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사냥 -1-
호랑이 사냥
"넥타르를 드신다고요?"
"예. 슬슬 4레벨로 가야죠."
최 소장이 멍하니 날 쳐다본다.
"어, 초인님. 그러니까······ 초인님 3레벨 된 지 얼마 안 되지 않으셨습니까?"
"한 달 정도 됐죠."
"그런데 4레벨로 가신다고요?"
"굳이 미룰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세상에."
떡 벌리는 입.
그러더니 걱정하는 표정이 된다.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레벨을 너무 빨리 올리면 부작용이 생긴다고 알고 있습니다."
"꼭 그렇지는 않죠. 적절하게 조치하고 제대로 관리하면 괜찮습니다. 우진이도 단번에 5레벨로 각성하지 않았습니까?"
"그야 그렇습니다만 서 본부장님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요? 들어 보니까 저번에 넥타르 마시고 격체전공에 벌모세수도 다시 받으셨다던데요."
"전 1레벨만 올릴 예정이니까요."
게임에서는 부작용이 크지 않았다.
넥타르를 연속으로 마시면 경험치가 쭉쭉 차는 대신 마력 중독 디버프에 걸리는 정도.
그나마 마력천에 박아놓고 잊어버리면 어느 순간 회복되어 복귀하곤 했다.
이 세상에선 다르다.
여긴 게임이 아니라 또 하나의 현실이니까.
실제로 저번에 마력이 안정되지 않아 고생을 좀 했고.
"저라고 무턱대고 도전하는 건 아닙니다. 안 그래도 저번에 넥타르 마시고 고생 좀 했어요. 그때 교훈을 얻은 게 있습니다."
"끙······ 저 때문에 괜히 고생만 하시고······"
"아닙니다. 제가 선택한 건데요. 하여튼 이번에는 정석으로 넥타르를 마실 생각입니다."
정석.
즉, 넥타르를 법제한 후 마시는 것.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특수한 재료 몇 가지를 첨가하여 탕약처럼 달여 마시기도 하고, 특수한 과정을 거쳐 기화시킨 후 들이마시거나, 마법으로 정제하여 정맥 주사하는 방법 등등.
흔히 특성 영약이라고 부른다.
"안 그래도 제가 준비는 해놨습니다."
최 소장이 벽장을 열었다.
마법 솥과 촉매, 화염석, 특수 재료 여럿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언질을 주셨으면 제가 주재료도 미리 준비했을 텐데요, 아쉽습니다."
만년삼왕, 용의 심장, 천사 날개 같은 것들.
특성 영약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재료에 담긴 특성을 가져올 수 있었지.
"그런 거 없어도 됩니다."
"아쉬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넥타르 효과도 좋아지고 부작용은 아예 없어지고, 새로운 능력까지 개화하실 수 있잖습니까?"
"그래요?"
듣고 보니 조금 끌리네.
최 소장이 내 눈치를 보곤 첨언했다.
"지금부터 법제 시작해도 완성하려면 며칠 걸립니다. 달이는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사이에 구해 보면 어떠십니까?"
"음······ 좋습니다. 주재료도 구하는 걸로 하죠."
최 소장이 모니터를 내 쪽으로 돌렸다.
영약 네 종류가 비쳐진다.
[뿔 호랑이 심장]
[괴물 고릴라 척수]
[세계수 열매]
[무쇠 이무기 내단]
"제가 목록을 뽑아 봤습니다. 전사 계열에서는 이 네 재료가 가장 인기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죠."
게임에서도 많이 봤다.
보기만 했겠어? 김전사한테도 많이 먹였지.
"뿔 호랑이 심장으로 하죠."
각각 얻는 특성이 다르다.
뿔 호랑이는 [용맹].
괴물 고릴라는 [괴력].
세계수는 [재생].
무쇠 이무기는 [철갑].
네 특성 모두 전사에게 유용한 특성이다.
내가 하나 빼고 다 갖고 있어서 그렇지.
괴력과 재생은 이미 있고 철갑은 방패에 담겨 있어서 장비 숙련을 올리는 중이다.
더구나 용맹?
처음부터 내 선택은 결정되어 있었던 셈.
'용맹이 마지막이야.'
거인의 힘 최종 재료.
즉, 뿔 호랑이야말로 최고의 재료였다.
"어, 음."
최 소장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초인님. 꼭 뿔 호랑이여야 합니까?"
"왜 그러시죠?"
"뿔 호랑이는 멸종 위기종이라 매물이 거의 없습니다. 매물이 나와도 중국에서 다 쓸어가고요. 다른 재료는 제가 어떻게든 구해올 수가 있는데 뿔 호랑이는 힘듭니다."
"휴전선에 많이 살지 않습니까?"
"살기는 사는데, 동부군에 사냥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직접 잡아야 한다는 소리구나.
하긴 게임에서도 뿔 호랑이 심장이 유독 비싸기는 했다.
신원 시장에서 가끔 뜨는 게 전부였고.
"그럼 허가만 받아 주세요. 제가 직접 잡아 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다 드려야 하는데······"
"제 입으로 들어갈 건데요 뭘. 아, 활동비는 필요 없으십니까?"
사냥 허가.
이 막장 세상에서 그냥 나올 리가 없다.
당연히 뒷돈을 찔러 줘야지.
최 소장이 내 말을 듣고 손사래를 쳤다.
"어이쿠, 아닙니다. 아니에요! 초인님! 저도 돈 많이 법니다. 허가 비용쯤은 제가 처리하게 해주십쇼!"
"미안해서 그렇죠."
"미안하다니요! 초인님 덕을 제가 얼마나 많이 보고 있는데요! 이 건물도 초인님께서 저한테 사주신 겁니다! 건물만 사주셨습니까? 목숨도 구해주셨죠!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절대로, 절대로 부담가지지 마세요."
"하하. 알겠습니다."
"영약 준비되기 전에 허가 나오게 하려면 조금 바쁘겠습니다. 초인님, 늦어도 모레까지는 처리할 테니 준비하고 계세요. 아, 그러고 보니까 초인님 차가 없으시죠?"
최 소장은 확실히 능력이 있었다.
전광석화처럼 일을 처리했다.
겨우 이틀.
동부군에서 사냥 허가를 받아온 것은 물론 번쩍이는 차 한 대까지 뽑아 가지고 왔다.
최 소장이 겸연쩍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제가 모셔다드려야 하는데, 일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일이 많이 늘어서 말이죠······"
"괜찮습니다. 소장님 사업이 번창하면 저도 편하죠."
"필요하시면 기사 한 명 붙여드릴까요? 전사 계열 초인님들은 자가운전을 선호하신다고 해서 보류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직접 운전하죠. 사냥터에서는 직접 운전하는 게 좋다고 들었습니다."
초인의 반사 신경과 동체 시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리고 뿔 호랑이가 출몰하는 것은 철원 평야.
어쩌면 차를 몰며 총격전을 벌여야 할 수도 있다.
게임에서는 총격전 미니 게임도 있었거든.
미친 듯이 운전대를 꺾고 변속기를 돌려야 하는데 운전기사 달고 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조심하세요. 요새 철원 평야에 밀렵꾼들이 부쩍 늘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가 보물 창고니까요."
"쯧. 북쪽 놈들이 조용하니까 밀렵꾼들이 난리네요. 그것도 3레벨 초인들이 꽤 많답니다. 초인님이야 잘하시겠지만, 그래도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당연하죠."
나도 방어 특성 하나 없이 저격 맞으면 죽는다.
마수 사냥꾼, 특히 밀렵꾼에 3레벨과 4레벨 초인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절대 마음을 놓아선 안 되지.
그르릉!
차에 올라 시동을 켰다.
네모네모한 디자인이 인상적인 SUV.
원래 세계 벤츠사의 G바겐을 연상시키는 자동차다.
휘발유로 굴러가는지 날카로우면서도 강렬한 시동음이 울렸다.
"마도과학 자동차를 사 드리고 싶었는데······ 너무 비싸서 못 샀습니다. 그래도 이놈 방탄유리에 특수 타이어입니다. 소총탄 얻어맞아도 버틸 거랍니다."
겸연쩍은 얼굴을 하는 최 소장.
나는 손을 한 번 휘저었다.
"아닙니다. 얻어 타는 처지에 마도과학 자동차가 왠말입니까. 제가 나중에 돈 벌어서 사겠습니다."
"어휴, 아닙니다. 제가 사드리겠습니다."
"뭐,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마도과학 자동차는 비싸다.
정확히 말하면 엔진이 무식하게 비싸다.
휘발유나 경유 대신 마력핵을 먹는 순간, 자동차 가격이 10배 이상 뛴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무리 1레벨 2레벨 마력핵이 싸다고 해도 그 돈 주고 사느니 내연기관 자동차를 굴리고 말지.
아예 럭셔리 중의 럭셔리, 비행차로 가거나.
"그럼 며칠 뒤에 뵙죠."
"예, 초인님. 살펴 가세요. 밀렵꾼 조심하시고요."
부르릉!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육중한 몸에 맞지 않게 SUV가 뛰쳐나간다.
우렁차게 울리는 굉음.
신림동에서는 흔히 보이지 않는 고급 SUV다.
행인들이 힐끔힐끔 시선을 던지는 게 느껴졌다.
그것도 잠깐.
신림동을 벗어나 초인대로에, 원래 세계의 올림픽 대로를 대체하는 자동차 전용도로에 접어들자 금방 자동차 사이에 묻히게 된다.
부아아앙!
천둥을 터뜨리며 내달리는 슈퍼카.
묵직하게 주행하는 럭셔리 세단.
새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비행차들이 널려 있으니까.
"부자 진짜 많아."
사람이 많은 만큼 차도 많다.
빈부격차만큼 차 사이에도 격차가 있다.
슈퍼카가 낡아빠진 경차를 위협하듯 추월하고, 그 위로 비행차가 신선놀음하듯 지나치는 게 한눈에 잡혔다.
어쩐지 입맛이 썼다.
에이, 신경 쓰지 말자.
속도를 올려 초인대로를 달렸다.
목적지는 동부군이 소재한 철원시.
고속도로를 타고 가도 두 시간은 걸린다.
두 시간 후.
동부군 영지, 철원 시국(市國) 시 정부에서 사냥 허가를 확인받았다.
"뿔 호랑이 사냥하러 오셨네요?"
"예."
"체류 기간은 일주일이고요. 한 마리만 사냥하실 수 있어요. 두 마리 이상 잡으시면 벌금 나옵니다. 뿔 호랑이는 1급 보호종이라 정당방위여도 과태료 나오니까 어지간하면 그냥 쫓아내세요. 차 가져오셨죠?"
"당연하죠."
"헬멧이나 방호복에, 그리고 자동차에 이거 블랙박스 붙이고 다니세요. 허가증 항상 갖고 다니시고요."
"규제 빡세네요."
"알고 오신 거 아니에요? 여기 대한민국 법 안 통해요."
까칠하게 반응하는 공무원.
말 그대로다.
철원 시국. 파주 시국.
동부군과 서부군이 북한과의 접경지대를 방어하는 개인 영지로 받아 챙긴 곳.
두 군단의 수장이 대한민국 건국에 엄청난 도움을 주어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21세기의 변경백이 따로 없다.
그만큼 두 군단의 위세가 막강하다는 뜻.
나는 두말하지 않고 작은 블랙박스를 헬멧에, 또 자동차에 장착했다.
철원 시 정부에서 나와 1시간을 더 달린 끝에 겨우 도착했다.
"후아!"
철원 평야.
원래 세계에서는 북한이 더 많이 가져갔지만 이 세상에서는 엄연히 남한 땅이다.
다만 북한과 바로 마주 보는 땅인 만큼 동부군에선 적극적으로 개척하지 않았다.
출입 금지까지 걸어놓고 야생 그대로 남겨두었지.
그것이야말로 신의 한 수.
지금에 와서는 온갖 영물들이 뛰어노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냥꾼들이 방문하는 꿀땅이 되어 있었다.
그 덕에 갈등도 생겼지.
여기서 동쪽 백두대간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선천적 돌연변이들이 모여 사는 괴물촌이 나오거든.
대한민국 법상 돌연변이는 엄연한 인간.
그러나 사회 인식은 법을 쫓아가지 못하는 게 현실이고, 가끔 변이체로 오인하여 사냥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나중에는 괴물촌도 가야겠지?'
어디까지나 나중 일.
근처에 보이는 풀밭으로 SUV를 몰고 갔다.
푸드득!
숨어 있던 새 떼가 날아오른다.
은빛 날개와 꽁무니 깃털이 인상적인 오리 떼.
[은광 오리]
저거 고기가 꽤 맛있다던데.
펄쩍!
사슴 떼도 뛰쳐나갔다.
뿔이 두 쌍에 등에서 은은한 무지갯빛 마력광을 흘리는 사슴들.
[무지개 사슴]
가죽을 벗겨 팔면 쏠쏠하다.
생산성으로는 인조 가죽을 따라갈 수 없지만, 수제 명품만의 가치가 있는 법이니까.
골프백에서 사냥용 산탄총을 꺼내려다가 말았다.
내가 허가받은 것은 뿔 호랑이 단 한 마리.
그 외에 보호종을 잡았다간 바로 벌금행이다.
"쳇."
사냥꾼 협회에 가입해야 하나?
협회 가입만 해도 2급 보호종까진 잡아도 된다던데.
에이, 아서라.
특성 먹고 상위 특성 조합할 시간도 부족하다.
차를 적당한 곳에 세웠다.
지붕에 올라가서 앉은 다음 특성 교체.
[보물찾기][밝은 눈][민감]
[통찰][집중][추적]
보물찾기 특성을 쓰는 건 오랜만이네.
"하!"
광점이 마구 반짝였다.
하늘 위에서, 수풀 속에서, 땅에서, 나무 사이에서, 바위 아래에서 파란빛이 은하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보물 창고 그 자체.
여기에 고글을 써서 헬멧의 [탐지] 특성도 발휘하고 있으니 내 눈을 피해 갈 보물은, 영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서 뿔 호랑이를 찾아야 한다는 점.
보물찾기에는 필터 기능이 없다.
영물들 위치를 확인한 건 좋은데 뿔 호랑이를 찾으려면 다른 수를 써야 했다.
'다 준비해 왔지.'
골프백을 열었다.
우선 무선 이어폰을 꺼내 스마트폰에 연결하고 음악을 틀었다.
시끄러운 락 음악.
먼저 음량 최대로. 다시 음량 최소로.
그렇게 수십 번을 반복했다.
귀가 멍멍해지더니 어느 순간 확 뚫렸다.
[쫑긋 귀] 특성.
두 번째로 꺼낸 것은 통조림.
통조림을 보자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진다.
"싫다, 진짜."
어쩌겠나.
특성 얻으려면 이 정도 고생은 해야지.
눈을 질끈 감고 통조림을 개봉했다.
"우으읍!"
역한 냄새가 콧구멍을 뚫고 대뇌에 직접 꽂힌다.
구역질이 올라온다.
당장이라도 코를 싸매고 싶었지만, 나는 [인내] 특성까지 장착하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으어억!"
크게 숨을 마셨는데도 안 됐다.
눈물을 머금고 [심호흡] 특성까지 장착.
길게 공기를 빨아들이자 역한 냄새가 허파까지, 심장까지, 심지어 내장까지 흡수되는 느낌이 들었다.
울렁이다 못해 뒤집히는 뱃속.
못 참고 구토를 하려 할 때 생겼다.
[개코]
특성이.
"우왜액!"
못 참겠다.
나는 즉시 통조림을 던지는 한편, 차에서 뛰어내려 토사물을 뿜어냈다.
너무 한 거 아니냐?
특성 획득 조건이 통조림 냄새 맡기라니!
차라리 푹 삭힌 홍어 냄새가 낫지.
이건 수르스트뢰밍이란 말이다!
호랑이 사냥 -2-
세계에서 가장 악취가 심하다는 그거!
"죽겠다. 죽겠어."
사람 똥을 코로 처먹으면 그럴까?
아직도 코와 허파에 썩은 똥내가 고여 있는 것 같다.
차에 시동을 걸고 도망쳤다.
창문은 물론 선루프까지 싹 다 열고 5 킬로미터는 튄 다음에야 똥내가 사그라졌다.
나는 차 밖에 나와서 심호흡을 했다.
"내가 또 저놈의 통조림을 따면 개아들이다. 으으으."
크게 한 번 몸서리를 쳤다.
수르스트뢰밍?
두고 봐라.
그 썩을 통조림 반경 10미터, 아니 반경 100미터 안에도 안 들어갈 테니!
게임에서는 터치 한 번으로 끝나는, 난이도 F급이던 조건이 현실이 되니까 난이도 SSS급이 되었다.
한참 서성이며 맑은 공기를 마시고, 영물들 뛰노는 광경을 보자 겨우 속이 진정되었다.
슬슬 시작해볼까?
허가받은 체류 기간은 겨우 일주일. 그 안에 뿔 호랑이를 잡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어디······'
골프백에서 곱게 포장된 박스를 꺼냈다.
박스 안에는 짐승 털가죽이 하나 들어 있다.
무두질을 제대로 하지 않은, 마치 갓 도축해서 벗겨낸 듯한 상태의 털가죽.
피까지 말라붙어 있어 냄새가 굉장했다.
육식동물 특유의 노린내와 피비린내가 동시에 코를 찔렀다.
굉장히 역겨웠지만 이 정도면 견딜 만하다.
수르스트뢰밍의 후각 폭력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킁킁.
심호흡과 개코를 써서 냄새를 들이마셨다.
몇 번이나.
대뇌 주름 안에 콱 박히도록.
그런 다음 차 지붕 위에 올라가 주위를 살폈다.
정신을 곤두세우고 파란 광점을 살피지만 이거다, 느낌이 오는 건 없었다.
'뿔 호랑이는 산 쪽에 살았지?'
오리산.
원래 세계에서도 이 세상에서도 북한 영토.
뿔 호랑이는 주로 오리산에 서식한다. 하지만 사냥감을 찾기 어려우면 철원 평야까지 내려오곤 한다. 특히 물을 마시러 한탄강에 자주 들렀다.
부르릉!
차를 몰아 한탄강으로 달려갔다.
정신을 집중하고 코를 킁킁거리자 후각 정보가 벌떼처럼 내 뇌로 돌진했다.
청량한 강 내음.
여름을 맞아 춤을 추는 벌레들의 페르몬.
새똥 냄새.
조금 전까지 수풀까지 숨어 있던 노루의 털 냄새.
그리고······
익숙한 노린내와 희미한 피비린내.
"찾았다!"
바로 근처였다.
차에 탈 것도 없이 빠르게 달려갔다.
한탄강에서 조금 떨어진 곳.
울창하게 가지를 뻗은 나무 아래.
핏자국이 흙바닥에 고여 있고, 짐승 뼈도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이 자리에서 뿔 호랑이가 식사를 했나 보다.
'어디로 갔을까?'
심호흡 특성도 장착해서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뿔 호랑이 냄새가 코에 새겨진다.
탐지 특성에 통찰 특성, 심지어 추적 특성까지 발동.
처음에는 잘되지 않았다.
하지만 핏자국 근처에 찍혀 있던 뿔 호랑이 발자국에 집중하자 드디어 추적 특성이 활성화되며 화살표가 선명히 떠올랐다.
됐다!
"넌 이제 죽었어."
차에 올랐다.
미리 사냥에 필요한 도구를 꺼내 놓는다.
대물 저격총.
대구경 자동 산탄총.
대지 속성 마법 함정.
특수하게 개조한 총알 한 다발도.
명백히 과화력.
하지만 이 정도는 써야 한다.
뿔 호랑이는 기본적으로 3레벨.
소총탄 정도는 가뿐히 버티고도 남는다.
대부분은 대물 저격총 선에서 정리가 되지만, 오래된 개체는 대물 저격총도 맞아가며 덤벼온다고 하니 준비해야지.
허리띠에 찬 성검과 마총을 툭툭 쳐 보곤 운전대를 잡았다.
부아앙!
바로 출발.
거칠 것이 없었다.
화살표는 북쪽, 오리산 방향이 아니라 남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풀이 길게 자라 뿔 호랑이가 몸을 숨기기에 딱 좋은 지형.
화살표를 주시하고 통찰과 탐지로 전방을 살피면서 달렸다.
"응?"
그러다가 발견했다.
앞쪽.
나무 몇 그루가 우거진 곳에 SUV 몇 대가 멈춰 있는 것을.
화살표는 공교롭게도 SUV 정중앙을 가리켰다.
설마 이미 잡힌 건 아니지?
가까이 다가가자 사냥꾼들이 총을 들고 일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쇼."
차를 대고 빈손을 보여주자 사냥꾼들이 경계를 풀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흠."
사냥꾼들이 자기들끼리 얼굴을 한 번 마주 보았다.
숨길 일은 아니라 생각했는지 순순히 답변했다.
"습격을 받았습니다."
"습격이요? 누구한테요?"
"누구긴. 산왕이지."
산왕?
그게 누구지?
머릿속 캐릭터 카드를 뒤지다 말고 퍼뜩 깨달았다.
사람이 아니었다.
영물이었다.
철원 평야에서 가장 유명한 뿔 호랑이.
나이도 많고 교활한 데다 육체적으로도 절정에 이르러 있다.
4레벨은 아니지만 3레벨 극에 달했다고 알려진 마수.
"산왕이 여기까지 내려왔다고요? 휴전선까진 올라가야 나오지 않습니까?"
"어떤 멍청한 놈이 산왕을 건드린 모양입니다. 우리 막내가 봤는데, 옆구리에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병신이 죽일 거면 끝을 봐야지."
"괜히 우리만 죽을 뻔했잖아."
아닌 게 아니라 SUV 한 대가 된통 찢어져 있었다.
운전석 뒷좌석 문이 반으로 갈라질 지경.
아슬아슬했다.
문짝이 아니라 바퀴를 찢었으면 그 자리에서 SUV가 전복됐을 거고, 사냥꾼들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러분도 모두 초인이신데 산왕을 못 잡으신 겁니까?"
"하!"
그렇게 묻자 사냥꾼 하나가 코웃음을 쳤다.
"마수 사냥은 처음인가 봅니다? 초인이라고 해도 무적은 아니지요. 우리가 초인이라면 산왕도 마수인데요. 그것도 언제 진화해서 4레벨이 되도 이상하지 않은 놈이고요. 일대일로 싸우면 인간이 집니다. 그런데 차 타고 있는 상태에서 싸운다? 목숨만 건져도 운이 좋은 거죠. 조금 전에도 우리 막내가 신들린 것처럼 운전하지 않았으면 우리 중에 셋은 죽었어요."
"저흰 이대로 돌아갈 겁니다. 산왕이 지랄하고 있는데 사냥하는 건 자살행위거든요."
"밀렵꾼 새끼한테 사냥감 뺏긴 것도 엿 같은데 산왕까지 지랄이고······ 어휴, 텼다. 텼어."
"철원 시국 가서 술이나 퍼먹죠."
"오케이! 술판이다!"
