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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송천혜는 상당히 기분이 저조했다.

아침부터 하한가를 치기는 했지만, 급격히 뚝 떨어진 게 언제인가 돌이켜 보면 아마 점심시간이었을 것이다.

여러모로 어수선했던 대인전을 마치고, 기분 전환이나 하자는 심정으로 디저트를 주문했다.

딸기 생크림 케이크.

번화가의 고급 제과점에서 매일 한정된 수량만 제작해 들여오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만점인 디저트다.

입학하기 전부터 이 케이크가 그렇게 맛있다는 소문을 들어왔기에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고, 마침내.

때가 와야 했는데....

'품절이라니....'

워낙 인기 상품이다 보니 경쟁이 엄청났다.

이 경쟁은 오직 선착순.

지위나 배경 따위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배경 하면 다들 만만치 않으니까.

결과적으로 송천혜는 달달한 생크림 대신 패배의 쓴맛을 보게 되었다.

침울해진 그녀를 한소미가 다독였다.

"천혜야 힘내. 다음에는 있겠지. 오늘은 이거 같이 먹자."

자기 몫의 양갱을 반절 나누어 주는 한소미였다.

왜 얘는 많고 많은 간식거리 중에서 양갱을 제일 좋아하는지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으나, 먹다 보니 양갱도 은근히 괜찮았다.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도 같았고.

그러나....

조금 나아졌나 싶었던 송천혜의 기분은 금세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김호에게 보내 준 디저트 쿠폰 사용 내역을 보고 나서.

그녀가 갖지 못했던 딸기 생크림 케이크가 그곳에 있었다.

송천혜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그 인간이...!'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녀가 화낼 일은 아니었다.

자신의 전격 마법 때문에 쿠키가 바닥에 떨어졌고,

디저트 쿠폰을 보내 주겠다고 먼저 제안한 것도 자신이었다.

김호가 그 디저트 쿠폰으로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산 건 순전히 우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다분히 이성적인 생각이고,

감성적인 부분은 마치 자기가 먹으려던 케이크를 빼앗긴 기분이 들게 했다.

솔직히 내가 잘못한 건 맞는데, 쿠키 한 조각에 최고급 케이크 한 조각은 교환비가 안 맞지 않나?

송천혜가 남은 양갱을 전투적으로 해치웠다.

* * *

그래서였을 것이다.

괜스레 그 남자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게 된 것은.

계속 외면해야지 다짐해 봐도 자꾸만 시선이 갔다.

김호는 회색 머리 여학생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예인. 대인전에서 상대로 만났었기에 똑똑히 기억한다.

던전에 입장할 준비를 하는 서예인에게 김호가 말했다.

- 라이플로 바꿔 드는 게 더 나을 거야.

- 마나 관리가 힘들면 근거리에서 헤드샷만 날리는 식으로 운영해.

'어처구니가 없네.'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말을 함부로 하지?

자기는 캐스터 계열이면서 총사한테 훈수를 둔다고?

또 던전 안에 뭐가 있는 줄 알고 권총보다 라이플이 더 좋다 확신하는 거야.

저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책임질 수 있나?

더욱 어이없는 건, 서예인이 그 조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순순히 라이플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며 송천혜는 헛바람을 터뜨렸다.

"허."

당사자가 저러니까 맥빠지네....

이제 모르겠다. 놔두면 알아서 하겠지.

조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본인의 몫,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도 본인의 몫이다.

서예인과 김호가 차례차례 포탈 안으로 사라진 후, 이내 그녀의 이름도 호명되었다.

"천혜 화이팅~"

한소미의 응원을 뒤로하며, 송천혜는 안개 숲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지옥을 보게 되었다.

온몸이 물에 푹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상태창을 열어 보니 모든 수치가 F로 하락한 상태였다.

항상 넘쳐흐르던 마나도 [코어]가 F랭크로 떨어지며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겨우 이거 갖고 뭘 할 수 있다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녀가 즐겨 쓰는 전격 마법 대부분이 통하지 않았다.

[체인 라이트닝], [벼락지대], [번개 채찍]....

모두 고블린 따위는 수십 마리 단위로 지져 버리는 강력한 광역 마법인데, 기껏해야 움직임이 조금 둔해지는 게 끝.

위력이 떨어지리라곤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어, 어떡하지....'

던전에 입장하기 전에 세워 둔 계획이 전부 무용지물이 됐다.

마법은 안 통하고, 시간은 흐르고, 몬스터는 쌓여 간다.

혼란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때였다.

그 남자의 조언이 머릿속을 스친 것은.

- 라이플로 바꿔 드는 게 더 나을 거야.

왜 하필이면 이게 떠오르나 눈썹을 찡그리면서도 송천혜는 생각을 이어 갔다.

왜 라이플로 바꿔 들라고 했을까?

권총과 라이플의 가장 큰 차이점을 꼽자면 가벼운 여러 발과 묵직한 한 발일 것이다.

'그러면 혹시.'

송천혜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검은색 장갑 위에서 생성된 전류가 뭉치고 압축되며 야구공 크기의 구체를 형성했다.

F등급 단일 대상 마법, [썬더 볼].

그것을 다가오는 고블린에게 집어 던지자,

"꽤액!"

[+4점]

허무하리만치 잘 통했다.

그랬다. 광역 마법이 안 통하면 단일 마법을 쓰면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 간단한 생각을 못 했을까?

송천혜는 계속해서 [썬더 볼]을 던져 댔다.

'나는 바보인가 봐.'

'나는 멍청이인가 봐.'

'바보 멍청이인가 봐!'

던질 때마다 마음속으로 되뇌면서.

그러나 중반쯤이 되자 또다시 한계에 부딪혔다.

'마나가....'

아주 바닥나지는 않았지만 남은 시간 동안 쓰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게다가 오크와 트롤의 비율이 늘어나서 [썬더 볼]만으로는 잘 안 쓰러진다.

그러자 김호의 두 번째 조언이 귓가를 스쳤다.

- 마나 관리가 힘들면 근거리에서 헤드샷만 날리는 식으로 운영해.

'근거리에서 헤드샷만....'

'이걸 나한테 맞게 해석하면....'

문득 마음 한구석에서 반발심이 고개를 들었다.

'꼭 그 사람 말대로 해야 돼?'

'아까는 어처구니가 없다고 했으면서.'

'넌 자존심도 없어?'

'그래도 리타이어하는 것보다는....'

바닥을 굴러다니던 탈락자들이 떠오른다.

자신이 그 꼴이 된다니,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송천혜는 결정했다.

최악보다는 차악을 선택하기로.

[라이트닝 인챈트]

장갑을 낀 두 주먹에 전류를 둘렀다.

그리고 어설픈 파이팅 포즈를 잡았다.

이런 식으로 싸워 보는 건 유치원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지만 어쩌겠는가. 달리 방법이 없는데.

"크르르르...."

트롤이 바로 앞에 서서 위협적으로 으르렁댔다.

픽스 존에서 보는 트롤이라 그런지 예전에 해치웠던 것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

송천혜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뻗었다.

* * *

[남은 시간 0:00]

[현재 점수:571점]

남은 시간이 0이 되는 즉시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증발했다.

안개 숲은 처음의 적막함을 되찾았다.

그제야 송천혜는 한숨을 푹 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끄, 끝났다아...."

10분을 버텨 냈다.

10분 동안 살아남았다.

출구가 입을 여는 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잠깐만.'

밖으로 나가려던 송천혜는 문득 제자리에 멈춰 섰다.

자기 모습을 돌아보니 귀신 꼴이 따로 없었다.

하기야 끝 무렵에는 몬스터들과 엎치락뒤치락하며 막무가내로 주먹을 휘둘러 댔으니.

아무튼 이 상태로는 못 나간다.

- 치지직,

송천혜의 손끝에 짧은 전류가 감돌았다.

그것을 정수리부터 빗어 내리자 산발을 했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정돈되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옷매무시를 깔끔하게 고치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전류를 흘려 먼지 한 톨까지 날려 버렸다.

[리플레이를 저장하겠습니까?]

[수락/거절]

"절대. 절대로 안 해요."

죽어도 이 흑역사가 저장되는 꼴은 못 본다.

* * *

밖으로 나온 송천혜는 항상 그렇듯 다른 학생들의 주목을 받았다.

지옥 같은 픽스 존의 10분을 겪고도 전혀 흐트러짐 없는, 자신의 모든 것을 완벽히 통제하는 모습에 누군가 감탄성을 흘렸다.

벌써부터 그녀의 이름을 찾아 리더 보드를 뒤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쉽게 찾지는 못할 것이다.

[송천혜, 571점, 47%]

그들의 기대치보다는 훨씬 낮은 점수일 테니까.

토파즈 마탑의 명성에 부합하지 못했지만, 지금 송천혜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단 거 먹고 싶다....'

끝나면 딸기우유 사 먹어야지.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돌아가던 송천혜는 군중 속에서 김호를 발견했다.

문득 그녀는 부끄러워졌다.

그의 조언을 엿듣고, 무시하고, 끝내는 그 조언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송천혜의 걸음걸이가 조금 더 빨라졌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19화 리플레이 (1)

공략전이 마무리되자, 이수독은 대인전 때와 마찬가지로 3반을 한곳에 불러 모았다.

"점수와 포인트에 대해 설명하겠다. 학생증 뒷면을 확인하도록."

학생들이 주섬주섬 학생증을 꺼내 살피니, 빈 공백이었던 곳에 새로운 항목이 추가되어 있었다.

김 호

[대인전:300점]

[공략전:683점]

(2,049pt)

동시에 이수독 옆의 빈 공간에 커다란 학생증 하나가 떠올랐다.

얼굴이 물음표인 '김아무개'의 학생증 견본.

김아무개

[대인전:300점]

+30점

-25점

"대인전은 너희가 익히 아는 제로섬 게임에 가깝다. 승리하면 점수를 얻고, 패배하면 잃지."

[공략전:500점]

+400점

+300점

"반면 공략전은 던전 공략에 성공할 때마다 점수가 계속해서 누적되는 방식이다. 두 실기 평가 모두 총 점수가 높을수록 순위가 올라가는 건 같다. 이제 집중해라."

김아무개

[공략전:500점]

(1,500pt)

김아무개의 공략전 점수 아래에 한 줄이 추가되었다.

"'가용(可用) 포인트'는 용살학원에서만 통용되는 화폐다. 너희가 추후 치르게 될 대인전이나 공략전에 도움을 주는 다양한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지. 자세한 내용은 카탈로그를 참고하도록."

주 소비처는 다른 학생의 리플레이나 던전의 간이 지도, 탈출 아이템 등.

원한다면 영약이나 스킬북, 장비까지도 구매할 수 있다.

포인트만 충분하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이 포인트는 대체 어떻게 얻는가? 눈치 빠른 놈들은 벌써 감을 잡았겠지."

김아무개

[공략전:500점] * 3.0배율

= 1,500 point

"너희가 획득하는 공략전 점수가 일정 배율(倍率)로 포인트로 환산된다. 이번 공략전은 첫 공략전이고, 픽스 존이라는 점을 참작하여 3.0배율이 적용되었다."

"아...."

학생들의 낯에 안타까운 기색이 서렸다.

아직 이 포인트라는 것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어도, 3.0이 꽤 높은 배율이라는 것 정도는 직감했으리라.

그래서 아쉬워하는 것이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할걸.

1점이라도 더 먹어 둘걸.

특히 리타이어한 학생들은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픽스 존은 너무 어려우니까 그냥 포기하고 다음부터 잘하자 싶었을 텐데, 포인트를 저렇게 잔뜩 쥐여 줄 줄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나 본인들이 자초한 일, 인제 와서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뒤늦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 보지만, 이수독이 마주 보내는 살기등등한 눈빛에 시선을 내리깔고 만다.

이수독은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던전들을 공략해서 점수를 쌓고, 그곳에서 얻는 포인트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각자 카탈로그를 보고 효율적인 방법을 고민해 보도록.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마치겠다. 충분한 휴식을 취해서 내일 수업에 지장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럼 해산."

다른 반 선생님들은 설명을 끝마치고도 한동안 자리에 남아 학생들과 질답을 주고받는데, 이수독은 곧바로 어딘가로 향하는 듯했다.

탈락자들이 마지막으로 말이라도 붙여 보려 하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간다.

저 양반은 학생들한테 관심이 없네.

공략전 자체가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 않은 터라, 저녁 식사까지는 한참 남았다.

이럴 때 시간을 때울 방법이라면,

"커피나 한잔하지."

"좋소. 본인도 그 커피라는 것에 흥미가 동하던 차였다오."

흔쾌히 수락하는 고현우.

서예인에게도 제안을 던져 보지만,

"서 소저도 가시겠소?"

"...."

서예인은 대답 대신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했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졸려. 가서 잘래...."

아까 전부터 조금씩 눈꺼풀이 처지는 게 보이기는 했다.

억지로 끌고 가느니 그냥 쉬게 놔두는 게 낫겠지.

"우리끼리 갑시다."

* * *

매점에서 아이스커피를 주문해 한 잔씩 들었다.

게임 속 세계에 들어와도 커피는 커피다.

맛이 조금 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고현우의 커피가 줄어드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대화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단숨에 원샷을 때려 버린 것이다.

그러고선 한다는 말이.

"양이 적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런 건 신경 쓰면 지는 거다.

어차피 커피는 곁가지고, 주목적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한번 봐."

먼저 고현우에게 카탈로그를 넘겨주었다.

천생 무인인 고현우가 각종 아이템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간다.

나 역시 큰 기대는 걸지 않았고, 대충 훑어나 보라는 의미로 보여 준 것이다.

예상대로, 고현우는 카탈로그를 이리저리 넘길 때마다 눈썹을 찡그렸다 폈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게 태반이라 본인으로서는 혼란스럽기만 하구려. 김 형이 가르쳐 주겠소?"

"아이템은 지금 당장은 무시해도 돼. 그래도 아예 모르면 나중 가서 불리해지니까 천천히 하나씩 파악해 둬."

"알겠소."

"지금 반드시 알아 둬야 할 게 있다면 리플레이지."

"리플레이?"

"아까 던전에서 나올 때 리플레이 저장할까요, 하고 안 물어보디?"

잠시 기억을 되짚던 고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 것으로 기억하오. 해가 되지는 않을 듯하기에 수락했소만."

"수락하면 네가 던전을 클리어했던 과정이 낱낱이 기록된다. 그걸 다른 사람이 구매하면."

예시를 들고자 한소미의 리플레이를 구매했다.

100포인트가 차감되며 손 위에 수정구가 나타났다.

(2,049pt) -100pt

[한소미_공략전_배치_고사_928점.replay]

수정구 속의 한소미는 날렵한 보법으로 안개 숲 이곳저곳을 누비고 있었다.

손에 든 검이 번쩍일 때마다 몬스터들이 깔끔하게 잘려 나간다.

함께 리플레이를 관전하던 고현우가 감탄했다.

"오오."

"이런 식으로 열람할 수 있지. 네 리플레이도 엄청 팔리고 있을걸? 포인트 확인해 봐."

