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언제나 관대한 처우에 감사를 표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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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물은 날 때부터 공평하지 않다.
발이 빠른 개체, 신체가 유달리 강건한 개체 그리고 비율이 아름다운 개체. 그걸 정하는 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오롯이 하늘이 던진 주사위였다.
그런데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신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믿는 건 그리 유난스러운 망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막연한 기대와 동경.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무언가를 꿈꾸는 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나 또한 그중 하나였다.
* * *
2044년, 세 번째 세계 대전이 터졌지만 그에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올 것이 왔다고 느꼈을 뿐.
해마다 악화되는 미중 갈등.
러시아의 무리한 영토 확장.
원초적인 편 가르기.
허울뿐인 국제 연합.
나아지지 않는 형편에 불만을 토로하는 개발도상국.
도리와 신뢰를 잃은 국제 무역은 이러한 악재를 짊어지고도 10여 년 동안 이어졌다.
그사이에 생겨난 건 형언할 수 없는 혐오와 비난을 위한 비난뿐.
무한 이기주의와 자국 중심의 정책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납득하지 않고, 양보하지 않았다.
문명이 발전해 그 어느 때보다 개방된 시대였지만, 모순적이게도 서로 고립되기만 했다.
평화와 협동이라는 개념을 망각하고 국제 정세는 과거의 전철을 차근차근 밟아 갔다.
시대의 흐름이란 운명과도 같은 것.
예견한다고 해서, 피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계까지 응집된 응어리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무너진 이성이, 뒤틀린 이념이 사회 구성원에게 희생을 강요한 거다.
나도 한자리 차지했다.
병사로 참전하게 되면서.
하지만 고도로 진보화된 사회에서 개인이 활약할 여지는 없었다. 이미 인류는 버튼 하나만으로 대륙적인 화력을 쏟아부을 수 있었으니까.
전 세계가 전화에 휘말려, 쑥대밭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매주 지도가 바뀌는 격전 속에서 군인들은 고기 방패조차 되지 못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
평범한 졸개 중 하나로 전선에 투입된 즉시, 빗발치는 포화를 맞고 죽어야 마땅했으나―
살았다.
아니, 살아났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죽어도 죽지 않았으니까.
육신이 죽음을 거부한 거다.
그건 개인적인 기량이나 천부적인 행운이 아닌 초자연적인 현상에 가까웠다.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순간이었으나, 마냥 기꺼워할 수 없었다. 들키면 어떻게 될지는 명약관화했던 거다.
그렇다고 혼란스러운 세상을 마냥 떠돌 수도 없었다.
경거망동하지 않고 수많은 사람 속에 숨는 게 최선.
적어도 전쟁의 희생양은 되지 않겠다는 판단하에 나온 결정이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어떠한 작전에 투입되어도 생환했으니.
상부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지 모를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쟁 영웅으로 추대되어 특진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계급이 올라갈수록 전쟁 또한 격화되었으니까.
결국, 국가 간에 핵까지 사용되었다.
그렇게 인류는 제 발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몸을 맡긴 채.
종말의 순간, 웃기게도 정전을 선언한 건 미국도 중국도 아니었다. 애당초 인류 자체가 아니었다. 세계 대전을 가로막은 건 자연재해.
시발점은 미국 최고의 국립공원, 옐로스톤이었다.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분지, 칼데라가 존재하는 초화산. 그곳이 전쟁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폭발한 거다.
가히 운석 충돌에 버금가는 대분출.
용암과 가스는 지상을 누비며 제 영역을 넓혔고, 대기권을 차지한 먼지구름은 햇빛을 가리고 몇 주 동안 화산재를 퍼부었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기온, 흉작이 예약된 토지.
바야흐로 빙하기의 시작이었다.
* * *
쿵, 쿵, 쿵.
그때 그 시절을 연상케 하는 굉음.
점차 커지는 소리에 따라 심장 또한 덩달아 거칠 게 뛰기 시작했다.
턱밑까지 차오른 숨결에 정신이 부상한 순간,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 울리던 소음이 잦아들었다.
쿵, 쿵, 쿵.
다시 들으니 문 두드리는 소리에 불과했다. 오랜만에 악몽을 꾸어, 착각한 듯싶었다.
"신! 안에 있는 거 아니까 나와라."
느릿하게 걸어가 문을 열자마자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발달된 대흉근이 눈에 들어오자 신은 한 발자국 물러났다.
유전자 조작과 사이버네틱스 수술이 성행하는 시대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체형이었다. 놀라운 건 순수하게 타고난 몸이라는 것.
그야말로 내추럴 본.
맨 오브 맨―
"미스터 테스토스테론. 오랜만에 보는걸. 가족과 함께 여행을 다녀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잘 갔다 왔어?"
"내가 그 별명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던 거 같은데."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 건물주, 아놀드 로저스의 불만에 신은 어깨를 으쓱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저기압인 듯싶었다.
"자랑해도 좋아. 내가 인정했다는 건 역사가 입증한다는 소리니까."
"헛소리는 됐고, 이번 달 월세나 내라."
"겨우 그것 때문에 이런 이른 시간에 온 거야?"
"해가 넘어가는데 무슨...."
늘어지게 하품하는 신의 얼굴을 쏘아본 아놀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하나 반박했다가는 끝이 없을 거 같아서였다.
"밀린 게 벌써 보름째다. 내가 말을 안 하니까 아주 살판났더군."
"미안, 잊고 있었어."
"하아. 정말이지, 누가 집주인인지 모르겠군."
"그래도 꼬박꼬박 내잖아."
"은행을 통하면 보다 수월하겠지."
"현물 거래가 더 확실하지 않아?"
"그런 이유로 이 시대에 자동이체를 사용하지 않는 건 너 정도일 거다."
그렇게 말한 아놀드가 보란 듯이 목뒤를 두드렸다. 거기에는 버튼처럼 납작하고 동그란 기기가 돌출되어 있었다.
신경계에서 발생하는 생체 전기를 이용해 작동하는 지능형 단말기, 통칭 '디바이스'.
여러 정보를 망막에 직접 투사해 사용자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전자 기기였다. 신분증 대용으로도 활용되는 만큼, 현대인에게는 필수품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신의 목뒤에는 있어야 할 게 없었다.
그 모습을 힐끗 내려다본 아놀드가 넌지시 물었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이 돔 바깥에서 섞여 들어왔다고?"
"뭐, 그렇지."
현대 사회에서 디바이스를 삽입하지 않은 부류는 크게 두 가지였다. 불법 체류자 혹은 범죄자. 어느 쪽이든 분명하게 신분을 증명할 수 없는 처지였다.
괜히 약점을 건드린 것 같아 아놀드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화두를 돌렸다.
"어쨌든 기다려 준 만큼 바로 지불해라. 제시간에 내는 것만이 네 유일한 장점이지 않나."
"어이, 나는 그것보다 더 많은 장점이 있다고. 적어도 이 건물에서 나보다 실물 현금이 많은 사람은...."
지갑을 뒤적거린 신이 턱을 긁적였다. 돌연 저번 주에 대량 출혈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평상시에는 좀처럼 구매할 수 없는 물품이 풀려 절조 없이 질렀더랬다.
"마침 다 떨어졌네."
"입주자가 아닌 사람에게 제공되는 서비스는 주먹밖에 없는데 말이지."
아놀드의 눈꼬리가 올라간 건 한순간.
"30분 주지."
"억지 부리지 마. 적어도 나가서 발품을 팔아야 돈이 나올 거 아냐."
"하루."
더 이상의 합의는 없다는 듯, 단호한 어조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언제나 관대한 처우에 감사를 표하지."
* * *
굴러다니는 외투를 대충 걸친 신은 집을 나섰다.
증강 현실이 구현된 거리에는 홀로그램 간판이 흘러넘쳤다. 정비된 보도블록 위로는 순찰 드론이 날아다녔으며, 혈관처럼 얽히고설킨 지하에는 하이퍼루프가 도시 곳곳을 누볐다.
머리 위에는 잃어버린 하늘을 대신해 인공조명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파스텔 톤의 도시에는 전체적으로 여유가 흘러넘쳤다. 제3차 세계 대전 이후 고작 300년도 흐르지 않았건만, 인류는 예전의 성세를 되찾기 시작한 거다.
물론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간 건 아니었다. 작용이 있다면 반작용도 있는 법.
활동 영역은 전과 비교할 수도 없이 줄어들었다.
빙하기가 도래한 당시 인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완전 환경계획도시, 아콜로지를 설계했다. 모든 게 제한적인 장소에서도 자생할 수 있도록.
전력을 쏟아부어 지어진 아콜로지, 통칭 돔(Dome)의 개수는 현재 여섯.
가장 크고 오래된 No.1에서부터 최근에 지어진 No.6에 이르기까지. 식별 번호는 돔의 규모와 역사를 고스란히 대변해 주었다.
세계 전역에서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피해, 각기 다른 돔에 몰려든 생존자들은 안정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인류는 모진 역경을 겪고도 존속했다고도, 반대로 모든 미래를 담보로 틀어박혔다고도 자평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쓰러진 이들의 넋은 셀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인력 자체가 귀한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안전이 보장되자 기술은 나날이 진일보했다. 설령 여러 번의 기적과 여러 번의 우연이 겹쳤다 할지라도.
특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인공지능이 발명된 2190년. 그날을 기점으로 인류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진정한 의미의 4차 산업 혁명에 다다르게 된 거다.
노동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과 동시에 누구나 최저 시급을 보장받는 기본 소득제가 대두되는 건 필연.
얼마 지나지 않아, 디바이스와 결합한 복지 제도는 현대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주축이 되었다.
분명 대국적인 결정이었으나, 신만큼은 웃을 수 없었다.
기본 소득제가 팽배한 세상에서 신분이란 곧 예산. 검열도 그만큼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론대로라면 여유 신분이 곧 여유 자금이 되니까.
방관하는 순간, 자금이 복사가 되는 거다.
더 이상 예전처럼 타인의 명의를 도용할 수도, 그렇다고 행정 부처에 접촉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구시대적 발상으로 신분을 얻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첨단을 달리는 문명은 사회 구성원의 일탈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격동의 역사를 몸소 겪은 신에게는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남들이 누리는 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자구책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양지에서 할 수 없다면 음지에서 이루면 될 일이니까.
신이 주목한 건 골동품이었다.
시간이 곧 가치가 되는 현물. 역사적인, 혹은 심미적인 물품은 언젠가 우상향하기 마련이었다.
함께 세월을 보내는 그이기에 더욱더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먼 옛날에는 당연하다 여겨지던 게, 지금에 이르러선 대체할 수 없는 귀중품으로 탈바꿈했으니까.
'월세를 구하려면....'
일단 하나는 판매해야 할 터.
번화가를 빠져나온 신은 곧장 골목길로 향했다.
따스한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듯한 거리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자, 주위의 풍경이 일변한다.
형형색색 발광하는 네온사인과 군데군데 고인 웅덩이.
방금 전과 비교한다면 극적일 정도로 대조적이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돔은 1억에 달하는 인구를 지탱하는 메트로폴리스였다. 전무후무한 수준의 공급과 수요가 교차하는 곳. 거대한 생명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달리 말하자면 버려지는 구역 또한 존재한다는 소리.
혹한의 대지와 맞닿아 있는 외곽 지역은 상대적으로 문명의 혜택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늘진 곳에는 벌레가 모여들기 마련이었다.
비리를 저지르고 다른 돔에서 도주한 도망자, 살인을 저지르고 숨어든 범죄자. 그리고 신처럼 한 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기구한 사연을 가진 사람까지.
간판도 없이 덩그러니 세워진 가게 앞에 멈춰선 신은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002 쐈네, 쏴 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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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은 없지만, 이곳은 전당포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업체 등록은 되어 있지 않은, 무허가 점포.
덕분에 수수료가 높지만, 금융 기관을 통하지 않고도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게 매력 포인트였다.
손님 대접은 영 아니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세워진 격벽은 타인의 접촉을 아예 불허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상반신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자그마한 창구가 없었더라면, 그 너머에 앉아 있는 인영을 보는 것도 불가능했을 터.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인 노인은 무언가에 눈길을 빼앗긴 듯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았다.
참다못해 가까이 다가간 신이 창구를 두드렸다.
"미스터 헤지호그."
그러자, 저편에 답변이 날아왔다.
"만나는 사람마다 별명을 붙이는, 그 거지 같은 버릇 버리라고 했을 텐데."
독설을 내뱉는 노인의 이름은, 쉐이드 크로웰.
이 지역에서 제일가는 큰손... 은 아니지만, 경력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배신과 폭력이 오가는 거리에서 이만한 가게를 마련한 게 그 증거.
"입이 걸걸하네. 그리 반응하지 말라고, 내 나름대로 친애의 표시니까. 그나저나 오늘도 신문을 읽는 건가. 여전히 고상한 취미네."
디바이스가 일상이 된 시대였다.
누구나 앉은 자리에서 최신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그저 그러겠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런데도 손으로 종이를 넘기는 건 구시대적인 취향이요, 비효율적인 발상이었다.
"너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 생각했지만, 아직 멀었나 보군. 이러한 것도 공감하지 못하다니."
"하고 싶지도 않아."
신문을 반으로 접은 쉐이드가 관자놀이에 박힌 금속을 톡톡 두드렸다.
그것은 용도와 용법에 따라 그 능력이 천차만별로 갈리는 체내 이식 기기, '슬롯'이었다.
진보된 사이버네틱스의 산물.
문명이 발전한 지금, 인류는 이미 생물이라는 영역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쉐이드가 사용하는 것 역시 그 연장선에 있는 물건이었다. 사고 능력을 항샹시켜, 손님에 대한 기록을 떠올리게 해 주었으니까.
뇌과학에 정통한 에밀사(社)에서 제작한 베스트셀러.
이르길, 서브 브레인.
누구나 애용하는 만큼 가격 자체는 낮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능까지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망막에 투사된 거래 내역을 확인한 쉐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용건이 뭐지? 얼마 전에 거래했을 텐데?"
'월세가 밀려서 급전이 필요하다.'라는 부연 설명은 사족에 불과했다. 평소 남의 수집품을 깎아내리는 데 혈안이 된 노인에게는 더더욱.
그렇기에 신은 말 없이 기념주화를 하나 꺼냈다.
"그건...."
구구절절한 사연을 듣지 않고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게 바로 안목이라는 능력.
쉐이드에게는 차고 넘치는 항목이었다.
"세컨드가 방문했을 때 선물한 거군."
"역시 영감에게는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돼서 좋아."
때는 1977년, 인류는 지구 바깥으로 무인 탐사선 2기를 쏘아 올렸다.
통칭, 보이저 1호와 2호.
그 안에는 골든 레코드라 불리는 물건이 적재되어 있었다. 그건 그때 당시의 인류가 이룩한 기술과 문화를 간략하게나마 소개한 LP 디스크.
말하자면 지구라는 행성에 인류라는 지적 생명체가 있다는 걸 알리는 소개장이나 다름없었다.
드넓은 우주에 문명을 이룩한 건 인류 하나뿐이라 자신하는 건 오만한 처사였으니까.
언젠가 마주할 외계와의 조우에 대비한 안배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로 그 소망은 보답받았다.
2158년, 여섯 개의 돔을 형성하고 그 안에 틀어박힌 시기. 골든 레코드를 발견한 외계 생명체가 돌연 지구에 방문한 거다.
그들은 자신들을 '세컨드'라 소개했다.
우주에서 두 번째로 문명을 이룩한 지적 생명체로, 인류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기술을 보유한 종족이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조우에 때아닌 소동이 일어나는 건 당연지사.
누군가는 믿음직한 동맹이 등장했다고 여겼고, 또 누군가는 침략이 시작될 거라 예견했다.
하지만 그러한 논쟁은 무의미했다.
