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일인공성전 (2)
원래 세 갈래 정도로만 나타나던 궤적이 다섯 갈래로 늘었다. 강철로 이루어진 갑옷을 베는 위력도 위력이지만, 터져 나온 폭음만으로도 고막이 나가 넋을 잃은 기사도 있었다. 왜 게벨이 이 기술이 난전에서 유용하다고 한 건지 알 것 같았다.
얼추 게벨이 쓰던 것보다 약간 아래 정도로 생각되었다.
'그간 알게 모르게 쌓인 실전 경험이 위력을 더해 준 건가?'
물론 여전히 몸에 부담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갑옷 안에 몸을 감싸고 있는 촉수들이 완충재가 되었는지 충격을 경감시켜 주었다.
아이작은 온몸이 삐걱거리면서 비명 지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웃었다.
주변의 기사들이 모두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숨차니까 너희들이 와라."
아이작은 칼을 들어 기사들을 겨냥했다. 기사들은 폭음의 충격에서 벗어나 비틀거리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이 있던 놈이 아이작을 향해 플레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백작님! 성기사님!"
그때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르하르트 군의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플레일을 휘두르려던 헨드락 영지 기사는 순식간에 말발굽에 짓밟혀 곤죽이 되었다. 후방에 있던 기사들이 합류하고, 처음의 기습 충격에서 벗어난 기사들도 병사들을 규합해 반격에 나선 것이다.
어설픈 군대라면 처음 기습의 충격만으로도 와해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르하르트가 기사들을 헛 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들은 흩어진 조직을 규합해 반격하고 있었다. 아이작이 기세를 꺾은 덕분에 나올 수 있는 반격이었다. 그가 나서지 못했다면 초반의 기습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와해되었을 것이다.
르하르트 군이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하자 결국 헨드락 기사들은 그 힘과 기세로도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백작님은 무사하십니까!"
헨드락 기사들을 방패 벽과 긴 창으로 몰아세우고, 플레일을 든 기사를 짓밟은 기사가 다가와 물었다.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르하르트 기사단의 단장이라고 했던가 그랬던 것 같았다.
"넋이 나가긴 했는데 괜찮습니다."
아이작은 여전히 충격에 빠져 있는 르하르트가 흑마 위에 올라타 있는 것을 보았다. 정신을 차리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우선 백작을 데리고 빠져나가십시오. 적들을 정리해야겠군요."
아이작은 난전이 벌어지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헨드락 기사단은 비정상적인 투지와 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숫자가 적고 제대로 된 조직력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이 진압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왜지?'
아이작은 이 와중에도 후퇴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는 헨드락 성채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이대로 가면 소중하게 키운 헨드락 기사들은 전멸이다. 벡스터의 처형과 함께 기사들도 같이 치워버리기로 한 건가?
'버림패로 쓴 건가? 이 정도 충격만 주면 충분하다고?'
결국 헨드락 성채에서 후퇴 지시는 내려오지 않았다. 헨드락 기사단은 기사단장이었던 벡스터 경을 포함해 대부분이 사망하고 일부가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헨드락 성채 안쪽에는 아이작이 심어 놓은 존재가 움직이고 있었다.
***
헤사벨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 뒤, 아이작은 당연히 손 놓고 있지 않았다.
표면적으론 헨드락 기사단 소속 기사의 암습이었지만, 그 배후에 붉은 성배가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아이작은 르하르트의 부탁대로 기다리는 척하면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지힐렛을 성채 안으로 잠입시켰다. 아이작의 전쟁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지힐렛은 녹아 흐르는 듯한 모습으로 성벽을 기어올랐다.
헨드락 성채에 숨어든 지힐렛은 벡스터와 카일이 벌이는 촌극도 모두 지켜보았다.
벡스터가 결국 오언의 칼에 목이 베이는 광경도.
이후 헨드락 성은 카일이 다시 장악하게 되었지만, 실권이 카일에게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엘라.'
지힐렛은 그녀를 주시했다.
아이작을 통해 지식을 받은 지힐렛은 헨드락 성채 안에 붉은 성배 클럽의 추종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벡스터의 반란을 진압한 것은 오언이지만 라엘라가 배후에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반란을 진압한 후, 오언은 기사들을 체포해 성채로 끌고 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반쯤 미쳐 버린 기사들이 르하르트의 병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때 아이작은 '벽 속의 쥐' 능력을 통해 이미 그 모든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다만 라엘라가 좀 더 본색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 방치하고 있던 것뿐이었다. 해서 르하르트가 살해당하기 전에 개입하여 막을 수 있었다.
만약 좀 더 일찍 개입했다면 병사들이 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라엘라를 처치하기 어려워졌을 것이다.
'성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아이작은 지힐렛의 눈과 귀를 통해 적막한 풍경이 계속되고 있는 헨드락 성채를 관찰했다.
기사들을 내보낸 뒤 라엘라는 성채 안에서 뭔가를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힐렛의 몸은 내부를 정탐하기에 적당하지 못했다.
지금도 어디든 숨어들기에는 나쁘지 않지만, 더 자세히 듣거나 보기 위해서는 다른 형태가 필요했다.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형태가 필요했다.
마침 지힐렛은 적당한 몸을 찾아냈다.
성벽 아래 구덩이에 버려진 벡스터의 몸뚱이였다.
구덩이 안에는 벡스터 외에도 소수였지만 끝까지 저항한 것으로 보이는 기사나 병사의 시체가 보였다.
하지만 지힐렛은 굳이 벡스터의 시체를 골랐다.
[가죽 아래에: 상대방의 내부를 '포식'하고 그 가죽을 당신의 외피로 이용합니다.]
한때 아이작에게 주어진 특전 선택지 세 가지 중 하나였지만 포기했던 그 능력이었다. 이제 그 능력은 사도로 승격된 지힐렛에게 부여되었다.
아이작에 의해 재탄생된 후, 지힐렛은 명확한 형태를 가지지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쥐에 가까운 외형이었으나 생전에 비해 체구가 많이 줄어 날렵한 형태였다.
하지만 몸은 수많은 촉수 다발이 얽혀 있는 실타래 같은 꼴이었다. 그 안에 무수히 많은 이빨과 눈을 감추고 있었고, 원한다면 얇은 피막을 형성해 피부 비슷한 것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 말은, 원한다면 거대한 곰만큼 몸을 부풀릴 수도 있지만, 동시에 딱 사람 크기만 한 외형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지힐렛은 벡스터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누군가 봤다면 그 기괴한 모습에 기겁했겠지만, 시체가 방치된 구덩이를 굳이 들여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덩이 안에서 벡스터의 몸을 장악한 지힐렛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머리가 떨어진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몸은 껍데기일 뿐, 본체는 지힐렛이었으니까.
지힐렛은 촉수들을 이어 머리와 몸통을 연결했다. 표정이 다소 어색할 수는 있겠지만 몸을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강인하고 단련된 벡스터의 몸을 차지하자 단순히 그 껍데기를 뒤집어쓴 것을 넘어 어느 정도 검술 흉내까지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죽었다고 알려진 사람이 돌아다닐 수는 없기에, 정체를 숨겨야 했다.
다행히 성채 안은 전투 준비와 혼란스러운 내부 상황 덕분에 온갖 병장기가 어지럽게 방치되어 있었다.
지힐렛은 굴러다니는 투구 하나 집어 어깨 위 투구 걸이에 씌웠다. 옷에 다소 피가 묻어있긴 했지만 어두운데다 흙먼지투성이였던 탓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저 평범한 병사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이봐!"
지힐렛이 성채 안으로 어떻게 들어갈까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급이 높아 보이는 병사 하나가 지힐렛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도 여기서 뭐 해? 매장 작업 중단하고 모이라는 명령 못 들었나?"
지힐렛이 대답을 하지 않자 병사는 더욱 화를 내며 다그쳤다.
"당장 따라와! 전투가 코앞이다!"
지힐렛은 얌전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피나 흙이 묻은 것도 매장작업 때문으로 오해한 것 같았다. 뜻하지 않게 일이 쉽게 풀렸다.
병사장의 뒤를 따라가 도착한 곳은 성 안쪽의 연회장 같은 곳이었다. 많은 인원들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실내 공간이었다. 아이작은 지힐렛을 통해 헨드락 성채의 병사 대부분이 그 안에 모여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뭐지? 전투가 코앞인데 연설이라도 하려는 건가?'
하지만 영주인 카일은 보이지 않았다.
카일을 체포하려던 벡스터의 반역은 실패한 데 더해 엉뚱한 자에게 권력이 넘어간 것 같았다.
바로 눈앞에 있는 두 남녀, 오언과 라엘라에게.
병사들도 이 상황이 두렵고 낯선 듯 동요하는 기색이 강했다. 하지만 벡스터의 목이 달아난 데다, 카일 헨드락이 공들여 키우던 기사들도 성채 밖에서 전멸하는 꼴을 보았다.
누구도 이 상황에서 나서서 불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때 라엘라가 일어섰다.
술렁이던 병사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라엘라는 천천히 병사들 사이를 가로지르더니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병사들은 눈앞에서 맨발의 라엘라가 걷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확히 병사들 한가운데 선 라엘라는 그 무수한 시선 속에서 속삭였다.
"경외하라."
숨소리조차 멎은 듯한 침묵이 찾아왔다.
오직 들리는 것은 자기 자신의 심장 박동뿐이었다. 아니, 몸 안의 피가 흐르는 소리까지도 들려올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지힐렛은 그 소리가 너무 조용해지거나 감각이 예민해진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말 성 전체를 울리는 심장 박동이 들리고 있었다.
성안에 맥동하는 핏줄의 생명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때 지힐렛의 머리 위로 무언가 떨어졌다. 검붉은 액체였다.
'피?'
동시에 성채의 벽 틈과 돌 사이로 무수한 피들이 흘러내렸다.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병사들은 혈향 가득한 폭우 속에서 정신 나간 듯 천천히 흐느적거리는 라엘라를 바라보았다.
