는 게 문제라고...?
그런데 나는 통제가 되잖아.
심지어 내 언데드 세균은 공기 중에서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거, 어쩌면...
"저기, 이거 제가 가져가도 되나요?"
"네? 이걸요?"
"기념 삼아서..."
"그러세요, 어차피 폐기물인데요 뭐."
별걸 다 탐낸다는 듯 개똥... 아니 엘릭시르가 들어있던 폐기물을 챙기는 나를 바라보는 그녀였다.
하지만, 내 눈에는 더는 폐기물로 보이지 않았다.
뭐, 사실 여전히 개똥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어쩌면, 황금 개똥이 될지도 모르는 개똥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성함도 모르네요."
"아, 제 이름은 임규선이에요."
"김세균입니다."
풉, 바로 뿜어버리고는 얼굴을 붉히는 규선 씨.
"죄, 죄송해요."
"익숙합니다. 차는 가져오셨어요?"
"아뇨, 택시 타려고요."
"제가 태워다 드리죠. 똥차라도 괜찮으시면."
"괘, 괜찮은데..."
"가면서 개똥... 아니, 엘릭시르 이야기나 더 하고 싶어서요."
"헉! 그럼 가야죠!"
나는 이쪽 분야에는 전혀 지식이 없으니까,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긴 했다.
어쩌면, 좋은 사업 파트너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잘 모셔야지.
사업(3)
사업(3)
회사일을 하려면 도저히 차 없이는 버틸 수가 없어서 장만한 200만 원짜리 중고차.
누굴 태우기는 여전히 민망했지만, 규선 씨는 별다른 선입견 없이 타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아..."
"감사는요. 댁이 어디죠?"
"아, 제가 주소 찍을게요."
그녀가 찍은 주소를 보고 흠칫 놀랐다.
동탄?
음, 동탄 이미지는... 아니,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녀의 직장인 화성이랑 가까우니 거기 사는 게 이상하진 않았다.
"크흠..."
"목 아프세요? 공기청정기라도 틀어드릴까요?"
그러면서 손가방에서 꺼내는 작은 공기청정기.
저래 봬도 마도 기술이 결합되어서 예전의 업소용 공기청정기를 가볍게 능가하는 성능의 고가 제품이었다.
"그걸 들고 다니세요?"
"아, 아뇨. 원래는 랩에 두고 다니는 건데..."
"아."
이후로 한동안 이어지는 침묵.
그 침묵을 깨고서,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퇴사하고 뭐 준비하고 계시는 건 있으세요?"
"아, 아뇨. 이제 생각해 봐야죠."
"하던 연구는 계속하실 생각 없고요?"
"글쎄요오... 일단 박테리아가 회사 자산이기도 하고..."
"회사에서는 그 자산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 같던데요."
입을 삐죽이며 울먹거리기 시작하는 규선 씨.
아니, 울리려고 말한 게 아니라고.
휴지를 뽑아 건네며 말했다.
"그, 저 개ㄸ... 아니 엘릭시르가 들어있다는 폐기물요."
"네, 루미나리온 펠릿."
"루미... 뭐요?"
"발광하다, 빛나다라는 뜻의 Luminar와 사자인 Lion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이름이에요. 말 그대로 빛나는 사자래요. 그 빛나는 사자, 루미나리온의 사체를 갈아서 엘릭시르를 추출한 다음에 펠릿 형태로 압축해놓은 게 그거고요."
"루미나리온... 57단계 던전에서 나온다는 몬스터 이름이 그거였군요."
발광하는 사자라.
왠지 발광(發光)이 아니라 발광(發狂)일 거 같은 건 내 착각일까.
"그런데 만약에 세균을 통제할 수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저 펠릿에서 엘릭시르를 추출할 수 있을까요?"
"통제만 가능하다면 무척 쉽죠."
언제 울먹거렸는지, 잔뜩 신을 내면서 다시금 수첩을 꺼냈다.
아니, 저 수첩은 대체 어디에 숨겨두는 거야.
"이게 결합구조인데, 여기에 있는 사슬만 깨면 돼요. 사실상 이 사슬 구조를 타겟으로 끊어낼 수 있는 효소나 박테리아 같은 걸 찾으면 되는데, 사슬이 너무 촘촘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쉽지 않아요."
"그렇군요."
운전하면서 보기 힘들었지만, 흘끗 눈에 해당 구조를 담았다.
"이게 진짜 연금술이죠. 쓰레기를 금 이상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요."
"이만한 사이즈의 폐기물에서 얼마만큼의 엘릭시르가 나올까요?"
"같은 중량의 루미나리온 사체에서, 순수한 엘릭시르가 1kg당 1g 정도가 나와요. 그런데 결합 상태의 엘릭시르가 순수한 엘릭시르와 비슷한 수준으로 있는데, 펠릿은 건조해서 압축한 거니까요. 아마 그 펠릿 1kg에 2g은 들어 있지 않을까요?"
일단 내 세균으로 추출이 가능할지는 봐야겠지만, 가능만 하다면 같은 중량의 루미나리온 사체 대비 2배 분량이라는 거다.
돈 주고 버려달라고 부탁하는 폐기물이, 프랑스에서 kg당 몇만 유로에 수입해 오는 루미나리온 사체의 2배 가치가 된다.
운전 중이었지만, 가슴이 뛰었다.
설마, 가능할까?
참을 수가 없어서, 작게 인벤토리를 열어 세균을 뒷좌석에 있는 펠릿을 향해 투사했다.
그리고, 조금 전 보았던 결합구조의 사슬 그림을 최대한 떠올리면서 명령했다.
'사슬을, 싹 다 분해해줘.'
그 와중에 어느덧 동탄의 한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아, 여기 단지 입구에 내려주시면 돼요."
"짐이 많은데, 집 앞까지 안 들어드려도 괜찮을까요?"
"괘, 괜찮아요. 여기까지 태워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난처해하는 모습에 더 권유하지는 않았다.
