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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시온이 오그리트를 격멸한 후 이어지는 전투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사대공 중 하나의 죽음.

그 충격으로 인해 마족들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고 그렇기에 제국 측의 군세는 별다른 피해 없이 마족들을 전부 정리할 수 있었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시온이 데려온 막대한 전력으로 인해 이미 승패는 정해져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전쟁이 끝이 나고 뒷정리 또한 서서히 마무리되어 갈 때쯤.

"하하! 맛이 어떠신지요, 시온 전하. 여기 경계에서만 마실 수 있는 특제 커피입니다."

시온은 경계 군단의 막사에서 경계 군단장인 기라드가 타준 커피를 들이켜고 있었다.

"나쁘지 않네."

곧이어 은은한 웃음을 지은 시온이 다시 찻잔을 내려놓았다.

원두도 아닌 커피 가루로 향을 내고 철로 만들어진 군용 물컵에 담긴 싸구려 커피에 불과했지만, 시온의 눈에는 만족감이 어려 있었다.

이 커피는 과거 시온이 전 세계를 통일하기 위해 전장을 누빌 때 한 번씩 수하들이 타 주었던 이름 모를 차를 떠올리게 했으니까.

그때의 향수와 커피에서 느껴지는 투박한 향은 시온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역시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시온을 향해 씩 웃음 짓는 기라드.

그렇게 시온을 바라보는 눈에는 예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존경과 경외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했다.

마왕을 제외하고 마역에서 가장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대공.

그중 하나인 오만의 대공을 시온이 격멸하는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상태였으니까.

그야말로 전설적인 업적.

제국이 건국된 이후로 이러한 업적을 세운 존재는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시온 전하처럼 홀로 대공을 격멸한 존재는 더욱 적고.'

어쩌면 기라드 자신은 앞으로의 역사에 기록되어 영원히 회자될 만한 존재와 함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오직 경외만이 담긴 눈으로 시온을 바라보는 기라드와는 달리,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구나.'

막사의 한쪽에서 그런 시온을 바라보는 이벨린의 눈에는 커다란 의문이 어려 있었다.

오그리트를 격멸할 때 시온이 보여주었던 힘.

그 힘은 분명 필멸을 초월하여 불멸에 다다른 힘이었다.

'그러한 경지를 1년이 약간 넘는 시간 만에 이룩했다고?'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역사상 최고의 재능을 지닌 존재라고 해도 아니, 용이라고 하더라도 불가능했다.

'유일한 가능성은 신기와 같은 최상급 유물의 능력을 빌려 일시적으로 그러한 힘을 냈다는 건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능력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절대로 그 정도의 경지에 다다를 수 없을 터.

생각하면 할수록 복잡해지는 머릿속에 고개를 한 번 저은 이벨린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릴 때였다.

"어? 전하! 전하도 커피를 좋아해?"

근처에서 그 장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리우시나가 슬금슬금 그녀를 향해 다가오며 물었다.

"그렇다만...."

무슨 일이냐는 듯한 눈으로 대답하는 이벨린.

그에 눈을 빛낸 마녀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슬쩍 황녀를 향해 내밀었다.

"그럼 이거 한 번 마셔볼래? 민트 커피라고 하는데 내가 무척이나 아끼는 거야! 요정림에서도 아주 극소량만...."

"싫다."

그런 리우시나의 말에 끝나기도 전에 이벨린의 입에서 거절의 말이 흘러나왔다.

"안 마실 거니 어서 그 통을 내 앞에서 치우거라."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눈썹을 찌푸린 이벨린이 다시 한번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그, 그럼 다른 사람들은...."

그 명백하기 그지없는 표현에 다음 타겟을 정하듯 리우시나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저도 민트는 좀...."

"저는 원래 커피 안 좋아합니다."

"오늘은 왠지 커피보단 홍차가 당기는군요."

"오, 군단장님도 그러십니까? 저도 마찬가지인데."

이미 주위 사람들은 그녀의 눈을 피하며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이거 맛있는데...."

그에 저번처럼 시무룩해진 채 중얼거리는 리우시나를 잠시 바라보던 시온은 기라드가 탄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일을 정리했다.

'이제 여기도 거의 정리된 것 같으니 슬슬 다음 목적지로 이동해야겠어.'

그 생각과 함께 시온이 떠올린 목적지는 바로 요정림이었다.

사실 중요도나 급한 것으로 따진다면 수인해 쪽이 먼저이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온이 요정림을 다음 목적지로 정한 이유는 바로 흑성하의 성취 때문이었다.

시온은 알고 있었다.

흑성하를 7성까지 올리지 못한다면 대공급 마족들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이번에는 크로노스의 물음을 사용해 처리할 수 있었지만, 이제 남은 물음은 단 하나였고 그에 비해 대공의 숫자는 셋이었다.

'만약 젤리스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둘.'

저번 부유 도시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대공급 마족이 또 언제 자신의 앞에 갑자기 나타날지 알 수 없었으니 최대한 빠르게 7성에 오르는 것이 맞았다.

요정림의 금지에 자신이 남겨놓은 물건을 이용한다면 훨씬 더 수월하게 오를 수 있을 터.

'물론 그 전에 여기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남긴 했지만.'

오우거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시온 전하, 용사 클레어 플로시마르를 비롯한 일행들이 전하를 뵙기를 청합니다!"

그런 시온의 생각이 끝나자마자 막사 바깥에서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자리를 비워주었으면 하는데."

기사의 외침과 동시에 슬쩍 웃음 지은 시온이 막사 안의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 *

사람들이 자리를 비운 후 곧바로 막사 안으로 들어온 용사 일행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을 보여주듯 몸 이곳저곳에 커다란 상처들이 존재했고 그중에서는 아직까지 출혈이 잡히지 않는 곳도 있었다.

'그래도 전부 살아 있는 게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전장에 처음 도착했을 때 보았던 저들의 상태를 떠올리며 시온이 그렇게 생각할 때,

"시, 시온 전하를 뵙습니다!"

살짝 상기된 얼굴을 한 엘리시스가 가장 먼저 시온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런 그녀를 따라 고개를 숙이는 다른 일행들.

"인사는 그쯤 하면 됐고. 날 찾아온 용건이 뭐지?"

이미 어느 정도 용건을 짐작하고 있음에도 시온은 용사 일행, 아니 정확히는 클레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에 다시 고개를 든 클레어가 시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시온 전하, 용건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봐."

생각을 정리하듯 잠시 침묵하는 용사.

곧이어 그런 용사의 입에서,

"영겁제 오르렐리온 칸 아그네스."

하나의 물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살아 있습니까?"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220화

55장 의문과 오해(2)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

시온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클레어를 향해 되물었다.

"처음 의문이 들었던 건 전하께서 '크로노스의 다섯 물음'을 사용하실 때부터였습니다."

그에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기 시작하는 클레어.

"저는 회귀 전 그 신기를 사용했었고 덕분에 어떠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렇기에...."

더욱 낮아지는 그녀의 목소리.

"전하께서 물음을 사용한 뒤 보여주신 그 광경이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지도 알고 있지요."

지금 다시 떠올려봐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무너지는 세계와 사라지는 빛.

그것들은 분명 운명에서 벗어난 존재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 후로 저는 계속해서 생각했습니다. 대체 어떠한 물음을 사용한 것이기에 그러한 광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인지."

사실 무슨 물음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불가능한 광경이긴 했지만, 그나마 아주 미약한 가능성이라도 존재하는 것을 꼽는다면....

"두 번째 물음, 혹은 네 번째 물음. 이 중 두 번째 물음인 '시간 탈취'는 레제로에서 사용하신 것 같으니 네 번째 물음이 맞겠지요."

다른 물음들은 그 미약한 가능성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 고정'이나 '시간 재현' 같은 것들은 일단 시전자가 자신이 그 경지에 도달해야 했으니까.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시간 탈취'는 시간을 가져올 대상을 한 번이라도 직접 본 적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여기에서 막히는가 했지만, 클레어는 그 해답을 의외의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전하가 평소에 사용하던 힘과 '시간 탈취'를 이용해 가져오신 힘. 무척이나 비슷해 보이더군요. 같은 힘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아니, 분명 같은 힘이었다.

그렇다면 힘의 근원 또한 같을 터.

"더불어 그 힘의 본래 주인으로 짐작 가는 존재는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더군요."

영겁제 오르렐리온 칸 아그네스.

사실 클레어는 회귀 전 마역의 심층부에서 숨겨진 역사 중 일부를 엿보았고 그때 영겁제에 대한 정보 또한 어느 정도 습득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 전부터 계속해서 의심해 왔고 이번에 확신할 수 있었다.

'크로노스의 물음'을 사용하여 오그리트를 압도하는 시온 황자의 모습은 숨겨진 역사에서 묘사되던 영겁제의 모습 그대로였으니까.

비록 그 묘사를 떠올린 건 전투가 끝난 후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애초에 그만한 힘을 지닌 존재는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몇 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뒤, 저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습니다."

계속해서 말을 잇는 용사의 눈이 기이한 빛을 품기 시작한다.