"초보 사냥꾼님도 사냥 쫑내고 돌아가시는 게 나을 겁니다. 혼자서 오셨나 본데 그러다 산왕한테 잡아먹혀요. 저흰 여럿이라 산왕이 한 대 때리고 튀었지만 혼자만 있으면 사냥감으로 생각한단 말입니다. 운 좋게 뭐 하나 잡으시고 산왕 피해 가도 밀렵꾼 새끼한테 뺏길 수도 있어요."
"조언 감사합니다."
산왕에 밀렵꾼이라······
알빠냐?
오히려 좋아.
평범한 뿔 호랑이가 아니라 산왕의 심장을 가져가는 거다.
'쉽지는 않겠네.'
산왕은 마수 주제에 특성 여섯 칸을 꽉꽉 채우고 있다.
[용맹][도약][강타]
[위기 감지][은신][포효]
산왕을 잡기 힘든 이유 첫 번째.
위기 감지다.
대물 저격총으로 머리를 노리면 뭐해?
아무리 제대로 타이밍을 잡고 쏴도 머리는 못 맞힌다.
최선이 몸통.
이번에도 누군가 산왕을 설건드린 까닭에 화가 나서 깽판을 치는 중이지.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게임에서도 그렇다.
함정을 파서 유인하는 게 최선이다.
당연히 미끼가 필요하고.
그 미끼는 절대로 평범해서는 안 된다.
동물 시체든 살아 있는 동물이든 미끼로 써도 산왕은 금방 상황을 눈치채고 역으로 사냥꾼을 노리니까.
즉, 나 자신이 미끼가 되어야 한다.
탕!
우선 평야에 넘쳐나는 노루 한 마리를 잡았다.
차에 싣고 화살표를 따라 달린다.
평야를 질주하던 발자국은 언젠가부터 방향을 꺾어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탄강을 따라서 계곡으로 접어드는 흔적.
'여기가 좋겠다.'
어느새 숲이 울창하게 우거졌다.
SUV로 더 들어가기도 힘들 지경.
이 근처는 완전한 야생이라 비포장 도로도 없었다.
노루 시체를 짊어지고, 골프백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숲 안쪽에 적당히 내려놓은 다음 돌을 들어 내리찍었다.
콰악!
총상이 난 목 언저리를.
죽은 지 시간이 좀 됐지만 피가 굳지는 않은 모양.
진득한 혈향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약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나무 위.
나뭇가지에 가려 나는 잘 보이지 않으나 사슴 시체를 놔둔 지점만은 잘 보이는 곳에.
'어차피 들키겠지.'
그래도 최선을 다한다.
숨은 나무 주변에 마법 함정을 빼곡하게 깔았다.
옆 나뭇가지에 미리 자동 산탄총을 올려놓았다.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산왕이 속는다.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도망칠 테니.
[마력심][은신][이탈]
[쫑긋 귀][민감][통찰]
일부러 마력심을 장착했다.
은신을 쓰고는 있지만, 산왕 같은 민감한 마수라면 내 마력향을 분명 맡을 것이다.
초인에게 마수는 좋은 수입원.
역으로 마수에게 초인은 좋은 마력 공급원이 된다.
분명히 옆구리를 다쳤다고 했겠다?
그럼 나 같은 3레벨 초인을 보면 잡아먹고 싶어서 안달이 나겠지.
'와라.'
망원조준경에 눈을 가져간다.
노루 시체를 계속해서 지켜본다.
그러나 이것은 겉모습에 불과하다.
마력을 위기 감지 반지에 불어넣는 한편, 온통 귀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휘이잉 불어오는 바람 소리.
맴맴맴 매미 소리.
사르륵 사르륵 풀잎 마주치는 소리.
거의 숨도 쉬지 않다 시피 하며 오직 한 소리만을 기다린다.
탓.
바로 이 소리를.
게임에서 산왕이 등장하기 직전 들리던 소리를.
아주 작고 얕지만 수십 번도 넘게 들어 절대 놓칠 수 없는 소리를.
'왔구나.'
거의 동시에 작동하는 위기 감지.
저절로 침이 넘어간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내색하지 않았다.
부동자세로 오로지 망원조준경만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내 모든 정신은 오로지 뒤를, 내 등 뒤를, 반대편 나뭇가지를 향해 있었다.
스윽, 스스슥.
마수가 나무를 타는 효과음.
기억이 현실에 덧씌워지는 느낌.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지금!'
게임 지식과 위기 감지 특성이 일치했다.
몸에 익힌 대로.
또 경고받은 대로.
정확히 이탈 특성을 발휘했다.
"크아아앙!"
포효가 터졌다.
공기를 진동시키다 못해 찢어발기듯 달려드는 음파.
그러나 이탈 특성에 의해 나는 거의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며, 몸을 뒤집으며 자리를 이탈하는 나.
산왕이 나를 본다.
SUV보다 도리어 큰 산왕이 흉흉한 살기를 뿌리며 나를 주시한다.
나도 산왕을 본다.
감각적으로, 거의 본능에 가깝게 저격총을 조준하며 산왕을 응시한다.
[사격][조준][집중]
[결의][총격술][급속 장전]
세상이 느릿느릿 움직인다.
크게 벌린 목구멍.
산왕의 목젖이 떨리는 것이 시계추를 연상시킨다.
그것을 끝까지 보며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분출되는 화염.
내리꽂히는 총성!
산왕이 펄쩍 뛰었다.
나무를 박차 옆 나무로 뛰어든다.
과연 산왕.
그러나 내 공격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노리쇠를 후퇴시킨다.
핑! 하는 경쾌한 소리가 들리며 황동색 탄피가 튀어나온다.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어 노리쇠를 전진하여 장전 완료.
그리고 사격.
타앙!
이 모든 것이 한 호흡 안에 벌어졌다.
총격술과 급속 장전의 아름다운 콜라보.
산왕이 머리를 홱 젖혔다.
마력 봉인 촉매를 섞은 특수 개조탄이 정확히 어깨에 박혔다.
"크아아앙!"
산왕이 분노에 차 울부짖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타앙! 타앙! 타앙!
5발 탄창을 모두 비웠다.
산왕은 총알 세 발을 얻어맞고 피를 흘리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모자라다.
치명상은 없다.
산왕은 여전히 쌩쌩했고 수염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격노하고 있었다.
"크아앙!"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산왕이 포효하고, 도약하여 나를 덮치고, 발을 거칠게 휘두르는 장면이 번개처럼 연결된다.
내 머리를 찍어오는 앞발이 흉험하게 번뜩인다.
강타!
기본 중의 기본 공격 특성이지만 용맹과의 시너지로 절대 얕볼 수 없는 그것!
[파산검법][일점][결의]
[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심][회피]
포효는 결의로 씹는다.
그리고 피한다.
회피하면서 미끄러진다.
산왕의 품으로.
도약하여 뛰어드느라 살짝 드러난 그 가슴팍으로.
이어서 찌르기.
파산검법의 산 꿰뚫기가 제대로 펼쳐졌다.
"크앙!"
내 머리를 후려갈기려던 펄쩍 뛰었다.
성검이 정확히 심장을 노린 까닭.
결국 내 공격은 심장 대신 배만 한 번 찌르고 말았다.
대신 나도 온전하지는 않았다.
산왕이 공중에서 제멋대로 몸을 뒤집더니 내 어깨를 강타했다.
"큭!"
그냥 맞았으면 어깨가 뭉개졌겠지.
피격 직전 방패로 막았다.
[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 방어막][방어]
[철갑][맷집][인내]
그래도 힘이 남았다.
흙바닥 위를 쭉 밀려갔다.
내 발이 대지를 긁으며 고랑 같은 흔적 두 줄기가 길게 남았다.
덕분에 거리가 벌어졌다.
눈을 번뜩이며 마총을 뽑았다.
마력 저장 반지를 끼지 않은 왼손.
마력을 있는 대로 퍼부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먹어라!"
특성 교체도 뭣도 없다.
고작 5미터 남짓한 지근거리.
막 착지한 산왕에게 묵색 광선이 날아갔다.
"끄어어어어엉!"
처절한 비명.
흑염 맛이 어떠냐?
마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지만 효과는 굉장했다.
산왕이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며 폭주하기 시작한 것.
꽈앙! 꽝! 우지끈!
거칠게 나무를 들이받는다.
아름드리나무가 똑 부러진다.
이번에는 바위에 머리를 박았다.
폭음이 터지고 흙먼지가 화산재처럼 치솟았다.
나는 산왕이 발광하는 장면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떨어진 저격총을 집었다.
철컥.
탄창을 교체하자 울리는 쇳소리.
발광하던 산왕이 뚝 멈춰 선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 노여움과 증오에 젖은 눈이 날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뿐.
뭘 하지는 못한다.
왕으로서의 위엄을 지키겠다는 듯 고고히 서 있는 것이 한계.
나도 산왕도 알았다.
이번 공격은 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세 발이나 박힌 개조탄 때문에, 또 전신 신경계를 불사르는 흑염 때문에.
철원 평야의 왕.
초인 사냥꾼을 역으로 사냥하던 존재.
최소한 백 년 이상을 묵은, 철원 인근에서는 전설로 치부되던 마수.
단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이었다.
나를 사냥감으로 고른 실수 하나로 죽음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고통스럽겠지.
1초 1초가 힘겹겠지.
두렵고 무섭겠지.
그런데도 산왕은 여전히 왕 다운 품위를 뽐내고 있다.
이제는 보내주어야 할 때.
마지막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그리하여 산왕은.
철원 평야의 제왕은.
꼿꼿이 선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호랑이 사냥 -3-
쿠웅.
산왕이 쓰러졌다.
코뿔소와 비슷한 크기.
1.5톤에 육박하는 몸무게.
그 거대한 체구가 쓰러지자 일순 땅이 울렸다.
"후우!"
긴장이 풀리며 한숨이 나왔다.
산왕은 나로서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
산왕에 대해 몰랐다면, 게임과 똑같이 행동하지 않았다면 나도 좀 고생했겠지.
저격총을 드느라 내팽개친 성검을 주웠다.
근질근질한 감각이 손끝에 맴돌고 있었다.
저절로 아까 장면이 재생된다.
내게 덤벼들던 산왕.
방패로 미끄러뜨리며 파고들고, 일점을 날리던 때의 감각!
[반격] 특성 획득.
강타, 연격, 방어, 회피와 함께 기본 전투 특성에 들어간다.
그동안 내가 치고받기만 했지 깔끔하게 카운터를 날린 적은 별로 없어서 이제야 획득한 것.
전투에 익숙해지긴 익숙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다······"
눈앞의 산왕 시체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심장만 빼 갈까?
아니면 시체를 통째로 옮겨?
무슨 고민을 하고 있어.
평범한 뿔 호랑이도 아니고 산왕이다. 산왕.
뿔 호랑이는 심장만 아니라 몸 전부가 귀한 마법 재료 취급을 받는다.
피, 골수, 내장, 발톱, 뼈, 근육, 가죽, 감각 기관, 어디 하나 버릴 데가 없지.
못해도 십몇억은 할걸?
이걸 버리고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지고 가자.'
문제는 적재 중량.
SUV가 버텨 줄까?
마도과학을 믿어봐야지.
원래 세계 차량보다 더 튼튼하고 힘도 좋은 물건이니까.
산왕 시체에 다가갔다.
SUV 위에 올리려고 힘을 준다.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끄응, 하며 힘을 써도 시체가 들썩이기만 하고 움직이지를 않았다.
"와······ 뭐냐 이거?"
초인이라고 해도 무적은 아니다.
무려 1톤이란 말이다.
원래 세계에서 데드 리프트 세계 기록이 505 킬로그램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1톤짜리 시체를 들려면 얼마나 힘이 세야 할까?
통째로 차에 실으려면 거중기를 가져와야 한다.
아니면 토막 내거나.
정석은 토막내어 겹겹이 쌓는 것이겠지만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최 소장이 준 차라서 피투성이로 만드는 것도 좀 그렇고.
퉤, 퉤, 양쪽 손바닥에 침을 뱉었다.
아랫배에 힘을 주며 다시 시체 앞에 섰다.
[근력][괴력][강건]
[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심][심호흡]
이러고도 버티나 보자.
데드 리프트하듯 쪼그려 앉았다.
산왕 시체를 강하게 붙잡았다.
"후읍, 후으읍."
길게 심호흡.
비린내 섞인 공기가 허파 깊숙이 스며든다.
내 가슴이 웅장하게 부풀었다.
방호복 상의가 빛나면서 내 체구를 키웠다.
허리띠가 반짝이며 마력을 한 점으로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폭발.
호흡을 일거에 터뜨리며 산왕 시체를 들어 올렸다.
"으아압!"
들렸다!
그 거대한 몸통이, 무거운 고깃덩어리가 비상하듯 수직으로 상승했다!
통쾌한 해방감과 함께 마력이 강하게 분출되는 것이 느껴졌다.
[마력 증폭] 특성.
희열을 느끼는 것도 잠깐.
거의 집어던지다시피 산왕 시체를 SUV 위에 얹었다.
조금은 볼품없는 모양새다.
산왕이 하도 커서 다리가 창밖으로 축 늘어지고 꼬리는 아예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었으니까.
"운전기사를 데려올 걸 그랬나······"
잡일을 혼자 다 하려니까 귀찮다.
미리 준비해온 로프를 산왕 시체와 SUV 루프랙에다가 꽁꽁 묶었다.
SUV를 흔들어 보니 어떻게든 버티는 중이다.
서울까지 가는 건 힘들어도 철원 시국까진 가겠지.
부르릉!
바로 출발.
차가 굉장히 굼떠지긴 했으나 달리기는 잘 달렸다.
올라왔던 길을 따라 남서쪽으로, 원래 세계로 치면 철원읍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꽤애액!"
"삐이이이익!"
"컹컹! 컹컹컹!"
산왕 시체를 매달고 있어서일까?
내가 달리기만 해도 영물들이 기겁하며 도망쳤다.
거의 모세의 해일을 보는 듯한 광경.
개중 값비싼 영물도 보여서 입맛을 다시게 된다.
보호종만 아니면 몇 마리쯤 사냥해도 괜찮으니까.
산왕 시체를 운반하는 중이 아니었으면 용돈 삼아 몇 마리는 사냥했을 것이다.
"정지! 정지!"
사냥터를 벗어나 검문소에 도착했다.
동부군 군인들이 황급히 앞을 막았다.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산왕 시체를 보고는 내게 묻는다.
"이거 도대체 뭡니까? 생긴 건 뿔 호랑이인데 뭐가 이렇게 큽니까?"
"산왕입니다."
"산왕!"
"진짜 산왕입니까?"
"중위님. 크기 보니까 산왕 맞지 말입니다."
"하긴 이 정도 크기는 산왕 밖에 없지. 허, 어떻게 산왕을 잡으신 겁니까? 산왕 이놈 엄청 똑똑해서 저격총도 피하는 놈이라고 들었습니다."
"운이 좋았죠. 산왕이 뒤에서 접근하는 소리를 못 들었으면 제가 역으로 사냥당했을 겁니다."
"와······"
검문소 지휘관, 동부군 중위도 3레벨은 되어 보인다.
내가 야생 지역으로 나갈 때는 내다보지도 않던 인간이, 산왕 시체를 보고 놀라 튀어나온 것.
한참이나 나와 산왕 시체를 번갈아 보더니 스마트폰을 꺼냈다.
"참 대단하십니다. 설마 혼자 잡으신 겁니까?"
"예. 혼자 잡았습니다."
"사냥꾼 협회 랭커들도 실패한 게 산왕 사냥인데······ 하하, 거참. 일단 절차라는 게 있으니 허가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뿔 호랑이는 1급 보호종이라 허가증 없이는 사냥 못 합니다."
"여기 있습니다."
"3레벨 전사 계열 초인 김전사······ 어어? 허가증 발급 일자가 오늘이네요? 그리고 등록일도 오늘? 설마 첫 사냥은 아니죠?"
"여기서는 첫 사냥입니다."
"하긴 그렇겠죠. 완전히 초짜는 아니겠죠. 후,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처음으로 오셔서 사냥한 게 산왕이라니."
중위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앞으로 자주 뵐지도 모르겠습니다. 음, 실례지만 인증샷 한 장만 찍을 수 있겠습니까? 산왕 잡혔다고 하면 동기들이 절대 안 믿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시죠."
SUV에 실린 산왕 시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중위랑 한 번.
다른 병사들이랑도 연이어 한 번씩.
중위도 병사들도 싱글벙글 웃었다.
"복무하면서 이렇게 큰놈 보는 건 처음입니다!"
"나도 5년 넘게 복무했지만 처음이야."
"SNS에 올리면 난리 나겠습니다."
"또 니가 잡은 것처럼 구라까게? 허세 좀 적당히 부려, 새꺄."
"SNS가 그러라고 있는 거 아닙니까."
검문소를 지나쳤다.
여기부터는 철원 시국 안.
드디어 시멘트로 깔끔하게 포장된 도로가 나왔다.
덜컹, 덜컹.
1.5톤 무게가 짓누르는 탓일까?
SUV가 심하게 흔들렸다.
마침내 접어든 철원 시국 시내.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집중되었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씩 들고 나오던 커플.
여자를 보며 웃던 남자가 내 쪽을 보더니 그대로 굳었다.
툭, 커피를 떨어뜨리자 뚜껑이 열리면서 커피가 분수처럼 폭발했다.
"오빠! 왜 그······ 어머?"
여자라고 다르지는 않다.
산왕 시체를 보고는 똑같이 굳어서 커피를 떨어뜨렸다.
다른 사람들도 반응은 비슷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길가에 우두커니 멈춰서는 아가씨.
쪼그려 앉아 쉬다가 눈을 껌뻑이고, 안경을 들었다가 다시 쓰는 할아버지.
호랑이다!를 연발하며 방방 뛰는 꼬맹이들.
파리가 들어가는 지도 모르고 입을 쩌어억 벌리는 아저씨.
산책을 즐기다 오줌을 지리며 꼬리를 감추는 강아지들까지.
철원 모든 사람이, 생명체가 나를 주시하는 것만 같았다.
부르릉!
SUV가 검은 매연을 뿜으며 미끄러져 들어갔다.
내가 멈춘 곳은 거래소 거리.
대한민국 최대의 마수 사냥터가 있는 곳답게 대형 거래소가 널려 있었다.
"이야!"
길가에 차를 대고 잡담하던 사냥꾼들이 산왕 시체를 보고 감탄했다.
"이거 산왕 아닙니까? 어? 몇 시간 전에 봤던 분이네요?"
나무 사이에서 부상자를 돌보고 있던, 내게 산왕 출현을 경고했던 사냥꾼 무리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예. 다치신 분은 괜찮으십니까?"
"펄펄 날아다녀요. 협회 소속 사제님한테 치료를 받았거든요. 그런데 사냥꾼님 혼자 아니셨습니까? 설마 혼자 잡으신 거?"
"운이 좋았습니다."
"허······"
기가 막힌다는 듯 나를 보는 사냥꾼.
"마수 사냥에 운이 어디 있습니까. 다 실력이고 능력이죠."
"감사합니다."
"강 이사가 보면 배 아파 죽으려고 하겠네요. 강 이사 그 인간은 무조건 자기가 산왕 잡는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강 이사?
사냥꾼 협회 이사 중에 강씨가 있었나?
회장 성이 강씨인 건 기억나는데 이사들까진 기억이 안 난다.
나는 어깨만 한 번 으쓱했다.
그런 다음 로프를 풀고 바닥에 방수포를 깔았다.
"사냥꾼님! 혹시 그 시체 파시려는 겁니까?"
"만약 파신다면 저희 거래소에······"
"아닙니다! 저희 거래소에······"
슬슬 상황을 파악한 거래소 사장들이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팔긴 팔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시 특성을 활성화하고 산왕 시체를 들었다.
"끄응!"
마력 증폭 특성을 써도 여전히 무겁다.
꾸우웅!
산왕 시체를 던지듯 내리자 땅이 둔중하게 울렸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사위가 조용해졌다.
시끄럽게 떠들던 구경꾼들도, 자기한테 팔라며 악다구니를 쓰던 거래소 사장들도, 쑥덕쑥덕 수군거리던 사냥꾼들도 입을 닫고 나를 주시했다.
"와, 사냥꾼님······"
나와 얘기하던 사냥꾼이 쓰게 웃었다.
"산왕 사냥하신 거 보고 알았지만, 정말 보통 분이 아니시네요. 혹시 그거 SUV에 올릴 때도 혼자 하신 겁니까?"
"당연하죠."
"아티팩트라도 쓰신 줄 알았더니······ 후, 사냥꾼이 아니라 동부군 영관을 하셔야 했을 분이었네요."
골프백에서 도축용 칼을 꺼냈다.
칼을 산왕 가슴에 가져다 대자 사냥꾼들이 질겁했다.
"어어, 잠깐만요!"
"그걸 여기서 도축하시게요?"
"통째로 팔아요! 통째로! 시체 손상되면 제값을 못 받아요!"
"뒤처리는 누가 하라고!"
다 무시하고 푸욱 칼을 찔렀다.
내 목적은 심장이니까.
돈은 소소히 벌어도 충분하고, 뒤처리할 소모품도 준비해서 가져왔다.
우악스럽게 가슴을 헤쳤다.
아직 더운 피가 후끈후끈 쏟아진다.
갈비뼈를 자르고 근육을 짓이기자 안타까운 탄성이 터졌다.
"아이고, 저 아까운걸······"
"뭐야. 초보잖아?"
"사냥 잘한다고 도축까지 잘하는 건 아니지."
"수수료 좀 주고 전문 업자한테 맡기지. 왜 저걸 직접 한대?"
"업자 못 믿나 보지."
그 말이 맞다.
못 믿겠다.
산왕의 심장 정도 되면 십억을 호가한다.
장난질 안 칠 거라고 누가 장담해?
또, 보물에는 파리가 꼬이는 법.
빨리 처리해서 회수하지 않으면 누군가 심장을 빼앗으려고 수작을 부릴 수도 있다.
그 꼴을 보느니 내가 피 좀 뒤집어쓰고 말지.
"저러다 심장 손상되면 진짜 손핸데······"
누군가 읊조린 말.
안타깝게도 틀렸다.
다른 부위는 다 손상되고 망가졌지만 심장만은 완벽한 상태로 꺼낼 수 있다.
[추출]
이 특성 때문에.
딸깍.
거침없이 파고들던 도축 칼이 딱딱한 물체에 막혔다.
뼈가 아니다.
그보다 더 단단하고 거친 질감.
흡사 돌이나 보석을 연상시키는 감촉이 칼을 타고 전해졌다.
칼을 빼고 손만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리고 추출 특성 사용.
우우웅······
나만 느낄 수 있는 진동과 함께 심장이 사르륵 떨어져 나왔다.
마력핵과 결합된, 반은 마력핵이고 반은 영물 심장인 부위.
조심스럽게 빼낸다.
워낙 커서 잘 나오지도 않는다. 다시 도축 칼을 들어 상처를 헤집은 다음, 두 손으로 벌린 다음에야 겨우 빼냈다.
