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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CALIPSISCHEF2

Auteur: Kakao_cuenta
Science-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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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1

432화 여기까지.

나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동안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서울의 풍경은 너무나도 멀쩡한 것이었다.

그 비현실적인 모습에, 말도 안 된다고 경악했을 정도였지.

"꽤나 멀쩡해 보이긴 합니다만."

"이곳저곳 파괴된 흔적이 있기는 하군요."

지금은 아니었다.

"괴물들이 나타났을 걸 고려하면 이 정도로 건물들이 온전한 건 말도 안 되는 편이야. 그 자칭 정부라는 이들이 꽤나 방어를 잘 해냈나 보군."

병사들이 얘기하는 대로.

여전히 꽤나 멀쩡해 보이는 모습이기는 했지만.

군데군데,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보였다.

'파괴되고 노후화된 건물들.'

이전처럼 완벽해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여의도에서 있었던 전투.'

그때 의아하게 생각했던 점이 하나 있었다.

'전투 규모에 비해 파괴가 너무 심하게 되어 있었어.'

나름대로 하늘에서 괴물들이 쏟아져 내려왔으니.

시설들이 파괴되는 것 정도야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때를 제외한 기억 속의 여의도와 비교하면 당시의 여의도는 너무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아니, 파괴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전까지는 멀쩡해 보였던 건물들이 마치 1년 이상 방치된 것처럼 먼지에 뒤덮여 있기도 했지.

'우리 병사가 너무 강해서 건물들이 저리 쉽게 부서져 나간 게 아니다.'

여의도에서의 전투도 그렇고.

체감상으로는 고작 몇 시간 전에 겪었던 서울에서의 전투에서 묘하게 손쉽게 파괴되어 나갔던 건물들도 그렇다.

애초에.

정말로 멀쩡했던 건물이라면, 아무리 우리 병사들이 강하다고 한들.

분대장급도 아닌 병사들의 공격 몇 번에 픽픽 부서져 나갈 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렇게 쉽게 무너졌던 이유는....

추측 가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원래 반파된 건물이었다면, 그럴 수 있지.'

그 겉면만 화려하게 포장되어 있었을 뿐.

그 본질이 이미 여기저기 무너지고 낡아 버린 것이었다면.

평범한 병사들의 공격이라도 건물을 쉽게 무너트릴 수 있었던 것도 납득이 간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머릿속에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생각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최대한 광범위한 파괴를 자행했다.

그리고, 그 결과.

알아낸 사실은 하나.

'이 힘은 공략할 구멍이 있다.'

이 서울 전역에 퍼져 있는 기현상은 분명 강력한 것이기는 하지만.

공략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이번에는 그 습격이 없군.'

아무래도 저번에 우리가 날뛴 것은 저번 습격이 원인이라고 생각한 모양.

나를 제거하기 위한 공격이 서울의 군단을 향한 공격 정도로 받아들여졌다고 추측한 결과.

이번에는 그 습격 자체를 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나를 제거하고자 마음먹은 상태겠지.

하지만.

"전원.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잘 들어라. 지금부터 이 도시를 파괴한다."

"예에???"

저 쪽에게는 아쉽게도.

이제 와서 멈춰 줄 생각은 없었다.

* * *

우리 부대가 도시를 파괴하려 나설 때마다.

김명환 중장과 그 부대원들은 꾸준히 우리를 방해하고 나섰다.

{나는 자네들을 전우라고 믿었네만...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군. 전군!!!}

수없이 많은 괴물과의 전투를 겪어 온 병사들과 그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지휘관.

그 공세는 분명 대단한 것이었으나.

"크윽... 저게 정말 우리랑 같은 인간들이라고?"

"적당히 제압했다 싶으면 파괴 행위로 복귀해라! 우리 목표는 적의 제압이 아닌 서울의 파괴라는 것을 명심하도록!"

군단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들로만 이루어진 100인의 전사들.

그 전사들을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게 제압이 완료될 때쯤이면.

다시금 이 세계가 '반복'되었다.

{만약에 대비해 경비 태세를 해 놓길 잘했군... 전군!!!}

"무시해, 적당히 상대해 주면서 계속 파괴해라!"

"충성, 충성!"

그리고, 그렇게 반복이 진행될 때마다.

저들의 대응은 조금씩 더 격해지기 시작했다.

'저쪽도 이제 뭔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챘겠지.'

우리는 저쪽.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저 장영웅이라는 자가 이 서울의 시간을 계속해 되감는 것을 눈치챘다.

저쪽도 이제는 우리가 그의 힘을 눈치채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쪽이 해 올 대응은 뻔한 것이었다.

'우리를 제압하려 하겠지.'

반복을 일으킬 수 있는 주도권은 저쪽에 있다.

저쪽은 우리에 의해 패배한다고 한들 몇 번이고 다시 반복하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한 번 저들에게 제압당하는 순간이 끝이다.

'김 중위와 나를 격리시킨 뒤에 저 반복을 실행한다면, 나는 다시금 모든 기억을 잊고 말 거다.'

나는 내 목표를 계속해서 수행함과 동시에.

저들에게 절대 제압당해서는 안 된다.

미친 듯이 불리한 조건이지만, 해내야만 했다.

{만약에 대비해 병력들을 전진 배치시켜 두기 잘했군.... 전군!!!}

처음에는.

기존에 근처 주둔지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력들이 어째서인지 좀 더 전진 배치되는 수준에 불과했다.

{만약에 대비해 휘하 병력들을 이 근처에 모두 주둔시켜 두길 잘했군.... 전군!!!}

"...병력이 조금 많긴 하지만, 무시하고 계속 파괴해라!"

몇 번을 반복하자.

어느새 적 병력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는가 싶더니.

{만약에 대비해 다른 곳에 배치되어 있던 모든 화기들을 이 근처에 재배치시켜 두길 잘했군.... 전군!!!}

"...신 병장님?"

"저건, 무시하기 좀 빡세긴 하네."

다음으로는

어디서 끌고 왔는지 모를 온갖 군용 병기들이 우리를 노리고 배치되어 있었다.

이쯤 되자.

우리 부대원들로서도 마냥 저들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아졌으나.

"...밥 먹고 하자."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내 쪽에서도.

아직 동원하지 않은 수가 남아 있었다.

"끼요오오오오오옷!!!"

내 요리를 먹은 부대원들은 서울 곳곳에 퍼져 있던 수방사의 전 병력을 상대로 미친 듯이 날뛰며 도시를 파괴했다.

요리의 성능이 올라 있지 않았더라면 이 시점에서 물러났어야 했겠지.

{북부 군단이 우리를 노리고 남하해 온다는 말을 믿기는 힘들었지만....}

이쯤 되자.

저쪽도 끝까지 해보자는 생각이었던 것일까.

{만약에 대비해 다른 단체들의 지원을 받아 두길 잘했군. 수도방위사령부, 서울자치방범대, 대테러부대, 대통령경호실, 경찰특공대, 해병대향우회, 종교단체연합 외 기타 등등 서울의 전 무력 집단들이여!}

"미친."

우리가 본격적인 파괴 행위를 시작하기도 전에.

서울 전역에 퍼져 있다고 했던 온갖 단체들이 몰려들어 와, 우리를 선공해 오기까지 했다.

"쿨럭...."

"신... 병장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슬슬 내 요리를 먹은 부대원들이라도 대응하기 힘들어졌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 쪽에서도 사망자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

'그전까지는 우리를 죽이려는 모습은 없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쪽은 어째서인지 우리 군단을 자신들의 휘하에 넣고 싶어 했다.

나 같은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면 군단원들을 죽이려는 시도는 보이지 않았으나.

'이제는 아니란 건가.'

저쪽도 이제는 살인을 망설이지 않고 있었다.

만약 군단원이 사망한 뒤에, 저 '반복'이 이루어진다면.

사망한 군단원이 다시금 되살아날지 어떨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

'사망자가 나와서는 안 돼.'

그렇다면.

흠.

툭툭.

나는 군홧발로 바닥을 두들기며 입을 열었다.

"야."

-네.

그러자.

발아래에서 공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너희가 일해 줘야겠다."

-그 말씀은?

"사방으로 퍼져서 파괴 행위를 일으켜라."

저쪽이 물량으로 나온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 줘야지.

-파괴 행위라. 나쁘지는 않지만... 저들은 인간 아닌가요?

짧은 질문이었지만.

거기 담긴 의도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밤의 귀족은 피를 마시면서 강해지는 종족이다.

하지만 나는 인간을 상대로 한 흡혈에는 제한을 두었다.

그 제한을 가진 상태라면, 자신들의 힘도 약화될 것이라는 얘기.

"이번은 예외다."

그렇다면.

"내 눈치 보지 말고, 너희의 본능대로 해."

-...!

그 말에.

그림자 속에 갇힌 채, 자신들의 본능을 억누르고.

내 명령에만 따라야 했던 이들.

-아이들이... 많이 기뻐하겠군요.

그들이 기뻐하는 기척이 느껴지고.

이내 그림자 속에서 느껴지던 수많은 기척이 서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 * *

"자, 장군님!"

"뭔가!"

"경찰특공대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연락!"

최근 서울은 전투 준비로 바빴다.

저 북쪽에 자리 잡은 군인 세력.

그들이 사실은 반란을 꿈꾸고 있는 반란 세력이며, 대한민국 전역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고자 하는 탐욕으로 가득 찬 단체라는 사실이 알려진 뒤.

서울에 퍼져 있던 모든 세력은 힘을 합쳐 그들의 침공에 대응할 준비를 해 왔다.

'그 침공이 고작 100여 명의 병사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좀 의아하긴 하지만.'

아무튼, 그 준비는 꽤나 성공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침공해 온 군단의 병사들을 상대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특공대 병력은 전장에서 이탈! 후방으로 이동하겠다고 합니다!"

"...!?"

그 세력들 간의 연합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몰아치면 저 반역도들을 제압할 수 있는데 갑자기 전장을 이탈하겠다니! 어째서!"

"그, 그게."

서울에 존재하는 모든 무력 단체들은 진심으로 이 서울을 지키기 위해 활동하는 이들뿐이었다.

그런 이들이 갑자기 물러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으나.

"갑자기 서울 전역에서 괴물들이 출현했다고 합니다...!"

"뭐?"

"거, 건물이나 시설은 물론 사람들까지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다고...."

그들이 이탈한 이유 역시.

서울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경찰특공대나 자치방범대는 외적의 침공보다는 영역 내의 치안 유지를 우선시하는 이들이지....'

당장 군단과의 전투는 서울 쪽이 우위였으니.

그보다도 더 심각한 파괴를 자행하고 있는 영역 내의 괴물들을 상대하기 위해 이동하겠다는 것.

그것 자체는 이해가 갔다.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은.

'갑자기 괴물이 나타났다고?'

어째서 이런 타이밍에.

괴물들이 나타났냐는 점이었다.

"...괴물들이 너무 강합니다! 종교연합, 해병대향우회도 그쪽으로 지원을 가겠다고...!"

심지어는.

"대, 대통령경호실의 요원이 전달하길, 갑작스러운 사태에 권한 대행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이니, 경호실은 의사당 지하 벙커에서 권한 대행의 보호에 임하겠다고...!"

"자치방범대 쪽에서도 연락 왔습니다! 도시 전역에서 날뛰고 있는 괴물들의 규모가 북쪽에서 침공 중인 군인들보다 더 심각하니, 방범대는 그쪽의 토벌에 집중하겠다고 합니다!"

"권한대행... 이게 대체, 무슨?"

그 괴물들이.

한두 세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규모조차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 * *

"...후우. 병철아."

"악! 병 563기 곽병철!"

"내가 보는 게 제대로 보고 있는 거냐?"

서울 한복판.

붉은 옷을 입고 있는 노인이 담배 하나를 입에 문 채 묻자.

상당한 나이의 중년인이 깍듯한 태도로 답했다.

"잘 보고 계신 것 같슴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노인의 시선이 향한 곳에 있는 것은.

"저 말도 안 되게 큰 뱀이 건물 하나를 통째로 감싸 으깨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 말이지?"

"예!!!"

"뭣 같네, 진짜...."

압도적인 크기에 붉게 빛나는 눈을 가진 뱀.

그 뱀을 따르는 수많은 괴물이 서울을 파괴하고 다니는 풍경이었다.

그곳뿐만이 아니었다.

"경호실장님! 오셨습니까!"

"무슨 일이야?"

"대략 10분 전에, 여의도 내부로 저 괴물이 쳐들어왔습니다. 일격에 외부 장벽을 쳐부수고 안쪽으로 진입해서... 일단 대통령경호실의 병력들로 대응 중입니다만, VIP가 있는 지하 벙커까지 도달하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입니다...!"

현 서울 세력의 중심지.

여의도에는 검은 발톱을 지닌 거대한 괴수가 나타났으며.

"북쪽에 지원 병력이 필요하다고?"

"제기랄, 김명환 중장한테 저 괴물 새끼 얼굴이나 보고 말하라 그래!"

"여길 뺏기면 사람들 다 굶어 뒈져! 우리 먹을 건 우리가 지켜야 한다!"

서울의 핵심 물자들을 보관해 두고 있던 지역에는.

하얀 가죽을 지닌 사자가 나타나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박 경장! 이 근처 방공포는 다 어디 갔어!"

"그, 그게 저 북쪽에서의 침공에 대응한다고 전부 재배치해 놔서...!"

"그럼 저 새는 어떻게 떨구라고!"

고층 건물들 사이를 낮게 비행하며.

그 날개에 닿는 모든 것들을 파괴시키는 거대한 괴조까지.

콰앙!!!

"서울 내의 괴물들은 이미 대부분 토벌되었을 텐데, 갑자기 어디서 그런 강력한 괴물들이 나타났단 말이냐!"

사방에서 날뛰기 시작하는 괴물들.

그 괴물들은 하나하나가 서울의 전 무력 집단이 힘을 합쳐 토벌해야 하는 수준의 강적들이었다.

'모든 괴물이 최소한 군부대 토벌 당시에 마주한 괴물들과 비슷한 수준....'

서울은 모든 군부대의 토벌에 성공한 이들이다.

충분한 시간과 여유가 주어진다면.

