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

Prologue 프롤로그

커버보기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어느 빌딩의 꼭대기.

그곳에선 두 명의 인물이 대치하고 있었다.

저 허공 위, 긴 금발 머리를 휘날리며 나를 노려보는 여자는 히어로, 스타더스.

그리고 그녀와 대치하는 나는, 분명한 악당이었다.

"자, 너의 장난질은 이대로 끝이다. 이제는 뭘 더할 셈이지?"

나를 째려보며 차갑게 쏘아붙이는 그녀.

인질 몇명 잡고 테러를 일으켰다는 이유만으로 히어로에게 매도를 당하고 있는 내 모습이다.

뭐, 당연한건가...?

나에게 맞서고 있는 그녀의 이름은 스타더스.

본명 신하루.

정의롭고, 불의를 지나치지 않으며, 착하고, 강단 있는.

내가 빙의한 이 만화의 주인공.

지난 세월 동안, 나는 그녀의 숙적이 되어 지냈다.

왜냐고? 음, 사실 다 그녀를 위해서다.

뭐 그녀가 알 리는 없겠지만.

난 그런 속마음을 숨긴 채, 후흐흐-라고 웃으며 악당같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건냈다.

"그래요. 이번에도 아주 잘하셨습니다. 아주 잘했어요. 역시 제가 인정한 제 숙적 답군요."

내가 허공 위에서 과장되게 박수를 치며 말하자, 구겨지는 그녀의 인상.

"너의 인정 따위는 필요 없다, 이 쓰레기 같은 놈아."

그래. 알았어 알았어.

근데 나 지금 염동력 사용 가능 시간이 얼마 안 남았거든?

이러다가 잘못하면 저 대지로 추락하게 생겼다고.

그러니, 빠르게 끝내자.

내 마지막 작별을.

"그래요, 스타더스. 그래요! 당신은 늘 그래왔죠. 제 '놀이'를 늘 제일 먼저 간파하고, 맞서왔으며, 저를 늘 추적해왔었죠."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양 나를 쏘아봤다. 어, 방금 이쪽으로 날아오려고 움찔한 거 같은데. 야, 아직도 이 건물 기폭장치 나한테 있다니까? 오지 마 임마.

"어쨌든, 오늘의 이게 제 마지막 유희가 될 거 같네요. 당신은 이미 다 컸어요. 더 이상 저랑 놀 필요가 없죠. 아마 앞으로 제가 당신을 지목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잘 있어요, 스타더스."

"잠깐..!"

마지막까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나는, 망토를 내 앞으로 돌려 빠르게 순간이동을 해 버렸다.

그리고 떠나간 나의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스타더스는...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뭐야. 왜 저런대.

EP.1 나 강림

커버보기

평화로운 낮.

다른 사람들은 전부 일을 하거나 자신만의 할 일을 하고 있을 무렵.

나는 혼자, 건물의 옥상 위에 서서 남의 집을 창문으로 염탐하고 있었다.

"시발...."

건물 위에서 혼잣말하고 있으니 담배가 땡기네.

그러나 이 세계에 빙의한 이후에 끊어버려서 현재 가지고 있지는 않다.

쓰읍, 그냥 다시 피울까.

아니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참아야지.

검은 머리에 검은 로브, 거기에 검은 망토까지.

올 블랙 패션에, 얼굴은 회색으로 이루어진 반쪽의 가면을 쓴 사람.

이게 바로 나의 현재 모습이다.

그래, 심각하게 중2병스러운 모습이기는 하다.

현실에서 이런 모습으로 지하철을 타면 '3호선 근황….'이라면서 인터넷에 박제될 것만 같은 기분.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이 모습이 정상이다.

그러니까, 악당 평균 복장이 이 정도는 되는 거라는 거지.

이 세계는 슈퍼 히어로 만화, [스타더스트!]의 세계니까.

분명 만화를 완결까지 봤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이 세계에서 깨어났다.

영문도 모르고 있던 나에게 생긴 거는 약간의 염동력 능력과 순간이동 능력뿐.

그래, 그래도 능력이라도 준 것은 감사하다.

아예 무능력자 일반인으로 빙의 된 것보다는 훨씬 낫지.

...그래도, 이게 다야? 염동력과 순간 이동?

내 능력을 테스트 해 본 직후 상당히 좌절했다는 것은 당연.

물론 어떤 이들은 나에게 물을 수도 있다.

초능력 두개면 충분히 좋은거 아니냐? 라고.

배가 불렀다고 질책할 수도 있겠지.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이거 원작 만화에서 후반부 가면 주인공을 포함한 대부분이 사기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이런 허접한 능력들로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는거 아닌가.

뭐, 먼 미래의 이야기기는 하지만.

일단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내가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다.

뭐?

일단, 악당 죽이기.

현재 S급이거나 미래에 S급이 돼서 주인공을 위협할 빌런들 죽이기.

사실 나 같은 잡졸이 걔들을 죽이는 거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나는 상식을 벗어난 존재.

이 세계를 이미 만화로 탐독하여 미래를 알고있는 자.

그러니까, 메인빌런들의 실명, 사는 곳, 얼굴 정도는 대충 다 알고 있다는 사실.

"휴우..."

그래, 이제 슬슬 움직일 차례다.

나는 창문으로 보이는 남자를 한번 더 힐끔 본뒤, 손을 풀었다.

빌런 암살의 시간이 왔다.

***

조용한 가정집.

햇볕이 나른하게 깔린 이곳에서.

한 남성이 세상 귀찮아보이는 얼굴로 빵을 뜯고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 선 정체불명의 괴한.

"?!"

뒤늦게 이변을 눈치챈 남자가 뒤를 돌아보지만.

이미 늦었다.

"잘가세요, 라이노."

괴한이 중얼거린 한마디에 갑자기 그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끄으윽, 끄윽?"

갑자기 남자는 밥을 먹다 말고 숨이 막힌다는 듯 끅끅거리더니.

펑.

어우.

그로테스크해.

나는 내가 만들어 낸 참상에 혀를 내둘렀다.

처음하는건 아니라 거부감이 덜하긴 한데... 으.

저 남자를 방금 살해한 괴한.

그래, 그 괴한이 나다.

내가 죽인 이놈은, 죽일만한 놈이었다.

A급 빌런인 라이노.

자신의 가진 뿔을 이용해 멋대로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미친놈.

사실, 어쩌면 이 도시에 널리다 널린 빌런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놈을 콕 찝어 먼저 죽이기로 결정했다.

왜냐? 얘가 나중가면 S급으로 진화해서 미친 학살범이 되거든...

물론 지금도 강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내가 이놈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몰래 뒤로 순간이동해서 기습쳐서 죽인거지. 약자에게는 약자의 싸움 방식이 있는법.

내 약한 염동력으로는 공격 한 방이 한계니까.

잘 가라, 라이노. 그래도 만화로 볼 때는 재밌었다.

근데 너가 그렇게 사람 갈아버리는게 현실이 될거라고 생각하니 이럴 수밖에 없었어...

그래도 이게 두번째 살인이라 그런지, 전보다 훨씬 거부감이 없었다. 내가 좀 적응력이 빠른가?

...그래도, 앞으로는 그냥 총으로 깔끔하게 보내주자.

머리 터트리는건 이번이 마지막!

짧은 감상을 마친 나는 피바다가 된 거실을 지나쳤다.

그리고 뒤적뒤적, 이놈의 옷장을 훑어보니.

역시.

라이노의 가면이 나왔다.

코뿔소를 닮은 가면. 그래, 이걸 이놈 시체 앞에 둘까.

이러면 나중에 누가 발견했을 때 이놈의 라이노인 줄 알겠지.

됐다. 자, 이제 그만 돌아갈까.

아니야, 무언가 기념으로 해 둬야지.

뭘 할까.

짧게 고민한 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이렇게 하면 어그로가 확 끌리겠다.

결심이 선 나는 검은 장갑을 낀 손을 슥 슥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 앞으로는 이런 짓 안하고만다 진짜.

***

대한민국 초상 능력자 협회.

일명 히어로 협회.

협회 소속 A급 히어로 신하루.

이명 스타더스.

그녀는 현재, 한 가정집에서 이루어진 끔찍한 참상을 보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이게 라이노의 흔적이라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옆에서 서 있던, 얼굴이 파래진 경관이 말을 이었다.

"주민의 신고받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난 뒤였습니다. 살해범은 이미 도주한 것 같고, 높은 확률로 저번 인물과 동일한 거로 추정됩니다."

경관의 말이 이어질 무렵, 집에서 수색을 하던 다른 경관이 말을 이었다.

"네. 그리고 이번 피해자도 역시나 빌런인 점을 고려하면 맞는 거 같군요. 그리고 저 흔적 역시나...."

거기까지 말한 경관은 말을 줄였다.

끔찍한 광경에 할 말을 잃었기에.

폭발한 머리를 뒤로한 사체.

그곳에는 빨간 피로.

나보다 악한 이에게 죽음을.

나보다 약한 이에게 죽음을.

To you, Stardus.

마치 중학생이 적은 것처럼 오글거리고 삐뚤빼뚤한 글씨.

그러나 그것이 피로 적었기 때문일까.

어째서인지, 섬뜩한 느낌이 드는 그런 문구였다.

"미친놈..."

그것을 본 신하루가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어떤 악인이라도, 이러한 방식으로 죽어서는 안 된다.

법정에 서서 공정한 재판을 통해 처벌받아야 하는 법.

"...스타더스에게라. 하."

그놈이 어째서 자신을 저격한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만약 이놈이 자신을 도발할 생각이었다면, 썩 훌륭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렇게 끔찍한 방식으로, 자기 멋대로 살인을 저지른 빌런.

이놈은.

자신을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여전히 굳은 얼굴로 신하루는 사건현장을 떠났다..

죽은 사람이 악인이든 아니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해치는 빌런이 있다는 것이고

그녀는 그게 누구든, 그를 막을 것이라는 것이다.

***

[오늘 오후 7시. A급 빌런 라이노가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현장에서 머리가 폭발한 것으로 보이고, 현재 범인의 신원은 미상입니다. 히어로 협회는 라이노를 제거한 자를 '끔찍하고 잔인한 사적 제재를 가한, 명실상부한 빌런'으로 규정하며, A급 빌런으로 지정했습니다. 범인은 염동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걸로 보이며….]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어라, 저거 내 얘기잖아.

소파에 누워서 게임이나 하던 나는 고개를 슬쩍 돌려 티비를 바라보았다.

나오는 것은 신하루의 얼굴.

[…A급 능력자 스타더스는, 자신을 지목한 빌런에 대하여 용서할 수 없는 무도한 자라며 그를 검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범인이 왜 스타더스를 지목했는지는 불명이며….]

아, 이제야 밝혀졌구나.

며칠 전에 내가 벌인 한바탕 소동이.

나는 휴대폰을 켜 인터넷 뉴스를 봐봤다.

본문, 본문, 본문. 그리고... 댓글.

[아니 근데 솔직히 빌런만 죽이는 거면 히어로 아니냐? 왜 빌런으로 규정함?]

[비질란테 형님 쌉호감인데ㅋㅋㅋ 그래 빌런들 감옥에 박으면 맨날 탈출하기만 하는데 아예 죽이는 거 응원합니다ㅇㅇ]

[난 저 빌런 응원함. 스타더스야 걍 잡지 마라.]

"어....."

나는 침음을 흘렸다.

어째, 인터넷에서는 나에 대해 우호적인 것 같다.

여러 뉴스와 커뮤니티를 훑어본 결과, 진짜인 것 같네.

"...."

역시 빌런들만 제거해서 그런가.

그래, 이런 식이면 안티히어로라 불려도 할 말이 없다.

안티히어로 맞나? 나쁜히어로? 하여튼.

"....곤란한데."

그래, 곤란하다.

내가 자꾸만 이렇게 여론이 좋아진다면, 나를 추적하는 스타더스에 대한 여론이 나빠질 수도 있다.

그건 안 되지.

스타더스. 이 세계의 진정한 주인공이자, 나의 최애캐.

내가 이렇게 빌런들을 사냥하는 건 전부 그녀를 위함이다.

그녀는 영원히 모르겠지만.

내 목표는 그녀가 꽃길만 걷게 해주는 것.

굳이 그녀가 목숨을 넘나드는 전투를 하거나 인격을 마모해가지 않은 채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래도 그녀는 주인공.

약간의 시련이 있어야 강해지는 존재다.

"흐음..."

어떻게 할까나.

나에 대한 여론을 뒤집으며 그녀도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지.

나의 빌런 정식데뷔.

"....흐으음."

내가 본 히어로 만화는 [스타더스트!]만 있는 게 아니다.

흔히들 알고 있는 다를 슈퍼히어로 만화나 영화도 많이 봤었다.

그렇게 성공한 만화들의 공통점을 꼽자면.

역시 '인상 깊은 빌런'을 꼽을 수 있을 거다.

그래, 그리고 이 만화의 인상 깊은 빌런은 내가 다 제거할 것이다.

음.

이게 진짜 만화였다면 욕 무지하게 먹을걸.

메인 빌런 한명에게 비중을 몰아준다고.

다른 만화들과 다르게 [스타더스트!]는 내가 제일 재밌게 읽은 만화.

사실 재밌게 읽은 정도가 아니라 매니악하게 읽고 씹고 맛보고 즐긴 고인물이다.

그러니, 이왕 이런 세계에 살게된 만큼.

내가 직접, 더 높은 곳으로 도약시켜야 하는 거 아니겠어?

나는 이 세계를 누구보다 사랑한 자.

나는 주인공을 가슴속 깊이 동경한 자로서.

내가 이 세계의 빌런이 되겠다.

그러니까, 진짜 빌런. 나쁜 놈.

솔직히 소시민으로 살아온 내가 뭘 하겠냐마는.

나한테는 빙의 전에 읽은 수많은 슈퍼히어로물들이 있다.

아마 다음에 벌일 사건이 나의 데뷔일 건데.

인상 깊게 가야지.

"...폭탄 구하고, 사람 구하고…."

바쁘겠구만.

***

한국 히어로 협회 사무실.

"스타더스씨! 지금 방송 틀어보세요!"

사무실에서 자료를 조사하던 신하루에게 누가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죠?"

"그 빌런, 그 빌런이 지금 전파납치해서 방송을 송출하고 있습니다!"

"네?"

그녀가 서둘러 사무실 벽에 있는 티비를 틀자.

검은 배경에 한 남성이 화면에 등장했다.

그의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회색 가면.

그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도시의 주민 여러분."]

베일에 쌓인 빌런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EP.2 악역 데뷔

강에도 파도가 치는가?

나는 잘 모르겠다. 아마 안치겠지. 내지니까.

하지만 지금의 강은, 마치 파도가 치는 것 같다고 표현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날은 화창하고 밝았다.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날 것만 같은 좋은 날.

그럼에도 이 강은 무척이나 잔혹해 보였다.

두 배 모두 유람선.

즐거움을 느끼러 온 손님들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질려 하고 있으니까.

["네, 지금 저 두 배에는 폭탄이 붙어져 있습니다. 쾅-! 하면 저 두 배에 탄 모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도 없이 떠나게 되겠죠."]

전국민이 보는 지상파 티비 앞에서 나오는 범인의 목소리.

지금까지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최초의 빌런발 전파납치 사건이었다.

["이런 짓을 한 제가 누구냐고요? 소개합니다. 제 이름은 에고스틱. 그냥 편하게 에고로 불러 주시길 바랍니다. 제 이력도 소개해야 할까요? S급 빌런 엔조디악. A급 빌런 라이노. 네, 제가 죽였습니다. 왜냐고요? 그야, 재밌으니까?]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그는 윙크했다.

비록 나머지 눈은 반쪽 가면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지마는.

["네, 근데 제가 뭐 살인마?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죠.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당연히,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로, 일단 전 10분 이내에 이곳에 A급 히어로 스타더스가 오는 걸 바랍니다. 왜냐고요? 그녀가 오지 않으면.... 아이고! 슬프게도 오늘 타이타닉이 2대나 더 생길 거 같네요."]

"지금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밖으로 나가 옥상쪽 문부터 열어주세요."

"예, 엽!"

사원이 문을 닫고 부리나케 나간 뒤.

신하루는 빠르게 옷을 슈트로 갈아입었다.

붉은 라텍스 슈트를 입고, 귀에 인이어 이어폰을 연결하고.

그녀는 창문을 향해 뛰어가, 몸을 날렸다.

[스타더스. 여기는 작전통제실입니다. A급 빌런 에고스틱이 준 좌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서대….]

빌런이 준 시각은 10분.

그리고 현재 빌런이 있는 위치를 생각해 봤을 때.

그녀에게는 충분하고도 남은 시간이었다.

***

"휴... 시발."

방송을 찍던 카메라는, 끄고 주머니에 처박아 놓은 상태.

아마 이제쯤이면 방송에는 두 배의 상황이 나오고 있을 것이다.

사전에 설치한 카메라가, 패닉에 빠진 두 상황을 그대로 방송에 송출하고 있겠지.

"아, 진짜 진심으로 담배 마렵네."

아마 이제 곧 스타더스가 이곳으로 날아 올 것이다.

내 최애캐였던 그녀를 볼 거라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는 했지만, 그녀가 살의에 찬 모습으로 나를 내다볼 생각 하니...

음.

더 두근거리는데?

하여튼, 내가 세팅해 놓은 걸 그녀가 만족해줬으면 좋겠다.

그냥 테러가 아니야. 죄수의 딜레마를 섞은 테러라고.

이거 할려고 지난 시간동안 배에다가 폭탄달고...

폭탄 사랴, 사람 고용하랴, 일정 조율하랴, 방송전파 납치하랴...

지금까지 쭉 소시민으로 살아왔던 내가 테러 하려고 드니, 참 쉽지가 않았다.

돈이라도 없었으면 어쩔뻔했어.

뭐, 그래도 어떻게든 노력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놀란 형님, 보고 계십니까?

당신이 그려 낸 이야기, 제가 이 세계에서 직접 구현해 보겠습니다.

약간의 조작과 변형이 있겠지마는...

나는 다시 한번 내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검은 로브, 검은 바지, 검은망토, 검은 머리.

그리고 오페라의 유령에서 깊은 영감을 받은, 얼굴의 반만 가리는 회색 마스크.

완벽하다.

지금 내가 서있는, 강이 한눈에 보이는 옥상의 한 건물.

그렇게 난간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 이쪽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허공을 가르며,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는 누군가.

긴 금발머리를 휘날리며 날아온 이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자 히어로 스타더스였다.

쾅- 하고 옥상에 착지한 그녀.

와! 히어로랜딩!

그녀가 멋있게 착지하는 모습을 실제로보니, 원작의 팬으로써 가슴이 뛴다.

그런데, 어, 왜 내쪽으로 다가오는거냐?

"아이고! 제 손에 기폭장치가 있습니다! 멈춰주시죠!"

내가 오른손에 든 기폭장치를 흔들자, 성큼성큼 다가오던 발걸음을 늦추는 그녀.

그렇게 이윽고 완전히 멈춘 그녀는, 팔짱을 끼고 나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에고스틱."

"네. 그게 제 이름이랍니다. 기억해 주셨군요?"

"지금 당장 폭탄을 해제해라. 그러면 몇 대 맞고 구속되는걸로 걸로 끝내주지."

"하하,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내 말에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일그러져도 진짜 눈부시게 이쁘기는 하다만.

"자자, 너무 인상 구기시지 마시고. 제가 분명 방송에서 말했잖아요? 모두가 살아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우리를 찍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찡긋했다. 그녀가 도착하기 직전에 다시 이쪽의 모습이 방송에 나가게 했지.

"스타더스씨. 저는 당신에게 관심이 꽤 많습니다. 네, 아주 많죠."

내가 말을 하든 말든 그녀는 입을 다문 채 나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일단 들어 보겠다는 걸까.

그녀의 묵인 아래,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C급에서 A급으로 올라간 대기만성형 히어로. 자신만의 정의와 신념으로 어떤 악과도 타협하지 않는 인물. 인간찬가의 대표적인 상징이라고 생각하죠. 저도 개인적으로 굉장히 존경합니다."

나의 아부 섞인 얼굴의 금칠에 그녀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그래도 이쁘지만.

"헛소리만 할거면 그냥 닥쳐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어, 지금 전국에 송출되는 방송에 너 칭찬하고 싶었을 뿐이야.

이렇게 하면 우리 신하루를 사람들이 더 많이 알아봐 줄 거 아니야...

하여튼, 팬으로써의 사족은 이만하면 됐다.

이제야말로 진짜 쇼를 시작할 때지.

"자자.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두 배 모두 선장실 오른쪽 아래 서랍을 열어 보면 기폭장치가 있을 거에요."

"그 기폭장치들은 각자 서로의 배를 터트리는 장치입니다. 자기 배가 아닌, 다른 배를요!"

내 말이 마치자 일그러지는 스타더스의 표정.

그래, 그녀라면 내가 하고픈 말이 무엇인 줄 알겠지.

