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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ZADORIMPE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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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Chapter 11

1-143 oz님 파일 재공

제국사냥꾼

#0.

마법이 돌아왔다.

가장 무가치한 지식을 지켜온 자들이 가장 영화로운 꿈을 꾸기 시작할 것이다.

#1. 삼각비행 (1)

싱가포르의 12월은 비가 많이 내리는 계절이었다. 소나기가 쓸고 간 열대의 도시엔 습한 공기가 가득했다. 숨 막히게 더운 거리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진다. 이렇게 뜨거운 도시에서도, 커다란 산타 조형물은 두껍고 붉은 털옷을 입고 있었다. 그 앞에서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보인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로 인해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눈곱만큼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형님."

부하 하나가 조용한 음색으로 부르는 소리.

"여기서도 그 「마소」라는 게 보이십니까?"

마소(魔素)란 내가 마법의 원천에 붙인 이름이다. 아주 오랜 세월 고갈된 상태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사흘 전부터 온 하늘과 땅에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래. 구석구석 안 흐르는 곳이 없을 정도로 많다."

답을 들은 부하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평범한 눈에 평범하지 않은 것이 보일 리 없다. 나처럼 눈알을 뽑고 유물을 박지 않는 이상에야.

다른 부하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럼 조금이라도 일찍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뭔가 대비를 하려면요. 서두르면 해가 지기 전에 인천 가는 표를 끊을 수 있을 겁니다."

"아니. 그러면 행적이 의심스러워진다."

"의심스럽다뇨?"

"외국까지 나와서 반나절도 체류하지 않는 여정이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지."

"아!"

"이 거대한 변화를 알아차린 놈들은 백이면 백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을 거야.... '우선 이게 내가 있는 곳에서만 벌어지는 일인지, 아니면 전 세계적인 현상인지를 확인해야겠다.'라고. 나중에라도 놈들의 추적에 노출되지 않으려면 뻔한 행동은 피해야지."

"오!"

"애초에 시간을 아끼려면 호주에서부터 서둘렀어야 한다. 브리즈번에서 보낸 사흘, 그리고 여기서 보내는 오늘 내일은 꽤 괜찮은 알리바이가 되어 줄 거다."

이 정도의 여백을 넣은 일정은 돈이 많아서 시간도 많은 놈들의 일상적인 돈지랄에 묻힐 것이다.

"그러니 너희 둘은 평범하게 여행을 즐기면 된다. 이 현상.... 이 비정상적인 마소과잉이 이대로 계속된다고 쳐도, 당장 무슨 일이 터지는 건 아니니까. 가시적인 변화는 느리게 찾아올 거야."

"크으! 형님께는 항상 계획이 있으시군요!"

"목소리는 줄이고."

"옙!"

"줄여라."

"옙...."

두 부하 중 정신 사나운 쪽이 합죽이가 되었다.

말한 것처럼, 싱가포르는 이번 여행의 두 번째 기착지다. 인천, 브리즈번, 싱가포르를 꼭짓점 삼아 거대한 삼각형을 그리는 비행. 이 짧은 여행의 목표는 경도와 위도에 따른 마소의 밀도 변화를 확인하는 것이다.

마소의 분포가 국지적일 경우, 위치가 달라지면 밀도 역시 달라질 터. 또한 그 분포는 넓은 면의 형태일 수도, 좁은 띠의 형태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계획한 게 삼각비행이다. 삼각형은 면을 이루는 최소조건이니까.

확인 결과, 마소의 분포는 지나온 모든 장소에서 균일했다.

내가 그린 삼각형의 면적을 감안할 때, 이 바깥에서부터 마소의 밀도가 감소한다고 쳐도 이변의 영향권은 지구 전역일 가능성이 높았다. 삼각형을 더 크게 그리고픈 욕심은 향후의 역추적 위험성과 그로써 얻을 확신의 가치를 저울질한 끝에 자제했다.

남은 문제는 이 이변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것인가...인데.

이것만은 지구상의 누구도 답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고민하면서 걷다보니 예약한 호텔이 가까웠다. 로비로 들어가는데, 합죽이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눈치를 보는 게 느껴진다.

"경태야. 목소리를 줄이랬지, 입을 다물라곤 안 했다."

"아하."

"할 말 있으면 해라."

허락을 하자마자 냉큼 입을 여는 녀석.

"여기가 인터컨티넨탈이잖습니까?"

"그런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여기서 한 블록 옆에 이 세상 모든 술을 다 판다는 바(Bar)가 있답니다. 당연히 과장이겠지만, 그래도 주당들 사이에선 알아주는 곳이라는데 거기 한번 들르는 게 어떨까요?"

"해가 지기도 전에 술부터 찾는 거냐?"

"여행을 즐기라고 하셨으니까요. 자고로 여행의 절반은 먹고 마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데서 꼭 술만 팔진 않을 겁니다. 거기 가셔서 간단하게 반주를 하시고, 해가 떨어진 다음엔 이곳 명물이라는 야시장을 돌아다니면서 딤섬도 먹고 락사도 먹고 온갖 꼬치구이를 곁들여서 잔에 이슬이 맺힐 만큼 차가운 맥주를 그냥-"

...긴 말을 주절주절 잘도 떠들어댄다. 잠깐 사이에 뭘 그렇게 많이 찾아봤는지.

그래도 '호텔에 틀어박혀 있기'보다는 나은 계획이다. 속이 복잡할 땐 일부러라도 찾아야 하는 게 여유 아닌가. 좋은 생각은 여유가 있을 때 떠오르는 법. 안내는 이놈에게 맡기고 애완견 산책시키듯이 돌아다니면 되겠지. 나는 녀석에게 보이도록 까딱 끄덕여주었다.

"알았으니까 일단 체크인부터 하자."

"감사합니다, 형님!"

"목소리."

"예."

관광객이 많은 곳이다. 이목을 끌어서 좋을 게 없다.

방에 짐을 두고 나오니 오후 5시를 살짝 넘긴 시간이었다. 길 건너엔 현대적인 양식의 국립도서관 건물이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다. 개인적인 취향으론 술보다 책을 선호하고, 영어든 화어(華語)든 읽는 데 지장이 없지만, 지금은 뭘 읽어도 눈에 들어올 것 같지가 않다.

"가시죠, 형님. 안내하겠습니다."

신이 난 경태가 반보 뒤에서 방향을 안내한다. 반대편에선 나직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도착한 바는 내장부터가 화려했다. 2층 높이의 천장과 탁 트인 공간만으로도 땅값 비싼 싱가포르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사치다. 커다란 내력 기둥의 선반을 가득 메운 술병들이 주광색 조명을 받아 다채롭게 반짝거렸다. 이 세상 모든 술을 다 판다는 말은 과장일지라도, 라인업이 수준급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실내엔 재즈 풍으로 편곡된 캐럴이 흐르는 중이었다. 볼륨은 대화가 묻힐 만큼 적당하다.

"천천히 고르시길."

테이블을 안내한 여급이 미소와 함께 메뉴를 두고 갔다. 펼쳐서 대강 넘겨보니 일반적인 주류만 25페이지, 특별한 컬렉션은 108페이지나 된다. 말 많은 주당 녀석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나는 녀석 앞으로 컬렉션 북을 밀어주었다.

"네가 봐라."

"이 중에서 시켜도 됩니까?!"

"내 것은 샴페인으로. 취하고 싶진 않다."

좋아라 하던 경태가 제 옆자리를 돌아본다.

"수연 누님은요?"

"형님과 같은 거면 돼."

"옙. 그럼 저도 개시는 샴페인으로. 같이 마실 거니까 병째 시키는 게 좋겠네요. 두 분은 씹을 거리를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컬렉션 북에 꽂혀있다. 팔락팔락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 완전히 몰두한 품새를 보고 있노라면 저렇게 좋을까 싶다.

"우와!"

뭘 찾았는지 놀라는 녀석. 이번에도 내 눈치를 본다.

"뭐냐."

"750밀리 한 병에 19만 700달러짜리가 있어서요."

"샴페인이?"

"예. 미친 것 같은데요?"

싱가포르 달러로 19만이면 원화로는 대략 1억 6천이다. 고가 브랜드인 돔 페리뇽 외노떼끄(Oenotheque)를 도쿄 한복판에서 30만 엔에 마실 수 있건만. 나는 경태에게 손을 까딱였다.

"보자."

"넵."

펼쳐진 페이지엔 영어로 상품 설명이 쓰여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10월 26일, 스웨덴 남부의 예블레(Gavle)항에서 한 척의 작은 밀수 스쿠너 옌셰핑(Jonkoping)호가 출항했다. 이 배엔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주문한 3천 병의 샴페인이 적재되어 있었다....」

이 뒤로 핀란드 해안에서 독일 잠수함 U-22에게 격침되었고 어쩌고 하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이어졌는데, 요약하면 바다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한 세기 전의 샴페인이라는 내용이었다. 샴페인이 상하지 않은 것은 해저의 압력과 온도 덕분이라고.

"1907년산이라 19만 7백 달러인가."

"자그마치 100년을 묵은 샴페인입니다. 맛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꼴까닥 침 넘어가는 소리. 나는 경태를 바라보았다.

"먹고 싶냐?"

"당연합니다! 하지만 가격이-"

"주문해라."

"오? 오오오오오오오오오?!"

경태가 두 주먹을 꾹 쥐고 소리 죽여 환호한다.

"이거 꿈은 아니죠?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형님! 하하하."

흘러가는 꼴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수연이 점잖게 끼어들었다.

"형님. 그렇게 다 받아주시면 이놈 버릇 나빠집니다."

"누님도 참. 제가 앱니까?"

"하는 짓은 그런데."

"치사하게 팩트로 승부하시다니."

"팩트로 뭐...?"

나는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려 두 녀석의 주의를 환기했다. 바로 조용해지는 둘.

"100년 만에 빛을 본 샴페인이다. 오늘 같은 날 기념 삼아 마시기에 괜찮지 않나? 같이 한잔하지."

처음 마소과잉을 느낀 날이야 어쨌든, 세계적인 현상임을 확인한 건 오늘이니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기념해둘 만은 하다. 오랜 세월을 두고 돌아왔다는 점에선 마법의 원천과 침몰선의 샴페인 사이에 공통분모가 있었다.

사치를 꺼리는 수연이 굼뜨게 납득한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경태는 커다란 덩치로 눈치를 보고 있다. 하기야 사업상의 필요 외의 이유로 이만한 사치를 부리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 그냥 내가 주문하는 게 낫겠다.

호출에 응한 여급은 주문을 듣고 당황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더니, 빠른 눈으로 날 탐색하고는 상냥한 미소를 머금었다.

"주문 확인했습니다. 다른 건 없으십니까?"

난 몇 가지 안주를 추가로 주문했다.

"음식이 준비되는 대로 함께 내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멀어지는 여급의 발걸음이 가볍다. 계산서에 ++로 붙을 서비스 차지를 생각하면 아마 날아가는 듯한 기분일 것이다. 세금을 더한 가격의 10%이니 술에 대한 팁으로만 경차 한 대 값이다. 다른 직원들과도 나눠야 하겠지만.

오래지 않아 술과 음식이 차려졌다. 미뇨네뜨 소스와 레몬을 곁들인 석화(石花)가 열두 개, 라 뻬랄(La Peral) 치즈와 샬럿 피클로 속을 채운 한 입 크기의 크로크 무슈들, 무설탕 크림이 들어간 마들렌이 한 접시, 안쵸비를 올려 구운 피살라디에르가 한 판이다. 조리가 필요 없거나, 준비만 되어있다면 비교적 빠르게 만들 수 있는 것들.

많아 보이지만, 이렇게 시키지 않으면 수연이 제 먹성을 감춰서 곤란하다. 이런 곳에선 주문을 맡겨도 일일이 내 의사를 확인할 만큼 삼가는 녀석이라.

샴페인은 라벨이 거의 벗겨졌고, 유리병과 코르크마개엔 꼼꼼한 손질로도 지우지 못한 바다와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매니저가 직접 나와 펼쳐 보인 크리스티 경매 인증서가 진품임을 보증한다. 고객이 가져가 경매업체에 고유번호를 조회할 수 있도록 만든 인증서였다. 경태 놈이 기념품 삼아 가지도록 하면 되겠다.

"그럼 개봉하겠습니다."

허락을 구한 매니저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병을 붙들고 코르크마개를 제거했다. 워낙 오래된 것이다 보니 세심하게 다루지 않으면 바스러질 위험이 있었다.

"잔을 채워드릴까요?"

이마가 조금 젖은 매니저의 질문에, 입맛을 다시던 경태가 투박한 영어로 손사래를 친다.

"아뇨아뇨. 괜찮습니다. 이만 가보셔도 됩니다."

매니저는 필요하면 불러달라는 말을 남기고 정중히 뒤로 물러났다. 경태는 히죽히죽 웃으며 두 손으로 공손히 병을 들었다.

"자, 먼저 한 잔 올리겠습니다."

난 잔을 기울여 녀석이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좁은 잔 속 투명한 금빛의 소용돌이로부터 탄산 기포들이 올라왔다.

"너희도 받아라."

병을 넘겨받은 내가 두 녀석의 잔을 순서대로 채워주었다.

서로의 잔을 쨍 부딪치고서 샴페인을 맛본다. 참나무와 과일의 향이 밴 첫 모금은 단맛이 적고 적당한 산미가 감도는 산뜻한 맛이었다. 숙성이 잘되어 부드럽긴 하지만, 순수하게 맛의 우열을 가리자면 시중에 도는 고급 라인업이 더 나은 수준이다.

비슷하게 느꼈는지 수연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가격만큼 특별한 맛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감동을 음미하던 경태가 반박한다.

"에헤이. 누님. 이런 건 감성으로 마시는 거란 말입니다, 감성으로."

"감성이 밥 먹여 주냐."

"쩌어기 애플이란 회사는 그렇던데요."

"...."

뭐야, 이 만담은.

두툼한 석화 위로 레몬을 짜고 있으려니, 수연이 조금 마신 잔을 내려놓고 물어왔다.

"형님. 만약 이번 사태가 장기화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글쎄다."

레몬을 얼음 위에 놓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예상되는 변화가 너무도 거대하여 그 양상을 일일이 늘어놓기엔 끝이 없겠고, 짧게 줄이자니 표현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이렇게 말하는 게 최선일 듯하다.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겠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거칠고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곳으로 바뀌어 갈 거다."

#1. 삼각비행 (2)

가만히 입술을 매만지던 수연이 다시 한 번 묻는다.

"그건 사람들 때문입니까?"

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살아있는 모든 것들 때문에."

이 답은 질문을 한 수연도, 귀를 기울이던 경태도 당황하게 만들었다. 두 녀석은 내가 예상하는 변화의 거대함이 이제야 피부에 와 닿았을 것이다.

"마법이라는 게 인간의 전유물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 정확히는 원시마법이라고 해야겠지만."

"원시마법이요?"

"외견상 특화된 초능력에 가까울 거야. 대부분의 각성은 생명 그 자체의 강화와 그 밖의 지엽적인 능력들로 나타나겠지."

마법의 구현은 마소를 돌려 마력으로 변환시킬 회로를 필요로 한다. 이 회로는 영혼에 새겨지는 것. 마소가 풍부한 환경에선, 영혼이 마소에 부대끼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회로가 트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런 회로가 내 것처럼 정교할 순 없지....'

마소가 너무 많아도 문제다. 이토록 크고 거친 흐름 속에서 집적도 높은 회로를 새기기란 불가능한 일.

그러므로 원시적인 회로는 흐르는 에너지의 총량에서 나를 능가할 순 있을지언정, 그 에너지를 활용하는 측면에선 누수와 낭비가 많고 복잡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짐작컨대 유효하게 쓰이는 에너지의 비율이 채 1%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흔할 것이다.

예전부터 마법사였던 자들과 새롭게 각성할 능력자들 사이엔 노력으로 극복하지 못할 격차가 존재하는 셈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두 녀석에게 풀어주었다. 천천히, 차분하게, 정리된 말들이 떠오르는 대로.

한 번 비우고 다시 채우는 잔 안쪽에 창밖의 연한 노을이 배어들었다. 평범하지 못한 내 시야에도 곱게 보이는 빛이었다.

제 잔을 멍하니 보던 경태가 머리를 긁적였다.

"에구, 대충은 알겠는데 상상은 잘 안 되네요. 사람도 사람이지만 그 뭐냐, 멧돼지 같은 게 지금보다 훨씬 더 위험해진다고 보면 되겠습니까?"

난 고개를 기울였다.

"다른 생물도 많은데 왜 하필 멧돼지냐."

"당장 떠오르는 게 그 정도라서 말입니다. 걔들이 주택가로 자주 내려오잖습니까. 편의점으로 들이닥쳤다느니 차를 들이받았다느니 하면서 뉴스에도 나오고. 그게 막 초능력 멧돼지? 같은 거라면 여러 사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말이죠. 하하."

흠.

"맞는 말이지만, 피해의 총량을 고려할 때 더 귀찮을 놈들은 따로 있을 거다. 인간을 직접적으로 공격할 동기가 있는 생물종 말이다."

"예를 들면요?"

"예를 들면-"

나는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이는 동물을 떠올렸다.

"모기."

"예? 모기요?"

"그래."

석화를 하나 집어먹고, 샴페인 한 모금을 삼키고서 말을 잇는다.

"다소 극단적인 예시이긴 하다만, 살충제도 잘 안 통하는 모기가 방충망을 힘으로 찢고 들어오는 세계를 상상해봐라. 굉장히 X 같겠지?"

"허미."

경태가 질겁을 했다.

"설마 그런 놈들이 떼로 나타납니까?"

"극단적인 예시라고 했다."

"하면...?"

"각성할 확률, 그리고 능력의 강약은 그 생물의 생체질량과 살아온 시간에 비례할 거다. 모기 중에서 그토록 강력한 개체가 출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지. 종에 따른 차이도 있고."

모기의 영혼은 작다. 작은 영혼이 작은 몸집에 깃들어있으니, 마소에 노출되는 표면적도, 그럼으로써 만들어질 회로의 크기도 그만큼 작을 수밖에.

그러나.

'문제는 숫자다.'

꼴에 술이라고 샴페인을 마셨기 때문인지, 내 사색은 잠시 생산성이 낮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 모기들이 있을까?

이건 페르미 추정으로 계산하는 수밖에 없겠다.

사막에도 모기가 살고 시베리아조차 예외가 아니므로, 모기는 극지방을 제외한 지구 전역에 분포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저 밀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면적은 대략 1,300만 제곱킬로미터쯤 되려나?

여기에 사막과 늪과 초원 등지의 평균을 대강 후려쳐서 5 제곱미터 당 한 마리의 모기가 있다고 치면....

2조 6천억 마리.

각성 확률이 만분의 일이라도 당장 2억 6천만 마리의 슈퍼 모기가 튀어나오는 셈이다. 게다가 이 확률은 세대가 바뀔 때마다 반복 시행된다. 체감 상으론 훨씬 더 많게 느껴질 거란 뜻.

이게 비록 부정확한 추산이라도 시사하는 바는 크다. 마소의 범람이 조기에 해소되지 않는다면, 인류는 앞으로 그런 세계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 한낱 모기 같은 미물부터 시작해서, 생명을 지닌 모든 환경이 낯설고 거칠어질 세계를.

경태 녀석이 마른세수를 했다.

"주식을 팔아야 하나...."

메모를 하던 수연이 미간을 좁혔다.

"뚱딴지같은. 갑자기 주식이 왜 나와."

"향후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나쁜 쪽으로 커질 것 같아서요."

"...."

참 일관성 있는 놈이다.

"뭐 샀냐."

물어보자 경태가 답한다.

"셀X리온이요."

"이익은?"

"손해죠. 여의도 김씨 아저씨 말을 듣고 재작년 말에 20만 언저리에서 몰빵했던 거를 여지껏 들고 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저씨 말대로 30만 찍었을 때 바로 놨어야 했는데, 계속해서 올라가는 걸 보고 욕심을 내다가 그만...."

