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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0-490

480화 당분간은 좀 편할 거다. (1)

동부 지역을 침략한 델파인군 5군단장 칸도레 백작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동부는 가장 먼저 전쟁이 일어난 지역이었다. 그러다 보니 왕국군과 연합군이 가장 빠르게 움직였고, 다른 지역보다 연합군의 수가 많았다.

5군단은 그들을 열심히 격파하고 수도로 향했지만, 마지막 방어선을 남겨 두고 보급로가 위협에 처한 것이다.

"굉장히 거슬리는군."

5만으로 시작했던 군세는 몇 번의 전투를 거치고 아멜리아에게 기습을 당한 탓에 4만으로 줄어 있었다.

여전히 많은 수이긴 하지만 남은 방어선도 만만치가 않았다. 동부로 이동했던 왕국군과 연합군이 죄다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최소 2만은 모여 있을 텐데...."

전력을 기울여서 쓰러뜨려야 하는데 레이폴드군이 뒤에서 알짱거리니 마음 편히 진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5군단은 진군을 멈추고 계속 전략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일단 보급로를 안전하게 만드는 게 어떻겠습니까? 공작가에서 후속 지원을 기다리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방어선은 더 강해질 겁니다. 지금도 연합군들이 오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들은 수도와 북부에서 편히 보급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 이대로 진군하기에는 위험합니다. 방어선을 뚫어도 보급로가 막히면 소용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공성 병기도 없이 4만으로 카르데니아를 점령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군단도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까? 수도만 포위하면 보급은 다른 쪽을 통해서 받을 수 있습니다."

"이미 2군단은 북부군에게 패배했다지 않습니까? 북부군이 어디로 움직일지 모릅니다."

"3군단과 4군단의 정기 연락이 끊겼습니다. 분명 무슨 일이 난 겁니다."

참모들끼리도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출정했지만 현재 상황이 무척 좋지 않았다.

칸도레 백작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북부군이 너무 강해."

북부군을 치기 위해 움직였던 2군단이 패배했다고 한다. 병력도 가장 많고, 무려 세 명의 초인까지 합류했는데도 말이다.

북부군 때문에 다른 군단들마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허, 그 애송이가 이렇게 커서 전쟁에 지대한 영향을 줄 줄이야."

칸도레 백작은 어이가 없다는 듯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겨우 군대 하나 때문에 눈치를 보고 있게 되다니. 전쟁 전에는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레이폴드 백작도 문제야."

적대 세력은 방어선에 전부 모였다고 생각해 진군 속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주변을 모두 정리했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그런 와중에 우회해서 온 레이폴드군에게 기습당하니 피해가 상당했다.

심지어 그들은 방어선에 합류하지 않고 후방 영지에 떡하니 죽치고 있었다.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치러 가는 것도 좋은 수가 아니고...."

레이폴드군은 약 1만 정도였다. 맞상대하면 얼마든지 이길 자신이 있지만, 기습하고 바로 도망을 간 사람이 대놓고 붙어 줄 리가 없다.

작정하고 도망 다니면 4만으로는 따라잡기 힘들다. 침략군인 자신들 입장에서는 유인하기도 힘들다.

병력을 나눠 보급로를 지키는 방안도 생각해 봤지만 그러면 방어선을 뚫기가 힘들어진다. 뚫어도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병력을 나눌 시간도 없었다. 언제 북부군이 당도할지 모른다.

"거슬려, 너무 거슬려."

칸도레 백작은 정말 미칠 거 같았다. 이렇게 고민하는 사이에도 적들의 방어선은 더 단단해질 것이다.

정말 지셀이고 아멜리아고 둘 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칸도레 백작은 며칠이나 고민만 했다. 그 와중에도 레이폴드군이 영지 하나를 더 차지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면서도 계속 보급로 주변에서 맴돌며 위협을 가하고 있단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어야 하니 더 환장할 지경이었다.

보급로를 제대로 확보하려면 공작가에서 대규모 군대를 보내 줘야 한다.

'전령을 보내 추가 지원을 요청해야 하나....'

그렇게 고민만 하면서 속만 끓이고 있을 때, 피투성이가 된 전령들이 달려왔다.

"3군단이 전멸했습니다!"

"뭐?"

"펜리스 백작에게 기습당해 전멸했습니다! 일부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칸도레 백작이 분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북부군은 다른 지역에 있었는데! 어떻게 2군단과 싸운 북부군이 3군단을 전멸시켰다는 말이냐!"

"사, 사실입니다! 정말 펜리스 백작이 친 게 맞습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를 갈던 칸도레 백작이 조금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북부군은 우리랑 상당히 멀리 떨어졌다는 뜻 아니냐?"

그렇다면 아직 시간이 있다. 차라리 이 기회에 서쪽으로 이동해서 4군단과 합류하는 게 나을 거 같았다.

4군단의 보급로를 쓸 수 있고, 병력 규모가 커지니 이득이다.

4군단의 팔가우 백작과 같은 생각을 한 칸도레 백작이 기쁜 표정으로 외쳤다.

"좋다! 이 지역을 포기한다! 일단 상대 전력이 예상보다 강하니 당장 4군단과 합류를...."

"4군단이 전멸했습니다!"

또 다른 전령 하나가 이번에도 피투성이가 된 채 달려와 울부짖었다.

"...."

칸도레 백작은 잠깐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 무어라 했느냐?"

"4군단이 전멸했습니다! 군단장님도 펜리스 백작에게 당해 전사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칸도레 백작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2군단을 박살 내고 3군단도 전멸시켰다더니 이제는 4군단까지?

미친 소리가 연달아서 들려오니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북부군 놈들은 어디 날개라도 달렸단 말이냐!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느냐! 펜리스 백작이 무슨 세 명이나 되는 것도 아니고!"

"사, 사실입니다! 펜리스 백작이 맞습니다! 펜리스 백작이 4군단장님을 직접 죽였습니다!"

"으, 으으으으...."

"그, 그리고...."

"그리고 뭐! 또 말할 게 남아 있느냐!"

"부, 북부군이 동부로 오고 있습니다."

"뭐라고?!"

"거기에 왕국군 총사령관이 이끄는 2만 5천의 군대도 함께 이쪽으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

칸도레 백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이 안 된다. 어찌 인간의 군대가 그리 빠를 수가 있다는 말인가. 역사상 그 정도의 기동력을 보여 준 군대는 없었다.

쉬지 않고 달리면 가능하기야 했다. 그래도 사람이 밥은 먹으면서 움직여야 하지 않겠는가.

식량은 도대체 어떻게 챙기고 움직인다는 말인가. 무슨 언데드들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칸도레 백작은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곧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가 정말 무서운 놈을 적으로 만든 거 같구나."

펜리스 백작 본인이 초인인 걸 떠나서, 그 기동력 하나만으로도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군대가 어디서 나타날지 알 수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북부군이 전부 그렇게 움직일 수는 없다. 아무래도 펜리스 백작은 따로 정예병만 추려서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모든 군단이 다 괴멸될 줄이야.

'괴물.'

두렵다. 자신으로서는 절대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쓱한 표정으로 넋이 나가 있던 칸도레 백작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퇴각 준비를 해라."

"...."

참모들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북부군에 왕국군까지 오고 있다니. 5군단의 4만 병력으로는 이제 수도를 포위하기는커녕 살아남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퇴각하려면 지금뿐이었다.

5군단은 그렇게 퇴각을 결정하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으면 손도 못 쓰고 패배할 게 뻔했다. 지금이라도 퇴각해 병력을 보존해야만 했다.

'쯧... 살아도 치욕이겠구나....'

모든 군단이 당했으니 어느 정도는 정상 참작이 될 것이다. 어쨌든 왕국군과 연합군은 계속 밀어붙였으니까.

단지 펜리스 백작이 너무 대단해서 문제일 뿐이었다.

"빨리 움직여라. 펜리스 백작이 움직이는 속도를 보면 당장 내일 올 수도 있다."

퇴각하기로 결단을 내리고 나니 마음은 더 급해졌다. 4군단은 중부 지역이다. 언제 펜리스 백작이 또 따로 군사를 이끌고 올지 모른다.

"쓸모없는 건 다 버려라! 행군에 방해가 되는 건 챙기지 마라!"

이제부터 전속력으로 후퇴해야 한다. 5군단은 남부 지역까지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보급만 남겨 두고 모든 걸 버렸다.

퇴각 준비를 지켜보던 칸도레 백작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펜리스 백작 하나가 무서워서 이렇게 도망을 가야 한다니.

'이 수모는 내 언젠가 꼭 갚고 말 테다.'

칸도레 백작은 하늘을 바라보며 전의를 가다듬었다. 문득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재수 없게 웬 까마귀가...."

시체도 없는 곳에 까마귀 하나가 하늘을 빙빙 돌고 있었다. 괜히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쯧, 내가 겁을 많이 먹은 모양이구나."

고작 까마귀 하나를 보고 불길한 마음이 들다니, 마음이 많이 약해진 모양이었다.

그렇게 사기가 떨어진 채로 5군단은 남부로 다시 방향을 틀었다.

호시탐탐 보급로를 노리던 레이폴드군은 5군단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에... 저놈들 무척 빠르게 퇴각하는데요? 물자들도 다 버린 거 같습니다."

정찰병의 보고를 받은 베르나프가 말하자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정도면 명분상 할 만한 건 다 한 거 같네. 영지를 더 먹지 못한 건 아쉽지만."

아멜리아가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북부군과 맞붙어서 시간을 더 끌기를 바랐건만 5군단이 이렇게 빨리 포기할 줄이야.

"뭐, 나쁘지 않은 판단이야. 지셀 그놈의 속도가 보통이 아니니까."

아멜리아도 그간의 보고를 받고 내심 놀랐다. 지셀이 전쟁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는 건 그간 들은 정보로 알았다.

서부 침공을 할 때도 기동력을 중시했던 지셀이다. 그런데 제대로 마음먹고 움직이니 그때보다 훨씬 더 빨랐다.

'알면 알수록 대단한 놈이구나.'

인정하기는 싫지만, 지셀의 전쟁 수행 능력만큼은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공작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군.'

향후 공작가의 움직임을 보고 전력이 얼마나 소모됐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도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아멜리아가 말했다.

"우리도 돌아가자. 이번에 차지한 '우리 영지'들을 빠르게 수습해야지."

"저기... 다른 영주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어쩔 거야? 내가 차지했는데. 이미 총사령관하고 다 합의한 거라고."

아멜리아가 만면에 비웃음을 띠었다.

이제 그녀도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레이폴드의 물자들을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소식을 알리고 이주 준비를 해."

북부 내에서는 지셀 때문에 더 이상 세력을 키울 수가 없었다. 마음 놓고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방안을 강구했고 기어코 전란을 이용해 새로운 기반을 만든 것이다.

그것도 기존 영지보다 훨씬 더 크게 말이다.

"아, 맞다. 5군단이 버리고 간 물자들부터 회수해. 양이 상당할 테니 우리가 알차게 쓰자고."

"알겠습니다!"

베르나프가 힘차게 군례를 올렸다. 아무튼 아멜리아가 하자는 대로 하면 다 잘 된다.

냐앙!

그 모습을 본 바스테트가 비웃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울었다.

* * *

5군단은 가능한 한 최고 속도로 움직였다. 물자도 거의 다 버리고 와서 가능한 일이었다.

"곧 남부 경계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음."

부관의 보고에 칸도레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지쳐 있긴 하지만 무리한 덕분에 무사히 이동할 수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처음에 싸웠던 남부 전선이었다. 그곳만 넘어가면 공작가의 영역이니 안전할 것이다.

"식량은?"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곧 도착할 수 있으니 병사들도 참을 겁니다."

"그래...."

칸도레 백작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적이 무서워서 식량까지 버리며 꽁무니를 뺐다. 그 탓에 가뜩이나 지친 병사들이 다 굶어야 했다.

병사들을 굶기는 건 훌륭한 지휘관이라 할 수 없다.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잔뜩 지친 5군단이 다시 움직였다. 그들을 버티게 하는 건 곧 도착할 거란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 희망도 안 좋은 소식이 들어오자 깨져 버렸다.

"페, 페, 펜리스군이 앞에 있습니다. 수, 수는 약 2만 정도입니다."

척후병이 사색이 되어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보고를 받은 칸도레 백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무슨 소리냐. 펜리스군이라니? 북부군이 아니라?"

"네. 펜리스의 깃발만 있습니다. 아무래도 펜리스 백작이 따로 움직인 거 같습니다."

"...."

칸도레 백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물자까지 버리고 바로 퇴각했는데 어떻게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

"우, 우리 쪽에 첩자가 있는 게 아니냐?"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 참모들은 아무런 말도 못 했다. 행군 중인 군대에 첩자가 어떻게 왔다 갔다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펜리스 백작이 먼저 와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떻게 움직임을 모두 알고 있을까?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는 느낌이었다.

"군단장님, 전투를 준비해야 할 거 같습니다."

"피할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침울한 말에 칸도레 백작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굶고 지친 병사들을 데리고 전투를 하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면 방법이 없었다. 이 대군이 펜리스 백작의 추격을 뿌리칠 수는 없을 것이다.

문득 출발하기 전 봤던 까마귀가 생각났다. 어쩐지 찝찝하더라니.

"정말 안 좋은 상황이 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배불리 먹고 힘을 비축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전투를... 준비해라...."

그냥 죽을 수는 없다. 어떻게든 싸워 이겨야 한다.

그 무시무시한 군대에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긴장된 표정으로 대열을 갖추었다. 특히 병사들의 공포가 가장 컸다.

지치고 굶어서 몸에 힘도 없는데 왕국에서 가장 무서운 군대와 싸워야 한다니. 수가 더 많음에도 벌써 짙은 패배감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그 공포는 저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는 군대를 보고 더 커졌다.

"저, 저게 펜리스군...."

"펜리스 백작... 불패의 군주...."

"저, 정말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펜리스의 깃발만 보고도 병사들은 술렁거렸다. 그 공포는 빠르게 주변으로 전염되었다.

평소였다면 호통을 치고 병사들의 전의를 북돋울 칸도레 백작도 가만히 있었다.

그 또한 앞에 다가오는 저 군대에 압도되어 있었으니까.

다그닥, 다그닥.

흑왕을 탄 지셀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앞에서 전투를 준비하는 델파인군을 보며 미소 지었다.

"공격할 때는 마음대로였지만 후퇴할 때는 내 허락을 받아야지."

전생에 왕국 그 자체였던 공작가와 싸웠던 지셀이다. 그 저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공작가의 전력은 단 한 명이라도 멀쩡히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481화 당분간은 좀 편할 거다. (2)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흑왕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위에 올라타 있는 지셀의 표정도 여유롭기는 다를 게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병력은 비록 두 배나 차이 나지만 펜리스군은 충분히 그걸 감당할 만한 실력이 있었다.

그리고 지셀을 따라 나오는 사람들.

에레네스, 파르니엘, 벨린다, 길리언은 초인에 이른 실력자들이고 카오르 또한 최상급 기사였다.

지셀을 포함해 무려 초인이 5명이나 있는 군대다. 이런 전력을 두었는데, 지치고 사기가 떨어진 5군단이 무서울 리가 없었다.

길리언이 이번에 초인에 올랐다는 걸 알게 된 카오르만은 무척 시무룩한 표정이었지만.

'젠장... 영감보다 먼저 벽을 넘고 싶었는데.'

요새 막혀도 아주 꽉 막혀 있었다. 수련을 조금 게을리한 것도 문제였다. 이럴 때는 그냥 목숨 걸고 싸우는 게 낫다.

푸르륵.

흑왕이 거칠게 투레질했다. 다시 날뛸 때가 왔다고 기대하는 것이었다.

"흠, 오늘은 딱히 머리를 쓸 필요가 없겠군."

지셀이 웃으면서 창을 어깨에 걸쳤다. 상대에 비해 압도적인 공격력이다. 전략 전술이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칸도레 백작은 아직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다들 정신 차려라! 저쪽보다 우리가 두 배는 더 많다! 아무리 펜리스 백작이 강해도! 우리 쪽에도 초인이 있지 않으냐!"

그 말에 지휘관들과 참모들이 정신을 차렸다.

펜리스 백작의 위명과 말도 안 되는 기동력 때문에 주눅이 들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자신들이 현저하게 부족한 전력은 아니었다.

비록 지치긴 했지만 이쪽도 훌륭한 정예병들이다. 왕국군과 연합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한 부대다.

악명을 떨치는 펜리스군보다 개개인의 실력은 떨어지겠지만 수는 무려 두 배다.

참모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원교의 사제분께서 펜리스 백작만 잡아 두실 수 있다면... 우리 병사들이 수가 많으니 충분히 해볼 만합니다."

"그렇습니다. 어차피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겁먹어서 좋을 거 없습니다."

"펜리스 백작이 장기인 기습 공격이 아니라 정면 대결로 온 게 우리에겐 다행입니다."

다들 비슷한 생각으로 열의를 불태웠다.

사실 피하는 게 가장 좋은 수이긴 하지만, 못 피한다고 그냥 죽어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이들에게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죽어라 싸워서 승리하는 수밖에.

델파인군의 지휘관들이 곳곳에 이런 사실을 알렸다. 어떻게든 사기를 끌어올리려는 속셈이었다.

"그래, 어차피 펜리스 백작도 사람이잖아?"

"창에 찔리면 죽는 건 마찬가지라고."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안 졌잖아?"

"붙어 보지도 않고 쫄 필요는 없지!"

델파인군의 기세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들 그냥 죽을 생각은 없었다. 역시 정예병들이라 할 수 있었다.

칸도레 백작도 그런 병사들을 보며 다시 전의를 불태웠다.

"펜리스 백작, 건방진 애송이 새끼. 몇 번 이기더니 콧대가 아주 높아질 대로 높아졌구나. 감히 나한테 정면 승부를 걸어? 그것도 북부군 전체가 아니라 일부 부대만 따로 데리고 와서?"

생각해 보니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지셀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자신은 영주이자 군의 지휘관이었다.

큰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번 기회에 아주 밟아 버릴 생각이었다.

자신은 북부군의 전체 전력이 부담스러워서 피한 거지, 펜리스 백작이 무서워서 피한 게 아니다.

칸도레 백작은 몇 번이나 그렇게 되뇌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사제님께서 반드시 펜리스 백작을 붙잡아 주셔야 합니다. 나머지는 제가 쓸어버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저놈의 거품을 오늘 다 꺼뜨리도록 하지요."

오만한 표정으로 대답한 자는 구원교의 심판관, 그리베일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지셀을 우습게 봤다. 지셀에게 처음 죽은 라비에르는 신학자에 가까운 자였고 다른 이들도 별로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그리베일은 다른 사제들과 조금 달랐다. 그는 젊을 때부터 몸 쓰는 걸 좋아해 여러 전투 기술을 익혔다.