그렇게 뽑은 심장.
컸다.
거의 어린아이 머리통 크기는 됐다.
반은 광물이고 반은 심장으로, 산왕이 죽은 지금도 간헐적으로 박동하듯 붉은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어? 완벽한데?"
"상처 하나도 없어!"
"거 신기한 사람이네. 사냥은 특급인데 도축은 삼류고, 심장은 또 제대로 손질해서 뽑았어?"
심장을 방수포에 꽁꽁 싸서 골프백에 넣었다.
거기까지 하자 산왕 시체에 묘한 선이 죽죽 그어진다.
어딜 어떻게 갈라야 하는지.
뭘 건드려야 하고 건드리면 안 되는지.
새로운 감각이 시각적으로 돋아났다.
[도축] 특성 획득.
과연 얼마나 쓸지 모르지만 있어서 나쁠 건 없지.
제작, 개조, 수리 3종 세트도 여러모로 잘 써먹었잖아.
"사냥꾼님. 저건 파실 겁니까?"
"그래야죠."
무거운 시체를 서울까지 끌고 갈 수는 없다.
가격은 좀 낮더라도 여기서 처분하는 것이 최선.
나와 대화하던 사냥꾼이 입맛을 다셨다.
"그럼 저한테 파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냥꾼님한테요?"
"예. 심장이 없고 거칠게 손대는 바람에 상품 가치가 조금 떨어졌으니 거래상한테 팔면 분명히 후려치려고 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시세 그대로 매입하지요."
"시세라고 하시면······"
"온전한 뿔 호랑이 시체가 한 구에 20억 정도 합니다. 산왕 프리미엄이 있으니 거기서 3배, 그리고 심장 가격 10억 빼고 50억에 하지요. 어떻습니까?"
50억!
내가 알기로도 그 정도면 괜찮은 가격이다.
아니, 아주 좋다고 봐야지.
완벽하게 도축해서 경매장에 올려서 받는 최종 금액이 그 정도거든.
사냥꾼은 거의 수수료 없이 산왕 시체를 매입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50억?"
"미쳤나."
"상도덕도 없기는······"
"저 가격이면 인건비도 안 나오겠다."
거래소 사장들이 욕을 하며 흩어졌다.
몇 명은 혹시 거래가 틀어질까 싶어 주위를 얼쩡거렸지만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지.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계산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바로 입금해 드리죠."
"지금 바로요?"
"예. 계좌 번호 알려주세요."
잠시 후.
내 스마트폰에 문자가 찍혔다.
[군단 은행]
[잔액 5,102,136,711원]
총액 51억!
이거 산다 저거 산다 비어 가던 통장이 쭈우욱 차오른 것.
사냥꾼이 내게 악수를 청하며 웃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나중에 연락 한 번 주시면 좋겠습니다."
목적은 그거였구나.
나쁘지 않다.
사냥꾼 협회는 고급 마법 재료와 다양한 퀘스트 수급처이기도 하니까.
'낯이 익은데······'
분명히 어디서 본 얼굴.
그런데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게임에서 등장했던 인물이라는 건데, 내 기억 속에서 일치하는 캐릭터가 없다.
'엑스트라였나?'
하지만 난 엑스트라 이름도 다 기억하는데 이상하네.
모바일 게임인 아케인 서울에서 나올 정도면 최소한 캐릭터 카드나 일러스트가 있었다는 소린데.
모르겠다.
중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대충 넘어가자.
"그러시죠. 시간 날 때 연락 한 번 드리겠습니다."
악수 한 번 나누고 연락처 교환하고 헤어졌다.
어느덧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서울을 향해 달렸다.
그로부터 며칠 후.
특성 영약이 완성되었다.
콜로세움 -1-
콜로세움
완성된 특성 영약은 용암빛이었다.
TV에서 보던 선명한 주황색.
질감도 걸쭉하기 그지없고 자체적으로 열기를 품고 있어 부글부글 끓는 중이다.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수정 그릇에 손을 가져갔다.
[조심하세요. 초인님.]
[벌써 두 번째 복용 아닙니까. 너무 많이 마시면 안 좋다는데······]
걱정하던 최 소장의 얼굴이 생각난다.
괜찮다.
부작용을 없애려고 철원까지 달려가서 산왕을 잡았던 거잖아.
특성 선택에도 변주를 주었다.
[파산검법][에인헤랴르 연공법]
[약물 의존][약물 중독]
[마력 안정][정화]
성장 방향 유도는 두 개로.
넥타르 효과 극대화도 두 개만.
나머지 두 개는 부작용 제어에 방점을 찍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후우우."
긴장되는 순간.
수정 그릇을 들었다.
맹렬한 열기가 손바닥으로 파고든다.
손바닥이 익어가는 것을 무시한다.
영약을 꿀꺽꿀꺽 삼켰다.
예전에 넥타르만 마셨을 때와는 달랐다.
활화산 같은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익어버리는 동시에 재생되는 목구멍. 식도. 위장.
시작되었다.
용암이 나를 관통한다.
태양 속에 몸을 던진 것만 같다.
뜨거운, 너무나도 뜨거운, 뜨겁고도 뜨거운 열기가 나를 그대로 불살라 버릴 듯이 번졌다.
그러나 그 안에서 피어난다.
청량함이.
맑고도 상큼한 힘이.
마력 덩어리가 불타는 감각을 쫓아와 온통 점령해버린다.
'아······'
나는 속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좁디좁은 관에 갇혀 있다가 산 정상에서 깨어나면 이럴까?
압도적인 해방감과 고양감이 나를 일깨우고 있었다.
육체를 진화시키고 있었다.
흡사 영혼 자체가 승격되는 듯하다.
이 비좁은 사바세계를 떠나 천국으로 헤엄치는 듯한 감각.
우드드득.
작은 환골탈태가 진행된다.
그 속에서 마력 회로가 확장된다.
3레벨이 되면서 손발 끝까지 닿았던 마력 회로.
더 질겨진다. 더 굵어진다.
아울러 회로들끼리 연결된다.
기존에는 사지 말단을 향해 종으로 쭉쭉 뻗었다면 이제는 자기들끼리 우회로를 겹겹이 생성한 것.
당연히 더 효율적이고 더 강력한 위력을 뽐낸다.
여기에 하나 더.
뜨끈뜨끈 아랫배로부터 차오르는 힘이 있었다.
힘은 내 머리를 한 번 자극했다가 내려와 심장에 깃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잠든다.
불러주기만을 기다리겠다는 듯이.
[용맹] 특성.
산왕의 선물.
강건과 비슷하게 1.5티어 정도 되는 특성이다.
특이한 점이라면 평소에는 적용되지 않고 오로지 전투 중에만 적용된다는 것.
대신 힘과 체력에 상당한 보정을 준다.
수치로 따지면 강건보다 더 높을 정도로.
나는 가만히 앉아서 주먹을 꽉 쥐어 보았다.
힘이 넘쳐났다.
전신이 가벼웠다.
무엇이든 해낼 것 같은 이 전능감.
찰랑찰랑 차오르는 자신감.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리고 부작용은······ 없다!
"좋았어!"
영약 만들길 잘 했고 마력 안정과 정화를 넣길 잘 했다.
마력을 한 바퀴 돌려봐도 걸리는 것이 없다.
체내 어디든 집중하면 그 순간 마력이 도달한다.
에인헤랴르 연공법의 영향으로 내 마력은 폭풍처럼 광폭하고 강철처럼 강인하다.
그런데도 몸에 부담 하나 주지 않는다.
"하하하."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이내 웃음소리가 커지며 수련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4레벨, 4레벨이다!
3레벨부터 진짜 초인 대접을 받는다면 4레벨은 그 이상.
어느 조직에 들어가든 중견 취급을 받았다.
몸값도 받는 임무도 차원이 달라진다.
현대병기로 따지면 걸어 다니는 공격 헬기 취급이니 오죽하겠어.
"하하하! 하하하하!"
한참을 웃다가 그쳤다.
한쪽에 놓인 마법 욕조를 보곤 피식 웃어 버린다.
이렇게 되면 마력천도 필요 없었다.
마력 안정이랑 정화 말고 마력 흡수랑 마력심 넣을 걸 그랬나?
'아니야.'
혹시라도 부작용 생겼으면 피똥 좀 쌌을 거다.
'이게 맞아.'
더구나 4레벨이다.
태생 N급 캐릭터의 한계.
5레벨이 되려면 한계 돌파해야 하는데 부작용에 발목 잡혀서 골골 거리고 있으면 안 된다.
'5레벨에는 또 얼마나 필요할까.'
한계 돌파도 넥타르만 마시면 안 되겠지.
특성 영약 비슷하게 다른 종류 영약이 추가로 필요할 것이다.
'넥타르를 구해야겠네.'
지금 내가 가진 걸로는 부족할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커피를 탔다.
싸구려 커피믹스.
고급 찻잔에 안 어울리게 믹스 커피를 마시며, 한 마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근력."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세 번째로 획득한 특성.
그리고 내가 조합하려는 어떤 상위 특성의 기본 특성이기도 하다.
"괴력, 강건, 용맹, 위압, 거구."
이 여섯을 합쳐서 나오는 특성.
거인의 힘.
전사 계열 상위 특성이다.
오로지 전사만이 얻을 수 있고 쓸 수 있다.
획득 조건도 엄청나게 까다롭지.
어려운 특수 퀘스트를 마치거나 거인왕 레이드에서 나오는 거인왕의 심장을 달여 먹어야 한다.
그래도 나는 김전사에게 이 특성을 자주 달아줬었다.
조합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거든.
3티어 공용 특성인 근력이 기본으로 들어가 있는 것부터가 감사한 일이지.
나는 수련실 한쪽에 걸어놓은 방호복을 가져왔다.
그리고 비밀 금고 안.
여태 신원 시장 고물상을 통해 모아놓은 다이아도 같이.
"갑옷을 바꿔야 하나?"
어쩌다 보니 방호복 특성을 먼저 가져오게 되었다.
아니, 아니지.
거인의 힘과 하위 특성은 서로 중첩된다.
거구 특성도 좋은 특성이니 그냥 입고 다녀도 좋다.
게다가 방호복 자체가 워낙 방어력이 좋아서 말이지.
SSR급 방호복을 구하기 전까진 이걸 써야겠다.
천천히 방호복을 입었다.
바지에 다리를 집어넣고, 상의에 몸을 끼우고.
굼벵이처럼 느리느릿.
방호복이 피부를 스칠 때마다 행복감이 전율하듯 일어났다.
심장이 방망이질 하듯 두근거린다.
여섯 속성 저항을 조합한 마법 저항만 해도 엄청났었다.
그럼 마법 저항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는, 모든 전사 계열 초인의 워너비인 거인의 힘은 도대체 어떤 결과물을 보여줄까?
여행 가기 전날 밤처럼 들뜬 내 심장.
방호복을 갖춰 입고, 전신 거울 앞에 앉아 다이아를 쥐자 완벽히 절정에 달했다.
"후우욱, 후욱."
길게 심호흡하며 진정했다.
도저히 가슴 뛰는 게 가라앉질 않아 [심호흡][마력 안정][명상] 특성의 힘까지 빌렸다.
그리고 사용.
다이아를 방호복 상의에다가 박아넣었다.
상의에 접촉한 즉시 다이아가 눈 녹듯 증발한다.
오색 보광이 핥듯이 나와 방호복 상의를 어루만졌다.
자연스럽게 내 체내로 스며드는 어떤 힘.
당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그래서 방호복 상의와 하의를 모두 벗어 던졌다.
속옷만 입은 나.
여전히 변화가 없다.
즉, 방호복 상의로 적용되었던 [거구] 특성이 온전히 이식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나는 차분히 특성을 갈아 끼웠다.
근력을 강화하는 기본 특성 [근력]
순간적으로 근력을 폭증시키는 [괴력]
근력과 맷집, 활기가 섞인 능력의 [강건]
육체를 키우고 근력과 체력을 함께 증가시키는 [거구]
전투 시 사용자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용맹]
마지막으로, 나보다 약한 적을 공포 효과에 빠뜨리는 [위압]
구웅 구웅.
심장이 울부짖었다.
전신이 저릿저릿 저렸다.
정신을 집중한다.
마법 저항 때와 비슷하다.
마력 회로가 깨지고 재조립되면서 심장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아울러 전신 근육이 찢어진다.
뼈대가 해체된다.
거인의 힘 조합은 마법 저항 조합보다 훨씬 더 극적이었다.
마력 회로와 심장만이 아니라 온몸에, 근골격계에 직접 작용하기 때문이겠지.
따닥따닥 올라오는 통증을 이를 악물고 버텼다.
혼백이 달아나기 직전.
한참이 지난 후에야 특성 조립이 완성되었다.
"흐아아!"
솨아아.
수증기가 증발한다.
허연 김이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내가 흘린 땀이 활성화된 마력 회로와 반응하여 기화한 것.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특성을 지우고 오직 [거인의 힘] 특성만 장착하고 전신 거울을 바라본다.
원래 김전사는 호리호리한 체구다.
그런데 거울 속 김전사, 나는 전혀 달랐다.
완벽한 근육질.
보디빌더를 연상케 하는 체형.
키도 컸다. 180 남짓하던 키가 190은 넘어간 것 같다.
여기서 하위 특성을 더 장착하면?
[거인의 힘][근력][괴력]
[거구][강건][강타]
근육이 뿌득뿌득 불어났다.
키도 더 커졌다.
거의 2미터를 넘는 거구.
근육이 얼마나 커졌는지 영화 속 초록색 돌연변이 히어로를 연상시킬 지경이다.
'이거 완전 돌연변이네.'
돌연변이 근육에 돌연변이 육체, 돌연변이까지 장착했을 때 내가 비슷했지.
그때보다는 훨씬 사람 같지만.
전투 시에는 강타가 아니라 용맹을 장착하는 게 낫겠다.
지금 굳이 강타를 선택한 건 따로 이유가 있었다.
"후으으읍."
주먹을 꽈득 쥐었다.
허공을 노려본다.
있는 힘껏 정권 지르기!
퍼어엉!
압도적인 근육의 폭격.
공기가 사정없이 떨렸다.
마력을 쓰지 않았는데도 충격파가 터지고 거울을 깨뜨릴 지경.
하지만 나는 깨진 거울을 보면서 쓰게 웃었다.
"너무 심했나?"
제대로 내지른 내 주먹.
허공에 휘둘렀는데도 시큰하게 아팠다.
오른팔 전체에서 스멀스멀 충격이 올라왔다.
거인의 힘 자체적으로 체력 강화가 붙어 있는데도 그렇다.
강타 대신에 용맹을 같이 쓰면 괜찮을까?
아니다.
금강체가 필요하다.
거인의 힘과 금강체를 세트처럼 써야 내 공격에 내 육체가 망가지는 꼴을 피할 수 있겠지.
지금 같아서는 주먹질이라도 했다간 내 주먹이 먼저 박살 날 판이다.
'재료는 다 있어.'
금강체의 재료는 맷집, 철갑, 성채, 인내, 결의, 극기.
방패에 깃든 성채와 방호복 하의에 깃든 극기만 가져오면 된다.
문제는 다이아.
신원 시장에서 물량 들어오는 대로 샀던 다이아는 거구를 이식하면서 모두 소모한 다음.
등급이 높아서 그런지 내 생각보다 다이아를 많이 쓴 것이다.
[물건 들어온 것 있습니까?]
고물상에게 문자를 넣었지만 돌아온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다음 달은 되어야 추가로 들어옵니다. 아시다시피 물량 수급하기가 힘들어서요.]
[알겠습니다.]
어디 다이아 광산 같은 거 안 터지나?
한숨을 내쉬는 한편, 완성 직전인 상위 특성이 하나 더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치유] 목걸이.
이걸 내가 김사제한테 받았었지?
재생, 소생, 상처 회복, 치유, 활기, 원기왕성으로 조합되는 상위 특성.
불사.
거인의 힘과 불사 조합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가장 좋은 것은 당연히 거인의 힘, 금강체, 불사 세 상위 특성으로 완성되는 삼위일체 빌드지만.
'다이아 한두 개만 있으면 되는데.'
게임에서처럼 숙련도 몇 %가 찼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강건을 체화한 게 며칠 전이니 치유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며칠, 길어야 몇 주다.
그전까지는 다른 특성으로 땜빵하면 된다.
[거인의 힘][파산검법][에인헤랴르 연공법]
[맷집][인내][활기]
이런 식으로.
여기에 방호복을 입고 벗어두었던 흡혈 장갑을 착용했다.
흡혈 저주를 감수할 만큼 강건 특성이 아쉬웠으니까.
[아니면 초인님.]
대안 마련에 골몰하고 있을 때, 스마트폰이 다시 진동했다.
[저랑 같이 다이아 캐러 가시겠습니까?]
[다이아를 캔다고요? 다이아를 캘 수가 있습니까?]
[흐흐. 마굴 청소부도 원래는 정화 업무 종사자가 정식 이름 아닙니까. 그걸 그냥 청소한다고 표현하는 거지요. 다이아도 똑같습니다.]
게임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말.
나는 스마트폰을 보며 눈만 끔뻑거렸다.
다이아를 캘 수가 있나?
초인이 자기 마력을 깎아 만드는 게 다이아잖아.
설정상으로는 레벨 다운까지 일어난다고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다이아 수급은 애초에 캐릭터 카드를 갈아서 했으니까.
[좋습니다. 같이 가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이아를 캐려면 리스크가 좀 있습니다. 마굴 청소도 그렇잖습니까?]
[그렇죠.]
[일단 가보시고, 아니다 싶으면 가셔서 구경만 하셔도 됩니다. 절대 초인님께 위험한 일을 강요하지 않을 겁니다.]
[대체 뭔데 그러십니까?]
[으음······ 밖으로 누출되면 안 되는 곳이라서요. 유선상으로 말씀드리긴 좀 그렇고, 직접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의구심을 품고 약속을 정했다.
밤이 늦은 시간에 신원 시장에서 만났다.
김춘복 고물상이 과장되게 내게 허리를 굽혔다.
"타시죠, 초인님."
"눈도 가려야 합니까?"
"에이, 농담도 잘하십니다. 초인님이 저랑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도착하시면 살짝만 조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가는 데는 초인이 꽤 많거든요. 3레벨, 4레벨, 심지어 5레벨도 꽤 많습니다."
"5레벨도요? 어딜 가는데 그렇습니까?"
"가 보시면 압니다."
고물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서쪽으로 달리는 차에 속도를 더할 뿐이다.
쌔애액!
멀지 않았다.
신림동에서 약 40분 거리.
서울과 이어지는 도시.
그러나 행정구역상으로는 명확히 구별된다.
이쯤 되자 나도 눈치를 챘다.
"부천이네요?"
"예. 부천입니다."
아케인 서울에서 부천, 하면 떠오르는 시설이 하나 있다.
수도권 최대의 격투장.
초인들끼리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장소.
게임에서는 랭킹전이 벌어지는 곳.
콜로세움이었다.
콜로세움 -2-
"너한테 걸었다!"
"쓰러뜨려!"
"죽여! 죽이라고!"
익숙한 소음.
수만 번 넘게 들은 함성.
옛날 생각이 난다.
투기장 파티를 완성한 다음에는 뉴비 절단기로 이름을 날렸지.
헤비 과금러들한텐 쪽도 못 쓰고 졌지만.
"지하 투기장입니다. 수도권에선 가장 큰 곳이죠."
고물상이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흔히 콜로세움이라고 부릅니다."
눈치가 좀 이상하다?
나는 고물상에게 대놓고 수상쩍다는 눈빛을 보냈다.
"혹시 여기 소속이십니까?"
"하하, 들켰네요."
"어쩐지."
게임에서도 단서는 있었다.
NPC 설명란.
[김춘복 고물상.]
[실명은 불명.]
[신원 시장의 젊은 개척자.]
[수상쩍은 출처의 마법 물품을 판매하며, 가끔 고등급 마법 물품을 상식 파괴 수준의 저렴한 가격에 팔 때가 있다.]
수상쩍은 출처, 상식 파괴 수준의 저렴한 가격.
그냥 있어 보이려고 있는 설정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
하긴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다이아 1개에 1억이 말이 돼?
그것도 정기 공급까지?
내가 뒤를 힐끔 돌아보자 고물상이 정색하며 두 손을 펼쳤다.
"초인님을 절대 강압하거나 협박하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저도 목숨이 아까운 사람입니다. 초인님이 신림동에서, 또 청소부 협회와, 사자 기사와 어떻게 싸웠는지 뻔히 아는데 미쳤다고 함정을 팠겠습니까? 그러면 저희 조직은 어쩔지 몰라도 전 죽습니다. 100퍼센트죠."
"흠. 그래도 하나 묻죠."
"네, 네. 말씀만 하세요."
"처음부터 계획했던 겁니까?"
고물상이 힐쭉 웃었다.
"뭐, 그렇습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정 마음에 걸리시면 여기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다이아 판매도 계속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다이아는 그만 판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초인님과의 인맥만으로도 도움이 됩니다. 그 값이라고 생각하면 그깟 다이아, 달에 몇 개 파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고물상이 나를 안내해 콜로세움 안으로 들어갔다.
말이 콜로세움이지 원조 콜로세움과는 전혀 다른 공간.
우선 지하에 있다.
통로는 비좁고 흐릿한 마력 전등 아래서 사람들이 열기를 뿜어내는 중이다.
습기가 얼마나 높은지 시야가 뿌열 지경.
에어컨과 공기청정기가 가동 중이나 이 열기를 어쩔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아래.
계단을 수십 개 내려가면 보이는 장소.
계단처럼 배치된 관중석 어디서든 잘 보이는 지점.
철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안에는 덩치 두 명이 대치 중이다.
팬티 하나 달랑 입고 근육질 육체를 드러낸 상태로.
"으아아아!"
"으어어!"
둘이 맞붙는다.
근접하여 난타전을 벌인다.
기름을 발라 미끌거리는 몸이 마력 전등 빛을 반사하여 번들번들 빛난다.
그 위로 찐득찐득 흘러내리는 피!
이내 승패가 결정되고, 승자가 패자를 짓밟으며 포효했다.
"이겼다! 크아아아!"
"우우우우!"
"와아아!"
"너 덕에 돈 벌었다!"
"니가 다 해 먹어라!"
"죽여! 죽여! 죽여!"
관중석이 떠나갈 정도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촤르륵!
철창이 올라가고 사회자가 급히 뛰어 올라갔다.
한 손에는 작은 오색 수정 몇 개를, 다른 손에는 계약서를 한 장 들고 있었다.
"지옥 도살자의 패배! 지옥 도살자님, 계약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희생하시겠습니까?"
"빌어먹을!"
패자가 승자에게 밟힌 채 욕설을 토했다.
승자가 패자의 등을 잘근잘근 짓밟았다.
"어이! 시간 끌기 있어? 빨리 안 하면 부러뜨린다? 마력 회로까지 부수는 수가 있어?"
"젠장······ 한다. 한다고!"