"사실 영겁제께서는 승하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황성의 비처에 머물고 있고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 전하께서는 아주 우연히 그런 영겁제를 뵙게 되어 그분의 힘을 이어받았다는 것."

정말이지 불가능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희박한 확률이며 평소라면 가설을 세운 클레어 자신조차 코웃음 칠 정도로 말이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것밖에 없었다.

이것이 아니고서는 며칠 전의 전투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더불어 이 가설이 맞는다면 시온 황자의 급격한 성장 또한 설명할 수 있었다.

'힘을 되찾았다는 마녀의 말이 걸리긴 하지만....'

그건 정말 터무니없는 말이었고 그렇기에 더 이상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한 클레어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건가?'

그런 용사의 말을 들으며 시온은 속으로 슬쩍 웃었다.

하긴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

그 본인이 다른 몸에 빙의한 채 눈앞에 떡하니 앉아 있을 줄은.

"다시 한번 질문을 바꿔서 묻겠습니다, 시온 전하."

그런 시온을 기이한 빛을 넘어서 열망까지 어린 눈으로 직시하며 용사가 다시 한번 물었다.

"전하께서는 실제로 영겁제를 뵌 적이 있습니까?"

물론 그 물음에 대한 시온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니, 없다."

당연한 말이었다.

그 자신이 영겁제인데 봤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리라.

차라리 방금처럼 영겁제가 살아 있냐고 물어봤다면 대답하기 모호했을 터.

"그럼 대체 어떻게...!"

"그래도 내가 영겁제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맞췄어."

그에 당혹감을 내비치는 클레어를 향해 시온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사실에 집중해서 다시 가설을 세워보도록. 좀 더 사고를 유연하게 만들어서 말이야."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직접 알려주지는 않겠다는 건가.'

잠시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런 시온을 바라보던 클레어가 동요를 가라앉히듯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시온 황자가 사용했던 물음의 대상이 누구인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에 대해 생각을 더 해봤자 답을 알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기에 그 의문을 접어 둔 클레어는 감았던 눈을 뜨며 주제를 바꾸었다.

"그럼 곧바로 용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예전 저희가 마역으로 향하기 전, 전하께서 말씀하셨지요.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고."

마역에서 수없이 전투를 치르는 동안 그녀는 계속해서 그에 대해 고민해 왔고 다른 동료들과의 상의 끝에 결국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래서 선택은?"

"...2대 용사 클레어 플로시마르를 비롯한 여기 있는 일행 전부는 시온 전하를 섬기도록 하겠습니다."

잠시의 침묵 끝에 흘러나오는 대답.

자신이 지닌 용사로서의 정체성이 흐릿해질 우려가 있었지만, 클레어는 그것보다 이 세상을 구하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시온 황자의 밑으로 들어가 그의 힘과 세력을 동원할 수만 있다면 세계의 구원은 지금보다 훨씬 더 수월해지리라.

"그래도 아예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군."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은 시온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를 섬기는 것을 허락하지. 하지만 내 곁에 머무는 것은 불허한다."

"예? 그게 무슨...."

그 알 수 없는 말에 용사 일행의 눈에 의문이 깃들었다.

"내 곁에 두기엔 너희들의 힘이 많이 모자라서 말이야."

물론 시온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 한 명 한 명이 세계 최상급의 강자들이며 이번 마역에서의 여정으로 인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을.

하지만 이들은 용사와 그 일행들이었다.

'세계 구원'의 운명을 짊어진 인류의 마지막 보루이자 마를 멸하는 최후의 검.

그렇기에 기준이 훨씬 엄격하고 높을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그런 시온의 기준은 이번 경계에서의 전투로 인해 더욱 높아진 상태였다.

'오만이 지닌 힘은 분명 연대기에서 묘사된 수준보다 훨씬 높았어.'

운명은 공평하다.

그렇기에 신들이 자신을 빙의시키고 용사를 회귀시킨 것처럼 마역 쪽에도 그에 상응하는 여러 가지 조치가 취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전체적인 힘의 향상일 것으로 시온은 추측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이 녀석들은 아직 회귀 전의 수준조차 회복하지 못한 상태지.'

그렇기에 좀 더 빡세게 굴려서 단기간에 힘의 수준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곁에 두지 않겠단 말씀은 즉... 마역으로 보냈던 것처럼 이번에도 저희를 다른 곳으로 보내시겠단 말입니까?"

시온의 말뜻을 잠시 생각하던 티르안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이해가 빠르군."

"그럼 이번에 저희가 가야 할 곳은 어딥니까?"

그런 시온을 향해 한 치의 거부도 없이 곧바로 다음 행선지를 묻는 클레어.

그녀는 이번 일로 인해 자신들의 부족함을 크게 느낀 상태였고 그렇기에 더욱 강해져야 할 필요성 또한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강해질 기회가 주어졌으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에 권태로운 눈으로 그런 용사 일행을 바라보던 시온이,

"수인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하나의 단어를 읊조렸다.

* * *

마역과 제국의 경계 외곽 부분.

스스스-

생명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사막 위로 한 명의 여인이 존재감을 숨긴 채 은밀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진녹색 머리카락에 매혹적인 외모를 지닌 여인의 이름은 젤리스.

바로 질투의 대공이었다.

"그래도 빠져나오긴 했네."

허망함이 깃든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젤리스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몸 여기저기에 새겨진 무수한 상처들과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진원력.

하지만 그녀는 지금 자신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무려 두 명의 대공과 전투를 치렀으니까.

"그나저나 오만이 당했다니."

젤리스는 그 둘 사이에서 자신이 빠져나올 틈을 만들어주었던 오그리트의 죽음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그녀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설마 그 오만이 다른 대공들도 아닌 인간들에게 당했을 줄이야.

"대체 어떻게 당한 거지?"

그 전에 최강의 기사라 불리는 이벨린 아그네스와 마역의 대적이라 불리는 시온 아그네스가 경계로 향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둘로는 절대 무리였다.

'무언가 다른 변수가 있었을 것 같은데....'

잠시 변수를 추측하던 젤리스는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털어 내었다.

지금은 그것보다 자신의 처지에 신경을 써야 했으니까.

'이제 더 이상 마역에서 내가 있을 자리는 없어.'

본거지는 이미 점령당했고 군세 또한 뿔뿔이 흩어진 상태.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대공들의 눈이 빽빽하게 퍼져 있는 마역에서 벗어나 다른 장소에서 재기를 꾀하는 것.

'여기에서 가까운 동시에 나에게 우호적인 세력이 있고, 더불어 내 힘을 가장 빨리 회복할 수 있는 곳이라면....'

곧이어 그 조건에 가장 알맞은 장소를 떠올린 젤리스가 눈을 빛내며 방향을 틀었다.

요정림.

바로 그녀가 향하는 목적지였다.

* * *

인공적으로 가공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고급스러운 나무 원탁.

"후...."

그런 원탁에 앉아 있던 요정 중 한 명인 중년 남성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의 이름은 할레그리온.

바로 세계수의 첫 번째 잎사귀이자 요정림의 수장이었다.

"...다른 방도가 없는 겁니까?"

곧이어 할레그리온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의 모습을 한 요정을 바라보며 물었다.

"현재로서는 없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정령왕이나 그와 비슷한 격을 지닌 정령을 소환하는 수밖에."

그에 중년 여성, 스피레나가 고개를 저으며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세계수의 두 번째 잎사귀이자 제사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큰일이군요. 정말로."

요정림의 최고위층인 둘, 그리고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5황녀 디에나의 표정이 이토록 심각한 이유는 바로 곧 있으면 열리게 될 축제 '풀잎과 나무의 노래' 때문이었다.

요정림 최고의 축제라고 일컬어지는 이 행사는 다른 축제들과는 그 성격이 달랐다.

자연과 정령의 신인 아케니디아에게 바치는 기원.

그리고 요정림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수의 유지가 그 목적이었으니까.

그중 이토록 요정들을 심각하게 만든 것은 바로 두 번째 목적인 세계수의 유지였다.

'세계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축제 때 정령 왕급 존재가 그 격에 맞는 정령력을 세계수에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요정림에는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 높은 정령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몇 년째라고 했죠? 세계수에 정령왕의 정령력을 불어넣지 못하게 된 것이."

"...40년입니다. 아마 이번에도 정령력을 불어넣지 못한다면...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디에나의 물음에 스피레나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하아...."

그에 5황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숨.

사실 세계 회의가 끝난 뒤 다시 할레그리온이 수도를 방문한 것도 디에나를 만나 이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였지만, 그녀라고 해서 달리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이렇게나 오랫동안 정령왕급 소환사가 나오지 못할 수가 있다니...."

요정은 태어날 때부터 정령의 신인 아케니디아의 축복을 받는다.

그렇기에 정령 소환에 관해서는 다른 어떤 종족보다 뛰어나야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 요정족 전체에서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는 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축복이 사라지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

"아케니디아께서 정말 우리를 버리신 건지...."

그때,

"사실 오늘 아침에 정령신께서 그에 관한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그 한탄을 듣고 있던 스피레나가 입을 열었다.

"정말입니까? 근데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에 할레그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그 내용이 이상하여...."

"이상하다니요?"

