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군단이 예상한 몬스터 웨이브의 일자가 다가오자.
도시는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임시로 지급해 드리는 장비입니다."
"우와...."
강 한가운데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요새 앞.
그곳에 상당히 많은 각성자들이 몰려 있었다.
강철 군단의 군인들뿐만이 아니었다.
'민간인 협력자들.'
군단에 협력해 방어 작전을 돕겠다고 나선 이들.
개중에는 지난 던전 공략에서 군단을 도와 어인들과 싸웠던 이들도 있었다.
"이 보급품들은 어디까지나 임시입니다만. 전쟁이 끝나면 충분히 만족스러울 정도의 전리품이 모두에게 돌아갈 겁니다."
군단에 조력하기로 한 이들.
군단의 입장에서도 우호적인 각성자들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전투가 끝났을 때의 보상을 후하게 줄 것을 약속하긴 했으나.
애초에 전투에서 죽으면 말짱 도루묵.
군단은 멀리 있는 탄약대대 기지에 연락.
급하게나마 장비들을 대량 양산해 임시로 대여해 주기로 결정했다.
"직업이 검사시군요. 여기 있습니다."
"아, 예."
장비를 대여해 준다고 했을 때는 그런가 보다 했던 각성자들이었으나.
막상 그 장비를 받아 들자.
"뭐야 이거."
"입는 것만으로 능력치가 올라간다고?"
각상자들의 눈이 커졌다.
"아이템, 이란 건가?"
"...나, 생산직 각성자가 파는 물건을 본 적이 있어. 그것도 나름 효과가 있긴 했는데, 너무 허접해서 굳이 아까운 전투식량으로 살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넘어갔거든? 그런데 이건...."
"급이 다르군."
군단의 생산직 각성자들이 만든 물건들.
부대원들에게 보급되는 물건들에 비하면 열악하기 그지없는 아이템이었으나.
"군인들은 왜 저렇게 다 강한가 했더니!"
"이런 아이템을 몸에 둘둘 두르고 있다는 거 아냐? 납득이 가네."
이제 막 던전에서 나와 레벨링을 시작하는 이들.
그들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고급품이나 다름없었다.
"보급된 장비들은 능력치의 절대치를 올려 주도록 주문했습니다. 레벨이 낮을수록 효과가 크게 체감되실 겁니다."
"오오...."
애초에 저레벨 각성자용으로 양산된 물건이었다.
퍼센티지 상승이 아닌 절대치 상승.
레벨이 낮은 이라면 능력치가 두 배 가까이 상승하는 느낌을 받겠지.
"그런데 그 몬스터 웨이브라는 거."
"음?"
"진짜 오는 건 맞죠?"
그때.
생존자 중 누군가가 그런 말을 꺼냈다.
"오겠지. 그러니까 이렇게 준비하고 있는 거 아냐?"
"그건 그렇죠.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진형까지 만들고 버티고 있으면 그 괴물들도 피해 가지 않을까요? 바보들도 아니고. 굳이 방어를 굳힌 적을 공격할 이유가 있나 싶어서."
물건을 보급하던 병사 중 한 명이 힐끗 각성자들을 보았다.
살짝 한숨을 내쉰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곳을 지키고 있는 한 올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는 겁니까?"
"우리만 한 세력을 무시하고 지나쳤다간, 후방을 습격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말이 몬스터 웨이브지.
박태준 병장의 말대로라면, 저들은 몬스터로 이루어진 군대였다.
"저들이 동진하려면 우리가 있는 이 도시를 거쳐야만 할 겁니다. 지나친다면 오히려 좋죠."
저들은 적극적으로 [점령전]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만.
다른 지역들에는 또 다른 괴물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
아무리 숫자가 많고 강하다고 한들.
넘쳐 나는 괴물들을 뚫고 도시를 점령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우리를 지나치고 다른 도시를 먼저 공략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 뒤통수를 치면 그만입니다."
"아~"
"그게 우리가 이 도시를 사수하려 한 이유입니다. 여길 포기하고 후퇴하면 그만큼 저들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영역이 늘어나는 셈이니까요. 그 늘어난 영역에 있는 인간들은 살아남기 힘들겠죠."
"어? 그럼 여길 사수한다고 한 건...."
"그게 사람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이라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서 막아야 한다는 게 군단장님의 판단이었죠."
군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문명이 파괴되고, 많은 인간들이 죽었다.
지금 세상은 야생이나 다름없었다.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것이 당연한 세상.
강한 힘을 가진 저들이라면 남들을 노예처럼 부려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힘을 지닌 세력은, 적어도 이 근처에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피해를 줄이려고 지역을 사수했다니.'
방금 그 얘기대로라면.
저 군인들은 여전히 군인으로서의 목표....
인간들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얘기.
사실, 군단의 입장에서는 살아남은 인간이 많을수록 군단의 생존에도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만.
이 자리의 각성자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각성자들의 입장에서, 이 군인들은....
정말 군인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한 것처럼 보였으니까.
남들을 힘으로 지배하려 하면 충분히 가능할 것임에도, 의무에 충실한 모습.
그 이유를 이해하기는 힘들었으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이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는 이유.
그리고. 아직은 모를 일이지만, 앞으로 살아남는 데 성공한다면 그 이유 역시.
"...그 군단장님이라는 분한테 고마워해야겠네요."
군단장이라는 이의 판단 덕분일 것이라는 사실.
133화 점령전 (1)
———!!!
저 멀리.
최소한 수천 마리의 괴물들이 괴성을 질러 댄다.
그 땅울림이 먼 이곳까지 전달될 정도.
[점령전이 시작됩니다!]
머지않아.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창.
[교전 세력]
[녹색갈기 부족 VS 강철 군단]
[지휘관]
[녹색갈기 부족 워 치프틴 하라-발 VS 강철 군단 지휘관 김현석 중위]
[교전 지역]
[대도시 (3)]
[전투에서 승리한 세력은 '대도시 (3)'의 점령권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적들을 결코 용서하지 마십시오!]
"점령전이라."
그래.
이 세상에 덮어 씌워진 이 '게임'은, 점령전을 베이스로 하는 게임이었지.
그동안은 누구의 주인도 아닌 땅을 차지해 왔다만.
생각해 보면 그런 건 점령전에서 튜토리얼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는, 세력과 세력 간의 싸움.
이번 전투야말로, 처음으로 겪는 '진짜 점령전'인 셈이다.
요새의 성벽 위에 선 나는, 멀리 보이는 괴물 놈들을 내려다보았다.
[식재료 감별(강화)]
[요리사의 눈]
[오르크 류 - 녹색갈기 종]
[신선도 - 상]
그러자.
눈앞에 놈들에 대한 정보가 나열되기 시작한다.
[녹색갈기 전사]
[오르크 족의 여러 분파 중 하나인 녹색갈기 부족의 전사입니다.]
[본래 오르크 족은 전쟁을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종족으로, 녹색갈기 부족은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물량을 자랑하는 부족입니다.]
[녹색갈기 부족의 임신 주기는 1개월이며, 한 번의 출산으로 수십 마리의 새끼가 탄생하고, 그렇게 태어난 새끼들은 6개월이면 훌륭한 전사로 거듭납니다.]
[항상 야생에서 뛰어다니는 종족의 특성상 탄력 있는 육질을 자랑하며, 특유의 감칠맛이-]
"가관이구만."
설명을 읽어 보니.
저놈들은 말 그대로 전쟁을 위해 태어난 종족이었다.
'임신 주기도 빠르고, 한 번에 많이 태어나고, 그 태어난 녀석들도 빠르게 성장한다고?'
종족 자체가 숫자 늘리기에 특화되어 있다는 뜻이다.
지금 눈앞을 가득 채운 저 숫자가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오히려 저것도 적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
하지만.
'우리도 만만치는 않을걸.'
전쟁을 위해 태어난 종족?
뭐 어쩌라고.
우리는 군대.
이쪽도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집단이거든.
"응...?"
그런데.
몰려드는 괴물들 사이사이.
그 한가운데에, 뭔가 익숙한 물건이 있었다.
"수혁아."
"...예 신 병장님."
"저거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거 아니지? 니가 시력은 가장 좋잖냐."
"음. 그렇긴 한데. 아마 신 병장님이 보고 계신 게 맞을 겁니다."
공성전에 앞서 괴성을 지르며 도열하고 있는 괴물들.
그 사이사이에 보이는 거대한 철 덩어리.
"괴물들이 전차를 끌고 오다니."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괴물들 사이에 있는 저 물건은, 전차.
그러니까.
탱크였다.
* * *
"미친. 어떻게 조종하고 있는 거야?"
"주변을 보니 사람들이 조금 보입니다."
서수혁 상병이 전차 근처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조종하는 건 인간이겠죠."
"그 사람들이 자의로 그러는 건 아닐 테고."
"예. 주변에 다른 괴물들이 있습니다. 전차병 출신의 인간들을 노예로 삼고 있는 게 아닐까 싶군요."
"...노예라."
까득.
"건방진 새끼들."
강원도에는 대한민국 육군 전력의 대부분이 집결되어 있다.
놈들이 점거했다는 강원도 서부 역시 상당히 많은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겠지.
'그 군부대 중 한 곳을 턴 건가.'
군부대가 많다는 것과 그 군부대를 탈환한다는 건 전혀 별개의 얘기.
모든 군부대에는 이상할 정도로 강한 괴물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도 2개 이상의 군부대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 바.
놈들 역시 그 정도는 처리할 수 있을 수준의 세력이라는 뜻이다.
설마하니 그렇게 턴 무기를 사용하기 위해 인간을 노예로 쓸 줄은 몰랐다만.
'진정하자.'
괴물 새끼들이 인간을 노예로 사용하는 모습.
처음에는 조금 분노가 치솟았으나.
지금 화를 내서 좋을 게 없다.
"우리가 할 일은 변함없겠지."
놈들이 전차를 끌고 오든 뭘 하든.
여기서 놈들을 격퇴할 뿐.
놈들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들고 온 요리를 꺼내 들었다.