"네가 잘못했네."

"제가 잘못했죠."

경태 녀석이 시무룩해졌다. 여의도 김씨는 내 국내 자산운용을 맡은 간부인데, 이 녀석에게도 투자정보를 귀띔해주었던 모양이다.

"너무 서두르지 마라."

"예?"

"이제까지 한 말들은 마소 범람이 장기화될 때의 이야기 아니냐."

이 현상이 단기적으로 끝난다면.... 기왕 쌓인 마소가 단번에 증발하진 않을지라도, 그렇게까지 심한 혼란은 없을 것 같다. 하락장이 올 경우 오히려 매수를 할 타이밍이겠지. 얼마 안 가 정상화될 테니.

어디까지나 예측에 불과하지만.

"결국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렇다."

나는 두 녀석의 잔이 가득 차도록 첨잔을 해주었다. 이로써 병이 다 비었다. 금방이라도 넘칠 듯 넘실거리는 샴페인을 본 경태가 어이쿠! 하며 입을 대고 빨아들인다. 그렇게 술을 밝히는 놈이 내가 더 마시게끔 참고 있던 눈치. 하물며 수연 쪽은 말할 것도 없다.

이까짓 게 뭐라고. 비싸봤자 술인 것을.

레몬과 버터의 풍미가 진한 마들렌은 샴페인과 궁합이 잘 맞았다. 마들렌의 기름진 부드러움을 차갑게 적셔주는 샴페인의 청량감.

잔을 홀짝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연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어쩐지 형님께선 이 사태가 달갑지만은 않으신 듯한 느낌이 듭니다."

관찰력이 좋다. 난 내 근심을 순순히 인정했다.

"맞다."

"그럴 리가 없... 네? 왜요?"

한 박자 늦은 경태 녀석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형님 인제 죽어야 할 놈들을 제물로 안 쓰고도 능력을 펑펑 쓰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조만간 그렇게 되겠지."

"엥? 조만간이요? 당장이 아니고요?"

"마소가 많아도 너무 많아서 그렇다."

내가 잠재력을 발휘하려면 변화한 환경에 맞게 회로를 조율해야 한다. 그러기 전에 최대 출력으로 회로를 돌렸다간 몸이 세포단위로 붕괴하거나 폐인이 되어버리고 말 터. 마치 과전압에 타버리는 전자회로처럼. 사실 가만히 있는 지금도 가벼운 부하가 가해지는 중이다.

경태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튼,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해지실 텐데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물론이다. 내가 강해지는 만큼 런던에 있는 놈들도 강해질 테니까."

런던에 있는 놈들이란 내 스승새끼의 옛 동지들을 말한다.

멍 때리는 경태 옆에서 수연이 끄덕였다.

"거기까진 미처... 생각을 못 했습니다. 일전에 말씀하시길, 세상의 그늘에서 조용히 살아간다면 죽을 때까지 마주칠 일이 없을 인간들이라고 하셨던지라."

"당시엔 그랬지. 그 제국주의자들에게 남은 거라곤 과거의 영광뿐이었으니."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마소 고갈에 허덕이며 화석이 되어가던 런던의 마법사들은 머잖아 거대한 힘과 권력을 손에 넣을 것이다. 놈들에겐 놈들의 제국에 해가 지지 않던 시절, 온 세상에서 약탈해 온 지식과 유물들이 넘치도록 있으므로.

나는 가벼운 짜증을 담아 내뱉었다.

"내 스승... 그 염병할 흰둥이가 놈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저질러놓은 짓들을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에.... 이대로라면 나와 런던의 충돌은 확정된 미래나 마찬가지야. 그건 아주 길고 위험하고 피곤한 싸움이 되겠지."

과거 스승이었던 인간이 생전에 내 생눈을 뽑고 박아놓은 의안, 이른바 「황금기의 눈」은 본디 런던 제국주의자들의 가장 귀중한 유물이었다. 이 장물을 도로 뽑아 돌려주며 목숨을 구걸한다는 선택지는 내게 없다. 뽑자마자 회로 파열로 즉사할 몸이 되어버린 까닭이다.

스승새끼를 떠올리니 보육원 시절의 술 맛 떨어지는 기억들도 함께 떠오른다.

하. X 같은 놈.

수연이 묻는다.

"그 '런던'의 눈을 피해 숨어 사는 건 불가능하겠습니까?"

난 딱 잘라 대답했다.

"가능하더라도 행운의 영역이다."

"...."

"나는 그러기 싫다. 한평생 두려움에 쫓기며 도망자의 삶을 사느니, 차라리 모든 걸 걸고 싸워보는 게 나아."

그들과 나, 어느 한쪽이 완전히 끝장날 때까지.

스승새끼가 내 머리에 남긴 기억 속엔 런던 제국주의자들의 혐오스러운 가치관과 만행들이 포함되어있다. 스승에게 그러했듯이, 그 선민의식에 찌든 놈들에게도 나는 그저 사람 흉내를 내는 유인원에 지나지 않을 터. 유인원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제국주의자는 없다. 놈들과의 협상이나 공존에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유다.

"그리고 장담하는데, 그놈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편이 너희에게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유익할 거다. 그냥 뒀다간 이 세상을 모조리 집어삼킬 암세포들이니."

말을 마친 나는 감정을 다스렸다. 어느 샌가 어조가 거칠어지고 있었기에. 여간해선 감정을 과하게 드러내는 일이 없건만, 스승과 제국주의자 패거리들에 대해서는 그러기가 어려웠다.

테이블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바에서 틀어놓은 음악과 거기에 묻혀 알아듣기 어려운 주변의 말소리들이 귓가로 어수선하게 밀려든다.

샴페인이 반쯤 남은 잔을 만지작대던 경태가 그걸 쭉 들이켜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세상이니 뭐니 거창한 건 알 바 아니지만서도.... 저희가 할 일은 지금까지나 앞으로나 다를 게 없을 것 같습니다. 형님께서 죽이라고 하실 땐 죽이고, 죽으라고 하실 때 죽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순간 내 눈은 습관처럼 경태의 뇌를 훑고 있었다. 전두대상피질과 편도체에선 어떤 거짓의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

이 녀석은 언제나 꼬리를 흔드는 개 같은 놈이다. 욕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개처럼 충성스럽다는 뜻. 가끔은 미친놈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래서 1억 6천짜리 샴페인도 아깝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요, 형님."

경태가 물었다.

"안주가 많이 남았는데 샴페인 한 병 더 시켜도 됩니까? 이제 너무 막 비싼 건 말고요."

"마음대로 해라."

"감사합니다!"

컬렉션 북을 뒤적이던 녀석이 한 페이지 위로 손가락을 짚어 보였다.

"이건 어떨까요?"

"뭔데?"

"폴 로저, 2000년산 뀌베 「써(Sir) 윈스턴 처칠」이요."

"...."

폴 로저는 윈스턴 처칠이 즐겨 마셨다던 샴페인 브랜드로, 아직까지 처칠의 이름을 붙인 제품들을 팔고 있다. 그리고 처칠은, 비록 런던의 마법사들과 큰 관련이 없지만, 사상적으로는 오십보백보로 역겨운 제국주의자 새끼다.

나와 수연이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니 경태가 낄낄대며 웃는다.

"기분이 좀 풀리셨습니까?"

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술은 죄가 없지."

"으하핫! 정말로 감사합니다, 형님!"

녀석은 곧바로 새로운 샴페인을 주문했다.

골초 제국주의자의 이름을 쓰는 샴페인은 백 년 전의 난파선에서 건져 올린 「미국의 맛(Gout Americain)」보다 훌륭했다. 그에 반해 디자인은 우스꽝스럽다. 진한 녹색 병에 금박으로 붙은 처칠의 낯짝이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그 와중에 경태가 고개를 돌리더니 소리를 최대한 죽여 그윽- 하고 트림을 내뱉는다.

실소를 머금게 만드는 꼴이다.

이 뒤로는 조용히 먹고 마시는 데 집중했다. 반쯤은 의식적인 노력이었다. 펼쳐진 음식들을 착실하게 먹어 치우는 수연 덕분에 세 병째의 샴페인은 필요치 않았다.

경태가 빈 접시들을 보며 제안했다.

"여기서 더 마시느니 나가는 게 낫겠죠? 슬슬 걸어가면 라우파삿인지 뭔지 하는 야시장도 열릴 것 같고."

처음엔 그렇게 욕심을 부리더니, 값비싼 샴페인이 들어가니까 욕구가 어느 정도 해소된 모양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수시로 내 테이블을 주시하던 매니저는 계산이 이루어지고서야 비로소 긴장을 풀었다. 그는 문 밖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꼭 다시 찾아달라는 인사말과 함께.

나란히 야시장으로 가는 도중에 경태가 수연에게 물었다.

"그런데 누님."

"왜?"

"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말입니다. 누님은 여잔데 형님을 왜 형님이라고 부릅니까?"

"그러고 싶으니까."

"그렇구나."

멋쩍어하는 경태에게 수연이 역으로 묻는다.

"그럼 형님을 오빠라고 부를까?"

경태 녀석이 멍하니 있다가 머리를 긁적인다.

"어,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잠시 끊어졌던 대화는 곧 시답잖은 주제로 넘어갔다.

그렇게 느린 걸음으로 40분쯤 걸어 이 도시의 명물이라는 라우파삿 거리에 도착했다. 낮엔 도로였던 곳을 바리케이드로 막아 테이블을 깔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장소였으나, 앉자마자 맥주부터 주문하는 경태는 마냥 즐거워 보이기만 했다. 그리고 수연은 여기서도 조용한 먹성을 보여주었다.

뭐....

이렇게 평범한 풍경도 앞으로는 보기 힘들어질 수 있으니,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해야겠지.

먹을 만큼 먹고 마실 만큼 마신 두 녀석과 호텔로 돌아온 시각은 대략 11시쯤이었다.

"쉬십시오, 형님."

"오늘은 부디 편안한 밤 되십시오!"

앞은 수연이고 뒤쪽 농담은 경례하는 경태다. 술이 들어가 기분이 좋아진 품새였다.

"그래. 잘들 자라."

녀석들과 복도에서 갈라져 내 방으로 들어선 나는, 희미한 빛이 드는 침대를 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1. 삼각비행 (3)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꿈은 언제나 동일한 악몽이다.

「나와라!」

포효하는 스승은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어디에 숨은 거냐!」

꺼멓게 번들거리는 촉수가 좁은 골목을 꽉 채우고 밀려온다. 헐떡이며 정신없이 달아나는 내 눈에, 스승이 뻗는 손길은 마치 검은 타르의 급류처럼 보였다. 콘크리트 벽돌에 시멘트를 바른 벽이 좌우로 와르르 무너지고, 박살난 건물로부터 슬레이트 지붕 파편이 치솟는다.

내 어린 시절이 깃든 셋집은 그렇게 부서졌다.

「나-와-라-!」

천둥처럼 울려 퍼지는 스승의 분노. 난 이게 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달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이 꿈에서 내 의식은 과거의 내 안에 갇힌 채다. 두개골 안쪽이 심장 뛰는 소리로 가득 찼다. 이만큼이나 미칠 듯이 달리는 데도 바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거운 공기가 축축한 점막처럼 달라붙는다. 마치 괴물의 위장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이었다.

비슷한 갈림길이 반복되던 미로 같은 풍경은 별안간 여러 번 바뀌는 계절을 건너뛰었다. 이곳은 과거의 내 정신세계. 당시의 내가 지니고 있던 온갖 기억들이 무한히, 무작위로, 누더기처럼 이어지는 추상적인 공간이다.

서로 다른 기억들의 경계면은 서로 다른 시간들을 비추는 깨진 거울조각들의 장막처럼 보였다. 나는 흐릿하게나마 그 너머를 볼 수 있었지만, 기억의 주인이 아닌 스승은 그렇지 못한 듯 보였다. 그 차이야말로 아슬아슬한 도주를 가능케 하는 힘이었다.

콰르르르-

돌아보면 가까스로 벗어난 유년기가 지진을 맞은 듯 무너지는 중이었다. 뭉글뭉글 치솟는 먼지구름 너머에 분노한 스승의 형상이 어른거린다. 실체보다 훨씬 더 거대한 그림자. 그러나 이곳은 애초에 실체와 그림자의 구분이 불분명한 영역이다.

새로운 기억의 경계를 넘다가 헛발을 디딘 나는 한바탕 구르며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거기 있었구나.」

스승은 어둠을 펼쳐 날개를 만들었다. 세찬 날갯짓 몇 번으로 구름을 넘은 그는 경계를 넘어 사냥감을 노리는 맹금처럼 떨어졌다. 벼락같은 발톱이 주변 풍경을 통째로 찢어발긴다. 갈라진 균열 사이에 무의식의 혼돈이 일렁거렸다.

나는 무너진 길 아래의 시궁창으로 굴러들었다. 허우적대는 와중에 하수구 바닥의 오수를 몇 번이나 삼키고, 네 발로 기다시피 일어나 콜록거리며 또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헉, 헉, 헉.

내가 굴러든 구멍으로 액화된 스승이 흘러들어온다. 그는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 끝에 검은 비늘을 두른 뱀으로 의태했다. 어둠 속에서 한 쌍의 노란 눈이 태양을 투과하는 호박처럼 타올랐다. 뱀은 수평으로 흐르는 폭포가 되어 철창을 부수고 벽에 충돌했다. 천장에 금이 가며 콘크리트 가루가 쏟아진다.

이 시절의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였음에도, 잡히면 모든 게 끝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것은 영혼을 삼키는 뱀이라고.

불행 중 다행으로 내 기억은 나에게 친숙하고 스승에겐 낯선 장소들로 가득했다. 드물게 스승도 아는 공간이 나타날 때가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공간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끝없이 범람하는 기억들, 서로 다른 시간과 서로 다른 공간이 제멋대로 뒤섞이는 이 미궁에서, 얄팍한 앎은 완전한 무지와 큰 차이가 없었다.

한 가지 더.

이때의 나는 미처 몰랐으나, 정신세계에 만들어지는 미궁의 무작위성은 사실 내 필사적인 바람에 영향을 받는 것이었다.

내가 품었던 바람은 오직 하나. 스승을 피해 살아남는 것.

하수구의 샛길은 빗물을 빼는 관형 터널로 이어졌다. 실제 이상으로 꺾이고 구부러지는, 그러나 내게는 왠지 낯설지 않았던 터널의 끝엔 또다시 경계의 장막이 반짝이고 있었다. 검은 뱀의 그림자가 창백한 전등불에 어른거리고 돌풍 같은 숨결이 내 머리카락을 흔들 때, 추적자의 속도가 미로의 복잡성을 상쇄하는 그 순간 나는 찰나의 한 걸음으로 터널을 탈출했다.

기억의 경계면을 넘은 즉시 중력의 방향이 뒤집혔다.

으아아아악!

역시나 현재의 나로선 통제할 수 없는 비명. 나는 발아래의 하늘로부터 머리 위의 개천으로 낙하했다. 뒤이어 경계를 넘어온 뱀이 허공에서 몸을 뒤트는 모습. 그 모습을 본 직후, 흐르는 물이 내 전신을 강타했다. 비정상적으로 거센 물살이 나를 하류로 쓸어간다. 입을 쩍 벌린 뱀 대가리가 굉음과 함께 수면을 뚫고 들어와 내가 있던 공간을 물어뜯었다.

헛된 입질에 분노한 스승은 새로운 환경에 맞게 자신을 변화시키려했다. 그러는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에선 물리현실에 작용하는 주문들 태반이 작용하지 않았으므로.

과거의 난 스승이 의태를 마치기 전에 허겁지겁 헤엄쳐 뭍으로 올랐다. 그러자 보이는 건 스승이 나를 거둔 보육원 단지의 전경이었다. 이때 핏빛으로 물든 하늘로부터 돌발적으로 쏟아지는 초현실적 폭우. 스승은 불어난 물살에 휘말려 낯선 경계를 향해 떠내려갔다. 깨진 거울조각들의 장막이 급류를 집어삼킨다. 형태가 뒤틀린 뱀이 흐릿한 기억 저편으로 멀어졌다.

전체 14동인 보육원의 건물들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치되어 있었다. 각각을 이어보면 일곱 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칠망성이 그려진다. 선과 선이 교차하는 점과 모서리의 꼭짓점마다 수용시설이 서있는 것이다. 과거의 나는 홀린 듯 그 선을 따라 달렸다. 건물의 숫자에 비해 부지의 면적은 좁은 편이었다.

첫 번째 건물엔 1명의 아이가 죽어 있었다.

두 번째 건물엔 8명의 아이가 죽어 있었다.

세 번째 건물엔 12명의 아이가 죽어 있었다.

네 번째 건물엔 9명의 아이가 죽어 있었다.

그리하여 네 개의 작은 숙소, 칠망성의 한 변에서 죽은 소년소녀의 합계는 30이었다.

또 네 번째 건물에서 방향을 꺾어 일곱 번째 건물에 이르기까지 널려있는 시체의 합계가 30이었고, 일곱 번째 건물에서 방향을 꺾어 열 번째 건물에 이르기까지 죽어있는 아이의 합계가 다시 30이었으며, 이후로도 하나의 선에서 발견되는 시체의 수는 모두 동일하게 30이었다.

이는 즉 각 변의 합계가 30이 되는 마방진이었다.

무지했던 이때의 나와 달리, 지금의 나는 그 숫자의 의미를 안다.

모든 변이 30인 칠망성은 의식을 행하는 술자가 일곱 개의 선을 걸어 별의 중심에 더해짐으로써 31로 완성된다. 31은 수비학에서 신의 이름인 엘(El)을 상징하는 수. 이는 또한 항해라는 뜻도 지녔다. 요컨대 신성을 향한 항해가 되는 것이다.

한편 칠망성의 7은 영원과 생명을, 마방진은 내적 균형과 폐쇄적인 완결성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105명의 소년소녀들을 죽여 제물로 쓴 이 끔찍한 주술제례의 정체는,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는 자가 신성에 닿고자 나아가는 항해의 의식이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기독교적인 신성은 부활을 포함한다. 영혼으로 영혼을 삼키고 육체를 강탈하여 새로운 젊음을 누리는 것이다. 술자는 삶이 끝나갈 때마다 이 의식을 반복하여 영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 늙은 제국주의자가 오랜 시간을 들여 설계한 영생. 이것이 그 첫 실천이었다.

칠망성의 중심에 도달한 나는 묶여있는 나와 그 앞에 선 스승의 환영을 발견했다. 악몽이 시작되기 직전의 상황이다.

쿠르르르-

지축이 흔들린다. 스승의 정신체가 기억의 경계를 거슬러 돌아온 것이다. 거친 땅울림은 더욱 더 거대해진 분노를 간접적으로 느끼도록 해주었다.

과거의 나는 더러운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본디 회를 칠한 벽이 있어야 할 자리에 새로운 기억의 경계가 물결치고 있었다. 기약 없는 도주를 재개해야 할 때였다. 경계로 몸을 던지자 시야가 온통 까맣게 물들었다.

....

.......

지이이잉. 지이이잉.

"...망할."

색이 다른 소음에 눈을 뜨니 호텔 객실의 천장이 보인다.

날 악몽에서 깨운 것은 머리맡에서 울리는 스마트폰의 진동 알람이었다. 잠만 들었다 하면 높은 확률로 악몽을 꾸는 탓에 매시 정각마다 알람을 맞춰두고 자는 습관이 생겼고, 이번에도 그 덕을 본 것.

이걸로 오늘 밤에만 벌써 세 번째 악몽이다.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긴 날숨을 토했다. 이젠 깊게 드는 잠이 어떤 느낌이었는지조차 가물거릴 지경이었다. 눈꺼풀 안쪽이 뜨거웠다.

잠시 눈을 감고 있으려니, 혼자 울다 지쳐 잠잠해졌던 알람이 다시 한 번 울기 시작했다. 불이 들어온 스마트폰 액정이 보여주는 시각은 새벽 4시 5분. 버튼을 밀어 알람을 끄고, 다른 알람들까지 비활성화하려고 보니 잠든 사이에 한 통의 문자가 도착해있었다.

