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MAESTODOINMORT

Acción
En Curso · 6.9K Visitas
  • 6 Caps
    Contenido
  • valoraciones
  • NO.200+
    APOYOS
Resumen

Chapter 11

프롤로그

시아스 자작령에 위치한 신성교 지부 안 예배실.

알록달록 화려한 색유리를 통과한 빛이 장내를 아름답게 물들이는 와중,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거래가 이뤄지고 있었다.

"이 아이가···?"

"맞습니다 사제님. 어서 보여드려."

꼬질꼬질한 행색의 중년 남자가 제 옆에 선 아이를 재촉했다. 검은색 머리와 눈을 가진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슬며시 손을 들어 자신의 '힘'을 이끌어냈다.

밤하늘의 별을 연상시키는 청백색 빛이 나타나 희미하게 일렁인다.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사제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선천마력이군요."

"그, 그렇지요?"

중년인의 표정이 활짝 폈다. 제 자식이 '불량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아 기쁜 모양이었다.

사제는 내심 그를 경멸하면서도 겉으로는 인자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적당한 양의 은화가 담긴 주머니를 건넸다.

"아이는 저희가 잘 가르치며 보살필 테니 신도님께선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럼요, 그럼요! 저는 하나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놈도 사제님 밑에서 배곯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할 겁니다!"

조금 역할 정도로 아부성 짙고 비굴한 어조였다. 사제는 끝까지 속마음을 내색지 않고 중년인을 점잖게 응대해 돌려보냈다.

아이는 자신을 팔아버리고 떠나는 아비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아이를 잠시 기다려주던 사제가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라온입니다."

"좋은 이름이구나."

아이, 라온은 어린 나이였지만 그 말에서 조금의 진정성도 느끼지 못했다.

"네가 잘만 하면 다시 부모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 아쉬워하지 말고··· 앞으로 지낼 곳을 알려줄 테니 따라오거라."

사제는 몸 돌려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그 뒤를 따르기 직전, 라온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떠나간 출입구 쪽을 보며 입을 달싹였다.

마지막 미련을 끊어내는 작별인사였다.

교단에서(1)

라온이 머물게 된 신성교의 시아스 자작령 지부는 도시 외곽부 한쪽을 크게 차지하고 자리했다.

한 명의 주교와 십여 명의 사제, 백여 명의 부제와 사백여 명에 가까운 수도자들이 상시거주하는, 어느 정도 자급자족까지 가능한 작은 장원 같은 곳.

그곳에서 라온은 부제(Deacon)가 됐다. 하지만 말만 부제였지 교단의 명부에 오르지도 못한 채 하인과 다를 바 없는 일을 했다.

아침저녁으로 바닥을 쓸고, 예배실의 색유리창과 촛대를 닦고, 신도들이 몰려오는 예배 시간 전 필요하지만 자질구레한 준비를 하고.

이 하찮은 처지를 벗어나야 한다. 버림받는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런 집념으로 라온은 하루 한 번 받는 공용어 문자 수업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헛된 자신감이 아니었던지라, 30명 정도 되는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 중에서 아주 빠르게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대단히 영특하구나···!"

글을 가르치던 수도자는 고작 한 달 만에 공용어를 완벽하게 읽고 쓰는 라온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덕분에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 더 많은 아이들과 함께 교리 수업을 듣게 됐다.

교리를 가르치는 이는 일개 수도자가 아니라 글론이라는 사제였다. 비쩍 마르고 조금 신경질적으로 생겼지만 학식이 풍부한.

"혹시 고대어도 한 번 배워보겠느냐?"

"예, 사제님."

어느 날 글론이 물었고 라온은 거절하지 않았다.

지식은 곧 재산이라,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라온은 그런 지혜를 깨닫고 있었다.

고대어는 공용어처럼 쉽지 않았다. 하지만 라온은 그것마저도 굉장한 속도로 배워나갔고, 글론은 하루에 한 번은 꼭 놀라움을 드러냈다.

자연스레 지부 전체에 라온의 소문이 퍼졌다.

소문을 접한 이들은 그 믿기 힘든 똑똑함에 놀라고, 직접 마주했을 때의 귀티 나는 외모에 또 놀라고, 농노의 자식이라는 하찮은 출신에 반전을 느끼면서 마지막으로 놀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그를 팔아넘길 때 직접 거래를 했던 사제, 데임이 찾아왔다.

"연금술을 배워볼 생각이 있느냐?"

"예! 사제님."

라온은 기쁜 티를 숨기지 않으며 열정적으로 답했다.

데임은 연금술 공방 책임자로 이곳 지부에서 가장 중요한 수입원을 맡고 있었다. 하여 사제들 사이에서 권위가 대단했고 어떤 면에선 주교조차 그를 존중할 때가 있었다.

라온은 그의 위세를 알게 된 순간부터 연금술 공방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야 정말로 부제다운 일을 하면서 좀 더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 터였으니까.

노리던 기회가 왔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내일부터는 아침 기도를 마치면 공방으로 오거라. 글론 사제에게는 내가 따로 말해놓으마."

"감사합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라온은 데임이 좋아할 법한 태도를 유지하며 몇 번이고 감사를 표했다.

@

아침 식사 후 기도를 마치고 간단하게 씻은 뒤, 공방으로 가서 포션 제조에 필요한 마법재료들을 정확하게 다듬어 놓는다.

점심 식사 후 장서실에서 이런저런 책을 읽으며 잠깐 휴식을 취하고, 사제 글론에게서 교리와 예식 및 고대어를 배운다.

저녁 식사 후 기도를 마치고 수도자들이 이용하는 연무장에서 운동을 한 다음,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4인용 숙소에서 잠을 청한다.

이것이 지난 3년간 라온의 생활이었다.

교인으로서의 삶은 평온하면서도 고요했고 또한 충실했다. 적어도 이곳에 팔려 오기 전과 비교하면 훨씬 나았다.

그렇게 오늘도 어김없이 공방으로 출근했을 때였다.

안쪽 선반에서 연금술 도구를 꺼내고 있는데 데임이 다가왔다.

"라온."

"예, 사제님."

"글론 사제에게서 이야기 들었다. 기본적인 교리와 예식을 전부 가르쳤다던데, 네가 올해 몇 살이었지?"

"13살입니다."

"어리군. 그런데도 벌써······."

잠시 뭔가를 고민하던 데임이 말했다.

"혹시 교리사제가 되고 싶으냐?"

사제라고 다 같은 사제가 아니다. 교리를 집중적으로 파고들며 해석하는 이들을 교리사제라 부르는데, 솔직히 별로 대단한 취급은 못 받는지라 라온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데임은 익히 예상했다는 듯 끄덕거리곤 말했다.

"그럼 더 배울 필요 없으니 시간이 나겠구나. 다음 주부터 내가 신성마법을 가르쳐주마."

그에 라온은 깜짝 놀랐다.

"사제님, 저는 아직 정식 부제도 아닌데···."

"괜찮다. 너 정도면 그저 시간문제일 뿐인데, 조금 일찍 배우는 게 뭐 대수라고."

"감사합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단, 그래도 되도록이면 다른 이들에겐 말하지 말거라. 누가 물어보면 연금술에 대해 배운다고 하고. 규칙은 규칙이니까."

당연히 라온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그는 문득 떠오른 걱정거리를 물었다.

"저는 선천마력 보유자인데, 신성마법을 배우는 게 힘들진 않을까요?"

"다 계획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데임은 자못 인자하게 웃으며 라온을 안심시킨 후 자리를 떴다.

마지막까지 감사를 표하던 라온은, 데임이 충분히 멀어진 후 살짝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연금술 공방 책임자가 굳이 시간을 내서, 사소하다지만 규칙까지 어겨가며 직접 가르쳐주겠다고···?'

분명 좋은 일인데 어째서인지 약간 찜찜하다. 여태 그가 파악한 데임이라는 사람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이런 혜택을 베풀어줄 이가 아니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 걸까?

라온은 아직 어렸지만 또래보다 사고능력이 비범했다. 동시에 부모에게 버림받은 기억으로 의심도 많았다.

언제나처럼 필요한 마법재료를 분류하고 다듬으면서, 그는 대체 왜 찜찜하게 느껴지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안타깝게도 별 성과는 없었다.

@

며칠 뒤.

라온은 평소 알고 지내던 부제 신드가 갑작스레 큰 병에 걸려 신성교 본단으로 이송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덕분에 그는 하루 종일 어딘가 체한 것처럼 불편했다.

"······."

잘 시간이 되어 숙소 침대에 누웠을 때도 머릿속이 복잡해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신드는 그보다 4살 많은 소년으로 나름 친한 사이였다. 적어도 서로 사적인 대화를 통해 둘 사이의 공통점을 여럿 파악했을 만큼은.

둘은 모두 선천마력 보유자였고 10살 무렵 이곳에 팔려 온 과거가 있었다. 또한 신드는 몇 년 전부터 데임에게 직접 신성마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하필 내가 데임 사제에게서 신성마법을 배우게 된 이때 병으로 이송됐다고?'

전부터 느껴지던 이유 모를 찜찜함이 이제는 명백한 불안감으로 화했다.

시기가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그 공교로움이 지나쳐서 오히려 정말 우연이 아닐까 싶다가도, 만약 여기에 뭔가 음모가 있다면 고작 열몇 살 먹은 아이를 속이는 일이라 상대가 방심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안심이 되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어떤 음모가 존재한다면 그 이유가 뭘까?

짐작 가는 부분은 선천마력뿐이었다.

선천마력은 특수마력의 일종인데, 만약 태어날 때부터 특수한 마력을 타고났다면 그를 선천마력이라 불렀다.

장서실의 책에서 얻은 정보대로라면 선천마력 보유자는 매우 희귀하다고 했다. 확률로 봤을 때는 만분의 일 정도.

한데 따져보니 이곳 지부엔 선천마력 보유자가 무려 6명이나 됐다. 아니, 신드가 이송됐으니 이제 5명이겠지만 그래도 많았다.

그만큼 이곳에서 선천마력을 가진 아이를 열정적으로 찾아 사들였다는 뜻이었다.

왜일까? 선천마력이라고 나중에 특히 더 뛰어난 것도 아니라던데, 대체 어떤 이유로?

"좀 더 빨리 알아봤어야 했는데······."

라온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데임이 자신의 선천마력을 확인하고서야 아버지에게 값을 치르는 장면을 봐놓고선, 그 이유를 알아보지 않았으니 이는 명백한 실수였다.

내일부터라도 자세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억지로 눈을 붙였다.

제발 별일 아니기를 바라면서.

@

신성마법 교육은 지부 안쪽에 따로 마련된 건물에서 진행됐다. 연금술 공방과 별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거기 앉거라. 오늘은 이론부터 공부할 것이다."

라온이 책상에 앉으려는데 데임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벽에 붙은 작은 탁자 위, 손때 탄 일지 한 권이 놓여있었다. 그를 집어 들어 살핀 데임이 짧게 혀를 찼다.

"놓고 갔군."

얼마 전까지 여기를 사용했고 '놓고 갔다'는 표현이 어울릴 사람은 한 명뿐이다.

"혹 신드 부제의 것입니까?"

조심스러운 라온의 질문에 데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인 일지인 듯하니 아무래도 내가 보관해야겠구나."

"저······."

라온이 말을 흐리자 데임은 그 일지를 내려놓으며 시선을 던져왔다.

"신드 부제가 큰 병에 걸려 이송됐다고 들었습니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요?"

"글쎄."

그러면서 그는 라온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사실 병 때문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구나."

"예?"

"그저 병이었다면 본단으로 갈 필요 없이 쉽게 치료할 수 있었을 거다. 하나 신드는 타고난 특수마력이 몸을 갉아먹은 경우라, 뭐라 장담하기 힘들지."

선천마력이 몸을 갉아먹어?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처음 들은 라온은 꽤나 당혹스러웠다. 그 자신이 선천마력을 가졌기에 더더욱.

"흔한 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거라. 시간이 넉넉지 않으니 바로 수업을 시작하자꾸나."

"예, 사제님."

"우선 마력에 대해서 알려주겠다. 마력이란···."

데임이 기초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장서실의 책을 통해 이미 이를 알고 있는 라온은, 그럼에도 티 내지 않고 집중해서 들었다.

마력이란 아스트랄 계면에 흐르는 힘을 뜻한다. 아스트랄 계면은 현실과 겹쳐진 비정형의 차원으로, 이를 인지하는 자만이 마력을 다룰 수 있다.

본격적으로 마력을 다루려면 체내에 고유한 아스트랄계를 만들어야 한다. 라온은 선천마력 보유자로서 태어날 때부터 심장에 고유 아스트랄계가 존재했다.

"10명 중 7명만이 아스트랄 계면을 인지할 수 있다. 또한 그 7명 중 4명만이 체내 고유 아스트랄계를 만들 수 있는데, 이들을 소위 하이랜더(Highlander)라 부른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비율이지."

하이랜더는 크게 기사와 마법사 두 부류로 나뉜다. 신성교에 속한 사제 이상의 하이랜더는 데임을 포함하여 대부분 마법사였다.

"교단의 특수한 수련법으로 체내 고유 아스트랄계를 만들어야만 신성력이라 불리는 특수마력을 다루면서 제대로 된 신성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데임은 거기까지 설명한 후 라온과 시선을 마주했다.

"라온 너는 선천마력 보유자이니 교단의 수련법으로 신성력을 다룰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그게 신성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네 선천마력이 신성력과 상극만 아니면 괜찮다는 말이다. 화염계 마법을 익힌 마법사는 냉기계 마법을 사용할 수 없지만, 대지계 마법이나 바람계 마법은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아······."

라온은 명확하게 이해했다.