[중급 요리사의 정성이 담긴 몬스터 백반]
[섭취 시, 모든 능력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섭취 시, 모든 특성에 보너스가 적용됩니다.]
[섭취 시, '중급 피해 저항' 효과가 적용됩니다.]
[섭취 시, '중급 피해량 증가' 효과가 적용됩니다.]
이번 전투를 위해, 특히나 고품질의 재료들만을 때려 박아 만든 요리.
그 위에 손을 올리고 중얼거렸다.
"오병이어."
요새의 병사들과 각성자들.
그 앞에, 요리가 나타났다.
"뭐, 뭐야."
"깜짝이야...!"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요리에 당황한 각성자들.
병사들이 그들에게 그냥 먹으면 된다며 안내를 해 주는 것을 지켜보며.
나 역시 요리를 입에 담았다.
[절대 미각의 효과로 효과가 증가....]
이걸로 준비는 끝났다.
이윽고.
괴물과 인간.
서로가 서로의 사정거리에 들어올 때쯤.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제1 포대 Lv.2이 작동을 개시합니다.]
[제2 포대 Lv.2이 작동을 개시합니다.]
포인트를 들여서 요새의 성벽에 건설한 시설.
거대한 포신이 적을 향해 움직인다.
그 옆에 늘어지듯 서 있는 사수와 마법사들.
그리고 탄약대대에서 끌고 온 전차들까지.
모두가 조준을 마친 순간.
"포격 개시!!!"
[지휘의 함성 - '포격 명령'이 울려 퍼집니다.]
김 중위의 함성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원거리 공격에 대한 보너스가 부여된다는 등의 메시지가 눈앞을 지나갔다.
그와 함께.
콰앙-
파지지지직!
두다다다다다....
우리 부대의 모든 화력이 적들을 향해 쏟아진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커다란 소음.
다양한 속성의 마법이 지면을 강타하자.
그 충격이 먼 이곳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세, 세상에...."
"말도 안 되는 화력이군."
경험이 적은 각성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인간의 몸에서 나왔다고 믿기 힘들 정도의 화력 투사.
많은 이들이 이 공격으로 인해 적들이 거의 괴멸할 만한 피해을 입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쯧."
"역시 쉽게 당해주진 않나 봅니다."
군단의 병사들은 달랐다.
포격이 적들을 강타하기 직전.
녹색 피부의 괴물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으니까.
둥... 두둥 둥.
포화로 인한 먼지 속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괴물들은 그 북소리에 맞춰 괴성을 질렀다.
북소리에 맞춘 리듬이 느껴지는 괴성.
단순히 사기를 고취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녹색갈기 부족'의 전쟁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녹색갈기 부족'의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전장의 '녹색갈기 부족' 외의 개체들의 능력치가 소폭 하락합니다.]
['녹색갈기 부족'의 모든 개체에게 일시적으로 특성, '원거리 공격 저항'이 부여됩니다.]
['녹색갈기 부족'의 모든 개체에게....]
[....]
[...]
[칭호 : 왕 시해자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종족의 정점. 왕들을 살해하는 자.]
[드높은 권위도, 강렬한 위압감도. 당신의 앞에서는 의미를 잃습니다.]
[전쟁 노래의 효과에 저항합니다.]
저건 일종의 피어.
심지어는 노래의 형태를 한 피어였다.
전쟁 노래라.
"군가 같은 건가?"
"저희도 질 수 없는데. 군가 제창 한 번 합니까?"
"큭큭. 아서라."
여러 개체들이 협력해서 만들어 낸 피어.
어지간한 보스급 몬스터의 그것보다도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먼지가 완전히 걷히고.
그 안쪽에 있는 것은.
-구어어억!!!
상처를 입은 건가 싶을 정도로 멀쩡해 보이는 괴물들이었다.
"계속해서 포격해라!"
괴물들은 '전쟁 노래'를 부르며 방패를 들고 계속해서 전진했다.
아군의 화력 투사가 이어졌지만 어떻게든 몸으로 막으면서 전진하는 모습.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에."
"완전 제대로 준비하고 왔네.'
전진하는 괴물들 사이.
커다란 공성병기 같은 것이 같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모습은 조잡해 보일지언정 그 위력마저 조잡하진 않겠지.
개중에는 노예로 잡힌 인간들이 조종하는 탱크 역시 끼어 있었으니까.
상당히 위압감 있는 모습이긴 했다만.
"걱정할 정도는 아닐 거다."
옆에서 마법을 발사하고 있던 민재 형이 말했다.
"놈들은 일단 저 강을 건너야 할 테니까."
아군의 요새.
비마나는 강 위에 세워져 있었다.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이 자연의 해자를 뚫어야 한다는 뜻.
이 강을 우회해 크게 돌아서 접근하려고 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전차나 사수 등.
긴 사거리를 자랑하는 아군의 화력이, 멀리 돌아오는 적들에게 피해를 누적시킬 수 있을 테니까.
'요새의 힘이란 거지.'
강력한 방어시설을 갖춘 상태에서 치러지는 방어전의 이점.
[강철 군단]은 산맥의 423대대를 방어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초창기에 각성한 정예 부대원 중에는 사수와 마법사 등 강력한 원거리 직종이 다수.
어쩌다 보니 그동안은 공격해 들어가는 싸움을 자주 했다만.
사실 우리 부대가 가장 자신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방어전.
콰아아아아앙!!!
"공성병기 한 대, 격추했습니다!"
느릿하게 접근해 오던 공성병기 중 한 대가 박살 나며 흩어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몸으로 버티며 전진하던 괴물들 사이에서도 피해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장은 저 '전쟁 노래' 덕분에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 것 같다만.
피어류의 스킬을 계속해서 지속할 수는 없는 법.
결국은 우리 화력이 먹히는 순간이 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응?"
괴물들 사이로 같이 전진하던 공성병기들.
그중에서 조금 특이한 것이 하나 보였다.
"벽인가?"
움직이는 거대한 장벽.
공성병기의 일종으로 보였다.
우리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공성병기를 가져오는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만.
조금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벽으로 뭘 어쩌겠다고?'
결국은 강을 넘어야 하는 것이 저들의 과제.
그 전까지의 공성병기들은 성벽의 포대를 제거하기 위한 공격 수단이 대부분.
저런 장벽은 없었다.
그렇다고 저게 강을 가로지르는 가교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물을 넘을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런 생각을 하며 지켜보고 있자니.
적 진형의 뒤 편에 있던 괴물들이 앞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우락부락한 거인 같은 모습을 한 [녹색갈기 전사]들이었으나.
지금 방벽을 향해 달려가는 괴물들은 조금 달랐다.
기괴할 정도로 왜소하고 마른 모습의 괴물들.
놈들이 다른 전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장벽의 뒤로 몸을 날렸다.
"서수혁!"
"예! 상병 서수혁!"
나는 뒤를 보며 소리쳤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놈들이 벽 뒤로 숨는 걸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머리를 스쳤다.
"저 새끼들 쏴 버려!"
"충성!"
내 명령이 떨어지자.
서수혁 상병과 사수들은 단 1초의 오차도 없이 놈을 향해 발포했다.
-크륵, 컥...!
사수들의 총알은 저 괴물들에게 확실히 적중했다.
광역 공격에 특화된 마법사들과 달리, 대인 화력에 특화된 사수들.
'피어'가 적용된 상태라고는 하나, 사수들의 화력은 여전히 치명적이었다.
빼빼 마른 괴물들 중 반수 이상이 머리가 터져 사망하고.
나머지 역시 고통스러운 듯 온몸을 비틀어 댔으나.
그게 마냥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고통에 몸을 비틀어 댄다는 건 즉.
죽이지는 못했다는 뜻이니까.
"아니. 저 노래의 효과도 있었으니 어쩔 수 없지."
장벽 뒤로 달려들던 괴물 중.
요격에 성공한 것은 반 정도.
나머지 반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벽 뒤로 몸을 옮기는 데 성공했다.
"저 벽을 향해 공격해라!"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김 중위가 다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부대원들의 화력이 그 벽을 향해 쏟아졌으나.
쯧.
'조금 늦었군.'
아군의 공격으로 벽이 무너지기 직전.
그 뒤쪽에서.
커다란 마력의 파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 어어!?"
"뭐야, 저건!"
파바바박!!!
놈들이 서 있던 땅을 중심으로.
바닥의 흙과 모래들이, 마치 의지를 가진 듯 움직이기 시작한다.
방벽 같은 것이 전진할 때는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만.
멍청한 생각이었다.
공성병기처럼 생겼다고 해서, 저들의 전략이 중세의 그것과 같을 리가 없는데.
놈들과 요새의 사이를 막아 주고 있던 강.
그 자연의 해자 한가운데.
"기, 길이 생겼어...?"
흙과 모래로 이루어진.
넓은 대로가 만들어졌다.
* * *
'저딴 짓도 가능할 줄이야.'
요리가 요새에 접근할 때 가교를 설치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강 위에 걸어갈 수 있는 땅을 만들어 버리다니.
-카아아아아아악!!!
강 한가운데에 길이 생기자.
괴물 놈들은 그 위로 신이 나서 달려들었다.
요새를 지켜 주던 자연의 해자가 그 의미를 잃었다.
쿠웅!!!
길을 타고 달려든 것은 괴물 놈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놈들이 끌고 온 공성병기가 성문을 두들기고.
멀리서는 캐터펄트가 성벽 위의 포대를 노렸다.
"계속해서 사격해라!"
그에 맞서 아군의 화력 투사가 계속되고 있었으나.
아직까지 저들의 '전쟁 노래'는 유지되고 있는 상태.
저 성문이 열리는 것을 막기는 힘들 것 같았다.
"대단한 짓을 해 주셨어."
강에 길을 만들어 내다니.
정말 상상도 못 한 짓이었다.
하지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강에 길을 만든다는 것만 상상하지 못했을 뿐이지.'
요새의 성문이 뚫릴 경우는.
얼마든지 상정해 뒀거든.
콰아아아앙!!!
[주의!]
