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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ESINGENIOS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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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umen

Chapter 11

1화 탈출 (1)

"강후야, 괜찮아?"

동료의 목소리에 강후가 수용소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살필 수 있는 녹슨 거울을 봤다.

테두리를 따라서 잔뜩 슬어있는 녹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핏자국도 같이 묻어 있다.

"음······. 주간 노동이 좀 무리였던 모양이네."

창백하게 변한 얼굴을 보고 놀랄 법도 하지만, 강후는 무표정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 때문이다.

자주 일어났던 일이라 대수롭지 않으니 별다른 감흥도 없었다.

일장일단이 있는 병.

마나를 느끼고 교감하며 끌어당기는 능력에서는 남들에 비해 압도적인 강점을 갖고 있지만.

몸이 견뎌낼 수 있는 이상으로 마나를 사용하면 탈진하고 쓰러지고 만다.

즉 체력 소모가 심하다.

그렇기에 마나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선 아이러니하게도 체력 회복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수용자를 마석 캐는 노예로만 보는 수용소에서 체력 회복은 언감생심이었다.

"버틸 수 있겠어?"

"신경 쓴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어."

"힘들면 힘들다고 얘기라도 해."

"······."

강후의 침묵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동료는 이내 자신의 철제 침상으로 돌아갔다.

수용소 18동 인부 61명 중, 강후를 제외한 모두가 곤한 잠에 빠져 있다.

새벽 3시.

취침 시간인 자정, 기상 시간인 오전 6시의 완벽한 중간 지점이라 도저히 깰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낡은 침상 위에서 잠을 청할 생각이 없는 강후의 정신은 더없이 맑기만 했다.

'인생이 참.'

강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 모든 상황을 어색하게 느끼지 않고 있는 이유는 자신이 쓴 소설에 빙의했기 때문이다.

구원자가 된 빌런의 생활백서.

인기가 많았지만, 변수를 준답시고 막판에 낸 배드 엔딩 때문에 욕을 바가지로 먹은 작품이다.

소설 속 주인공이 사실 마왕의 부역자였고, 결국 세상이 마왕의 손에 넘어갔다는 최악의 마무리.

'욕먹어도 싼 내용이었지. 차별화를 한다고 너무 무리수를 뒀어.'

몇 번을 곱씹어도.

무슨 고집에 정신이 나가서 그런 결말을 냈나 싶을 정도로 참담한 결말이었다.

만약 작중 주인공 – 엔딩에서는 빌런이 되지만 - 인 '장시환'에게 빙의했다면.

엔딩에서 5년 전인 지금, 세상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을 텐데.

하필이면 장시환의 대항마로 만든 비운의 빌런 '신강후'의 몸으로 빙의를 해 버렸다.

시니컬한 인물로 설계를 해 놓고 선천성 마나 과민증부터 해서 긍정적 요소를 말살시켜 놨으니······.

피폐한 정신으로 처박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며칠 사이, 정신적인 동기화가 완벽히 끝난 상태.

덕분에 빙의하기 전의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다.

물론 원작의 기억은 또렷하다.

'탈출이 늦어질수록 세상을 구할 골든 타임도 함께 놓치는 거다. 낭비할 시간이 없어.'

이야기 속 신강후의 시작은 빌런이지만, 결국 엔딩만 놓고 보면 그의 본질은 구원자다.

진짜 빌런은 마왕 강림을 돕고, 이 세계를 통째로 마왕의 손에 넘겨버리는 존재.

주인공 장시환을 포함해 영웅으로 추앙받는 열세 명의 헌터, 바로 '열세 개의 별'이다.

'그놈들의 입맛대로 잘 짜인 이 세계에서 빈틈을 찾는 건 쉽지 않겠지.'

신강후에게 설정된 특유의 염세주의가 감정을 잠식하지만, 그는 좀 더 먼 미래를 봤다.

어차피 마왕 엔딩을 보게 될 이야기의 끝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인간은 부역자들 뿐이다.

미래를 바꾸지 못하면 이러나저러나 죽는다.

딱히 살고 싶은 생각이 없으면.

사실 깊은 고민할 것 없이 지금 목을 긋고 죽으면 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은 지독한 비관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슴 속에서 꿈틀대는, 원작에서 신강후를 세상으로 나가게 만든 유일한 빛이다.

강후는 그 시기를 앞당기고 싶었다. 바로 오늘로.

이유는 명확했다.

새 수용자가 들어오면서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야 했었던 간수들이 가장 지쳐있는 날이라서다.

[신강후는 그날 청명 수용소를 탈출하겠다고 마음먹었어야 했다. 그날의 망설임이 그에게 3년의 지옥을 선물로 남긴 것이다.]

환상처럼 아른거리는 원작의 기억.

강후는 고개를 저으며, 그 기억을 휘휘 털어냈다.

그리고 입술을 질끈 깨물며, 거울을 살피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반드시 나간다.'

단기 목표를 정했다.

범죄 조직 이클립스(Eclipse)에게 관리되고 있는 거대한 인력 착취의 장.

청명 수용소를 탈출한다.

수용소 밖이라고 해서 세기말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의 현실이 천국처럼 느껴질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몸의 자유는 누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 정도면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다.

* * *

얼마 후.

"1분이다. 그 이상이면 네 똥은 안 끊겨도, 목숨은 끊길 거다."

"예."

강후는 간수의 감시 속에 수용소 바로 옆에 마련된 간이 화장실에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화장실 특유의 악취와 더불어 시체 썩는 냄새도 함께 풍겨왔다.

원래는 수용소 내에도 화장실이 있었다.

하지만 화장실 안에서 목을 매고 자살하는 수용자가 워낙 많아지다 보니 궁여지책을 낸 것이다.

인권 사각지대에 있는 이 수용소는 사실상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고.

이 화장실도 그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였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강후가 주변을 살폈다.

기억대로 밖에서 누군가가 발로 찼는지 외관이 찌그러지며 안으로 날카롭게 들어온 부분이 보인다.

살점을 그어 상처를 내기 딱 좋을 날카로움과 길이다.

스으윽!

강후는 망설임 없이 손바닥을 그었다. 그러자 선혈이 철철 쏟아지며 바닥을 적셨다.

남은 시간 50초.

강후가 피를 잉크로, 반대편 손가락을 붓으로 삼아 좁은 화장실 바닥 위에 오망성을 그렸다.

소환 의식이다.

성좌 '차원 강탈자'를 불러내는 의식.

지금의 강후에게 이 성좌가 필요한 이유는 간단했다.

차원 강탈자가 부여해줄 수 있는 성좌 특성은 전부 잠재력을 폭발시켜주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볼품없는 레벨 10 헌터의 육신으로만 수용소를 탈출하기에는 다수의 난관이 있다.

당장 문밖에서 장검을 든 채 기다리고 있는 간수만 해도 레벨이 45다.

헌터 경험을 쌓은 지 최소로 잡아도 1년은 됐다는 얘기다.

즉, 정면 승부로는 힘들고, 상황을 단번에 반전시킬 수 있는 힘의 확보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안 싸냐, 새끼야?"

날이 선 간수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바닥을 긁는 쇳소리도 같이.

40초.

오망성이 반짝이며 특유의 검붉은 생기가 피어올랐다.

물론 이제 시작이다.

강후가 오망성에 닿을 듯 말 듯 손바닥을 올린 채, 머릿속에서만 맴돌 생각의 말을 꺼냈다.

'내 운명을 관찰하고 있다는 걸 알아. 그리고 당신이 계약자의 비극, 시련, 슬픔에 열광하는 것도.'

······.

답은 들리지 않는다.

성좌와의 계약은 결코 일방통행이 아니다. 오고 가는 말의 교감과 의식을 필요로 한다.

차원 강탈자는 '하찮은' 인간의 반말에 감정이 상할 옹졸한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흥미를 느끼지.

'당신의 능력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나야.'

역시 무응답.

강후는 원작에서 차원 강탈자가 미래를 비관하고 부정하던 신강후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당신이 하루를 망설일수록, 이 세계에 찾아올 희망은 몇 배, 몇십 배로 더 멀어질 거야.'

앞으로의 삶이 결코 순탄치는 않을 것이다.

세상이 악마라고 손가락질을 할 빌런에게 빙의했으니.

또 마왕의 부역자들이 능숙하게 짜놓은 선전 선동의 틀, 프로파간다를 정면으로 들이박아야 한다.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이제 생생하게 현실이 된 세계에서 의미 없이 소모품처럼 죽고 싶진 않았다.

바로 그때.

[당돌한 놈. 네게 고귀한 성좌의 힘을 경험할 아주 짧은 시간을 주겠다. 증명해봐라.]

'됐어.'

강후가 웃었다.

그가 성좌로서 계약자를 지정하면 세 가지 특성을 부여한다.

첫째, 학습한 혹은 학습할 모든 스킬의 숙련도를 최대치로 유지시킨다.

둘째, 보스 스킬을 나의 것으로 강탈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셋째, 다른 헌터를 죽였을 경우 그가 섬기던 성좌와의 계약을 강탈할 수 있다.

하나 같이 계약자로 하여금 강력해질 수밖에 없는 특성이다.

그리고 지금 강후가 재미를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첫째, 스킬 숙련도다.

[신강후 Lv. 10]

[클래스 : 암살자]

[클래스 스킬 보유 : 단거리 도약(레벨 1 획득) / 횡이동(레벨 10 획득)]

[기타 스킬 보유 : 없음]

[고유 재능 : 제법 우수한 주력 / 대단히 뛰어난 동체 시력]

비록 스킬은 두 가지밖에 없지만, 요구받은 증명에 문제는 없을 듯했다.

그가 말하는 증명이란, 손에 피를 묻히는 것에 두려움이 없음을 보이라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밖의 간수, 그놈의 숨통을 끊으라는 뜻이다.

20초.

"······."

강후가 숨을 죽였다.

그사이, 임시로 특성을 부여받은 강후의 두 스킬은 전혀 다른 형태가 되어 있었다.

스킬 숙련도는 레벨 1에서부터 시작, 레벨 20이 되어야만 비로소 최대치가 된다.

숙련도 작업은 오랜 시간의 꾸준함을 필요로 하는데, 아무리 서둘러도 최하가 5년이었다.

물론 최대치를 찍는 것은 의미가 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스킬의 유지 기간부터 시작해서 거리, 파괴력 등등 모든 계수가 급상승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게 변했다.

1m나 뛰면 다행일 단거리 도약 스킬은 12m를 단숨에 좁히는, 사실상의 공간이동 스킬이 됐고.

살짝 측면으로 회피하는 수준인 횡이동 스킬은 은신 상태에서 대상의 등 뒤로 이동하게 됐다.

전자와 후자를 누가 같은 스킬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이것이 신강후라는 인물과 성좌인 차원 강탈자의 시너지다. 사기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

5초.

"이 새끼가······!"

끼익!

간수는 나올 기색은 없는데, 미안하다는 말조차 없는 강후에게 괘씸함을 느끼고 문을 열었다.

어차피 수용자가 하나 죽는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다.

어차피 '법'이라는 것이 그나마 기능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서울이 전부니까.

그 외에는 군벌과 범죄 조직, 용병들의 질서가 잡힌 세계다.

힘이 법이다.

강한 힘 앞에서는 살인도 죄가 되지 않는다.

바로 그때, 간수는 분명히 아주 잠깐이지만 강후의 모습을 봤다.

눈빛이 정확하게 마주쳤었으니까.

하지만 마치 사람이 투명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말이 되지 않는다.

겨우 레벨 10에 불과한!

자신보다 레벨이 35나 낮은, 보잘것없는 실력의 수용자를 자신이 놓칠 리 없다.

그런데.

푸우욱!

"커억!"

경동맥을 뚫으며 들어온 차가운 금속성의 무언가가 목의 중심점을 그대로 관통했다.

비명을 더 토해낼 것도 없는 완벽한 치명상이었다.

간수의 목 옆에 강후가 꽂아 넣은 것은 젓가락이었다.

더 이상 삶에 대한 미련이 없을 때, 깨끗하게 자신의 목숨줄을 끊기 위해 쓰려고 마음먹었던 무기.

하지만 삶에 대한 의지는, 젓가락의 방향을 자신이 아닌 적으로 바꿔주었다.

그리고.

[계약은 성립되었다.]

고귀한 성좌가 레벨 10의 볼품 없고 형편없는, 초라한 헌터의 부름에 응했다.

레벨 100을 넘어도 차원 강탈자와 같은 고위급 성좌와의 계약은 꿈도 꾸지 못하는 대다수의 헌터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이변이었다.

2화 탈출 (2)

간수의 옷은 빼앗아 입지 않았다. 3급 간수복이었기 때문이다.

계획대로 탈출하려면 2급 간수복 이상이 필요하다. 이 녀석은 아니다.

일단 강후가 죽은 간수가 들고 있던 장검을 주워들었다.

총 9등급으로 분류되는 헌터의 아이템 체계에서 8등급에 해당하는 무기 아이템이었다.

[고블린 전사의 장검]

[등급 : 8등급]

[근력 +10]

'단순하군.'

따로 특수한 효과는 없다.

물론 근력 10도 가치는 충분했다.

몸이 일반인 수준을 겨우 넘는 강후에게는 더더욱.

현재 강후의 근력은 5.

여기서 10이 오르면, 적어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몇 개월 꾸준히 한 수준의 몸은 될 수 있다.

[고블린 전사의 장검을 '무기' 탭에 등록하시겠습니까?]

바로 등록을 마쳤다.

헌터의 시스템 구조상 아이템을 이런 식으로 등록하지 않으면, 스탯 효과가 적용되지 않아서다.

하나의 무기만 등록할 수 있기에 많이 갖고 있다고 해서 효과를 다 볼 수 있지도 않았다.

'정문으로 가야 한다.'

강후의 시선이 향한 곳은 경계가 제법 삼엄한 정문 방향이었다.

그쪽으로 가야만 탈출에 용이한 최단 루트를 선택할 수 있다.

원작에서 신강후가 선택하는 탈출로이기도 하다.

정해져 있는 모범 답안인 셈.

청명 수용소의 상주 간수 자체가 많지 않기에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전투 능력이 있는 헌터면 수용소 관리보다는 던전 공략에 대부분 참여하기 때문이다.

'저쪽이 함정이고.'

북서쪽의 청명산을 봤다.

언뜻 보기에는 어둡고, 길도 복잡해 보이고, 경비 시설도 없어서 안전한 탈출로 같아 보이지만.

올가미와 덫은 기본, 푹 꺼지는 땅굴까지 파둔 곳도 있어 가장 위험했다.

이클립스 측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둔 함정이었다. 그쪽으로 가면 무조건 죽는다.

'눈길을 좀 끌어야겠다.'

강후가 장검을 든 채로 성큼성큼 수용소 18동 앞을 지나, 다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까운 간부 전용 숙소였다.

수용소 18동과의 직선거리는 50m 정도로 가깝다.

시간이 시간이라 그런지 불침번을 서고 있는 간수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잠들어 있었다.

어차피 비상 상황이 생기면 사이렌이 울리는 만큼, 비효율적으로 불침번을 여럿 두지 않았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간수에게로 최대한 숨을 죽이고 거리를 좁히려 하는 순간.

"음······?"

미세한 기척을 느낀 간수가 눈을 번쩍 떴다.

간수들은 전부 헌터이기에 그들의 예민한 감각을 무시할 수 없었다.

강후도 예상했던 바고.

영구적으로 차원 강탈자의 능력을 얻은 강후이기에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파앗!

10m가 넘는 먼 거리였지만, 강후가 도약 스킬을 활용해 순식간에 물리적 거리를 좁혔다.

허공에서 한참을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급격한 공간이동에 가까웠다.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타나는 것처럼 강후의 위치가 단숨에 뒤바뀌었던 것이다.

서걱!

앞서 죽인 간수에게 탈취한 장검으로 불침번을 서던 간수의 목을 깔끔하게 날렸다.

아무리 양질의 강화 장비를 착용하고 있다고 한들, 가장 취약한 부위인 목을 지키기는 어렵다.

투웅!

힘없이 아래로 떨어진 머리.

두 눈이 황망한 표정으로 강후를 바라봤지만, 강후는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간수의 머리를 발로 찼다.

그리고 바로 그가 입고 있던 옷을 벗겼다.

이제 본격적인 탈출을 시작하려 한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려면 위장은 필수다.

아무리 정문이 지름길이라고 한들, 죄수복 같은 수용자 전용 의복을 입을 수는 없잖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옷을 갈아입었다.

옷 여기저기에 피가 묻어 있긴 하지만,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얼빠진 수용자를 손봐주다가 튀어서 묻은 피라고 둘러대면 그만이니까.

그런 일은 청명 수용소에서 밥 먹듯이 일어나는 일 중에 하나다.

한편, 가장 벗기기 좋은 신발도 잽싸게 바꿔 신었다.

9등급의 아이템 신발.

민첩 스탯 5를 올리는 신발로, 10% 정도 주력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듯했다.

애초에 고유 재능으로 '제법 우수한 주력'을 갖고 있는 강후인지라 시너지는 괜찮을 것이다.

주르륵! 주륵!

강후가 간수동 근처에 있던 기름통을 가져와서는 주변에 남김없이 붓기 시작했다.

초봄이다 보니, 아직 추워서 여기저기서 불을 때려고 장작과 함께 준비해둔 기름이었다.

기름통의 기름을 말끔히 비운 후에는 죽은 간수의 속주머니에서 꺼낸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화르르륵!

그러자 간수동 외곽을 따라 만들어져 있는 기름띠 위로 불길이 활활 치솟았다.