나는 찬찬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 모두가 사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아무도 기폭장치를 안 누르면 되죠."

"제한 시각은 30분. 딱 그 시간만 두 배 모두 기폭 버튼을 안 누르면 됩니다."

"대신, 한 배라도 버튼을 누르는 순간 다음 배는 쾅.... 이런."

"뭐, 먼저 버튼을 누른 배의 사람들은 '100프로' 살 수 있을 테니까. 꼭 나쁜 것만은 아니겠죠."

여전히 이해를 못한 듯한 그녀의 얼굴.

그래, 사람들이 그걸 당연히 누르지 않을꺼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향해 말할 뿐이었다.

"우리 정의를 사랑하고 인간을 예찬하는 스타더스씨."

"인간이 얼마나 악하고 이기적인지, 이번에 깨달으셨으면 좋겠네요."

그 말과 동시에 나는 박수를 짝 치며 소리쳤다.

"앞서 말했듯이 제한 시각은 30분. 그럼, 건투를 빌어요 여러분!"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를 비추던 카메라가 꺼졌다.

그리고 두 배의 선실을 교차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자, 이제 여기 특등석에서, 우리는 함께 보도록 할까요."

그녀가 나를 째려봤으나, 나는 그런 그녀에게 내 손에 들린 기폭장치 두 개를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처신 잘하라고!

그렇게 나는 옥상 벽쪽에 설치한 빔 프로젝터로, 선실의 화면을 띄어주었다.

무심한 얼굴로 그쪽을 응시하는 스타더스.

"사람들이, 너가 의도한대로 움직일 것 같으냐?"

그렇게 나한테 한마디 쏘아주는 그녀.

아, 아마 사람들이 다들 조용하고 차분하게, 버튼은 누를 생각도 않고 있을 줄 아는 모양이지?

"뭐, 보시면 알겠죠."

나는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그렇게 벽에 영상이 틀어지기 시작하고.

선내의 상황을 파악한 그녀의 얼굴은, 이내 굳어지기 시작했다.

[버튼을 눌러!!!! 저놈들이 우리를 모두 죽일거라고!!!! 우리가 먼저 눌러야 살 수 있다!!!]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모습.

왜, 기대했던건과 정 반대지?

당연하다.

저기에 내가 선동꾼들 풀어 놓았거든.

옆에서 눌러야된다고 소리지르면, 옆사람도 동조효과로 '눌러야하나?'라고 생각하는 법이다.

안누르면 죽는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게 해서, 사람들의 불안심리를 이용하려는 내 계획.

하하하.

[버튼!! 버튼!! 버튼!! 버튼!! 버튼!!]

예상치 못한 상황을 보고 굳어있는 그녀를 지켜보며, 나는 씨익 웃었다.

프로 악당이란 말이다.

모든 상황을 자기가 의도한 대로 흘러갈 수 있게, 미리미리 판을 다 깔아두는 법이라고, 어?

자, 어떤 혼돈이 일어나는지 같이 봐볼까?

"스타더스.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큭. 많이 다른 것 같지 않습니까?"

아, 웃으면 안되는데

왜 놀리는게 재밌지?

***

"헬기! 헬기는 준비했나?"

"네! 배가 폭파되는 즉시 이동할 수 있도록 미리 세팅했습니다!"

"휴, 그거 말고는 더 없지?"

"다른 B급 이하의 히어로들도 한강 인근에 배치해 놓았습니다!"

"걔네들은 별 도움도 안될거 같은데... 하, 스타더스가 저기 잡혀있는 바람에 답이 없구만."

한국 히어로 협회 컨트롤 센터.

수많은 요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그곳에서, 50의 협회장은 자신의 대머리에서 나는 땀을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요즘 좀 오랜만에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나 했더만,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가.

여전히 땀을 닦고 있는 그는, 화면에 비추어지는 선실에 상황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근데. 저들은 왜 버튼을 누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는 건가? 그냥 안 누르면 다 사는거 아니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협회장님."

"허 참..."

[버튼 안눌러!!!!!]

선실의 상황은 여전히 개판이었다.

EP.3 The Show Must Go On

혼란스러운 선실 안. 사람들의 서로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당장 버튼을 누르라고!"

"비켜! 못 누르겠다면 내가 누를 테니까!"

"다들 미쳤어요? 저쪽도 아직 안 눌렀는데 왜 그래요!"

"조금만 더 늦으면 우리가 죽는다고! 미리 눌러야 할 거 아니야!"

두 개의 배.

두 개의 폭탄.

두 개의 버튼.

버튼을 누른 배는 '무조건' 살 수 있다.

하지만 버튼을 안 누르는 순간 '죽을 수도' 있다.

사실, 이성적이고 상식적이게 생각해보면, 이거는 눌러야 할 이유가 없다.

눈앞에 버튼이 보이면 일단 뭐든간에 무조건 눌러보는 정신이상자가 있지 않는 이상, 아무도 누를리가 만무.

뭐 다른 배 하나가 죄수들만 탄 배라 저놈들은 미친놈들이 누를거같다! 이런것도 아니고.

두 배 모두 폭탄을 안 누르면 둘다 터진다! 이런것마저 아니다.

그러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둘 다 가만히만 있어도 이기는거니까, 아무도 누를리가 없다는건데...

그렇다면! 이성적으로 생각해 봤을떄 눌러야 할 이유가 없는거니, 이성적으로 생각을 못하게 막으면 되는것이 아닌가?

내가 풀어놓은 선동꾼들이여, 빨리 선동과 날조를 시작하거라!

"저 새끼들이 누를거 같다니까!! 내가 다 알아!!!"

"옳소! 우리가 먼저 눌러야 살 수 있을거요! 저놈들이 안누른다는 보장 있소? 이 세계는 죽거나 죽이거나야!!"

그래서 나는 두 배 모두 골고루, 선동꾼들을 풀어놨다.

사람들이 미처 이성적인 생각을 하기도 전에, 버튼을 우리가 먼저 누르지 않는다면 다 죽을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것이다.

그 결과 정신이 없던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불안감과 공포를 느끼게 되고.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져, 끝내 집단광기로 변절되는 것이다.

저 놈들이 먼저 누르기 전에, 우리가 먼저 누르자! 라는...

물론 그러나, 사간이 가면 이제 이건 감성과 이성의 싸움으로 이어져갈 확률이 높다.

선동에 의해 공포에 질린 '감성'은 지금 당장 저 버튼을 누르라고 하겠지.

누르라고, 그래야 네가 살 수 있다고.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건 '이성'일 것이다.

왜냐고?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점점 깨닫게 될 것이거든.

"아직도, 저쪽 배도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고요!"

여자의 세찬 비명의 장내를 뒤흔든다.

그래.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것.

아직 저쪽도 버튼을 눌러 배를 쾅-하고 폭발시키지 않았다는 것.

생각해보면, 둘 다 굳이 버튼을 눌러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

내가 세팅해 놓은 무대는 완벽하다.

일단, 배에 탄 사람들의 전화, 인터넷을 다 끊어 버린다.

와이파이? LTE? 그런 거는 없다.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폰이 맛이 갔나-라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그와 동시에, TV에서 방송이 나온다.

내가 미리 사전에 찍어놓은 방송.

지금 너희 배에는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

이거 터지면 다 죽는다.

그런데 너희 배에 기폭장치가 있다.

근데 이건 너희 것이 아니라 너희 반대편에 있는 배의 폭탄을 터트리는 기폭장치다.

이거 누르면, 그 배 사람들도 다 죽는다.

근데 어머나? 너희 옆 배에도 그 기폭장치가 있네.

너희는 그 버튼 안 누른다고 해도 혹시 아냐? 너희 옆 배가 그걸 누를지.

버튼을 누를 것이냐 말 것이냐. 너희 마음대로 해라.

제한 시각은 30분. 건투를 빈다.

그리고 시작되는 아수라장.

전쟁이 난 듯한 개판.

선장실에서 선장이 기폭장치를 든 채 고민하고, 승객들은 여전히 아우성치고.

그래. 이 장면이다.

내가 너무나 연출하고 싶었던 장면이.

이 세계에 빙의하기 전에 봤던 다른 영화.

박쥐인간과 광대가 싸우는 영화의 제일 명장면.

야밤의 배 양자택일.

비록 거기서는 죄수배와 유람선에, 배경은 밤이기는 했지만.

어른의 사정으로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구현은 못 했다.

아니, 서울에 죄수배가 어딨냐고.

비록 이 만화가 초능력자들이 마구마구 나오는 히어로물 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서울이 배경이기에 죄수배 같은 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극적 긴장감이 좀 떨어지지 않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는데.

뭐, 그거는 다른 방법이 있으니까.

하, 근데 이거 진짜 준비도 힘들었다.

일단 그때와는 다르게 이 세계는 스마트폰이 배급되어 있으니 이것도 다 전파 차단해야 하고.

이 조그마한 나라에 다른 자잘한 하위급 히어로들은 또 어찌나 많은지 얘네들이 간섭 못 하게 해야 하고.

빌런의 삶도 쉽지가 않다.

어쨌든...어디 보자, 아직도 싸우냐?

그래, 1번배는 아직도 싸우고 있네.

그럴 줄 알았어. 계획대로네.

자, 그럼 2번배는?

"버튼을 눌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손을 들어 주세요."

어...사람들이 눈을 감고 손을 올리고 있다.

그걸 선장이 숫자를 세고 있는 모습.

이게 뭐야. 초등학교 반장선거도 아니고.

음. 뭔가 좀 어질어질하네.

아무리 내가 의도한 거여도, 좀 황당하기는 하다.

빔프로젝터에서 눈을 뗀 나는 내 옆쪽에 멀찍이 있는 스타더스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굳은 얼굴로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그녀.

와.

근데.

진짜 이쁘긴 하다.

[스타더스트!]라는 만화의 주인공 스타더스.

대한민국 작가가 그린 몇 안 되는 히어로 만화의 주인공.

그리고 최초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한국의 히어로 만화.

스타더스. 본명 신하루.

별빛을 머금은 것과 같은 윤기 나는 금발 머리.

전신에 달라붙는 빨간 라텍스 슈트.

그리고 진짜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미모.

와, 진짜 어...

그게 내가 최애캐를 현실로 만나게 돼서 살짝 보정이 된 걸 수도 있는데....

나는, 그녀를 실물로 봤다는 것만으로도 이제 죽어도 좋아...

물론,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긴 하지만.

이크, 너무 오래 봤나.

그녀가 내 쪽을 째려보기 시작했다.

"....네가,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목소리도 이쁘다.

큼, 그런 생각은 저 밑에 묻어두고, 다시 일에 집중할 때.

나는 짐짓 쾌활하게 말을 건넸다.

"뭐 그런 섭섭한 말씀을. 솔직히 제가 뭐 배에 탄 사람들보고 버튼 눌러 다 죽이라고 했습니까 뭘 했습니까. 그냥 기폭장치만 던져줬을 뿐인데, 저들이 알아서 누르려고 난리를 치는거죠.."

그렇게 말하며 나는 싱긋 웃었다.

사실 저기에 사람을 풀어 상황을 조작하기는 했으니까, 양심에 찔리기는 한데.

들키지만 않으면 아무도 모르니까 상관없다! 그래.

여전히 굳어있는 스타더스.

나는 그녀에게, 또다른 말을 건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스타더스씨에게 굉장히 큰 관심이 있습니다. 제가 본 바로는 굉장히, 굉장히 모범적인 영웅에 가까우신 분이거든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내쪽을 돌아보는 그녀.

좀 더 말해볼까.

"예전에 인터뷰에서, 모든 인간은 가슴속에 자신을 희생할 용기가 있다고 하신 말. 캬...정말 명언입니다. 제가 그거 들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지 뭡니까."

자, 여기서 한 번 더 웃자.

일초, 이초, 웃은 뒤 다시 입을 열고.

탁, 손가락을 튕겼다.

손가락을 튕김과 동시에, 미리 설치해 둔 뒤쪽의 조명들이 켜져 그녀를 비추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빛에 그녀가 눈을 찡그리고 있을 때, 다시 말을 이어가는 나.

"그렇기에 이번에 한번, 기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렇게 이기적인 인간들을, 스타더스 당신은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요?"

내가 그렇게 말을 함과 동시에, 카메라가 다시 켜졌다.

방송에서는 이제 유람선의 상황이 아닌, 이곳의 모습이 나오기 시작하겠지.

전국의 사람들과 배의 승객들까지, 모두에게 이 모습이 송출되고 있을 거다.

"네, 지금 시간이 한... 20분 지났네요. 제한 시간 10분 전! 이때, 한번 저희의 영웅 스타더스가 할 말이 있으시다고 합니다! 다들 한번 들어 보시죠! 승객 여러분, 집중해 주시길 바랍니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카메라가 그녀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살짝 당황한 것처럼 보이는 스타더스.

그러나 역시 프로 영웅이라는 걸까. 그녀는 금세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A급 영웅 스타더스입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자연스럽게 말을 내뱉는 그녀.

대충 옆에 있는 사람도 누군가의 선한 가족이다. 사람을 믿어라.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 걱정하지 말라 뭐 이런 이야기였다.

한 삼사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한 연설.

그렇게 마지막까지 호소력 깊었던 그녀의 연설이 끝난 뒤. 나는 카메라를 껐다.

그리고 객실의 상황을 살펴보니...

몇몇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치고.

선장들은 만세를 하며 그냥 기폭장치를 망설임도 없이 바다에 던져 버렸다. 응?

그렇게 갑자기 인간찬가를 하고 있으니 제한 시간 30분이 다 되었고.

살아남은 승객들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 축하하며 함성을 질렀다. 어... 내가 의도한거기는 하지만 참으로 극적인 모습이다. 80년대 국뽕 영화같은 느낌인걸.

그러거나 말거나, 스타더스는 모두가 살아남았다는 거에 일단 안심한 눈치다.

이거 내일 유튜브에 올라오겠는데. [일본이 놀라고 유럽이 경악하고 미국이 부러워한 K-히어로! 그녀의 말을 듣자 승객들이 눈물을 흘리며 연합되었다!]뭐 이런 식으로.

됐어. 이제 다시 연기를 시작할때다.

카메라를 자연스럽게 우리 둘의 모습을 나오게 바꾸고...

오케이, 고.

나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영상이 비추어지는 벽을 보며 살짝 몸을 비틀었다.

"어, 어라? 이럴 리가 없는데. 인간들이., 저 이기적인 인간들이..."

나는 몹시 당황한 거처럼 중얼거렸다. 조금 큰 목소리로. 카메라 잘 잡히게.

"이럴 리가..."

음, 근데.

이런 일이 없을 리가 없기는 뭐가 없어.

저거 승객들 일부랑 선장 모두 내가 고용한 사람들인데. 하하.

그냥 사람들 내버려 뒀다가

기폭장치 눌러버리면 어떻게?

원래 쇼는 철저하게 기획해야 하는 법이다.

제작자에 의도와 똑같이 벌어지는 일은 별로 없다.

늘 변수에 대비해야 하는 법.

그러기 위해서, 상황을 통제해야 하는 건 당연.

선장도, 승객도.

모두 짜여진 말들.

자, 이제 연기를 잘 해야 한다.

나는 당황한 눈빛으로 스타더스를 보는 척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스타더스, 스타더스. 신하루.

원작에서는 늘 핍박받고 음해당하던 그녀.

걱정하지 마.

내가, 너 꽃길만 걷게 해줄게.

조작과 연출.

거짓과 기만.

무엇이든 써서.

연기를 시작하자.

"아무리 그래도 이럴 리가 없는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거죠!!"

EP.4 도주의 미학

"하하하... 이럴 리가 없는데."

찬 바람이 부는 옥상.

나는 그 위에서, 허탈하다는 듯이 웃었다.

"인간은, 인간은 저렇게 이타적인 생명체가 아니란 말입니다! 분명 버튼을 누를 줄 알았는데 어째서! 어째서 안 누른 거죠?"

미친놈처럼 큰 소리로 혼잣말하기 시작하는 나.

눈은 허공에, 손도 허공에 허우적 허우적.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손을 멈추고 눈을 내 앞에 서 있던 스타더스에게 고정했다.

"아."

내 짧은 한마디.

스타더스를 바라보며, 여는 입.

"당신 때문이었군요."

당연히 스타더스 때문은 아니다.

내가 선장들한테 히어로의 연설이 방송에 나온 뒤에 바로 바다에 던지라고 명령했거든.

하지만 그것은 나와 선장 두 명밖에 모르는 비밀.

그러니 이 전국에 송출되고 있는 카메라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척.

마치 이 모든 테러가 스타더스의 연설 때문에 좌절된 듯.

입을 놀렸다.

"당신의 연설을 듣고 나서, 모두가 갑자기 연합되었었죠."

그리고 미친놈처럼 웃기.

"하, 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 진짜 너무 쪽팔린데.

나는 부끄러움을 꾹 참고 계속 미친놈처럼 웃었다.

슬쩍 보니 이런 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스타더스의 표정은... 미친놈을 보는듯 했다.

으, 최애의 경멸하는 표정을 보는 팬의 심정을 아는가?

나는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내가 그렇게 웃는동안 그녀가 나를 집지 않고 가만히 있는 이유는, 당연히 내 손에 들린 기폭장치 때문.

배가 항구에 완전히 정박해 사람들이 내리기 전까지는, 그녀는 긴장의 끈을 풀 수 없겠지.

다 웃은 나는, 다시 입을 털었다.

"그래요. 그래. 제가 아무래도 당신을 과소평가했던 모양입니다. 다른 누구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일. 당신이라면, 말 한마디로 대중을 계몽시키는 건 일도 아니겠죠."

음.

큰일 났다.

나도 슬슬 내가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어.

전생의 나는 어떤 인물이었나.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성 그 자체였다.

그러니까, 나를 5초 안에 손짓만으로 죽일 수 있는 괴물 앞에서, 전국의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청산유수처럼 말을 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고.

아까까지는 어떻게든 준비한 대로 말했는데.

슬슬 정신이 나갈 것 같다.

바람이 차다. 나 추워.

로브 안에 핫택스라도 입었어야 하나?

아니, 이런 고민은 왜 하고있는거지...

좇됐다. 슬슬 멘탈이 나간다.

이제 준비해야겠다.

무슨 준비? 튈 준비.

"큼, 큼. 제 실수였군요. 스타더스, 당신을 너무 과소평가했나 봅니다."

"...."

"다음번에는 이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다음에 보죠 여러분!"

카메라를 보면서 싱긋, 한번 웃어 주고.

카메라랑 함께 사라졌다.

망토를 몸 앞으로 두르고 순간 이동을 했다는 소리.

여기 근처에는 경찰들이 쫙 깔려 있을 테니 저 멀리 내 집까지 순간 이동해야겠지.

아, 거기까지 순간 이동하면 힘 딸려서 앞으로 3일은 몸져누워야 할 텐데.

에휴, 인생이 쉽지 않다.

"네 녀석!"

나의 도주를 눈치챈 그녀가 순식간에 내 곁으로 달려왔으나.

어림도 없지, 잘 있어라.

"그럼, 안녕히."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사라졌다.

****

[[단독]한낮의 테러, 사상자는 없었다.]

[A급 빌런 '에고스틱'은 누구인가? 집중취재.]

[[속보]히어로협회, 성명 발표. '빌런의 능력은 염동력, 순간 이동으로 보여.]

[이 시국에 전파납치…. 한국 방송 보안, 이대로 괜찮은가.]

[전국민이 본 전파납치 빌런이 지목한 히어로 '스타더스'는 누구인가? 그녀의 업적을 살펴보자.]

[승객 및 승무원들, 불안 및 공황장애 호소. 인터뷰 거절 의사 밝혀.]

그날, 전국에 기사가 우후죽순 쏟아져 내렸다.

일상 속에 나타난 비일상.

특정 구역, 특정 인물들을 상대로 벌어졌던 다른 테러들과 다르게, 이번 테러는 테러의 현장을 방송으로 전국민에게 송출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테러들과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어그로가 엄청나게 끌렸다는 듯.

하루 만에 전국민이 전부 이 사건을 알게 되었고, 이 사건의 주도자 빌런 '에고스틱'과 그를 맞선 히어로 '스타더스'가 단숨에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외신들도 주목할 만큼 대규모 사건이었다는 것.

한국 히어로 협회는 'A급 영웅 스타더스의 활약으로 테러를 사상자 0명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라고 밝히며 치하했고, 보도자료들도 다 그렇게 나갔다.

테러 풀영상이 유튜브 실시간 조회 수 1위에 오르는 등, 센세이션했던 사건.

이미 수많은 곳에서는 빌런 에고스틱을 정리하고 분석한 게시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히, 분석한 이들 중에는 한국 초상 능력자협회도 있었다.

***

"그래, 브리핑을 시작해 보게."

한국 히어로 협회.

그곳의 최상층에서는,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번에 새롭게 등장한 빌런, 자신이 밝힌 이름은 에고스틱입니다."

"성별은 남성에 한국인으로 추정되며, 대략 20대 초중반으로 보입니다."

