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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BREVIVIRENSIGLO121

Author: Kakao_cuenta
Urb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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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1-10

1화

결국 전쟁이 터졌다.

여기서 말하는 전쟁은 세계대전이었다. 전 세계의 강대국이라는 강대국은 모

조리 참가해 인간을 믹서기 속 과일처럼 싹 갈아버리는, 그런 전쟁.

빽도 뭣도 없이 건강한 몸뚱이가 전부였던 대한민국 20대 청년인 나는 당연히

징집되어 최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래도 운이 좋았던지 징집 이후 3년 차가 될

동안 사지육신 멀쩡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비록 최전선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투가 연속이었지만 어디는 핵폭탄이 터져서 한순간에 수만 명이 가

루가 되는 상황이었으니 악운이 강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전쟁이 시작되고 최전선에 투입되었던 탓에 난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야 했다.

말단 병사였으니 그저 지휘부가 시키고 이끄는 대로 움직였는데, 그래도 압록

강을 넘어갈 적에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이거 드디어 만주를 되찾나?

그렇게 벌판을 달릴 즈음 최전선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적군에 무슨 초인

병사들이 날뛴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이상한 놈들이 백 미터를 3초 만

에 뛰고 맨손으로 레토나를 뒤집어엎는다는 소문이었다. 심지어 무슨 불곰 가

죽을 뒤집어쓴 것도 아닌데 권총탄 정도로는 접근하는 걸 막을 수도 없댄다.

하지만 진짜 당혹스러웠던 순간은 그 소문이 실제로 내 눈앞에 나타났을 때였다.

그 미친놈은 한밤중 막사에 잠입해서 맨손으로 내 분대원들을 찢어 죽이고는

나마저 끝장내려 했다. 힘에 취한 광전사가 벌건 두 눈을 번들거리며 날 노려

보더랬다.

다행히 소란을 듣고 움직인 다른 부대원들 덕분에 난 목숨을 건졌다. 분대원

들을 죽인 미친놈의 시체에서는 소총탄만 서른여덟 발이 나왔다. 그나마도 김

상철 대위가 대물 저격총으로 그놈 머리통을 박살 내지 않았다면 그놈은 본인

두 발로 우리 부대 숙영지를 탈출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충격적인 사건으로 초인 병사의 실체를 확인한 상부는 벌판을 달려

가던 병력을 멈췄다. 그리고 전 병력을 한곳으로 집중했다. 초인 병사의 연구

소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 지역이었다. 북쪽, 더 높은 북쪽.

초인 병사들은 강력했지만, 숫자가 많지 않았다. 어쨌거나 벌집이 되면 뒈지

는 건 같았기 때문에 놈들은 큰 피해를 줄지언정 우리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달려가던 중 첩보가 전해졌는데, 적군에서 연구소가 넘어가는

걸 그냥 두고 보지 않으리라는 정보였다. 놈들은 연구소 자체를 지워버릴 작

정이었다. 초인 병사 연구를 넘기느니 그냥 태워버리겠다는 심보였다.

상부도 멈추지 않았다. 부대를 멈추고 최전선의 정예 일부를 뽑아 연구소에

침투시켜 데이터를 탈취하기로 한 것이다. 나도 거기 뽑혔다.

으리으리한 경력의 특수부대원들 사이에서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분대원들의

복수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난 항공기 아래로 뛰

어내렸다.

그리고 한바탕 활극, 총질, 난장판, 개판을 넘어 연구소 최하층에 도달. 난

김상철 대위와 함께 초인 병사를 만들어 낸 박사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 박사가 말했다.

"자넨 초인이 되고 싶지 않나?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어! 내가 자네들

을 슈퍼맨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난 권총 방아쇠를 당기는 것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박사는 죽지 않았다. 그

순간 김상철 대위가 총구를 밀어 겨냥이 빗나간 탓이었다. 총알은 박사의 팔

뚝을 스쳤을 뿐이었다.

김상철이 말했다.

"무슨 짓이냐! 저 박사는 살려가야 한다! 그게 우리 임무야!"

내가 말했다.

"여기까지 내려오면서 못 보셨습니까? 그 초인 하나 만들겠다고 저놈들이 무

슨 짓을 했는지?"

연구소는 지옥이었다. 인체실험이 기본이었고, 나이와 성별 또한 가리지 않았

다. 이곳에서 인간은 그저 실험 쥐, 아니 페트리 접시 위에 피어난 곰팡이 정

도였다. 아무렇지 않게 죽이고, 번식시키고, 온갖 약품을 뒤집어씌우는.

"···나도 봤다. 하지만 우리 임무는 저 박사를 잡아가는 거지, 심판하는 게

아니야."

김상철의 말에 난 슬쩍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그렇게 저놈 잡아가면? 글쎄, 제 생각에는 우리 군대에서도 똑같은 짓을 할

것 같은데요."

"헛소리! 국군과 연합군을 뭐라 생각하는 거냐!"

그러나 그렇게 강하게 반발하는 김상철 대위의 얼굴은 이미 스스로가 하는 말

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보아서 알았다. 전선에서 날뛰던 적군의 초인

병사들의 위력을. 당연히 국군이든 어디든 그런 병기를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케, 케헤헤··· 어, 어차피 너희는 날 죽일 수도 없어···!"

그때 총알이 스친 팔뚝을 감싸 쥐고 비틀거리던 박사가 입을 열었다. 나와 김

상철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박사가 말을 이었다.

"이 연구소엔 시설을 지하로 묻어버리기 위한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기폭장치는 내 심장과 연결되어 있고. 내 심장이 멈추면 이 연구소도 무너

진다는 말이야! 어차피 너희는 날 살려가야-"

탕-하는 총성과 함께 박사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의 허벅지

가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

김상철이 나에게 총구를 겨눴다. 하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허벅지에 총상. 과다출혈로 죽기까지 이제 몇 분 남았을 겁니다."

"너···!"

"뛸 시간입니다, 대위님."

김상철은 아찔한 표정으로 나와 박사를 번갈아 보더니, 곧 허탈한 한숨 한 번

내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개또라이 새끼. 살아 나가면 넌 뒈졌어."

"전 오래오래 살 건데요?"

"새끼가 빠져가지고···"

난 김상철의 말을 무시하고 뒤돌아 달렸다. 곧이어 뒤따라 움직이는 그의 군

홧발 소리가, 잠시 후에는 훌쩍 앞장서 달리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시발

저 양반 뜀걸음은 왜 저렇게 빨라.

그리고 박사의 절규가 있었다.

"아, 안돼! 살려줘! 내가 초인으로, 무적의 전사로 만들어 주겠다! 아무런 부

작용 없이! 돌아와! 돌아오라고오! 너 이 새끼들 내, 내 연구가 얼마짜리 연

구인지 알고···"

뒷말은 못 들었다. 발바닥 땀나게 뛰어야 했으니까.

지상을 향해 신나게 달리기를 잠시. 갑자기 연구 시설 전체에 웨에에에엥-하

는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자연스럽게 나와 김상철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벌써 뒈졌다고?"

"그럼 미친 새꺄, 노인네가 총 맞고 버텨봐야 얼마나 버티겠냐! 죽여도 연구

소는 빠져나가고 죽였어야지!"

나의 떨떠름한 중얼거림에 김상철이 핀잔을 놓았다. 난 무시하고 존나 뛰었

다. 그도 입 한 번 벌릴 시간에 호흡 한 번 하는 게 낫다는 걸 깨닫고 바로

따라붙었다.

하지만 아직 반도 못 올라갔는데 연구 시설 전체에 커다란 굉음과 진동이 울

려 퍼졌다. 이어서 콰르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뒤쪽이 무너져 내리기 시

작했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존나게 앞으로 뛰는 것 말고

는 없었다.

그리고 난 단 두 걸음이 모자라서 아래로 무너지는 발판과 함께 떨어졌다. 평

소 뜀걸음 훈련을 게을리한 대가였다.

그러나 내 몸은 곧장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뭘 어떻게 낌새를 눈치챈 것인

지 김상철이 뒤돌아 내 오른손을 붙잡고 난간 끝에서 버틴 탓이다.

이 악문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 위로 와장창 무너져 내리고 있는 연구소의

풍경도 함께 보였다. 이쪽 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당장 멈췄지만, 대충

보아도 여기서 시간을 보낼 상황이 아니었다.

난 김상철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뭘 잡고 계십니까? 적당히 하고 얼른 가세요."

"이 미친, 새끼···! 그걸, 말이라고···"

"내 분대원들 다 죽었을 때 나도 반쯤 죽은 거였습니다. 이 좆같은 전쟁 최전

선에서 3년 버텼으면 오래 버텼죠. 다들 이렇게 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 개또라이, 새꺄···! 그 전쟁, 우리가, 거의 다, 이겼어···!"

난 왼손을 오른손으로 가져갔다.

"그렇죠. 그러니까, 대위님은 전쟁 이후 세계에서 존나 뺑이 치십쇼. 난 이만

쉴랍니다."

"너, 너! 오래오래 살겠다며···!"

"아, 피곤하다고요. 그만 가쇼, 김 대위."

내 왼손이 김상철의 손을 풀어냈다. 자연스럽게 내 몸은 아래로 훅 떨어져 내

렸다. 허탈한 표정의 김상철의 얼굴이 점점 작아지는 게 보였다. 알아서 잘

살겠지 싶었다. 아니면 또 어떤가. 난 이제 뒈진 놈인데.

그래도 아프게 죽는 건 싫어서 얼른 몸을 둥글게 말았다. 물론 직후 그게 무

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그래도 그냥 실 끊어진 인형처럼 펄럭거리며 떨어

져 죽긴 싫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건 두어 호흡쯤 이어간 후였는데, 얼른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니 난 아직도 떨어지고 있었다. 뭐여 시발?

난 무너져 내리는 잔해와 온갖 실험장비들 사이에 낙하하고 있었다. 곧 뒈질

놈이 열심히 고개를 틀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대충 상황을 이

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연구소 지하에는 커다란 공동과 지하 호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연구

소가 파괴되며 지하 공동의 천장이 무너져 내렸고, 결과적으로 나와 연구소

시설은 저 아래 호수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한참을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짧은 상념이 지나는 동안 내 몸은 다 떨어졌다. 시커메서 무

슨 금속처럼 보이는 호수의 어둑한 수면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자세를 바꿔 발부터 떨어져 내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는지, 아니

면 몸에 밴 생존 본능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발과 수면이 만났다. 전신이 부러질 듯한 압력 이후 내 의식은 끊겼다.

* * *

지하 호수 위로 연구소의 시설이 쏟아져 내렸다. 그중에는 미치광이 박사가

만들어 내던 약품도 있었다. 인간의 육신을 종의 한계 이상으로 강화하는, 수

백, 수천의 생명을 대가로 만들어진 약품. 맑은 호숫물에 풀린 그 약물은 그

호수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 역시 연구소 장비 중 시신과 실험체의 냉동 보관을 위해 만들어

진 시설 또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호숫물을 얼리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위쪽 연구소에서 2차 폭발이 일어났다. 그것이 연구소

의 자폭 기관이었는지, 아니면 인체실험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적군의 폭격이

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저 지하 공동이 완전히 무너져 연구소를 발굴할

최소한의 가능성마저 지워버렸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21세기의 군인 한 명이 그렇게 지하 깊숙한 곳에 묻혔다. 물론 그는 죽지 않

았다. 기묘한 약물이 원래라면 급속 냉매 상태에서 파괴되었어야 할 그의 육

체를 보존했다.

이어서 지하 세계의 무수한 유기, 무기화합물이 그의 몸으로 흡수되며 그의

육신은 천천히 변해갔다. 백 미터를 3초에 뛰고 군용 차량을 맨손으로 뒤집어

엎는 초인 병사로. 아니, 그 이상의 존재로.

그 후 한 인간에겐 너무나 긴, 그러나 이 지하 세계의 기준으로는 찰나나 다

름없는 시간이 흘렀다.

대충 만 년 정도.

* * *

물의 흐름은 변한다. 그건 지하수도 마찬가지. 가늘기만 하던 작은 흐름이 어

느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이 거세졌다. 깊은 지하 속 오랫동안 멈춰있던 웅덩

이가 그 흐름에 휩쓸렸다. 그 웅덩이 속에 잠자고 있던 누군가 또한.

흐름은 면면부절 이어져 때론 더 깊이, 때론 지상 가까이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큰 강줄기와 만났다. 잠든 누군가 역시 그 흐름에 따라 강줄기에

휩쓸려 갔다.

오랫동안 얼어붙어 있던 그의 몸이 강물 속에서 녹아내렸다. 멈췄던 신체 기

관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강렬한 박동은 만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생명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건하고 활기찼다.

잠시 후 물속에서 그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 * *

"쿨럭, 케흑, 아으, 씹···"

그가 기다시피 강가를 벗어났다. 머릿속에 얼음덩이가 든 것처럼 띵하고 전신

이 무거워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온몸이 푹 젖어서 물이 질질 흐르는 가운

데, 대충 물가를 벗어났다 싶어서 그대로 엎어졌다. 자갈과 진흙이 반겼지만

그딴 걸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 그냥 엎어져서 숨만 헐떡거렸다.

그렇게 헥헥대길 잠시. 그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여긴 어디야, 시발."

그의 눈앞에는 울창한 원시림이 펼쳐져 있었다.

작가의말

새로운 이야기, 시작합니다.

2화

"아으, 시발···"

머리가 띵했다. 팔다리 전부가 저릿한 가운데 기이한 추위가 느껴졌다. 마치

한겨울 냉기가 뼛속까지 침습한 느낌이었다. 절로 몸이 덜덜 떨렸다. 이게 대

체 무슨 상황이지? 분명 연구소가 무너졌고, 바닥이 무너져서 그대로 나도···

"···살아, 있네?"

몸에서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어쨌든 숨은 쉬고 있었다. 팔다리도 잘 움

직였고, 어디 심각하게 부러지거나 움직이지 않는 곳은 없는 듯했다. 덜덜 떨

리는 몸을 둘러보던 그는 꿇어앉은 채 몸을 바로 세워 고개를 들었다.

새털구름이 느긋하게 흘러가는 파란 하늘이 보였다.

뭔지 모를 시원함이 눈과 가슴을 가득 채웠다. 마치 다시 태어난 듯한 기분이

었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가 하늘의 푸르름을 그대로 들이마시려는 듯.

"아."

그 순간 머리가 띵했다. 이어서 눈앞이 흐려지다가 옆으로 기우뚱, 퍽 쓰러졌

다. 시야가 검게 변했다. 그는 그렇게 강가 어귀에 쓰러져 기절했다.

한참 뒤. 푸르던 하늘에 불그스름한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그의 정면에 펼쳐

진 숲은 이미 어두컴컴했다. 숲의 밤은 일찍 찾아오는 법이다.

그때 강의 하류 쪽에서 누군가가 강줄기를 따라 종종종 걸어 올라왔다.

하나가 아니었다. 그들은 셋이었는데, 그 생김새가 낯설었다. 키는 1미터가

조금 안 되는 정도. 복슬복슬한 털이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중요 부위를 가

린 천과 팔뚝에 착용한 팔찌, 깃털 등으로 치장한 목걸이, 손에는 본인들 키

보다 조금 더 큰 막대-끝부분에 조그만 날이 달린 게 무장용인 듯했다-를 들

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성이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등에는 망태기가 메여 있었다. 안에서는 아직 살아있는 물고기들이 퍼

덕거리는 중이었다.

강 하류를 따라 한 줄로 종종종 거슬러 올라오던 그들은 어느 순간 우뚝 걸음

을 멈췄다. 저 앞에 쓰러져 있는 덩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직후 그들은 겁먹은 듯 잔뜩 굳어서 서로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하지만 그런

다고 이미 기절한 사람이 깨어나진 않는다. 한참이 지나서야 털북숭이 난쟁이

들도 그걸 깨달았다.

셋 중 그나마 용기 있는 하나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녀석은 자신의 막대기로

콕콕 기절한 남자의 등을 찌르다가 고개를 돌려 자기 동료들을 불렀다. 그 부

름에 조심스레 다가온 녀석들은 자기들끼리 뭐라뭐라 한참을 소곤소곤하더니

이내 망태기에서 줄을 꺼내 기절한 남자를 묶어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복실이 셋과 기절한 남자는 어둑한 숲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강

가 진흙에 얼핏 남은 흐릿한 흔적뿐이었다.

* * *

거센 총성에 귀가 찢어질 것 같았다. 다행히 직후 옆에서 터진 포격 덕분에

귓가는 조용해졌다. 아마 고막이 터진 거겠지. 그리고 온몸이 찢어질 듯 아팠

다. 검은 하늘 아래 불타는 예광탄과 포탄의 불길이 지상을 붉게 달궜다.

그때 그 검은 하늘에서 얼굴이 나타났다.

[강 하사님. 전역하면 뭐 할 검까? 할 거 없으면 저랑 사업이나 하시지 말입

니다. 제가 죽여주는 아이템이 하나 있는데, 옆에서 좀 도와줄 사람이 있어야

하지 말입니다. 아무래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는 얼굴이다. 보고 싶기도, 보고 싶지 않기도 했던 얼굴. 이유는 당연하지

만 죽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때 누군가 그 얼굴을 밀어내고 등장해 껄렁거

리며 말했다.

[사업은 무슨 사업. 이 전쟁 끝나면 강뱀은 나랑 유튜브 찍을 거다. 할 거죠,

강뱀?]

안 해 새끼야. 그리고 억지로 하사 단 지가 언젠데 아직도 강뱀이야. 그런데

이놈도 죽은 놈이다.

[강 하사님. 이제 이 전쟁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여동생이랑 소개팅하고 싶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그동안 강 하사한

테 얻어먹은 것도 많고 하니까 특별히! 이번 소개팅 주선해보겠습니다!]

슬그머니 끼어든 190짜리 거구. 미친놈아, 네 여동생 얼굴 네 얼굴에서 머리

만 긴 거 다 아는데 소개팅은 지랄.

이어서 수많은 얼굴이 자기 낯짝을 들이밀고 내 이름을 불렀다. 다 아는 얼굴

이었다.

[강 하사님! 그러지 말고···]

[강뱀, 강뱀! 좀 들어보시라니까···]

[강 하사님. 강뱀?]

[···강 병장님! 강 하사님! 강뱀~ 강뱀! 강뱀-!]

아니 이 미친 새끼들아. 강뱀이고 지랄이고, 적당히 안 하면-

다음 순간 그들의 얼굴이 변했다. 마지막에 만났던 모습으로. 난장판이 된 막

사 아래 피범벅이 되어 고깃덩어리처럼 널브러진 순간으로.

그 한가운데 역시 피범벅이 된 채 시퍼런 두 눈을 번들거리며 이쪽을 노려보

는 미친놈도 보였다. 놈의 미소가 보였다.

그 장면을 마주하니 절로 호흡이 멈췄다.

그러다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김상철 대위와 그가 잡은 손이 보였다. 그가

악을 썼다.

[강 하사! 이 머저리야! 놓지 마! 살 수 있다고! 이 전쟁 우리가 거의 다 이

겼어! 이제 제대로 살아봐야 할 거 아니야!]

귀찮게 굴지 마쇼, 김상철 씨. 왜 '씨'냐고? 그야 난 뒈졌으니 퇴역한 셈이잖

아. 이제 그쪽 부하 아니라고.

