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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48. 세나

곽병식은 저녁때 신당읍 읍내에서 조금 벗어난 농가로 갔다. 커다란 창고가 딸린 농가에는 다섯 명의 남자가 쇠파이프나 야구방망이를 만지고 있었다.

두목인 조기택이 곽병식을 보더니 짜증을 냈다.

"너 이 새끼.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곽병식은 읍내를 어슬렁거리다 지금 돌아왔다.

"형님. 쌀집이나 다른 가게 놈들이 말을 듣게 하려고 열심히 돌아다녔습니다."

"뜨내기한테 얻어터지는 새끼가 말은 잘해."

다른 놈이 웃었다.

"하하하. 형님. 그래도 병식이가 와꾸는 먹어주잖습니까?"

조기택이 물었다.

"그래서 땅을 팔겠대?"

"제가 잘 설득하고 있습니다. 성과도 있었습니다."

"쌀집은?"

"거기는 아직…."

"왜 아직도 아직이야? 그 논이 제일 중요한데."

"제가 더 노력을…."

"하긴. 이 새끼는 요즘 제대로 하는 일이 없지. 너 믿고 있다간 일이 안 되겠다."

조기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오늘 밤에 조져야겠어."

곽병식은 당황했다.

외진 곳에 사는 농부 몇 명은 이미 집에 찾아가 협박하는 방식으로 매매 각서를 받았다. 하지만 쌀집을 운영하는 김기환은 사람이 많은 곳에 산다.

"형님. 쌀집 주인은 읍내에 사는데 어떻게…."

"그러니까 그 새끼를 이쪽으로 유인해야지."

조기택이 다른 부하에게 물었다.

"야. 쌀집 주인 딸, 그 고삐리 말이야. 어떻게 됐어?"

부하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깨를 사겠다는 핑계로 유인했으니까, 곧 잡을 수 있습니다."

그 부하가 곽병식을 보며 비웃었다.

"병식아. 봤냐? 일은 이렇게 하는 거다. 이제 우리도 스마트하게 일해야지."

"너 이 새끼…."

조기택이 부하에게 지시했다.

"고삐리를 잡으면 휴대폰부터 빼앗아서 쌀집 주인을 이쪽으로 유인해. 오늘 도장 받자."

"이미 세 녀석을 보냈습니다. 바로 그렇게 진행하라고 하겠습니다."

차우진이 물었다.

"세 녀석은 어디로 보냈냐?"

"버스가 읍내에 들어가기 전에…."

부하가 멈칫했다.

누가 질문하니까 그냥 대답하다가, 이 조직에서 그에게 반말할 수 있는 사람은 조기택과 곽병식뿐이라는 게 생각났다.

부하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누구?"

차우진이 마당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나도 그게 참 궁금하다. 너네 누구냐? 왜 이 마을 논을 노리는 거냐? 시기가 너무 빠르잖아."

두목인 조기택이 평상에서 일어났다.

"못 보던 놈인데, 여긴 어떻게 찾아왔지?"

차우진이 곽병식을 향해 턱짓을 했다.

"저놈을 따라오니까 여기가 나오더라."

조기택이 곽병식을 노려보며 화를 냈다.

"등신 새끼! 멍청하게 뒤를 밟혀?"

곽병식은 억울했다.

"예? 아, 아니. 형님. 제가 뒤를 확인하면서 왔는데…."

잠입 추적의 베테랑이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까지 쓰면서 미행했다. 곽병식의 감각으로 차우진의 미행을 눈치채는 건 무리였다.

"저 새끼가 너 따라왔다잖아!"

"형님. 여기 오려면 평지를 지나와야 하잖습니까? 그때도 분명히 아무도 없…."

"이 새끼야! 네가 달고 온 놈이니까 닥치고 네가 처리해!"

여기에는 조직원이 많다. 차우진은 혼자다. 똥개도 자기 집 앞에서는 먹고 들어간다.

곽병식이 얼른 잭나이프를 꺼내 차우진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너 이 새끼! 누군데 나를…."

차우진이 곽병식의 손을 툭 쳤다. 칼이 옆으로 휙 날아갔다.

"어?"

차우진이 곽병식의 다리를 걷어찼다. 곽병식이 엎어졌다. 엎어지는 놈의 머리를 발로 찼다.

"켁!"

곽병식은 칼을 놓치고 기절했다. 차우진이 곽병식을 발로 툭 밀었다.

조기택이 인상을 구기며 부하들에게 손짓을 했다.

"좀 치는 새끼구나."

"내가 아주 잘 쳐."

며칠 전에 곽병식과 같이 있던 두 놈은 쌀집 딸을 납치하러 갔다. 지금 이곳에 서 있는 놈 중에는 며칠 전에 차우진을 본 놈이 없다.

어차피 배가 다르고 복장도 달라서 있었다 해도 알아보긴 어렵다.

조기택의 손짓을 본 조직원들이 옆으로 움직이며 차우진을 포위했다.

조기택은 여전히 평상 앞에 있었다. 차우진을 포위한 놈은 넷이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너희가 여기 왜 왔는지, 왜 땅을 사려고 하는지를 대답할 생각이 없구나?"

조기택이 실실 웃었다.

"이 새끼가 숫자 감각이 없나? 혼자서 왜 이렇게 건방져? 다구리 앞에 장사 없다. 너 그러다 죽는다."

"아. 죽여도 되는 거냐?"

"뭐?"

"아니다. 그래도 살려는 놔야겠지."

여기는 프라하가 아니다. 나중에 이 마을을 조사하러 다시 방문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시체는 만들지 않아야 한다.

"운 좋은 놈들이네."

"미친 새끼. 뭐해? 일단 조져!"

조기택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차우진의 오른쪽 뒤에 있던 놈이 쇠파이프를 위로 들었다. 차우진은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다.

'큰소리치더니, 한 방이구나!'

조직원이 그렇게 생각하며 차우진을 향해 다가가 쇠파이프를 내리쳤다.

차우진이 바닥을 툭 찼다. 그의 몸이 왼쪽 뒤로 이동했다. 그쪽에 있던 놈은 일이 간단히 끝난다고 생각하고 건들거리느라 반응이 늦었다.

차우진이 적이 들고 있던 야구방망이를 잡아챘다.

"어?"

오른쪽 놈은 쇠파이프로 허공에 헛손질을 했다.

"엇!"

차우진이 야구방망이를 훅훅 휘둘러본 후에 왼쪽 놈의 머리를 내리쳤다.

"켁!"

당황한 얼굴로 서 있던 왼쪽 놈이 고꾸라졌다.

쇠파이프를 허공에 휘둘렀던 놈이 뒤늦게 차우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쇠파이프도 위로 번쩍 들었다.

"이 새끼가!"

차우진이 야구방망이를 옆으로 쭉 뻗었다. 그의 공격이 적의 쇠파이프보다 빨랐다.

야구방망이의 뭉툭한 끝이 적의 가슴 한복판을 콱 찔렀다.

"켁!"

적이 가슴에 충격을 받고 비틀거렸다. 위로 들었던 쇠파이프는 내리치긴 했는데 이미 힘이 빠져 있었고 속도도 느렸다.

차우진이 옆으로 움직여 적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며 야구방망이를 크게 휘둘렀다. 방망이가 적의 턱을 갈겼다.

"케엑!"

상대는 옆으로 빙글 돌며 자빠졌다.

조기택은 당황했다.

이미 부하의 절반이 당했다. 쇠파이프나 야구방망이로는 차우진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여, 연장, 칼 꺼내!"

다른 두 놈이 허겁지겁 주머니 속의 칼을 찾았다.

시간 낭비였다.

차우진이 성큼 전진했다. 주머니 속을 뒤지던 놈이 겨우 칼을 쥐고 손을 빼냈다.

늦었다. 차우진의 야구방망이가 아래로 떨어졌다.

칼을 빼내던 놈은 머리를 얻어맞고 고꾸라졌다.

"케엑!"

왼쪽 앞에 있던 놈이 겨우 잭나이프를 제대로 꺼내 움켜쥐었다. 그 칼을 차우진 쪽으로 겨누려 했다.

차우진이 눈으로는 조기택을 보며 방망이를 왼쪽으로 던졌다. 방망이가 창처럼 날아가 뭉툭한 부분이 적의 이마를 정확히 때렸다.

"으악!"

머리를 얻어맞은 적이 뒤로 나자빠졌다.

이제 서 있는 건 조기택 하나뿐이다.

차우진이 말했다.

"자. 다시 질문. 여기 왜 왔냐?"

조기택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뒤쪽에 평상이 있어서 더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 그건…."

"대답이 느리다."

차우진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잭나이프를 발로 툭 찼다. 잭나이프가 화살처럼 날아가 조기택의 어깨에 꽂혔다.

"으아악!"

"다시 질문. 땅은 왜 사려는 거냐?"

"나, 나는 시켜서…."

"누가?"

조기택이 외쳤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내 뒤에 엄청난 분이…."

차우진이 다른 잭나이프를 발로 찼다. 칼이 날아가 이번에는 조기택의 반대쪽 어깨에 꽂혔다.

그런데 이번이 조금 전보다 더 목에 가까웠다.

"아악!"

"내가 칼을 걷어차다 발이 미끄러지면 칼날이 네 목에 박힐 텐데, 그렇게 대답을 질질 끌어도 되겠냐?"

"히익!"

"아니다. 여기에는 너 말고도 대답할 놈이 다섯이나 더 있으니까."

차우진이 쓰러진 놈이 발을 손으로 툭 건드렸다. 손에 쥐고 있던 잭나이프가 빠져나왔다.

겁먹은 조기택이 급히 말했다.

"큰 회사에서 청부를 받았다!"

"큰 회사가 한두 개냐? 이름."

"모, 몰라. 의뢰하는 사람은 봤는데 어느 회사인지까지는…."

"이름은 모르는데 큰 회사인 건 어떻게 알았을까?"

"어? 그, 그건…."

"구라 치다 걸렸으면 죽어야지."

잭나이프가 다시 날아갔다. 칼날이 이번에는 조기택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히이익!"

"아. 그게 빗나갔네."

"의뢰인이 외국인하고 같이 있었어! 그래서 큰 회사라고 생각했다고!"

차우진은 SL 제약 분석팀을 움직여 농약이나 비료 관련 화학 회사들을 조사하고 있다. 그런 회사는 외국에도 많다.

"외국이 한두 곳이냐? 어느 나라 외국인이냐?"

"백인! 백인! 영어는 아닌 말을 썼는데 여하튼 백인이었다고!"

차우진이 혀를 찼다.

"쯧."

"히익!"

짐작 가는 곳이 있었다.

'그놈들이 벌써 움직인 건가? 너무 빠르긴 한데…. 아니면 준비는 미리 해놓은 거였나?'

차우진이 물었다.

"매매 계약은 어떻게 진행하려고 했지?"

"땅 판다는 각서만 다 받아내면, 거기서 찾아와서 계약하겠다고…."

"웃돈을 줄 거면 너희를 쓰지 않았을 테니까, 싸게 후려치려고 했겠네."

"그, 그게…. 잘 안 팔려고 해서…."

"전화번호는?"

"일이 끝나면 문자를 보내기로…."

"쯧. 대포폰이겠군. 내놓는 대답마다 실속이 없어."

조기택이 다급히 말했다.

"내, 내가 아는 건 다 말했어. 그러니까 살려줘. 난 이 일에서 빠질 테니까 제발…."

"그럼 하나 더."

"뭐, 뭘 또…."

"납치한다던 쌀 집 애. 어디서 만나기로 했냐?"

***

고등학생 김세나는 깨를 한 봉지 들고 시골길을 걸었다.

"용돈 생겼다. 히히."

김세나는 평소에도 집에서 운영하는 쌀집의 곡식을 몰래 팔아 용돈을 벌곤 했다. 곡식 판 돈은 모두 그녀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돈 다 모으면 오빠들 공연 보러 가야지."

실실 웃으며 걷던 김세나의 맞은편에서 차우진이 걸어왔다.

차우진은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당황했다.

"세나? 네가 왜 여기 있어?"

김세나도 당황했다.

"네? 누구세요?"

"나는…. 아니다. 너 지금 어디 가냐?"

"깨 팔러 가는데요? 혹시 아저씨가 깨 산다는 사람이에요?"

"아니."

"그럼 누구…."

그들이 있는 곳으로 세 놈이 걸어왔다.

"어이. 학생. 깨 팔러 왔지?"

"아! 네! 깨 시키신 분이시죠? 지금 갈게요!"

차우진이 손을 뻗어 그녀의 앞을 막았다.

"가지 마라."

"네?"

"저놈들은 깨를 사려는 게 아니다."

"그게 무슨…."

세 놈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야! 너 뭔데 남의 일에 끼어들어? 너 그냥 갈 길…. 아니지. 야. 저 새끼도 잡아! 신고 못 하게 해!"

차우진이 김세나에게 말했다.

"봤지? 저놈들의 목적은 깨가 아니야."

김세나가 겁을 집어먹었다.

"유, 유괴범?"

"넌 그냥 미끼로 쓰려던 거긴 한데, 어차피 거기서 거기긴 하지."

한 놈이 차우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새끼. 꿇…."

차우진이 발을 내질렀다. 발차기에 체중을 실었다.

"꾸엑!"

정통으로 걷어차인 놈이 뒤로 나자빠졌다.

뒤따라 오던 놈은 깜짝 놀라 주춤거렸다.

차우진이 앞으로 뛰며 주먹을 뻗었다. 공중에서 내지른 주먹이 두 번째 놈의 턱을 돌려버렸다.

"켁!"

셋이 왔는데 순식간에 두 놈이 바닥에 나자빠졌다.

마지막 놈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도망쳤다.

"으아아!"

"저놈은 저번에도 저렇게 먼저 도망치더니 이번에도 그러네."

차우진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을 주웠다.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였다.

그는 마치 투수처럼 자세를 잡고 돌을 날렸다. 빨랫줄처럼 날아간 돌이 도망치는 놈의 머리를 때리고 튕겨 나갔다.

"컥!"

도망치던 놈이 바닥에 엎어졌다.

"스트라이크! 역시 난 야구를 배웠어야 했는데."

"네?"

차우진이 김세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손에 검은색 비닐봉지가 있었다.

"그거 깨라고?"

"네? 네. 깨 팔러 왔…."

"기름은 지금 이 시기에도 이미 잘 짰나 본데?"

"네?"

멸망한 세계의 김세나는 압축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스킬은 전투에 쓰기엔 부족했지만, 식물에서 식용유를 짜낼 때는 높은 효율을 보여주는 생산계 스킬이다.

"치킨 사줄까?"

"네? 갑자기요?"

"아니다. 치킨은 나중에 사줄게. 일단 넌 집에 가라."

"그, 그래도 돼요? 그럼 이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라 새끼."

"네?"

"아니다. 가라. 집에서 부모님이 걱정하신다."