"현재 신원과 거주지는 불명이나, 일으킨 사건사고들이 전부 서울에 집중된 걸 보면 서울에 거주중일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범인의 외형은 자료집을 봐주시길 바랍니다."

회의에 참석한 이들에게 배부된 자료에는 그의 정면샷과 측면샷이 찍혀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검은색으로 통일된 그의 외형.

마치 롱코트와도 같은 검은 로브에, 검은 망토를 입고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얼굴의 반을 가린 마스크. 반만을 가렸음에도, 얼굴을 확실시하기 힘든 것이 인식저해 기능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사진 아래 각주에 적혀 있었다.

"그가 현재 직접 살해한 인물은 두 명. A급과 S급 빌런입니다. 둘 모두 머리를 염동력으로 압축, 또는 폭발시켜 죽인 것으로 보이며, 다른 곳에는 일체의 외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기습을 한 게 아닌가라는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빌런의 염동력의 세기는 어느 정도로 보이나."

"그것은…. 아직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두개골을 박살 낸 것은 가만히 있는 무방비 적을 상대로라면 C급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상대가 저항을 하고 있었다면 A급도 쉽지 않습니다만, 범행 상태를 보면 아무래도 무방비할 때 공격한 것 같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흠. 그러면 C급 정도 된다는 건가?"

"그건 아직 확신할 수 없습니다. 범인이 일부러 힘을 빼고 공격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알았다. 계속해 보게."

"예. 에고스틱이 직접 살인한 사람은 빌런 둘이 유일하지만.... 이번에 일어난 대규모 테러로 일반 시민도 학살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브리핑을 하는 자가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이들이 여기에 모인 이유도, 어제의 그 사건 때문이니.

"네. 어제의 사건, 통칭 '한강 유람선 폭탄테러 미수'사건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일단 폭탄은 미리 부착해 놓은 것으로 보이며, 해체 결과 배를 반파시킬 정도의 위력을 가진 고성능 폭탄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어디서 이것들은 구한 건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연설자는 잠시 실례한다고 말한 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파납치. 최신식 보안기술을 뚫고 어떻게 전파납치를 해 방송을 송출했는지는 미정입니다. 로그도 남아 있지 않고, 카메라 또한 빌런이 이동시켜서 검증이 불가능합니다."

"일각에서는 전파 관련 능력도 있는 게 아니냐, 라는 말도 있지만. 아직 정보통신 기술 관련 능력을 갖춘 초상 능력자는 확인되지 않았고, 3개의 능력을 동시에 가진 초상 능력자도 없기에, 추측뿐입니다."

"일단 확실한 건, 에고스틱은 자유롭게 방송 3사의 전파를 탈취 할 정도의 능력은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전파 자체도 저희 쪽이 막은 것이 아닌, 사건이 끝난 후 에고스틱이 방송송출을 관두었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아…."

"그래, 알았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알 것 같군."

협회장이 연설가의 말을 잘랐다.

발표자는 고개를 한번 꾸벅 숙이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고.

긴 테이블에는, 협회장의 말만이 울려 퍼졌다.

"이 빌런은 계획적이며, 정보가 매우 많다. A, S급 빌런의 소재와 신원을 파악하고 있으며, 마음대로 방송국의 전파를 해킹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있나."

"네."

자리에 앉은, 아까 브리핑을 했던 남성이 입을 열었다.

"또한... 일단은, 자신이 뱉은 말은 지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배의 누구도 버튼을 누르지 않자 그대로 살려 보내기도 했고요. 그리고 제일 중요한 점은 스타더스에게 집착한다는 점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테이블 끝 쪽에 앉아 있던 누군가에게 눈이 모두의 눈이 쏠렸다.

자리에 앉아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스타더스, 신하루 그녀에게.

모두의 주목받은 스타더스가, 자신을 보는 청중을 향해 말을 이었다.

"네, 맞습니다. 범인은 어째서인지, 빌런을 살해한 현장에서도 저를 향해 메시지를 남겼고, 이번 사태에서도 저를 콕 찍어 불렀습니다."

"왜인 줄 자네는 알고 있나, 스타더스?"

협회장의 질문에, 하루 그녀는 그저 덤덤히 답할 뿐이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흠.... 이상한 일일네 그려."

그녀의 답변을 들은 협회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른 주제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랭크를 S급, 그러니까 최우수 수배 대상에 올리는 게 맞지 않겠냐. 그러자 아니다, 그가 아직 민간인 살인 미수만 있지 실제로 살인도 하지 않았고, 염동력의 강함도 모르는데 S급을 주는 건 시기상조다...

그렇게 밤새, 열띤 논의가 이루어졌다.

***

그시각.

테러 현장으로부터 몇키로 떨어진 곳의, 작은 원룸.

"아이고.... 시발 나 죽겠네."

나는, 침대에 누워 끙끙 앓고 있을 뿐이었다.

빌런으로 살아가는게 쉬운게 아니야...

EP.5 쇼가 끝난 뒤에

"아이고... 나 죽겠네..."

와.

진짜 죽겠다.

"그으윽... 윽."

겨우겨우 침대에 누운 나는

그대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으아악..."

악당 살려!

***

"하아, 에휴."

눈을 떠보니 이튿날 아침.

거의 한나절을 자다가 쑤시는 삭신을 뒤로한 체 일어나 티비를 켜보니.

뉴스는 전부 어제의 내가 일으킨 사건을 보도하고 있었다.

[뉴스와이드- 빌런 '에고스틱'심층분석]

티비에는 두 패널이 나와 나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초능력이 어쩌구, 해킹 실력이 어쩌구...

그러더니 내 얼굴이 딱-하니 티비에 나왔다.

검은 머리카락에, 얼굴의 반을 가리는 회색 마스크를 쓴 모습.

"와! 어머니, 저 방송 탔습니다! 아, 이 세계에서는 없으시지?"

어머니, 저쪽 세계에서 잘 지내십니까?

저는 이쪽 세계에서 완전 유명인이 됐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다 저 잡으려고 혈안이 됐네요.

"아이고, 아이고 내 삭신이야..."

나는 허리를 탁탁 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누워 있을 시간이 없어요.

일어나 보니 내 옷은 아직도 어제 입었던 옷 그대로였다.

다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로브를 입은 모습.

입은 채로 자서 그런지, 여기저기 구겨져 있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다.

"휴, 옷이나 갈아입자."

옷장에서 편한 옷을 갈아입고 난 뒤, 노트북을 켰다.

위잉-하면서 뜨는 윈도우 효과음.

켜지기 시작하는 노트북을 뒤로한 체 방을 둘러보았다.

창밖으로는 햇볕이 비추는, 조그마한 원룸.

"씁. 여기도 빨리 떠야 하는데."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꽤 오래 살았던 집이지만, 이제 돈도 벌었는데 굳이 여기 있을 필요가 있을까.

이제 명색이 A급 악당인데, 좀 폼나는데 살아야 하지 않겠어.

나 정도면 A도 아니고 AAA급 악당정도 되는 거 같은데. S급 승격은 안 시주나?

뭐, 아직 그 정도 악행은 안했으니 안되겠지만.

근데 그건 그렇고, 사람들 반응은 어떠려나?

켜진 노트북에 들어가, 인터넷을 살펴보니...

"자, 어디 보자... 아이고, 난리가 났었네."

포탈 헤드라인에 온통 내 얘기다.

[대규모 테러 생중계....빌런 '에고스틱'은 어떤 인물인가']

"이렇게 뜨거운 관심은 처음인걸."

역시, 어그로를 끄는 게 정답이었다.

저 한강 저 구석에서 배 납치하고 했으면 어디 누가 알아줬겠어?

한국 히어로 협회 특성상 아무도 모르게 묻으려 들었을 거다. 뭐, 그래도 9시 뉴스에 헤드라인으로 언급은 됐겠지만은...

[오늘 낮 2시, 한강 유람선에서 대규모 테러 행위 일어날뻔.. 다행히 사상자는 '0명']

뭐 이렇게 나오고 땡 끝났겠지.

지금처럼 막 온종일 내 얘기만 하고 이러지는 않았을 거다.

이게, 현장감이라는 게 무서운 거거든.

생각해 봐라, 친구랑 티비로 닌텐도하며 놀고 있는데, 갑자기 티비가 꺼져.

그러더니, 갑자기 내가 나온다. 검은 옷, 회색 마스크에 음흉하게 웃고 있는 내가.

그러더니 배에 폭탄을 설치했다네? 근데 먼저 누른 사람이 살 수 있다네?

내가 이걸 영화관에서 볼 때도 전율했는데, 이걸 실제상황으로 본 대한민국 국민들은 얼마나 집중했겠는가.

솔직히 이 정도면 거대한 예능이지. PPL이라도 받아야 했나? 선실 벽에 콜라 포스터같은 거라도 붙여서.

실없는 상상을 하며, 나는 계속해서 인터넷으로 반응을 살폈다.

무섭다, 대단하다...등등. 대중은 새롭게 등장한 A급 빌런에 주목했다. 하긴, 전파납치와 죽음의 2지선다는 내가 생각해도 임펙트가 엄청날 거야.

거기에 인간 찬가도 빠질 수 없었다. 결국 누구도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정의는 승리한다 어쩌구 저쩌구. 이번 사태는 인간이 결코 이기적이지 않다는, 인간의 선함을 증명하는 사건이라는 등.

몇 시간의 서칭으로 대략적인 분위기를 파악한 나는 이번 쇼로 얻은 것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얻은 것 첫 번째. 내 이름을 전국민에게 알린 것.

에고스틱. 솔직히 말해서, 좀 못 지은 거 같다.

내 검은 로브 생각하면 '블랙 로브', '페르소나'뭐 이렇게 지었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쩝... 어쩔 수 없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데로 둬야지.

그런데 뉴스 기사창에 망고스틱 저놈 잡으라는 댓글을 보니 좀 많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아.

어쨌든, 수익 두 번째. 스타더스를 전국에 알리기.

스타더스도 정말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다. 9시 뉴스에 내 얼굴 다음으로 많이 비췄더만.

스타더스는 원작에서도 대중들에게 꽤 인지도 있는 인물이었다. 일단, 예쁘잖아. 히어로 중에서도 저 정도 미모를 가진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러나 스타더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대중들에게 그리 좋은 이미지는 아니게 되었다. 애초에 처음에 유명했던 이유가 이뻐서인데...

빌런은 1권, 2권을 지나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창의적으로 스타더스를 괴롭히게 된다. 그놈들은 여론몰이와 더붙어 여러 장치를 통해 대중에게 '싸가지 없다'라는 인식을 주게 하는데 성공한다.

거기에 스타더스로의 사회적 관계만이 아닌 신하루로서의 사회적 위치도 교묘히 멸망으로 이끌어가는, 진정한 피폐물.

하. 생각해 보니 또 화가 나는데, 그 못된 빌런놈들은 내가 다 제거할 거니 우리 스타더스는 그냥 나만 생각하면 된다. 범죄 없는 서울, 테러없는 대한민국. 제가 만듭니다. 범죄와 테러는 나만 할 거거든.

그래서 일단, 이번에 스타더스를 대중에게 알렸다.

그것도 외모 관련이 아닌, 정의로움. '히어로다움'을 가진 인물로, 긍정적인 인식을 팍 박았다.

...박은 거 맞지? 뭐, 뉴스 댓글과 커뮤니티를 훑어보니 긍정적인 반응이 대다수였다. 연설도 잘했고, 내가 앞에서 추켜세워준 것도 좀 먹혔겠지. 원래 적의 인정이 제일 객관적인 거거든. 사람들의 인식이.

"일단 첫스텝은 땠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쉴 틈이 없다 쉴 틈이 없어. 바로 다음을 계획해야 할 때다.

이제 또 다른 S급 A급 빌런들을 암살...이 아니라 제거. 제거해야 하고... 또 테러도 계획해야 한다. 테러는 테러인데 사상자가 안 나오는 테러를. 쉬운 게 없구나.

"일단... 그 전에 걔를 다시 한번 만나야겠지."

누구를 만나냐고?

내가 전파납치하는 걸 도와준 놈.

원작에서는 S급 빌런이 되지만, 내가 그 전에 거두어 빌런이 되는 미래가 바뀌었을 아이.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를 한통 걸기 시작했다.

"어. 어, 서은아. 오빠 지금 일어났다. 어 그래. 아, 그럴 수도 있지. 아 오빠 힘들었다니까? 그래, 그래. 어, 지금 그쪽으로 갈게. 어~."

전화가 마무리되고 나서, 나는 코트를 챙겨서 방 밖으로 나갔다.

순간 이동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보다시피 내가 능력이 딸려서 조금 먼 거리를 이동하면 지쳐서 쓰러진다.

그러니, 걸어가자.

오늘은 날도 좋더라.

***

창밖에 봄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잔잔히 나오는 빗줄기에 우산을 들고 나서 조금 걸었다.

한 시간 정도 걷다 보니 나오는 주택가.

그곳에 있는 한 평범해 보이는 주택.

문짝에 걸려 있는 도어락.

거기에 4자리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니 또 문이 있다.

그 문에 또 달린 도어락.

2중 잠금인가... 하며 다른 비번을 누르면 문이 열리고 일반 가정집이 나온다.

그러나 이 도어락에는 비밀이 있다.

비밀의 비밀번호?라고 할 수 있겠지.

그걸 순서대로 입력했다.

족히 13자리는 넘기는 비밀번호.

...내가 원작의 팬이라 대충 외워서 아는 거지, 이거 처음 들었으면 절대 못 외웠다.

이윽고 모든 번호를 누르자, 갑자기 진동하는 실내.

그와 동시에 발밑이 점점 꺼지며, 나는 잠기기 시작했다.

저 밑으로, 점점...

나는 어디로 가는걸까.

심연으로 가는 듯한.... 엘리베이터라 해야 하나?

뭐 대충 발판 승강기라고 할 수 있는 걸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밑으로, 밑으로...

근데 말이다.

음, 근데 생각해 보니까 위에서 지하까지정도는 순간 이동 해도 괜찮은데...

그래, 힘 계속 아껴두면 좋지 뭐.

그렇게 짧은 시간이 지나고, 승강기가 정지했다.

깔끔한 회색 벽으로 정돈된 실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벽에 붙어져 있는 LED빛들이 나를 감싼다.

마치 근미래 SF 영화에서나 볼 풍경.

더, 더 안으로 들어가니 이윽고 큰 방이 나온다.

한쪽 벽면에 디스플레이들이 수없이 붙어 있는, 마치 미국 우주 영화 보면 나오는 NASA연구소의 그 장소 같다. 막 휴스톤 휴스톤 하면 '여기는 휴스톤 오바.'라고 말하는 그런 곳.

모니터들에서 수없이 뿜어져 나오는 빛들 가운데, 자기 몹집에 두 배는 되어 보이는 큰 가죽 의자에 앉아 있는 아이.

이 아이가 내 전파납치를 실현하게 해주는,

원작 만화의 후반부에 S급 빌런으로 등장하는.

"야, 오빠 왔다."

"오셨어요 '형'?"

천재 해커, 한서은이다.

나는 서은이가 앉아 있는 의자쪽으로 가 머리를 헤집어줬다.

"대체 내가 왜 형이냐... 하여튼, 뭐하고 있었냐?"

"뭘 하긴요, 이거 손보고 있었죠."

하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터는 서은이.

키도 조그만하고 생김새도 이쁘장한, 영락없는 여자애다... 그런데 자신은 강력히 남자라고 우기고 있는.

이미 원작을 읽은 나로서는 얘가 여자애인 걸 뻔히 알기에 귀여울 따름이다. 자기가 여자라는거에 살짝 트라우마가 있나?라기에는 그런것 같지도 않은데 왜그러는건지...

여자애한테 형이라는 소리를 듣는 거는 좀 묘하기는 하다만... 얘도 나름 중학교 3학년이다. 물론 전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만.

"어제 전파납치는 정말 잘해줬다 서은아. 그냥 전국에 내얼굴이 나오더만."

"뭘요. 그런 쉬운 거, 누구든지 할 수 있었을걸요."

말은 그리 퉁명스럽게 하면서도, 칭찬해주니 입술을 씰룩이는 서은이. 너 미소 짓는 거 다 보여 인마.

"그리고 형.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일 났어요."

"뭐? 무슨 문제라도 있어?"

문제 있을게 없는데?

"자, 이거 봐봐요."

이윽고 서은이가 디스플레이 한쪽의 영상을 보여주자, 내 얼굴은 살짝 굳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대체 뭐야?"

[에고스틱의 추종자들이 방금 인천 한복판에서 폭탄테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건물에 폭탄을 설치한 그들은...]

저 새끼들은 누군데 내 이름 팔고 저 지랄이야.

EP.6 Imitation Elimination

[에고스틱의 추종자들이 방금 인천 한복판에서 폭탄테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건물에 폭탄을 설치한 그들은 현재 더 많은 폭발을 일으킬 예정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농성 중인 그들은 별다른 원하는 조건 없이, 그저 죽음만을 원한다는 입장입니다. 현재까지 사망자는 최소 3명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서은이가 보여 준 뉴스를 본 나의 얼굴은 딱딱히 굳었다.

저 새끼들이 누군데 자칭 추종자라며 나를 팔아먹는가?

심지어 뭐? 사상자 발생? 사람을 죽였어?

내 안의 무언가가 비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인지도 높이고 이미지 메이킹 한다고 그지랄을 한 게 어제인데.

이걸 바로 이튿날 무너트려.

너희, 선 넘은 거다. 알어?

너희가 뭔데 내 이름을 들먹이며 테러를 일으켜.

그리고 저렇게,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나랑 전혀 어올리지 않는 천박한 방법으로?

"....."

그리고 사람이 죽었다.

내가 이 빌런의 길을 걸으며 결심한 것이, 결코 민간인 사상자는 내지 않겠다는 거다.

그런데 사람이 3명이나 죽었다.

내 추종자라는 것들이 일으킨것이니, 사실상 내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세 명분의 목숨은.

나는 딱딱히 굳은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는 서은이에게 말했다.

"서은아, 한 번만 더 도와주라. 저것들 좀 정리하고 난 뒤에 뭘 해야겠다."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뒀어요."

서은이가 서랍을 뒤지더니 건넨 휴대폰.

난 그것을 든 채로, 승강기를 향해 걸었다.

"하, 하하."

헛웃음이 절로 나오네.

진짜로.

이틀 연속 일이라니, 너무하는구만.

***

한국 초상 능력자 협회.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안 부르는 그곳, 히어로 협회.

지금 히어로 협회의 분위기는, 딱딱히 굳어 있었다.

"현재 상황은 어떤가."

낮은 목소리로 묻는 협회장의 말에, 앞에 앉아 있던 요원이 신속히 말했다.

"범인들은 현장에서 여전히 농성 중입니다. 현재 인질들 약 300명 정도가 건물 안에 고립된 걸로 보입니다."

"추가 사상자는?"

"아직은 더 없는 걸로 보입니다."

"그래, 알았다. 지금 히어로들은 오고 있나?"

"현재 C, B급으로 이루어진 히어로팀이 대기 중입니다. 하지만 저들이 폭탄을 기폭한다는 협박을 하고 있어 접근이 어렵습니다."

"젠장, 저 새끼들. 에고스틱 그 새끼가 데려온 건가?"

"현재 유착관계에 대해선 조사 중입니다만... 아직까진 불명입니다."

"그래, 알았다. 아 그래. 스타더스 그녀는 지금 어디 있나."

"현재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고 합니다. 유사시 아마 습격을 감행할 겁니다."

그 말 그대로.

신하루, 스타더스인 그녀는 현재 근처 건물 옥상에서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젠장, 어찌해야...'

히어로 협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또 다른 초상 능력을 사용하는 빌런은, 일반 시민으로 이루어진 경찰들로 잡기 어렵기에.

같은 초상 능력, 그러니까 초능력을 쓰는 이들이 잡든다는 명목하에 이루어졌다.

현세대의 테러는 거의 다 초능력을 갖춘 빌런들이 일으킨다.

자기 힘을 과시하기 위해, 또는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빌런으로 각성한 이들이 일으키는 테러가 대부분.

그러니까, 이렇게 초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이들이 일으키는 테러는 현세대에 거의 처음 일어난 일이다.

그 이유는 바로...

'에고스틱, 그 새끼.'

신하루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놈이 초능력을 별로 사용하지 않고, 폭탄만으로 히어로를 압박하는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준 게 분명하다.

'아니지. 그놈이 일으킨 사건 이튿날 바로 이런 일이 벌어진 걸 보면 그 자식이 사주한 거겠지.'

그래, 오히려 그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아니면 이런 대규모 테러를 하루 만에 조직한 것이라는데, 그건 말이 안 된다.

계획 범죄일 것이 자명.

'어제 그놈을 죽여 버렸어야 하는데... 잠깐만, 저건?'

그녀가 무언가를 발견함과 동시에, 인이어에서 상부의 연락이 들려왔다.

[스타더스, 그곳에 에고스틱 그놈이 등장했다. 다시 한번 말한다. 에고스틱 본인이 현장에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범인은 유튜브로 자기 모습을 송출하고 있다. 당장 확인 바란다.]

