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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진주언가 4

#116화. 

— ······. 

장내가 소름끼치도록 고요해졌다. 

언 선생 숙부의 머리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고, 떨어진 몸뚱이에서는 무언가 흘러나온다. 사람의 피겠지. 대나무 끝에 고고히 서있던 결단경 수도자는 그렇게 죽었다. 사람 머리가 저리도 쉽게 터질 수 있던 거였나. 어째서 터진 것인가. 

그래, 진법 안에서는 원래 진법가가 왕이다. 

진법가의 머릿속 심상을 현실에 구현해낼 수도 있으니, 누군가를 저리 죽일 수도 있다. 아무래도 언 선생은 언가의 진법에 특이한 방법으로 손을 뻗어 숙부를 죽인 듯했다. 

공손히 꿇어앉은 언 선생은 환히 웃으면서도 계속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오락가락. 원래도 저랬던 사람이라 나는 금세 적응했다. 

그때였다. 

동생이 죽었는데도, 그의 부친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고대부터 이어져온 대라금몽진을 비틀어 혈족을 죽이고, 괴공법에 손을 대가며 부모를 죽이는 것이 바로 네가 내린 결론이더냐. 허면 너는 끔찍하고 어두운 마(魔)다. 왜 자신있게 들어왔는지 알겠다." 

부친이 그리 말하자, 짐작할 수 없이 피어오르던 언 선생의 악의가 잠시 수그러들었다. 

"예! 이 언가는 그리하여 어두운 흑돌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떻게 두시든 단판으로 끝날 것입니다. 이제 착수하십시오! 괴물로 변하셔도 좋고 사람으로 남아도 좋습니다!" 

"······." 

그가 늘 곁에두던 바둑 얘기로군. 

바둑은 보통 백(白)돌을 잡은 쪽이 불리하다. 

흑(黑)돌이 첫수를 두어 선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언 선생의 대국을 떠올려보면 그가 흑돌을 잡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곳과 비교하면 참으로 비좁은 플라자의 골방에서. 

풍령개와는 물론이고 늙은 개방도들과 바둑을 둘 때도 그는 늘 백돌을 선택했다. 패해도 백돌 이겨도 백돌. 반나절 전 경계선의 객잔에서도 그는 후공인 백돌을 잡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흑돌과도 같이 선공을 취했다. 주저하지도 않고 가문의 숙부를 죽였다.

그는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선공을 취한 것이다. 

그것은 언 선생이 원영경의 수도자인 부모를 상대로 불리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부분일 수도 있으나, 어떻게 보면 뜻이 맞지않아 출가했던 언 선생이 큰 결심을 하고 돌아와 던진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백을 고집하다 흑이 되었으니. 

취이이익—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팔이 두꺼운 개방도들이 하나같이 옷자락을 걷어붙이고는 건틀릿을 예열하는 소리였다. 숯더미 속에 던져진 듯 덥혀진 열기가 훅 불어왔다. 

다들 기세는 좋으나 절정은 못 되는군. 

왕초삼놈의 건틀릿도 증기를 뿜어내며 꿈틀댔다. 나는 그 거지들과 한 발짝 떨어져서 흐름을 파악했다. 

저쪽에 법부적 붙은 생강시가 삼십 기는 되었다. 법력을 보아 가문의 문지기였던 혈시보다는 약할 것이었으나, 크게 뒤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는 진주언가가 다스리는 공간 아닌가. 

지금, 상대의 목숨을 취할 전투 준비가 끝났다. 

— ······. 

헌데도 이곳에서 가장 요주의 인물인 언 선생의 부친과 모친은 생각을 하는듯 가만히 있었다. 

그 묘하게 정적인 상태에서, 누군가가 빽빽대며 소리를 질렀다. 

— 저런 괴물딱지 같은 놈! 

— 정말로 돌아가셨다는 말인가? 

— 결단경의 수도자를 벌레처럼 죽이다니. 

— 마귀나 다름없는 저자를 당장 죽입시다! 

여기저기서 모여든 언가의 수도자들이었다. 

숙부의 머리가 펑 하고 터진 후, 지금까지는 조용했는데 언 선생을 잘 모르는 듯한 수도자들이 극도로 동요했다. 그들은 연기경이나 축기경 수준의 평범한 수도자들로 보였는데, 당장 언 선생을 죽여야한다며 욕을 뱉었다. 

그러나, 다른 언가의 수도자들은 아니었다. 

— 실로 흉악한 법력이야. 대성을 이뤘구나. 

— 제 부모를 죽이려 정말로 정신을 버리고 왔다니. 

— 미친채로 영화를 누리는 게 무슨 소용인가? 공허하다. 차라리 변절이 더 낫지 않겠는가. 

앞선 수도자들보다는 나이도 있고 법력도 심후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침착했다. 언 선생의 이 행동이 변절과 관련되어 있는 것을 알고있는 듯했다. 수도자들은 속세를 등지고 가문에만 처박혀 살만큼 수행에 몰입해있는 자들이었고, 그들은 모두 같은 가문의 사람들이라 모르는 게 더 이상하리라. 

수염이 신선처럼 늘어진 한 수도자가 말했다. 

— 원영경에 오르지 않는다면, 육신이 부하를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버릴 것이다. 하지만 원영경에 오르더라도 정신이 오염되어 미쳐버릴 터. 정말 단단히 마음을 먹었구나. 

천재라던 언 선생의 말은 모두 진짜였나보군. 

나도 마공이라 부를만한 것을 몇 개 알고있다. 

고강해보이는 수도자도 언 선생의 성취를 저리 평할 정도라면, 평범한 범인이 익히기에는 어림도 없을 만큼 대단한 마공일 것이다. 

끝없이 단단하고 깊은 정신력이 있어야 시도나마 가능한 것. 그러니 언선생은 자신이 말한 대로 천재가 맞을 것이다. 

그는 공법의 무서움을 알고도, 언가를 도모하고 수도자들을 세상에 끌어내기 위해 끝끝내 그걸 극성까지 익혔으니. 

하지만 미쳐갈 것이다. 

천천히 미쳐가다 마침내는 아예 돌아버릴 것이다. 지금까지 오락가락하며 버티고는 있지만 어느 시점이 지나면 순식간에 침전되어 가라앉는다. 나도 저 정도의 악의를 보일줄은 차마 상상치 못했으니, 아주 빠르게 가라앉을 것이다. 

상황이 아주 어수선한 도중에, 나는 울고 웃는 언 선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언 선생." 

"하하! 첫 번째로, 나의 비정한 도리에 숙부가 죽었구나. 내게 법부적의 묘리를 알려준 분이었지. 아직도 잘 쓰고 있노라." 

숙부를 죽인 뒤로 더욱 정신이 나갔는지, 언 선생은 확실히 부리또를 먹을 때보다도 정신이 약간 더 나가 보였다. 그런데 심후하면서도 사악한 법력을 일으키던 그가 갑자기 울면서 내게 물었다. 

"헷갈리냐? 헷갈리겠지." 

"뭐가 헷갈리냐는 말입니까." 

"나의 육신이 토하는 기운이 사악하고, 울보처럼 울다 웃다 횡설수설하여 너의 검끝이 갈피를 잡기 힘드냐는 말이다. 피 섞인 숙부를 이리 흉하고 처참하게 죽였는데 너는 무섭지 않으냐. 저들보다 사실 내가 더 괴물일까봐. 너의 머리도 저렇게 터질까봐." 

변절을 선동하는 부모를 죽이러 왔는데, 다른 가솔들마저 그를 괴물이라 욕하니, 언 선생은 확연히 창백해졌다. 의지할 곳이 없는 고아 같았다. 실체가 무엇이든 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았다. 

그리고 언 선생의 부친과 모친이 입을 딱 닫고, 백돌을 두지 않는 이유도 알았다. 

앞선 수도자들의 비난이 그의 부모가 둔 백돌이었다. 언 선생은 분명 호기롭게 나서 혈겁을 펼치겠노라 했으나, 정신이 온전치 않아 자칫하면 그대로 무너져 내릴 듯했다. 

"부모는 자식의 하늘이라 했습니까." 

그래서,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창백해진 언 선생이 즉시 긍정했다. 

"우리 진주언가는 그랬다. 분명 그랬다." 

"언 선생. 나는 이번 생에 부모없이 태어나 천애고아로 자랐으니, 부모를 새로 모시기 전까지 내게 하늘이란 없습니다. 오늘 언 선생도 부모라는 하늘을 내다버릴 참이니, 이제 하늘없는 고아끼리 어디 잘 꾸려나가봅시다. 뭐 사는 게 힘들면 사람이 미칠 수도 있지요."

"······푸하하핫!" 

"크하하하!" 

아무 얘기나 뱉었는데, 언 선생이 호방하게 웃길래 나도 산적처럼 웃었다. 다들 우리를 미친놈들 보듯 보았다. 미친놈들이 맞았다. 아무튼 나는 언 선생이 혈겁을 펼치는 데 도움이 되어주어야 하므로 녹림이 운영하는 산채의 산적 두목처럼 박력있게 웃었다. 그랬더니 몸에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오늘 하늘을 버리고 벗을 얻었구나." 

그 말 뒤로, 울고 웃던 언선생이 움직였다. 그는 이제 다음 돌을 놓을 준비를 했다. 아까보다 훨씬 쩌렁쩌렁한 음성이 진주언가를 때려울렸다. 천지가 들고일어나 노호성을 지르는 듯했다. 

[ 나의 부모, 숙부, 그들은 인의 도가 아닌 그릇된 도를 걸으려 했다. 사람이 아닌 괴물이 되고자 하는 그들을, 어찌 언가의 수도자라고 할 수 있겠나! 너희중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살다 끝내 사람으로 죽을 자! 나 언가를 막지 말아라!!! ] 

어미아비도 그들 나름의 이유랄 것이 있겠으나, 어차피 언 선생의 도리에는 부합하지 않을 것이었다. 결국에는 파국이었다. 

꽈과과광! 

언 선생의 악의가 심대히 부풀더니 푸르렀던 하늘이 간단하게 무너져내렸다. 그것은 진짜 하늘이 아닌 거짓 하늘이었다. 언 선생은 진주언가의 수도자들이 진법으로 연성해낸 거짓 하늘을 무너뜨렸다. 

곧. 

넘실대는 악의가 언 선생의 혀를 타고 온사방을 장악했다. 많이 놀랐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언 선생이 이룩한 법력과 경지는 심후했다. 방금의 노호성을 마지막으로, 그는 고심하던 원영경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임자, 죽입시다." 

"그럽시다. 어서 죽입시다." 

하늘이 무너지는 걸 본 언 선생의 부모는 급해졌다. 

애초부터 원영경의 수도자였던 그들의 생각보다도 언 선생의 법술이 극히 강했던지, 그들은 황급히 수결을 맺고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구름을 타고 빠르게 허공을 가르는 그들은 정말로 대단한 수도자같았다. 

"비좁은 수도계에서 내놓은 고급의 법기들이 금방 팔려나간다더니, 그것도 네 짓이었더냐! 저 한심한 거지들과 꾸민 짓이야!" 

콰과과광—! 

그의 모친이 고함치자, 생강시들의 전신 부적에서도 법력이 일어났다. 놈들은 이내 거지들에게 달려들었고, 배부른 거지들은 건틀릿에서 발경을 뿜어내며 생강시들을 막아섰다. 이 작은 언가의 세상이 피로 물들어갔다. 

"합!" 

언 선생의 부친과 모친은 합공으로 전투를 이루었다. 

그들이 품속에서 각자 법기를 꺼내어 법력을 밀어넣자, 언 선생이 뿜어내던 무형의 법력과 맞부딪쳐 세상이 뒤집어졌다. 밖에 나와있던 수도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들의 법력 대결에 휘말리지 않으려 몸을 뒤로 물렸다. 

그들의 법력 싸움은 잠시 동수를 이루는 듯 하다가, 원영경 수도자 둘의 합공에 언 선생의 악의가 밀려났다. 

콰직! 

"!" 

그에, 꿇어 앉아있던 언 선생의 목이 비틀렸다. 

[ —. ] 

그런데 목이 비틀리는 순간. 

언 선생이 울컥하고 핏덩이를 토하나 싶더니, 입을 미친 사람처럼 웅얼거렸다.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가 아니었다. 법력이 약한 수도자들이 피를 흘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사특한 악의와 법력은 몇 배나 더 강하게 솟구쳤다.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악의가 더욱 더 끔찍하게 부풀었다. 

잠깐 어? 하는 사이, 언 선생의 악의는 이미 통제할 수 있는 규격을 벗어나 있었다. 

다음 순간. 

쾅! 

"임자!" 

그가 먹던 부리또처럼, 어디선가 홀연히 생겨난 작은 궤짝이 그의 부친을 잡아 가두었다. 구름을 타고 허공을 날던 그의 부친이 궤짝 안에 갇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언 선생의 하늘이 떨어지고 있다. 

동시에 무수한 법부적이 언 선생의 원통에서 빠져나왔다. 

스아아악— 

떨어진 궤짝에 법부적들이 날아와 붙었다. 얼마나 많았는지 궤짝의 외형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상계 법부적보다도 강대한 법력을 지닌 법부적들이 휙휙 날아다녔다. 

이윽고, 그 법부적들은 칼처럼 빳빳히 서더니 궤짝을 푹푹 뚫고 들어갔다. 궤짝 속에서 부친의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언 선생의 모친은 이마를 찡끄리더니, 연신 웅얼웅얼대며 무언가를 신속히 읊었다. 원영경의 수도자답게 느껴지는 법력이 굉장했다. 

우드드득. 

"마(魔)를 받아들여 원영경에 올랐구나!" 

모친의 법력에 의해 진주언가에 있던 대나무 숲이 송두리째 뽑혀서 공중으로 올라간다. 그것은 고공에서 절반으로 나뉘어 잘리더니, 날카로운 죽창처럼 변해 언 선생의 전신을 겨누고 떨어졌다. 

이제는 내가 움직일 차례였다. 

스르릉— 

풍령개와 거지들은 생강시를 상대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광선을 뽑아들고 더없이 집중한 언 선생의 앞에 섰다. 그는 칠공에서 피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괴언을 읊는것을 멈추지 않았다. 

"음." 

그래도 나는 미쳐가는 언 선생을 믿어야했다. 

언 선생의 부모는 잉꼬다. 부친이 가두어져 당하니, 그를 보호하려 모친이 힘을 썼다. 뽑혀나온 대죽들은 강대한 법력을 담고 쏘아졌다. 이곳은 진법 안의 세상이다. 바깥의 현실과는 다르다. 명심하고 전력을 다한다. 

서거걱! 

한 번의 출수. 전력을 담은 오색 검강이 번뜩인다. 

내가 날카로운 대나무들을 단숨에 잘라나가자, 그의 모친은 그제야 크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동으로 만든 불상처럼 단단하던 모친의 표정이 굳어간다. 언 선생은 실로 강해서, 단단히 지켜준다면 알아서 부모와의 연을 끊을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내가 백이 넘는 대나무와 강대한 법부적 수십 장을 베어넘긴 시점에, 댕! 하는 종소리가 청아하게 울렸다. 

그 후, 언가 내에서 벌어진 일은 아주 기괴했다. 

거지들과 열심히 싸우던 생강시 다섯 기가 공중으로 질질 끌려가더니, 우드득대며 구 형태로 뭉쳤다. 한번 더 종소리가 들리자, 생강시들이 더 작게 뭉쳐졌다. 더해서 연신 종소리가 울렸고, 다섯 기의 생강시는 끝내 주먹만한 크기의 공으로 뭉쳐졌다. 

쾅! 

그리고 그 생강시로 만든 법기는, 무거운 암석처럼 떨어져 언 선생의 부친이 들어있던 궤짝을 뭉갰다. 그 안에서 선혈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결단경의 수도자뿐만 아니라, 원영경의 수도자도 쉬이 벌레처럼 죽었다. 나는 그쯤 되니 이리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건 언 선생이 준비를 '너무도 공들여 한 것' 이라고. 

[ ···— —— —— —— ] 

부친이 짓눌려 죽어도, 언 선생의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괴언은 이어졌다. 질린 얼굴의 모친은 더 이상 안되겠던지, 침을 꿀떡 삼키며 퇴로를 찾았다. 그러나 진주언가의 출입구는 하나였고, 고대의 진법을 전부 부수지 않는 한은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괴언을 뱉는 언 선생을 지킬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찢어지는 소리가 세상을 울린다. 

언가를 지키던 고대의 진법이 깨지는 것이었다. 

산산이 조각나며 흩어지는 언가의 대라금몽진 밑에서. 

힘겨워하는 기색의 언 선생 모친이 입을 열었다. 

"변절한다면 정신을 유지하며 생을 늘리고 수행을 닦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너를 봐라. 우리를 막겠답시고 제정신을 공허에 던져버린 거다. 마귀의 공법이야. 그게 무슨 수도자이고 사람의 도리라는 말이냐? 네가 선택한 길 역시도 틀렸다. 배움이 빨라 촉망받던 네 꼴을 보아라." 

[ ······. ] 

원영경의 수도자라던 그의 모친은 가진 법력을 죄다 소진하고, 어느새 꿇어앉은 언 선생 앞까지 끌려와 있었다. 두루마기 원통을 끌어안고 괴언을 외던 언 선생은 진즉 칠공에서 피를 뿜어냈고, 한참이나 울어댄 탓에 이미 앞섶이 다 젖어있었다. 