"일단 읊어 드리겠습니다. 세계수를 구할 자가 곧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스피레나가 신탁을 전부 읊기 전이었다.

콰앙!

"할레그리온 님!"

병사로 보이는 요정 한 명이 다급한 얼굴을 한 채 회의실의 문을 강하게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그에 슬쩍 눈썹을 찌푸린 할레그리온이 병사를 향해 물었다.

"시, 시온 아그네스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흠, 이제 오신 건가? 그런데 그 사실을 왜 이렇게 다급하게 말하는 것이냐. 시온 전하의 방문은 이미 예정된 일이지 않느냐."

"그, 그런데 오자마자 저희 쪽 요정들을 학살...!"

그런 병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투콰아아아앙!

대지가 흔들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입구 쪽에서부터 막대한 불길과 어둠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221화

56장 요정림(1)

요정림의 관도는 다른 지역과는 달랐다.

포장되어 있지 않은 흙길과 그 위로 자라난 풀들.

더불어 주변을 감싼 온갖 나무들은 길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지만, 최대한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정신을 가진 요정림의 모든 시설은 대부분 이런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관도 위를 시온과 다른 두 명의 여인이 걸어가고 있었다.

"주인,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이 요정림의 수도라는 거지?"

그중 하나인 리우시나가 따분한 목소리로 시온을 향해 물었다.

"그래."

시온은 저 멀리 앞쪽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도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공식적인 방문임에도 시온이 이토록 소수의 인원만을 데리고 움직이는 이유는 존재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쟁 준비와 함께 수도 휴브리스를 비롯한 제국 전역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여기저기에서 불협화음 또한 발생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온 자신마저 황성을 비우게 되었으니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모든 전력을 그쪽 일을 처리하는 데 투입하고 있는 상태였다.

'요정림의 일을 처리하는 데 이 정도면 충분하기도 하고.'

시온은 그 생각과 함께 연대기에 나와 있던 요정림에 관한 내용을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슬슬 세계수가 위태로울 때겠군.'

정령왕급 소환사의 부재로 인한 정령력의 고갈.

물론 그 이유는 마역 때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수도의 플랜트와 같은 비밀 시설 하나가 요정림에도 은밀하게 지어졌고 그 시설이 하는 일이 바로 요정들에게 향해야 할 아케니디아의 축복을 탈취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정령왕급 소환사가 나오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설을 박살 내는 것이 흑성하 7성에 오르는 것과 함께 이번에 요정림에서 시온이 할 일이었다.

'더불어 숨어 있는 쥐새끼들도 정리하고.'

그때,

"맞다, 너 특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며?"

지루한 표정을 지은 채 주변을 둘러보던 리우시나가 문뜩 또 다른 일행인 연분홍색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바로 셀피아였다.

"듣기로는 마물을 먹는다고 하던데."

"그... 마물은 못 먹는데요."

마녀의 눈빛이 부담스러운 듯 슬쩍 한 발자국 떨어지며 대답하는 셀피아.

그런 그녀의 말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더욱 달라붙은 리우시나가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럼 이건 어때? 민트라는 건데 마물 같은 거랑 비교도 안 되게 맛있거든."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던 걸까.

전혀 연관 없는 것을 가져다 붙이며 민트 커피 통을 내미는 리우시나의 모습은 천살이 아닌 민트의 마녀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미, 민트요?"

"그래, 이거 되게 구하기 힘든 거야. 혹시 달달한 게 취향이야? 그럼 이건 어때? 이건 민트에다 초콜릿을 섞은 민트 초코라는 건데 내가 최근에 만들어낸...."

이제는 커피조차 아니게 된 민트 맛 음료를 권하며 물 만난 고기처럼 말을 쏟아내는 마녀.

그에 셀피아가 슬쩍 고개를 돌려 구원의 눈빛을 보냈지만, 시온은 그 시선을 외면했다.

자신이 저 민트 전도사에게 시달리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이것도 시련이니 견디도록.'

그렇게 속으로 새로운 희생양에게 애도를 표하며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요정림의 수도 엘브리움의 정문 앞에 도착한 시온의 눈에 모여 있는 수많은 요정이 들어왔다.

미리 방문 소식을 듣고 마중을 나온 것이리라.

"어서 오십시오, 시온 전하. 엘브리움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중 맨 앞에 서 있던 요정 한 명이 시온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를 따라 예를 표하기 시작하는 뒤쪽의 요정들.

차기 황제를 맞이하는 것이기에 그런 요정들의 태도는 정중하기 그지없었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나온다라....'

그들을 바라보는 시온의 눈은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나를 시험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어리석은 건가.'

그와 함께 시온의 입가에 어리기 시작하는 차가운 미소.

'어느 쪽이든 어울려주는 게 맞겠지.'

"...시온 전하?"

자신들의 인사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시온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요정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 때였다.

"쥐새끼들이 있어."

시온의 입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림자 뒤에 숨어서 내 것을 갉아 먹고 있는 좀벌레 같은 녀석들이지."

갑작스럽게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말에 요정들의 눈동자에 어리는 의문.

하지만 예전 아카데미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한 번 들은 적 있던 셀피아의 눈동자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여기에 그러한 쥐새끼들 대부분이 모여 있는데 정작 우두머리는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지금 시온이 바로 손을 쓰지 않고 있는 유일한 이유.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시온 전하, 그게 무슨 말씀...."

그 말에서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낀 요정 중 한 명이 입을 열었지만, 그의 말은 곧바로 들려오는 리우시나의 목소리에 의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주인, 그런 걸 왜 물어보는 거야?"

셀피아에게 민트 초코를 권할 때의 쾌활한 모습은 거짓이었던 것처럼 마녀의 입가에는 어느새 섬뜩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사냥감을 앞에 두고 참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잖아."

웃음과 같이 섬뜩함을 품은 말.

"어차피 전부 정리할 거였으니 지금부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에 시온의 입에서 허락과도 같은 말이 흘러나오는 찰나였다.

화악!

더욱 짙게 웃음 지은 리우시나의 왼쪽 눈앞에서 자그마한 붉은색 마법진 하나가 떠올랐다.

"무, 무슨...!"

그로부터 느껴지는 기이한 마력에 요정들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이었다.

콰드드득!

파육음과 함께 맨 앞에 서 있던 중년 요정의 목이 뜯겨 나갔다.

공중으로 솟구치는 요정의 머리와 함께 사방으로 터져 나가는 핏물.

그 장면을 본 요정들의 입이 채 벌어지기도 전,

"요정의 피는 오랜만인데."

그 장면을 만들어낸 리우시나가 기대 어린 목소리로 손을 슬쩍 휘저었다.

끼리리릭!

그와 함께 퍼져 나가던 핏물들이 기괴한 소리와 함께 응집되며 수십 개의 붉은 실선으로 변하더니 주변에 존재하던 다른 요정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아니, 마물의 피인가?"

"이 미친 마녀가!"

그중에도 실력이 뛰어난 자들이 존재했던 것일까.

그러한 혈선들을 막아내거나 피해낸 몇몇 요정이 리우시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직접 가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다니 고마운걸?"

그 말과 함께 다시 리우시나의 왼쪽 눈앞에 떠오르는 자그마한 마법진.

그 순간,

우저저저저적!

아무런 전조도 없이 달려들던 요정들중 절반 이상의 상반신이 그대로 사라졌다.

뒤늦게 그 자리에서 나타나는 거대한 짐승의 입.

"죽여버리겠다!!"

일족의 죽음에 남아 있던 요정들이 완전히 눈이 뒤집힌 채 미친 듯이 달려들었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리우시나는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

투화하하학!

그저 수천 개에 달하는 마안(魔眼)을 소환하여 그들의 전신을 묶어놓기만 했을 뿐.

'효과 좋네.'

그 알 수 없는 리우시나의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시온은 슬쩍 웃음 지었다.

마물과 마물이 아닌 요정을 걸러내는 것.

부유 도시와 세계 회의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이미 색적진의 존재를 알아챘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이렇게 시온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색적진이 발동되기 전 미리 알아챌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을 터였다.

지금까지의 색적진은 준비 시간이 필요했고 발동할 때의 이펙트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었으니까.

하지만 저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색적진의 발전 속도.'

개량판이 완성된 후로도 대학 마탑과 혈탑에 의해 색적진은 계속해서 향상되었고 현재로서는 똑같은 게 맞는지 헷갈릴 정도로 발전한 상태였다.

진화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

지금 리우시나의 눈앞에 떠오른 자그마한 마법진 또한 그러한 색적진의 형태 중 하나였다.

모습을 강제로 드러나게 할 순 없지만, 어디서든 구별은 가능하도록 간편화한 형태.

'나한테는 별로 필요 없긴 하지만.'

그 생각과 함께 시온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겁을 먹은 듯 부들부들 떨며 학살의 현장을 벗어나고 있는 한 요정 여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혼자서 삼세 중 하나를 맡아야 했기 때문일까.

요정림와 수인해에 암약하는 마령들에게는 그들을 보좌하는 최상급 부관이 하나씩 존재했고 여기에서의 부관이 바로 저 요정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요정의 탈을 쓴 채 연기 중인 마족이라고 해야 했지만.

