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납치
분수에 맞지 않는 일에 엮이면 반드시 화를 당한다.
별 볼 일 없는 뒷골목의 좀도둑이었지만, 항상 눈치 빠르고 약삭빨랐던 에이든의 아버지가 항상 그에게 주입시키듯이 말하던 내용이었다.
"넌 큰일을 할 그릇은 못 된단다, 아들아."
"왜요."
"잔머리 굴려서 적당적당히 사기 치는 것 말곤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니."
"피붙이한테 하는 평가가 왜 그래요."
"분수에 맞게 살렴. 괜히 큰물에서 놀겠다고 사고 치지 말고. 우리 정도 수준에서는 딱 뒷골목의 잡범이 어울려."
"거, 아들한테 덕담 좀 하시면 안 된답니까."
"지금 하는 중이잖아."
"...그게 그렇게 되나?"
어느 순간 기점으론, 에이든 본인도 그런 말에 납득할 정도로 본인은 딱히 잘하는 게 없는 인간이긴 했다.
평균.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살아남기 위해 가끔 누군가한테 사소하고 짜증 나는 사기를 치는 것 외에는 기억하기조차 힘든 범부.
아, 물론 큰 사기는 말고. 피해자에게도 사소하고 짜증 나는 것만.
범죄자라도 지켜야 할 선은 있는 법이니.
언젠가 여동생과 나눴던 문답에서도 그런 면이 잘 드러났을 것이다.
"그래 봐야 범죄자인데 왜 체면을 차려?"
"크게 범죄 저지르면 결국 눈에 띄어서 크게 당해. 어쩌다가 피해자랑 마주치더라도 흠씬 두들겨 맞는 수준에서만 벗겨 먹어야지."
"...."
"가족들 먹여 살리고, 내 앞가림하고, 결코 원한 살 짓은 안 하는 수준에서만. 그래야 오래 산다니까?"
에이든 켈러메인의 인생은 딱 그 정도였다. 평범하고 하찮은 사기꾼.
방바닥에 머리를 좀 세게 박는 바람에 '지구'란 곳에서 살았던 전생을 각성하는 괴상한 이벤트를 거친 이후에도 그런 사실은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다.
-Status Info
< 에이든 켈러메인 >
▶ 시스템 열람 권한을 미충족하여 상태를 열람할 수 없습니다!
▶ 메인 스토리에 발휘하는 영향력이 대단히 낮습니다!
▶ 중요 인물들과 접촉하여 특수 능력을 개방하세요!
이런 글자가 적혀있는 하얗고 네모난 사각형이 자신의 눈앞에 떠오르고, 본인이 게임 속 세계에 있는 등장인물이란 걸 깨달은 뒤에도.
꼬박 며칠을 심사숙고한 뒤에 내린 결론이 다음과 같았으니.
"굳이 대단한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할까?"
메인 스토리니, 특수 능력이니. 스스로가 돋보이고 싶어 할 인간들이라면 좋아했을 문구들이다.
하지만.
대단한 일을 하면 대단한 위험에도 노출되기 쉽다. 안전하게 살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위험해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에이든은 본인의 위치에 그대로 남기로 했다.
공권력이 나설 이유조차 못 느끼는 잡범 중의 잡범. 피해자들도 원한보다는 한심함을 느끼는 수준의 범죄만 저지르는 별 볼 일 없는 사기꾼.
그리고, 그런 인생을 살다 보면.
절대 엮일 일이 없을 거라 확신이 드는 인간들도 있기 마련이다.
[-노엘 경이 개선문으로 들어오고 계십니다!]
[제국 신민들은 모두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맞이해주시길 바랍니다!]
왜, 당장 그가 보고 있는 낡은 TV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여자부터가 그러하다.
"어이구야."
그가 TV 화면을 보며 그런 탄식을 흘렸다.
개선문 안으로 말을 타고 걸어들어오는 여자의 모습은, 화면 너머로 보는 것만으로도 그런 반응을 받을 가치가 있었으니.
주변의 빛을 빨아먹는 것 같은 흑요석 같은 머리칼, 그것과 대비되는 새하얀 피부, 그리고 번쩍거린다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란한 빛이 담긴 붉은빛 눈동자.
일각에서는 제국의 주신이자 투쟁의 여신인 카르바의 현현이라고까지 불리는 인간이다.
단순히 '아름답다'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아우라마저 느껴지는 그런.
'...투쟁의 여신이라고 하면 꽤 어울리긴 하지?'
노엘 아스트리아 시머스.
제국이란 나라가 존재한 이후 최고라고 불리는 무인.
당장 가슴팍에 패용한 네 개의 사자머리 훈장이 그런 사실에 넘치도록 설득력을 부여한다.
사자심(Lionhearted) 훈장. 제국 군부에서 수여받을 수 있는 명예 훈장 중에서도 최고 훈장이다.
명예 훈장이라는 게 보통 어떤 조건을 거쳐서 수여되는지 생각해 본다면, 최고 명예 훈장을 네 개나 받았다는 건 단신으로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준의 활약을 한 인간 모양의 괴물이란 뜻이다.
주먹으로 바위를 부수고, 맨몸으로 하늘을 날 수 있으며, 무구를 쥐여주면 단신으로 요새를 돌파할 수 있다는 '기사'라는 초인 중에서도 최고봉에 앉아 있는 인간.
제국 군부에 있는 기록이란 기록은 전부 다 갈아치운,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재.
태생부터가 다르다.
에이든 본인 같은 범부라면 평생 한번 말이나 걸 수 있을까 싶은 인간.
그리고, 에이든만큼은 그런 평가에 한 줄 더 주석을 붙일 수 있었다.
'저게 주연인가.'
저 여자가, 지금 그가 속해 있는 이 세계- '판타지 게임'의 중요 인물 중 하나 되시겠다.
역경을 딛고, 게임의 '주인공'과 함께 전대미문의 위기에 처한 대륙을 구원으로 이끌 운명을 타고난 인물 중 하나.
그리고, 노엘은 그중에서도 꽤 눈에 띄는 뚜렷한 특성이 있는 인물이었다.
[노엘 경의 혼사로 사교계가 떠들썩하다는 소문이-]
[후보들의 명단만 봐도 어마어마하다는-]
그렇지. 결혼.
노엘 본인의 운명과 메인 시나리오의 전체 '축'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
[글쎄요. 누구와 결혼하시건 노엘 경의 앞날에 만신전의 축복이 있길!]
개선식을 중계하는 진행자가 던지는 멘트에, 에이든이 실소를 흘렸다.
'그렇게 축복이 가득할 것 같진 않은데.'
그가 아는 게임 내용을 생각하면, 노엘 경은 결혼과 동시에 신세가 크게 꼬이게 된다. 메인 스토리가 혼돈으로 치닫는 것도 그쯤이고.
노엘 본인도, 지금 시점에서는 그중 누구하고도 가까워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이쯤 해서는 어떻게든 혼사를 피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한다는 설정이었던가.
그리고, 사실.
그런 건 에이든에겐 아무래도 좋은 정보들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엮일 일 없는 사람들의 혼사 이야기야 호사가들이나 열심히 떠들 이야기지.
세계를 구하건, 결혼을 하건, 그건 '주연'의 일이지 그의 일이 아니니까.
그래,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일어나셨습니까."
"...?"
지금은,
"일어나셨군요."
눈앞에 있는 노엘 경이 은은한 미소와 함께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서로 얼굴의 잡티 개수를 셀 수 있을 정도밀착한 거리에서.
"...??"
에이든이 멍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명백하게 낯선 곳이었다.
적어도 자신은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의자에 팔이 묶인 상태로 잠든 기억은 없으니까.
그가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리는 사이, 상대방이 팔락거리는 서류를 클립에 끼워 넣으며 말을 이었다.
곁눈질로 살펴보니, 제국 군부의 워터마크가 찍힌 서류에는 그의 신상 정보와 '고객'들의 명단이 전부 적혀 있었다.
이미 신상이 하나부터 열까지 탈탈 털렸다는 걸 의미하는 모습이겠지.
"에이든 켈러메인. 오랫동안 일한 사기꾼이라고 들었습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노엘 경?"
"예. 노엘 아스트리아 시머스입니다. 당신에게 특별히 의뢰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아직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그에게 무감정한 목소리가 자박자박 떨어졌다.
왜 이 인간이, 어째서 자신한테, 무엇을 위해 이런 짓을.
그런 의문을 끝까지 완성시키기도 전에, 입은 반사적으로 대답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직업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언제나 상대방의 말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의뢰, 라고 하셨습니까."
"예. 사기꾼이면 누군가를 속이는 직업이잖아요. 당신은 숙련된 사기꾼이고. 저도 누군가를 속여야 하거든요."
숙련되었다- 라고 표현할 만큼 대단한 솜씨가 있는진 모르겠다. 에이든이 그렇게 자평하고 있자니.
"빙빙 돌려서 말하는 건 취향이 아니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잠시 뜸을 들인 노엘 경이.
"결혼합시다."
느닷없이.
"1년 동안만, 제 남편인 '척' 해주시겠어요?"
"...."
"제국 전체를 속여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언어로 된 폭탄을 떨어트렸다.
끔찍할 정도의 후폭풍을 동반한.
- System Message
▶ '사자심', 노엘 아스트리아 시머스와 접촉합니다.
▶ 스토리 최중요 대상입니다. 대상에게 어떤 영향을 주냐에 따라 세계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 메인 스토리에 미치는 영향력이 증가합니다.
▶ 새로운 특수 능력이 개방됩니다!
▶ 메인 스토리에 새로운 사건이 개방됩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일에 엮이면 반드시 화를 당한다.
에이든의 아버지가 늘 주문처럼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System Message
▶ 스킬 '운명의 길쌈꾼'이 개방됩니다.
▶ 대상 '노엘 아스트리아 시머스'의 스킬을 1개 복사해 올 수 있습니다.
▶ 메인 스토리의 중요 인물들과 상호 작용하여 능력을 추가로 개방하세요!
그리고, 그는 지금.
아버지에게 주입받은 인생 신조를 비껴갈, 일생일대의 대격변을 눈앞에 둔 참이었다.
2화. 납치 (2)
인생의 변화는 항상 예고 없이, 격렬하게 찾아온다고들 한다.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의 변화가 하루아침에 찾아오는 건 조금 너무하긴 할 것이다.
남편인 '척'을 해달라는 부탁에 거절할 권한 따위는 없다는 듯이, 당장 '오늘부터 함께 지내자'며 끌려온 게 바로 오늘이다.
따라오지 않으면 수집한 범죄 증거를 경찰에 넘기겠다는 은은한 협박과 함께.
이런저런 반항이나 탈출 시도는 노엘 경의 철벽과도 같은 은은한 미소에 전부 격침되었으며, 그나마 가족한테 다녀올 곳이 있다는 편지 한 장 정도는 남기게 해준 것이 마지막 배려일 것이다....
"오늘부터 이쪽 방을 쓰시면 됩니다."
그 안에서, 에이든의 안내역으로 배치된 여기사가 은빛 갑주를 절그럭거리며 사무적인 어투로 말을 이었다.
스텔라 경, 이라고 들었다. 노엘 경의 최측근이라고 하던가.
에이든이 강제로 체결한 위장 결혼에 대해서 노엘 경과 더불어 유이하게 알고 있는 인물.
"당번병을 배치해 드릴 테니, 필요하신 건 그쪽으로 전달해 주시면 조속히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예."
"머지 않아 황궁에 입궁하길 겁니다. 모쪼록 잘 준비해 주시길."
멍한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문장이 뒤죽박죽 뒤엉키고 있었지만, 그래도 질문할 것 한 가지 정도는 어떻게든 포착할 수 있었다.
"...황궁이요?"
"노엘 경은 제국 군부를 상징하는 국가적 영웅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그 혼담에 대해서는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계시니, 한 번 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거 꼭 해야 하는-"
스텔라 경의 표정을 본 에이든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면, 순순히 안 하게 해줄 것이었으면 애당초 자신의 의견 하나 물어보지 않고 여기까지 끌고 오진 않았겠지.
대신, 그는 조금 다른 의문을 입에 담기로 했다.
"그런 대단한 일을 나한테 맡겨도 괜찮은 건가요?"
애초에 이 위장 결혼이라는 정신 나간 사기극을, 고작해야 자신한테 부탁해도 되냐는 의문까지 같이 담긴 질문이다.
"노엘 경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괜찮지 않을 리가 없잖습니까."
"...."
"노엘 경은 한 번도 그릇된 결정을 내리신 적이 없습니다."
맹목적일 정도의 신뢰가 느껴지는 말에, 에이든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노엘 경의 의견에 의문을 품은 자신을 질책하는 것 같은 기색이다.
이어지는 감상도 자연스러웠다.
'미친 사람인가?'
광인의 자질이 느껴진다.
노엘 경이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하면, 다음 날 아침 동쪽에서 뜨는 해에게 왜 서쪽에서 안 뜨냐고 화를 낼 것 같은 그런 자질이.
"그럼, 모쪼록 편히 쉬시길."
그런 말과 함께 스텔라 경이 방을 닫고 나가자, 이내 에이든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다 갑작스러웠지만, 일단 상황 정리부터.
의자에 앉아 허공을 노려보니, 언제나 그의 생각에 반응하여 떠오르는 창 하나가 곧바로 눈앞에 열렸다.
-Skill Info
◈ 운명의 길쌈꾼
오직 당신만이 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메인 스토리의 중요 인물들과 유대를 쌓음으로써 새로운 보상을 얻으세요!
[ 노엘 아스트리아 시머스 ]
- 유대: 1단계
- 1개의 스킬을 복사할 수 있습니다.
어이가 없다.
운명의 길쌈꾼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이름은 차치하고서라도.
'노엘 경과 유대 1단계?'
남편인 척해달라면서 이쪽을 납치한 인간과 강제로 끌려온 인질 사이에 유대는 무슨 얼어 죽을 유대란 말인가?
스톡홀름 신드롬을 꽃 피우고 싶어도 그런 게 일어날 만한 최소한의 교류도 없었던 사이다. 대화도 몇 마디 나눠본 게 전부고.
그나마, 그런 괴상한 단어 아래에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스킬 복사라는 건....'
이건 노엘 경의 능력 중 하나를 똑같이 흉내 낼 수 있다는 걸 의미할 것이다.
노엘 경이 이 세계에서 가지는 위상을 생각했을 때, 당장 그런 게 있다는 사실 자체는 꽤 큰 도움이 되겠지.
왜냐하면.
-Quest Info
▶ 해당 항목에 표기된 사건들은 실패 시 막대한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 위장 결혼
- 당신은 노엘 경의 배우자로 간택되었습니다. 상대방과의 계약을 끝까지 유지하세요!
- 추가적인 정보는 메인 스토리와 관련된 사건이 다가오면 갱신됩니다!
에이든이 가늘게 뜬 눈으로 그 창들을 노려보았다.
위장 결혼이라는 내용만 봐도 속이 쓰리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아래 붙어 있는 내용이다.
메인 스토리라는 게 무엇인가.
세계를 위협하는 악의 무리와 싸우는 장렬한 전투.
전란의 위기를 잔뜩 품고 있는 대륙에서 소용돌이치는 온갖 군웅들의 간계와 음모의 도가니.
대단한 사람들의 대단한 이야기.
그렇다는 건, 즉.
'얽히면 죽겠지.'
문제는, 좋건 싫건 자신은 이미 거기에 엮여버렸다는 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정확히는, 어떻게 해야 전부 다 집어치우고 지금이라도 도망칠 수 있을까.
에이든이 그렇게 고민하고 있자니, 문득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그의 귓전을 두들겼다.
아까 스텔라 경이 당번병을 배치해 준다고 했었으니, 아마 그쪽이겠지.
곧바로 에이든이 몸가짐을 정갈하게 단정하며 표정을 관리했다.
아무튼, 당장 여기에 끌려와 있는 동안은 노엘 경의 배우자를 연기해야 한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쾅-!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인간이 싸늘하게 읊조렸다.
"나는 노엘 경의 오랜 친우이자 오스론 후작가의 후계자, 게일 오스론이다. 검을 뽑아라."
"...."
지금 얘가 뭐라는 건가.
아무리 봐도 당번병이 말할 내용은 아니었고, 실제로 방 안으로 들어온 놈도 당번병의 모습은 아니었다.
검에 갑주까지 잘 착용하고 온 모습은 어딜 봐도 전투를 상정하고 온 인간의 모습이다.
그것도, 상대에게 숨길 생각도 없는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에이든이 부들부들 떨리려는 볼살을 간신히 붙들어두며 말을 이었다.
"미안한데, 무슨 뜻인지 잘-"
"노엘 경의 혼약자라고 들었다. 실력 좀 보고 싶군."
"...왜?"
아니, 진짜로.
왜?
노엘 경 근처에는 이런 사람들밖에 안 모여 있나?
"난 노엘 경에게 너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오늘 갑작스럽게 혼약이 결정되었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그렇게 말한 게일 오스론이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친우가 배우자로 받아들일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는, 내가 직접 시험해 보지 않고서는 안심할 수 없다. 그리고 검을 부딪쳐 보면 그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있지. 덤벼라."
"...."
에이든은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노엘 경 근처에는 정말 미친 사람이 많다는 것.
진짜로 검을 뽑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기사의 모습에, 에이든의 시선이 다급하게 시스템 창 쪽으로 돌아갔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진짜로 칼침에 맞을 수도 있다. 뭐라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System Message
▶ '스킬: 운명의 길쌈꾼'의 스킬 복사 능력을 사용합니다.
▶대상 '노엘 아스트리아 시머스'의 스킬 목록을 분석합니다.
▶가장 가치가 높은 스킬을 최상단부터 표시합-
보지도 않고 가장 최상단의 것을 고른다. 뭐라도 좋으니 당장 여기서 벗어날 게 필요하니까!
-System Message
▶ '고유 능력: 순백의 심장'을 복사합니다.
▶ 전 세계에서 오직 해당 인물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 대상 '노엘'이 당신에게 가지는 관심도가 증가할 수 있습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문구가 시야에 스쳐 지나갔지만,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건 분명했다.
"선공은 이쪽에서 간다."
"...."
기사도는 어디에다가 팔아치웠는지 모르겠다.
하다못해 선공 정도는 양보해야 하는 것 아닌가.
"똑바로 서서, 실력을 보여라!"
그런 말과 함께, 자신에게 내려꽂히는 칼날의 모습에, 에이든이 눈을 질끈 감았다.
▣
"상태는 어때 보여?"
부드러운 목소리로 떨어지는 질문에, 스텔라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억눌렀다.
경애하는 노엘 경의 앞에서 그런 결례를 저지를 순 없었으니까.
"잔뜩 겁에 질려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끌려 들어왔다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비 맞고 축 늘어진 강아지 같달까요."
퉁명스러운 목소리의 연속에, 노엘 경의 입에서 참지 못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지간히도 웃겼는지, 가벼운 차림으로 휘두르던 목검도 잠시 바닥에 내려놓을 정도였다.
"그게 당연한 거야, 스텔라. 오히려 이 상황에 금방 적응했으면 내가 더 당황했을걸?"
"...."
노엘 아스트리아 시머스- 또는 사자심(獅子心)이란 이명으로 불리는 기사의 군부 내 위치는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스텔라 본인도 그런 분위기를 주도하는 인간이기도 했지만, 저런 태도를 본다면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해."
