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5

26화 내 지각에는 낭만이 있다 (3)

"정말 이걸 다 잡으신 겁니까?"

줄줄이 포승줄에 매여 걸어오는 산적들을 보며 관군이 놀란 얼굴을 했다.

"예. 확인해 보세요. 토벌 확인서도 따로 챙겨 주시고요."

"아, 그러면 혹시 어떤 사유로 쓰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무림학원 생도인지라 확인용입니다."

"그렇군요."

종종 무림학원에서 생도에게 외부에서 의인 활동을 하도록 했던 터라 쉬이 납득했다.

봉사 점수를 도적 떼 소탕하면서 얻는 학원이라니. 생각해 보면 참 신기했다.

더 신기한 건 이렇게 첫 살인을 저질렀어도 멀쩡한 나 자신이었지만. 이건 [극한의 의지]가 심적인 부분을 보조해 준 덕분이겠지.

"여기 있습니다."

나는 백 냥짜리 전표 몇 장을 받아 챙겼다. 이렇게 산적들을 잡았는데도 몇 달 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금액이 전부였다. 참, 사람 목숨이 껌값인 세계였다.

'돈을 노리고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토벌 확인서를 챙겨서 가려던 때였다.

"누가 잡혀 왔다고?!"

멀리서 급히 온 기색이 뚜렷한 중년의 관군이 물었다. 아무래도 이곳의 상급자인 모양.

"최근에 인근 산지에서 날뛰던 산적 무리들입니다. 우두머리인 조돈추도 잡았습니다."

"뭐? 내가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했…!"

그가 도적 떼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조돈추라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했다.

'상관없지.'

왠지 소란스러워질 것 같았기에 전표를 챙긴 채 나서려 했다.

뒤에서 붙잡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이봐, 낭인. 그쪽이 잡아 온 건가?"

"그런데?"

"…젊어 보이는데 말이 짧군."

"그쪽이야말로 생각이 짧네. 내가 왜 이럴 거라 생각해?"

오히려 세게 나오자 순간 굳는 상대. 어디서나 갑질 공무원들의 행동 양식은 비슷했다.

만만해 보이면 무시하지만 있어 보이면 누구보다 조심스러워지는 족속들.

"실례지만…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네 부하한테 물어봐."

뒤늦게 공손해져 봤자 이미 늦었다. 매몰차게 녀석을 무시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증언 중에 제갈세가 쪽 사람이라는 걸 알렸으니 알아서 조용해질 터.

'이럴 땐 가문빨이 도움이 된단 말이지.'

문제는 지금부터 내가 돌아갈 무림학원은 그런 배경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는 점이었다.

학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 * *

"여기가 여관인 줄 아나 보군?"

학원 입구를 지키던 문지기에게 연행된 끝에 도달한 곳은 징계위원회였다.

나는 초라한 나무 의자에 앉아 높은 단상 위에서 날 내려다보는 남궁도혁의 싸늘한 힐난을 듣고 있었다.

"하급생도 주제에 무단 외박에 수업까지 무시하다니. 수석의 눈에는 이곳이 그리 만만해 보였나?"

이에 동조하듯 내려다보는 다른 교수들의 시선 역시 싸늘했다. 어지간한 담력으로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

'큰일 났네.'

이럴 땐 바짝 엎드려야 한다. 나는 사과문의 원칙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저는 제 부주의함으로 인해 지난 5일간 무단 외박으로 교칙을 어겼습니다. 수석이라는 과분한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모범을 보이기보단 도리어 학풍을 해치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현대에서도 널리 쓰이는 사과문의 정석.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그들이 이 자리를 만든 이유를 깔끔하게 토로한 것만으로도 약간은 분위기가 누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무림이 배경이라 해도 이곳은 학원, 엄연히 교육을 표방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리 발언의 기회가 주어지니 감히 말씀드리겠지만, 제겐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품 안에서 토벌 확인서를 꺼냈다.

"그건 뭐지?"

"토벌 확인서입니다. 관아에서 받아 온 산적 무리를 처리한 증표입니다."

"그것 때문에 늦었다고 하는 말인가?"

중앙에 앉아 있던 구자범 교수가 물었다.

"예, 아무런 힘도 없는 양민들이 죽고 약탈당하고 있었습니다."

"네 객기로 인해 늦어진 거로군. 자신의 능력도 모르고 경거망동한 결과다."

그때 남궁도혁이 끼어들었다. 정론이었다.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어 변론을 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을 버리고 갈 수 없었습니다. 징계가 무서워서 눈앞의 민초조차 구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정파란 말입니까?"

무림학원의 설립 목적은 무와 협.

세계의 분쟁을 해소하고 의협심으로 약자를 지키기 위한 사명 역시 있었다.

지금 내가 지적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정의를 위한 인재를 기르는 곳에서 정작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규칙을 어긴 것을 처벌하려 한다는 역설을 말이다.

"무림인에게 있어 정의가 먼저입니까? 규칙이 먼저입니까?"

내가 묻자 남궁도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규칙이라고 선언하면 학원의 근간을 부정하는 말이 된다. 질서니, 권위니 운운하며 뭐라고 하기엔 궁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곰곰이 생각해 보면 빠져나갈 구석은 있겠지만 인생은 언제나 실전이다.

망설인 순간 이미 프레임 싸움에서 먹히고 들어간 거다.

쐐기를 박듯 강한 어조로 다시 한번 물었다.

"학원의 가르침에선 사람이 먼저입니까? 체면이 먼저입니까?"

정의.

정파의 근간을 담고 있는 내 발언에 주변의 교수들이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저는 오대세가의 일원으로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선인들의 고결한 뜻과 함께 명예를 목숨처럼 중히 여기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말입니다."

잠시 말을 멈추자 언어의 공백 속 모든 교수들의 시선이 내게 쏠린 것이 느껴졌다.

"명예는 언제나 책임 위에 쌓이는 것이라고. 올바른 의를 그 희생 아래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무림인이 짊어져야 할 진정한 몫이라고 말입니다."

내 말이 끝나자 한순간 장내에 정적이 일었다. 그것은 숨 막히는 침묵이 점차 뜨거운 열기로 고조되고 있다는 징표였다.

마침내 구자범이 입을 열었다.

"학원의 교수에게 교육의 목적을 논하다니…."

건방지다는 듯이 책망하는 말투였으나 그 눈꼬리는 슬쩍 휘어져 있었다.

"건방지지만 나쁘진 않군. 기다리도록."

그리고는 구자범이 주변에 기막을 형성했다. 자기들끼리 논의를 하려는 모양.

'어떻게 되려나.'

그나마 준비해 둔 연설이 꽤 먹힌 모양이긴 한데. 정작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최악의 경우 가문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면 나가린데….'

지금 제갈세가에서는 날 잡아먹으려고 안달인 인간이 한둘이 아닐 터.

지금 내 수준으로는 목숨 부지하기도 어려웠다.

'뭐가 됐든 각오할 수밖에.'

잠시 후, 기막이 해제되는 감각과 함께 구자범이 판결 결과를 읽어 내려갔다.

"사유가 있는 만큼 퇴학은 보류하도록 하겠다."

권위가 실린 울림 있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무려 5일간 무단 외박 및 강의 불참 등의 교칙을 어긴 점은 규칙의 엄중함을 보여 줘야 할 이유가 있다. 더욱이 토벌 확인서를 통해 참작할 여지가 있다 해도 보고도 없이, 소탕에 너무 오래 걸린 점 등 대처의 문제까지 있는 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마른침을 삼켰다.

"제갈천우의 수석 지위 박탈과 비급서고의 출입 금지, 그리고 일주일간의 면벽수행을 명한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구자범의 말이 이어졌다.

"면벽수행은 오늘부터이며, 처벌에 뒤따르는 모든 불이익은 생도의 몫이다."

그 같은 선고와 함께 구자범의 전음이 들려왔다.

[완전히 눈감아 주긴 어렵네. 이렇게 크게 사고를 칠 줄은 몰라서 말이지. 그래도 퇴학은 면했으니 좋게 생각하게. 물론 그 이후가 고달파지겠지만.]

역시 이번 징계에선 입학시험 때 얻은 1회 사고 방지권이 큰 역할을 한 듯했다. 그나저나 그 이후가 고달파진다는 게 무슨 뜻이지?

'잠시만, 설마?'

뒤늦게 그의 말을 이해한 내 표정이 굳었다.

* * *

"벽곡단에… 한쪽에 수로가 흐르는 좁아터진 공간, 거기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창뿐이라."

돌벽을 마주한 채로 중얼거렸다. 지금 나는 면벽수행동에 갇혀 있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마침 요양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체내에 여전히 영약의 잔재들이 시한폭탄처럼 남아 있었으니까.

'이걸 체내로 흡수한다.'

육체의 조화를 맞춰야 할 시기였다. 나는 체내의 기운을 응집시키며 심장 코어로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더럽게 까다롭네.'

마치 시가전을 하듯이 기운이 복합적으로 신체 곳곳에 퍼져 있는 데다, 각자의 내성을 지닌 채 저항하고 있었다.

"오래 걸리겠어."

마력을 펑펑 써댄 대가는 뼈아팠다. [절대마도]의 친화력이 아니었다면 진작 저 기운들에 잡아먹혀 죽었겠지.

온 힘을 다해 주요 회로에 있는 기운 중 일부를 복속시켜 중단전 쪽의 서클을 향해 일주천시켰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체력이 소모됐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눈앞이 하얘질 때쯤이 되어서야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을 정도였다.

"진짜 약하네."

전신을 흠뻑 뒤덮은 땀을 닦을 힘도 없어 절로 불만이 튀어나왔다.

이건 내 체질적인 문제였다.

[시한부]를 이겨 내기 위해선 [생명연장]을 강화해야 한다.

그런데 [생명연장]을 강화하기 위해 육체를 죽음에 가깝게 몰아칠수록 육체의 [쇠약]이나 [약골] 등의 디버프들이 심화된다.

이러면 아무리 [무극지체]의 재능으로 육체를 강화하려 해도 결국 제자리걸음인 셈이었다.

'처음부터 대기만성형으로 설정한 거지만 이렇게 보니 답이 없네.'

애초에 마법을 주력 능력으로 쓰려고 했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초중반부엔 이런 식으로 주요 디버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육체는 걸레짝이 되어 갔으니까.

근력은 느는데 육체는 그대로 물몸인 셈이었다.

'살아남으려면 마법뿐이야.'

태생적 특성을 최대한 활용할 방도는 이것뿐이었다. 그나마 극복할 방안이 있다면….

"그 의원 영감탱이. 설마 먹고 도망치진 않겠지?"

이곳에 끌려오기 전에 몰래 마법으로 약성신선초와 같은 영초들을 고원태가 있는 의료실로 넘겼으니 내가 나갈 때쯤이면 영약을 만들어 뒀을 거다.

"그때까지 버틸 수밖에."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 나흘 그렇게 내실에 집중하는 사이 눈 깜짝할 새 날은 흘러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어떤 방해도 없이 오로지 내 몸 상태에만 집중해 나갔던 나날이 성장의 토대가 되었다.

마침내 체내의 영약 기운을 모조리 복속시켜 태워 낸 끝에 맞이한 당일.

드디어 면벽수행동의 문이 열렸다.

"나와라."

굳게 잠긴 쇠문 너머로 드러난 건 주임 교관인 정묵이었다.

그가 무심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부로 학업에 복귀하도록."

"남은 강의가 있습니까?"

기대감을 배제한 채 질문을 던졌다.

"받아라."

그러자 정묵이 나무패를 몇 개 내게 던졌다.

"이건?"

"남은 과목들이다."