아무래도 상황의 불리함을 눈치채고 몸을 빼는 것이리라.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스륵-

시온의 몸이 발끝부터 시작하여 서서히 어둠으로 변해 흩어진다.

암류.

흑성하에 존재하는 유일한 이동기.

6성을 넘어 7성으로 향해 가는 암류는 훨씬 더 기이하게 바뀌어 있었다.

이제는 바로 눈앞에서 봐도 그 원리를 이해하거나 인지할 수 없을 정도.

"뭣...!"

물론 요정 여인의 탈을 쓴 마족, 탈리스 또한 그런 시온의 암류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도 요정림에 암약하는 마족 중 두 번째 서열이라는 것일까.

콰드드득!!

"크윽!"

그런 시온의 일격을 팔 한쪽을 내주는 것만으로 무마한 탈리스가 곧바로 정령을 소환해 내어 반격을 가했다.

짜자자자자작!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푸른색의 뇌전.

애초에 정령 자체가 자연으로부터 파생되었기 때문인지 뇌전의 위력은 자연적으로 내리치는 벼락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콰직!

한 손을 들어 올려 가볍게 움켜쥐는 것만으로 그러한 뇌전을 소멸시키는 시온.

처음부터 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듯 당황하지 않은 탈리스가 곧바로 다음 정령들을 소환해 내었다.

불꽃, 바람, 어둠.

각자의 속성에 해당하는 힘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등장한 고위 정령들이 집채만 하게 몸을 부풀린 채 시온을 집어삼키려는 순간, 투화하하하학!

시온의 전신에서 터져 나온 폭발적인 무스펠하임의 불꽃이 그러한 정령들을 모조리 불사르기 시작했다.

"커억!"

역소환의 여파로 인해 피를 토하는 탈리스.

그런 그녀의 눈 안에서 신염(神炎)을 휘감은 시온의 주먹이 순식간에 확대되었다.

쩌어어어엉!

이어지는 격돌과 함께 그대로 날아가는 탈리스의 반대쪽 팔.

그렇게 순식간에 두 팔을 잃었음에도, 그녀의 눈에는 오히려 희망의 빛이 깃들어 있었다.

'이 정도라면....'

소문이 과장되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은 힘을 쓸 수 없는 어떠한 제약이 존재하는 것일까.

지금 탈리스가 겪고 있는 시온 아그네스의 힘은 들었던 것보다 훨씬 약했다.

어찌저찌 치명상만은 피할 수 있었고 반격도 가능했으니까.

'전력을 다한다면 달아날 수 있겠어.'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계산을 마친 탈리스의 눈이 검붉게 물들었다.

동시에,

드드드드!

그녀의 전신에서 솟구치기 시작하는 어마어마한 마기.

그렇게 전력을 끌어 올린 탈리스가 곧바로 시온을 향해 마탄을 쏘아내는 동시에 반대쪽으로 몸을 튕기려 할 때였다.

쩍!

탈리스의 몸이 그 자리에 정지했다.

그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어?"

그녀의 가슴을 뚫고 튀어나온 하나의 손.

정확히 핵과 심장을 부수며 튀어나온 새하얀 손에 의해 탈리스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기다렸잖아, 언제쯤 마기를 사용할지."

그런 마족의 눈에, 박아 넣은 손을 빼내며 히죽 웃는 시온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어서,

"그래도 최소한의 납득은 시켜야 하거든."

서서히 밑으로 떨어지는 시야 속에서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한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5황녀 디에나와 할레그리온의 모습까지 들어온 순간, 마침내 탈리스는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시온 아그네스는 일부러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악마... 마역은 악마를 적으로 두었구나."

그 말과 함께 요정림에서 수십 년 동안 암약하며 수많은 공작을 펼쳤던 최상급 마족의 숨이 완전히 끊어졌다.

서서히 사라져가는 마족의 시체에서 곧바로 눈을 뗀 시온은 고개를 돌렸다.

'저쪽도 거의 정리된 것 같고.'

어느 때보다 신나 보이는 표정으로 마물들을 학살하는 리우시나와 그 옆에서 마지못해 마물들을 상대하는 셀피아를 거쳐 굳어진 표정과 요동치는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디에나에게서 멈추는 시온의 시선.

"이건 수고비 정도는 받도록 하지."

그런 디에나를 향해 시온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222화

56장 요정림(2)

마역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심연.

"짜증 나네."

최소한의 시야조차 보장되지 않는 어둠 속에서 광란의 대공인 아크리모시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내용과 같이 그녀의 목소리에는 잔뜩 짜증이 묻어나 있었다.

얼마 전 질투의 세력 대부분을 소탕했음에도 아크리모시아의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존재했다.

"그 녀석, 어디로 튀었는지 알아냈어?"

정작 제일 중요한 젤리스를 놓쳤기 때문.

사실 대공에 비한다면 그 밑 세력의 중요도는 거의 없다고 해도 맞았다.

이미 반신에 다다른 대공급 마족의 힘과 격이라면 세력쯤은 언제든지 다시 모을 수 있었으니까.

오직 힘만을 추구하는 마역이었기에 가능한 일.

그렇기에 젤리스의 숨통을 끊어놓지 않은 이상 언제든지 이번과 같은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아직. 아무래도 마역에서 빠져나간 것 같다."

그 질문에 분노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에 더욱 찌푸려지는 광란의 눈썹.

"...하, 순식간에 가용할 수 있는 대공 전력 중 반이 날아갔어. 그런데 아무것도 파악된 게 없다니. 심지어 오만을 죽인 녀석조차도."

대체 자신들과 동등한 무력을 지닌 오그리트가 어떻게 인간들에게 죽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첫 번째 하늘'이라도 움직인 것일까?

아니, 아무리 그 녀석이 움직인다고 해도 혼자서는 무리일 터.

"그 자리에 있던 우리 쪽 전력이 싸그리 전멸해서 정보가 거의 없으니... 이번 일에 관해서 왕께서는 뭐라고 하셨어? 저번에 뵈러 갔을 때 반응이 있으셨다고 했잖아."

"'드디어 나왔나'라는 한 마디가 끝이셨다. 그 뒤로 다시 침묵하셨지."

그렇게 대답하는 분노의 목소리에는 얕은 회의감이 배어 있었다.

어찌 보면 마역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떠한 지시나 반응도 하지 않는 왕에 대한 회의감이었다.

그때,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심연 바깥에서 수하 마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전과는 달리 그리 다급한 소식은 아니었는지 마족은 미리 허락을 구한 뒤 들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이번에 오그리트 님을 멸한 존재가 파악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충분히 그들의 주의를 집중시킬 만한 것이었다.

"뭐, 누구야?"

"누구지?"

동시에 대답을 재촉하는 아크리모시아와 분노.

그에 수하 마족의 입에서 하나의 이름이 흘러나오는 순간,

"시온 아그네스입니다."

두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마역과 제국, 그리고 요정림의 경계 부분이 만나는 외곽 지역.

그곳에는 두 명의 마족이 은밀한 재회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마중까지 나올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바로 질투의 대공 젤리스와,

"다른 대공도 아닌 젤리스 님이니까요."

요정림 쪽 마물들을 총괄하는 존재이자, 오마령 중 하나인 크레비스였다.

거의 백여 년을 요정림에서 암약했기 때문일까.

중년 요정 남성의 거죽을 뒤집어쓴 크레비스의 모습은 진짜 요정보다도 더욱 요정다워 보였다.

"최근 소식은 들었습니다. 꽤 곤욕을 치르셨더군요."

"곤욕 정도가 아니야. 아예 죽을 뻔했다니까?"

그 말과 함께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젤리스가 문뜩 의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너 혼자서 나온 거야? 다른 녀석들은?"

"다른 곳으로 마중 보냈습니다."

"다른 곳?"

"이번에 시온 아그네스가 요정림을 방문했습니다."

젤리스의 눈동자가 묘한 빛을 띠었다.

"...그 시온 아그네스가 여기에 있다고?"

"그렇습니다. 최근에는 오그리트 님을 격멸했다는 소식마저 들려오고 있기에 근처에 눈들을 붙여 놓고 정보를 파악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러기에는 수행원들이 안성맞춤이지요."

그렇기에 크레비스는 처음 시온 아그네스를 마중 나갈 요정 중 대부분을 마물로 채워 놓은 상태였다.

그래야 그중에서 수행원을 뽑을 때 눈들을 수월하게 심어 넣을 수 있었으니까.

"그래? 그런 말이 돌고 있단 말이지... 그런데 괜찮겠어? 시온 아그네스에게는 우리의 정체를 드러나게 할 방법이 있다고 하던데? 그 색적진인가 뭔가 말이야."

"들은 바로는 여러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아마 바로는 정체가 드러나지 않을 겁니다."

"만약 바로 들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덕분에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는 거니 헛된 죽음은 아닐 겁니다."

그 말과 함께 자신을 안내하는 크레비스를 바라보며 젤리스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 녀석도 어지간하단 말이야.'

