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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욱!

종아리에 창이 박힌 싸이클롭스가 울부짖으며 주변을 살폈다.

하동건은 허공에 생성된 창을 집어 들어 다시 한 번 거인을 향해 던졌다.

우우웅―

스킬로 인해 공격력이 5배 상승한 창은 싸이클롭스의 종아리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크아아아악!

서면역에 있던 킹스네이크를 잡으며 36레벨이 된 하동건이었다. 거기다 김다정의 축복을 받은 상태에서의 창던지기는 거인에게 제법 아찔한 고통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의 창던지기로는 거인의 목숨을 위협할 수는 없었다.

분노한 싸이클롭스의 눈에 하동건이 들어왔다.

놈과 눈이 마주친 하동건이 급히 자리를 피했다. 3층 건물에서 뛰어내린 다음 전속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건물 숲 속으로 하동건이 사라지자 싸이클롭스가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으어어어어!

하동건이 사라진 건물 숲을 통째로 짓밟기 위해 걸어가던 그 순간.

푸슉!

이번에는 뒤꿈치 쪽에서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아아악!

수인화를 한 오언주가 뒤꿈치를 공격한 것이다.

오언주는 거인의 뒤꿈치에 새긴 상처를 보며 혀를 찼다.

'너무 얕아.'

겨우 살갗만 도려낸 정도였다.

김다정의 축복을 받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힘이 부족했다.

하지만 거인의 상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본 순간.

"크릉!"

그녀의 눈이 벌겋게 변하며 전신의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급격히 상승한 신체능력을 기반으로 다시 한 번 달려들어 발톱을 휘둘렀다.

퍼걱!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었다.

-크아아아악!

싸이클롭스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댔다.

'한 방 더···!'

상처 안으로 거인의 아킬레스건이 드러나 있었다.

완벽히 끊어내지는 못하더라도 공격하면 거인의 기동력을 효과적으로 제한할 수 있을 터였다.

오언주가 다시 한 번 발톱을 휘두르려는 순간.

부웅!

거인의 발이 엄청난 속도로 올라갔고, 목표를 놓친 그녀의 발톱은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올라갈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린 발이 오언주가 있던 바닥을 완전히 깨부쉈다.

"커헉···!"

민첩한 움직임으로 간신히 밟히는 것은 면할 수 있었지만, 싸이클롭스의 발 구름에 휘말렸으니 멀쩡할 수는 없었다.

콰아아앙!

포탄처럼 날아간 그녀의 몸이 건물 벽면을 박살내고 들어가서야 겨우 멈췄다.

"크흡!"

싸이클롭스가 오언주를 마무리하려고 다가가던 그때.

[어이! 이 멍청한 괴물 자식아!]

번쩍이는 갑옷과 창을 든 강덕수가 거인을 도발했다.

확성기를 사용한 탓에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싸이클롭스의 눈에는 번쩍거리는 은빛 창을 들고 있는 강덕수의 모습이 방금 자신에게 창을 던진 하동건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이번에는 놈을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한 것 같았다.

놈이 강덕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쿠우웅―!

도발에 성공한 강덕수가 아파트 정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도망치는 동안, 근처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던 김다정이 오언주가 날아간 건물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거기까지 지켜본 나는 권총으로 무장한 101명의 시민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준비하세요."

일렬로 늘어선 시민들이 권총을 든 채로 침을 꿀꺽 삼켰다.

"헉, 허억!"

전력을 다해 뛰어오고 있는 강덕수의 뒤로 잔뜩 성이 난 얼굴의 싸이클롭스가 쩔뚝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오언주가 만든 뒤꿈치의 상처 덕분에 금세 거리가 좁혀들지는 않았다.

쿠웅― 쿵!

'온다.'

이번 작전에서 1조가 맡은 역할은 '미끼'였다.

놈을 상대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로 놈을 유인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조는 매우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해 주었다.

쿠웅!

강덕수가 보호막 안으로 무사히 들어오고, 싸이클롭스가 정문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까악―

김 건의 까마귀, 까망이가 거인의 눈을 향해 돌진했다.

-아악!

기습적인 공격에 눈이 찔린 거인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까망이가 날아가는 방향을 노려봤다.

그 순간.

쐐애애액― 푸슉!

정문 근처의 아파트 옥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가영의 화살이 싸이클롭스의 손을 꿰뚫고 하나 밖에 없는 눈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카아아아악!

거인이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비명을 지르는 놈의 입은 커다랗게 벌어져 있었다.

슈슉!

거인의 입 앞에 문병호가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생쥐 한 마리가 들려 있었고, 싸이클롭스의 목구멍 너머로 생쥐를 집어 던졌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다.'

오언주가 리타이어 되는 것은 계획에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퀘스트 완료를 위해, 그리고 전체적인 이익을 위해서라도 그녀에게 막타를 양보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눈앞에 있는 거인은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을만큼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끝낼 수 있을 때 끝낸다.'

서예진은 미리부터 내 옆에서 가부좌를 튼 채로 생쥐와 감각을 연결하고 있었고, 그 대상은 당연히 싸이클롭스의 목구멍으로 넘어간 놈이었다.

절대자의 눈이 어두컴컴한 거인의 식도를 비추고 있었다.

'가스 소환.'

창고에 가득 채워 두었던 가스가 싸이클롭스의 식도와 위를 가득 채웠다.

다음 순간, 나는 절대자의 시야로 비친 어둠 속으로 최대한 커다란 불꽃을 이미지 했다.

화륵―

그렇게 피어오른 불꽃은 곧이어.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의 시발점이 되었다.

036화 [Episode 08] 환수 소환 (5)

콰과과과과―

싸이클롭스가 두꺼운 불길을 토해냈다.

정면으로 뿜어지던 불길은 이내 하늘을 향해 높이 치솟았다.

화르르륵―!

놈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공기가 따뜻해지는 듯 하더니 이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기를 차단하고 있군.'

집구석 영역이 정도 이상으로 뜨거워진 공기를 차단해버린 것이다.

한동안 화려하게 불을 내뿜던 거인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쿠웅!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앞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거인의 그림자가 점점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어? 어어?!"

"여, 여기로 떨어진다!"

"도망가!!"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려는 사람들을 향해 차분하게 말했다.

"제자리를 지키세요."

거의 완벽하게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방어벽 위로 쓰러진 놈의 머리를 향해 시민들을 화력을 집중시킬 것이다.

일종의 확인 사살이었다.

'이왕이면 마무리는 가신들이 했으면 좋겠는데.'

하동건이나 오언주가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마침 바로 옆에 서예진도 기사 칭호를 들고 있으니 그녀에게 총을 쥐어줘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 때, 검은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이제 곧 거인의 몸체가 방어막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재, 재현님! 뒤, 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최형준이 내 뒤쪽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

지금쯤이면 거인의 머리가 방어벽과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와야 할텐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곳에는.

-크으으으

'···말도 안 돼.'

놈은 입에서 시꺼먼 연기를 내뿜으며, 붉게 충혈 된 눈으로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격! 사격 개시! 재현님을 지켜!"

최형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 이후.

탕― 타앙―

시민들의 손에 들린 권총들이 거인의 눈을 향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크아아악!

나름대로 의미 있는 타격이 있기는 했다.

겨우 권총이라고 해도 총은 총이었고, 백 자루가 넘는 권총의 집중 사격은 제법 위협적이었으니까.

빗발치는 총알이 거인의 눈을 벌집으로 만들어 놓았다.

싸이클롭스의 눈은 완벽하게 제 기능을 잃어버린 듯 했다.

그러나 놈은 위장 안쪽에서의 가스 폭발도 견뎌낸 괴물. 겨우 38구경 권총으로 끊어낼 수 있는 목숨이 아니었다.

-크아아아아악―!

거인이 분노의 포효를 내질렀고, 용감하게 울리던 총소리들이 일제히 멈췄다.

그 직후 거인은 주먹을 들어올렸다.

마치, 이제는 자기 차례라고 말하는 듯 했다.

'온다···!'

긴장한 탓일까?

녀석의 묵직한 주먹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처음으로, 진한 죽음의 공포가 느껴졌다.

'막을 수 있을까?'

저 압도적인 주먹을 내 스킬이 버텨낼 수 있을까?

약간의 믿음은 있었지만, 확신은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방어벽을 공격했던 괴물 중 가장 쎈 놈이라고 해 봐야 28레벨이었던 켈리칸이 다였으니까.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더 진하게 내 머리 위를 덮쳐왔다.

'보이지 않는 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최후의 저항의 수단을 준비했다.

'거대화.'

작전을 시작하기 전, 아껴뒀던 스킬 포인트를 투자하고 얻은 기능이었다.

내 몸에서 튀어나온 보이지 않는 손이 순식간에 거대하게 변하며 거인의 주먹을 막아설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아아앙!!!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방어벽이 싸이클롭스의 혼신의 힘을 다 한 주먹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막았다!'

녀석의 주먹을 막아낸 방어벽은 작은 흔들림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실금조차 가지 않은 상태로 그저 그 자리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을 뿐이다.

놈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풀이하듯 계속해서 주먹을 내질러댔다.

콰아아앙― 쿠우웅!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그럴 때마다 육중한 충격음이 퍼져나갔지만, 영역 안으로는 아무런 충격도 전해져오지 않았다.

""와아아아아―!""

어째선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쏴라! 쏴!"

굳건한 방어벽 안에서 자신감을 얻은 시민들이 다시 역습을 개시했다.

투두두두―

거인의 주먹에, 팔에, 발과 다리 그리고 몸에 끊임없이 총알이 박히기 시작했다.

-크워어어어어!

그때 서예진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재현님, 어떻게 할까요? 한 번 더 시도하시는 게···."

"가능하시겠어요?"

"앞으로 한 번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이를 악물고 깍지 낀 두 손으로 방어벽을 내려치는 거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수로 저 입에 생쥐를 집어넣어야 할까요?"

생쥐 폭탄을 의식하고 있는 탓일까, 녀석은 공격을 감행하는 중에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타격이 없는 건 아니다.'

생쥐를 희생한 가스 폭발 공격은 확실히 먹혀 든 듯 했다.

거기다 시민들의 권총 공격도 계속해서 놈의 몸에 상처를 누적시키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하면 잡을 수 있을 거 같기는 한데···.'

거인의 괴물 같은 생명력이 언제 다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무언가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수단이 필요했다.

그때였다.

푸억!

어디선가 날아온 창 하나가 거인의 옆구리를 헤집었다.

'왔군.'

하동건을 비롯한 1조의 나머지 인원이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김다정의 치료로 멀쩡해진 모습의 오언주도 함께였다.

'보급형 창 소환.'

하동건이 자유롭게 날뛸 수 있도록 계속해서 보급형 창을 소환해주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허공의 창을 잡고, 거인을 향해 집어던졌다.

푸욱!

-크아아아악!

거인도 자신의 몸에 박히는 창에 대해 인지한 것인지 짜증내며 몸부림쳐댔다.

푸욱!

그러나 거인이 그러든 말든 놈의 몸에 박히는 창의 개수는 차곡차곡 늘어만 갔다.

그리고.

쐐애애액! 푹!

아파트 옥상에서 쏘아진 화살이 거인의 몸을 여기저기 헤집어댔다.

피어싱 스킬이 담긴 김가영의 화살도 거인의 몸을 벌집으로 만드는 데에 동참하고 나선 것이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거인의 몸을 작살내고 있던 그때.

띠링!

[삼족오(三足烏)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태양광 발전기의 효율이 100% 증가합니다.]

[태양광 발전기가 최대 효율에 도달했습니다.]

까미가 레벨 10이 됐다는 알림이었다.

[삼족오(三足烏)가 태양의 힘을 일부 개방합니다.]

[환수의 힘을 일부 계승합니다.]

[초급 속성 마법(火)이 중급 속성 마법(火)으로 진화합니다.]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중급 속성 마법(火)의 지식이 머릿속으로 들어오며 불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삼족오(三足烏)가 영역 내 적의 침입을 감지합니다.]

[삼족오(三足烏)가 힘의 개방을 요청합니다.]

[허가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응?'

이상한 알림이 하나 떴다.

'힘의 개방이라고?'

적의 침입이라고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싸이클롭스를 두고 말하는 것 같은데, 그 자그마한 녀석이 뭘 어쩌겠다는 것일까?

'해 봐.'

그 순간.

[300,000,000 원이 소모됩니다.]

'어? 3억?'

그와 동시에 13개 동에 설치된 태양광 시설에서 일제히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이 향하는 목적지는 우리 집.

30층의 거실 창가 쪽이었다.

파아아앗!

강렬한 태양빛이 그곳으로 집중된 직후.

콰직!

무언가 거대한 것이 우리 집 거실 창문을 뚫고 튀어나왔다.

'저건···?'

날개를 펼친 그것은 켈리칸보다도 서너 배는 더 커다란 덩치를 가진 까마귀였다.

윤기 나는 검은 깃털과 세 개의 다리를 가진 그것은 삼족오(三足烏)가 분명했다.

'···까미?'

거대화한 까미가 이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거인을 향해 입을 벌렸다.

지이이잉―

까미의 입에서 튀어나온 강렬한 레이저가 거인의 가슴부근을 훑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쿠우우웅!

싸이클롭스의 상반신이 미끄러지듯 추락했다.

까미의 일격이 거인의 몸을 두 동강 내버린 것이다.

"허어···."

믿기지 않는 광경에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크어, 아아아악!

방어벽 위로 떨어진 상반신만 남은 싸이클롭스가 두 팔을 버둥거렸다.

그 때.

"크허엉!"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수인화를 한 오언주가 거인의 등 쪽을 타고 달려왔다.

단숨에 싸이클롭스의 어깨까지 올라온 오언주가 거인의 목을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퍼석!

거인의 살갗이 도려내지면서 피가 뿜어져 나왔고, 그와 동시에 오언주의 두 눈이 붉게 변하며 그녀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크아아아앙!"

포효를 내지르며 내지른 그녀의 손톱이 거인의 목에 난 상처를 점점 더 크게 만들었다.

-크아아악!

거인이 손을 들어 오언주를 내치려할 때.

'보이지 않는 손, 거대화.'

거대화한 보이지 않는 손을 뻗어 그것을 막아내었다.

콰아앙!

그 결과 오언주는 오롯이 거인의 목을 공격하는 데에만 집중 할 수 있었고.

콰직! 퍼걱―!

끝끝내 그녀의 손톱이 싸이클롭스의 경동맥을 헤집었다.

푸확―!

싸이클롭스의 목에서 피분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방어벽 위에 쏟아진 거인의 피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싸이클롭스(Lv. 51)를 사냥하셨습니다.]

[초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31,925,374,089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300억이 넘는 거금이 꽂히는 것과 동시에.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레벨이 네 단계나 한꺼번에 상승했다.