솔직히 아이던과 같은 집행관이 되고 싶었는데 성력의 질이 뛰어나 심판관이 된 것뿐이었다.

"사실 저놈이 무서워서 퇴각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싸우게 되니 참 잘된 일이라 생각이 드는군요."

오만한 그리베일의 말에 칸도레 백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펜리스 백작을 차치하더라도 북부군은 8만의 대병력이다. 거기에 모리스가 이끄는 2만 5천의 군대까지 오고 있다.

앞에는 왕국군과 연합군의 2만 군대가 방어선을 펼치고 있었고 뒤에는 레이폴드군이 보급로를 위협하고 있었다.

사방으로 포위될 판인데 저런 말이라니. 참으로 힘 빼고는 식견이 없는 자였다.

"뭐 꼭... 그 때문만은 아니지요. 병력 차이가 꽤 커서 말입니다."

불쾌했지만 칸도레 백작은 대충 둘러댔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같은 편과 신경전을 벌일 필요는 없었다.

5군단이 그렇게 준비를 끝마칠 즈음, 펜리스군이 가까이 다가왔다.

칸도레 백작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온다! 모두 준비해라!"

철컹! 철컹! 철컹!

델파인군의 전열이 이를 악물며 방패와 창을 내밀었다.

펜리스 기마병의 힘은 유명했다. 저들의 강한 돌격을 막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해야 했다.

천천히 다가가던 지셀은 그 모습을 보고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흐음.... 그래, 그래야지."

전의가 꺾여 대항할 힘조차 없는 적들을 죽이는 건 취향에 맞지 않는다.

저렇게 전의를 불태워야 자신의 마음속 불꽃도 같이 활활 타오르지 않겠는가.

"가자. 저놈들만 밀어 버리면 당분간은 좀 편할 거다."

다그닥, 다그닥, 두두, 두두두두두!

천천히 걷던 흑왕이 조금씩 속도를 내더니 이제는 질풍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지셀의 측근들과 펜리스 기동군도 속도를 올렸다.

두두두두두두두두!

사나운 펜리스군의 기세를 정면으로 맞으며 델파인군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초반의 돌격만 버티면 된다.

마법사들도 마력을 끌어올렸다. 가장 효과적인 거리에서 단숨에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가장 앞서 달려오는 지셀을 향해 그리베일이 뛰쳐나갔다.

파아아아앙!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나간 그가 크게 외쳤다.

"너는 나랑 어울려 보자! 펜리스 백작!"

그리베일이 기운을 끌어올리며 손을 휘저었다. 먼저 말의 목을 날릴 심산이었다.

파앗!

"어?"

그리베일의 공격은 허공을 갈랐다. 흑왕이 크게 뛰어올라 그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웃기는 놈이군."

지셀은 그 한마디만을 남기고 그대로 다시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몸을 돌린 그리베일이 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놈! 어딜 도망가느냐!"

그리베일이 외쳐도 지셀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적진을 향해 돌격하기에 바빴다.

그리베일의 얼굴이 붉어졌다. 감히 자신을 이렇게 무시하다니!

그가 더 많은 기운을 끌어올리며 쫓아가려고 할 때.

드드드드!

땅에서 웬 덩굴들이 올라와 그리베일의 발목을 잡았다.

그의 옆으로 에레네스가 무심한 표정으로 지나갔다.

"뭐야! 이건!"

그리베일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은 덩굴을 끊어내려 할 때.

파아악!

갑자기 그의 주변을 수십 개의 단검이 에워쌌다.

"무슨...."

허공에 떠 있는 단검 하나하나에 오러 블레이드가 서려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기술에 그리베일이 넋이 나간 찰나, 단검들이 움직였다.

카가가가가가각!

"크아아악!"

단검들이 빛처럼 움직이며 그리베일의 몸을 갈랐다.

그는 공간을 가득 채운 공격을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기운을 잔뜩 끌어올려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베일이 단검들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벨린다도 그를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다.

퍼어어어엉!

"으아아악! 이놈들!"

몸 곳곳이 갈려 피투성이가 된 그리베일이 한껏 기운을 끌어올려 겨우 단검들을 하나하나 쳐 냈다.

검은 기운이 일렁이며 상처를 감쌌다. 상처는 금방 회복될 것이다. 자신들이 강력한 이유가 바로 이 회복력에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싸우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웬 거대한 메이스가 눈앞에 나타났다.

"헉!"

콰아아아앙!

가까스로 팔을 들어 올려 막았지만 그리베일은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으지직!

메이스를 막은 팔이 으스러지고 땅을 디디고 있던 다리가 부러져 버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무지막지한 힘에 그리베일은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고 말았다.

힐끗 그를 바라본 파르니엘도 그냥 무시하고 달려 나갔다.

"끄으으윽.... 뭐야! 이놈들 뭐야!"

펜리스 백작에게는 무시를 당했고 순식간에 지나가는 놈들한테는 저항도 못 해 보고 당해 버렸다.

도대체 이놈들은 초인이 몇 명이란 말인가!

"이, 이놈들... 가만두지 않겠다."

다른 사제들과 달리 전투에 자신 있었던 그리베일은 이 상황에 진한 굴욕감을 느꼈다.

이를 갈며 어떻게든 일어나 복수를 하려고 할 때.

두두두두두두!

말을 타고 달려오는 하얀 머리의 중년인이 보였다.

앞선 자들은 누군지 몰랐지만 저자는 눈에 띄는 특징 덕분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얀 머리? 길리언?"

최상급 기사라던 정보와 다르게, 그가 들고 있는 거대한 도끼에는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가 서려 있었다.

깜짝 놀란 그리베일이 기운을 다리에 보내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처럼 곧바로 상처가 회복되지 않았다.

"시, 신성력이었나!"

파르니엘의 신성력이 몸 안에 남아 회복을 방해하고 있었다.

"크아아아! 이놈들이 감히!"

그리베일이 어떻게든 기운을 폭발시키며 신성력을 덮었다. 그 기운으로 부러진 부위들을 감싸며 몸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길리언이 더 빨랐다.

말을 타고 달리던 길리언이 한쪽으로 자세를 낮추며 번개같이 도끼를 휘둘렀다.

콰지지직!

"커억...."

철판이 짓이겨지는 듯한 거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길리언이 휘두른 도끼를 버티지 못한 그리베일의 목이 결국 찢겨 나갔다.

그가 다른 사제들보다 전투 기술이 뛰어난 건 사실이었지만, 다른 사제들이 워낙 실력이 없어서 상대적으로 특출나 보였을 뿐이었다.

수많은 실전을 겪은 이들에게는 그리베일도 힘만 센 애송이일 뿐이었다.

그리베일은 자기객관화를 못 한 죄로 어처구니없이 두드려 맞고 죽은 것이다.

그리베일의 목을 자른 길리언도 더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마지막으로 따라가던 카오르는 할 일이 없었다.

"퉷!"

그래서 그냥 지나가면서 침만 뱉었다. 지금 그의 눈에는 델파인군이고 그리베일이고 보이지 않았다.

"...."

카오르는 분한 표정으로 길리언의 등만 바라보았다.

'영감만 없으면.... 내가 일등...은 아니군.'

길리언이 없어도 일등은 못 한다.

너무 분했다. 벨린다도 그렇고 길리언도 그렇고 이렇게 빨리 벽을 넘을 줄이야.

자신만 뒤처지는 거 같아서 또 마음이 초조해졌다. 이 천성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젠장, 두고 봐. 언젠가는 내가 다 뛰어넘어 줄 테니까!'

카오르는 그렇게 이를 갈며 열심히 말을 달렸다. 이 분노는 일단 델파인군을 박살 내며 풀면 된다.

두두두두두두!

뒤이어 달리던 펜리스 기동군은 모두 웃음을 지었다.

지나가면서 한 번씩 친 것뿐인데 저 무서운 구원교의 사제가 그냥 죽어 버렸다.

이 왕국에 이 정도로 강한 군대가 있었던가? 아니,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없었다.

자신들이야말로 진정 왕국 최강의 군대이리라.

적들이 가까워졌다. 기동군을 앞에서 이끄는 루카스가 크게 외쳤다.

"거창!"

철컹! 철컹! 철컹!

루카스의 외침에 기사들과 기동군 병사들이 창을 겨드랑이에 강하게 고정했다.

이번에는 팔라딘 고든이 우렁차게 외쳤다.

"가자아아아아!"

"와아아아아!"

그의 외침에 펜리스 기동군도 같이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이 내지르는 함성이 전장을 크게 울렸다.

그 어떤 적이라도 단번에 쓸어버릴 듯한 울림이었다. 그 어떤 적이라도 무릎을 꿇릴 듯한 포효였다.

두두두두두두!

다가오는 지셀과 펜리스 기동군을 본 델파인군 병사들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분명 자신만만하게 시작했다.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자신들의 착각이었다.

초인이라 불리는 구원교의 사제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맞아 죽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니기에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지나가면서 그리베일을 공격한 자들이 전부 초인이라는 뜻이다.

침 뱉은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두두두두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델파인군 병사들은 입술을 달달 떨었다.

"이, 이게 북부 최강의 군대...."

"저걸 어떻게 이긴다는 거지?"

"이길 수 없어. 우린 다 죽을 거야."

맞붙기도 전에 모두가 겁을 집어먹고 말았다.

저 험악한 기세를 보라. 단숨에 모든 것을 쓸어버릴 듯한 광폭함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제야 새삼 깨달았다.

이 강력한 군대를 누가 만들어 냈는지.

"지셀 페르디움."

누군가의 중얼거림이었지만 그것은 전염병처럼 번져 갔다.

귀에 꽂히는 그 이름.

왕국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던 델파인의 네 개 군단을 홀로 쓸어버린 자.

두두두두두두!

그가 저 군대의 가장 앞에서 붉은 눈을 빛내며, 사나운 웃음을 지은 채 달려오고 있었다.

방어 대형을 취하고 있던 델파인군은 맞붙기 전부터 결과를 알게 되었다.

자신들은 절대 저자를 이길 수 없다는 걸.

그리고.

히이이이잉!

거친 말 울음소리와 함께.

드디어 그자가 자신들의 앞에 뛰어들었다.

콰아아아아앙!

482화 당분간은 좀 편할 거다. (3)

콰앙! 콰앙! 콰아앙!

"으아아아악!"

지셀이 뛰어들자 델파인군의 중앙 대열은 앞쪽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넋을 놓고 있던 칸도레 백작은 그 광경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법사! 마법사들은 뭐 하는 거야! 왜 공격을 안 하는 거냐!"

마법사들도 모두 잠깐 얼이 빠져 있었다.

믿었던 구원교의 사제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맞아 죽었기 때문이다.

"어, 어서 공격해라!"

마법사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마법을 시전했다. 고서클 마법사들이 섞인 군대답게 강력한 마법들이 뿜어져 나갔다.

두두두두두!

그럼에도 펜리스 기동군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나아갔다. 저 마법을 막을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엔다이론."

콰아아아아!

에레네스가 소환한 물의 상급 정령이 넓은 보호막을 만들었다.

콰콰콰콰쾅!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마법들이 물의 장막에 부딪혀 사라졌다.

"여신이시여!"

콰아앙!

파르니엘이 메이스로 강하게 땅을 내리치자 신성한 빛의 울림이 퍼진다.

쿠쿠쿠쿵!

밝게 빛나는 대지는 땅 밑에서 몰려오는 마력을 막아 내었다.

마법사들은 그걸 보고 경악해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마법이 아니다! 이 기운은 정령과 신성력이야!"

"도대체 저기에 누가 있는 거야!"

마법사들은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도대체 얼마나 강한 자가 왔기에 수십 명의 마법을 이리 쉽게 막아 낸다는 말인가!

마법 공격까지 무위로 돌아가니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입만 벌리고 다가오는 펜리스군을 구경하는 게 전부였다.

훗날 대륙 7강이라 불릴 사람이 세 명이나 모여 있는 군대다. 5군단의 전력으로 막아 내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콰앙! 콰앙! 콰아아앙!

"으아아악!"

지셀은 흑왕과 함께 델파인군의 전열을 유린했다. 어찌나 호쾌하게 싸우는지 델파인군의 진형이 금세 움푹 들어가 버렸다.

그 뒤로 에레네스와 파르니엘, 벨린다와 길리언이 뛰어들었다.

"마, 막아라!"

초인 네 명이 일반 병사들 사이를 활보했다. 중간중간 끼어 있던 델파인군의 기사들이 그들을 막아섰지만 그리 큰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쿠르르릉!

에레네스가 소환한 대지의 정령으로 인해 델파인군의 진영은 곳곳이 무너졌다.

콰앙! 콰앙! 콰아앙!

파르니엘과 길리언이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병사들은 벌레처럼 죽어 나갔다.

카가가가가각!

벨린다의 단검이 사방으로 날아다니며 기사들만 찾아 암습을 가했다.

델파인군의 진형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진 공간으로 펜리스 기동군이 들이닥쳤다.

콰아아아앙!

"으아아아악!"

이미 진형이 무너진 이상 기마 돌격을 막을 수 있는 군대는 없다. 델파인군은 처음에 보였던 전의가 무색하게도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펜리스 기동군은 어떠한 저항도 없이 파고 들어갔다. 그저 나무토막을 넘어뜨리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이건 전쟁이 아니라 그냥 학살이었다.

칸도레 백작은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았다.

"차이가 이 정도란 말인가...."

아무리 자신의 병사들이 굶고 지쳤다 해도 이렇게 무력하게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리 펜리스 백작이 강해도 구원교의 사제라면 싸워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이 착각이 자꾸 펜리스 백작과 싸우게 된 가장 큰 원인이리라.

상대방이 상식 밖의 존재란 걸 모르니까.

콰앙! 콰앙! 콰아앙!

아군 대열 앞에서 날뛰던 검은 말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말 위에 탄 자가 창을 풍차처럼 휘두를 때마다 수십 명의 목이 동시에 날아갔다.

칸도레 백작은 마지막 선택의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여기까지인가...."

하지만 그는 그냥 죽을 생각이 없었다.

콰아아아앙!

폭음이 울릴 때마다 지셀 주변은 휑하게 비어 갔다. 그는 엄청난 파괴력으로 병사들의 숲을 뚫고 전진했다.

지셀을 노려보며 칸도레 백작이 말에서 내렸다. 피를 잔뜩 뒤집어쓴 채 웃으며 달려오는 상대를 보니 저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드드드드드!

지셀도 칸도레 백작을 발견하고 창에 기운을 몰아넣었다.

이제 창을 집어던지기만 하면 칸도레 백작의 머리는 단숨에 박살이 날 것이다.

지셀이 팔에 힘을 주던 바로 그때....

"항복하겠소!"

칸도레 백작이 바닥에 바짝 엎드리며 외쳤다.

"엥?"

지셀이 황당한 표정으로 던지려던 창을 잠깐 내렸다.

지금까지 델파인군 중에서 군단장급의 인사가 항복한 적은 없었다. 그건 전생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겪는 상황에 절로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칸도레 백작은 엎드린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항복하겠다! 모두 멈춰라! 모두 무기를 버리고 엎드려라!"

동시에 델파인군 진영 곳곳에서 같은 외침이 들렸다.

"싸우지 마라!"

"모두 엎드려라!"

"무기를 버려라! 항복이다!"

가뜩이나 밀리고 있는데 항복하라는 명령까지 떨어졌다. 거부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 항복입니다!"

"치지 마세요!"

"무기를 버렸습니다!"

다들 여기저기서 무기를 버리고 엎드렸다. 신나게 파고들던 기동군도 모두 지셀을 바라보며 잠깐 공격을 멈췄다.

전장의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김이 새 버린 것이다.

다그닥, 다그닥.

지셀이 천천히 흑왕을 몰아, 모두가 엎드린 전장을 가로질렀다.

여전히 엎드려 있는 칸도레 백작을 보며 지셀이 입을 열었다.

"자존심 높은 남부의 귀족이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의외로군."

"...굳이 쓸데없는 희생을 늘릴 필요는 없지 않소이까."

"그렇다고 엎드리기까지 할 줄은 몰랐군."

"확실히 보여 줘야 믿을 게 아니오."

"하긴, 그건 그렇지."

혼란스러운 전장 상황에서 이만한 항복 표시는 없긴 했다.

지셀의 목소리에 담긴 열기가 조금 가라앉은 듯하자 칸도레 백작이 슬그머니 일어나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항복하겠소. 관습대로 포로로서 대우해 주시오."

"흐음, 관습대로라...."

항복한 귀족은 그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날 수 있다. 그때까지 정중하게 모시는 게 귀족들 사이의 관습이었다.

지셀이 나타나 이놈 저놈 다 죽이고 패고 다니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왕국에서 관습이고 뭐고 모두 때려 부수기로 유명한 사람이 딱 둘 있으니, 한 명은 찬탈자 아멜리아였고 다른 한 명은 눈앞에 있는 북부의 망나니 지셀이었다.

즉, 칸도레 백작의 요구는 통하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는 뜻이다. 그도 그건 잘 알고 있었다.

칸도레 백작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봉신들은 모두 가족들이 공작가에 인질로 잡혀 있소. 전쟁을 반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소."

"그러니까 살려 달라?"

"...그렇소. 큰 대우를 바라지 않소. 그냥 최소한의 예우만 해 달라는 것이오."

지셀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칸도레 백작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자도 낯이 익었다. 전생의 기억을 끄집어낼수록 조금씩 선명해졌다.

"칸도레 백작, 맞지?"

"...맞소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애틋한가 보군.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참여한 걸 보면 말이야."

"크흠흠, 누구라도 그러지 않겠소."

"그래, 그렇지. 가족이 인질로 잡히면 그럴 수 있지."

지셀이 몇 번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항복한 사람을 그냥 죽이는 취미는 없어. 그런 건 별로 재미없거든."

칸도레 백작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꼴통이라더니 제법 말이 통하지 않는가?

'이놈, 내가 어떻게든 돌아가기만 하면 꼭 복수할 테다. 이 수모를 반드시 갚을 테다.'

애초에 그런 각오로 후퇴를 결정했었다. 지금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런 굴욕을 감내하는 셈이었다.

칸도레 백작은 속내를 숨기고 말했다.

"참으로 좋은 신념이외다. 그러면 항복 협상을...."

푸욱!

"어?"

가슴을 뚫는 아픔에 칸도레 백작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지셀의 창이 어느새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쿨럭!"

피를 토한 칸도레 백작이 고개를 들어 허망한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왜...?"

항복한 자를 죽이는 취미는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지셀이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너는 아니야."

지셀은 전생에 전쟁을 일으키기 전, 어지간한 귀족들에 관해서는 다 조사를 했었다.

델파인 공작가가 왕국을 차지한 뒤, 칸도레 백작도 공신으로서 상당한 보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 이후의 행보가 문제였다.