"네, 네. 아. 제가 드릴 건 없고, 이거라도 드릴게요!"

김세나가 두 손으로 깨 봉지를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차우진이 봉지를 받자마자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반대 방향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그러다 갑자기 멈춰서 뒤를 돌아보고 외쳤다.

"버스 정류장에서 경찰에 신고할 거니까 아저씨는 빨리 튀세요!"

차우진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어…. 그래.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

149. 소문

여고생 납치 미수 사건을 피해자인 김세나가 직접 신고했다.

경찰에 비상이 걸리고 순찰차가 즉시 현장으로 출동했다.

김세나는 버스 정류장에 있었다. 정류장 주변에는 집도 몇 채 있고 지나가는 차도 종종 있었다.

경찰차가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경찰 두 명이 내렸다.

그중에는 김세나를 아는 경찰도 있었다.

"어? 너 쌀집 딸 맞지?"

"안녕하세요. 아. 제가 안녕하지 못하구나."

"어떻게 된 거야?"

김세나가 조금 전에 겪은 일을 설명했다.

"나쁜 놈들이 깨를 미끼로 저를 잡으려고 했는데요. 그놈들을 지나가던 아저씨가 때려줬어요."

"응?"

요약을 너무 잘해서 설명이 너무 짧았다. 그래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김세나가 옆쪽을 가리켰다.

"저기 저 길로 가면 그놈들이 있어요."

동네 경찰이 말했다.

"넌 아저씨랑 있자. 거기엔 다른 경찰이 갈 거야."

경찰차가 추가로 도착했다. 새로 온 경찰들이 김세나가 말한 곳으로 뛰어갔다.

조직원 셋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찾았다."

"이놈들을 누가 이렇게 때려눕힌 걸까?"

"이 동네 사람이 한 거 아닐까요?"

"이 동네에 그렇게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있나?"

엎어진 놈의 얼굴을 확인하던 순경이 고개를 들었다.

"어? 김 경장님. 이놈…."

"왜? 아는 놈이야?"

"읍내에서 시비 걸고 다니던 놈 있잖습니까? 문신한 놈이요. 그놈이랑 같이 다니던 놈인데요?"

"어? 이 새끼들이…. 잠깐. 그놈들이 평소에 어디 모여 있는지 알지?"

"예. 얼마 전부터 집 하나 빌려서 거기서 지내고 있습니다. 무슨 사고는 안 치는지 주시하던 중입니다."

"지원 요청해.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우린 그렇게 시키는 쪽이 아니라 몸으로 뛰는 쪽 아닐까요? 우리가 말단인데요."

"아. 그렇지. 한 놈도 놓치지 말자."

***

조기택의 패거리가 있는 농가를 경찰이 덮쳤다.

형사들은 마당의 상황을 보고 당황했다.

"어?"

"이거 전부…."

"당했네?"

팀장이 물었다.

"이놈들 원래 몇 놈이야?"

"저희가 파악한 건 열 놈입니다."

"정류장 근처에 세 놈. 여기엔 여섯 놈. 거의 전멸하긴 했는데, 한 놈이 비잖아."

"수배 때릴까요?"

"당장 때려."

두목인 조기택은 잭나이프 두 개를 어깨에 꽂은 채로 기절해 있었다.

"구급차는?"

"불렀습니다."

"어? 팀장님. 여기 좀 보셔야겠습니다."

"뭔데?"

외진 곳에 사는 주민이 논을 팔겠다는 각서가 현장에서 발견됐다. 각서에는 도장이 아니라 지장이 찍혀 있었다.

"이거 정상적인 경로로 받은 각서는 아닌 거 같지?"

"당연히 아니겠죠. 땅을 팔 거면 계약서를 쓰지 각서를 왜 쓰겠습니까?"

"이 새끼들이 땅 보러 다녔다고 했지?"

"예."

"각서 쓴 사람 찾아가서 무슨 일인지 물어봐. 이놈들을 체포했다는 이야기도 꼭 해라. 그러면 뭔가 말이 있겠지."

***

차우진이 집에 돌아왔다.

차유리가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다가 고개만 돌리며 물었다.

"그 봉지는 뭐냐?"

"깨."

차유리가 입맛을 다셨다.

"오늘은 깨로 요리 해주게? 무슨 요리인데 한 봉지나 샀어?"

"누나는 어떻게 모든 걸 먹을 거랑 연관시키냐?"

"깨는 원래 먹는 거잖아. 먹으려고 사온 거 아냐?"

"그건 그렇지. 근데 이건 선물 받았어."

"그럼 선물 해준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어서 뭐라도 만들어봐. 깨강정도 좋고, 깨죽도 좋고. 아니다. 뭔가 더 창의적이면서 맛있는 걸 만들어라."

차우진이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그러다 건강한 돼지 된다. 아니다. 이미 돼지구나."

"그런 소리는 네 배를 보고 나서 해라. 양심이 있으면 못 할 거다. 아. 넌 양심이 없고 배만 있지."

"이건 그냥 배가 아니라 인덕이라고."

"나도 인덕 생기게 어서 요리나 만들어라. 아니면 치킨이라도 시켜주던지."

"요즘 경찰은 월급 안 나오냐? 왜 나한테 시키래?"

"월급은 나오는데, 동생이 부자라서?"

"난 왜 치킨 사주는 부자 누나가 없을까?"

***

조기택은 양쪽 어깨에 칼을 맞았다. 잭나이프의 칼날 크기가 작아서 생명이 위험한 건 아니다.

그래도 치료는 받아야 해서, 일단 병원에 보내져 봉합 수술을 받았다.

그런 후에 형사들이 조기택을 경찰서 취조실로 끌고 갔다.

조기택이 불평했다.

"어깨가 나을 때까지라도 기다려주지 말이야. 그리고 증거도 없이 이래도 됩니까?"

형사가 물었다.

"그래서 당신들은 잘못한 게 없다?"

"형사님. 우리는 그냥 농촌에서 잠시 쉬던 것뿐입니다. 전원생활을 즐긴 거죠."

"여학생을 납치하려던 건?"

"그건 그냥 깨를 사려던 겁니다."

김세나가 깨를 가져갔던 곳에는 CCTV가 없었다. 김세나를 유인하기 위해 깨를 산다고 한 톡만 남아 있었다.

"논 거래 차용증은?"

"본계약 전에 확실히 해두려던 것뿐입니다."

형사가 인상을 썼다.

"그런다고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난 잘못한 거 없다니까요."

다른 형사가 옆에 서 있었다. 광수대에서 온 형사였다.

"제가 잠깐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후우. 그러시죠."

광수대 형사가 삐딱하게 서서 말했다.

"조기택 씨.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봐?"

조기택이 의자에 기대고 앉아 느긋한 척했다.

"우리는 죄가 없습니다만?"

"역시 무슨 일에 엮였는지 모르는군."

"형사님. 우리는 아무 짓도 안 했다니까요?"

"당신과 부하들까지 여섯이 한 명에게 당했지?"

조기택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 새끼 빨리 좀 잡아주시죠? 그게 경찰이 할 일 아닙니까?"

광수대 형사가 조기택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빌런 킬러라고 들어본 적 있어?"

조기택은 당황했다. 등이 등받이에서 떨어졌다.

"어? 예? 예?"

"들어본 적 있구나?"

"아, 아니, 소문은…."

"어떤 소문?"

"조직 몇 개가 빌런 킬러에게 몰살당했다고…."

"너희 여섯을 혼자 잡은 사람이 누구일 거 같아? 소문하고 비슷하지 않아?"

조기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말을 할 때 입술도 바르르 떨렸다.

"아니, 그렇지만 그런 거물이 왜 우리 같은 잔챙이를…."

"조기택 씨. 마약이라도 취급했어? 빌런 킬러가 마약조직을 특히 잘 조지는데."

조기택은 양쪽 어깨를 다쳐 팔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그런데도 손을 흔들려고 애썼다.

"아, 아닙니다! 우리는 약은 취급 안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애들은 다 살아있고, 저도 칼에 조금 찔린 것뿐입니다! 소문하고 다릅니다!"

"하긴. 중상자가 없는 걸 보면…. 아닌가?"

조기택은 아니라는 말을 듣자마자 화를 벌컥 냈다.

"아이, 씨발! 놀랐잖아!"

"씨발?"

"아, 아닙니다. 휴우. 너무 놀라서 그랬습니다. 그놈이 진짜 빌런 킬러였으면 제가 살아있겠습니까?"

"아직 안 죽인 걸 수도 있지."

"히익!"

"그러니까 털어놓지? 괜히 풀려났다가 죽지 말고."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당연히 경찰이 보호해 주셔야죠!"

"우리는 잔챙이들을 보호하는 데 투입할 인력이 없어. 그냥 다 자백하고 감방에 가. 거기가 제일 안전해."

***

깨를 팔러 갔다가 납치될 뻔한 김세나의 집은 난리가 났다.

쌀집 주인 김기환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휴. 내가 그 새끼들 생각만 하면…."

정작 김세나는 여유가 있었다.

"그래도 지나가던 아저씨가 구해줬잖아."

"누군지는 봤어?"

"아니. 마스크랑 안경으로 얼굴을 다 가렸는데 한밤중에 어떻게 봐."

김기환이 논이 있는 방향을 보며 말했다.

"논 그냥 확 팔아버릴까?"

"그걸 왜 팔아?"

"이번에 너 큰일 날 뻔한 게 결국 논 때문이니까."

"에이. 아빠. 그놈들은 다 잡혔대. 한 놈 남았는데 지명수배도 했대. 그럼 이제 괜찮겠지."

"그런가? 어휴. 그래도 누가 값만 잘 쳐주면 다 팔아버리고 싶다."

"그 문신한 놈이 맨날 찾아와도 안 팔았는데 갑자기?"

"이런 일을 저지를 놈들인 줄은 몰랐지. 안 되겠다. 세나야. 너 서울에 가 있어라."

김세나의 표정이 확 펴졌다.

"앗! 진짜?"

"너 서울 학교 전학 날짜 어차피 얼마 안 남았잖아. 이제 주말에는 서울에 가서 지내."

"언니 방 내가 쓰면 되지?"

김세나의 언니 김세린은 신인 걸그룹 루나페어리의 멤버다. 루나페어리는 숙소에서 네 명이 같이 산다.

하지만 꼭 숙소에서만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김세린은 스케줄이 없을 때는 집에 와서 지낸다.

그 집이 서울에 있다. 김기환은 김세나의 전학까지 고려해서 투룸을 구해놓았다.

"아싸아!"

"서울 가면 공부해. 공부."

***

차우진이 SL 제약에 출근해 분석팀을 소집했다.

SL 제약 분석팀 팀원들은 평소에는 각자 부서에서 일한다. 그러다 차우진이 소집하면 TF 조직인 분석팀에 모여서 활동한다.

차우진이 지도를 짚으며 말했다.

"지난번에는 국내 화학 회사가 관계됐는지만 알아봤습니다만, 범위를 넓히겠습니다. 앞으로는 유럽 화학 회사 중에서 찾아봅시다."

성혜리가 물었다.

"조사 분야는 지난번과 같나요?"

차우진이 확실히 아는 제품은 몇 년 후에나 나온다. 지금은 주력 상품이 다를 수 있다.

"농약, 비료, 기타 농업과 관련된 화학제품을 만드는 회사. 제품의 목적은 식량 증산."

"아. 저 지역에 논이 많죠. 건설이 아니라 화학이군요. 잘됐네요."

딥어스테크가 토목과 건설 쪽 정보를 수집 중이고, SL 제약은 화학이나 바이오 쪽을 조사하고 있다.

"차 이사님. 혹시 그렇게 판단하신 이유가 있나요?"

"경찰 쪽에서 나온 정보인데, 여기서 농지를 강제로 매입하려던 놈들이 잡혔습니다. 그놈들이 유럽 사람을 봤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럼 그쪽으로 더 파볼게요. 경찰 쪽 우리 라인을 통해서도요."

***

차우진이 조사를 맡겨놓고 SL 제약을 나왔다. 전화가 걸려왔다. 미국에 있는 정수찬의 전화였다.

- 차 이사님. 마그마에너지가 설립됐습니다.

"관련 기술은 아직 하나도 안 나왔을 텐데요?"

- 일단 회사만 만들어둔 겁니다. 어차피 감압 연구를 비밀리에 진행하려면 위장용 간판이 필요하잖습니까?

"에너지 개발을 위한 연구라고 속이긴 좋겠군요. 예산 받기도 좋고요."

- 그래서… 관계자가 차 이사님을 찾아갈 겁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제가 할 일이 없습니다만?"

- 저도 그렇게 말했는데, 굳이 간다더군요.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오윤서 씨가 전화 좀 자주 하라고 불평하던데요."

- 하, 하하. 그래야죠. 조만간 한국에도 들어갈 겁니다. 차 이사님이 강원도에서 테스트했던 그 장소에 가야 하니까요.

차우진이 집으로 가는데 전화가 왔다. 발신자를 확인했다.

[대머리독수리]

차우진은 미국 대사관 간부인 라이언 최의 전화번호를 대머리독수리라는 이름으로 저장했다.

- 잠시 뵐 수 있겠습니까? 조용한 곳에서요.

"한강공원 좋아하십니까? 거기가 조용하고 좋던데."

공원에서 라이언이 차우진에게 명함이 들어 있는 케이스를 주었다.

"마그마에너지의 차우진 이사님 명함이 나왔습니다. 이걸 전해주려고 뵙자고 했습니다."

"바쁘신 분이 굳이?"

"아쉬운 건 우리 쪽이라서."

"내가 이사가 되는 건 누가 반대한다더니?"

"입을 닥치게 했습니다."

"기술 개발은 전적으로 정수찬 박사님이 하셔야 한다니까, 믿지를 않으시나?"

"알고 있습니다. 기본 개념은 차우진 이사님이 만드셨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그거야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 거고, 구현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닙니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건 'Dagger'를 찾아준 것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단검이라…. 암호명이군요."

"그게 뭔지는 탑 시크릿이니까요."

"상황을 공개해도 될 만큼 감압 기술이 개발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군요."

라이언이 말했다.

"우리처럼 간절하진 않을 겁니다."

뉴욕시 바로 옆 지하에 마그마 폭탄이 있다. 그게 터지면 뉴욕이 날아간다. 미국이 감압 기술을 원하는 건 당연하다.

차우진이 말했다.

"저도 간절합니다. 진심입니다."

그 마그마 폭탄은 미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강원도에도 있고, 한반도 주변에도 있으며, 지구 전체에도 여러 개가 있다.

차우진은 마그마 감압 기술을 개발하지 못한 세상을 이미 경험해봤다.

그래서 진심으로, 간절하게 정수찬이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정수찬 박사님에게 연구 인력이나 예산을 최대한 밀어주시죠.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여유가 없습니다."

라이언 최가 차우진을 보며 씩 웃었다.

"역시 이번 일에는 차우진 씨가 필요합니다. 미국으로 가시죠."

