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화 [Episode 16] 폭풍전야 (4)
쿠웅!
새까맣게 그을린 육지 상어의 사체가 땅에 떨어지며 충격음을 발산했다.
김민호는 사체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며 피부 경화를 풀었다.
"후아."
"수고하셨습니다!"
뒤쪽에서 강성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팀의 막내인 강성철과 하서준은 곳곳에 떨어진 하늘 청새치들의 사체를 수거하고 있었다.
평범한 시민권을 가진 경우 몬스터를 사냥하면 그 사체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지만, 강성철과 하서준처럼 사냥꾼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사냥한 사체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김민호 파티의 주력 사업은 바로 이것을 팔아치우는 것이었다.
청새치는 살집이 많고 부드러워 인기가 많은 식품 중 하나였다.
매점에서도 구입할 수 있는 품목이었지만, 그곳에서 파는 청새치는 너무 비쌌다.
매점보다 몇 배는 더 싸게 팔기 때문에 김민호 파티가 가져오는 청새치들은 수요가 나름 있는 편이었다.
김민호가 아직 살아서 꿈틀거리는 청새치 한 마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성철아 저건 죽이지 말고 남겨 놔라."
"넵!"
트럭에 청새치를 싣는 작업을 모두 끝낸 다음 김민호 파티는 남아 있는 청새치 시체 앞으로 모여들었다.
당연하다는 듯 앞으로 나선 강성철이 품속에서 사시미 칼을 꺼내들어 하늘 청새치의 숨통을 완전히 끊었다. 그 다음부터 능숙하게 청새치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금세 작업을 끝낸 강성철이 회를 뜨기 시작했다.
옆에서는 하서준이 일회용그릇과 나무젓가락을 가져와 파티원들에게 분배해주었다.
"초장은?"
"여기 있습니다!"
일회용 그릇에 큼직큼직하게 썰린 청새치 회가 셋팅되었고, 하나 둘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으음!"
문해리가 감탄사와 함께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며 강성철을 칭찬했다.
"우리 성철이 갈수록 회 뜨는 솜씨가 늘어나는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맛있군."
큼직한 회를 초장에 찍어 한입에 넣은 김민호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어떻게, 쩝. 이건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를 않냐."
"그러게요."
그때 문해리가 초장이 묻어 붉게 물든 젓가락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도 사업이나 할까? 요즘 이것저것 음식점 같은 곳이 많이 생기던데, 이거 팔면 꽤 잘 될 것 같은데."
김민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누님. 이게 바로 잡은 걸 먹어서 이렇게 맛있는 거지, 가게에서 팔면 이런 맛 절대 못 느껴요. 누나도 저번에 먹어봐서 알잖아요."
"그 우리 거래처 사장님이 장사하는 곳?"
"네. 전문가가 팔아도 신선도가 떨어지면 그렇게 되는 거라구요."
"으음. 내 얼음 화살로 얼려버리면 어느 정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면 냉동탑차 같은 거 구해서 보관하는 건 어때?"
"에이, 누님. 한 번 얼린 거는 훨씬 급이 떨어지는 거 아시잖아요. 우리가 왜 여기서 이러고 회 떠서 먹고 있는데? 이게 훨씬 맛있어서잖아요."
문해리가 회를 한 점 더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음~ 맛있어"
그때 강성철이 훈 술 더 떠 말했다.
"그럼 이건 어때요? 관광 팀을 받아서 같이 여기까지 나오는 거예요. 사냥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서비스로 회도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거죠. 재밌지 않을까요? 요새 심심해하는 사람들도 많고."
얼핏 그럴싸하게 들리는 그의 의견을 김민호가 정면에서 반박하고 나섰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동안 아무런 사고도 없어서 감을 잃었나 본데, 여기는 진짜 위험한 곳이야. 정신 차려."
"앗, 넵. 죄송합니다."
다시 열심히 회를 써는 강성철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던 김민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그래서 얼마씩 받을 건데?"
"네?"
"방금 말한 그거. 한 사람 당 얼마씩 받을 생각이었냐고."
"음-. 한 사람당 5만원...?"
강성철이 자신 없게 말하자 김민호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야. 겨우 그거 받고 먹고 살겠어? 적어도 한 사람당 10만 원 정도는 받아야지."
"아하하. 그러네요."
실없는 소리를 이어나가던 중 남지호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들 서둘러, 고기 품질이 떨어지기 전에 복귀해야 한다."
"앗, 넵."
그의 말에 모두가 먹는 속도를 높였다.
김민호는 허겁지겁 배를 채우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차라리 얼린 걸 파는 게 나을까?'
요즘은 몬스터와 마주치기 위해서는 차를 타고도 꽤 먼 곳까지 달려와야 했다.
한 달 쯤 전과는 달리 영역 내에서 차량을 운전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며 교통체증도 생긴 상황이었다.
때문에 한 번의 사냥이 끝나면 곧바로 청새치들을 챙겨 돌아가야만 했다.
사냥 시간이 길어지면 생선의 신선도가 떨어질 테니까.
하지만 문해리의 아이디어처럼 청새치들을 얼려버린다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오래 사냥할 수 있다.'
그만큼 한 번에 많은 양의 청새치를 운반하는 게 가능해질 것이다.
'싸게 팔아도 이쪽이 훨씬 더 남는다!'
박리다매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게다가 지금은 그나마 겨울이라서 신선도가 유지되는 거지, 여름이면 고기 품질이 급격히 안 좋아지게 될 거야'
결국 언젠가는 냉동고기를 팔게 될 것이란 소리였다.
"진짜 냉동탑차 같은 걸 한 번 찾아봐야 하나?"
그때였다.
['거래소'가 개방됩니다.]
"응?"
눈앞에 희한한 알림이 나타났다.
"거래소?"
그가 의문을 표하는 순간.
"엇!?"
[거래소]
-[거래소 검색]
-[물품 등록]
눈앞에 반투명한 홀로그램창이 나타났다.
"이건..?"
무언가를 직감한 김민호가 얼른 트럭으로 달려갔다.
그 직후 청새치 사체 한 마리를 들고 말했다.
"물품 등록"
그러자.
[가격을 설정해주십시오.]
평상시에 청새치를 파는 가격으로 설정하고 나니 새로운 알림이 나타났다.
[해당 물품을 등록하기 위해서는 수수료 증거금 5%가 필요합니다.]
[등록하시겠습니까?]
김민호의 지갑에는 나름대로 돈이 빵빵하게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등록하겠습니다."
그 순간.
지이이잉—
청새치의 사체가 사라지며 거래소에 등록되는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거래소 상품 제일 상단에 청새치 사체 한 마리가 등록되었다.
이후 여러 가지 상품들이 우후죽순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판매가 완료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자신의 지갑에 입금되는 액수를 보며 환호했다.
'돈이 전부 들어왔어!'
처음에 물품을 등록할 때 냈었던 증거금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것을 치더라도 수수료가 5%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거래의 편의성을 생각한다면 5%의 수수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김민호는 자신의 입안에 남아 있는 싱싱한 회의 맛을 떠올렸다.
갓 잡은 청새치를 회 뜬 다음 거래소에 올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건 무조건 된다'
김민호의 광대가 승천할 듯 올라갔다.
"형. 왜 그러세요?"
"성철아."
"네?"
"우리 대박나게 생겼다."
나는 시민들 간의 거래를 달가워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거래하면서 생겨나는 10%의 수수료는 절대자의 지갑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 완전히 공중 분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거래가 활발하면 활발해질수록 '세금 징수' 스킬의 효율이 떨어진다는 소리였으니 반가울 수가 없었다.
때문에 현금 거래가 활성화 되었을 때 속으로 조금 반가웠다.
수수료로 돈을 날리는 경우가 그만큼 줄어들 테니까.
그런데.
'앞으로 현금 거래는 이제 완전히 죽어버리겠군!'
거래소의 기능을 확인한 순간 현금의 가치가 확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너무 편해'
물건을 사고 파는 과정이 비정상적으로 줄어드는 구조였다.
지금 현금 거래는 대부분이 직거래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거래소는 달랐다.
파는 사람은 물건을 거래소에 등록하기만 하면 되고, 사는 사람은 거래소에서 물건을 사겠다고 결심만 하면 된다. 시간과 공간을 혁신적으로 줄여버리는 것이다.
이 기능을 이용하고 지불하는 수수료 5%는 정말 별 것 아니게 느껴질 것이다.
'잘 됐군'
나는 미소 지었다.
시민들 개인 간의 거래와 거래소를 이용한 거래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거래소에서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으로 521,026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거래소에서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으로 1,024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거래소에서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으로 30,113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거래소에서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으로 577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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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거래소에 지불하는 5%의 수수료가 내 지갑으로 들어온다는 점.
그게 달랐다.
그것도 내가 쓰고 있는 절대자의 왕관 효과로 인해 2배로 증폭된 돈이 들어오고 있었다.
내 입장에서 거래소의 존재를 환영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게다가 이거, 생각보다 쓰임새가 많을 것 같은데?"
예를 들면 거래소에 무기를 등록시켜 두었다가 필요할 때 등록을 취소한다면 무기를 들고 다니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5%의 수수료만 내고 일종의 인벤토리처럼 사용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은 굳이 그럴 필요도 없지!'
거래소에 등록되어 있는 물품이 다양하다면 그냥 필요한 순간에 물건을 구입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여러 가지로 쓸모가 많겠어!'
벌써부터 거래가 활발해지려는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거래소에서 입금되는 금액을 보니 입고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희소식은 이것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시민 정보창'
바로 새로운 각성자가 합류했다는 것.
『이름 : 유한길 (Lv. 39)
신뢰도 : 21
각성 능력 : 천리안
경험치 분배율 : 0% (+200%) 정산금 분배율 : 0% (+200%)
★퀘스트 부여 퇴출
천리안 스킬의 등급이 A등급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레벨이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
'A등급 능력을 각성해서 30레벨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저기까지 올리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짐작 가는 것은 있었다.
'모두 총기로 무장하고 있군.'
총을 든 유한길이 적극적으로 몬스터 사냥을 해왔다면, 39레벨의 수준까지 오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일단 총부터 모두 압수해야겠네!'
창고 능력을 통해 그들 집단이 가지고 있는 총과 총알을 모조리 압수했다.
손에 들고 있던 총들이 모두 실시간으로 사라지자 사람들이 극도로 흥분했다.
"위, 위험해!"
"역시 되돌아가자!"
"미친 총이 다 사라졌어!"
유한길이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들 진정하세요!"