'크읍!'

그 이후 당연하다는 듯이 찾아온 아찔한 격통과 함께 집구석 영역이 넓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아 있던 12개의 동 전부가 내 휘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렇게 1단지 전체를 집어삼키게 된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

고통이 너무 심하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고 하던가.

지금 내 상태가 딱 그랬다.

1단지 전체를 집어삼키며 확장을 끝낸 듯 하던 영역이 폭발적으로 넓어졌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건물이나 땅 표면을 따라서 확장되던 집구석 영역이 허공을 집어삼키더니 최종적으로는 돔 형태의 모양을 갖추게 됐다.

[축하합니다!]

[아파트 1단지 전체에 집구석 선포하셨습니다.]

[건설 지원금 10,000,000,000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보상과 시스템 알람, 그리고 몸이 터져나가는 듯한 격통이 끝났을 때, 긴장이 풀린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쓰러졌다.

"재현님!"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최형준이 쓰러지던 내 몸을 붙잡아줬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최형준이 내 등과 무릎 뒤쪽을 잡고 들어올렸다.

"······."

졸지에 공주님처럼 안기는 자세가 되어버린 나는 생각했다.

'이건 좀···.'

쪽팔리는데.

"···잠시만요."

"예? 왜 그러십니까? 어디 불편한 데라도···."

그냥 평범하게 업어달라고 부탁하려던 그때였다.

-삐입···.

내 배 위로 조막만 한 털 뭉치 하나가 내려앉았다.

"너 임마···."

제멋대로 3억이나 써먹다니.

게다가 3억이나 사용하면서 한 것이라고는 고작 공격 한 번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공격이 결정적이었지.'

당연한 말이지만, 까미가 사용한 3억 따위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 이후에 벌어들인 돈이 300억이 넘어가는 데 그런 푼돈을 아쉬워할 리가.

'환수 소환. 집구석 영역 내로 활동이 제한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엄청난 가성비다.'

더불어 녀석을 소환할 때 들어간 10억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환수 소환 10마리를 채워버릴까?'

이 정도 성능이라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환수 소환 버튼을 바라봤을 때.

"······?"

나는 눈을 의심했다.

[환수 소환] (10,000,000,000 원) {비활성화}

어째서 0이 하나 더 늘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100억? 100억이라고?'

게다가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막혀 있었다.

날것의 욕설이 튀어나오려던 찰나.

[시민 오언주가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퀘스트 비용 324,576,089 원이 소모됩니다.]

오언주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037화 [Episode 09] 집결 (1)

이준혁은 서면역 근처에서 생존자 집단을 이끌던 각성자 중 한 명이었다.

겨우 물을 만들어내는 능력이었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물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생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 주었다.

덕분에 그가 이끄는 생존자 집단은 다른 집단에 비해 상당히 많은 숫자가 살아남은 상태였다.

그러나 많은 숫자의 생존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장점이 아닌 단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숫자만큼 빠르게 식량이 소모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포함해 총 24명.

성인 24명이 먹어대는 식량은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이제 진짜 한계다.'

주변에 있는 몬스터들과 싸우며 치열하게 얻은 식량들도 슬슬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디로든 떠나야 해.'

그런 고민을 하던 때였다.

콰르르르릉―

절망의 전주곡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어느 유난히 화창한 오후쯤이었다.

쿠구구구구―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뒤흔들렸다.

그가 있는 곳이 지하였기에 더욱 심하게 체감이 되었다.

'지진인가?'

그때 위쪽에서 다급하게 내려온 남자 한 명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

"준혁아! 당장 위로 올라와 봐야겠어!"

"왜? 무슨 일이야?"

"큰일 났어! 괴물이야, 괴물!"

공포로 짙게 물든 남자의 표정을 본 이준혁이 말했다.

"진정하고, 안내 해. 어디로 가면 돼?"

"따라와."

그를 따라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는 와중에도 땅의 진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심해지고 있다.'

이준혁이 남자의 안내를 따라 3층까지 올라왔을 때, 건물 사이 틈으로 '그것'의 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게 뭐야?"

거인이 그곳에 있었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키 때문에 서면 어디에 있든 녀석의 모습이 보일 듯 했다.

그 괴물이 건물들을 부수고 있었다.

"준혁아. 이, 이제 우린 어떡하지?"

이준혁은 멍하니 괴물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형."

"으, 응?"

"어쩌긴 뭘 어째요. 저걸 상대로."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모두에게 지하에서 꼼짝하지 말고 숨어 있으라고 전해요."

"뭐? 하, 하지만···!"

"모르겠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형. 그저 저 놈이 여기로 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요."

포식자가 등장하면, 피식자의 선택지는 보통 두 가지로 나뉜다.

도망치던가, 숨어 있던가.

그러나 이준혁 일행의 상황에서는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선택할 수 없었다.

"아니면 어디로 가게요? 당장 밖에 고블린이나 오크들이 깔려 있는데, 어디로 도망칠 생각인데요? 놈들이랑 싸우다가 거인의 눈에 들기라도 하면 그대로 다 끝장인데?"

"그, 그건··· 알겠어. 숨어있으라고 전할게. 그런데 너는 뭐 하려고?"

"저는 저 놈이 어디로 가는지 지켜보려고요."

"그, 그래."

그렇게 남자를 내려 보낸 뒤 이준혁은 건물 옥상으로 이동했다.

옥상에 도착하자,

"캬아아악!"

고블린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아직 남아 있었나.'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고블린을 향해 가볍게 야구 배트를 휘둘렀다.

콰직!

고블린은 한 방에 즉사했다.

이준혁이 이토록 쉽게 고블린을 사냥하는 것은, 그가 각성자이기 때문이었다.

각성하는 순간 일반인과는 다른 신체 스펙을 가지게 되는데다 몬스터를 사냥하면 할수록 미세하게 강해졌다.

이제는 운동을 열심히 한 사람들보다 뛰어난 신체 능력과, 모든 감각이 극한으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일반인의 스펙을 한참 뛰어넘은 것이다.

'이제 고블린 가지고는 아무런 느낌도 안 나네.'

일정 수준 이상이 된 이후로 이제는 고블린을 사냥해도 특유의 그 성장하는 느낌을 느낄 수 없었다.

'적어도 오크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건가.'

이 특유의 성장하는 느낌은 동료들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마도 각성자만 성장할 수 있는 거겠지.'

쿠우우웅―

다행히도 거인은 이쪽 건물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거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런 걸 잡을 수만 있다면, 엄청나게 강해질 수 있을 거 같은데.'

알고 있었다.

그게 쓸데없는 망상에 불과하다는 건.

그러나 욕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 괴물을 잡기만 한다면 당장 자신의 신체 스펙이 한 단계 더 진화하리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크아아아아악!

거인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음?'

무슨 일인가 하고 자세히 노려보니 누군가 거인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친 놈 아니야?'

자신은 상상만으로 끝낸 일을 누군가 실제로 벌일 줄이야.

'저 놈은 무조건 나와 같은 각성자다.'

아직 자신과 같은 각성자와 마주친 일은 없지만, 확신 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목숨 걸고 위험한 도박을 벌일 리가 없었다.

이준혁의 눈에는 그가 경험치 욕심에 눈이 멀어 무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자기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는 한심한···.'

그런데.

-아아악!

이변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

고통스러워하는 거인의 목소리를 보면 그 주제 파악 못하는 한심한 놈이 나름 유효타를 먹이고 있는 듯 보였다.

'설마? 거인을 잡을 수 있다고?'

그런 기대가 들었던 것도 잠시.

콰아아아앙!

거인의 유독 거대한 발이 메테오가 되어 지상을 내려찍었다.

쿠구구구―!

"크윽!"

순간적으로 흔들리면서 주변 건물들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광경이 보였다.

그리고 그 진동의 일부가 이준혁이 있는 건물까지 전해져왔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 하였지만, 각성자가 되며 뻥튀기 된 신체능력과 운동신경 덕분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죽었겠군.'

거인의 발에 밟혀 죽었을 이름 모를 각성자를 애도하던 그때.

'음?'

거인이 다시 발광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까보다 묘하게 거인의 발걸음이 느렸다. 자세히 보니 한쪽 발을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다.

'뭐야? 아직 살아있다고?'

혼란스러웠다.

지금 저 각성자는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각성했기에 저 거인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얼마나 강력하기에.

자신도 몬스터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 날 이후 끊임없이 사냥하며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저런 괴물과 싸울 수 있는 수준의 각성자가 있다니.

'나도 전투 관련 능력을 얻었더라면 가능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저 괴물과 싸우는 이미지가 그려지질 않았다.

그런데 그 이후 더욱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다.

화르르륵―!

"!!!"

거인의 입에서 거대한 불길이 분수처럼 치솟았다.

그와 함께 이준혁이 있는 곳까지 따스한 바람이 불어 닥쳤다.

이 거리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불길이라니.

'저건 또 무슨 괴물 같은 능력이야?'

저 폭발은 거인의 능력이 아님에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능력이라면 저렇게 타격을 입은 듯한 모습을 보여줄 리가 없었으니까.

그렇다는 것은 거인과 전투를 벌이는 각성자의 능력이라는 건데, 저런 압도적인 스케일이라니.

'나와는 수준이, 아니 격이 다르다.'

이제는 거인이 아니라, 거인과 싸우고 있는 정체모를 각성자가 더 괴물처럼 보이고 있었다.

비슷한 수준이라야 질투도 나고 경쟁심도 불태울 텐데, 저건 도를 넘었다.

그저 경이로운 모습이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거인도 무시무시한 생명력으로 그 대폭발을 견뎌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한참이나 바닥을 향해 주먹질을 하던 거인은 어느 순간.

번쩍!

찬란한 빛의 번쩍임과 함께 상반신이 잘려나갔다.

"!?!?!?!"

그것으로 전투는 끝났고, 갑자기 거인의 몸이 통째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미쳤다."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이준혁은 한 가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저 사람이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 사람에게 붙어야 한다고.

'지금 당장 찾아가야해.'

결심이 서자마자 이준혁은 곧바로 지하로 내려가서 사람들을 설득했다.

길게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준혁이가 가자고 하면 가야지."

"당연히 없겠지만, 준혁이 말에 반대하는 사람?"

"없지."

이미 그가 있는 생존자 집단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준혁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는 조만간 떠나야 한다는 것까지 모두가 인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이준혁의 말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이들밖에 남지 않았다.

애초에 이준혁은 자신의 의견에 토를 다는 사람을 데리고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냉정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연한 선택일 뿐이었다.

"출발하죠."

의외로 거인이 죽은 아파트단지까지 가는 길은 그리 험난하지 않았다.

거인이 설쳐댄 덕분인지 주변에 몬스터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준혁이 이끄는 생존자 집단은 고블린 사냥은 물론이고, 오크들까지도 사냥해 본 적이 있을 정도로 고급 인력들이었다.

물론 이준혁의 활약 덕분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일인분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게 중요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들은 한 시간도 안 되어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오빠, 저기야?"

"그런 거 같아."

이준혁이 긍정하자 옆에 있던 남자가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감상을 내뱉었다.

"준혁이 네 말대로 뭔가 있기는 있나 보네. 아무리 신축이라고 해도 이 난리가 났는데 너무 깨끗해 보이는 걸?"

특이한 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형 말대로다. 주변이 너무 깨끗해.'

그 흔한 사람 시체도, 몬스터 사체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핏자국이나 그런 것들도 거의 없는 편.

마치 누군가 청소라도 한 듯한 모양새였다.

그때였다.

"어? 저기 좀 봐 준혁아."

남자가 가리킨 곳에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대부분이 오크의 창과 활로 철저하게 무장을 한 그룹이었다.

어렴풋이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는데 그 내용이 뭔가 이상했다.

"와. 진짜 식겁했네."

"그러게. 고블린 사냥으로 용돈 좀 벌려다가 뒤질 뻔 했네 진짜로. 갑자기 거인이라니."

"그 거인은 정체가 뭘까."

"몰라. 근데 돈 얼마 벌었냐?"

"나? 오늘은 고블린 세 마리 잡았으니까 만 원 정도? 경험치도 쏠쏠하게 먹었고, 가서 컵라면이나 사 먹어야겠다."

"좋겠네. 나는 두 마리 밖에 못 잡았는데."

고블린을 잡아서 경험치를 얻는다는 표현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준혁 자신이 느끼는 감각도 딱 저 표현에 알맞았으니까.

'근데 돈은 무슨 소리야?'

고블린을 세 마리 잡아서 만원을 벌었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잠깐. 그런데 경험치를 얻는다는 건 저 사람들도 그 감각을 알고 있다는 건데, 그럼 저 사람들이 죄다 각성자라는 소리야?'

이준혁의 그룹에서 저 감각은 오로지 각성자인 그 혼자서만 느끼고 있는 감각이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모두가 경험치에 대한 이야기에 공감하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게다가 뭐지 이 위화감은?'

저들에게서 단 한 톨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몬스터에 대한 두려움도, 생존에 대한 절박함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이 거인을 죽인 그 엄청난 각성자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준혁아. 왜 그래?"

"현찬이 형."

"응?"

"저 사람들 따라가자."

그렇게 그들의 뒤를 따라 아파트 단지에 진입하려던 어느 순간.

"억!"

"뭐야?"

갑자기 투명한 벽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출입 불가.]

그리고.

[시민권을 획득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그들의 앞에 묘한 글자가 떠올랐다.

"이건 또 뭐야?"

"준혁아. 이거 어떻게 할까? 보니까 시민권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모양인데?"

이준혁은 난생 처음 보는 허공의 글자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받죠."

띠링!

[시민권을 획득하셨습니다.]

그것을 받자마자 투명한 벽이 사라지며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파티 퀘스트"

퀘스트 내용 : 114동 3002호로 찾아오기.

제한 시간 : 1시간 00분 00초

보상 : 소량의 경험치.

실패 페널티 : 없음.

다시 한 번 그 홀로그램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퀘스트?"

"경험치는 또 뭐야?"

이준혁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부르니까 일단 가 봅시다."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것들에 대해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당장 자신도 무(無)에서 물을 만들어내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게임 시스템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으니까.

그렇게 자신의 그룹 23명을 이끌고 퀘스트 지역을 찾아갔을 때였다.

"반갑습니다, 이준혁씨."

그와 마주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다.'

그 거대한 거인을 무릎 꿇렸던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남자라는 것을.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의 압도적인 존재감은 그 덩치만 큰 거인보다도 더 거인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저는 김재현이라고 합니다."

그의 전신에서 오오라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사소한 몸짓과 말투에 깃든 품격이 절로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과거 귀족이나 왕족, 황족이라는 계급은 이런 사람을 위해 존재했던 게 아니었을까.

이준혁은 김재현의 손을 마주잡으며 허리를 구십도로 숙였다.