탈출 계획의 시작이었다.

* * *

시간이 흐르고.

몸집을 키운 불길이 특유의 타는 냄새와 함께 시야에 들어오자, 다른 동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었거나, 잠에서 깬 간수들이 상황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뭐야? 불이야?"

"18동 앞이다! 누구 짓이야, 이거? 시체 소각은 간수동이 아니라 소각동에서 해야 할 거 아냐?"

"화재 진화반 불러!"

화재는 종종 있는 일이기에 당황하는 간수는 없었다.

애초에 헌터 출신의 수용자 인력을 착취하는 범죄의 현장이다 보니, 비상 대비는 물론 유사시엔 전투에 돌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신속히 수용자를 제압할 수 있어야, 그들의 인력을 온전히 마석 광산에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 무렵.

강후는 당당하게 정문을 향해서 걷는 중이었다.

누가 봐도 영락없는 간수의 발걸음으로.

[당당히 정문으로 오는 신강후를 간수들은 탈출을 시도할 수용자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시선과 밝은 조명이 큰 압박으로 다가왔지만 그럴수록 신강후는 더 당당하게 걸었다.]

원작 내용에 충실한 발걸음이었다.

강후는 서둘러서 뛰지 않았고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않았다.

바로 그때.

"정지!"

철컥!

정문 양옆 초소에서 동시에 조명이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라이트가 강후를 비췄다.

간수도 순환 근무를 하기에 서로의 얼굴을 모두 알지는 못한다.

가까이서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면, 간수 동료인지 수용자인지 알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강후가 태연하게 소리쳤다.

"어이, 나다! 18동! 우리 18동에 불이 났는데 생각보다 불길이 거세 지원이 좀 필요할 것 같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더 능청스럽게 굴었다.

동시에 양쪽 팔을 들어 엄지 끝으로 등 뒤를 가리키자, 강후에게 쏠렸던 시선도 뒤쪽으로 향했다.

"어, X발. 불이야?"

"어떤 새끼가 담배 핀 거냐?"

적절하게 관심이 쏠렸다.

이내 라이트는 바로 꺼졌고, 강후에 대한 관심도 사그라들었다.

그러는 사이, 강후는 시야에 들어온 차 한 대를 향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막 출발을 앞둔 차였다.

이미 운전석과 조수석에 간수 둘이 타고 있었다.

오픈 형태의 군용 지프차였기에 안에 어떤 간수가 탔는지 보인다.

해골 모양 세 개. 3급 간수다.

강후가 옷을 빼앗아 입은 간수는 2급 간수로 그들보다 상급자였다.

가까이 온 강후가 거리낌 없이 문을 열고 뒷좌석에 앉자, 운전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탈옥자가 있다. 18동 북서쪽에 있는 철조망 사이로 나갔어. 놈이 빠져나갈 앞길을 잡으려고 한다."

강후가 차분하게 답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이기에 모를 수가 없는 내용들이었다.

처음부터 생각했던 대답이라 아주 잠깐의 망설임이나 버벅거림도 없었다.

"······배정된 차가 있으실 텐데."

조수석의 간수가 강후를 흘겨보았지만, 상급자이기에 더 토를 달지는 못했다.

"여기서 이런 대화로 힘 뺄 거냐? 아니면 내려서 걸어가길 바라는 거냐?"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원하시는 지점까지 먼저 이동해 드리겠습니다."

강후의 질타에 운전수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액셀을 밟았다.

강후는 팔짱을 낀 채로 최대한 여유 있는 모습을 하고서, 시간이 흘러가길 기다렸다.

곧 앞의 두 놈이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릴 것이다. 분명 간수의 생김새와는 거리가 머니까.

게다가 핏자국도 자세히 살피기 시작하면 이상한 점을 눈치챌 수도 있다.

가리거나 숨기려는 행동 자체가 오히려 의심을 받을 수도 있고.

물론, 알아채는 시점이 몇 초라도 늦어질수록 정문에서는 그만큼 훨씬 더 멀어진다.

강후는 시간을 더 벌기로 했다.

"수용자 새끼들. 말을 안 듣는 놈들은 독방이 아니라, 그대로 죽이는 게 속 편한데 말이야."

운전수가 맞장구를 쳤다.

"솔직히 이름만 헌터지, 자기들 앞가림도 못 하는 패배자들 아닙니까. 우리가 갱생시켜주는 겁니다."

이클립스의 슬로건이 그랬다.

[쓸모없는 인간쓰레기를 쓸모있는 일꾼으로.]

강후가 청명 수용소로 납치되어온 것도 저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덧씌웠기 때문이다.

서울에 한정되어 움직이는 정부와 공권력.

그 외의 지역은 완벽한 무정부 상태였다.

- 통과!

그 사이, 정문 밖의 최종 검문이 끝나고, 지프차는 본격적으로 수용소 밖으로 향하는 도로에 진입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적막이 흐른 뒤, 검문소와의 거리가 300m 이상 벌어졌을 즈음.

처음부터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뒤를 계속 살피던 조수석의 간수가 가늘게 뜬 눈으로 물었다.

"2급 간수님."

"어?"

"18동에는 언제 오신 겁니까?"

"그저께 왔다."

"9조 근무셨나 보군요."

"그렇지."

이 부분까지는 강후도 아는 내용이기에 대답이 쉬웠다.

누굴 죽였는지 알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오늘 암구호가 뭐였습니까?"

간수들만이 알고 있을 암구호.

원작에도 언급된 바가 없으니, 죽었다 깨어나도 생각이 날 리가 없다.

강후는 다른 답을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예견했던 결과.

답은 하나뿐이었다.

솨악! 퍼석!

전광석화처럼 옆에 내려뒀던 장검을 들어, 순차적으로 두 간수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검에 마나를 최대한 싣는 안배도 잊지 않았다.

버프나 스킬 형태로 발현되지는 않지만, 마나를 실으면 예기가 좀 더 강화되는 효과가 있어서다.

"흐윽······."

"커걱······."

1초 아니, 0.5초만 망설였더라면 거꾸로 당했을 정도로, 두 간수의 반응도 빨랐다.

눈알을 까뒤집은 채로 죽어가고 있는 운전수는 이미 왼손에 마법 스킬이 캐스팅된 상태였고.

조수석에 있던 간수는 오른팔을 쭉 뻗어, 강후의 어깨를 단검으로 노리던 참이었다.

쿠웅!

"크윽."

운전수를 잃은 지프차가 산길을 따라 난 도로의 흙벽을 들이받고 멈췄다.

강후가 손잡이를 잡고 있지 않았다면, 자칫 밖으로 튕겨 나갔을 수도 있었을 충돌이었다.

핑······!

그 순간, 세상이 마치 360도로 회전하는 것처럼 강후의 시야가 한 바퀴 돌았다.

"망할 마나 과민증."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방금 일격에 힘을 싣느라 마나를 전부 끌어다 썼더니, 몸에 곧바로 과부하가 걸린 모양이다.

부우웅!

검문소 방향에서 엑셀이 밟히는 소리가 들린다.

멀리서 헤드라이트가 향하는 방향을 보니, 이쪽으로 출발한 것이 틀림없다.

'마지막 고비다.'

강후는 연신 고개를 휘저으면서 정신을 차렸다.

아직 탈출은 끝나지 않았다.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멈춘 지프차의 핸들을 다시 도로를 주행할 방향으로 잡은 뒤, 막 시작되는 내리막길에 맞춰 전력으로 밀었다.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과 무거움이 느껴졌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우우웅!

그러자 곧바로 차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마 자신을 추격하기 위해 나온 간수의 차라면, 아직 켜져 있는 헤드라이트를 보고 추적을 할 것이다.

물론 곧 들통나고 말 테니, 그때까지 조건부로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프스슷. 프슷!

강후는 도로 우측 아래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비탈길을 향해 그대로 몸을 날렸다.

이 역시 원작의 탈출 루트.

피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결국은 선택하게 되는 묘한 운명의 장난이었다.

3화 탈출 (3)

* * *

어둠이 짙게 깔린 비탈길 위를 달빛에 의존하며 내려가는 동안.

강후는 짧은 순간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수많은 상황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탈출 과정에서 간수 세 명을 죽였다. 원작에서는 없었던 일이다.

'아직 이 세계에서 형편없는 내 비중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로 미래가 바뀔 일은 없겠지.'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는 미래가 비틀리지 않길 바랐다.

그만큼 아는 것을 누릴 수 있을 테니까.

어쨌든 오늘의 변화로 성좌와의 계약이 무려 3년이나 일찍 이루어졌다.

강해질 준비는 끝났다.

이 특성과 능력을 치열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활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탈출을 선택한 이유가 퇴색된다.

사삿. 사사삿.

비탈길을 따라 조금씩 가까워져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새벽이라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지만,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있었다.

'성좌와 계약한 헌터다.'

그것은 바로 이쪽으로 추적해오는 헌터의 머리 위에 보이는 붉은 점이었다.

차원 강탈자와 계약하게 되면서 얻은 성좌 강탈 능력이 특성으로 활성화된 덕분이다.

성좌를 보유하고 있으면 자동으로 머리 위에 붉은 점이 표시되는 성좌 탐색 능력이 있기에 위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능숙한 교감자]

[중립 성향의 성좌. 마나 추적 능력을 보유한 성좌입니다.]

'아, 이래서 날 추적할 수 있는 거군. 마나의 흐름이 느껴질 테니까.'

멀리서 불빛 하나 없이, 정확하게 이 위치를 특정하고 올 수 있는 이유를 알았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저 헌터는 레벨이 최소 100은 넘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레벨 100이 될 때, 성좌와 계약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간택'이라고 불리는 절차다.

물론 훨씬 낮은 레벨에서도 계약은 이뤄질 수 있었다.

격이 떨어지는 성좌라면 세상 물정 모르는 계약자를 꼬셔서 의도적으로 조기에 묶어두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에 달린 셈이다.

어쨌든 레벨 100의 헌터면, 지금 상황에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다.

정면승부는 피해야 한다.

그 대신.

'끌어들여 친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강후가 마침 눈앞에 우뚝 서 있는 굵은 나무 뒤에 멈춰 섰다.

서로 위치가 어디쯤인지 짐작은 해도, 두 눈으로 볼 수는 없을 완벽한 사각지대였다.

사악!

강후가 들고 있던 장검으로 손바닥을 그었다.

그리고 선혈이 뚝뚝 흘러내리는 손으로 돌멩이 하나를 힘껏 움켜쥐었다.

피가 짙게 묻었다.

그렇게 시간이 약간 흐른 뒤.

파악!

앞의 굵은 나무와 눈높이가 맞는 지점에 힘껏 그 돌멩이를 밀어 넣었다.

깊게 홈이 파여있던 나무줄기라서 납작한 돌멩이를 밀어 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남아 있는 마나를 모두 짜내듯 끌어내선, 돌멩이에 한 번 더 불어넣었다.

"······."

이어 숨을 죽인 채로 마나 과민 상태를 억제했다.

원래 상태로 두면, 폭발적으로 주변의 마나를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럼 위장의 의미가 없다.

"우욱."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어서인지 바로 구역질이 났다. 동시에 쇠 맛도 함께 났다.

과민증으로 기절하기 전 징조.

단기간에 마나를 과도하게 많이 쓰고 회복하는 탓에 몸에 과부하가 걸려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강후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등 뒤에 보이는 나무를 타깃으로 삼아 횡 이동을 성공시키자 몸이 투명해졌다.

파슷! 파슷! 타앙!

이윽고 이동 스킬을 활용해 거리를 좁힌 헌터가 힘껏 추진력을 더하며 몸을 날렸다.

마나가 느껴지는 위치가 정확히 나무 뒤였기에, 고민할 것도 없이 그쪽으로 화력을 집중한 것이다.

"쥐새끼 같은 놈!"

그가 들고 있던 무기는 도끼였다.

퍼억!

묵직한 도끼날이 나무 옆을 강타하자 나무 전체가 흔들리며 도끼에 파인 곳이 사선으로 꺾였다.

하지만.

"없어?"

가장 중요한 존재가 없었다.

바로 강후였다.

헛물을 켠 헌터에게 돌아온 보답은 어디선가 불쑥 들어온 날 선 장검이었다.

푸욱!

"커걱······!"

턱 아래를 뚫고 들어온 장검이 그대로 얼굴 한가운데를 지나, 이마 위를 뚫고 나왔다.

강후의 노림수가 통한 것이다.

제아무리 레벨 높은 헌터라고 한들, 강철 턱을 가진 것은 아니기에.

자신의 능력을 믿고, 강후의 위치를 확신한 나머지 주변 경계를 놓쳤던 헌터의 패착이었다.

[대상을 죽이고, '능숙한 교감자'와의 계약을 탈취하였습니다.]

['능숙한 교감자'는 '차원 강탈자'에게 예속된 관계가 되며, 소멸과 계약 해지 이외에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능숙한 교감자'의 모든 능력이 당신에게 계승됩니다.]

이 메시지가 떴다는 것은 헌터가 죽었다는 뜻이다. 혹은 살아날 가망이 아예 없거나.

"커, 크걱, 커거걱······."

헌터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쓰러져가며, 강후의 몸을 잡히는 대로 움켜쥐었다.

성좌의 계약을 강탈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헌터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있다면 기억했을 것이다.

사기나 다름없는 능력이니까.

한데 지금 자신의 얼굴에 장검을 꽂아 넣은 이 탈옥수에게 그런 황당한 능력이 있었다.

쿠웅!

헌터가 쓰러졌다.

숨이 끊어진 심장은 다시 뛰지 못했다.

[추가 능력 열람]

[마나 추적 능력]

[야시(夜視)]

"좋아."

쓸만한 능력을 얻었다.

야시 능력을 얻기가 무섭게, 마치 적외선 야시경을 착용한 것처럼 어두웠던 시야가 달라졌다.

마나 추적 능력은 이 헌터가 자신을 추적한 것처럼, 은신한 적을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우웨에엑!"

방금의 일격으로 또 한 번 마나를 무리해서 쓴 탓인지, 이번에는 참을 수 없는 토악질이 나왔다.

그것도 붉은 피가 섞여서 나올 만큼 영 좋지 않은 상태였다.

"조금만 더 무리하면 이 자리에서 그냥 뒈지겠군."

강후가 주변을 살폈다.

마침 비탈길에서 좀 더 아래로 내려간 위치에서 새 도로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모래를 잔뜩 실은 덤프트럭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일단 이거라도 챙겨야······."

강후가 어질어질한 머리를 움켜쥐고 죽은 헌터에게서 도끼 한 자루와 목걸이, 팔찌를 챙겼다.

어떤 구성인지 확인해 볼 틈도 없이 전력으로 달렸고, 트럭의 모래 위로 힘껏 몸을 날렸다.

철푸덕!

모래와 일체가 된 몸.

"후아."

강후가 뜨거운 한숨을 토해내며 새벽하늘을 바라보았다.

"더럽게 맑네."

반짝이는 별들의 아른거림에 푹 빠진 채,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일단 안전한 곳이 필요하다.

* * *

30분 후.

청명 수용소에서 막 도착한 소식을 전달받은 한 남자가 내용을 확인하고 있었다.

강동현.

이클립스의 서열 3위이자, 정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는 1위, 2위를 제외한 사실상의 대장이었다.

충청권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범죄 조직 이클립스는 인력 착취로 유명한 곳이었다.

특히 마석 광산에서 많은 일꾼을 부렸는데, 그만큼 마석이 큰돈이 됐다.

헌터의 시대가 열리며 일부 광물이 마석으로 변했는데, 청명산도 그렇게 변한 마석 광산이었다.

"정문으로 나갈 생각을 하다니, 똑똑한 놈이군. 수용자에 어울리지 않는 당당함이 무기였겠지."

강동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떠올린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확실한 답을 찾아낸 강후에게 감탄했다.

[신강후]

[레벨 10. 암살자 클래스.]

[입소 시 모든 아이템을 몰수하였으며, 이후 육성 정보는 없음. 파악된 거주지 정보도 없음.]

보고서의 형태로 동봉된 강후의 정보도 확인했다.

대부분 수용자가 그렇듯, 간수들을 상대로 제대로 된 전투조차 할 수 없을 초보 스펙이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놈이라고 한들, 간수 하나만 붙어도 순식간에 무력화되고 마는 것이다.

가장 직급이 낮은 3급 간수라고 해도, 최소 레벨 35는 넘어갈 기본적인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레벨 10 헌터가 45, 55 둘, 여기에 성좌를 둔 100까지 잡았다 이건가······? 미친 새끼네, 이거."

강동현이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보고서를 곧이곧대로 믿자니, 눈뜬 바보가 된 느낌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레벨 10의 헌터면 던전의 전투 경험도 제한적일 테고.

심지어 수용소에서 생활을 2년 이상 했으니, 전투적인 감각 자체가 거의 사라졌을 것이다.

어떤 노림수인지는 몰라도, 저 정도 헌터들이 손도 못 쓰고 당하려면 강력한 일격이 필요하다.

"하나는 뒤에서 목 옆을 젓가락으로 찔렀고. 둘은 뒷좌석에 태웠다가 대가리가 쪼개졌고. 마지막 이놈은 마나 추적 능력도 있는데 턱 아래를 찔려······?"

기가 차는 결과물이다.

이 정도면 죽여달라고 아예 대준 게 아닐까 싶을 정도.

강동현은 강후가 탈출한 사실에 분노하고 있지는 않았다.

수용자의 탈주는 흔한 일이니까.

강후가 없다 해서 일이 마비되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일꾼이야 또 납치해오면 그만이다.