본부에서 온 급박한 연락을 듣지 않아도, 신하루는 현재 그가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재 범인들이 인질을 잡은 건물, 그 앞에 에고스틱이 등장한 게 보이니.

"유튜브...?"

본부에서 온 연락 중에 유튜브로 방송 중이라는 내용이 있었지.

그녀는 서둘러 휴대폰을 킨 뒤 앱으로 들어갔다.

메인화면에 바로 보이는 현재 급상승 1위 영상.

[에고스틱 LIVE]

그녀는 그 동영상을 눌렀다.

***

싸늘한 긴장감이 감도는 건물.

어느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 거리.

그곳에서, 검은 형체의 무언가가 등장했다.

전신을 가리는 검은 로브.

옷과 똑 닮은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얼굴을 감추는 반쪽짜리 마스크까지.

그래, 바로 나. 에고스틱이다.

[이거 뭐냐?]

[빌런 라이브방송 ㅅㅂㄷㄷㄷㄷ]

[에고스틱 이 새끼 지금 테러 라이브로 찍고 있는 듯ㄷ]

[이시대 최고의 빌런 에고스틱 등장ㅋㅋㅋㅋ]

[아 오늘 할 거 없었는데 존나 재밌네ㅋㅋㅋ]

[채팅창에 미친놈들 많네 지금 범죄 현장이다 미친 새끼들아]

[응 나만 아니면 돼~~~~]

[중☆고♧차#바%겐♡세@일×지₩금□이☆마♧지#막%즉♡시@판×매₩상□담☆문♧의>>>0703461555<<<]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

[시발 채팅창 곱창났네]

[이거 유튜브가 안내리냐?]

[이 새끼 어제 전파납치한 거 생각하면 유튜브 측에서 못내리고 있는 걸 수도]

....그리고 내가 걸어가고 있는 광경은, 유튜브에서 실시간으로 스트리밍되고 있었다.

나를 찍고 있는 폰은 염동력으로 고정해 놓은 상태.

나락가는 걸로 보이는 인지도를 되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

슬쩍 채팅창을 봐보니 후회되기 시작했다.

어쨌든, 계속 걸었다.

그렇게 어느새 건물 앞으로 왔다.

별다른 제지없이 들어가 보니, 눈에 들어오는 어두운 실내.

그리고 안에서 앉아 있는 수많은,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서 있는 사람들은, 마치 나처럼 검은색 옷들을 입고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나처럼 얼굴 반쪽을 가리는 가면이 아닌, 얼굴 전부를 가리는 가면.

넓은 건물의 로비로, 입구를 통해 들어온 나.

총을 든 체 서 있던 그들은 나를 보자 처음에는 흠칫 놀랐지만.

이윽고 검은 로브와 반쪽짜리 가면을 통해 나임을 알아보자, 몇명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더니 울려 퍼지는 테러리스트의 목소리.

나를 보더니 웃음기 넘치는 목소리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영웅, 에고스틱님께서 직접 강림하셨다!"

하...시발 저 새끼들 왜 그래.

어째서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

처음 말한 그놈을 시작으로 주위의 추종자들도 똑같이 합창하기 시작했다.

"에고스틱! 에고스틱!"

"그가 왔어! 진짜 왔어!"

"끼에에에에엑!"

나를 보고는 괴성을 지르기 시작하는 폭도들.

그놈들 사이에서, 인질들은 웅크린 체 떨고 있을 뿐이었다.

비록, 내가 빌런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해도.

나 또한 빙의 전까지는 일반적인 대한민국 시민이었다.

그런 내 마음속에, 무언가 불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야 이 무식한 놈들아.

이건 그냥 폭동이잖아.

나의 엘레강트한 위압감과, 참신한 수법, 심리적 압박이라고는 없는.

원시적인 공포와 협박질만 쓰는 천박한 테러.

이런 걸, 나를 추종한다며 내 이름을 팔며 이런 일을 일으켜?

건물 안으로 들어온 뒤, 나는 아직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찬찬히, 그놈들의 면면을 살폈다.

검은 로브에 마스크를 쓴 이것들 전원이 들고 있는 건 총.

그리고 어딘가, 이들 중 한 명이 기폭장치를 들고 있을 거다.

[3시 방향에 서 있는 놈이 기폭장치를 들고 있어요.]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목소리.

역시 천재 해커, 한서은.

나에게 필요한걸 바로 알려쥤다.

...어떻게 알아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놈들이 서 있는 곳 사이사이로 가득 찬 사람들.

대략 300명쯤이라고 했나.

"....."

자, 이것들을 이제 어쩐담.

음... 그래.

일단, 좀 웃어보자.

"하하, 하하하."

나는 고개를 밑으로 숙인 체, 큭큭 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다시 웃는다.

"크하하, 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광기 어린 박장대소.

조용한 건물 안에는, 내 웃음만이 울려 퍼졌다.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자칭 추종자 새끼들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실컷 웃은 나는, 다시금 웃음을 뚝 멈추고 말했다.

"제 추종자들이 있다기에,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왔는데. 참, 참..."

내가 말을 길게 늘어트리자 긴장하기 시작한 실내.

"참, 참 잘하고 계셨군요! 훌륭합니다!"

내 말을 듣자 급격히 안심하는 게 보이는 추종자 새끼들. 그래, 안심해라.

그중, 대장격으로 보이는 놈이 입을 열었다.

"하, 하하! 감사합니다! 저희는 에고스틱님의 열렬한-"

"아주 훌륭하게."

내가 싸늘히 말을 끊고 말했다.

그와 동시에, 외투 안에 손을 넣었다.

"아주 훌륭하게, 지랄들을, 하고-."

말을 하며, 염동력으로 보스로 보이는 놈과 기폭장치를 들고 있는 놈을 못 움직이게 붙잡았다.

"-계시는군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외투안에서 총을 꺼내 그놈 둘에게 쐈다.

탕, 탕. 즐거운 소리.

염동력으로 몸을 고정해 둔 덕분에, 그놈 둘은 참 무력하게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앞에서 총이 쏴지며 사람이 쓰러지자 비명을 지르는 인질들.

명백히 당황한 표정을 가면 뒤로 숨긴 것 같은 자칭 추종자들 사이에서, 나는 다시 총을 갈무리했다.

자, '정신교육'의 시간이다.

EP.7 정신교육

대한민국의 초상 능력자, 그러니까 초능력자의 비율은 굉장히 적다.

그중에서도 이중으로 능력을 갖춘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고.

내 능력, 염동력과 순간 이동.

따지자면 메이져급 능력 2개를 동시에 가지고 있으니, 나도 초능력으로 따지자면 금수저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래, 금수저였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애석하게도, 내 능력은 순금수저 보다는 도금된 수저에 가까워 보인다.

그 이유는 하나. 능력들이 다 하자가 있어서.

순간 이동을 예시로 들자. 1km를 순간 이동하고 나면, 순간 이동 후 1km를 전속력으로 달리고 난 뒤에 느껴지는 피로가 한 번에 닥쳐온다.

어제 좀 장거리 해봤다가, 온종일 잔 것 만으로도, 하자가 좀 있다는 게 보인다.

원작에 등장하는 빌런중 하나인 텔레포터를 보면, 얘는 순간 이동 능력을 하나만 가진 대신 아무런 제약이 없다.

그냥 신출귀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할 수 있다는 이야기.

같은 원리로, 내 염동력 능력도 하자가 좀 크다.

비유하자면, 인형 뽑기 기계에 달린 허약한 집게손 느낌?

격렬히 저항하는 사람을 고정해 두는 건 아예 못 하는 수준이고, 그나마 물건들을 허공에 띄울 수 있는 정도다. 마치 내가 지금 허공에 띄어논 스마트폰처럼.

물론 고정이 힘들다는 거지, 쳐 내는 거는 그것보다야 쉽다. 인형 뽑기보면 집게손이 잡지는 못해도 휙휙 이동은 잘하듯이.

유일한 장점은 유사 차징공격이 되는 거랄까? 오랫동안 힘을 모은 뒤에 한 번에 쓰면 그래도 나름 딜이 들어간다. 이걸 순간 이동이랑 연계시켜서 빌런들 뚝배기를 깨고 돌아다녔지.

물론 그런 장점이 있던 말던, 하자투성이 라는 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여기에 총 하나만 쥐여 주면, 저 정도밖에 안 되는 잡졸들을 처리할 능력 정도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이,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인질들의 비명이 가득한 건물 안.

명백히 당황한 듯한 놈의, 목소리에 나는 그저 이렇게 대꾸해줬다.

"지랄을 하고 계시니, 제가 좀 교육을 해드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와 동시에 입을 연 놈을 향해서도 총을 한 방 먹여줬다.

그놈과 내가 서 있는 거리는 꽤 길었지만, 총알은 흔들림 없이 나아가 놈의 미간을 맞췄다.

다행히 방탄마스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는 걸 보면.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에고스 불렛.

물론 총알의 이동 경로를 미리 염동력으로 고정해 놔서 가능했던 거지만, 뭐 이것도 내 '능력'이잖아?

휴, 정말 약한 염동력이 있어서 다행이라니까.

이게 없었으면 총을 써본 경험이라고는 군대밖에 없는 내가 이렇게 사람을 정확히 맞췄을리가 없다.

3명이 쓰러지고 나서야, 비로서 총을 나에게 겨누기 시작하는 나머지 놈들.

아니, 내 추종자라면서. 왜 나한테 총을 겨누는 거야? 웃긴 놈들이구만.

일촉즉발의 긴박한 상황. 아직 공중에 둥둥 떠다니면서 잘 스트리밍하는 내 스마트폰을 슬쩍 봐봤다.

[3명 그냥 죽이네ㅋㅋㅋㅋㅋㅋㅋ]

[속이 뻥~ 울컥울컥~]

[아니 근데 같은편 아니었음? 왜 그냥 죽이냐]

[이거 19금 달아야 할 거같은데 피봐]

[저기 우리 형있다는 데 씨발]

[에고스틱 이 새끼 착한 놈이냐?]

[원샷원킬ㄷㄷ]

[미친, 새끼들아~~~. 이게 게임으로, 보이냐. 실제, 상황인데, 하하 호호, 하냐,,, 요즘, 것들이란,]

[히어로들은 뭐하고 있냐]

[꺄아아아아아아악]

[저기 있으시분들은 어떻게ㅜ 걱정된다]

[다들 힘내세요!]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

[ㅅㅂ여기 매니저 없냐? 도배좀 쳐 내라]

[에고오빠 얼굴 반쪽만봐도 잘생긴 거 같에 ㅠㅠㅠ]

[여기 미친애들 많네ㅋㅋㅋㅋㅋ실제상황이다 이것들아]

[빌런 테러 실황보면서 매니저ㅇㅈㄹㅋㅋㅋ]

[여기 댓글 창 누가 캡쳐해서 올리면 국제망신 제대로일 듯;;]

....잠깐만 봤는데도 어지럽네.

다시 고개를 돌린 뒤, 현장의 분위기를 파악했다.

소리를 지르던 인질들은 이제는 귀를 막고 오들오들 떨고 있다.

그래, 총소리가 무섭기는 하지.

인질들을 둘러보니 주로 20대, 30대 남성 여성이 섞여 있는 모습이다.

...여기가 무슨 건물인지도 잘 모르겠네. 회사일려나?

내가 추측을 하던 가운데, 총을 나에게 겨누고 있던 한 놈이 나를 향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저런 싸가지 없는 새끼를 봤나.

"에고스틱이시여! 저희가 무얼 잘못했다고, 갑자기 이러시는 겁니까!"

나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이놈. 괘씸하네.

솔직히, 얘네들이 내 이름을 판것만 아니었어도 이런 테러따위 나는 관심도 안줬을 거다. 이거는 히어로의 역할이니까. 물론, 대규모 사상자가 나오는 테러를 벌이는 빌런은 그전에 내가 다 제거할 생각이긴 하지만.

어쨌든, 자기 잘못도 모르는 무지한 자를 위해, 나는 친히 알려주기로 했다. 하, 진짜 빌런들 중에 내가 인성 원탑일 거야 아마.

"잘못? 잘못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총을 손에서 한 바퀴 회전시켰다. 이러니 움찔하는 놈들이 웃겼다. 새끼들, 그래도 나름 추종자라고 나한테 쏘지는 않네. 그런데 이러자 여기를 힐끔힐끔 보던 인질들까지 움찔거리자 좀 미안해진다. 이런, 나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빌런이라고 할 수 있겠냐?

"물론 무식한 게 잘못이라고 하면, 잘못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렇게 따지자면 당신들은."

말을 함과 동시에 염동력으로 미리 외투에 놓았던 총 여러 자루를 부유시켰다.

갑자기 허공에 떠오른 총들을 보니 눈이 휘둥그레진 놈들의 모습.

아니, 내가 총을 손으로만 들고 쏠 거로 생각했나?

나 염동력자야 이것들아.

"모두, 대역죄인이네요. 즉시 처형입니다."

그와 동시에 염동력으로 허공에 띄워둔 총들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일제히 발포했다.

꺄아악거리는 인질들의 비명을 백그라운드로, 탕-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나의 추종자들.

정신교육만 시키려고 한 건데, 좀 과격한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뭐, 오늘 일을 교훈 삼아 다음 생부터는 조심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 하며, 나는 내 쪽으로 날아오던 총알 하나를 염동력으로 쳐 냈다.

비록 내 염동력이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날아오는 총알의 방향 정도는 바꿀 힘은 된다. 뭐, 이것도 다 미리 총알이 날아올 거라는 걸 알아서겠지만.

"아, 아아..."

다 쓰러지고 남은 한 명.

모든 동료들이 다 쓰러지고, 혼자 남은 나의 추종자.

한 명을 살려놓은 이유는 간단하다.

협회도 한 명은 잡아놔야지 그... 일이 어떻게 된 건지도 알고, 기자회견에서도 할 말이 있지 않겠어?

그리고 증언을 통해 나의 무고함을 알 수도 있을 거다.

8명이나 되는 놈들 중 얘를 남긴 이유는...

혼자 머리가 길길레. 여자인 거 같아서.

뭐, 왜. 여자가 좋은 게 죄인가? 나는 당당하다.

여자를 싫어하는 자와 동성애자만 나에게 돌을 던져라. 다 피해 주마.

그렇게 모두를 쏴 죽인 나는, 이후 웃으며 천천히 그녀에게 걸어갔다.

뚜벅. 뚜벅.

"으, 으흐흐. 사, 사, 살려..."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오들오들 떠는 그녀.

더 이상 나에게 총을 쏘지도 않는다. 쏴봤자 안 먹힐 걸 알아서 그런가?

이윽고, 이제는 거의 고장 난 거처럼 떨고 있는 그녀에게 완전히 다가섰다.

"흐, 흐으윽..."

이젠 거의 울기 일보 직전까지 간 듯한 그녀의 앞에 서서, 나는 그녀의 턱을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를 떼어냈다.

마스크를 벗기자, 드러나는 그녀의 외모.

'예쁘네?'

뜬금없이 예쁜애가 등장하니까 살짝 당황스러웠다.

눈가가 촉촉이 젖은 채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은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모습 그 자체.

순간적으로 스윗해져서 눈가의 눈물을 닦아줄 뻔한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을 걸었다.

"잘못했어요, 안 했어요?"

상냥한 목소리로 묻는 내 말에, 벌벌 떨면서 답하는 그녀.

"자,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오 흐흑, 흑."

아니, 왜 이래? 누가 잡아먹는데?

우는 데도 빛이 나는 외모에 평정심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아니야, 나는 일편단심 오직 스타더스뿐이라고. 다른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마음을 굳세게 먹은 나는, 그녀의 멘탈을 터트릴 질문을 던졌다.

"뭘 잘못했는데요?"

"네, 네에?"

"뭘 잘못했냐고요."

싱긋 웃으며 다시 질문하는 내 말에, 그녀는 결국 다리의 힘이 풀렸는지 쓰러지고 말았다.

"아, 아아. 제가, 저희가, 에, 에고스틱님의 허락도 없이, 그, 그 이런 일을 벌이고."

"또?"

"그, 그리고 또 아, 아아 흐, 흐으윽. 자,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오. 흑, 흐아아아앙."

갑자기 말하다 말고 대성통곡을 하는 그녀.

아니, 왜 이래. 내가 뭘 했다고.

나쁜 놈은 넌데, 꼭 내가 나쁜 놈 같잖아!

...아, 나는 나쁜 놈이 맞나?

그렇게 고요한 건물 안에는 그녀의 울음소리만 가득해졌다.

[ㅋㅋㅋ 와 개쓰레기네ㅋㅋㅋㅋㅋㅋ]

채팅창에 올라온 말을 보니 속이 쓰렸다.

개쓰레기라는 말을 들어도 이런 이유로 듣게 될줄은 몰랐는데.

EP.8 사상초유

300명.

300명이면, 어지간한 고등학교 전교생의 인원수.

그 많은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뜻은, 많은 걸 의미한다.

그만큼 그들이 있는 공간이 넓다거나, 그만큼 그들이 좁게 붙어 있다던가.

지금 같은 경우는, 아마 둘 다이겠지.

300명이라는 이 많은 인원이 넓은 공간에 좁게 있는 거다.

근데 그렇게 많은 인원이 동시에 있는데, 입을 열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러면 조용하냐고? 아니, 그건 아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세상 서럽게 우는 한 여자 때문에.

"흐어어어어어엉. 흐아아아아아앙. 흐, 흐어어어어어엉."

그만 울어 제발.

[진짜 세상 서럽게 우네ㄷㄷㄷㄷ]

[자기편 7명이 끔살당했는데 울만하지ㅋㅋㅋ]

[얘도 이제 곧 가는 거임? 예쁜데 안타깝네]

[미친, 놈들아. 떨고, 있는 인질들이, 안 보이더냐,,,, 이건, 영화가, 아니다.]

[응 나만 아니면 돼~~~~]

[지금 딱보니 인질들 다 죽이지는 않을 듯?]

[여자분 너무 서럽게 우시는 게 걱정된다ㅜㅜ]

[아니 저 여자도 테러범이야 미친놈들아ㅋㅋㅋㅋ]

[지상파보다 이게 훨씬 재밌네. 직관 꿀잼ㄹㅇㅋㅋ]

슬쩍 분위기가 어떤지 보려고 채팅창을 다시 한번 봤는데.

이젠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다는 것만 깨달았다. 어질어질하네....

"흐어어어어어엉."

일단 이 여자가 더 곤란하다.

어떻게 하지, 시끄러운데.

그냥 죽일까?

아니, 그래도 경고는 해주자. 나는 신사니까.

자리에 쪼그려 앉아 여자가 떨어트린 권총을 주웠다.

자세를 낮춘 채로 있자, 여자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딸꾹질을 하는 그녀를 향해, 자상하게 웃으면 한마디 해줬다.

"자꾸 우시면, 쏩니다?"

그렇게 말하며 권총으로 장난삼아 빵!하며 쏘는 시늉을 했더니, 기겁하며 눈물을 멈추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입에 주먹을 넣는다고 울음이 참아지나? 잘은 모르겠다만.

어쨌든, 전보다는 조용해졌다.

뒤편에서 그녀가 히끅거리는걸 들으며, 나는 인질들의 앞에 섰다.

300명이나 되는 인원이 쪼그려 앉아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은 장관.

그들은 대체적으로 공포에 질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왜 이러나... 했는데 생각해 보니 방금 내가 눈앞에서 7명을 죽였구나?

사람이 살면서 다른 사람이 총맞아 피 흘리며 쓰러지는 장면을 얼마나 많이 직관해 봤겠는가.

아, 이 세계 사람들이면 좀 많이 봐봤으려나?

이곳은 서울.

아시아 제3위의 경제도시이자, 제3위의 테러빈출도시.

이상할 정도로 초능력자가 많아 히어로도, 빌런도 많은 대한민국의 수도답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잔뜩 긴장한 사람들.

그런 이들에게 나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A급 빌런 에고스틱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염동력을 이용해 소리를 증폭시켜서,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나는 말했다.

내 말이 끝나자 더욱 냉랭해지는 분위기. 다들 불안해하는 게 보인다. 왜 이래. 해치지 않아요.

[이제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가는 거임? ㅎㄷㄷㄷㄷ]

채팅창을 보니 왜 그러는 줄 알겠네.

아니, 나를 뭐로 보는 거야. 나 그런 사이코패스 아니거든?

...생각해 보니 전에 배 두 개에 먼저 죽이는 사람만이 살 수 있다. 이러긴 했구나. 에휴 그래, 다 내 죄지 내 죄야.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해주었다.

"일단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진짜로. 염동력까지 사용해서 직각으로 숙였다. 이런 디테일이 중요한 거거든.

내가 갑작스럽게 사과하며 고개를 숙이자, 사람들이 숨을 참는 게 느껴졌다.

다시 허리를 핀 나는, 말을 이었다.