나는 나무패들을 바라봤다. 적힌 건 [무파의 역사연구], [전술과 진법개론] 등. 비인기 강의만이 남아 있었다.

'미치겠군.'

그나마 내가 노렸던 것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전술과 진법개론]와 [무파의 역사연구].

[무공전투실습]처럼 기초 필수 수업을 제외하고 내가 고를 과목은 이론 중점의 강좌였다.

실전 수업 위주로 강의를 짜면 몸이 남아나질 않는다.

어차피 내 주력은 마법이니 배울 수 있는 여지도 적은 게 사실이기도 하고.

"이제 곧 수업 시작이니 강의실로 가도록."

전달이 끝나자 정묵이 몸을 돌려 사라졌다.

기억상 이번 시간은 필수 과목인 [무공전투실습] 수업.

남궁도혁이 교수로 있는 강의였다.

'복귀일부터 까다롭게 됐군.'

앞서 징계를 주장하던 남궁도혁을 떠올리며 강의실로 향했다.

'그래도 겨우 한 주 차이인데 별일은 없겠지.'

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오늘은 지난주에 예고했듯 조별 전투다."

남궁도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생도들이 저마다 뭉치는 것이 보였다.

썰물처럼 내 주변을 힐끔거리다가 사라지는 다른 생도들을 보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조별 과제 실화냐.'

27화 4가 5를 이기는 법 (1)

면벽수행 이후 내가 마주한 것은 조별 전투였다.

'하필이면 조별 전투라.'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예상은 했었다.

무림학원은 다양한 무파들이 모이는 배움의 장소.

저마다 다른 무공을 익혀 온 조원들과의 조화와 협치를 추구하는 합동 훈련 역시 필수적이었다.

그 훈련이 이렇게 일찍 시작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이러면 큰일인데.'

나는 홀로 선 채 고심에 빠졌다.

당연히 저번 수업에 참여하질 않았으니 나와 상의한 조원도 없었을 거고, 함께 합을 주고받은 이들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 뒤늦게 끼기도 난감하군.'

적어도 서로 일주일간 합을 맞춰야 했는데, 누가 징계받느라 코빼기도 비치지 않은 이와 함께하려 한단 말인가.

지금의 나는 수석이 아닌, 무단결석으로 징계까지 받은 일개 문제아일 뿐이었다.

그 증거로 이미 날 힐끔거리며 수군거리는 무리도 있지 않나.

"멋대로 나간 주제에 뻔뻔히 다시 돌아오다니. 무림학원의 기강이 바닥에 떨어졌군."

"다른 놈들이라면 퇴학이었을 텐데 어떻게 돌아왔데?"

"가문이 좋아서 그런 거겠지. 망나니 수석 같으니. 아니 이제 '전' 수석인가?"

그런 은근한 따돌림. 그 속에서 어떻게든 다른 방도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데, 문득 다가오는 기척이 있었다.

"곤란한 모양이네."

"너희들은?"

고개를 들고 보니 거기에 있는 건 빡빡 깎은 머리 하나와 중단발의 청년.

바로 구동과 이희문이었다.

"설마 날 기다린 거냐?"

눈치껏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들.

감동적이로군. 이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 다른 팀원들은?"

조 편성에 필요한 수는 5인 1조. 그러나 지금 여기에 모인 인원은 나 포함 셋뿐이다.

"그건 걱정할 것 없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우리는 4인 1조다. 너와 함께하려면 어쩔 수 없었지."

중간에 끼어든 이희문이 은근히 생색내듯 말했다.

원래 이런 수업에서 조는 무작위로 뽑는다. 자율적으로 놔뒀다간 명문세가끼리만 뭉칠 테니까.

다만 수가 맞지 않아 열세인 4인으로 된 조의 경우에는 생도들이 자율적으로 바꿀 수 있었다고 했다.

"다들 4인 조는 안 하겠다고 해서. 일단 우리만 들어왔소."

구동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아무리 수석이라 해도 당일 합류해서 같이 활동해야 한다니 꺼려질 수밖에.

그것이 4인이라는 적은 수의 조에 들어가는 거라면 더더욱.

"그래도 마침 참여해 준 분이 있지 뭐요."

"반가워."

그때 들려온 중저음의 미성.

"너는…!"

예상외의 인물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목소리를 높였다.

부드러운 인상의 잘생긴 외모의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

올곧은 눈매에 길게 묶은 머리칼. 모를 리가 없었다.

'백하신.'

무림학원의 플레이어블 캐릭터. 이 게임의 주인공이었다.

* * *

"잘해 보자."

백하신이 붙임성 있게 다가왔다. 과연 주인공답게 호감 가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의문이 들었다.

"너라면 다른 조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당연한 지적에 백하신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하하, 아무래도 나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아서. 다들 좀 꺼려 하더라."

'그러고 보니 백하신을 싫어하는 교수가 있었지?'

백유환, 백씨세가 출신의 교수로 그는 언제나 백하신을 못마땅해했다.

사실 백하신은 백씨세가에서도 눈 밖에 난 혈통이었다.

과거, 그의 어머니인 백연서는 과거 백씨세가뿐만 아니라 중원에서 촉망받던 후기지수였다.

하지만 백연서가 멋대로 출가한 후, 10년 만에 찾아와 당시 갓난아이였던 백하신을 맡기고 사라지자 그때부터 핍박이 시작됐다.

정말 백씨세가의 혈통이 맞는지에 대한 논쟁을 비롯해 온갖 가십과 괴롭힘 등을 겪어 왔으나, 그가 이렇게 압박을 받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몇 년 전 백씨세가의 가주가 백하신의 재능과 오성을 눈여겨보고는 후계자 싸움에 끼워 넣은 거였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백씨 혈통의 장남과 차남으로 하여금 백하신에게 자극을 받게 하려는 노림수도 있었을 거다.

아무런 세력도 지지 기반도 없는 백하신을 후계자 후보로 등극시킨 것 자체가 이미 그 의도가 다분했으니까.

실제로 무재가 뛰어난 백하신의 성장은 직계 혈통들에게 무공에 대한 호승심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참 치졸한 수법이야.'

그런 가문의 압박에 덤덤히 참아 가며 백하신은 외압 없이 성장하기 위해 무림학원에 입학했고, 지금 백유환에 의해 견제받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자신이 담당하는 중급생도들에게 슬쩍 이야기를 흘려 비슷한 연배인 유급생도들에게 지령을 전달하고 소문이 퍼지게 해 백하신을 고립시킬 생각이었겠지.

나도 공략 중에 몇 번이고 당한 기억이 난다.

'덕분에 이렇게 조를 꾸릴 수 있었지만 말이지.'

물론 이런 식으로 주인공과 엮이는 게 걸리긴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선 별거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상관없어. 나도 소문이 좋은 편은 아니거든."

"아."

그 말에 생각나는 게 있다는 듯 백하신이 저도 모르게 외마디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가 이내 사과했다.

"미안, 네가 더 헛소문으로 고생할 텐데."

나에 대한 평판을 떠올린 모양. 이상한 곳에서 배려심이 넘치는 녀석이었다. 그런 백하신을 향해 확실하게 말했다.

"사실이야."

"어?"

일순 당황한 반응을 보이는 백하신. 하지만 이쪽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네가 들은 거 대부분 다 맞아. 대련에서 진법으로 이겼다든지, 무단 외박했다가 징계받은 것도 다."

곧 그가 의문에 찬 시선을 내게 보냈다.

그럴 수밖에.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은 둘째치고 그 망나니 수석이 이렇게 바로 납득할 줄은 몰랐을 테니.

하지만 이런 이력을 순순히 읊은 건 다 노림수가 있었다.

바로 내 역할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다.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내 진법이 쓸 만하다는 소리이기도 하지. 무단 외박을 해도 징계로 끝날 만큼."

앞선 소문을 역으로 능력의 증거로 내세우자 백하신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기에 조별 과제라면….'

"우리가 할 조별 전투 이름이 살구 쟁탈전이지?"

대화의 주도권을 잡아 온 내가 물었다.

"그렇다."

옆에 서 있던 이희문이 대답과 함께 조별 전투의 배경과 그 규칙을 알렸다.

과거 파천마가 건립되고 있는 학원의 뒷산에서 산책을 하다, 살구나무를 둘러싸고 싸우는 두 날짐승 무리를 보게 된다.

그들은 어떻게든 부족한 수로 서로의 살구나무를 지키면서 상대의 것을 빼앗으려 했는데, 파천마는 여기서 영감을 얻어 단체전을 구상했다고 했다.

그런 역사가 있는 살구 쟁탈전의 규칙은 간단했다.

각 조는 서로의 살구를 지키면서 상대의 살구나무에서 열매를 따면 됐다.

서로 방어와 공세를 동시에 해야 하는 만큼 전략과 역량이 필수인 조별 전투였다.

"일단 모두가 알다시피 우린 열세다."

이번 단체전. 우리 조만 수가 적다.

원래는 한 명을 더 불러오든지 해야 하지만, 열세인 상황에서도 이기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남궁도혁의 말로 인해 묵살된 지 오래.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만의 전력으로 이를 해결할 수밖에.

"전략의 기본은 전력 파악과 그 분배다. 우선 공과 수의 숫자를 정해야 해."

전력을 어떻게 나눌지는 가장 기본적인 병법 수칙이다.

"2대2이면 되지 않아?"

구동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정석이지. 하지만 열세인 경우엔 달라. 공방을 동일하게 나누는 게 조화로워 보일지 몰라도 우리에겐 오히려 불리하다."

"어째서지?"

백하신이 의문을 표하자 역으로 물었다.

"우린 4인이지만 저쪽은 5인이지. 만일 저쪽에서 생각이 있으면 어떻게 병력을 분배할까?"

"공격3 방어2나, 공격2에 방어3?"

고개를 끄덕이며 이희문의 대답에 긍정했다.

"만일 정석적으로 보자면 3대2, 2대3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우린 어떻지?"

적은 방어에 한 명 더 많아도, 공세에서 밀리지 않고, 공격이 한 명 더 많아도 방어하는 수가 같다.

즉 우리가 무난히 밀린다는 뜻이다.

"정석 대 정석으로 붙으면 이쪽이 불리해."

공격과 방어 비중 0대5부터 5대0까지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봤을 때 2대2가 가장 승리할 가능성이 낮았다.

적이 미치지 않고서야. 방어에 0명, 공격에 5명인 극단적인 전략을 취할 리가 없었으니까.

유리한 입장의 상대 조가 그런 도박수를 펼칠 이유 따윈 없었다.

반면 공격 0, 방어 5명의 전략을 펼칠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5대4의 유리한 싸움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지켜보고 있던 교관들에게 감점만 당할 테니까.

결국 적은 1, 4나 2, 3의 조합 중 하나를 택할 거다.

"우리는 그러면 수비를 해야 하는 거 아냐? 그게 최선으로 보이는데?"

그때 백하신이 예리하게 물어왔다.

기본적으로 불리한 입장일 테니 공세에 인원을 분산하는 것 자체가 손해라고 느껴질 테지.

우리가 모두 수비를 하면 적의 조합을 생각했을 때 최소 동률, 운이 좋으면 4명이서 2명의 적을 상대해도 되니 말이다.

"그렇게 다가오는 적을 낚아 먹자는 건가?"

이희문이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탄성을 터뜨리며 물었다.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바보라면 가능한 전략이지."

만일 적이 무작정 공격만 하는 꼭두각시라면 그대로 부딪치고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언제나 전황은 실시간으로 변한다.

전술에 있어 정보 수집은 필수다. 적은 상대에 비해 자신들의 수가 적다고 생각하면 곧장 빠질 것이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신호를 보내 우리가 뭉쳐 있는 사이를 노려 전부 몰려오겠지.'