모두의 예상을 깨부수고 세컨드는 기이할 정도로 우호적인 입장을 내비쳤으니까. 대가 없는 기술 원조와 자원 양도. 인류에게는 필수 불가결한 손길이었다.
그 과정에서 인류는 '포스(Fourth)'라는 명칭을 부여받았다.
우주에서 네 번째로 문명을 이룩한 종족.
직관적이고, 명료해 더 이상 설명의 여지가 없는 단어 선정이었다.
두 종족 간의 관계가 수립된 후에 세컨드는 돔들을 순회하면서 행사나 축제에 몇 번인가 참석했다.
기념주화는 그때 참석한 이들에게 세컨드가 증정한 친애의 증거.
무분별하게 나눠 주었기에 개수 자체는 적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기념주화의 가치는 건재했다.
외계 문명에서 사용하는 금속은 어떠한지 알아보고자 하는 집단은 차고 넘쳤으니까.
드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흔한 것도 아닌지라 오늘날까지도 합리적인 가격대가 형성되었다.
그래도―
"시중에 풀린 지 오래된 물품이지. 500만 피아. 어떤가?"
4인 가족이 두 달 동안 걱정 없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수준. 쉐이드 치고는 양심적인 가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 신이 한 가지 사실만 알지 않았더라면.
"650만. 언젠가 메가콥들이 시중에 나온 매물을 전부 쓸어 갔잖아. 모를 줄 알아?"
"쓸데없는 소리를 듣고 다니는군."
"영감은 여전히 남 골탕 먹이는 걸 좋아하고."
"550만."
"대화가 길어지는 게 취향이야? 그렇다면 언제까지라도 서 있을 수 있어. 마침 직종이 프리랜서에 한없이 가까워서 말이야."
이래서 꺼렸던 거였다. 만날 때마다 괜히 손해 보는 기분이니까. 쯧, 하고 짧게 혀를 찬 쉐이드가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600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빌어먹을 녀석아."
* * *
전당포 밖으로 나온 신은 두툼한 봉투를 품속에 넣었다. 퍽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이걸로 월세도 예정대로 낼 수 있을 터.
하지만 즐거운 기분은 한순간이었다. 굽이치는 골목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등에 눌어붙은 그림자가 강하게 느껴졌던 거다.
처음에는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그다음은 아니었다. 집요하리만치 강박적으로 박자를 맞추는 발걸음에 의미가 없을 리 없었다.
누군가 따라오고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신은 상대를 유인했다. 다행히 소외된 구역이라 할지라도 랜드마크로 삼을 만한 건 많았다.
하이퍼루프 정차역으로 개발되다 중단된 지하도가 그 적절한 예시라 할 수 있을 터.
폐자재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공동(空洞)을 하염없이 걷던 신은 돌연 멈춰 섰다.
"나오지 그래?"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
그 물음에 이끌리듯 사각지대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눈치챘으면 도망가야지. 제 발로 무덤에 들어오는 녀석은 또 처음이네."
험한 어투와 다르게 외견은 평이했다. 이런 곳에서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견실한 청년으로 착각할 만큼.
조용히 시선을 마주치고 있자니, 등 뒤에서 또 다른 일행이 둘이나 등장했다.
둘러싼 인원은 총 셋.
신은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대접은 오랜만이네."
그들의 행동 양식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디바이스가 보급된 현대, 자금 거래는 대부분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현찰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범죄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강탈하기 쉬웠으니까.
하지만 선별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어지간히 부피가 크지 않는 이상 특정할 수 없는 거다. 하지만 녀석들은 당당하게 따라왔다.
그 말인즉슨―
"여태껏 전당포를 주시했던 건가."
현물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쉐이드 본인을 노리는 건 부담이 컸을 테니, 그와 거래를 마치고 나온 이를 습격하는 게 합당한 선이었을 터.
"혼자서 갔던 게 문제였나."
"닥치고 이리로 오기나 해. 참고로 도망칠 수 있다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보니까 며칠 동안 조사한 것 같았다.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친 상대를 겁박하는 무뢰배보다는 부지런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게 한 가지 빠져 있었다.
"혹시 내가 누구인지 알아?"
"알아야 해? 그 전당포를 이용할 정도면 너도 떳떳한 인간은 아닐 텐데? 기껏해야 잘나가는 해결사 정도잖아, 안 그래?"
"예상외로 정확해서 할 말이 없네. 그래도 한 가지는 알겠어."
"뭐?"
"너희들, 돔 바깥에서 왔지?"
다른 돔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돔 바깥, 혹한의 대지에서 왔냐고 물은 거였다.
당연하지만 그곳에서도 살아가는 이들은 있었다.
2056년, 돔이 완성되었을 당시에는 모든 인류를 포용할 정도로 크지 않았다. 선별 작업을 거칠 수밖에 없었고, 복역자와 범죄자는 자연스레 도태되었다.
하지만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생명은 꿈틀거렸다. 유목민처럼 세상을 떠돌면서 자신들만의 생활을 정립한 거다. 노략질과 노획 그리고 원초적인 폭력으로.
그들의 이름은 '스트라이더'.
어떠한 의미에서는 빙하기에 걸맞은 인재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해할 수 있지. 평생 남을 사냥하는 게 업이라지?"
"자꾸 뭐라 뭐라 지껄이는데 그다지 쓸모없는 건 알고 있지? 너도 디바이스가 없는 건 매한가지니까. 여기에서 널 묻어 버려도 처벌은 받지 않아."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설령 사건 현장이 발견된다고 해도 마찬가지.
돔에서 디바이스는 신분증.
물론 그걸 소지하지 않았다고 해서 체포하지는 않지만, 그 대신 어떠한 것도 보장해 주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한방임주의. 그 기조는 죽어서까지도 이어졌다.
"이제 정신이 들어?"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은 청년이 신에게 총구를 들이밀었다.
"널 지켜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죽기 싫으면 가진 돈 다 내놓고 얼른 꺼져."
"싫다면?"
"이게 장난 같아?"
방아쇠에 검지를 걸친 청년이 신을 노려보았다.
하나 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쏠 수 있으면 쏴 보든가. 대신 그 뒤는 책임지지 않는다?"
"하, 순 미친 새끼네. 그런 말 하면 내가 무서워서 물러날 것 같냐?"
"쏴."
"뒤지고 싶다는데 못 해 줄 것도 없지."
탕!
주저하지 않고 당긴 방아쇠를 따라 격발음이 터진다.
탄환은 신의 미간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청년은 그걸로 끝이라 생각했다. 지근거리에서 바람구멍이 뚫리면 그 누구도 버티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쓰러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과 다르게 신은 넘어지기 직전, 오직 허리의 힘만으로 상체를 지탱했다.
그리고 천천히 무게 중심을 잡았다.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가 다시 활기를 되찾듯이.
죽었다면 결코 보일 수 없는 행동.
순간, 간담이 싸늘해지자 청년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났다.
"쐈네, 쏴 버렸네."
핏방울 대신 납탄이 흘러내린다.
떼구루루.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였지만 공동을 채우기엔 충분했다. 넋이 나간 듯, 말을 잊지 못하는 무리를 바라보며 신은 비릿하게 웃었다.
초탄을 허용한 건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구태여 그들이 살인자가 되지 않게 노력해 줄 필요가 없어서였다.
고작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무리였다. 여기에서 끝내지 않으면 또 어디에선가 사고를 칠 게 분명했다.
그것도, 자신과 다르게 죽을 수밖에 없는 약자에게.
"나도 한 번 죽었으니, 너희들도 한 번씩 죽을 차례네."
003 닥치고 달게 받아
* * *
분명 미간이 꿰뚫렸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무리 중 하나가 뒷걸음질 치자 청년이 호통쳤다.
"멍청한 새끼들아, 슬롯이잖아!"
사이버네틱스 수술을 받는다면 근골격의 강도 자체를 높일 수 있었다. 어쩌면 유전자를 조작했을 수도 있었다. 방법은 무궁무진. 결코 허깨비가 아니었다. 인류가 추구한 진화의 한 갈래일 뿐이었다.
"그렇게 착각해 주면 좋고."
고도로 발달된 사회.
신분을 구하기 어려워졌지만, 덕분에 실체를 감추는 것도 쉬워졌다. 변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석하고 받아들이니까. 과감하게 본성을 드러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탕! 탕!
코앞에서 탄환이 연달아 쏘아졌지만 신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정면에서 회피했다.
깔끔하기 그지없는 더킹.
그에 반해 청년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일그러졌다. 바로 눈앞에서 터진 오발이건만, 먼 곳에서 일어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서였다.
그만큼 허무맹랑한 전개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거친 격통과 함께 현실이 들이닥쳤다. 어느새 턱밑까지 치달은 신이 그대로 복부를 돌려 찬 거다.
속이 뒤집힐 정도로 강렬한 충격이 전신을 휘감았지만, 청년은 넘어지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신이 그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으니까.
"가더라도 이건 주고 가야지."
청년의 손아귀에서 권총을 우악스럽게 빼앗은 신은 달려오는 두 사람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보지도 않은 채로.
탕, 탕.
소비된 탄환은 단 두 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필요치 않았다. 총성이 멎기도 전에 청년을 따르는 이들이 뒤로 쓰러졌으니까.
효율적이다 못해 괴기스럽다는 인상마저 느껴지는 폭력.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과 마주한 청년은―
"어떻게?"
멍청하게 그러한 물음을 입에 담을 뿐이었다.
"남는 게 시간이라서 말이야."
그 말대로.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신은 오랜 시간 동안 인류사와 함께 다녔다. 때로는 방관자가 되어, 때로는 협력자가 되어.
세월이 지나 문명은 성숙해졌지만, 인류의 정신은 여전히 3차 세계 대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돌고 돌아 진보된 기술이 낳은 건 야만의 시대.
생활은 풍족해졌지만, 일상은 피폐해졌다.
제 한 몸 건사하기 위해서라도 무술을 익혀야 하는 건 필연.
가장 결정적인 건―
"너 같은 쓰레기만 보면 몸이 뒤틀려. 환경 미화에 관심이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분리수거 정도는 알아서 해야 하지 않겠어?"
협박과 절도 미수.
그 대가로 이러한 처벌은 심한 게 아니냐고 항의할지도 모르지만, 알 바 아니었다.
"어디 보자."
신은 5만 피아를 꺼내, 청년의 윗주머니에 넣었다.
"이로써 범행 동기는 갖춰졌고, 흉기 또한...."
물끄러미 권총을 내려다본 신이 밝게 웃었다.
"여기 있군. 너희 같은 스트라이더가 의견 마찰로 죽더라도 관심을 가지는 이는 없을 테지."
빼앗았을 때처럼 청년의 손에 우악스럽게 권총을 쥐여 준 신은 방아쇠에 검지를 걸었다. 그리고 총구를 청년의 관자놀이에 겨누었다.
"아니, 나는...."
겁만 주려고 했는데.
설익은 거짓을 내뱉으려던 청년은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이미 방아쇠를 당긴 후였던 거다. 이제 와서 변명이 통할 리 없었다.
애당초 자비를 구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청년은 소리를 질렀다.
"이거 놔! 놓으라고!"
온 체중을 실은 발악에도 신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바이스에 눌린 것 같은 감촉에 청년의 발악은 발작에 가까워졌다.
"너, 우리 애들이 알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이 구역 스트라이더는 다 네 적이 되는 거야. 생각 잘해. 아니면...."
벌써 수천, 수만 번은 더 들은 듯한 레퍼토리. 무심하게 청년을 내려다본 신은 고저 없이 판결을 내렸다.
"닥치고 달게 받아."
탕!
* * *
"오, 미스터 테스토스테론. 이걸 봐, 네가 그리도 원하던 월세란 거야."
능청스럽게 봉투를 꺼낸 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놀드의 얼굴이 심상치 않아서였다.
다른 때였다면 또 별명으로 부른다며 한 소리가 나왔을 테지만, 오늘은 굳어 있는 표정이 펴질 줄 몰랐다.
"기껏 구해 왔더니, 왜 그런 반응이야. 무슨 일인데?"
신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본 아놀드가 나지막이 탄성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너, 해결사라고 했지?"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15년 동안 거주한 녀석의 직업을 집주인이 모른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하긴."
냉막한 인상이지만, 그래도 신분이 불확실한 신에게 거주지를 제공한 마음씨 좋은 주인이 바로 아놀드였다.
하지만 그게 방관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조사했겠지.
이렇다 할 흠결이 없으니까 받아들인 걸 테고.
"그래서, 의뢰라도 하고 싶다는 거야?"
그 말에 아놀드가 침울한 얼굴로 답했다.
"조카 녀석이 학교 폭력을 당했다."
"대단히, 소소한 이유네."
물론 얕잡아 보는 건 아니었다. 단지 심각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주제라 그러했을 뿐.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보복 전문이야. 타일러서 듣게 해 주는 보모 같은 게 아니라고."
"걱정하지 마라, 그렇기에 너를 부른 거니까. 원만하게 처리만 된다면 평생 월세 따윈 받지 않도록 하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신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자, 아놀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면회 시간이 머지않았군."
* * *
빈터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부모님이 일찍 죽어, 삼촌인 아놀드가 그 자리를 대신해 준다는 것만 빼면.
불편하지만 불운한 건 아니다.
적어도 빈터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제랄드 패거리의 눈에 띄기 전까지만 해도.
"네가 전교 1등이라면서. 내일 중간고사 때 답지 좀 돌려라."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제랄드가 다가왔다. 당연하다는 듯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내밀면서.
"시험 중 디바이스를 사용한 통신은 교칙 위반이잖아."
당당하게 반박한 빈터였지만 제랄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할 거야, 말 거야."
오히려 제 패거리를 불러와 재촉하기까지 했다.
"묻고 있잖아."
그에 빈터는 대답하지 않고 무시했다. 괜히 움츠러들어 우왕좌왕하면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교내에 떠도는 소문도 들은 바 있었다.
제랄드가 얼마나 악랄하고, 악독한지.
그 때문에 그때 당시에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라 믿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최악의 결과로 나타났다.
운영이 중지된 공장에 억지로 끌려간 거다.
제랄드 혼자였다면 도망칠 수도 있었겠지만 그에게는 같이 다니는 패거리가 있었다. 작정하고 사방에서 달려드니, 빈터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동안 좋았겠다? 내 말 씹어서. 그래, 너 같은 범생이에게 나 같은 깡패 새끼는 가축 이하라는 거지. 뭐냐, 그 표정은? 눈 깔아, 뽑아 버리기 전에."
보지 못한 사이에 제랄드의 태도는 더욱 험악해져 있었다. 무어라 항변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시험을 못 보면 너도 못 보지. 그게 공평하잖아? 야, 잡아."
"뭐, 뭐야?"
"참교육."
그 뒤에 이어지는 건 무자비한 구타. 폭력에는 이골이 났는지 퍽 매서웠지만, 빈터는 굴하지 않고 저항했다.
"네까짓 게 날 무시해? 공부 좀 한다고?"
그러고 보니 제랄드의 꿈이 '공찰(公察)'이라고 했던가. 높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 이러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저의를 알았다고 해서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시발, 졸업장 받고 나중에 머리에 서브 브레인 하나 박으면 그만이야. 멍청하게 외우지 않아도 그거면 된다고! 거지새끼가 글자 몇 줄 좀 안다고 의기양양해서 대들어?"
울분이 쌓이기는커녕, 더 커진 듯한 모습이었다. 어떠한 면에서는 심취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뒤져, 뒤지라고!"
"큭."
빈틈이 보이자마자 내달린 빈터였지만 얼마 가지 않아 제랄드에게 붙잡혀야만 했다. 공장 밖에도 그의 패거리가 있었으니까.
"이걸로는 굴하지 않는다 이거지."
한 번 도망쳤기 때문일까.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금형에 쓰이는 절단기 앞에 끌려간 것도 그 연장선.