자신도 그리 수하들을 아끼는 편은 아니었지만, 크레비스는 수하들을 언제든지 쓰다 버릴 도구나 소모품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힘을 좀 회복해야겠어. 이번에 좀 많이 소모되었거든."

그런 마령을 따라 걸으며 젤리스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크레비스가 곧바로 대답했다.

"일단 휴식을 취하시다가 해가 진 후에 바로 '마계수'가 있는 곳으로 가시지요. 거기에 아케니디아의 축복과 정령력을 모아 두었습니다. 거의 백 년 가까이 모아 두었으니 충분히 만족하실 겁니다."

"기대하지."

그 말을 끝으로 두 마족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 *

요정림의 수도 엘브리움의 중심지.

그중에서도 최심층부에 존재하는 건물인 '세계수의 자비'.

"하, 어떻게...."

그 안에 존재하는, 평소에는 오직 '잎사귀'들만이 출입 가능한 회의실 안에서 디에나의 한숨이 울려 퍼졌다.

곧이어 그런 디에나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시온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적어도 먼저 언질은 주고 나서 일을 벌여야 하는 것 아닌가요?"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일은 아까 전 엘브리움의 입구에서 벌어진 마물 학살이었다.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말한 뒤에 움직였으면 늦었을 거라는 것을."

디에나의 물음에 시온이 특유의 권태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알지 못했을 쥐새끼들을 대부분 솎아내었으니 오히려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요정 중에서도 사상자가 거의 나오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 내가 안 죽이려고 얼마나 신경을 썼는데!"

그에 옆에서 딴짓을 하던 리우시나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거들었다.

"...."

그런 시온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디에나.

확실히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여기는 제국의 수도가 아닌 디에나 자신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요정림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마저 시온이 제멋대로 활개를 치고 다니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사이 5황녀와 주변에 앉아 있는 다른 잎사귀들을 한 번 쭉 훑은 시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곧 축제가 열리는 것치고는 얼굴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군."

"요정림에도 그토록 많은 마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는데 좋을 리가 없지요."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또 있는 것 같던데."

시온의 말과 동시에 굳어지는 디에나와 다른 요정들의 얼굴.

곧이어 시온의 눈을 잠시 노려보던 5황녀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에서 동생님이 해결할 수 있는 건 없어요. 그러니 어서 용건을 마치고 수도로 돌아가시는 건 어떤가요? 안 그래도 전쟁 준비로 할 게 많으신 걸로 아는데. 마족들을 처리해 준 대가는 곧 치르도록 하지요."

정말로 시온이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했고 방금도 생각했다시피 디에나는 시온이 요정림에서 활동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안 그래도 경계에서 대공 중 하나를 격멸하는, 말 그대로 상상을 초월하는 업적을 세우며 그 명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시온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정림까지 영향력을 넓히기 시작한다면 자신은 정말로 모든 것을 빼앗길지도 몰랐다.

그때,

"저... 디에나 전하."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두 번째 잎사귀, 스피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현재로서는 시온 전하의 용건을 들어주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잠시 눈치를 보던 그녀가 디에나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세계수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아니, 시들기 일보 직전이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이 상태에서 누군가 금지이자 세계수가 있는 장소인 '요람' 안으로 들어선다면 더욱 상태가 안 좋아질 우려가 있습니다."

안 그래도 약해질 대로 약해진 세계수가 외부인과 함부로 접촉한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현재 제사장이자 세계수의 관리자인 스피레나조차 금지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해결 방법은요?"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극소한 정령력이라도 공급하여 상태를 완화하는 수밖에...."

"하아...."

그 말에 디에나의 입에서 다시 한번 한숨이 흘러나왔다.

현재로서는 정령왕급 정령력을 공급할 방도가 전혀 없었으니까.

"일이 꼬였나 보군."

그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시온이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온 목적 중 하나인 '세계수의 요람'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온의 얼굴은 처음과 같았다.

오기 전부터 이미 예상했던 상황이었으니까.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짧게 말할게요. 현재 요정림을 지탱하고 있는 세계수가 위태로운 상태에요. 그래서 '요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아요. 혹시 용건을 바꿀 생각은 없나요?"

"용건을 바꾸는 것 말고 이건 어때?"

물음에 물음으로 대답한 시온의 입에서 곧이어 하나의 제안이 흘러나왔다.

"내가 세계수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 주도록 하지. 그럼 금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지?"

"...!"

그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디에나를 비롯한 요정들의 눈동자가 한순간 확장되었다.

그런 그들의 뚫어질 듯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리는 시온.

사실 처음부터 세계수를 살리는 것 또한 시온의 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곧 있으면 일어날 대전쟁에 있어 요정림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터였고 그렇기에 이대로 무너지게 둘 수는 없었다.

'물론 맨입으로는 아니지만.'

그때 흔들리는 눈으로 그런 시온을 잠시 바라보던 디에나가 입을 열었다.

"무슨 수를 쓸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세계수에 관한 일을 요정도 아닌 외부인에게 맡길 수는 없어...."

하지만 요정족의 기본적인 규칙에 따라 거절의 뜻을 내비치는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디, 디에나 전하!"

어느새 회의실에 있던 다른 모든 잎사귀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런 그들의 눈에 어린 간절함.

마치 썩은 지푸라기라도 주저 없이 잡을 것만 같은 그들의 간절함이 디에나의 말을 멈추게 만들고 있었다.

약 천 년.

아그네스 제국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세상에 존재했던 요정림이었다.

그런 요정림이 자신들의 대에서 멸망한다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이자 절망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희망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요정들의 절박함은 상상을 초월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끔찍이도 지켜오던 규칙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 정도로.

"어떤 식으로 해결한다는 거죠?"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쉰 디에나가 시온을 향해 물었다.

이번 일로 인해 시온이 요정림에 영향력을 떨치게 되는 건 막을 수 없게 되겠지만, 요정림이 사라지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그 전에 한 가지."

그런 디에나의 질문에 시온이 다시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만약 세계수를 살린다면 너희는 나에게 무엇을 줄 거지?"

"...원하는 게 뭐죠?"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디에나가 곧바로 시온에게 물었다.

세계수를 살리는 것은 요정림 전체를 살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그 대가 또한 클 터.

'정령 군단, 아니면 내가 가진 기반 세력 전부나 오대 가문을 원할 수도....'

하지만 시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가는 그보다 커다란 동시에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었다.

"요정림."

서서히 휘어지는 시온의 눈.

"나는 겉핥기가 아닌 진정으로 요정림 전부가 내 밑으로 들어오길 원해."

그런 시온의 눈 속에서 떠오르며 휘돌기 시작하는 검은 별들을 보는 순간, 디에나는 그 옛날 이야기책에서 보았던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악마를 떠올렸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223화

56장 요정림(3)

제국과 수인해의 경계 외곽 부분.

"오랜만이네."

산꼭대기에 존재하는 분지 안에 숨겨져 있는 하나의 신전을 바라보며 용사 클레어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빛, 자연, 바다 등.

세상에는 수많은 속성과 개념들이 존재하며 그에 해당하는 신격들 또한 존재했다.

그렇기에 운명에 관한 신들 또한 존재했으며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저 신전이 바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운명의 신들을 모시는 신전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다녀올게."

다른 일행들을 향해 그렇게 말한 후 신전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클레어.

수인해로 향하기 전 그녀가 굳이 이곳에 들린 이유는 풀리지 않는 한 가지 의문 때문이었다.

회귀 전의 인연으로 인해 클레어는 운명의 신전에 무엇이든 한 가지 물을 수 있는 권한이 존재했고 이번에 그 권한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어서 오시지요, 용사여."

이미 올 줄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일까.

클레어가 신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전신을 하얀색 로브로 가려 입밖에 보이지 않는 여인 한 명이 그녀를 맞이했다.

바로 운명의 신들을 모시는 사제였다.

그러한 사제를 제외하고는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신전의 분위기는 꽤 기이했지만, 클레어는 익숙한 얼굴로 사제를 향해 다가갔다.

운명의 신들을 모시는 사제는 항상 한 명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전대의 사제가 일곱 번째 하늘인 이오와 테우티카나였지.'

은퇴하며 신과의 연결이 끊겨버린 그녀가 '운명을 읽는 현자'라고 불릴 정도의 능력을 지녔으니 현역인 눈앞의 사제가 지닌 능력은 그보다 더 뛰어날 터.

분명 클레어 자신이 원하는 답을 해줄 수 있으리라.

"무엇을 묻기 위해 오신 겁니까?"

그런 용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듯 정확히 용건을 집어내는 사제.

"시온 아그네스."

그에 곧바로 클레어의 입에서 하나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자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그와 함께 클레어는 경계에서 시온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영겁제의 힘이 맞다고 했었지.'

그런데 정작 영겁제를 만난 적은 없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황성 안에 숨겨져 있던 영겁제의 힘을 우연히 찾아내어 스스로 익혔다는 건데....'

말이 되지 않았다.

그동안 어떠한 재능도 없이 20년 가까이 살아왔던 사람이 1년 수개월 만에 그토록 강해질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그 전부터 힘을 숨기고 있었을 가능성도 없었다.

'그랬다면 회귀 전에 그토록 쉽게 죽지 않았을 테니....'