처음 보는 외간 남자를 집앞까지 들이는 것도 요즘 같이 흉흉한 세상에 생각해볼 일이었으니까.
대신에 짐을 꺼내주면서, 뒷자리에 있는 펠릿을 흘끗 바라보았다.
다 된 건가? 별로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개똥같이 생긴 펠릿에 가로등 불빛이 닿았을 때였다.
반짝, 하고 펠릿 표면에서 점점이 무언가가 반짝이며 밝게 빛났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
직감했다.
틀림없이 저게 엘릭시르라는 걸.
"그, 그러면 들어가볼게요오..."
짐을 한가득 들고서 종종걸음으로 들어가는 규선 씨를 향해, 처리를 마친 펠릿에서 세균군을 회수하면서 들고 달려갔다.
"무, 무슨 일이시죠?"
깜짝 놀라 멈추어 선 그녀가 한 아름 안고 있는 짐의 가장 맨 위에, 펠릿을 툭 올려두었다.
그녀는 양손을 쓸 수가 없어서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멍하니 황당함을 담아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기념품으로 가져가신다고..."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시간 되시면 그 펠릿을 다시 한번 분석해주세요."
"네? 그게 무슨..."
"그냥 묻지 말고, 한 번만요. 뭔가 다를 거예요."
"에에..."
"이건 제 명함이에요. 사실 저도 오늘부터 회사 퇴사라서요. 그냥 전화번호만 확인해주세요."
명함도 함께 올린 뒤에, 그녀가 미처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에 뛰어서 차로 돌아왔다.
이렇게 해놓으면 궁금해서라도 연락하겠지.
그냥 무시한다면 뭐...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겠지만.
그런데, 그녀라면 뭔가 내 이야기를 무시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예감은 바로 다음 날 아침에 바로 들어맞았다.
**
집에 도착해서 그야말로 신생아처럼 잤다.
엊그제 자정이 넘게 일하고, 집에 와서 일어나자마자 판정센터에 갔다.
판정센터에서 다녀와서는 컨택받은 업체들을 따져보느라 몇 시간을 보냈고, 그러다가 다시 성광 연구소에 가서 야간작업까지.
꽉꽉 눌러담은 압축 하루였으니, 잠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잠을 깬 건 휴대폰의 진동 때문이었다.
"우으으음... 여보세요..."
─저, 저... 김세균씨 핸드폰...
"맞는데요... 누구... 아? 임규선씨?"
─네! 저, 저예요! 톡 보냈는데... 안 보셔서...
지금이 몇 시지?
오전 7시?
집에 도착해서 뻗은 게 2시였으니 5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네, 무슨 일이시죠?"
─어, 어제... 주셨던 그 펠릿... 어떻게 된 거죠?
빠르기도 해라.
그걸 벌써 했다고?
"벌써 분석하신 거예요?"
─집에 가져와 보니까, 이미 엘릭시르가 표면에 결정화 현상으로 나타났었어요. 놀라서 바로 분석했는데... 저, 정말로... 결합 사슬 구조가 깨져 있더라고요!!
아 그렇지, 겉에 반짝거리던 반짝이.
"그게 결정화 현상이었군요."
─이, 이거 알고 계셨던 거죠? 알고서 저한테 분석해보라고 하셨던 거죠? 저, 정말로...
"순도는 어떻던가요?"
─내부에 있던 잔류 엘릭시르를 거의 99.9% 추출할 수 있었어요! 남는 것 없이! 이거 완전 대박이에요!
"다행이네요."
─다행이요? 다, 다행 같은 게 아니죠 이건... 혁명이에요! 완전히...!
"규선 씨."
─네?
"골 울려요."
아침부터 머리 아파 죽겠네.
─죄, 죄송해요...
"아뇨, 그, 아침이니까 다른 집 사람들 깨지 않게 조용조용히..."
─네에엥...
"그리고, 이 사실은 당분간 조용히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왜죠? 이게 알려지면...
"네, 펠릿 가격이 미친놈처럼 오르겠죠."
─아...
"우리, 돈부터 벌자고요."
어차피 천년만년 숨길 수는 없다.
하늘에서 엘릭시르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그걸 수급해서 팔면 이유를 찾겠지.
그렇게 되면 펠릿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를 거다.
그렇다고 해도 펠릿에서 엘릭시르를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은 현재로서는 나뿐이니까, 아주 오르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공짜 수준으로 가져올 수는 없을 거다.
그 전에 많이 확보해놓을 필요가 있었다.
─네? 우리...요?
"네, 규선 씨랑 같이 사업하려는데. 생각 없으세요?"
사실, 내가 저 사슬 구조를 깨놓은 펠릿에서 엘릭시르만 추출하는 기술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다.
그것만 생각하면 굳이 규선 씨와 일하지 않아도 되겠지.
내가 그녀와 꼭 사업을 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쪽이었다.
"세균, 박테리아, 이런 쪽으로 능통하신 거 아니에요?"
─그쪽을 전공하긴 했는데요오...
"딱이네요."
이미 집에 와서 기절하기 전에 검색까지 다 했지.
임규선, 성광바이오 연구소에 영입되기 전에는 MIT에서 분자생물학에 신소재공학까지 함께 복수전공해서, 분자생물학과 결합한 신소재 연구가 전공 분야였다.
엄밀히 말하면 나같은 고졸이랑은 하늘과 땅 수준에 있는 사람이라는 거다.
저런 사람이랑 이렇게 인연을 맺게 되었으니, 꼭 함께 하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내 각성 능력에도 도움이 많이 될 테고.
"원하는 연구, 다 하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성광바이오처럼 뻥 아니고요."
아마 성광바이오도 원하는 거 다 해 준다고 하고 데려왔겠지.
물론, 대기업의 인내심은 5년을 채 넘지 못했다.
그에 반해서.
당연히 내가 어지간히 성공해도 돈으로 재벌 대기업을 넘어서긴 힘들겠지만, 내게는 능력이 있었다.