"마법의 구성요소를 배우기 전에, 알려진 특수마력의 종류와 상성부터 배우도록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데임이 방 안쪽 책장에서 책 두 권을 꺼내들어 가져왔다. 둘 모두 '신비학 기초'라는 제목을 가진 똑같은 책이었다.

"22쪽을 펼쳐라. 앞의 내용은 나중에 스스로 읽어보도록 하고."

"예, 사제님."

데임은 차분한 목소리로 수업을 이어나갔고, 라온도 슬슬 모르는 내용이 나오기 시작해서 더욱 집중했다.

교단에서(2)

라온이 데임에게서 신성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지 일주일째.

"검술을?"

"네. 안 될까요?"

지부 외곽 쪽에 자리한 연무장, 한창 검술 수련에 열중하던 수도자 마테이는 갑자기 찾아와 검술을 가르쳐달라는 라온의 부탁에 의아한 기색이었다.

"안 될 건 없지만, 검술은 생각만큼 쉽지 않아. 위험하기도 하고. 건강을 위해서라면 그냥 달리기나 하는 게 나을 거야."

사실 직위로만 따지면 수도자 마테이는 부제인 라온에게 존대해야 한다.

하지만 세상사가 꼭 규칙대로 돌아가진 않는지라, 마테이처럼 나이 많고 실력 있는 수도자는 라온 정도의 부제에겐 말을 놔도 괜찮았다. 게다가 엄밀하게 따지자면 라온은 정식 부제가 아니기도 했고.

하여 라온은 전혀 개의치 않고 답했다.

"건강이 아니라 호신을 위해 배우고 싶어요. 살면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또 그냥 검술 자체에 흥미도 있어서요."

"흠··· 그래?"

마테이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었지만 딱히 더 뭐라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르쳐주시면 제 나름대로 보답도 하겠습니다."

말하면서 라온은 슬쩍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연금술 공방에서 일하면서 조금씩이나마 받게 된 동전이 든 주머니였다.

"하하하!"

주머니를 받아 내용물을 본 마테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보니 라온 부제님이 사람 웃기는 재주가 있었군. 내가 같은 신앙의 형제에게, 그것도 라온 부제 같은 어린 형제에게 돈을 받고 검술을 가르치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나?"

"어, 그런가요? 하지만 책에선 부탁을 하려면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테이는 다시 웃었다.

"그거 썩 유익한 책이로군. 어쨌든 나는 마음만 받지."

돈이 든 주머니를 라온에게 돌려주며 그가 질문했다.

"라온 부제는 검이라는 무기를 어떻게 생각하나?"

"음······."

질문의 요지가 뭘까, 잠시 고민하던 라온이 답했다.

"다루기 어렵지만 그만큼 다재다능한 무기라 생각합니다. 벨 수도 있고 찌를 수도 있으니까요."

"좋은 답이야. 또한 첨언하자면, 검은 오직 같은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지. 도끼나 창 같은 것과는 다르게."

그에 라온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어째서 기사의 상징이 다른 무엇도 아닌 검인지를.

"도끼처럼 무신경하게 다루면 깨지기 십상이며, 창처럼 다루기엔 그 공격거리가 충분치 못하다. 하나 비교적 소지가 간편하고 가벼우면서 공간의 제약을 덜 받지."

마테이는 대화하느라 잠깐 늘어트렸던 검을 들어 허공에 몇 번 휘둘렀다. 가벼운 동작이었지만 날카로운 소리가 섬뜩하게 터졌다.

"그러면서 살상력은 충분하고 말이야. 대부분의 기사들이 검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이유랄까."

"그렇군요."

"물론 그렇다고 검이 최고라는 말은 아니야. 상황마다 다르니까. 어쨌든······."

그가 들고 있던 검을 휘리릭 돌려 잡더니 라온에게 손잡이 쪽을 내밀었다.

"검은 충분히 훌륭하고 매력적인 무기라는 말이지. 한 번 잡아봐.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부터 알려줄 테니."

@

늦은 저녁, 라온은 욕탕에서 몸을 씻으며 마테이에 대해 생각했다.

어두운 갈색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가진, 항상 술에 취한 것처럼 붉은 얼굴이 특징적인 그 중년인은 이곳 지부에서만큼은 검술의 일인자였다. 그래서 돈까지 들고 찾아갔다,

과연 그 평판이 헛되지 않아 겨우 하루 만에 검술의 기초적인 골자를 대략적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 마테이는 가르치는 일에 재능이 있는 듯했다. 아니면 본인이 배웠던 방식을 잘 기억하는 것이거나.

지나가듯 물어보니 본인은 라흐트란 검술도장에서 배웠다고 했다. 이곳 시아스 자작령의 북쪽 도일 후작령에 있는 대륙적으로 아주 유명한 곳이라고.

그래서인지 기초는 확실하게 가르쳐줄 수 있어도 그 외는 불가하다고 못을 박았지만, 대신 단검술과 체술의 기초도 함께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라온으로선 아쉽긴커녕 더욱 고마울 뿐이었다.

그가 갑자기 검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냥 불안했으니까.

데임에게서 신드가 본단으로 이송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당시에는 꽤 그럴듯하다 느끼며 찜찜함이 풀렸었는데······.

문득 다시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신드의 개인적인 일지가 왜 거기에 있었을까? 신성마법 수련을 위한 장소에 그걸 가져다 놓을 이유가 있나?

어딘가 작위적이다.

그래서 설마 별일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불안감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몸이 고된 게 낫다고 여겨 검술까지 배워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마법도······.'

라온은 손가락 하나를 편 채 눈앞으로 가져왔다. 청백색 선천마력이 아지랑이처럼 나타나 타올랐다.

여태 파악한 바로 그의 선천마력은 신체능력을 강화시켜줬다. 동시에 점도가 높은 것처럼 몸에서 떼어놓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다른 마력과 비교했을 때 아주 특이한 점이었다.

그래서 사실 걱정이 많았다. 팔려 왔지만 어쨌든 신성교의 부제가 됐는데, 막상 신성마법을 배울 수 없는 건 아닐까 하고.

다행히 기우였다.

순간, 라온의 손가락에서 아른거리던 청백색 빛무리가 조금 더 밝아졌다. 육안으로 보기엔 미약한 변화였지만 시전자인 라온은 차이점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선천마력에 신성마법 '정화'의 힘이 깃들었음을.

앞서 생각한 두 가지 특성보다 사실 지금의 이 특성이 가장 중요했다.

그의 선천마력은 쉽게 표현해 마법을 '녹여내서' 발동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게 어렵지도 않았다. 아니, 어렵지 않은 것을 넘어 그냥 평범하게 마법을 시전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그저 책에 적힌 이론만 보고도 지금 같은 일을 해낼 수 있을 정도로, 정상적으로는 당연하다는 듯 시전에 실패하는 마법을.

잘은 모르지만 일단은 좋은 일이다.

지식에 대한 갈증이 느껴졌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몸을 지킬 수 있으려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앞으로는 더욱 바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마저 몸을 씻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라온은 어느덧 16살이 됐다.

식당에서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식사를 하던 그는 어느새 상념에 잠겼다.

지부에서 왜 선천마력을 가진 아이들을 사들이는지 알아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대놓고 탐문하기엔 걸리는 점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성과가 전혀 없진 않아서, 데임이 선천마력을 가진 이들만 골라 신성마법을 가르쳐왔고, 신드가 세 번째이며, 그들 모두 모종의 이유로 이곳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사실을 알아갈수록 위기감은 뚜렷해졌다. 이건 누구라도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정황이 아닌가?

게다가 데임은 가면 갈수록 신성마법을 가르치는 일보단 라온의 선천마력 특성을 알아내는 실험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더욱 잘 가르치기 위해서라는 설명을 들었지만 당연하게도 믿기 힘들었다.

알 수 없는 수정구에 마력을 불어넣으라고 시키거나, 괴상한 형태의 마도구를 쥐여주고 발동해보라고 하거나, 심지어 최근에는 팔뚝에 상처를 내고 상당한 양의 피를 뽑아갔다.

데임은 그런 실험들의 결과를 가끔 라온에게도 알려줬다. 하지만 정말로 모든 걸 알려주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라온은 궁여지책으로 힘을 숨겼다.

현재까지 그가 배운 신성마법은 정화, 보호, 치유로 총 셋이었다. 하지만 데임에겐 정화 신성마법만 배웠다고 알렸다.

3년에 겨우 마법 하나를 숙달했으니 이는 결코 빠른 속도가 아니었다. 여태 라온이 보여준 총명함을 생각하면 너무나 느렸지만, 똑똑함과 마법의 적성이 꼭 비례하진 않으니 크게 의심당할 일은 아니었다.

또한 검술의 성취도 마테이에게 부탁해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누가 직접 라온을 감시하는 게 아닌 이상 검을 수련한다는 건 알아도 그 정확한 실력은 알 수 없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즘 한 가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냥 이곳에서 도망치는 건 어떤가 하는.

돈도 어느 정도 모았고 호신을 위한 최소한의 힘도 갖췄다. 만약 하고자 한다면 밤중에 몰래 내빼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이다. 그렇게 내빼고서 먹고사는 일도 크게 걱정되지 않았고.

하지만 망설이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그의 삶에서 다신 오지 않을 커다란 기회였으니까.

데임이 가르쳐주는 신성마법도, 장서실에 있는 여러 책들도, 마테이에게서 배우는 검술과 단검술 및 체술도, 바깥이었다면 절대 얻을 수 없었을 귀중한 것들이다.

"음···."

라온은 복잡한 머릿속을 애써 잠재우며 일단 식사에 집중했다. 깨끗하게 비운 그릇을 반납하며 식당을 나오는데, 누군가 옆으로 다가왔다.

"라온."

누군가 해서 보니 그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처지로 부제가 된 티마든이었다. 평소 매우 바쁘고 과묵하여 친구가 거의 없는 라온과도 꽤 격의 없이 굴 수 있을 정도로 성격이 좋은.

"혹시 그 소문 알아?"

"무슨 소문?"

"도일 후작과 프로스 후작이 전쟁을 벌일 거라는 소문."

"···그래? 진짜야?"

"진짜인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그런 소문이 파다하긴 해."

정말로 전쟁이 벌어진다면 이건 남의 일이 아니었다.

도일 후작령과 프로스 후작령은 이곳 시아스 자작령의 북쪽에서 서로 경계를 맞대고 있는데, 시아스 자작가는 도일 후작가에 충성을 바치고 있었으니, 어떤 식으로든 전쟁의 불똥이 튈 것이었다.

"그래서 조만간 종군사제를 뽑아간다는 이야기도 있어."

"······."

신성교는 그저 종교일 뿐 국가에 소속된 집단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원리원칙대로 따졌을 때의 이야기고, 전쟁이 벌어지면 각 영지의 신성교 지부에서 종군사제들이 뽑혀가는 게 보통이었다.

물론 그렇게 뽑혀간 사제들은 직접적인 전투에는 나서지 않았다. 그저 부상자를 치료하는 역할에만 투입됐는데, 그럼에도 전쟁의 광기에 휩쓸려 다치고 죽는 일이 꽤 많았다. 그러니 라온의 일상에도 어떤 변화가 들이닥칠지 몰랐다.

만약 데임이 종군사제로 뽑혀 한동안 이곳을 떠나게 된다면 좋은 일일까?

"이야기 고마워."

"고맙긴. 그냥 소문을 말해준 것뿐인데. 그나저나, 요즘 신성마법 진도는 어때?"

"그냥··· 아직도 정화 하나밖에 배우지 못했어."

"그게 어디야? 난 언제 입문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쓸데없는 대화임에도 라온은 냉대하지 않았다.

티마든과의 한담을 마치고 이동한 곳은 언제나 그렇듯 장서실이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조용한 곳에서,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는 조금 희망찬 생각을 했다.

뭔가 위험이 있더라도 그 위험의 핵심으로 보이는 데임이 이곳을 떠난다면, 한동안 안심하고 다른 사제에게서 다양한 신성마법을 계속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후 데임이 돌아오기 전 교단 명부에 올라 정식 부제가 된다면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제발 그랬으면······.'

라온은 큰 욕심이 없었다. 그저 걱정 없고 평화로운 일상을 바랄 뿐이었다.

교단에서(3)

전쟁에 대한 소문을 접한 지 두어 달 후.

라온이 평소처럼 신성마법을 배우기 위해 수련실로 향했을 때였다. 어째서인지 데임에게서 불편한 기색이 가득 전해져왔다.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혹 전쟁에 대한 소문을 들어봤느냐?"

"예. 설마···?"

데임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종군사제로 가게 될 것 같구나."

라온은 즉시 속내와 반대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만들어냈다. 지난 3년간 하도 연기를 해서인지 아주 자연스러웠다.

"왜 데임 사제님이 가시는 겁니까? 공방 책임자이신 사제님이 가시면 포션 제조는 누가 하고요."

"부제들이 있으니 기본적인 건 괜찮을 거다. 특히 라온 너도 있지 않으냐."

"예?"

예상 밖의 칭찬에 살짝 놀란 라온에게 데임이 이어 말했다.

"네 연금술 성취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혀 얕지 않다. 오래 공방에서 일한 다른 부제들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어. 설령 있다 해도 미미하겠지."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고평가였다.

"그래서 이참에 네게 진짜 비전을 전수해줄까 싶다."

진짜 비전?

"말이 나왔으니 망설일 이유는 없겠지. 내일 자정쯤에 연금술 공방으로 오거라."

"···자정쯤에 말입니까?"

"의아하겠지만 다 이유가 있느니라. 이곳 지부가 만들어진 지 백 년도 넘었으니, 정해진 시간에만 드나들 수 있는 특별한 문 정도가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아."