차우진이 손가락을 옆으로 흔들었다.

"난 할 일이 많아서 안 됩니다."

미국에 가면 마그마 폭탄 하나에 붙잡혀 있어야 한다.

다른 멸망급 재난들은 차우진이 막지 않으면 높은 확률로 터진다. 마그마 폭탄 하나를 막아도 다른 재난들이 터지면 현대 문명은 멸망한다.

차우진이 말했다.

"명함은 받겠습니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조언 정도는 하겠지요. 내가 미국에 해줄 수 있는 건 거기까지입니다."

150. 민지

라이언 최가 주한미국 대사관으로 돌아갔다.

대사관에는 암호화 통신장비가 있었다. 라이언은 그 장비를 이용해 국무부 랜더스 국장과 통화했다.

라이언이 보고했다.

"'차'는 예상대로 프로젝트 참여는 거절하더군요."

- 옵저버 관계는?

"이사 자리는 받아들였고, 대가로 조언 정도는 해주겠답니다."

- 그것도 예상대로군. 연구능력은?

"다양한 경로로 확인했습니다만, 지질학이나 마그마에 관한 연구 이력이 전혀 없습니다. 탐지기 개발팀을 지휘하긴 했지만, 본인은 전기 전문가 경력만 있습니다."

- 최초 발견자이긴 한데, 역시 핵심 연구 인력은 아니야.

라이언이 단서를 달았다.

"그렇지만 이번 일의 위험을 예측하고 방향을 제시한 직관력은 진짜입니다. 우리 프로젝트에 어떤 형태로든 도움이 될 겁니다."

- 그러면 앞으로 '차'와는 우호적인 관계 정도는 유지해야겠어.

"저도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

차우진은 집으로 돌아왔다. 소파는 이미 차유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TV에서는 드라마 '친구와 연인 사이'가 나오고 있었다.

차우진이 물었다.

"재미있어?"

차유리가 소파에 누워 과자를 먹으며 대답했다.

"난 현실에서는 험악한 강력범죄자들 때문에 힘드니까, 드라마는 저렇게 달달한 게 좋더라."

"누가 더 험악하고 힘든지는 누나한테 맞은 놈들 이야기도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

"야. 저 드라마 세트장 공사 네가 했지?"

"가끔 했지."

"네가 그렇게 중요한 일을 하다니. 날백수로 놀고먹기만 할 줄 알았는데."

"날백수 아니었다고. 좀 쉬다가 다시 일하잖아. 난 이제 백수 아니다."

차유리가 손을 흔들었다.

"그러네. 너 부자였지. 부자 동생아. 오늘은 피자로 하자. 시켜라."

"돈은?"

"가난한 공무원 쥐어짜지 말고 부자가 얼른 시켜라. 꼭 치즈 크러스트로 시키고 토핑은 세 가지 이상 추가해라. 오븐 스파게티 까먹지 말고."

"탐관오리 같으니라고."

***

드라마 '친구와 연인 사이'는 아직 방송 중이다. 그런데 촬영은 이미 끝났다.

촬영 종료 며칠 후에 쫑파티가 열렸다.

시청률이 잘 나와서 쫑파티는 소고기 전문점으로 잡혔다.

소고기를 공짜로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간 차우진이 쫑파티에 참석했다.

"역시 고기는 맛있다."

드라마 작가 유소진은 한쪽에서 맥주잔을 홀짝이며 차우진의 자리로 옮겨갈 기회를 슬쩍 보았다.

조연출이 그녀에게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유 작가님. 저랑도 짠 하시죠."

"아, 네."

유소진이 잔을 가볍게 부딪친 후에 맥주를 마저 마셨다.

그녀는 이 드라마의 작가다. 그래서 그녀를 보는 눈도 많고 다가오는 사람도 많았다. 지금 옮기면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끈다.

'술자리가 무르익으면 저 자리로 옮겨야지.'

신인 배우 진소영도 눈치를 살살 살폈다.

'테이블 돌면서 인사하면서 마시다가 중후반쯤 되면 슬그머니 저기에 앉…. 앗! 벌써!'

정예지가 차우진의 옆자리에 대놓고 앉았다.

"차 매니저. 이 자리 비어 있지?"

"그놈의 매니저 소리는 아직도 하네. 포기하라니까."

"히히. 얼른 술 줘요. 술. 고기도 내놔."

"벌써 취했구나."

"오늘 정말 아름다운 밤이에요."

"여기는 실내라서 형광등밖에 안 보여."

"고기 맛있다."

"누가 이렇게 술을 마시게 한 거야?"

"야! 이제 나 시간 많으니까 같이 놀아주나 했는데 바쁘다고만 하고!"

"정말 스캔들이 안 무섭나?"

오윤서가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예지랑 나랑 처지가 비슷하네요. 나도 수찬 오빠가 바빠서 얼굴도 못 보고 있는데."

"정 박사님과는 뉴욕에서 같이 지냈잖습니까?"

"그때도 바빠서 같이 보낸 시간이 많지는 않아요. 괜히 뉴욕에서 예지하고 놀러 다녔겠어요?"

"정 박사님이 잘못했네요."

"실망이야."

"중요한 일이라서 그러니 이해해 주시죠."

"우진 씨는 알죠? 진짜 무슨 일이에요?"

"이런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서."

오윤서가 슬그머니 물었다.

"그럼 조용한 자리로 옮기면 무슨 일인지 말해줄 수 있어요?"

"아니요."

"진짜 이 남자들이…. 예지야. 너도 정신 차려."

정예지가 큰소리쳤다.

"언니! 저 말짱해요!"

"그게 아니라…. 에휴. 아니다. 너도 나처럼 고생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피디가 차우진에게 다가왔다.

"차우진 씨. 내 술 한 잔 받아요. 내가 진짜 이번 드라마 촬영하면서 차우진 씨 신세 많이 졌습니다."

"촬영장에 전기 공사 몇 번 해준 것뿐입니다만?"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병원에서…."

병원에서 마약 딜러 박동식에게 붙잡혔던 오윤서가 이 자리에 있다. 정예지도 위험할 뻔했다.

그래서 피디는 직접적인 언급은 피했다.

"어쨌든 내가 진짜 고맙습니다. 혹시 방송 출연하고 싶으면 나한테 말해요. 내가 예능에 단발 게스트 정도는 꽂아줄 테니까."

옆에서 술에 취한 정예지가 자랑했다.

"우진 오빠 연기 잘해요."

"어? 그래?"

"네. 제가 봤어요. 액션 연기는 더 잘할 걸요? 눈빛도 좋고 감정도 진짜 잘 잡아요."

그녀는 신당읍 근처를 걷다가 문신투성이 곽병식 패거리와 시비가 붙었을 때 차우진이 어떻게 했는지 보았다.

그렇다고 그 사건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술을 마셨어도 그걸 말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피디가 제안했다.

"그러면 내 후배가 하는 드라마에 킬러 자리가 하나 비는데…."

"피디님도 포기를 안 하시네."

"하하하. 다른 거라도 상관없으니까 뭐든 내 힘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만 해요. 그게 뭐든 내가 진짜 적극적으로 도와줄 테니까."

***

그 식당을 촬영팀이 전세 낸 건 아니다.

중소 기획사 LPP 엔터가 그 식당에서 신인 배우 몇 명을 모아놓고 작은 회식을 했다.

드라마 쫑파티는 다른 방에서 하는 데다가 남의 행사라 함부로 낄 수 없다.

LPP 엔터 사장은 신인 배우들이 식당 복도에서 우연히 드라마 관계자와 마주쳐 얼굴이라도 보여주기를 바랐다.

신인 아이돌 루나페어리의 멤버 김세린도 LPP 엔터 회식에 참여했다. 그녀는 드라마에 단역으로 몇 번 출연했다.

그녀는 오늘 소고기를 먹었다.

"맛있다. 싸가고 싶다."

모처럼 소고기를 많이 먹었더니 배에 신호가 왔다. 그녀가 화장실에 갔다가 개운한 표정으로 나왔다.

"휴우. 죽는 줄 알았다. 어머? 비행기 옆자리 아저씨다."

차우진이 복도를 걸어오다가 김세린과 마주쳤다.

"여기서 다시 보네?"

"네. 여기서 회식이 있어서요."

"루나페어리?"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회사 소속 신인배우들만 따로 모아서요."

"아이돌이라며?"

김세린이 자랑했다.

"제가 노래와 연기가 다 되는 멀티플레이어거든요."

"어. 그래. 많이 먹어. 여기 소고기 맛있더라."

"이미 너무 많이 먹어서 큰일 났어요. 아. 배 터질 거 같아. 근데 그건 뭐예요?"

차우진이 손에 들고 있는 봉지를 들어 보였다.

"아이스크림."

"앗! 나도 아이스크림 좋아하는데."

"신인 아이돌인데 고기를 그렇게 먹고 이것까지 먹으면 안 되지 않나?"

"그, 그렇죠?"

"나 혼자 먹어야지."

"너무해요!"

"커피라도 줄까?"

"아아?"

"어."

"네!"

차우진이 식당 한쪽 대기실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먹었다.

김세린에게는 아이스크림 대신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었다.

그녀가 커피를 쪽 빨아 마시며 말했다.

"아. 쌉쌀한 게 들어가니까 기름기가 씻기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

차우진이 김세린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혹시 동생 있어?"

"네. 고딩이에요."

여기서 이름까지 물어보면 이상하게 보일 게 뻔하다.

'김세나. 김세린. 얼굴도 좀 닮았어. 세나가 동생인 거 같은데….'

차우진은 루나페어리가 표절곡을 부르다가 망한다는 미래를 안다. 그렇지만 그걸 알려줄 수 방법이 없어서 손을 놓았었다.

'정말로 세나가 동생이라면….'

멸망한 세계의 김세나는 생산계 압축 스킬로 식용유를 추출할 수 있는 능력자였다.

'그때 얻어먹은 치킨을 생각하면, 모른 체할 수가 없단 말이야.'

김세린이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응?"

"뭔가 되게 걱정된다는 표정이시다."

"신곡 준비한다며. 그거 불렀다가 망할까 봐."

김세린이 자랑했다.

"어머. 우리 이번 노래 진짜 좋아요. 망할 리가 없어요. 진짜 제대로 해볼 거예요."

"아니, 그게…."

정예지가 두 사람 사이에 갑자기 나타났다.

"뭐지? 우진 오빠가 왜 또 얘랑 이야기하고 있지?"

그녀는 술은 대충 깬 상태였다.

김세린이 벌떡 일어났다.

"앗!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는…."

"알아. 루나페어리 김세린. 공항에서 만났잖아."

"앗! 기억해주시는군요! 고맙습니다!"

"왜 기억하는지 알면 안 고마울 텐데."

"네?"

차우진이 비닐봉지를 들어 보였다.

"아이스크림 사서 들어오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정예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우연 아닐 텐데? 내가 얘네 소속사 사람들을 복도에서 두 번, 화장실에서 한 번 마주쳤는데."

"세린이야 뭐, 회사에서 시킨 대로 하는 거니까."

"하긴. 얘가 꾸민 건 아니겠다."

차우진이 다시 궁리했다.

'그 쌀집 주인하고도 좋은 관계를 맺어야 앞으로의 일에 도움이 되는데….'

이미 그 집 딸인 김세나를 조기택 패거리로부터 구해주었다.

하지만 김세나를 구해준 사람이 차우진이란 건 밝힐 수 없다. 그러니 그건 계산 외로 쳐야 한다.

'김세린이 망하는 걸 막아주면, 멸망한 세계에서 세나에게 치킨 얻어먹은 걸 좀 갚을 수도 있고.'

쌀집 주인과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런데 루나페어리가 망하는 미래를 바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방법이…."

정예지가 물었다.

"방법? 막 손발이 오그라드는 저주 같은 거?"

"그런 저주도 있긴 하지. 피해자의 상태가 비슷…."

"아니, 오빠는 왜 농담을 진담처럼 받아? 무섭게."

"농담 맞아."

갑자기 사람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차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곽민지가 뛰어왔다.

"앗! 아저씨! 나도 아이스크림!"

차우진이 봉투를 내밀었다.

"옜다. 하나 골라라."

"아싸아!"

차우진이 옆자리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는 곽민지를 보며 물었다.

"미성년자가 왜 아직도 여기서 고기를 먹고 있냐? 아주 소 한 마리를 다 먹을 기세더라."

"아빠가 데리러 올 건데. 회사에 일이 많아서 좀 늦게 온대요. 그때까지 열심히 먹어야 해요."

"어? 어?"

"난 그 일을 누가 시켰는지 알고 있는데."

그 일을 시킨 사람이 차우진이다.

마그마 탐지기는 지금도 쓸만하지만, 성능은 더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이미 곽수찬이 마그마에너지란 회사 이름으로 추가 계약을 진행 중이다. 계약금은 미국 정부에서 뜯어냈다.

차우진이 말했다.

"그래. 고기 더 먹어라. 어차피 내가 사는 것도 아닌데."

"아저씨. 아이스크림 하나 더 주세요."

"벌써 다 먹었냐? 곽 팀장님이 아이스크림 안 사주시냐?"

"고기만 먹었더니 달달한 게 땡겨요."

"채소도 좀 먹어라."

"앗. 우리 엄마인 줄."

김세린은 뒤늦게 곽민지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드라마에서 고딩 가수로 나오는 걔?'

"가수구나! 반가워요! 나도 가수예요."

곽민지가 방긋 웃었다.

"네. 안녕하세요. 알아요. 근데 전 가수 아닌데요?"

"네? 하지만 드라마에서 분명히…."

"그건 피디님이랑 작가님이 시키셔서 한 거예요. 저 가수 아니에요."

김세린은 당황했다.

"아니, 무슨 배우가 나보다 노래를 잘해…."

차우진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말했다.

"아! 방법이 있구나."

***

차우진이 곽민지를 데리고 피디를 찾아갔다.

"피디님 힘으로 도와줄 수 있는 건 뭐든 말하라고 하셨지요?"

피디가 아까 술을 마시면서 그렇게 말했다.

"당연하지요! 뭐 필요한 거 있어요? 내가 우진 씨를 예능에 꽂아줄까요? 아까도 말했지만 단발 게스트 자리쯤은…."

"민지가 우리 드라마에서 추가로 부른 노래요. 아직 방송 안 했잖습니까?"

"그렇죠. 그건 마지막 회에 나올 거니까."

그 장면 때문에 곽민지가 최근에 촬영장에 왔었다.

차우진이 물었다.

"그건 기존에 발표된 노래를 쓰는 겁니까?"

"물론이지요. 새로 추가된 장면이라서."

"그 노래를, 민지가 작곡한 노래로 바꾸는 건 어떻습니까? 민지가 자기 노래를 부르면 홍보에도 도움이 될 텐데요."

피디가 놀란 눈으로 곽민지를 돌아보았다.

"너 작곡도 해?"