그러나 그동안 몬스터들과의 싸움에서 목숨 줄과도 다름없었던 총기가 사라진 사람들은 쉽사리 진정하지 못했다.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네 말만 듣고 여기까지 왔는데 제일 중요한 무기가 사라졌다고! 어떻게 책임질 거야?"
"총에 대한 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직접 보시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보아하니 유한길이라는 각성자가 저 집단의 대표가 아닌 듯 했다.
상황을 보면 계속 유한길을 향해 따지고 드는 아저씨가 저들 집단의 대표인 것 같았다.
대표로 보이는 아저씨가 두 손으로 머리를 싸잡으며 말했다.
"하아. 한길아. 이건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야. 총이 없는 이상 여기서 움직이는 것조차 위험하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곳에는 몬스터가 없어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 시국에?"
"제 능력이 뭔지 아시잖습니까."
"하아..."
나는 티격태격 하는 그들에게 이곳을 찾아오라는 퀘스트를 부여했다.
'아무리 총을 들고 있다고 해도 몬스터를 뚫고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다.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어!'
그때였다.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는 개체가 집구석 근처에 접근하였습니다.]
[시민권을 제의하시겠습니까?]
예전에야 시도 때도 없이 새로운 시민들이 찾아왔지만, 요즘은 아니었다.
이미 찾아올 사람들은 다 찾아왔고, 나머지는 죽거나 자기 알아서 살 길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연속으로 사람이 찾아온 경우는 드물었다.
'한 명인가?'
험악하게 생긴 근육질의 남자로 보였다.
별 생각 없이 그 놈의 정보를 확인한 순간.
'이 놈...'
상급 흡혈귀가 출현했다.
078화 [Episode 17] 전초전 (1)
'50레벨....'
그때 봤던 놈보다 1 레벨이 더 높았다.
하지만 레벨이 올라갈수록 레벨 하나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생각한다면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차이가 아니었다.
'시민권 제의해'
곧바로 놈에게 시민권을 제의했다.
'받아라!'
5만 명이 넘어가는 시민들을 모두 통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문제가 있는 시민 한 명을 통제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퀘스트 부여를 통해 행동을 제약시키는 것도 가능했으며, 페널티로 죽음을 부여할 수도 있었으니까.
사실상 놈이 시민권을 받아들이는 순간 게임 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경험치와 정산금이 아깝기는 하지만..'
이것은 추측에 불과하지만, 시민권을 부여한 놈을 사냥하면 그 어떤 보상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제갈성규가 시민들을 죽였을 때, 시체가 그대로 남았다.'
그때 당시에는 분명 제갈성규도 시민권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인 시민들의 시체가 사라지지 않았다.
당연히 경험치도, 정산금도 없었다.
'내가 그곳을 찾아간 뒤 죽어나갔던 최하급 흡혈귀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향해 악의를 드러냈던 최하급 흡혈귀들은 머리가 폭발했지만, 시체가 그대로 남았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 정산되지 않은 것이다.
그때의 경우를 생각하면 저 놈도 마찬가지 일 것이 분명했다.
'시민권을 부여한 다음 죽이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급 흡혈귀는 너무 위험하다. 될 수 있으면 지금 여기서 처리하는 게 가장 베스트야'
경험치나 돈을 생각하면 손해긴 했지만, 영역 밖을 돌아다니는 사냥 팀의 안전을 생각하면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게다가....'
놈이 시민권을 받게 되면 나는 놈에게서 정보를 빼낼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하동건 파티와 협동하여 해치운 상급 흡혈귀가 언급했던 '그분'이라는 단어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분이라는 존재가 상급 흡혈귀를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과연 놈이 찾아왔을 때, 하동건 파티만으로 놈을 사냥하는 게 가능할까?
만약 놈이 부리는 상급 흡혈귀가 한, 두 마리가 아니라면?
'힘들다'
하동건 파티는 충분히 강력하지만, 상급 흡혈귀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때 상대했던 수준의 흡혈귀가 세 마리만 되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거기에 더해 그보다 더 강력한 존재가 있다면?
내가 아무리 보조한다고 해도 전멸하는 것은 하동건 파티가 될 것이다.
"다른 사냥팀까지 모두 모아서 상대한다면 가능할까?"
솔직히 회의적이다.
다른 사냥팀들도 제법 성장하긴 했지만, 상급 흡혈귀와 전투를 벌일 수준은 아니었다.
'가신들의 레벨을 모조리 올려버린다면 몰라도...'
나는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지워냈다.
어차피 지금 생각하는 방법들은 의미가 없었다.
상대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으니까.
지피지기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내야 해'
놈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놈이 가지고 있는 병력은 어느 정도 규모인지.
상급 흡혈귀와 같은 존재가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지 등.
'...그런데 이놈은 왜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상급 흡혈귀 놈은 험상궂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투명한 벽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한동안 시간을 끌던 놈이 내린 결론은.
[대상이 시민권 제의를 거부했습니다.]
'....어째서?'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놈은 한동안 투명 방벽을 두드리며 방벽의 크기를 가늠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더니 갑자기 자세를 바로 잡았다.
'뭐 하는 거지?'
울컥
그의 오른쪽 팔이 부풀어 오르며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 직후.
콰아아아앙!
엄청난 속도로 내질러진 주먹이 투명 방멱을 두드리며 거대한 폭발음을 만들어냈다.
투명 방벽 전체로 파문이 퍼져나가며 충격력이 흡수되었다.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당연하게도, 놈의 주먹이 방벽을 뚫어내는 일은 없었다.
방벽은 자그마한 금도 생기지 않은 채로 멀쩡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박살 난 것은 오히려 상급 흡혈귀의 주먹 쪽이었다.
츠즈즈즉
실시간으로 회복되어 가는 놈의 손을 바라보며 나는 얼굴을 굳혔다.
'위험한 놈이다'
비록 방벽은 뚫지 못했지만, 방금 놈이 보여주었던 기세와 주먹의 위력은 결코 만만하게 볼만한 것이 아니었다.
'싸이클롭스의 주먹보다도 오히려 강력해 보였어!'
방벽에 생겨난 힘의 파장이나 무식한 폭발음만 보아도 싸이클롭스의 마구잡이식 주먹질 보다는 강력해 보였다.
'스킬인가?'
각성 능력이 있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 하동건 파티만 보아도 각성 능력 덕분에 레벨보다 훨씬 강력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저번에 사냥했던 상급 흡혈귀 또한 피를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곤 했었다.
저 힘도 분명 그런 종류인 거겠지.
그때 놈이 등을 돌렸다.
천천히 방벽에서 멀어지는 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대로 그냥 보내 줄 순 없지!'
곧바로 소통의 반지를 사용했다.
[다빈씨. 지금 당장 수영구 쪽에서 사냥중인 사냥 팀들 모두 복귀하라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제일 먼저 흡혈귀 놈과 마주칠 가능성이 있는 사냥 팀들부터 모조리 불러들였다.
그 다음.
[예진아. 우리 집으로 올라와.]
서예진을 부르고,
[여러분.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하동건 파티까지 호출한 뒤 잠시 고민했다.
나에겐 비장의 카드가 하나 있었으니까.
"불러야 하나?"
상급 흡혈귀, 고인석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거대한 힘은 도대체..'
거대한 투명 방벽.
주먹을 내지른 뒤 방벽 전체로 퍼져나가는 파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담았다.
'미쳤어'
그것의 크기가 너무나도 컸다.
도무지 그 끝이 가늠되지 않을 정도였다.
거의 도시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 방벽이었다.
그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가진 주제에 고인석이 혼신의 힘을 담은 주먹을 맞고도 멀쩡했다.
"그런 규모의 방벽이 상시 유지되도록 만드는 존재가 있다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을 보는 순간 정영훈의 죽음이 단박에 이해가 갔다.
'정영훈의 죽음은 분명 저 안의 존재가 벌인 짓이다'
고인석이 방벽의 크기만 보고도 그 안에 있는 위대한 존재를 가늠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이미 그와 비슷한 존재를 직접 겪어봤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불가해한 힘을 가진 상식 밖의 존재.
'하지만....'
고인석은 만신창이로 박살난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부러진 뼈가 피부를 뚫고 곳곳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천천히 제 모습을 찾아가는 중인 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무리 그분이라고 해도 저런 규모의 힘을 발휘하실 수 있을까?'
방금 제의 받았던 그 '시민권'이라는 것도 이상했다.
그것의 제의를 받는 순간, 이상하게도 처음 흡혈귀가 되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분의 위대한 피가 입안으로 흘러들어오던 그 순간이 떠오른 것이다.
본능적으로 이것은 받아들이면 안 되는 제안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 일은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돌아가자.'
그렇게 결론을 내린 고인석은 본거지로 향했다.
생쥐 한 마리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상급 흡혈귀를 추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만약에 놈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면 놈을 추적할 방법이 얼마 없었을 테지만, 놈이 서두르지 않아준 덕분에 서예진의 생쥐만으로도 충분히 추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어떡해? 이제 곧 연결이 끊길 것 같아."
그동안 숙련도가 많이 늘어난 서예진은 감각 링크를 유지하면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생쥐들과 감각을 링크할 수 있는 거리도 많이 늘어나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곧 연결이 끊긴다는 것은.
"지금 어디라고 그랬지?"
"지금 막 신해운대역을 지나가는 중이야."
놈이 엄청나게 멀리까지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앗."
"끝났어?"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서예진이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으응. 미안...."
나는 서예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녀를 위로했다.
"잘했어. 어차피 하동건 파티가 놈을 추격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서예진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다행이다."
"피곤할 텐데 눈 좀 붙이고 있어."
"으응."
소파에 조심스럽게 눕는 서예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기장까지라도 갈 생각인가?"
놈을 통해 흡혈귀들의 본거지를 알아낼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놈들의 본거지가 상당히 멀리 있는 듯 했다.
"설마 울산?"
상급 흡혈귀 놈이 걸어가고 있는 선로는 부산에서 울산 중구의 태화강역까지 이어지는 '동해선'이었다.
많고 많은 선로 중 굳이 '동해선'을 선택했다는 것부터 심상치 않았다.
'정말로 흡혈귀 놈들의 본거지가 울산이라면.'
그 전에 찾아왔던 상급 흡혈귀가 죽고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서 찾아온 것도 말이 된다.
'....만약에'
불길한 가정이었지만,
'울산 전체가 흡혈귀 놈들이 집어삼켰다면'
울산은 무려 인구 100만의 거대 도시였다.
그 많은 숫자의 인구가 흡혈귀들의 양분이 되어주었다면, 상급 흡혈귀들의 숫자는 과연 얼마일까?