「[Singapore Airlines] 귀하께서 예매하신 항공편(SQ602)의 출발예정시각이 항공사 사정에 따라 12/23 14:30(SGT)으로부터 12/23 15:23(SGT)으로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다음 번호로 연락 주십시오. (+65) 0800-124-8888. 통화 가능 시간은....」

가끔 있는 일이다. 차라리 문자가 왔을 때 깼으면 좋았을 것을.

눈꺼풀 안쪽이 뜨겁지만 오늘은 더 자기 그른 것 같다.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두어 시간 눈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찬물로 샤워를 마친 나는 내선 전화로 카페라떼를 주문했다. 룸서비스 메뉴에 없는 것이라도 고급 객실에서 오는 주문이면 컨시어지가 어떻게든 받아낸다.

커피는 15분 만에 올라왔다. 직원에겐 팁으로 100달러를 쥐여 보냈다.

시나몬 스틱으로 잔을 저어놓고, 향이 밸 동안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책이나 읽을 요량이었다.

손 가는 대로 불러온 책은 세계 근대사를 다루는 교양서적이었다. 페이지는 거북이처럼 느리게 넘어갔다. 악몽의 여운으로 정신이 산만하기도 하거니와, 서구 중심적인 역사관의 얄팍한 깊이와 몰이해가 한심하게 느껴진 탓도 있다.

그러다 마침내 책을 라이브러리에서 지워버리기까지 한 시간을 넘게 낭비했다. 특별할 게 전혀 없는 양산형 교양서였다.

뉴스 채널을 켜봤으나 별다른 사건사고는 눈에 띄지 않았다. 책은 그만두고 학술지나 읽을까 싶은 와중에 핸드폰이 진동했다. 메신저 수신 알림이었다.

「혹시 일어나셨습니까?」

수연이 보낸 메시지. 시간을 보니 오전 6시 1분이다.

「그런데?」

「오래 주무시지 못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찾아뵙겠습니다.」

새벽부터 어떤 용건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다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일러둘 말이 있던 참이다. 어쩌면 수연 또한 그걸 예상하여 선수를 치는 것일 수도 있겠고. 나는 답신을 보냈다.

「천천히 와라.」

10분쯤 지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체인을 걸고 열어보니 벌써부터 정장 차림인 수연이 서있었다. 나는 녀석이 들어올 수 있도록 걸쇠를 풀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라며 방에 들어선 수연은 바닥이 마른 커피 잔을 보더니 옅은 유감을 표했다.

"피곤하시겠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빨리 깼을 뿐이야. 앉아라."

나는 녀석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질문했다.

"무슨 일이냐?"

손을 모으고 뜸을 들이던 수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말.

"형님. 제가 앞으로도 형님께 쓸모가 있겠습니까?"

"앞으로도?"

"결국 그 '런던'과 싸워야 한다면 말입니다."

"...."

나는 비스듬히 턱을 괴며 답했다.

"쓸모야 있겠지. 각성의 기회는 너에게도 열려있고, 뭣하면 내가 손수 회로를 열거나 교정해줄 수도 있으니."

"그렇습니까?"

"어제도 말했지만 내 것처럼 정교하게는 안 돼. 그러나 원시능력자 기준으로는 보기 드문 수준이 될 거고, 그 정도면 충분하지. 제아무리 날고 기는 마법사라도 대가리에 총 맞으면 죽는 건 똑같거든. 좀 강한 화력이 필요하겠지만."

원시마법은 생명의 기본 기능에 관련된 부분부터 개화할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방향성은 다양할지언정 대개는 신체능력부터 강화될 거라는 뜻. 이는 곧 휴대 가능한 화력의 증가로 이어진다. 철저하게 준비된 싸움에선 진정한 마법사에게도 위협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야."

"...."

"수연아. 너는 나에게 빚이 없다."

이렇게 말한 순간, 듣고 있던 수연의 눈빛에 동요가 일었다. 그 정체는 서운함, 불안감, 상실감 등이 뒤섞인 감정의 소용돌이였다.

#1. 삼각비행 (4)

내가 거둔 조직원들은 간부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나에게 적어도 하나 이상의 목숨을 빚지고 있다. 자신의 목숨이든,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이든, 아니면 같은 하늘을 이고는 살아갈 수 없을 원수의 목숨이든. 도덕과 법, 그리고 신이 해결해주지 않는 문제들을 나와 내 조직이 해결해주었다. 굶주린 가족들을 내가 먹여주었고 죽을 듯이 맺힌 한들도 내가 풀어주었다. 그들은 그 대가로 자기 자신을 지불하는 데 동의했다. 목숨을 목숨으로 갚기로 한 거래다.

따라서 나에겐 부하들에게 죽으라고 명령할 권리가 있다.

수연은 유일한 예외였다.

10년 전의 여름, 사무실로 찾아와서는 죽은 오빠의 채무를 상속하겠다고 내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이 녀석은 어린 티도 다 벗지 못한 고등학생이었다.

좋은 인재는 드물다. 싹수가 보인다면 애라도 거두어 키워볼 법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거래가 성립할 때의 이야기. 채권자로서의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연대보증을 인정하지 않는다. 목숨의 빚이란 그런 식으로 추심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따라서 이 녀석이 갚겠다던 빚은 빚을 진 본인의 죽음과 함께 소멸한 것이었다. 비록 그 죽음이 병마에 의한 것이었을지라도, 죽는 순간까지 충성했으니 그걸로 됐다.

"빚이 없다...라. 그 말씀을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수연은 착잡한 얼굴이었다.

"제게 뭔가 부족함이 있었습니까?"

"그럴 리가."

난 모자란 녀석을 가까이에 둘 만큼 허술하지 않다.

"그러면 왜...?"

"오해하지 마라. 내치겠다는 소리가 아니야. 스스로의 거취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해볼 기회를 주려는 거다."

이 녀석을 처음 받아들일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나.

"제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성급하긴."

"죄송합니다."

별로 죄송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다.

"들어봐라."

나는 손가락을 튕겨 수연의 주의를 환기했다.

"기어코 마법의 시대가 돌아오고 만다면, 스승새끼의 옛 동지들은 국가권력의 비호를 받게 될 거다. 뭐, 내가 싸울 준비를 끝마칠 즈음엔 아예 권력 그 자체가 되어있을 가능성도 농후하지. 넌 이게 무엇을 의미할 것 같으냐?"

"...."

"그 늙다리들의 시꺼먼 심장을 파내려면 우선 영국이라는 껍데기부터 벗겨내야 할 거란 뜻이다. 군대를 흩어 놓고 치안과 행정을 마비시켜서 결정적인 순간 제국주의자들의 본거지를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야 해. 그들 자신의 힘 말고는 그들을 지켜주는 게 무엇 하나 남지 않게끔. 나는 그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작정이다."

"혹시 그 방법이 테러...입니까?"

"테러 이상의 테러지.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면 나는 핵이라도 밀수해서 터트리겠다. 9백만 명이 사는 도시에다가 말이야."

물론 현실성 희박한 이야기다. 허나 내 각오를 전달하기엔 적절한 예시였다. 더티 밤(Dirty Bomb/방사능 폭탄) 같은 건 실제로 쓰게 될 수도 있겠고. 사회 혼란을 유발하며 국가의 대응능력을 소진시킨다는 측면에선 가성비가 지극히 좋을 물건이다. 조달이나 제조가 비교적 용이할뿐더러, 대여섯 발만 터트려도 영국 전역에 확실한 혼돈이 빚어질 테니. 그 혼돈이 반드시 길어질 필요는 없다. 기습적으로 치고 빠질 동안에만 유지되면 족하다.

사람을 아무렇게나 죽이지는 않겠다. 그러나 부수적인 피해를 줄이겠답시고 애써 낮은 승산을 감수하지도 않겠다. 그딴 데 신경을 써도 좋을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므로.

"나에게 진 빚이 없다는 건-"

수연에게 충분히 곱씹을 시간을 주고서 말을 잇는다.

"다른 녀석들과 달리 너에겐 열차가 폭주하기 전에 내릴 권리가 있다는 말이다. 좀 더 안전한 곳에서, 더는 손이 더러워지지 않을 역할을 맡아도 괜찮지 않겠냐."

내 보좌역은 원래 고급간부가 되는 지름길이다. 기업에 비유하면 계열사 사장이나 부사장급으로. 그러니 이 녀석의 경우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영전을 몇 년 가량 앞당긴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만한 능력이 있는 녀석이고.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만, 그래도 제 대답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곧게 바라보는 수연의 눈빛이 공손하면서도 고집스럽다. 벌써 10년 전에 한 차례 물리도록 겪은 바 있는 강단. 몇 번을 끌어내도 조직의 '본사' 앞으로 돌아와 다시 무릎 꿇던 모습이 떠오른다. 겁을 줘도 소용이 없었고 뺨을 후려쳐도 표정 하나 바뀌질 않았다.

결국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까 하여 내버려뒀더니, 탈수로 실신할 때까지 물 한 모금 입에 안 대고 독하게 버티는 게 아닌가. 도리어 지켜보던 조직원들이 동요할 지경이었다. 수연의 죽은 오빠는 조직 내에서 평판이 좋았다. 유력한 차기 비서실장이었으니.

그래서 받아들였다. 내버려두었다간 정말로 죽을 녀석이었고, 이 정도의 각오라면 못 쓸 것도 없겠구나 싶어서. 오빠와 같은 피를 물려받았으면 재능이 넘칠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 녀석은 자신이 계승한 기대에 훌륭하게 부응해보였다.

"형님."

짧은 정적 끝에 수연이 침착한 음성으로 못을 박는다.

"저는 형님께서 원하신다면 당장이라도 칼을 들고 나가서 눈에 띄는 모든 사람들을, 애와 어른을 가리지 않고 찔러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같은 배려는 불필요합니다. 오빠가 살아서 이 자리에 있었어도 저와 똑같은 말을 했겠죠."

"수혁이 녀석이야 당연히 그랬겠지. 하지만 동생이 이렇게 살기를 바라진 않았을 텐데."

"...오빠는 죽은 사람이고, 저는 10년 전부터 저를 위해 살고 있습니다."

"그러냐."

"예."

"알았다. 더는 이 문제로 귀찮게 하지 않으마."

"감사합니다."

수연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 위에 대고 사과했다.

"섭섭하게 했다면 미안하다."

"별말씀을."

아니라고는 하지 않는다. 차라리 입을 다물지언정 거짓을 말하진 않는 녀석이었다.

대화의 흐름이 끊기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지그시 보는 내 앞에서 머뭇거리던 녀석이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었다.

"간밤에, 어제 하셨던 말씀들을 복기하면서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뭔데?"

"세상이 급격히 바뀌진 않을 테니, 벌써부터 구체적인 대비를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급할 때 바로 구하기가 까다로운, 그러면서 한 번에 구할 수 있는 물량에 제한이 있는 것들만은 국내에 미리 재고를 쌓아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예를 들어... 무기와 탄약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것들은 나중에 아예 구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과연.

"좋은 지적이야."

경태에게 서두를 것 없다고 했던 건, 사실 심란한 마음에 깊은 생각이 귀찮았던 탓도 있다.

암시장에 한하여, 무기와 탄약은 공급이 비탄력적인 재화다. 탄약 쪽이 특히 더 그러하다. 유사시 나 자신을 지킬 수단이라는 점에서 우선순위도 높다. 별다른 일이 없을 경우 야쿠자나 동남아의 여러 반군들에게 털어버리면 된다.

특히 필리핀 반군은 정부와 평화협정을 맺고서부터 전보다 더 많은 무기를 사들이고 있었다. 무장을 반납하는 대가로 정부로부터 다양한 양보를 얻어내는 중이기 때문에, 더 많은 무기가 곧 더 많은 권리로 직결되는 상황이었다. 또 협상이 파기될 경우에 대비해 보험을 들어둬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반납하는 양 이상의 무기가 필요한 이유.

유통마진이 워낙 높은 시장이라 어떻게 되더라도 손해를 보진 않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을 보고 수연이 물었다.

"대구에 연락해서 약속을 잡을까요?"

"그래."

"누구를 보내시겠습니까?"

"내가 가야지. 중요한 일이니."

나는 조커다. 내 조직이 협상장에 내놓을 수 있는 최강의 패다. 아무리 우수한 녀석이라도 생체신호를 눈으로 보면서 교섭을 하는 나를 대신할 순 없다.

"그렇군요. 날짜는 언제쯤이 좋겠습니까?"

"당장 내일 오후나 모레라도 괜찮아."

"확인해보겠습니다."

내가 거래하는 국내의 무기 벤더는 미군 내 사조직이다. 다른 공급자도 있고 조직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하는 총기도 있지만, 단가가 가장 저렴한 건 역시 미군 놈들이다. 왜냐면 이놈들이 원가 개념도 없이 장사를 하는 데다, 거래를 내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까닭.

놈들과는 처음에 일반 군수품과 면세품을 빼돌리는 정도로 안면을 텄으나, 오랫동안 신뢰를 쌓은 끝에 민감한 물건들까지 거래하는 관계로 성장했다. 세탁이 잘 된 달러의 마력은 부사관과 장교를 가리지 않고 끌어들였다.

난 수연이 메모를 끝내길 기다려 손을 내밀었다.

"잠깐 보자."

"예."

녀석이 넘겨준 양장수첩엔 근래의 내 일정과 조직 운영 전반에 관한 사항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나니까 바로 파악이 가능한 것이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각종 은어와 은유, 개인적인 암호와 변형된 속기술로 기록한 정보들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첫 페이지엔 SNS 주소, 대포폰 번호와 함께 다른 누군가의 셀피를 붙여놓았다. 습득 시 꼭 연락 바란다면서. 난 그 사진을 보다가 수첩을 돌려주며 물었다.

"이건 네 아이디어냐?"

"...예."

"잘했다."

수첩을 갈무리한 수연은 스마트폰 메신저로 대구 소재의 사업장에 연락을 넣었다. 내용을 최소화한 통보였다.

이다음에는 달리 어떤 투자가 필요할지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다 7시가 되자 경태가 합류했다. 아침운동을 마치고 와서 문자를 보내고 문을 두드린 것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형님. 누님은 오늘따라 빠르시네요."

식사는 다시 룸서비스로 해결했다. 요리의 수준도 수준이거니와, 탁 트인 거실이 있는 스위트를 두고 굳이 뷔페를 이용할 필요는 없다. 이 시간에 나가봤자 문을 연 곳은 토스트 가게 정도가 전부일 터이고.

식후 차를 마시던 중에 수연이 불현 듯 떠오른 것처럼 질문했다.

"형님. 마소에 관한 정보는 어느 선까지 전파하면 좋겠습니까?"

"글쎄."

곰곰이 생각하던 내가 대답했다.

"내 비밀을 아는 놈들에겐 다 오픈해줘. 나머지 애들은 천천히 고민해보지."

"알겠습니다."

조직 내에서 나의 이질성을 아는 조직원의 수는 의외로 적지 않다. 한풀이 과정에서 신비를 경험한 놈들이 꽤 되고, 무엇보다 조직의 존재목적 중 하나가 바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안전장치였기 때문이다.

유사시 스승새끼의 옛 동지들, 혹은 그들이 보낼 추적자들을 저지해야 할 녀석들인데, 핵심 전력조차 마법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라면 상황이 발생했을 때 패닉에 빠져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조직 차원에서 대비해야 할 '실제 상황'의 강도가 앞으로 현격히 증가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미리 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위험해졌다고 간단히 배신할 놈들도 아니다.

또 선물시장에서도 돈을 굴려야 하는데, 그러자면 여의도 김씨 같은 녀석에겐 정보를 감춘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핸드폰 우는 소리가 들린다. 수연의 것이다. 액정을 들여다본 녀석이 고개를 눈을 살짝 찌푸린다.

"미군 측의 회신을 받았다는 전갈입니다. 굉장히 빠르군요. 그런데...."

"그런데?"

"격이 맞질 않습니다. 책임자로 워커 소령이 나온다고 합니다. 형님께서 직접 가실 거라고 분명하게 전달했다는데도."

"그 정도면 됐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미군 놈들 자부심을 감안하면 소령 짬으로도 괜찮을 거라고 판단했겠지. 한국군의 소령하고는 경력의 질이 다른 인력이니."

"그래봤자 군수물자나 빼돌리는 카르텔의 자부심입니다."

"그걸 건드려봐야 거래가 파투나기밖에 더하나?"

"...."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 이토록 빠르게 회신을 보냈다는 것 자체가 그쪽에서 나를 충분히 존중하고 있다는 증거다."

정확히는 내가 가진 돈을 존중하는 것이겠지만.

무엇보다 표면적인 계급은 사조직 내의 서열과 일치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예컨대 소령이 계급 이상의 실세일 수 있다는 뜻. 그렇지 않고서야 나를 상대하라고 내보낼까.

"아무튼, 그 친구들이 제안한 일자와 장소는?"

"내일 오후 여섯 시, 항상 만나던 그곳입니다."

"확정지어."

"예."

이로써 내일의 일정이 정해졌다.

귀국하는 길에 인천에서 투숙하고 국내선을 탈 수 있다면 좋겠는데, 아마 시간에 맞는 비행기가 없을 것이다. 대구는 항공수요가 그리 많지 않은 도시니까. 하물며 싱가포르에서 대구로 가는 직항 따위가 있을 턱이 없다.

이후 두 녀석에게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한나절의 자유를 준 나는,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어제부터 눈여겨보았던 국립도서관에 들어갔다. 비록 개장이 느지막하여 오래 이용하진 못했어도, 서가로 꽉 채워진 드넓은 공간은 그 자체로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것이었다.

지식은 힘이며, 어둠 속에서도 길을 비춰주는 빛이다. 이는 내가 중히 여기는 신조의 하나였다.

#2. 모색 (1)

다음 날 오후, 나는 여유를 두고 대구에 도착했다. 경태가 운전대를 잡은 차는 팔공산 IC를 지나 불로교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빠졌다.

살얼음이 언 개천을 오른편에 끼고 5분쯤 더 달리니 개발과 미개발의 경계지대가 나타난다. 듬성듬성 텃밭이 지나가는 풍경 저편에 간판 하나가 솟아있었다. 파란 바탕에 노란 글씨로 향산 환경이라고 쓰여 있다.

이곳, 봉무동 가장자리의 대형 고물상은 내가 대구에 거느린 사업장들 가운데 가장 중히 여기는 시설이었다. 군수품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 원래는 김천 근처에 두었던 것인데, 부지가 개발제한구역에 걸쳐있었던지라 부득불 옮겨올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차가 정지했다. 우리가 온 것을 알고 사무실로 쓰는 컨테이너로부터 정정한 노인이 걸어 나온다. 이 고물상을 담당하는 간부 박씨였다. 그는 차에서 내리는 나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랜마임니데이, 회장임요. 각제 기밸 주셔서 놀랬네예. 오실 거믄 째매앵이 일찍 연락 하시지않구.... 양키 놈 보러 바리 가실 줄 알았심더."

"대구까지 온 김에 물건들 상태를 점검할까 하고 들렀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머 맨날 그날이 그날 아이겠심꺼. 지하창고를 보시겠다꼬예?"

"예."

"모시겠심더."

나는 박 노인과 함께 한쪽이 넓게 열린 조립식 가건물로 들어갔다. 수연과 경태가 뒤를 따른다. 박 노인은 조직원들을 시켜 정문을 닫는 한편 천장에 설치된 호이스트 크레인을 가동시켰다. 지하로 내려가려면 우선 입구를 막은 석판부터 들어내야 했다.

그그그긍-

크레인의 모터음은 콘크리트 긁히는 소리에 가려졌다. 석판을 든 크레인이 횡으로 미끄러지면서 지하로 내려가는 길에 빛이 들었다. 10톤 트럭도 충분히 들어갈 크기의 경사로였다.