"이준혁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038화 [Episode 09] 집결 (2)

허리를 숙인 이준혁을 바라보며 그의 시민 정보창을 확인했다.

『이름 : 이준혁 (Lv. 33)

신뢰도 : 48

각성 능력 : 크리에이트 워터

경험치 분배율 : 0% (+100%)

정산금 분배율 : 0% (+100%)

★퀘스트 부여 퇴출』

크리에이트 워터 (B 등급)

정신력을 소모하여 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신기하게도 능력에 비해 레벨이 높은 남자였다.

서예진이 31레벨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준혁의 레벨은 엄청 높은 편이라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서예진보다 각성 능력의 등급도 낮은 데 말이지.'

B 등급 능력이니 25레벨 정도에서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는 것은 각성 후에 8번이나 레벨업을 했다는 소리인데, 그만큼 몬스터 사냥을 많이 했다는 뜻이 된다.

인성에 하자가 있어보이지도 않았다.

'가신으로 들여도 되겠어.'

처음부터 신뢰도가 높아서 금방 가신 등록의 조건을 채울 것 같았다.

"함께 오신 분들의 총원이 몇 명이라고 하셨죠?"

"저를 포함해서 총 24명입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방 세 개를 드리겠습니다. 1802호는 준혁씨가 쓰시면 되고, 1501호랑 1302호는 나머지 분들이 사용하시면 됩니다."

이준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네?"

"전기나 수도, 가스도 전부 공급해드릴 테니 우선 가서 샤워라도 하시죠."

"자, 잠시만요. 집을 주신다고요?"

"네. 이준혁씨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시민 이준혁의 신뢰도가 50을 달성했습니다.]

[충성도가 개방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빠르게 반응이 왔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준혁의 뒤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다른 사람들도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저,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들 고블린 한, 두 마리쯤은 감당 가능한 실력이니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그 남자의 말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레벨은 겨우 9레벨이었다. 나름 높은 편이기는 했지만, 평균적인 레벨일 뿐이었다.

'몬스터 사냥을 했다면 레벨이 더 높아야 정상 아닌가?'

그를 향해 물었다.

"고블린을 사냥해 보신 적이 많으신가 봐요?"

그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벌써 제 손에 죽은 고블린의 숫자만 세 자리 수는 될 겁니다."

그렇다면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당장 시민들이 기본급 스킬을 획득한 뒤로 고블린 몇 마리만 잡아도 금세 10레벨을 달성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렇게나 많은 숫자의 고블린을 사냥했다면 적어도 10레벨대 초반은 달성해야 할 텐데.

"나머지 분들도 그런가요?"

"차이는 있지만,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대부분 수십 마리 정도는 잡았을 겁니다. 저기 저 형은 오크를 잡은 적도 있고요."

그러나 다른 이들의 레벨도 전부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다.

10레벨이 넘는 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다들 운동으로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몸이 좋은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 10레벨 대였던 것을 생각하면, 저들은 수많은 고블린들을 사냥하고도 레벨이 오르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레벨업이라는 게 각성자만 가능한 거였나?'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일반인들은 몬스터를 사냥하더라도 경험치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은 시민권을 받기 전부터 몬스터를 사냥한 경우가 잘 없어서 알 수 없었던 정보였다.

지금까지 그런 경우는 하동건 파티나 오언주 밖에 없었으니까.

'시민권을 얻으며 성장할 수 있게 되는 거였군.'

사실상 시민권을 얻는 것만으로도 유사 각성자 대우를 받게 되는 셈이었다.

'생각보다 내 능력이 엄청나구나.'

지금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시민의 한계 인구수는 1만 9천 명.

유사 각성자 1만 9천 명을 육성할 수 있다는 소리가 되는 것이다.

이준혁을 향해 물었다.

"저 분의 말이 정말인가요?"

"네. 조금 허풍이 섞여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사실입니다."

"야! 내가 언제···!"

나는 순수하게 감탄하고 말았다.

"대단하네요."

나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부디 몬스터 사냥에 적극적으로 나서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냥으로 얻은 돈은 1층의 매점에서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 2층에 있는 헬스장에 등록하시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네?"

몬스터를 잡아서 돈을 번다는 개념을 아예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눈치였다.

시민권을 받기 전에는 몬스터를 사냥하더라도 돈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동건 파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덕분이었다.

시민이 되기 전에는 몬스터를 잡아도 아무런 알림도 뜨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런 것들을 이들에게 일일이 설명하자니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았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21층에 가셔서 김다빈씨를 찾으세요. 제가 보냈다고 말씀하시면 친절하게 설명해주실 겁니다. 그리고···."

상점에서 그들에게 줄 선물을 샀다.

라면, 초코파이, 콜라와 과자 등등.

그리고 활과 화살 10세트와 창 10자루를 소환했다.

지이잉―

"이것은 제 약소한 선물입니다."

그들이 기대에 걸 맞는 활약을 보여주기를 바라며.

[시민 이현찬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차정현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장진영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김지태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

······

그렇게 그들을 보내고 나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시우야, 맛있어?"

그곳에는 행복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오언주가 있었다.

"웅! 맛있어요!"

5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의 앞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소시지 야채 볶음, 스팸구이, 계란후라이와 함께 고슬고슬 잘 지어진 따스한 밥과 미역국이 놓여 있었다.

"엄마. 그런데 누구 생일이에요?"

"으응? 아니?"

"그런데 왜 미역국이 있어요?"

"우리 시우가 좋아하잖아."

"와아! 너무 좋아요!"

정성껏 차린 밥을 오물오물 먹는 시우를 보며 오언주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맛있어?"

"네!"

거실로 돌아오는 나를 발견한 시우가 숟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법사 삼촌이다!"

나는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 다음 식탁에 앉았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재현님."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감사드려야죠. 시우 덕분에 이런 맛있는 집 밥도 얻어먹고."

부활한 시우는 집구석 영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도 지금까지 레벨업하며 확장된 영역이 아닌, 우리 집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게 오언주가 지금 우리 집에 있는 이유였다.

"잘 먹었습니다!"

시우는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고는 곧바로 소파로 달려가 앉았다.

"삐삐야, 이리 와!"

-삐입

까미는 시우가 다가오자 작게 한숨을 내쉬며 시우의 품에 안겼다.

내가 될 수 있으면 시우에게 맞춰주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시우는 까미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오언주를 향해 말했다.

"엄마! 저 고고다이노 틀어주세요!"

"그래."

원래라면 시우의 바램은 들어줄 수 없었을 것이다. TV채널은 모두 종영되었고, 인터넷이 되지 않는 이상 IPTV의 다시보기도 불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오언주의 집에는 고고다이노 영상이 저장되어 있는 컴퓨터가 있었다.

그것을 우리 집으로 옮겨와서 티비에 연결해 틀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움직이는 바위 스테고사우르스!]

평소에 시우가 좋아하던 만화라 아예 다운로드 받아 놓은 덕분이었다.

티비에 집중하는 시우를 지켜보며 조심스럽게 오언주에게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네? 뭐가요?"

"여기서 나갈 수 없는 거요. 저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오언주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에 이렇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차라리 잘 됐어요. 이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편이 재현님께도 좋을 테니까요."

항상 그녀의 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분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저는 지금 너무 만족스러워요. 평생 재현님께 충성을 바치고 싶을 정도로요."

[시민 오언주의 충성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오언주의 충성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시민 오언주는 이미 가신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가신 보유 한계치가 늘어납니다.]

"······."

굳이 시스템 알림이 아니더라도 표정과 태도에서 그녀의 마음이 전해져왔다.

오언주는 내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 설거지를 마치고 나서야 아들에게로 다가갔다.

"시우야. 엄마도 같이 봐도 돼요?"

"네!"

그녀는 자신의 아들 옆에 꼭 붙어서는 머리에 입을 맞춘 뒤 조용히 그렇게 한참을 옆에 붙어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걸까.

'조급해 하지 말자.'

겨우 하루였다.

이 하루를 손에 넣기 위해 오언주가 그동안 어떤 태도로 임무를 수행해 왔던가.

하루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었다.

'어차피 서예진의 생쥐가 본가로 향하고 있으니까.'

거인의 횡포로 박살이 난 부산역 부근을 지나간다고 애를 먹긴 했지만, 지금은 무사히 넘어가 자갈치로 향하고 있었다.

'생쥐가 집에 도착하면 가족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전달해 줄 수 있다.'

물이나 식량을 줄 수도 있었고, 총과 같은 무기를 건네줄 수도 있었다.

편지를 적은 종이를 창고 스킬로 건네어 내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절대자의 눈을 서예진이 감각 공유를 한 생쥐에게 고정한 채로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또 왔군.'

이준혁 일행뿐만이 아니었다.

거인을 잡은 이후로 생존자들이 우리 아파트 단지로 집결하고 있었다.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는 개체가 집구석 근처에 접근하였습니다.]

[시민권을 제의하시겠습니까?]

이번에는 가족으로 보이는 여섯 명의 남녀였다.

'시민권 제의해.'

이준혁의 사례가 있었던지라 기대감을 품고 확인해봤지만, 이번에는 각성자가 없었다.

'바로 김다빈을 찾아가라고 해야겠군.'

각성자가 없다면 굳이 나를 찾아오라는 퀘스트를 주어 신뢰도나 충성도 작을 할 필요는 없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어느새 벌써 잘 시간이 되었다.

"오언주씨는 시우랑 안방 침대에서 주무시면 됩니다."

"아닙니다. 저희는 밖에서 자도―."

"안 됩니다. 시우랑 같이 편하게 주무세요. 명령입니다."

"···배려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강제로 그들을 안방으로 들여보내고 나는 소파에 누웠다.

소파에 누워 있으니 완전히 닫기지 않은 안방 문틈 사이로 오언주의 자장가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듣고 있자니 스르륵 눈이 감기는 것 같았다.

그날은 그렇게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도 특별할 것 없이 흘러갔다.

오언주가 해 주는 밥을 시우와 함께 먹고, 시우가 좋아하는 만화를 다 함께 시청했다.

시우는 까미를 귀여워했고, 까미는 태양빛을 쬐는 것을 방해하는 시우를 귀찮아했다.

오언주와 시우는 함께 낮잠을 자고, 내가 상점에서 사준 장난감을 함께 가지고 놀았다.

그동안 시간은 무색하게도, 단 한 순간도 기다려주지 않은 채 흘러만 갔다.

딱 하루였다.

내게 오언주와 시우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는 시간은.

약속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어느새 이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엄마."

"응?"

"왜 울어?"

"엄마 안 울어."

오언주는 자신의 아들을 품에 안은 채로 하염없이 울고만 있었다.

"아닌데, 우는데."

시우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한 손을 들어 올려 어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시우가 오언주의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울지 마세요, 엄마."

"흑. 시우야···."

그것이 기폭제가 된 것일까.

그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이 폭발하듯, 오언주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흐윽. 엄마는··· 무서워."

"뭐가요?"

"우리 아들이 없는 세상이 너무 무서워요···."

오언주는 시우가 다치지 않게 조심하며, 최대한 강하게 끌어안았다.

"엄마 숨 막혀."

"미안···."

울먹이는 얼굴에서는 눈물이 그칠 줄을 몰랐다.

하염없이 떨리는 두 손을 조심스럽게 시우에게서 떼어내고, 목소리는 계속해서 갈라졌다.

행여 힘 조절을 하지 못할까 어쩌지도 못하는 모습이, 그러면서도 흘러가는 시간을 안타까워하는 그녀의 모습이 보고 있기가 괴로웠다.

그때, 시우가 짧고 자그마한 두 팔로 오언주를 안아주었다.

"엄마. 저 여기 있어요. 어디 안 가."

따스한 목소리로, 자신의 엄마를 안심시키려는 시우의 모습에.

"흐흐윽."

오언주는 무너져 내렸다.

"엄마, 사랑해요."

"나도, 엄마도 우리 시우 사랑해. 시우야 엄마는···."

그때,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다.

시우의 몸이 점점 흐려지고, 목소리가 희미해진다.

아이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인지, 자신의 어미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안녕, 엄마."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시우, 시우야! 시우야!"

시우가 떠나가고.

"흐윽. 흐으윽."

오언주는 한참이 지나도록, 그 자리에 시우가 남겨둔 온기가 다 사라질 때까지, 충분히 슬퍼하고 눈물 흘렸다.

희망.

희망은 절망 속에서만 피어나는 꽃이다.

그렇기에 희망을 손에 넣은 사람은 언제나 절망의 구렁텅이 한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는 거겠지.

잔인하게도.

"너무 낙담하지 마십시오.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니까요."

나는 그녀에게 다시 한 번 희망을 불어넣었다.

"흐윽. 저, 정말입니까?"

오언주가 눈물범벅인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악마의 유혹에, 오언주가 귀를 기울였다.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지."

[시민 오언주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오언주의 신뢰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태고의 생명력'을 획득합니다.]

039화 [Episode 09] 집결 (3)

'젠장.'

백승엽은 어제부터 기분이 하루 종일 좋지 못했다.

'사라졌어!'

자고 일어나니 김재현에게 하사 받았던 보급형 창과 운 좋게 얻었던 오크의 창이 사라져 있었다.

게다가 열심히 벌어들인 전 재산의 압수. 자고 일어나니 그동안 열심히 벌어뒀던 돈이 사라진 것이다.

그런 일을 겪은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너네들 것도 없어졌다고?"

"어. 자고 일어나니까 전부 사라져 있더라."

그와 함께하는 쌍둥이, 문지훈과 문상훈의 무기와 전재산도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문지훈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알아보니까 이런 일을 겪은 사람들이 꽤 있더라. 그런데 우리를 포함해서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뭔데?"

"정문에서 군필자 소집할 때 안 갔다는 거야, 씨팔. 심지어는 거기 갔다가 되돌아온 놈들도 멀쩡한 거 같더라."

문상훈이 옆에서 한숨을 크게 내쉬며 후회했다.

"아, 그때 그냥 갔어야 했는데."

그 말을 들은 백승엽은 곧장 문상훈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말했다.

"그래서 내 탓이라는 거냐? 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씨발, 너네들도 동의했잖아! 네 입으로 그런 명령에 따르는 것들이 병신이라고 말했어. 맞아, 아니야?!"

문상훈이 잔뜩 쫄아서는 대답했다.

"마, 맞지. 미안해, 승엽아."

"쯧."

백승엽은 혀를 차고는 문상훈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들에게서 무기를 거두어 간 것은 분명 김재현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애초에 자신들이 먼저 잘못했기에 명분이 저쪽에 있다는 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솔직히 말해서 김재현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퇴출될 수도 있다.'

