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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띠리리리링!

한참 운동하고 있을 때였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최선수 소장]

이 사람은 또 왜?

계약서 다시 쓰자고 하려는 걸까?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아예 인연 끊을 거라면 모르겠으나, 죽을 때까지 광질만 할 거 아니면 무슨 소리 하는지 들어나 보자 싶어서.

"여보세요."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우리 김전사 초인님! 그간 격조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축하드립니다. 그제 초인 인증을 받으셨다고요!]

"그랬지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휴, 당연히 알지요. 모를 수가 없지 않습니까? 무려 1년 만에 등장한 슈퍼루키이신데요! 이 바닥에선 벌써 소문이 짜하게 났습니다.]

전에 없이 사근사근한 목소리.

처음 만났을 때는 물론 사무소에서 정산받을 때와도 확연히 차이 나는 어조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하하하. 축하 인사도 드리고 초인님께 제가 제대로 대접을 해드린 적이 없어서 언제 시간 괜찮으신지 여쭤보려고 전화드렸습니다. 제가 아는 좋은 곳이 있는데······]

대접은 무슨 놈의 대접이야.

그딴 거 다 필요 없으니까 넥타르나 구해다 주면 좋겠다.

넥타르만······

어, 잠깐만.

섬전처럼 뇌리를 스치는 영감이 있었다.

우선 넥타르는 굉장히 구하기 힘든 물건이다. 나중에 에피소드 5, 6쯤 가면 대악마와 악룡 레이드를 통해 얻을 수 있지만 그 전에는 특별 퀘스트나 특수 이벤트, 극악한 확률의 뽑기를 통과해야 얻을 수 있으니까.

최 소장한테 시켜보면 어떨까?

사실 최 소장이 넥타르를 물어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말이다. 이 작자는 처음부터 날 이용해 먹으려고 했던 인간이잖아. 아무리 지금 살갑게 나온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가 않는다.

이젠 둘의 처지가 뒤바꼈다.

나는 최 소장이 아쉽지 않지만 최 소장은 나와의 계약이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노루까지 죽었으니 더더욱.

"대접은 필요 없고요, 한 가지 요청할 의뢰가 있습니다."

[의뢰 말씀입니까? 뭐든지 말씀만 하십쇼! 중개든 알선이든 뭐든 해드리겠습니다!]

"넥타르가 필요합니다."

[네, 넥타르요?]

"예. 뭔지는 아시죠?"

[예. 압니다. 불노불사의 영약 아닙니까? 초인 분들께서 드시면 레벨이 팍팍 오르고요. 부르는 게 값인 보물인데 그게 필요하시다고요?]

"예."

[그, 그게······ 초인님, 넥타르는 말이죠······]

"안 되면 할 수 없고요."

암, 할 수 없지.

너랑 일 못 하지.

어디 기업형 거대 인력사무소에 찾아가거나 군단, 재벌 같은 초거대 집단에 들어가고 말지 동네 인력사무소랑 뭐 하러 일을 해?

첫인상이 좋지도 않았고 신뢰가 가지도 않는 놈이랑.

내 속내를 읽었는지 최 소장의 말이 바빠졌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어떻게든 구해 보겠, 아니 넥타르를 보상으로 건 의뢰를 중개하겠습니다! 초인님께서도 그걸 원하시는 게 맞지요? 제가 그냥 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정확합니다."

넥타르는 5레벨 초인도 구하기 힘들다.

그 귀한 걸 1레벨 초인에게 그냥 건네준다?

100% 사기.

사실 보상으로 준다고 해도 의심스럽고.

"만약 소장님께서 넥타르 보상 의뢰를 따오시면, 적당한 조건으로 소장님과 재계약하겠습니다."

이 정도 보상은 걸어야지.

그래야 최 소장도 의욕이 생겨서 의뢰를 물어올 거 아냐.

실패할 확률이 99% 이상이긴 하지만.

꿀꺽.

스마트폰 너머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시지요? 장난치시는 거 아니지요?]

"그럼요. 생각해 보세요. 1레벨 초인한테 넥타르 보상 의뢰를 중개할 수 있는 사무소장이면 탑티어 중개업자 아닙니까? 규모가 작든 덜 유명하든, 제가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꿀꺽.

최 소장이 또다시 마른침을 삼킨다.

[어떤 조건이든 괜찮습니까?]

"최소한 실현 가능한 조건이어야지요. 절 산 채로 해부한다거나 하는 비상식적인 조건이면 안 됩니다. 난이도는 높더라도 제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렵긴 하지만······ 알겠습니다! 제가 의뢰를 따오면 초인님, 저랑 계약하시는 겁니다!]

"조건 봐서요."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딱 일주일, 일주일만 기다려 주십쇼! 일주일입니다!]

별로 기대하진 않았다.

조용히 제 1 매립지를 찾고, 하루하루 광질하면서 돈과 특성 캐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최 소장에게 다시 연락이 온 것은 정확히 4일 후였다.

[찾았습니다, 초인님.]

목소리가 잔뜩 격앙되어 있었다.

"뭐가요?"

[넥타르 보상 의뢰 말입니다.]

"정말입니까?"

내 귀로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최 소장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요. 전화로 말씀드리기는 어려우니 사무소에 들르시겠습니까? 직접 뵙고 설명해드리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지금 가죠."

나도 막 퇴근하려던 참이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4일 연속 제 1 매립지에서 밤을 새웠더니 죽을 것 같다고.

하루 더 일할까 하다가 주말에는 공무원들이 출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포기했다.

어차피 많이 벌었으니까.

정화비를 정산하고 열쇠를 반납한 다음 샤워, 방역 절차를 거쳐 택시를 탔다.

신림동에 있는 인력사무소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인력사무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 왔을 때 봤던 직원만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 공손히 허리를 접었다.

"어서오세요, 김전사 초인님. 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너무 늦게 온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요."

"아닙니다. 초인님께서는 언제든지, 늦은 밤이든 이른 새벽이든 마음에 내키시는 대로 방문하셔도 됩니다. 소장님께서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실 겁니다."

"초인님 오셨습니까!"

원래 최 소장은 직원이 안내할 때까지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엔 아니었나 보다.

나와 직원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 그 소리를 듣고는 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왔다.

최 소장이 급하게 내 손을 붙잡고는 흔들었다.

"어서 들어오십쇼, 어서! 어이쿠, 이게 그 소문의 성화입니까? 딱 봐도 굉장합니다!"

호들갑을 떠는 최 소장.

아저씨와 스킨십하는 건 썩 좋지 않은 경험이었다.

적당히 손을 뿌리치자 최 소장이 넉살 좋게 웃는다.

날 소장실로 데려가 앉힌 다음, 자기가 직접 커피를 내려서는 잔에 담고 책상에서 파랗게 빛나는 각설탕을 두 개 꺼냈다.

"초인님, 사탕도 넣으십니까?"

사탕?

아, 평범한 설탕이 아니구나.

"아뇨. 그냥 커피만 주세요."

"흐흐, 역시 초인님이십니다. 저는 감각이 발달하지 않아서 사탕이랑 성유를 같이 넣어야 마실 만해서 말입니다."

성유랍시고 꺼낸 걸 보니 가관이었다.

분홍빛으로 반짝이는 우유.

투명한 수정잔 속에서 까만 커피와 분홍 우유, 파란 사탕이 서로를 휘감으며 춤추는 건 확실히 볼만한 광경이긴 했다.

달다 못해 코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진하게 피어오르는 향기를 제외하면.

최 소장이 삼색 커피를 마시곤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흐, 제가 이 맛에 삽니다. 초인님도 한잔하시면 참 좋은데 말이지요. 제가 무제한으로 사탕이랑 성유를 공급해드릴 수 있습니다."

"됐습니다."

미쳤냐?

약쟁이 되게?

하여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인간이다.

"일 이야기나 하죠. 어떤 의뢰입니까?"

사무적인 어조로 묻자 실실거리던 최 소장도 얼굴을 굳혔다.

내가 보낸 무언의 경고를 감지한 것.

"조금 까다롭긴 합니다만 완전히 불가능한 의뢰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받아 왔습니다. 초인님, 혹시 제일보안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제일보안이요? 처음 들어봅니다."

이름만 들어서는 경호업체 같다.

아마도 평범한 경호업체는 아니겠지.

이 세상에서 '보안' 두 글자가 들어가면 대부분 민간군사기업을 가리키니까.

"그럼 혹시 제검문하고 일검문은 아십니까?"

"들어봤습니다."

"두 무문이 합쳐진 게 제일보안입니다. 소문주들끼리 결혼했지요. 지금은 대표 부대표입니다."

"그래요? 신기하네요."

제검문, 일검문.

게임 설정에서 보긴 봤는데 어느 항목에서 봤더라?

내가 기억을 더듬는 사이 최 소장이 설명을 이었다.

"전통 있는 무문이 합쳐진 거라 민간군사기업 중에서는 꽤 알아주는 기업입니다. 열 손가락 안에 들지요. 아시죠? 다섯 손가락은 재벌들이 독점하고 있는 거."

"그럼요. 잘 알죠."

"거기 부대표님이 개인적으로 의뢰하신 겁니다. 대표님도 부대표님도 6레벨 초인이신데, 아드님이 스무 살이 넘었는데도 초인이 못 되어서 걱정이 많으십니다."

"스무 살이 넘었는데도요? 아예 마력 적성이 없는 거 아닙니까?"

"그건 확실히 아닙니다. 소문이긴 합니다만 마탑 마법사들이 확인하기론 7레벨, 어쩌면 8레벨까지도 가능한 잠재력이라고 합니다. 아직 각성을 못 해서 문제입니다만."

"흠, 그래요? 정확히 의뢰 내용이 뭡니까?"

"간단합니다."

최 소장이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스마트폰 화면에 사진 한 장이 출력된다.

여자로 착각할 정도로 예쁘장하게 생긴 청년.

"의뢰 내용은 이분, 서우진 도련님을 1레벨 초인으로 각성시키는 겁니다. 기준은 공식 초인 인증에서 1레벨 이상이 나오는 것이고, 반드시 전사 계열이어야 한답니다. 성공 시 성공 보수로 넥타르 한 병을 지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는 얼굴이었다.

칠흑 학살자.

혹은 악신의 검.

에피소드 3의 여덟 중간 보스 중 하나.

서우진.

성녀 못지않은 난이도로 수많은 유저를 울리고 좌절시켰던 8레벨 성기사가,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똘망똘망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서우진 -2-

판교 인근 한 단독주택.

나는 잘 가꿔진 정원이 보이는 응접실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옆에는 최 소장이 앉아서는 안절부절못하는 중.

"대표님께서 바쁘신 모양입니다. 늦으실 분이 아닌데······"

"그러실 수 있죠."

본인이 6레벨 초인이고 운영하는 기업이 10위권 민간군사기업이면 안 바쁠 수가 없지.

나는 드론들이 날아다니며 정원 나무 가지치기하는 모습을 한가로이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거의 1시간째.

드디어 문이 열리고 중년 남녀가 들어섰다.

흰색 정장을 깔맞춤한 부부. 둘 다 허리에 길쭉한 검을 차고 있었는데 검이나 양복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들어온 즉시, 둘이 발하는 기파가 응접실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게 6레벨.'

위축되는 마음을 다잡으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대표님! 부대표님! 바쁘신데도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리를 거의 90도로 꺾는 최 소장.

"처음 뵙겠습니다. 김전사입니다."

나는 그 정도까진 아니고, 적당히 예의를 차려 인사했다.

"흠."

대표가 탐탁지 않다는 듯 헛기침을 한다.

반면 그 옆의 부대표는, 역시 6레벨 초인인 그녀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반가워요. 이미리라고 해요. 여기, 이 삐진 남자는 서정주라고 하고요. 잘 부탁해요."

"아, 뭘 삐졌다고 그래."

"삐진 거 다 보여. 이럴 거면 당신은 서재에 들어가 있어."

"그럴 순 없지."

대표가 콧방귀를 뀌고는 응접실 한쪽 소파에 앉았다.

몸을 틀어 정원만 내다보는 게, 명백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태도.

부대표가 한숨을 쉬고는 나와 최 소장에게 자리를 권했다.

"고집하고는······ 앉으세요. 저랑 얘기하시면 돼요."

"예, 부대표님.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해요. 여기까지 오셨다는 건, 저희 의뢰를 수락하시겠다는 뜻이지요?"

최 소장이 내게 시선을 던졌다.

나는 묵직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요. 성공 보수가 그거 아닙니까."

"하긴, 초인님께도 필요하겠지요."

내게 새삼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부대표.

지혜를 품은 눈동자가 내 몸 주변, 검은 불꽃에 꽂혀 있었다.

멀찍이서 딴청을 피우던 대표 역시 마찬가지다.

안 보는 척하면서 은근히 검은 불꽃을, 성화를 관찰하는 중이다.

'역시나.'

슬슬 전후 사정이 파악된다.

국내 민간군사기업 중 10위 내의 견실한 회사.

본인도, 심지어 공동 대표인 와이프 역시 6레벨의 강력한 초인.

아는 초인도 교육자도 많고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 하나 각성시키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략적인 설명은 최 소장님께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한 속사정은 최 소장님께서도 모르셔서 그러는데, 혹시 마력 각성에 문제가 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 두 분 다 유서 깊은 무문의 후예시고, 아드님께서는 그런 두 분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아주 특수한 이유가 없는 한 무난하게 각성해서 초인이 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게 말이죠······"

부대표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흠, 흠."

대표도 뜻 모를 헛기침을 했다.

그래, 그렇겠지.

말할 수가 없겠지.

일이 잘못 새어나갔다간 집안 망신일 테니.

기업 이미지에도 약해빠진 호구 이미지가 덧씌워질 테고.

"죄송해요. 밖에 알려지면 안 돼서요. 의뢰를 수락하시고, 마법적으로 비밀 서약을 하시면 알려드릴게요."

"어, 부대표님?"

최 소장이 이의를 제기했다.

"이유도 안 알려주시고 의뢰받으라고 하시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어요. 저희한테도 사정이 있어서요."

"음······"

최 소장이 어쩌겠냐는 눈으로 나를 돌아본다.

뭘 어째.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부대표님 입장은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무작정 의뢰를 받을 수도 없으니, 한 번 아드님을 뵙고 결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진이를요?"

"예. 비밀 면담까진 필요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잠깐 이야기 나누고 결정하도록 하지요."

이것까진 거부할 수 없겠지.

부대표는 납득했다는 얼굴인데, 대표는 저쪽에서 혼자 투덜거렸다.

"허 참, 1레벨 초짜가 보면 뭘 안다고······"

"당신은 가만히 있어! 좋아요. 우진이를 불러올게요."

부대표가 허공에다가 손짓을 한다.

마력 파장이 발해지며 천장에 설치된 감지기를 두드렸다.

그러자 즉석에서 전기 신호로 변환되어 집 어딘가로 전달되었다.

신기한 장치네.

내가 신기하게 감지기를 주시할 때, 문이 열리면서 예쁘장하게 생긴 청년이 걸어들어왔다.

"어머니, 부르셨어요?"

"그래. 우진아. 내가 말 했었지? 성녀의 세례를 극복하고 1레벨이 된 초인이 있다고. 그분이란다. 인사드리렴."

"안녕하세요. 서우진입니다."

