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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

맑은 검명.

그러나 엉거주춤한 자세.

태어나서 몽둥이는 많이 휘둘렀지만 검은 처음 들어본다.

단검파 보스가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푸하하! 그것도 검이라고 드는 거냐? 지금이라도 항복하지 그러냐? 내 자비를 베풀어 팔 하나만 자르고 보내주마."

웃고는 있으나 눈은 차갑다.

살기가 뚝뚝 흘러내린다.

조금이라도 허점을 노출하면 바로 달려들 태세.

차오르는 긴장감 속에서, 나는 조용히 특성을 바꿨다.

[파산검법][강타][연격]

[마력심][근력][맷집]

'단숨에 끝낸다.'

단 한 번의 공방.

그 결과가 생사를 가를 것이다.

나도 단검파 보스도 서로를 노려보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식은땀이 주룩주룩 났다.

이명은 더욱 심해지고 세상이 물결치듯 흔들거렸다.

그래도 버텼다.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견뎌냈다.

원래 세계의 나였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

이 괴상한 세상에 떨어지면서 겪은 경험이, 그 무수한 위기가, 날 담금질한 사건들이 내가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타앙······ 타앙······

멀리서 총소리가 들린다.

치직! 치직!

단검파 보스가 낀 이어폰에서 살짝 소음이 울린 것 같다.

무슨 말을 들은 걸까?

얼굴이 흉악하게 변하더니 두 눈에 섬광이 번뜩였다.

내 본능이 맹렬한 경고를 토했다.

지금이다!

인내심 싸움에서 패한 것은 단검파 보스였다.

탓, 하고 가볍게 땅을 딛고는 내게 쇄도해 온다.

암살자답게 빠른 속도.

그러나 틀린 선택이었다.

나를 마력 방어막을 가진 총잡이라고, 방어막을 만들 마력도 소진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겠지만 전제조건부터가 완벽히 빗나갔다.

10분 전의 나는 총잡이였을지 몰라도 지금의 나는 총잡이가 아니다.

전사다.

검법을 익히고 강타와 연격으로 무장한 정통 전사!

"하!"

나도 땅을 박찬다.

모든 마력을 검에 주입한다.

머릿속에서 일렁이는 환상, 근엄한 얼굴을 한 남자가 그리는 궤적 그대로.

동시에 강타와 연격 발동.

무모한 기술이었다.

참으로 우악스럽고 미련한 기법이기도 했다.

사실 기술이라고도 기법이라고도 부르기에 부끄러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우격다짐에 불과한 행동.

그러나 효과만큼은 무시무시했다.

강타로 강력한 힘이 부여되고, 연격으로 파산검법 투로가 연거푸 실행된다.

가장 단순하고 우직하되 파괴적인 파산검법 제 1식.

산 무너뜨리기.

수직 내리긋기가 기관총 쏘아대듯 쏟아져 내렸다!

"허어억!"

초보자라면 도저히 불가능할 일격.

2레벨 초인으로도 불가능한 연속 공격.

3레벨 정통 전사나 무사 정도는 되어야 날릴 맹격.

단검파 보스가 경악하는 것이 보인다.

눈에 불이 켜지는 것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달콤하도록 내 뇌리에 박혀든다.

이어 최후를 직감한 듯 결연해지는 표정.

"죽어!"

상처 입은 호랑이처럼 포효하며 몸을 우겨 넣는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공격 아래로.

단검파 보스가 마지막 발악을 한다.

크게 떨치는 손.

그 끝을 떠난 단검이 녹색 빛과 함께 내게 날아든다.

튕겨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 실력으로는 검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하니까. 그저 정해진 투로 대로, 강타와 연격 기술을 부여한 채로 허수아비처럼 내리찍었을 뿐이다.

"으하악!"

"커헉!"

비명과 신음이 교차한다.

목덜미와 가슴, 왼쪽 팔에 검상을 입은 단검파 보스가 길게 피를 뿌렸다.

척 보기에도 치명상.

분수처럼 치솟은 피를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머리를 떨어뜨린다.

나라고 멀쩡하진 않았다.

마지막 발악으로 날아온 단검이 아랫배에 꽂혔다.

권총탄 정도는 충분히 막아내는 방호복이지만 마력을 담아 던진 단검은 이토록 강력했다.

평범한 단검도 아니고 마법 단검이었으니 더더욱.

"제기랄······"

이건 약과다.

정말로 치명적인 것은 마력 고갈.

정신을 잃을 것만 같다.

혈맥 내부가 따끔거리다 못해 찢어진 듯한 느낌.

팔다리에서 힘이 빠져 저절로 바닥을 나뒹굴게 된다.

심지어 독에 중독되기까지 했다. 호흡근이 마비되고, 심장이 차츰 느리게 뛰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었다.

원래는 여기서 치유 물약과 마력 물약, 정화 물약을 모두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 그만큼 내 부상이 크고 마력 고갈과 중독 역시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내겐 개사기 능력이 있지.

[마력심][심호흡][마력 회복]

[상처 회복][재생][활기]

모든 특성을 회복 관련한 특성으로 교체한다.

놀랍도록 몸이 안정되면서 마력이 아주 조금씩 차올랐다.

아직 아프고 아직 힘들지만 견딜 수 있을 만큼.

"후, 살았다."

격전의 끝.

몇 가지 기묘한 감각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널브러진 시체들을 보니 저런 것들이 떼로 몰려와도 다 죽여버릴 수 있을 것만 같고, 바닥에 내팽개쳤던 산탄총을 집자 마치 내 몸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위압] 특성과 [총격술] 특성.

약한 적을 확률적으로 공포에 질리게 하는 위압.

근접전과 백병전에서 작용하는 총격술.

둘 다 좋은 특성이다.

오늘처럼 갱단 쓸어버릴 때 특히.

"하아, 후아아."

기둥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이대로 쉬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타앙! 타앙! 탕탕탕!

[큰형님! 으아악! 큰형님! 어디 계십니까!]

[안 돼! 전동이 형님이!]

[히에에엑!]

[철권파 놈들이 몰려옵니다!]

[살려주십쇼! 끄으윽!]

멀리서 울리던 총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절명한 단검파 보스가 낀 이어폰을 들어보니 비명과 신음이 난무했다.

내 연락을 무시하지 않고 배팅한 모양이었다.

"끙!"

산탄총 대신 소총을 꺼내고, 소총을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철권파와 마주치기 전에 일을 끝내 놓아야 한다.

먼저 단검파 보스의 시체에서 챙길 걸 챙겼다.

단검 두 자루, 검은 코트 한 벌.

그리고 오른쪽 검지와 왼쪽 눈알.

"으, 토 쏠려."

영화에서나 보던 짓을 하게 될 줄이야.

어기적 어기적 기다시피 걸어서 5층으로 올라간다.

게임에서, 김철권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개인 퀘스트에서 단검파는 김철권의 친동생을 납치하고 협박한다.

납치된 동생은 대표 사무실에 설치된 밀실에 감금되어 있었지.

여기서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여기구나."

나는 대표 사무실 한쪽에 설치된 책장을 유심히 살폈다.

한 번도 읽지 않았을 양장 전공 서적들로 도배된 책장.

게임에서는 책장에 단검파 보스의 손가락과 눈을 한 번씩 사용하면 그만이지만 여기서도 그럴 리는 없다.

한참 뒤진 끝에 유독 반질거리는 지점을 하나 찾았다.

기이잉.

거기 손가락을 대자 책장 한쪽이 열리며 인식 장치가 나타난다.

눈알을 대주자 인식 완료.

잠금장치가 풀리면서 책장이 벽면과 함께 통째로 회전했다.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다섯 평 남짓한 비밀 공간과 손발이 묶이고 재갈이 물린 채로 버둥거리는 한 중년 남자였다.

"우읍! 우으읍!"

날 보자 발광하는 중년 남자, 최 소장.

나는 한숨을 쉬고는 결박을 풀어주었다.

"도대체 어쩌다 잡힌 겁니까?"

"그, 그게 말입니다······"

최 소장이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알 만하다. 당황스럽겠지.

1레벨이 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은 나.

아무리 단검파가 작은 갱단이라고 해도 1레벨 초인이 어쩌기는 어렵다.

혼자서 다 죽여버리려고 하면 3레벨 초인이어야 하고, 3레벨 초인도 중무장해야 한다는 게 이 세상의 상식.

"일단 가죠."

이런저런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툭 하고 고갯짓을 했다.

"예, 가지요. 가야지요."

최 소장이 일어서려고 했으나 다리가 꺾이고 만다.

파르르 떨리는 다리에 상처가 가득했다.

온통 짓무르고 까맣게 죽어버린 상처.

단검파 놈들이 칼로 좀 쑤신 게 아니라, 아예 불로 지져버린 모양이다.

"죄, 죄송합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괜찮습니다. 저한테 업히세요."

"네? 아니,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초인님께 폐를 끼칠 수야 없지요!"

"괜찮다니까요. 먼저 피하고 봅시다."

최 소장은 내게 의리를 지켰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

내가 봤던 최 소장이라면 고문을 당하자마자, 아니 단검을 불에 지져서 보여주자마자 나에 대한 정보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불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그런데 이런 참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날 유인하는 대신 대각선 드립으로 위험을 알려주었다.

당연히 내가 배려해줘야지.

'치유 물약이 있으면 좋은데.'

비밀 금고가 있을 방향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긴 생체 정보로 못 연다.

전자 잠금이랑 마법 잠금이 되어 있어서 [해킹] 특성과 [마법] 특성이 필요했다.

게임에서는 김철권과 김마법으로 풀 수 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까.

'너 가져라.'

김철권을 향해 생각했다.

어차피 저기 든 건 현금과 부동산, 단검파의 사업 장부들. 그 외에는 치유 물약 등 소소한 소모품이 있을 뿐이다.

철권파 보스 김철권이야 환장을 하겠으나 내게는 아무래도 좋다고.

최 소장을 업고 단검파 본거지를 빠져나왔다.

타타타탕!

퉁! 투우웅, 쾅!

총성과 폭발음이 지척에서 들렸다.

최대한 멀리 피해서 인력사무소로 돌아갔다.

불이 꺼져 있다.

집중과 민감 특성을 장착하고 안쪽을 살폈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쿨럭, 크흐음!"

내 등에 업힌 채 자기 강철 뺨을 만지작거리는 최 소장.

그냥 의체가 아니었나 보다.

유리창에 비친, 진짜 눈인 줄 알았던 최 소장의 한쪽 눈에 녹색 글자가 빠르게 떠오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안에 아무도 없어요."

"아까는 몇 명 있었는데요?"

"흐흐흐. 자기 아지트가 털렸는데 여기 있겠습니까? 다 돌아갔거나 도망쳤거나 했겠죠. 크크크, 꼴 좋다! 시발새끼들! 이주희, 그 썅년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최 소장이 울고 웃더니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이주희?"

"예. 카운터 보던 그년이요. 시발년, 엿 같은 년······ 정말 다 줬었는데······"

알고 보니 둘이 그렇고 그런 관계였던 모양.

남의 연애사에는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오늘만큼은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사람 믿은 놈이 병신이지요."

"크, 초인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도 모르게 무뎌졌나 봅니다. 이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사람을 믿다니, 인간을 믿다니, 정말로 멍청한 짓이었지요."

최 소장도 닳고 닳은 인물.

눈물 한 방울 흘리고, 자기 뺨을 한 번 갈긴 다음에는 놀랍도록 명철해져 있었다.

인력사무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모든 잠금장치와 보안 장치를 가동한 후, 자기 여자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밀실에 불을 켜고 둘이 앉았다.

최 소장이 비밀 금고에서 치유 물약을 꺼내 자기 상처에 뿌리고 마신 후, 내게 새 치유 물약과 마력 물약, 심지어 하급 성수까지 하나 따서 건넸다.

"초인님. 쭉 들이키십쇼."

약 세 병을 차례로 들이켰다.

전신에 뜨거운 기운이 돌고, 마력이 차오르며, 뱃속에서는 상쾌한 감각이 번졌다.

동시에 나를 괴롭히던 중독이 해소되고 새로운 특성이 선물처럼 다가왔다.

[독 저항]

고생은 했지만 성과도 많았다.

이건 뭐 거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 수준.

"그런데······ 초인님."

완전히 회복된 나를 보며, 최 소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넥타르를 드신 겁니까?"

아.

흑염을 꺼놓고 있었구나.

어쩔 수 없었다.

흑염을 끼울 특성 칸 하나마저도 아까웠으니까.

부상과 마력 고갈, 중독 삼중고를 견디려면 모든 특성 칸을 회복 계열 특성으로 채워야만 했다.

"예."

감추기에는 늦었다.

나는 느릿느릿 머리를 끄덕였다.

"안 마셨으면 소장님을 구할 수 없었을 겁니다."

최 소장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 그럴 수가! 저 때문에, 저 때문에 그 귀한 넥타르를!"

사실은 그게 아니지만 그런 걸로 치도록 하자.

나는 목소리를 낮춰 다짐하듯이 말했다.

"넥타르 마신 건 비밀입니다. 애초에 전 넥타르를 구한 적이 없는 거예요. 아셨죠?"

"하, 하지만 신열 때문에 금방 들통날 겁니다."

"안 그럴걸요?"

히죽, 웃으며 특성을 교체했다.

유일하게 교체한 특성 하나.

[흑염]

내 손끝에서, 눈썹에서, 등줄기와 무릎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난다.

마력 방어막으로 밀어낸 신열 디버프와 꼭 닮은 불길.

도깨비불처럼 너울너울 내 주위에서 타오르자, 최 소장이 넋 놓고는 나와 검은 불꽃을 응시했다.

"흑염······"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가능하겠지요?"

영원히 숨길 수는 없어도 한두 달은 되겠지.

최 소장이 고장난 인형처럼 고개를 퍼덕거렸다.

"그럼요! 당연히 되지요! 되고 말고요! "

"비밀은 반드시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당연한 말씀을! 초인님께서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초인님을 배신하면 그야말로 개새끼 중의 개새끼지요! 제가 죽는 한이 있어도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믿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로 믿지는 않았다.

내가 말했지.

사람은, 인간은 믿는 거 아니라고.

그래도 궁금하기는 하다.

어째서 내게 의리를 지킨 걸까? 도저히 그럴 위인으로는 안 보이는데?

"소장님.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뭐든 말씀만 하십쇼."

"기분 나빠하시지 말고 들으세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문자 봤을 때, 솔직히 좀 의외였습니다."

최 소장은 바로 내 말뜻을 알아들었다.

"제가 초인님을 배신하지 않아서요?"

"예. 사실, 소장님 첫인상은 썩 좋지 않았거든요."

"그건 저도 인정합니다. 제가 믿음직스러운 인간은 아니죠. 솔직히 인부들 뜯어먹으면서 사는 밑바닥 인생한테 무슨 믿음이 가겠습니까? 하지만 초인님,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최 소장이 눈에 힘을 준다.

나를 똑바로 보면서 진중한 목소리로 말한다.

"초인님을 배신하고 단검파한테 초인님을 넘긴다고 해서 제가 살 수 있었을까요?"

"아니죠."

"예. 단검파 놈들은 분명히 절 죽였을 겁니다. 그래서 초인님께 배팅한 겁니다. 초인님은, 서우진을 치료한 초인님은 평범한 분이 아니니까요. 제가 살길은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멀거니 최 소장을 쳐다보았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거기까지 계산했다고?

"어?"

뭐라고 감상을 토하기도 전, 최 소장이 움찔 놀랐다.

자기 강철 뺨을 조작하더니 급히 CCTV 모니터를 켠다.

모니터 안.

총과 폭탄으로 무장한 덩치들이 보였다.

쾅쾅쾅!

그중 하나가 인력사무소 철문을 두드리는 것도.

"초인님, 어, 어쩌죠?"

무게 잡던 모습이 무색하게 벌벌 떠는 최 소장.

반면 나는 침착하기만 했다.

한 발짝 물러나서 뒷짐을 서고 서 있는 한 남자.

그 정체를 알아보았으니까.

단검파 -3-

김철권.

흐린 CCTV로도 오른팔이 강철 의수인 것과, 왼쪽 허리에 기관단총을 꽂아놓고 있는 게 잘 보였다.

'정리하긴 해야지.'

서로 갈 길 가기에는 내가 쳐놓은 깽판이 무시무시했다.

현장을 확인하고 김철권도 위협을 느꼈겠지.

껄쩍지근한 뒷맛을 남겨놓기보다, 어떻게든 해결을 보려 할 것이다.

무력으로든 대화로든 간에.

"철권파입니다."

"아, 그, 그렇네요! 철권파네요!"

최 소장이 고장난 듯 머리를 끄덕였다.

고문 당한 직후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모양.

나는 골프백에서 소총을 꺼낸 다음 느리게 일어섰다.

"가죠. 이야기라도 해봅시다."

"초, 초인님. 김철권 그 새끼가 미쳐서 확 총질이라도 하면······"

"여기서요? 에이, 힘들죠. 그리고 저도 그냥 당해주진 않을 겁니다."

보란 듯이 소총을 두드리자 비로소 얼굴이 밝아진다.

사실 김철권은 지금도 굉장히 무리하고 있다.

여긴 엄연히 경찰 순찰 구역 안이라고.

대놓고 무장한 채 몰려온 것만도 부담스러운데 총질을 한다?

지가 무슨 전국구 갱단도 아니고, 신림동 안에서 아웅다웅하는 게 전부인데 경찰이랑 척을 질 수가 없지.

아무리 경찰이 무능해도 작은 갱단쯤은 간단히 작살 낼 수 있으니까.

찰칵!

인력사무소 불을 켜고 대기실로 나갔다.

항상 여직원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출입구를 노려본다.

최 소장이 문 앞에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문 열까요?"

"잠시만요."

나는 잠깐 머리를 굴렸다.

김철권이 굳이 자기 갱단을 몰고 온 이유는 뻔했다.

최대한 위협적으로 보이려는 거지.

날 경계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할 일은 약간의 허세.

강인하고 폭력적인 인상을 주어 감히 범접할 할 수 없게끔 만드는 것이다.

'관우 짓 좀 하자.'

우드득!

왼쪽 팔의 츄리닝을 그대로 찢어버렸다.

피와 엉겨 붙다시피 한 방패도 제거.

로켓탄 파편이 박힌 탓에 거의 넝마가 된 상태였다.

'이건 못 쓰겠다.'

그 아래 방호복 역시 마찬가지였다.

구멍이 송송 뚫리고 찢어져서 수리하느라 돈이 더 들게 생겼다.

드디어 드러나는 내 왼팔.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호랑이가 깨물고 흔들기라도 했는지 상처가 그득하고 시퍼런 피멍과 함께 퉁퉁 부어 있다.

입술 한 번 깨물고 흑염도 발동.

검게 불타는 꽃잎들이 내 주변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무대 준비 완료.

"문 열겠습니다!"

최 소장이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철컥, 촤르륵!

유리문을 막고 있던 철문이 올라가고 후덥지근한 바깥바람이 핥듯이 몰려온다.

텁, 텁, 텁.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김철권.

"어어? 잠시만요!"

최 소장이 뭐라고 하지만 무시.

김철권 말고도 간부처럼 보이는 남자 몇이 그 뒤를 따라왔다.

내가 행동에 나선 것은 바로 이때.

미리 빼놨던 단검을, 보랏빛 은은한 마법진을 빛내는 저주 단검을 팔에 힘껏 찔러넣었다.

'끄으윽!'

찢어지는 통증이 퍼뜩 튀어오른다.

비명을 겨우 집어삼켰다.

'나는 관우다.'

속으로 수십 번도 넘게 그 말을 되뇌인다.

인내 특성이 아니었다면 못 견뎠겠지.

눈살 한 번 찌푸리고 이를 한 번 간 후, 단검을 쭈우욱 내리그었다.

푸슈슉!

어디 안 좋은 곳을 갈랐는지 피가 길게 솟았다.

뿜어진 피가 천장과 바닥을 붉게 물들었다.

얼마나 피가 많이 나왔는지 접근해 오던 김철권 앞에까지 뿌려진다.

뿌려진 피가 마치 하나의 선처럼 보였다.

더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

"으음······"

신음을 흘리며 멈춰선 김철권.

따라온 남자 하나가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새끼, 허세는. 소싯적에 자해 좀 해봤냐? 할 거면 배를 째서 장기자랑을 하지, 겨우 팔을 갈라서 뭐하게?"