[남쪽 성문 Lv.2가 파괴되었습니다.]
계속되는 공성추의 공격.
결국 요새를 지키던 성문이 무너졌다.
"서, 성문이 뚫렸다!"
"제기랄. 이제 어떻게-"
도시의 각성자들이 혼란에 빠지는 모습.
이해는 간다.
일반적인 공성전이라면, 성문이 뚫린 시점에서 수비 측의 패색이 짙어졌다고 봐야 할 테니까.
하지만.
놈들이 전략이 평범한 중세의 그것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
우리의 전략 역시.
요새가 뚫린다고 마냥 당해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카하아아아악!
괴물 놈들은 신이 난 듯 괴성을 지르며 부서진 성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놈들이 원하는 신나는 학살극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카...악?
무너진 성문.
그 안에서.
철그럭....
[열화 용아병]
전신을 갑옷으로 무장한.
강철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134화 점령전 (2)
-아프다, 아파!
녹색갈기 부족의 고위 주술사.
카르굴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주술을 연마한 이들은, 전사들에 비해 몸이 약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전사들이 방벽을 설치한 뒤에야 주술사들이 나선 것이었다만.
-카하하. 그 짧은 순간을 노리다니. 대단한 수완이로군.
전사들의 보호가 없어진 순간을 노린 사격.
그로 인해, 귀중한 주술사 중 절반이 사망.
이번 원정에 참여한 주술사들을 이끄는 카르굴은 오른팔부터 어깨까지가 모두 날아가 버렸다.
-크륵. 적들을 칭찬하다니. 미친 것인가!
-...자업자득이다. 주술사.
-크으윽.
주술사의 말을 찍어 누른 것은.
다른 전사들보다도 유독 큰 몸집을 지닌 전사.
녹색갈기 부족이 자랑하는 전사 중에서도, 부대를 이끌 자격을 허락받은 치프틴.
하라-발이었다.
그가 대놓고 면책을 주었음에도.
고위 주술사 카르굴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네놈들이 말한 대로라면 본래 저런 요새는 없었어야 정상 아닌가.
-크윽.
-요새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면 다른 전략을 준비해 왔을 테지.
하지만.
이건 주술사들로서도 억울한 일이었다.
'저런 요새가 갑자기 어디서 솟아났단 말이냐!'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족은 전쟁을 멈춘 상태였으나.
주술사들만은 누구보다 바쁘게 일해야만 했다.
그들의 눈을 가리고, 천기를 숨기려고 한 존재.
그와 영적인 대결을 나누어야 했기 때문.
그 대결에서 결국 승리한 것은 주술사들이었다.
부족의 주술사들은, 별에 비친 지상의 모습을 보았다.
이 근방의 세력과, 방어시설 등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데 성공한 것.
그 정보를 바탕으로, 부족은 침공을 개시했다.
주술사들이 알아낸 정보를 바탕으로 침공에 필요한 준비가 이루어졌었다만....
'이곳에 도시가 있다는 건 알았다. 상당히 많은 토착종들이 있다는 것도...!'
그렇기에, 원정군의 전력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편이었다.
충분한 준비를 갖추느라 침공이 조금 늦춰졌을 정도로.
하지만.
그 준비는 어디까지나 도시에 있는 토착종들을 상대로 한 것.
'강 위에 세워진 포격 시설까지 갖춘 요새?'
그에 대응할 만한 장비 따위.
가져올 이유가 없었다.
요새가 있다는 정보가 없었으니까!
주술사들이 천기를 엿볼 때만 해도, 저런 요새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엄청난 규모의 요새로군. 고향에서도 본 적이 없을 정도의 규모야. 저런 요새가 갑자기 허공에서 솟아날 리는 없으니.
-....
-네놈들. 주술사들이 일을 잘못한 것이지. 그야말로 자업자득 아닌가.
-크으윽.
몇 번이고 확인을 거쳤던 주술사들로서는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으나.
부족의 입장에서는 주술사의 실수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몸으로 때웠지 않느냐!
-큭큭. 팔 한쪽 없어진 모습도 썩 나쁘진 않아.
주술사들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주술을 사용한 것도 그래서였다.
자신들이 싼 똥은 자신들이 치워야 하는 법.
그들이 감지하지 못한 요새에 대한 공략법은 그들이 몸을 바쳐서라도 마련해야 했으니.
-아무튼 고생했소.
-흥....
-강을 가로지르는 길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니. 다음은 우리 전사들에게 맡기시오.
강 위에 세워진 요새는 확실히 위협적이었으나.
일단 길이 생긴 이상.
그들 전사들이 해결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저 도시의 토착종들을 처리하고도 더 깊이까지 침공해 들어갈 것을 상정한 부대.
수상 요새에 대비한 전략이 없었을 뿐.
전력 자체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동원되었으니까.
-요새가 있다는 정보는 틀렸지만. 그 외의 정보는 틀림없겠지?
-흥. 당연한 소릴. 토착종의 숫자는 많지만. 그중 주의할 만한 강적은 300명도 되지 않아.
-그렇다면. 우리 전사들이 질 이유는 없지.
거구의 전사, 하라발이 호방한 웃음을 지으며 소리 질렀다.
-다들 전진하라!
이번 전장을 지휘하는 치프틴, 하라발의 명령에 따라.
부족의 전사들이 요새를 향해 전진한다.
그들의 전쟁 노래가 울려 퍼지며 적들의 공격을 무마하고.
인간들을 노예 삼아 끌고 온 전차들이 불을 뿜으며.
부족의 주술사들이 만든 공성 장비가 성문을 두들겼다.
아무리 드높은 요새라고 한들.
수많은 전쟁을 겪어 온 부족의 전사들에게는 공성전 역시 익숙한 것이었다.
그리고.
쿠웅....
요새의 성문이 부서진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부족의 전사 수천이 요새에 들어가 안에 있는 적들을 처리한 뒤.
그 뒤에 있는 도시의 어중이떠중이들을 학살하는 것뿐.
...이라고 생각했는데.
서걱-
-뭣!?
가장 앞서서 요새로 들어가려 하던 전사의 몸이.
무언가에 의해 두 동강이 났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토착종... 같지는 않군.
칠흑의 갑옷을 두른 기사들.
치프틴급의 전사인 하라발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를 한 전사들이었다.
그들이 칼을 휘두를 때마다.
부족의 전사들이 무력하게 베어져 나갔다.
-주술사. 요새 외에는 틀린 정보는 없을 거라 하지 않았나?
-....
-저런 존재는 들어 본 적이 없다만.
-그, 그게.
주술사가 변명을 해 보려 했으나.
그런 변명을 일일이 들어주기에는 전장의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일은 나중에 부족 회의에서 다루도록 하지.
정말이지.
주술사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 * *
[열화 용아병]
그 이름대로.
본래의 용아병에 비하면, 아무래도 그렇게 강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래의 용아병에 비교할 경우고.
"가, 강하다...."
부대의 병사들이 [열화 용아병]을 보며 중얼거렸다.
강자들이 즐비한 우리 부대의 병사들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지켜봐야 할 정도.
녹색갈기 부족.
저 괴물들도 상당히 강했다.
'무려 노란색의 기운을 내뿜는 괴물이니까.'
게다가, 종족 자체의 특성일까.
저 수많은 전사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잠재력을 개화한 상태였다.
하지만.
서걱.
-크뤄어어억!!
그런 괴물들이, 용아병의 칼질 한 번에 두 동강이 난다
놈들이 성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고 하나.
성문은 그렇게 넓지 않았다.
수십 마리의 용아병이 충분히 틀어막을 수 있을 정도로.
'한 마리의 용아병이 생성되는 데 필요한 시간은 3시간.'
지금까지 뽑는 데 성공한 건 총 80마리.
수천 마리의 적에 비하면 아무래도 모자람이 있다.
막말로 평지에서 싸운다면 저 엄청난 병력에 파묻혀 금세 박살 나 버리겠지.
'물론 그건 평지에서 싸울 때 얘기고.'
지금은 좁은 성문을 틀어막고 싸우는 상황.
수적 열세는 큰 의미가 없었다.
좁은 입구.
수십, 수백의 정예병이 수만의 병력을 막을 수도 있는 환경이었으니까.
"저 녀석들. 얼마나 강한 겁니까?"
"음. 글쎄."
수혁이 녀석의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해 봤다.
내가 직접 성능을 실험해 본 결과에 따르면.
"우리 부대의 대장급... 광일이보다 조금 약한 수준 아닐까?"
"...예?"
그 말에.
감정 변화가 적은 편이던 서수혁 병장조차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말이 됩니까?"
"전광일 상병님 정도의 전사가 80마리나 있다니."
"아. 그냥 단순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거고. 세세하게 비교하면 다르긴 하지."
검은 갑옷을 두른 전사들.
분명 강하긴 더럽게 강하다.
하지만 내가 성능 테스트를 하며 그 갑옷 안쪽을 살펴본 결과.
안쪽에는 인간 형태의 뼈다귀만 있을 뿐이었다.
즉.
"쟤네는 음식을 못 먹거든."
"아."
김 중위의 피어 계열의 버프는 적용되겠지만.
내 요리를 통한 버프를 얻기는 힘들다.
최근에야 괴물은 물론 나무에게도 요리를 먹여 봤다지만.
뼈가 음식을 먹는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거든.
"요리를 통한 버프나 [광기] 같은 특성까지 포함하면 광일이 녀석이 훨씬 더 강하겠지. 요리까지 감안하면 전사 중에서도 비슷한 급이 몇 명 있을걸? 대원이랑 한일이라던가."
"그, 그렇군요."
"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엄청난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요리를 비롯한 버프를 모두 받는다고 한들.
저 정도의 강함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없다.
말 그대로 최고참 병사들의 바로 아래 수준.
우리 부대에도 10명은 될까?
"저게 열화된 거라니."
열화되기 전의 용아병은 저것보다 20배는 더 강했겠지.
괜히 '최초 달성 보상'이 아니란 거다.
"그리고. 그냥 강한 게 전부가 아니지."