....끔찍하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우리 구역을 정찰하고 떠난 저 상급 흡혈귀가 그곳에 도착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상상할 수 있었다.
가장 끔찍한 상상이었지만, 상급 흡혈귀 수십 마리를 거느리고 있는 괴물이 이곳을 찾아온다는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절대 저 놈을 보내선 안 돼!'
결론이 났다.
상급 흡혈귀를 바짝 뒤쫓고 있던 하동건 파티를 향해 말했다.
[플랜 B로 가겠습니다.]
그 순간 하동건 파티원들이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대자의 눈'
쐐애애액ᅳ
까망이와 일체화 한 상태로 하늘을 날던 김 건이 전철 선로를 향해 빠르게 낙하했다.
동시에.
'창고 오픈. 독가스 방출'
퓌쉬이이이—
김 건의 밑으로 보라색 독가스가 뿜어져 나와 지상으로 떨어져 상급 흡혈귀의 앞을 막아섰다.
신해운대역에서 다음 역인 송정역으로 이어지는 선로는 지하가 아닌 지상에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음?"
갑작스럽게 자신의 앞을 막아선 보라색 독가스를 마주한 상급 흡혈귀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놈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김 건에게 주의를 빼앗긴 순간.
줄곧 은신을 유지하며 상급 흡혈귀를 가장 가까이서 추적해왔던 문병호가 총을 연사하기 시작했다.
투두두두두―! 투두두두―!
흡혈귀들의 약점인 심장을 정확히 노린 공격이었다.
그러나.
뿌드득 뿌득
달칵- 달칵—
놈의 등에 박혔던 탄두가 하나하나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흡혈귀의 등 전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크으윽. 네놈들은..."
흡혈귀가 악귀와 같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달려들었다.
정확히 문병호가 있던 위치로 주먹이 날아왔다.
"!!"
문병호는 잠시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텔레포트를 사용해 상황을 벗어났다.
슈슉 후우웅!
놈이 허공에 헛손질을 하던 그때 왼쪽에서 빛의 화살이 날아와 다시 한 번 놈의 심장을 노렸다.
"크윽!"
상급 흡혈귀는 그대로 몸을 앞으로 구르며 화살을 피해냈다.
놈이 다시 몸을 일으키는 순간.
쐐애애액!
검은 기운을 머금은 창이 그를 향해 날아왔고,
"일어나라!"
지척에 은빛 갑옷 기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솟아올랐다.
혀를 찬 상급 흡혈귀의 선택은 독가스 안으로 몸을 던지는 것이었다.
멍청한 선택이었다.
아무리 숨을 참고 도망친다고 해도 독가스를 아예 들이마시지 않을 수는 없었고, 일단 유혜린의 마비 독이 몸에 침투하기만 한다면 놈을 추적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독가스 건너편에는 오언주가 기다리고 있다!'
도망가 봤자 부처님 손 안이라는 뜻이다.
[김건씨. 오언주씨를 도와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주세요.]
그동안 하동건 파티가 합류하여 다 같이 상급 흡혈귀를 잡아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아아앙!
갑작스레 독가스 안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돌풍이 일어나며 독가스를 주변으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전신이 새빨갛게 물든 상급 흡혈귀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런'
놈이 독가스 안으로 몸을 던진 것은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능력 발휘를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 독가스 안으로 몸을 숨겼던 것이다.
철컥!
놈을 향해 강철의 기사가 달려들었다.
그러나.
카가각—!
강철의 기사가 휘두른 할버드는 흡혈귀의 피부조차 뚫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상급 흡혈귀는 같잖다는 표정으로 강철의 기사를 쳐냈다.
콰아아앙!
육중한 몸무게를 가진 강철의 기사가 장난감처럼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소름끼치는 침묵 속에서, 놈이 히죽 웃었다.
다음 순간.
"크윽!"
하동건을 향해 돌진한 상급 흡혈귀가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하동건은 양손으로 창대를 붙잡고 그 공격을 막아내려 했으나.
콰직!
놈의 주먹은 창대를 단숨에 꺾어버리고 나아갔다.
콰아아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동건의 신형이 뒤로 멀찍이 날아갔다.
079화 [Episode 17] 전초전 (2)
고인석은 하동건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군'
머리를 박살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놈은 주먹과 맞닿는 순간 몸을 공중으로 띄워 충격량을 대폭 감소시켰다.
게다가 하동건은 그의 주먹에 확실하게 반응했다.
비록 막지 못하고 창대가 부러지긴 했으나, 대단한 반응속도였다.
게다가.
화르륵
고인석은 자신의 가슴 부근에서 박혀서 검은 기운을 내뿜고 있는 부러진 창대를 바라봤다.
이것은 반격의 흔적이었다.
놈은 주먹에 맞고 날아가기 직전, 손에 들고 있던 창을 던졌다.
불안정한 자세로 던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위력을 지니고 있던 창이 고인석의 피부를 뚫은 것이다.
'위험할 뻔 했어!'
조금만 더 깊이 들어왔다면 심장이 꿰뚫렸을 것이다.
가슴에 박힌 창을 빼냈지만, 상처 부위에 검은 기운이 남아 불타올랐다.
고인석은 인상을 찌푸리며 피를 이용해 검은 불을 꺼트렸다.
치지직-
'저 놈부터 죽여야 해!'
하동건의 마무리를 하기 위해 달려 나가려는 그 순간이었다.
투두두―!
고인석의 바로 앞에서 커다란 총격음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티티팅-
탄두는 고인석의 피부조차 뚫지 못하고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하동건의 숨통을 끊어내기 위해서 달려가던 고인석은 총소리가 들려온 허공을 향해 전력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후우우웅!
이번에도 헛손질을 한 것이었지만, 아예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파지직!
"크윽!"
지근거리에서 휘둘러지는 주먹을 완전히 피해내지 못한 문병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투명화가 풀린 것이다.
귀찮은 날파리부터 처리할 생각으로 고인석이 다리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푸욱!
갑자기 양쪽 눈에서 불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아아악!"
고인석은 양쪽 눈두덩이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러댔다.
그의 두 눈은 빛을 잃었다.
그리고 빛을 잃기 직전 똑똑히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난데없이 총알이 생성되는 장면을 말이다.
고인석은 문병호가 있던 자리를 향해 발을 내려찍었다.
콰아아앙!
당연하지만 문병호는 이미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쭛!"
두 눈을 질끈 감고 피눈물을 흘리는 고인석을 향해 빛의 화살이 날아왔다.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고인석이 곧장 몸을 움직였다.
푹!
피어싱의 기운이 담긴 빛의 화살이 고인석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갔다.
그러나 왼쪽 팔이 꿰뚫리고 말았다.
"이런 씻파아알!"
그는 짜증 섞인 외침과 함께 화살이 쏘아진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일어나라!"
그 순간 강철 기사들이 생겨나 몸으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콰직!
고인석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주먹에 강철 기사들의 갑옷이 처참하게 일그러지며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한 두 기가 떨어져나가더라도 상관없었다.
강덕수가 소환할 수 있는 강철 기사는 서른 기에 달했다.
그것들이 하나 둘 고인석의 팔과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이, 개 잡것들이!"
고인석은 화가 났다.
한 명 한 명 따지면 자신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 놈들이었다.
투명화를 사용하는 각성 상태에서는 조금 거슬리기만 할 뿐이고, 강철 골렘을 소환하는 놈도 마찬가지로 시간만 질질 끌 뿐이었다.
이곳에서 그에게 실질적인 위협이 되는 것은 수상할 정도로 관통력이 좋은 화살을 쏘아내는 김가영과, 검은 불꽃을 피워 올리는 하동건 정도였다.
사실상 그 두 사람도 혼자서 덤벼들었다면 순식간에 압살할 자신이 있었다.
'뭣도 아닌 것들이!'
분명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별 것 없는 놈들이었는데, 힘을 합쳐 공세를 퍼부으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눈을 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대처가 어려웠다.
'눈부터 재생시켜야해!'
현재 모든 재생력을 눈에 집중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쐐애애액!
위협적인 기운을 품은 무언가가 날아오는 것을 느낀 고인석이 몸을 뒤틀었다. 움직임을 방해하는 강철 기사들 때문에 제대로 된 회피가 불가능했다.
푸욱!
곧이어 날카로운 무언가가 그의 어깨를 파고들어와 꽂혔다.
화르륵!
이미 한 번 당해본 적 있는 기운이었다.
오른쪽 어깨에 검은 불꽃이 넘실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인석은 혀를 찼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푸욱!
빛의 화살이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갔다.
그리고.
'됐다'
고인석이 천천히 왼쪽 눈을 떴다.
한쪽 눈에만 재생력을 집중시켜 최대한 빨리 눈을 재생시킨 것이다.
처음에는 흐릿하던 시야가 깜빡거릴수록 해상도가 높아졌다.
이윽고 다시 세상이 눈에 보였을 때,
빛의 화살이 자신의 심장을 향해 날아오는 광경이 보였다.
콰가각!
몸을 뒤트는 것으로 가볍게 그것을 피해낸 고인석이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자신을 붙들고 있던 강철 기사들을 단숨에 떨쳐버리고 어깨를 관통한 창을 뽑아냈다. 그리고 곧장 활을 쏘는 여자를 향해 돌진했다.
하동건이 던져대는 창보다도 저 여자가 쏘아내는 빛의 화살이 더 위협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우드득!
고인석의 다리 전체에 핏줄이 울긋불긋 솟아올랐다.
콰아앙!
콘크리트 바닥을 박살내며 거의 날아가다시피 돌진한 고인석이 김가영의 심장을 노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순간.
슈슉!
문병호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놈을 공격하려다 두 눈을 잃은 경험 때문인지 고인석은 반사적으로 왼쪽 눈을 감았다.
그대로 김가영과 문병호가 있는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놈들을 붙잡고 피를 흡수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슈슉!
고인석의 손이 닿기 직전, 두 사람의 신형이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손아귀에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자 살짝 왼쪽 눈을 뜬 고인석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혀를 찼다.
천천히 등을 돌리자 그곳에 하동건, 강덕수, 문병호, 김가영을 비롯해서 강철의 기사 수십 기가 고인석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크릉."
독가스가 사라진 쪽에서 웬 곰 한 마리가 등에 여자를 태우고 달려오고 있었다.
오언주의 등에 타고 있던 김다정이 하동건 일행에게 손을 뻗자.
우우웅!
네 사람의 몸에 밝은 빛이 깃드는 것과 동시에 기세가 강맹해지는 게 느껴졌다.
고인석은 히죽 웃으며 물었다.
"정영훈 그 모지리 자식을 죽인 게 바로 너희들이구나."