라엘라는 춤을 추듯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그녀의 모습은 피부가 벗겨진 여인 같기도 했고, 팔다리가 아홉 개인 것 같기도 했으며, 살점으로 점토를 빚어 만든 인형 같기도 했다.
지힐렛은 속이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혈류의 흐름이 빨라지고 있었다.
'기적인가?'
아이작은 이변을 알아차리고 지힐렛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붙들어 맸다. 이제는 신수의 격에 속하는 지힐렛이었지만, 눈앞의 강력한 신적 존재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행히 아이작이 통제력을 강화하자 지힐렛은 다소 흥분감을 느끼는 정도에서 그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신수인 지힐렛조차도 영향을 받는 기적이었다.
라엘라가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적의 살을 그릇 위에 올리고, 피로 잔을 채우라."
피의 소나기가 그친 순간, 병사들의 눈과 입은 광기와 투지로 물들어 있었다. 르하르트의 기사들을 급습했던 기사들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한층 더 강한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아이작은 이 전투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
"공성전을 포기하겠다구요?"
"예."
르하르트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르하르트는 그날 전투의 충격이 컸는지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놀라지도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당장 짐 싸서 영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충격을 받은 것은 르하르트만이 아니었다.
마을 주민들조차도 좀 멍청하지만 사람은 좋은 영주가 이런 일까지 저질렀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것도 주민 대피까지 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병사들이 주민들을 상대로 화풀이라도 했다간 대학살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르하르트는 그런 명령 따윈 내리지 않았다. 충격으로 그럴 기력도 없었거니와, 이미 절반에 가까운 병사와 기사들을 잃은 상태에서 주민들까지 적으로 돌리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사실 이 정도 피해라면 패배를 인정하고 후퇴하는 것이 맞긴 한데....'
하지만 르하르트가 병력의 절반 가까이 손실을 보았다고 해도, 헨드락 쪽은 벡스터를 포함해 기사들이 전멸하다시피 했다. 기사들이 실질적으로 장교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헨드락 영지는 농민병이나 다름없는 어중이떠중이만 남은 셈이었다.
게다가 헨드락 영주는 지원군이 올 가능성이 전무하지만, 르하르트에게는 실시간으로 지원군이 계속해서 도착할 예정이다.
이미 포로로 삼은 기사들을 통해 헨드락 성채 안에서 이단에 가까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증언을 얻은 상태였다. 원래 증언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지만 아이작이 나서서 손을 보자 그나마 봐줄 만한 상태가 된 것이다.
"빛의 법전 교단에서 성기사와 사제들을 보내줄 겁니다. 그러면 저 성벽도 무너지겠지요."
르하르트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기적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사제들에게 의존하는 것은 가장 효율적인 공성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상황이 쉽게 호전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저 성벽 뒤에는 라엘라가 있다.'
아이작은 지힐렛을 통해 어젯밤 헨드락 성채에서 벌어진 광경을 떠올렸다.
그리고 라엘라를 본 순간 나타난 이름 없는 혼돈의 메시지를 떠올렸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이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포식하길 원합니다.]
[혼돈의 포상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63화. 일인공성전 (3)
'붉은 살점의 선지자....'
아이작은 붉은 성배 클럽에서 가장 유명한 천사의 이름을 떠올렸다.
천사들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신이 직접 창조한 기천사(基天使, Basic angel)와 역사에 남을 업적을 세워 신이 이름을 내려준 명천사(名天使, Named angel)다. 기천사는 대부분이 사후세계에서 활동할 뿐, 극히 일부 사자 역할을 할 때가 아니면 볼 일이 없다.
다만 명천사는 다르다. 지상에서 역사에 남을 업적을 세운 사람들인 만큼 이미 유명 인사인 경우가 많고, 사후세계보다 지상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도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붉은 성배 클럽에서 가장 활동적인 천사였다. 같은 붉은 성배 신앙인 헤사벨이나 헤인켈이 아이작을 천사로 의심했을 때 바로 그녀를 떠올렸을 정도로.
물론 음모와 비밀 조직을 통해 움직이기 때문에 그 동태가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붉은 성배 신앙을 선택해본 아이작은 그녀가 온갖 신앙에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약점도 알고 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분명 강한 천사지만... 직접 싸우는 스타일은 아니지.'
물론 가장 약한 천사도 감히 인간이 대적하기 힘들 만큼 강하다. 하지만 아이작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일단 싸움으로 끌어내면 크게 약화시킬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싸우기를 꺼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제 갓 성기사가 된 아이작이, 어떻게 보면 신앙인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천사를 처치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이작의 답은 '불가능'이었다.
천사를 죽이는 데엔 단순히 강한 힘만이 아니라 복잡한 요소들이 더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추방하는 것 자체는 불가능하지 않았다.
'다만 빛의 법전이 개입하게 되면 내 몫을 주장하기는 어렵겠지.'
이 판국에도 몫을 따지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작은 여기까지 와서 헛걸음을 하고 싶진 않았다. 더군다나 붉은 성배가 감히 자신의 권속을 노렸다는 점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저 성채 안에 있는 게 천사든, 악마든 아이작이 직접 손을 봐야 했다.
"르하르트 백작님."
"예. 성배기사님...."
"헨드락 성채에 무언가 불경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카일 헨드락은 벌 받아 마땅한 죄인이지만 그 안에 있는 사용인들과 병사들은 휘말려 든 일반인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예... 그렇기는 하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이 불경한 일에 휘말리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질 겁니다. 벗어날 수 없는 죄악도 늘겠지요."
물론 중세 귀족인 르하르트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평민들의 문제다. 하지만 성배기사가 하는 말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아이작은 힘을 주어 말했다.
"병사를 움직여 주십시오."
"성배기사님...."
르하르트가 난처한 표정으로 반대하려 하자 아이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성전을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직접 성을 공략할 테니, 밖에서 호응만 해주시면 됩니다. 잘하면 싸움이 벌어지기도 전에 끝날 수도 있습니다."
"예? 혼자서 성을 공략하겠다구요?"
"아뇨. 제 부하도 함께할 겁니다."
"부하라면 그... 헤사벨이라는 여자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해도 단둘이다. 혼자나 다를 바 없다.
아이작은 지힐렛도 염두에 두고 있긴 했지만, 굳이 설명하진 않았다. 대놓고 드러낼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고.
르하르트는 아이작을 말리고 싶은 눈치였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헨드락 성채 쪽이 먼저 지쳐 나가떨어지게 되어 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지원군이 올 것 아닌가?
르하르트가 그 사실을 조심스럽게 지적하려 하자 아이작이 말했다.
"포위망이나 방어선도 없이 그저 기다리다가 만약 헨드락 성채 안의 병사들이 기사들처럼 광기에 휩싸여 뛰쳐나온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
르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과도한 우려가 아니라 당장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오히려 아이작은 라엘라가 왜 당장 그러지 않는지를 궁금해할 정도였다. 헨드락 성채의 병사들이 기사들이 보여 주었던 광기를 내세운다면 르하르트의 병사들을 휩쓸어 버릴 수 있을 테니까.
르하르트는 지금 당장 후퇴하든가 아이작의 계획에 호응하든가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혼자서 적진 속으로 뛰어들겠다는 성배기사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싶진 않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아이작의 입가에 미소가 스며들었다.
***
"암살이요?"
"어려운가?"
새벽.
헨드락 성채 근방의 으슥한 장소에서 아이작은 헤사벨에게 계획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의지를 전달하는 것은 애매한 방향성일 뿐, 자세한 이야기를 하려면 직접 대화를 해야만 했다.
아이작의 계획을 전해 들은 헤사벨은 난처한 표정을 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녀가 암살해야 하는 상대는 다름 아닌 라엘라. 붉은 성배 클럽의 천사였으니까.
헤사벨은 이제 아이작이 붉은 살점의 선지자도, 붉은 성배 클럽에 속해있지 않다는 것도 납득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믿음을 보이고 있었다.
아이작은 그것이 오히려 묘하게 느껴졌다. 때문에 이 지시는 그녀에게 내리는 시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헤사벨에게 아이작의 지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뇨, 어렵기도 하겠지만 그... 만약 라엘라라는 여자가 천사라면 죽이는 게 불가능할 텐데요?"
천사가 된 자들의 본질은 이미 사후세계에 속해 있다.
신이 허락하기 전까진 천사를 완전히 죽일 수 없다. 만약 라엘라를 죽인다고 해도, 일시적으로 지상에서 추방하는 것에 불과하다.
"성공하지 않아도 좋아. 중요한 건 시도하는 거다."
"시도요?"
"실패해도 상관없으니까 시늉만 하다가 도망쳐도 좋다고. 나머지는 상황이 닥쳐보면 알아."
헤사벨은 납득하지 못한 듯했지만, 그녀가 납득하고 말고는 상관없었다. 실패해도 상관없으니까 시도나 하라는 정도라면 그녀가 곧잘 받는 명령 중에서도 관대한 명령이었다.
"잠깐, 그 전에 이걸 가져가라."
아이작은 헤사벨에게 천에 감싸여있는 무언가를 넘겨주었다. 헤사벨은 천을 들춰보았다가 기겁하며 다시 가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이, 이, 이건 대체?"
"이 정도는 있어야 천사를 상대할 수 있겠지."
"저, 저, 저를 어떻게 믿고?"
헤사벨은 너무 놀라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아이작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배신할 건가?"
"전혀 아닙니다!"
"그럼 가서 네 할 일을 해."
헤사벨은 고개를 열 번 정도 끄덕인 다음 성벽을 넘어갔다. 성벽 위에는 순찰을 도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밤중에 헤사벨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헤사벨이 동요하는 모습이 신경 쓰였지만, 신뢰를 보여 주었으니 그만큼 밥값도 하리라고 기대했다.
'그럼 나도 움직여야겠군.'
아이작은 헤사벨처럼 성벽을 박차고 뛰어오를 재주가 없었다. 대신 밤의 어둠을 이용해 붉은 탄원을 사용했다. 붉은 안개가 순식간에 성벽을 기어올랐다.