"너는 사람으로 살다 사람으로 죽을줄 아느냐!" 

언 선생의 모친은 그를 향해 다그치고 소리질렀다. 

"수도자는 수행만 쌓는 존재가 아니다. 본질은 남을 밟고서 하늘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누구보다 강해져 선계에 이르는 것이다. 영생과 영화를 누리는 것인데 왜 그걸 모르느냐! 너는 세상이라도 구하고 싶으냐?" 

그러자. 

언 선생은, 닫혀있던 입술을 떼어 괴언이 아닌 말로 답을했다. 

"······당신께서도 알다시피, 그건 내가 고리타분한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나는 남이 닦아놓은 길을 고집하는 수도자라 그렇습니다. 진주언가의 선조가 닦아놓은 대로,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수행을 쌓고, 사람으로 죽을 것입니다. 만약 천운이 닿으면 경지에 올라 중경계에도 갈 수 있겠지요. 어머니. 보십시오. 제가 부순 저것은 가짜 하늘입니다. 진짜 하늘은 언가 바깥에 있습니다. 하늘이 흑요석처럼 어둡단 말입니다. 바깥은 피 냄새가 끊이질 않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도. 

내 눈엔, 언 선생의 정신이 점점 가라앉는 게 보였다. 

그의 어미는 그런 건 관심이 없다는 듯, 처절하게 소리질렀다. 

"원영경이 왜 원영경인 줄 아느냐. 영육이 따로 갈라지는 경지이기에 그리 불린다. 혼을 빼서 옮길 수 있음에 그러하다. 그러니 나의 혼을 생강시에라도 옮겨다오. 그만 나를 살려다오." 

"······." 

영생에 대한 미련과 절절한 부탁이 들끓었다. 

그러나 언 선생은 이제 모친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모친이 악의에 질려 도망치기 위해 무너뜨린 진법의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언가의 대라금몽진은 무너지고 진짜 하늘이 보였다. 오늘은 밝은 달이 떴다. 

"당신은 언제 그렇게 비겁해 지셨소." 

다음 순간, 언 선생은 마치 이미 죽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언 선생은 이제 부모가 없는 고아가 되었으니까. 

펑! 

부친에 이어, 모친마저 죽었다. 

커다란 대마가 죽고 언가의 바둑판이 뒤집혔다. 

으아아악— 

이어서 스산한 괴성이 들렸다. 

그것은 언 선생의 괴성이었다. 언 선생은 이제 미쳤다. 

웃다가, 오열하다, 피를 토하다가, 사방으로 법력을 난사하는 꼴이 좋게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무너졌던 하늘이 다시 생겨났다가 또 사라지고, 없던 대나무가 생겨나 활활 불타고, 생강시의 팔다리들이 마구 날아다녔다. 

엎어버린 바둑판에서 바둑알이 날아다니듯. 

"정신 차려라 언가야! 좋은 법기는 다 쓴거냐!" 

퍼억! 

그러자 기다리던 풍령개가 타구봉을 들고 뛰어와 언 선생의 머리통을 후려치니, 언 선생은 잠시 번뜩 정신이 들었는지 금세 또 멀쩡해져 입을 열었다. 그는 심히 창백했다. 

"풍령개. 진법이 깨졌으니 도망가라. 어서." 

"······." 

쾅! 

그러고는 또 미쳐서, 악의 가득한 법력을 쏘아낸다. 

상황이 참 황망했다. 

언 선생은 도망가라는 말을 남긴 뒤, 완전히 제정신을 잃고 법기에 사악한 법력을 담아 마구 난사했다. 이미 언가를 지키던 팔방의 진법은 다 깨져나갔다. 나는 언 선생의 법력 난사를 피해가며 대화를 나눠보려했다. 

"언 선생. 확실히 미쳤습니까?" 

사실 내게는 익숙한 장면이었다. 

나는 절강 출신의 광인이 사람을 마구 베어내 토막 치는 걸 가끔 본 놈이었다. 그래서 나는 광인이 싫었고, 사람이 싫었고, 똑같이 미친 나도 싫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을 때도 있었다. 광마라고 불리는 사내라 할지라도 정신이 돌아올 때도 많았다. 

"······." 

미쳐서 힘을 마구 써대는 언 선생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그의 부모로부터 목숨을 한 번 구해주었으나, 언선생은 나를 두 번이나 구했으니 내게는 한 번이 남았다. 

"너도 나가자! 어서!" 

내가 깊은 생각에 빠지려는 도중에 풍령개가 타구봉을 들고 달려들기에 검집으로 후려쳐서 밀어냈다. 

쾅! 

나는 곧, 언가 본문에서 혈겁을 일으킨 희대의 악인이자 패륜아인 언 선생의 앞에 섰다. 이러니까 괜히 독고웅백과의 비무가 생각났다. 그도 쓰러진 나를 이렇게 내려보았겠지. 나는 그의 목숨을 한 번 살려줬으므로 미쳐가는 언 선생에게 당당하게 물었다. 

"언 선생. 근데 이름이 뭐요?" 

* * * 

까맣다. 

세상이 칠흑처럼 까맣다. 

진주언가의 수도자, 언 선생. 

그는 자그마치 오십 년간 수행하여 자신만의 도를 구했다. 언젠가, 점점 변해가는 언가에서 출가한 뒤 이름을 버리고 남들에게는 자신을 언 선생이라 부르라 하였다. 다만 그는 언가의 출신인 것을 숨기지 않으려 언(言)이라는 성만큼은 남겨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언가는 미쳤다. 자신도 그걸 알았다. 정신을 제물로 바치고 원영경에 올라 부모를 죽인 뒤 완전히 미쳐가고 있었고, 앞으로도 더 미칠 것이었다. 똑똑한 자신이라면 그래도 조금은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부모의 얼굴을 보니 묘한 감정이 불길처럼 치고 일어나 부여잡고 있던 정신이 혼탁해진 탓이다. 

웅얼웅얼. 

지금 달싹이는 내 입술을 보라. 지금도 끝없이 중얼거리며 괴언을 내뱉고 있었다. 공법을 익히려 정신을 허무에 바쳤으니. 수도자들은 영생과 영화를 목표로 두고 수행을 하는데, 앞으로는 자신이 아닐 것이라 수도자의 길은 끝이었다. 

전신은 필시 기이하게 꺾였을 것이고, 정신은 저 지독한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다. 이제 마지막을 쥐어 짜내어 육신을 통제하는 것도 한계였다. 

언 선생은 자타공인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수도자였다. 그렇기에 몇 초나마 육신으로 돌아가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대단한 경지인 원영경에 올라도, 이미 공법에 먹혀 혼탁해진 제정신을 차리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데. 

침침한 물속에 잠겨드는 듯한 정신을 비집고, 느닷없는 한 사내의 질문이 불쑥 들어왔다. 

— 근데 이름이 뭐요? 

어떻게 뚫고 들어왔는가? 

언 선생은 곧바로 대답했다. 

"나는 언평이다. 언평." 

오랜만에 다른 이에게 진명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덕분이었을까. 

깜깜하게 가라앉던 세상이 잠시간 열렸고. 

사악한 법력을 담아 종을 치고있던 언평이 눈을 떴다. 

"······." 

그는 사내였다. 

여인처럼 허리 밑으로 내려오는 긴 머리칼은 바람에 휘날렸다. 온 세상이 붉었다. 악의 섞인 법력이 붉게 만들었다. 부모의 피가 그리 만들었다. 

진주언가를 지켜오던 진법마저 다 무너져 내린 세상 속에서, 눈앞에 있는 사내는 백탁처럼 새하얀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언가의 가짜 하늘이 무너지고 진짜 하늘이 보였는데, 날이 좋은 새벽처럼 큰 달이 떴다. 달 밑으로는 거뭇한 세상이 보였고, 이름을 묻던 사내는 악한 법력을 풍기는 자신을 그저 내려다보고 서있었다. 

돌연, 그 사내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언평 선생, 정신이 나갈까 무섭소? 솔직히 나도 무섭소.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소. 진법 안에서는 무적이군. 하하하!" 

"······." 

자신도 미쳤지만 사내도 이상한 광인이었다.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멋들어진 미소였다. 

그 사내가 다시 말했다. 

"나는 알고있소. 죽어보니 중경계는 없더라고. 죽으면 다음 생이 시작될 수도, 그냥 혼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지. 여기서 나의 스승께 배운대로 언평 선생의 강냉이를 다 털어버려 정신을 차리게 해볼 수도 있으나, 우리는 강냉이 대신 미련을 털어버리는 걸로 갑시다. 숙부도 죽이고 부모도 죽였으니, 이제 다 털어버리고 삽시다." 

그는 여유로워 이전과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말투도 바뀌었다. 한없이 가볍기만 하던 어조가 무게를 잡는 무인들처럼 변했다. 

언평은 끔찍한 괴언을 연신 뱉는 입술을 막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장면만 보일 뿐, 정신은 아득했다. 

화르륵— 

칼을 쥔 사내는 언평의 원치 않는 공격에 활활 불타면서도 걸어왔다. 이내, 하늘은 달이 보일 정도로 맑은데 푸른 비가 내렸다. 기운으로 뭉쳐진 기의 덩이들이 가랑비처럼 내려 자신의 악의를 흩어내려한다. 

수도자, 언평의 앞까지 다가온 사내는 컸다. 

언평은 그 사내를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사내는 이번에 꽤 길게 입을 열었다. 

"언 선생과 비슷한 사람이 있었소. 세상에 몇 없는 사람이었지. 언 선생은 멀쩡했던 시절의 부모를 그리워하며 엉엉 울었고, 그자는 구하지 못한 동료를 그리워해 무아지경에 살다 죽었으니, 결이 맞았으면 좋겠소. 그때는 그 한심한 사내를 막지 못하고 떠나보냈으나, 이제는 막을 힘이 생겨 언 선생은 한 번 살려보겠소. 수도자로 살든, 시체 사냥꾼으로 살든, 계속 살아보시오. 먼저 간 한심한 사내가 장벽 밖에서 외로이 죽어가며 느낀 게 있겠지. 오늘은 신기하게도 달이 예쁘니, 이곳마저 좆같은 동네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소. 언 선생이 힘을 내서 그렇게 해주시오. 같이 사람으로 살다 사람으로 죽읍시다." 

이윽고. 

으직- 

그 사내는 법력에 활활 불타면서도, 언평의 관자놀이에 차가운 무언가를 밀어넣으며 웃었다. 

"나는 언평이라는 사람을 믿고 있겠소."

#117화. 진주언가 5

#117화. 

수도자, 언평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 

오늘 일로 그의 벗이 된 나는 이제 어둑한 하늘을 보며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언가의 안에서 싸우는 동안 바깥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는지, 하늘을 가리던 자욱한 먼지는 어디가고 달이 꽤 가까이 보였다. 

사무라이 륭이 후련히 남기고 떠난 칩을 언 선생의 머리에 밀어넣은 나는, 다리가 뻐근해 제자리에 풀썩 앉았다. 

언 선생이 자신만의 심상 속에서 부모에 대한 미련을 털어내며 심마인지 마귀인지를 몰아내는 동안, 나도 상념에 잠기기로했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륭의 칩을 꽂으려다가 원영경에 오른 언 선생이 마구 쏘아낸 법력에 전신이 아주 곤죽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도 자주 병신이 되어서 이제 앉은뱅이 신세 정도는 익숙하다. 

그리고 언평 선생은 나를 두 번이나 살려준 사내라, 그를 살리려다가 몸이 좀 다쳤대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아이고." 

몸을 뒤척이자 노인처럼 앓는 소리가 나왔다. 

사지육신이 이곳 저곳 뻐근하니 본전치기가 생각난다. 

만약 언 선생이 제정신을 차린다면 종후표의 처리는 물론이고, 전투에서 사용했던 좋은 법부적으로 갈음하라며 당장에 압박을 넣어야겠다. 

그런데 아까 전에 너무 무게를 잡았나. 

조금이라도 피해가며 시도해볼 것을 그랬나. 

아니다. 그렇게 했다면 언 선생이 잠깐 정신을 차렸을 때 칩을 꽂아넣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나는 언 선생을 반드시 살리고 싶었다. 

그저 부리또만 처먹으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괴상한 인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숨어있는 수도계의 수도자들을 이 세상 바깥으로 끄집어 내겠다니. 그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내 진짜 하늘을 보여주겠다니. 사람으로 살다 사람으로 죽겠다니. 

그 얼마나 원대한 목표이자 신념인가? 

나는 언 선생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세상에 드문 사내를 보았는데, 은혜도 갚을 겸 몸이 부서지는 것이야 감수할 수 있었다. 어차피 몸은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 이미 수백 번을 넘게 부서졌는데, 이번 한 번 더 상하는 것 쯤이야. 

"언 선생은 오히려 너무 강했기에 오래 고민했구나." 

언 선생은 고고한 정신력을 제물삼아 마공법으로 결단경의 끝까지 이른 뒤, 비로소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그쪽으로 재능을 타고나, 원영경을 이룬 부모보다도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극성까지 마공법을 익히면서, 자신의 부모를 반드시 죽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겠지. 

그렇기에 발두르 촌구석 골방에 처박힌 채로, 바둑을 두며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을 거다. 

그는 여지껏 후공인 백돌만을 잡고 바둑을 두었다. 고심이 끝나고 결단을 내린 뒤 흑돌을 잡은 날에, 부모는 당연하다는 듯 죽었다. 언 선생이 고심해 얻은 힘은 규격 외였으니까. 

문득, 발두르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잃을 것도 없다고 판단한 나는, 법부적을 몇 장 내려달라며 염치없이 언 선생의 거처에 찾아갔었다. 

[ 저놈은 왜 대국 도중에 와서 사단을 내? 구석에 처박혀 있었으면 그깟 부적쯤 어련히 챙겨줬을까. 쓸데없이 입을 열어서! ] 

그때 두던 풍령개와의 바둑 대국에서, 언 선생은 내가 끼어든 탓에 이기고 있었음에도 흑돌을 잡은 풍령개에게 패했다. 그러자 어련히 챙겨줬을 텐데 아주 꼴보기가 싫다며 역정을 냈다. 

해서 이번에 나는 언 선생의 대국에 끼어들지 않고, 그를 지키기만 했지. 

언 선생의 부친과 모친은 사이가 좋았다. 

죽기 전까지도 서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물론 출가한 언 선생과는 아니지만, 가족간의 정이란 게 상당히 끈끈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피를 나눈 진주언가의 수도자들을 변절이라는 길로 같이 데리고 가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들도 이런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들이었다. 

아무튼 언 선생은 마침내 부모를 사람으로 죽게 해주었다. 내가 없었으면 조금 더 고전이야 했겠으나, 그가 내보인 신위를 보자면 원영경의 수도자 둘이 합공했더라도 어떻게든 죽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수도자가 친 진법 안에서는 진법가가 왕. 언 선생의 재능은 그의 부모보다 확실히 윗줄에 있는듯 했고, 부모를 죽이기 위해 오랜 기간을 연구하고 고심하고 작심한 언 선생이 대국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언 선생은 승리를 거두자마자 미쳐버렸다. 자신이 정한 도리에 따라 부모를 죽여놓고, 더없이 절망했다. 어떤 감정에 잠식되어 힘을 주체할 줄을 몰랐다. 마공을 익힌 자의 말로가 대부분 그렇지만. 

그런 언 선생에게서 과거 나의 모습이 비쳐보였다. 

아니라면 나는 내가 보고싶은 것만 보는 사람이라, 그에게서 독기만 남았던 내 시절의 모습을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이 살의와 악의, 절망감으로만 가득차서 누군가를 죽여 살아남을 생각만 가득했던 시절이었다. 

"형님." 

"어. 돌프왔니." 

"이걸로 다 끝난 겁니······그런데 지금 다리가 불타고 있는데 괜찮으세요?" 

화르륵! 

아, 어쩐지 다리가 뻐근하더라니. 감각이 없군. 

나는 곧장 마력을 일으켜 언 선생의 법화를 정리했다. 잔불처럼 계속 타오르던 그것은 악의처럼 진득하게 들러붙어 나를 괴롭히려했으나, 진법이 망가진 뒤 언 선생의 법력도 멈추어서 금세 힘을 잃었다. 

진법 안에서야 언 선생이 왕이었으나, 진법이 깨지고 현실로 나왔으니 나도 꽤 강했다. 법력의 불을 꺼버리고는 말했다. 

"돌프야, 너는 다시봐도 정말 못생겼구나." 

저 루돌프놈은 개방도들 사이에 끼어들어 생강시와 맞섰다. 이제 적어도 제 몫은 해내는 놈이었다. 여전히 쓸모가 크지는 않지만. 

"이 분위기에서, 저더러 갑자기 못생겼다고요?" 

"갑자기가 아니고, 넌 원래도 더럽게 못 생겼잖아." 

"···그래서 어쩌라고요. 돈 모아서 성형 할 건데요? 턱도 깎고." 

"공연히 지랄하지마라. 그거 돈 낭비다.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한계가 있어." 

"······." 

녀석은 거지들보다 더 못생기고 더럽게 생긴 놈이라 거지속에 던져놓아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같이 싸우던 거지들도 몰랐을 거다. 검게 변한 피딱지들이 아직 몸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저쪽의 싸움도 꽤 격하긴 했던 모양이지. 

"허어······." 