다만 수준이 제법 되는 헌터를 단숨에 제압한 레벨 10의 헌터라고 하니 관심이 가는 것이다.

"이상한 데서 관심이 가는군."

쭉 빨아들인 담배 연기만큼이나 강동현의 눈빛도 깊어졌다.

인생 패배자라고 규정한 탈옥수에게 관심을 가질 일이 생길 줄이야.

하지만 그럴 가치가 있을 만큼 강후의 행보는 특별함이 있었다.

* * *

대전역 인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공중전화를 가까스로 찾아낸 강후가 기억을 더듬어 전화를 걸었다.

원작의 신강후와 동기화된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른, 무의식에 깊이 박힌 번호였다.

- 여보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익숙한 음성.

제대로 연락이 닿은 듯해, 일단 마음이 놓였다.

"나야, 강후."

- 가, 강후 오빠?

"어."

- 오빠! 도대체 뭔 일이 있었기에 2년 넘게 연락이 안 돼? 아무리 헤어진 사이라도 그렇지······.

타박하는 듯하면서도, 안타까움과 애절함이 함께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이름은 한서연.

강후의 '전' 여자친구였다.

성격 차이로 헤어진 사이.

그래서 헤어지기는 했어도 흔한 남사친, 여사친의 느낌으로 종종 연락을 하고 지냈었는데.

2년 전부터는 연락이 두절됐던 것이다.

강후에게 벌어진 일을 그녀가 알 리 없었다.

"그럴 일이 있었어."

자초지종을 구구절절 말할 힘도 없기에 짧게 말을 끊었다.

시간은 흘렀어도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기에, 그녀도 강후의 말에 대답의 방향을 바꿨다.

- 오빠, 뭐가 필요한 거야?

"하루만. 네 집에서 좀 쉬자."

- 알았어. 내가 곧바로 데리러 갈게. 어디인데?

"대전역 5번 출구 옆 공중전화. 미안해."

- 미안은 무슨. 예전에 오빠가 나한테 해줬던 걸 생각하면 이건 당연한 보답이야. 기다려! 금방 가!

전화가 바로 끊어졌다.

동시에 강후는 한숨을 토해내며 옆에 보이는 화단 위에 대충 걸터앉았다.

그래도 트럭 위에서 잠깐 눈도 붙이고, 중간중간 쉴 일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나의 과사용으로 수차례나 과민증에 시달린 몸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레벨을 올리고, 저질인 체력 스탯을 어떻게든 끌어올리는 것이 필수다.

과민증에 몸이 본격적으로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 계속 체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구원자가 될 빌런의 역할에 왜 하필이면 이런 특이 설정을 죄다 갖다 붙여 가지고······.'

원작자이면서 동시에 강후가 된 그로서는 후회막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는 것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재능을 가졌기 때문이다.

오늘의 수용소 탈출은 그저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장담할 수 있었다.

4화 의뢰꾼 (1)

* * *

주변을 둘러싼 모든 풍경이 물에 탄 잉크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할 즈음.

한서연의 오피스텔에 도착한 강후는 처음으로 모든 부담을 내려놓고 푹 쉴 수 있었다.

바보같이 그녀를 믿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자신에게 바보 같았기 때문이다.

이별하기 전까지 애틋했던 사이라고 한들, 결국은 남이 되어버린 과거의 인연일 뿐인데.

한서연은 항상 마음속에 자신을 품고 있었다.

헤어지고 나서도 자신을 잊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를 믿었다.

다른 사람은 자신을 배신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남은 미련 때문에 그럴 수 없을 테니까.

한서연도 헌터였다.

레벨은 150으로 강후와 비교하면 아득히 높은 세계에 있는 실력자였다.

강후는 만난 순간부터 한서연의 성좌에 대한 정보가 보였기에.

헌터로서는 그녀를 자신보다 한참 앞서 나가 있는 실력자로 판단하고 있었다.

"······."

한서연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강후를 살폈다.

처음 오피스텔에 데려왔을 때보다야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얼굴이 창백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디 납치라도 당했던 거야?"

그녀가 속상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강후에게 물어본 것이 아니라 혼잣말이었지만······.

"이클립스에게 납치당했었어."

강후가 바로 답했다.

깊은 잠에서 깬 지는 좀 됐다.

단지 눈을 감고 쉬고 있었을 뿐이다.

이것만으로도 몸 상태가 빠르게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오빠, 안 잤던 거야?"

"아냐. 덕분에 잘 잤어."

강후가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꽤 흐른 탓인지, 한서연의 외모도 달라져 있었다.

전보다 더 근육질의 구릿빛 몸이 된 것은 물론, 허리까지 내려오던 긴 흑발도 쇼트커트가 됐다.

마지막으로 통화를 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막 헌터 세계에 입문한 초보였는데.

지금은 산전수전 다 겪고서 찌들대로 찌든, 오랜 짬밥의 헌터를 보는 듯하다.

"이클립스라면······. 마석 광산으로 끌려갔던 거야? 그놈들, 헌터들 납치하기로 유명하잖아."

"마석을 캐려면 마나가 필수니, 나 같이 레벨 낮은 헌터가 좋은 먹잇감이었을 수밖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오빠······. 미안해. 내가 평소에 자주 연락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한서연의 눈에서 당장에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했다.

그녀의 감정이 깊어지기 전, 강후가 차갑고도 냉랭한 말을 돌려줬다.

"내 운명을 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 나 역시 네 운명에 뭐라 하지 않듯이 말이야."

"하지만."

"마음 쓰는 건 그쯤 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는 신세가 될 거야. 주고받은 셈 치자."

"속으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차갑게 구는 그 성격은 안 바뀌었네. 오빠, 다 티나."

"이젠 나랑 엮여서 좋을 게 없을 거야. 이클립스에서 추적할 수도 있고."

"오빠, 나도 헌터야. 레벨 150. 어지간한 애들이 함부로 못 건드리는 수준까지 올라왔어."

"그래. 그 힘은 널 위해서 쓰면 되는 거야. 나까지 신경 쓸 것 없어."

"······."

한서연이 대답 대신, 침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닫힌 마음은 잘 열지 않는 강후다.

그런 성격을 잘 알기에 더는 고집부리지 않았다.

대신 준비해 둔 것들을 강후에게 쓱 내밀며 말을 이어갔다.

"갈아입고 나갈 새 옷. 그리고 세탁이 깨끗이 된 스마트폰이야. 어지간해선 추적이 안 될 거야."

"소속 길드가 적당히 회색 경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모양이네."

"응. 그리고 100만 원. 여기서 더 넣으면 오빠가 거절할 것 같아서 필요한 만큼만 뽑아왔어."

"그래."

"그리고 간단한 자료도 준비했어. 당장 서울 갈 계획이 아니면, 이 자료를 보는 게 좋을 거야."

한서연이 내민 자료는 정식 길드가 아닌 용병단에 관련된 자료들이었다.

강후에게는 꼭 필요했던 자료이기도 했다.

길드에 들어가는 것은 여러모로 강후에게 위험한 일이라서다.

'열세 개의 별'과는 접점이 생길 일을 줄여야 하는데, 국내 길드에는 장시환의 입김이 꽤 닿는다.

장시환과 직접적인 연줄이 없더라도, 열세 개의 별의 영향권에 들어갈 가능성이 컸다.

즉, 안전하지 않다.

지금이야 성좌 '차원 강탈자'에 대해서 열세 개의 별들, 그러니까 부역자들의 인지가 없지만.

어느 순간 인지되고 나면, 집요한 추격과 제거 시도가 이뤄질 것이다.

그래서 길드나 범죄 조직, 지방 군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용병단에서 의뢰만 받는 '의뢰꾼'을 하는 것이 가장 적합했다.

의뢰꾼은 의뢰가 마무리되고 난 후에는 완벽하게 남남이 되므로, 따로 엮일 일도 없다.

강후의 시선이 한곳에 오래 멈춰있자, 한서연이 말을 덧붙였다.

"가장 가까운 용병단은 내가 연결해줄 수 있어. 아는 언니가 단장으로 있기도 하고."

"가명은 상관없고?"

"당연하지. 레벨 스캔하고, 기초 검증을 하는 정도만 제외하면 아무것도 묻지 않을 거야."

"그럼, 여기로 연결을 해줬으면 해. 마지막 부탁이 될 것 같다."

"뭘 자꾸 마지막, 마지막 그래? 오빠가 전에 내게 주었던 사랑과 마음을 돌려주는 거라 생각해."

"서연아."

"응?"

"과거에 갇혀 있지 마."

용병단의 '아는 언니'에게 막 연락을 넣으려던 순간 한서연의 손이 멈췄다.

강후가 건넨 말에서 느낀 깊은 울림 때문이었다.

과거에 갇혀 있지 말라는 말은 분명 그녀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그 당사자가 눈앞에 있으니까.

한서연이 고개를 돌린 채, 붉어진 눈시울을 닦아내며 전화를 걸었다.

동시에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강후에게 말했다.

"잘 지내, 오빠. 늘 건강하고."

"너도 건강하길 바랄게."

그것으로 애틋했던 지난 감정도 모두 지금 이 순간에 묻었다.

* * *

준비는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연락이 닿았고, 강후가 만날 용병단 단장과 접선할 장소도 정해졌다. 대전역 인근이었다.

짧은 포옹을 마지막으로 한서연과 이별한 강후는 다시 대전역으로 향하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앞서 탈출 과정에서 얻은 아이템을 잠시 살폈다.

도끼는 따로 쓸 일이 없을 듯했다. 이런 무기를 활용하는 재주는 없었으니까.

나중에 적당히 가격을 받고 팔면 될 것이다. 도끼를 쓰는 헌터들이 아예 없진 않으니 말이다.

[순풍의 목걸이]

[등급 : 7등급]

[민첩 +15]

[상승의 기력 팔찌]

[등급 : 6등급]

[체력 +25]

[1분당, 체력 1 추가 회복]

마지막에 처치한 헌터에게서 빼앗은 목걸이와 팔찌는 각각 착용을 마쳤다.

기본 스탯이 턱없이 낮은 강후의 입장에서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아이템들이었다.

도합 40의 스탯이 올라갔다.

레벨로 보면, 40레벨 상승에 해당하는 스탯을 손쉽게 아이템으로 메꾼 셈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탈출 과정에서 전투가 있었던 것이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됐군.'

확실히 그랬다.

청명 수용소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기존에 있던 아이템을 전부 빼앗겼기 때문이다.

빈털터리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는 만큼, 쓸만한 아이템이 채워지는 것만큼 기쁜 것은 없었다.

그때, 택시 기사가 차내의 고요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조심스럽게 강후의 눈치를 봤다.

"손님, 라디오 좀 틀려고 합니다만. 괜찮으실까요?"

"그러시죠."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사가 늘 듣던 주파수에 채널을 맞췄다. 때마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장시환 헌터는 강원도 정선에 본거지를 둔 용병단 '하얀 장미단' 전원을 척살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얀 장미단은 강남역 11번 출구의 테러 사건을 획책한 범죄 조직으로 오래전부터 장시환 헌터의 추적을 받아왔습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얀 장미단은 테러 조직이 아니다.

당연히 강남역 11번 출구의 테러 사건도 그들의 소행이 아니다. 장시환의 자작극이다.

하지만 내막을 모르는 일반인의 시점에서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

마침 택시 기사가 강후가 생각했던 것과 딱 같은 말을 꺼냈다.

"역시 장시환 님! 대한민국에 이런 영웅적인 헌터가 있다는 사실이 참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이미지메이킹의 힘이다.

더 나아가 앞으로 강후가 마주할 미래의 맛보기이기도 했다.

부역자의 엔딩을 바꾸기 위해 본격적으로 장시환과 대척점에 서기 시작하면, 그는 전력을 다해 자신을 악당으로 몰 것이다.

원작에서 수도 없이 이뤄진 일.

전 세계적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열세 개의 별은 언제든 여론을 자신들의 뜻대로 만들 힘이 있다.

"저희 아들도 얼마 전에 헌터로 각성했는데, 어떻게든 장시환 님의 길드에 들어가려고 하더군요."

강후는 기사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혼 없는 긍정을 하고 싶지도, 굳이 감정이 담긴 부정을 하고 싶지도 않아서다.

'가깝게 보면 레벨 20이 가장 중요해. 스킬을 얻는 순간에 바로 숙련도 최대가 될 테니.'

헌터에게 있어 기본 스킬 획득은 레벨 1, 10, 20, 30, 40, 50, 100의 순서로 이뤄진다.

더 확장하면 200, 400, 800도 포함되지만 상당히 먼 이야기이기에 보통 100까지를 본다.

성좌 효과를 톡톡히 보려면 어쨌든 스킬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레벨 20이 되는 방법도 있고, 보스 몬스터로부터 스킬을 강탈하는 방법도 있다.

다만 연줄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던전 출입은 언감생심인 만큼,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비용을 현금으로 결제하고 내리자마자, 먼저 약속 장소에 나와 있던 '단장'이 강후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서연이에게 얘기 들었어요. 고등학교 동창이셨다면서요? 저는 이예린이에요."

"정선규입니다."

강후가 가명을 댔다.

악수로 맞잡은 그녀의 손을 따라서 따뜻한 기운이 전해졌다.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

'버퍼 겸 마법사다 이건가.'

강후는 그녀에 대해 잘 알았다.

훗날 열세 개의 별에 대적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설정해 둔 존재니까.

아마 지금 시점에도 레벨이 최소 250은 넘고 있을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일 수도.

당연히 성좌도 스캔된다.

[혼돈의 관찰자]

[중립 성향의 성좌. 시야 왜곡과 차단에 특화된 능력을 가진 성좌입니다.]

'서열 100위권 내에 있는, 든든한 후원자를 두고 있기도 하지.'

나름 공들여 설정한 인물을 이른 시점에 만난 덕분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작중 신강후와는 추구하는 바와 그 결이 비슷하기에 앞으로 도움이 될 일이 훨씬 더 많을 듯했다.

"어떤 일이 하고 싶죠? 채집 의뢰?"

레벨이 10이라는 것은 이미 한서연을 통해 전달된 터라, 그것에 맞는 견적을 미리 낸 듯했다.

물론 강후가 원한 일은 아니다.

"던전 공략도 좋고. 아니면 까다로운 수배자 추적도 상관없습니다만. 보상만 확실하면."

"수배자야 한두 놈이 아니지만, 마음 하나만으로 놈들을 잡을 수 있는 건 아닐 텐데요."

"놈들을 잡는 데 레벨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얼마나 놈들의 습성을 잘 파악했느냐가 중요하지."

"자신 있다는 건가요?"

이예린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강후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근거 없는 자신감인가 싶었지만, 눈빛을 보니 아니었다. 그만의 특별한 독기가 있었다.

확신이 없다면 허세로도 보여줄 수 없는 선명한 독기였다.

강후가 답했다.

"오늘을 살려고 처절하게 도망치는 놈에게. 오늘 죽어도 상관없는 미친놈은 부담스럽겠죠."

"그 미친놈이 선규 씨라는 건가요? 선규 씨, 패기와 현실은 달라요."

"편견과 실제도 다르죠."

"좋아요. 그럼 실력을 한 번 보죠."

"얼마든지."

강후가 원했던 그림이 나왔다.

5화 의뢰꾼 (2)

* * *

'심판의 날'과 함께 헌터의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대전역 인근은 늘 사람이 붐볐다.

10년 전의 얘기다.

하지만 지금은 을씨년스러운 찬 바람만이 부는 침묵과 고요의 장소가 되어 있었다.

상점이 많았던 번화가는 공실만 가득한 죽음의 거리가 됐다.

그리고 사람이 전혀 안 다니는 텅 빈 거리가 되어, 주변 시선에서 자유로운 비밀 지대가 되었다.

이예린은 강후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선 뒤, 먼저 운을 뗐다.

"저는 선규 씨에게 딱 한 가지만 볼 거예요. 스킬을 피할 수 있는가. 그것뿐이죠."

"암살자 타이틀을 달고 있으니, 적어도 제 몸 하나 간수 할 수 있는지를 본다는 거겠죠."

"맞아요. 피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공격 기회를 바로 가져올 수 있다는 뜻이 되니까."

이런 테스트를 원했다.

아무리 입에 발린 소리를 해봤자, 이예린처럼 실력으로 평가하는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눈을 믿지, 귀를 믿지 않는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움직임을 본다.

"준비됐습니다."

강후의 눈빛이 반짝였다.

[고유 재능 : 제법 우수한 주력 / 대단히 뛰어난 동체 시력]

이럴 때를 대비해서 항상 빛을 발휘할 준비를 하고 있는 고유 능력이 있다.

'언제든 장시환의 뒤를 노릴 수 있는, 긴장감을 줄 빌런이 되도록 해 뒀던 안배.'

왜 더 많은 재능을 주지 않았을까 아쉬웠다. 하지만 그때는 빙의할 줄 몰랐으니 그랬을 수밖에.

그래도 '암살자'로서의 정체성은 확실하게 잡아뒀기에 미래에 대해서는 불안하지 않았다.

다만 긴장해야 할 부분은 있다.

뛰어난 재능을 과신하는 일.

장시환을 비롯한 열세 개의 별은 정말 무서우리만치 자신들에게 혹독한 실력의 잣대를 적용한다.

아득히 높은 실력으로 그들만의 세상에서 사는 부역자 놈들도 그럴진대, 느슨해질 자유는 없다.

"시험 스킬은······."

"바로."

친절하게 시험용 스킬을 알려주려는 이예린의 말을 끊었다.