강한 걸로 따지면 결국 버프를 받은 광일이가 훨씬 더 강하다.
하지만 광일이가 80명이 있다고 한들.
수천의 병력을 상대로 저렇게 성벽을 막고 버틸 수 있을까?
'될 리가 있나.'
아무리 광일이가 강하다고 한들.
저만한 숫자의 괴물들이다.
놈들에게 당하지는 않을지언정, 사람의 체력은 무한하지 않다.
전쟁에서 미쳐 날뛰는 광전사라 할지언정.
언젠가는 지쳐서 물러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놈들은 사람이 아니거든.
[용아병들은 절대 지치지 않습니다.]
[파괴되기 전까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파괴되기 전까진 절대 지치지 않는다.
아무리 오래 싸워도 체력의 소모가 없다는 것.
좁은 공간에서 싸우는 만큼 숫자로 밀어붙일 수도 없다.
저 용아병들을 치우려면, 애초에 용아병보다 강한 존재가 올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저 괴물들... 숫자도 많고, 강하긴 한데. 딱 거기까지야."
"예?"
전쟁을 위해 태어나는 종족이라고 했나.
엄청난 출산 능력에, 6개월 만에 1인분의 전사로서 완성되는 놈들.
여기까지만 들으면 완벽한 종족처럼 느껴진다만.
내가 [전투력 측정기]를 통해 살펴본 결과.
한계도 분명히 존재했다.
"대부분이 비슷한 수준으로 강해. 특별하게 강한 괴물은 극히 드물더라고."
일정 수준까진 빠르게 도달하지만.
그 이상으로 강해지는 건 힘들다는 거겠지.
"수천 마리나 모여 있지만, 용아병을 부술 수 있을 만한 강자는 드물 거야."
어쩌면 아예 없을 수도 있고.
좁은 성문을 지키는 싸움이니 숫자로 밀어붙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성문을 뚫었을 때는 자기들이 이긴 줄 알았겠지."
하지만.
그곳을 용아병들이 막아섰다.
기껏 성문을 부순 노력이 무색하게도.
괴물 놈들은 저 용아병들을 뚫지 못한 채 막혀 있었다.
게다가.
우리 병력은 용아병만 있는 게 아니거든.
"계속해서 쏴라!"
[전장의 함성 - 포격 명령이 울려 퍼집니다.]
요새에서는 화력 투사가 계속되고 있다.
[전쟁 노래]를 통해 피해를 어느 정도 무마시키고 있다고 하나,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지치지 않는 용아병들을 어떻게든 뚫어 내지 못하는 한.
이 국면은 계속해서 유지될 수밖에 없다.
놈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다.
하나는, 공략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
물론 놈들이 돌아가는 걸 그냥 보내 줄 생각은 없다.
후퇴 중인 병력만큼 빈틈이 많은 병력도 없는 법이니까.
후퇴를 결정할 경우, 뼈아플 정도의 피해를 안겨 줄 자신이 있다.
두 번째 선택지는.
어떻게든 방법을 내서, 이 국면을 돌파하는 것.
"슬슬 오려나?"
두 번째 선택지를 골랐을 경우.
곧 뭔가 제스처를 취해 올 터.
그리고.
과연 내 예상대로.
"저기, 뭔가 접근합니다!"
"...투석기 같은 건가?"
멀리서 접근해 오는 공성병기.
캐터펄트....
투석기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성벽을 무너트리겠다는 건가?'
성문을 뚫기가 힘드니.
다른 곳에 구멍을 내겠다는 전략은 이해가 간다만.
"그건 안 먹힐 텐데."
[기동요새 비마나 Lv.1]
[내구도 = 91873/100000]]
이 요새.
성문은 Lv.2에 불과한 탓인지, 비교적 금방 무너졌다만.
성벽은 이상할 정도로 튼튼했다.
투석기에 몇 번 두들겨져 봐야 금도 안 갈 정도.
실제로 저들은 전차를 끌고 오기까지 했다만.
그 전차의 포격에도 내구도가 거의 닳지 않은 모습이었다.
저 투석기도 평범한 중세의 그것과는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제 아무리 성벽을 공격해 봐야 의미는 없겠지.
"응?"
그런 내 예상과 달리.
놈들이 끌고 온 투석기 위에 올려진 것은 커다란 돌덩이 따위가 아니었다.
"허허, 미친."
팡!!!
투석기가 작동하고.
요새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무언가.
그 무언가는, 부숴야 할 성벽을 노리고 날아온 게 아니었다.
놈들이 노린 것은 조금 더 위쪽.
성벽의 위를 지나, 요새 안으로 떨어진 것은.
-크륵!!!
-크워어어어어어!
[녹색 갈기 전사]
[녹색 갈기 정예 전사]
"화끈한 새끼들일세."
괴물들.
투석기에 탑승해 몸을 던진 괴물들.
놈들이 요새 안에 자리를 잡았다.
135화 점령전 (3)
투석기를 통해 요새 안으로 '투석'된 괴물들.
그 전부가 성벽을 통과한 것은 아니었다.
푸직!
-키에엑....
일부는 성벽에 부딪혀 그대로 튕겨 나가기도 했으며.
"요격해라!"
사수와 마법사들의 견제 사격.
그로 인해 절반 이상이 요격당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포화를 뚫고 요새 안쪽으로 들어온 괴물들.
-크, 크륵....
-케흑. 쿨럭.
그놈들 역시, 반쯤 죽어가는 꼴이었으니.
"미친 괴물들 같으니."
"저 멀리서 투석기로 날아왔는데. 아무리 괴물이라도 몸이 성하고 배겨?"
투석기.
애초에 생명체를 던지기 위해 고안된 병기가 아니다.
낙하 당시의 충격만으로도 대부분의 괴물들이 몸 어디 하나는 부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강력한 몬스터들이라 간신히 즉사는 면한 꼴.
반대로 말하면
"이렇게 해서라도 요새 안쪽을 두들겨야겠다 이거군."
요새의 성벽은 단단하고, 높다.
기껏 뚫은 성문은 용아병들이 틀어막고 있다.
성벽을 기어오르기에는, 사수와 마법사들의 화력이 너무 강력했다.
이 방법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
안쪽에서부터 흔드는 거지.
'용아병들이 성문을 틀어막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
첫째로
용아병들은 지치지 않는다
둘째.
그리고 성문이 좁아서 용아병들과 괴물들이 사실상 1:1의 싸움을 해야 한다.
지치지 않는 용아병들은 사실상 무한하게 싸울 수 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요새 안쪽에 진입한 괴물들이, 용아병들의 뒤를 친다면?
'아무리 강하고 지치지 않는다고 해도. 2:1이 되는 순간 파괴당할 수도 있다.'
그렇게 용아병들이 한두 마리씩 파괴되는 순간.
성문에 빈틈이 생기고, 용아병에 막혀 있던 수천 마리의 본대가 안쪽으로 들어올 것이다.
거기까지 가면 우리가 패배한 거나 다름없겠지.
다만.
"그 꼴로 되겠냐?"
헛웃음이 나온다.
온전한 상태여도 될까 말까인데, 부상당한 상태로 안쪽을 뚫겠다니.
'우릴 얕봐도 너무 얕보시는데.'
군단의 병사들.
거기에 협력을 약속해 온 도시의 각성자들까지.
그 모든 전력은 요새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을 위해.
* * *
"큭...!"
투석기를 타고 요새 안쪽으로 들어온 '녹색 갈기 전사' 들.
비록 부상을 입었다고 하나, 본래 한 마리 한 마리가 상당히 강력한 괴물들이었다.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은 편인 도시의 각성자들은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요새에 있는 건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큭큭... 크하하하하!"
요새 안에서 울려 퍼지는 광소.
각성자들의 시선이 그 소리의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의 거구를 자랑하는 병사.
그리고.
-콰직!
그 손에 하나씩 들려 있는 괴물의 머리통이었다.
각성자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던 강력한 괴물.
그 괴물의 머리통이, 거구의 병사의 손안에서 으깨져 버렸다.
"재밌구나!"
괴물 한 마리의 머리통을 박살 내 버린 전광일 상병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이 또 다른 괴물의 머리통을 쥐는가 싶더니.
콰지지지지직!
-크, 크르르륵...!
그대로 건물의 벽에 처박은 뒤.
거칠게 갈아 버렸다.
괴물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춰 버렸다.
"참으로 재밌어! 나를 더 즐겁게 해 봐라!"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거구의 병사.
그 주변에는 이미 시체가 된 괴물들이 즐비해 있었다.
-크륵....
제 몸이 망가지는 것조차 개의치 않으며 요새 안으로 몸을 던진 '녹색 갈기 전사'들이었으나.
그들조차 전광일 상병이 내뿜는 기세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각성자들은 그 모습을 보며 아연해졌다.
"...저게 인간이라고?"
각성자들이 서너 명씩 모여서 괴물 한 마리를 겨우 상대한다면.
전광일 상병은 단신으로 괴물 서너 마리를 압도해 버렸다.
다른 군인들 역시 나름대로 괴물들을 상대로 분전하고 있었으나.
그들과 비교해도 급이 다른 강함.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데?"
말마따나.
괴물보다도 괴물 같은 존재감이었다
* * *
[녹색 갈기 부족]이 동원한 투석기.
그걸 타고 날아든 것은 [녹색 갈기 전사]뿐만이 아니었다.
"이쪽은 처리했습니다!"
"아니, 잠깐만."
한 무리의 괴물들을 처치한 병사들.
그중 선임병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저기. 몇 마리 더 있다."
선임병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 서 있는 것은 분명 녹색 갈기 부족의 괴물이었으나.
다른 전사들과 달리 기괴할 정도로 마르고 길쭉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뭐야?"
"한 대 치면 부러질 것처럼 생겼는뎁쇼."
"야, 조심...!"
가볍게 여긴 병사들이 무기를 뽑고 달려들자.
메마른 몸의 괴물들이 바닥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콰지직...!
"큭!"
그들의 손이 닿은 땅이 뒤집어지며 병사들을 덮쳤다.