서우진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금수저답지 않게 예의 바른 태도였다.

하기야 게임에서도 비슷했지. 흔히 말하는 존댓말 캐라고 할까? 존댓말 하면서 유저들을 잡아 죽이는 통에 유저들 사이에서는 예절캐가 아니라 능욕캐로 통했지만.

"저도 반갑습니다."

빠르게 서우진을 훑어보았다.

호리호리하고 균형 있는 몸.

척 보기에도 귀티 나는 얼굴.

품격이 느껴지는 와이셔츠와 슬랙스.

이런 건 아무래도 좋다. 내 눈길이 멎은 곳은 서우진의 오른쪽 손이었다.

게임에서 서우진은 두툼한 흑금 장갑을 차고 다녔다.

오로지 오른손에만.

여기서도 게임과 같았다. 다만 지금 차고 있는 건 옛 아버지 교단의 흑금 장갑이 아니라 진은으로 짠, 가닥가닥 마법진을 새겨넣은 은실 장갑이라는 점이 달랐다.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고 품이 많이 갔을, 최소한 초인 명장의 손이 닿은 물건.

"장갑이 멋지십니다."

"감사합니다. 제게는 과분한 물건이지만 항상 감사하며 쓰고 있습니다."

"그렇겠지요."

숨 한 번 쉬고 뼈아픈 일격을 날렸다.

"신성 봉인입니까, 마력 봉인입니까?"

"예?"

"그거요. 그 장갑."

서우진이 엉겁결에 자기 오른손을 등 뒤로 감춘다.

뚜렷하게 동요하는 얼굴.

나는 서우진과 중년 부부를 차분히 돌아보았다.

겉으로는 담담한 척 평온한 얼굴을 가장했지만, 그들의 눈 속에서 나는 먹이를 노리는 한 마리 표범처럼 비치고 있었다.

"세례에 당하셨나 봅니다. 저처럼요."

"으흠!"

"아······"

"어, 어떻게 아셨어요?"

뻔하지.

나는 내 주변 검은 불꽃을 톡톡 건드리며 대답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서우진 씨가 여태 각성하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됩니까? 태어났을 때 벌모세수도 받았을 거고 어릴 때부터 두 무문의 무공이란 무공은 다 배우셨을 텐데요. 아무리 둔재라도 1레벨, 아니 3레벨은 됐을 판에 아직도 각성하지 못했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다는 거죠."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보자마자 아셨습니까?"

"머리가 조금만 돌아가면 가능하죠. 뭔가 특수한 이유가 있는데 마법사나 사제가 아니라 전사 계열 초인에게 의뢰를 한다? 고레벨에 경험 많은 초인도 아니고 엊그제 1레벨이 된 초짜한테? 답은 하나죠. 제가 극복한, 더 정확히 말하면 극복 중인 성녀의 세례와 관련이 있다는 것."

"우와······"

서우진이 짧게 손뼉을 쳤다.

"대단하시네요. 탐정 소설 주인공 보는 줄 알았어요!"

"에이,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완전 똑똑하신 분 같아요."

사실은 서우진에 대해 알고 있으니까 가능했던 거지.

결과에 원인을 꿰맞췄다고 보면 될까?

응접실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대표도 흥미롭다는 듯 귀를 기울이고, 부대표는 아예 두 눈을 반짝이면서 마력 파장을 폴폴 흘리고 있었다.

"초인님. 해결할 방법이 있을까요?"

"부대표님도 아시다시피 세례는 기본적으로 없앨 수 없습니다. 받아들이고 해당 신의 신도가 되거나 거부하고 극복하는 것, 둘뿐이지요."

"그렇죠······"

부대표가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겠지.

"그런데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제가 듣기로는 옛 아버지의 신도가 되는 건 썩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했습니다. 옛 아버지 교단은 대한민국 7대 교단에서도 상당히 교세가 크지 않습니까? 차라리 교단에 입교하는 것도······"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마시오!"

듣고 있던 대표가 화를 버럭 냈다.

부대표가 손을 들어 대표를 진정시키고는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세례를 거부하신 분이니까 정말로 몰라서 물어보신 거로 생각할게요. 저희는 거부할 수밖에 없어요. 초인님께서는 잘 모르시나 본데 옛 아버지 교단은 소문이 안 좋거든요."

"소문이요?"

"예. 교단 교리도 그렇지만, 성녀부터 7대 사도, 대사제, 사제들 모두 이상해요. 애초에 인신 공양 받는 신을 모시는 작자들 정신머리가 어떻게 정상이겠어요?"

"확실히 그렇지요."

"저희는 가이아나 시바를 모시면 모셨지 옛 아버지 교단에 입교할 생각은 절대 없어요. 우리 우진이가 거기 들어갔다간 회사째로, 가문째로 잡아먹힐 판인데 누가 좋다고 하겠어요? 저랑 이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절대 안 돼요."

아하,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나는 묵직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아케인 서울 속 서우진은 [제일 병단]이라는 친위대를 끌고 다녔다.

제일보안, 제일 병단.

대표와 부대표의 정략결혼으로 설립된, 제검문과 일검문의 결합.

훗날 부부가 모종의 사고로 죽거나 힘을 잃고 서우진이 옛 아버지 교단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제일보안을 통째로 들고서.

"베스트팔렌 신멸 조약 진짜 쓸모없네요."

"그렇진 않죠. 그거라도 없었으면 옛 아버지가 우리나라를 중세 시대처럼 아예 지배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우진이는 진작 세뇌당해서 끌려갔을 거고요. 초인님도 마찬가지에요. 마력 방어막 생성하자마자 이단 심문관들이 초인님을 납치했을걸요? 신멸 조약이 저희도, 초인님도 보호하고 있어요."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베스트팔렌 신멸 조약은 신들이 자기 이름을 걸고 맺은 조약.

아무리 강대한 신이라도 정면으로 어기기는 어렵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원칙적으로만 돌아간다던가.

우회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대표적인 게 '신은 극복할 수 있는 시련만을 내린다', '세례를 거부하고 극복하면 된다' 등의 개소리.

당하는 건 언제나 약자 쪽이다.

제일보안이 5대 재벌 계열사만 됐어도 못 부릴 수작.

간단히 따먹을 수 있는 미래의 8레벨 초인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가만히 놔둔다고?

못 참지, 그건.

"극복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세례는 대상에 따라 강해지니까요. 우진 씨는 잠재력도 잠재력이지만 어릴 때부터 꾸준히 수련하셔서 품고 있는 마력이 상당하실 텐데, 그 정도면 어지간해서는 떨쳐낼 수가 없어요. 원래는 넥타르가 신열에 특효약인데 이미 써보셨을 것 같고요."

"초인님께서는 정말 많이 아시네요. 의뢰 넣기를 잘했어요. 솔직히 이 정도일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는데."

"그래서 됩니까, 안 됩니까?"

성질도 급하셔라.

대표가 부대표 옆으로 옮겨와서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묻는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뜸을 들였다.

과연, 될까?

먹힐까?

강력한 저주이자 축복인 신열을, 그것도 남의 몸에 걸린 신열을 해결할 수가 있을까?

나조차 아직 신열을 해결하지 못하고 이리 골골거리고 있는데?

······가능성은 있었다.

아니, 내 1만 시간 게임 경험과 지식에 비추어 보면 충분했다.

문제는 보상이지.

개고생을 해야 하는데 넥타르 한 병으로는 부족하다.

지를 것이냐, 넥타르로 만족할 것이냐?

나는 질렀다.

"됩니다."

"저, 정말입니까?"

"농담 아니시죠? 진짜죠?"

대표 부부의 얼굴이 확 펴진다.

서진우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뭡니까?"

"말씀만 하세요. 우리 우진이가 낫기만 한다면야······"

"넥타르가 대단한 보물이긴 합니다만 난이도에 비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단순히 마력 각성이 아니라 신열을, 세례를 극복해야 하는 문제 아닙니까?"

"음."

대표와 부대표가 서로를 마주 본다.

눈빛 속에서 무수히 많은 무언의 대화가 오갔다.

"좋습니다."

대표가 크게 머리를 주억거렸다.

"원하시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최대한 맞춰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말씀해 드리지요."

듣고 발작하지나 마라.

나는 대표를 보면서 꾹꾹 힘주어 말했다.

"제게 파산검법을 전수해 주셨으면 합니다."

서우진 -3-

"뭐요!"

대표가 격노하여 소리쳤다.

입에서 불을 뿜는 듯한 모습.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말이 안 될 건 또 뭐야.

가주와 직계에게만 전해지는 비전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 아랫 단계, 장로와 방계에게 개방된 무공을 달라고 한 것도 아니다.

파산검법은 어디까지나 중급 검법.

현재는 민간군사기업으로 변신한 제검문의 부장급만 되어도 배울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협상할 만하지.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실행 보수도 아니고 성공 보수로 말씀드린 겁니다만, 그게 그렇게 화 내실 일입니까?"

"아니, 이 자가?"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파산검법 정도 무공은 대학교나 초인 학원에만 가도 배울 수 있잖습니까? 대표님께서도 그동안 갖은 수를 다 쓰셨을 텐데 실패했던 일을 성사시키겠다는 겁니다. 이 정도는 요구할 수 있다고 봅니다."

"크흠!"

대표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진다.

주의 깊게 듣고 있던 부대표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 말씀은, 우리 진우를 반드시 치료할 수 있다는 거지요?"

"장담합니다."

"만약 실패하면, 저랑 이이가 진심으로 화를 낼 건데 그래도 괜찮으세요?"

부대표가 슬며시 기세를 피어올린다.

6레벨 초인의 마력 파장이, 살기와 결합된 힘이 저릿저릿하게 나를 찔러왔다.

전신의 솜털이 올올이 일어서고 목덜미가 뻣뻣해진다.

입이 바싹바싹 말라오지만 나는 대범한 척 웃어 보였다.

"그럼요. 그만한 각오 없이 파산검법을 입에 담았겠습니까?"

속으로는 살짝 투덜거렸다.

정보화 시대에 비전이 웬 말이냐고.

하기야 말이 중급 검법이지 파산검법은 제대로 익히면 4, 5레벨까지는 무난하게 올라갈 검법이다.

대학교에 진학하려면 인맥이, 사립 학원에서 배우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

1레벨에 거지인 내 처지로는 파산검법이 가장 적당하다는 뜻.

'나중에는 3대 검법 익힐 거지만.'

제세검법? 일기검?

줘도 안 가진다.

대표가 탐탁잖다는 듯이 말했다.

"좋습니다. 성공 보수로 넥타르에 더하여 파산검법을 걸지요. 원한다면 내가 직접 지도하겠습니다."

"거기까진 원하지도 않습니다. 기억칩만 주셔도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단, 내 앞에서 기억칩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당연하지요."

"흐아······"

여태 숨죽이고 있던 최 소장이 짧은 한숨을 불어냈다.

내가 과욕을 부리는 거 아닌지 싶다가, 대표 부부가 승낙하자 안심이 됐나 보다.

"또 필요한 게 있나요?"

"마력 집중진과 중급 마력 물약 200병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많이요?"

"이건 제가 쓰려는 게 아니라 소모할 물건입니다. 혹시 남으면 돌려드리지요."

"마력 폭주로 강제 각성을 유도하려는 건가요? 그건 안 돼요. 강제 각성한 초인들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그래요?"

"제가 마실 겁니다. 우진 씨가 아니라."

"흠······"

대표 부부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본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겨우 1레벨.

당연히 마력 총량이 극도로 적다. 최하급 마력 물약만 마셔도 절반은 차고, 중급 마력 물약 기준이면 한 모금만 마셔도 꽉 찰 정도로.

"그리고 마력 집중진은 비밀 연무실에 설치해주시고, CCTV나 마력 감지기 같은 물건으로 감시하지 않는 게 조건입니다. 저와 우진 씨, 단둘이 실행하기를 원합니다."

"그 정도야······ 분명히 성공하실 수 있는 거지요?"

"저도 제 목숨 아까운 줄은 압니다. 대충 사기치고 도망갈 생각이면 밀실 달라는 말을 하겠습니까?"

"그야 그렇죠. 좋아요. 또 필요한 게 있나요?"

"마지막으로 우진 씨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요?"

멍하니 앉아 있던 서우진이 화들짝 놀란다.

얘 어째 맹해 보이네.

악신의 검 맞아?

"미리 말씀드리지만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최대한 우진 씨의 부담을 줄이긴 할 거지만, 어쨌든 장갑을 벗어야 일이 진행이 되거든요."

장갑을 벗어야 한다······

그 말에 서우진의 눈이 흔들렸다.

당연하지.

신열로 인한 작열통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통증 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고통스러우니까.

단 1분 1초라도 겪고 싶지 않을 터.

서우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 할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평생 이렇게 사느니 잠깐 아프고 말죠. 무공도 수련할 수 없고 집에서 제대로 나갈 수도 없고······ 대신 꼭, 반드시 성공하셔야 해요?"

"그것만큼은 약속드리죠. 우진 씨는 오늘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서우진이 내 옆에서 떠도는 검은 불꽃을 힐끔 보았다.

그러더니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잔뜩 달아오른 분위기.

소뿔도 단김에 빼야 하는 법. 나는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금 바로 시작하죠."

"지, 지금요?"

"으흠?"

"저한테나 우진 씨한테나 그게 좋습니다. 대표님? 혹시 마력 집중진 설치된 비밀 연무장이 있습니까? 마력 물약만 준비해주시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명색이 대한민국에서도 유서 깊은 전통의 무문.

그런 곳에 비밀 연무장이나 마력 물약이 없을 리 없다.

대표가 감탄한 듯 기가 막힌 듯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있지요. 정말 지금 시작해도 괜찮겠습니까?"

"마음의 준비 한답시고 시간 끌어봐야 우진 씨만 스트레스 더 받습니다."

"어, 선생님, 그래도요······"

서우진이 나를 엉겁결에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부대표가 그런 서우진을 한 번 보고는 날 따라 일어섰다.

"초인님 실행력이 마음에 드네요. 그럼요. 기세 탔을 때 검을 휘둘러야 하는 법이죠. 마력 집중진도 마력 물약도 다 있으니까 바로 시작하죠."

"어머니!"

"엄마는 우리 아들 믿는다. 아들? 이번 기회에 다 털어버려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래? 무공 수련도 하고 회사 수업도 받고 연애도 하려면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없어."

서우진은 며칠이라도 미루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자기 어머니를 이길 수는 없었다.

거의 붙들리다시피 해서 주택 지하에 있는 비밀 연무장으로 오게 되었다.

상당히 널찍한 공간.

천장에는 마법등이 반짝이고 벽면과 천장, 바닥에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익숙한 그 문양.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입체 마력 집중진이었다. 평면 마력 집중진만으로 충분한데, 비싸기는 수십 배 비싸고 효율은 몇 배밖에 안 나온다는 그것.

쿵! 쿵!

대표가 직접 플라스틱 상자를 가져와서는 바닥에 내려놓았다.

생긴 건 소주병 담는 상자처럼 생겼는데 속에는 파란 액체 찰랑거리는 유리병이 그득그득 쌓여 있었다.

"중급 마력 물약입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충분합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는 그 말만 남기고는 휑 나갔다.