"계약이요?"
"희생한다고! 희생! 시발, 노예 계약하느니 마력 조금 깎고 말지."
패자가 엎드린 채 수정을 받았다.
울컥울컥 피를 토하며 마력을 주입한다.
고글을 쓰고 보니 보였다.
마력만이 아니라 신체에 깃든, 단단히 결합된 후천 기관, 즉 마력 회로가 토막토막 잘려 주입되는 것을.
"저렇게 만들어도 다이아가 만들어집니까?"
"그럼요. 핵심은 자발적인 헌신과 희생이거든요."
"저게 헌신이고 희생이라고요?"
"본인 선택이니까요. 마력 희생하기 싫으면 계약서에 도장 찍으면 됩니다. 아니면 위약금 내도 되고요."
"위약금이 꽤 많나 봅니다."
"많죠. 초인마다 다르긴 하지만 3레벨 초인이 다이아 서너 개 정도 만드는데요. 그거 복구하려면 100억은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이아는 솔직히 돈이 있어도 못 구하잖아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쓰러져 있던 패자가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안 돼! 난 못해! 내 마력! 내 마력은 못 줘!"
평생을 쌓아온 마력이다.
게임으로 치면 능력치이며 경험치이기도 하다.
초인은 본인의 무력이 최대 자산인 법.
그걸 빼앗기게 생겼으니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새끼가?"
승자가 인상을 팍 긁었다.
퍼억, 패자를 걷어차며 수정을 들이밀었다.
"새끼야! 해! 내 다이아 만들란 말이야!"
"못해! 못한다고!"
"이 새끼가 진짜?"
"자, 자. 고정하시지요."
사회자가 능숙하게 끼어들었다.
"강압과 협박으로는 다이아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 척추 추출공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젠장! 에이, 퉤!"
"다이아는 저희가 보상해 드립니다. 자, 자, 이제 내려가시지요. 끝내주는 게임과 끝장나는 미녀들이 오늘의 승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흐흐. 좋아. 내가 아저씨 얼굴 봐서 참는 거야. 가자고!"
승자가 호쾌하게 몸을 돌렸다.
이어 초인 경비들이 올라와 패자를 끌고 퇴장했다.
패자를 따라가는 직원 손에 계약서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고물상이 혀를 끌끌 찼다.
"멍청하긴. 차라리 마력 좀 뱉고 말 것이지 계약서에 도장 찍히게 생겼네."
"초인이 아니면 이해 못 합니다. 마력은 초인의 모든 것이에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투기장은 한 곳이 아니었다.
여기서는 전사 계열 초인만 싸운다고 했다.
당연히 강화병 계열, 마법사 계열, 사제 계열마다 투기장이 달랐다.
기본적으로 아무 장비 없이 맞붙는다고.
"진짜는 여기죠."
콜로세움 최심부.
단체전이 벌어지는 곳.
여기만큼은 원조 콜로세움을 닮았다.
흙바닥을 깔아놓고 돌기둥을 요소요소 불규칙하게 세웠다. 언덕과 구릉이 있어 지형적 이점을 누릴 수도 있었다.
"랭킹전 장소입니다. 저기 전광판이 보이십니까?"
총천연색 초대형 전광판.
쉬지 않고 광고가 나오는 가운데 투기장 랭킹이 노출되고 있었다.
계열별 1위부터 100위.
개인 종합 순위. 그리고 단체 순위까지.
'쟈네트가 안 보이네.'
전사 계열 3대장 중 하나.
게임에서는 콜로세움에서 첫 등장인데 이름이 안 보인다.
시작 시점 몇 년 전이라 그럴까?
아직 나이가 10대 후반일 테니 등록이 안 되겠지.
어쩌면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고.
고물상이 나를 보며 말했다.
"여기서만큼은 모든 장비, 소모품 사용이 허가됩니다. 상층 투기장과는 다르죠."
"독이나 광전사 소모품, 치유 물약도요?"
"흐흐흐. 돈도 능력이고 인맥도 능력이죠. 그리고 여긴 무제한 투기장입니다. 아무 제한이 없어요. 레벨 떼고 계열 떼고 싸우는 곳이라고요. 못 이길 것 같으면 기권하면 됩니다."
기권하면 참가비를 내면 끝.
상층에서는 통하지 않는, 무제한 투기장만의 규칙이라고 했다.
대신 대박도 무제한 투기장에서 터진다고.
이기면 상대의 다이아는 물론 장비까지 갈취할 수 있으니까.
"한 판에 거의 수십억이 오가겠는데요?"
"수십억만 터지겠습니까? 수백, 수천억도 터지죠. 예전에 7레벨 초인들이 여기서 싸운 적도 있습니다."
"7레벨이요? 아니, 왜요? 차라리 변호사 공증 세워서 합법 결투를 하지."
"원한 관계였거든요. 여기 출신이기도 했고요."
"누가 이겼습니까?"
"흐흐. 같이 죽었습니다. 한 명은 엘릭서까지 꺼냈는데 못 마시고 숨이 끊어졌죠. 콜로세움 운영진만 노났습니다. 저도 그때 콩고물을 얻어먹었죠."
그렇지.
이득 보는 건 항상 운영진이고 모집 주체지.
나는 팔짱을 끼고 투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투기장에 참가해서 이기면 사장님한테도 떨어지는 게 있나 보죠?"
"그럼요. 3레벨 초인이 보통 두세 개를 만들잖습니까? 4레벨이면 서너 개, 5레벨이면 일고여덟 개고요."
"그렇죠."
"그중 절반은 초인님 몫입니다. 사 분의 일은 주최 측이, 나머지 사 분의 일은 소개한 사람이 먹고요."
"비율이 안 맞는데요?"
"한 번 싸우고 말 건 아니지 않습니까. 첫 경기에서 못 받으면 다음 경기에서 받습니다."
"한 번만 이기고 패하면 어쩌려고요?"
"흐흐. 그래서 사람 보는 눈이 있어야죠. 제가 볼 때 초인님은 한 번만 이기고 끝날 분이 아닙니다. 최심부는 몰라도 최소한 상층부는 제패하고도 남을 분이죠."
고물상이 꼴깍꼴깍 침을 삼켰다.
"독약파랑 나체파 상대하시던 모습, 동영상으로 잘 봤습니다. 더구나 박대엽이랑 사자 기사를 일대일로 이기지 않았습니까! 초인님을 이길 초인 따위, 투기장에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음······"
"마음에 안 드시면 여기서 돌아가셔도 됩니다. 하지만 초인님! 이건 진짜 거저먹는 겁니다! 완전 쉽게 다이아를 수확하실 수가 있어요! 저기 저놈들 보이십니까? 저놈들 다 초인님 밥이에요, 밥! 초인님도 어서 다이아 드시고 5레벨 가셔야죠! 5레벨 넘어서 6레벨, 7레벨까지 가셔야죠!"
나는 주위에 즐비하게 늘어선 초인들을 둘러보았다.
미남미녀를 끼고 술과 담배를 즐기는 초인들.
솔직히 보잘것없다.
기세등등하게 근육질 상체를 드러내거나 마력 파장을 뿜어내고는 있으나 하찮다.
대부분이 3, 4레벨.
나보다 약한 것들이니까.
솔직히 말해서 4레벨 이하 동레벨에게는 질래야 질 자신이 없다.
날 잡으려면 최소한 5레벨이 와야지.
말 그대로 돈 놓고 돈 먹기.
아니, 다이아 놓고 다이아 먹기.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좋습니다. 참가하지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거죠! 다 때려잡아 버리는 겁니다!"
고물상이 펄쩍펄쩍 뛰었다.
"한 번 맛이라도 볼까요? 오늘은 상층부에서 경기 몇 번 해보겠습니다."
최악의 경우 남겨놓은 넥타르를 마시면 된다.
넥타르를 그렇게 소모하더라도 다이아 수십 개를 얻을 수 있으면 확실히 남는 장사다.
거인의 힘, 금강체, 불사.
그것으로 완성되는 삼위일체 빌드.
여기에 이동기인 대공습, 마력심의 진화 특성인 마력혼, 상태 이상 하드 카운터인 불굴, 실전 능력을 강화하는 검 전문가와 총잡이를 상황별로 섞어주면 더 바랄 게 없지.
두 칸은 검법과 마력 연공법을 위해 비워둬야겠지만.
'검법이랑 연공법 새로 구할 때가 됐네.'
파산검법과 에인헤랴르 연공법은 3, 4레벨까지 유효하다.
그 이상은 상급 검법과 연공법이 필요하다.
이 두 개만 써도 5레벨에 도달할 수 있지만 미리 땡겨오는 것만은 못하지.
'성장 한계니까 더 열심히 해야지.'
한계 돌파하려면 넥타르를 미리 구비하는 것만큼이나 검법과 연공법이 중요하다.
"준비 끝났습니다."
잠깐 자리를 비웠던 고물상이 싱글벙글 웃으며 돌아왔다.
"벌써요?"
"당연하죠. 준비 다 해놨습니다."
"제가 참가할 거라고 확신하셨나 봅니다."
"흐흐흐. 초인님은 스마트한 분이시니까요. 처음 뵀을 때부터 알아봤지요. 그건 그렇고 언제 4레벨이 되신 겁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 안 됐습니다."
"저야 좋지요. 배당도 엄청날 거고요. 3레벨에 4레벨을 이기신 초인님인데, 4레벨에서 4레벨을 못 이기겠습니까?"
상층부로 돌아왔다.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걸친 것이라곤 팬티 한 장과 가운 한 벌이 전부.
비키니만 입은 미녀들이 다가와 기름을 발라주겠다고 했으나 거절했다.
필요 없어.
다치지 말라고 바르는 이유 절반, 번들거리는 시각 효과를 위해 바르는 이유 절반인데 나한텐 의미가 없다.
1초 컷 낼 작정이거든.
[거인의 힘][괴력][강타]
[맷집][인내][활기]
힘이 충만하게 차오른다.
커지는 덩치만큼이나 자신감도 자라난다.
"청코너! 슈퍼루키죠? 신림동의 밤을 제패하고 4레벨 초인을 연속으로 격파한 검의 대가, 투기장 최초 출전! 입장합니다!"
"와아아!"
"슈퍼루키라고?"
"4레벨 초인을 연속 격파했다는 소리는 뭐야?"
"저거 그놈이잖아! 사자 기사를 죽인 그놈!"
"뭐? 진짜야?"
세상이 떠나가도록 내지르는 함성.
귀청이 따가운 걸 넘어 뼈가 진동할 지경이다.
나는 적당히 맨주먹을 흔들며 걸어 나갔다.
기대와 의구심이 섞인 시선이 빗물처럼 떨어진다.
맞은편, 키가 2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구의 상대가 얼굴을 구기며 나를 주시했다.
"홍코너! 상층 투기장 3연승에 빛나는 그 이름! 근육 몬스터가 입장합니다! 슈퍼루키 대 근육 몬스터, 근육 몬스터 대 슈퍼루키! 과연 승리의 여신은 누구에게 웃음 지을 것인가!"
저벅. 저벅.
거구가 걸어온다.
마력 파장을 힘껏 담아 바닥을 꽉꽉 짓누르며, 그래서 유독 짙은 발자국 소리를 퍼뜨리며 내게 다가온다.
"흐흐흐."
거구가 징그럽게 웃었다.
"슈퍼루키시라고? 알아보니 명성이 자자하시던데."
"날 알아?"
"어, 알지. 유명하잖아. 사자 기사 잡은 거로. 칼이랑 도끼를 기가 막히게 썼다지? 하지만 말이야······"
거구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드득. 우득.
뼈 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렸다.
"투기장은 바깥에서 치르는 결투랑은 달라. 제한이란 제한을 덕지덕지 붙여놓고 싸우는 게 결투냐? 도련님들 소꿉장난이지. 흐흐, 마력 토하면서 울지나 마라."
"말이 길다."
"새끼가?"
인상을 팍 쓰는 거구.
"불쌍해서 좀 봐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다. 너 이 새끼, 근육이 생으로 뜯어져야 정신을 차리겠다? 아주 죽었다고 복창해라."
"죽는 건 너지."
입씨름하는 사이 시간이 되었다.
촤르륵!
철창이 내려왔다.
가로 세로 높이 4미터의 좁디좁은 철창.
도망칠 곳은 없다.
맞서 싸워서 이기는 수밖에.
"죽어!"
거구가 달려든다.
날 얕잡아 보는 듯한 말투와 다르게 냉정한 얼굴. 차가운 눈.
복싱을 배웠는지 체계적이면서 날카로운 몸놀림.
퍼억!
정확한 리버 블로우.
거구가 주먹을 내 복부에 꽂았다.
상당한 충격.
그러나 거인의 힘, 맷집, 인내 특성으로 견딜 수 있었다.
냉담하게 거구를 쳐다본다.
아무 피해도 받지 않은 것처럼.
티끌만큼도 아프지 않다는 듯 연기하면서.
거구의 눈이 흔들렸다.
"뭐······"
"내 차례지?"
뻐억!
단 일격.
그것으로 충분했다.
거구를 쓰러뜨리는 것은.
첫 상대인 거구만이 아니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무려 5연승.
자연스럽게 날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리고 도전장이 날아왔다.
발신자는 파괴왕.
게임 시작 시점에서는 랭킹 1위이자, 랭킹전 퀘스트를 주는 NPC.
내가 알기로 SR급 전사 계열 초인이었다.
콜로세움 -3-
"대박입니다, 대박!"
고물상이 싱글거리며 웃었다.
"역시 제 눈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와하핫! 5연승이라니. 5연승!"
"다이아 좀 버셨습니까?"
"다이아뿐이겠습니까! 돈도 몇 배로 불렸지요. 흐흐, 초인님 알아본 인간들이 돈을 걸어서 배당이 생각보다는 적었습니다만, 그래도 대박, 완전 대박입니다!"
나도 소소하게 용돈을 챙겼다.
돈에 구애 받지 않을 만큼 많이 벌긴 했지만 습관 같은 거였다.
언제 또 써야 할지 모르니까 벌 수 있을 때 버는 게 맞지.
5연승해서일까?
내게 개인 대기실이 배정되었다.
비키니 미녀들이 달라붙으려고 하자 귀찮아서 쫓아내 버렸다.
그러자 고물상이 묘한 얼굴로 날 쳐다본다.
"초인님은 여자한텐 관심이 없으십니까?"
"네. 별로요."
"그럼 잘 생긴 놈들로 들어오라고 할까요?"
응? 뭐라고?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저절로 머리를 격하게 흔들게 된다.
"절대, 절대 싫습니다. 절대로요!"
"어이쿠, 실수했습니다. 여자도 싫고 남자도 싫으면, 그쪽엔 아예 관심이 없으신가 봅니다."
"예. 없어요."
"인생의 가장 큰 재미를 외면하시다니······ 그래서 이렇게 강해지셨나 봅니다."
원래 세계에서 당한 게 있어서 그렇다.
전세 사기만 당하고, 공사 현장에서만 당한 게 아니라는 말.
정말 호구 중의 상호구였지.
온 세상이 나를 억까하는 기분.
그래서 요즘 이런 생각이 가끔 들곤 했다.
'꼭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할까?'
돈 있고 능력 있으니 이 세상도 살 만하다.
문제는 연이어 전개될 에피소드들.
고대신 부활, 핵전쟁, 차원 균열······
그것들을 막을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텐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고물상의 스마트폰이 띠리링 울렸다.
"오호."
고물상이 재미있는 사건을 목격했다는 듯 웃었다.
"도전장이 왔습니다."
"누구한테요?"
"4레벨 랭킹 1위, 종합 랭킹 10위한테요. 파괴왕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당연히 알지.
"들어봤습니다."
"역시 초인님이십니다. 파괴왕이 초인님 경기를 본 모양입니다. 초인님과 특별 경기를 갖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자신 있나 보네요."
"흐흐. 파괴왕을 얕보시면 안 됩니다. 초인님이 원샷원킬한 것처럼 파괴왕도 원샷원킬했었거든요. 요즘엔 쇼맨십에 불이 붙었는지 적당히 시간 끌면서 싸우고는 있습니다만."
파괴왕.
NPC이자 SR급 캐릭터.
게임 시작 시점에서는 5레벨.
지금은 4레벨이라는 것을 보면 그때처럼 완성되어 있진 않겠지.
'시작 특성이 뭐였더라?'
[실전 격투][거인의 힘][격투술]
이렇게 세 개.
보이는가?
상위 특성을 두 개나 가지고 있다.
특히 실전 격투.
강타, 연격, 방어, 회피, 반격, 제압을 조합하여 만드는 범용 전투 특성이다.
맨몸 격투든 무기 전투든 다 적용이 된다는 말.
'조금 어렵겠는데······'
관절기가 문제다.
파괴왕에게 거인의 힘이 없다면 우격다짐으로 어떻게든 벗어나겠으나 잡히면 그대로 경기가 끝날 가능성이 컸다.
나는 다이아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오늘 하루 번 다이아가 정확히 7개.
조금 아쉽다.
한 명이 다이아 제작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9개도 가능했을 텐데.
그래서 슬며시 욕심이 생겼다.
'꼭 지란 법은 없어.'
내게도 장점이 있다.
백지 신체와 특성 전환.
맨손 격투를 벌이면 내가 불리한 건 사실이지만 스펙만큼은 내가 우위에 있다.
하나 더.
여기서 내가 실전 격투 특성을 조합하면 어떻게 될까?
'충분히 가능해.'
실전 격투 특성의 마지막 조각, 제압.
그 특성 획득 조건을 떠올린 후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괜찮으시겠습니까? 특별 경기는 꼭 안 받으셔도 됩니다. 상대가 파괴왕이니까 주최 측에서도 이해할 겁니다. 랭킹도 심하게 차이가 나고요."
"자신 있습니다."
"그러시다면야 뭐······ 꼭 이기셔야 합니다!"
경기가 성사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무대가 마련된다.
"와아아!"
"슈퍼루키가 파괴왕과 맞붙는다고?"
"파괴왕이 특별 지명했대!"
"여윽시 파괴왕. 슈퍼루키가 잘 나가는 꼴을 못 보지!"
"자라나는 새싹은 밟아줘야 우리의 파괴왕 아니겠어?"
철창이 내려오기 전.
파괴왕과 마주 보고 섰다.
나도 파괴왕도 근육질의 거구.
키도 평범한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컸고 근육이 위압적으로 울룩불룩 돋아 있었다.
똑같이 거인의 힘을 장착한 까닭이다.
"흐흐."
프로레슬링 마스크를 쓴 파괴왕이 이죽거리며 웃었다.
"애송이가 내 지명을 받다니, 간이 배 밖에 나온 게 아니냐?"
"간이 배 밖에 나온 건 너겠지."
"흐흐. 실컷 떠들어라. 어차피 곧 처맞고 애처럼 엉엉 울게 될 거다."
"너야말로."
"타고난 몸을 믿는 모양인데 스펙 따위, 기술 앞에선 무의미하다는 걸 알려주지."
가만히 몸을 풀었다.
스트레칭 쭉쭉 하고 제자리 뜀뛰기를 해서 몸에 열도 올리고.
가장 중요한 특성을 교체한다.
[거인의 힘][괴력][근력]
[맷집][인내][반격]
밸런스 따위 집어치웠다.
나 자신이 다칠 위험까지 감수하고 선택한 특성 세트.
촤르륵!
철창이 내려왔다.
땡! 하는 종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된다.
"죽여주마!"
비호처럼 몸을 날리는 파괴왕.
신속한 움직임.
내게 주먹을 날리려다 내가 몸을 틀자 바로 태클 자세로 전환한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관절기부터 걸 줄 알았어!
쿠웅!
어떻게 손 쓸 새도 없었다.
실전 격투와 격투술의 조화.
내가 파괴왕이 달려드는 것을 인지했을 때 이미 파괴왕이 내 허리를 붙잡고 머리부터 거꾸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끝이다!"
잔뜩 희열에 차 외치는 파괴왕.
"우오오!"
"나왔다!"
"꽂아버려!"
환호하는 관중들.
게임에서 파괴왕의 특기가 이것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격투가 직업으로 분류되는 파괴왕.
세부적으로는 레슬러.
인간형 적을 만나면 파괴왕은, 무조건 달려들어 머리를 땅에 메다꽂곤 했다.
그런데 그거 알아?
공격 방법과 타이밍을 알고 있으면 아무리 대단한 관절기라도 쉽게 파훼할 수 있다는 거?
나는 처음부터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괴력을 발동하고 반격을 사용한 채로.
파괴왕이 잽 날리듯 페이크를 넣던 그 순간부터 진작.
뻐억!
주먹이 복부에 제대로 꽂혔다.
거인의 힘, 괴력, 근력의 삼중주.
더하여 반격까지 완벽히 발동.
"끄억!"
파괴왕이 흔들렸다.
그 틈을 타 나도 균형을 잡고 빠져나왔다.
그러나 파괴왕은 파괴왕이었다.
태생 SR 등급의 격투가.
내 팔을 잡아채서는 그대로 암바를 넣으려고 했다.
나는 이마저도 예측했다.
최초 공격이 빗나가면 선보이는 3연속 관절기!
그 두 번째가 암바였으니까.
뻐억!
이번에도 반격.
또, 괴력.
팔꿈치로 아까 때린 복부를 다시 후려갈겼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파괴왕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는 것을.
"끄아악!"
모르긴 몰라도 내장에 심각한 타격이 갔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내장이 파열되고도 남았을 위력.
파괴왕은 이마저도 견뎌냈다.
비록 팔은 놓쳤지만 우람한 팔뚝을 뻗어 내 목을 휘감으려고 한다.
초크.
하지만 느렸다.
상복부에 2연타를 맞은 까닭에 아주 약간의 틈이 생겼다.
타앗!
특성 교체와 함께 뛰쳐나간다.
[기동][도약]
파괴왕의 손끝이 아슬아슬 내 목을 핥았다.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
거의 철창에 닿기 직전에 멈춰선 나.
그런 나를 노려보는 파괴왕.
"너······"
숨길 수 없는 놀라움이 두 눈동자 가득하다.
예지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리도 반격하고 피했냐는 얼굴.
그런데 이걸 어쩌나.
정말로 놀랄 장면은 지금부터인데.
"후우우."
참았던 숨을 길게 들이쉰다.
새로운 힘이 느껴진다.
파괴왕을 주시하자 어디를 어떻게 잡아야 꺾을 수 있는지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실제 현실과는 다를지라도 새로 얻은 특성이 주는 영감.
[제압] 특성.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나는 전광석화처럼 특성을 바꿨다.
[강타][연격][반격]
[방어][회피][제압]
설명도 필요 없는 여섯 가지 기본 전투 특성.
"으음?"
파괴왕이 멈칫했다.
이상하겠지.
자기처럼 장대한 체구를 자랑하던 내가 갑자기 쪼그라들었으니.
키 190에서 키 180으로.
우락부락 근육질 체형에서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그게 패착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즉시 달려들었으면 혹시 몰랐다.
이번 경기가 파괴왕의 승리로 결정되었을지.