"자, 이래도?"
녹이 슨 톱날과 울퉁불퉁한 몸체.
섬뜩한 외견이었지만, 빈터는 애써 쿵쾅거리는 가슴을 억눌렀다. 전력이 끊긴 지 오래된 공장이라는 건 명약관화했으니까.
작동될 리 없다.
그리 속으로 단언한 순간, 파국이 일어났다.
* * *
이런 일에 익숙한 신도 빈터의 사연을 듣고는 질색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 폭력이라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구타가 주를 이루었다. 그 이상은 장난이라 부를 수 없는 영역이었으니까.
"이건, 좀 심하군."
보이는 건 길이가 맞지 않는 두 다리. 강압적인 방법이 동원되었을 거라는 건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비인간적인 수단 또한.
어금니를 깨문 아놀드가 새어 나오는 입김을 단어로 바꾸었다.
"의도한 건 아니라고 하더군."
"지랄."
반사적으로 그러한 소리가 나올 정도로 구질구질한 사족이었다.
"접합 수술은?"
"할 수 없다고 하더군."
어떻게 잘려 나갔는지 묻는 것도 무서웠다.
빈터가 이대로 살아야 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NO였다. 현시대의 의학 기술은 인간의 이지를 초월한 지 오래였으니까.
신체 일부를 배양하는 것도, 의족을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래, 구입할 돈만 있다면.
기본 소득제가 시행된 세상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으로서의 최소 존엄을 보장하는 거지 막대한 부를 약속하는 건 아니었다. 기호품과 사치재는 여전히 노동으로만 구할 수 있었다.
신이 침음을 흘렸다.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는 건 알겠어. 하지만 이런 건 공찰의 소관이잖아."
특수 상해와 범죄 단체 조직, 제랄드에게 부여할 수 있는 죄목은 차고 넘쳤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아놀드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학교 측에 항의하는 건 의미 없었다. 공찰도 똑같더군."
"왜?"
이만한 사고였다. 뉴스에 나오지 않을 리 없었다.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합의하는 게 현명한 처사일 터.
대답은 아놀드가 아닌 빈터에게서 흘러나왔다.
"그 녀석의 형이 보안관이니까요."
"그래서 나를 찾은 거네."
보안관.
공찰에서 10년 이상 근속한 이만 얻을 수 있는 직위였다. 물론 그만한 성과도 뒤따라야 했다. 수사관 중에서 보안관이 되는 건 1할도 되지 않으니까.
말하자면 엘리트 중의 엘리트.
일반인에게는 재앙과 다를 게 없었다.
"원하는 게 뭐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녀석에게 제 기분이 어땠는지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원하는 방향이 워낙 명료한지라 아놀드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제랄드가 빈터만큼 당해야 한다는 건 곧―
"잠깐, 빈터. 나랑 약속했을 텐데.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선에서 의뢰하자고 말이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배려해서 피해야 한다니 저는 그렇게 못하겠어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넘쳐서였다.
좌중에 흐르는 침묵을 깬 건 신이었다.
"옳은 소리."
004 신, 부탁한다
* * *
야만적이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제 권리조차 주장할 수 없는 게 작금의 세태였다. 아놀드가 정녕 동의하냐는 듯 불안한 눈초리로 쳐다보았지만 신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낯설군. 너도 빈터도."
마른세수를 반복한 아놀드는 빈터를 바라보았다.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라고, 너도 제랄드와 똑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당장 머릿속에 떠도는 구상만 수십 개였다.
빈터라고 그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참고 넘어간다고 해결될까? 제랄드가 스스로 제 잘못을 뉘우칠 거였다면 상황이 이리 복잡해지지도 않았을 거다.
학교에서는 이미 사건을 덮기로 결정했다. 학생들은 무언가 석연찮다는 걸 알면서도 흘려넘겼다. 결국 그들의 일은 아니었으니까.
디바이스에 녹화한 영상이 있지만, 정작 그걸 다루는 공찰이 제랄드의 편이었다.
빈터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공장에 있었을 때처럼.
"죄송해요, 삼촌. 하지만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어요. 어쩌면 이 결정을 두고 나중에 후회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런 기회는 지금밖에 오지 않아요. 하지 않고 후회하느니 저는 하고 후회하겠어요."
강인한 의지가 느껴지는 한마디.
아놀드는 그동안 빈터를 어리게만 보았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무심하게 내뱉은 말이라고 그 과정까지 얕은 건 아니었던 거다. 오히려 그리될 때까지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었으리라.
"이런 제 생각이 잘못된 걸까요?"
새삼스러운 물음 앞에 머리가 멍해진다.
그래, 지금 고려해야 할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아니, 너는 잘못한 거 없다."
여태껏 제 발목을 잡고 있던 게 가식이나 위선이었다는 걸 깨달은 아놀드였다.
어른스러운 대처? 신중하고 깊은 고민?
다 부질없었다. 모든 게 순리대로 돌아가지 않는데 모범을 보이라 강요하는 건 가혹했다.
말없이 빈터의 등을 쓰다듬은 아놀드가 고개를 숙였다.
"신, 부탁한다."
* * *
오랜만에 의뢰를 받았지만 심란한 마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선량하다고 해서, 올곧다고 해서 그에 합당한 결말을 맞이하는 건 아니었다.
돔에서는 더더욱.
3차 세계 대전 이래로 인류는 최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기본 소득제가, 깔끔하게 관리되는 거리가 그 증거였다.
갑작스레 위정자가 이타주의에 눈을 뜬 건 아니었다. 그들이 실질적으로 한 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러한 결과가 나왔느냐.
구태여 자문할 것도 없었다.
이는, 끝없이 발달한 기술의 수혜였으니까.
아무리 방만하게 건축한다고 해도 아파트가 움집이 되지 않듯이 이러한 생활 수준이 표준으로 자리 잡은 거다.
그래, 기득권층이 살점을 게걸스럽게 먹고, 남은 뼈대가 이 정도.
당연하게도 속은 곪아서 썩기 일보 직전이었다.
빈터가 겪은 부당한 사건이 적절한 예시였다.
민중의 지팡이가 되어주어야 할 공찰은 본래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시민을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닌 계도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던 거다.
그와 관련된 스캔들은 예전부터 몇 번인가 대두되었다.
가장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은 2302년, No.1 돔에서 일어난 '밀레니엄 코드 게이트'였다.
발단은 순찰 드론이 대상의 직위를 고려해 처벌 수위를 낮추거나, 아예 혐의를 지우지 않는다는 제보가 들어오면서부터.
어디까지나 음모론이었기에,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중범죄를 제외한,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경범죄는 대부분 순찰 드론이 도맡아서 처리했던 거다.
치안 유지를 위한 도구로써 당당히 기능 중이건만, 거기에 허점이 있다니.
시민들은 아무리 돔을 관리하는 시정부가 부패했기로서니, 공동체의 근간을 뒤집는 선택은 하지 않았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VIP 명단이 실제로 드러나면서 그러한 기대와 관심은 무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공찰은 모든 의혹을 사실무근이라며 일축했지만, 관련 알고리즘을 발견한 내부 고발자가 나타나면서 사태는 한층 더 복잡해졌다.
순찰 드론을 납품한 회사 '밀레니엄 코드'는 여섯 개의 돔을 아우르는 메가 코퍼레이션, 일명 메가콥이었던 거다.
각 돔을 다스리는 시정부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집단. 그런 곳에서 아무런 대비 없이 제품을 발매할 리 없었다. 애당초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두 단체 사이에 긴밀한 협의가 오고 갔다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비로소 인지했다. 순찰 드론은 신호탄에 불과하다는 걸.
인공지능이 등장하면서 노동의 가치는 한없이 낮아졌다. 예전에는 반드시 인간의 손을 거쳐야 했던 작업도 이제는 네트워크상에서 이루어지기 일쑤.
그 점을 악용해, 법률마저도 무시할 수 있는 기반을 세우려다 적발된 거다.
이제 더 이상 숨길 수 없다 생각했던 걸까.
급히 편성된 특검은 관련 알고리즘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리고 모종의 협약이 있었음을 시인했다. 그렇게 정의는 바로 세워지는 듯했으나, 그건 순전히 착각에 불과했다.
과징금 50억 피아.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밀레니엄 코드에게 부과된 액수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었다.
솜방망이라 아니할 수 없는 처벌.
우롱에 가까운 판결에 대로한 대중이 폭력을 동반한 시위를 일으킨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에 따라, 세태와 야합하는 것도 모자라 유지하는 데 일조한 밀레니엄 코드에는 한차례 폭풍이 일었다.
당대 회장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부회장이 그 자리에 취임해 수습하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그조차도 서막에 불과했다.
밀레니엄 코드를 휘어잡은 부회장이 바로 시정부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동생이자, VIP 명단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던 장본인으로 밝혀졌던 거다.
허수아비가 된 회장이 실은 시정부에서 구비해 놓은 방패막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시민들은 그 후안무치한 처사에 다시 한번 불타올랐다.
하지만 이미 공소시효가 끝난 후.
공찰은 물론이고 검찰도 움직이지 않았다. 인과와 죄과가 명확한데도 변하는 건 없었다.
무기력한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공권력에 기댈 수 없다면 사적으로라도 제재하겠다는 의식이 싹튼 거다.
급진적인 사상이 극단으로 치달은 건 한순간.
모두가 복수자이자 혹은 그 대행자가 되었다.
그 뒤에 펼쳐진 건 혼돈의 도가니.
걷잡을 수 없이 번진 증오의 연쇄는 누구인지 모를 이가 사건과 관련된 인사를 모두 참살하면서 진정되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 했던가.
마법에서 풀려난 것처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조금씩 합의점을 찾아갔다.
정당방위와 자력구제에 대한 법규가 따로 제정될 정도.
그 과정에서 순찰 드론과 함께 투입하기로 예정된 안드로이드 조사관은 계획표째로 휴지통에 들어갔고, 검찰에서 준비 중이던 A.I 판사 또한 무위로 돌아갔다.
인공지능은 완벽할지언정, 그걸 다루는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는 게 이번 사례를 통해서 입증된 거다.
기술이 발전한 만큼 도태된 도덕과 윤리.
그로 인해 더 나은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게 된 인류.
해결사라는 직종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기실, 근대사에서 용역 대행의 역사는 뿌리 깊은 편이었다.
조폭이 양지로 나와 흥신소를 차리고, 모여서 자경단이라 칭하고, 전문적인 인재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해결사라는 거창한 단어를 내세우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법망의 테두리에서는 이루지 못할 소망을 이뤄주는 대리자.
신분 없이 떠돌아다니는 불로불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직업이었다.
* * *
아무도 없는 공장 옥상.
위이잉!
머리 위로 순찰 드론이 스쳐 지나가자 교복을 입은 무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를 벌렸다.
성인 남성의 상반신 정도 될까.
크기 자체는 별거 아니지만, 언제든지 범죄 현장에 투입될 수 있도록 정비가 끝난 기기였다. 지금 바로 진압 작업에 착수할 수 있을 정도.
비록 제압에 국한된 무장뿐이기에 살상력은 없다지만 혹시 모르지 않던가. 저만한 속도라면 부딪치기만 해도 위협적일 테니까.
애당초 순찰 드론이 낮게 날아다니는 건 언어도단이었다. 뜻하지 않는 접촉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었던 거다.
때문에, 평상시에는 눈에 띄지 않는 높이까지 상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순찰 드론이 입력된 경로에서 벗어난 건 제랄드가 손에 움켜쥔 통제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익숙해지니 RC카랑 다를 게 없네."
그 과정에서 몇 번인가 긁혔지만 제랄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그램을 만지작거리면서 순찰 드론을 조종했다.
"공찰에 걸리는 건 아니지?"
"하, 새끼, 덩치에 안 맞게 쫄기는. 괜찮아, 괜찮아. 형 거야."
보안관에게 배급된 물품이지만―
"잠깐 빌린 거라고, 아무런 문제 없어."
한두 번도 아니었다. 더구나 저번에는 들키기까지 했다. 하지만 경고를 받는 선에서 그쳤다. 다음에는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했던가.
그런다고 포기할 제랄드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순간, 순찰 드론이 공장의 벽면을 받고 지나갔다.
우당탕, 커다란 소리가 나면서 철근과 콘크리트가 떨어져 나갔다.
"생각보다 멍청하네."
패거리 중 하나가 그렇게 말하자 제랄드는 피식 웃었다. 그가 보기에도 순찰 드론은 둔한 감이 있었다. 이런 게 돔을 지킨다니 우스울 정도. 하지만 무리도 아니었다.
"인공지능 같은 건 없으니까."
"없어?"
다른 녀석이 되묻자 제랄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수십만 대나 운용하는 데 다 집어넣었겠냐. 한나절 동안 날아다니는 게 고작인데도 수천만 피아야."
필수 기능은 대규모 클라우드 컴퓨팅 플랫폼이 대행했다. 말하자면 인공지능 무리가 원격 조종하고 있는 셈.
비용을 줄이기 위해 내부에는 기록 장치만 있을 뿐, 연산 장치는 없었다.
―라는 게 형의 설명이었다.
'아니지, 무슨 게이트가 터지면서 감사하기 용이한 시스템으로 옮겼다고 했던가.'
무언가 들었던 것 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
"그보다 빈터, 그 녀석은 어떻게 할 거야? 보니까 시정부에도 진정서를 넣겠다고 난리를 피우던데."
"헛짓거리지."
기업과 기업 간의 마찰도 아니고, 누가 일개 학생의 불행에 눈길을 주겠는가. 하물며 빈터가 접수한 서류는 모두 공찰이 먼저 훑어보고 삭제할 터였다.
"내버려 둬. 쓴맛도 봐야 빳빳한 고개가 숙여질 테니."
"하긴 이번에 쩔더라, 너."
"나도 보안관 형, 가지고 싶다. 나 너네 집에서 막내 하면 안 되냐?"
"지랄."
좋은 경험이었다는 건 제랄드도 부정하지 않았다. 제가 가진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후일 범죄자와 마주하더라도 떨지 않고 상대할 수 있을 터.
사실, 이번 사건은 보안관이라고 해도 쉽사리 막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집안 대대로 공찰에 근무했던 터라 이런저런 인맥이 많았다.
사전에 들불을 꺼트릴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
'내가 이어받을 유산이라 이거지.'
005 조심하라구우우
* * *
제랄드가 공찰이라는 직업에 집착하는 건 그 때문이었다. 아직 학생인데도 불구하고 빈터의 아우성 같은 건 단숨에 묻어 버렸다.
정식 조사관이 되면 얼마나 더 많은 권리를 향유할지 짐작도 되지 않을 정도.
"시발, 인생 편하다. 편해."
"너만 편하면 되냐. 중간고사는 어떻게 할 거야, 완전히 망했는데."
칭얼거리는 소리에 탄력을 받듯이 여기저기에서 불만이 터져 나온다. 물론 어디까지나 장난이라는 걸 알기에 제랄드는 코웃음 치며 답했다.
"수석이 안 되면 차석을 쓰면 되잖아."
명쾌한 결론이 나오기 무섭게, 저 아래에서 일진 한 명이 여학생을 끌고 올라왔다. 양갈래 머리에 일탈이라고는 해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인상.
빈터가 전교 1등이라면 소녀는 그 뒤를 잇는 수재였다.
미쉘이라고 했던가.
"데려왔어."
"거기 둬."
사태 파악이 되지 않는 듯, 몸을 움츠린 미쉘 앞에 선 제랄드가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동시에 순찰 드론 또한 멈춰 섰다.
그 비정상적인 광경에 미쉘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동급생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로 변한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내가 일생일대의 결심을 했거든. 아니지, 장래를 정했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성적이 조금 모자라더라고."
자세를 낮춘 제랄드가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그러니 부탁 좀 하자. 중간고사 때 답지 좀 돌려라."