곧, 뒤로 물러서 언 선생의 폭주를 바라보던 진주언가의 수도자들도 내쪽으로 다가왔다. 아까 신선처럼 수염을 늘어지게 기른 수도자를 앞세워서는 말이다. 

신선 수염의 늙은 수도자가 말했다. 

"······평이의 마음이 실로 어지럽겠구나. 원영경에 올랐다 하여도, 마공법에 저항하는 것은 사람의 의지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저 천운에 달린 일이지." 

그의 뒤로 아직 언평 선생을 이해 못하겠다는 듯 화를 삭이고 있는 어린 수도자들도 보였지만, 죽어버린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는 일. 게다가 언평 선생의 모친이 죽기전에 변절하려 했다는 것을 구구절절 다 늘어놓고 떠났기에, 아직 몰랐던 이들도 사태의 내막을 알게되어 이제는 분을 삭여야만 할 것이다. 

털썩. 

신선처럼 수염을 길게 기른 수도자는 나처럼 길가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이 자리에서 언 선생 다음으로 법력이 고강한 수도자가 그리하니, 다른 수도자들도 어쩔 수 없이 길에 나앉아야만 했다. 

"뜻이 맞지 않다며 출가했던 평이가 마음을 굳게먹고 돌아와 대라금몽진도 무너지고. 원영경 초기의 수도자 둘이 세상을 떠나갔구나. 얼마 전에도 둘이 죽었는데, 그 짧은 사이에 원영경의 수도자가 넷이나 떠나버렸어. 이제 수도계의 종주인 진주언가는 누가 이끌어야 하는가." 

"······."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수도자의 물음에, 나는 원통을 붙잡고 죽은 사람처럼 꿇어앉아 있는 언 선생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과연 륭의 기억들을 다스리고 있는 것인가.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진주언가를 이끌 수 있겠는가. 

나로서는 알 수 없기에 대수롭잖게 답했다. 

"그야 숙부도 모자라 하늘같은 부모도 죽일 정도의 사내인데, 그 사내가 잘 이끌어 주겠지요." 

"제정신을 차려야 알아서 하든 말든 할 터인데." 

"정신을 못 차리면 죽이려고 이리 오셨습니까." 

"그야 당연한 것. 운이 따르길 빌어야지." 

척! 

신선수염의 수도자는 법부적들을 꺼내 언 선생의 전신에 붙였다. 괴상한 그림들이 그려진 법부적에 언 선생의 피가 금세 스며들었다. 

나는 언 선생의 벗이 되었으나, 그것까지는 막을 생각이 없었다. 그가 끝까지 정신을 되찾지 못하면 마인이나 다름 없으니 죽여야한다. 하늘없는 고아끼리 살아가자 다짐하여 믿고 기다리지만, 끝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내 손으로 죽일 생각이었다. 

물론 최후까지 미뤄둔 방법이 남아는 있다. 강냉이를 털어가며 몸을 두들겨볼 마음도 있었다. 

"그럼 그리 합시다. 수도자께서도 언평이란 사람에게 천운이 따르길 빌어주십시오." 

"알겠네. 그는 나의 먼 혈육이기도 하니." 

나는 그렇게 언평 선생을 죽이려는 수도자들과 바닥에 쪼르르 앉아 쉬었다. 

위이이잉— 

불현듯,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한참 바닥에 둘러앉아 쉬고 있던 때였다. 아무래도 야밤에 소란이 컸는지 수르트 시티 경찰까지 이곳으로 출동했다. 그러나 몇 수도자들이 스스로 나서 별 일 아니라며 경찰을 돌려보내곤 간단한 진법을 쳐버렸다. 

원영경의 고강한 수도자들이 패륜아의 손에 살해당한 건 당연히 큰일이었으나, 변절이라는 말이 나오면 그냥 큰일로 끝나지 않아서 이제 별 일이 아닌게 되었다. 

"레반, 저 수도자는 열반에 다가간 게 아닐까요?" 

그때, 아힘사가 내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아힘사가 이리 관심을 보이는 대상은 처음인 것 같다. 

"글쎄다. 무아에서 건져 놓은줄 알았더니 무아지경에서 살고 있었던 사내만이 알고 있겠지. 륭은 지금 언평 선생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을 테니." 

"······." 

내 옆에 앉은 아힘사는 물음을 멈추었다. 

묻지않고 혼자 답을 구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잠시 뒤. 

아힘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올리고는, 나와 같이 하늘만을 바라봤다. 차가운 금속으로 제작된 아힘사라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사람으로의 도리를 지키는 언평과 막연한 열반을 찾아 헤매는 아힘사의 모습이 괜스레 겹쳐 보였다. 

* * * 

수도자들의 진법 속에서 시간이 지났다. 

그래. 

못해도 한 사흘은 지났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언평 선생은 나의 바람대로 눈을 번뜩 떴다. 그는 진정한 사내라 나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으며, 정신을 되찾기까지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나야 그의 머릿속 상황을 알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내가 겪었던 심마들에 뒤지지 않을 것이었다. 

스윽. 

그는 피투성이인 팔을 들어, 신선수염의 수도자가 붙여둔 법부적을 한장 한장 떼어갔다. 수도자들은 주변에서 진작에 원형의 공격진을 만들고, 그의 머리 위로 법력을 쏟아부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해서, 풍령개의 지시에 따라 몸이 멀쩡한 거지들도 다 몰려들었다. 

그의 벗인 나는 이 상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평." 

그런 내가 곧바로 입을 열어 주저 앉아있는 그를 부르자, 언 선생은 얼굴에 말라붙은 피를 슥슥 닦더니 느닷없이 물었다. 

"······담배 있나?" 

"돌프야. 네가 얼른가서 사와라." 

"예." 

나는 곧장 현물지폐 몇 장을 건네주며, 루돌프놈을 시켜 밖에서 비싼 담배를 사오게 했다. 

루돌프놈은 담배를 잔뜩 사왔다. 

딸칵- 

언평 선생은 부리또는 먹어도 담배는 태우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굉장히 익숙한 손짓으로 고급 담배 한 개비를 꺼내더니 입에 물었다. 

당장이라도 불만 붙이면 피울 수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상하게도 그러지 않았다. 

"······." 

그는 돌연 고개를 젓더니, 담배를 뚝 부러뜨렸다. 

나는 두 쪽으로 부러진 고급 담배를 보며 말했다. 

"언평 선생, 애써 가져왔더니 왜 안 피우십니까? 다른 거 드려요?" 

"갑자기 피우고 싶지 않아졌다." 

"왜 그렇게 됐습니까?" 

나의 물음에 몇 분이나 망설이던 언평 선생이 말했다. 

"막연히 생각이 나기에 담배를 태우고 싶은 줄 알았는데, 보니까 태우고 싶은 것은 아니었던 듯 하다. 그저 아련할 뿐이다. 아련히 남아있구나." 

나는 언평 선생의 대답이 매우 기꺼웠다. 

그는 마인이 아니었다. 정말 제 정신으로 돌아온 것이 맞았다. 

륭은 장벽 밖으로 떠나갈 때, 모든 담배를 두고 떠났으니. 

그는 클로에 덕에 담배를 끊었다. 애시당초 사무라이 륭은 담배를 태우는 걸 좋아해서가 아니라, 동료가 담배 한 까치를 달라했을때 건네주지 못한게 아쉬워 피우는 사내였다. 

그래서 륭은 깨달음을 얻고서 장벽 바깥으로 나가는 날, 사무실에 있던 모든 담배를 두고 떠났다. 

하하하. 

그러므로, 나는 그제야 언평 선생을 보며 웃었다. 

진주언가의 도움을 받아 계륵같은 종후표놈을 해결할 수 있다는 기쁨보다, 이 세계에서 화산의 청풍이 말고 또 하나의 좋은 벗을 얻은 것 같아 웃었다. 

"정말 고생했습니다. 선생."

#118화. 다음 계획

#118화. 

언평 선생의 정신이 돌아오고 하루가 더 지났다. 

내가 보기에, 그의 정신력은 어지간한 수도자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했다. 륭의 메모리칩을 받아들인 이후로, 륭이 생전 했던 행동이나 버릇이 언뜻 드러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예상보다도 자신을 멀쩡히 잘 유지하고 있었다. 

"어지럽군. 지금까지 발작이 몇 번이나 있었냐." 

"기억하기로, 한 두어 번쯤 됩니다." 

다만, 마공의 정신 침식은 끝나지 않았는지 간헐적인 발작이 있었다. 뭐든 초기에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애당초 불안정한 정신에 다른 이의 생까지 억지로 밀어 넣었으니······ 

게다가 원영경의 수도자 둘과 법력 대결을 하느라 피를 워낙에 많이 흘린 탓에, 그의 원기도 많이 쇠했을 것이다. 그의 안색은 조금 파리했다. 

"됐다. 아예 광인이 되느니, 발작 정도는 담백하게 받아들여야지. 적응이 되면 차차 나아질 것이야." 

다행히도, 언평 선생은 그것에 기꺼이 순응했다. 

륭의 기억과 깨달음이 안착하여 언평 선생의 정신에 완전히 스며들 때까지, 혼란한 시기가 반복될 것이다. 다행인 점은 옆에서 발작을 막아줄 풍령개와 경험 많은 수도자들이 있다는 것. 

이곳을 떠날 나까지 나서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탁! 

언평 선생이 마신 물잔을 내려놓기에, 내가 물었다. 

"수도자들이 언가 안을 샅샅이 뒤져보던데, 뭐가 나왔답니까?" 

이를테면 네임드 시체 가륵의 혈액이라든지. 

하지만 언평 선생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시체의 혈액이나 수상한 요기가 느껴지는 물건은 따로 발견하지 못했다. 언가 바깥 어딘가에, 따로 변절할 방법을 안배해 둔 것일 수도 있겠어. 어쩌면 특별한 진법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숨겨두었을 수도 있다." 

"원영경의 수도자가 둘이니, 그랬을 수도 있겠군요." 

"부모와 가까웠던 수도자들을 회유해 찾아볼 거다. 가문의 큰어른이 나를 도와주고 있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하루 사이, 신선수염의 수도자가 나서 출가한 언평 선생을 진주언가의 품으로 다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남은 혈족중 배분이 가장 높은 자의 말이고, 언평 선생도 나름 제정신을 차렸기에 반발은 없었다. 

최근 원영경 넷이 죽어, 이제는 몇 남지 않았다는 원영경의 수도자. 앞으로 진주언가를 이끌게 된 언평 선생의 입지가 수도계 내에서 꽤나 커질 듯했다. 

"이제 진주언가는 완전히 봉문을 푸는 겁니까?" 

언평 선생이 머리를 끄덕였다. 

"안온하게 모여살던 이전보다야 세상 밖에 자주 모습을 비출 거다. 사람의 도리를 앞세워 패륜까지 저지른 이 불효자 언가가 그렇게 만들 거다. 사람으로 살다 사람으로 죽어야 하니, 시체에 뜯어먹혀 망자들과 같은 꼴이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 

만약 드워프 다르간트와 마주하기 전이라면. 

자신의 혼과 삶, 미련까지 병기에 벼려내는 드워프의 집념을 목도하지 못했더라면, 방금 언평 선생의 말은 내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삶은 다르간트를 만난 뒤로, 전생들보다 대차게 살아 인류의 멸망을 조금이나마 늦춰보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니, 그의 말에서 전해져 오는 느낌이 왜인지 남달랐다. 

"그렇군요. 그거 아주 잘된 일입니다." 

자연히 미소가 지어졌다. 

잠시 뒤, 내가 유치하게 물었다. 

"하면, 언평 선생은 세상을 구하려 하십니까?" 

"내가 세우고 믿는 도리를 지키려면 그리되겠지." 

세상을 구할 거냐는 유치한 물음에, 언평 선생은 부끄러운 기색이 일절 없이 즉답했다. 그래서 나도 한 치의 부끄러움이 없어졌다. 

"나도 세상을 한 번 구해보려 합니다. 벗인 언평 선생이 많이 도와주십시오." 

"그런 놈 치고는 어째 한가로워 보이는데. 누가 보면 몇 번은 죽은 놈인줄 알겠다. 미친놈이냐?" 

나는 언평 선생의 가벼운 힐난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한가롭지는 않았으나 실제로 미친놈은 맞기 때문이다. 

"한가로워 보이면 절간에 들어가서 폐관이나 할까요?" 

웃으며 그리 묻자, 언평 선생이 코웃음을 쳤다. 

"그건 길을 구할 때나 하는 거다. 헌데 너는 이미 길을 구했잖냐. 앞에 무엇이 기다리든 끝까지 걸으면 될 터."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 가려던 길바닥에 언평 선생이 칼 맞고 쓰러져있지 뭡니까. 내친김에 금창약도 바르고 반창고도 붙여줬지요. 그러니 좋은 법부적이나 써서 몇 장 내려주십시오. 어서 세상을 구하러 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어이없는 등신들이라며 한껏 비웃었을만큼, 매우 등신같고 비현실적인 사내들의 대화였다. 

우리는 누구도 쉬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히 높은 경지를 이루긴 했으나, 아직은 십이제급에도 한참 못 미친다. 그런 놈들이 세상을 구한다니 만다니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 참으로 우습겠지. 

"그나저나, 저 백리뇌부 종후표놈 말이다." 

언평 선생도 나처럼 그게 우습다 생각했는지, 화제를 돌렸다. 실은 법부적을 써달란 말에 귀찮아서 화제를 돌렸을 수도 있다. 

아무튼, 덜렁 대가리만 남아있는 종후표. 이번 언가 전투에서 딱히 활약이라 할만한 것은 없었다. 딱히 귀중히 돌보지 않았는데, 어차피 언가의 진법 속이라 도망도 못 치고 상당히 좆같았을 것이다. 

"예, 따로 좋은 방법이 있겠습니까?" 

"있다. 어렵고 귀찮더라도 벗의 부탁이니···." 

언평 선생이 이어서 말했다. 

"저 종후표는 내가 해결해주겠다. 꽤 번거로우나 법기를 통해 육신을 구속해둘 방법을 알고있다. 원영경에 오르니 그 해법이 보이는구나. 정 힘들면 생강시 쪽도 있고." 

자신있게 장담하는 언평 선생. 

이로써 종후표 대가리의 긴 여정은 끝이 나겠군 

나는 언평 선생에게 고맙다고 한 뒤, 말을 돌려 다시금 물었다. 

"하시는 김에 법부적도 몇 장 얹어주시지요." 

"법부적? 뭔 법부적?" 

언평 선생이 모르는 척하기에 집요하게 물었다. 

"상계 법부적보다 더 좋은 법부적이 있더군요." 

"남한테는 절대로 못 내어주는 물건이다. 상계 열 장 만드는데 드는 노력으로 연성하는 법부적이야. 재료도 극히 귀해서 대단한 수도자들도 많이는 못 만든다." 

"그래도 몇 장만 내려주시지요." 

"네놈은 어째 개방 거지들보다 구걸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개방에 찾아가봐라. 너는 한 삼 결개부터 시작할 수 있겠어." 

"그럼 저기서 마당 청소나 하는 왕초삼 놈보다 밑이지 않습니까." 

"시끄럽다." 

"헌데, 왕초삼놈은 왜 끌고 다니시는 겁니까?" 

"풍령개가 아끼는 제자다. 나중에 개방에서 크게 한자리 받겠지." 

"저런 놈이요?"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언가 앞의 길거리를 쓸고있는 왕초삼을 바라봤다. 저놈은 확실히 발두르의 모래폭풍 속에서 마주쳤을 때와는 또 달라져 있었다. 

그때, 슬며시 일어난 언평 선생이 아힘사를 보며 말했다. 

"이미 길을 정해놓고 걷는 놈 옆에, 길을 묻고 다니는 구도자(求道者)가 뽈뽈 따라다니고 있으니 그야말로 재미있는 광경이야. 그토록 믿음이 있다면······함께 걸으면 될 일인데 말이지." 

"······." 

아힘사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언평 선생은 그 말과 함께, 아힘사를 지나쳐 언가의 진법 앞에 섰다. 무너진 대라금몽진의 자리에 진법을 만들어 임시로 마련한 언가의 거처였다. 

그 앞에서 하늘을 올려다본 언평 선생이 입을 열었다. 

"······옛 수도자들은 하늘을 보고 천기(天機)를 읽으며 때때로 길흉화복을 점칠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에 재액이 붙어있는지도 알 수 있었지. 나도 어릴적, 천문으로 세상의 흐름을 읽는 법을 배웠었다." 

"선생이 보는 제 운은 어떻습니까?" 

"너는 이번에 굉장히 운이 좋았다." 

"그거 그냥 유사과학 아닙니까?" 

"맞다. 원래는 실재했으나 지금은 의미가 없지. 하늘이 저리 우중충하고 침침하여 이제는 없어진 말이다. 천공에 떠있는 것들을 누구도 보지 못하니." 

"언평 선생, 발할라 산맥의 여섯 번째 봉우리에 오르시면 언제나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탑주의 서재 윗면에는 무수한 별이 떠 있어요." 

"마탑주의 서재? 아서라. 경지의 마법사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언가의 수도자가 무슨 수로? 게다가 마법은 내가 추구하는 길이 아니다." 

"그렇습니까." 

"다만, 삼존(三尊)중 한 명이 수행하고 있다는 발할라의 첫 번째 봉우리 정도면 마음에 차겠다. 세상의 지붕에 서야 천문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 듯해." 