그렇기에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혼란만 가중되고 있었다.

그때,

"시온 아그네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부 명백한 사실이지요."

클레어의 말을 듣고 있던 사제의 입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또한 그대가 원하는 답 또한 이미 나와 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불가능한 일이라 치부한 그대가 그 답을 놓치고 있을 뿐이지요."

"그게 무슨...."

그에 클레어가 입을 열기 전 다시 사제의 물음이 이어졌다.

"회귀 전 숨겨진 역사에 기록되어 있던 영겁제에 관한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예."

"그렇다면 그 힘에 관한 기록 또한 기억하시겠군요."

"그렇긴 합니다만 그게 지금 이것과 무슨 상관...!"

거기까지 말하던 클레어가 말을 멈추었다.

그와 함께 그로부터 보았던 한 구절을 떠올린 그녀의 동공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영겁제의 힘은 그 누구에게도 이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런 클레어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천천히 입을 여는 사제.

"아니, 애초부터 이어질 수 없는 힘이지요."

"설마... 설마...."

"이 세계의 신들은 판단했습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목소리를 내뱉는 용사를 향해 운명의 사제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용사, 클레어 플로시마르. 당신을 회귀시킨 것만으로는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고. 그러기에는 세계에 쌓인 멸망의 운명과 그 운명을 따르는 적들이 너무나도 강력했으니 말입니다."

그 목소리와는 달리 사제의 눈은 알 수 없는 빛을 띠고 있었다.

"그렇기에 신들은 한 가지의 대책을 더 세웠습니다. 어떠한 상황이나 고난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돌파하는 것을 넘어 그 자체를 박살 낼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지닌, 즉 규격 외의 존재를 이 세상에 불러오는 것으로."

규격 외, 혹은 이레귤러.

신들에게조차 그렇게 불리는 자는 이 세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틀어도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회귀자가 나온 마당에 다른 존재가 나오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굳어버린 용사를 향해 운명의 사제가 기이한 웃음을 지은 채 물었다.

* * *

요정림의 수도 엘브리움의 거리.

그곳에서는 현재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그네스의 직계 황족, 그중에서도 그리 사이가 좋지 않다고 알려진 시온과 디에나.

그 둘이 나란히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것도 정체를 들키지 않도록 로브까지 푹 뒤집어쓴 채로.

"하아...."

그중 한 명인 디에나는 자신보다 앞서가는 시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건지.'

그 생각과 함께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금 이 상황을 만들어낸 조금 전의 대화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요정림 전부를 원한다는 시온의 말에 디에나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친 말이었다.

그런 그녀의 격렬한 반응에도 시온은 여전히 찻잔을 들어 올린 채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어차피 내가 해결해 주지 않는다면 요정림은 무너질 게 아니었나?'

그 말에 반박하지 못하는 디에나를 향해 시온이 차갑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너희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해.'

'기회?'

'이제 곧 나는 황위에 오를 거야. 그건 알고 있겠지?'

'....'

'그리고 가장 먼저 내부 정리를 시작할 거야. 내부가 정리되지 않고서는 전쟁을 치를 수 없으니까. 물론 그 정리에는 요정림 또한 포함되지.'

시온의 입가에 그려지는 호선.

'그때는 이렇게 말로 하지 않을 거야.'

디에나는 그 웃음이 섬뜩하다고 느꼈다.

그 뒤로 이어지는 무거운 침묵과 다른 잎사귀들 간의 눈빛 교환 끝에,

'알겠어요.'

디에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수락에 가까웠다.

'전체의 의견을 들어야 하기에 곧바로 정할 수는 없지만 진지하게 고려해 보도록 하죠.'

사실 다른 방도가 없긴 했다.

여기에서 거부한다면 시온이 황제가 되기 전에 요정림이 무너질 수도 있었으니까.

'단, 정말로 세계수를 완벽하게 치유한다면.'

그거면 되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시온은 곧바로 일처리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디에나는 직접 옆에서 어떻게 해결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말과 함께 그런 시온을 따라나선 게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다.

그것도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말에 아주 소수의 수행원만을 대동한 채로 말이다.

하지만 벌써 30분이 되어 가도록 아무런 말 없이 걷기만 하는 시온의 행동에 디에나는 점점 불만이 쌓여 가고 있었다.

심지어 시온의 일행으로 보이는 두 사람조차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 적어도 어디로 가는지 말이라도...."

결국 디에나가 앞서가는 시온을 향해 직접 그러한 불만을 토로하려는 때였다.

"도착했다."

시온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함께 디에나의 눈동자에 어리는 의문.

"여긴 왜...."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시온과 그녀가 있는 장소는 엘브리움에서도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녹빛 광장'의 한복판이었으니까.

"준비되었나?"

"갑자기 준비라니 무슨...."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묻는 시온의 모습에 디에나를 비롯한 일행들의 눈에 어린 의문이 더욱 짙어지는 찰나였다.

"사냥 준비."

쩌어어엉!

그 말과 함께 시온이 바닥으로 강력한 진각을 찍어 내렸다.

그런 시온의 발을 중심으로 퍼져 가는 거미줄 같은 금.

그 파격적인 행동에 주변에 있던 요정들이 시온이 있는 쪽을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콰지지지직!

굉음과 함께 바닥이 무너지며 그 위에 있던 시온과 디에나, 그리고 다른 일행들이 밑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처음부터 텅 비어 있었던 것일까.

셀피아의 비명과 함께 막힘 없이 밑으로 계속해서 떨어지는 그들의 신형.

그렇게 얼마나 추락했을까.

타닷!

마침내 바닥에 발이 닿음과 동시에,

"이, 이건!!!"

디에나의 입에서 경악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엘브리움의 한복판에 이런 커다란 지하 공간이 있다는 것에 놀란 게 아니었다.

지금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

그 광경이 그녀를 경악하게 만들고 있었다.

끼아아아아악!

마역에 오기라도 한 것일까.

마물.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지하 공간을 전부 메울 정도로 수많은 마물이 디에나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떻게 이 정도 숫자의 마물들이 엘브리움 한복판에...!"

그리고 그러한 마물들의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란 나무 한 그루.

나무의 외형은 세계수와 비슷해 보였지만, 온통 검붉은 혈관으로 둘러싸인 채 박동하고 있어 무척이나 기괴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디에나는 그 나무를 보는 순간, 저게 바로 지금 요정림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원흉임을 알 수 있었다.

근 40년간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정령왕급 정령력이 저 나무로부터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아아...."

마치 파도처럼 연이어 들이닥치는 충격적인 사실에 디에나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꺄하하하하하!"

시온의 옆에 있던 리우시나가 광소를 터뜨리더니 제일 먼저 앞쪽으로 튀어 나갔다.

끼리리릭!

마치 칠판을 긁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전신에서 터져 나오는 소름 끼치는 핏빛 기운!

"대체 여기를 어떻게...!"

이곳이 발각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일까.

"마, 막아라! 마계수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디에나와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마족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마녀의 공격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콰드드드득!

그들만으로는 이미 천살을 넘어 종말로 다가서고 있는 리우시나를 막을 수 없었다.

"끄아아아악!"

사방으로 터져 나오는 핏물과 그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악수들의 2차적인 공격에 의해 밀리기 시작하는 마물들.

더불어 충격에서 벗어나 하나둘씩 전투에 합류하는 디에나의 수행원들에 의해 그러한 승기가 더욱 빠르게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여긴 대체 뭐죠?"

그 장면을 보며 침착함을 되찾은 디에나가 옆에 있던 시온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물어보는군. 확인이라도 받고 싶은 건가?"

그런 그녀를 향해 대답한 시온은 빠르게 정리되는 전장을 훑은 후 공동의 한복판에서 불길하게 박동하고 있는 새카만 나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되었는데.'

연대기에서 저 나무, 마계수를 처음 발견했던 용사 일행은 마계수를 없애지 못한 채 도망치듯 지하 공동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연대기의 중후반부였기에 무력적으로 꿀릴 게 없었던 당시의 용사 일행이 마계수 토벌을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공동을 지키는 마물들 때문이 아니었다.

'저 마계수.'

바로 저 마계수가 가진 자체적인 방어 시스템 때문이었다.

그런 시온의 생각이 신호라도 된 것일까.

끄아아아아아!

공동의 한가운데 솟아 있던 마계수가 마치 사람의 비명과도 같은 끔찍한 소리가 터뜨렸다.

그와 함께 몸통을 감싼 채 박동하던 혈관들이 찢어지며 그 안에서 마기와 오염된 정령력이 뒤섞인 액체가 주르륵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드드드드!

그렇게 바닥을 붉게 물들인 마계수의 핏속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거대한 혈룡.

그로부터 터져 나오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운에 의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투를 멈춘 요정들이 혈룡 쪽을 바라보며 질린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벗어나야 해요!"

그러한 요정들과 마찬가지의 표정을 지은 디에나가 시온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저것은 우리끼리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예요!"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자신들의 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럼에도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존재했다.

저 혈룡으로부터 느껴지는 정령력.

그러한 정령력의 수준은 분명 왕급 이상이었으니까.