"내가 왜...?"
"그래야 너도 시험을 보니까?"
한 박자 늦게 눈에 들어온 패거리의 윤곽에 미쉘은 마른침을 삼켰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랄드의 범행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바라는 건 안정된 삶이지, 이처럼 굴곡진 위기가 아니었다.
"고민할 게 뭐 있어. 졸업하기 전까지만 눈 감고 날 도와. 혹시 알아? 공찰에 들어간 내가 은혜를 갚을지."
"나는...."
저절로 뒷걸음질 치는 두 발.
도망쳐야 한다.
그러한 일념만이 뇌리를 지배했다.
하지만―
"빈터와 다르게 너는 여자니까 여러모로 쓸 데가 많을 것 같은데."
조용히 이어지는 한마디에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머리로 갚는다면 몸은 봐줄게."
미쉘의 얼굴은 삽시간에 사색이 되었다. 그제야 빈터가 어째서 입원했는지 알게 되었던 거다.
누가 보아도 의지가 꺾인 듯한 모습인지라, 퍽 만족스럽게 웃는 제랄드였지만 그 미소도 오래가지 못했다.
빈터라는 반면교사가 있으니 반항하는 건 꿈도 꾸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방금 전부터 미쉘의 눈은 허공을 헤집고 있었다.
당황해서 경련이 일어난 게 아니었다.
저건, 디바이스를 조작할 때 나타나는 특유의 징조였다.
"어째 범생이 새끼들은 하나같이 예상을 벗어나지 않나 몰라."
툭.
통화권 이탈이라는 문구와 함께 통신이 끊기자 미쉘은 화들짝 놀라 제랄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에는 보안관 전용 통제기가 들려 있었다. 순찰 드론을 조종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디바이스의 송수신을 제어하는 것도 가능한.
그날, 빈터가 공찰을 부르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지극히 한정적인 범위 내에서 기능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일대를 통제하기에는 충분했다.
엄연한 범법 행위지만, 제랄드에겐 이제 이 정도는 별것 아니었다.
"아아."
털썩 주저앉은 미쉘은 무의미하게 탄성을 지를 뿐이었다. 고장 난 라디오처럼, 계속해서 끊임없이.
그 얼빠진 표정을 여유롭게 감상한 제랄드가 방점을 찍었다.
"널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닥치고 협력해."
"속단하기에는 이르지 않을까."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
고개를 돌린 제랄드의 눈에 비친 건 방금 전까지 자리에 없던 인물이었다. 젊은 건 확실하지만 연령을 정확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눈동자.
그래, 섬뜩할 정도로 차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그 판단에 혼란을 주었다.
괜히 기분이 나빠진 제랄드가 삐딱하게 몸을 기울였다.
"뭐냐."
"나? 너에게 유감이 많은 사람."
제랄드의 얼굴을 확인한 남자, 신이 씨익 웃어 보였다.
* * *
제랄드와 그 패거리를 찾는 과정은 싱거울 정도로 쉬웠다. 애당초 특수 부대 출신 범죄자도 아니고, 일개 학생 무리였다.
하교하는 시간에 맞춰 뒤를 밟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설마하니 그사이를 못 참고 다른 피해자를 양성할 줄은 몰랐지만.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학교 폭력은 다른 범죄에 비해 가볍게 다뤄지는 편이었다. 그를 대변하는 주장 또한 한결같았다.
어린 날의 치기.
그래도 앞으로를 생각하면 감형해 줘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실처럼 따라다녔다.
미성숙한 인격체가 저지른 실수이기에 바로잡을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건데, 남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을 정도로 자란 핏덩이가 어째서 그 영역에 들어가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불의에 굴종하고, 권력에 복종하고, 법의 허점을 이용하고.
아이들의 순수함은 잃어버린 녀석들이 형성한 집단은 폭력배 못지않은데 말이다.
개인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제랄드의 행동이, 사상이, 그리고 드러난 행적이 모든 걸 입증했다.
"설마 빈터가 고용한 놈이야?"
허무맹랑한 추론은 아니었다. 인과 관계가 뚜렷했으니까. 그 외에는 변수라고 할 것도 없었고 말이다.
잘 걸렸다는 듯, 짐짓 으스대는 제랄드였지만―
"빈터가 누구인지 모르겠는걸. 내가 여기에 온 건 저 아이의 비명이 들려서야."
곧이곧대로 설명해 줄 신이 아니었다. 대신 그가 가리킨 건 미쉘이었다.
그제야 돌아가는 정황을 파악한 일진들이 혀를 찼다.
"아, 꼰대한테 잘못 걸렸네."
"굳이 공장까지 와서 이 지랄을 한다고? 그것도 대낮에? 노숙자 아냐?"
"그러고 보니...."
모두의 시선이 신에게로 향했다.
유행이 지난 코트와 색이 빠지기 시작한 장갑. 사용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멋스러운 차림새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하나, 어디를 어떻게 보아도 사회에서 승승장구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디바이스도 없잖아."
"와,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나온 거야?"
시민이 아닌 자는 공찰의 보호를 비롯해 돔의 여러 편의 시설을 이용할 수 없었다. 물론 생활이 불편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악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묻어 버려도 상관없다는 거잖아."
패거리 중 하나가 호기롭게 다가온 순간, 신은 녀석의 멱살을 잡고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무릎으로 콧대를 짓뭉갰다.
연속된 동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컥."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일진을 뒤로 내던진 신이 무미건조하게 외쳤다.
"다음."
"미친놈이었네, 이거."
한 명이 나가떨어졌지만 패거리의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동안 노출된 폭력의 수만 해도 수십, 수백은 되었던 거다. 더구나 상대는 한 명.
"어디에서 싸움 좀 배운 티가 난다만, 너무 깝쳤어."
일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덤벼들었다. 무리를 지어 먹잇감을 사냥하는 데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그들이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팔과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면 제까짓 게 어쩌겠는가.
"처맞고 빌지 마, 안 놓아줄 거니까."
같잖다는 듯 공세에 나선 놈들이 생각을 달리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너클을 말아 쥔 친구의 주먹이 그대로 부서지는 걸 감상하고 나서야 일진들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뭣."
"고작 이 정도로 호랑이 흉내 냈던 거냐."
관자놀이에 닿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쇠파이프를 피한 신은 그대로 상대의 팔을 접었다. 결코 꺾일 수 없는 각도로.
무언가 파열되는 소리, 그 이상으로 형언할 수 없는 고함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서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 그조차도 얼마 가지 않아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제랄드라고 패거리가 당할 때까지 넋 놓고 지켜만 보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자신이 합류한다고 해결될 문제라는 걸 알고, 비장의 패를 꺼내 든 거다.
전조를 감지한 미쉘이 소리쳤다.
"위험해요! 아저씨!"
"아무리 그래도 아저씨는 아니잖아."
최대 속력으로 날아온 순찰 드론이 신을 들이받은 건 그 순간.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자 미쉘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한계까지 가속한 쇳덩이와 충돌한 거다.
보지 않아도 어떻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상황은 그녀의 예상과 다르게 전개되었다.
"요즘 아이들은 순찰 드론도 들고 다니네."
신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팔꿈치와 무릎을 집게 삼아 순찰 드론을 막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무게 중심은 놀랍도록 안정된 상태. 한 발로 서 있는 게 도리어 자연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 뒤에 이어지는 행동은 더욱더 파격적이었다.
맨손으로 순찰 드론의 중추를 깨부쉈으니까.
"미친."
미쉘과는 다른 의미로 놀란 제랄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정할 수 있는 건 크게 두 가지.
성능 좋은 슬롯을 박았거나, 비범한 유전자를 보유했거나.
어느 쪽이든 외관상 보이는 특징은 없다시피 했다.
적당히 놀아 준 뒤, 풀어 줄 생각이었지만 바뀌었다.
"걸어서 나갈 생각하지 마."
"그런 당연한 거에 생각까지 하는 사람이 있어?"
"그래, 실컷 지껄여."
제랄드가 통제기 위로 떠오른 홀로그램을 조작하자, 근처를 배회하던 순찰 드론이 합류했다.
그 수가 넷이나 되었지만 신은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기쁘게 웃었다.
"이런 식으로 내 걱정을 덜어 주다니, 감격스러운걸."
"개소리 말고 뒤져."
순간, 사방을 점거한 순찰 드론에서 테이저 니들이 발사되었다. 일반적인 동체 시력으로는 감지조차 할 수 없는 속도였으나 신은 도약을 감행했다. 그리고 순찰 드론을 징검다리 삼아 제랄드에게 쇄도했다.
황급히 날아온 순찰 드론 한 대가 그 앞을 가로막자, 신은 기다렸다는 듯 팽이처럼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이윽고, 원심력이 한계에 다다른 순간 신은 순찰 드론을 걷어찼다.
제랄드의 두 다리를 향해.
쿠쾅!
육중한 무게를 지녔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곧게 쏘아지는 순찰 드론.
일련의 과정을 제랄드가 인지한 건 섬뜩할 정도로 선명한 굉음이 제 귀에 닿은 뒤였다.
"끄아아아악!!"
목구멍이 찢어져라 외쳐도 해소되지 않는 고통.
새빨갛게 물든 하체를 내려다본 제랄드는 발작을 일으켰다.
"이 병신 같은 새끼가!"
"병신은 너지. 순찰 드론을 조종하다 다친, 너."
그제야 제랄드는 신이 말한 '걱정'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저 미친 녀석은 순찰 드론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할 작정인 거다.
이가 갈리지 않을 수 없는 수작.
"방금 공찰에 신고했으니까 누가 뒤지나 보자. 개새꺄."
"신고한 거 맞아?"
"대가리에 총...."
거기까지 말한 제랄드는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하고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트린 통제기가 어느새 상대방의 손에 들어간 거다.
"설마."
"디바이스도 적당히 써야지. 하루 종일 하면 머리 나빠진다, 너?"
해맑게 웃은 신이 홀로그램을 조작했다.
계속해서 통화를 시도해도 소용이 없자, 제랄드는 두 눈을 부릅떴다.
"내놔."
"네 것도 아니잖아."
신의 입꼬리가 하염없이 올라가자 제랄드는 두 팔을 부르르 떨었다.
"진짜 그러다 죽여 버리는 수가 있다?"
"쥔짜, 그뤄다 죽여 버리는 수가 있따구우우. 조심하라구우우."
006 나야
* * *
얄밉게 되받아친 신은 제랄드의 발목을 질근 밟았다.
"지랄 났네, 진짜.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인지 모를 정도야."
"다 녹화했어."
"아, 디바이스로?"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사이버네틱스 수술이 성행하면서 인간의 생활은 한층 더 윤택해졌다. 언제 어디에서든 인터넷과 연결될 수 있는 기반이 갖춰진 거다.
수많은 전자 기기가 체내에 이식되고 활용되는 지금, 인간과 기계를 따로 떼어 놓는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일견 범죄에 휘말릴 가능성이 낮아진 것 같지만, 확률 자체는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걸 파훼하는 수단 또한 발전했으니까.
'노이즈 웜.'
신이 항시 소지 중인 장치의 이름이었다. 기능은 별거 없었다. 특수한 방해 전파를 퍼트려, 형상과 소리를 왜곡할 뿐이니까.
당장 제랄드가 녹화한 영상만 보아도 얼굴과 음성은 어딘가 모르게 일그러져 있을 터.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될 정도는 아니었다.
해결사로서의 역량은 이 부분에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적 제재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잡히지 않는 건 그보다 배는 어려웠으니까.
당연하지만 노이즈 웜 외에도 여러 대책을 보유 중이었다.
"어디서 뭐 하는 녀석인지 모르겠지만 각오해. 어떻게든 찾아내서 끝장내 줄 테니까."
역시는 역시.
놈은 궁지에 몰렸는데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아니, 반성조차 하지 않았다.
갱생의 여지조차 없는 악의 싹.
여태까지 저지른 잘못을 되돌아보면서 조금이나마 깨닫는 바가 있길 바랐지만, 아무래도 그건 개인적인 소망에서 그쳐야 할 듯싶었다.
그래도―
"싫지 않네."
"뭐?"
"나는 좋아해."
신이 갑작스럽게 호감을 표시하자, 제랄드의 눈빛에 자그마한 희망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건 파멸로 가는 전조.
이어지는 말에 제랄드의 낯빛은 차게 가라앉았다.
"너 같은 녀석이 있어야 비로소 해결사를 찾는 사람들이 생기니까."
법률은 만인에게 적용되어야 마땅한 것.
심판은 모두에게 내려져야 하는 게 옳은 것.
하지만 어디에서나 이레귤러는 존재했다. 때문에 항상 구원의 손길을 바라는 이가 생겨났다.
해결사로서는 바라 마지않는 환경.
"이름이, 미쉘이라고 했던가?"
"네? 네!"
호명된 미쉘은 누가 보지도 않건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눈 좀 감아 줄래?"
아무렴.
구해 준 사람이 말하는데 그런 사소한 부탁쯤이야.
곧이어, 귓가로 엄청난 소음이 들려왔지만 미쉘은 듣지 않은 셈 쳤다.
* * *
보안관, 제레미 머피는 동생이 입원했다는 사실에 업무도 미룬 채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그간 제랄드가 난동을 부렸으면 부렸지, 다쳤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서였다.
그래도 보나마나 학생 간 다툼이겠거니 했다.
넋이 나간 제랄드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두 다리가 망가졌다고?"
의사의 소견으로는 오작동을 일으킨 순찰 드론이 들이받은 것 같다고. 입력된 경로에도 없는 공장, 그것도 옥상까지 날아올라 사람을 전속력으로 치고 지나간다?
제레미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건 공찰도 마찬가지였는지 따로 조사관이 파견될 정도였다.
하나, 반갑게 맞이해 줄 수만도 없었다.
제 앞으로 등록된 통제기가 발단이 되었다는 걸 뒤늦게 눈치챘으니까.
직위를 앞세워 조사관을 억지로 돌려보낸 제레미는 침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제랄드와 진솔한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았다.
"해결사로 보였다고?"
"응, 다른 아이들도 손쉽게 쓰러트렸거든."
축 늘어진 어깨.
힘 하나 없는 어조.
며칠 만에 마주한 동생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철이 든 게 아니었다. 무언가 근간부터 바뀐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빈터가 고용한 사람일 거야."
"빈터?"
제레미도 익히 알고 있는 상대였다. 제랄드가 일으킨 소동에 휘말린 학생이었으니.
"동기는 충분하군."
조사해보면 윤곽이 잡히리라.
"그냥 이 건은 덮고 넘어가면 안 될까?"
제랄드가 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내뱉자 제레미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제랄드의 의견이 타당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진정 빈터가 배후에 있다면 주고받은 게 되는 걸 테니.
하지만―
"우리 머피가는 대대로 공찰에 투신해 돔의 안전을 지켜왔다는 걸 알 텐데. 희생해서 기껏 오늘의 평화를 만들어 줬건만, 보복이라니 당치도 않다."
"그래도...."
"너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단호하게 선을 그은 제레미는 병실을 나섰다.
신체 배양에 이식 수술 일정까지 결정 난 상태였다.
재활까지 1개월이라고 했던가.
한숨만 푹푹 나오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한동안 피지 않았던 담배를 입에 물 정도.
야외 테라스 밖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마음을 다잡고 있자니, 처음 보는 청년이 다가왔다.
"나야."
서론도 본론도 없는 고백이었지만 제레미는 상대가 제랄드를 다치게 한 장본인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건 그가 보안관으로 활동하면서 얻게 된 관록의 발로. 말하자면 날카롭게 벼려진 직관이 발휘된 순간이었다.
손에 쥔 담배를 반으로 꺾은 제레미가 헛웃음을 흘렸다.
"겁이 없다고 해야 하나. 과연 백주 대낮에 무고한 학생들을 폭행한 녀석답군."