세균을 자유자재로 통제하며, 언데드화시켜 약점까지 극복하는 능력.
그 능력은, 분명 저 연구에 미친 연구 덕후에게 어필할 수 있을 거다.
내 확신에 부응하듯, 잠시 말이 없던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건... 만나서 이야기하랬어요... 그, 그래도 긍정적이에요! 저는 연구만 할 수 있으면 다 좋으니까요...
"좋습니다. 일단 좀 주무시고 이따가 일어나면 연락 주세요. 근처로 갈게요."
좋아, 연구는 해결됐고.
나머지는 펠릿을 수급할 방법인데...
루미나리온 펠릿만 달라고 하면 누가 봐도 너무 의심스럽다.
그렇다고 회사를 다시 다녀?
그것도 아니고...
"잠깐만..."
내 눈에, 자취방 한구석에 말끔하게 사라진 쓰레기가 보였다.
분명, 어제 능력 테스트한답시고 세균으로 없앴던 쓰레기.
그렇다면...
"던전 폐기물도 똑같이 처리할 수 있는... 건가?"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갔다.
한참 생각을 이어가다가, 휴대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민철이 형. 지금 통화 가능하지?"
어제 같이 일했던 민철이 형이었다.
─그래, 야 임마, 너 오늘부터 퇴사라며?
"응, 그렇게 됐어."
─어제 말이나 하지. 밥이라도 샀을 텐데.
"어제 너무 피곤했어서."
─그래, 언제 만나서 밥이나 한번 먹자.
"응, 형. 그나저나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형 거래처들 연락처 다 있지?"
─거래처? 뭐, 그렇지.
가끔 어제처럼 바쁠 때는 수거 작업 땜빵도 들어가지만, 민철이 형은 기본적으로는 영업직이었다.
영업직이 무슨 노가다를 뛰냐고 할 수도 있지만, 중소기업이 다 그렇지 뭐.
제약회사나 연구소 등지를 돌면서 폐기물 처리 수주를 따오는 게 본래 민철이 형의 역할이었다.
"형 나랑 사업 하나 할래?"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지금 받는 월급의 두 배를 줄게. 노가다도 없을 거고, 형은 영업만 뛰어."
─너... 미친 거 아니지?
어제까지 같이 노가다 뛰던 애가 사업한답시고 나한테 월급 두 배를 준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형, 내가 톡으로 보내준 거 봐봐."
그건 5억 연봉을 제시받은 계약서 내용이었다.
대충 가릴 건 가리고, 금액 부분만 보냈다.
─... 너 설마...? 각성했냐?
"그래, 내가 제시받은 계약서야. 나 연봉이 5억이야 세후로. 형."
물론 5억짜리랑 계약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연봉 5억이면 직원이 자본 걱정하지 않을 정도 돈은 되었다.
─아니, 헌터나 하지 그러면 무슨 사업이여?
"일단 할 거야 말 거야. 빨리 말해. 내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니까."
─그걸 지금 당장...
"형이 상무이사야. 장 상무라니까? 이거 참아?"
─아씨, 생각 좀 해 보고.
"제안은 오늘 밤까지야."
─알겠어. 끊는다.
오늘 밤까지라고 했지만, 몇 시간 되지 않아 답장이 올 거라는 예감이 또 들었다.
어쩐지 요즘 내 예감이 잘 맞는 느낌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화를 건 곳은...
"제피로스!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이러나저러나 사업을 꾸리려면 초기 자금이 필요하니, 저 명함 뭉텅이의 회사들 중 하나는 골라야 했다.
그리고, 어쩐지 제피로스와 가장 먼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명성(1) (수정)
명성(1)
강남의 한 카페에 도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 똥차를 끌고 오기엔 조금 과분한 동네여서 발렛 맡기면서도 민망했긴 하지만, 차에는 별로 욕심이 없다.
아마 돈을 많이 벌어도 적당한 거 하나 사고 말지 않을까.
심지어 지금 차 따위에 돈을 쓸 여유도 없었다.
돈 한푼 없어서 사업자금 땡기러 온 백수가 무슨 놈의 차야.
"여기에요, 여기."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웃으며 손을 흔드는 제피로스를 발견했다.
옆에 여자도 있네?
"안녕하세요. 옆에 분은..."
"내 후배예요."
"안녕하세요! 배수진이에요! 그날도 있었는데, 전 못 보셨었죠?"
"아, 판정 날이요. 얼핏 본 것 같기도 하네요."
제피로스와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가 저 사람이었구나.
"그래, 이제 어느 정도 싱숭생숭함도 조금 가라앉았을 것 같은데요?"
"네, 아,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일단 저보다 한참 어른이시니..."
"음, 그럼 그럴까?"
"네, 그게 편합니다."
"하하, 원래 이러면 안 되는데."
실제로 옆에 앉은 수진이 제피로스를 쏘아보고 있었다.
"우리 회사 스카우터들 원칙이, 친분 관계, 상하 관계, 실력과 관계없이, 무조건 존댓말 사용이거든."
"아, 그렇군요. 제가 괜한..."
"아냐아냐, 원래 규칙이라는 게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건 아니거든. 흐흐. 알겠니 수진아? 너는 안 되지만 나는 된단다. 억울하면 너도 회사 창립멤버가 되려무나."
"쳇."
"하하... 사실 뵙자고 하기 전에 고민이 좀 되긴 했어요. 물론 RHS는 무척 좋은 회사로 알고 있긴 한데, 제피로스가 부정적으로 말씀했던 것 때문에요."
그 말에, 수진의 눈에 불이 붙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선배? 무조건 와달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뭐가 어째요?"
"아니아니, 내, 내가 그랬다고?"
"약간 뉘앙스가..."
"허, 눈치 빠른 친구네."
반쯤 수긍하는 제피로스.
문득 궁금해졌다.
"왜죠?"
"당연히 우리 회사가 안 좋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 내가 지분까지 들고 있는 회사를 왜 싫어하겠어? 다만 요즘 시장 분위기가 안타까워서 그렇지."