상대는 우리보다 수가 많다. 그리고 두 열매까지의 거리는 기껏해야 동산 하나 정도의 거리.

산지라는 걸 감안해도 꽤 짧다.

수비에 2명, 중간에 연락책 1명, 공격에 2명. 이런 식으로 배치해 유동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다는 거다.

이 경우 공격 측 2명을 얼른 끝내자고 생각할 수 있으나, 적도 이걸 알 거다. 그래서 발이 빠르고 강한 녀석들로 공격하려 할 거고.

그들이 즉시 도망치며 시간을 끄는 사이 중간 연락책이 합류하고 이후 수비 측마저 가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 열매를 지켜야 하는 우리 입장에선 골치 아프게 된다.

"착각하면 안 돼. 우린 수성을 하는 게 아냐."

지킨다고 수성을 생각하면 안 된다.

지리적 이점과 성벽 없이 지킬 존재만 있으면 그건 호위에 가까우니까.

호위의 경우에는 지킬 것이 있어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수비 측보다 공격 타이밍을 잡을 수 있는 공격 측이 도리어 유리하다.

거기다 이 전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상대의 열매를 쟁탈하는 것.

"애초에 고작 상대의 열매를 하나 따는 것만으로 승패를 가르게 한 이유를 생각해야 해."

열매를 미끼로 함정을 깔고 소위 존버하는 행동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규칙을 그렇게 만든 거다.

기본적으로 공격을 해야 승리할 수 있으며, 은근히 공격 측에 유리하게 판을 깔아 둠으로써 말이다.

'이를 파악하지 못하면 그저 휘둘릴 뿐.'

"그렇군…. 우리의 목적과 사정, 나아가 상대의 전략까지 고려해야 하는 거로군."

백하신이 옅은 감탄사를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비범하긴 하단 말이지.'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오."

그때 구동이 물었다.

"답 맡겨 놨나?"

"아니, 그건 아니지만… 대협이라면 뭔가 방도가 있을 거라 생각했소."

물론 방도는 있다.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었다.

"우리가 상대할 조의 구성원과 성향은?"

"저번에 상대한 도소기를 비롯한 유급생들로 구성된 조다. 실력은 다들 엇비슷하다는 평이고."

이희문이 답했다.

"유급생이니 뭔가 보여 주려고 할 테지."

이미 한 번 떨어졌고, 이 조별 전투에 익숙한 상황. 거기에 상대는 4명으로 구성된 신입생 조.

'잡아먹기 딱 좋지.'

"상대는 공세에 무게를 두겠군?"

"그래."

백하신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턱대고 상대의 행동을 확신해선 안 되겠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백하신을 고립시키려고 한 백유환 교수가 과연 백하신의 패배만으로 만족할까?

'절대 아니지.'

아마 아무것도 못 한 채로 무력하게 당하는 꼴을 연출하려 할 테다.

그걸로 평가 점수를 최악으로 떨어뜨려 진급조차 못 하게 할 생각이겠지.

'그렇겐 안 둔다.'

이 녀석은 주인공이니까.

앞으로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대신해 줘야 하는 대체 불가 고급 인력이란 말이다.

이전에야 능력이 부족해 아무것도 못 해줬지만 성장한 지금이라면 돕지 못할 것도 없었다.

'뭐 덕분에 상대가 어떻게 행동할지 뻔히 알 수 있었으니 말이지.'

아이러니하게도 백유환 교수의 수작이 오히려 내게 적이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정보를 준 셈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질 수야 없지.

"그럼, 이제 우린 어떻게 하는 게 좋지?"

백하신의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어느새 조원들의 중심이 된 내가 결단을 내렸다.

"이쪽도 공격한다."

28화 4가 5를 이기는 법 (2)

"뭐?"

이희문이 놀란 반응을 보였다.

"어째서지?"

백하신 역시 우려의 낯을 내비쳤다. 상식적으로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지금 우리는 열세였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주요했다.

나는 그런 그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지."

그러면서 브이 모양으로 손가락을 두 개 폈다.

"먼저 적은 우리가 공세에 나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거다. 우린 불리하니까. 만일 염두에 둔다 해도 그 가능성을 낮게 잡겠지."

열세인 상황에서는 그나마 방어에 전념하는 게 유리한 길이라 생각할 테니까. 지금 조원들의 우려스러운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적도 마찬가지일 테지.'

"그렇기에 공격이다. 그들이 생각지도 못할 테니까."

병법의 기본은 적이 원하지 않는 시간과 상황에 우리가 원하는 전투를 하는 것.

그렇다면 병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적이 원하지 않는 게 뭘까.

'바로 예상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즉 역으로 허를 찔러 변수를 창출하는 일.'

저들이 우리를 얕잡아 볼수록, 우린 격렬히 싸워야 한다.

"그런 건가, 요지는 알겠다."

이희문이 중간에 말을 끊어 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적이 신경 쓰지 않는 것에도 다 까닭이 있다. 허점을 노리기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진형은 제한되어 있어. 애매하게 덤벼들었다간 정공법에 오히려 잡아먹힐 거다."

그런 이희문의 말에 검지를 접고 남은 중지를 보이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마지막 이유로는 바로 내가 진법을 쓸 줄 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내 입으로 금칠하긴 조금 그렇지만 제갈세가의 장여 호법도 진법으로 박살 냈는데 모의전 정도는 쉬웠다.

물론 백하신이 아직도 미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지만 여기까지는 예상 범주였다. 나는 [오만한 귀공자]의 특성을 살려 허세를 덧붙였다.

"내가 어떻게 수석을 차지했는지 못 들었나 보군. 그 기괴했던 진법에서 백청과 팽근우를 꺾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나는 일부러 약간의 악역 같은 비웃음을 흘리며 신빙성을 더했다.

어차피 지금 내 평판은 바닥.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런 내 악평을 이용해 설득에 쓰는 편이 나았다.

"…확실히 네가 진법에 일가견이 있다는 건 알겠어. 그렇다면 전략은 어떻게 되는 거지?"

"3인이 공격. 나는 홀로 방어한다."

통보에 가까운 선언에 나머지 셋이 놀란 반응을 보였다.

"뭐?"

"그건 위험하오! 천우 공자."

"그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나?"

앞서 공격한다고 했을 때 딱 눈치채야지. 그들의 반발을 뒤로한 채 부연 설명했다.

"어차피 진법으로 방어하는 거면 지키는 숫자는 큰 의미 없어."

진법은 범위로 작동하는 거니까.

아군까지 휘말리게 하는 것보단 아예 공세에 합류시키는 게 낫다.

실전에선 진법의 위력을 세세하게 조절할 틈이 없으니까.

"날 믿어라. 버티는 것 하나는 잘하니까."

"너…!"

백하신이 의외라는 듯 반응을 보이자 추가적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너희들의 역할이 중요해. 서로 강 대 강으로 나서게 된 이상 먼저 적의 살구나무를 차지한 쪽의 승리니 말이야."

이쪽에서 진법으로 최대한 시간을 벌고, 그동안 공격 조가 가서 살구를 먼저 차지한다. 간단한 전략이었다.

"버틸 수 있겠어?"

"그래."

백하신의 물음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교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 조는 지금부터 모의전을 준비하도록!"

* * *

우리가 배정받은 살구나무는 고지대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적이 오는 것을 살펴보기 쉬운 위치였다.

"나팔 소리와 함께 시작될 거야. 다들 전략대로 행동하도록."

나지막한 지시에 백하신을 비롯한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뿌우우우!!

곧 들려오는 나팔 소리.

동시에 백하신과 조원들이 튀어 나가고 나는 옥석을 던지며 미리 주변에 깔아 둔 진법을 발동했다.

'역시 전부 커버하기엔 무리가 있군.'

앞서 대기하는 시간 내내 진법을 깔았으나 이 넓은 동산을 전부 뒤덮을 순 없었다.

'그래도 상대가 올 만한 길목들은 확보했다.'

앞서 산적들을 진법으로 상대해 본 경험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덕분에 그때랑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능숙하게 진법을 구성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이전에 비해 확연히 달라진 건 따로 있었다.

'내 서클이 성장했다는 점.'

서클 내에 가득 찬 마력을 느끼며 진법의 활성화를 완료했다.

영약을 그렇게 집어먹어서 그런지 남은 분량만 흡수해도 이 정도였다.

고작 1서클이었지만 이전의 부실했던 마력의 고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제야 간신히 출발점에 선 셈이로군.'

마법사로서 말이다.

'온다.'

곧 감지용 진법에 상대의 움직임이 간파됐다.

빠른 속도로 서쪽에서 질주해 오는 두 인영.

나는 옥석을 꺼내 물의 기운을 담아 주변에 흩뿌렸다.

쏴아아아-

그러자 진법과 연동해 응달 부분에 옅은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어떤 물리력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그 자체로 시야와 환각을 유도하는 운무 속에서 순간 두 인영이 멈춰 섰다.

나는 곧장 살구나무 주변에 은신진을 친 후 그대로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기습한다.'

애초에 이런 급조한 진법으론 적들을 오래 헤매게 할 순 없었다.

그럴 바에는 진법의 이점을 살려 상대의 허를 찌르는 편이 나았다.

'그나저나 다른 녀석들은 어디로 간 거지?'

예상대로라면 다른 녀석들이 공세에 있을 터. 이를 의식해 마력으로 감각을 최대한 높여 주변을 살피던 그때, 저 멀리 옅은 소음이 들려왔다.

'적들과 부딪친 건가?'

거리로 짐작해 봤을 때, 가운데 지점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예상했던 대로 적들은 중간에 공격용 예비 병력을 둔 거다.

'최상의 시나리오군.'

3대1의 싸움.

백하신을 비롯한 세 명이 중간 지점의 적을 깨부수고 난 후면 남은 적은 두 명뿐.

저 녀석들 딴에는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중간에 인원을 배치한 거겠지만, 반대로 말하면 역으로 허를 찔리면 애매한 전술이 된다는 뜻이었다.

바로 현 상황처럼.

'문제는 방어하는 측인 내가 얼마나 버티냐이지만.'

서로 공세가 우세한 상황. 이젠 속도전이다.

그 생각대로 적들은 이변이 생겼다는 걸 깨닫자마자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온다.'

언덕 아래에서 안개를 헤집으며 다가오는 적 조원들을 보며 자세를 낮췄다.

가장 먼저 보인 건 큰 덩치의 도소기였다.

'먼저 둘을 떨어뜨린다.'

나는 진법 조절해 안개를 더욱 짙게 깔기 시작했다. 그러자 언덕 밑으로 고이듯 번지기 시작하는 안개들.

곧 저들이 운무를 피해 아래 골짜기에서 위쪽 언덕을 향하기 시작했다.

일단 현 위치를 살피려는 것인지 둘이 양옆으로 갈라지면서 말이다.

'좋아.'

여기까지는 생각대로였다.

일부러 바람의 방향을 제각기 달리 흐르게 만들어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 덕에 둘을 분리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속도전에 돌입했을 땐 빠르게 표적을 찾는 게 급선무이니 말이지.'

내 두 눈이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차분히 가라앉았다.

도소기가 안개를 뚫고서 내가 숨어 있는 언덕 쪽으로 다급히 올라오는 게 보였다.

'어차피 급조한 진법으로는 시간을 오래 끌 수 없어.'

산적과는 달리 이 녀석들은 나름 재능을 인정받아 학원에 입학한 하급생도들.

어쭙잖은 진법으로 시간을 끌기보단 기습을 하는 게 나았다.

'지금처럼 적이 쫓기듯 진격할 때는 더더욱.'

나는 마력을 끌어 올려 진법의 흙 속성을 건드렸다.

후두둑-

그러자 순간 도소기가 내디딘 언덕의 지면이 움푹 파이듯 부스러졌다.