다음 순간 붙잡고 있던 김상철 대위의 손이 권총으로 변했다. 그리고 익숙한

늙은이 하나가 내 앞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도 악을 썼다.

[내가 널 초인으로 만들어 주겠다! 내가 도와주면 넌 신이 될 수 있어! 신세

계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고!]

좆까.

미친 박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총성이 울렸다.

*

번쩍 눈이 뜨였다. 검은 동공이 좁게 오므라들며 빛을 받아들였다. 그 눈동자

에 비친 것은 조그만 털북숭이였다.

"뭐야 씨발."

"!@#!#$!!@!!"

그가 눈을 뜬 것이 놀라웠는지, 아니면 그가 대뜸 중얼거린 욕설에 겁을 먹은

것인지 조그만 복실이는 호다닥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

키는 남자를 보며 조그만 강아지 같은 목소리로 깡깡거렸다.

남자는 비스듬히 상체를 일으키고는 가만히 그 복실이를 바라보았다.

"···뭐 말티즈 인간이냐?"

털 색이 어둡고 조금 꼬질꼬질한 것만 빼면 덩치도 조그마한 게 영락없이 강

아지가 두 발로 선 것처럼 보였다. 녀석은 그가 하는 말을 듣고는 진짜 강아

지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곧 호다닥 밖으로 빠져나갔다. 덕분에 남자는

방 안에 홀로 남게 되었다.

"···"

복실이가 빠져나간 후 남자는 천천히 자신이 있는 방을 둘러보았다. 벽과 바

닥, 천장까지 모두 갈색 대나무로 이루어진 방이었다. 심지어 가구들도 대부

분 대나무를 이용해 만든 듯 보였다. 벽과 바닥이 모두 같은 소재로 이루어진

탓인지 묘한 안정감과 시원함을 주는 공간이었다.

잠시 방을 둘러보던 남자의 눈이 자신의 발을 향했다. 그의 다리가 무릎쯤부

터 침대 밖으로 나가 널브러져 있었다. 이들의 침대가 그에겐 너무 작았던 탓

이다. 어딘가 현실감이 없는 광경.

"···키가 커진 느낌이라 나쁘지 않은데."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며 실실 쪼갠 남자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불쑥

천장이 다가왔다. 그에겐 침대만큼이나 천장도 낮았다. 남자는 허리를 조금

굽히고 턱도 옆으로 숙여야만 했다.

그는 이어서 복실이가 빠져나간 문으로 다가갔다. 대나무로 이루어진 문을 열

고 나가니, 역시 대나무로 만든 발코니와 계단이 보였다. 밖으로 나가서야 겨

우 고개와 허리를 펼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거기에 기뻐하는 대신 발코니

난간 가까이 서서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주 거대한 나무, 그 한 그루가 작은 숲과 같이 보이는 거대한 나무들이 보

였다. 그리고 그 나무의 줄기와 가지에 걸쳐 이루어진 갈색 대나무 건물들 또

한 보였다. 그가 서 있는 곳 또한 그 대나무 건물이었다.

거대한 나무는 셋이 삼각꼴을 그리며 울창하게 솟아 있었다.

그 나무들 위에 대나무를 엮어 얹은 집들은 마치 커다란 벌집을 보는 것 같았

다. 거기에 무수한 계단과 흔들다리가 그 벌집들 사이를 그물처럼 이어주며

더욱 혼잡해졌다. 종합하자면 벌집과 거미줄의 혼혈아쯤 되어 보이는 마을이

었다.

"!@#!@#@@."

경이와 황당함, 낯섦과 아찔함을 함께 느끼던 남자는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조금 전 방에서 보았던 복실이와, 녀석과 비슷하게

생긴 다른 복실이 대여섯이 호기심으로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그중에 한 녀석이 유독 다른 모습이었는데, 남자는 그 녀석의 굽은 허리와 길

게 늘어진 털, 그리고 묘하게 맑은 눈동자를 보고는 그 녀석이 이 복실이들

중 최연장자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조금 전 말을 꺼낸 것도 그였다.

"!@#@#?"

"···미안한데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한국말 할 줄 아는 놈 없냐."

늙은 복실이가 다시 말을 꺼냈고, 남자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

다. 그는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풍경, 그러니까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복실이들

과 난생처음 보는 원시림 대나무 마을 덕에 두려움보다는 그저 황당함만이 가

득했다. 죽기 전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 미소를 뭐라 받아들인 것인지 늙은 복실이는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옆

에 있던 다른 복실이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 복실이는 들고 있던

작은 나무상자를 늙은 복실이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늙은 복실이는 그 나무상자를 열어 무언가를 꺼냈는데, 남자가 가만히 보니

무슨 귀밑에 붙이는 멀미 패치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

이어서 늙은 복실이가 보여주는 행동에 남자는 당혹감을 느꼈다. 들고 있던

손톱만 한 그것을 정말 멀미 패치라도 되는 양 본인 목덜미 털 속에 붙이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남은 하나를 남자에게 내민 것이다.

"···나도 그렇게 붙이라고?"

복실이는 연신 재촉할 뿐이었다. 남자는 하는 수 없이 그걸 받아서 요리조리

둘러보았다. 멀미 패치처럼 생긴 손톱만 한 원형 스티커에는 무언가 회선처럼

보이는 것이 살짝 반짝거리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이내 늙은 복실이처럼 귀밑에 패치를 가져다 붙였다.

"이러면 됐나?"

늙은 복실이는 홀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남자에게 계속 손짓했다.

"뭐? 계속 말하라고? 뭘 더 말해? 말을 하고 싶어도 뜻이 통해야-"

[사용자 언어 확인. 실시간 통역을 시행합니다.]

"뭐야 시발."

남자는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목을 움츠렸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의 귀에 무언가 속삭일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귀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 원인은 그것밖에 없었다.

"흠, 흠. 이제 내 말 알아듣겠나?"

남자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거기엔 늙은 복실이가 홀홀 웃으면서 본인 턱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사람 말을 하네?"

"그러면 사람이 사람 말을 하지 뭘? 혹시 아티팩트 처음 써보나?"

"아티팩트?"

늙은 복실이가 본인 귀밑을 톡톡 두드리며 대답했다.

"이거."

"···처음인데."

"허허. 그럼 조심히 다뤄주게. '에테멘의 목소리'는 우리도 딱 두 개 남았고,

어디 가서 구할 수도 없는 물건이거든."

"아, 예. 뭐··· 조심하죠···"

남자는 본능적으로 말을 높였다. 생긴 건 두 발로 선 포메라니안처럼 생겼지

만 일단 저들 중에서는 연장자로 보였으니까. 그러자 늙은 복실이는 흡족하다

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이름은 아투카이라고 하네. 자네 이름은?"

"···진철. 강진철."

"진철강진철? 발음이 특이한 이름이군."

"아뇨, 강진철. 성이 강이고 이름이 진철."

"오! 성이 있나? 그럼 역시 자네는 에사이족인 모양이지?"

아투카이는 진철에게 성이 있다는 말에 반색했다. 하지만 진철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에사이족은 또 뭔데요?"

"자네 에사이 아닌가?"

"···전 그냥 사람인데."

"우리 모두 그냥 사람이네. 자네 종족이 뭐냐는 말이었지. 어쨌든 아쉽군. 에

사이족이었으면 보상금을 잔뜩 받았을 텐데."

진철은 보상금이라는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그, 뭐냐. 일단 감사합니다. 절 구해주신 모양인데···"

아투카이는 웃었다.

"에사이는 아니라면서 또 예의는 따진다 이거군··· 재밌는 친구인데."

"저기, 일단 지금은 제가 가진 게 없어서··· 나중에 집에 가게 되면 다만 얼

마라도 부쳐드리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 그러니까··· 여기가 어디죠?"

설마 이세계는 아니겠지. 강진철은 속에서 피어오르는 황당한 망상을 얼른 지

우면서도 얼굴 위로 당혹감이 피어오르는 걸 막진 못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지금 속되게 말해 얼을 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눈앞에

펼쳐진 원시림 대나무 마을과 두 발로 걸으며 옷을 입은 복실이들을 앞두고

도, 집에 가서 보상금을 보내겠다는 헛소리나 하고 있었으니 얼을 타도 제대

로 타고 있다 할 수 있었다.

아투카이는 그런 진철의 표정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가 어디긴. 우리 마을이지."

"아, 그게··· 그러니까 중국인지 한국인지···"

"미안하네만 그런 이름의 도시는 모르네. 여긴 우리 캄포니족 마을이야."

진철의 얼굴에 피곤함이 떠올랐다.

"···캄포니족이 여러분입니까?"

"그래."

"···캄포니족은 사람의 한 부류고요."

"그렇지."

"···허, 참. 돌겠네, 이거."

진철의 말에 아투카이는 뭐가 즐거운지 와하하 크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며

진철과 다른 복실이들이 황당함을 감추지 못할 때, 그가 다시 말했다.

"어쨌든 만나서 정말 반갑네, 강 가문의 진철. 원하는 만큼 편하게 머무르게."

"저는 지금 가진 게 없는데요."

진철은 웬 누더기로 하반신만 겨우 가린 자신의 꼴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

다. 그러나 아투카이는 싱글벙글한 낯을 지우지 않았다.

"그럼 뭐 어떤가. 우리 마을은 손님을 그렇게 박하게 대하지 않는다네. 그런

걱정이랑 접어두고 편히 지내게."

"아, 예. 감사합니다···"

진철의 감사 인사에 아투카이는 다시 크게 웃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옆에 있

던 복실이에게 가볍게 손짓했는데, 그 손짓을 받은 복실이는 진철에게 호다닥

다가와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치 아이가 어른의 얼굴을 만져보겠

다고 손을 뻗는 모습 같았다.

그 손을 본 진철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여 주었고, 복실이는 그의 귀밑머리

에 붙어있던 멀미 패치, 그러니까 아티팩트라는 물건을 냉큼 떼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아투카이가 말했다.

"!@#!@$#$. !@#!@##1$."

"예? 뭐라고, 아니 그걸 떼가면 난 어쩌라는···"

진철이 뭐라 하거나 말거나 아투카이는 그에게 잘 있으라는 듯 손짓을 하고는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른 복실이들 또한 힐끔힐끔 진철을

돌아보면서도 그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진짜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네. 진짜 뒈지기 직전에 이세계 진입이라

도 했나. 응?"

진철의 누더기 하의를 툭툭 당기는 손이 있었다. 고개를 내려보니 복실이 하

나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눈이 마주치자 녀석은 히죽-미소를 지어 보

였다.

자세히 보니 진철이 처음 눈을 뜬 순간 그를 바라보고 있던 복실이였다.

"왜?"

짧게 묻자 녀석은 무언가를 퍼먹는 손짓을 했다.

"밥? 밥도 주는 거냐?"

진철이 따라서 무언가를 떠먹는 시늉을 하자 녀석은 어딘가 신이 난 듯 고개

를 끄덕이더니 호다닥 앞장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진철은 조금 당황했다. 녀

석이 조금 전 아투카이와 복실이들이 내려간 계단이 아니라 이쪽 대나무집과

저쪽 대나무집 사이를 잇는 흔들다리를 내달려 갔기 때문이었다.

그 흔들다리는 아무리 봐도 안전법 허가가 나지 않았을 게 확실한 모양새였

다. 그 위를 우다다 달려가는 복실이의 모습이 위태위태했다. 이곳 높이가 상

당했으니 다리가 끊어지면 그대로 추락사였다.

하지만 진철은 곧 피식 웃고 말았다. 앞장서 달려가는 복실이의 엉덩이에서

바람개비처럼 흔들거리는 꼬리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거 참··· 이세계인지, 지옥인지··· 아니, 천국인가? 뒈진 건 맞나? 진짜

모르겠네···"

진철은 고개를 살살 가로저으며 복실이가 앞장서 달려간 흔들다리로 나아갔다.

그때 가는 바람 한 줄기가 그의 곁을 스치고 날아올랐다. 치솟은 바람은 캄포

니족 마을의 수많은 흔들다리와 밧줄, 계단과 대나무 지붕, 마침내 거대한 나

무의 가지와 잎들까지 스쳐 푸르른 하늘로 날아올랐다. 울창한 녹음과 청명한

하늘, 새하얀 구름이 바람을 반겼다.

잠시 뺨을 스친 바람을 따라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진철은 이내 저편에서

깡깡 소리치는 복실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지옥인지, 천국인지. 어쨌든 지금 당장 숨을 쉬고 살아있으니 먹어야 했다.

그렇게 계속 살아야 했다. 영문은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래야만 했다. 앞에서

는 복실이가, 뒤에서는 삶이 그를 재촉했다.

진철은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3화

"그러니까 이게 에사이고, 이게 라비토라고?"

진철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렇게 묻자 토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

고는 다시 그림을 짚으며 말했다.

"라비토. 에사이."

"아니, 둘 다 귀가 길잖아. 다르게 그린 건 귀밖에 없으면서 어떻게 구분하라

고."

진철은 퉁명스레 말하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단호하게 굴던 토비는 정말로

진철의 흥미가 떨어진 것처럼 보이자 금방 안절부절못하더니, 그의 앞에 다시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늘어놓으며 말했다.

"라비토, 에사이, 올로그, 바이카."

"그리고 캄포니."

"응?"

"너희도 사람이라며. 그럼 너희도 있어야지. 캄포니."

진철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뭔지, 토비는 헤실헤실 웃었다. 진철도 그냥 툴툴

웃으면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헤헤, 진철. !@#!@#. 좋다."

'좋다'. 그래도 며칠 있었다고 그 단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진철은

그의 손길에 머리를 맡긴 채 진짜 강아지처럼 헥헥대는 토비를 바라보며 가만

히 생각에 잠겼다.

토비. 처음 진철이 깨어날 적에 장로 아투카이를 불러온 녀석이다. 그 후에도

계속 진철의 곁에 머물면서 그의 캄포니 마을 생활을 도와주고 있었다.

식사와 잠을 잘 곳은 물론 용변을 볼 곳까지 녀석이 알려주었다. 게다가 며칠

지내며 알게 되었는데, 강가에 쓰러져 있던 그를 마을까지 구출해 온 것도 녀

석과 녀석의 친구들이었다.

그렇게 적당히 분위기를 살피며 알게 된 점도 있었다. 토비가 어린 녀석이라

는 점이었다. 다른 캄포니들이 녀석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어

른 캄포니들은 토비를 듬직하지만 아직 눈여겨봐야 할 어린애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았다.

진철의 눈이 앞에 놓인 탁자를 향했다. 역시 대나무를 촘촘하게 엮어 만든 탁

자였다.

그 위에는 종이 몇 장이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어떤 그림과 그 그림을 설

명하는 듯한 꼬부랑글씨 몇 자가 적혀 있었다.

종이가 설명하는 것은 이 땅의 종족들이었다. 라비토, 에사이, 올로그, 바이

카. 토비의 몸짓 설명에 따르면 그들이 이 세상의 주류 종족이었다.

"···뭔 종족이 그렇게 많아, 씨발. 머리 아프게. 진짜 이세계냐?"

"진철, 또 시발?"

진철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토비가 되물었다. 진철은 떨떠름한 표정

을 지으며 말했다.

"씨발은 나쁜 말이야. 착한 아이는 그런 말 쓰지 않아요."

"···시발?"

고개를 갸웃거리는 토비의 표정은 순수해 보였다. 진철은 그 순수한 강아지

한 마리를 타락시켰음에 희미한 죄책감을 느끼며 다시 종이로 눈길을 돌렸다.

캄포니족은 전체적으로 그림 실력이 많이 모자란 듯 종이 위의 그림은 엉망진

창이었다. 초등학생이 그린 듯한 어설픈 그림. 그래도 여기저기 포인트를 따

로 짚어 놓아 특징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에사이는 귀가 긴 사람. 그럼 엘프냐? 바이카는 배를 탄 개구리 같고··· 라

비토는 아무리 봐도 두 발로 걷는 토끼인 것 같은데. 이 올로그가 그나마 평

범한 사람처럼 생겼구만. 근육 빡빡머리라는 것만 빼면···"

"올로그 !@#!@$. 멍청해. 그리고 나빠."

진철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던 토비가 올로그라는 말에 반응했다. 진철은 올로

그 종이를 들어 토비에게 보여주며 캄포니족 단어를 말했다.

"나랑 올로그. 같아 보이냐?"

올로그와 진철이 같은 종족처럼 보이냐고 물어본 것이다. 그러자 토비는 격하

게 고개를 저었다. 녀석은 곧바로 손짓을 섞어가며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

다. 진철을 위해 단순한 단어만 쓰는 것은 물론이었다.

"올로그 멍청해. 진철은 똑똑해. 벌써 우리말 하니까. 올로그 커. 진철보다

커. 그리고 올로그는 싸워. 언제나. 멍청하고 싸우기만 해."

토비가 한 말은 훨씬 많았지만 진철이 알아들은 말은 그 정도였다.

그는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이곳이

진짜 이세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트럭에 치인 것도 아닌데

왜 이딴 곳에 떨어졌지? 진짜 인간은 없나? 이 올로그가 그나마 무난하게 사

람 같은데-

"그리고 올로그, 캄포니 잡아먹어."

"뭐?"

토비의 속삭임에 진철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토비는 그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무언가를 들고 으적으적 뜯어먹는 시늉을 했다.

"올로그, 배고프면 아무거나 먹어. 캄포니, 에사이 안 가려. 가끔 자기들끼리

도 잡아먹어."

"···확실히 인간은 아닐 것 같군. 그딴 식인종이랑 같은 족속 취급받을 순 없

지."

진철은 생각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말도 통하는 캄포니를 배고프다고 잡아먹

는 놈들을 인간 취급해주고 싶진 않았다. 지난 며칠간 지내본 결과 캄포니들

은 단순히 순박한 복실이들이 아니라 나름의 문화와 생활을 가진 종족이었다.

심지어 진철을 구해주고 이렇게 묵을 곳과 말까지 가르쳐주고 있었다.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길을 잃은 손님이라는 이유로. 그러니 진철은 굶

어 죽는 한이 있어도 이들을 잡아먹고 싶지 않았다.

"좋아, 적어도 올로그라는 종족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았군. 그러면 얘네, 라

비토? 이 토끼처럼 생긴 놈들도 설명해 봐. 얘네 진짜 토끼냐?"

진철이 '라비토'라는 항목의 종이를 들어 토비에게 보여주며 그렇게 질문하

자, 녀석은 갑자기 본인의 조그맣고 말랑말랑해 보이는 손을 허공에 들어 올

렸다. 그러고는 '슈우우웅~'하는 소리를 내며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뭔데."

"라비토 비행정. 라비토 날아다니며 전쟁해. 개미처럼 부족끼리 싸워. 자기

부족이 가장 우수하다면서. 가끔은 다른 종족하고도 싸워. 토비는 본 적 없는

데 장로님 말씀으로는 노래도 부른대. 전쟁 노래."

그러면서 뭔가 웅얼웅얼 노래를 불렀는데, 그 어딘가 웅장한 음률을 듣는 진

철의 얼굴에 또다시 떨떠름함이 떠올랐다. 토비의 설명을 들으니 그려지는 그

림이 괴상했기 때문이었다.

"비행정을 타고 다니며 자기 민족이 가장 우수하다고 노래를 부르는 전쟁광들

이라··· 무슨 파시스트냐? 플라잉 파시스트 토끼 군단? 어질어질하군."