무기고의 커다란 방폭문은 다이얼을 돌려 여는 방식이었다. 박 노인은 금속 핸들처럼 생긴 다이얼을 돌려 8자리의 번호를 맞췄다. 문 안쪽에서 철컹 하는 쇳소리가 울린다. 손잡이를 꺾어 밀자 두꺼운 문이 좌우로 서서히 밀려났다.

전력계통이 독립되어있는 공간에 자동으로 불이 들어온다. 나는 무기고로 들어섰다. 방폭문 바로 안쪽엔 방수포에 덮인 헬기 엔진과 부품들이 있었다. 내 기억으론 출고가 이미 확정된 상품들. 그 외엔 모래마대로 천장까지 쌓은 벽을 사이에 두고 듬성듬성 늘어선 선반과 나무상자들이 있을 뿐이었다. 크기가 다양한 상자들은 겉에 찍힌 문자로 내용물과 수량, 무게, 생산연도 등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내 눈엔 내용물도 보인다. 주차장처럼 넓은 지하를 박물관 관람하듯 천천히 돌아보았으나, 구석구석 섬세하게 조절되는 온도와 습도 덕분에 상태가 나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정전기에 대한 대비도 선반마다 철저하게 되어있다. 빈 공간이 넉넉하여 재고를 많이 들여도 무방할 것 같았다.

박 노인이 묻는다.

"어떠심꺼?"

나는 노인을 바라보며 답했다.

"괜찮군요."

"그럴낌더. 엉가이 관리하는 기 아이이까네."

이렇게 말하는 박 노인의 안쪽에선 긴장의 징후라곤 무엇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중요도에 비해 자주 오지는 못하는 사업장이지만, 불시점검인데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솔직히 말하면 물건보다는 사람을 보러 온 것이다. 빚을 질 때 아무리 필사적이고 절박했던 사람이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으니까. 또한 목숨의 빚은 다분히 개인적인 관계다. 즉 때때로 직접 얼굴을 맞댐으로써 나와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 중요하다.

"여긴 이만 됐으니 애들 일하는 거나 보고 가겠습니다."

내 말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향산 환경에 배치된 조직원은 박 노인을 포함하여 스물두 명이었다. 그중에서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건 열 명에 불과했다. 비록 작은 위장 사업체이긴 하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흑자를 낼 만큼 견실하게 돌아가는 곳이다. 전부 다 대기하고 있었으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나는 군데군데 흩어져 쉬거나 작업에 열중하고 있던 그 열 명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금일봉을 전해주었다. 녀석들은 내 등장에 다소 긴장하면서도, 내가 자신들을 기억하는 것에는 멋쩍어했다. 사실은 수연이 비서로서 미리 챙겨준 내용들이었지만.

부하들에게 있어 내 방문이 군단장의 검열처럼 X 같은 것이어선 안 된다. 그딴 건 충성심 유지에 하등 도움이 되질 않으니까.

사업장 점검을 마치고 차에 오르려는데 박 노인이 수연을 부른다.

"아야. 갱태 요즘 저지레 안 치고 회장임 쪽바로 모시드나?"

수연이 뭐라 하기도 전에 경태가 불퉁거린다.

"아, 박 사장님도 참. 저만큼 괜찮은 인재가 어딨다고 그러십니까."

"개안키는 마. 니 전에 시무식 때도 술을 억만고로 처먹디 회장임 보시는 앞에서 홀라닥 도라내지 않았나."

"으아아아! 그게 벌써 3년 전 일입니다, 3년이요! 글구 그때 토했던 거는 내기를 한답시고 양주를 궤짝으로 마셔서 그런 거구요, 그 담부턴 한 번도 안 그랬다니깐요? 그 흑역사 땜에 요즘은 주량의 반의 반의 반도 안 마시고 다닙니다, 제가."

"진짜가?"

못미더워하는 노인에게 수연이 끄덕여 보였다.

"진짭니다."

"하이고마, 사람 됐네."

수연의 말 한마디에 바로 납득하는 노인을 보고 경태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억울하다."

박 노인이 나에게 작별인사를 건네었다.

"날 추운디 조심히 살펴 가이소."

난 그를 바라보며 묵례로 인사를 받았다. 차가 출발하자 박 노인은 몇 걸음 따라 나오다 멀찍이 멈춰 섰다. 사이드 미러에 비춰진 그의 모습에선 아쉬움이 묻어났다. 만약의 경우, 모든 혐의를 자진해서 뒤집어쓸 충성스러운 부하였다.

워커 소령을 만나기로 한 곳은 대구 남동쪽 교외의 고급 펜션이었다. 조직 산하의 관광개발회사가 운영하는 곳으로, 폐허가 된 일제 강점기의 고급 가옥 단지를 사들여 일본 장인들의 손으로 재건축해서 쓰고 있었다. 미군 애들이 이런 걸 의외로 좋아한다. 방바닥에 앉기는 불편해하는 주제에.

먼저 도착해 차를 곁들여 애독서의 책장을 넘기고 있으려니, 약속시간을 10분 앞둔 시점에서 워커 소령이 들어왔다. 닫히는 문 밖으로 경태가 도청 감지를 위해 스펙트럼 분석기를 펼치는 모습이 보였다. 워커는 뻣뻣한 미소를 머금고 맞은편에 앉았다.

"직접 뵙기는 3년 만이군요, 치프(Chief).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뇨. 나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여러 번 독파한 책인데도, 기다리는 동안 겨우 서른 페이지 가량을 읽었을 따름이다. 나는 책에 책갈피를 끼워 조금 뒤에 앉은 수연에게 넘겨주었다. 표지를 본 소령은 반쯤은 의식적인 호기심을 드러냈다.

"제목이 뭡니까? 한글은 아직 낯설어서."

"침팬지 폴리틱스."

"침팬지의 정치학이요?...하긴 정치인들이 다소 동물적이지요. 침팬지라고 불릴 법도 합니다."

"다릅니다. 비유 같은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침팬지들의 권력다툼에 관한 내용입니다."

"오."

의아해하던 소령이 웃음을 터트린다.

"권력을 다퉈요? 침팬지가? 하하하하! 그것 참 웃기는군요! 짐승들의 원시적인 서열 싸움을 권력처럼 거창한 단어로 표현하다니!"

무식하기는. 나는 속을 감추며 부연했다.

"...재미있습니까? 동물들이 얼마나 영리한지 알면 더 재미있을 겁니다."

"하하. 뭐, 가끔 저런 머리로 어떻게 사람인가 싶은 소위가 오곤 하는데, 어쩌면 그런 소위들보다야 침팬지가 더 똑똑할 수도 있겠군요. 시간 날 때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시간이 과연 죽기 전에 나기는 할는지.

어쨌든 상대의 무식함 덕분에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이 무식한 놈은 내가 제 계급에 개의치 않는다는 걸 느꼈는지, 굳어있던 어깨가 부드럽게 이완되었다.

"그럼 우리의 사업 이야기를 해볼까요?"

난 천천히 손을 들어보였다.

"뭐가 그리 급합니까? 시간상 식사도 아직이실 텐데."

만족스럽게 배를 채우고서도 둥글어지지 않을 사람은 없다. 때맞춰 측면의 미닫이문이 양쪽으로 열리며 육류 위주의 요리들이 들어왔다. 상대의 입맛에 맞춘 식탁이었다.

워커는 배를 채우는 내내 공화당이 어쩌고 민주당이 어쩌고 하는 말들을 떠들어댔다. 나는 옳고 그름을 떠나 사실관계에서부터 오류투성이인 정치적 견해에 끄덕끄덕 그렇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시시비비를 가려본들 얻을 게 무엇인가.

그렇게 워커 혼자 즐거운 한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전연락에서 예고한 대로, 이번엔 평소보다 많은 발주를 넣으려고 합니다."

워커가 반문한다.

"어떤 걸 얼마까지 생각하고 계십니까?"

나는 짧은 간격을 두고 이렇게 답했다.

"무제한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 여러분이 마련할 수 있는 모든 무기를 무제한으로 매입하겠다는 뜻입니다. 위력과 구경(口徑)이 큰 종류에 우선순위를 두겠지만 말입니다."

눈을 깜박거리던 워커가 엑스자로 쥐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포크가 있는데도 고집스럽게 쓰던 젓가락이다.

"'품목'이 아니고 '무기'라.... 어디서 전쟁이라도 치를 셈입니까?"

면세품이나 일반 보급품 따윈 제외하겠다는 뜻을 제대로 이해했다.

이제까지의 거래는 내가 먼저 품목과 금액을 제시하든, 재고를 확보한 미군 쪽에서 역으로 구매의사를 타진하든 간에 구체적인 내용을 확실히 약정하고서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내 요구에 워커가 몸을 사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전쟁은 무슨."

우선 이놈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려야겠다.

"그동안은 세계시장의 수요에 비해 우리의 비즈니스 규모가 너무 작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난 오랜 시간 내가 안전한 거래선임을 증명해왔지요. 서로의 이익을 위해, 다시 한 번 판을 키워볼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처음으로 판을 키웠던 건 거래품목에 처음으로 무기를 넣었을 때의 일이다. 그때도 이놈들은 겁먹은 새끼고양이처럼 굴었었다. 워커가 수염을 매만지며 긴 숨을 내쉰다.

"이제까지의 거래가 오늘을 위한 포석이었다는 말씀입니까?"

"편의상 그렇다고 치자는 겁니다, 내 말은."

"흠."

"12년과 17년, 두 번에 걸쳐 전체적인 검열이 있었지만 우리는 별 탈 없이 고비를 넘겼습니다. 당신들도 경험했듯이, 내 회사의 일처리가 완벽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넘겨주는 물량은 바다에 뿌리는 소금처럼 세계시장으로 녹아 사라졌지요. 한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겁을 낼 이유가 있겠습니까?"

"겁을 내다뇨."

자존심을 건드리자 워커가 눈을 찌푸린다.

내가 언급한 12년과 17년은 동종업계의 아마추어들이 꼬리를 밟힌 해다.

먼저 12년도에 적발당한 고물상은 10만 달러짜리 적외선 감시장비(TOD)를 유출시키곤 그 값어치를 몰라 단돈 5만 원에 팔아넘긴 등신인데, 이 카메라가 돌고 돌아 미국 경매 사이트 매물로 올라가는 바람에 덜미를 잡혔다.

17년은 더 가관이다. 이때 체포된 고물상은 미군이 쓰던 전술차량 및 트레일러 백여 대를 비닐하우스 옆에다 줄줄이 세워놓고 인터넷에 판매 글을 올렸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렇게 멍청한 짓을 일삼으면서도 3년 동안 들키지 않았다는 것. 경찰은 원래 이런 데 별로 관심이 없다. 경찰이 마침내 비닐하우스 옆 공터를 찾아왔을 때, 트레일러에 실려 있던 군용 컨테이너는 내용물이 다 사라진 상태였다.

어째서 전부 고물상인가 하니, 이 모든 밀수의 중심에 미 군수국(DLA)이 운영하는 김천 잉여재산처리처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우리도 보통은 거기서 차떼기로 물건을 받아온다. 폐기된 차량이나 컨테이너를 통째로 실어오면 그 안에 주문한 물건이 들어있는 식.

워커가 경고하듯 말했다.

"치프. 당신은 CIDC를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습니다."

CIDC는 미 육군 범죄수사사령부의 약자다. 내겐 워커의 경고가 같잖게 들렸다.

"난 그들을 얕보는 게 아닙니다, 소령. 하지만 그들에겐 더 중요한 문제가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더 중요한 문제?"

"그들을 진지하게 만드는 건 대개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이잖습니까. 가령 우리가 오늘 당장 백만 발의 소총탄을 거래한다고 칩시다. 그게 미국의 안보를 얼마나 크게 위협합니까? CIDC나 CIA가 유의미한 안보위협으로 인식할 만큼 위협적입니까?"

워커는 내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소총탄은 들어가는 수고에 대비하여 마진이 많이 남는 품목은 아니었으나, 무기거래의 전체 규모를 반영하는 지표로서는 유용했다.

지식은 힘이다. 나는 시장 사정에 해박한 무기상으로서 차분한 설득을 이어갔다.

"미국인에게 미국을 설명하려니 꼴이 꽤 우습지만.... 뭐, 유통 분야에 대해서는 내가 더 전문가니까, 한번 들어보십시오."

"무슨?"

"백만 발의 실탄...이라고 해봤자 텍사스의 총포상들이 일주일 동안 팔아치우는 양보다 조금 많은 수준에 불과합니다. 공식적인 판매량이 말입니다."

미국 국세청이 아무리 무서워도 탈세를 할 놈들은 한다. 오히려 세계 최대의 탈세 시장이 바로 미국이다. 고로 총포상의 공식 판매량은 전체 거래물량보다 반드시 적다.

"당신의 조국엔 4억 정 이상의 총기가 있고, 그 중 3억 9천만 정은 시민들이 보유하고 있어요. 정식으로 등록된 총기만 헤아려서 그 정도입니다. 동호인들끼리 모임이라도 여는 날이면 하루에 쓰는 실탄이 기본적으로 만 단위를 넘어가더군요."

어디 만 단위뿐이겠는가. 미 서부 최대의 사격 축제는 매년 평균 350만 발씩을 소모한다. 여기에 전차와 장갑차를 끌고 오는 사람들마저 있다.

"당신네 시민들은 매해 백억에서 백이십억 발 가량의 총탄을 구매합니다. 단체를 제외한 순수 개인 구매량은 팔십억 발쯤 되고요.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었습니까?"

"...조금은."

"그렇겠지요. 구체적으론 몰랐을 겁니다."

미국인이 미국의 이야기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조금은 웃기는 일이었다.

"이제 지구본을 돌려보면... 워커 당신도 겪은 바 있는 저 아프간에선, 좀 산다 싶은 집안끼리 결혼식을 올릴 때마다 축하한답시고 쏴 갈기는 탄이 수만 발입니다."

그쪽 동네의 전통이 그 모양이라 미군이 곤욕을 치른다. 멀리서보면 하객들이 마치 격분한 무장단체처럼 보여서.

"알다시피 테러리스트들은 그보다 더 많은 총탄을, 당신들을 겨냥해서 쓰지요."

"음...."

"중국과 러시아와 동유럽...그리고 가끔은 북미와 남미로부터 중동의 암시장으로 생필품처럼 팔려나가는 무기의 양은, 아마 거래를 하는 당사자들조차 모를 겁니다. 워낙에 큰 시장이고, 너무도 많은 세력들이 활동하고 있으니까."

한국에서야 총 한 자루에 실탄 한 발만 사라져도 난리법석을 떨지만, 미국 정보기관들의 관점에서 다른 나라에 유통되는 백만 발의 실탄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2. 모색 (2)

"반면 이쪽 동네의 바이어들은 어떻습니까."

다섯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잠재적인 고객들을 나열해본다.

"공산당 따까리 노릇으로 연명하는 광둥 삼합회, 일본 안에서만 놀면서 지들끼리 죽고 죽이는 야쿠자 놈들, 필리핀 정부와 줄다리기를 하는 모로 해방전선, 인권 문제로 무기 수입에 애를 먹는 미얀마, 그 미얀마와 싸우는 각종 반군들 및 그들을 지원하는 세력들...."

실제로는 더 많지만 이 자리에선 중요하지 않다. 내 거래처들을 일일이 다 밝힐 이유도 없었고. 나는 주먹을 내리며 질문했다.

"소령. 이놈들의 공통점을 알겠습니까?"

"...우리 정부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

"정확히는 우선순위가 떨어진다고 해야겠지요."

미국의 힘이 예전 같지 않은 데 반해, 관리가 필요한 문제아는 많아졌다. 무엇보다 동북아엔 중국과 북한과 러시아가 존재한다. 이 셋은 미국의 첩보예산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구멍들이었다. 결국 한정된 돈을 어디에 먼저 써야 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말을 길게 하니 목이 마르다. 빈 잔을 쥐자 수연이 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라주었다. 따뜻한 차를 물처럼 마시고서, 끝나지 않은 말을 이어간다.

"겸허하게 인정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진짜 화약고에서 오일 머니로 불장난을 치는 동업자들이나 지구의 암세포인 중국 공산당을 능가할 수 없고, 또 그들만큼 미국과 세계의 관심을 받을 수도 없어요. 지켜야 할 선만 철저하게 지키면 트러블을 겪을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지켜야 할 선이란 아마추어처럼 굴지 않는 것이다. 상품을 아무 데나 보관하지 않고, 아무에게나 막 팔아버리지도 않고, 돈을 아무렇게나 주고받지도 않는 것. 이는 밀수의 기본인데도 투자비용과 관리비용이 크기 때문에 얼뜨기들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다. 혹은 가능한데도 안 하거나.

어느 분야든 사고는 기본 원칙을 지키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법이었다. 원칙을 지키면 우리도 편해지고 정보기관들도 편해진다. 나는 혹시나 싶어 경고를 해두기로 했다.

"물론 당신들도 선을 엄격하게 지켜줘야겠지만 말입니다. 내가 무제한 매입을 약속했다고 해서 근시안적인 욕심을 부렸다간, 그때야말로 본토의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될 테니."

너무 단기간에 대량의 물자를 유출시키거나, 건드려서는 안 될 위험한 품목을 건드리거나. 이놈들이 그렇게 과욕을 부려도 내 쪽에서 인수를 거부하면 그만이긴 하나, 그럼에도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기에 일깨워두려는 것이다.

또한 현재 나에게만 맞춰져 있는 위험성의 초점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화법이기도 했다.

역시나 워커가 발끈하며 말려든다.

"허. 우릴 못 믿습니까? 우리는 굉장히 신중하고, 우리의 공급 능력은 치프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지금까진 그 물량을 소화 가능한 파트너가 없었을 뿐이지. 우리 사령부가 작정하고 물량을 밀어내기 시작하면 당신은 당신이 보장한 '무제한'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군요."

"자신감이 과하십니다."

"글쎄.... 당신들이 다음 연말까지 10억 달러를 바닥낸다면, 그때는 내가 패배한 셈 칩시다."

"10억 달러?"

얼이 빠진 워커는 잠시 후 고장 난 기계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10억 달러? 10억 달러라고요?"

"말했잖습니까. 무제한이라고."

"허."

잠깐 사이에 두 번째의, 그러나 의미는 달라진 '허'였다.

"그 돈이면 구축함도 살 수 있겠습니다."

나는 어울려주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봤자 전성기의 펩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뭐라구요? 하하하하!"

워커가 웃음을 터트린다. 내 농담을 바로 알아듣고 웃는 게 조금 의외였다.

1989년, 펩시는 소련에 약 30억 달러어치의 콜라를 공급하는 대가로 열일곱 척의 재래식 잠수함과 한 척의 프리깃, 한 척의 구축함, 한 척의 순양함으로 구성된 함대를 받아냈다. 과거 소련 해체기에 무기 밀수로 악명 높았던 칼리 카르텔의 모든 실적을 더해 본들, 규모 면에선 펩시가 체결한 이 한 건의 계약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좋습니다."

마침내 워커의 벽이 허물어졌다. 돈이 돈이라 빠른 함락이었다.

"제가 졌습니다. 10억 달러라니. 도저히 무립니다. 너무 터무니없는 금액이라 현실감이 안 느껴질 정도로군요.... 워낙 큰 건이라 이 자리에서 확답을 드리기는 어렵지만, 일주일 안으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보실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기대하죠."

"그런데 말입니다."

"뭡니까?"

이상하게 뜸을 들이던 워커가 내게 묻는 말.

"치프. 거래에 앞서 혹시 코카인을 좀 구해다 주실 순 없으신지요."

...이 새끼들 봐라?

"당신들 설마 마약 합니까?"

그렇다면 이 거래를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마약에 빠진 놈들은 매사에 절제를 모르는 병신들이라 언젠가 반드시 꼬리를 밟히기 때문이다. 일단 마약에 손을 댄 시점에서 그 인간에겐 미래가 없는 것이고, 미래가 없는 인간과 장기적인 계획을 논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드물 터였다.