"허억?!"

기껏해야 산짐승을 잡을 때나 쓸 정도의 깊이였지만, 상대의 균형을 잃게 하기엔 충분했다.

기회를 틈타 은신진 밖으로 뛰쳐나가 바로 검을 휘둘렀다.

카앙!

'역시 안 먹히나.'

넘어지려는 와중에도 다급히 검을 뽑아 막은 도소기가 언덕 아래로 반쯤 날아가듯 밀려났다.

"이 망할…!"

썩어도 준치라고 유급생이라 해도 아주 약한 건 아니었다.

곧장 준비해 둔 마력을 끌어 올리며 품 안에서 위장용 부적 꺼냈다.

'이걸로 변명거리는 챙겼고.'

부적이 팔락이기도 전에 손끝에 불꽃 마법을 피워 불태웠다.

현재 주변에는 습기가 많은 상황.

나는 즉시 마력을 부여해 허공의 수분을 얼려 날카로운 얼음의 송곳니를 여럿 생성했다.

그동안 학원 내에선 마력량이 적어 하지 못했던 제대로 된 공격 마법이었다.

"막아 봐."

허공에 뜬 채 그대로 이쪽을 놀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도소기.

틈을 주지 않고 즉시 바람 마법의 돌풍에 얼음의 송곳니를 실어 쏘아 냈다.

쐐애애액!!!

보조나 눈속임용이 아닌 진짜배기 살상 마법.

마치 비수처럼 얼음 송곳니들이 도소기의 급소를 꿰뚫었다.

"크헉!"

예상치 못한 공세의 연속에 도소기의 머리를 제외한 옆구리, 복부, 허벅지 등에 얼음 송곳니가 박혔다.

'얼른 후속 공격을…!'

도소기가 얼음 조각이 박힌 두 팔을 들어 올린 채 머리를 보호하고 있는 걸 보고는 검을 내질렀다.

"크헉!"

얼음 송곳니에 꿰뚫린 도소기의 두 팔이 힘을 쓰지 못한 채 내 검격에 밀려났다.

'끝이다.'

추가로 생성시킨 얼음 송곳니를 근거리에서 도소기의 관자놀이를 향해 날리려던 그때.

짤랑!

도소기의 검 손잡이에 달린 기묘한 문양의 장식품에서 방울 소리가 나더니 원거리에서 끌어모으던 마력이 일순 흩어졌다.

"뭐?"

예상외의 사태에 당황했지만, 곧장 도소기의 얼음 박힌 복부를 차 언덕 아래로 날려 버렸다.

그리고는 빠르게 검 끝을 옆으로 돌렸다.

동시에 사선에서 쇄도해 오는 검격.

채앵!

손목이 절로 꺾일 만큼 묵직한 일격에 두 걸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빠르군.'

상대도 보통이 아닌 듯 곧장 연격해 오며 내 안을 파고들었다.

날카롭게 목을 향해 날아오는 검날.

하지만 그게 날 베는 일은 없었다.

"어?"

순간적으로 정지한 상대의 검 끝.

놀랐는지 상대의 실눈 역시 약간은 크게 뜨이는 게 보였다.

"뭘 놀래? 구속진 처음 봐?"

사실은 중간에 실드를 띄워 녀석의 관절부의 움직임을 막은 거였지만 말이다. 물 흐르듯 자연스레 거짓말을 뱉으며 검을 내질렀다.

그러자 유연히 몸을 틀어 피하고는 거리를 벌리는 실눈 뜬 상대.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백라욱."

"제 이름을 아시는군요?"

백라욱이 영혼 없이 마른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알 수밖에. 초반부에 백하신의 뒤통수를 치는 대표적인 악역이었으니 말이지.'

나는 대답 대신 검을 들어 올린 채 녀석을 겨눴다.

원래라면 여기서 도망을 치거나 해서 시간을 끌어야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저 자식은 여기서 탈락시킨다.'

백하신의 성장에 백해무익한 녀석이다.

현재 이 세계는 재도전도 못 하는 불합리한 망겜 그 자체.

후환을 남길 바에는 여기서 싹을 잘라 내는 편이 나았다.

"다행이군. 혹시나 네가 살구나무를 지키는 쪽에 있었으면 아쉬울 뻔했는데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시죠?"

뜬금없는 말에 백라욱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내가 전신의 모든 마력을 한곳에 끌어모았다.

"이제 알게 될 거야."

동시에 검 끝에 맺히는 순백의 기운. 나는 고도로 응축된 마력으로 이루어진 검기를 띄우며 말했다.

29화 4가 5를 이기는 법 (3)

선명한 오러가 검날에 맺히자 백라욱이 뱁새 같은 실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귀가 있어도 듣질 못하는군. 버러지답게 말이야."

일부러 내면에서 올라오는 [오만한 귀공자]를 막지 않으며 대꾸했다.

냉정하고 오만한 충동이 이 순간에는 필요했으니까.

나는 곧장 검기를 두른 무학검을 휘둘렀다.

키이이잉!

허공에서 부딪친 두 검 사이에 기운이 얽히며 검명이 울었다.

"버러지 주제에 실력을 숨기고 있었군."

"크윽!"

검에 미약하게 씌워진 기운. 그건 검기가 되지 못한 내기였다.

이는 백라욱이 최소 일류급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

"어째서 너 같은 쥐새끼가 승급하지 않고 이곳에 있을까."

차갑게 냉소하며 녀석을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마력 강화와 검기를 더한 힘겨루기.

평소라면 오히려 내가 밀렸을 거다.

이곳이 내 영역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울렁이는 진법과 함께 백라욱이 서 있던 바닥이 슬쩍 무너졌다.

고작 몇 치 정도의 이변이었으나 전황을 기울게 하기엔 충분했다.

카드드득!

백라욱의 낡아 빠진 검이 조금씩 파이며 밀리기 시작했다.

'역시나.'

가라앉은 두 눈으로 잘려 나가는 녀석의 검을 바라봤다.

설정상 백하신은 어머니가 남기고 간 검을 쓰는데, 백라욱도 비슷한 사연이 있는 유품을 들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빌미로 백하신과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접근하는 내용도 나오곤 했다.

배신 이후 다른 건 다 거짓말이었는데도 이건 몇 안 되는 진실이어서 더 어이없었던 기억이 있었다.

'여기서 박살 내주지.'

끼기기긱!

쇳덩이를 긁는 듯한 끔찍한 소음과 함께 백라욱의 검이 불안정하게 요동쳤다.

이를 눈치챈 백라욱이 뒤로 빠지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안개를 집어삼키고 덩치를 키운 얼음 송곳이 백라욱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순간 몸을 비틀어 이를 피하며 무학검을 밀어내는 백라욱.

확실히 실력을 숨긴 값은 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대응하느라 녀석의 검은 이미 반절가량 이가 나간 상태였다.

나는 곧장 자세를 잡으려는 백라욱을 향해 검기를 두른 검을 내질렀다.

어깨에 박힌 얼음 조각 때문에 역공도 못 한 채 방어하는 백라욱.

쇠와 쇠가 부딪치며 옅은 불꽃이 튀었다.

검기의 무서운 점은 절삭력만이 아니다.

우웅-

검끼리 대치하는 와중에 진동이 울린다.

소위 고수끼리 내공 싸움을 하면 내상을 입는 것처럼.

검기를 두른 검과 그렇지 못한 검끼리도 공명하며 내구성 싸움을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당연히….

파창!

철심이 부서지며 검의 절반이 날아가는 백라욱의 검.

검 끝이 허공을 부유하는 찰나에 백라욱의 작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

"그 주인에 그 검이로군."

차갑게 비웃으며 그대로 녀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반토막 난 검으론 도저히 대응할 수 없는 연격.

그렇게 검이 녀석의 어깨를 가르고 지나가려는 찰나, 녀석의 신영이 흐려졌다.

백라욱이 곧장 내 안으로 파고들며 장법을 내지른 것.

검이 잘린 틈을 이용해 물 흐르듯 허를 찌르는 기습이었다.

곧 주먹이 내 턱 밑까지 날아왔다.

퍽!

좋은 시도였다.

내가 상대가 아니었다면.

"발악은 끝났나?"

나는 허공에 멈춰 있는 녀석의 주먹을 응시하며 처형하듯 자세를 잡았다.

이럴 줄 알고 미리 목 부근에 펼쳐 둔 실드에 백라욱의 주먹이 채 뻗기도 전에 막힌 거다.

그 덕에 지금 백라욱의 자세는 무방비한 상태.

'팔 하나 정도.'

검 끝이 빛나고 선명한 잔상을 남기고서 무학검이 내리꽂혔다.

서걱!

핏방울이 튀고 언덕 중턱이 적막에 휩싸였다.

"…쥐새끼 같군."

나지막이 한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곳에는 너덜거리는 팔 한쪽을 잡고는 흙바닥에서 일어나는 백라욱이 있었다.

분명 베었다. 다만 상대가 아슬아슬하게 피해서 완전히 베어 내진 못했다.

아예 나갈 정도로 부상을 입혀야 했는데.

나는 재차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처음이야 겨우 피할 수 있었겠지만 그뿐이었다.

맨손으로 마법 실드에 검기를 두른 적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백라욱이 체념의 눈빛을 보내던 그때.

부우우우-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녀석에게 내질러지던 내 검이 허공에 멈췄다.

"거기까지다."

어느새 다가온 정묵 교관이 내 검을 막아선 채였다.

"너희 조의 승리다."

조별 전투가 끝난 것이었다.

결과는 우리의 승리였다.

"4인으로 5인 조를 이기다니. 꽤 인상 깊었다. 그 특이한 술법도 말이다."

그리 중얼거리는 정묵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나는 묘한 심정으로 백라욱을 신경 쓸 뿐이었다.

'확실히 없애야 했는데.'

녀석의 배후를 생각하면 더더욱. 하지만 이 이상 싸우는 건 뒤탈이 컸다.

"나머지 부상자는 알아서 부축해서 데려오도록."

그렇게 정묵을 비롯한 교관들이 부상자들에게 응급조치만 취해 주고는 사라지자 백라욱이 부서진 검을 주섬주섬 챙기는 모습이 보였다.

"수리할 수 없을 거다."

얄밉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일부러 속을 긁으려고 한 거다.

도발해서 2차전에 돌입하면 이번엔 확실히 꺾어 버릴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백라욱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녀석이다.

그렇게 나 또한 돌아서려던 그때….

파앙!

내 뒤로 돌멩이가 하나 날아와 미리 펼쳐 둔 실드에 막혔다.

도소기였다.

"뭐 하는 거지?"

슬쩍 미간을 찡그리며 남은 마력량을 확인했다.

부상이 컸는지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일어나려고 애쓰는 녀석.

"누구 마음대로…."

도소기가 바닥의 흙을 방사형으로 긁으며 주먹을 쥐었다.

고작 과제 한 번 패배한 것 치고는 격렬한 반응.

하지만 그의 기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우걱우걱.

저 녀석, 흙을 퍼먹고 있었다.

아니다. 주먹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먹은 것이었다.

섬뜩한 감각에 본능적으로 거리를 벌리려던 그때.

순간 도소기의 내부에 기운이 요동치는 게 보였다.

'뭐야?'

도소기의 관자놀이에 혈관이 튀어나오더니 곧장 날아오는 검.

나는 돌진해 오는 도소기의 검을 흘리며 자세를 잡았다.

'도핑한 건가?'

전에 비해 더 강한 근력과 마구 솟은 핏줄을 보며 추론했다.

'교관이 없어진 틈을 타 기습이라.'

시기가 묘했다.

금지 약물은 걸린 즉시 퇴출일 텐데 고작 나 하나 이기겠다고 시험도 끝났는데 그만한 위험을 감수한다고?