"아뇨?"

"노래 있으면 들어보자."

"없는데요?"

피디가 차우진을 돌아보았다.

"우진 씨?"

"마지막 화 방영 전까지 민지가 곡 하나 만들 겁니다."

곽민지는 당황했다.

"네? 제가요?"

"그래. 네가 작사작곡 다 할 거야."

"어떻게요?"

"넌 할 수 있어. 재능이 있거든. 내가 알아."

"전 모르는데요?"

피디는 차우진이 술을 많이 마셔서 농담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웃으며 큰소리쳤다.

"하하하. 민지가 일주일 안에만 곡을 만들어오면, 그리고 그 노래가 좋은데 마지막 화에 어울리기까지 하면 안 바꿀 이유가 없지요."

"잘 어울릴 겁니다."

곽민지는 당황했다. 아이스크림 좀 얻어먹다가 생각해본 적 없는 숙제를 받았다.

"아니, 저는 작곡을 해본 적이 없…."

차우진이 말을 끊었다.

"내가 도와줄 테니까 네가 해. 너 나 믿지?"

"제가 저를 못 믿는데요?"

"그래. 마침 내일이 곡 하나 만들기 딱 좋은 날이다. 토요일이잖아."

"넹?"

151. 민지 II

차우진이 곽민지를 자리로 데려가며 말했다.

"민지야. 자세한 이야기는 곽 팀장님 오시면 하자."

"아빠도 제가 작곡을 한다고 하면 황당해하실 걸요?"

"그러게. 딸을 못 믿으시네."

"저도 저를 못 믿는다니까요?"

차우진이 혼란에 빠진 곽민지를 원래 자리로 보냈다. 그런 후에 그의 자리로 돌아와 편안한 모습으로 앉았다.

"방법을 찾으니까 마음이 다 편해진다."

정예지가 물었다.

"우진 오빠. 가능하겠어요?"

"일단 민지가 곡을 만들게 할 거야."

"그게 우리 드라마에 채택되겠냐고."

"안되면 뭐, 그냥 민지가 직접 발표하게 해야지."

드라마 OST로 나가게 하는 게 최선이지만, 직접 발표해도 차선은 된다.

정예지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납득했다.

"그래? 차트에 드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근데 잘할 거야. 아. 예지 씨가 도와줄 것도 있는데."

"나? 흐흥. 내가 노래 좀 하는 건 어떻게 알았지?"

"아는 편곡자 있으면 소개 좀 해줘.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작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녹음실도 전담 엔지니어가 있는 곳으로."

"으응?"

"민지가 아직은 아는 게 없네?"

정예지가 의심하는 눈빛으로 차우진을 보며 물었다.

"진짜 뭔가 알고 진행하는 거 맞지?"

***

곽수혁 팀장의 허락을 받는 건 쉬웠다.

"작곡이요? 하하하. 우리 민지가 날 닮아서 예술적인 감각이 아주 뛰어납니다. 잘할 겁니다. 으하하하."

***

이튿날은 토요일이다.

차우진이 곽민지를 곡 작업이 가능한 녹음실에 데려갔다. 그 녹음실은 정예지가 인맥을 동원해 구해준 곳이다.

정예지도 녹음실에 찾아와서 말했다.

"아. 어제 술을 너무 마셨나 봐. 머리가 아직도 지끈거려."

"신나게 마시긴 하더라. 피곤하면 집에 가."

"무슨 소리."

그녀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정신을 차렸다.

"작곡 한 번 해본 적 없는 애를 데려다가 도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구경해야지."

멸망한 세계의 박창수는 민지의 노래를 좋아했다. 차우진도 박창수 덕분에 민지의 노래를 자주 들었다.

멸망한 세계의 민지는 싱어송라이터다. 그녀의 노래는 대부분 직접 작곡한 것이다.

그렇게 듣던 노래 중에 드라마와 어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문제는 그 노래를 고등학생 곽민지가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까 감성도 다르고 경험도 다르겠지.'

멸망한 세계의 곽수혁은 멸망 초기보다 10년 전에 사망했다. 그 기억을 가지고 살아온 20대의 민지와, 곽수혁이 멀쩡히 살아있는 현재의 고등학생 곽민지의 감성이 같을 수는 없다.

차우진이 말했다.

"일단 떠오르는 멜로디가 있으면 아무거나 눌러봐."

곽민지가 물었다.

"아무거나요?"

"어. 생각나는 거 아무거나."

곽민지가 키보드 건반 앞에 앉았다. 피아노는 칠 줄 알아서 키보드도 잘 다뤘다.

곽민지가 건반을 눌렀다.

정예지가 뒤에서 그걸 들으며 말했다.

"정말 아무거나 누르는구나."

차우진은 진지하게 들으며 말했다.

"그거 아니다. 다른 거."

"이건요?"

"그것도 아니다. 다른 거."

그렇게 열 번쯤 하다가, 익숙한 멜로디가 나왔다.

"어? 그건…."

민지의 노래이긴 한데, 지금 쓰려는 게 아니라 다른 노래의 멜로디였다.

"그건 기록해뒀다가 나중에 쓰고, 다른 거. 아. 그래. 그거다."

드디어 민지의 노래 '무지개 고백'와 비슷한 멜로디가 나왔다. 다만, 똑같지는 않았다.

"그래. 거기서 뒤쪽을 조금만 더 낮춰서. 그래. 잘했어."

"저 잘했어요?"

"그럼. 잘했지. 자. 또 해보자."

차우진은 곽민지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건반을 눌러보게 했다. 그러다 '무지개 고백'과 비슷한 멜로디가 한 마디씩 나올 때마다 그걸 따로 빼낸 후에 다듬게 했다.

토막 멜로디가 여러 개 모였다. 곽민지도 흥미를 느꼈다.

"아저씨. 이거 재미있어요."

"그치? 더 해보자."

"근데 점심은 언제 먹어요?"

"배달시켜줄게."

점심을 먹으면서 정예지가 투덜댔다.

"해장으로 햄버거라니."

"맛있어요!"

"넌 술을 안 마셨으니 맛있겠지."

그녀가 햄버거를 모이 쪼아먹듯이 먹다가 물었다.

"우진 오빠. 이렇게 하는 게 맞아요?"

"어. 맞아."

"아니, 몇 초짜리 음악 조각들만 계속 만들고 있잖아요. 세상에. 짧은 건 1초짜리도 있어. 이걸로 어떻게 노래가 돼요?"

"기다려봐. 이게 다 모여서 노래로 변하는 마법을 보여줄 테니까."

오후에도 차우진은 곽민지와 멜로디 수집 작업을 했다. 그렇게 두 시간쯤 더 작업한 후에, 차우진이 말했다.

"이제 대충 모았다."

곽민지가 밝은 얼굴로 물었다.

"앗! 끝난 거예요?"

"이제 이걸 하나로 연결해야지. 네가."

"네? 제가요? 어떻게요?"

"일단 7번 멜로디를 제일 앞에. 그다음엔 뭐가 나와야 어울릴까?"

"제가 골라야 하는 거예요?"

"네가 만드는 노래니까?"

"웅…. 13번?"

"그건 더 뒤에. 다른 건?"

"18번?"

"그렇지!"

정예지가 그런 식으로 작업하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디스크 조각 모음 하는 거 같다."

차우진은 그가 기억하는 '무지개 고백'과 같은 모습으로 곽민지가 오늘 만든 조각들을 배치했다.

30분쯤 후에 차우진이 말했다.

"이제 한 번에 쭉 들어보자."

"네!"

정예지는 스마트폰을 보면서 놀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각설이 타령 나오는 거 아녜요? 멜로디 조각들을 막 기워 넣은 거 같은데."

"일단 들어보면 그런 생각이 안 들 거다."

"기왕 듣는 거 제대로 들어요."

녹음실 엔지니어는 처음에 간단한 조작법만 알려주고 나간 상태였다. 지금 이곳에는 세 명밖에 없다.

정예지가 엔지니어를 불렀다.

엔지니어가 장비를 조작해 지금까지 이어붙인 곡을 제대로 세팅하고 재생했다.

녹음실 스피커에서 음악이 나왔다. 아직 목소리는 들어 있지 않았다.

엔지니어가 감탄했다.

"와. 이 노래 좋은데요?"

정예지는 당황했다.

"아니, 이게 왜 좋지?"

곽민지는 아무 생각 없이 음악에 맞춰 흥얼거렸다. 가사는 없지만 목소리가 노래와 잘 어울렸다.

음악 재생이 끝난 후에 엔지니어가 말했다.

"와아. 이거 누가 만든 곡입니까?"

차우진이 곽민지를 가리켰다.

"민지가요."

곽민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제가요?"

"어. 방금 네가 만들었잖아."

"아저씨가 시킨 대로 한 것뿐인데요?"

"하지만 모든 멜로디는 네가 만들었지."

"그건 그렇지만…."

정예지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우진 오빠. 이게 왜 되는 건데? 왜 노래가 좋은데? 어째서?"

"뭐가 문제인데?"

"내가 이 노래 어떻게 만드는지 다 봤잖아. 이게 왜 돼?"

"날라리 곽민지가 알고 보니 음악 천재?"

"그게 아니잖아!"

차우진이 손뼉을 쳤다.

"자. 이 곡에 아직 빠진 곳이 있다. 민지야. 어딘지 알겠어?"

"웅…. 몇 군데 좀 아쉬운 곳이 있어요."

"몇 군데지?"

"한…. 세 곳?"

"정확히 맞혔다. 거기도 마저 작업하자."

엔지니어가 나간 후에 차우진이 곽민지를 시켜 빈 곳을 채우게 했다.

이번 작업은 금방 끝났다. 곽민지는 빈 곳에 어울리는 멜로디를 금방 찾아냈다. 이번에는 차우진이 도와줄 필요도 없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곡은 이제 완성! 물론 편곡도 해야 하고 후처리할 게 많지만 어쨌든 완성!"

곽민지도 끝났다는 말에 신났다.

"아싸아! 근데 이거 진짜 제가 한 거 맞아요?"

"민지가 만든 노래 맞아."

이 노래는 멸망한 세계의 민지가 만들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이제 가사 만들어야지?"

"그것도 제가 해요?"

"어. 네가. 이건 다 네가 해야 해. 원래 그렇게 정해져 있어."

"같은 방식으로요?"

"어. 같은 방식으로 네가 작사해. 난 그냥 조금 가이드만 해줄 테니까."

"조금 아니던데…."

"맞아."

***

이튿날은 편곡을 맡길 사람을 만났다.

정예지는 처음부터 편곡에 차우진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걸 조건으로 사람을 구했다. 정예지의 인맥을 동원하면 편곡자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예지는 오늘도 차우진과 곽민지가 어떻게 작업하는지 구경했다.

편곡자는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아마추어가 프로한테 이래라저래라 하겠다는 건가? 내가 정말 정예지 씨 얼굴 봐서 이 일 받는다.'

그는 작업보다 구경하러 온 정예지에게 관심이 더 있었다.

그런데 그의 태도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빠르게 바뀌었다. 차우진의 요구사항대로 작업할수록 음악의 수준이 급격히 올라갔다.

'이 사람, 아마추어가 아닌데?'

차우진이 말했다.

"여기서는 소리가 좀 더 풍성해져야 합니다."

"이번에는 어떤 악기를 쓸까요?"

"그거야 편곡자님이 알아서 하셔야죠."

"아니, 하나하나 다 개입하고 계시면서…."

"아. 그렇지. 현악기가 좋겠군요."

"바이올린?"

"일단 들어볼까요? 어. 바이올린 맞네."

"아니, 이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말해주시면 편한데."

차우진은 '무지개 고백'을 이미 알고 있다.

그는 아는 소리에 맞춰서 악기를 배치한 것뿐이다.

차우진의 전투 센스는 소리만 듣고도 벽 너머에 있는 적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그 전투 센스 덕분에 악기 소리는 정확히 구분할 수 있었다.

잠깐 쉬는 시간에 정예지가 편곡자에게 말했다.

"양해 좀 해줘요. 우진 오빠는 초보자잖아요."

편곡자가 도로 물었다.

"초보라니요? 누가요?"

"그럼 아마추어?"

"저분이 어딜 봐서 아마추어입니까?"

"그냥 감으로 하는 거라던데요?"

"저도 저런 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결과가 좋은 거죠?"

"좋다 뿐입니까? 저는 이런 속도로 이런 퀄리티의 편곡 작업이 가능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거 누가 부를 노래입니까?"

"드라마 OST로 들어갈 거예요."

"어느 드라마인지 노래에 진심인가 보네요."

편곡 작업도 끝났다.

차우진이 편곡자의 작업실을 나오며 말했다.

"휴우. 이제 민지 노래만 부르면 되겠다. 오래 걸렸네."

정예지가 말했다.

"우진 오빠.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남들이 들으면 욕해."

"민지가 재능이 남다르긴 하지?"

"아니, 이게 민지의 재능 맞냐고."

"맞아."

***

토요일에 작사와 작곡을 하고, 일요일에 편곡을 했다. 월요일에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

곽민지는 학생이다. 그래서 월요일에는 수업을 듣고 저녁때 녹음실로 찾아왔다.

이번에는 장비 조작을 전문 엔지니어가 맡았다.

곽민지가 노래를 불렀다.

차우진은 곽민지의 목소리와 감성이 멸망한 세계의 민지와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노래 실력도 민지가 나았다.

'지금 민지는 훈련을 받은 적도 없고 시련도 겪지 않았으니까, 노래가 똑같을 수는 없지.'

그 차이를 보정해야 한다.

차우진이 전투 센스를 사용해 '무지개 고백'을 부른 민지의 목소리와 곽민지의 목소리가 어떻게 다른지 구분했다.

그는 그 차이를 좁히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민지야. 거기서는 조금 더 애절하게."

"애절한 게 어떤 거예요?"

"어…. 모르는구나. 그럼 그냥 거기서 힘을 조금 빼."

"이렇게요? 아! 이러니까 애절하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거 같아요!"

"알아?"

"그러니까 떡볶이가 너무 먹고 싶은데 용돈이 떨어졌을 때?"

"그건 배고플 때고. 그래. 그럼 그냥 떡볶이가 먹고 싶을 때의 감정으로 불러보자."

"넹. 우리 오늘 녹음 끝나면 떡볶이 먹나요?"

"아니. 굶을 거야."

"히잉."

"어. 지금 좋다. 그 감성으로 노래해."

정예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진짜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엔지니어가 옆에서 말했다.

"귀가 워낙 좋으셔서, 이렇게 해도 되나 봅니다."

"우진 오빠가 귀가 좋아요?"

"장난 아닙니다. 절대음감이신가 본데요?"

"나중에 같이 노래방이나 가자고 해야겠다."

녹음은 3시간 만에 끝났다.

네 사람은 완성된 곡을 감상했다.

곽민지가 물었다.

"아저씨. 어때요?"