부대표가 내 손을 붙잡고는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초인님. 우리 우진이 정말 불쌍한 아이입니다. 10년도 전에 성녀에게 강제 세례받고, 학교에 가기는커녕 친구도 못 사귀었어요. 집에서 게임만 하는 걸 보면 가슴이 다 미어집니다. 이제 믿을 건 초인님밖에 없어요. 꼭 우리 우진이, 건강하게 만들어만 주세요. 그럼 넥타르든 파산검법이든 뭐든 다 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초인님만 믿겠습니다. 우진아? 초인님 말 잘 듣고 힘들어도 견뎌야 한다. 알았지?"

"알았어요."

부대표가 서우진을 한 번 다독이고는 연무장 밖으로 나갔다.

도어락 잠기고, 마법 잠금 발동하고, 자물쇠까지 거는지 철컥 쇳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서우진이 본격적으로 벌벌 떨기 시작했다.

여태 침착함을 가장하던 얼굴.

두 눈에 진한 두려움이 번지고 있었다.

"저, 선생님."

"네?"

"저거 진짜 제가 마시는 거 아니죠?"

마력 물약에 고정된 눈동자.

속사정을 알 만했다.

나는 힘주어 머리를 끄덕였다.

"미리 말씀드린 것처럼 물약은 제가 마십니다."

"예전에 선생님들은 안 그랬는데······"

"뭔지 알겠네요. 묶어놓고 플루이드 달았죠?"

마력 물약과 생명 물약 모두 입으로 마시는 것보다야 정맥 주사가 훨씬 효과가 빠르고 효율적이다.

"네. 마력을 각성해야 한다고······"

"그런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

가장 정석적인 방법.

1레벨도 되지 못한 0레벨 캐릭터에게 가해지는 신열에는 한계가 있고, 마력을 무제한으로 공급하면 신열로 불타는 마력보다 공급되는 마력이 많아지는 시점이 반드시 오니까.

그 마력을 강제 각성 중인 정신을 통해 느끼고, 미리 익혀둔 마력 운영법에 따라 운영하여 신열에 대항하기 시작하면 절반은 완료.

이후 넥타르를 복용하면 신체가 초인에 걸맞게 진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신열을 극복하게 된다.

문제는 그 대상이 어디 뒷골목 사는 김철수가 아니라 서우진이었다는 점.

태어나자마자 벌모세수를 받았을, 또 걸음마 시작할 무렵 영재 교육을 받았을 서우진이다. 아직 어린 나이라 마력을 얻진 못했어도 기틀은 잡혔고 체내에 막대한 마력이 잠자고 있었다는 뜻.

당연히 신열도 차원이 다르게 강해지기 마련이다.

"그거 말고 또 뭐 해봤어요?"

"몸 묶은 다음 신경계에 전극 꽂아서 마력 자극을 주기도 했고, 마법사가 와서 절 재우고 신체를 강제 각성시키려고도 했어요."

"어휴, 미개하긴."

다 욕 나오는 방법들이다.

그러니까 실패했지.

사실 게임 속 인물들이야 한계가 있으니까.

나처럼 게임 내외 설정과 게임 내 모든 특성 획득 조건을 외우고 있지 않다면 그게 최선일 것이다.

"어쨌든 시작합시다. 우진 씨는 제가 하라고 하는 대로만 하면 돼요."

"어······ 뭘 하죠?"

"지금은 내가 할 일이 많으니까 그냥 앉아서 구경이나 하세요. 낮잠 자도 되고요. 아, 그래도 한 가지 명심할 게 있습니다."

"뭔데요?"

"지금부터 보는 거, 절대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됩니다. 대표님이나 부대표님이 물어보셔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셨죠?"

"비밀로 하라면 비밀로 할 수는 있지만, 왜요?"

"제 비밀이어서요. 남자 대 남자의 약속입니다. 비밀, 지키실 수 있지요?"

나는 눈에 힘을 주고 서우진을 직시했다.

서우진은 게임 설정상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한 번 내뱉은 말은 지킨다고 되어 있던 인물. 설정이 그러니 믿어봐도 좋을 것이다.

살짝 흔들리는 눈으로 날 마주 보던 서우진.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절 치료해주실 분인데 믿어야죠. 이상하게 선생님은 믿음이 가요."

그야 확신이 있으니까.

100% 될 거라서 질러대는 거니까, 안 되면 말고 되면 좋고 하던 다른 사람들이랑 같아?

나는 마력 물약 상자를 가져와 내 옆에 대충 늘어놓았다.

"그럼 시작할게요."

심호흡 한 번.

아울러 특성 전환.

[마력 방어막][활기][심호흡]

[마력 회복][마력 흡수][마력심]

신성 저항을 걷어내고 마력 방어막 외에는 마력 회복 관련 특성만 장착했다.

우우웅!

연무장의 마력 집중진이 발동하며 내게 마력을 쏟아붓는다.

내 특성들과 상승효과를 일으킨 덕에 회복되는 마력량은 나조차 무서울 지경.

대신 신성 저항이 빠진 탓에 신열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물론 방어막을 뚫지는 못한다.

내 마력은 신열에 앞서 마력 방어막에 먼저 공급되니까.

"후우우."

여기서 그치면 안 된다.

마력 방어막에 최대한 정신을 집중했다.

거침없이 불어나는 마력 방어막.

넓어진다. 커진다. 뻗어나간다.

원래는 내 몸만 간신히 덮고 있었으나 이젠 그 이상으로 확대된다. 거의 2배 가깝게, 부피로 따지면 8배까지.

파직! 파지직!

자연히 밀도와 강도가 감소할 수밖에 없다.

검은 불꽃이 좋다고 달려들었다. 아귀처럼 덤벼들어 방어막을 물어뜯는다. 쉽사리 구멍이 뚫리고 검은 불꽃이 내 몸을 살라 먹기 시작했다.

"으으윽!"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통증.

방어막이 없을 때와는 천지 차이지만 그래도 고통스럽다.

몸을 태우지는 못해도 달군 인두로 마구 찔러대는 느낌.

저절로 신음이 나오고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서우진이 눈을 크게 떴다.

"서, 선생님?"

무시한다.

대신 방어막을 더욱 키운다.

마력 방어막의 한계까지.

통증이 짙어지고 허탈함이 몰려온다. 무식하게 공급되던 마력까지 끊기려는 전조다. 그걸 자각하자마자 마력 물약을 땄다.

뽕!

마력 물약을 입에 단숨에 털어넣는다.

쭉쭉 차오르는 마력. 몸에 충만함이 깃들고 마력 방어막이 또렷해진다. 그러나 잠깐에 불과했고, 나는 또다시 마력 물약을 따서 들이부어야 했다.

마력 물약이 들어간다. 맛 좋은 술 마시듯 쭉쭉쭉 들이킨다. 그때마다 마력 방어막은 강해지고 약해지길 반복했고, 검은 불꽃은 성을 내며 내 신경계를 갈기갈기 찢었다.

"서, 선생님. 그러시면······"

안다, 나도.

단기간에 마력 물약을 이렇게 처먹으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사실 그거야말로 내가 노리는 거였다.

몇 병이나 마신 다음이었을까.

어느 순간 마력 물약이 꿀처럼 달게 느껴지더니 탄산음료 마셨을 때처럼 청량함이 전신으로 번졌다.

눈을 떠서 확인하니 내 손등에 온통 시퍼런 핏줄이 올라와 있었다.

[약물 의존]

평소 받는 피해와 소모 마력량을 소량 증가시키는 대신 약물 효과를 일정량 증가시키는 특성.

그러나 이게 내가 원하는 특성은 아니다.

가는 길에 주운 것뿐.

활기 대신 약물 의존을 장착했다. 마력 공급이 원활해진 것을 느끼며, 마력 방어막에 집중하여 범위를 키워나가는 것을 지속했다.

그렇게 마력 물약 100병을 작살 냈을 때였다.

얼마나 마력 물약을 많이 마셨는지 [약물 의존]이 [약물 중독]으로 진화한 시점.

마침내 마력 방어막 표면이 번들거리며 무지갯빛 광택이 감돌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보고 눈을 치떴다.

'지금이다!'

언젠가 말했지.

마력 방어막은 방어 전사라면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그 답이 여기에 있었다.

무지갯빛 광택이 감도는 마력 방어막.

나는 그걸 보며 속으로 집중하여 외쳤다.

'커져라!'

마력 방어막은 3가지 형태 중 하나로 진화한다.

갑옷, 방패, 영역.

내가 선택한 것은 그중 영역이었다.

마력 방어막이 내 의지를 담고 급격히 팽창한다.

원래는 내 주위, 나로부터 1미터 남짓한 곳만 감싸고 있던 마력 방어막.

빠르게 커져서는 배 이상 넓어진다.

그로 인해 지름 5미터는 될 정도로 커져서 비눗방울처럼 번들거렸다.

[영역 방어막]

원래의 마력 방어막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견고한 방어막.

여태 날 괴롭히던 검은 불꽃이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아니, 소실되어버린다.

신열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내 몸에 잠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상태에서 넥타르를 마시면 완전히 소멸하는 것도 사실.

"와아······"

서우진이 날 존경에 찬 눈빛으로 쳐다본다.

눈앞에서 신열 소멸시키는 걸 봐서 감명 깊은 모양.

"다 된 건가요?"

그럴 리가.

지금부터 시작인걸.

너도, 나도 개고생할 일만 남았다고.

서우진 -4-

서우진을 앉혀놓고 말했다.

"이제 장갑을 벗을 겁니다."

"괘, 괜찮을까요?"

"당연히 안 괜찮죠."

나는 서우진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리고 눈으로 연무장 빈 곳 적당한 곳을 조준한 다음 쏘았다.

방어막을.

우우웅.

내가 지정한 지점에서 영역 방어막이 치솟는다.

서우진을 완전히 감싼 대신 나는 들어가지 않게끔 펼쳐진 영역 방어막.

손을 뻗으면 닿는다. 정확히 말하면 서우진이 오른손을 뻗으면 손목에서 딱 잘릴 거리였다.

"뭐 하시는······"

"간단합니다. 이 상태에서 장갑을 벗고 제가 서우진 씨의 손을 잡을 겁니다. 그리고 제 방어막을 제거하고요."

나는 지금 [영역 방어막] 범위 밖에서 [마력 방어막]을 쓰고 있다.

여기서 마력 방어막을 없애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신열이 폭풍처럼 몰아칠 것이다.

동시에 서우진이 방어막 밖으로 손을 내밀고, 장갑을 벗는다면?

서우진이 설마 하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공명 효과?"

"맞습니다."

"말도 안 돼요! 신열이 얼마나 무서운지 선생님도 잘 아시잖아요! 그게 공명되면 정말 사람 죽어요, 죽어!"

"절대 안 죽습니다.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아플 뿐이죠. 그리고 신열 극복이 쉬울 줄 아셨습니까?"

"그건······"

"힘들겠지만 서우진 씨도 각오하신 내용 아닙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사실 겁니까? 오늘 하루 잠깐 고생하는 게 훨씬 낫죠."

서우진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반사적으로 잠긴 문을 한 번 보고는 머리를 흔든다.

자기 뺨을 쫙쫙 몇 번 때리고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선생님이 저보다 더 고생하실 텐데 우는소리 할 수는 없죠. 할게요."

"좋습니다. 손 내미세요."

"장갑은 제가 벗을게요. 생체 신호 잠금 되어 있어서 저 말고는 아무도 못 벗겨요."

서우진이 왼손으로 오른손을 잡았다.

번뇌 가득한 얼굴로 한참을 주시하더니, 이를 악물고 장갑을 벗었다.

순간 흑색 화룡이 승천했다.

불길이 사방으로 폭발하듯이 번지는데 그 기세가 어마어마했다.

내 주위에 떠돌았던 검은 불꽃 따위 빈딧불에 불과할 정도.

서우진이 억눌린 목소리로 외쳤다.

"빠, 빨리!"

즉시 손을 낚아챘다.

살짝만 잡아당겨 영역 방어막 밖으로 꺼낸다.

그러자 폭발하듯이 분출하는 화염.

동시에 내 몸에서도 불꽃이 터져 나왔다. 동종의 화염이, 성화가, 흑염이 서로 공명하며 폭주하고 있었다. 눈앞이 컴컴해지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척추를 타고 치달렸다.

"끄으윽!"

성녀에게 세례받았을 때보다 더하다.

나는 비명을 삼키면서 미리 생각해뒀던 대로 움직였다.

[영역 방어막][신성 저항][인내]

[마력 흡수][약물 중독][마력심]

특성 전환은 최우선.

벌컥벌컥.

두 번째로는 미리 뚜껑 따놓은 마력 물약 원샷.

마지막으로 마력을 제어한다.

힘을 빨아들인다는 느낌.

강제로 끌어 올려진 집중력을 통해 나와 맞잡은 손, 그래서 격렬하게 공명 중인 서우진의 성화를 내게 끌어오려고 해본다.

평소라면 불가능했을 일.

지금이라면 가능했다.

인간을 초월한 상태의 집중력, 동일한 주체로부터 비롯된 성화, 내 심장에서 빛나는 마력심의 삼위일체가 조그마한 기적을 일구어냈다.

쿠르르릉.

하늘이 신음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움직인다.

조금씩, 달팽이 구르듯, 혹은 파도 거품 터지듯이 내게 밀려오고 있었다.

'된다!'

그에 따라 내 몸을 불태우는 힘이 더욱 강해진다.

더럽게 아프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다.

내가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 모든 것을,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 참아냈다.

'넥타르! 넥타르가 필요해!'

이게 다 성녀 때문이다.

그 개 같은 성녀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렇게 아플 일은 없었다.

역경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

시련을 겪어야 강해진다?

그런 거 없어도 나는 쭉쭉 강해질 수 있었다!

두고 봐라.

무지막지한 속도로 강해져서 옛 아버지 교단을, 성녀를, 그 엿 같은 종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말 테니까!

"으아아! 으아아악!"

서우진이 미치광이처럼 소리를 지른다.

왼손으로 자기 가슴을 퍽퍽 치고, 아예 전력으로 머리를 강타한다.

그러느라 피눈물을 잔뜩 흘리지만, 그 와중에도 오른손만큼은 내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이놈도 보통 아니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방어막 안으로 진작 도망쳤을 텐데. 괜히 8레벨까지 올라간 놈이 아니야.

그러던 중, 별안간 오른손이 못 견디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서우진이 손에 힘을 준 걸까?

아니다.

피부가 아니라 뼛속부터 아팠다. 불길이 피부에 몰린 신경 세포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흡사 뼈 깊은 곳에서 한 토막 한 토막 조각내는 듯한 감각이었다.

왔구나!

나는 즉시 서우진을 껴안고 방어막 안으로 몸을 날렸다.

검은 불꽃이 분출되다 말고 토막토막 끊어진다.

증폭된 상태라 완전히 사그라진 것은 아니지만, 조금 전보다 훨씬 나았다.

"흐억, 흐억, 흐어억."

서우진이 바닥에 엎드려서는 숨을 몰아쉰다.

나는 새로 얻은 특성을 활성화했다.

몸 전체에 싸한 느낌이 한 번 들더니 뼛속 깊은 곳에서 불타는 통증이 느껴진다.

아니, 방어막 안에서 이 정도고 전체도 아닌 일부가 이 정도면 평소에는 어떻다는 거야?