오르크 족의 주술사들이 장기로 삼는 대지의 주술.
덤벼들던 병사들이 주술에 밀려나자.
그 사이를 [녹색 갈기 전사]들이 메꿨다.
주술사들은 전사들의 엄호를 받으며 부대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앞쪽에는 전사들에, 뒤쪽에는 마법사라."
지금까지 상대했던 괴물들과는 조금 다르다.
요새의 성문을 공략할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이놈들은 전술을 능숙하게 다뤘다.
"저거 큰일인데요."
"그러게. 우리 병사들은 그나마 괜찮겠지만."
군단의 병사들이야 워낙 산전수전 다 겪었다 보니.
전술을 사용하는 적이라고 한들 크게 힘겹지는 않았다.
"제, 제길!"
"무슨 괴물들이 진형을 짜!"
문제는 평범한 각성자들.
짐승이나 다름없던 괴물들만 상대해 왔던 그들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콰릉....
'콰릉?'
어디선가 울리는 번개 소리.
사람들의 시선이 그 진원지를 향했다.
요새의 상공.
맑은 하늘 한가운데에, 작은 먹구름이 하나 보였다.
"...어?"
훤한 대낮에 갑자기 생겨난 먹구름.
그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기도 전에.
콰아아아아앙!!!
먹구름에서 거대한 번개가 내려쳤다.
전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주술을 사용하던 [녹색 갈기 주술사]들.
그 대부분을 불태워 버릴 정도로 강력한 번개가.
'이민재 병장님이다!'
번개를 떨군 이민재 병장은 말없이 돌아선 뒤.
다시 성벽 밖의 적들에게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수들과 마법사들의 임무는, 성벽 밖에 몰린 괴물들의 처리.
그 와중에 잠깐 안쪽에 힘을 실어 준 모양.
"미, 미친."
"먹구름을 불러오다니."
평범한 각성자들로서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번개를 던지는 정도의 마법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특히.
그중 기억력이 좋은 몇몇은 더 크게 놀라고 있었다.
'저 먹구름. 본 적이 있어.'
도시가 아직 물의 장벽에 갇혀 있을 무렵.
물에 뒤덮인 도시의 중심부를 타격한.
신벌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번개.
'그것도... 군인들이 한 짓이었다고?'
당시 던전 공략에 합류한 소수의 그룹만이 알고 있을 뿐.
대부분의 각성자들에게는 베일에 싸인 상태였던 '신벌'.
그 정체가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 * *
"크으. 죽겠네!"
"제기랄. 왜 여기에만 적들이 몰린 거야!?"
"우리가 운이 더럽게 없었나 보지!"
투석기를 통해 요새 안으로 쏟아져 내려온 괴물들.
그중, 우연히 유독 많은 괴물들이 떨어진 장소가 있었다.
"지원 병력은...."
"다른 곳이라고 편하겠냐! 우리끼리 해야 해."
"돌겠네."
아무리 강한 군단의 병사들이라고 한들.
수적 열세 앞에서는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어, 저거 누구야."
"이번에 들어온 신병 같은데?"
"신병이라고? 이런 미친... 야! 돌아와!"
병사들 사이에서 한 인형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진형을 벗어나 적들의 한 가운데로 걸어가는 신병.
'저게 미쳤나!'
군단은 가장 약한 병사조차 나름대로 강한 힘을 지닌다.
가입하는 시점에서 제공되는 장비들.
거기다 능력치를 올려 주는 길드 스킬들의 영향을 받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차라리 다른 전장이라면 모를까.
괴물이 유독 많이 몰린 이곳은, 신병이 나서기에는 너무 위험한 전장이었다.
"제기랄, 저 새끼 잡아...."
"죄, 죄송해요."
앞으로 나서던 신병이 입을 열었다.
"참아 보려고 했는데... 저놈들을 보니, 너무 배가 고파서 그만."
"뭐?"
병사들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배가 고프다니.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신영준 병장이 만든 버프 요리를 모든 부대원이 먹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것들은 사람들을 위협하는 괴물들이니...."
중얼거린 신병이 괴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힘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손이었으나.
그 손에 괴물이 붙잡힌 순간.
쩌저저저적...!
살이 뜯겨 나가는 소리와 함께.
괴물의 팔이 뜯겨 나온다.
"먹어도 되는 거잖아요?"
"...."
잠시 뒤.
병사들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녹색 피부의 괴물이 그녀의 입 안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그녀의 오른팔이,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 * *
몬스터 웨이브.
이를 막기 위해 요새를 만들고, 용아병을 양산하는 등.
여러 준비를 하긴 했다만.
그래야만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압도적인 수적 열세 때문.
만약 비슷한 숫자였다고 한다면.
요새고 뭐고.
군단 측의 압도적인 승리였겠지.
한 마리 한 마리가 나름대로 강하고.
심지어는 전략까지 사용하는 괴물들이라고는 하나.
전력도, 전략도.
모두 군단 측이 앞서고 있었다.
요새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싸움.
양측의 숫자는 비슷하거나, 녹색 갈기 측이 약간 더 많은 상황.
하지만 전황은 군단 측에게 압도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챈 것일까.
2미터가 넘는 괴물인 [녹색 갈기 전사].
그들 사이에서.
다른 괴물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대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콰직.
퍼어어억.
쿵!
"아까의 기세는 어디 갔느냐!"
전광일 상병.
그는 괴물들을 상대로 학살을 벌이고 있었다.
요리로 인한 버프를 제외하더라도, 저 용아병들보다 조금 더 강할 정도의 강자.
거기에 지금은 신영준 병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요리까지 먹은 상태였다.
"이것밖에 안 된단 말이냐!!!"
-크에에에엑!
평범한 괴물들 따위.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저게 사람이냐? 괴물이지."
"평소에는 얌전하신 분이 싸움만 시작됐다 하면 저러니."
"...아군이라서 정말 다행이다."
요새 안에서 벌어진 전투.
거기서 가장 큰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것은, 누가 뭐래도 전광일 상병이었다.
"어?"
그때.
"전 상병님! 전 상병님!"
"크르륵.... 다음은 네놈이냐?"
"예? 아. 아뇨! 제가 아니라! 저기 좀 보십쇼!"
"음...?"
전광일 상병은 후임의 재촉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저 멀리.
"음?"
안 그래도 덩치가 큰 괴물들.
그 사이에서.
다른 괴물들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거대한 전사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뭐야 저놈은?"
"엄청 크네. 패는 맛은 있겠어."
병사들과 각성자들이 거대한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덩치가 크다고 한들, 그래 봐야 한 마리.
'지휘'와 '요리'의 버프를 모두 받은 그들의 적수가 될 턱이 없....
콰아아앙!!!
"커헉."
괴물이 휘두른 무기에 얻어맞은 병사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근처 건물의 벽에 처박힌 그의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
그 모습을 본 병사들과 각성자들 사이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튕겨 나간 병사는 결코 약한 병사가 아니었다.
423대대 출신의 고레벨 전사 각성자.
그런 그가, 단 일격에 정신을 잃은 것.
"...강적이다!"
"방어 태세로! 최대한 막는다!"
범상치 않은 괴물인 것을 눈치챈 이들이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 앞을 막아섰으나.
"쿨럭."
"끄륵...."
거구의 괴물이 도끼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한 명의 각성자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고 만다.
엄청난 전투력.
평범한 병사들로서는 막을 수 없을 정도의 강적.
대부분의 병사들은 식은땀을 흘렸으나.
단 한 명.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가 있었다.
"크하하하하!!! 드디어!"
적의 강함을 두 눈으로 본 전광일 상병.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뻔한 것이었다.
"조금은 재밌을 것 같은 놈이 나타났구나!"
기쁨을 숨길 생각조차 없이, 광소를 내뿜는 전광일 상병.
그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광기]
이성을 잃어버리는 대가로, 한계를 초월하게 만들어 주는 힘.
쿵!
전광일 상병이 땅을 박차고 몸을 내던졌다.
2미터가 넘는 거구가 총알 같은 속도로 적을 향해 돌격했다.
136화 점령전 (4)
-무리한 짓은 하지 말라, 치프틴!
하라-발이 투석기에 몸을 담기 전.
고위 주술사는 그를 말리며 말했다.
-요새 안으로 침투하는 것은 다른 전사와 주술사들로 충분하다. 그들이 성공한다면 그대가 나설 필요도 없을 것이고. 그들이 실패한다면 그대가 나서도 실패할 것이야. 일단은 기다리라. 저들이 실패하면, 후퇴한 뒤 작전을 다시 점검해야....
-크륵.
그 말이 하라-발의 심기를 건드렸다.
분노한 하라-발의 입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부족에서도 손꼽히는 전사이자, 차기 대전사로 여겨지는 전사가 내뿜는 기세.
고위 주술사는 상처 입은 부위가 더 쓰라려 오는 것을 느꼈다.
-주술사들은 긍지도 모르는가. 전사에게 후퇴란 없다.
-...부족의 전통을 잊었는가? 주술사의 의견을 경청하라. 치프틴.
-주술사의 의견이라. 예전이라면 확실히 경청할 필요도 있었겠지. 하지만.
강 위에 떠 있는 요새.
그리고 그 성문을 틀어막고 있는 기괴한 갑옷들을 턱짓하는 하라-발.
-저런 것들을 보고도 주술사를 믿으라니. 그대라면 가능하겠나.
-....
고위 주술사는 속으로 한탄했다.
그들이 점성술을 통해 알아낸 정보가 틀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왜 이해하지 못하는가!
고위 주술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저 요새도 그렇고, 저 검은 갑옷들도 그렇고. 저런 것이 갑자기 나타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실제로 일어났지.
-...무언가 심상치 않다. 우리의 인지를 벗어나는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고 있어.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저 요새 안에,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한 존재가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다!
최대한 설득하려 한 고위 주술사였으나.
하라-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주술사들은 너무 겁이 많아.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
-치프틴!
투석기 위에 제 몸을 얹으며.
하라-발은 덤덤하게 말했다.