'뭔가 있군.'

혹시 모를 변수를 차단하기 위해 즉시 남은 대기 중의 수분을 이용해 얼음 송곳니를 쏘아 냈다.

도소기의 부상 입은 허벅지를 향해 날아가는 얼음 날붙이들.

파바바박!

하지만 얼음 송곳니는 도소기의 허벅지 부근에서 넘실거리는 보랏빛 기운에 부스러졌다.

'뭐?'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도소기가 검을 휘둘렀다.

카앙!

순간 실드가 깨지고 무지막지한 힘에 의해 나는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이상해.'

간신히 균형을 잡아 나무 뒤로 몸을 숨긴 채 고심에 빠졌다.

마법이 적중한 순간이 떠올랐다.

그 보랏빛의 기류. 마치 신체 내부 기운이 타올라 막는 모양새였다.

일순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항마(降魔)?'

이상하게 도소기에겐 마법이 안 먹히는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에서나 나오는 개념인데?'

의아하던 그 순간.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비교적 얇은 나무의 기둥이 부서지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도소기가 짐승처럼 나무를 깎아 베며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쯧."

나는 마력을 끌어모아 검기를 구성해 막아 냈다.

그럼에도 폭주한 도소기의 검에 근력이 밀리고 있는 지경.

'장애물이 없었다면 진작에 당했겠어.'

지금 나는 아까보다 두꺼운 나무 사이를 두고서 뱅글뱅글 도는 형식으로 피하고 있었다.

거기에 얼음이나 그리스 등의 보조 마법을 통해 바로 쫓아오지 못하도록 바닥을 미끄럽게 만들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걸로는 승부는 나지 않는다.'

겨우 막아 내고는 있지만 이대로는 이쪽의 마력과 저쪽의 체력 둘 사이의 소모전이 될 게 뻔했다.

이미 앞서 검기와 마법에 서클 내 대부분의 마력을 사용했기에 시간은 내 편이 아니었다.

'그 전에 끝내야 한다.'

급박한 상황 속 마법을 준비했다.

상대가 항마의 힘을 지니고 있다면, 일반적인 마법으로는 안 된다.

나는 서클 내 남은 마력을 모조리 끌어모았다.

우우웅-

그러자 진동과 함께 지금까지 응축된 마력이 터져 나가려 했다.

펼친 내 손바닥이 아닌 바로 도소기와 나 사이에 있는 나무의 중심에서 말이다.

'마법이 안 되면 물리력으로 승부 봐야지.'

눈에 실핏줄이 붉게 돋우며 달려오던 도소기가 순간 이변을 느끼고는 눈동자를 크게 떴지만 이미 늦었다.

파아아아앙!!

미리 수분을 채워 넣은 나무속에 화염을 비롯한 여러 마력 확장을 일으키자 급격한 팽창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 나무가 클레이모어처럼 터져 버린 것이었다.

물론 도소기가 달려들던 바로 그 방향에서만 말이다.

증기를 비롯한 연기가 슬쩍 피어오르고 그 너머로 드러난 건 바로 나무 조각이 이리저리 박힌 도소기의 모습이었다.

"이… 자식."

피투성이가 된 녀석이 반쯤 꿇은 무릎을 펴며 으르렁거렸다.

몸 한쪽이 나무 조각에 의해 넝마가 되었는데 멀쩡할 리가 없지.

나는 이미 실드를 펼친 채 그런 그를 내려다봤다.

"튼튼하군."

그러자 이를 드러내고 달려드는 도소기. 하지만 이미 내 손 안에는 마지막 남은 마력을 짜내 만든 마법이 펼쳐지고 있었다.

"몸속에서 불길이 터져도 무사할까?"

그 순간 도소기의 몸에 박힌 무수한 나뭇조각 끝이 불길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화륵!

마력으로 강제로 일으킨 현상과 달리 실제 나무가 열에 반응해 타오르는 불길은 강렬하게 넘실거렸다.

"끄아아악!"

고통스러워하는 도소기, 그런 그의 주변으로 바람 마법이 소용돌이치듯 둘러쌌다.

그러자 불길이 바람을 타고서 마치 용오름 치듯 화염의 회오리를 만들었다.

화아아악!!

내 모든 마력을 태워 구현한 불과 바람의 합성 마법.

"힘이 안 먹히면 더 강하게 찍어 누르면 될 일이지."

이윽고 불의 소용돌이가 걷히고, 드러난 건 검게 탄 도소기의 모습이었다.

이내 털썩 쓰러지는 녀석.

완전히 바닥난 서클 내의 마력을 감지하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거 대단하군요."

그러자 들려오는 백라욱의 무덤덤한 목소리.

"방관하고 있던 주제에 선생질까지 할 생각인가?"

나는 날카로운 기색으로 백라욱을 노려봤다.

도소기의 정체불명의 약과 항마(降魔).

정황상 이런 일을 만든 배후는 이 녀석밖에 없었다.

"이 녀석의 기행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라."

검을 들어 올리며 그를 다그쳤다. 더 이상 남은 힘은 없었지만 허세라도 부려야 했다.

어떻게든 정보를 얻어야 했으니까.

'항마라니.'

이런 건 듣지 못했다. 백라욱과 엮이는 건 첫 번째 회차에 뒤통수를 맞은 이후로 아예 차단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현실이다.

여기서 정보를 얻지 못하면 다음에는 어떤 변수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

그렇게 백라욱에게 검을 들이밀려던 그때.

"뭐 하는 거야?"

숲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곳에 있는 건 백하신이었다.

30화 4가 5를 이기는 법 (4)

백하신은 언제나 의심받는 자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남기고 간 검과 함께 백씨세가에 맡겨질 때부터 말이다.

혈족이 맞는지, 언젠가의 그날처럼 사고를 치진 않을지, 후계자 싸움에 끼어들진 않을지 등.

언제나 그를 둘러싸고 있던 시선은 경계와 의심이었다.

그러나 그런 백하신에게도 한 때 편견 없이 다가와 준 친구가 있었다.

백라욱. 백하신과 같이 가문에 핍박받던 그들이 친해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어린 한때였지만 그와 함께 놀았던 순간은 즐거웠다.

이후 사정으로 인해 헤어지게 되었지만, 그날 일들은 백하신이 간직한 몇 안 되는 추억 중 하나였다.

그건 무림학원에 입학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0년 만에 본 백라욱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가문 내에서도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진 모양이었다.

한편, 백하신은 여전히 적이 많았다.

그렇기에 다가갈 수 없었다.

조별 과제를 할 때도 말이다. 백유환에게 찍힌 자신 때문에 친구에게 민폐를 끼칠 순 없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젠 그들은 그때 그 시절의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그러자 이번에도 다가온 건 백라욱이었다.

"오랜만이야. 그 검은 여전하네."

백라욱은 서슴없이 다가왔다. 10년 전 같이 놀던 그날처럼.

"우연이네. 나도 형에게 받은 검을 들고 들어왔거든. 이젠 유품이 됐지만."

그가 우수에 찬 눈빛으로 말하다 이내 주제를 바꿨다.

"이번에 조 보니까 우리 맞붙게 됐더라."

"그러게. 져도 원망하기 없기다."

"…열세면서 잘난 척은. 너나 잘해."

백라욱의 같잖다는 반응에 백하신이 옅게 미소 지었다.

이후 망나니로 유명한 제갈천우와 만났고, 그는 날카로우면서도 과감한 전략을 짰다. 그리고는 가장 위험한 역할을 맡아 보란 듯이 성공시켰다.

그렇게 승리를 거머쥔 백하신이 제갈천우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그를 찾았다.

겸사겸사 백라욱에게 으스대기 위해서도.

재수 없어 보일지 몰라도 이 정도 장난은 쳐도 되겠지.

친구니까 말이다.

'제갈천우도 소문처럼 냉혈한은 아닌 것 같아.'

백하신은 은근한 기대감을 느끼며 그들을 찾았다.

어쩌면 둘 다 같은 자리에 있어서 이번 기회에 셋이서 말문을 틀 수도 있을 거다.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한 백하신의 앞에 펼쳐진 건 검게 탄 도소기와 피투성이가 된 채 부서진 검을 끌어안고 있는 백라욱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참상 가운데서 냉정한 눈빛으로 백라욱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제갈천우의 모습이었다.

피가 싸늘하게 식은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묘하게 들떴던 자신을 질책하듯 현실의 광경이 차갑게 그의 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렇기에 백하신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거야?"

* * *

'귀찮게 됐군.'

검을 거둔 내가 가볍게 혀를 찼다.

검게 탄 채 쓰러진 도소기부터 피투성이인 채 부서진 검을 들고 있는 백라욱.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멀쩡한 얼굴로 서 있는 망나니 전 수석까지.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어째서 이런 거지?"

곧 백하신의 시선이 이 상황의 장본인으로 향했다.

"먼저 달려들었으니까."

"그래도! 너무 과하잖아."

격하게 반응하는 백하신을 보며 냉정히 되물었다.

"그래서 손속을 두라는 건가? 날 죽이려 한 녀석들에게?"

"죽이다니…! 시험일 뿐이야."

"교관이 사라지자마자 내게 달려든 게 도소기였다. 그 옆에 있던 백라욱은 그걸 방조했고."

내 말에 백하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에 추가로 폭로를 이어 나가려던 그때.

"오해야."

백라욱이 끼어들었다.

"난 방관한 게 아냐. 능력 밖이라서 끼어들지 못한 것일 뿐이지."

"그 말은 도소기가 멋대로 폭주해서 날 공격한 것도 봤다는 거군."

"…그래."

이걸로 증인까지 확보했다. 조금 긁었다고 바로 부정부터 하고 보다니.

'도소기는 이걸로 끝장낼 수 있겠고.'

치료를 명목으로 고원태에게 데려가면 약물 여부를 알 수 있을 터.

거기에 증인까지 더해지면 무조건 퇴학이다.

'문제는 저 녀석인데.'

짧은 고민 끝에 백라욱을 바라보며 물었다.

"실력이 없어서 끼어들지 못한 것치고는 상당히 강하던데."

"뭐?"

그런 내 증언에 의외라는 듯 두 눈을 깜빡거리는 백하신.

백라욱이 불편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말을 이었다.

"좋게 봐줘서 고마워 그래도 난 그 정도 수준이…."

"무슨 소리야. 너 실력 숨기고 있잖아. 유급생 수준이 아닌데?"

"그, 그게 무슨 소리…."

돌직구로 지적하자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녀석.

'아직 백하신 앞에선 약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을 테니.'

백라욱이 백하신에게 접근한 이유는 가문 내 후계 세력에 대한 견제 때문.

그건 즉 앞으로 꾸준히 백하신을 방해할 녀석이라는 뜻.

'미리 의심의 싹을 심어 둔다.'

"왜 네가 약한 척하면서 유급생 신분에 멈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의 눈까지 속이려 들지 마라. 이곳은 그렇게 만만한 장소가 아냐."

그리 말하고는 도소기를 등에 업었다.

마음 같아선 같은 조였던 백라욱에게 시키고 싶었으나 무슨 짓을 할지 몰랐으니 내가 데리고 가는 게 편했다.

'더럽게 무겁네.'

마력은 강해졌어도 여전히 신체는 허접했다. 이건 단순히 근력의 문제가 아닌 선천적인 체질과 디버프의 문제였다.

묵직한 중량에 애써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남은 마력으로 보조하며 나아갔다.

저 뒤에서 백하신의 경계 어린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미 예상했던 터였다.

어차피 백라욱과 자신은 쌓아 온 친밀도가 다르다.

당연히 바로 믿을 순 없겠지.