그러나 잠깐, 아주 잠깐 주저한 것이 승패를 가르고 말았다.
와장창!
마력 회로가 깨진다.
글자가 부러지듯 낱낱이 해체된다.
마력 회로를, 전신 신경계를, 심혈관계를 모조리 으깨듯 질주하는 통증.
고통은 이내 짜릿한 시원함으로 변했다.
온천에 들어간 듯한 쾌감이 척수를 타고 뇌까지 질주했다.
파앗!
머릿속에서 방아쇠가 당겨진 것 같다.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특히 저 앞에 서 있는 파괴왕.
자연스러우면서 꼿꼿한 자세가 얼마나 힘든 단련을 거쳤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실전 격투] 특성이 개화한 것.
파괴왕이 불가해의 괴물을 보듯 나를 보았다.
"넌, 넌 뭐냐?"
"뭐가?"
"도대체 뭐냔 말이다! 대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그렇게 강해질 수가 있어!"
[거인의 힘][실전 격투][강타]
[맷집][재생][활기]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내가 실전 격투 특성을 획득한 것을.
실전 격투를 얻기 전의 내가 덩치 크고 힘센 애송이에 불과하다면 지금은 어엿한 한 명의 전사.
맨손 격투로만 따지면 파괴왕에게 밀리겠지만 내게도 비장의 무기가 있다.
뚜벅뚜벅 걸어간다.
파괴왕이 두 주먹을 들어올린다.
복싱 자세.
레슬링 기술을 또 걸 생각은 없어 보인다.
장기로 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3연속 관절기가 파훼 당했으니 또 쓰고 싶진 않겠지.
나도 그게 낫다.
본격적인 그래플링으로 들어가면 기술적으로 너무 떨어지니까.
"죽어!"
휘익!
주먹이 날아온다.
터업.
팔을 들어막는다.
강타 특성을 방어 특성으로 바꾼 다음이다.
둔중한 충격이 팔을 타고 번졌지만 크지 않다.
쌔애액!
나도 주먹을 휘두른다.
다시 장착한 강타 특성 아래 주먹이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터뜨린다.
파괴왕이 머리를 숙여 피했다.
이어 자세 낮춘 그대로 벼락처럼 접근하여 주먹을 내지른다.
뻐억!
이번에는 막지 못하고 그대로 맞았다.
격한 충격이 상복부를 관통하지만 괜찮다.
이미 장착한 방어 특성이 실전 격투 특성과 함께 피해를 효과적으로 막아줬으니까.
퍼억! 뻑! 뻑!
난타전이 벌어진다.
맞고 때리고 맞고 때린다.
확실히 파괴왕의 공격은 예리하고 정교했다.
사각에서 솟구치는 주먹이 내 턱을 부술 듯 후려치고 관자놀이를 강타한다.
내가 한 번 때리면 최소한 서너 번은 유효타를 맞는 느낌.
그러나 비등비등하다.
실전 격투 특성과 다른 하위 특성의 중첩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평타에 강타가 묻고 자동으로 방어가 발동하며, 다른 모든 전투 행동에 보정이 더해지는 실전 격투 특성.
여기에 얻어맞을 때는 방어를, 공격할 때는 강타를 같이 쓰면 어떨까?
반격할 때는 반격 특성을 쓰면?
그 결과가 지금 나오고 있었다.
"크으윽!"
한 대 얻어맞은 파괴왕이 이를 갈았다.
얼굴이 찐빵처럼 부풀어 있다.
얻어맞기는 내가 훨씬 많이 얻어맞았지만 내겐 특성 전환이 있었다.
방어, 맷집으로 피해를 줄인다.
재생, 활기로 상처를 치료하고 체력을 회복한다.
그런데 파괴왕이 날 이길 수 있을까?
절대로 불가능하다!
"끄아악!"
마침내 날린 최후의 일격.
파괴왕이 나동그라졌다.
"아직, 아직이다! 아직이란 말이다!"
바닥을 벅벅 기며 일어서려 하는 파괴왕.
나는 콜로세움에 처음 들어왔을 때 봤던 전사처럼 파괴왕의 허리를 짓밟았다.
"커허억!"
"항복해라. 허리 부러지기 싫으면."
"젠장!"
이미 [제압] 특성을 장착했다.
관절기를 쓸 때 가장 강력하게 적용되는 특성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쓸 수 있지.
버둥거리던 파괴왕이 결국 축 늘어졌다.
억울함에 이를 갈고 머리를 바닥에 쿵쿵 찧으면서도 해야 할 말을 입에 담았다.
"항복······ 항복한다."
잠시 정적.
그리고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우와아아!"
"파괴왕이 졌다!"
"세상에, 파괴왕이 지다니!"
"김전사! 김전사!"
"전사왕이다!"
"전사왕! 전사왕!"
뭐? 전사왕?
파괴왕도 그랬지만 뭐 이런 유치한 이름이 다 있어.
쌍팔년도 프로레슬링 선수들 이름보다 더하다.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고.
내가 슬쩍 외면하고 천장만 바라보자, 철창이 열리고 사회자가 들어와 내 팔을 들어 올렸다.
"승자는 청코너! 청코너의 전사왕! 놀랍게도 오늘 데뷔한 전사왕의 승리입니다! 등장 하루 만에 랭킹 1위 파괴왕을 꺾은 전사왕! 과연 그는 어디까지 올라갈 것인가! 다시 한번 소개합니다. 4레벨 전사 분야 랭킹 1위, 전사왕입니다!"
"전사왕! 전사왕!"
"니가 최고다!"
"전사왕! 다 죽여버려! 우아아! 전사왕!"
그만해······
내 HP는 이미 0이라고!
"자, 그럼 계약대로 다이아 생성을 진행하겠습니다."
사회자가 들고 있던 오색 수정을 내밀었다.
파괴왕이 침중한 얼굴로 수정을 본다.
아쉽겠지.
여태 쌓아온 마력 회로를 허물 생각을 하면.
그런데 파괴왕의 대답은 내 예상 밖의 것이었다.
"특약 사용을 요청한다."
"특약. 패배 시 특약 말씀이시죠?"
"그렇다."
"그러려면 승자의 허락을 받으셔야 합니다."
파괴왕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특약이라니?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사회자가 차분히 설명했다.
"파괴왕이 랭킹 1위가 되었을 때 저희가 맺은 특약이 있습니다. 패배 시, 다이아 제작과 장기 계약 말고 새로운 선택지를 받는 특약이었지요."
"그게 뭡니까?"
"간단합니다. 파괴왕은 지금 4레벨이고, 다이아를 만들면 서너 개밖에 안 나옵니다. 그러니 주최 측에 다이아 1개, 중개자에게 다이아 1개를 주고 승자와 따로 협상하여 타결되면 직접 다이아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특약이었지요. 승자 입장에서도 다이아를 더 받을 수 있으니 이익이잖습니까."
그런 식으로 빠져나간다고?
하긴 안 그러면 콜로세움 유지가 안 되지.
랭킹 1위면 한 번 패했다고 폐기 처분하는 건 아깝기도 하고.
아마 파괴왕 말고도, 랭킹 1위 말고도 이런 특약을 맺은 선수가 꽤 있지 싶다.
나는 팔짱을 끼고 파괴왕을 주시했다.
"그래서 허락하면 뭘 줄 겁니까?"
파괴왕이 굴욕적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든 다이아 제작만은 피해야 할 상황.
파괴왕은 고민하지도 않고 조건을 불렀다.
"다이아 10개를 드리지요."
"10개?"
"예. 전사님······ 전사왕님도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제가 다이아 만들어도 많아야 4개밖에 안 나옵니다. 전사왕님은 겨우 2개 받을 거, 다섯 배는 더 받는 셈이지요."
그 정도면 괜찮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은가?
거인의 힘과 실전 격투, 상위 특성을 두 개나 가진 파괴왕.
SR급 4레벨 초인의 마력 회로가 그 정도 값어치밖에 안 돼?
넥타르 마실 거 아니면 최소 몇 달은 쉬어야 하는데?
"부족합니다."
"예? 부족하다니요? 다이아 10개가 부족합니까?"
"하나 더 주시죠."
"하나 더요? 음, 다이아 11개라······ 그 정도는 드릴 수······"
"아뇨. 다이아 말고요."
나는 파괴왕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모멸감과 치욕, 분노로 떨리는 눈동자.
그 안에 숨긴 비밀.
다이아쯤 파괴왕에게 별것 아니다.
그래서 요구했다.
파괴왕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을.
게임에서 등장할 때 차고 나오는, 개인 퀘스트를 완료하지 않는 한 장비 해제도 안 되는 그 물건을.
"무쇠주먹을 얹어 주시면 합의해드리겠습니다."
SR급 마법 무구.
무쇠주먹.
파괴왕이 눈을 부릅떴다.
콜로세움 -4-
"무쇠주먹이라뇨? 그게 뭡니까?"
파괴왕은 급히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늦었어.
놀란 거 다 봤다고.
"없으면 다이아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10개로 부족하면 20개를 드리겠습니다!"
"됐어요. 다이아 10개에 무쇠주먹. 그 조건 아니면 거부합니다. 다이아 만드세요."
내가 보는 이익에 정신 팔리면 안 된다.
상대, 즉 파괴왕이 입을 손해가 중요하다.
나처럼 넥타르가 있다면 모르겠으나 다이아만으로는 부족하지.
아무리 다이아가 미니 넥타르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넥타르처럼 환골탈태 효과까진 없으니까.
여기서 마력 회로를 덜어주고 나면 한동안 정양해야겠지.
으드득!
파괴왕이 이를 갈아붙였다.
단호한 내 태도에서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느낀 것.
"정말로, 정말로 그 조건이어야만 합니까? 다른 조건은 안 됩니까?"
"안 됩니다."
성질 더러운 인간이라면 엿 먹어라 하고 마력 회로를 쨌을 것이다.
파괴왕은 그런 류의 인간이 아니다.
자기 실리가 더 중요하다.
대신 자존심이 드높은 만큼 내게 한 가지 조건을 달겠지.
"······좋습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까지 안 받으신다면 원하시는 대로 다이아를 만들어 드리지요. 제가 직접!"
"뭡니까?"
"나중에 제가 원하는 때, 이 콜로세움 최심부에서 무제한전을 치렀으면 합니다. 무쇠주먹을 걸고요."
예측대로였다.
파괴왕은 게임에서 보던 것과 똑같이 행동했다.
"좋습니다. 단, 일정은 서로 협의하는 것으로 하죠. 저도 바쁜 몸이라서요. 그렇다고 차일피일 미루지는 않겠습니다. 분명히 약속드리지요."
"믿겠습니다."
파괴왕이 휘청휘청 일어났다.
씁쓸히 퇴장하는 뒷모습.
무대 위에서 약간의 시간을 보낸 다음 대기실로 돌아왔다.
고물상이 잔뜩 흥분해서는 기다리고 있었다.
"초인님! 아니, 전사왕님! 정말로 엄청나십니다! 와, 그 깔끔한 회피에 불꽃 튀는 맞대결이라니요! 벌써 소문이 자자합니다. 초신성이, 전사왕이 등장했다고요!"
"다 좋은데 그 별명은 부르지 마세요."
"예? 왜요? 멋있잖아요?"
"전혀 안 멋있습니다. 유치해요. 제 앞에서는 절대 그 별명 쓰지 마세요."
"멋있는데······"
"한 번만 더 부르시면 다른 중개자 찾아가겠습니다."
"허억! 절대, 절대 안 쓰겠습니다. 절대로요!"
투자한 다이아가 얼만데 절대 날 못 놔주겠지.
나지막한 협박에 고물상이 머리를 수그렸다.
그것도 잠시. 문이 열리고 고풍스러운 상자가 들어오자 받아들고는 내게 가져온다.
"파괴왕이 보낸 겁니다. 특약으로 받으셨다면서요? 다이아 10개랑 무쇠주먹······ 허억! 무쇠주먹? 이야, 초인님 제대로 한 건 하셨네요. 상위 아티팩트 무쇠주먹입니다."
콜로세움 직원 입회하에 상자를 개봉했다.
파괴왕이 동봉한 핏방울을 떨어뜨리고,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USB를 꽂고, 아날로그 열쇠까지 돌린 다음에야 상자가 열렸다.
그리고 드러나는 투박한 강철 장갑 하나.
손부터 아래팔까지 싹 보호하는 형태.
얇은 강철판이 물고기 비늘처럼 촘촘히 배치되어 있다.
이음새 안쪽에서는 청회색 마력광이 숨쉬듯 박동했다.
철컥.
손에 차자 저절로 크기가 줄어들며 딱 맞춰진다.
보유한 능력은 [무쇠주먹].
한 번 사용해 보았다.
촤아악!
강철판이 펼쳐지며 마력광이 내 전신을 감싼다.
마치 판금 갑옷을 껴입은 중세 기사를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무쇠주먹.
평소에는 힘과 체력을 강화하는 수준에서 그치지만, 딱 10초에 한해 모든 피해를 어마어마하게 감소시킨다.
재충전에 24시간이 걸린다는 게 단점이지만 여벌의 목숨이라고 생각하면 싸다.
'드디어 흡혈 장갑을 벗겠네.'
그 자리에서 고물상에게 넘겼다.
"잘 썼습니다."
"어······"
고물상이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팔았던 물건이네요. 다시 매입해드릴까요?"
"그럼 좋죠."
"흐흐. 그냥 주시면 더 좋고요."
"계산은 확실히 합시다."
"어휴, 그럼요. 당연한 말씀을. 이렇게 다시 받으니까 기분이 좀 묘합니다."
"그때 사장님이 오버하셨던 건 기억나세요?"
"당연하죠. 그게 다 초인님한테 절 어필하려고 그랬던 겁니다."
그러니까 장갑을 착용해서 살갗을 뜯는 퍼포먼스까지 한 거지.
물건 팔고 말 게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나를 콜로세움 선수로 세우고 싶어서.
결과적으로 보면 제대로 성공했고.
"초인님. 그럼 다음에는 언제 또 오시겠습니까?"
"글쎄요? 다이아가 필요해지면요."
"하긴 오늘만 17개를 버셨으니······ 저도 다이아 물량이 생기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오늘 번 건 저도 쓸 곳이 있어서요."
고물상이 콜로세움 직원을 힐끔 본다.
콜로세움 직원이 씨익 웃는 것이, 아마 콜로세움에 빚진 다이아가 있는 모양.
아쉽네.
고물상한테 다이아 3개 정도만 샀으면 특성 2개 이식이 확정되는 건데.
"알겠습니다. 그럼 돌아갈까요?"
"흐흐! 예! 댁에 가셔야죠!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슬슬 동이 트고 있었다.
아직 출근 시간 전.
뻥 뚫린 도로를 쌩쌩 달려 집에 돌아왔다.
수련실에 들어온 다음 다이아를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불사 먼저 가자.'
다이아 20개를 벌었다면 내 선택도 달라졌을 것이다.
성채와 극기를 가져와서 금강체를 완성했겠지.
하지만 애매하게 17개.
게다가 오늘 너무 화려하게 데뷔한 탓에 당분간 경기를 치르기도 어렵다.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낼 필요가 있었다.
"후우우."
심장이 벌렁거렸다.
상위 특성을 하나하나 조합하고 갖춰나가는 재미.
강해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는 데서 오는 고양감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나씩 특성을 곱씹으며 장착했다.
언제나 충실하게 몸을 회복시키는 [재생]
몸이 망가져 있을수록 강하게 발현되는 [소생]
외상 치유에 특화된 [상처 회복]
가장 기본적이지만 체력 회복만큼은 확실한 [활기]
체력을 크게 강화하고 빠르게 회복시키는 [원기왕성]
마력을 소모해서 몸을 치료하는, 마법에 가까운 [치유]
우드드득!
특성을 조합한 순간 전신이 크게 흔들렸다.
거인의 힘 때보다 심했다.
뼈와 근육이 으스러지는 것은 물론 내장이 크게 뒤틀리고 전신 혈맥이 끓어오른다.
"끄으윽."
겨우 신음을 삼켰다.
인내 같은 특성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몸이 으깨지고, 찢어지고, 불타고, 얼어붙고, 힘이 쫙 빠졌다가 차오르는 것을 맨정신으로 견뎌야 했다.
거의 신열에 비견되는 고통.
한참이 지나고서야 특성 조합이 끝났다.
더없이 명징한 정신으로, 어쩐지 어색한 감각을 느끼며 거울 속 나를 보았다.
겉으로 보이는 변화는 없다.
다만, 다만 뭐라고 할까?
내가 보기에도 이상한 분위기가 풍겼다.
차돌처럼 단단한 자세.
심원하게 가라앉은 눈빛.
[불사]를 해제하자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간다.
'눈에 띄긴 하겠네.'
거인의 힘으로 장대한 덩치가 되어, 조금 전처럼 강인한 분위기를 풍긴다?
어딜 가든 시선을 끌 것이 분명했다.
금강체까지 완성해서 삼위일체 빌드를 이루면 아주 장관이겠어.
"마지막은······"
방호복 하의와 접이식 방패를 놓고 생각에 잠겼다.
극기와 성채.
마법 방어에 특화된 극기와 일정 시간 방어력과 저항력을 크게 올려주는 성채.
한참 생각하다가 방패를 골랐다.
'성채를 이식하고, 방패를 새로 하나 더 구하자.'
어차피 방호복은 오래 써야 한다.
이만한 물건을 구하기가 힘드니까.
방패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돈을 쌓아둔 지금 어떻게든 적당한 방패를 구할 수 있었다.
무쇠주먹처럼 고유 특성 SR급 방패면 참 좋겠는데.
성검이랑 마총도 바꾸고 말이야.
솨아아.
성채가 내 몸에 스며들었다.
금강체까지 남은 것은 단 한 발자국.
삼위일체 전사 빌드까지 남은 것도 단 한 발자국.
뿌듯하게 차오르는 충만감을 느끼며 잠시 여운을 즐겼다.
나머지 다이아는 킵.
최우선 목표는 금강체이고 두 번째는 대공습, 세 번째는 마력혼이었다.
이것들 말고도 불굴이랑 총잡이, 검 전문가가 줄줄이 대기하는 중이지.
'내친김에 육감도 만들어?'
육감의 재료 특성은 민감, 밝은 눈, 쫑긋 귀, 개코, 신의 혀, 예민 피부. 이렇게 여섯.
가장 얻기 어려운 게 개코였다.
자그마치 수르스트뢰밍에 코박죽을 해야 했으니까.
신의 혀나 예민 피부는 쉽지.
살미아키(감초 사탕) 좀 먹으면 되고 화장품을 건성 지성 복합성 민감성 피부 네 종류별로 사서 피부에 바르면 된다.
'나가기 귀찮다.'
스마트폰 놔두고 발품 팔 필요 없지.
즉석에서 감초 사탕과 남성용 화장품을 종류별로 주문했다.
아마 내일 정도면 도착하겠지.
수련하는 틈틈이 감초 사탕 먹고 화장품을 바르도록 하자.
"흐, 좋다."
마력천 물에 몸을 담갔다.
특성을 교체하면서 최적의 조합을 찾아본다.
[파산검법][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심]
[거인의 힘][불사][인내]
이 정도면 적당했다.
만약에 인내를 금강체로, 마력심을 마력혼으로, 파산검법과 에인헤랴르 연공법을 상급 검법과 연공법으로 교체한다면?
그야말로 완성형.
물론 그렇게만 사용할 생각은 없지만.
'좀 자자.'
2레벨 막바지.
잠도 안 자고 수련하느라 부작용이 생겼던 것을 기억한다.
오늘도 밤을 샜으니 조금이라도 자둬야지.
마법 욕조에 몸을 묻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네 시간쯤 지나 정오 무렵 깨어났다.
수련 시작.
쌔액! 쌕쌕!
바람 가르는 소리가 씩씩하다.
일점과 참격을 연달아 쓰면서 머리를 굴렸다.
'검 전문가도 얻어야지.'
최소한의 필요 특성, 즉 검술은 갖췄다.
서우진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지.
여기에 일점과 참격이 있으니 발도, 흘리기, 쳐내기 특성만 있으면 검 전문가가 완성된다.
추가로 다른 무기류 전문가를 잔뜩 만들어 조합하면 그게 무기 전문가 빌드인데······
'나한테는 소드마스터가 나아.'
소드마스터는 별명.
정식 명칭은 검의 주인.
무기 전문가는 여섯 개나 되는 무기류 전문가의 조합 특성인 만큼 보너스가 무시무시하다. 추가 능력치로만 따지면 아케인 서울 모든 최상위 특성 중에서도 0티어.
문제는 고유 특성이었다.
누구나 인정하는 원탑 천마신공.
그 뒤를 잇는 3대 검법.
나머지는 싹 다 3대 검법 아래니까. 창법이든 권법이든 간에.
아무리 무기 전문가로 김전사 능력치를 뻥튀기해도 천마한테는 안 됐다.
천마를 이길 방법은 하나.
3대 검법을 모두 전승받고 검의 주인에 기반한 특화 특성 세트를 짜는 것.
'발도부터 얻어보자.'
자세를 잡았다.
몸을 살짝 틀고 왼손으로는 검집을 잡고 뒤로 뺀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성검 손잡이를 잡고 마력 부여.
마력이 검집 내부에 고였다 싶을 때 폭발시키며 발도!
꽈르릉!
마력이 터지며 천둥이 울렸다.
새파란 빛이 섬뜩하게 뛰쳐나왔다.
그러나 날카롭지는 않다.
소리만 요란할 뿐, 사방팔방으로 힘이 방사되며 빛만 터뜨리고 있었다.
"아오!"
더구나 마력 일부가 내 얼굴을 때렸다.
불사 특성 덕분에 금방 회복되었지만 따가운 건 따가운 거였다.
'쉽지 않네.'
그나마 백지 신체의 김전사라 도전하는 거지, 다른 캐릭터로는 수련으로 발도를 얻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실전을 겪거나 스승 NPC를 찾아가 전승받아야 했다.
"후우, 후우."
쉬지 않고 발도 연습을 한다.
실전에서 발도를 쓰는 게 획득 확률이 10배 이상 높지만 실전에서 쓰다간 칼 맞고 죽기 십상.
지겹고 오래 걸리더라도 시간과 노력을 충분히 들이는 게 답이었다.
특히 김전사에게는.
꽈릉! 꽈르릉! 꽈릉!
내 계산으로는 사흘 정도 걸리지 싶다.
문제는 발도가 아니라 흘리기와 쳐내기.
혼자 수련해서는 절대 얻을 수 없다.
스승이나 상대가 필요한데······
'또 신세 지기는 그렇고.'
저번에 검술 지도는 허용 범위였지.
내가 베푼 게 있으니까.
그런데 흘리기와 쳐내기까지 서우진의 지도를 받는다?
공짜로?
명백히 선을 넘는 거고 빚을 지는 거다.
차라리 초인 용병을 고용해서 대련하는 게 백번 낫다.
'그렇게 하자.'
우선 발도부터 얻고.
"후읍, 흡!"