"왜 하필이면, 그 남자입니까."
땀을 닦던 노엘 경의 붉은색 눈동자가 천천히 스텔라 쪽으로 돌아왔다.
아무런 감정도, 의도도 담기지 않은 눈동자였지만, 스텔라는 그 투명한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일순 틀어막히려는 숨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그저 같은 공간에 자리하는 게 전부인데도 느껴지는 존재감의 격이 다르다.
마치.
이 세계 전부가 저 여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설계된 것 같은.
그러니, 이어지는 목소리가 살짝 목이 메인 것은 불가항력이었을 것이다.
"...혼담이라면 다른 후보들도 많았잖습니까. 누굴 골라도 저 남자보다는 나았을-"
"농담도."
하지만, 그런 의문이 이어지기도 전에, 노엘이 단호한 목소리로 스텔라의 문장을 중간에 잘랐다.
"지금 상황에선 내가 누구랑 결혼해도 시끄러워져. 스텔라도 모르진 않을 거 아니야?"
분명히, 그렇다.
대륙 전체를 전란의 구덩이에 수십 년간 빠트린 연합 전쟁이 끝난 게 바로 1년 전이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 바로 아래 가는 위신을 가지고 있는 국가의 영웅이 어느 한쪽의 세력과 결합하는 건,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평화를 깨트릴 나비 효과로 이어질 확률이 대단히 높으니.
"그럼 차라리 모두를 내치시면 되는 일 아닙니까."
"다른 곳은 다 그렇다 치는데. 황자님이 직접 들이받는 건 나도 좀 힘들어서."
스텔라도 이 부분에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노엘 경이 제국 역사에 이름을 새겨넣은 기사라고 해도, 결국은 제국 군부 소속의 군인이다. 직계 황족이 나서서 혼담을 밀어 넣는 건 상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다.
물망에 오른 황자라는 인간의 소문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래. 그런 식의 결혼은 나도 싫다고. 그러니, 대체재가 그거."
안색이 창백해진 스텔라에게, 노엘이 낄낄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런 정치적 배경도 없이, 어디선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 제삼자. 서로 마음이 맞아서 결혼했다고 하면 황자 저하도 끝까지 꼬투리 잡진 못하실 것 아니야?"
"...그런 분류 안에서 찾더라도 저 에이든이란 남자의 대체재는 넘치도록 많았을 겁니다."
스텔라가 여전히 딱딱한 목소리로 꺼내놓은 말에, 노엘의 고개가 삐뚜름하게 돌아갔다.
"스텔라는, 그 남자 자료 조회 같은 건 안 해봤어?"
"특별한 점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뒷골목의 사기꾼. 굵직굵직한 건수에 하나 얽힌 적 없는 밑바닥 범죄자.
얼마나 특별한 점 하나 없는 잡범이면 공권력에게 체포당한 기록조차 하나 없을까.
그럴 가치조차 못 느꼈던 것이리라.
"그래. 그게 중요한 건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스텔라에게, 노엘 경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떨어졌다.
"어떻게 그 '특별한 점'을 전부 다 피해 갔을까?"
"예?"
멍하니 반문하는 스텔라의 모습에, 노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 신기할 정도로 평범하다고. 직업인데."
사기꾼이라는, 그렇게나 눈에 띄기 쉬운 일을 생업으로 삼은 주제에.
체포당하기는커녕 공권력에 조사당한 적조차 없다.
말 그대로 철저하게 잡범이다.
그래, 철저하게.
어떻게 보면 작위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음- 그런 게 있어. 곧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
그렇게 말한 노엘 경이 다시금 목검을 곧추세웠다.
"그냥, 좀 흥미로워 보이는 사람인 건 확실해서."
"...."
에이든이라는 남자를 떠올렸을 때, 스텔라 기준에서는 이것도 의문스러울 정도의 고평가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이내 곧바로 그녀의 성대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목검을 잡은 노엘 경의 몸을 타고 기(氣)가 순환하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기氣. 제국의 주신이자 투쟁의 여신인 카르바가 그녀의 신민들에게 내린 은총.
제국 기사들이 다루는 초인적인 힘의 근간은 체내의 에너지를 연공법으로 갈고 닦아 체외로 방출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숙련의 척도는 기의 색깔.
유명한 일례로는, 기를 사용한 투로와 투법을 최초로 개발한 '여명의 기사'가 있을 것이다.
최초의 기사. 검 한 자루만 잡는다면 산을 가르고 하늘을 쪼갤 수 있었다는 괴물. '검의 성인'으로 칭송받는 위인.
체내에서 피어오르는 기를 은색과 푸른색, 단 두 개로만 압축시킬 수 있었다는 인간.
그리고, 지금 여기에.
그런 전설조차 구시대의 유물로 만들어 버리는 천재가 있다.
"-"
노엘이 깊은 날숨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그 몸을 타고 연무처럼 기가 피어올랐다.
'순백.'
스텔라가 저도 마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노엘이 다루는 기는,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것이다.
누구보다도 정순하고, 누구보다도 단순하고, 누구보다도 뚜렷한.
제국의 모든 유구한 역사를 통틀어,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많았던 그 수많은 인재들 중에서도.
기를 한 가지 색깔로만 압축한 기사는 노엘 경이 유일하다.
"-노엘 경. 노엘 경!"
그리고 그런 경이적인 광경에 끼어드는 병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스텔라의 얼굴이 가열차게 찌푸려졌다.
이런 장엄하기까지 한 장면을 방해하다니, 하찮은 용건이라면 용서하지 않-
"오스론 후작가의 장남이 지금 혼약자분의 처소로 들어가셨습니다-!"
-을 수가 없을 만큼 긴급한 사안이긴 했다.
스텔라와 노엘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게일 오스론. 노엘 경의 오랜 친구.
나쁜 사람은 아니다. 나쁜 사람은 아닌데.
"그 뇌까지 근육인 녀석이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스텔라. 말이 너무 과격해."
쓴웃음을 지으며 말리는 노엘 경도 그 내용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 모습이다.
재빠르게 외투를 걸치는 모습만 봐도, 사고를 칠 게 분명하니 자신이 직접 끼어들어야겠다는 결심히 보였으니까.
게일의 성격을 생각하면 또 인간성을 시험해 보겠다며 다짜고짜 검부터 들이밀었을 거고, 그건 생각보다 꽤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가 정식으로 서임 받은 기사 수준의 엘리트는 아니지만, 그래도 후작가의 장남으로서 오랫동안 전투 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은 남자니까.
일반 병사 사이에 던져놓으면 양들 사이에 떨어진 사자 꼴이 되어버릴 인간이지.
'-빨리 안 가면 진짜 무슨 사달이 나겠는데?'
하물며, 에이든의 예상되는 스펙은 그 일반 병사보다도 아래다. 진짜로 무슨 일이 터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노엘이 심호흡을 하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당장에 에이든이 있는 쪽으로 도약하여 한달음에 도달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아마 창문은 좀 깨 먹으면서 들어가겠지만, 뭐 어떻게 하겠는가. 한시가 급한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쨍그랑!
"아아아아악-!"
그녀가 깨 먹으면서 들어가려고 한 창문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며 자유 낙하하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전신의 갑주가 마치 거인의 주먹으로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우그러진 모습이다.
"...."
저거.
게일 아닌가?
완전무장한 모습만 봐도, 그녀가 알고 있는 그 남자가 맞다.
그리고, 그 남자가 떨어지면서 깨고 나온 창문 쪽으로, 누군가가 급하게 몸을 내미는 모습까지 이어서 눈에 들어왔다.
"야, 야! 괜찮아?!"
깨진 창문 바깥으로 새어 나오는 건,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에이든 켈러메인.
"...?"
그리고 그 몸에 휘감겨 있는 것은, 새하얀 기.
노엘 본인이 방금 전까지 다루던 순백의 기와, 완전하게 동일한.
"...어?"
틀림없이.
노엘 경조차 얼빠진 목소리를 흘릴 만한 모습이었다.
3화. 너무하네
기사의 갑옷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특상품이다.
장비라는 건 사용자에게 맞춰지는 물건이고, 제국 내에서도 내로라하는 엘리트인 기사들에게 평범한 장비는 의미가 없을 테니.
"그런데 그게 이 꼴입니다."
완전히 찌그러진 갑주를 가리키며 노엘이 꺼내는 말에, 에이든의 등가가 빠르게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딱히 전투에 큰 소질이 없는 이라고 해도, 지금 노엘이 뿜어내고 있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테니까.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무슨 의미죠?"
"방어구가 없었다면 게일은 즉사했을 거란 소리입니다. 당신이 자세조차 제대로 잡지 않고 엉망으로 날린 권격 한 방에."
노엘이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게일 정도면 일반 전투원 중에서는 군계일학인데 말이죠."
"...."
"서임 받은 기사도 그런 어처구니없는 공격 한 방으로 이런 결과를 낼 수는 없을 겁니다."
칭찬 좀 그만해 줬으면 좋겠다.
입이 버쩍버쩍 마르니까.
"생각해 보면 같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딱 한 명 떠오르긴 합니다만."
"...그렇습니까?"
"네."
노엘 경이 얼굴에 걸고 있는 미소가 조금 더 큼지막해지고, 이내 그 입술이 다시 열렸다.
"접니다."
"...."
"당신이 방금 몸에서 뽑아낸 새하얀 기는 모든 기 중에서도 가장 정순한 것이니까요. 출력만으로도 그런 일이 가능하겠죠."
"그게-"
에이든이 말꼬리를 흐렸다.
솔직히, 뭐라고 설명하기 곤란한 장면이긴 했으니까.
천재라고 불리는 자라 해도 간신히 동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집단이 기사고, 그중에서도 정점에 선 이가 평생을 갈고닦은 능력이 바로, 이 순백의 기다.
그러니, 지금 이 여자는 돌려서 묻고 있는 거다.
자신이 쌓아 올린 기술의 정수를, 너 따위가 대체 어떻게 다루고 있느냐?
"설명해 보세요, 에이든 켈러메인."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에이든의 등 뒤가 축축해지는 속도는 더욱 가속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노엘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으니까.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입니까?"
목이 턱턱 메이는 감각을 애써 억누르며, 에이든이 간신히 말을 받았다.
"제 기록, 보시지 않았습니까. 저 진짜 아무것도 없는-"
"그 면피용 기록 말씀이십니까. 예. 보긴 했죠. 보기는."
툭툭-
느릿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노엘이 제 팔을 두들겼다.
"...예?"
면피용 기록이라니, 이건 또 대체 무슨 소리인가.
에이든이 멍하니 눈을 꿈뻑거리고 있자니, 노엘이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왜 굳이 당신을 데려왔다고 생각하세요?"
왜 이쪽이 그런 걸 알 거라 생각하면서 물어보는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그게 제일 궁금한 건 에이든 본인인데.
다행히, 노엘은 딱히 설명에 뜸을 들이는 타입은 아니었다.
"정체를 제대로 숨기고 싶으셨으면 적어도 한 번 정도는 흠결을 남기셨어야죠. 장난도 적당히 치셔야 믿어드리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에이든 씨. 아무리 거물 범죄자라도 한 번은 검거당합니다. 아무리 운이 좋고, 실력이 좋아도 필연적으로 한 번은 미끄러지게 되어 있거든요. 세상만사 전부 꿰뚫고 있는 현인이라고 해도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는 게 인생이니까. 그런데-"
노엘의 눈빛이 더욱더 가라앉았다.
"여기, 평범하고 하찮은 사기꾼이라 주장하는 사람은 10년이 넘도록 체포는커녕, 조사 한번 안 받았군요."
"...."
"겪어오신 경력을 보면, 큰 건수에 얽힌 것들은 전부 피해서 지내셨고. 조금이라도 위험해질 것 같으면 전부 다 미리 발을 빼셨던데요?"
"...."
"이건 솔직히 위험한 일을 전부 '알고' 피해 다녔다는 소리밖에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에이든의 입이 슬쩍 벌어졌다.
'...그건 그렇긴 한데.'
실제로 법의 테두리 바깥에서 일을 하다 보면 어떻게든 큰 사건에 얽히게 되는 건 당연지사다.
실제로 그도 어떻게든 위험한 일에 엮이지 않으려 있는 힘껏 피해 다니기도 했고.
물론 원작의 지식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요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위험한 일에 엮이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도망다닌 게 에이든을 고평가할 이유가 되진 않을 테지만.
"그래서 당신을 데려온 겁니다."
...이 사람은 전혀 다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게 문제다.
"어차피 이 위장 결혼의 남편역은 누구를 앉혀놔도 소화하기 힘들 게 분명하거든요. 적어도 제가 아는 사람 중엔 없어요."
노엘이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부연했다.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건, 역량의 끝을 아무도 모른다는 이야기예요. 천장이 안 보인단 얘기죠. 그래서 반쯤 복권 긁는 심정으로 데려왔습니다만."
아니, 알겠다.
일리는 있는데.
그 기록이란 것들의 실체는, 그저 어떻게든 눈에 띄지 않고 메인 스토리에 얽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친 결과물일 뿐이다.
설마 그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지.
꿈보다 해몽에도 정도가 있다.
에이든이 그걸 어떻게든 납득시키기 위해 다시 입을 열려고 했다.
아무튼, 혀를 굴리는 직업의 경력은 꽤 쌓았으니까. 어떻게든 그럴듯한 설명을 자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당첨된 기분이네요. 다루시는 능력을 보니까."
"...."
...이것만 아니었다면.
그가 주장하는 이력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장면을 보이고 말았으니까.
에이든의 입이 곧바로 꽉 닫힌 조개처럼 다물렸다.
"에이든 씨. 저는 되도록 평화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싶습니다. 당신이 기대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오히려 제 쪽에선 좋은 이야기예요."
여태 은은하게 깔려 있던 노엘의 눈동자가 곧바로 올라와 에이든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것만으로도 압도당한다.
시선에 물리력이란 게 존재한다면,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베일 것 같다는 느낌.
"하지만, 적어도 방금 보인 장면에 대한 것만큼은 해명을 받고 싶네요. 그 순백의 기는-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사연이 조금 많이 얽혀 있거든요."
"...."
어... 음, 그래 보이긴 한다.
- Skill Info
◈ 운명의 길쌈꾼
.
.
.
< 복사된 스킬 >
[ 노엘 아스트리아 시머스 ]
◆ 순백의 심장
※고유 – 해당 캐릭터만 보유하고 있습니다!
모든 기 연공법 중에서 최고의 효율을 가지고 있으며, 숙련을 위해서는 대단한 수준의 노력과 감각을 요구합니다. 노엘 경의 스승에게 일자 전승된 연공법을 극한까지 갈고닦아 가지게 된 기의 특성입니다.
에이든 본인이라도 일자 전승된 연공법을 느닷없이 다른 사람이 쓰고 있으면 이게 대체 뭔가 싶을 것이다.
심정이야 십분 이해하지.
"그러니, 빨리 말씀해 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안 그러면 검을 뽑을 수밖에 없으니까."
정정하자.
죽어도 이해 못 하겠다.
"...결론이 왜 그렇습니까?"
"게일의 사고방식이 항상 맞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이 쌓아 올린 투로(鬪路)만큼은 검을 부딪쳐 보면 확실히 알 수 있거든요. 당신이 어떻게 그걸 익혔는지는 그 정도만 해도 얼추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노엘이 허리춤의 검을 만지작거리는 걸 보자마자, 안 그래도 축축하던 에이든의 뒷덜미가 아예 싸늘하게 식었다.
얼굴이야 여전히 웃고 있지만, 행간에 녹아있는 기색만큼은 틀림없이 진심이다.
이 여자, 납득가는 설명을 못 들으면 진짜로 검을 꺼내서 벨 생각이다.
"...."
아니, 근데.
무슨 설명을 어떻게 하나.
자신이 게임에 빙의한 사람이고, 그 특전으로 어떻게든 스킬을 복사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소리를 어떻게 설명하라고?
"계속 입을 다물고 계신다는 건, 찬성하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뭐라도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진짜 죽을 수도.
그리고, 그런 생각을 되뇌자, 에이든의 머릿속에서 찰칵- 하고 버튼이 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고객'을 대할 때면 늘 울려 퍼지는 소리다. 업무 상태에 들어서는 느낌으로.
평범한 사기꾼이라는 자신의 신원을 납득시키는 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깔끔하게 포기하자.
이 자리에서 노엘을 납득시킬 설명을 떠올릴 수도 없고.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속여야지.'
애초에 그의 업이 그것 아니던가. 살아남기 위해 속이는 것.
에이든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 도움이 될만한 '원작' 지식이 머릿속으로 마구마구 쏟아져 내린다.
사기꾼의 근본은 남을 속이는 것이고, 남을 속이는 것의 근본은 감정의 움직임을 이끌어 내는 것에서 나온다.
그러니.
노엘 아스트리아 시머스라는 인간의 정보를 종합했을 때, 지금 이 인간이 가장 동요할 키워드를 샅샅이 털어낸다.
그 끄트머리에서 튀어나온 건.
"아무래도-"
에이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성보다는 본능 수준에서 조립된 문장이었다.
"예전 기억은 못 하시는 모양이네요?"
"예?"
"어렸을 때라든가."
그런 말을, 넌지시 툭 내뱉는다.
쓸쓸하다는 듯이, 섭섭하다는 듯이. 그런 감정을 미묘하게 연기하며.
본인 스스로도 이게 대체 뭔 소린가 싶은 심정이다.
기억 못 하는 게 당연하지. 애초에 그는 이 사람과 만난 적도 없으니까.
하지만, 에이든이 그렇게 꺼내든 말을 듣자마자.
"-"
노엘의 몸짓이 그대로 멈췄다.
그녀의 눈빛이 순간 점멸한다. 그 표정도 일순 비틀리며 깨진다.
곧바로 평소의 모습 그대로 돌아오긴 했지만.
찰나의.
찰나의 끄트머리에 아주 잠깐 머무른 빈틈이지만, 에이든의 눈은 그걸 정확하게 잡아냈다.
이 사람.
게임 안의 정보를 생각하면, 어떤 '사건'의 영향으로 어릴 적의 기억이 일부 날아간 상태다.
무슨 사건인지는 모른다. 게임 안에서 거기까지 다루진 않았으니까.
'중요한 건...!'
이 사람은 진짜로 기억을 잃었고, 추가로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을 거란 점이다. 그럴 이유도 없었을 거고.
그러니.
노엘 본인만이 알고 있을 정보 안에 자신의 존재를 끼워 넣을 수만 있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정말로 당사자가 아니면 모를 정보를 아는 것만으로도, 이야기의 신뢰도를 대폭 올릴 수 있으니.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에이든 씨?"
그리고, 이렇게 동요를 감추는 문장이 돌아왔다는 건 이 말도 안 되는 변명이 그럭저럭 먹혔다는 뜻이다.
본인의 비밀을 자극당한 것이니 당연한 반응이겠지.
아마 머릿속으로는 에이든의 정체에 대해서 온갖 가설이 휘몰아치고 있을 것이다. 그것 자체만으로도 지금 그에게 있어선 훌륭한 방패막이가 된다.
아무튼, 지금 이 자리에서는 살아 나가야 할 것 아닌가.
그러니, 남은 건.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설마 진짜로 잊으셨을 줄은 몰랐는데."