포인트를 조회한 고현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이구려. 잠깐 사이에 많이 늘었소."

"네가 공략전 수석이잖아. 1학년 중에 유일하게 1,000점이기도 하고. 엄청 팔릴걸."

1학년뿐만 아니라 2, 3학년들도 궁금해서 챙겨 볼 것이다.

지금쯤 4대 세력 쪽에서는 난리가 났겠지.

학생선도부 아니면 유망주 중 하나가 1위를 먹으리라 예상했을 텐데, 웬 듣도 보도 못한 무소속이 덜컥 튀어나와서 그 자리를 차지했으니.

'공략전 수석'이라는 타이틀이 갖는 가치는 엄청나다.

이번 안개 숲 리플레이는 물론, 앞으로 치를 공략전과 대인전 리플레이까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갈 것이다.

그러던 와중, 고현우가 무언가 떠오른 듯 물었다.

"헌데, 리플레이가 많이 팔린다는 건, 본인의 무공을 견식 하는 자가 늘어난다는 뜻 아니오?"

"그렇지. 그것도 아주 낱낱이 파헤치려 들걸."

"으음.... 마냥 좋기만 한 일은 아니구려."

리플레이 저장의 가장 큰 단점.

자신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만천하에 공개된다.

가령 던전 공략에 다른 학생의 리플레이를 참고할 수도 있으며,

대인전에서 붙을 상대의 리플레이를 미리 보고 분석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전략이다.

"네 말대로 무공을 견식 하는 사람이 많아서 좋을 건 없지. 누군가는 파훼법을 찾아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포인트. 이걸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만해."

용살학원은 드래곤에 대적할 영웅들을 육성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경쟁은 필수적이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겠다고 서로 실력을 감추기만 한다면 주객이 전도되는 셈이다.

때문에 포인트에는 남에게 실력을 공개한다는 리스크를 뛰어넘는 강력한 이점이 존재한다.

'나 같은 경우는 예외고.'

이번에는 픽스 존에서의 내 실력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리플레이를 저장하지 않았다.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인 만큼, 꼭꼭 숨기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을 생각이다.

어차피 순위권도 아니라 포인트가 많이 벌리지도 않을 텐데, 그거 조금 못 가져가면 어떤가.

나중에 그 이상의 이득을 취하면 그만이다.

"김 형의 말을 들어 보니 이 포인트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대단한 용도가 있는 것 같구려."

"그래, 그 얘기를 하려고 커피 한잔하자고 한 거야."

공략전 1위를 해서 얻은, 그리고 앞으로 얻게 될 포인트를 어떻게 써먹는 게 최선일까.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이야기가 되리라 직감했는지, 고현우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나를 똑바로 마주 보며 입을 연다.

"김 형의 고견(高見)을 들려주시오."

"오늘 확인했겠지만 네 기량 자체는 1학년 탑급들과 비교해도 안 밀려."

"김 형의 안목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소. 김 형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사실이겠지."

"다만, 네 약점은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다."

"...뼈저리게 통감하던 참이오. 오늘 일로 더욱."

고현우가 자조적인,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첫 번째 약점은 낮은 등급의 [코어]로 인한 내공 부족.

두 번째는 심심하면 깨져 버리는 무기.

무기는 당장 내가 손쓸 수 없는 영역이다.

사문의 신물이라는 고현우의 장검과 깊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

자칫하면 내가 사문의 일에 참견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고, 이건 무인에게 굉장히 큰 무례다.

서로 간에 더욱 신뢰를 쌓고, 고현우 쪽에서 먼저 손을 내민 뒤에야 도와줄 수 있다.

그러니 다시 [코어]로 돌아와서.

고현우는 한소미와 붙었을 때 내공 싸움에서 크게 밀렸다.

내가 [증폭]으로 코어를 2랭크나 올려 주고 나서야 그나마 비슷해졌고.

조벽과의 경기에서는 얼핏 비등한 승부를 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무기가 파괴된 데다 내력도 모조리 끌어다 써서, 대인전이 끝나자마자 운기조식을 해야 했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번 공략전 규칙이 픽스 존이라 1위지, 마나 싸움으로 들어가면 넌 무조건 져. 그러니 지금은 다른 걸 다 제쳐 두고 [코어]에 집중해야 한다."

"본인이 어떻게 하면 좋겠소?"

"'트레이닝 센터'로 가라."

트레이닝 센터.

단순한 체육관이 아니다.

아레나와 비슷하게, 마법공학의 정수가 가미되어 온갖 종류의 수련이 가능한 장소.

"트레이닝 센터에 가 보면 마나연공실이 있을 거다."

"...!"

"다른 곳보다 마나의 농도가 짙어서 같은 시간 운공을 해도 훨씬 내공이 빠르게 쌓이지."

"그런 곳이 있었단 말이오?"

고현우가 감탄성을 흘렸다.

몸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기색이었다.

그런 고현우를 붙잡고 설명을 이었다.

"끝까지 들어. 이게 제일 중요하니까. '특수연공실'이라는 곳이 있다. 일반 마나연공실보다 마나의 집중도가 극도로 높아. 어림잡아 열 배 이상."

"...!!"

고현우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저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연공실도 효율이 좋다는데, 그 열 배가 넘어가는 특수연공실은 대체 어떤 곳이라는 말인가?

"물론 그런 엄청난 장소가 무한정 존재할 리가 없지. 아무나 못 들어가."

"대화의 흐름상... 포인트가 필요하겠군."

"그래. 6시간 이용에 500포인트."

가히 살인적인 소모량이다.

하루에 6시간만 쓴다 쳐도 고현우가 공략전에서 얻은 3천 포인트를 태우는 데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는다.

무인들은 주말 같은 경우 하루를 모조리 연공에 투자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18시간 1,500포인트, 24시간 2,000포인트가 순식간에 증발하는 것이다.

이걸 한 학기 내내 쓰려면.... 얼마나 많이 필요할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네가 정말 포인트를 열심히 모아서 특수연공실에만 모조리 쏟아부으면 가능은 한데, 대신 다른 걸 전혀 못 사게 되겠지."

"으음.... 다른 방법은 없는 거요?"

"있어. 시즌 패스."

시즌 패스.

보유하고 있으면 한 학기 동안 포인트 소모 없이 언제든 특수연공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그런 물건이라면 얻기가 무척이나 어려울 것 같소."

"가장 쉬운 방법이 경매야. 평균적으로 3~4만 포인트 사이에 낙찰되는 편이지."

"허어, 그게 가장 쉽다니. 하면 다른 방법은 무엇이오?"

"시즌 패스는 용살학원의 여러 이권 중 하나다. 실적이 좋은 동아리들에게 우선적으로 지급되지. 검술 동아리나 백마법 동아리 같은 전통적인 강호들은 대여섯 개는 갖고 있을걸."

그런 강호들마저 1, 2, 3학년이 각각 두어 개씩 나눠 가지기도 빠듯하다.

그러니 가장 뛰어난 실력자들에게 분배한다.

"검술 동아리에 들어가서 1학년 유망주 자리를 뺏으면 돼."

"...."

문제는 모용준의 실력이 한소미, 조벽과 엇비슷한 수준이라는 점이다.

이길 수 있겠냐 묻자 고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어렵다 보오. 아무래도 시즌 패스는 보류해야겠군. 그래도 틈틈이 포인트를 투자한다면 특수연공실에 제법 자주 드나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아니, 아직 포기하기는 일러."

"...다른 방법이 더 있소?"

"그럼, 있지."

나는 나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구해다 주겠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20화 리플레이 (2)

"진정 김 형이 시즌 패스를 구해 줄 수 있다는 말이오?"

"나라면 가능하지."

"어떻게?"

카탈로그를 슬슬 흔들자 고현우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설명은 해 줄 수 있는데, 그래 봤자 못 알아들을걸."

"크흠...."

카탈로그의 아이템도 다 못 알아보는데, 내가 어떤 아이템을 무슨 용도로 써먹을지 이해할까.

"중요한 건 어떻게가 아니라, 내가 시즌 패스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 아니겠냐."

"그도 그렇군. 하면 본인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오?"

시즌 패스의 가치를 생각하면 당연히 떠올릴 만한 의문이었다.

경매에서 수만 포인트를 써서 낙찰받는 게 그나마 쉬운 길인데, 그런 귀한 아이템을 거저 구해다 줄 리가 없다.

원하는 게 있으니 이런 제안을 했다, 까지 생각이 닿았을 것이다.

"던전이라는 게 오늘 들어간 안개 숲처럼 1인 던전만 있는 게 아니야. 2인, 4인, 십수 명이 동시에 들어가는 레이드 던전도 있지."

"본인이 김 형과 함께 들어가기를 원한다는 뜻이로군."

어지간한 2인 던전이라면 나 혼자서도 깰 수 있지만, 개중에는 구조적으로 솔로 플레이가 불가능한 곳도 존재한다.

아예 두 갈래 길이거나 역할을 분담해야 하는 경우.

가령, 한 명이 퍼즐이나 함정 따위의 장치를 푸는 동안 다른 한 명이 쏟아지는 몬스터를 막아야 하는 던전도 있다.

고현우가 반쯤은 장난스러운, 반쯤은 서운한 투로 답했다.

"이거 섭섭하군. 그런 거라면 시즌 패스를 구해 주지 않아도 본인은 김 형을 도울 거요. 우리는 친우 아니오?"

"일반적인 던전이라면 그렇지."

내 표정이 여전히 진지한 것을 확인하자, 고현우도 태도를 진지하게 하고 내 말을 경청했다.

나는 발밑을 가리켰다.

"내가 노리는 곳은 훨씬 아래, 심층부 던전이다. 네 실력으로도 버거울 거야.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몰라."

"...!"

열차에서는 실상 아무 보상도 약속받지 않고 손을 보탰다.

하지만 그때는 리스크가 적었기에 나도 큰 거리낌 없이 부탁한 것이고, 목숨이 걸리는 일에까지 그럴 수는 없다.

정당한 보상을 제시해야 한다.

고현우가 질문을 던졌다.

"본인이 수락한다면, 그 심층부 던전에는 언제쯤 도전할 심산이오?"

"당연히 지금은 어림도 없지. 너나 나나 실력을 더 키워야 해. 네 성장이 빠르면 그만큼 도전하는 시기도 앞당겨질 거고."

"시즌 패스는 일종의 투자로군."

"그래. 거기에 던전 보상도 얻게 될 거야. 명검, 영약, 기연."

"으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얼마든지. 꼭 지금 답하지 않아도 된다."

"잠깐이면 되오."

고현우가 상념에 빠진 동안, 나는 내 몫의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기다렸다.

나도 원샷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속도가 빠른 편이라 커피가 금세 바닥났다.

그사이에 고현우는 고민을 끝마쳤다.

"김 형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확실해? 다시 말하지만 죽을 수도 있다."

고현우는 당당하게 웃음 지었다.

"본인은 무인이오. 항상 더 강해지는 길을 갈망하지. 이런 나에게 김 형이 길을 보여 주는데, 목숨이 아깝다고 걷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이만하면 단순히 치기 어린 결정이 아니라 각오가 됐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당분간은 시간 날 때마다 특수연공실에서 살아라. 포인트 아끼지 말고."

"본인이 가진 포인트로 감당이 되겠소?"

"리플레이 판매로 계속 들어올 테니까 앞으로 2주 정도는 부족하지 않을 거야. 그 안에 시즌 패스를 구해다 주지."

"2주면 적절하군. 그리 알고 기다리리다."

* * *

트레이닝 센터로 고현우를 보내고, 나는 퀘스트 창을 띄워 올렸다.

[서브 퀘스트:배치 고사](완료)

▷대인전 배치 고사에서 1승 이상 (1/1)

▷공략전 배치 고사에서 상위 50% 이상

(현재 랭킹:41%)

▷보상:[복사-스킬] 슬롯+1

복사-스킬[1/2]

1. 허밍버드(E)

2. 없음

빈 슬롯이 하나 추가되었다.

이걸로 배치 고사는 일단락된 셈이다.

이제 시즌 패스에 집중해야겠지.

어떻게 얻을 것인가?

'거래해야지.'

4대 세력에서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아이템으로.

상점을 열어 아이템 하나를 구매했다.

한 방에 1,000포인트가 날아갔다.

(1,949pt) -1,000pt

['열 촉매 시약'을 획득합니다.]

열 촉매 시약은 제작 재료다.

정확히는 마법공학 아이템의 제작 재료.

1,000포인트는 지금은 크게 보일지 몰라도, 학기 내내 벌어들이는 포인트에 비하면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이 시약 역시 보기만큼 귀한 아이템은 아니라는 뜻.

다만, 마법공학 아이템에 밥 먹듯이 들어가는 재료라 항상 수요가 더 많다.

이 재료를 첫 번째 미끼로 쓴다.

'지금쯤이면 한두 명은 있겠네.'

나는 걸음을 옮겼다.

마법공학 공방으로.

* * *

'저 인간이 여긴 왜 왔대?'

자료실 직원은 뜻밖의 방문자를 맞이했다.

인간 백정 이수독.

범죄자들 잡아 죽이던 양반이 덜컥 이 학교 교사가 되었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래 봤자 학교 한구석에서 묵묵히 일만 하는 자신과 만날 일이 있으랴 싶었는데.

무슨 변덕에서인지 학기 첫날부터 자료실에 찾아온 것이다.

슬쩍 눈알을 굴려 보니 하필 자료실에 자신밖에 없다.

자신이 직접 응대해야 한다는 뜻.

이수독 역시 그 사실을 확인한 듯 그에게 똑바로 걸어왔다.

"...."

풍기는 분위기가 심히 흉흉하기는 했으나 위축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일선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그 또한 한때는 A급 슬레이어.

이 정도 살기는 무난하게 받아넘길 수 있다.

또 이수독이 자신을 해하러 온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흉악한 인상과는 달리 점잖은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예,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리플레이를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리플레이? 웬 리플레이?

자료실 직원이 의아함에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리플레이라면 공략전 말씀이십니까?"

"맞습니다."

"그건.... 학생 상점에서 구매하시면 될 텐데요."

"비공개라서 그렇습니다."

비공개 리플레이.

대강 돌아가는 상황이 짐작된다.

학생 하나가 리플레이를 비공개로 돌렸고, 이수독은 그것을 열람하고자 이곳에 온 것이다.

그러나 그건 이쪽에서도 딱히 손쓸 방도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말로만 안 되네요, 하고 돌려보내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 주고 납득시키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학생 이름이...?"

"김호입니다. 1학년 3반."

직원이 키보드를 두드리자 곧 스크린에 학생의 정보가 출력되었다.

공략전 성적도 함께.

[김 호, 683점, 38%]

이수독에게 보여 주듯 계속해서 리플레이 조회를 시도해 보지만, 스크린은 [열람 불가]라는 문구만 띄워 올릴 뿐이었다.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보시다시피 불가능합니다."

"...."

이수독은 말없이 그를 응시하기만 했지만, 자료실 직원에게는 '왜?'라는 질문이 들리는 듯했다.