"요즘에는 미친개도 아이 취급해 주는가 보지? 그리고 녀석을 습격한 건 순찰 드론이지 내가 아니야. 조서를 보면 알 텐데?"
"그래, 마음대로 지껄여라.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널 시궁창에 처박아 줄 테니."
호언장담하는 제레미 앞에 선 청년, 신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달콤한 꿈에 젖기 전에 내가 왜 나타났는지부터 고민해야 하지 않겠어?"
"훈수 두지 마라. 한평생 너 같은 녀석과 싸우며 살아왔으니까. 딴에는 흔적을 잘 지웠다 자신하는 거겠지. 그래서 이리 나타나서 의기양양해 하는 걸 테고."
"동생이 그 모양이라고 해서 형까지 그 모양이지는 않네."
"용서를 구하고 싶은 거라면 늦었다고 말해 주지."
"용서는 무슨. 생산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온 거야."
"생산적인 이야기?"
독사처럼 눈을 부라리는 제레미의 태도는 퍽 적대적이었다.
기실, 돔에서 보안관의 눈길을 피할 수 있는 이는 몇 없었다. 물론 혼자였다면 연결 고리를 모두 끊고 잠적할 수 있을 터.
하지만 빈터는 아니었다. 제랄드와 원한 관계에 있었으니까. 제레미의 눈길이 닿는 건 한순간이었다. 거기에 얽힌 내막이 밝혀지는 거야 시간문제일 따름. 자칫 아놀드까지 불길이 번질 수 있었다.
그래서 먼저 나타난 거였다.
깔끔하게 매듭까지 지어야 의뢰를 완수했다고 자찬할 수 있는 걸 테니까.
"일탈한 녀석의 복수를 하겠다고 옷을 벗을 작정이라면 상대해주지. 하지만 너도 그러긴 싫을 거 아냐. 좋게 좋게 넘어가자고."
"그러기 싫다면?"
"젊은 나이에 보안관까지 되어서 말이 좀 통할 줄 알았는데 이거 귀가 먹었네. 내가 구걸하는 걸로 보여?"
미소를 지운 신은 그대로 제레미의 숨결이 닿는 데까지 고개를 들이밀었다.
"간간이 외곽 지역에서 부랑자들을 들여보내 주면서 뇌물을 받고 있잖아."
돔을 구성하는 생태계는 완벽했다. 아콜로지의 저의이자 의의이기도 했다. 일종의 테라리엄Terrarium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당연하게도 불순물이 생겨날 틈은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당초 설계와 다르게 돔의 일부는 이미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기에 생겨난 오차.
설마하니, 내부 구성원이 대가를 받고 난민을 받아들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물론 나도 사람이니까 뒷주머니 차는 걸로 비난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스트라이더와 결탁하는 건 용서받지 못 할 일이지."
그들의 성정은 체계가 정립된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전당포 밖에서 신을 습격한 일련의 무리가 그 일례.
웃기지만 그러한 뜨내기들이 늘어난 데에는 제레미를 비롯한 여러 보안관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터무니없는 모함이군."
"아니라고? 그러면 내가 한 번 훑어볼까?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그런 것도 꽤나 잘하는데."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제레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자리에서 널 체포할 수도 있다. 그걸 알고 이리 자신만만하게 구는 건가?"
제레미는 금방에라도 순찰 드론을 호출할 것처럼 자세를 잡았다.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게 공찰이었다.
하물며 신 같이 시민도 아닌 사람에게는 저승사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디바이스를 소지하지 않은 이를 체포하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인도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관행일 뿐이었다.
정식적인 절차를 밟는다면 해결사 정도야 아무도 모르게 없앨 수 있었다.
"사이좋게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나는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겠지만."
"없는 증거도 만들어낼 수 있다."
"해 보자니까. 잔업은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피하지도 않아. 눈에 띄었을 때 처리해 놓아야 안심이 되는 법이잖아?"
허세도 아니고 자만도 아니었다. 표정에는 여유가 흘러넘쳤으니까. 제랄드를 통해 그만한 능력도 있다는 걸 몸소 입증했다.
때문에, 제레미는 혼란스러운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거다. 이처럼 자기희생적인 헌신을 보여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쯤 되니 궁금증이 솟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너희야말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신에게도 제레미는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인 건 마찬가지였다.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공찰이 도리어 피해자를 압박하고 있었으니까.
책임은 뒤로한 채, 권리만 행하다니.
뒤틀려 있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신은 철학가도 사상가도 아니었다. 성실하게 의뢰를 수행하는 해결사일 뿐.
"나는 네 탈선을, 너는 내 보복을, 모르는 척해 주자는 것뿐이잖아. 내가 너무 돌려서 말한 건가?"
"흠."
제레미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신은 주저하지 않고 덧붙였다.
"네가 묵인해 준다면 이쪽에서도 고소는 진행하지 않을 거야."
빈터나 아놀드나 그런 기색은 없었지만 블러핑도 때로는 중요한 법.
법정까지 끌고 간다고 해도 유의미한 결실을 맺지 못할 공산이 크지만, 그래도 귀찮은 건 피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제레미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났다.
신과 마주하고 나서야, 만만찮은 대결이 될 거라는 걸 직감한 거다.
보안관이 되고 나서 입지를 다지는 중인 그에게 무의미한 소모전은 백해무익했다.
신분 상승의 욕구가 동생에 대한 애정을 뛰어넘는 순간, 제레미의 입이 열렸다.
"그 말, 지켜라."
"네가 동생 관리만 잘한다면 또 만날 일은 없겠지. 나도 돈 받고 하는 일이라 괜히 보안관님의 심기를 거스르긴 싫거든."
"불순한 언행이지만 넘어가도록 하지."
"관대한 처우에 감사를 표할게."
한 건 해결한 신이 등을 돌린 것과 제레미가 고갯짓한 건 거의 동시.
"이름, 이름이 뭐지?"
"신."
"신, 이라고?"
들은 적 있다. 알음알음 공찰 내부에 퍼진 이름이었던 거다.
30명이나 되는 스트라이더 무리를 박살 냈다느니, 10층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았다느니, 제삼자가 듣기엔 허무맹랑한 소문뿐이었지만.
하나, 마주하고 나니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진짜였던 거다.
"너는...."
재차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입을 연 제레미였으나, 신은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뒤였다.
007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 * *
* * *
이걸로 빈터와 아놀드는 평화를 되찾았다. 의뢰를 완료했다는 말에 활짝 웃은 그들의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온 신은 소파에 널브러지듯이 앉았다.
그리고 품속에서 스마트 기기를 꺼냈다. 비록 디바이스가 없다지만 그렇다고 현대 문명에서 멀어진 건 아니었다. 그걸 대체할 도구는 차고 넘쳤으니까.
떠오른 홀로그램 위로 수많은 정보가 스쳐 지나간다. 커뮤니티의 인기 글은 분마다 갱신되었고, 긴급 뉴스는 초가 다르게 선정되었다.
보고 있는 건 눈인데도, 귀까지 간지러워질 지경.
돔은 오늘도 떠들썩한 듯싶었다.
그중에서 신의 눈에 띄는 문구가 있었다.
['뉴델바이어', '사이타'와 합병 선언]
"뉴델바이어."
No.3 돔에 위치한 메가콥 중에서는 체급이 작은 편이지만, 신흥 강자라 부를 수 있는 포지션에 있는 기업이었다. 주력 분야는 군수와 방산.
거기에 걸맞게 악독한 경영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잦은 정리해고는 물론이고, 임금 체불도 마다하지 않았다. 기본 소득제가 시행되는 시대에 무슨 폭거인가 싶지만, 그런데도 사람들은 퇴사하지 않았다. 메가콥에 근무하는 것도 일종의 권력이 될 수 있었으니까.
측은하고 한심한 이야기.
그 뒤로도 한동안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린 신은 더 이상 볼 게 없자 스마트 기기를 끄고, 벽난로를 쳐다보았다.
실제로 설치한 건 아니었다.
완벽하게 구현된 홀로그램이 시야를 현혹하고 있을 뿐이니.
타닥, 하고 불규칙적으로 타오르는 불꽃 위에는 달력이 걸려 있었다.
전당포에서는 쉐이드에게 신문을 버리지 못한 망령 취급했지만, 신 또한 아날로그의 신봉자였다.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은 익숙한 걸 찾기 마련이니까.
[2321년 7월 15일]
"올해로 19년째."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혼잣말을 집어삼킨 신은 거울을 쳐다보았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No.1 돔을 떠나 No.3 돔에 정착한 건 19년 전.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자신을 20세로 소개했다. 당시에 이견을 표하는 이는 없었다. 정말로 그렇게 보였으니까.
하지만 세월의 흐름이 그러한 인식조차 뒤틀었다. 그때 그 시절과 비교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던 거다. 슬슬 위화감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을 외모였다.
문명이 성장함에 따라 노화 방지에 관련된 기술도 발전했지만, 그건 부호에게나 허락된 영역이었다. 유지하는 비용만 해도 수억, 수십억은 되었으니까.
온전한 신분도 없는 해결사가 부리기에는 과한 사치였다. 금력과 권력은 항상 비례하기 마련이지 않던가. 어떤 식으로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나올 터.
'때가 되긴 했지.'
20년.
신이 정한 마지노선이었다. 그 이상 머무르면 싫어도 들킬 수밖에 없었다.
'No.2로 가야 하나.'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인도, 미국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돔의 건설이 완료된 지역을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이렇게 되었다. 물론 해당 국가가 돔을 대표하는 건 아니었다. 국경과 민족의 경계는 3차 세계 대전 때 이미 사라진 뒤였으니까.
진정 의미 있는 건 당시 새겨진 식별 번호뿐.
중국이 No.1이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No.6.
현재 신이 있는 No.3 돔은 과거 독일이었던 곳이니, 사우디아라비아였던 No.2 돔까지 가려면 퍽 혹독한 여정이 될 거다. 다른 사람과 다르게 신분이 없는 신에게는 여러모로 걸림돌이 많았으니까.
더군다나 그에게 실패는 실패가 아니었다. 설령 횡단하다 얼어붙는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죽는 게 아니었으니까.
죽지 않고 늙지 않는다는 건 분명 축복이지만, 어떠한 의미에서는 저주이기도 했다.
최악의 경우, 눈 뜬 채로 억겁의 세월을 보내야 할 수도 있었던 거다.
이미 한 번, 겪어 본 적 있기에 더욱더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후."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일.
부평초 생활도 슬슬 지겨워졌다. 익숙해질 만하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야 했던 거다. No.3 돔도 마찬가지. 아놀드와 쉐이드를 비롯해 여러 인연을 버리고 떠난다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꿈에서 깨어날 때였다.
타닥.
다시 한번 불꽃이 튀어 오르는 소리와 함께 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드니, 오랜만에 친구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 * *
No.3 돔은 거대한 도시이자 국가였다. 1억에 육박하는 인구를 수용하려면 모든 면에서 우월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부지의 면적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광역시 하나에 달하는 구역을 건넜는데도 이동 시간은 불과 몇 분에 불과했다.
모두 하나의 교통수단이 적용되면서 생긴 변화였다.
진공 튜브를 통과하는 고속 열차, 하이퍼루프.
공기 저항과 지면 마찰을 한없이 제로에 가깝게 유지하는 이 시설은 드넓은 지하 곳곳을 마하에 육박하는 속도로 누볐다.
소리조차 추월하는 문명의 이기.
차가 식기 전까지, 돔 반대편에서 반대편까지 도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정차역 밖으로 나온 신은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볼 수 있었다.
한 박자 늦게 무언가 번쩍이는가 싶더니, 저 멀리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하지만 놀랄 건 없었다. 모두 계산된 홀로그램이었으니.
돔 전체를 뒤덮고 있는 반구형 지붕은 인류가 만들어낸 또 다른 하늘.
사계절을 구현하지 못할 리 없었다.
7월이면 장마가 시작될 시기이기도 하니, 먹구름이 들이닥치는 건 당연지사.
본래의 자연환경과 다른 게 있다면 예정된 시각에 실시되어, 예고된 시각에 종료되는 행사라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우산도 챙겨오지 않았다.
1분 후에 멈출 거라는 걸 알기에.
아니나 다를까, 폭포수처럼 내리꽂히던 호우도 금세 잦아들었다.
거리로 나가, 웅덩이 하나 고이지 않게 설계된 도로를 따라 걷는다.
낮이 지나가고 밤이 찾아왔음에도 번화가에는 활기가 맴돌았다. 그야말로 불야성. 저도 모르게 그 분위기에 취한 신의 발걸음에는 경쾌함이 깃들었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그칠 즈음, 영원할 것만 같던 불빛도 따라 사그라들었다. 어스름한 골목길, 그 사이로 영업 중인 바가 하나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홀 매니저, 아리아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신 씨. 오늘은 마스터가 돌아오셨어요."
"그래?"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굳이 시간을 맞춘 것도 그 때문이기도 하고. 2주 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을 본다 생각하니, 괜스레 반가워졌다.
아리아의 뒤를 따라 바 카운터로 가니, 익숙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희끄무레한 머리칼과 주름이 가득한 피부. 그런데도 노인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탄탄한 체구.
모든 게 한 사람을 가리켰다.
토마스 러셀.
이곳, '애티튜드'의 바텐더이면서 주인인 노인이었다.
"자네인가, 어서 오게."
맞은편에 앉은 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뭘 마실 텐가."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항상 듣는 말이네만, 그거 의미가 있는 요청인 건가?"
스푼 대신 셰이커를 집어 든 토마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노년기에 접어든 뒤에야 바텐더가 된 거지만, 경력까지 일천한 건 아니었다. 어언 20년은 되었으니까. 하지만 신의 말은 언제나 아리송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이 유명한 말을 알지 못하다니, 마스터도 어리네."
"또 그 이야기인가. 나도 이제 허리가 구부러질 나이인데 말이야."
"내 앞에서?"
"그도 그렇군."
서로가 서로에게 스스럼없는 두 사람이었다. 오래전부터 나이를 초월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
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현시점에서 토마스가 유일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토마스 앞에서만큼은 신의 입도 한결 가벼워졌다.
"떠날 생각이야. 물론 정리하느라 몇 주 걸리겠지만."
"그런가."
반쯤 사라진 보드카 마티니를 바라본 토마스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도 어렴풋이 그러한 기색을 느끼긴 했다. 이리 빨리 고백할 줄은 몰랐지만.
"어디로 갈 건가?"
"글쎄, 일단 No.2 돔으로 갈까 생각 중인데."
"그럴 거면 차라리 화성으로 가는 건 어떻나?"
"화성?"
생각하지도 못한 선택지에 신은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면 그는 대륙만 떠돌아다녔지, 제3의 목적지를 추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한번 떠올리고 나니, 새롭게 시작하는 데 그만큼 잘 어울리는 곳도 없다 싶었다.
화성.
3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존재를 알고, 의식하지만 결코 갈 수는 없는.
하지만 지금은 개척의 대상일 뿐이었다. 화성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있었으니까.
천금이 굴러다니는 이상향이나 다름없는바, 이 시간에도 수많은 집단과 단체가 화성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거기에 신분이나 출신은 무의미. 섞여 들어가기에는 최적이라 할 수 있었다.
모든 건 인류가 눈부시게 발전한 결과―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화성의 환경이 변한 건 세컨드의 조력 덕분이었다.
본디 그들이 바꾸고 싶어 한 곳은 지구였다.
얼어붙은 대지는 그들이 보기에도 퍽 불편한 환경처럼 보였는지 선뜻 돕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던 거다.
하지만 인류는 이미 빙하기를 정복하는 중이었다.
모든 재앙은 옐로스톤이 터지면서 시작된 것일 뿐, 언젠가 끝날 악몽이라는 걸 알았던 거다.