라온도 그런 종류의 보안 마법이 있음을 들어봤는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조금 혼란스러웠다.

정말로 자신에게 연금술 비전을 전수해주려는 걸까? 만약 아니라면 목적이 뭘까?

"떠나기 전 마지막 수업이니, 그간 배운 걸 복습하고 앞으로 네가 배워야 할 걸 어떤 식으로 예습해야 할지 알려주마."

"알겠습니다."

데임이 책을 펼쳐 수업을 시작했다. 그에 라온도 다른 생각을 접고 일단 집중했다.

적어도 그가 가르치는 지식은 진짜였으니까.

@

다음 날 자정.

라온은 데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달빛을 받아 고요히 빛나는 건물들의 모습은 낮에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풍겼다.

특히 연금술 공방이 그랬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장소가 눈에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몇몇 포션 유리병이 신비로우면서도 어쩐지 음산했다.

"왔구나."

인기척이 들리고 잠시 후, 데임이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평소와 같은 차림새였으나 라온의 예리한 관찰력이 몇 가지 달라진 점을 잡아냈다.

우선 못 보던 귀걸이가 보였고, 손에는 반지 두 개를 낀 상태였으며, 언뜻 드러난 손목에는 딱 봐도 보통 마도구가 아닌 팔찌가 걸려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모르는 체하며 라온은 평소처럼 공손히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딱 맞춰서 왔다. 이쪽으로 오거라."

데임이 앞장서서 공방 안쪽으로 향했다. 다양한 마법재료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구역을 가르는 문을 지나 더 깊은 곳으로 향한다. 온갖 마법재료가 보관된 선반의 모퉁이를 꺾어 돌기 무섭게, 원래는 벽만 있어야 할 공간에 낯선 석문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었다.

"오···."

라온이 자신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냈다. 푸른빛 수정이 흡사 나무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끼워져 반짝이는 그 석문은 아주 신비로웠다.

"허허, 신기한가 보구나."

"예, 사제님. 이런 건 처음 보는지라···."

"이해한다. 나도 처음엔 그랬지."

데임은 그렇게 말하며 석문에 반지 낀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은은한 빛이 퍼지더니 곧, 손잡이 하나 없이 매끄럽던 석문이 중간부터 뚝 갈라져 양쪽 벽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그긍-

돌과 돌이 마찰하는 묵직한 소리를 뒤로하며 데임이 안으로 들어섰다. 라온도 잠깐 망설이다가 뒤를 따랐다.

짧은 통로에 이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양옆 벽면에 일정 간격으로 빛을 내는 수정구들이 박혀 전혀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상쾌한 느낌마저 조금 있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계단을 전부 내려서자 제법 넓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 벽면을 따라 다양한 서적들이 꽂힌 책장이 있었고, 그 반대편으로는 위쪽 공방과 비슷하게 각종 마법재료와 도구들이 정연하게 놓인 선반이, 중앙에는 커다란 테이블과 그 위에 올려진 약간 섬뜩한 형태의 도구들이 보였다.

"여긴 무엇을 위한 공간이죠?"

"조금 더 비밀스러운 포션 제조와 연구를 위한 장소다. 제조보다는 연구에 좀 더 집중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라온은 반사적으로 자신이 제조할 줄 아는 포션 목록을 떠올렸다.

교단을 대표하는 포션이라 할 수 있는 치유 포션, 그다음으로 유명한 해독 포션, 전염병이 돌면 수요가 폭증하는 질병치료 포션, 순이익이 가장 큰 저주해제 포션.

전부 아주 유용하면서 중요한 것들이다. 한데 그보다 더 비밀스러운 포션을 연구하는 곳이라고?

그르릉-

그때, 들어왔던 출입구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온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했을 때였다.

"혹 오늘 이곳으로 오면서 다른 사람을 마주친 적 있느냐?"

"···아니요. 없습니다."

"그렇군. 다들 잘 시간이긴 하지. 이쪽으로 와보려무나."

책장 앞에 선 데임이 자신의 옆으로 그를 불렀다. 라온이 순순히 다가가자 그는 책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 책들이 바로 네게 알려주겠다고 한 비전의 지식이다."

"많군요."

대충 세어봐도 백여 권에 달했다. 하지만 데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코 많지 않다. 아무리 파고들어도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연금술이거든. 본단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이 있을 거야. 그래도··· 이것만은 유일하게 나만의 비전서라고 할 수 있지."

그렇게 말하며 데임은 책장 중간에서 표지가 가죽인 책 하나를 꺼냈다.

"읽을 수 있겠느냐?"

그는 표지가 잘 보이게끔 라온에게 내밀었다.

고대어로 된 표지였는데, 1년 전까지 글론에게서 고대어를 열심히 배운 라온은 그것을 수월하게 읽어냈다.

"허머 이유스···?"

인간 비약.

섬뜩함을 느낀 라온이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반응에 데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책을 원래 자리에 꽂아놨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의심하고 있었구나. 역시 보통이 아니야."

"···예?"

"여태 네가 보여준 모습대로라면, 고작 책 이름이 조금 섬뜩하다고 그리 놀라진 않을 테니 말이다. 나를 믿는다면 그렇게 행동할 리 없지."

라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데임을 쳐다봤다. 데임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완전히 달라진 상태였다.

인자한 느낌이 완전히 사라진 냉담한 눈이었다.

"라온, 더는 속이지 않으마. 나는 네 희생이 필요하다."

"······."

"원래는 전쟁이 끝난 후 일을 시작할까 싶었다. 한데 생각해보니, 그때는 너를 지금처럼 쉽게 다루지 못할 듯하더구나. 네가 보통 총명해야 말이지."

"···무슨 짓을 하시려는 겁니까?"

"인체실험. 흔한 일이지."

데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온이 한 걸음 더 물러서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 한차례 눈길을 끌었던 중앙 테이블 위 도구들을 향해서였다.

"지금도 대륙 각지에선 무수한 인체실험이 벌어지고 있을 거다. 신비학 역사에서 인체실험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아느냐? 동물로 대체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 연금술 분야는 특히나 그렇지. 과장을 조금 보태면 인체실험은 지금 시대 문명의 한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교리에 어긋나는 비윤리적인 일입니다. 제국법에도요."

"그래, 그렇게 취급되지. 지금 우리 교단에서 파는 포션들조차 수많은 인체실험을 바탕으로 탄생했는데 말이야."

데임이 날카로운 단검 같은 도구를 집어 들었다. 일반적인 단검과는 다르게 조금 짧지만 아주 예리하고 섬세한 모양새였다.

"신드 부제는···."

"죽었다."

"······."

"한 번 생각해보거라. 나는 네가 10살일 때 네 비루한 아비에게서 너를 구했다. 만약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너는 지금껏 아주 고되고 비참하게 살아왔을 테지. 여태 네가 누려온 풍요와 평온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대가인 셈이야."

"제가 사라지면 지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라온이 그렇게 협박했으나 데임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공식적으로 아침 일찍 전선으로 출발할 예정이다. 너를 수행부제 삼아서."

"···준비를 해두셨군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가 벌써 네 번째인데···."

"그것까지 알아냈느냐? 하지만 걱정 말거라. 주교도 이 일을 알고 있으니까. 애초에 지부에서 대놓고 선천마력을 가진 아이들을 구매하고 있지 않으냐. 그러니 네 일도 어떻게든 덮을 수 있다."

라온은 살짝 충격을 먹고 잠시 입을 벌렸다가, 곧 다른 말을 했다.

"이런 식으로 희생시킬 생각이었으면, 저에게 왜 연금술과 신성마법을 가르친 겁니까?"

"연금술은 그래야 내 곁에 두기 자연스럽기 때문이고, 신성마법은 네 선천마력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서지. 가치도 없는데 대뜸 해부할 수는 없으니까."

전부 이유가 있다는 말이었다.

"왜 저입니까? 아니, 저로 정확히 뭘 하려는 거죠?"

"여태 파악한 바로 네 선천마력은 신체능력을 크게 강화시켜주더구나. 기사의 오러(Aura)와 버금가는 효율로."

데임은 단검 도구를 든 손의 반대편을 라온에게 뻗었다.

"네 심장의 고유 아스트랄계를 연구해서 네 선천마력의 본질을 반이라도 파악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걸 보완하는 특성의 다른 마력과 조합할 수 있다면···."

갑자기 데임이 말을 멈췄다.

여태 당황스러워하며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라온의 모습이 갑작스레 기이할 정도로 차분해진 탓이었다.

조금 소름이 끼칠 정도로.

"조합할 수 있다면요?"

"···영구적으로 육신을 강화하는, 능히 엘릭서(Elixir)라 불릴 비약을 제조할 수 있을 거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진 않겠지만."

"근거가 있는 내용인가요? 여기 있는 책들에 관련된 내용이 있다거나?"

"네 태도를 보니, 아무래도 각오를 굳힌 모양이구나. 잘된 일이다. 나도 살려달라 애원하는 아이를 죽이기엔 마음이 편치 않으니까."

데임의 손에서 백색의 신성력이 피어오른 순간.

그 순수하면서 따뜻하게 느껴지는 빛이 급속도로 모여들어 쏘아졌다. 길쭉한 형태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요동치며 날아든 덩굴이 라온을 휘감으려 들었다.

신성포박 마법.

배우지 못했으나 그 존재와 파훼법을 안다. 라온은 땅에 닿을 듯 몸을 숙여 빛의 덩굴을 피하면서 그대로 달려들었다.

폭발적인 속도였다.

포박이 빗나가리라 예상치 못했던 데임은 상상을 뛰어넘는 라온의 속도와 기세에 화들짝 놀라 보호막을 펼쳤다.

콰드득-!

언제 어디서 꺼내 들었는지 모를 시퍼런 단검이 반투명한 백색의 보호막을 반쯤 뚫어낸다. 그 첨단이 겨누는 것은 데임의 눈, 칼날에 서린 청백색 선천마력이 아지랑이처럼 타오르며 기세를 더했다.

라온은 단검을 힘주어 누르며 보호막을 마저 뚫으려 했다. 바로 그때 데임의 손에서 재차 빛이 번쩍이며 타올랐다.

세상으로(1)

라온이 상체를 뒤로 젖혀 잽싸게 피한 자리를 빛의 화살이 스쳐 지나간다. 뒤편의 벽에 틀어박힌 화살에서 폭발이 일고 지하실이 굉음으로 우르르 떨렸다.

제대로 맞으면 뼈도 못 추릴 위력의 공격에도 라온은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바로 단검을 휘둘러 눈앞의 보호막을 난도질하며 오히려 상대를 압박했다.

"이놈이···! 애초부터 싸울 각오를 단단히 했구나!"

까드득-!

대답 대신 날아든 단검이 재차 보호막을 찢듯이 관통한다. 자신의 목덜미 근처까지 다가와 멈춘 그 단검을 노려보는 데임의 눈에서 당황과 분노가 일렁였다.

"발악해도 소용없다! 누가 도와주러 올 거라는 생각도 버려!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밖은 조용할 테니까!"

애써 침착하려는 호통과 함께 빛이 폭발했다.

순간 라온은 눈을 찌르는 듯한 고통과 함께 시력을 상실했다.

누구라도 당황할 법한 상황, 그럼에도 라온은 한쪽 손으로 데임의 보호막을 더듬어 확인하면서 거리를 벌리지 않고 주위를 빠르게 돌았다.

쾅! 꽈광-!

그런 라온의 뒤를 아슬아슬하게 스친 빛의 화살들이 벽과 선반에 부딪혀 폭발했다.

"이런···!"

진귀한 마법재료가 폭발에 휩쓸리는 것을 본 데임이 순간적으로 정신이 팔렸다. 그사이 희미하게나마 시력을 회복한 라온이 다시금 손에 든 단검으로 보호막을 내리찍었다.

세 번째로 보호막을 반쯤 관통한 단검의 칼날이 데임의 어깨 바로 앞에서 멈춘다. 그 순간 라온은 단검을 힘껏 비틀었다.

쨍-!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단검이 부서진다. 동시에 보호막 역시 크게 손상되며 출렁였고, 그 틈새로 번개처럼 손을 넣은 라온이 데임의 목덜미 옷깃을 낚아챘다.

헛, 하는 놀란 소리와 함께 라온의 몸 전체에서 청백색 빛이 아지랑이처럼 타올랐다. 그리고 데임이 보는 세상이 뒤집혔다.

쾅!

"컥···!"

호되게 메치기를 당한 데임이 숨 막힌 신음성을 낼 때, 라온은 그가 떨어트린 날카로운 단검 같은 도구를 낚아채 그대로 내리찍고 있었다.

목을 노리고 닥쳐드는 칼날을 본 데임의 몸에서 순간 빛을 동반한 폭음이 터졌다.

충격파에 밀려 잠시 허공을 날은 라온이 바닥을 뒹굴다가 벌떡 일어섰다. 데임 역시 전신에 빛을 휘감은 채로 급히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일으킨 전방위 폭발로 난장판이 된 지하실을 둘러보며 이를 갈았다.

"여기 있는 물건들이 얼마나 귀중한지 아느냐?"

"그럼 싸울 장소를 잘못 고르신 겁니다."

"······."

데임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다. 라온이 처음으로 보는 데임의 화가 난, 그리고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어디서 그렇게 싸우는 법을 배웠느냐? 누가 가르쳐줬지?"

"이날을 상상하면서 혼자 배웠지요."

"헛소리!"

데임의 몸을 휘감은 빛이 강하게 명멸하며 그의 양쪽 손으로 이동했다.

"말하기 싫다면, 좋다. 대신 한 가지 물어보마. 어떻게 나를 의심할 수 있었지? 계기가 뭐냐?"