'하지만 역으로 신뢰를 잃게 만들긴 쉽다.'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들키는 것만으로 신뢰를 잃는 셈이 되니까.

미묘하게 떨어져 걷고 있는 백하신과 백라욱을 힐끗 보며 집합지로 향했다.

"허억!"

"뭐야? 제갈천우랑… 도소기?!"

집합지에는 이미 승패가 갈린 두 부류의 조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까맣게 탄 도소기를 업고서 하산한 나를 보며 기겁했다.

"가차 없군."

"저 정도면 손봐 준 정도가 아니잖아?"

"무단 외박에 시험을 빙자한 폭행까지…."

날이 갈수록 묘한 소문이 더해지고 있었으나 지금 나는 거기에 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망할.'

의식 없는 사람을 업는 게 얼마나 힘든지 뼈저리게 체감할 수 있었다.

내 몸만 왔다 갔다 하는 산행과는 차원이 달랐다.

거기다 백하신과 백라욱에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일부러 무리해서 서둘렀던 탓에 더더욱 체력의 소모가 컸다.

쿵!

"의원이 필요합니다."

마침내 도소기를 공터 한가운데에 던져 놓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와 닿았다.

"…대체 뭘 했길래 이런 상태가 된 거지?"

책임자로 통솔하고 있던 정묵 교관이 검게 그을린 도소기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전부 설명하겠습니다. 이 자리에서라도 괜찮으시다면요."

은근한 유도에 정묵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따라오도록."

곧 다른 교관에 의해 의원실로 실려 가는 도소기의 모습에 수군거림은 더욱 커져만 갔다.

* * *

"약물이란 말입니까?"

의원실에서 정묵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네. 아주 교묘하게도 말이지. 자연적으로 원기에 태워지도록 배합됐지만 그을린 피딱지 안에 남아 있었네."

고원태가 진지한 눈빛을 내비치며 이쪽을 흘겨봤다.

"저 녀석이 어떻게 화(火)공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는 내게 할 말이 있어 보였으나 상황에 맞지 않는다 생각했는지 이내 축객령을 내렸다.

"자네는 이만 나가 보게. 혹여 궁금한 점이 있다면 주말에 찾아오도록."

모든 증언을 마친 후였기에 나 역시 의례적인 인사말을 남기고는 의료원 밖을 나섰다.

방금 저 말은 신호다. 영단이 완성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나중에 다시 찾아와야겠군.'

기지개를 켜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한쪽에선 백라욱이 교차로 증언을 끝마쳤을 터.

'이미 수업은 끝났을 거고.'

증언과 채혈 결과가 나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각 조별로 전략적으로 부족했던 점과 잘했던 점을 논평하는 부분만 남아 있었기에 수업은 그대로 끝났을 터.

그렇기에 굳이 날 찾아온 사람은 없어야 했다.

"왔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커다란 덩치의 사내라면 더더욱.

나는 반사적으로 체내의 마력량을 체크했다.

그 정도로 눈앞의 상대는 위험했다.

당당한 자세로 서 있는 굵은 선의 사내, 팽근우.

'어째서 날 찾은 거지?'

경계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지금 내 평판은 그야말로 최악.

반면 팽근우는 뼛속까지 정파인이며 그만큼 책임을 중시하는 녀석이다.

'큰일이군.'

불안한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고지식한 놈인데 이쪽은 멋대로 수석을 차지했다 내팽개치거나, 시험이 끝났는데도 상대 조원을 잔인하게 작살낸 녀석으로 보일 테니까.

사고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실시간으로 가까워지는 녀석.

'마법 실드를 펼쳐 놔야 하나? 아냐, 몇 겹을 하든 순식간에 박살 날 거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렇게 고심하던 내 머리 위로 팽근우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순간.

덥석-

우악스러운 손길이 내 손을 붙잡았다.

"감명 깊었소. 천우 소협!"

"뭐?"

예상 밖의 호의적인 발언에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어느새 팽근우가 반짝이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완벽한 전술!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조원을 위해 제 한 몸을 희생한 그 면모. 정말 감명 깊었소!"

부담스럽다. 난데없이 덩치 큰 녀석이 달라붙으니 더더욱.

아무래도 전술 평가 시간에 우리 조에 교관들이 좋은 평가를 해준 모양이었다.

"게다가 고통받는 양민을 위해 녹림십팔채의 산적 떼를 소탕하기까지 하지 않았소. 수석의 지위를 포기하면서까지 말이오. 정말 대단한 일이지. 하하하!"

그가 내 어깨를 움켜쥐며 말했다. 착각을 한 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무언가 들려선 안 될 게 들렸다.

"녹림십팔채?"

"그렇소. 잡힌 녀석 이름이 조돈… 뭐시기였다는데 아무래도 녹림십팔채의 간부와 연줄이 깊어 그간 관군이 건드리지 못했던 모양이오. 심지어 관군 중 몇 놈은 그놈과 붙어먹은 전력마저 있었다지."

"...."

"그런데 소협이 무림학원의 이름을 내걸고서 그 산적 놈을 잡았지 않소. 빼도 박도 못하게 할 요량으로 말이오! 녹림십팔채의 직계 조직이면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의협심이 넘치오!"

팽근우가 제멋대로 떠들어댔다. 나는 그 말을 듣다 그만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게 사실이었어?'

자신이 녹림십팔채와 연관이 있다고 할 때까지만 해도 허세인 줄 알았는데.

설마 조돈추인가 하는 놈이 말한 게 전부 사실이었을 줄이야.

"흐흐,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시오. 생도 신분으로는 그야말로 대단한 업적이니."

팽근우가 그런 내 반응을 착각했는지 능청스레 말했다.

나는 말없이 그저 두 눈을 가늘게 뜰 뿐이었다.

이 세계에선 적대는 쉽게 늘고, 우호 관계는 맺기 어렵다.

그래서 최대한 적을 만들지 않는 게 중요했는데, 난 생도 시절부터 사파 세력 중 하나와 척지게 된 셈이었다.

게다가 녹림십팔채의 수장을 생각하면… 아찔했다.

'이젠 산은 함부로 타지 말아야지.'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팽근우는 진지했다.

그가 갑자기 내게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사실 소협에게는 전부터 내가 저지른 무례를 사과하고 싶었소. 그대는 수석에 걸맞은 힘과 협의를 지니고 있소. 비록 징계 때문에 뒤늦게 찾아왔지만 내 마음만은 진심이오. 지금부터라도 친우가 될 수 있겠소?"

내게 있어 전혀 불리한 제안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호 관계를 맺는다는 것 자체가 추후 도움이 될 터였다.

물론 친구를 그런 식으로 사귀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지만.

'나도 사실 맛이 좀 간 게 아닐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한편에 치워 버리고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답했다.

"그러지."

해가 되지 않는 선이라면 친분을 다지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하하! 영광이오. 그런데 듣자 하니 특이한 무공을 쓴다고 하던데, 친교를 다지는 의미에서 나와 한번 대련해 보는 건 어떻소?"

"...."

아무래도 어느 정도는 거리를 둘 필요가 있을 듯했다.

* * *

"이건 이상합니다!"

징계위원회 내부에 정묵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건은 도소기의 약물 복용과 폭주 사태.

여러 정황과 증거가 확실했기에 도소기의 퇴학은 확정된 상황이었다.

문제는 그걸로 끝이었다는 점.

"개인의 일탈일 뿐이라니요?"

도소기만의 실수로 징계와 조사가 끝나려 하자 정묵이 항의했다.

고원태의 증언에 따르면 도소기가 복용했던 약물은 별다른 뒷배가 없는 하급생도가 구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외부의 개입이 있었던 게 뻔한데 이대로 사건을 종결하자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본인이 암시장에서 구했다지 않나. 저잣거리의 사파 조직까지 모두 추적하자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그러자 백유환이 끼어들었다.

얼핏 타당한 의견이었으나 결론적으론 사건을 축소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정묵이 무어라 더 반박하려는 그때.

"둘 다 일리 있어."

구자범이 나섰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정해야 할 건 징계 처분과 앞으로의 예방 대책이지. 징계에 대한 이야기는 얼추 끝났으니 남은 건 예방의 차원이겠군."

그가 상황을 정리하며 좌중을 둘러봤다.

"의견들을 한번 내보게. 어떻게 할지."

그러자 여기저기서 말이 나왔다. 교수뿐만 아니라 각 급수를 포괄 지도하는 주임 교관 역시 모였기에 논의는 다양했다.

"생도들의 외출이 문제가 됐으니 하급생도의 경우 외출을 제한하는 것도 방법일 듯합니다."

"그건 처사가 좀 과하지 않소. 차라리 단속을 더 강화하는 게 낫지."

"지금까지는 설렁설렁했나? 단속에도 한계가 있으니 하는 소리네."

학생들을 통제하자는 의견에서부터.

"일대의 사파 무리를 이참에 소탕하는 건 어떻습니까? 하급생도들에겐 활동 영역의 제한을 두고요."

"우리가 그 생각을 못 해서 안 했다고 생각하나?"

주변 환경을 바꾸자는 의견까지.

하지만 이 모든 논의 가운데서 이야기되지 않는 게 있었다.

"애초에 환경이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면 어쩌겠습니까?"

정묵의 말에 시선이 돌아왔다.

"하급생도 따위가 저런 수준의 약물을 구한다니요. 그것도 사파 무리 한가운데서 아무런 연줄도 없이."

그가 다시금 핵심을 짚으며 논리를 이어 나갔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배후가 있다는 건가?"

구자범의 지적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예. 근래 학원에서 벌어지는 조짐들이 심상치 않습니다. 혹시 모르니 대처가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온건한 말이었지만 여러 함의를 담고 있는 이야기였다.

"알겠네. 이 자리에서 바로 정하기엔 어려움이 있을 듯하군. 징계는 이대로 진행하고, 그에 따른 대처는 추후 학원장님과 상의 후 결정하도록 하겠네."

그렇게 구자범의 말에 자리가 파하려는 그때.

"아, 그런데 특이 사항이 있더군? 불에 탄 자국이라. 정묵 주임 교관이 직접 목격했으니 말해 보게."

"…그게 그건, 저로서도 처음 보는 사술이었습니다."

잔뼈 굵은 무인인 정묵의 말에 다른 교수와 주임 교관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그건 흥미롭군. 자세히 이야기해 보게."

예기치 않게 제갈천우의 마법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31화 심법소동 (1)

다음 날.

하급 생도관으로 향하자 날 둘러싼 주변 교관들의 시선이 달라져 있었다.

'뭐지?'

뭔가 기이한 것을 보는 듯한 눈빛들이었다. 조심스레 그들 중 한 명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제게 말씀하실 것이 있습니까?"

"흠흠.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것치고는 태도가 영 부자연스러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같은 꺼림직한 반응은 비단 교관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헉! 제갈천우?"

"쉿, 조심해. 듣자 하니 도소기는 결국 퇴학당했다더라."

"벌써 두 명째야…! 거슬리는 이들은 모두 치운다는 건가?"

"아예 학원에 다니지 못할 정도로 짓밟았겠지."

절로 한숨이 나올 법한 소문들이었다.

눈치껏 슬쩍 응시해 주자 소스라치며 흩어지는 녀석들.

그건 다른 생도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자동으로 열리는 복도를 따라 이동할 수 있었다.

오늘은 수업은 [심법의 이해]. 무림학원에서는 보기 드문 실내 수업이었다.

내가 들어서자 한순간 얼어붙은 강의실 안.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생도들이 덩달아 긴장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성가시게 됐군.'

본능적으로 남은 뒷자리 중 한 곳에 앉으려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나는 지금 평범한 학생으로 시간을 때우러 온 게 아니다.'