"비록 제가 한 일은 아니지만은, 저의 선례로 인해 벌어진 이러한 모방범죄에 대하여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입이 떡 벌어진 인질들.

갑자기 분위기가 술렁술렁해진다.

[?????????]

[점마 뭐라는 거니?]

[이게...빌런? 내가 지금까지 본 빌런은 대체?]

채팅창 또한 당혹 그 자체.

맨날 사고만 치고 돌아다니던 아들이, 갑자기 수능 공부를 50일 열심히 하더니 서울대 합격증을 들고 오는 모습을 본 부모와도 같은 반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말했다.

"인질 여러분은 딱히 제가 터치할 부분이 아니니, 그대로 집에 돌아가 주시면 됩니다. 저때문에 피해를 입으신 분들에게 소소하게 계좌로 100만원씩 보낼 예정이니, 확인 바랍니다."

[???이게 뭔 개소리임???]

[피해 보상 뭔데 ㅅㅂㅋㅋㅋㅋㅋㅋㅋ]

[엄마 난 커서 인질이 될레요! 엄마 난 커서 인질이 될레요! 엄마 난 커서 인질이 될레요! 엄마 난 커서 인질이 될레요! 엄마 난 커서 인질이 될레요! 엄마 난 커서 인질이 될레요!]

[이게...테러? 지금까지 내가 당했던 테러는 도대체?]

"안타깝게도 숨진 세분께는 1000만원씩 보내드리겠습니다. 계좌는 제가 전부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말했었지.

나 돈 많다고.

예전에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제일 잘할 수 있는 게 돈지랄이다.

[겨우... 천만원?]

[쓰읍 사람이 죽었는데 천만원은 에반데....]

[???사실 에고스틱 쟤가 죽인 것도 아닌데 천만원이면 많은거 아니냐?]

[그런?가? 그래도 사망보상금 천만원은 좀...]

[아니 애초에 쟤가 죽인게 아니라니까ㅋㅋㅋㅋㅋㅋ]

채팅창을 보니 1억을 쏜다고 해야 했나 후회가 되긴 하는데....

이젠 어쩔 수 없다, 이미 계좌로 송금 대기 완료라고.

계좌는 어떻게 아냐고? 천재 헤커인 서은이가 알아서 해주지 않을까? 서은이만 믿으면 될 거야 아마.

[....하아...]

어째 인이어에서 한숨이 들린 거 같지만 기분 탓일 거다 아마. 그렇고말고.

할 말은 다 한 나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뒤편에는 아직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름도 모를 여자 추종자가 있었다.

얘는 여기다가 버려두면 맞아 죽을 수도 있거나 사고 칠 수도 있으니 묶어둬 볼까...

[형. 그 여자 그냥 데리고 와요.]

갑자기 인이어로 들리는 서은이에 목소리.

데리고 오라고? 얘를? 왜?

그러나 여기서 왜라고 육성으로 물을 수도 없었다.

지금 수백 명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데, 혼잣말을 중얼중얼하고 있으면 너무 없어 보이잖아....

[제가 아는 사람 같아서 그래요. 맞다면 아마 큰 도움이 될 거 같으니, 데리고 오는 게 좋을걸요.]

흠 그래.

서은이가 이 정도로 강력하게 말하면, 그런 이유가 있는 거겠지.

"아가씨? 아가씨는 저와 함께 갑시다."

"히에에에에엑?"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는 여자를 일으켜 내 품에 안았다.

당황한 듯 꿈틀거리는 그녀를 잡은 채 나는 사람들을 보며 인사했다.

"그럼, 안녕히."

말과 동시에 망토를 내 앞으로 펼치며

나는 그대로 사라졌다.

[뭐야 방종임?]

[마지막이 좀 루즈하게 끝났네요... 6/10드립니다]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

[저 도배 보고 김선우 사형시키기로 결정했다.]

===[방송이 종료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어질어질한 방송도 끄고 좀.

***

[빌런이 책임지고 돈으로 배상? 실제 인질들의 계좌 인증 속속. 에고스틱, 그는 뭐 하는 인물인가. 집중취재.]

[[사설]자신을 추종하는 테러리스트를 살해한 빌런, 과연 옳다고 할 수 있는가.]

[어제에 이어 오늘도 9시 뉴스 메인으로 나온 에고스틱 근황....NEWSTREE]

***

[글쓴이]익명

[제목]그러니까 이게 사실이라고?

A급 빌런 모가지를 딴 놈이 갑자기 배 두 개 납치해서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이러다가 안죽이니까 빤쓰런하더니 이튿날 자기 추종자들이 테러 일으키니까 직접 등판해서 다 죽이고 인질들 피해 보상금주고 풀어줬다는 거지?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라이브로 송출했고?

[익명1]에이 그럴 리가 없잖아ㅎㅎ

ㄴ[익명2]ㄹㅇㅋㅋ

ㄴ[익명3]세상에 그런 놈이 어딨냐(진짜 있다)

ㄴ[익명4]그것도 공중파 전파납치? 뻥이겠지(아님)

[익명5]ㄹㅇ망고스틱같은 빌런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 이틀 만에 머리에 각인이 되네

ㄴ[익명6]망고스틱은 또 누구냐?ㅋㅋㅋㅋ

ㄴ[익명7]망고스틱 ㅅㅂㅋㅋㅋㅋ

ㄴ[익명8]어떻게 빌런 이름이 망고스틱ㅋㅋㅋ

[익명9]아니 얘 솔직히 빌런도 죽여 테러도 막고 인질도 풀어 줘... 이거 완전 히어로 아님?

ㄴ[익명10]히어로(배납치해서 폭탄테러하려 함)

ㄴ[익명9]아 그래서 사람 죽었냐고ㅋㅋㅋㅋ

ㄴ[익명11]어둠의 다크히어로 망고스틱 지지합니다

***

이틀 연속으로 전국민에게 그 이름을 각인시킨 빌런, 망고스틱.

...이 아니라 에고스틱.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속으로 정정했다. 여론을 살핀다고 커뮤니티를 너무 봤더니 머리가 약간 맛이 간 거 같다고 생각했다.

"하루야, 뭐 해?"

"아, 언니."

카페 안.

대학생인 신하루는 그녀의 선배와 함께 과제를 하고 있었다.

히어로로 활동할 때는 기본적으로 이름도 숨기고 인식저하 필터도 상시 착용하기에, 그녀가 히어로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누릴 수 있는 평범한 대학 생활.

그녀는 낮에는 평범한 대학생인 신하루, 밤에는 히어로인 스타더스로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루야, 너무 집중을 못 하는 거 같은데. 뭔 일 있어?"

"아, 아니에요.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손을 내저으며 연신 괜찮다며 이제 열심히 하겠다는 말로 선배를 안심시킨 그녀는, 다시 과제를 하기 위해 펜을 잡았다.

그러나 그녀의 관심은 딴 데로 가 있었다.

대체 에고스틱, 이놈은 뭐 하는 놈일까-라는.

EP.9 그녀의 일상

신하루.

연희대학교에 재학 중인 3학년 학생.

금발 머리에, 누구나 돌아볼 만한 외모를 가진 걸 제외하고는 평범해 보이는 그녀. 사실 예쁜 거 자체가 평범한 거는 아니지마는....

하여간, 그런 그녀가 히어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히어로 협회의 일부 요원들과 동료 히어로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

그렇기에 그녀는 상대적으로 평범한 대학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수상할 정도로 결석하는 날이 다른 학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기는 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개강총회도 빠져, 오티도 빠져, MT도 빠져, 뒤풀이도 빠져, 축제도 빠져...

뭐 하나 학교행사에 참여한 게 없기에, 그녀와 친한 사람은 굉장히 드문 편이었다.

물론 그녀가 일부러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에 그런 것이겠지만은.

물론 그래도 친한 동기나 선배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기에,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나름 대학생과 히어로의 이중생활을 잘 해내고 있었다.

서울에서 테러가 자주 있는 건 아니다.

뭐 이주에 한 번 정도?

사실 그것만 해도 자주 있는 거지만, 이 세계는 원체 혼란스럽기에 그 정도만 해도 버틸만했다.

아직은, 한국에서 그렇게 강한 빌런이 나온 적이 많지도 않고.

물론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은, 그 인구수에 걸맞게 매일 테러가 난무한다고는 들었지만.

대신 그만큼 S, A급 히어로가 많아서 나름 균형이 유지되고 있다.

미국가면 도시에 널린 게 A급 히어로라는 말이 있으니까.

대한민국은 전체로 따져도 A급이 몇 명 없다는 걸 생각하면, 미국이 대단하기는 하다.

그래서 그녀는 A급임에도 딱히 자기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녀의 능력이 무엇인가. 힘이 아주 센것과 날아다니는 것 말고는 더 없다.

그것밖에 안 되니, 저번에 에고스틱이 그럴 때도 아무것도 못 하고 손 놓고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지.

"....."

톡. 톡.

그녀는 자신이 마시던 망고스무디가 담긴 유리잔을 손가락으로 쳤다.

에고스틱.

처음에는 빌런을 죽이고 다니는 걸 보고는, 분노에 찼었다.

사실 그때 그녀는 에고스틱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

철모르는 꼬맹이가 힘을 얻고 날뛴다.

그녀의 추측은 이랬다.

그냥 관종 하나가 힘을 얻으니까

'어, 이걸로 다 악당 해치우면 되는 거 아닌가?'이러면서 신나서 막 다른 빌런들을 죽이고 다니는 거라고.

정식으로 히어로 신청을 해, 사법부의 소속이 되는 대신.

자기 멋대로 과분한 힘을 써가며 자신이 정의인양 행동하는 애새끼.

힘을 얻고나니 사적제제에 열을 올리며, 그에 따른 대중의 관심에 희열을 느끼는 놈들이 있다.

자신이 소위 '고지식한 히어로'들과는 다르게 '영웅'이라는 착각에 빠진 놈들.

그녀가 제일 혐오하는 부류였다.

관종들.

그런 생각은 그놈이 살인 현장에 신하루 자기 이름을 피로 써둔 것을 보고 확신으로 바뀌었다.

역겨운놈.

대충 내 얼굴만 보고 껄떡거리는 놈이겠지.

그것도 야만적이게 피로 뭐 하는 거야?

그녀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를 감옥에 박아넣을 생각이 가득했다.

...물론 그때도 어떻게 정체를 숨긴 A급 빌런이 사는 곳을 알았는지는 몰랐지만.

그래, 그때만 해도 아무도 몰랐다.

이 자식이 이렇게 미친놈일지는.

[네, 지금 저 두 배에는 폭탄이 붙어져 있습니다. 쾅-! 하면 저 두 배에 탄 모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도 없이 떠나게 되겠죠.]

[제한 시각은 30분. 딱 그 시간만 두 배 모두 기폭 버튼을 안 누르면 됩니다.]

단순히 능력에 취한 애새끼가 아니었다.

대규모 테러를 기획하는, 확실한 빌런이었다.

거기에, 사람의 마음을 갖고 노는 일종의 사이코패스.

내색은 안 했지만, 그녀는 속으로 경악했다.

어떻게 인간이 이런 반인륜적인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에고스틱은 자기 아이디어가 아닌 전생의 영화의 오마쥬라며 억울해하겠지만, 그녀가 이를 알리는 없었다.

자기 이름을 에고스틱이라고 밝힌 그.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이 분석하기를, 이기적인을 뜻하는 영단어 Egistic(에고이스틱)에서 이름을 따온 것 같다고들 한다.

그의 이름과, 그가 말한 인간은 이기적이다-의 연관성.

이걸 보더라도, 그가 정상적이지 않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망의 저번 주.

처음에 에고스틱의 지지자들이 폭탄테러를 일으키고 있다는 말에, 그녀는 한숨만 쉬었다.

미친놈이 한 명 나오자, 낙수효과처럼 다른 빌런들이 우수수 쏟아진다.

심지어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에고스틱이 테러를 일으킨 바로 이튿날 거사를 진행했다.

사전에 준비된 계획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히 이루어진 테러.

그러나 그 방식이 에고스틱이 한 행동을 모방한 것 자체였기에,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심으로 에고스틱을 추종하는 광신도가 하루 만에 생겼고, 그들이 바로 이튿날 테러를 일으킬 정도로 적극적이라는 것.

아직 에고스틱이 한 폭탄테러의 모방범죄에 대한 방지책이 협회에서 논의되기도 전에.

너무 빠르게 일어난 테러라, 그녀 또한 아무런 대비책 없이,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못 한 체 자책만을 하며 초조히 상황을 지켜보기도 잠시.

에고스틱 그가 직접 등판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굉장히 긴장했다.

겁먹었다? 그래, 그녀는 쿨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조금 겁먹었다. 조금. 많이 겁먹은 거는 절대 아니다.

대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또라이놈이, 직접 그곳으로 왔다? 그것도 인질 수백명이 있는 곳에?

걱정을 안 하면 그게 이상했을 상황이다.

그렇게 협회의 모두와 자신을 포함해 대기하던 히어로들이 숨죽인체 지켜보았다.

...물론 그의 방송을 통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서 촬영되는 그의 낯짝이 가려져 있음에도 참으로 뻔뻔해 보여 당장 달려가 때려주고 싶다는 마음을 참아가며. 계속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는, 역시 자신이 또라이라는걸 증명했다.

자기 추종자들을 보고, 지랄하지 말라며 일제히 쏴죽여 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인질들을 풀어줬다. 심지어 돈까지 쥐어준다는 약속과 함께. 들어 보니 실제로 피해자들의 계좌에 돈이 입금되었다고 한다. 대포통장인가 뭔가로 보내서 추적할 수는 없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돈만 줬냐? 사과까지 했다. 추종자들이 지랄해서 죄송하다고. 그것도 스스로가 틀어놓은 방송 앞에서.

그쯤 되자, 그녀는 정말로 혼란스러워졌다.

대체 뭐 하는 놈인가? 빌런이면 빌런다워야지.

그리고 터놓고 말해서, 그날 그의 행보만 때놓고 보면 사실은 영웅다웠다.

....물론 사적제제를 허용하는 거는 결단코 아니다. 다만 이미 협회에서 인질들을 무사히 구출하기 위해 사살을 허용했기에,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는 것.

그러니까 그녀는 이상하다는 거다.

지금까지의 빌런들 중 이 에고스틱 같은 놈은 없었다.

무차별 살인, 폭격, 방화, 납치, 테러.

이런 짓을 일으키는 빌런은 매우 흔했다.

하지만 에고스틱 이놈처럼 무언가 '신념'이 있어 보이는 빌런?

그녀에게는 처음 보는 사례였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 보면 어딘가 비슷한 케이스가 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처음이었다.

-따랑.

과제를 다 마친 그녀는 카페의 밖으로 나왔다.

따사로운 햇볕이 몸을 감싸는, 좋은 날.

그녀는 습관적으로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폈다.

"흐응-."

팔을 뻗으며 기지개를 펴는 그녀의 모습에 길을 걸어가던 남성들이 고개를 힐끔거리는 일이 있었지만, 그녀는 모를 일이었다.

"에고스틱..."

'....빌런들의 위치도 알고, 전파납치도 할 수 있고, 처음 본 인질들의 계좌도 알 수 있고, 돈도 많다.'

대체 뭐 하는 놈일까 이놈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미 에고스틱은 최우수 경계대상 1위가 되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그녀의 머릿속에 에고스틱이라는 남자가 좋은쪽이던 나쁜쪽이던, 큰 지분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내가 꼭, 너의 정체를 밝혀주마.'

***

"쓰읍. 어디서 누가 내 얘기를 하나."

"형 요즘 안 씻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서은아. 내가 너 여자인 걸 뻔히 아는데 자꾸 형 거릴..."

"형. 조용히. 하세요."

"그래..."

".... 물, 받아. 놓을까요?"

"아니 수빈씨는 또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계셔도 돼요. 그리고 저 매일 깨끗이 씻습니다. 음해에요, 음해."

"....네."

"아니, 왜 안믿는 눈치지? 진짜 음해라니까!"

서울의 한복판.

평범해 보이는 주택이 있는 곳에서 몇십층 깊이에 있는 비밀기지.

바로 에고스틱의 기지. 줄여서 에고-베이스다.

"형. 왜 맘대로 남의 집에 이름을 짓고 그래요."

"씁. 서은아, 너와 나 사이에 너집 내집이 어딨니? 너집이 내집이고 내집이 너집이지."

"형 집 팔아서 이제 집도 없잖아요."

"..."

그래, 나는 집을 옮겼다.

서은이네 지하 비밀기지로.

이제부터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많기에, 모든 장비가 다 모여 있는 여기서 숙식을 해결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저 수빈씨도 문제고.

서은이도 흔쾌히 동의했다.

비록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겠는 지하지만 LED로 떡칠되어 밝고 좋다. 거기에 이곳이 엄청 넓고 방도 많아서, 큰 무리는 없었다.

서은아 고마워.

내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서은이를 바라보자, 서은이는 뭘 보냐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저 저 싸가지없는.

나의 일등 최측근이자 천재해커, 한서은.

은색 단발을 한 몹시 작은 아이다. 애초에 중3밖에 안 되니까. 처음에는 중1인 줄 알았다.

자꾸 나를 형이라고 부르며 자신이 남자라고 주장하기는 하는데...

서은아, 사실 나 원작 읽어서 너 여자인 거 알어...

내가 살면서 여중생한테 형소리 들을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그렇다고 여기에 나와 서은이만 사는 건 아니다.

자칭 나의 추종자였던, 내가 유사 납치?를 한 여자.

"...?"

겁먹은 듯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 수빈씨도 함께 살고 있다.

....어쩌다 그녀를 줍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자면 길다.

"하아..."

어째 같이 사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EP.10 지하기지

"끄... 끄아아아악."

"형, 이상한 소리 좀 내지 마요."

"나쁜, 놈아. 오빠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으면. 위로해주지는 못할망정."

".....오빠라고 하지 마요. 어쨌든, 거기 누워 있으면 좀 나을 텐데 뭘 그리 엄살이에요."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서은이의 시선에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아니야, 나 진짜 아프다니까?

이곳은 서울 어딘가의 깊숙한 지하.

바로 천재 헤커이자 못 만드는 게 없는 천재 과학자, 한서은의 지하 기지였다. 물론 아직 중3밖에 안 되는 꼬맹이긴 하지만.

나를 사칭하는 추종자들이 일으킨 테러를 무산시키자마자 텔레포트로 이곳까지 온 나는, 다시 쓰러졌다. 연속으로 순간이동 하니까 죽겠어. 심지어 여기가 너무 깊은 지하이기도 하니...

그래도 이번에는 서은이가 만들어둔 피로회복캡슐에 들어가 있어서 그런지 확실히 덜 아프기는 했다. 아니, 이런 게 있었으면 어제 좀 알려주지. 어제는 아예 하루종일 기절해 있었건만.

심지어 이번에는 나만 이동한 게 아닌, 다른 사람 한 명을 같이 끌고 이동했으니 두 배로 힘든 거다.

대신 서은이가 만들어 놓은 이 피로회복캡슐인가 뭔가가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면 진짜 쓰러졌을 거다.

"끅, 그래서. 이분은 왜 데리고 오라고 한 거야?"

나는 그러면서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자신이 주목을 받자 '히끅'거리며 놀라는 그녀.

긴 검은색 생머리를 늘어트린 체 쥐 죽은 듯 눈치를 보며 앉아있는게 좀 짠하기는 했다.

심지어 미모까지 받쳐주니 왠지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느낌.

8명의 추종자들 중 내가 유일하게 살려 둔 그녀.

사실 히어로 협회와 스타더스에게 선물로 주려고 살려놓은 건데, 서은이 말만 듣고 그냥 데려왔다.

"아."

컴퓨터 화면으로 뭔가 바쁘게 하던 서은이가 의자를 돌려 우리 쪽을 보았다.

서은이가 그녀를 바라보며 묻기를.

"언니....가 아니라 누나. 누나, 이수빈 맞으시죠?"

"어, 어. 그, 근데 어떻게 알았어?"

"전 다 알아요."

시크하게 말하는 서은이. 근데 잘 보면 뭔가 콧대가 좀 높아진 거 같다?

쪼그만게 저렇게 말하니 그냥 귀엽다. 괜스레 아빠 미소가 지어지는 기분.

근데 저분 이름이 이수빈이었구나. 생각해 보니 아직 이름도 몰랐었네. 이수빈이라. 뭔가 굉장히 흔한 이름이구만.

"자, 그래서 서은아? 우리 자칭 나를 추종하신다는 이수빈씨를 왜 데리고 와야 했는지 설명해 줄레?"

내가 입을 열자 또 몸을 흠칫 떠는 그녀.

아니, 이렇게 심약한데 대체 테러는 어떻게 하셨대.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데 굉장히 당황스럽다.

"아, 저 좀 도와달라고 부탁하려고요."

서은이는 무심하게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잠깐, 도와준다고? 너를?