"···작은 의심들이 쌓였을 뿐입니다."

"작은 의심들이라면?"

"바쁘신 분이 규칙까지 어겨가며 직접 신성마법을 가르친다거나, 공교로운 시기에 신드 부제가 사라지고, 그 공교로움을 해소하는 개인적인 일지가 전혀 개인적이지 않은 장소에 우연히 놓여있다거나, 가르침에는 소홀하면서 연구에만 집중하는 모습이라든가······."

데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작 그런 것들로?"

"그리고 무엇보다 감이 안 좋았습니다. 사제님이 저를 대하실 때 진심이라고 느껴진 적이 별로 없었거든요."

"하."

그제야 그는 조금 납득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직감이란 때로 한없이 날카롭지. 그렇게 발동한 직감을 무시하지 않은 건 전부 네 총명함 덕이겠다만, 어쨌든··· 딱히 내 실수는 아니었다는 말이군!"

쾅!

그 순간 기습적으로 뻗어진 데임의 손에서 빛이 번쩍이고 폭음이 터졌다.

한시도 긴장을 놓지 않았던 라온은 그 폭발을 간신히 피하며 다시 달려들었다.

바람이 갈라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빛의 화살이 날아든다. 들고 있던 도구로 쳐내기 무섭게 원래부터 내구도가 약해 보이던 도구의 칼날이 뚝 부러졌다.

라온은 속으로 실수했다고 자책하며 망가진 도구를 즉시 버렸다. 그리고 두 손에 보호 신성마법을 녹여낸 선천마력을 두르고 나머지 화살을 쳐내기 시작했다.

파파파팍!

쾅! 콰과광-!

신기하게도 쳐낸 화살이 즉시 폭발하는 대신 그를 스쳐 지나가 뒤편의 벽과 책장에 부딪히고서야 폭발했다. 정면이 아닌 측면을 흘리듯 쳐낸 덕이었다.

그 놀라운 기예에 경악한 데임이 좀 더 많은 빛의 화살을 쏘아내려 할 때, 라온은 마침 내디딘 발치에 나뒹구는 수정병 하나를 발견하고 즉시 차 날렸다.

데임의 앞까지 날아가 빛의 화살과 충돌한 수정병이 깨져 부서지고, 그 안에 가득 차 있던 '태양그림 꽃가루'가 마력에 자극당해 빛을 번쩍였다.

콰과과광-!!

폭발하는 샛노란 불꽃 사이에서 빛을 휘감은 데임의 신형이 휘청이는 모습이 보였다.

틈을 놓치지 않고 라온은 전력으로 달려가며 중간에 커다란 쇠집게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데임의 전면에 도달하기 무섭게 그것을 몽둥이처럼 휘둘러 머리를 노렸다.

콰직!

어느새 펼쳐졌는지 모를 보호막이 유리처럼 깨지고 일그러진다. 그 너머에서 명백히 겁에 질린 표정의 데임이 보였다.

"가, 감히···!"

콰직-! 콱!

재차 휘둘러진 커다란 쇠집게가 보호막 위를 연신 강타한다. 라온은 데임이 쏘아내는 빛의 화살을 제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절묘하게 피하면서 계속 쇠집게를 내리쳤다.

파사삭-!

그렇게 어느 순간 보호막이 모래벽처럼 깨져 흩어졌다. 이어 거칠 것 없이 떨어져 내린 쇠집게가 데임의 어깨를 박살냈다.

"끄아아악···!"

발작적으로 뿜어지는 빛을 버텨내며 라온은 반대편 주먹으로 데임의 안면을 강타했다. 얇은 핏줄기와 함께 치아 조각 몇 개가 허공으로 튕겨 나간다.

계속해서 추가 공격을 하려던 그는 순간, 전신의 털이 모조리 곤두서는 섬뜩함을 느끼고 몸을 던져 피했다.

고통으로 연신 비명을 내지르는 데임의 몸에서 날카로운 빛줄기 수십 개가 튀어나와 발작적으로 주변 공간을 찢어발긴다. 신성마법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흉포한 모습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가 절규하듯 고함쳤다.

"어찌 이리 잘 싸우는 게야-!!"

두려움을 넘어 분노에 잠식된 핏발선 시선이 라온에게 내리꽂힌다.

"죽어-!!"

신성력의 분배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빛이 화살이 날아들었다. 숫제 화살이 아니라 창이라 불러도 과하지 않을 크기와 기세였다.

꽈릉-! 콰과광-!

라온이 피하고 벽에 날아가 박힌 빛의 창은 사방으로 굉음과 파편을 튀기며 지하 전체를 뒤흔들었다. 벽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이 천장까지 빠르게 퍼져나가는 모습이 썩 심상치 않다.

라온은 데임에게 작지 않은 타격을 입혔지만 결코 결정타라 할 수는 없었다. 분노한 데임은 연신 빛의 창을 날려대는 와중에도 신성마법 치유를 통해 실시간으로 회복하고 있었으니까.

피투성이로 망가졌던 어깨의 뼈가 붙고 근육과 피부가 재생한다. 주먹에 맞아 함몰됐던 광대가 솟아오르고 빠졌던 이빨도 빠르게 자라난다.

하나, 그렇게 상처가 다 재생될 때쯤 이미 마구잡이로 쏘아내는 창들을 피하며 접근한 라온이 쇠집게를 휘두르고 있었다.

데임은 아무리 공격해도 하나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상황에 언제 분노했냐는 듯 다시 공포에 질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과도한 힘을 불어넣은 보호막을 만들었다. 대량의 신성력이 투입된 보호막은 척 보기에 아주 두텁고 견고했다.

그렇게 데임이 조금 안심한 순간.

라온의 손이 보호막 위를 짚었다. 그리고 경악스럽게도 보호막이 단번에 종잇장처럼 뚫려 무너졌다.

크게 부릅떠진 데임의 눈동자에 맹렬한 기세로 날아드는 쇠집게가 가득 들어찼다.

파콱!

살을 찢고 뼈를 부수는 섬뜩한 소리가 터진다. 핏줄기에 섞인 허연 뇌수가 사방으로 튄다. 정수리부터 코까지 쇠집게에 흉측하게 뭉개진 데임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사방을 휘몰아치던 신성력의 잔재는 주인의 통제를 잃고 빠르게 스러져갔다.

라온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생전 처음으로 자신이 죽인 사람을 내려다봤다.

승리의 기쁨과 살인의 충격이 뒤섞여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마법을 구성하는 세 요소는 항시 조화로워야 한다. 염력이라고도 부르는 의지, 그 의지를 담아 초자연적 현상을 일으키는 마력, 끝으로 모든 과정을 매끄럽고 효율적으로 만들어주는 글리프(Glyph)."

라온은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모를 중얼거림을 이어갔다.

"그 마지막 보호 신성마법은 전혀 조화롭지 못했어. 마력만 넘쳤지 의지는 겁에 질려 흔들렸고, 공식이자 그릇인 글리프도 급하게 시전하느라 여기저기 구멍투성이였지."

균형이 깨진 마법은 만약 상대가 그럴 역량만 있다면 언제든지 단번에 파훼하거나 장악하여 역이용할 수 있다.

"전부 당신이 알려준 것들인데······."

라온은 의심이 그저 의심에서 끝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마침내 위험을 극복했다는 안도감 사이에서도, 그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씁쓸함을 느꼈다.

"내 선천마력이 기사의 오러와 비견된다고 당신이 그랬잖아. 그러면 내가 정말로 기사처럼 움직일 수도 있음을 대비했어야지······."

물론 정말로 그렇게 대비했으면 죽은 것은 라온이었을 거다. 이번의 승리는 그저 효율적으로 잘 싸웠기 때문이지, 그가 데임보다 객관적으로 강하기 때문이 결코 아니었으니까.

데임은 죽는 순간까지 가진 힘의 절반도 채 발휘하지 못했을 터였다. 반면 라온은 지금 남은 마력이 일할 정도에 불과했으니, 꽤 아슬아슬했다.

결론적으로 데임은 준비가 부족했고 싸움에도 익숙지 못했다. 반면 라온은 충분히 대비했고 첫 싸움이었음에도 더없이 냉철하면서 과감했다.

그는 처음부터 이길 자신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

아니, 어쩌면 사실 치명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했어도 따라왔을지 모른다. 가진 의심의 진위를 판별하기 위해서.

야속하게도 의심은 사실로 드러났다.

아버지가 자신을 속이고 교단에 팔아넘기려 했을 때처럼, 직감은 이번에도 그에게 진실을 속삭였다.

"하······."

깊은 한숨으로 애써 감정을 떨쳐낸 라온은 주변을 둘러봤다. 싸움이 끝났고, 데임의 말대로라면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의 소란은 외부로 흘러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즉, 전리품을 챙길 시간이었다. 당장 도망쳐야 할 신세가 됐으니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라온은 데임의 시체를 꼼꼼히 살폈다. 단순히 눈으로 훑어보는 것을 넘어 옷을 전부 벗기기까지 했다.

딱히 죽은 자를 모욕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데임은 그런 존중을 받을 자격이 없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앞으로의 여정에 유용할 물건을 다수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그중 하나가 굉장했다.

"아공간 팔찌라니."

책에서 본 바로 아공간 마도구는 못해도 사오십 골드가 넘는다고 했다. 연금술 공방 책임자답게 데임은 꽤 부자였다.

1골드면 자식이 셋 정도 되는 평범한 서민 가정이 한 달을 풍요롭게 지낼 수 있는 금액이니, 사오십 골드가 넘는 마도구를 가졌으면 충분히 부자라고 할만했다.

세상으로(2)

천천히 마력을 주입해 사용법을 숙지하고 성능을 파악하기까지 몇 분 정도 걸렸다.

아공간 팔찌의 넓이는 대략 그가 사용하던 4인용 숙소 정도였다. 데임은 정말로 그를 해부한 후 바로 떠날 생각이었는지 여행에 필요한 온갖 물건이 쌓여있었다. 남은 공간이 절반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라온은 지하실을 돌며 전투의 여파에 휩쓸리지 않은 연금술 재료와 책을 모두 챙겼다.

확실히 챙길 것을 모두 챙긴 후에야 지하실의 출입구로 향했다. 설마 내일 자정에나 열리는 건 아닐지 살짝 걱정했지만, 다행히 안에서 손을 대기 무섭게 바로 열렸다.

그그긍-

묵직한 소리를 뒤로하고 연금술 공방으로 빠져나온 라온은 잠시 익숙한 내부를 둘러보며 묘하고도 우울한 기분에 휩싸였다.

"······."

데임이 자신을 가만 놔두었다면, 그래서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질없는 망상에 젖는 마음을 채찍질하며 그는 조용히 움직였다.

약간의 준비 후 지부를 벗어나서 동쪽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

그그긍-

사제 데임이 부제 라온을 데리고 일찍 전장으로 떠났다고 알려진 그 다음 날 자정.

지부의 책임자인 주교 요안즈가 지팡이를 짚으며 연금술 공방의 숨겨진 문을 열었다. 사제 데임의 것과 똑같은 반지를 통해서였다.

딱- 딱-

지팡이가 석재 바닥을 짚는 소리가 날카롭다. 마침내 계단을 전부 내려가 난장판이 된 지하실을, 그 한쪽에 옷가지마저 벗겨진 채 소지품이 전부 털린 데임의 시체를 본 요안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연락이 늦어지기에 설마했건만······."

그녀는 자신의 백발을 정리하듯 매만지며 주변을 한차례 살폈다. 그런 그녀의 눈에서 백색 신성력이 일렁였다.

일을 망친 범인이 누군지는 뻔하다. 라온이라는 녀석이 아니고서야 지금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으니까.

하나 그녀는 범인을 아는데도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일단 이곳에서 벌어지던 인체실험은 교단의 위층에서도 알고 있다. 심지어 이곳 지부에서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일이 아무나 알아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었다.

인체실험은 윤리도덕적으로는 물론 법적으로도 금지된 지 오래다. 단순히 금지된 것을 넘어 만인의 지탄을 받을 극악한 범죄로 여겨진다.

그러니 만일 이 일이 소문으로라도 퍼진다면 신성교의 위신에 작지 않은 흠집이 생길 터였다.

따라서 설령 같은 교단의 인원이라도 되도록 이 일의 경위를 몰라야 하는데, 바로 그렇기에 '제대로 된 조치'의 가장 첫 번째 단계이자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하는 공개수배가 불가능했다.

교단을 도와준답시고 다른 세력이 개입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더더욱.

소규모 추적대라도 보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요안즈는 곧 고개를 저었다.

어린 나이에 혼자서 사제를 죽인 녀석이다. 소규모 추적대로 잡으려면 믿을 수 있고 실력 있는 정예를 골라 보내야 할 텐데, 이 작은 지부에선 적당한 인물이 없었다.

그녀의 생각에 차라리 그냥 놔두는 게 가장 깔끔했다.

어린애가 뭐라 떠들고 다니든 증거도 없이 누가 믿겠는가? 똑똑하다고 소문난 녀석이니 도망자 주제에 함부로 입을 놀리지도 않을 테고.

"피라미라서 산 줄 알아라."

작게 중얼거린 요안즈는 이 일을 위층에 어찌 보고할지 고민하면서 가볍게 손을 털었다. 이후 즉시 몸 돌려 지하실을 나섰다.

털어낸 손에서 휘날린 작은 백색의 불씨가 데임의 시체에 내려앉은 순간, 화려한 빛이 타오르며 시체와 주변 모든 흔적을 불살라 지우기 시작했다.

@

라온은 새삼 정화 신성마법의 유용함을 체감했다.

정화의 범위에는 상당히 많은 것들이 포함된다. 더러움, 질병, 독, 저주까지.