슬슬 귀찮음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용살학원을 졸업한 양반이 이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굳이 설명을 듣고 싶나?

그러나 이수독은 '굳이' 듣고 싶은 눈치였다.

자료실 직원이 어쩔 수 없이 설명했다.

"...우리 쪽 권한이 더 높기는 한데, 이건 권한이 높고 낮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리플레이 저장 자체가 안 됐거든요. 데이터베이스에 남아 있지도 않은 걸 열람할 수는 없는 일이죠."

"...."

이수독은 잠시 얼굴을 굳히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직원은 생각했다.

'저 인간이 의외네....'

잡아 죽일 범죄자 말고는 사람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는 걸로 아는데, 그런 자가 학생 하나에 관심을 가진다?

흥미가 동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해서 직원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게 왜 궁금하십니까? 성적만 봐선 특이한 구석이 없어 보이는데요."

"...김호 학생은 들어간 지 4분도 안 돼서 나왔습니다."

"예? 그럴 리가요."

4분도 안 돼서 나왔는데 683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10분 다 채우고 나왔는데 이수독이 착각한 거겠지.

한편으로는 정말 4분 만에 그 점수라면 아무리 인간 백정이라도 궁금하겠구나 싶다.

이수독이 말했다.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시간을 잘못 봤는지."

"아, 그거라면 방법이 있습니다."

자료실 직원이 다시 키보드를 두들기며 말했다.

"리플레이는 없으니까 열람이 안 돼도, 던전 출입 로그는 확인할 수 있죠. 언제 들어가서, 언제 나왔는지."

탁, 엔터를 누르자 로그가 뜬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굳어졌다.

[김 호][안개 숲][13:31:02]

[김 호][안개 숲][13:34:28]

"...!!"

자료실 직원은 두 눈을 의심했다.

안경을 벗고 눈을 비벼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떠 보았다.

그러나 숫자는 처음 그대로였다.

이수독을 돌아보니 그 역시 얼굴을 굳히고 출입 로그를 노려보는 중이다.

31분에 입장해서 34분대에 퇴장.

이수독의 짐작이 사실임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이수독이 생각했다.

'3분에 700점 근처라면 단순 계산으로 6분에 1,400.... 10분이면 2,000점은 무조건 넘는다.'

내가 안개 숲 픽스 존에서 몇 점을 냈었더라.

3학년 말미에 1,300대 후반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교장직을 맡고 있는 전대 용사의 최고점이 1,500이 약간 안 됐다고 들었다.

그걸로도 살아 있는 전설 소리를 듣는데, 2,000점 이상은 대체....

골몰히 생각에 잠긴 그에게 직원이 물었다.

"...교장 선생님께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픽스 존에서 2,000점을 찍는 엄청난 실력자가 입학했다면 용살학원의 일원으로서 기뻐해야 할 일이다.

문제는 그 엄청난 실력자가 실력을 감추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실력을 감추는 경우 대부분은 좋지 않은 의도를 품고 있다.

용살학원은 수많은 아군만큼이나 적도 많다.

드래곤의 하수인들, 악신의 사도들, 범죄자 집단....

그들 중 하나가 학교에 잠입한 것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알리고 대책을 세우는 게 상책이리라.

그러나 이수독은 거절 의사를 표했다.

"아니오. 당분간은 더 지켜봤으면 합니다."

그는 아직은 이르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주머니 속의 송곳은 드러나게 마련.

당장 내일부터 대인전이 열릴 예정이다.

대인전은 두 명이 치르기 때문에, 양측 모두가 동의하지 않는 이상 리플레이가 무조건 저장된다.

그것을 지켜보다 보면 점점 더 실체에 가까워질 것이다.

굉장히 뛰어난 학생인지, 드래곤의 하수인인지, 아니면... 정말 드래곤인지.

그리고 결과가 후자에 가깝다면....

"제가 담임이니까요."

그의 말에는 진득한 살의가 묻어 있었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21화 잡동사니를 뒤지다 (1)

학기 첫날임에도 마법공학 공방은 몹시 분주했다.

전투 계열 클래스들이 대인전 승패와 공략전 고득점에 사활을 걸듯, 생산 계열 클래스들은 양질의 아이템을 제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잘 만든 아이템들은 카탈로그에 실려서 포인트 벌이가 되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용살학원 외부로 팔려 나간다.

부족한 전투력으로 인한 실기 평가 점수를 성과를 내서 메꾸는 것이다.

그러니 첫날부터 뭐라도 하나 더 만들어 보겠다고 혈안이 될 수밖에.

공방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인데, 1군이 사용하는 제1공방의 시설이 가장 훌륭하고, 이 때문에 이용자도 가장 많다.

근처에만 가도 시끄러운 기계 소리가 윙윙 울려 대서 귀가 아프고, 곳곳에서 번쩍이는 푸른빛에 눈이 멀 것 같다.

반면 공방 앞에 붙은 숫자가 늘어날수록 시설의 수준도 떨어지고 자연히 사람도 적어진다.

해서 내가 제4공방에 가까워질 즈음에는 소음이 거의 잦아들어 고요해졌다.

4공방 문은 반쯤 열린 채였다.

안에서 작은 기계 소리와 함께 마나의 파동이 느껴진다.

열린 문틈으로 슬쩍 보니 학생 하나가 등을 돌린 채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며 몰두하고 있었다.

두 손에 각기 다른 공구를 들었으며 열 손가락이 모두 투명하게 푸르다.

[마법공학] 스킬이 발현되고 있다는 뜻.

- 똑똑,

손을 들어 노크를 했다.

집중을 깨뜨릴 만큼 크게, 하지만 짜증은 덜 나도록 적당히 작게.

"누구세요."

학생이 앉은 자리에서 상반신만 돌려 문 쪽을 확인했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꾸벅 인사부터 했다.

이 시각에 이런 곳에 있다면 100% 선배니까.

넥타이핀 색을 확인하니 3학년이 맞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신입생?"

"네."

"마공학 동아리 들어오려고?"

"관심이 있습니다."

같은 말처럼 들리지만 다른 말이다.

관심만 있고 가입할 생각은 없으니까.

3학년 선배는 그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아니면 알고도 신경을 안 쓰는지, 그저 하던 일이나 마저 하고 싶다는 눈치였다.

"그러면 1공방이나 가서 보지, 왜 여기까지 왔어?"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실은 거기부터 갔는데, 선배님들이 4공방부터 돌아보고 오라고...."

"아... 진짜."

3학년 선배의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자기한테 일을 떠넘겼다는데 누가 좋아할까.

1군에서 떠넘긴 일이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

정작 나는 1공방에 발을 들인 적도 없지만, 이런 거짓말이라도 안 해 놓으면 아예 무시로 일관할 듯해서 불가피하게 구라를 쳤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무구한 얼굴로 물었다.

"둘러봐도 되나요?"

"...대충 둘러보고 가. 바쁘니까 나 좀 방해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조용히 볼게요."

"...."

휘휘 손을 저어 보이고 다시 자기 일로 돌아간다.

공구들이 재가동하고 손이 푸르게 변한다.

곁눈질로 지켜보며 [마법공학]의 수준을 가늠했다.

'B랭크군.'

썩어도 준치라고, 아무리 4공방 구석에 박힌 신세라도 용살학원 3학년.

주력 스킬 정도는 B랭크를 달성한 것이다.

이곳에 온 첫 번째 목표였다.

['복사-스킬'을 사용합니다.]

[대상의 스킬 '마법공학(B)'을 슬롯에 등록합니다.]

▷복사-스킬[2/2]

1. 허밍버드(E)

2. 마법공학(B)

B랭크 아래였다면 1공방까지 돌아가서 스킬을 따로 복사해야 했겠지만, 이 선배의 성취가 의외로 높은 덕에 두 번 일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다음 목표.'

나는 정말로 공방을 견학하러 온 신입생인 양, 일부러 이곳저곳을 열심히 둘러보는 척했다.

'우와! 이건 뭐지?', '너무 신기하다!'를 연발하면서.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도착한 곳은, 정체불명의 아이템들이 가득한 잡동사니의 산이었다.

양이 얼마나 많은지 쌓인 높이가 어깨까지 온다.

나는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척하며 물었다.

"선배님, 이건 뭐예요?"

"그냥 실패작들이야."

제작 도중에 일부분이 파손되거나, 초안에 비해 결과물이 별로라 판단했거나, 재료 충당이 안 되는 등, 갖가지 이유로 만들다 만 아이템들을 쌓아 둔다.

제4공방은 반쯤 쓰레기장 역할도 겸하는 셈이다.

나는 대놓고 호기심을 드러냈다.

"와, 안에도 뭐가 많은 것 같은데, 한번 뒤져 봐도 돼요?"

"그러든가 말든가."

허락이 떨어졌다.

한계를 넘은 귀찮음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 느낌이 강하지만 어쨌든 허락은 허락.

나는 잡동사니의 산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위에서부터 잡템 쪼가리들을 한 아름씩 덜어 내 옆으로 쌓고, 계속해서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든다.

내 주위에 작은 산 여러 개가 쌓일 즈음, 손에 잡히는 게 있었다.

'찾았다.'

축구공보다 조금 작은 정육면체.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수한 손톱만 한 정육면체들이 합쳐진 것이다.

마법공학 아이템이 제작되는 방식 중 하나인 '큐브'다.

자그마한 정육면체 하나하나에 복잡한 마법 회로가 새겨져 있고, 그 정육면체들을 알맞은 장소에 배치하여 아이템으로 완성하는, 일종의 입체적 설계도인 셈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큐브는 가로 셋, 세로 셋, 높이 셋의 3x3x3으로 27개, 4x4x4로 64개 설계도를 주로 사용하는데,

내 손에 들린 이것은 10x10x10이었다.

작은 정육면체가 무려 천 개.

나름 한 솜씨 하는 장인들도 건드릴 엄두를 못 내는 초고등급 설계도라는 뜻이다.

큐브를 손에 드는 즉시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서브 퀘스트:의문의 큐브]

마법공학 공방에서 매우 특이한 설계도를 발견했습니다.

▷목표:설계도에 대해 조사하십시오.

▷보상:연계 퀘스트 수행 가능

[수락/거절]

기나긴 연계 퀘스트의 시작이다.

설계도에 대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조사하고,

선배, 선생님, 졸업생에게 자문을 구하고,

제작에 동참할 장인들을 모으고,

재료를 구하러 이 던전 저 던전 밥 먹듯이 들어가고,

특별한 재료를 구하기 위해 보스 몬스터를 잡고....

그런 기나긴 대장정 끝에 완성되는 것.

바로 S랭크 아이템인 [생명의 큐브]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생큡'이라고 불리는 매우 강력한 아이템.

'응, 안 해.'

문제는 수락하는 순간 최소 1년 이상 이 퀘스트에만 붙잡혀 있어야 한다는 것.

나는 곧바로 퀘스트를 거절하고 치워 버렸다.

내 목표는 오직 큐브 설계도뿐이다.

막 다시 집중하려는 3학년 선배에게 큐브를 가져갔다.

"저, 선배님. 저기에서 이런 걸 찾았는데요...."

"...?"

자꾸 방해를 받아서 버럭 화를 내려던 선배가 내 손에 들린 큐브를 발견했다.

그러나 여전히 심드렁한 태도인 걸 보면 잡동사니에 있을 만한 아이템이라 생각하나 보다.

"설계도네. 이게 뭐?"

"10x10x10이면 엄청난 거 아니에요? 전설의 아이템?"

"완성을 해야 전설의 아이템이지. 그건 그냥 쓰레기야. 6x6x6도 완성하기 힘든데, 어떤 욕심 그득그득한 인간이 일을 벌였나 몰라."

그 말대로, 절대로 완성되지 않을 설계도는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러니 저렇게 신포도 보듯 하는 것이고.

나는 학구열에 불타는 신입생을 가장했다.

"저 이거 너무 재밌어 보이는데, 가져가서 뜯어봐도 돼요?"

"가져가 봤자 완성이 안 된다니까? 그게 되면 우리가 벌써 만들었지."

"다 못 만들어도 보면서 공부 좀 하려구요. 제가 이런 거 모으는 취미가 있기도 하고...."

선배가 '안 돼, 자식아!' 비슷한 말을 하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적절한 타이밍에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아이템을 보고.

1,000포인트를 주고 구매한 [열 촉매 시약].

마법공학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아이템이다.

"그냥 가져가긴 당연히 저도 죄송하고, 염치가 없기도 해서.... 대신 이거라도 드릴까 하는데, 어떻게 안 될까요?"

"...."

선배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쯤 머릿속이 맹렬하게 회전하는 중일 것이다.

[열 촉매 시약]의 가격은 1,000포인트.

저등급 던전 한두 번만 깨면 얻는 포인트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나에게 이 시약을 받으면 던전 한두 번을 덜 들어가도 된다.

거기에 들어갈 시간과 노력, 스트레스 등을 절약하여 온전히 마법공학에 집중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반면 저울 반대쪽에 놓인 것은 자신과 아무 관련도 없는 잡동사니 하나.

고등급 큐브 설계도라는 점이 살짝 마음에 걸리지만, 어차피 누구도 완성하지 못할 것 아닌가?

이곳에서 사라진들 누구도 찾지도, 신경 쓰지도 않을 쓰레기다.

당장 자신에게 도움이 될 1,000포인트어치 재료와 쓰레기 하나.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다.

선배가 슬그머니 손을 뻗어 [열 촉매 시약]을 챙겼다.

"...이번만 특별히 해 주는 거다. 원래 이런 거 함부로 못 가져가."

"감사합니다, 선배님!"

"다른 데에는 절대 말하지 마라. 우리끼리만 알고 있어야 돼. 부장이 알면 그거 도로 뺏어 갈걸?"

"당연하죠."

아무리 이 잡동사니들이 쓰레기나 다름없다 한들, 외부인에게 넘겨줄 권한은 동아리 부장만 갖고 있다.

그것을 사소한 포인트 절약을 위해 나에게 넘겨주는 것이니 가능한 비밀에 부치고 싶을 것이다.

거듭 당부하는 선배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저는 들어가 볼게요. 감사합니다."

"그래라."

마지막까지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4공방 문을 뒤로 닫으며 나왔다.

문 너머에서 '아싸! 천 포인트 굳었다!'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웬 어리숙한 신입생한테 쓰레기를 대동강 물 팔아먹듯 팔아먹었으니 신날 만도 하지.

하지만....

'과연 정말로 쓰레기일까?'

큐브의 연계 퀘스트를 거절한 첫 번째 이유는 시간을 지나치게 많이 잡아먹어서.

기반을 다지기에는 1학년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 봐도 과언이 아닌데, 퀘스트에만 매몰되다 보면 정작 더 중요한 히든 피스들을 획득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나 자신의 성장도 더뎌지고, 고현우와 서예인을 챙겨 줄 시간도 부족해진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내가 너무 고인물이라서 연계 퀘스트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만드는 방법을 알거든.'

서포터가 다 해먹음

22화 잡동사니를 뒤지다 (2)

[생명의 큐브] 연계 퀘스트는 S급 마공학자를 육성하기 위해 필히 거쳐 가야 하는 과정 중 하나다.