뭐하긴.

나는 단검을 접수대에 내려놓고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우악스럽게 벌려서 살에 파묻힌 쇳조각을 잡은 다음, 단숨에 잡아 뽑았다.

푸욱!

피와 함께 뾰족한 쇳조각, 살점 덩어리가 딸려 나온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남자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시선을 즐기며 손가락을 튕긴다.

뚜웅!

쇳조각이 타일 위에 떨어지며 쇳소리를 냈다.

남자들의 시선이 날 한 번 향했다가 떨어진 쇳조각을 따라간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서걱거리며 팔을 절개하는, 그리고 절개한 자리를 비집고 쇳조각을 꺼내는 내 손에 고정되어 있을 뿐.

"으, 으아아!"

내게 시비를 걸었던 남자가 얼굴이 퍼레져서는 뛰쳐나갔다.

그럴 만도 하지.

생각해보라.

하이얀 형광등 아래, 까만 도깨비불을 휘감고서 자기 팔을 썰어 쇠 파편을 꺼내고 있다고.

그게 귀신이지 사람이냐?

나는 쇳조각을 꺼내 떨어뜨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김 사장님 부하가 좀 겁이 많네요. 평소에 공포 영화라도 좀 보라고 하세요."

"후우······"

김철권이 짜증 난다는 듯 자기 머리를 쓸어올렸다.

"니들은 나가 있어."

"혀, 형님!"

"하지만······"

"새끼들아. 표정 관리라도 좀 하던가. 니들 지금 전혀 도움 안 되니까 나가서 애새끼들 단속이나 하라고. 알아들어?"

"아, 알겠습니다!"

"예, 옙!"

남아 있던 둘마저 뛰쳐나갔다.

말로는 싫다고 하지만 백지장처럼 질린 얼굴에는 잘 됐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김철권이 한숨과 함께 투덜거렸다.

"내가 저딴 새끼들이랑 무슨 큰일을 하겠다고······"

글쎄다.

댁 얼굴에도 나 질렸소, 하고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나는 피식 한 번 웃고는 주먹을 꽈악 쥐어보았다.

무시무시한 격통이 휘몰아치지만 아까 전부터 느껴졌던 이물감만은 느껴지지 않는다.

팔 안에 박힌 쇳조각은 다 해결했다는 뜻.

근육과 살이 갈기갈기 찢어지긴 했지만 시간만 충분히 주면 상처 회복과 재생으로 치유될 것이다.

"최 소장님. 잠깐 이리 와보세요."

"네? 넵!"

최 소장이 바짝 군기가 들어서는 뛰어온다.

나는 최 소장에게 등을 내밀고는 태연하게 방호복을 벗었다.

조각조각 갈라진, 보기 좋게 발달한 근육이 환한 형광등 아래에 드러난다.

꿀꺽.

밖에서 누군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냥 패션 근육이 아니다. 실전에 가장 적합하고 이상적인 형태의 근육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특히 등 곳곳이 비정상적으로 붓고 피멍이 들어 있어 더욱 위협적이었다.

당연히 내 근육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근력 특성 때문에 자라난 근육이었다.

나는 최 소장에게 저주 단검을 들려준 후, 내 등에 부어 있는 지점을 가리켰다.

"거기 째서 파편 좀 빼주세요."

"에에엑? 제가요? 이런 건 의사한테 맡기셔야지요!"

"파편만 빼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합니다."

"하, 하지만, 초인님······"

"괜찮다니까요?"

"소독도 안 했는데······"

"소독이 뭐가 문제가 됩니까? 괜찮습니다. 하세요."

조금 전부터 어질어질하고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다.

기가 인터넷 쓰다가 전화 모뎀으로 다운그레이드하면 이럴까?

저주 때문이다.

1레벨의 하급 저주.

평소에는 행동이 조금 느린 정도로 끝나지만 전투 시에는 치명적인 그것.

"흐읍, 흐읍."

긴장한 숨결이 내 등에 와 닿는다.

"하, 합니다?"

"거기서 2센티미터 아래요."

"여, 여기요?"

"0.5센티미터만 오른쪽이요. 네, 거기. 한 3센티미터 찌른 다음에 잘 찾아보세요."

"후으읍, 훕."

푸욱!

마침내 최 소장이 내 등을 찔렀다.

"잘하셨습니다. 이제 파편 빼세요."

"으으으······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최 소장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시키는 대로 곧잘 했다.

손가락으로 헤집다가 안 되겠는지 어디서 핀셋을 가져와 뒤적거린다.

땡그랑!

접시에다가 파편을 놓는 최 소장.

안도해서는 한숨을 내쉬지만 아직 멀었다.

"다섯 개 남았습니다. 조금만 더 수고해주세요."

"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한 번 해봤다고 상처를 째는 손길에 관록이 붙었다.

또, 이때쯤 저릿저릿하던 감각이 사르륵 사라졌다.

[저주 저항] 획득.

몇 개만 더 모으면 된다.

독 저항과 저주 저항, 그리고 여러 가지 상태 이상 저항을 더 얻으면 조합된다고.

[불굴] 특성이.

나는 몸을 온전히 최 소장에게 맡겨놓고 고개만 틀어 김철권을 돌아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김철권.

그러나 몸은 솔직했다.

동공이 부리나케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오신 겁니까?"

"아."

김철권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우선, 단검파 놈들을 궤멸시키신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놈들은 정말로 기생충이자 사회악이었습니다. 놈들에게 당해 피눈물을 쏟은 사람은 트럭 수십 개에 태워도 모자라지요. 김전사 초인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우리 모두를 구하신 겁니다."

어쭈?

지는 안 그런 것처럼 말한다?

뭐, 단검파가 조금 더 악랄한 건 사실이다.

그래 봐야 거기서 거기, 오십보백보,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라는 격.

"공치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놈들이 절 건드려서 본때를 보여준 거니까요. 단검파가 절 먼저 건드리지 않았으면 저도 굳이 놈들을 공격하진 않았을 겁니다."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전 굳이 다른 사람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안 그래도 할 게 많은데요. 절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됩니다."

노골적이기까지 한 말.

김철권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상의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런 일은 철저하게 짚고 넘어가야지, 적당히 넘어갔다간 나중에 꼭 뒷말이 나오거든요."

"뭘 말입니까?"

"단검파가 갖고 있던 영역 말입니다. 초인님께선 거기 욕심이 없으십니까? 원래대로라면 초인님께서 절반은 가져가셔야 맞지만, 이번 일에 저희 쪽 피해도 적지가 않아서요. 저희 애들이 벌써 볼멘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

다 주겠다는 투로 말한 건데, 김철권은 딴소리를 하고 있었다.

정면으로 김철권을 바라보자 김철권 역시 나를 직시했다.

눈에 잔뜩 힘을 준 상태.

왜 저러는 거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짚이는 점이 있었다.

김철권은 두려운 것이다.

내가 혹시 뒷골목에 몸을 담글까 봐. 그래서 단검파 영역을 부여잡고 날아올라 신림동을, 관악구를 제패하려 들까 봐.

참 내. 내가 갱단이나 할 사람으로 보여?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고 똥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더니 딱 그 짝이다.

그렇다면 안심시켜줘야겠지.

속물에게, 뼛속까지 갱단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필요 없습니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어차피 전 혼자고 영역 싸움에는 관심도 없어요. 애초에 그쪽 세계에 깊이 얽히는 건 사절입니다."

"그렇습니까······"

김철권이 안도하는 한편으로 불편한 표정을 짓는다.

자존심이 상한다 이거지.

"하지만 이번 일에 제 지분이 큰 것도 사실이지요? 제 지분을 주장하는 대신 두 가지를 요구하도록 하지요."

"말씀하세요."

"첫 번째로 저번에 졌던 빚은 이번에 갚은 것으로 합시다. 솔직히 김 사장님께서 오늘 이득을 꽤 많이 보시지 않았습니까? 명실상부하게 신림동의 지배자가 되셨으니까요."

"좋습니다. 인정하지요."

"두 번째, 저도 얻는 게 있어야 하니 딱 하나만 요구하겠습니다."

김철권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명백히 재촉하는 태도.

나는 조금 뜸을 들였다가 입을 뗐다.

"단검파가 갖고 있던 거든, 사장님이 갖고 있는 거든 집 한 채만 주시죠."

"집······이라고요?"

"예. 단독주택이든 상가주택이든 상관없습니다. 단, 임차인들은 사장님께서 알아서 해결해주셔야 합니다. 크기는 클 필요가 없지만 보안과 방음, 두 가지만큼은 확실해야 하고요."

"보안과 방음이라······ 흠, 지하에 운동 시설도 있어야겠습니다."

"바로 그거죠."

초인, 특히 전사 계열 초인이 가장 선호하는 집이 어딜까?

아파트? 펜트하우스?

답은 단독주택이다.

지하에 비밀 연무장이 있으면 금상첨화.

하다못해 운동방 정도는 있어야 한다. 전사에게는 수련실, 강화병에게는 공방, 마법사에게는 연구실, 사제에게는 기도실이 있어야 한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니까.

나는 서우진네 집에서 비밀 연무장을 보고 필요성을 절감했다.

지금까지는 우격다짐으로 강해졌지만 지금부터는 다르다.

파산검법을 익혀야 하고 마력 연공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수련실은 필수.

내 요구를 들은 김철권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직 단검파 자산을 다 파악하지 못했을 테니 자기가 가진 부동산 중에서 생각하고 있겠지.

상가주택은 아닐 것이다.

가만 놔두면 임대료 따박따박 나오는 곳을 미쳤다고 나한테 넘기겠어?

결국 하나밖에 없다.

아케인 서울에서 첫 번째 거점으로 주어지는 그곳.

지하 밀실 완벽하고 파출소도 바로 근처에 있지만 산자락에 있고 교통이 불편해서 상대적으로 땅값도 집값도 싼 단독주택.

생각을 마친 김철권이 다짐하듯이 내게 물었다.

"보안과 방음만 확실하면 되지요? 다른 것은 상관없지요?"

"예. 다른 조건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조용하고 사람 안 다니면 더 좋지요."

"마침 딱 맞는 집이 있습니다."

김철권의 눈가가 실룩인다.

좋냐?

단검파 영역 절반 내줘야 할 거, 집 한 채로 퉁칠 수 있어서?

그런데 말이지.

한 번은 생각해보아야 한다.

어째서 하필 그 집이 아케인 서울의 첫 거점으로 주어지는지.

김철권이야 당연히 모르겠지만.

"한 번 직접 보시겠습니까? 신림동 외곽, 건우봉 능선에 있는 집입니다. 그리 큰 집은 아닙니다만 조용하고 파출소 근처에 있어서 수련하기에 아주 적당하고 좋습니다. 초인님께서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

빙고.

내 집 마련 -1-

내 집 마련

툭.

인부들이 나르던 큰 상자가 벽에 부딪혀 작은 소리를 냈다.

다른 곳을 감독하고 있던 최 소장이 얼른 뛰어와 고함을 질렀다.

"이봐! 제대로들 못해! 그게 얼마짜리인 줄 알고 그래! 살살 하란 말이야, 살살!"

"아이고, 죄송합니다. 사장님."

팀장이라는 사람이 허리를 굽실거렸다.

"이게 원체 무거운 물건이라······ 그래도 걱정하지 마십쇼. 단단히 포장해 와서 상처 하나 안 났을 겁니다."

"배송료를 그렇게 받아먹었으면 돈값을 해야 할 거 아뇨! 우리 초인님께서 쓰실 물건인데 제대로 하쇼, 제대로!"

"죄송합니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초인님."

내가 어지간히 신경 쓰이나 보다.

팀장이 내 주변에서 떠도는 불꽃을 보고는 더욱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좁은 골목길로 배송 트럭이 끝도 없이 들어왔다.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닙니까? 이 정도까지 안 해주셔도 됩니다만."

"어휴, 초인님께서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이 정도는 당연하죠. 얼마 안 들었습니다."

"마법 욕조도 그냥 최하급품이면 충분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초인님께 최하급품이라뇨.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방금 인부들이 옮긴 게 마법 욕조였다.

마력을 잘 보존하고 전달하는 특수한 재질에, 흑금으로 마법진을 새기고 진은으로 마력 회로를 덧씌운 물건. 솜씨 좋은 마법사가 온열 마법과 회복 마법, 정화 마법, 마력 집중 마법을 부여했다고 한다.

가격은 무려 9억 9천만 원.

최 소장이 생색내려고 흘린 가격을 듣고 아주 기함을 했지.

욕조 하나에 10억을 태우다니!

그럴 돈 있으면 현금으로 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겨우 참았다.

사실 좋은 욕조가 필요하긴 했으니까.

"이건 어디 놔둘까요?"

"어, 초인님?"

"모두 지하 수련실에 놔두세요."

"예에엡."

새로 배송된 물건은 전동 드릴과 삽, 곡괭이, 배관, 모터 등 건축용품.

종류도 많고 무게도 무거웠다.

최 소장이 힐끔 한 번 보고는 지나가는 어투로 물었다.

"수련실을 확장하실 생각입니까?"

"그렇죠. 저한테는 좀 작긴 합니다."

"하기야······ 운동방으로나 쓰지 수련실로는 작지요. 그런데 직접 하시려고요? 저한테 말씀만 하시면 원하시는 대로 콱콱 넓혀드리겠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구상하고 있는 게 있어서요."

최 소장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 공간이라도 만들려나 보다, 하는 얼굴.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나는 비밀 공간이 아니라 어떤 것을 파내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후아!"

"다 됐습니다!"

"사장님! 확인해 주십쇼!"

모든 배송이 끝났다.

집에 들어가 느긋하게 돌아다녔다.

김철권이 준 집은 2층 구조, 지하 1층으로 이뤄진 50평 규모의 단독주택.

1층에는 거실과 부엌, 방 1개, 화장실 1개가, 2층에는 방 2개와 욕실 2개, 화장실 2개가, 지하에는 창고와 운동방이 배치되어 있다.

아침에만 해도 텅 비어 있었지만 이제는 꽉 찼다.

최고급 명품은 아니어도 상당한 가격의 가구와 가전들로.

아무리 이 세계 생활 물가가 싸다고 해도 값이 상당히 나갈 것이다.

지하실에 건축용품과 마법 욕조가 잘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최 소장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고맙습니다, 최 소장님. 덕분에 집이 꽉 찼네요."

"하하하. 초인님께서 제게 해주신 거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냥 마음의 선물입니다, 마음의 선물."

가구와 가전이 다가 아니었다.

현금 꽉꽉 채운 금고를 선물 겸 판매 대금이라고 안겨주었다.

그 금고는 2층 안방 비밀 공간에 잘 숨어 있다.

얼마나 들었냐고?

나도 슬쩍 봐서 잘은 모르지만 20억은 가뿐히 넘는다.

제일보안에서 완벽히 세탁해서 건넨 용돈.

그리고 단검파 보스에게 얻은 단검 두 자루를 매각한 돈.

이 둘을 합쳤으니까.

최 소장이 개인적으로 더 넣기도 했고.

나에 대한 호의이기도 하고, 나한테 줘야 할 돈이 있어서 그렇기도 하다.

"사장님. 저흰 가보겠습니다."

"예,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조심히 가십쇼."

"흠, 흠. 날이 좀 더운데······"

"예에! 고생하셨습니다!"

수전노는 수전노.

최 소장은 인부들이 더운 티를 내도 용돈 조금 음료수 하나 챙겨주지 않았다.

비싼 배송료 냈는데 뭐가 문제냐는 태도.

최 소장이 여름인데도 몸에 걸친 코트, 단검파 보스의 그림자 마법이 부여된 코트를 매만지며 내게 인사했다.

"초인님. 저도 가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여기 동작 감지기에 파출소랑 제 사무소 둘 다 연결해 놨으니까 뭔가 수상하면 바로 신호 보내십쇼."

"걱정하지 마세요. 파출소가 코앞인데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털 도둑은 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초인님인데 별일은 없겠습니다만.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당분간 연락 안 드릴 테니 푹 쉬십쇼."

최 소장이 인사를 하고 떠났다.

삽시간에 조용해진 집.

아까 그토록 북적북적했던 게 거짓말 같다.

나는 옥상으로 올라가 나무 벤치에 적당히 드러누웠다.

손에 든 것은 캔커피 하나.

적막과 함께 고요함이 새 우짖는 소리처럼 몰려온다.

"좋다······"

건우봉이 지척인 언덕길.

어느덧 6월 하순을 향해 달리는 시점이다.

햇볕은 뜨겁고 습기는 찰랑찰랑 차오르는 중.

무더운 바람이 뺨을 핥고 지나가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달콤한 캔커피와 이르게 찾아온 매미 소리를 즐기며 살포시 눈을 감았다.

'처음엔 진짜 막막했는데.'

병원비가 얼마였더라?

3천 3백만 원 정도 했었지?

그거 듣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진짜 이러다 죽겠다 싶어서 열을 내며 뛰었지.

더러운 마굴에서 뒹굴다시피 하며 돈을 벌고, 노루 패거리와 싸우고, 갑자기 튀어나온 성녀에게 세례를 빙자한 고문을 당하고······

많은 일이 있었다.

그래도 결과는 꿀처럼 달았다.

최소한 20억,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현금을 가지게 됐지.

무엇보다도 기껍고 기쁜 것은 바로 이 집.

무려 50평짜리 단독주택.

내가 평생 단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평수다.

전세로 1년 살았던 곳도 15평 남짓한 오피스텔이었지. 그나마 전세 사기로 경매 넘어가 버린.

옥상에 앉아 집을 찬찬히 살펴본다.

흔히 생각하는, 담장이 정원을 감싸고 구석에 텃밭도 있는 그런 형태가 아니다.

정원과 담장을 없애고, 두툼하고 단단한 외벽을 주변에 둘러싼 다음, 외부에서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만든, 가히 작은 성처럼 보이는 위압감 넘치는 단독주택이다.

원래 세계였다면 내부에 중정, 중앙 정원이 있었겠지만 그런 것도 없다.

오로지 보안, 보안만을 위한 형태.

안으로 들어오는 입구는 ㄱ자 형태로 꺾인 출입로를 한참을 들어와야 하고, 그나마 삼중 철문으로 봉인되어 있다.

옥상도 마찬가지.

방범문이 아니라 아예 방범벽이 설치되어 있다. 내부에서 미리 열어두지 않으면 아예 출입이 불가능하다는 뜻.

'이 세상엔 도둑이 많고 강도는 더 많아.'

이 집이라면 쉽게 털릴 일은 없다.

잠시간 즐기는 평화.

벤치에 드러누워 스마트폰을 뒤적였다.

가장 먼저 처리한 것은 카드 할부금 완납.

한 차례 납부하여 11번 남아 있던 할부금을 오늘 완전히 끊어냈다.

"흐, 시원하다."

현금이 20억 넘게 있지만 카드값 3천은 최고급 가구에 묻은 때 같은 거였다.

괜히 옛날을 생각나게 만든다고.

그래서 깔끔하게 갚아 버렸다.

다시는 생각나지 않게끔.

"휴우우."

한참을 뒹굴다가 일어났다.

잠시간의 평화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

다시 달려야 할 시간.

돈 좀 벌고 집 좀 생겼다고 자빠져 있기에는 이 세상의 운명이, 또 옛 아버지 교단과 얽힌 내 악운이 너무나 험난하고 위태롭다.

철컥, 기이잉, 쿠웅!

방범벽을 내리고, 철제 격자문을 닫고, 자물쇠를 잠그고, 전자 잠금장치까지 작동시켰다.

옥상에서 내려온 다음 향한 곳은 지하 1층 수련실.

오늘의 메인 이벤트가 남아 있었다.

'지하실 북쪽 벽이었지.'

정확히 말하면 지하실 북쪽 벽을 무너뜨리고 1미터를 판 다음, 거기서 수직으로 10미터를 파고 내려가면 된다.

"후읍."

나는 곡괭이를 쥔 다음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강타][근력][활기]

[마력심][마력 회복][마력 흡수]

"하압!"

기합과 함께 벽을 내리찍는다.

원래라면 수십 번은 넘게 곡괭이질 해야 무너질 벽.

하지만 강타로 휘둘러진 곡괭이는, 근력과 마력의 보조까지 받는 곡괭이질은 평범한 곡괭이질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그긍!

당장 벽에 금이 가면서 꽝꽝 무너져 내렸다.