가족? 칸도레 백작은 가족에게 아무런 애정이 없었다.

새장가를 가려고 명문가의 여식이었던 제 부인도 암살해 버리고, 후계 자리를 바꾸려고 자식도 죽이는 놈이 무슨 가족을 운운하는가.

그저 지금 당장 제 목숨을 건지겠다고 혓바닥을 놀리는, 다른 자들보다 더 위험한 놈이었다.

"너 같은 놈을 살려둘 수는 없지."

파악!

지셀이 창을 뽑자 칸도레 백작의 심장에서 피가 솟구쳐 나왔다.

"커억...."

칸도레 백작은 원통한 눈빛으로 지셀을 노려보았다.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 굴욕을 참으며 퇴각했다. 여기서는 땅에 엎드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조차도 통하지 않다니!

"이... 비정한 새끼.... 그르륵...."

손을 부들부들 떨며 지셀을 잡으려 했던 칸도레 백작은, 결국 피거품을 게워 내며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칸도레 백작의 시체를 보며 지셀이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구한테 비정한 놈이라는 건지.'

그 모습에 델파인군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긴장한 채 지셀을 바라보았다.

항복한 귀족도 자비 없이 죽이는데, 그가 학살을 자행하면 자신들은 그냥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셀은 그럴 생각이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포로들을 수습해라. 모두 왕국군으로 재편하겠다. 그리고 고서클 마법사들은 추려서 북부군에 편입시킨다."

그 말에 마법사들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마법사들은 고급 인력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좋은 대우를 받으며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이 충격적이었다.

"노예 계약은 확실히 진행하도록. 모두 알포이 밑으로 보내겠다."

노예라는 말에 마법사들의 낯빛이 시꺼멓게 죽었다. 어찌 마법사들을 노예로 삼는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는 말인가!

한 마법사가 나서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5군단의 마법사들을 이끄는 자였다.

"저, 저는 6서클 마법사입니다."

"그래서? 우리 쪽에도 6서클 마법사들 꽤 있어. 5서클은 더 많지."

지셀은 그간 전쟁을 하며 잡을 수 있는 마법사들은 다 잡았다. 정말 알뜰살뜰하게 마법사들을 데려다가 왕국군에도 주고, 북부군에도 넣었다.

무심한 지셀의 대답에 마법사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6서클 마법사라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뭐! 지금 내 앞에서 서클 자랑하는 거야? 어이가 없네."

우리도 7서클 마법사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조금 유치해 보여서 참았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마법사를 노예로 쓴다는 말이 이해가 안 가서 말입니다."

"우리 영지에서 마법사는 다 노예야. 어떤 놈들 때문에 만들어진 정책이지."

어찌 보면 알포이와 친구들 때문에 만들어진 체제였다. 그놈들이 까불다가 마법사 노예제가 시작됐으니까.

그게 전통이 되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는 것이었다.

선진적인(?) 펜리스의 체제를 모르는 마법사들은 미칠 것만 같았다.

저런 헛소리를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었으면 분노하며 바로 얼굴에 불덩이를 갈겨 줬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상대는 악마라 소문난 자였다.

그래도 노예가 되기 싫어서 조금 싫은 티를 내며 뻗댔다. 항복까지 했는데 대우를 좀 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마법사들을 보며 지셀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계약 기간만 지키면 풀어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게 싫으면... 죽어야지? 우리 원래는 적이잖아?"

지셀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차가워졌다.

어차피 마법사들은 통제가 안 되기로 유명한 족속들이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강제로 묶어 놔야 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알포이가 그 일을 무척 잘하고 있었다.

"...."

서늘한 눈빛을 본 마법사들은 현실을 깨달았다. 저건 진짜다.

바닥에 엎드린 귀족도 단숨에 죽였는데 자신들이라고 못 죽일까.

마법사들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노예가 되는 것보다 죽는 게 더 싫었다. 죽음을 감수할 기개는 없었다.

기사들의 회유는 더 쉬웠다. 다른 군단의 기사들처럼 다들 사교와 결탁한 공작가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칸도레 백작이 생각보다 빨리 항복한 덕분에 이곳에서는 무려 3만에 가까운 병력을 얻어 냈다.

이제 이들은 다시 왕국군으로 편입되어 남부 전선을 지키는 데 쓰일 것이다.

상황 정리가 끝나자 지셀이 창을 높이 들며 외쳤다.

"이번에도 이겼다!"

"와아아아아!"

펜리스 기동군도 모두 환호를 내질렀다. 초인이 잔뜩 있어서 그런지 이번 전투가 가장 쉬웠던 느낌이었다.

그보다 더 좋은 건 5군단이 수도로 향하던 마지막 군단이었다는 것이다.

"이러면 이제 전쟁 끝난 거 아니야?"

"공작가가 항복하지 않을까?"

"20만이 넘는 대군이 다 없어졌잖아?"

"캬! 이제 우리가 왕국 최강이 확실해진 거지? 공작가 끝난 거지?"

델파인군의 4개 군단이 모두 사라졌다. 당연히 병사들로서는 이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건 구원교와 균열뿐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대륙 곳곳에 퍼져 있던 구원교의 고위 사제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이쪽에도 지셀 외에 초인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까짓거 우리가 세상을 구해 보자고!"

"으하하하하!"

다들 웃고 떠들며 전의를 불태웠다.

균열과 구원교를 없애는 것은 곧 세상을 구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사기와 기백으로 충만한 이들이 그런 영광스러운 일을 마다할 리가 없었다.

흥분한 병사들을 보며 지셀도 미소 지었다.

'좋은 현상이야.'

다들 전투를 거듭할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단일 세력으로는 정말 왕국 최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일이 병사들의 바람대로 쉽게 흘러가진 않을 것이다.

'이제 잔챙이들은 다 정리했군.'

지셀은 알고 있다. 전생에 공작가와 싸워 봤기에, 누구보다도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숨겨진 실력자들이라 생각했던 구원교의 고위 사제들이 이제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그러니 잠깐 쉴 틈이 나는 동안에 전력을 다시 정비하고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

구원교도 사제들을 불러 모으고 있지만, 지셀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일이 그들 생각처럼 풀리진 않을 것이다.

곧 엄청난 놈이 나타나 그들을 휩쓸 테니까.

483화 궁금한 게 있습니다. (1)

전장 정리가 모두 끝나고, 펜리스 기동군은 포로들을 이끌고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이제 왕국군과 합류해 앞으로의 일을 결정해야 했다.

에레네스가 지셀에게 물었다.

"당장 죽일 필요가 있었는가. 일단은 살려 두고 정보를 캐내도 좋을 거 같았는데."

"구원교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을 거야. 공작가의 봉신들은 대부분 그냥 위에서 받은 명령대로 움직이는 거니까."

"그들을 무척 잘 아는 모양이군."

"뭐, 꽤 잘 알고 있지."

사실은 전생에 싸워 봐서 아는 거지만, 에레네스는 그저 지셀이 왕국의 귀족이라 잘 아는 줄로 알았다.

그녀는 오랜 시간 결계의 숲에 갇혀 지내왔기에 그런 부분은 지셀의 정보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지셀과 대화를 하던 에레네스가 힐끗 고개를 돌렸다.

뜨거운 눈길이 느껴졌다. 파르니엘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에레네스가 고개를 저으며 눈을 피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저 뜨거운 눈길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과격한 성녀라니....'

자신이 성녀라고 알린 파르니엘은 몸이 아주 근질거리는 모양이었다. 에레네스와 한번 싸워 보고 싶어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아무래도 전쟁의 여신이 선택한 성녀라 그런 모양이었다.

'하아....'

다시 파르니엘을 스쳐본 에레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오래전, 그녀가 만났던 성녀는 달랐다.

싸움을 싫어하고 모든 걸 사랑하는,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그런 고결한....

'그만.'

에레네스가 입술을 깨물며 이마를 짚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었다. 그리워해 봤자 달라질 건 없었다.

에레네스가 그렇게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척하자 파르니엘은 입맛을 다셨다.

대결을 하고 싶은데 성녀라는 신분상 시비를 걸 수도 없으니 참 애매했다.

그래도 에레네스의 기운은 정말 감탄스러웠다.

'세상에는 대단한 사람이 많군.'

구원교의 고위 사제는 분명 강했다. 하지만 자신의 기준에서는 아무래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셀을 따라 북부군에 오니 뛰어난 인물이 몇이나 보였다.

파르니엘이 먹이를 찾는 맹수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벨린다라는 여자도 만만치 않아.'

기운은 분명 자신보다 약하지만, 잠깐 본 기술은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뛰어났다. 자신이라도 갑자기 그녀에게 기습당하면 큰 상처를 입고 싸워야 할 것이다.

한번 겨뤄 보자고 은근히 운을 띄워도 벨린다는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저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할 일이 많아서 말이죠. 호호호."

말은 저렇게 해도 수틀리면 웃으면서 칼침 놓을 사람처럼 보였다.

벨린다뿐만이 아니었다. 길리언이라는 자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몸에서 흐르는 기세가 대단했다. 몇 번 보니 전투 스타일도 자신과 흡사했다.

저 기세를 이용한 공격을 직면하면 누구라도 간담이 서늘해질 것이다.

기도뿐만 아니라 기술도 그만큼 뛰어났다.

벨린다와의 싸움은 머리가 아플 거 같지만 길리언과의 싸움은 속이 시원해질 거 같았다.

해서 길리언에게도 슬쩍 운을 띄워 봤지만 돌아오는 건 거절이었다.

"성녀님이 저보다 강하시니 굳이 겨룰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자신이 더 강하다 하더라도 싸움은 해봐야 아는 법이다.

하지만 본인이 싫다는데 어쩌겠는가. 파르니엘은 아쉬움에 입맛만 다실 수밖에 없었다.

싸우자고 하면 싸울 거 같은 놈이 하나 있긴 했지만....

'카오르라고 했나?'

실력이 꽤 뛰어나 보이고, 눈빛도 도발적인 게 싸움 개가 따로 없긴 한데 조금 아쉬웠다.

'다 좋은데 벽을 넘지 못했군.'

만약 벽을 넘는다면 정말 훌륭한 상대가 될 것이다. 그 정도로 카오르는 날 것과 같은 야성을 풍기고 있었다.

"아! 싯팔! 짜증 나! 그냥 다 짜증 나! 왜 나만 이래!"

기세뿐만이 아니라 불평불만이 가득한 저 얼굴과 걸걸한 입도 꼭 짐승 같아 보였다.

파르니엘은 마음속에 꿈틀대는 욕망을 당장은 접어 두기로 했다. 전쟁이 끝나면 그때 마음껏 대결을 신청하면 된다.

그전까지는 구원교와 싸우면서 강한 놈이 나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전투를 통해 여신의 뜻을 전파하고 희열을 느끼는 존재. 전쟁의 성녀란 그런 것이었다.

그렇게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이동하던 펜리스군은 드디어 왕국군과 조우했다.

"으아아아아! 조카아아아!"

왕국군을 이끌고 뒤늦게 도착한 모리스는 감격해 눈물을 글썽였다.

반역을 일으킨 델파인군이 모두 전멸했다. 거기에 포로도 무수하게 잡아 왕국군에 편입시켰다.

그간 전쟁으로 감소했던 아군의 수가 다시 늘어나는 기적이 벌어진 것이다.

무서울 게 없어진 모리스가 호기롭게 외쳤다.

"이 정도면 남부를 지키는 병력을 빼고 모두 전멸한 거 아니야? 이제 우리가 쳐들어가자고! 당장 델파인 공작, 그놈의 목을 잘라야겠다!"

총사령관의 위엄을 아낌없이 보여 주는 그의 말에 지셀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병력을 정비하고 휴식을 취해야 할 때입니다. 다들 너무 지쳤습니다."

왕국군과 연합군은 쉬지 않고 싸웠다. 깨지기도 많이 깨졌다.

북부군은 어느 군대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펜리스 기동군은 더욱더 그랬다.

이 정도로 움직였으면 휴식도 필요했다. 무조건 쥐어짜는 게 능사는 아니었다. 쉴 때는 쉬어 줘야 계속 싸울 수 있는 법이다.

모리스도 그 점은 알고 있지만 지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그건 아는데! 남부는 인구가 엄청나게 많다고! 다들 잘 사는 거 알잖아? 시간을 주면 또 병력을 끌어모을 거야. 지금 군단들이 다 전멸했을 때 쳐들어가야 한다니까?"

평범한 상황이라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지금이 역습에 적기라는 것은 명확했다.

하지만 지셀은 여전히 반대했다.

"공작가의 힘은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구원교의 사제들도 전부 모여들고 있을 겁니다. 우리도 병력을 정비하고 다음 전쟁을 준비해야 합니다."

"다음... 전쟁?"

"네. 구원교의 사제들은 지금 나온 놈들이 전부가 아니니까요. 공작가의 전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작가의 저력은 만만치 않았다. 고작 이 정도에 끝날 거였으면, 전생에 공작가는 대륙 7강인 용병왕의 군대에 단숨에 쓸려 버렸을 것이다.

애초에 공작가가 마음만 먹었으면 왕국을 진작 엎을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포우드 백작이 브랜포드 후작에게 그런 말을 했었지.'

데스몬드 백작이 펜리스를 공격했을 당시, 분노한 브랜포드 후작은 공작파의 외교를 담당하던 포우드 백작을 감옥에 가뒀었다.

공작가와 싸울 각오까지 했던 그때, 포우드 백작은 말했다.

― 내전을 억누르는 건 친왕파가 아니라 공작가의 요제프 자작입니다. 그는 합리적인 자입니다. 우리는 정말 최소한의 피만 흘리고 싶었습니다.

라울이 전쟁을 억제하고 있었다고. 그렇기에 공작가가 진작에 왕국을 쓸어버리지 않았던 거라고.

물론 그 당시에는 대륙에 퍼진 구원교의 사제들이 모이지 않았기에 공작가의 전력도 지금보다는 약했을 테지만 말이다.

'공작가는 온전한 전력을 내전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 쓰려고 했다. 역시 마수의 숲인가?'

그리고 그게 공작가의 가장 큰 오판이 되었다.

'내가 성장하고 군대를 키우고 사람들을 모을 시간을 벌었으니까.'

미래를 알고 있기에 그 정보를 이용해 차근차근 성장했지만, 사실 지셀도 공작가의 의도를 전부 알지는 못했다. 그저 마수의 숲이 연관되어 있을 거라 추측할 뿐이었다.

그들이 오래전 어머니에게 한번 당하고 자연스럽게 왕국을 차지하기로 계획을 바꾼 것도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앞으로 싸우다 보면 궁금한 점은 하나씩 풀리겠지.'

이유야 어쨌든, 지셀이 역습에 단호하게 반대하자 모리스가 아쉬운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정말 안 돼?"

"안 됩니다."

"나는 가고 싶은데."

"그러다 먼저 여신께 가실 겁니다."

"...."

모리스는 아쉬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전쟁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는 조카였다. 그러니 그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요새 병사들 사이에서는 거의 전쟁의 신으로 통할 정도였으니까.

하긴, 지셀이 이끄는 군대는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지 않은가.

분명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일 것이다.

'할멈이 있으면 물어봤을 텐데.'

만약 점쟁이 노파가 들어가자고 했으면 총사령관 권한으로 바로 남부로 쳐들어갔을 것이다.

지금은 없으니 지셀의 말을 들을 수밖에.

"끄응.... 알겠다. 그러면 당장은 병력부터 수습하고 재편 작업을 해야겠어."

포로들이 너무 많았다. 지휘에 잘 따르도록 적절하게 분배해야 한다.

문득 모리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아참, 레이폴드 백작은 그러면 어떻게 하지?"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아멜리아가 남의 영지를 4개나 차지하고 있다.

분명 영지를 뺏긴 영주들과 다른 귀족들이 난리를 칠 것이다.

"이미 끝난 얘기 아닙니까? 그냥 밀어붙이세요. 정 어려우면 제가 지지했다고 하십시오."

"끄응.... 그래."

전쟁은 단순히 싸워서 이긴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그 뒤에 전쟁 피해를 수습하고 이권 싸움을 조율하는 절차가 따른다.

방어선을 만들고 있는 왕국군과 연합군의 병력도 다시 파악해 남부 전선으로 내려보내는 것도 총사령관의 일이었다.

거기 더해 귀족들의 못난 꼴을 수도 없이 보게 될 걸 생각하니 모리스는 벌써 골치가 아파졌다.

"에휴. 일단 수도로 이동하자. 휴식도 재편도 그쪽에서 하는 게 맞겠다."

그렇게 왕국군과 펜리스군은 수도 방면으로 이동했다. 북부군 또한 같이 움직일 것이다.

델파인군의 모든 군단이 전멸했으니 수도로 향하는 병사들의 마음은 이보다 더 편할 수 없었다.

수도에도 델파인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은 널리 퍼져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북부군이다!"

"펜리스 백작님이 오셨다!"

"우리가 이겼다!"

카르데니아에는 거리가 터져 나갈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승전 소식을 들은 수도 사람들은 빠짐없이 몰려나와 지셀을 환호하기에 바빴다.

"루타니아 왕국에 여신의 축복을!"

"펜리스 백작님 여기 좀 봐 주세요!"

"왕국의 수호자!"

환호는 지셀에게만 향한 게 아니었다.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 왕국을 지키기 위해 한마음으로 싸운 자들이 있다는 걸 말이다.

"모두 정말 잘 싸우셨습니다!"

"왕국군 만세! 북부군 만세!"

"연합군도 우리를 도와줬다고!"

왕국군 전체가 들어오기에는 너무 수가 많아 대부분은 수도 바깥에 대기하고 일부 병력만 들어왔다. 그들은 운 좋게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

비록 북부군이 거의 다 하긴 했지만 왕국군도 힘을 보탠 건 사실이었다.

기사들은 물론이고 병사들까지 모두 얼굴이 상기되었다. 지친 병사들의 허리와 어깨가 곧게 펴졌다. 걸음걸이는 더욱더 당당해졌다.

정말 힘겨운 전투였다. 남부 전선이 괴멸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래도 그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방어선을 만들며 싸우려 했다.

그들이 있기에 수도가 점령당하기 전에 지셀과 북부군이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걸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쿨쩍."

"울지 마, 새끼야."

"가슴 펴라고."

병사들이 하나둘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노고가 다 풀리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한 일을 인정받는다는 건 그런 것이다.

개선장군이 된 지셀은 흑왕의 위에서 미소 지었다.

전생에도 이런 환호는 많이 받았다. 하지만 환호를 받아도 언제나 가슴이 공허했었다.

'역시 다르군.'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처음 페르디움을 지켜 냈을 때 받은 감동만큼은 아니더라도 가슴이 벅찼다.