다시 검을 휘두른다.
벽력음을 울리며 허공을 찢는다.
이틀이 지났을 무렵.
침묵하던 내 스마트폰이 울음을 토했다.
[정진영 사냥꾼]
내게 산왕 시체를 비싸게 샀던 사냥꾼.
갑자기 무슨 일이지?
[안녕하십니까. 저 기억하시죠? 철원 시국에서 뵀었습니다만.]
"기억하지요. 산왕 시체 사시지 않으셨습니까."
[하하. 기억하시네요. 다른 게 아니라 초인님을 우리 협회 정회원으로 초빙하려고 하는데 어떠십니까? 산왕 시체를 보고 회장님께서 크게 감탄하셨습니다.]
사냥꾼 협회?
그거 좋지.
사냥꾼 협회 정회원이면 두 군단에게 일일이 사냥 허가를 받을 필요도 없다. 회원증 제시하고 들어가서 사냥하고 나중에 신고만 하면 된다.
특성 영약의 재료가 되는 수많은 사냥감.
마법 무구와 영약, 희귀한 재료를 대가로 주는 다양한 임무.
거부할 이유가 없다.
"좋습니다. 기꺼이 받아들이지요."
[그럼 죄송하지만 협회에 잠깐만 와주시겠습니까? 협회장님께서 초인님을 꼭 한 번 뵀으면 하십니다.]
"영광이지요. 바로 가겠습니다."
아마 그 사람이겠지?
동글동글 사람 좋고 성격 좋고 보상 퍼주는 아저씨.
흔히 호구 협회장으로 통하는 인물.
그런데 아니었다.
전혀 엉뚱한 사람이 내 앞에서 날카로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사냥꾼 협회장 윤병진입니다."
당신 사냥꾼 협회장 아니잖아.
내 기억 속, 스마트 화면 속에서 이 남자는 전혀 엉뚱한 직함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국회의원]이자 [암살 조직 보스]로서.
사냥꾼 협회 -1-
사냥꾼 협회
게임에서는 우호 NPC가 아니라 빌런으로 나오는 캐릭터.
이 인간이 왜 여기 있어?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전사입니다."
"허허, 영광은요."
협회장이 허허거리며 웃는다.
그러나 웃을수록 날카로운 눈이 더욱 매서워지며 뱀 같은 인상만 짙어질 뿐이다.
겉으로는 나도 웃으며 캐릭터 설정을 떠올렸다.
1만 시간 게임을 하면서 게임 내 모든 정보를 암기했던 나.
협회장, 즉 암살 조직 보스는 비중이 큰 빌런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렸다.
'맞아. 사냥꾼 협회 출신이라고 했지.'
사냥꾼 협회에서 모종의 사건을 일으켰고 그게 계기가 되어 현재, 아니 미래의 협회장에게 쫓겨났다고 했다.
그 모종의 사건이 뭔데?
아쉽게도 아케인 서울은 거기까진 알려주지 않았다.
나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고.
"헉, 헉, 늦었습니다!"
"강 이사. 빨리빨리 다니라고 몇 번을 말해?"
"하핫, 죄송합니다. 협회장님."
잠깐 대화를 나누는 사이 문이 열렸다.
익숙한 얼굴이 들어온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머리카락이 슬슬 빠지는 이마.
방글방글 항상 웃고 있는 인상.
유저들 사이에서 호구 협회장으로 통하던, 개꿀퀘를 강물처럼 내려주던 NPC.
지금은 강 이사였다.
강 이사가 날 보더니 반색했다.
"산왕 사냥하신 분 맞지요? 이거 반갑습니다! 강기석 이사입니다. 편하게 기석아, 라고 불러 주십쇼."
"하하, 농담도 잘 하십니다. 김전사입니다."
"하하핫, 초인님 덕에 제가 요즘 마누라한테 큰소리치고 살지 않습니까? 앞으로도 산왕 같은 놈 잡으면 꼭, 꼭 저한테 팔아주세요!"
"으흠."
듣고 있던 협회장이 헛기침을 했다.
강 이사가 자기 뒤통수를 뻑하고 때렸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아, 협회장님. 그 이야기는 하셨습니까?"
"이제 해야지. 그리고 강 이사는 중국 간다더니 어떻게 온 거야?"
"이무기 사냥도 중요하지만 저 없어도 잘하지 않겠습니까? 송 부장이랑 성 과장이 같이 가는데요. 그 둘이면 믿을 만하죠."
"그야 그렇지."
"해서 산왕 사냥꾼도 볼 겸, 단합대회도 참가할 겸 돌아온 겁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암, 강 이사가 참가해야 모양이 살지. 요즘 연천파만 챙겨준다고 오죽 말이 많아서 말이야."
"그러게 적당히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크흠!"
연천파?
내가 생소한 단어를 머리에 입력시킬 때 강 이사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래서 초인님. 초인님도 우리 협회 가입하시는 거지요?"
"긍정적으로 고려하는 중입니다."
"아따, 간 보지 말고 남자답게 팍 가입해 버리지 그럽니까! 우리 협회 가입하면 뭐가 좋은지 알아요?"
"뭐가 좋습니까?"
"우선 사냥 허가 문제! 우리 협회 가입만 하면 2급 보호종까지는, 그러니까 뿔호랑이 같은 놈 빼고는 팍팍 잡아도 된다 아닙니까! 대신 눈치는 잘 봐야죠. 멸종은 안 되게 해야 하니까요."
"세제 혜택도 말씀드려."
"그럼요! 세제 혜택! 사냥 허가에 사냥세도 포함되는 거 알지요? 그거 다 무룝니다. 협회원 할인에, 나머지 사냥세는 우리 협회가 다 대납한다, 이겁니다."
"대납까지 해줘요?"
"그럼요! 대신 사냥감을 우리한테 넘기는 조건입니다. 아, 나쁜 조건은 아닐 거예요. 우리도 합리적인 가격에 인수하거든요. 도축까지 하실 줄 알면 더 좋고."
강 이사는 온갖 혜택을 떠들었다.
입 안 아프나?
게임에서도 대사 엄청 출력하더니 투머치토커가 따로 없다.
과장 조금 보태어 고막에서 피가 날 지경.
나는 질렸다는 얼굴로 두 손을 내밀었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가입하겠습니다."
"하핫! 잘 생각하셨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나오셔야죠. 그럼 가입 신청서를······"
"강 이사. 강 이사가 직접 챙길 필요는 없어. 관리국에 맡기면 그만이지."
"아 참. 그렇죠."
"가입을 환영합니다, 김 사냥꾼. 서류 처리가 남아 있지만 내 직권으로 지금 가입을 승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협회장님. 강 이사님도 설명 열심히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제 가도 되냐?
커피라도 마시면서 쉬고 싶은데 강 이사는 날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김 사냥꾼도 단합대회 참석하는 거지요?"
"단합대회요?"
"예. 우리 회장님께서 몇 달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신 협회 행삽니다. 바로 오늘 출발이고요."
내가 그런 데를 꼭 가야 하나?
수련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협회장도 영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이미 올 사람 다 정해서 일정까지 잡아 놨는데······"
"협회장님! 겨우 숟가락 하나 얻는 게 뭐가 힘듭니까? 단합대회라고 해봐야 떼로 몰려가서 사냥하고 고기 뜯으면서 술 먹는 게 다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같이 가지요. 말까지 나왔는데 안 데려가면 사람 서운해집니다. 협회장님이 자꾸 그러시니까 연천파만 챙긴다는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끄응, 알겠네. 알겠어. 어떻습니까, 김 사냥꾼? 가입하신 김에 단합대회에 같이 가시는 게? 우리 협회만 아는 사냥터로 가니까 희귀한 사냥감도 많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아, 그게 핵심이구나.
비밀 사냥터. 희귀한 사냥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요. 사냥에는 관심이 있습니다."
희귀한 사냥감을 잡아먹으면 간혹 특성을 주는 것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말씀하시죠."
"아까부터 말씀하시던 연천파가 뭡니까?"
갱단은 아닌 것 같고.
협회장이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강 이사가 건수 잡았다는 듯 옆에서 끼어든다.
"회장님 파벌입니다."
"파벌이요? 아, 물론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든 파벌 만들어지긴 하지만 보통 이름까진 안 붙지 않나요?"
"그건 내가 설명하지요."
협회장이 강 이사를 한 번 노려본 후 말했다.
"내 파벌이라서 연천파가 아니라, 연천에 독점 사냥 지대를 설치하려고 해서 연천파입니다."
"독점 사냥 지대요?"
"예. 솔직히 말해서 우리 협회 위치가 불안정합니다. 두 시국, 그러니까 두 군단의 허가가 철회되면 당장이라도 공중분해 될 수 있어요."
그건 그렇지.
대한민국의 마수는 휴전선 부근에 몰려 있으니까.
지리산? 태백산? 한라산?
청소가 끝난지 오래다.
그마저도 5레벨 이상 상급 마수를 잡으려면 중국이나 러시아로 넘어가야 한다.
"해서 우리 협회만이 사용할 수 있는 독점 사냥 지대를 할당받는 것이 저와 절 따르는 사람들의 목표입니다. 서부군은 파주와 서해를, 동부군은 철원과 태백산맥을 관할하고 있으니 중간 지점인 연천이 가장 가능성이 크고요."
듣기에는 나쁘지 않은 목푠데?
"에이, 협회장님. 그게 진짜 목표가 아니지 않습니까."
강 이사가 툴툴거리며 끼어들었다.
"들어보세요, 김 사냥꾼님. 우리 협회장님 목표는 단순히 독점 사냥 지대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세 번째 군단으로 인정받는 게 목표입니다. 철원 시국이나 파주 시국처럼 연천 군국을 만들고 싶어 하신다고요."
연천 군국? 세 번째 군단?
내가 말을 잊고 쳐다보자 협회장이 항변하듯이 말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이미 교감을 나눈 인사들도 많아요. 그분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10년, 20년 뒤에는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글쎄요. 갓 입회한 주제에 말씀드리긴 뭐합니다만, 두 시국은 솔직히 군단장들이 워낙 대단한 사람이라 세워진 거 아닙니까? 독립유공자에 전쟁유공자이고, 당시 정부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지요. 가장 중요한 건 그분들께서 8레벨이었다는 점이고요. 사냥꾼 협회가 정말로 대단하고 중요한 곳이라는 건 저도 인정합니다만, 두 군단장과 비교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두 군단장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일선에서 반쯤 물러나긴 했으나 전설 그 자체.
군단은, 두 시국은 그들의 카리스마와 능력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순히 목표가 세 번째 군단 창설과 군국 설립이면 뭐, 나도 이해하겠습니다. 호랑이를 그려야 고양이를 그릴 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냥꾼님, 들어보십쇼. 그걸 하겠다고 자기 실력을 높이는 게 아니라 정치꾼 놈들 뒤를 닦아주는 게 문제입니다."
"하아, 강 이사. 몇 번이나 말했잖아. 현실적으로 그 방법밖에 없다고. 우릴 지지할 인사를 확보하는 것 말고 무슨 대안이 있어?"
"실력을 높이시라니까요! 협회장님께서 8레벨이 되면 만사가 해결됩니다!"
"그놈의 실력 지상주의하고는. 그리고 나나 강 이사나 똑같이 강화병인데 레벨 올리기가 쉬워? 내가 뭐 리바이어던도 아니고!"
둘 다 강화병 계열 초인.
협회장은 핏빛 눈동자와 송곳 같은 송곳니가 말하듯 생체 변이 강화병이고 강 이사는 상대적으로 흔한 의체 삽입 강화병이었다.
실제처럼 정교하지만, 양쪽 눈에서 번뜩이는 마법 안광과 보통 사람보다 두꺼운 양팔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강화병의 단점.
초반 레벨 업은 빠르지만 후반 레벨 업이 느리다는 것.
자기한테 적합한 변이 인자나 의체를 찾아 장착하고 조율해야 하는데 거기에 엄청난 노력과 우연이 필요하다는 설정이다.
게임에서는 막대한 경험치로 표현되었지.
"최대한 지지자를 모으는 게 핵심이야. 물론, 자네 말처럼 8레벨 협회장이 탄생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그러니까 이렇게 김 사냥꾼님을 영입한 게 아닌가?"
협회장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김 사냥꾼님에게는 개인적으로 기대가 큽니다. 알고 보니 전적이 화려하시더군요. 1레벨에서 4레벨까지 이렇게 쾌속하게 크신 분은 최소한 평범한 분 중에는 없었습니다. 김 사냥꾼님도 아실 서 본부장처럼 재능과 가문을 동시에 타고난 사람이라야 가능했지요. 만약 김 사냥꾼님께서 7레벨이 되시고 8레벨이 되신다면, 협회장 자리 따위가 대수겠습니까? 기필코 세 번째 군단장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눈이 번들거린다.
숨기지 못하는 야망의 빛이 핏빛을 품고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협회장의 동공 아래에서 익숙한 감정을 읽어냈다.
탐욕과 이기심.
협회장 자리를 주겠다고?
세 번째 군단장으로 만들어?
퍽이나!
저 인간은 2인자로는 만족하지 못할 인간이다.
반드시 남을 밟고 올라서야, 하늘 위에서 굽어보아야 직성이 풀리겠지.
'이거였구나.'
어째서 파탄이 발생했는지.
무엇 때문에 현재의 협회장은 미래의 암살 조직 보스가 되었는지.
강 이사가 협회장 자리에 앉았는지.
그리고 어쩌면······
'설마 이번 단합대회가 계기는 아니겠지?'
강 이사는 원래 중국에 갈 계획이라고 했다.
그런데 날 보려고 일정을 틀어 돌아왔지.
아마 협회장을 견제하려고 한 모양.
나 정도로 빨리 성장하는 초인이 협회장 라인을 타면 곤란할 테니.
여기서 원래는 무슨 사건이 벌어질 거였다면?
그 사건이 강 이사의 합류로 인해 변질된다면?
'젠장.'
뭔진 몰라도 내게 좋을 것 같지는 않다.
구경만 하다가 강 이사한테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
개꿀퀘를 마구 퍼주는 호구 협회장이란 말이다.
이런 인간은 지켜줘야 한다.
속으로 머리를 팍팍 굴리면서도 겉으로는 기분 좋게 웃었다.
"7레벨이요? 듣기만 해도 설레네요. 꼭 7레벨이 될 수 있도록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우리 협회에서 사냥꾼님이 가장 가능성이 커요. 전사 계열 아닙니까, 전사 계열."
"흠. 사냥꾼님이 우리 협회 소속인 채 7레벨만 되도, 아니 6레벨만 되도 우리 협회 위상이 확 커지는 건 사실이죠. 혹시라도 8레벨 되면 세 번째 군단도 꿈은 아니라고 봅니다."
"강 이사가 많이 도와드려. 강 이사도 알잖아? 내가 이런 건 좀 약한 거. 대신 내가 잘하는 걸 하지."
"그 잘하는 것 좀 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협회로 나오니 분위기가 벌써 시끌시끌했다.
단합대회 겸 사냥 대회에 다들 들뜬 모양.
입회원서를 쓰고 나오자 강 이사가 손을 흔들었다.
"여! 사냥꾼님! 여깁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차 좀 얻어타게요."
"예?"
"흐흐, 제가 차를 안 가져와서······ 급히 오느라 비행 택시 빌려 타고 왔지요. 휴, 하마터면 늦을 뻔했다니까요?"
사냥터는 철원 평야에 있다고 했다.
다른 차들은 이미 출발하는 중.
나도 시동을 걸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협회장님한테 유감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그래도 열정적인 분이시던데요."
"아, 그야 인정하죠. 우리 협회장님 능력 있고 열정적인 분입니다. 그건 인정해요. 문제는 자기 레벨 업은 제쳐두고 외부에만 힘을 쏟는 거지요. 초인의 본질이 뭡니까. 무력 아닙니까, 무력. 본인 실력을, 또 우리 협회 실력을 키우면 해결되는 문제에요."
"꼭 그렇지는 않을걸요. 5레벨 되면 협회를 떠나지 않습니까."
"쓰읍, 그게 문제죠."
5레벨이면 누가 뭐래도 상위 초인이다.
굳이 힘들게 마수를 사냥하며 돈을 벌고 마력을 쌓을 필요가 없다.
차라리 자기 사업을 하거나 4대 세력에 소속되고 말지.
간혹 대미궁이나 대균열에 들어가 수호자가 되는 초인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소수.
"사냥꾼 협회는 이익 단체 아닙니까. 군단과는 시작부터 다르죠. 뭔가 확실한 이익을 회원들에게 주지 않는 한 성장하기가 힘들어 보입니다. 독점 사냥 지대? 글쎄요. 5레벨 마수가 펑펑 솟지 않는 한은 한계가 있죠."
"제 말이 그 말입니다. 협회장님만 그걸 몰라요."
부아앙!
도로를 따라 달린다.
옆에서는 강 이사가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협회장 욕을 했다가 칭찬을 했다가, 옛날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변이 인자 이상한 걸 주입하더니 사람이 바뀌었다고 하고, 자기 가족들 이야기를 한 다음에는 날씨 이야기, 건너뛰어서 까마득한 과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러다 고막 찢어지겠다, 진짜.
나는 질린 얼굴을 하고 있다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 콘솔박스를 열었다.
비닐봉지 하나가 잡힌다.
한 손으로 부욱 찢어서 내용물을 입에 가져갔다.
까맣고 동그란, 타이어 쪼가리 같은 물건.
"뭡니까?"
"감초 사탕입니다."
핀란드 특산이라는 그것.
개코 특성은 수르스트뢰밍 코박죽이 획득 조건이었다면 신의 혀는 감초 사탕 퍼먹는 것이 획득 조건이다.
망설이다가 하나를 입에 넣었다.
이게 그렇게 노맛이라고······
"으어어억!"
씹는 순간 괴상한 맛이 입 전체에 퍼졌다.
이게 뭔 맛이야?
이게 대체 무슨 맛이냐고!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짠맛.
강렬한 짠맛 사이에서 쓴맛과 떫은맛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리고 찌르듯이 혀와 코를 자극하는 꼬랑내!
어릴 때 감초를 생으로 씹어본 적이 있는데, 그건 그냥 풀맛이었지만 이건 화학 약품에 소금을 왕창 뿌리고 화장실 암모니아 향까지 첨가해서 먹는 맛이다!
"사냥꾼님만 드십니까? 저도 주세요."
강 이사가 불쑥 손을 넣어 감초 사탕을 한 움큼 가져갔다.
생김새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걸 한입에 다 털어넣는다.
안 돼!
그러다 다 죽어!
아니나 다를까.
강 이사의 얼굴이 휴짓조각처럼 일그러진다.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강 이사.
"지, 지금 날 죽이려고······"
사냥꾼 협회 -2-
"무슨 말씀이세요. 이사님이 직접 가져가셨으면서."
"말리셨어야죠!"
"그럴 시간도 없었습니다."
"아니, 뭐 이딴 걸 드시고 그러세요? 사람 먹고 싶어지게."
"맛이 궁금해서요. 이거 좋아하는 사람도 있대요."
"혀가 고장 났나 보죠."
강 이사는 감초 사탕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완전히 여기에 꽂힌 모양.
철원 시국으로 갈 때까지 계속 그 얘기만 했다.
나는 그 옆에서 감초 사탕을 자꾸 집어먹었고.
"맛있습니까?"
"전혀요."
"그런데 왜 계속 드세요?"
"산 건 다 없애야죠."
"차라리 버리시지."
"먹을 거 버리면 벌 받아요."
"벌을 왜 받죠? 먹을 건 넘치는데."
이 세상엔 그런 말 없나?
하긴 마도과학 때문에 자원이 넘쳐나는 세상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운전하면서 꾸역꾸역 감초 사탕을 삼켰다.
씹을 때마다 고역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암모니아 향이 코끝을 찔렀다.
이놈의 코는 마비도 안 되나? 원래 똑같은 냄새 계속 맡으면 둔해지는 게 정상이잖아.
성과는 있었다.
[철원 시국] 표지판이 보일 때쯤 혀가 트이며 짠맛이, 신맛이, 쓴맛이 더욱 노골적으로 내 혀를 찔러댄 것.
"에퉤퉤!"
즉시 창문을 열고 씹고 있던 감초 사탕을 뱉었다.
사탕 봉지를 뒷좌석에 던지자 강 이사가 피식 웃는다.
"이제 포기하십니까?"
"예. 포기합니다. 그냥 버릴래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건 사람이 먹을 게 아니에요. 어떻게 저런 맛이 있지?"
당신도 특성 하나 공짜로 준다고 하면 감초 사탕 아주 포크레인으로 퍼먹을걸?
육감 특성까지 남은 건 하나.
화장품 세트도 감초 사탕이랑 같이 배송되었다. 지금은 골프백에 잠들어 있지. 가까운 시간 내에 발라서 예민 피부를 가져올 생각이었다.
마침내 단합대회 장소에 도착.
"여깁니까?"
"예. 오랜만이네요. 거의 몇 년은 지난 것 같습니다."
"협회 전용 사냥터라면서요?"
"그렇긴 한데 연천파가 주로 먹고 있어서요. 근처에 가기만 해도 연천파 놈들이 와서 인상부터 쓰곤 했습니다. 지금도 연천파 놈들이 많이 보이네요."
SUV 천지다.
세상에 존재하는 SUV란 SUV는 모두 가져온 것 같다.
대부분 원래 세계 SUV와 닮았지만 특이한 형태도 몇 개 있었다.
삐죽삐죽 강철 가시를 달아놓은 SUV.
거대한 괴수의 등뼈로 장식한 SUV.
모형인지 실제인지 모를 로켓포를 단 SUV.
나는 새삼스럽게 그 세 SUV를 구경했다.
"마도과학 엔진을 달았나 본데요? 마력 파장이 느껴집니다."
"돈지랄이죠. 저거 단다고 속도가 팍팍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오버슛 나서 전복되기 일쑵니다. 연천파 소속이 원래 허세가 심해요. 저 같으면 비행차를 샀을 텐데."
"비싸지 않습니까?"
"비싸죠. 저도 사실 부담스럽고요."
사냥꾼들이 많이 보였다.
대물 저격총과 산탄총으로 무장한 사냥꾼들.
대부분 강화병이고 전사 계열은 가끔 보인다.
어슬렁어슬렁 야영지를 누비던 사냥꾼 하나가 급히 다가왔다.
낯 익은 얼굴.
내게 산왕 시체를 사 갔던 사냥꾼이었다.
"사냥꾼님! 얘기 들었습니다. 입회하셨다고요?"
"안녕하세요.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쉽게 가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야 실력이 있으시니 가능했던 거죠. 제가 뭐 한 게 있겠습니까. 강 이사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정 사냥꾼님. 오랜만입니다."
사냥꾼은 강 이사와는 데면데면한 모양.
둘이 어색하게 눈인사만 나눴다.
"이사님. 죄송한데 김 사냥꾼님을 잠시 빌려 가도 되겠습니까? 지부 입회 관련해서 의논할 게 조금 있어서 말입니다."