나는 무념무상으로 곡괭이를 휘둘렀다.

벽에 어느 정도 구멍이 뚫리자 전동 드릴을 가져와 가장자리를 예쁘게 다듬었다.

그다음에는 다시 곡괭이질이다.

내가 초인이 되긴 된 모양이었다. 전동 드릴보다 곡괭이질이 훨씬 파괴적인 것을 보면.

'원래는 건우봉 금역까지 클리어해야 만드는 시설이었지.'

건우봉 금역.

금역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곳이다.

공간 왜곡 범위도 좁고 정도도 약해서 건우봉이 관악산 크기로 불어난 것에 불과하니까.

지형도 평범한 산이자 고원. 괴물은 몽땅 토벌당했고 있는 것이라곤 청소부 협회에서 극비리에 운영하는 마약 농장 겸 인신매매 조직 거점 겸 신체 개조 공방밖에 없다.

아케인 서울에서는 그 조직을 소탕한 다음, 마법사 계열 초인과 함께 건우봉 금역을 방문하면 이런 메시지를 보게 된다.

[어, 이 느낌은······]

[북쪽이다! 북쪽으로 향하고 있어!]

[잠깐. 우리 거점이랑 가까운데?]

이후 해당 초인에게 하루 휴식을 주면 특수한 시설이 개방된다.

[마력천]

쉽게 말해 마력이 용솟음치는 온천이라고 보면 되겠다.

생명력이 0이 돼서 기절한 초인을 여기에 하루만 담가놓으면 완전히 회복된다.

신열 정도 치명적인 디버프가 아니면 어떤 디버프와 후유증도 사라지지.

심지어 자동으로 경험치가 쌓이는 효과가 있다.

"후읍, 후읍."

쉬지 않고 곡괭이질을 했다.

역시 게임과 현실은 다르다.

게임에서는 터치 한 번에 시간만 들이면 끝날 일.

이 세상에서는 내가 직접 움직여야 했다.

그렇다고 사람을 쓸 수도 없잖아.

마력천은 이런 집 한 채와는 비교도 안 되는 보물이니까.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지치면 자동 드릴을 가져와 구멍을 팠다.

엄청난 속도였다.

거의 인간 천공기가 따로 없었다.

아침부터 꼬박 구멍 뚫기에 골몰한 결과, 늦은 오후쯤 10미터를 몽땅 파내는 것에 성공했다.

푸확!

온천수 터지듯 마력천 물이 길게 솟구쳤다.

차갑디차가운 물이 땀으로 흠뻑 젖은 나를 적신다.

청량하면서 서늘한 감촉.

동시에 전신이 자극되면서 뜨끈한 기운이 돈다.

마력천의 효능이 벌써 발현되고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쓰려면 마법 욕조를 쓰는 것이 필수.

서우진네 마력 집중진만큼은 못해도 그 절반 효율은 나오지 싶다.

"배고프네."

밥이라도 먹고 할까?

아니다.

기왕이면 오늘 일을 다 끝내고 쉬도록 하자.

나는 구덩이를 적당히 다듬은 다음 모터를 가져와 물을 뺐다.

그리고 급속 시멘트를 반죽하고 구덩이에 치덕치덕 발랐다.

노가다 경력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때 경험이, 또 어깨너머로 훔쳤던 기술이 도움이 되었다.

유튜브 비슷한 이 세계의 플랫폼도 한몫했지.

나는 막일만 해서 제대로 된 기술이나 세세한 것까진 모른다.

그런 부분은 모조리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찾아보고 따라 했다.

스마트폰은 무적이다. 동영상 플랫폼은 신이고.

어떻게든 모터 설치와 배관 공사, 마무리까지 다 끝을 냈다.

바닥을 완전히 덮고 마법 욕조와 커튼으로 위장까지 끝낸 다음 길게 기지개를 켰다.

"으으으, 죽겄네. 죽겠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아니, 빨리 끝난 거라고 해야 할까?

현재시간 새벽 3시.

내가 오전 11시부터 1분도 안 쉬고 일했으니까 16시간이 걸린 셈이다.

덕분에 온몸이 찌뿌드드했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제작][개조][수리] 3종 세트.

그럼 개시해보자.

냉장고에서 캔커피와 샌드위치 하나를 가져왔다.

마법 욕조에 트레이를 장착하고 그 위에서 식사를 즐겼다.

이미 마력천 물이 차 있는 상태.

욕조의 마법이 작동하며 물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살랑살랑 작용하는 회복, 정화, 마력 집중 마법.

뼛속까지, 내장까지 뜨끈해지는 느낌이었다.

정돈되지 않아 거칠게 흐르던 마력이 조금씩 고요해진다.

느릿하게 가라앉는 정신.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육체.

옥상에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평온함이 나를 포근하게 감쌌다.

넥타르의 잔존 마력이 조금씩 녹아내린다.

마력 연공법만은 못해도 상당한 효과.

'이게 천국이지.'

마력천에 취해 있노라니 끼무룩 잠이 몰려왔다.

돌연변이 후유증에 시달려 기절하듯이 잤을 때랑은 달랐다.

아무 걱정 없이.

아무 근심 없이.

이 세상에 떨어진 후 처음으로.

집다운 집에서. 진짜 내 집에서.

다디단 꿀잠에 빠져들었다.

내 집 마련 -2-

아침.

전에 없이 활기찬 몸으로 일어났다.

"으아아아암."

늘어지게 하품 한 번.

맛있게 아침을 먹고 수련실 중앙에 가서 섰다.

'검법 수련해야지.'

총격술 기반으로 총잡이 빌드를 타는 것도 나쁘진 않다.

저레벨에서는 최강의 빌드기도 하고.

문제는 고레벨이 되었을 때.

결국 전사는 검으로 귀결된다.

맨손 격투, 철퇴, 창, 도끼, 활, 쇠뇌를 선택할망정 총을 택하는 것은 바보짓.

검을 들었다.

총포상에서 산 그 검.

공장에서 강철을 틀에 넣어 찍어낸, 절대 좋다고 할 수 없는 물건.

게임이라면 이렇게 표기되겠지.

[N] 강철 장검

그래도 2레벨인 내가 막 쓰기에는 나쁘지 않다.

"후우읍."

길게 심호흡.

공기와 함께 마력이 내 허파로 스며든다.

상시 끓고 있는 마력천 물 때문일까?

지하 수련실의 마력 농도가 꽤 높았다.

[파산검법] 장착.

뇌내에서 재생되는 영상을 참고하며 검을 내리긋는다.

파산검법 제 1 동작, 산 부수기.

아랫배에서 움튼 마력이 심장을 거쳐 팔로 질주한다.

그리하여 검에 깃들어서는 맹렬하게 쏟아졌다.

우르릉!

거칠고도 강렬한 소리.

이어서 제 2 동작 산 가르기와 제 3 동작 산 꿰뚫기를 시현.

검을 가로로 길게 베자 무형의 힘이 공간을 흔들고 앞을 향해 가파르게 찌를 때면 철판이라도 뚫을 듯 날카로운 기세가 일었다.

'나쁘지 않아.'

동작 자체는 극도로 단순하다.

세로베기, 가로베기, 찌르기니까.

무협 소설로 치환하면 태산압정, 횡소천군, 독사출동이라고 보면 되겠다.

사실 동작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진짜는 인체 내부에서 이뤄지는 마력의 흐름과 강약 조절.

어떻게 보면 동작은 교보재일 뿐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21세기에 누가 검 휘두르고 창 찌르면서 싸워?

만병지왕은 검이라는 말, 아케인 서울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모든 무기의 제왕은 총이지.'

총알 앞에서는 어린아이도 근육질 덩치도 모두 평등하다.

그게 역전되는 것은 대략 3레벨.

3레벨 초인들은 철갑이니 마력 방어막이니 하는 특성으로 총알을 막을 수 있다.

나만 해도 단검파 습격할 때 소총탄 몇 발 맞으면서 싸웠잖아.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5레벨, 7레벨 정도 되면 일반적인 총알로는 생채기도 안 난다.

"후으읍."

다시 심호흡.

마력심을 안정시키고 마력을 제어하며 검을 뿌렸다.

일격 일격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동작 한 번 한 번에 마력을 모조리 폭발시킨다.

정돈되지 않은 마력이 혈맥을 뒤흔들었다.

전신 혈맥이 저릿하게 아프고 심장이 바늘에 찔린 듯 은은한 통증이 일었다.

'상태가 안 좋긴 안 좋네.'

여러 회복 종류 특성과 마력심 특성 덕에 버티는 거다.

그게 아니었으면 사단이 나도 났겠지.

마력 폭주가 발생했든, 심장마비가 찾아왔든 간에.

"후욱, 후욱."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온몸 관절 마디마디가 삐걱거리고 근육은 불타듯이 아팠다.

여기에 마력 혈맥은 칼로 쑤시는 통증까지 호소한다.

더는 못 버티겠다.

"으아악!"

나는 검을 집어던지고 마법 욕조에 몸을 던졌다.

뜨끈하고 청량한 기운이 피부로, 마력 혈맥으로 파고들자 비로소 통증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집에 마력천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제대로 수련도 못 했겠지.

지금처럼 최대 출력으로 검을 쓰기는커녕 70% 정도로 하다가 내상 잔뜩 입고는 며칠씩 끙끙 앓았을 것이다.

"휴······ 살겠다."

1분만 더했어도 심각하게 내상을 입었지 싶다.

지금은 마력 혈맥에 상처가 조금 난 정도.

나는 특성을 교체하고는 마력천 물의 감촉을 즐겼다.

뜨끈뜨끈 기분 좋긴 한데 가만히 누워 있으려니까 조금 아쉽다.

'뭐 특성 얻을 게 없나?'

몇 개 있지.

가장 먼저 생각나는 대로 양손을 마력천 물에 담갔다.

[흑염] 장착.

회복되는 모든 마력을 흑염에다가 때려 부었다.

몸 주변에 생성할 수도 있지만 몸에 덧붙이는 게 더 쉬운 법.

내 양손에서 불꽃이, 검은 화염이 맹렬하게 일어났다.

부글부글.

당장 마력천 물이 끓으며 거품이 올라온다.

물이 뜨거워진다.

목욕하기 딱 좋은 37도에서 단숨에 치솟아 40도로, 50도를 향해 달려간다.

'뜨, 뜨거워!'

목욕물 45도만 되도 저온 화상을 입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정도 온도로는 안 될걸?

정신을 다잡고 흑염에 더욱 마력을 불어넣었다.

부글부글 터지는 기포가 확산되고 물이 더욱, 더더욱 뜨거워졌다.

아예 수증기까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괜한 짓을 했나?

조금 후회하려다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신열 디버프에 비교하면 1%만큼도 아프지 않다.

이 정도쯤이야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마력을 더, 더, 더 쓰며 물을 가열하며 열기와 싸우길 수십 분.

마침내 상쾌한 기분과 함께 열기가 훅 가셨다.

[화염 저항] 획득.

"됐다!"

나는 급히 마법 욕조에서 몸을 뺐다.

지하 수련실을 뿌옇게 감도는 수증기 구름.

몸은 완벽히 회복되어 있었다.

사실, 끓는 물로 인한 화상쯤이야 별것 아니니까.

상처 회복과 재생 앞에서 화상은 해치우기 쉬운 먹잇감에 불과하다.

내상이 진짜 어려운 거지.

'이대로만 하자, 이대로만.'

마법 욕조로 얻을 특성이 또 뭐가 있더라?

다음 목표를 정하고 검을 휘둘렀다.

산 부수기, 산 가르기, 산 꿰뚫기.

그래도 몇 번 해봤다고 마력 운행이 한결 쉬워졌다.

흐름은 부드러워졌고 강약 조절도 확실하게 들어갔다.

하고 나면 전신이 망가지는 건 여전했지만 동원 가능한 마력량이 조금씩 늘어나는 느낌이다.

'너무 오래 걸리네.'

마법 욕조에 들어간 후 속으로 혀를 찼다.

이대로라면 넥타르의 마력을 모두 흡수하는 데 적어도 세 달은 걸리겠다.

그러면?

잉여 마력을 다 흡수하기도 전에 아까운 마력이 잔뜩 증발하겠지.

역시 마력 연공법이 필요하다.

그 생각을 하면서도 흑염을 발동시켰다.

이번에는 물 속에서 아니라 물 밖으로.

손을 뻗은 채 화염 방사기 뿌리듯이.

화아아악!

검은 불기둥이 뿜어져 나간다.

목적도 의미도 없이 마구 발사하는 화염.

당연히 내 마력이 금세 바닥났다.

남은 것은 혈맥에 잔존해 있는 넥타르의 마력뿐.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마력 회복이니 흡수니 하는 마력 관련 특성을 모두 지웠다.

남긴 것은 딱 하나, 마력심.

눈을 감고 내 안으로 깊숙이 침잠해 들어간다.

오로지 심장에만, 마력심과 결합하여 사뿐사뿐 마력을 생산하는 기관에 정신을 집중한다.

잘 되진 않았다.

원래 세계의 나는 명상이나 면벽, 사색과는 완전히 담을 쌓은 인간이었거든.

시간 나면 멍하니 TV 보거나 게임 하던 인간이었다고.

하지만 마력 특유의 질감과 흐름, 탄생과 생장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정신이 무거워지고 또 무거워지며 저 아래 무의식까지 닿았다.

이 세상에 떨어진 후 겪은 그 많은 경험들이 도움이 된 것.

자연스럽게 새로운 특성이 생성된다.

[명상]

이 새로운 특성과 마력심이, 또 마법 욕조에 담긴 마법이 상승 효과를 일으켰다.

[마력 안정]

마력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이 느껴진다.

넥타르를 마신 후 혼란스럽고 난잡하던 내 마력에 질서가 깃들었다.

혈맥 안의 잠재 마력 역시 마찬가지.

조금이나마 무거워지면서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오고, 그 부스러기가 마력심을 통해 흡수되고 있었다.

'이래도 한 달은 넘게 걸리겠네.'

한 달이면 절반은 날아가고도 남는다.

그 절반도 막대한 양이고, 차후 3레벨에 도전해 볼 만한 양이지만 전부 먹는 것보다는 못하지.

그래도 기분 좋은 소식이기는 하다.

'마력 회복, 마력 흡수, 마력 안정······ 두 개만 더 모으면 된다.'

마력심은 하위 특성 다섯 개를 모아 상위 특성으로 진화할 수 있다.

거기까지 존버하기 힘들어서 보통은 특별한 퀘스트를 깨는 것으로 얻었던 그 특성.

'너무 빨리 얻으면 안 돼.'

육체에 비해 마력량이 너무 많아도 안 좋다.

마법사 계열 초인이라면 감당할 수 있지만 전사 계열 초인은 안 된다고.

욕심내다가 마력 폭주로 반신불수 되기 십상.

최소한 5레벨은 된 다음에야 쓰는 게 좋다.

아니면 마력이 차는 족족 써야 하는 특수한 상황이거나.

쌔액! 쌔애액!

조금 더 휴식하고 검을 휘둘렀다.

마력 안정 특성을 끼고 있으니 확실히 마력 흐름이 안정된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검 끝이 조금씩 제 자리를 찾고 있었다.

깔끔한 일직선.

마력이 쉬지 않고 분출되어도 그랬다.

덕분에 천둥 같던 폭음 대신 매서운 파공성이 울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검을 휘두르다 말고 간질간질한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에 골몰한다.

완전히 몰입하여 들어가, 세상을 잊고 마력도 잊고 나도 잊고는 일념으로 검을 내리긋는다.

찌이잉······

귓가에서 울리는 이명.

그리고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장검.

장검에서 튀어 나간 빛이 허공에 낙인을 찍었다.

아주 잠깐, 찰나에 불과했지만 내 망막에는 선명하게 남았다.

[참격] 특성.

강타와 비슷하지만 최종 공격력은 더 높다.

들고 있는 무기의 공격력이 일정 배율로 더해지니까.

칼날이 있는, 소위 말하는 베는 무기들만 적용되긴 하지만.

'내친김에 타격 무기도 익혀?'

나쁘지 않다.

검, 총, 창, 도끼, 철퇴, 쇠뇌 등 다양한 무기를 들고 다니면서 싸우는 무기 전문가도 아주 강력하니까.

더구나 특성 전환 능력은 무기 전문가와 궁합이 아주 좋고.

'아니지, 아니야.'

그러나 곧 고개를 젓게 된다.

내 목표는 역시 천마.

이 세상에서 살아남든 원래 세계로 돌아가든 간에 천마만큼은 강해져야 1%라도 가능성이 있다.

그럼 무기 전문가 김전사로 천마와 싸워 이길 수 있느냐?

힘들다.

이미 해봤다고.

역시 천마와 비비려면 3대 검법밖에 없다.

하나하나로는 천마신공을 못 따라잡지만 각자 강점 부분에서만큼은 천마신공보다 뛰어나니까.

각 검법에 맞춰서 최적화 특성 세트를 만든 다음 실시간으로 특성 전환해가며 싸우는 것.

그게 내 목표였다.

"후우읍."

잡생각은 그만.

전력으로 찌르기를 날린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참격 특성 획득으로 고양되었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검 끝에 온 정신을 집중한다.

명상 특성이 내 몰입을 도와주고 있었다.

반드시 정적인 자세에서 내부에 침잠할 때만 적용되지는 않았던 것.

그리하여 어느 순간.

검 끝이 번쩍이면서 한 줄기 광선을 그려냈다.

태어난 즉시 사그라지나 선명하게 불타는 마력.

옆에서 보면 일직선의 궤적이지만 내가 보기엔 단 하나의 점처럼 보이는 그것.

"후아!"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주저앉았다.

혀끝에서 쇠 맛이 나고 눈앞이 노래졌다.

열중해서 수련한 건 좋은데 너무 무리했나 보다.

거의 기다시피 마법 욕조로 가서는 겨우 몸을 집어넣었다.

"힘들다, 힘들어."

어쩌겠어.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그래도 무기류 기초 특성 두 개는 얻었다.

아까 얻은 [참격]에 더해 [일점]까지.

'검술 특성까지 얻고 싶은데.'

아쉽게도 검술 특성을 얻기란 꽤 까다롭다.

실전에서 치열하게 검만 가지고 싸우거나, 고명한 스승에게 집중 과외를 받아야 하거든.

내게는 둘 다 어려운 일.

오늘은 참격과 일점을 얻은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지금은 검술 특성보다 마력 연공법이 더 급하다.

'마력 연공법을 얻을 방법이······'

퀘스트나 던전은 포기.

대부분 난이도가 높고 적당한 난이도 중에선 욕심낼 만한 게 없다.

역시 돈 주고 사는 게 가장 좋지.

내 금고에는 자그마치 20억이 넘는 현금이 잠자고 있으니까.

'20억을 다 써도 좋아.'

문제는 그 돈을 주고도 제대로 된 마력 연공법을 구하기 힘들다는 것.

이 세상의 생필품 물가는 싸지만 사치품은 극도로 비싸다.

하물며 초인이 될 수 있는 마력 연공법?

부르는 게 값이지.

3레벨은커녕 1레벨 초인이 간신히 될 쓰레기 마력 연공법도 몇억은 줘야 한다.

'역시 하나밖에 없어.'

내가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그곳.

마침 거리도 가깝다.

시기적으로 게임과 몇 년 차이 나긴 하지만 젊은 상점 주인 NPC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었다.

[10년 넘게 창고에 처박혀 있던 건데······ 정말 사시려고요?]

10년 넘게.

즉, 지금도 거기 있을 거라는 뜻.

바로 몸을 일으켰다.

마침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

신림동 신원 시장이 한창 암흑 영업을 불태우고 있을 때였다.

암흑 시장 -1-

암흑 시장

신원 시장.

신림역 근처, 도림천을 따라 설치된 시장이다.

원래 세계에서 재래시장은 대형 마트에 밀려 힘을 잃어가는 형국이었다.

이 세상에서는 달랐다.

재래시장에는 대형 마트에 없는 것이 있으니까.

"어휴. 여기도 예전 같지 않아."

"물건들 상태가 왜 이래?"

"내 단골 가게도 문 닫았어. 당분간 안 나온다네."

"개 같은 깡패놈들. 싸울 거면 지들 구역에서 싸우지 왜 시장에서 지랄이야?"

자정이 넘은 시간.

시장은 불이 꺼져 있다.

지붕 없이 노출된 거리, 다닥다닥 달라붙은 점포에선 퀴퀴한 냄새마저 풍겼다.