지금의 승리는 공작가와 그 배후에 있던 구원교를 막아 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끝이 난 건 아니지만 잠깐 정도는 이 기분을 만끽해도 괜찮을 것이다.

"크흠, 흠."

모리스는 왕국군 총사령관인 자신보다 더 많은 환호를 받는 지셀에게 살짝 질투가 들었다.

전쟁은 지셀 혼자서 거의 다 했으니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지만.

'하여튼 대단한 놈이라니까.'

처음 봤을 때는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웬 건방진 애송이가 브랜포드 후작의 총애를 받고 설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라.

지셀은 왕국의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친왕파의 귀족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잠깐 든 질투를 금세 내다 버린 모리스도 싱글벙글 웃었다.

자신도 브랜포드 후작 못지않게 지셀에게 많은 권한을 주고 밀어주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내 덕도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두고두고 다른 귀족들에게 생색내고 우려먹을 생각이었다.

왕성의 앞에는 브랜포드 후작과 수많은 고위 귀족들이 나와 있었다.

브랜포드 후작도 당당하게 다가오는 지셀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늘이 우리를 도왔구나.'

자신을 먼저 찾아온 건 지셀이었다. 자신을 이용해서 이것저것 얻어 가려는 속셈이 컸겠지만, 그게 오히려 천운이었다.

모두가 반대해도 그를 믿고 밀어주었다. 그 믿음이 이런 보답으로 돌아올 줄이야.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투자였군.'

아직 전쟁이 끝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기세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브랜포드 후작은 생각했다.

이미 20만이 넘는 군대를 잃었는데 공작가가 버티면 얼마나 버틸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또한 공작가와 구원교의 진정한 힘을 모르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와라. 수고가 많았다."

지셀이 말에서 내려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네 덕분에 잘 지냈다.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는데 말이다. 북부군이 그 정도로 해낼 줄은 정말 몰랐다."

브랜포드 후작이 감정을 숨기지 않고 기쁜 표정을 드러냈다. 평소에는 얼음장 같던 그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냉정하게 굴진 못했다.

"자, 어서 들어가자. 승전 연회도 준비하고 있고 듣고 싶은 얘기도 많다."

다른 귀족들이 말을 걸기도 전에 브랜포드 후작이 지셀을 끌고 들어갔다.

하지만 지셀은 지금 연회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잠시만 따로 시간을 내어 주시지요."

"...또 무슨 일이냐?"

브랜포드 후작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살짝 몸을 뒤로 뺐다. 이놈이 이렇게 말할 때는 뭘 뺏어갈 때다.

그 모습에 지셀이 어이없어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다.

도대체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보고 있는 건지.

"뭘 달라는 게 아니라... 몇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으음, 그래. 알겠다."

모인 귀족들이야 조금 기다리게 하면 된다. 어차피 전쟁에 참여했던 모리스를 비롯해 다른 귀족들과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브랜포드 후작과 지셀은 왕실에 있는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 무엇이 궁금한 것이냐."

지셀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어떻게 얘기를 꺼낼까 고민하던 그는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림자 기사단에 관해 알고 싶습니다."

그 이름을 들은 브랜포드 후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484화 궁금한 게 있습니다. (2)

"그 이름은... 어디서 들었느냐."

'그림자 기사단'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이 왕국에서도 극소수였다.

북부의 변경에서 자란, 중앙 귀족이 아니었던 페르디움가의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이름이다.

브랜포드 후작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예전부터 느끼던 거지만 지셀 페르디움은 묘할 정도로 정보력이 뛰어났다. 아니, 정보력이라기보다 예언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왕실의 비밀 정보까지 알고 있다니.

"설마 왕실에 첩자라도 심어 놓은 것이냐?"

그게 아니라면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저놈은 필요하다면 정말 그럴 놈이긴 했다.

뭔가 딱딱해진 분위기에 지셀이 오해를 풀기 위해 당당하게 말했다. 이럴 때마다 쓰는 좋은 핑계가 있었다.

"구원교의 사제에게 들었습니다."

"...?"

"아주 오래전에 그림자 기사단하고 싸웠다고 하더군요. 왕실을 습격했었다고."

"아니, 그게 무슨...."

"지금 전쟁은 그때의 연장선이라 생각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다른 놈을 파는 건 생각보다 무척 효과가 좋았다.

게다가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지 않은가?

지셀이 뻔뻔하게 말하자 브랜포드 후작이 침음을 삼켰다.

"으음...."

적한테 들었다는데 따지기도 뭐했다. 여전히 수상하긴 했지만 달리 캐낼 방도가 없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브랜포드 후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단지 어둠 속에서 왕실을 지켰다는 것 외에는."

이번에는 지셀이 인상을 찌푸렸다. 왕국 최고의 실세이자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브랜포드 후작이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가?

지셀의 노골적인 표정을 본 브랜포드 후작이 헛웃음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이미 없어진 단체다. 그런 단체가 있었다는 기록만 남았을 뿐이지. 알아보려 해도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재상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아니, 그분도 잘 모르신다. 그림자 기사단은 워낙 은밀한 단체였으니까. 나도 재상께 여쭤본 적이 있지만, 그저 그쪽에서 필요한 것을 요구하면 지원해 주는 정도였다고 들었다."

"그러면 그들에 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까?"

"그래, 그러니 비밀 단체가 아니겠느냐. 왕국군 총사령관인 모리스조차 그런 단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럼... 왜 없어졌는지는 정보가 남아 있습니까?"

"내부 분란으로 사라졌다고만 나와 있다."

지셀은 가만히 브랜포드 후작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정도로 정체를 숨기는 단체가 왕실에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군요."

"나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 그런데 지금 네 말을 들으니, 그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구원교와 싸웠던 모양이구나. 내분으로 없어진 게 아니었어."

"네, 그림자 기사단과 구원교는 이미 오래전에 한 번 싸웠습니다."

"흠, 그들이 왜 왕실을 노리는지 알고 있느냐?"

"저도 그것까지는 잘 모릅니다."

브랜포드 후작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공작가가 단순히 권력을 노리고 반역을 일으킨 건 아닌 모양이구나."

"그런 거 같습니다. 오래전부터 그들은 암중에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아는 것은, 그림자 기사단에 의해 그놈들의 시도가 한 번 실패했다는 것뿐입니다."

"폐하라면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구나. 그림자 기사단이 있을 시기에는 국정을 직접 이끌고 계셨으니 말이다."

그 말에 지셀이 눈을 반짝였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폐하를 만나 뵙고 싶습니다."

"음? 어째서 말이냐."

"그림자 기사단에 대해서도 여쭈어보고, 오래전에 무슨 일이 있는지도 알아보고 싶어서 말이죠."

그러자 브랜포드 후작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왜요?"

"폐하께서는 몸이 무척 약하시다. 그리고 그림자 기사단에 관해 얘기하기를 싫어하신다."

"싫어하신다고요?"

"그래. 그래서 그림자 기사단이 없어졌음에도 새로운 단체를 만들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왕실 기사단에 더 힘을 실어 준 거지."

그 덕분에 왕실기사단장은 드래곤 하트 조각을 비롯한 많은 지원을 얻어 마스터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즉, 이제 루타니아 왕실에는 비밀 단체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폐하께서 그림자 기사단을 왜 싫어하셨습니까?"

"그들은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는 단체로 알고 있다."

"그렇군요."

지셀은 알아들었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왕도 통제되지 않는 힘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지셀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잠깐도 안 되겠습니까? 솔직히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저잖아요?"

그 말에 브랜포드 후작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지셀은 지금 왕국을 구한 공신이었다. 왕이라도 그의 요구를 거부하기 힘들 정도다. 애초에 지셀 정도로 활약했다면 직접 만나서 치하하는 것이 맞았다.

그럼에도 브랜포드 후작은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지금은 안 된다. 폐하께서는 정말 몸이 안 좋으시다. 일단 폐하의 상태를 보고 알려 주겠다."

"쩝, 알겠습니다."

'뭐, 그냥 복면 쓰고 몰래 들어가서 만나면 되겠지.'

지셀은 브랜포드 후작의 거부에도 마음 편히 생각했다. 죽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궁금한 것 좀 물어보겠다는데 저들이 뭐 어쩌겠는가.

왕실에는 실력자들이 많으니 걸릴 확률이 높겠지만, 일단 힘으로 밀고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 잠깐만 대화 좀 하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브랜포드 후작이 지셀을 노려보며 경고했다.

"너, 설마 몰래 숨어 들어가서 만날 생각은 아니겠지?"

"...아니거든요."

"아니야, 넌 그럴 놈이야. 필요하면 복면을 쓰고서라도 들어갈 놈이야."

"...."

브랜포드 후작과도 너무 오래 만난 모양이었다. 자신에 대해 이제 상당히 잘 파악하고 있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한탄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안 된다. 네가 갑자기 나타나거나 난리를 피우면 심장마비로 승하하실 수도 있다."

"...그 정도입니까."

"그래, 그러니까 섣부르게 행동하지 말아라. 네가 국왕 암살자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이제 더 이상 얘기할 게 없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원래는 남부로 바로 진격할 계획이지 않았느냐."

원래 계획은 그러했다. 2군단을 없애고 남부로 가서 나머지 군단을 유인하려고 했다. 전장을 남부 전선으로 바꾸려고 세웠던 작전이었다.

"유인이 통하지 않을 거 같아서 각개격파로 진행한 겁니다. 다행히 성공할 수 있었지요."

"그러면 남부로는 언제 진격할 생각이냐? 최대한 빨리 치는 게 낫지 않겠느냐?"

브랜포드 후작도 모리스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또한 지금이 적기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셀은 당장 무리해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우선 병력부터 제대로 정비하고 남부로 진격할 생각입니다. 공작가는 만만치 않으니까요. 대신 너무 늦지 않게 하겠습니다."

"그래, 알겠다. 이런 기세면 큰 문제가 없겠지. 전쟁은 너에게 일임하겠다."

지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에레네스와 파르니엘이 있고, 벨린다와 길리언도 초인에 올랐다. 거기에 바네사와 테넌트도 있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상대 쪽 전력도 만만치 않았다. 왕국제일검과 왕국제일의 마법사가 있고 대륙 7강 중 하나인 아이던이 있다.

그리고 구원교의 고위 사제들도 얼마나 남았는지 몰랐다. 그들을 이끄는 자도 아직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니 무리하기보다는 이 기회에 휴식을 취하며 전력을 정비해야 했다.

브랜포드 후작과 정세에 관해 몇 가지 더 얘기를 나눈 지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기 전, 지셀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

"그림자 기사단장을... 잠깐이라도 본 적은 있습니까?"

"...없다. 난 그저 남은 기록만을 봤을 뿐이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지셀은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아직 그림자 기사단장이 자신의 어머니였다는 걸 알릴 시기는 아닌 거 같았다. 감춰진 부분이 너무 많아 찝찝했다.

물러나는 지셀의 등을 보며 브랜포드 후작이 옛 생각에 잠겼다.

'그 이름을 다시 듣게 될 줄이야.'

사실 그는 그림자 기사단장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셀에게 말한 것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모든 진실을 지셀에게 말해 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 허허, 제 사위입니다. 앞으로 저와 함께 폐하를 모시며 국정을 이끌어 갈 것입니다.

젊은 시절, 재상이 불러서 참석한 은밀한 자리. 거기엔 편한 복장에 가면을 쓴 여인이 있었다.

재상조차 깍듯하게 대하는 여인을 대면하고 당시 브랜포드 후작은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인은 웃으며 말했다.

― 뭐야? 다음 후계자로 선택한 게 사위라고? 너무 집안에서 다 해 먹는 거 아니야?

― 크흠흠, 그게 아닙니다. 그만한 능력이 있습니다. 왕실을 지키기에는 충분할 겁니다.

― 그래, 고집 있게 생겼네. 이런 아이가 일은 잘하긴 해.

여인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 들어서는 상당히 젊은 거 같았기에 더 의아했다.

도대체 이 여인은 누구인가?

브랜포드 후작이 궁금해하며 캐물어도 재상은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았다. 그저 왕실을 지키는 높으신 분이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그때 처음 알았다.

이 왕국의 실세는 저 여인이 결정한다는 걸.

저 여인이 점찍은 자가 왕국 최고의 권력가가 된다는 걸 말이다.

이 왕국을 어둠 속에서 지키는 또 다른 가문이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 열심히 해 봐. 내가 도와줄 테니까.

여인은 그 말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재상은 자신에게 신신당부하듯이 말했다.

절대 비밀로 하라고. 지금은 앞으로 자신을 키워 주기 위해 인사를 드리고 얼굴을 익히는 자리였다고 말이다.

아직 젊고 힘이 없던 브랜포드 후작은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브랜포드 후작이 하는 일마다 너무나도 잘 풀렸다.

본인이 열심히 했고, 능력이 있는 것도 맞았다. 애초부터 권세가 출신이고 재상의 사위라 많은 혜택을 받은 것도 맞았다.

하지만 운이 너무나 좋았다.

무슨 일을 하든 승승장구했다. 가문과 자신의 힘으로도 어려울 일도 시간이 지나면 다 좋게 풀렸다.

마치 세상이 자신을 도와주지 못해서 안달이 난 것만 같았다.

브랜포드 후작은 기쁘면서도 두려웠다.

'이 왕국을 움직이는 진짜 힘.'

모든 것은 그녀의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모든 이들은 그녀의 꼭두각시일 뿐이다.

심지어 왕조차도 말이다.

이게 옳은 것인가?

혈기 왕성했던 브랜포드 후작은 그걸 인정할 수 없었다. 어찌 왕국에 그런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몇 번이나 재상과 그 일에 대해 상의하려 했다. 도대체 무슨 가문이길래 왕국을 좌지우지하냐고 따지려 했다.

하지만 재상은 언급조차 피했다. 아니, 두려워했다.

― 우리는 왕국의 낮만 책임지면 된다. 밤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절대 그걸 잊지 말아라.

― 그게 말이 됩니까? 어째서 그간 왕실이 가만히 있었던 겁니까?

― 그들은 왕실을 지키기도 하지만 감시하기도 한다.

― 감시를... 한다고요?

― 그래. 더는 알려고 하지 말아라.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 그냥 이 나라가 그렇게 돌아간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

당시 재상의 강경한 태도에 브랜포드 후작은 분한 마음을 감추며 물러났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내가 권력을 잡으면 그 단체를 절대 용인하지 않겠다.'

권력은 투명해야 한다. 뒤에서 움직이는 손이 있으면 안 된다. 그래야 왕국이 제대로 돌아가는 법이다.

그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생각보다 빠르게 달성되었다.

쿠르르릉!

폭풍우가 치는 밤이었다. 업무 때문에 늦게 잠이 들었던 브랜포드 후작은 문득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그러고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다, 당신은...."

"쉿."

여인은 그림자 기사단장이었다.

그런데 모습이 이상했다. 어디서 싸우고 왔는지 몸 곳곳이 피투성이였다. 가면은 일부가 깨져 한쪽 눈이 보이고 있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 일부를 보게 되었다.

여인, 아네트가 브랜포드 후작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떠날 것이다."

"무, 무슨 말씀입니까?"

"그림자 기사단은 해체됐다. 네가 바라는 대로 말이다."

"아, 아니 지금 무슨...."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네 앞길에 방해가 될 만한 인물은 모두 처리했다. 권력을 잡는 데는 문제 없을 것이다."

"...."

아네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네 능력과 가문의 힘이라면 결국 해낼 일이긴 하지만 쉽게 가서 나쁠 건 없지 않으냐. 어떤 변수가 있을지도 모르고."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약간 문제가 생겼을 뿐이다. 앞으로 네가 왕실을 지켜라."

브랜포드 후작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강력했던 그림자 기사단이 해체되다니. 도대체 누가 그렇게 한 것이란 말인가?

"누, 누구와 싸운 것입니까?"

"어둠."

그녀의 두 눈에 소름 끼치는 빛이 일렁거렸다. 브랜포드 후작은 애써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지금은 알려고 하지 마라. 알 필요도 없다. 모습을 드러낸 어둠은 내가 전부 죽였으니까.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앞으로는 델파인 공작가를 견제해라."

"공작가를... 말입니까?"

"그래. 내가 유일하게 손을 댈 수 없던 곳이 공작가다. 그들 또한 내가 무서워서 그 오랜 세월을 움직이지 못한 것이다."

브랜포드 후작은 큰 충격을 받았다.

역대 공작가의 가주들은 무척이나 조용히 살았다. 공식 석상에 나서는 것조차 꺼릴 정도로 존재감을 숨기고 살았다.

그 강력한 힘을 가지고도 권력을 탐하지 않는 게 의문스럽긴 했었다. 그런데 그게 그림자 기사단 때문이었다니.

도대체 눈앞에 있는 자는 얼마나 강하다는 말인가?

아네트는 서늘한 눈빛으로 브랜포드 후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사라진 걸 확신하게 되면 공작가는 반드시 그 야망을 대놓고 드러낼 것이다. 이제 어둠 속에서의 싸움은 끝났다. 겉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그게 언제입니까?"

"10년은 내 행방을 찾느라 조용히 있을 것이다. 그 뒤 10년은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는 나도 장담할 수가 없구나."

"...."

"그 안에 권력을 잡아라. 그 누구도 넘볼 수 없게 말이다. 그렇게 해서 왕실을 지켜라. 그걸 위해 너의 앞길을 치워 준 것이다."

"공작가의 후계자인 에른하르트는 제 친우입니다. 그는, 그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 그랬으면 좋겠구나."

그녀도 에른하르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 무엇에 관심이 없고 권태로이 지내는 자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둠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

아네트의 몸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내 말을 잊지 말아라. 이제 왕실을 지킬 사람은 너밖에 없다."

"어,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글쎄... 왕실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겠지."

파악!

그 말을 끝으로 어둠이 퍼지며 그녀의 몸이 사라졌다.

브랜포드 후작은 한참을 그렇게 제 자리에 서 있었다.

날이 밝고 나서는 그저 어제와 같은 하루가 이어졌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어떠한 소문도 나지 않았다. 세상은 변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브랜포드 후작은 자신이 꿈을 꾼 건 아닌지 의심했다.

몇몇 귀족들이 행방불명되거나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도 믿지 않았건만....'

그녀의 계획대로 자신은 왕국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애써 그 기억을 지우고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 모든 건 자신의 노력 덕분이다. 그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도움을 받는 것도 그만한 역량이 있어야만 하니까.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잊혀 갔다. 굳이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깨진 가면 안에 보였던 그 눈빛만은 아직도 기억 속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 그 눈빛은....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끼친 브랜포드 후작이 크게 외쳤다.

"집사!"

"네, 네. 후작님!"

집사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브랜포드 후작이 이렇게 큰 소리를 낸 적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잠깐 숨을 고른 브랜포드 후작은 지셀이 나간 문을 노려보며 말했다.