"음. 내가 기억…. 생각하던 것보다 조금 앳된 목소리인데…."

"넹? 그럼 더 해야 해요? 힘들어요. 내일 학교 가려면 집에 가서 일찍 자야 돼요."

정예지가 옆에서 말했다.

"난 듣기 좋은데?"

엔지니어도 맞장구쳤다.

"노래가 진짜 최고인데요?"

차우진이 말했다.

"그 앳된 목소리도 나름 괜찮네. 여기까지 하자."

끝났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곽민지가 외쳤다.

"배고파요! 떡볶이 먹으러 가요!"

"일찍 잔다더니?"

"먹고 잘 거예요."

"순대도 사줄게."

"아싸아!"

152. 민지 III

월요일 밤에 녹음이 끝났다. 곽민지는 떡볶이와 순대를 먹이고 집에 데려다주었다.

화요일에는 차우진이 방송국으로 갔다.

드라마 '친구와 연인 사이'의 피디는 마지막 화 OST 작곡에 일주일의 시간제한을 걸었다. 농담 삼아 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쨌든 약속은 받았다.

드라마 종영이 얼마 안 남았다. 루나페어리도 문제다.

이런 건 빨리 전해줄수록 돌발상황을 줄일 수 있다.

곽민지는 학교에 가야 해서 방송국에 올 수 없었다. 대신에 정예지가 차우진과 동행했다.

그녀가 말했다.

"차 매니저 쩌네. 자기 배우가 부를 노래가 필요하면 아예 직접 만드는구나."

"내가 만든 게 아니라 민지가 만든 거야. 봤잖아."

"봤지. 근데 민지도 자기가 만든 게 맞는지 긴가민가하던데?"

"피디님 앞에서 그런 이야기 하지 마라. 이거 민지가 작곡하는 걸 조건으로 마지막 화 OST 교체 약속을 받은 거니까."

정예지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우진 오빠. 진짜 내 매니저 하면 안 돼요?"

"응. 안돼."

"너무해! 민지는 해주면서!"

"민지도 이번에만 하는 거야. 이 노래를 쓸 데가 있어서 그래."

"어디 쓰게?"

"궁금하면 계속 따라오던가."

차우진이 피디를 만났다.

"우리 드라마 쫑파티 때 말했던 민지의 노래를 가져왔습니다."

피디가 술자리에서 했던 약속을 기억해내고 웃었다.

"하하하. 차우진 씨. 농담하는 거구나?"

"진짜입니다."

"에이. 그게 말이 되나. 그 이야기 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민지가 벌써 작곡을…."

"작사, 편곡에 녹음까지 다 끝냈습니다."

"어?"

옆에서 정예지가 지원사격을 했다.

"피디님. 진짜예요. 제가 옆에서 다 봤어요."

"그, 그래?"

피디는 처음에는 장난치는 줄 알았다. 이 일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차우진이 노래를 가져온다고 해서 무조건 OST로 채택하는 건 아니다. 피디가 들어보고 나서 좋아야 채택한다.

그러니 이 노래를 들어보고 안 좋으면 '다음 기회에'라면서 넘기면 그만이다.

피디가 말했다.

"뭐, 약속은 했으니까 들어는 봐야지. 근데 차우진 씨가 의외로 성급한 데가 있었네. 아직 며칠 더 여유가 있는데."

"민지가 빨리 만들더라고요."

피디가 의자에 등을 기댄 채로 아무런 기대감 없이 말했다.

"들어봅시다. 그냥 여기서 스피커로 해봐요."

차우진이 스마트폰에 담아온 노래를 재생했다.

곽민지가 부른 '무지개 고백'이 스마트폰의 작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피디가 등받이에서 등을 뗐다.

"어?"

노래가 좋았다. 예상보다 훨씬 더 좋았다.

다른 자리에서도 몇 사람이 일어나서 그쪽을 보았다.

"노래 좋네."

"누구 노래야?"

"노래 잘한다."

몇 분 후에 곽민지의 노래가 끝났다. 피디가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이걸 정말 민지가 작곡했다고요?"

"작사도 민지가 했습니다."

"헐. 작사까지? 그것도 며칠 만에? 고등학생이?"

"예."

"내가 이걸 믿어야 하나…."

"예지 씨가 증인입니다. 작업하는 거 옆에서 다 봤으니까요."

피디가 정예지에게 물었다.

"진짜야?"

"아니, 보긴 봤는데…."

"그런데?"

정예지가 차우진을 보았다. 차우진은 이걸 곽민지가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피디 앞에서 그렇게 말해야 한다고 다짐까지 받았다.

정예지가 사실만 말했다.

"민지가 멜로디도 다 만들고 가사도 다 쓰긴 했어요."

그러면서 추가 설명도 붙였다.

"우진 오빠가 설계하고 세팅한 대로 된 느낌이지만요."

피디에게는 앞부분이 중요했다. 뒷부분은 대충 들었다.

"와. 민지는 배우 재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 가수 재능이 있다는 것도 알았는데, 작곡도 잘할 줄이야."

차우진이 물었다.

"피디님. 이 곡을 우리 드라마 마지막 회 OST로 써도 되겠습니까?"

"써야지. 배우 본인이 만든 노래인데, 그게 이렇게 좋아. 그럼 안 쓰면 바보지. 물론 스태프들의 의견은 물어봐야 하는데, 이 정도면 반대할 리가 없어요."

"그럼 피디님만 믿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정식으로 음원 출시하겠습니다. 마지막 회와 동시에 음원 사이트에 올라가게요."

***

차우진이 방송국을 나왔다.

정예지가 물었다.

"우진 오빠. 진짜 추진력이랑 속도감 쩐다. 너무 빨라서 어질어질해."

"이건 시간 끌 일이 아니라서."

"우진 오빠에게 이런 반전 매력이 있다니."

"왜 띄워주지?"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아니, 오빠가 나도 이렇게 막 도와주면 진짜 좋겠다 싶어서요."

"구체적으로?"

그녀가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두 손을 뺨에 대며 물었다.

"프로듀서님. 나한테도 혹시 작곡 재능이 있을까요?"

"스스로 생각하기엔?"

"없어 보이지만, 숨겨진 재능을 우진 오빠가 찾아주면…."

"네가 없다면 없는 거다. 난 네 판단을 믿는다."

"뭐지? 이 믿는다고 말로만 하고 까는 느낌은?"

"민지는 음악에 재능이 보였는데, 넌 아직 안 보여."

곽민지는 멸망한 세계에서는 싱어송라이터이자 배우인 민지가 되었다. 그때 직접 만들어서 부른 노래들을 알고 있으니, 재능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이번처럼 나중에 곽민지가 만들 노래를 미리 당겨서 만들 수 있게 도와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정예지는 지난번 지진 때 강원도에서 죽을 예정이었다. 그때 절벽에서 떨어지던 그녀를 차우진이 구해줬기 때문에 지금 살아있다.

앞으로 그녀가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는 차우진도 모른다.

"어쩌면 너에게 가수나 작곡가의 재능이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모든 사람의 재능을 알아보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하고 싶으면 스스로 노력해."

"노력하면 곡 만들 때 도와주나?"

"노력하라니까?"

"아니, 우진 오빠? 그냥 가지 말고, 대답을 하라고!"

차에서 정예지가 물었다.

"우리 이제 어디 가요?"

"OST를 만들려면 음원을 출시해야지."

"민지가 계약된 데가 있나?"

"이제부터 하려고."

"응? 소속사 계약을 가수로 한다고? 배우가 아니라?"

"둘 다 아니야. '무지개 고백'의 음원 유통만 맡길 거야. 민지 부모님께는 이미 허락받고 동의서도 받아왔어."

곽민지는 수업이 끝나고 학교에서 나오다가 차우진을 발견했다.

"앗! 아저씨! 우리 학교에는 어쩐 일이에요?"

"'무지개 고백'이 우리 드라마 OST에 포함됐다. 마지막 회에 나오는 노래가 네 노래로 교체될 거야."

"아싸아! 방송국에서 돈 나오면 떡튀순 맘대로 사 먹을 수 있…. 아…."

"왜?"

곽민지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엄마가 대학 갈 때 등록금 하라고 통장에 다 넣어버리시겠다. 안 봐도 뻔해. 출연료 받은 것도 이미 학자금 통장에 다 들어갔어요."

"그럼 돈을 더 벌어보자."

"어떻게요?"

"OST 음원 내야지."

곽민지가 손뼉을 쳤다.

"와! 방송국에서 음원도 내줘요?"

"아니."

"네?"

"어쨌든 후딱 해치우자. 너희 부모님하고는 이미 이야기 끝냈어. 너만 동의하면 돼."

차에서 정예지도 내렸다.

"민지야. 얼른 가서 음원 문제 처리하고 밥 먹으러 가자."

곽민지의 친구들이 정예지를 알아보았다.

"와아! 정예지!"

"곽민지 쩐다! 연예인이랑 이야기하고 있어!"

곽민지가 친구들을 보며 자랑했다.

"나 오늘 예지 언니랑 밥도 먹는다?"

"우와아아!"

세 사람은 차를 타고 학교 앞을 벗어났다. 정예지가 물었다.

"네 친구들 반응이 되게 좋다? 왜 연예인 처음 보는 것처럼 저래?"

"얘들은 연예인 처음 보는 거예요."

"너도 연예인이잖아."

"네? 제가요?"

"왜 아니라고 생각해?"

곽민지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 저는 그냥 드라마에 어쩌다 잠깐 나온 건데요."

"너 노래도 잘 만들던데."

"그거 진짜 제가 만든 거 맞아요?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하니까 노래가 그냥 뚝딱 나온 건데…."

"그치? 나도 옆에서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어."

차우진이 운전하며 말했다.

"그 노래는 민지가 작사 작곡한 게 맞아. 진짜야."

그 노래는 멸망한 세계의 민지가 만들었다. 민지와 곽민지는 같은 사람이다.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곽민지가 물었다.

"여기는 어디예요?"

"드라마 쫑파티 때 김세린 봤지?"

"그럼요. 같이 아이스크림 먹었잖아요."

"김세린 소속사. LPP 엔터."

"여기서 음원을 내주는 거예요?"

"그 협상을 이제부터 해야지."

"네?"

차우진은 루나페어리의 신곡이 언제 나오는지 모른다. 조만간 나올 수도 있다.

그 전에 신곡을 확인하고 문제를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일을 좀 서둘러 진행했다.

차우진이 일을 급하게 진행하고는 있지만, 만날 약속 정도는 미리 잡아두었다.

LPP 엔터는 중소 기획사다. 회사에 연습실이나 녹음실은 있지만 회사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정예지가 말했다.

"내가 차에서 알아봤는데, 걸그룹 하나 데뷔시켰고 가수랑 배우도 조금 있더라. 그중에 누구 하나 제대로 뜨면 회사 커지는 건 순식간이겠지. 물론 망하는 회사가 더 많지만."

차우진이 회사 간판을 보며 말했다.

"이 회사는 그걸 기다릴 여유가 없을 거야."

"그걸 오빠가 어떻게 알아요?"

"그러니까 드라마 쫑파티 하는 식당에서 신인배우들 회식을 시켜줬지. 마음이 급해서 이것저것 시도한다는 소리잖아."

"오! 보기보다 똑똑해!"

"보기보다?"

"앗?"

차우진이 LPP 엔터의 팀장을 만났다. 정예지는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연락드린 차우진입니다."

"반갑습니다. 음원을 내고 싶으시다고요?"

"제가 아니라 이 친구가요."

팀장이 곽민지를 알아보았다.

"어? 아! '친구와 연인 사이'의 걔?"

곽민지가 신난 얼굴로 말했다.

"앗! 저 몇 번 안 나왔는데 알아보시네요? 안녕하세요!"

"하하. 반가워요. 내가 하는 일이 가수 관리하는 일이라서, 드라마 속 가수도 유심히 봤죠."

"아. 그래서 알아보셨구나. 깜짝 놀랐어요. 히히."

"그런데 어떤 노래를 음원으로 내려고? 혹시 드라마에서 부른 그 노래?"

드라마 OST에 사용된 노래는 신곡이 아니라 예전에 다른 가수가 발표한 노래다. 곽민지가 이미 방영된 회차에서 부른 노래도 마찬가지였다.

"아뇨. 마지막 회에 나가는 OST요."

"아. 노래가 더 있구나. 그건 누구 노래예요?"

"저요."

"아니, 원래 누가 부른 노래냐고."

"그러니까 저요."

차우진이 말했다.

"이번에 발표하는 겁니다."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마 출연하니까 곡을 받았나 보군요. 이야아. 좋겠네. 작곡가는 누구시지?"

"민지입니다."

"민지? 민지가 누구…."

곽민지가 손을 들었다.

"전데요!"

"어?"

팀장은 당황했다.

"배우가 직접 만든 노래를… OST로 써준다고?"

"네. 피디님이 마지막 회에 써주신대요. 제가 직접 부를 거예요."

"아. 마지막 회. 메인 OST가 아니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인기 드라마의 OST로 결정된 노래를 맡으면 회사에 이익이 되면 됐지 손해는 아니다.

팀장이 제안했다.

"그럼 우리 회사에 들어와서…."

차우진이 끼어들었다.

"음원 판매만 맡기고 싶습니다만?"

"예?"

"이미 녹음까지 다 끝났습니다. LPP 엔터에는 판매만 맡기고 싶습니다."

"아…. 맞다. 원래 그렇게 연락하셨지."

"싫으시면 어쩔 수 없지요."

팀장이 머리를 굴렸다.

'잘나가는 드라마의 OST인데, 제작까지 다 된 걸 우리가 유통만 하면 돼?'

그런 노래를 유통해줄 기획사는 여기가 아니라도 많았다.

'제작비 한 푼 안 들이고 유통 수수료를 먹으니까 짭짤할 텐데 왜 다른 회사에 넘기겠어?'

계산을 마친 팀장이 웃었다.

"싫기는요. 하하하. 저희가 원래 음원 유통도 자주 합니다. 그런데 그 전에,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안 그래도 들려주려고 했다. 여기는 음원 유통 계약만 하러 온 게 아니다.

차우진이 회의실을 보았다.

"오디오가 있군요."

"이런 일이 자주 있어서요. 저걸 쓰시죠."

차우진이 USB를 오디오에 삽입하고 노래를 재생했다.

팀장이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노래를 들었다.

"어?"

노래가 심상치 않게 좋았다.

멸망한 세계의 민지는 작곡한 노래 중에 본인이 잘 부를 수 있는 것만 직접 불렀다. 잘 안 맞는 노래는 남에게 넘겼다.

지금 곽민지는 나이가 더 어리고 노래 실력도 부족하다. 그런데 이건 원래 본인이 잘 부를 수 있게 만든 노래다.

곽민지의 목소리가 노래와 아주 잘 어울렸다.

노래가 끝나고 스피커가 조용해졌다. 팀장이 상기된 얼굴로 일어났다.