지금 날뛰고 있는 저 괴물들 역시, 결국은 해치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시간과 여유는... 없다!'

그 시점에서.

김명환 중장은 제3포대가 군단의 손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 * *

병사들을 투입하고.

내 요리를 먹이고.

심지어는, 그림자 속에 있던 병력들까지 투입해 가며.

이 도시를 계속해서 파괴해 나간다.

그리고, 그렇게.

수 번.

수십 번을 반복해 가며, 도시를 파괴할수록.

"여기가 서울인가. 꽤 멀쩡해 보이는데...."

"이 정도면 저희가 주둔한 춘천하고 비슷한 수준은 되는 것 같습니다."

'반복'이 시작된 지점.

그곳에서 보이는 풍경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여기가 서울인가... 꽤 평범해 보이는데."

"이 정도면 파괴가 덜 된 강원도 도시하고 비슷하군요."

그렇게.

지나칠 정도로 멀쩡해 보이기만 했던 도시.

"여기가 서울인가...."

"쯧. 역시 서울도 멀쩡하지는 못했던 모양이군요."

그 모습이.

점차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을 때.

"그만."

"...?"

다시금 반복된 세상 속에서.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은 지금까지와 같은 수도방위사령부의 군인들이 아닌.

"여기까지 하지."

"어, 저 아저씨는 또 누구랍니까?"

이 끝없는 반복을 일으키고 있던 장본인.

초췌해진 얼굴의 사내, 장영웅이었다.

433화 기회 (1)

"여기까지 하지."

전에 마주했던 장영웅은 무척이나 말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본인이 서울의 대표로 당당하게 나섰을 때는 물론이고, 뒤에 숨어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지.

"도대체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딴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어.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한 저 괴물들의 정체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어떻게 내 비밀을 눈치채고, 그 비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많이 수척해지고, 초췌해진 모습의 사내.

잘못 보면 가죽만 겨우 붙어있는 해골처럼 보일 지경.

처음에는 저자가 그 장영웅과 동일 인물인지 아닌지조차 분간이 안 갔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아. 앞으로 수천 번을 반복해도 나는 아마 자네들을 저지할 수 없을 거라는 거."

"아니,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헛소리를...!"

"잠깐."

병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장영웅의 모습에 경계심을 품었지만.

나는 그들을 제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포기가 조금 빠르시군요."

"자네는...?"

"솔직히, 앞으로 수백 번은 더 이 짓을 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러자.

장영웅은 내 얼굴을 보더니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런가... 자네였군."

그 시선이 주변을 향한다.

그는 이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와 장영웅을 바라보고 있는 김 중위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이 힘에 대항하고 있던 건... 김현석 중위가 아니라, 자네였던 거야."

"...."

"하, 하핫. 맙소사. 당연히 김 중위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터무니없는 착각이었군 그래."

이제 막 강원도로 넘어온 시점.

아직 김 중위는 자신의 레벨이 변화한 것조차 확인하지 못한 시점이다.

갑자기 나타난 사내를 영문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는 그 표정에서 답을 알아낸 것이겠지.

"하하. 포기가 빠르다고 했나?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지. 솔직히 말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전략이 다 떨어진 것도 아니긴 해. 하지만 나라고 바보는 아닐세."

"무슨 의미입니까?"

"어떻게든 자네들이 날뛰는 것을 저지해 가며 시간을 끈다고 한들... 하루 이틀 내로 추가 병력이 오겠지?"

"...크흠."

그 말대로.

나는 이 반복을 시작하게 된 이후.

강원도 땅에 발을 붙이는 즉시, 군단에 병력을 요청하고 있었다.

"고작 100명 남짓한 인원이 날뛰는 것을 못 막은 거야. 군단의 본대가 도착한다면 우리에게 승산은 없겠지. 유일한 답은 하루 안에 자네들을 제압하는 것뿐이네만. 그건 거의 불가능처럼 느껴지더군."

"그래도. 당신도 아직 여력이 좀 남아 있는 거 아닙니까?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우리 빈틈을 찾을 수도 있으셨을 텐데."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지 않겠나."

아직 계속해서 이 싸움을 반복할 수 있는 저쪽과 달리.

우리는 한 번 저쪽에게 제압당하는 순간 패배가 확정된다.

벌써부터 포기하는 건 조금 이르지 않나 싶었지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군. 다 같이 살자고 노력하는 사람들인데, 이렇게 싸울 필요가 있는가... 하고 말이야."

"그게 무슨."

"다른 이들이라면 모를까. 자네들은 이미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을 테니, 여기서 숨기는 것도 의미가 없겠지."

그는 할 말이 많은 듯.

내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저 풍경이 보이나?"

눈앞에 보이는 서울의 풍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이 풍경을 되찾기 위해 수천 번의 삶을 반복해야만 했네."

"...."

"솔직히 말하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어. 너무나도 힘겹지만, 이대로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이 멸망을 완벽하게 이겨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이를 악물고 계속 같은 시간을 반복해 왔지."

그는 거기까지 말하더니.

이내 내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4872일세."

"...예?"

"마지막으로 셌던 숫자야. 그 후로는 세는 걸 포기했거든."

뜬금없는 숫자였지만.

나는 그 숫자의 의미를 눈치챌 수 있었다.

"당신은 대체."

그렇기에.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나 이 반복을 겪어 온 겁니까."

* * *

[00:00:00]

어느 날.

장영웅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투명한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보자 보호 시스템이 해제됩니다.]

바라는 보고 있었으나.

그것을 읽는 것은 그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너무나도 흐릿하고, 어둡게만 보이는 글씨들.

결국에는 그 내용을 읽는 것조차 포기했을 때쯤.

{...쌍한 아이로구나.}

'...?'

그의 귓가에.

아니, 뇌리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가엾고 불쌍한 아이야. 네 마음속에 산더미처럼 쌓인 후회가 보이는구나. 얼마나 많은 날을 후회로 지새웠을까....}

안타까움이 섞인 목소리.

그 따뜻한 목소리에, 장영웅은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더는 슬퍼하지 말거라.}

그리고.

{네가 원한다면 네게 새로운 기회를 주마.}

그 따스한 목소리는.

그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 후회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그 말에.

장영웅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흐릿한 정신으로 아주 살짝.

끄덕....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파아아아아아악....

그 몸이.

어디론가로 끌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어?"

정신을 차린 뒤.

그 눈앞에 있는 것은.

"여보?"

"어? 어어...."

"뭐 해요? 출근 안 하고."

멸망의 날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먼 훗날, 지친 몸을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복귀했을 때....

처참하게 썩어 가던 시체로 마주했던 이들.

"여보...!"

"어어? 이 사람이 왜 이래?"

그의 가족들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눈치챌 수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었어...!"

기회가 주어졌다.

"이번에는 좀 더 잘할 수 있겠지."

그가 후회한 모든 것들을.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기회가.

* * *

그에게 이런 기회를 준 그 목소리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비참한 실패를 겪은 뒤에 주어진 기회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번에는, 기필코.

가족들을 지키고 살아남아 보이겠노라고.

"...이렇게 많은 물건을 사서 어디다 쓰려는 겁니까?"

"알 필요 없소."

그가 돌아온 날은 멸망의 날로부터 한 달 전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은 물론, 대출까지 끌어 가며 멸망의 날에 대비했다.

처음에는 그가 겪은 모든 것이 그저 꿈에 불과했기를.

그가 하는 이 모든 대비가 사실은 전혀 쓸모없는 일이고, 현실에서 멸망 따위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으나.

-크워어어어어억!!!

"그럴 리가 없지."

결국.

멸망의 날은 찾아오고야 말았다.

'이때 이 시점에서 쓸 만한 정보가 분명히....'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그는 정보 수집에 특화된 각성자라는 점이었다.

전생에 얻어 둔 정보는 많았다.

막상 전생에는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던 정보들이지만.

활용할 수 없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그 정보들을 얻은 시점에서는 이미 활용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정보였기 때문이었다.

미리 그 정보를 알고 있다면, 이를 활용해 어떻게든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첫 번째 삶에서는 가족들과 멀어진 상태에서 그 혼자 살아남기에 급급했지만.

다시 주어진 삶에서는 어떻게든 가족들과 함께 살아남고자 노력했다.

정보를 좀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이유로.

비전투 인원을 둘이나 데리고서 이 멸망에서 살아남겠다는....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린 셈이다.

콰직.

"어...?"

그 자신감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 그런 건가.'

욕심을 고집한 결과.

그 눈앞에 보이는 것은 싸늘하게 식은 채 괴물들에게 뜯어먹히는 가족들의 모습이었다.

'이 멸망은.'

가족들을 집어삼킨 뒤, 자신마저 잡아먹기 위해 다가오는 이형의 괴물들을 바라보며.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애초에... 이겨 낼 수 없게 되어 있던 거야.'

그 절망적인 깨달음 속에서.

그는 오히려 첫 번째 삶보다도 빠르게 죽고야 말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어...?'

그는 다시.

멸망의 날로부터 한 달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기회를 준다고 했지만."

본래라면 결코 이겨 낼 수 없었을 멸망.

하지만.

"한 번만 준다고 하지는... 않았지."

무한히 재도전할 권리가 주어진다면.

얘기가 조금은 달라진다.

'아무리 이겨 낼 수 없는 멸망이라도.'

계속해서 도전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겨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 * *

그 후로.

그는 수십, 수백.

아니, 수천 번을 반복해 가며.

세계를 덮친 이 멸망과의 투쟁을 시작했다.

그 투쟁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각성하지 않는다.'

다시금 주어진 기회 속에서, 대부분 사람은 각성하지 못했다.

드물게 나오는 각성자들도 일정 레벨에 도달한 뒤에는 갑자기 성장이 멈춰 버리곤 했다.

그 이유는 조만간 깨달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삶에서 각성하지 못하고 죽은 이들은... 이 새로운 기회 속에서도 각성하지 못하는 거야.'

그에게 기회를 준 이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각성자를 만들어 주는 정체불명의 힘.

[시스템]과는 별개의 존재인 듯했다.

다시금 기회가 주어졌다고 한들.

각성자들은 첫 번째 삶에서 성장했던 수치까지밖에 성장하지 못했다.

'각성자를 무한정으로 늘릴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어지간한 인원으로는 이 멸망을 이겨 내는 건 불가능해.'

그렇다면.

답은 간단했다.

'최대한 많은 인간을 살려 낸다.'

'어지간한'을 넘어선 숫자까지.

최대한 많은 인간을 살려 내는 것이었다.

"...국무총리가 살아 있다, 이 말이오?"

"음. 그쪽은 그 양반을 중심으로 뭉쳐 있는 모양이더군. 당장은 타 지역과 연결이 끊기긴 했지만 이 사태도 오래가지는 않을 테니까. 곧 군대가 괴물들을 처리해 주겠지."

4번째 반복에서, 그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모두 사망했다 생각했던 정부의 요인들.

그중 일부는 멸망의 날 이후로도 꽤 오랜 기간 생존해 있었다는 사실.

그는 그 정부의 요인들과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최근에 급격하게 세를 불리고 있다던 그 그룹인가... 자네들 정도라면 받아들일 가치가 있지. 합류를 환영하오."

몇 번을 죽어 가면서 새로운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정부 측 인사들과 공유하며, 차근차근 이 멸망을 이겨 나갔다.

그 과정은 꽤나 순조로웠으며.

그는 이때 처음으로, 이대로만 간다면 언젠가 이 멸망을 이겨 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보았다.

하지만.

"능력이 있는 건 좋지만... 쯔쯔. 적당히 나댔으면 좋았을 것을."

"각하... 이건 대체 무슨?"

"그룹 내에서 자네의 입지가 너무 커지고 있다는 걸 자네도 눈치채고 있었을 테지?"

그의 12번째 죽음은 괴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적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능력은 좋은데, 정치에 대해서는 너무 모르는 것 같더군. 자네의 영향력이 나를 위협할 정도로 커지는 와중에도 어떤 대처도 하지 않다니. 이래서야... 자네가 내 자리를 먹기 전에 내가 먼저 행동할 수밖에 없잖나."

"쿨럭...."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는 말게. 뭐... 죽은 뒤에 억울해할 수도 없을 테지만."

동료라고 생각했던 이의 배신으로 인한 죽음.

그때,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최대한 많은... 가능한 모든 사람을 살리려고 했다.'

하지만.

때로는....

"죽여야만 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로군."

"여보? 출근하다 말고 무슨 살벌한 소리를."

기회를 노려 국무총리를 살해했다.

괴물들을 이용해 교묘하게 처리한 덕분에 그를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그, 그러면... 설마."

"이제부터 장관님이 권한 대행이십니다."

"맙소사."

다음으로 정부의 장이 된 것은 모 부처의 장관이었다.

본래는 사망했을 인물이었으나, 그가 정부에 협력함으로써 생존하게 된 인물.

그는 배신자였던 국무총리와 다르게 그럭저럭 선인이기는 했으나.

"나, 나는... 이런 사태까지 공부하지는 않았단 말이오!"

본래의 역사에서 빠르게 사망한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높은 위치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멸망을 이겨 내기에는 너무나도 심약하고 무능했다.

'다른 인물을 세워야 한다.'

다음 삶에서.

그 장관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은 수행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대통령 각하나 국무총리 각하, 각 부서 장관님들 등등... 법적으로 명시된 대통령 권한 대행자가 모두 사망해서, 차관인 내가 장관님의 권한 대행 권한을 대행해 대통령 권한 대행을 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이게 뭔 개소리야?"

그 후로도.

합법적으로 국가의 수장이 될 자격을 지녔으나.

그럴만한 능력이나 인성을 갖추지 못한 이들을 모두 갈아 치워 버린 결과.

"자네도 이게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건 알고 있지? 난 어지간하면 이런 말장난에 어울리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정부를 중심으로 뭉치고 있어요. 적법한 대상이 수장을 맡지 않는다면 사회가 급격하게 붕괴할 겁니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기는 한데.... 하아, 그렇게 해야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면, 까짓거 좀 짖어 보는 수밖에."

82번째 삶에서야.

수장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을 가진 이에게 차례가 돌아가, 정부 세력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왜 날 살렸나! 자네들이라면 내가 아니라 총장님을 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실수였습니다. 어쨌든 살아남은 건 당신이니... 당신이 군부대의 최고 계급자이십니다."