그쪽이 먼저 알아채지 않으면, 얘기해도 의미가 없다는 듯이 대답을 흐릴 뿐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노엘 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젠 동요를 감출 수도 없는 얼굴이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노엘 경."
즉.
적당히 있어 보이는 척 말하고 튀기에 최적의 타이밍이란 소리다.
에이든의 우수에 가득 찬 목소리가 이어서 떨어졌다.
"...다음에 뵐 때는, 조금 다르게 인사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이게 무슨 의미일지, 노엘은 결코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몰라...!'
에이든 본인도 이게 당최 뭔 개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누가 보아도 재빠르게 방 안에서 내빼기에는 확실한 순간이었다.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노엘 경의 시선을 느끼며, 에이든이 성큼성큼 방을 벗어났다.
▣
그게 바로 어제의 일이다.
취직 하루 만에 몰아친 질풍노도와 같은 시기에 에이든이 녹초가 되어버린 사건의 연속이다. 지금은 그의 개인실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는 상태고.
- Skill Info
◈ 운명의 길쌈꾼
오직 당신만이 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메인 스토리의 중요 인물들과 유대를 쌓음으로써 새로운 보상을 얻으세요!
[ 노엘 아스트리아 시머스 ]
- 유대: 2단계
- 1개의 스킬을 추가로 복사할 수 있습니다.
< 복사된 스킬 >
◆ 순백의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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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이다.
아무렴, 좋은 일이다.
어제 그가 했던 일이 너무 잘 먹히는 바람에 공짜 스킬 복사권까지 굴러떨어진 셈이니까. 어떻게 봐도 손해랄 건 없다.
◈ 위장 결혼
- 당신은 노엘 경의 배우자로 간택되었습니다. 상대방과의 계약을 끝까지 유지하세요!
- 관련 사건이 곧 발생합니다.
...이것만 빼면 말이지.
'관련 사건은 또 뭐람.'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런 창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봐도 좋은 예감이 드는 단어는 아니다. 분명히 또 일신상의 위험이 닥칠 것 같은 느낌.
'...능력을 더 모아야 하나.'
솔직히 먼저 싸움에 휘말리는 건 사양이지만, 이런 식으로 대놓고 너한테 곧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말해줄 정도면 가만히 앉아있는 건 멍청한 짓일 것이다.
'그런데, 누구한테서?'
노엘 경한테 가서 또 스킬을 가져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바로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지금은 가서 얼굴을 마주치기도 어색한 상황이니까.
적당한 후보가 없으려나. 그런 생각을 이어가고 있자니.
뭔가 주변이 대단히 부산스럽다.
"다니엘 저하께서 곧 도착하십니다!"
"다들 정리 마무리하시고, 자리 비우세요! 괜히 눈에 띄지 말고!"
때아닌 소란스러움에 복도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보니, 뭔가 지체 높으신 분이 방문하는 모양이다.
제도 사령부는 제국군의 중추 신경부라고 할 수 있는 곳이고, 온갖 사람들이 다 오는 곳이지만. 그럼에도 한 나라의 왕족이라면 쉬이 보기 어려운 수준의 신분의 귀빈인 건 분명하다.
왕자가 위풍당당하게 복도를 걸어가자, 근처를 지나가던 제도 사령부 직원들이 길을 휙휙 터주는 게 눈에 띌 정도다.
그걸 보고 있는 에이든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성황국의 왕족이라면....'
에이든이 머릿속으로 게임 속 설정을 뒤적거렸다.
제국의 인원들이 다루는 이능은 카르바의 권능을 받은 기(氣)이고, 성황국의 인원들이 다루는 이능은 정화의 신 시어의 권능을 다루는 신성(神性)이다.
그리고 그걸 가장 잘 다루는 인원들은 그 왕족들이고. 말하자면 신성에 근원에 가까운 이들이니까.
'...시도는 좀 해볼까.'
인연 관계를 올리면 스킬이 복사된다면, 저런 사람과 안면을 틔운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 않을까.
좋게 인연이 맺어지면 그걸로 좋고, 아니면 말고.
노엘 경의 배우자라는 타이틀이 달려있으니 잠시 인사하고 대화 나누는 게 그리 심한 결례는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한 그가 복도로 가슴을 쭉 펴고 걸어가는 왕자를 포착했다. 자연스럽게, 그쪽을 맞이하듯이 그 앞에 마주친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하. 저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내밀자마자.
짝- 소리와 함께 그의 손이 거칠게 뿌리쳐졌다.
마치 자신에게 접근하려던 바퀴벌레라도 본 것 같은 역겨움이 섞인 목소리가 이어서 떨어졌다.
"치워라. 천한 것 같으니."
"...."
...세상살이 참 험난하다.
에이든이 새삼 그런 감상을 곱씹으며 자신의 손을 후려갈긴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뺀질거리게 생긴 젊은 남자다. 얼굴 근육 하나하나에 오만과 권위가 가득 찬 느낌.
'...아까 전에 사람들이 어떻게든 이 사람 오기 전에 달아나던 이유가.'
이런 성질머리라면 그런 반응이 나올 법도 하다.
"왕족에게는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하는 법이다. 그런 것도 모르는 무지렁이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
그거, 사장돼도 한참 전에 사장된 문화 아니던가.
요즘 시대에 이런 걸 요구하면 왕족이라도 매장당하는 게 기본인 시대인데.
"난 크레이븐 성황국의 제7 왕자다. 이름은-"
뺀질이.
딱히 본명을 기억할 필요도 없다. 이 녀석은 그냥 뺀질이다.
에이든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방금 들은 문장을 머릿속에서 가위질하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이어진 말만 봐도 꽤 잘한 일이 분명했다.
"-그리고 시정잡배 같은 행동거지를 보니, 네놈의 혈통은 물을 필요도 없겠군."
"...."
세상에.
몇 초 만에 그 인성의 결을 드러내는 언행을 보고 있자니, 에이든의 관자놀이가 폭발하듯이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저하. 이 자를 너무 가벼이 대하시는 건 다시 고려해 보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옆에 서 있던, 갑주를 전부 갖춰 입은 호위가 그를 만류하려는 듯 옆에 섰다.
물론 곧바로 뺀질이 왕자의 표정이 꾸깃꾸깃 해졌지만.
"조용히 해라. 누가 끼어들라고 했지?"
"하지만 상대는-"
옆쪽에 서 있는 호위가 조용히 소곤거리는 말을 듣자, 뺀질이의 얼굴에 삐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아."
마치,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들어 어이가 없다는 비웃음이다.
"이번에 데려왔다는? 그 사자심의?"
"예, 저하."
호위가 답하는 말에, 뺀질이의 재수 없는 눈길이 에이든을 위아래로 한 차례 훑었다.
"이런 녀석이?"
"...."
"내 요청은 들은 척도 안 하더니, 배우자랍시고 이런 놈을 골랐다고?"
...말하는 걸 들어보니.
이쪽은 노엘 경의 배우자 자리에 원래도 지대한 관심이 있던 인간임이 분명했다.
어렴풋한 깨달음은 그제야 찾아들었다.
◈ 위장 결혼
- 당신은 노엘 경의 배우자로 간택되었습니다. 상대방과의 계약을 끝까지 유지하세요!
- 관련 사건이 곧 발생합니다.
"...."
여기 적힌 관련 사건이란 거.
다름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망나니 왕족과 관련되어 굴러가는 것 아닌가.
본인은 그걸 대비하기 위해서 나오다가 거기에 정통으로 머리를 들이민 것이고.
'아.'
에이든 켈러메인.
취직 2일 차.
1일 차에는 배우자의 친우라는 사람이 칼을 뽑고 달려들더니, 2일 차에는 타국의 왕족과 시비에 걸렸다.
'아.'
그런 탄식 말고는 뱉을 게 없었다.
4화. 역린
크레이븐 성황국에서 왕족이 가지는 의미는 조금 특별하다.
물론 대륙에서 손꼽히게 강대한 성황국의 왕족이라는 건 그것 자체로도 특별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조금 남다르다.
"레스터. 가서 망보고 있어."
어느 정도로 특별하냐면, 왕국 내 최고 전력 중 하나인 팔라딘에게 이런 시답잖은 심부름을 시켜도 별다른 불만을 사지 않을 수 있단 소리다.
"...."
왕족의 호위를 맡는다는 건 일반적으로 대단히 고귀한 임무지만, 이런 머저리가 대상이라면 한 번은 재고해야 할 명제일 것이다.
제7 왕자. 다니엘 크레이븐.
성황국 왕족 최고의 골칫거리로 꼽히는 탕아.
'이전부터 사자심을 가지고 싶다느니 뭐니 하더만....'
아마 대륙에서 힘깨나 쓴다는 유력자들도 꽤 탐내고 있을 것이 사자심의 신랑 자리다.
그런데도 다니엘은 언감생심이란 말을 뇌에 쑤셔 박아주고 싶을 정도로, 이전부터 제국 최고의 보물이라는 기사에게 추한 욕망을 드러내던 놈이고.
이번에 그녀가 데리고 왔다는 약혼자가 척 봐도 단련된 인간은 아니니 화풀이라도 하려는 게 분명하다.
"저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사자심의 약혼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귀빈이다.
그런 인간에게 수작질을 부리는 건 양국의 외교 문제로까지 번질 수 있는 사안일 것이다.
물론, 다니엘은 그런 현실적인 문제에 신경 쓸 인간은 아닌 게 분명했다.
"네가 다루는 신성(神性)은 누구에게 서원을 바쳐서 나온 것이지?"
다니엘이 사납게 쏘아붙인 문장에 레스터의 입이 다물렸다.
그래. 이게 문제다.
모든 국가의 전투원들은 각기 다른 이능(異能)을 다루며, 그것들은 모두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다.
그리고 그런 모든 이능의 원천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각국의 주신이 내린 은총.
모든 이능은 만신전의 신들이 하계에 내린 그들의 권능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문제는 성황국은 그런 신들의 권능 대다수가 왕족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금 레스터 본인이 다루는 이능조차 이 망나니 왕자에게서 '빌려 쓰는' 것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그런데도 제국까지 쫓겨나다니.'
이능의 원천을 책임지는 귀중한 인재가 이런 머나먼 타국에 처박혀 있다는 건, 대단히 많은 사실을 시사하는 게 분명했다.
사실상의 유배다. 오지에 가서 정신 좀 차리고 오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 특권으로도 보호받지 못할 만큼, 이 다니엘이란 녀석이 개망나니란 뜻이지.
"뭐 하고 있어. 가서 망보라니까?"
"...."
그리고 그런 상황임에도 기어코 일을 저지르겠다는 기색에 레스터가 속으로 가열 찬 비명을 질렀다.
애초에 그에게 거부권은 처음부터 없다. 아무리 망나니 왕자라고 해도 결국은 왕족이니까.
"...받들겠습니다."
바꿔 말하면.
성황국의 대표 전력인 팔라딘조차 그 말에는 일단 한 수 접어야 할 만큼, 왕족이 다룰 수 있는 신성은 막강하다는 의미다.
'불쌍하게도.'
이내, 레스터가 저 에이든이란 남자의 명복을 빌며 몸을 돌렸다.
▣
다니엘이 성큼성큼 에이든 쪽으로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그 몸을 타고 신성이 위협적으로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전쟁의 신 카르바가 그녀들의 신민에게 몸속의 에너지를 다루는 법을 선사했다면, 정화의 신 시어가 그의 신민에게 내린 축복은 뭐든지 태울 수 있는 불꽃이다.
왕족 최고의 망나니답게 그런 신성을 다루는 방법은 하나도 익히지 못한 것을 보면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가 따로 없었지만.
진주목걸이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는 물건이기 마련이다.
잘 벼려진 신성은 추가적인 가공 없이도 그 자체만으로 방패이자 검의 역할을 수행한다.
닿는 것만으로도 일반인의 몸 정도는 쉬이 녹여버릴 수 있을 테니.
"...."
에이든의 표정이 급속도로 찌푸려졌다.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 중 하나.
신성을 꺼내 든 성황국의 왕족은, 적어도 상대방을 적극적으로 손봐주겠다는 의사 표시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이전에 그의 앞에서 검을 뽑아 든 게일 이상 가는 위협 행위란 소리다.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팔짱을 낀 다니엘이 피우며 에이든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원을 그리며 걷는 걸음걸이에는 비꼼과 거드름이 한껏 묻어나오고 있었다.
"사자심 정도의 여자면, 이런 변변찮은 사내를 굳이 배필로 맞이할 이유가 있나? 음?"
"...."
"말해 봐, 천민. 꼬리라도 쳤나? 사내놈이 그 반반한 얼굴로 꽃뱀 노릇이라도 했냐고."
레스터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사고 수준이 보이는 모욕이다.
의외인 점이라면, 바로 신성을 이용해 폭력을 휘두를 것 같았던 것에 비해 입만 나불거리고 있다는 점일까.
'...아, 그러니까.'
이건 일부러 긁는 거다.
저쪽이 먼저 화가 나서 손을 대게 함으로써 자신은 정당방위라고 변명하려는 속셈인가 보지. 뒷감당을 아예 생각 안 하는 건 아닌가 보다. 왕자 본인도 성황국 본국의 압박은 무서울 테니까.
물론 먼저 시비를 건 게 이쪽이지만, 성황국의 왕족이라면 그런 사소한 결함 정도는 찍어 누를 정도의 권력은 가지고 있는 존재다.
아무리 망나니 왕자라도 '선공'을 받았다면 상대방을 매장하는 것 정도야 그리 어렵지 않겠지.
"차라리 그거였으면 좋겠는데요."
"...."
"그럼 나 대신 뛸 수 있는 놈을 소개해 주기라도 하지."
"...."
이놈, 보통내기가 아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퉁명스러운 어투로 돌아온 대답에, 레스터와 다니엘이 동시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물론, 납치당해서 이런 곳에 끌려온 에이든 입장에서 이 신랑 자리는 정말 딱 그 정도 의미 이상을 가지지 못했지만.
"...사자심이 들으면 경을 치겠군. 명예도 모르나, 네놈은? 정말로 이딴 놈보단 내가 나았을 텐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다니엘의 입에서 명예 어쩌구 운운하게 만드는 대답이었지만, 오히려 에이든의 눈이 활기로 번쩍였다.
"그쪽이 대신 할래요?!"
"...."
반응이 어찌나 파멸적이었는지, 시비를 걸던 다니엘 쪽의 말문이 그대로 막힐 정도였다.
'...이거 뭐 하는 새끼야?'
마치, 정말로 사자심과의 결혼은 자신에게 애물단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기색이다.
뭇 대륙의 남자라면 일단 선망부터 할 그런 기회가.
"-"
그리고, 분명히.
그건 그것대로 자존심 상한다.
자신은 바라 마지않았음에도 근처도 갈 수 없었던 목표를, 이 남자는 정말로 자신에게 없어도 되는 것 취급 아닌가.
이를 부득 갈면서 튀어나온 문장이 생각 이상으로 울분에 가득 차 있던 것도 그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아가리 닥쳐라, 이 버러지 같은 것. 천한 집안에서 태어난 놈답게 왕족에게 이 이상 무례할 수가 없구나!"
"그런데, 그거. 제 가족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왕족이면 그래도 최소한의 명예는 지키셔야죠."
어.
어라.
이건 좀, 제대로 긁힌 느낌이다.
일순 냉기가 스며든 에이든의 문장을 들은 다니엘이 당황하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사자심과의 관계를 언급할 때와는 180도 다른 반응이니까.
하지만, 이내 그의 표정이 회심에 찬 미소로 바뀌었다.
"명예? 명예라고?"
이런 식으로 화를 내준다면 방향성을 똑바로 잡아주기만 하면 그만이다.
"천한 애비와 천한 애미의 퀴퀴한 혈통을 물려받았을 뿐인 버러지가. 어딜 감히 왕족에게 고귀함을 논하는 거지?"
"...."
와.
레스터도 잠시 임무를 잊고 탄식할 만큼 천박하기 짝이 없는 문장 조합이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듣고 나자.
에이든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왜 그러지, 천민. 맞는 말뿐이라 반박할 수가 없나? 응?"
이번에는, 에이든이 뭐라고 대답하는 대신 침묵하며 다니엘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머릿속으로 뭔가 주판을 튕기는 모습이다.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괜찮을 것 같네."
이어서, 그런 말을 중얼거리더니.
곧바로 에이든의 눈빛이 다니엘과 자신의 거리를 주의 깊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
그리고, 숙련된 무인인 레스터는 그런 몸짓의 의미를 얼추 파악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이건, 그러니까.
마치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때려야 상대방을 아프게 팰 수 있을지 계산하는 것 같은 눈빛이다.
물론 제대로 단련도 하지 않은 게 분명해 보이는 남자가 그런 짓을 한다고 해서 뭔가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
뭔가 이상하다. 뭔가.
큰일이 일어날 것 같으니, 말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잠깐, 경...!"
하지만, 그가 그쪽에 끼어들기도 전에.
"저하."
에이든이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건치가 생생하게 드러내는 새하얀 미소였지만.
레스터가 보기에는, 어쩐지.
이성의 끈을 놓은 인간 특유의 후련함이 엿보이는 무시무시한 표정이었다.
"부디 좋은 치과 의사를 알고 계시기를 빌겠습니다."
"...허?"
다니엘이 뭔가 제대로 이해했다는 표정을 짓기도 전에.
그의 눈앞으로 순백의 기가 확 치솟아 올랐다.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건 다니엘이 애초에 의도한 것에 그대로 들어맞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무튼 저쪽의 신경을 긁어서 선공을 끌어내는 것까진 성공했으니까.
문제는.
'잠깐, 뭐...!'
그게, 정말로, 너무.
아주 잘 성공했다는 점이다.
다니엘의 순도 높은 신성을 마분지처럼 찢으면서 날아온 주먹이, 다니엘의 왼쪽 볼에 격렬하게 틀어박혔다.
-!
틀림없이.
하얀 이빨 열댓 개가 한 번에 공중을 수놓을 만큼 아름다운 일격이었다.
▣
따져야 할 건 한두 개가 아니다.
어떻게 이 인간이 사자심의 전매특허인 새하얀 기를 다루고 있는 것인지, 그런 주제에 왜 몸은 단련이 하나도 안 된 일반인에 싸움 기술은 하나도 안 익힌 것처럼 보이는 것인지.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지금 집중해야 하는 것은.
"...경."
레스터가 떨리는 목소리로 에이든을 불렀다.
머리가 핑 돈다.
벽에 처박힌 상태로 전신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다니엘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그걸 수습하는 것보다 현재 상황의 충격이 우선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사람을 이 정도로 인사불성을 만들었으면 단순히 '왕족을 때렸다'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최소 외교 분쟁, 최대가 전면전.
안 그래도 전쟁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도 않은 게 현 대륙의 정세다.
그런데 제국의 귀빈이 성황국의 왕족을 곤죽으로 만들어 놨다?
뭘 어떻게 봐도 가볍게 넘어갈 사안은 아니다...!
"일단 그 '경' 소리는 떼 두세요. 저 기사 아닙니다."
"...."
순백의 기를 다루는 인간이 어떻게 기사가 아니란 말인가.
레스터가 그런 의문을 뻐끔거리며 꺼내놓으려 했지만, 그것을 끊고 들어오는 에이든의 말이 더 빨랐다.