하동건 파티는 아무런 대꾸 없이 고인석을 노려봤다.
그 모습을 바라본 고인석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쉬워. 내가 너무 자만했다."
전장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두 놈... 아니, 한 놈만 더 데려왔어도 죽는 것은 너희들 쪽이었을 텐데 말이지."
그때, 고인석이 먼저 움직였다.
"!!"
다만 이번에는 하동건 파티를 향해서가 아닌 반대방향이었다.
양 사이드를 가로막고 있는 울타리를 훌쩍 뛰어 넘으려는 고인석의 모습을 확인한 하동건이 소리쳤다.
"추적해!"
그러나 그 순간.
[그럴 필요 없습니다.]
김재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커헉!"
울타리 너머에서 상급 흡혈귀의 단말마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 직후 사방이 조용해졌다.
"...어?"
추적을 위해 전철 울타리 위쪽으로 순간이동 했던 문병호는 멍하니 아래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전신이 푸른빛에 둘러싸인 한 중년 남자가 상급 흡혈귀의 심장을 한 손으로 꿰뚫은 채 서 있었다.
이윽고 상급 흡혈귀의 시체가 증발하듯 사라졌다.
문병호는 잠시 패닉에 빠졌다.
'아무리 우리가 힘을 빼놨다고는 해도....'
붉게 달아오른 놈의 피부는 총도 뚫지 못했다.
고작해야 검은 기운이 서린 하동건의 창과 피어싱 스킬이 담긴 김가영의 화살만이 놈에게 유효한 타격을 먹였었다.
그런 괴물의 심장을 맨손으로 꿰뚫는 존재라니.
단 일격에 상급 흡혈귀의 심장을 부순 남자를 보며 문병호는 옅게 몸을 떨었다.
'정체가 뭐야?'
순간.
슈슉-
남자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문병호의 옆에 나타났다.
"우와!"
자신이 아닌 사람이 텔레포트를 사용하는 사람을 처음 목격한 문병호가 울타리 위에서 균형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슈슉-
그 순간 남자의 신형이 다시 사라지더니 바닥과 부딪히기 직전의 문병호를 낚아챘다.
남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하동건 파티를 향해 물었다.
"우리 아들 친구분들이시죠?"
다른 이들이 멍하니 있는 것과 달리 이미 구면이었던 하동건이 먼저 인사를 해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님"
"아버님?"
하동건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파티원들을 향해 남자를 소개했다.
"재현님의 아버지되시는 분이셔."
그 뒤를 이어 김동혁이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아빠가 흡혈귀를 마무리 짓는 것을 지켜본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하동건 파티가 상급 흡혈귀 뒤를 따라붙기 시작했을 때, 본가에 있는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혈족 버프 때문에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압도적일 줄이야'
하동건 파티도 나름대로 칭호 버프를 받고 있어서 레벨보다 강한 편인데도 호신강기를 두른 아빠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상급 흡혈귀(Lv. 50)를 사냥하셨습니다.]
[초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혈족 페널티로 정산금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경험치는 더욱 더 범핑되어 들어오는 편이었다.
당연하게도.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다.
"하아."
영역이 확장되는 것과 동시에 찾아오는 고통에 대비했다.
------
명불허전의 고통에 뇌가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레벨이 하나만 올랐기 때문인지 저번보다 빠른 시간에 영역 확장 과정이 끝났다는 점이었다.
"스읍, 후우."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는 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시민권을 부여하시겠습니까?]
늘어난 공간에 포함되어 있던 새로운 사람들을 일일이 확인한 다음 시민권을 부여하는 일까지 마친 뒤 소파에 늘어지듯 누웠다.
"이제 괜찮아, 오빠?"
"응. 다 끝났어."
서예진이 시원한 얼음물을 건네며 말했다.
"수고했어."
"고마워."
시원한 물을 마시며 얼음을 아그작아그작 씹고 있자니 긴장이 조금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이 고통을 네 번 더 겪어야 스킬 포인트를 얻을 수 있는 건가'
그때였다.
[시민 문병호가 오늘 수행 가능한 퀘스트 횟수를 모두 소모하였습니다.]
[시민 문병호가 수행한 퀘스트들을 평가합니다.]
[ 평가 중 ...]
하동건 파티를 포함해서 가신으로 들인 이들은 모두 일일퀘스트 3번을 완수 할 수 있도록 하는 편이었다.
들어가는 돈에 비해 능률이 좋았으니 단 하루도 빼먹을 수 없었다.
자연스레 일일퀘스트 보상도 하루에 수십 개씩 받고 있었는데, 별 기대하지 않았다.
"이번엔 정신력이 상승하려나?"
그것을 보며 진지하게 생각했다.
'고통 내성 같은 것을 기르는 방법은 없나?'
고통스러운 퀘스트를 주면 고통 내성 따위가 늘어나는 것 아닐까?
사람이 많아지면서 뻘 짓을 하는 이들의 숫자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벌도 주고 레벨업을 대비하여 고통 내성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와중이었다.
[평가 완료]
문병호의 일일퀘스트 평가가 완료되었고,
[잭팟 당첨!]
[축하드립니다.]
[스킬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예전에 한 번 획득해 본 적 있던 '그 보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선물에 나는 잠시 얼을 탈 수밖에 없었다.
핏물로 가득 채워진 욕조 안에서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각과도 같은 섬세한 근육들이 핏물 아래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10평이 넘어가는 그곳은 작은 목욕탕과도 같았다.
남자가 일어나자 그와 마찬가지로 발가벗은 채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자가 수건으로 열심히 핏기를 훔쳤다.
남자는 잠시 기다리다가 천천히 욕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앞에는 여자 하나가 무릎을 꿇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말했다.
"고인석이 죽었다."
"!!"
"네가 부산에 다녀와 줘야겠다."
"알겠습니다."
여자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080화 [Episode 17] 전초전 (3)
'병호야, 나이스'
지금까지 수많은 일일퀘스트 보상을 받아봤지만, 스킬 포인트를 받은 적은 지금 것까지 합쳐서 딱 두 번이었다.
'그때도 병호였었지.'
한 번 축캐는 영원한 축캐인 걸까.
종속의 계약으로 투명화 스킬을 얻은 뒤로 존재감마저 투명해지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매력 어필을 할 줄이야.
문병호 덕분에 얻은 공짜 스킬 포인트를 사용할 생각에 싱글거리고 있자 서예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왜 그래요, 오빠?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음. 로또 걸렸어."
"로또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서예진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그만큼 좋은 일이 생겼다는 말이야."
사실상 하나 남아 있던 스킬 포인트는 상점 스킬을 올릴 생각으로 남겨둔 상태였다.
레벨이 올라가는 속도를 생각하면 30레벨이 되기 전에 상점 슬롯을 전부 다 채울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스킬 포인트를 어디에 투자할지 고민해보지 못했다.
스킬창을 보며 생각했다.
'무난한 것은 역시 품위 유지 스킬인데...'
가신 등록, 환수 소환, 신기 뽑기 등등,
모든 신박한 기능이 품위 유지 스킬에서 나왔다.
이번에는 또 어떤 새로운 기능이 추가될지 기대가 되는 스킬이었다.
'창고 스킬을 올릴까?'
요즘따라 창고의 용량인 200kg도 턱없이 부족하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창고에 보관하는 순간의 운동에너지를 그대로 보존해주는 '현상 유지'기능 덕분에 이제는 창고보다도 전투에서 자주 써먹는 스킬이었다.
이번 상급 흡혈귀와의 전투에서도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탄두를 놈의 눈앞에서 소환해서 두 눈을 앗아갈 수 있었다.
'생각보다 엄청 도움이 된단 말이지.'
그 다음 후보는 창고 스킬과 더불어 내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스킬, 절대자의 눈 스킬이었다.
'이젠 없어서는 안 될 스킬이지.'
절대자의 눈만큼 다방면에서 사용되는 스킬도 없을 것이다.
이제는 다중시야도 적응되어 서너 개 정도는 부담 없이 늘릴 수 있었으며, 최대 일곱 개 까지도 시야를 늘리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딱히 스킬 레벨을 올려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어.'
레벨을 올리면 무언가 신박한 기능이 추가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 기능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레벨을 올릴 이유는 없었다.
그 다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집구석 절대자의 건강'이었다.
혹시 이걸 올리면 레벨업 때의 고통이 조금 줄어들까?
잠시 충동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이성을 되찾고 고개를 저었다.
'너무 도박이야'
괜히 레벨을 올렸다가 평범하게 '재생력 증가' 같은 게 나와 버리면 낭패였다.
나는 이미 오언주의 스킬인 '태고의 생명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오언주의 신뢰도가 100을 찍으며 얻은 스킬로, 상처가 생기면 재생력을 급격히 증가시켜주는 스킬이었다.
'거기에 페어리의 능력도 있지.'
세계수가 있는 본가에 소환시켜둔 환수로, 레벨업 할 때마다 영역 내에서의 자연 회복율을 크게 증가시켜 주었다.
벌써 페어리의 레벨이 9까지 올라 900%의 효율을 발휘하고 있었다.
자잘한 상처는 실시간으로 회복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떠나서,
'나는 다칠 일이 없다.'
애초에 안전한 집구석 영역에서 나가지 못하는 몸이었다.
행여 제갈성규의 경우처럼 우연찮게 흡혈귀나 몬스터 따위가 영역 내에 들어온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내게 적대심을 품는 순간, 머리가 펑하고 터지며 상황이 종료될 것이다.
'아무리 공짜로 얻은 스킬 포인트라고 해도 이렇게 낭비할 수는 없지.'
그 뒤로도 보이지 않는 손, 집구석 수복, 절대자의 문까지.
모든 스킬의 기능을 다시 한 번 곱씹어보며 어떤 스킬에 포인트를 투자해야 좋을지 고민했다.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은.
'역시 무난한 게 제일이지.'
[정말로 집구석 절대자의 품위 유지 스킬을 올리시겠습니까?]
"그래."
우웅!
황금빛을 뿜어내며 스킬창이 점멸했고,
[집구석 절대자의 품위 유지 스킬이 Lv. 6이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었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응?"
나는 그것의 이름을 보고 두 눈을 깜빡였다.
'...실화냐?'
********
2902호에는 하동건 파티와 서예진 그리고 아빠가 함께 했다.
내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놈의 움직임을 고려하면 흡혈귀 놈들의 본거지가 울산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 템포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최악의 경우 울산 전체가 흡혈귀의 영향력 아래 편입되었을 수 있습니다."
"!!"
내 말을 이해한 이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울산은 공업도시로,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주하던 광역시였다.