정부뿐만이 아니었다.

몇 번의 죽음을 겪어 가며 군부대를 점거한 괴물들의 약점을 파악해 낸 결과.

군부대의 탈환에는 성공했으나, 그렇게 확보한 장비들을 사용할 만한 인물과 체계가 없었다.

군부대의 체계를 재확립시키고, 사람들을 군인으로 조련시킬 인물이 필요했다.

"국가를 수호하는 게 내 의무이니 일단은 그 자리를 맡도록 하겠네. 하지만... 명심하게. 나는 자네를 따르는 것이 아니야. 내 의무에 충실하는 것뿐."

"이해합니다."

그가 개입하지 않아도 한 달은 넘게 생존에 성공했을 군의 최고 지휘권자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본래는 멸망의 날이 시작되자마자 괴물들에게 습격당해 단 하루 만에 사망했을 뛰어난 능력의 장군을 확보했고.

그에게 군대의 양성과 지휘를 맡겼다.

'이자를 살려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쩔 수 없이 그 가족들이 죽어 줘야겠군.'

모든 사람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후로도 그는 살릴 사람과 죽일 사람을 선정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성격은 나쁘지 않아도 쓸모가 없는 이들이었으니, 여기서 희생시키는 게 좋겠어.'

살아서 그의 생존에 방해되는 이는 빠르게 죽이고.

살아서 그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이는 다른 이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살려 낸다.

'마치....'

그러던 중.

그는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신이라도 된 것 같군.'

그는 어느새.

산 자와 죽은 자를 정할 권리를 가진 사신이 되어 버렸노라고.

434화 기회 (2)

수백 번의 삶을 반복하며, 끝없는 분류를 계속한다.

그럴수록, 스스로도 정신이 마모되어 가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4천 번의 반복을 넘기고 나서부터는 숫자조차 세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금만 더... 나은 결과를....'

그는 이를 악문 채.

최선의 결과를 낳기 위해 무한한 반복을 계속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확인된 생존자들의 숫자는 약 100만... 인가."

"다른 지역의 정복을 완료하는 것도 시간문제로군요."

그는 100만에 달하는 사람을 살려 내고.

서울에 있는 대부분 괴물은 큰 피해 없이 토벌해 냈다.

결과적으로는 90%에 달하는 이들이 죽기는 했으나.

그들 중 대부분은 살려도 도움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방해만 되는 이들이었다.

'인간이란 이렇게도 쓸모없는 이들이 많았단 말인가.'

반대로 말하자면.

그가 살려 낸 10%의 인간들은 그야말로 알짜배기들.

누구 하나 생존에 방해되는 이가 없는, 정예 중의 정예들이었다.

조금씩 부서진 건물들이 있었지만.

서울의 사회는 붕괴되지 않았다.

그들은 비축된 자재들을 사용해 부서진 서울의 풍경을 재건했다.

'여기까지 오다니.'

스스로가 이루어 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풍경.

장영웅은 자신의 반복이 헛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다음 반복을 시작했다.

그런데.

"확인된 생존자들의 숫자는 약 100만... 인가."

"다른 지역의 정복을 완료하는 것도 시간문제로군요."

그 시점부터.

더 많은 정보를 얻고, 더 유효한 선택을 내리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결과물을 내고자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확인된 생존자들의 숫자는 약 100만... 인가."

"다른 지역의 정복을 완료하는 것도 시간문제로군요."

수백 번을 더 반복해도.

'어째서.'

더 나은 결과를 낼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아.'

그는 자신이 한 일들을 되돌아보았다.

자신의 능력을 통해 모은 정보들을 최대한 활용했으며.

생존에 방해가 되는 이들은 미리 제거하고, 도움이 될 이들은 어떻게든 살려 냈다.

괴물들을 상대로 수십 번씩 죽어 가며 그 약점을 파악했고.

그 약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했다.

'이게 최선이었구나.'

그 결과.

더 나아질 수 없는, 최선의 결과에 도달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00:00:00....]

계속해서 반복되던 시간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초보자 보호 시스템이 해제됩니다.]

"이게 이런 내용이었나."

그는 수천 번의 삶을 반복하기 전.

첫 생의 마지막에 보았던 그 시스템 메시지를 다시 보게 되었다.

* * *

"...그런 걸 저한테 이렇게 밝혀도 되는 겁니까?"

나와 장영웅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비밀 얘기를 할 것이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으나, 이 정도 얘기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무얼, 자네한테 밝히는 게 처음도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한테 밝혀 본 적은 꽤 많지. 백 번은 훌쩍 넘지 않을까?"

"예?"

"물론 현시점에서 그걸 아는 건 자네뿐이긴 할 거야. 결과적으로는 밝히지 않는 게 낫다는 걸 알게 됐거든. 하지만... 자네는 내가 밝히지 않아도 내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지 않았나.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야."

하긴.

그렇게 많은 반복을 겪어 왔다면, 그 와중에 자신의 능력을 밝히는 경우도 있었겠지.

"그럼 밝힌 적은 있다고 치고, 그걸 제게 말하는 이유는 뭡니까?"

"말했잖나. 꼭 자네들을 쓰러트려야만 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는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네는 내 힘에 대해 알고 있고... 어느 정도 저항도 할 수 있겠지."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런 자네라면 더더욱 잘 이해하고 있을 거야. 내게 주어진 이 힘은... 터무니없이 강력한 것이라고."

확실히 그 말대로.

나 역시 지금 이자를 상대로 승리할 자신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긴 했다.

"하지만 한계도 몇 가지 존재하네."

그 말에.

나는 짐작 가는 것이 있어 입을 열었다.

"각성자로군요."

"이 힘으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한들, 각성자가 아니었던 자가 각성자가 되는 경우는 없었네. 그나마도 일정 수준에서 정체되는 경우가 많았고."

서울의 각성자 숫자가 유독 적은 이유였다.

"아무래도... 이 시스템이란 녀석은 내 능력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것 같더군."

"...협조할 생각이 없다 라."

"날이 갈수록 적은 강해질 텐데 내가 가진 전력은 어느 수준에서 정체되고 마는 상황이란 걸세."

아무리 기회가 무한하다고 한들,

병사 한 명으로 수억 마리의 괴수를 쓰러트릴 수는 없는 법이다.

그 기회를 살리려면 그에 걸맞은 최소한의 전력이 필요했다.

이대로 가면 언젠가 그는 그 최소한의 전력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가 되어 버리겠지.

그리고.

'아, 과연.'

그 말에.

나는 무언가를 눈치채고 말했다.

"그래서 그렇게 이를 악물고 우리를 포섭하려 하신 거군."

"그렇네. 내게 모자란 부분을 채워 줄... 아주 강력한 각성자 전력이 필요했거든."

이 자는 다른 세력들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유독 우리를 포섭하려 했다.

그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실은 그 외에도 몇 가지 한계가 있었네. 두 번째 한계는 범위였지."

"범위?"

"장벽이 열리자마자 부대원들을 데리고 서울 경계 밖을 조금 살펴보고 왔었네. 그때 몇 번의 전투가 있었지. 그런데... 시간을 반복한 뒤에도, 그 전투로 인한 흔적이 남아 있더군. 내 영향력이 닿지 않는 땅에까지는 이 반복 또한 발동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네. 반대로 그 땅을 내 영향력 아래에 두면 반복 또한 제대로 작동했지. 즉."

"영토를 넓히실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게... 자네들이었어."

헛웃음이 나왔다.

결국은 처음으로 돌아왔다.

"군단은 저 라디오로 인해 명성이 높지. 내게 갖춰지지 않은 각성자 전력도 풍부하고. 영토 확장을 위한 요건을 가장 잘 갖추고 있는 곳이었어."

우리가 이 서울에 굳이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살아남은 모든 인간 세력을 통합하고.

이 한반도 땅을 통합해야 하기 때문이었지.

"첫 번째 만남에서 김 중위와 대화를 나눠 보았네. 상당한 애국자인 것 같더군. 그 부분을 잘 파고들면 군단을 휘하에 둘 수 있을 거로 생각했네."

"굳이 휘하에 둬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평범한 동맹이라면 저희도 수락했을 텐데요."

"평범한 동맹으로써 군단이 영토를 넓히면 그 땅은 군단의 땅일 뿐, 내 영향력을 받는 땅이 아니게 될 테니까. 확실한 내 세력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네. 뭐, 결국은 이렇게 되어 버렸네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우리를 쥐도 새도 모르게 흡수할 생각이었다는 뜻이다.

나는 살짝 불쾌감을 담아 물었다.

"그래서? 군말이 길어지시는데,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잖습니까."

"하하... 까칠하군. 그야 뭐, 자네 입장에서는 화나는 것도 이해는 하네만."

그는 진중한 표정을 하더니.

조금은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면 알아주리라고 믿네. 나는... 진심으로 이 멸망을 이겨 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야."

"...."

"지난번에 자네를 내 집에 초대한 적이 있었네. 그건 기억하나?"

"기억합니다. 간단한 요리도 대접받았었죠."

"내가 원하는 것은 그저 그 풍경을 지켜 내는 것뿐이네. 내 가족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되찾는 것.... 그걸 위해서 나는 저 끝없는 반복을 이겨 냈지. 그 과정에서 자네들에게 불쾌한 경험을 선사한 것은 미안하네만."

"의도마저 악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네."

확실히 그 말대로.

만약 내가 갑자기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얻는다고 한다면, 나 역시 결국은 저자와 비슷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아니, 저자보다 훨씬 못했을 가능성이 높겠지.'

얘기를 들어 보면, 저 반복은 언제나 멸망의 날로부터 일주일 전으로 돌아가게 되는 구조다.

그 반복 속에서 평균적으로 얼마나 오래 생존해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1년 가까이 생존한 적도 많았을 것이다.

'못해도 수천 년 이상을 보낸 셈.'

글쎄다.

나라면 한 천 번쯤 반복한 시점에서 정신이 무너져 버렸을지도 모르지.

솔직히 말하면.

평범한 인간이 저 정도의 일을 겪고도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내 진심은 알아주었으리라고 믿네. 그러니... 나와 함께하는 건 어떤가."

"함께라."

그리고.

이게 바로 그의 본론이었다.

"내게 주어진 이 능력은 말도 안 되게 강력하지만, 내심 아쉬움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네. 내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서 쓸데없는 시행착오를 너무 많이 겪어야만 했거든. 하지만!"

그는 시선을 돌리더니.

멀리서 우리 쪽을 지켜보고 있는 김 중위를 보며 말했다.

"내 능력에서도 자유로울 정도의 힘을 지닌 자네나, 저 김현석 중위 같은 천재 지휘관이 함께해 주기로 한다면 얘기가 많이 달라지지."

"천재 지휘관... 으음."

"내가 만들어 낸 '최선'보다도 빠르게 강원도의 점령에 성공한 것만 봐도, 저자가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지닌 지도자인지는 알겠네. 그만한 능력자라면 남의 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것도 이해는 가."

뭔가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지만.

그 착각이 우리 쪽에서 의도한 부분이니,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 세상은 결코 만만하지 않아. 아무리 대단한 자네들이라고 한들 언젠가 한 번은 실패를 겪겠지."

그 말대로다.

실제로 우리는 몇 번이나 큰 위기를 겪었다.

지금까지는 운 좋게 모든 위기를 이겨 내 왔지만, 언젠가는 패배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이 세상은 그 한 번의 실패를 대충 넘어가 줄 정도로 자상하진 않을걸세."

한 번 치명적인 실패를 겪는 순간.

우리는 지금까지의 승리와는 상관없이.

이 개 같은 세계에게 패배하고 말 것이다.

"나라면 그 실패를 없던 일로 만들어 줄 수 있어."

장영웅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게. 김현석 중위의 천재적인 지휘력에 자네와 같은 군단의 강병들, 거기에 내가 살려 낸 서울의 인재들과 물자, 장비가 더해지는 거야."

"...."

"어지간하면 실패를 겪을 일도 없겠지. 하지만, 실패해도 상관없어. 다시 도전하면 그만이니까!"

그는 흥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자네들과 내 힘이 합쳐진다면, 대한민국 전역을 점령하는 데에는 긴 시간도 필요하지 않겠지. 시간이 좀 오래 걸렸다 싶으면 다시 시작하면 돼. 나도 나름대로 노하우가 생겼으니, 몇십 번만 반복하면 이 대한민국 전역을 최선의 속도로 정복해 낼 수 있을걸세. 그러면 그 땅 전체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게 될 테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스윽 하고.

내게 손을 내미는 장영웅.

"결국, 이 멸망을 이겨 낼 수 있겠지."

나는 그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그때마다 저 멸망의 날 근처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까지야 1년 조금 안 되는 시간이었다지만, 다음부터는 한 번 되돌릴 때마다 수년, 수십 년을 다시 겪어야 할지도 모르는데요."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지. 하지만, 나를 따라 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지도자로서... 그 정도의 책임은 질 셈일세."

말로 하니까 간단하게 느껴지는 것이지.

평범한 인간들이라면, 몇 번이고 정신이 붕괴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

그는 이 멸망에서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그 미친 짓을 감내하겠다고 하고 있었다.

'...대단하군.'

그가 말한 대로 된다면.

어떤 강적이 나타난다고 한들 언젠가는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며.

어떤 위기도 우리를 진정으로 위협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손을 잡게. 나와 함께 하세나."

그가 말한 대로.

이 빌어먹을 멸망을 이겨 낼 수도 있겠지.

"제안은 고마운데."

...물론.

"거절하겠습니다."

"뭐?"

정말.

그가 말한 대로 된다고 했을 경우에는, 말이지만.

* * *

"...어째서지?"

내 거절에.

그는 갑자기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자네도 내가 한 짓이 추악하다 생각하는 건가."

"예?"

"살아남을 인간을 선별하고, 필요 없는 인간을 버리고... 그런 내 행동이 추악하다 느껴서 협력을 거부하는 것 아닌가."

"그런 얘기는 안 했는데요."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직접 그리 말하시는 걸 보면... 그 부분이 꽤나 신경 쓰이긴 하셨나 봅니다."