그 외에도 '생명'이라는 키워드와 연관된 수많은 영웅이 이 퀘스트의 수혜를 받는다.

내가 이 지겨운 짓을 수십 번은 반복했었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퀘스트를 거듭할수록 [생명의 큐브] 완성품이 점점 눈에 익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그냥 내가 만들어 볼까?'

어쩐지 퀘스트 없이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공부했다. 암기했다.

천 개에 달하는 정육면체들의 배치 하나하나를.

물론 외우기만 한다고 설계도가 완성품으로 뚝딱 변신하는 것은 아니었다.

손수 하나하나 짜 맞춰야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한참 헤맸지만, S급 영웅을 키울 때와 마찬가지로 한 개 두 개 완성하기 시작하면서 요령이 붙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영웅 육성에 퀘스트가 필수적이지 않다면, 그냥 건너뛰고 큐브만 챙긴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먼저 트레이닝 센터로 가서 마나연공실 하나를 골라잡았다.

특수연공실까지는 가지 않아도 괜찮다.

고현우는 [코어]의 성장이 무엇보다 급해서 거기에 모든 포인트를 쏟아붓는 중이지만, 나는 다른 곳에 쓰는 게 더 유용할 거다.

마나연공실은 몇 평 되지도 않는, 독방이나 다름없는 밀폐된 공간이다.

온 방에 마나가 넘쳐흐른다는 점만 다르다.

그 한가운데에 앉아서 큐브 설계도를 꺼냈다.

큐브에 유의미한 변화를 주기 위해서는 일정 랭크 이상의 [마법공학] 스킬이 요구된다.

최소 조건에 미달한다면 아무리 열심히 큐브를 주물러 봤자 다 헛수고다.

그리고 이 거대한 10x10x10 설계도에 변화를 주는 최소 조건은 A랭크 이상.

용살학원 내에서도 A랭크 마법공학을 가진 사람은 기껏해야 교직원 한두 명 정도일 것이다.

마법공학 동아리 부장도 B 끝자락 즈음에 걸쳐 있겠지.

그래서 연계 퀘스트 중에 외부 장인들을 초빙하는 과정이 존재한다.

내가 제4공방에서 복사한 스킬의 등급 역시 B로, 마찬가지로 조건에는 못 미친다.

'안 되면 되게 만들어야지.'

시작하기에 앞서 큐브 설계도를 면밀히 뜯어보았다.

어떻게 완성해 나갈지 미리 계획을 짜 두기 위함이다.

한참이나 이리저리 돌려 가며 내 기억 속의 완성품과 설계도를 대조하다 보니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시작해 볼까.'

['증폭'을 사용합니다.]

['마법공학'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B->S)]

[지속시간 00:00:59]

[재사용 대기시간 00:59:58]

[증폭]으로 두 단계 상승해서 S랭크.

이걸로 최소 조건은 넘어섰다.

큐브를 쥔 내 손이 선명한 푸른빛을 발했다.

열 손가락이 거미처럼 움직이며 엄청난 속도로 큐브 이곳저곳을 누볐다.

- 촤라라라라락!

큐브를 회전시키고, 접고, 펴고, 작은 정육면체 하나하나를 빼서 다른 곳에 붙이고 끼워 넣은 다음 또 돌린다.

거대한 퍼즐이 아주 조금씩 맞춰지다가,

[지속시간 00:00:00]

[재사용 대기시간 00:58:54]

1분이 지나자마자 손을 놓았다.

도중에 [증폭]의 지속 시간이 다해 랭크가 원상 복귀된 것이다.

F랭크 증폭의 지속 시간은 1분, 쿨타임은 1시간.

1시간마다 1분씩 큐브를 만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 기다리는 동안은 무엇을 하는가?

'마나는 다다익선이지.'

명상을 하며 [코어]를 가다듬으면 그만이다.

랭크를 올려서 마나량이 많아지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폭도 더 넓어지니까.

틈틈이 투자해서 나쁠 게 없다.

나는 큐브를 근처에 고이 모셔 두고 정신을 집중했다.

* * *

1시간 명상하고, 1분 큐브를 손보고, 다시 명상하고를 무아지경으로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하루가 훌쩍 넘어가고 아침이 밝았다.

큐브를 들어 살펴보면 한 귀퉁이에서 보일 듯 말 듯 한 초록빛이 흘러나온다.

생명의 기운.

큐브가 점점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다.

다만 아직은 한 귀퉁이에 불과하다.

더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아마 이 진척도라면 완성까지 3일은 걸리지 않을까?

'금요일까지 끝내려면 조금 빠듯하겠네.'

첫 주 금요일에는 '그 이벤트'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때까지 작업을 끝마쳐 둬야 뽕을 제대로 뽑을 수 있다.

어쨌든 그건 그거고,

'학교 가야지.'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러다가 늦겠어.

* * *

학생 식당에서 토스트 하나, 커피 하나를 주문해 양손에 들었다.

먹으면서 어슬렁어슬렁 교실로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나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으니 안 봐도 누구인지 뻔하다.

"신병철."

"어오씨깜짝이야!"

놀래 주려 왔다가 되레 놀라서 펄쩍 뛰는 신병철.

따라붙어 걸으며 볼멘소리를 내뱉는다.

"아니. 야, 너는 등에도 눈이 달렸냐?"

"비슷하지."

"거, 사람이 알면서도 속아 주고, 리액션도 취해 주고 그래야 되는 거 아닌가?"

"뭔 리액션이야. 먹을 거 들고 있는데."

그러다 커피 쏟아지면 네가 책임질래?

토스트도 먹는 중이니까 말 시키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신병철은 내 퉁명스러운 반응에도 불구하고 계속 옆에 붙어서 대화를 시도했다.

"고현우 서예인은 어디 가고 혼자 가냐?"

"트레이닝 센터에서 밤 샜다. 걔도 어디 있겠지."

고현우 역시 트레이닝 센터에서 등교할 텐데, 약간의 시간 차로 엇갈린 모양이다.

아마 교실에 가면 있지 않을까.

신병철이 물었다.

"공략전은 잘 쳤냐? 어제는 바빠 가지고 끝나고 얘기도 못 했네."

"리더 보드에서 내 이름 봤을 거 아냐."

"그게, 상위권 체크하느라, 헤헤."

상위권만 보느라 내 점수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는 뜻이다.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 서운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신병철에게는 기대 자체를 안 해서 대충 중하위권쯤에 깔려 있겠거니, 하고 신경을 껐었다.

지금도 별로 안 궁금하고.

하지만 아주 많이 자신만만한 표정에다가 꼭 점수를 물어봐 줬으면 하는 눈치라, 못 이기는 척 물었다.

"몇 점인데."

"흐흐, 놀라지 마시라. 이 몸이 무려 530점으로 50% 턱걸이를 하셨다, 이 말씀이야."

"네가? 어떻게?"

솔직히 조금은 의외였다.

잘해 봐야 400점대일 거라 예상했는데, 픽스 존이라서 그런지 제법 선방했나 보다.

내가 눈을 치켜뜨자 신병철은 한층 더 오만한 표정이 되었다.

사람을 가르치는 듯한 어조로 말한다.

"인생은 요령이란다. 요령이 중요하지."

"와, 정말 대단하시네요."

"고럼 고럼. 넌 몇 점이니?"

"683점."

신병철의 얼굴이 도로 겸손해졌다.

"...너 캐스터 아니었냐?"

"맞는데?"

"아니, 송천혜가 571이고 홍연화가 640인데, 네가 무슨 수로 683을 찍었어?"

나는 신병철이 했던 말을 되돌려주었다.

"인생은 요령이란다."

* * *

교실에 가면 고현우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더 일찍 온 것 같다.

대신 의외로 서예인이 앉아 있었다.

"...."

나를 바라보며 살랑살랑 손을 흔든다.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물었다.

"너 오늘은 일찍 왔다?"

"일찍 일어났어."

"어쩌다가?"

"...."

대답 대신 부스럭거리며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더니, 열어서 안쪽을 보여 준다.

한 입 거리 크기의 공룡 모양 쿠키들.

구운 지 얼마 안 됐는지 약간의 온기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넘어온다.

일찍 일어나서 쿠키를 구웠나 보다.

생각해 보니 열차에서 그런 약속을 했었지.

- 미안. 쿠키 맛있었는데.

- 또 해 줄게.

- ...진짜?

- 응.

그 기약 없던 약속이 벌써 지켜진 것이다.

역시 사람은 베풀고 살아야 하는 법이다.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나눠 먹으니까 수제 쿠키가 돌아오지 않는가.

하나 집어 먹어 보니 맛은 이전보다 조금 발전한 것 같았다.

단맛이 적고 담백한 것은 여전하다.

전략을 바꿨는지 초코칩 대신 검은깨가 들어갔는데, 애매한 순도 65% 카카오보다는 이게 낫지, 싶다.

서예인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길래, 매우 높은 비율의 진심을 담아 칭찬했다.

"음, 맛있네. 고소해. 공룡들도 아기자기하고 귀엽고."

"...?"

서예인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잠시간 그 상태를 유지하다가 나에게 묻는다.

"...공룡?"

"공룡 아니야?"

"...."

서예인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진 것 같았다.

뭔데. 이게 공룡이 아니면 대체 뭔데.

하나 집어서 확인해 보려고 종이봉투로 손을 뻗자 슬그머니 뒤로 뺀다.

"왜, 뭔데 그래."

"...곰돌이야."

그게 곰돌이였다고???

순간 혼란스러움을 느꼈으나 나는 애써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혔다.

더 이상 당황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앞으로 수제 쿠키는 구경조차 못 하게 될 것이다.

"어쩐지. 보고 곰인지 공룡인지 살짝 헷갈렸다. 거꾸로 봐서 그랬나 봐."

"...."

"한 개만 더 먹을게. 맛있어서 그래."

서예인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치였지만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던 종이봉투를 도로 열어 주었다.

과자를 하나 집고 입에 넣기 전에 슬쩍 살펴보았다.

"이렇게 보니까 곰돌이 맞네. 내가 잘못 봤다."

'이게 어딜 봐서 곰돌이야.'

입에서 나오는 말과 속마음이 정반대였다.

그래도 맛에는 흠잡을 구석이 없었기에 계속 종이봉투로 손이 갔다.

서예인과 번갈아서 하나씩 쿠키를 먹다 보니 고현우도 등교했다.

"김 형, 서 소저. 좋은 아침이오."

"이거 뭐 같아?"

서예인이 대뜸 고현우에게 유사 곰돌이 쿠키를 하나 내밀며 물었다.

반색하며 받아 든 고현우가 말했다.

"오! 매우 먹음직스러운 과자요. 마치 도마뱀이 살아 숨 쉬는 것 같구려."

"...."

'아이고....'

나는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서예인의 미간이 꿈틀거렸으나, 고현우는 그 미세한 변화를 잡아내지 못했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이럴 때는 재빨리 화제를 돌리는 게 상책이다.

"어땠냐."

특수연공실에서 운공을 해 본 소감이.

고현우가 감탄한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처음 해 보는 진귀한 경험이었소. 내공이 그토록 빨리 쌓일 줄은."

"비싼 값은 하지?"

"500포인트가 전혀 아깝지 않더군. 오히려 본인이 들인 수고에 비해 과한 기연이라고 느껴질 정도였소."

리플레이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만 해도 타인이 자신의 무공을 견식 한다는 점 때문에 탐탁지 않아 했는데, 지금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달았나 보다.

특수연공실에서 코어를 다듬는 건 중하급 효율의 영약을 끊임없이 먹는 것과 비슷한 효율이니까.

"조금만 더 노력하면 벽 하나를 넘어설 것도 같소. 김 형이 조언한 대로 당분간 특수연공실에서 살다시피 할 생각이오."

"그래, 당분간은 그곳에만 집중해. 시즌 패스도 가능한 빨리 구해다 줄게."

"고맙소."

고현우가 예를 갖춰 보였다.

이렇듯 훈훈한 분위기가 감도는 반면, 교실 전체를 놓고 보면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신병철 패거리가 혼란의 중심으로, <용살학원 심부름 서비스> 명함을 나눠 주며 선전한다.

"뭐든지 구해다 드립니다!"

"새 학기 특가 할인이 적용 중입니다!"

송천혜는 그들을 매우 못마땅한 눈으로 보지만, 아직 교칙을 어긴 건 아니기에 나서지 못한다.

언제 말썽을 일으키나 벼르고 있는 듯하다.

한소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배시시 웃고만 있고.

그러나 이런 시장통은 의외로 단숨에 정리되었다.

- 드르륵,

문이 열리자 떠들썩하던 교실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이수독이 문을 연 채로 교실 내부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자리에 앉으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모두 일사불란하게 제 자리를 찾아서 착석한다.

그제서야 이수독은 안으로 들어서서 교탁 앞에 섰다.

— ♩♪♬♩

정적 속에서 울리는 멜로디가 수업 시간임을 알렸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23화 1주 차 대인전 (1)

이수독은 매우 훌륭한 대인전 교사였다.

고인물 중의 고인물인 내가 보기에도 말이다.

그는 용살학원을 졸업한 후 지금까지 수많은 악인을 잡아 죽였다.

그 경험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풀어내니 유익한 수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단점 아닌 단점이라면, 경험담들이 하나같이 살벌하기 그지없다는 점이었다.

"...두목을 보니 굴복할 눈빛이 아니더군. 그래서 척추를 붙잡고 뽑아 버렸다. 다음으로 부두목을 붙잡았지. 이제 네가 두목이니까 다 꿇려라. 아니면 다음 두목을 알아보겠다...."

3반 학생들이 몸을 떨었다.

이수독의 어조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하고 아침을 먹었다'같이 일상적이었지만,

자세히 들어 보면 누구 머리를 터뜨렸다, 아구창을 으깨 버렸다, 목을 뎅겅 잘랐다 같은 흉흉한 소리들로 가득했다.

저 인간한테는 저게 일상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는 하다.

도적단 하나를 몰살시킨 이야기를 다 풀어낸 후 이수독이 시간을 확인했다.

곧 종이 친다는 사실을 깨닫고 수업을 마무리 짓는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마치기 전에 공지 사항을 전달하겠다. 오늘부터 아레나에서 대인전을 진행할 수 있다."

이수독이 가볍게 손짓하자 칠판에 글자들이 떠올랐다.

MAP:[무작위]

RULE:[데스매치][10분 제한]

"앞으로 대인전 환경은 모두 무작위로 결정된다. 제한 시간 역시 5분에서 10분으로 증가했으니 신중히 운영할 것. 1학년은 이번 주중에 최소 3회의 대인전을 치러야 한다. 불참할 시 점수가 자동으로 감소하니 주의하도록. 이상."

설명하는 도중 이수독의 시선이 자꾸 나에게 꽂히는 것 같았다.

저 인간이 나한테 관심을 가질 건수가 있던가?