"이건…. 아. 이래서 마지막 회 OST로…."

"그렇죠. 피디님도 들어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채택하시더군요."

팀장이 곽민지를 보았다.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왔기 때문에 교복을 입고 있었다.

'고등학생이 이런 노래를 만들어?'

탐이 났다. 어떻게든 회사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러려면 좋은 인상을 줘야 한다.

"곽민지 학생. 우리 회사 구경해볼래?"

"앗! 진짜요?"

곽민지가 차우진을 돌아보았다.

"우리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그러려고 여기에 왔다.

차우진이 말했다.

"연습실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정확히는 루나페어리가 신곡을 연습하는 모습을 봐야 한다.

연습실부터 보자는 말에 팀장이 신나서 말했다.

"물론이죠! 가시죠!"

153. 루나페어리

LPP 엔터에는 가수나 배우가 쓸 수 있는 연습실이 있다. 그곳에 신인 걸그룹 루나페어리 네 명이 신곡 연습을 위해 모여 있었다.

"이번 신곡 정말 좋지?"

"이걸로 우리도 뜨나?"

"그랬으면 좋겠다."

"맛있는 거 먹고 싶다."

연습실 문이 열리면서 차우진이 말했다.

"팀장님. 그 신곡, 우리도 좀 들어볼 수 있습니까?"

팀장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들어왔다.

"하하하. 물론이죠. 일단 들어보시면 우리가 가수들한테 얼마나 진심으로 투자하는지 아시게 될 겁니다."

김세린이 차우진을 알아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앗! 아저씨가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우연히?"

팀장이 물었다.

"어? 네가 아는 분이야?"

"저번에 귀국할 때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던 분이요."

"그런데 어떻게 보자마자 알아?"

"며칠 전에 쫑파티, 아니, 우리 회식 때도 봤어요. 그 쫑파티에 참석하셨던데요."

팀장은 쉽게 납득했다.

"아. 드라마 관계자라서 오늘 곽민지 양하고 같이 오셨구나."

차우진이 김세린에게 말했다.

"네가 여객기에서 자랑하던 신곡이 뭔지 좀 들어볼 수 있을까?"

"앗! 네! 노래 진짜 좋아요. 근데 들려드려도 되는지 제가 잘…."

팀장이 얼른 말했다.

"괜찮아. 녹음만 안 하시면 돼."

김세린이 MR을 재생했다. 그런 후에 루나페어리 네 명이 MR에 맞춰 노래했다. 그러면서 춤도 가볍게 추었다.

차우진이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다.

'신곡 준비가 이미 꽤 진행됐네? 서두르길 잘했다.'

그런데 노래가 생소했다.

'이게 창수 형이 말하던 그 노래가 맞나?'

확실하지 않았다. 그런데 노래가 꽤 좋았다.

차우진이 노래하는 루나페어리를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다들 예쁘고, 기존에 발표한 노래를 보면 춤도 잘 춰. 노래가 약해서 못 떴다는 평이 많던데.'

이 노래는 좋았다.

'루나페어리가 이 노래를 부르면 못 뜰 수가 있나?'

뜰 것 같았다.

'이 노래로 떴으면, 다음번에 표절곡이 떴어도 순식간에 망하진 않았을 텐데?'

그런데 이 노래는 멸망한 세계에서 들어본 기억이 없다.

차우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창수 형이 뭐라고 했더라?'

박창수의 말이 생각났다.

'데뷔는 나쁘지 않게 했는데, 신곡을 냈다가 표절이 걸렸거든.'

"아. 그렇지."

노래가 끝났다. 루나페어리 네 사람의 표정은 밝았다.

차우진이 김세린에게 물었다.

"이게 데뷔음반 발표 후에 처음 내는 신곡이지?"

"네. 맞아요."

팀장이 얼른 설명했다.

"좋은 곡을 고르느라 시간이 좀 걸렸지만, 그리 늦은 건 아닙니다. 대신에 이렇게 좋은 곡을 받았잖습니까? 하하하."

차우진이 단언했다.

"표절이네."

밝았던 연습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루나페어리는 당황했다.

"네? 네?"

팀장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아니, 이게 무슨…."

팀장은 곽민지가 탐났다. 그래서 잘 보이려고 연습실에도 데려왔다.

하지만 이건 농담으로 넘길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 노래. 표절곡입니다."

"지금 우리를 모욕하는 겁니까? 당신이 뭘 안 다고!"

곽민지가 얼른 차우진의 편을 들었다.

"아저씨가 표절이라고 했으면 표절일 거예요."

"차라리 곽민지 양이 그렇게 말했으면 또 몰라. 저 사람이 작곡가도 아닌데…."

"'무지개 고백'은 아저씨가 다 기획한 거예요."

"어? 그 노래는 민지 양이 직접 작곡했다고…."

"제가 작곡한 건 맞는데, 아저씨가 다 준비하고 방향도 잡고 하여간 전부 다 했어요. 편곡할 때도 악기 구성까지 아저씨가 다 정하고, 프로듀싱도 아저씨가 다 했어요."

"이봐요. 곽민지 양. 갑자기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믿을 거 같아요? 드라마 관계자가 그걸 어떻게 다…."

정예지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사실이에요. 내가 다 봤어요."

"아니, 당신은 누군데 끼어듭니까? 민지 양의 아는 언니라면서!"

정예지가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벗었다.

"민지의 아는 언니 맞아요. 우리 꽤 친한데."

팀장은 깜짝 놀랐다.

"어? 정예지 씨?"

정예지는 톱스타는 아니지만 요즘 뜨는 배우다.

그녀는 연기력도 좋고, 얼굴도 예쁘고, 이번에 출연한 드라마의 시청률도 좋았다.

거기다 최근 몇 가지 사건 때문에 연예면은 물론이고 사회면에도 이름이 자주 올라갔다.

그런 것들이 모여서 더 많은 사람이 정예지라는 배우를 알게 됐다.

연기력과 미모가 되는데 많이 알려지기까지 했다. 뜨는 배우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네. 저예요. 제가 다 봤어요. 그 노래 만들 때 우진 오빠가 다 했어요."

곽민지가 옆에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맞아요. 아저씨가 다 했어요."

정예지가 얼른 단서를 붙였다.

"어머. 물론 작사작곡은 민지가 했지만요."

팀장은 당황했다.

그는 차우진이 '무지개 고백'을 만들 때 뭘 어디까지 했다는 건지 헷갈렸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아들었다.

'곡의 기획부터 프로듀싱까지 담당했다는 건가?'

차우진이 혼란에 빠진 팀장에게 물었다.

"이거 루나페어리가 직접 작곡한 거 아니지요?"

"물론 아닙니다."

아닌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박창수는 작곡가 대신에 루나페어리가 욕을 먹다가 해체됐다고 했다.

"회사 소속 작곡가입니까?"

팀장은 이제 차우진의 말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전문가의 귀에 표절처럼 들려서 그렇게 말한 거라면….'

팀장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좋은 곡을 사서 아티스트에게 주는 게 우리 회사 방식입니다."

차우진이 결론을 내렸다.

"그 외부 작곡가가 표절곡을 팔아먹었습니다. 여러분은 당한 겁니다. 철저히 조사해보시죠. 나오는 게 있을 테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팀장이 눈동자를 굴렸다. 곽민지가 보였다.

LPP 엔터에는 전속 작곡가가 없다. 고등학생이 만들었다면서 들고 온 '무지개 고백'은 노래가 정말 좋았다.

팀장은 욕심이 났다. 그래서 제안했다.

"그럼 내기하시죠. 이 노래가 표절이 아니면 곽민지가 우리 소속사에 들어오는 거로."

"선 넘네."

"뭐요?"

차우진이 인상을 썼다.

"망할 뻔한 걸 막아줬더니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내기를 하자니? 그것도 이겨봤자 민지한테는 좋을 게 하나도 없고, 지면 민지만 손해 보는 내기를?"

"아니, 자신이 있으면 내기를 받으면 될 거 아닙니까?"

"자신 있는데 민지를 걸고 하는 내기는 안 합니다. 민지야. 가자. 여기랑 계약 안 할 거다."

곽민지가 물었다.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다른 데랑 하자. 네 노래는 지금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의 OST로 나올 거야. 음원 유통해달라고 하면 해줄 회사 많다."

팀장은 당황했다.

"아니, 잠깐만요. 그게 아니고요. 내기는 농담입니다! 농담!"

"이젠 거짓말도 하시네?"

"이 노래, 우리 회사에서 철저히 검증하겠습니다!"

"그러시든 말든 이제 우리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만…."

차우진이 김세린을 돌아보았다. 그가 여기 온 건 김세린 때문이다.

"세린이를 봐서 넘어가겠습니다."

"고, 고맙습니다."

김세린이 놀라서 물었다.

"네? 저요?"

"우리가 그래도 같은 비행기 타고 오고 아이스크림도 같이 먹은 인연이 있잖아."

"그, 그렇죠?"

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차우진 씨. 그럼 이 노래가 어느 곡의 어떤 부분을 표절했는지…."

"그 정도는 직접 찾는 성의를 보이셔야지. 어떻게 날로 먹으려고 합니까?"

"그, 그렇습니까?"

차우진이 연습실을 나가려다가 김세린을 돌아보았다.

루나페어리 네 명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신곡 덕분에 들떴다가 표절이라는 말에 크게 실망했다는 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차우진이 김세린에게 말했다.

"다음에 좋은 곡이 들어올 거야. 실망하지 마."

"그렇겠죠?"

"이 곡 작곡가가 누구냐?"

"부비디 님이요."

"외국인이야?"

"아니요. 예명이 부비디예요."

팀장이 말했다.

"아니, 아직 표절이 확실한 건 아니니까…."

"확실하다니까 그러시네. 확인은 서두르는 게 좋을 겁니다. 우리 민지의 노래는 마지막 회 방송 전에 음원을 출시해야 해서."

***

세 사람은 기획사를 나왔다. 음원 계약은 하지 않았다.

곽민지가 물었다.

"아저씨. 그럼 음원 유통은 다른 데서 해요?"

"아니. 여기서 할 거야. 여기가 아쉬운 게 많은 곳이라서 딱 좋아."

"계약 안 하고 나왔잖아요."

"저 회사에서 오늘 말한 문제를 해결하면, 그 후에 더 좋은 조건으로 하려고."

"앗! 더 좋은 조건. 아저씨는 계획이 있으셨구나!"

정예지가 물었다.

"우진 오빠. 근데 이래도 되나? 그러다 루나페어리가 준비한 노래가 표절이 아니면 어떻게 하지?"

"표절 맞아."

"그게 그냥 들으면 알아요?"

"알겠더라고."

"그럼 오빠는 전기 공사가 아니라 음악 일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음악 쪽으론 재능이 없어서."

"와…. 그게 없는 거라니…."

"사실이다."

곽민지가 걱정했다.

"근데요. 저 회사에서 어디를 어떻게 표절했는지 찾아내지 못하면 어떻게 해요?"

"그땐 내가 알려줘야지."

정예지가 옆에서 말했다.

"음악에 재능 없는 사람 맞냐고."

"없어. 그냥 소리만 잘 구분하는 거야."

***

연습실에는 팀장 외에도 루나페어리 네 명이 있었다. 신곡 표절 이야기까지 나왔으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은 회사에 알려질 수밖에 없다.

팀장도 그걸 알기 때문에 바로 모든 상황을 보고했다.

사장이 곧바로 관련 업무를 맡은 직원들을 회의실로 소집했다.

사장이 물었다.

"진짜로 표절곡이야?"

"저희가 들어봤는데, 모르겠던데요?"

"작곡가는 뭐래?"

팀장이 대답했다.

"아직 못 물어봤습니다."

"그럼 빨리 물어봐."

"사장님. 부비디 쪽에 확실한 증거 없이 그런 걸 물어보면 뒷감당이 안 됩니다. 곡을 도로 회수한다고 하거나, 앞으로 자기 곡 받을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할 텐데요."

"하긴. 표절이 아닌데 매도당한 거라면 그럴 만도 하지."

사장이 팀장에게 물었다.

"그럼 표절이라고 주장한 그 사람은 어때? 정체가 뭐야?"

"곽민지를 데려온 사람인데, 누군지는 잘…. 드라마 쫑파티에도 참석했다고 하고 정예지도 같이 온 걸 보면, 방송 관계자인 것 같습니다."

"곽민지가 만들었다는 노래가 그렇게 좋아?"

"예. 진짜 좋습니다."

"그 사람이 기획자고?"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서 그 노래를 들어볼 수는 없다. 차우진이 음원 파일을 넘겨준 건 아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그 음악을 들어본 팀장이 장담했다.

"그 곡을 우리 애들 준다고 했으면 엎드려 절이라고 했을 겁니다."

사장이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안 그래도 급한데 골치 아프게 됐다. 표절 여부는 더 조사해봐. 아니길 바라자고."

***

그날 밤에 차우진이 조용히 움직였다. 목표는 작곡가 부비디였다.

"어디를 표절했는지는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

부비디가 자주 가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내는 건 쉬었다. SNS에 자랑을 워낙 많이 하는 사람이라서, 그것만 봐도 위치 추적이 가능했다.

"술을 마셨다 하면 인사불성에 필름 끊길 때까지 마신다던데."

그런 정보도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만취 상태로 음주운전 하다 걸린 적은 없으니까, 대리운전을 부르겠네."

***

부비디가 그의 차 뒷좌석에서 술에 잔뜩 취한 채로 말했다.

"내 기술이 얼마나 좋은데. 아무도 몰라. 아무도."

"너 그러다 언제 한 번 걸린다."

"이 새끼가 재수 없게."

"너 전에도 문제 될 뻔한 거 덮었잖아."

"그건 참고만 한 거야. 참고만."

"이번에도 그런 거 아냐?"

"이번에도 참고하긴 했지. 인기 별로 없는 신인에 조그만 기획사니까 그래도 괜찮아. 표 안 나게 잘 가려놨어."

***

이튿날 아침에 부비디가 그의 집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우. 씨. 어제 얼마나 마신 거야?"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필름이 끊겼다.

그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휴대폰을 찾아서 어제 만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나 어제 몇 시까지 마셨냐?"

- 형 2차 간다고 해서 나는 빠졌는데?

"내가 2차 누구랑 갔는데?"

- 나야 모르지.

부비디가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어우. 머리 아프고 속 쓰려.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 형 너무 자주 필름 끊길 때까지 마시는 거 아냐? 그러다 훅 간다?

"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끊어."

부비디가 전화를 끊었다.

"내가 어제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기억이 제대로 나지는 않았지만 뭔지 모르게 찜찜했다.

그가 전화를 몇 군데 더 돌리다가 어제 마지막까지 같이 있었던 사람을 찾았다.

- 3차까지 마시고 대리 불러서 집에 가셨어요.

"그래? 내가 술자리에서 뭐 이상한 말 한 거 없지?"