"그보다, 사람 빨리 불러오세요. 쟤 저러다 죽겠다."
"예?"
"뒷수습해야죠."
"...."
본인이 저질러놓은 일을 말하는 것치곤 대단히 평온한 목소리다.
아니, 평온하다기보단 서늘하다.
말이 뒷수습이지, 상대방 머리통을 더 확실하게 깨놓기 위한 수단을 마련해 달라는 것처럼 들릴 정도로.
"이거 아주 큰 일이니까, 서로 정리를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레스터는 한 가지 사실만큼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사람.
화났을 때는 아예 다른 성격이 되는 게 분명한 모양이다.
5화. 두 번째
스텔라에게 있어, 에이든 켈러메인은 오늘 하루 종일 격무거리를 안겨 주던 사람이었다.
주로 경애하는 노엘 경이 하루 종일 이 남자를 신경 쓰는 것에서 나온 부산물에 가까운 현상이었지만, 아무튼 스텔라에게 그건 썩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에이든 씨."
그런 면에서.
거기에 이 정도로 강렬한 일거리를 추가로 남겨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게 대체 뭡니까?"
스텔라가 기도 안차다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코앞에는 피떡이 되어 있는 다니엘 왕자가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의식은 있지만 뭐라고 말을 꺼내놓지도 못하는 게 분명한 상태다.
정작 왕자를 그런 모습을 만들어 놓은 당사자는 어깨만 으쓱이고 있었지만.
"다 이유가 있다면 믿어주시겠습니까."
"왕족에게 중상을 입힐 만큼의 충분한 이유여야 할 겁니다."
스텔라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무리 사실상 유배를 와 있는 처지라지만, 이건 왕족이다. 국가 간의 분쟁 사유가 되기엔 충분하지.
"그리고 과실도 분명히 이쪽에서 증명해 내야 할 거구요. 왕족의 권력은 그만큼-"
하지만, 에이든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그런 맥락에 전혀 맞지 않는 문장이었다.
"굳이 입증해야 합니까?"
"...예?"
멍하니 반문하는 스텔라에게, 에이든의 말이 덤덤히 이어졌다.
"왕족도 정도 이상의 범죄를 저지르면 파문당합니다. 그렇죠?"
"-그렇긴 합니다만, 그걸 왜 지금 갑자기?"
"얼마 전 제도에서 발생한 크롬웰 자작 영애 납치 사건 있었죠?"
"...."
"떠들썩했잖아요. 그 젊고 아름다웠던 자작 영애가 납치당하고 실종되다니."
스텔라의 얼굴이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딱딱해졌다.
지금 이야기 맥락이 하나도 이어지지 않는 것도 그렇지만.
그걸 들은 다니엘 왕자의 반응이 너무 이상하다.
그 커다란 부상을 입고, 말도 제대로 꺼내놓지 못한 인간이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크게 움찔하는 게 바로 눈에 들어왔으니까.
마치.
들킬 거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악행을 단숨에 찔린 것 같은 기색이 아닌가.
"만약 그 범인이 여기 있다면 좀 재밌어지겠다. 그죠."
"...."
설마.
설마 싶긴 하다.
왕족이 타국으로 유배된 상태에서 그 국가의 귀족을 건드리다니.
사실이라면 정말로 왕족에서 파문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의 중범죄다.
"증거는 있으십니까."
"증거는 없지만, 여기에 있잖아요. 진위를 가릴 수단."
"...예?"
"거짓말인지 아닌지만 알아낼 수 있어도 충분히 증거가 되죠?"
스텔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확실히, 그런 물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적어도 눈앞의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존재 여부를 알아도 되는 물건이 아닌 것도 분명했다.
"일병."
스텔라가 가늘게 뜬 눈 그대로, 근처의 병사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1층의 마도구 연구실에서 물건 하나를 가져와. '탐지기'라고 하면 알아들을 거야."
"-알겠습니다!"
병사의 대답이 어쩐지 늘어졌던 건, 아마 본인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일이 뭔가, 대단히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걸.
그렇게 틀린 감상도 아니었을 것이다.
'본인은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라는 다니엘 왕자의 옹알이 비슷한 변명이, 제국 군부에서 비밀리에 개발 중인 '거짓말 탐지기'에 낱낱이 포착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까.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군."
스텔라로서는 그런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두 가지 면에서 그랬다.
지금 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연속으로 일어난 사태가. 황궁으로 이야기가 들어갈 급의 초대형 사건이라는 것.
그런고로, 종일 야근이 확정이라는 것.
▣
이후 수사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다니엘 왕자의 숙소와 그 행적이 묻어 있는 장소를 샅샅이 뒤져보니, 크롬웰 자작 영애의 옷가지와 개인 물품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저지른 짓들을 은폐하려던 흔적들과, 그 외 다른 '잡다한' 범죄들의 흔적까지 전부.
"-이상입니다."
보고를 마치는 스텔라를 앞에 두고, 노엘이 관자놀이를 꾹꾹 문질렀다.
"성황국에서는 뭐라고 하는데."
"감사를 표했습니다."
"...뭐?"
"성황국 내부의 법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왕족으로 데리고 있던 바리데기인데 시원하게 방출시켜 줘서 고맙답니다. 에이든 씨가 성황국으로 올 일이 생긴다면 한번 극진하게 대접하겠다고."
"...."
성황국의 지도자인 법황, 그중에서도 현대의 법황은 역대 모든 법황 중 가장 괴짜로 유명한 사람이다.
이 답변만 봐도 명불허전이라 해야겠지.
"사실 법황보다 더 심각한 쪽이 있습니다만."
"뭔데."
"[데스위시]가 에이든 씨에게 관심을 표하고 있습니다."
"...."
"언제 식사라도 한번 하자는 식으로 친근하게 언질을 넣더군요. 역시 마음에 드는 인간이면 물불 안 가리고 포섭하는 야심가다운 행동력입니다."
노엘이 피곤하다는 기색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데스위시라고."
"예."
"성황국 제2 왕녀 말하는 거지?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자기 오빠를 죽여서라도 법황 자리 따낼 기회만 보고 있는 그 제왕병자."
"예."
"신성을 다루는 솜씨만 따지면 현재 법황보다 더 윗줄이라는 그 여자."
"...예."
일이 있고 하루는커녕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런 정보가 들어온다는 건, 향후 일어날 일에 대한 단편이라고 보는 게 좋겠지.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오늘 있었던 일은 벌써 주변의 정보란 정보는 전부 긁어모으고 있는 야심가들에겐 일파만파 퍼져나갈 것이다.
"에이든 씨한테 왜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평범한 사기꾼인데."
평...범?
스텔라의 눈썹이 휘는 사이, 노엘이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순도 높은 신성을 다루는 성황국의 왕족을 맨손으로 일격에 작살내고, 그쪽이 감추고 있던 범죄를 바로 적발해 내고, 제도 사령부 내부 인원 말고는 아무도 모를 대외비인 물건을- 평생 군부에 발 디뎌본 적도 없는 인간이 태연하게 써먹자 하고."
"...예."
"그랬더니 그쪽 말대로 진짜 증거가 나온 거잖아."
"...."
"별거 아닌데. 왜 그렇게 호들갑인지 모르겠다. 안 그래?"
"...."
반쯤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말하는 노엘의 모습에, 스텔라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보고하는 입장에서도 숨이 턱턱 막힐 만치 불가사의한 사건의 연속이니까.
이게 평범한 사기꾼을 자처하는 인간 한 명이 하루도 안 되어서 저지른 일이라고 한다면.
음.
"저, 노엘 경. 외람되지만."
"응?"
"이런 인간은 대체 어디서 어떻게 데려오신 겁니까?"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이 정도였나?"
확실히, 이쯤 오면 본인이 주장하는 이력이랑은 너무 동떨어진 행적이다.
스텔라로서도 왜 '하필' 저런 인간을 데려왔냐는 소리가 하루 만에 쑥 들어갈 만큼.
문제는, 정작 그를 데리고 온 노엘조차 현재 상황에 대단히 당황하고 있다는 것.
'어떻게?'
당연한 이야기지만, 왕족쯤 되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작정하고 범죄를 은폐하려고 한다면 그걸 잡아내는 건 바늘구멍에 동물을 집어넣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척 봐도 더럽고 추잡해서 본인이 기를 쓰고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애썼을 범죄는 더더욱이.
거기에, 군부에서 실험하고 있는 물건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의 괴상함은 그것보다 더하다.
이쯤 되면 바늘구멍에 코끼리를 집어넣는 수준이다.
군부의 악명 높은 보안 절차는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대외비라는 이름이 붙은 이상, 외부 인원에게 발설된 전례가 없다는 사실이 그런 편집증적인 경향을 증명한다.
그런데.
그것 두 개를, 전부 다 알고 있었다. 에이든이란 남자는.
'...어떻게?'
그런 의문 말고는 떠올릴 수 있는 게 없다.
뭘 얼마만큼 알고 있는 거지.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혼란이 가속된다.
대체 이 인간, 정체가 뭐야?
어디서 굴러먹다 온 사람....
"노엘 경."
그런 생각을 가속하는 노엘에게, 문득 스텔라의 말이 떨어졌다. 답지 않게 뭔가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노엘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볼 때까지 이어지던 망설임이, 이내 문장으로 구체화되어 튀어나왔다.
"한 가지 더, 의문이 남는 점은 있습니다만."
"의문?"
"애초에 그 둘이 어쩌다가 싸웠냐는 겁니다. 경은 알고 계시는지요?"
"대충은. 왕자가 먼저 시비 건 것 아니야?"
현장에 있었던 레스터 경이 말하길, 다니엘 왕자는 '사자심의 신랑이 마음에 들지 않은 왕자가 싸움을 걸었고, 이에 에이든이 반격했다' 정도의 상황이라 했지.
당사자야 최대한 담백하게 상황을 설명한 것이겠지만,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들릴 수도 있기 마련이다.
"본인이 노엘 경의 신랑으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모욕당하자 격노한 에이든 씨가 저지른 일이라 하더군요."
"...."
"조금 다시 봤습니다. 남자다운 면도 있잖습니까."
...말은 항상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그 보고를 듣자마자 노엘의 입가가 묘하게 비틀렸다.
"그 사람, 나 그 정도로 좋아했어?"
"노엘 경을 싫어할 사람이야 이 행성에 없겠지만, 의문이긴 합니다. 처음 보였던 태도와는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이상하긴 해. 애초에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닌-"
그렇게 말하려던 노엘이 바로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으로는 바로 얼마 전에 들은 문장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예전 기억은 못 하시는 모양이네요? 어렸을 때라든가.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설마 진짜로 잊으셨을 줄은 몰랐는데.
그런 말을 했었다.
어떤 남자가.
"노엘 경? 괜찮으십니까?"
의아하게 날아오는 스텔라의 말에, 노엘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의 눈이 살풋 감겼다.
"아니."
이어서 그런 말이 그녀의 입가에서 씁쓸함을 담아 휘감겼다.
"알고 지냈을... 수도."
"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 말과 함께 잠시 침묵하던 노엘 경이, 이내 눈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스텔라."
"예."
"중앙정보부에 연락해 둬."
스텔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앙정보부는 제국 산하 첩보 기관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곳이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황제의 가장 은밀한 비밀까지도 샅샅이 털어낼 수 있는 곳이라는 게 중론인 기관이다.
이곳에 연락한다는 건, 어지간히 중한 일이 아니고서는 사자심조차 부담스러운 일이다.
"...에이든 씨의 신상 조사를 상세히 의뢰하면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놀라움과는 별개로 척하면 착이라고, 오랫동안 같이 일한 사이답게 스텔라는 이미 노엘의 의중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사소한 정보까지 빼지 말고 전부 다 확인해. 알아내는 것 전부,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나한테 전하고. 필요하면 내 이름이야 얼마든지 팔아도 좋으니까."
"받들겠습니다."
그런 말과 함께 경례를 붙이고 사라지는 스텔라를 보고, 노엘이 다시 찻잔을 기울였다.
쓴맛이 입가에서 다시 세게 감돌았다.
군부의 정보 수집 능력도 훌륭하지만, 중앙정보부는 그런 부분에서 궤를 완전히 달리한다.
이번 의뢰로, 반드시 무언가 '가닥'은 잡힐 것이다.
이 남자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최소한 그걸 밟아나갈 실마리라도.
"에이든."
노엘이 천천히 읊조렸다.
"에이든 켈러메인."
그 이름을 음미하듯이.
"-해봅시다, 그래."
알아내 주겠어.
당신이 누군지.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반드시.
▣
"집에 가고 싶다."
에이든이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System Message
▶ '데스위시', 카티야 하인켈 크레이븐과 접촉합니다.
▶ 스토리 최중요 대상입니다. 대상에게 어떤 영향을 주냐에 따라 세계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 메인 스토리에 미치는 영향력이 증가합니다.
▶ 대상과의 유대 단계가 1단계로 향상됩니다!
▶ 스킬 '운명의 길쌈꾼'과 연동됩니다!
"...."
이게 다 뭐람.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뭔가 무시무시한 인간이랑 엮였다.
'이래서 사람이 욱하면 안 되는데.'
자꾸 선을 넘길래 조금 힘을 내서 짓이겼는데, 그 후폭풍이 조금 무시무시하다.
사실 그 뺀질이 왕자는 게임 안에서도 자주 마주치는 악역이라, 에이든의 듬성듬성한 원작 지식으로도 금방 제압할 수 있는 약점투성이 인물이었다.
저지른 악행이 한두 개가 아니라, 하나만 파헤쳐도 묶인 소시지처럼 다른 것들도 마구마구 수면으로 드러나는 놈이니까.
'거기에 그게 대외비일 것까진 몰랐지.'
군부에서 써먹는 탐지기는 게임 안에서 써먹을 수 있는 대표적인 핵심 아이템 중 하나여서 언급했을 뿐인데.
지금은 아직 시제품이 간신히 완성되고 있는 시기라 군부에서 기밀 취급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그보다.'
에이든이 음울하게 자신의 눈앞에 떠오른 창을 훑었다.
카티야 하인켈 크레이븐.
통칭 [데스위시]. 메인 시나리오의 '주역 인물' 중 성황국 세력의 최중요 핵심.
스킬 복사권을 받긴 받았는데, 무슨 이유로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이유를 모르니까 그 부분이 좀 찝찝하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가져갈 건 가져가야겠지?'
▶ '스킬: 운명의 길쌈꾼'의 스킬 복사 능력을 사용합니다.
▶ 대상 '카티야 하인켈 크레이븐'의 스킬 목록을 분석합니다.
▶ 가장 가치가 높은 스킬을 최상단부터 표시합니다.
그런 창과 함께 카티야가 보유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 스킬창이 쭉 내려왔다.
전에 다니엘이 보인 신성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
이 왕녀가 대충 어떤 스킬을 가지고 있는 진 알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대단한 것이라면 에이든도 안다. 노엘의 스킬을 복사해 올 때와 비슷하지.
원작 지식을 좀 복기해 보면, 노엘과 마찬가지로 이 왕녀는 전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고유한 '이능'을 보유한 이니까.
신성의 근원인 성황국 인원들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능력.
- System Message
▶ '고유 능력: 최초의 서원'을 복사합니다.
▶ 전 세계에서 오직 해당 인물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 대상 '카티야'가 당신에게 가지는 호감도가 증가할 수 있습니다!
...뭔지 모를 관심이 또 들어왔다는 사실에는 조금 신경이 쓰이지만.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오늘 하루는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에이든이 창을 치우며 그대로 눈을 내리감았다. 하루 종일 온갖 일에 시달린 덕분에, 의식이 끊어지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마, 그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가 깊은 잠에 빠져들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으로 떠오르는 창을 보지 못한 것은.
- System Message
▶ 현시점에서 유일하게 '고유 스킬' 2개 이상을 보유한 상태입니다.
▶ 대상 '만신전'이 당신을 주목합니다!
▶ 메인 스토리에 대단히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변화입니다!
▶ 새로운 ̶̤̈́ ̷͖̣̝̱̔́̓̈특̸̤̅͊수̸̠̈́ ̶̛̯͙͆̑능̷̣̰̩̀̇͋력̴̢̔̆을̴͍̼̠̙͐ ̸̼̖̜̀개̶̲́방̷̦͖͂̈́합̸̢̧̪̬͊̉니̴͎̇다̶͚̤̹̺̂
▶ 메̴̢͓̠͉͊̋인̴̹̀ ̵̳̪͠스̵̼̦̻͕̐͝토̶̝͌̊리̸͇̟̒̏̌에̵̰̥̱̆̅͝ ̸̤̿̆̊́새̷̢̤͚̥̄로̶̫̾̓͋̕운̸̡̜̤̓͜͝ ̸͙̞̱̪́́͑̑사̵̨̠̩̃̀͆̐건̷̥̳̭̚이̷̟̩̆Ą̷̦̘͉̹͓̝́̾͂͂̂͂̅͡͝ø̵̧̡̜̲̗̳̟̀̒̽̊͆̃͒̎̚͟͟ͅ Î̶̻̙͓͓͎̫͛́͌̀̆͊͒͆̚±̦͖̺̗͎͍̰͊̏͒̉̍̉̚͟͠×̵̢̯̥̟͖̞̔̈́̃̚͘͞·̶̛͈̪͚̹̺͖͉̪̇̎̃̏̃̎̚͡ͅ¡̴̹͉̤̭̥̒̇̎̅͘͝ͅ¹̖̯̰̰̦̝͐͆̿̌̃͂͟͠Ö̵̩̭͇̹̭̤͌͆̔̀̆̚Ą̷̦̘͉̹͓̝́̾͂͂̂͂̅͡͝ø̵̧̡̜̲̗̳̟̀̒̽̊͆̃͒̎̚͟͟ͅ Ç̳͈̟̯̻̾̿̔͆̃̋́͌͘̕Ḁ̷͉̞͎̯̥̫̳̻́͆͊̉̀̾͘͞·̴̢̥̱̝̘̟͎͊͐͌̿̎̋̕͜͟͝͞Ą̷̦̘͉̹͓̝́̾͂͂̂͂̅͡͝ø̵̧̡̜̲̗̳̟̀̒̽̊͆̃͒̎̚͟͟ͅ Ç̳͈̟̯̻̾̿̔͆̃̋́͌͘̕Ḁ̷͉̞͎̯̥̫̳̻́͆͊̉̀̾͘͞·̴̢̥̱̝̘̟͎͊͐͌̿̎̋̕͜͟͝͞Î̶̻̙͓͓͎̫͛́͌̀̆͊͒͆̚±̦͖̺̗͎͍̰͊̏͒̉̍̉̚͟͠×̵̢̯̥̟͖̞̔̈́̃̚͘͞·̶̛͈̪͚̹̺͖͉̪̇̎̃̏̃̎̚͡ͅ¡̴̹͉̤̭̥̒̇̎̅͘͝ͅ¹̖̯̰̰̦̝͐͆̿̌̃͂͟͠Ö̵̩̭͇̹̭̤͌͆̔̀̆̚Ą̷̦̘͉̹͓̝́̾͂͂̂͂̅͡͝ø̵̧̡̜̲̗̳̟̀̒̽̊͆̃͒̎̚͟͟ͅ Ç̳͈̟̯̻̾̿̔͆̃̋́͌͘̕Ḁ̷͉̞͎̯̥̫̳̻́͆͊̉̀̾͘͞·̴̢̥̱̝̘̟͎͊͐͌̿̎̋̕͜͟͝͞Ą̷̦̘͉̹͓̝́̾͂͂̂͂̅͡͝ø̵̧̡̜̲̗̳̟̀̒̽̊͆̃͒̎̚͟͟ͅ Ç̳͈̟̯̻̾̿̔͆̃̋́͌͘̕Ḁ̷͉̞͎̯̥̫̳̻́͆͊̉̀̾͘͞·̴̢̥̱̝̘̟͎͊͐͌̿̎̋̕͜͟͝͞Î̶̻̙͓͓͎̫͛́͌̀̆͊͒͆̚±̦͖̺̗͎͍̰͊̏͒̉̍̉̚͟͠×̵̢̯̥̟͖̞̔̈́̃̚͘͞·̶̛͈̪͚̹̺͖͉̪̇̎̃̏̃̎̚͡ͅ¡̴̹͉̤̭̥̒̇̎̅͘͝ͅ¹̖̯̰̰̦̝͐͆̿̌̃͂͟͠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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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을 재조정합니다.