노래를 웅얼대던 토비는 다시 양손을 들어 비행정 흉내를 내며 뭔가 더 설명

하려 했다. 하지만 진철의 시선은 토비를 떠나 문 쪽을 향했다. 손님이 왔기

때문이었다.

"토비!"

토비의 시선도 그곳을 향했다. 녀석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차카이! 다름바!"

문을 살짝 열고 등장한 손님들은 토비의 친구들이었다. 진철을 구해왔다는 녀

석들. 문을 열고 들어온 녀석들이 호다닥 탁자로 달려왔다.

"뭐해? 뭐 하고 있어? 이방인은 !@#!@? 재밌어?"

"배 안 고파? 내가 !@#!열매 가져왔어. 잘 익어서 엄청 달아. 같이 먹자."

두 녀석은 토비에게 다가와 조잘조잘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거기 대답하는 토

비까지 해서 정말 강아지 세 마리가 왕왕대며 짖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가만히 녀석들이 떠들어대는 걸 바라보던 진철이 입을 열었다.

"무슨 열매냐. 나도 줘."

그 말에 안 그래도 크고 동그란 차카이와 다름바의 두 눈이 두 배가 되었다.

잠시 말을 멈췄던 차카이는 신기하다는 듯 진철을 올려다보았다.

"진철, 벌써 우리말 해?"

"조금."

진철의 대답에 어째선지 토비는 우쭐한 표정을 지었고, 다음 순간 차카이와

다름바는 폴짝폴짝 뛰면서 난리를 피웠다.

"진철! 굉장하다! @#$$@! 신기해! !@###$!"

"똑똑하다, 진철. 아, 이거 !@#!열매야. 진철도 먹어."

폴짝거리는 두 녀석을 웃으며 바라보던 진철은 다름바가 내민 열매를 받아서

눈앞에 가져왔다. 익숙한 색과 모양이었다.

"···이거 바나나 아닌가?"

"바나나?"

진철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복실이들을 내버려 두고 능숙하게 바나나 껍질을

깠다. 노란 껍질 안에서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그걸 잠시 바라보다가 얼른

한 입 크게 베어 무니, 부드럽고 달콤한 바나나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음. 달달하군··· 아니 이거 진짜 존나 다네. 이세계 바나나는 당도가 세 배

쯤 되나 보다."

그렇게 진철이 유사 바나나를 까먹는 동안 복실이 삼인방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가 그가 입 안에 있던 걸 꿀꺽 삼키자, 그제야 호다닥

자기들도 그 바나나를 까먹기 시작했다.

"달다!"

"맛있어."

"진철, 하나 더 먹어."

"고맙다."

복실이 셋과 전직 군인 하나는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바나나 한 다발을 다 까

먹었다. 넷 모두 입 안에서 달곰한 바나나 향이 났다. 진철은 자기 손과 코를

할짝거리는 복실이들의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순간 그곳의 풍경이 진철의 눈 안에 담겼다.

활짝 열린 문 너머에서는 숲의 풀벌레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오고 있었고, 대

나무로 이루어진 집은 공기가 잘 통해 시원했다. 울창한 숲 특유의 후덥지근

함이 없진 않았으나 그건 바나나의 향에 섞여 어딘가 달짝지근하고 묘한 안도

감을 주는 공기가 되었다.

종합하자면, 지금 이곳에서 진철은 나른하고 편안했다.

그렇게 의자에 늘어져 복실이들을 바라보면 진철이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자연 상태의 바나나는 씨가 많지 않나? 이렇게 달고 먹기 좋은 바나나는 인

간이 개량한 걸로 아는데."

이 복실이들이 인간처럼 바나나를 품종 개량한 걸까? 그러고 보니 지난 며칠

간 얻어먹은 음식 중에는 쌀과 콩을 이용한 음식도 있었다. 하지만 이 울창한

숲과 거대 나무들, 그리고 그 나무에 벌집처럼 매달려 있는 대나무집 마을 주

변에서는 어디에서도 논과 밭을 찾을 수 없었다.

"토비."

"응? 왜?"

"쌀. 어디서 키워?"

진철이 손짓을 섞어가며 설명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토비가 활짝 웃었다.

"땅에서!"

"···땅에서?"

그럼 벼를 땅에서 키우지 어디서 키워. 당연한 소리에 잠시 진철은 어떻게 반

응해야 할지 몰랐다.

"구경하러 갈래?"

이어진 토비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도 슬슬 재

미없던 참이다. 그러자 녀석은 거침없이 앞장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사람

의 걸음은 문 앞에서 금방 멈췄는데, 다른 복실이 둘이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

이었다.

토비가 다른 두 녀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는 안 가?"

"···우린 그냥 여기 있을게."

대답하는 차카이와 다름바는 토비와 진철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도 못했다. 눈

알이 굴러가는 모양새가 나쁜 짓이 걸린 강아지 같았다.

그 표정을 본 진철은 곧바로 상황을 눈치챘다.

"허이구. 니들 일하다가 땡땡이쳤구나?"

"···땡땡이가 뭐야?"

"지금 너희 하는 거."

진철의 말에 차카이와 다름바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곧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맞아! 땡땡이! 우리 땡땡이 해!"

"몰래 나왔어. 걸리면 혼나. 우린 여기 있을래."

건실한 토비와는 달리 두 녀석은 마을의 작은 반항아쯤 되는 모양이었다. 진

철이 어쩔까 싶어 토비를 바라보니 녀석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진철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저 녀석들 어른도 아니고, 뭔가 훈계할 입장은 아니었

다. 토비는 마냥 웃으며 어깨 으쓱이기를 따라 했다.

결국 토비와 진철은 두 복실이를 두고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니 두 사람 앞

에 복잡하면서도 어딘가 안정감을 주는 대나무 계단과 흔들다리들이 이어졌

다. 두 사람은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토비의 뒤를 따라가면서 다른 캄포니들도 마주할 수 있었다. 토비는 그들에게

가볍게 인사했고, 진철도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캄포니들은 그런 가벼운

눈인사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다들 웃는 낯이었다.

"다들 진철 좋아해. 진철 같은 손님 오랜만이야."

"내가 뭘 했다고···"

진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째선지 물 마시는 법만 알아도 칭찬받는 이세계물

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러다 어느 순간 눈 뜨면 솥 안에 인간 곰탕이 되

어 끓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잠시 후 토비가 걸음을 멈춘 곳은 계단의 제일 아랫부분, 캄포니 대나무 마을

의 최하단이었다. 그러니까 나무 밑동.

거기에 문이 있었다.

"잠깐만. 금방 열게."

토비가 그 문 옆의 나무 표면을 손으로 훑었다. 그러자 그들의 문자와 비슷한

꼬부랑글씨가 반짝 빛나며 나타났다. 그걸 본 진철의 눈에 기대가 떠올랐다.

"오. 드디어 이세계 마법인가?"

직후 띠링-하는 어딘가 밝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땅이 지하를 말하는 거였군. 진철은 기대가 어린 눈

빛으로 앞장서는 토비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짧은 계단이 끝나고, 토비가 멈췄다. 진철도 멈췄다. 이어서 토비가 진철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가 우리 농장 1층. 여기서 쌀 키워."

"···"

진철은 눈을 끔뻑거리며 눈앞에 펼쳐진 학교 운동장 하나 크기의 농장을 바라

보았다. 정확히는, 그곳에 수직으로 층층이 쌓여 빛나는 전등들과 그 빛을 받

아 파랗게 올라온 벼들을 향한 시선이었다. 진철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매직이 아니라 사이언스였네."

복실이들의 지하 농장은 수직 재배가 이뤄지는 커다란 식물공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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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생김새 이해를 돕기 위한 간단한 스케치를 넣어보았습니다. 앞으로 새로

운 종족들이 등장할 때 간단하게나마 올려 보겠습니다.

4화

널찍한 지하 공간 내부에 환한 조명이 빛나며 그 아래 수경 재배 장치를 밝게

비췄다. 벼 재배 장치는 다층으로 쌓여 있었고, 그 사이에서 몇몇 캄포니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조막만 한 손길에 푸르른 벼들이 흔들거렸다.

"이거 분위기 격차가 너무 커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캄포니 식물공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토비가 진철의 바짓단을

끌어당겼다.

"진철! !@#!열매는, 어, 그러니까 바나나는 2층에서 키워."

"···그래. 거기도 가보자."

진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토비는 어딘가 신이 난 기색으로 앞장서 달리기 시작

했다. 진철은 천천히 그 뒤를 따라가며 식물공장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저건 전등이 분명한데··· 전력은 어디서 끌어오지? 발전소는커녕 기름 넣고

돌리는 발전기도 못 봤는데."

공기도 달랐다. 위쪽보다 이 지하가 더 습하고 더웠다. 온도와 습도까지 조정

하는 모양이었다. 진철은 일을 하다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늙은 캄포니

에게 살짝 허리를 숙여 마주 인사하며 생각했다. 이런 식물공장을 무슨 스마

트팜인가 뭔가 했는데···

마주치는 캄포니들과 인사하며 나아가니 곧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하나 나

왔다. 토비가 뭔가를 꼼지락대자 계단을 막고 있던 문이 열렸고, 그 아래에는

1층과 같은 식물공장이 등장했다.

1층 벼 공장과는 조금 달랐다. 나무의 크기 때문인지 이곳에서는 식물이 층층

이 쌓여 있지 않았다. 수경 재배 시설이 갖춰진 1층과 달리 나무가 흙더미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도 달랐다.

그리고 진철은 그 나무에 달린 과일들을 보곤 머리가 살짝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바나나 나무인데, 거기 열린 열매는 바나나뿐만 아니라 사과와

포도도 함께였기 때문이었다. 그 뒤섞인 나무의 모습이 진철에겐 기이하게 보

였다.

"종이··· 좀 다르지 않나···? 사과나무는 나무지만 바나나나 포도는···"

접목도 안 될 텐데. 나무의 굵은 허리에는 바나나가, 축 늘어진 가지에는 포

도가, 그리고 제일 높은 가지에는 사과가.

그렇게 세 종의 열매가 뒤섞인 처음 보는 나무들이 진철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 위에는 윗층처럼 환한 조명이 있었고, 각각의 나무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고무호스가 연결되어 있었다.

진철은 덜 익어 푸르스름한 바나나 다발과 붉게 익은 사과, 탐스럽게 열린 포

도 따위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토비."

"응?"

자기 양 허리를 짚고 어딘가 뿌듯한 얼굴로 잡종 농장을 바라보던 토비가 시

선을 돌렸다. 진철은 그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농장, 몇 층?"

"몇 층? 아, 5층까지 있어. 거기서 각각 다른 걸 키워."

"그럼 이거, 이건 어떻게?"

"어떻게? 뭘?"

진철의 검지가 잡종 나무를 비추는 전등을 가리켰다. 그 손길을 따라 전등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리던 토비는, 금방 무슨 말인지 깨달았는지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나무가 밝혀 주셔."

"···어머니 나무?"

"응. 이 위에 있는 큰 나무."

"그게 어머니 나무야? 대나무 집들의 기둥이 되는 커다란 나무가?"

진철이 본인 언어로 말하자 토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곧 그가 뭘 말

하고 싶은지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너무 많이 와도, 땅이 갈라질 정도로 날이 더워도, 불어난 강물이 넘쳐

흘러도 우린 상관없어. 위험하게 맹수들이 가득한 숲 깊숙이 들어갈 필요도

없어. !@#!@$#, 그러니까 어머니 나무와 우리 농장이 있으니까. !@#$!@, 여기

가 우리 집이고 우리의 터전이니까."

두 팔을 활짝 펼치며 그렇게 말하는 토비는 그것이 자랑스럽다는 듯, 그리고

그 이상 더 필요한 것도 없다는 듯 뿌듯한 표정이었다. 진철은 멍하니 그 얼

굴을 바라보다가 짧게 말했다.

"···물고기를 잡으러 자주 강가에 간다며."

진철의 딴죽에 토비는 히죽 웃었다. 그리곤 그 덕분에 진철의 목숨도 살렸다

고 뻐기는 대신에 장난스럽게 말했다.

"밥만 먹고는 못 살잖아."

진철은 싱겁게 마주 웃으며 다시 농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질문은 전등의 전력원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토비는 그게 위에

있는 어머니 나무 덕분이라 말하고 있었다. 진철은 잠시 그것이 어머니 나무

에게 어떤 마법의 힘이 있어서 전등을 밝혀 준다고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나무에 뭔가 놀라운 비밀이 있어서 지하 5개 층의 전력을 생산한다고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둘이 같은 말인가?"

하긴 나무의 크기부터가 범상치 않긴 했다. 충분히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

분할 수 없다던가. 하지만 그가 이 뜬금없는 장소에서 눈을 뜬 이후 본 캄포

니들의 모습은 순박하고 선한 복실이들이었지, 놀라운 지능으로 이해할 수 없

는 마법을 부리는 외계인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진철은 곧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시발. 하긴 무슨 상관이야."

무슨 상관인가. 캄포니들이 지하에 거대한 유전자 조작 식물공장을 가졌든,

그들의 나무가 신비한 방식으로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소이든, 그들이 사실 놀

라운 지능을 가진 복실이였든.

어차피 그에게 지금의 삶은 보너스였다. 미친 과학자 하나를 죽이고 무너지는

연구소 아래에 깔린 게 체감상으론 불과 며칠 전이었다. 눈을 뜨니 뜬금없이

이곳이었고, 덕분에 진철은 아직도 여기가 천국인지 지옥인지, 아니면 진짜

이세계인지 확정 짓지 못했다.

그러니 복실이들이 마법을 부리는 것이든, 아니면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과학

기술을 가진 것이든 상관없었다. 진철의 심정은 그랬다.

"···진철? 화났어?"

"뭐?"

진철을 올려다보는 토비의 얼굴에 작은 불안함이 떠올라 있었다. 진철은 자신

이 혼자 중얼거린 소리 때문이라는 걸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화 안 났어."

"그런데 시발해?"

"그거 나쁜 말이라니까."

"진철은 계속하잖아."

"···말해 뭐하냐. 내 죄가 참 깊다."

저승 심판대 앞에서 삶의 죄목을 나열할 때, 분명 '순진한 복실이에게 씨발을

가르침'이라는 죄목이 있을 것이다. 진철은 잡종 나무에 시선을 두며 초탈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농장이 신기한 모양이구먼."

그때 진철과 토비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목소리의 주

인공이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마을의 장로 아투카이였다.

진철은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 마을의 가장 큰 어른에게 하는 것치

고는 조금 시원찮은 인사였지만 아투카이는 아무래도 상관없는지 허허 웃을

뿐이었다.

"위쪽 풍경과 달라서 굉장히 신기하네요."

"오? 벌써 우리 말을 그렇게 잘하다니? 자네, 굉장히 똑똑하군?"

"아뇨, 그 정도는 아니고···"

아투카이의 칭찬에 진철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건 사실 진철 본인도 조금 당

혹스러워하던 사실이었다.

진철은 학생 때에도 공부를 잘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었다. 외국어는 더욱

더 그랬다. 그는 열을 가르치면 겨우 하나 얻어가는 부족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눈을 뜨고 지난 며칠을 지내며 느낀 것은 이상하게 머리가

맑고 기억력이 좋아졌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토비나 다른 캄포니들이 말하는

단어도 잘 기억할 수 있었고, 고작 며칠 지냈다고 그럭저럭 의사소통이 가능

한 정도가 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곁에 딱 달라붙은 토비가 많이 도와주었던 덕분이 가장 컸다. 아무

리 기억력이 좋아졌어도 옆에서 계속 대화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이 정도

수준은 이를 수 없었을 것이다.

진철은 그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

"토비 덕분입니다. 좋은 선생이에요."

"그래? 겸손도 하군. 마을 사람들이 자네를 왜 좋아하는지 알겠는걸."

겸손을 부릴 생각이 없었던 진철은 다시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여전

히 묘한 눈빛으로 그런 진철을 바라보던 아투카이는 자신의 턱수염을 쓸어내

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어디 어머니 나무를 좀 구경해 보겠나?"

"예? 구경이요?"

진철이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아투카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이 농장의 !@#!@#이 궁금한 거지. 어머니 나무가 어떻게 빛을 밝히

고, 농장을 굴리는지. !@#!!@#. 아닌가?"

못 알아들은 단어도 있었지만, 진철은 아투카이가 뭘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짧게 말해 이 농장의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걸 저한테 알려줘도 되겠습니까? 전 외부인인데요."

"상관없네. 어차피 다른 종족들은 알아도 쓸 수 없을 테니까."

역시 캄포니만의 어떤 신비한 마법이 있는 거야··· 진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전력 시설이라면 종족에 상관없이 지성이 있다면 다

활용할 수 있어야 했으니까. 정말 캄포니만 쓸 수 있다면 마법이 분명할 것이다.

"따라오게."

아투카이는 그렇게만 말하고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진철과 토비는 잠시 서로

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그 뒤를 따랐다.

지나왔던 풍경이 되돌아왔다. 1층의 농장, 나무 밑동의 문, 그리고 대나무 집

을 향해 올라가는 계단. 그렇게 커다란 나무를 빙빙 둘러 올라가는 계단을 따

라 잠시 걸어가니, 어느새 아투카이의 걸음이 멈췄다.

"여기가 내 !@##라네."

여느 대나무집과 다를 것 없는 집. 그곳이 본인의 거처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렇게만 소개한 아투카이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진철은 그대로 그

뒤를 따라가려다가 멈칫했다. 토비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기 때문이었다.

"왜?"

"···장로님 방은 함부로 들어가면 안 돼."

"들어오라는 거 아니야?"

"진철만 들어가. 난 여기 있을게."

녀석의 꼬리가 밑으로 추욱 처져 있었다. 우물쭈물하는 녀석을 바라보던 진철

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에 가 있어. 금방 돌아갈게."

"그럴까?"

조금 굳었던 녀석의 표정이 밝아졌다. 진철은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주고는 아

투카이의 방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진철이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던 토비

는 그 순간 대나무집의 문이 저 혼자 덜컹 닫히자 깜짝 놀라서 뒤로 넘어졌

다. 그러고는 후다닥 계단 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네 발로.

"···애가 뭐 저렇게 겁이 많아."

집 안으로 들어온 진철은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우린 원래 그렇네. 이유는 딱 봐도 알지 않나? 우린 에사이처럼 날래지도 않

고, 올로그처럼 힘이 세지도 않거든."

"···음, 무시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혼잣말에 아투카이가 대답하자 진철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

다. 하지만 아투카이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으하하 웃었다.

"괜찮네.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래도 우린 사정이 좋은 편이야. 어떤 캄포니

들은 어머니 나무와 농장을 잃어버리고 땅 위에 직접 농사를 짓거나, 아니면

도시에 가서 일자리를 찾는다고 하니까. 물론 그 과정에서 다른 종족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는 건 물론이지."

"도시? 도시가 있습니까?"

아투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장로가 되기 전에 딱 한 번 다녀왔지. 정말 오만가지 종족들이

모여서 시끌시끌한 곳이었어."

진철의 눈이 빛났다. 도시. 수많은 사람이 오가며 온갖 잡음이 터져 나오는

곳.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정보가 모이기도 하는 곳. 어쩌면 이 세상에 대해

더 알 수 있을지 몰랐다. 더 나아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방법 또한.

"···자네 눈을 보니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군. 동족을 찾아보려고?"

아투카이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언제까지 신세를 질 수도 없으니까요."

"우린 상관없네. 정 마음이 무겁다면 우리 농장 일이나 도와주면 될 일이야."