- 평소에 하던 이야기만 하셨죠.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

- 음…. 여자, 여행, 명품, 부동산, 주식. 그런 거요. 왜 그러시는데요?

"아니야. 됐어."

부비디가 전화를 끊었다.

"누구랑 작곡 이야기를 한 거 같은데 꿈이었나 보다."

***

차우진이 이튿날 LPP 엔터 앞에서 하품을 했다.

"어제 대리기사 알바를 하느라 너무 늦게 잤다. 피곤해."

154. 기획사

차우진이 투덜댔다.

"대리기사를 뛰었는데 오히려 적자다."

어제 부비디가 부른 대리기사는 차우진이 먼저 만나서 돈을 주고 돌려보냈다. 자기가 직접 운전해준다는 핑계를 댔다.

그런 후에 부비디의 차를 차우진이 대신 운전해서 집으로 데려갔다.

집에 가는 동안 차우진은 부비디의 친구인 척했다.

술에 취해 눈도 제대로 못 뜨던 부비디는 차우진의 뒷모습만 흐릿하게 보고 친구가 운전한다고 착각했다.

차우진은 이런저런 말을 걸어 필요한 정보를 얻었다.

만취 상태인 부비디는 그 와중에도 표절 정보는 숨기려 했다. 그래도 이리저리 돌려 물어보면 단편적인 정보들은 자랑삼아 떠들었다.

차우진은 전기 전문가다. 그는 부비디를 데려다주면서 차량 블랙박스를 고장 내서 예전 기록까지 싹 다 날려버렸다. 그러면 그게 언제 고장 났는지 알 수 없다.

차우진은 집에 돌아와 그렇게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신곡의 어디를 어떻게 표절했는지 확인했다.

차우진은 대리기사에게 돈을 줘서 돌려보냈지만, 부비디는 대리비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적자였다.

정예지가 차우진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차우진이 방금 한 말을 잘못 이해했다.

"우진 오빠. 대리기사도 뛰어요?"

"어쩌다 한 번 해봤어."

"그렇게 힘들게 일하지 말고 그냥 내 매니저 하라니까?"

"포기하라니까?"

"내 매니저가 돼서 나도 가수 데뷔시켜주는 건 어때?"

"가수까지 겸업하고 싶으면 너 스스로 재능을 찾아."

"쳇."

차우진이 LPP 엔터의 회의실에서 팀장을 만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장과 담당자들까지 다섯 명이나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팀장이 당당하게 말했다.

"어제 말씀하신 거 말입니다. 저희가 알아봤습니다. 표절 아닙니다. 그걸 알려드리려고 빨리 뵙자고 했습니다."

"저런. 제대로 안 찾아보셨구나."

"담당자들이 밤새도록 조사해 확인했습니다."

회의실에는 밤샘 작업으로 피곤한 직원이 두 명이나 있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고생하셨는데, 괜히 하셨네요. 그냥 부비디한테 물어보시지."

"아니, 그러면 뒷감당이 안 되니까…."

사장이 끼어들었다.

"차우진 씨. 우리는 이만하면 성의를 보인 것 같군요."

"눈 아래에 다크서클이 내려오신 분들을 보면, 그렇긴 하네요."

"그 노래가 진짜 표절이라면, 이제 어떤 노래의 어디를 어떻게 표절했는지 알려주시죠. 이렇게 설명도 없이 우리 애들 곡 발표만 늦추면 되겠습니까?"

차우진이 어제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 몰랐기 때문이다. 그 대답은 어젯밤에 알아왔다.

차우진이 사람들을 둘러본 후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곡이 그대로 발표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려드리죠. 인기를 꽤 얻을 겁니다. 노래가 좋고, 루나페어리도 실력이 있으니까요."

사장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당연히 그럴 겁니다."

"그렇게 인기가 한창 올라갈 때 표절 사건이 터질 겁니다."

"꼭 터진다고 볼 수는 없…."

"작곡가인 부비디는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할 겁니다. 하지만 결국 표절로 밝혀지죠. 그러면 그 욕은 뒤에 숨어 있는 작곡가가 아니라, 대중에게 노출된 루나페어리가 다 먹습니다."

사장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게 되면 우리 회사에서 작곡가에게 책임을 물을 겁니다."

"그 과정이 오래 걸리겠죠. 그러는 동안 루나페어리는 망할 겁니다. 해체되겠죠. 그리고 이 회사도 뭐…. 인기 올라갔을 때 계약한 광고나 행사 위약금 물어주다 보면 문 닫겠네."

차우진이 말은 마치 그런 일을 직접 보고 온 사람의 이야기처럼 그럴듯하게 들렸다.

사장은 루나페어리가 망하고 회사도 망한다는 말에 불안해졌다.

"설마 그렇게까지 되겠습니까?"

"그렇게 될 겁니다."

지금 LPP 엔터는 여유가 있는 편은 아니다. 고점을 찍었다가 위약금 폭탄을 맞으면 회사가 날아갈 수도 있다.

"그러니까 차우진 씨의 말은, 루나페어리는 욕을 먹다가 해체되고…."

"위약금은 회사가 물어줘야겠지요. 루나페어리가 직접 표절한 게 아니라,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니까."

사장이 고민했다.

'그 손실을 작곡가한테서 도로 받아낼 수 있나?'

부비디가 그 정도로 돈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 돈을 못 받아내면 회사가 망할 수도 있다. 설사 받아낸다 해도 회사는 이미 망한 후일 수도 있다.

사장은 가슴이 답답했다. 넥타이를 조금 풀었다.

결과가 심각하긴 하지만, 차우진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다. 이 바닥에 있으면 사기꾼을 수두룩하게 본다.

사장이 말했다.

"알겠으니까, 증거를 좀 봅시다."

"증거를 보여주면, 우리 민지의 노래 음원 유통 조건이 좋아집니까?"

사장이 장담했다.

"증거가 있다면, 무료로 해드리지."

"홍보는?"

"당연히 최선을 다해서 홍보하겠습니다."

"좋군요. 루나페어리의 신곡을 다시 들려주시죠. 증거를 보여줄 테니까."

팀장이 오디오를 작동시켰다.

회의실 스피커로 신곡이 흘러나왔다.

차우진이 손을 들었다.

"정지. 거기."

차우진은 어젯밤에 가짜 대리기사로 일하면서 알아온 부분을 짚었다.

"첫 번째는 거기인데."

차우진이 스마트폰에 담아온 노래를 재생했다.

"이건 브라질에서 발표된 노래입니다. 이 부분하고 비슷하지요?"

"어? 아니, 그게…."

가사는 다른 언어인데 멜로디가 비슷했다.

"한 번으로는 부족하신가? 노래 계속 들려주시죠."

일시 정지된 노래가 다시 재생됐다. 좀 더 듣다가 차우진이 말했다.

"여기 이 부분도. 이건 스페인 노래입니다."

차우진이 이번에는 다른 노래를 들려주었다. 가사가 스페인어였다.

"아…."

"하나 더 있는데, 좀 더 들어봅시다."

차우진이 세 번째 부분까지 짚어준 후에 추가로 설명했다.

"모두 세 곡에서 핵심 멜로디를 떼어다 썼습니다."

"그, 그거 혹시 우연히…."

"하나라면 몰라도 셋이면 우연이 아니지요. 그리고 그 뼈대가 된 건 이 노래인데."

차우진이 스마트폰에 담아온 다른 노래를 들려주었다.

"멜로디는 다른 곳에서 가져왔으니 당연히 이 노래와는 다릅니다. 하지만 곡의 진행이 똑같습니다."

어제 부비디가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했을 때, 차우진이 친구인 척하면서 어디를 어떻게 참고했는지 물었다. 그렇게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밤새 분석했다.

그가 부비디에게 들은 건 여기까지다. 부비디가 말하지 않은 부분이 더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 정도면 충분했다. 지금 이 회의실에는 대중가요 전문가들이 있다.

팀장이 말했다.

"이 정도면 대놓고 짜깁기를 한 건데…."

사장도 그걸 알았다. 그가 차우진에게 물었다.

"워낙 잘 숨겨놔서 찾아내기 어려웠을 텐데 이걸 어떻게 한 번 듣자마자…."

어제 차우진은 연습실에서 이 노래를 딱 한 번 듣고 나서 표절이라고 선언했다.

'창수 형이 알려줬지.'

그렇게 설명할 수는 없다. 차우진이 둘러댔다.

"소리가 들리더군요."

"아…."

사장은 이제 회사가 망할 수도 있다는 경고가 현실로 느껴졌다.

차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알려줄 건 여기까지군요. 나머지는 직접 해결하시죠."

차우진이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정예지도 따라 나왔다.

그녀가 호들갑을 떨었다.

"와. 우진 오빠 쩔어. 그걸 어떻게 다 알았대?"

"마침 내가 아는 노래들이라서 우연히 안 것뿐이야."

"이게 우연히 가능한 일인가?"

"우연히 되더라고."

회의실 안에서 사장이 화를 내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떻게 이걸 못 골라내!"

"그 작곡가 섭외한 거 누구냐? 뭐 받아먹었어?"

"표절한 거 있는지 찾아보라고 했더니, 왜 못 찾은 거야! 딱 한 번 듣고 찾아낸 사람도 있는데!"

"사장님. 그래도 신곡으로 발표하기 전에 찾아냈으니까, 피해는 없…."

"에라이! 회사가 망할 뻔했잖아! 내가 길바닥에 나앉을 뻔했다고!"

차우진이 옆을 보았다.

김세린과 동료 아이돌 세 명도 회의실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다들 표정이 안 좋았다. 울먹이는 멤버도 있었다.

차우진이 김세린에게 말했다.

"신곡이 날아간 건 슬프겠지만, 이걸로 망할 위기는 벗어났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회사에서 다른 좋은 곡을 구해오겠지. 루나페어리는 실력 좋잖아."

"저희가 실력이 좋아요?"

"노래랑 춤 다 잘하더라. 좋은 곡만 받으면 금방 뜰 거야. 그러니까 이 상황은."

차우진이 위로했다.

"그냥 신곡 발표가 한두 달쯤 늦어진 것뿐이야. 그것 말고는 바뀐 거 없다."

네 명의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그들이 생각하는 차우진은 대중음악 전문가다.

'드라마 OST의 프로듀서.'

'우리 노래를 딱 한 번 듣고 어디를 어떻게 표절했는지 다 찾아낸 고수.'

'그런 분이 우리 실력이 좋다고 말씀하셨어.'

'정말 좋은 곡만 받으면 뜰 수 있을까?'

김세린이 대표로 물었다.

"정말 그럴까요?"

"당연히 그렇게 돼야지."

***

차우진은 LPP 엔터를 나왔다. 정예지가 말했다.

"밥 먹으러 가요. 내가 쏜다."

"다른 꿍꿍이가 있으면 내가 쏠 거다."

"쳇. 눈치챘구나. 음악에 관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지."

LPP 엔터에서는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 허세를 부린 것뿐이다. 진지한 이야기를 할 만큼 알지 못한다.

"밥은 내가 쏜다."

"뭐 먹을 건데요?"

"국밥?"

"오늘은 다른 것 좀 먹자!"

***

차우진이 정예지와 밥을 먹고 차도 마신 후에 그녀를 보냈다.

그런 후에 SL 제약 사장의 딸인 분석팀 성혜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사 법무팀에서 외부 개인 계약서를 봐줄 수 있습니까?"

- 그냥은 안 되지만 제가 거기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사바사바 하면 되죠. 제가 여러 부서를 돌아다녔잖아요.

"가수 기획사에 노래를 하나 팔아달라고 맡기는 계약서인데, 사바사바로 되려나?"

- 네?

"아는 애가 부른 노래를 디지털 음원으로 내려고요."

성혜리가 슬쩍 물었다.

- 혹시 여자 연예인….

"단역인 데다가, 본인은 아직 연예인이라는 자각은 없는데."

- 예뻐요? 막 섹시하고 그래요?

"고딩이니까 귀엽다고 하는 게 맞을 텐데."

성혜리의 목소리가 확 밝아졌다.

- 앗! 고딩이구나! 제가 해결할게요! 저만 믿으세요!

***

딥어스테크는 광고를 할 일이 딱히 없지만, 제약회사인 SL 제약은 가끔 CF를 제작해서 방송에 내보낸다.

그래서 SL 제약 법무팀은 음원 관련 계약에 관한 경험이 충분히 있었다.

법무팀 대리 윤병수가 인사했다.

"차 이사님. 이렇게 직접 뵙게 되니까 너무 좋습니다."

"나를? 회사에서 나에 대해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텐데."

"공장 테러 미수 사건 때, 제가 법무팀 현장 담당자였습니다."

"아. 그때…."

사장 아들 성준혁이 휘말린 SL 제약 공장 폭파 미수 사건은 차우진 덕분에 터지기 전에 발각됐다.

그때 차우진은 무선 기폭장치를 가진 범인들의 차를 트럭으로 들이받았다. 그런데 외부에는 그 트럭을 보안팀장이 운전한 것으로 발표됐다.

그로 인해 생긴 법적인 문제는 회사가 맡아서 해결했다. 당연히 법무팀이 움직여야 했다.

성혜리가 자랑했다.

"제가 일부러 믿을만한 사람에게 부탁했어요. 윤 대리가 입도 무겁고 일도 잘해요."

윤병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차 이사님. 혹시 분석팀에 자리가 있으면 저도…."

"그러면 일만 많아지는데 굳이?"

"굉장히 재미있다고 들었습니다. 직장생활이 스릴 넘친다고…."

"지금은 분석팀에 법무 쪽은 자리가 없어서."

"아! 나중에 자리 생기면 저도 꼭 지원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지금 잘 보여야 한다.

윤병수가 계약서를 꺼냈다.

"표준으로 가시려면 이 계약서를 쓰시면 되고요."

그가 다른 계약서도 꺼냈다.

"성 대리에게 들은 것처럼 대놓고 유리하게 가려면 이쪽 계약서를 들이밀면 됩니다."

"이 조건이면 얼마나 좋은 겁니까?"

윤병수가 장담했다.

"이건 칼자루를 차 이사님이 쥐는 겁니다. 수익 배분도 일방적이고, 언제든지 계약을 끝낼 수도 있습니다."

"민지가 아직 고등학생이라서 내가 대행하는 거지, 내 계약은 아닙니다."

"하하하. 그 학생은 좋겠습니다."

계약서를 받아서 나오는 길에 성혜리가 질문했다.

"그런데 차 이사님은 그 학생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딥어스테크 개발 2팀 곽수혁 팀장님 딸입니다."

성혜리는 당황했다.

"아니, 그럼 왜 우리 회사에…. 딥어스테크 법무팀한테 물어보시지."

"이런 건 SL 제약이, 그중에서도 홍보팀과 법무팀을 다 경험한 성혜리 씨가 잘 알 거 같아서."

"그건 맞아요. 전 CF 기획 경험도 있으니까요."

"역시 유능하네."