당장 짐작 가는 게 없었기에 기분 탓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이수독이 3반을 떠나고, 나는 방금 막 도착한 퀘스트를 조금 더 자세히 살폈다.

[서브 퀘스트:1주 차 대인전]

▷목표:대인전 3회 완료. (0/3회)

▷기한:~일요일 자정.

▷보상:승리 횟수에 따라 차등 지급. (0/3승)

'이건 다 이겨야겠군.'

단순히 지나가는 퀘스트처럼 보이지만, 3연승을 했을 때의 보상이 아주 후한 편이다.

[생명의 큐브] 제작 시간을 단축시켜 주는 아이템이 나올 가능성이 크니 무조건 다 이길 생각이다.

나는 고현우를 불렀다.

"아레나 가자."

"지금 말이오?"

"이런 건 일찌감치 하고 치워 버리는 게 나아. 첫날 리플레이가 더 많이 팔리기도 하고."

배치 고사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대인전인 만큼 첫날에는 다들 눈치를 본다.

비슷한 점수대의 리플레이를 챙겨 본 다음에 들어가는 게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극적으로 간만 보다가, 금요일쯤부터 본격적으로 아레나에 사람이 몰릴 것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 치르는 대인전 리플레이는 더 수요가 많다.

포인트 벌이가 된다는 말에 고현우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체할 이유가 없지. 어서 갑시다."

바로 아레나로 이동하려는데, 서예인이 내 소매를 약하게 잡아끌었다.

나와 눈을 맞추고 이렇게 말한다.

"나, 오늘 시간 돼."

"...?"

서예인의 말에 귀 밝은 영웅 지망생들이 곧바로 반응했다.

여학생들은 저들끼리 입을 가리고 빠르게 소곤거리고, 남학생들 반은 음흉한 표정, 반은 부러운 표정을 짓는다.

고현우는 이걸 빠져 줘야 하나 내 눈치를 본다.

앞뒤 다 자르고 저렇게 말하면 당연히 오해하지.

이럴 때는 빠진 단어들을 채워 넣어 줄 필요가 있다.

"마력탄 수련 같이하자고?"

"응."

"오늘 시간이 될까 모르겠다. 저녁쯤에는 확실히 알 것 같은데, 그때 다시 얘기하자."

"알았어."

지금 내 최우선 목표는 금요일까지 큐브를 완성하는 것.

3연승 보상이 내 예상대로 나와 준다면 큐브가 더 빨리 만들어질 테고, 그렇다면 서예인에게 잠시 할애할 틈이 생긴다.

대인전 결과를 보고 결정하면 되겠지.

* * *

수업이 끝나자마자 아레나로 직행했기에 우리가 처음일 것이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선객이 있었다.

다른 반 수업이 조금 더 일찍 끝났나 보다.

길쭉한 창을 든 남학생 하나, 두꺼운 양손도를 든 남학생 하나.

무기의 형태나 전신에 흐르는 기도로 미루어 볼 때 둘 다 무인으로 짐작된다.

개중 창잡이가 내 얼굴을 알아본 듯했다.

"저자는...."

"일면식이 있는가?"

"송 소저에게 기권했다는 그자일세."

"아, 저자가 그 겁쟁이로군."

"사나이 실격이지. 실로 부끄러운 일이야."

대놓고 씹어 대지만 나는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랭킹 1위로서 사람들 입에 쉴 새 없이 오르내리던 때에는 시기와 질투로 점철된 비난들도 곧잘 쏟아졌었다.

그런 것들을 하도 겪다 보니 이제 겁쟁이 같은 단어에는 별 신경도 안 쓰게 되었다.

못 들은 척 지나치려는데, 이런 일에 면역력이 없는 고현우가 자기 일처럼 화를 냈다.

"참으로 졸렬한 자들이로고. 어찌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리 함부로 입을 놀린단 말인가?"

졸렬하다는 말에 발끈하려던 두 무인이 멈칫했다.

고현우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다.

공략전 배치 고사 수석이라 나름 유명인이다.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직감한 듯, 조금은 위축된 기세로 반박한다.

"흠, 흠, 우리가 뭐 틀린 말 했는가?"

"지금도 그쪽 뒤에 숨어서 한마디도 안 하는데, 과연 누가 졸렬한 것인지 잘 생각해 보시게."

"...."

고현우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 내가 나섰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촉이 와서다.

나랑 점수대가 비슷할 것 같다는 촉이.

나는 창잡이를 지목했다.

"너 몇 점이냐?"

"...300점이다."

"나돈데. 겁쟁이랑 동점이네?"

살살 긁자 창잡이가 입가에 차가운 비웃음을 머금었다.

"점수가 같다고 너 따위 잔챙이랑 동급인 줄 아느냐? 두 번째 경기에서 송천혜를 만나지만 않았어도 600점, 아니 900점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송천혜?"

듣고 보니 이 창잡이를 어디서 본 것도 같았다.

송천혜, 두 번째 경기, 대인전, 배치 고사....

기억을 되짚어 가다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생각났다. 벼락 맞고 실려 간 거, 너 맞지?"

"...!"

내가 송천혜에게 기권하고, 몹시 심기가 불편해진 송천혜의 다음 상대가 이 창잡이였다.

경기가 시작되는 즉시 허밍버드에 몸이 마비되고, 뒤이어 꽂히는 벼락을 맞아 단숨에 승부가 났었다.

그리고 그대로 실려 가 버리는 바람에 3경기를 치르지 못하고 부전패한 것이다.

"나 한마디만 해도 돼?"

"...말해라."

"한 방에 뻗을 거면 차라리 기권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

이 말에는 고현우뿐만 아니라 양손도를 든 남학생 역시 무언의 동의를 표했다.

창잡이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한 방이 아니라 두 방이다!"

"자랑이다 새꺄. 아무튼 300점이시라고?"

"...."

더 입을 열면 손해라 생각하는지 말없이 고개만 까딱이는 창잡이.

나는 턱짓으로 무대를 가리켰다.

"지금 여기에 우리밖에 없으니까 매칭 돌리면 바로 잡힐 것 같은데, 겁쟁이랑 한판 붙지?"

"좋다. 벽을 느끼게 해 주마."

양손도 남학생 역시 고현우에게 경기를 신청했다.

서로 큰 악감정이 없어서인지 비교적 온건한 말투였다.

"600점이시오?"

"그렇소."

"마침 잘됐구려. 괜찮다면 한 수 가르침을 청하고 싶소."

"좋소. 시작해 봅시다."

무대 근처에 마련된 단말기에 학생증을 스캔했다.

각자의 점수에 맞춰서 300점인 나는 창잡이와, 600점인 고현우는 도객과 경기가 잡혔다.

순간이동 마법진을 타고 이동하자 시야가 급변했다.

어제 같은 원형 투기장이 아니라 수풀이 무성한 벌판 위였다.

불어오는 바람이 잡초들을 흔들고, 흔들리는 잡초가 다리를 간질인다.

[김 호 100% vs 양지홍 100%]

[남은 시간 10:00]

저 친구 이름이 양지홍이구만.

나는 [대지의 스태프]를 한 손에 들었다.

반대쪽 마법진에서 나타난 창잡이, 양지홍도 두 손에 창을 꼬나쥐고 나를 노려보았다.

[3]

[2]

[1]

[Start!]

"단숨에 끝내 주마!"

경기가 시작되는 즉시, 양지홍은 창날을 앞세워 나에게 일직선으로 돌진해 왔다.

제법 많은 수련을 쌓은 듯 자세가 좋고 움직임도 상당히 쾌속하다.

문제는 나를 너무 얕보고 있다는 점이지.

"그래, 단숨에 끝내자."

- 파지직!

"...!"

나에게 도달하기 거의 직전에 양지홍의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옆구리를 내려다보니 작은 스파크가 튀기고 있다.

[허밍버드]에 격중당한 것이다.

"이...이것...은...!"

"이걸 또 당하냐."

배치 고사를 친 게 바로 어제니까 아직 마땅한 대처법을 준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원체 뇌 속성 마법사가 드물다 보니까 송천혜 말고 또 누가 허밍버드를 익혔겠나, 하는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임한 것 같은데,

'그 누구가 나야.'

내가 송천혜한테서 허밍버드를 복사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으리라.

비틀거리는 양지홍에게 다가가서 대지의 스태프를 번쩍 들어 올렸다.

"자... 잠시만 기다려라...."

"미안하다. 송천혜처럼 깔끔하게 두 방으로는 못 끝내겠네."

- 퍽! 퍽! 빠각!

대지의 스태프로 양지홍의 머리를 연거푸 내리쳤다.

녀석은 몇 대 버티다가 결국 정신을 잃고 바닥에 철퍼덕 엎어지고 말았다.

[김 호 Win vs 양지홍 Lose]

[대인전:300+30점]

양지홍이 전투 불능에 빠지자 경기가 종료되고 30점이 들어왔다.

순간이동 포탈을 타고 나가서 기다리고 있자니 양지홍이 기절한 채로 땅바닥에 나타났다.

송천혜에게 당했을 때는 상태가 매우 심각해서 실려 갔었는데, 지금은 그 정도까진 아니라 교직원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적당히 힘 조절을 하기도 했고.

"헛!"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는 양지홍.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고, 학생증 뒷면의 점수를 확인하곤 상황 파악을 마쳤다.

어이없는 패배가 분했는지 이를 부득 간다.

"크윽...."

"내가 이겼네?"

"...방심했을 뿐이다. 다시 붙으면 내가 이긴다."

"그래? 그럼 또 붙어."

그렇게 성사된 리벤지 매치.

이번 전투 장소는 황야였다.

[김 호 100% vs 양지홍 100%]

[남은 시간 10:00]

[3]

[2]

[1]

[Start!]

시작하자마자 뇌전으로 이루어진 벌새를 만들어 날려 보냈다.

마주 달려오던 양지홍이 허밍버드에 닿기 직전에 강하게 땅을 걷어차며 옆으로 뛰었다.

허밍버드가 스쳐 지나간 것을 확인하고, 그대로 나에게 창을 찔러 든다.

"끝이다!"

"응, 끝이야."

- 파지직!

양지홍의 몸이 마비되었다.

잘 안 돌아가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서 등을 확인하니, 스파크가 튀기고 있었다.

"이... 이런 빌어먹을...."

"피한 줄 알았니?"

허밍버드는 단순한 투사체가 아니다.

목표에 적중하거나 격추되기 전까지 술자의 조작을 따라 끊임없이 비행한다.

양지홍을 지나쳐 간 허밍버드가 곧바로 방향을 틀고, 그를 뒤따라와서 등에 꽂힌 것이다.

녀석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

"나중에 리플레이 돌려 봐라."

- 퍽! 퍽! 빠각!

묵직한 나무 스태프로 녀석의 정수리와 관자놀이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김 호 Win vs 양지홍 Lose]

[대인전:330+29점]

다시 마법진을 타고 밖으로 이동했다.

고현우와 도객은 아직 한창 싸우는 중인 듯하다.

내 대인전이 빨리 끝나긴 했지.

거의 자판기 수준으로 점수를 뽑아냈다.

"헉!"

정신을 차린 양지홍.

앉은 자리에서 자기 창을 붙잡고 부들부들 떨다가 입을 연다.

"...한 번만 더 붙자. 이번에는 반드시 내가 이긴다."

"싫은데. 두 판 이겼으면 충분하지."

"이렇게 끝내면 내 체면이 서지 않는다!"

"그건 네 사정이고. 피곤하니까 오늘은 그만할란다."

"크윽...."

"정 하고 싶으면—"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정 하고 싶으면 뭐냐? 라고 양지홍이 묻기 직전까지 기다렸다가, 한 손을 펴서 내밀었다.

"—수업료."

"...!"

퀘스트를 완료하려면 어차피 대인전을 세 번 치러야 한다.

이번 주 할당량이기도 하고.

하지만 일부러 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몸값을 올렸다.

짧은 시간 파악한 양지홍의 성격상, 내가 거는 조건을 수용해서라도 승부를 보고 싶어 할 것 같았으니까.

사실 대인전 승패라는 게 이 정도로 목숨 걸고 매달릴 일은 아니다.

준비가 덜 돼서 2패 했구나, 하고 흘려보내도 아무 문제 없다.

하지만 그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이렇게 끝내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양지홍이 품 안에서 작은 목함을 꺼내 열어 보였다.

영단 하나가 들어 있다.

"우리 가문에서 제조하는 영단이다. 이걸 주지."

"그거 괜찮네. 조건 하나만 더 붙이자."

"뭐냐."

"이번 경기는 비공개로. 리플레이 저장도 안 하고 내용도 함구하는 거다."

"좋다. 내 입장에서도 새어 나가서 좋을 게 없으니까."

경기가 성사되었다.

나는 단말기에 학생증을 찍으며 말했다.

"네가 납득할 때까지 어울려 주마."

서포터가 다 해먹음

24화 1주 차 대인전 (2)

[3]

[2]

[1]

[Start!]

"...."

양지홍은 더 이상 무모하게 돌진해 오지 않았다.

방어적인 자세를 유지한 채, 한 걸음씩 천천히 거리를 좁혀 오기 시작했다.

제법 정답에 가까웠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람이 세 번이나 당했으면 배우는 게 있어야지.'

[허밍버드]를 시전하고 날려 보냈다.

다가오는 벌새를 마주하며 양지홍이 안광을 빛냈다.

창이 뒤로 당겨졌다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허밍버드가 날아가던 도중 꿰뚫려 흩어졌다.

두 번째로 던진 것도 창을 휘둘러 베어 버린다.

'이건 너무 쉬웠나?'

봐준답시고 일부러 단조로운 궤적으로 날려 보냈는데, 가볍게 쳐 내는 걸 보니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것 같다.

다시 허밍버드를 시전했다.

벌새가 날아가면서 불규칙적으로 흔들렸다.

양지홍이 그것을 찌르려 들었으나, 벌새는 꿰뚫리기 직전 유려한 비행으로 피하곤 창대를 타고 올랐다.

양지홍이 훌쩍 옆으로 뛰자 그것마저 예상했다는 듯 궤도가 급격히 꺾이며 따라붙는다.

- 파지직!

"크으윽...."

양지홍이 오만상을 썼다.

조금은 충격을 받은 것도 같았다.

가문의 영단까지 주면서 성사시킨 경기인데, 고작 세 수 만에 끝나 버리다니.

내가 물음을 던졌다.

"납득했나?"

"이럴 수는 없다. 더 기회가 있었더라면!"

"그렇겠지. 아직이구만."

"...."

"...."

"...?"

분한 기색으로 노려보던 양지홍의 표정이 점점 의아하게 변했다.

허밍버드를 적중시켰으면 다가와서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내가 제자리에 그대로 선 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 끝낼 건가?"

"말했지. 납득할 때까지 어울려 준다고."

"...!"

"마비 풀리면 말해라."

영단까지 받았으니 수업료 값은 할 생각이다.

양지홍의 낯에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지나갔다.

그러다가 하는 데까지 최대한 해 보자고 결론을 냈는지 각오가 선 눈빛이 되었다.

곧 다시 창을 움켜쥐고 자세를 잡는다.