-정 그렇게 두렵다면. 내가 죽은 뒤에 병력을 물리시오, 주술사.
-....
그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주술사는 한탄했다.
-대족장께서 살아계셨다면....
주술사가 조언하고, 전사들이 수행한다.
오랜 부족의 전통.
하지만 이 전통은 무너져 가고 있었다.
주술사와 전사의 사이를 조율해 주던, 그들의 왕.
대족장은 이제 세상에 없었으니까.
그들은.
지도자를 잃고 다른 차원을 방랑하는 꼴이 되어 버렸으니까.
-...살아 돌아오길 기원하지.
-아니. 그대는 내가 죽기를 바라야 할 것이오. 내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잘못된 정보를 유포한 것으로 모자라, 겁먹어서 도망치자고까지 한 겁쟁이를 용서하지 않을 테니.
그렇게.
치프틴은 요새 안쪽으로 제 몸을 던져 넣었다.
* * *
각성한 뒤에 점점 키가 자라난 결과.
이제는 2미터 30센티에 달하게 된 거구의 전사.
전광일 상병.
그리고, 그런 그보다도 거대해, 거의 3미터에 근접한 초록색 피부의 괴물.
녹색갈기 부족의 치프틴, 하라-발.
쿠우웅!!!
두 거인들이 요새의 한가운데서 격돌했다.
그 여파로 주변의 땅이 흔들렸다.
"제기랄!"
"다들 빠져! 우리가 낄 전투가 아니다!"
평범한 각성자들은 물론.
군단의 병사들조차 전투로 인한 여파를 버티기 힘들었다.
쿵!
"크륵...!"
치프틴이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자.
전광일 상병은 양손의 건틀릿을 교차해 공격을 막아 냈다.
그럼에도 충격을 모두 받아 내지 못해, 전광일 상병의 몸이 수 미터씩 뒤로 밀려났다.
몸이 밀려나는 것 정도야, 전투를 겪다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하지만.
그 광경을 본 병사들은 경악했다.
'전광일 상병님이 밀려나다니.'
'최소한 보스 몬스터급...!'
요새에서의 전투가 시작된 뒤.
그가 처음으로 밀려난 순간이었으니까.
한편으로.
전광일 상병을 날려 보낸 괴물, 하라-발은 생각했다.
'토착종들 중에서도 이런 강자들이 있을 줄이야.'
이번 전투의 지휘관이자.
부족 내에서도 손꼽히는 전사.
부족을 이끄는 대전사조차 그를 신뢰해, 이번 침공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대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런 그가, 군단의 병사들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토착종들은 벌레 같은 놈들뿐이라고 생각했건만.'
[녹색갈기 부족].
그들은 강원도 북서부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을 위해 태어난 종족.
그중에서도 병력으로는 한 손가락에 꼽히는 녹색갈기 부족이기에 가능했던 성과.
물론 그 점령지를 모두 안정화시켰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들의 점령지 안에도 그들을 위협할 만한 강적은 얼마든지 있었다.
'토착종들의 병기고를 지키는 존재들이 대표적이겠지.'
가까스로 그 병기들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으나.
부족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그 위협이 될 만한 적들 중에, 토착종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마력조차 느껴지지 않는 약자들.
드물게 마력을 띄는 이들조차 부족의 전사들과 비교하면 한참은 모자랐으니까.
그러나 지금.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카하하하하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요새 입구를 막고 있는 존재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요새 안쪽에서의 싸움에서조차 부족의 전사들이 밀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하라-발이다.
하지만, 요새 안에 있던 토착종들은 강했다.
하라-발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튕겨 나간 이들조차 부족의 전사들과 비슷하거나 더 강력한 수준.
그중에서도 특히.
가장 큰 전과를 올리고 있던 것이 바로 이 전사.
쿵!
하라-발의 공격이 또다시 전광일 상병에게 적중한다.
피해가 상당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크... 크하하하! 더, 더 공격해 봐라!"
상처를 입으면 입을수록, 더욱 기쁘다는 듯 날뛰는 모습.
멀리서 보았을 때도 경계할 만한 강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기에 지휘관인 하라-발이 직접 나선 것이다.
'하지만 이 모습은 대체.'
녹색갈기 부족은 전투를 숭상한다.
하지만.
그런 그의 부족에서조차, 이 정도의 광기는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 모습에.
하라-발은 한 가지 이야기를 떠올렸다.
부족에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전설.
누구도 진심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전사를 꿈꾸는 부족의 아이들이라면 모두가 한 번쯤은 꿈꿨던 존재.
-광전사?
광전사는 전투가 끝나기 전까지는 죽여도 죽지 않는다.
살점이 베여나갈수록 더욱더 쾌감을 느끼며.
피를 흘릴수록 그 힘은 더욱 강해진다던가.
그야말로 전설 속의 전사.
하라-발은 겸허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이 전사.
살려 두면, 언젠가 부족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주술사가 말한 것도 거짓은 아니었군.
주술사들의 인지를 벗어난 짓을 벌이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존재가 있다던가.
'그저 겁먹은 주술사의 헛소리라고 생각했건만.'
만약 이 전사가 정말로 그 '광전사'라면.
인지를 벗어나, 불가능을 가능케 할 수도 있겠지.
주술사가 말한 것도 거짓은 아닌 셈이다.
그렇기에 결심했다.
-여기서 죽인다.
콰직!
하라-발이 전력을 다해 휘두른 도끼가, 전광일 상병의 어깨에 찍혔다.
아무리 전설에서나 다뤄지는 존재라고 한들.
그 재능을 모두 개화하지 못한 지금.
차기 대전사로 꼽히는 부족의 영웅.
하라-발의 적수는 아니었다.
* * *
콰직!
전광일 상병의 방어가, 기어코 뚫렸다.
괴물이 휘두른 거대한 도끼가 그의 어깨에 박혔다
본래라면 그대로 어깨를 지나 온몸을 두 동강 냈어도 이상하지 않을 위력.
[중급 재봉사와 중급 공병의 강철가죽 강화 지휘 전투복]
-평범한 가죽이 아니로군.
군단의 공병들과 재봉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방어구.
[강철을 먹는 맥]에 의해 강화된 철판으로 급소를 보호하고.
그 위에 [강철 리자드]의 가죽을 덧대어 만든 전투복.
군단이 자랑하는 최고의 명품이, 그 충격을 크게 완화해 주었다.
하지만 그뿐.
"크륵!"
전투복조차, 하라-발의 일격을 모두 막아내진 못했다.
철판이 으스러지고, 가죽이 찢겨 나가며.
전광일 상병의 어깨에 박히는 거대한 도끼.
뼈가 보일 정도로 크게 베인 상처.
짜릿한 고통이 전광일의 등을 타고 올랐다.
"크, 크흐흐...."
다른 이들이었다면, 기절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고통.
하지만 전광일 상병은.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 고통을 광기로 치환했다.
최대한으로 해방된 [광기]가 마치 갑옷처럼 전신을 뒤덮는다.
인간의 언어는 물론.
기어코 인간의 전술조차 상실한 그가 짐승처럼 몸을 날렸다.
"저, 전광일 상병님을 도와야...!"
"아서라 인마! 우리가 끼어들 수준이 아니야!"
전광일 상병, 서수혁 상병, 이민재 병장.
부대에서도 가장 먼저 각성한 이들이자.
각 조의 조장을 맡았던 이들.
그 3인은 다른 부대원들과 비교해도 몇 단계는 앞서나가는 강자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전광일 상병은 남달랐다.
평상시의 그는 다른 둘과 비교했을 때 그렇게까지 강한 편은 아니다.
문제는, 그의 직업이 '광전사'라는 것.
[광기]를 모두 해방했을 때.
그는 다른 두 조장급 병사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괴물로 변한다.
그런 전광일 상병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오히려 압도하는 괴물.
군단의 다른 강자들은 모두 다른 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
"젠장!"
"아무나 가서 상병님들이나 병장님들 좀 불러와!"
평범한 병사들은 그 싸움에 끼어들 수조차 없었다.
그들이 지원을 요청하러 이동할 때.
전광일 상병의 머리를 채우는 감정은 단 하나였다.
'즐겁다...!'
눈앞의 녹색 거인은 강했다.
공격 하나하나가 묵직하다.
한 번이라도 공격을 허용하는 순간 엄청난 고통이 등을 타고 내달린다.
'이놈과 나! 둘 중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싸운다!'
하지만 그런 고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통이 지나간 자리를 채우는 것은, 희열.
'영광스러운 죽음이, 나를 기다린다!'
광기에 잠식된 머리로, 전광일 상병은 죽을 때까지 싸우리라 각오했다.
하라-발 역시.
눈앞의 전사가 대결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두 강자의 대결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쿠웅.
"크, 크크흐, 쿨럭...! 카하하하하!"
전광일 상병의 한쪽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전투를 지속할 수 없을 정도의 상처.
그럼에도, 전광일 상병은 광소를 지으며 주먹을 내뻗었다.
-대단한 전사다.
그 앞에 선 하라-발이, 전광일 상병을 내려다보았다.
-토착종들은 약해 빠진 벌레들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만, 내 오만이었구나. 전설에서나 들어 본 광전사... 그걸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입었음에도, 계속해서 주먹을 내뻗는 전사.
비록 지금은 그보다 약하다고 하나.
-시간이 지난다면 대전사님조차 위협했겠지.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쓰러진 것은 하라-발이었겠지.
-운이 좋았다. 그 재능이 모두 개화하기 전에 싹을 자를 수 있게 되었으니.
"그르륵...."
-...주술사가 경고한 존재도 네놈을 말하는 것이겠지. 반대로 말하면. 네놈만 죽일 수 있다면 두려워할 존재는 없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
양손에 쥔 도끼를 치켜드는 하라-발.
그 거대한 도끼가, 전광일 상병의 목을 향해 내리쳐진다.
-좋은 싸움이었다. 전쟁의 언덕에서 다시 만나자, 광전ㅅ....
도끼가 전광일 상병의 목을 베어 넘기려던.
바로 그 순간.