"마공법을 공부한 수도계의 수도자가, 발할라의 첫 번째 봉우리에 서면 그거 볼만 하겠군요." 

내 말이 끝나자 언평 선생은 몸을 못 가누고 휘청였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지만 말해라. 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머리가 어지럽고 울린다." 

언평 선생의 상태가 아주 온전치는 못해 많은 대화가 힘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상대가 나인지라 최대한 어지러움을 참아가며 배려를 해주었을 것이다. 

이제 언평 선생과 더 대화를 나누는 것은 힘들겠군. 다시 마공이 도져서 법력을 사방팔방으로 난사하면 안 되니까. 

나는 잠시 고심하다가 답했다. 

"언평 선생의 말대로 세상을 구하겠다 해도 그저 한심한 치기로 보이는지라, 이제 힘을 기르러 다녀야겠습니다." 

"어떻게?" 

"그야 시체를 죽여야겠지요." 

"알았다. 그건 너 알아서 해라. 그리고 첫 번째 봉우리 얘기는 어디가서 얘기하고 다니지 마라. 이 언가를 죽이기 싫다면." 

"예." 

"또 보자." 

언평 선생은 그 말을 끝으로, 종후표의 대가리를 가지고 진법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이틀뒤. 

나는 백리뇌부 종후표가 담겨진 법기와 심후한 법력이 가득 담긴 법부적 몇 장을 받아 진주언가의 영역을 빠져나왔다. 법기 속이라 종후표의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지극히 감격한 듯한 놈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어찌 되었든 살았구나. 하하하하! 내가 해냈다. 이 백리뇌부 종후표가!!!" 

종후표는 앵무새처럼 생긴 법기에 담겨 봉해져 있었다. 앵무새의 입이 열리면 종후표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언평 선생이 법부적까지 써가며 요기를 눌러 놓은 덕에 요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주언가에 종후표의 육신을 봉해두고, 이 법기에는 놈의 음성만 담아낸 것이다. 이것은 진주언가에서 혈시 제작에 쓰이는 비전을 언평 선생이 특별히 개량시킨 것으로, 놈의 육신을 완전히 되찾으려면 언가로 가야 한다던가. 

종후표는 이제 요기도 쓸 수 없기에 도망은 어림도 없을 것이나, 신기하게도 굉장히 흡족해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뭐가 좋은 건지는 몰라도 일단 그토록 원하던 대로 살아남긴 했으니. 

"말만 하는 앵무새가 되었구나. 나는 그래도 안전하게 살아간다." 

언평 선생의 법력이 다 사라지지 않는 한, 종후표는 앵무새 모양의 법기에 계속 담겨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진주언가를 뒤로 한 채, 몇 시간을 걸어 수르트 시티 스테이션 근처에 도착했다. 이제 수르트 시티에는 큰 볼 일이 남아있지 않았고, 슬레모킨이 나를 찾아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 저기 오네. 야! 막내! 

마침, 약속대로 나를 마중나온 슬레모킨이 보였다. 

그런데 그 슬레모킨 옆으로. 

"···아니, 마탑주님 아니십니까?" 

연녹색의 머리칼이 옷 바깥으로 흩날렸다. 

동시에, 청록빛의 마력이 내 팔에 빛났다가 사라졌다. 

슬레모킨과 같이 우리를 마중을 나온 사람은, 긴 로브를 걸친 일레힌 포이체카였다. 

무려 발할라의 마탑주가 수르트까지 친히 걸음한 것이다. 

마법계를 상징하는 거물이 무림계의 고향인 수르트 시티까지 오다니. 이건 정말로 희귀한 광경이어서 나는 마탑주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께서 여기까지는 어쩐 일입니까."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지 궁금해서 같이 와봤다. 또 이상한 걸 가지고 있군? 심지어 느껴지는 기운도 놀라울 정도로 늘었구나." 

"제가 없는 동안 마탑에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까?" 

"있었지. 나의 마탑에 십이제가 셋이나 왔다 갔거든." 

"······." 

그간, 여섯 번째 마탑의 인기가 상당히 많아진 모양이군. 

나도 그렇고. 

하여튼 나는 십이제중 누굽니까? 혹은 그 사람들이 왜요? 보다는 다른 방향의 질문으로 물꼬를 텄다. 

"혹시 개중에 전 십이제도 있었습니까?" 

"모두 현재 십이제의 위에 있는 자들이다. 카스트라 뷔에탕은 내 가문의 사업체를 비집고 다니다가, 요즘 조용해졌다." 

"그거 다행이군요." 

뷔에탕 그년만 없으면 뭐. 괜찮다. 

다만, 독고웅백과의 비무로 십이제들 사이에 내 얘기가 퍼져나간 듯했다. 

하기야 10레벨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충격이고, 그는 10레벨에 올랐다고 해서 가만히 수련만 할 사람도 아니었으니. 

"그런데 하오문주께서는, 진공진인과 붙었습니까?" 

느닷없는 나의 질문에, 일레힌 포이체카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헛웃음이 나왔다. 

독고웅백은 10레벨의 경지에 오르기가 무섭게, 정말로 십이제 수좌인 무당의 진공진인에게 대결을 신청하러 간 것이었다. 

남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는 나라도, 초인 둘의 비무결과는 궁금했다. 

"누가 이겼답니까?" 

"아침에 시작된 비무가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다더군. 밤낮으로 천 이백합 가량을 겨루었고, 끝까지 동수를 이루었다고만 들었다." 

그렇군.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는 말인가? 

현경이라는 무의 경지는 너무도 아득해서 아직은 내가 가늠할 수 없다. 나는 생각을 마치고는 마탑주와 슬레모킨을 따라 걸었다. 

스테이션이 보이자, 일레힌 포이체카가 조용히 말했다. 

"십이제 중 특히 로라 마르티네즈가 네게 관심을 많이 보이더군. 하지만 호의를 보인다고 해서 너무 가까이하지는 말도록. 그녀는 절대 허술한 마법사가 아니니 적당한 거리를 둬." 

"예." 

마탑주, 일레힌 포이체카는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수복전 이후로 나를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설마, 마탑주께도 제자 어쩌고 했습니까?" 

"제자로 키워볼 테니 마탑에서 너를 넘겨 달라더구나." 

"저 대신, 아카데미에 있는 반 루벤카를 소개시켜주면 되겠군요. 재능있는 마법사를 찾는다면 필시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발할라로 돌아가지." 

"무슨 일이 있습니까?" 

"수복전 이후, 연방의 다음 계획이 잡혔다."

#119화. 앙굴리마라는 어떤 꿈을 꾸는가 1

#119화. 

발할라 상공으로 캐리어가 들어선다. 

어두운 천공을 떠받치고 있는 저 거대한 산맥. 

어쩐지 든든하군. 

후웁- 

나는 발할라 시티의 저 장엄한 정경이 그리웠는지, 땅을 딛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물론 산맥 밑둥이라 공기가 딱히 좋지는 않다. 발할라 스테이션의 상공은 수많은 캐리어들로 인해 활기를 띠었다. 

구우우우웅—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 이후, 알 헤임달의 메카 세계수와 흡혈귀들이 주교로 있는 혈교의 금지, 남경의 남궁세가와 화산의 본문. 그리고 북경의 진주언가까지 돌고 돌아 이제야 발할라에 돌아왔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수복전 이후로 나는 확실히 성장했다. 남궁세가에서 전대가주 남궁천을 죽인 뒤 헤어진 슬레모킨, 그녀의 격앙된 반응에서 얻은 성취가 피부로 와닿았다. 

"진짜 5위계라고?" 

"그래." 

"······와,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 건 반칙일 정도인데. 하긴 십이제가 괜히 셋이나 찾아왔나 싶더라. 정말 기겁하는 줄 알았다니까." 

나는 무공으로만 따져도 어지간한 8레벨을 지났고, 하오문주 독고웅백과 499번의 생사결과도 같은 비무를 거친 덕에, 이미 완숙한 화경의 수준에 발을 밀어넣었다. 가장 문제였던 정기신의 균형도 점점 잡혀가고 있었다. 

게다가 주춤하던 마법 방면의 성과 역시도 컸다. 로라 마르티네즈가 나의 육신을 공들여 재구축 해준 덕에 세상의 마나와 동화되는 체질로 바뀌었으며, 마나회로를 늘려 진정한 마법사를 가르는 경계선인 5위계까지 달성했다.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같은 8레벨 수준에서는 적수가 거의 없으리라. 

다만 언평 선생같이 특이한 경우도 있어서, 제멋대로 설치고 다니다간 목이 달아나기 좋겠지. 나는 인류 연방을 구해볼 생각이므로, 언제나 겸손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십이제가 셋이나 다녀갔으면, 마탑주께서 곤란했겠군." 

"아냐. 그래도 마탑 내에서는 마탑주의 권위가 절대적이라서 다들 말썽없이 조용히 독대만 하고 사라졌어. 그런데 일단 너한테 관심을 보인건 맞으니까, 바깥에서도 가만히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을걸." 

스윽. 스윽. 

뾰족한 귀를 쫑긋 세우며 그리 말한 슬레모킨은, 앵무새 모양의 법기를 신기하다는 듯 만지며 구경했다. 

"종후표 그 인간이 여기 담겨있는 거야? 뇌만 빼서 담았나?" 

"육신은 수르트 시티에 생강시들과 함께 봉인되어 있고, 법기에 담아둔 법력을 통해 음성만을 전달받는 형식이라더군." 

"오~그런 것도 가능해? 수도자도 장난 아니네." 

슬레모킨도 놀랄 만큼, 언평 선생은 고절한 경지의 수도자가 맞다. 생각해보면 종후표가 좋아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이 앵무새 모양의 법기가 박살나도 본신은 진주언가에 꽁꽁싸매져 봉인되어 있으니 당장은 안전할 것 아니던가. 

"그렇지! 언평 선생께서는 신이다!!!" 

종후표가 불쑥 입을 열어 소리를 지르자, 인상을 찌푸린 슬레모킨이 귀를 축 늘어뜨리며 떨어졌다. 

"아, 깜짝이야.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얘 왜 이래?" 

"더 이상 대가리를 먹히지 않아서 신이 났나보군." 

"······?" 

그러는 사이, 우리는 마탑에 도착했다. 

스아악— 

그런데 외부와 단절된 공간인 마탑주의 서재에 이르자. 

"이번 연방의 두 번째 계획은, 로키 시티의 군벌 숙청과 세력 통합인가?" 

종후표는 느닷없이, 자기가 나서서 저런 말을 했다. 

'로키 시티의 군벌 숙청?' 

계획이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데려온 마탑주보다 한발 빠르게 연방의 계획을 추측해 뱉은 것이다. 종후표는 마탑에 올라오는 동안 죽을 위기를 완전히 벗어났다 생각했는지, 내내 기분이 괜찮아 보였다. 

일단 머리가 영리한 놈이긴 해서, 입을 이상하게 놀렸다간 언가에 있는 육신이 박살날 것을 알고 있을 터. 들어보기로 했다. 

"맞다." 

놀랍게도 종후표의 질문이 맞다는 듯, 서재에 들어선 일레힌 포이체카가 긍정했다. 

"하지만, 아니기도 하다. 혹시 그 이유도 알고있나?" 

이윽고, 일레힌 포이체카는 말하는 앵무새를 재미있다는 듯 응시했다. 

* * * 

약간의 법력이 담긴 음성이 서재를 울렸다. 

"로키의 군벌 숙청은 연막이지. 표면적인 명분에 불과해. 어차피 로키는 라그나로크보다 작은 도시라 먹을 것도 적고, 군벌들도 자기들만의 대응 체계가 있어서 제대로 숙청하려 했다간 연방쪽도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닐 거다. 아마도 진짜 이유는 로키에 숨어든 네임드의 토벌과 멸절. 더 정확히는 '가륵' 을 위시로 한 시체다. 야단스럽게 피를 뿌리고 다니는 놈들." 

"네임드 시체가 로키에 있다는 건 어찌 확신하지?" 

"연방 내부에 둥지를 틀고 숨어있을 수 있는 거점이 사실 로키밖에 없다. 거긴 이미 연방이 반쯤 포기한 곳에다, 로키를 맡은 칠좌는 은거한지 오래이니." 

휘익! 휘익! 

앵무새 법기는 날개를 정신없게 끄덕거리면서 말했다. 어쩌다 보니 일레힌 포이체카와 종후표의 선문답 시간이 되었는데, 나는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수복전이 끝난 뒤에 1차적으로 변절자를 색출해 처리했고 라그나로크 시티까지 안정 되었으니, 이제 라그나로크를 거점으로 삼아 공권력이 작동하지 않는 로키에 숨어있는 위협을 뿌리부터 뽑아버릴 계획이겠지. 현 연방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칠좌(七座), 슈나우젠 하비에르의 결정일 테고. 최근 피를 뿌리고 다니는 시체놈들의 위치를 특정할 만큼, 무언가 확실한 신호나 사건이 있었을 것 같다." 

종후표는 실로 정보의 화수분이었다. 자기 혼자만 몰래 알고있던 고급 정보들이 수두룩했다. 

일레힌 포이체카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겠으나, 종후표의 추측이 다 맞아 들어가는 게 재미있다는 듯 흥미로운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 부분까지 세세히 알고있나? 신기한 일이군." 

"계획의 초안을 작성한 게 연방 의회이고, 나 종후표는 변절자들과도 계속 접촉을 해왔으니. 앞으로 어떻게 돌아갈지 대충은 예상이 간다. 라그나로크 수복전에 실패했을 때를 상정한 계획도 있었거든. 다른 정치인들도 꽤 알고 있을 거야." 

백리뇌부 종후표는 자그마치 연방 의원 출신. 

연방의 대소사를 결정하고 수많은 기밀을 독점할 수 있는 권력집단 중앙에 들어가 있던 놈이다. 연방 정부라는 형태가 조금 기이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건 뭐 세상이 등신같아서 등신같이 발전한 거라. 

"그렇게 잘 알고 있었으면 좀 진작에 열심히 막지. 정치하는 새끼들, 존나 무책임하네." 

와중에, 그걸 듣던 루돌프놈이 슬쩍 입을 열었다. 

"응?" 

허나 종후표는 루돌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아니, 아예 이해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뇌 구조가 짜여있는 게 분명했다. 

의아한듯 위 아래로 갸웃대던 앵무새의 머리는 곧장 욕을 뱉었으니. 

"무슨 개뼉다귀 뜯어먹는 소리인지." 

"뭐?" 

"반반 괴물. 넌 대체 정치계에 무얼 기대하는 거냐. 정치인들이 힘을 합쳐서 으쌰으쌰 좋은 법안이라도 발의할까? 세상이 망해가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정보를 독점하고 단 하루라도 더 권력과 명예가 가져다주는 도파민 과다분비를 즐겨야지. 권력을 올바르게 쓰면 뭘 얻는데? 정당 수뇌부의 눈칫밥?" 

"······." 

"원래 정치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으로 하는거다." 

원래가 그렇다는 종후표의 말에 나는 쉽게 납득해버렸다. 망할 걱정이 전혀 없는 현대에서도 그랬는데, 실시간으로 망해가는 세상임에야 논할 거리도 안 된다. 말세의 정치 권력, 타락과 부패는 실과 바늘처럼 따라오게 되어있다. 

"정치판 돌아가는 원리가 별로 대단하지가 않아. 연방 의원들이 막 고결한 성인군자라 아침에는 운기조식하다가 점심에는 의회가서 건설적인 토론을 할 것 같아? 아니라고. 아침까지 술 퍼먹고 여자좀 주무르다 점심쯤 되면 아무 핑계나 대고 원격회의로 대체한다고. 그나마 양심있는 놈들은 제 보좌관을 보내오지. 의원님께서 급성치질에 걸렸다는 개소리나 찍찍 뱉으면서. 밤에 똥꼬로 뭘 했길래 급성 치질이 걸리는지는 몰라도, 이 세상이 그래요 세상이!"

"······." 

종후표는 답답했는지 말을 마구 뱉었다. 앵무새 부리가 마구 움직이며 신묘한 법력이 슬쩍슬쩍 흘러나오는 듯했다. 시체가 된 변절자놈이 대단한 법기같아 보이는 기적이다. 

"그리고 정당에서 똘똘히 일 잘하는 놈들 좋아할 것 같아? 아니지. 인간 대가리가 아무리 똑똑해봐야 인공지능 언저리도 못 오지. 네 새대가리 100개를 합쳐봐라. 인공지능보다 셈이 빠른가. 그저 힘있는 놈들 사타구니 심심하지 않게 옆구리에 파트너 척척 붙여주고, 질 좋은 당가표 한정판 마약 구해다주는 놈을 더 아끼고 좋아한다고. 권력이 지나치면 도파민이 머릿속에서 계속 나오는데, 거기다 마약까지 해봐! 도파민이 두 배야 두 배!"

종후표는 루돌프를 한심히 쳐다보며 마지막까지 말을 덧붙였다. 지랄발광을 하면서 딱딱한 날개를 푸드덕댄 종후표놈 덕분에, 듣고만 있던 루돌프가 조금 질린 얼굴로 말했다. 

"형님, 이거 아주 완전히 미친 새끼네요. 대가리를 계속 띵가먹었더니 돌았나. 법 뭐시기라 먹지도 못하고." 

"······." 