만약, 흡혈귀 놈들이 그 사람들을 모두 자양분으로 삼았다면,
"당연히 상급 흡혈귀 또한 더 많이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번에 잡았던 상급 흡혈귀가 했던 말을 생각해보면 그들보다 더 급이 높은 존재가 있을 겁니다."
적어도 상급 흡혈귀가 '그분'이라고 말하며 극존칭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급이 높은 흡혈귀가 존재하는 것은 확실했다.
이번에 사냥한 상급 흡혈귀는 그다지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말했었다.
(두 놈... 아니, 한 놈만 더 데려왔어도 죽는 것은 너희들 쪽이었을 텐데 말이지.)
조직에 포함된 상급 흡혈귀의 숫자가 고작 서너 명이었다면 저런 말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상급 흡혈귀인 그가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상당히 무리를 한 것일 테니까.
하지만 놈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상급 흡혈귀 세 마리쯤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는 것처럼 말했다.
하동건 파티를 향해 물었다.
"만약에... 상급 흡혈귀가 두 마리 이상 나타난다면 상대할 자신이 있으신가요?"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하동건이 대답했다.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돈지랄을 하면 가능하다.'
가신으로 등록되어 있는 그들은 돈을 들여서 인위적인 레벨업이 가능했으니까.
하동건 파티의 레벨을 상급 흡혈귀와 같은 수준인 50레벨까지 끌어올린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봤다.
'문제는 수천억이 든다는 거지.'
45레벨부터는 1레벨을 올리는 데 자그마치 100억이라는 거금이 들어갔다.
다행히 한 달 간의 사냥 덕분에 레벨이 한두 개씩 오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거금이 들어간다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때 아빠가 손을 들고 말했다.
"아들, 나 혼자서도 그놈들 서너 마리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너희 엄마랑 같이 오면 그 이상도 가능할 것 같고."
아빠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엄마와 함께 있을 때 발동되는 신체 증폭 효과와 엄마의 스킬 중 하나인 '왕의 축복'을 사용한다면 지금보다 더 강력한 신체 스펙을 손에 넣게 될 테니까.
거기다 김다정의 축복까지 추가된다면 정말로 혼자서 모든 상급 흡혈귀를 쓸어버리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급 흡혈귀들이 '그분'이라며 떠받드는 놈도 감당할 수 있을까.
'정보가 너무 부족해.'
그때였다.
"제가 울산으로 정찰을 가보겠습니다."
김건이었다.
"김 건씨가요?"
"네. 제 능력이라면 울산까지 금방 다녀올 수 있으니까요."
까망이와 한 몸이 된 상태의 김건은 시속 100km가 넘는 속도로 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울산까지의 거리는 약 50km 정도이니 마음먹고 비행한다면 삼십분도 안돼서 도착한다는 소리였다.
문제는 그곳이 내 예상대로 흡혈귀 밭이라면 김건이 위험해질 것이란 점이었다.
그럼에도.
"그러면...."
필요한 일이었다.
"계속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위험해지면 잠시만 시간을 벌어주세요. 몇 초면 됩니다."
"네."
몇 초만 벌어준다면 가신 소환을 써서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서누리는 그분의 지시에 따라 부산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도대체 거기에 무슨 괴물이 있는 거지?'
상급 흡혈귀 두 명이 죽었다.
두 사람 다 괴짜 취급받기는 했지만, 약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급 흡혈귀 중에서도 꽤나 강한 편에 속했다.
'조심해야 해.'
그분께서 두 사람보다 약한 서누리에게 정찰 임무를 맡긴 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능력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그분에게 직접 힘을 받은 진(眞)흡혈귀들은 저마다 피를 이용한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촤라락
건물 옥상에 올라 있는 그녀의 등 뒤로 선혈이 뿜어져 나오며 이리저리 엮였다.
그것은 서서히 피막의 날개를 만들어갔다.
펄럭
몇 번 움직여 보던 서누리를 과감하게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
동시에 날개를 펼쳐 하늘 높인 날아올랐다.
그녀의 발아래로 건물들의 모습이 점차 작아지더니 이내 울산 도심의 모습이 한 번에 내려다보였다.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
그야말로 정찰에 특화되어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빨리 확인하고 복귀하자.'
잠시 후 부산 하늘에 진입한 그녀는 일단 부산을 한 번 크게 훑어봤다.
정영훈과 고인석이 정확하게 어디에서 죽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늘에서 전체적으로 훑어본 다음 이상이 없으면 좀 더 세밀하게 살필 계획이었다.
그러나.
'저게 뭐야?'
서누리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바닷가 근처 작은 마을.
그곳에 엄청나게 커다란 나무 하나가 자라나고 있었다.
'무슨 크기가 저렇게 커?'
원근법을 무시하는 나무가 도시 한 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상한 것은 저 주변에는 그 흔한 몬스터들이 코빼기도 안 보인다는 점이었다.
서누리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나무구나, 두 사람 다 저 나무한테 죽은 게 분명해.'
한 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나무였다.
그런데.
'음?'
이상한 점이 몇 가지 더 있었다.
'...인간?'
바로 그 나무 근처에 인간들이 돌아다닌다는 점이었다.
이제 슬슬 해가 저물고 있었는데, 여기저기에서 불빛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서누리는 처음에 그것들이 그냥 불을 붙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전기...? 전기를 쓴다고??'
그들의 집안을 밝히고 있는 불빛은 LED 전구들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봐야겠어'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밑으로 날아가던 도중,
툭
"음?"
무언가 투명한 벽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출입 불가.]
그리고 그녀의 앞에 묘한 홀로그램 창이 나타났다.
'...이건?'
서누리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시민권을 획득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새로운 창이 나타났다.
'이건 또 뭐야?
아무래도 정황상 이 투명한 벽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시민권을 획득할 필요가 있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것을 이해한 동시에 서누리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나를 인식했어!'
문득 이곳 부산에서 자신 보다 강력한 상급 흡혈귀 두 마리가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도, 도망가야 해!'
더 이상의 정찰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서누리는 필사적으로 날개를 펄럭였다.
그녀의 몸이 다시 빠르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공포에 질린 채로 본거지인 울산을 향해 비행하던 그때였다.
"
"저건 또 뭐야?"
도시 전체가 빛을 뿜어내고 있는 곳이 있었다.
흡사 그곳만 멸망이 찾아오지 않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파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들이 별빛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게다가 도로에는 차까지 다니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뭐야?'
서누리는 그 모습에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고, 다시 힘차게 날갯짓하여 그곳을 빠르게 벗어났다.
081화 [Episode 17] 전초전 (4)
또 다시 새로운 상급 흡혈귀가 출현했다.
혹시나 싶어 시민권을 제의해 봤지만, 이번에도 거절당하고 말았다.
'아쉬워'
시민권을 획득하기만 하면 주도권은 완전히 이쪽으로 넘어오게 되어 있었다.
퀘스트 부여를 활용하여 흡혈귀들의 규모나 '그분'에 대한 정보를 빼낼 수도 있었고, 아예 죽여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쪽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게 가능했다. 잘만하면 저쪽에 거짓 정보를 흘리는 것도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날개가 달린 흡혈귀라니.'
아쉽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흡혈귀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따라붙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똑같이 하늘을 날 수 있는 김 건 정도인데, 혼자서 저 흡혈귀를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흡혈귀가 가지고 돌아갈 수 있는 정보라고 해 봐야 한계가 있었다.
세계수의 모습과 그것을 보호하는 투명한 장막, 그리고 시민권을 제의받았다는 정도가 전부일 테니까.
'생각보다 반응이 빨랐어.'
첫 번째 흡혈귀를 죽이고 난 뒤에 다음 상급 흡혈귀가 나타나기까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당연히 이번에도 그 정도 시간을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흡혈귀가 죽은 지 하루가 채 되지 않아서 새로운 상급 흡혈귀가 출현한 것이다.
'부하의 죽음을 느끼기라도 하는 건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만 해도 시민들이 죽을 때마다 시스템 알림이 뜨고 있으니까.
'어쨌든 덕분에.....'
놈들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게 됐다.
현재 김건이 날개 달린 상급 흡혈귀의 뒤를 추적하고 있었다.
김건의 속도가 좀 더 빨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까마귀의 까만 깃털이 어둠에 녹아들었기 때문인지 아직까지는 들키지 않고 잘 따라가는 중이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흡혈귀의 뒤를 쫓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아들'
아일랜드 식탁 위에서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던 아빠가 나를 불렀다.
"네?"
"잠깐 이야기 할 수 있나?"
전투가 벌어지면 곧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그러자 아빠는 술병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너도 술 한 잔 할래?"
"아니요, 전 괜찮아요."
"그래? 아쉽네."
혼자서 술을 따르려는 아빠를 향해 말했다.
"제가 따라드릴게요."
아빠가 히죽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꽉 채워, 꽉."
술잔에 가득 찬 술이 표면장력을 이루어 봉긋하게 올라온 것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빠는 그대로 소주를 한 모금 들이킨 다음 입을 열었다.
"아들아."
"네."
"가끔 집에도 오고 그래. 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셔."
할머니는 여전히 잠들어 계셨다.
페어리의 힘이 커지면서 깨어 계시는 시간이 십 분 정도로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하루의 대부분을 잠들어 계시는 중이었다.
엄마가 할머니 곁에서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계셨기 때문에 큰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도 그동안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은 것은 분명 내 잘못이었다.
"조만간 한 번 갈게요."
"그래."
아빠가 끓인 라면에는 햄과 만두가 들어가 안주용으로 딱이었다.
"한 입 먹을래?"
!!
"...네."
밥그릇과 함께 젓가락, 숟가락을 건네받은 나는 국자로 라면을 한 그릇 떴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 입 퍼 먹으니 기름진 라면 국물 맛이 혀를 적셔왔다. 정확히 기대한 대로의 맛이었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아빠가 이것저것 넣어서 끓인 라면은 의외로 맛이 좋았다.
"먹을만해?"
"네, 맛있어요."
그제야 아빠는 본론을 꺼냈다.
"흡혈귀 말이다."
소주잔의 술을 마저 비워낸 아빠가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빈 잔을 채워드리며 대답했다.
"일단은 규모부터 파악해야죠."
"그 다음은?"
"적의 규모에 따라서 어떻게 토벌할지 고민해봐야겠죠."
그러자 아빠가 질문했다.
"꼭 토벌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거냐?"
!!