서걱-
어디선가.
살점이 베여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전광일 상병의 목은 아니었다.
-커, 커헉...?
녹색갈기 부족의 치프틴이자.
대전사조차 총애하는 위대한 전사.
그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등을 타고 오르는 고통을 참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마는 하라-발.
-도, 도대체 무슨...!
고통을 느끼면서도 상황을 파악하려는 치프틴.
그 모습을 보며.
한 남자가 중얼거렸다.
"와. 이 자식 이거 통뼈네."
전광일 상병, 서수혁 상병, 이민재 병장.
그들 3인은 다른 부대원들과 비교해도 몇 단계는 앞서 나가는 강자들이었으나.
단 한 명.
다른 부대원들과의 비교 대상으로 언급조차 되지 않는 남자가.
군단에는 존재했다.
137화 먹잇감을 보는 눈
하라-발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광전사'는 그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강자였다.
벌레로만 여겼던 토착종들 사이에서 나타난, 엄청난 강자.
주술사들이 겁에 질려 경고를 한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래 봐야 자신의 재능을 모두 꽃피우지도 못한 존재.
나중이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나.
당장의 강함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한 공격은 아니었다.
'공격을... 당한 건가? 언제?'
고통이 몸을 엄습하기 직전까지.
누군가가 그를 향해 접근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부족의 암부들조차 불가능한 일....'
하라-발 정도의 전사라면 공격이 이뤄지기 직전에는 눈치챌 수 있어야 정상.
그의 시선이 자신의 옆구리를 향했다.
오른쪽 어깨부터 허리까지 이어지는 부분.
그 넓은 부분의 살점이....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얼마나 깔끔한 손질이었는지, 새하얀 뼈가 그대로 비쳐 보일 정도.
하라-발은 식은땀을 흘리며 눈앞의 토착종을 바라보았다.
"쓰읍. 한 번에 내장까지 손질하려고 했는데. 이게 갈비뼈가 안 잘리네. 역시 중식도로 베어야 했나."
한 손에 쥔 중간 정도 길이의 도를 흔들며 인상을 찌푸리는 토착종.
다른 손에는 도끼처럼 널찍하지만 길이는 짧은 도를 쥐고 있었다.
그는 앞서 싸운 토착종과 비슷한 의복을 하고 있었으나.
훨씬 작고, 왜소했다.
전사보다는 암살자에 어울리는 모습.
'부족의 암부보다도 뛰어난 암살자가 있었나.'
자신을 바라보는 토착종의 시선에서.
하라-발은 소름이 끼치는 기분을 느꼈다.
'나를... 생명체로 보고 있지 않은 건가.'
공허하기까지 한 눈.
살아 있는 생명을 바라볼 때 저런 눈빛을 하는 존재는 없다.
높은 경지에 도달한 전사.
하라-발은, 그 눈빛에 담긴 의미를 직감할 수 있었다.
죽은 것.
혹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
'먹잇감을 보는 듯한 눈.'
하지만.
상대가 암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하라-발은 오히려 안심했다.
'암살자에게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몸을 숨기고 적에게 접근하는 데에는 능하지만.
그쪽을 단련한 만큼, 전면전에서는 전사들을 이길 수 없는 법.
그렇기에 암살자들은 일격에 적의 목숨을 끊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이 실패한 이상.
승패는 이미 갈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를 여러모로 놀라게 하는구나. 저 전사에 이어, 이토록 뛰어난 암살자라니.
첫 일격에 목숨을 잃지 않은 이상.
하라-발은 자신이 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소 지쳤다고 한들.
암살자를 상대로 질 만한 그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모자라다. 진정한 암살자라면 방금 일격으로 내 목숨을 끊어야 했어. 그게 실패한 이상, 네놈 역시....
"뭐라는 거야 얘?"
하지만.
그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하라-발의 옆구리를 베어 낸 인간.
그는 암살자 따위가 아닌.
[각성자 : 신영준]
[중급 요리사 Lv.29]
[적용 중인 요리 목록 - 4]
[파란의 물방울 젤리 - 특성, 환경 동화]
[리자드 육포 - 모든 능력치 상승, 방어력 상승, 특성, 강철 비늘]
[혼마르 사골국 - 힘 능력치 대폭 상승, 특성, 야생의 감각]
[코스 요리, 전쟁 - 전투와 관련된 모든 행위에 보너스 부여.]
[특성 - '요리사의 눈'이 발동합니다.]
[중급 요리 비결 - 녹색갈기 치프틴 손질법의 깨달음'을 획득합니다.]
요리사라는 것.
* * *
강철 군단 최고의 전사.
전광일 상병.
전광일 상병은 신영준 병장을 누구보다 존경하고 있었다.
그가 평생을 짊어져야만 했던 나약함을 없애고.
그곳에 용기를 불어넣어 준 은인.
'나는 신 병장님 덕에 다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 존경심은 날이 갈수록 더해져만 갔다.
처음 각성할 때만 해도, 전투 면에서는 자신이 앞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점점 더 강해졌고.
이제는 요리사라는 직업에도 불구하고.
전광일 상병 자신으로서는 이길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질 때도 많았다.
전광일 상병은 쓰러진 채로 눈앞을 바라보았다.
-!@#%$%!!!!!!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개시끄럽네."
자신을 쓰러트린 녹색의 거인.
그 거인이, 이번에는 신영준 병장과 싸우고 있었다.
신영준 병장이 직접 싸우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의외로 드물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는 후방 지원에 머무를 뿐.
자잘한 전투는 부대원들이 치르는 게 일반적이니까.
후방에서 요리와 버프에 집중한다는 부분에서, 부대의 엄마처럼 여겨질 때도 많다.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모든 부대원을 친근하게 대한다는 점 역시 그런 부분에 일조했겠지.
하지만, 가끔 그가 칼을 들고 전투에 나설 때.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이 입을 모아 하는 얘기가 있다.
'지나칠 정도로 잔혹하다.'
신영준 병장의 전투법은 간단하다.
[요리사의 눈]을 통해 적의 정보를 파악.
'손질법'에 따라, 적을 처리하는 것.
문제는 이 '손질'이라는 단어였다.
일반적으로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쓰는 말은 아니니까.
'신영준 병장은 말 그대로... 적을 손질해 버린다.'
숨통을 끊고.
살과 뼈와 내장을 분리해 내는 작업이, 손질.
그걸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적용한 결과.
신영준 병장의 전투법은 그 누구보다도 잔혹했으며.
살상력이 높았다.
"어우 씨. 뼈가 단단하니까 한 번에 손질이 안 되네."
-커, 커허....
"읏차!"
-크, 크으읍.... 쿨럭.
바로 저렇게.
고통에 겨운 신음을 흘리고 있는 괴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전광일 상병과 승부를 겨루던 [녹색갈기 치프틴].
하라-발이었다.
다른 [녹색갈기 전사]보다도 거대했으며.
전투 능력은, 다른 전사들과의 덩치 차이 그 이상으로 뛰어났던 괴물.
그 전광일 상병을 패퇴시킨, 진정한 강적.
-끄르륵....
"야야, 엄살 그만하자."
그 강적이, 피눈물을 흘리며 고통에 허덕이고 있다.
전광일 상병의 시선이 괴물의 상처 부위를 향했다.
'등의 살점이... 산 채로 [손질]됐군.'
등의 근육과 살점이 통째로 잘려 나갔다.
얼마나 깔끔한 손질이었는지, 새하얀 등뼈가 고스란히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처음에 베인 것은 옆구리.... 그다음에는 오른팔.'
그 후에 왼쪽 허벅지.
가슴, 귀.
그리고 이번에는 등.
많은 병사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신영준 병장의 전투법.
정작 본인은 스스로의 전투법에 별다른 생각이 없다는 것이 더 소름 끼친다는 병사들도 많았다.
"어디 보자. 다음은 목살로 갈까."
살아 있는 생명을 아무렇지 않게 손질하는 모습.
그 모습에서, 모든 걸 식재료로만 바라보는 것 같은 광기가 느껴진다던가.
모든 병사들과 친근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
군단장이라는 그의 지위에 의문을 품는 자가 없는 데에는, 공포가 한몫을 하고 있었다.
서걱.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 주변의 살점이, 모조리 손질되어 나간다.
-끄르륵....
아무리 강력한 전사라고 한들.
전설 속의 '광전사'가 아니고서야, 저런 상처를 입고도 서 있을 수는 없다.
쿵....
[녹색갈기 치프틴].
하라-발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처박혔다.
"저, 저게, 신영준 병장님."
"우욱."
괴물의 시체를 보는 데에는 이골이 난 병사들조차 마른침을 삼켰다.
전투를 많이 겪어 보지 못한 도시의 각성자들은, 산 채로 손질된 괴물을 보며 구역질을 참지 못했다.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신영준 병장은 쓰러진 괴물을 보고 말없이 발걸음을 옮기더니.
"광일아."
전광일 상병의 앞에 섰다.
* * *
"광일아."
"...예. 신 병장님."
"고생했다."
전광일 상병은 말없이 신영준 병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신 병장을 존경했다.
그 존경심은, 아마 죽기 전까지 변하지 않겠지.
하지만.
자신을 쓰러트린 괴물이, 신 병장의 칼에 해체되어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자.
가슴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울컥하는 감정이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엉?"
"크륵...!"
평소라면 참고 넘어갔을 감정이었으나.
광기에 휩싸인 지금은, 감정을 절제할 수 없었다.
"전사들의 싸움에 끼어들다니!"
"?"
"싸움에 끼어든 것도 모자라, 암습이라니. 저와 놈의 대결을 모욕하신 겁니다...!"
그 말에.
신영준 병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뭐야. 네가 죽게 내버려 두라고?"
"놈과 저.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울 생각이었습니다. 여기서 패할지언정, 영광스러운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야."
신영준 병장이, 그 말을 끊었다.
"전광일 상병."
"...상병, 전광일."
신영준 병장은, 대부분의 병사를 친근하게 이름으로 부른다.
그가 병사의 이름에 계급을 붙이는 경우는 둘 중 하나.