"흠, 지부 때문에 할 얘기를 비밀리에 한다고요? 뒤가 구려서는 아니고요?"
"그런 건 아닙니다."
"뭐, 마음대로 하십쇼. 연천파가 저 따돌리는 거 어디 하루이틀입니까."
강 이사가 휘파람을 불며 몸을 돌렸다.
사냥꾼을 따라 적당히 이동한 후 당부를 들었다.
"사냥꾼님. 제가 소개한 분이고 워낙 실력 좋은 분이라 말씀드리는 건데, 강 이사랑 가까이 지내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왜요?"
"그럴 일이 있습니다."
사냥꾼은 말을 아꼈다.
강 이사 쪽을 한 번 본 다음 질문했다.
"협회 안에 파벌이 갈려 있다는 건 저도 들었습니다. 그 부분은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제가 강 이사 라인을 탈까 봐 그러시나 보죠?"
"알고 계셨습니까?"
"협회장님 앞에서 직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여간 강 이사 저 인간은······"
사냥꾼이 강 이사를 향해 혐오스럽다는 눈빛을 던진다.
"대계도 못 보고 과정에만 집착하는 인간입니다. 다소 간의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면 어떻습니까? 그 과실이, 그 목표가 중요하지요."
"독점 사냥 지대요?"
"당연하죠.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닙니다. 세 번째 군단! 가슴 뛰는 이야기 아닙니까? 갈 길이 멀다는 건 저희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뚜벅뚜벅 걷다 보면 언젠가는 달성할 거라고 봅니다. 첫걸음이 독점 사냥 지대고요."
아니, 그래 봐야 소용이 없다니까?
사냥 지대 인가받는다고 사냥꾼 협회가 도약한다고는······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노란색 두 눈동자였다.
동공은 까맣고 흰자위 대신 노랗게 물든 눈.
산왕 시체를 팔 때도 생각했었지.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가까이서 한참을 들여다보니 알겠다.
팔을 하나 의수로 바꾸고 얼굴에 흉터를 마구 새기면 내가 아는 얼굴이 된다.
[R 늑대발톱]
암살 조직 간판 중 하나.
퀘스트와 뽑기로 영입 가능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이제 알겠다.
독점 사냥 지대는 허울에 불과했다.
목표는 사냥꾼 협회만, 더 정확히는 암살 조직의 전신인 연천파가 마음대로 써먹을 수 있는 지역을 마련하는 것.
거기서 뭐든 할 수 있겠지.
불법 약물 제조? 노예 유통? 의체 제작?
높으신 분들의 비밀을 묻어놓는 것도 가능하다.
청소부 협회가 건우봉 금역에 자기네 비밀 기지를 만들었던 것처럼.
"그래도 사람은 좋아 보이시더라고요."
"흠, 뭐, 사람은 좋지요."
"성격도 좋으시고, 무엇보다 사람 뒤통수치거나 음험한 비밀이 없는 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잠깐만요. 마음에 들었다고요?"
"예. 보면 볼수록 진국이더라고요. 말 많은 것만 빼고요. 그것만 아니면 의형제 맺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나는 강 이사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가정적이고 유머스럽고 남자답다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사냥꾼의 얼굴이 한껏 구겨진다.
나한테 산왕 시체를 살 때는, 미끼를 던질 때는 이걸 생각하고 그런 게 아니었을 테니.
그런데 당연한 거 아니야?
암살 조직 소속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나사가 빠졌다.
게임이라 캐릭터 카드를 써먹는 거지, 반드시 배신하고도 남을 인간들이라고.
그런 놈들이랑 어떻게 같이 가?
고막 터지는 한이 있어도 호구 협회장(진)이랑 같이 해야지.
"끙, 알겠습니다. 사냥꾼님께선 이미 마음을 정하신 모양입니다."
"오늘 가입했는데 뭘 알겠습니까? 그래도 저분은 최소한 남의 뒤통수부터 치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휴······ 뭐, 알아서 하십쇼. 전 이제 모르겠습니다. 협회에 소개한 사람으로서 할 도리는 다한 겁니다?"
그 말만 남겨놓고 몸을 돌리는 사냥꾼.
뒷모습을 보며 나는 얼굴을 굳혔다.
이거 느낌이 심상치가 않다.
설마, 아니겠지?
정말로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겠지?
"뭐랍니까?"
"강 이사님 라인 타지 말라네요."
"네? 제 라인이요? 으하하핫! 감초 사탕으로 저 독살하려고 했던 사람이 제 라인을 탄다니, 지나가던 개미가 웃겠네요. 그리고 제가 사냥꾼님 라인을 타야지 왜 사냥꾼님이 제 라인을 탑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제 라인이라뇨?"
"흐흐, 전 이미 알아봤습니다. 사냥꾼님이 조만간 5레벨 찍고 6레벨 넘어서 7레벨로 날아갈 거를요. 그때 가서 저 잊지나 마십쇼. 흠, 그렇지. 여기 영물 사슴 고기가 그렇게 맛있는데 한 번 맛이나 보겠습니까?"
기잉, 철컥.
강 이사가 팔을 들고 손을 꺾었다.
오른손이 그대로 접히고 포구가 드러난다.
이어서 들어가 있던 포신이 연달아 나오고, 안쪽에서 쇠뇌 화살이 날카로운 빛을 뽐냈다.
쾅!
폭음과 함께 발사하자 주변에서 야단이 났다.
"뭐, 뭐야!"
"으헉! 깜짝이야!"
"저 인간 또 저러네."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옵시다!"
화살이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강 이사가 마법 안구로 멀리 확인하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명중! 으하핫, 이 맛에 사냥을 못 끊습니다. 잠시 차 빌려도 되겠습니까? 사슴만 가져오겠습니다."
"그, 그러시죠."
이 인간도 별종이네.
나는 혹시 몰라 골프백만 SUV에서 챙겼다.
짬이 난 틈에 화장품 세트를 꺼내 치덕치덕 바르자 사냥꾼들이 뭐하냐는 눈으로 쳐다본다.
"저 사람은 왜 또 저래?"
"몰라. 강 이사 라인이래."
"뒷골목에서 유망한 초인이라며? 산왕도 잡은 인간이라던데 강 이사한테 갔어?"
"그랬다잖아."
"하여간 끼리끼리 노네."
"갑자기 대포 발사해서 사슴을 저격하지 않나, 갑자기 화장품을 바르지 않나······"
"선크림 아냐?"
"아니야. 보면 몰라?"
"우리 라인 안 들어온 게 다행이네. 왜 저래?"
다 니들 때문이잖아.
니들이 수상해 보이지만 않아도 나도 이 짓거리 안 해!
우선 건성 피부 화장품을 피부에 잔뜩 바르고 화장솜과 클렌징 워터로 화장을 지웠다.
당연한 말이지만 제대로 지워졌을 리가 없다.
하지만 쪽팔리기도 하고 시간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지성 피부, 복합성 피부, 민감성 피부까지 총 네 종류 화장품을 빠르게 바르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김 사냥꾼님? 뭐하십니까?"
SUV에 사슴을 싣고 온 강 이사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피부 관리합니다."
"예? 무슨 피부 관리를 그렇게 해요? 관리가 아니라 고문 같은데요?"
"관리 맞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특성이 완성됐거든.
[예민 피부] 특성.
그 증거로 내 얼굴이 피부병에 걸린 것마냥 벌겋고 퍼렇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게임에서는 유독 물질이나 오염 마력 감지에 도움을 줬었지.
추적 같은 특성에도 보정이 있었고.
하지만 상위 특성 조합 재료 말고는 썩 많이 쓰이지 않았던 특성이다.
[민감][밝은 눈][쫑긋 귀]
[개코][신의 혀][예민 피부]
강 이사가 사슴을 도축한다, 즉석에서 육회를 뜬다, 법석 떠는 틈을 타 SUV에 잠깐 들어왔다.
특성을 조합한다.
마력 회로를 쪼갰다가 재조립한다.
전신이, 특히 눈, 코, 귀, 혀가 불에 덴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피부도 후끈후끈 했지만 눈, 코, 귀, 혀만큼은 아니었다.
흡사 불덩이로 지지는 느낌.
다행히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이목구비에서 출발한 전깃불이 마력 회로를 따라 질주하며 피부에서 시작한 불길과 만났다.
그리고 전혀 다른 새로운 힘이 되어 뇌를 향해 치솟았다.
새로운 감각이 개방된다.
세계의 민낯이 내게 낱낱이 노출되는 듯한 감각.
방구석에 앉아서도 온 세상을 조망하고 어두운 진실을 꿰뚫어 볼 듯한 이 전지감.
"아······"
나는 확 트인 감각에 취해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어떤 덩어리가 걸어온다.
밝고 맑은 빛으로 뭉쳐진 사람 형체가 다가와서는 산뜻하고도 맑은 무언가를 내민다.
"무지개 사슴 육회입니다. 맛이라도 보세요."
"감사합니다."
일부러 신의 혀를 장착하고 먹은 사슴 육회는······
맛있었다!
지방이 적어 담백하면서 감칠맛이 철철 넘쳐흘렀다. 부드럽기는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워서 혀에서 거의 녹아 없어지다시피 했다.
소주랑 먹으면 서너 병 싹 넘어갈 맛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맛있는 사슴 육회를 마음 놓고 즐길 수가 없었다.
육감을 통해 본 단합대회 본부.
시커먼 악의가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으니까.
밝고 맑은 강 이사와는 정반대.
단합대회 본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주변의 사냥꾼들.
또 저기서 뭘 열심히 준비하는 진행요원들.
전부 한통속이었다.
속이 시커멓고 성격도 시커멓고 의도도 시커멓고, 하여튼 다 시컴댕이 투성이였다.
"이사님? 오늘 여긴 연천파만 모인 겁니까?"
"그건 아니죠. 제가 아는 사람도 꽤 있습니다. 어이! 최 부장! 박 과장! 이 과장! 자네들도 사슴 육회 좀 먹지?"
"하하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언제 부르시나 했네요."
주변을 맴돌던 사냥꾼들이 급히 뛰어온다.
아마도 강 이사 라인.
겉으로는 누구보다도 기껍다는 듯 활짝 웃고 있었다.
강 이사도 방글방글 웃었다.
사슴 고기를 뭉텅뭉텅 잘라서는 사냥꾼들에게 건네고, 사냥꾼들은 천연덕스럽게 사슴 고기를 받아먹는다.
그러나 이 화기애애한 광경을 보면서도 나는 웃지 못했다.
최 부장.
여기서는 강 이사 다음 서열로 보이는 인물.
4레벨 강화병 계열 초인.
과장들과 다르게 홀로 시커멓게 물들어 있다.
통찰까지 장착하고 보자 더욱 확실해진다.
냄새가 났다.
지독한 악취가.
입에 담기조차 역겹고 생각하기만 해도 토해버리고 싶은.
배신의 향기가.
사냥꾼 협회 -3-
어쩌지?
강 이사에게 사실을 알리는 건 힘들다.
나랑은 오늘 처음 본 사이.
자기 부하가 배신했다고 하면 날 믿겠어 아니면 자기 부하를 믿겠어?
자연스럽게 이 자리를 벗어날 방법이 필요했다.
'나 혼자 가는 건 쉬운데.'
문제는 강 이사가 잔뜩 신이 났다는 점.
사슴 고기를 나눠주며 실룩실룩 춤을 추고 고래고래 노래를 부른다.
술도 안 마셨는데 왜 저래?
배신자일 가능성이 농후한 최 부장도, 다른 두 과장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입니다."
"최근에는 격조했지요."
"스트레스 받을 일이 많으셨으니까."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힘 빼지 마시고 아껴 두시죠. 곧 대회가 열립니다."
단합 대회는 어떻게 진행되는 거지?
게임에서는 오픈월드 사냥으로 구현 됐었는데.
희귀한 마수를 많이 잡는 팀이 승리하는 거였다.
그걸 묻자 강 이사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당연히 사냥이지요. 희귀한 사냥감을 많이 잡으면 우승합니다. 산왕 같은 놈이요."
그렇단 말이지······
뿌우우우!
단합대회 본부에서 거대 마수 뿔피리를 불었다.
사냥꾼들의 시선이 모이자 간부로 보이는 사람이 마이크를 들고 외친다.
"곧 단합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참가하신 회원분들은 사냥팀을 구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냥팀은 솔로, 듀엣부터 스쿼드, 쿼드라 스쿼드까지 자유롭게 구성하셔도 좋습니다. 단, 수가 늘면 채점에서 불이익이 있다는 점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강 이사가 나와 부하 셋을 한 번 돌아보았다.
"어때? 간만에 우리끼리 사냥할까? 여기 김 사냥꾼님도 같이 말이야."
"좋지요. 간만에 옛날 느낌도 내고요."
바로 찬성하는 최 부장.
반면 과장 둘은 아쉽다는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약속이 되어 있어서······"
"저도 약속이 있습니다. 협회장님 사람들이긴 한데 웬일로 같이 사냥하지 않겠냐고 하더라고요. 좋은 사냥감을 봐뒀다고."
육감은 별다른 경고를 하지 않았다.
단지 친목만 다지려고 가는 걸까?
하지만 여기서 놔두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협회장에게 회유당하고 말면 차라리 다행이지.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다행히 내겐 좋은 핑계거리가 있었다.
"아쉽네요. 두 분이랑 같이 사냥하고 싶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요."
"용을 사냥할 기횐데 어쩔 수 없지요."
"용?"
"용이라뇨?"
무심한 척 툭 뱉은 말에 둘이 관심을 보였다.
사실 용은 아니지.
아니지만······
"제가 산왕 잡으러 돌아다니다가 천둥 이무기를 발견했습니다. 4레벨 정도로 보이던데 그땐 제가 3레벨이라 잡기가 힘들었지요."
"이무기요? 정말입니까?"
"진짜 이무기요? 확실해요? 큰뱀을 잘못 보신 거 아니죠?"
"이무기가 확실합니다. 머리에 뿔이 나 있었어요."
철원 평야 최북단.
원래 세계에서는 북한 평강군에 속한 곳.
산자락 사이 작은 못이 숨어 있다.
그 자체로 외부와 차단된 금역.
바로 그 못에 천둥 이무기가 산다.
용이 없는 대한민국에서는 최고의 사냥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 이사가 엉덩이를 들썩였다.
"뭐하십니까? 빨리 가죠! 이무기 잡으러!"
"저는 여기 과장님들도 같이 가셨으면 한데, 안타깝게도 선약이 있다고 하셔서요. 토종 이무기 잡을 기횐데 아쉽습니다."
"으음."
"어, 흠, 그러니까······"
과장들이 뭐라 말하고 싶은지 입을 오물거린다.
강 이사가 과장들의 등을 후려쳤다.
"뭐해? 빨리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하지 않고. 이무기가 눈앞에 있는데 눈 뜨고 놓칠 거야? 여기까지 와서 호랑이나 곰 몇 마리 잡고 말게? 그런 건 평소에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어!"
강 이사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과장들도 마음을 정했다.
"잠시 전화하고 오겠습니다."
"좋습니다. 합류하지요. 이번이 아니면 언제 또 이무기 잡아보겠습니까? 그것도 토종 이무기를요."
"암, 암. 그래야지. 둘 다 잘 생각했어!"
과장들만 아니라 최 부장도 잠깐 자리를 비웠다.
"저도 원래는 다른 사람들하고 약속을 해둬서, 양해를 구하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해."
과연 누구한테 전화를 할까?
[육감][민감][쫑긋 귀][통찰]
관련한 특성을 총동원했다.
아, 이거 추적에 탐지까지 더하면 괜찮은 상위 특성 하나 더 나오겠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최 부장이 입을 손에 가리고 전화를 걸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스마트폰 속에서 들렸다.
[최 부장? 무슨 일이지?]
"김 사냥꾼 말입니다. 천둥 이무기 위치를 안답니다."
[천둥 이무기라······ 우승은 강 이사가 가져가겠군. 괜찮아. 어차피 대계에는 영향이 없어.]
"그게, 박 과장이랑 이 과장도 동행할 것 같습니다."
[이런. 그건 곤란한데.]
협회장의 목소리.
역시 육감이 경고한 게 맞았다.
최 부장은 협회장에게 넘어간 것.
그렇다면 관건은 뭘 꾸미느냐다.
적당히 훼방만 놓는다면 모르는 척 넘어가도 괜찮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선을 넘는다면······
[할 수 없지. 모조리 치우는 수밖에. 능력 있는 자들이었는데 안 됐어.]
"아쉽습니다. 강 이사 라인에서는 그나마 말이 통하는 인간들인데요."
[어쩌겠어. 약은 잘 갖고 있지?]
"물론이지요."
[강 이사는 반드시 소맥을 말 거야. 그 인간은 소맥밖에 안 마시니까. 강 이사가 소맥을 최대한 많이 마시게 해. 5레벨이라 약도 잘 안 통하니까 어지간한 양으로는 택도 없어.]
"명심하겠습니다."
약?
최 부장이 강 이사가 마실 소맥에 약을 타나?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명색이 5레벨 강화병. 눈앞에서 수작을 부리면 모를 수가 없다.
아마 소맥에, 소주와 맥주에 미리 약을 탔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 부장이 갖고 있다는 약은 평범한 약이 아니라 해독제겠지.
"저 음료수 좀 받아오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차에 물이 없네요."
"같이 갈까요?"
"그럼 좋고요."
통화를 마친 최 부장과 강 이사가 나를 따라왔다.
본부에는 주전부리와 음료수, 술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중 술에 특히 시선을 던졌다.
고급 위스키, 브랜디, 와인이 제일 많다.
소주와 맥주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하지만 강 이사는 입맛을 다시면서 그 두 종류를 들었다.
"사냥하면서 입가심도 좀 할까?"
자연스럽게 술 궤짝을 받는 최 부장.
"또 음주 사냥 하시게요?"
"음주 사냥이 진짜지! 병나발 불면서 총을 쏴야 제맛이야!"
"그리고 고기 뜯으면서 소맥 마시고요?"
"흐흐, 역시 최 부장이 날 잘 알아."
"이사님이랑 함께 한 세월이 몇 년인데요.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갑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하하. 강산이 바뀌고도 남을 세월이야. 정말로 오래 됐어."
"그랬지요."
소주와 맥주를 박스째로 실었다.
원래 세계 콜라를 연상시키는 탄산음료와 생수도 당연히 가져왔고.
통화를 마친 과장들까지 합류하자 출발.
부아앙!
SUV가 경쾌하게 들판을 내달렸다.
강 이사가 호쾌하게 맥주병 목을 날리고는 그대로 병나발을 불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이 근처에 천둥 이무기가 있어요?"
"예. 정확한 장소는 비밀입니다."
"어디 숨어 있길래 여태 발견이 안 된 겁니까? 협회 소속 사냥꾼들이 철원 평야는 자기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있는데요."
"금역 안에 숨어 있습니다."
"아하, 금역······"
"오래 묵었으면 정말 용이 될 수도 있었겠습니다."
"철원 평야 마력으로는 힘들죠. 용이 승천하려면 커다란 호수나 높은 산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김 사냥꾼님 말이 맞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이무기가 있다곤 생각도 못 했죠. 백두산이나 한라산은 주기적으로 뒤져보고 있습니다만."
금역이라는 말에 최 부장이 묘하게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육감으로 봐서 안 거지 아니었으면 몰랐을 정도로만.
그렇지.
협회장한테 위치를 알려야 하는데 금역 안으로 들어가면 전파가 안 통하니까 그럴 수가 없게 되지.
위치추적 어플을 미리 깔았다면 간단하지만, 연인 사이도 아니고 위치추적 어플은 무슨 놈의 위치추적 어플이야.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꽉꽉 밟으며 쉬지 않고 떠들었다.
투머치토커가 된 느낌.
덩달아 강 이사도 신을 냈다.
여기 올 때까진 지겹다는 기색을 퍽퍽 내다가 잘 받아주니 기분이 좋았겠지.
그러다 뒤에 탄 과장이 굴러다니는 감초 사탕을 발견했다.
"이게 뭡니까? 젤리? 사탕?"
"아, 그거!"
강 이사가 반색했다.
"그거 엄청 맛있더라고. 핀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사탕이래. 거의 국민 간식으로 통한다던데?"
"그래요?"
"맛이나 봐야겠네요."
최 부장도 박 과장도 이 과장도 약속이라도 한 듯 감초 사탕을 입에 넣었다.
당연히 일그러지는 얼굴.
강 이사가 낄낄대며 웃었다.
"푸하하!"
그러는 사이 목표 금역에 도착했다.
차를 끌고 바로 진입하자 최 부장의 눈에 낭패했다는 기색이 스쳤다.
"오호!"
차에서 내리자마자 감탄하는 강 이사.
"이런 곳이 있었다고?"
공간 왜곡되어 변형된 지형.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수평선이 보일 정도로 드넓은 호수.
물은 맑고 투명했다. 수십 미터 아래 호수바닥이 그대로 투과될 지경이었다.
온갖 물고기들이 유유자적 호수 안을 헤엄쳤다.
대부분이 오색 빛깔 영물들.
"이사님! 저깁니다!"
그리고 그 중심.
커다란 뱀이 한 마리 보였다.
몸길이가 적어도 수십 미터. 눈에 띄는 것은 머리에 난 뿔과 청색 비늘을 타고 흐르는 마력 번개였다.
물 속인데도 주위로 방류되지 않고 방어막처럼 뱀을, 이무기 주위를 맴돌고 있다.
강 이사가 침을 질질 흘렸다.
"김 사냥꾼님이 잡으실 거죠? 김 사냥꾼님이 발견한 거니까."
"아, 전 괜찮습니다. 강 이사님이 잡으셔도 됩니다."
"제가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전 총을 써서 물 아래 있는 건 잡기 힘듭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강 이사가 손목을 꺾는다.
사슴을 잡을 때처럼 철컥철컥 돌출되는 포신.
사냥은 싱겁게 끝났다.
강화병답게, 원거리 사냥꾼답게 전력을 단 한 번의 공격에 쏟아부은 것.
물의 저항을 무시하고 날아간 마법 화살이 천둥 이무기의 목을 꿰뚫었다.
"역시 이사님!"
"솜씨가 전혀 녹슬지 않으셨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순살이었습니다!"
"흠, 흠."
강 이사가 멋쩍게 웃었다.
"내가 이무기 건져올 테니 회식 준비나 해. 여기서 한 잔 하자고."
"여기서 말입니까? 본부로 안 가시고요?"
"당연하지! 아니면 내가 왜 술을 가져왔겠어! 술판은 사냥터에서 벌여야 제맛인 거 몰라?"
"일단 확인이라도 받고 드시는 게······"
"머리만 남겨놓으면 돼! 쓸개랑 고기 좀 먹는다고 문제 안 생겨!"
강 이사가 신바람을 내며 호수로 뛰어든다.
과장들은 미니 버너에 후라이팬을 올린다, 술을 꺼내온다 야단이었다.
최 부장만 머쓱하니 서 있다가 슬쩍 자리를 떴다.