진철은 작게 웃었다.

"그건 물론 도와드려야죠. 떠나기 전에 무슨 일이라도 시켜만 주시면 하겠습

니다."

"하하하! 글쎄, 자네처럼 큰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을까? 지금도 손이

남아서 놀고먹는 날이 얼마나 많은데. 만약에 때 되면 찾아오는 상단에게 팔

아야 할 물건이 없었다면 지하 농장은 일 년에 반 이상은 쉬고 있었을 것이네."

"상단도 옵니까?"

"그럼. 강줄기를 타고 온 바이카 상인들이 있지. 그들 덕분에 우리도 이것저

것 생필품을 구하고 있네."

어쩌면 그들을 따라 도시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진철은 혼자 그렇게 생각했

다. 아투카이는 그런 진철을 가만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때 진철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 캄포니 말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걸 깨닫고 아투카이를 바라보니, 그는 왜 자신을 바라보는지 안다

는 듯 목덜미 쪽을 보여주었다.

익숙한 멀미 패치, 아니 아티팩트가 보였다. 무슨 에테멘인지 에티맨인지 무

슨 목소리라고 하는 이름의 물건이었다.

"하지만 이쪽은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은 어머니의 제단과 가까이 있으니까. '에테멘의 목소리'는 어머니의 제

단에 연결될 수 있네. 어머니가 자네 목소리를 듣고 해석해 주는 거지."

"어머니의 제단이요?"

"그걸 보러 온 거 아니었나? 이리 와보게."

아투카이는 뒤돌아서 안쪽으로 걸어갔다. 다른 대나무집에 비해 조금 어두운

실내를 따라 깊숙한 안으로 따라 들어가니, 기둥 나무의 표면이 그대로 드러

난 방이 나왔다.

그리고 그곳에 어머니 나무의 제단이 있었다.

기와를 얹은 삼각 지붕과 기둥을 가진 나무 제단이었다. 그 높이가 진철의 키

보다 조금 더 컸으니 캄포니들 사이에선 꽤 큼지막한 제단일 터였다.

그 제단 주변을 치장한 깃털과 향, 염료로 칠한 나무 장식 등이 보였다. 놀랍

게도 금으로 보이는 큰 그릇도 있었는데, 거기 새겨진 화려한 문양이 이곳에

서도 황금을 귀중히 여긴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진철을 당혹시키고, 어벙한 표정을 짓게 만든 것은 그 제

단의 한가운데에서 빛나고 있는 화면, 그러니까 디스플레이라고밖에 할 수 없

는 유리 때문이었다.

그 유리와 나무 사이에는 줄기처럼 보이는 것들이 치렁치렁하게 늘어져 있었

는데, 그것은 마치 나무뿌리로 이루어진 전선이 어머니 나무와 유리 패널을

연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줄기에서 희미한 빛이 반짝이고 있으니

그 신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 아투카이가 그 제단에 손을 올리자 유리에서 반짝, 빛이 나더니 반투명

해지는 동시에 글자와 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어머니 나무의 제단이라네. 지하 농장의 온도와 습도 등 재배 환경을

조절하는 것 역시 이 제단을 이용한다네. 그리고···"

[어서 오십시오. 지역번호 AS-12, 386번 재배 구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재 1번부터 5번 재배 농장이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6번, 7번, 8번 농장은

시설 이상으로 폐쇄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머니 나무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지."

어딘가 우쭐한 표정을 짓는 아투카이의 모습에서 아까 보았던 토비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쯤 해서 복잡하게 생각하기를 관둔 진철은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일단 중세 판타지가 아닌 건 확실하군··· 일종의 컴퓨터인가?"

진철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뭔가 신이 난 듯한 아투카이는

반투명 유리 위에 손을 올리고는 무언가를 조작해 보여주고 있었다.

"이게 우리 농장의 작물 생산량이고, 이건 어느 작물을 키웠을 때 얻을 수 있

는 생산 예상치라네. 어머니 나무는 현명하시기에 간단한 정보만으로도 미래

를 예측하실 수 있지."

반투명 화면 위에는 그래프와 숫자로 이루어진 다양한 그림과 표가 나타나 빛

나고 있었다.

"숫자도 아라비아 숫자네···"

"아, 자네가 알아도 상관없다고 한 이유도 궁금하지? 이리 와서 제단을 만져

보게."

"아, 예···"

멍하니 아투카이의 설명을 듣던 진철은 얼떨결에 반투명 화면 위로 손을 올렸

다. 그러자 반투명 화면이 불그스름하게 빛나며 '어머니 나무'의 목소리가 들

렸다.

[본 재배 농장 관리 시스템의 조작은 현재 관리 바이오로이드에게 전권이 있

습니다. 사용자는 '최후 법령'에 따라 관리 바이오로이드에게서 관리 권한을

회수할 수 있습니다. 관리 권한을 회수하시겠습니까?]

"예? 뭐요?"

[관리 권한 위임. 이제부터 본 재배 농장의 새로운 관리자는 사용자입니다.

환영합니다, 관리자님.]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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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불그스름 빛나던 반투명 조작 패널이 본래 색을 되찾았다. 진철은 어리둥절해

져서 아투카이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역시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모습이었다.

"···이거 괜찮은 겁니까?"

"···아니. 자네 뭐 한 건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아투카이는 진철을 밀어내고 반투명 패널로 다가가 화면을 조작하려 했다. 그

러나 그때 패널의 색이 불그스름하게 변하며 어머니 나무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접촉 권한이 없습니다.]

"···"

진철은 캄포니족이 공포와 당황에 휩싸이는 표정을 그때 처음 보았다. 그저

순박하고 느긋하기만 하던 복실이가 그렇게 겁에 질린 모습을 보니 절로 안쓰

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괜찮으십니까? 이거 뭔가 이상한데요."

"···뭐라 말한 건가? 갑자기 자네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그렇군. 이, 이

건 어머니 나무께서 나에게 속삭여주고 계시지 않는 거야···"

아투카이는 가늘게 손을 떨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목덜미에 붙어있는 아티팩

트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진철은 성급하게 뭐라

말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복실이 장로는 떨리는 손으로 본인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방금 어머니 나무의 경고는 자네가 제단을 만졌을 때 나와야 할 말이었어.

우리 종족이 아닌 자가 제단을 만지면 그런 경고음이 나와야 하는데··· 내가

아니라··· 어떻게 이런 일이··· 하필이면 내 세대에서··· 하필 오늘 어머니

나무가 우릴 저버리시다니··· 이게 무슨···"

그는 점점 더 깊은 공황에 빠져가는 모습이었다. 땡그란 두 눈에서 그렁그렁

눈물까지 맺히기 시작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진철은 그 꼴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그는 다시 반투명

패널에 손을 올렸다.

"···저기, 그 뭐냐. 뭐라고 불러야 하지?"

[환영합니다, 관리자님. 현 재배 농장의 현황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아니. 그 관리자 권한이라는 걸 넘기고 싶은데."

[관리자 권한 이양 요청··· '최후 법령'에 의거, 사용자 의견의 조건 없는 수

용. 현재 확인되는 사용자는 관리자님뿐입니다. 따라서 현재 관리자 권한을

포기하신다면 해당 권한은 농장의 관리 바이오로이드에게 이양됩니다. 정말

관리자 권한을 포기하시겠습니까?]

"그래."

[명령 확인. 사용자의 관리자 권한은 495세대 관리 바이오로이드에게 이양되

었습니다. 본 재배 농장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됐나? 진철은 반투명 패널에서 손을 떼고 아투카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는 여전히 공황에 빠진 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을 뿐이었다.

"아투카이."

"···이, 이럴 순 없어. 하필이면 내가 장로일 때···"

"아투카이!"

진철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러자 아투카이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

다. 진철은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내 말 이해 되십니까?"

"뭐, 뭐?"

"지금 목덜미에 붙이고 계신 아티팩트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물어보는 겁

니다. 난 지금 캄포니 말을 쓰고 있지 않아요."

멍한 표정으로 진철의 말을 듣던 아투카이의 얼굴이 다음 순간 활짝 펴졌다.

그 얼굴이 환하게 웃는 강아지 같았다.

"오, 오오! 자네 말을 알아들을 수 있군! 다시 어머니 나무께서 속삭여주고

계신 거야!"

그는 그렇게 외치더니 다시 반투명 패널에 달라붙었다. 조금 전 붉게 변하며

그를 거부하던 패널은 다시 농장의 현황을 표와 숫자로 보여주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아투카이가 돌아서서는 진철의 손을 잡았다.

"고맙네! 고마워!"

"아뇨, 애초에 제가 손대지 않았다면 있지도 않았을 일인데요. 그러실 거 없

습니다."

아투카이의 땡그란 눈이 말없이 진철을 바라보았다. 아투카이는 그렇게 환한

얼굴로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진철을 바라보기만 했다.

눈을 끔뻑거리며 그 시선을 받던 진철은 잠시 후 조심스레 붙잡은 손을 흔들

었다.

"아투카이?"

"···그들은 언젠가 돌아올 지혜롭고 선한 지배자들이자 질서의 수호자이며,

세계의 진정한 주인이로다··· 그러나 그 모든 이름 앞에 진정 부를 말 있으

니, 바로 우리의 '친구'라···"

"예?"

무언가 입술 안에서 달싹거리던 아투카이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그는 손으로 자기 코를 슥슥 훑더니 주제를 바꿨다.

"그래, 자네 말마따나 자네가 괜히 건드리지 않았으면 없었을 일이지! 이 사

태를 어떻게 책임질 건가? 잘못했으면 우리 모두 이 마을을 떠나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예? 아니 저한테만 책임을 물으시면 어떡합니까? 아투카이가 먼저 만져보라

면서요?"

"아, 그랬지?"

아투카이는 으하하-크게 웃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럼 내 잘못도 있으니 조금 전 일은 그냥 조용히 넘어가세. 다른 마을 사람

들이 알면 곤란해."

"제가 어디 가서 그거 떠들어봐야 뭐합니까. 벌써 다 잊었습니다."

"그래?"

"예."

조금은 시큰둥한 진철의 태도에도 아투카이는 빙긋 웃더니, 제단 아래쪽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의 품에 안겨 주었다.

그건 잘 익은 바나나였다.

"···입막음하시는 겁니까?"

"잘 아는군. 모자라는가?"

"아뇨. 애들이랑 나눠 먹기엔 충분하군요."

"나눠 먹게? 혼자 먹어도 부족할 것 같은데."

진철도 빙긋 웃었다.

"혼자 다 먹기엔 너무 달아서요."

*

바나나를 든 진철이 방을 떠난 후, 아투카이는 어머니 나무 제단의 가장 아래

쪽 숨겨진 공간을 열었다. 그 공간에 있던 것은 두꺼운 책이었다.

책을 책상 위에 올려둔 아투카이는 표지 위에 후-하고 바람을 불었다. 그동안

위에 쌓였던 먼지가 훅 밀려나며 제목이 보였다. 진철이 그 글자를 보았다면

놀라서 읽었을 것이다. [농장 관리자 안내서]라고.

"으흠···"

책자를 열자 아주 혼잡한 책 내부가 드러났다. 아주 오랫동안 책의 내용이 첨

삭된 듯 낡은 종이와 그나마 덜 낡은 종이, 새로 붙인 그림 등등이 너덜너덜

한 모습이었다. 그중 아투카이가 찾는 부분은 가장 뒤쪽, 대부분이 그나마 덜

낡은 종이로 이루어진 페이지였다.

그 페이지는 책 가운데를 사이에 두고 상반된 그림 두 장이 그려져 있었는데,

하나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서 있는 크고 건장한 남자의 뒷모습과 그의

주변에서 해맑게 웃는 캄포니들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쪽은, 검은 그림자 거인이 숲과 세계를 불태우고 있는 그림이

었다.

아투카이는 맑은 눈빛으로 두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아투카이의 방을 나선 진철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그러나 대나무 계단을 오르는 그의 걸음은 어느 순간 느려지기 시작했고, 결

국 몇 발짝 내딛지 못한 채 멈춰버렸다.

"···"

멈춰 선 그의 얼굴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는 그의 얼굴에

깔린 짙은 음영은 마치 원시림의 그림자가 달려와 그의 얼굴을 잡아먹은 것만

같았다.

"뭐가 뭔지 모르겠군."

진철은 그렇게 속삭였다. 조금 전 그가 보고 겪었던 장면들이 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용자, 관리자, 바이오로이드, 어머니 나무, 반자동 지하 농장, 아라비아 숫

자와 도표 등등. 이곳이 정말 이세계라면 그렇게 익숙한 관념과 단어들이 그

를 반기는 건 왜일까. 만약 이곳이 정말 현실과 다른 세상이라면 관념과 그를

나타내는 단어 또한 달라야 함이 옳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곳이 이세계가 아니라면 지금 그의 상황은 또 뭔가. 분명 미친

늙은이 하나를 쏴 죽이고 지하로 무너지는 연구소에 휩쓸린 것이 마지막 기억

인데, 왜 강아지를 닮은 복실이 마을에서 눈을 뜬 것인가. 그 복실이가 말해

주는 이 세상의 종족들은 또 무엇인가.

진철의 눈이 옆을 향했다. 안전 규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계단과 건물들,

캄포니 마을을 넘어, 울창한 원시림이 펼쳐져 있었다. 무성한 나무와 풀의 짙

은 푸르름이 하늘을 가려 그 아래 환한 위쪽과 대조되는 깊고 뚜렷한 그림자

를 만들었다.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 그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미친 것일까? 아니면 죽음 직전에 어떤 환상을 체험하고 있는 것? 둘 전부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유쾌하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지 몰랐다. 초인 병사 연구소 같은

거창한 곳이 아니라, 그저 막사 한구석에서. 다른 분대원들과 함께. 홀로 살

아남은 분대장이란 단어는 그저 연옥 속의 한 단면일지도 몰랐다.

그 생각이 정답이라는 듯 그를 마주 보는 짙은 그림자 속에서 어떤 형체가 나

타났다.

그들은 죽은 자들이었다. 그들의 마지막 순간. 엉망이 된 막사와 피범벅이 된

살덩어리들. 시체가 되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사병들.

시체가 되어 널브러진 그들의 눈이 진철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입이 속삭였

다. 함께 사업을 하자고, 유튜브를 하자고, 여동생을 소개해주겠다고. 그것도

싫으면, 그저 이 엿같은 전쟁이 끝나면 어딘가 괜찮은 술집에 모여 술이나 한

잔하자고.

우리와 함께하자. 너를 기다리고 있어.

"닥쳐."

진철이 속삭임과 동시에 환상은 사라졌다. 진철은 짙은 눈으로 묵묵히 원시림

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한순간 사라진 환상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진철은 어째선지 그 사실에 작은 슬픔을 느꼈다.

"···좆도 궁상이군."

진철은 바나나 한 다발을 든 채 우두커니 계단 한켠에 서서 중얼거리는 자신

의 모습을 인지했다. 입에서 비웃음인지 헛웃음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를

미소가 실실 흘러나왔다.

혼자 고개를 가로젓던 진철은 이내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가

바라보던 짙은 원시림의 그림자는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애써 그를 붙잡지도

않았다.

진철은 훌쩍 계단을 뛰어올랐다. 캄포니 발에 맞춰진 그대로 계단을 오르기엔

그는 너무 컸다. 덕분에 계단 서너 칸을 휙휙 건너뛰니 토비가 기다리는 방에

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살짝 열린 문을 스윽 열고 들어가니 책상에 앉은 토비가 뭔가 끄적거리는 모

습이 보였다.

"토비."

끄적대기에 집중하던 녀석은 휙 돌아 진철을 바라보았다. 그는 녀석에게 바나

나를 들어 보였다. 토비는 얼른 달려와 그걸 낚아챘다.

"와! @#$%! 바나나!"

"네 친구들은?"

"숲에 놀러 갔어."

토비는 바나나를 뜯으며 그렇게 태연히 말했다. 진철은 헛웃음을 흘렸다.

"숲은 위험하다며?"

"맞아. 근데 마을은 심심해."

"스릴은 마을 밖에 있다? 이거 진짜 애들··· 아니, 애들 맞지."

고개를 흔든 진철은 토비가 끄적거리던 책상에 눈길을 주었다. 거기엔 토비가

그린 그림이 있었다. 유치원 아이가 그린 듯 조잡한 그림이었다.

"이건 뭐냐? 공룡이냐?"

"!@#!@#. 공룡은 뭐야?"

"카알, 티사라··· 이것도 발음이 어렵군. 어쨌든 이게 뭔데?"

"공포의 짐승."

"···공룡 맞는 거 같은데."

"공룡이 뭐야?"

진철은 설명하는 대신에 웃으며 토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은 질문하던

것도 잊고 혀를 내밀고 헥헥대며 진철의 손길을 만끽했다.

"밥 먹으러 갈까?"

"진철 배고파?"

"그렇네. 배가 고프네. 아주."

"그럼 가자."

진철을 올려다보던 토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섰다. 진철은

천천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지금 이 순간이 죽음 직후 보는 환상이든지, 아

니면 미쳐서 헛것을 보는 것이든지, 어쨌든 밥은 먹어야 했으니까.

이후 진철은 마을 식당에서 차려주는 식사를 배부르게 먹고는 방으로 돌아와

낮잠까지 때렸다. 공부하자고 보채는 토비도 옆에서 같이 재웠다. 그렇게 놀

고먹는 꼴이 훌륭한 한량이었다.

한참 후 느긋하게 일어나니 마을은 벌써 어둑하고,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군."

"으에? 벌써?"

옆에서 자던 토비가 비몽사몽 몸을 일으키며 눈을 끔뻑거렸다. 눈곱을 떼며

낄낄대던 진철은 침대-진철 전용으로 침대 두 개를 붙여놓았다-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갔다. 계단 겸 발코니에 서서 보니 캄포니 마을의 전경이 한눈

에 보였다. 그곳에 서서 기지개를 켜고는 크게 한숨을 들이키고 있으려니 눈

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뭐지?"

마을이 어수선했다. 진철의 눈에 평소 느긋하기만 하던 캄포니들이 다급한 걸

음으로 계단과 흔들다리를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흐아암··· 바로 저녁 먹으러 갈 거야, 진철?"

토비가 하품을 하며 옆으로 다가왔다. 잠시 생각하던 진철은 두 번 고민하지

않고 토비를 집어 들었다.

"에? 왜 그래?"

"무슨 일이 있나 보다."

그렇게만 말한 진철은 마을의 계단을 달리기 시작했다. 마을 아래, 그러니까

어머니 나무 밑동 쪽에 모여서 웅성거리는 캄포니들을 향해서였다.

"지, 진철! 너무 빨라!"

"그러냐? 그럼 더 빨리 가야지!"

"으아아-!"

토비의 비명을 배경음 삼아 훌쩍 마을 계단을 주파하니 금방 땅이 나왔다. 진

철은 자신의 몸이 가벼워도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면서 토비를 내려놓았다. 녀

석은 땅을 딛고서도 비틀비틀 갈지자를 그렸다.

비틀거리는 녀석을 웃으며 바라보던 진철은 시선을 돌렸다. 지상에는 마을 캄

포니들이 거의 다 내려와서 어딘가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이 인간이었다면 진철도 그 너머 상황을 보기 어려웠겠지만 캄포니들의

키는 진철의 허리춤에 불과했기 때문에 상황 파악은 간단했다. 그냥 고개를

들어 보면 됐으니까.