내 시선이 차가웠던지 워커가 얼른 손을 저어보였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지킬 건 지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단지 융통성 없는 친구가 하나 있어서 보험을 들어두려는 것뿐입니다."

"리스크 관리의 일환이다?"

"예."

확신하긴 어렵지만, 생체적인 징후들을 보건대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마약을 약점으로 잡으면 막상 써먹을 때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증거는 헌병이 아니라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여줄 겁니다. 안전한 방법으로 말이죠."

"과연."

생각에 잠겨있던 내가 역으로 물어보았다.

"한 사람이 서너 차례 투약할 양이면 되겠지요?"

이에 워커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어떻게 그 한 사람만 딱 먹이겠습니까. 본토에서 약 좀 하다가 온 녀석들을 유인해 바람잡이로 써야 하니, 가급적 넉넉하게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바람잡이들에겐 약 자체가 보수가 될 거라서."

"좋아요. 하지만 꼭 코카인일 필요는 없어 보이니 모르핀으로 구해드리죠. 미인가 오피오이드(Opioid) 제제(製劑) 남용 정도면 커리어를 날리기에 충분한 약점 아닙니까."

모르핀은 중독성이 강한 편에 속하나, 그래도 코카인에 비하면 양반이다. 부작용 측면에선 특히 더 그러했다. 워커 소령의 '융통성 없는 친구'에게 보내는 나의 작은 호의였다.

난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을 존중한다. 나에게 위협이 되지만 않는다면.

워커가 미간을 좁히는 게 보인다.

"모르핀은 약한데...."

모르핀이 약하다니. 처방전도 없이 약국에서 마약성 진통제를 구할 수 있는 나라의 군인다운 말이다. 내가 굳이 미인가 제제라는 말을 덧붙인 이유였다.

"여긴 미국처럼 지나가는 사람 모두에게 코카인 냄새가 묻어있는 동네가 아닙니다, 소령. 저 강남의 유흥가라면 모를까, 추적이라도 당하게 되면 개 한 마리만 풀어도 서울에서 대구까지 쫓아올 수 있을 텐데 미쳤다고 코카인을 배달하겠습니까?"

과장이 심한 겁주기라도 워커에게는 먹힌다. 아까도 잠깐 말이 나왔는데, 이놈은 무기든 마약이든 구체적인 유통과정에 대해선 아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코카인이 다른 마약에 비해 냄새가 오래도록 선명하게 남는 것도 사실이고.

다시금 워커가 손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모르핀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판을 키운 다음에도 결제방식은 동일하겠지요?"

확인하듯 묻는 워커에게, 나는 품에서 카지노 칩 하나를 꺼내어 테이블 위로 밀어주었다.

"가서 설득이나 잘 해주십시오."

세계 암시장에서 북미 원주민 보호구역의 카지노들은 스위스 은행만큼이나 신용이 높다. 실제로 일반 은행을 지점처럼 운영하는 카지노도 있으며, 나와 거래하는 카지노 역시 그런 유형에 속한다.

내가 내민 칩은 카지노가 발행하는 수표 같은 것이다. 수수료가 많이 비싸긴 하나, 원주민들이 부족 차원에서 자금세탁과 칩 위조방지에 들이는 노력을 감안하면 감수할 만한 대가다. 또한 그들의 자치권은 정치적인 방패이기도 하다. 워커는 걱정 말라고 웃으며 칩을 갈무리했다.

합의에 도달하고 나서도 대화는 한 시간쯤 더 계속되었다. 이놈이 언젠가 장군이 될지도 모를 노릇이니,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둬서 나쁠 것은 없었다. 워커는 돈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했고, 억만장자들에 대한 부러움과 선망을 드러냈다. 그런 흐름 끝에 술잔을 여러 번 비우고는 한탄하는 소리가 이랬다.

"소령을 달기 전에 비트코인을 사뒀어야 했습니다. 17년의 그 엄청난 행운이... 진짜로... 내 것이 될 수 있었건만...."

X신 같다.

"치프. 당신께선 비트코인으로 얼마나 재미를 보셨습니까?"

일단 재미를 보았다는 건 기본 전제로 깔아놓고 던지는 질문이었다. 하기야 암시장 관계자가 암호화폐에 손을 댄 적이 없다고 한다면 지나가던 개가 웃을 것이다.

"뭐, 차익이 크긴 했지요. 우리 업계에선 등장 초기부터 쓰던 결제수단이라."

평범한 사람들은 관심도 없겠지만, 사실 암호화폐의 초기 수요를 견인한 게 바로 전 세계의 크고 작은 범죄조직들이었다.

"오!"

눈을 크게 뜬 워커가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인다.

"초기부터 돈을 묻으셨으면 이익률이 어마어마했겠습니다! 거래가가 얼마일 때 차익을 실현하셨습니까? 1만 5천? 1만 7천? 당신쯤 되는 분이면 역시 17년 말이었겠지요?"

17년 말은 세계적인 암호화폐 투기 열풍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다. 해외 거래소들에선 평균적으로 1만 8천 달러 안팎이 최고점이었으나 유독 한국에서만은 2만 달러를 넘겼었다.

난 워커의 억측을 부인했다.

"아닙니다. 당시 보유하고 있던 양의 절반을 1천 달러에서 털고, 나머지도 단계적으로 현금화하다가 4천 달러 선에서 완전히 정리했습니다."

취기가 도는 워커는 제 돈을 잃기라도 한 양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왜.... 4천이면 상승세에서 중간에도 채 못 접어든 단계였는데...?"

"그건 광기였습니다, 소령. 뉴턴도 모르겠다고 한 게 버블의 광기인데 내가 그 광기의 끝을 어떻게 예측했겠습니까. 사업을 하는 사람이 요행을 바라선 안 되는 겁니다."

"아...."

테이블 위로 가까워지던 워커의 몸뚱이가 제 위치로 돌아간다. 1천 달러 선에서 정리한 절반만 해도 평균 매입가 대비 2천 7백 퍼센트의 이익이었지만, 이 욕심 많은 녀석에겐 너무나 소박한 행운이라 이익률을 물어볼 마음조차 안 드는가 보다.

과하게 몰입해있던 놈은 제 이야기가 아님에도 흥분이 쭉 빠진 품새로 한숨을 쉬었다.

"안타깝군요. 그럼 그 후론 손을 일절 안 대시는 겁니까?"

"아뇨."

"하면?"

"필요한 만큼만 매입해서 굴리고 있습니다. 줄 때나 받을 때나, 추적을 회피하는 용도로는 암호화폐만큼 편리한 수단이 드물어서 말입니다."

솔직히 금전적으론 이득을 보았어도 사업상으론 불편해진 부분이 많다. 가치 변동이 커지고 안전성이 떨어진 탓에 암호화폐를 화폐로서 쓰기가 곤란해졌기 때문.

그럼에도 여전히 암호화폐를 쓰는 이유는 대체재가 없어서다.

비판적인 사람들은 비트코인을 위시한 암호화폐들이 그저 다단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아니다. 암호화폐의 최저수요는 마약과 불법적인 무기 거래, 희귀동물 밀수, 밀렵, 밀입국, 뇌물수수, 탈세, 해적질, 사이버 범죄, 인신매매, 그리고 중국의 지랄 맞은 국부유출 방지정책에 의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투기꾼들이 거품을 냈을 따름이지.

이걸 누군가에게 알려준들 그렇구나! 하고 말 테지만.

워커가 묘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치프는 신중한 분이니 그렇다 쳐도, 다른 조직들은 앉은 자리에서 떼돈을 벌었겠습니다? 이를테면 중남미의 마약상들이라거나."

"...그런 경우가 꽤 있을 겁니다. 매도와 매수를 거듭하다 손해를 본 놈들도 많겠습니다만, 최소한 내가 아는 몇몇 중간상들은 17년 전후로 굴리는 자금의 단위가 달라졌으니까요."

"하, 부럽습니다. 진심으로 부러워요. 어쩐지 요즘 멕시코 정부가 카르텔을 상대로 맥을 못 춘다 했습니다. 그게 돈의 힘이었다니. 하하. 하긴 세상을 지배하는 건 예산이죠."

글쎄....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포기한 건, 지난해 말 카르텔 하나를 끝장내겠다고 벌였던 총력전이 무진장한 부수적 피해- 민간인 사상자를 쏟아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배경엔 카르텔이 마르지 않는 자금력으로 영입한 전직 특수부대원들과 암시장에서 구한 온갖 중화기들의 활약이 있었다. 굳이 따진다면 가상화폐 시장에서 거둔 수익도 거기에 얼마간의 지분이 있긴 했겠지.

가상화폐에 투자를 빙자한 투기를 했다가 돈을 날린 사람들은, 자신이 제3세계의 치안 악화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것이다.

#2. 모색 (3)

워커를 보내고서 남은 것은, 끼니를 거르며 대기한 두 측근에게 늦은 저녁을 먹이는 일이었다. 상을 새로 내오도록 지시하자 수연 녀석이 버려질 음식들을 아까운 눈으로 응시했다. 그러나 내 보좌역쯤 되는 애들 입에 누가 먹다 남긴 음식이 들어가선 안 되는 것이었다.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난 워커를 상대하는 내내 쓰고 있던 실리콘 마스크를 벗겨냈다. 피부를 닮은 실리콘이 찌직거리며 뜯어진다. 외견상의 위장이 필요할 때마다 쓰는 물건이지만, 이 답답한 느낌엔 도무지 적응하기가 어렵다. CIA 놈들은 이걸 착용한 채로 며칠을 버티기도 한다는데 그게 어찌 가능한지 의문이다.

기다리는 시간, 경태가 따뜻한 찻잔을 감싸 쥐며 묻는다.

"형님. 아까 말씀하신 펩시는 대체 뭐였습니까? 설마 펩시맨의 그 펩시입니까?"

"맞다."

해당 일화를 대강 요약해주니 경태가 신기해한다.

"콜라 업계에선 만년 2인자인 주제에 엉뚱한 데서 굉장했군요."

"소련에 보드카가 부족해서 벌어졌던 일이지. 그때 안 부족한 게 있었겠느냐만."

"엥? 원랜 콜라 값을 보드카로 냈나 보죠?"

"그래. 네가 좋아하는 스톨리치나야로."

"아, 스톨리치나야! 맛있죠 그거! 펩시가 보드카 고르는 안목이 있었네요."

경태는 좋은 보드카일수록 알코올향이 커피 원두향처럼 느껴지니 어쩌니 하며 스톨리치나야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러는 사이 아까보다는 간소해진 상이 차려지고, 두 녀석이 식사를 시작했다. 먹는 데 열중하는 모습들을 보니 둘 다 허기가 지긴 했던 모양. 나는 둘이 배를 채우는 동안 차를 홀짝이며 가만히 사색에 잠겼다.

'전쟁이라....'

내게 전쟁이라도 치를 셈이냐고 물었던 워커는, 그러나 자신이 정곡을 찔렀음을 꿈에도 알지 못할 것이다. 내 각오를 알게 된다면 당장이라도 관계를 끊으려 들겠지.

이곳 대구, 캠프 헨리(Camp henry)의 무기 도둑들에겐 테러리스트와 직거래를 할 배짱이 없었다. 더군다나 내 목표인 영국은 미국의 핵심 동맹인 「다섯 개의 눈」 중 하나이므로, 걸렸다간 범죄자를 넘어 국가반역자에 준하는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물론 여기서 확보한 무기들이 영국에서 쓰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일단 가져가는 것부터가 난관이다. 테러 위협이 나날이 증가함에 따라 영국은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강화해왔으며, 다섯 눈의 첫 번째다운 정보수집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장기간의 항공밀수는 모험에 가깝고, 원양어선이나 화물선을 이용한 분선밀수도 상대적으로 안전할 뿐 상당한 위험을 무릅써야만 한다. 들여갈 물건을 다른 지역에서 구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운반할 양이 워낙 많아야 말이지.

허나, 런던의 마법사들과 싸우게 된다면 언젠가는 결국 런던을 쳐야 한다. 방어전만 치러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을 싸움이기에. 아직 벌어질지 확실치도 않은 전쟁이지만, 터지고 나서 방법을 찾으려 들면 너무 늦을 것이다.

보다 확실한 루트는 없으려나.

생각의 흐름은 자연스레 중남미 카르텔 놈들에게 닿았다.

'놈들처럼 잠수정을 쓴다면 어떨까.'

그놈들이 마약을 채워 멕시코 만에서 출항시키는 잠수정들은 북대서양 난류를 타고 유럽까지도 간다. 크기가 작으니 엔진을 끄고 해류의 힘으로만 움직이면 영국 근해에 깔린 해저 감시망(SOSUS)도 돌파 가능하다.

아예 그놈들에게 잠수정 건조를 주문해도 괜찮겠다. 운송 자체를 위탁하는 게 베스트겠으나, 녀석들이 마약 대신 무기를 싣도록 만들려면 1회당 최소 3억 달러는 지불해야 할 것이었다. 코카인을 실었을 때의 기대수익만큼은 맞춰줘야 하니까.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막나가는 지출은 감당 못한다. 잠수정을 직접 사는 편이 낫다.

문제는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

놈들의 구형 반잠수정이 2백만 달러 선으로 추정되고, 완전 잠항이 가능한 최신형이라도 1억 달러를 넘진 않을 테지만.... 최신형은커녕 폐기 연한을 넘긴 구형조차 암시장에 매물로 나온 적이 없다.

이해는 간다. 가장 은밀한 운송수단을 무분별하게 팔아댔다간 새로운 경쟁자들이 우후죽순 등장할 테니. 보스 개인의 재산을 제외해도 최저 수십억 달러씩은 현금으로 들고 있을 주요 카르텔들이 '고작' 1억 달러에 장사밑천을 판매할 것 같지도 않다.

친분도 거래도 없는 놈들에게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까. 누구에게 다리를 놓아달라고 해야 할까. 신뢰성이 검증된 잠수정을 입수할 다른 경로는 없을까. 이런 고민들이 깊어질 때였다.

"음?"

밥 먹던 두 녀석이 손을 멈춘 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수연이 묻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십니까? 한숨까지 쉬시면서."

"...한숨? 내가 그랬나?"

"예."

무의식중에 마음이 샜나보다.

이럴 때 머리를 더하는 것도 보좌역의 역할이다. 나는 둘에게 내 고민을 공유해주고서 이렇게 덧붙였다.

"당장 결론을 낼 문제가 아니니 먹던 거나 마저 먹어라. 음식 식는다."

내가 조직의 우두머리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책임이 바로 부하들에게 밥을 먹이는 것이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그렇게 내 것이 된 목숨들의 생계를 책임져 나가는 일. 조직이 곧 삶이 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충성이 성립한다.

나를 알만큼 아는 두 녀석은 눈치 보지 않고 식사를 재개했다. 어느 정도 배가 찼는지 젓가락질과 숟가락질이 한결 여유로워진 게 보인다.

"아까 말입니다."

얼마 안 가 수저를 내려놓은 수연이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입을 열었다.

"워커 소령이 말실수를 하더군요. 눈치채셨습니까?"

"'우리 사령부' 말이냐."

"예."

"전부터 심증이야 있었다만, 그런 소리가 무심결에 나올 만큼 공모자들이 늘어났다는 뜻이겠지. 어쩌면 사령관마저 가담했을 수도 있고."

수연 녀석이 건조한 기대를 표했다.

"10억 달러는 도저히 무리라고 했지만, 그쪽 패거리가 지원사령부를 장악한 게 사실이라면 앞으로 늘어날 물량을 기대해 봐도 좋겠습니다. 본토로 돌아간 선임자들이 밥값을 해줄 때가 되었으니까요."

한국에 붙박이로 배치된 부대라도 구성원은 계속 물갈이된다. 캠프 헨리의 공모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일정 연수를 복무하고 나면 근무지가 변경되는 것.

따라서 그들 사조직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선 일정 주기마다 새로운 구성원을 포섭해야 했다. 그러나 반대로, 한국을 떠난다고 조직에서 배제되는 건 또 아니었다. 아예 관계가 끊어지면 불안요소가 된다. 지난날 내가 의문을 제기하자 저쪽에서 해명한 내용. 여기에 관해서는 안심해도 좋으니, 앞으로도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길 바란다고 했던가?

따라서 내가 제안한 거래 확대는, 규모가 뜻밖이었을 뿐 저놈들로서도 바라던 바였을 것이다. 사람이 늘어나는 만큼 파이도 커지는 게 이상적이니까.

나는 시선을 돌렸다.

"경태야."

"네, 형님."

"워커는 어쩌고 있냐."

다 먹고 배를 쓰다듬던 경태는 내 질문에 잠시 제 폰을 들여다보았다.

"차 안에서 상급자로 추정되는 누군가와 47초간 통화를 한 것 외엔 이제껏 특기할 만한 행동이 없었다고 합니다. 통화는 대충 내일 만나서 보고하겠다는 내용이었고.... 지금은 같은 부대의 테일러 상사를 불러내 술을 마시는 중인데, 기분이 굉장히 좋은 상태랍니다. 위치는 자주 애용하는 술집이고요."

"기분이 좋은 건 내가 준 용돈 덕분이겠지."

워커는 오늘 기지를 나서는 순간부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었다. 차 안에서 하는 통화조차, 창문의 진동을 감지하는 원거리 레이저 도청을 피하지 못한다. 감시팀에겐 이동 간 도청을 목적으로 개조한 특수차량까지 주었다.

경태가 우스개처럼 말한다.

"전쟁을 준비해야 평화를 누린다고들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준비를 하는데 막상 싸울 필요가 없어지면 그것도 웃기겠네요. 마소 농도가 지금보다도 훨씬 더 높게 치솟아서 말입니다."

"...."

마소의 농도는 오늘도 변화가 없었다. 흐름에 따라 일시적으로는 변할지언정, 평균적으론 옅어지지도 않았고 진해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변화가 한 번으로 끝이란 보장은 없다. 그땐 싸움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공산이 높다. 문명이 후퇴하거나 붕괴하는 건 필연이며, 그런 세계에선 런던 놈들이 이 먼 곳까지 날 찾아다닐 엄두를 못 낼 테니까.

당연히 그런 상황도 대비는 하고 있다. 전쟁 준비와 재난 대비는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아, 기왕 하는 김에 조금만 더 하면 그만이다.

경태의 말이 이어졌다.

"농도가 계속 올라 만에 하나라도 세상이 대충 망하게 되면, 비축해둘 무기의 가치가 새로워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소리냐?"

"제가 좋아하는 소설이 하나 있는데 말입죠. 메트로 2033이라고, 혹시 읽어보셨습니까?"

"아니."

간결한 대꾸에 경태가 실없이 웃는다.

"역시 그렇군요. 형님께서 다른 책은 다 보셔도 소설책은 안 보시죠.... 아무튼 그 소설이 핵으로 망한 세상의 생존자들 이야기인데, 그 세계관에선 총알을 화폐처럼 쓰더라고요. 우리가 사는 현실도 그렇게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째선지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단 느낌이 듭니다. 비슷한 장르의 소설들을 많이 봐서 그런가...?"

마지막 한마디는 작아지는 혼잣말이었다.

총탄은 생사를 결정하는 권력이다. 사람의 목숨을 실물자원으로 간주한다면, 총탄은 교환가치가 확실한 화폐가 되는 셈.

속에서 차라리 경태 말처럼 되기를 바라는 나약함이 잠시 고개를 들었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건, 사냥꾼들에게 쫓기며 사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살아남기 위해서만 사는 삶'이 되지 않겠는가.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괜한 소리 마라. 내가 이기든 제국주의자들이 이기든, 끝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점에서 개놈들과의 전쟁이 세상 무너지는 꼴을 보는 것보다 백배는 더 나아."

"하하, 옳은 말씀이십니다."

경태가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옆에서 생각을 정리하던 수연이 입을 열었다.