그 점포들 사이로 사람들이 사라졌다가 밖으로 뿅 하고 나오기를 반복했다.

내가 들은 말도 막 밖으로 나오던 사람들이 투덜거린 거였다.

'예전 같지 않다고? 깡패놈들?'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

며칠 전 내가 단검파를 무너뜨린 것 때문에 도미노 현상이 발생한 모양.

그런데 이상하다.

지금쯤이면 철권파가 신림동은 다 먹었어야 정상 아냐?

일단 들어가 보자.

출입구는 점포와 점포 사이, 은밀한 구석에 숨겨져 있었다.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지 형광등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깜빡거린다.

또 한쪽 벽면에는 역겨운 토사물이 쌓여 있고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심각하네.'

길고 좁은 복도를 따라 내려간다.

사람 둘이 간신히 교차해서 내려갈 정도로 좁은 통로.

거의 3개 층을 내려간 다음에야 지하 시장에 도착.

"싸요! 싸요! 단숨에 뿅 가는 최고급 마력 담배가 단돈 3만 원!"

"의체 재료 삽니다! 의체 재료 사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다! 전설의 무공 비급, 신화 속 마법서를 팝니다!"

"거 삼재검법을 전설의 무공 비급이라고 광고하는 건 사기 아뇨?"

"무협 소설에 필수로 나오는 게 전설의 무공 비급 아니면 뭡니까?"

"사기꾼 새끼!"

나는 입구에 서서 지하 시장을 한 번 쭈욱 둘러보았다.

뿌옇게 흔들리는 형광등.

현란하게 빛나는 네온사인 입간판.

술 먹고 고함을 지르는 아저씨.

마약에 취해 흐드러지게 몸을 흔드는 매춘부.

올올이 퍼져 나오는 청록색 마약 연기.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잡동사니.

안쪽에 숨겨놓은 보물을 내오며 음흉하게 웃는 사장.

음험한 눈빛과 함께 은밀하게 주고받는 돈다발.

마약, 독물, 총기, 폭탄, 무술서, 불법 의체, 마법 물품, 불경한 성물 등등 없는 게 없는 곳.

신림동 최대 규모의 암흑 시장.

'내가 가야 할 곳이······'

김춘복 고물상.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다.

게임에서는 갈 수 있는 상점을 메뉴 형식으로 늘어놓은 게 다였거든.

아무래도 좋다.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구경하도록 하자.

'문 닫은 데가 많긴 많네.'

신원 시장은 암흑 시장이 원 시장보다 더 크다.

규모로 따지면 3배 정도.

천천히 구경하면 10분이 아니라 30분은 걸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많은 점포 중 절반 이상이 문을 닫아 놓았다.

점포 전체를 천막으로 꽁꽁 싸매고, 청테이프와 마법 봉인으로 감아 열지 못하게 한 것.

닫은 점포마다 이런 문구를 걸어놓았다.

[시장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휴업합니다.]

나 말고 시장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욕설을 내뱉었다.

"진짜 언제까지 이럴 거야?"

"짭새들은 뭘 하는지······"

"뭔 개소리야. 짭새들 얽히면 더 골치 아파지는 거 몰라?"

"그래도 돈 받아 처먹은 값은 해야지."

"어쩌겠어? 철권파 놈들이 해결하든, 독약파나 나체파 놈들이 알 박을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휴, 병신 같은 놈들."

독약파는 금천구 독산동을 지배하는 갱단이고, 나체파는 관악구 봉천동을 지배하는 갱단이다.

신림동 기준 바로 양 옆.

철권파가 생각보다 일을 못 한 모양이다.

신원 시장은 단검파 사업장에서도 알짜배기인데 단숨에 못 먹어치우고 다른 갱단이 비집고 들어오게 한 걸 보면.

'설마 그 고물상도 문 닫은 거 아냐?'

불길한 느낌에 발걸음을 빨리 했다.

약 10분 뒤 내 걱정이 현실화되었다.

시장 구석에 위치한 [김춘복 고물상] 입간판.

점포가 비닐 천막에 싸인 채 꽁꽁 봉인되어 있었다.

"아 진짜."

정말이지 욕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김철권 뭐해!

응? 뭐하냐고!

경쟁 갱단을 치워줬으면 인마, 시장쯤은 간단히 잡아먹어서 잘 운영되게 해야 할 거 아냐!

일은 이미 벌어졌고 대안을 생각해야 한다.

상점이 문 닫았으면 상점주인 찾아가면 되는 거 아니겠어?

마침 옆에 점포는 멀쩡히 운영 중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물담배를 뻐끔뻐끔 마시는 주인장 눈깔이 썩은 동태 같지만,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요즘 물건 좀 어떻습니까?"

주인장이 흐릿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물담배 상점인지 물담배 물품들이 가득하······

아니, 취소, 취소다.

여긴 마약상이다.

물담배 형태 마약은 물론 담배, 주사, 껌, 과자, 사탕, 좌약, 화장품, 연고, 립스틱, 향, 패치 등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마약이 모여 있었다.

"어떻기는. 손님도 없고 죽겠어. 깡패 새끼들이 허구한날 치고 받으니 손님이 올 턱이 있나."

퉁명스럽게 말하는 주인장.

"여기 철권파 영역 아니었습니까?"

"하! 철권파는 무슨. 단검파 넘버투가 먹고 있던 곳이었지. 그치가 약삭빠르고 경찰이랑 구청에 기름칠도 잘해서 모두 좋아했지. 보호비도 조금만 받았거든."

"아······ 그, 눈 하나 의체 박으신 분 말이죠?"

"잘 아네?"

암. 잘 알지.

그놈이 나한테 로켓탄을 선물로 줬잖아.

"그 인간도 이번에 단검파 작살 나면서 같이 작살 났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철권파가 여기 먹을 줄 알았는데 병신들이, 여긴 안 들어오고 빈민가 쪽 사업장에만 신경을 쓴 거지."

"거긴 머리 쓰는 사람이 없나 봅니다."

"내 말이. 며칠 지나니까 철권파에서도 사람을 보내긴 했는데 이미 늦었어. 옆 동네 독약파랑 나체파에서도 사람이 왔거든. 그것도 유명한 놈들이 왔어."

"유명한 놈들요?"

"어. 둘 다 넘버투를 보냈더라고."

독약파랑 나체파 서열 2위면 2레벨 초인이다.

철권파는 보스인 김철권이 직접 오지 않는 한은 상대하기 어렵지.

김철권 혼자 2레벨, 나머지는 1레벨밖에 안 되거든.

그나마 세 명밖에 없고.

'원래는 김철권이 배신당해서 1레벨로 떨어지는 스토리였지.'

돌아가는 상황은 알겠다.

나는 닫힌 김춘복 고물상을 한 번 보고는 주인장에게 물었다.

"상황이 안 좋을 때 왔네요. 혹시 저기 상점은 언제 문 여는지 아십니까?"

"흠."

나를 멀거니 쳐다보는 주인장.

"맨입으로?"

오른손 검지와 엄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그려 보인다.

그래, 이럴 줄 알았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나는 지갑에서 신사임당 두 분을 꺼내 내밀었다.

주인장이 지폐를 낚아채더니 누런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다.

"흐흐흐! 말이 통해서 좋구먼. 암,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

"거두절미하고 묻겠습니다. 여기 사장님 어디로 가면 찾을 수 있습니까? 저도 많이 급해서요."

"그야 나도 모르지."

"예에?"

"여기 사람들 인생을 몰라서 그래? 다 약쟁이, 도박쟁이, 빚쟁이야. 김춘복? 그거 그 인간 본명도 아닐걸. 어디 사는지, 평소에 뭘하는지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

"하? 그런 얘기는 저도 하겠습니다. 돈을 받아먹었으면 받아먹은 값은 하시죠?"

나는 얼굴을 대놓고 찌푸렸다.

주변에 은은하게 흐르던 검은 불꽃이 화악 하고 번진다.

그러자 움찔해서는 검은 불꽃을 보는 주인장.

마약으로 정신이 흐릿한 탓에 내가 초인인 것도 몰랐던 모양이다.

"그, 그렇지! 돈 받았지! 내 정신 좀 봐, 흐흐흐. 김춘복 그 인간은 그냥 문을 닫은 게 아냐. 바로 어제 깡패들끼리 싸우는 바람에 휘말려서 갈비뼈가 부러져서 닫은 거지."

"갈비뼈가 부러졌다고요?"

"엉. 철권파 놈이 독약파 놈한테 한 대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는데 하필 김춘복 그 인간을 덮쳐버린 거지. 어휴, 부실한 인간. 그러게 평소에 약 좀 빨라니까 약을 안 빨아서 그래. 하여튼 어제 그러고는 바로 문 닫고 휴업한다고 하고 갔어. 지금은 병원에 누워 있겠지?"

병원, 병원이라 이거지.

"보나마나 불법 무허가 병원일 거야. 잘 찾아보라고! 아마 이 근처 병원이긴 할 거니까. 흐흐, 돌팔이 새끼들이 갈비뼈 고쳐준답시고 몇 개 빼먹지 않았을지 모르겠네. 왜, 내가 아는 병원이라도 소개해줄까? 그 병원에 가진 않았겠지만 원래 돌팔이는 돌팔이가 가장 잘 아는 법이거든. 그치들 네트워크 따라가면 어디 있는지 바로 나올 거야."

"됐습니다."

이 주인장 말 참 많네.

투머치토커가 따로 없어.

'갈비뼈 골절······'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내가 알기로 갈비뼈 골절에는 특별한 치료 방법이 없다.

아예 부러졌으면 바로 수술 들어가야 하고, 실금만 갔으면 진통제 먹으면서 누워 있는 게 전부.

직접 상점을 봉인하고 집에 갔다는 것으로 보아 실금만 갔을 확률이 높다.

그럼 집을 찾아야 한다는 얘긴데······

주인장 말을 듣고 판단하기로는 굉장히 힘들 것 같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머리를 굴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활기에 찬 듯 하면서 침체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시장.

문을 닫은 점포들.

저 멀리서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덩치들.

퍼뜩, 생각 하나가 공기 방울처럼 떠올랐다.

"혹시 말입니다."

"뭐가?"

"시장이 안정되면 저기 사장님도 돌아올까요?"

"아암, 돌아오지. 우리 같은 하루살이 인생이 장사 안 하면 뭐해? 다리 몽둥이가 부러져도, 중풍에 걸려도 문은 열고 봐야 한다고. 장사할 여건만 되면."

"그렇겠죠."

역시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고물상 사장이 약국에서 진통제만 타 먹었을지, 진짜 병원에 갔을지, 불법 무허가 병원에 갔을지 누가 알아.

시장부터 안정시켜놓고 생각하자.

고물상 천막 더미에 앉아 사방을 훑어보았다.

특히 무리지어 돌아다니는 덩치들을.

크게 세 부류.

하나는 익숙했다. 그냥 평범한 깡패들이었다.

"뭘 봐?"

"콱 그냥!"

"눈 안 깔아?"

야구 방망이와 골프채를 들고 건들거리고는 있으나 위축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증거로, 바로 앞에서 한 여자를 필두로 걸어오는 무리를 보고는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돌아가 버린다.

대머리 여자.

이쁘장하게 생겼는데 눈꺼풀, 코, 귓바퀴, 입술, 심지어 두 갈래로 갈라진 혀에 빼곡하게 심어놓은 피어싱이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왼손 중지만 합금 의체로 대체했고, 오른손에는 흉악한 가시 쇠장갑을 꼈다.

[N 쇠전갈]

독약파 부두목.

원래는 자동 산탄총을 갈겨 대는데 총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시장에서 총질하다가 상인들 죽어 나가면 대형 사건이지.

아무리 뇌물을 많이 찔러줘도 경찰이 움직이기 마련.

"비켜, 병신들아!"

"으, 으힉!"

"우리는 철권파······"

"꼬우면 니네 보스 데려오던가!"

쇠전갈이 철권파 조무래기들을 걷어차며 지나갔다.

그 뒤를 이어 나타난 것은 흰색 짧은 망토를 입은 무리.

그것 말고는 삼각 팬티가 전부였다.

와, 세상에!

저걸 내 눈으로 직접 보네!

눈이 진짜 썩는 것 같다.

생각해 봐라.

근육질 덩치들이 겨우 어깨만 가릴락 말락한 짧은 망토랑 삼각 팬티 한 장 달랑 입고 있다고.

스마트폰 화면으로 볼 때도 토 쏠렸는데 직접 보니 더 역겹고 징그럽다.

"좋은 말씀 전하러 나왔습니다."

"형제님. 태초의 여신께 귀의하심이 어떠십니까?"

"싫으시다고요? 그럼 종교세를 내셔야 합니다."

"세금 내셨다고요? 어이쿠, 그건 세금이지 종교세가 아닙니다. 왜 모르십니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 아시잖아요?"

아주 개판이네.

선두에 선, 삼각 팬티도 아니고 빨간 티팬티를 입은 남자가 가장 패악을 부렸다.

말이 안 먹히자 괴상한 기도문을 외며 손을 뿌린다.

거기서 마력 파장이 발해지자 상인들이 급히 마약을 빨았다.

세뇌당해 돈을 바치느니 약 먹는 게 낫다고 본 모양이다.

티팬티 남자가 혀를 찼다.

"다 헛되고 헛된 것을······ 결국 여러분은 태초의 여신께 몸도 마음도 다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흐흐흐!"

"히히히!"

다들 웃었다.

덩치들도 웃고 상인들도 마약에 취해서는 웃었다.

[N 노출광]

처음 만난 사제 계열 초인이 왜 이딴 놈이야.

더는 못 보겠다.

나는 성큼 몸을 일으켰다.

알게 모르게 시선이 집중된다.

내가 여태 켜놓고 있던 흑염. 암흑 시장의 현란한 조명 탓에 잘 안 보인다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반인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 쇠전갈도 노출광도 은연중에 나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쪽으로 쭉 걸어갔다.

아까 돌아다니면서 확인했던 방향.

시장 거의 반대편이다.

유독 상인도 손님도 안 보이고 점포도 거의 닫은 그곳에 한 남자가 있었다.

"야."

"으······ 뭐야, 시발. 아파 죽겠는데."

잡동사니를 대충 침대처럼 쌓아놓고 그 위에 누운 남자.

전신이 퍼런 멍투성이였다.

팔이 하나 부러졌는지 부목을 대어놓았다.

호위하던 갱단원이 날 보고는 흠칫 놀란다.

내 얼굴을 알아본 것.

나는 발로 남자를 툭툭 건드렸다.

"엄살 피우지 말고 일어나."

"시발, 어떤 새끼가······ 헉!"

짜증 난다는 듯 날 돌아본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당연히 알아봐야지.

이거 그놈이잖아.

인력사무소에서 김철권과 대면했을 때, 먼저 나서서 나대다가 내가 쇠 파편 셀프 수술하는 거 보고 도망쳤던 그놈.

"언제까지 쳐 누워 있을래?"

"어, 그, 그게······"

눈치를 보다 비칠비칠 일어나는 간부.

어색하겠지.

내가 자기 상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적은 아닌데 동맹이라고 할 수도 없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할 말을 했다.

"야."

"뭐, 뭡니까?"

"우리 일 하나 같이 하자."

"무슨 일을요?"

"저놈들. 여기서 쫓아내자고."

멀리 보이는 쇠전갈과 노출광을 가리켰다.

순간.

철권파 간부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암흑 시장 -2-

"끄응차!"

간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진심이시지요?"

"뭐가."

"저놈들 쫓아내자는 거요."

거의 눈을 희번덕거리며 묻는 간부.

나도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시장 분위기가 이 꼴이 돼서 쓰겠어? 물건도 제대로 못 사겠다."

"흐흐흐. 정말이시지요? 정말 도와주시는 거지요?"

"어. 그런데 나중에 김 사장한테 내가 도와줬다는 얘기는 하고. 나도 무료 봉사하고 싶진 않거든."

"암요, 암요. 지당하신 말씀이지요. 세상에 공짜가 어딨답니까? 저희 큰형님은 절대 인색하신 분이 아닙니다. 초인님께서 도와주셨다는 말씀 들으시면 두 손 무겁게 한 번 찾아가실 겁니다."

간부는 부쩍 힘이 나는 모양이었다.

성한 오른쪽 팔로 자기 가슴을 몇 번 두드리더니 수사자처럼 고함을 질렀다.

"야! 새끼들아! 다 모여봐!"

쩌렁쩌렁 시장 전체로 퍼져 나가는 소리.

주눅 들어 어슬렁거리던 철권파도, 위협적으로 으스대던 독약파도, 헌금하라며 세뇌하던 나체파도 휙휙 시선을 던진다.

가장 먼저 온 것은 철권파 조무래기들.

반쯤은 반항하는 눈으로, 반쯤은 두려워하는 눈으로 간부를 쳐다본다.

"형님. 몸도 안 좋으신데 몸조리나 잘하시지 왜 그러십니까?"

"혹시 큰형님께서 연락 하셨습니까?"

"새끼들이, 닥치고 이리 와 봐. 여기 이분 알아보겠냐?"

모여든 갱단원들이 어리둥절해서는 날 쳐다본다.

그러다 누군가 내 정체를 깨닫고 짧게 신음을 뱉었다.

"어, 며칠 전에 그, 단검파 뭉갰던 그······"

나는 짧게 머리만 끄덕였다.

옅은 술렁임이 갱단원들 사이에서 번진다.

간부가 흐흐 웃으며 말했다.

"여기 초인님께서 딱 오늘만 우리를 도와주기로 하셨다. 누구신지는 다 알지? 큰형님께서도 친구처럼 대하는 분이야! 큰형님처럼은 아니어도, 나 보듯이 하란 말이야. 알아들어?"

"예에, 예에."

"사, 살았다······"

"그럼 저놈들이랑 한판 뜨는 겁니까?"

간부가 대답하는 대신 나를 쳐다본다.

나는 팔짱을 끼고 슬슬 걸어오는 쇠전갈과 노출광을 주시했다.

'싸우는 건 좀 그렇지.'

이미 상인들에게 인심을 잃은 다음.

내가 보호비 받아먹을 것도 아니고 나쁜 인상을 심어주면 나만 손해다.

"못할 것도 없지."

그렇다고 얕보일 수는 없다.

또, 정말로 싸우면 쇠전갈이나 노출광보다 내가 훨씬 더 유리하다.

"오호?"

내 말을 들은 쇠전갈이 한쪽 눈을 치켜떴다.

"자신 있으신가 봐?"

"당연하지."

"날 이겨 보시겠다고?"

"제대로 들었네."

쇠전갈이 기괴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서슬에 은빛 피어싱 수십 개가 뱀 비늘처럼 꿈틀거린다.

아울러 전갈 꼬리처럼 까딱거리는 왼손 중지.

옆에선 노출광이 음험한 웃음을 토했다.

"이거야 원, 아무리 봉천동 밖에서라곤 하지만 대놓고 싸우자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참 상쾌합니다그려. 그쪽 초인분께서는 저랑 여기 이 미녀분이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나 봅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

"뭐라!"

노출광이 벌컥 화를 냈다.

일순 마력이 발산되며 짧은 망토가 사방으로 휘날린다.

그 아래 드러나는 건 투실투실한 지방 덩어리.

쇠전갈이 질색하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왼손만큼은, 왼손 중지만큼은 내게 꽂혀 있었다.

누가 갱단 아니랄까 봐 욕부터 날리네?

"싸우고 싶다면 받아주지."

쿠웅!

골프백을 던졌다.

아까 간부가 누워있던 잡동사니 침대에다가.

뭐에 부딪혔는지 둔탁한 소리가 크고 웅장하게 울렸다.

쇠전갈과 나체광이 경계하는 눈으로 골프백을 쳐다본다.

둘은 알아챈 것이다.

골프백에 총이 최소한 두 자루 이상 들어있다는 걸.

"이게 좋겠네."

"어어?"

나는 멍하니 서 있던 철권파 갱단원에게서 쇠파이프를 뺏어 들었다.

쇠전갈이 주먹을 움켜쥐고 나체광은 두 손을 합장한다.

"해보자는 거지?"

"흐흠, 그리도 헌금을 하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받아드리지요!"

무시한다.

정신을 집중하여 세 가지 특성을 활성화한다.

[마력 방어막]

[흑염]

[일점]

마력 방어막이 쭈우욱 불어났다.