위장과 위선이 난무하는 전장에 그런 '매너'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슈르륵!

이예린이 바로 자신의 양손 위에 녹색 빛의 구체를 만들어냈다.

어떤 스킬인지는 보자마자 바로 파악을 끝냈다.

'안개 추적자.'

안개 형태의 하수인을 만들어낸 뒤, 목표물에 들러붙도록 만든다.

안개가 스치기만 해도 목표물의 몸에 흔적이 남아서 먼 곳에서도 얼마든지 추적이 가능하다.

공격 스킬이 아니기에 피격당하더라도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킬을 피하지 못했다는 증거는 남으니, 그 자체로 테스트가 끝나는 셈이다.

화악!

이예린이 불쑥 손을 뻗으며, 안개 추적자를 강후에게 보냈다.

시전자의 뜻대로 움직임을 조종할 수 있기에 굉장히 까다로운 녀석이다.

'적당히 피할 재주만 있어도 밥값은 하는 거니까.'

이예린의 머릿속에 강후가 피하는 그림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저 얼마나 늦게 안개 추적자에게 당하는가.

아니나 다를까.

'역시.'

강후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제자리에 긴장한 듯이 멈춰 선 것이 보였다.

예측이 어려울 것이다.

이예린이 좀 더 추진력을 불어넣자 안개 추적자가 속도를 높이며 순식간에 강후를 덮쳤다.

바로 그때.

파아앗!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던 강후의 몸이 10m는 족히 뒤로 빠진 곳에서 나타났다.

'레벨 10 암살자치고는 기본 도약 스킬이 너무 화려하잖아?'

산전수전 다 겪은 이예린이기에 자신의 클래스가 아니어도, 다른 스킬에 대한 견적은 낼 수 있었다.

지금 강후가 보인 도약 스킬의 성능은 레벨 250 이상의 암살자가 보일 수 있는 숙련도였다.

그것도 잘 풀렸을 경우를 가정한 것이고, 350에서 400까지로도 볼 수 있는 수준.

한 번은 우연일 수 있다.

이예린이 곧바로 안개 추적자의 속도를 더 높였다.

안개 추적자는 레벨 250의 그녀가 주로 쓰는 스킬 중 하나인 만큼, 성능을 극대화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쿠와아아!

공간을 가르는 굉음까지 들려올 정도로 속도가 붙었다. 실로 벼락같은 덮침이었다.

스으윽.

하지만 강후는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딱 두 걸음만 옆으로 이동해서 공격을 말끔하게 피해냈다.

그뿐만 아니라, 바로 옆에 우뚝 솟아 있던 기둥을 타깃으로 삼아 횡이동으로 자신의 모습을 숨겼다.

기둥 뒤로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은신이 활성화된 것이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이예린이 마나의 흐름을 추적하며 강후의 위치를 특정하려 했을 때.

'앞이라고?'

이예린이 본능적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몸이 먼저 반응하며 뒤로 쭉 물러났다.

그리고 간발의 차로 그녀가 있던 자리에서 강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신 후에 도약 스킬을 쓰면서, 바로 역공을 노렸던 것이다.

물론 진짜 살의가 있던 것은 아니지만.

"와."

당황, 놀람, 의외, 안도.

다양한 감정이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예린이 손짓으로 안개 추적자를 소멸시켰다.

이미 테스트는 충분히 된 것 같았기에 바로 강후에게 물었다.

"훈련받은 적 있어요?"

"없습니다."

"레벨 스캔은 분명히 10이 맞는데. 이런 감각적인 움직임을 탑재할 수 있는 레벨은 아니잖아요."

"검증된 겁니까?"

강후는 그녀의 말에 굳이 답을 해줄 필요가 없어 화제를 돌렸다.

중요한 건 방금 했던 일의 목적이니까.

"네. 이 정도면 레벨 50 정도로 판단하고 의뢰를 해도 될 것 같아요."

"참, 잘됐네요."

긍정이 듬뿍 담겨 있는 말의 내용과 다르게, 강후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예린은 강후를 보며, 그가 평생 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입가의 근육이 상당히 경직되어 있다.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그 기억을 잃어버린 것처럼.

분명 사연이 있는 헌터 같은데, 그가 자신에게 속을 드러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대화의 결이 그렇잖은가?

그는 철저하게 이야기의 핵심을 제외한 그 어떤 말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 * *

이예린이 끌고 온 검은색 밴 안에서 다음의 이야기가 이뤄졌다.

용병 일에 얽힌 두 사람의 대화라고 해봤자, 의뢰 제안과 수락의 단순한 구조다.

밴 안에는 겹겹으로 창문에 붙여둔 투명한 판이 있었는데, 방탄 용도가 분명해 보였다.

강후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의뢰서를 꺼내며 말했다.

"요즘 귀찮은 총잡이가 하나 더 붙었거든요. 이클립스 놈들의 사랑을 듬뿍 받다 보니. 호호."

이클립스에서 그녀를 경계한다는 뜻이다. 아마도 이권 사업에서 충돌하는 부분이 있을 터.

총잡이가 붙었다는 건, 마나 건을 전문으로 다루는 '거너' 클래스의 헌터가 미행함을 의미한다.

굳이 방아쇠를 당기지 않더라도 언제든 그녀를 노릴 수 있음을 경고하는 의미에 가깝다.

"이겁니까?"

강후가 손을 뻗어 이예린에게서 의뢰서를 넘겨받았다.

그녀의 말에 관심이 가기는 했지만 결국 그녀의 일이다.

안다고 해서 신경 써 줄 일도 아니다.

먼저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고.

"네. 수배자 추적 의뢰예요. 의뢰인은 저고요. 선규 씨에게는 쓸만한 의뢰일 거예요."

용병단의 사람들은 내용을 최대한 축약하되, 핵심을 담는 작업에 익숙하다.

이예린에게서 넘겨받은 의뢰서도 필요한 정보와 용건만 짧게 적혀 있었다.

[김목현. 레벨 50. 마법계.]

[경기도 오산. 버려진 폐허 던전. 3등급 아이템 '바르타로스의 신발'에 대한 회수 요청.]

"살려서 와야 합니까?"

강후의 말을 들은 이예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큭. 아, 미안해요. 이런 질문을 바로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만."

보통 왜 수배자가 되었는지.

그러니까 추적을 당하게 된 이유를 묻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강후는 생포가 필수인지 아니면 아이템 회수만 할 수 있으면 죽여도 되는지를 묻는 것이다.

사실 나쁘게 말할 구석은 없고, 좋게 말하면 프로페셔널하게 의뢰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뜻했다.

이예린이 말을 이었다.

"죽여도 돼요. 김목현의 소행으로 확인된 일반인 살인이 너무 많아서요. 오히려 좋아할걸요?"

"헌터 치안청에서는?"

"잡으면 현장 처형이에요."

헌터 치안청.

국가기관으로 다수의 헌터 치안관이 있지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는 서울이 전부.

어쨌든 치안청의 판단이 공식적인 근거를 갖기에, 처형 판단이면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다.

물론 법의 체계가 와르르 무너진 작금의 세계에서, 법의 입김이 닿는 곳은 대단히 제한적이다.

김목현 정도의 잔챙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럼 의뢰품만 회수하고."

"네. 나머지는 선규 씨가 다 갖든, 처분하든 뭘 하든 제 의뢰 사항 밖이에요."

"바로 착수하죠."

"버려진 폐허 던전이 워낙 넓어야 말이죠. 구석에 박혀있을 테니, 쉽진 않을 거예요."

"직접 찾아 나서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치칙. 치칙. 화르르륵!

강후가 바로 의뢰서를 태워버렸다. 내용은 머릿속에 담았으니 더 확인할 것도 없다.

그녀가 말을 보탰다.

"보상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공할 수 있는데, 어떤 식으로 받기를 원하죠?"

이예린에게 의뢰를 받기 전부터 강후의 생각은 하나였다.

"던전 공략 라이센스만 얻을 수 있으면 됩니다. 특히 미들 보스, 라스트 보스가 많은 쪽으로."

중간 보스 몬스터라고도 불리는 미들 보스, 그리고 보스 몬스터.

이 둘에게서 스킬을 강탈할 수 있다.

다른 헌터는 절대 얻을 수 없는 보스의 고유 스킬을 얻는 것이다.

강후는 레벨은 물론, 보유 스킬의 개수를 최대한 빠르게 늘리고 싶었다.

성좌 덕분에 어떤 스킬을 얻어도 숙련도를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 무조건 이득이다.

"좋아요. 보상은 사후 협의? 아니면 사전 협의?"

이예린의 말에 강후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서는 차 문을 열며 말했다.

"단장의 센스를 믿어보죠."

그 말을 끝으로 강후는 경기도 오산시로 향하는 무궁화호를 타기 위해 역으로 이동했다.

* * *

기차 안.

임박해서 표를 구매했음에도 한 자리가 비어 있어 꽤 운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앉아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좌석 전체가 온통 피로 물든 자리였던 것이다.

붉은색이 제법 강한 것을 보면, 어제나 그저께쯤에 칼부림이 났었던 모양이다.

완벽한 미신에 가깝지만.

대부분 헌터들은 핏기가 가시지 않은 좌석이나 벤치 위에 앉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현실은 그런 자리를 피하려다가 다른 곳에서 서로 엉켜, 감정싸움이 돼서 피를 보지만 말이다.

하지만 애초에 미신이나 징크스 따위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강후에게는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버려진 폐허. 정식 던전으로의 첫 데뷔로 나쁘지 않은 곳이군. 공략법도 확실히 알고 있고.'

시작은 마음에 들었다.

버려진 폐허 던전 전체가 원작에서 신강후의 도피처로 쓰였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법부터 해서, 전략적으로 유리한 고점까지 전부 다 자신이 설계한 곳이었다.

'쓸만한 미들 보스가 있으니 김목현을 추적하기 전에 스킬 수급을 두 개는 할 수 있겠어.'

시종일관 창백했던 얼굴에 실로 오랜만에 핏기가 돈다.

그 핏기가 강후에게는 '웃음'과 같다.

막간을 이용해 강후가 강탈 능력을 다시 확인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스킬을 무차별적으로 강탈하며 채워갈 참이기 때문이다.

원래 모든 헌터는 자신의 클래스 외의 스킬을 얻으면 엄청난 페널티를 감수해야 한다.

스킬 효율의 1할도 안 되는 최악의 비효율을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강탈로 얻은 모든 스킬은 페널티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강후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6화 의뢰꾼 (3)

* * *

오산역 인근의 암시장에서 강후는 필요한 재료들을 샀다.

'세비우로 넙적살. 코볼트 혈액. 그리고 몬스터 전용 마취제. 빠짐없이 샀군.'

재료들은 시장통에서 싸게 구입한 오래된 백팩에 넣어서는 양쪽 어깨에 멨다.

소를 닮았지만 고기는 식용으로 먹기 힘들 정도로 냄새가 나고 퍽퍽한 몬스터 세비우로의 살.

여기에 포션 제작을 포함한 그 어디에도 전혀 쓸모가 없는 코볼트의 혈액.

강후를 위한 물품은 아니었다.

"이상한 취미라도 있으슈? 나야 버릴 재료들을 팔아서 좋긴 한데, 팔고도 미안하네."

그래서인지 판매자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판 사람 입장에서는 돈을 주고 폐기해야 할 것을 돈 받고 판 셈이 됐으니까.

하지만 강후는 꼭 필요했다.

이 재료들이 있어야만 던전 안에서 김목현을 찾았을 때, 갑자기 나타날 '변수'를 차단할 수 있다.

"······."

판매자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강후에게는 익숙한 의사 표현이었다.

보통 대답할 가치가 없을 때, 가장 많이 쓴다.

"클클. 마취제까지 산 것을 보니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어떤 여자에게 쓸 거요?"

"한 번만 더 입을 놀리면, 너한테 쓸지도 몰라. 닥칠 수 있게."

"······히익!"

기분 나쁘게 어깨까지 툭툭 치면서 말을 거는 판매자의 친한 척에 강후가 확실한 표현을 보냈다.

그러자 판매자도 황망하게 뒤로 물러서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부우욱!

백팩 지퍼를 닫았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다.

강후는 성큼성큼 버려진 폐허 던전으로 이동했다.

별도의 라이센스가 필요하지 않은 개방형 던전인 이곳은 항상 헌터들로 붐볐다.

아니나 다를까, 던전 안이 아닌 밖의 초입에도 대기 중인 헌터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 새끼야, 그 자리가 니 자리야? 애초에 던전에 주인이 없는데 자리 주인이 어딨냐고!"

"근본 없는 새끼면 닥치고 있어라. 우리 사촌 형이 이클립스 소속이야. 알아?"

"요즘은 개나 소나 이클립스 얘기를 하네. 거긴 뭐 너 같은 버러지 놈도 받아주는 모양이지?"

"내가 아니라 사촌 형이라고!"

그중에는 이미 한바탕 붙고 있는 헌터도 꽤 있었다.

불구경만큼이나 재밌는 것이 싸움 구경이라고 다들 멈춰서 드잡이질을 지켜봤다.

하지만 강후는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바로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예상한 그림이 보였다.

오산역에서 제법 유명한 패거리 중 하나인 '오산 수호'의 헌터들이 보였다.

그들은 던전의 초입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는 포인트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변에 경계선까지 쳐 놓고, 교대로 통제까지 하는 모습이었다.

헌터 하나는 아무 생각 없이 가까이 갔다가, 오산 수호의 헌터들에게 죽도록 맞기도 했다.

통제의 이유는 있었다.

다른 곳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몬스터가 빠르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폭젠'이다.

"후."

강후가 짧은 한숨을 토해내고는 장검을 허리춤에 밀어 넣었다.

일단 당장에 마주칠 몬스터들은 장검보다는 단검이 더 공격에 알맞을 듯싶어 무기를 바꿨다.

[연습용 기본 단검]

[등급 : 없음]

[근력 +1]

아직 돈이 부족한 탓에 최하 9등급의 단검 아이템도 살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공격 포인트만 잘 잡으면, 무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이 강후의 생각이었고.

그래서 값싼 연습용 단검을 장비했다.

물론 돈을 벌면, 가장 먼저 바꿀 무기이기도 하다.

원작의 설정에 따르면, 단검은 길이에 대해서 만큼은 자유도가 높은 편이다.

그래서 지금 든 연습용 기본 단검도 생각보다 검날이 길었다.

장검보다는 짧지만 통상적인 단검보다 반 뼘 정도는 더 길게 나와 있었다. 이래저래 쓰임새는 좋았다.

그때.

끼잉. 끼잉끼잉.

버려진 폐허 던전 초입을 알리는, 일종의 마스코트이기도 한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시 발톱 토끼]

유독 길고 날카로운 발톱을 갖고 있어, 매우 위협적인 공격 수단을 가진 몬스터 토끼.

몬스터 레벨은 35 수준으로 결코 낮다고 할 수 없었다.

강후 같은 레벨 10 헌터에게는 더욱.

"······."

스윽.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친 토끼를 보던 강후가 자연스럽게 검 끝으로 왼손의 검지 끝을 베었다.

그러자 약 1초 간격으로 핏방울이 한 번은 떨어질 법한 상처가 만들어졌다.

끼잉!

피 냄새를 맡은 토끼의 눈이 평소보다 더 새빨갛게 변했다.

공격 본능이 자극받은 것이다.

본래는 매우 조심스럽고 그래서 접근하기가 까다로운 녀석이지만, 이제는 성격이 바뀌었다.

카칭!

토끼의 모든 발톱이 순식간에 자라나더니 마디마디가 모두 위협적인 흉기가 됐다.

가시 발톱 토끼의 특징은 '가속'이다.

시간을 줄수록 미쳐 날뛰므로 장기전은 피하는 것이 좋았다.

강후는 움직이지 않았다.

녀석은 워낙 민첩하기에 작정하고 달려든다고 해봤자, 요리조리 피하면서 약을 올린다.

쓸데없이 힘만 빼게 되는 그림인 것이다. 그래서 강후는 뒤집은 그림을 봤다.

끼이잉!

그것은 바로, 토끼가 먼저 달려들게 만드는 것!

자극한 덕에 토끼는 강후가 생각한 대로 움직였다.

뒷발을 열심히 차며 뛰기 시작한 토끼가 힘껏 도움닫기를 하며, 강후를 향해 몸을 날렸다.

포물선의 정점을 찍고, 이내 하강 페이즈로 접어들면서 날카로운 발톱 전체를 강후에게 겨눴을 때.

파앗!

강후가 활성화된 횡이동으로 모습을 감쪽같이 숨겼다.

이것을 기다렸던 것이다.

횡 이동은 허공에서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타깃이 될 대상이 필요했다.

끼잉······?

강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가시 발톱 토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길쭉한 귀 역시 나풀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푸우욱!

끼엥!

백허그를 하듯이 뒤에서 녀석을 안은 강후가 왼쪽 가슴 아래서 사선으로 단검을 찔러 넣었다.

더 확인할 것도 없는 즉사였다.

단단한 대흉근과 갈비뼈를 완벽하게 피해서 들어간 단검은 심장을 그대로 꿰뚫어버렸다.

[레벨이 올라 11이 되었습니다. 다음 기본 스킬 획득 시점은 레벨 20입니다.]

실로 오랜만의 경험치 획득.

청명 수용소에 있을 때는 티끌만큼도 얻어본 적 없는 경험치의 온전한 수급이었다.

레벨 11을 코앞에 두고 있어서 바로 레벨이 올랐고, 강후는 보너스 포인트 1을 체력에 넣었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만 잘 관리할 수 있으면, 내게 마나 스탯은 사실 필요가 없지.'