성벽 위에 올라서자마자 기절한 병사가 보였다. 헤사벨이 처리하고 지나간 것 같았다.
아이작은 혹시나 싶어서 병사의 눈을 까뒤집어 보았다. 역시나 마을에 포로로 잡힌 기사들처럼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상태였다.
'역시....'
지힐렛을 통해 라엘라가 성채 안의 병사들에게 광기를 불어넣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병사 한 명 한 명이 헨드락 기사단 같은 전투 능력을 보인다면 르하르트 측은 당해 낼 방법이 없었다. 헨드락 쪽의 병사가 부족하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병사를 몰고 쳐들어오는 쪽이 더 이득이었을 텐데.'
하지만 라엘라는 기사들만을 내보냈을 뿐 병사는 성채 안에 둔 채 버티기에 들어갔다. 인명을 아끼기 위해서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상태가 계속될수록 병사들은 생명력이 빨리든 정신력이 소모되든 점점 피폐해질 것이다.
'역시 그건가?'
사실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바는 있었다. 그래서 헤사벨을 먼저 보낸 것이기도 했다.
아이작은 경계가 허술한 성문을 보면서 아쉬운 표정을 했다.
'만약 르하르트 백작이 건재했다면 이대로 성문을 여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지금 르하르트는 소심해진 데다 헨드락 성채의 병사들 역시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항복하는 병사조차 없을 테니 쓸데없는 피해만 불러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차피 그녀가 무슨 수작을 쓰든, 아이작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날 뿐이었다.
이미 지힐렛을 통해 잠입하기 쉬운 경로는 이미 파악해 둔 상태였다.
아이작은 성채 안으로 빠르게 잠입했다.
***
'조용하군.'
내성으로 잠입했지만 병사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새벽이라지만 성벽 주변에 서 있던 일부를 제외하곤 순찰 다니는 병사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기묘했다. 게다가 그 눈 벌게진 병사들이 잠을 잔다는 것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순조롭다면 순조로운 잠입이지만, 내성을 코앞에 둔 어느 순간 아이작은 묘한 적막을 느꼈다. 새벽이라서 그렇다기에는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 나쁜 적막함이었다.
아이작이 멈춰 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내성문 앞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헨드락 기사단의 부단장, 오언이었다. 아니, 여전히 시커먼 안개에 휩싸여 있어서 오언이 맞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정말 이렇게 제 발로 걸어 들어올 줄은 몰랐군."
아이작은 대답하는 대신 칼을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보이지 않던 병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거친 호흡과 괴로운 듯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장이라도 공격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느라 앓는 소리였다.
"용감한 건가, 아니면 멍청한 건가? 선지자께서 그럴 것이라 예견하셨다만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었다. 혼자서 이 성안으로 잠입해?"
"듣고도 믿을 수 없었잖아. 평범한 사람이라면 속았을 거란 말이지."
아이작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지나치게 동요 없는 모습에 오언은 경계하는 듯 병사들을 억제시켰다. 아이작이 혹시 무슨 수를 꾸미거나 르하르트의 병사들이 더 잠입한 것은 아닌지 경계하는 눈치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없다. 그걸 걱정하는 거라면 말이지."
"먼저 앞서 보낸 굴마르 가의 여식을 빼고 말인가?"
아이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언은 비웃듯 말을 중얼거렸다.
"알고 있어서 놀라운가? 이 일대는 이미 라엘라 님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다. 이 성채, 그것도 한때 붉은 성배에 몸 담갔던 자를 감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우리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작."
"기다리고 있었다라...."
"너는 붉은 성배의 계획을 망쳤어. 이제 그 피와 살로 대가를 치러야 할 때다."
그 순간 오언이 목줄을 풀어놓은 것처럼 병사들이 일제히 아이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병사들을 무기를 쓰는 법도 잊은 것처럼 손과 이빨로 아이작을 물어뜯으려 했다. 아이작은 주먹을 휘둘러 병사들을 후려갈겼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갑옷에 병사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오언은 그 모습을 보며 비웃었다.
"고결한 성배기사께서는 그저 이용당하기만 할 뿐인 병사들을 죽이지 못하는 모양이군."
콰득, 퍽!
오언의 비웃음이 무색하게 아이작의 칼이 병사의 몸을 꿰뚫었다. 그리곤 단숨에 오언과의 사이를 좁히며 그 사이를 이삭 검술: 여덟 갈래로 베었다. 잘려 나간 병사들의 팔다리와 피보라가 폭풍처럼 몰아닥치며 주변을 휩쓸었다.
오언은 급히 검을 들어 아이작의 공격을 막아 냈다.
요란한 금속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까드드득! 칼날이 맞부딪치며 불꽃이 튀어 올랐다. 이번에도 아이작의 공격은 오언의 갑옷을 둘러싼 검은 안개 일부를 벗겨 냈을 뿐, 갑옷에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무슨... 성배기사라는 놈이 병사들을 가림막으로 쓴 거냐!"
"조종당하고 있으면 내가 못 죽일 줄 알았나? 신뢰를 감당하기 힘들군."
아이작은 자신이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적들은 자신을 너무 고평가해 주는 것 같았다.
이건 전쟁이다. 조종당했건 어쨌건 상대방이 창칼을 쥔 병사라면 아이작이 봐줄 이유가 없었다.
아이작은 기세를 이어가며 오언을 몰아붙였다.
체력의 소모가 적지 않았기에, 매번 갑옷을 벨 정도의 상급 검술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아이작은 검술 연습을 하던 때를 떠올렸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적의 경로를 향해 칼을 휘두른다.
이미 검은 안개가 걷힌 부분으로 아이작의 칼날이 파고들었다. 정확히 갑옷의 가죽 이음새가 있는 부분이었다. 칼날은 팽팽하게 당겨진 가죽을 째고, 비틀었다.
게 껍질이 벗겨지듯 오언의 갑옷이 벗겨졌다.
드디어 첫 번째 선혈이 흩뿌려졌다.
오언은 아이작의 실력에 경악했다. 라엘라의 종복이 된 후 그는 벡스터에 버금가는 실력을 얻었었고, 살점까지 취한 지금은 그 이상의 힘과 속도를 얻었다.
아무리 기습의 효과가 있었다지만 아이작의 실력은 불과 며칠 전 새벽 때보다도 좋아진 것 같았다.
심지어 동작 일부는 낯익기까지 했다.
'설마 그 새벽에 본 동작을 보고 익혔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오언은 애써 부정하며 이를 악물었다.
쾅! 오언은 검은 안개와 라엘라가 준 살점의 힘을 믿고 강하게 부딪쳤다. 평범한 결투가 아닌 팔다리 한 개쯤 잃어도 상관없다는 투의 저돌적인 행동이었다.
실제로 힘과 방어력이 강해진 오언에게는 오히려 이쪽이 더 맞는 전투방식이었다.
처음 아이작이 잡고 있던 주도권도 잠시, 금세 오언에게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선지자님은 네가 헤사벨 굴마르를 제압했다면 나는 상대도 안 될 테니 도망가라고 하셨지!"
쾅, 쾅, 쾅! 오언이 내려치는 검이 금방이라도 아이작을 두 쪽 낼 듯 강하게 내려쳤다.
"선지자님이 한 가지는 틀리셨군! 내 가능성은 선지자님이 예측하셨던 것보다 더 크다는 것을 말이다!"
"아니, 한 가지만 맞았어."
아이작은 이를 악물고 오언의 공격을 버티며 중얼거렸다.
"네가 날 보자마자 도망갔어야 했다는 거."
콰드드득.
아이작의 왼팔이 크게 부풀었다.
아니, 아이작의 갑옷이 일그러지면서 그 틈새에서 촉수가 뻗어 나온 것이었다.
오언은 힘을 겨루던 와중 갑작스럽게 칼과 손을 휘감아 도는 촉수를 보고 경악하며 뒤로 빠졌다.
그러나 이미 갑옷이 벗겨진 부위에 촉수가 살짝 닿았다.
촤악! 이내 섬뜩한 소리와 함께 피부와 살점이 뜯겨나갔다.
'스쳤을 뿐인데...?!'
오언은 경악하며 뒤로 빠지려 했다. 하지만 이미 너무 가까이 있었다. 아이작은 촉수를 빠르게 뻗어 오언의 몸 곳곳으로 촉수 가닥들을 내보냈다.
아이작이 촉수를 움직이자 말도 안 되는 힘이 오언을 잡아당겼다.
"너, 이게 무슨...!"
순간 오언은 끔찍한 가능성을 떠올렸다.
"너, 빛의 법전 성기사가 아닌 거냐!"
아이작의 입가에 비웃음이 담겼다.
"그걸 대답해야 알겠냐."
64화. 일인공성전 (4)
오언은 아이작의 대답이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검을 쥔 순간부터 그는 성배기사를 동경해 왔다.
하지만 그는 성기사는 물론 제국 기사단에 들어갈 실력조차 되지 못했다. 그는 그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칼과 갑옷 덕분에 그나마 검에 익숙한 동네 청년일 뿐이었다.
오언의 재능의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라엘라에게 성기사처럼 신의 권능을 허락받을 수 있다는, 막강한 힘과 재능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유혹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비록 부정한 길을 걷게 되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성배기사를 동경하고 있었다.
그가 아이작을 만났을 때 보였던 존경의 표시는 거짓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 어린 성배기사를 동경하고 있었다.
비록 그와 맞서게 되었지만, 그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수준이 되어 만족한다고.
'그랬는데....'
오언은 쉴 새 없이 난입해 오는 촉수들을 쳐 내느라 정신없었다. 촉수들은 질기고 잘 끊어지지도 않았는데, 그나마 잘린 것조차도 거머리마냥 갑옷에 달라붙어 갉아먹고 구멍을 냈다.
갑옷을 보호하는 검은 안개조차도 소용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조차 먹어 치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사악한...!"
붉은 성배의 힘을 빌린 자신조차도 가늠할 수 없는 불길하고 공포스러운 힘이었다. 이건 무슨 신앙인지도 짐작이 되지 않았다. 신앙이 맞긴 한 건가? 괴물이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촉수 조각 하나가 갑옷 안쪽으로 파고든 것인지 종아리 안쪽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촉수는 그의 피부 안쪽을 파고들어 허벅지까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오언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놈을 죽여야 한다.'