"네 말대로 흡혈귀 놈들이 울산을 전부 먹은 거면 위험하지 않겠어? 어쩌면 네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굳이 위험을 부담할 필요가 있을까? 놈들이 이곳을 찾아와서 싸운다고 해도 늦지는 않을 것 같은데. 게다가 여기에서 싸울 경우 네 능력인 안전지 대를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도 있겠지. 최악의 경우에는 다 같이 네 영역 안으로 숨으면 그만이야."
아빠의 말이 맞았다.
만약에 그놈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온다고 하더라도 투명 방벽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그가 물었다.
"이유가 뭐야?"
아빠의 질문을 들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자문해보았다.
'나는 왜 무리를 해서라도 흡혈귀들을 토벌하려 하는 걸까.'
그 순간 죽은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시민권을 얻었음에도 나의 부주의함 때문에 희생되었던 가련한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부모를 잃고 통곡하던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는...'
!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여러 가지 방비를 해 두었지만, 그럼에도 불안했다.
비극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보이는 모든 싹을 잘라놓고 싶었다.
"한 달 쯤 전이었어요. 저도 모르게 흡혈귀를 한 마리 시민으로 받았어요."
아빠에게 그때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그날의 참극을 들은 아버지는 굳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무셨다.
"아빠, 놈들은 사람을 먹어요. 저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고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점점 더 명확해지는 기분이었다.
"울산이 흡혈귀 놈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고 해도 생존자들은 반드시 있을 거예요. 저는 울산에 있는 흡혈귀들을 박멸하고, 그 사람들을 구해낼 겁니다."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하동건씨 파티가 전면에 나서주겠지만, 저도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에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도움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저도...
그때 갑자기 아빠가 소주를 원샷하더니 감탄사를 뱉어냈다.
"크으으. 미안하다."
"...뭐가요?"
아빠는 술기운으로 인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묵묵히 술잔을 채우고는 겸연쩍은 듯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나는 우리 아들이 경험치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았어."
"...예?"
"크흠, 아니, 그 흡혈귀 놈을 잡으니까 경험치가 어마어마하잖아? 그래서..."
내가 짜게 식은 눈빛으로 바라보자 아빠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에요?"
"큽. 괜찮아, 괜찮아. 라면 더 줄까?"
"괜찮아요."
어쩔 줄 몰라 하며 대화 화제를 돌리려는 아빠를 향해 말했다.
"뭐, 확실히 경험치도 짭짤하긴 하겠네요."
"오해해서 미안하다."
라면을 다 먹고 설거지까지 끝냈을 때 쯤 상급 흡혈귀가 울산에 진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울산에 진입하고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다행히 그때까지도 김 건의 존재는 들키지 않은 듯 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 그래."
아빠가 안방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절대자의 눈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이제 슬슬 도착할 때가 됐는데.'
한참을 더 날아가던 상급 흡혈귀는 울산의 중심부인 삼산동에 도착해서야 급격히 고도를 낮추었다.
'여기가 놈들의 본거지인가.'
하늘에서 내려다 봤을 때는 멀쩡해 보이는 도시였다.
고층 건물이 무너져 있다거나, 커다란 발자국이 새겨져 있지도 않았다.
"내려가 보겠습니다."
[조심하세요.]
멀리서 본 도시의 품경은 평온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자 도시의 본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
"허억, 헉!"
박새롬은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다.
뒤쪽에서는 잔뜩 흥분한 채 흡혈귀들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이다!"
"잡아!"
박새롬은 운이 나빴다.
그 소리를 듣고 주변에서 굶주린 흡혈귀들이 잔뜩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그녀의 앞에서도, 옆에서도 흡혈귀들이 이를 드러낸 채 다가오고 있었다.
"흐윽."
박새롬은 어떻게든 울음을 집어삼키며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아파트 울타리를 넘어가기 위해 기어오르는 순간.
"진짜다!"
"저기 인간이 있어!"
"비켜!"
아파트 단지 내부에서 몰려오는 흡혈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박새롬은 울타리를 넘어가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이 씻팔. 좆 됐네."
후회했다.
괜히 여기까지 와서는 개죽음을 당할 줄이야.
스스로의 능력을 너무 믿은 탓이다.
그 순간.
"으윽?!"
갑자기 양쪽 어깨와 겨드랑이에서 톰증이 느껴졌다.
이윽고 자신의 몸이 하늘로 점점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박새롬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까마귀 형상을 한 괴물이 있었다.
"하하...."
허무했다.
흡혈귀를 피해 도망쳤더니 까마귀 괴물에게 사로잡히다니.
'아니지, 차라리 이렇게라도 저길 벗어난 게 어디야. 정신만 바짝 차리면 이 괴물 놈에게서도 도망칠 기회가 있을 거야.'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자신의 능력으로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애써 긍정회로를 돌리던 박새롬은 문득 자신의 발아래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흡혈귀들이 고함을 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썩 유쾌해진 박새롬은 자신의 신세도 잊고 흡혈귀들을 향해 소리쳤다.
"야이 개 병신들아!! 다 죽어버려어!!"
그때였다.
"조용히 해 주세요."
갑작스럽게 들려온 사람의 언어에 박새롬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네?"
"흡혈귀들 어그로 끌리지 않게 조용히 좀 해 달라고요."
부리가 움직이며 사람의 언어를 뱉어내는 것을 확인한 박새롬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까마귀 괴물은 박새롬을 적당한 건물 옥상에 내려준 다음 자신도 그곳에 내려앉았다.
괴물이 박새롬을 향해 부리를 뻐끔거렸다.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박새롬은 경계 어린 눈빛으로 뒷걸음질 치며 대답했다.
"뭐, 뭔데요?"
"흡혈귀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흡혈귀에 대해서요?"
"네."
"으음... 심장을 부수면 죽는다는 것?"
잠시 침묵하던 까마귀 괴물이 물었다.
"그게 끝입니까?"
"잠깐! 잠깐만,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말씀하세요."
박새롬이 눈을 새초롬하게 뜨며 질문했다.
"당신... 인간이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질문이었다.
괴물들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새로 변하는 남자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까마귀 괴물이 사람 말을 배웠다는 것 보다는 그쪽이 더 현실성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까마귀 괴물이 대답했다.
"사람입니다."
"증거를 보여줘."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변신을 풀어보였다.
그의 몸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떨어져 나오더니 이내 평범한 남자의 모습이 되었다.
"됐습니까?"
!!
"...진짜네."
남자가 박새롬을 향해 말했다.
"흡혈귀 놈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말씀해주세요. 도대체 놈들이 이 도시에 얼마나 퍼져 있는 겁니까?"
"흐흠, 흡혈귀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 궁금한 거지? 그런 거에 관해서는 내가 또 전문가긴 하지."
"말씀해주세요."
"흐음, 그냥 말해주기는 좀 그런데, 워낙 고급 정보라...."
슬쩍 보니 남자가 짜게 식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 뻔뻔하시네요."
"내가 좀 그런 편이지."
박새롬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농담이야, 농담. 나 그렇게 썅년 아니야. 그냥 가벼운 부탁 하나만....."
이대로 혼자서 흡혈귀들의 구역을 빠져나가기는 어려우니 도와달라고 부탁하려던 그때였다.
지이잉-
허공에서 콜라와 초코바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거면 되겠습니까?"
박새롬은 멍하니 콜라캔부터 땄다.
치직-
청량한 탄산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 꿀꺽꿀꺽 삼켰다.
"!"
진품이었다.
따가운 탄산이 목을 지져댔지만, 고통은커녕 행복하게 느껴졌다.
단숨에 콜라를 원샷한 박새롬이 입을 열었다.
"꺼억-!"
곧바로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초코바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남자가 한 발 뒤로 빼며 말했다.
"질문에 대답 먼저 해 주십시오."
박새롬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무엇을 말씀드리면 될까요, 주인님?"
082화 [Episode 18] 알박기 (1)
박새롬이 초코바를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울산 전체에 흡혈귀 놈들이 득실거리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대충... 절반 정도?"
아주 절망적인 수치는 아니었다.
도시 전체가 흡혈귀화 되었다는 소리는 아니었으니까.
"태화강을 기준으로 남쪽은 흡혈귀들의 땅이라서 위험하지만, 강만 건너가도 괜찮아져요. 거긴 인간이 더 위험해!"
절대자의 눈을 통해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자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곳은 명백히 태화강의 남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러니까 흡혈귀들의 구역이라는 뜻이다.
곧장 소통의 반지를 활성화시켜 김 건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어째서 흡혈귀들의 구역에서 쫓기고 있었던 건지 물어봐주시겠어요?]
그러자 김건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앵무새처럼 내 말을 되풀이하였다.
"그쪽 말대로라면 여기는 흡혈귀들의 구역인데, 왜 여기서 흡혈귀들에게 쫓기고 있었던 겁니까?"
"아, 그거? 일이 좀 꼬였어."
초코바를 다 먹어치운 박새롬이 귀신같이 반말을 시전 했다.
"근데 방금처럼 그런 거 얼마나 더 만들 수 있어?"
김건이 짜게 식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박새롬이 눈치를 보며 말꼬리를 올렸다.
"요?"
나는 그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고는 상점에서 콜라 1.25L짜리와 ABC 초콜릿을 한 봉지 사들였다.
지이잉-
허공에서 시원한 콜라와 초콜릿이 생성되자 박새롬의 눈빛이 곧장 날카롭게 빛났다.
김 건이 그것들을 잡기도 전에 먼저 다가와서는 콜라와 초콜릿을 낚아챘다.
그제야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왜 제가 목숨 걸고 여기까지 왔겠어요? 당연히 먹을 거 구하러 왔죠. 내가 먹여 살려야 되는 사람들이 좀 있어서."
이번에는 손에든 물건을 다 먹지도 않았는데 다시 반말체로 돌아와 버렸다.
실소를 머금는 김건을 향해 박새롬이 은근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나랑 같이 좀 가줄 수 있나?"
김건이 내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을 완곡한 거절의 표현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박새롬이 한결 다급해진 목소리로 재촉했다.
"아니, 그렇잖아? 보아하니까 너도 궁금한 게 여러 가지 있는 것 같은데요. 안전한 곳으로 가서 함께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눠 보는 것은 어떨까요?"
박새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흡혈귀들의 본거지인 이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는 안전한 곳에서 대화를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사실 이제 들을 건 다 들었는데.'
태화강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생존자 집단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더 들을 정보라고 해 봐야 생존자 집단의 구성 정도인가.'
박새롬의 말을 들어보면 모든 생존자 집단이 하나로 힘을 합치고 있는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그쪽 상황이 궁금하기는 했다.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죠. 인간이 더 위험하다는 것도 궁금하기도 하고.]
김건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어디로 가면 되지?"
"일단 변신부터 해 봐."