흑염이 마력 방어막 표면에서 여전히 이글거린다.

쇠전갈과 나체광의 눈이 휘익 커졌다.

내가 쇠파이프를 찌른 것은 그때.

쌔애액!

둔하고 공기 저항이 큰 쇠파이프.

그런데도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렸다.

그와 함께 모두 목격하게 된다.

쇠파이프 끄트머리가 차갑게 번뜩이는 것을.

또, 그 빛이 허공에 남아 하나의 궤적처럼, 혹은 하나의 점처럼 보이는 것을.

"저, 저건!"

"으으음!"

쇠전갈과 나체광이 나란히 경호성을 질렀다.

마력 방어막에 일점 조합.

절대 얕볼 수 없다.

총을 쓰기 힘든 지금 조건에서는 더더욱.

어때?

너희가 비벼 볼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무심히 쳐다보자 쇠전갈과 나체광이 자기들끼리 눈을 마주쳤다.

낭패했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어디, 판단하기 쉽게 도움을 좀 줄까.

"솔직히 말할까? 난 철권파 도움도 필요 없어. 나 혼자서도 너희 둘만 아니라 너희 패거리 전부를 쓸어버릴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아무리 당신이 강한 초인이라고 해도 우리 모두를 어쩔 수는 없어!"

"과연 그럴까?"

나는 입고 있던 츄리닝 지퍼를 내려 속을 보여주었다.

츄리닝 안에 받쳐 입은 것은 방호복.

방탄 방검이 다 되는, 단검파를 쓸어버릴 때 입었던 바로 그것.

그런 다음 골프백을 툭툭 건드렸다.

자연히 둘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초인 대 초인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뭘까?

장비다.

특히 저레벨에서는 더더욱 장비가 중요하다.

가죽 재킷에 가죽 바지만 입은 쇠전갈?

성물 하나 들고 벌거벗다시피 한 나체광?

산탄총 꺼내서 갈기면 1초 컷이다.

쇠전갈이 뱀처럼 눈을 치떴다.

"그러고 나면 당신도 무사하진 않을걸."

"그것도 맞는 말이지. 어디 깡촌 가서 살거나 외국으로 떠야 하는데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아."

땡그랑!

나는 쇠파이프를 내던지며 어깨를 으쓱였다.

마력 방어막과 흑염도 몸 가까이 거둔 후.

쇠전갈과 나체광이 여전히 불편한 얼굴로 내 검은 불꽃을 주시했다.

"그래서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

"제안?"

"그래. 정정당당히 일대일로 붙어보자고. 이긴 쪽이 여길 먹는 거다. 어때?"

"뭐? 내가 미쳤어? 전사 계열 초인이랑 일대일로 붙게?"

"그걸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나?"

"싫으면 막장까지 가야지. 당신네들은 지옥으로 꺼지고 나는 외국으로 튀고. 어때? 나쁘지 않은 조건이지?"

둘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때, 나체광 옆에 달라붙어 있던 갱단원이 나체광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뭔가 놀랄 말을 들었는지 나체광이 눈을 가늘게 뜬다.

그걸 훔쳐 들은 쇠전갈도 두 갈래 갈라진 혀로 자기 입술을 핥았다.

"이야, 알고 보니 유명하신 분이었네?"

"흐흠. 목 뻣뻣할 만한 인간이셨고만. 혼자서 단검파를 끝장내셨다고?"

"그 유명한 성녀한테 세례도 받으셨고."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둘이 일제히 이를 갈았다.

독약파와 나체파 갱단원들 손에도 힘이 들어간다.

상인들은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누구는 아예 짐을 싸는 중.

고물상 사장이 그러했듯 자기들한테 불똥이 튈까 봐.

잠시 뜸을 들인 후, 나는 선심 쓴다는 어투로 말했다.

"일대일은 자신 없냐? 그럼 종목을 조금 바꾸지. 각자 가장 자신 있는 종목으로 승부하기로."

"자신 있는 거?"

"그래. 너희 독약파는 독이랑 마약 제조가 장기라지? 뭐든 내놔 봐. 기꺼이 먹어주지."

"먹는다고? 진심이냐?"

"그 정도는 해야 균형이 맞지. 왜, 그것도 자신 없어? 그럼 꺼져."

"후후후."

쇠전갈이 음충맞게 웃었다.

입꼬리만 양쪽으로 비죽이 잡아당겨서,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운 채로.

"좋아, 좋아. 그런 조건이라면 안 받을 수가 없지. 내가 약병 하나를 줄 테니까 그걸 마셔. 버티면 네 승리고 기절하거나 죽으면 내 승리다."

"오케이. 그렇게 하지."

"초, 초인님!"

간부가 놀라서는 날 부른다.

하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독약파에서 유명한 독은 셋.'

회색 사신, 연인의 키스, 꽃놀이패.

'꽃놀이패를 쓰겠지.'

회색 사신은 독약파 보스 비장의 독이다.

쇠전갈도 한 병은 갖고 있지만 목숨이 위태롭기 전에는 쓰지 않을 것이다.

연인의 키스는 죽을 때 쾌락에 저며 죽는다.

쇠전갈 성격상 나를 고통스럽게 죽이고 싶어 할 테니 꽃놀이패일 확률이 가장 높다. 꽃놀이패는 신열과 비슷할 정도로 고통에 몸부림치게 만들거든.

"누가 먼저 할 거지?"

"당연히 나지."

"흠, 레이디 퍼스트라지요? 제가 양보하겠습니다."

"레이디 퍼스트는 지랄."

쇠전갈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마다하지 않았다.

포식자처럼 나를 훑어보며 허리에 찬 가방을 열었다.

"자, 여기."

빙고.

투명한 약병 속 까만 액체가 은가루를 머금은 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내가 약병을 받아들자 쇠전갈이 한쪽 눈을 찡긋한다.

"살아남으면 함 대줄게. 잘해 봐."

거기서 그치지 않고 왼손 강철 중지를 자기 오른손에 대고 퍽퍽 꽂는 시늉을 한다.

토 나온다 진짜.

얼굴이 예쁘면 뭐해?

피어싱 때문에 괴물로밖에 안 보이는데.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싫어."

"왜?"

"못 생겨서."

"뭐? 이 미친 새끼가?"

쇠전갈이 얼굴을 팍 긁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가 전력으로 주먹을 날린 것은.

뻐억!

찰진 타격음.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허연 옥수수 알갱이 몇 개.

붕 나가떨어지는 쇠전갈.

그리고 피!

어때?

근력과 강타의 조합이.

"어헉?"

"이 새끼가!"

"감히 누님한테!"

독약파가 발작하며 무기를 치켜든다.

덩달아 내 뒤에 늘어서는 철권파.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간부가 눈치 빠르게 내 골프백에서 총을 꺼내 오자 확 분위기가 기울어진다.

무려 세 정.

산탄총, 소총, 여기에 유탄 발사기까지.

쇠전갈이 부축 받아 일어서서는 침을 퉤 하고 뱉었다.

침과 함께 피, 그리고 부러진 치아 조각이 섞여 바닥을 더럽혔다.

"시발······ 해보자는 거야?"

"아니. 내가 독을 받았으니 한 대 날려준 거지. 말했잖아? 각자 장기대로 대결하자고. 내 장기는 주먹이야."

"옘병. 두 대 맞으면 진짜 죽겠네."

턱이 아예 뒤틀려 있었다.

골절도 좀 있는지 피멍과 함께 얼굴이 퍽퍽 부어오른다.

쇠전갈은 이를 갈면서도 성질을 부리지는 못했다.

내 뒤에서 자기를 향해 겨눠진 총 때문이었다.

아무리 깡이 세도 총 앞에선 겸손해지는 법이지.

"그래서 마실 거야, 안 마실 거야?"

"마시지."

뽕!

주저하지 않고 뚜껑을 땄다.

열자마자 시큼하게 올라오는 악취.

본능의 경고를 무시하고 단번에 들이켰다.

쇠전갈의 눈에 득의한 빛이 스치고, 독약파 갱단원들도 다 끝났다는 듯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나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독 저항][인내][활기]

[명상][집중][흑염]

사실 독 저항만으로는 부족하다.

독약파의 3대 독은 독과 마약을 섞어서 만들거든.

하지만 연인의 키스라면 모를까 꽃놀이패는 독이 9 마약이 1 정도 비율이다.

지금 특성으로도 충분히 버틴다는 뜻.

부글부글.

곧 신호가 온다.

불닭 먹고 잔 다음 날처럼 뱃속에서 천둥이 치기 시작한다.

이어서 온몸에 열꽃이 올랐다.

츄리닝과 방호복으로 가린 피부는 물론 얼굴에도 활짝 열꽃이 피었다.

쇠전갈이 안 어울리게 화사한 웃음을 짓는다.

"어때? 슬슬 느낌이 오지? 지금이라도 항복하시는 게 어때? 무릎 꿇고 멍멍 짖은 다음에 내 발과 이거를 핥으면 지금이라도 살려줄게. 해독약이 있다구."

도발하듯 왼손 중지를 내미는 쇠전갈.

아깐 대충 넘어갔는데 손버릇이 아주 아름다운 새끼네.

조금 이따 두고 보자.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명상 특성을 활성화한다.

정신을 집중하여 내 안에, 내 심장에, 또 전신으로 퍼지는 독 기운에 집중한다.

쉽지는 않았다.

마력으로 독과 싸우고 정화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나.

미끌미끌한 계란에 참기름을 바르고, 역시 참기름 바른 쇠젓가락으로 살짝 집어서 강속구를 던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독 저항과 인내가 독 기운을 억눌렀다.

명상과 집중이 날 도왔다.

조금씩 약해지는 몸은 활기가 보충해주고 있었다.

핑-

머리가 조금씩 어지러워졌으나 잘 참아냈다.

꽃놀이패에 소량 섞인 마약 기운만으로는 날 침습하지 못했던 것.

사실 정신에 작용하는 기능은 약하고 심장 박동과 혈류 속도 때문에 첨가한 마약이었으니까.

되레 이 마약 성분은 내게 이득이 되었다.

[마약 저항] 획득.

생각대로다.

나는 마력으로 독 기운을 모두 그러모은 다음 왼손에 밀어냈다.

열린 골프백 사이에서 장검을 빼어 왼손바닥을 긋자 시커먼 액체가 분수처럼 터진다.

"헉!"

"저, 저게 진짜 된다고?"

"지가 무슨 무협 소설 주인공이야?"

"저런 건 영화에서만 봤는데······"

액체에서는 시큼한 냄새가 줄기줄기 올라왔다.

확인할 필요조차 없다.

꽃놀이패 독이 분명했다.

조금 전만 해도 의기양양해서는 날 보던 쇠전갈.

이제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완전히 백지장처럼 새하얘져서는 날 쳐다본다.

"또 할 거냐?"

"뭐?"

"또 할 거냐고."

내가 여지를 열어주자 빠르게 혈색이 돌아온다.

무심결에 자기 왼쪽 엉덩이를 짚는 쇠전갈.

아, 그래.

너 거기에 잿빛 사신을 담아두고 다녔지?

하지만 쇠전갈의 선택은 잿빛 사신이 아니었다.

자기 보스의 엄명을 기억해냈는지 손을 한 번 움찔하고는 허리 가방에서 다른 약병을 꺼낸다.

이번에는 분홍색 액체.

로제 와인처럼 상큼해 보이는 액체가 꽃잎처럼 찰랑이고 있었다.

"이, 이게 마지막이야!"

쇠전갈이 발악하듯 외쳤다.

"이번에도 이기면 패배를 인정하겠어!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못 할걸? 아까 그 약보다 두 배는 더 센 약이라고!"

어, 나도 알아.

독과 마약 성분이 예술적으로 어우러진 극독.

그것이 잿빛 사신과 연인의 키스니까.

하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뚜껑을 열고 여유롭게 달콤한 냄새를 만끽한 후 천천히 독을 마셨다.

초조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어쩐지 유쾌했다.

[독 저항][마약 저항][인내]

[명상][집중][흑염]

연인의 키스는 오히려 쉬웠다.

독성이 강하면 뭐해?

내 특성이 거기 맞춰서 최적화되어 있는데.

아까 내 특성이 소프트 카운터였다면 지금은 하드 카운터.

덕택에 꽃놀이패를 마셨을 때보다 더 빨랐다.

아직 아물지 않은 왼손바닥으로 분홍색 액체를 쏟아내자 쇠전갈의 눈동자가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마, 말도 안 돼!"

"내 차례지? 딱 대라."

"히이익!"

쇠전갈이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가죽 재킷을 잡고 쭉 끌어당겼다.

"누, 누님!"

"누님을 놔줘!"

독약파가 시끄럽게 굴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소리만 시끄럽게 꽥꽥 지르지 행동으로 나서는 놈은 없었다.

갱단에서 무슨 의리를 찾겠어.

대신 맞으면 어디 한 군데 망가져도 단단히 망가질 판에.

"뭐, 뭘 하려는 거야!"

쇠전갈이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저 한 번 웃어주었다.

그리고 잡았다.

쇠전갈의 왼손 중지를.

아까부터 버릇없이 혼자 곧추서던 그놈을.

"아, 안 돼에!"

내가 뭘 하려는지 깨달았는지 새된 비명을 지른다.

가시 쇠장갑으로 날 후려치지만 글쎄, 별로 아프지 않았다.

이미 마력 방어막을 장착해서 활성화하고 있었거든.

"다음부턴 사람 보고 손장난 쳐라. 알았어?"

대답 따윈 필요 없다.

강철 중지를 단숨에 뽑아버렸다.

단순히 손에 연결된 것이 아니라 그 부품이 손을 가로질러 손목까지 이어진, 신경과 혈관까지 단단히 결합된 물건.

강철 손가락과 손 부품, 핏줄, 신경, 심지어 손이 조각나면서 살점과 뼈 무더기가 몽땅 딸려 나왔다.

"끄아아아악!"

처절히 메아리치는 비명.

심약한 상인 몇몇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암흑 시장 -3-

"옘병······ 옘병······"

쇠전갈이 식은땀을 비오듯이 흘린다.

부하들이 보고 있어서일까?

울지는 않는다. 욕을 하고, 바닥을 긁고,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 피가 날 뿐이다.

떠엉!

뽑은 강철 손가락을 집어던졌다.

"더 해볼 거냐?"

휘익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쇠전갈.

두 눈에 원독과 분노, 증오가 진득하니 맺혀 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수락해서 잿빛 사신을 먹일 듯 하면서도 차마 입을 떼지 못한다.

위계 관계가 확실한 갱단.

아무리 No. 2라고 해도 보스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너······ 이름이 뭐냐!"

그걸 이제 물어봐?

나는 팔짱을 끼고 쇠전갈을 굽어보며 대답했다.

"김전사다."

"김전사, 김전사, 김전사!"

쇠전갈이 내 이름······ 김전사의 이름을 입에서 굴리며 증오를 불태웠다.

"두고 보자, 김전사! 언젠가 내 손가락을 네 심장에 꽂아주겠어!"

"어, 그래라."

나는 코웃음만 한 번 날려주었다.

"진부한 엑스트라 새꺄, 안 덤빌 거면 꺼져."

"크흑!"

지도 지가 진부한 말을 했다는 자각은 있나 보지?

쇠전갈이 몸을 일으켰다.

여태 구경만 하던 독약파 놈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누님!"

"저한테 업히십쇼!"

"얼른 병원에 가셔야 합니다!"

"이거 놔! 내 발로 간다! 저리 꺼져!"

쇠전갈은 업히는 것도 부축받는 것도 거부하고 자기 발로 걸어 나갔다.

그 뒤를 따라 독약파가 썰물처럼 빠졌다.

남은 것은 실시간으로 안구 테러 중인 나체파뿐.

나는 노출광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제 그쪽 차롄데?"

"흐흐흥, 그러게 말입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독산동 쇠전갈이 저리 비참하게 도망칠 줄이야. 김전사 초인님이라고 하셨지요? 앞으로 뒤통수 조심하셔야겠습니다."

"그거야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언제는 안 그랬나.

거래소에서 마력핵 팔자마자 노루 패거리한테 습격당했었는데.

결국 믿을 거라곤 나 자신의 무력뿐.

그러려면 지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력 연공법을 구해야 한다.

노출광이 과장되게 팔을 벌렸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태초의 여신께 귀의하심이 어떠십니까? 김전사 초인님께서는 얼굴도 잘생기셨고 몸도 참 좋으십니다. 지극히 남자다운 상처도 있으셔서 태초의 여신께서 아주 흡족해하실 겁니다. 태초의 여신께 귀의하시기만 하면, 저희 조직과 교단에서 전력을 다해 초인님을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흐흐, 어쩌면 저보다 상급자로 시작하실 지도 모르지요."

하여간 사제 계열 초인놈들은 죄다 교세 확장시키지 못해 안달이 났다니까.

나는 정면으로 팩트 폭력을 가했다.

"내가 왜 니네 교단에 들어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야, 잘 생각해 봐. 내가 교단에 들어갈 거면 당연히 크고 강한 교단에 들어가야지, 7대 교단도 아니고 그 아래 2티어 교단도 아니고 하꼬 중의 하꼬, 아니, 사이비밖에 안 되는 너희 교단에 왜 들어가냐고. 안 그래?"

말을 하면서 검은 불꽃을 쿡쿡 찔렀다.

마음만 먹으면 옛 아버지 교단에 들어갈 수 있는데 왜 너희 교단에 들어가겠냐는 뜻.

화악, 검은 불꽃이 타오르면서 노출광의 얼굴에도 붉은 불꽃이 피어났다.

"가, 감히!"

"왜? 사이비라고 하니까 화나? 너희 사이비 맞잖아. 베스트팔렌 조약에 기재된 100좌 신격. 거기 없으면 사이비인 거 몰라?"

"이이익! 이 무엄한 자가!"

노출광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그러더니 놀랍게도 금방 평정을 되찾는다.

"과연 불신자이십니다. 이리 오십시오. 여신의 자비와 사랑을 그 볼품없는 두뇌에 콰악 찍어드리겠습니다."

"하긴 그게 너희 장기지. 좋아, 받아주마."

노출광의 특성은 별것 없다.

[정신 지배]

전투에선 꽤 쓸모 있는 특성이었다.

적 중 하나를 우리편으로 만들어 버리니까.

현실이 되어버린 이 세계에서는 더 강력할 테고.

철권파 간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보았다.

"초인님. 조심하십쇼. 저놈 저거 어설퍼 보여도 대단히 강한 놈입니다."

"아까 보니까 별것 아니던데?"

"직접 손을 대고 신성력을 쓰는 것과 멀리서 쓰는 건 차이가 큽니다."

게임에선 별 차이 없었는데 여기선 아닌가 보네.

상관없다.

나는 당당하게 걸어가 노출광 앞에 섰다.

그러자 노출광이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지껄인다.

"무릎을 꿇으십시오. 강하고도 잘생긴 형제여."

"개소리 말고."

"후······ 여신의 은총을 영접하는 일이거늘, 어찌 이리도 무도하단 말인가."

김전사의 키는 180을 살짝 넘는다.

반면 노출광은 키가 작아서 160 정도.

팔을 뻗고도 내 정수리에 손이 안 닿아서 노출광은 까치발을 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기대 어린 시선과 걱정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특성을 교체했다.

[신성 저항][명상][집중]

[인내][마력심][흑염]

이 정도면 N급 초인의 정신 공격따위 충분히 대항할 수 있다.

그래도 방심하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느껴진다.

정수리를 통해 이질적인 힘이 투사되는 것이.

거룩하고도 압도적인 그림자가, 높고도 높은 존재감이 내 정신에 드리워지는 것이.

무릎 꿇고 싶어진다.

그녀의 발등에 키스하고 싶다.

그 아름다움을, 그 고귀함을, 그 영광스러움을 찬미하고 싶다.

옷을 벗어서.

나 또한 내 몸을 드러내어서.

발정 난 개가 되어 이 거대한 그림자에 몸을 비비는 것으로 찬양하고 감사하고 예배드리고 싶어진다.

생각보다 강하다.

분명히 신성 저항과 인내가 날 보호하고 있음에도 이 지경.

신성력에 노출된 상인들이 왜 약을 빨았고, 게임에선 적들이 예외 없이 정신 지배 당했는지 알겠다.

나는 혀를 꽈악 깨물었다.