당분간 우직하게 체력에만 보너스 스탯을 넣을 생각이다.

그래야 과민증으로 인한 과부하에 체력이 깎이고 날아갈 때, 빠른 회복을 도모할 수 있다.

[반경 500m 내에서 중간 보스 몬스터가 감지됩니다. 위협적 개체에 대한 자동 경고입니다.]

강후가 이예린에게 김목현에 대한 추적 의뢰를 받았을 때, 기쁘게 응했던 이유가 나타났다.

중간 보스 몬스터 혹은 미들 보스라고 불리는 몬스터의 등장이었다.

스킬 강탈의 대상이기도 하다.

'성질이 더 급한 놈은 내 입장에서는 요리하기 수월하지.'

강후가 차갑게 눈을 빛냈다.

몸뚱이로만 놓고 보면 훨씬 까다로운 적이지만, 머리로만 보면 상대하기 쉬운 녀석이다.

***

"쟤 뭐냐, 방금?"

"뭐가요?"

"못 봤어? 방금 가시 발톱 토끼 상대로 은신하면서 곧바로 뒤에서 심장 따버린 거?"

"정말입니까? 누굽니까?"

"쟤. 폭풍의 숲 쪽으로 혼자 가고 있는 저놈."

그 무렵, 강후의 '원맨쇼'를 정확하게 목격한 오산 수호의 헌터 하나가 혀를 내둘렀다.

폭젠 포인트를 선점하고 손쉽게 재미를 보고 있는 그들이지만.

각자 레벨은 최소 50은 될 정도로 기본적인 실력은 갖고 있는 헌터들이었다.

이제 막 레벨 11이 된 강후를 생각하면, 한참 높은 경지의 헌터들인 것이다.

그들이 레벨 11일 때는 이 던전에 올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상대가 안 되니까.

그래서 말을 꺼낸 오산 수호의 헌터는 당연히 강후의 레벨을 자신과 비슷하게 보고 있었다.

"그래, 대성아. 나도 봤다."

"보셨죠, 형님?"

"어."

오산 수호의 서열 3위이자, 레벨 65의 헌터인 조영재가 부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광전사라는 특수한 클래스를 갖고 있는 그는 조기에 성좌와 계약을 끝낸 실력자이기도 했다.

던전에서 여유가 있을 때면, 종종 주변을 살피기는 하지만 딱히 볼거리가 없는 일이 태반.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강후가 보여준 깔끔한 움직임은 모두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았다.

가시 발톱 토끼의 레벨이 35다.

조영재도 가시 발톱 토끼를 한 번에 죽이지는 못했다. 최적화된 루트를 아직 만들지는 못해서다.

토끼의 심장을 찌를 줄 몰라서가 아니다. 녀석이 심장을 당연히 쉽게 내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후는 너무 쉽게 토끼의 후방을 선점했고, 최소한의 동선으로 급소를 찔렀다.

부하가 조영재에게 말했다.

"스킬로 봐서는 암살자 클래스가 틀림없는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 저렇게 신속한 은신 옵션은 암살자 클래스 아니면 누구도 얻을 수 없어."

"하지만 은신 스킬은 레벨 200에 얻는 기본 스킬 아닙니까?"

"맞아. 그럼 도대체 저 은신 스킬은 어디서 파생된 건지, 짐작이 안 가는군. 너무 탐나는데."

이 던전에 올 만한 수준의 헌터가 가질 수 없는 좋은 스킬을 갖고 있다.

그것이 조영재의 생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주변에 암살자 인맥이 있다고 한들, 스킬의 최고 숙련도를 달성한 케이스는 없기 때문이다.

네임드라고 불리는 헌터들도 이제야 한두 개 정도의 기본 스킬을 숙련도 최대로 찍는 수준이다.

'네임드'라는 타이틀이 있는데도 말이다. 일반적인 헌터면 숙련도 최대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조영재의 관심을 바로 알아차린 부하들이 손바닥을 비비며 저마다 아양을 떨었다.

"한 번 끌고 와 볼까요?"

"형님이 원하신다면야, 저런 놈은 바로 잡아다가 앞에 무릎 꿇리는 거죠, 하하하!"

"확 그냥 옷까지 벗겨버릴까요? 다른 재미도 같이 보시게?"

"됐다. 어차피 입구 앞의 이 포인트는 우리가 먹고 있잖아. 놈이 나올 때, 얼굴 한 번 더 보자고."

"후후, 어차피 기다리면 알아서 형님 품으로 오겠군요."

조영재가 빠르게 멀어져가는 강후의 뒷모습을 다시 눈에 담았다.

그에 대한 동경이나 부러움이라기보다는 질투에 가까웠다.

어떻게 저런 스킬을 갖고 있는 걸까.

* * *

미들 보스에게 향하는 동안, 토끼를 네 마리 더 사냥했다.

죽은 몬스터는 말이 없고, 서로 정보 공유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똑같은 패턴에 죽었다.

덕분에 레벨 13이 됐다.

강후의 레벨이 낮다 보니, 상대적으로 레벨이 높은 토끼 몇 마리를 잡은 것으로도 큰 이득이었다.

"클클클."

이윽고 강후에게 계속 경고 메시지를 나타나게 한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벤투스(Ventus).

인간형의 미들 보스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으로 맞춰 입고, 복면까지 둘러쓴 녀석이었다.

클래스로 분류하면 강후와 같은 암살계였다.

[강탈이 활성화된 대상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스킬은 다음과 같습니다.]

[환영술]

스킬 강탈의 활성화 여부를 알리는 메시지도 동시에 보였다.

환영술.

귀한 스킬북을 얻거나 비싼 돈을 주고 구매해야 배울 수 있는 스킬로 당연히 지금 레벨에는 언감생심인 스킬이다.

"이젠 아니지."

하지만 지름길이 열렸다.

7화 의뢰꾼 (4)

벤투스의 환영술은 헌터들의 환영술보다 훨씬 좋다. 특유의 '보스 스킬 보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영이 더 선명하고, 잔상이 거의 안 남았다. 사실상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힘들 정도.

더 무서운 것은 이 스킬을 강탈하면 바로 숙련도 최대치까지 달성할 것이기에.

보편적 인식보다 훨씬 더 대단한 스킬을 얻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보스 스킬 보정이 들어간 상태에서 넘어온다.

그러니 기대가 될 수밖에 없다.

"죽이겠다."

"입만 털지 말고."

살기 가득한 경고를 보내는 벤투스에게 강후가 의도적으로 내민 가운데 손가락을 앞뒤로 까딱였다.

파앙!

복면 안에서 입을 씰룩인 벤투스가 강후를 향해, 곧바로 환영술을 전개하며 접근했다.

순간 벤투스의 몸이 좌우로 흩어지는 느낌과 함께 환영이 생기니, 확실히 분간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대단히 뛰어난 동체 능력'을 부여받은 강후에게는 간발의 차이로 진실이 보였다.

거기에 일전에 수용소 밖에서의 전투에서 죽인 헌터에게 얻은 성좌도 빛을 발휘했다.

바로 마나 추적 능력.

본체와 환영은 마나의 밀집도에서 차이가 있고, 그 덕분에 구분이 가능했던 것이다.

'명색이 미들 보스인데, 정면승부는 껄끄럽지. 스스로 빈틈을 만들게 하는 게 좋겠어.'

강후가 살짝 뒷걸음질쳤다.

의도된 기만이었다.

환영에 대응하는 대다수 헌터들의 반응인 신중함이다.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을 더하면 금상첨화.

그래서일까.

기만을 숨기고, 겁을 더한 강후의 메소드 연기에 벤투스가 비릿한 미소와 함께 속도를 냈다.

혹시나가 역시나라는 생각.

딱히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벤투스의 표정 변화에서 읽을 수 있는 마음속 언어였다.

환영과 본체의 부지런한 움직임이 보인다. 어떤 것이 진짜인지를 알기에 당황할 것이 없다.

강후가 오른손에 움켜쥔 단검을 살짝 주머니 뒤로 숨긴 채, 타이밍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스파앗!

환영이 강후의 정면 시야를 잠식하며 훌쩍 몸을 날렸다. 미끼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리한 물고기는 눈앞의 질 나쁜 미끼가 아닌, 그 뒤에 보이는 확실한 먹잇감을 보고 있다.

타탓!

강후가 최소한의 절제된 움직임으로 회피했다.

환영이 잠식한 시야를 바꾸기까지는 넓은 보폭의 두 걸음이면 충분했다.

그 상태에서 바로 도약을 활용하며, 진즉에 가까웠던 벤투스의 눈앞으로 바로 붙었다.

이 정도는, 아예 서로 포옹하기 직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푸욱!

철저하게 '살해'라는 목적성만을 가진 강후의 단검이 벤투스의 복부를 찌르고 지나갔다.

손잡이를 제외한 검날이 깊숙하게 박힐 만큼 단검은 벤투스의 내장 깊숙한 곳을 뚫었다.

아마도 가까운 거리에서 완력을 이용해서만 단검을 놀렸다면 이렇게 깊게 박히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도약의 추진력 대부분을 단검에 온전히 실어낸 효과는 어지간한 공격 스킬 못지않았다.

강후가 지금 만들어 낼 수 있는 최대의 퍼포먼스를 훌쩍 뛰어넘는 파괴력이었다.

"크허억! ······어떻게?"

환영을 바로 간파당한 것도 모자라 일격을 당한 벤투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 횡 이동에 성공한 강후는 은신과 함께 벤투스의 뒤로 이동해 있었다.

명색이 미들 보스인데 단검 공격 한 번에 죽을 것이라고는 처음부터 생각한 적 없었다.

그 대신.

퍽!

"크윽!"

기술적으로 오금을 뒤에서 걷어찬 강후가 벤투스의 무릎이 꿇어지도록 판을 짰다.

노림수가 성공한 순간에 양손으로 움켜쥔 장검은 이미 정확히 대각선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쇄골의 움푹 파인 부분에서 시작해, 사선의 경로로 심장에 찍히는 즉사 루트였다.

가슴 전반을 감싸는 강화된 대흉근을 가진 벤투스도 절대 버텨낼 수 없는 약점 공격인 것이다.

"······!"

"닿았다."

서로가 느꼈다.

하나는 죽음을 느꼈고.

다른 하나는 떠올리고 되짚었던 기억의 파편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느꼈다.

푸화악!

강후가 쇄골을 뚫고 들어간 장검을 힘껏 빼냈다.

그러자 선혈이 분수처럼 솟아오르며 얼굴 전체를 적셨다.

분명히 비릿하고 뜨거운 핏물이지만, 지금은 오롯이 희열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자극제에 가까웠다.

벤투스의 흔들리던 눈이 어느새 앞으로 위치를 옮긴 강후의 얼굴을 훑었다.

허무한 표정만이 가득한 벤투스의 얼굴에서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한 '억울함'이 가득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리도 확실하게 자신을 '해체'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었다.

"노림수는 세 가지다. 상대가 짠 판을 엎거나, 비틀거나, 아니면······."

"크허억."

강후가 말을 마무리 짓기 전에 벤투스가 눈을 까뒤집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내 판에 들어오게 만들어서 다 잃고 죽어버리게 만들거나."

가장 중요한 말을 마무리했다.

그랬다.

벤투스가 꼬여버린 이 판의 콘셉트는 마지막 콘셉트였다.

[레벨이 대폭 올라 16이 되었습니다.]

한 번에 2 이상의 레벨이 오를 때만 출력되는 특수한 멘트.

미들 보스 하나를 혼자 잡은 덕분인지, 경험치의 양이 상상을 초월했다.

이쯤이면 입구에서 포인트를 잡고 반복 사냥을 하는 패거리들의 하루치 경험치는 될 것이다.

[대상으로부터 환영술 스킬을 성공적으로 강탈했습니다.]

바로 강후의 스킬창이 반짝이며 강탈이 완벽하게 이뤄졌음을 알렸다.

[환영술]

[스킬 숙련도 : Lv. Max]

[다섯 개의 환영을 15초간 만들어 적의 시야를 교란합니다.]

[외력이나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서 해체된 환영은 3초간 연막 효과를 발생시킵니다.]

[무의식을 반영한 환영의 움직임을 다채롭게 구현할 수 있으나, 철저한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능력 덕분에."

나는 강해질 수밖에 없다.

바로 최대치에 도달한 스킬 숙련도는 기존의 스킬 콘셉트를 대폭 강화시켰다.

암살자에게 있어서 시야 교란과 혼란 유발만큼 시너지가 좋은 스킬도 없잖은가.

'던전에서 나갈 때면 레벨 20에 얻는 기본 스킬도 추가할 수 있을 것 같네.'

강후가 아직은 비활성화되어 있는, 하지만 곧 열릴 예정인 레벨 20 제한의 기본 스킬을 살폈다.

가속 찌르기.

암살자 클래스의 밥줄이라고 불리는 스킬이다.

숙련도 최대를 찍으면, 정식 명칭이 바뀌면서 그 가치가 폭등한다.

또한 '원작자'가 가장 사기적인 옵션만을 골라 덕지덕지 붙여 놓은 밸런스 붕괴 스킬이기도 했다.

* * *

그 시각.

이예린은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한 남자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최근 기지국을 의도적으로 마비시키는 범죄 조직의 방해 공작이 수시로 일어나기 때문인지.

통화 품질은 썩 좋지 않았다.

마치 한참 먼 곳에서 겨우 들릴 만큼의 목소리로 아슬아슬하게 대화를 하는 느낌이었다.

이예린이 말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통화 품질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갈수록 악화가 되네요."

그러자 그도 맞장구를 쳤다.

- 어쩔 수 없죠. 특히 대전 쪽은 이클립스나 흑사자의 영향권 안이라 더 그럴 겁니다.

차분하면서 발음이 정확한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그렇겠죠."

- 요즘 이클립스 놈들과 엮여서 고생이 많으신 것 같던데.

"괜찮아요. 어차피 뒤통수에 눈 몇 개를 달고 다니는 건 예전부터 익숙했던 일이라."

- 혹시 제게 추천할 만한 괜찮은 헌터 있습니까? 요즘 인력 부족이 워낙 심하다 보니.

"흠······. 장시환 씨의 마음에 들만한 헌터가 있을까요? 죄다 입구컷일 텐데."

이예린과 통화를 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장시환이었다.

평범한 헌터는 만나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헌터들의 연예인이나 다름없는 그다.

이예린과는 오래전부터 친분이 있던 터라 이런 대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 기준을 좀 많이 낮추려고 합니다. 낮은 레벨 단계에서부터 확실하게 육성을 하려고 합니다만.

그 순간, 이예린은 강후를 떠올렸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떠오른 얼굴이었다.

확실히 그녀에게도 강후는 떡잎이 달라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헌터가 있긴 해요."

- 그렇습니까?

"하지만 좀 더 메이드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지금은 속단을 하는 감이 없잖아서."

- 예린 씨의 인재 추천은 지금까지 틀린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이전에 추천해주신 인재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긴 했지만 그들의 아쉬운 실수죠.

"네, 다 지난 일이니, 마음 쓰실 것 없어요. 어쨌든 좀 더 지켜보고 검증되면 말씀을 드리죠."

- 알겠습니다. 저희 길드가 정말 인재가 많이 필요합니다. 좋은 분을 보내만 주시면, 저희는 최고의 대우를 할 겁니다.

"알겠어요. 고생 많으시네요."

- 이클립스에 관련해서는 쓸만한 내부 정보들을 몇 개 얻었습니다. 곧 보안 메일로 보내죠.

"네, 감사해요."

짧은 통화가 끝났다.

확실히 장시환의 길드에 가면, 전방위적인 지원을 받으며 급성장 가도를 걸을 수 있다.

이예린이 강후에게 깊은 유대감이나 친밀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장시환처럼 항상 쓸만한 인재에 목말라 있는 입장에선, 강후만큼 매력적인 카드도 없었다.

눈에 띄는 재능을 가진 헌터가 이제 겨우 10레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잠재력이 차고 넘친다.

"어지간히 나도 실력에 마음을 빼앗기긴 했나 봐. 이제 첫 의뢰를 맡긴 용병한테······."

이예린이 머리를 쥐어박았다.

용병의 세계만큼 냉정해야 하는 세계도 없다.

하지만 강후가 첫 만남에 보여준 강렬한 임팩트 때문일까?

자꾸 머릿속에서 그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 * *

그 무렵.

"아흐윽······."

강후가 벤투스에 이어 또 다른 미들 보스 하나의 목숨을 빼앗고 있었다.

마족 이브리아.

여성형 마족으로 콘셉트만 놓고 보면 벤투스와 비슷했다. 다크 어쌔신이라고 볼 수 있다.

공격 패턴은 직관적이면서 단순한데, 대상을 강제로 끌어당긴 후에 급소를 찌르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이브리아 공략에서는 방어형 탱커가 그녀를 전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끌려가서 공격을 당하더라도 어느 정도 버텨낼 수 있는 맷집과 체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강후 같은 암살자나 방어 능력이 약한 마법사 계열이면, 끌려가자마자 즉사 확정이다.

어쨌든 이브리아가 강제로 끌어당기는 스킬인 '납치'의 사전 동작을 알고 있었기에.

강후는 어렵지 않게 그녀를 제압할 수 있었다.

눈 뜨고 당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원래는 7m 거리 안에 있는 적을 1m 앞 지점으로 끌고 오는 강제 소환 스킬이지만.

[납치]

[스킬 숙련도 : Lv. Max]

[반경 15m 이내의 지정 대상을 1m 앞에 소환합니다. 아이템 같은 무생물도 가능합니다.]