새삼 몸서리를 치게 된다.

"어······ 이거 왜 이렇죠?"

서우진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나 보다.

엎드린 채 자기 손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만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의문만 가득하던 눈에 별안간 이채가 떠올랐다.

"혹시, [피해 흡수]?"

역시 명문가 도련님.

바로 눈치채네.

"맞습니다."

"어, 피해 흡수가 그렇게 쉽게 각성하는 능력이었나요? 굉장히 희귀한 능력이고, 전문적인 수련을 밟아도 열에 한둘이나 각성한다고 들었는데요."

당연히 아니지.

김전사의 몸뚱어리라 가능한 거고, 내가 치밀하게 설계했기 때문에 가능한 거다.

나는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서우진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비밀은 지켜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내 진지한 얼굴에 서우진도 얼굴을 굳혔다.

"당연하죠. 선생님. 남자 대 남자의 약속인 데요."

"믿겠습니다."

나는 연무장 한쪽에서 목검을 주워다 서우진에게 건넸다.

서우진에게는 검을 들게 하고, 나는 강철 보호대를 양팔에 착용한 다음 방어막 안에서 마주 보고 섰다.

방어막으로 신열을 일부 막아내고, 피해 흡수로 신열의 일부를 내게 전가 중인 서우진.

하지만 얼굴이 썩 좋진 않다.

약화된 상태라고 하나 작열통은 작열통. 평범한 사람이라면 당장 진통제 내놓으라고 엉엉 울고도 남았다.

"서우진 씨, 마지막 단계입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지금부터 전력으로 절 공격하시면 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아시죠?"

"예전 선생님들한테 들었어요. 신열에 걸리면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수준으로 집중력이 높아지니까 마력 각성과 무공 수련에 최적의 상태가 된다고······"

"맞습니다. 서우진 씨라면 제세검법과 제심공, 일기검과 일기신공 모두 배우셨을 겁니다. 맞지요?"

"예. 어릴 때긴 하지만 다 배웠어요."

"뭐든 좋습니다. 배운 모든 걸 써서 절 공격하세요. 그러다 꽂히는 게 있으면 그 무공에 집중하고요. 그렇게 마력을 각성하면, 단전에 내공이 채워지면 끝입니다. 넥타르를 마셔서 신체 진화하면 신열이 완전히 소멸합니다."

집중력은 칼날 같고 고통은 견딜 만하다.

성공이 눈앞에 있었다.

그 사실을 직감한 서우진이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나도 마력 물약을 한 병 비운 다음 당부하듯 말했다.

"체내에, 특히 단전에 집중하세요. 아무리 10년 이상 수련을 못 했어도 지금 상태라면 약해빠진 마력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제심공이든 일기신공이든 운영해서 서우진 씨 걸로 만드는 겁니다."

서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러더니 툭, 내뱉듯 한마디를 했다.

"퍼스트 소드에요."

"네?"

"퍼스트 소드요. 아빠랑 엄마가 새로 만들었어요."

어, 그러니까······

제검문과 일검문의 무공을 하나로 합쳤다는 말이지?

제일이라는 이름에서 따와서 퍼스트 소드로 명명했고.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작명 솜씨는 좀 없으시네요. 애초에 한자도 다르지 않아요?"

"다르죠."

"억지로 영어로 안 고치고 한자 그대로 쓰는 게 나았겠습니다. 음, 솔직히 말씀드려서 좀 구려요."

"아하하, 역시 그렇죠? 나중에 제가 제대로 익히면 이름을 바꾸려고요."

"그게 낫겠습니다."

그러려면 여기서 서우진이 나아야겠지.

나는 웃음기를 지우고 서우진을 쳐다보았다.

서우진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진다.

"갑니다."

"오세요."

서우진이 목검을 들어올린다.

제대로 쥔 것은 10년만일 서우진.

그런데 기세가 범상치가 않다.

목검을 드는 순간 낭창낭창 유연해지는 착각과 함께, 서릿발 같은 기세가 나를 찔러왔다.

뭐야?

0레벨 맞아?

저게 마력을 각성하지도 못한 놈이라고?

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 서우진이 목검을 내리그었다.

쌔애액!

날카로운 파공음.

초보자 특유의 어색함이나 거친 동작 따윈 어디에도 없다.

쇄도하는 서우진은 이미 완성된 무사, 그 자체였다.

"미친!"

겨우 팔을 교차하여 막았다.

빠각!

강철 보호대를 착용했는데도 격한 소리가 났다.

충격도 어마어마하다.

내 팔이 양쪽으로 젖혀져서 가슴이 노출될 정도.

막 목검을 회수하던 서우진의 눈이 육식동물처럼 번뜩였다.

낯 가리고 어색해하던 모습이 무색하게, 흉포한 짐승이 되어서 목검을 찔러온다.

"젠장!"

다급하게 몸을 피했다.

목검이 아슬아슬하게 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것만으로도 얻어맞은 쪽이 못 견디게 아프고, 검은 불꽃까지 옮겨붙어 지독하게 타올랐다.

살살 할 만도 한데 서우진은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연격 특성이 있는 것처럼 연속 공격을 퍼붓고, 일점 특성이 있는지 섬뜩하게 찔러오고, 강타 특성을 얻기라도 했는지 강렬한 참격으로 내 머리를 쪼개려고 한다.

정말이지 간신히 막고 피했다.

단 한 번이라도 실수했다간 어디 한 군데가 부러져도 단단히 부러질 지경.

"이이익!"

퍽!

"으헉!"

쉬이익!

"으아아!"

뻐어억!

서우진이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내가 도망 다니는 형국.

한편으로는 뼈저리게 실감했다.

역시 난 놈은 다르다.

직접 몸을 움직여서 싸우는 것에서 나는 한참 낙제점이다.

애초에 싸워 본 적이 있어야지. 검법을 따로 수련한 것도 아니고. 누가 보면 처지가 뒤바뀐 줄 알겠다. 서우진이 스승, 내가 제자라고 생각하겠어.

서우진이 흥이 올라 소리쳤다.

"겨우 이 정도로 절 가르치겠다고 하신 겁니까!"

"가르친다고 한 적 없어! 치료한다고 한 거지! 그리고 그딴 말 할 정신 있으면 단전에 집중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마력을 못 느껴?"

"저는 모르죠!"

쌔애액!

검을 내리치는 서우진.

빠악!

간신히 막긴 막았는데 팔이 못 견디게 아프다.

이거 금 간 것 같은데?

대신 양팔이 번들거리며 뿌듯한 힘이 솟구쳤지만 바로 취소해 버렸다.

[방어] 특성 획득.

아쉽지만 특성칸이 꽉 차서 못 넣는다.

슈웅!

이어지는 횡 베기를 피하자 얻은 [회피] 특성도 마찬가지.

이럴 줄 알았으면 흉갑에 투구까지 찰 걸 그랬어.

서우진이 이렇게 센지 누가 알았겠냐고!

"후우우."

한참을 칼질하던 서우진이 별안간 심호흡을 한다.

10년 만에 검을 잡아서일까?

흥을 낼대로 낸 서우진.

어느새 눈을 반개하고 있었다. 깊이 침잠해 들어간 눈에선 심원한 안광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시간이 멈춘 듯 정지한 몸에선 검은 불꽃 대신 수증기 구름이 빽빽 피어오르는 중이다.

각성의 순간.

나는 가슴이 벅찬 느낌을 받으며 서우진을 쳐다보았다.

"역시 된다니까."

피해 흡수가 큰 역할을 했다.

뭐, 나니까 가능한 일이긴 했지.

누가 동종 신열에 걸린 채로 피해 흡수를 걸어주겠어.

불가능하지, 암. 신열 걸리면 다 내팽개치고 신전에 쫓아가서 정식 세례받는 게 국룰이니까.

내가 팔짱을 끼고 흐뭇하게 서우진을 보고 있을 때였다.

서우진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목검을 들어올렸다.

목검에서 희뿌연 기운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설마, 검기?

그럴 리가. 아무리 잠재력이 대단해도 1레벨짜리가 검기를 쓸 수는 없는데?

그랬다간 전신 마력 혈맥이 다 망가져서 몇 달은 정양해야 한다.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 순간.

목검이 무럭무럭 자라나더니 서우진을 감싸듯이 감추었다.

세상이 멀어진다.

연무장도 마력 집중진도 널브러진 약병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목검만이, 희뿌연 빛에 휩싸인 목검만이 내 시야를 가득 가리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묘사.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신검합일이다!'

신검합일!

이게 말이 되냐?

1레벨 시작 특성이 신검합일이라는 게?

게다가 신검합일은 고유 특성도 아니고 계열 특성이잖아!

서우진의, 성기사가 아닌 무사 서우진의 고유 특성은 도대체 어떤 사기 특성이기에 시작 특성이 신검합일이라는 거야?

이윽고 목검이 정점에 도달했다.

하늘 높이 곧추선 목검.

달을 찌를 듯 세워진 거대하고도 웅혼한 힘의 집합체.

추락하기 시작한다.

대기를 불태우며 강하하는 유성처럼, 혹은 두 갈래로 쪼개져 붕괴하는 산봉우리처럼.

이건 못 막는다.

그 사실을 직감하면서도 나는 빠르게 특성을 전환하고 있었다.

[방어][마력 방어막][근력]

[맷집][인내][마력심]

이어, 방어 특성을 두 팔로 활성화하면서 마력 방어막을 두 팔에 집중.

여전히 내 몸을 불태우던 신열이 나를 보조해주었다.

두 특성이 결합한다.

[방어]와 [마력 방어막]이.

그 결과로 진화하는 [마력 방패] 특성.

가까스로 펼쳐낸 방패 모양 방어막.

그 위로 거대한 목검이 떨어졌다.

넥타르 -1-

넥타르

꽈르릉!

벼락이 쳤다.

시퍼런 전광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통하고 지나간다.

세상이 새하얗게 변하고, 찌이잉 하는 이명이 대뇌까지 파고드는 느낌이다.

그리고 두 팔에서 올라오는 불같은 통증.

부러진 게 분명했다.

"크으윽!"

하지만 막아냈다.

신검합일, 그 위대한 경지의 일격을 어떻게든 방어하고야 막았다.

"허억, 허억."

정신을 차려보니 비밀 연무장 벽면에 구겨지듯 처박혀 있었다.

고개를 들자 이명이 더욱 심해진다. 어질어질한 것을 겨우 참고 정면을 주시했다.

저만치 앞, 비밀 연무장 중심에는 서우진이 쓰러져 있다.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

그 와중에도 목검을 신주 단주 모시듯 소중하게 품고 있었다. 더군다나 목검에서는 희뿌연 기세가 피어오르며 서우진을 감싼다.

서우진 주위에 검은 불꽃이 일렁였으나 목검이 뿜는 기세에 실시간으로 증발하는 중.

저절로 실소가 나왔다.

'천재는 다르네.'

그게 등급 수저라는 거겠지.

한 가지는 확실하다.

서우진은 태생 등급 SSR이라는 것.

어쩌면 전사 계열 3대장이라는 백소린, 칼리, 자네트와 비슷한 성능일지도 모르고.

"끙차!"

특성을 갈며 몸을 일으켰다.

마력 방어막이 내 주변에 펼쳐지며 신열을 밀어낸다.

검은 불꽃이 타닥타닥 타오르기 시작하고 나를 괴롭히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 두 가지는 빼고.

팔에서 올라오는 격통과 귀에서 징징거리는 이명만큼은 여전했다.

어떻게든 팔을 맞추고 상처 회복과 재생을 장착했다.

그나마 특성 칸 두 개가 비어 있어서 다행이다.

아직 절대적인 마력량이 적은 나로서는 마력 회복 관련 특성만 네 개를 투자해야 마력 방어막의 마력 소모를 감당할 수 있거든.

아픔을 참으며 문 옆에 설치된 빨간 단추를 눌렀다.

"끝났습니다. 들어와서 확인하세요."

우당탕탕!

급히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철문을 열어젖히며 대표 부부가 뛰어들었다.

"우진아!"

"괜찮으냐!"

나는 살짝 몸을 비켜주었다.

대표 부부가 서우진을 잘 볼 수 있도록.

목검을 껴안고 누운 서우진. 그런 서우진에게서, 아니 목검에서 자라나는 신령한 기운이 서우진을 감싸고 있다.

이 장면이 뭘 뜻하는지 모르면 6레벨 초인, 특히 전사 계열 초인이라고 할 수가 없다.

"신검합일!"

"세상에! 우진아!"

대표가 얼빠진 얼굴로 입을 벌리고, 부대표는 눈시울을 촉촉하게 적셨다.

부지불식간에 서로의 손을 맞잡는다.

두 눈 가득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피어나고 있었다.

훈훈한 광경이지만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나는 아픈 팔을 어루만지며 한마디 했다.

"보고만 계실 겁니까? 넥타르부터 먹이셔야지요."

"참! 내 정신 좀 봐!"

"이런, 그렇지. 고맙습니다.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서우진에게 다가가는 둘.

나는 열린 철문을 한 번 본 다음 말했다.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우진 씨가 회복된 것은 제가 하지 않은 것으로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걸 왜······ 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교단 때문이지요?"

역시 척하면 척.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교단에게 오늘 일이 알려지면 좋을 게 없죠. 저는 교단이 콧김만 불어도 날아가는 신세 아닙니까."

"베스트팔렌 조약 때문에 교단이 직접 힘을 쓰기는 어렵습니다."

"여보. 초인님 말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아직 레벨이 낮으시잖아.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

"하긴······"

"밖에 있는 최 소장에게는 알려주세요. 입막음 조로 좀 쥐여주시면 알아서 할 겁니다."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 인간이지만 어쩌겠어.

오늘 일을 중개해준 것만으로 그 능력을 입증했는데.

일단은 같이 가는 게 좋을 것이다.

대표가 머리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나겠지만 저희가 먼저 밝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대표님이랑 제가 연기를 조금 하는 게 좋겠습니다."

"연기라뇨?"

나는 허공에 주먹질해 보였다.

당연하잖아.

꼴랑 1레벨따리가 찾아와서 금쪽같은 아들내미 치료하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쳤는데 대차게 실패했다고 치자.

그런데 멀쩡히 걸어서 나갔다?

말이 안 된다. 반신불수로 만들지는 않더라도 다리 몽둥이 정도는 분질러야, 눈탱이 밤탱이 정도는 만들어야 납득할 것이다.

대표가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래도 어떻게 선생님께 주먹을 휘두릅니까."

"안 아프게 때리실 수 있잖아요. 그리고 정 미안하면 용돈이나 좀 챙겨주시죠. 요즘 제가 많이 궁합니다."

"허허, 알겠습니다. 섭섭하지 않게 챙겨드리죠. 넥타르랑 파산검법도 바로 드리겠습니다."

부대표와 서우진을 남겨놓고 비밀 연무장을 나섰다.

서우진은 그대로 비밀 연무장에서 돌볼 모양.

나가기 전 잠깐 서우진을 돌아보았다.

[SSR 서우진]

다음에 만날 때는 전사 계열 초인이 되어 있겠지.

그때는 몇 레벨일까?

최소한 3레벨, 어쩌면 5레벨 이상일지도 모른다.

'잘 지내라.'

이유 없이 배가 불렀다.