준비가 되었다는 뜻.

내 손 위에서 스파크가 튀겼다.

"다시 간다."

* * *

계속해서 뇌전의 벌새가 날았다.

양지홍의 실력도 대강 파악했겠다, 나는 적절하게 난이도를 조절했다.

매우 쳐 내기 까다롭도록, 그러나 아주 손도 못 쓰고 당하지는 않도록.

- 파지직!

마비 상태에 빠지면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 주고, 준비가 되면 다시 마법을 시전한다.

양지홍은 이제 자존심을 내려놓고 하나라도 더 배워 가고자 마음먹은 듯했다.

당초의 목적은 나를 쓰러뜨리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허밍버드에만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

다채로운 움직임으로 날아다니며 그를 노리는 벌새를 상대로 미친 듯이 창을 찌르고 휘두른다.

그러자 실력이 쭉쭉 늘어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 파지지직!

"큭."

여덟 번째로 허밍버드에 당한 양지홍.

나는 막간을 틈타 스코어보드로 시선을 돌렸다.

[김 호 100% vs 양지홍 93%]

[남은 시간 00:43]

대인전 제한 시간 10분이 거의 끝나 간다.

몸을 추스르는 양지홍에게 물음을 던졌다.

"이제 납득했나?"

"...납득했다."

이제는 깨달았으리라.

앞선 두 경기에서 패배한 것은 자신이 방심했거나 운이 없었던 게 아니라, 순전히 실력 차이였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보여 주지. 받아 봐라."

['증폭'을 사용합니다.]

['허밍버드'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E->C)]

전류로 이루어진 벌새가 소환되었다.

몸집이 더 크고 뿜어내는 빛이 선명하다.

그 차이를 양지홍도 알아챘는지 바짝 긴장하며 창을 꼬나 쥐었다.

- 팟!

"!!"

허밍버드가 성큼 거리를 좁혔다.

양지홍의 시선에는 마치 한순간 공간을 뛰어넘은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랭크가 두 단계나 상승한 C급 허밍버드.

안력을 집중해도 쉽사리 움직임을 잡아낼 수 없다.

- 팟, 팟, 팟!

허밍버드가 몇 번의 도약만으로 지척까지 접근했다.

양지홍의 창끝이 잘게 떨리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앞에서 지켜봤음에도 끝내 움직임을 읽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듯 이를 악물고, 기세를 있는 대로 끌어올려 창에 담았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전방에 내질렀다.

- 콰아아아—!

막대한 경력이 지나가며 모든 것이 쓸려 나갔다.

최소한 양지홍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벌새가 그의 가슴팍에 내려앉았다.

- 파츠츠츠츠!

뇌전의 폭발이 양지홍을 집어삼켰다.

섬광이 가시자 그는 창대로 바닥을 짚고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끝내 한쪽 무릎이 바닥에 꿇리고 만다.

혼잣말을 하듯 바닥에 대고 말한다.

"실력을 한참 더 숨기고 있었나.... 처음부터 내가 이길 수 없는 승부였군."

"정진해라, 너는 가능성이 있어."

"...내가 졌다."

[김 호 Win vs 양지홍 Lose]

[대인전:359+27점]

무대 밖으로 이동하니 때마침 고현우와 양손도 남학생도 경기를 끝마친 듯했다.

모두 입가에 잔잔한 웃음기가 감도는 걸 보니 훈훈하게 마무리됐나 보다.

"좋은 승부였소."

"피차일반이오. 소협의 검기를 보고 배우는 바가 많았다오."

"다음 기회에 또 겨뤄 봅시다."

다음에 다시 만나서 바둑이나 같이 두자 같은 뉘앙스다.

고현우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이겼냐?"

"2승을 거두었다오. 김 형은?"

"난 3승 다 끝났다. 더 할 거야?"

"온 김에 세 번째까지 마무리를 짓고 가는 편이 깔끔할 듯하오. 김 형은 먼저 가시오."

아예 단말기에 학생증을 스캔해 두고 다음 상대를 기다리는 중이다.

어차피 관전도 못 하고, 끝나고도 따로 연공실에서 시간을 보낼 테니 내 입장에서는 여기서 더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라, 먼저 간다."

"내일 봅시다."

"잠깐."

걸음을 옮기려는 나를 양지홍이 불러 세웠다.

처음 만났을 때의 깔보던 기색은 온데간데없다.

나에게 정중히 예를 갖춘 다음 입을 연다.

"무례를 사과하고 싶다. 내가 사람의 일면만 보고 경솔히 판단했어. 너는 겁쟁이 따위가 아니다."

"아니. 당분간은 계속 겁쟁이인 걸로 해 둬."

"당분간은 계속 겁쟁이라...."

잠시 내 말을 곱씹어 보던 양지홍이 무엇인가 깨달은 듯 피식 웃었다.

"...그렇군. 당분간은 계속 겁쟁이인 게 좋겠다. 나만 당할 수는 없지 않겠나."

내가 계속 얕보여야 희생자가 더 늘어날 테니까.

그러면서 목함 하나를 더 꺼내 건넨다.

"영단 하나로는 셈이 안 맞겠더군. 덕분에 많이 배웠다."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나는 영단을 냉큼 받아 챙겼다.

뜻밖의 수확이다.

제일 중요한 대인전 퀘스트도 클리어했다.

[서브 퀘스트:대인전 1주 차](완료)

▷목표:대인전 3회 완료. (3/3회)

▷3승 보상:랭크 업(F)

퀘스트 보상은 큼지막하게 'UP'이 적힌 양피지 한 장.

[랭크 업]이라는 아이템이다.

사용하면 종류를 불문하고 스킬이나 특성의 랭크를 한 단계 올려 준다.

내가 막 받은 F등급 [랭크 업]이라면 어떤 F랭크 스킬이든 곧바로 E랭크로 승급시킬 수 있다.

이것의 사용처는 당연히,

['랭크 업(F)'을 사용합니다.]

['증폭'의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F->E)]

[지속시간 1:00->2:00]

[재사용 대기시간 1시간->50분]

매우 뛰어난 효용성을 자랑하는 스킬이라 최우선적으로 올려 줄 가치가 있다.

스킬을 증폭하는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났으며 재사용 대기시간도 10분 줄었다.

즉, [생명의 큐브] 완성에 들어가는 시간을 대폭 단축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원래는 금요일에 빠듯하게 맞추는 정도였다면, 이제는 수요일 중에 끝날 만큼 널널해졌다.

그리고 시간이 널널해졌다는 말은 곧,

'마력탄을 좀 봐줄 수 있겠어.'

서예인의 수련에 할애할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다.

* * *

서예인과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쳤다.

함께 트레이닝 센터로 가서 마나연공실 하나를 잡고 들어갔다.

"지금부터 1차 마력탄 특강을 시작하겠습니다."

"와—"

서예인이 소리 없는 박수를 쳤다.

곧바로 마력총을 꺼내 들길래 손을 들어 제지했다.

"총은 넣어 둬. 당분간은 안 쓸 거야."

"응."

"우선 마력탄 하나 만들어 볼래?"

직접 봐야 어디가 부족한지 파악할 수 있으니까.

내 지시를 따라 서예인이 마나를 끌어올렸다.

손 위에 모여든 마나가 압축되며 몽실몽실한 마력 뭉텅이를 형성했다.

나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짜 대단하기는 하다....'

어떻게 이런 마력탄도 아닌, 대충 만든 마력 뭉텅이로 송천혜한테 판정패를 했는지.

게다가 서예인의 대인전 점수는 600점.

송천혜한테 패한 경기 말고는 2승을 했다는 뜻이다.

고등급 라이플이나 투명 길리슈트 등 신입생이 쓰기에 과하게 좋은 장비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전부 설명이 안 됐다.

'조작은 어떤가 볼까.'

"자, 따라 해 보세요."

마나를 조작해 원을 그렸다.

서예인도 똑같이 마나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원을 삼각형으로 바꾸자, 서예인의 동그라미도 세모로 바뀌었다.

원, 삼각형, 사각형, 별....

다양한 도형을 따라 그리게 했다.

'마나 조작은 곧잘 하는군.'

'곧잘'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굉장히 뛰어난 축에 속한다.

본인 말로는 마력 수련을 안 해 봤다는데, 그러고도 이 정도라면 그냥 타고났다고 봐야 한다.

짐작건대 내가 올바른 방향만 제시해 줘도 쑥쑥 성장할 것이다.

"오늘은 '분배'부터 배워 보자."

유리 상자를 꺼냈다.

트레이닝 센터에서 수련용으로 제공하는 아이템이다.

두 손으로 손쉽게 안을 수 있는 크기이며 한쪽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다.

"봐 봐."

구멍을 통해 마나를 불어 넣자 유리 상자가 금세 마나로 가득 찼다.

의도적으로 마나를 더 불어 넣으니 조금씩 새어 나온다.

"정확히 이 상자만큼이 F급 [마력탄]에 들어가는 정량이야. 탄환 한 발당 적절한 양을 사용하는 게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는."

유리 상자를 한 차례 흔들었다.

상자 속 마나의 색깔이 그라데이션처럼 짙은 군청색부터 흰색에 가까운 하늘색까지 단계별로 나뉘었다.

"이렇게 일부분만 마나가 짙거나 옅으면 안 돼. 완전한 단색이 되도록 고르게 마나를 분배하는 것, 그게 '분배'의 핵심이다."

서예인이 자기 어깨 위로 손을 들어 올렸다.

질문이 있다는 뜻.

"네~ 말씀하세요."

"왜 마나를 고르게 분배해야 돼?"

"보면서 얘기하자."

그라데이션을 띠던 상자 속 마나가 단숨에 일점으로 모여들며 압축되었다.

완성된 마력탄을 서예인에게 보여 주었다.

자세히 봐도 알아차리기 힘든 아주 미세한 흠집이 나 있다.

"고르게 분배되지 않은 마나는 압축되는 과정에서 구겨져. 지금은 이대로 써도 상관없지만, 일정 경지 이상부터는 이 흠집이 문제가 되지."

가령 고등급 마력탄은 이 상자에 담는 양보다 훨씬 많은 마력을 압축하는데, 이때 흠집이 나 있으면 그곳에서 마나가 줄줄 새거나 그대로 형태가 무너져 버린다.

그때 가서 몸에 밴 악습관을 고친다고 고생하느니, 처음부터 제대로 익혀 놓는 게 낫다.

"다시 정리하면, 상자의 정량에 맞춰 마나를 불어 넣기, 색깔이 다르지 않도록 고르게 분배하기. 마지막으로,"

- 딱!

손가락을 튕기는 즉시 마력탄이 만들어졌다.

"위 두 과정을 한 호흡 만에 해내기. 여기까지 할 수 있으면 '분배'는 마스터했다 봐도 돼. 이제 직접 해 봐."

서예인에게 유리 상자를 건넸다.

서예인이 구멍에 대고 마나를 불어 넣자 잉여 마나가 줄줄 흘러나왔다.

상자 내부도 각종 푸른색으로 알록달록하다.

한 호흡 만에 해내는 건 아직 꿈도 못 꾸고.

"...."

시도할 때마다 계속 실패하자 서예인의 눈썹이 조금 찡그려졌다.

조언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분히 감각적인 영역이라 이 부분에서는 별달리 해 줄 조언이 없다.

해낼 때까지 계속 연습해서 깨우치는 게 최선이다.

"난 옆방에 가 있을 테니까, 끝나면 메시지 보내."

"알았어."

말은 이렇게 했지만,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일이 아니었다.

사실상 숙제로 내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나대로 할 일이 있었다.

빈 마나연공실을 하나 찾아서 자리를 잡고, 큐브 설계도를 꺼냈다.

- 촤라라라락!

손으로는 척척 큐브를 완성해 나가며, 머리로는 딴생각을 했다.

'얼마나 걸릴까?'

과거에 육성했던 S급 총사가 한 트럭.

지금의 서예인처럼 기초부터 쌓아 올린 총사도 한 다스는 넘는다.

그중에서 제일 빠른 녀석이 '분배'를 깨우치는 데 이틀 걸렸고, 나조차도 처음에는 하루를 꼬박 썼었다.

이 정도까지는 기대하지 않지만, 아마 서예인의 재능이라면 사흘 중에는 해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서예인:끝]

서포터가 다 해먹음

25화 1주 차 대인전 (3)

['코어'의 랭크가 상승했습니다. (E->D)]

[김 호]

▷스킬

증폭(E)

복사-스킬[2/2]

1. 허밍버드(E)

2. 마법공학(B)

▷특성

코어(D)

군주(F)

복사-특성[1/1]

1. 원소 저항(S)

▷장비

교복(D)

대지의 스태프(E)

▷인벤토리

10실버

10x10x10 큐브 설계도

[대인전:386점]

[공략전:683점]

(949 +1,200pt)

오늘도 아침이 밝아 올 무렵까지 큐브 제작과 명상을 병행했다.

암흑빙정을 흡수하고 남은 마나에 양지홍에게 수업료로 받은 영단 두 개를 더해 D랭크 [코어]를 달성할 수 있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마법공학이나 허밍버드를 증폭해서 쓸 때마다 마나 소모가 극심했었다.

이제 조금 더 숨통이 트인 셈이다.

[생명의 큐브] 제작도 상당히 많이 진척됐다.

흘러나오는 초록빛 기운이 더욱 짙어졌으며, 한구석에서는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까 말까 한다.

이제 절반 이상 왔다.

하루만 더 투자하면 완성이다.

급한 일들을 처리하고 나니 서예인은 어쩌고 있나, 까지 생각이 닿았다.

큐브나 명상에 집중할 때는 반쯤 무아지경에 빠지는 이유도 있고, 하룻밤 사이에 '분배'를 깨우칠 리도 없기에 비교적 신경을 덜 썼다.

그런데 학생증 뒷면을 확인해 보니 메시지가 와 있었다.

[서예인:끝]

'끝났다고?'

하다가 싫증이 나서 그만둔다는 뜻은 아닐 테고, 정말로 '분배'를 익혔을 가능성이 큰데....

서예인이 쓰던 마나연공실로 가 보니 공실이었다.

내 답장이 한참 늦어서 그냥 갔나 보다.

[김호:님]

[김호:어딤?]

[김호:어디냐]

메시지를 몇 개 보냈으나 답장이 돌아오지 않는다.

'자나 보네.'

'분배' 수련을 하는 내내 유리 상자에 마나를 계속 불어 넣었을 테니 지칠 만도 했다.

이럴 때는 마음을 느긋하게 갖는 편이 낫다.

정말 내 숙제를 벌써 끝냈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조바심을 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만나서 확인해 보면 되겠지.

* * *

[서예인:가는 중]

[서예인:(달리는 강아지 이모티콘)]

내 추측대로 서예인은 자러 간 게 맞았다.

그것도 아주 곤히 푹 주무셨다.

어떻게 아는가 하면, 저 답장이 점심시간이 가까워서야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의 수업은 당연히 모조리 빼먹었고.

-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자 3반 학생들의 이목이 일제히 서예인에게 꽂혔다.