"페르디움 후작 부인의 초상화를 구해 와라."

"후, 후작 부인의 초상화를 말입니까?"

"그래, 최대한 빨리."

브랜포드 후작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잊히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고 서늘했던 그녀의 눈빛은.

지셀의 눈빛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485화 궁금한 게 있습니다. (3)

연회에는 많은 귀족이 참여했다.

물론 주인공은 지셀이었다. 보통 연회가 아니라 승전 연회였으니까.

귀족들과의 연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지셀도 예의상 참석은 했다. 며칠 동안 이어지는 연회에 내내 나서진 않겠지만 하루 정도는 얼굴을 비출 생각이었다.

"동생! 싸움 좀 한다고 잘난 척하더니 정말 싸움 잘하네!"

메리엘이 환하게 웃으며 지셀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다른 귀족들도 앞다투어 지셀에게 칭찬을 건네기 바빴다.

"북부군 사령관께서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요, 왕국을 구한 영웅이십니다. 영웅."

"예전부터 알아봤죠. 그때도 보통 인물이 아니지 않았습니까?"

몇 년 전만 해도 지셀을 두고 애송이니 뭐니 욕을 하던 귀족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그를 칭송했다. 이제는 그들이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지셀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질투심에 미친 귀족들도 있었다. 바로 지셀과 비슷한 나이대의 귀족들이었다.

'으으, 왜 아직도 살아 있는 거야.'

'배 아파 죽겠네. 진짜 죽었으면 좋겠다.'

'어떻게 저런 놈이 승승장구할 수가 있지?'

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지셀을 폄하하기 바빴다.

"전부 다 운이지. 안 그런가?"

"그럼, 브랜포드 후작과 맥쿼리 후작이 밀어주니까 그런 거지."

"차라리 날 밀어줬으면 공작가는 지금쯤 다 쓸어버렸을걸?"

"그러니까 말이야. 왜 승기를 잡고도 가만히 있는지. 쯧쯧. 아직 한참 부족하다니까."

흑화할 대로 흑화해 까맣게 변한 그들은 틈만 나면 모여서 지셀을 욕했다. 어떻게 그가 하는 일을 방해할지 모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그들은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었다. 그냥 그렇게 불평불만이나 내뱉고 배 아파하는 게 전부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지셀에게 청탁하려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현재 동부군 사령관 자리가 비었는데... 이 친구는 어떻습니까?"

"북부군 사령관께서 추천해 주시면 모양새가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어차피 전쟁은 끝난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전후 수습은 이 친구가 괜찮을 겁니다."

"저희가 사령관님께 충분한 성의를 보여 드릴 생각입니다."

원래 동부군 사령관 자리는 브랜포드 후작의 첫째 아들이 맡고 있었다.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은 전쟁 전에 아들의 역량이 부족하다며 동부군 사령관을 교체해 버렸다.

그리고 바로 그 동부군 사령관이 전쟁 중에 사망했다.

아무리 브랜포드 후작이라도 그 자리에 다시 자신의 친인척을 앉힐 수는 없었다. 아들을 살린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다들 빈자리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평소에는 명목뿐인 직위이지만 전쟁 중에는, 그리고 전후 수습에는 강력한 이권을 쥘 수 있는 자리니까.

귀족들의 은근한 청탁에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은 브랜포드 후작님과 맥쿼리 후작님이 결정할 일입니다."

"아이참, 그러지 마시고. 북부군 사령관께서 말씀을 좀 해 주시면...."

지셀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제야 분위기가 어색해진 걸 안 그들은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욕하는 걸 잊지 않았다.

'참 내, 이제 좀 컸다 그거지?'

'아휴, 저놈 군사력이 너무 강하니 건드릴 수도 없고.'

'어른들 말 잘 듣는 놈이 저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귀족들의 불만 어린 기색을 감지한 지셀은 피곤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귀족들의 선망, 질투, 유혹, 아부, 그 모든 게 귀찮기만 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긴장이 풀려서 자기들 이득만 따지고 있었다.

'한심하기는. 목숨이 날아갈 때까지 정신을 못 차리는 인간들이 많아.'

이런 이들을 데리고 국정을 운영하는 브랜포드 후작이 참 피곤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귀족 아가씨들은 예전처럼 지셀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고위 귀족들이 지셀의 주변에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은 눈을 빛내며 호시탐탐 지셀과의 연결을 노리고 있었다.

'아직도 연인이 없다지?'

'후후후, 어떻게든 기회만 되면 내가 꼬실 수 있는데.'

'저런 남자를 놓칠 수는 없지.'

다들 먹이를 눈앞에 둔 고양이 같은 표정이었다. 그걸 본 로잘린이 혀를 찼다.

'백날 노려 봐라. 저 인간은 돈 얘기 말고는 여자랑 대화를 안 하는 인간이라고. 여자 보기를 돈같이 하는 인간이지.'

그녀가 보기에 지셀은 참으로 신기한 인간이다. 보통 저 나이대의 공자들은 여자에 미친 놈들이 많다.

그런데 저놈은 돈하고 싸움에만 미쳐 있었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자신이 미칠 거 같았다.

로잘린이 그렇게 다른 귀족 아가씨들을 한심하게 보고 있을 때, 놀랄 일이 벌어졌다.

"어머, 어머! 이쪽으로 온다!"

"누구지? 누굴 만나러 오는 거지?"

"걸음걸이 당당한 거 봐."

아가씨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말로는 모두가 함께 즐기는 연회라 해도, 젊은 청년들은 구석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연회장 중앙은 연회의 주인공과 고위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셀이 고위 귀족들을 헤치며 아가씨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귀족 아가씨들이 다들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미소를 지었다. 지셀이 누구에게 춤을 신청할지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지셀은 그 모든 걸 무시하고 곧바로 로잘린을 향해 다가갔다.

어찌나 박력 있는지 다들 깜짝 놀랄 정도였다.

"아가씨."

지셀의 부름에 로잘린은 턱을 꼿꼿하게 세웠다. 모두가 그녀를 부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선망의 눈길을 잔뜩 받은 로잘린은 미소를 지으며 살짝 손을 내밀었다.

"네, 백작님."

"이번 달 정산 아직 안 들어온 거 같던데."

"...."

'죽일까?'

로잘린이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곳이니 표정 관리를 해야 한다.

주먹을 꽉 쥔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어색한 웃음으로 답했다.

"전쟁... 중이잖아요? 당연히 매출이 떨어져서... 지금 수습을 좀 하느라."

"그렇죠? 난 또 혹시 무슨 문제가 있나 하고요. 하하하하."

해맑게 웃는 지셀을 보며 로잘린도 마주 웃었다. 진짜 X나 패고 싶었다.

주변에 있던 아가씨들이 피식대며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 잠깐 경계했지만 역시 그냥 사업 파트너일 뿐이었다.

로잘린의 얼굴이 창피함에 붉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귀족가 아가씨들 사이에서 로잘린에 관한 말이 많았다. 지셀의 명성이 올라갈수록 사교계에서는 일부러 더 그녀를 험담하고 깎아내리려고 했다.

그래야 안 좋은 소문이 지셀의 귀에 들어갈 테니까.

귀족 아가씨들이 비웃음을 숨기지 않고 수군거렸다.

"그러면 그렇지. 연인도 아니면서 가까운 척하기는."

"그냥 사업만 대신 맡아서 해 주는 거잖아?"

"솔직히 가문 믿고 펜리스 백작한테 꼬리 치는 거 아니야?"

로잘린의 얼굴이 다시 벌겋게 달아올랐다.

정확히 들리지는 않지만 자신을 욕하는 건 분위기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했다는 창피함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저는... 이만 몸이 안 좋아서 들어가 볼게요."

로잘린은 몸을 돌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분하기도 했다. 자신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누가 뭐라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사실 지셀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로잘린도 잘 알았다. 지셀은 정말 사업 파트너로서만 자신을 대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남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상황이 오면 누구든 창피함을 느낄 것이다.

"아가씨, 잠시만요."

지셀이 몸을 돌려 떠나려는 로잘린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구경하던 아가씨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로잘린이 당황했다.

"왜, 왜요?"

또 돈 얘기를 할 게 남았던가? 그걸 꼭 사람들 보는 앞에서 해야 하나? 그렇게 레이디의 체면에 상처를 줘야 하냐고!

로잘린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지셀이 피식 웃었다.

그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무어라 수군거리는지 다 들었다.

'그러면 이렇게 보낼 수는 없지.'

로잘린은 보통 영애들과 달랐다. 자신의 훌륭한 조력자이자 든든한 후원가이기도 했다.

화장품 사업을 도맡아 운영해 주었고 여러 귀족을 설득해 큰 투자를 받아 내 주었다.

가뭄 때는 자신을 믿고 식량을 구매해서 친왕파를 위기에서 살렸다. 전쟁 때는 자신을 구하려 피오테와 해결사들을 보내 주었다.

구원교와 싸울 때도 자신을 믿고 치료약을 대량으로 생산해 많은 사람을 구했다.

이런 멋진 사람이 남의 험담이나 하는 자들에게 망신당하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이거, 선물입니다."

지셀이 미소 지으며 품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로잘린도, 구경하던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저 짠돌이로 소문난 펜리스 백작이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다니!

"뭐, 뭔가요?"

혹시 보증 계약서나 채권 같은 게 아닐까 하고 로잘린이 의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지셀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답했다.

"팔찌입니다. 우리 영지에서 가장 뛰어난 드워프가 만들었죠. 그리고 7서클 마법사가 심혈을 기울여 방어 마법을 새겼습니다."

"이, 이게 무슨...."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랐다. 그 정도 아티팩트를 만들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간다.

로잘린이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어 팔찌를 꺼냈다.

"와아...."

구경하던 모두가 감탄을 내뱉었다. 드워프의 섬세한 세공 솜씨가 돋보이는 팔찌는 그야말로 예술품이었다.

'샤르넬'이라고 새겨져 있는 게 너무 노골적이라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말이다.

지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게 언제나 아가씨를 지켜 줄 겁니다."

"백작님...."

로잘린은 목이 메는 걸 애써 참았다.

대놓고 짝퉁이지만 어쨌든 이런 귀한 물건을 선물로 주다니. 역시 자신을 단순한 사업 파트너로만 보는 게 아니었다.

분명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지 않았는가!

'언제나 나를 지켜 줄 거라고?'

동화 속의 공주님이 된 기분이었다. 자신한테 관심 있으면서 지금까지 없는 척하다니. 이런 깍쟁이 같으니라고.

"흐, 흐흥! 선물이라니 고맙게 받도록 하겠어요."

로잘린이 턱을 치켜들고 도도하게 팔찌를 착용했다. 주변에서 다들 부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그 시선에 기분이 더욱더 좋아졌다.

'어때? 펜리스 백작은 너희한테 관심이 없다고.'

지셀도 기뻐하는 로잘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또 누굴 줘야 하나.'

로잘린은 모르겠지만 팔찌는 꽤 여러 개 만들었다.

이 팔찌는 펜리스에서 갈바릭과 바네사가 합작으로 만든 것이다. 착용자가 강한 공격을 당했을 때 막아 주는 마법이 걸려 있다.

클로드나 로웰 등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기 힘든 자들을 위해 만든 것이었다.

로잘린도 예전에 상단주로 위장한 성전사에게 당할 뻔한 적이 있다.

그래서 원래도 하나 건네줄 심산이었는데, 로잘린의 체면도 살려 줄 겸 지금 준 것이다.

'저번처럼 위험에 빠지면 안 되니까. 열심히 내 일을 도와주셔야지.'

로잘린에게는 안타깝게도, 지셀은 그저 순수한 선의로 선물을 준 것이었다. 로잘린도 그의 계획에 중요한 인물이었으니까.

하지만 남의 속마음을 읽지 못하는 로잘린은 그저 지셀이 자신에게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떻게 보면 지셀이 확실하게 마음을 표현하긴 했다.

"그거 진짜 비싼 겁니다."

"...알겠어요."

지셀이 대놓고 생색을 낼 만큼 팔찌는 비싸고 만들기 힘든 물건이었다.

드래곤 하트 조각의 남은 가루들을 모아 룬스톤과 함께 가공하고, 거기에 바네사의 마력이 엄청나게 들어갔다.

왕국에 둘밖에 없는 7서클 마법사가 희귀하고 비싼 재료로 만들었으니 정말 귀한 물건이 맞았다.

로잘린은 팔찌를 보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만 특별한 선물을 받은 거 같아서 정말 좋았다.

구경하던 아가씨들은 이를 갈았다.

'으으, 왜 저런 귀한 물건을....'

'차라리 날 주지. 내가 더 예쁜데.'

'진짜 마음이 있는 건가? 설만 브랜포드 후작가라고 그러는 거야? 실망이야!'

펜리스 백작은 왕국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젊고 능력이 있는 것도 모자라 모든 귀족이 벌벌 떨 만한 군사력까지 가지고 있다.

그를 잡기만 하면 왕국 최고의 귀부인 자리에 오를 터였다. 심지어 파혼한 지 오래라 약혼자도 없었다.

그런 남자가 로잘린에게만 저런 특별한(?) 선물을 주니 다들 질투가 나서 환장할 것만 같았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른 분들하고도 중요한 대화를 나눠야 해서요."

"그, 그래요. 어서 가 보세요."

지셀은 다른 귀족들의 대화 요청도 뿌리치고 바쁘게 움직였다.

그의 다음 목표는 바로 포리스코 주교였다.

성자 사건 이후로 잘 나가는 포리스코는 세상 겁날 게 없었다. 어찌나 겁날 게 없는지 연회장에서 술에 불콰하게 취해 있었다.

남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포리스코는 지셀을 보자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외쳤다.

"여어, 왔어? 캬! 너 진짜 싸움 쩔더라."

술에 취한 포리스코는 아예 예의를 벗어던진 모습이었다. 주변에 있는 귀족들이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 놔 봐! 내가 얘랑 얼마나 친한데! 어? 내가 같이 식량도 나눠 주고! 어! 얘랑 같이 밥도 먹고! 어? 선물도 주고받고 어? 다 했어!"

귀족들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개판인 놈인 줄은 알았지만, 사람들의 추앙을 받더니 이제 완전히 맛이 갔다.

'어휴, 저런 놈이 성자라고 소문나다니.'

'그거 다 펜리스 백작이 나눠 준 거잖아?'

'사람들이 몰라서 다행이지. 쯧쯧쯧.'

어차피 다 짜고 치는 판임을 알고 있던 귀족들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

지셀은 혀를 차며 포리스코를 구석으로 끌고 갔다. 포리스코는 영문도 모르고 주절거렸다.

"아, 왜 그래? 또 뭐 몰래 하려고? 좋은 거 있어?"

"조용히 좀 하세요. 묻고 싶은 게 있으니까."

휴게실 용도로 연회장에 마련된 방으로 포리스코를 끌고 들어간 지셀이 조용하게 물었다.

"주교님은 폐하를 만난 적 있죠?"

"끄억, 있지. 주교들이 돌아가면서 폐하에게 신성력 치료를 해야 하니까."

국왕이 그 약한 몸으로도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왕국의 모든 마법사와 사제들이 돌아가면서 그를 치료하기 때문이다.

포리스코도 주교랍시고 나름 신성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위치가 있으니 가끔 국왕을 찾아뵈고 상태를 살피는 것이 그의 역할 중 하나였다.

지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폐하께서 몸이 그렇게 약하십니까? 다른 사람도 만나기 힘들 만큼?"

"그러엄, 진짜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계시지. 음식도 제대로 못 드신다니까? 그게 벌써 10년이 넘어. 아, 목숨 끈질겨 진짜. 앗차차. 내가 무슨 말을."

실언을 한 포리스코가 슬금슬금 주변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언제 죽을지 몰라. 사실 우리끼리도 제발 내 차례에 죽지 말아라, 이러고 있다니까?"

확실히 자신의 치료 차례에서 죽으면 상당히 입장이 곤란해질 것이다.

생각보다 국왕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안 지셀이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다음에 폐하를 치료하러 갈 때 저 좀 데리고 가시죠."

그 말에 포리스코는 찬물을 맞은 듯, 술이 확 깨는 걸 느꼈다.

486화 거의 다 왔다. (1)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널 왜 데리고 가!"

포리스코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지셀은 태연하게 답했다.

"저도 폐하 좀 만나 뵈려고 그러죠."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부탁해! 브랜포드 후작한테 부탁하면 되잖아!"

"당장은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아, 안 돼, 안 돼. 널 데리고 가면 그날이 폐하께서 승하하시는 날이 될 거야."

"...."

"넌 분명 폐하 성질 긁어서 화병으로 돌아가시게 할 게 분명해."

"아니,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그대로 본 거야!"

가뜩이나 국왕은 몸이 너무나도 약해 다들 그를 대할 때 조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꼴통이 들어가서 성질 건드리는 통에 국왕이 죽었다? 그러면 지셀을 데리고 간 포리스코도 그날로 끝나는 거다.

포리스코가 하소연하듯이 물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솔직히 반은 시체야. 아무런 영향력도 없어. 굳이 네가 만날 필요가 없다니까. 도대체 왜 만나려고 하는데?"

"그냥 궁금한 거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그간의 정황을 보면 델파인 공작가가 왕실을 집요하게 노리는 건 확실했다. 그들의 목표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게 아닌 거 같았다.

그런데 굳이 전쟁을 벌인 이유를 아무도 몰랐다. 브랜포드 후작도 모르고 있었다. 다들 단순히 공작가가 왕국을 차지하려고 한다고만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진짜 이유가 따로 있을 거 같았다.

그래서 그냥 국왕이 뭔가를 좀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덤으로 그림자 기사단에 관해서도 묻고 말이다.

포리스코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냥 뭐 좀 궁금해서 만나 봐야겠다? 큰 이유는 없고?"

끄덕끄덕.

포리스코가 울먹이며 말했다.

"왕이 네 친구니? 그냥 뭐 좀 궁금하다고 만나고 싶을 때 만나게? 그것도 오늘내일하고 있는 사람인데?"

"...."

"제발 나 좀 그만 괴롭히면 안 돼? 네가 하자는 대로 다 했잖아. 어? 피오테도 주고 성물도 줬잖아? 내 재산도 다 너한테 기부했잖아!"

"...."

"나도 화장품 사업 투자자라고. 성금까지 몰래 다 끌어와서 투자해 줬는데 왜 자꾸 나 곤란하게 하는데?"

"...."

"그리고 나 따라와도 국왕은 못 만나."

"왜요?"

"브랜포드 후작이 직접 확인하거든. 보조 사제들까지 전부 말이야. 그러니까 나한테 부탁해도 소용없다고."

"음...."

확실히 그렇다면 포리스코를 몰래 따라가도 걸릴 게 뻔했다. 그 정도로 철저하게 검문을 할 줄이야.