서은이의 말에 나뿐만이 아닌 이수빈 그녀도 상당히 당황해 보였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 서은아. 내가 잘 이해를 못하겠거든? 그러니까 오늘 처음 본 테러리스트를 갑자기 납치해서 대뜸 널 도우게 하겠다고? 어...음... 그전에 너가 자다가 저분에게 칼빵 맞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뒤에서 그녀가 '칼..빵 안놔요오...'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곳은 냉혹하고 비정한 에고-베이스. 목소리가 작은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하아,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서은아, 너가 아직 중학교 3학년이라 그런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거 같구나. 이 세상은 막 사람 납치해서 일하라고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조용히 일하는 세상이 아니야. 앙심을 안품겠니? 너가 가진 정보를 다 탈취해서 런하던가 너한테 복수하던가 둘 중 하나란다. 애초에 너를 어떻게 도와 준다는지도 모르겠지만."

뒤쪽에서 누가 고개를 붕붕 휘둘며 '배신 안 할게요오...'라고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아니라 실제로 말한 거긴 하지만.

내 일장 연설에 서은이는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아니, 이놈이? 안 되겠다, 아빠의 마음으로 따끔한 훈육을 해 줘야지.

내가 일장 연설을 시작하려 할 때, 서은이가 입을 열었다.

"언니. 이수빈 언니."

"으, 응?"

"언니 부모님, 한은그룹 연구원들이셨죠?"

그 순간, 이수빈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얼굴.

'아, 아, 아니야...'라며 부정하기 시작한 그녀였으나, 그런 모습을 보며 서은이는 그저 쓰게 웃을 뿐이었다.

"언니, 언니도 복수하고 싶지 않아요? 한은그룹, 그놈들한테."

"어...?"

"언니 부모님도, 그때 그 '참사'에 돌아가신거 아니에요?"

서은이의 말에, 이수빈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서은이한테 너 컨셉 풀려서 언니라고 하고 있다며 핀잔을 주려고 했던 나도, 한은그룹과 '참사'가 언급되자, 진지하게 경청하기 시작했다.

"언니가 딥웹에서 쓴 글들 봤어요. 언니도 한은그룹 싫어하잖아요. 다 죽여 버리고 싶다면서요."

"어, 어, 어떻게..."

"어떻게 아냐고요? 언니 차단 프로그램이 허점이 좀 많더라고요. 새로 만들어야겠어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서은이는 이수빈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의자에 앉아 있는 이수빈이 서 있는 서은이보다 더 크다는 게 좀 웃기기는 했지만, 지금은 굉장히 진지한 순간인 거로 보이니 별말 않기로 했다.

"저는 한은그룹 수뇌부를 찾고 있어요. 전 그 새끼들 때문에 인생이 망했었어요. 그놈들 찾아서, 찾아서 다 죽여 버릴 생각이에요. 그래야 제 한이 풀릴 거 같아요."

언니, 저를 도와주시겠어요?

서은이에 말이 그렇게 끝나자, 이수빈은 눈물을 왈칵이며 서은이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 내가, 내가 도와줄게!"

"고마워요, 언니."

그러면서 둘은, 서로를 껴안았다.

어....

그, 하얀 머리칼을 가진 서은이와 검은 머리칼을 가진 이수빈이 서로 껴안으니 흑백이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 같기는 한데 말이야.

나만... 나만 지금 감정선을 못 따라가겠나?

대체 둘이 갑자기 뭐하는 거니...? 뭐 말 몇 마디 나누더니 서로 울컥하며 껴안어...?

그렇게 여자 둘이 껴안는 모습을 보며, 홀로 남자인 나는 굉장히 뻘쭘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이게 뭐냐 대체....

***

이수빈.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 졸업.

25살로 나이는 나랑 동갑.

어렸을 적 부모님 두 분이 다 돌아가셔서 홀로 보조금으로 생활함.

중학생 때부터 히키코모리처럼 집에 박혀서 컴퓨터만 연구해 컴퓨터 기술은 수준급.

얼마나 수준급이냐면, 서은이가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이해 하나도 못 하겠던데.

주로 활동은 딥웹에서 사이버테러 대행해주며 경제생활.

이번에 내 추종자라며 테러에 나온 이유는....

"뭐라고요? 얼떨결에?"

"네... 채팅방에서 막 에고스틱을 추종한다며 뭐라 뭐라 하길레... 저도 거기 끼고 싶어서...'

"....."

뭐야.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내 추종자도 아니라는 거 아니야?

나는 자리에서 꼼지락거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수빈. 뭔가 착해 보이는 이름과는 다르게, 그녀는 실제로 보면 약간 무섭게 생겼다.

검은색 긴 생머리에 장신이라, 무표정으로 있으면 학창 시절 기센 일진이 생각나는 느낌.

...근데 어째 생긴 거와는 다르게, 어찌...

"친구가 하나도 없다고요?"

"네... 제가 집에만 있고 학교수업도 딱 졸업할 정도로만 나갔어서..."

"...."

어째서 듣는 내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거 같지.

뭐, 그녀는 전체적으로 무해해 보였다.

물론, 여전히 수상한 점은 남아 있긴 한데.

일단 그녀는 내가 빙의한 이 세계, [스타더스트!]만화에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나온 적이 없다는 건, 사실 뭐 큰 임팩트를 주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저 그런 엑스트라였다는 거지. 마치 나처럼.

"알겠습니다. 이수빈씨, 저희 크루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네...넷!"

나는 그녀와 악수를 나눴다.

그녀가 말을 하다 혀를 씹어서 얼굴이 붉어진 거는, 모른척 해주기로 하자.

"...우리가 언제부터 크루가 있었데."

서은이가 저 뒤에서 중얼거린 말도 무시하기로 했다.

이제 사람이 3명인데, 이 정도면 크루지 뭐!

***

이수빈씨는 지하 기지로 짐을 옮겨 여기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서은이 옆에서 같이 살면서 배우고 협력하고 한데나 뭐라나.

자주 여기로 왔다 갔다 하면 주목받을 수도 있기에, 이렇게 하는 게 좋다는 게 서은이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불안하다.

차라리 내가 그녀가 원작에 나오는, 내가 아는 캐릭터라면 모를까.

진정한 성격도, 속도 모르는 사람을 우리 서은이 옆에 붙여둔다? 뭔 일 날 줄 알고?

그렇기에, 나도 이 지하 기지로 아싸리 집을 옮겼다.

서은이에게는 다른 이유를 대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녀도 대충 내 걱정을 아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왜 그러는 거지.

원래 수빈씨를 알고있는 건가?

그렇게 깊은 지하 이곳에서, 나와 한서은, 이수빈 총 세 명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남자 하나에 여자 둘이 사는 거라, 좀 그림이 이상하긴 한데.

서은이는 중학생이고 수빈씨는... 뭐, 확실히 미녀이긴 하지만. 별문제는 없다.

애초에 내 마음은 늘 스타더스, 신하루 그녀에게 가 있다. 이 세계에 왔을 때 다짐한 게 이번 생은 하루 그녀를 위해 살겠다 였으니.

물론 그녀와 내가 이어질 날은 평생 없겠지만. 하하.

그렇게 나는, 이곳에서 살아가기 시작했다.

여럿이서 사니 뭐 혼자 살 때보다는 시끌벅적 재미있네.

"형, 냉장고 문 열어두고 나온 거 알아요? 이러면 아이스크림 다 녹는다고요!"

"나? 야, 나 냉장고 문 열은적 없어!"

"서, 서은아. 그거 내가 열어둔 거 같애. 미, 미안...."

"앗! 아...괜찮아요 언니!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죠. 헤헤."

"...와, 내가 한 줄 알았을 때는 뭐라 뭐라 하더니."

"....."

서럽구만 서러워.

EP.11 악당의 일상

[일본이 놀라고 미국이 경악하고 유럽이 뒤집어졌다! 세계를 뒤흔든 K-빌런. "우리는 어째서 에고스틱같은 빌런이 없는 것입니까?" 일본 히어로협회 대변인, 눈물!]

"쓰읍."

나는 그만 휴대폰을 내려놓고 말았다.

아니 유튜브 잘 보고 있는데 왜 이런 게 뜨고 난리야.

"당, 당이 필요해."

어질어질한 국뽕티비에 등장한 내 얼굴을 보자, 급격히 당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세상에, 어떻게 전의 세계와 이런 거는 하나도 안 달라졌지?

현실이 된 만화 속 세계는, 역설적이게도 원래의 현실과 매우 유사했다.

'그냥 평범한 지구에 그저 초능력자들이 있을 뿐인 세계' 라는 만화의 세계관과 걸맞게, 히어로 빌런 이런 것들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똑같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도 국뽕티비는 돈이 된다는 말이지. 대체 왜 하다 하다 빌런까지 국뽕요소로 삼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방에서 나온 나는 냉장고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저 오렌지 주스가 마시고 싶었을 뿐인데, 무슨 복도를 걸어야 한다.

이거 실화냐?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방에 개인용 냉장고를 하나 장만해놔야 할 것 같다.

이제 돈도 많은데, 아낌없이 써야지.

무슨 강당만 한 거실에 도착한 이후, 나는 냉장고를 열었다.

...미닛메이드가 한 병 남았다. 분명 두병 마신 거 같은데, 왜 한 병밖에 안 남았지? 서은이가 마셨나?

뭐, 서은이도 나처럼 단 걸 좋아하니까.

그래, 생각난 김에 서은이는 뭐 하는지 봐볼까?

나는 발걸음을 돌려 서은이가 있는, 이 지하 기지의 메인섹터로 향했다.

물론 가는 길에 오렌지주스도 마셔주는 건 잊지 않았다. 캬아. 역시 시원한 게 참 좋다. 목 넘김이 좋아.

좀 더 어렸을 때는 초코우유가 좋았는데, 요즘은 오렌지쥬스가 더 좋다는 말이지.

....뭐, 둘 다 여전히 초딩입맛인 거는 매한가지지만은.

또 복도를 열심히 걸어가며, 나는 잠시 서은이에 대해 생각했다.

한서은. 나이로는 중학교 3학년인 여자애.

원작에서는 만화 후반부에 빌런으로 출연.

홀로 대한민국에 전산망을 망가트리고, 최악의 빌런들을 모아 놓은 송도수용소의 보안시스템을 무력화해 대탈옥을 일으킴.

이게 바로 [스타더스트!] 이슈 120~150까지의 메인 이벤트인 '한국대재앙'시기를 연 사건이다.

'한국대재앙'이벤트에서 최종빌런으로 등장한다.

이후 이슈에서는 사망하여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 남자처럼 숏컷을 하고있는 지금과는 다르게, 성인으로 등장한 그때는 백발을 늘어트린 체, 자신이 발명한 온갖 무기로 스타더스를 공격한다.

그리고 결국, 스타더스에 의해 저지되고 사망.

그때의 별명은 하얀 마녀였다.

...물론 지금은 그런 모습을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냥 단 걸 좋아하고 입이 좀 거친 여중딩일뿐.

한서은. 원작에서의 활약을 보면 알겠지만, 엄청난 천재이다.

주로 특기는 컴퓨터 해킹과 발명. 사실 뭐 머리가 워낙 뛰어나 못 하는 게 없다. 사실상 작가가 만든 파워밸런스 붕괴 캐릭터. 그렇기에 원작 후반부에 등장하는 거겠지마는.

얘도 인생 스토리가 참 기구하다.

어렸을 적부터 한은그룹의 실험쥐로 길러진 일생.

초능력자를 인위적으로 만든다는 명목하에 온갖 불법실험을 실행했고, 결국 어느 정도 결실을 맺었다.

수백 명의 죄 없는 아이들을 갈아 넣어서 결국 무언가 특별한 능력을 갖춘 4명의 아이들을 만들어냈다.

그중 한 명이 우리 서은이. 연구자들이 통칭 '초상지능'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나머지 아이들은 전부 직접적인 초능력을 개화했다. 전기공격이라던지, 얼음을 내뿜는 능력이라든지...

그렇게 각성 이후로도 한은그룹 수뇌부의 지시로 계속 끔찍한 실험을 계속해나가던 그놈들.

아이들은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4명이서 같이 서로 다독이며 버텨나갔다.

그러나 그러던 중, 한 명이 사망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의 정신적 지지대였던 그들인 만큼, 서은이를 포함한 남은 세 명이 느꼈을 충격은 너무나도 컸고.

결국 너무 큰 스트레스로 인해 아이 한 명의 능력이 폭주하여, 그 실험실에 있던 모두가 휘말려 사망하게 된다.

물론, 전부는 아니다.

여기 서은이가 살아남았으니까.

그렇게 홀로 살아남은 서은이는 한은그룹의 눈을 피해 이 지하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내가 찾아오기 전까지, 홀로.

내가 없던 원작에서, 그녀는 계속 혼자서 한은그룹을 추적했다. 그 끔찍했던 참사 이후로 몸을 숨긴 한은그룹 수뇌부들을 징벌하기 위해.

결국, 그녀는 홀로 그들을 다 찾아내어, 복수에 성공하게 되지만.

결국 복수후에 남는 건 허무함뿐.

지독한 공허감에 몸을 떨던 그녀는 결국 살짝 어... 맛이 가 버린다. 갑자기 자기와 형제자매들이 이렇게 된 거는 무능한 국가와 히어로 때문이라며 테러를 저지르며 빌런이 되니.

물론, 이제는 내가 나서서 서은이가 그런 빌런이 되게 납두지 않을 거다.

잠깐, 생각해 보니 이미 나랑 공범이어서 빌런인 거 아닌가? 어....

정정한다. 내가 나서서 서은이가 그런 '미친' 빌런이 되게 놔두지 않을 거다. 적당히 빌런인건 몸에도 좋다고.

내가 살던 원래 세상을 따라 한 세계인 만큼, 대한민국에서는 히어로보다는 빌런이 되는 게 나은 법이다.

원래는 뭐 한서은이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고 그저 기술쪽으로 이용하려고 접근한 거지만 말이야, 지내다 보니 이 꼬맹이한테 정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허무하게 개죽음을 맞게 둘 수는 없지.

그런 생각 하며, 나는 어느새 도착한 메인 섹터로 들어섰다.

***

들어가자마자 나를 반기는 수많은 모니터들의 향연.

어느 모니터는 CCTV를, 어느 모니터는 무슨 자료를.

눈알이 핑핑 돌아갈 것만 같은 이 공간.

이 지하 기지의 메인 섹터다.

흠, 이 공간도 이름 붙여주면 더 멋지지 않을까.

감시센터?

자리에 앉아서 무언가를 바쁘게 하는 서은이.

그 옆에서 같이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수빈씨.

"서은아, 뭐하고 있냐?"

내가 가까이 다가가며 묻자, 서은이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날 봤다.

"아 오빠, 일로 와서 이거 좀 봐봐."

"오, 뭔데?"

내가 가까이 가서 보자 그녀가 보여 준 건...

"제 13회 국제 아이스크림 페스티벌?"

"그래! 이거 한국에 처음으로 오는 거야. 내가 얼마나 가고 싶었는데! 다음에 여기 가자. 수빈언니도 함께."

"엄... 그래..."

옆에서 수빈씨도 쑥스럽게 웃고 있었다.

수빈씨...

"음, 그래. 그래서 서은아, 아이스크림 축제가 가고 싶었구나."

참. 이렇게 보니 서은이도 많이 밝아진게 느껴진다.

처음에 만났을 때 상처 입은 새끼 고슴도치처럼 날 경계하던 게 엊그제같은데...

이제는 같이 아이스크림 축제도 가자고 하고. 대체 세상에 아이스크림 축제같은 게 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그래. 순수하고 밝으니 좋네. 좋긴 한데...

그 뭐 일하고 있던 걸 아니었니?

난 막 모니터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길래 또 뭔가를 계획하고 있구나! 이러면서 기특하게 생각했는데.

...아이스크림 축제에 갈 계획을 하고 있었구나.

내가 이 나이 먹고 아이스크림 축제에 갈지는 몰랐는데 말이지...

"어쨌든 그거는 뭐 가면 되는 거고. 그래서 우리의 다음 목적은 뭐 계획해 둔 거 없어?"

"다음 목적?"

내 말을 들은 서은이는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고는 '흠....'하면서 무언갈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 그래, 일단 오빠가 말한 게 뭐였지? 선한 사마리안?"

"어. 근데 그건 또 대규모 테러라, 한 주 간격으로 바로 실행하기는 뭐 해. 국민들에게 피로감을 준다고. 좀 이제 그 다크나이...가 아니라 그 배 테러 사건이 잊혀질 때쯤 팡! 하고 터트려 줘야지."

"그래, 그럼 뭐 한다고 했지? 빌런 제거?"

"그래. 남는 시간에는 그거나 해야지. 뭐 추천할 만한 빌런 있어?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라."

"흠... 오빠가 원하는 게 뭐였지? 오빠가 말한 그 테러를 일으킬 예상도인가 그걸로 정한다고 하지 않았어?"

서은이가 내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테러 예상도. 라고 말하고 원작에서 나중에 테러를 일으킬 애들이라고 풀어 읽으면 된다.

대충 내가 아는 무엇무엇 방법을 통해 아는 거라고 설명했던 건데...

"저번에 제일 중요한 애들 두 명은 이미 제거해 둬서 괜찮아. 이제는 그냥 내가 준 리스트에 있는 애들 중 아무나 하면 될걸?"

"아 그래? 어디 보다... 수빈언니, 그 빌런 리스트좀 띄워주세요."

"응!"

힘차게 대답하며 컴퓨터를 조작하는 그녀.

그래도 같이 산지 한 주 정도 됐더니, 이제는 좀 적응한 거 같은 모습이다.

나를 좀 무서워하길레 한 주 동안 그거 달랜다고 힘들었지. 이제는 괜찮아진 거 같기도 한데 나를 아직도 좀 무서워하는 거 같다. 아니, 그래도 이제 같은편인데 해치지 않아요. 저번에 너무 겁을 줬나.

"어디 보자... A급 빌런들 중에, 얘 어때? 순간 이동하는 놈. 텔레포터."

"걔? 아 걔 죽이기 힘들꺼 같은데."

내가 몰래 슥삭 죽이기 위해서는 먼저 염력으로 몸고정, 그다음에 머리쾅이나 총쓰기 둘 모두가 실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순간 이동을 할 수 있으면, 염력으로 몸 고정이고 뭐고 그냥 슥- 빠져나가서 곤란하다. 곤란해!

"오빠, 원래 곤란한 적일수록 먼저 해치워야 하는 거야."

"하아. 그런가."

그래, 매도 먼저 맞으라고.

저놈부터 일단 족쳐보자.

그러니 제발 나를 공부하기 싫어하는 애인거처럼 한심하게 보지 말아 줄래?

"알았어, 슬슬 준비해야겠네. 그리고 서은아."

"응?"

"너 아까부터 오빠라고 하더라. 컨셉 이젠 벗어던지기로 했냐?"

내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눈치챘는지 빨개지기 시작한 서은이의 얼굴.

'아, 수빈언니한테 언니라 하다 보니...'

뭔가 중얼거리기 시작하길래 재빨리 빠져나왔다.

얘 막 부끄러우면 나한테 소리친다고.

EP.12 순간이동

그림과도 같은 넓은 저택.

하얀 겉면에, 현대식 세련미가 넘치는 위풍당당한 이 저택.

서민층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부자들만 모여 있는 이곳.

...그런 이 근처 어딘가에서, 나는 몸을 숨기고 있었다.

지금 내가 노리는 놈은, A급 빌런 텔레포터다.

주요 특기는 순간 이동인 놈.

하자가 있는 내 순간 이동과는 다르게, 저놈의 순간 이동은 훨씬 능력이 좋다.

그러니까 이동하고 나서의 부작용도 없는 진정한 '순간 이동' 능력자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거리 제한은 좀 있는 거 같긴 한데.

어떻게 보면 이것도 사기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 그냥 사기 능력이 맞다. 다만 이 텔레포터라는 놈이 담이 작은 건지 멍청한 건지 이 정도 능력을 그냥 은행에서 돈 훔치는 용도로 쓰고 있다.

그래, 적어도 지금은.

현재 내가 활동하는 시기를 원작 만화로 친다면 이슈 5쯤? 진짜 극 초반이다. 200 이슈로 이루어진 만화에서 단 5라니.

사실 그게 다행인 거다. 만약 이슈 100너머의 후반대에 빙의했으면 이미 총체적 난국이니. 작가가 파워밸런스를 못 잡아서 처음에 허접스럽던 빌런은 어디 가고 하나하나가 세계 멸망을 불러 올 수 있는 놈들이 튀어나온다.

애초에 이슈 150쯤에 끝난 대공황 에피소드의 마지막 빌런으로 등장한 우리 서은이도 사실 한국만 정복시키려고 해서 그 정도로 끝났지, 마음만 먹으면 세계의 정보통신망을 무너트릴 수 있었다.

이 텔레포터. 이놈도 정말 끈질긴 놈이다. 얘는 초반에 스타더스랑 싸우게 됐다. 방심하고 있던 놈을 스타더스가 어찌어찌 기절시킨뒤, 마취약에 절인체로 감옥에 보내버린다. 정신 차리면 바로 순간 이동으로 도망갈 테니.