딱 한 번 그런 경우가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미성년자를 건드리려다 걸려서 그대로 퇴출당했다고 하는데, 그 범죄자 새끼는 얼마 뒤 길거리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고블린들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거역한다면 나도 그렇게 되겠지.'

사실상 이곳에서 퇴출되면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인 만큼 그에게 대드는 일 같은 건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니 애꿎은 문상훈에게 화풀이를 하게 되는 것이다.

'씨발 지하 주차장이 아니라 아예 단지 밖으로 도망쳤어야 했는데.'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인이 나타나는 타이밍에 사냥을 나갔던 이들은 모두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정문에 갈 수 없었던 이들은 모두 운 좋게 처벌을 면한 것이다.

거인이 쳐들어왔을 때, 지하 주차장이 아닌 아파트 단지 밖으로 도망쳤다면 자신도 처벌을 받지 않았을 것 같았다.

'좆같네.'

그를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은 정문 소집에 응한 자신의 동생, 백승민의 존재였다.

그는 김재현에게 무려 권총을 하사받았다.

솔직한 심정으로 당장 그 총을 훔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감히 김재현이 직접 하사한 물건에 손을 댔다가는 어떤 화를 입을지 몰랐다.

이제는 집구석에서 동생 눈치마저 봐야하는 실정이었다.

"하아.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그러나 백승엽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겪은 것들은 겨우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김재현에게 '처벌'을 받았다는 딱지가 붙은 남자들이 후에 생존자 그룹에서 어떤 대우를 받게 되는지, 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또한.

"퀘스트"

퀘스트 내용 : 고블린 사냥. (0/20)

제한 시간 : 24시간 00분 00초

보상 : 소량의 경험치.

실패 페널티 : 1분 동안의 극심한 고통.

'······이건 또 뭐야? 극심한 고통?'

앞으로 자신들이 이 안전 구역 내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어떤 책임을 져야하는 지도 몰랐다.

***

태고의 생명력.

오언주가 가지고 있는 A 등급 스킬 중 하나로 상처가 늘어나는 것에 비례하여 재생력이 급격히 증가하는 능력이었다.

'신뢰도 100 보상이 대상이 가지고 있는 스킬일 줄이야.'

당장 이 스킬이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다.

내가 전투에 나설 것도 아니었고, 집구석 밖으로 나갈 일이 없는 이상 내가 다치게 될 상황은 거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신뢰도 100의 보상으로 스킬을 얻었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었다.

'문병호의 신뢰도가 100을 앞두고 있다. 만약 문병호의 각성 능력을 얻게 된다면···.'

텔레포트.

시야가 확보된 곳으로 이동 가능한 스킬이었다.

'전초기지를 활성화 시킨 다음, 절대자의 눈으로 텔레포트를 사용한다면?'

이론상 정신력만 충분하다면 그곳으로 이동이 가능할 것이다.

'정신력을 높여놔야겠군.'

앞으로는 스킬 숙련도가 아니라 정신력 강화를 퀘스트 보상으로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일일 퀘스트 보상으로 내 정신력을 강화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쯤 눈물을 멈춘 오언주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재현님. 이제 보내주십시오. 제가 직접 재현님의 가족 분들을 구해오겠습니다."

"지금이요?"

"네. 원래라면 어제 작전을 시작했어야 했는데, 저 때문에 하루가 미뤄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귀중한 시간 양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배려해주신 만큼 보답하고 싶습니다."

내 생각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말에 고맙기도 하면서, 동시에 조금 부끄러웠다.

"제가 조급한 티를 많이 냈던가요?"

"아닙니다. 그저 제가 재현님 입장이었어도 조급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가족이 가장 중요한 법이니까요."

비록 불완전한 방식이기는 하나 시우를 한 번 만난 덕분일까, 이글이글 타오르던 분노 대신 단단한 신뢰가 그녀의 두 눈에 깃들어 있었다.

"그렇기에 재현님이 내어주신 하루라는 시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오언주의 진심 어린 감사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하동건씨 파티와 함께 2901호에서 대기해주세요. 저도 곧 내려가겠습니다."

"네."

그들을 바로 서면역으로 출발시키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거인 때문에 서면역 선로가 일부 무너졌다.'

지하철의 선로뿐만 아니라 서면역 지하 대부분이 박살이 나 있는 상태였다.

그 무거운 몸집의 거인이 날뛰어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새로운 루트를 파야겠지.'

그를 위해 어제부터 서예진이 부지런히 생쥐들을 부리고 있는 중이었다.

어제부터 하루 종일 탐색한 덕분에 대략적인 루트는 확보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절대자의 눈.'

서예진에게 시야를 집중시키자 그녀가 실시간으로 감각 공유를 하고 있는 생쥐에게로 곧바로 이동되었다.

'음?'

생쥐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찍찍!

무언가에 쫓기듯 빠르게 도망치는 중이었는데, 일단 생쥐의 덩치가 웬만한 소형견 보다도 커 보였다.

「길들여진 거대 생쥐(Lv. 7)」

아니나 다를까 절대자의 눈으로 본 생쥐의 명칭부터 달라져 있었다.

'진화했구나.'

서예진이 가신 등록 되면서 새로 생긴 능력 중에 진화라는 게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것의 영향인 것 같았다.

"으어어!"

진화한 거대 생쥐를 열심히 쫓아오는 존재들이 있었다.

초점 없는 눈, 흐느적대는 팔다리, 전신에 피칠갑을 한 시체의 모습들.

「좀비(Lv. 11)」 「좀비(Lv. 13)」 「좀비(Lv. 11)」 「좀비(Lv. 9)」 「좀비(Lv. 9)」

수십 마리의 좀비가 생쥐의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찍!

좀비들은 생쥐의 뒤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몰려들었는데, 덕분에 자연스럽게 생쥐를 둘러싸는 포위망이 형성되었다.

생쥐는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좀비들이 빽빽이 몰려들어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몸집이 작았으면 어둠에 의지하여 어떻게든 빠져나갈 틈이라도 있었을 거 같은데, 진화해버린 탓에 도망칠 장소가 마땅치 않은 것이다.

아이러니였다.

'끝났군.'

의미 없이 생쥐를 죽일 바에야 가스 폭발을 사용해 좀비들을 쓸어버리기라도 할까 고민하던 그때였다.

걸음을 멈췄던 거대 생쥐가 좀비들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최후의 발악으로 공격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이내 좀비들의 다리 사이 틈으로 몸을 비틀어 넣더니 포위망을 뚫는 것에 성공했다.

'오.'

마침 그곳은 출구가 있는 곳이었고, 거대 생쥐는 열심히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곳에는.

[5 남포]

남포역 5번 출구라는 표시가 적힌 간판이 보였다.

'어쩐지 익숙하더라니.'

너무 어두운 탓에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곳은 부산광복점이 있는 장소였다.

'그 많은 좀비가 다 어디에서 왔나 했더니.'

그날은 토요일 주말이었다.

백화점에 사람이 무척이나 많았을 것이고, 좀비가 나타났다면 굉장히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겠지.

지하상가에도 제법 사람이 많았을 것이고, 대참사가 벌어졌을 게 뻔히 보였다.

'자갈치역까지 가는 걸 포기하고 올라온 것을 보면 지하철 선로도 마찬가지 상황이라는 소리인데.'

중앙역에서 자갈치역으로 이어지는 루트를 포기해야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때.

-찌익―!!

거대 생쥐의 앞에 괴물 한 마리가 나타났다.

매끄러운 피부와 위협적으로 튀어나와 있는 이빨들.

그것은, 상어였다.

「육지 상어(Lv. 23)」

와작!

손 쓸 틈도 없이 육지 상어의 이빨에 거대 생쥐가 당했다.

그와 함께 절대자의 눈도 강제로 꺼졌다.

'······.'

그다지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백화점이 있는 남포역에서부터 본가까지의 거리는 고작 수 킬로미터.

그런데 저런 위험한 놈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은 본가의 근처에도 저런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였다.

'서둘러야겠어.'

나는 2402호에 들러 서예진을 데리고 하동건 파티가 대기하고 있는 2901호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서예진이라고 합니다."

하동건 파티와 서예진은 서로 안면은 트고 있었지만, 이렇게 서로를 소개시켜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갑작스럽게 생긴 이런저런 일로 그동안 경황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하동건이라고 합니다."

"김가영이라고 해요!"

"오언주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생쥐를 다루는 게 서예진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던 터라 그들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특히 강덕수가 서예진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강덕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에."

"너무 예쁘십니다!"

"가, 감사해요."

그렇게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난 뒤 그들을 향해 말했다.

"본격적으로 작전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거인의 등장으로 서면역을 경유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습니다."

거인의 발걸음으로 인해 서면역은 완전히 아작이 난 상태였다.

"하지만 이대로 지하철 선로를 포기하기는 아쉽습니다."

서면역 근처가 박살난 것이지, 그 이후 범내골부터 초량역으로 이어지는 길목은 멀쩡했기 때문이다.

서예진의 생쥐들을 이용해 확인해본 결과 아직까지 그곳은 몬스터가 자리 잡지 않아서 프리패스로 이용이 가능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첫 번째 목표는 범내골역으로 가는 루트를 뚫는 것입니다."

나는 서예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서예진씨가 설명해주실 겁니다."

"네."

서예진은 품에서 꼬깃꼬깃 접은 A4용지를 하나 꺼내더니 거실 바닥에 펼쳐보였다.

그곳에는 서예진이 직접 그린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강덕수가 호들갑을 떨었다.

"와 너무 잘 그리셨어요!"

"···감사합니다."

이상하다.

내가 보기에는 초등학생 방학 숙제보다 조금 나은 수준으로 보이는데.

어쨌든 서예진은 지도를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여기가 저희가 있는 아파트입니다. 그리고 여기가 전포역이고요. 그리고 여기가 목적지인 범내골역입니다. 추천하는 경로는 이렇게, 큰 도로를 따라서 움직이는 방식입니다."

큰 도로에는 몬스터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마주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미리 알 수 있으니 충분히 대비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웬만한 몬스터 무리는 하동건 파티에게 상대도 되질 않을 테니까.'

거인 사냥 작전을 실시하기 전, 돈을 퍼부어 하동건 파티원들의 레벨을 최대한 올려두었다.

조금이라도 거인을 상대하기 수월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지금은 모두가 30레벨을 달성한 상황이었다.

이제 가신들 중에서 레벨이 30보다 낮은 이는 최형준과 유혜린뿐이었다.

"범내골역에 도착하기 전에 조심해야 할 스폿은 여기입니다. 홈플러스를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오크들이 있는데, 그 규모가 최소 오백 이상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서예진의 말에 하동건이 물었다.

"굳이 부딪힐 필요 없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어차피 저희들의 목적은 범내골역으로 진입해 지하철 선로를 이용하는 거니까요."

"범내골역에도 몬스터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하동건의 지적은 정확했다.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숫자가 좀 많기는 해도 고블린들 뿐이라서 마주치는 놈들만 정리하며 빠르게 개찰구 안쪽으로 진입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서예진은 다시 지도를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일단 지하철 선로 안에 진입하기만하면 아무 방해 없이 초량역까지 도착하실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이 다음역인 부산역부터입니다."

거인에 의해서 반파된 부산역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강덕수가 부르르 몸을 떨며 물어왔다.

"그, 그 말은 부산역에도 그 거인이 있다는 겁니까?"

"아니요. 거인이 날뛴 흔적만 남아 있을 뿐, 거인은 이미 떠난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어제 우리 아파트를 찾아왔던 그 놈과 이놈이 동일한 놈인 것 같아요."

"그,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이어진 서예진의 설명에 딱딱하게 굳었던 사람들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아무튼 부산역도 서면역과 마찬가지로 박살이 난 상태여서 초량역에서 올라간 다음 위에서 건너가야 합니다. 부산역 근처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거인이 날뛴 탓인지 몬스터가 거의 없거든요. 그런데 이 다음 부터는 지하철 선로 말고 다른 루트를 찾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죠?"

"선로 안을 어마어마한 숫자들의 좀비들이 채우고 있거든요. 아마 그것들을 처리하는 데에만 꽤 시간을 낭비해야만 할 거예요."

서예진이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좁은 공간에 있는 몬스터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도 없는 이상, 이 루트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겁니다."

그녀의 말에 하동건 파티 모두가 한 곳을 바라봤다.

"에?"

갑작스레 모두의 시선을 받은 유혜린은 당황해서는 말했다.

"나, 나는 이제 밖으로는 안 나가기로···."

순간 모두가 실망하는 듯한 표정을 짓자 유혜린이 말을 바꾸었다.

"···했었지만, 예진씨."

유혜린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서예진을 향해 말했다.

"그···. 제, 제 능력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040화 [Episode 09] 집결 (4)

김다빈은 어제부터 오늘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팀장이라는 직책을 받은 이후 평소 눈여겨보고 있던 열네 명을 고용했다.

김재현이 직접 연결시켜 준 유혜린까지 합쳐서 총 15명의 인원으로 팀을 굴리기 시작한 것이다.

공용시설의 관리감독과 청소 등의 업무는 금방 가르칠 수 있었고, 세 개로 늘어난 공용시설에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업무 강도가 훨씬 수월해졌다.

그렇게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어제는 거인이 나타나서 비상이 걸리더니, 그때부터 신입들이 우수수 쏟아져 들어오면서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니까 총 여섯 분이신 거죠?"

"네, 그렇습니다."

"113동 503호로 가시면 됩니다."

김다빈은 떠나는 그들의 등을 바라보며 속으로 계산했다.

'이걸로 503호에 넣은 인원이 49명. 조금 더 밀어 넣을 수 있으려나? 아슬아슬한데.'

새롭게 들어오는 사람들은 모조리 공용 시설에서 수용하고 있었다.

사실 말이 공용 시설이지, 이제는 난민 구호소가 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좁은 방에서 발도 제대로 못 뻗은 채로 자야겠지.

그때였다.

"다빈씨! 6층 정리 끝났어!"

최형준이 그녀에게 찾아와 보고했다.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마침 503호가 미어터지려 하고 있었으니까.

"수고하셨어요. 이제 110동 4층, 6층, 7층 정리해주시면 돼요."

"110동. 4층, 6층, 7층. 알았어! 수고!"

"네, 수고하세요."

최형준이 맡은 역할은 일종의 청소였다.

가구나 쓸데없는 물건들을 치우고 청소를 하는 일이었는데,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힘 하나만큼은 장사였던 그였기에 혼자서도 척척 정리를 해내고 있었다.

♩♬―

[21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최형준이 떠나는 것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며 사람들이 우루루 내렸다.

자꾸만 주변을 둘러보는 저 행동, 아파트 단지 밖에서 찾아온 신입이 분명했다.

"실례합니다. 여기 김다빈씨가 누구신가요?"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접니다. 새로 들어오신 신입분들이신가요?"