나는 종후표의 말을 듣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약 팔아먹는 사천당가 그 놈들을 대체 무슨 수로 막아야할까. 연방의 권력을 쥔 인간들이 정신을 조금이나마 차리려면 자제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스윽- 

나는 당가의 소가주가 준 음각패를 꺼내 보았다가, 금세 다시 집어넣었다. 아직은 당가를 상대로 어깨를 펼 수준이 아니다. 수복전에서 죽은 당명 원로를 생각해보아도, 필시 한 줌 독수로 녹아내려 죽겠지. 

역시 난세의 영웅이 되는 건 멀고도 험하구나. 

"그만." 

그렇게 마약을 근절하는 영웅이 되려다 한줌 독수로 녹아 내리는 상상을 하고 있던 때, 일레힌 포이체카가 우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 구체적인 보상안이 확정되지 않았고, 실행 단계까지는 시간이 2주일 정도 남았을 거다. 그리고 이번 연방의 행사는 연방군도 참여하지 않고 조용히 진행될 예정이다. 저번처럼 필참도 아니다. 다만 참여할 마음이 있다면, 남은 시간 준비를 단단히 해오도록."

"생각해보겠습니다." 

"앵무새는 두고 나가라. 물어볼 것이 있다." 

"예." 

나는 고개를 숙이고는, 종후표를 두고 마탑주의 서재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 * * 

나는 마탑에서 빠져나와 곧장 산맥을 내려왔다. 

카산드라 교수 저택에 있는 레나를 보러갈 생각으로. 내 옆에는 아힘사 뿐이었다. 루돌프놈은 슬레모킨이 자신의 짐승 부스러기와 싸움을 붙여 보겠다며 데려 갔고, 앵무새 종후표도 당장은 마탑주와 있으니. 

잠시 뒤,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 근처. 

나는 카산드라 교수의 대저택에 이르렀다. 

"어라, 레반? 레반 맞아?" 

"메리." 

그런데 저택 중앙의 식탁에는 레나도, 루벤카도, 카산드라 교수도 아닌 시종인 메리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악독한 루벤카년의 그나마 착한 안드로이드 시종 메리. 그녀는 싱긋 웃으며 나를 맞이하고는, 손수 탄 차를 내주었다. 

"레나님을 보러 왔구나. 그런데 어쩌지? 지금은 루벤카님과 함께 외유를 나가셔서 안 계시는데." 

"그럼 다음에 오지." 

덥썩- 

"어디가게? 더 있다가 가지." 

그 순간, 빠른 속도로 뛰어온 메리가 대뜸 나를 껴안았다. 메리는 원래 성적인 농담이나 농염한 짓거리를 즐겨하는 안드로이드. 이건 루벤카가 없을 때마다 나오는 메리의 장난이다. 아직 반 바이오 컴퍼니에서의 시종 생활을 잊지 못한 듯했다. 

"······." 

나를 안고있던 메리를 아힘사가 빤히 바라봤다. 아힘사의 안광이 붉게 빛났다. 딱히 반응을 하지 않으니, 메리는 막상 머쓱했는지 내게서 슬쩍 떨어졌다. 

"······나 조금 과했나. 옛날 생각이 나서." 

"다음에 레나가 있을 때 올 테니 전해줘." 

"응, 빠뜨리지 않고 전해둘게." 

나는 메리를 그렇게 떼어버리고는 카산드라 교수의 저택을 나왔다. 

그런데 그때. 

"레반." 

메리를 보고 저택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아힘사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게 건넸다. 

그것은 빳빳한 글씨로 무언가가 쓰여있는, 한 장의 종이였다. 

[ 발할라 시티, 로메로 주점 ] 

[ 발할라 시티 ······ ] 

[ 발할라 시티 ······ ] 

그런데 그곳에는 총 다섯 개의 주소가 적혀 있었고, 그 중 세 개가 발할라 시티 내에 있었다. 

종이는 아힘사가 다르간트의 손에 재탄생한 뒤부터 계속 간직하고 있었던 듯, 안쪽에서 꽤 오랫동안 구겨져있던 흔적이 보였다. 나는 답을 원하는 눈빛으로 아힘사를 바라봤다. 

그러자 아힘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힘사의 한쪽 손은 꼭 불안한 사람처럼, 회중시계를 쥐고 있었다. 회중시계의 줄이 찰랑거렸다. 

"······열반을 벗은 앙굴리마라가 있는 장소. 다르간트께서 일러주셨습니다." 

백 육십 먹은 앙굴리마라의 제작자, 다르간트. 

그래, 그때 분명 또 다른 앙굴리마라가 있다고 했지. 

나는 바로 답하지 않고, 아힘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제 레반의 시간이 조금 생긴 것 같아서, 그들을 한 번 찾아가보고 싶어요. 열반에서 벗어난 그들은 어떤길을 걷고 있는지 보고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나를 따라다닌지 햇수로 이 년이 넘게 지나니, 회의감이 든 것인가. 아니면 언평 선생의 토막같은 말에서 무언가 느낀점이 있는 것일까. 아힘사의 적극적인 물음에, 나는 이전에 내뱉어둔 말이 다시금 기억났다. 

내 옆자리에서 진정한 열반을 고민해 보라고 했던 그 말이. 

그간 떠올려보면, 아힘사는 어떤 위험한 곳이라도 나를 늘 따라와 주었다. 별 것은 아니라도 항상 조용히 옆에 있었다. 마침 생긴 시간을 아힘사에게 사용해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아힘사를 응시했다. 마법사의 손가락을 꿴 염주를 발목에 차고는, 삼호문 기루를 다 부숴놓던 녀석이 마치 사람처럼 굴 줄도 안다. 아니. 사람인가. 이제 사람으로 봐도 되는가. 

"안 될 것은 없지." 

"!" 

그렇기에 나는 아힘사의 제안을 수락했다. 생각해보면 항상 옆에 있던 아힘사의 길도 아직 구하지 못했는데, 그런 내가 무슨 세상을 구하겠답시고 설치겠는가. 

내가 흔쾌히 대답하자, 조심스럽게 물었던 아힘사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레반."

#120화. 앙굴리마라는 어떤 꿈을 꾸는가 2

#120화. 

우리는 내려가는 길에, 한 양복점을 찾았다. 

아힘사가 원하는 답을 구하러 찾아가는 것이다. 다짜고짜 찾아왔다며 초진동 블레이드를 꺼내지 않도록 준비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깔끔한 구두를 신고, 때깔이 좋은 셔츠를 입었다. 휴머노이드 재단사의 실력이 괜찮았다. 

— 상류층 부부 같으세요. 산맥의 위쪽 주민으로 보인달까요. 멋지십니다! 

휴머노이드 재단사의 립서비스를 받으며 나와, 발할라 산맥의 도로를 따라 걸었다. 첫 번째 목적지인 [ 로메로 주점 ] 은 시립 아카데미보다 산맥 밑에 위치해 있었다. 

후우우우— 

찬바람이 산등성이를 타고 오른다. 저 아래쪽으로는 수많은 도심의 불빛들이 들고 일어난다. 그것을 보며 걷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얼마 전만 해도 당가며 뷔에탕이며, 껄끄러운 놈들 때문에 감히 길거리를 싸돌아다닐 생각은 못했는데 말이지. 

오늘은 머리를 깨끗이 비우고 걸었다. 아득하게 보이는 발할라 산맥 밑의 도시들이 형형색색의 불빛을 내서, 세상의 미래는 일견 밝고 희망차 보였다. 알아서 잘 살아가겠다는 듯이. 

나는 그렇게 산맥 밑을 보며 걸었고, 아힘사는 내 옆에 붙어 속도를 맞추었다. 각자의 이유로, 발놀림은 평소보다 가벼웠다. 

그리고 얼마 뒤 도착한 곳은, 산맥 해발고도 2천 미터쯤에 있는 소도시. 

아주 밑바닥 최하층이 사는 곳은 아니고, 그냥 적당한 하층민들이 오밀조밀 사는 동네. 입에 풀칠 정도는 하는 주민들의 평범한 동네였다. 

우리는 곧장 첫 번째 목적지를 찾았다. 

"레반, 찾았습니다." 

"그래." 

[ 로메로 주점 ] 

로메로 주점이라 쓰인 간판. 안쪽에서는 둥둥거리는 강렬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거기다 주위에 홍등이 가득한 게 대충봐도 유흥주점이었다. 어쩐지 어감이 별로더군. 

나는 아힘사와 함께 주점으로 들어갔다. 

둥···둥··· 

주점 안으로 들어가자, 칠이 다 벗겨진 가죽쇼파와 테이블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묘하게 싸구려 느낌이 강한 유흥주점이었다. 그래도 테이블이 스무 개는 되어 보인다. 인기가 없는 유흥주점은 아닌가. 

딱히 반겨주는 종업원은 없어서 우리는 대충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러자 한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지고 왔다. 셔츠 밑으로 파츠의 형태가 그대로 보이는 휴머노이드였다. 외관은 조잡했고, 낡은 명찰이 셔츠 앞주머니에서 대롱거렸다. 

그 낡은 명찰에 쓰여진 이름은, 톨리아. 

— 주문이 필요하면 불러주세요. 

그런데 톨리아라는 종업원은 한쪽 다리가 유독 짧았다. 그래서인지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로 홀을 다니며 서빙을 하고있었다. 그것이 미묘한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뒤뚱뒤뚱 펭귄같이 걷는 폼이 우스웠다. 실제로 실실대며 웃는 손님들도 꽤 있었다. 

— ······. 

다만 험상궂고 몸집이 큰 식당 사장이 저쪽 카운터에서 눈을 부릅뜬채 팔짱을 끼고 있기에, 주점이 떠나가라 크게 웃을만큼 간 큰 놈은 없다. 부릅뜬 그의 눈은 의안 같았다. 지금까지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았다.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다. 

— 계집년들처럼 웃는군. 이빨을 부숴버릴까. 

나는 귀가 이리도 좋다. 사장이라는 사람은 그래도 저 휴머노이드 종업원인 톨리아를 꽤나 아끼는 듯 보였다. 주점의 재산이니 아끼는 건지, 돈이 되는 직원이라 아끼는 건지, 아니면 그저 성격이 더럽고 다혈질인 사내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안주와 술을 대강 시키고 앉아만 있었다. 

아무래도 유흥주점이라 답없는 취객이나, 창녀들이 많이 들러서 주점 바닥에는 쓰레기가 계속 생겨났다. 꾸깃한 휴지나 먹다 흘린 안주같은 것들. 톨리아라는 종업원은 뒤뚱대는 다리로도 꽤 일을 잘 해냈다. 불평 한번 없이 성실하고 묵묵했다. 

그쯤에서, 나는 아힘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곳에 먼저 찾아가 보는건 어때." 

"······." 

로메로 주점에 있다던 앙굴리마라는, 아마 아힘사가 찾아 헤매던 느낌과는 조금 다를 듯했다. 폭포 밑에서 도를 찾는 수도승을 원한 건 아니라지만, 유흥주점의 종업원. 과연 일반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조금만 더요." 

하지만 아힘사의 눈은 이미 톨리아라는 이름의 종업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그 시선이 흩어지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듯했다. 그래서 나는 예의상 안주를 더 시켜놓고 잠자코 기다렸다. 

— 여기있습니다···? 

다른 종업원이 추가한 안주를 가져왔는데, 톨리아라는 종업원에게 꽂힌 아힘사의 시선을 눈치챈 듯 속닥였다. 별 특별한 일도 아니라는 듯. 같은 종업원의 시선에도 얕은 동정과 연민이 깃들어 있었다. 

— 일은 싹싹하게 해요!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톨리아라는 종업원이 실수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기야 여긴 취객들을 상대하는 주점. 병신이 아닌 종업원이라도 가끔 뺨을 맞기 일쑤인데, 병신이니 더하면 더 할 것이다. 

— 먼저 가보마. 오늘도 잘 마무리해라. 

얼마 뒤, 험상궃고 덩치가 큰 사장이 퇴근했다. 그는 보기보단 가정적인 사내인 듯,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안주를 한움큼 챙겨 떠나버렸다. 가족을 잘 챙기는 사내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눈을 부릅뜨고 있던 사장이 사라지니, 이제 톨리아를 챙길 사람이 없어졌다. 몇 안 되는 종업원들은 손님이 몰려 죄다 바빴고, 허드렛일이나 하는 톨리아를 보듬어줄 사람은 없다. 

아힘사는 철저하게 톨리아만을 응시했다. 나는 땅콩처럼 생긴 안주를 천천히 까먹었다. 사실 로메로 주점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부터, 눈에 기대감을 풀고 있었다. 게슴츠레하게 뜬 내 눈동자가 주점 거울에 비쳐보였다. 

와장창! 

그때, 벽면의 유리거울로 누가 날아오더니 산산조각이 나며 깨졌다. 어떤 취객이 테이블을 치우고 있던 톨리아를 몸으로 밀었기 때문이다. 꽤 단골인지 말리는 종업원은 없고 다들 제 일만 했다. 

이제 험상궂은 사장도 없다. 톨리아의 셔츠와 팔이 갈라지며 블레이드 날을 꺼내 썰어버릴까. 아니면 그냥 넘어갈까. 나는 그것이 궁금해서 땅콩 까먹는 것을 멈추었다. 

— 죄송합니다. 

놀랍게도 톨리아는 상황에 순응하고, 감정의 동요 없이 거울의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누가봐도 평범한 휴머노이드 종업원 같다. 

이윽고, 나도 아힘사와 함께 톨리아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톨리아는 외형이 예쁘지 않고 조잡한 휴머노이드에 다리도 병신이기 때문에 가끔 지나가던 취객이 장난삼아 발로 차기도 했는데, 당연하게도 취객의 발만 다쳤다. 검기로도 자르기 버거운 만년한철이 섞인 만든 뼈대이고 파츠일 테니. 

— 빌어먹을. 

결국 톨리아를 발로 걷어찬 손님은 욕을 마구 뱉으면서 술맛을 잡쳤다며 나가버렸다. 그는 굉장히 독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저리 독한 술이 달게 느껴지면 뇌 아니면 간이 맛이 간 거겠지. 아무튼 톨리아는 그럼에도 죄송하다며 떠나가는 손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 다음에 또 찾아주세요. 

프로그래밍된 열반이라는 태초의 족쇄를 벗어난 앙굴리마라. 방랑자가 되었을 앙굴리마라. 어째서 이런 술집까지 흘러 들어왔는가. 저 앙굴리마라는 어떤 목표를 위해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그들은 자아를 깨우쳤을 테니, 누군가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톨리아의 일은 새벽 5시까지 이어졌다. 

다른 종업원들은 진작 퇴근했고, 가장 힘든 마감 청소는 오로지 톨리아의 몫이었다. 유흥주점이 그렇듯 손님들이 떠나간 자리가 상당히 더러웠는데, 싹싹하게 일을 한다는 말이 사실인지 절뚝대는 다리로도 일은 잘 했다. 

쓱- 쓱- 

톨리아는 청소 점검표를 체크하고, 물과 술에 젖은 점원옷을 줄에 걸어놓고, 힘든 일을 마친 사람처럼 텅 빈 주방 앞에 서서 기지개를 켰다. 

아아악! 시원한 기지개였다. 어두운 주점 안에 마나가 잠시 파동쳤다. 톨리아의 고함에 조명이 켜졌다 꺼지는 해프닝도 있었다. 저러니까 정말 힘든 사람같군. 

"······." 

오도독. 

나와 아힘사는 테이블에 계속 앉아있었다. 마감이 끝나고도 땅콩이나 까먹는 진상들. 나는 안주라도 먹었지 아힘사는 아무것도 안 먹었다. 그래도 톨리아는 우리를 내보내지 않았다. 

톨리아의 기지개가 끝나니 정적이 찾아왔다. 

원래라면 이런 정적을 반기지 않는 내가 무언가라도 말하며 입을 열었을 타이밍이다. 하지만 오늘 톨리아의 손님은 아힘사다. 유흥주점은 문을 닫았고 조명도 꺼졌다. 맥주 기계가 내뿜는 파란 불빛만이 남았다. 

드르륵— 

"또 누가 알려줬나봐. 나 여기 있다고." 

아힘사는 톨리아가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자, 그제서야 첫 말문을 열었다. 

"열반을 벗었잖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응, 그게 뭐?" 

톨리아는 피로를 느끼지 못할 기계임에도, 굉장히 지친 기색으로 답했다. 거죽을 씌워놓지 않은 기계 그 자체임에도 그랬다. 기계가 현실에 찌든 사람을 저토록 잘 표현할 수 있다니. 올해의 사진상을 받고픈 사진작가를 데려오면 좋아하겠어. 

셔츠를 벗은 톨리아는 앙상한 뼈대와 파츠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충 흔적을 지우기는 했어도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아주 옅게 보이는 흔적. 앙굴리마라 11. 로메로 주점의 종업원인 톨리아는 분명 앙굴리마라가 맞다. 

사실 앙굴리마라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현상금이 걸린 범죄자를 때려잡거나 뒷골목 흑도의 대가리를 으깨서 돈 좀 뜯는 건 일도 아닐거다. 기업에 취직하거나 하는 건 무리겠지만, 그래도··· 

아니다. 나는 저잣거리 흑도같은 논법을 버렸다. 태생이 사파 출신이라 이런 걸지도 모른다. 사람을 패서 돈 빼앗을 생각부터 하다니. 그래, 돈은 정직하게 벌어야지. 사람이라면. 