"...."

살 자와 죽을 자를 구분한다느니 뭐니.

솔직히 말하면, 꽤나 불쾌한 얘기긴 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최선이었다는 점까지 부정하지는 못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방법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협력을 거부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협력을 거절하는 이유는... 그냥 간단합니다."

"뭐지?"

"전제가 잘못되어 있으니까."

아까부터 계속 지적할까 말까 고민했었지만.

이제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의 그 힘 말인데...."

"뭐?"

"시간을 되돌리는 거 맞습니까?"

내 생각에는.

그거 그렇게 대단한 힘은 아닌 것 같거든.

435화 바깥의 존재 (1)

"당신의 그 힘... 시간을 되돌리는 거 맞습니까?"

"뭐?"

내가 그리 말하자.

장영웅은 이해가 가지 않는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실제로 나는 이 힘으로 시간을 되돌렸네."

"음...."

"이 서울의 모습이 보이지 않나? 저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도!"

파악! 하고.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는 장영웅.

"내가! 수천, 수만 번의 시간을 반복해서 얻어 낸 결과야."

"뭐, 대단하다고는 생각합니다."

내가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자.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자네들은 이런 힘 없이도 저 강원도를 점령해 냈지. 그런 자네들에게는 이 힘이 우습게 느껴질 수도 있어. 하지만 알아 둬야만 하는 게 있네. 이 서울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도 극도로 생존이 어려운 장소였다는 걸!"

아니.

알고 있다.

'애초에 우리는 서울에 생존자 따위 존재하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그가 이 모습을 만들어 낼 때까지 얼마나 고생했을지.

이 모습을 구현해 낸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게 대단한 일인 것과 그 힘의 정체는 별개잖아요?"

"...하!"

이 부분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물론 믿기 힘든 건 사실이야."

내 말을 장영웅은 오히려 내가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나를 설득하려 나섰다.

"하지만, 자네는 어째서인지 내 능력에 어느 정도 저항하고 있는 듯하군.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모든 반복을 다 보았을 텐데. 왜 현실을 부정하는 거지?"

"왜냐니...."

그 말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애초에, 그딴 대단한 능력이었다면 이렇게 들이박지도 못했어.'

가장 처음 이 서울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서울의 광범위한 파괴를 명령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확인했어야 했다.'

저 능력이 정말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그렇게 보일 뿐인, 허상뿐인 힘인 것인지.'

그리고 그 결과.

내가 확인한 것은.

'전과 다른 모습의 서울이었다.'

정말로 시간을 되돌리는 힘이라면.

그전에 보았던 모습과 다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 자의 능력은 시간을 되돌린다느니 하는 대단한 힘이 아니야.'

빈틈이 있고, 공략할 만한 능력이다.

그걸 알았기에.

이렇게 싸우기를 택한 것이다.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뭐?"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해 봐야, 저자에게는 헛소리처럼 들릴 테지.

그렇다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싶어 하는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굳이 그렇게까지 묻는다면야 말씀드리죠, 뭐."

나는 내가 이 의심을 품게 된 가장 첫 번째 이유.

저자의 능력이 정상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가장 처음 깨달은.

그 이유를 알려주기로 했다.

"집 구경은 잘했습니다. 아내분, 이쁘시고 요리도 잘하시더라고요."

"...갑자기 내 가족 얘기는 왜 꺼내는 거지?"

"그런데... 이 멸망에서 살아남느라 상당히 바쁘셨을 텐데. 가정에는 충분히 신경 쓰셨습니까?"

"그러니까. 내 가족 얘기는 왜...!"

"아이가 15개월이라 하셨죠. 귀엽긴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자는 아마 별생각 없이 했을 초대.

그 집 안에서 만난.

"아이가 잘 성장 중인지는... 확인해 보셨습니까?"

"...?"

그 아기가.

너무 작았으니까.

* * *

'이게 15개월이라고?'

나도 육아 전문가는 아니다.

아이의 성장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때 내 품에 안긴 아이의 모습을 보면,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갓난아기잖아. 이제 막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왔을 것 같은....'

아기는 생후 3개월 정도에 가장 폭발적인 성장을 한다던가.

내가 본 아이는 그 성장조차 겪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렸다.

생긴 것만 보면 첫 돌도 지나지 않았을 법한 갓난아기.

'이 아이가 15개월이나 된다는 게 이상하지 않나...?'

처음에는 그저 이상하다는 생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같이 있었다.

그 왜, 미숙아라든가.

그런 경우도 충분히 생각해 볼 만하니까.

하지만.

그 생각은 집을 조금 더 둘러본 뒤에 바뀌었다.

장영웅의 집 안에는 가족사진도 있었다.

개중에는 저 멸망의 날이 오기 전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도 존재했다.

문제는 그 사진 속에 찍혀 있는 아이가.

'그대로야.'

저 집에 있던 아이와.

똑같은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때는 그저 위화감에 사로잡힌 수준이었다.'

그 위화감에.

어쩌면 장영웅이라는 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에게 질문을 던져,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모든 기억을 되찾은 뒤.

그 기억들을 되새기고 나니, 확신할 수 있었다.

'각성자들은 첫 번째 삶에서 성장한 수준에 고정됐다고 했지. 첫 번째 삶에서 각성하지 못한 이는 그다음에도 각성하지 못했고.'

그것과 비슷한 얘기다.

'성장하지 못한 거다.'

내가 본 아기는.

정말로 기껏해야 생후 1~2개월 된 갓난아기였을 것이다.

'첫 번째 삶의 죽은 시점에서... 고정된 거야.'

그런 내 말에.

장영웅은 아연하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게, 무슨...."

내 말에 아연실색하고 있는 장영웅.

그는 헛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하, 하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내 아이의 성장도 모를 것 같...."

내 말을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은지.

잔뜩 찡그려진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는 장영웅.

하지만.

"그럼, 보고 오십쇼."

"뭐?"

나는 손을 내밀어.

저 여의도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아이를 보고 돌아오십시오. 저희는 여기서 가만히 있겠습니다. 날뛰지도, 도시를 파괴하지도 않을 테니. 여유롭게... 아이랑 만나 보고 오세요."

"...."

"당신의 아이가 1년 전에 비해 컸는지, 어떤지. 직접 확인하시면 되잖습니까."

내가 그리 말하자.

장영웅은 주먹을 꽉 쥔 채 잠시 고민하더니.

"만약 내 가족을 가지고 장난질을 하려고 한 것이라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네."

"예, 예."

이내 엄청난 속도로 내 시야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상당한 고레벨 각성자다

막으려는 이도 없는 이 도시에서는 꽤나 빠른 속도로 자신의 집에 도착할 수 있겠지.

나는 그를 보내고 난 뒤.

그 자리에 앉아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난 뒤.

"어떻게...."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창백한 인상으로 울먹이고 있는 사내.

"어떻게... 이럴 수가...."

그 얼굴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

"말도... 안 돼."

이게.

내가 저 힘의 정체를 의심했던 이유다.

정말 시간을 되돌린다는 말도 안 되는 힘이라면.

과거로 되돌아간다고 한들.

그 과거에서부터는 시간이 제대로 흘러야 정상이다.

저 아이 역시 마찬가지.

아무리 본래는 멸망의 날 이후 얼마 안 돼 죽었을 아이라고 한들.

과거로 돌아가 살려 내는 데 성공했다면.

그때부터는 무난하게 성장해 나가야 정상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렇지 않은 시점에서.

나는 그런 거창한 힘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서울을 뒤덮고 있는 이 현상은 시간을 되돌리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뭐랄까.

'덮어씌우는 거야.'

이 현상을 일으킨 자가 원하는 모습을.

본래의 모습 위에 '덮어씌우는' 것에 불과하다고.

'어디까지나 그 겉을 덮어 놓을 뿐. 그 속에 있는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닌 거다.'

나는 너무나도 쉽게 파괴되던 건물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건물들이 쉽게 파괴되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 본질이 이미 파괴되기 쉬운 형질의 것이었으니까.'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그 속은 낡고 오래되고 파괴되기 쉬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물리적으로 파괴하면, 덮어씌워진 모습이 사라지고...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거다.'

저 아기 역시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아무리 멀쩡해 보인다고 한들.

그 본질은 아마도 이미....

'....'

그리고.

이런 생각에 확신을 준 존재가 있었다.

'여의도에서 쏟아져 내린 그 괴물들.'

그 괴물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녀석은 말했다.

'이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병력을 보내 보았다고 했지.'

당시에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녀석이 살고 있던 [바깥]이 있다.'

저 장영웅이라는 사내에 의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이 땅.

이 서울은....

'이 세계는 가짜다.'

현실이 아니라고.

'저자가 수천 년인지 수만 년인지를 보내며 만든 이 풍경 또한... 가짜.'

그렇기에.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해가 안 돼...."

내가 그리 말하거나 말거나.

그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받아들이기 힘들만도 하지.'

그만큼 충격적인 이야기였으니.

저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도 이해는 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믿기 힘드신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이셔야...."

"아니, 아니야."

그런데.

"믿기 힘든 게 아니야.... 네 말을 부정하려는 것도 아니고."

"...?"

"네, 네 말대로야. 아무래도 이 힘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힘인 것 같군. 문제는... 그딴 게 아니야."

그런 내 생각과 달리.

그가 보이는 저 모습은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그런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걸 왜... 내가 눈치채지 못했지?"

"...!"

"이게... 말이 되나?"

그는 아무래도.

무언가 다른 것을 깨닫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네는 내가 바보 병신으로 보이나?"

"예?"

"그 끝없는 반복을 계속하면서 내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낸 게 몇 번인데. 아이가 성장하지 못하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병신으로 보이느냐, 이 말이야."

그야.

나도 그 부분이 조금 걸리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야, 이 멸망을 이겨 내느라 바쁘셨을 테니 그럴 수도...."

"제기랄, 따지고 보면 그렇게 바쁘지도 않았어!"

소리치는 장영웅.

그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쥐어 싸며 외쳤다.

"그 수천, 수만 번의 반복 중 수백 번은 정신이 붕괴된 채 가족들이랑만 지냈다!"

"예?"

"세상이 멸망하든, 사람들이 다 뒤지든 간에 내가 알 바냐는 생각으로! 서울에서 그나마 안전한 곳에 가족들하고만 숨어 지낸 적도 많단 말이다!"

그 말에.

나 역시,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그런데도 내 아이의 성장이 멈췄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고?"

"...그건."

"말이 안 되잖아...."

그는 머리를 쥐어짜던 손을 내려놓고.

엉망이 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딴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그리고.

그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속이려 든 게 아니고서야...."

그리고.

그가 그 말을 입에 담은 바로 그 순간.

-아아....

"!?"

해가 지고 있는 저 하늘 위.

흐릿하게 보이는 별들 사이에서부터 들려오는 하나의 목소리.

{가엾고, 불쌍한 아이....}

"...아."

그 목소리를 들은 장영웅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경악하며 외쳤다.

"수천, 수만 번의 삶을 반복했지만...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지."

{네 마음속에 있던 산더미 같던 후회... 그 슬픔을 보았다.}

"이, 이 목소리는."

{그렇기에, 후회를 바로잡을 기회를 주었거늘... 아아, 참으로 안타깝구나.}

나 역시 그곳을 바라보자.

저 하늘 위.

[신력이 외부의 존재를 감지합니다.]

"그때 그...!"

우주에서부터 이곳을 바라보는.

강렬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특성이 발동합니다.]

나는 그 존재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구름조차 넘어선.

저 바깥의 어두운 세계.

[식재료 감별(강화)]

[후회하는 자들의 대모]

그곳에 있는 거대한 형태가.

이 땅을 내려다보며, 안타깝다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었다면, 모든 후회를 잊고 행복해질 수 있었을 텐데.}

436화 바깥의 존재 (2)

{이대로 조금만 더 있었다면, 모든 후회를 잊고 행복해질 수 있었을 텐데.}

그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 있는 것은.

"당신이...."

평범한 사람보다 세 배는 거대한.

한 여인의 형상이었다.

그 몸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으며.

등에는 신성해 보이는 빛무리가 마치 날개와도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제게 힘을 준 존재... 이십니까."

{이 땅의 장막이 열린 순간, 나는 네 안에 담긴 후회를 들었단다.}

늘어진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입가에는 자애로운 미소가 서려 있었다.

{그 안에 담긴 슬픔과 비애가 내 발을 붙잡았지. 그렇기에... 기회를 주고 싶어졌을 뿐.}

인간과는 다른 격을 지닌.

희미한 빛무리로 이루어진, 신성한 형상의 여인.

"기회를... 주셨다 하셨습니까."

여인의 몸에서는 너무나도 고차원적인 존재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장영웅은 그 존재감에 압도당한 듯,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역시... 저자의 말은 헛소리였던 거군요."

{무슨 말을 가리키는 것이냐?}

"다, 당신께서 제게 주신 힘이 시간을 되돌리는 게 아니라... 그저 다른 모습을 덮어씌울 뿐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은, 저자의 착각인 것이겠지요?"

어떤 불가능도 없을 것 같은, 초월적인 존재로만 보이는 여인.

그 신적인 모습에, 장영웅은 혹시나 하는 생각을 품은 듯했다.

"수영이가 자라지 않은 것처럼 보인 것도, 그저 제 착각일 뿐이고! 사실 그 힘은 제대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힘이 맞는 거겠죠? 이 서울의 모습이 모두 가짜라는 것도 저자의 착각일 뿐... 제가 만든 이 풍경은 모두 현실이 맞는 거겠죠?"

간절함으로 가득 찬.

떨리는 눈빛.

"저, 저는 지금 이 서울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수천, 수만 번의 삶을 반복했습니다. 중간부터는 세는 것도 포기했지만, 아마 햇수로는 만 년 이상... 정신이 붕괴될 것만 같았지만, 이 악물고 참아 내며 만들어 낸 게 이 풍경이었습니다. 그런 풍경이... 가, 가짜라니."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

제발 그렇다고 답해 달라는 듯 말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겠죠?"

{하아아....}

그리고.

그런 장영웅의 말에 거대한 여인은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아이야.}

"예."

{생각을 조금 바꿔 보는 것이 어떻겠니.}

이내.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더냐?}

* * *

"...예?"