▶ 대상 '만신전'이 당신을 경계합니다.
▶ 대상 'Ç̷̨̳͈̟̯̻̦̘͉̹͓̝̾̿̔͆̃̋́͌̾͂͂̂͂̅͘̕͡͝ø×̵̢̯̥̟͖̞̔̈́̃̚͘͞·̶̛͈̪͚̹̺͖͉̪̇̎̃̏̃̎̚͡ͅ'가 당신을 주목합니다.
▶ 새로운 특수 능력이 주어집니다!
▶ [ 고유 특성: 전능 ] 이 주어집니다!
▶ [ 고유 특성: 근원 ] 이 주어집니다!
6화. 황제
그 뒤로 며칠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에이든이 하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군부 청사 안에서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눈치를 살피는 정도였지만, 의외로 그의 주변 환경 자체는 놀랄 정도로 조용했다.
틀림없이 이전과 똑같이 불려 나가서 이것저것 추궁당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쪽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아무 반응이 없다.
다만, 이전에 비해 확실히 달라진 점은 있었다.
"...."
에이든이 앞쪽에서 무표정하게 집무를 보는 중인 노엘을 곁눈질로 흘끔흘끔 살폈다.
명목상은, 여기에 초대되고 짧은 기간 사이 두 번이나 불미스러운 일을 겪은 그를 불편함 없이 보살피기 위함이라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이 사람의 집무실에서 함께 보내야 하는 것이 문제다.
'감시당하는 느낌인데.'
그렇게 느껴질 만큼, 노엘이 그를 옆에 밀착시켜 두는 정도가 심하다.
당장 일하는 것만 봐도 보통 바쁜 사람이 아닌데, 마치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려는 것처럼 항상 붙어있다.
딱히 생활에 제약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거북하기 짝이 없다. 위궤양이 생길 것만 같다....
"...저, 노엘 경."
"예."
"제 당번병은 언제 배치되는 겁니까?"
일전에 스텔라에게서 그런 인원을 붙여둘 테니 대기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필요한 게 있으면 그쪽으로 전할 테니 제발 좀 혼자 있게 해달라는 의사 표시였지만, 노엘이 담담하게 돌려준 대답은 여전히 가차 없었다.
"제가 거북하시다고 돌려서 말씀하시는 건 알겠지만."
"아니, 꼭 거북하다고 그렇게 직접적으로 짚을 필요는 없..."
"에이든 씨의 당번병은 아마도 추려지는데 꽤 시간이 걸릴 겁니다."
"예?"
"기준을 충족시키는 인원이 현재는 없어서 말이죠. 물색 중입니다."
그럴 수가 있나?
당번병이라고 해봐야 결국 평범한 부관 비슷한 느낌 아닌가. 수도 청사에 그런 일에 적당한 인원이 없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뇨. 평범해선 안 됩니다. 당신에게 붙일 인간이라면 반드시 특별해야 하니까."
"...."
"보여주신 능력이 있는데 범용한 사람을 붙여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루의 대부분을 밀착해 있을 사람이라면 적어도 수준은 맞아야 법입니다."
쓸데없는 고평가다. 평범한 사람이면 더할 나위 없다.
안 그래도 최근 특이한 사람과의 만남이 너무 과다했던 느낌이 드는데...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여러 면에서 흡족한 인재로 붙여드릴 거니까요."
...괜히 위궤양만 더 심해지는 느낌이다.
잠시 표정을 찌푸린 에이든이 이내 곧바로 다른 변명거리를 꺼내 들었다.
"...집무 중에 계속 외부인과 함께 있다고 하신다면 소문이 안 좋게 나실 수도 있-"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일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 말과 함께 잠시 뜸을 들인 노엘 경이 싱긋 웃으며 문장을 이었다.
"저희, 곧 부부가 될 사이인데요?"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미소였지만, 그걸 듣는 에이든의 얼굴에선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부부가 될 사이.
형식상으론 그렇긴 하다.
노엘은 몰라도 에이든 본인은 들을 때마다 경기가 올라오는 말이긴 하지만.
그도 그럴 게, 이 여자와 얽힌 뒤 고작 며칠 만에 무슨 일들을 겪었는지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반응도 아니리라.
'...팔자 한번 대차게 꼬였네.'
그만한 사고를 치고 다녔으면 결혼 자체를 재고할 법도 한데, 의지가 보통 확고한 게 아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그걸 또 새삼 되새기는 걸 보니, 지금 당장 가해지고 있는 감시에서 괜히 벗어날 생각하지 말라는 압박도 겸한 말이겠지.
그렇다면, 적어도 이 거북한 분위기에서 정신을 돌리기 위한 뭔가 할 일이 필요한 타이밍이다.
딱히 그에게 할당된 업무가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정리해야 할 정보는 분명히 있었다.
"...."
에이든이 찌푸린 얼굴로 책상 위로 올라와 있는 서류를 뒤적거렸다.
노엘이 업무를 보는 동안, 적어도 에이든 역시 원하는 자료를 조사할 시간 정도는 그럭저럭 나는 편이다.
'왜 없지?'
...찾는 내용이 하나도 없는 것이 대단히 큰 문제지만.
심지어 찾는 내용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그건 단순히 '큰 문제'라는 표현으로 끝나지 않을 대재앙의 전조일 가능성이 높다.
'주인공' 관련된 정보가.
메인 시나리오의 구심점이자, 세계의 구원자의 정보가.
잘 보이지 않는다.
지금도 메인 시나리오에서 벗어나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고, 그걸 위한 '급행 티켓'의 존재가 바로 그쪽이다.
'없을 수가... 있나...?'
그리고 주인공이 없다면, 그건 단순히 에이든이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걔 없으면 세상은 누가 구하라고?'
주인공, 즉 이 세계의 구원자.
에이든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며 그런 생각을 이어 떠올렸다.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메인 시나리오는 결국 그쪽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지.
에이든이 가족을 만나 평화롭게 사는 것도, 결국엔 그쪽이 제 몫을 다 한다는 전제하에 구성되는 미래 계획이다.
'...내가 못 찾은 거겠지.'
물론 아직 그쪽이 이 세상에 완전히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건 시기상조다. 아직 자신이 수집한 정보는 빈말로도 충분하다고 보기 힘드니까.
하지만, 만약 그쪽이 진짜로 없다면.
에이든 또한, 거기에 맞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상상만 해도 오한이 올라오려는 가정을 꾹꾹 내리누르며 눈앞으로 시스템 창을 불러왔다.
주인공도 주인공인데, 당장 그에겐 달리 확인할 게 하나 더 있었으니까.
-Skill Info
[ 카티야 하인켈 크레이븐 ]
- 유대: 1단계
< 복사된 스킬 >
◆ 최초의 서원
※고유 – 해당 캐릭터만 보유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구도자가 정화의 신과 맺은 서약을 모방한 맹세입니다. 화력 면에서 독보적이며, 정화의 신과 <서원의 의식>을 통해 사용자 본인만의 고유한 특질을 추가적으로 발현시킬 수 있습니다.
◈ 아직 의식을 행하지 않아 고유 특질이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에이든이 나열된 문장을 천천히 읽어내렸다.
'다른 건 몰라도....'
화력이 뛰어나다는 건 여러 상황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노엘의 <순백의 심장>과 비교하면 틀림없이 출력은 떨어지겠지만, 이능 자체에 별다른 속성이 없는 기와 달리 신성은 확연하게 강력한 특성이 있으니까.
'다른 건...'
서원의 의식이란 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분명히 성황국 본토에서나 행할 어마어마한 의식 같은 느낌이 든다. 지금 신경 쓸 이유는 없겠지.
이어서, 창을 내리며 쭉 훑어보던 에이든의 얼굴이 슬쩍 찌그러졌다.
사실 여기까지 쓰인 내용만 보면 그럴 이유까진 없을 것이다.
사람이 뭐든 익숙해질 수 있다고, 노엘의 경우를 떠올려 보면 차라리 이런 게 떨어진다고 알려주고 떨어진 경우는 훨씬 더 나은 편이니까.
문제는 이거다.
창 맨 아래에 붙어있는, 아예 못 보던 내용들.
-Skill Info
■ 전능 [ Locked ]
스킬이 잠겨있습니다. 두 가지 이상의 이능을 동시에 다룸으로서 최초 단계를 개방하세요.
■ 근원 [ Locked ]
스킬이 잠겨있습니다.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딱히 이런 걸 따로 입수한 기억도 없는 판에, 아예 정보까지 잠겨서 열람까지 못 하는 판국이다.
'...최선은 이런 것들을 쓸 상황이 안 나오는 거지만.'
에이든이 그리 생각하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뭐든, 여기 있는 능력들을 사용할 때가 된다면 급박한 상황에 또 휘말렸을 상황이 높다.
불행히도, 그렇게 될 확률은 결코 낮아 보이지 않았다.
"...."
지금이라도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인생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원래대로면 지금쯤 아버지와 여동생이나 불러놓고 같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시간 아닌가.
'아빠랑 시셀라는 뭐 하고 있으려나...'
아마 편지만 남기고 휙 사라진 그를 애타게 걱정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에이든이 곁눈질로 집무에 열중하고 있는 노엘을 흘끔 바라보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족들이랑 함께 보낼 시간을 지금 저 여자 때문에 빼앗겼다고 봐도-
"에이든 씨."
"-예."
느닷없이 튀어나온 말에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이 틀어막힐 뻔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대답을 돌려주기는 했다.
노엘이 잠시 그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훑어보긴 했지만, 이내 평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일 황궁에 갈 겁니다."
이건 들은 기억이 있다.
스텔라에게서도 이전에 언질을 받은 일정이다. 노엘 경과 오간 혼담을 황제에게 직접 보고해야 한다고 하던가.
"황궁에 간다면 주의해야 할 점이 한두 개가 아니지 않나요? 교육을 받은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바로 얼마 전에 예법으로 시비를 걸린 경험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나오는 질문이지만, 노엘이 무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법이라면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달리 주의하셔야 할 점이라면 있겠지만."
"그게 무슨...?"
찻잔을 한 모금 기울인 노엘이,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 아래로 턱을 받치며 말을 이었다.
"이 '위장 결혼'의 계약 기간은 1년입니다. 계약 종료 이후에는 반드시 후하게 사례할 테니, 그동안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저 같은 여자와 얽혀서 괴로우신 건 이해하겠지만, 입장상 공식 선상에서는 평소보다 조금 더 친밀하게 행동해야 하니까요. 미리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거기에 양해를 구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애초에 문답무용으로 사람을 납치해 놓고 이제 와서?
"제가 갑작스럽게 스킨십을 하거나 친근한 척을 하더라도 참아달란 뜻이죠. 쉽진 않으시겠지만."
에이든은 조용히 눈만 끔뻑거리며 노엘이 담담하게 꺼내는 말을 경청했다.
느낌이 조금 이상하다.
농담이라고 하기엔 진심으로 자신의 가치가 낮다고 생각하는 말투 아닌가.
'자존감이 낮은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제국 최고의 무력을 가진 기사고, 뭇 남자들이 그렇게 선망하는 미인이고, 황제도 각별하게 신경을 쓸 정도의 입지를 가진 군인이?
이어 나온 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이었고.
"그런 말을 하실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에이든이 볼을 긁적거리며 대답을 돌려주자, 잠시 침묵하던 노엘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힘 빠진 목소리가 미소와 함께 돌아왔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어쩐지 기뻐한다기보다 그의 말이 의례적으로 돌아온 대답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
에이든의 고개가 슬쩍 비틀렸다.
이 사람.
진심으로 '자신 같은' 여자와 결혼하는 건 상대방에게 고역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가 연애 경험이 전혀 없어서 말입니다."
"...."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노엘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진다. 얼굴에도 점점 더 홍조가 올라온다. 헛기침을 하며, 그녀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어디가 적절한 선인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거든요."
"...."
"...그래서 좀 부적절한 행동을 보일수도 있다는, 그런 겁니다만...."
아.
그런 이유에서?
'...그건 또 의외인데.'
생각해보면, 이 사람 정도면 남자가 줄을 서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애초에 위장 결혼할 사람을 주변에서 안 찾고 다짜고짜 에이든을 납치해 온 것부터가 그렇게 따지면 좀 이상하긴 하지.
"아,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자면."
이어, 노엘이 곧바로 첨언했다.
"황궁에 들어간다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계시죠. 괜히 눈에 띄지 마십시오."
이 사람에게선 쉬이 찾아보기 힘든 진중한 경고에, 에이든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예?"
"최대한 '그분' 인식 바깥에 나와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안 그러면...."
노엘이 잠시 침묵했다.
에이든의 눈에는, '그분'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덜 불경스럽게 표현할 단어를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잘못 얽혔을 때 대단히 피곤해지실 겁니다."
"...."
물론,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튀어나온 말은 불길하기 짝이 없는 느낌을 주는 문장이었다.
▣
"쓸데없이 반반하게 생겼네. 취향이 원래 그쪽이었나?"
황제라는 무시무시한 호칭들에 비해, 지금 그의 앞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는 사람은 친근해 보이는 옆집의 소탈한 형에 가까운 모습이다.
연배로 따지자면 에이든보다 겨우 몇 살 더 먹어 보이는, 훤칠하게 박힌 이목구비가 인상적인 청년.
그리고 그런 첫인상에 걸맞게, 현재 상황도 황제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하기도 하다.
'예법을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이유가....'
이런저런 복잡한 절차 없이 곧바로 황제와 직통으로 만나니까 꺼낸 말이었나.
황제와 절친한 성황국의 법황도 패권국의 군주 중에선 괴짜라는 소리를 유독 자주 듣지만, 이것만 보면 제국의 황제도 만만찮은 느낌이다.
"예, 뭐."
그리고 그런 괴짜 주군을 섬기는 일에 스트레스라도 받는 모양인지, 노엘이 찌푸린 얼굴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평소에 직급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든 예의 바른 모습을 보이던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면 대단히 충격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충격적인 건 그런 태도를 눈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제국의 황제겠지만.
"얘야. 내가 누누이 남자는 듬직하게 생긴 놈이 최고라고 하지 않았니. 이렇게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놈을 데리고 와선 무슨 결혼이고 자시고-"
"폐하께서 왈가왈부하실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골라온 제 남편 아닙니까."
"얼씨구. 황제한테 말버릇 봐라."
"애초에 먼저 저한테 시비를 거셨-"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의 수준은 더욱더 경악스럽다.
흡사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온 사춘기 여동생과 그 남자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오빠의 모습이다.
어딜 어떻게 보아도 제국 최고의 군인과 황제가 나눌만한 대화는 아닐뿐더러, 이런 식의 유치한 대화가 처음도 아니라는 듯이 둘 다 대단히 익숙해 보인다...
"...."
물론 그럼에도 지금 상황에서 정리할 수 있는 사실이 두 가지는 확실히 있었다.
사자심과 황제는 세간에 알려져 있는 것보다 훨씬, 아주, 대단히 친밀한 사이라는 것.
실제로 이런 격의 없는 모습은 하루 이틀 만에 나올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전부터 꽤 깊은 교류가 있었던 게 분명하지.
그리고.
"-그러니까, 지금 상태로는 절대로 윤허해 줄 수 없는 결정이란 말이지."
그런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런 말이 나올 만큼 황제는 노엘의 이번 혼사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다는 것.
"노엘."
"...예."
아까와 비교해 훨씬 묵직하게 내려앉은 목소리에, 노엘 역시 퉁명스러운 기색을 거두고 진지한 기색으로 답변했다.
"제국의 내부 상황을 모르는 것도 아니잖니, 얘야. 지금 귀족 사회는 제 잇속 챙기는 아귀들로 가득 찬 복마전이다. 민중에게 큰 지지를 받는 네 거취에 모두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고, 내가 가만히 있더라도 다른 파벌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제가 누구와 혼사를 치르더라도 저울의 무게가 기울어집니다, 폐하. 가장 이상적일 때가 내전이고, 최악이면 다시 연합 전쟁으로 번지겠죠. 제삼자를 데리고 오는 게 그나마 합리적이지 않겠습니까."
"미봉책이지. 눈 가리고 아웅이란 짓을 모를 녀석이 없어. 내 아들놈부터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이어서, 에이든으로서는 못 알아들을 이야기가 한참 또 지나갔다.
전후로 어지러운 귀족 사회의 정세가 어쩌니, 황권이 대단히 약화 되어 그들을 통제할 수 없다느니,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높으신 분들의 어려운 이야기.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라면, 황제가 황자를 칭할 때 취하던 태도다.
거의 남남을 대하는 말투나 진배없는 모습이다. 사이가 안 좋은 것을 넘어 불구대천의 원수기라도 한 것처럼.
에이든의 눈썹이 미묘하게 휘었다.
'가족끼리 사이가 안 좋다고?'
-이건.
그가 알고 있는 '원작'의 형태와는 미묘하게 느낌이 다르다.
기억엔, 황자는 분명히 훌륭한 선역이었다. 인격적으로 무결점에 가까운 인간.
아버지와 딱히 사이가 틀어질 인간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럼 남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그런 생각을 곱씹고 있자니, 문득 그런 문장이 앞에서 떨어졌다.
"결국 가장 큰 문제는, 이 녀석이 네 신랑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다른 놈들이 이의를 제기한다는 거잖아. 너희 둘이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걸 인식하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표면적인 불만은 쑥 들어갈 거다."
"...에이든 씨에게 부담을 더 지우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애초에 제 개인적인 문제를 그렇게까지 깊이 파는 쪽이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정치판이란 게 원래 그런 쓰레기장이야."
그런 식으로 왈가왈부 논쟁이 오가는 사이, 에이든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말을 들어보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지금 이 혼약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계신 게 분명하다.
그건 그의 입장에서도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고.
'결혼이 날아가면....'
위장 결혼이 파투 난다면, '퀘스트 실패'다.
에이든이 절대 바라지 않는 상황이지.
그럼, 현재 그가 취해야 할 행동은 명확하다.
"해보겠습니다."
황제와 노엘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왔다.
"해보겠습니다. 가치 증명. 그래야지 혼약을 올릴 수 있다면요."
에이든의 말에, 주변으로 침묵이 쭉 깔렸다.