그렇게 초반의 잡범으로 잡혀간 이놈이, 지금까지의 모든 빌런들이 탈옥하는 '대탈옥'에피소드에서 화려하게 부활. 스타더스를 가장 괴롭히는 적으로 등극한다.

원래는 돈이나 삥땅치며 살던 빌런중에서도 좀 소확행?을 추구하던 놈이지만, 스터더스에 의해 몇 년이고 마취약에 절여져 갇혀 살다 탈옥한 뒤에는...

그저 자신을 처박은 스타더스, 그녀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간다. 애가 흑화해 버린다고.

애초에 순간 이동. 이 얼마나 얍삽하게 딜넣기에 좋은 능력인가. 이후 에피소드에서 뭐만 했다 하면 갑자기 튀어나와 한 대 때리고 도망치고, 때리고 도망치고...

아마 [스타더스트!]가 웹툰이었으면 고구마라고 쟤좀 빨리 죽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속출했을 거다. 책으로 간행되는 코믹스여서 실시간 반응은 확인 못 하지만 열불내며 읽는 독자들이 많았을 거다.

그리고 그건 당연히 나도 그렇다.

그러니까 이놈은, 미리 죽일 수 있을 때 죽여야 한다.

다시 저택 앞.

근처에 자동차를 주차해 두고 대기하고 있던 나는, 인이어에 꽂힌 이어폰으로 서은이에게 연락했다.

원래라면 굳이 서은이 귀찮게 할 필요 없이 내가 혼자 알아서도 잘하는데, 이번에 이놈은 워낙 까다로운 게 아니라.

"서은아, 이제 슬슬 들어갈까?"

[아니, 형 아직도 안 들어갔어요? 빨리 들어가세요.]

"아니, 이거 바로 거실로 순간이동하면 되는 게 맞는 거야? 저놈이 거실에 있으면 어쩌게!"

[하아. 제가 몇 번이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면 그냥 위치추적기를 던지는 것과 동시에 총을 쏘세요. 총은 아마 걔가 어지간하면 순간 이동해서 피할 거 같기는 한데, 혹시 모르니까. 그래도 위치추적기는 원리 자체가 거미줄을 이용해서 총알보다 빠르니, 그거는 높은 무조건 붙을 거예요.]

"대체 거미줄을 이용한 위치추적기가 뭐길래 총알보다 빠른 데... 난 이해가 안 된다."

[총알은 공장에서 만든 거고, 위치추적기는 제가 직접 만든 건데 당연히 제 게 더 빠르죠. 위치추적기 옆에 붙여진 실 쏘는 구멍에서 나가는 거라 물리 저항이 더 적은데... 근데 어차피 이렇게 설명해봤자 형 문과라 못 알아듣지 않아요? 그냥 의문 가지시지 않는 게...]

"야... 문과라도 대충 다 알아들어. 아마. 어쨌든 근데 난 이해가 안 돼. 그냥 막 스파이 영화같은데 보면 위치추적기는 길거리에서 실수로 툭 부딪치면서 딱 자연스럽게 어?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애초에 저놈은 텔레포트를 써서 길거리를 안 지나다닐뿐더러, 그런 짓 하다 CCTV에 찍히면 더 골치 아프니까 이렇게 하세요. 이게 제일 정확해요. 제가 얘 생활루틴이랑 이동 경로 조사하고 짠 거니까요. 이놈은 집 밖으로 나갈 때도 거의 다 순간 이동으로 나가고 어디로 이동할지도 예측 불가라, 그냥 지금, 이런 식으로 제거하는 게 맞아요.]

"아니 그래도... 이동추적기 붙이는 건 이것보다 좀 더 좋은 방법이.."

[제가 말씀드린 거 외에도 형이 모르는 더 많은 이유가 있으니까, 이렇게 해주세요. 하아.]

한심하다는 듯이 말하는 서은이에 말에 나는 풀이 죽고 말았다. 이런 싸가지 없는... 내가 너보다 거의 10살은 많다 이놈아...

"....그래. 알았다...."

내가 묘하게 풀죽은 듯이 말하자 서은이가 살짝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아 오빠. 왜 그래요. 갑자기 시무룩해지지 말고요. 저희 이미 비슷한 얘기한번 했는데 또 그러시니까...]

서은이가 말하던 도중 옆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서은이의 말이 끊겼다. 옆에 있는 수빈씨가 뭐라고 말을 건넨거 같다.

네..네..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서은이가 나한테 말했다.

[...죄송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들어가요 오빠!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그래, 알았다."

아까부터 계속 바꿔 부르는 형 오빠 호칭에 대해 헷갈리니까 제발 하나로 결정해서 부르라고 하고 싶었는데, 할 타이밍이 아닌 거 같아서 그냥 참았다.

...그리고 하나로 결정하라고 하면 형이라고 계속 부를 거 같아서. 대충 처음 만난 날 나한테 보여 준 정황으로 추측하면 살짝 남자공포증이 있어서 일부러 자신을 남자라고 하고 나보고도 형이라 하는 거 같은데. 실험실에서 연구가들이 다 남자였던 것과 상관있을까?

그래도 몇 달 지내다 보니 좀 나아져서 다행이다. 아마 내가 무해하다는 걸 깨달아서 좀 마음을 여는 거겠지. 아니 애초에 원작을 모르더라도 딱 봐도 여자인데... 숏컷만 하면 남자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그건 좀 귀엽네.

사실 제일 좋은 건 밤에 몰래 침입해서 사살하는 건데, 그건 그놈 때문에 안 된다.

대한민국에 스타더스와 더불어 몇 안 되는 A급 히어로인 '섀도우 워커' 때문에.

이놈 능력 때문에 밤에 뭔짓을 저지르면, 바로 잡힌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테러가 낮에 벌어지는 건 다 이놈 때문이다.

나쁜 놈. 얘만 없었으면 진짜 편하게 빌런들 쓱삭쓱삭 쉽게 쉽게 처리할 수 있는데. 히어로라서 막 보내버리는 것도 양심에 찔리고. 또 막상 제거해 버리면 문제가 더 커지기에 그냥 낮에만 활동하고 있다.

음, 실전을 해보려고 하니 온갖 잡생각이 다 드네. 약간 학창 시절에 책상 앞에만 앉으면 딴생각이 드는 것과 비슷한 기분?

나는 얼굴에 반쯤 걸쳐진 마스크를 매만졌다.

그래, 이제는 행동할 시간이다.

[계획 잊지 않았죠?]

"그래."

이 근처에서, 저놈의 거실로 텔레포트.

거실에 없으면 조용히 수색 후 몰래 사살.

만약 걸리면? 그래도 위치추적기는 뿌렸을 테니 Plan B로 가면 된다.

"시작한다."

나는 심호흡하고, 순간이동을 준비했다.

그리고- 시작.

***

나는 텔레포터놈 집의 거실로 순간이동했다.

순간이동하자마자 보이는 건.

어떤 놈의 면상?

"아이 씨!"

"헉!"

[형, 쏴요!]

서로가 소스라치게 놀람과 동시에, 나는 바로 오른손으로 총을 쏘며 왼손으로는 이동추적기를 던졌다.

-탕!

총을 쏘고 나서 보니, 이놈은 이미 시야에 없었다.

총은 맞았는지 모르겠네.

아이 씨, 얘 왜 거실에 있고 난리야. 바로 도망갔잖아.

이렇게 된 이상, 플랜B로 간다.

"서은아! 위치추적기는 붙여졌냐?"

[네! 수빈언니, 위치 불러 주세요!]

[응! 지금... 동쪽으로 500m거리에 있어!]

[들었죠? 형, 빨리 가요!]

"아니 야, 나 이렇게 계속 순간 이동하면 휴유증이..."

[빨리!]

"아 알았어."

나는 재빨리 이동했다.

***

어림잡아 500m 앞으로 이동해 보니.

잠깐, 여기 시내인데?

"꺄악!"

"뭐, 뭐야?"

갑자기 사람 많은 곳으로 순간 이동한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여기 번화가잖아!

갑작스럽게 전신에 검은 로브를 두르고 마스크를 쓴 사람이 허공에 뿅 등장하니 사람들이 당황한 게 보였다.

"어, 저 사람 뭐야..?"

"오빠 저거 에고스틱아니야?"

"어? 진짜네!"

시민들이 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당황해서 식은땀이 흘러나올 찰나세, 귀에서 서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오른쪽에!]

오른쪽?

오른쪽으로 돌아보니 저 멀리.

몸에 피를 뚝뚝 떨어트리며 배를 움켜쥐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어라, 너 거기 있었구나?

심지어 총에 이미 맞았네?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가 씨익 지어지는 걸 느꼈다.

그래. 가끔은 쉽게 가는 것도 있어야지.

내가 총을 들고 그쪽으로 순간 이동 하려는 찰나. 그놈이 나를 보더니 비틀거리며 다시 사라졌다.

"그래, 해 보자 이거지?"

그렇게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때아닌 순간 이동 추격전이 벌어졌다.

***

"...네. 한국 히어로 협회입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네? 에고스틱이 시내 한복판에 나타났다고요?"

EP.13 플래시몹

***

[실시간 에고스틱 길거리에 등장함ㅋㅋㅋㅋㅋ]

(사진)

이거 뭐냐ㅋㅋㅋㅋㅋ

ㄴ[오 뭐임?ㅋㅋㅋㅋㅋ]

ㄴ[라이브 이벤트 ONㅋㅋㅋㅋㅋㅋ]

ㄴ[이거 위험한 거 아니냐? 진짜 모름]

ㄴ[아ㅋㅋㅋ 영화 찍냐고ㅋㅋㅋㅋ]

ㄴ[게이야 그거 찍다가 죽는다ㄷㄷ도망쳐라]

ㄴ[상남자특) 범죄 현장 찍음]

***

[헐헐헐 애들아 지금 망고스틱 길거리에 등장했데!]

(동영상)

ㄴ[오 뭐야? 또 테러야? 무섭다...]

ㄴ[아니! 이번엔 그냥 누구 추격하는 거 같데!]

ㄴ[헉 영상보니 누구 피흘리며 번쩍번쩍 하는데 살인 아니야?ㅜㅜ]

ㄴ[아니 그거 딱 봐도 빌런 쫓는 거 아니야?]

ㄴ[어둠의 다크 히어로 망고스틱! 어둠의 다크 히어로 망고스틱! 날 가져요!!!]

ㄴ[망고단 뭔뎈ㅋㅋㅋㅋㅋㅋ]

***

실시간 트레드 1위

#에고스틱

***

"헉...헉..."

텔레포터, 김학철은 거친 숨결을 내뱉으며 몸을 움직였다.

원래라면 순간이동 따위는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그지만, 지금 그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막기 위해 손으로 상처를 잡은 체, 계속. 계속.

앞으로만, 그저 앞으로만 이동했다.

그의 눈앞은 벌써 흐려지고 있었다. 몸이 무겁다. 죽을 거 같다.

문득 그는 분노가 치솟는 걸 느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

자신은 그저 은행 몇 개를 턴 거밖에 잘못한 게 없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몇 명을 죽이기는 했지만, 그건 전부 그놈들이 잘못한 거였다. 왜 잘 가고 있던 자신을 막고 난리인가.

그는 계속 앞으로 순간이동 했다. 하지만 몸이 아프고 머리가 어지러워서일까. 이동이 쉽지가 않았다.

원래 순간 이동은 머릿속으로 원하는 위치나 좌표를 명확하게 인지해야 가능한 거다. 그러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총을 맞아본 김학철의 정신은 이미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그저, 자기 눈앞에 보이는 가장 멀리 있는 곳으로 가고, 또 갈 뿐이었다. 사실 그마저도 점점 눈앞이 흐려져 쉽지 않았다.

"까약!"

"뭐, 뭐야!"

"으악!"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시내 한복판.

유동 인구가 많은 이곳에서, 피를 한 바가지 흘리고 있는 남자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사람들 틈 사이에서 나타나니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러나 그래도 그는 계속 앞으로, 앞으로 가야 했다.

왜냐면 뒤에서, 뒤에서 그놈이 쫓아오고 있었거든.

"예, 예 안녕하세요! 접니다, 에고스틱!"

"네 네. 지금 잠시 제가 업무중이라 바빠서요. 아이고!"

"어허. 놀라지 마세요. 해치지 않습니다!"

"시민 여러분을 위해 쓰레기를 청소하고 있을 뿐이니, 여러분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해주세요!"

뒤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

가증스러운 그놈, 에고스틱.

텔레포터인 김학철은 당연히 그를 알고 있었다.

사실 대한민국은 에고스틱을 모르면 간첩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를 모르는 자가 없었다.

저번 주만 해도 온종일 티비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심지어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에고스틱 얘기를 했었으니.

김학철은 에고스틱이 일으킨 일을 알고 있었다.

빌런 2명을 암살했다는 거.

그러나 그는 딱히 에고스틱을 경계하지 않았다.

벼락에 맞을까 무서워 밖에 안나가는 사람을 본 적 있는가?

그는 뭐... 에고스틱이 지금까지 살해한 빌런들이 아마 그와 개인적으로 엮인 일이 있었을 거로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그놈들을 죽이지는 않았겠지 말인가.

그래서 김학철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에고스틱이 자신을 죽이려들지 않을 거라는 확신.

에고스틱이 자기 정체를 모를 거라는 확신.

그리고 에고스틱이 자신을 죽이려 들어도, 자신은 능력을 사용해 도망칠 수 있을 거라는 확신.

그리고 그 확신은, 실시간으로 김학철을 배신하는 중이었다.

세상 어느 사람이 집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총든 놈이 튀어나와 자신을 쏠꺼라고 예상했겠는가.

그리고 그 예상을 못한 결과는, 그에게 처절하게 돌아오고 있었다.

"자 나와요! 쓰레기 하나 오늘 잡습니다!"

"A급 빌런 텔레포터! 그만 이제 지옥가자!"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쓰레기 빌런은 주님곁에!"

정신병자처럼 헛소리를 하는 에고스틱.

마치 사람들한테 들으라는 듯이 말을 미친놈처럼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그놈.

그런 그놈이, 김학철에게는 그 무엇보다 두려웠다.

정확히는, 줄어들지 않는 그의 목소리가.

자신이 계속 순간이동하고 있음에도, 소리가 줄어들지 않고 계속 들리는 그의 목소리.

김학철은, 계속해서 이동하며 신음했다.

"으윽..."

그는 슬슬 눈앞이 도는 게 느껴졌다.

애초에, 총에 맞은 몸으로 여기까지 온 게 기적이었다.

그가 순간 이동 능력이 없었다면, 그리고 죽음을 직감한 육체가 마지막 힘까지 짜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거다.

"그러나 오호통제라(Oh-hoh統制라)! 너의 목숨은 여기까지인가 보구나!"

뒤에서 들려오는 헛소리를 들으며, 김학철은 결국 쓰러졌다.

그의 육신의 힘이, 결국 순간 이동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인 그에게, 그림자가 졌다.

그림자를 확인하기 위해 올린 고개에는, 반쪽짜리 마스크를 쓴체 비열하게 웃고 있는 악당이 있었다.

"텔레포터! 니 죄를 니가 알렸다."

"헉.. 헉.. 살려, 살려 줘. 살려주세요..."

"아! 살려달라고?"

그는 그 말을 듣더니 주위를 빙 둘러봤다.

그들 주위에는 둘을 둘러싼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의 에워싼 시민들에게, 에고스틱은 연극조의 목소리로 큰 소리로 물었다.

"여러분! 여기 있는 이 쓰레기는 남의 재산 몇십억을 훔치고 선량한 사람 4명을 죽인 놈입니다!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빠, 누군가의 친구, 누군가의 아들이었을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학살한 이놈을, 살려야 하겠습니까?"

"죽여라!"

"죽여 버려!"

잔뜩 흥분한 시민들의 죽이라는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개 중에는 에고스틱 저놈도 누군가의 죄 없는 아들 딸을 수백명 침수시키려 하지 않았나-라는 의문을 가진 이들도 있었지만, 총을 들고 있는 빌런 앞에서 그걸 대놓고 말할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목숨은 소중한 법이지.

그렇게 죽여 버리라는 고함소리의 한복판에서, 에고스틱은 김학철을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씨익 웃었다.

"죽이라는데?"

"제, 제발. 한, 한 번만. 한 번만 살려 줘..."

"그래? 딱 한번? 그래. 딱 한번이니까... 살려줄까?"

에고스틱의 긍정적인 반응에 순간적으로 밝아지는 김학철의 표정.

그러나 김학철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에고스틱이 손이 이미 뻗어져 있었다.

"미안하지만 학철아, 그런건 없다!"

웃음기 섞여 있는 에고스틱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어디선가 탕-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것이 A급 빌런 텔레포터, 김학철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휴우..."

총 한 방 더 맞자 결국 죽어 버린 텔레포터.

끝내 그가 죽자, 주위에 몰린 사람들이 환호성과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과장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더욱 크게 박수를 치는 사람들.

근데... 어...

그, 애들아. 내가 일단 형식적으로 빌런이거든?

그런데 말이야... 너희 내 주위에서 뭐 하니?

이 세계는 히어로와 빌런들을 비롯한 초능력자들이 있다는 걸 제외하면, 놀랍도록 내 원래 세계랑 비슷하다.

그런데 이럴 때마다 나는 내가 다른 세계에 왔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어떨때? 바로 눈앞에서 사람이 총 맞아서 죽었는데 박수치며 사람들이 좋아할 때.

아니, 눈앞에서 총맞아 사람이 죽으면 막 무섭고, 소리지르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피흘리며 죽어 가는 시체들 앞에서 웃음 지으며 박수 치는 사람들을 보니, 참 묘한 기분이 든다.

마치 중세 시대때 공개처형을 흥미진진하게 보는 사람들 같달까. 사실 다를 게 없으려나?

아마 이 세계에서는 히어로와 빌런의 대격돌로 인해 사람들이 죽음에 익숙해진 걸려나,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아니 잠깐. 일단 다 제쳐두고, 나 빌런이라니까? 내가 히어로가 아닌데 너희 뭐 하니.

나는 아직도 박수를 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번 씨익 웃어 보인 뒤 돌아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도 빌런이거든요. 갑자기 여기 계신 분들한테 제가 총 막 쏘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흠칫하며 멈추는 사람들.

그래, 그래도 상식적인 판단이 되는 모양이다.

이제야?

어쨌든, 딱히 겁줄 생각은 없었기에 말을 덧붙였다.

"농담입니다 여러분! 제가 막 갑작스럽게 무고한 시민들을 해치지는 않습니다! 제가 뭔가를 벌일 때면, 다 사전에 공지하고 히어로를 부르고 일으키니,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그저 저보다 좀 더 '질 나쁜' 빌런을 청소하러 왔을 뿐이니, 안심해도 좋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사람들이 안심하는 게 보였다.

아니, 그렇게 쫄꺼면 처음부터 가까이 오지 말든가...

[형, 이제 다 처리됐으면 나와요. 히어로들 오기 전에.]

귀에서 들려오는 서은이의 목소리.

그래, 이제 슬슬 떠나야지.

아, 근데 지금까지 계속 순간이동해서 힘든데 또 원거리 가야돼. 죽겠네.

내가 한숨을 쉬며 일으키려는 찰나, 하늘 위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에고스틱!"

그 소리에 놀란 내가 위를 올려다보니 그곳에는.

"스타더스?"

아니 너가 왜 여기서 나와?

EP.14 호감악당이 되었다

나는 스타더스를 참 좋아했다.

스타더스. 만화 [스타더스트!] 주인공.

스타더스를 좋아한 이유는 뭐가 있을까?

일단 뭐 당연히. 이뻤다.

현실로 봤을 때보다는 아니지만, 만화에서도 매우 이쁘게 그려졌었다.

어쨌든 예쁜 여자에게 본능적으로 호감이 가는 건 남자라는 슬픈 생물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또, 히어로 활동할 때와 평소와의 갭이 좋았다.

평소에는 그냥 평범한, 조금은 무뚝뚝한 여자애일 뿐이지만, 히어로로 활동할 때는 특유의 어색한 말투로 '네 이놈! 뭐 하는 짓이냐!'하는게 보다보면 재밌다.

일상과 비일상을 분리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자기 평소 말투를 숨기기 위해서 그러는 건지 뭐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내 생각에는 그냥 그러면 멋져 보인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 같기는 한데...

뭐,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그녀 특유의 정의감이었다.

어렸을 적에 부모님이 빌런이 일으킨 사건에 휘말려 사망한 이후, 계속 그때부터 빌런들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심을 길러왔다.

그렇게 히어로가 되기를 꿈꾸던 그녀.

그러나 아무 초능력도, 능력도 없던 그녀이기에.

그녀는, 별에게 빌 뿐이었다.

제발 능력을 각성하게 해 달라고.

그래서, 저 빌런들을 자신이 직접 복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별이 그녀의 요청에 응답해준걸까?

그녀에게는 기적과도 같이 초능력이 생겼다.

초능력을 각성하며, 특이하게도 그녀의 머리도 별빛과도 같은 금발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스스로 지은 이름. 별의 먼지. 스타더스트.