다가올 미래에 옛 아버지 교단의 일익을 꺾어놓아서인지, 아니면 나도 인맥이라는 게 생겨서인지 모르겠다.

그게 아니면 한 사람의 인생을 구했다는 만족감 때문일 수도 있고.

"시작하겠습니다."

통로 철문에 손을 가져다 대며 대표가 말했다.

본능적으로 마력 방어막에 정신을 집중하게 된다.

날 감싼 방어막이 또렷해지는 것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듯 쏟아지는 무지막지한 고함.

"이 애송이가 감히 날 농락해?"

대표가 내 멱살을 잡아다가 힘껏 집어던진다.

"어헉?"

와장창!

큼직한 거실을 날아 한쪽에 쑤셔박힌다.

하필이면 날 집어던진 곳에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도자기가 장식대 위에 놓여 있었다.

도자기가 깨지면서 그 파편이 내게 우르르 쏟아진다.

거의 10여 미터를 날아 처박혔는데 아프진 않았다.

대표가 불어넣은 기운이 날 보호한 까닭.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난리 난 것처럼 보였겠지.

거실에 얼쩡거리던 고용인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대, 대표님!"

"고정하십시오!"

"부대표님! 부대표님 어디 계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놈!"

대표는 아예 흥이 올랐다.

10미터를 단숨에 도약하여 내게 발길질을 날렸다.

"켁!"

역시 아프진 않다.

대신 발에 실린 기운이, 내공이라는 힘이 내 배를 제대로 뒤집어 놓았다.

쨍그랑!

이번에는 거실 통유리창을 깨뜨리며 정원으로 튕겨 나간다.

내 입에서 분수처럼 토사물이 뿜어졌다.

토사물 무지개를 그리다시피 하며 정원에 나뒹구는 나.

내가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어째 기분이 이상하다.

너무하는 거 아니야?

항의하고 싶은 마음을 알았는지, 어느새 달려와 내 멱살을 쥔 대표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막 바로 옆에서 모기처럼 앵앵대는 목소리.

즉, 전음으로.

[용돈은 10억 정도면 되겠지요? 간편하게 쓰실 수 있게 세탁 다 끝내서 최 소장 통해서 전달하겠습니다.]

어······

그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아이고, 그럼요.

이 천한 몸뚱이 따위 얼마든지 때리셔도 됩니다!

어디 한 군데 고장 나는 것도 아니고 아프지도 않은데 완전 개꿀 아니냐?

퍼억! 퍽퍽!

대표가 나를 쉬지 않고 연타했다.

그 와중에 내 주머니에 조그마한 넥타르 병과 기억칩을 넣어주는 걸 보면 고수는 고수지 싶다.

내 얼굴이 찐빵처럼 부풀고 울긋불긋한 피멍이 올라올 무렵이었다.

응접실 문이 대차게 열리면서 최 소장이 뛰쳐나왔다.

"대표님! 대표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러다 저희 초인님 정말로 죽습니다!"

이미 상황을 아는 눈치.

하긴 대표쯤 되는 고수면 저 정도 거리에 전음 써서 목소리 전달하는 건 어렵지 않지.

대표가 코웃음을 치고는 날 힘껏 던져 버렸다.

"끄악!"

정문 밖, 도로를 뒹굴며 합 맞추어 비명을 질렀다.

대표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최 소장을 노려보았다.

"이번에 자네에게 크게 실망했어!"

"왜, 왜 그러십니까?"

"뭐? 슈퍼루키? 상식을 파괴하는 신예? 에라, 그딴 말에 홀린 내가 등신이지. 와이프는 아예 앓아누웠어! 이 사기꾼들 같으니!"

대표가 노호하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검법으로 유명한 제검문의 당대 가주이자 제일보안에서 가장 강력한 초인.

그렇다고 권법을 못 쓰는 건 아니다. 시퍼런 기운이 드릴처럼 맺혀 있다가 대표가 주먹을 내지른 순간 한 마리 천리마가 되어 질주했다.

꽈과광!

"히끅!"

청색 빛 덩어리가 대지를 할퀴고 지나갔다.

나와 최 소장 사이, 그 중간을 정확하게.

땅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빛 덩어리가 할퀸 자리에는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먼지가 흩날리기 전에 먼저 강렬한 진동이 덮쳐와서 최 소장이 딸꾹질하며 주저앉았다.

심지어 오줌을 지렸는지 정장 바지가 까맣게 물들었다.

나는 그나마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아직도 이명이 웅웅거려 넘어질 뻔했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버텼다고.

대표가 역시, 하는 눈으로 나를 보고는 사자후를 질렀다.

"썩 꺼져라! 이 사기꾼 놈들! 다시는 내 집에 얼씬도 하지 마라! 다음에는 땅이 아니라 머리통을 갈라주겠다!"

"히이익! 초, 초인님! 얼른 갑시다!"

"그러죠."

차는 어차피 저택 밖에 주차되어 있었다.

최 소장이 운전석에 앉아서는 조수석에서 향수통을 꺼내 자기 사타구니에 칙칙 뿌린다.

"아흐······ 이게 무슨 꼴이야."

나는 조수석 뒷자리, 상석에 몸을 묻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에휴, 어쨌든······"

시동을 걸고 운전대 뒤 숨겨진 버튼을 누르는 최 소장.

지이잉.

마력이 은밀하게 자동차 내부를 뒤덮었다.

도청 방지 마법이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걸 보면 아주 고레벨 마법은 아닌 것 같다만.

"성공하셨나 보지요?"

"그럼요. 제대로 성공했습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넥타르 병과 기억칩을 꺼내 흔들었다.

최 소장이 그걸 보더니 놀란 표정이 된다.

"기억칩? 아까 대표님께선 자기 보는 앞에서 사용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잊어버렸나 보죠."

"서 대표님이 그렇게 만만한 분이 아닙니다. 곰 같이 생기셨어도 아주 세심하신 분이에요. 그러니까 교단에서도 저렇게 복잡하게 수를 쓰는 거지요."

"그럼 이걸 그냥 제게 준 거라고요?"

"뭐, 그만큼 믿으신다는 뜻이겠지요. 아마 초인님께서 팔아치워도 아무 말씀 안 하실 겁니다."

하지만 썩 유쾌하진 않겠지.

차를 운전해서 신림동을 향하는 최 소장에게 슬쩍 미끼를 던졌다.

"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파는 게 나을까요?"

백미러로 날 힐끔 보고는 답하는 최 소장.

"아니요. 제 생각에는 사용하셔서 파산검법을 익히시는 게 맞습니다."

"역시 그렇지요?"

"예. 초인님께서 강화병 계열 초인이라면 파는 것도 좋지만 초인님은 전사 계열 아닙니까. 초인님께서 강해지셔야 뭐가 되도 됩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수련을 통해 자신의 내부에서 힘을 얻는 전사.

강화와 신체 개조로 강해지는 강화병.

돈에 눈이 멀어서 미래의 가능성을 파는 건 명백히 바보짓이다.

"저 당분간은 잠수하려고 합니다."

"하기야 교단 눈에 뜨일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지요. 넥타르는 어쩌실 겁니까? 바로 드실 거지요?"

"당연하죠."

넥타르는 보물이다.

돈으로도 구할 수 없는 귀물이고.

경매장에 나오기라도 하면 수십 수백 억을 가뿐히 호가한다.

내가 넥타르를 가지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습격해올 인간이 트럭 열 대는 채우고도 남는다.

최대한 빨리 먹어서 없애야지.

"초인님, 복용 방법은 알고 계시지요?"

"복용 방법이라뇨?"

"초인님도 아시겠지만 영약은 적절한 복용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 제 역할도 발휘하고 부작용도 최소화됩니다."

그건 맞다.

무턱대고 마시면 3레벨 될 거 2레벨밖에 안 되고 한계 돌파에 실패하는 수도 있었다.

하다못해 마력천(魔力泉)이라도 있으면 좋은데······

"제가 넥타르를 법제할 약재랑 장비를 구해보겠습니다. 가능하면 연금술사도요.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기다려달라.

곰곰이 생각했다.

넥타르를 제대로 복용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부작용을 감수하고 신열부터 제거하는 게 나을까?

내가 고민하고 있자 최 소장이 운전에 집중했다.

"일단 진행하겠습니다. 어차피 며칠 안 걸립니다. 충분히 생각하시고 결정하시지요."

"고맙습니다.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최 소장은 나를 내가 묵는 호텔에 내려주었다.

"푹 쉬십쇼. 용돈 들어오면 연락 한 번 드리겠습니다."

"예. 부탁드립니다."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찌른 채로 내 방에 올라간다.

마주치는 호텔 직원들이 깜짝 놀랐다.

"소, 손님! 괜찮으세요?"

"의사 불러드릴까요?"

"손님 얼굴이······"

직원들이 하나같이 놀랄 만하다.

나도 차 안에서 봤지만, 아주 찐빵처럼 제대로 부풀어 있었거든.

하지만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적당히 얼버무리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방에 들어온 다음, 내부 잠금장치를 모두 걸어 잠근 후에야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넥타르.

그리고 기억칩.

사용 순서가 중요하다. 나는 먼저 기억칩을, 작은 수정 USB처럼 생긴 것을 두 손으로 잡고 빠각 부러뜨렸다.

맑은 광채가 솟구치더니 무지개가 어린다. 무지개가 내 주변을 감돌다가 정수리를 통해 흡수되고, 뇌 속에서 어떤 영상이 재생되었다.

짧고 뭉툭한 검을 가진 남자가 검술을 펼치는 영상.

[파산검법]

간결하면서도 힘찬 동작이 특징인 검법.

파산검법도 훌륭한 검법이며 특성이지만, 오늘만큼은 애피타이저에 불과하다.

메인 디시는 따로 있었다.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넥타르 병을 들었다.

오색 머금은 투명한 수정병. 그 안에서 금빛 액체가 은하수처럼 반짝인다.

최 소장은 잠깐 아껴놓으라고 말했지.

하지만 아끼다 똥 되는 법.

내 특성 전환을 생각하면, 특성 칸을 네 개나 낭비하게 만드는 신열이야말로 최우선 제거 대상이었다.

겨우 며칠 차이라고 해도.

혹시 알아?

존버하고 있다가 무슨 사건이 터질지.

노루가 날 마법사에게 팔아넘기겠다고 습격한 것처럼.

결정을 내렸다.

뽕.

조심스럽게 약병 뚜껑을 땄다.

특성 전환.

[파산검법][마력 방어막][마력심]

[마력 흡수][약물 의존][약물 중독]

성장 방향을 유도할 특성 셋.

넥타르 복용 효율을 극대화할 특성 셋.

정식으로 법제하는 것만큼은 못해도 넥타르의 효과를 극대화할 것이다.

부작용?

몸으로 때우지 뭐.

꿀꺽.

단숨에 넥타르를 삼켰다.

넥타르 -2-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청량함이었다.

상쾌하고도 맑은 액체가, 아니 마력 덩어리가 내 폐부를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이어 심장으로, 혈관으로, 전신으로 퍼지며 씻어내린다.

온몸의 세포가 알알이 깨어나는 것 같다.

새로 태어나는 느낌.

나라는 존재가 고등한 차원으로 승천하는 듯한 그런 고양감이, 산뜻하고도 시원한 감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둑, 우드득.

푸시시시.

뼈 마디마디에서 콩 볶는 소리가 들린다.

근 섬유 한 올 한 올이 해체되었다가 재조립되고 있었다.

모공이란 모공은 다 열려서 체내 노폐물을 진득한 연기처럼 만들어 내보낸다.

그러나 화재 경보도 오염 마력 경보도 울리지 않는다.

배출된 모든 노폐물은 즉시 황금빛 불꽃에 타버렸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열락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기껏해야 1분 남짓.

신체가 강화되긴 했으나 환골탈태하듯 대격변을 맞이하진 못했다.

벌모세수를 1/10쯤 받았다고 하면 적당할까.

나는 타는 목마름을 간직한 채 눈을 떴다.

'아쉽네.'

물약 의존에 물약 중독, 마력 흡수까지 동원했지만 넥타르의 효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느낌이다.

마력 회로와 심장, 혈맥에 마력이 꽉꽉 차 있었다.

명백히 용량 초과.

마력이 너무 많아 감각이 둔해질 지경.

손을 움직여 보니 움직임이 묘하게 늦다.

아주 조금,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나 약간 신경 쓰일 정도로.

더구나 조금씩 휘발되고 있다.

최대한 빨리 수습하지 못하면 모두 사라지고 말겠지.

'그래도 2레벨은 됐다.'

마력 회로가 뚜렷하게 확장되었다.

크기는 커졌고 더욱 복잡해졌으며 두께도 두꺼워졌다.

아쉬운 점은 회로와 혈맥을 흐르는 마력.

도도하되 정제되지 않았고 힘차되 거칠었다.

마력 연공법이 필요한 시점.

이 넘치는 마력을 수습하면 분명히 3레벨이 될 테니까.

파산검법 말고 내공심법 하나 달라고 할 걸 그랬을까?

아니다.

김전사는 무사보다는 다른 직업으로 키우는 게 낫다.

전사 계열 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종류.

흔해 빠진 만큼 일정 이상의 성능을 보장하는 그 직업.

전사.

육체 강화에 중점을 두고 가공한 마력을 통해 기술을 뿌리는 전사야말로 김전사와 찰떡궁합이었다.

'마력 연공법을 어떻게든 구하자.'

다음 목표가 정해진 것.

나는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하나 치켜들었다.

특성 전환.

넥타르를 마시고 신열을 극복하면서 얻은 특성을 장착했다. 손가락 끝을 주시하면서 딸깍, 속으로 중얼거리자 손가락 끝이 따가워지면서 검은색 불길이 치솟았다.

아주 작은, 촛불처럼 약하고 서울 하늘 별빛처럼 흐릿한 불꽃 하나.

[흑염]

"캬!"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건 1티어 중의 1티어.

화염 속성 피해가 통하는 상대에게라면 언제든 유효하게 쓰는 특성이다.

모든 무기와 방어구, 소모품에는 물론 어떤 기술에든 덧씌워 쓸 수 있고.

전사 계열이라고 속성 피해가 필요 없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유령이나 정령, 무형체 괴물을 상대하려면 반드시 필요했다.

"어디······"

모든 특성을 지우고 [흑염] 하나만 장착했다.

몇 개를 띄워본다.

몸 주위에다가, 신열 걸려 있을 때 방어막으로 밀어내던 때 느낌처럼 그렇게.

내가 띄운 것은 정확히 12개.

마력 소모가 크지 않았다. 계속 집중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까다롭긴 했으나 아무 특성 없는 상태에서도 유지되었다.

'수련용으로 좋네.'

넥타르 복용 부작용으로 인해 거칠고 둔한 마력.

12개 흑염 구현은 까다로운 만큼 마력 정제에 도움이 되었다.

섬세하고도 부드럽게, 그것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서 마력을 다뤄야 하니까.

"좋아, 좋아."

당분간 흑염과 파산검법 수련에 전념하자.

마력 연공법은 구할 곳이 있다.

그것도 적당한 걸로.

돈이 수억은 있어야 하니까 제일보안 대표가 돈을 주길 기다려야지.

'내가 지금 특성이 몇 개가 있지?'

중간 점검.

차분히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미친?

정답은 35개였다.