죽어버린 사제 데임의 설명에 의하면 그 모든 것은 일종의 '부정함'이었다.

더러움은 사람의 기분과 건강을 해치는 부정함이요, 질병은 목숨까지 위협하는 부정함이며, 독은 질병보다 더 직접적이고 악랄한 부정함이고, 저주는 악독한 효과를 지닌 마법적인 부정함이다.

그렇기에 정화해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 라온이 유용함을 체감하는 범위는 바로 더러움에 대한 것이었다.

여행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흔히 여행의 고됨이라 하면 떠올리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오래 걸으며 몸을 움직이는 체력적인 힘듦이고, 다른 하나는 위험한 들짐승 혹은 괴물을 마주치는 신변의 위험이다.

하지만 직접 여행을 해보면 앞의 두 가지 못지않게 고된 부분이 바로 위생이었다.

흙투성이 손으로 찝찝한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고, 떡진 머리가 가려워 긁어도 잠깐 시원할 뿐이며, 땀 흘려 끈적이고 냄새나는 옷을 입고 잠자리에 든다.

소변은 몰라도 대변을 본 후에는 그 뒤처리가 고역이며, 흙먼지를 뒤집어쓰면 안 그래도 땀으로 끈적이던 피부에 검은 땟자국이 생기고, 괴물을 만나 전투를 벌인 후엔 그 피를 어떻게든 닦아내야 한다.

그 모든 것들이 사람의 신경을 갉아 먹어 지치게 만든다.

여행자는 때로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지친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중간에 냇물이라도 발견하면 환장해서 달려드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 모든 불편함을 라온은 정화 마법 하나로 해결할 수 있었다.

덕분에 라온은 챠크 백작령으로 향하는 상단에 합류하고서 아주 귀한 대접을 받았다.

"음······."

나무 아래에 앉아 겉보기와 달리 꽤 짭짤하게 맛있는 스튜를 먹으며, 라온은 잠시 어두워지는 하늘을 살폈다.

이들과 만나게 된 건 이틀 전이었다.

라온은 아공간 팔찌에 들어있던 적당한 의복을 입고 신성교의 수도자 행세를 했고, 상단으로선 정말로 수도자 느낌이 나면서 별로 위험해 보이지도 않는 그를 흔쾌히 합류시켜줬다.

해서 라온은 보답으로 자신 역시 그 효용을 느끼고 있던 정화 마법을 몇몇 사람에게 사용해줬다.

그렇게 바로 다음 날.

상단 행렬 전체에 소문이 퍼져 라온을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졌다. 라온은 그들을 냉대하지 않고 가능한 선에서 정화의 쾌적함을 선사해줬고······.

일개 수도자로 행렬의 꽁무니에 합류를 허락받았던 라온은, 상단주의 마차에 앉아 이동하는 특권을 얻었다.

"레인 수도자님, 다 드셨습니까?"

상념을 깨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상단의 호위 책임자인 도틈이라 불리는 중년인이었다. 레인이라는 이름은 당연히 라온이 댄 가명이었다.

"예. 도틈 씨가 향신료를 쓰셨다던데, 덕분에 맛있게 먹었습니다."

"기분 좀 냈지요. 예정대로라면 내일은 마을에서 쉴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도틈의 기분은 상당히 좋아 보였다.

"제가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드린다 했죠?"

"용병단에서 일한 이야기요."

"아아, 그랬죠. 그게 대략 7년 전 이야기인데······."

도틈이 차분하지만 즐거운 기색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렇듯, 라온은 정화 마법을 써주는 대신 그들의 경험을 들었다.

경청할 준비가 된 사람에게 자신의 인생사 일부를 떠들어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틈도 예외는 아니었다.

라온은 정말로 진지하게 도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정도의 자기방어적 왜곡과 과장이 섞여 있으리라는 가정을 해도, 그건 세상 경험이 부족한 라온에게 꽤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잘 시간이 될 때까지 도틈의 이야기를 들은 라온은 감사의 표시로 정화 마법을 써줬다.

이후 그는 상단주의 마차로 향했다.

상단주는 탄가드라는 이름의 노인이었는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주 건강했다.

그의 마차는 한 번에 서너 명이 잘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덕분에 라온은 밤이슬 맞으며 어설픈 침낭 속에서가 아닌, 비교적 아늑한 마차 내부에서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오늘은 누구랑 대화를 하셨소?"

"오늘도 도틈 씨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용병단에서 있으실 때 고생을 많이 하신 듯하더군요."

"아, 그 친구의 그때 이야기는 나도 많이 들었지."

라온은 이번엔 상단주와 이런저런 한담을 나누다가 정화 마법을 걸어주고는 잠을 청했다.

지부에서 도망치며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더 편하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

약 보름에 걸친 여정을 통해 라온은 무사히 챠크 백작령에 도착했다.

잠깐이지만 충분히 즐겁게 교류했던 탄가드의 상단을 뒤로하고, 그는 우선 마을 으슥한 곳으로 이동해 옷을 갈아입었다. 수도자가 아닌 평범한 여행자 혹은 모험가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튼튼한 가죽 부츠, 질기고 실용적인 상하의, 무기를 포함한 이런저런 도구를 거치할 수 있는 벨트, 급소 부위에 금속판이 박혀 방어도를 올린 가죽 흉갑, 어깨서부터 뒤로 늘어진 후드 달린 망토.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감이었고 그게 검은색 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라온과 꽤 잘 어울렸다. 전부 아공간 팔찌에 있던 것으로 원래 데임이 자신을 위해 준비한 것들이었는데, 라온에게도 그럭저럭 크기가 맞았다.

환복을 마친 라온은 도시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금방 한계에 봉착했다.

도시가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복잡했다.

"여기 무기를 파는 대장간이 어디 있습니까?"

길을 지나는 행인들에게 몇 번 그런 질문을 던져봤지만, 답변은커녕 전부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그제야 라온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평범한 여행자 따위에게 별로 친절하지 않았다.

만약 복장을 갈아입지 않고 여전히 수도자 행세를 했다면, 짐작건대 완전히 다른 반응을 마주했을 것 같았다.

'이게 신성교의 영향력인가······.'

잠시 의기소침해졌던 라온은 그래도 굴하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러다 한 남자가 마침내 반응했다.

"이보쇼. 길을 모르면 성문 근처에서 안내인 꼬맹이라도 고용하든가 해야지. 대뜸 대장간이 어디냐고 물으면 뭐 어떻게 알려주라고? 직접 데려다 달라고? 아니면 내가 대충 저기라고 가리키면 알아서 찾아갈 수 있소?"

"아, 성문 근처··· 감사합니다."

남자는 잠시 라온을 쳐다보다 피식 웃고는 지나쳐갔다.

'길 안내를 하는 아이들이 있었구나.'

탄가드의 상단과 함께 성문을 통과했던지라 전혀 몰랐다. 라온은 기억을 더듬어 즉시 성문으로 향했다.

과연, 성문 안쪽 광장 한곳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매의 눈으로 살피는 아이들이 보였다. 라온이 접근하자 그중 한 아이가 우연히 시선이 마주치더니 쪼르르 달려왔다.

"여행자님, 혹시 길 안내가 필요하신가요?"

대충 10살이 조금 넘은 듯한 아이였다. 라온은 자신의 어릴 적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를 파는 상점이나 대장간, 그리고 적당히 싸고 좋은 여관을 찾고 싶은데."

"제가 둘 다 알아요. 두 곳이니까 4코퍼만 주세요."

4코퍼?

눈치로 짐작해보건대 절대 싼 가격은 아니었지만, 아공간 팔찌 안에 상당한 돈을 가진 라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신 정말 좋은 곳으로 안내해줘야 한다. 일단 1코퍼만 주고, 안내가 끝나면 성과에 따라 3코퍼를 마저 줄게."

"좋아요!"

아주 신나서 대답하는 걸 보면 역시 싼 가격이 아니었다.

반응을 보고 나중에 값을 후려치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라온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앞장서는 아이의 뒤를 따랐다.

세상으로(3)

라온은 며칠간 낯선 도시에서의 생활에 적응하려 힘썼다.

단순히 여관방에만 처박혀 있어선 아무것도 되지 않기에,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며 도시의 구조를 파악하기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니는 라온의 허리춤엔 평범하지만 꽤 괜찮은 품질의 장검과 단검이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첫날 아이의 길 안내를 통해 방문한 무기점에서 구매한 물건이었다.

어제는 잡화점에서 지도도 샀다. 아공간 팔찌에 데임이 마련해놓은 지도가 하나 있긴 했지만, 이 지방의 것이 아니라 새로 구매해야 했다.

도시 사람들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걸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금방 갔다. 점심을 대충 걸렀기에 라온은 배고픔을 느끼며 여관으로 돌아왔다.

여태 그랬듯,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주문했을 때였다.

"합석해도 될까?"

라온보다 살짝 더 나이가 많은 듯한 한 청년이 웃으며 앞에 섰다. 차림새는 라온과 크게 다를 바 없어 여행자 혹은 모험가로 추측됐고, 금발에 금안이 주는 느낌 때문인지 부자처럼 보였다.

"무슨 일이신지?"

"별 건 아니고, 그쪽도 나랑 같은 처지인 듯해서. 그리고 그냥 말 놔. 비슷한 나이로 보여서 편하게 말 건 거니까."

초면인데도 꽤 격의 없이 구는 태도에서 악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라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라온의 수락에 그는 바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같은 처지라는 게 정확히 뭘 말하는 거야?"

"교류제 기다리는 거 아니야?"

"그게 뭔데?"

"허, 아니라고?"

그는 정말로 의아하다는 기색이었다.

"너 하이랜더 맞지?"

"···맞아. 어떻게 알았어?"

"뭘 어떻게야? 그냥 딱 보면 알지. 근데 교류제를 모른다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그가 갑자기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통성명을 안 했네. 테이엘이야."

"···레인."

라온은 전에 썼던 가명을 댔다. 라온이라는 이름이 꽤 흔하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서였다.

"교류제가 뭔지 알려줘?"

"알려주면 고맙지."

"그래? 아, 근데 갑자기 배가 고프네."

그런 테이엘의 능청에 라온은 지나가던 종업원을 불러 음식과 술을 주문했다.

"그래서, 그게 뭔데?"

"하이랜더를 위한 축제이자 시장이랄까? 4년 간격으로 열리는데 그게 올해야. 대략 두어 달 정도 남았고 여기 동문 밖 평원에서 열려."

예상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야기로 느껴졌다.

곧 음식이 나왔고 라온은 식사를 하며 테이엘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와, 너 진짜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덕분에 하이랜더로서의 상식이 한참 부족하다는 사실을 들키고 말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라온은 좀 더 적극적으로 질문했다.

"두어 달이나 남았으면 너무 일찍 온 거 아니야?"

"일정 계산을 잘못했거든. 너도 나랑 같은 처지인 줄 알았어. 뭐, 어차피 공부해야 할 것도 많은데 집에서 하나 여기서 하나 똑같긴 해."

"뭘 공부하는데?"

"스크롤 제작술."

라온의 눈이 반짝였다.

스크롤은 마력만 있으면 배우지 않은 마법이라도 쉽고 빠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마도구의 일종이다.

여러모로 유용할 수밖에 없는지라, 신비학 영역에서 스크롤 제작술은 연금술과 비교해도 위상이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네 스크롤 제작술 실력은 어때?"

"그리 대단치는 않아. 그냥 몇 가지 마법만 간신히 담아내는 수준이랄까. 그러니까 공부한다는 거지."

잠시 고민하던 라온이 말했다.

"너 혹시 연금술 할 줄 알아?"

"아니. 왜?"

"그럼 나랑 거래하자. 나한테 스크롤 제작술 기초를 가르쳐줘. 대신 나는 연금술 기초를 가르쳐줄게."

테이엘은 예상치 못한 제안에 살짝 당황한 듯했다. 눈을 굴리면서 포크로 소스 묻은 돼지고기 한 점을 찍어 먹고는 술잔을 들어 목도 축인다.

"네 연금술 실력은 어떤데?"

"기초는 확실하다고 자부해."

"흐음, 연금술이라······."

그는 조금 구미가 당기는 기색이었다.

하이랜더로서의 상식이 부족한 라온조차 연금술 비약의 중요성을 잘 안다. 즉, 이건 테이엘의 입장에서 정말로 괜찮은 거래였다.

"좋아. 장소는 내가 대충 알아볼 테니까, 내일 여기서 이 시간에 다시 보자고."

"그래."

라온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

@

라온과 테이엘의 거래는 객관적으로 따지면 라온이 살짝 손해였다. 아무래도 스크롤 제작술보단 연금술이 더 가치 있게 여겨지니까.

하지만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라온은 아주 편하고 효율적으로 쓸만한 지식을 얻은 셈이었다.

교류제가 열리기 보름 전쯤엔 서로 기초를 전부 가르칠 수 있었는데, 테이엘과는 그때 헤어졌다. 서로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라온은 도시 중앙의 커다란 도서관에서 돈을 내고 기간제 카드를 받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예 거기서 살았다.

많은 이들에게 개방되는 도서관인 탓인지 유용한 책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지식은 지식이었다.

교류제 며칠 전부터는 동쪽 성문 밖 평원에 교류제를 위한 터가 닦이기 시작했다. 하이랜더가 직접 건설하는지라 그 속도가 무시무시했다.

그때부터 라온은 도서관 가는 일을 멈추고 즐겁게 건설과정을 감상했다. 그 역시 공부의 일환이었으니까. 함께 구경하는 이들이 꽤 있어서 가끔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그렇게 교류제가 열리는 날.