특히 노엘의 눈이 큼지막하게 떠져있었다. 설마하니 에이든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는 기색이다.
이어서.
"-기백이 괜찮잖아."
곰방대를 재떨이에 툭툭 내려친 황제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가, 마치.
좋은 생각을 떠올린 악동 같은 모습이다.
"네가 한다고 한 거다?"
"...."
-잘못 얽히면 대단히 피곤해지실 겁니다.
머릿속으로는, 바로 어제 들은 문장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폐하. 너무 위험한 일은-"
노엘이 긴장감이 깃든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안색이 살짝 파리해진 걸 보니, 마치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황제에게 시달려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란 기색이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무시한 황제가 에이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쪽, 에이든이라고 했나?"
그런 말을 꺼내든 황제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둘이 얼마나 금슬 좋은 부부인지, 한번 증명해 보자고."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무슨 뜻인지 잘-"
"고루한 제국 귀족들에게 전투력만큼 효과적인 설득 수단은 없지. 특히나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국이면."
"...."
"같이 싸워보라고, 둘이."
황제가 씩 웃으며 에이든의 대답을 중간에 잘라버렸다.
"마침 좋은 상대가 있거든?"
7화. 합성
"뺏어간 영토 돌려달라고, 이 야만인아."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얼굴을 보자마자 그대로 면전에 폭언부터 때려 박는 황제의 모습에도, 대평원의 족장- 두나단이 무표정하게 예의 바른 인사를 꺼내 들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라는 듯 대단히 익숙한 기색이었다.
실제로 외교적 대형 사고가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음에도, 주변에 있는 누구도 쓴웃음만 지을 뿐 그런 상황을 저지하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다.
뺏어갔니 어쩌니 해도, 애초에 저 영토도 전쟁 기간 내내 든든한 우방의 역할을 한 부족 연합에 황제가 직접 양도한 것이다.
"제국의 이번 전사단은 어떠신지요. 여느 때와 같이 강녕합니까?"
"전에 비해 조금 얇아지긴 했지. 전쟁 막바지에 조금...."
황제가 잠시 말을 삼켰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으니까."
"...."
황제가 무슨 말을 꺼내는지 이해한 두나단이 고소를 머금었다.
참으로 끔찍한 사건이 하나 있긴 했었다.
제국의 가장 커다란 별이 진 사건.
"-호국경의 자리는 누군가 채울 수 있을 겁니다, 폐하. 황자도 언젠가는 다시 예전처럼-"
"됐고. 너희들 전사단은 어때?"
가열차게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황제의 목소리에 두나단이 다시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말 몇 마디로 위로를 할 정도의 사건이 아니었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화제에 맞춰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혈기 넘치고 싸울 의지가 왕성한 젊은 전사들 위주로 뽑아왔습니다."
"햇병아리들을 좋게 포장하기는."
"그걸 아시면서 어쩌자고 저런 걸 내보내셨답니까."
두나단의 눈길이 대련이 예정되어 있는 스테이지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전투에 앞서 몸을 풀고 있는 수어 명의 부족 연합의 전사들에 반해, 제국측의 인원은 단촐하기 짝이 없다.
명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있는 여자 한 명.
그리고 그것 자체만으로도, 주변의 공기조차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 같은 존재감을 사방으로 뿌리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그야말로 포식자의 위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너무 진심을 내시는 것 아닙니까. 기껏해야 교류 행사에 사자심이라뇨."
경외마저 깃들어 있는 그 목소리에, 황제가 피식 웃으며 담배를 입에서 질겅거렸다.
"그래 봐야 한 명이잖아. 연합의 전사들이 얼마나 잘 싸우는지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닌데."
"...엄살이 너무 심하십니다."
두나단이 그렇게 말하며 스테이지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시작이 얼마 남지 않은 대련 이전에, 사자심이 심호흡과 함께 기를 운용하는 것이 보인다.
그 심장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른 백색의 기가, 이내 대련장 전체를 감싸는 돔 형태의 역장을 형성한다.
안전장치의 마련이다. 혹시라도 싸움의 여파가 근처로 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지.
그럼에도.
고작 인간 한 명이, 저렇게나 거대한 반구형 역장을 만들어 내는 모습은 흡사 장엄하기까지 한 모습이다.
아무리 기가 이능 중에도 출력에서 비교 우위를 가지는 이능이라지만, 원래대로는 저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병단 한 개가 통째로 소요되어야 할 거사다.
'...웃기는 일이긴 하지.'
이제 곧 저기서 싸울 인간에게 저런 작업까지 맡기는 건, 언어도단이나 다름없는 사태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에 뭐라고 항의를 하는 인간은 이 자리에 한 명도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기색마저 그득 차 있다.
이유도 간단하지.
사자심이란 인간은, '그래도 될 정도의' 괴물이니까.
'순백의 기.'
두나단이 그 반구를 구성하고 있는 기를 눈으로 쓱 훑었다.
제국의 모든 기사가 다룰 수 있는 기(氣) 중 정점.
사자심이 인간 모양의 '이능 발전소'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모두 저 특수한 성질을 가진 이능 덕분이다.
"그녀는 그런 전사들이 초개처럼 나자빠지던 전장에서도 일인 군단이라고 불리던 인재입니다만. 혼자면 넘치도록 충분한 것 아닙니까?"
황제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엄밀히 말하면 혼자는 아니야."
"예?"
"아직 안 올라오긴 했는데. 한 명 더 있어. 뭘 보여줄지 궁금한 녀석."
틀림없이.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
...너무 긴장돼서 화장실에 다녀왔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되었을까.
그의 시선이 앞쪽으로 쏠렸다.
콘크리트 건물과 흑백 TV, 전화기 등등이 보편화된 시대에 혼자서만 동떨어진 것 같은 '야만 전사'의 이미지가 그대로 구체화된 험악한 남정네들이 시야를 꽉 메우고 있었다.
'저런 것들과 치고받으라고?'
이걸 피해 갈 수 있는 협상 테이블이 있다면 수명 1년 정도는 바쳐도 수지맞는다고 생각할 만한 상황이다. 결코 빈말이 아닌 진심이다....
"...말려들게 해서 죄송합니다, 에이든 씨."
그리고 이게 곤란한 상황이라는 건 에이든만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도 자명했다.
미안한 목소리로 그렇게 소곤거리는 노엘의 모습만 봐도 그러하다.
아무리 그녀 입장에서 에이든이 불가사의한 힘과 과거를 숨기고 있는 대상이라지만, 이렇게 위험한 일에 강제로 엮여들게 만드는 건 별개의 문제니까. 본인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모습이렷다.
문제는, 노엘로서도 그걸 강하게 거절할 구실이 없었다는 점일 것이다.
에이든이 기사 바로 아랫급의 전력을 가지고 있는 고급 전투원을 일격에 분쇄시킨 데다가, 신성을 다루는 성황국의 왕족까지 마찬가지로 일격에 분쇄한 게 바로 얼마 전이다.
황제도 굳이 이런 일까지 꾸민 걸 보면 그런 사실들까지 전부 전해 듣고 저지른 일이겠지.
"대신, 뭔가 직접 많이 하실 필요는 없으실 겁니다. 간단한 것 하나만 부탁드릴 테니까요."
다행인 점이라면, 그녀 본인이 그런 상황을 수습할 정도의 능력은 넘치도록 있다는 것이다.
에이든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대련장 정중앙에 있는 표지판의 색깔이 적색에서 청색으로 바뀐다. '대련 시작'을 의미하는 신호다.
그와 동시에.
"보주여, 연화여, 광명을 발하소서!"
격렬한 전투 함성이 연합의 전사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이어서 그 몸에서 문자들이 일제히 그 빛을 발한다. 환한 빛무리가 터져 나오며 주변으로 수많은 빛무리가 흘러나오고, 그중에서도 그런 빛이 무쳐진 광구(光球)도 몇 개 떠올랐다.
"구경하시는 건 처음입니까?"
척 봐도 눈이 동그래진 에이든의 모습에, 노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렇게나 험악한 인간들을 눈앞에 두고도 여유롭기 짝이 없는 기색이다.
"법력입니다. 대평원의 전사들은 스스로에게 금제(禁制)를 걸고 그에 대한 대가로서 힘을 수여받지요."
부족 연합의 주신 <상승上乘의 신> 우르간이 내린 권능.
그를 섬기는 일원들은 스스로에게 일종의 '금지 사항'을 추가함으로써 힘을 수여받는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가치 증명'을 하기엔, 부족함이 없을 상대죠."
그런 말이 이어지며, 그녀의 심장을 중심으로 순백의 기가 뭉게뭉게 풍겨 나온다.
에이든으로서도 익숙한 광경이다. 저게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하는진 이미 그가 직접 사용해 본 바 있기도 하다.
'...이 사람, 괜찮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이 앞서는 건 사실이다.
그만큼이나 눈앞의 전사들이 뿜어내는 위압감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이런 기를 다룬다고 해도 저만한 역량의 전사를 일대다로 상대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노엘이 아무렇지도 않게 에이든 앞으로 성큼 나서며 그를 뒤로 물렸다.
그리고 그게 마치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부족 연합의 전사들이 일제히 온몸이 찌릿 거릴 정도의 함성을 지르며 이쪽으로 쇄도해 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만치 무시무시한 돌진이다. 분명히 사람이 돌진하고 있는데도 마치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거대한 차량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걸 마주하고 있는 인간은 여전히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시범이나 좀 보여드릴까요."
이어서, 뽑혀 나온 순백의 기가 노엘의 심장을 중심으로 그 전신을 맹렬하게 타고 돌기 시작했다.
"-율(律)."
이어서, 노엘의 입가에서 그런 말이 경건하게 흘러나왔다.
"맹세합니다."
신에게 직접 바치는 축성- 곧, 이능을 강화 시키는 신과의 '소통' 방법의 하나. 제국의 주신 카르바에게 바치는 주 기도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투에서, 승리를."
바친 맹세에 천상의 신위가 응답하고, 그녀의 팔에 순백의 기가 아까보다 훨씬 더 강맹한 기세로 깃들었다.
"이능은 이런 식으로 형태를 갖춘 '물질'에 부여하면 훨씬 더 정교해지죠. 이렇게 신체에 담으셔도 되지만, 무기에 담는 게 더 효율적입니다."
"...아하."
"물론."
그리 담담하게 말한 노엘이 취한 행동은, 예전에 에이든이 몇 번 한 것처럼 제자리에 서서 내지르는 정권 지르기다.
다만 그와 다르게, 훨씬 더 숙련된 모습으로.
"순백의 기를 다룰 수 있으면, 맨몸으로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죠."
전신을 발사대 삼아, 권격이라는 포탄이 발사되는 모습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디딤발, 다리, 이어서 허리축을 타고 올라서 등, 그리고 팔, 일점으로 모아 쏘아내듯 주먹 끝으로.
그리고.
모든 기중에서 가장 정순하고, 그 덕분에 순간적인 [출력]에서는 모든 이능을 다 합쳐도 따라오지 못할 폭발적인 위력을 내는 순백의 기가, 축성을 통해 훨씬 더 강력해진 결과는.
---!!
----!!!!
에이든이 입을 쩍 벌렸다.
전방이 통째로 '밀려 나가는' 모습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공기가 찢어진다. 스테이지 주변에 펼쳐진 역장이 찌릿거리며 흔들리고, 관중석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일순 폭풍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대련장 주변의 모든 풍경이 일제히 나부낀다.
주먹으로 직접 친 것도 아니고, 그 끄트머리에서 나온 풍압만으로 이쪽으로 맹렬하게 달려오던 부족 연합의 전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대련장 저 건너편으로 나부낀다.
브레이크 고장난 8톤 트럭처럼, 파괴적인 힘을 담아 돌진하던 초인 여러 명을, 제자리에 서서 날린 주먹질의 '여파'만으로 모조리 밀어낸 것이다.
"...."
에이든이 멍하니 눈앞의 노엘을 바라보았다.
이거, 인간 맞기는 한가...?
"좀 아시겠습니까?"
"...."
불행히도.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무표정하게 그를 돌아본 노엘이 꺼내든 질문은 그를 더더욱 멍하게 만들 만한 것이었다.
이 정도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란 기색이었다....
'...모르겠는데?'
방금 거기서 대체 뭘 알아채란 말인가.
노엘 본인과 에이든이 종자부터 다르다는 것 정도야 넘치도록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마, 이 정도만 따라 해 주셔도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가치 증명' 정도야 넘치도록 되지 않겠습니까."
"...예?"
"순백의 기를 사용할 수 있다면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닌 기술이지요. 그 '색깔'이 가진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당신이 더 잘 아시겠지만, 이번엔 그 편린 정도만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
방금 그걸 따라하라고?
에이든 자신이?
"-!"
"--!!"
아찔한 감각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눈앞에 있는 부족 연합의 전사들이 벌떡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단순히 쳐서 날아가기만 했으니 별 부상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고, 따라서 저렇게 일어나는 것도 자연스럽지만.
안 좋은 점은, 그들 본인이 방금 당한 일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렷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것처럼 다들 이마에 굵은 핏줄이 솟아올라 있었으니까.
아마, 노엘이 그들을 가지고 논다고 생각하는 모습이겠지.
그리고 이전과 다르게, 노엘도 다시 달려드는 그들을 별로 막아설 기미가 없어 보인다.
'...내 팔자야.'
에이든이 핑 도는 정신줄을 부여잡고 간신히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어차피 이 여자와 위장 결혼으로 엮였을 때부터, 어떤 종류로든 위험한 일에 엮일 것이라는 각오는 처음부터 해두긴 했다.
그러니 황제에게도 직접 뛰어든다고 얘기했지.
방금 노엘이 한 짓을 그대로 따라할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믿어볼 만한 구석은 한 가지 있다.
그가 재빠르게 상태창을 눈앞에 띄워올렸다.
사용하려는 것은, 이전에 1회 남겨둔 노엘의 스킬 복사권이다.
-System Message
▶ '기(氣) 강화: 축성'을 복사합니다.
노엘이 써먹은 것과 동일한 기의 운용법.
스킬을 배우자마자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 '사용법'이 들어온다. 마치 누군가 머릿속에 글자를 또박또박 입력해주는 감각이다.
"...율律. 맹세합니다."
자신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오는 전사들을 마주한 상태에서, 에이든의 몸 근처로 기가 확 새어 나왔다.
옆에서 보고 있던 노엘도 고개를 슬쩍 끄덕이는 게 눈에 들어온다. 역시 그라면 당연히 해낼 줄 알았다는 기색이다. 이대로 그 기를 휘둘러 노엘이 한 것과 똑같이 따라하기만 된다.
뭔가, 일이 잘못될 여지에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노엘은 그리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에이든 본인은 조금 다른 걸 생각하고 있었지만.
"...."
그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엘을 보고.
관객석 위쪽에서 바라보고 있을 황제와 족장도 시야에 담아둔다.
만약에 일이 잘 풀리면, 저기에 있는 사람들한테서도 직접적인 반응이 올 것이다.
잘 안 풀리면?
'...그때 가서 어떻게든 해야지, 뭐.'
어차피, 그가 지금 비빌 구석은 이것밖에 없지 않은가.
그가 축성을 마처 끝마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행위만으로도, 심장을 중심으로 순백의 기가 확 퍼져 나옴과 동시에 전신을 묵직하게 속박하는 압박감이 느껴진다.
비록 일방적으로 이쪽에서 천상으로 올려보내는 메시지임에도, 이 통신 건너편에 있는 존재가 정말로 신성한 존재임이 대번에 느껴질 정도로.
염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맹세를 바치라고. 끊임없이 그런 속삭임이 들리는 느낌이다.
하지만, 거기에 추가적으로 말을 이어가는 대신에.
에이든은 조금 다른 짓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발, 먹혀라...!'
그런 기도에 가까운 속마음과 함께, 그의 몸에서 '신성'이 피어올랐다.
무채색의 화염. 얼굴 한 번 못 본 성황국의 왕녀님한테서 가져온 이능이다.
옆에서 노엘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거, 신성...? 아니, 그걸 대체 어떻게 당신이-"
하지만, 그런 반응이 이어지기도 전에.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백의 기에 그걸 밀어 넣는다.
발밑부터 피어오른 무채색의 불꽃이 후끈하게 그 기와 부딪혔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듯이 탐색하다가, 이내 두 가지의 기운이 서로에게 녹아들 듯이 뒤섞인다.
"...에이든 씨...?"
그리고, 옆쪽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노엘이 흘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자신이,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믿기지가 않는단 기색이다. 새파랗게 질린 안색과 부들부들 떨리는 눈동자가 그런 느낌을 뒷받침한다.
그녀가 지금 보고 있는 게, 어느 정도로 초현실적인 현상인지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느낌이다.
신의 '권능'이.
섞였다.
결코 섞여서는 안 될 두 가지 영역이 융합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상을 두고, 에이든의 눈앞으로 메시지가 쭉 이어졌다.
< System Message >
[ 신성神性이 축성의 반동을 정화합니다. 기와 신성이 융합됩니다! ]
!! System Message !!
[ 두 가지의 이능을 동시 사용합니다. ]
[ <고유 특성: 전능> 이 개방됩니다. ]
…심호흡을 하며 그런 것들을 눈으로 쭉 훑는다.
이런 것들이 떠오른 이상, 일단 노린 것은 성공한 모양이다.
-Skill Info
■ 전능 [ Locked ]
스킬이 잠겨 있습니다. 두 가지 이상의 이능을 동시에 다룸으로써 최초 단계를 개방하세요.
…이것 말이지.
저번에 봤을 때부터, 반드시 써먹겠다고 다짐하고 있던 능력이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 튀어나온 게 어느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냐의 문제지만.
[ <고유 특성: 전능>의 효과로, 각 이능을 합쳤을 때 새로운 효과가 개발됩니다! ]
[ <순백의 심장>과 <최초의 서원>을 합성하여, <수호자의 불꽃>을 개발하셨습니다! ]
…다행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보였다.
성황국의 왕족들이 다루는 신성은 아무런 색깔도 띠고 있지 않은 무채색의 불꽃 형태다.
정화의 신 시어가 내린 이능답게,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은 가장 순수한 형태를 띠고 있다 해야겠지.
그리고, 지금 여기에.
순백의 기와 그런 불꽃이 섞인 것처럼, '하얀색 신성'이 에이든 주변으로 펼쳐져 있었다.
신성으로 피어오른 불꽃이, 다른 이능의 영향을 받아 '색'이 부여된 것이다.
어찌나 강렬하게 타오르는지, 그 주변에 진공 상태가 펼쳐져 마치 누군가 풍경을 오려내어 손으로 마구 구겨놓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
"...."
에이든이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이거, 어쩐지.
생각했던 것보다도, 뭔가 더 위험해 보인다.
실제로 대련이 한창 진행 중인 와중에도, 그런 것의 속행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게 분명했다.
노엘도, 부족 연합의 전사들도, 심판을 맡고 있는 두나단도.
그 불꽃이 피어오르자마자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그리고, 다음 순간.
--------------------!!!!!!!!!!!!!!!!!!!!!!!
에이든을 중심으로 치솟아 오른 거대한 불기둥이, 스테이지 주변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반구에 부딪히며.
-노엘이 펼쳐놓은 방어 역장을, 아주 시원하게 산산조각 내었다.