"네. 사실은 어제 찾아왔어야 했는데, 씻고 밥 먹고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늦어져서요."

"네? 그게 무슨···."

신입들이 무슨 수로 씻고 밥을 먹는단 말인가.

그러다 김다빈은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오크의 창과 활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눈치가 빠른 김다빈은 곧장 대표로 보이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

"재현님을 뵙고 오시는 길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다빈씨에게 모르는 걸 물어보라고···."

이들이 자신이 아니라 김재현을 먼저 만나고 왔다는 것은 그만큼 김재현이 이들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었다.

그것을 파악한 김다빈은 영업용 미소를 띠우며 물었다.

"어떤 점이 궁금하셨을까요?"

"그게 몬스터를 잡으면 돈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몬스터를 잡게 되면 돈이 들어오게 되는데, 일종의 포인트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걸 가지고 먹을 것도 사고, 전기나 가스와 같은 자원도 살 수 있지요. 직접 경험해보시는 게 베스트인데, 장비도 준비되어 계시니 밖으로 나가서 직접 몬스터를 사냥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얼른 그를 보내고 조금이라도 쉬고 싶었던 김다빈이 물었다.

"더 물어보실 거라도?"

"매점이라는 게 있다던데···."

"매점은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다시피 물건을 파는 매장입니다. 다만 조금 특별한 게 있다면 최첨단 방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물건을 주문하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물건이 생성되는 신기한 방식이죠. 일종의 키오스크라고 해야 할까요? 1층에 있으니 몬스터를 잡은 돈을 가지고 직접 가셔서 사용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흠. 그렇군요."

아무래도 남자는 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김다빈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가 손을 내밀며 갑자기 통성명을 했다.

"이준혁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빈씨."

살면서 지겹도록 받아왔던 게 남자들의 관심이었기에, 김다빈은 곧바로 이준혁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어떻게든 내 손 한 번 잡아보고 싶어서 그러는구나. 하여튼 이놈의 인기란.'

모르는 척 그의 손을 맞잡아주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김다빈이라고 합니다."

"하하. 또 물어볼 게 있었던 거 같은데···."

이준혁이 김다빈의 손을 잡은 채로 말을 이어나가던 순간 뒤쪽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 오빠. 몬스터 사냥이나 하러 가자. 늦었어."

"어? 어어. 그래야지."

김다빈은 앙칼진 눈매로 자신을 노려보는 여자를 향해 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드디어 갔네.'

잠시 의자에 앉아서 눈을 붙이려던 찰나.

"실례합니다. 김다빈씨를 찾아가라고 해서 왔는데요."

김다빈이 눈을 떠 보니 이번에는 4명 정도의 가족이 그곳에 있었다.

"하아."

한숨을 내쉰 다음 그들을 불렀다.

"이쪽으로 오세요!"

그렇게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김 팀장님."

"앗! 재현님!"

"고생하십니다."

김재현이 그녀를 찾아왔다.

"고생은요. 다 돈 받아가면서 하는 일인데."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공용시설이 부족하지는 않습니까?"

"아직 좀 넉넉하기는 한데, 지금 속도로 사람들이 유입된다면 금방 부족해질 것 같기는 해요."

그러자 김재현은 허공에서 노트 하나를 소환하더니 김다빈에게 건네며 말했다.

"여기 새롭게 공용 시설로 사용할 세대의 리스트입니다."

그곳에는 50채가 넘는 곳의 호수가 적혀 있었다.

김다빈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이 정도면 당분간 문제없을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그리고···."

김재현의 미안해하는 듯한 얼굴 표정에서 무언가 불안감을 느낀 김다빈이 그를 재촉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재현님."

"다름이 아니라 유혜린씨를 이틀 동안 빌렸으면 해서요."

"예···?"

유혜린은 그녀의 팀원들 중에서 유일하게 대부분의 업무를 인수인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맡고 있는 이 역할을 대신해 줄 사람은 유혜린 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그 말은···.'

예정된 자신의 미래를 눈치 챈 김다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김재현이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누구보다 잔혹한 말을 내뱉었다.

"그럼 이틀간 잘 부탁드립니다, 김 팀장님."

"아··· 무, 물론이죠!"

김다빈은 순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결심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재현님."

"네?"

"···야간 수당 쳐주시면 안 될까요?"

김재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2배로 쳐드리겠습니다."

***

김다빈과의 쇼부를 끝내고 돌아오니 유혜린과 서예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자 소파에 늘어져 있던 유혜린이 바짝 긴장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잘 쉬고 계셨어요?"

"네."

"그럼 다시 시작할까요?"

유혜린은 소파에서 일어나 허공으로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허공에서 보라색의 독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창고 보관, 독 안개.'

창고의 용량이 100kg이다보니 기체인 독 안개는 생각보다 더 많은 양이 들어갔다.

그러다보니 유혜린의 정신력이 남아나질 않는 것이다.

한 눈에 봐도 유혜린은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다.

'안 되겠군.'

나는 곧장 가신 관리창을 켜서 유혜린의 레벨을 올렸다.

5천만 원을 투자해야 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지금 나는 수백억의 자산가였으니까.

25였던 레벨이 30레벨이 되는 순간, 제일 먼저 변화를 느낀 유혜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왜 그러시죠?"

"갑자기 힘이 나는 것 같아요."

독안개의 생성 속도도 아까보다 2배는 더 빨라져 있었다.

'좋네.'

확실히 정신력과 스킬 숙련도가 확 올라간 모습이었다.

[창고에 보관 가능한 무게를 초과하였습니다.]

"됐습니다. 이제 그만 만들어내셔도 좋아요."

"앗, 네!"

허공에 남은 보라색 안개들은 유혜린의 의지를 따라 점점 희미해지더니 사라졌다.

"그런데 정말 제가 직접 안 가도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여기서 계속 독 안개를 만들어주시기만 해도 충분해요."

사전 작업을 마친 뒤 서예진에게 말했다.

"이제 시작해주세요."

"넵!"

서예진이 가부좌를 틀고 감각 공유를 실행하자 절대자의 눈에 어두컴컴한 지하실이 보였다.

찐득한 어둠 속에 시체 썩은 내와 허파에 바람이 빠지는 듯 그르렁 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이곳은 좀비들이 가득한 중앙역 선로 위였다.

'창고 오픈.'

푸쉬이이―

창고에서 독 안개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순간, 생쥐가 선로를 달렸다.

「길들여진 생쥐(Lv. 3)」

아직 진화하지 않은 작은 덩치의 생쥐의 뒤쪽으로 보라색 독안개가 분사되고 있었다.

"우어어어―!"

"크아악!"

좀비들이 독 안개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에 흥분하여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커억―!"

유혜린의 독 안개를 흡입하는 순간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독 안개는 기본적으로 마비 독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들이마시게 되면 처음에는 서서히 움직임이 느려지고,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게 된다. 그 다음에는 횡경막과 늑간근의 마비로 질식사하게 만드는 종류의 치명적인 마비 독이었다.

독 안개를 들이마신 좀비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좋아. 일단 마비는 통한다.'

일단 기본적으로 시체들이라 독 안개가 통할지 조금 걱정됐었는데, 다행히 마비시키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좀비들이 죽질 않았다.

'역시나인가.'

좀비들은 이미 죽어 있는 시체.

숨 좀 오래 못 쉰 걸로 죽거나 하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근육이 마비된 것만 해도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한 플랜 B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예진씨. 부탁드릴게요."

"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생쥐 부대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쓰러진 좀비들의 목을 사정없이 물어뜯기 시작했다.

콰직!

[좀비(Lv. 11)을 사냥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120,085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좀비(Lv. 12)을 사냥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212,112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

······

수십 마리의 생쥐들이 마비 독에 당해 쓰러진 좀비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좀비들을 사냥하는 과정에서 일부 개체들은 경험치를 획득하여 진화했다.

「길들여진 거대 생쥐(Lv. 7)」

덩치가 거대해진 생쥐들은 더욱 더 거침없이 좀비들의 목을 물어뜯었고, 빠르게 경험치를 습득하기 시작했다.

'서예진에게 분배해 놓은 경험치를 나눠 먹고 있는 건가?'

기본급 100%에 추가로 100%의 경험치를 분배해 준 상태였다.

생쥐들도 사냥으로 2배의 경험치를 획득하고 있는 셈이다.

그때였다.

좀비의 피를 입에 댄 생쥐들이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뭐지?'

잠시 후, 생쥐들의 명칭이 변화했다.

「길들여진 좀비 생쥐(Lv. 5)」

작은 덩치 그대로 좀비 생쥐로 변한 녀석들도 있었고,

「길들여진 거대 좀비 생쥐(Lv. 9)」

진화해서 바뀐 커다란 덩치를 가진 채로 좀비가 된 생쥐들도 있었다.

'이거 위험할 뻔 했군.'

보아하니 좀비들의 피에 당하면 좀비화가 진행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전면에 나서서 발톱과 이빨로 공격을 하는 오언주의 경우,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됐을 가능성이 컸다.

생쥐들을 이용한 전술 덕분에 최악의 경우를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어? 이게··· 어라?"

서예진은 당황스러워 하고 있었다.

자신의 귀여운 생쥐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그녀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좀비로 변한 생쥐들 상태는 좀 어떤가요? 말은 잘 듣나요?"

"네? 어··· 그게 제 명령에는 따르는 것 같은데, 애들이 좀 공격적으로 변한 거 같아요."

"다행이네요. 그럼 작업을 계속 진행해 볼까요."

다시 한 번 유혜린의 독가스를 창고 가득 채우고, 서예진의 능력과 절대자의 눈을 활용하여 좀비들을 마비시킨 다음, 좀비로 변한 생쥐들로 마무리.

그런 식으로 일을 진행하니 중앙역에서 자갈치역까지 이어지는 선로에 쌓여 있던 좀비들을 금세 몰살시킬 수 있었다.

그때쯤 하동건 파티는 범내골역 선로에 진입하여 초량역을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순조롭군.'

계획대로 진행되는 작전.

이대로 자갈치역까지 무사히 도착한다면 이제 고지가 머지 않았다.

이번에야 말로 가족들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때.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이제는 지겹도록 들려온 알림이었다.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는 개체가 집구석 근처에 접근하였습니다.]

[시민권을 제의하시겠습니까?]

특이한 것은 이번에 찾아온 시민들의 숫자였다.

'157명?'

어디선가 단체로 숨어있던 생존자들이 온 것인지 그 숫자가 상당했다.

그들이 시민권을 받아들인 그 순간.

[시민의 숫자가 3,000명에 도달했습니다.]

[시민들의 숫자가 일정 수준에 도달함에 따라 '경제활동인구 지원금' 스킬을 개방합니다.]

{경제활동인구 지원금}

시민들에게 직책을 부여하고, 지원금을 지급합니다. 지원금은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있는 현금과는 별도로 지급되는 금액입니다.

※하루 일당

-사원 : 10만 원 (0/300)

-대리 : 15만 원 (0/100)

-과장 : 20만 원 (0/30)

-차장 : 25만 원 (0/10)

-부장 : 30만 원 (0/3)

꽤나 쏠쏠한 스킬이 등장했다.

041화 [Episode 10] 부산역 (1)

'김다빈과 공영시설 관리팀에게 직책을 부여하면 딱 이겠군.'

원래 주기로 했던 주급 70만원과 사원이 받는 하루 일당 10만원이 정확하게 일치했다.

이제 수수료를 떼이면서 그들에게 돈을 건네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이 스킬의 장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공영 시설 관리 인원을 확 늘려야겠어.'

경제활동인구 지원금에서 시민들에게 지급되는 돈은 모두 공짜였다.

그런데 그 금액이 결코 적지 않았다.

사원들이 받는 10만원도 300명 전부가 받게 되면 하루에 3,000만원인 것이다.

사원부터 부장까지 모든 인원을 가득 채웠을 때 받게 되는 돈은.

'전부 다 합쳐서 하루에 오천만원이 넘는다.'

이것들이 쌓이면 세금 징수 스킬로 얻을 수 있는 돈이 늘어나고, 또 한편으로는 매점에서 소비되어 그 중 일부가 나에게 돌아올 것이었다.

'최대한 많은 시민들에게 직책을 부여하는 게 이득이야.'

그러나 아직은 공영 시설 관리 말고는 적당한 직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설물 관리나 청소, 경비 정도가 있겠군.'

당장 떠오르는 것은 그 정도가 다였다.

'경비는 그때 정문에 모였던 이들 위주로 짜야겠어.'

대충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우선 세 자리 밖에 없는 부장 중 하나에 곧바로 김다빈을 임명했다.

'김다빈이 팀원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최형준이랑 유혜린 그리고 또 누구였더라?'

사원으로 채워 넣을 인원들의 이름을 생각하고 있던 찰나.

[시민 김다빈의 충성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시민 김다빈이 가신으로 등록되었습니다.]

[가신 보유 한계치가 늘어납니다.]

가신이 아니었던 이들 중에는 처음으로 충성도 100을 달성한 사람이 나왔다.

'역시 충성도 100을 달성하면 곧바로 가신이 되는군.'

그렇다는 것은 충성도가 100이 되는 것과 동시에 각성 능력이 생긴다는 말과 같았다.

김다빈의 능력을 확인해보려던 찰나.

그때.

"드르러엉."

우렁찬 코골이 소리가 나를 상념에서 끄집어냈다.

"?"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유혜린이 소파에 누워 골아 떨어져 있었다.

"쿠우울― 드르렁―."

많이 피곤했던 탓인지 유혜린은 요란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내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서예진이 물어왔다.

"깨울까요?"

"아닙니다."

유혜린은 이미 자신의 소임을 다 한 상태였다.

오히려 이 지경이 되도록 정신을 혹사했다는 소리였으니 상을 줘야 마땅했다.

"이대로 자게 내버려두죠."

보이지 않는 손을 사용하여 그녀를 안방의 침대로 옮겨주었다.

어찌나 깊은 잠에 빠졌는지 침대까지 이동하면서 한 번도 깨지 않고 꿀잠에 빠져 있었다.

정말로 누가 업어 가는데도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것이다.

"드르러엉― 쿠구구굴."

물론 화려한 코골이도 여전했다.

서예진이 안방으로 사라지는 유혜린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한 마디 했다.

"소리가 꼭 증기기관차 같네요."

"그러게요."

방문을 닫고 나니 요란한 코골이 소리도 조금 진정되었다.

"예진씨는 괜찮으신가요?"

"저야 힘들 게 있나요. 완전 멀쩡합니다."

"그럼 계속 수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넵!"

서예진의 정찰 능력은 그 누구보다도 탁월했다.

사방으로 퍼져나간 수백 마리의 생쥐들이 모두 그녀의 눈과 귀가 되어주고 있었으니 비교할 대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라···?"

"왜 그러시죠?"