치과에서 마취 주사 맞은 듯 어릿하고 둔한 통증과 함께 비릿한 액체가 뜨끔하니 퍼진다.

'정신 차리자.'

성녀의 세례도 이겨낸 몸.

고작 N급 2레벨 초인에게 당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내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간다.

특히 대뇌에, 중추 신경계에 집중했다.

마력 회로는 심혈관계와 신경계를 따라 분포하는 법.

마력심에서 출발한 마력이 로켓처럼 치솟는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대뇌에 꽂히고, 중추 신경계 전체로 퍼지고, 요소요소 성채를 건설하고 길고도 긴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상상했다.

머리가 불타는 것 같다.

뇌리가 새하얗게 변하고, 맹렬한 열기가 뇌척수액을 타고 등골까지 질주한다.

어렵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미 내게는 경험이 있었다.

또, 나를 보조할 특성도 있었다.

어차피 승리는 나의 것.

뜨겁고도 뜨겁던 머리가 갑자기 차가워진 순간, 격한 힘의 역류가 발생하며 여태 내 정수리에 손을 대고 있던 노출광을 덮쳤다.

"크허억!"

노출광이 피를 뿜으며 튕겨 나갔다.

거의 10미터는 넘게 나가떨어진 노출광.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서는 모두 피를 뿜으며, 경악에 차서는 날 쳐다보았다.

"이, 이럴 수가! 어떻게, 어떻게 여신의 권능을 튕겨낸단 말이냐!"

정신 지배에 크게 자부심이 있었나 봐?

하지만 말이다. 정신 지배도 무적은 아니거든.

정신 보호 관련 특성 하나만 있어도, 장비 하나만 있어도 성공률이 확 떨어지는 게 정신 관련 능력이다.

세뇌가 무조건 성공하면 아케인 서울에서도 정신 계열 초인만 썼게?

더구나 이번 겨루기로 내가 얻은 것도 있었다.

[결의] 특성.

정신 방어에 특화되어 있으며, 추가로 마법 피해를 감소시켜 준다.

좋아. 하나씩 하나씩 잘 쌓이고 있어.

"내 차례지?"

주먹을 모아쥔다.

특성을 교체한다.

내 주먹에 핏줄이 일어나고 츄리닝이 위협적으로 꿈틀거렸다.

노출광이 기겁해서는 소리쳤다.

"자, 잠깐! 하지 마십시오! 형제님! 제가 위로금을 드리겠습니다!"

"위로금?"

"예! 예! 형제님도 손 아프게 이러실 필요까진 없지 않으십니까! 제가 1억, 아니, 2억, 아니, 3억을 드릴 테니까 이번만 참아 주십쇼!"

와, 태세 전환 봐라.

사제 계열 초인이라 돈 많다 이거지?

3억이면 분명히 큰돈이다.

한 대 때리지 않고 돈 받으면 그게 이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머리를 끄덕이는 대신 주먹을 휘둘렀다.

뻐어어억!

"꾸에엑!"

턱을 후려갈기자 핏물이 일직선으로 쭉 솟구쳤다.

눈을 까뒤집는 노출광.

그 투실투실한 몸이 부들부들 떨다가 축 늘어졌다.

나는 은은히 통증이 올라오는 손을 탈탈 털었다.

"3억 가지고는 안 되지."

한 10억 넘게 주면 몰라.

처음부터 개패고 싶었다고.

단망토에 티팬티.

으, 꿈에 나올까 두려운 몰골이다.

"안 꺼져?"

"가, 갑니다!"

"사제님 챙겨!"

"으······ 주교님께 뭐라고 말씀드리지."

나체파가 노출광을 들고 사라졌다.

철권파 간부가 그 뒤에 대고 성한 쪽 중지를 들었다.

"꼴 좋다! 개 같은 새끼들. 으하하하!"

"초인님, 고맙습니다!"

"김전사 초인님 만세!"

"와하하하! 우리가 이겼다!"

내가 나서기 전만 해도 비 맞은 패잔병 꼴이던 철권파.

이제는 날 둘러싸고 만세를 부른다.

내가 철권파 소속이었으면 아예 헹가래까지 쳤겠어, 아주.

그런데 주위에서 구경하던 상인들의 표정이 영 어둡다.

그럴 수밖에 없다.

철권파는 악질적인 보호비 수금으로 유명하니까.

예전에 내가 살던 고시원 주인 아줌마 죽었을 때를 생각하면 알 수 있다.

그때도 주인 아줌마가 보호비 내야 한다고 돈에 환장해 있다가 칼침을 맞았지.

"이봐."

"예! 초인님!"

간부를 부르자 바짝 군기 든 목소리로 대답한다.

"이번 일, 솔직히 내가 다 한 거 맞지?"

"어······ 그야 그렇습니다. 초인님 없었으면 여기 시장은 저희가 못 먹었죠."

간부가 약간 불안한 기색을 내비친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김철권에게 말은 잘해주기로 했으나 그걸로 입 씻으면 곤란하지.

유형의 이익은 아니더라도 무형의 이익은 받아내야 한다.

"나한테도 여기 시장 지분이 있어. 그렇지?"

"어, 어흠, 하지만 아까는······"

"앞으로 일은 생각 안 해? 지금은 독약파는 독산동에, 나체파는 봉천동로 돌아갔지만 천년만년 그럴 것 같아? 다시 여기 시장 욕심내서 들어오면 그때는 어쩔래?"

법정동 구역을 벗어나는 건 경찰 눈치가 보여서 여간해서는 하지 않는 일이다.

동을 넘어 구로 진출하려면 그만큼 체급이 되어야 한다.

파출소가 아니라 경찰서에, 주민 센터가 아니라 구청에 뒷돈을 팍팍 찔러주고 인맥도 확보해야 하니까.

그래도 시장 하나쯤은 가능하지.

"어, 어,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저희 큰형님께서 생각이 있으실 겁니다!"

"그래서 여태 여길 방치 했고?"

"그야······"

"솔직히 말해서 김 사장은 아직 신림동을 먹을 깜냥이 안 돼. 2레벨 초인이 김 사장 본인밖에 없잖아."

그러면서도 단검파와 비등비등 싸우던 건 대단하긴 하다.

대신 신림동 알짜는 단검파가 다 갖고 있었지.

여기 신원 시장처럼.

경찰 구역 바깥 빈민가는 사실 영역은 넓어도 돈은 얼마 안 된다.

나는 검지를 바짝 세워 아래쪽을, 지면을 가리켰다.

"내 요구를 들어주면 여기, 신원 시장에서만큼은 너흴 도와주지."

"도와주신다고요?"

"그래. 시장 내부 일은 너희가 알아서 해. 대신 정말 골치 아픈 분쟁은 개입할 수 있어. 신림동 바깥 갱단이 들어오면 같이 싸워줄 수도 있고."

불가침을 넘어선 제한적인 동맹.

나쁘지 않다.

나도 어둠의 경로를 통해 해결할 일이 있고, 아무리 밑바닥 조직이라도 알아두면 도움이 될 테니.

간부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신원 시장에 제한된 조건이라 해도 동맹은 동맹.

머리 굴리는 소리가 내 귀까지 들린다.

간부는 지금 이 동맹을 통해 나와 더 밀접한 관계를 맺을 생각을, 그래서 철권파에 가입시킬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나 정도로 전투력이 증명된 초인을 가입시킨다?

그건 정말이지 어마어마하게 큰 공이다.

비록 서열은 한 단계 내려가겠지만 1레벨 초인 간부 중에선 입지가 확 강해지겠지.

"좋습니다.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간단해."

나는 지면을 향했던 손가락을 들어 주변을 가리켰다.

그리고 원을 그린다.

시장 전체를 향해.

혹은 주위에 늘어선 상인들을 향해.

"보호비, 예전에 단검파가 받은 만큼만 받아."

이건 평판작이다.

철권파가 상인들 등골을 가혹하게 빨아먹는다고 생각해 봐.

그 원망이 철권파한테만 가겠어?

나한테도 오지.

그러면 꼭꼭 숨겨둔 보물은 나한테 팔려 들지 않을 것이다.

"예? 그러면 저희가 남는 게 없는데요······"

"없기는 왜 없어. 다 알고 하는 말이야."

"끄으응."

"싫어? 싫으면 말고. 그런데 좀 섭섭하다? 힘은 내가 다 썼는데 이런 것도 못 들어줘? 앞으로도 도와준다고 했는데? 이거 진짜 섭섭하네."

섭섭하다는 단어에 강세를 왕창 실었다.

간부가 안절부절못하며 끙끙거리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알겠습니다. 이 정도는 큰형님도 이해해 주시겠지요. 오늘부터 보호비는 예전 그대로, 단검파가 걷던 대로만 받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역시 그 정도 재량은 있을 줄 알았다.

"와!"

상인들 사이에서 짧은 환호가 터졌다.

"고맙습니다! 초인님!"

"초인님 덕에 살았습니다!"

몰려와 인사하는 상인들.

나는 대놓고 내 본심을 말했다.

"앞으로 저한테 할인이나 많이 해주세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아, 그럼요! 본전 그대로······는 아니지만 하여튼 많이 할인해드리겠습니다!"

"전 밑지고 드리지요!"

"어휴, 강하신 분이 말씀도 예쁘게 하시네."

"요즘 보기 드문 분이야."

"앞으로는 깡패놈들이 행패 부리는 일 없을 테니 손님 많이 모아서 돈 많이 버세요. 물건도 많이 들여오고, 지금 쉬시는 분들한테 연락해서 가게 다시 열게 하고요."

"암요, 암요!"

"초인님만 믿겠습니다!"

좋아서 소리 지르는 상인들과 어색하게 웃는 갱단 새끼들.

누가 보면 철권파가 아니라 내가 신원 시장을 먹은 줄 알겠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지.

보호비만 철권파로 갈 뿐이다.

철권파나 다른 갱단이 깽판을 치면 상인들은 날 찾겠지.

그때마다 내 평판은 오를 거고 무슨 물건이든 시장에서 쉽게 구하게 될 거다.

그것이 마력 연공법이든 뭐든 간에.

나는 그저 사람 좋은 듯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상인들이 더 크게 환호를 지르고, 철권파도 어색하게나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다음 날.

마침내 영업 중인 김춘복 고물상과 대면했다.

암흑 시장 -4-

"어서 오십셔!"

김춘복 고물상은 이름과 다르게 20대의 쾌활한 청년이었다.

나는 고물상 얼굴을 확인하고 속으로 웃었다.

게임에서 보던 그 사람이 맞다.

내가 알던 고물상은 30대 초반이었고 여기서는 20대 중반으로 보인다는 게 달랐지만.

"다친 건 괜찮으십니까?"

"아휴, 그럼요. 다 나았습니다. 요즘 돌팔이는 솜씨가 좋더라고요. 저기 사장님이 소개해주셨는데 기공 치료? 그거 한 번 받으니까 싹 나았습니다!"

"기공 치료라고요?"

순간, 느낌이 팍 꽂혔다.

지금 시점에 신림동에서 기공 치료하고 있을 사제 계열 초인이 하나 있는데······

"예! 후끈후끈 아주 좋았습니다! 부러진 갈비뼈가 대번에 붙었다니까요? 초인님한테도 소개해드릴까요? 언제 몸 안 좋을 때 한 번 가보시죠!"

"명함 있으면 하나 주세요."

"응? 하하하! 역시 초인님은 진짜를 알아 보시네요. 여기 있습니다."

내가 정말로 달라고 할 줄은 몰랐나 보다.

고물상은 조금 당황하면서도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치료사 김제사]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abcd-efg 205호]

혹시나 했는데 내 짐작이 맞았다.

이 성의 없는 가명과 대충 만든 명함을 보라.

누군지 뻔하다.

오늘 일이 끝나면 바로 찾아가야겠지.

명함을 주머니에 쑤셔 넣자 고물상이 호기심 반, 경계심 반 섞인 얼굴로 날 쳐다본다.

"옆에 사장님한테 들었는데, 어제 오셔서 저를 찾으셨다고요?"

"예. 좋은 물건 많이 가지고 계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으흠, 제가 보물상 주인이긴 하지요. 얼마든지 구경하십쇼! 없는 거 빼고 다 있습니다!"

고물상이 과장되게 손을 펼쳐 진열한 잡동사니를 가리켰다.

뭐가 많기도 많다.

기계 의체, 마법 지팡이, 특수 제작 저격총, 초합금 흉갑, 기이한 빛을 뿌리는 유리구슬, 부처와 야차를 섞은 듯한 미니 조각상 등등.

하지만 이건 다 그럴듯해 보이는 가짜.

나는 일부러 바닥에다가 발을 쿵쿵 굴렀다.

"밖에 있는 거 말고 안에 있는 걸 보여주시죠?"

"어······"

살짝 당황하는 고물상.

"어떻게 아셨습니까?"

"다 아는 수가 있지요."

"아오, 입 싼 새끼들. 진짜."

이런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고물상이 눈살을 찌푸린 후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초인님이시니까 보여드리지요. 그래도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시면 안 됩니다? 좀 민감한 물건이 많아서요."

"그러죠."

"어휴, 안 되는데······ 처음 오신 분한테는 절대 안 보여드리는데······"

고물상은 투덜거리면서도 나를 가게 안으로 인도했다.

절대로 넓다고 할 수 없는 점포.

잡동사니의 벽을 지나 뒤로 돌아가면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지점이 있다.

거기 덮인 양탄자를 제거하자 비밀문이 나온다.

끼기긱.

고물상이 문을 열어 내부를 보여주었다.

깊고 어두컴컴한 지하.

빛 한 점 없는 게 정상인데 마력광이 도깨비불처럼 일렁였다.

"보고 싶은 대로 보시고 사가실 거 가지고 나오십쇼. 아, 여기 있는 물건은 다 비쌉니다. 모조리 마법 물품이거든요."

나는 어두컴컴한 계단을 밟고 내려가다가 손을 휘저었다.

"이거 스위치 어디 있습니까?"

"스위치요? 아, 거기 전기 시설 안 되어 있습니다."

"잠깐만요. 조명이 없다는 겁니까?"

"대충 보세요, 대충. 초인님도 스마트폰은 있으시잖아요."

아니, 여기서 폰없찐을?

스마트폰을 꺼낼 필요도 없다.

나는 밝은 눈 특성을 장착하고는 완전히 내려갔다.

잘 정리된 진열장.

나 비싼 몸이요, 자랑하듯이 칸마다 물건 하나씩만 들어있다.

흑마법으로 처리하여 반들거리는 사람 두개골.

제멋대로 공중을 부유하는 종이비행기.

불길한 파장을 뻐끔뻐끔 내뱉는 역십자가.

핏자국이 사선으로 남은 비단 속옷.

'저주받은 물건이 많네.'

그러니까 여기 처박아뒀겠지.

하지만 이중에도 보물은 있다.

나는 차분히 비밀 창고를 둘러보며 보물을 탐색했다.

'엇!'

그러던 중 발견한 안경 하나.

안경알 하나가 아예 없다. 남은 안경알에도 거미줄처럼 금이 가 있다. 심지어 거미줄 같은 금을 따라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상태였다.

눈에 익다.

게임에서 몇 번이나 써본 물건이다.

'광전사 안경이잖아!'

이건 장비가 아니라 소모품이다.

유사시 안경알을 빼서 자기 몸에 꽂는 것으로 안경알에 부여된 마법이 발동한다.

마법이자 저주.

[광분]

이름 그대로 사용자를 광전사로 만드는 물건이다.

사용하고 나면 끔찍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동료를 죽일 위험도 있지만 뭐 어때.

일단은 살고 봐야지.

그리고 내게는 이 후유증을 최소화할 방법도 있다.

마력천.

일단 광분을 쓰고 어떻게든 집까지만 가면 며칠 쉬는 것으로 다 회복이 된다는 말씀.

'여기에 돌연변이까지 사용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목숨은 건져올 수 있다.

마력 연공법을 찾아온 자리에서 얻은 의외의 성과.

먼저 안경을 챙긴 다음 옆으로 넘어갔다.

옆 옆자리, 눈에 익은 물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죽 장갑 한 짝.

한 쌍이 아니라 한 짝이다.

왼손에 찰 수 있는 가죽 장갑이, 손가락부터 손등까지 긴 쇳조각을 덧댄 녀석이 붉은 마력광을 핏물처럼 흘리고 있었다.

알지 알지.

이놈이 어떤 녀석인지.

[피 먹는 장갑]

주인의 피를 빠는 흉악한 물건.

대신 성능도 상당하다.

신원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초반템이라고 보기엔 과하게 좋은 능력.

[강건]

근력과 맷집, 활기를 적당히 섞은 특성이라고 할까?

1티어라고 하기엔 모자라고 2티어라고 하기엔 뛰어나다.

대충 1.5티어 정도 되는 특성.

가장 좋은 것은 이 장갑을 오래 끼고 다니면 저절로 특성 획득이 된다는 점.

장비 숙련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은신의 망토에서 은신 특성을 가져온 것과 비슷한 시스템.

몇몇 특수한 특성을 빼면 장비 숙련으로 특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은신과 다르게 시간이 오래 걸려서 문제지.

'심 봤네, 심 봤어.'

마지막으로 대망의 마력 연공법을 향해 걷는다.

지하 창고 가장 깊숙한 곳.

작은 뿔피리가 어둠에 묻혀 잠자고 있었다.

나 흉악한 놈이요, 하고 으름장을 놓듯 노란 위험 테이프로 칭칭 감아놓은 상태.

심지어 노란 테이프 위에는 신성 문자가 빼곡하게 박혀 있다.

이놈이 멀고 먼 북유럽을 떠나 여기까지 어떻게 흘러들어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봉인만 풀면 양질의 마력 연공법을 얻을 수 있다는 점.

진열장을 열고 뿔피리를 꺼냈다.

경고하듯이 신성 문자가 번쩍이고 찌릿한 충격이 전해진다.

초인이 아니면 제대로 들지도 못했겠다.

왜 안 팔렸는지 알겠어.

뭐가 있긴 하니 고물상은 가격을 세게 불렀고, 손님들은 사고 싶으면서도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그냥 넘어갔겠지.

"이렇게 세 개 사겠습니다."

"오호. 안목이 좋으십니다."

고물상이 입맛을 다시더니 계산기를 두드렸다.

"마법 안경에 강건갑, 고대신의 뿔피리까지! 다 강력하고 희귀한 물건들이지요. 하나같이 고레벨 마법이 걸려 있고요. 마법 안경은 1억, 강건갑은 5억, 고대신의 뿔피리는 10억 되겠습니다."

얼씨구?

기본 단위가 1억부터 시작이야?

거기다 뭐, 장갑은 5억에 뿔피리는 10억?

내가 벌컥 화를 내기 직전, 고물상이 두 손을 활짝 펼쳤다.

"하지만 이건 뜨내기들한테나 부르는 금액이지, 우리 시장의 수호자이신 초인님께는 당연히, 다앙연히 할인이 팍팍 들어갑니다!"

"그래서 얼만데요?"

"흠, 우선 자세히 설명을 해드리죠."

고물상이 가죽 장갑만 들어 스스로 찬 다음 바로 떼어냈다.

찌이익.

살갗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피부 조직이 뜯어지고, 노출된 근육 위에서 피가 퐁퐁 샘솟는다.

"보시다시피 이건 저주받은 물건입니다. 흑마법으로 만든 거라 저주 해제도 안 돼요. 장갑을 완벽히 체화해서 능력을 이식하지 않는 한은 계속 피가 빨려야 하는데······ 이거 때문에 가격이 훅 내려갔습니다. 원래는 50억은 받아야 하는 물건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5억도 과해요."

"그걸 아시는 분이 5억을 부릅니까?"

"하하하. 뜨내기용 아닙니까, 뜨내기용. 모르면 수업료 내야죠. 능력만 보면 싼 가격이라니요? 초인님한테는 제가 특별히! 아주 특별히 2억에 모시겠습니다."

2억.

시세보다 조금 싸다.

고물상도 적당히 이익을 남길 수 있겠고.

어제 그렇게 소란을 피우며 평판작 한 보람이 있네.

"좋습니다. 그리고요?"

"다음은 이놈, 이 안경입니다. 초인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이건 사실 마법 안경이 아니라 광전사 소모품입니다. 1억은······ 솔직히 제가 생각해도 양심 출타한 가격이죠."

"알긴 아시네요?"

"으흐흐. 속은 놈이 바보 아닙니까."