왕실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삼는 브랜포드 후작이라면 그럴 만하지만 말이다.

실컷 하소연을 한 포리스코가 다시 주변 눈치를 보더니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런데... 설사 네가 만난다 해도 폐하는 너 안 좋아할 거야."

이번에는 지셀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날 언제 봤다고 만나기 전부터 싫어합니까?"

"브랜포드 후작이 밀어주잖아. 폐하는 브랜포드 후작을 엄청나게 싫어하거든."

"이유가 있습니까?"

브랜포드 후작은 비록 모든 권력을 쥐고 있으나 왕실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 그가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진작에 왕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싫어한다니 궁금함이 앞섰다.

포리스코는 왜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히 브랜포드 후작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으니까 그렇지."

"어차피 폐하께서는 국정을 운영할 만한 건강 상태가 아니시지 않습니까?"

"어휴, 그래도 사람 마음이 그런 게 아니지.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갈 때마다 브랜포드 후작 욕을 한다니까."

"뭐라고 욕을 합니까?"

"그냥... 지가 왕인 줄 안다느니... 왕실을 우습게 본다느니... 또 뭐라더라? 자기는 평생 허수아비 왕이었다느니... 감시만 당하고 살았다느니... 아무튼 맛 갔어. 치매 온 거 같더라고."

"흠."

"그런데 뭐 어쩌겠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데. 브랜포드 후작이 아니었으면 국정이 더 혼란스러워졌을걸? 그 인간이 힘으로 다 누르고 있으니 겨우 왕국이 돌아가는 거지. 솔직히 귀족들 다 개판이잖아."

자신도 개판이라는 건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포리스코였다.

지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듣고 보니 국왕도 참 피곤하게 살았던 거 같다.

어느 정도는 이해되었다. 어설프게 접한 정보로도, 그림자 기사단이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는 것은 짐작이 갔으니까.

그런데 왕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권력이 생각보다 더 컸던 모양이었다.

왕은 평생 그 부분에 관해 불만을 품은 게 분명했다. 몸져누운 뒤에도 브랜포드 후작을 싫어하는 걸 보면 말이다.

스스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아직도 권력에 대한 욕심을 놓지 못하다니.

그것이 권력의 속성이자 무서운 점이리라.

지셀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때 뵙는 수밖에요."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안전하게 국왕을 만날 방법 말이다.

포리스코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잘 생각했어. 너는 공신이나 마찬가지니 분명 기회가 생길 거야. 그러니까...."

말을 하다가 만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설마 복면 같은 거 쓰고 몰래 만나려는 건 아니지?"

"...저를 어떻게 보고."

"아니야, 넌 그럴 거 같아. 정말 그러면 안 돼. 진짜 난리 난다.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어. 너 바로 역적 되는 거야."

"...."

모두가 한결같이 말하는 걸 보면 조금만 건드려도 죽을 상태이긴 한 모양이다.

"어휴, 안 그럽니다. 나도 바쁘다고요."

지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지간한 일은 모두가 반대해도 밀어붙여 온 지셀이지만, 국왕은 자칫 잘못하면 그냥 죽는다고 하니 제 마음대로 밀어붙이기도 참 애매했다.

'흠, 몸에 좋은 거라도 찾아봐야 하나.'

사실 엄청 중요하고 급한 용무는 아니니 조금 더 생각해 봐도 된다. 여차하면 공작가와 구원교의 인물들을 잡아서 고문해도 되니까.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만나 보는 수밖에.

"저, 그럼 가 봅니다. 잘 지내세요."

떠나는 지셀을 포리스코가 불안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제발 사고 좀 안 쳤으면 좋겠다는 눈빛이었다.

본인도 엄청나게 사고 치고 다니는 주제에 말이다.

지셀은 떠나면서 슬쩍 로잘린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귀족 아가씨들에게 둘러싸여 열심히 팔찌를 자랑하고 있었다.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 모습은 처음 본 거 같았다.

지셀은 쓴웃음을 짓고는, 메리엘에게 다가가 팔찌를 주며 작게 말했다.

"이거, 비밀로 해 주세요. 로잘린 아가씨가 자기한테만 준 줄 알아요. 잘 숨기고 다니세요."

메리엘은 한껏 웃더니 팔찌를 잘 숨겼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소매가 넓은 드레스만 골라 입어야 할 거 같았다.

그녀는 언제나 로잘린을 응원하는 사람이었으니까.

* * *

공작가에서 소식을 들은 라울은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4개 군단이 모두 전멸했다. 그것도 북부군 하나에 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보고서에 적힌 전쟁 과정을 복기하며 그는 처음으로 질린 표정을 지었다.

"펜리스 백작...."

대단하다. 어찌 한 인물이 이 정도로 싸울 수가 있다는 말인가.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 맞춰 초인까지 미끼로 썼다.

그 틈을 이용해 왕국군을 밀어 버렸다. 혹시나 지셀이 돌아와 2군단이 패배할 것까지 예상해 군단을 나눴다.

비대한 북부군으로는 전부 상대하지 못하게 말이다.

그렇게 해서 빠르게 수도를 점령하고 국왕을 사로잡으려 했다. 목표만 이룰 수 있다면 나머지 군단은 모두 다 버려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펜리스 백작 하나에 전부 다 패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돼.... 어떻게 이런 기동력을 보일 수 있는 거지?"

보고를 들어도 믿기지 않았다. 펜리스 백작으로 위장한 군대들이 사방에서 나타났다는 게 더 신빙성이 있었다.

참모들도 다들 침묵만 지켰다. 그들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그때 죽였어야 했다."

오래전 연회에서 만났을 때 죽였어야 했다. 어떤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말이다.

상대를 그저 제법 뛰어난 젊은이로 생각한 게 큰 실수였다. 알고 보니 상상을 초월한 괴물이었다.

침중한 분위기 속에서 가트로스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는 '그림자'들이 막아서더니 지금은 펜리스 백작이 우릴 막아서는구나. 참으로 왕실의 명줄이 끈질기도다."

라울이 힐끗 가트로스를 바라보았다. 그 당시 라울은 젊어서 지금처럼 정국을 지휘할 위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대략적인 상황만 알고 있었다.

"너무 과하게 몸을 사려서 실패한 것 같습니다. 차라리 그냥 대놓고 밀어 버릴 걸 그랬습니다."

"됐다. 그림자 기사단장이 살아 있을까 봐 숨을 죽였던 게 아니냐. 그때 입은 피해가 너무 커서 우리도 다시 힘을 길러야 했고."

구원교는 아주 오래전부터 대륙 곳곳에서 암약해 왔다. 오랜 시간 숨죽이며 기어코 힘을 기른 그들이 처음 움직인 곳은 바로 이곳 루타니아 왕국이었다.

'그리고 시작하자마자 실패를 맛본 곳이기도 하지.'

구원교는 루타니아에 그림자 기사단이라는 단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만큼 철저하게 대비했음에도 패배했다.

그렇기에 구원교는 그림자 기사단장에 대해 큰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가트로스도 그랬고 멜키르도 그랬다.

'도대체 얼마나 강하길래....'

라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강해도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자가 무서워 무려 10여 년 동안 행방을 찾겠다고 숨을 죽였다.

정말 사라졌다는 걸 확신한 뒤에야 왕국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라울도 실제로 구원교의 고위 사제들이 떼로 죽어 나갔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도 덩달아 조심했던 면이 있었다.

그런데 보라. 몸을 사리며 시간을 끈 결과 펜리스 백작이라는 괴물이 탄생했다.

그 점이 아쉬워서 혀끝에 계속 같은 말이 맴돌았다.

"너무 전력을 아끼려고만 한 거 같습니다.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빠르게 전쟁을 일으킬 걸 그랬습니다."

"아니다. 마수의 숲은 위험한 곳이다. 마수의 숲이 우리가 찾는 성지가 맞다면 수호자들이 지키고 있지 않겠느냐. 당시에 전력을 보존하려는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가트로스가 괜찮다는 듯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또한 우리의 정체도 숨겨야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그때는 참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지 펜리스 백작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나타났을 뿐이다. 우리라고 모든 걸 알 수는 없는 법이지."

한 번 실패했기에 최대한 안전하게 왕국을 차지하려 했다. 어차피 기다림은 그들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가트로스가 양팔을 펼치며 웃었다.

"그때보다는 낫다. 봐라. 세상에 점점 차오르는 신의 기운이 느껴진다. 결국 우리가 승리할 것이다."

"...."

라울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자신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까.

하지만 부정할 수도 없었다. 실제로 균열을 여는 속도는 날이 갈수록 빨라졌고 구원교의 고위 사제들도 점점 늘어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은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가트로스가 열망 어린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어서 '왕'을 찾아야 할 텐데. 그분만 찾는다면 우리의 염원을 더 빨리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라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차라리 모든 힘을... 그 '왕'이란 분을 찾는 데 쏟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럴 순 없다. 왕을 찾아도 '성물'이 없다면 염원을 이룰 수 없다. 그러니 반드시 루타니아 왕실부터 함락해야 한다."

"...."

라울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저들이 말하는 '성물'이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무엇에 쓰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고개를 저으며 포기했다는 듯이 말했다.

"다른 곳에서라도 빨리 찾으면 좋겠군요."

그가 알기로는 성물은 하나가 아니었다. 다른 왕국에서도 구원교의 사제들이 성물을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서든 하나만 찾으면 된다. 그러면 '성지'로 들어갈 수 있다.

그저 루타니아 왕국에 성물이 하나 있는 것이 확실하기에 가트로스가 이곳에 온 것이었다.

라울도 빨리 성물을 찾기를 바라고 있었다. 구원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답답한 상황을 참을 수가 없어서였다.

'그래야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빨리 끝내지.'

초점이 성물을 찾는 데 맞춰져 있으니 전략을 짜는 데도 제한이 걸렸다. 이번에도 그랬다.

왕실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니라 왕국 전역을 차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차근차근 영토를 확장하며 나아갔을 것이다.

구원교의 이상한 고집 때문에 이상한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라울로서는 이 종교 놀음을 빨리 끝내고만 싶었다.

그러려면 빨리 성물을 찾아야 했다.

"다른 왕국도 지금 문제입니다."

구원교의 사제들이 루타니아로 몰려올수록 다른 곳에서 움직일 수 있는 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최근에 골치 아픈 일이 또 하나 생겼다.

"웬 이상한 네크로맨서가 설치고 있습니다. 사제들을 잡아서 실험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소식은 들었다. 참으로 불경한 놈이더구나."

처음에는 구원교의 적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놈은 구원교뿐만이 아니라 왕국의 사람들도 무차별적으로 건드리고 있었다.

그냥 이 혼란을 틈타서 제 욕망을 채우는 미친놈이었다. 그런데 미친놈이 강하기까지 하다.

초인인 구원교의 고위 사제를 붙잡아 실험을 한다니 말이다.

가트로스가 심유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이던을 보냈으니 해결될 거다."

"그자가 이번 전쟁에 투입되지 않은 건 아쉽군요."

집행관 아이던은 무척이나 강했다. 왕국제일검인 발자크 백작도 인정할 정도였다.

그런 그를 웬 미친놈 때문에 다른 곳에 보내야 했던 것이다.

가트로스도 그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다른 쪽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으냐."

공작가에서는 이번 전쟁은 고위 사제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펜리스 백작을 유인해서 떼어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략은 완전히 실패했다. 그러니 전투에 뛰어난 집행관 아이던의 부재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가트로스는 아이던을 보낸 걸 후회하지 않았다.

"루타니아 왕국을 차지하더라도 모든 왕국과 교단이 전력을 정비하고 이쪽으로 오면 힘들어진다. 그러니 다른 왕국들도 계속 살펴야 한다."

성물을 찾고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팽팽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뛰어난 실력자인 아이던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라울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이쪽에는 아직 고위 사제들이 남아 있었다.

이제 어떻게 전쟁을 이끌어갈지 다시 고민할 시간이었다.

"아직 병력은 충분합니다. 다만 펜리스 백작과 북부군의 힘이 생각보다 강합니다. 새로운 초인도 합류했다고 하는군요."

"보고는 나도 들었다. 우리도 그에 못지않은 준비를 해야겠구나."

"네, 최대한 피해를 줄일 수 있게...."

라울이 가트로스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그때, 갑자기 회의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온 자를 보고 라울이 흠칫 놀랐다.

"발자크 백작."

사자와 같은 기세와 철탑과 같은 풍채를 지닌 자, 바로 왕국제일검 카이엔 발자크 백작이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라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요제프 자작, 이제 머리를 굴릴 필요는 없다. 피해를 줄이는 건 포기해라."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어차피 펜리스 백작 때문에 모든 일이 꼬이지 않았는가. 봉신들에게 전해 남은 병력을 모두 소집하라. 남부군 사령관은 내가 맡겠다. 이미 전하의 명령이 떨어졌다."

"설마...."

"그래, 내가 직접 움직여 수도를 점령하겠다. 그리고...."

카이엔이 흉흉하게 눈을 빛내며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북부군도 내가 쓸어버리도록 하지."

487화 거의 다 왔다. (2)

지셀이 귀족들을 만나며 이것저것 볼일을 보는 동안, 북부군은 수도 인근에서 대기했다.

따로 떨어졌던 펜리스 기동군과 합류한 북부군의 인물들은 뒤늦게 파르니엘을 만나게 되었다.

모두가 그녀의 거대한 체구와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던 알포이가 물었다.

"이게... 성녀라고? 거인이 아니고?"

무척이나 무례한 발언이었지만 다들 그러려니 했다. 원체 싸가지가 없는 놈이었으니까.

파르니엘도 그냥 알포이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도 이런 반응은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눈치가 좀 있는 클로드가 알포이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 왜 찔러! 말이 안 되잖아! 성녀가 뭐 이래!"

아무래도 알포이의 머릿속에 있는 성녀는 이러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알포이가 피오테의 손목을 잡고 강제로 끌고 왔다.

"왜, 왜 그러는데!"

피오테가 난리를 쳐도 알포이는 억지로 파르니엘의 옆에 세웠다.

"음...."

다들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는 피오테와 여전히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파르니엘이 비교되었다.

확실히 피오테가 더 여자 같긴 했다.

"푸하하하핫!"

"푸하하하핫!"

알포이가 피오테를 보더니 배를 잡고 웃었다. 클로드도 결국 참지 못하고 같이 웃었다.

평소에도 피오테를 놀리는 걸 좋아하는 두 사람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알포이는 실컷 웃다가 갑자기 피오테를 가리키며 외쳤다.

"얘가 성녀야!"

"...."

모두가 침묵했다. 클로드도 바로 정색하며 입을 닫았다. 알포이가 점점 선을 넘고 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알포이는 계속 깐족거리기 바빴다.

"딱 봐도 피오테가 더 여자같이 예쁘잖아! 더 여리여리하잖아! 그러니까 이제부터 피오테가 성녀다!"

확실히 겉모습만 봐서는 그랬다. 피오테 쪽이 외모도 예쁘장하고 체구도 왜소했다.

게다가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얼굴까지 붉히고 있었다. 천생 여자가 따로 없었다.

그렇다고 진짜 성녀 앞에서 저딴 소리를 지껄이다니.

다들 어이없어하면서 입을 닫았다. 동조하면 안 될 거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왜 다들 가만히 있어? 내 말 맞잖아!"

알포이가 계속 깐족거려도 파르니엘은 그냥 무시했다. 저런 거 하나하나에 반응할 만큼 그녀의 수양은 낮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앞에서 저렇게 까부는 놈을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귀여울 정도였다.

옆에 있는 사제에게서 강한 신성력이 느껴져서 그쪽에 더 호기심이 갔다.

"모리아나 님을 모시는 파르니엘입니다. 대단한 신성력이 느껴지는군요."

"쥬, 쥬아나 님을 모시는 피오테입니다. 성녀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그걸 본 알포이가 또 깐족거렸다.

"오늘부터 피오테도 성녀다! '신을 이긴 남자'인 내가 성녀로 임명하지!"

모든 걸 무시하던 파르니엘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말이 들렸다.

쿠웅.

그녀가 앞으로 나서자 아찔한 기운이 느껴진다. 모두가 뒤로 물러났다.

"지금 무어라 했느냐?"

알포이가 살짝 식겁했지만 기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아 외쳤다.

"쟤도 성녀라고!"

"그거 말고."

"시, 신을 이긴 남자?"

"무엄한 놈."

쿠웅!

파르니엘이 다가와 주먹을 들었다. 같은 편이라 살짝 꿀밤만 때릴 생각이었지만 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거대한 주먹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저걸 맞으면 죽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 실드!"

마력 운용만큼은 영지에서 최고 수준에 이른 알포이였다. 순식간에 5개의 실드가 중첩되며 그의 머리 위에 생겨났다.

하지만 상대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투두두두두둑!

실드가 무참히 깨지며 파르니엘의 주먹은 그대로 알포이의 정수리에 꽂혔다.

쿠웅!

"푸헥!"

묵직한 소리와 함께 알포이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찌그러지며 쌍코피가 터져 나왔다. 알포이는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우와...."

사람들이 감탄을 내뱉었다.

깐족거리는 성격 때문에 다들 가끔 잊고 있지만 알포이는 5서클 마법사였다. 한 마디로 어지간한 마탑의 장로급에 비견되는 실력자라는 뜻이다.

아는 마법은 많지 않지만 실전 경험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런 알포이를 꿀밤 하나로 잠재우다니.

역시 성녀(?)였다. 얼마나 강한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구경하고 있던 벨린다가 고개를 젓더니 기절한 알포이를 질질 끌고 갔다.

"아휴, 얘는 도대체 언제 철이 들려나."

전부터 느낀 거지만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새끼였다. 지셀이 어렸을 때 이후로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놈은 처음... 아니, 클로드와 카오르까지 있으니 여러 놈이긴 하다.

끌려가는 알포이를 보며 에레네스가 피식 웃었다. 뭔가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깜짝 놀랐다.

'헛, 내가 지금 웃었다는 말인가?'

세상에 이럴 수가! 언제나 감정을 억누르며 품격 높게 살아오던 자신이 저 바보를 보고 웃어 버리다니!

에레네스는 금세 표정을 관리했다. 인정할 수 없었다. 저런 바보를 보고 웃었다는 게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 그새 에레네스가 웃는 것을 본 클로드가 깐족거렸다.

"어! 대족장님 웃었다!"

"웃지 않았다."

"방금 웃었잖아요! 내가 봤다니까! 저딴 게 웃겨요? 숲에서 재미없게만 살아서 그런가? 저런 것도 다 웃긴가 봐! 웃음 저항력 뭐야! 푸하하하학!"

분위기가 굉장히 안 좋아졌다. 웬디가 바로 클로드의 입을 막았다.

"...."