"안타깝다면...?"
"예전에 내가 던전 공략하던 시절만 해도, 던전은 전부 국영이었어. 원한다면 누구나 들어가서 자기 레벨도 올리고 전리품도 챙길 수 있었지. 물론 탈세는 힘들었지만. 입구에서 공무원들이 인벤토리 까고 다 확인했거든."
히죽,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탈세를 언급하는 제피로스.
다만 그 모습이 별로 나쁜 사람처럼 보이질 않았다.
"헌터들은 자기 능력 여하에 따라 혼자서 단계를 올라가거나, 아니면 사람들을 모아서 던전을 공략했지. 그러다가 사람들이 모여 길드가 생겨났고, 길드는 조금 더 이윤을 추구하는 조합이 되었다가 한층 더 큰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로 발전했어. 매니지먼트 같은 것도 광의로 보면 회사니까 넘어가자고."
1세대 헌터에게 듣는 과거 헌터 업계 썰.
전집에서 막걸리라도 한잔 걸치면서 듣고 싶은 이야기였다. 여기가 강남의 고급 카페인 것이 아쉬울 정도.
"요즘 시대에는 그런 로망이 없지. 실제로 루키가 그럴 만한 능력이 되어도, 쓸만한 던전들은 국영 개발회사나 사설 개발회사, 길드들이 들고 있어. 어딘가에 소속이 되지 않는다면 활약할 수 있어도 활약하지 못하는 시대인 거다."
사실 요즘은 헌터로 활동하려면 어딘가에 소속되는 게 당연시되는 분위기라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그래도 회사나 길드가 나쁜 건 아니잖아요?"
내 말에, 똥 씹은 표정으로 듣고 있던 수진이 반색하며 외쳤다.
"그, 그렇죠? 선배 지금 므슨 스릴 흐는 그..."
이를 꽉 깨물고 밑에서 꼼지락거리는 수진의 손.
동시에 입을 헙 다물고 고통을 참는 듯한 제피로스였다.
밑에서 꼬집기라도 하는 건가.
"하, 하하... 그렇지... 회사가 나쁘진 않지."
"그럼요, 그럼요, 지원도 해주고, 좋아요."
화사하게 웃어 보이던 수진이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려고 뒤적일 때.
웃던 표정을 싹 고친 제피로스가 한껏 진지하게 말했다.
"너무 좋은 게 문제지."
"... 좋은 게 문제라고요?"
좋은 건 좋은 거지, 문제가 될 수 있는 건가?
"정해진 던전에서 정해진 공략법대로, 지원까지 빵빵하게 받아 가면서 하는 헌터 활동. 그게 회사나 길드에서의 활동이지. 세대 나누는 건 정말 싫어하는 일이지만... 요즘 친구들은 거의 부품이다. 게이트 안에서 자기 할 정해진 역할만 수행하는 부품."
자율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다양한 던전들을 센스만으로 돌파하던 과거의 헌터.
그 1세대의 선두주자였던 제피로스로서는 작금의 상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당연하겠지.
그런데, 그에게서 이어지는 말은 내 예상을 조금 넘어선 것이었다.
"그런 헌터들이 야생의 던전에 내던져지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쉽지 않겠죠."
"태반은 죽을 거다."
"뭐, 그러면 그런 야생의 던전에 안 가면 되잖아요?"
내 말에 제피로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흘끗 창밖을 바라보았다.
"너는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이 각성 시스템과 던전을 얼마나 믿어?"
"얼마나 믿냐고요? 어... 그런 개념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나는 안 믿는다."
아무도 헌터가 아니었을 때.
던전도 존재하지 않았을 때.
어느 날 하루아침에 헌터가 되어버린 사람.
그런 남자는, 얼떨결에 떨어진 환경에서 필사적으로 목숨을 걸고 싸웠고, 살아남았다.
"던전이 언제까지 이렇게 호의적일지, 사람들은 너무 확신하고 사는 것 같단 말이지."
제피로스 씨도 던전 비관론자였나.
던전에서 나온 신물질과 각성자들의 신기술로 순식간에 발전해 나가는 인류.
그런 것을 찬양하는 던전 찬양론자들도 있는 반면에, 반대로 제피로스 씨가 말하는 것처럼 던전에 대해 비관적인 시각을 지닌 사람도 있었다.
"바람도, 그냥 살랑이는 바람은 땀을 식히는 아주 소중한 존재지만."
제피로스가 자신의 찻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마나를 유동하자, 찻잔 안에 작은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그 소용돌이가 점점 커지다가, 이내 쩡! 하고 깨져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물론, 날아가는 파편과 물방울은 허공에서 어떤 보이지 않는 장막에 막혀 더 가지 못하고 그대로 후두둑 떨어졌다.
"이런 태풍은 큰 피해를 주기 마련이지."
엄청난 마나 운용이었다.
저런 사람이... 은퇴 헌터라고?
놀란 눈으로 있을 때, 수진이 제피로스의 등짝을 팡 때리는 찰진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카페 와서 멀쩡한 잔은 왜 깨욧!"
"그, 그게... 교육 목적? 변상하면 되잖아..."
"에휴, 정말."
"어쨌든... 던전도 자연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자연은 변화무쌍하며, 어지간해서는 막을 수가 없지. 조금만 지금 같지 않게 되어도, 과거는 몰라도 지금의 헌터 업계로는 아주 큰 타격을 입게 될 거야."
"그래서, 제피로스의 추천은요?"
흘끗, 수진의 눈치를 조금 보다가, 제피로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자네가 어딘가에 소속을 두지 않기를 바란다."
"소속을 두지 않는다면..."
"프리랜서."
"미쳤어요?!"
내가 미처 답하기도 전에, 수진이 먼저 뾰족하게 외쳤다.
"이상한 소리예요, 들을 필요도 없는. 아니, 김세균 헌터가 뭐가 모자라서 프리랜서를 해요?"
맞는 말이긴 했다.