어떤 확고한 목적의식이 오언의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지금까지는 그저 명령에 의한 행동이었다면 지금은 사명감에 가까웠다.
오언은 아이작이 빛의 법전 성배기사를 사칭하며 칭송받는 숭고한 여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럴 수 있나? 그래도 되는 건가?
오언은 이 사악한 존재가 대체 어떤 목적으로 그런 짓을 하고 있을지,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존경받는 존재가 되었을 때 어떤 본색을 드러낼지 상상해 보았다.
'막아야 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붉은 성배에 조종당하는 흑기사 오언이 아닌, 어린 시절 성배기사에 대한 동경을 막 품었던 어린아이였다.
오언은 전신을 파고들려는 촉수를 향해 거침없이 몸을 던졌다.
아이작의 눈이 커졌지만 오언은 목숨을 던질 각오로 온 힘을 다해 아이작을 내리찍었다.
콰득!
그 순간 오언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의 검이 허무하게 허공을 가로질렀다. 오언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얼굴을 흠뻑 적시는 피는 느낄 수 있었다. 피가 눈에 스며든 것인가 싶어서 눈을 문질러 닦아 보았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온몸에서 무언가 근질근질 꿈틀거리고 있었다.
"방금은 꽤 용감했어. 오언."
존경했던 성배기사가 그를 칭찬했다. 하지만 오언은 달갑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오언은 검을 들어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휘둘렀지만 닿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퍽, 콰득, 콰드드득.
전신에서 뭔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종기가 급속도로 자라다가 터지는 것 같았다.
"네 몸에 저 너머의 기생충을 잔뜩 박아넣었다. 게 껍질이 꽤 단단한 것 같아서 말이야. 하지만 속살은 평범하게 야들야들한 모양이군?"
기생충? 그런 것은 모른다. 하지만 오언은 자신의 갑옷과 피부 안쪽을 기어 다니는 작은 벌레 같은 것들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시각을 잃었으며, 안구까지 기어 올라간 기생충이 눈을 통해 튀어나와서 그렇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 이대로 죽이기는 아까우니까 좀 더 숙성시키면 지힐렛 같은 쓸 만한 놈이 될지도...."
"나는 충분한 위협이 되었나?"
오언은 이제 움직이지 못했지만 쓰러지지는 않은 채 물었다. 아이작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너의 숭고한 여정에 위협적인 대적자였나?"
아이작은 대답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럭저럭?"
"그렇다면 계속 그렇게 남겠다."
오언은 그렇게 말하더니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 순간, 일대의 새벽 안개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이작이 이게 또 무슨 짓거리인가 했을 때, 주변에 쓰러져있던 병사들이 마치 흡착되듯 오언을 향해 끌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퍽, 퍼퍽!
시체가 된 병사들은 물론, 부상병, 심지어 관문 근처에 있던 병사들까지 끌려오기 시작했다. 오언 주변에 순식간에 사람의 산이 쌓였다.
살아 있는 사람, 죽은 사람 모두 뒤엉킨 아수라장이었다.
아이작은 그것들이 오언을 중심으로 녹아내려 합쳐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언 안에 흩뿌렸던 기생충들도 수많은 자아와 살점에 묻혀 더 이상 의지를 느낄 수도 없었다.
아이작은 이 괴물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어보미네이션(Abomination)....'
붉은 성배 클럽에서 사용하는 중위 소환체 중 하나였다. 이런 권능까지 부여해 주다니, 라엘라가 작정하고 아이작을 막아서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보미네이션에 융합된 병사 중 하나가 뻐끔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라는 역경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네 여정은 여기까지다. 성배기사."
***
헤사벨은 밖에서 들리는 소란에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며 라엘라가 있는 방을 찾아갔다. 숙련된 암살자인 헤사벨에게 라엘라의 방을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이 새벽에 불이 켜져 있는 유일한 방이기도 했다.
방문은 열려있었다. 하지만 그 초대하는 듯한 문을 굳이 열고 들어가는 대신, 라엘라는 붉은 안개로 변해 은밀하게 숨어들었다.
방은 온갖 호사스러운 물품들과 아름다운 장신구, 가구들로 가득했다. 일반적인 시녀가 쓴다기에는 지나치게 값비싼 것들이었다. 단순히 호화로운 것이 아닌 진짜 귀족들이 쓸법한 명품들이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라엘라가 붉은 안개를 응시하고 있었다.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나라는 생각에 헤사벨은 조용히 변신을 풀었다.
"나의 기적을 잘도 사용하는구나, 헤사벨."
붉은 탄원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천사가 되었을 때 만들어 내고 사용한 의식이었다. 이 의식을 통해 그녀는 피부를 벗고 살과 피와 뼈를 자유롭게 분해했다가 다시 형성하는 기적을 거쳤다. 이후 이 기적은 그녀의 사랑을 받는 혈통에게 부여되어 이어졌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님을 뵙습니다."
헤사벨은 최소한의 예의만을 표시했다. 이미 적대하는 관계가 된 마당에 이 이상의 예절은 기만이나 다름없었다.
"네가 창문을 넘어오기 전에 기적을 거두어 창밖에 떨어뜨릴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 거다."
"...예. 물론입니다."
헤사벨이 가진 권능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붉은 성배에게서 받은 권능이다. 붉은 성배의 천사인 라엘라는 얼마든지 그 기적을 거두고 중단시킬 수 있었다.
그녀를 암살하기 위해 오언을 보냈던 밤처럼.
라엘라는 부드럽게 다리를 꼬면서 헤사벨을 응시했다.
"네게 마지막 기회를 주마. 헤사벨. 이 제안을 위해 너를 끌어들였다."
헤사벨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듣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라엘라는 미소로 응답했다.
"성배기사에게 나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고 보고해라. 그리고 그에게 돌아가서, 그의 목에 칼을 박아넣어라. 아직도 그가 살아있다면 말이지."
"그건...."
"그렇게 한다면 네 가문은 계속해서 내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굴마르 공작가는 붉은 성배의 피를 직접 받아마시기도 했지만,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강점이 있었다. 사후세계에서 주로 활동하는 다른 천사들과 달리 현세에 자주 모습을 보이는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그만큼 영향력이 강했으니까.
"네 백부가 실종되고 후계자까지 배교한다면 공작가는 크게 흔들릴 거다. 이미 가주는 난리가 났더군. 네 아버지를 실망시킬 생각이냐?"
"저는...."
헤사벨은 주춤했다.
아이작에게 굴복한 것은 공포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 때문에 가문이 몰락한다면? 가문의 수많은 식솔들과 자신을 믿고 의지하던 동생들, 아버지는?
붉은 성배 클럽은 몰락한 자들에게 관대하지 않다.
"헤사벨."
라엘라의 채근에 헤사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고민할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헤사벨은 조용히 라엘라 앞에 무릎을 꿇었다.
라엘라는 만족한 듯 미소를 띠었다.
그녀가 헤사벨을 완전히 복종시키기 위해 손을 뻗으려던 순간, 헤사벨은 갑자기 온몸을 붉은 안개로 변화시켰다.
붉은 안개가 순식간에 라엘라를 휘감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순간에 녹여 없앨 수도 있는 강력한 흡혈 능력이 발동되었다.
우둑.
그러나 다음 순간, 헤사벨은 라엘라의 손에 목이 붙잡혀 있었다.
라엘라는 그 가녀린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올까 싶은 모습으로 헤사벨의 목을 움켜쥔 채 서 있었다.
"대체 뭘까, 헤사벨?"
라엘라는 오른손에서 돋아난 스무 개의 손가락으로 헤사벨의 목을 툭툭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헤사벨은 권능을 써 보려고 했지만 역시나 모든 기적들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체 그 성배기사가 뭐길래 네가 공작가의 지위와 경력과 가족까지 다 버리고 네가 이렇게까지 할까? 단순한 공포? 강압적인 복종? 아니야. 뭔가가 분명 더 있어."
라엘라는 헤사벨의 의도를 캐내려는 듯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애당초 그녀는 헤사벨이 항복하리라곤 생각조차 안 했다.
헤사벨의 침입을 허용한 이유는 그녀를 통해 아이작에 대한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때 헤사벨이 입을 뻐끔거렸다. 라엘라는 목을 압박하는 손을 살짝 풀어 주었다. 뭐라고 말하는지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헤사벨의 입에서 나온 것은 목소리가 아닌 다른 것이었다.
촉수 한 가닥이 라엘라의 눈을 꿰뚫었다.
콰득! 상당히 깊숙이 꿰뚫린 라엘라는 순간적으로 몸의 통제력을 잃었다. 헤사벨은 급히 라엘라의 손에서 빠져나와 호흡을 가다듬는 동시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준비해 온 단검으로 라엘라의 심장이 있을 부위를 연달아 찔렀다.
콱, 콱, 콱!
1초도 안 되는 사이 라엘라의 심장은 너덜너덜해질 만큼 구멍이 뚫렸다. 여기까지였다.
'이렇게 쉽다니?'
헤사벨은 놀랍도록 일이 잘 풀렸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이작은 암살하는 시늉만 해도 된다고 했지만 헤사벨은 결코 일을 대충 할 생각 따윈 없었다.
라엘라에게 들킬 것은 뻔했다. 기적을 금제당할 것도 알고 있었다. 라엘라 앞에서 헤사벨은 일반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 가지 단서가 붙는다.
라엘라는 오직 '붉은 성배 클럽 신앙의 기적만을 거둘 수 있다'는 것.
헤사벨은 아이작이 축적해 온 신앙을 소모해 기적을 하나 더 받았다.
촉수의 기적.
이름 없는 혼돈이 베푸는 가장 기초적인 기적 중 하나였다.
헤사벨은 성공했다는 기쁨도 잠시, 라엘라의 머리라도 잘라야 하나 했다. 어차피 천사는 죽지 않고 일시적으로 추방될 뿐이지만 그래도....