아케인 서울에, 이 막장 세계에 떨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수십 개가 넘는 특성을 수집한 것이다.

"지리네."

나 정말 열심히 살았구나.

그중 1티어 특성이 흑염에 마력 방어막, 영역 방어막, 마력 방패가 있고 파산검법도 계열 특성 중에는 괜찮은 평가를 받는 특성이다.

나는 뿌듯함을 느끼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검을 구해야겠다.'

돈이 얼마나 있지?

정답은 5,100만 원.

원래 가지고 있던 돈에 서우진을 만나기 전 월화수목 광질 뛴 돈, 거기서 얻은 마력핵을 합성해서 거래소에 판 돈까지 다 합친 금액이다.

조만간 호텔 숙박비를 내야 하니 조금 빼놓으면 4,800만 원이 남는다.

'10억은 당분간 묻어두자.'

4,800만 원으로 적당한 검을 구하고, 총과 수류탄을 보충하고 하면······

차라리 명품을 구해볼까?

마법 걸린 종류로?

'아니지.'

아무리 간단한 마법이 걸린 검이라도 기본이 억 단위다.

대표가 주겠다고 한 10억을 쓸 게 아니면 꿈도 꿔선 안 된다.

'대신 장비를 충실하게 갖추는 게 나아.'

전신 방호복과 고글이 달린 접이식 헬멧.

돌격소총과 고화력 자동 산탄총.

질 좋은 장검과 손목 방패.

수류탄과 섬광탄, 최루탄, 봉인탄도 필요하지.

사는 김에 유탄도 몇 개 살까?

본격적인 유탄 발사기까지는 몰라도 소총에 부착할 언더배럴형 유탄발사기 정도는 괜찮겠지.

"후······"

한참을 누워 있어서일까?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하긴 오늘 많은 일이 있었지.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지만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러느라 몰랐다.

늦은 밤.

스마트폰이 징징거리며 우는 것을.

다음 날 아침, 해가 중천에 떠오른 다음에야 눈을 뜨곤 스마트폰을 확인하게 되었다.

[초인님, 바쁘십니까?]

[계속 전화를 안 받으셔서 메시지 남깁니다.]

[차 안에서 말씀드렸던 건 때문에 그러는데 내일 잠깐 뵐 수 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무공 전수와 무문 가입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분명히 도움이 필요하시겠지요.]

[초인님이 망설이는 이유는 압니다.]

[무문 안에서 가당치도 않게 반대하는 놈들 때문 아닙니까?]

[싹 다 무시하고 단단히 마음을 먹으셔야 합니다.]

[제검문입니다, 제검문. 검법을 전수 받기만 하면 초인님은 탄탄대로를 걸으실 겁니다.]

[물론 문도들에게 편파적이라고 욕은 먹긴 하겠지요.]

[뭐 어떻습니까. 그 제검문, 제일보안인데요.]

[드릴 말씀은 많지만 직접 뵙고 상의하는 것이 예의인 것 같아 이만 줄입니다.]

[보시는 대로 답변 주시기를 바랍니다.]

[최선수 인력사무소장 올림.]

어······

뭐냐?

이 어색한 메시지는?

무공 전수는 뭐고, 무문 가입은 또 뭐야?

나랑은 전혀 나누지 않았던 말.

강렬한 어색함이, 이질감이 내 본능을 쿡쿡 찔러대고 있었다.

"아!"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깨달았다.

대각선 드립.

앞에 네 줄 뒤에 네 줄 떼고, 또 앞에 세 글자 띄워서 드립을 치는 바람에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분명히 [도]움이······]

[초인님이 [망]설이는······]

[무문 안에서 [가]당치도······]

[싹 다 무시하고 [단]단히······]

[제검문입니다, 제[검]문······]

[물론 문도들에게 편[파]적이라고······]

합치면 이런 문장이 된다.

[도망가 단검파]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건 무슨 뜻일까.

단검파 때문에 도망치라는 것인지 단검파로 도망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단검파로 가라는 말은 아니야.'

애초에 이 근처 상인들은 죄다 단검파 아니면 철권파에 선을 대고 있다.

최선수 인력사무소는 경찰 순찰 범위 안에 있지만, 그래도 법보다는 주먹이 가까운 법이거든.

단검파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면 최 소장이 알아서 했겠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

'병신 새끼.'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최 소장, 그 인간이 정보를 흘린 게 분명했다.

자기 의지로 그런 건 아니겠지. 실수로 그랬을 것이다.

메시지가 온 시간을 보니 늦은 밤.

뭐 술이라도 마셨냐?

그래서 실수를 하고, 단검파에 끌려가서 고문이라도 당했어?

최 소장이 배신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해서 날 끌어들였겠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날 배신할 줄 알았던 인간이 나한테 의리를 지키다니?

들킬 위험을 무릅쓰고 대각선 드립 문자까지 보내고 말이야.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최 소장도 나보고 도망가라고 했고 나도 최 소장 구하겠다고 목숨을 걸 의리 따위는 없다.

고민하는 이유는 하나.

도망친다고 일이 끝나겠느냐는 것.

'넥타르······ 젠장.'

이미 먹어 치웠다고 하면 누가 믿어주겠어?

내 배를 가르거나, 자기들 배가 갈라진 다음에야 믿지.

도망쳤다가 소문이라도 퍼지면 단검파 같은 뒷골목 갱단이 아니라 보물 사냥꾼들까지 달려들 수 있다.

평범한 사냥꾼이 아니라 초인 사냥꾼이.

차라리 여기서 끝장을 봐야 한다.

[제가 몸이 영 좋지 않네요. 조금 더 쉬어야겠습니다. 저녁에 사무소로 가지요. 한 8시? 그때쯤으로 생각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예전엔 내가 문자만 남겨도 바로 전화를 걸던 최 소장.

처음으로 문자 답변을 한 것에서, 나는 내 추측에 강한 확신을 가졌다.

딸깍.

후드를 푹 눌러쓰고 방을 나왔다.

금고 안의 5,100만 원을 모두 챙긴 다음이다.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비상계단을 통해 이동, 호텔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중간에 마주친 경비원도 무시.

거의 달음박질치다시피 걸어서 총포상에 들어왔다.

내가 노루 패거리와 싸우기 직전에 들렀던 바로 그 총포상.

"으흠?"

주인 여자가 한가로이 에어컨 바람을 쐬다 말고 날 돌아보았다.

"그때 왔던 손님이네? 어때, 물건은 잘 썼어?"

암, 잘 썼지.

소총도 삼단봉도 부숴 먹었지만 그거 없었으면 나도 여기 없었을 거야.

나는 인사도 하지 않고 골프백을 계산대에 꿍 내려놓았다.

이어서 골프백을 열어 현금다발을 모조리 꺼냈다.

여자가 눈을 치켜떴다.

"뭐야? 뭔데 그래? 무슨 일 있어?"

"바쁘니까 빨리. 여기 이 돈만큼······ 아니, 5천만 원어치만큼 소총 한 자루, 자동 산탄총 한 자루, 검방 세트 하나, 전신 방호복이랑 접이식 헬멧, 그리고 총알이랑 수류탄 종류 챙겨줘. 언더배럴 유탄 발사기랑 유탄 몇 개도 필요하니까 주고. 아, 소총에 달 소음기도 하나 줄 수 있으면 줘."

"5천만 원? 다 합쳐서 5천? 진짜 무슨 일 있어?"

"그러니까 이러지. 빨리. 시간 없어."

나는 만 원권 뭉치 하나만 빼고 나머지 현금을 모조리 여자에게 밀어주었다.

여자가 띄엄띄엄 현금 뭉치를 짚어보고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뭔 일인지는 모르지만 대박 맞았네. 근데 5천만 원으로는 조금 부족해. 검방 세트나 방호복이야 괜찮지만 소총이랑 산탄총, 유탄은 불법이라서."

"불법 아냐. 이거 등록해."

"이게 뭔데? 아, 초인증? 초인이었어? 아니, 그새 초인 된 거네? 너 보기보다 능력 있다. 좋아. 쿨거래니까 나도 쿨하게 물건 줄게. 마진은 최소한으로 붙여서 줄 테니까 다음에도 이런 일 생기면 나한테 와. 알았지?"

"오케이."

촤르륵, 촥!

벽면이 돌아가고 아래쪽 선반이 튀어나오며 숨겨놓았던 물건을 토한다.

주인 여자가 쉬지 않고 물건을 집어주었다.

"먼저 돌격소총······ 저번에 사 간 건 어쨌어? 뭐? 초인한테 얻어맞고 뽀개졌다고? 그거라도 가져오지. 중고로 팔아먹으면 좋은데. 산탄총이랑 방호복, 검방 세트······ 어, 잠깐. 방호복만 입고 다니게? 이거 츄리닝도 한 벌 사지? 공장제긴 한데 하급 마력사를 섞어 놔서 허접한 권총탄 몇 발은 막아줄 거야. 방호복 위에 걸쳐 입기 딱이라고. 그리고 유탄 발사기······ 유탄······ 수류탄······ 소음기······"

나는 탈의실에 들어가 방호복으로 갈아입었다. 그 위에 츄리닝을 걸친 다음, 권총과 방패 말고는 모조리 골프백에 집어넣었다.

방패는 말이 방패지 팔 보호대에 가까운 형태였다.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이어진 보호대에 길쭉한 철판을 겹친 물건.

여자가 내 왼팔에 직접 팔 방패를 채워주었다.

"츄리닝 품이 넉넉하니까 이렇게 입으면 밖에서는 잘 모를 거야. 접이식 헬멧은 츄리닝 후드에 넣었어. 이렇게 이렇게 착 쓰면 바로 장착돼. 편하지?"

"원래 이렇게 만든 물건이야?"

"어. 3레벨 초인 아니면 무장을 숨겨야 하니까 요즘엔 다 이렇게 나와. 괜히 비싼 게 아니라고."

준비 완료.

내가 골프백을 짊어지고 몸을 돌리자 주인 여자가 내 등을 팡 하고 쳤다.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싹 다 죽여버려! 절대 죽지 말고, 얼굴 아는 사람이 죽으면 꿀꿀하거든."

"그러지."

최선수 인력사무소는 총포상 바로 근처.

후드를 눌러쓴 채 앞을 지나가며 슬쩍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쪽에 험상궂은 남자들이 주르륵 앉아 있고, 카운터를 보는 직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스마트폰을 하는 중이다.

겉보기에는 별 이상이 없지만 난 명백히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원래 저기서 죽치고 있던 아저씨들은 전부 나한테 죽었다.

모두 노루 패거리였으니까.

그 뒤로는 새벽에만 잠깐 북적거리고 파리만 날리기 일쑤.

그런데 인력사무소가 꽉 차 있다?

이 시간에? 가장 한가해야 할 이 점심시간에?

직원이 멀쩡히 남아 있는 것도 이상하다.

소장은 잡혀갔는데 직원은 왜 저리 태평해?

'배신했구나.'

직원도 얽혀 있는 게 분명하다.

또, 저 남자들은 아무리 봐도 갱 같았다.

아마도 단검파.

여기서 인력사무소로 돌진하는 건 명백히 하수.

차라리 본진을 쳐야지.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그냥 놀고만 있진 않았다.

내가 살던 고시원 근처, 어떤 건물을 찾아가 경비를 서던 갱단원에게 통보했다.

"너희 보스한테 전해. 내가 밤에 단검파를 공격한다고."

"어? 뭐?"

"관악구 먹고 싶으면 잘 생각하라고 해. 늦으면 나도 모른다."

"야! 잠깐만! 야!"

초인 티를 팍팍 내며 벗어났다.

갱단원이 헥헥대며 쫓아왔지만 어엿한 2레벨 초인인 나를 잡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밤.

해가 진 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격][은신][죽은 척]

[마력 방어막][밝은 눈][질주]

사람 죽이기에는 최적의 특성 세트.

전쟁의 시간이다.

넥타르 -3- [1권 끝]

단검파 본거지 앞.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빌라 건물.

1층에는 작은 카페와 국밥집도 입점해 있다.

하지만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면 금물.

나는 빌라 건물 옆, 거의 벽을 잇다시피 한 건물들을 함께 눈에 담았다.

'여기도 던전이었지.'

던전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그냥 구획 구분된 체육관 수준에 불과했지만.

천천히 기억을 떠올린다.

단검파 던전은 지긋지긋하게 겪었다. 아케인 서울 튜토리얼에 두 번째로 합류하는 캐릭터, 김철권의 개인 퀘스트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제작진이 마르고 닳도록 우려먹어서 다른 곳에서도 걸핏하면 똑같거나 놀랍도록 비슷한 던전을 만나기도 했고.

'입구는 둘.'

정문은 눈속임.

진짜는 오른쪽 건물이었다.

사실 단검파 본거지는 여섯 동의 빌라 건물을 하나로 이어 만들어진 복합 던전이었다. 겉으로는 사람 사는 빌라인 척 지어놓았고 입주민도 받았지만, 실은 비밀 공간에서 불법 도박장을 운영 중인 것.

그냥 도박장도 아니다. 매춘과 마약, 지하 격투장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를 본거지로 삼은 것이다.

이런 것까지 알려지면 단검파도 껄끄러워지니까.

'어디······'

나는 인근 고시원 건물 옥상에 올라 소총을 꺼냈다.

노루에게 두 조각난 총과 똑같은 모델.

아래쪽에 언더배럴 유탄 발사기를 장착한다.

유탄을 밀어 넣자 딸깍, 쇳소리가 울렸다.

난간에 몸을 기대고 빌라 건물 정문을 조준.

밤이라 드나드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술을 진탕 마셨는지 고래고래 노래 부르는 소리, 부부싸움을 하느라 고함 지르는 소리만 울릴 뿐이다.

내부적으로는 다르겠지.

방음이 철저하게 된 비밀 공간에서 한참 환락과 방종, 죄악의 불꽃이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을 것이다.

그 공간으로, 진짜 단검파 본거지로 들어가려면 정문이 아니라 다른 곳을 통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굳이 눈속임인 정문을 골라 방아쇠를 당겼다.

퉁!

맥 빠지는 소리와 함께 발사되는 유탄.

꽈아앙!

그러나 폭발은 절대 맥 빠지지 않았다.

강렬한 폭음과 함께 쇠 파편이 사방을 찢어발겼다.

빌라의 낡아빠진 철문 따위로는 유탄 폭발을 막을 수 없다.

단숨에 박살 나면서 연기가 치솟았다.

아울러 울리는 요란한 경보음.

왜애애앵!

"어어?"

"으아악!"

"테러다! 테러야!"

"사람 살려!"

인적 하나 없이 조용하던 뒷골목.

비명이 귀를 따갑게 하고 집집마다 일제히 불이 커진다.

특히 유탄에 얻어맞은 건물의 반응이 즉각적이었다.

벌집 쑤신 것마냥 주민들이 혼비백산해서는 몰려나왔다.

해당 건물만 아니라 연결된 건물도 그랬다.

개중에는 벌거벗다시피 한 사람도, 마약에 취해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사람도 있었다.

"흥."

나라고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유탄을 새로 먹이는 대신 총을 껴안고 몸을 던졌다.

파쿠르 하듯이 인근 건물 옥상을 띄엄띄엄 건너뛴다.