정화 작업도 궤도에 올라, 적도 부근에서 고무적인 성과를 얻기까지 했다. 그래봤자 영하 30도를 웃도는 수치였지만, 영하 50도였던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발전이었다.
그래서 각 돔의 정상들은 화성에 테라포밍을 하는 게 더 합리적일 거 같다는, 당시엔 정신이 나갔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제안을 던졌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혜택을 얻기 위해 상대의 한계를 알아보는, 일종의 시그널에 가까운 공수표였지만 놀랍게도 세컨드는 인류에게 무한한 애정을 베풀었다.
붉은 행성에 대기를 붙잡아 둠으로써.
그 뒤로도 시행착오가 많았지만, 작금에 이르러서는 한때의 추억일 뿐이었다. 관광 상품이 나올 정도로 일상생활에 녹아들었으니까.
"세상 참 좋아졌더군. 예전에는 화성에 갈 수 있는 건 선택받은 극소수뿐이었는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가족 여행을 화성으로 다녀왔다고 했던가. 출혈이 컸겠어. 개방되었다고 해도 한두 푼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을 텐데."
"말하지 않았던가? 아들 녀석이 한 부호의 주치의로 들어갔다고. 개인 병원까지 받았네."
"출세했네."
어렸을 때 몇 번 본 것 빼고는 이렇다 할 인연이 없는 아이였다. 그런데 벌써 그렇게 성장했다니 놀라울 따름.
글라스를 닦던 토마스의 손이 멈춘 건 그때였다.
"한편으로는 뿌듯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걱정도 되더군. 적어도 손주 녀석이 장성하는 것까지는 보고 죽었으면 하는데 말이야."
기대 수명이 150세까지 늘어났다지만, 그만큼 삭막해진 세상이었다. 살 수 있는 기술이 범람하듯이, 죽을 수 있는 요건 또한 흘러넘쳤다.
더구나 토마스도 예전 같지 않았다.
어느덧 팔순에 다다른 거다.
돌연, 고개를 돌린 토마스가 물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죽지도 늙지도 않는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
008 노브랜드는 알고 있지
* * *
"글쎄,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애당초 일반적인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신이었다.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어류가 육지를 달리는 맹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머리로는 그럴 거라, 이럴 거라 예상은 하지만 심적으로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내가 자네였더라면 평가가 조금 달랐을 텐데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신이 바라보자 토마스가 뒷말을 이어 갔다.
"돌이켜보니 후회하고 반성하는 데만 시간을 썼더군. 인간의 삶이 이렇게나 짧다는 건 생각하지 못하고 말이야."
"마스터만큼 올바르게 인생을 소비한 사람은 없다고."
그건 가까이에서 지켜본 신이 장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마스터처럼 어엿하게 자란 자식도 없어. 결코 부러워할 대상이 아니라는 거지. 분명 생명체로서 완성됐다 할 수 있겠지만, 인간으로서는 결함품이야. 마음대로 마침표를 찍지도 못하니까."
회한이 담긴 듯한 그 한마디에 토마스는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내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군."
"그러니까 하나 마나 한 이야기는 이쯤 하자고. 화성에 갔던 이야기나 해봐. 나도 그곳에는 가본 적이 없으니까 꽤 궁금하거든."
신의 재촉에 토마스가 기억을 반추했다.
"이곳과는 모든 게 다르더군."
"일단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을 테니까."
"확실히 장소가 그래서 그런지, 개방적이더군. 사람이나 기술이나. 돌아오는 길에는 안드로이드와 결혼하는 사람도 보았다네."
"드물지만 지구에서도 있는 일이잖아."
"구설수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나. 그곳은 풍조가 다르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해야 하나, 해결사에 대한 인식도 한결 낫더군. 일감도 넘쳐나고."
"사건 사고가 많다는 말이잖아."
"어찌 됐든 해결사 같은 직종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을 테지. 그렇지 않나?"
은근하게 권유하는 게 느껴질 정도로 노골적인 언사였다. 어깨를 으쓱인 신이 받아쳤다.
올해는 유별나게도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더니, 거기에서 깨달은 바가 많은 듯싶었다.
"마스터의 말대로 나쁘지 않겠네, 디바이스만 있다면 말이지."
대륙과 대륙을 넘나드는 방법은 몇 개인가 있었다. 하지만 행성과 행성 간의 이동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함부로 도전할 수 없었다. 더구나―
"우주 공항은 시정부가 운영하잖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메가콥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그 말인즉슨, 자금이 아무리 많아도 적법한 절차를 밟은 신분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라는 소리.
괜히 신이 화성을 후순위로 미루고, 잊은 게 아니었다.
"이런, 내가 누구인지 잊은 건 아니겠지?"
다른 손님에게는 닿지 않을 정도로 자그마한 목소리.
그제야 신은 토마스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토마스 러셀, 그는 애티튜드를 소유한 오너이면서 이 일대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한 브로커였다. 하지만 그런 그라도 가능한 게 있고, 가능하지 않은 게 있었다. 대표적인 게 바로 디바이스 수급, 그러니까 시민 ID 발급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정적인 의견을 내보였던 그였다.
"설마 방법을 찾은 거야?"
"여행을 다녀온 김에 자네의 선물을 챙겨 왔을 뿐이라네."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고 나서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개구쟁이 같은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었다. 난데없이 화성을 추천하더니, 그곳까지 갈 수 있는 티켓을 마련한 게 틀림없었다.
"능구렁이가 따로 없군. 그래서 언제 주는 거지?"
"생일이 머지않았지 않나. 바로 포장을 풀기에는 적절하지 않지."
"그때까지 기다리라는 거지?"
더 말해 무엇하겠냐는 듯, 토마스가 미소 지었다.
보드카 마티니를 밑바닥까지 털어 넣은 신 또한 따라 웃었다.
* * *
그 뒤로, 신은 차근차근 제 신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NO.3 돔에서 19년 동안 생활한 기록은 결코 짧지 않았지만,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한 이사였다. 이제는 기계적일 정도로 빠르게 절차를 밟아 가며 흔적을 지웠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과정이 있다면, 그건 바로 보관 창고의 대여 기간을 늘리는 것. 아쉽지만 골동품이나 다른 기자재는 짊어지고 이동할 수 없었다. 부피를 줄여야 했으니까.
정착할 자금만 챙기는 게 베스트. 어차피 다른 돔에도 비슷한 장소가 있으니 아쉬워할 이유가 없었다.
마지막 단계까지 순조로웠다.
아니, 순조로울 뻔했다.
묘한 시선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간간이 수행하던 의뢰도 끊고 조용히 지내던 참이라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누군가와 부딪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던 거다. 그렇다고 마음에 걸리는 게 없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원한을 잊지 못한 보안관 제레미가 배신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따로 사람을 고용해 뒤를 노리는 것도 있음 직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 가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며칠 전에 혼내주었던 제랄드 패거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무리가 따라붙었다는 걸 깨달은 참이었으니까.
보안관이 돈 몇 푼 쥐여 준다고 타이를 수 있는 집단이 아니었다.
결국, 으슥한 공터를 골라 그들을 유인한 신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나오지 그래?"
무엇이 그리도 원망스러워 사흘 내내 따라다니는지 모를 노릇. 질렸다는 듯 짧게 혀를 차는 신의 시선에 장정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일반적인 범죄자와 다른 기세. 여기까지 다르다면 맹인이라도 알 수밖에 없었다.
'스트라이더?'
돔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건지 저마다 위협적인 흉기로 무장 중이었다.
그때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앞으로 나오더니, 다짜고짜 물었다.
"브랜드, 알고 있지?"
오, 하고 탄성을 터트린 신이 낱말을 짜 맞췄다.
"노브랜드는 알고 있지."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 말장난에 사내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개소리하지 마라. 너와 놀아 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나는 진심이다만."
"시치미 떼지 마라. 현장 조사는 끝났으니까.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처음 들어본다니까."
하지만 말과 다르게 신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갔다.
아무래도 얼마 전에 만난 스트라이더들과 연관이 있는 듯싶었다. 그때 처리한 청년과 눈앞의 사내는 놀랍도록 닮아 있었으니까. 죽기 전까지 의기양양하던데 그럴 만했다.
"내 동생이 전부터 전당포 앞을 지키면서 사냥감을 물색했다는 건 알고 있다. 그 아이가 죽은 그날, 물망에 오른 게 너였다는 것까지."
"...."
신이 말을 아끼자,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떠벌렸다.
"해결사 신. 이 근방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 인사더군. 여태까지 맡은 의뢰는 실패한 적이 없다고? 그것도 19년 동안."
일견 기록적이고 전설적인 실력자처럼 들리지만 사내는 내막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면밀히 살펴보니 우습기 짝이 없더군. 불륜 조사에 학폭 개입. 그리고 사채 해결. 듣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소꿉장난이라도 하는 줄 알았으니까."
"네게는 별거 아닐지라도 당사자들에게는 일생이 걸린 문제야."
"그래, 이제 네 문제이기도 하지."
"끝까지 모른다고 해도 너는 믿지 않겠지?"
"여기까지 오면 그런 건 상관없지. 내 동생의 원수는 어떻게든 갚아야 하니까."
입가에 미소를 지운 신이 한 차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내가 아무리 자원봉사를 좋아한다지만, 무급으로 마을 청소까지 맡는 건 조금 부담스러운데."
"아, 그런 기분으로 내 동생을 처리했다 이거냐?"
한층 더 흉흉해진 표정으로 거리를 좁힌 사내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을 까닥이는 순간, 장내의 분위기는 돌변할 테지.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가 일촉즉발의 상황을 알렸다.
숨 쉬는 것조차 거북스러운 가운데, 돌연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 사이로 들어섰다.
"델."
묵직한 소리에 사내, 델이 주춤했다.
"당분간 자중하라고 했을 텐데? 집중 단속 기간이라고. 말해 주지 않았나?"
거한이 허리를 수그려 델과 눈을 맞춘다.
"아니면 내 충고가 쓸모없었나?"
"아닙니다."
신은 그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24세기가 도래해, 인류가 우주로 나갈 정도로 진보하는 동안 조직 폭력배는 어떻게 거기에 적응하고 진화했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내.
이 구역의 음지를 양분하는 조직, 게릴라 패밀리의 간부.
그 이름은 마크 로시.
다른 말로―
"미스터 스테로이드, 한창 재미있을 때 왔네."
"얼빠진 소리는 그쯤 해라."
귀찮다는 듯 신의 말을 일축한 마크가 델을 비롯해 그를 따르는 스트라이더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너희들도 이쯤 해라. 이 녀석은 내가 담당하는 해결사니까."
"이건 제 패밀리의 위상이 걸린 일입니다. 아무리 마크 님이라고 해도 개입하실 권리는 없을 텐데요."
"지금 내 말이 요청으로 들리나? 이건 명령이다."
제 주장을 굽히지 않는 델의 어깨를 쥐어짜듯이 잡은 마크가 으르렁거렸다.
"그렇게 고개를 들이밀 때와 들이밀지 않아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니까 매번 비주류로 남을 수밖에 없는 거다."
모욕에 가까운 발언이었지만, 델은 불덩이를 삼키는 심정으로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체격 차가 압도적이었던 거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결국 그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썰물이 지는 것처럼 사라지는 일련의 무리를 무심하게 감상한 신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서운하군, 우리가 일이 있어야 만날 정도로 서먹했나?"
"용건이 없다면 일부러 끼어들지도 않았을 테니까."
퍽 날카로운 지적에 마크가 졌다는 듯 입을 열었다.
"중개업자가 해결사를 찾는다. 이게 뜻하는 바는 하나일 텐데?"
"의뢰라도 맡기겠다는 거야?"
"그래."
수상쩍기 그지없는 접근이었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마크는 딜리버리 서비스까지 해 주지 않았다. 성의 없이 메신저로 연락하는 게 고작, '아쉬운 녀석이 먼저 와서 빌어라.'라는 방침을 고수했던 거다.
더구나 양자 간의 신뢰 관계는 무너진 지 오래였다.
1년 전, 마크가 저지른 패악 때문에.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너는 내게 거짓말을 했어."
전까지만 해도 신은 관성에 따라 의뢰를 수행했다.
사건이 벌어진 당일에도 마찬가지.
처음에는 단순히 무고한 희생자가 생겨난다는 소식에 몸소 나섰다. 하지만 이게 웬걸. 그 끝에서 마주한 건 마크의 치부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 완벽하게 해결된 마크의 치부.
"네 비밀 장부를 들고 도망친 녀석을 잡기 위해 날 속였지."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간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발을 뺐지만 곤혹스러웠던 건 틀림없는 사실.
명백히 이용한 거다.
제 사익을 위해서.
근성이 썩어빠진 녀석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나 노골적일 줄은 몰랐기에 연락을 끊고 살았다.
"케케묵은 앙금은 넣어 둬라. 그 일에 대한 보수는 넉넉히 주었을 텐데? 그것보다 의뢰다. 너에게도 나쁘지 않은 의뢰라는 거다."
"네게 나쁘지 않은 의뢰가 아니라?"
"저 위에서 내려온 거다."
순간, 신은 멈칫했다. 조심스러운 언동으로 보아 하건대, 마크가 가리키는 건 시정부나 메가콥일 공산이 컸다.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 조용한 곳으로 가지."
이렇게까지 붙잡고 늘어지는 건 처음인지라 조용히 수긍했다. 어차피 신변을 정리하느라 의뢰 같은 건 받을 생각이 없지만 듣는다고 손해는 없을 테니까.
정보 수집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도 해결사의 덕목이었다.
009 도망칠 생각하지 마
* * *
* * *
클럽, 다비뉴.
게릴라 패밀리가 운영하는 업소이자 마크가 소유한 장소 중 하나. 1년 전까지만 해도 제집처럼 방문한 곳이었기에 신은 망설이지 않고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겼다.
맞은편에 앉은 마크가 시가를 입에 물었다. 폐부에 모인 연기를 뿜어낸 그는 신의 얼굴을 보더니 시가 커터를 내밀었다.
"하나 피울 거냐?"
"아니, 됐어."
친근하게 다가오는 마크이지만 신에게는 껄끄러울 따름이었다.
수많은 세월을 보낸 그였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수만 해도 수천, 수만.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그래도 특징만큼은 뇌리에 남아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별칭을 지어 주는 건, 나중에 망각하더라도 그때의 감상은 쇠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온 일종의 자구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스테로이드란 마크의 별명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그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부정적인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도전과 경쟁의 화신이었으니까.
게릴라 패밀리의 차기 보스 후보로 오른 게 그 증거라 할 수 있었다.
웃는 낯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 본성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었다. 애당초 평범한 일반인이 저러한 의수를―
'착용할 리 없지.'
신의 시선은 마크의 오른팔에 고정되었다.
굵직한 팔뚝, 그 자리를 대신한 건 거무칙칙한 강철과 굵은 케이블이 가득한 이물이었다. 하나, 투박하지 않고 인체 곡선의 공식을 그대로 답습한 건지 위화감이랄 게 없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전체적인 구조를 말한 거였다. 크기만 보자면 경악할 수준.
마치 어른의 팔을 어린아이가 이식받은 것만 같았다.
돈만 있다면 누구나 사이버네틱스 수술을 받을 수 있다지만 저렇게까지 거창하게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간편하고 자그마한 슬롯이 유행하는 편이었다.
마크의 내심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남자라는 족속은 최종 병기 같은 자신의 모습을 꿈꾸니까.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 같은 것이니 부정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지향점은 '최종'이지, '병기'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직하게 강행한 건 그가 폭력에 매료된 파탄자이기 때문이리라. 보다 더 높은 경지를 이루기 위해 제 육신을 버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못 본 사이에 의수를 바꿨네."
"역시 너도 부럽나 보지? 이 의수가?"
"시중에 나온 적 없는 물건 같은데."