덜컹! 

그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닫힌 문이 덜컹이더니 누가봐도 도둑으로 보이는 복면인이 들어왔다. 약하지만 마력이 느껴졌다. 발할라라 그런가? 좀도둑도 마법사다. 

— ···! 

도둑은 불꺼진 유흥주점에 형체가 셋이나 있으니, 흠칫 당황했지만 자신의 실력을 믿었다. 휴머노이드 하나에, 섹스토이 하나에, 가만히 앉아있는 머리긴 사내 하나. 도둑은 혼자 사부작대더니 우리를 때려눕힐 마음을 먹었는지 총을 꺼냈다. 

하지만 나는 앙굴리마라 아힘사와 톨리아의 재회를 여기서 끝낼 마음이 없었다. 이제 시작이라 누군가 나설 필요가 있었다. 

스르륵. 

내 손가락에서 쏘아진 마력 투사체가 놈의 가방을 순식간에 잘라버렸다. 정확히 반으로 잘린 놈의 가방 안에서 뭔가 우르르 쏟아졌다. 이미 다른 곳에서 한 차례 좀도둑질을 끝낸듯 웬 배터리가 우르르 빠져나왔다. 

그러자 복면을 쓴 좀도둑은 빠르게 권총을 던져버리고는, 공손히 뒤돌아 문을 달려 나갔다. 한낱 유흥주점이나 털어먹는 좀도둑치고는 훌륭한 대처. 역시 마법사다. 

방해꾼이 사라지자 톨리아가 말했다. 

"마법사를 많이 죽였으니까. 그래서 발할라로 왔어." 

아힘사가 자색빛 안광을 빛내며 물었다. 

"지난날 과오에 대한 속죄(贖罪)를 하는 건가요?" 

"속죄······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를 좀 내버려 둘 수 없을까." 

"당신은 원한다면 이런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이런 일이 뭐가 어때서. 열반이 가짜라는 걸 알았으니까, 당장 각성해서 세상의 진리를 찾아다녀야 해?" 

"······." 

아힘사는 말이 없었다. 대신 톨리아가 말을 이었다. 

"나는 열반에서 벗어난지 오래됐어. 앞날에 대한 진지한 고찰도 몇 번이나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평범한 인생을 살아보는 중이야." 

그리 말한 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톨리아는 아까 좀도둑이 흘리고간 바닥의 배터리 몇 개를 집더니, 전류를 빨아들였다. 

파지지직—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톨리아, 당신은 별다른 목표 없이 살아가는 건가요?" 

"굳이 대단한 목표가 있어야 해? 난 종업원 일이 나쁘지 않아. 발에 차인다고 해서 고통을 느끼는 것도 아니니까. 따분해 보여도, 나름의 재미가 있어." 

"아까는 왜 소리를 질렀나요? 슬픈 게 아닌가요?" 

"기지개야. 오늘 할 일을 마쳤으니까. 마감 파트의 직원들은 늘 일이 끝나면 소리를 지르면서 기지개를 켰지. 그들을 따라해본 거야. 오늘 할일 끝. 기뻐." 

"······." 

다시금 정적. 

분명 다르간트가 건네준 앙굴리마라들의 주소를 보았을 때. 아힘사는 기대감에 차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꽤 긴 시간 용케도 기다리고 있었던 아힘사는, 2주라는 시간이 주어지자 내게 곧바로 앙굴리마라들을 만나보러 가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런 광경을 보려고 온 것은 아닐 터. 진정한 열반까지는 아니라도, 무언가 길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앙굴리마라가 발할라에 있으면 좋겠다고 여기지 않을까. 

아힘사는 좋은 섹스토이의 부품만을 써서, 항상 차가운 표정이지만 정말 차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의 분위기나 주변 상황에 따라 오묘하게 느낌이 다르다고 할까. 그런데 지금 아힘사는, 꽤나 실망하고 있었다. 

푸하— 

나는 정적을 깨며 깊게 숨을 뱉었다. 하루종일 주점에 앉아있었는데. 얻은 소득이라곤 사람처럼 일에 찌든 앙굴리마라를 발견했다는 것 정도인가. 신기한 일이다. 

"레반, 이제 가요." 

"그럴까." 

나는 실망한 아힘사와 함께, 톨리아를 뒤로하고 로메로 주점을 빠져나왔다. 

곧이어 톨리아가 안쪽에서 문을 걸어 잠구었다. 아마도 저 로메로 주점에서 먹고 자는 모양이다. 

약한 침침한 듯한 톨리아의 안광은 우리를 주시하다 이내 시선을 거뒀다. 어차피 이곳에 있으니, 또 궁금한 점이 생기면 찾아오면 되겠지. 

그런데, 우리가 떠나가려던 다음 순간. 

반대편 길가, 아까 먹거리 안주들을 사들고 나갔던 험상궂은 사장이 저 멀리서부터 걸어왔다. 그는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아이는 잠에서 깬지 얼마 안 된 듯 졸린 눈으로, 아까 사장이 가지고 나간 안주를 먹고 있었다. 

아까는 톨리아를 보느라 알아채지 못했는데, 사장으로 보이는 사내의 다리도 조금씩 절뚝이고 있었다. 톨리아처럼 한쪽 다리가 짧았다. 왜인지 눈 한 번을 깜빡이지 않더니. 저 사장도 휴머노이드였나보다. 아니면 안드로이드던가. 

— 아, 왔어요? 

주점의 문을 잠갔던 톨리아는 그것을 보고서 잠긴 문을 다시 열었다. 험상궂은 사장과 아이는 웃으며 로메로 주점 안으로 들어갔고, 이제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그것을 본 내가 길거리에 서서 말했다. 

"저들은 만년한철이 섞인 파츠를 떼어 붙여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가 보군." 

"······." 

왜일까. 

저 톨리아라는 종업원을 처음 보았을 때, 사회의 냉엄함을 느끼고 침침히 젖어드는 초년생의 분위기 같았다. 몸에 맞지도 않는데 입고 있었던 싸구려 셔츠처럼, 별 의미도 쓸모도 없는 인생으로 보였다. 

적어도 아힘사가 원하는 진정한 열반의 길은 아닌 것도 확실했다. 

그런데 앙굴리마라 11은 톨리아가 되어, 유흥주점의 말단으로 홀서빙을 한다. 같이 지내는 안드로이드도 있는 모양이고, 거기에 나름 만족하며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나와 아힘사가 산맥의 양복점에서 옷을 맞출 때, 휴머노이드 재단사가 그랬었다. 부부처럼 보인다고. 그런데 저들을 보니, 휴머노이드 재단사의 그 말이 더욱 뻔하고 틀에 박힌 립서비스로 느껴졌다. 

아무리 봐도, 새 옷을 맞추어 단장한 우리보단 저 기계들이 더 부부같아 보이는군. 

"아힘사, 다음은 어디로 갈까." 

"······." 

나와 아힘사는 다음 앙굴리마라를 찾으러 가기 위해, 조용히 몸을 돌렸다.

#121화. 앙굴리마라는 어떤 꿈을 꾸는가 3

#121화.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보다 해발고도가 상당히 낮아졌다. 

발할라 산맥의 아득히 거대한 그림자가 머리 위로 진다. 

[ 발할라 시티, 로톤 4가 6번지 ] 

다음 목적지는 로톤 4가 6번지의 어떤 주택. 우리는 로메로 주점이 있던 동네에서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중이다. 

해발 고도가 낮아져갈 때마다, 주위 소도시들의 풍경이 점점 바뀌어 간다. 잘사는 동네에서 못사는 동네로. 가끔 마주치는 주민들의 의복과 사이버웨어의 수준이 그걸 반영한다. 

8억의 인구가 살아가는 도시 발할라. 여전히 도시가 선보이는 불빛은 눈부시게 밝다. 내려갈수록 불빛은 더 쨍한 색감으로 변해갔다. 싼값으로 자극적인 색을 낼 수 있는 조명을 써서 그렇다. 

발할라 산맥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면적이 넓어진다. 산맥이니 당연하다. 그에 따라 각 소도시로 가는 도로와 갈림길이 무수히 많아진다. 나는 아힘사와 함께 복잡한 갈림길을 여러번 지나쳤다. 

사실 귀찮고 복잡한 도로는 그냥 뛰어내리면 그만이지만, 길을 찾아가며 산맥의 배경이 바뀌는 과정을 구경하는 것도 괜찮았다. 작은 소도시마다 나름의 개성을 가지고 있어서. 슬쩍 지나가며 소소히 담아둘만한 풍경이 많았다. 이것도 다 추억이다. 

다만 못사는 동네인 산맥 밑둥 쪽으로 내려갈수록, 도로변의 네온 라인이 꺼지거나 가로등이 없어 어두운 길이 이어졌다. 

차량도 이용하지 않고, 어두운 산맥의 도로변을 남녀 둘이 걸어 내려간다. 게다가 여기는 못사는 산맥 밑둥 근처 동네. 당연히 만만해 보일 테고, 마치 운명처럼 길가에 숨어있던 노상강도 무리를 만났다. 불쑥 튀어나온 놈들은 대담하게도 소총을 겨누고 있었다. 

— 어이 거기······ 

쾅! 

으악— 

내가 손을 쓰자, 놈들은 식상한 협박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산비탈로 굴러 떨어졌다. 굉장히 빨리 굴렀다. 강도들의 비명이 점점 멀어진다. 

"맛있게 구르네." 

원래 이런 산에 난 도로에는 갈림길도 있고, 노상강도도 있어 줘야 맛이 산다. 산에 산채를 차려놓고, 통행세를 받던 녹림의 산적들이 떠오른다. 녹림도들은 대부분 못배운 산적이었으나, 영리하고 노련해서 무작정 칼부터 들이밀지 않았다. 상대가 칼을 차고 있다면, 일단 높임말을 쓰며 깍듯하게 통행세를 부탁했다. 프로페셔널한 강도들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발할라 산맥의 노상 강도단은 수준 미달이다. 하지만 추억을 끄집어내기 위한 배경으로는 꽤 잘 어울렸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유유히 산맥을 걸어 내려가는 도중, 아힘사가 물었다. 

"······톨리아는, 주점의 사장과 무슨 사이인 걸까요?" 

아힘사의 입에서 저런 질문이 먼저 나오다니. 솔직히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아힘사 딴에는 꽤 진지한 질문이었다. 아힘사는 기대와는 다른 상황에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으나, 톨리아의 말 한 문장 한 문장과 주변의 상황을 되새기며 고찰하고 있었을 것이다. 

꿈틀. 

미세하게 움직이는 아힘사의 눈가 근육. 

저거 봐. 표정부터가 굉장히 진지하잖아. 

나는 아힘사의 물음에 답했다. 

"나와 언평 선생처럼 벗일 수도 있고, 그저 가까운 사장과 종업원 사이일 수도 있고, 아이를 입양해 키우는 휴머노이드 부부일 수도 있다." 

앙굴리마라 11, 톨리아는 아힘사보다 빠르게 열반을 벗어난 기체였다.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발할라까지 흘러들어와 험상궂은 인상의 안드로이드 주점 사장과 저런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다리까지 떼어준 것을 보면, 필시 자의로 그리 행동하는 것이었다. 

"무얼 위해 그렇게 살아가는 걸까요?"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게 사니, 그것이 부러워 따라 해보고 싶었을 수도 있지." 

"그들에겐 작은 아이가 있었어요. 인간 부부처럼." 

"그래, 졸려도 행복해 보이더군. 과자가 맛있었나봐." 

"열반이라는 이름의 오랜 번뇌를 벗어버리고 선택할 만큼, 평범한 인간처럼 행동하는 것이 가치가 있는 길일까요?" 

명확한 정답이 없는 문제가 이어졌다. 설령 정답에 한없이 가까운 대답이 있다고 해도, 언제든 답이 바뀔 수 있는 문제들. 첫 번째로 만난 앙굴리마라인 톨리아는, 여러가지 의문을 남기고는 아힘사의 고찰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래서인지 아힘사는 산맥을 내려가는동안, 부쩍 말이 많아졌다. 

"다음 앙굴리마라는, 톨리아보다 선명한 답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나는 적당히 대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글쎄." 

* * * 

로톤 4가 6번지. 

어둡고 축축한 반지하 쪽방들이 모여있는 동네였다. 

검은 곰팡이가 핀 건물들과 엎어져 내용물을 쏟아낸 쓰레기통. 누가 뒤진듯한 쓰레기 봉지들. 마약할 때 쓰는 주사기들. 진한 가스 냄새와 금속 냄새. 습한 곰팡내와 아무렇게나 버려진 고장난 오토바이들. 

그리고 공기에 섞여있는 혈향. 고기 부패한 냄새. 

"······." 

나는 로톤 4가 어귀에 이르자마자 기감을 넓게 펼쳤다. 숨길 수 없는 향들이 공기중으로 계속 풍겨왔기 때문이다. 나의 오감은 예전과 같지 않아서 먼 거리라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레반, 이곳입니다." 

아힘사가 가리키는 곳은 6번지의 한 주택 앞. 들어가는 입구는 경사진 계단이었고, 지하로 이어져있다. 어두침침해서 계단 밑쪽은 잘 보이지 않았다. 

계단의 경사는 높고 실로 비좁다. 안력을 돋구자, 좁은 계단복도 사이로 사람이 끌려간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구멍난 콘크리트 복도벽에는 사람의 머리카락이 박혀 있었다. 머리를 강하게 부딪쳐 뜯어졌을 것이다. 

으음. 

나는 앞장서서 그 계단을 통과해 내려갔다. 어두운 복도 한쪽으로 단 한개의 문이 나있었다. 그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문을 열자 평범한 현관이 우릴 맞이했다. 

끼익. 

따각- 따각- 

조명도 고장난 듯 어두운 현관. 신발이 없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 

그로테스크한, 사체의 산. 

층층이 쌓인 인간 사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즉사한 듯, 깔끔한 절단면과 다 사라진 손가락들. 

바닥과 벽에 새카맣게 굳은 피와 부패해가는 살점들. 

곰팡이와 작은 벌레로 가득한 바닥. 

그리고 백골처럼 하얗게 센 손가락 뼈가 바닥에 여럿. 

창문도 없는 작은 지하방 안. 당장 시티경찰을 불러도 이상치 않을 광경이 펼쳐져 있다. 

역시나 반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따각- 따각- 

연신 따각대는 소리. 

그리고 하얀 연기가 지하방 안에 가득하다. 

그래, 누군가 작은 탁상 위에 향을 피워놓았다. 향 옆으로는 생화인지 조화인지 모를 꽃을 꽂아놓았으며, 조그마한 호롱등을 켜놓았다. 더해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까지 올려놓았다. 

향, 꽃, 등, 차. 

그것을 올려놓은 탁자의 앞. 무언가를 하는 형체가 어렴풋이 보인다. 조용히 좌선한 채 무언가를 하는 사람 형태의 기계. 형체로 미루어보아 앙굴리마라가 확실했다. 이윽고 그 앙굴리마라가 말했다. 이미 우리가 온 것을 알고 있었다. 

— 술 향이 나. 너희는 나 이전에 톨리아에게 다녀왔구나. 톨리아는 인간처럼 살고 싶어해. 그래서 수수께끼 같은 사람의 행동을 따라하지. 

앙굴리마라도 후각이 있었던가. 

그건 모르겠다. 

아무튼 나와 아힘사가 두 번째로 찾은 앙굴리마라는, 분명 열반을 벗으며 같이 버렸을 인골 염주를, 새로이 꿰서 만들어내고 있었다. 인간 사체를 방에 산처럼 쌓아두고. 지하 단칸방에 앉아 외톨이처럼 혼자서. 

톨리아와 마찬가지로 가짜 열반을 벗어냈을 저 앙굴리마라는, 희한하게도 그 가짜 열반 속으로 재차 기어들어 간듯 보인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지하방의 벽지에 수백장에 이르는 몽타주가 붙어있다는 거였다. 강력범죄를 저지른 마법사들의 몽타주. 한쪽에 장작처럼 쌓여있는 사체를 힐긋 보니, 몽타주에 있는 놈들이 태반이었다. 

범죄자를 죽여 쌓아뒀군. 

그러니까 저 좌선하고 있는 앙굴리마라는, 강력한 범죄를 저지른 마법사를 잡아 죽이고 그들의 손가락으로 인골염주를 꿰고 있던 것이다. 악인을 죽였다고 해서 살인이 아니란 건 아니지만, 살인에 익숙한 나는 그때부터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몸에 들어간 힘이 스르륵 풀렸다. 

그때, 언뜻 보이는 앙굴리마라-6 라는 각인. 

그것이 저 앙굴리마라의 기체명. 저기서 인골염주를 꿰고 있는 앙굴리마라는, 아힘사나 톨리아보다도 먼저 만들어진 앙굴리마라였다. 

곧, 아힘사가 한 발짝 더 들어가며 말했다. 

"저는 아힘사입니다." 

— 좋은 이름이네. 누가 지어줬어? 

"내 옆에 있는 레반이 지어줬어요." 

— 그래, 여기까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나처럼 가짜 열반에서 벗어난 이들이 어떤 길을 걷고있는지 궁금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왜 다시 인골염주를 꿰고 있죠?" 

따각- 따각- 

그러자 앙굴리마라 6은 손을 멈추지도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 열반만이 목적지였던 때로 되돌아가 보려 해. 