에레네스가 싸늘한 눈빛으로 클로드를 노려보았다. 눈치 빠른 클로드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내가 잘못 봤나 봐."

클로드가 눈을 돌렸다. 알포이처럼 괜히 계속 깐족거리다가 맞고 싶지 않았다.

확실히 눈치 면에서는 클로드가 알포이보단 낫긴 했다.

새로운 인물을 소개받은 북부군은 그렇게 약간(?)의 소란을 피우며, 수도 인근에서 며칠간 대기했다.

지셀이 왕국군과 연합군의 재편 작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전보다 수는 많이 줄었지만, 그간의 전투로 무려 5만에 가까운 포로들을 얻었다.

그들을 기존 병력에 편입하며 어떻게 군단을 나눌지 의견이 오고 갔다. 며칠이 지나서야 회의가 끝이 났다.

"다들 오래 기다렸지? 이제 우리도 움직이자."

지셀의 말에 클로드가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왕국군이 재편되는 대로 연합군과 함께 남부 지역을 압박할 거야.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확실하게 해야지."

병사들이 이동하고 정비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주먹구구식으로 아무렇게나 재편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북부군은 주요 길목에 터를 잡고 휴식을 취하며 보급을 받고 정비를 할 예정이었다.

지셀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끝나면 동시에 남부로 진격할 거다. 서부군도 미리 준비하고 있으라고 전해. 우리는 그전까지 확실하게 휴식을 취하자고."

북부군만큼 바쁘게 뛴 군대는 없었다. 이 정도로 싸웠으면 이제 좀 휴식을 취하고 정비를 해야 한다.

'거의 다 왔다.'

전생과는 달랐다. 전생에는 홀로 싸웠던 지셀은 이제 수많은 아군과 함께하고 있었다.

물론 공작가만 처리한다고 끝이 아니었다. 구원교도 대륙에서 뿌리를 뽑고 균열도 없애야 한다.

하지만 지셀은 자신이 있었다.

'곧 끝이 날 것이다.'

그래, 얼마 남지 않았다. 제대로 정비된 군대가 한꺼번에 남부를 포위하면 공작가는 빠져나갈 구멍도 없어질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지셀의 눈이 살기 어린 빛을 띠었다.

전생에는 실패했다. 변수가 너무나도 많았고 숨겨졌던 것들이 계속 튀어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이 공작가의 변수가 되었고 차근차근 계획대로 모든 걸 쌓아 올렸다.

그러니까, 반드시.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승리를 취할 것이다.

* * *

촛불 몇 개만 켜져 있는 어둡고 적막한 방.

방은 무척이나 넓고 화려했지만 어둠이 그 형태를 가렸다.

방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침대에는 깡마른 노인이 누워 있었다.

"펜리스... 백작이라고...."

노인이 다 죽어 가는 듯한 음성으로 입을 달싹거렸다.

옆에 있던 중년인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폐하. 그자가 델파인 공작의 군대를 모두 막아 냈다고 합니다."

노인은 바로 루타니아 왕국의 국왕, 베르헴 라드란 2세였다.

그리고 옆에서 그를 보살피는 자는 왕실의 시종장, 도몬트 자작이었다.

도몬트 자작은 국왕인 베르헴이 가장 총애하고 신임하는 자였다. 오랫동안 시종장으로서 왕을 모셔 왔으며, 유일하게 왕의 말벗을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거동조차 제대로 못 하는 베르헴은 그를 통해서만 바깥의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래... 왕실이 위험할 때마다 지켜 주는 자가 나오는구나.... 오래전의 그년처럼 말이다...."

"폐하...."

말을 잇는 베르헴의 눈빛은 정상이 아니었다. 미친 사람과도 같은 광기가 일렁거렸다.

"어차피 펜리스 백작도... 브랜포드 후작의 사람이 아니더냐.... 짐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는 귀족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폐하, 그들 모두 폐하께 충성을 바치는 자들이옵니다."

"웃기는 소리... 짐을 배제하고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브랜포드 후작이 무슨 충신이란 말이냐.... 그년이 세운 후계자지...."

베르헴은 그렇게 누워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욕을 계속 내뱉었다.

도몬트 자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국왕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국정을 제대로 돌볼 수가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그 결핍이 커져 성격이 비틀릴 대로 비틀려 버렸다.

그런 와중에 모든 권력이 브랜포드 후작에게 가 있으니 심기가 더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 어찌하겠는가. 이렇게 누워서 죽을 때만 기다리는 국왕에게 국정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혼자서 옹알거리던 베르헴은 도몬트 자작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짐이 믿는 건 왕실기사단장과 자네뿐이야.... 그 외에는 아무도 안 믿는다. 충신은 오직 그대들뿐이야...."

왕의 옆을 지키는 사람은 둘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도몬트 자작은 그런 베르헴을 안쓰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왕으로 태어났음에도 제대로 된 권력을 쥐어 보지 못했다. 몸이 약해 뭐 하나 해 볼 수 있는 게 없었다.

베르헴은 공허한 눈빛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친왕파니 공작파니... 짐을 빼고 무도한 놈들끼리 권력 싸움을 하는 것 아닌가.... 도대체 누굴 위해서... 싸우느냔 말이다...."

그는 바들거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작은 수정이 달려 있는 무척이나 수수하고 평범한 목걸이였다. 일국의 왕이 쓰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그것이 무척이나 소중한 듯, 조심스럽게 수정을 만지작거렸다.

"이 왕국을... 같이 세운 델파인 공작가가... 무엇을 원하는지 짐은 알고 있지...."

도몬트 자작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 얘기는 정말 수백 번은 들었다.

아마 왕가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은 자신일 것이다.

매일같이 국왕과 대화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왕 또한 제 옆에 있는 자와 대화를 하는 게 생의 유일한 낙이었다.

베르헴은 계속 천장만 바라보며 혼자 떠들었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어.... 왕가와 공작가에 구전되는 내용도... 대부분이 잊혔지... 두 가문의 약속도 다 잊고... 근본도 잊은 채...."

두서없는 베르헴의 중얼거림이 계속 이어졌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도 많았지만 도몬트 자작은 되묻지 않았다.

어차피 왕은 반쯤은 미쳐 있다고 할 수 있으니까.

처음에는 매일 미친 소리를 듣는 게 곤욕이었지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구원교... 라고 했나? 공작가와 함께 움직이는 자들이...."

"네, 그렇습니다."

"몸이 잘리고... 상처 입어도... 금세 회복한다고...."

"예, 그런 힘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이기가 무척이나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교로 지정이 되었다고...."

"네, 4대 교단과 브랜포드 후작이...."

"이놈들... 감히 짐에게 윤허도 받지 않고...."

베르헴이 말을 하다가 부들부들 떨었다. 도몬트 자작이 급히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폐하, 마음을 가라앉히시옵소서. 폐하께서 언제든지 말씀만 내리시면 바꿀 수 있는 것들이옵니다."

사실 불가능했다. 봉건제인 루타니아 왕국에서는, 아무리 왕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대륙의 4대 교단까지 끼어 있는데 어찌 왕의 말만으로 되돌릴 수 있겠는가.

도몬트 자작은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베르헴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거짓을 말했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베르헴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구원교의 사제들이 부럽구나... 목만 잘리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는 말이지 않은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니...."

"폐하...."

베르헴에게는 확실히 부러워할 만한 능력이었다. 그에게는 구원교가 사교라는 것도 별 의미가 없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에게 사교든 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베르헴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던 그가 갑자기 도몬트 자작의 손을 잡고 말했다.

"짐의 부탁을 하나 들어 다오...."

"부탁이라니 당치 않으십니다. 하명하십시오."

"꼭 들어줄 거라 약속해 다오...."

"목숨을 걸고 이행하겠나이다."

베르헴은 도몬트 자작의 손을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의 두 눈은 알 수 없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구원교의 사제를... 그 힘을 가진 자를... 짐의 앞에 데려다 다오.... 그 힘을... 갖고 싶구나...."

도몬트 자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왕은 지금 무척이나 위험한 부탁을 하고 있었다.

구원교의 사제를 데리고 오는 것 자체도 어렵지만, 설사 데리고 왔다고 해도 브랜포드 후작이 왕과 만나도록 허락할 리가 없었다.

발각되면 자신도 반드시 죽게 된다.

하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한 사람만 설득하면 된다.

충성스러운 그는 왕의 부탁을 꼭 들어주고 싶었다.

평생 불쌍하게 살았던 왕을 위해 말이다.

"반드시... 명을 이행하겠나이다."

도몬트 자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빛은 굳은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488화 왕실을 위해서다. (1)

도몬트 자작은 집무실을 서성거리며 한참을 고민했다.

'구원교의 사제를 데리고 오라니....'

사실 왕은 무리한 부탁을 하고 있었다.

구원교의 사제가 그냥 치료해 줄 리가 없다. 분명 어떤 제약을 걸거나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거기다 이미 대륙의 공적으로 지정된 구원교다. 왕이 그들의 손을 잡으면 왕 또한 대륙의 공적이 되게 된다.

그 사실이 밝혀지면 브랜포드 후작과 그를 따르는 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대세를 뒤집을 수 있다.

친왕파라고 모두 같은 계파는 아니다. 그저 브랜포드 후작이 가장 강한 권력을 가졌기에 그가 중심이 되었을 뿐이다.

왕이 건강을 되찾는다면 브랜포드 후작에게 눌려 있던 귀족들과 영주들이 고개를 들 것이다. 어쩌면 그를 축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브랜포드 후작이 펜리스 백작을 밀어주는 데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꽤 많다.'

지셀은 강제로 귀족들을 억압하며 일을 진행하는 편이었다. 그 때문에 그에게 이를 가는 귀족들도 꽤 많았다.

'특히 약재를 뺏긴 귀족들과 동부 지역 귀족들이 그러하지.'

약재를 뺏긴 귀족들은 물론이고, 아멜리아에게 영지를 빼앗긴 귀족들도 그녀를 지지한 지셀에게 원한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왕이 기력만 찾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싸움이었다.

물론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자신의 목숨이 달아날 것이고 왕은 더욱더 고립될 것이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

그럼에도 도몬트 자작은 왕의 소망을 들어주고 싶었다.

오랫동안 그의 불쌍한 모습을 봐 오며 연민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번쯤은 베르헴이 왕으로서의 위엄을 되찾기를 바랐다. 그것이 도몬트 자작의 충성 방식이었다.

'방법을 찾아야 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수도 전체에 브랜포드 후작의 눈과 귀가 깔려 있다.

공작파 귀족들과 선을 대는 것도 불가능했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대부분이 도망가거나 붙잡혔기 때문이다.

'시종장인 내가 왕실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브랜포드 후작에게 바로 잡힐 거야.'

한참을 고민하던 도몬트 자작이 자신의 둘째 아들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그의 둘째 아들, 콜헨은 좋게 말하면 무척이나 활동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놀기 좋아하는 남자였다. 그리고 장래가 유망한 기사이기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왕국 곳곳을 쏘다니는 그야말로 전쟁이 잠깐 멈춘 이 시국에 바깥을 돌아다니기 가장 좋은 인물이었다.

도몬트 자작은 아들의 손을 꽉 잡고 애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너에게 부탁이 있다."

"무엇입니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의아해하는 콜헨에게 도몬트 자작은 차분하게 왕의 바람을 설명했다.

계획을 들은 콜헨은 사색이 되어 말했다.

"무, 무슨 말씀입니까? 만약에 걸리면 우리 가문은 아예 끝장이 날 겁니다."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폐하를 위해 이 일을 꼭 하고 싶구나."

"설사 제가 구원교의 사제를 설득해서 데리고 온다 한들 폐하의 앞까지 가지 못할 겁니다. 브랜포드 후작의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다. 어떻게든 데리고만 와 다오. 이 일을 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

"아버지! 정말 가문을 걸겠다는 말씀입니까? 성공하더라도 브랜포드 후작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폐하께서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습니까!"

공포에 질린 콜헨의 어깨를 도몬트 자작이 강하게 붙잡았다.

"왕실을 위해서다."

"아버지...,:

"그리고 만약 성공한다면, 우리 가문이 브랜포드 후작의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것이다."

"...!!"

"중앙 귀족이라 하지만 우리 가문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기반이 되는 영지조차 없이, 그저 내가 폐하의 총애를 받는 게 전부다."

도몬트 자작의 눈은 알 수 없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도 방위 병력을 제외하면 모든 군대가 남부 전선으로 이동하고 있다. 총사령관은 아직 수도에 있고 군단장들의 가족도 수도에 남아 있다. 왕실 기사단은 우리 편이다. 내 말뜻을 모르겠느냐?"

꿀꺽.

콜헨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았다.

왕만 기력을 찾으면 된다. 그러면 뒷일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것이다.

콜헨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위험한 일이지만 가문을 위해서라면 해 볼 만한 일이기도 했다.

이번에 처음 알았다. 언제나 조용하고 잔잔한 성격이라 여겼던 아버지에게도 야심이 있었다는 걸.

"구원교의 사제가... 정말 폐하를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치료가 아니지. 하나 지금까지 알려진 그들의 힘이라면 폐하의 기력을 되찾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도몬트 자작은 분명 그들이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사람의 생명력을 이용해 균열을 열고 성전사를 만들던 자들이니 말이다.

콜헨은 가만히 앉아 고민에 빠졌다. 도몬트 자작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고민을 끝낸 콜헨이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한 눈빛을 보였다.

"해 보겠습니다. 반드시 구원교의 사제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고맙다, 고맙구나. 성공만 한다면 우리 가문은 크게 부흥할 것이다."

그날부터 콜헨은 다시 술을 마시며 바쁘게 놀러 다녔다. 워낙 노는 걸 좋아했던 인물이라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쟁도 끝난 거나 마찬가지 아니야? 수도에만 처박혀 있었더니 몸이 근질거려 미치겠군. 사냥이라도 가야겠어."

주변에 이런 소리를 지껄이던 그는 며칠 뒤 호위 기사 몇 명과 사용인들을 데리고 수도 밖으로 나가 버렸다.

딱히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콜헨은 방심하지 않았다.

'전부 떨어뜨려야 해.'

도몬트 가문의 기사들과 사용인들이지만 분명 브랜포드 후작의 명령을 받은 자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여기저기 유람하며 남부 쪽으로 내려가던 콜헨은 곧 호위 기사들에게 제지당했다.

"공자님, 더 이상 가시면 안 됩니다. 곧 위험 지역입니다. 도적들이라도 나타나면 우리 인원으로는 당해 내기 힘들 겁니다."

그를 따라온 것은 호위 기사 세 명에 사용인 두 명뿐이었다. 그나마 호위 기사들도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남부 전선 쪽으로 내려갈수록 치안은 개판이다. 이 인원으로 도적들이 나타나면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음, 그래. 슬슬 다시 돌아가 봐야지. 오늘은 노숙을 하자고. 내가 첫 번째 불침번을 서도록 하지."

며칠간 여기저기 싸돌아다닌 콜헨 때문에 피곤해진 호위 기사와 사용인들은 저녁을 먹고 금세 잠이 들었다.

교대 시간이 왔을 즈음, 모두가 잠든 걸 확인한 콜헨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는 오늘 일부러 더 많이 돌아다녔다. 다들 피곤해서 곯아떨어지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실력이 그저 그런 기사들이라 해도 세 명이나 된다. 빠르게 처치해야 했다.

푸욱!

"컥!"

자다가 목을 뚫린 기사가 소리를 내자, 남은 두 명이 바로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준비하고 있던 콜헨이 한 박자 더 빠르게 움직였다.

촤악! 촤악!

"크륵... 왜...?"

아예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의문을 풀지 못한 채 그대로 죽고 말았다.

벌벌 떨고 있는 사용인들을 보며 콜헨이 씁쓸한 표정을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날 감시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서 말이다."

스각!

사용인들은 저항도 못 하고 죽었다.

그렇게 모든 일행을 처치한 콜헨은 비장한 표정으로 로브를 뒤집어썼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치안이 엉망이 된 지역을 통과해 무사히 남부까지 가야 했다.

쉽지 않을 것이다. 사방에 도적들이 들끓고 곳곳에 척후병들이 돌고 있을 테니까.

그래도 성공해야만 한다. 이미 지도를 보며 홀로 숨어다닐 수 있는 길은 달달 외운 상태였다.

"아버지, 제가 꼭 성공하겠습니다."

만나야 할 사람은 라울 요제프 자작이다. 그자가 공작가의 두뇌였으니까.

콜헨은 이를 악물고 말 허리를 박찼다.

* * *

"왕국군과 연합군이 다시 모이고 있습니다."

"북부군은 조금 떨어진 곳에 대기 중입니다. 어떻게 움직일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사방에서 저희를 압박한 뒤에 가장 약한 곳을 파고들 거 같습니다."

참모들의 보고를 받은 라울이 입술을 씰룩거렸다.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북부군이 활약하니 나머지 놈들까지 기가 살아서 감히 남부로 몰려들고 있었다.

더 시간이 지나면 포위망이 완성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쪽이 곤란해진다.

"북부군의 전력은 만만치가 않아. 새로운 초인들까지 합류했으니...."

북부군에 정확히 몇 명의 초인이 있는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일단 소문으로만 듣던 '세계수의 수호자'가 북부군에 있다고 한다. 패배한 2군단에서 팔이 잘린 채 도망친 사제가 알려준 것이다.

"거기에 '전쟁의 성녀'까지 합류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7서클 마법사인 '알포이'도 있다. 길리언도 초인에 올랐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믿을 수 없지만, 지금까지 상식적으로 판단하다가 계속 당하지 않았는가. 그냥 무조건 그렇다고 가정하고 전력을 준비해야 했다.

"가트로스 님도 이번에는 참전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라울의 말에 가트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세계수의 수호자는 내가 맡도록 하지."

세계수의 수호자는 구원교의 오랜 적이었다. 그자를 상대하려면 그만한 인물이 나서야 했다.

"펜리스 백작은 발자크 백작이 맡을 겁니다. 그리고 알포이는 일로이스 경이 맡을 거고요. 나머지는 고위 사제들을 최대한 많이 투입해야 할 거 같습니다."

그 정도면 북부군과 해볼 만할 것이다. 문제는 왕국군과 연합군이었다.

"최대한 적은 병력으로 버텨야 할 겁니다. 북부군만 처리하면 나머지는 오합지졸들이니까요."

"힘든 싸움이 되겠구나."

"어쩔 수 없습니다. 북부군이 너무 강해졌습니다."

"그들이 하나로 모여서 들어오면 어쩔 테냐?"

"차라리 그게 더 상대하기 쉬울 겁니다. 우리도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펜리스군보다 기동력이 떨어집니다."

지금까지의 전적으로 봤을 때 펜리스군의 기동력은 절대 따라갈 수가 없다.

차라리 뭉쳐서 오는 게 이쪽에서는 더 상대하기 편할 정도였다.