고물상이 음흉하게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천만 원은 받아야 하는데······ 초인님께는 특별히 5백만 받죠."

"5백만 원이라······"

"그 이하는 안 됩니다. 아무리 초인님이라고 해도 밑지고 팔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5백도 솔직히 제가 울며 겨자 먹기로 넘기는 가격이에요. 여기 든 거, 격노도 아니고 광분이란 말입니다. 여벌 목숨이나 다름없는데 5백이면 진짜 거저에요. 거저."

그건 맞지.

잘 정제된 마법칩이 아니라 어설픈 안경알이라는 게 아쉽지만 마법칩으로 광분을 구하려면 5천 아니라 1억은 줘야 한다.

그만큼 안정성 면에서 차이가 크니까.

"싸긴 하네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이건 얼맙니까?"

마지막은 뿔피리.

고물상이 뿔피리를 한 번 빙글 돌려보고는 말했다.

"이건 2억입니다."

2억. 2억.

게임과 똑같다.

이게 정상가란 소리.

하지만 나는 바로 수락하는 대신 미끼를 던졌다.

"이 안에는 뭐가 들어 있습니까?"

"그건 모릅니다."

"몰라요?"

"예. 감정 마법을 써봤는데 신성 봉인에 다 막혔습니다. 사제 계열 초인이면 아무나 풀 수는 있다던데, 그냥 그대로 놔뒀지요."

사실 이런 류 물건은 대박보단 꽝이 많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안다.

그걸 돈 주고 사려면 2억이 아니라 20억, 아니 40억으로도 모자란다는 사실도.

나는 고민하는 척 한참 뿔피리를 쳐다보았다.

깎아줄 생각은 없나 보다.

고물상은 그러거나 말거나 휘파람을 부르며 딴청을 피웠다.

"후, 좋습니다. 장갑이랑 안경알을 괜찮은 가격에 샀으니 이것도 제가 사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분명히 상급 연공법이나 전설의 검법 같은 게 들어 있을 겁니다! 초인님께는 분명히 초대박이 터질 거예요!"

"절 놀리시는 겁니까?"

"어휴, 그럴 리가요. 우리 시장의 수호자님을 제가 놀린다고요? 그러면 저 맞아 죽습니다. 맞아 죽어요."

도합 4억 하고 5백만 원.

골프백을 열어 즉석에서 신사임당 뭉치를 안겨주었다.

이곳 암흑 시장에서도 적지 않은 돈.

고물상의 입이 큼지막하게 벌어졌다.

"흐흠, 어흠!"

괜히 주변을 살피면서 헛기침을 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인다.

"초인님. 실은 이번에 저한테 아주 좋은 물건이 몇 개 들어왔는데 한 번 보실랍니까?"

귀가 확 뜨였다.

신원 시장을 들르면 가끔 고물상이 치는 멘트.

뭔지는 몰라도 진귀한 보물이 평소보다 몇 배는 싸게 나왔을 때만 출력하는 대사다.

퍼드득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뭐가 들어왔습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점포 뒤.

다른 시장 상인이나 손님에게 노출되지 않는 곳.

고물상이 날 구석에 놓고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열자 찬란한 보광이 새어나온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오색 다이아!

다이아몬드가 아니다.

[다이아]다.

아케인 서울의 인게임 화폐 중 하나.

현질해서 구매하는 것이 속 편한 그것.

나는 캐릭터 카드를 갈아서 다이아를 얻곤 했었지.

"다이······"

"쉿! 초인님! 여기 시장에는 벽에도 귀가 있습니다. 절대 입 밖으로 내시면 안 됩니다."

고물상이 과장되게 자기 입술에 오른손 검지를 붙였다.

나도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렇고 이 인간 능력 있네.

다이아를 구해 와?

에피소드 1도 안 열린 지금 시점에서?

"초인님도 이게 뭔지는 아시죠?"

"알죠."

당연한 소릴.

다이아는 기본적으로 미니 넥타르다.

캐릭터에게 먹이면 경험치를 쭉쭉 채워준다.

여기에 시간 단축 효과가 있다.

가령 휴식하는 캐릭터에게 쓰면 휴식 시간을 단축하고, 착용 중인 장비에 쓰면 장비 숙련을 올려주지.

특성 숙련 시스템이 없어서 다행이다.

그런 게 있었으면 다이아 소모가 몇 배는 늘어났겠지.

내가 무과금으로 랭킹 9위를 하는 건 꿈도 못 꿀 정도로.

"말이 필요 없는 이 물건, 이 보물을 단돈 1억에 모십니다!"

"1억이요? 진짭니까?"

"오직 초인님에게만 드리는 기횝니다!"

저렴한 약장수처럼 떠드는 고물상.

그러나 확실히 싼 가격이다.

게임에서는 다이아를 원화(₩)로 구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고물상이 가져온 다이아는 다섯 개.

장비 하나 숙련 채우기도 어려운 숫자다.

하지만 나는 아낌 없이 신사임당 뭉텅이를 꺼내 고물상에게 안겨주었다.

"으흐흐! 쿨거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팍팍 이용해 주십셔!"

"혹시 이거 더 구할 수 있습니까?"

설정상 다이아는 초인의 헌신으로, 특수한 수정에 자기 마력을 깎아 주입하는 것으로 만들어진다.

당연히 구하기 힘들다.

초인의 자유의사가 아닌, 강압과 강제, 고문으로 마력을 뽑아내면 다이아가 아니라 영혼석만 만들어지니까.

그래서 별로 기대는 안 했다.

김춘복 고물상이라도 다이아 고정 거래는 힘들지 싶어서.

그런데 이게 웬일?

고물상이 이를 드러내며 씨이익 웃어 보인다.

"당연히 가능하지요! 물량은 적지만 고정적으로 들여오는 길이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그럼요!"

"앞으로 제가 몽땅 매입하겠습니다. 물건 들어올 때마다 연락주세요."

"흐흠······"

고물상이 눈을 굴린다.

다이아 가격이 가격이다 보니 고민되는 모양.

"에이, 좋습니다! 우리 초인님 덕에 제가 먹고사는 건데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앞으로 들여오는 물건은 전량, 초인님께, 똑같은 가격으로 팔겠습니다!"

됐다!

다이아를 고작 1억에, 그것도 고정 판매라니!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입이 실룩대면서 웃음을 발사하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야죠! 초인님!"

이것이 평판 작업의 위력.

시장에서 볼 일은 다 끝났다.

나는 뿔피리와 다이아 주머니를 쓰다듬으며 실쭉 웃었다.

뿔피리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여기에 다이아까지 먹으니 아주 배가 터질 것만 같다.

한참을 히죽거리며 웃다가 겨우 진정했다.

뿔피리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현재는 봉인된 상태.

고물상이 말했듯, 이걸 풀려면 사제 계열 초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갑에 고이 모셔둔 명함을 따라가면 되니까.

[치료사 김제사]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abcd-efg 동아빌 205호]

김제사는 가명.

진짜 이름은 김사제.

아케인 서울 튜토리얼 캐릭터 넷 중 하나, 김사제를 찾아갈 시간이었다.

황금 쌓는 김사제 -1-

황금 쌓는 김사제

신림동 외곽 빌라촌.

가파른 언덕을 따라 만들어진 곳.

'난장판이네.'

와서 보니 내가 살던 고시원 뒷골목이 생각난다.

도로는 전혀 관리도 안 되어 바닥이 쩍쩍 갈라진 상태.

위생도 최악이라 까만 쓰레기봉투가 아무렇게나 버려졌고, 그 위에서 파리가 잔치를 벌이고 시궁쥐가 찍찍대는 중이다.

숨을 거의 참다시피 하며 언덕길을 올랐다.

하필이면 내 목적지, 김사제가 살고 있다는 동아빌은 언덕길 끝에 있었다.

그나마 건우봉 자락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 덕에 악취가 조금 가셔서 다행.

'같은 산자락이어도 이렇게 다르네.'

관공서가 있느냐 없느냐.

주변에 중산층이 사느냐 아니냐.

그게 동네 운명을 갈랐다.

3층짜리 허름한 빌라 건물.

명함에 찍힌 대로 205호를 찾아가자 문에 대충 페인트칠한 것이 보였다.

[기공원]

예전에 고시원 주인 아줌마가 소개해준다고 했던, 불법 무허가 병원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계십니까?"

아무도 없나?

민감 특성을 활성화하고 귀를 기울였지만 기척 하나 들리지 않았다.

다시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쾅!

"아무도 안 계세요?"

그제야 느껴지는 인기척.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한참이나 들리더니 거의 10분 이상이 지난 다음에야 문이 열렸다.

"꼭두새벽부터 뭐에요."

짜증 난다는 얼굴로 날 보는 한 남자.

아니, 소년.

10대 후반이나 됐을까? 고등학교 2학년이나 3학년 정도로 보인다.

강아지처럼 유순하게 처진 눈매.

유독 창백한 얼굴.

기묘한 금속광택이 감도는, 하얗게 탈색된 머리.

맞다.

김사제가 분명했다.

이마가 X자 상처 없이 매끈하다는 것이 달랐으나 분명히 스마트폰에서 보던 그 얼굴.

조금은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12시가 넘었는데 아침이요?"

"저한테는 아침이라고요. 한참 좋았는데······ 진짜 무슨 일이세요? 아직 보호비 낼 때 안 됐어요."

"소개받아 왔습니다."

나는 미리 챙겨뒀던 명함을 꺼내 보여주었다.

김사제가 눈을 끔뻑이며 명함을 보다가 활짝 웃었다.

"뭐야, 손님이었어요? 또 철권파 깡패 새끼가 온 줄 알았죠! 얼른 들어오세요, 들어와요."

빌라 안은 좁았다.

흔히 말하는 1.5룸 구조.

거실은 영업장으로 꾸며놓았고 침실은 김사제의 생활공간이었다.

영업장에는 미용 베드가 하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조각상 하나, 괴상하게 생긴 향로 하나가 놓여 있었다.

김사제가 미용 베드를 가리켰다.

"누우세요. 어디 아파서 오셨어요?"

"기공 치료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엥? 기공원에 치료받을 거 아니면 뭐하러 와요?"

"이거 때문에요."

골프백을 열어 뿔피리를 꺼냈다.

언뜻 보기에도 뭔가 있어 보이는 뿔피리.

뿔피리가 발하는 마력 파장과 테이프에 빼곡히 적힌 신성 문자를 본 김사제의 눈이 짧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 흔들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미리 챙겨온 신사임당 스무 뭉치, 즉 1억 원을 내려놓자 아예 태풍에 휩쓸린 가랑잎처럼 격한 진동을 일으켰다.

"뭐, 뭐, 뭐에요?"

"이거 봉인 해제 부탁드리려고 왔습니다."

"봉인 해제요? 번지수 잘못 찾으신 거 아니에요? 여기 기공원인데요. 그거 보니까 신성 문자인데 어디 큰 신전 같은 데 가셔서 해달라고 해야죠. 저어기 종로에 옛 아버지 대신전이나 강남에 가이아 대신전 가세요."

"거긴 너무 비싸요."

비싸기만 하면 다행이지.

결과물이 좋아 보이면 강제로 뺏기도 한다.

신실하고 겸손하며 박애가 넘치는 성직자?

이 세계에선 소설과 만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상이다.

"하, 하지만 여기는 기공원이라고요."

확실히 거짓말은 못 하네.

나는 김사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김사제 씨."

"예에에? 응? 어? 어어?"

"다 알고 왔습니다. 김사제 씨는 기공사가 아니라 사제 계열 초인이시잖아요. 어떤 신을 모시는지도 다 압니다."

"거, 거짓말! 그걸 어떻게 알아요!"

"다 아는 방법이 있지요. 기공 치료랑 안수 치료는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공원에서 기공 치료라고 하고는 안수 치료를 한다? 그럼 뻔하지요, 뻔해."

"치잇!"

김사제가 구석에 놓인 조각상을 한 번 보고는 잇소리를 냈다.

"이래서 한 군데서 오래 하기가 싫었는데······"

"이건 저 혼자만 알고 있습니다. 비밀로 해드리죠."

"하아, 비밀 지켜주세요. 다 알고 계신 것 같으니까 드리는 말씀인데, 저희 신님은 베스트팔렌 조약에 기재되지 못하셔서 알려지면 사이비라고 이단심문관들이 떼거리로 쫓아와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 입은 무겁습니다."

나도 조각상을 한 번 보았다.

황소와 사자, 용을 대충 아무렇게나 기워 붙인 듯한 조각.

아니, 신상(神像).

나는 저 정체를 안다.

게임 설정상 지금은 신격을 잃고 이름마저 잊힌, 영락할 대로 영락한 신이긴 하지만 김사제 개인 퀘스트를 통해 부활하거든.

신은커녕 소악마 급에 불과한 힘이긴 해도.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뿔피리와 1억 원을 김사제에게 밀어주었다.

김사제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 이거 힘들어 보이는데······"

그래도 1억 원이다.

빈민들 치료나 근근이 하는 수준으로는 몇 달을 일해도 벌기 힘든 돈.

김사제는 1억 원을 조각상 앞에 놓고는 스스로 미용 베드에 걸터앉았다.

뿔피리를 조심스럽게 쥐고는 눈을 감는다.

머리가 한 차례 번들거리고 금속성 광채가 어렸다.

후광이자 마력광.

혹은 신성력의 발현.

빛이 일렁이며 팔을 향해 스르륵 내려왔다.

평소 기공 치료랍시고 약하게 안수 치료하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신성력 투사.

김사제의 이마에 땀이 맺히고 창백하던 얼굴이 더 하얘졌다.

윙······

변화가 있었다.

테이프 위 신성 문자가 빨갛게 변한다.

그러더니 가장 첫 글자부터 흐릿하게 지워지기 시작했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신성 문자를 노려보는 김사제.

흰자위가 빨갛게 변하고 눈가가 찢어져 피눈물을 흘리는 그때.

퍼억!

신성 문자가 일거에 지워졌다.

작은 폭발과 함께 노란 테이프가 휘리릭 풀린다.

그 안에서 떠오르는 마법 문자들.

아니, 음표들.

악보처럼 혹은 서적처럼 줄지어 떠오른 고대 글자가 허공에서 춤을 춘다.

그러면서 어떤 형상을 그려내는데, 그 모습이 흡사 인체 도식 같았다.

"어?"

김사제가 살짝 입을 벌렸다.

"와, 이거 대박이네요!"

"그렇죠?"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거 아마 연공법 같은데요? 마력 연공법이요!"

새삼스레 나를 훑어보는 김사제.

"어쩐지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저 큰돈을 턱턱 내놓는다 했더니······ 뭐가 들었는지 알고 오셨나 봐요."

"짐작은 했죠."

짐작이 아니라 확신했지.

나는 뿔피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김사제가 혹시 떨어뜨릴세라 조심스럽게 뿔피리를 건네준다.

뿔피리를 받자마자 뿔피리 주변에서 춤추던 마법 문자가 내게 몰려들었다.

칭얼거리듯이 내 몸을 핥고, 마력 회로에 스며들었다가 도로 나오고, 신경계를 간지럽히고, 마력심이 깃든 심장에 들어가고 싶어 노래를 부른다.

김사제가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그, 어디서 흡수하실 거예요? 직접 쓰시려는 거 맞죠? 그거 가방으로는 절대 안 가려질걸요. 밖에 들고 나가면 바로 눈에 띄어요!"

"괜찮으시면 여기서 하죠."

"전 괜찮아요! 제가 호위도 서 드릴게요!"

나이가 어려서 그럴까?

아니면 본래 성격이 그래서일까?

게임에서도 그러더니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다른 닳고 닳은 초인 같으면 호위비로 돈 천만 원 정도는 우려내려고 했을 텐데.

편하게 누워서 뿔피리를 입에 가져다 댔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직감한 듯 마법 문자들이 기뻐 날뛴다.

눈을 감고, 특성을 교체하고,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불었다.

뿔피리를. 마력 연공법을.

구아아아아앙-

장엄한 울음이 울려퍼진다.

뼛속까지, 건물 골재까지, 심지어 대지까지 진동시키는 울음.

음파가 중첩되고 중첩되다가 사람의 고막으로는 들을 수 없는 영역으로 진입했다.

"컹컹컹!"

"으르릉, 왈왈!"

"멍! 멍! 멍멍!"

사방에서 울리는 개소리.

"야아아오옹!"

"찌익! 찍찍!"

합창하듯 내지르는 고양이, 쥐 떼.

"짹짹짹!"

"까악! 까악!"

새들도 발작적으로 우짖는다.

당연히 여기저기서 창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뭐지?"

"지진? 지진 났어?"

"뭔 일이야! 뭔데 그래!"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황홀한 감각에 잠겨 있었다.

인간의 청취 영역을 벗어난 음파는 어느새 증발하여 무형의 글귀가 되었다.

마법 문자와 무형 문구가 결합한다.

그 결과 빚어지는 것은 기억이자 정보 집합체.

마법적 지식이 내 대뇌 주름에 새겨진다.

전방위 폭격하듯 쏟아지는 개념, 경험, 잠언.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이름으로 정리하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에인헤랴르 연공법]

북유럽에서 기원한 마력 연공법.

거칠고 폭력적이면서도 영원히 싸우는 전사들답게 강렬하면서도 묵직하다.

파산검법과 더불어 3레벨, 4레벨까지는 충분히 쓰고도 남지.

"후우우."

벌써 마력이 빠르게 안정되는 게 느껴진다.

북해 바다는 겉으로는 격렬하게 휘몰아쳐도 심해에서는 고요하고 안정되어야 하는 법.

마력 안정 특성을 병행하자 자연스럽게 마력 흐름이 바로잡히고 있었다.

이 정도면 보름만 지나도 완전히 마력을 흡수할 수 있겠다.

그래, 보름.

그때 나는 완벽한 3레벨 초인이 된다.

"와아아."

김사제가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전사 계열 초인님이 마력 연공법 흡수하는 거 처음 봐요!"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죠."

무문에서 대대로 전승하는 비전이 아니면 보기 힘들지.

나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몸이 여러모로 조금 어색했다.

너무 가볍고 활기가 넘쳐서, 또 민감해진 감각을 통해 막대한 양의 정보가 쏟아져서.

김사제가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저희 협회······ 아니 교단에서 번제 올릴 때 쓰는 차인데 정신과 마력을 맑게 만들어줘요."

"좋죠. 한 잔 주세요."

김사제가 경건한 태도로 차를 우려서는 내게 한 잔을 주었다.

나는 차 맛도 커피 맛도 모르는 인간이지만 확실히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또, 에인헤랴르 연공법과 마력 안정 특성 효과가 폭증하면서 마력 흐름 안정화에 속도가 붙었다.

'이거 좋네.'

내가 차를 마시는 사이 김사제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차를 우린 김에 번제를 올리려는 모양.

"제가 있어도 됩니까?"

"네, 상관없어요. 어차피 다 아시고 계신데요. 돈도 많이 주셨으니까 쉬고 싶은 만큼 쉬고 가세요."

"고맙습니다. 나중에 혹시 제가 다치면 그때도 잘 부탁드립니다."

"헤헤. 돈 많은 고객은 언제나 환영이죠!"

신상 손에 먼저 찻잔을 올린 김사제.

이어 절을 한 번 하고 찻잔에 차를 채운다.

그 찻잔을 들어 기도문을 외고, 찻잔은 조각상 앞에 내려놓고 신사임당 한 뭉치를 손에 올렸다.

저런 식으로 진행하는구나.

김사제가 모시는 신은 재물의 신.

돈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당연······

잠깐만.

이상하다?

게임에서는 안 이랬었는데.

내가 고개를 갸우뚱할 무렵이었다.

김사제가 한쪽에서 작은 플라스틱 통을 하나 꺼내왔다.

뚜껑을 여니 휘발유 냄새가 진하게 난다.

김사제가 신사임당 뭉치를 아깝다는 눈으로 한 번 본 후 고개를 홱홱 저었다.

미련을 떨치려는 듯이.

이어서 휘발유를 신사임당 뭉치에 주르륵 부어버린다.

"어어?"

뇌 정지가 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설마, 설마 돈을 태우려고?

그 귀중한 돈을? 목숨보다 중요한 돈을?

김사제가 주머니에서 싸구려 라이터를 꺼냈다.

"잊힌 신이시어, 제 제물을 받으사 마침내 부활하시고 그 권세와 영광을 영원토록 되찾으소서."

화악!