캄포니들이 그린 원형 가운데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장로 아투카이와 어린

캄포니, 차카이였다.

아투카이는 심각한 표정이었고 차카이는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

었다.

"몰래 숲에 놀러 갔다고 혼나고 있었던 거야? 다른 녀석은 어디 갔데."

상황을 본 진철은 실실 쪼갰다. 이 순진한 복실이들은 애 하나 혼내는 일도

흔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다들 구경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때 옆에서 다른 캄포니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은 토비가 사람들을 밀

쳐내며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건 진철이 이 마을에 머물며 처음 본 토비의 거친 모습이었다. 그래서 두

눈을 땡그라니 뜨고 보고만 있으려니 사람들을 다 헤치고 나아간 토비가 아투

카이 앞에 무릎 꿇는 모습이 보였다.

"친구들 변호를 하려고? 복실이 변호사라. 어린이 만화 같군."

그때 아투카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락할 수 없다. 다름바는··· 그냥 병에 걸려 죽은 셈 치거라."

"엥?"

예상치 못한 소리에 진철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눈을 끔뻑거리다가 고개를 돌

려 주변을 살펴보니, 다른 캄포니들의 얼굴이 모두 어두웠다. 안타까움을 느

끼지만 그렇다고 나서서 무언가 할 생각은 없는 표정들이었다.

잠시 그들의 표정을 살피던 진철은 곧 무슨 생각에서인지 앞으로 나아갔다.

덩치가 훨씬 큰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그만큼 눈에 띄기 때문인지 캄포니들은

강이 갈라지듯 우르르 길을 텄다.

그 소란 덕분에 아투카이 또한 진철이 내려온 것을 발견했다.

"진철."

"어르신."

진철이 허리를 살짝 숙이자 아투카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낮의 것과는 다르게 지금은 그저 씁쓸해 보일 뿐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하아."

아투카이는 한숨을 쉬며 차카이를 바라보았다. 이미 울먹거리고 있던 차카이

는, 그 시선에 결국 엉엉 울어버렸다. 옆에 있는 토비가 달래보아도 울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뭔데요?"

"···차카이와 다름바가 숲 깊이 들어갔다가 떠돌이 올로그들을 만난 모양이네."

"올로그면···"

올로그. 진철의 기억대로면 그들은 식인귀들이었다. 지성이 있으면서도 아무

렇지 않게 다른 사람들을 잡아먹는 식인귀들.

"다름바는 그 자리에서 잡혔다는군. 그 길로 도망쳐 달려온 차카이는 지금 여

기 있고."

"···그래서요?"

아투카이의 눈이 진철을 향했다. 맑게 반짝이던 눈동자는 지금 탁하게 가라앉

아 있었다.

"그래서라니?"

"애 구하러 안갑니까?"

"···안 가네."

조금 늦은 대답에 진철의 얼굴도 가라앉았다. 그는 그 자리에 있는 캄포니들

을 쭉 둘러보았다. 그저 겁먹은 복실이들의 모습만 보였다.

"우린 전사가 아니네."

변명처럼 뒤늦게 따라붙은 말이었다.

"우린···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야. 올로그는 우리 종족의 세 배는 넘

어가는 크기고, 열 배는 더 난폭한 놈들이네. 게다가 차카이의 말대로라면 그

떠돌이 올로그는 셋이나 되네. 그럼 마을 사람 서른이 몰려가도 그냥 헛된 죽

음만 당할 뿐이야. 하나로 끝날 피해가 몇십 배로 늘어나는 것이지···"

"그럼 애가 잡아먹히는 걸 그냥 두고만 봅니까?"

아투카이의 입가에 다시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우린 이렇게 살아왔네. 어머니 나무의 은혜에 힘입어 숲의 위험을 피하지

만, 때때로 피할 수 없는 재난에 친인척을 잃기도 하지. 우린 위험한 동물이

쳐들어오면 어머니 나무 위로 올라오는 다리를 끊고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기

다리거나 화살로 쫓아버릴 뿐이네. 다행이랄까, 어머니 나무는 악의를 품고

당신께 손대는 존재에게 따끔한 벌을 주시며 우릴 지켜주시기에 이곳은 안전

하다네."

"아니, 그래도 다들 동물 같은 건 사냥해 봤을 것 아닙니까. 다 같이 뭐라도

하면···"

"올로그와 싸우는 건 지성이 없는 동물을 사냥하는 것과는 다르네. 그들은 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어. 우리보다 훨씬 강인한 전사이기도 하지. 단순한 동

물을 사냥하는 것과는 달라.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네. 그러니 이번 일은··· 그저 사고일 뿐이야. 우린 다 그렇게 사랑

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네. 이전 장로도, 토비의 부모도 그랬지."

진철의 눈이 토비를 향했다. 차카이를 달래던 녀석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되

어 있었다.

"자네 눈에는 겁쟁이처럼만 보여도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야."

아투카이의 말에 진철의 눈이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순박하고 느긋하

던 복실이의 눈에 깊게 깔린 오래된 두려움과 무력감이 보였다. 쉽게 지워지

지 않을 낙인과 같은 감정들.

그 순간 진철은 캄포니들의 어두운 단면을 엿본 기분이었다. 어머니 나무의

지하 농장으로 여유롭고 목가적인 생활을 영위하지만, 그 과육에 물들어 다른

삶의 방식은 꿈도 꾸지 못하는 자들. 심지어 다른 종족에게 공동체 일원이 사

냥당하는 일마저도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 정도로 여기는 겁쟁이들.

마을의 아이가 잡혀갔고 그 끝에 잡아 먹히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백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 중 누구 하나 무기를 드는 자가 없었다. 심지어 일부는 몸을

돌려 나무 위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다름바라는 아이는 이미 죽은 아

이였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던 진철은 이 순박한 복실이들을 겁쟁이라 비난하지도,

어설픈 무기라도 하나 들어 억지로 앞으로 나서라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건 너무 가혹한 짓거리였다. 애초에 자신이 그런 비난을 할 자

격이 있다고 믿지도 않았다.

그래서 비난 대신에, 그냥 싱겁게 미소 지었다.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그저 받아들이며 나아가는 게 인생이라죠."

"···뭐?"

"드디어 밥값을 할 시간이군요."

아투카이의 눈이 커졌다.

6화

*

아투카이가 말했다.

"굳이 자네가 나설 필요는 없네. 정말로."

하지만 진철은 그의 말을 들은 체도 안 하고 바닥에 피워놓은 모닥불 앞에서

뭔가를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캄포니들이 쓰는 작은 활과 화

살, 그리고 창인지 막대기인지 모를 작대기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다른 캄

포니들이 마을에서 그나마 무기라고 할 만한 것들을 긁어모은 것이다.

"지금 제 걱정은 아직 아이가 살아있을까 하는 겁니다."

진철은 고개도 들지 않고 손을 움직이며 그렇게 말했다. 아투카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올로그들은 미식을 즐기네. 다름바는 그들에게 별미일 거야. 아마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를 하려 하겠지. 내 예상엔 신선도를 위해 다름바의

숨을 끊는 것이 굉장히 나중이리라 보네."

"그래도 오늘 밤을 넘기진 않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달이 뜰 때까진 괜찮을 것 같은데···"

진철이 고개를 들었다. 빼곡한 대나무 집과 흔들다리, 울창한 나뭇잎 너머로

검푸르게 물들어가는 초저녁 하늘이 보였다.

"서둘러야겠군요."

그의 손이 한층 빨라졌다. 화살촉으로 줄을 끊고 송진으로 마무리하는 과정이

후다닥 지나갔다. 아투카이의 눈에 그의 손 아래 시원찮은 활 여러 대가 하나

로 뭉쳐 굵은 나무 몽둥이가 되는 게 보였다.

"설마 그걸 당기려고?"

"어설프게 만들긴 했는데 생각보다 활대가 세진 않습니다. 제 걱정은 이게 과

연 화살을 몇 발이나 쏘고 망가질까 하는 거죠."

진철의 손이 그 굵은 나무 몽둥이를 굽혀 시위를 걸었다. 그의 손이 완성된

활을 크게 한 번 당겼는데, 아투카이의 눈에 빠드드드-소리를 내는 활과 시위

가 보였다.

"활대가 세진 않다고···?"

활을 원상태로 되돌린 진철은 바닥에 널브러진 화살들을 바라보다가, 그거 말

고 옆에 있던 단창을 집어 들었다.

"그건 창인데?"

"일단 창대를 쪼갠 후에 이쪽 화살 깃을 떼서 붙여볼 생각입니다. 잘 날아갈

지는 모르겠군요."

움직이는 손놀림은 빠르고 간결했다. 그의 손에 비해 너무 가늘었던 창대가

돌화살촉에 쭉쭉 쪼개져 더 가늘고 긴 화살대가 되었다. 이어서 원래 화살에

붙어있던 깃 또한 금방 해체되어서 새로운 화살대 끝에 정렬되었다. 그걸 본

아투카이가 감탄하며 말했다.

"자네, 손재주가 굉장하군."

"현역 꽉 채우고 동원 끝날 때쯤 다시 징집당해서, 몇 년 뒈지게 구르면 손재

주가 늘고 싶지 않아도 늘 수밖에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북쪽에서 죽어라 달

리다 보면 물자가 모자라서 웬만한 건 직접 손으로 고치고 꿰매 써야 하니까요."

"동원? 징집?"

진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아투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때 보면 토

비나 그나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진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완성된 활과 화

살을 정리했다. 이 급조 병기가 올로그라는 놈들에게 얼마나 효용 있을진 모

르겠으나, 어쨌든 맨손으로 쫓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투카이는 일어서는 진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네 정말로···"

진철은 싱긋 웃기만 할 뿐 말없이 활과 복장을 정리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간단한 옷 정리가 끝나면 당장 숲으로 달려갈 기세였다.

그 모습에 아투카이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속에 복잡한 마음이 흘러나왔다. 그건 감사이기도 했고, 두려움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오래된 무력감과 슬픔이 담긴 숨결이었다. 작은 노인은 그 한

숨 끝에 손을 움직였다.

"···그래. 그렇다면 이 겁 많고 비루한 늙은이는 자네에게 줄 수 있는 게 하

나뿐이군."

"예?"

뜻 모를 소리를 하던 아투카이는 자신의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조그마한 복실이 손에 비해선 꽤 크고 굵은 물건이었는데, 몸체의 절

반은 상아색, 절반은 검은색이었고 표면에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복잡하고 신

비한 문양이 꺼끌꺼끌 희미하게 양각되어 있었다.

종합적으로 그 물건은 마치 어떤 손잡이 같았다.

"이게 뭡니까?"

아투카이는 양손으로 그 손잡이를 잡아 몸 앞에 바로 세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챙-하는 맑은소리와 함께 흑백의 손잡이 한쪽 끝에서 길쭉한 칼날

이 솟은 것이다.

"워우."

진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길어진 칼을 바라보았다. 손잡이 길이는 진철 기

준으로 한손반 정도, 칼날의 길이는 한쪽 팔 정도. 대충 7, 80cm쯤으로 보였다.

"받게. 이제 자네 거야."

"예? 이게요?"

아투카이는 하얗게 번쩍이는 그 칼날을 양손으로 받쳐 들어 진철에게 내밀었다.

"오랫동안 마을에 보관하던 아티팩트네. 전해 내려오는 이름은 딱히 없으니

자네 마음대로 부르게. 우릴 위해 나서주는 전사에게 줄 건 이런 것밖에 없군."

"괜찮으시겠습니까? 전 이런 거 주시면 거절 안 하고 다 받는 사람인데요."

"그러라고 주는 거야. 나 팔 아프니까 빨리 가져가게."

진철은 칼을 집어 들었다. 흑백 손잡이가 손안에 착 감기는 느낌이었다. 은빛

보다 순백에 가까운 칼날에 얼핏 그의 얼굴이 비쳤다.

"아주 가볍군요."

"그리고 튼튼하지. 그걸로 가끔 큰 짐승을 해체했는데, 뼈를 갈라도 이빨 하

나 나간 적 없네."

"···도축용 칼이었습니까?"

진철의 떨떠름한 질문에 아투카이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진철은 손잡

이를 만지작거리다가 엄지가 닿는 부위에 무언가 딸각 들어가는 부분이 있음

을 깨달았다. 그걸 누르자 스릉-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사라졌다. 손잡이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칼날 길이가 맞질 않는데··· 이게 어떻게 됩니까?"

"그걸 알면 아티팩트겠나? 자네 '에테멘의 목소리'를 눈으로 보고 그 작동 방

식을 이해할 수 있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습니다."

존나 신비한 마법이든지, 아니면 이해 못 할 초과학이든지. 어느 쪽이든 지금

의 진철이 이해 못 하는 건 같았다. 진철은 그 신비한 칼 손잡이를 허리띠에

끼웠다. 원거리는 물론 근접전을 위한 무기까지 생기자 마음이 든든해졌다.

물론 다른 무엇보다 큼직한 소총 한 자루 있었다면 제일 좋았겠지만.

그렇게 모든 무장을 챙긴 진철이 움직이려 할 때, 위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잠까아안!"

진철과 아투카이의 시선이 계단을 향했다. 그곳에서는 활과 단창을 든 토비와

차카이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녀석들은 놀랍게도 허리춤에 단검으로

보이는 칼집과 두툼한 가죽을 잘라 붙여 조잡하게나마 만든 갑옷을 입고 있었다.

"아니 이 녀석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무기를 든 녀석들의 모습에 대번에 상황을 눈치챈 아투카이가 녀석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토비는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당당히 말했다.

"차카이가 길을 알아요! 그치?"

"에, 예! 아, 알아요! 금방 갈 수 있어요···!"

"이 녀석들이!"

아투카이는 아찔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토비는 이미 마음이 굳은 얼굴이었고,

차카이 역시 겁먹은 와중에도 포기하고 싶진 않아 보였다. 두 녀석 모두 말로

해서 말릴 수 있을 것 같은 눈빛은 아니었다.

진철만이 뒤에서 그런 세 캄포니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말없이 입을 우물거리던 아투카이는 갑자기 휙-진철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진철은 그 시선에 어떤 말이나 행동 대신에 그저 가만히

눈을 마주 볼 뿐이었다.

"···좋다. 가거라. 가서 진철을 도와 다름바를 구해오거라."

결국 아투카이는 두 눈을 꾹 감고 그렇게 말했고, 토비와 차카이는 환한 표정

으로 후다닥 진철 가까이 붙었다. 진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복실이 꼬마들

은 지금 자신들이 무얼 하러 가는지 알긴 하는 걸까.

"어쨌든 길잡이가 생겼군."

"내가 앞장설게! 나 아직 길 기억하고 있어!"

차카이는 그렇게 말하며 후다닥 앞장섰다. 토비가 그 뒤를 따랐다.

진철은 그 뒤를 따라 움직이기 전에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캄포니들

이 어머니 나무라 부르는 커다란 나무들과, 그 나무들을 기둥 삼아 벌집처럼

붙어있는 대나무 집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수많은

시선이 있었다.

캄포니들이 진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숲은 이미 어두워졌기에 횃불의 불안

한 불길만이 그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고, 그래서 그 순박한 얼굴 위에서 일

렁거리는 것이 그저 횃불의 흔들거림인지 아니면 그들이 뼛속 깊이 가지고 있

는 불안과 두려움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잠시 그들을 올려다보던 진철은 말없이 몸을 돌려 앞장서는 두 캄포니를 향해

움직였다.

그렇게 떠나는 진철의 뒷모습을 나무 위에서는 수많은 캄포니들이, 나무 아래

에서는 장로 아투카이가 바라보고 있었다. 원시림의 어둠 속으로 떠나는 자는

진철이고 밝은 횃불과 달빛 아래 있는 것은 그들이었으나, 어째서인지 더 환

한 곳으로 나아가는 건 진철인 것만 같았다. 그의 뒷모습은 어둠 속에 묻힐수

록 더 뚜렷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곳에 있던 캄포니들은 모두 그렇게 느꼈다.

*

진철이 입을 열었다.

"냄새를 기억하는 거냐?"

차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한참 나아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멈춰서서

는 흙바닥과 풀숲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코를 킁킁대던 중이었다.

"지금처럼 어두울 땐 눈으로 흔적 못 찾아. 횃불도 못 켜니까."

"그렇긴 하지···"

진철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실, 말과 달리 그는

지금 주변 상황을 알아보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둑한 와중에도 풀과 나

무, 낙엽, 넝쿨, 썩어가는 고목 등등을 알아볼 수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밤눈이 이렇게 좋진 않았다는 걸 알았다. 달빛

이 강한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울창한 숲 덕분에 나무 아래는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더 기묘한 것은 숲에 들어온 후 시야뿐만 아니라 모든 오감이 점점 더

예민하게 살아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낮에 들어와도 이것보다 분명히 주변

을 구분할 것 같진 않았다.

"이쪽이야."

잠시 멈춰서서 킁킁거리던 차카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철은 스스로

의 오감에 기이함을 느끼면서도 천천히 녀석의 뒤를 따랐다.

"잠깐만!"

그때 토비가 낮게 속삭이며 두 사람을 잡았다. 진철의 자세가 자연스럽게 낮

아지며 오른손이 화살을 잡아 시위에 걸었다. 이후 그가 빠르게 주변을 훑었

지만, 이 자리엔 그들뿐이었다.

진철이 물었다.

"왜?"

하지만 토비는 대답 대신에 눈을 감고 허공을 킁킁대기 시작했다. 녀석뿐만

아니라 앞장서던 차카이 또한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허공을 킁킁거렸다. 잠시

후 눈을 뜬 토비가 속삭였다.

"맛있는 냄새가 나!"

"맛있는 냄새?"

어둑한 와중에도 토비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올로그의 솥. 놈들이 끓이고 있는 솥에서 나는 냄새일 거야. 하지만 피 냄새

는 없어! 다름바는 아직 살아있는 거야!"

그즈음 진철 또한 코끝을 스치는 희미한 향을 느낄 수 있었다. 냄새는 굉장히

흐릿했지만 어째선지 절로 침이 고이는 맛있는 향기였다.

"나도 나는군. 이걸로 방향을 잡을 수 있나?"

"진철도 맡았다고? 하지만 진철은 캄포니가 아닌데 어떻게···"

진철의 말에 혀로 코를 핥던 차카이가 놀라서 중얼거렸다. 진철은 개처럼 생

긴 종족답게 냄새 맡기에 자부심이 대단한 모양이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대신

토비가 진철의 말에 대답했다.

"당연히 찾을 수 있지! 이쪽이야!"

두 복실이와 전직 군인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뜀박질이 시작되자

토비와 차카이는 때때로 네 발로 달리며 한밤의 원시림을 내달렸다. 그 모습

이 마치 숲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들개들 같았다.

그리고 진철은 그 들개들의 주인이었다. 울창한 풀숲과 어둠 속에 숨은 수많

은 장애물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두 캄포니와 함께 달리는 그의 속도는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달리면 달릴수록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깊은 숲을 평원처럼 달리길 한참. 진철은 자신이 꽤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어서 울창한 나무와 풀로 가로막혀 있던 시야가 확 트이

는 순간이 왔다.

"돌산이군."

나무 대신 나타난 것은 달빛을 받아 파랗게 빛나는 바위였다. 주변을 확인한

진철은 빠르게 그 바위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원래부터 그렇게 타고 올라가

라고 있는 바위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늦게 따라붙은 토비와 차

카이는 거길 따라 올라가는 대신 헐떡거리며 멈췄다.