"···링크가 안 돼요."

"네?"

서예진의 능력도 만능은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갑자기요?"

"잠시만요."

서예진은 눈을 감은 채로 이것저것 시험해보더니 결론을 내렸다.

"거리가··· 너무 먼 것 같아요."

"아까는 잘 연결 됐잖습니까?"

"링크를 건 상태로 움직이면 범위 밖으로 조금 더 멀리 나갈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링크를 걸 수 있는 범위는 딱 중앙역 근처가 한계네요."

'하필이면.'

자갈치역에서 조금만 더 가면 가족들이 있는 본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예진의 생쥐를 이용해서 먼저 본가의 상태를 확인할 계획이었는데···.

그것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번거롭겠지만 중앙역에서 다시 한 번 출발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서예진이 중앙역에서 감각 공유를 걸어 자갈치역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곳에 있는 좀비들을 모두 쓸어버린 터라 거침없이 이동하는 모습이었다.

'다행히 금방 도착하겠어.'

생쥐가 자갈치역으로 이동하는 동안 절대자의 눈으로 하동건 파티의 동태를 살폈다.

***

하동건 파티는 초량역 1번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오고 있던 중이었다.

오후 6시가 조금 안 된 시간임에도 벌써 사위가 캄캄했다.

겨울이 다가오며 해가 짧아진 탓이다.

"헐···."

빛 한 점 없는 도시의 하늘은 한적한 시골의 밤하늘처럼 화려한 색채를 내뿜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처참하게 부서진 도시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곳곳에 새겨진 거인의 발자국과 모로 뉘어진 건물, 박살나며 주변으로 흩어진 콘크리트 더미들.

참혹한 파괴의 현장은 달빛을 받아 한 폭의 그림처럼 빛나고 있었다.

"엄청나네요."

"건아. 정찰."

"넵, 누님."

김가영의 재촉에 김 건이 까망이를 하늘 위로 날렸다.

까악―

하늘 높이 날아간 까망이가 주변을 훑었고, 그에 대한 느낌을 전달받은 김 건이 말했다.

"이 근처에 몬스터는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강덕수가 말했다.

"초량역에도 그 흔한 고블린 한 마리 없었잖아. 거인이 난리를 피워둔 덕분에 여기는 편하게 통과할 수 있겠네."

김 건이 그에 동조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이 광경을 보고 이곳에 접근할 강심장은 없을 테니. 일종의 영역 표시나 마찬가지니까요. 거인의 영역에 누가 감히 발을 들이겠어요."

그때 김다정이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그런데 괜찮을까요? 이제 곧 밤인데 어디 안전한 곳에 묵었다 아침에 출발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다정씨! 걱정하지 마세요. 고블린들의 습성을 생각해보면 밤이 오히려 안전합니다. 놈들은 밤이 되면 숨어버리는 습성이 있거든요. 그래서 예전에 아파트에서는 밤에만 움직이기도 했었죠!"

잠시 고민하던 하동건은 이내 결론을 내렸다.

"움직이겠습니다. 만약 위험해진다면 재현님께서 저희를 소환해주실 겁니다."

하동건의 말에 모두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재현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두터운 것이다.

상황이 심각해지더라도 그라면 어떻게든 해 줄 거라는 믿음이 존재했다.

그때 그들의 앞에 생쥐 한 마리가 도착했다.

찍―

"서예진씨가 보낸 생쥐인가 보네요. 따라가겠습니다."

생쥐는 미리 탐색해 놓은 경로로 하동건 파티를 이끌었다.

서예진이 감각 공유를 하고 있는 생쥐는 중앙역에서 출발해 자갈치역으로 달리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길들여진 생쥐들은 상당히 똑똑한 편이어서 길 안내 쯤은 혼자서도 가능했다.

그렇게 생쥐의 안내를 따라 부산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거대한 호수였다.

"여긴 뭘까요? 이것도 거인이 만든 곳일가요?"

"아마도. 저 옆에 부서진 빌딩이 바닥이랑 부딪히면서 만들어진 공간이겠지."

부산역 고속철도 건물의 앞마당에 지름 수십 미터 크기의 구덩이가 생성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바닷물인지 지하수인지 모를 물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곳곳에 콘크리트 잔해가 외딴 섬처럼 떠 있었다.

그 때.

촤라락―

외딴 섬 위로 무언가가 올라왔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물소리에 하동건 파티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저건···?'

처음에 얼핏 봤을 때는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이야?"

"여잔 거 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상반신은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하반신은 사람의 것이 아닌 푸른 비늘로 뒤덮인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반인반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것의 정체는, 세이렌이었다.

"아아아아―."

세이렌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노래라기보다는 하이 톤의 비명에 가까웠다.

"아아아아아―!"

"으윽!"

"윽, 뭐야?"

귀청을 찢을 듯한 소음에 모두가 두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그 순간.

"어어, 어?!"

풍덩!

제일 먼저 강덕수와 문병호가 경직된 상태로 호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덕수야! 병호야!"

이윽고.

"아아아아아―!!"

나머지 일행들도 차례차례로 호수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풍덩!

꼬르르륵―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김다정이었다.

'매직 아머!'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기 직전, 오언주를 향해 스킬을 사용했다.

우우웅―

그러자 오언주의 몸에 밝게 빛나는 갑옷이 생겨났고,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크릉!"

순식간에 수인화를 끝낸 오언주가 세이렌을 향해 역으로 달려들었다.

첨벙―!

수인화한 오언주가 무서운 기세로 헤엄치며 세이렌을 향해 다가가자, 세이렌도 상당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순간 세이렌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멈추었고, 덕분에 다른 이들의 마비가 풀렸다.

쐐애애애액―! 푸확!

물속에서 날아온 하동건의 창이 세이렌의 심장을 꿰뚫었다.

***

[세이렌(Lv. 33)을 사냥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350,376,203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놀래라.'

세이렌에 의해서 하동건 파티가 하나 둘 호수에 빠질 때에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순간적으로 가신 소환을 사용해야하나 고민했었다.

'위험했어.'

다행히 김다정의 활약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특수 능력이 있는 개체는 성가시군.'

겨우 33레벨짜리 몬스터인데도 파티 전체를 위험하게 만들었다.

'김다정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정말이지 큰일 날 뻔 했어.'

그녀의 능력인 매직 아머는 단순히 물리적인 공격만을 막아주는 스킬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해로운 효과에게서 대상을 '보호'하는 마법 갑옷이었다.

세이렌에게 제압당해 물에 빨려 들어가는 순간 몸이 마비된 것처럼 꼼짝 못하게 되는 것 같았는데, 그것을 김다정의 매직 아머가 막아준 것이다.

그래서 오언주만 멀쩡히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고, 세이렌이 당황하며 잠깐 마비가 풀린 틈을 타 하동건이 창을 던져 마무리한 것이었다.

'김가영이 다쳤군.'

다른 이들은 물에 젖은 것 말고는 문제가 없었는데, 김가영은 들어가는 과정에서 머리를 다친 모양이었다.

다행히 김다정이 그곳에 있어 바로 치료에 들어간 모습이었다.

"휴우."

아무리 생각해봐도 김다정을 파티에 포함시키기로 한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

축복의 효율, 다쳤을 경우 사용해주는 힐도 좋지만 가장 좋은 것은 지금과 같은 특수 능력에 대항하는 카드가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재현님···."

그때 침울한 표정의 서예진이 말을 걸어왔다.

그 모습만 봐도 결과가 어떤지는 알 수 있었다.

"실패했나보군요."

"네에···. 이번에는 자갈치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링크가 끊겼습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하동건 파티의 길안내에 집중해주세요."

"네에···. 죄송합니다."

어찌됐든 하동건 파티가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고 더욱 확신이 생겼다.

'지금 이 사람들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조합이다.'

서예진의 보조가 없더라도 이 사람들의 힘만으로 충분히 본가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믿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김가영의 화살과 하동건의 창을 실시간으로 보급해주고, 중급 속성 마법(火)을 활용해 최대한 보조하는 것 정도가 내 최선이었다.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게···.'

그 순간.

[고블린(Lv. 6)을 사냥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7,150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고블린(Lv. 6)을 사냥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6,920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

······

해가 저문 이 시간에도 부지런히 사냥을 이어나가는 시민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덕분에.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집구석 선포가 20레벨에 도달하였습니다.]

[스킬 포인트를 3개 획득합니다.]

[새로운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오르며 격통이 찾아왔다.

042화 [Episode 10] 부산역 (2)

"!!!"

이번 고통은 지금까지의 고통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지금까지가 몸이 부풀어 오르는 듯한 고통이었다면, 20레벨이 되며 느껴지는 고통은 마치 송곳으로 전신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었다.

마치 몸속에서 수십 개의 바늘이 피부를 뚫고 밖으로 뻗어나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재현님! 재현님! 괜찮으세요!?"

서예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반응할 수 없었다.

"재현님! 숨! 숨 쉬셔야 해요!"

실시간으로 전해져오는 고통을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몇 분 동안이나 이어진 고통 덕분에 정신이 아득해지려던 찰나.

드디어 영역 확장이 끝났다.

"허억, 허억."

식은 땀이 온 몸을 적시고 있었다.

고통으로 인해 수축되었던 온몸의 근육이 일시에 풀어지며 탈력감이 찾아왔다.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 같은 무력감과 함께 가슴에서 약간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눈을 떠 보니 기겁한 표정의 서예진이 내 가슴 위에 두 손을 올리고 있었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CPR을 하려고···."

나는 물에 젖은 솜처럼 느껴지는 팔을 들어 올려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내 상태가 제법 심각해 보였는지, 소파에 자리 잡고 있던 까미도 내게 다가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삡?

"···난 괜찮아."

까미는 소파 대신 내 배 위에 자리를 잡고는 엎드렸다.

그런 녀석을 살며시 쓰다듬어주고 있자니 슬슬 졸음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나른한 감각을 느끼며 눈을 감은 채, 절대자의 눈으로 새롭게 늘어난 집구석 영역을 확인했다.

'규모가 엄청나다.'

생각보다 넓은 지역에 걸쳐서 영역이 늘어나 있었다.

영역은 도로를 따라 확장되어 있었다.

차가 다니는 큰 길만 골라서 늘어난 상태였는데, 그 범위가 전포역은 물론이고 서면역과 부전역 일부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영역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반경 1km 범위 안에 있는 찻길을 모두 집어삼킨 것이다.

빌어먹게도 넓은 영역이었다.

'이러니까 그렇게 아팠지.'

역대 최대 규모로 영역이 늘어났으니 어쩌면 당연한 고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피곤하군.'

딱 5분만 잠들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나를 위해 임무를 수행중인 하동건 파티를 지켜봐야만 했다.

잠을 깨기 위해 일어나 앉은 나는 서예진에게 부탁했다.

"예진씨, 미안한데 냉수 한 잔만 떠 주실 수 있을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보이지 않는 손을 사용할 기력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신력이든 체력이든 고통을 견뎌내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소진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찬 물을 마시니 조금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괜찮으세요?"

"덕분에요."

절대자의 눈으로 하동건 파티를 살피면서 스킬창을 확인했다.

20레벨이 되며 부여 받은 스킬 포인트 3개를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스킬 레벨 옆에 [+]가 있는 스킬들 중 제일 먼저 레벨업 시킬 스킬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현재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스킬.

'절대자의 눈 레벨업.'

[집구석 절대자의 눈 스킬이 Lv. 4가 되었습니다.]

[다중 시야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곧바로 새롭게 추가된 기능을 시험해 봤다.

다중 시야는 말 그대로 절대자의 눈을 사용한 시야가 여러 개로 늘어나는 기능이었다.

동시에 여러 곳을 관찰하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시야의 개수가 점점 늘어나는 게 느껴졌다.

'아직은 3개가 한계인가.'

이제는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사용이 가능한 절대자의 눈이었는데, 시야가 3개로 늘어나게 되니 집중력에 한계가 찾아왔다.

조금이라도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처음처럼 아예 두 눈을 감고 절대자의 눈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꼭 CCTV 화면을 모아놓은 경비실에 앉아 있는 기분이군.'

세 개의 시야가 동시에 보였다.

하나는 여전히 하동건 파티를 보여주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정신없이 바빠 보이는 김다빈의 모습을 비췄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새롭게 늘어난 영역인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비추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몰라. 갑자기 고블린들 머리가 터져 버리더니 돈도 안 주고 사라지던데?"

최근에 합류했던 이준혁 파티였다.

고블린 사냥으로 부족했던 경험치를 채워주었던 것은 바로 이 파티였던 것이다.

"준혁 오빠! 저기 좀 봐요!"

여자가 골목길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고블린들이 이쪽으로 못 들어오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준혁이 코앞에까지 다가갔음에도 고블린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식칼이나 무기를 휘둘러도 투명한 벽에 막혀 튕겨져 나갈 뿐이었다.

반면에.

푸욱!

"꽤애액!"

이준혁 쪽에서 고블린을 공격하는 건 가능했다.

"이거 완전 개꿀이잖아?"

그 모습에 파티원들이 열광했다.

"야! 나도! 나 아직 한 마리도 못 잡았어!"

"너만 못 잡았냐! 나도 못 잡았다!"

"다 비켜! 활 쏠 거야! 활 맞기 싫으면 다 꺼져!"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고블린들은 본능적으로 도망쳤지만, 이미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다.

뒤를 쫓아간 사람들에 의해 고블린 여섯 마리가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엇? 진짜다. 허공에 이상한 메시지들이 뜨잖아?"

"이제 처음 보는 거냐?"

"어어. 처음 잡아 본 거거든. 오늘따라 준혁이가 너무 적극적이었잖냐."

놀랍게도 그들은 아주 익숙하게 고블린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그때 그 남자의 말이 아주 허풍은 아니었나보군.'

지금이야 내가 레벨업 하면서 안전지대 안에서의 사냥이 되어버렸지만, 그 전부터 최소 열 마리 이상의 고블린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긴장된 기색의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정말로 고블린 사냥을 자주 경험했다는 뜻이었다.

'이 정도면 지금까지 봤던 일반인 그룹 중에서도 최상위급이다.'

이들은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죽이는 것에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그것도 일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기 모인 모두가 그랬다.

그런 성향들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인지, 끼리끼리 모인 것인지는 몰라도 이들은 고블린 사냥을 재미있는 놀이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이것도 그 분의 능력인가? 고블린을 막아주는 이 벽 말이야."

"아마도. 처음에 우리가 겪었던 그 투명 장벽의 연장선인 거 같은데?"

"와. 엄청난 능력이었네. 잠깐만···."

이준혁 그룹 중 하나가 불안한 눈빛이 되어 말을 이었다.

"만약에 우리도 눈 밖에 나게 되면 방금 고블린들처럼 머리가 날아가 버리는 거 아니야?"