이 근처는 죄다 원룸, 빌라, 고시원 건물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건물 높이도 비슷했고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으니까.

탁탁탁!

외부에 돌출된 비상계단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단검파 본거지 건물 바로 뒤.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발소리가 들렸다.

"제길! 어디야! 어디서 쏜 거야!"

"경계하던 새끼를 족쳐야 합니다! 그 새끼 그거 졸고 있던 거 아닙니까? 로켓은 아니고, 유탄이나 수류탄 같은데 유탄 날아오는 걸 못 본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

"등신. 수백 미터 밖에서 갑자기 날리면 이 밤에 어떻게 보냐? 그게 되면 초인이지, 븅신아."

"빌어먹을 철권파 놈들!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잡히기만 해 봐라. 아주 곱창을 만들어 주겠어!"

골목 사이에 몸을 숨기고 그들을 관찰했다.

모두 중무장한 상태.

나만큼은 아니어도 방탄복에 소총 정도는 차고 있었다. 고글 역시 마찬가지. 분명히 적외선 감지장치나 레이저 감지장치 정도는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후드를 내려 접이식 헬멧을 장착했다.

고글은 물론 방독면도 결합된 일체형 헬멧이다.

처음에는 세상이 까맣게 보였지만 곧 불이 들어오면서 천연색으로 변하고, 방독면이 내 코와 입에 달라붙으며 쌕쌕 공기를 공급했다.

"형님! 주변에 아무도 없답니다!"

"그게 말이 돼? 샅샅이 뒤져! 너무 멀리 가진 말고! 철권파 개새끼들이 큰형님을 노릴지도 모른다!"

"옙!"

타타탁!

갱단원 몇 명이 내가 숨어 있는 골목으로 뛰어든다.

괜찮다.

나는 건물 벽에 몸을 기대고 죽은 척 특성을 활성화했다.

심장이 느리게 뛰고 체온이 내려가면서 얼굴에서는 핏기가 싹 빠져나간다.

죽은 척만 쓰는 것도 아니고 은신도 장착한 상태.

고글을 쓴 갱단원들이 나를 인지하지 못하고 우르르 지나갔다.

한참이 지나서야 죽은 척을 거두고 일어섰다.

내 앞쪽 골목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

주위를 충분히 경계하면서 본거지 건물을 향해 다가갔다.

'아, CCTV.'

건물 벽에 작은 벽돌 형태 CCTV가 몇 개 설치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 앞에 나무를 심거나 넝쿨 식물을 길러 CCTV를 가렸다.

미리 그 지점에 뭐가 있을 거라고 예측하지 않는 한 발견하지 못할 지경.

CCTV는 쓰레기통처럼 생긴 비밀통로 출입구를 비추는 중이다.

털래털래 들어갔다간 바로 발각당하겠지.

조금 입맛이 썼다.

'해킹 특성을 개방할 걸 그랬나?'

에이, 해킹은 무슨 해킹이야.

해킹은 강화병과 마법사의 영역이다.

전사면 전사답게 행동하도록 하자.

소총에 소음기를 꽂았다.

소음기를 쓴다고 총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변은 온통 혼란과 공포의 도가니.

유탄 한 발에서 촉발된 폭동이, 소란이 사방으로 번지고 있었다.

이 정도면 소음기 소음 몇 발은 묻힐 것이다.

푸슈슉! 푸슉! 푸슉!

연달아 세 발 발사.

벽돌 닮은 CCTV를 모조리 깨뜨렸다.

그리고 즉시 움직인다.

쓰레기통 뚜껑을 빠르게 젖혀 몸을 비집어 넣고, 미닫이문을 열어 들어가면 시작.

"넌 뭐야?"

"치, 침입자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비상 눌러!"

미닫이문 뒤에 있는 것은 길쭉한 통로.

CCTV가 천장에 줄지어 설치되어 있고, 보안실이 복도 양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비상시 철문을 닫아걸고 총알을 쏟아부을 수 있게끔.

문제는 내가 너무 빨리 돌입했고, 아케인 서울 게임을 통해 이곳 지형이 어떻게 생겼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푸슉! 푸슉! 푸슉! 푸슉!

사격 특성을 통해 쏜 네 발의 총알.

내가 생각하기에도 깔끔한 자세였다.

미처 닫지 않은, 훤히 개방된 철문을 지나 막 일어서던 갱단원에게 딱 한 발 먹여주었다.

이제 기관단총을 쥐어 가던 갱단원도, 빨간 비상 단추에 손을 가져가던 갱단원도 사이좋게 미간에, 혹은 목에 총알을 얻어맞고 쓰러지는 공평한 신세가 되었다.

내 고글에 [사망] 두 글자가 떠올랐다.

"후우."

뭔가 좀 묘했다.

사람 넷을 죽였는데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오히려 찬물을 뒤집어쓴 듯 머리가 차가워질 뿐이다.

'나도······ 닳았구나.'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본다고 했지.

괴물을 상대하고 있으면 자신 또한 괴물이 되는 법.

나도 어느새 이 막장 세계에 물들어 버린 것 같다.

어쩌겠나.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야지. 살아남아야지.

철벅, 철벅.

스르륵 번지는 핏물을 짓밟으며 통로를 걸어갔다.

그런 내 뒤로 핏빛 발자국이 길고도 선명하게 남고 있었다.

애애애앵!

때를 맞추어 건물 전체에 울리는 경보음.

[비상! 비상!]

[습격이다! 적의 습격이다!]

[모든 형제는 무장하고 지정된 집결지에 집결하라!]

[경고! 경고!]

[단검파를 제외한 모든 인원은 즉각 무장을 해제하고 제 자리에 손을 들고 엎드려라! 명령에 불응할 시 즉각 사살하겠다!]

시끄럽네.

푸슈슉! 푸슉!

나는 총을 쏘아 CCTV와 스피커를 모조리 망가뜨렸다.

통로 끄트머리, 견고한 철문 앞에 서서는 잠시 숨을 고른다.

이 뒤의 지형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ㄱ자로 꺾인 복도, 그 앞에는 호텔 로비처럼 큰 공간이 있을 것이다. 평소에는 로비와 대기실 역할을 하고, 오늘처럼 공격받을 때는 바리케이드를 쳐서 방어선이 되는 공간.

그냥 나갔다가는 바로 벌집이 된다.

하지만 초인에게는 초인의 전투법이, 김전사에게는 김전사의 전투법이 있는 법.

소총으로 잠금장치를 쏴서 문을 연 후, 빠르게 돌입하여 꺾인 복도에 살짝 몸을 내밀었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광경이 펼쳐졌다.

겹겹이 설치된 바리케이트와 총구만 내놓고 이쪽을 조준 중인 갱단원들.

섬뜩한 살기가 경동맥을 차갑게 핥고 지나간다.

"조져버려!"

투타타타!

소총 수십 정이 일제히 불을 뿜는다.

그러나 그들보다 내 행동이 더 빨랐다.

퉁!

두 번째로 터지는 흐릿한 발사음.

유탄이 날아가는 것을 보지도 않고, 나는 급히 몸을 빼서 철문 뒤로 돌아왔다.

꽈르릉!

"으아아!"

"커헉!"

"끄흡!"

폭발음과 함께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역시 유탄이 최고라니까.

하지만 한 발로는 모자랐을 것이다. 골프백에서 수류탄 몇 발을 꺼내서 복도 너머로 던져 주었다. 몇 번의 폭음 후, 그나마 들리던 신음마저 뚝 끊겨 버렸다.

전초전은 승리.

방심해서는 안 된다. 나도 총 맞으면 죽는 것은 똑같으니까. 마력 방어막과 방호복으로 소총탄까진 막아도 대구경 저격총이나 기관총에는 장사 없다.

또, 단검파 보스와 행동 대장은 2레벨 초인이다.

그것도 전사 계열 중 암살자.

내가 방심했을 때 저격하거나 뒤를 찌르면 나도 훅 갈 수 있다.

푸슉! 푸슉!

"꺽!"

"크허억!"

살아 있던 갱단원을 확인 사살하며 지나친다.

평소에는 사업장으로 사용하는 곳이라 함정 따위는 없는 던전.

놀랍도록 순조로웠다.

내가 아는 곳에서 갱단원들이 튀어나오고 뻔한 방식으로 총격을 가했으니까.

현대전에서 상대가 어디 있는지 알면 그만큼 상대하기 쉬운 게 없지.

먼저 수류탄이든 섬광탄이든 던져놓고 돌입. 유탄도 아낌없이 썼다. 그렇게 3층까지 파죽지세로 돌파했다.

나도 몇 발은 맞았지만 방호복에 박히는 선에서 끝났고.

그때쯤, 솜털이 곤두서면서 기묘한 감각이 피부를 핥았다.

[민감] 특성 획득.

밝은 눈 특성을 민감 특성으로 교체했다.

'슬슬 때가 됐는데.'

게임에서는 적들이 배치된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은 현실.

단검파 보스와 행동대장이 단세포 생물이 아니라면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바짝 긴장해서는 계단을 올라갔다.

총도 아예 산탄총으로 바꿨다. 유탄도 다 썼고, 소음기도 이미 의미가 없어졌으니 조금이라도 화력을 올리는 게 낫겠지.

"어?"

그런데 이상하다.

4층은 실질적으로 마지막 방어선 역할을 하는 지점.

5층 비밀 공간에는 대표 사무실과 회의실 정도가 다라서 항전할 만한 곳이 없었다.

당연히 4층 VIP 도박장에 갱단원들이 진을 치고 있어야 하는데 텅 비어 있다.

보이는 거라고는 카지노 시설과 널브러진 카드와 칩, 그리고 왜 있는지 모를 바닥의 핏자국뿐.

"뭐지?"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몸을 낮추고 카지노 탁자에 은폐하며 살금살금 전진한다.

그렇게 사방을 경계하던 무렵.

부우웅!

소형 드론이 환기구를 통해 내려오더니 작은 막대 같은 것을 툭 떨어뜨렸다.

섬광탄.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제, 젠장!"

뭘 어쩌기에는 이미 늦었다.

파아앗!

새하얀 빛이 망막을 태워버릴 듯이 질주하고, 쩌어엉 하는 소음이 도끼처럼 고막을 후려갈겼다.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는 나.

촤르륵.

고글이 섬광탄에 반응하여 조리개를 꽉 닫아줘서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몇 초 정도는 시각을 잃고도 남았지.

지이이이잉.

그러나 이명만큼은 남아 있다. 평형감각에도 문제가 생겼는지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나는 산탄총을 움켜쥐고 속으로 고함을 질렀다.

'정신 차려! 김준수, 아니, 김전사! 정신 차리라고!'

푸시시시.

심지어 드론 몇 기가 더 날아들어 연막탄을 뿌렸다.

희뿌연 연기가 도박장에 피어오르고, 내 고글 안쪽에 빨간 불과 함께 경고 메시지가 떴다.

[방독면 작동]

독가스다!

미친 새끼들.

자기네 본거지에 독가스를 풀어?

하지만 이것으로 끝일 리 없다.

내가 보는 족족 CCTV를 부수긴 했지만 내 사진 정도는 건졌겠지.

고글과 방독면이 일체화된 헬멧을 쓰고 있는 사진을.

다음 수는 뭐냐?

포위 공격?

저격? 암습?

나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었다.

단검파 본거지 보스룸에 입장하면 시작되는 연계 공격.

그것이겠지.

바로 특성을 전환했다.

[마력 방어막][방어][민감]

[마력심][인내][맷집]

그대로 창밖을 노려본다.

어느 부위를 노릴지, 어떤 궤적으로 날아들지도 뻔히 안다.

팔 방패에 마력 방어막을 집중시키고 방어를 사용한다면, 행동대장이 사용하는 그 저격총으로는 관통하기 어렵다.

최악의 경우라도 팔 하나 잃고 끝.

이 세계에선 팔을 재생하는 것도 의수를 다는 것도 어렵지 않으니 무조건 개이득이다.

'언제지?'

고글 시야가 축소된다.

행동대장이 잠복하고 있을 건물 옥상이 화악 다가온다.

옥상 난간 위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내밀어지는 총구······

어라?

총구가 아니다.

난간 위로 나온 것은 예리하게 번쩍이는 저격총과는 전혀 다른 물체였다.

진녹색 탄두.

저격총과 비교하자면 훨씬 두툼하고 묵직한 그것.

원래 세계의 RPG-7, 알라의 요술봉을 꼭 빼닮은 로켓 발사기가 이쪽을, 나를 겨누고 있었다.

"미, 미친 새끼가!"

놀라고 있을 틈조차 없었다.

이미 점화된 불꽃.

그로부터 가속되는 로켓.

게임에서처럼 느리디느린 속도가 아니다.

초속 수백 미터를 간단히 넘나드는 로켓이, 번뜩이는 섬광처럼 들이닥친다!

꽈르릉!

그리고 폭발.

세상이 새하얀 빛에 와락 삼켜졌다.

[1권 끝]

단검파 -1-

단검파

건물 전체가 흔들린다.

가구들이 쪼개질 듯이 진동하고 천장에선 먼지가 폴폴 날렸다.

불상처럼 시립하고 있던 남자가 공손히 말했다.

"큰형님. 여긴 너무 위험합니다. 옆 동에 계시는 게 어떠십니까?"

"흥. 늑대 새끼 한 마리 왕왕 짖는다고 꼬리마는 호랑이가 있더냐? 닥치고 불이나 땡겨라."

거대한 중역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시가 끝을 베어 문다.

키가 작고, 유난히 눈이 째진 남자.

시립하고 있던 남자가 시가에 불을 붙이자 청록색 마력광이 점멸했다.

앉아 있는 남자, 단검파 보스가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청회색 연기가 허공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후, 역시 전동이 자식은 화끈하다니까. 저격하겠답시고 로켓포를 쏴대는 새끼가 어디 있어?"

"너무 위험했습니다. 보스께서 바로 위층에 계신데 로켓포라니요."

"마. 전동이 놈이 나한테 총질이라도 할 것 같아? 그리고 우리도 폭탄을 그렇게 얻어맞았는데 답례는 해줘야 하지 않겠어?"

"그야 그렇습니다. 개 같은 김철권 새끼, 도대체 어디서 저런 미친놈을 데려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돈 팍팍 쥐여줬겠지. 문제는 그게 아냐."

단검파 보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정말이지 무서운 놈이었다.

불의의 습격을 당해서 대처가 호구 같았다는 점까진 인정한다.

그런데 저건 뭐란 말이냐?

심혈을 기울여 설계한 방어 지점, 은신 지점에다 무조건 유탄과 수류탄, 섬광탄부터 까 넣어?

내부에서 정보가 샌 게 분명하다.

미리 알지 않으면 4층까지 쾌속 전진을 할 수가 없다.

손님들이야 영업용 내부 공간만 즐기고 돌아가지만, 단검파의 방어 계획은 비밀 공간과 비밀 통로, 비밀방까지 총망라하고 있으니까.

"어쨌든 놈은 죽었을 겁니다."

호위가 낮은 어조로 말했다.

"전동 형님께서 대인 유탄을 쓰겠다고 하셨으니, 밀폐된 곳에서는 살아 있을 수가 없지요."

"놈이 3레벨 초인이라면? 방어막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설마 가능하겠습니까.

호위가 그 말을 꿀꺽 삼켜 버렸다.