그 말뜻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장영웅이 멍하니 입을 벌리자.

그녀는 부드럽게 손을 뻗어 그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나는 네가 가진 후회를 느끼고, 거기에 공감했단다. 나만큼 후회하는 자들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는 자는 전 우주를 뒤져 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야.}

"...."

{해서, 그 후회를 없애 주고자 마음먹었단다. 네가 후회하는 모든 일들을 되돌리고, 후회 없이 만족할 수 있기를 바랐지. 그리고... 후회 없이 만족할 수만 있다면.}

은은하게 빛나는 손이.

장영웅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진다.

{그것이 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니겠느냐.}

"...."

장영웅의 눈 안에 자리 잡았던 아주 미약했던 희망의 불씨가.

서서히 꺼져 나가는 것이 보인다.

{네가 한 일이 최선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느낀 만족감. 기억하느냐.}

"...."

{너는 네가 저지른 모든 잘못을 바로잡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고, 그토록 후회하던 가족을 잃은 일도 없던 일이 되었다고 안심했지.}

"...그."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깊은 후회가 사라지는 순간, 후련하게 기분 좋게 웃지 않았느냐.}

"그럼."

{그것이 비록 현실이 아니라고 한들... 너는 만족했지 않느냐.}

그 말에.

장영웅은 피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내가 보낸 시간은!"

{시간?}

"이 서울에서만 적어도 만 년 이상의 시간을 반복했다!"

[대모]는 자상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 품에 안긴 장영웅의 얼굴은 격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정신이 붕괴될 것 같아도 꾹 참고, 그렇게 해서 되찾은 게 이 땅인데...! 그렇게 만든 이 땅이 가짜라면...."

{아아. 그 얘기로구나.}

"나, 나는. 만 년 이상을. 그 긴 시간을... 아무런 의미도 없는 가짜를 위해...."

그녀는 손가락을 뻗더니.

장영웅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그 얘기라면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아라.}

"뭐?"

{아이야. 너는 네가 겪은 시간이 14832년 3개월 12일 8시간 정도라고 느끼고 있겠지?}

"어, 어? 그렇게 자세한 숫자까진...."

{그 긴 시간을 실제로 겪었다면, 그렇게 안타까워할 수도 있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자상한 미소를 짓는 여인.

하지만.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단다.}

그 입에서 나온 내용은.

잔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네 가슴 속에 자리 잡은 후회는 너무나도 깊이 박혀 있어서 쉽게 빠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어.}

후회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 후회를 뽑아내는 건 쉽지 않은 법이다.

{생각해 보거라, 그런 깊은 후회가 고작 1년 고생해서 모든 걸 되돌린다고 한들, 후련하게 해소될 리가 없지 않으냐.}

새로운 삶이 주어졌다고 한들.

갑자기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단 한 번에 모든 후회의 원인이 제거된다면.

그 마음속에는 여전히 찝찝함이 남아 있겠지.

{그런 후회를 뽑아내려면,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해서 그 후회의 원인을 이겨 내는 것이 최고지.}

그렇기에.

대모는 저 장영웅에게 수만 년의 시간을 보내도록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리 긴 시간을 보내라 하는 건 너무한 일 아니겠니.}

"그게, 무슨."

{해서. 내가 직접 네 체감을 조절해 주었지.}

그녀는 장영웅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는 만 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실제로 네가 겪은 시간은 10년도 되지 않는단다.}

"...아?"

대모는 그리 말했으나.

장영웅은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하니 입을 벌렸다.

{기억을 떠올려 보거라.}

"무슨 소리야. 생생히 기억난다. 내가 겪은 전투들, 괴물을 처치하고, 부대를 탈환한...."

{큰 전투나, 큰 성과를 얻은 일 같이 중요한 사건들은 분명 네 기억 속에도 남아 있겠지. 하지만, 생각해 보거라. 길을 걷거나... 어딘가로 이동하거나 어디선가 대기하며 멍하니 시간을 때우거나, 밥을 먹거나. 그런 시간들이 기억이 나느냐?}

"그, 그건."

삶에 있어서, 나중에까지 기억나는 것은 그만큼 인상적이었던 기억뿐이다.

하지만.

보통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시간들이다.

{기억나지 않겠지? 당연한 일이야. 그런 쓸데없는 시간은 후회를 이겨 내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빠르게 넘겨 버렸거든.}

그 '대부분'을 차지하는 쓸데없는 시간들이 사라지고.

인상적인 사건들만을 겪는다면.

고작 십 년의 시간 동안, 수만 년의 경험을 할 수도 있는 일이다.

{너는 네가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그 사실에 죄악감을 지니고 있었지. 하지만, 1만 년이 넘는 시간을 노력했다는 생각이 네 죄책감을 많이 덜어 주었을 것이야.}

만 년이 넘는 시간.

그 시간은 분명 고통으로 가득 찬 시간이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10년도 되지 않는 시간이기는 했지만... 뭐, 현실이 무에 중요하겠느냐.}

"...아."

그 긴 시간을 소모해 간 끝에 결국은 최선의 결과를 얻어 냈다.

장영웅은 그 긴 시간이 아무리 고통스러웠을지언정.

{이해하거라. 그렇지 않았더라면 너같이 나약한 아이는 그리 긴 시간을 버틸 수 없었을 게야.}

아마도.

그 긴 시간을 버텨 냈다는 사실에.

큰 자긍심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제대로 시간을 보내게 했다면, 200년쯤 되었을 때 정신이 무너져 버렸겠지. 너를 배려한 이 어미의 마음을 헤아려 주겠니?}

"아, 아아...."

한 사내가 당당히 설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던 그 자긍심이.

지금 처참하게 박살 났다.

털썩.

설 의지를 잃은 사내의 몸이.

바닥을 향해 쓰러졌다.

* * *

"아아... 아...."

이 멸망을 이겨 내기 위해 모든 걸 바쳐 온 남자.

자신의 모든 것을 그 일만을 위해 바친 사내가.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모습.

"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악...!"

그 절망이 얼마나 깊은 것일지.

나로서는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하아. 힘들여서 뽑아낸 후회였거늘, 그 빈자리에 다시 후회가 가득 차 버렸구나. 하긴, 뽑아낸 상처가 아물 만한 시간은 없었으니.}

그리고.

그 절망을 선사한 장본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이래서 현실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하도록 인지를 조정해 주었는데... 깨닫지만 못했더라면 계속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인데.}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우리 쪽을 향했다.

{너희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 장영웅을 바라보던 시선과 달리.

그 시선에는.

미약한 분노가 섞여 있었다.

{너희들이 방해만 하지 않았더라도 이 아이는 행복했을 것이야.}

"...."

{너희들이 이 아이를 망가트린 것이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단지 그것만으로도.

"...끄윽."

"뭐, 뭐야. 저거."

그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짓눌리는 이들이 생겨날 정도로.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저게 어떤 존재인지는... 대충 알겠다.'

아무것도 들은 게 없었다면 당황했겠지만.

다행히도, 이런 일에 대해서 미리 경고를 들은 것이 있었다.

'바깥의 존재.'

대한민국 땅을 뒤덮은 보호가 해제된 순간.

나를 새하얀 공간으로 불러들였던 존재.

미리내는 말했다.

-이 세계를 보호하던 벽이 무너지고 외부에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지.

-어떤 보호자도 존재하지 않는 나약한 세계.... 바깥의 존재들이 눈독을 들이기에는 최고의 조건이지.

지금 이 땅은 보호가 사라졌으며....

그렇기에.

바깥 존재들의 시선이 이 땅을 향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것들의 정체가 뭡니까?

-바깥의 존재들.

저게 바로.

미리내가 말한 바깥의 존재.

저 장영웅에게 이 서울을 뒤덮은 강대한 힘을 선사한 장본인이자.

-부르는 이름은 너무나도 다양하지. 신, 초월자, 위대한 자.

...신이라 불릴 만한 격을 지닌.

강대한 존재였다.

"누, 눈이 아파...."

"...!"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황급히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끄윽...."

"머, 머리가."

저 [대모]의 형상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저기에 있는 저 [대모]의 형상은 본체가 아닐 것이다.

이 땅에 잠시 자신의 모습을 구현시킨 환상에 불과할 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환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저 정도라고?'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이런 경우가 내게는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셰프 : 서울에 있는 전 부대원에게 전한다.]

나는 그 목소리에 병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눈치채고는.

황급히 시스템 창을 조작해 길드 메시지를 보냈다.

[셰프 : 고개를 숙여라!]

내가 들은 것은 그저 눈이 아프다는 병사의 목소리에 불과했으나.

그것만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으니까.'

너무나도 거대한 것을 바라보았을 때.

그 압도적인 정보량에 머리가 녹아 버리려 하는 증상.

[셰프 : 저것하고 고개를 마주하지 마라. 저걸 바라볼 생각도 하지 마.]

나 역시 한때 겪어 본 적이 있었으며.

그때 위기를 이겨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저것과 눈을 마주치게 될 것 같은 상황이 생긴다면... 이 메시지창을 통해, 녀석의 모습을 가려라.]

그때.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 준 시스템 창이 내 시야를 가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후, 후욱...!"

"사, 살았다."

지금.

내 길드 메시지가 병사들의 시야를 가림으로써.

"신 병장님의 메시지가 시야를 가려 줬어...!"

저 존재를 직접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처럼.

* * *

"전원 고개 숙여!"

"병장님 명령에 따라라!"

병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기척들이 느껴진다.

그러자.

{흐음? 이건 조금 흥미롭구나.}

그런 병사들을 바라보던 [대모]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단 한 명도 나를 직접 바라보지도 못할 정도라면... 내 힘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할 텐데.}

[대모]는 병사들이 그녀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한 듯했다.

그도 그럴게.

{생각해 보면, 어찌 내 아이를 방해할 수 있었을까? 저 아이에게 건넨 힘이 이 땅의 주민들이 쉬이 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한 힘은 아니었을 것인데. 흐음.}

지금 [대모]가 굳이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우리가, 저 장영웅의 능력을 방해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으니까.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는 격 낮은 이들.

그런 이들이, 자신의 힘을 받은 장영웅의 계획을 방해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것이겠지.

{아니, 나를 바라보지도 못할 정도로 격이 낮은 이들이면서도 저리 빨리 대응하는 것을 보면... 판단이 빠른 것일까?}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저 존재는.

{흐으음, 그렇다고 내 힘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닐 테고.}

사실.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녀석.'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 이 녀석의 눈에는.

{하아. 이 벌레들이 범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도대체 누가 내 아이를 방해한 것일꼬.}

'내가 보이지 않는 건가?'

'나'를 제외한 병사들의 모습만이.

비치고 있는 듯했다.

그 이유는.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미리내의 보호.'

그는 나를 바깥 존재들의 시선으로부터 숨겨 주겠다고 하였다.

그때 그가 내 몸에 새긴 칼자국.

그 자국들이 저 [대모]에게서 나를 숨겨 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자격이 되지 않는 이를 데리고 장난을 치려는 자들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미리내가 한 말이 또 한 가지 떠올랐다.

-그렇게 이 세계에 얼굴을 들이민 이들은 너를 발견할 수 있게 될지도 몰라.

나를 숨겨 주기는 하겠지만.

이 땅에 직접 얼굴을 들이민 이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

그리고, 그 말대로.

{아니, 아니구나. 고개를 숙인 이들만이 전부가 아니야.}

신성한 분위기를 내뿜는 거대한 여인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한 걸음 한 걸음 내 쪽을 향해 다가오며 중얼거렸다.

{너무나도 흐릿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지만... 자세히 보니... 무언가 있구나.}

머릿속에 떠오른 미리내의 말 중에서.

신경 쓰이는 것은 내가 발견될 수 있다는 쪽이 아니었다.

'자격이 되지 않는 이를 데리고 장난을 치려는 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고 했지.'

저 멀리 보이는.

쓰러진 채 괴성을 내지르고 있는 사내.

"끄아아아아...."

솔직히 말하면.

잘 알지도 못하는 놈이다.

{인간, 인간이로구나! 이토록 존재감이 흐릿한 인간이라니?}

집에 초대받아서 주전부리 좀 대접받은 게 전부고.

그것마저도 저자가 나를 속여서 이용하려 했단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원수에 가깝다.

지금 저 꼴을 누군가는 쌤통이라고 받아들이겠지.

{아이야, 너는... 나를 바라보고도 멀쩡한 게냐?}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를 바라보는 [대모]의 말에.

"그래, 이 새끼야."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참지 못한 채.

그렇게 말했다.

437화 입양 제안 (1)

{아아, 이럴 수가!}

내가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크게 놀란 듯 중얼거렸다.

{나를 멀쩡하게 볼 수 있을 정도의 아이가 이토록 존재감이 옅다니. 이 무슨 신비로운 조화란 말인가!}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대모

나는 그 시선을 받으면서 생각했다.

'바깥의 존재가 개입할 수도 있다는 건 들었는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경고를 듣고 바로 만나는 게 말이 되냐, 제기랄.'

그나마 미리내의 경고가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을 수는 있었으나.

속으로 욕지거리가 나오는 상황은 확실했다.

{아, 아아. 그래. 자세히 보니 보이는구나. 너는, 너는!}

그리고.

그런 그녀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맙소사. 이 땅에도... 영웅이 있었구나!}

환희에 찬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아아! 이 땅에서 태어난 자 중에 격을 이룬 자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거늘. 이리도 훌륭한 모습이라니!}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기괴한 신음을 흘리고 있는 장영웅을 내버려 둔 채.

나를 향해 다가오며 외쳤다.

{어째서 이렇게 숨어 있었느냐? 이렇게 숨어 있지만 않았더라면 너를 찾아올 이들이 많았을 텐데!}

내 얼굴에 손을 뻗으며.

호감이 가득한 따스한 목소리로 묻는 여인.

"...눈에 띄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후후, 재밌는 아이로구나. 그런 격을 이루어 놓고 그리 소심한 태도라니.}

그녀는 재밌다는 듯.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 이유야 어찌 되었든 상관없지.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너를 내가 가장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니!}

"...?"

{후후. 참으로 운이 좋구나. 이곳을 둘러보지 않기로 했다면 크게 후회할 뻔했어.}

그리고.