"뉴델바이어에 주문 제작한 녀석이니까. 믿겨지나? 중량은 28킬로그램이지만 순간 악력은 2,650킬로그램까지 나온다. 맹수의 아가리와 다를 게 없다는 거지. 누구든 이 손에 잡히기만 하면 확!"
보란 듯이 허공을 움켜쥐는 마크였다.
확실히 그 손아귀는 압착기와 다를 게 없을 터.
하지만―
"바꿀 때마다 아프지 않아?"
"답지 않게 어린아이 같은 소리를 하는군. 그러고 보니 너는 내추럴이었나."
내추럴.
아무런 시술도 받지 않은 순수한 육체.
갓 태어난 아기도 디바이스를 이식받는 시대였다. 신 같은 이는 이례적인 케이스일 터.
순간, 마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와 다르게 너는 1년이나 지났는데도 변한 게 없군."
"고작 1년이야."
"고작이라고 말할 건 없지, 너는 내가 애송이였던 시절에도 똑같았으니까. 그렇지 않나?"
추궁하는 듯한 물음에 신의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래, 저 눈빛.
마크와 갈라서게 된 건 그의 불순한 사상도 한몫했지만, 저 눈빛이 차지하는 비중도 적지 않았다.
신도 사람인지라 제 비밀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었다. 때로는 들킬 뻔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항상 그전에는 저러한 반응이 따라다녔다. 꼬리가 길면 잡히기 마련이고, 늙지 않는 외견은 퍽 긴 꼬리였으니까.
"예전에도 답한 적 있는 것 같은데, 괜한 호기심은 명을 재촉할 뿐이라고."
"그러니 더 궁금한걸. 신분도 없는 사람이 팔자 좋게 에스테틱에서 시술을 받았을 것 같지는 않은데."
"받았다면?"
"그렇게 말하니 뭐라 대꾸할 수가 없군."
"내 동안의 비결은 됐으니까 의뢰에 대해서 말하기나 해."
가만히 신의 얼굴을 쳐다본 마크가 서류철을 내밀었다.
"뉴델바이어에서 내려온 수색 의뢰다."
"메가콥에서? 굳이 우리 같은 사람들의 손을 빌린다고?"
"당연히 겉보기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곳에서 요청한 사안이다. 하지만 게릴라 패밀리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보도 들어오거든."
그러니까 무단으로 의뢰인을 알아냈다는 거였다, 음지의 힘을 빌려. 뉴델바이어에서 안다면 기가 차리라.
"목표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만으로 20억 피아. 구미가 당기지 않나?"
"누구를 찾길래 그런 금액이 걸린 거지?"
"중국계 동양인을 찾더군. 우리 애들을 풀까 했는데 인종이 맞지 않아서 말이야. 서양인은 몰라도 동양인은 도무지 구분을 못 하더군."
"그거 인종 차별이야."
"할 수 없는 걸 있다고 억지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나."
구태여 서양인과 동양인을 나눈다는 것부터가 시대착오적인 발언이었다.
빙하기가 도래하고 나서, 정확히는 돔이 완성되고 나서 국가라는 개념은 없어졌다. 기존의 질서는 사라지고, 생존의 시대가 열린 거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게 바뀌었다.
언어 통합.
법률 대제정.
통신과 교통 그리고 도량형 개정.
문화와 사상 공유.
직업과 신분 이동.
주거지 개편.
3차 세계 대전을 치르고 나서야 진정한 의미의 통합이 시작된 거다.
아직도 잡음은 그치지 않았지만 분명 유의미한 진보라 할 수 있었다. 적어도 하나가 된 듯한 모양새는 갖춰졌으니까.
아무튼 마크의 의도는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동양인인 내가 필요하다는 거네? 이름은?"
"양후."
그 이름에 신은 작살이라도 맞은 것처럼 발가락 끝을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동요는 없다시피 했다. 그 정도 수양도 쌓지 못했다면 지나간 세월이 덧없다 할 수 있을 테니까.
양후, 그는 19년 전에 일어난 밀레니엄 코드 게이트를 종식시킨 장본인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력한 용의자로, 아직까지도 그의 범행이 완전히 확인된 건 아니었다.
관계자들이나 알 법한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소리.
사실, 밀레니엄 코드 게이트 이후에도 여파가 엄청났던지라 도저히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을 여건이기는 했다.
나중에 밝혀지기로 소란을 일으킨 이들이 진정으로 바란 건 일반적인 부정이 아니었다.
VIP 명단을 작성하고, 해당 알고리즘을 치안 유지 병력에 적용한 건 반란을 도모한 것에 가까웠다. 사회 구조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방관하는 것을 넘어 이용하려고 한 거다. 자신들에게 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본래 목적은 밀레니엄 코드를 앞세워 독재 정권을 이룩하는 거였다.
그래, 가령 그들의 야욕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영역에서조차 인공지능에게 모든 걸 맡긴다는 맹점을 이용한 그들의 야욕이 말이다.
보나 마나 순찰 드론에게 걸린 정적의 죄에 무게추를 달고, 현장의 판단이었다는 변명 아래 안드로이드 조사관의 손을 빌려 경쟁자를 도륙했으리라.
그리하여, 그러한 사건이 가십거리로도 소비되지 않고 일상에 스며든다면 아무도 모르는 폭정이 완성될 터였다.
이는 비단 신만이 상상하는 미래가 아니었다. 돔에 거주하는 시민들 또한 어렵지 않게 그 구상에 다다랐다.
점점 첨단을 달려가는 문명에 경각심을 가지게 되는 건 당연지사.
허무맹랑한 음모론이 세기의 스캔들로 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에 따라 양후 또한 재평가되었다.
과오를 범해서라도 정의를 관철시키려는 그 의지가 드러난 거다.
신에게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왜 아닐까.
양후, 그는 바로―
'이전에 사용하던 신분인걸.'
어떤 이는 왜 하필 중국인으로 둔갑했냐고 물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주관적인 선정이 아니라 지극히 산술적인 판단이었다.
'2천만보다 2억이 더 숨기 좋은 수풀이니까.'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 편견이라는 건 때때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방패가 되기도 하니까.
이미 성형 수술을 했기에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주의해서 나쁠 건 없었다.
본심을 감춘 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넌지시 물었다.
"No.1 돔에서 활동하는 녀석 아니었어?"
"듣기로는 여기로 이어지는 흔적을 찾았다더군."
"흔적?"
그 말이 사실이라면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었다. No.1 돔이 위치한 곳은 중국. No.3 돔까지 다다르려면 대륙을 건너야 했다. 그것도 실낱같은 단서에 의지한 채.
더불어 그 과정을 19년 동안 반복했을 테니 쏟아부은 자금도 적지 않을 터.
어쩐지 수면에 발목이 잠긴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정작 의뢰한 건 뉴델바이어잖아."
"밀레니엄 코드와 모종의 협의가 오고 간 걸로 파악 중이다. 어쩌면 그쪽 시정부도 합세했을지도 모르지. 양후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건 한두 사람이 아니니까."
의뢰 내용만 듣고 나가려고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중간에 개입해서 훼방을 놓는 것만큼 확실한 건 없을 테니까. 마침, 신분을 변경할 시기와 맞물렸으니 잘만 이용하면 완전히 따돌릴 수 있을 터.
그때, 마크가 첨언했다.
"보수를 챙기고 싶다면 빨리 나서야 할 거다. 이미 관계자를 찾았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니까."
"관계자?"
그 말에 신은 마른침을 삼켰다. 듣지 않았건만,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밀레니엄 코드 게이트에 관여한 내부 고발자, 그 사람도 이 돔에 있었던 거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
'마스터.'
* * *
마크와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즉시 클럽 다비뉴 밖으로 나온 신은 하이퍼루프 정차역을 향해 내달렸다. 애티튜드에 가야만 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 바람은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일찍이 한 번 마주친 무리가 길목을 막아섰던 거다.
"델?"
"누구 마음대로 내 이름을 입에 담는 거지?"
"시비 걸지 말고 비켜."
다른 때라면 백번이라도 상대해주겠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왜? 방패막이가 사라지니까 무섭나?"
"마크 말이야? 그 녀석이 너희들 방패막이였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하, 올해 들은 것 중에서 가장 멍청한 소리군."
이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토마스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대비해야 했다.
하지만 델은 사정을 봐주지 않겠다는 듯 물러나지 않았다.
스트라이더들 또한 주위를 빙 에워쌌다.
"개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진짜."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했는데 거기에 어울려 줄 이유가 없었다. 대화는 무용.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사내의 목을 낚아챈 신은 그대로 쥐어짰다.
콰직.
뭉개진 살점이 과즙처럼 흘러내린다.
상궤를 벗어난 악력에 몇몇이 주춤했다. 어쩌면 잘못 건드렸다고 후회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거 어쩌나.
"어르고 달래는 것보다 죽이는 게 더 빠르겠지."
품속에서 폴딩 나이프를 꺼낸 신이 손목을 흔들자 새파란 칼날이 튀어나왔다.
"도망칠 생각하지 마."
010 하여튼 대쪽 같아서 좋아
* * *
* * *
토마스의 인생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가상 현실에 틀어박혀 시간을 허비할 뿐인 패배자였던 거다.
24세기에는 드물 것도 없는 사회 문제 중 하나였다.
현실 세계로 나오지 않고, 외면하는 걸 택한 무리는 적지 않았으니까.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해야 할까.
기본 소득제가 보편화되면서 노동의 가치는 낮아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쟁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떠한 면에서는 격화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중요한 건 그걸 직시하고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도망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는 것.
애석하게도 아버지란 인간에게 용기란 없었다.
야생이 사라진 시대에서도 이례적인 초식 동물.
토마스의 어머니라고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의식주를 최대한 덜어내 자신의 사치를 부리는 데 남은 돈을 사용했으니까. 가상 현실에 매몰되지 않는 대신, 현실 세계에 집착한 거다.
둘 다 유형은 다르지만 생산은 하지 않고 소비에만 열중하는 기생충.
극도로 발달된 사회의 보조를 받아, 태어난 김에 살아갈 뿐인 극빈층인, 통칭 패러사이트였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토마스의 미래도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그에게는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유전자 조작을 받지 않았는데도 이해력과 기억력이 남달랐던 거다.
이른 나이에 제 재능을 깨달은 토마스가 선택한 건 '다이버'였다.
자의식을 간직한 채, 휘몰아치는 네트워크 속에 직접 접속하는 해커. 신경을 열어놓고 전자 공간 속에 뛰어들기에 풀다이버(Full―diver)라고 부르는 이도 적지 않았다.
타고난 두뇌를 연산 장치로 활용하기에 해당 적성이 없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직종이지만 토마스에게 모자란 건 없었다.
어차피 내리막길 인생.
모든 걸 걸고, 디지털 세계에 침잠한 토마스는 남들의 은밀한 의뢰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일각에서는 추앙하는 이들마저 있을 정도.
음지로 끌려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거부할 수 없었다.
배운 게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그 외의 삶은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덜미를 잡혔다. 애당초 인가받지 않은 우회 루트를 애용했던 거다. 공찰의 시선에 띄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건 오만한 처사.
더구나 알게 모르게 피해를 입었던 조직들마저 토마스를 위협했다.
원한을 짊어지기에 열여섯이라는 나이는 짧기만 했다.
어떻게 대비할 틈도 없이 쫓기게 되는 건 당연지사.
추적은 집요하게 이어졌다.
후덥지근한 여름에서부터 유난히도 비가 많이 내리는 가을까지.
지칠 대로 지친 토마스는 반쯤 체념한 채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굴러떨어진 굴다리 밑에서―
"뭐냐."
한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인생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으리라.
토마스에게 남자는 이해할 수 없는 인종이었다. 제 처지를 가엾이 여긴 건지 스스럼없이 다가왔던 거다.
"다이버? 네 나이에? 열심히 살았네."
태평한 감상은 기본.
"시정부에서 운영하는 자활 프로그램이야. 성과에 따라서 대우가 달라지는 게 흠이지만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
"전과 기록? 없앴는데?"
터무니없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저질렀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새로운 삶, 살고 싶은 거잖아."
생애 처음 받아보는 호의였다. 부모에게도 받아본 적 없는. 그런 따뜻한 감정이 처음에는 어색했다. 그래도 곧 익숙해졌다. 덕분에 충실한 삶을 산다는 게 어떠한 기분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스무 살이 되던 해에는 그럴듯한 교육 기관에서 수료증을 받기까지 했다.
그것도 수석으로.
들뜬 마음을 품고 토마스는 남자의 집까지 달려갔다.
당신 덕분에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노라 외치고 싶었기에, 당신이 끝까지 믿어주었기에 나 또한 포기하지 않았노라 말고 싶었기에.
하지만 거기에 그는 없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
기약 없는 편지만 남긴 채 사라졌을 뿐.
갑작스러운 이별이 당황스러웠지만 토마스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은혜를 잊지 않고 간직하는 마음 또한 남자에게 배웠던 거다.
"네, 언젠가."
기억이 추억 속으로 아스라이 흩어질 때까지 걸린 시간은 40년.
그동안 토마스의 생활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No.2 돔에서 No.1 돔으로 거주지를 옮긴 것도 모자라 이른 나이에 아내와 사별한 거다.
슬하에 있는 건 아들 한 명뿐.
더 이상 청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다. 어느새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 회의를 느끼면서도 진지하게 노후를 준비하고 있었으니.
당연하지만 과거의 악동 같은 성정은 사라진 지 오래.
유일한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건 메가콥, 밀레니엄 코드에 입사해 오랜 시간 동안 근무 중이라는 거였다.
성과를 인정받아 기밀문서를 열람할 수 있는 권한까지 얻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봐서는 안 될 걸 봐 버렸으니까.
밀레니엄 코드가 시정부와 발맞춰 준비한 프로젝트는 돔의 향방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무겁고 어두웠다.
묵인할 것인가, 폭로할 것인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토마스는 후자를 택했다. 영웅 심리에서 나온 결단도, 추악한 현실에 발끈한 것도 아니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제 아들이 걱정되었을 뿐이었다. 이 시기를 놓치면 그 아이가 넘겨받을 세상은 형언할 수 없는 지옥일 테니까.
하지만 혼자 할 수 있는 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래서 토마스는 다시 한번 다이버가 되었다. 사상 최대의 스캔들을 함께 터트려 줄 동료를 찾기 위해.
고르고 고른 끝에 선별한 최후의 일인.
그 남자와 만난 토마스는 전율했다.
분명 모르는 사람이었다.
출신도, 이름도, 외형도 전부 처음 접하는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익숙한 향기였다. 말투였다. 그리고 미소였다.
저 깊은 곳에 가라앉았던 추억이 기억으로 변한 건 한순간.
운명처럼 과거와 재회한 토마스는 저도 모르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형님."
혹시라도 모르는 척하면 어쩔까 싶어 걱정했지만 의외로 순순히 대답이 돌아왔다.
"미스터 베이비. 이렇게 만난 건 40년 만이네."
그리워질 정도로 낡아빠진 애칭.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에 토마스는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는 말없이 떠난 남자가 야속하기만 했다.
하지만 다시 만나니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남자는, 아니 양후는 그 시절과 비교해 조금도 늙지 않았던 거다.
* * *
불현듯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린 토마스가 조용히 두 눈을 떴다. 시야에 들어온 건 애티튜드 내부.
한 박자 늦게 제 손에 대걸레가 들려 있다는 걸 깨달은 토마스가 침음을 흘렸다.
그래, 그는 바 카운터를 청소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잠시 앉아서 쉬려고 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든 듯했다.
들은 적 있었다.
인간의 뇌는 노화하면 정보를 받아들이기보다 습득한 정보를 회상하는 데 더 특화된다고.
지금 꾼 꿈도 어떻게 보면 그러한 연유에서 시작된 걸지도 몰랐다.