그리고 그제서야 그녀는 라엘라가 쓰러지지 않고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헤사벨은 라엘라를 올려다보았다.
촉수가 꿰뚫은 라엘라의 눈 쪽 구멍이 기이할 정도로 크게 보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시커먼 구멍이 헤사벨을 응시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눈구멍 사이로 새하얀 손가락들이 뻗어 나왔다. 손가락들은 구멍을 크게 벌리며 밖으로 몸을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헤사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이 정도면 아이작이 시킨 일 이상으로 한 것이 분명하다고 믿으면서.
"아이작 님!"
쿵, 쿵쿵, 쿵쿵쿵!
헤사벨은 미친 듯이 복도를 달려가면서 소리쳤다. 성이 기이한 진동과 소음으로 가득했다.
마치 성 전체가 거대한 심장이 되어 뛰는 것 같았다. 이제 아이작이 나타나 뭔가 해야 하지 않나? 라엘라를 암살하고 나면 다음에 뭘 해야 할지 알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때, 복도 건너편에서 다급히 달려오는 무언가가 보였다.
흰 갑옷에 금발.
그녀가 신봉해마지않는 성배기사, 아이작이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바쁘게 달려올 줄은 몰랐지만, 자신이 그만큼이나 아끼는 부하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뻤다.
"아이작님, 저를 구하러 오셨군요!"
"아니, 나도 쫓기는 중이다."
아이작은 헤사벨을 지나쳐 가며 대답했다.
쿵쿵쿵쿵!
그제야 헤사벨은 아까부터 성을 울리던 기묘한 진동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복도 저편에서 천장과 바닥을 가득 메운 채로 달려오는 거대한 살점 무리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헤사벨은 그제야 아이작의 뒤를 따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65화. 붉은 살점의 선지자 (1)
"아아아아!"
복도에서 튀어나온 병사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아이작을 물어뜯으려 했다. 아이작은 병사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성큼성큼 전진했다.
오언 렌리가 병사들을 흡수해 거대한 살점 괴물로 변신하자 아이작은 바로 성 안쪽으로 도망쳤다. 덩치가 커진 놈은 척 보기에도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작은 자신이 똑똑한 판단을 했다고 생각했다.
오언이 복도를 거대한 살점으로 채우면서 추적해 오기 전까지는.
"으아으아아!"
아이작이 쓰러뜨린 병사가 새롭게 오언의 살점에 짓눌리며 흡수되었다. 아무래도 병사들이 죄다 성안에 매복해 있던 것 같았다. 다행인 점은 어보미네이션의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 않아서 빠른 걸음만으로도 충분히 따돌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어보미네이션 역시 그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 가고 있었다.
"라엘라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어요. 그런데...."
"되살아났지?"
"알고 계셨어요?"
알고 있었다기보다 예측 가능한 선이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게임을 공략할 때에도 가장 자주 얼굴을 드러내는 천사였다. 당연히 싸울 일도, 퀘스트를 받을 일도 많다. 그리고 그녀는 결코 어지간해서는 본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라엘라는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쓰고 있는 껍데기다."
아이작은 복도 저 너머 어딘가에 있을 어보미네이션을 찾으며 말했다. 어보미네이션은 무슨 꿍꿍이인지 더 이상 쫓아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놈의 기척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저 어보미네이션, 그러니까 오언이랑은 좀 다르지. 권속이 아니라 아예 천사의 살점을 대량으로 쑤셔 넣어서 그 안에 들어간 셈이니까. 적당히 쓰다 버리기 충분할 정도로 말이야."
어디부터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의지인지 라엘라의 의지인지는 알 수도 없고 의미도 없다. 이 정도 권능을 발휘하려면 거의 수족이나 다름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헤사벨은 아이작의 말에 혼란스러운 표정을 했다.
"껍데기에 불과하다면... 암살을 해도 소용없지 않나요?"
"아니. 충분히 의미 있었어."
아이작은 세 가지를 노렸다. 헤사벨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것과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주의를 끄는 것. 이 두 가지만 성공해도 시도는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마지막은 라엘라의 생명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계속해서 라엘라를 껍데기로 쓰려면 그녀의 육체가 살아 있어야 한다. 그녀가 부상을 당하면 그만큼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라엘라를 살려 두기 위해 계속해서 자신의 힘을 계속해서 쓸 수밖에 없다.
하지만 헤사벨은 라엘라를 '죽였다'고 판단할 정도의 치명상을 입혔다. 그렇다면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꽤 강한 힘이 유출될 수밖에 없다.
원래 양손으로 자유자재로 휘두르던 무기를 손끝으로만 들고 휘두르게 된 셈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같은 무게의 무기라도 후자의 경우가 훨씬 더 힘들고 고통스럽다.
"너는 지시했던 것 이상으로 잘해 줬다. 잘했다. 헤사벨."
헤사벨은 아이작의 칭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낯설다는 듯 얼굴을 매만졌다.
"어, 음,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는 거죠? 이제 그 살점 괴물도 쫓아오지 않는 것 같긴 한데, 이러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때 아이작과 헤사벨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들을 막아서는 새로운 적이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마저도.
복도가 닫힌 자루 주둥이처럼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이작은 뒤를 돌아보았다. 시커먼 새벽의 복도는 정적과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공기가 밀폐된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마치 짐승의 뱃속에 들어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몰이사냥에 당했군."
***
지힐렛은 성의 공기가 바뀐 것을 느꼈다.
온 사방에서 눅눅한 땀과 침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신성은 잃었지만 한때 짐승이자 수도원 지하에서 지하 세계를 은밀하게 손에 넣었던 존재답게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상에 출현했던 기괴한 존재가 결국 성안을 장악한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 존재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가는 지힐렛이 알 바 아니었다. 아이작이 그에게 맡긴 임무는 따로 있었다. 지힐렛은 지금까지 하던 대로 성의 지하를 계속해서 탐색했다.
성 지하에는 성의 사용인들과 집사, 그리고 죽여서는 안 되는 예민한 사람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모두 의식을 잃거나 약을 먹은 듯 몽롱하게 취해 있었지만 살아 있었다. 탈출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으니 지키는 병력도 없었다.
지킬만한 병사들은 모두 지상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존재가 있었다.
파라라라락!
천장에 붙어서 붉은 눈을 번뜩이던 박쥐 떼가 순식간에 지힐렛을 덮쳤다. 평범한 박쥐가 아닌 붉은 성배의 힘으로 소환된 신수들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목덜미에 이빨만 박아도 순식간에 절명시킬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지힐렛의 몸 곳곳에 박쥐의 이빨이 박혔다. 그중 한 놈은 기어코 지힐렛의 투구 아래로 기어들어 목을 물었다. 그러나 놈과 이빨을 맞부딪친 것은 혈관이나 살점이 아닌, 또 다른 이빨이었다.
콰드드득!
도저히 입이 있을 리가 없는 위치에 생겨난 입은 박쥐의 머리를 단숨에 물어뜯었다. 박쥐가 파닥거렸지만 겨우 투구를 바닥에 떨어뜨렸을 뿐 결국 벗어날 수는 없었다.
동료 박쥐가 생으로 씹어 먹히는 꼴에 박쥐들은 기겁하며 물러나려 했다. 경고성 음파가 퍼져나갔다. 하지만 지힐렛의 몸에 달라붙은 놈들 중 도망칠 수 있는 놈들은 아무도 없었다.
콰득, 콱, 우드드득.
지힐렛의 몸이 기이하게 휘고 꺾이며 박쥐들의 몸을 낚아채고 사로잡았다. 지힐렛이 갖게 된 포식 특성은 제 발로 먹잇감이 날아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삽시간에 포식자에서 피식자의 위치가 되었다는 것을 자각한 박쥐들이 날아오르려 했지만 낮은 천장과 좁은 복도는 이제 그들에게 감옥이 되었다.
쉭, 스걱.
복도를 빠져나가려던 박쥐마저도 촉수에 휘감겨 으스러져 잡아먹혔다. 순식간에 복도에는 혈흔만 잔뜩 남을 뿐, 살점 하나, 뼈 한 조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지힐렛은 입맛을 다시면서 투구를 주워 들었다. 그때 그는 옆 감방에서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깨달았다.
그는 멍하니 지힐렛을 바라보다가, 아직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모습으로 꿈틀거리는 지힐렛의 얼굴을 정면에서 응시했다. 이내 남자는 뭐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지힐렛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가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쇠창살은 구불거리는 그의 몸을 전혀 제지하지 못했다. 남자의 상태를 확인한 지힐렛은 아이작에게 의지를 보냈다.
[카일 헨드락, 찾았음.]
***
오언은 이제 직접적으로 몸을 움직여 덮쳐 오지 않았다. 성안으로 숨어 버린 아이작을 그런 식으로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대신 그는 성의 구조에 대해 해박했다. 아이작을 원하는 곳으로 몰아넣는 것은 간단했다. 일찌감치 무너뜨린, 원래대로라면 뚫려 있어야 할 길고 좁은 복도 쪽으로 말이다.
그리곤 그 나름의 공성전을 시작했다.
거대한 덩치를 흐물텅하게 구겨 넣어 뱀처럼 기어가는 형식으로.
복도 너머에서 어보미네이션이 되어 버린 오언이 기어 오고 있었다. 성기사가 되고 싶었던 그는 이제 원래 모습은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는 괴물이 되어있었다.
게다가 수많은 사고와 육신을 통제하기 위해 그의 사고는 극단적으로 단순화되어 있었다.
아이작을 죽여라!
"그어어어어!"
복도를 덜덜 떨리게 만드는 괴성이 울려 퍼졌다. 쿵쿵거리며 좁은 복도를 비집고 들어오는 살점 괴물의 모습은 흉측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빠져나갈 문이나 창문도 없었다.
아이작이 몸을 피하기 위해 들어온 성은 이제 덫이 되어 있었다.
"아이작 님, 제가 막아보겠습니다!"