아침을 든든히 먹은 라온이 성을 나섰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을 부지런히 걸어서야 교류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작 며칠 만에 지어졌다고는 믿기 힘든 거대한 입구 안쪽, 질서정연하게 지어진 상점가 거리와 그곳을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람이 보였다.

하이랜더가 이렇게나 많다니.

여기 있는 이들 중 대다수가 라온 자신과 비슷하거나 더 뛰어난 힘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절로 긴장감이 든다. 하지만 그는 겉으로 태연함을 가장하며 상점들을 둘러봤다.

걱정과 달리 사고도 없었고 의외로 많은 물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신성교 지부와 이곳 도서관에서 읽은 책들의 공이 컸다.

'역시 책이야말로 모두의 스승이지.'

그런 생각을 해서인지, 라온의 발걸음은 책을 파는 상점 앞에서 절로 멈췄다.

과연 하이랜더에게 팔려고 내놓은 책들은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한 권에 얼마입니까?"

"책에 따라 다르지요."

"이거는요?"

라온이 '아티팩트 식별과 귀속화'라는 제목의 책을 가리켰다.

아티팩트는 마도구를 뛰어넘는 수준의 물건을 뜻하므로 지금의 그가 꿈꾸기엔 너무 이르다. 하지만 이 책의 핵심은 식별과 귀속화에 대한 정보였다.

"3골드입니다."

"음······."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라온은 가진 돈을 다시 세봤다.

"혹시 할인은···?"

서른 정도로 보이는 상점 주인이 피식 웃었다.

"일단 사고 싶은 것부터 골라보시오. 봐서 깎아드릴 테니."

갑자기 말이 짧아졌지만, 어쨌든 할인해 준다니 라온은 개의치 않고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처음 가격을 물은 책을 포함해 두 권을 더 골랐다.

각각 '마법진의 기초'와 '글리프 없는 원시마법'이었다.

"마법진의 기초는 인기 있는 책이라 깎아줄 수 없고, 나머지 둘은 조금 깎아드리지. 다 합쳐서 14골드만 주시오."

라온이 가진 재산의 절반이 조금 넘는 액수였다. 그래도 일단 사겠다고 마음먹은 물건인지라 그는 흔쾌히 값을 치렀다.

"교류제는 처음이신 모양이군."

"네. 어떻게 아셨어요?"

"누구라도 알 거요. 나이도 아주 젊어 보이고 5골드도 안 되는 물건을 할인해달라 하셨으니까. 사실 그건 암묵적 규칙을 어기는 거거든."

"아, 몰랐습니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값을···."

"됐소. 내가 깎아드린다고 했는데 뭘. 이것도 인연이니 다른 암묵적 규칙도 알려드리리다."

사내는 느긋하게 그 암묵적 규칙이란 걸 설명했다.

되도록 골드로만 거래하고, 5골드 미만의 물건은 값을 흥정하지 않으며, 구매한 물건은 이번 교류제에선 되팔지 않는다.

"이 셋만 알아도 거래하다가 욕을 먹진 않을 거요."

"감사합니다."

"한 번 둘러보고 다시 오시오. 사고 싶은 책이 더 있을 테니까."

너무 속내를 드러냈구나. 만약 상대가 깐깐한 성격이었으면 이미 사고 싶다는 열망을 내비친 자신에게 할인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살 게 뻔하니까.

작은 깨달음을 곱씹으며 라온은 정중히 인사하고 계속해서 상점들을 둘러봤다.

그러다 조금 특이한 모양의 펜던트 여덟 개를 파는 상점 앞에서 멈춰 섰다. 줄은 평범했지만 펜던트의 핵심인 보석 부분이 흡사 말안장을 작게 축소한 듯한 형태였다.

"유령마 소환 마도구인데, 하나 필요하신가?"

라온의 눈빛을 읽은 것처럼 이제 노년으로 접어드는 나이의 여성 주인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제대로 된 사령마법으로 만들어서 이 핵이 파괴되지 않으면 죽지 않아. 햇빛 아래서 조금 느려진다는 점만 빼면 그냥 말보다 훨씬 낫지."

설명과 함께 주인은 말안장 모양을 닮은 펜던트 본체를 툭툭 건드렸다.

"얼마인가요?"

"80골드. 만약 실런티움으로 거래하면 7실룸에 팔지."

라온은 나오려던 헉 소리를 삼켰다.

책을 사고 남은 재산이 13골드가 약간 안 되니 도저히 살 수 없는 가격이었다. 실룸, 그러니까 실런티움 동전은 여태 말로만 들었지 본 적도 없는 귀물이었고.

"다른 곳도 좀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그러쇼."

상점 주인은 라온의 사정을 눈치챘는지 바로 신경을 꺼버렸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그는 생전 처음 돈 욕심을 느꼈다.

돈이 충분하면 원하는 책도, 방금의 유령마도, 앞으로 보게 될 다른 흥미로운 물건도, 원하는 대로 가질 수 있을 테니까.

교류제는 두 달 정도 연속해서 열린다. 한데 첫날인 오늘 가진 재산의 반을 써버렸으니, 자칫하면 남은 기간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손가락만 빨게 생겼다.

물론 그냥 둘러보면서 식견을 늘리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겠지만 너무 아쉽지 않은가?

고민에 빠져 걷던 라온의 눈에 여러 마법재료를 파는 상점이 들어왔다. 약초, 종이, 가죽, 기름, 광석, 기타 등등.

연금술로 포션을 만들어 팔아볼까?

하지만 아는 레시피가 신성교의 포션뿐인데, 아무리 용감해도 이런 곳에서 신성교 비전의 포션을 팔아댈 수는 없다. 자신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건 자살행위였다.

그렇다면 스크롤은 어떨까?

테이엘에게서 기초를 확실하게 배웠다. 그리고 스크롤 제작술은 연금술과 달리 자신이 사용할 줄 아는 마법을 그대로 레시피로 삼을 수 있다.

탄가드 상단과 동행했던 경험을 떠올려보면 정화 신성마법의 인기가 가히 대단했다.

그러니 더러움만 씻어내는 쪽에 집중해서 신성마법의 느낌을 최대한 죽이고, 한 번에 모든 힘을 방출하는 단발형이 아닌 서서히 힘을 소모해 여러 번 발동할 수 있는 지속형 스크롤을 만들 수 있다면······.

가격을 한 장에 1골드로 책정하면, 그리고 지속형 스크롤의 사용횟수를 기초지식을 바탕으로 약 10번이라 가정하면, 1회 사용에 1실버인 셈이다.

아무것도 없는 야외에서 몸과 의복과 장비의 더러움을 즉시 완벽하게 씻어내는 대가로 1실버? 조금 비싸지만 돈이 많은 하이랜더라면 충분히 지불할 수 있지 않을까?

일단 비슷한 물건이 있는지부터 파악해야겠다.

라온은 마법재료를 파는 상점의 위치를 기억하곤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교류제(1)

결과적으로 비슷한 물건이 있었다.

사람의 생각은 전부 비슷하고 마법은 필요에 의해 탄생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더러움을 씻어내는 마법이 정화가 유일할 리 없었다.

위생을 위해 사용되는 가장 유명한 '마력 세척'이라는 마법이 있었는데, 바로 그 마법이 담긴 마도구를 파는 상점이 두 곳 있었다.

상점 주인의 설명에 따르면 액체화한 마력이 빠르게 진동하며 오염을 씻어내는 원리라고 했다. 시전자의 마력 특성을 가리지 않고 소모도 낮으면서 효과도 좋지만, 배우기가 까다롭다고.

얼마나 까다로운지는 몰라도 그 덕분이랄지 마도구는 상당히 비싼 가격을 자랑했다.

그러니 스크롤의 경쟁력은 충분했다. 제대로 만들 수만 있다면.

라온은 망설이지 않았다. 설혹 실패한다 해도 어차피 남은 돈으로는 책이나 몇 권 살 수 있을 뿐이다.

지금이 아니면 대체 언제 도전할 수 있겠는가?

하여 그는 약 4골드 어치의 마법재료를 구매해 곧장 여관방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용감하게 스크롤 제작에 들어갔다.

과정은 복잡하면서도 정교했다.

우선 흑뿔소 아교를 뭉근한 불에 중탕으로 녹인다. 이후 하급 마력석을 곱게 빻아 숯가루와 함께 정확한 비율로 섞고, 녹인 아교와 함께 반죽하면 약간의 탄성을 가진 말랑말랑한 고체가 만들어졌다.

그것을 잉크스톤(Inkstone)이라 부르는 흑석 그릇에 유리꽃 기름을 살짝 부어 열심히 갈면, 스크롤 제작자의 의지를 담을 수 있는 특수한 마법잉크로 완성되었다.

다음 과정은 황색 포식나무껍질 종이에 파도풀 줄기 액즙을 붓으로 도포하고, 하피(Harpy) 깃펜 끝에 앞서 만든 잉크를 묻혀 정화 신성마법의 글리프 일부를 그려내는 것이었다.

바라는 효과는 오직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뿐이니 전부 그릴 필요는 없다. 애초에 그러기엔 마법재료의 수준이 높지도 않았고.

지속형 스크롤을 위한 기본적인 형식에 맞춰서, 한 획을 그릴 때마다 흔들림 없이 필요한 의지를 담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글리프 새김을 마친 후.

잠시 잉크가 마르길 기다렸다가 붓에 유리꽃 기름을 발라 얇게 도포했다. 그려진 글리프 문양의 흐트러짐을 막고 성능의 안정성을 높이는 마무리 과정이었다.

"······."

완성된 스크롤을 바라보며 라온은 실패를 직감했다.

겉보기엔 그럴듯했지만 아무래도 처음 하는 일이라 실수가 잦았다. 특히 의지를 담아내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다.

시범 삼아 스크롤에 마력을 불어넣자 아니나 다를까, 그려진 글리프에서 청백색 마력이 흐르다 끊기길 반복하며 그저 깜빡이기만 했다.

'젠장.'

안타깝다.

하지만 좌절감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스크롤은 종이에 담겨 발동이 유보된 마법이다. 마력을 품은 마력석 가루 섞인 잉크에 의지를 담아 글리프를 그려내니, 마법의 세 요소를 충족한다.

비슷한 식으로, 연금술 비약도 액체에 담겨 발동할 때를 기다리는 마법인 셈이었다. 아티팩트도 마찬가지고.

전부 마법의 정의를 어떻게 두는가에 달렸다. 모든 초자연적 현상을 마법이라 한다면, 주문이든 포션이든 스크롤이든 아티팩트든 전부 마법을 사용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니 스크롤 제작이라고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제작술의 기초를 알고 담으려는 마법을 알고 있으니 노력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그는 묵묵히 망한 스크롤을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새로운 종이를 앞으로 가져왔다.

다시 한 번, 깃펜이 잉크를 담아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

라온은 일주일 넘게 여관방에 처박혀 스크롤만 만들었다.

4골드어치 마법재료 중 절반을 실패로 날렸지만, 그 후로는 슬슬 제작에 성공하는 스크롤들이 나타나 그를 흡족하게 했다.

모든 마법재료를 소모하고 다시 시장에서 사 왔을 땐 제작 성공률이 7할을 넘길 정도였다.

스크롤의 이름은 간단하게 '청결'이라고 붙였다.

약 보름에 걸쳐 모든 마법재료를 소모했을 때, 성공적으로 만들어진 스크롤은 무려 120장을 넘겼다. 전부 판매한다면 유령마 소환 마도구를 사고도 무려 40골드 이상 남을 것이다.

'다 팔 수 있다면 말이지만.'

긴장과 기대가 섞인 마음으로 그는 스크롤을 챙겨 여관을 나섰다.

교류제에는 세 가지 종류의 상점 건물이 있다. 라온은 그중 '인증 상점'의 자리를 빌릴 생각이었다.

챠크 백작가 소속 관리에게 필요한 검증을 받고 이용료까지 내야 장사를 할 수 있는 건물로, 그렇게 구매자에게 최소한의 신뢰를 보장하는 곳이었다.

만약 이용료가 아깝다고 무인증 상점에 자리를 잡는다면 득보다 실이 클 것이다. 개나 소나 그의 스크롤 품질을 의심하거나 아예 관심조차 주지 않을 테니까.

잠시 후.

라온은 이음새 하나 보이지 않는 통짜 석제 건물에 도착했다. 대지계 마법의 산물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삐 일하던 하이랜더 중 하나가 라온을 맞이했다. 젊은 남자로 꽤나 신경질적인 태도였다.

"청결 스크롤이라, 대략적인 원리가 뭐죠?"

"신비계 마법이라 글리프를 공개하지 않고는 원리 설명이 난해합니다."

"흠, 그래요? 그럼 각 스크롤당 품질 편차는요?"

제법 까다로운 검증이 이뤄졌다.

그 와중 무작위로 골라진 스크롤 몇 장이 검증용으로 그냥 사용되었다. 당연히 돈은 못 받았고 되레 인증 상점 이용료를 내야 했다.

비상금으로 남겨뒀던 1골드가 그렇게 사라졌다. 겨우 하루를 빌리는 대가로.

'만약 오늘 한 장도 못 판다면······.'

내일부터는 상황이 암울해질 것이다.

라온은 어쩔 수 없는 초조함을 안고 인증 상점으로 향했다. 충분히 팔릴만한 물건이라 생각하지만,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도착한 상점 건물 안쪽에서 가판대에 스크롤들을 올려두고 판매를 시작한 지 몇 분 후.

그는 자신이 하이랜더들의 재력과 씀씀이를 얕봤음을 깨달았다.

"이게 뭐요?"

"청결 스크롤입니다. 한 장에 십여 번 정도 사용 가능하고, 효과는 이름대로 더러움을 씻어내는 겁니다."

"오호, 이런 것도 있구만."