[납치 중에 다수 스킬을 복수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강탈과 함께 숙련도 최대가 즉시 적용되면서 영향 범위가 2배 이상 늘어났다.

그뿐만 아니라 납치가 완료되기 전까지 연계 불가능한 스킬 활용에도 제약이 풀렸다.

"모션 캔슬 방법까지 알고 있으니, 이젠 당했는지도 모르게 끌고 올 수 있겠지."

그때.

당분간 별말 없이 지켜볼 것이라고 생각한 존재가 말문을 열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급성장하는군. 내 눈과 결정에 확신을 주고 있구나.]

메시지화된 차원 강탈자의 말이 전해졌다. 짧은 내용이지만, 충분히 만족할 만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원작에서 저 성좌가 남성형인지, 여성형인지 정해놓진 않았다.

어쨌든.

'걱정마. 앞으로 내가 당신에게 뜯어낼 수 있는 모든 능력과 재능을 더 가져갈 거니까.'

강후의 답에는 거침이 없었고.

[미친놈.]

차원 강탈자의 대답에도 필터링은 없었다. 피차 다른 의미로 죽이 잘 맞는 인연이었다.

8화 제압 (1)

지금 강후가 차원 강탈자로부터 부여받은 특성은 집으로 따진다면 계약금 정도의 느낌이다.

아직 중도금과 잔금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성좌가 계약자에게 모든 특성을 나눠주지 않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네 번째로 부여해 줄 수 있는 특성부터는 계약자의 죽음이 성좌의 '소멸'로도 이어질 수 있어서다.

[계약자를 부담 없이 후원하는 것과 목숨을 걸고 후원하는 것은 얘기가 전혀 다른 법이다.]

차원 강탈자의 말에 강후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했다.

'알아.'

이해는 했다.

중대한 결심이 필요한 만큼, 차원 강탈자가 보인 반응이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저 실력을 직접 증명하면 될 뿐이다. 그러면 마음은 알아서 열릴 것이다.

* * *

얼마 후.

던전 내부의 몬스터들에게서 다소 떨어진, 적막과 고요가 가득한 공간으로 접어들었다.

강후가 목적지로 삼고 있는 곳은 김목현이 있을 것으로 확신하는 지점이었다.

버려진 폐허 던전은 무인 도시가 된 현대를 배경으로 하기에 건축물이 많았다.

강후는 그중에 녀석이 오랜 시간 은신하면서, 자신을 잡으러 오는 외부인을 처리하기 딱 좋은 최고의 포인트를 알고 있었다.

애초에 원작에서 신강후가 은신처로 삼았던 곳이기도 했다. 김목현도 같을 것이다.

쯔읍-. 쯔읍-.

"후우. 이제 좀 살 것 같군."

강후는 여기로 오는 길에 운 좋게 얻은 식물 '솔라키움'의 진액을 쪽쪽 빨고 있었다.

던전에서 구하기 어려운 식물로 진정(鎭靜) 및 고통 경감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과도한 마나의 사용으로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발동할 경우에 효과가 좋았다.

혹은 슬슬 몸에 과부하가 걸려, 거부 반응이 올라오려고 할 즈음의 억제 작용으로 탁월했다.

"다섯 개나 얻은 거니까."

강후가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진액을 빨린 솔라키움을 휙 던졌다.

속주머니 안에 있는 솔라키움은 총 네 개. 아쉬운 양이다.

전투를 길게, 또 소모전의 양상으로 치르면 한 번에 없어질 양이기도 했다.

일반 던전에서 솔라키움을 얻을 확률은 거의 1%. 게다가 전부 자연 성장이라 대량 확보도 어렵다.

국내에는 딱 한 명.

이 녀석을 사람 손으로 키우는 법을 알아낸 능력자가 있다.

그에게 가야 돈을 주고 넉넉하게 살 수 있다. 물론 가격 흥정은 불가능하다.

'그라운드 제로 안까지 가야 하니, 큰마음 먹고 가야겠네.'

그라운드 제로는 과거에 DMZ라고 불리는 위치에 있다. 거리가 좀 멀다.

어쨌든 과민증의 진정은 꼭 필요한 부분 중의 하나였다.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을 때, 과민증으로 몸에 제약이 걸리면 죽음을 면하기가 어려워서다.

스슷. 파슷. 스슷. 파슷.

강후는 이동하는 동안 납치 스킬의 기척을 최대한 숨기는 '모션 캔슬'을 연습했다.

원래 납치 스킬은 한 손을 주먹 쥐듯 움켜쥐고, 팔을 뒤로 두 번 당기는 예비 동작이 있다. 이브리아가 했던 동작이기도 하다.

그런데 납치 스킬 사용 이후에 타이밍을 맞춰서 다음 스킬을 쓰면, 사전 동작의 90%가 생략된다.

주먹을 살짝 쥐는 듯하다가, 곧바로 다음 스킬로 이어지는 것이다. 물론 납치는 발동된다.

다만 그 '타이밍'을 맞추기가 어려워 계속 반복 연습 중이었고, 이제야 제법 잘 맞고 있었다.

"슬슬 때가 됐다."

강후가 백팩을 열어, 암시장에서 샀던 재료들을 꺼낼 준비를 했다.

고기와 피, 그리고 마취제.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에게 꼭 필요한 미끼였다. 이게 없으면 김목현을 노리는 건 언감생심이다.

잠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힘없이 내려앉은 구름은 노을의 붉은 빛을 머금고, 흐르는 핏물처럼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던전 밖이라고 이 우울하고 음습한 풍경이 딱히 다르지는 않다.

주인을 잃고 버려진 차.

탈선 사고에도 끝내 선로에 원상 복귀되지 않은 기차.

추락한 후에 시신조차 수습되지 않은 군용 헬기.

범죄 조직의 소굴이 되어 아예 민간인 거주자가 통째로 사라져버린 마을.

이런 세기말의 풍경은 던전 안보다 밖이 더 심했다. 차라리 던전 안은 '평온'하기라도 하다.

'이쯤에서 멈출까.'

강후가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던 발걸음도 멈추고, 억센 수풀로 둘러싸인 바위 앞에 멈춰 섰다.

찰나였지만 누군가의 인영을 봤기 때문이다. 위치는 뼈대만 남은 10층 건물 꼭대기였다.

'잘 찾아왔군.'

굳이 그 그림자의 주인공이 누군지 뜯어볼 필요는 없을 듯했다. 녀석이 맞다.

* * *

지익! 지이익!

김목현은 말린 육포를 열정적으로 뜯고 있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바깥 음식이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바깥의 소식통이 이곳에 들렀다가 갔다.

적당히 밖으로 내뺄 틈을 찾는 김목현이 돈을 주고 고용한 정보통이었다.

던전 안에서는 어떤 전자기기도 사용할 수 없기에 구식이지만 확실한 수단으로 소식이 전달됐다.

바로 종이였다.

[흑사자에서 김목현 씨의 조직 가입을 조건부 승인했습니다.]

[이예린이 운영하는 용병단 내부 정보만 넘기면 됩니다.]

확인을 끝낸 김목현이 종이를 불태웠다. 어떤 증거도 무조건 남지 않는 게 좋다.

'내부 정보'라는 것은 그녀가 소유권을 틀어쥐고 있는 던전과 이권에 관련된 정보를 말한다.

이를테면 던전 외부가 아닌, 내부에 구현된 마석 광산의 소유 여부나.

혹은 주기적으로 보스 몬스터를 공략하면서 고등급 아이템을 고정 수급 할 수 있는 곳의 여부.

이 정보는 이예린과 오랜 시간 '거래'를 했던 용병 하나를 죽이고 얻은 정보로 검증이 끝난 정보이기도 했다.

거기에 이예린의 3등급 아이템도 하나 훔쳤으니, 무척이나 열받아 있을 터.

그동안 이예린의 의뢰로 찾아왔던 헌터들은 대부분이 죽었다.

한둘만 겨우 살았던가?

이제는 이예린도 복수를 포기했는지, 요 근래 몇 주는 자신을 찾아오는 방문자가 없었다.

그래서 던전 밖으로 나갈 기회를 보던 찰나, 흑사자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흑사자는 대전 일대에서 범죄 조직 이클립스, 용병단 청안과 함께 던전의 이권을 삼분(三分)하고 있는 범죄 조직이었다.

"그년의 헛소리만 듣고 와서 아이템만 대준 새끼들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정말 던전은 최고의 피신처라니까. 마음만 먹으면, 잡아먹을 몬스터도 넉넉하고 말야."

김목현이 낄낄 웃었다.

사실 자신을 잡겠답시고 여기까지 온 헌터들을 죽여서 얻은 아이템의 개수만 해도 10개였다.

그중에는 5등급 아이템도 2개나 있다. 개당 2억 원 이상은 족히 지출해야 할 값어치다.

그때.

"음?"

창문 하나 없는 10층의 난간에 반쯤 기대어 서 있던 김목현이 흠칫 몸을 세웠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는 사냥할 몬스터가 등장하는 구역이 아니다.

즉, 상대는 이 건물을 목적지로 찍고 왔다는 뜻.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지쳐서 쉬러 왔거나 아니면 여기에 볼 일이 꼭 있거나.

'뭐든 간에 내 입장에서는 털어먹을 놈이 하나 늘어나는 거라고.'

김목현이 씨익 웃으며 콘크리트 벽면을 세 번, 똑똑똑 하고 쳤다.

그러자 기둥이 만들어낸 어두운 그림자 안에 웅크리고 있던 존재들이 몸을 일으켰다.

어스름 늑대.

이곳을 찾아온 헌터들이 자신의 얼굴을 보려면 반드시 돌파해야 하는 하나의 '시련'이다.

신호를 주기 무섭게 어스름 늑대들이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이미 1층에 도착해서 바로 강후를 향해 달려가는 녀석도 두 마리나 있었다.

"딱 봐도 암살자 같은데. 저런 녀석이 종이처럼 찢기기 아주 좋은 놈들이지. 큭큭."

김목현이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크룩! 크루룩! 크룩!

강후에게 돌진하던 어스름 늑대 셋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땅에 있는 뭔가를 게걸스럽게 먹었다.

고기였다. 그것도 꽤 멀리까지 악취가 세게 풍기는 양념 된 고기.

분명히 고기를 가려먹는 어스름 늑대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정신 줄을 놓고 먹어댔다.

거기서 상황이 끝났다면 해프닝이었겠지만, 문제는 다음이었다.

푸욱! 푸욱! 푸욱!

사뿐히 어스름 늑대의 등 위로 올라탄 강후가 경추에 단검을 찔러넣고, 바로 신경을 끊었다.

"뭐야, X발······."

김목현의 얼굴이 흙빛이 됐다.

어스름 늑대는 그도 오랜 시간 공들여 길들인 던전의 야수였다. 직접 싸우는 것은 자신 없었다.

그런데 강후는 미끼가 될 고기로 관심을 완벽하게 끌고, 경계가 풀어진 틈을 노려 죽인 것이다.

한 번에 목숨을 끊은 것도 어스름 늑대의 정확한 급소를 알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로 신경을 끊지 못하면, 역으로 어스름 늑대 무리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리는 순식간에 이뤄졌다.

기세 좋게 달려 내려간 늑대들은 강후가 던진 미끼를 앞다투어 물었고.

몸 안에 빠르게 퍼지는 마취제의 몽롱함과 마비 속에서,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목숨을 잃었다.

당연히 어스름 늑대 무리의 한 끼 식사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불청객 강후.

하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한 타이밍으로 정리당한 것은 어스름 늑대 전체였다.

그리고.

퍼석! 콰드득! 푸시이이잇!

건물 1층부터 연기가 피어오르며, 김목현이 설치해둔 마법형 트랩이 해체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 새끼, 뭐냐고······?"

김목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손이 잘 닿지 않는 난간이나 구석에 숨겨둔 트랩이 모조리 강후에게 간파당하는 중이었다.

마치 이 건물을 방어자의 입장에서 써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꿰뚫어 보고 있었다.

휘이익! 휘이익!

김목현이 다급하게 휘파람을 불어봤지만, 소리를 듣자마자 달려와야 할 어스름 늑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 죽었으니까.

"X발, 내가 겁먹을 것 같냐?"

김목현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휴식으로 식었던 몸의 열기를 끌어올렸다.

어스름 늑대 선에서 정리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불청객은 생각보다 강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김목현은 레벨 50 헌터의 수준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다수의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었다.

자신감의 근거이기도 했다.

아이템을 통해 추가로 보고 있는 효과를 레벨로 정산해보면, 못 해도 100은 넘어갈 것이다.

[혼돈의 싸움꾼]

[악성향의 성좌. 적의 방향 감각 상실과 시각 상실에 효과적인 능력을 부여하는 성좌입니다.]

"나는 성좌님이 지켜보는 귀한 몸이시라고. 알겠냐?"

그가 뿌듯한 표정으로 성좌창을 보며 웃었다. 자신의 재능을 진즉에 알아봐 준 성좌이기에.

"지옥의 흑마법을 보여주마."

김목현이 양손 가득하게 타락의 기운을 끌어 올리며, 강후와 일전을 벌일 준비를 마쳤다.

사르르륵.

그리고 시종일관 검게 빛나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악신의 분노]

[1초당 1의 마나를 소모하는 각성 상태에 돌입합니다.]

착용한 부적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변화인 '각성'이었다.

이제부터 극적으로 스킬 캐스팅 시간이 감소할 것이다. 그것은 곧 침입자에게 지옥이 펼쳐질 것임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했다.

* * *

"트랩을 아주 떡칠을 해 놨군."

강후는 1층부터 차근차근 올라오면서, 눈에 띈 트랩부터 해체하는 중이었다.

트랩이라는 것이 대놓고 함정으로 짜놓은 판 위에서 놀면, 대책 없이 죽기에 딱 좋다.

하지만 영향권 밖에서 현장으로 시선을 둘 수 있으면, 훤히 허점이 보이는 것이다.

어스름 늑대를 제압할 때를 빼고, 강후는 계단이 아닌 난간으로 도약하며 올라가는 중이었다.

애초에 이 건물의 콘셉트가 시공 중에 중단되어, 골조만 남은 형태기에 이런 응용이 가능했다.

"후우."

도약 스킬을 건물 등반 용도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무척 요긴하게 쓰는 중이었다.

딱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반복된 도약으로 슬슬 또 올라오려는 마나 과민증.

이것을 달래기 위해 솔라키움을 빨아야 한다는 것이다.

쯔읍. 쯔읍.

"무슨 약쟁이도 아니고······."

난간에 매달려 하얀 진액이 끊임없이 나오는 알로에류의 식물을 쪽쪽 빨고 있는 광경.

괜한 자괴감을 느끼며, 다시금 도약할 채비를 하려는 즈음.

"쥐새끼 같은 놈, 여기 있었네?"

위를 올려다보던 강후와 김목현의 시선이 정확하게 마주쳤다.

영 좋지 않은 위치에서 걸려버렸다.

9화 제압 (2)

가장 좋은 타이밍을 두고 한가롭게 대화만 오가진 않았다.

화르륵!

김목현의 손바닥에서 발현된 스킬 하나가 곧바로 날아들었다.

'진보라 불꽃.'

흑마법 계열 헌터의 레벨 1 기본 스킬이다.

강후로 따지면 도약이다.

지금은 난간 한 층계 위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마법이기에 후방이나 측면 회피는 불가능했다.

"흣!"

강후가 난간을 붙잡고 있던 몸을 앞으로 튕겼다.

파앙!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온 강후는 김목현의 첫 공격을 간발의 차로 피했다.

강후가 들어온 층계는 4층.

김목현이 있는 층계는 5층.

콘크리트 벽을 각자 천장과 바닥으로 두고서 묘한 대치가 이루어졌다.

"누가 보내서 온 거냐? 어? 날 죽이고 뭐라도 챙겨오라 하디? 뭐라고 했냐고, 새끼야!"

"신발 찾으러 왔다."

"이예린 말이냐?"

"내게는 의뢰인이지."

강후로서는 김목현의 잡담이 나쁘지 않았다.

연달아 도약을 쓴 탓에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이예린, 그년! 너처럼 돈 주는 의뢰에 눈먼 애들 보내서 여럿 죽였는데? 얘기 안 해주디?"

"어. 마지막 의뢰가 될 것 같다고 하던데."

"푸하하! 어지간히 꿰였나 보구만! 하긴 용병들에게 저승사자 취급을 받고 있을 테니! 푸핫!"

"······."

김목현이 참 말이 많은 캐릭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보통 원작에서 이렇게 주둥이부터 놀리는 녀석은 단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녀석도 그런 운명에 순응하도록 만들어주고 싶었다.

김목현의 말이 새삼스럽지는 않다.

어차피 헌터들은 기본적으로 서로를 잘 신뢰하지 않는다.

이예린이 솔깃한 의뢰를 건넸을 때도, 당연히 밑에 깔린 까다로운 이슈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적선하듯 자신에게 의뢰를 던져줄 리는 없으니까.

어쨌든 예상대로 김목현이 여기에 있는 것은 확인했으니, 다음의 일을 볼 차례다.

"김목현."

"뭐?"

"괜찮은 선택지를 하나 주고 싶은데."

"갑자기 혀는 또 왜 놀리냐?"

"네가 갖고 있는 아이템을 전부 내놓으면 살려는 줄게."

"뭐래, 이 병신은? 지금 착용한 아이템 세팅으로도 레벨 100 마법사는 뺨치는데. 너 병신이냐?"