"정령왕급이라고요!"

왕급의 정령, 즉 정령왕은 말 그대로 자연 그 자체를 의미했다.

그렇기에 같은 왕급이 아니거나 필멸의 존재라면 그 힘에 상관없이 아예 피해를 입힐 수가 없었다.

"그러니 어서...!"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하지만 시온은 고개를 저었다.

"이쪽에도 비슷한 녀석이 하나 있거든."

그런 시온의 입에 호선이 그려지는 순간,

스르륵!

의문으로 물들어가는 디에나의 얼굴로 오직 북방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224화

56장 요정림(4)

이곳은 지하였다.

사방이 흙과 바위로 막혀 있는 지하 깊은 곳에 자리한 공동.

그런데 어째서 바람이 불어온단 말인가.

그 기이한 현상에 디에나를 비롯한 요정들의 고개가 자신도 모르게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정령?'

곧이어 그런 그들의 눈에 어느새 눈처럼 새하얗게 변한 대지 한복판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는 투명한 머리카락의 소녀가 들어왔다.

'아니야, 저건 그냥 일반적인 정령이 아닌....'

고유 정령.

그것도 최상위의 격을 지닌 고유 정령이었다.

거의 정령왕에 맞먹을 정도로.

대체 어디서 갑자기 저 정도의 존재가 튀어나왔단 말인가.

'설마 계약을 맺은 건가?'

그 예상치 못한 등장에 5황녀의 눈이 흔들릴 때,

"짹짹아! 도와주러 나온 거야?"

앞쪽에 있던 리우시나가 서리 정령을 바라보며 반갑게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그와 달리 눈썹을 찌푸리는 서리 정령.

-그렇게 짹짹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건만!!

그렇게 리우시나를 향해 노한 음성을 터뜨린 서리 정령이 시온을 향해 고개를 휙 돌리며 째려보았다.

아무래도 왜 아직까지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서 저렇게 부르도록 만드냐는 불만의 표시인 것 같았다.

시온은 그런 정령의 시선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지어줄 생각이었으니까.

서리 정령과 저 혈룡.

둘은 비슷한 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힘의 차이는 무척이나 컸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그 차이를 메꿀 방법은 있지.'

그게 바로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었다.

"세피르."

-뭐?

"그게 네 이름이다."

서리란 뜻의 '세'와 바람이란 뜻의 '쉬피르'.

두 용언을 합쳐 만들어 낸 이름.

툭 내뱉듯이 말했지만, 무척이나 긴 고민 끝에 지은 이름이었다.

-서리 바람이라... 나름 괜찮은 이름이구나.

이름의 뜻을 단번에 알아챈 서리 정령, 아니 세피르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는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악!

정령의 전신에서 시리도록 푸른 빛이 터져 나오며 주변을 환하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기 그지없는 빛.

그때,

그 아 아 아 아 아!

위협이라도 느낀 것일까?

핏속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킨 혈룡이 푸른 빛에 감싸인 세피르를 향해 검붉은 불길로 이루어진 숨결을 쏘아내었다.

그 격을 증명이라도 하듯 대기와 공간을 모조리 태워내며 뻗어나가는 불꽃.

"위험...!"

투콰아아아앙!

디에나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불꽃이 정확히 여왕에게 작렬하며 공동 전체를 검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그런 혈룡의 숨결은 정작 그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쩌저저저저적!

푸른 빛에 닿자마자 그대로 얼어붙었으니까.

마치 공간 그 자체에 고정되기라도 한 듯 허공에 멈춰 있는 불꽃.

-위험할 것 없다.

곧이어 그러한 불꽃이 유리 조각처럼 부서져 내림과 동시에 푸른 빛 속에서 하나의 존재가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불꽃은 나에게 해를 입힐 수 없으니.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푸른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내린 채 20대 초반의 여인.

바로 서리 정령의 완전한 형태였다.

예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의 냉기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혈룡을 오시하는 그 모습은 과거 묘사되던 서리 여왕의 모습 그 자체였다.

'물론 이걸로도 저 녀석에 비한다면 힘이 모자랄 테지만... 상관없겠지.'

그런 세피르와 혈룡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시온의 전신에서 무스펠하임의 염화가 솟구치기 시작한다.

'타격을 입힐 정도의 힘만 있으면 되니까.'

그리고 애초부터 시온은 서리 정령 혼자서 싸우게 할 생각이 없었다.

투화학!

한 줄기의 불꽃으로 화한 시온의 신형이 악수들과 마물들이 전투 중인 전장을 넘어 단숨에 혈룡에게로 치달았다.

시온의 움직임에 반응하여 고개를 돌리는 혈룡.

그런 용의 눈동자가 완벽하게 시온을 담아내는 순간,

끼아아아아!

온갖 속성의 상급 정령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시온을 향해 쏘아졌다.

타락이라도 한 것인지 마기와 함께 끔찍한 괴성을 질러내는 정령들.

하지만 그들의 공격은 시온에게 닿지 못했다.

시온이 막거나 피해낸 것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가만히 서 있을 수는 없겠지요."

뒤쪽에 있던 디에나가 똑같은 상급의 정령들을 소환하여 시온을 보호한 것.

기본적으로 차분한 성정이었기에 금방 정신을 차리고 전투에 합류할 수 있게 된 그녀였다.

'아직 이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일단 눈앞의 저 용과 싸워야 한다는 거겠지.'

그 생각과 함께 디에나의 눈 안에서 떠오르는 여섯 개의 별.

화아아악!

그러한 천성해의 별빛을 전해 받아 마치 갑옷처럼 두른 그녀의 정령들이 혈룡이 소환한 정령들과 격돌하기 시작한다.

정령 별빛.

천성해와 정령술을 접목시킨.

이 세상에서 오직 디에나만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이었다.

"그래도 상황 파악은 빠르네."

그런 디에나의 지원에 힘입어 단숨에 혈룡의 앞까지 치달은 시온이 슬쩍 웃으며 위쪽의 허공을 움켜쥐었다.

키이이잉!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시온의 손안으로 잡혀 들며 공명음을 터뜨리는 멸광검.

그로부터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이 거슬렸던 것일까.

그르르!

낮은 그로울링을 흘린 혈룡이 그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던 한쪽 팔을 휘둘렀다.

그 덩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순식간에 음속을 돌파하며 시온을 향해 날아오는 용의 발톱.

그 순간,

탓-

허공을 디뎌 몸을 살며시 틀어낸 시온이 그대로 이클락시아를 사선으로 그어 올렸다.

터어어엉!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힘으로 정확히 역점을 타격하는 시온의 검에 의해 몇십 배는 더 커다란 용의 팔의 궤도가 틀어지며 허공으로 솟구친다.

그로 인해 드러난 혈룡의 허점을 향해,

투콰아아아앙!

곧바로 이어진 시온의 검격이 완벽하게 꽂혀 들었다.

그러나 조금 전 디에나의 말이 사실이었던 듯 작은 상처조차 내지 못하는 시온의 공격.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온의 눈은 차분했다.

처음부터 타격을 줄 존재는 따로 있었으니까.

이 일격은 혈룡의 중심을 흐트러뜨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영혼 채로 얼려주마.

서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와 함께,

쩌저저저저저적!

비틀거리는 혈룡의 위쪽에서 수백 개에 달하는 냉기의 창이 쏟아져 내렸다.

시온의 공격과는 단숨에 외피를 뚫어낸 세피르의 창들이 혈룡의 속살마저 얼려내기 시작했다.

그아아아아!

처음으로 제대로 들어온 타격에 이어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고통에 혈룡의 입에서 커다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런 혈룡의 감정에 반응하듯 주변에서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정령들이 미친 듯이 날뛰며 온갖 자연 재앙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하여 마물과 악수들을 비롯한 전장 전체가 휩쓸린 채 박살 나고 있었지만, 정작 가장 가까이 있는 시온의 상태는 멀쩡했다.

이런 마구잡이식의 공격에 당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것은 뒤쪽에 있던 디에나 또한 마찬가지였던 듯,

"왼쪽 다리를 노릴 거예요."

폭풍 속에서도 수십 개체의 번개 정령을 뭉쳐 거대한 창을 만들어 낸 그녀가 그대로 혈룡을 향해 쏘아내었다.

고유 기술 '정령 별빛'에 의해 강화된 뇌전의 창이, 짜자자자자작!

혈룡의 다리와 격돌하며 주변으로 어마어마한 충격파를 흩뿌린다.

또다시 흔들리는 혈룡의 중심과,

콰드드드득!

그로 인해 드러난 틈으로 어김없이 꽂혀 드는 세피르의 권능.

그러한 패턴이 반복되며 혈룡의 몸에 새겨지는 상처들 또한 점차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 아 아 아 아!

포효를 토해낸 혈룡이 어떻게든 그 반복을 깨뜨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쩌저저정!

마치 그 모든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한 시온의 움직임에 의해 무의미한 발버둥으로 변하고 있었다.

자신의 힘이 더욱 강한데도 불구하고 밀리는 상황에 혈룡의 눈동자에 어리는 당혹감.

하지만 이건 당연한 결과였다.