철권파가 성장하면서 보여준 수완이라면, 놈들이 요새 벌어들이는 돈이라면 3레벨 초인도 잠깐은 고용하지 싶어서.

사실 그게 더 합리적인 추론 아닌가?

아무리 내부 정보를 알고 있어도 혼자 다 죽이고 4층까지 올라왔는데.

"애들 내려보내서 확인사살 하겠습니다. 아니,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그래. 이상하면 바로 지원 요청하고. 내가 직접 가마."

"큰형님께서요? 저한테 맡겨 주시지요.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3레벨일지도 모르는데? 그러다 너도 죽고 애들도 다 죽는다. 너까지 죽으면 우린 끝이야."

단검파 보스가 신경질적으로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대훈이랑 지성이네는 어떻다든?"

"철권파 놈들이 떼거리로 몰려온 모양입니다. 대치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빌어먹을. 아주 칼을 갈았고만, 칼을 갈았어."

본거지 안에는 초인 총잡이 하나.

본거지 밖에는 철권파.

어느 하나 만만한 녀석이 없었다.

목에 칼이 들어온 느낌.

정말이지 오랜만에 만끽하는 이 서늘한 감각.

자칫 잘못하면 백척간두에서 떨어져 저 까마득한 구렁텅이로 추락할 거라는 예감이 정수리를 핥아댔다.

뭐, 언제는 안 그랬나.

단검파 보스는 허리에 찬 단검 두 개를 한 번씩 쓰다듬었다.

마법 단검.

하나는 [저주]가 하나는 [중독]이 걸려 있었다.

이 두 자루야말로 단검파 보스가 믿는 최후의 보루이자 유일한 친구였다.

이번에도 이들로 이 난관을 돌파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초인이고 철권파고 다 썰어버린다.'

단검파 보스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하지만 일이 쉽게 돌아가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탕탕탕!

몇 분 후, 총소리와 함께 아래층이 시끄러워졌다.

[끄아악!]

[조, 조심해!]

[노, 놈이 살아 있다!]

[지원 요청! 지원 요청!]

[으아아! 살려줘!]

[형님! 도와주십쇼! 저희 다 죽습니다!]

눈가가 꿈틀거린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이 새겨진다.

살아 있다고?

로켓탄을 박아넣었는데?

"빌어먹을!"

단검파 보스가 벌떡 일어섰다.

중역 의자 옆 옷걸이에 걸쳐놓은 까만 코트를 몸에다 걸친다.

코트 표면에서 마법진이 일렁이고, 그 자리에서 스르륵 사라지는 단검파 보스.

단검파의 진실한 전력이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

"끄흐윽!"

운이 좋았다.

고글을 통해 로켓을 본 즉시 움직이지 않았다면 전신이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이다.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원형 카지노 탁자 중심으로 들어간 것이 신의 한 수.

그 안에 웅크려서 [마력 방패]를 순간적으로 장착, 활성화했다.

직후 로켓이 날아들었지.

수십 미터 밖, 건물 옥상에서 발사한 탓일까?

로켓은 창문을 깨뜨리고 바로 그 앞 바닥에 박혔다.

덕택에 대인 유탄의 살상력이 약해졌고, 무수히 날아든 파편은 내 정면의 카지노 탁자와 마력 방패에 막히고 말았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다.

카지노 탁자도 마력 방패도 단숨에 돌파당했고, 파편 십여 개가 내게 쏟아졌다.

그 결과 내 왼팔이 아주 넝마가 되었지.

팔을 내밀고 [방어] 특성을 사용했거든.

"으으으!"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왼팔을 타고 오른다.

나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속으로 안도했다.

아프다.

즉, 신경이 살아 있다.

팔이 잘리지도 않았다.

이쯤이야 상처 회복과 재생을 사용하면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낫긴 낫는다.

아, 그래도 수술은 받아야겠구나.

파편 몇 개는 박혀 있을 테니까.

'이럴 때가 아니야.'

놈들이 곧 올 것이다.

아픔을 참으며 현재 상태를 점검했다.

몸 상태가 아주 말이 아니다.

마력 회로에 꽉꽉 차 있던 마력은 가뭄 맞은 논바닥처럼 바싹 말라 버렸다.

써먹지도 못할 잉여 마력만 넘쳐날 뿐이다.

귓가에선 이명이 매미울음처럼 울린다.

그런가 하면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서 일어서기도 힘들었다.

왼팔은 물론 전신에서 격통이 올라와 정신이 혼미할 지경.

'일어나야 해.'

손을 떨며 산탄총을 들었다.

다가올 전투를 대비하여 특성을 교체했다.

[사격][마력심][민감]

[상처 회복][마력 회복][활기]

조금이라도 회복해야 한다.

출혈 과다도, 마력 고갈도 신체에는 치명적이니까.

의식적으로 집중해서 5층으로 향하는 복도를 살필 때였다.

간질간질한 느낌과 함께 시야가 좁아지고, 세상이 느리게 돌아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집중] 특성 획득.

총격전에선 크게 쓸모없는 마력심을 제거하고 집중을 넣었다.

그러자 민감 특성과 반응하여 주위 자극을 내 뇌에 쑤셔넣기 시작한다.

창밖에서 부는 바람 소리 하나.

끊어진 전선에서 나는 전기 튀는 소리마저도.

신기한 감각이었다.

흐릿하긴 하지만 주위 공간이 3D 지도로 변환되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한 느낌.

그래서였을까?

퉁퉁, 하고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소리가 수채화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막내야. 가서 확인해라."

"형님, 놈이 살아 있기라도 하면······"

"손에 든 총은 장식이냐? 고개 들면 걍 쏴버려. 자동으로 놓고 갈겨버리면 초인도 끝이야, 끝!"

스윽, 스윽, 스윽.

아주 조심스럽게, 발소리 안 나도록 조심스럽게 걷는 갱단원.

집중과 민감 조합 앞에선 다 소용없다.

나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지금!'

번쩍 몸을 일으킨다.

놀랍도록 민첩하게, 칼같이 정확한 자세로 사격 자세를 취했다.

"이힉!"

갱단원이 소스라치며 놀랐다.

손을 떨면서 방아쇠에 손가락을 넣지만 내가 더 빨랐다.

투앙! 투앙! 투앙! 투앙! 투앙!

일반 소총보다 확연히 묵직하고 무거운 총성.

상당한 반탄력이 내 어깨를 친다.

자동으로 놓고 쐈으면 근력 특성을 쓰지 않는 한 총구가 하늘로 솟구치고도 남았을 정도.

그 화력 또한 무시무시했다.

제대로 얻어맞은 갱단원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렸다.

뒤에서 경계하며 내려오던 갱단원들 역시 마찬가지.

재수 좋은 놈은 팔만 날아가고, 재수 없는 놈은 머리통이 터지고, 그 옆에 묻어가던 놈은 배에 구멍이 뚫려 길게 절규했다.

"끄아악!"

"조, 조심해!"

"노, 놈이 살아 있다!"

"지원 요청! 지원 요청!"

"으아아! 살려줘!"

"형님! 도와주십쇼! 저희 다 죽습니다!"

그냥 죽어주지만은 않는다.

타타탕!

엄폐물을 찾아 움직이며 반격을 가한다.

소총과 산탄총이 불을 뿜었다. 마력 방어막을 못 쓰는 상태에서 저걸 맞으면 나도 죽는다. 별수 없이 구멍 송송 난 카지노 탁자에 몸을 웅크렸다.

딸깍.

거의 동시에 울리는 쇳소리.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수류탄에서 안전핀을 제거하는 소리였으니까.

'어디냐?'

급히 머리를 빼어 정면을 살핀다.

고급 양복을 입은 놈이 수류탄을 들고 있는 게 보인다.

야구공 던지듯 자기 머리 뒤로 팔을 힘껏 당기는 장면이 느릿느릿하게 내 눈에 박혔다.

척 보기에도 숙련된 움직임.

이를 악물고 산탄총을 올렸다.

집중 특성이 내 시간을 한없이 느리게 만들고 있었다.

가늠자를 맞춰볼 시간 따윈 없었다.

감각적으로 총구를 겨냥한 다음 방아쇠를 당겼다.

투우웅!

유난히 길게 울리는 총성.

한 발로 그치지 않았다.

투웅! 투웅! 투웅!

20발들이 탄창을 모조리 비워냈다.

솔직히 막 쏜 총알이었다. 내가 노렸던 수류탄은 맞추지도 못했다. 대신 수류탄을 던지려 했던 양복쟁이 갱단원이 맞아 허수아비처럼 춤을 추었다.

"끄어억!"

가슴이, 어깨가, 팔이, 손이, 얼굴이 차례차례 부서진다.

구멍이 뚫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뚝뚝 떨어져 나간다.

그리하여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마는 쇳덩이 하나.

안전핀이 제거된 수류탄.

"아, 안 돼!"

갱단원들이 비명을 질렀다.

나도 내 실수를 깨달았다.

급히 카지노 탁자에 몸을 숨기고 웅크리는 것과 동시에 충격파가 번졌다.

꽝!

섬광도 화염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바닥과 건물을 함께 진동시키는 충격파.

그리고 피어오르는 검은 먼지.

거기에 한 발짝 앞서서 도박장을 쓸어버린 쇠 파편이 있을 뿐.

"아아악!"

"끄악!"

"캬하악!"

비명이 충격파를 타고 날아왔다.

목덜미가 섬뜩해지는 비명에, 나도 모르게 내 온몸을 더듬게 된다.

'안 다쳤나?'

천운이었다.

튼튼한 카지노 탁자가 일차적으로 막아주고 방호복이 파편을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방호복에, 헬멧에, 특히 등과 뒤통수에 뾰족한 파편 몇 개가 박혀 있었다.

거리가 좀 있어서 이 정도로 끝났지, 수류탄이 내 쪽으로 던져졌으면 진짜로 죽었다.

"이것도 먹어라!"

니네만 수류탄 쓰냐?

나도 쓴다!

수류탄을 하나 까서 던졌다.

던질 때 유난히 긁히는 느낌이 있었다.

내 마음대로 맞출 수 있겠다는 느낌.

심지어 야구공 던지듯 변화구도 가능하겠다는 감각.

[투척] 특성.

던진 수류탄이 빨려들 듯 갱단원들 중심에 낙하했다.

꽝!

폭발 직후 산탄총을 꼬나쥐고 돌격.

거의 대부분 시체가 되어 있었다.

딱 한 명만 빼고.

"으으으······"

이미 전신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갱단원.

마지막 생존자였다.

살아날 가능성도 없었다.

나는 친절하게도 갱단원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머리에 총알을 박아서.

"후우."

끝났나?

주변에는 피 칠갑을 한 시체밖에 없다.

바람 소리 전깃불 소리 말고는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비록 내 심장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흘리는 신음을 못 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그래도 확실하게 해야지.

투웅! 투웅! 투웅!

온전해 보이는 시체 머리마다 총알을 박아주었다.

확인사살을 끝낸 뒤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단검파 보스는 암살자니까.

심지어 암살자에게 최적화된 마법 무구를 세 점이나 가진, 저레벨 대에서는 상대하기 힘든 강자였다.

'저격도 조심해야 해.'

집중과 민감 특성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다.

특성도 새로이 교체한다.

[사격][집중][민감]

[방어][인내][맷집]

어떻게든 한 방을 버텨야 한다.

지금 내 특성으로 단검파 보스의 은신 특성과 마법 코트의 그림자 마법을 파훼하기는 어렵다. 아마 단검파 보스가 내 등에 먼저 단검을 꽂고 시작할 것이다.

'어디냐?'

5층 보스룸, 정확히 말하면 대표 사무실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 어려울 게 없다.

단검파 보스가 숨어 있을 곳은 뻔하니까.

하지만 이곳은 게임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이자 세계.

로켓포 저격이 실패하고 내려보낸 부하들도 전멸했다면, 단검파 보스라고 자기 자리만 덥히고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쌔애액!

환풍구를 통해 드론들이 줄줄이 내려온다.

작은 몸체에 소형 기관총을 양옆으로 두 정 장착한 드론.

"하!"

하지만 나는 코웃음만 한 번 쳤다.

저렇게 작아서야 제대로 된 화력이 안 나온다.

말이 좋아 기관총이지 끽해야 권총탄 위력이나 될까?

더구나 환풍구에서 저렇게 줄지어 날아오면 맞추기도 쉽다.

의도가 뻔히 보였다.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 반격했다.

카지노 탁자에서 나온 다음 두툼한 기둥 뒤로 질주하고, 거기 숨어서 방아쇠를 당겼다.

퉁퉁퉁! 퍼엉! 펑펑!

한 기 한 기 격추되는 드론들.

드르륵!

총알을 긁어대지만 날 조준하기 전에 쏴 떨어뜨리면 그만.

성능은 아쉬울지언정 비싼 드론들이 폭죽처럼 터지고 있었다.

거기에 내가 정신이 팔린 사이.

일어난다.

내 그림자가.

입술처럼 벌어진 코트 그림자 사이, 잿빛 송곳니가 빛조차 가리고서 삐져나온다.

기척 하나 없이 내 등으로 날아드는 단검 한 자루.

'흥.'

나는 소리 없이 비웃음을 날렸다.

다 예측한 대로였으니까.

단검파 -2-

퍼억!

둔탁한 파열음이 내 등을 찔렀다.

묵직한 충격이 등 전체로 퍼지지만 거기까지였다.

척추를 파고드는 끔찍한 통증도, 뜨겁다 못해 불타는 듯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 뭣······"

놀랐는지 다급히 들이쉬는 숨소리.

기회였다.

나는 산탄총 개머리판을 붙잡고 크게 휘둘렀다.

야구 방망이 휘두르는 듯한 동작.

부우웅, 뻐억!

제대로 맞았다.

검은 코트를 입은, 후드까지 눌러써 유령처럼 보이는 그림자가 산탄총에 얻어맞고는 나뒹굴었다.

역시 보통은 아니다.

그 짧은 순간에 몸을 뒤로 날려서 충격을 최소화하다니.

하지만 내가 쥔 건 방망이가 아니라 총이라고.

다시 총을 들어 조준하려고 할 때였다.

단검파 보스가 눈을 번뜩이고는 손을 떨쳤다.

쌔액!

허공에 번뜩이는 검광.

나는 엉겁결에 산탄총을 내밀어 막았다.

푸욱, 소리와 함께 단검이 총열에 부딪혀 튕겨나갔다.

문제는 얼마나 힘이 강했는지 총열에 반쯤 푹 패인 상처가 났다는 것.

이게 말이 돼?

특성도 뭣도 아니다.

단순히 마력을 담아 던진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강철 총열을 망가뜨린다고?

"미친?"

"크크크. 밑천이 떨어지셨나?"

단검파 보스가 다른 단검을 뽑아든다.

튕겨 나간 단검과 똑같이 생긴, 표면에 보라색 마법진 대신 녹색 마법진이 새겨진 단검.

중독 마법이 부여된 마법 단검이다.

공격력은 그럭저럭이지만 독 디버프만큼은 강력하다.

쌍둥이 무기인 저주 단검과 사용하면 디버프만으로도 어지간한 초인은 황천길 보낼 정도.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골프백에 고이 모셔놓은 소총을 꺼낼 시간은 없다.

대신해서 허리에 꽂은 검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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