"잠시 볼일 좀 보고 오겠습니다."
금역 밖으로 나가지는 않는다.
그건 너무 눈에 띄니까.
대신 주위 나무 뒤로 돌아갔다.
왜?
뻔하지. 미리 해독제를 먹어놔야 할 거 아냐.
나는 아닌 척 최 부장을 주시했다.
최 부장이 주위를 살피곤 바지춤을 추슬렀다.
얼핏 보면 오줌을 싸려는 자세.
그러나 자세히 보면 지퍼를 여는 게 아니라 손이 주머니에 들어가 있다.
이윽고 금박에 싼 작은 환 같은 걸 꺼낸다.
해독제를 막 입에 가져가려는 찰나 마총을 뽑아 쏘았다.
검은 광선이 쭉 뛰쳐나가 최 부장을 직격했다.
"끄아아아악!"
줄기줄기 비명을 지르는 최 부장.
전신에서 검은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신열만큼이나 신경계를 고문하는 그 사악하고도 잔혹한 화염.
당연히 손에 든 환이 땅에 떨어졌다.
"어어?"
"뭐야?"
"최 부장!"
과장들이, 막 이무기를 짊어지고 나온 강 이사가 빠르게 반응했다.
급히 뛰어오지만 내가 더 빨랐다.
먼저 최 부장을 확보한 후 해독제를 주워 주머니에 넣은 것.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강 이사가 내 앞에 서서 입으로 불을 토했다.
"최 부장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최 부장을 공격한 겁니까! 당장 저거 취소하세요!"
강 이사는 이미 전투태세.
왼손에서는 초진동 칼날이, 오른손에는 쇠뇌 화살이 겹겹이 솟아 있다.
"그러지요."
바닥을 나뒹구는 최 부장에게 손을 댔다.
[흑염] 장착.
[마력 흡수]로 빨아들이자 최 부장을 불태우던 검은 불꽃이 내 손으로 쭉 딸려왔다.
"허억, 허억."
숨을 헐떡이며 날 올려다보는 최 부장.
그러나 꼼짝하지 못한다.
콜로세움에서 배워온 [제압] 특성으로 등골을 짓누르고 있었거든.
심장 바로 뒤.
힘껏 내리치기만 해도 심장이 터질 수 있는 자리.
최 부장도 4레벨 초인이지만 하필 원거리 특화 강화병이었다.
거리를 내게, 전사 계열 초인에게 내준 시점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흑염으로 갈기갈기 고문당한 직후라면 더더욱.
할 수 있는 거라곤 목소리를 어떻게든 짜내어 항의하는 것이 전부.
"어째서······ 어째서 이러는 겁니까. 제가 뭘 했다고······"
강 이사와 과장들도 소리를 높여 항의했다.
"김 사냥꾼님! 당장 최 부장을 놔주십쇼!"
"혹시 우릴 여기로 끌고 온 게 함정이었던 겁니까?"
"최 부장님한테 원한이라도 있어요?"
당장 달려들 것 같은 강 이사와 다르게 두 과장은 이성적인 모습이다.
그래도 최 부장이 배신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
내가 최 부장에게 원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해명해드리지요. 제 해명을 들으시면 다 납득하실 겁니다. 제가 왜 이러는지요."
"납득이 안 되면 각오해야 할 겁니다!"
강 이사는 숫제 마법 화살을 내게 겨눴다.
신기전처럼 빼곡하게 장전된 마법 화살.
보기만 해도 위협적이지만 나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대신 두 과장을 향해 부탁했다.
"죄송하지만 차에서 소주랑 맥주, 텀블러 하나만 가져와 주시겠습니까? 제가 해명하려면 필요합니다."
"소주? 맥주? 텀블러? 뭘 하려고요?"
"뭐, 가져다드리지요."
즉석에서 소주와 맥주를 섞었다.
거품이 나도록 잘 흔든다.
그제야 내가 뭘 하려는지 깨달은 최 부장이 악을 썼다.
"이사님! 강기석 이사님! 이 새끼가 절 음해하려고 합니다! 두고 보십쇼! 분명히 소맥에 독을 탔을 겁니다! 제가 피 토하고 죽을 거라고요!"
"독을 탔다고? 언제?"
"모릅니다! 그런 능력이라도 있나 보죠!"
어쭈. 이 인간이 선수를 쳐?
나는 미련 없이 소맥이 담긴 텀블러를 내팽개쳤다.
"제대로 맞추셨네요. 술에 독이 있습니다."
"뭐? 진짜 독을 탔다고?"
"제가 탄 게 아닙니다. 소주와 맥주에 처음부터 독이 들어 있었습니다. 조합독 종류로요. 제가 직접 섞는 게 문제라면, 과장님들이나 이사님이 직접 섞어서 드셔 보세요. 아, 물론 뒷일은 책임 못 집니다. 최 부장님 말을 들어보니까 피 토하고 죽는 종류인가 보죠?"
강 이사가 못 믿겠다는 얼굴로 날 쳐다본다.
하지만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협회 이사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그동안 어떤 모략도, 음모도 겪어보지 못했을까?
처음에야 내가 자기 부하를 제압하고 있으니 열부터 냈겠지만 슬슬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내가 직접 하지."
"이사님! 저 좀 구해주세요! 저 이러다 죽습니다!"
"자네가 소맥 한 잔만 먹어보면 되는 거잖아. 괜찮아. 내가 구해주지. 김 사냥꾼이 아무리 뛰어난 전사여도 레벨 차이는 극복 못 해. 날 믿으라고."
강 이사가 직접 소맥을 말았다.
나는 최 부장을 제압한 채로 상체를 일으켜 앉혔다.
최 부장이 반항하지만 소용없다.
거인의 힘 특성까지 장착하고 있었으니까.
강 이사가 소맥 담긴 텀블러를 들이댔다.
"자, 자, 쭈욱 들이키게. 내가 직접 만 소맥이야. 김 사냥꾼이 아무리 초능력을 써도 여기에 독을 타진 못해. 어서 마시라니까? 최 부장도 소맥 좋아하잖아?"
최 부장이 입을 꽉 다물었다.
아무리 텀블러를 들이밀어도 마시려고 하지 않는다.
아예 고개를 돌리며 철저히 거부하고 있었다.
진실은 명확했다.
강 이사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이 개 같은 새끼가!"
삼위일체 빌드 -1-
삼위일체 빌드
"왜 이 새끼야!"
최 부장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10년도 전에 신세 좀 졌다고 해서 열정 페이나 주면서 착취하던 새끼가, 뭐? 개 같다고? 개 같은 건 너지! 이 씹새야!"
강 이사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박 과장이 최 부장을 죽일 듯이 노려본다.
"신세 조금 지셨다고요? 그때 부장님 어머니가 죽을 뻔한 거 잊으셨습니까? 이사님 아니었으면 부장님 어머니가 죽었어요!"
"그 쌍년은 죽어버리는 게 나았어!"
"뭐라고요?"
"이 인간이 미쳤나!"
"그래, 미쳤다! 너희들도 정신 똑바로 차려! 저 새끼가 너흴 이용해먹는 것도 몰라? 어디 보안회사 갔으면 너희나 나나 고연봉 받으면서 호의호식할 수 있었어! 그딴 걸 이 쥐꼬리 같은 월급 받으면서 10년 넘게 착취당했는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어?"
"하······ 부장님 이런 사람이었습니까?"
"저나 부장님이나 이사님한테 목숨을 빚졌습니다. 그 은혜를 다 잊었습니까?"
"잊었다! 어쩔래!"
"허허허."
헛웃음을 터뜨리는 강 이사.
과장들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는 표정이다.
최 부장이 눈을 번들거리며 외쳤다.
"강 이사! 당신이 날 제대로 대우해줬으면 내가 이렇게 나오지도 않았어! 뭐? 이사 되기에는 레벨이 부족하다고? 내가 부족한 게 뭔데? 4레벨? 사냥 실력만큼은 내가 당신보다 위야! 사냥꾼 협회가 사냥 실력이 중요하지 레벨이 뭐가 중요해! 어?"
"그것 때문이었나······"
탄탄해 보였던 관계도 나름의 알력이 있었던 모양.
강 이사가 허탈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최 부장이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다 끝났어! 협회에 강 이사 당신 자리가 있을 것 같아? 중국 간 송 부장이랑 성 과장 말고, 여기 있는 박 과장이랑 이 과장 빼고는 다 협회장님 라인이야! 연천파 줄 잡았다고! 얌전히 사퇴하고 야인으로 돌아가! 안 그러면 협회장님께서 당신을 가만히 안 놔두실 거다!"
더 들을 게 없겠다.
스르릉.
검을 뽑았다.
은빛 성검이 햇볕을 받아 찬란한 빛을 드리웠다.
"으헉?"
목 아래 칼이 들어오자 깜짝 놀라는 최 부장.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강 이사에게 물었다.
"제가 할까요? 이사님이 직접 하시겠습니까?"
강 이사는 말없이 한숨만 폭폭 쉬었다.
최 부장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 안 돼! 이사님! 살려주십쇼! 대장님! 그래도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야, 아니, 선생님! 이것 좀 놔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협회장 그 새끼한테 저도 깜빡 속았습니다! 그놈이 돈 준다고 해서, 이사 자리 준다고 해서 잠깐 혹했어요! 실수, 실수였단 말입니다!"
끝까지 추하게 울부짖는 최 부장.
과장 둘이 강 이사를 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강 이사도 마지막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김 사냥꾼님."
"안 돼!"
서걱.
말이 필요 없었다.
단숨에 목을 그었다.
경동맥이 잘리고 피 분수가 치솟았다.
최 부장이 손을 목에 가져갔지만 그걸로 막기란 불가능하다.
곧 피 웅덩이에 잠긴 채 숨통이 완전히 끊어졌다.
"사람 일이란······"
강 이사가 나직이 탄식을 토했다.
"최 부장이 욕심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고작 이사 직급에 넘어가서 날 배신할 줄은 몰랐어."
"아마 자기 딴에는 이사님이 자기를 견제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내가? 최 부장을? 내가 최 부장을 왜 견제해? 난 최 부장 이사 승격 안건에 찬성했던 사람이야."
"반대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누가 그래?"
"정 사냥꾼이······ 아."
알게 모르게 이간질당했던 모양.
강 이사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협회장, 아니 윤병진 이 새끼. 나한테 이렇게 엿을 먹여?"
"중요한 건 이게 아닙니다."
내가 급히 끼어들었다.
"최대한 빨리 자리를 떠야 합니다. 최 부장이 죽은 걸 알면 협회장 측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요."
"음······ 모르는 척 본부로 갈까요? 저거 가지고 가면 시간은 벌 수 있을 겁니다. 술만 안 마시면 되죠."
"협회장이 최 부장에게 연락하려고 할 겁니다. 연락 안 되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죠."
"그럼 그냥 튑시다."
박 과장이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철원 시국에 들어가기만 해도 지들이 뭘 어쩔 겁니까? 시국에는 이사님 아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까? 잠시 그 사람들한테 의탁해서 소나기를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차라리 협회장을 들이받으면? 일단 협회장만 제거하면······"
"협회장이 쉽게 당해주겠습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사님은 협회장보다 약하잖아요."
"아, 그야 상성 문제지. 윤병진 그 새끼는 변신수고 난 저격수잖아."
"협회장 죽이면 다른 사냥꾼들은 가만히 있고요? 뭘 하려고 해도 송 부장이랑 성 과장이 돌아와야 합니다."
"후, 그 둘을 중국 보낸 게 실수였네."
아무리 생각해도 도망치는 게 상수였다.
강 이사는 이 와중에도 천둥 이무기 시체를 가져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처참히 기각.
심장만 추출하여 SUV에 실었다.
부아아앙!
달리기 시작한다.
최 부장의 시체는 금역에 버려두었다.
나중에 일이 일단락되면 강 이사가 수습하든지 하겠지.
과장들이 바짝 긴장해서는 주위를 살펴본다.
나도 골프백을 옆에 두고 지퍼를 열었다.
그 안에서 소총과 연발 유탄 발사기를 꺼내자 강 이사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전쟁이라도 하러 가십니까?"
"느낌이 좋지 않아서요."
산왕을 잡을 때 생각했었지.
어쩌면 여기서 자동차 추격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게임 고인물로서의 직감인지 어쩐지 알 수 없지만 정말로 추격전이 벌어진다면 지금일 것이다.
부아앙!
남쪽으로 달리자 SUV 한 대가 따라붙었다.
눈에 익은 SUV.
정 사냥꾼, 나한테 산왕 시체를 산 사냥꾼이 끌던 SUV였다.
"여어! 사냥꾼님! 이사님!"
SUV가 바로 옆으로 따라붙었다.
"뭣 좀 잡으셨습니까? 대박 사냥감을 잡으러 가셨다면서요!"
"잡았지요!"
"구경 좀 합시다!"
정 사냥꾼이 수신호를 보낸다.
낭패한 표정을 짓는 강 이사.
"잠깐 멈추라는데?"
"안 되지요."
"알았네. 여어! 정 사냥꾼! 사냥감 정체를 알고 싶으면 본부로 와! 거기서 공개할 거야! 우승은 우리 거라고!"
강 이사가 내가 꺼낸 유탄 발사기를 감추고 앞쪽으로 손가락질했다.
더 빨리 달리라는 뜻.
액셀러레이터를 힘주어 밟았다.
적당히 달리던 SUV가 속도를 높인다.
먼지구름이 파바박 일어나고 정 사냥꾼이 뒤쪽으로 쳐졌다.
백미러를 통해 정 사냥꾼을 확인한다.
[민감][밝은 눈][쫑긋 귀]
[통찰][육감][집중]
특성을 총동원한 가운데 보는 정 사냥꾼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SUV에 탄 넷을 확인했기 때문에.
최 부장의 부재를 알아차렸겠지.
사냥감으로 보이는 시체는 전혀 없다는 사실도.
스마트폰을 꺼내어 전화하고, 누군가에게 보내는 목소리가 [쫑긋 귀] 특성 덕에 아련하게 잡혔다.
"······큰일 났습니다. 아무래도 최 부장이······"
젠장.
눈치 한 번 빠르네.
부아아앙!
더욱 속도를 높였다.
SUV가 심하게 덜컹거리지만 무시하고 질주한다.
강 이사도 눈살을 찌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눈치챈 것 같지요?"
"예. 빨리 튀죠."
"염병.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된 거지."
철원 평야는 넓다.
애초에 우리를 포위한 게 아니라면 얼마든지 사냥꾼들을 따돌리고 철원 시국으로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협회장 측 입장은 내 생각보다 더 강경했던 모양이다.
타앙!
총소리가 울렸다.
뒤쪽에서.
정 사냥꾼이 직접 몸을 내밀고 총을 쏘아댄 것.
"미친!"
"뭐, 뭐야!"
"총을 쏴?"
강 이사도 과장들도 악을 썼다.
"개 같은 놈이!"
강 이사가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어 유탄 발사기를 갈겼다.
그러나 형편없이 빗나간다.
아무리 초인이라고 해도 시속 백 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유탄을 쏴서 맞추는 건 어렵다.
"빌어먹을! 좀 천천히 달려봐!"
열이 뻗쳤는지 존대 따위 집어치우고 외치는 강 이사.
"좀 제대로 해보시죠."
시범을 보여줘?
오른손으로 운전대를 단단히 붙잡았다.
전방에 방해물이 없다는 걸 확인한 다음.
특성을 적당히 갈았다.
[사격][조준][저격]
[통찰][육감][집중]
소총을 왼손으로 쥐고 몸을 절반만 돌린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이 과장이 기겁하여 몸을 숙였다.
총구 끝 가늠쇠와 가늠자가 거칠게 흔들린다.
하도 진동이 심해 타이어는커녕 차도 못 맞출 정도.
그러나 조준, 사격, 저격 3중 특성이 내게 어마어마한 보정을 부여하고 있었다.
집중력 또한 강제로 최고조에 달한다.
통찰로 움직임을 읽고, 육감으로 어떠한 영역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정신이 선명해지고 선명해진 끝에.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딱 세 번.
총알이 뛰쳐나간다.
폭음을 동반하고 불꽃을 거느리며 질주한다.
끼이이익!
거칠게 미끄러지는 SUV.
다시 운전대에 집중하며 백미러를 보자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직선으로 달리다 사선으로 살짝 꺾었던 정 사냥꾼의 SUV.
안 보였던 타이어 하나를 빼고는 전부 펑크가 나 있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총알 세 방으로 타이어 셋을 맞춘 것이다.
"뭐야 이거!"
"완전 괴물이네!"
"미쳤군! 정말로 미쳤어! 완전히 미쳐 버렸다고!"
4레벨의 근력과 마력이 없었으면 소총을 한 손으로 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운전에 집중했다.
과아아아앙!
SUV는 잘 버텨 주었다.
시속 100킬로미터를 넘어 150킬로미터로 주행하는데도 그랬다.
최 소장이 상당히 좋은 차를 준 것 같다.
진동이 심하고 차가 미친 듯이 튀어오르긴 하지만 어쨌든 버틸 수 있었다.
물론 초인이라 그런 거다.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이미 구토하고 난리 났겠지.
"9시 방향 적 출현!"
"3시 방향에도 있습니다!"
"빌어먹을! 앞에도 있어!"
사냥꾼들이 우리를 포위하려 한다.
강 이사가 유탄 발사기를 들자 내가 나서서 말렸다.
"그거 말고 골프백에 기관총 있으니까 그거 쓰세요."
"응? 기관총? 기관총도 있다고?"
강 이사가 골프백을 뒤적였다.
안에 온갖 폭탄에 중화기, 총기류를 보더니 괴상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기관총만 꺼내서 밖에 쏴 갈기기 시작했다.
투투투투투!
"이거나 먹어라!"
하지만 실속은 없다.
단 한 발도 맞추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질 뿐이다.
화답하듯 총을 쏘는 사냥꾼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 하나 제대로 맞추는 사람이 없다.
개중 내 시선을 끄는 SUV 한 대.
로켓포를 설치한 SUV.
제 자리에 멈추더니 로켓포에 로켓탄을 장전하고는 이쪽을 겨냥한다.
육감과 통찰이 맹렬한 경고를 보냈다.
저 거리에서 나를 맞춘다고?
시속 150킬로미터로 달리고 있는데?
그것이 강화병, 특히 저격수 강화병의 무서움.
단검파와 싸울 때 당했던 로켓탄 저격을 잊으면 안 된다.
위험을 감지한 즉시 소총을 들었다.
덜컹거리는 진동도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충격도 잊었다.
직감에 몸을 맡기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내가 아주 조금 빨랐다.
총성이 막 불꽃을 뿜던 로켓탄에 꽂혔다.
충격 신관이 작동하고 로켓탄이 SUV 지붕에서 폭발했다.
꽈르릉!
고폭탄을 장착해둔 걸까?
폭발이 SUV를 강타했다.
마도과학 엔진이 휩쓸리며 더 큰 폭발이 일어난다.
마력 파장이 사방을 강타하고 화염과 충격, 전자파가 버섯구름처럼 터지면서 주위 SUV들이 거북이처럼 전복되었다.
"이햐아!"
"저것 좀 보라지! 김 사냥꾼!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신총입니다, 신총! 영화에서나 보던 건데!"
달리는 SUV 안에서 방방 뛰는 셋.
어린아이가 따로 없었다.
그쯤 되자 SUV 들도 접근하는 걸 포기했다.
딱 둘만 빼고.
강철 가시를 단 SUV와 괴수 등뼈로 장식한 SUV.
마도과학 엔진을 단 두 SUV가 지그재그 회피기동을 하면서 따라붙고 있었다.
타당탕!
소총을 쐈지만 이번에는 만만하지 않았다.
분명히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감각적으로 브레이크를 밟고 운전대를 꺾으며 회피한 것.
강 이사가 두 SUV를 보고 이를 갈았다.
"김 이사랑 장 이사야! 사냥보다 운전을 더 좋아하는 놈들! 어지간해서는 따돌리기 어려워!"
성능도 훨씬 좋다.
내가 모는 건 평범한 SUV지만 저 둘이 모는 건 오프로드 최적화에 마도과학 엔진, 그리고 여러 튜닝이 들어간 맞춤형 SUV니까.
슈우웅, 쾅!
거기다 로켓포까지 내밀어 날려댄다.
시속 200킬로미터로 달리는 차 안이라 턱없이 빗나가야 정상인데 놀랍게도 정확도가 꽤 높다.
겨우 10미터 밖에서 터져서 충격파와 파편이 SUV 창문까지 두드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놈 방탄유리에 특수 타이어입니다. 소총탄 얻어맞아도 버틸 거랍니다.]
자랑스럽게 말하던 최 소장이 고마운 순간이다.
나는 집중력을 최대한으로 세웠다.
한편으로는 특성을 또다시 바꾸었다.
[민감][쫑긋 귀][밝은 눈]
[통찰][육감][집중]
여기에 아까부터 맹렬하게 발동하는 [위기 감지]도 있다.
반격은 포기하고 운전에 집중.
밝은 눈으로 백미러를 살피고, 귀를 쫑긋 세우고, 육감에 의존하여 운전대를 꺾었다.
"으억!"
"우어억!"
엑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은 상황.
디젤 엔진이 한계의 한계까지 출력을 뽑아냈다.
차가 몇 번이나 들썩들썩하고, 돌을 밟아 휙 떠올랐다가 추락하기를 반복하지만 속도는 확실히 올라갔다.
거의 200킬로미터 이상.
그만큼 운전은 어렵고 멀미가 찾아왔으나 좁혀지던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슈웅!
그때.
유난히 내 육감을 건드리는 파공성이 있었다.
머리를 넘어 날아가는 까만 점.
유탄.
내 앞에서, 차 앞쪽에서, 수십 미터 앞 지면을 향해 내리꽂힌다.
이대로 진행하면 폭발을 뒤집어쓸 곳으로.
'안 되지.'
순간 세상이 느려졌다.
머리가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
과분비된 아드레날린으로 심장이 쾅쾅쾅 뛰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운전대를 꺾었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있는 힘껏 당긴다.
끼기기기기기긱!
바퀴가 요란하게 땅을 긁으며 속도를 줄였다.
드리프트!
속도 따위 줄이지 않았다.
여전히 시속 2백으로 달려나간다.
그러나 직각에 가깝게 방향 전환에 성공한다.
더불어 나를 찾아오는 해방감.
기이하게 몸이 가벼웠다.
SUV가 내 몸과 일체화된 느낌이 들었다.
거친 지면, 날리는 흙먼지, 뜨거운 열기가 전신으로 느껴졌다.
운전대를 살짝만 틀어도 SUV가 뜻대로 움직이고 별로 뭘 한 것도 없는데 진동이 줄고 속도가 올라갔다.
[운전] 특성과 [탑승] 특성.
평범한 탈것이라도 R급 탈것과 비견되게 하는 조합.
순전히 그 덕분이었다.
우리가 사냥꾼들의 추격을 뿌리친 것은.
한참 달리고 총질한 끝에 결국, 파주 시국에 무사히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