아무리 가진 힘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하더라도 혈룡은 세계수에 의해 방금 세상에 태어난 존재였다.

즉, 전투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가진 힘을 어떻게 다루고 적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알 리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절세의 보검을 쥐여준 꼴.

그렇기에 반푼이나 다름없었고 그런 혈룡에게 정령왕이라는 방어조차 뚫어낸 창을 가진 시온이 질 리가 없었다.

'이제 마무리 지어야겠어.'

그래도 기본적인 스펙이 압도적인 탓일까.

수많은 타격을 가했음에도 아직까지 쓰러지지 않는 혈룡을 바라보며 시온은 이클락시아를 강하게 쥐었다.

슬슬 세피르를 유지할 힘이 부족해지고 있었다.

평소라면 이 정도는 거뜬했겠지만, 정령이 또 한 번 각성함으로써 들어가는 힘 또한 많아진 것.

그런 시온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그 오 오 오 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포효를 내뱉은 혈룡이 주변에 흩어져 있던 모든 정령력을 가슴 앞으로 그러모았다.

시온이 계속해서 공격을 맞지 않자 아예 공동 전체를 날려버리려고 하는 것.

응집된 정령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힘의 여파로 인해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혈룡의 공격은 완성되지 못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죠."

콰드드드드득!

디에나가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만들어 낸 거의 공동만 한 크기의 바람 화살이 그대로 혈룡의 가슴에 작렬했으니까.

타격은 입히지 못했지만, 그대로 혈룡을 뒤쪽으로 튕겨 버리며 기술의 완성을 방해하는 화살.

쩌저적!

뒤따라 날아든 냉기가 휘청이는 혈룡의 다리를 바닥과 같이 얼려버리며 그대로 그 자리에 고정시킨다.

그리고 그로 인해 드러난 틈은,

"세피르."

시온이 혈룡을 마무리 짓기 충분했다.

용의 머리 앞에 도달한 채 나지막이 서리 여왕을 부르는 시온.

그 부름에 따라 푸른 빛으로 화한 세피르가 어느새 최대치로 당겨진 이클락시아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키이이이잉!

조여드는 공간과 얼어붙는 대기.

그로부터 느껴지는 압도적인 여왕의 권능에 혈룡의 두 눈동자가 확장되는 순간, 쩌저저저저저적!

푸르게 변한 이클락시아가 수평으로 그어지며 용의 목을 완벽하게 베어내었다.

그대로 갈라지며 공중으로 떠오르는 혈룡의 머리.

그보다 뒤늦게 그어진 검의 궤적을 따라 세상 자체가 얼어붙기 시작한다.

쿠우웅!

공동의 바닥으로 용의 머리가 떨어지며 커다란 소리를 내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디에나의 눈이 흔들렸다.

"정말로 이기다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그녀.

자신이 전투에 참여했음에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곧이어 그런 디에나의 시선이 방금 하나의 업적을 이뤘음에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권태로운 눈빛을 한 시온에게 향했다.

'정말로 알 수 없구나.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이번만큼은 영겁제의 힘을 익히거나 소환한 고유 정령 때문이 아니었다.

정말 시온 아그네스란 사람 자체를 알 수가 없었다.

누구라도 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벽을 마주하고도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는 대범함.

어떠한 상황에서도 유지되는 침착함과 상황 파악 능력.

그리고 마치 셀 수도 없을 만큼 긴 세월을 절대자로서 살아온 듯한 카리스마와 권태로움까지.

이 모든 것을 갖춘 자의 나이가 이제 갓 성인이 되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적이라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두렵겠지만, 같은 편이라면 그 무엇보다 든든하리라.

'어쩌면 시온이라면 요정림을 맡겨도....'

디에나는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고개를 흔들어 지웠다.

그러고는 거의 정리되어가는 전장을 바라보는 시온을 향해 걸어가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죠?"

"나한테 물어볼 필요가 있나?"

그에 당연하다는 듯 되묻는 시온.

애초부터 요정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원인은 이곳 지하 공동에 있는 마계수 때문이었다.

그런 마계수를 탈취했으니 이제는 마계수 안에 저장되어 있는 정령력과 아케니디아의 축복을 세계수로 옮기기만 하면 끝이었다.

그것 정도는 시온 자신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할 수 있으리라.

"없긴 하죠."

디에나 또한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이제...."

곧이어 그런 그녀가 다른 요정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려 할 때였다.

"주인, 짹짹이가 나무 파먹어!"

리우시나의 외침이 들려왔다.

'나무?'

이곳에 존재하는 나무는 하나뿐이었다.

그에 동시에 돌아가는 시온과 디에나의 고개.

"이건 나무가 아니라 정령력이니라."

그런 둘의 눈에 어느새 마계수에 흠집을 낸 채 그 틈으로 새어 나오는 정령력을 빨아들이고 있는 세피르의 모습이 들어왔다.

"미안하군. 너무 맛있어 보이길래 조금만 먹었다."

그 말과는 달리 조금이 아닌 양과 왠지 모르게 멋쩍어 보이는 여왕의 얼굴.

일이 살짝 꼬인 것 같았다.

소설 속 막내황자가 되었다 225화

56장 요정림(5)

어느덧 해가 지고 정령과 마법으로 작동하는 불빛 등이 엘브리움을 밝히기 시작하는 저녁.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녹빛 광장'에서는 수많은 요정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제 곧 열릴 요정림 최대의 축제인 '풀잎과 나무의 노래'를 준비하는 것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몇 시간 전 일어난 마계수 토벌의 흔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시온이 바닥을 그대로 박살 내며 진입한 탓에 광장 일부가 손상되어 있었을뿐더러 밑의 지하 공동에도 아직 막대한 마기가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리하는 요정들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이번 일로 인해 다시 요정림은 살아나게 될 테니.

"늦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광장의 외곽에서 그런 요정들을 오마령 중 하나인 크레비스와 질투의 대공, 젤리스가 몸을 숨긴 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요정림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움직일 줄이야. 듣던 대로 정말 파격적이군요. 그런데...."

살짝 굳어진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크레비스의 눈동자에는 진한 의문이 깃들었다.

"대체 어떻게 마계수가 있는 곳을 찾아낸 건지 알 수가 없군요. 그것도 이렇게 빨리."

마계수를 심어놓은 지하 공동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놓은 장소였다.

극비를 유지하기 위해 마계수를 지키는 마물들을 제외하고는 몇몇 간부들에게만 그 위치를 알려주었으며 들어갈 수 있는 입구 또한 하나밖에 만들지 않고 오직 밤에만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

그렇기에 아무리 제국의 황족이라고 해도 이토록 빠르게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미리 그 위치를 알고 있지 않은 이상.

"거기다가 마계수를 지키는 수문장까지 처리하다니...."

수문장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왕급의 정령이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요정들은 그런 존재를 소환할 능력이 없으니 분명 시온 아그네스 쪽에서 소환했을 터.

"경계에서 오그리트 님을 멸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가 보군요."

"흠...."

그런 크레비스의 옆에서 젤리스가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내가 힘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은 뭐가 남았지?"

"마계수에 담겨 있던 정령력과 축복이 어디로 옮겨졌나에 따라 다르겠지만, 십중팔구 세계수에게로 갔을 겁니다."

"그래? 그럼 세계수를 먹는 수밖에 없겠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흘러나오는 젤리스의 목소리.

"...그렇게 되면 엘브리움 전체를 비롯하여 시온 아그네스와도 충돌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적어도 시온 아그네스가 요정림을 떠난 다음에 움직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실 젤리스의 힘이라면 엘브리움이 아닌 요정림 전체랑 붙는다고 해도 꿀릴 게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더불어 시온 아그네스는 다른 대공 중 한 명을 죽인 전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크레비스의 이런 제안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젤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반신급 존재가 세상에 얼마 만에 한 번씩 나타난다고 생각해?"

그와 함께 흘러나오는 하나의 물음.

그 물음에 마령이 대답하기도 전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무척이나 드물어. 없다고 해도 될 정도로. 그리고 필멸로부터 올라선 존재는 더욱 드물지. 그래서 반신의 격을 획득한 존재는 다른 반신의 탄생이나 움직임을 대충은 알 수가 있어. 드문 만큼이나 티가 확 나거든."

"...."

"그런데 시온 아그네스에게서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단 말이야. 심지어 오만과 싸우고 있을 때조차도."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었다.

"시온 아그네스의 지닌 힘은 반신급 존재에 비해 한참이나 미치지 못할 거야. 아마 오만을 죽인 것 또한 수백 개의 우연이 겹쳐져 일어난 행운이거나... 일시적으로 격이나 힘을 무지막지하게 올려주는 무언가를 사용했을 거란 말이지."

그리고 그 무언가는 일회용일 가능성이 컸다.

상식적으로 반신을 죽일 수 힘이 영구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그러니까 사릴 필요가 없다는 거야."

마주친다고 해도 그저 압도적인 힘으로 짓눌러 주면 그뿐.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움직이실 생각이십니까?"

"바로. 굳이 더 기다릴 필요는 없으니까."

크레비스의 말에 그렇게 대답하는 질투의 눈은 어느새 불길한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