헤사벨은 재빨리 앞으로 나서더니 뭔가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얄팍한 검도, 짧디 짧은 단검도, 달리는 기사도 낙마시키는 석궁도 도저히 어보미네이션을 멈추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그녀는 이런저런 시도를 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다가 물속에 간식을 빠뜨린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뭘 어쩌게?"
"이쯤 되면 '됐으니까 저리 꺼져' 하면서 앞으로 나서주실 줄 알고...."
점수 딸 기회 정도로 생각했지 별 생각은 없었다는 뜻이다. 역시 음모와 기회주의자 집단의 가문 후계자답다.
"됐으니까 저리 꺼져."
아이작은 검을 끌고 앞으로 나섰다. 사실 아이작도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꺼내 들기 어려운 패라서 그렇지.
아이작이 다가오자 어보미네이션은 다시 포효하며 창칼을 쥔 손들을 뻗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다가오는 그 무수한 무기들을 하나하나 쳐 내기 시작했다.
쩡, 쩌억, 퍽, 콰득!
연달아 울려 퍼지는 뼈와 살을 베는 소리가 섬뜩했지만, 아이작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세상에...!"
헤사벨이 아이작의 칼놀림에 놀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아이작도 다 계산이 서서 하는 행동이었다.
'역시 내구력이 약해.'
게임상 어보미네이션은 강력하지만 피돼지, 즉 HP만 비정상적으로 높고 방어력은 극단적으로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
형태가 자유롭게 바뀌니 근육이 유연해야 하고, 뼈대는 흐물흐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단한 갑각을 갖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덕분에 아이작이 화려하게 팔다리를 썰어내는 것은 그저 두부를 베는 것만큼이나 간단했다.
게다가 이 좁은 공간은 아이작을 가두는 덫이지만, 동시에 어보미네이션이 그 커다란 덩치를 살려서 짓누르는 것이 불가능한 지형이기도 했다. 만약 어보미네이션이 이렇게 일직선으로 공격해올 것이 아니라 사방에서 짓누르다시피 했다면, 아이작도 이렇게 반격하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남은 것은 그저 HP가 무한대에 가까운, 분노한 초보 검사뿐.
아이작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걱정되는 거라면 하나뿐인데....'
아이작은 어느새 발목에서 찰방거리는 핏물과 살점을 밟으며 생각했다.
아이작의 걱정거리는 체력이 바닥나거나 이 복도가 결국 어보미네이션의 살점과 핏물로 가득 차서 익사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거라면 아이작도 막아 낼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조건이 마련되어야만 했다.
그 순간, 지힐렛으로부터 아이작에게 의지가 전달되었다.
[카일 헨드락, 찾았음.]
아이작의 입가에 미소가 스며들었다. 이제 마지막 조건이 완료되었다.
어보미네이션은 아이작의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아니면 도저히 그를 상처입히지 못하고 자신만 공격당하는 상황에 화가 난 건지 더욱 거세게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이제 이 성안에는 목격자가 될 만한 사람이 없다 이거지."
어보미네이션의 몸 안에서 갑옷을 통째로 구겨서 만든 것처럼 보이는 갈퀴손이 튀어나왔다. 아이작은 그 갈퀴손을 향해 검을 휘두르거나 피하는 대신, 마주 대하듯 주먹을 내밀었다.
쾅! 굉음과 함께 으스러진 것은 갈퀴손을 감싼 어보미네이션의 주먹이었다.
아이작의 손에서 튀어나온 촉수는 순식간에 어보미네이션의 주먹을 휘감아 조개를 으스러뜨리듯 뭉개 버렸다. 속살이 쥐어 짜내지듯 터져 나오자 어보미네이션은 고통과 공포에 포효하면서도 흥분한 듯 몸을 밀어붙였다.
"오오오오오!"
그때 아이작에게 놈의 찌르는 듯한 생각들이 침투했다. 어보미네이션과 살갗을 접촉하면서 그 안에서 요동치던 의지와 생각들이 아이작과도 연결된 것이다.
'어리석다! 어리석은 놈!'
'놈을 먹어! 흡수해 버려!'
'놈도 우리와 같은 꼴로 만들어 버려!'
어보미네이션은 아이작을 으스러뜨릴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지금처럼 접촉해서 그의 몸을 어보미네이션의 몸 안으로 흡수해 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어보미네이션의 가장 위험한 능력이었으니까.
그리고 놈의 생각이 정답이라도 되는 듯, 촉수가 뭉개진 주먹 안으로 빠르게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상처가 났던 부위 위에는 피부가 덮이고 출혈이 멈췄다.
어보미네이션은 아이작을 흡수하기 위해 온몸으로 덮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작은 전혀 동요하는 기색 없이 어보미네이션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대하고 있던 메시지가 이미 나타난 상태였으니까.
['어보미네이션'을 포식하였습니다.]
['포식' 특전으로 섭취 효율이 상승합니다.]
['신체융합(임시)' 특전을 습득하였습니다.]
[소화될 때까지 축복이 유지됩니다.]
66화. 붉은 살점의 선지자 (2)
어보미네이션 안에서 요동치는 자아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자아는 역시 오언의 것이었다.
오언은 육체를 통제하기 위해 아이작을 죽인다는 가장 단순한 목적을 가지면서도, 전략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의 전략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아이작을 몰아넣은 뒤, 직접 접촉하는 것이었다.
'놈의 몸을 융합해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한, 그리고 동시에 동경하던 성배기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황홀한 선택지였다. 그래서 아이작이 오히려 주먹을 맞부딪쳐 왔을 때, 의아해하면서도 그 어리석음에 쾌재를 불렀다.
아이작의 손에서 촉수들이 튀어나와 그의 손을 찢어발기고, 짓이기는 순간에도 그는 비웃었다.
이제 아이작에게 남은 것은 어보미네이션의 무수한 살점 속에 파묻혀 녹아내리는 길뿐이었다.
"오오오오오오!"
어보미네이션은 이제 아이작의 왼손을 넘어, 팔꿈치까지 집어삼키고 있었다. 아이작은 집어삼켜지는 와중에도 차분하게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동요하지 않는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오언은 그 얼굴마저 삼켜 버리면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것은 강렬한 허기를 느끼면서였다.
'배가 고프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오직 분노와 살의만을 느껴야 할 의지 안에 엉뚱한 생각이 끼어든 것이다. 심지어 수십 명의 사람을 흡수하고 아이작까지 집어삼키는 와중에.
이미 아이작의 어깻죽지까지 흡수했는데도, 오언은 맹렬한 허기에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때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아무거나 먹으면 탈 난다."
어보미네이션의 몸이 꿈틀거렸다.
순간 오언은 자신의 몸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방의 벽을 밀어낼 정도로 비대해졌던 몸이, 어느새 상당히 쪼그라들었다는 사실까지도.
잘못됐다.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다.
어보미네이션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내려 했다. 살의를 압도하는 생존 의지였다.
오언은 분노하며 다시 어보미네이션을 조종해 아이작을 덮치려 했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보미네이션은 아이작의 어깻죽지에서 멈춰 도망치지도, 더 이상 덮치지도 못했다.
더욱 강한 허기만을 느낄 뿐이었다.
어보미네이션의 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오직 아이작뿐이었다. 아이작은 꽤 오랫동안 채우지 못했던 허기가 서서히 충족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자가포식(autophagy).'
세포가 자신의 단백질이나 불필요한 성분을 스스로 포식해 에너지를 얻는 현상.
그것이 어보미네이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보미네이션은 아이작과 그의 촉수를 흡수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정반대였다.
이미 촉수가 어보미네이션의 주도권을 빼앗아 자가포식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일용할 한 끼 식사로 만들기 위해서.
"아아아아아아!"
오언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몸을 비틀어 빼내려 했다. 하지만 어보미네이션의 주도권은 이미 완전히 아이작에게 넘어가 있었다.
인간 수십 명의 의지 따위는 가볍게 압도하는, 초월적이고 강렬한 의지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보미네이션이 가지고 있는 의지보다 더 단순하고 폭력적이며, 근본적이었다.
채워지지 않는, 채울 수 없는 강렬한 허기.
오언은 비명을 지르며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비명을 지를 입으로 이미 자기 자신을 먹어 치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내 어보미네이션은 촉수에 의해 산산조각 나 개별적으로 흡수당했다.
아이작이 어보미네이션을 완전히 자가포식하기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먹어 치운 사람에 비해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상태였기 때문에, 실제로 먹은 양은 보기보단 적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포식한 것 자체가 몇 달만이었기에 제법 포만감이 느껴졌다.
그때 아이작에게 메시지가 나타났다.
['어보미네이션'을 대량 포식하였습니다.]
['포식' 특전으로 섭취 효율이 상승합니다.]
['신체 융합' 특전을 완전 습득하였습니다.]
'신체 융합 능력 완전 습득이라... 이건 기대 이상의 수익인데.'
오언에게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시험 삼아 촉수를 움직여 보자 어보미네이션처럼 상대방의 살점을 완전히 녹여서 자기 걸로 삼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촉수 일부를 특정한 형태로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짐승의 이빨이나 뿔 같은 것을 달아도 좋을 것 같군.'
오언을 처리했으니 이제 라엘라의 차례였다.
그때 아이작은 뒤를 돌아보고 역시 만만찮은 상대라고 생각했다.
헤사벨이 기다리고 있어야 할 자리에는 흥건한 핏자국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해뜨기 직전의 새벽녘은 어두컴컴했다.
라엘라에 의해 성벽 위로 끌려 나온 헤사벨은 시커먼 어둠 속에서도 라엘라의 붉은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여러 개의 동공으로 빛나는 붉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라엘라를 통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엘라는 삐걱거리는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헤사벨의 목을 움켜쥔 채 들어 올렸다. 육신으로써의 라엘라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하지만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직접 몸을 하나하나 조종하고 있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을 뿐이었다.
"자괴감 느끼지 마라. 네 근본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라엘라의 말에도 헤사벨은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작이 오언을 포식하는 사이, 헤사벨은 속삭임을 들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헤사벨의 몸속에 흐르는 피를 강제로 쥐어짜 붉은 탄원을 발동시켰다. 저항하려는 그녀의 의지는 한 움큼의 피로 남았을 뿐, 거부할 수는 없었다. 천사의 권능을 넘어서기에는 그녀의 힘 자체가 너무 미약했다.