"마법사의 손가락을 잘라 염주를 만든다고 해서 열반이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당신도 열반을 벗어났다면 분명 알고 있을 텐데요. 그 열반은 사실 허상이고, 미혹이고, 번뇌였다는 것을요." 

위잉— 

아힘사가 안광을 빛내며 따지듯이 물었다. 

그러자 앙굴리마라 6은 나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음성은 어조도 없고 평온했다. 라디오를 틀어둔 것처럼. 

— 아무도 모르지. 허상이었던 그 번뇌 속으로 다시 뛰어들어 극복해낸다면, 불현듯이 깨닫고 있지 못했던 미상의 무언가가 찾아올 수도 있는 거니까. 

"과거처럼 마법사를 죽여가면서 말인가요?" 

— 백팔번뇌(百八煩惱). 번뇌는 살아가면서 끊이지 않아. 열반이라는 이름의 허상을 극복해냈다고 해서 번뇌가 끊어지며 새로운 세상이 뜨이는 게 아니야. 삶이 번뇌이고 번뇌를 풀어가는 과정이 곧 삶이야. 번뇌는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는 것. 그래서 나는 방황을 거듭하다, 과거의 첫 번째 번뇌 속으로 다시 몸을 던져본 것뿐. 

"······." 

확고부동한 신념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예상을 벗어나는 대답에 아힘사의 자줏빛 안광이 약간 잠잠해졌다. 아마 말의 의미를 곱씹고 있을 것이다. 앙굴리마라 6은 여전히 인골염주를 꿰며 말을 이었다. 다른 이가 끼어들 틈은 없다.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다. 

— 삼라만상(森羅萬象).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것. 그것들은 번뇌와도 이어져 있다. 행복도, 슬픔도, 새로운 목적지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진실을 알지 못하는 미욱한 자들의 번뇌가 될 수 있지.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번뇌고, 그걸 풀어가는 것이 삶이야. 

불친절한 말을 늘어놓는데도 흡입력이 상당하다. 

지하방 입구부터, 기이한 광경과 독백의 연속이다. 

여섯 번째 앙굴리마라. 가장 초창기에 탄생한 기체라 그런가. 

정갈히 좌선한 채로 무심하게 인골염주를 꿰는 앙굴리마라 6의 기계손은 유려하며 노련했다.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고. 적당하게. 이미 모든 맥락을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 아힘사, 다른 앙굴리마라들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왔다고 했지? 

"네. 맞습니다." 

— 무구무착(無求無着). 구함과 집착이 없다면 진정한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야. 그런데 너는 다른 길을 걷는 앙굴리마라들을 집착적으로 찾고 다니며,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구하고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구함과 집착. 첫 번째 번뇌인 열반을 벗은 뒤, 다른 의미의 열반을 좇으며 깨달음을 구해야 한다는 집착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아힘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아무것도 없는 벽을 조용히 응시했다. 습한 곰팡이가 까맣게 핀 벽이었다. 앙굴리마라 6은 아힘사가 고개를 내렸을 때, 다시 말문을 열었다. 

— 아힘사, 어차피 삶은 누구도 먼저 가보지 못한 여행이야. 태초의 목적을 잃고 이정표가 사라진 삶에서 방황하는 것조차도 번뇌를 풀어가는 과정. 한 차례 굴레를 벗었음에도 방황하며 인골염주를 꿰고, 또 다시 살생의 업을 쌓아가는 나처럼. 

타각- 타각- 

앙굴리마라 6은 오랜만에 다른 객체를 만난듯, 하던 말을 멈출 기미가 없었다. 아힘사도 말을 하기보단, 앙굴리마라 6의 말을 듣고 싶어했다. 

— 이정표는 사라졌고 남은 번뇌는 많아. 번뇌의 풀이는 곧 삶의 과정. 답은 명확치 못한 것이라서, 살생의 업을 쌓아가는 앙굴리마라 6의 삶과 인간처럼 살고 싶어하는 톨리아의 삶, 아힘사의 삶은 다를 수밖에. 우리는 이미 다른 길을 걷고있는 각각의 존재야. 같은 앙굴리마라로 탄생했어도, 지금은 서로 다른 삶을 살지. 

"계속된 번뇌를 겪으며, 스스로 답을 찾아가야 하는 걸까요." 

탁- 

앙굴리마라 6이 꿰던 인골염주를 탁상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호롱등이 바람에 약간 흔들렸다. 

— 아힘사, 이곳에 내려올 때 어땠지? 

그러자 아힘사가 즉시 대답했다. 

"사방이 너무 어두워서 주위를 경계해야 했죠." 

— 한낱 계단 따위를 내려올 때도 그 아래에 뭐가 있을 지 알 수 없으니 두렵고 막막하지. 하지만 다른 앙굴리마라를 만나기 위해 계단을 지나왔잖아. 그랬더니 앙굴리마라 6을 만났지. 번뇌를 지나면 인연이야. 

"······그렇군요." 

그 말에 아힘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앙굴리마라 6은 바닥에 좌선해 있었으므로, 아힘사는 곰팡이 핀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웠다. 향의 불빛과 조그마한 호롱등 말고는. 그래서 아힘사는 앙굴리마라 6의 묘한 안광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 소림의 시조께서 말씀하시길. 모든 것은 인(因)과 연(緣)이 합해져서 생겨난 결과이고, 인과 연이 흩어지면 사라진다 했어. 인(因)은 너를 뜻하고, 연(緣)은 외부를 뜻해. 인과 연이 어우러지는 것. 산맥 밑둥의 골방에 틀어박혀 범죄자를 사냥하는 앙굴리마라 6은 아직 이렇다할 인연이 없어. 너희처럼 '이름' 을 갖지도 못했지. 

"······." 

— 하지만 아힘사, 네게는 이름을 지어준 동행자가 옆에 있잖아. 그게 번뇌를 지나 얻은 인연(因緣)이야. 너의 인연을 소중히 여겨. 그곳에 너의 길이 있을 수도 있어. 인골염주를 꿰는 앙굴리마라 6은 갈 수 없는. 

타각- 타각- 

앙굴리마라 6은 그 말을 끝내고는, 다시 인골 염주를 꿰어갔다. 

인간들의 군상이 다양한 만큼, 열반을 벗은 앙굴리마라들의 군상도 다양했다. 확실히 로메로 주점에서 빠져나온 뒤, 아힘사는 고찰 거리가 생겼는지 이전보다 조금 가라앉아 있었는데, 앙굴리마라 6을 만나고는 다시 말이 없어졌다. 

열반이라는 꿈에서 빠져나와 사람처럼 살아가는 톨리아, 그리고 길을 찾기 위해 꿈 속으로 다시금 들어간 앙굴리마라 6. 

아힘사와 같이 무형의 목표를 찾아 고뇌하는 앙굴리마라는 없었다. 적어도 이 발할라 산맥에는. 

족쇄에서 벗어난 앙굴리마라들은 어떤 꿈을 꾸는가. 

지금, 아힘사는 어떤 꿈을 꾸어야 하는가. 

상념은 짧았고, 시간은 지나갔다. 

검은 곰팡이가 핀 벽과 부패한 시체를 뒤로한다. 

앙굴리마라 6과의 대화를 끝내고 지하방에서 나온 아힘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꼭 무언가 결심한 듯이. 

"레반, 이제 마지막 한 곳 남았네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하지만, 거긴 가보지 않아도 괜찮아요." 

돌연, 아힘사가 지도처럼 들고있던 종이를 접어 다시 넣었다. 다른 앙굴리마라가 있는 주소가 아직 한 곳 남아 있지만, 아힘사는 지금 갈 마음이 없어보였다. 

곧. 

길가에 우두커니 선 아힘사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레반, 레반의 목표는 뭐였나요?" 

"연방의 멸망 늦추기였지." 

"터무니없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저도 그거 같이 해볼까요?" 

아힘사가 대뜸 그리 말하기에, 나는 그냥 웃었다. 

자줏빛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도 짙게 빛나는 듯했다.

#122화. 군벌 도시, 로키

#122화. 

앙굴리마라중 6번째로 탄생했고 가짜 열반을 벗은뒤 오랜 고찰을 했으나, 지금은 작은 지하방에서 살업을 쌓으며 다시 번뇌 속으로 들어간 앙굴리마라 6. 

앙굴리마라 6보다 뒤늦게 탄생했고 가짜 열반 역시 뒤늦게 벗었으나, 나와의 연이 닿아 동행하며 깨달음을 구하는 아힘사. 

누가 더 옳은 길을 걷고 있다 단언할 수 있겠는가. 

오늘 발할라 산맥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나와 아힘사는 함께 걸었고, 복잡한 갈림길을 되짚어가며 다시 발할라 산맥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저, 정말이야? 레반이 여기에 왔다 갔어?" 

한편, 카산드라 교수의 저택은 시끌벅적했다. 저택 내에 당황한 목소리가 연신 울려퍼졌다. 목소리의 정체는 언니인 루벤카와 외출에 나섰다가 이제야 돌아온 레나였다.

"네, 레나님." 

소식을 전한 메리도 흠칫 놀랄 만큼 큰 목소리였다. 까만 흑발처럼 어두운 레나의 동공은, 몰라볼 정도로 커진 상태였다. 

자신이 없는 사이, 레반이 저택에 들렀기 때문이었다. 

"······왜 미리 연락을 안 했지?" 

와르르!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레나는 잔뜩 사온 길거리 음식들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이 끝나고, 전 연방의 주민이 보는 앞에서 깽판을 벌인 뒤 홀연히 사라진 레반. 얼마나 상황이 급박했는지, 그때는 따로 연락이랄 것도 없었다. 

하지만 원래부터가 종잡을 수 없는 레반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어떻게든 금방 돌아오겠지? 생각하며 아카데미에서는 수면, 저택에서는 주식에 매진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연락도 없이 왔다 가면 어떡해······." 

레반은 한 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도 도통 나타나지 않았다. 

연방 전체를 뜨겁게 달군 이슈도 꺼진지 오래. 그 파급력 대단했던 욕설 사건도 시간이 흘러 잠잠해졌는데, 레반은 소식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마탑에 찾아갈 수도 없어서, 요즘 레반이 어디서 뭘 하고 있나 걱정이 깊어지던 시점이었는데— 

"서, 설마 다시 안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레반이 또 사라져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 덜컥 들었다. 

바이오 기업의 업무까지 맡아 할 정도의 그녀라지만, 사실 성년이 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게다가 어릴 적부터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왔고, 최근 몇 년은 함께 생사를 넘나들었다. 

레반의 빈자리는 하루아침에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레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으득- 

그리고, 그런 레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 

방금 전까지 사랑스러운 동생과의 외출을 끝내고 온 덕에, 기분이 매우 좋았던 루벤카였다. 

척봐도 레나가 안절부절못하자, 루벤카는 자신의 고운 눈썹을 벅벅 긁었다. 괜히 눈가가 간지러웠다. 이러다 피가 날 때까지 긁어버릴 수도. 

'그 새끼는 어디 있다가 이제야 기어나왔대?' 

반 루벤카는 이 상황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근 주식에만 빠져있던 레나가 조금 우울해하는 듯 싶어서, 나름 바쁜 시간을 쪼개서 쇼핑까지 하고 온 참이다. 이제 조금 안정됐나 싶었는데······ 

고작해야 레반 그 자식 때문에 저렇게 반응하다니. 대체 왜 레반 그 새끼 소식에만 안달복달하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레반이라는 이름 하나에 저렇게 반응할 일인가? 그리고 저렇게 헤어진 연인처럼 그리워하면 곤란하다. 자신이 과거 레반에게 했던 짓이 있으니까. 

레나가 알면 실망할 수도 있는 레반과의 '뜨거운 비밀' 이 꽤 남아있었다. 언제 한 번은 눈을 똑바로 뜨고 까불길래 뜨거운 염화로 살짝······. 

'하 씨, 그냥 확 묻어 버릴 수도 없고.' 

마음 같아서는 아주 멀리 떨어뜨려놓고 싶다. 

하지만,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에서 젊은 영웅으로 취급받았던 자식이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연방 전체가 짜고 반 자매를 속일리는 당연히 없으니, 전공이 부풀려졌대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겠고······. 

'이건 커도 너무 컸어.' 

비정상적인 성장속도. 

사실 알려진 전공의 반의 반만 사실이라 해도, 레반놈은 이미 평범한 7레벨이라고 볼 수 없다. 자취를 감추고 활동하지 않는데도, 지금까지 발할라 넷에서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걸 보면. 

도저히 평범한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사랑이라도 받는지 천부적인 재능을 몰아받은 인간들이 존재한다. 비슷한 천재를 일전에 남경 무학관에서 보았다. 

그런 놈들은······그냥 빨리 지나가게 길을 터주는게 맞지. 

일단 루벤카의 이성은 그렇게 결론을 냈다만, 감성은 아니었다. 하필 왜 레반 그 자식이어야 해? 인정 못 하겠다. 이건 엄청나게 긴 꿈일 거야. 좋아. 계속 부정하자. 

"레나님." 

루벤카가 핏대를 세우며 이를 갈아대는 와중에 메리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눈치가 빠르게 행동했다. 레나가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하자 어르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연 것이다. 

"레나님이 저택에 돌아오시면, 연락을 달라고 전하셨습니다." 

"!" 

"돌아오실 겁니다." 

빙긋- 

메리는 그렇게 말을 전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하셨습니다. 웃긴 말이다. 시종의 숙소에서 같이 지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하셨습니다' 라고 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주인인 루벤카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이유도 동일하지 않을까. 메리는 미소를 짓는 동안, 짧은 연산과정을 통해 그런 결론을 도출해냈다. 

이윽고, 이를 갈던 루벤카가 나직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안 돌아와도 괜찮은데." 

"왜, 맞을까봐?" 

갑작스레 귓가에 맴도는 누군가의 목소리. 

"흑!?" 

루벤카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들어왔는지 젊은 남자가 보였다. 혼잣말을 하던 루벤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주 잠시간의 엉거주춤. 꽤 봐줄만한 얼굴에 긴 머리칼이 특징이었다. 몸도 저만하면 괜찮······. 

'아냐.' 

그러나 루벤카는 곧 정신을 차렸다. 

여기는 시립 아카데미, 론 카산드라 교수의 저택. 이런 식으로 들어올 수 있는 남자는 한 명뿐일 것이다. 

루벤카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며,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눈살을 찌푸리며 평소처럼 말했다. 

"뭐야? 더럽게." 

[ 화들짝 놀랐으면서 알고 있었던 척 자연스럽게 눈만 찌푸리는게, 역시나 성격이 더럽고 심계가 흉해 보이는군. 악독한 년. ] 

"······." 

놀랍게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 머리는 노랗게 염색해가지고. 팔에 마나문신 그려놓은 거 봐라. 건드리기만 해도 터지는 공격 계열이로군. 네 몸이 무슨 폭탄이냐? ] 

"······." 

비아냥에 최적화된 레반의 전음이 들려온다. 

꾸깃! 

루벤카는 아닌척 신경질적으로 옷을 내려, 팔뚝에 있던 마나문신을 가렸다. 어이가 없었다. 집중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지만, 약간의 기척도 느끼지 못했기에. 

루벤카는 7레벨의 마법사. 그것도 이제는 완숙함의 능선을 넘어 단계의 마지막 경지를 바라보는 마법사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마음만 먹으면 죽였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 

그때보다도 더 성장했다고? 

수복전 이후에 시간이 꽤 길긴 했어도 1년은 지나지 않았는데, 더 성장했다고? 심지어 얼굴이랑 골격은 왜 저렇게 바뀌었지? 전신 성형이라도 하고 온 건가? 

부득! 

아무튼 루벤카는 이를 갈며 분을 삼켰다. 눈에 힘도 줬다. 실상 이를 갈며 분을 삼킬 이유는 딱히 없지만. 뭔가 지금까지 해온 행동상, 왜인지 이번에도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레반!" 

곧, 레반을 본 레나가 종종대며 달려왔다. 레반을 뒤따라 온 아힘사가 레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응?" 

아힘사의 인사에 레나는 잠시 의아한 기색으로 있다가,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크으— 

목구멍이 얼어버릴 듯한 느낌. 

얼음에 담긴 콜라는 언제나 시원하다. 연방이 망하면 이것도 없겠군. 다시 한번 굳게 의지를 다진다. 

나는 아힘사와 함께 카산드라 교수의 저택으로 레나를 찾아왔다. 레나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쩐지 기분이 편안해졌다. 아쉽게도 꼴보기 싫은 루벤카가 옆에 붙어 있었으나, 나 대신 레나를 보좌하는 시종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저택의 홀에 앉아, 레나와 하루종일 대화를 나눴다. 콜라도 마시고. 지나간 얘기도 하고. 알 헤임달과 수르트에서 겪었던 것들을 모두 세세히 말할 정도의 여유는 없어도, 충분히 즐거웠다. 

레나는 뭐라도 자랑하고 싶었는지, 주식 계좌를 꺼내 보여주었다. 저번보다도 금액이 훨씬 늘어있었다. 그래서 나도 연방으로부터 하사받은 라그나로크의 땅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굉장히 좋은 목에 있는 필지라, 레나도 눈을 빛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집을 짓기에는 땅이 너무 크고, 그렇다고 그냥 놀리기에는 아깝고, 팔아서 크레딧으로 줄까?" 

"아냐, 이미 내 재산도 감당하기에 벅차." 

"그래? 둘 다 싫으면 나 줘." 