입에 걸레를 물었나, 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인물을 찾는다면 멀리 갈 필요가 없다.

김목현에게 대답을 들은 강후의 입이 씰룩였다.

처음이자 마지막 협상이 바로 결렬됐다.

"혹시 지금 이 소리 들리나?"

"무슨 소리. 이게 약을 쳐 빨았나, 아까부터 헛소리야. 자꾸?"

"네게 유일했던 장밋빛 미래가 가루가 되는 소리야."

파앗!

말을 끝내자마자 곧바로 계단으로 질주했다. 위층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다.

강후는 김목현의 공격 레퍼토리를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

원작에서 김목현의 스승이자 멘토인 전중호가 장시환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전투씬을 설계한 사람은 원작자인 지금의 강후였다.

그리고 지금의 전투 구도는 그 상황과 똑같았다.

타다다닷!

순식간에 올라온 강후와 시선이 마주친 김목현이 곧바로 성좌에게 부여받은 스킬을 썼다.

시야 강탈이다.

김목현을 보기 전, 일찌감치 떠 있던 성좌 정보로 강후도 나름의 노림수를 파악한 상태였다.

강후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단검을 들어 눈 앞을 가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단검 옆면으로 눈을 가려서 시야 강탈을 회피하는, 고전적이지만 가장 어려운 방법이었다.

"······뭔데?"

김목현이 당황했다.

시야 강탈은 몸을 뒤로 돌리거나. 미리 눈을 감고 있거나, 혹은 가리고 있어도 걸린다.

시야 강탈의 이펙트가 닿기 직전에 칼같이 눈 앞을 가려야만 효과가 있는 것이다.

김목현은 지금까지 이렇게 매끄럽게 시야 강탈을 받아친 헌터를 본 적이 없었다.

이건 스킬의 매커니즘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간파한 것이 아니면 절대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놀람도 잠시.

강후의 손이 주먹을 쥐듯, 살짝 움찔했다가 곧바로 움직임을 멈췄다.

눈썰미 좋은 김목현도 어떤 스킬의 예비 동작인지 인지할 수 없는 짧은 움직임이었다.

그때.

"크억!"

김목현의 몸이 허공에 붕 뜨더니, 손쓸 틈도 없이 강후에게 끌려갔다.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

김목현은 자신에게 무슨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끌려갔다.

그도 그럴 것이 납치 스킬은 마족 이브리아의 전유물이자 트레이드 마크 같은 스킬이라서다.

헌터가 가질 수 있는 스킬이 아니다. 가질 수 있다면, 누구든 확보하려 했을 것이다.

납치 이후에 횡 이동 스킬을 연계한 강후는 이미 그 시점에 김목현의 뒤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깔끔한 연계는 끌려온 김목현의 시야에서 강후를 완벽히 사라지게 했다.

강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단검을 내질렀다.

허리춤에 끼워둔 장검을 사용하기에는 중간의 공백이 있어, 타이밍을 놓칠 것 같았다.

푸욱!

"크아아악!"

힘껏 뻗은 단검이 김목현의 오른쪽 등 뒤를 뚫고 들어갔다.

왼쪽을 노린 공격이지만.

시야에서 강후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김목현이 본능적으로 몸을 확 비튼 것이다.

그 바람에 최종 타격점이 오른쪽 등으로 바뀌었다.

촤아악!

우악스럽게 단검을 뽑아낸 강후에게 피가 튀었다.

공격 기회는 여전히 강후에게 있다. 그렇기에 바로 좀 더 깊게 들어가 목뒤를 찌르려고 했다.

하지만 김목현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고, 바로 맞대응했다.

치이이익!

'마나 태우기.'

흑마법사 스킬.

타깃 범위의 마나를 모두 불태워버리는 공격적인 스킬이다.

파팟.

무시하고 들이댔다가 얼굴이 통째로 타버릴 수도 있기에, 강후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각성 상태군.'

강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김목현의 반응과 대응이 빠르다. 이유는 각성밖에 없다.

자신의 마나를 담보로 삼아, 공격 템포를 극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각성'.

성좌와 영향이 있는 것 같진 않으니, 분명 착용한 아이템 중에 각성 효과가 있을 터.

파앗! 파앗! 파앗!

시간을 번 김목현이 강후를 향해, 연속적으로 진보라 불꽃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도약이 쓸만하기는 하지만, 파상공세를 무시하고 뛸 정도는 아니었다.

눈으로 쫓아갈 수 없다고 해서,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녀석의 아이템을 다 벗겨 먹어야 할 이유는 확실히 생긴 것 같네.'

분에 넘치는 아이템을 갖고 있다. 각성 효과라니. 어떤 헌터의 뒤통수를 치고 얻어낸 걸까.

타다닷!

도약을 활용해 전장에서 최대한 뒤로 벗어났다.

진보라 불꽃이 총알처럼 날아드는 상황에서 굳이 회피에 힘을 뺄 필요가 없었다.

강후가 건물 중심부를 관통하는 기둥이 우뚝 선 곳으로 빠르게 위치를 옮겼다.

콰콰쾅!

그러자 강후를 타깃으로 날아들던 진보라 불꽃이 모조리 콘크리트 기둥에 부딪히며 비산했다.

사방으로 조각이 날렸지만, 단단한 기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언제까지 거기 숨어있을 거냐?"

김목현이 소리쳤다.

강후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틈을 타, 기둥 뒤 사각지대에서 환영술을 전개했다.

다섯 개의 환영이 생겼고, 그중에 환영 하나만 기둥 밖으로 내보냈다.

그와 동시에.

스슥.

앞의 기둥을 타깃으로 삼아, 횡 이동을 썼다.

그러자 몸이 기둥 뒤로 이동하며, 자연스럽게 은신 상태에 돌입했다.

환영을 본체처럼 던져주는 기만과 은신으로 완벽히 모습까지 숨기는 위장.

잠시 숨을 고른 강후가 김목현을 살폈다. 예상대로 김목현의 시선이 환영으로 향해 있었다.

파앙!

공간을 가르는 굉음과 함께 도약한 강후는 순식간에 김목현의 코앞까지 거리를 좁혔다.

확실히 김목현이 여러 헌터들을 상대하면서 뼈가 굵은 탓인지.

따앙!

도약의 추진력을 실은 첫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막혔다.

김목현이 레벨 50 기본 스킬인 악마의 벽을 이용해 막아낸 것이다.

알고 막았다기보다 뭔가 접근하는 것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막은 쪽에 가까웠다.

강후는 바로 다음 수를 꺼냈다.

김목현에게 반쯤 올라탄 것처럼 몸을 붙인 후 빠르게 단검을 찔러 넣었다.

마나를 있는 힘껏 불어넣은, 예기 가득한 공격이었다. 그것도 전광석화와 같은 3연타.

푸욱! 푸욱! 푸욱!

"커억! 억! 커억!"

순식간에 쇄골과 왼쪽 겨드랑이 안쪽, 그리고 옆구리 방향을 찔린 김목현이 신음을 토했다.

강후는 김목현이 옷 안에 흉갑 형태의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흉갑이 커버해주는 단단한 부위를 노리기보다, 방어가 취약한 틈새를 노렸다.

결과는 대성공.

터진 물풍선처럼 뚫린 세 군데의 상처로 김목현이 피를 철철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

김목현의 짧은 탄성에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당황과 놀라움.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식은땀이 흘렀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강후가 활용하는 스킬마다 극단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그 위력이 좋았던 것이다.

은신을 깔끔하게 딴 것도 그렇고, 그 상태에서 자신에게 도약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매우 짧았다.

레벨 100쯤 되는 헌터라고 한들, 스킬이 다 효율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이라는 것이 적용되어야 하기 마련이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강후는 예외였다.

"씨, 씨바아아알······!"

참을 수 없는 굴욕감에 김목현이 어둠에 얼룩진 독기를 폭발적으로 발산했다.

동시에 더 깊은 각성 상태에 몰입하면서 강후를 향해 모든 스킬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바닥을 일시적으로 질퍽하게 만들어 기동력을 저하시키는 스킬인 낙오자의 손길.

여기에 공중에서 불꽃이 쏟아지게 만드는 광역 스킬인 '진염 낙하'까지 활용했다.

강후가 또 한 번 기둥 뒤로 위치를 옮겼다. 도약 두 번을 연달아 쓰니 금방이었다.

'아냐, 지금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두통에 강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기둥 뒤에 잠시 모습을 숨겼던 강후가 숨 한 번을 고르고, 바로 나섰다.

환영술?

아니었다.

환영술을 가장해서 직접 본체가 움직이는 루트였다. 앞선 기만에 기만을 또 얹은 것이다.

정직하게 기둥 반대편으로 나오는 강후를 보며, 김목현이 코웃음을 쳤다.

"병신아! 내가 또 속냐?"

그의 시선이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사각 밖으로 나온 강후가 도약 대신 질주로 달려오자, 김목현은 더욱 강후의 본체를 무시했다.

본체였다면 이렇게 정직하게 긴 시간을 주면서, 접근할 리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진짜 강후가 올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 방어 스킬인 '악마의 벽'을 펼쳤다.

그 순간.

파앗!

강후가 몸을 날렸다.

상당히 가까운 위치에서 곧바로 거리를 좁혀오는 확실한 도약이었다.

푸화악!

그리고 이번에는 일찌감치 뽑아둔 장검이 김목현의 옆구리를 거의 터뜨리다시피 하며 지나갔다.

워낙 가까운 거리에서 추진력을 실은 공격이라 하찮은 인간의 살덩어리로 버틸 재간이 없었다.

"끄헉!"

당했다.

너무 뻔해서 가짜라고 생각했던 강후는 환영이 아니라 진짜였다.

그리고 김목현의 피를 화려하게 뒤집어쓴 강후가 말려 올라간 입꼬리로 덤덤히 말했다.

"응. 또 속을 것 같더라."

10화 제압 (3)

김목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악마를 보았다.

타악!

강후가 먼저 한 것은 비틀거리는 김목현에게 다리를 걸어, 그를 확실하게 넘어뜨리는 것이었다.

마법이든 검이든 무엇이든 간에 누운 상태에서는 상대에게 공격을 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방어도 마찬가지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보는 형태로 방어를 해야 하는데, 중력을 거스르는 형태라서 쉽지 않다.

푸욱! 푸욱! 푸욱!

"크아아아악!"

그 말 많던 김목현도 다른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고통이 계속 전해졌다.

김목현을 넘어뜨린 강후가 계속 상처난 옆구리에 단검을 찔러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에 붉은 피가 튀고, 김목현이 갓 잡은 붕어처럼 팔딱대며 절규하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해체, 해체, 또 해체.

마치 사람의 살점을 발라내듯이 잔혹하게 김목현을 제압했다.

고통에 모든 정신을 빼앗겨버린 그는 강후에게 반격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성좌 '기동전의 대가'가 당신의 공격 전략을 매우 훌륭한 전술이라고 극찬합니다.]

[성력을 소량 소모하여 당신에게 약간의 버프를 후원합니다.]

[경험치 증가 +0.1%]

생각지 않은 후원이 생겼다.

수많은 성좌가 헌터를 관찰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후원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어쨌든 성좌의 힘인 '성력'을 사용해야 해서다.

자신의 제한된 재화 중 일부를 썼다는 것이기에 그 가치는 절대 낮게 평가할 수 없었다.

후원을 말로만 하는 것과 쓸만한 성의로 보이는 것은 차이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하찮은 최하급 성좌의 민망한 후원이다. 무시해라. 계약의 주인인 내 품격마저 떨어뜨리는군.]

차원 강탈자의 말을 들은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질투심이 많은 그의 반응은 반대로 해석해야 옳다. 꽤 의미가 있는 후원이 들어왔다는 얘기다.

"쿨럭! 쿨럭!"

그 와중에도 묵묵히 단검을 쑤셔 넣고 있었던 김목현에게 드디어 반응이 왔다.

무슨 반응인가 하면······.

죽음이 임박했다는 뜻이다.

축 늘어진 채, 차가운 콘크리트 지면에 붙어버린 그의 양팔이 사라진 의지를 증명하고 있다.

"잔인한 새끼······."

말과 피가 동시에 섞여 나왔다.

불규칙적인 호흡은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압박을 이미 지나쳤음을 말해준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나 같은 놈 하나 잡는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너같이 하찮은 놈 하나 잡아서 세상이 달라지면, 애초에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안 했을 거다."

"뭐······?"

"그냥 얌전히 뒈지기나 해."

퍼석!

강후가 양팔에 힘을 실어, 장검의 날 끝으로 김목현의 이마 한가운데를 뚫어버렸다.

의심할 여지 없는 즉사였다.

[대상을 죽이고, '혼돈의 싸움꾼'과의 계약을 탈취하였습니다.]

['혼돈의 싸움꾼'의 모든 능력이 당신에게 계승됩니다.]

[입에 걸레를 문 이 성좌는 내가 알아서 제압할 것이니 신경 쓸 것 없다.]

성좌 강탈도 빠르게 이뤄졌다.

차원 강탈자가 바로 뒷말을 붙이는 것을 보니, 예속되는 과정에서 몸부림을 치는 모양이다.

어쨌든 성좌를 흡수하면서 자연스럽게 해당 성좌가 갖고 있던 스킬까지 강후의 것이 됐다.

총 두 개.

하나는 김목현이 썼던 스킬이고, 다른 하나는 쓸 틈도 없었는지 처음 보는 녀석이었다.

[시야 강탈]

[얕은 혼돈]

숙련도 최대가 적용되면서 기존에 김목현이 활용했을 콘셉트보다는 훨씬 향상된 스킬이 됐다.

시야 강탈은 상대의 시야를 암흑으로 만든 후에 '서서히' 원상복구가 되도록 더 악랄해졌고.

얕은 혼돈은 방향 감각 상실에 주변 시야 왜곡까지 함께 유발하는, 두 번을 꼬는 형태가 됐다.

'장시환도 초반부터 이렇게 급성장을 하지는 않았어. 무척 고생하게 만들어 놨었으니까.'

과거의 장시환을 똑같은 출발점에 놓는다면, 아마 자신이 몇 배는 더 빨리 가는 셈이 될 거다.

강후는 새로 얻은 스킬의 구성을 꼼꼼하게 살폈다.

모두 암살자 클래스와 시너지가 좋은 스킬들이다.

"남자 벗기는 취미는 없지만."

강후가 부릅뜬 눈으로 싸늘하게 식어가는 김목현의 몸을 이리저리 만지기 시작했다.

전부 다 벗겨야 한다.

그래야 착용하고 있는 모든 아이템을 회수할 수 있을 테니까.

허리띠 아이템의 경우는 미관상의 문제로 바지 밖이 아닌, 몸 안에 착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더 안쪽을 살펴봐야 한다.

김목현에게서 제법 많은 아이템을 회수하기 시작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요즘 헌터들이 던전을 잘 가지 않는지 말이다.

답은 간단하다.

던전을 가서 고생하는 것보다.

어설프게 아이템을 장착하고 다니는 눈먼 헌터를 죽이고 가진 것을 빼앗는 게 더 이득이기 때문이다.

회수는 금방 끝났다.

이예린에게 돌려줄 의무가 있는 의뢰품 아이템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강후의 소유가 됐다.

"엄청 많이 해 먹었네. 하긴, 찾아온 헌터마다 어스름 늑대로 재미를 많이 봤을 테니."

강후가 건물 밖에 차갑게 식어 있는 어스름 늑대의 시체를 쭉 내려 보았다.

이 녀석들을 이용해서 침입자를 처리하거나, 교전 중에 기습하는 것이 김목현의 전략이었을 터.

여기에 당한 헌터가 한둘이 아닐 테니, 김목현이 잔뜩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 출처도 이해가 갔다.

[악신의 부적 - 부적]

[몰리스 마니체 - 장갑 ]

[아수라의 혜안 - 흉갑]

[무신의 유희 – 반지]

우선 이렇게 착용했다. 기존의 착용 아이템과 중복되지 않는 부위다.

각각 옵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좀 더 꼼꼼하게 살피기로 하고 부적의 구성만 확인했다.

[악신의 부적]

[등급 : 없음]

[1초당 1의 마나를 소모해 '각성' 상태에 돌입합니다. 스킬 캐스팅 시간이 감소합니다.]

"역시."

아낌없이 진보라 불꽃을 퍼붓던 김목현의 자신감은 여기서 나왔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마나 과민증을 빠르게 진정시키거나 억제할 수 있으면, 강후에게는 시너지가 정말 좋을 부적이다.

착용한 것 외에, 따로 확보한 9등급 아이템 열두 품목은 전부 팔 생각이었다.

아무리 못 받아도 100만 원 이상은 챙길 수 있으니, 이미 1200만 원은 번 셈이다.

"나가는 루트에 딱 레벨 20까지 찍으면 좋겠군."

어스름 늑대 열 마리를 잡으면서 레벨 18을 찍었다. 정확하게는 18.5쯤?

던전 안에서 20을 마저 찍을 생각이었다.

그러면 20레벨 기본 스킬인 가속 찌르기를 얻을 수 있다. 암살자에게는 밥줄 같은 스킬.

"레벨 20······. 그놈이 지금 레벨 800인 걸 생각하면, 하층민도 이런 하층민이 따로 없군."

강후가 갈 길이 한참 남은 레벨을 보며,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까워는 보이지만 손조차 닿을 수 없는 저 위의 구름.

딱 그 위치에 장시환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은 아름다울 정도로 완벽하게. 부역자의 손아귀 속에서 굴러가고 있다.

* * *

"형님, 저기 나옵니다."