현시대에 프리랜서는 말이 프리랜서지, 일용직 노가다랑 다를 바가 없다.
비중 떨어지는 포지션에서, 싼값에 머릿수를 채우는 역할.
"그런 프리랜서 말고. 진짜 프리랜서 말이다. 부품만으로 안 돌아가는 던전의 윤활제들."
"으, 설마..."
제피로스가 뭘 말하려는 건지 감이 잡혔다.
그리고 수진이 기겁하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어떻게 보면 던전개발회사들의 적이라고 볼 수도 있는 존재들이었으니까.
"단건계약 헌터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던전개발회사가 자체적으로 공략하지 못하는 던전을 공략하는 헌터들.
말 그대로, 단건, 건 바이 건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공략해 주는 헌터들을 말했다.
그를 위해서는 처음 보는 던전도 공략할 만큼의 센스와 실력이 당연히 필요했고, 몸값은 말할 것도 없이 비쌌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프랑스의 네크로맨서 아흐마드 트리아인.
57단계 던전을 공략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사실 하나를 바탕으로, 그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국영 던전 공략을 대가로 매번 막대한 인센티브를 챙겼다.
"나, 나는 못 들은 걸로 할래요."
"수진아, 어차피 우리 품에 잡아둘 수 있는 친구가 아니다. 생각해 보렴. 지금 2년이나 3년 계약을 제시해서 계약을 따낸다고 해도, 이 친구가 우리 회사랑 재계약을 할 것 같냐? 그럴 바에는 다른 쪽으로 접근하는 편이 낫다."
"..."
"플랜 B. 꺼내줘."
마지못해 가방에서 서류를 꺼낸 수진이, 스윽 내 쪽으로 밀어두었다.
"계약서... 인가요? 잠깐 읽어봐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안 읽고 사인하려고?"
그런데 계약서가 이렇게 짧아도 되는 건가?
보통의 헌터 계악서는 엄청 두툼하다고 아는데.
심지어 별것도 없는 내가 다니던 그 폐기물 수거업체 고용 계약서도 열 페이지는 되었다.
그런데, 이거...
"고용 계약서가 아니라... 스폰서쉽 계약이요?"
"바로 봤다. 나는 광고판을 선점할 거다. 그것도 제일 좋은 자리로."
그렇게 말하면서 내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계약금이... 시, 십...억?"
"5년 총액이니까. 놀랄 것도 없지."
제피로스는 별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가슴팍에 큰 로고만 붙이고 활동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 대가가 연간 2억이라고요?"
어떤 회사는 고용 계약을 연 1억 제시한 곳도 있는데?
"5년 뒤에는 그 가슴팍이 100억짜리가 될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1000억일 수도 있고."
아무리 그래도, 내가 헌터 업계를 잘 몰라도...
루키에게 계약할 수준의 금액과 계약은 아닌 것 같은데.
"이건 회사 입장에서도 도박이긴 해. 내 자의로 밀어붙이는 거고."
"결국, 제가 기대에 부응할 정도로 커야 남는다는 거군요."
"키우는 건 내 전문이니까."
"그런 건 계약서 내용에는 없던데요?"
"일단 사인부터 하면 알게 될 거야."
잠시 고민하다가, 펜을 들어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사인했다.
변호사를 통해 확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 명확한 계약서였다.
어디 소속되지도 않고, 자율적으로 활동하면서 초기 자금 문제도 해결할 수 있으니 근본적으로 내게는 최고의 계악 조건이었다.
돈이야 초기 자금만 확보되면, 어차피 엘릭시르 쪽 사업이 제 궤도에 오르기만 하면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벌 거다.
오히려 돈보다도, 저 제피로스가 날 키운다는 소리가 더 마음에 들었다.
제피로스는 내 사인을 확인하고는 흔쾌히 말했다.
"수진아, 김세균 헌터 계좌에 10억 넣어."
순식간에 계좌에 10억이 입금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항상 텅텅 비어있던 곳간이 꽉 찼음에도, 거기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키워주실 건데요?"
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면서, 제피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겁결에 자리에서 같이 일어난 내게, 그가 말했다.
"네비 찍고 따라와. 충청북도 충주시..."
**
두 대의 차가 충북 충주의 한 외곽 지역에 있는 버려진 채석장에 나란히 도착했다.
수진 씨는 회사로 돌아갔는지 차에서 내리는 건 제피로스 혼자였다.
"여긴... 게이트입니까?"
"맞아."
"거의 이용되지 않는 것 같은데요."
모든 게이트가 철저하게 잘 관리되는 건 아니었다.
모종의 이유로 인기가 없는 게이트들은, 이렇게 거의 버려지다시피 방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그렇다고 쳐도 조금 정도가 심한데?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지금 레벨이 3레벨은 되지?"
"예."
1단계 게이트를 완벽하게 클리어하면서, 레벨도 2단계나 올랐었다.
내 레벨을 내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알고 있는 이 양반이 더 대단하군.
던전 보상과 레벨업 필요 경험치를 완벽하게 꿰고 있는 거다.
"그러면 2단계 게이트는 건너뛰고 3단계에 입장해도 문제는 없겠군."
레벨은 해당 단계에 입장할 수 있는 최소 수치를 의미했다.
3단계 게이트에 입장하려면 3레벨 이상이어야 하는 것.
"입장하기 전에 설명만 해 주신다면요."
아무리 제피로스라고 해도, 이렇게 수상한 게이트에 그냥 들어갈 수는 없지.
"여긴 3단계 게이트, 버려진 스톤골렘의 사원이다. 사실 위험도는 제로인 던전이야."
"스톤골렘이면 엄청 강한 몬스터 아닌가요?"
"맞지. 그런데 그랬으면 3단계가 아니겠지."
"아."
최소 20단계 이상에서나 나오는 몬스터가 스톤골렘이었다.
그런 스톤골렘이 3단계에서 나온다는 건 본래의 성능을 내지 못하는 열화판이라는 것.