은은하게 빛나는 그 손을 내게 내미는 [대모].

{아이야.}

"앙?"

{내 자식이 되어 볼 생각은 없느냐.}

그녀의 꺼내 든 것은.

입양 제안이었다.

"자식이 되라고?"

나는 경계심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나한테 뭘 바라고 그런 제안을 하는 거지?"

{바라는 것이라니. 너는 부모에 대해서 모르는구나.}

"뭐?"

{어미는 자식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단다. 오히려 자식에게 베풀기만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

말로만 들으면 훈훈한 얘기였지만.

듣는 입장인 나로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네게 내가 가진 힘을 주마. 내가 가진 모든 권능을 너와 나누겠다.}

그녀가 주변으로 손을 뻗자.

그 손에서 퍼져 나온 안개를 중심으로, 주변의 풍경이 서서히 변화해 나간다.

{나는 이 우주의 모든 후회하는 자들의 대모다. 깊은 후회를 품은 채 피눈물 흘리는 모든 이들이 곧 나의 자식이지.}

"...."

{뼈아픈 후회를 겪어 본 이들은 다른 이의 후회에 공감할 줄 아는 법이란다. 그리고, 누구보다 많은 피눈물을 흘려 본 내가 보았을 때.}

그렇게 바뀐 풍경은.

내게 있어서는...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너 역시... 마음속에 후회가 많아 보이는구나.}

처음 보인 것은 산속 깊은 곳에 보이는 군부대였다.

그리고 그 군부대의 외곽.

철책을 찢고 그 안으로 기어 들어가고 있는 두터운 가죽을 두른 짐승 수십 마리가 보였다.

-크뤄억.

이족 보행을 하는 거대한 도마뱀처럼 생긴 그 괴물들은 군부대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그중 몇 마리는 한창 하얀 연기가 올라오고 있는 시설.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까 보니까 소금 다 떨어져 가더라.

그리고.

그 식당 안에서는.

창고에서 좀 가져와 줘.

-옙.

한 병사가.

선임병의 명령으로 인해, 건물 밖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인간을 먹잇감으로밖에 보지 않는 짐승이 다가오고 있는.

바로 그 장소를 향해.

{저 때 저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대모는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린 채 그 풍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후임한테 심부름을 시킬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갔더라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멋대로 남의 기억을 훔쳐보다니. 애의 사생활은 존중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그런 대모의 말은 부정하지 못했다.

그 말대로.

저 풍경은 내가 몇 번이고 후회한 것이었으니까.

-커, 커헉....

내 별생각 없는 명령으로 인해.

처참하게 뜯어 먹히고 있는 맞후임.

'준혁이는 나보다 뛰어난 요리사였다.'

일찍이 일식집에서 요리를 배웠으며.

요리도 잘하고 성격도 좋았던 에이스.

{나는 많은 아이들의 후회를 둘러보았지만, 그중 대부분은 자신에 관련된 일이었지.}

내 저 명령으로 허무하게 죽지만 않았더라면.

녀석은 나보다 뛰어난 요리사로 각성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너는 아니야.}

그런 녀석이 허무하게 죽어 나갔다.

내 별것도 아닌 명령 때문에.

{네 마음속에 박혀 있는 후회들은... 대부분이 타인에 대한 것이로구나.}

그뿐만이 아니다.

그 후로도 내 잘못된 명령으로 인해 죽어 나간 병사들이 많았다.

{가엾고, 딱하고, 착한 아이 같으니.}

별다른 할 일이 없어 멍하니 생각에 잠길 때면.

그때의 일들이 문득 떠올라, 가슴을 부여잡아야만 했던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 후회를 바로잡고 싶지 않으냐?}

하지만.

아무리 후회해 봤자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라고.

그리 생각했으나.

{나와 함께한다면 가능하단다.}

그녀가 다시금 손을 뻗자.

쉬이이이익!

마치 비디오를 역으로 재생하기라도 한 듯.

괴물에게 뜯어 먹혔던 준혁이의 몸이 일으켜 세워지고.

괴물의 입안에 들어갔던 살점이 그 몸에 달라붙는다.

{이 땅의 모습을 보았겠지. 모든 후회가 바로잡혀, 과거의 모습을 되찾은 영광스러운 모습을.}

어느새 나와 대화를 나누던.

바로 그 시절로 돌아온 준혁.

{네 모든 후회 또한 이렇게 고쳐질 수 있을 것이야.}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선임병.

'나'는 준혁 녀석의 어깨를 붙잡고 뒤로 넘기더니.

-아니, 방금 심부름은 취소다!

식당에 퍼져 있는 국자들을 들어 두 후임에게 건네주며 기름 솥으로 향했다.

-신 병장님?

-국자 잡아! 끓는 기름을 뿌리는 거다! 막내, 너는 안쪽에서 칼 꺼내 와!

잠시 뒤.

괴물은, 원래의 역사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왔으나.

미리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세 병사들이 끓는 기름을 부어 가며 공격하고.

그로 인해 벌어진 상처를 찌른 결과.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죽지도 않았구나. 이 얼마나 좋은 일이더냐.}

세 명의 취사병은.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은 채, 괴물을 처치하는 데 성공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야.'

그녀의 말대로.

{네가 살면서 겪은 모든 후회들을 바로 잡을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저 모습은.

내가 저리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몇 번이고 상상했던.

다시 보아도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지. 너는 이 어미의 장손이 될 것이다. 전 우주에 퍼져 있는 깊은 후회를 가진 모든 이들이 너의 형제자매가 될 것이다. 그 아이들은 네 상처에 공감할 줄 아는 아이들이야. 네 상처를 같이 핥아 주고 너의 명령에 따르겠지.}

스윽- 하고.

부드럽게 손을 내미는 그녀.

{나와 함께 가자꾸나, 아이야. 이 어미는 자식을 결코 섭섭하게 대하지 않으니.}

분명 매력적인 제안이다.

하지만.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모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좀 싫은데."

{뭐라?}

나는 미리내가 한 말을 떠올렸다.

저 바깥의 존재들은 이 세상에 속한 이들을 통해 그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 땅에서 태어나 격을 이룬 존재는 그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최적이라던가.

그리고.

"자식을 결코 섭섭하게 대하지 않는다고? 그럼 하나만 묻자."

격을 이루지 못한 존재는.

그 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던가.

"저기 누워 있는 저 남자는 네 자식이 아니란 거냐?"

바닥에 쓰러진 채.

자신이 겪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상한 신음을 흘리고 있는 사내.

"처음 만났을 때는 꽤 건강해 보였는데, 지금은 아니군."

그 사내는.

꽤나 초췌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구나. 이 어미는 저 아이에게 기회를 주었단다.}

"기회?"

{저 아이가 겪은 모든 후회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며, 그 과정에서 정신이 붕괴되지 않도록 저 아이의 체감 시간 또한 적절히 조절해 주었지. 그러면서도 저 아이에게서 무엇 하나 바라지 않았단다. 이 어미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지지 않느냐.}

미리내는 말했다.

그가 나를 발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물리적으로 가까워서였으며.

그 다음으로 나를 발견했을 존재는... 나와 연이 깊은 존재일 것이라고.

그 매커니즘이 다른 이들에게도 적용된다고 한다면.

'저 존재의 이름은 [후회하는 자들의 대모].'

아마 그녀가 장영웅을 발견하고 그에게 기회를 준 것은.

장영웅이 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후회를 품고 있는 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하나 바라지 않았다고? 그러면, 왜."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그녀의 힘을 얻음으로써, 장영웅은 어느 시점까지는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후회를 모두 바로잡은 뒤에도, 그 힘을 회수하지 않았지?"

정말 그 후회를 바로잡게 해 주는 게 목표였다면.

과거의 모든 후회를 되잡는 데 성공한 시점에서.

장영웅의 '반복'은 멈췄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그 후에 우리를 만났을 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시간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시점에서 더 후회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내가 맞춰 볼까?"

그 이유는 아마.

"저 녀석을 이용해, 이 땅에 네 힘을 퍼트리고 싶었던 거잖아."

{....}

지금 저 멀쩡한 서울의 풍경은 가짜다.

아니, 가짜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 녀석의 힘이 만들어 낸... [이계]다.'

단순히 꿈이나 환상 같은 게 아니라

저 '대모'라는 자가 현실의 위에 덮어씌운 이계.

그 본질을 따지자면 던전에 가까운 공간.

"장영웅은 자기 영향력이 닿는 곳에서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했지. 정확히 말하면, 장영웅의 영향력이 닿는 곳이 네 영지가 되었던 거야."

그리고.

저 바깥의 존재들은 이 땅에 간섭하기 위해 이 땅의 주민들을 매개체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그 녀석을 이용해서 영역을 넓히고, 이 땅에 숟가락 하나 얹고 싶었겠지. 운 좋게 우리도 장영웅의 휘하에 들어가면 네 부하가 되는 셈이니까. 순식간에 한반도 전역을 네 영향력 아래에 둘 수도 있었을 테고. 그런데 말이야."

그리고.

내가 이 서울을 몇 번이고 파괴하고, 장영웅이 몇 번이고 반복을 계속했을 때.

"그렇게 반복할 때마다... 저 녀석의 얼굴이 점점 초췌해지더라고."

장영웅의 레벨은 35였다.

[격]의 기준인 40레벨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레벨.

그럼에도, 저 대모는 장영웅을 매개체로 그 힘을 발휘했으며.

지금은 이렇게 그 일부나마 이 땅에 내려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영웅은 네 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이었다. 네 힘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망가져 갔겠지."

그저 환상에 불과했을.

그렇기에 수만 번을 반복해도 문제없었을 과거와 달리.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은 현재다.'

우리의 기억까지 조작해 가면서 시간을 반복해 대는 데에는 큰 힘이 들었을 것이다.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듯하지만.

아마도 장영웅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겠지.

그리고.

"너는 그래도 상관없었던 거잖아? 아닌가?"

{...그저, 후회하는 아이들을 모두 품어 줄 수 있는 땅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을 뿐이다.}

"결국. 자격도 없는 장영웅을 저렇게까지 굴린 목적이 있었다, 이거로군."

나는 이를 까득 깨물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 지은 채 말했다.

"후회를 없애 주고 싶었다? 자식에게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지랄하고 있네."

{참으로.}

"너는 그냥 네 장기 말이 필요했던 것뿐이잖아."

그래.

저 녀석에게서는 아까부터.

{참으로, 마음에 드는 아이로구나...!}

"거짓말."

거짓말을 하는 맛이.

진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 * *

{참으로, 마음에 드는 아이로구나...!}

"마음에 들기는 개뿔이."

나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까까지 보였던 자애롭기 그지없는 여인의 형상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거대한 형상.

{아아, 아아. 그저 무식하게 격만 높인 것들과는 다르구나. 이런 척박한 땅에서 스스로 격을 이룬 만큼, 그에 어울리는 가치를 지닌 아이인 게야.}

그리고.

녀석에게서는 짙은 거짓말의 향기와 함께.

분노의 맛 역시 느껴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물으마.}

어느새부턴가.

그 자애로운 목소리 역시 딱딱하게 변하고.

{내 사도가 되거라, 인간.}

인간미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나를 향해 제안을 건네는 녀석.

{그리하면 네 안의 모든 후회를 없던 일로 해 줄 것이니.}

하지만.

그런 녀석에게 내가 해 줄 말은 하나뿐이었다.

"꺼져, 인마."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엇나간 아이를 바로잡아 주는 것 역시 어미의 역할.}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은은한 빛을 내뿜던 성모와도 같았던 [대모].

그 모습은 어느샌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우리 엄마 멀쩡히 잘 살아 있으시거든? 니가 왜 우리 엄마야."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흉흉한 암적색으로 이루어진 거인.

"이딴 징그러운 엄마가 어딨냐."

새빨갛게 충혈된 눈동자 수십, 수백, 수천 개가 허공에 떠 있었으며.

그 눈동자들은 짙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흐르는 붉은 피눈물들이 모여, 저 거인의 몸을 이루고 있었다.

{내 제안을 거절한 것을 후회하도록 하거라.}

그 피눈물로 범벅된 손이 내 눈을 가린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

{그 후회를 안고 다시금 부탁한다면, 그때 너를 거두어 줄 테니.}

"...어?"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한 어린아이.

-슈가야!

작은 강아지를 품에 안은 채.

세상이 찢어져라 울고 있는 어린 남자아이였다.

438화 입양 제안 (2)

-슈가야!

저 [대모]가 그 손으로 내 시야를 가린 순간.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한 어린아이였다.

'저건.'

...뭐랄까.

그 아이의 모습은 내게 낯익은 듯하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낯설게 보였다.

실제로 본 기억은 까마득하지만.

그럼에도 사진으로는 몇 번 보았던 아이.

'내 어린 시절이다.'

어린 시절의 나였다.

* * *

어린아이가 하늘이 무너져라 통곡하고 있었다.

그 품 안에 있는 것은 작고 하얀 강아지였다.

헥, 헥....

나는 멍하니 그 강아지를 내려다보았다.

그 강아지는 힘들게 숨을 헐떡이더니.

헥....

이내.

헐떡이던 숨조차도 멈춰 버리고 말았다.

-슈가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그 몸에서 생기가 사라져 간다.

부드럽던 강아지의 몸은 점점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갔다.

'슈가.'

어렸을 때 키웠던 강아지의 이름이다.

원래도 썩 건강한 아이는 아니었고, 아이라기에는 나이도 많았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저 때의 슈가는 슬슬 수명이 다한 상태였을 것이다.

천수를 누린 셈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저 땐 어렸지.'

어렸을 때의 나는 그런 걸 잘 몰랐다.

그냥 평소처럼 잘 지내다가, 어느 날 시름시름 앓는 슈가를 보게 되었고.

건강하다고만 생각했던 슈가는 그렇게 앓게 된 후로 일주일을 버티지 못했다.

그때.

나는 뼈저리게 후회했다.

'더 잘해 줄 걸.'

하고.

"끅...!?"

그 순간.

쿵 하고 심장을 직접 때리는 듯한 격렬한 고통이 느껴진다.

'이건.'