8화. 데스위시
험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받는 사이일수록 꽤 통하는 면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황제와 두나단이 같은 결론에 이르는 속도만 봐도 얼추 설득력이 생기는 문장이겠지.
"...퍼져나가면 난장판 된다, 이거."
"동의합니다, 폐하."
이능을 다루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 하나.
모든 이능은 그 하나하나가 신이 그들의 신민에게 내린 그들만의 권능이다.
손상되어서도, 변형되어서도 안 되는 가장 오롯한 형태의 힘이나 다름없단 소리지.
이미 어떤 신의 권역 아래 태어나 이능을 부여받은 이는 오직 그 권능에만 복속되며, 다른 이능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을 '동시에' 다루는 것은, 대단히 희귀한 재능이다.
그건, 바꿔 말하면 여러 신에게 동시에 선택받았다는 말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런 와중에.
저 에이든 놈이란 녀석은 그런 이능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것 두 개를 동시에 사용했다.
기 중에서도 노엘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순백의 기와, 성황국의 왕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신성.
익히기 어렵기로 따지자면 둘 다 둘째가기로 서러워할 것들이다.
"뭘 보여줄지 기대는 했는데 말이지."
그렇게 중얼거린 황제가,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서류첩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누군가가 순발력 좋게도 당시의 현장을 찍어놓은 사진이다.
노엘이 펼쳐놓은 역장을 마분지처럼 찢어발기고 튀어 나간 모습이 아주 훤하다.
"비슷한 짓을 할 수 있는 놈은 성황국 왕족 중에서도 두 놈밖에 없어."
"법황과 데스위시입니까."
"그래."
"...참 대단한 원석이군요."
물론 벌써부터 그런 나라를 대표하는 괴물들 반열에 올려놓기엔 시기상조란 생각은 들지만, 그럼에도 그런 선상에 놓일 잠재력을 보인 건 틀림없다.
긍정적인 면을 보자면, 저 녀석이 사자심의 신랑 자리를 꿰찰 자격이 없다고 지껄일 대다수의 의견은 이것 하나만으로 순식간에 쓸려나갈 것이 분명하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너무 잘 달성해서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황제가 다시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이며 눈을 찡그렸다.
제국의 옥좌 위에 오른 뒤로 별별 꼴을 다 본 인간답게, 놀라움과는 별개로 머릿속으로는 냉정하게 주판을 튕기고 있었다.
"두나단."
"예."
"입단속 잘 시켜."
"물론입니다."
"그냥 잘 시키는 정도로 끝내면 안 될 거야. 필요하면 제국 암살청에서 인원 차출해가도 되니까 죄다 감시 붙이고."
"일부에게 이야기가 새어나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요."
"오랫동안 보안이 철통같이 지켜지는 건 바라지도 않아. 대신 제국의 황제가 이만큼이나 신경 쓰고 있다는 걸 티만 내도 당분간 버팀막은 될 거다. 저 녀석한테 침 바르려고 하면 나한테 싸움 거는 게 되니까."
저 정도의 인재가 앞으로 영영 소문이 나지 않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 바로 퍼져 나가서는 안 된다.
전후의 직접적인 피해 복구도 완전히 끝나지 않은 대륙이다.
이 와중에.
이만큼이나 '맛있는' 냄새를 풀풀 풍기는 대어가 떨어진다면, 어느 정도의 난장판이 벌어질지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그런 상황을 피하려고 하는 이유도 더 있었다.
황제나 두나단이나 한 가지 감상을 공통적으로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다른 놈들 주기엔 아깝지?"
"물론입니다."
황제와 두나단이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이런 당첨 예정된 복권을 남한테 넘기는 건, 너무 배 아픈 일이다.
"노엘한테 코가 꿰인 상태니까, 일단은 그쪽을 통해서 잘 데리고 있자고."
녀석, 어디서 비실비실한 놈을 데리고 온 줄 알았더니. 이게 웬 떡이란 말인가.
그렇게 말한 황제가, 다시 한번 서류에 찍혀있는 불기둥에 시선을 내렸다.
사실, 꽤 흥미로운 광경이다.
'노엘이 써먹는 순백의 기에, 왕족중에서도 드문 초고온의 신성....'
기는 기본적으로 별다른 속성이 없는 대신에 그 출력과 총량에 있어 특출난 강점을 가지고, 신성은 그 열기를 통한 파괴적인 공격력을 가진 대신에 출력을 높게 가져가기 어렵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에이든이 보인 불기둥은, '출력'에 강점을 가진 순백의 기에 '공격력'에 강점을 가진 신성이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두 개의 특성이 '합쳐진' 것처럼.
순백의 기처럼 쏟아져 나오는 신성의 모습.
'설마.'
황제가 피식 웃으며 파이프에 다시 연초 쌈지를 채워 넣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지나친 가정이다.
이능 두 개의 장점만을 취해 섞어낼 수 있다니.
만약 그런 짓이 진짜로 가능하다면....
'...전능(全能)이잖아.'
나중엔 어느 정도의 괴물이 될지, 짐작도 안 된다.
▣
- System Log
▶ '제국의 황제', 라이오넬 13세와 접촉합니다.
▶ '용 사냥꾼', 두나단 우`잘과 접촉합니다.
▶ 스토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조연들입니다.
▶ 메인 스토리에 미치는 영향력이 증가합니다.
▶ 새로운 특수 능력이 개방됩니다!
-Skill Info
◈ 운명의 길쌈꾼
[ 노엘 아스트리아 시머스 ]
- 유대: 2단계
◆ 순백의 심장
◆ 기 강화: 축성
[ 카티야 하인켈 크레이븐 ]
- 유대: 1단계
◆ 최초의 서원
『 라이오넬 13세 』
- 유대: 1단계
- 1개의 스킬을 복사할 수 있습니다.
『 두나단 우`잘 』
- 유대: 1단계
- 1개의 스킬을 복사할 수 있습니다.
에이든이 새롭게 들어온 정보를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예상했던 게 그대로 먹힌 모양이다.
'엄청 눈에 띄긴 했지.'
일이 잘 풀리면 이쪽에서도 반응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 정도로 대단한 화력이 나올 줄은 에이든도 예상 못 했던 부분이다.
덕분에 이런 어마어마한 인간들의 스킬 복사권을 하나씩 먹었다. 불평할 이유는 없겠지.
하지만.
-Quest Info
▶ 해당 항목에 표기된 사건들은 실패 시 막대한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 위장 결혼
- 당신은 노엘 경의 배우자로 간택되었습니다. 상대방과의 계약을 끝까지 유지하세요!
◈ 제1막, < 제도 균열 >
- 시나리오의 중요 인물들과 접촉 빈도가 충분할 정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 곧 시나리오에 당신의 존재가 정식으로 편입됩니다. 당신의 거취에 따라 시나리오의 향방이 결정됩니다!
- 관련 사건이 곧 발생합니다. (D-3)
스킬 복사권이 떨어져서 사건에 대비할 수 있게 된 건 좋은데.
그래도 좀 적당한 걸 떨어트려 줬으면 좋겠다.
이건 좀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안 돼.
안 된다...!
그렇게나 피하고 싶어서 애를 쓰던, 이 세계의 '메인 시나리오'에 들어가는 게 이제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이다.
스킬을 모아 대비한다는 것도 당장 눈앞에 있는 위험 요소들에만 대비하는 거지, 진짜로 주인공을 대체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떻게든, 벗어난다...!'
처음 이쪽에 끌려왔을 때부터, 목적은 거기에서 단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다.
시나리오 안쪽에 끌려 들어간다면 대체 무슨 지옥길이 펼쳐질지 상상조차 하기 싫으니까.
한술 더 떠서, 지금은 그쪽에 에이든을 끌고 들어갈 새로운 사건이 3일 안에 발생한다고 적혀있기까지 하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그때 무슨 일이 확실하게 발생하니, 최소한 '대비'는 할 수 있다는 거다.
지금까지는 아예 정체조차 모를 사건들에 끌려다니기만 했을 뿐이라면, 여기 적혀있는 사건은 무슨 결일지 짐작은 되니까.
그가 시나리오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판가름은 아마 이쪽에서 날 것이다.
"...."
에이든이 골똘하게 머리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원작의 지식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쪽의 진행을 생각한다면, 이게 무슨 종류의 사건일지는 그럭저럭 짐작이 갔다.
아예 대놓고 시나리오와 정식으로 관련이 있다고 못을 박을 정도의 사건이면, 모르긴 몰라도 평화롭게 서로 담소나 주고받을 확률은 대단히 낮다.
폭력과, 피와, 누군가의 고통이 뒤따르겠지.
그럼 그에게 당장 필요한 건 역시, 전투에 쓰이는 능력이다.
■ 전능 [ 1단계 ]
두 가지 이상의 이능을 조합하여 기존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 현재 발견한 조합
〓 수호자의 불꽃 (순백의 심장 ↔ 최초의 서원)
특성: 고출력, 고화력
순백의 기를 토대로 삼아 신성을 전개합니다. 기존의 신성보다 더욱 화력이 강하며, 신성 단독으로 사용할 때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에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 스킬 단계가 높아질수록 조합할 수 있는 이능의 숫자가 늘어나고, 추가적인 효과가 생깁니다.
※ 다룰 수 있는 이능의 숫자를 늘려서 스킬 레벨을 올리세요!
■ 근원 [ Locked ]
스킬이 잠겨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기 적혀있는 것들은, 그의 적성에 맞는다 보긴 힘들어도 꽤 든든하긴 했다.
당장 3일 뒤에 사건이 터졌을 때 그의 목숨줄이 되어줄 것들이니까.
'이능을 섞어서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다라....'
이능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아직도 알쏭달쏭한 에이든으로선 이게 얼마만큼의 효과를 가진 건지 잘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한 가지 추론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이능의 가짓수가 많을수록 선택지는 어마무시하게 넓어질 거라는 것.
그럼, 현재 최적의 선택지는....
『 두나단 우`잘 』
- 유대: 1단계
- 1개의 스킬을 복사할 수 있습니다.
역시, 이 사람일 것이다.
그 창을 선택하자 이 사람이 보유하고 있는 스킬이 시야를 주르륵 메웠다.
용 사냥꾼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무시무시해 보이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여기서 에이든이 찾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System Message
▶ '범용 이능: 법력'을 복사합니다.
부족 연합의 전사들이 다루던 금제를 통한 법력.
어떻게 다루는진 차차 익혀야겠지만, 적어도 에이든이 가진 능력 특성상 현재 이것만큼의 효율을 내는 스킬은 또 없으리라.
"...."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한결같은 사람은 있었다.
에이든이 눈앞의 노엘을 흘끔흘끔 바라보며 말했다.
바로 어제 그 난장판이 있었음에도, 당장 그녀가 보이는 태도는 거의 비슷했다.
"물어보고 싶은 거라도 있으십니까?"
그런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곧바로 노엘이 살풋 미소 지으며 그런 말을 던져왔다.
그런 대형 사고가 바로 얼마 전에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노엘의 기색은 여전히 한결같다. 예의 바름. 가면처럼 걸고 있는 얼굴의 미소.
"...아뇨."
어제 신성을 다룰 때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릴 만큼 놀란 기억이 있지만, 지금 집무실에서 그와 함께 있을 때는 여느 때와 다름없다.
그런 점을 정리해서 질문으로 던지자, 여전히 평탄한 기색으로 대답이 돌아왔다.
"확실히, 처음 봤을 땐 대단히 놀라긴 했지만-"
"했지만?"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천장이 안 보이는 사람이라 당신을 데려왔다고."
"...."
"...솔직히 말씀드려서, 전 기억하지 못하지만 에이든 씨는 예전부터 저를 알고 있다는 티도 풀풀 내시고 말입니다."
아.
그랬었지.
생각해 보면, 바로 얼마 전에 상황을 모면하려고 그런 사기를 치고 나왔었다.
노엘 입장에서는 정체도 모를 인간이 감추고 있는 사실 한 가지가 추가로 더 밝혀진 느낌밖에 없으리라.
"-이전에 말씀하신 게 무슨 뜻인지 알려주실 생각은, 여전히 없으신 거죠?"
"...."
빙긋 웃으며, 턱을 괴고, 은근한 목소리로 말하는 노엘 경의 모습은 솔직히 압박이긴 했지만.
알려줄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애초에 그는 노엘 경과 이전에 만난 적이 없으니까...!
"그럼 그냥 그대로 있어 주시면 됩니다. 제가 직접 알아보는 게 더 재밌을 테니까."
"...."
그러니까, 그런 것 없대두.
에이든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 뒤로 몸을 쭉 젖혔다.
조금이라도 안정을 취하기 위한 동작이었다.
물론.
- System Message
느닷없이 떠오르는 그런 창은, 그런 소박한 휴식 시도까지 앗아가고 있었지만.
▶ '데스위시', 카티야 하인켈 크레이븐이 당신에게 가지는 호감도가 높아집니다!
▶ 유대 단계가 상승합니다!
-Skill Info
◈ 운명의 길쌈꾼
오직 당신만이 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메인 스토리의 중요 인물들과 유대를 쌓음으로써 새로운 보상을 얻으세요!
[ 카티야 하인켈 크레이븐 ]
- 유대: 2단계
- 1개의 스킬을 복사할 수 있습니다.
에이든의 눈이 가열차게 찌푸려졌다.
...이건 또 뭐야?
▣
크레이븐 성황국의 왕궁 안에는 모두가 들어가길 꺼리는 방이 하나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불이 꺼져 있고, 내부에서는 괴상한 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울려 퍼지는.
선배 관리들이 신입에게 유령이 나오는 장소라고 속여 먹을 때 자주 쓰이는 곳이고, 실제로 꽤 성공률이 높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농담을 공적인 자리에서 내뱉을 용기가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왕궁에 있는 전원이, 이 방이 누구의 것인지는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카티야."
성황국 제1 왕자- 알레스터 팬셔스 크레이븐이 걱정스럽다는 목소리로 다시 말을 꺼내들었다.
적통 계승권자를 상징하는 금색의 법복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덕분에, 어둠 안에서도 '동생'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진 그럭저럭 잘 보이고 있었다.
"...제대로 들었니, 카티야?"
대답 대신 총성이 돌아왔다.
살이 뭉개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방 안을 그득 메웠다.
한가로운 대화 도중에 갑작스레 끼어들 요소들은 도저히 아니었지만, 방 안에 있는 두 명 모두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눈앞에서 총이 발사된 것을 목격한 제1 왕자도, 총을 '자기 미간에 대고 발사한' 제2 왕녀도.
"그러니까, 그런 짓은 그만두래도."
하지만, 그런 걸 보고 있는 알레스터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탄했다. 마치 절제심 모자란 어린아이의 장난을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비슷한 짓을 수십 번도 넘게 봤다는 것처럼.
실제로.
그런 말투에 어울리는, 어린아이같이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대답으로 돌아왔다.
"아, 못 들었다. 뭐라고 했어?"
자기 머리에 대고 총을 발사해 놓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기색이다.
"...."
알레스터가 착잡한 눈으로 어둠 안쪽을 바라보았다.
귀를 후벼파는 것 같은 끈적거리는 소리가 그쪽에서 연이어 들려오고 있었다.
가려져 있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그 너머에서 총알에 관통된 동생의 머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진 짐작이 되었다.
불가해한, 역겨운, 혐오스러운, 끔찍한.
아무리 좋게 말해도, 그런 표현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힘든 현상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카티야 하인켈 크레이븐. 성황국 왕족 내에서도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불세출의 천재.
역대 신성 사용자 중에서도 순위권을 다투는 역량을 가진 괴물.
하지만, 그녀가 가진 이능의 성질은- 본인에게 있어선 '저주'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알래스터가 시선을 떨구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임무야. 어머니께서 직접 하달하셨어. 제국 안에 중요한 사람이 생겼다고 하셨거든."
"중요한 사람?"
"신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했어. 성황국의 왕족도 아닌데."
이 말은 아마 카티야에게도 놀라웠던 모양이다.
어둠 속에서도 확실하게 눈에 띄는 금빛 눈동자가 알레스터에게 맞춰지며, 투명한 빛을 내며 깜빡거렸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데?"
"다중 이능 보유자라고 했어."
"기록상으로만 존재하던 거 아니야?"
"이번에 발견됐다 하더라고."
"신빙성은?"
"꽤 높아."
카티야가 잠시 침묵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방금 들은 정보를 토대로 상황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기괴하기 짝이 없는 행동 양식과 다르게, 카티야의 머리 회전은 기민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빠른 편이었다.
"그럼, 데려와야겠네?"
굳이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법황이 원하는 바를 순식간에 추론해 내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알레스터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직접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무력을 써도 좋으니, 반드시 데리고 와야 해."
"굳이 나를? 닭 잡는 일에 소 잡는 칼 쓰는 것 아니야? 성하께서 드디어 미치셨대?"
당당하게 튀어나오는 신성 모독에 알레스터의 입에 걸린 쓴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사실, 얼추 맞는 말이다.
그 남자를 성황국에 데려오는 것 자체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신성은 성황국의 왕족에게 귀속되어 있고, 그런 것이 외부인에게서 발현됐으면 최소한의 진상 규명은 해야 한다. 곧, 명분도 성황국의 것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괴물'을 보내는 이유라면.
"사자심의 신랑이거든, 그 사람."
그 말을 듣자마자 카티야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기 신랑 관련된 일이니 사자심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고, 무엇보다 이미 제국의 황제가 그쪽을 비호하겠단 뜻을 밝혔어. 어쩌면 무력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사자심의 신랑이라고?"
"그래. 분명 이름이-"
"에이든 켈러메인."
이번엔 이 말을 들은 알레스터의 눈썹이 기묘한 방향으로 휘었다.
"...맞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어제까지만 해도 완전히 무명이었는데."
"살짝 관심이 좀 있었거든."
그렇게 말한 카티야가 하품과 함께 침대 위에서 뒹굴거렸다.
살벌한 배경만 제외하면, 영락없이 나른한 고양이 같은 꼴이다.
"오라버니. 그 에이든이라는 사람."
"응?"
"얼마나 강하지? 오라버니가 보기엔 어때?"
"...소문만 들어도 상당해. 당장은 몰라도, 반드시 강해지겠지."
"날 죽일 수 있을 만큼?"
여전히 천진난만하게 돌아온 대답에, 알레스터가 피가 나오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 질문의 의도는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가능성은 충분하지."
"아."
카티야가 활짝 웃었다.
"그럼 반드시 데려와야지."
일컫기를.
데스위시(Deathwish).
곧, 죽음 희망자.
그런 별명을 가진 여자가, 순수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다녀올게. 제국."
9화. 데스위시 (2)
성황국의 제2 왕녀가 왜 또 그에게 침을 더 진하게 바르는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할 것이다.
첫 단계는 역시, 다음 날 오전이 되자마자 노엘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이쪽에 관리되고 있으니까. 이 인간의 실력을 생각하면 몰래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하다.
"외출하고 싶다고요?"
"그렇게 이상한 말을 한 것 같진 않은데요...?"
노엘이 가늘어진 눈으로 꺼내든 질문에, 에이든이 황망하게 반문했다.
사람이 좀 나갈 수도 있지. 저렇게 별말 다 듣는다는 얼굴로 볼 건 또 없지 않은가.
"그, 혹시 현재 생활에 불만이라도 있으십니까."