김건이 반말을 하자 자연스럽게 말투가 편해진 박새롬이었다.
다시 까망이와 하나가 된 김 건의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박새롬이 손가락으로 강 너머를 가리켰다.
"저기 저쪽으로 가면 돼."
"알겠다."
대략적인 방향을 확인한 김건이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 나 아직 안 탔는-!"
박새롬의 말은 마지막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김건이 발톱으로 그녀의 양쪽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야! 잠깐만! 아파, 아프다고!"
"조금만 참아라."
"아이 싯팔! 등에 태워 달라고!"
"싫다."
"왜!"
김건은 덤덤하게 부리를 놀렸다.
"냄새 난다."
그 강렬한 한 마디에 충격 받은 듯한 얼굴을 한 박새롬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뭐어?"
"냄새, 심하다."
팩트긴 했다.
절대자의 눈은 단지 시야만을 보이는 게 아니라 스킬이 발동되는 공간의 냄새를 맡거나 공기의 흐름을 느끼는 것도 가능했는데, 박새롬에게서 냄새가 심하게 나기는 했다.
당연했다.
당장 마실 물도 구하기 어려운 이 망해버린 세상에서 몸을 깨끗이 씻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새삼스럽게 내 영역 안에서 누리는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야이, 새끼야! 너 이리 와 봐! 안 와?!"
난리 부르스를 추는 박새롬을 향해 김 건이 덤덤하게 말했다.
"얌전히 있어라. 떨어진다."
"아씨."
박새롬은 자신의 발밑을 확인한 뒤 곧바로 얌전해졌다.
기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쥔 김건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날개를 펄럭였다.
********
"...이상입니다."
보고를 마친 서누리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서누리는 그 상태 그대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막상 보고를 이어나가다 보니 자신이 들고 온 정보가 얼마나 별 것 없는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용이라고 해 봐야 거대한 나무의 존재와 그것을 보호하는 커다란 벽, 그리고 '시민권'이라는 것의 존재가 전부였다.
그것들이 정확히 어떻게 정영훈과 고인석의 목숨을 앗아간 것인지 알아오지 못한 것이다.
질책을 받을 마음을 준비를 하고 있던 그때,
"흥미롭군."
!!
그로부터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고작 아파트 크기만 한 나무라."
서누리는 살짝 당황하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항시 무감정한 얼굴로 기계처럼 명령만 내리던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이 피어날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다.
"흐음."
남자는 소파에 몸을 더 깊게 파묻으며 와인 잔을 입 안으로 가져갔다.
와인 잔에 담긴 붉은 선혈을 잠시 음미하던 그가 짧게 명령했다.
"안내해라."
남자의 말에 서누리가 짧게 반문했다.
"...예?"
그러는 동안 남자는 테이블에 와인 잔을 올려두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말했다.
"그 나무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라. 내가 직접 간다."
한 박자 늦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서누리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모, 모시겠습니다."
********
박새롬이 안내한 곳은 홈플러스로 그곳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생존자 집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인구가 거의 천여 명에 달할 만큼 거대한 조직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나를 더 흥미롭게 하는 것은.
"여어, 박새롬이. 아직 안 뒤졌구만? 뒤에는 뭐야. 신참인가?"
"내가 침 발라 뒀으니까 신경 끄셔."
"뭐야?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궁금해지는 걸?"
"엿이나 까 잡숴."
박새롬과 거칠게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 중년 남성.
그는,
『정웅(Lv. 21)』
각성 능력 : 돌주먹
'또다.'
각성자였다.
'벌써 세 번째인가.'
겨우 천 여 명밖에 되지 않는 조직에서 벌써 각성자를 세 명 째 발견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박새롬을 포함한 숫자였다.
'그렇다고 해도 벌써 다섯 명이나 마주치다니.'
천명을 일일이 다 둘러본 것도 아니었다.
홈플러스 옥상으로 진입하여 박새롬을 따라가면서 마주친 수십 여 명의 사람들 중에서 무려 두 명의 각성자를 추가로 발견한 것이다.
'왜 이렇게 많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는 말이 안 되는 비율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그동안 5만 명이 넘는 시민들을 받아들이면서 확인한 '네츄럴'은 총 6명뿐이었다.
네츄럴이란 하동건이나 오언주처럼 가신 등록 이전부터 각성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경우를 말한다.
어쨌든 대충 8천 명 중에 한 명 꼴로 각성자가 나타난 셈이다.
그런데 여기는 전체 인구가 천 여 명 정도인 주제에 벌써부터 각성자만 세 사람이 있었다.
'여기, 의외로 노다지일지도?'
통상적으로 네츄럴들은 가신이 되던, 종속의 계약을 맺던 그 효율이 더 좋게 나타나곤 했다.
내 입장에서 잠재력 높은 시민을 받을 수 있다는 건 호재였다.
'지금 당장 시민권을 발급해주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야'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한 홈플러스 구석에 '스태프 온리'라고 적혀 있는 문을 거침없이 열고 들어간 박새롬을 환한 손전등의 불빛이 환영 해주었다.
"윽. 안 치우냐?"
"뭐야, 박새롬?"
"어? 누나? 벌써 왔어요?"
"뭐야.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실패했겠지.'
그런 그들을 향해 박새롬이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주며 대꾸했다.
"이 썅것들아. 그게 뒈질 뻔하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온 리더한테 할 소리냐?"
"리더는 개뿔, 배낭은 어디 팔아먹었냐?"
"살려고 버렸다, 씨발."
흡혈귀들에게 쫓기던 순간이 떠올랐는지 짜증 섞인 말투로 고개를 흔들거리더니 소파를 향해 손에 들고 있던 콜라와 초콜릿을 던졌다.
"어? 이게 뭐야? 콜라?"
"오오, 뭐야, 아예 허탕만 친 건 아닌가 보네."
곧바로 초콜릿을 뜯어 나눠먹는 이들 사이에서 박새롬은 테이블 위에 놓인 손전등을 들어 김건을 향해 비췄다.
"그래서, 어떤 게 궁금하실까요, 고객님?"
"누구야?"
"닥치고 가만히 있어."
그녀의 말투에서는 정보료를 톡톡히 뜯어 먹겠다는 다짐이 보였는데, 아마도 아까 전 김 건의 그 발언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괜히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겠지.'
여기까지 오면서 홈플러스 내부를 대충이나마 둘러봤다.
전체적으로 사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마주친 사람들의 표정과 몰골만 보아도 식량이 부족하다는 것쯤은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형 마트는 분명 이러한 상황에서 입지가 좋은 곳이기는 했다.
여러 가지 상황에 도움이 될 물건들은 물론 식자재까지 풍부한 편이었다.
재고가 쌓여 있는 창고는 생존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물자로도 평생을 버틸 수는 없었다.
이들도 이젠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박새롬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밖으로 나돌아야 할 만큼 말이다.
'상점 오픈'
저들이 지금 가장 갈증하고 원하는 것.
그것을 채워주기로 했다.
저들이 기대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이.
'일종의 충격 요법이지.'
물과 참치캔, 스팸을 비롯한 각종 비축 식량, 그리고 라면, 과일, 과자, 음료수를 비롯한 수많은 먹을거리들.
그것들이 박스채로 소환되어 김건의 주위로 나열시켰다.
"어, 어어?"
무서운 기세로 증식하는 상자 부대에 당황스러워 하던 박새롬이 조심스럽게 상자에 접근했다.
그리고 상자를 개봉했다.
찌직-
마침 그녀가 개봉한 상자에는 그녀가 좋아하던 콜라가 잔뜩 들어가 있었다.
"헐'
!!
박새롬은 잠시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대더니.
"..대박."
조용히 감탄사를 뱉어냈다.
그리고.
"흐어어어엉!"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림이라 잠시 멍해졌다.
그것은 김 건도 마찬가지였는지 박새롬 앞에서 굳은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때 안쪽에 있던 박새롬의 동료들이 반응했다.
"누나? 왜 그래?"
"괜찮아?"
"뭔데."
박새롬이 울음을 터뜨리자 초콜릿에 정신이 팔려 있던 동료들이 하나 둘 다가와 상황을 파악했다.
"아니, 이게 도대체...."
"갑자기 뭐야? 어디서 나타난 거야?"
입구에 가득 쌓인 상자들을 보면서 얼떨떨해하는 이들과,
"흐아아앙!"
"누, 누나, 그만 울어 봐요."
아예 자리에 주저 앉어 우는 박새롬과 그런 그녀를 달래는 이들.
"야! 씨발! 이거 봐봐! 라면이야, 라면!"
"뭐라고? 진짜?"
그리고 상자를 뒤져대는 이들로 상황은 완전히 뒤죽박죽이었다.
"아니, 씨발! 근데 왜 다 진순인건데?"
"야. 진순 맛있거든?"
"아, 모르겠고, 하나만 줘봐. 부셔먹게."
그렇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박새롬이 김건에게 기어와 말했다.
"뭐, 뭐든 말씀하세여. 흐윽, 주인님. 흐윽."
아무래도 충격 요법이 너무 지나치게 잘 들어간 듯 했다.
'조금 짠하네'
어찌됐든 자기 사람들을 위해 목숨까지 걸고 흡혈귀들의 땅을 밟은 사람이었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흐윽, 싯팔, 로또다, 흐극, 로또!"
그 이후 박새롬은 순종적인 태도로 모든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다.
083화 [Episode 18] 알박기 (2)
박새롬의 말에 의하면 생존자 그룹은 크게 종합운동장 그룹, 중앙동 그룹, 공업지대 그룹 이렇게 세 그룹으로 나뉜다고 한다.
"저희가 속해 있는 곳은 종합운동장 그룹이에요."
온순해진 박새롬의 설명을 듣던 김 건이 질문했다.
"여기는 마트인 것 같은데 어째서 그룹명이 종합운동장이지?"
마침 나도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곧바로 박새롬이 대답했다.
"여긴 저희 그룹의 본진이 아니거든요. 본진이 종합운동장 쪽에 있어서 종합운동장 그룹이라고 불러요. 그 근처에 있는 경찰서가 저희 그룹 본진이거든요."
"경찰서?"
"네.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경찰서가 아니라 그 근처 땅 전체를 본진이라고 해야 하긴 하는데..., 어쨌든 저희 그룹 대표가 거기 경찰서장이거든요. 그래서 다들 경찰서를 본진이라고 생각해요."
놀라운 이야기였다.
'마트에 있는 천 명이 다가 아니었을 줄이야.'
울산에 남아 있는 생존자 그룹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그 규모가 훨씬 큰 것 같았다.
"저희는 보급 부대예요. 보급 3팀. 그래서 여기에 자리 잡은 거죠."