"······."

"······."

그의 발언에 한껏 흥분하던 파티원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 그럼 방금 그건 그 분이 보내는 일종의 경고장이라는 거야? 말 잘 들으라는?"

무거운 침묵이 파티 전체에 내려앉았다.

"우, 우리가 뭔가 잘못이라도 했나?"

그것이 공포로 번져갈 때쯤, 이준혁이 나섰다.

"눈 밖에 날 일이 없으면 되는 거 아닌가?"

"뭐라고 준혁아?"

"다들 겪어봤잖아. 정상적인 화장실. 따뜻한 물로 샤워가 가능한 집. 따뜻한 밥을 해먹을 수도 있고, 따뜻한 이불 속에서 잘 수 있는 집을 주신 분이야."

이준혁은 파티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니 눈 밖에 나는 일 없도록 알아서 잘, 깔끔하고 센스 있게. 우리가 처신을 잘 하면 되잖아."

[시민 이준혁의 충성도가 30을 돌파했습니다.]

[시민 이준혁이 가신 등록을 위한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마침 타이밍 좋게 이준혁이 가신 등록을 위한 최소 조건을 만족시켰다.

'가신 등록, 이준혁.'

그 순간 이준혁의 몸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어?"

"뭐, 뭐야?"

"준혁 오빠!"

『이름 : 이준혁 (Lv. 40) [+]

칭호 : [열두 번째 종] [기사] [마법사]

신뢰도 : 59 충성도 : 31

각성 능력 : 크리에이트 워터, 워터밤, 컨트롤 워터

경험치 분배율 : 0% (+100%)

★퀘스트 부여 』

{마법사}

스킬의 위력이 100% 증가합니다.

워터밤 (A 등급)

고열로 압축된 물을 소환하여 폭발시킨다. 소모되는 정신력에 비례하여 위력이 올라간다.

컨트롤 워터 (S 등급)

정신력을 소모하여 자신이 소환한 물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다.

'음?'

S 등급 능력을 각성할 줄이야.

이준혁이 처음 들고 있던 능력의 등급이 B등급이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잘 풀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레벨이 높았기 때문인가?'

가신으로 등록하는 시점의 그는 33레벨로 오언주가 가신 등록할 때의 레벨과 같았다.

'단순히 운은 아닌 것 같은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결과가 좋다는 게 중요했다.

'어찌됐든 대박이다.'

이것으로 두 번째 S 등급 능력자가 탄생한 것이다.

'퀘스트 부여.'

"퀘스트 부여"

퀘스트 내용 : 워터밤과 컨트롤 워터 사용해보기.

제한 시간 : 10분 00초

보상 : 정신력 강화.

실패 페널티 : 정신적 피로감.

시민들은 자신의 상태창을 볼 수 없었다. 당연히 자신이 얻은 새로운 각성 능력에 대한 정보도 알 수 없었다.

스킬의 사용법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깨닫게 될 수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직접적으로 스킬 명을 알려주는 방식이 훨씬 습득이 빨랐다.

"준혁아 괜찮냐? 방금 네 몸에서 빛이···!"

"잠시만요."

이준혁은 내가 준 퀘스트를 정독하고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워터밤."

콰아아앙!

허공에서 제법 위력적인 폭발이 터졌다.

그리고.

쏴아아아아

물폭탄에서 뿜어져 나온 물방울들이 소나기 되어 쏟아졌다.

지금 이준혁 파티 일행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빗방울은 모두 이준혁이 만들어낸 물줄기였다.

"컨트롤 워터."

그 순간.

쏟아지던 물줄기가 허공에 멈추어 섰다.

허공에 멈춰선 물방울에 달빛이 산란하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대규모 마술 공연과 같은 그 광경에 모두 잠시 넋을 놓았다.

"윽."

그러나 잠시 후 이준혁의 집중력이 깨어지는 순간.

쏴아아아―

물방울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

"이게 뭐야?"

"준혁아 네가 한 거야?"

그러나 그들의 말소리는 이준혁에게 닿지 않는 듯 했다.

"하하, 하하하하!"

미친 듯이 웃던 이준혁은 갑자기 두리번거리더니 아파트 단지를 향해 절을 하며 머리를 박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이준혁의 돌발 행동에 파티원들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민 이준혁의 신뢰도가 크게 올라갑니다.]

[시민 이준혁의 충성도가 크게 올라갑니다.]

[시민 이준혁이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퀘스트 비용 70,251 원이 소모됩니다.]

'어우. 왜 저래? 너무 과한데.'

이게 머리까지 박으면서 감사할 일인가.

좋은 능력을 각성하긴 했다지만, 그 반응이 너무나도 격렬했다.

그래도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다시 퀘스트 부여.'

똑같은 내용의 퀘스트를 2번 더 부여해서 단숨에 일일퀘스트를 완료해버렸다.

[시민 이준혁이 오늘 수행 가능한 퀘스트 횟수를 모두 소모하였습니다.]

[시민 이준혁이 수행한 퀘스트들을 평가합니다.]

[······ 평가 중 ······]

일일퀘스트 평가가 진행되는 동안 그를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 봤다.

'하동건 파티에 합류시키는 게 나으려나?'

이제 와서 이준혁만 쏙 빼서 하동건 파티에 합류시키는 건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하동건 파티는 이미 균형이 잘 맞는 파티였다.

그들만의 팀워크가 완성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준혁을 투입한다면 처음 오언주를 집어넣었을 때처럼 삐걱거리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준혁이 지금 이끌고 있는 집단의 가치가 확 떨어지게 되겠지.'

그들은 이준혁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여기서 이준혁이 빠지는 순간 높은 확률로 오합지졸로 변하게 되겠지.

아무래도 당분간은 이준혁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굴리는 것이 맞지 싶었다.

[평가 완료.]

[정신력이 대량으로 상승합니다.]

'음?'

일일퀘스트 보상 중에 '대량의'라는 수식어가 붙는 경우는 정말 거의 없었다.

체감 상 100번 중 한 번 정도 있을까 말까 하는 수준이었는데, 그것이 지금 터진 것이다.

'운이 좋군.'

그렇지 않아도 레벨업에 따른 격통에 무척이나 피곤하던 참이었는데, 정신력이 상승하며 견딜만한 수준으로 바뀌었다.

그때.

'음?'

하동건 파티 쪽이 소란스러워 지는 것을 느꼈다.

043화 [Episode 10] 부산역 (3)

'무슨 일이지?'

의식을 되찾은 김가영이 서럽게 울고 있었다.

"허어엉. 동건아, 흐윽."

하동건이 품에 안긴 김가영을 위로했다.

"잘못 본 걸 거야. 괜찮아."

김가영은 고개를 휘저으며 말했다.

"봤어, 흑, 아, 아빠인 거 확인 했어. 분명히 봤어, 내가

그녀는 제대로 말을 이어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머리를 다친 김가영이 헛소리를 하는 줄로만 알았다.

"허윽. 아빠, 우리 아빠, 불쌍해서 어떡해?"

하지만 분위기를 보니 그게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물에 들어갔다 온 듯한 김가영의 모양새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물에 흠뻑 젖은 그녀의 모습은 한 번 더 물에 들어갔다 왔다는 것을 뜻했다.

그녀는 호수 안쪽에서 보고 만 것이다.

세이렌에게 당해 호수 속으로 끌려 들어간 아버지의 최후를.

"동건아. 우리 아부지 불상해서 어떻게, 어떻게 해. 흐으읍."

하동건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김가영은 하동건의 품 안에서 흐느껴 울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녀의 모습이 남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김가영은 우연히 죽은 아버지를 만나 뵙게 되었지만, 나는 스스로 자초하여 가족들의 죽음을 확인하러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악의 경우에도 길은 있다.'

플랜B.

만약에 가족들이 죽었을 경우에는 내 능력으로 부활시킬 생각이었다.

얼마가 들건 돈을 모아서 완전하게 부활시킬 작정이다.

그러다 문득 지금 상황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한 가지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퀘스트 재구성, 대상 김가영, 퀘스트 보상- 아버지의 부활"

그러나.

[불가능한 퀘스트 보상입니다.]

돈이 부족하다는 알림이 아니었다.

불가능한 퀘스트 보상이라는 알림.

즉, 김가영의 아버지를 부활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그런가

오언주의 아들은 집구석 영역의 영향력이 미치는 공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김가영의 아버지는 전혀 별개의 공간인 부산역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것이 차이점이었다.

'모든 죽음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활이 가능한 경우와 불가능한 경우가 나누어져 있었다.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집구석 영역 근처에서 발생한 죽음.

집구석 선포의 영향력 아래 있는 공간에서 죽은 이들만 부활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는 건--'

만약 가족들이 이미 죽었을 경우, 아무리 많은 돈을 모아도 부활은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으득

어째선지 아버지의 죽음에 서럽게 울고 있는 김가영의 모습에 스스로가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후우'

당장 움직이라고 재촉하고 싶었지만, 가족을 잃고 슬퍼하고 있는 김가영에게 차마 그런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다.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아파하기에도 모자랄 테니까.

"흐흐흑"

무거운 침묵 속에서 김가영의 울음소리만 한동안 울렸다.

그때였다.

하동건이 말했다.

"아버님 저기서 꺼내드리자."

김가영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저기서 끌어올려 드리자. 내가 다녀올게"

"응, 응"

코맹맹이 소리로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김가영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하동건은 울먹이는 김가영에게 가볍게 입을 맞춘 후 곧바로 다시 호수 속으로 들어갔다.

첨벙!

하동건의 헤드랜턴이 물속의 어둠을 몰아내고 그곳의 광경을 비추었다.

'끔찍하군!'

호수의 밑바닥은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그곳에는 세이렌에게 당해 끌려 들어간 사람들과 몬스터들의 사체들이 한 데 뒤엉켜 있었다. 고블린, 오크, 인간이 사이좋게 얽혀 있는 모습은 한 차원 다른 역겨움을 선사해주었다.

'이러니 근처에 아무것도 없었지?'

적호 때와 비슷했다.

단순히 거인이 날뛰었기 때문이 아니라, 세이렌이라는 몬스터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던 거였다.

하동건은 침착하게 호수 속을 유영하더니 한 남자의 앞에서 멈춰 섰다.

솔직히 물에 분 얼굴은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만큼 처참하게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구분할 방법이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코레일 직원 유니폼과 그 위에 붙어 있는 명찰.

「김덕훈」

그 위에 적힌 이름을 확인한 하동건이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김가영의 아버지구나'

김가영이 그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확신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동건이 그를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하반신이 콘크리트 더미와 철근 사이에 끼어 있어 쉽지 않아 보였다.

결국 내가 나섰다.

'창고 보관, 김덕훈 씨의 사체'

지이잉—

하동건은 사체가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한 듯 했다. 그는 시체가 모두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 물 위로 올라왔다.

'소환!'

김덕훈 씨의 사체가 나타나자 김가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빠..."

김가영은 아버지의 명찰을 쓰다듬더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울었다.

어째서일까.

이번에는 서럽게 울고 있는 김가영보다도 주변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표정이 더욱 눈에 들어왔다.

눈시울을 붉히는 오언주, 씁쓸한 표정을 짓는 김다정, 충격받은 얼굴의 강덕수, 입술을 깨무는 김 건, 입을 꾹 닫은 하동건까지.

그들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들이 나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다른 이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가족들의 생사를 걱정하고, 동시에 두려워했다.

'그런가'

알고는 있었다.

가족들을 걱정하며, 하루라도 빨리 그들을 보고 싶어 하는 게 나만의 소망은 아니라는 것을.

다른 이들도 가족이 있고, 당연히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리라는 것을.

그러나 나는 애써 모른척 했다.

당장 내 가족들을 구하는 게 먼저였으니까.

'다들 내게 양보해준 거구나'

머리로 알고 있었던 것과, 실제로 실감하게 되는 것은 정말이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들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그리고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했던 걸까.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걸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나는 가족들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죄인이라도 된 듯 안절부절못하던 문병호가 김가영을 향해 말했다.

"시신은 재현님에게 잠시 보관해달라고 하는 게 어떨까요. 여기 근처에는 마땅한 장소도 없고 또, 아파트 단지 근처에 못자리를 만드는 게.."

김가영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빠는 여기가 좋을 거야"

"네?"

"우리 아빠는 일 중독자였거든. 자부심도 대단하셨고 죽어서도 기찻길에 묻히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셨어."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될 수 있으면 기찻길에― 흑. 묻어드리고, 싶어"

다음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시신을 창고 안으로 수습했다.

그들을 도와서 김덕훈씨의 사체를 옮겨주기 위해서였는데, 그 모습을 본 하동건 파티는 약간 당황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오언주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으음. 무덤은 임무 수행 이후에 부산역에 다시 돌아와서 만드는 게 어떨까요?"

아무래도 내가 작전 실행을 재촉하는 것처럼 느껴진 모양이었다.

오해를 풀기 위해 그들 모두에게 퀘스트를 부여해 주었다.

<파티퀘스트 부여"< p>

퀘스트 내용 : 기찻길에 무덤 만들기.

제한시간: 1시간 00분 00초

보상 : 소량의 경험치 획득.

실패 페널티 : 없음.

[이대로 퀘스트를 부여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예'

아무래도 의지를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이 이런 것밖에 없다 보니 조금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의사소통에 커다란 문제는 없었다. 이렇게 바로잡으면 되는 문제였으니까.

그렇게 내 의지를 전달받은 하동건 파니는 부산역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현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너무 안 좋으세요."

눈을 뜨자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서예진의 얼굴이 보였다.

"예진씨.."

"네?"

순간적으로, '예진씨는 좋으시겠어요.'라고 말할 뻔했다.

서예진의 가족은 무사히 그녀 품으로 돌아왔으니까. 지금 함께 있으니까.

그러니까 좋겠다고, 부럽다고 그렇게 말할 뻔했다.

다행히도 간신히 이성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부산역 주변으로 생쥐를 퍼뜨려서 몬스터가 있는지 없는지 살펴주세요. 위험한 상황이 될 것 같으면 즉시 하동건 파티에게 알려주시고요."

"알겠습니다."

하마터면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뻔했다.

무사히 가족과 만난 사람을 질투하는 모습이라니.

'꼴사납군'

집중력이 느슨해진 탓일까, 어느새 절대자의 눈의 시야는 두 개로 줄어들어 있었다.

하동건 파티를 비추는 것과 이준혁 파티를 비추는 것 하나였다.

내가 더 이상 퀘스트를 내주지 않자 이준혁은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를 보니 문득 다시 스킬 포인트에 대한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스킬 포인트가 아직 2개나 남아 있었지!'

집구석 절대자의 눈 스킬을 올리면서 생겨난 다중 시야에 집중하느라고 남은 스킬 포인트에 대한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두 번째로 올릴 스킬은...'