"예?"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하시죠.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해드릴 테니까요."
"아뇨, 불편함은 없는데...."
매일매일 군부 청사에서 일하는 노엘 옆에서 빈둥거리는 것도 솔직히 고역이다. 누가 보면 영락없이 데릴사위나 다름없는 꼴 아닌가.
그런 이유를 설명하니.
"...그거 에이든 씨한테는 좋은 거 아닌가요?"
"...."
"아무것도 안 하고 계셔도 제가 꼬박꼬박 봉급도 지급해 드리고 있고, 의식주도 다 해결되는데?"
"...."
그러게.
뭔가 변명처럼 꺼내기엔 말이 좀 이상하다.
에이든이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자니, 노엘이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딱히 청사에 영원히 감금시켜 둘 생각도 아니었으니 상관은 없습니다만... 호위는 웬만하면 데리고 나가시죠."
"호위요?"
"물론 본인이 보여준 실력이 있으니 쉽게 해를 당할 거란 생각은 안 해도. 에이든 씨는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 분위기가 있어서 말입니다."
"...."
"그래서 솔직히 외출하시는 것도 꺼려집니다만."
동의한다.
거기서 제일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게 본인이고.
"...잠깐 바람만 쐬고 오는 건데, 호위는 너무 거추장스럽지 않나요."
하지만, 지금부터 그가 바깥에서 할 일을 생각하면 호위를 붙이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다.
딱히 남한테 떳떳한 곳에 가는 것도 아니니까.
"아뇨, 그래도 호위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요."
"...."
무슨 10년 넘게 결혼 생활에 구르다 지친 유부남 같은 변명이었지만, 노엘은 말없이 한숨만 푹 내쉴 뿐 별다른 태클을 걸진 않았다.
아무튼 그녀가 거의 하루 종일 그의 옆에 붙어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럼, 다녀오시죠."
그래도, 이렇게 신속하게 허락할 줄은 몰랐는데.
시원스레 떨어진 문장에 에이든이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경호도, 감청도, 다 안 할 테니까 하고 싶은 것들 하고 오세요. 대신 이건 가지고 나가시고."
그런 말과 함께, 노엘이 뭔가를 에이든에게 건네주었다.
방범 부저처럼 생긴 손바닥 절반만 한 스위치다.
"이게 뭐죠?"
"위치추적기입니다. 결혼식 전에 도망가시면 안 되니까."
"...."
"농담입니다."
"...애초에 안 도망가요."
어차피 도망가 봤자, 이 사람이라면 어디까지든 쫓아올 것 같다.
그 대답에, 노엘이 만족한 듯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신호기예요. 조금이라도 위험해지시면 누르세요. 그럼 제가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이 사람이 평소 얼마나 격무에 시달리는진 옆에서 보고 있는 에이든이 제일 잘 안다.
하나하나가 국정 운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일인데, 그것 전부 내팽개칠 만큼 그가 중요하단 말인가.
"당신을 데려온 건 저니까, 나중에 계약 종료 후 무사히 돌려보내는 것도 제 몫이죠. '그렇게까지'가 아니라, 당연한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서류 위로 시선을 돌리는 노엘의 모습에, 에이든이 눈을 조금 크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 말이지.'
다짜고짜 사람을 납치해 온 것만 제외하면, 진짜로 책임 하나는 확실히 진다는 생각은 든다.
사람을 납치해 온 주제에 하나하나 신경 써주는 건 흡사 부모의 모습이다.
"감사합니다."
참, 좋은 사람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나 이상한 사람한테 납치되어 있어, 아빠."
...물론, 애초에 납치를 한 시점에서 그런 평가 외에는 받기 힘들지만.
청사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한 일은, 당연히 가족에게 연락한 것이다.
[그건 또 뭔 소리냐?]
수화기 건너편에서 깜짝 놀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피아 놈들한테 돈이라도 빌렸어? 내가 그런 범죄자 놈들이랑은 얽히지 말라고 그렇게....]
"아빠랑 나도 범죄자인데."
이런 소시민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이 도둑질 같은 짓으로 생업을 이어간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는다.
절대로 큰물에서 놀지 말라고 어렸을 때부터 그를 교육한 사람 아니랄까 봐.
에이든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납치되긴 했는데,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니야. 배부르고 등 따신 곳에 돈까지 받으면서 납치됐답니다."
[...대체 그게 뭐야?]
"그런 게 있어. 당장은 말 못 해주는데, 놀랍게도 전부 사실이야. 제도에서 가장 비싼 동네인데도 이러고 산다니까."
[나도 같이 납치해 주면 안 되냐?]
...이런 사람도 아버지라고.
하지만 지금 에이든이 앉아있는 자리가 뭔 자리인지 안다면 아버지 입장에선 기절초풍할 가능성이 높다. 나중에 상황이 다 정리된 다음에나 무용담처럼 밝히기로 하자.
"그보다, 아빠."
그리고 이런 미덥지 못한 아빠지만.
신뢰하고 맡길 수 있는 부분은 또 분명히 있기 마련이다.
"제도 암시장에 아는 사람 있어?"
수화기 건너편에서 잠시 침묵이 배어져 나오고, 이내 한숨 푹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도 일하게?]
"정보 모을 일이 좀 있어서. 난 여기에 인맥이 없으니까 소개가 필요해. 어디로 가야 해?"
[도구 상점의 빌리 헤이건. 암구호는 초승달과 햇님.]
뒷골목의 좀도둑이라고 해도, 수십 년간 그런 짓을 하면서 생업을 이어왔으면 일을 통해 형성된 '네트워크'는 말이 안 되기 마련이다.
에이든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아기자기하네. 알겠어."
[에이든.]
"응?"
[몸조심해라. 시셀라와 나는 언제나 네 편이라는 것 잊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가족한테 꼭 얘기해.]
"...알아."
이 사람들만큼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에이든의 편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분투하는 것 아닌가.
아빠와 여동생의 품에서, 다시 평화롭게 살기 위해.
"...하아."
그리고, 정말이지.
그가 지금 걷고 있는 곳은 분투하고 있다고 말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곳이다.
제도의 암흑가는 그 이름답게 험악한 분위기가 풍겼으니까.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다들 뒤가 구린 기색이 풀풀 풍기는 사람들뿐이다.
그럼에도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제1막은 여기서부터 시작.'
제1막, 제도 균열은 제국의 수도 안쪽에서 일어나는 대규모 분란과 반역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다.
가장 먼저 신경 써야할 게 뭔지도.
'불법 유통된 무기가 암시장에 대량으로 풀리는 다는 것.'
당연히 대규모 분란과 반역을 위해서는 훈련된 군대가 필요하고, 그들을 무장시킬 물자가 하늘에서 떨어지진 않는다.
어두운 루트를 통해 밀반입하는 게 정상이지.
제1막은, 그렇게 불법 유통된 무기와 관련된 사건에 '주인공'이 얽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
그래. 주인공.
노엘이나 성황국의 제2 왕녀처럼 시스템 창에 시나리오 최중요 인물이라고 표현된 인물들은, 그 말대로 주인공과 얽히는 '최중요' 인물들이지만 주인공은 아니다.
게임 전체의 스토리 축을 움직이는 이 세계의 중심. 끝끝내 세상을 구하고 말 구원자.
그런 존재가,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 녀석이 내 시나리오 탈출 급행 티켓이니까.'
지금 에이든이 해야 할 일은, 그쪽을 찾아서 지금 그에게 부과된 짐을 모조리 떠맡기는 것이다.
자신 같은 엑스트라는 사라지고, 진짜로 빛나야 할 인간을 무대 위로 올려야 한다.
사자심의 신랑이니, 세상을 구할 시나리오라느니, 그런 골치 아픈 일들 말이지.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며칠 뒤에 대체 무슨 사건이 일어날지 윤곽이라도 잡아야 한다.
이 세계에 주인공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그런 것이 일어나는 곳에 얽혀있을 테니까.
'....'
하지만.
만약, 없다면?
이전에 찾았던 자료에 드러나지 않은 것처럼, 만약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니, 아직 확실하지 않아.'
그것까지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 것 아닌가.
'여기구나.'
생각을 이어가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빌리의 공방. 암시장의 도구 상점치고도 담백하기 짝이 없는 이름일 것이다.
문 안쪽으로 들어서자, 손님에게 인사할 생각이라곤 추호도 없어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나른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초승달과 햇님."
암구호를 대자, 가게 주인이 볼을 긁적거리며 답했다.
"정보 값은 50골드야. 뭐가 궁금한데?"
"500골드 줄 테니까, 여기 있는 것들 확실히 긁어와 주시죠."
그렇게 말한 에이든이 미리 준비해 온 종이 뭉치 하나를 카운터에 턱 하니 올려놓았다.
암시장 내에서 굴러다니는 무기들에 대한 정보다. 대략적인 흐름만 파악해도, 거래 장소나 판매자, 구매자에 대한 윤곽 정도야 쉽게 잡아낼 수 있지.
가게 주인이 서류를 훌훌 넘기며 눈으로 쭉 훑었다. 이내 코 먹는 소리와 함께 조소가 날아왔다.
"죽기 딱 좋은 정보에 손대네. 위험한 일이 적성에 맞나 봐?"
"...선택지가 없거든요."
"저런."
그런 걸 피하기 위해 오히려 그런 상황 한가운데에 놓여야 하는 아이러니란.
에이든이 속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있자니, 다시금 남자가 질문을 얹었다.
"작업 기간은?"
"최대한 빠르게. 어느 정도 걸리겠어요?"
"내일이면 충분해. 500골드 약속은 지켜."
역시 아버지 지인이다. 일 처리 솜씨는 믿을 만하지.
고개를 주억거린 에이든이 남자가 서류를 카운터에서 본인 작업대로 옮기는 동안 가게 안을 휘적휘적 둘러보았다.
제도 암시장의 도구 상점은, 그가 원래 활동하던 변두리 뒷골목의 마도구 상점보다도 훨씬 더 많은 상품을 다루는 것이 분명했다.
당장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물건이 있는 것만 봐도 그러하지.
'...이딴 걸 왜 암시장에서 파는 거야?'
이게 뭔지는 '업계 종사자'인 에이든이야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마석으로 작동하는 가변 마스크와 음성 변조기.
범죄에 써먹기 딱 좋은 도구지만, 원래는 엄연히 정부 기관에서 연구하던 물건이다. 이런 곳에 떡하니 놓여있을 물건은 아니지. 확실히 제도가 아니면 구경도 못 할 특상품이렸다.
"살 거야? 품질은 보증하는데, 에누리는 없어."
"...돈 없어요."
사실 노엘이 '계약금'을 워낙 두둑하게 챙겨줘서 주머닛돈은 꽤 있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굳이 이런 걸 쓸 만한 상황은 당분간 없을 게 분명하다.
이런 것까지 써서 누군가를 '속여야 할' 상황은 지금 그의 위치에서도 맞닥트리기 그리 쉽지 않은 상황-
"...."
-그러니까.
창문 바깥의 어느 광경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지만 않았어도 그리했을 거란 의미다.
"...?"
에이든이 목을 쭉 길게 빼며 가게 바로 앞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뭔가.
기시감이 든다.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은 '광경'이 저쪽에....
"...!"
그리고, 그 모습을 명확하게 인식하자마자.
그의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System Message
▶ '서브 퀘스트'가 주어집니다.
▶ 실패 시 불이익이 주어집니다.
▶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시겠습니까? [Y/N]
그런 광경에 맞춰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에이든의 얼굴이 더 없이 창백해졌다.
'...아니.'
아니.
아니, 설마.
설마 이게 그가 지금 생각하는 그런 상황일리 없다.
그렇게 생각한 에이든이 떨리는 동공으로 '서브 퀘스트'라는 것의 내용을 확인했다.
"...."
그가 풀린 눈동자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살기 싫다.'
지금부터 해야 할 짓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감상이었다.
"하나 여쭐게요."
"뭔데?"
"이거, 얼맙니까?"
그렇게 말한 에이든이 가리킨 것은, 방금 비싸다고 말하며 손사래를 친 가면과 음성 변조기였다.
▣
암시장이란 곳은 그 특성상 별의별 사람들이 다 오기 마련이지만, 모두가 암묵적으로 기피하는 사항 몇 가지가 있기 마련이다,
이를 태면, '눈에 띈다'라거나, '귀중품을 들고 온다'라거나, '무방비한 상태로 온다'라거나....
그런 점에서.
지금 이 조그마한 소녀는, 상어 무리 사이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먹잇감이나 다름없는 상태일 것이다.
이런 귀하신 분이 왜 이런 곳에- 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어울릴 외양이었다.
장인이 한땀 한땀 세공해서 만든 게 분명한 명품 정장. 장갑에 부츠까지 깔맞춤으로 나온 게 이것만 가져다 팔아도 서민 한 달치 생활비는 우습게 나올 모습이다.
어딜 어떻게 봐도, 이런 곳에 어울릴 사람은 아니다.
"-그런 꼴로 돌아다니면 좋은 꼴은 못 본다고, 아가씨."
그리고 그런 요소가 조합되면, 마치 철가루가 자석에 이끌리듯이 이런 녀석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불한당 무리. 손에는 품질이 좋다고 보기 힘든 무기들을 제각각 들고 있지만, 개중엔 권총 같은 소형 화기를 갖춘 녀석들도 간간이 보였다.
이능을 갖추지 않은 일반인들에겐 그것만으로도 이들을 보고도 모른 척할 좋은 구실을 만들어 주기 마련이고, 여긴 안 그래도 무법 지대인 암시장이다. 이런 광경이야 관심을 기울일 것도 못 된다.
실제로 그런 무리가 소녀를 에워싸는 동안 그쪽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려는 이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고운 차림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다닐 만큼 만만한 곳은 아닌데.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왔나?"
"암시장 아니야?"
"...."
거의 쾌활하다고 해도 좋을 만한 대답이 돌아오자, 말을 꺼낸 남자의 말문이 턱 틀어막혔다.
누가 들으면 점심 먹고 오후에 피크닉 나온 줄 알겠다 싶은 말투다....
"...알면서 올 만큼 멍청할 줄은 몰랐는데.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취미 생활하러."
궤를 벗어나도 한참이나 벗어난 대답에, 불한당들이 동시에 멍해졌다.
"뭐?"
"제도의 암시장은 처음 오거든. 고향의 뒷동네는 여러 번 가봤지만."
그렇게 말한 소녀의 얼굴은, 여전히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좀 도와줄 수 있어? 너희들 정도면 적당할 것 같은데."
불한당들이 저들끼리 시선을 마주 보았다. 이내 그들 사이로 실소가 연이어 비어져 나왔다.
"암. 도와주지. 도와주고말고. 일단 저쪽으로 가서 뭘 도와주면 될지 이야기 좀 들어볼까?"
그렇게 말한 누군가가 암시장에서도 으슥한 뒷골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마 머릿속으로는 이미 이 소녀의 소지품을 탈탈 털어먹고, 추가적으로 인질로 잡아 누군지 모를 그 귀하신 부모에게 추가적으로 탈탈 털어먹는 그림이 초 단위로 완성되고 있으리라.
그리고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를 눈앞에 두고도, 소녀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도리어 더욱 환해지고 있었다.
마치, 정말로 '도와줄' 사람을 찾아서 다행이라는 기색이다.
"천천히 이야기 들어보자고. 응? 시간은 이제부터 많을 테니-"
표정 관리에 실패한 얼굴로 그런 말을 이어졌지만, 그 문장은 누군가 그의 어깨를 콱 움켜잡는 바람에 끊기고 말았다.
"어떤 새끼야!"
험악하게 말하며 뒤돌아본 사내가 곧바로 움찔했다.
그의 어깨를 잡은 사내는, 그야말로 악몽 같은 외모였으니까.
누군가 정성들여 칼로 세공한 것처럼 울퉁불퉁한 피부, 이마부터 목까지 가로지르는 흉터, 매부리코, 눈은 애꾸였고, 입술은 어디에서 잘렸는지 반이 사라져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범죄자라도 마주치자마자 새파랗게 질릴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흉측함이다....
"꺼져."
심지어, 목소리조차 칼로 철판을 긁는듯한 기괴한 톤이었다. 그 자리에 모여있던 사내들 전원이 듣는 것만으로도 뒷걸음질 칠 만큼.
"뭐, 뭐야, 싸우자는 거야, 이 새끼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목소리가 한 단계 더 낮아진다.
그 끔찍한 면상이 더 가까이 다가오자, 누군가로부터 히익-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마지막 경고야. 꺼져."
"...."
마음을 움직일 만큼 열정적인 웅변임이 분명했다.
그 자리에 있던 불한당 전원이 그 메시지를 이해하고, 말대답 한마디 없이 와르르 흩어져 줄행랑 침으로서 호응한 것만 봐도 확실한 사실이다....
"-너도."
이어, 그런 화려한 언변을 자랑한 남자가 씹어서 내뱉듯이 소녀 쪽을 돌아보았다.
"얼른 집에나 돌아가. 여긴 너같은 놈이 있을 곳이 아니야."
그렇게 말한 남자가 미련 없이 쿨하게 뒤로 휙 돌았다.
볼일 다 봤으니 갈 길 간다는 기색이다.
"아저씨."
하지만, 그런 그의 뒷덜미를 붙잡아 놓는 목소리가 곧바로 따라붙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구나?"
손발이 얼어붙는 느낌에- '변장' 중인 에이든이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그게 무슨 말-"
"날 구하러 온 거 아니잖아?"
"...."
"대충 눈에 보이는데."
-틀림없이, 정답이다.
에이든이 끼어들어서 구하려고 했던 것은, 이 무방비해 '보이는' 소녀가 아니라 '무장한 불한당 무리' 쪽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소녀가 누군지 생각했을 때.
!! Sub Quest !!
▶ '데스위시', 카티야 하인켈 크레이븐과 접촉합니다.
▶ 최대한 평화롭게 상황을 해결하세요.
▶ 현재 상황을 순조롭게 대처 시, 당신에 대한 대상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실패 시, 불이익이 주어집니다!
...방금 그 녀석들은, 사자의 아가리에 목을 집어넣던 것을 에이든이 뒷덜미를 붙잡아 빼준 것이나 다름없다.
"안 되지. 기껏 사람이 재밌어지려고 하는데 그걸 다 망쳐놓으면 어떻게 해."
"...."
"방금 그 녀석들은, '정당방위'로 처리할 수 있었는데. 응?"
뒷짐 지고,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한 소녀가 종종걸음으로 에이든 쪽에 접근했다.
쟁반 위로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은 미성이지만, 그걸 듣고 있는 에이든은 혈관이 버쩍버쩍 마르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
"책임져야지. 내 여가 생활 망쳤는데."
"...."
"제국까지 온 김에 여유가 조금 남아서, 기껏 시간을 쪼개서 좋은 기회를 잡았는데 말이야."
젠장.
빌어먹을.
에이든이 속으로 그런 단어를 연달아 곱씹는 사이, 소녀가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에이든으로서도 기억에 있는 얼굴이다.
성황국의 제2 왕녀.
메인 시나리오, 그중에서도 성황국 사이드의 최중요 핵심 인물.
그런 대상이.
"잠깐, 나랑 말동무 좀 해줄래?"
대수롭잖다는 말투로 그런 말을 꺼내 들었다.
10화. 데스위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