"안에 있는 스톤골렘들은 완전히 가동을 멈춘 상태다. 공격도 하지 않고, 그냥 멈춰 있지."
"그러면 엄청 꿀 던전 아닙니까?"
공격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몬스터를 잡고 경험치를 올린다.
세상 그런 꿀이 어디 있어?
내 말에, 제피로스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스톤골렘을 파괴 판정 내려면 바위 안 어디엔가 있는 아주 작은 생명석을 파괴해야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어?"
"설마... 가만히 있는 스톤골렘을..."
"응, 곡괭이질을 하든 뭘 하든 해서, 어떻게든 생명석을 찾아서 부숴야지."
"아..."
그제야 내 눈에, 이곳의 전경이 들어왔다.
세상에, 버려진 채석장에 생긴 게이트 아니랄까 봐...
"기본이 20단계 이상에 나오는 몬스터니, 그 내구도는 말할 것도 없다."
인기가 없을 만도 했다.
게이트에 들어가서 폼나게 몬스터 잡는 대신에, 안전하지만 하루 종일 곡괭이질이나 해야 하는 던전.
심지어 3단계 던전이라 보상도 짤 터였다.
"그런데, 여기 절 데려오신 이유는..."
"쇳덩어리도 순식간에 분해하는데, 돌덩어리는 다르겠어?"
맞다. 내게는 최고의 환경이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이어지는 제피로스의 말.
"게다가 여긴 아직 클리어가 이루어지지 않은 던전이니까."
"서, 설마..."
클리어 판정은 해당 던전의 단계에서 5레벨 차이 이하의 헌터에게만 주어진다.
즉, 이곳이 3단계 던전이니, 8레벨 이하의 헌터만 클리어 판정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제아무리 8레벨 헌터라고 해도 하루 종일 곡괭이질을 해 봤자, 리젠 속도조차 따르지 못할 거다.
설계 자체가 통상 8레벨의 능력으로는 클리어가 거의 불가능한 던전인 셈이었다.
내게도 그 정도 지식은 있었고, 놀란 눈으로 제피로스를 바라보자니,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 동아시아 전체에 김세균 이름 한 번 울리게 해 보자."
최초 클리어 보상.
다른 아이템이나 숙련도, 경험치 등의 보상도 물론 있지만, 제피로스가 원하는 보상은 그런 게 아닌 듯 보였다.
그게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게이트가 최초 클리어되면, 그 지역에 있는 모든 헌터들에게 메시지가 갔다.
심지어 한국의 지역(Zone)은 동아시아에 귀속되어 있었다.
그 말인즉슨...
한국, 대만, 일본, 중국, 몽골까지.
약 17억에 육박하는 인구를 자랑하는, 세계 최대 경제권의 권역(圈域)에 있는 모든 헌터들에게 메시지가 간다는 뜻이었다.
"명성."
이제는 거의 남지 않은 클리어되지 않은 게이트들.
이른바, 클리어 불가 판정 던전들.
그것을 클리어했다는 그 짧은 메시지 하나가 가져올 어마어마한 명성.
그것이야말로 제피로스가 노리고 있는 진짜 목적이었다.
**
김세균이 게이트로 입장한 뒤에, 잠시 혼자 있게 된 류현수가 전자담배를 꺼내어 빼물었다.
우우웅, 그런 류현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배수진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선배, 조금 전에 김세균 씨한테 집행했던 10억이요...
"어, 왜."
─신 대표가 반려냈어요. 어쩌죠? 이미 계좌에 돈은 들어갔는데.
"뭐?"
류현수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말 그대로예요, 고작해야 1단계 게이트 아니냐고... 운이 좋아서 능력이랑 상성 관계가 맞으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조금 더 검증한 다음에 계약해도 늦지 않는다고...
"하..."
머리를 짚고 있던 류현수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말했다.
"내 개인 후원 계약으로 돌려."
─... 네?
"못 들었어? 내가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계약으로 바꾸라고. 10억은 내 인센티브에서 차감하고. 그 스폰서 계약을 채권 형태로 내가 인수하는 방식으로 바꾸면 되잖아."
─정말 그렇게까지 하시려고요?
"어, 정말 그렇게까지 하려고 한다."
이기는 포커에서는 올인을 아끼지 말라는 것이 그의 지론.
심지어 10억 정도면 그에게는 올인 축에도 끼지 못했다.
게이트 입구를 보는 류현수의 눈은, 확신으로 차 있었다.
명성(2)
명성(2)
[3단계 게이트, '버려진 스톤골렘의 사원'에 입장합니다.]
인생 두 번째로 입장하는 게이트.
하지만, 혼자 입장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아무리 위험성 없는 게이트라는 소린 들었지만, 보호자가 있는 것과 혼자는 마음가짐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던전 자체가 변화무쌍해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공간이니 당연한 긴장이었다.
"음, 정말로 돌덩어리만 있네."
시험 삼아 하나 툭툭 건드려 봤는데, 역시 비활성화 상태였는지 따로 움직임은 없었다.
"좋아... 그러면..."
나는 30억에 달하는 숫자의 맹수(猛獸)들을 던전 전체를 향해 풀어놓았다.
괜히 미시세계의 존재가 아닌지, 육안으로는 확인조차 불가능한 세균들이었다.
하지만, 보이지는 않아도, 그 기운은 느껴졌다.
세균군 무리 하나하나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내가 이끄는 언데드 군단이었으니까.
나의 군단이 골렘 몇 기를 향해 적절히 나뉘어 뿌려졌을 때.
"물어뜯어."
고삐를 풀었다.
푸스스스! 강철조차 분자 단위로 흩어버리는 세균군 앞에서, 오랜 기간 비활성화 상태로 그 자리에 있던 바위는 두부처럼 흩어졌다.
순식간에 드러난 생명석들 역시 가루가 되어 파괴되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한 번의 명령으로 다섯 개의 골렘이 파괴되며 레벨이 올랐다.