협회가 히어로명 5글자는 너무 길다며 스타더스로 줄여버린, 이름이다.

어쨌든 그렇게 복수심으로 시작된 히어로 생활이었지만, 여러 사건을 통해 그녀는 깨닫게 된다.

히어로란, 빌런을 단순히 족치는 게 아닌, 시민들을 지키는 존재라는걸.

그렇게 그녀는, 진정한 영웅. 히어로가 된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런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었었다.

사실 더 인상적인 스토리텔링과 정의관을 가진 히어로들도 많았지만, 그녀가 한국인이었기에 내 최애캐가 된 게 아닐까 싶다. 공감이 갔거든. 그녀의 이야기에.

....내가 왜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있냐.

그 최애캐가 갑자기 내 눈앞에 등장했거든.

"에고스틱!"

"스타더스?"

에그머니나.

이게 무슨 일이래.

사람들이 붐비는 이곳.

텔레포터의 제거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나는, 이제 그만 집에 가려고 했다.

분명 조용히 보내버리려고 한 건데 어째 어그로를 너무 많이 끌어서 좀 곤란했거든.

근데 갑자기 짜잔! 스타더스가 등장했다.

아니 대체 내가 여기 얼마나 오래 있었다고 벌써 튀어나오지?

나는 사람이 많은 탓에 불쌍하게도 착륙도 못한 채 떠 있는 그녀를 지켜봤다.

땀을 비 오듯 흘리는 게, 굉장히 급하게 날아온 듯한 모양새다. 아마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듣자마자 날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특유의 빨강 라텍스 옷은 챙겨입고 왔네?

"에고스틱, 네놈!"

"예, 예. 듣고 있습니다."

[형, 뭐 해요! 빨리 와요!]

아니 서은아, 잠깐만 기다려보렴.

내 최애캐가 나를 보려 여기까지 진짜 말 그대로 '날아서' 왔는데, 한번 뭐라고 하는지 들어봐야지.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데, 내가 갑자기 뿅-! 하고 사라져 버리면 얼마나 무안하고 민망하겠어. 사람들이 우리 신하루 비웃으면 어떡해!

"네놈, 지금. 지금 뭘한거냐."

스타더스가 내 발치에 쓰러진 채 있는 텔레포터를 보더니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미 시민들은 갑자기 우리 둘이 싸울 기세자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다. 아니 여러분, 그러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고 있으십니까? 얼레? 이제는 아예 휴대폰 꺼내서 영상까지 찍고 있네? 아 저거는 아까부터 찍고 있던 건가? 아 그게 더 심각한 거 아닌가...

이 위험이라고는 모르는 안전불감증 시민들 앞에서, 나는 스타더스와 조금 더 어울려주기로 했다.

"뭘 하다니요. 사회의 기생충같은 빌런들을 제거했을 뿐이죠. 히어로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했을 뿐입니다. 마치 당신 같은 분들이 해야 할 일을요. 뭐,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 인사 받을려고 한 일이 아니니. 하핫!"

"네놈..."

스타더스의 이마에 힘줄이 돋는 게 여기서도 보일 지경이었다. 얼굴이 새빨개진게 진심으로 빡친 모습. 어어, 왜 이래? 내가 무슨 뭐 심한 말을 했나?

몸이 부들부들 떠는 게 금방이라도 컨셉을 집어던질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야, 야 진정해! 조금 깐족거렸다고 이렇게 나오기냐?

그녀가 분노에 일갈을 하기 전, 내가 재빠르게 먼저 입을 열었다.

"물론! 물론 제가 공권력을 빌리지 않고 사적제제를 한 것은 맞습니다! 한 것은 맞는데, 정상참작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텔레포터, 이 잔혹한 놈은 능력의 강력함과 도주의 위험성때문에 A급으로 지정된놈 아닙니까? A급이면 애초에 현장에서 히어로에 재량에 따라 즉결심판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내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도 입을 열었다.

"그래, 가능하지. 근데, 그래서 너가 히어로냐?"

그녀는 일단 당장 나한테 달려들어 한 대 때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러는 즉시 내가 도주할 것과, 근처의 시민들이 말려들까 봐 차마 못 하는 모습이었다. 흠. 뭔가 내가 더 있어 봤자 딱히 도움이 될 거 같지는 않은데. 이제 슬슬 런각을 봐야겠다.

"뭐, 스타더스씨의 말은 잘 알겠습니다. 죽어마땅한 쓰레기라도 히어로가 직접 죽여야지, 저 같은 빌런이 죽이면 의미 없다는 소리군요. 역시 투철한 정의관을 가진 스타더스씨 다운 생각입니다."

일단 대충 스타더스를 옹호해줬다.

나의 스타더스 대인기 히어로 만들기 계획 첫 번째, 칭찬하기!

원래 철수가 "저 공부 잘해요."라고 말하면 뭔가 안 미덥지만, 철수의 경쟁자인 영희가 "저놈 딴 건 몰라도 공부 하나는 인정이다."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그제야 '아 철수가 공부는 정말로 잘하는구나.'라고 생각하는 법이다. 경쟁자의 칭찬만큼 효과적인 게 없지!

근데 시민들의 생각은 달랐나보다.

"뭐야, 빌런은 히어로만 잡으라는 거야?"

"자기가 뭐라고... 재수 없어."

갑자기 주위에서 나오는 수근수근한 목소리들.

미안한데, 다들린다.

내가 진짜 이 세계 오고 나서 느끼는 건데.

여기 사람들, 좀 맛이 갔다.

안전불감증은 기본이요, 이제는 히어로와 빌런이 대치하는데 빌런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그... 진짜로 정신이 나간 건가?

"일 다 벌어지고 나서 달려와 놓고 자기는. 어이없어."

"솔직히 에고스틱이 뭘 잘못했냐?"

나는 그만 정신을 잃을뻔했다.

내가 듣고 있는 이 대화가 과연 현실의 대화가 맞나?

우리를 둘러싼 수군거림이 커질수록, 나와 스타더스의 표정은 점차 굳어갔다.

비난이 대상이 내가 아닌 스타더스가 되어, 아무 죄 없는 스타더스가 욕을 먹기 시작했다.

대체 왜지? 사람들이 피를 보더니 돌아버린 건가?

어쨌든 이건 내가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욕먹고 스타더스가 칭찬받는 그림을 원했지, 이런 구도가 될 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 했다.

대체 왜 시민들이 빌런의 편을 들어 주냐는거다. 이게 뭐야?

스타더스도 뭔가 여론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만회할 필요가 있다는 걸 느꼈다. 급히, 재빨리 나는 입을 열었다.

"저도! 저도 제가 뭐 잘했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런 거 아니냐고 말했을 뿐이죠! 저는 계속 이런 어...악행을 이어갈 테니! 스타더스씨가 저를 막아보도록 노력하길 바랍니다! 그럼 어... 전 이만!"

나는 말을 속사포처럼 내뱉은 뒤 망토를 앞으로 돌리며 순간 이동했다. 뭔가 이상해. 일단 도망가야겠어.

순간 이동하고 나니 핑핑 도는 시야. 울렁거리는 속. 나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한 체 결국 쓰러졌다. 사실 아까부터 텔레포터 잡는다고 무리했는데, 또 장거리를 이동하니 몸이 버텨주질 않았다.

"헉...헉..."

내가 쓰러져서 숨만 겨우겨우 쉬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왔다.

"오빠!"

서은이였다. 달려온 서은이는 나를 붙잡고 일으키기 위해 낑낑대기 시작했다.

"아, 왜 이렇게 무거워! 오빠, 정신 좀 차려 봐요! 안 되겠다, 언니! 저 좀 도와주세요!"

"어! 지금 가고 있어!"

그리고 잠시 뒤 뛰어들어 온 수빈씨. 사실 수빈씨가 아닐까 추측만 했을 뿐이다. 나는 지금 쓰러져서 눈도 못 뜨겠거든. 와 이러다가 진짜 죽겠다.

"자 하나둘! 같이 들어요!"

이륵고 둘은 낑낑대며 나를 옮기기 시작했다. 사실 서은이는 별 도움이 안 되고 수빈씨가 나를 혼자 옮기는 기분이었지만, 말은 안 했다. 말을 못할 상황이기도 하고.

여자 둘이 내 몸을 질질 끌고 가니 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근데 지금 진짜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이겠어.

"하아, 앞으로는 제발 피로회복기 바로 앞으로 이동해요 오빠."

나를 결국 피로회복캡슐에 넣는데 성공한 서은이는, 쌕쌕거리며 나에게 말했다. 그래, 앞으로는 그래야겠어. 아까는 정신이 없었어서.

"...고...맙..다.."

"알았으면 빨리 쉬어요. 다 죽어 가네."

그렇게 툴툴거리며 챙겨 주고 떠난 서은이.

옆에 있던 수빈씨도 주먹을 잡게 말아쥐고 '빨리 나으세요!'라며 파이팅하는 자세를 잡으며 응원해 주고 나가셨다. 귀엽네.

그렇게 쓰러진 나.

푹 자고 휴식을 취해야 하지만 내 머리는 걱정 때문에 쉽게 잠들지 않았다.

아까 스타더스한테 수군거리던- 그 소리들 때문에.

***

[호감도조사)개꼰대 스타더스보다 상남자 망고스틱좌가 더 좋으면 개추ㅋㅋㅋㅋㅋㅋㅋ]

일단나부터ㅋㅋㅋㅋㅋ

[추천] 1380 [비추천] 28

***

EP.15 이게 아닌데

[글쓴이]익명

[제목]A급 빌런 에고스틱에 대해 팩트만 정리해보자...real

1. S급 빌런 엔조딕악 제거

2. A급 빌런 라이노 제거

3. 지루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긴장감을 던져 주는 특집 유람선의 딜레마 방영(사상자 0명)

4. 자기 추종자들 테러 벌이는거 진압하고 인질들한테 보상금까지 지급함

5. A급 빌런 텔레포터 제거. 참고로 얘는 히어로 협회에서 잡기 매우 힘들 거 같다고 공인한 애임.

에고스틱 솔직히 빌런 아닌 것 같은데ㅋㅋㅋㅋㅋ

[익명1]빌런ㅇㄷ? 진정한 "히어로"밖에 보이지 않는걸?

ㄴ[익명2]ㄹㅇㅋㅋ

[익명4]솔직히 스타더스보다 에고스틱이 나은 듯 ㄹㅇㅋㅋ

ㄴ[익명5]ㄹㅇ스타더스가 지금까지 한 게 솔직히 뭐있음? 지금까지 A급 빌런 한두 명 잡지 않음? 우리 킹갓에고좌는 이미 S급도 잡았는데ㅋㅋㅋ

ㄴ[익명6]이건 좀;; 아무리 요즘 에고스틱 띄워준다해도 히어로에 비비는 건 좀 에바지. 선넘네...

ㄴ[익명7]스타더스 팬클럽 검거

ㄴ[익명15]히첩 검거

ㄴ[익명16]히첩이 뭐임?

ㄴ[익명17]히어로협회 첩자

ㄴ[익명6];;;;

[익명8]빌런도 제거해 줘~ 엔터테인먼트도 제공해 줘~ 솔직히 호감가는데ㅋㅋㅋㅋㅋ

ㄴ[익명9]테러범한테 호감ㅇㅈㄹ

ㄴ[익명8]아 그래서 사상자 있냐고ㅋㅋㅋㅋ

[익명10]그래서 스타더스는 왜 욕먹는 거임? 진짜 모름.

ㄴ[익명11]걍 에고스틱이랑 비교돼서 까이는 거 아님?

ㄴ[익명12]A급 히어로 3명중에서 제일 활약 없어서 그런 것도 있는 듯ㅋㅋㅋㅋ 솔직히 섀도우워커나 아이시클 둘은 혼자서 몇십 몇백명 구하는데 스타더스는 지금까지 한 게 별로 없음.

ㄴ[익명13]솔직히 스타더스는 그냥 얼굴원툴이지ㅋㅋㅋㅋ 걍 B급으로 낮추고 에고스틱 A급 히어로로 넣자

ㄴ[익명14]히어로협회는 당장 새로운 히어로로 우리 망고틱을 지정해라!

***

"쓰읍...."

나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침음을 흘렸다.

생각보다 일이 안 좋게 돌아가고 있다.

일단 텔레포터 그놈이 튀는 바람에 그놈 쫓는다고 시내로 간게 문제였을까?

사람들 눈에는 빌런을 해치우는 내가 히어로로 보였나보다.

어이가 없네...

"휴우..."

나는 착찹한 표정으로 네이X 카페에 들어갔다.

[에고스틱 공식 팬카페]라고 적혀 있는 이곳.

벌써 가입자가 와... 이렇게 많다고?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둡구나!"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탄식을 흘렸다.

빌런을 지지하는 국민들이라니, 어떻게 이런 이들로 이루어진 국가가 있을 수 있는가?

물론 그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스타더스였다.

수상할 정도로 많아진 나의 팬클럽(?)이 스타더스에 대한 비난 여론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

아무래도 나의 사실상 전담 히어로가 된 스타더스를 뭐랄까... 굉장히 싫어하는 느낌인데.

"이게 아니야... 이게 아니라고..."

결코 이렇게 되는 걸 바란 게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어떻게 나를 빨아줄 생각하지?

나의 유람선 폭파 이벤트는 벌써 잊은 건가?

...하긴. 그 유람선을 탄 한 사람이 유튜브에서 인터뷰로 '사실 지나고 보니 좀 재밌었다.'라고 말하는 걸 보고 머리가 띵했었지.

아무래도 이 세상에 대한민국은 좀 맛이 간 거 같다.

내가 대중의 스타더스 호감도를 올리려고 그 지랄을 했는데, 오히려 호감도를 떨어트리다니.

나는 얼마나 죄 많은 팬이란 말인가.

"안 되겠다. 바로 두 번째 테러로 간다!"

나는 다짐했다.

저 우매한 민중들에게 빌런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 보여주겠다.

그리고 스타더스가 얼마나 이쁘고 정의감 넘치고 성실하고 귀엽고 멋진 존재인지도 다시금 사람들 뇌리에 박겠다!

"서은아, 작전 시작이다!"

나는 성큼성큼 거실로 나갔다.

거기에는 때마침 서은이와 수빈씨가 소파에 앉아서 티비를 보고 있었다.

"에휴. 누워서 골골댄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힘이 넘쳐요..."

서은이가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몸은 며칠 쉬었더니 바로 나은지 오래. 피로회복기 성능이 좋다니까?

나는 서은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나처럼 서은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수빈씨는, 사과를 깎으며 티비를 보고 있었다.

"다인씨, 다인씨가 또 티비에 나오고 있어요!"

수빈씨는 눈을 반짝거리며 티비를 향해 손을 가리켰다.

같이 산지 한 2주쯤 지났더니, 이제는 나와 꽤 친해진 수빈씨.

그래! 그녀도 깨닫고 만거다. 내가 얼마나 무해한 인간인지.

비록 그녀와 나의 첫시작은 좋지 않았지만, 나의 지속적인 가스라이팅...이 아니라! 나의 지속적인 그 친절. 친절로 그녀는 나를 향해 마음을 연 것이다.

그녀가 나를 이름으로 편하게 부르는 것도 같은 이치다. 다인씨라고. 같은 집에서 사는데 에고스틱씨라고 하면 웃기자너.

다인. 그게 내 이름이다. 에고스틱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내 이름. 이제는 아는 사람이 이 세계에선 서은이와 수빈씨밖에 없는 이름이다. 물론 이제는 다인이라는 이름보다 에고스틱으로 더 유명해졌다.

수빈씨와 서로 이름을 튼 이후, 그녀는 매우 씩씩해졌다. 요리도, 빨래도, 설거지도 다 그녀가 하고 있다! 그렇게 나랑 서은이는 딱히 손가락 까딱 안 하고 편하게 살고 있다. 우리가 나쁜 게 아니야. 그녀가 '제가 이런 거라도 해야죠...'라면 눈물을 글썽이며 부탁했기게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시키는 거다. 정말이다.

결론은 이제 수빈씨가 나를 겁내지 않는다는 거. 좋은 일이다. 이제 같은 한집에 사는데 나를 무서워하면 좀 어색하고 그러자너.

어쨌든, 나는 그녀가 가리킨 티비를 봐보았다.

거기에는 약간 뉴스 끝자락에 나오는 시사 토론같은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밑에 나오는 주제는.

[에고스틱, MZ세대에 새로운 아이콘이 되나.]

"....."

세상에.

내가 이 세계에서도 MZ세대라는 용어를 볼 줄이야.

나는 이마를 탁 치며 침음을 흘렸다.

MZ세대, 20-30대를 지칭하는 용어다.

그러니까 저기서 하는 말은, 이제는 내가 젊은 애들의 아이콘이 됐다는 소리.

"야, 오빠. 인기 많아졌다?"

서은이가 놀리듯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인기가 많아지기는 했네. 심지어 좋은 쪽으로.

나는 수빈씨가 깎아 놓은 사과를 먹으며 티비를 지켜봤다. 대체 뭐라고 하는지 한번 들어나 보자.

수빈씨도 나처럼 티비를 집중해서 보았다. 아니, 나보다 더 집중해서 보는 거 같은데. 왜 그러세요, 민망하게... 차라리 옆에 있는 서은이처럼 스마트폰을 해주셨으면 한다.

[MZ세대가 빌런을 이렇게 광신적으로 따르는 건 살짝 문제가 되긴 합니다. 지금, 이게 포탈 메인 뉴스인데요, 댓글을 보면 전체적으로 다 에고스틱을 옹호하는 분위기입니다. 이게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사실 MZ세대가 기존 히어로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죠. 운 좋게 능력을 얻었는데 그걸로 출세했다는 이미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히어로가 일을 안 한다, 사고가 일어나도 대처가 늦다 이런 이야기가 많았죠.]

패널로 보이는 한 중년남성이 거기까지 말하더니 침을 삼켰다. 그리고 잠시 양해를 구하고 나서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옆에 수빈씨는 그걸 들으면서 필기까지 하기 시작했다. 수빈씨... 뭐 하세요...

티비에서는 그 패널이 다시 입을 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에고스틱이라는 이 빌런이 시민들의 가려운데를 딱 긁어줬다 이겁니다. 히어로가 빌런을 사살하지 않고 제압만 하는 거에 불만을 가진 분들이 많지 않았습니까? 사형당해도 남을 놈들을 단순히 감옥에 가둬둔다... 형이 너무 적다 이런 말들이 많았죠. 근데 에고스틱이라는 이 빌런이 딱 즉시사살을 하니? 시민들이 통쾌해하는 면이 있죠.]

[그래도 이 빌런도 유람선에서 테러를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사회자의 말에 패널은 답했다.

[이제 그거는 저번에 그가 한 추종자들의 테러를 막은 걸로 상당히 희석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 테러도 사상자가 안 나오기는 했고요.]

"그래!"

내가 벌떡 일어나며 큰 소리로 외치자, 옆에 있던 서은이와 수빈씨가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왜 그래요?"

"이대로 가면 안 된다. 새로운 테러를 바로 실행해야겠어!"

"응? 새로운 테러는 빌런 한 명 정도 제거하고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서은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나는 고개를 가로질렀다.

"안돼. 지금 내 이미지가 나날이 좋아지고 있어. 이래서는 안 된다고! 나는 스타더스에 대적하는 악당이 되고 싶었지, 갑자기 졸지에 히어로 취급받고 싶었던 게 아니었으니까... 아무래도 말이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께 '진짜 악당'이 무엇인지 한번 보여줘야겠다. 지금 당장!"

내가 열의에 불타 소리치자 서은이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그래... 알겠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뭐 하게요? 저번에 그 무슨 선한 사마리안 그걸로 가요?"

"아니, 다른 거로 간다. 좀 더 사악한 거로 가야겠어."

"하아... 알았어요. 새로 준비해야겠네. 일단 말해 봐요."

"그래... 계획이 뭐냐면..."

기다려 스타더스.

내가 꼭 다시 떡상시켜 줄게.

***

[속보) 에고스틱 방송켰다ㅋㅋㅋㅋ]

지금 당장 티비 켜보삼ㅋㅋㅋㅋㅋ

[추천]43 [비추천]0

ㄴ[???이왜진?]

ㄴ[??? 왜 진짜임?]

ㄴ[큰거왔다ㅋㅋㅋㅋㅋㅋ]

ㄴ[자 드가자~ 자 드가자~ 자 드가자~ 자 드가자~ 자 드가자~ 자 드가자~자 드가자~ 자 드가자~자 드가자~ 자 드가자~자 드가자~ 자 드가자~]

***

바람이 휘몰아치는 다리 위.

그곳에 홀로 선 나는, 카메라를 향해 씨익 웃었다.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겠지.

그들을 향해,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오랜만입니다 국민 여러분! 여러분의 호감 빌런, 에고스틱입니다!"

자, 다시 한번 쇼를 해보자.

이렇게 해도 과연 나를 좋아할 수 있을지, 한번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