대화 중간중간 루벤카가 끼어들었다. 레나에게 집착하는 년이니 저럴만도 하지. 

물론 철저하게 무시하고 레나와만 대화를 나누었다. 밤이 늦으면 자고, 아침이면 일어나고, 식사가 차려져 있으면 먹고, 또 레나와 대화를 나누고. 

아니나 다를까 말초적인 백수생활은 즐거웠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나는 카산드라 교수의 저택에서 사흘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다. 레나와 함께 보낸 시간이라 전혀 아깝지는 않았다. 

다만, 그 시점에 나는 슬슬 떠나야 할 때라고 느꼈다. 루벤카년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고, 레나는 아쉬운 기색으로 극구 말렸으나 나는 일어났다. 

지금 일어나지 않는다면, 계속 이 저택에 남고 싶어질 듯해서. 

"금방 돌아올게." 

그렇게 나는 카산드라 교수의 저택을 떠났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밝은 별무리가 보이는, 마탑주의 서재. 

허공을 둥실둥실 떠다니는 청록빛 마력. 오래묵은 책 냄새와 서재를 성벽처럼 둘러싼 책장. 장식품처럼 책상 위를 꾸미는 앵무새 법기. 고강한 마력을 가진, 서로 다른 개성의 마탑 소속 마법사들. 

그들을 둘러보던 일레힌 포이체카가 말했다. 

"멀지 않은 과거, 가륵은 도시 안에 숨어있다가 9레벨 집행관 모리 무라타를 참살했다. 그저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최근 변절자들에게 피를 뿌리고 다니는 네임드 시체는 그 가륵이 맞는 듯하다. 남궁세가에서 가져온 언데드의 혈액이, 과거 모리 무라타와의 전투때 남았던 가륵의 혈액과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니." 

가륵. 

최근 다시금 이름이 오르내리는 네임드다. 수복전 이후 로라 마르티네즈라는 걸출한 마법사와 진공진인이라는 걸출한 거물들을 필두로, 변절자 색출 작업이 이루어졌다. 

변절을 준비하던 이들은 줄줄이 잡혀 처벌을 받았다. 어떤 방식으로 변절자들의 자백과 밀고를 받았는지는, 당신들의 상상에 맡기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라며 공개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변절자를 찾는 여러 과정 사이에서 마침내······ 

"네임드, 가륵의 위치가 특정되었다." 

— !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은, 로키 시티로 갈 것이다."

#123화. 군벌 도시, 로키 2

#123화. 

마탑주의 말에 따르자면. 

마탑은 네임드 '가륵' 토벌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기야 마탑은 발할라 시티와 마법계를 대표하는 세력. 이를테면 토템같은 존재다. 여타 기업 집단보다는 명예를 조금 더 중요시하는지라, 어지간해선 참여할 운명이었겠지. 

"한 가지 알려둘 내용이 있다. 발설은 금한다." 

— ? 

그런데 세상을 움직이는 자들의 결정은, 언제나 간단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것저것 살피고 재는 것이 참으로 많다. 나는 그런 것들이 복잡하고 귀찮아 외면하는 게 일상이었으나, 요즘에 와서는 귀담아듣고 있다. 

"목표는 로키에 숨어 변절자를 늘려가던 네임드 '가륵' 과 그 주변 세력. 변절자를 토벌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레힌 포이체카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외부에는 로키 군벌세력의 토벌과 와해가 목적이라는 공표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제가 있는 약소 군벌들은 실제로 토벌될 것이야." 

그러자, 서재에 있는 이들은 이해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 9레벨 이상의 네임드 시체 가륵은, 도시 안에 대담하게 숨어들어 자신의 피를 뿌리고 있는 놈이니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변절자들과의 정보망이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정예만 뽑아서 움직여도 시작도 전에 들통날 위험성이 있다는 뜻. 

그래서, 겉으로는 '로키 시티를 장악한 군벌세력의 토벌' 이라는 이유를 내걸었단다. 

'종후표가 했던 예측대로 전부 들어맞았군.' 

내놓은 자식마냥 팽개쳐놓은 로키 시티라도, 명백히 연방에 소속된 거대도시. 정부가 손 놓고 있었다 해도, 과거 마피아 섬멸전등 전력이 있었기에 저것은 꽤 괜찮은 명목이었다. 

군벌들은 안 그래도 말썽을 부리는 놈들이니. 꽤나 그럴싸한 기치 아래 세력들이 움직임을 보여도 수상하지 않을 이유를 만든 것이다. 

세력이 움직인다는 사실이, 설령 가륵 놈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큰 문제가 없도록. 

"마탑주님." 

그쯤, 조용히 듣고만 있던 내가 입을 열었다. 

"본 목적을 연방에도 숨기겠다는 얘기인데, 마탑주님은 그걸 어떻게 전해들으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 말은 설마 나를 의심하는 건가. 아니면···." 

일레힌 포이체카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또 다른 무언가를 너희들에게도 숨기고 있다 생각하나?" 

"제가요? 오해입니다. 너무 깊이 생각하셨군요." 

"마탑주에 대한 존경이 없구나." 

짐짓 못마땅한 말투가 이어졌다. 

그러나 연녹빛 머리칼이 가벼이 찰랑이는 게, 내 물음의 의도를 마탑주도 곡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탑주쯤 되는 거물이면, 세상 돌아가는 데에는 빠삭할 양반이라. 

곧, 마탑주가 물음에 대답했다. 

"라그나로크 수복전에서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 소속 마법사들' 의 공이 꽤 지대하다 알려졌지. 세상이 마탑의 노고를 알아준 덕분이다." 

실상은 북부 편제쪽에 네임드 시체들이 떼거지로 몰려드는 바람에 선택권도 없이 그렇게 흘러간 거지만, 여차저차 이 마탑의 활약이 컸던 점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라. 

"그럼, 이중에서 혹여 변절자가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육신에 나의 마력이 없는 자 손을 들어봐라." 

화악— 

청록빛 마력이 서재 여기저기서 빛났다. 

확실히, 신뢰할 만한 이들에게만 알렸다는 건가. 

"마탑 말고도 어떤 세력이 참여합니까?" 

"나도 정확히 모른다. 로키에 가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연방······아니, 슈나우젠 하비에르는 저번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더군." 

남궁세가라는 거대한 세력에서 가주까지 해먹었던 남궁천이 변절자였다. 때문에 연방 정부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오딘의 칠좌 슈나우젠 하비에르는,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널 생각인가보다. 

"아무래도······." 

그때, 팔찌 네 개의 8레벨 마법사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도 진한 에스프레소 잔을 들고서. 

"······로키 시티의 군벌들이 절대 가만히 있지는 않겠군요. 가륵도 문제지만 그것도 문제입니다. 아무리 양동작전이고 기만이라 해도······내막을 모르는 그들은······전력으로 받아칠 거예요. 오히려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보다도 전투의 규모가 커질 수도······." 

서재에 있는 마법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리자, 마탑주가 그 말을 긍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도 있다." 

로키의 군벌들은 연방의 움직임을 포착한 순간, 벌집을 공격당한 벌들처럼 똘똘 뭉쳐서 대항할 거다. 저번 라그나로크 수복전 때처럼 변방 군벌세력 하나를 자신들의 손으로 멸절시킨 다음 '그쯤으로 만족하쇼' 하면서 평화를 원할 수도 있겠지. 

로키는 무역도 활발히 일어나는 만큼 돈이 된다. 그러니 군벌들도 지금껏 쌓아온 게 있어서 쉽게 물러서지도 않을 거다. 

물론, 대응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냥 로키 시티로 항해하는 캐리어와 물자들을 싸그리 끊어버리면 된다. 

이를테면 물이나 기름 같은 생활 필수품목을 끊어버리고, 몇 년쯤 잠자코 기다리면 결국에는 두손 두발 다 들 것이고··· 

마지막에는 결국, 변절을 선택해 버리겠지. 

거기다 로키의 수많은 주민도 고통받다 죽어갈 테니, 벼룩 잡자고 초가삼간 태워먹는 꼴이 될 거다. 캐리어 티켓값이 어마어마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로키에 계속 사는 주민들이 상당수인데 말이다. 

그러니 물자를 끊는 안은 불가. 결국 답은 하나다. 그들의 안방인 로키 시티로 들어가 싸우는 것. 

이쪽에서도 희생자가 꽤 나올 수도 있겠다. 군벌 수장들의 출신과 무력등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 출신들도 참 다채로워서 명문가 출신의 군벌들도 있는 판국이고, 세력이 약한 소규모 군벌도 최소 8레벨급 이상의 대단한 실력자가 이끄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 하나의 일례가 전 십이제였던 카스트라 뷔에탕. 거대 조직인 마피아를 이끌고, 로키 시티에서 가장 격전지인 중심 '신동경' 을 성공적으로 수성하는 중. 

로키의 군벌. 그들은 말이 군벌이지, 어느 관점에서는 구파일방이나 대기업들처럼 하나의 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숨쉬듯 악행을 일삼는 블랙 기업과 갱단 그 어딘가. 

···아무렴 카지노와 지하 세계의 제왕인 마피아라도, 세계의 마약을 독점공급하는 당가와 비교해보면 뭐가 다른가 싶기도 하다. 

문득, 마탑주가 말을 이었다. 

"마탑은 가륵을 잡기 위해 로키의 군벌 세력과 싸우는 시늉 이상을 해야할 것이다. 나머지 더 궁금한 점 있나?"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깔끔해서 좋았다. 

"없으면 이만 출발하지." 

* * * 

잠시 뒤. 

마탑의 인원들은 조용히 발할라 스테이션에 당도했다. 

행선지는 로키 시티 스테이션. 

구우우웅— 

캐리어의 엔진음이 가득 메우고 있는 발할라 시티 스테이션. 저번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처럼 산맥을 가득 메운 환영인파는 없었다. 

아직 이번 사안에 대해 공표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고,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려 개인 캐리어를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슬레모킨의 개인 캐리어 내부. 

"가륵같은 괴물을 확실히 잡으려면, 로키의 칠좌가 힘을 보태줘야 하는 건데. 여태까지 가만히 있던 작자가 갑자기 움직인다고 했을 리는 없고······연방의 대가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는 모르겠다. 계획을 수립했으면 무언가 확신이 있는 걸 텐데." 

현재는 앵무새 법기에 담긴 종후표가 입을 놀리고 있다. 종후표는 이번 작전이 있을 줄 진즉부터 예상하고 있던 놈이라 들어줄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가륵은 평범한 9레벨의 네임드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고귀한 피를 받은 놈이니까. 연방이 제대로 판단하고 있나 모르겠어." 

그러자 캐리어의 주인, 슬레모킨이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했다.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판단할 수 있는 인간과 마주치고, 전투를 벌이는 등의 행동을 해야만 언데드의 레벨을 특정할 수 있어. 모리 무라타는 연방 집행관 중에서도 최상위권의 전투력을 지닌 남자였는데 그를 죽였다는 건······." 

"자굴라······그 자굴라보다 강하려나······모르겠네." 

다크서클이 내려온 마법사도 이어 말했다. 지난 라그나로크 북부 편제 전투에서 죽다 살아난 8레벨의 마법사. 그녀는 평소보다 더 피곤해보였다. 

구우우웅— 

순간, 그들의 대화를 끊어내며 캐리어가 공중으로 높이 떠올랐다. 시선을 돌리자 내 앞에는 두 눈을 감은 사내, 유크 루베르겐이 보였다. 

"······." 

가륵에게 죽은 모리 무라타의 인격 메모리칩을 이어받은 루베르겐 집행관. 그는 연방 정부 직속의 집행관으로 저번 수복전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어째서인지 참여하게 되었다. 

그때, 옆에 딱 붙어앉은 슬레모킨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녀의 전음이 들려왔다. 

[ 가륵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싶어하는 것 같던데? 연방에 직접 요청한 건가봐. ] 

[ 남궁천을 잡을 때 힘을 쓰지 않았나? ] 

[ 그거 언제적 얘기야? 반년이나 지났어. ] 

[ 그렇군. ] 

[ 근데 너, 품이 되게 빵빵하네. 준비 열심히 했나봐? ] 

나는 슬레모킨과의 대화 중에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언평 선생에게서 받은 법부적들과 나뭇대를 만지작거렸다. 그의 법력에 마음을 가라앉히는 효과라도 있는지 조금 정신이 가라앉았다. 

정신이 가라앉으니, 곧 상념이 찾아왔다. 

얼마 전, 독자노선을 밟던 알 헤임달 시티의 대개척마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 흙만 파도 질좋은 석탄과 기름이 분수처럼 솟구친다고 하니, 연방은 연료 걱정 역시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이번에 온갖 분탕질을 치는 가륵이라는 놈까지 잡아 족치고, 말썽쟁이 군벌 세력까지 눌러 놓는다면 앞으로의 연방 행보에는 날개가 달릴 것이다. 연방의 멸망을 늦추는 것이 목표인 내게는 참으로 환영할 일이다. 

······단지. 

나는 가륵에게 당장은 관심이 없다. 

며칠 전, 카산드라 교수의 저택 안. 

밤을 새워가며 대화를 내누던 도중 레나가 잠시 화장실에 갔을 때, 옆에 뻘쭘하게 앉아있던 루벤카가 돌연 그런 말을 꺼냈다. 

[ 저번에 레나랑 같이 산맥 밑에 있는 딸기 탕후루 맛집을 찾아갔거든? 그때도 지금처럼 레나가 화장실에 들렀지. ] 

내가 레나와만 대화하고 자기는 끼워주지도 않자, 입이 근질한지 뭔가를 자랑하고 싶었나보다. 원래는 나를 벌레보듯 보며 꺼내지도 않았을 말이었다. 신세가 많이 발전했다. 

[ 그런데 기이한 마력이 느껴지는 사람이 레나를 따라 들어가더라? 더럽고 칙칙하면서도 은근히 좆같은 마력. 사람 자체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아니라, 꼭 누구한테 조종당하는 것 같더라고. ] 

[ 그래서 어떻게 했냐. ] 

[ 당연히 씨발, 불태워서 재로 만들어버렸지. 기척을 숨기는 수준이 발군이어도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내 눈을 어떻게 피하겠어? ] 

[ 알았다. ] 

[ 알아? 네가 알기는 뭘 알아? 너가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동안, 내가 없었으면 레나가 어떻게 됐을지도— ] 

[ 처리하고 온다. ] 

[ ······처리해? 뭐를 처리해? ] 

루벤카가 말한 그것은, 뷔에탕이 조종하는 인형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교수의 저택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거기서 오랜 시간을 더 머무르고 싶어지기 전에. 

그리고 나는 웃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데, 루벤카의 말을 듣고는 앞으로 더 웃지 못할 듯하여 떠나기로 했다. 레나 앞에서 인상을 구기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카스트라 뷔에탕, 이제는 레나의 주위까지 침범했는가. 

화산의 본문 비무장에서 허물을 벗고 10레벨이 된 독고웅백의 첫 번째 목표였던 뷔에탕, 그 여자는 인형 수백 기를 죄다 잃고 겨우 도망쳤다고 들었다. 하오문주인 독고웅백은 내게 하오문의 전령을 보냈고, 뷔에탕이 앞으로 몇 년은 제 힘을 내지 못할 거라며 단언했다. 

그럼에도 다른 도시로 인형을 보낼 여력이 남았구나. 

카스트라 뷔에탕은 아직 신동경의 본거지에서 은거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게다가 마침 연방이 로키의 군벌세력 토벌을 간판으로 내걸었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했다. 

끈질기게 로키행을 권하던 카스트라 뷔에탕의 얼굴을 마주할 적기. 또는 뷔에탕을 죽이거나 아예 불구로 만들어버릴 적기. 

이미 카산드라 교수의 저택에서부터, 결심을 세웠다. 

탓! 

해서, 나는 슬레모킨의 캐리어가 로키 시티 스테이션 상공에 들어서자마자 종후표가 담긴 앵무새 법기를 들고 캐리어에서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장벽 안쪽으로 떨어진 나는 땅에 발을 딛기가 무섭게 전력으로 경공을 펼쳤다. 

쾅! 

지면이 폭탄처럼 터져나가며, 매캐한 바람이 눈 앞으로 불어온다. 

종후표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주변의 광경들이 뒤로 밀려났고, 로키의 스테이션을 지키던 누구도 나를 제지할 수 없었다. 

이윽고, 악취가 나는 로키 시티의 어느 뒷골목에 이르렀을 때. 

자기 의사와는 일절 상관없이 마탑의 본대와 외따로 떨어진 종후표의 앵무새 법기는, 그제야 어안이 벙벙해진 말투로 물었다. 

"갑자기 혼자 왜 뛰쳐나온 거지? 단독행동인가?" 

"뷔에탕의 얼굴을 보러 가야겠다." 

"탕? 뭔 탕? 왜 얼굴을 보러 간다는 거냐?" 

"전前 십이제, 인형사 카스트라 뷔에탕. 죽이지는 못해도 팔 한쪽은 잘라내야겠다." 

"······." 

내가 그리 말하자 잠시간의 정적이 있었다. 

조용했던 로키의 어느 뒷골목은 더욱 적막해졌고. 

잠시 뒤, 종후표의 앵무새 부리가 급격히 힘 빠진 목소리를 냈다. 

"······뷔에탕을 죽여? 착륙하다가 대가리라도 깨진 거냐?"

#124화. 군벌 도시, 로키 3

#1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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