품위 유지 스킬의 옆에 레벨업 버튼이 활성화되어 있는 게 보였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택했다.

'품위 유지 스킬 레벨업!'

[집구석 절대자의 품위 유지 스킬이 Lv. 5가 되었습니다.]

[신기 뽑기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크리스탈 300개를 지원받았습니다.]

'크리스탈?'

크리스탈은 또 뭔가하고 보니 새롭게 추가된 기능인 신기 뽑기에 필요한 자원었다.

1회 뽑기에 크리스탈 300개.

그러니까 신기 뽑기를 체험해 보라고 300개의 크리스탈을 건네준 것이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신기 뽑기'

우우웅!

일전에 까미를 소환했을 때처럼 화려한 문양의 마법진이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절정의 순간, 마법진이 뱉어낸 황금색 빛줄기는 한곳으로 모여 뭉쳤다.

그리고.

딸각

거실 바닥에 무언가 떨어졌다.

'반지?'

평범해 보이는 금반지였다.

'절대자의 눈'

그러나 절대자의 눈으로 본 그 반지에는 특별한 힘이 담겨있었다.

<소통의 반지>

가신들에게 집구석 절대자의 음성을 전달해주는 반지.

'흠 나쁘진 않은데'

지금도 소통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퀘스트 부여의 빈틈을 이용해 얼마든지 명령을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퀘스트 내용으로 명령을 전달하고, 퀘스트를 취소해버리면 아무런 손해 없이 정보를 전달하는 게 가능했다.

복잡한 정보를 전달해야 할 때는 편지를 써서 창고 스킬로 전달하는 방법도 있었다.

'한 번 사용이나 해 볼까!'

반지를 착용해보니 내 손에 꼭 맞았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힘을 사용해야 할지 곧바로 전해져 왔다.

절대자의 눈에 비치고 있는 하동건 일행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제 목소리 들리시나요?]

부산역으로 막 진입하고 있던 하동건 파티는 깜짝 놀란 듯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잘 들리시나 보네요.]

"네, 잘 들립니다"

하동건이 대답했다.

[이제부터는 이렇게 소통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덤은 기찻길 옆에 단촐하게 만들어졌다.

오언주가 판 땅속에 시신을 누이고 흙으로 덮은 다음 끝이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소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빠 소원 이뤄졌네"

김가영은 김덕훈의 무덤 앞에서 짧은 묵념을 끝내고는 말했다.

"이제 가죠."

[조금 더 있어도 됩니다.]

"충분합니다. 아빠의 소원을 이뤄드릴 수 있었는걸요."

김가영은 아버지의 무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제 고집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응어리진 마음이 많이 풀렸어요."

그렇게 하동건 파티는 다시 자갈치역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직접 사용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장점이 훨씬 많았다.

일단 다른 방법에 비해서 즉각적인 피드백이 가능하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퀘스트 부여를 사용하는 방식은 아무래도 정보를 전달하는 데 시간이 걸렸으니까'

전달하는 정보의 질에도 한계가 있었다.

퀘스트로 부여 가능한 형식으로만 정보를 알려야 했으니까.

더불어 아까와 같은 오해가 생길 일도 없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곧바로 그 에 대한 설명이 가능했다.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게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생각보다 되게 괜찮은데?'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장점이 존재했다.

'이건 김다빈 쪽과 상성이 훨씬 좋겠는걸?'

김다빈을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잊고 있었던 사실이 하나 떠올랐다.

'맞다. 김다빈도 각성했었지?'

정확히는 충성도가 100이 되며 자동으로 가신으로 등록된 상태였다.

당연히 각성 능력도 얻었을 것이다.

'가신 관리, 김다빈'

「이름 : 김다빈 (Lv. 25) [+]

칭호: [열한 번째 종]

신뢰도 : 77 충성도 : 100 각성 능력 : 텔레파시

★퀘스트 부여」

그녀가 각성한 능력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대박이네.'

어쩜 이리도 업무에 찰떡궁합인 능력을 각성한 것인지.

그녀에게 텔레파시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절대자의 눈으로 21층을 비추었을 때였다.

'음?'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곤란해하고 있는 김다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044화 [Episode 10] 부산역 (4)

"50명이 한 세대에서 같이 자라고? 우리가 무슨 닭인 줄 알아?"

"그게 일단 임시로.."

"임시는 무슨 놈의 임시! 아까 보니까 빈집도 많더만! 다 둘러보고 온 건데 무슨!"

사람들이 단체로 몰려와 김다빈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불만을 토로했다.

"아니, 적어도 사람들이 다 같이 자게는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애들은 편하게 재워야 할 것 아니야."

"그러지 말고 빈방 몇 개만 줘요. 들어가서 잠만 잘 테니까"

"죄송합니다. 저희 원칙상"

거기까지 본 나는 곧바로 움직였다.

거실 중앙에서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는 서예진을 지나, 유혜린이 잠들어 있는 안방의 문고리를 잡았다. 현관문이 아닌 이곳으로 향한 이유는 이번에 레벨업으로 얻은 새로운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집구석 절대자의 문 Lv. 1

-집구석 선포가 된 영역 내의 있는 문과 문 사이를 연결할 수 있다.

20레벨이 되면서 새롭게 생겨난 스킬의 기능이었다.

'21층으로'

안방으로 향하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유혜린이 잠들어 있는 모습이 아닌 21층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차피 당신들도 남의 집 마음대로 무단 점거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이런 비상 상황에 서로서로 돕고 살아야지, 당신들이 뭐라도 된 줄 알아? 어?"

이제는 도를 넘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접니다. 그 남의 집 무단 점거한 사람이"

김다빈에게 단체로 항의중이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집중되었다. 방금 김다빈의 앞에서 목소리를 키우던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만든 정책이 불만이시라면, 제 집에서 나가주시겠습니까?"

"뭐요-? 나이도 어린 것이 지금 얻다 대고---!"

긴말 필요 없었다.

'퇴출, 성윤식'

김다빈을 향해서 위협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던 남자를 곧바로 퇴출시켰다.

그 순간.

[시민 성윤식이 집구석 선포 영역에서 추방됩니다.]

슈슉—

성윤식의 몸이 사라졌다.

집구석 영역 밖으로 추방된 것이다.

추방될 경우 정말 신사적으로 집구석 영역 밖으로 이동시켜 준다.

강제로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다치거나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경우는 없었다.

물론 지금 시간에 혼자서 집구석 영역 밖으로 나간 시점에서, 목숨을 보장받기는 어려웠지만 말이다.

'절대자의 눈'

혹시나 몬스터가 있는 구역으로 내보내진 것은 아닌지 확인해봤다. 다행히 그가 퇴출된 골목에는 어둠과 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어색한 손길로 투명 방벽을 건드려왔다.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저, 저기요."

성윤식의 떨리는 목소리만 골목길을 공허하게 물리고 있었다.

"아, 아무도 없어요? 저기요---!"

그 모습을 확인하며 나는 다른 이들을 향해 물었다.

"또 불만 있으신 분?"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어색하게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나는 잠시 그들을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친 뒤에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시간부로 여러분들이 이용하시는 세대의 전기, 수도, 가스 공급을 중단하겠습니다."

"네?"

"아니, 그게 무슨?"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

정확히 불만을 내뱉은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네요. 지금 이게 도대체 무슨 경우입니까?"

나라고 좋아서 사람들을 한 곳에 몰아넣는 게 아니었다.

"묻고 싶네요. 여러분들이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여러분들이 이곳을 찾은 시점이, 저희가 거인을 처리한 직후인 것은 우연인가요?"

157명이라는 대규모 인원.

이들은 다른 생존자들에 비해 마실것과 먹을 것을 넉넉히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당연했다 저만한 인원이 모이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였으니까.

각성자는 없었지만, 물자적으로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집단이었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뻔했다.

"거인과 같은 괴물도 처치할 정도의 능력이 있는 곳이니 믿을만하다고 판단해서 찾아온 것 아닙니까? 보호받기 위해서요."

워낙 요란한 이벤트였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죄다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는 것은 거인과의 전투가 일종의 홍보 효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장 여러분들과 비슷한 생각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백 명씩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순간 그 즉시 세 가지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하나, 빠른 속도로 빈방이 소모되고, 결국에는 새로 유입되는 사람들을 받을 수 없게 되거나 그들을 길바닥에 나앉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둘, 기존에 시민으로 있던 이들이 불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셋, 한 번 들어주게 되면 끝도 없이 요구해올 것이라는 점이다.

"이번 기회에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힘 있는 자의 폭거.

솔직히 그렇게 바라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입장이 훨씬 더 좋은데 내가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여러분들이 바라는 기본권, 복지 그런 건 여기에 없어요. 세상을 보십시오. 대한민국 정부는 이미 망했고, 저는 정부의 대리자가 아닙니다."

지금 세상은 그런 낭만적인 것들을 원하기에는 지나치게 잔혹한 곳이었다.

"권리를 누리고 싶다면, 그에 걸 맞는 자격을 먼저 갖추시길 바랍니다."

솔직히 보기 좋지 않았다.

다른 생존자들은 불편한 환경에서 적응하기 위해 자기들 나름대로 노력하는 중이었다.

3교대로 나누어 잠을 청하며 공용 시설의 공간 활용을 극대화한다든지, 먼저 이곳에 적응한 시민들에게 조언을 구한다든지, 기존에 있던 시민들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세를 들어가든지.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적응하고 있었다.

불편함 속에서도 아이들과 약자들을 먼저 배려하고, 함께 헤쳐나가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들은 방법을 찾는 대신 무작정 요구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배가 부른 거지.

그런 사람들과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배정된 숙소로 돌아가세요. 이 이상 잃고 싶지 않다면"

내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고개를 떨구고 우루루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시민 김다빈의 신뢰도가 크게 올라갑니다.]

그 모습을 보던 김다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재현님. 덕분에 살았어요."

나는 빙긋이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소통의 반지를 사용했다.

[감사하긴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어?"

[감사는 오히려 제가 드려야죠.]

김다빈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입을 열지 않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내 음성이 들려오고 있으니 당황스럽겠지.

그런 그녀를 향해 계속해서 소통의 반지를 사용했다.

[신기하신가요?]

"엇, 네에"

[아마 다빈씨도 비슷한 걸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네? 제가요?"

[텔레파시 아시죠? 말을 전하려는 대상을 생각하면서 속으로 말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순간.

[이, 이렇게요?]

김다빈이 텔레파시를 사용하는 데에 성공했다.

[잘하셨습니다. 정확한 사용 조건이나 제한 등은 직접 사용하시면서 익혀 나가시면 될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바로 코앞에 두고 텔레파시만을 사용해서 대화를 하자니 약간 이상한 느낌은 있었다.

그때였다.

"저, 저기.."

뒤를 돌아보자 머리가 벗겨진 아저씨 한 명이 초조한 기색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까 우르르 몰려왔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나요?"

내가 강하게 나오자 남자가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저, 정말 염치없다는 건 알지만, 방금 퇴출당한 친구... 한 번만 용서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하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그것이 윤식이가 목소리가 제일 크긴 했지만, 그것이 모두의 의견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모두의 책임인데, 윤식이 혼자서 모든 것을 뒤집어쓰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불이익을 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한 번만 자비를..."

확실히 성윤식을 퇴출시킨 것은 과한 처사이긴 했다.

혼자서 쫓겨난다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는 사실상 사형 선고와 같았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다시 받아주려고는 했었지.'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다행히 성윤식도 어디 가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 상태였다.

눈물 콧물 흘리며 서럽게 울고 있다는 점이 다르긴 했지만,

나는 눈앞의 대머리 남자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제 이름은 김재현이라고 합니다."

"한경훈이라고합니다."

한경훈과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 난 뒤 물었다.

"묻겠습니다. 한경훈씨는 그 집단의 대표로 저를 찾아온 것인가요?"

"네?"

"방금 그 의견이 다른 분들도 동의한 내용인지 묻고 있는 겁니다. 성윤식씨를 다시 받아주는 대신에 다 함께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는 의견 말입니다."

"그, 그렇습니다. 다 함께 결정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제쯤 성윤식을 받아줘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다. 본보기를 위해 한 사람의 생명을 거두어 갈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저쪽에서 먼저 숙이고 들어와 주니 오히려 고마웠다.

또한, 어느 정도 나쁘게 자리잡힌 이미지도 희석되고 있었다.

'그래. 이 정도 결속력은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거겠지?'

각성자도 없이 대규모 집단을 형성한 사람들이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아 그만한 집단을 이룬 것부터가 나름대로 능력이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분명 쓸만한 구석들이 있을 것이다.

"좋습니다. 성윤식씨에게는 다시 시민권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사용하는 공용 시설에 가스를 제외한 전기와 수도를 공급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저, 정말입니까?"

"여러분들의 동료애를 봐서 이번 한 번만 봐 드리는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시민 한경훈의 신뢰도가 크게 올라갑니다.]

이 집단에 포함된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스도 풀어주고 싶지만, 그래서야 벌이 아니게 된다.

적어도 찬물에 샤워하고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는 바닥에서 잠자는 고통은 겪어야 하지 않겠는가.

'전기장판도 있으니 애들은 알아서 따뜻하게 재우겠지!'

한경훈이 떠나가고 김다빈이 텔레파시로 말을 걸어왔다.

[재현님은 참 마음이 따뜻한 분이신 것 같아요.]

그에 나도 소통의 반지를 사용해 화답해 주었다.

[제가요?]

[네.]

이상하다.

방금 대화에서 내 마음이 따뜻하다고 여겨질 구석은 없는 것 같은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것도 일종의 콩깍지가 아닐까.

따스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다빈을 향해 말했다.

"지금 3개 동에 배치된 공용시설 말입니다만, 25개 동에 전부 하나씩 배치할까 생각 중입니다."

"25개 동 전부요?"

"네."

그와 동시에 김다빈의 눈가에 다크서클이 한 층 더 진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지금 다빈씨 팀원이 몇 명이라고 하셨죠?"

"혜린씨와 형준 아저씨를 포함해서 총 15명입니다."

"100명까지 늘리셔서 운영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한 개 동에 4명씩이면 충분히 관리가 될 것 같은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김다빈이 토끼눈을 하며 되물었다.

"배, 백 명이요?"

"네. 모두 일당 10만 원씩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즐거운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미소였다.

"그 정도 규모라면 안정적으로 돌릴 수 있을 것 같네요. 더불어서 제 발언권도 강해질 것 같고요."

그때였다.

[21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이곳으로 다가왔다.

그들 중 남자 한 명이 대표로 나와 김다빈에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혹시 의료팀 같은 거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의료팀이요?"

남자는 자부심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부산백병원 신장내과 부교수 이성민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기 시작하니 다른 의미의 능력자들도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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