불과 세균을 뿌린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명령 수행 과정에서 사멸한 개체 : 10,711,487개]
[명령 수행 과정에서 새로 분열한 개체 : 6,691,320개]
어? 분열한 개체가 더 적네.
분열한 개체보다 사멸한 개체가 더 많으니, 총 개체수가 약 400만 정도 감소했다는 뜻이었다.
30억에 달하는 개체수에서 400만이면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을 만큼 적은 비율이었지만, 그래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생각해 보니 유기물을 분해할 때는 분열하는 개체의 양이 사멸 개체보다 많았지만, 무기물은 오히려 사멸하는 개체가 아주 미세하게 많았다.
그게 대량의 무기물을 분해하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눈에 띌 정도로 늘어난 것이었다.
"사료라도 먹여줘야 하는 건가?"
세균 군단의 개체수가 많을수록 위력은 강할 테고, 숫자가 적어지면 위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지사일 테니, 관리해 둘 필요가 있겠지.
"하아아암..."
던전 안에 들어왔을 때 끌어올렸던 긴장도 잠시,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는 적을 그저 파괴하기만 하는 건 역시 지루했다.
하품을 터트리면서, 던전 내부를 천천히 돌면서 골렘들을 하나둘씩 파괴하던 차였다.
[던전 내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골렘을 파괴하셨습니다.]
[동족들의 파괴로 최후의 스톤골렘 개체가 분노합니다!]
"응?"
뭐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던전 보스, '영락한 사원의 수호자'가 등장합니다!]
우르르르! 작은 지진처럼 지축이 울렸다.
그 진원(震源)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쓰러져있기만 하던 골렘과는 다르게, 다 부스러져가고는 있었지만 온연히 그 동체를 일으켜 선 골렘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문제는, 골렘이 너무 과하게 가까웠다.
골렘이 휘둘러오는 주먹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부우우웅! 시야에 들어오는 골렘의 주먹이 점차 거대해졌다.
이대로 죽는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바로 그 찰나였다.
[가디언, '아테나'가 소환사의 위기를 감지하여 스스로 소환됩니다!]
눈앞에, 혈금으로 이루어진 피막이 허공에 방패처럼 넓게 펼쳐지며, 내 시야를 가렸다.
쿠우웅! 큰 충돌음에도 혈금의 피막은 금 하나 가지 않고 멀쩡했다.
이어 골렘의 주먹을 막아낸 방패가 다시 꿈틀거리며 뭉쳐 작은 인간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감히, 하찮기 그지없는 최하급의 골렘 따위가, 내 소환사님을 공격해?
내게 말할 때와는 전혀 다른 차가운 어조로 쏘아내는 아테나.
그녀의 오른손에 작은 창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분명 작은 창에 불과했던 그것이, 쑤우우욱! 늘어나며 골렘의 심장부를 관통했다.
동시에 쩌적, 하고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격에 생명석을 관통당한 거였다.
생명석을 파괴당한 골렘이 더는 그 거체를 유지할 동력원을 잃고 우르르 허물어졌다.
[던전 보스, '영락한 사원의 수호자'가 영원한 안식에 들었습니다!]
... 그, 선제적인 방어라는 게 이런 거였나.
고작 0.01%의 혈금만으로 저 정도 위력이면... 100% 다 모았다가는 거의 혼자서 다 해먹겠는데.
라고 생각하던 때.
[일시적으로 너무 많은 마나를 소비하셨습니다.]
[마나 탈진 현상을 겪습니다.]
[마나 회복 속도가 3시간 동안 50%로 감소합니다.]
"뭘 했다고 탈진..."
[마나 현황]
─7%/100%
─현재 자연 마나 회복 속도는 초당 0.5%(기본 1%, 마나 탈진 상태)입니다.
─현재 개체수를 유지하기 위해 초당 0.317%(기본 30.12%, 통제력 195% 효과 적용)의 마나를 사용 중입니다.
"설마, 아테나 네가 쓴 거야?"
─그렇습니다. 자체적인 기동 범위를 넘어선 움직임을 위해서는 소환사의 마나가 필요합니다. 선제적 조치를 위해 소환사님의 마나를 사용했습니다.
순식간에 93%의 마나통이 날아갔다.
저 한 번의 움직임을 위해서.
확실히 강하긴 한데...
이렇게 위기 상황이 아니면 막 써먹다가는 마나통 금방 오링나겠는데.
"그래도 덕분에 살았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던전에서는 마지막에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거기서 멀쩡한 골렘이 하나 남아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테나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골렘의 주먹에 으스러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을 때, 눈앞에 메시지들이 주륵 떠올랐다.
이번엔 차근차근 읽어봐야지.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일단 순식간에 레벨 3단계 업. 벌써 7레벨이었다.
원래 이렇게 레벨업이라는 게 쉬운 건가?
[당신은 3단계 게이트, '버려진 스톤골렘의 사원'을 최초로 토벌하셨습니다.]
[최초 클리어 보상으로, 당신의 클래스 주요 능력치가 일부 상승합니다.]
[통제력이 5% 상승하였습니다.]
[위대한 업적! 당신은 처음으로 최초 토벌의 위업을 달성하셨습니다.]
[보상으로 'B급 클래스 전용 장비 교환권'이 주어집니다.]
[당신의 클래스에 해당하는 B급 전용 장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클래스 마스터, 성좌 아비센나가 보상에 개입합니다!]
[보상이 '성좌 아비센나의 왕홀'로 대체됩니다.]
[당신의 통제력이 200%를 돌파했습니다.]
[당신이 통제하는 모든 소환물들이 한층 더 강화될 것입니다.]
"음...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거겠지?
일단 통제력 5%가 올라서, 195%였던 통제력이 200%에 도달했다.
고작 5% 차이라지만, 99%와 100%의 차이가 엄청나다고 했던 후기를 보았다.
그러면 195%와 200%의 차이도 크겠지.
거기에 새로 받은 보상은...
─창조주께서 사용하시던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구성 물질이 많이 유실된 상태입니다.