"펜리스의 기술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입니다."

펜리스군은 신소재 장비로 무장했다. 새로운 전투 식량도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그런데 두 가지 다 정확히 어떤 기술인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전투 식량과 장비는 오직 펜리스 영지 내에서만 생산하고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간의 경험에 의존해서 최대한으로 기동력을 산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병력을 모으는 대로 이쪽에서 먼저 치고 가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준비가 조금 미흡하더라도 그게 나았다. 왕국군과 연합군이 전부 모여서 남부를 압박하면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대략적인 전략을 짠 라울이 참모들과 세부적인 상황을 논의하던 그때, 문밖이 시끄러워지며 기사들이 들어왔다.

라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자작님을 꼭 뵙겠다는 놈이 찾아왔습니다."

"누구냐."

"본인이 왕실 시종장의 아들이라고 밝혔습니다."

"음?"

라울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은 전쟁 중이었다. 친왕파와는 끝장을 볼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왕실의 사람이 왔다고? 그것도 정식 사신이 아니라 시종장의 아들이?

도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왔다는 말인가?

궁금함이 앞선 라울이 손을 까닥였다. 데리고 오라는 뜻이었다.

기사들이 끌고 온 자는 바로 콜헨이었다. 그는 몸 곳곳에 상처를 입고 완전히 거지꼴이 되어 있었다.

콜헨은 들어오자마자 허물어지듯이 엎드리며 외쳤다.

"자작님! 저는 시종장의 둘째 아들 콜헨입니다! 아주 오래전 연회 때 잠깐 뵌 적이 있습니다!"

"고개를 들어 봐라."

라울은 콜헨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머리도 산발이었지만 분명 기억 속에 있는 얼굴이었다.

"그래, 본 기억이 있구나. 네놈은 왜 여기까지 와서 날 보겠다고 한 것이냐? 지금 전쟁 중인 걸 모르고 온 것이냐?"

꼴을 보니 아주 험한 고생을 하면서 온 것 같았다. 주변의 눈을 피해서 온 게 분명했다.

무슨 말을 할지 자못 궁금했다. 그런데 콜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보다 더 놀라웠다.

"저는 폐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무어라?"

"브랜포드 후작의 눈을 피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구원교의 사제님을 모셔가 폐하를 치료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라울과 가트로스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마주쳤다. 가트로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울이 짐짓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 폐하를 치료해 달라고? 자세히 말해 보거라."

콜헨은 자신이 들었던 말을 모두 전해 주었다. 왕이 구원교 사제와 같은 힘을 갖기를 원하며, 브랜포드 후작도 내치길 바란다는 것을 말이다.

콜헨은 비장한 표정으로 그들이 내어줄 대가를 말했다.

"그렇게만 하면... 공작가가 원하는 '왕실의 비보'를 내어주고 원하는 건 모두 들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호오...."

라울이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딱 봐도 이건 거짓이 아니었다. 왕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건 자신도 잘 알고 있으니까.

고작 구원교의 사제 한둘을 인질로 삼으려고 이런 일을 벌일 리도 없었다.

"분명... '왕실의 비보'라 하셨는가?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걸 다 들어줄 수 있다는 말인가?"

"네, 다만 반드시 폐하가 기력을 찾을 수 있게 힘을 주셔야 합니다. 그게 우선입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흐음...."

라울이 입꼬리를 올리며 가트로스를 바라보았다. 듣고 있던 가트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콜헨을 보며 말했다.

"그럼, 가능하고말고.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초인으로도 만들어 드릴 수 있다."

가트로스의 눈은 묘한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장 원하던 것을 쉽고 빠르게 손에 넣을 기회였다.

콜헨이 고개를 들어 가트로스를 바라보았다. 검은 기운을 내뿜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공포가 몰려왔다.

콜헨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 누구십니까?"

"나에 대해 알 필요는 없다. 그저 너의 소원을 들어줄 자로만 알고 있으면 된다."

가트로스는 콜헨과 얼굴을 가까이하고 희열에 가득 찬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은 마치 악마가 웃는 것처럼 보였다.

489화 왕실을 위해서다. (2)

라울은 웃음을 지었다. 이것이 적의 계략일지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고위 사제 하나만 보내면 될 일이다. 혹여 일이 잘못되어도 그 한 사람만 잃을 뿐이다.

초인을 잃는 건 큰일이긴 하지만, 고작 그 정도 이득을 보자고 이런 큰일을 벌일 리가 없었다.

"도몬트 자작. 이 음흉한 인간 같으니라고."

국왕이 기력을 되찾으면 브랜포드 후작은 굉장히 골치가 아파질 것이다.

친왕파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그가 쉽게 실각하지는 않겠지만, 친왕파 귀족들이 분열하는 것은 막지 못할 터였다.

그리고 새로운 권력의 중심에는 이 일을 진행한 도몬트 자작이 떠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척이나 조용하고 진중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덕분에 시종장의 자리에 오른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에게도 이런 야망이 있을 줄이야.

"우리에겐 정말 좋은 기회구나."

왕이 기력을 찾고 국정에 관여하기 시작하면 명령 체계도 혼선을 빚을 수밖에 없다.

왕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도 브랜포드 후작과 대립하려 할 테니까 말이다.

즉, 친왕파로서 왕실을 지킨다는 브랜포드 후작의 가장 큰 명분이 사라지게 된다.

내부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꼭 성공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가트로스도 상당히 고심한 뒤에 적절한 인물을 선정했다.

"플라쿠스, 이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플라쿠스는 부드럽고 선한 인상을 지닌 중년 남자였다. 신을 모시는 사제라면 응당 이렇게 생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한 외모였다.

가트로스에게 신신당부를 받은 콜헨과 플라쿠스는 바로 수도로 향했다.

왕국군이 정비하고 남부 전선으로 몰려들기 전에 빠르게 일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는 길은 힘들지 않았다. 초인인 플라쿠스는 어지간한 도적들 따위는 단숨에 쓸어버렸다.

"대, 대단하십니다."

콜헨의 감탄에 플라쿠스는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별거 아닙니다. 공자께서도 진심으로 저희의 신을 믿으시면 얻으실 수 있는 힘이지요. 차후 일이 잘 풀리면 제가 교단의 고위직에 공자를 추천하도록 하겠습니다."

콜헨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이런 힘을 가질 수 있다면 구원교에 투신해도 될 거 같았다.

'그간 내가 너무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았구나!'

왕국과 교단이 적대시하기에 정말 사악한 집단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며칠 같이 지내 보니 이렇게 신사적인 사람이 없었다.

역시 선입견은 좋지 않다. 콜헨은 반드시 이번 일을 성공시켜 강대한 권력과 초인의 힘을 갖겠다고 다짐했다.

두 사람은 무사히 수도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어떤 제지를 받지 않았다.

도몬트 자작은 플라쿠스를 반갑게 맞이했다. 자신의 아들이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한 것이 기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브랜포드 후작은 이미 콜헨이 플라쿠스를 데리고 온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전말을 완전히 깨닫기 전에 무사히 국왕의 앞까지 이 자를 데리고 가야 한다.

도몬트 자작과 플라쿠스는 밤늦게 왕궁으로 입성했다. 시종장이라는 직위 덕분에 딱히 제지는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왕의 침전으로 들어가기 직전, 기사들에게 막혔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무엄하다. 나는 폐하의 부름을 받고 가는 길이다."

"동행이 있기에 그냥 가실 수는 없습니다."

"...."

이 정도는 예상했다. 브랜포드 후작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기다리자 곧 브랜포드 후작이 당도해 물었다.

"시종장, 이자는 누구이기에 이런 늦은 시각에 폐하께 데려가려는 것이오. 유람을 나갔던 아들이 데려온 자라는 건 알고 있소.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수행인들은 모두 사라지고, 본인도 거지꼴이 되어서 돌아온 거요?"

역시 다 알고 있었다. 수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브랜포드 후작의 눈과 귀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도몬트 자작은 떨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폐하께서 이분을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어째서?"

"아들이 유람을 나갔다가 도적들을 만나 큰 위험에 빠졌었습니다. 그때 이분이 도와주셨습니다. 폐하께 말씀을 드렸더니 직접 보고 치하해 주고 싶다 하셨습니다."

"흐음, 그렇소?"

"예. 게다가 이분은 뛰어난 마법사이자 치료사라고 합니다. 폐하께서도 당신의 병세를 한번 보이고 싶다 하셨습니다."

"그렇구려."

무심한 표정으로 답한 브랜포드 후작이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알겠소. 그러면 그자는 일단 놓고 가시오."

"폐하께서 보자고 하셨습니다."

"정체도 모르는 자와 폐하를 만나게 할 수는 없소이다. 충분히 조사한 뒤에 풀어 주겠소. 데리고 가라."

기사들이 다가와 플라쿠스의 양팔을 잡았다. 플라쿠스는 잔뜩 긴장한 채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이런 상황이 일어날 거라고 이미 도몬트 자작에게 들었다. 도몬트 자작은 자신을 믿고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고도 했다.

'정 안 되면 브랜포드 후작이라도 죽여야 해.'

차선의 선택지이긴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브랜포드 후작을 공격하면 자신은 이곳에서 죽겠지만, 교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었다.

마침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지만, 플라쿠스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옆에 있는 놈의 기도가 만만치가 않다.'

브랜포드 후작의 옆을 지키는, 후작가의 기사단장 톨레오는 최상급 기사였다. 그 정도 실력이라면 브랜포드 후작이 도망갈 시간은 충분히 만들어 줄 수 있었다.

플라쿠스도 그걸 느꼈기에 계속 갈등했다. 구원교의 사제들은 전투 기술이 떨어지니 기습을 하려거든 단 한 번에 성공해야 했다.

'제길... 나를 계속 살피고 있구나.'

톨레오는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고 브랜포드 후작보다 한 걸음 더 나와 있었다. 한시도 방심하지 않는 게 과연 후작가의 기사단장다웠다.

'어떻게 하지?'

가장 좋은 건 역시 국왕을 만나 그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왕국군이 후퇴하든 분열하든 할 테니 말이다.

플라쿠스는 조금 더 도몬트 자작을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과연 도몬트 자작은 평소와 다르게 물러나지 않았다.

"어찌 이러십니까? 아무리 궁내부 장관님이라도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폐하께서 부르셨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조사를 하고 풀어 준다는 거 아니오."

"폐하의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고 있습니다! 이분이 잠깐 폐하의 옥체를 보는 게 무슨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까!"

"왕국 최고의 마법사들과 사제들이 10년을 넘게 살폈지만 소득이 없었소. 거기에 폐하께서는 심각한 노환이시오. 그자가 정말 치료할 수 있을 거라 보시오?"

"이분은 뛰어난 마법사입니다.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설사 이분이 실패하더라도 지금과 달라질 것은 없지 않습니까! 어찌 작은 희망마저 짓밟으려 하십니까!"

그 말에 브랜포드 후작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왕국의 마법사들과 사제들도 고치지 못하는 병을 떠돌이 마법사가 자신 있게 고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건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겠지."

"무, 무슨...."

"흑마법이나 사술이 아니라면 그리 말하지 못할 터. 고귀한 왕가의 핏줄에 그런 방법을 쓰게 할 수는 없다."

차갑게 말한 브랜포드 후작이 기사들에게 턱짓했다.

"끌고 가라. 정말 뛰어난 마법사인지 바로 조사하겠다."

"이익! 당신이 무슨 권리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어찌 폐하의 권위를 이리 무시할 수 있다는 말이오!"

"왕실을 위해서다."

"왕을 무시하면서 어찌 왕실을 위한다고 말하는 것이오!"

그 말에 브랜포드 후작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도몬트 자작이 한 말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도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알고 있었다. 세간의 소문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말할 뿐이었다.

"시종장도 데리고 가라. 행동이 수상하니 같이 조사해 봐야겠다."

철컹, 철컹, 철컹.

기사들이 움직여 도몬트 자작까지 붙잡았다. 두 사람이 함부로 반항하지 못하게 아예 그들을 에워쌌다.

플라쿠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실패인가?'

이미 기습할 타이밍도 지나갔다. 이 기사들을 뚫을 순 있어도 단번에 브랜포드 후작을 암살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도몬트 백작은 이를 악물며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크게 소리를 지르며 시간을 끌었다. 다 바라는 바가 있어 취한 행동이었다.

과연 두 사람이 끌려가기 직전,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멈추시오!"

브랜포드 후작이 눈매를 찡그렸다.

나타난 것은 왕실 기사단, 그리고 루타니아 왕국의 소드마스터이자 왕실 기사단장인 팔란츠 백작이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팔란츠 백작, 무슨 일이오."

"폐하의 명입니다. 그만하시지요."

"무어라?"

"폐하께서 오셨단 말입니다."

왕실 기사들이 좌우로 퍼져 길을 냈다. 그 너머에서 곧 깡마른 노인이 한 기사의 등에 업혀 나타났다.

루타니아의 왕, 베르헴이었다.

베르헴은 충혈된 눈으로 브랜포드 후작을 노려보았다.

"짐이... 불렀다 하지 않았느냐...."

"폐하. 신분이 불분명한 자입니다."

"왕인... 내가 불렀다고 하지 않았느냐!"

"...."

"네가... 네가 어찌... 이리 무도할 수가 있느냐!"

"왕실을 위해서입니다."

"짐이... 왕실이다! 내가 없으면... 이 왕국도... 의미가 없다! 네놈이... 그년하고 뭐가 다르다는 말이냐! 쿨럭!"

한스럽게 외치던 베르헴이 피거품을 게워 내기 시작했다. 눈도 흰자위가 보일 정도로 돌아갔다.

옆에 있던 왕실 마법사가 깜짝 놀라며 바로 마법을 시전했다.

"폐하! 정신을 차리시옵소서!"

왕실 마법사는 초인이 되지 못했지만 드래곤 하트 조각을 흡수해 마력이 넘쳤다. 그는 열심히 마력을 뿜어내 베르헴의 생명을 붙잡았다.

팔란츠 백작이 브랜포드 후작에게 말했다.

"오늘 한 번만은 양보하시지요. 폐하께서 심기가 매우 불편하십니다."

브랜포드 후작은 도몬트 자작을 노려보았다. 이미 서로 말을 다 맞춰 두었던 게 분명했다.

여기서 전부 끌고 가려면 왕실 기사단과 무력 충돌을 감수해야 한다. 이길 자신은 있지만, 그렇게 되면 왕이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이를 악물며 베르헴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베르헴은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 있어 대답하지 못했다. 계속 숨만 헐떡일 뿐이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기사들에게 말했다.

"알현이 끝나면 시종장과 저자를 체포해라."

그 말을 끝으로 브랜포드 후작은 몸을 돌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베르헴이 외쳤던 말만이 계속 맴돌았다.

― 네놈이... 그년하고 뭐가 다르다는 말이냐!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젊은 시절 그렇게 싫어했던 '그림자 기사단장'과 점점 닮아 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왕국은 점점 쇠락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악행은 여전히 하늘을 찌르고, 공작가는 왕실을 노리고 전쟁을 일으켰다. 사교가 판을 치고 괴물들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왕국의 사람들은 매일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사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나라였다.

'안 된다. 그렇게 무너지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브랜포드 후작은 그 모든 걸 힘으로 누르며 왕국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지금도 지셀 덕분에 겨우 끌고 가는 중이었다.

갈수록 힘에 부쳤지만, 자신이 무너지면 안 된다. 자신이 무너지면 억눌려 있던 귀족들이 다시 날뛰고 결국 왕국이 무너질 것이다.

'제발 위험한 짓은 하지 마십시오. 폐하.'

이 상황은 너무나도 공교롭고 너무나도 수상했다. 공작가와 구원교가 엮여 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되었다. 왕이 자신을 쳐내려고 허튼짓을 할까 봐 말이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브랜포드 후작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왕실을 위해서였다.

공작가만이 위험한 게 아니었다. 실상 더 무서운 자는 따로 있었다.

'지셀 페르디움.'

자신이 밀어준 덕분에 그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고 왕국 최강의 군대를 갖게 되었다. 그 덕분에 자신이 지셀의 족쇄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서로 필요하기에 지금까지 관계를 이어 온 것이지만, 지셀도 고마움을 아는 인간이라 브랜포드 후작 자신에게는 한 수 접어 주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이 있기에 지금까지 지셀을 그 정도라도 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없어지면....'

그놈은 일반적인 귀족들과 달랐다. 체면을 차리지도 않고 명분도 찾지 않는다.

제 앞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모두 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었다.

그러니 왕이 방해가 된다면 아무 거리낌 없이 왕실을 향해 칼을 들이밀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느껴지는 안 좋은 예감이 그저 자신의 착각이어야 한다.

정말 왕실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말이다.

* * *

베르헴은 침대에 누워 가느다란 숨을 내쉬었다.

눈이 자꾸 감기려 했다. 억울함과 분함이 앞섰다.

그는 흐릿한 눈빛으로 구원교의 사제, 플라쿠스를 바라보며 힘겹게 말했다.

"내 삶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게 느껴지는구나...."

"제가 봐 드리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베르헴은 애원하는 듯한 눈빛을 내비쳤다.

"그래, 어서 짐을... 짐을 치료해 다오... 너희와 같이 만들어 다오.... 그리하면... 내 왕실의 비보도 주고 너희가 원하는 걸 모두 이루어 주겠다...."

플라쿠스가 베르헴의 손을 잡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짐은... 왕이되 평생 왕으로 살지 못했다... 평생 허수아비로 살았느니라.... 이리 죽을 수는 없다. 나를 치료해 준다면... 내 반드시 권력을 되찾고 구원교를 왕국의 국교로 삼으리라...."

"참으로 반갑고도 황송한 말씀이옵니다. 제가 꼭 폐하를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플라쿠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이며 솟아올랐다.

그걸 본 도몬트 자작과 팔란츠 백작이 마른침을 삼켰다.

특히 초인에 이른 팔란츠 백작은 소문으로만 듣던 저 기운이 무척이나 불길하다는 걸 피부로 느꼈다.

하지만 왕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면 그런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고, 팔란츠 백작은 술렁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 또한 끝까지 왕을 보필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내가 지켜드리면 된다.'

구원교가 허튼수작을 부리려 하면 자신이 막으면 된다. 왕국제일검인 발자크 백작에게 명성은 밀리지만 실력으로는 밀리지 않을 거라 자신하고 있었다.

싸움은 붙어 봐야 아는 게 아닌가. 팔란츠 백작은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최고의 길만 걸어왔다.

그러니 왕을 지킬 자신이 있었다.

파아아아....

플라쿠스의 손에서 일렁이는 검은 기운이 더욱더 짙어졌다.

그는 그 손을 베르헴의 심장에 가져다 대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곧 사자 사냥도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던 그의 입꼬리는.

무척이나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490화 왕실을 위해서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