"네 몸속에 흐르는 모든 피는 굴마르의 것이다. 그리고 굴마르의 피는 붉은 성배에서 흘러나온 것이지. 네가 마음을 잘못 먹는다 한들 붉은 피가 푸르게 변하겠느냐."
"혓바닥이... 길다."
헤사벨의 대답에도 라엘라는 표정 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 무표정하다기보다는 표정을 바꿀 여력이 없는 것에 가까웠다. 헤사벨은 애써 비웃기 위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살점을 잃어버릴까 봐 무섭지?"
"...."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목을 쥔 손에 힘을 더욱 주었다. 하지만 목을 부러뜨리거나 죽일 정도는 아니었다. 언제든지 그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점은 네가 지상에 발붙일 수 있는 힘이지! 하지만 살점을 받아들이려면 붉은 성배를 숭배해야 하니까... 나를 다시 꼬드기려는 거야!"
헤사벨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생각하는 바를 멋대로 입 밖에 꺼내며 떠들었다. 그녀 말대로였다. 라엘라에게는 그녀의 살점이 들어가 있었다. 오언에게 준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힘이 담긴 살점이었다.
그저 쓰다 버리는 껍데기에 불과한 라엘라의 몸이 죽는 것은 상관없다.
문제는 이 살점을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때문에 지금 이 죽어 가는 라엘라의 몸을 버리고 헤사벨에게로 갈아타려는 것이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계획이었다.
라엘라의 입가가 쥐어짜지듯 올라갔다.
"싫은가?"
그녀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너라면 나의 대리인이 된다는 것에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알고 있을 텐데. 네 일탈은 잠깐의 방황으로 치부해 줄 수 있다. 굴마르 공작가는 성물을 잃어버린 책임을 면제받고 천사의 살점을 먹은 너를 크게 환영하겠지. 그리고 또."
라엘라는 입을 크게 벌렸다. 거의 목까지 내려온 턱 안쪽에서 거대한 살점이 나타났다. 벌떡이는 살점에서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달콤한 냄새가 났다.
"이게 얼마나 맛있는지도 알고 있을 테고."
중독적인 향.
붉은 성배가 제안하는 천국은 지극히 말초적인 쾌락의 천국이다.
빛의 법전처럼 빛과 진리로 가득한 신전도, 엘릴과 함께하는 영광과 명예로 가득한 전장도 아니다. 그저 단순한, 누구나 좋아하고 누구나 유혹당하는 쾌락.
헤사벨 역시 당연히 붉은 성배가 제안하는 사후세계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이 살점을 먹는다는 것은 천국을 보장받는다는 뜻이다.
"받아들여라."
헤사벨이 아무리 단호하게 아이작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해도, 이 유혹은 마약 중독자에게 다시 마약을 코앞까지 들이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헤사벨은 떨리는 눈으로 입가로 다가오는 살점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살점이 입에 닿았다. 하지만 헤사벨은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지 않았다. 입술에 피 맛이 나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것은 뱀파이어들에게 그 자체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다시 기이한 감정에 휩싸였다.
뭔가를 놓치고 있다.
지금 헤사벨의 반응은 그녀의 눈에 법칙을 거스르는 수준의 기이한 일이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만.'
하지만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어차피 헤사벨이 받아들이든 말든, 살점을 입안에 쑤셔 넣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강하게 붉은 성배를 거부한다 하더라도 이 맛을 보면 다시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약이나 다름없으니까.
라엘라의 손이 강제로 쥐어짜듯 헤사벨의 입을 벌렸다. 그리곤 이내 입안에 살점을 쑤셔 넣었다.
헤사벨은 괴로운 표정을 하면서도 거부하지 못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일단 입안에 넣은 이상 뱉어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대리인을 교체하기 위해 붉은 예식을 준비했다.
"왜 우리 애한테 이상한 거 먹이고 그러냐."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
아이작은 헤사벨의 기운을 쫓아 성벽 위로 올라왔다.
그가 본 것은 라엘라가 헤사벨의 입에 살점을 강제로 넣는 모습이었다.
아이작은 그게 라엘라에게 이식되었던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신체임을 알아보았다.
라엘라의 몸은 기이했다. 마치 탈피를 준비하는 곤충처럼 거죽이 길게 늘어지고 뼈대가 제멋대로 툭 튀어나오거나 꺼져 있었다.
라엘라라는 껍데기 안에 괴상한 괴물이 엉성하게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안 좋을 때 왔나 보지?"
라엘라는 말없이 푹 꺼진 눈으로 아이작을 응시했다. 그녀는 아이작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째선지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성배기사. 소문은 들었다만...."
"명예롭고 신앙심이 두텁다는 소문? 아니면 엄청난 강자라서 나쁜 놈들을 썰고 다닌다는 소문?"
"얼굴이 꽤나 반반하다는 소문."
천사의 귀에 들릴 정도라길래 기대했는데 맥 빠지는 말이었다. 그러나 라엘라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소문 이상이군. 이건... 흠.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외모가 아닌데. 엘릴의 혈통인가, 아니면 어떤 천사가 함부로 피를 뿌리고 다녔나?"
네필림을 암시하는 말에 아이작은 말없이 웃었다.
천사인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알아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애당초 붉은 성배조차도 네필림 출신이니까.
라엘라는 까딱 고개를 기울이며 헤사벨을 바라보았다.
"상관없겠지. 네가 신성의 방계라는 것을 알았다면 내 전략도 조금 달라졌겠지만... 나는 본래 이렇게 노골적으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든."
"확실히 정정당당해 보이는 성격은 아니야."
라엘라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지금은 네가 유리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천사를 추방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솔직히 말하자면, 너 하나쯤 지워 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천사의 힘은 막강하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직접 힘을 써서 싸우는 타입은 아니지만, 진짜 힘을 쥐어 짜내기 시작하면 이제 막 성배기사로서의 행보를 시작한 아이작이 감히 대적하기는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다. 붉은 성배가 바라는 일도 아닐 테고."
붉은 성배는 은밀한 방식을 좋아한다. 그것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제안을 하나 하지."
"제안? 이 와중에도 주둥이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는 게 실로 음모의 대가답군. 성배기사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거냐?"
"네가 정상적인 성기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봤다. 정상적인 성기사라면 나와 대화를 이렇게 나눌 일도 없겠지. 내 눈엔 네가 품고 있는 야망이 보이는구나."
아이작은 웃으면서도 말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네게 지금 당장 승리와 명예, 그리고 힘을 주겠다. 이 자리에서는 내가 패배하고, 네가 승리한 것으로 하지. 그리고 나의 힘 일부를 남겨두고 가겠다. 너는 싸울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을 얻는 거야."
"대가는?"
"지금 당장은 이 아이면 충분하겠군."
그녀는 헤사벨의 목덜미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67화. 붉은 살점의 선지자 (3)
천사와 목숨 걸고 대적할 것이냐, 아니면 공짜 부하를 넘기고 간단하게 승리를 얻느냐.
'힘 일부를 두고 간다는 것은 살점을 의미하겠지.'
그것이라면 이름 없는 혼돈이 제안한 퀘스트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심지어 이건 헤사벨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굴욕과 손해를 맛보는 것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뿐이지만, 그녀 역시도 무모한 도박수를 두고 싶진 않을 게 분명했다.
협상만 하면 간단하게 윈─윈.
아이작은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미소 지었다.
"각자의 신앙을 걸고 맹세할까?"
라엘라도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좋다. 증표가 될만한 것을 보여주마."
라엘라의 입이 벌어지면서 그 안에서 붉은 살점이 나타났다. 달콤한 향기가 제법 떨어져 있는 아이작에게까지 풍겨 왔다.
라엘라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며 말했다.
"이것을 취해라. 내 몸의 일부요, 붉은 성배의 피가 담긴 살이다."
아이작은 칼을 내리고 천천히 라엘라를 향해 다가갔다. 라엘라는 여전히 헤사벨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채 가만히 있었다. 아이작이 라엘라의 손에 얹혀있는 붉은 살점을 집어 들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라엘라의 몸이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퍼퍼퍼퍽! 살점이 터져나가면서 아이작의 몸 위에 피를 흩뿌렸다.
피를 뒤집어쓴 아이작은 벌에 쏘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뒤로 튕겨 나갔다. 아이작은 피를 뒤집어쓴 자리를 살펴보았다. 마치 독극물을 끼얹은 것처럼 수포가 연신 부풀어 올랐지만 빠르게 가라앉았다.
아마도 지독한 독이었으리라. 평범한 사람이라면 순식간에 피부가 터지고 녹아내릴 수도 있는 그런 독.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약간 따끔한 정도였다.
"흐... 어, 어섯게?"
오히려 문제는 라엘라였다.
그녀는 턱부터 이마까지 갈라진 몰골로 아이작을 쏘아보고 있었다. 혀가 둘로 갈라진 탓에 발음이 어색하게 샜다.
아이작은 심판의 검에 묻은 라엘라의 피가 타들어 가는 것을 보며 말했다.
"피차 안 믿고 있던 사이에? 뭘 또 그래."
라엘라가 피를 터뜨린 순간, 아이작 역시 기다렸다는 듯 왼손으로 칼을 휘둘렀다.
촉수에 휘감긴 검은 라엘라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각도로 움직여 단숨에 그녀의 얼굴을 베었다. 원래 몸을 양단할 생각이었지만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 피를 뒤집어쓰고도 어떻게 버티고 있느냐는 말이다!]
공기를 우르르 울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라엘라가 아닌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목소리였다.
"내 몸 안에는 이미 네 피 못지않게 지독한 것들이 흐르거든."