서예인이 무심히 그 시선들을 지나쳐 터덜터덜 자기 자리로 발걸음을 옮기는 도중,

"서예인."

이수독의 차가운 목소리가 서예인을 불러 세웠다.

매서운 눈빛을 보내며 추궁하듯 묻는다.

"왜 지각했나."

"늦자믈잣서효—"

작은 하품과 함께 답하는 서예인.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수독의 눈빛을 받아넘기는데, 오히려 상황을 지켜보던 학생들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인간 백정을 앞에 두고 저런 태도라니, 오늘 시체 하나 치우나 싶을 것이다.

어쩌면 시체도 못 찾을지도 모르고....

"뭐 하다 늦잠을 잤지."

"마력 수련을 했어요."

"무슨 수련."

"마력탄 부여, 래요."

—래요, 라고 끊는 부분에서 서예인의 눈동자가 무의식중에 나를 향했고, 이수독은 그걸 캐치한 듯했다.

갑자기 내 쪽으로 눈을 번뜩이는 걸 보면 말이다.

심지어는 눈빛이 더 강렬해진 것 같다.

'부담스럽네....'

왜 볼 때마다 저러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양반이랑 접점이 없는데....

이수독은 나와 서예인을 번갈아 노려보며 잠시 무슨 생각을 하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컨디션 관리에 신경 쓰도록. 또 늦으면 벌점이다."

"네."

수업이 재개되었다.

더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금세 점심시간이 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 * *

"'분배'를 마스터했다고?"

"응."

"한번 봅시다."

서예인이 한 손을 펴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나의 정육면체가 나타났다.

유리 상자를 쓰지 않고도 F급 [마력탄]의 정량에 맞는 마나를 사용하며, 내부의 마나 역시 고르게 분배되고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해."

조금도 흠잡을 구석이 없는 완벽한 '분배'였다.

익히는 속도도 나보다 빨랐다.

하루를 꼬박 쓴 내가 <용살학원>의 역대 최단 기록이었는데, 서예인은 그것을 반나절 만에 해내며 깨뜨려 버린 것이다.

가히 악마적인 재능이었다.

'이러면 가르칠 맛 나지.'

"오늘도 마력탄 수련할까?"

"좋아."

서예인은 내 제안을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수락했다.

우리는 어제와 똑같이 마나연공실 하나를 잡고 들어갔다.

"지금부터 2차 마력탄 특강을 시작하겠습니다."

"와—"

서예인이 다시 소리 없는 박수를 쳤다.

나는 '분배'가 끝난 마나 정육면체를 손 위에 띄워 올렸다.

"마력탄은 '분배'가 반, 그리고 '압축'이 나머지 반이야."

정육면체의 크기가 단번에 절반으로 압축되었다.

작아진 정육면체가 또 절반, 그 절반으로 계속해서 줄어들다가, 마침내 탄환 크기까지 작아졌다.

"이렇게 점점 줄이는 방식부터 해 보자."

"응."

서예인이 마나 정육면체를 만들었다.

그대로 정신을 집중하자 이곳저곳이 울룩불룩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

그러다가 결국 한쪽이 무너져서 구멍 난 풍선처럼 마나가 새어 나간다.

슬쩍 내 눈치를 살피지만 내 입장에서는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다.

원래 처음에는 다들 그렇지.

"다시."

정육면체가 위아래로 눌려 납작해졌다가 원상 복구되었다.

또 위로 길쭉하게 늘어났다가 원상 복구.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또다시 구멍 난 풍선처럼 찌그러진다.

"다시."

서예인이 계속해서 압축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만 했다.

다시, 다시, 다시.

횟수가 늘어갈수록 내 마음속의 의아함도 커져 갔다.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이 아닌데?'

서예인이 무너져 가는 마나 정육면체를 손에 든 채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하지만 어쩐지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처럼 보인다.

이런 건 직접 깨우치는 게 제일 좋은데, 약간의 방향성 정도는 제시해 줘야겠다.

"마나."

곧바로 새로운 마나 정육면체를 만드는 서예인.

나는 검지 끝에 아주 작은 마나 알갱이를 모은 뒤 정육면체를 콕 찔렀다.

- 퐁,

알갱이가 정육면체를 파고들어 정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저걸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해 봐. 밖에서는 압박하고, 안에서는 끌어당긴다는 이미지로."

"...."

살짝 고개를 끄덕인 서예인이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동안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곧 정육면체의 크기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줄어들고 또 줄어들다가 마침내 작은 탄환이 되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이걸 한 번에 성공하네.'

방향성만 제시해 줬다고 단박에 감을 잡는 게 천재는 천재구나 싶다.

서예인은 어려운 문제가 풀려서인지 조금 들뜬 기색이었다.

"이제 어제랑 똑같이 연습하면 돼. 한 호흡 만에 해낼 수 있게."

- 딱!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엄지와 검지 사이에 마력탄이 끼워져 있었다.

'분배'와 '압축'이 찰나에 이루어지면, 정육면체가 만들어지고 압축되는 과정은 보이지도 않고 탄환만이 남는다.

그 수준에 이르면 비로소 [마력탄] 스킬이 주어진다.

내 클래스가 서포터라서 그렇지, 총사였다면 지금쯤 마력탄 수준만 C랭크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옆방에 가 있을게. 스킬 얻으면 메시지 보내."

"응."

생명의 큐브를 만지면서 기다렸다.

일찍 끝나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에 깊이 집중하지는 않았다.

과연 [증폭]을 두 번밖에 시전하지 않았는데 메시지가 왔다.

[서예인:얻었어]

[김호:마력탄?]

[서예인:ㅇㅇ]

[서예인:(덩실덩실 곰돌이 이모티콘)]

[김호:ㄱㄷ]

마나연공실에 들어서자 서예인이 보란 듯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 위에 푸른빛을 지닌 탄환이 놓여 있다.

완벽하게 조형된 F등급 마력탄이.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보면서도 안 믿기네.'

분배에서 압축, [마력탄] 스킬 습득까지 모두 합해 한나절이 안 걸렸다고 말하면 과연 누가 믿을까.

모든 과정을 지켜본 나조차도 안 믿기는데.

괜스레 욕심이 생겨난다.

시간도 한참 절약했겠다, 진도를 한 단계 더 빼도 괜찮을 것 같다.

"하는 김에 E급까지 해 볼래?"

"응."

트레이닝 센터에서 더 커다란 유리 상자를 빌려 왔다.

E급은 세 배 이상의 마나를 압축하기에 정량부터 F급보다 많다.

분배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F급에서 감은 충분히 잡았을 테니, E급은 훨씬 적은 시간을 소모할 것이다.

그날, 서예인은 끝내 [마력탄]의 랭크를 한 단계 올리는 데 성공했다.

* * *

모래바람이 휘날렸다.

안 그래도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데, 가끔씩 달궈진 모래까지 날아와서 몸에 붙으니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서예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뜨끈한 모래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의 손에는 검은 광택을 뿌리는 길쭉하고 두꺼운 라이플이 들렸고, 그 모습을 광학미채 길리슈트가 투명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서예인 99% vs 곽지철 98%]

상대방인 곽지철의 모습 역시 안 보이는 건 매한가지였다.

투명 길리슈트는 아니고, 봉긋 솟은 모래 둔덕 안에 숨어 있어서 그렇다.

에메랄드 마탑 소속의 대지술사.

지금 같은 사막 지대에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대였다.

물론 마법사인 곽지철 입장에서도 총사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상대다.

사람들이 총사와 마법사가 상성이 나쁘다고 늘상 말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는 서예인과 송천혜의 배치 고사를 관전한 바 있다.

은신한 총사를 어떻게 상대하는지 송천혜를 보고 배웠고, 그녀가 썼던 전법을 똑같이 따라 하는 중이었다.

송천혜처럼 마력이 압도적이지는 않지만, 토속성 마법에 능한 그이기에 방어만큼은 더 자신이 있었다.

곽지철은 우선 마력을 몸 위에 갑옷처럼 둘렀다.

그다음 주위에 모래를 끌어 올려 둔덕을 만들고, 마나를 주입해 단단하게 굳혔다.

서예인은 그 모든 정보를 '눈'을 통해 읽어 냈다.

[매직 아머(E)]

[어스 배리어(D)]

거북이처럼 방어를 굳혀 놓은 뒤 추가로 마법을 시전하는 곽지철.

[어스 그래버(E)]

모래로 이루어진 손들이 지면을 더듬더듬 짚고 돌아다닌다.

서예인의 위치를 포착하는 순간, 저 손들이 일제히 그녀를 붙잡고 움직임을 방해할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총사를 끝장내는 건 매우 손쉬우리라.

모래의 손들은 점점 수색 범위를 넓혀 가고 있었다.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로 보인다.

저 손에 잡히지 않더라도, 그녀가 걸음을 옮기는 순간 모래에 찍히는 발자국만으로도 들킬 가능성이 매우 컸다.

"...."

그러나 서예인의 얼굴에서는 한 점의 위기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한 손을 폈다.

하얀 손바닥 위로 마나가 응집하며 탄환 모양으로 단단히 압축되었다.

완성된 마력탄을 라이플에 가져다 대자 스르르 안으로 스며든다.

서예인은 스코프를 통해 곽지철이 숨은 모래 둔덕을 관찰했다.

그녀의 눈이 모래 둔덕을 유지하는 마력의 흐름을 읽었다.

흐름이 부자연스럽게 툭툭 끊기는 부분.

언제나 저런 곳이 약점이었다.

침착하게 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겼고,

- 콰드드득!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마력탄은 곽지철의 단단한 모래 둔덕은 물론, 그가 옅게 두른 마력 갑옷까지 산산이 깨뜨렸다.

모래 둔덕이 무너져 내리며 곽지철의 모습이 드러났다.

곽지철은 부지불식간에 시야가 확 트이자 순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으나, 금세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니, 이, 이게,"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인가?

송천혜의 장벽은 못 뚫어 놓고, 어떻게 더 방어력이 높은 자신의 배리어는 이리도 손쉽게 부수는가?

그러나 당황만 할 틈이 없었다.

'막아야 한다!'

곽지철이 황급히 모래를 그러모아 어스 배리어를 수복하려 했으나, 그 전에 두 번째 탄환이 날아와 그의 안면을 강타했다.

- 쾅!

"...."

정신을 잃고 뒤로 넘어가는 곽지철.

[서예인 Win vs 곽지철 Lose]

[대인전:630+30점]

서예인은 스코어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입꼬리를 콕콕 눌렀다.

어쩐지 살짝 올라가 있었던 것 같아서.

서포터가 다 해먹음

26화 1주 차 대인전 (4)

늦은 밤.

송천혜는 잠옷 차림으로 자기 방 의자에 편히 앉았다.

회전하는 의자 위에서 천천히 왼쪽으로 빙글, 오른쪽으로 빙글, 돌다가 학생 상점을 열람했다.

200포인트를 지불하자 리플레이 수정구 두 개가 손 위에 툭 떨어졌다.

[김호300양지홍300_대인전_1주차.replay]

[김호330양지홍270_대인전_1주차.replay]

송천혜는 김호의 배치 고사를 관전했었다.

시종일관 홍연화의 마법 세례를 버티기만 하다가, 마지막에 날려 보낸 벌새 한 마리.

[허밍버드]는 토파즈 마탑 소속이 아닌 외인도 익힐 수 있는 마법이다.

토파즈 마탑이 그것을 좌시하는 이유는 익히기는 쉬워도 숙달하기가 지극히 까다롭기 때문.

어차피 저등급 마법이기도 하고, 익혀 봤자 써먹지도 못할 테니, 어디 한번 해 보라는 식으로 놔두는 것이다.

그러니 김호가 벌새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에는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다음 배치 고사 상대가 자신이었기에 직접 상대하며 겪어 볼 생각이었는데,

- 저 기권할게요.

- 네가 이긴 걸로 치자.

그 남자는 컨디션이 안 좋다는 속 뻔한 핑계를 대면서 자리를 피해 버렸다.

설득을 시도해 보았지만 승패에도 점수에도 별 흥미가 없다는 투였다.

영웅으로서 마음가짐이 덜 되었다는 비판과는 별개로, 허밍버드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다고 300점대인 김호와 900점인 자신이 대인전에서 붙을 가능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으니, 이렇게 리플레이라도 챙겨 보는 것이다.

상대는 양지홍이라는 창술사 무인.

배치 고사 두 번째 상대였던 걸로 기억한다.

김호에게 거절당한 직후라서 화풀이 겸 조금 과하게 힘을 썼던 것도 같다.

양지홍에 대한 기억은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이제 경기 내용을 살펴볼 차례다.

송천혜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수정구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리플레이를 재생하고 막 집중하려는데,

"어?"

...경기가 끝나 버렸다.

시작되자마자 양지홍이 돌진하고, 허밍버드에 적중되어 마비 상태에 빠진다.

움직이지 못하는 양지홍을 김호가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고 끝.

두 번째 경기도 같은 양상이었다.

겨우 한 번 피하려는 시도가 추가되었지만, 곧바로 등에 허밍버드를 얻어맞고 끝.

리플레이 두 개를 합쳐서 1분이 채 안 된다.

짧아도 너무 짧다.

'내 200포인트....'

어쩐지 허위 광고에 속은 기분이었다.

겨우 이거 보여 주고 200포인트나 받아 가다니, 이렇게 양심이 없을 수가!

이런 질소만 잔뜩 든 과자 봉투 같으니!

잘못이라고는 리플레이를 저장한 것밖에 없는 김호가 욕을 먹는 와중에도, 수정구는 계속해서 리플레이를 반복 재생하고 있었다.

"...?"

뚱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송천혜의 눈이 점점 이채를 머금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허밍버드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는데, 보면 볼수록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오묘함이 느껴진다.

'뭐였지?'

한참 동안 수정구를 붙잡고, 집중해서 수십 번 반복했지만 오묘함의 정체를 정확히 짚어 내지 못했다.

하수가 고수의 기술을 보고 막연히 대단하다고 생각은 해도, 정확히 무엇이 대단한지는 짚어 내지 못하는 것처럼.

오히려 머리에 과부하가 오기 시작하는지, 벌새의 궤적을 계속해서 읽을 때마다 정신이 점점 더 멍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조금만 더 보면 알 것 같아서 멈출 수 없었다.

정신이 약 80% 정도 멍해졌을 즈음,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송천혜는 저도 모르게 마법을 시전했다.

허공에 구조식이 떠오르고, 전류가 뭉치며 벌새가 만들어진다.

허밍버드가 방을 가로질러 날았다.

송천혜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벌새는 그녀가 방금 전까지 계속해서 눈에 담았던 궤적을 재현해 내고 있었다.

- 우당탕탕!

집기들이 죄다 쓰러지기 전까지는.

정신이 번쩍 든 송천혜가 후다닥 달려 나갔다.

* * *

이 시각 리플레이를 반복 재생하는 사람은 송천혜뿐만이 아니었다.

이수독 앞에도 리플레이 수정구가 둘.