인증 상점에서 판매하는 덕에 성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이 그냥 흥미롭다는 식으로 지나갔지만, 그러다 한 여성 마법사가 구매욕을 드러냈다.

"마력 세척과 비교하면 어때요?"

"더 빠르고 편하고 효과적이라고 자부합니다."

"한 장에 열 번 정도 사용할 수 있다고 했죠?"

"스크롤마다 횟수 한두 번 정도 편차는 있습니다."

"일단 하나 줘봐요."

1골드를 받고 스크롤을 한 장 건네자 여성 마법사는 바로 사용했다.

그녀의 몸을 감싸며 흰색 아지랑이가 잠시 타오르는가 싶더니, 꽤 놀랍고 만족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당장 몸이 더럽지 않아도 사용하는 순간 상쾌함을 느꼈을 것이다. 정화 신성마법을 자주 사용해 본 라온은 그 느낌을 아주 잘 알았다.

"괜찮네?"

그렇게 말한 그녀는 품속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은빛 동전 3개를 꺼내 들이밀었다.

라온은 그것이 실런티움 동전임을 바로 알아봤다. 스크롤 제작 재료를 구하면서 두어 번 구경해 본 덕이었다.

"실룸이니까 35장 줘요."

"그러지요."

제국법상으로는 10골드에 1실룸이지만, 시중에선 여러 가지 이유로 12골드에 1실룸으로 계산하는 편이다. 그러니 라온에겐 전혀 손해가 아니었다.

성공적으로 첫 판매를 마친 라온은 기분이 좋았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않았는가.

그는 생전 처음 손에 쥔 실런티움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서늘한 감촉을 즐겼다. 슬쩍 마력을 흘려 넣자 은은하게 빛을 뿜어내는 것이 매우 아름다웠고, 테두리와 표면에 새겨진 제국 조폐국의 정교한 용 문양은 눈을 즐겁게 했다.

손님은 많지는 않지만 꾸준하게 왔다. 그리고 스크롤 20장 정도를 구매하며 대놓고 속내를 밝히는 자도 있었다.

"이 스크롤에 담긴 마법, 내가 개인적으로 연구해서 써도 되는 거겠지?"

"안 된다고 하면 안 하실 겁니까?"

그에 중년 남자는 껄껄 웃으며 돈을 지불하고 떠났다.

걱정은 전혀 되지 않았다. 스크롤 제작술에는 당연하게도 글리프에 여러 속임수 문양을 추가해 보안을 챙기는 기법이 존재한다. 그저 스크롤만 보고서 마법의 원형을 파악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래도 실력이 있으면 열화판으로나마 마법을 추출할 수 있을 테지만, 그때는 여러모로 정화 신성마법과 크게 달라졌을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 초조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라온은 해가 지기 전 모든 스크롤을 팔고 자리를 뜰 수 있었다.

5실룸 57골드라는, 처음 갖고 있던 재산의 4배가 넘는 거금을 가진 채였다.

@

교류제는 중반을 넘어 슬슬 후반으로 접어들었다.

라온은 교류제를 시장으로만 이용했지만, 사실 이 교류제의 핵심은 하이랜더끼리 실력을 겨루는 대회였다.

승패에 상관없이 눈에 띄어 주최자인 챠크 백작가나 다른 명망 높은 세력에 영입되기 위한, 따라서 경쟁이 매우 치열하고 그만큼 볼만할 수밖에 없는 흥미로운 대회.

하이랜더에게 뒷배경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크고 유명한 세력은 무릇 하이랜더를 강하게 육성하는 온갖 지식과 수단을 가졌기 마련이니까.

물론 라온은 대회에 나갈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도망자 신세임을 잊지 않았다.

하여 여태까지처럼 시장에서 식견을 늘리는 데 열중하던 중, 문득 처음 책을 구매했던 상점이 떠올라 그곳으로 향했다.

"안 오실 줄 알았는데?"

상점 주인은 용케 그를 기억하곤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라온도 마주 인사하곤 돈이 부족해 포기했던, 그리고 여태까지 안 팔린 책을 전부 집어 들었다.

로암달 황실 편찬 대륙 몬스터 도감.

비전성 편찬 마법재료 도감.

상태변화 및 융합촉진을 통한 마도구 제작과 수리.

초감각 마법서.

유용한 기초 생활마법 모음 10선.

"27골드인데, 괜찮겠소?"

"여깄습니다."

라온이 흔쾌히 돈을 건네자 그는 의외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 깎아달라며 쩔쩔매던 청년이 갑자기 돈이 어디서 났는지 궁금할 터였다.

잠시 뭔가를 고민하던 상점 주인은 별안간 2골드를 돌려줬다.

"25골드로 하자고."

"아··· 감사합니다."

"내가 자네 나이일 때는 집에서 빵만 축내고 있었는데 말이야."

역시 좋은 사람이구나.

라온은 몇 번을 더 감사하다고 인사한 후 책을 아공간 팔찌에 넣으며 자리를 떴다.

향하는 곳은 인상 깊었던 유령마 마도구를 파는 상점이었다.

@

"유령마 소환 마도구인데, 하나 필요하신가?"

노년 초입의 여성 상점 주인은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말을 던져왔다. 다만 물건의 개수는 여덟에서 둘로 줄어있었다.

그간 식견을 기른 라온은 그 금속제 펜던트에 특수한 마법금속이 함유됐음을 알아챘다. 과연 비싼 이유가 있었다.

"얼마죠?"

"80골드. 실런티움으로 거래하면 7실룸에 팔고."

그러더니 둘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한다.

"근데 이건 50골드에 팔겠네. 실런티움으로는 4실룸에."

"왜죠?"

"불량품이거든."

주인의 눈동자에 얼핏 안타까움이 스쳤다. 아무래도 그냥 만들다 실수해서 나온 불량품이 아닌 듯했다.

교류제(2)

"괜찮으시면 관련된 이야기를 좀 듣고 싶은데요."

"왜?"

"어떤 식의 불량품인지 알면 제가 살 수도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불량품이면 잘 안 팔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게 잘 설명해서 한 번 팔아봐라, 재고가 되면 그게 고스란히 손해이지 않으냐.

라온의 의도를 읽은 주인은 별 고민하지 않고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령마를 만들려면 되도록 좋은 품종의 말을 찾기 마련이지.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마법재료 값이 만만찮거든. 최소한 군마로 써도 문제가 없을 정도는 돼야 쓰기도 좋고 팔기도 좋으니까."

어설프게 만들면 돈은 돈대로 들고 써먹기가 애매해서 잘 안 팔린다는 뜻이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그런 말을 구하기가 어디 쉬운가? 설령 구할 수 있어도 그래서야 쓸데없이 비싸지기만 하지. 어차피 죽여서 유령마로 만들 거라면 더 좋은 방법이 있단 말이야."

"그게 뭐죠?"

"적당한 품종의 말을 이런저런 포션을 먹이면서 키우는 거지. 그렇게 키우면 성질이 난폭해지고 수명도 짧아지지만, 어차피 죽일 거니까."

아주 똑똑한 방법이었다. 그런 식의 부작용을 감수하는 포션은 싸고 쉽게 대량으로 만들 수 있다.

"한데 이 마도구 제작에 쓰인 말은 혈통에 조금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야. 죽이기 전엔 아주 뛰어난 모습을 보여서 기대가 컸는데, 정작 유령마로 만들고 보니 힘이 팍 죽었거든."

"이유가 뭐였죠?"

"말했듯이 혈통 문제라고 짐작할 뿐이야. 아마도 신성력과 비슷한 힘을 품은 혈통이었겠지. 그러니 상극인 사령마법으로 되살리자 쇠락한 거고."

신성력 비슷한 힘을 품은 혈통이라.

라온은 조금 고민하다가 물었다.

"얼마나 불량입니까?"

"파는 가격만큼."

"흐음······."

80골드짜리를 50골드에 파는데, 그 가격만큼 불량이라면 거의 반절에 가깝게 성능이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전투상황이나 급히 내달리는 상황만 아니면 50골드 값어치는 충분히 할 거야. 지치지 않고, 먹고 마실 필요가 없고, 다치거나 병들지 않고, 언제든지 역소환할 수 있고······. 아무리 반쪽짜리라지만 평범한 짐말보다야 훨씬 낫지."

하지만 50골드면 평범한 짐말을 열 마리도 넘게 살 수 있다.

조금 더 고민하던 라온이 흥정을 시도했다.

"3실룸에 파신다면 사겠습니다."

"그러지."

"······."

벼락처럼 떨어진 수락에 조금 떨떠름해졌지만, 어쨌든 3실룸이면 충분히 살만하다는 생각에 그는 흔쾌히 값을 치렀다.

@

교류제가 끝나고 몇 달째.

라온은 여전히 같은 여관에 눌러앉아 있었다.

그는 굳이 도시를 떠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신성교에서 그를 잡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니, 자연히 그가 떠돌아다닐 이유도 없어진 셈이었다. 교류제가 끝나서인지 숙박비가 많이 낮아져 부담도 줄었고.

하여 그는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다. 부족한 점이 느껴지면 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가 관련된 지식을 보충하는 나날이었다.

가끔은 성 외곽의 헛간을 빌려 몇 가지 작은 실험을 하기도 했는데, 주로 마법진 설치와 마도구 제작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교류제에서 스크롤 제작술로 큰돈을 벌었던 감각을 잊지 못했다. 지식이야말로 진짜 재산임을 그때 생생하게 느꼈으니, 자연히 뭔가를 배우고 익히는 데 전보다 훨씬 더 열정적이 됐다.

모순되게도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모르는 것 역시 많아졌다. 하지만 시야가 점점 넓어지는 느낌은 그를 심히 즐겁게 했다.

신기하게도 세상은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예를 들면, 몰랐을 때는 그냥 지나치던 풍경도 마법진에 대한 지식이 생기자 이곳이 어떤 목적으로 어떤 원리를 품고 만들어졌는지가 보이는 식이었다.

책으로 식별 마법을 배운 후엔 데임을 죽이고 얻은 전리품을 좀 더 확실하게 감정할 수 있었다.

여태 유용하게 사용하던 아공간 팔찌에 그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기능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작은 벌레를 쫓는 기능이었다.

목걸이는 약간의 독 내성을 부여해줬고, 귀걸이는 큰 소리에서부터 고막을 보호해줬으며, 반지는 추위와 더위를 덜 타게 만들어줬다. 다른 반지 하나는 그저 지부 연금술 공방의 비밀문을 여는 열쇠일 뿐이었다.

목걸이도, 귀걸이도, 반지도, 모두 사용하기 애매한지라 그냥 다시 아공간 팔찌에 수납했다. 나중에 팔 기회가 생기면 돈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이후 그는 귀속화와 상태변화 및 융합촉진 마법을 집중적으로 수련했다.

귀속화는 그 이름대로 특정한 물건에 소유권을 새기는 마법으로, 어느 때건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되고, 타인이 함부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들고, 무엇보다 내재된 특성이나 힘을 좀 더 효율적으로 끌어내는 묘용이 있었다.

상태변화 및 융합촉진은 연금술과 제작술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이는 마법으로, 사실상 그 두 분야에 제대로 입문하려면 필수였다.

이 세 가지 마법을 배우고 나니 그는 한 가지 새로운 발상이 떠올랐다.

'융합촉진 마법으로 마력을 특정 대상에 녹여 넣을 수 있다. 그리고 내 선천마력은 내가 배운 마법을 녹여낼 수 있지. 이걸 연금술과 제작술에 쓴다면······.'

도저히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는 발상이라, 그는 즉시 움직였다.

이후로 아주 바쁘면서 보람찬 나날이 흘렀다.

성과가 없지 않아, 버릴 각오를 했던 첫 번째 실험용 단검에서 유의미한 성과가 나타났다.

일단 그가 의도했던 정화 신성마법의 힘이 성공적으로 깃들었다.

이물질 따위에 오염되지 않는 것은 물론, 언데드를 상대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터였다. 언데드를 구성하는 마력은 신비학에서 저주로 취급되고, 정화 신성마법은 바로 그런 저주에 치명적인 힘이니까.

또한 평범한 강철제 단검이었던 것이 은은한 청백색 빛이 흐르는 정체불명의 재질로 변했다. 실제로 빛을 뿜어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착각할 정도로 외관이 달라졌다.

몇 가지 실험으로 강도와 예기가 크게 강화됐음을 파악하자, 그는 자신의 선천마력에 대해 추가로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신체능력 강화로, 단검에서는 강도와 예기의 증폭으로, 깃든 대상의 본질적 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이로운 효과가 나타난다는 점이었다.

이는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냥 마력 자체로 마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아직은 완벽하지 못한 가설에 불과했지만, 운 좋게도 이에 힘을 더해주는 내용이 바로 책 '인간 비약'에 있었다.

어째서 사제 데임이 그를 해부하려 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책에서는 선천마력의 종류와 가치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라온의 선천마력과 상당히 유사했다.

'내 선천마력은··· 객관적으로 봐도 여러 면에서 확실히 뛰어나다.'

그런 결론에 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앞으로 그가 만들 모든 물건은 투여한 마법재료보다 훨씬 더 뛰어난 성능을 발휘할 터였다.

게다가 꼭 직접 만들 필요도 없이, 이미 만들어진 물건의 성능을 별 투자 없이 크게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라온은 그날 하루 종일 붕 뜬 기분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는 언제나처럼 보람찬 내일을 위해 집처럼 익숙해진 여관방 침대에 몸을 뉘었다.

@

꿈이다.

라온은 어느 순간 그것을 깨닫고 주변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폈다. 그가 읽은 책 중 자각몽에 대한 것도 있었기에 살짝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를 둘러싼 주변 광경은 조금 기괴했다.