아테나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성좌 아비센나의 왕홀]
[품격] : 성좌의 유산
[설명] : 성좌 아비센나가 인간 시절 항상 사용하던 지팡이다. 그의 권위를 상징한다. 구성 물질이 다수 소실되어,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기엔 부족하다. 구성 물질을 보충하면, 봉인된 기능을 해방할 수 있다.
[내용] :
─보유한 모든 스킬의 숙련도가 한 단계 증가한다.
─이 기능은 봉인된 상태입니다.
─이 기능은 봉인된 상태입니다.
─이 기능은 봉인된 상태입니다.
─이 기능은 봉인된 상태입니다.
<현재 잔여 구성 물질 : 0.01%>
어차피 가지고 있던 장비도 없으니, 이 정도면 감지덕지였다.
그런데 설마 이것도 혈금으로 구성된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저와는 다른 재질입니다.
"응?"
─해당 지팡이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별의 유물(Star Relic)이 필요합니다.
"그게 뭔데 씹더... 아니, 그게 뭔데?"
─아득히 먼 우주의 별에서만 추출된다는 광물입니다.
"... 그걸 어떻게 구하는데?"
─운석에서 낮은 확률로 나오거나, 별의 유물이 포함된 다른 장비를 분해하여 광성분을 추출할 수 있습니다.
어찌 된 게, 딱 들어봐도 혈금만큼 구하기 어려워 보였다.
어이, 성좌인지 뭔지 하는 양반... 당신 명품만 가지고 다녔구만?
그래도 명품 둘둘 성좌님께서 다 부서져 가는 무기라도 하사해 주셨으니, 잘 써먹어야겠지.
[성좌 아비센나의 왕홀을 착용하셨습니다.]
[언데드 라이즈(고유)의 숙련도가 D로 상승하였습니다.]
[숙련도 D 효과 : 총 2종류의 언데드를 유지할 수 있다.]
"... 뭐?"
충격이었다.
2종류의 언데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효과가 충격이 아니라...
원래 1종류였다고?
아무 세균이나 다 언데드로 만들어 다닐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종류만 유지할 수 있었다고?
"미친,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지..."
나중에 지금 보유한 1호기 세균 친구들 말고 급하게 2호기를 사용할 일이 있었을 때, 숙련도 이슈로 사용할 수 없었으면 얼마나 당황했을거야...
그렇다고 지금 유지하고 있는 이 1호기들을 버릴 수는 없다.
내 모든 계획의 기초이자 기본이니까.
"그나저나, 그러면 스킬 숙련도가 엄청 중요해졌네."
아마도 언데드 라이즈 스킬의 숙련도가 올라갈수록 유지 가능한 세균의 종류가 늘어날 걸로 보였다.
스킬 숙련도를 끌어올리는 걸 목표로 잡아야겠는걸.
그렇게 미처 생각을 채 이어가기도 전.
[던전이 클리어되어 던전 밖으로 방출됩니다.]
나는 게이트 밖으로 방출되었다.
**
밖으로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낄낄대며 웃고 있는 제피로스였다.
"해냈군. 정말로."
"해낼 줄 알고 보낸 거 아니었어요?"
"원트(One try)에 해낼 줄은 몰랐지. 여러 차례 입장해 가면서, 동선을 파악해서 몇 번 재도전해서 성공할 줄 알았지."
"죽을 뻔했어요."
"엄살은."
"정말로요."
나는 갑자기 던전 보스인 스톤골렘이 일어나서 공격을 가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그제야 제피로스의 안색이 확 굳어졌다.
제대로 움직이는 스톤골렘은 이런 3단계 던전에 나올 몬스터가 아니었으니까.
"물론 완전한 상태는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요."
내 말을 잠자코 듣던 제피로스가 내 볼을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너 살아있는 거 맞지? 귀신 아니지?"
"... 네?"
"스톤골렘을 상대하고 살아있다고?"
"네, 뭐... 그렇죠."
가디언 덕분이긴 합니다만.
제피로스는 굳어진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진짜 미안하게 됐군. 안전하다고 별 소릴 다 해놓고... 위기에 빠트리다니. 던전은 어느 순간에도 방심해선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던 놈이..."
"괜찮습니다. 잘 살아 있는데요, 뭘."
"정말 다행이다. 다음부터는 모든 변수를 사전에 체크해둬야겠다."
"그나저나, 계획은 성공적인가요?"
"성공적이냐고?"
제피로스가 씨익 웃으면서, 헌터들의 커뮤니티를 휴대폰으로 열어 보여주었다.
─김세균 이 미친놈 대체 누구냐?
─골렘 사원이 어디임?
─와 골렘 사원이 충주 그 채석장에 있는 그 미친 게이트냐?
─김세균 그 새끼는 곡괭이 마스터임? 거길 어떻게 깸?
이후로도 실시간으로 쭉 갱신되고 있는 게시물들.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로 게시물이 올라오고 있었다.
거기에, 한국 최고 포털 사이트의 메인 뉴스 기사에도.
[속보, 대한민국 헌터 김세균 씨, 클리어 불가 판정 3단계 던전 클리어 (1보)]
[해당 던전은 대한민국 7대 클리어 불가 던전으로 유명한, 버려진 스톤골렘의 사원 (2보)]
[자원개발부, 현재 신원 파악 중 (3보)]
속속들이 속보 기사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중국이나 일본 쪽 포털도 보여주랴?"
"아, 아뇨. 그런데... 이게 그 정도인가... 싶긴 한데요..."
"헌터 업계도 고였으니까."
이런 클리어 불가 판정 던전들이 그런 판정이 난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제피로스가 현역으로 적극 활약하던 1세대.
거의 15년 전부터 난 판정이었다.
달리 말하면, 최근 15년 내에 전 세계적으로 클리어 불가 판정 던전이 공략된 일이 없었다는 것.
그걸 설명해 준 제피로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때, 이제 유명해질 준비는 됐나? 15년 만의 불가사의 공략자?"
명성(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