"숨이, 숨이 차, 숨이 너무 차, 진철···"

"헥, 헤엑··· 죽겠다···"

헥헥대는 두 녀석을 두고 바위 위에 올라선 진철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 조용히 주변 일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바위가 높았던 덕분에 진철은 이곳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물론 울창한

나무 때문에 보이는 것은 대부분이 그 잎과 가지뿐이었지만, 진철의 눈은 한

번 깜빡거리는 것도 없이 또렷이 주변을 훑어갔다.

다음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찾았다."

달빛도, 별빛도 아닌 붉은 광원이 숲 아래쪽에서 나뭇가지와 잎을 비추고 있

었다. 연기까지 피어나고 있으니 불을 피웠음을 알아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진철은 벌떡 일어나서 그곳을 노려보았다. 불이 피어난 곳은 이 울창한 원시

림 중에서도 그나마 공터라고 할만한 장소였다. 덕분에 그는 막히는 것 없이

그곳에 피어난 모닥불과 그 위에 얹힌 솥,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괴인 셋,

그리고 공터 한구석에 묶인 채 쓰러져 있는 다름바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니들이 올로그냐?"

괴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괴인이었다. 우락부락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몸집과 근육들은 보기만 해도 위협적이었고, 털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머리통은 이마가 아주 좁고 정수리도 심히 낮아 괴상했다.

거기에 눈두덩과 입가까지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어 인간보다는 유인원에 가

까워 보였다. 코가 큰 탈모 고릴라 같은 외모였다. 바지와 가죽끈 따위로 대

충이나마 몸을 가리지 않았다면 그냥 원시인 정도로 여겼을 터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인간과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는 특징은 피부색이었

다. 놈들의 피부는 붉은 모래를 바른 듯 짙은 빨간색이었는데, 모닥불의 빛을

받아 그런 게 아니라 원래 색이 붉은색인 모양이었다.

진철은 활을 들어 시위에 화살을 재웠다. 하지만 그 시위를 당기지는 못했다.

생각보다 모닥불과 그가 선 바위산의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쏜다

고 닿을 것 같지 않았고, 또 맞출 자신도 없었다.

그때 토비와 차카이가 낑낑대며 바위산을 기어 올라왔다.

"진철? 뭐 찾았어?"

"저기. 모닥불과 올로그 셋, 그리고 다름바가 보인다."

"어디, 어디?"

두 캄포니는 진철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녀석 모두 고개를 높

이 빼면서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녀석들의 눈에 보인 것은 불그스름한 광

원과 꾸물거리는 덩어리들, 그리고 피어오르는 연기뿐이었다.

"저기가 보여, 진철?"

"난 키가 크잖냐."

"어, 그, 키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토비의 말은 이 밤중에 저 먼 곳의 모닥불과 사람들을 모두 구분할 수 있느냐

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철은 기이할 정도로 예민해진 자신의 오감을 설명하는

대신 두 녀석을 붙잡고 강하게 말했다.

"너희가 도와줘야겠다."

"뭐든지. 뭘 도와줘야 해?"

"일단 네 친구 먼저 구해야 한다. 무턱대고 습격하면 다름바가 다칠 수도 있어."

"뭘 어쩌려고?"

진철은 불안과 흥분으로 반짝거리는 두 복실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빙

긋 웃었다.

*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이 진짜 무쇠 솥뚜껑을 열었다. 이어서 그 손은 작은 칼

로 푸성귀 따위를 잘게 썰어 솥 안에 떨어뜨렸다. 퐁당퐁당 빠지는 소리와 보

글보글 끓는 소리가 정겨웠다.

이어서 솥뚜껑 손이 허리띠에 걸어 두었던 국자를 뽑아 솥 안을 휘휘 저었다.

손의 주인은 진한 김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국물 한 국자를 떠 홀짝 맛을 보았다.

"크으··· 으헐헐헐헐!"

국물을 맛본 올로그가 만족스러운지 낮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은 다른

두 놈도 솥으로 다가와 기웃거렸다. 그러자 국자 올로그가 둘을 거칠게 밀어

내며 말했다.

"$!#!@! 꺼져!"

공터 구석에 묶인 채 쓰러져 있던 다름바는 마치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에 파르르 몸을 떨었다. 놈들이 하는 말 일부는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그 발성기관의 차이인지 아니면 뭔가 잘못된 말을 쓰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았다.

"힝···"

다름바는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을 애써 참아내며 몸을 웅크렸다.

몸집이 아주 작아 보이면 혹시 먹을 게 없어서 살려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녀석은 애초에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구하러 오리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그러기엔 저 올로그들이 너무 컸다.

하지만 몸집이 작아 보이길, 그래서 살려주길 바랐던 소망은 당연하게도 다름

바를 배신했다. 다른 두 놈을 밀어낸 국자 올로그가 다름바를 향해 돌아선 것

이다. 모닥불을 등진 놈의 얼굴엔 징그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히익···"

"흐흐흐. !@#!@$. 맛있겠군."

다름바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흘렀다.

"사, 살려주세요··· 잡아먹지 마세요···"

"으잉? 잡아먹지 마?"

"네, 네에···"

"크하하하하!"

국자 올로그가 크게 웃자 뒤에 있던 다른 두 놈도 같이 웃었다. 숲이 떠나가

라 큰 목소리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뚝-웃음을 그친 국자 올로그가 섬뜩한 눈으로 다름바를 내

려다보며 말했다.

"안 돼."

"왜, 왜요···?"

"배고프니까."

그렇게 말한 놈은 허리띠에 끼워두었던 작은 칼을 쑥 뽑으며 다름바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그 서슬퍼런 칼날을 마주한 다름바의 몸이 바짝 굳었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낯선 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다.

올로그들의 눈이 휙-소리를 따라갔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공터에 들어서고

있었다.

어둠과 횃불의 경계를 거침없이 넘어 등장한 남자. 그는 진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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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그림은 올로그입니다.

7화

"···"

진철이 등장한 후 그와 올로그들은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보글보글 솥

끓는 소리와 타닥거리는 모닥불 소리, 찌르륵거리는 밤벌레 소리만 공터를 채

웠다.

"진철···!"

묶여있던 다름바가 진철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하지만 조용히 서로를 노려보

는 그와 올로그들의 모습에 목소리를 높이진 못했다.

올로그들은 뜬금없이 등장한 진철에게 무엇 하나도, 심지어 누구냐고 물어보

지도 않았다. 그저 검게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며 거칠게 숨을 몰

아쉴 뿐이었다.

그것은 맹수와 맹수가 마주쳐 본능적으로 상대방을 탐색하는 것과 같았다.

"으르르르···"

서로를 노려보기만 하길 잠시. 올로그들의 목에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놈들의 호흡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올로그 한

놈이 슬쩍 발을 움직였다.

직후 진철의 손이 활시위에 화살을 걸어 쏘았다.

곧게 날아간 화살은 움직이려던 올로그의 발밑에 꽂혔다. 퍽-하는 둔탁한 소

리와 함께 절반 이상 틀어박힌 화살이 파르르 떨었다. 움직이려던 올로그의

몸이 바싹 굳어버린 것은 물론이었다.

진철은 곧바로 다시 화살 하나를 더 걸어 국자를 든 올로그를 겨눴다. 자신을

겨눈 화살을 보며 올로그의 호흡은 한층 더 거칠어졌다.

그리고 그때 진철과 쓰러져 있던 다름바의 시선이 얼핏 마주쳤다. 눈물범벅을

하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름바에게 진철은 슬쩍 한쪽 눈을 윙크해 주었다.

"누구냐?"

국자 올로그의 말이었다. 놈이 먼저 말문을 연 것이다. 그리고 놈의 말은 발

음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캄포니들이 쓰는 말과 비슷했다.

"말이 아주 안 통하는 건 아닌 모양이군."

"뭐? !@#!@#. 누구냐고 물었다. 두 번 묻는 거 !@# 안 좋아한다."

"안 좋아하면 어쩔 건데."

올로그는 진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깊이 생각하기가 싫은지 킁-하고 콧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넌 혼자다. 활도 하나다. @#$$%. 너 죽는다."

놈의 시선이 빠드드드 소리를 내는 진철의 활을 향했다. 진철은 웃었다. 놈이

뭘 말하는지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거리에선 화살을 두 번 쏠 수 없었다. 놈들은 셋이고 화살은 하나. 그러니

자신들이 유리하다는 거겠지. 하지만 진철은 상관없었다. 어차피 지금 그의

역할은 저 근육몬 셋의 시선을 끄는 것뿐이었다.

그런 진철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국자 올로그가 대뜸 앞으로 발걸음을 내

디뎠다. 진철은 화살을 쏘는 대신에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올로그는 그걸

보곤 진철이 겁을 먹었다 생각했는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진철···"

뒤쪽에 있던 다름바는 그런 진철과 올로그들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뭔가 도

움을 주어야 할 것 같은데, 당장 자신은 묶여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다름바의 입을 조그만 털북숭이 손이 감싸 쥐었다.

깜짝 놀란 다름바가 돌아보니 그곳엔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는 토비와 차카

이가 있었다. 녀석들의 손에는 작은 칼이 들려 있었다.

진철은 올로그들 뒤편에서 녀석들이 다름바의 포박을 끊어내기 시작하는 걸

보며 계속 물러섰다. 간단한 계획이었다. 그가 앞에서 올로그들의 시선을 끌

고, 공터를 멀리 돌아간 토비와 차카이가 다름바를 구해 도망치는 것. 문제는

이 계획의 위험성 대부분을 끌어안은 것이 진철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밥값을 해야지."

진철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성큼 발을 디디던 국자 올로그가 다시 고개를 갸웃

거렸다. 다른 올로그 두 놈도 슬그머니 진철의 좌우를 포위하려 움직이고 있

었다.

"근데 진짜 누구냐? 왜 갑자기 나타나서 지랄이냐?"

국자 올로그의 말이었다. 놈은 진철의 생김새를 지긋이 노려보면서 계속 턱을

갸웃거렸다. 놈의 눈에 진철의 모습은 낯설기 그지없었던 탓이었다.

에사이라기엔 귀가 너무 짧았고, 그렇다고 올로그라기에는 생김새가 너무 달

랐다. 생선처럼 생기진 않았으니 바이카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진철의 피부색

은 그 어떤 종족들과도 달랐다.

"내가 누군지 알면 어쩔 건데. 신분 확인하고 여권 하나 찍어서 집으로 보내

줄 거냐?"

"여권?"

쓸데없는 잡소리를 하는 동안 진철은 다섯 걸음 정도를 물러섰다. 그건 올로

그들도 그만큼 앞으로 다가왔다는 뜻이었고, 복실이 삼총사가 포박을 풀고 슬

금슬금 물러날 정도로 시간을 벌었음을 말했다.

진철을 골똘히 노려보는 국자 올로그를 제외한 나머지 두 놈은 그쯤부터 당장

이라도 진철의 좌우를 덮칠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놈들의 손에는 언제 들었는지 제각각 묵직한 도끼 하나와 넓적한 칼 한 자루

씩이 들려 있었다. 웃통을 벗고 다니길래 원시인 수준인 줄 알았는데 그놈들

날붙이는 한밤에도 시퍼렇게 빛나는 강철이었다.

"거 존나게 씩씩대네. 숨 좀 살살 쉬어, 새끼들아."

그 칼날을 보고서도 진철은 괜히 틱틱대며 다시 올로그들의 주의를 다시 끌었

다. 복실이 삼총사가 꼬물꼬물 공터 밖으로 물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녀석들이 도망칠 때까지 잠깐 버틴 후엔 진철도 화살 하나 날리고 후다닥 튈

작정이었다.

물론 생각대로만 되는 세상일이란 없는 법이다.

툭-하는 소리와 함께 물러나던 복실이 삼총사의 움직임이 멈췄다. 소리의 근

원은 토비의 발밑에 있던 나뭇가지. 동시에 국자 올로그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복실이 삼총사와 눈이 마주친 국자 올로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놈은 다시

진철에게 몸을 돌리며 입을 쩍 벌렸다. 그 입에서 야수의 포효가 터져 나왔

다. 올로그들의 눈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짧은 순간 진철은 판단을 마치고 캄포니들에게 외쳤다.

"뛰어!"

그리고 국자 올로그를 겨누고 있던 시위를 놓았다. 마법처럼 날아간 화살이

국자 올로그의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직후 놈의 상태를 확인할 새도 없이 왼편에서 올로그의 도끼가 떨어져 내렸

다. 진철은 새 화살을 거는 대신 활대를 들어 도끼날을 막아야 했다.

캄포니들은 당기지도 못할 정도로 굵던 활대가 퍼석-부러졌다. 대신 진철의

머리통을 노리던 도끼의 경로는 틀어졌다.

진철은 그대로 부러진 활대를 양손에 들고 상대의 얼굴을 번갈아 후려쳤다.

쫙쫙 채찍 소리가 나며 놈의 머리가 휘청거렸다.

물러서는 놈을 따라가며 계속 공격하고 싶었지만, 이번엔 오른쪽에서 큰 호선

을 그리며 내려오는 칼이 문제였다.

반사적으로 오른손의 반쪽 활대를 들어 막았더니 그 굵은 것이 또다시 반으로

뚝 부러졌다. 그래도 정수리에 칼 박히는 것은 막았다. 직후 진철은 부러진

활대를 놓아버리고 칼 든 놈의 낯짝에 냅다 왼 주먹을 꽂아주었다.

으적-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칼 든 놈이 뒤로 쓰러졌다. 놈의 콧대는 망치

에 얻어맞은 듯 무너져 있었다.

그때 휘청거리며 물러서던 도끼 든 놈이 함성을 내지르며 정신을 차렸다. 놈

은 도끼를 양손으로 쥐고 머리 뒤로 크게 당겼다. 장작을 패듯 진철의 머리통

을 찍어버릴 작정인 듯했다.

진철은 무언가 생각하는 대신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놈의 머리통을 향해 오

른발로 휙 뒤돌려차기를 날린 것이다.

그의 발끝이 바람처럼 놈의 턱을 스쳤다. 그러자 놈의 크고 각진 턱이 덜컥

흔들리더니, 이내 놈의 눈이 맹-하게 풀렸다. 등 뒤까지 당겼던 도끼는 그대

로 툭 떨어져 소리를 냈다. 그렇게 도끼를 놓친 녀석은 그대로 앞으로 엎어져

버렸다.

"후-"

짧은 격돌의 순간이 지나고 진철은 이제까지 참아왔던 호흡을 크게 내뱉었다.

그 자리에서 복싱 스텝을 밟듯 가볍게 통통 뛰기까지 했다.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생각보다 할 만하다는 것이었다.

올로그들의 외형은 그야말로 전사 그 자체였다. 우락부락한 인상은 물론 차돌

이 박혀 있는 듯한 근육들은 그 모양만으로도 충분한 위협이 되었다. 만약 길

거리에서 이런 사람을 만났다면 얌전히 눈 깔고 발걸음만 재촉했을 것이다.

손에 소총이라도 쥐여주기 전에는 절대 싸우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는 이야기다.

사실 열심히 만들기는 했으나 진철은 활을 쏴 본 경험이 짧았다. 기껏해야 전

쟁 전에 실내 양궁장 같은 곳에서 친구들과 시위를 당겨본 게 전부였으니, 따

지고 보면 없다고 해도 좋았다.

그래서 먼저 올로그들을 발견했음에도 저격이나 기습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

다. 막말로 국자 든 놈을 겨누고 쐈는데 대뜸 복실이의 머리통에 화살이 꽂힐

수도 있었다. 진철이 본인 목숨을 걸고 올로그들 앞에 섰던 건 그런 이유에서

였다.

"풍선 근육이냐? 이거 약쟁이들도 아니고···"

순간의 흥분이 가라앉자 진철은 슬쩍 입가에 웃음을 띠며 쓰러져 꿈틀대는 올

로그 두 놈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맨몸으로 이 두 놈을 쓰러뜨렸으니 가슴 한

켠에서 뿌듯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토비의 외침이 들렸다.

"진철!"

퍼득 고개를 들어보니 보인 것은 조그마한 검은 구멍이었다.

가슴팍에 화살을 달고 일어선 일그러진 얼굴의 올로그. 국자를 들고 있던 놈

이다. 그리고 놈의 손에 들린 것은 그 세부적인 모양은 달랐으나 어쨌든 현대

인이라면 대충 알아볼 수 있는 형태의 그것, 이런 장소에서 뜬금없이 만나리

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그것.

바로 권총이었다.

뭘 어쩌기도 전에 그 검은 구멍이 불을 뿜었다.

"컥···"

망치로 가슴팍 한가운데를 찍은 듯 묵직한 느낌이 드는 동시에 덜컥 숨이 막

혔다. 통증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저 귓가에 핑-하는 이명이 들릴 뿐이었

다. 그리고 풀썩 무릎이 풀려 꿇어앉을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내려 가슴팍을 바라보니 캄포니들이 만들어 준 그의 옷에 시커멓고 큼

지막한 구멍 하나가 뚫린 게 보였다. 그제야 어떤 화끈함이 전신을 휘감았다.

"크흥-!"

대뜸 총알을 갈긴 국자 올로그 놈이 성큼성큼 진철 앞으로 다가와 콧김을 뿜

었다. 놈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진철을 바라보며 자신의 권총 뒤쪽 뭉치를 당

겼다. 그러자 빈 탄피가 덜그럭 튕겨 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진철이 멍하니 보고 있자니 놈은 허리춤에서 본인 엄지손가락만 한 탄환 하나

를 꺼내 권총 뒷부분에 끼우고 뭉치를 조정해 재장전을 마쳤다. 그러니까 저

건 큼지막한 대구경 탄환 한 발을 갈기는 단발 권총인 셈이었다.

중기관총도 아니고 저딴 만들다 만 듯한 권총 한 발에 죽는다니. 진철은 허탈

함을 느끼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이상한 식물공장도 있는데 총기가 없으

리라 생각한 게 실수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이건 반칙 아니냐고.

문득 공터 저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캄포니 녀석들이

보였다. 도망치라 외쳤는데 왜 아직도 거기 있는지 모를 녀석들. 겁먹고, 놀

라고, 슬픈 얼굴. 그 강아지 같은 얼굴을 며칠이나 보았다고 그 감정이 다 보

였다.

그리고 그 너머. 녀석들의 뒤쪽, 숲의 그림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 진철은 이미 반쯤 자신

의 죽음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지난 며칠간 겪은 캄포니 마을의 놀라운 경험

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오히려 그 환상적이면서도 목가적인 캄포니들의 모습

이 자신의 죽음을 확신시켰다.

지하에 공장형 스마트팜을 가진 거대한 거주형 나무와 그곳에서 사는 유사 강

아지 인간들. 낯선 자신에게도 별다른 차별 없이 친절하고 순박한 그들.

불과 며칠 전까지 미사일과 총탄이 날아다니던 전장에서 살던 그의 상식선에

서는 이런 어린이 만화 속 같은 장소에 떨어진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

다. 마치 판타지 영화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가능성 높은 결론도 결국 환상적일 수밖

에 없었다.