농노의 자식일 적 살던 헛간 같은 집에, 신성교 지부에서 사용하던 4인용 숙소, 그리고 현재 머무는 여관방의 풍경이 뒤섞여 있었다. 문도 각자 따로였다.

벌컥-

그때 헛간 부분의 문이 열리더니 라온의 친부모가 나타났다. 검게 물든 형상으로 조금 섬뜩한 모습이었다.

- 라온, 또 농땡이를 부리는구나.

- 어서 나가렴.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단다.

그렇게 항상 입에 달고 살던 말을 하는 부모를 보니, 그간 마음속으로만 품어왔던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간신히 굶지 않을 정도의 곡식만 수중에 남는데, 평생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 자신의 부모는 도망칠 생각을 안 했을까?

도망치다 걸리면 죽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그렇게 평생 착취당하는 삶이라면 한 번쯤은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시도해볼 법하지 않나?

당연히 성공할 확률은 낮다. 농노가 도망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목숨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니 당장 죽지 않는 이상 수탈을 당해도 납작 엎드려있어야 현명하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하지만 목숨이 중요한 이유가 뭔가? 살아있어야 무언가를 원하고 추구할 수 있기 때문 아닌가? 바로 그러한 자유와 희망이 있기 때문 아닌가?

오직 목숨만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면 누군가가 나를 억압하려 들 때 무조건 항복하고 노예가 되어야 하나? 맞서 싸우는 투쟁은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숨통을 조이고 팔다리를 억죄는 사슬을 감수할 만큼 삶이 소중한가?

- 저는 당신들처럼 살지 않을 거예요.

라온의 말에 검게 물든 친부모의 형상이 멈칫한다. 이후 마치 화를 내는 것처럼 거친 움직임으로 몸 돌려 나가버렸다.

조금도 안타깝지 않았다. 그들과의 인연은 이미 교단에 팔렸을 때 끊어졌으니까.

행복한 추억도 있지만 굳이 따지자면 불행한 추억이 더 많다. 이별의 순간 애써 붙잡지 않은 이유는 어쩔 수 없는 후련함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반대로 밉지도 않았다.

그들이 보인 모든 어리석음은 반복적인 고통과 두려움과 좌절을 겪으면서 몸과 마음이 약해진 상태로 나타난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으니까.

그가 자신의 부모에게 붙일 수 있는 최대한의 변명거리였다.

덜컹-

이번엔 교단 부분의 문이 열리더니 검게 물든 사제 데임이 나타났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면서 뻔뻔하게 떠들었다.

- 사람이란 결국 큰 이득 앞에서 이기적으로 굴 수밖에 없다. 타인을 희생해 나를 살릴 수 있다면, 타인을 희생해 나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를 택하지 않을 이가 대체 몇이나 되겠느냐? 그저 법과 윤리가 최소한의 선을 강제하고 있을 뿐, 세상은 근본적으로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곳이다.

라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데임의 말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 그래서 그런 세상을 원하십니까? 당신보다 강한 이가 아무 이유도 없이 당신을 마구 약탈해도 그게 세상의 본질이라면서 납득하고 넘어갈 수 있나요? 미개한 야만인 부족에서조차 그런 일은 드물 텐데?

데임이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 어쩔 수 없었다면 몰라도, 충분히 다른 대안이 있는 상황에서 무고한 자를 희생양 삼아 이득을 취하려 했으니, 내 손에 죽는 순간까지도 억울하진 않았으리라 믿겠습니다. 당신 말마따나 결과적으로 내가 더 강했을 뿐이니까.

검게 물든 데임은 잔뜩 굳은 표정과 기색으로 몸 돌려 방에서 나갔다.

교류제(3)

시원하게 반론하긴 했지만 처음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듯, 데임의 말은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세상엔 확실히 그런 식으로 굴러가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지키려면 어떠한 형태로든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끼익-

마지막으로 여관방의 문이 열렸다. 이번엔 누가 들어오려나 궁금해하는데, 여태까지와 달리 전혀 모르는 남자가 들어왔다.

검게 물들었긴 하지만 이목구비는 멀쩡하니 그럭저럭 외모를 파악할 수 있다. 한데 아무리 봐도 모르는 얼굴이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냈다.

날이 예리하게 선 단검이었다.

설마 하는 사이에도 남자는 조용히, 그러나 빠른 움직임으로 다가와 가만히 지켜보고 선 라온을 향해 그 단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전신의 털이 모조리 곤두서며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듯한 섬찟함이 덮쳐든다. 그저 꿈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단검에서 무시무시한 위기감이 전해져왔다.

그 순간, 덕분이랄지 때문이랄지 라온은 눈을 떴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떨어지기 시작한 단검의 날을 간신히 몸을 틀어 피했다.

팍!

단검이 방금까지 그가 누워있던 베개를 꿰뚫는다. 상체를 이용해 튕기듯 침대 아래쪽으로 몸을 피한 라온은, 바닥에 선 즉시 이제 막 단검을 회수하는 상대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푸른빛 아지랑이를 휘감은 주먹이 상대가 다급하게 들어 올린 팔뚝에 작렬했다.

우득-!

"끅···!"

상대의 몸에서도 마력의 기운이 엿보였으나 라온의 주먹에 담긴 힘이 훨씬 강했다.

방어를 뚫고 뼈를 부순 라온의 주먹이 연속해서 안면과 명치 등의 급소를 향해 날아들고, 물러서며 단검을 휘두르는 상대의 옆구리에 언제 뻗어졌는지 모를 다리가 벼락처럼 꽂혔다.

콰직!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침입자가 입에서 피를 뿜었다. 들고 있던 단검마저 놓치며 우당탕 바닥을 굴러 벽에 처박힌 그가 재차 피를 토하더니,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려 손을 가져갔다.

"아악···!"

그 손을 당장 달려들어 짓밟은 라온은 떨어진 단검을 낚아채선 상대의 목에 겨눴다.

"너 누구야?"

"사, 살려··· 줘···!"

"어디서 왔지? 누가 시켰고?"

라온의 검은색 눈동자에서 은은한 청백색 빛이 흘렀다. 그 눈을 마주한 침입자는 고통과 두려움에 떨면서 더듬더듬 말했다.

"나, 난··· 그냥··· 무, 물건을 훔치려고···!"

"그럼 얌전히 훔쳐가면 될 것이지, 왜 죽이려고 했어?"

"그래야··· 저, 전부··· 가질 수 있으니까···!"

그저 도둑일 뿐이라는 뜻이다.

혹시 신성교에서 보낸 자객인가 의심했던 라온은 살짝 안심했다.

정말로 순수한 도둑일까? 상대의 심지가 그리 굳세 보이지 않으니, 좀 더 심문하면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살려줘···!"

라온의 고민을 느꼈는지 도둑이 애걸했다.

"나, 날 죽이면 클랜에서 쫓을 거야."

"클랜?"

"까마귀 클랜··· 몰라?"

모른다. 하지만 대충 도둑들의 집단이라는 것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덕분에 어떻게 해야 할지가 정해졌다.

퍽-!

주먹으로 턱을 후려치자 도둑이 정신을 잃었다. 라온은 그렇게 기절한 상대의 한쪽 발목 힘줄을 단검으로 자른 후, 그 단검을 창밖에 내버리곤 짐을 싸기 시작했다.

여관에는 언제든지 도둑이 들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이제 보니 기본적인 방범 장치들은 전혀 쓸모가 없었고, 게다가 그는 자신이 돈을 쓰는 모습을 별로 감추지도 않았다.

또한 그가 이곳에서 머문 기간은 꽤 길었다. 오늘은 누구를 털어볼까 온종일 고민하며 다니는 도둑들의 눈에 들기 충분할 정도로.

돈은 좀 있는 것 같은데 나이도 어리고 별로 강해 보이는 구석이 없으니, 스스로 생각해 봐도 정말 털어볼 만한 대상이지 않은가.

어쨌든 일은 벌어졌다. 이제는 이 도둑을 죽여도 문제고 놓아줘도 문제다.

만약 죽인다면 만에 하나 이자가 중요한 인물일 때 돌이킬 수 없는 원한을 살 테고, 놓아준다면 바로 동료들을 이끌고 복수한다며 설칠 수 있었다.

그러니 살려주면서도 힘줄을 끊어 적당한 교훈을 준 것이었다.

치안대에 넘긴다는 선택지는 고려하지도 않았다. 조사가 들어가면 어떤 식으로든 그의 신상정보를 말해야 할 텐데, 그건 도망자 신세인 그가 피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고작 도둑놈 하나 처리하자고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니 그냥 지금 떠나는 게 현명하다. 비상시를 대비해 언제든지 떠날 준비는 충실히 되어있었다.

다만, 그런 준비와는 별개로 기분이 매우 안 좋았다.

"······."

라온은 떠날 준비를 완전히 마친 후 자신이 기절시킨 도둑을 내려다보며 화를 삼켰다.

고작 이까짓 놈이 자신의 생활을 방해하고 이곳을 떠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생각할수록 분했다. 그냥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어차피 이놈도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는 꾹 참고 고개를 저었다.

의미 없는 화풀이일 뿐이었다. 그는 감정에 휘둘리는 얼간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운 좋은 줄 알아라."

라온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미련을 털어내며 방 창문을 넘었다.

@

도시는 밤에도 남쪽 성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도시라고 불릴 만큼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니, 밤마다 성문을 전부 닫는다면 다양한 사람들의 온갖 불만이 쇄도할 터였다.

라온은 성문을 나서고도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누구의 이목도 닿지 않는 곳에 도착해서야 아공간 팔찌에서 유령마 소환 마도구를 꺼내 들었다.

구매하고 처음 실험해 본 뒤로 두 번째 소환이다.

천천히 마력을 불어넣자 펜던트의 핵에서 뻗어 나온 잿빛 연기가 그의 바로 앞쪽에서 뭉쳐들기 시작했다. 곧, 검은색 마구가 씌워진 잿빛의 말 한 마리가 나타났다.

얼핏 평범하지만 자세히 보면 몸체가 연기 같은 것으로 이뤄진 명백한 유령마였다.

놈의 생기 없는 검은색 눈이 라온을 향한다. 그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준 후 등자에 발을 걸치고 훌쩍 올라탔다.

"흠."

말을 타는 법은 배운 적 없다. 하지만 유령마를 구매하고 도서관에서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읽었다. 가면서 슬슬 연습하면 될 듯했다.

푸르륵-

유령마는 투레질하면서도 라온이 고삐와 다리로 주는 신호에 맞춰 이리저리 방향을 틀고 속도를 바꿨다.

그렇게 말을 타고 있자니 들끓던 화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상당히 재밌었다. 아니, 굉장히 재밌었다.

언데드인 유령마임에도 약간의 지능이 남은 듯, 그의 명령에 점점 더 익숙하게 반응하는 모습이 썩 기꺼웠다.

'사길 잘했다.'

정말로 3실룸이 안 아까웠다.

라온은 느긋하게 남동쪽으로 향하며 계속 승마술을 연습했다.

다른 말을 타본 적도 없고 아직 승마술이 부족하기도 해서인지, 상점 주인의 말처럼 정말로 불량품인지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문득 흥미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정말로 이 유령마가 혈통적 문제로 사령술의 흑마력과 거부반응을 일으킨 것이라면, 단검에 실험했던 것처럼 이 마도구를 구성하는 재료와 마력의 성질을 변화시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가능성이 느껴졌다.

물론 어디까지나 느낌상 그럴 뿐이었고, 충분한 연구와 다른 마법재료를 통한 여러 차례의 실험이 필요할 터였지만.

그럼에도 가슴이 뛰었다.

만약 성공한다면 이는 단순히 유령마의 수준을 높이는 것에서 끝날 이야기가 아니었다. 응용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후···."

라온은 맑은 밤공기를 마시며 긴 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일단 적당한 거처가 필요했다. 안전하게 머물면서 가진 지식을 완전히 소화할 수 있는 그런 장소가.

괜히 멀리 갈 필요는 없다. 이제 와서 신성교의 추적이 시작될 것 같진 않으니, 적당한 규모의 마을이 나타나면 한 번 자리 잡아 볼 생각이었다.

머릿속으로 여러 계획을 점검하던 중.

그는 도둑과의 일전을 떠올렸다. 자연히 사제 데임과의 전투도 함께 떠올렸다.

'나는 이 대륙에서 얼마나 강할까?'

진지한 고민이었다.

두 자릿수의 신성마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데임을 이기긴 했으나, 그는 전투경험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하이랜더임이 분명한 도둑을 수월하게 제압했지만, 놈은 그저 여관을 털고 다니는 좀도둑에 불과했다.

라온은 자신에게 검술을 가르쳐준 마테이를 떠올려 봤다.

지금 그와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는 어느 순간 고개를 저었다. 왠지 느낌상 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부에 떠돌던 마테이에 대한 소문을 떠올려 보면, 귀족에게 서임 받은 정식 기사와 비슷하리라는 내용이 꽤 많았다.

'기사급이라······.'

기사를 만나본 적 없는 라온은 그게 어느 정도일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대충 풍문으로 듣고 책에서 본 내용으로 짐작건대 넘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현재 아공간 팔찌에 든 모든 책의 지식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활용할 수 있게 되는 날, 그는 평범한 기사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괜히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달래면서 그는 말의 속도를 높였다.

행여나 낙마하더라도 다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거침이 없었다.

@

También te puede interesar

valoraciones

  • Calificación Total
  • Calidad de escritura
  • Estabilidad de Actualización
  • Desarrollo de la Historia
  • Diseño de Personajes
  • Contexto General
Reseñas
¡Guau! ¡Si dejas tu reseña ahora mismo, sería la primera!

APOY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