안 그래도 나에 대한 흉흉한 소문과 여러 사건이 있는 지금 정신을 한층 더 바짝 차려야 했다.

'강해지기 위해선 감내할 수밖에.'

그렇게 굳은 결심과 함께 내가 향한 곳은 강의실의 가장 앞 중앙 좌석.

게임처럼 정해진 시간 동안 가만히 강의만 들어도 이해도가 높아지는 기적 따윈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이해하고 배워 나가야 했다.

더구나 무단결석과 징계로 인해 수업을 몇 번이나 놓친 상황이다.

'이런 식으로라도 얼굴도장을 찍어 둬야지.'

그리 생각하며 과감히 앞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 옆 옆자리에 앉아 있던 범생이 풍의 생도가 움찔하더니 저 멀리 멀어졌다.

덕분에 내 사방으로 휑 비었다.

이쯤 되면 상처받아야 할 사람은 나일 터. 하필이면 이희문이나 구동은 다른 반이라 내 옆에 앉을 만한 이가 없었다.

'그나마 저 녀석 빼고는 말이지.'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백청이 있었다.

화산파에서 낳은 천재이자 차석 입학자. 그리고 지금은 박탈 후 공석이 된 수석 자리의 가장 유력한 후보이기도 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곧장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 그가 눈을 슬쩍 크게 뜨더니 슬쩍 손을 들어 친한 척을 해왔다.

싱글대는 상 특유의 친화력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나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강의실의 앞문이 열리고 무공 교수가 입장했기 때문이었다.

"수업 시작이다. 요놈들아."

"클클…. 오늘은 못 보던 학생이 있군."

좌중의 침묵 속에서 단상 앞에 선 건 구부정한 허리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쌍둥이 노인이었다.

"저번 시간엔 심법의 기초와 종류에 대해 배웠으니 오늘은 운용에 관해 설명하도록 하마."

그리고는 그중 깐깐하게 생긴 측, 맹동이 곧바로 수업을 시작해 나갔다.

"심법의 기초는 순환. 그 순환의 조합에 있다 봐도 무방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수학적인 영역에서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

심법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얼마 안 가 다들 졸기 시작한다.

확실히 몸만 쓰는 녀석들이 주로 모인 곳이다 보니 이런 정신 공격엔 취약한 모양.

다만 내겐 전혀 아니었다.

'흥미로운 점이 많군.'

역천심법의 이해에 도움이 될 만한 여지가 많은 수업이었다.

여러 주요 심법들의 흐름이라든지, 심법이 기운을 어떻게 증폭시키며 육체를 강화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렴풋이 알고 있던 개념에 대한 틀을 잡을 수 있게 해주었다.

"자, 그럼 각자 직접 심법을 운용해 보도록."

마침내 이론 수업이 끝나고 실기가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저마다 가부좌를 튼 채 운기조식에 들어가는 생도들.

심법 운용에 고수가 도움을 준다는데 누가 마다하겠나. 무림학원에 들어선 생도들이 빠른 성취를 얻는 건 이런 도움 덕분이기도 했다.

단점이 있다면 그들의 가르침이 상당히 깐깐하다는 점.

"여전히 기를 회수할 때 흐트러지는구먼. 쯧쯧, 집중력이 흩어지니 그렇지."

기준 미달이면 그 이상 봐주지 않는다. 매 수업마다 자신의 한계를 증명해야 하는 셈.

주변의 생도들은 인정받아 조금씩 발전하는 데서 오는 묘한 호승심과 열기가 이 수업의 주요 동력이었다.

"자네는 처음 보는군."

그때 들려오는 낮게 긁히는 목소리. 고개를 들자 있는 건 날 보며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는 노인, 맹하였다.

"듣자 하니 사고깨나 친 말썽꾸러기가 자네겠구먼. 한 번 운용해 보게."

'앞자리에 앉길 잘했군.'

이렇게 빠르게 어그로가 튈 줄이야. 안 그래도 요즘 심법에 대한 지도가 필요하다 생각하던 참이었다.

나는 곧장 삼재심법을 운용했다.

그러자 이쪽 등에 손을 댄 채 감지하는 노인이 순간 고개를 갸웃하는 게 느껴졌다.

당연하지. 제갈세가의 혈족이자 수석 입학생인 이의 내공심법이 고작 삼재심법이라니 믿을 수 없을 거다.

"장난이라면… 꽤 발칙하구먼."

맹하가 하얗게 센 눈썹을 모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장난을 좋아하지만 그렇기에 눈치 없는 자에겐 냉정했다.

만일 제대로 된 능력을 보이지 않으면 여지없이 관심을 끊을 게 뻔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계속 심법을 운용했다. 평소처럼 깔끔하고 선명하게.

그러자 맹하의 눈빛에 이채가 띄었다.

'이것 봐라?'

너무 깔끔하다. 아니 완벽했다.

보통 심법을 운용하는 건 초식과 견주어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다.

같은 동작을 같은 흐름 속에서 이루는 것.

주먹의 궤적과 발 보폭 등 전신을 얼마나 통제해 완전히 초식을 구현하는가는 형태만 보자면 심법의 일면과 닮아 있기도 했다.

하지만 초보와 고수의 초식이 겉으로는 같아 보인다 해도 그 안에서도 차이는 분명히 있다.

근육의 긴장도, 체내의 무게 중심이나 관절을 타고 이어지는 힘의 흐름과 같이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의 완성도가 갈린다.

하물며 육체만 해도 그런데, 내기라는 무형의 힘을 다루는 건 어떻겠는가?

당연히 정해진 혈도를 따라 일주천시키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그렇다 해도 그 흐름이나 완급이 삐뚤빼뚤한 경우가 대다수다.

'혈관 한 줄기, 힘줄 한 가닥 차이가 끝없는 변수를 만드니 말이지.'

그렇기에 평생을 단련한 고수들마저도 깊게 파고들수록 어려워하는 것이 바로 심법이다.

그런데 지금 이 녀석은 뭐란 말인가?

'흠잡을 것이 없다.'

비록 간단하기 그지없는 삼재심법이지만 섬뜩할 정도로 완벽하다.

'엄청나군.'

마치 자연에서 완벽한 원을 보는 것처럼 이질적이며 아름다웠다.

한편으로 이는 일식 때 태양을 집어삼키는 달이 정확히 원형의 불고리를 이룩하듯이 경이로운 광경이기도 했다.

"다, 다시 해보게."

맹하가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무인이 평생에 몇 번 느껴 보지 못하는 심체일원의 순간. 심법과 의지 그리고 육체가 하나로 운용되는 그 순간을 목격한 셈이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제갈천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일상적으로 심법을 이어 나갔다.

그 모습에 맹하가 옅은 탄성을 터뜨렸다.

고작 삼재심법 따위에 이런 귀한 기회를 놓친 것이 안타까워서.

'만일 다른 심법이었다면 탁월한 심득을 얻었을 텐데 말이야.'

그래서 한 번 더 시켜 본 것이다. 방금의 감각을 최대한 가깝게 재현시켜 주기 위해서.

하지만 이후 펼쳐진 심법은 맹하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제갈천우의 체내에 정순하게 모인 기운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체내의 혈도를 따라 고고하면서도 아름답게 전신에서 단전으로 일주천을 해냈다.

완전무결.

더할 나위 없었다.

"한 번 더 할까요?"

일주천을 끝낸 제갈천우의 말은 지금 맹하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는 한 가지 단어만이 떠올랐다.

완성.

그 사실을 떠올리자 맹하의 눈동자에 경악이 담겼다.

지금 이 아이는 고작 약관도 되지 않는 나이에 심법 하나를 완성한 것이었다.

"…그래 보겠나?"

한 번은 우연일 수 있으나, 두 번은 필연이다.

그렇다면 세 번은?

"허…!"

운명. 부정할 수 없는 재능이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무당파의 은퇴 고수이자 심법 연구에 있어 중원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그였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천재(天才).'

수십 년간 무림학원에 들어온 재능 있는 아이들을 만나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맹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의 무공은 어느 귀인께서 사사하셨느냐?"

"독학했는데요?"

뜬금없는 물음에 사실을 답하자 등에 손을 대고 있는 맹하의 손바닥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뭐지?'

변태인가?

'이런 설정은 없었던 것 같은데.'

모종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자니 예상 밖의 제안이 돌아왔다.

"자네, 내 수제자 할 생각 없나?"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그 내용만으로도 강의실 내부에 정적을 불러오기엔 충분했다.

곧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주변 생도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수제자라니! 그것도 하급생도에게?"

하나같이 깜짝 놀라며 이쪽을 돌아본다. 그래도 나만큼은 아닐 거다.

지금 가장 의아한 사람은 나였으니까.

'대체 왜 무당파의 전 장로가 내게 이러는 거지?'

단지 삼재심법만 운용했을 뿐인데 말이다.

"…물론 영광입니다. 하지만 다소 갑작스럽네요."

최대한 말을 돌려 난감함을 표했다.

물론 나쁜 제안은 아니다.

교수의 수제자가 된다는 것은 탄탄한 뒷배가 생기는 것이고 이는 진학과 졸업 이후의 삶에도 큰 도움이 되니까.

'문제는 그 영향도 크다는 거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 무언가 도움을 받았으면 그만큼 기여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

잘못 코 꿰이면 앞으로의 행보에 제한이 될 게 뻔했다.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무림학원을 클리어하는 거니까.'

일단 속단은 금물이다.

그런 내 의중을 읽었는지 맹하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게. 나는 심법의 운용을 도와주고, 자네는 겸사겸사 나와 연구를 같이하면 되는 걸세. 그러다 적성에 맞으면 대학(大學)에 진학하여 나와 함께 연구하는 거고."

나한테 대학원생이 되라는 뜻이다.

'그건 아니지.'

하지만 그렇다고 단칼에 거절하기도 애매하니 결국 나는 유예를 택했다.

"죄송하지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방금 잘못 들은 건가?"

그러자 들려오는 깐깐한 목소리. 신경질적인 인상의 노인, 맹동이 다가와 있었다.

"무공 교수의 제안을 거부하다니.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군."

"너무 그러지 말게. 아직 앞날이 창창한 인재니 말이야."

"자네는 너무 무른 게 잘못이야."

"자네는 너무 딱딱하고 말이지."

졸지에 나를 두고선 저들끼리 싸우는 교수들.

'머리 아프군.'

이렇게 주목받는 건 예상 밖인데 말이다.

"그래서 대체 어떻길래 이런 새파랗게 어린 생도에게 수제자 자리를 주겠다고 한 건가?"

말다툼의 와중에 맹동이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허허, 아무것도 아니네."

"자네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더 수상한데… 생도. 한 번 심법 운용해 보게."

그 말에 다시금 심법을 운용했다.

"이건…!"

놀란 듯 재차 내게 심법을 운용해 보라고 하는 맹동.

갈수록 그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일자로 다문 입술이 벌어졌다.

"자네… 내 제자가 될 생각 없나?"

"이 말코 같은 놈이! 어딜 빼앗아 가려고!"

"이 아이가 자네 건가? 참 인륜을 저버린 자로고."

"인륜 운운하기 전에 자네 양심부터 살피게!"

강의실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맹동 교수님까지 가세하다니…."

"또 제갈천우야?"

"무섭다, 무서워…."

주변의 수군거리는 소리. 그리고 나를 둘러싼 나이 든 이들의 고성까지.

'개판이군.'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32화 심법소동 (2)

맹동과 맹하.

둘은 무당파의 쌍둥이 원로이자 양의심공의 대가다.

두 가지 심법을 운용하며 조화하는 양의심공 속 태극의 묘리를 통달한 그들은 심법 연구의 권위자였다.

어딜 가도 고수 대접을 넘어 귀한 연구자로 추앙받는 존재들.