"아까 무기 운송의 어려움을 이야기하셨습니다만, 막상 운송을 한들 그 무기를 들려줄 인원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애들을 런던으로 투입하는 데엔 한계가 있습니다."

맞는 말이다.

"그것도 해결해야 할 과제지."

죽고 죽이는 싸움은 머릿수가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내 부하들만으로 거사를 치를 경우, 설령 승리를 거둔다 한들 정보당국의 역추적을 피할 수가 없게 되어버릴 터.

"왜, 뭔가 떠오르기라도 했나?"

내 물음에 수연이 작게 끄덕인다.

"필리핀 방사모로 반군들 말입니다."

"그놈들이 왜?"

"우리가 거래하는 해방전선 외에 이슬람 광신도 집단이 넷이나 더 있잖습니까. 그중에서 BIFF와 그 분파를 제외한 나머지 둘, 「아부 투라이피에」와 「아부 사야프」는 잘만 다루면 중동의 이슬람 극단주의 진영으로 닿는 연락선 역할을 해줄지도 모릅니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손을 내밀자는 거냐?"

"예. 런던이 목표라면 그들도 싫어하진 않을 겁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IS 붕괴 이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유명세이고, 우리는 그딴 것에 관심이 없잖습니까."

"흠."

"형님께서 광신도들과의 거래를 꺼리신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니다, 아니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고 했던 사람은 나지. 잘 말해줬다. 검토해볼 가치가 있어."

아부 투라이피에와 아부 사야프는 같은 무슬림에게도 총질을 해대는 광신도 새끼들이다. 게다가 둘 다 머릿수가 오십 미만이라 거래상대론 매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규모는, 징검다리 역할을 맡기기엔 오히려 장점에 가깝다. 백만 달러만 흔들어보여도 침을 질질 흘릴 애송이들이니까.

문제는 이쪽하고도 전혀 연줄이 없다는 것인데....

우리의 클라이언트인 필리핀 모로 해방전선 측엔 소개를 요청할 수가 없다. 양쪽 모두와 원수지간인 까닭. 특히 아부 사야프 쪽은 놈들의 특공대인 「아장-아장」이 모스크에다 폭탄을 터트려버린 후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경태는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누님. 전 그렇게 허접한 놈들이 소개나마 제대로 해줄 수 있을지 의심스럽네요."

이에 수연이 즉각적으로 답변했다.

"아부 사야프는 나도 솔직히 의문스러워."

"그렇죠?"

"하지만 투라이피에 놈들에겐 기대를 걸어볼 만해."

"어떤 면에서요?"

"그놈들은 파키스탄 교민 사회와 가깝고, 실제로 파키스탄 협력자들을 활발하게 모집하고 있어. 납치와 해적질에 목숨을 거는 아부 사야프와 달리 활동자금의 출처에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지.... 리더가 연달아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이상할 만큼 흔들림이 없는 조직력도 수상해."

수연은 잠시 공백을 두고 결론을 내렸다.

"여러 정보들을 종합해볼 때, 난 놈들이 초창기의 탈레반처럼 파키스탄 정보부의 지도를 받고 있을 공산이 크다고 봐.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다에쉬(IS) 출신 두목이 죽었어도 탈레반과는 여전히 확실한 채널이 존재하는 거지."

"와우."

또박또박 물 흐르듯 쏟아진 분석에 감탄하는 경태.

"그렇게 하찮은 놈들의 정보마저 외우고 다니시다니."

"이게 내 일이야."

"그래도요. 크으. 멋져요, 멋져."

엄지를 쌍으로 세우는 경태를 무시하며, 수연이 담담한 태도로 나를 응시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중남미 지역 카르텔에 대한 접촉은 추장님께 의뢰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추장? 다이아몬드 카지노의?"

"네."

수연이 말하는 추장은, 내가 워커 중령에게 준 칩을 발행한 카지노의 비공식적인 주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진짜 추장으로서 부족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이쪽 세계에서 통하는 별명일 따름. 대부분의 원주민 부족들은 현대적인 정치제도를 받아들인 지 오래다.

의아해진 난 고개를 기울였다.

"왜 하필 추장이지? 이 세상에서 그만큼 마약상을 혐오하는 사람도 드물 텐데."

북미 원주민 부족들은 과거 빈곤과 마약중독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은 바 있다. 때문에 자신의 부족 「사막의 사람들(타호우너 아덤)」을 아끼는 추장은 마약상들을 극도로 싫어했다. 부족의 땅이 멕시코 국경에 접해있는데도 그가 마약 카르텔과는 일절 거래를 트지 않는 이유였다.

#2. 모색 (4)

질문을 받은 수연이 침착하게 답변한다.

"맞습니다. 그렇기에 「사막의 사람들」이 중개하는 밀입국은 다른 밀입국 경로들과 달리 카르텔과의 접점이 없겠죠. 카르텔로부터 몸을 피하고 싶은, 그러면서 추장이 카르텔과 거래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아는 관계자가 이용하기에 좋을 경로입니다."

"...과연."

미국-멕시코 국경과 가까운 원주민 부족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밀입국 중개업이었다. 큰돈이 되진 않을지언정 없는 것보단 낫고, 심리적으로 미국보다는 중남미 사람들을 더 가깝게 여기는 탓도 있다. 원주민들 입장에서 미국은 침략자들이 세운 국가일 뿐이니.

「사막의 사람들」 부족은 대다수가 미국 영내에 있지만, 나머지 소수는 멕시코 땅에도 거주한다. 독자적인 밀입국 사업을 벌이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나는 손끝으로 테이블을 천천히 두드렸다.

"그렇구나. 그중에서도 추가금을 내고 다른 서비스까지 의뢰한 놈들을 찾으면 어떤 식으로든 카르텔과 관계되어있었을 확률이 높겠어. 그게 좋은 인연은 아니더라도 말이야."

"카르텔과 척을 졌다는 게, 알고 지내던 구성원 모두와 사이가 틀어졌음을 뜻하진 않습니다."

"안다."

한 조직 내에서도 은원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놈들이지.

그 복잡함의 원인은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는 권력투쟁과 내부단속이었다. 숙청을 피하기 위해, 혹은 정적들의 공격을 무마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족과 친구, 측근들을 내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카지노가 제공하는 '다른 서비스'란 신분위조, 자금세탁, 이동수단과 안전가옥 제공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런 서비스들을 이용하는 데엔 적잖은 비용이 필요하고, 그런 비용을 지불할 여력이 있는 시점에서 그 밀입국자는 평범한 밀입국자가 아니게 된다.

수연이 말했다.

"신용을 중시하는 추장이 고객의 정보를 팔지는 않겠으나, 연락이 닿는다는 전제 하에 본인의 의사를 확인해달라는 것 정도는 조건에 따라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하여간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야. 내가 가만히 바라보자 수연은 시선을 겸손히 내리깔았다.

그나저나 카르텔의 전 관계자인가....

국경을 넘었다고 금수가 사람이 될 린 없으니, 추장의 도움을 얻어 미국으로 간 연놈들 중엔 살던 대로 살다가 인생이 고달파진 얼간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얼간이들일수록 제 연줄을 파는 데 거부감이 없을 터.

이건 정말 시도해볼 가치가 있겠다. 파키스탄 정보국과 엮일 위험이 있는 필리핀 반군보다야 카지노 추장 쪽이 훨씬 나은 상대이잖은가.

"그렇잖아도 조만간 미국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그때 한번 타진해보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습관처럼 메모를 하던 수연이 살짝 갸우뚱한다.

"조만간 다녀오려 하셨다면, 다른 용무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뭐, 용무라면 용무겠지. 거대한 것들을 내 눈으로 직접 봐두려고 한다."

"거대한 것들...이요?"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 중에서 질량이 독보적으로 큰 것들 말이다."

"...."

"어제 내가 원시마법을 각성할 확률은 그 생물이 살아온 시간과 생체질량에 비례할 거라고 했던 것, 기억나나?"

"아."

감을 잡지 못하던 녀석이 이제야 탄성을 삼킨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거대한 유기체들은 조만간 각성의 조짐들을 드러내기 시작할 거야. 어쩌면 그것들의 회로가 처음 열리는 순간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르고.... 나는 그런 현상들을 관찰함으로써 무언가 가치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어떤 마법사도, 어떤 제국주의자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지."

들은 내용을 곱씹던 수연이 자연스러운 질문을 꺼낸다.

"그 거대한 것들이 혹시 고래입니까?"

아마 대왕고래를 떠올렸을 것이다. 상식적인 연상이지만, 틀렸다. 고래를 볼 거면 꼭 미국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

"고래는 가장 거대한 포유류일 뿐, 가장 거대한 생명체가 아니야. 내가 북미 땅에서 보려는 건 식물과 균류(菌類)다."

"균류라는 건 설마...."

"버섯이지."

짧은 침묵이 흐르고 나서, 수연은 보기 드물게 선명한 곤혹감을 드러냈다.

"...고래보다 질량이 큰 버섯이라는 게 존재합니까?"

"한다."

고래는 가장 무거운 개체라도 200톤을 밑돈다. 그러나 내가 보고자 하는 버섯은 균사(菌絲)를 뻗은 면적이 965헥타르에 추정중량 3만 7천 톤짜리 단일 생명체다.

확답을 듣고 입을 다무는 수연. 이에 잠자코 듣고만 있던 경태가 슬그머니 손을 들고 나와 수연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저기,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뭐냐."

손을 든 경태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질문한다.

"초능력 같은 걸 얻을 확률이 생체질량에 비례한다고 하셨는데, 그럼 과체중인 사람이나 비만 환자가 날씬한 사람보다 빨리 각성할 가능성이 높습니까?"

"맞다."

"세상에, 형님께서 농담을 하시는 날이 오다니. 하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던 경태는, 내 침묵이 길어지자 제 웃음을 느리게 거두었다.

"하하...하...."

"...."

"어...."

"...."

"혹시 농담이 아니었던 겁니까? 진짜로 체중이 많이 나가면 더 빨리 각성한다고요?"

"내가 언제 너희에게 농담하는 거 봤냐."

"맙소사."

충격을 받은 경태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이거 진짜 맙소사네요. 뱃살이 두꺼워야 영혼도 살찌는 거였다니! 영혼이라는 게 그런 거였습니까? 고칼로리는 옳았구나!"

"진정해라. 정신사납다. 설마하니 영혼이 그렇게 쉽게 성장할까."

"그러면요?"

"영이 나무라면 생체는 화분이야. 나무가 자라려면 분갈이가 필수지만, 분갈이를 해준다고 나무가 즉각 성장하진 않지. 거기엔 종에 따른 차이도 있거니와, 살아온 세월 역시 영향을 미친다고 했을 텐데."

"아, 참. 그랬었죠."

납득했던 경태가 다시 의아해한다.

"근데 그 말씀은 비만 환자의 빠른 각성하고 모순되지 않습니까? 아주 오래된 비만 환자라면 또 모를까."

"그건 조금 다른 이야기다."

나는 잠시 숙고하고서 대답을 이었다.

"영의 질량.... 이게 물질적인 개념은 아니다만, 편의상 일단 질량이라 하마. 그편이 이해하기 쉬운 비유가 될 테니."

"예."

"핵심은 같은 질량이라도 부피와 밀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거다. 영은 생명에 깃드는 것. 고로 육신이 커질수록 영이 마소와 닿는 표면적이 증가하는 셈이지. 질량과는 무관하게."

"아하. 각설탕과 그냥 설탕이 녹는 속도의 차이 뭐 그런 거네요?"

"현상은 달라도 원리는 비슷해."

"이야...."

같은 맥락에서, 생체질량 대비 각성률은 곤충처럼 자그마한 동물들이 인간보다 훨씬 높게 나타날 것이다. 각각의 개체만 놓고 비교하면 당연히 인간이 압도할 테지만, 곤충은 설탕이고 인간은 각설탕이니까.

동요를 가라앉힌 경태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님. 저 지금 미래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형님은 안 보이십니까? 방구석에 처박혀 하루하루 몸무게만 늘려가던 사람들이 「드디어 내 세상이 왔다!」라거나 「나는 선택받은 인간이었어!」라고 흥분하면서 세상으로 쏟아져 나올 미래가요."

"...."

"요즘 시대가 시대라 그런 애들 많잖습니까. 살기는 팍팍하고 희망은 없고 해서 다 체념하고 삶 자체를 놓아버린, 정부가 실업자 통계에서도 빼버리는 친구들 말입니다."

쓸 데 없이 현실성 넘치는 예언이었다.

"그래봐야 잠깐일 거다."

"어째서입니까?"

"암에 걸려 죽는 녀석들이 속출할 테니까."

"예? 암이요?"

"덜 여문 마력회로는, 마소를 마력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새는 양이 많을 수밖에 없다."

"...새면 어떻게 됩니까?"

"정제되지 않은 마력은, 살아있는 것들에 한하여 방사선과 유사한 영향을 미친다. 완전히 같은 건 아니어도."

"어이구...."

마소, 그리고 마력은 영혼을 지닌 유기체에 깃들어 현실을 비틀어놓는 힘이다. 그 힘을 다스리지 못하면 가장 먼저 비틀리는 건 유기체 그 자신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엔 세포와 유전자도 포함된다.

"능력을 쓰면 쓸수록 회로가 그 능력에 맞게 굳어가겠다만, 거기까지 이르기 전에 죽을 놈들이 결코 적은 수는 아닐 거야. 그리고 그 연이은 죽음들은 나머지 전체가 몸을 사리도록 만들기에 충분할 흉조겠지."

따라서 새롭게 나타날 각성자들의 미래는 둘 중 하나다.

'능력이 안정되어 법칙의 반열에 들거나, 아니면 암에 걸려 뒈지거나.'

다소 어렵겠지만, 단시간에 한계를 넘은 힘을 사용하면 암이 아니라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죽을 수도 있겠고. 이런 면에선 동물보다 식물이 더 우월하겠다. 철저한 모듈화가 이루어진 생물이므로.

"불쌍한 친구들. 기껏 방에서 나온 보람도 없이 암으로 가버릴 수도 있다니.... 매미 같겠네요, 매미. 몇 년 동안 땅 속에 있다가 나와서는 한 달인가? 햇빛 보다가 죽어버리는."

경태 녀석이 말은 이렇게 해도 유감이 깊은 표정은 아니었다.

수연이 건조하게 한마디 했다.

"매미가 낫지. 짝짓기라도 하니까."

"아 누님. 그거는 조금 말씀이 심하십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매미들이 짝을 못 찾고 죽는지 아십니까?"

"안됐다고 하는 소리야. 우리가 경고해줄 의리는 없지만."

이 녀석이 남을 함부로 비웃을 성격은 아니다. 곧 죽일 놈이라도 진지하게 죽이지.

어쨌든, 수연의 말처럼 미리 경고를 해줄 의리는 없다.

어차피 능력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국가 단위의 관심이 집중될 게 뻔하고, 온갖 검사와 연구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비정제 누수 마력의 부작용쯤은 금세 발견될 것이었다. 그 정보가 초기에는 다소 부정확할 수 있을지라도.

경태가 자세를 바꾸며 가벼움을 덜어낸다.

"자, 농담은 여기까지 해두고.... 경호실장으로서는 미국으로 가시는 게 다소 위험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런던 놈들이 나랑 같은 생각을 할까봐서?"

"예. 그 뭐냐, 요번에 브리즈번이랑 싱가포르 다녀올 때도 말씀하셨잖습니까. 이 이변을 느낀 마법사라면 누구나 형님과 같은 생각을 했을 거라고."

"그랬었지."

"이번에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 버섯이 얼마나 큰지는 몰라도, 그렇게 큰 버섯이 지천에 널려있을 것 같진 않은데요. 런던 측과 날짜와 동선이 겹칠 확률이 너무 높습니다."

타당한 판단. 그러나 정답은 아니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지난 여행에서 경계했던 건 당장의 충돌이 아니라 훗날의 추적 가능성이다. 지금 당장은 놈들이 외부로 전력을 내보낼 여유가 없을 거야."

"어째섭니까?"

"이렇게 중요한 시기엔 누구도 자리를 비우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어, 거기도 뭐 정치질 같은 게 있나보죠?"

"당연하지. 출신성분들이 죄다 귀족인데 계파 갈등이 없을 리 있나."

그것도 탐욕스럽고 독선적이며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제국주의자 놈들이.

"애초에 내 스승새끼부터가 「황금기의 눈」을 독차지하겠답시고 동지들을 배신한 놈 아니냐. 그놈들의 지도부인 「원탁내각」은 지금쯤 칼 차고 들어가던 영국의 옛 의회 이상으로 개판이 되어 있을 거다."

보유한 유물 및 장서들의 접근우선권과 앞으로 구축할 질서, 그리고 그에 따른 가문의 이권 등을 두고 치열한 알력다툼을 벌이는 중이겠지.

경태가 끄덕인다.

"말씀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형님의 추측일 뿐인 거죠? 바깥으로 세력을 투사할 여유가 없을 거라는."

"일단은 그렇다."

"뭐가 또 있습니까?"

"버섯의 크기 말이다."

"예."

"그거 면적이 여의도의 두 배다. 가장 큰 놈 하나만 따져서."

"...."

"그리고 그 일대는 죄다 산과 숲으로 가득한 국유림이지. 거기서 날 포착하려면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자원을 투입해야 할 것 같으냐? 만에 하나 그 정도의 인력이 움직인다고 치자. 과연 내 눈을 피할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하겠네요."

"그렇지?"

제국주의자 놈들은 현재의 「원탁내각」에 대한 반란모의까지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공격자든 방어자든, 마법사뿐만 아니라 사병집단까지도 밖으로 내보내기 싫을 게 뻔하다. 수연에게 말했듯이, 마법사도 무방비로 총에 맞으면 죽는 건 똑같으니까.

하물며 당분간은 나처럼 회로를 조정하느라 마법을 제대로 쓰지도 못할 처지.

난 귀족 놈들의 권력욕과 생존본능을 믿는다.

#2. 모색 (5)

"한 가지 더."

나는 손가락으로 내 눈가를 툭툭 건드려보였다.

"이 눈. 놈들에겐 마소와 마력을 시각적으로 관측할 수단이 없다. 관찰에 기초한 연구가 어렵지. 그러니 생각이 비슷한들 우선순위는 다를 수밖에."

또한 인간이야말로 자연계에서 가장 우월한 존재이며 자신들은 그중에서도 특별히 더 우월하다고 믿는 놈들인 관계로, 인간의 가장 위대한 지혜인 마법을 하찮은 짐승과 식물들의 원시마법으로 더럽히려 들 것 같지도 않다.

대신 놈들은 풍부한 유물과 전승을 통해 까마득한 고대의 「황금기」를 더듬을 것이다. 런던의 원탁은 마법에 관한 모든 기준을 바로 그 시대에 두고 있으니까.

그들과 나, 누구의 방식이 더 옳은지는 결과가 알려주겠지.

"위험도가 의외로 낮다는 사실은 이해했습니다."

경태가 끄덕인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거 없겠죠. 마침 4/4분기 종합 전술훈련 받던 애들이 복귀할 때니까, 허락만 하신다면 걔들을 돌려서 쓰겠습니다."

"숫자가 얼마나 되는데?"

"잠시만요, 형님."

경태가 핸드폰을 보며 대답했다.

"191명입니다."

"너무 많다. 한적한 동네에선 지나치게 눈에 띄는 규모야."

"넵. 그럼 성적순으로 스무 명만 추려서 대기시킬까요?"

"그렇게 해라."

난 수정된 건의를 받아들였다. 191명이면 멕시코 카르텔의 거점을 공략해도 좋을 숫자다. 전면전까진 무리더라도.

내 조직의 행동타격대원들은 정기적으로 미국에서 전술훈련을 받는다. 단순히 훈련이 가능한 국가라면 얼마든지 많으나, 전문적인 레벨의 전술 아카데미가 민간인에게까지 열려있는 국가는 미국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이 바보는 아닌지라 이런 훈련기관들을 국무부에서 감시하기는 한다. 그러나 조직의 행동대 전원은 명목상 보안업체나 경호업체, 사설군사기업(PMC) 등의 직원 신분으로서, 다수의 트레이닝 센터에 나누어 입소시키므로 의심을 받을 일이 없다. 게다가 찾아보면 고객의 신원을 묻지 않는 센터들도 많았다. 가격이 다소 비싼 게 흠.