라엘라가 뿌린 피에는 붉은 성배의 독이 스며 있었다. 신성력이 깃든 기적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역병신 지힐렛을 포식했다. 신성, 그것도 역병에 대한 저항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거기에 이미 어보미네이션을 대량으로 포식한 데다, 재생 능력까지 겹쳐 있었으니 라엘라의 독이 통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아이작은 라엘라와 오래 수다를 떨 생각이 없었다. 그는 라엘라가 상처를 회복시키기 전에 바로 성벽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
라엘라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퍼덕이면서 팔을 휘둘렀다. 팔에서 긴 상처가 생겨나더니 피가 흩뿌려졌다.
또 같은 공격을 하는 건가 했지만 흩뿌려진 피에서 나타난 것은 거대한 가시 방벽이었다. 단순히 저지를 위한 가시 방벽이 아니라, 날카롭게 아이작을 향해 찔러 들어오며 성장하기까지 했다.
[감히 인간이 천사에 대적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본체도 아니면서 무슨.'
아이작은 얼굴을 스치는 붉은 가시들을 쳐내며 비웃어 주고 싶었지만, 솔직히 만만치 않았다.
썩어도 준치. 계략가에 가까운 붉은 살점의 선지자라도 천사는 천사다.
아무리 몰려 있어도 지금 상태로 아이작이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적당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쉬리리리리릭!
라엘라의 오른팔에 이어 왼팔 또한 찢어지면서 피가 성벽 위로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가시 방벽은 이제 덤불처럼 성벽을 옭아매며 아이작을 향해 쉴 새 없이 달려들었다. 아이작은 일단 달려들기보다 침착하게 가시를 쳐내면서 기회를 노렸다.
[네 힘이 그게 전부는 아닐 텐데!]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고함을 내지르며 붉은 가시 덤불로 아이작을 몰아붙였다. 아이작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정체불명의 힘이 헤사벨을, 강화된 오언을 물리쳤을 것이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자신 또한 그 꼴이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방심하지 않고 최대한 신중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아이작이 진짜 패를 꺼내지 않는 한, 그녀도 전력을 다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슬슬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늘이 밝아지고 있었다. 산골이라 일출이 늦어지고 있었지만 곧 해가 떠오를 것이다.
밤은 붉은 성배의 시간이지만 낮은 빛의 법전의 시간이다.
[전력을 다할 생각이 없다면, 거기서 눌러 터뜨려주마!]
와드드득! 가시덤불이 성벽에 단단히 뿌리를 박은 채로 갑작스럽게 부풀어 올랐다. 성벽 위를 덮을 만큼 거대한 가시 창이 아이작을 향해 쇄도했다.
가시라기보다 공성추에 가까운 거대한 것이 덮쳐 오자 아이작은 별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의 왼손이 기묘하게 움직였다.
왼손에서 튀어나온 촉수들이 가시 창을 휘감고 물어뜯는 동시에, 아이작은 검을 휘둘렀다.
이삭 검술: 여덟 갈래에 의해 찢어진 붉은 가시의 상처 사이로, 순식간에 아이작의 촉수가 파고들었다. 그리곤 순식간에 거대한 가시 창을 상처의 결을 따라 그대로 찢어발겼다. 터져나간 촉수가 그대로 핏빛 비로 비산하며 아이작에게 쏟아졌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그 모습을 보며 오한을 느꼈다.
[그거군! 그거였군! 네 놈의 정체는...!]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앓는 소리를 토해내며 아이작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드러냈다.
이제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헤사벨의 굴복과 오언의 패배, 그리고 아이작이 성배기사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빛의 법전 기적은 한 번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직도 썩지 않고 남은 시체가 있었나!]
아이작은 그녀의 영문 모를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아이작에게 온 집중을 다하며 어깨를 폈다.
아이작이 정체를 드러냈으니 그녀 또한 온 힘을 다해야 할 차례였다.
[머리가 있는 놈들 중에 그 씨앗을 잇는 놈이 있는 줄은 몰랐구나! 심지어 그 씨앗이 등대지기 아래에 숨어 있었다니?]
아이작은 굳이 말을 섞는 대신 라엘라를 향해 다가갔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긴장하며 힘을 끌어모았다. 그녀는 아이작의 촉수가 어떻게 움직일지 예의주시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촉수를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빠르게 촉수를 회수해 몸 안으로 집어넣었다.
대신 그는 검을 치켜들었다.
마치 촉수를 쓰지 않고 대적하겠다는 듯한 모습에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뭐? 무슨....]
그 순간, 그녀는 눈을 찌르는 통증을 느꼈다. 마침내 아침 해가 떠오른 것이다.
그을리는 듯한 통증과 함께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이작에게 집중하지 않는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오히려 방심한 척 눈을 감았다.
역시나 아이작은 기다렸다는 듯 아침 햇살과 함께 달려들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 역시 성벽 위에 뿌려진 피 속에서 일제히 가시들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아이작의 섣부른 동작을 비웃었다. 네가 아침 해를 기다렸다는 것을 모를 줄 알았나? 설령 해가 뜬다 해도 네깟놈은....
그런데 촉수는 왜 다시 집어넣었지?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의문이 스쳐 지나간 순간, 그녀는 자신의 가시들이 아이작의 갑옷을 전혀 뚫지 못하고 구부러지거나 튕겨 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그 모습에 경악했다. 그리고 뒤늦게 어떤 목소리들을 들었다.
"저것 봐! 성배기사님이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온 신경을 아이작에게 집중하고 있던 덕분에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곳을, 아직도 계곡의 그늘 아래 가려져 어두운 헨드락 성채 아래쪽을 보았다.
그곳에 르하르트 백작과 그의 병사들이 아이작이 미리 지시했던 대로 대기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그 무수한 시선 속에 자신의 권능이 쇠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붉은 성배는 음모와 유혹, 암살을 권장한다. 그녀의 권능 역시 당연히 어둠과 은밀함 속에서 가장 강해진다. 모든 것을 드러내는 빛은 그 모든 권능을 약하게 만든다.
이 밝은 여명과 수많은 목격자의 시선 속에 노출된 그녀는 본래의 힘을 절반도 내지 못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발악을 위해 있는 힘껏 가시를 내질렀다. 하지만 아이작의 몸이 기묘하게 움직였다.
어보미네이션을 흡수한 이후 아이작이 새롭게 익힌 기술, 바로 오언이 사용했던 상급 검술이었다.
아이작의 몸이 동시에 두 방향으로 움직였다. 가시는 그중 하나를 꿰뚫었지만 다른 하나는 저지하지 못했다.
검날이 햇살을 받아 번뜩였다.
텅.
라엘라가 피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검날이 그녀의 목을 베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칼이 닿기도 전에 이미 자신의 목이 베였음을 깨달았다.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이작은 보랏빛의 섬뜩한 눈으로 라엘라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피 냄새가 났다.
"이제 누가 눌려 터진 모기에 어울릴지 한번 볼까?"
***
라엘라는 휘청거리다가 성벽을 짚었다. 그 순간 머리가 기울어지면서 머리통이 성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목이 텅텅거리며 성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성벽 밑에서 기다리던 르하르트의 병사들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침묵했다. 하지만 이내 발치까지 굴러온 라엘라의 머리와, 붉은 가시에 휘감긴 헨드락 성채, 그리고 성벽 위에 당당하기 서 있는 아이작의 모습을 보고 모든 것을 깨달았다.
"우, 우와아아아! 성배기사님! 성배기사님이!"
"아이작 성배기사님께서 마녀의 목을 베셨다!"
병사들의 눈앞에 오래된 전설이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타락한 영주와 사악한 마녀, 그리고 그들을 응징하러 나타난 성배기사.
물론 어디에도 영주가 타락했다거나 라엘라가 마녀라는 증거는 없었지만 이미 그들은 헨드락 성채를 적으로 뼛속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오언이 지시했던 기사 돌격 때문이었다.
때문에 단신으로 성채를 굴복시킨 아이작의 모습은 전설 속 영웅 그 자체였다.
"성배기사님! 아이작 성배기사님, 만세!"
여기저기서 아이작을 칭송하는 환호성이 들려왔다. 아이작은 그 소리를 들으며 몸속에서 무언가 따뜻한 것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이작은 금방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신앙?'
바르바리들을 붙들고 설교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신앙이 스며들고 있었다. 사람들의 순수한 찬양이 아이작에게 힘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 물론 이전에 쇠르에서 '파수자의 등대'를 썼을 때에도 위업을 세우기는 했지만, 솔직히 찬양을 받지는 못했다.
그때는 그저 정신을 차리게 만들고 꾸짖었을 뿐이니까.
'역시 백 마디 설교보다는 한번 보여주는 게 낫군.'
그래서 신들도 신도들에게 기적을 베푸는 것이리라.
하지만 아이작은 병사들의 찬양이 너무 이르다고 느끼고 있었다. 아이작조차도 아직 칼을 놓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아이작은 아까보다 더 칼을 단단하게 쥔 채로 정면을 응시했다.
사실 진정한 싸움은 지금부터라고 해야 했다.
목이 잘린 라엘라는 쓰러지지 않고 삐딱하게 서 있었다.
잘린 목의 단편에서 선혈이 연신 솟구쳤다.
이윽고, 목의 단면의 목구멍이 마치 입술처럼 뻐끔거리며 목소리를 토해냈다.
"이미 늦었다."
공기를 떨리게 하는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목을 자른다고 무엇을 기대했느냐?]
라엘라의 피부는 이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무언가가 그저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 그 안의 뼈나 근육, 관절 따위는 아랑곳 않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그 가죽이 벗겨지고, 그 안에서 붉은 형체가 뼈대를 뒤틀며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라엘라의 몸뚱이는 망가진 인형처럼 널브러졌다. 피부를 탈피하고 붉은 선혈을 쏟아내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의 3m에 이르는 기이한 형체였다.
인간의 팔과 다리는 가지고 있지만 몸통은 없었다.
세 개의 팔과 세 개의 다리, 그리고 세 개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속지가 쉴 새 없이 역할을 바꿨다.
복잡했지만 기품있었으며, 그로테스크했지만 아름다웠다.
그것이 지상에서 붉은 성배의 신성을 대변하는 천사.
붉은 살점의 선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