너무나도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식은땀이 흐르고, 시야가 흐릿해지는 가운데.

-너도 날 못 믿는 거냐?

-어. 나도 못 믿겠으니까 꺼져, 그냥.

그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또 다른 풍경.

유치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있었다.

아마 중학생 때였나.

그런 녀석과 크게 틀어지는 일이 있었다.

-너라면 믿어 줄 줄 알았는데.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건 온전히 내 쪽의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걸 깨닫고 난 뒤에 녀석을 찾아가 사과하고 싶었지만.

그때는 이미 연락이고 뭐고 다 끊겨 버린 상태였지.

나는 친구를 믿어 주지 못했던 어리석은 재 자신을 뼈저리게 후회했었다.

"끄륵...."

그 후로도.

수없이 많은 모습들이 시야를 거쳐 간다.

말실수를 해서 부끄러웠던 기억.

좋아하는 애한테 고백도 못 한 채 멀어졌던 기억.

잘못된 선택으로 큰 손해를 봤던 기억.

내 사소한 명령으로 인해 후임이 죽었던 기억까지.

오랜 시간이 지나며 점점 무뎌졌던 일들이다.

당시에는 큰일이라 생각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면 별거 아닌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꺼... 헉...."

당시에는 정말.

세상이 무너질 듯 고통받았던 일들이기도 했다.

'후회하라는 게... 이런 의미였냐?'

대모가 했던 경고는 비유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후회를 하도록 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과거에 겪은 모든 후회를 다시금 경험하도록 하고 있었다.

'하, 하핫.'

그 당시의 후회와 고통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쉴 틈도 없이 내 머리와 가슴을 두들겼다.

"크, 크흐흐...."

고통으로 바닥을 뒹굴면서 생각했다.

이미 오래 지난 일들이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일들이었다.

'맘 같아선 과거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뭐 이러고 싶은데....'

아무래도.

현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안되는구만.'

저 모습들은 모두 환상이다.

'격'이란 게 오른 덕분일까.

저 환상을 이겨 내는 방법 역시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냥, 저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치부하고 넘기면 된다.'

당장 당시의 고통이 그대로 느껴지고는 있었지만.

그 고통조차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만 있다면.

'이 후회 자체를 훌훌 털어 버릴 수만 있다면.'

[대모]의 공격은 내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고통들을 다시 겪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과거에 후회했던 모든 일들이.

지금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일들이.

'아직도.'

내 발목을 꽉 부여잡은 채.

떨어지지 않고 있노라고.

멋있는 척하면서, 과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느니.

중요한 건 미래라느니.

그딴 말을 하는 것은.

내게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라고.

"큭... 개같네."

난 원래도 모자란 점이 많은 놈이다.

살면서 무언가를 후회한 일 정도야 쌔고 쌨다.

아마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많은 일들을 후회하고, 그 후회들을 털어 내지도 못할 것이다.

그때마다 발걸음은 무거워질 것이고.

나는 그 한 없이 무거워진 발걸음을.

억지로, 이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나가야만 하겠지.

'끔찍하군.'

[대모]가 내게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러기 싫으면, 자기 손을 잡으라... 이거냐."

하지만.

그런 대모의 말에 해 줄 답변은 하나였다.

"X 까, 이 새끼야...."

저 과거의 후회들이 내게 아무리 무겁다고 한들.

그걸 달고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무리 힘든 일이 될 것이라고 한들.

'지금은.'

[대모]의 손을 잡는 것은.

거기에 묶여서, 뒤로 돌아서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마음이야 편해질 수도 있겠지만.

멈춰 서는 것보다도 최악인,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

'보내 줘라.'

개같이 무거운 발걸음이라도.

일단은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끄륵...."

나는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손을 옮겨, 바닥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그러다 보니, 손끝에 닿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독고구식.'

고통에 신음하며 쓰러졌을 때 무심코 놓아 버린 칼.

나는 그 칼을 꽈악 손에 쥐며 생각했다.

'이 공격을 정석적으로 파훼하는 건... 내게는 불가능하다.'

과거의 후회를 모두 훌훌 털어 버리는 거?

그게 가능한 훌륭한 인간들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게 내 얘기는 아니었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나는 이곳에서 저 후회들에 매몰된 채 고통받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다 언젠가 좌절하고, 저 [대모]에게 굴복하고 말겠지.

하지만.

'다행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방법이 없다면의 얘기.

'다른 방법이... 없지는 않아서.'

얼마 전.

김 중위가 내게 내렸던 명령을 떠올린다.

'이곳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기억하라는 명령.'

생각해 보면.

저 명령은 [대모]의 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라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어려운 명령이었다.

하지만.

[기대부응]으로 인해 극도로 강력한 지휘관이 된 김 중위의 명령이다.

거기에 나는 내 요리까지 동원해 가며 그 명령의 효과를 증폭시켰었다.

'아무리 어려운 명령이라도,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했지.'

그 결과.

나는 나조차도 제대로 다룰 수 없었던.

내 몸 안에 잠재되어 있는 힘을 이용해.

내 뇌 속에 자리 잡은 대모의 힘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었다.

그리고.

요리를 통해 생긴 효과는 일시적이지만.

그로 인한 여파는 영구적이다.

저 말도 안 되는 명령을 수행해야만 했던 경험.

그 경험 덕분에.

['20'의 신력이 당신의 무기에 깃듭니다.]

나는.

그 힘을 다루는 노하우를 조금은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무수히 많은 기억들.

그곳을 향해 칼을 크게 휘두르자.

쩌억....

['20'의 신력이 바깥 존재의 간섭을 베어 냅니다.]

후회로 점철된 모든 기억들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 * *

"커허어억...!"

{...어찌!?}

정신을 차리자.

내 눈앞에는 크게 당황한 듯 움찔거리고 있는 [대모]의 모습이 있었다.

{말도 안 돼! 평범한 필멸자가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그... 러게."

{설령 신화적인 정신력을 가진 이라고 한들, 이딴 방법으로 탈출할 수는 없을 텐데!}

그리고.

[대모]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피 흘리는 눈동자.

그 눈동자들이 내가 쥐고 있는 식칼을 향했다.

{그 힘은... 맙소사!}

정확히는.

그 식칼에 서려 있는 힘에 쏠렸다.

{과연, 사도의 자리를 거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구나.}

"후우, 머리야."

{설마하니.}

그러자.

[대모]는 그제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경악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도 정도가 아니라, 그 너머를 넘보는 멍청이였을 줄이야...!}

그리고.

그렇게 경악하고 계시거나 말거나.

"그래서?"

{뭐?}

"제안을 거절한 걸 후회하게 해 준다 뭐다 하지 않았나?"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나는.

아픈 머리를 뒤로한 채,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게 다야? 생각보다 별거 없는데?"

{버러지 같은 것...!}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아 내며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는다.

말로는 별거 없다느니 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달랐다.

'미리내가 괜히 바깥의 존재를 조심하라고 한 게 아니야. 이 자식, 터무니없는 괴물이다.'

아니, 괴물이라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신적인 존재.

'이번에는 운이 좋아서 저 기억 속에서 탈출할 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편법이었어.'

이딴 편법이 없었다면.

나는 저 녀석의 공격을 결코 이겨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이 편법이 있었더라도 마찬가지다.

저 녀석이 조금만 더 강한 힘을 발휘했다면.

나는 저 환상을 베어 내지 못했겠지.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저런 녀석에게 적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겠지.'

신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

저 녀석의 전공은 이 [후회]와 관련된 이능 쪽인 듯하지만.

아마 이런 이능을 제외한 순수한 힘 역시 나 따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대할 방법이 없지는 않을 거야.'

애초에.

그런 방법 같은 게 아예 없었다고 한다면.

이렇게 녀석에게 적대한다는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실제로.

저 하얀 공간에서 미리내와 마주했을 때.

난 그런 존재를 잘못 거스르면 큰일이 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조심스럽게 행동했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일단 사는 게 중요하니까.'

정말 답도 없는 적이라고 한다면.

일단 무릎부터 꿇고 목숨 구걸이나 했을 것이다.

나보고 아들이 되라고?

자존심이고 뭐고 내팽개친 채 '네 엄마!'라고 했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저 녀석의 눈치 따위는 보지 않고.

오히려 녀석의 화만 돋우었다.

방금 내가 당한 공격도 그렇고.

저 녀석이 가지고 있을 힘을 생각하면 꽤나 위험한 행동일 수도 있지만....

아무 생각도 없이 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이 녀석을 보는 데 부담이 없었어.'

저 녀석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던 병사들과는 달랐다.

나 역시 모르잔의 기억 속에서 마주한 존재를 바라보았을 때는 뇌가 터져 죽을 뻔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내가 그때보다 강해져서... 도 있기는 하겠지.'

[40레벨]은 격을 넘는 기준이라고 했으니.

'모르잔'의 기억을 보았을 때의 30레벨 초반대 시절과는 달라진 셈이긴 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모르잔의 기억 속에서 본 그 괴물보다 훨씬 작다.'

더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이것.

'모르잔보다도, 벨스니켈보다도, 다스무르보다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저 녀석은 분명 강대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훨씬 작아.'

아마도.

30레벨 정도 되는 각성자라면 충분히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존재일 것이라고.

'저 녀석은 내가 지금까지 본 이들에 비하면 작은 존재다.'

아마도 신격이니 뭐니 하는 이들 중에서는 격이 낮은 축에 속하는 존재.

나를 숨겨 준 미리내의 공작을 코앞에서 보았는데도 눈치채지 못한 점을 보면.

자신이 신선들 중에서는 별거 아니라고 했던 미리내보다도 격이 낮을 확률이 높았다.

'미리내는 이 땅에서 자신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매개체가 필요하다고 했다. 저 바깥 존재들의 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자격을 갖춘 것은 나뿐이라고도 했지.'

녀석이 내게 무슨 짓을 해 올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지금 저 녀석의 힘은 장영웅을 매개체로 행사되고 있는 거다!'

30레벨 중반대의 그는 매개체로써의 자격이 부족하다.

실제로 저 반복을 계속하던 장영웅의 얼굴은 초췌해져 있었다.

'녀석이 발휘할 수 있는 힘에도 분명히 한계가 있을 거야.'

내가 저 녀석의 공격을 찢고 탈출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 덕분일 것이다.

저 장영웅을 상대로 싸울 때.

이 서울을 무차별로 파괴했던 것 역시 마찬가지.

그 파괴가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복구에 드는 힘 역시 커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별거 없다고?}

저 녀석을 토벌하는 것까지는 불가능하겠지만.

최대한 녀석의 힘을 크게 소진시킴으로써.

그 한계까지 끌어내릴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더 보여 주도록 하지.}

어떻게 해 볼 구석이....

없지는 않을 것 같거든.

439화 김 중위 (1)

{네놈이 나름의 재주가 있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대모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그 분노의 여파만으로도.

주변에서 거대한 진동이 인다.

{네가 품은 힘은 결국은 한없이 작은 것. 네 목표가 아무리 높은 곳에 있다고 한들, 지금은 아주 미비한 것이지.}

아니, 아니다.

처음에는 저 대모의 분노로 인해 땅이 흔들리는 것이라 생각했으나.

나는 잠시 뒤에야, 이 진동이 일어나는 곳이 따로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결국 지금의 네놈은 한낱 필멸자. 그 한계 또한 명확한 법일 테니.}

나는 그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한계 속에 파묻혀라. 벌레 같은 것.}

그러자.

그곳에 보이는 건.

"또냐?"

전차와 군인들.

이곳에 와서 계속해서 상대했던 지긋지긋한 적들이었다.

'말은 번지르르한데. 결국 물리력으로 찍어 누르겠다, 이거 아냐?'

그렇다면.

오히려 내 쪽에서는 편하다.

이상한 이능을 발휘하는 것보다는, 물리적으로 물리칠 수 있는 쪽이 조금 더 상대할 만하니까.

"...아니, 잠시만."

하지만, 잠시 뒤.

나는 이게 그리 간단히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군대가 오는 건 알겠는데."

지금까지 싸웠던 수도방위사령부의 군인들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왜 저기서 와?"

그 병력들이 오는 곳이.

서울 쪽이 아닌....

'강원도.'

내가 왔던 바로 그곳.

강원도 방면이었다는 점이었다.

* * *

대한민국 국군의 전력은 의외로 꽤나 강한 축에 속한다.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군사력을 가진 국가가 한국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대한민국의 군사력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육군 전력이었다.

당연하지만.

이렇게 강한 군사력을 유지해야만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저 북쪽에 자리 잡은, 명백한 적국을 경계하기 위해서였으며.

그렇기에.

그 강력한 육군 전력의 대부분은 적국과의 최전선.

즉.

'강원도.'

강원도에 몰려 있었다.

그리고 지금.

[서울을 점거한 적을 토벌하라!]

"돌겠네 진짜."

그 강력한 대한민국 국군 전력 대부분이 모여 있는 강원도에서부터.

엄청난 숫자의 병력이.

나를 노리고 남하해 오고 있었다.

투두두두두두....

저 멀리 보이는 것은 엄청난 속도로 접근해 오는 전투 헬기들.

그뿐만이 아니라.

파아아아앙!

제대로 보기조차 힘들 정도의 속도로 하늘을 가로지르고.

그 궤적을 하늘 위에 그대로 남기는.

'전투기까지.'

평범한 인간으로는 절대 대항할 수 없다고 평가받는.

공중 전력들까지.

이제야.

저 대모가 저리 자신만만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모]는 후회... 즉, 과거를 다루는 신격이다.'

그렇기에.

녀석이 나를 상대로 꺼내는 것 역시.

'과거의 모든 군부대.'

만약 우리나라의 국군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면.

대모가 과거에서 꺼내 들 수 있는 전력 역시 별거 없었겠지만.

"...뭔 놈의 군사력이 이렇게 강해서는!"

지금은 아니었다.

장영웅이 우리를 공략할 때, 서울의 수방사가 나설 수 있었던 것처럼.

대모가 조금 무리해서 힘을 발휘한다면.

강원도의 군인들을 재현시켜, 나를 토벌하는 데 쓰는 것도 가능하단 얘기였다.

'반대로 말하면, 저 힘 역시 장영웅을 매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다.'

물론.