보급 3팀이라는 것은 이와 비슷한 규모의 조직이 적어도 2개는 더 있다는 소리였다.
1팀과 2팀 모두 3팀과 같은 규모라고 가정하면 보급팀만 3천여명이 되는 것이다.
'그럼 전체 규모가 얼마나 된다는 거지?'
김건을 향해 말했다.
[종합운동장 그룹의 조직 구조와 전체 인구수를 물어봐 주시겠어요?]
박새롬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보급 부대는 세 팀, 전투 부대 세 팀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전체 인구는... 대충 일만 명을 조금 넘는 정도인 것 같아요."
"다른 그룹도 그 정도인가?"
"규모는 저희 그룹이 제일 크지만, 다른 두 곳도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지역에만 약 3만 명에 달하는 생존자들이 있다는 거였다.
"세 그룹에 속하지 않는 소규모 집단도 꽤 있어요. 대부분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뭉친 시민들인데, 그분들 숫자도 꽤 될 거예요."
살아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어떻게 그렇게 많을 수 있지??'
이상했다.
내 능력 안에서 보호받고 있는 시민들의 숫자가 현재 약 5만 명이었다.
이것도 서면에 있는 사람들과 자갈치 시장 쪽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모두 합한 인구수였다.
그런데 별도의 보호를 받고 있지도 않은 이곳에 있는 생존자들의 숫자가 수만 명에 달하다니.
'더군다나 이쪽에는 고블린이나 오크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력한 흡혈귀들이 있는데...?'
특히나 상급 흡혈귀들의 강력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나와 비슷한 급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시민들을 보호해준 게 아니고서야 이런 생존률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각성자들의 비율이 너무 많은 것도 그렇고, 이곳은 무언가 부자연스러웠다.
박새롬은 열심히 자신이 아는 정보를 토해내고 있었다.
"중앙동 그룹은 태화강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흡혈귀들을 막아주는 고마운 존재죠. 저희 쪽에서도 전투 부대를 파견해서 힘을 합쳐 흡혈귀들의 북상을 막아내고 있어요. 문제는...."
그녀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공업지대 그룹이에요. 이놈들은 대놓고 약탈과 범죄를 일삼고 있어요. 흡혈귀보다 더 한 놈들이죠. 제가 인간이 더 위험하다고 말했던 이유가 바로 이놈들 때문이에요."
위화감이 느껴졌다.
'...어째서 다른 몬스터들에 관한 이야기가 없지?'
주변을 돌아다니는 고블린이나 오크가 아니라 '인간'이 무섭다니?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나는 김 건에게 지시했다.
[김건씨. 고블린이나 오크에 대해서 좀 물어봐 주시겠어요?]
김건은 내 요구를 충실히 이행했고, 박새롬은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고블린? 오크? 농담하시는 거예요?"
박새롬은 진심으로 그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넌 오크 본 적 있냐?"
"아니, 고블린도 본 적 없는데."
"저 형이 저렇게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거 보면 진짜 있는 거 같은데."
다른 이들도 고블린이나 오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혼란스러워하는 김 건의 눈치를 보면서 박새롬이 말했다.
"가, 가끔 괴물처럼 큰 거대 멧돼지가 나타나기는 해요. 괜찮은 식량 공급원이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흠흠, 보급 3팀 팀장 얼굴이나 보러 가실래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그때였다.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음??'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는 개체가 집구석 근처에 접근하였습니다.]
[시민권을 제의하시겠습니까?]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한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여자는...?'
아까 시민권 제안을 거절했었던 날개 달린 여자였다.
김건이 뒤를 쫓았던 그 상급 흡혈귀말이다.
분명 울산에 도착했던 것을 절대자의 눈으로 확인했건만,
'어느 틈에?'
이번에도 여자 흡혈귀가 나타난 곳은 본가가 있는 자갈치 시장 쪽이었다.
절대자의 눈을 확장하여 그곳의 시야를 공유하려는 순간,
"크으윽!"
갑작스레 격통이 느껴짐과 동시에,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여러 개의 알림이 연속해서 나타났다.
뜨겁게 달군 인두가 몸속을 파고드는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레벨업 때마다 이보다 몇 배는 더 심한 고통을 겪어왔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 정도 고통에는 익숙했다.
절대자의 눈!'
고통이 느껴지는 부위였기에 금세 장소를 특정할 수 있었다.
절대자의 눈 시야에 날개를 펄럭이며 멀어지는 여자 흡혈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한 명 더 있다고?'
허공을 유영하듯 나아가고 있는 어떤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저놈은 뭐야?'
시스템이 인식한 개체는 분명 여자 흡혈귀 하나였었다.
그런데 막상 보니 웬 남자가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여자 흡혈귀처럼 피막의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허공에 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건...?'
화르륵!
검붉은 기운이 투명 장벽 위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정확히 고통이 느껴지는 부위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구멍?'
누군가 칼집이라도 낸 것처럼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은 천천히 아물어가더니 이내 검붉은 불꽃이 사라지며 완전히 깨끗이 사라졌다.
'무슨...??'
투명 장벽 너머로 멀어지던 남자가 이쪽을 향해 내려다보고 있었다.
놈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게 보였다.
「진조(眞) (Lv. 62)」
...
놈은 잠시 이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여자 흡혈귀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괴물이다.'
이것으로 더욱 명확해졌다.
'울산을 공략하지 못한 게 아니야'
저놈이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도 울산 전역을 쓸어버리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일부러 놔둔 거다.'
놈의 정확한 목적은 알 수 없었지만, 일부러 생존자들을 살려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포기해야 하나?'
저런 괴물이 존재하는 도시를 건든다는 것 자체가 불안으로 다가왔다.
괜히 놈을 자극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처음이다.'
투명 장벽이 뚫렸다.
그것의 의미하는 바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장벽을 뚫고 영역 안으로 강제로 들어올 수도 있다는 소리다.'
시민권 없이 영역에 발을 들이는 고렙의 몬스터.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나에게 적의를 가질 시 그대로 머리가 날아가는 시스템의 힘이 놈에게 적용될지 조차 미지수였다.
'만약에 놈이 여기까지 들어오게 된다면.....'
나는 무사할 수 있을까?
십중팔구.
'죽겠지.'
소름이 돋았다.
지금까지 안전지대 안에서 안락한 삶을 영위하면서 망각하고 있던 근원적인 공포감이 천천히 피어올랐다.
'지금은 물러났지만.....'
언제 또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울산과 부산은 너무 가까웠다.
놈이 직접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결국 위험을 방치하는 꼴이었다.
'그눈'
그것은 포기하고 떠나는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다음을 기약하는, 기회를 노리는 승냥이의 눈빛이었다.
놈은 반드시 다시 부산을 찾을 것이다.
'언젠가 부딪혀야만 하는 거라면'
기회가 있을 때, 조금이라도 주도권을 가져와야만 했다.
'우선 흡혈귀들의 숫자를 최대한 줄이는 거야.'
아무런 대책도 없이 머리부터 들이대려는 게 아니었다.
흡혈귀들의 피해를 극대화시킬 방안이 한 가지 있었다.
'이렇게 써먹을 일이 오네.'
전초기지 건설.
나는 울산에 알박기를 할 생각이었다.
'전초기지 건설을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전초기지를 건설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땅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사] 이상의 칭호를 가진 가신이 세 명 이상이 필요했다.
'사람이야 하동건 파티를 보내면 해결되지만.....'
땅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전초기지 건설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특정 지역에 자리 잡은 보스급 몬스터를 사냥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지하철역이나 건물에 자리 잡은 오크 족장 정도면 딱 적당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는 고블린이고 오크고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다는 거지.'
대신 흡혈귀들은 많았다.
결국 전초기지를 짓기 위해서는 태화강 남쪽에 있는 흡혈귀들의 구역을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는 뜻인데,
'그러면 너무 눈에 띈단 말이지.'
이 경우 흡혈귀들의 우두머리인 그 놈이 개입할 가능성이 지나치게 올라간다.
자그마한 구멍에 불과했지만, 투명 장벽을 뚫는 힘을 가진 놈이 개입하게 될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될 수 있으면 놈의 개입은 최대한 늦춰야만 한다.'
이런저런 점을 고려해 봤을 때, 박새롬이 안내해준 그 홈플러스가 여러모로 전초기지로 삼기 좋은 장소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
갑작스러운 고통에 꺼졌던 김건을 향한 절대자의 눈을 다시 활성화시켰을 때였다.
박새롬이 한 남자를 소개시켜주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신정민이라고 합니다."
"야! 3팀장 좀 더 허리 숙여! 이분이 어떤 분이신 줄 알아?!"
"아하하, 새롬이가 경어를 쓰다니. 이거, 꽤나 귀하신 분인가 보군요."
작은 키의 남자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김 건을 향해 손을 내밀어왔다.
나는 그놈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것 봐라?'
놈의 정체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중급 흡혈귀(Lv. 33)」
***********
서누리는 울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등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남자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누리가 눈치를 보거나 말거나 남자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방금 전 상황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힘은 도대체.....'
어린 세계수를 발견했을 때만 하더라도 기분이 좋았다.
지금 자신의 수준으로도 충분히 불태우거나, 잘하면 침식시켜 세계수의 권능의 일부를 집어삼킬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세계수에 다가가려는 순간 미지의 힘이 담긴 장벽이 자신을 막아섰다.
위대하신 분의 축복으로 그것을 뚫으려 시도해 봤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분명 세계수의 권능은 아니었다.'
세계수를 보호하고 있던 그 장벽은 전혀 다른 존재의 권능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흉측하게 불타오른 오른손이 조금씩 꿈틀거리며 재생되고 있었다.
자신의 재생력을 생각하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광경이었다.
'믿을 수가 없군.'
겨우 작은 구멍을 만들어낸 게 다였다.
그 대가가 이 정도로 가혹하다니.
'억지로 진입했다가는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자는 떠올렸다.
세계수를 보호하던 장벽의 거대한 규모와 영역 안에서 느껴지던 밀도 높은 권능의 존재감.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종류의 기운이었다.'
두려웠다.
동시에 경이로웠다.
'현세에 강림한 신이라도 된단 말이더냐.'
남자는 몸을 옅게 떨었다.
'곧 만월의 밤이 다가온다.'
만월의 밤,
피를 머금은 땅은 위대하신 분의 축복이 깃든 대지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위대하신 분의 축복은 빠르게 영역을 넓혀갈 것이고 이내 그 경이로운 권능조차도 침식시키고 말 것이다.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겠군.'
남자의 입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084화 [Episode 18] 알박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