"어딜 갔다 온 거지? 아예 그냥 피를 뒤집어쓰고 나왔는데?"

"던전에서 몰래 뒤치기하는 놈들이 한둘이냐? 눈먼 놈 하나 후려서 배나 불렸겠지."

시간이 흘러 강후에 대한 기억도 조금 잊혀질 즈음, 오산 수호의 시야에 강후가 다시 나타났다.

당연히 조영재도 강후를 봤다.

사실 오산 수호의 넘버 쓰리니 뭐니 해도, 결국 군벌이나 길드에는 명함도 못 내밀 골목대장이다.

그나마 오산이 군벌과 범죄 조직의 관심권 밖이라서 이런 대장 놀이라도 되는 것이다.

"형님, 저 자식 끌고 올까요?"

"데려와. 낯짝 좀 보자."

조영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데려온다고 해서 강후에게서 스킬을 빼앗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의 이목을 끈 것만으로도 조영재는 기분이 나빴다.

레벨 65의 광전사 헌터.

심지어 그는 '선혈의 탐식자'를 계약 성좌로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후가 부러웠다. 상대적인 열등감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사냥을 멈추고는 우르르 몰려간 오산 수호의 패거리 열 명이 강후를 빙 둘러쌌다.

"어이. 너."

"응? 잠깐만 기다려봐. 하던 게 좀 있어서."

"닥치고 따라와라."

"기다리라고."

강후는 방금 레벨 20을 찍고서, 기본 스킬 해금으로 얻은 가속 찌르기 스킬을 보던 차였다.

[출혈 찌르기]

[스킬 숙련도 : Lv. Max]

[최소 1중첩에서 최대 50중첩까지 대상에게 '출혈' 수치를 중첩시킵니다.]

[10중첩부터는 회복에 관련된 능력이 제한됩니다.]

[2초 안에 다음 공격을 이어가야 중첩이 쌓이며, 그 이후에는 중첩이 초기화됩니다.]

가속 찌르기였던 스킬은 숙련도 최대치 달성과 함께 아예 이름과 성격이 바뀌었다.

출혈 특성은 클래스로는 암살자와 광전사만이 보유가 가능하다.

심지어 그마저도 상시 옵션으로 얻는 때는 둘 다 레벨 200의 기본 스킬을 얻을 때다.

아득히 먼 시기인 셈이다.

출혈이라는 상태 이상이 힐러는 물론, 보스의 자체 회복에 완벽한 카운터를 치기 때문에 헌터에게는 가장 희소성이 높고 전략적으로도 가치가 컸다.

당장 던전 공략을 위해 짜는 용병팀의 섭외 1순위도 '힐러'가 아닌 '출혈 딜러'다.

'출혈 찌르기를 쓸 때마다 마나 소모가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너무 좋은 스킬이다.'

최대 숙련도 덕에 스킬 정체성 자체가 아예 달라져서인지 내용이 참 마음에 들었다.

물론 스킬에 한정해서만 마음에 드는 거고, 주변의 돌아가는 그림은 영 언짢다.

강후가 미동도 하지 않자, 포마드 펌으로 머리를 넘긴 헌터 하나가 강후를 위협했다.

"새끼가 귀때기에 못이 박혔나. 안 들려?"

순간 턱선에 아슬아슬하게 닿은 것은 그의 단검이었다.

꽤 위협적인 접근이었지만 강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헌터를 응시했다.

"그래, 이제 볼일이 끝나서. 뭔데?"

"형님께서 너를 좀 보자 신다. 우리 조영재 형님이 말이야. 누군지 당연히 알지?"

"꼭 그런 것까지 알아야 되나?"

"그런······ 것?"

"어딘데? 안내해."

그때.

"대가리가 깨져 겁을 상실했나, 아까부터 말하는 꼬라지가 왜 이리 좆같냐? 이 새······."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그가 단검에 힘을 실어, 강후의 턱 아래에 검을 꽂아 넣으려 할 즈음.

강후가 각성 상태에서 곧바로 도약까지 연계하며, 단숨에 그의 손을 하늘 높이 날려버렸다.

단순한 쳐내기로는 손목을 잘라내기 힘드니, 아예 스킬로 추진력을 실어버린 것이다.

"끄아아악!"

깔끔히 일자로 잘려 나간 오른손을 본 헌터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주인을 잃은 오른손이 바닥에서 파닥거리고 있었다.

사람의 손을 베는 것이 이리 쉬웠던가?

"씨, 씨, 이, 이 새끼 뭐야."

뒤가 없이, 마치 오늘만을 사는 것 같은 강후의 반응에 오산 수호 헌터들이 한두 걸음씩 물러섰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그들은 동료의 고통을 빠르게 외면하고, 본인 몸부터 착실히 챙겼다.

"너희들이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구는 건, 오산에 있던 헌터 치안청이 폐쇄되어서잖아?"

"······."

무언은 긍정이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강후가 스리슬쩍 저 멀리 뒤에 있는 조영재의 눈치를 보는 헌터들에게 경고했다.

"피차 바깥 눈치 안 보는 건 나도 똑같거든. 그러니까. 너희들은 꺼져. 당사자만 있으면 되잖아."

강후가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단검 끝으로 조영재를 가리켰다.

잔챙이는 필요 없다.

도대체 무슨 용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좌까지 달고 있는 녀석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역겹기 짝이 없는 똥폼과 함께.

11화 제압 (4)

* * *

납치에 바로 연계한 시야 강탈.

여기에 방향 감각과 시야를 왜곡시켜버리는 얕은 혼돈.

확실한 기습을 위해 더한, 횡이동에 출혈 찌르기까지.

강후가 하나의 '콤보'로 만든 구성이다. 입구까지 걸어오면서 생각했던 그림이기도 했다.

사실은 언제 이 콤보를 쓸 일이 올까 싶었다.

의뢰는 끝났고.

일단 복귀해서 이예린을 만나고 난 다음에야 던전을 가든, 일거리가 주어질 테니 말이다.

하지만 생각하지도 않았던 곳에서 시비가 걸렸다. 조영재 때문이었다.

짧은 순간에 강후와 조영재 사이에서 서로의 목숨을 노린 완벽한 노림수가 오갔다.

먼저 공격한 것은 당연히 조영재였다.

강후는 정당방위에 가까운 대응으로 맞상대를 했을 뿐이었다.

다만 강후는 조영재의 노림수를 피했고, 조영재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쿨럭······."

강후의 앞에서 조영재가 무릎을 꿇은 채로 피를 뚝뚝 쏟아내고 있었다.

목, 옆구리, 가슴 가릴 것 없이 깊게 난 자상(刺傷)은 하나하나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이었다.

사실 조영재와 피를 볼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원한 산 일은 없었으니까.

물론 훗날에 조영재가 장시환의 하수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원작에서 장시환이 이 시기에 한 번 세력 토벌에 들어가는 곳이 오산 권역이기 때문이다.

범죄 조직이 가장 득시글거리는 곳이기에 토벌이라는 대외적인 명분은 충분했다.

그러면 누군가의 뒤를 닦는 일에 도가 튼 이런 패거리들은 자연스럽게 줄을 설 터다.

그런 예상까지 하긴 했지만, 그래도 조영재를 먼저 노릴 만한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조영재는 얼굴이 마주치자마자, 있는 힘껏 표정을 찌푸리더니 대검을 그대로 내질렀다.

비겁한 선공이었다.

물론 죽이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 강후의 신념이었지만.

그것은 서로 죽여야 할 어떤 원한 관계나 목적 – 이를테면 살해 의뢰 같은 – 이 있을 때 얘기고.

오늘 조영재와 자신의 사이에는 그럴 연결 고리가 없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대검을 찌른 것이다.

강후의 도약 스킬이 10m 이상 이동할 수 없는 스킬이었다면, 진즉에 목이 날아가 죽었을 터.

하지만 살짝 짧은 조영재의 '돌진' 거리와 맞물려, 후방 도약으로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고.

바로 턴을 가져온 강후가 각성 상태에서 전방 도약을 바로 연계하며 조영재의 목을 그어버렸다.

'놈이 먼저 흉수를 드러낸 것이 내 입장에선 거꾸로 빈틈을 노리기에 좋은 기회를 줬어.'

강후는 그렇게 자평했다.

조영재는 광전사다.

시간을 줄수록 더 강해지는 클래스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장기전을 지양해야 했다.

그런데 조영재의 호전성이 기회를 만들어줬고, 강후는 딱 한 번의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혀, 형님이······."

"으아아! 영재 형님이 죽었어!"

"성좌랑 계약도 하셨는데······."

강후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버린 전투를 목격한 오산 수호의 패거리들은 모두 넋이 나갔다.

제삼자가 보기엔 골목대장일지 몰라도, 그들에게 있어서 조영재는 '신'이었다.

고가의 6등급 아이템을 무려 세 개나 착용한 데다가, 레벨 65에 성좌 계약도 마친 상태여서다.

그런 신이 가장 하찮게 생각했던 녀석에게 목숨을 잃었다. 의심할 여지 없는 완패였다.

강후가 속주머니에서 솔라키움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딱 5초 줄 테니까 알아서들 선택해라. 강요는 안 하는데 결과는 같을 거야."

쯔읍. 쯔으읍-.

강후는 열심히 진액을 빨았다.

조영재에게 했던 공격은 한 템포지만, 다수 연계가 한 번에 들어가서인지 머리가 욱신거렸다.

강후가 슬쩍 시선을 돌려 쳐다보자 한 놈도 남김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죽음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게 된 세상. 그래서인지 강후도 달리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죽이려고 한 놈을 죽였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왜 죽였을까 하는, 머저리 같은 감성은 없었다.

"둘."

"으아아!"

강후가 둘을 세기가 무섭게, 모두 36계 줄행랑을 쳤다.

가장 뒤처져 뛰는 녀석은 아까 초면에 강후에게 오른손을 잃었던 포마드 펌의 그놈이었다.

* * *

"정선규입니다."

- 네, 선규 씨. 의뢰가 완료된 건가요?

"네. 회수했습니다."

- 김목현은요?

"대전역에 도착하는 대로 연락드리죠."

던전 밖으로 나온 강후는 이예린과의 짧은 통화를 끝냈다.

그녀에게 김목현의 생사에 대해 알려주지 않은 것은 그 정보도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정보에 공짜는 없다. 그리고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다.

[선혈의 탐식자]

[중립 성향의 성좌. 체력을 잃을수록 정신 공격에 면역이 될 확률이 상승합니다.]

조영재에게서 강탈한 성좌의 능력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강후가 가장 원했던 능력이었다.

'적'이라고 가정했을 때, 헌터들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것이 정신을 조종하는 헌터이기 때문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살을 하도록 만든다거나, 동료를 죽여버리도록 지시할 수 있다면?

실력이 꽤 있는 '정신계' 헌터는 이런 비극을 어렵지 않게 현실로 만들어낸다.

여기에 저항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전투적으로 갖는 의미가 정말 컸다.

어쨌든 조영재에게 세 개의 아이템을 얻었다.

[광기의 전주곡 – 장갑]

[등급 : 6등급]

[체력 +25]

[마법사 사냥꾼 - 발찌]

[등급 : 6등급]

[항마 +25]

[추적의 신발]

[등급 : 6등급]

[민첩 +25]

[지정한 대상을 추격할 때, 이동 속도가 25% 상승합니다.]

셋 다 알짜 아이템이다.

특히 마법사 사냥꾼 발찌는 희소성이 정말 높은데, 항마 옵션이 매우 얻기 힘들어서다.

그래서 보통 항마 관련 아이템은 무조건 한 등급을 더 높게 쳐줬다.

시중에 팔면, 다른 부류의 5등급 아이템과 같은 가치의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10분 후.

"여기가 좋겠군."

버려진 폐허 던전에서 살짝 떨어진, 오산역 서편 일대로 왔다.

사실 색다를 게 없는 장소지만, 오늘만큼은 볼거리가 있어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향한 것이다.

- 평정 새끼들은 다 죽여라!

- 바스타드 놈들은 항복해도 죽인다!

오산역 일대로의 진출을 꿈꾸는 범죄 조직 '평정'과 'Bastard'가 전면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역 서편에 위치한 던전 '황금 고블린의 광산'이 알짜배기 던전이기 때문이다.

폐쇄식이라 세력 통제가 가능하고, 리셋식이기에 공략이 빠를수록 내부 회전이 빨랐다.

특히 고등급 마석이 잘 나오는 덕분에, 빨대만 꽂고 있으면 매일 억대의 순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조직의 운영 자금 밑천으로 활용하기에는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이 없는 것이다.

적어도 오산에서는 그랬다.

딸깍. 치이익.

강후가 캔 커피를 들이켰다.

아래가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커피 한 모금과 함께 피 튀기는 전장을 보고 있자니······.

꼭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석양이 지는 하늘을 뒷배경으로 삼아, 두 조직의 검은 그림자들이 뒤엉켜 서로를 유린한다.

피는 석양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허공에 휘젓는 고통의 몸부림 속에서 죽음을 읽는다.

"······."

강후는 자신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마나 추적 능력의 힘이다.

근방에 있는 상대가 마나를 기반으로 쓰는 헌터라면, 절대 이 감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강후가 이 능력의 원주인이었던 간수를 처치했을 때처럼, 작정하고 속인다면 당하겠지만....

슬쩍 고개를 돌리니, 자신의 키만 한 양손 대검을 든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혓바닥을 파랗게 물들일 작정인지, 싸구려 막대사탕을 힘껏 물고 있다.

흩날리는 긴 머리에 언밸런스하게 입은 후드 집업 자켓과 트레이닝 바지까지.

전투복이라기엔 동네 산책을 나올 때 딱 입기 좋을, 그런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명당이죠?"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장에서의 이동 경로로는 길지만, 물리적인 직선거리로는 짧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죽는 애들 구경하기는 여기만큼 좋은 곳이 없어요. 물론 구경하다가 죽기에도 딱 좋죠."

자연스럽게 강후의 옆쪽에 앉는 그녀.

두 뼘 정도 되는 거리에 가까운 착석이었다.

초면에 달리 섞을 말도 없기에 강후는 침묵을 지켰다.

살갑게 말하는 재주는 아쉽게도 원작의 신강후에게는 탑재되지 않았다.

오히려 결핍된 쪽에 가깝다.

하지만 그녀는 불편한 기색 없이 오히려 강후에게 힘주어 물었다.

애초에 대답을 듣기 바란다기보다 혼잣말을 하는 데 강후가 옆에 있는 느낌이었다.

"용병이에요?"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용병인데. 괜찮은 용병단 혹시 아는 곳 있어요? 페이 좋고, 의뢰 난이도는 낮은 곳?"

돈은 더 받고 싶은데 일은 쉬운 것으로 하고 싶다니?

용병으로서의 자세가 글러 먹었다.

"전제가 잘못된 것 같은데."

"큭! 앞뒤가 안 맞는 말은 못 참는 성격이네. 월척이네, 월척이야! 제대로 낚았어!"

"······."

그제야 강후는 그녀가 목석같은 자신에게서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 미끼를 던졌음을 알았다.

좋은 시도였다.

제대로 당했으니까.

"윤상미예요. 이름은 안 물어볼게요. 안 알려줄 것 같거든."

"정선규."

"가명이죠?"

"응."

"나도 가명이에요."

강후는 그녀와 마주쳤었던 시선을 다시 전장으로 돌렸다. 가명으로 통성명하는 것이 새삼스럽지는 않으니까.

용병 중에 자기 이름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거의 없다.

그런 경우가 있다면 이미 본명이 널리 알려져 가명 자체가 의미가 없어졌을 경우밖에 없다.

아니면 수배가 걸렸거나.

"대전역 쪽에 가면 일감은 많을 거야. 이클립스가 워낙에 전방위적으로 어그로를 끌어놔서."

"이클립스. 알고 지냈었던 용병 다섯이 걔네한테 죽었어요. 실종자도 꽤 있고. 보나 마나 청명 수용소로 갔을 텐데······."

윤상미의 말에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름이 떠올라, 강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기억을 외면하려 해도 그곳에서 받았던 고문과 학대는 몸이 기억하고 있다.

그 순간.

온몸이 말라비틀어지는 느낌과 함께, 두통이 강하게 치밀어오르기 시작했다.

학습된 고통이다.

마석을 캐기 위해서 극한의 마나 소모를 강요받았고, 마나 과민증이 수시로 발동했었다.

"간부급에 걸린 현상금만 쓸어 담아도, 몇 년 은퇴해서 유유자적하기에 딱 좋지."

"강동현 같은 간부요?"

"서열 3위니까. 죽여서 목만 잘 잘라가도 200억은 너끈히 받겠지."

지금 강동현을 노릴 수는 없다.

어린아이와 격투기 선수가 맞붙는 수준일 터.

강동현은 레벨 500을 상회하는 헌터였다.

이 정도가 어느 수준인가 하면, 한 번 휘두른 검격에 군용 트럭을 반토막 낼 수 있을 정도다.

아직 갈 길이 먼 것이다.

'물론 언젠가 닿을 곳이기도 하지. 내게 필요한 건 시간뿐.'

윤상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용병 활동에 대한 또 다른 방향성이 떠올랐다.

실제로 용병 중에는 수배된 헌터를 쫓는 현상금 사냥꾼이 상당히 많다.

응당 죽음으로 죗값을 치러야 할 헌터가 있다면······.

성좌 강탈 능력이 있는 강후로서는 엄정한 법의 집행자가 됨과 동시에 수배된 헌터의 능력도 함께 취할 수 있는 현상금 사냥꾼이 제격이었다.

12화 클럽 하데스 (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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