공적인 자리라 계급을 명시해야만 할 때.
그리고.
'신 병장님이, 진심으로 분노했을 때.'
싸늘한 시선이 전광일 상병을 향했다.
"착각하지 말자. 너 전사 아니다."
"저를 모욕하실-"
"군인이지."
"...."
"내 후임이기도 하고."
쓰러져 있는 전광일 상병의 눈높이에 맞춰 쭈그려 앉은 신영준 병장이 말했다.
"그 대단하신 전사님들한테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우리 같은 군바리들한테는 말이지. 명예로운 죽음? 그딴 건 있을 수가 없어요."
"크륵...!"
"알잖아. 군대에서 죽으면 다 개죽음이라는 거."
전광일 상병은, 신 병장이 분노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멸망의 날' 초창기.
그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생각났다.
'살아남기 위해.'
신영준 병장은 누구보다도 생존에 집착하던 병사였다.
그런 그인 만큼, 죽음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단 거겠지.
전광일 상병 역시.
이성으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날 살려 주려고 하신 일이다. 탓할 이유가 없지.'
하지만.
그럼에도 이 감정은 가라앉지 않았다.
애초에, 싸움에 끼어들었다느니, 명예로운 죽음을 방해했다느니.
그딴 이유로 분노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부대 최고의 전사라.... 고작 나 따위가?'
그의 몸을 뒤덮은 것은, 전투를 방해받은 전사의 분노가 아니었다.
지독한 패배감.
괴물한테 진 것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구차하게 목숨을 구원받은 것으로 모자라.
자신을 압도한 괴물이, 신영준 병장의 손에 가볍게 손질되는 것을 보았다.
'나도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힘은, 진짜 강적 앞에서는 언제나 무력하기만 했다.
그런 진짜 강적들을 처리한 것은....
언제나, 신영준 병장이었고.
"야. 전광일 상병."
"...예."
"네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 네가 잘나서 그런 것 같냐?"
그 질문에, 전광일 상병은 생각했다.
'내가 잘나서? 그럴 리가 있나.'
나약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그건 언제나 하나였다.
"전, 신 병장님 덕에...."
"내가 아니라. 다른 부대원들 덕이겠지."
"...."
한숨을 내쉰 신 병장이 말을 이었다.
"리자드 치프틴. 기억나지."
"...예."
"그놈 잡겠다고 너랑 같이 덤빈 게 대원이랑 한일이었지. 그 둘은 그대로 시체가 될 뻔했고. 벌써 잊었냐?"
"안 잊었습니다."
전광일 상병 혼자서 상대할 수 없었던, 처음 만난 강적.
같이 붙은 두 전사는 죽기 직전까지 몰렸고.
급하게 의무병과 군종병을 각성시켜야만 했지.
"저 뱀파이어들은 어때? 그놈들을 토벌할 때는, 진짜 시체가 된 병사들도 있었지."
"...."
"우리가 살아 있을 수 있는 건. 다른 부대원들이 그렇게 목숨 걸고 같이 싸워 준 덕분이다. 난 아직도 죽은 병사들 얼굴이 잊히지가 않아. 그런데 뭐? 영광스러운 죽음? 너 그 말 진심으로 하는 거냐?"
신영준 병장의 분노는 이해가 갔다.
하지만 동시에.
전광일 상병은 생각했다.
"리자드 치프틴도, 뱀파이어 퀸도. 결국은 신 병장님이 토벌하셨잖습니까...."
"뭐?"
전광일 상병도.
다른 부대원들도, 목숨을 걸고 열심히 싸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저나 다른 부대원들이 열심히 싸운 게, 정말 의미가 있긴 한 겁니까?"
"너, 뭔 소리를...."
그들이 적당히 힘을 빼고 싸웠다면.
저 전투들의 결과가 달라졌을까?
"어차피 신 병장님이 다 해결하셨겠죠."
전광일 상병은 여러 상황을 상상해 보았으나.
어떻게 해도, 결국은 신영준 병장이 해결하는 모습만이 머리를 채웠다.
저런 대단한 사람이 아군이란 것은, 더없이 든든한 일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병사들은 그저 받아들이기만 했다.
신영준 병장이 어떤 대단한 일을 해도, '역시 신 병장님' 하고 넘어가는 게 불문율이 되었지.
하지만.
전광일은 거기서 그치고 싶지 않았다.
도움을 받기보단, 도움을 주고 싶었다.
오랫동안 노력해 왔고, 피나는 노력 끝에 힘을 키웠다.
'그 결과가 이거라.'
괴물에게 패배하고.
신 병장에게 구차하게 목숨을 구해지는 결말.
'넘을 수 없는 벽.'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억눌러 왔으나.
이 패배감은 꽤 오래된 것이었다.
"차라리, 죽게 두시지 그러셨습니까."
"...."
"그러면, 열심히 싸우다 죽을 수라도 있었을 텐데. 싸우다 진 놈이, 선임 도움으로 목숨만 건진 꼴은 벗어났을 텐데...."
이윽고.
전투의 흥분으로 인한 광기가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이성이 돌아온 뒤.
전광일 상병은 고개를 꾸벅였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광기] 탓에 그만."
"...그래. 네 특성이 그런 거니까. 이해한다."
"죄송합니다."
신영준 병장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나중에 부대에서 얘기하자고. 의무병 불러 놨으니까 지금은 푹 쉬고."
"예."
"고생했다."
고생했다.
과거.
겁 많던 그에게, 처음 사적인 요리를 해 주면서 해 줬던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은혜를 갚기는커녕 민폐만 끼치는구나.'
광기가 줄어들고, 이성을 되찾았으나.
새어 나오던 감정을 참아 내는 데 성공했을 뿐.
전신을 뒤덮은 패배감은 여전했다.
의무병의 치료를 받으며, 전광일 상병은 조용히 몸을 웅크렸다.
...너무 아팠다.
* * *
"...광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광일이 녀석에겐 쉬라고 했지만.
떠나면서도 묘하게 찝찝했다.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착해빠진 녀석이라 혼자 끙끙거리는 것 같단 말이지.'
맘 같아선 자백제...가 아니라.
[솔직한 마음]의 요리라도 먹여 놓고 묻고 싶다만.
"지금은 바쁘단 말이지."
요새에서의 전투가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다른 전투에 합류해야 할 상황.
게다가.
[적용 중인 요리 효과 - 4]
지금 나는 요리를 무려 4개나 중첩해서 먹은 상태였다.
[절대 미각]의 효과로 요리의 효과가 중첩되는 것은 대단한 효과지만.
이렇게 버프를 중첩하면 몸에 부담이 상당하다는 게 문제.
'어떻게든 뽕을 뽑아야지.'
솔직히 말하면, 효과를 4개나 중첩시키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냐.
"어지간한 괴물보다도 괴물 같은 광일이를 쓰러트린 놈이니."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광일이 녀석과 정면 승부를 펼쳐, 기어코 이겨 낸 괴물.
말이 정면승부지, 내 요리와 김 중위의 함성 등.
온갖 버프를 다 때려 박은 광일이와의 대결이다.
평균 전력이 높을 뿐, 특별하게 강한 괴물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다른 병사도 아니고 만전의 상태였던 광일이를 쓰러트리다니.
"요리 한두 개만으로는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급하게 전투식량들을 죄다 씹어 삼켰다.
중첩된 4개의 버프.
심지어 그 효과 중에는 [환경 동화] 특성도 섞여 있었다.
'몰래 접근해서 암습까지 갈겼는데도 못 죽였을 땐... 솔직히 식겁했다.'
다행히, 놈은 광일이와의 전투로 꽤 지친 상태였다.
거기에 암습으로 옆구리 살점을 모두 베어 내기까지 했으니.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이길 수는 있었다.
4중첩 버프가 아니었다면....
아니, 광일이 녀석이 체력을 깎아 둔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 도끼질이 나를 두 동강 내 버렸겠지.'
제기랄.
도무지 방심할 수가 없는 세상이다.
나도 조금은 강해졌나? 싶을 때면.
그 오만을 순식간에 겸손으로 바꿔줄 만한 괴물이 등장해 버린다.
강적을 함께 해치워 줬더니 오히려 화를 내던 광일이 녀석에겐 조금 놀랐다만.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잘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광일이 녀석이 뭔가 문제를 안고 있다는 건 알았으니까.'
지금 눈치채지 못했다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
생각해 보면 정신 상태가 해이해져 있던 나도 그렇고, 저 광일이도 그렇고.
병사들 멘탈 케어에 조금 소홀해졌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조만간 전 부대원들 상대로 면담 한번 해야겠어.'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이 전장에서 살아남고 나서의 얘기.
나는 몸을 돌려 전장으로 향했다.
요새를 넘어오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고 하나, 숫자는 저쪽이 더 많다.
전력을 다해 상대해도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적들.
'미안하지만. 또 방심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렇게 다짐하며 놈들에게 다가갔다.
138화 AI가 좀....
고위 주술사는 요새의 성벽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저 안쪽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겠지.
아마도, 주술사들의 예상을 뛰어넘은 어떤 존재가 도사리고 있을 요새.
그렇기에 후퇴를 건의했던 그였으나.
'부족에서 손꼽히는 전사인 하라-발이라면. 어쩌면....'
그런 생각을 놓지 못한 채.
이렇게 멀리서 요새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픽.
-....
주술사는 한 생명의 불씨가 꺼지는 것을 느꼈다.
강자가 나타나기 힘든 그의 종족에서, 종의 한계를 뚫고 거듭난 위대한 전사.
그중 한 명의 불씨가, 지금 꺼졌다.
-낭패로다....
부족의 침략 전쟁이 재개되고 난 뒤.
처음으로 벌어진 대규모 전투.
이 전투에서의 승패는 상당히 중요했기에, 그만큼 많은 병력을 이끌고 왔으나.
그 결과는.
-전사들에게 전하라.
지휘관의 사망.
그리고.
-저 요새를 공략할 방도가 없으니, 최대한 안전하게 후퇴하라고.
부족의 패배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