농담조로 이세계 진입이니 마법이니 중얼거렸지만, 사실 진철은 자신이 지금

죽음 이후 짧은 환상을 겪고 있는 것 아니면 저승 가기 직전 단계에 있는 것

이라 믿었다. 그가 지난 며칠간 겪은 모든 일은 노곤한 여름밤 꿈처럼 사라질

환상에 불과하리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환상 속이기에 더더욱 저 캄포니 꼬마들을 구하고 싶은 것일지

몰랐다. 인간이 장난처럼 갈려 나가던 전장 속에서 죽지 않기 위해 남을 죽이

던 그에게, 작은 생명이지만 그에게 따듯하던 캄포니들을 구한다는 것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충족감을 주었다.

그것은 설령 지금 이 순간이 죽음 후의 환상이거나 연옥의 그림자일지라도 충

분히 목숨을 걸만한 대가였다.

이제 저 원시림의 어둠이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죽은 전우들이, 또 그가 죽

인 적군들이 짙은 그림자 속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의 유예가 끝나

그에게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하아···"

마른 날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 나갔다. 마지막 호흡일까? 그렇진 않았다. 죽

음의 그림자 아래, 아직 자신을 바라보는 복실이 꼬맹이들이 있었다. 저 녀석

들이 도망칠 시간은 벌어야 했다. 이것이 마지막 순간이라면 이제 남은 모든

힘을 터뜨릴 시간이었다.

다시 들숨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인간 강진철이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였을 때. 가슴팍

에 무식한 굵기의 권총탄을 맞은 그의 육신은 도리어 위기 속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일만 년 동안 동면 상태에 빠져있던 육체는 지난 며칠간 충분한 영양분과 휴

식을 통해 활발히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 임계점을 향해 나

아가던 몸은 지금 이 순간 총격이라는 강렬한 충격을 겪고 본능에 따라 폭발

적으로 활동량을 늘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만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폭발한 격류였다.

"킁···"

한편 진철에게 총알 한 방을 먹여준 국자 올로그는 낑낑대며 자신의 가슴팍에

박힌 화살을 뽑으려 했다. 그는 무릎 꿇은 진철에 대해서는 이미 반쯤 신경을

끈 상태였다. 아티팩트를 뒤집어쓴 에사이나 용맹한 올로그가 아닌 이상 가슴

팍에 정통으로 총을 맞고 멀쩡한 종족은 없었다.

저놈은 아무리 봐도 둘 다 아니니 상황은 종료된 셈이었다. 도리어 그는 먹을

것이 늘어난 상황에 내심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지금 가슴팍에 박힌 화살만

없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으엉?"

그런데 그런 국자 올로그의 눈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그건 그의 앞에

꿇어앉은 이름 모를 놈의 머리카락이 갑자기 스르르륵 길어지는 장면이었다.

손가락 한 마디쯤 되어 보이던 놈의 검은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몇 뼘짜리 장

발이 되었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국자 올로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그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어느새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머리카락 속에서 번뜩 자신을 노려보는

안광 두 줄기였다.

"너···"

그 순간 꿇어앉아 있던 진철의 왼발이 훌쩍 움직여 앞으로 한 발을 디뎠다.

쿵-하는 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천둥 같았다.

"진철!"

걱정과 슬픔에 빠졌던 캄포니 녀석들이 환하게 웃으며 진철을 불렀다. 그 환

호에 대답하듯 진철의 몸이 천천히 일어서려 했다.

"어딜!"

하지만 녀석들의 목소리에 정신 차린 것은 진철뿐만이 아니었다. 국자 올로그

역시 진철의 안광에서 벗어나 재빨리 권총을 들어 앞으로 겨눴다. 이번엔 확

실히 끝내겠다는 듯 진철의 미간 사이를 노린 겨냥이었다.

안광으로 빛나는 진철의 눈은 그 총구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직후 그 총구가 불을 뿜었다.

동시에 진철의 머리가 아래로 훅-낮아졌다. 소리보다 빠르게 날아간 탄환은

그의 정수리 부근을 스쳐 지나갔다.

"뭣-"

국자 올로그의 황당함 섞인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바닥으로 웅크렸던 진철

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동시에 마치 어떤 채찍이 공기를 찢어버리는 듯한 소리가, 그리고 그 끝에선

가죽으로 만든 북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채찍은 진철의 주먹이었고 터져나간 북은 국자 올로그의 머리통이었다.

8화

*

토비는 쒜에엑-하는 날카로운 소리에 이어 쫘악-하고 귀가 찢어지는 듯한 타

격음에 순간이지만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확히는 그것이 올로그

의 머리통을 맨주먹으로 박살 내는 장면이었기에 그랬다.

그러나 녀석이 무슨 느낌을 받았든 간에 시간은 흘렀고, 머리가 으깨진 올로

그의 몸뚱이는 휘청 쓰러졌다.

벼락같은 일격 후 몸을 바로 세운 진철은 그 앞에 우뚝 서서 시체를 내려다보

고 있었다. 흔들리는 모닥불의 빛이 그의 얼굴을 흔들었다. 야영지엔 그 모닥

불 타는 소리만 남았다.

"···진철?"

토비의 목소리에 진철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속에서 어

떤 당혹감을 품고 있던 눈동자는 금방 빛을 되찾았다. 그는 캄포니들에게 다

가가며 말했다.

"괜찮냐?"

"에? 우리?"

"그래, 너희."

토비는 멍청한 표정으로 진철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총 맞은 사람이 다른

멀쩡한 쪽을 걱정하고 있는 상황에 머리통이 살짝 고장 난 모습이었다.

그 표정을 본 진철 역시 자신의 질문이 조금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바람 빠지

는 웃음을 흘렸다.

"풍선 근육처럼 총알도 불량품을 썼나?"

진철은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본인의 가슴팍을 더듬으며 내려다보았다. 온몸

이 화끈하고 저리는 듯하던 고통이 잠깐 사이에 확 가라앉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덕분에 피범벅이 된 오른 주먹이 눈에 띄었다.

"···역시 여긴 이세계?"

사람 주먹 또한 뼈와 살, 근육으로 이루어졌을 텐데, 같은 살과 뼈를 마치 두

부처럼 박살 내놓은 상황에서 당장 진철이 내놓을 수 있는 결론은 결국 그딴

것뿐이었다. 심지어 이쪽 주먹의 피범벅은 오롯이 올로그의 피뿐이었다. 진철

의 주먹은 고작 살갗이 조금 까진 정도였다.

"전쟁통에 기절했다 정신 차려보니 이세계 권왕···?"

"권왕? 그게 뭐야?"

"착한 캄포니는 알 필요 없단다."

진철은 대충 대답해주며 오른 주먹의 피와 살점을 툭툭 털어냈다. 조금 전의

다짐과 마음, 생각이 무색하게 몸뚱이는 멀쩡했다. 게다가 의식하고 한 것은

아니지만 무려 눈앞의 권총을 격발 순간 피한 상황이었다. 그는 살아있었다.

너무나 분명하게.

"···그럼 살아야지."

그는 한숨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진철을 올려다보던 토비는 이내 고개

를 휘휘 흔들더니 정신을 차렸다는 듯 말했다.

"됐다! 이제 도망치자, 진철!"

"다 쓰러뜨렸는데 뭘 또. 그러지 말고 이놈들 짐이나 좀 털어보자고. 권총이

있었잖아. 아니 그리고 이놈의 머리카락은 왜 갑자기 길어진-"

그 순간 탕-하는 총성과 함께 무언가 진철의 턱 끝을 스쳤다.

잠깐 석상처럼 굳었던 진철의 고개가 스윽 총성이 울린 곳을 바라보았다. 그

곳엔 조금 전 진철의 주먹에 코가 무너졌던 올로그 한 놈이 어설픈 자세로 권

총을 들고 있었다. 여태 조용히 있던 놈이 국자 올로그가 들고 있던 권총을

냉큼 주워 들어 쏜 것이었다.

"헉!"

진철과 눈이 마주친 놈은 허겁지겁 권총 뭉치를 당겨 탄피를 꺼내고는 다급히

시체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허둥거리는 놈의 손길에 온갖 보푸라기와 탄환

이 쏟아져 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차분하게 해도 몇 초는 걸릴 동작을 그렇

게 버벅거리니 일 분을 줘도 재장전은 힘들어 보였다.

진철은 굳은 얼굴로 놈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오, 오지 마라! 거기 멈춰라!"

코 깨진 올로그는 코맹맹이 목소리로 외치며 계속 손을 움직였다. 그래봐야

덜덜 떨리는 손아귀는 계속 탄환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정말 진철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니, 도리어 어딘가 살짝 질린

표정으로 뒤로 한 발짝 물러서기까지 했다. 올로그는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얼

른 바닥에 떨어진 탄환을 주워 재장전을 마쳤다.

놈은 끝내 공이까지 철컥 당긴 후 진철을 겨누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헤, 헤헤··· @#$$! 멈추라고 진짜 멈추다니! 멍청이냐?"

"멍청이는 네가 아닐까."

"뭐?"

그때 올로그의 뒤쪽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딱딱딱딱-하는 혀를 튕기는 듯

한 소리. 소리를 죽여 움직이는 은밀한 걸음걸이. 그리고 뒤통수 가까이 느껴

지는 숨결. 올로그의 붉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놈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파충류 포식자의 눈이 놈을 노려보고 있었다.

"으, 으아-"

비명이 제대로 울려 퍼지기도 전에 포식자의 거대한 아가리가 올로그의 머리

통을 와작-씹어버렸다. 이어서 몸통을 그대로 들어 벌컥벌컥 물을 삼키듯 목

안으로. 진철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장

면을 실제로 눈앞에서 마주하게 된 순간이었으니까.

어둠 속에서 보이는 몸길이가 적어도 7, 8미터는 되었다. 높이는 그 움직임

때문에 제대로 감을 잡을 수 없었으나 머리통이 올로그를 으적으적 씹어버릴

정도로 크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거기에 앙증맞은 크기의 앞발까지.

"이세계에는 티라노도 사는 거냐···"

"진철! 지금 이상한 소리 할 때가 아냐!"

오히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토비와 캄포니들이었다. 녀석들은 멍청히 포식

자만 올려다보는 진철을 붙잡아 흔들었다.

"빨리 도망쳐야 해, 진철!"

"어? 아, 아아. 그렇지. 잡아먹힐 순 없지··· 근데 저거 진짜 공룡···"

"진철!"

"어어···"

그렇게 진철이 뒤로 몇 발짝 물러섰을 때였다. 올로그를 꿀떡꿀떡 삼키던 공

룡-일단 진철의 눈에는 티라노처럼 보였다. 대충 포식자 공룡처럼 생겼다는

말이다-이 휙 고개를 돌려 이쪽을 노려보았다. 진철과 강아지들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하나 먹었으면 그만이지. 안 그래?"

"···카알티사라는 한 번에 하루 종일 #$@#$ 한 마리를 먹어 치우기도 해."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듣냐. 그냥 캄포니로 계산해 봐."

"에? 어··· 그러면···"

진철과 토비의 속삭임이 이어지는 동안 공룡의 머리가, 정확히는 자세가 점점

낮아졌다. 그리고 놈의 목에서 또다시 딱딱딱딱-하는 혀 차는 소리가 울렸다.

흉포한 짐승의 소리라기보다는 어떤 새가 우는 소리 같았다.

"···대, 대충 한 스물? 캄포니 스무 명은 되지 않을까?"

"씨발, 아귀 새끼였네. 그럼 지금 저게 우리도 잡아먹으려 각 보고 있는 거라

이거지."

놈의 머리가 낮아지는 만큼 진철의 자세도 점점 낮아졌다. 마치 둘 모두 서로

를 향해 전력 질주를 하기 직전 자세를 잡는 것 같았다. 놈의 불타는 듯한 세

로 동공과 진철의 검은 눈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진철이 말했다.

"튀자."

다음 순간 진철의 손이 후다닥 토비를 머리 위에, 양손엔 차카이와 다름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냅다 뒤로 돌아 달렸다.

까-아아아-악-!

갑작스러운 그들의 도주에 공룡의 입에선 찢어지는 괴성이 터져 나왔다. 이어

서 올로그 캠프의 모닥불과 냄비를 걷어차고 쿵쿵 소리를 내며 진철의 뒤를

쫓아 달려오기 시작했다.

"저 새끼 입에서 왜 까마귀 소리가 나와!"

"까마귀가, 뭔지는 몰라도, 카알, 티사라는, 원래, 저렇게, 울어!"

토비는 진철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흔들거리면서도 대답을 내놓았다. 진철

은 어릴 적 보았던 영화 속 티라노의 웅장한 포효와 환상이 살짝 깨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쓰러진 아름드리나무 하나를 훌쩍 뛰어넘었다.

뒤이어 달려온 카알티사라가 머리통으로 그 아름드리나무를 와자작-박살 내버

렸다.

까아-아아-악-!

"염병! 저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새끼야!"

"소리! 그리고, 피 냄새! 올로그들이, 카알, 티사라를, 불러들였어!"

피 냄새는 내가 만든 거잖냐. 아닌가, 어쨌든 다름바를 해체했을 테니 결국

피 냄새는 났으려나.

등 뒤에서 공룡 한 마리가 쫓아오는 상황에도 진철은 머릿속에는 엉뚱한 생각

이 돌았다. 하지만 그 잡생각과는 달리 몸은 바위와 쓰러진 나무, 구덩이 등

등을 가볍게 휙휙 뛰고 피하며 바람처럼 질주하고 있었다. 양 옆구리에 끼인

차카이와 다름바는 제대로 앞도 보지 못하고 진철의 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렇게 등 뒤에 유사 티라노사우르스를 달고 질주하길 잠시. 목말을 타고 있

던 토비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 진철의 머리카락을 당겼다.

"진철!"

"왜!"

"저 앞에!"

허리를 낮춰 나뭇가지 하나를 피하던 진철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도 굳

었다.

"아. 엿 됐네."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거대한 칼로 단면을 가른 듯 직각으로 치솟은 절벽

이었다. 웬 바위산 하나가 성벽처럼 치솟아 길을 막은 것이다. 아, 저거 아까

올라갔던 그 바위산인가?

진철은 얼른 옆으로 경로를 바꿔 달리려 했지만, 그 잠깐의 멈칫거림 사이에

카알티사라가 훌쩍 뒤를 따라잡았다.

놈과의 덩치 차이 때문에 옆으로 달리면 금방 따라붙어 그 커다란 아가리를

벌릴 것이 분명했다. 결국 진철은 절벽을 등진 채 놈을 마주 보게 되었다.

"···시발."

양 옆구리와 뒤통수에서 캄포니 녀석들의 떨림이 느껴졌다. 앞을 가로막은 카

알티사라는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뒤따라오던 주제에 그 공포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듯 머리를 낮게 깔고는 예의 그 혀 차는 소리를 냈다. 마치 다 잡

은 먹잇감을 비웃는 듯한 소리였다.

"···"

잠시 놈의 눈을 마주 보던 진철은 천천히 옆구리에 끼고 있던 녀석들을 내려

놓았다. 달달달 떨던 녀석들이 화들짝 놀라 진철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목말

을 타고 있던 토비까지 들어 내려놓았다.

"지, 진철?"

그리고 허리띠에 끼워 놓았던 흑백의 손잡이를 꺼내 들었다. 이어서 그 손잡

이 끝에서 챙-하는 맑은 쇳소리와 함께 길쭉한 백색 칼날이 솟아났다.

"뒤로 가 있어라."

"진철! 카알티사라는 올로그 한두 명하고는 완전 다른···"

"가 있어. 괜찮으니까."

진철의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결국 캄포니들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카알티사라의 파충류 세로 동공이 그 장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캄

포니들은 물러섰지만 진철은 도리어 앞으로 몇 발짝 다가왔기 때문일 터였다.

진철은 그런 놈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무모증 고릴라에 이어 공룡? 중세 판타지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원시 판타지라니. 장르가 뭐 이래."

카알티사라의 목에서 다시 딱딱딱딱-혓소리가 났다. 진철을 위협하는 듯했다.

진철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고 칼을 어깨에 걸친 채 자세를 낮췄다. 그것은 어

찌 보면 야수 두 마리가 서로에게 달려들기 직전처럼 보였다.

"···"

그렇게 캄포니들은 숨을 죽이고 진철과 카알티사라가 서로를 노려보길 잠시.

카아-악-!

카알티사라가 입에서 째진 괴성이 터뜨리며 진철을 향해 아가리를 쩍 벌린 채

달려들었다. 진철 역시 놈을 향해 마주 달렸다. 목표는 놈의 넓은 두 다리 사

이였다. 그 사이로 슬라이드 하듯 휙 빠져나간 뒤 놈의 뒤를 친다는 것이 짧

은 순간 그가 생각한 계획이었다.

문제는 만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깨어난 그의 육신이었다.

"엇!"

그냥 앞으로 달릴 적에는 크게 상관없었으나 어느 작은 틈을 향해 움직이자

문제점이 드러났다. 그의 몸은 초인이 되었으나 정신은 아직 거기에 적응할

시간이 없었다.

결국 진철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훨씬 강하게, 훨씬 당황한 채 카

알티사라의 한쪽 발목을 향해 의도와는 다른 몸통 박치기를 날렸다. 그나마

그 짧은 틈에 몸을 틀어 어깨로 들이박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카아-악-!

당황한 것은 카알티사라도 마찬가지였다. 조그만 먹잇감이 갑자기 휙 사라지

더니 무언가가 강하게 발목을 후려쳐 앞으로 자빠져 버렸다. 균형을 잃은 놈

은 그대로 앞으로 나뒹굴었다. 그렇게 진철과 카알티사라 모두 넘어져 엉망진

창으로 구르게 되었다.

흙과 썩은 낙엽이 흩날렸다. 넘어진 둘 모두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버

둥거렸기에 바닥에 있던 것이 사방으로 날린 것이다.

둘은 그렇게 후다닥 자세를 바로잡고 다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당혹감 때문인

지 양측 모두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 순간 진철은 흘끗 오른손에 든 칼을 바라보았다. 어깨를 들이박고 넘어져

나뒹구는 동안 용케 그 칼날에 베이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제 칼로 제 배

를 찌를 뻔했다.

그는 활을 쓸 때처럼 이렇게 긴 칼을 쓰는 법에는 미숙했고, 알았다 쳐도 저

런 공룡을 상대로 칼 쓰는 법과 인간을 상대로 한 것은 완전히 다를 터였다.

그러니 결국 지금 믿을 것은 본능뿐이었다.

"···후."

호흡을 가다듬은 진철이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카알티사라를 노려보았다. 반

대로 놈은 흥분한 듯 씩씩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과 머리를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때 진철이 달렸다.

카아-아-악-!

진철이 달려오는 것을 본 놈 역시 주둥이를 쩍 벌리며 마주 달려왔다. 이번엔

다리를 노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머리가 바닥에 깔리듯 낮았다. 그

럼 고맙지.

진철의 발이 훌쩍 바닥을 뛰어올랐다. 낮게 깔리던 카알티사라의 머리가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 공중의 정점에서 진철의 몸이 날렵한 체조선수처럼 회전했

다. 동시에 자신을 따라오는 카알티사라의 정수리를 향해 쑥 칼을 집어넣었다.

백색 칼날이 진흙을 찌르고 나오듯 깔끔하게 살갗을 빠져나왔다.

정점을 지난 진철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깨끗한 착지는 없었다. 진철은 칼

을 놓치고 그대로 우당탕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몸이 아프거나 말거나 그는

퍼뜩 고개를 쳐들고 카알티사라를 바라보았다.

"···"

카알티사라는 머리를 높게 든 모습으로 굳어 있었다. 놈의 눈이 별바다로 반

짝이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물감이 흐르는 듯한 파충류의 눈동자 속에

서 은하수가 함께 흘러넘쳤다.