커다란 화면에는 사진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허밍버드가 양지홍에게 날아가서 격중하기까지의 몇 초를 쪼개고 쪼개 가며 연속 촬영한 것들이다.

사진들을 응시하는 이수독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컨트롤이 극에 달했군.'

사진 하나하나에 찍힌 허밍버드의 방향이 다 달랐다.

그 짧은 시간에 수십 번이나 벌새를 조작했다는 증거다.

양지홍이 어떻게 대응했든 결과는 바뀌지 않았으리라.

저놈은 아마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수법에 당했는지조차 모르겠지.

두 번째 경기도 마찬가지다.

양지홍은 자기가 허밍버드를 피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상 허밍버드는 그가 옆으로 도약하기도 전에 이미 방향을 틀고 있었다.

처음부터 지나가게 두고 배후를 노릴 심산이었던 것이다.

'아주 갖고 놀았다.'

마무리도 깔끔했다.

마법사가 좋은 마법 놔두고 스태프로 후려친다는 점과, 휘두르는 무기가 하필 [대지의 스태프] 따위의 하급 장비라는 점이 더해져 일견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이것이 교묘하게 연막을 치고 있어서 처음 리플레이를 볼 때는 이수독도 간과하고 넘어갔었다.

자세히 뜯어보면 김호의 자세와 스태프를 휘두르는 동작에서 조금의 군더더기도 찾을 수 없다.

만에 하나 양지홍이 마비를 일찍 풀어내고 불의의 반격을 날렸더라도 정면에서 깨부쉈을 것이다.

알고 보니 마법은 눈속임이고, 사실 봉술의 대가는 아닐까 의심될 정도다.

그런데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또 허밍버드의 숙련도가 너무 높고.

문제는 그것 말고도 더 있었다.

이수독이 손을 가볍게 한 번 젓자 화면이 새로운 사진들을 띄워 올렸다.

서예인의 마력탄을 초근접 거리에서 촬영한 것들.

먼저 배치 고사 때의 사진.

이때만 해도 마력탄이 아니라 어설프게 뭉친 마력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성취가 더디기는 했지만, 신입생인 점을 감안하면 그리 이상할 점은 아니었다.

반면 정확히 이틀 뒤, 곽지철과의 대인전에서 찍힌 사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조형된 마력탄이다.

이틀 만에 사람이 이렇게 급변할 수가 있는가?

'천재.'

영웅들이 품은 잠재력이 용살학원에 입학하고 나서 폭발하는 사례는 은근히 자주 벌어지곤 했다.

아마 서예인도 비슷한 케이스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 계기를 제시한 자는 아마.

- 마력탄 부여, 래요.

서예인은 그 말을 하며 무의식중에 김호를 지목했었다.

저 마력탄 조형에 크든 작든 김호의 지분이 들어가 있다는 의미다.

이 사실이 안 그래도 복잡했던 이수독의 머릿속을 더욱 뒤엉키게 만들었다.

'도대체 뭐 하는 놈이지.'

마법과 봉술, 사격은 사실상 별개의 영역이라 봐도 과언이 아닌데.

이 셋에 동시에 능한 사람이 누가 있더라.

빌런들은 물론 현역 영웅들, 인간형 네임드 몬스터들까지 되짚어 봐도 떠오르는 자가 없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이 조금 드러나기는 했는데, 드러난 부분이 영 생소하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이수독이 미간을 찌푸렸다.

'강압적으로 나간다면.'

일단 찔러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그러나 이수독은 이내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용살학원의 학생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고, 뚜렷한 물증 없이 일단 찔러 보는 건 그의 방식과 정반대였다.

그래서 결론은 돌고 돌아 원점이다.

지금으로서는 더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아직 윤곽조차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퍼즐을 완성시키려면 조각을 더 모아야 한다.

리플레이 분석은 당분간 계속될 듯했다.

"쯧."

그게 썩 기껍지 않았기에, 이수독은 짧게 혀를 찼다.

올해 들어 왜 이리 사서 고생을 하는지.

괜히 어울리지도 않는 교사직을 맡고, 학생 하나가 의심스럽다고 열심히 리플레이까지 챙겨 보는 신세다.

'천하의 인간 백정 다 죽었구나.'

이수독은 그런 생각을 하며 화면을 껐다.

리플레이 수정구도 치워 버렸다.

* * *

['증폭'을 사용합니다.]

['마법공학'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B->S)]

[지속시간 00:01:13]

[재사용 대기시간 00:49:13]

- 촤라라라락—

푸르게 빛나는 손이 엄청난 속도로 큐브 이곳저곳을 누볐다.

손끝이 닿을 때마다 천개에 달하는 조그마한 정육면체들의 배치가 끊임없이 변화한다.

- 찰칵, 찰칵,

어느 순간부터 큐브를 만지는 손이 조금씩 속도를 줄여 가기 시작했다.

그 대신 움직임 하나하나가 더욱 신중하고 정확해졌다.

큐브를 천천히 훑으며 검토하고,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

- 우웅—

큐브가 부르르 떨리며 공명했다.

내가 손을 멈췄는데도 저절로 조립되고 속이 비워지며, 마침내 덮개를 여닫을 수 있는 작은 상자로 변했다.

상자가 완성된 다음에는 안쪽에서부터 강렬한 녹색빛이 차오르더니, 작은 틈새 사이사이로 갖가지 식물이 자라나며 꽃이 피었다.

식물들은 금세 큐브를 온통 뒤덮어 버렸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처음부터 나무줄기 따위를 엮어 만든 상자는 아닌가 착각할 듯했다.

'완성이다.'

[생명의 큐브(B)]

생명의 큐브가 가진 효과는 단 하나.

수납하는 '생명' 계열 아이템의 효과를 1.3배로 늘려 준다.

가령 [회복의 토템]의 기본 효과가 '10초마다 범위 내 아군을 치유'하는 것이라면,

큐브 안에 토템을 넣기만 해도 7초로 시간이 줄어들며, 치유량도 증가한다.

[가공된 에메랄드]는 목토 계열 마법의 위력을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는데,

이것을 큐브에 보관하면 증가 폭에 1.3배가 곱해진다.

20% 증가라면 26%로.

게다가 상자의 용량이 허용하는 한 여러 개의 아이템을 수납할 수도 있으니, 가히 사기적인 아이템인 셈이다.

이것마저도 정상적인 루트를 타고, 연계 퀘스트를 모두 클리어해서 얻는 'S등급' 생명의 큐브에 비해서는 다소 손색이 있다.

S등급은 증가 배율이 무려 2배나 된다.

내가 만든 큐브는 시제품 설계도를 강제로 완성시킨 것이기에, 랭크도 효과도 다소 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하다.

'1.3배만 해도 어마어마하지.'

용살학원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아이템이다.

특히 4대 세력에서 군침을 줄줄 흘릴 것이다.

아마 어느 동아리에 가져가든 시즌 패스 정도는 손쉽게 내어 주리라.

그렇게 하면 고현우와의 약속은 아무 문제 없이 지켜지겠지만,

'그걸로는 부족하지.'

달랑 시즌 패스 하나 바꿔 먹고 만족할 생각은 없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27화 생명의 큐브 (1)

목요일.

수업 사이의 휴식 시간, 신병철을 복도로 불러냈다.

"왜, 무슨 일이쇼?"

"저번에 유망주 얘기한 거 있잖아."

"어, 그게 왜?"

"길드 쪽에 드루이드 유망주, 걔 몇 반이냐."

"아~ 박나리? 바로 옆 반이지. 저기 계시네."

2반을 슬쩍 들여다보니, 소심해 보이는 여학생 하나가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떠드는데, 혼자 외딴 섬처럼 떨어져서 책상 위 고양이랑 놀아 주는 중이다.

허공에 볼펜을 휘휘 저으면 고양이가 샌드백 치듯 연신 볼펜 끝을 때려 댄다.

신병철의 말에 따르면 저 소심해 보이는 애가 길드 연합의 가장 강력한 유망주, 박나리란다.

책상 위 손바닥만 한 고양이는 알고 보면 축소 마법이 걸린 호랑이고.

내가 잠시 박나리에게 시선을 고정시키자 신병철의 눈매가 점점 가늘어지면서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띠었다.

"왜, 관심 있냐? 불러 줄까?"

"아니. 안 불러도 돼."

'오게 만들면 되거든.'

이 정도 거리라면 충분할 것이다.

[생명의 큐브]를 꺼냈다.

작은 정글을 연상시키는 상자를 보고 신병철이 호기심을 표했다.

"이야.... 그거 뭐냐? 되게 귀한 아이템 같은데."

"나중에. 지금은 나랑 연기를 좀 해 줘야겠다."

"연기라. 연기 하면 또 이 신병철 님을 빼놓을 수 없지. 뭐 하면 되는데?"

큐브 덮개를 열자 싱그러운 초록빛 파동이 퍼져 나갔다.

안쪽은 당연히 텅 비어 있다.

"이 상자 안에 굉장히 흥미로운 것들이 들어 있다고 칩시다."

"정말이네요. 하루 종일 봐도 안 질리겠어요."

"앗!"

등 뒤에서 여학생의 외마디 외침이 들렸다.

십중팔구 박나리일 것이다.

뒤를 돌아보려는 신병철을 붙잡고 반쯤 돌아간 고개를 원위치시켰다.

"뒤쪽 보지 말고."

"...아하. 감 잡았쓰."

내 의도를 반쯤은 눈치챘는지 연기에 집중한다.

연기라 해 봐야 빈 큐브 속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것 외엔 없었지만.

그 상태를 유지하고 몇 초.

- 툭, 툭,

작은 무언가가 내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보니 박나리의 고양이가 내 다리에 앞발을 얹고 있다.

크기는 영락없는 새끼고양이인데, 몸의 무늬를 자세히 보면 호랑이에 가깝기는 하다.

한발 늦게 그것을 발견한 신병철이 움찔 놀랐다.

"어? 얘 언제 여기까지 왔대."

'예상한 대로지.'

생명의 큐브가 발하는 고유한 파동.

동물들이 이런 데에는 사람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오랜 세월 마나를 몸에 쌓아 온 영물이라면 더욱.

멀리서부터 파동을 감지하고 다가오리라 예상했다.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괜히 경계심만 커지니까, 먼저 나를 건드릴 때까지 모른 척한 것이고.

고양이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한쪽 앞발은 내 다리에 얹은 채, 반대쪽 앞발로 생명의 큐브를 가리켰다.

내가 큐브를 살살 흔들며 물었더니,

"뭐, 이거?"

"애옹."

긍정하는 듯 짧은 울음소리를 냈다.

나는 무릎을 굽히고 쭈그리고 앉으며 큐브와 고양이의 높낮이를 맞춰 주었다.

고양이가 덮개를 슬쩍 들어 올리더니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안에서 만족스럽게 몸을 말고 그르렁댄다.

'아주 전세 냈네.'

고양이들한테는 상자에 환장하는 습성이 있다던데, 호랑이도 비슷한 걸까.

"범아 안 돼!"

반려 호랑이를 쫓아 헐레벌떡 달려온 박나리.

나는 일부러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박나리는 연신 사과부터 했다.

"저기, 그게, 미안. 바로 데려갈게!"

닫혀 있는 생명의 큐브에 대고 살살 달래 보지만,

"범아, 빨리 가자. 그런 데 들어가면 안 돼."

고양이는 새로운 휴식처가 몹시 만족스러운 듯했다.

박나리가 덮개를 반쯤 열어젖히자, 틈새에서 조그만 앞발이 튀어나와 손을 탁 쳐 냈다.

두어 번 더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

나는 난처한 얼굴을 유지한 채 말했다.

"이제 수업 들어가야 되거든. 데려가 줬으면 좋겠다."

"...진짜 미안."

박나리가 울상이 돼서 다시금 사과했다.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생명의 큐브를 활짝 열어젖히고 두 손을 쑥 집어넣어 고양이를 붙잡았다.

자기를 붙잡은 손을 사정없이 깨물어 대는 고양이.

'거 성질 한번 더럽네.'

그래도 진심으로 깨무는 건 아닌 데다, 손을 쳐 낼 때도 발톱은 안 세우는 걸 보면 나름대로 주인과 교감이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아무튼 붙잡았으니 이제 빼내기만 하면 되는데,

"...!"

순간 박나리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소심해 보이기만 하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친다.

짧은 시간 동안 큐브를 조금 더 자세히 이모저모 뜯어본다.

'눈치챘군.'

드루이드와 가장 파장이 잘 맞는 생명의 기운.

멀리서도 범상치 않음을 직감했겠지만, 손을 넣어 큐브와 접촉한 지금은 그녀가 겪어 왔던 어떤 아이템과도 다르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리라.

"...."

그러나 박나리는 놀란 표정을 지우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양이를 꺼내 갔다.

고양이는 발버둥을 쳤지만 꼭 끌어안은 상태가 유지되자 체념한 듯했다.

박나리가 또다시 나에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 얘가 상자만 보면 들어가는 버릇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지."

내 앞 교실을 살피고 조심스레 묻는다.

"혹시 3반...이야?"

"어."

"아, 그렇구나. 아무튼 미안."

박나리는 마지막까지 미안을 연발하며 도망치듯 자기 반으로 돌아갔다.

제 책상에 앉고서야 한결 표정이 편해지는 걸 보면 이 상황이 적잖이 불편했던 것 같다.

'일단 선전은 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생명의 큐브]가 대단한 아이템이라는 건 몸소 확인시켰으니, 이제 박나리는 소유자인 나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대자연 동아리에도 이 일이 들어가게 될 테고.

거기서부터가 시작이다.

"와.... 나 '범이'가 저러는 거 처음 봐."

신병철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영물들과 친화력이 높은 생명 계열 아이템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박나리의 고양이, 아니 호랑이가 아무 거리낌 없이 상자 안으로 몸을 구겨 넣는 건지.

"무슨 아이템이길래 저렇게 좋아하냐? 척 보기에도 뭔가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좋은 아이템이지."

4대 세력의 유망주가 탐을 낼 만큼.

신병철의 추가 질문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생명의 큐브를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그리고 슬쩍 말문을 돌렸다.

"아무튼 네 덕분에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연기 잘하대."

"에이, 이런 건 연기 축에도 못 드는데 뭘. 그래도 정 고마우면 밥 한 끼 정도는? 사 주면 고맙고?"

"밥은 다음에 사고, 도움이 될 만한 정보 하나 줄게."

"정보? 뭔데?"

"네 인벤토리에 있는 거, 내일은 방에 두고 와."

내일은 1주 차 금요일이니까.

신병철은 한순간 움찔했으나, 여전히 안면에 웃음기를 잃지 않고 대꾸했다.

"에이, 그,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야. 제가 무슨 위험한 물건이라도 갖고 다니는 줄 아시나 본데, 저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뭐, 네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그냥 내가 헛소리했다고 생각해."

"...."

- ♪♬♩♪♪

수업이 시작됐기에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표정이 묘해진 신병철을 뒤로하고.

신병철이 과연 내일 '아이템'들을 방에 두고 올까?

아니.

쟤도 남의 말을 잘 귀담아듣는 성격은 아니더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