대응법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한계는 있을 거야. 최대한 버티면서 그 한계까지 몰아넣기만 하면 된다.'

저 군대를 없앨 때마다.

장영웅의 힘이 소비될 것이고.

이 도시를 파괴할 때마다.

장영웅의 힘이 깎여 나갈 테니까.

아마 그 한계까지 많이 남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장영웅의 얼굴은 꽤나 초췌해져 있었으니.

문제가 있다면.

"나도 한계가 있단 말이지...?"

아무리 녀석에게 한계가 있다고 한들.

나 혼자 저 공격을 버텨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나는 비전투직.

이딴 일을 하는 건 내 전문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답은 하나.

내가 비전투직이란 게 문제라면.

전투의 전문가.

"전 부대원! 전투 준비!"

내 부대원들.

이럴 때를 위해 전력을 다해 키워 왔던.

나의 군단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나.

"...전 부대원?"

...그런데.

"...얘들아?"

나는 고개를 돌려.

부대원들이 있을 장소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

눈을 감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부대원들의 모습이었다.

* * *

"설마."

쓰러져 있는 부대원들.

그 모습을 본 나는 머리가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그야.

나한테도 저런 고통스러운 환상을 보여 주었던 대모다.

그녀가 그런 힘을 나한테만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니.

'다른 부대원들도...!'

다른 부대원들 역시.

저 대모의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

"하, 하핫... 나를 따라와."

"이, 이쪽으로 가면... 식량이 비축된 장소가...."

나는 쓰러진 병사들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눈치챌 수 있었다.

대모의 공격에 당한 것은 같지만, 나와는 조금 달랐다.

굳이 따지자면.

"장영웅이 당한 것과 비슷한 건가...."

내 부대원들은 지금.

자신들이 후회한 일들을 바로잡는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기는 했다.

부대원들이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였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당한 것이야.

식칼에 신력을 담아 휘두름으로써 어떻게든 빠져나올 수가 있었지만.

저 녀석들한테 칼을 휘두를 수도 없는 일이다.

"요리... 라면 효과가 있기는 하겠지만."

나는 이를 까득 문 채 중얼거렸다.

"이런 때 효과적인 힘은 아니야."

이들은 저 [대모]가 건 힘에 의해 잠들어 있는 것이다.

내 요리라면 거기에 나름대로 저항할 수는 있겠지만.

'[특별소스]는 감정을 다루는 힘이지, 행동을 강제하는 힘은 아니다.'

요리에 '현실을 직시하고 싶은 감정'을 넣는다거나.

혹은 '후회를 털어 낼 수 있는 감정'을 넣는다면.

어느 정도 저 대모가 보여 주는 환상에 저항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거기까지.

'결국은 감정에 불과하다.'

저런 상태에서 깨어날 수 있을 정도의.

그런 강제력을 부여하기는 힘들었다.

'방법이... 없지는 않은데, 그걸 여기서 써야 하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방법이 없지는 않았지만.

하나같이 너무나도 한정적인 힘들.

최대한 아껴 놓아야만 하는 힘들이라는 점이 걸렸다.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되는데.

그 버티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

"...제기랄.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아껴야만 하는 힘을 풀어서라도 이 상황을 해결하고자.

그리 마음먹었을 때.

"끄으으응...."

"...!?"

저 멀리서.

누군가가 몸을 일으키는 것이 느껴졌다.

"어, 어떻게?"

흠칫 놀라며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후우우. 겨우 탈출했나."

"당신, 대체 어떻게!"

그곳에 있는 것은.

"어떻게 깨어나신 겁니까. 김 중위님...!"

김현석 중위였다.

* * *

바닥에 쓰러져 있는 병사들.

그들은 저 [대모]가 보여 준 환상에 잠겨 있었다.

과거의 모든 실수들을 되돌릴 수 있는.

말도 안 되게 달콤한 유혹.

그 달콤한 광경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조차 거절하게 만든 채.

저리 깊은 잠에 빠지도록 만든 것이겠지.

하지만.

단 한 사람.

"어떻게 일어나신 겁니까, 김 중위님...?"

"...후우! 미안한데, 머리가 아파서 잠시만."

김현석 중위.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저 대모의 환상을 스스로 이겨 내고 눈을 뜬 것이다.

내가 무슨 수를 쓴 것도 아닌데.

자력으로.

...대체 어떻게?

"대단한 건 아니다. 그냥...."

"그냥?"

"저 이상한 괴물이 나타났을 때, 혹시 몰라서 미리 스킬을 발동해 뒀을 뿐이야."

"...아!"

식은땀을 닦아 내며 몸을 일으키는 김 중위.

그가 말하는 스킬이 무엇인지는 나도 알았다.

[기대 부응]

남들이 생각하는 김 중위의 능력을 실제로 발휘할 수 있게 되는 힘.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 바깥 존재의 간섭을 이겨 낼 수 있을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저 환상은 내가 후회하고 있는 일들을 보여 주고, 그 모든 후회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같더군. 확실히 꽤 달콤한 유혹이었어. 하지만... 공략법이 없는 건 아니었어."

내가 당한 환상 역시 공략법은 존재했다.

[대모]는 후회라는 감정을 다루는 존재.

그 후회를 털어 내는 것이, 내가 당한 공격에서 벗어나는 방법이었겠지.

그리고.

지금 부대원들을 잠재운 환상을 이겨 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냥, 그 환상을 벗어나고 싶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

환상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스스로 그리 생각하는 것이었다.

'말이 쉽지...!'

대모가 저들에게 보여 주고 있는 환상은 아마도 장영웅에게 보여 준 것과 동일한 것일 테지.

그들을 과거로 돌려보내, 후회하고 있던 모든 일들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는 것.

'말도 안 되게 달콤한 환상이었을 거다.'

그리고.

사람의 정신이란 그 사람이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달콤한 환상 속에 빠졌을 때.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까지는 할 수 있을지언정.

벗어나야겠다는 결단을 내리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당한 공격을 이겨 내는 방법이, 후회를 털어 내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음에도.

그렇게 털어 내고 싶다고 해서 털어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저 칼날에 신력을 담아 휘두르는 편법으로 탈출한 것이다.

그런데.

"과거는 과거일 뿐. 굳이 고칠 필요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과거를 고치는 일 따위 의미도 없으니, 현실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리 생각하니 이렇게 자연스럽게 눈이 떠지더군."

"...맙소사."

김 중위는.

나조차 포기한 그 정석적인 파훼법으로 저 환상을 이겨 냈다는 것.

"아, 아니. 그 방법이 먹힌 건 그렇다 쳐도, 저게 환상이란 건 어떻게 알아채신 겁니까?"

나야 [신력]으로 뇌를 보호하고 있었기에 대모의 간섭을 이겨 낼 수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저 환상이 가짜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장영웅 역시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이 가짜라는 것을 내가 알려 주기 전까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지금 누워 있는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

그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것이 달콤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 따위 추호도 눈치채지 못한 상태겠지.

"그것도 스킬의 효과야."

"예?"

"군단의 장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고평가되고 있는 건지... 나조차도 어이가 없을 정도더구나."

그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한 것이었다.

"군단의 장쯤 되는 인물이라면, 어지간한 정신 간섭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이겨 낼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로 여겨지는 모양이더군."

"...아."

"이 스킬이 발동하는 동안, 나는 대부분의 정신 간섭에 면역이 되는 것 같다. 그전까지 걸려 있던 모든 간섭도 마찬가지지. 정확히는 정신력으로 이겨 낸다는 느낌이긴 하지만."

강철군단의 장이라는 위치.

이 멸망한 세계에서 이만한 세력을 이끄는 이라면.

어지간한 정신 간섭 따위는 씹어 먹을 정도의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로 여겨진다는 것.

그 말에.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무슨 그딴 개사기 스킬이."

"내가 생각해도 그래. 아무튼...."

김 중위가 주변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황이 좋지는 않은 것 같은데.

"...예. 그렇게 됐습니다."

적들은 곧 우리를 공격할 수 있는 거리에 도착할 것이다.

반면 우리 쪽의 방어 태세는 갖춰지지 못한 상태.

'...어쩔 수 없지. 김 중위한테는 보일 수밖에.'

김현석 중위가 눈을 떴다는 사실이 놀랍기는 했지만.

일단 저들에게 대응하는 게 먼저였다.

"나와라."

-예.

콰앙!

나는 그림자를 발로 차면서 말했다.

그러자.

"흐으음...!"

그 안에 있던 병력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머리가 조금 아프네요."

"문제가 있는 수준이냐?"

"아뇨,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무래도 무언가가 저희의 정신에 간섭하려고 하고 있는 듯한데... 아시잖아요?"

그림자 속의 친위대.

그리고, 그 친위대의 수장.

아리엘라는 가볍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 어떤 간섭도, 권속의 맹약보다 위에 있지는 못한다는 것."

저 대모는 이 녀석들에게도 환상을 보여 주고 꼬드기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나와 권속의 맹약으로 묶여 있는 상황.

'아리엘라를 벙커에 묶어 뒀던 정체불명의 목소리도 이 맹약을 이기지는 못했다.'

저 군부대에 나타난 다른 괴물들처럼.

아리엘라는 그 벙커를 떠나선 안 된다는 정신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그 강력한 정신 지배조차 이 맹약을 맺는 순간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뭐든 명령해 주시길."

후회고 정신 간섭이고 뭐고.

이들은 내 권속으로서 내 명령에 따르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것.

"할 일은 간단하다. 몰려오는 군인들을 최대한 막아."

"으음, 주인님?"

"왜."

"상황을 보니, 저 전사들은 이 나라가 원래 보유하고 있던 병력들을 재현한 것 같은데...."

그런 내 명령에.

아리엘라는 살짝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이 땅의 지식이 어느 정도 있으신 건 아시죠?"

"알아. 사람들의 피를 마시면서 얻은 지식이 있다며."

"저 병력이 제 머릿속에 있는 지식대로라면... 저희만으로 막아 낸다는 건 좀 어려울 수도 있답니다?"

그야 당연하다.

한 여단 정도도 아니고, 전국에 퍼져 있는 모든 군부대의 구현.

나와 부대원들이 수방사를 상대로 분투했다고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수도방위사령부라는 국군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이들이었으며.

그마저도 전멸한 군부대를 김명환 중장이 억지로 다시 살려 낸 것에 불과했다.

수방사는 어디까지나 수도의 방위에만 치중한 이들.

수방사가 보유한 전력은 사실 국군 전체로 따지면 극히 미미했다.

그리고.

각 국가가 보유한 대부분 전력은 국경의 경계에 서는 법.

강원도에서 내려오고 있는 저 군인들은.

저 악의에 의해 갑자기 각개 격파되지만 않았더라면 지금까지도 건재했을 이들이었다.

"저도 저 경기도에서 새롭게 얻은 아이들도 있고, 지금은 귀족의 시간... 밤이기도 하니 꽤 오래 싸울 수는 있겠지만."

"그래. 해가 뜨는 시점부터는 더 버틸 수 없게 되겠지."

밤의 귀족은 결국은 밤의 귀족.

밤이 아니게 되는 순간, 녀석들은 국군의 화력에 속수무책으로 밀려 버리고 말 것이다.

"상관없어. 일단 버티기만 해라."

"...뭔가 방법이 있으신가 보네요? 그러시다면야."

쿠우웅 하고.

붉은 눈의 괴물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인간의 군대를 막기 위해 나선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방법이라.'

솔직히 말하면.

방금 전까지는 제대로 된 방법 따위 없었다.

나름대로 저항을 해보긴 했는데 말이지.

설마 저딴 식의 무력 시위도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김 중위님."

"그래."

"준비하십쇼."

지금의 김현석 중위는 남들이 생각하는 군단장에 어울리는 능력을 갖춘 상태.

그리고, 그렇다면.

"그러마."

진짜 군단장인 내가 생각한 부분을 떠올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병사들은 다 쓰러져 있고.

남아 있는 것은 나와 김 중위 둘 뿐인 상황.

그리고.

이 상황을 이겨 낼 방법이라고 해 봐야.

"요리겠지?"

정해져 있는 거 아니겠냐.

440화 김 중위 (2)

타악!

"이 화구 좀 저쪽에 설치해 주십쇼."

"그래."

나는 그림자 속에서 도구와 재료들을 꺼내 든 뒤.

곧바로 요리 준비에 들어갔다.

'간만에 전력을 다한 요리.'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이 재료들 저기 냇가로 가서 씻어 주세요."

"그래!"

김 중위의 도움을 받아 가며.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갖췄다.

화륵.

파아아악!!!

불이 켜진 화구 위에서 요리가 시작된다.

[야전 취사]의 효과로 인해.

전장에서의 내 요리 속도는 터무니없이 빨라진다.

[보조 셰프]들도 바쁘게 하늘을 누비고 있는 상황.

아마 이 요리 역시 금방 끝낼 수 있겠지.

"...김 중위님?"

"어. 다음은 뭘 하면 되지?"

내 예상대로라면.

아마 요리는 충분히 제시간에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더 하실 건 없는데,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음?"

그 요리를 하는 사이에.

짚고 넘어가고 싶은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아까 말씀하셨죠. [기대 부응]을 발동한 김 중위님의 정신력은 어떤 정신 간섭도 이겨 낼 수 있는 수준이라고."

"그랬지."

"심지어는, 과거에 걸린 간섭도 이겨 낼 수 있다고도 하셨고요."

"그래, 맞다."

말도 안 되는 사기 스킬이지만.

저 [대모]의 환상을 스스로 이겨 낸 것을 보면, 의심할 여지도 없는 사실이겠지.

"그러면 말입니다. 그 정신 면역이라는 거."

그리고,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

저 [대모]가 우리 부대원들에게 정신 간섭을 걸어오기는 했지만.

사실.

"제 요리의 효과도... 포함되는 겁니까?"

"...."

우리 부대원들의 정신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은.

[대모]가 아닌, 나였다는 점.

그리고.

"제가 김 중위님한테 먹인 요리도 마찬가지인 거 아닙니까?"

김현석 중위는.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정신 간섭을 당했던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혹시나 해서 한 질문이었지만.

"뭐... 그렇지."

그런 내 생각은.

아무래도 적중했던 모양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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