일단 눈앞의 경태 녀석부터가 그런 훈련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인재다. 경력 쟁쟁한 교관들이 보내오는 평가서엔 항상 최고라는 수식어가 들어가 있었고.

가정일 뿐이지만, 일본 최대의 지정폭력단인 「로쿠다이메 야마구치구미(六代目山口組)」와 전면전을 벌여도 행동대만으로 압도할 자신이 있다. 그들이 자랑하는 1만 1천 임협(任?) 집단은 내 부하들의 질적 우위 앞에서 무의미한 허수나 마찬가지였다.

'반수가 늙다리들이기도 하고.'

범죄조직으로서의 야쿠자라면 모를까, 폭력조직으로서의 야쿠자는 이미 한물 가버린 지 오래다. 나라가 늙으면서 폭력조직도 늙어버린 경우였다. 필요하다면 정규군과도 한판 붙는 멕시코 놈들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

경태가 물었다.

"그래서 가시려는 데의 구체적인 위치가 어떻게 됩니까?"

"버섯은 오리건에 있지만, 먼저 캘리포니아의 세쿼이아 숲부터 보고 가려고 한다."

"어, 여기에다가 찍어주시면 안 될까요?"

"줘봐라."

경태는 내게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띄운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난 그 지도 위에 시에라네바다 산맥 남쪽의 국립공원에서부터 오리건 주 동쪽의 국유림으로, 그리고 다시 유타 주의 소도시로 이어질 여정을 표시했다. 미리 계획을 세웠음에도 정확한 위치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아, 나도 내 폰으로 정보를 다시 찾아봐야만 했다.

폰을 돌려받은 경태가 갸우뚱 한다.

"거 참 공교롭네요. 형님께서 말씀하신 '거대한 것들'은 어째 다 미국에만 몰려 있답니까?"

그건 나도 공교롭다고 느낀다.

"모르지. 아마존 같은 곳에 미처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더 있을지도."

어쨌든 미국에게 있어서 좋은 일만은 아닐 것이다. 거대한 것들은 앞으로 그 거대함만큼의 미지이자 잠재적인 위협으로 거듭날 테니. 미국뿐만 아니라 국토가 넓고 식생이 풍부한 나라들은 예외 없이 고난을 겪겠지만.

늦은 식사 후의 이야기가 다소 길어졌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늦었구나. 오늘은 이쯤에서 정리하자."

"앗, 알겠습니다."

두 녀석이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아직 자정이 되지 않았으나, 수면의 질이 떨어지는 난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이상 하루를 일찍 마무리하는 편이었다.

조직의 '본사'로 돌아가는 건 내일이다. 내가 묵을 특실은 일본식 정원을 갖춘 독립적인 공간이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나는, 마루의 유리문을 통해 처마 너머로 떨어지는 눈발을 보았다. 밀가루를 뿌리는 것처럼 입자가 고운 가랑눈이었지만, 그래도 왕대나무의 마디와 푸른 잎 위에 조금씩 쌓이는 모습이 보인다. 대구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 풍경을 좀 더 평범하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황금기의 눈」이 제공하는 시야는 쓸 데 없이 고성능이어서, 눈을 감아도 눈꺼풀을 투과하여 보여주는 수준이다. 어느 정도 조절은 가능해도 시각을 아예 차단해 버리지는 못한다. 그래서 요령이 생기기 전까진 하루하루 잠드는 것이 너무나도 힘겨운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어렵게 잠들어 봐야 얼마 못 가 악몽에 짓눌려 깨어버리니, 한때는 정말 잠이 부족해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지금도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의 겉과 속이 한꺼번에 보이는 건 기본이다. 집중하면 대나무의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잎으로 이어지는 양분과 화학적 신호의 흐름들까지도 눈에 들어온다. 시각적 인지의 과포화 상태다. 고대의 유물은 나에게 이처럼 초월적인 인지능력을 부여했다.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나, 평범함이 그리울 때가 많다. 피로와 과도한 정보량으로 인해 겪는 두통은 일상이나 마찬가지.

그래도 사람이 있는 장소보다는 이렇게 조용한 풍경을 보는 게 나았다. 내게 있어서 사람이 많은 장소란 내장과 근육의 꿈틀거림으로 가득한 인체의 신비전이나 다름없으니까. 오래도록 겪어 익숙해진 지금조차, 이따금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은 순간들이 찾아온다.

...자야지.

눕기가 꺼려져 꾸물대는 자신을 다그치는 나날도 지긋지긋하다. 망연히 보던 풍경으로부터 눈을 떼고 방으로 들어온 나는, 이불을 덮고 누워 다가올 악몽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 생각을 떨치지 못하면 오늘 밤 잠은 물 건너간다고 봐야 한다.

달리 무슨 잡념으로 머리를 채우는 게 좋을까.

눈을 감은 시야에 눈꺼풀의 핏줄들이 겹쳐진 천장이 보였다.

#3. 대통령 (1)

해가 바뀌었다. 대구에서의 협상 이후 스물 닷새가 경과한 오늘, 1월 7일에, 나는 경태의 부하가 모는 차에 몸을 싣고 중부 캘리포니아의 내륙 주도(州道)를 달리는 중이었다. 마소의 농도는 변화가 없다.

로스앤젤레스로부터 북상하는 내내 보이는 거라곤 포도밭과 오렌지 과수원뿐인 단조로운 길. 내 옆에 앉아 핸드폰을 지분거리며 시간을 죽이던 경태는, 야트막한 절벽 사이를 지나 갑작스럽게 트이는 절경을 보고 표정을 달리했다.

"와. 경치가 아주 그냥 확 달라져버리네요."

나는 태블릿에서 눈을 떼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연이은 가뭄으로 수위가 내려가고도 여전히 푸른빛이 넘실대는 호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물을 가둔 능선들이 노랗게 죽어있는 건 지금이 추운 계절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수연 누님이 없어서 아쉽습니다, 형님."

"어차피 며칠 후에 합류할 거 아니냐."

"그래도요."

수연은 아직 한국에 있다. 조직 본사 비서실장 겸 기조실장으로서 산하조직들 및 사업장들의 신년 운영계획을 조율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캠프 헨리의 양키들은 거래 확대에 동의한다는 뜻을 전해왔고, 1월 2일부터 나흘간 진행한 조직 신년회에선 중역들을 모아 앞으로의 경영 방침을 하달했다. 그 방침을 구체화하는 건 수연을 비롯한 참모들과 핵심간부들의 역할. 내가 선택한 사람들의 결정이 곧 나의 결정이다.

경태가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다.

"그나저나 어떻습니까? 제가 추천해드린 소설들은. 마음에 드십니까?"

"글쎄."

나는 잠시 태블릿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썩 도움이 되지는 않는구나."

"그렇습니까...."

"처음부터 큰 기대는 없었으니 실망하지 마라."

나는 평소 소설을 가까이 하지 않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낭비가 많은 독서이기 때문. 소설은 대개 지식의 전달보다 감동과 흥미의 전달을 더 중시한다. 그건 내가 책에 바라는 바와는 정반대인 지향성이었다.

그러나 대구에서 경태가 했던 말을 곱씹어본 끝에, 앞날을 대비하는 데 소설적인 상상력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사례도 있었으니까.'

2001년, 9/11 테러로 인한 쌍둥이 빌딩의 붕괴는 전 세계 범죄시장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나는 시장예측을 위해 몇몇 싱크탱크의 학술지들을 꾸준히 받아보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미국연구재단(ASA)의 정기 저널인 「미국연구(American studies)」였다.

기억하기론 아마 거기서 보았던 내용일 것이다.

테러리즘에 관한 문화적 상상력 어쩌고 하는 제목의 짧은 논문은, 테러로부터 한 달 후, 미 국방부가 할리우드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어떤 의뢰를 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펜타곤은 영화 관계자들에게 집단적인 브레인스토밍을 요구했다. 테러리스트들이 앞으로 어느 목표를 노릴 것인가. 그들의 음모는 어떤 방법으로 실행될 것인가. 그리고 그 음모들을 어떻게 하면 저지할 수 있을 것인가.

논문의 저자는 이 계획이 하나의 소설로 인하여 촉발된 것이라고 적었다. 소설의 내용이 테러의 양상과 매우 흡사했던 탓에, 테러 당일 CNN 뉴스에서도 언급할 정도였다면서. 그 소설을 쓴 작가의 이름이 톰 클랜시다.

경태가 머리를 긁적인다.

"제가 드린 목록은 제 회심의 추천작들이었지 말입니다."

"내가 바랐던 건 소설적 완성도와는 별개다."

"알죠, 그야."

앞쪽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진다. 조수석에 앉아있는 건 수연이 제 역할을 대신하라고 보낸 비서실 소속 중간간부였다. 직급은 차장. 조직에서 주는 밥은 상급자인 수연보다 훨씬 더 길게 먹은 친구다. 운전석에 앉은 놈도 경태보다 길기는 마찬가지지만.

나는 백미러로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홍영식이. 뭔가 할 말이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말해봐. 얼버무리지 말고."

"진짜로 별거 아닙니다. 경호실장이 회장님을 편하게 대하는 걸 가까이에서 보니 신기했을 뿐입니다."

"중요한 건 마음이지 형식이 아니니까. 너희는 내가 그렇게 말을 해도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모자라서 들어먹질 못하는 거고."

"하하. 그 말씀이 맞습니다."

홍 차장이 멋쩍게 수긍했다.

"모두를 위해 변명을 해보자면, 회장님께서야 저희들의 속을 본다고 하시지만 정작 저희들은 스스로의 속이 어떻게 보일지를 모르니까 말입니다. 오히려 겉으로만 예의를 지키면 그만인 경우보다 훨씬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그런 조심성이 자연히 행동에도 묻어날 수밖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나무라겠다고 한 소리가 아니야. 신중한 태도는 좋은 거지.... 내 말은, 속까지 풀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으면 너희 역시 경태처럼 굴어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분발하겠습니다."

"그래."

형식에 집착한다고 꼭 조직의 능률이 증가하진 않는다. 옛 일본제국 황군이 어디 군기가 빠져서 2류 군대였던가?

어차피 나는 조직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이며, 내가 보유한 능력은 나에게 불가침의 위상을 부여한다. 고로 부하들에게 꼰대처럼 굴 이유가 없다.

난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수연 녀석 밑에서 일하는 건 익숙해졌나? 나이가 한참 아래라 껄끄러웠을 텐데."

질문을 받은 홍 차장이 당치도 않다는 반응을 내비친다.

"껄끄럽긴요. 전대 실장만 해도 내가 얘를 안 밀어주면 직무유기라고 했을 정도였고, 회장님께서 사람을 잘못 보셨을 리도 없잖습니까. 단지 강 실장은 감정 표현이 워낙 메마른 사람이라.... 이건 아시지요? 아무튼 그래서 대하기가 좀 어렵기는 했습니다. 그것도 처음 1년 정도였습니다만.... 껄끄러웠다기보단 어려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다행이구나."

이때 앞서가던 호위 차량으로부터 운전석에 앉은 녀석의 인이어 리시버로 무전이 들어왔다. 공원 입구를 통과했다는 전언이었다. 의심을 피하고자 선행 및 후속 차량 간 간격을 넓게 잡았으나, 유사시 지원을 받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내가 탄 차도 곧 공원 입구에 도달했다. 차량요금으로 35달러를 징수한 관리직원이 창구를 통해 통행증을 내밀었다.

"7일간 유효한 통행증입니다. 전면 유리창 안쪽에 붙이십시오. 밖에서도 딱 보이게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좋은 여행되시길."

운전석에 앉은 녀석은 직원과 자연스러운 인사를 주고받았다. 차는 산간 저편에 있을 세쿼이아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3. 대통령 (2)

반시간이 흘러 어느덧 해발 5천 피트까지 높아진 도로는, 빛바랜 아스팔트가 백색에 가까운 잿빛으로 얼어 있었다. 길 가장자리로 속도제한 표지판과 운행주의 경고판이 스쳐지나간다. 후자는 스노우 체인 장착을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다른 차량들이 멈춰 서서 체인을 장착하는 모습도 보였으나, 본사 현장지원팀이 준비한 차량은 4륜구동에 스노우타이어를 장착하고 있었으므로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오래된 세쿼이아 군락이 가까워질수록 심장 뛰는 속도가 빨라졌다. 눈에 들어오는 마소의 흐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정제되지 않은 마력의 갈피도 섞여있다. 가까이에 최소 하나 이상의 각성체가 있다는 증거.

각성체의 회로는 주변의 마소를 빨아들이며, 그 빨아들이는 힘을 장악력이라 한다. 그리고 그 장악력이 발휘되는 범위는 회로역장 내지 마력장이라 부른다.

나는 입술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근원이 보이지도 않을 거리까지 역장을 전개하는 각성체라....'

예상 밖이었다. 이곳 세쿼이아 국립공원의 나무들이 거대하고 오래된 것들이라고는 하나, 벌써부터 회로를 개방할 정도는 아니라고 여겼다. 8천 7백 년간 균사의 영토를 확장시킨 오리건 주의 버섯이나, 최소 8만 년을 존재해온 것으로 추정되는 유타 주의 금빛 포플러 나무쯤은 되어야 비로소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했지.

이 세쿼이아 숲을 찾은 건 어디까지나 각성 이전의 초기 전조현상을 보겠다는 이유에서였지만, 아무래도 나는 거대함에서 비롯되는 잠재력을 과소평가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장구한 세월을 견뎌온 영혼의 질이 또 다른 변수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내가 지닌 마법적 지식들은 기본적으로 내 머릿속에서 뒈져버린 스승새끼의 영을 소화한 결과물이다. 그 오만한 새끼는 꼴에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마법에 관한 모든 이치에 통달했던 건 아니었다. 따라서 그 지식에 기반한 나의 판단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하기야, 스승새끼도 종교적 편향과 인간우월주의에 빠져있기는 마찬가지였지.

"이쯤에서 차를 대겠습니다."

경태의 부하 녀석이 핸들을 돌리며 속도를 줄였다.

차에서 내린 나는 산책로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초조하게 남쪽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밀착 호위로 따라붙은 경태가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

"어, 형님. 여기서 가장 큰 나무는 반대쪽으로 가야 있다는데요. 「제너럴 셔먼」이라고."

"안다. 하지만 내가 봐야 할 건 그놈이 아냐."

"벌써 뭔가 찾아내신 겁니까?"

"...넌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상상조차 못할 거다."

나는 나의 역장이 쥐어짜이듯 수축하는 것을 느꼈다. 서로 다른 역장이 영역다툼을 벌일 때 벌어지는, 장악력 대 장악력의 순수한 힘겨루기. 이 주변의 마소에 대한 나의 장악력이란, 이제야 겨우 전모가 보이는 거목의 힘에 비하면 실로 보잘 것 없는 수준에 불과했다.

'내 회로가 완전히 정상화된 후에는 어떨까?'

대충 어림해본 난 내심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밀린다. 회로의 밀도와 정교함만으로는 극복하지 못할 체급의 격차라는 게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거목의 회로 또한 나름의 자연적인 최적화를 거칠 것이고.

끌어들인 마소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지만, 어쨌든 이 거목의 영역 내에선 어떤 마법사도, 어떤 원시능력자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주변에 분포하는 마소를 최대 효율로 끌어다 쓸 수가 없으니까. 나무 자체를 파괴해버리지 않는 이상에야.

이윽고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비수기라 그런지, 아니면 이게 이 공원의 가장 유명한 나무가 아니어서 그런지, 주변엔 우리 일행 이외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우려하던 감시자도 없다. 관광객 흉내를 내는 경호팀이 멀찍이들 서서 바깥 방향을 경계할 뿐. 옆으로 온 경태가 나무 앞의 명패를 읽는다.

"「더 프레지던트」.... 대통령이라니, 이름부터 거창합니다. 이놈이 형님께서 찾으시던 그겁니까?"

난 눈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어쩌면 이 시대 최초의 자연 각성체일 거다."

"각성이요? 그 뭐냐, 마력회로 뭐시기가 이미 뚫렸다는 말씀이시네요?"

경태 녀석은 고개를 꺾어 높고 거대한 수관을 올려다보았다.

"어이구야. 이 「대통령」 녀석, 크기는 진짜 엄청나게 크군요. 높이가 어지간한 아파트보다 높겠는데.... 나무가 아니라 무슨 절벽을 보는 것 같네."

뒤로 갈수록 혼잣말에 가까워지는 감탄이다.

압도적인 질량의 「대통령」에게 다가간 나는 결이 거친 표면 위로 손바닥을 대보았다. 목피 안쪽, 마소와 마력의 물살이 촉각으로 느껴지는 듯하다. 그저 보기만 하는 것과는 또 다른 감각. 내부의 흐름이 급류와 폭포를 닮아있는 회로였다. 혼잡하고 비효율적이지만, 아름답다.

내 눈에 비치는 마소와 마력은 서로 패턴이 다른 광점(光點)의 물결이었다. 그러므로 「대통령」은 땅 속 깊은 곳의 뿌리로부터 저 높은 수관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색상으로 물들어있는 빛의 나무였다. 불완전한 회로를 이탈한 마력은 오로라를 닮은 빛무리가 되어 은하수처럼 밀려나간다.

나는 감탄 섞인 한숨을 내쉬며 경태에게 경고했다.

"경태야."

"예."

"너희는 나를 중심으로 대략 5미터를 벗어나지 말고, 저쪽에 있는 애들은 좌우로 비키라고 해라. 거긴 마력이 새는 방향이다."

"엇."

경태가 지시할 것도 없이, 동행한 부하가 얼른 무전을 넣었다. 슬쩍 돌아보면, 해당 방위의 경호원들이 흩어지는 게 보인다. 나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되돌렸다.

눈어림으로 반경 5미터는 내가 여기서 장악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범위였다. 마소를 끌어들이는 장악력은, 기술적으로 이용하면 마소나 마력을 역으로 밀어낼 수도 있었다. 난폭한 비정제 마력에 피폭당하지 않으려면 나와 가까운 곳에 머물거나, 아예 자리를 피해버리는 방법밖에 없다.

그래도 겨우 5미터라니. 지금의 내가 작고 초라하여 실소가 나올 것 같았다.

물론 이게 부정적인 감정만은 아니었다. 자조감보다는 감동이 더 크다. 이 나무는 내가 이제껏 보아온 그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웠다.

한편 「대통령」의 회로를 해석하는 데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아직 회로의 복잡성이 낮은 데다, 유의미한 기능을 수행하는 회로는 거기서도 다시 일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의 회로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 차이는 앞으로 점점 더 확대되어 갈 것이다. 종마다 발현되는 능력의 양상이 다를 거란 가설에 한층 더 무게가 실린다.

"형님."

겪어본 적 없는 미지를 앞두고 경태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낸다.

"그래서 이 녀석은 가진 능력이 뭡니까?"

"능력?"

"예."

"이제까지보다 더 잘 자라겠지. 튼튼해지기도 할 것이고."

"...그게 답니까?"

"이거야말로 생명의 원초적인 욕구 아니냐."

단순하게 표현하긴 했어도 이건 정말 대단한 능력이다. 성장에 필요한 에너지 일부를 마력으로 대체하게 될 테니.

이 거목이 앞으로 얼마나 더 거대해질지 사뭇 기대가 된다. 생체강화로 에너지가 남아돌기 시작한 식물들은 과연 어떤 변화를 보여줄까. 그 변화가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든, 인류 문명은 녹음(綠陰)으로 가득한 진통을 겪어야 할 것이다.

대답을 들은 경태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맞는 말씀이긴 한데, 식물한테 욕구라는 표현은 다소 안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왜?"

"식물은 지능이 없잖습니까."

"누가 그러냐."