"어머!"

성혜리가 소리 내어 웃으며 큰소리쳤다.

"오호호호! 다음에도 이런 일 있으면 저한테 말하세요. 제가 깔끔하게 처리해줄 테니까요."

155. 쿠에르노 인더스트리

차우진이 곽민지를 데리고 LPP 엔터를 방문했다. 오늘은 곽민지의 아버지인 곽수혁 팀장도 같이 움직였다.

회의실에서 사장이 담당 팀장과 함께 차우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LPP 엔터는 중소 기획사라서 가수나 배우의 계약을 사장이 직접 챙기는 일은 흔했다.

다만 이번처럼 곡 하나의 유통만 맡기는 경우는 굳이 사장이 나오진 않는다.

사장이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그 노래가 표절인 줄 모르고 그대로 발표했으면 우리 애들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사장님도 큰일 나셨을 거라니까요."

"그, 그렇죠. 하, 하하."

사장이 팀장에게 물었다.

"계약서 가져왔지?"

"예. 여기 있습니다."

사장이 계약서를 보여주며 말했다.

"곽민지 양의 노래는 저희가 좋은 조건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여기 사인만 하시면 됩니다."

차우진이 그 계약서를 훑어본 후에 말했다.

"LPP 엔터의 표준 계약서겠군요."

"표준보다 좋은 조건으로 바꾸었습니다."

"약속한 것보다는 못합니다만?"

"그렇지만 이 정도면 신인에게는 최고의 조건…."

"그래서 저도 계약서를 가져왔는데."

"예?"

차우진이 SL 제약 법무팀 윤병수 대리를 통해 입수한 계약서를 꺼냈다.

"이것도 업계 표준 방식이라 LPP 엔터 계약서와 기본 구성은 비슷한데, 디테일이 좀 다릅니다."

"어. 잠시만요. 좀 보겠습니다."

사장이 계약서를 확인한 후에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저기, 이건 조건이 너무…."

"우리에게 유리하죠."

"그 정도가 아니잖습니까? 이러면 우리는 남는 게 없습니다."

"'무지개 고백'을 무료로 유통해주시겠다더니?"

사장은 루나페어리의 신곡이 표절이라는 증거를 보여주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차우진은 이미 증거를 보여주었다.

"그, 그렇죠. 유통은 약속대로 무료로 진행하지만, 홍보나 그런 비용은…."

"홍보비는 정확히 계산해서 정산해드리죠. 영수증 복사본이라도 첨부하시면요. 물론 노래가 팔려야 정산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안 팔리면…."

"회사가 손해 보겠군요."

"예?"

차우진이 손가락을 하나 세워 흔들었다.

"어차피 음원 하나만 유통을 맡기는 계약서입니다만? 손해가 나 봐야 얼마나 나겠습니까?"

"아니, 그게…. 그리고 홍보비 외에도 비용이…."

"그걸 무료로 해주시기로 하셨죠."

"그, 그렇죠. 그렇지만!"

사장이 계약서의 한 부분을 짚었다.

"여기 이 부분도 문제입니다. 계약 파기가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조건은 좀 너무합니다."

차우진이 사장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루나페어리가 큰일 날 뻔했지요?"

"그, 그렇죠."

"사장님도 망할 뻔한 것도 아시고요."

"그렇…."

"그럼 이 정도는 해주셔야지요."

사장은 초조해졌다.

'무지개 고백'이 그냥 흔한 아마추어의 노래였다면 사장이 이렇게 협상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안 팔릴 노래라면 공짜로도 유통해줄 수 있다. 그런 경우라면 홍보도 대충 하면 된다.

사장이 생각했다.

'잘 팔릴 거 같단 말이야.'

현재 LPP 엔터의 상황은 여유가 있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무지개 고백'을 유통할 때 적당히 수익을 챙기는 계약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차우진이 가져온 계약서는 칼자루를 잡고 대놓고 휘두르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이 계약을 거절할 수도 없다. 매출이 잘 나오는 노래를 유통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익이 생긴다.

게다가 LPP 엔터는 차우진에게 신세를 크게 졌다. 하마터면 겨우 데뷔한 루나페어리가 해체되고 회사도 망할 뻔했다.

사장이 결국 항복했다.

"알겠습니다. 이 건은 제시하신 계약서대로 진행하겠습니다."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사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저기, 곽민지 양."

"네?"

"루나페어리가 발표할 신곡이 없어졌는데…."

곽민지도 걱정했다.

"저도 알아요. 이제 어떡해요?"

"곽민지 양이 곡을 만들어주면 정말 고마울 텐데…."

"네?"

"우리 애들이 지금 실망해서 축 처져 있는데, 너무 안쓰러워서. 민지 양이 '무지개 고백' 같은 노래 하나만 주면, 우리 애들이 진짜 좋아할 텐데…."

곽민지는 당황했다.

"그러니까 제가 작곡을 하라는 말씀이세요?"

"그렇지!"

"저는 작곡할 줄 모르는데요?"

사장은 당황했다.

"으응? 아니, 그럼 '무지개 고백'은 어떻게…."

"그거 아저씨가 다 하신 건데."

"어?"

차우진이 얼른 말했다.

"멜로디는 네가 만들었어. 가사도 네가 만들었고."

그 노래는 멸망한 세계의 민지가 만들었다. 지금 곽민지도 그 노래에 들어가는 멜로디와 가사를 만들긴 했다.

"그렇긴 하죠. 그치만 그렇게 되게 해준 건 아저씨잖아요. 기획부터 편곡에 녹음까지 아저씨가 다 하셨는데…."

사장이 차우진을 돌아보았다.

"차우진 씨. 그럼 우리 애들 신곡을 부탁…."

"작곡은 민지가 했습니다."

"곽민지 양?"

"도와드리고 싶어도 저는 할 줄을 모르는데요?"

***

계약은 차우진이 가져온 계약서대로 진행됐다.

LPP 엔터에서 나온 후에 곽수혁 팀장이 물었다.

"차 이사님. 음반 제작에도 조예가 있으십니까?"

"아니요. 편곡이나 녹음도 다 사람 써서 했습니다."

"민지 말은 다르던데요."

"민지가 경험이 없어서 모르는 겁니다. 원래 다 그렇게 합니다."

"아닐 텐데…."

그들은 밥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곽민지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차우진이 말했다.

"네가 먹을 걸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다니. 이런 모습 처음인데?"

곽민지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니, 그게요. 도와주고는 싶은데 도와줄 방법이 없어서요."

"곡 만들어달라는 것 때문에?"

"네. 아까 세린이 언니 잠깐 봤는데, 기운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곤란해지긴 했겠지. 지금쯤 좋은 곡 하나 발표하면 딱 좋은데."

곽민지가 물었다.

"아저씨가 그 곡을 만들어주면 안 돼요?"

"도와주고 싶으면 네가 만들어야지?"

"제가 학교에서 피아노 치면서 해봤거든요? 안 되던데요?"

"음…. 아직 너한테는 이른가?"

멸망 초기의 민지는 싱어송라이터로 좋은 노래를 여러 개 만들었다. 그러니 곽민지에게 타고난 재능은 있다고 봐야 한다.

차우진이 말했다.

"하긴. 맨땅에 헤딩하는 게 어렵긴 하지."

"이마만 까지게 생겼다니까요?"

"정말 곡을 주고 싶냐?"

"넹. 세린이 언니가 기운이 났으면 좋겠어요."

"음…."

차우진은 김세린의 고향인 신당읍을 조사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 그냥 찾아가는 건 곤란하다. 경찰 수사가 끝났어도 외지인이 나타나 돌아다니면 의심을 살 수 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곳에 갈 명분을 만들어야 한다. 명분 중에 제일 좋은 건 신당읍 주민의 자연스러운 초대다.

그 동네 유지인 김기환과 친분이 있으면 정보 수집을 할 때도 좋다.

김기환의 딸인 김세린에게 도움을 더 주면 그 모든 일이 편해진다.

김세린을 도와줄 이유는 또 있다.

'세나한테 얻어먹은 치킨값은 해야지.'

멸망한 세계의 김세나는 차우진과 박창수에게 가끔 치킨을 나눠주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치킨을 얻어먹는다는 건 정말 큰 신세를 지는 일이다.

"그래. 곡 하나 더 만들자."

"앗! 진짜요?"

"이번에도 네가 만든 노래인데, 그걸 줘도 되겠어? 그것부터 확실히 하자."

"만들 수만 있다면요. 저 혼자서는 안되더라니까요?"

"어차피 네 노래인데, 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면야 뭐."

차우진이 곽민지의 노래를 다 아는 건 아니다.

박창수 덕분에 민지의 노래를 들을 기회는 많았다. 그렇지만 기억에 확실히 남아 있는 건 자주 들어본 히트곡 위주다.

게다가 이건 곽민지가 아니라 4인조 걸그룹이 불러야 하는 노래다.

'그런 게 있긴 있지.'

민지가 만든 노래가 모두 본인에게 맞는 건 아니었다. 멸망한 세계의 민지는 그런 곡은 다른 가수에게 주었다.

차우진은 멸망한 세계에서 자주 듣던 노래 하나를 떠올렸다. 그 노래도 4인조 걸그룹이 불렀다.

***

박창수가 스피커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말했다.

"크으. 민지는 이렇게 신나는 노래도 만들 줄 안다니까."

"이 밝고 신나는 노래를 민지가 작곡했다고?"

"그렇다니까."

"걸그룹 노래도 잘 만드는구나. 노래 좋은데 직접 부르지 왜 남을 줬대?"

"민지가 부르기엔 좀 안 맞으니까 다른 가수에게 넘긴 거지."

"만들 수 있으면 부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어허. 네가 민지에 대해 뭘 알아?"

"마그마 탐지기를 멸망 10년 전에 개발할 뻔했던 프로젝트의 팀장 딸이라는 거? 그 팀이 화재 사고로 다 죽어버려서 탐지기 개발이 중단됐다는 건 알지."

"그거 말고. 가수 민지를 네가 얼마나 아느냐고. 난 많이 안다."

***

곽민지가 활짝 웃었다.

"앗! 진짜요? 아싸아! 지금 세린이 언니한테 연락해도 돼요?"

차우진이 말렸다.

"아니. 지금은 안돼. 미리 말했다가 네가 곡 만드는 데 실패하면 실망할 거야. 그러니까 작곡에 성공하면 그때 연락해."

"넹!"

곽민지가 신나서 볼이 빵빵해질 때까지 탕수육을 입에 넣었다.

"여기 너무 맛있다!"

"야. 튄다. 먹고 말해."

"넹! 짜장면도 시켜주세요!"

"먹고 말하라고."

차우진이 곽민지가 먹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창수 형. 형도 모르는 거 같아. 민지가 형이 생각하던 거랑 많이 달라.'

***

딥어스테크 조사팀이 신당읍 관련 조사 결과를 차우진에게 보고했다.

"개발 호재에 관한 소문은, 최근에 그곳에서 강제로 땅을 매수하려던 조직 때문에 생긴 헛소문으로 추정됩니다."

"실망하는 분이 많겠네요."

***

SL 제약은 차우진이 알아보라고 한 유럽 회사 목록을 가져왔다.

성혜리가 설명했다.

"유럽 화학 회사 중에 농약이나 비료 관련 업체 명단을 먼저 뽑았어요. 그중에서 국내에 진출했거나, 하려는 기업들만 다시 정리했어요."

차우진이 화면에 떠 있는 보고서를 빠르게 넘겼다. 페이지가 1초에 한 장씩 넘어갔다. 요약된 자료인데도 분량이 꽤 많았다.

전투 센스로 강화되는 감각 중에는 동체 시력도 있다. 차우진은 눈이 빨라서 날아오는 칼날도 보고 피하거나 쳐낸다.

그런 시력이 있다고 해서 속독이 저절로 되는 건 아니다. 하려면 할 수는 있지만 피곤해진다.

대신에, 빠르게 넘어가는 화면에서 미리 알고 있는 특정 글자를 찾는 건 쉬웠다. 전체를 다 읽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단어만 찾아내는 것이라 피곤하지도 않았다.

중간에 그가 아는 이름이 나왔다. 그렇지만 화면을 멈추지 않고 끝까지 보고서를 넘겼다. 팀원들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차우진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확인한 후에 보고서의 중간으로 돌아갔다.

"이 회사는?"

"새로 진출한다는 소문이 도는 곳들이에요. 그중에서도 국내 기업과 제휴하는 형식으로 진출하려는 곳이죠."

그런 회사는 다섯 곳이었다. 차우진이 찾은 건 그중 한 회사였다.

"쿠에르노 인더스트리."

차우진이 보고 있는 화면에는 쿠에르노의 현황과 국내 진출 계획이 한 페이지에 요약되어 있었다.

성혜리가 설명했다.

"그 회사는 국내 진출 소문은 도는데, 확실한 건 아니에요."

"여기가 제일 의심스럽습니다."

"네?"

"직접 진출하지 않아도 국내 업체를 통하면 사전 작업은 할 수 있으니까요."

"아니, 잠깐만요. 보고서를 다 보신 거예요?"

"대충?"

"방금 보신 것만으로 그 회사를 찾으신 거고요?"

"제일 수상하니까."

성혜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 게… 왜 돼요?"

쿠에르노 인더스트리의 이름을 알기 때문에 찾을 수 있었다.

'쿠에르노.'

차우진은 멸망 초기에 쿠에르노에 관한 기사를 여러 번 보았다. 대부분이 비난하고 욕하는 기사였다.

박창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

"쿠에르노에서 개발한 액체 비료 첨가제 덕분에 농업혁명이 일어날 줄 알았지."

차우진이 물었다.

"효과는 좋았다며?"

"좋았지. 그걸 쓰면 생산량이 확실히 늘었거든. 투입한 비용에 비해 결과가 너무 좋으니까 다들 쓰고 싶어 했지. 멸망 직전에는 전 세계적으로 사용했어."

"그러다 망했고?"

"망했지. 그걸 쓴 곳은 멸망 초기에 식량 생산량이 박살 났으니까."

차우진이 불평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도 이렇게 배가 고프구나."

156. 당일치기

차우진이 물었다.

"창수 형. 쿠에르노 인더스트리는 그 첨가제가 농업을 망칠 줄 알면서 팔아먹은 건가?"

박창수가 대답했다.

"그놈들이야 당연히 예상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지."

"진상 조사는?"

"그때는 그것까지 조사할 여력이 없었어. 이미 다른 재난들이 연달아 터졌으니까."

"하긴."

"멸망 초기에는 여러 이유로 농사짓기 힘들었는데, 쿠에르노 때문에 식량 생산량이 더 박살 났지."

그 여파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인구가 너무 많이 줄어들어 땅은 남아돌지만, 식량은 여전히 부족했다.

박창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너무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어."

"우리나라에는 그 일을 책임져야 하는 곳이 있나?"

"국내에 쿠에르노의 협력업체가 있었다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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