그런 그들이 지금 코앞에서 서로 투닥거리고 있었다.

"내게 양보하게. 어릴 때부터 자네가 맛있는 것도 먼저 가져가지 않았나."

"흥, 그건 느려 터진 놈이 잘못이지."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이렇게 유치하게 싸우는 걸 보고 있자니 도리어 이쪽이 괴로워진다.

결국 그들이 서로 말다툼하다 말고 화살을 내게 돌렸다.

"이럴 게 아니라 차라리 당사자에게 선택하도록 하지."

"바라는 바네."

""자네는 누구를 선택할 건가?""

'골치 아프네.'

마음 같아선 둘 다 거절하고 싶었다. 내가 알기론 저들 둘 다 상당한 괴짜들.

정석 공략대로라면 그다지 엮일 일 자체가 없는 노고수들인 만큼 갑자기 제자가 되라느니 같은 제안은 조심하는 게 좋았다.

제자랍시고 받아 놓고 산속에 처박아 놓거나 고문에 가까운 훈련을 시키는 경우가 어디 한둘인가.

안 그래도 지뢰계 스승들이 넘치는 세계관이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거부할 순 없다. 하급생도 주제에 한 학기도 안 돼서 교수에게 밉보일 수도 없지 않은가?

이렇게 된 거, 최대한 이 상황을 활용할 수밖에.

"제가 아직 스승님들을 잘 알지 못해서…."

망설이며 답하자 맹하가 옳거니 답했다.

"그거 좋은 말이로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무당파의 원로이자 심법 연구에 있어서 제일로 꼽히는 연구자이기도 하지!"

"그건 나도 같네. 양의심공에 있어 나만 한 이는 없지. 자네가 바란다면 현존하는 어떤 심법이든 가르쳐 줄 수 있네."

그러자 자신의 장점과 업적을 뽐내기 시작하는 그들.

듣다 보니 혹하는 제안이었다. 어떤 심법이든 가르쳐 준다니.

'슬슬 역천심법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도 됐지.'

삼재심법의 대성이 가까워졌으니 이제 다른 심법을 익힐 차례다.

그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살피던 내가 불쑥 물었다.

"혹시 육합공도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당연하네."

"물론이지. 너라면 뭘 배워도 잘할 거다. 그런데 아예 무당 쪽 심법은 어떻겠느냐? 무당파의 심후한 심법이 네게 어울릴 것 같은데."

기다렸다는 듯이 제안해 오는 두 고수들. 이에 은근히 핑계를 대며 둘러댔다.

"제가 여러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요. 두 분께 심법을 한 번씩 배워 볼 수 있을까요?"

"그러면 혈도가 뒤틀릴 텐데? 차라리…."

"나라면 상관없네! 뛰어난 스승은 제자가 어떤 길을 가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법. 나 정도 되면 육합공이든 태극심법이든 다 가능하지."

"뭣이? 그건 나도 가능하다."

그렇게 저들끼리 싸우기 시작하는 그들.

'잘됐어.'

마침 징계로 비급서고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인지라 곤란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럼 가능할까요?"

내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물론이네."

"물론이지!"

그렇게 수업 내내 두 노인들이 소란스레 자신들의 능력을 뽐내며 경쟁한 끝에 수월히 육합공의 진수를 배울 수 있었다.

'이게 화산파의 기초 심법인 육합공인가?'

나는 혈도를 따라 도도하게 흐르는 순수한 기를 느끼며 눈을 떴다.

전신의 기운을 정화해 준다는 성능대로 확실히 기운 자체가 정순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느리지만 그만큼 안정성이 뛰어나 마치 압착기에 생과일 음료를 짜듯 순도 높은 내공을 쌓을 수 있었다.

'놀랍군.'

유려하면서도 올곧은 심법. 그러면서도 변화무쌍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게 바로 추후 화산파의 화려한 무공의 기반이 되는 심법인 건가.'

파천마가 쓴 [무武]에선 익히는 난도가 하급이라길래 그래도 가볍게 봤었는데 알면 알수록 심후한 구석이 있었다.

어쩌면 구파일방의 무공이니 당연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얼 묻나? 당연히 내가 더 낫지."

맹동과 맹하가 티격대며 물어왔다.

'벌써 정할 순 없지.'

가만있으면 심법이 튀어나오는 인간 서재들이다. 그중 하나도 놓칠 수 없었다.

나는 우선 면목 없다는 듯이 무당파 식으로 포권을 했다.

"아직 제가 부족하여 두 분의 고명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당장 제가 짧은 식견으로 판단하기엔 실례가 될 듯하니 부디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남은 심법마저 다 털어먹을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그런 불온한 마음가짐과는 달리 내 자세는 꽤 정중했고 그 때문에 맹하와 맹동 역시 침음성을 내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좋다. 앞으로 수업 내내 알려 줄 테니."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도 좋네."

"허, 자네 연구는 언제 하고?"

"우리 제자를 위해선 언제든 시간을 낼 수 있지. 자네와는 달리 말이지."

다시금 이어지는 소란. 그때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린 터라 우선 그들에게 적당히 인사를 하고는 물러났다.

"두 분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선약이 있어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복도에 뭉쳐 있던 하급생도 무리가 다시금 사방으로 갈라졌다.

'뭐 편하긴 하네.'

기왕이면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소문 덕에 전처럼 귀찮게 시비 걸릴 일은 없지 않나.

이제 남은 건 숙소로 돌아가서 오늘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일뿐이었다.

예상외의 인물이 다가오기 전까진 말이다.

"화산의 무공에 관심 있나 봐?"

단정히 정리한 말총머리에 귀공자 같은 부드러운 선의 미남이 흥미로운 기색을 내비치며 아는 체해 왔다.

백청.

입학시험 때 차석이자, 내가 강등되고 난 후로 현 수석에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인물이었다.

"이번에 흥미가 생겨서."

그러자 백청이 웃어 댔다.

"하하하, 그래? 내 동문들은 다 지루하다던데. 너 특이하구나?"

"너도 만만치 않은데."

"응?"

"아까부터 날 샅샅이 훑고 있잖아 변태 새끼처럼."

나는 전신에 꽃잎처럼 나풀거리는 녀석의 내기를 차단함과 동시에 마력을 끌어 올렸다.

같잖은 수작질을 할 거면 당장에 대응할 생각이었다.

그러자 백청이 놀란 눈초리를 하더니 이내 볼을 긁적이며 사과해 왔다.

"미안. 너무 궁금해서 그만. 알다시피 이번 신입생 중에서 네가 가장 유명하잖아? 게다가 맹동, 맹하 교수님까지 주목하셔서 말이야."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순순히 믿지 않았다. 이 녀석도 알고 보면 또라이였으니까. 주로 무공과 관련해서 말이다.

"그럼 서로 볼 장은 다 봤군."

녀석을 지나치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인재는 가까이 두는 편이 좋다지만 이 녀석은 다루기가 어렵다. 차라리 거리를 두는 게 나았다.

"응, 그럼 다음에 또 봐."

뒤를 보니 백청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역시 이상한 녀석이었다.

* * *

다음 수업은 [실전전투실습]이었다. 백유환이 교수로 있는 바로 그 강의.

내가 가장 우려하는 수업이기도 했다. 여기선 대놓고 몸을 써야 했으니까.

보통은 생도끼리 붙거나, 교관이 대련 상대가 되어 주고 중간중간 백유환이 조언하는 식의 수업이었으나 오늘만은 달랐다.

같은 시간 남궁도혁이 이끄는 [기초무공강의]를 듣는 하급생도까지 모두 모여 있었으니까.

갑자기 하급생도 전체가 모여 있는 꼴인지라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의아한 기색이었다.

그때 백유환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다음부터는 중급생도와 하급생도의 생도 간 친선교류전을 하도록 하겠다."

충격 선언에 삽시간에 생도들이 술렁거렸다.

'드디어인가.'

빼놓을 수 없는 이벤트 중 하나인 친선교류전.

말이 친선이고 교류지, 실질적으로 선배인 중급생도가 하급생도를 찍어 누르는 서열 정리의 연장선이었다.

'물론 올해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겠지만.'

제각기 다른 표정으로 눈매를 빛내는 백청과 팽근우, 그리고 백하신을 보니 벌써부터 열의가 넘쳐 보였다.

"올해도 각 생도 대표 다섯 명을 뽑아 서로 맞붙도록 하겠다. 기준은 성적순이다!"

백유환의 말에 나는 내심 안도했다.

'수석에서 탈락하길 잘했군.'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수석 지위에서 내려간 덕에 저 다섯 명 중에 포함되지는 않을 거다.

누가 이제 막 징계받은 망나니에게 대표 자리를 주겠는가?

괜히 얻어맞는 자리에 끌려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물론 조만간 되찾긴 할 거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백유환이 대표자 이름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백청, 팽근우…."

그런데 기다려도 들려야 할 이름이 들리지 않았다.

대신 들리지 말아야 할 이름이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제갈천우! 이렇게 다섯이 대표자다. 선배 보기에 부끄럽지 않게 준비하도록."

백유환은 그 말과 함께 뒤돌아서더니, 그대로 잔풍을 일으키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뭐, 네가 될 줄 알았다."

"역시 대단하오!"

곧 호들갑을 떨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희문과 구동.

"예상대로군. 혹시 대련 상대가 필요하면 말하시오."

그리고 살갑게 다가오는 팽근우까지.

하지만 그런 주변의 반응에도 여전히 내 얼굴은 굳은 채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백하신이 불리지 않았다.

아무리 초반이고, 아직 두각이 엄청나게 드러나지는 않을 시기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백하신이 대표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혹시 백유환이 손을 써서?'

아니다. 보통 대표자 선정 때는 다른 교수들의 총체적인 성적과 교관의 개인 평가가 더해진 결과가 반영된다.

그렇다는 뜻은 현재 백하신은 순수한 실력으로 TOP 5에 들지 못했다는 의미이고, 그건 백하신이 앞으로 있을 시련들을 이겨 내지 못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

'왜 이렇게 됐지?'

변수다.

하지만 나는 원인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는 전부터 우려했던 일이기도 했다.

'백하신은 플레이어가 아냐.'

그에겐 공략집이 없다. 당연하지만 상태창도 세이브 로드 따위도 없다.

어쩌면 약한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재능 있는 인간이 얼마든지 고꾸라질 수 있는 세계니까.

실제로 나도 몇 번이나 중간에 실패하지 않았나.

'너무 안일했다.'

알아서 잘 커 줄 거라고 믿은 건, 내 현실적인 능력 부족이기도 했지만, 낙관론이기도 했다.

나만 성장하기에도 바빴으니까.

하지만 그런 이유 말고도 백하신의 성장 부재에는 다른 원인이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원인이.

지금으로서는 절대 원작대로 될 수 없다.

무엇보다 현재 원작과 다른 가장 큰 변수가 이 자리에 있었으니까.

'나.'

제갈천우는 본래 악역이다. 모종의 열등감으로 백하신을 괴롭히는 그런 삼류 악당.

그러다 각성한 백하신에게 얻어맞고 퇴장하는 주인공 성장용 빌런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빙의했고, 현재 백하신은 원작과는 서서히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사실 이전부터 징조는 있었다.

원래는 백하신이 얻을 수 있었던 추천패 관련 기연을 내가 얻었다든지.

입학 때 내가 수석을 하는 바람에 백하신의 순위가 한 단계 낮아진 것이라든지.

그 밖에 내가 저지른 크고 작은 사건들이 나비 효과처럼 백하신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을 거다.

"망할."

애써 외면하고 있던 현실이 다가오는 감각이었다.

'나 때문이다.'

나라는 변수가 백하신을 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말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해야 했다.

Chapitre suiv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