서브 브레인이라도 장착해야 하나 싶지만, 그건 실없는 생각에 불과했다. 그보다 더 뛰어난 슬롯이 머릿속에 삽입되어 있었으니까.
브로커로 활동하면서 얻은 별것 아닌 장치.
반사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던 토마스의 뇌리에 얼마 전에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떠날 생각이야. 물론 정리하느라 몇 주 걸리겠지만.'
신과 만난 지 벌써 반백 년이 훌쩍 넘었다.
세월이 지나 겉모습은 역전되었지만 평생의 은인이라는 건 변치 않았다.
그래서일까.
괜스레 아쉬웠다. 이번에 헤어진다면 죽을 때까지 만날 수 없을 테니까.
마지막을 장식할 선물을 고르는 것에 신중을 기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무리한 탓에 적금도 깨야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웃을 신의 얼굴이 떠올랐기에.
바깥에서 딸그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열었다는 신호.
준비 중이라고 팻말을 걸어놓은 참이었다. 그런데도 들어왔다는 건 지인이거나 단골일 공산이 컸다.
하지만 그 예측과 다르게 내부로 들어온 건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한 사람은 지팡이를 짚고 선 청년,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호위로 보이는 사내였다.
밀레니엄 코드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 구분할 수 있었다. 기득권 특유의 오만방자한 기색을.
하지만 모르는 척 고갯짓했다.
"자네들은 누구인가?"
"아, 이런 사람이야."
청년이 손짓하자, 기다렸다는 듯 뒤에 선 사내가 플라스틱 명함을 내밀었다. 인식 태그 위로 떠오른 건 예상치 못한 정보.
[뉴델바이어 전략기획실 실장]
[전무이사 니엘 후버]
"뉴델바이어?"
전략기획실이라는 건 선두에 서서 실질적인 기업 운영을 도맡는 부서였다.
거기의 실장이라는 건 실세 중의 실세라는 소리.
이르자면 차기 회장.
그러고 보면 청년은 뉴스에 얼굴을 비춘 회장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그래, 그런 귀한 곳에서 이리 누추한 곳에는 무슨 일인가? 그쪽 입맛에 맞는 술은 팔지 않는데 말이야."
"도련님 앞입니다. 발언에 주의해 주시길."
겨우 한 발자국, 거리가 좁혀졌을 뿐이지만 사내에게서 풍기는 냄새는 한층 더 강렬해졌다.
봄이 연상되는, 달콤하고 산뜻한 플로럴 계열의 향기.
인위적으로 배합한 향수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체취.'
짐승처럼 거친 이목구비에 좀처럼 맞지 않는 조합.
놀라울 건 없었다.
이는 유전자 조작의 상징으로, 강화 인간만이 가진 특징이었으니.
청년이나 사내나 일반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건 틀림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긴장하는 모습을 내비치면 안 되었다. 듣지 않아도,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명약관화했으니까.
"특별한 용건이 없다면 내 일 좀 먼저 해도 되겠나? 곧 있으면 문 열 시간이라서 말이야."
"금방 끝나. 그러니까 이리 와서 앉아. 밀레니엄 코드 클라우드 서버 보안 담당 엔지니어, 토마스 러셀. 퇴사했으니 전직이라고 덧붙여야겠지만."
코웃음 친 청년, 니엘이 토마스를 향해 검지를 까닥거렸다.
"하여튼 대쪽 같아서 좋아. 내부 고발자 주제에 내 앞에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잖아."
"그게 무슨 말인가?"
짐짓 모른다는 듯 답하는 토마스였지만, 속을 니엘이 아니었다. 이미 교차 검증만 수십 번 했던 거다.
"그러지 말라고. 그쪽을 찾기 위해서 버린 돈만 해도 수영장을 가득 채울 정도니까. 내 노력과 정성을 그리 일축해 버리면 화가 나잖아."
니엘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찍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지면이 움푹 팼다.
"다시 물을게. 20년 전에 밀레니엄 코드의 기밀을 폭로한 내부 고발자 맞지?"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
이건 경고하는 거였다. 다시 한번 헛소리를 한다면 기회는 없다는.
결국 토마스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그렇네만."
"그러면 양후에 대해 알고 있을 거야, 그렇지?"
"뜬금없군. 그와 연락이 끊긴 지는 오래되었네. 벌써 20년은 더 된 일이 아닌가."
"그렇단 말이지."
순순이 받아들였나 싶은 순간, 돌연 니엘의 눈빛이 번쩍였다.
"내 예상으로는 함께 No.3 돔에 왔을 것 같은데."
011 누굴 부른 건지 알려 줄게
* * *
"자기 판단이 맞다고 생각하는 건 좋지만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하는데."
"네 주위를 조사하다 보면 정답이 나오겠지. No.1 돔에서도 유달리 양후와 친했다면서? 안 그래?"
실실 웃는 니엘의 입술이 한없이 올라갔다.
압박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건 뻔히 알고 있지만, 그런데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고전적이라는 건 다시 말해 효과적이라는 소리이기도 하니까.
등 뒤로 흐르는 땀방울이 유난히도 선명하게 느껴진다.
물러날 곳은 없었다.
들킨 이상, 다다를 미래는 하나.
어떠한 변명을 쥐어짜 내든 니엘은 믿지 않으리라.
애당초 지금 이 순간에도 양후의 흔적을 찾기 위해 뉴델바이어가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디바이스를 이용해 공찰에 신고하려고 해도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말없이 다가온 사내가 눈앞에 섰다.
그의 손에는 통제기가 들려 있었다.
공찰, 그것도 고위 직급에게만 지급되는 물품. 보란 듯이 노출한 건 알아서 처신하라는 신호겠지.
"무언가 문제 있습니까?"
가증스러울 정도로 정돈된 어조였다. 하지만 그에 반응하는 건 하수나 하는 짓.
대걸레를 집어넣는 척 바 카운터 아래에 손을 가져다 댄 토마스는 재빠르게 산탄총을 꺼냈다.
"이제 생길 참이네."
하이벨 M310.
세븐 메탈에서 제작한 명기 중 하나.
일반적인 총기와 다르게 총열이 세 개나 되는 녀석이었다. 이른바, 트리플 배럴.
더구나 산탄은 화약으로 추진되는 것도 모자라 내장된 배터리팩의 보조를 받아 자기 가속까지 했다.
현대 화기의 정수.
위력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투쾅!
폭풍이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일격. 산탄에 적중된 공간 전체가 찢겨 나갔다.
그래, 단 두 사람만 빼고.
특히나 니엘에게는 닿지도 않았다.
사내가 방패막이가 되어 그 앞을 가로막은 거다.
"아, 머리칼이 휘날리잖아. 똑바로 못 해?"
"죄송합니다."
니엘의 질타에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로.
겉으로는 정장처럼 보이지만 그가 착용한 건 고분자 복합소재로 구성되어 거의 갑옷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그 강도는 일반적인 강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뉴델바이어가 자랑하는 기술이 빛을 발하는 순간.
물론 소재가 뛰어나다 하여, 충격까지 전부 해소되는 건 아니었다. 옷은 옷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사내는 그마저도 극복했다.
유전자 조작, 근골 강화로.
태생적으로 육신의 내구가 남다르니, 피해에 대한 상한선도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건 부차적인 효과에 불과했다.
핵심이 되는 건 맹수에 비견되는 운동 능력이었으니까.
쿵!
인간에게 주어진 천성을 뛰어넘으며 질주한다.
그 사이에 산탄총이 몇 번인가 불을 뿜었지만 사내는 멈추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 토마스의 턱밑까지 단번에 치달아 목덜미를 움켜쥘 뿐.
"컥."
그것만으로도 훈련을 받지 않은 토마스에게는 버거운 반격이었다. 거기에 더해 노쇠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여러모로 열세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사내의 물음에 니엘이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필요한 정보를 캐낸 뒤 처리해, 확실하게."
* * *
니엘이 리무진에 탑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애티튜드가 폭발했다. 난데없는 불꽃놀이에 소란이 일어났지만, 니엘은 무심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그의 눈에는 개미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거다.
어차피 메가콥이란 이름 아래 종속될 뿐인 노예들.
금세 흥미를 잃은 니엘이 시선을 돌린 순간, 문이 열리며 사내 로이드가 들어왔다. 희미하게 피 냄새가 나는 듯했으나, 그것도 한순간뿐이었다. 강렬한 체취가 모든 걸 뒤덮었으니까.
"노후된 건물에서 일어난 전기 합선 사고로 기록될 예정입니다. 일단 흔적도 없이 전소할 수 있도록 주변은 통제했습니다."
"잘했어. 캐낸 정보는?"
"입이 무겁더군요. 머리에 이식한 슬롯이 특별한 건지 손을 쓰자마자 모든 통각을 차단하기까지 했습니다."
"대강 그럴 거라는 건 예상했어. 그러니까 처리하라고 한 거고."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밀레니엄 코드 측에서는 위치 추적만 부탁했지 않습니까. 그에 대한 처벌까지 우리에게 맡긴 건 아닐 텐데요."
딴에는 직언이라 생각하는 것일 테지만, 니엘에게는 잔소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래서 네가 아직까지도 그 자리인 거야."
비릿하게 웃은 니엘이 첨언했다.
"그 녀석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잘나가는 메가콥인 건 사실이야. 나도 인정해."
밀레니엄 코드.
No.1 돔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기업이었다. 그건 밀레니엄 코드 게이트가 대변해 주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No.1 돔에서나 으스대는 녀석들이지. 마음에 안 들면 어쩔 거야? 여기까지 쳐들어올 거야?"
민감한 사안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메가콥에 협조를 구했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하지 못할 거라는 걸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돔과 돔 사이를 오가는 교통편이 정립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비용과 시간, 그리고 절차가 복잡다단했다. 전쟁이 성립될 정도로 많은 인원이 오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아무리 메가콥이라고 해도 물리적인 거리까지 없애는 건 무리였던 거다.
경제적인 보복을 한다고 해도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돔은 완전 환경계획도시, 아콜로지.
자급자족하는 걸 전제로 세워진 도시였다.
당연하게도 무역에 대한 의존도가 낮은 편이었다. 서로 수출입에 대한 권한을 축소하고, 위탁 생산 경로를 제한한다고 해도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유감스럽다면서 넌지시 경고하는 게 끝이야."
완벽한 구도였다.
그리고―
"기회라고, 멍청아."
돔이라는 불야성을 다스리는 필두. 초거대 기업연합체, 메가 코퍼레이션.
축약해서 메가콥.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완전히 자본주의 체제의 망령이었다. 인류의 인지 범위보다 부풀어오른 시장을 대변하는 단어인 만큼 그 내부에서는 무한한 경쟁이 일어났다.
안주하는 순간, 쇠퇴하는 건 당연지사.
그건 회장의 자식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성과를 보여야 해."
실장 자리를 얻어 다른 형제들보다 앞선 건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했다.
"남들보다 한 발자국 앞서 양후를 생포해 거래 대상으로 삼는 수밖에 없어."
밀레니엄 코드나 그쪽 시정부 입장에서는 불구대천의 원수일 테니, 어렵지 않게 협상할 수 있을 터.
"그렇다면 차라리 그 노인을 살려 두는 편이 나았을 텐데요."
로이드의 지적은 지당했다.
하지만 니엘에게는 미적지근하게 보일 뿐이었다.
"여태까지 숨어 지내던 녀석이야. 냉정하게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돼. 역치를 넘어서는 자극을 줘야지."
그러잖아도 유령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행적이 묘연한 상대였다. 원하는 결과를 얻고 싶다면 쫓는 게 아니라 쫓아오게 만들어야 했다.
"정말 양후가 근처에 있다면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좌시할 리 없어. 아마 단번에 우리의 존재를 알아내고 달려올 거야."
"도망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No.1 돔을 그 지경으로 찢으며 돌아다닌 녀석이?"
"확실히 그렇군요."
밀레니엄 코드 게이트는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었다. 물론 용의자인 양후에 대한 정보는 철저하게 통제된 편이었으나, 그래도 그 과정에서 뜬소문이 몇 개인가 확산되었다.
이를테면 양후가 슬롯을 이식하지 않은, 내추럴이라든가.
터무니없는 공상이지만 그래도 로이드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양후의 잠재력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거니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날뛴 것도 벌써 20년 전 이야기야. 살아 있다면 육십이 넘은 노인이라고. 녀석이 웅크려 있는 동안, 기술은 발전했어. 그 시절처럼 멍청하게 당하고 싶어도 당할 수 없다는 거야."
밀레니엄 코드 게이트 때 양후가 활개 칠 수 있었던 건 아무도 그의 존재를 몰라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모두가 그를 인지하고 경계했으니까.
아무리 잘나봤자 개인은 개인.
메가콥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초대 손님이 오나 기다려볼까?"
* * *
빌어먹을 녀석들을 상대하느라, 고작 몇 분 늦어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소한 차이점이 커다란 분기점으로 변했다.
화르륵.
익숙한 풍경이 화마로 물든 걸 두 눈으로 확인한 신은 순간 멈칫했다. 평상시 화재는 옆건물에 그을음이 생기기도 전에 진화되었다. 하지만 애티튜드는 그렇지 않았다. 더 타오르라는 듯이 접근하는 이가 없었던 거다.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한 게 틀림없었다.
정체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대해 고찰하는 건 뒤로 미뤄야 했다. 우선순위는 누가 보아도 자명했으니까.
쿵.
피부로 느껴지는 열기를 무시하고 곧장 내부로 진입한다.
불꽃이 뱀처럼 몸을 휘감은 건 한순간. 작열하는 듯한 둔통이 전신을 내달렸지만 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죽음이란 건 그에게 한없이 덧없는 것.
영원히 오지 않을 이상향에 가까웠다.
거리낄 이유가 없었다.
"토마스!"
애타게 부르면서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샘솟았다. 차라리 도망쳤길 바랐다. 단순한 사고로 그치길 소망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신은 그러한 바람이 부질없다는 걸 느껴야 했다.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널브러진 토마스를 발견했으니까.
"토마스! 정신 차려!"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던 신은 두 눈을 부릅떴다.
처참하게 짓뭉개진 얼굴. 그 입에서는 금방에라도 끊어질 듯 옅은 숨결만이 새어 나왔다.
앞으로 토마스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몇 초.
여태껏 수많은 사람을 떠나보낸 신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애당초 불길로 막힌 길을 뚫고 지나간다 해도 토마스가 버티지 못할 터.
"젠장."
오갈 데 없는 감정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다.
토마스와 시선이 마주친 건 그때.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한 눈빛에 신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귓가에 들린 건 회한이 담긴 한마디.
미처 은혜를 갚지 못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먼저 가게 되어서? 그것도 아니면 뉴델바이어에 들켜서?
"뭐가 죄송하다는 거냐, 멍청아."
돌이켜보면 질긴 인연이었다. 억지로 끊었는데도 40년 후에 재회했으니까.
더구나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신이 불로불사라는 걸 눈치챈 이는 토마스 하나뿐이었다.
여러모로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일어나기나 해."
끓어오르는 슬픔을 참고 겨우 입을 열었지만, 토마스의 숨은 끊긴 뒤였다.
며칠 전에 웃고 떠들었던 게 거짓말 같아, 신은 차마 직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나마 소방차가 출동한 것이리라.
마음 같아서는 토마스가 어디로 가는지 끝까지 확인하고 싶지만, 아무리 무고하다 해도 현장에서 발각된다면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공찰에 아는 사람이 몇 명 있는 만큼 쉽게 풀려날 테지만, 뻔히 지체될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토마스를 이런 식으로 처리한 거다. 상대의 의도는 명확했다.
숨바꼭질 따윈 하고 싶지 않다는 거겠지.
"너희들이...."
자리에서 일어난 신이 읊조렸다.
"누굴 부른 건지 알려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