부싯돌을 당긴다.

불꽃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벌건 불길이 돈뭉치를 덮치려는 찰나.

나는 가까스로 몸을 던졌다.

"야 이 미친놈아!"

김사제를 감싸며 그대로 바닥을 구른다.

"케헥!"

둘이 하나가 되어 몇 바퀴를 구르자 김사제가 비명을 질렀다.

나야 괜찮지만 김사제는 사제 계열 초인.

상대적으로 연약한 몸이라 조금 아팠던 모양.

김사제가 항의하듯이 소리쳤다.

"왜, 왜 이러세요! 신님한테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요! 저희 신님은 돈밖에 안 받아요! 돈을 태워야 신님께서 신성력을 내려주신단 말이에요!"

"틀렸어! 등신아!"

나는 목 놓아 부르짖었다.

"돈이 아니라 황금을 태워야 한다고!"

황금 쌓는 김사제 -2-

"황금이요?"

김사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에요."

뭔 개소리야.

그럼 게임에선 왜 황금만 보면 환장해서 달려들었는데?

내가 빤히 쳐다보자 김사제가 강조하듯이 다시 말했다.

"완전 옛날이긴 한데요, 우리 교단에서도 그런 주장이 있었어요. 신님이 재물의 신이니까 옛 방식대로, 돈이 아니라 황금을 태워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주장이었죠."

"그래서요?"

"효율이 너무 낮다고 판명 났어요. 분명히 신성력을 내려주시기는 하시는데 차라리 돈 태우는 게 훨씬 나았죠. 같은 신성력으로 비교하면요. 그 뒤로는 황금 바쳐야 한다고 주장한 사제님들은 싹 다 이단 판명받고 파문당했어요."

이상하다.

게임에서는 분명히 황금이었는데······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아케인 서울은 모바일 게임이라 이런 세세한 부분에서 묘사가 부족하다.

출력되는 대사, 캐릭터 설명을 잘 읽어봐야 알 수 있지.

'그때 분명히······'

김사제의 개인 퀘스트는 교단 복귀.

서로를 향해 이단이니 어쩌니 쏘아붙이던 기억이 선하다.

그리고 김사제가 분명히 말했었지.

황금을 바쳐야 한다고.

황금을 태워서, 태워서······ 그 뒤에 뭐가 있었는데······

'아!'

드디어 생각났다.

"태우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네?"

"황금 태워봐야 황금이죠. 제대로 하려면 끓여서 기체로 만들어야 합니다."

"실제로 증발시켰었는데요?"

증발시켰다고?

황금 끓는점이 거의 3천도 아니야?

하여간 광신도들 어디 하나에 미치면 감당이 안 된다니까.

이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

분명히 비효율적이라고 했겠다.

끓는점 3천 도를 구현하는 게 어디 쉽겠어?

현대에도 로켓 엔진 정도는 되어야 3천 도를 돌파한다.

소규모로 구현하려면 마법적인 능력과 막대한 재정을 갈아넣어야 가능하지.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것.

하지만 내가 알기로 꼭 황금을 기화시킬 필요까진 없었다.

"태우는 게 잘못입니다. 사제 씨가 말한 것처럼 태우면 너무 비효율적이에요. 제가 듣기로 황금을 끓일 필요도 없고, 녹여서 차에 타서 마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말도 안 돼. 완전 처음 듣는데요?"

"확실합니다. 제가 직접 눈으로 목격했었고요."

"누가 했었는데요?"

"그건 대답할 수 없습니다."

"완전 이단의 논리 같은데······"

"이단의 논리라뇨. 그랬으면 그분이 신성력을 잃었겠죠."

나는 당당하다.

게임에서 니가 그렇게 해서 니네 신이 부활한다니까?

김사제가 이단 같다는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이단은 무슨. 사이비 주제에.

목구멍까지 이 말이 올라왔지만 참았다.

아케인 서울에서 몇 안 되는 순둥순둥한 인물, 김사제.

알아두면 손해 볼 거 하나도 없다.

굳이 역린을 건드릴 필요가 어디 있겠어.

"방법이 틀렸을 수도 있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우리 교단이 수천 년 동안 정립한 방법이에요! 얼마나 힘들게 만든 방법인데 틀렸다뇨!"

"생각해 보세요. 사제 씨 교단 분들이 노력한 건 저도 인정합니다. 신이 죽었는데도 거의 3천 년 이상 살아남은 종교 아닙니까? 그것만으로도 대단하죠. 그런데 여태 신이 부활하지 못하고 이름도 못 찾은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조곤조곤 날리는 팩트 폭행.

"이이익!"

김사제가 얼굴을 붉히고 발을 쿵쿵 굴렸다.

하지만 뭐라고 대꾸하지는 못했다.

신이 죽은 것으로 모자라 이름마저 잊혔다.

그건 김사제네 교단의 가장 큰 약점이었으니까.

"애초에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 왜 신용 화폐를 재물로 받아요? 현물로 받아야죠."

"먹는 거랑 바치는 건 다르잖아요."

"아니죠. 사제의 소화기관 자체가 제단 역할을 합니다. 불에 태워 존재를 지우는 것처럼, 금은 소화되어 증발하고 사제님네 신한테 직행하는 겁니다."

"말도 안 돼. 금이 어떻게 소화되요?"

"어휴, 답답하기는. 정 못 믿겠으면 한 번 해보십쇼."

나는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신이 살해당하고, 교단은 지리멸렬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고, 적대적인 이단심문관들이 신도를 사냥하고, 그 과정에서 모든 지식이 소실되었을 것이다.

신이 살아 있다면 그 정도로도 신성력과 기적을 내렸겠지만 죽은 상태에서 그게 되겠나.

악순환의 고리가 반복되고 이름마저 잊혔겠지.

박해를 신앙의 증거로 삼는 끈질긴 종교도 아니고, 이 세상에 널리고 널린 신격 숭배 신앙이니 쪼그라드는 건 순식간.

여태 살아남은 게 기적.

김사제가 자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금을 먹는다.

금가루를 차에 섞어 마신다.

거기서 어떤 사건을 연상한 모양이다.

"듣기만 해도 엄청 불경한 짓이라고요."

"모시는 신이 그렇게 죽었으니까요?"

"······잘 알고 계시네요."

"그렇다고 하던 대로 해서는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사제 씨 교단에 지금 4레벨 초인이라도 있습니까?"

"그건······"

"아무리 규모가 작아도 3천 년이 넘은 교단 아닙니까. 그런 교단 주교가 3레벨이라는 게 말이 됩니까? 심지어 대주교나 총대주교는 있지도 않죠."

"끄응!"

"다른 어떤 영세 교단도, 심지어 사이비도 5레벨 정도는 있습니다. 죽은 신도 잊힌 신도 그 정도 힘은 써요. 사제 씨 교단은 어떻습니까?"

"하아. 할 말이 없네요."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습니다. 수련 방법이, 아니 기도 방법 자체가 잘못되어서 고레벨 초인이 안 나오는 겁니다."

"하지만 돈 태우기 전에는 3레벨이 아니라 2레벨도 없었어요."

"그 부분은 인정합니다. 황금을 기화시켜서 흡수하는 게 굉장히 비효율적이라는 걸요. 그런데 효율적인 방법 찾아 돈 태우는 쪽으로 넘어왔으면, 또 효율적인 방법 찾아서 황금 먹는 거로 넘어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어······"

김사제가 그런가? 하는 얼굴을 한다.

좋아, 넘어왔어.

괜찮은 사제 하나 뚫어놓기 힘드네.

그래도 이번 일 성공해두면 앞으로 두고두고 편하겠지.

김사제네 교단을 통해 파생되는 퀘스트도 많고.

나는 잠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작은 골드바 하나 구해 오겠습니다. 한 번 시험해보죠."

"자, 잠깐만요! 초인님이 잘못 알고 계신 거면요?"

"뭐가 문젭니까? 저랑 사제 씨만 입 다물고 있으면 되지."

"그, 그래도······ 잠깐만요!"

무시하고 빌라를 나왔다.

언덕길을 내려가서 금은방을 들렀다.

1돈 골드바를 하나 구입.

생필품 가격은 싼 세상이지만 금값은 원래 세계보다 3배는 비쌌다. 130만 원을 주고서 사서 돌아오며 깨진 보도블록을 걷어찼다.

'투자다, 투자.'

금만 있어도 안 된다.

신원 시장에 들러서 특수 솥도 하나 샀다.

마법사들이 흔히 쓰는 약재용 솥.

무려 2천 도까지 견딘다던가?

'가스레인지 온도가 1천 5백까지 올라가니까 충분하지.'

금의 녹는점이 1천 도 근처일 것이다.

특수 마법 화로에 약재 솥을 얹는 게 정석이지만 마법 화로는 너무 비싸다.

적당히 이 정도로 타협하도록 하자.

기공원에 돌아오자 김사제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쫑쫑쫑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 저기 초인님!"

날 보자마자 난색을 보이는 김사제.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왜요?"

"그, 좀 그렇잖아요. 이러다 들키면 저 진짜 파문이라고요. 차라리 저 세례 해주신 사제님이랑 제 위에 주교님한테 말씀드려 볼 테니까 공의회 열고 확실히 한 다음에 진행하는 게 좋겠어요."

그게 정석이긴 하지.

그런데 사이비 교단이자 점조직으로 된 비밀 조직이 의견을 교환하고 취합한 다음에 공의회를 열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

5년? 10년?

모르긴 몰라도 아케인 서울의 에피소드 1이 발동된 다음일 것이다.

게임으로 치면 시작 시점.

그때까지 기다려줄 여유 따윈 없다.

김사제가 1레벨인 채로 썩게 내버려 둘 수가 없다고.

"이거 섭섭하네요."

나는 골드바와 약재용 솥을 손에 들고 흔들었다.

"제가 사비를 털어서 무려 백삼십만 원짜리 골드바랑 백만 원짜리 솥을 사 왔는데요."

"배, 백삼십만 원이요? 그리고 무슨 솥이 백만 원이나 해요?"

"마법사용 특수 솥입니다. 열전달 확실하게 되고, 좀 과한 화력으로 조져도 끄떡없이 버티는 놈이죠. 이거 환불받으면 수수료 드는 거 아시죠? 수수료 사제 씨가 물어주실래요?"

"제가 사달라고 말씀도 안 드렸는데······"

"그러니까 한번 해보죠.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성공하면 사제 씨가 좋은 거고, 실패하면 제가 손해 본 거로 치죠."

김사제가 망설이다가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휴······ 알겠습니다. 대신 비밀은 지켜주셔야 해요."

"그러죠. 사제 씨도 성공하면 제 공을 잊으시면 안 되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은데······ 에휴."

이제부터는 김사제의 영역.

한참 손을 움찔거리던 김사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내가 내민 골드바를 약재용 솥에 담아 신상 앞에 바쳤다.

기도문을 읊고 신성력으로 축복한 다음 가스레인지에 올린다.

치이익!

가스레인지 최대 출력.

시간은 오래 걸렸으나 약재용 솥 전체가 달아오르고 금이 녹기 시작했다.

1돈짜리 골드바.

즉, 3.75 그램.

솥 바닥에 늘어 붙듯이 한 금색 액체는 한 꼬집에 불과하다.

그걸 적당히 식힌 다음 대충 숟가락으로 짓이겼다.

그렇게 얻은 금가루를 미리 우려낸 차에 넣으면 준비는 끝.

김사제가 푸념을 흘렸다.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저만 믿으시라니까요."

"정말 효과가 있을까요?"

"제가 맞으면 마시는 즉시 신성력이 폭증할 겁니다. 잘 느껴보세요. 사제 씨 신이 응답하는지 안 하는지."

김사제가 찻잔을 한참이나 노려본다.

겨우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입에 가져가는 김사제.

목젖이 꼴깍꼴깍 움직였다.

찻물이 다 식은 지 오래라 마시는 데 무리가 없었다.

그렇게 금가루 탄 차를 한 잔 다 마셨다.

순간, 김사제가 정지했다.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응시한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나무토막처럼, 혹은 바싹 마른 진흙 덩어리처럼 변한 채 못 박힌 듯 움직일 줄을 모른다.

거봐, 된다니까.

나는 김사제를 구경하며 조용히 차를 마셨다.

안 그래도 금속성 광택을 흘리며 찰랑이던 머리칼.

은은한 광채가 빗물 내리듯 아롱아롱 떨어지고 있었다.

후광이 은은하게 번지나 싶더니 확 꺼져버린다.

그와 함께 천천히 쓰러지는 김사제.

"끅! 끄으윽!"

잠깐이었다.

곧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김사제의 얼굴에 맑은 정광이 흘렀다.

"제 말이 맞지요?"

"하, 하하하."

김사제가 나를 보고는 실없이 웃었다.

"정말이었네요. 이 좋은 방법을 두고 그 개고생을 했다니······ 아까 뭐라고 하셨죠? 백삼십만 원?"

"솥까지 합치면 이백삼십만 원이죠."

"그 이백삼십만 원이, 제가 지금까지 태운 돈보다 훨씬 가치가 있었어요."

완전히 얼빠진 얼굴.

현자 타임을 직격으로 맞은 모양새다.

그럴 만도 하지.

지금까지 태운 돈이 상당할 거다.

교단 전체로 치면 어마어마하고.

"아, 이거요."

김사제가 휘발유 뿌렸던 신사임당 뭉치와 바닥에 내려둔 신사임당 뭉치, 즉 1억을 내게 돌려주었다.

"이건 왜요?"

"이렇게 좋은 걸 알려주셨는데 받으면 안 되잖아요."

"괜찮습니다. 이미 드린 거예요."

"아니에요. 정말로 못 받아요. 이거 받으면 신님이 저 혼내실 거예요."

사제 계열 초인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돈뭉치를 골프백에 집어넣었다.

아, 휘발유 묻은 건 다른 칸에 구분해서.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김사제가 주섬주섬 자기 몸을 뒤져 작은 목걸이를 꺼냈다.

목걸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중세 시대 은화에 구멍을 뚫어 질긴 마력사를 꿰었을 뿐인 물건.

"받으세요."

"잠깐만, 이거 성물이잖습니까?"

"네. 이 정도는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짜 괜찮으니까 받으세요. 이 정도는 받으셔야 제 마음이 편해요."

김사제가 목걸이를 내 손에 꼭 쥐여주었다.

잠시 갈등하는 나.

게임에선 이미 파괴된 채로 등장했던 성물.

혹은 장신구.

그래도 상당히 좋은 성능이라 꽤 오래 썼지.

사실 나보다는 김사제에게 유용할 물건.

'에라, 모르겠다.'

난 욕심쟁이다.

또, 속물이다.

애초에 손익 다 따지고 김사제를 도와준 거잖아.

괜히 내숭 떨지 말자.

나는 내 본연의 욕망에 충실하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잘 쓰겠습니다."

"네. 신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손을 움켜쥐자 김사제가 순진하게 웃는다.

내 시커먼 속도 모르고.

그렇게 겹친 손 아래.

목걸이가 탁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치유] 특성을 품고서.

황금 쌓는 김사제 -3-

퍼먹인다.

"으으으······"

마구 퍼먹인다.

"그만······"

무시하고 퍼먹인다.

"더, 더는 못 먹어요!"

김사제가 헛구역질을 했다.

옆에 조그마한 골드바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물론 진짜 산은 아니고 미니어처 산. 주먹 한 줌 정도 될까 말까 한.

나는 집게로 골드바를 들어 마법 솥에 가져갔다.

"왜 못 먹어요?"

"속이, 속이 끓는 것 같아요!"

"아 그거 마력 반응이에요. 신경 쓰지 말고 기도나 열심히 해요. 마력, 아니 신성력 올려야죠."

"그러다 저 죽어요! 마력 중독 걸린다고요!"

"누가요? 사제 씨가요? 모르는 소리. 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기도나 한 번 더 하세요."

"진짜 죽을 것 같은데······"

"안 죽는다니깐요?"

튜토리얼 캐릭터 넷은 저마다 특징이 있다.

김전사가 대표적이지. 백지 신체를 갖고 있으니까.

김사제는 어떨까?

바로 마력 중독이 없다는 거다.

사제 계열 초인이 대부분 그렇지만 김사제는 더 심하다.

섬기는 신이 알아서 마력을 알아서 잘 가공해서 내려주거든.

황금을 퍼먹으면 퍼먹는 대로 신성력이 되어 쌓인다.

'게임에선 썩 좋지 않았지.'

금을 구하기 힘들어서 그렇다.

게임에 금은방을 구현하는 게임사가 몇이나 되겠어.

마물이 떨어뜨리는 걸 줍거나, 가끔 랜덤하게 뜨는 금괴나 금화를 사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파티에 김사제가 있으면 [황금이다!]를 외치곤 했지.

현실에서는 다르다.

금은방만 가도 금괴, 금화, 금 장신구가 널려 있다.

신원 시장도 마찬가지.

방금 나는 동네 금은방은 물론 신원 시장도 털어온 다음이었다.

"많이 드세요. 많이. 아직 많이 있어요."

"으······"

김사제가 토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짓는다.

쌓아놓은 황금 미니어처 산 옆.

황금 예술품 몇 점이 놓여 있었으니까.

손가락보다 작은 불상, 정체 모를 신의 성표, 신성 문자가 새겨진 황금 찻잔.

나는 액체 황금을 짓이겨 가루로 만들며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레벨 낮을 때는 그냥 황금만 녹여 드셔도 괜찮아요. 그런데 레벨 높아지면 황금으로는 안 돼요. 그때부터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귀에 못이 박히겠네요. 다 외웠다구요. 기체로 만들어 마시거나 황금 예술품을 녹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렇죠. 그럼 예술품 중에서는 뭘 드시라고 했죠?"

"종교 관련한 예술품이요."

"정답입니다."

금가루를 차에 타서 먹는 건 어디까지나 제 2안.

정석은 기화시켜 마시는 거다.

제물로 바친답시고 대충 날려 보내지 말고.

이건 3레벨 때 이야기고 5레벨이 되면 또 달라진다.

"5레벨부터는 성물로 바꾸셔야 합니다. 다른 종교의 성물요. 황금 소재여야 하고요."

"으······ 그런 걸 어디서 구하죠?"

"창고에 없어요? 사제 씨 교단은 역사가 오래됐으니까 뭐가 있어도 있겠죠."

"저도 교단 창고에는 안 들어가 봐서요."

"대주교 되면, 아니 총대주교 되면 꼭 들어가 보세요. 사제 씨 교단에선 5레벨이 총대주교라면서요? 그럼 명분이 있죠. 교단 창고 보물을 마음대로 써도 될 거 아닙니까."

그러면서 나 줄 성물도 챙기고.

성물만 있겠냐? 마법 무구도 많지 싶다.

아무리 가난뱅이에 영세 교단이라고 해도 3천 년 역사 동안 쌓아온 게 있을 테니.

"으······ 좀 쉬었다가 하면 안 돼요?"

"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기도만 하는 건데 뭐가 그리 힘들어요?"

"진짜 힘들어요······ 신님을 계속 대면해야 한다고요."

"그거 좋네요. 그러다 사도 되시는 거 아닙니까?"

"에엥? 사도가 그렇게 쉽게 돼요?"

"신을 자꾸 만난다면서요."

"진짜로 만나는 건 아니고, 존재감만 느끼는 거예요. 우리 신님은 존재도 잊혀서 명확하게 말씀을 하실 수도 없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더해보죠. 자, 쉬지 말고 쭈욱 들이키세요. 쭈욱 쭉쭉!"

"으아아······ 괜히 한다고 그랬어."

김사제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새끼 새처럼 찻물을 받아마셨다.

내가 사도 운운한 건 빈말이 아니다.

[사도] 특성.

김사제가 충분히 얻을 수 있으니까.

아마도 조만간.

숨겨진 조건을 만족하기만 하면.

내가 알려준 방법대로만 해도 오래 걸리진 않을 거고.

"음······"

김사제가 황금 섞은 차를 마시다 말고 침음성을 흘렸다.

두 번째 각성.

혹은 레벨 업.

겉에서 보기에는 2레벨이 될 때와 비슷했다.

신성한 후광이 번지고 힘의 파장이 물결친다.

미리 김사제가 결계를 안 쳐놨으면 바깥에서도 각성의 순간을 알아챘을 정도로.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김사제를 구경했다.

김사제는 한참이나 법열에 잠겨 있다가 느릿느릿 눈을 떴다.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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