"예? 당연한 거 아닙니까?"

"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

"어...."

"때로는 상식을 의심해라. 식물에겐 지능도 있고 인지능력도 있다. 인간의 것과는 원리와 형태가 다를 뿐."

인간이 인간의 기준으로 정한 지능만을 진정한 지능이라고 믿으며 식물을 우습게 여기는 꼴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기네 문명만이 진정한 문명이라고 주장하며 온 세상을 식민지로 도배하고 다녔던 제국주의자 새끼들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제국주의가 싫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냥 제국주의가 제국주의라서 싫다.

"납득이 안 되는 모양이지?"

내 물음에 경태가 도리질을 친다.

"설마요. 이 김경태에게 형님 말씀은 언제나 옳습니다. 단지 이제까지 알던 거하고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이다 보니깐 실감이 안 나서 말이죠. 하하."

"흠."

이런 대화가 여러 번이라 슬슬 피로감이 느껴지지만, 미래를 대비할 지식이 오로지 나에게만 있는 걸 어쩌겠는가. 앞으로를 생각할 때 이놈은 머리가 깨어있어야 하는 놈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체질량의 99.5%가 식물이며, 이는 앞으로 등장할 각성체의 태반이 식물일 것을 예고한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주마."

내가 입을 열었다.

"많은 수목(樹木)들은 제 친족을 알아본다."

"와."

"유전적으로 가까운 친족끼리는 경쟁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끝장을 보질 않아."

요컨대 식물들에게도 가문이 있다. 인간 사회가 그렇듯이, 유전자를 보존하고 확산시킨다는 측면에선 당연한 행동전략이다.

"허나, 같은 종이어도 '혈통'이 다른 나무들 간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하려고 적대적으로 뿌리를 뻗어가는 전쟁이야. 그래서 밀도가 높은 숲에선 땅 속을 보면 그 일대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의 친족관계를 알 수 있지."

"거 신기하네요. 뇌가 없는데 그런 판단을 어떻게 내리는지...."

여기까지 답변하자니 정보량이 너무 많다. 번거로워진 나는 길게 나와야 할 말들을 한마디로 줄였다.

"식물은 뿌리가 뇌다."

"...."

입을 다문 경태 녀석이 새삼스럽게 제 발 아래를 살핀다. 그런다고 평범한 눈에 표토 아래가 보일 리 없는데도.

사실 내 말은 줄여도 지나치게 줄여놓은 지식이다. 식물의 지능은 뿌리 이외의 부분에도 분산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뿌리의 비중이 지극히 큰 것만은 맞다.

그 근간이 되는 건 뿌리의 끝부분에 존재하는 근단(根端)이다. 근단 세포들은 서로에게 전기신호와 화학신호를 보냄으로써 동물의 뇌와 기능적으로 유사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길가에 널린 들꽃들조차 천만 단위의 근단 세포를 지닌다. 눈앞의 「대통령」 같은 거목이라면? 수를 헤아리기보단 무게를 재는 편이 더 빠를 것이다. 굳이 이런 거목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크기가 있는 나무들의 인지 네트워크 중량은 인간의 뇌보다 훨씬 더 무겁다. 인지가 이루어지는 방식 면에서 차이가 있을 따름. 그 차이는 상호간의 교감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어놓을 만큼 크다.

그래서 나는 동물은 불쌍하니까 식물만 먹자고 떠드는 연놈들을 X신 같다고 생각한다.

'생명을 소중히 하려면 그냥 굶어 뒈져야지.'

그 난폭한 야만인들이 내비치는 도덕적 우월감은 나로 하여금 스승과 런던 새끼들의 역겨운 선민의식을 떠올리게 만든다.

상념의 흐름을 끊은 나는 몸을 돌려 「대통령」을 등졌다.

"이 녀석은 이만하면 됐다. 다른 놈들을 둘러보러 가자."

경태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벌써 다 보신 겁니까?"

"이제 막 열린 회로이니 당장은 더 볼 게 없어. 훗날 다시 온다면 모를까."

마음 같아선 회로의 발달과정을 길게 지켜보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 나무를 통째로 옮겨 심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최소한 인간과는 원리가 다른 생체강화 회로운용의 단초를 보았으니, 이 먼 곳까지 발걸음을 한 보람은 있다 하겠다. 프로그래밍으로 따지면 코드를 수집한 셈. 이런 식으로 코드 라이브러리를 늘려 가면 언젠가는 유용하게 쓸 날이 올 테지.

이러한 노력이 제국주의자들이 보유한 지식과 유물들을 능가하길 바랄 따름이다.

이후 나는 「상원(The Senate)」, 「맥킨리」, 「링컨」, 「프랭클린」을 순서대로 둘러본 뒤 마지막으로 이 국립공원에서 제일 거대하다는 「제너럴 셔먼」 앞에 섰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나무의 기준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놈이기도 하다.

경태가 가까운 관광객들을 경계하며 묻는다.

"어떻습니까?"

"다른 것들보다는 발달이 좀 늦구나."

"에이, 덩칫값 못하는 친구네요."

생체질량이 클수록 각성 확률이 높아진다지만, 그래도 결국 확률은 확률이다. 마소의 흐름이 빛의 균열처럼 「제너럴 셔먼」 곳곳을 파고든 걸 볼 수 있었으나, 아직까진 유의미한 회로를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회장님."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홍영식 차장이 나를 돌아본다.

"다이아몬드 카지노로부터의 연락입니다."

나는 홍 차장으로부터 전화기를 넘겨받았다.

#4. 하얀 추장 (1)

카지노의 추장은 애리조나 주 투손(Tucson) 남쪽에 위치한 샌 재비어(San Xavier)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나를 초대했다. 과거엔 부족의 영토가 아니었으되 연방정부 및 주정부와의 거래를 통해 새롭게 얻어낸 땅. 다이아몬드 카지노 또한 이 구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 차량 대열이 보호구역으로 진입하자 도로변에서 대기하던 경찰이 정지신호를 보냈다. 붉은 피부를 지닌 두 경관이 비어있는 양손을 펼친 채로 다가와 창문을 두드린다. 운전석에 앉은 부하가 창문을 열자 두 경관 중 선임자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여행하기에 좋은 날이지요?"

부하가 대응했다.

"그렇습니다. 오는 길에 비가 내린 걸 제외하면 말이죠."

여기는 사막이다. 우기가 아니니 비 같은 건 내린 적이 없다.

경찰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답한다.

"환영합니다. 추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곳으로 에스코트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탄 차량의 번호를 미리 전달하긴 했으나 한 번 더 확인하는 절차였다. 차는 그대로인데 사람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 차량 번호 등의 정보와 암구호는 별개의 채널로 주고받는다.

목적지는 카지노가 아니었다. 선두의 경찰차는 빈곤한 거주지의 모랫빛 비포장도로로 들어섰다. 바퀴자국을 따라 희뿌연 먼지가 연막처럼 일어난다. 직선이라곤 없는 길과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는 목조 주택들이 황량함을 더했다.

이윽고 정지한 곳은 다른 집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주택이었다. 먼저 내린 경태가 의례적으로 주변을 확인한 뒤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막의 열기가 강렬하게 엄습했다. 북쪽으로는 오래된 성당의 백색 첨탑이 보인다. 피부 하얀 침략자들의 유산이었다.

쿵. 낡은 순찰차 문짝을 세게 닫은 경관이 펼친 손으로 주택 입구를 가리켰다.

"들어가십시오."

나는 경태에게 살짝 끄덕여보였다. 집 안에 아무런 위험이 없다는 몸짓이었다. 이렇듯 나를 경호하는 건 일반적인 경호와 성격이 완전히 다른 일이다.

집 안은 일체형 에어컨의 웅웅거림과 인공적인 냉기로 차있었다. 해묵은 필터 특유의 냄새가 난다. 실내의 모습도 전형적인 가정집인 걸로 미루어, 부족민 중 하나에게 협조를 받은 듯했다.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렇게 꾸며놓은 안전가옥이거나.

앉아서 기다리던 늙은 추장이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일어나 나를 맞이한다.

"어서 오시오, 회장. 직접 보기는 오랜만이구려."

"반갑습니다, 추장. 건강해보여서 다행입니다."

"당신이야말로. 당신은 세월이 흘러도 도무지 변하질 않는군. 이마에 주름 한 줄이라도 생길 법하건만.... 아무튼 이쪽으로 앉으시오."

자리를 안내하는 추장은 세련된 양장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와 낡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추장은 내게 우선 사과부터 건네 왔다.

"당신처럼 중요한 고객에게 시간과 장소를 일방적으로 통보하다시피해서 미안하오. 하지만 최근 부족 차원에서 대응해야 할 정치적인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지금이 아니고선 따로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소이다. 오늘만 해도 새벽에야 D.C로부터 돌아온 것이고, 얼마 안 있어 다시 떠나야 한다오. 부디 양해해주길 바라오."

"그거야 전화상으로 이미 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신과의 직접적인 면담은 드문 요청이기도 하고. 헌데 어떤 문제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질문을 받고 잠시 가만히 있던 추장은, 이내 머리를 흔들며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입을 다물어도 어차피 조금만 알아보면 드러날 일이니...."

"...?"

"문제는 구리광산이요."

추장의 눈에 분노와 짜증이 스친다.

"노천광을 파먹는 광업회사가 부족의 땅을 몇 해째 침범하고 있는데, 주정부에서 광업회사 편을 들어 수익 분배비율을 후려치려 드는 게 아니겠소?"

"그래서 연방정부와 씨름하고 계십니까?"

"말하자면 그렇소. 우리 부족정부를 음지에서 돕고 있지. 현재까진 아무런 소득이 없지만."

"...광업회사에게 머리가 있다면 그쪽으로도 로비를 했을 테니까요."

"이를 말이겠소."

언제나 있는 일이다. 말이 보호구역이고 말이 원주민 자치구역이지, 그 땅에서 돈이 되는 무언가가 발견되면 어떻게든 헐값에 빼앗아가려고 드는 게 바로 이 나라 미국이었다. 내가 혐오해마지않는 제국주의적 행태.

어차피 드러날 약점이니 괜한 허세로 신뢰를 손상시키지나 말자, 라는 게 근심을 솔직히 털어놓는 추장의 속내인 듯했다.

내가 호응하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아파치 족도 비슷한 일을 겪지 않았습니까? 그 사건이 아직 법정에 계류 중이라면 힘을 합쳐 한 목소리를 내자고 제안해보시지 그러십니까?"

이 또한 과거 추장에게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들의 문제도 구리광맥이었을 것이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으나, 이런 종류의 법적 분쟁은 금방 끝나는 법이 없다.

내 말에 추장이 냉소를 머금는다.

"벌써 그렇게 하고 있소이다."

"유감입니다."

"연방정부 그 빌어먹을 놈들. 마약팔이들보다 신용이 없는 사기꾼들! 내 부족의 말로는 욕조차 해줄 수 없는 게 안타까울 지경이오."

「사막의 사람들」이 쓰는 모어(母語)엔 욕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북미 원주민 언어들 대부분의 공통점인데, 원주민들의 문화에선 특정 개인을 저주하거나 모욕하는 게 매우 강한 금기로 통했기 때문이다.

나는 작은 기대감이 들었다.

'일이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지금 추장에겐 정계에 먹일 로비자금이 절실할 것이다. 고객의 정보를 팔라는 것도 아니고, 우리와 거래를 할 의사가 있는지 확인이나 해달라는 요청 정도는 얼마간의 돈을 받고 받아들여 줄 법했다. 상대가 하필 중남미 카르텔이라는 게 변수이긴 하지만.

가뜩이나 추장의 사업은 전성기에 비해 이익이 큰 폭으로 감소한 상황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암호화폐의 등장.

암호화폐는 범죄조직들의 거래와 자금세탁, 자산은닉 등을 너무도 편리하게 만들어주었다. 최근 규제와 감시를 도입하는 국가들이 늘고 있어 추장의 사업이 바닥을 치고 반등하기 시작했으나, 그럼에도 80년대 말에서 2000년대 후반까지의 황금기와 비교하면 아직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그게 반드시 악재였던 것만은 아니다. 추장은 고객들의 계좌 보안과 칩 위조 방지에 암호화폐의 블록체인 기술을 접목함으로써 카지노의 신뢰도를 제고하는 데 성공했다.

당장 내가 카지노 측의 자금 유용을 걱정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 그 블록체인 암호화는 우리 조직 내에서도 기술적 검증을 마친 상태다.

추장이 묻는다.

"더운 길을 오셨는데 뭔가 마실 것이라도 드리리까?"

난 필요 없다고 하려다가, 그의 기미를 살핀 뒤 다른 의도를 감지하곤 고개를 끄덕거렸다.

"부탁드립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술은 썩 좋아하지 않으실 테고."

"차 종류면 뭐든 좋습니다."

"그렇군. 마샤트!"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젊은 혼혈 여성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 있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몰랐던 척 잠시 일어나 인사를 건넨다.

"손녀분도 와계셨군요."

손녀는 내 인사를 절제된 정중함으로 받았다.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회장님."

추장이 손녀에게 부탁했다.

"나와 손님에게 냉차를 한 잔씩 내주겠느냐?"

"네, 할아버지."

내가 다시 자리에 앉자, 손녀는 이쪽으로 개방된 주방에서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추장은 먼 걸음을 한 중요 고객에게 후계자의 눈도장을 찍어두고 있는 것이었다. 늙은 자신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더라도 뒤가 준비되어 있노라고. 그러니 만에 하나의 경우에도 부족과의 거래를 끊지 말아달라고.

마샤트(Mashath). 「사막의 사람들」 부족의 언어로 달을 뜻하는 이름이라고 소개받은 기억이 난다. 처음 볼 때만 해도 앳된 인상이었는데, 성숙해지고 나니 혼혈의 특색이 당시보다 훨씬 뚜렷하게 드러났다.

사실은 할아버지인 추장부터가 혼혈이었다. 그것도 1세대 혼혈이라, 외모가 백인에 가까운 구석이 많았다. 이는 건드려서 좋을 게 없는 추장의 역린이다. 수연이 따로 배경을 조사한 바로는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못하고 괴롭게 산 세월이 길었다고 한다.

차는 금세 준비되었다. 도토리로 만드는 차는 이 척박한 땅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몇 안 되는 기호식품 가운데 하나였다.

차를 내려놓은 마샤트가 물러나는 대신 가만히 서서 무언가를 기다린다. 정해진 절차처럼 추장이 내게 물었다.

"손녀가 동석해도 괜찮겠소? 잠자코 듣기만 할 거요."

"상관없습니다."

고객마다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현장을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다. 내 동의를 얻은 추장은 손녀가 앉기를 기다려 입을 열었다.

"이제 진짜 대화를 해봅시다. 회장께서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뭐요? 당신쯤 되는 사람이 몸소 움직인 걸 보니 보통 일은 아닐 것 같소만."

"사람을 소개받고 싶어서 왔습니다."

"사람을? 나에게?"

"예."

"어떤 사람을 원하는 거요?"

"중남미 카르텔들을 피해 당신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한 사람. 그중에서도 출신 카르텔 내부에 연줄이 남아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돈을 받고 자기 연줄을 팔 생각이 있는지 물어봐주시길 바랍니다. 카르텔은 대형 조직일수록 좋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추장의 시선에 냉기가 서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나에게 마약팔이들과의 다리를 놓아 달라?"

"그렇습니다."

내가 중요 고객이 아니었다면 추장은 이 시점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워진 사업과 부족의 형편이 그를 붙잡아두고 있었다.

여기까지 계산하고서 직설적으로 털어놓은 것이다.

추장이 노기를 억누르며 묻는다.

"설마 당신도 마약을 취급하려는 거요? 지켜야 할 선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라 믿었건만."

"마약이 엮인 용건이면 내가 당신에게 부탁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나 또한 마약은 싫어합니다. 당신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러면? 그들에게 무기라도 팔아보려고? 아니면 인신매매? 그것도 난 도와주기 싫소."

"역시 아닙니다. 이상한 오해를 하시는군요."

두 번을 부인하자 서릿발 같은 시선이 누그러진다.

"사지도 않겠다, 팔지도 않겠다. 어느 쪽도 아니라면, 대체 목적이 뭐란 말이오?"

"그걸 꼭 확인하셔야겠습니까? 내 모든 신용을 걸고 맹세컨대,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닙니다."

카지노와 내 조직의 관계는 다분히 신용에 의지하고 있다. 즉 신용을 걸고 맹세한다는 건 당신과의 거래를 재검토할 수도 있다는 위협이다. 은근한 협박을 받고 흠칫했던 노인은, 이내 다시 안색을 굳혔다.

"그래도 알아야겠소. 당신이 지금 대단히 이례적인 의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시오."

"...."

여기서 의도를 노출해도 좋은 걸까 싶었지만, 궁리해보아도 노년의 완고함을 허물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노인이 그랬듯이, 나 또한 솔직함으로 신뢰를 사야 할 때였다.

"하는 수 없군요. 내가 원하는 건 그들이 보유한 잠수정입니다."

"잠수정?"

내 대답을 곱씹던 노인이 일단은 납득해주었다.

"잠수정이라.... 하긴, 당신 같은 상인에겐 탐이 나는 물건일 테지. 마약팔이 놈들이 그걸로 얼마를 남겨먹는지 상상조차 하기 힘드니까."

잠수정 한 척은 한 번의 운항에서 최대 4억 달러의 매출을 올린다. 그런 잠수정을 수십 척씩 운용하는 중남미 카르텔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자금을 굴리고 있을 것이었다. 지난 세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콜롬비아의 마약왕을 비웃을 정도로.

'카르텔 놈들이 상장이 가능했으면 시가총액으로 애플을 능가했을지도 모르지.'

매출에선 카르텔이 애플에 지더라도 이익률만은 마약이 스마트폰을 압도할 테니까.

이쪽 바닥에서도 장사의 기본은 자리다. 세계 최대의 시장과 세계 최대의 원산지 사이에 끼어있는 환상적인 입지가 멕시코와 콜롬비아 등 중남미 지역의 마약상 놈들을 정상으로 밀어 올려주었다. 그중 최고는 물론 멕시코였다. 내 조직 역시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지만 멕시코 놈들에 비하면 손색이 있다. 어디까지나 규모만 놓고 비교했을 때.

추장이 의문스러워한다.

"녀석들이 그걸 팔려고 하겠소이까?"

"그건 당신께서 소개해줄 사람의 연줄이 얼마나 좋은 연줄인가에 달려있겠지요."

"...차라리 해안경비대의 누군가를 매수해서 그들이 나포한 잠수정을 어떻게 빼내보는 쪽으로 알아보는 건 어떠하오?"

유감스럽게도 수연 녀석이 이미 검토해본 대안이다.

"해상순찰에 걸리는 건 죄다 잠수도 못 하는 고물들입니다. 건조 중인 현장을 급습해서 확보한 최신형도 있다지만, 그렇게 희소한 물건은 감시가 너무 삼엄해서 안 됩니다. 완성품조차 아니고 말이죠."

"...."

진지한 침묵 속에서 시선을 찻잔에 둔 채 숙고하던 추장은, 5분쯤이 지나서야 결심이 섰는지 나와 다시금 눈을 맞췄다.

"좋소. 의뢰를 받아들이지. 그러나 통상적인 업무가 아닌 만큼 통상적이지 않은 대가를 받아야겠소."

"얼마를 원하십니까?"

내 말에 추장이 고개를 젓는다.

"통상적이지 않은 대가라고 했잖소. 돈 말고 다른 것을 원하오. 여기엔 협상의 여지가 없소."

이렇게 못 박는 추장은 대단히 단호했다. 조금 불쾌감이 느껴질 정도로.

"...다른 거라면 뭘 말씀하시는지?"

"짐승들을 좀 사냥해 주셔야겠소."

"짐승들?"

내가 되묻자 추장이 끄덕인다.

"그렇소. 잡아 죽여야 할 짐승 같은 놈들이 있어서 말이오."

#4. 하얀 추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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