그리고 휘청, 이윽고 놈의 육중한 몸뚱이가 쿵-하고 쓰러졌다.

놈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진철도 푹-한숨을 내쉬었다. 이세계 티

라노도 머리통에 뇌가 들어찬 것은 같은 모양이었다. 혹시나 '내 뇌는 사실

가슴 쪽에 있었지롱' 하며 방방 날뛰면 어쩌나 싶었는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느릿하게 일어나고 있으려니, 뒤로 물러섰던 캄포니 녀

석들이 호다닥 달려와서 호들갑을 떨었다.

"와! 와아-! 굉장해! 카알, 카알티사라를 혼자서···!"

"진철! 진철 멋있다! $@%#!!"

"시발! 진철 시발이다! 씨발!"

마지막은 뭐야. 진철의 손이 휙 움직여 토비의 정수리에 꿀밤을 먹였다.

"으악! 진철! 머리 깨질 것 같아!"

녀석의 비명에 진철이 움찔 놀랐다. 그도 그럴게 조금 전 그 주먹으로 무모증

고릴라의 머리통을 박살 낸 참이었다. 진철은 놀라서 얼른 녀석의 머리를 살

폈다.

"···헤헤."

"에라이."

하지만 녀석은 혓바닥을 내밀고 헤헤 웃기만 할 뿐이었다. 진철은 녀석의 엄

살에 뭐라 화를 더 낼 수 없었다. 방금 유사 티라노사우루스 한 마리를 물리

치고 그러기엔 힘이 남아나질 않았다.

진철은 흙바닥에 그냥 철푸덕 앉아서 강아지 세 녀석이 자신을 둘러싼 채 호

들갑을 넘어 빙글빙글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전직 군인은 두 발로 걷는 강아지 셋이 정수리에 구멍 뚫린 공룡 사체

를 앞에 두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광경을 구경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하늘은 검푸르게 밝아오고 있었다.

분명 서늘하기 그지없을 새벽의 공기가 어째선지 아늑하게 주변을 둘러싸는

것만 같았다. 어둡기만 하던 숲의 저층이 잎사귀와 가지 틈으로 스며들기 시

작한 햇살로 은은히 빛났다. 그 어둠 속에서 이리 오라 말하던 그림자들은 그

햇살에 너무나 간단히 흐려져 버렸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던 진철은 알 수 없는 허탈함에 픽-웃어버렸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9화

문득 눈이 떠졌다.

"···"

그렇게 뜬 눈에 보인 것은 낯선 천장. 아니, 이젠 조금 익숙해진 대나무 천장

이었다. 진철은 그 연속된 가로줄 세로줄의 연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가슴팍이 뭔가 축축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어보니, 토비가 그 위

에 머리를 대고 새근거리며 자고 있었다. 축축한 느낌은 녀석의 입에서 질질

흐른 침이었다.

"짜식이 더럽게···"

진철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녀석이 깨지 않게 조심스러운 손길로 머리를 들

어 옆으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가슴팍을 바라보게 되었다.

거기엔 동전보다 작은 흉터 하나가 남아 있었다. 어제까진 상처였던 놈이다.

"···가죽이 두꺼워졌나?"

토비 녀석들을 구해 마을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이 그 상처였다. 가

슴팍 한 가운데 총상. 그러나 뭉개진 총탄은 근육을 뚫지 못하고 피부 바로

아래에서 나왔고, 그나마 찢어놓은 피부 또한 하룻밤이 지나니 반쯤 아물어

흉터가 되어 있었다.

총 맞은 상처 정도는 당연히 구분할 수 있었다. 그 정도도 못 알아보면 전쟁

터에서 구른 시간이 아까웠다. 하지만 이런 회복 속도와 총탄도 뚫지 못하는

근육층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그런 놈들이 있었다. 약물을 맞고 초인 병사가 되어 날뛰

던 광전사들. 맨몸으로 소총탄을 뚫고 달려와 맨손으로 전우들을 찢어 죽이던

괴물들.

"···씨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깊이 생각하자니 떨쳐낼 수 없는 어떤 그림자들이 몰려오는 것 같아 진철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렇게 일어나니 식당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강아지들이

보였다. 함께 굴러다니는 술병들 또한. 지난밤의 광란을 엿볼 수 있는 광경이

었다.

놀랍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캄포니들은 술을 담가 먹을 줄 알았다. 아무 때

나 먹는 것은 아니고 중요한 행사나 좋은 일이 있으면 지하 깊숙한 곳에서 숙

성하던 것을 꺼내와 마셨다. 처음엔 캄포니들의 이미지를 생각해 달달한 과일

주 정도를 생각했는데 입에 대고 보니 아주 진한 독주였다.

캄포니들은 그걸 병째로 들고 신나게 마셔댔다.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게 그

순간만은 주정뱅이들이 따로 없었다. 그들은 작은 북과 피리로 신나는 노래를

연주하며 고주망태가 되었다.

진철은 일어나 앉은 채로 술 냄새를 풀풀 풍겨대는 캄포니들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 웬일로 일어나 있었군."

그때 문 쪽에서 캄포니 하나가 햇살을 등지고 등장했다. 다른 캄포니들에 비

해 늙수그레한 얼굴. 아투카이였다. 진절은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어제 함께하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허허. 나도 체면이 있지. 명색이 장로인데 저 녀석들처럼 꽥꽥 소리나 지를

순 없잖은가. 나도 나이 많은 놈들끼리 알아서 적당히 마셨으니 걱정하지 말게."

"그럼 다행이고요."

진철은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자연스레 입에선 하품이 새어 나왔다. 아

투카이는 그런 진철과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젊은 캄포니들을 바라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이것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오늘 중으로 준비가 끝나야 내일 문제

가 없을 텐데."

"준비? 무슨 준비요?"

"무슨 준비는. 거래 준비지."

반쯤 졸면서 얼굴을 비비적거리던 진철의 손이 멈췄다. 거래. 강줄기를 타고

오는 바이카 상인들. 도시로 갈 수단.

"그 상인들이 옵니까?"

"정확히는 우리가 가야지. 그들과의 거래를 위해 이용하는 $#@$가 있다네."

"$#@$?"

아투카이가 손짓, 발짓을 섞어 설명했다.

"부두? 배를 댈 부두가 있다고요?"

"그래. 거기서 하룻밤을 기다리면 바이카 상인들이 배를 댄다네. 그러면 그들

은 농작물이나 담가둔 술 따위를 가져가고, 대신 소금과 생필품으로 내놓는

게야."

진철은 벌떡 일어섰다. 그 덕분에 자고 있던 토비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져 으악! 비명을 지른 녀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 어? 뭐?"

"그만 일어날 시간이다."

"에? 벌써?"

"그래 요 녀석아."

정신 못 차리는 녀석을 두고 아투카이에게 다가가니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는 쉬고 있게. 아이들을 구해준 은인에게 일을 시킬 순···"

"무슨 소립니까. 그냥 같이 빨리빨리 해치우죠."

"으음. 정 그렇다면야."

"에, 장로님? 아침부터 무슨 일···"

옆으로 따라온 토비가 비몽사몽 정신을 못 차리고 있자 아투카이의 손이 녀석

의 머리를 꽁 내려찍었다. 꿀밤을 맞은 녀석이 아프다고 버둥거리는 동안 아

투카이가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진철은 웃옷 하나 집어 들고 성큼성큼 그 뒤

를 따랐다.

식당을 나와 천천히 나무계단을 내려가자니 나무 밑동 쪽에 벌써 이것저것 쌓

아둔 것이 보였다. 그 주위에 부지런히 움직이던 캄포니들이 진철을 보고는

다들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아, 예. 반갑습니다들."

진철은 대충 손을 흔들어 인사를 받았다. 그러고는 저장고에서 짐을 빼는 캄

포니들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저장고는 제일 지하층이었는데, 캄포니들은

그곳에서 자기들 상체만 한 포대 하나씩을 등이나 어깨에 짊어지고 계단을 오

르고 있었다.

"이거 들고 올라가면 됩니까?"

질문을 받은 늙은 캄포니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철은 포대 하나

를 집어 대충 무게를 짐작해 본 후, 양 옆구리에 두 가마씩 끼고 움직이기 시

작했다. 그걸 본 캄포니가 신기하다는 듯 웃으며 손뼉을 쳤다.

진철은 한 번에 캄포니 네다섯 사람 분의 짐을 들어 옮겼다. 다리도 길어 속

도도 서너 배 빨랐으니 결과적으로는 혼자 열 사람 이상의 일을 한 셈이었다.

아투카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자네 안 힘드나?"

"할만한데요. 아무래도 캄포니가 드는 짐이라 그런 거겠죠."

"그런가? 체력이 좋구만."

사실 아무리 작은 캄포니에게 맞춰진 짐이라 해도 그걸 네다섯 포대씩 들고

날랐으니 절대 적은 양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철은 그걸 굳이 내색하기보단

그냥 포대 하나라도 더 날랐다. 본인도 근원을 모르는 힘으로 뻐기는 것도 웃

겼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만 꺼내와도 되네."

"이걸 하나씩 들고 갑니까?"

"그건 아니네. 그렇게 하면 거래 한 번에 마을 사람이 모조리 움직여야 해."

캄포니들이 다시 내려가 무언가를 꺼내왔다. 가방처럼 등에 메는 구조의 뼈대

였다. 그걸 본 진철이 중얼거렸다.

"지게네?"

"오, 이게 뭔지 아나?"

"모양은 조금 달라도 대충 어떻게 쓰는지는 알겠군요."

"그래? 이거 자네를 놀라게 하려면 어지간히 신비한 물건이어야 할 것 같군.

좋아. 그럼 이걸 보고도 놀라지 않을지 보자고."

"예? 아니, 뭐···"

사실 당신들이 제일 신기한데.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말티즈들이잖아. 뒷말을

겨우 삼키고 있으려니 아투카이가 한쪽 구석 수풀로 걸어가 뭔가 꼼지락거렸

다. 뭐 하는 건가 기웃거리고 있으려니 갑작스레 우웅-하는 진동음과 함께 바

닥이 떠올랐다.

"오."

"에사이들의 도시에는 짐을 끄는 짐승이 있다네. '소'라고 하는 짐승인데, 힘

은 좋지만 먹이도 먹여야 하고 병에 걸리면 치료도 해줘야 한다지. 하지만

'우리 소'는 그런 거 없다네. 어머니 나무의 은혜로 먹이도 먹지 않고 병에

걸리지도 않지."

"···이걸 소라고 부르기엔 좀."

아투카이가 자랑스레 '우리 소'라고 보여준 물건은 소라기보다는 그냥 공중에

떠다니는 널빤지 같았다. 물론 그 크기가 웬만한 5톤 트럭 정도 되고, 무엇

하나 받치는 게 없음에도 둥둥 공중에 떠 있었기에 그냥 널빤지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 '공중 널빤지'의 머리에 뭔가 조종기 따위로 보이는 막대가 삐죽 솟아 있

었다. 아투카이가 거길 만지작거리자 공중 널빤지는 느릿하게 아투카이의 뒤

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짐 대부분은 여기 싣고 가네. 그래도 남는 물건을 등에 메고 가는 거지."

저장고에서 꺼낸 식량과 술 따위를 그 널빤지 위에 얹고 떨어지지 않도록 노

끈으로 묶고 나니 대강 점심때였다. 중간쯤부터 합류했던 토비가 혓바닥을 내

밀고 헥헥거렸다.

"힘드냐?"

"헤헤, 응. 진철은 안 힘들어?"

안 힘들었다. 그래도 쉼 없이 움직였다고 몸에 열이 나고 땀이 나긴 했는데,

그럼에도 힘들기보다는 상쾌했다.

"아니 시발. 내가 노가다 체질이었나."

"어, 진철 또 시발."

"어허. 시발은 나쁜 말. 착한 캄포니는 쓰지 않기."

토비는 헤죽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귓등으로도 안 듣는 표정이었다. 순수

한 강아지를 타락시킨 벌은 얼마나 될까? 그 심판은 사후에 따로 받기로 하

고, 점심이나 먹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진철이 토비를 휙 들어 머리 위로

비행기를 태우며 식당으로 움직였다.

점심을 해치우고 나서 방으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 사실 뭐 챙길 것도 없었

다. 이곳에 오길 맨몸으로 왔기 때문일 터였다. 그래도 캄포니들이 만들어 준

옷을 담기 위해 간단한 봇짐을 챙겼다. 허리띠에 검, 정확히는 검 손잡이를

끼우고 방을 나서니 마을 아래쪽엔 이미 캄포니들이 모여 있었다.

"바로 출발합니까?"

평소와 달리 조금 더 활동적인 옷을 입은 아투카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네도 준비가 된 건가?"

"예."

"우리도 준비됐어, 진철!"

짐을 챙긴 캄포니들에는 토비와 친구들도 있었다. 이틀 전에 그런 험한 일을

겪고도 녀석들의 표정은 해맑기만 했다. 어쩌면 저리 쉽게 힘든 과거를 잊을

수 있다는 것이 캄포니라는 종족의 힘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머

릿속도 저렇게 편하면 얼마나 좋아.

잠시 후 짐이 잔뜩 실린 공중 널빤지를 중심으로 지게 하나씩 멘 강아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짧은 행렬이 캄포니 마을을 빠져나갔다.

제일 먼저 만난 것은 빼곡한 대나무 숲이었다. 이곳에서 대나무를 잘라 와 마

을의 집을 만드는 모양이었다. 대나무 숲은 울창했지만, 그리 크진 않았다.

이후에는 어딘가 깊고 음침한 원시림이 이어졌다.

그렇게 풀과 썩어가는 낙엽을 헤치고 나아가길 잠시. 어느 순간부터 길이 평

탄해졌다.

"···이거 참."

두꺼운 낙엽층을 발로 슬쩍 걷어보니 단단한 바닥이 나왔다. 돌 질감을 가진

검고 매끈한 바닥이었다. 설마 아스팔트인가 싶어 자세히 보니, 그보다는 콘

크리트에 가까워 보였다.

"신기한가?"

"예? 아, 예. 좀 그렇네요."

옆으로 다가온 아투카이가 허허 웃었다.

"시달리아 강은 언제나 멈춤 없이 흐르고, 코간트 숲의 나무도 겨울을 넘기면

한 뼘씩 자라건만, 잊어버린 제국의 검은 땅은 내 일생이 다 지나도 변함이

없구나."

"···그게 뭔 소립니까?"

"투킨이라는 에사이 시인이 남긴 말이네. 나도 어릴 적에나 들어본 이야기인

데, 이런 검은 돌로 이루어진 길이 세상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는군."

"남아 있다는 건 누가 만들었는지 모른다는 겁니까?"

"알긴 알지. 방금 내가 말했잖나, 잊어버린 제국이라고."

진철은 시선을 내려 밖으로 드러난 검은 도로를 바라보았다. 옆에서 따라오던

토비와 녀석들도 발발거리며 낙엽을 걷어내고는 검은 바닥을 구경하고 있었다.

"잊어버린 제국이 뭔데요?"

"이 친구야, 내가 거기까진 어떻게 알겠나? 그냥 아주 오래전에, 정확히 얼마

나 옛날인지도 모를 옛날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하는 이야기가 남아 있을

뿐이네. 위대한 도시를 세우고 검은 길을 건설한 신비한 사람들이었다고 하더

군. 어쨌든 검은 길이 나왔으니 우리 여정도 반쯤 다 온 것이나 마찬가지네."

아투카이는 어슬렁어슬렁 앞장서 나아가며 말을 이었다.

"이 길만 쭉 따라가면 자네 말로 '부두'가 나오니까."

진철은 앞장서는 아투카이의 뒷모습과 검은 바닥을 번갈아 보았다. 오래전에

사라진 고대 제국의 유물. 오랜 세월 변하지 않는 길이라. 신기하긴 했지만

이미 유사 티라노와 두 발 강아지, 그리고 그 강아지들이 운영하는 지하 식물

공장을 본 터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무래도 이쪽은 낙엽과 부식토 따위에 덮여 있어서 뭔가 신비한 길이

라기보다는 그냥 나무 없는 숲길 정도로 보이는 편이라 더더욱 그랬다.

"진철, 안 가?"

"···가야지."

토비의 재촉에 진철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능하다면 도시에 가서 역사도

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얼핏 스쳤다.

'검은 길'은 울창한 숲과 짙은 응달이 지는 계곡, 야트막한 언덕 따위를 따라

곧게, 때론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길게 이어졌다. 길 대부분이 낙엽 따위에

덮여 있어 그 시커먼 표면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았으나 그 넓고

긴 도로에 끊긴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검은 길의 마법이지."

"마법이요?"

여정 중 진철이 계속 검은 길에 관심을 보이자 아투카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낙엽과 흙먼지, 비와 바람, 햇빛과 시간을 피하는 마법. 난 검은 길

위에 지금 이상의 낙엽이 쌓인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네. 분명 시간이 지

나며 썩어가는 낙엽과 흙이 길을 덮어 지워내는 것이 자연스럽건만, 이 '검은

길'은 그런 자연스러움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어. 게다가 크고 위험한 짐승들

은 모두 이 길 가까이 다가오는 걸 꺼린다네. 그 역시 기이한 마법이지."

"오···"

이제야 진짜 마법다운 마법이랄까. 지하 스마트팜과 나무에 박혀있는 컨트롤

패널보다는 훨씬 신비로운 이야기였다.

단단한 아스팔트로 만든 길조차 꾸준한 관리 없이 시간이 지나면 깨지고 주저

앉았다. 거기에 썩은 낙엽을 밀어내고 짐승들을 쫓아내기까지. 진철의 상식으

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길이었다.

"진짜 마법이란 말이지···"

그렇게 검은 길을 바라보던 진철의 시선이 문득 언덕의 능선 아래를 향했다.

환한 햇빛을 받아 초록으로 반짝이는 숲과 구불거리는 강의 지류, 짙은 색으

로 음침한 계곡, 하얗게 찢어진 구름이 흘러가는 푸른 하늘까지. 광활한 자연

이 그의 눈 안에 담겼다. 어쩐지 진짜 마법처럼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불타고 무너진 집과 콘크리트 잔해, 고장 난 전차와 탄피, 그리고 시체가 굴

러다니는 파괴된 도시에 비하면 분명히 그랬다.

"또 뭐 봐?"

그렇게 멍하니 능선 아래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느새 다가온 토비가 말을 걸

었다. 진철은 뭐라 대답하는 대신 녀석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줬다. 녀석은 화

를 내듯 왈! 한번 짖고는 호다닥 대열을 따라 뛰어갔다.

진철의 시선은 녀석의 뒷모습과 캄포니들의 행렬을 향했다. 그들의 느긋한 행

렬은 조금 전 풍경만큼이나 정적이었다. 연옥치고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진

철은 그렇게 느꼈다.

"그만 가세."

그때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아투카이가 그런 진철의 팔을 툭 건드리고는 앞장

서 나아갔다. 진철은 깊은 한숨 한번을 내쉬곤 그 뒤를 따랐다.

서쪽 하늘이 옅게 붉어지기 시작할 즈음, 진철과 캄포니들은 아투카이가 말했

던 부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의 강은 강폭이 100미터는 되어 보이는 넓은 강줄기가 상류에서 구불구불

흘러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가 한쪽에 인공적인 구조물이 강 가운데를 향

해 삐죽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이 바로 캄포니들의 부두였다.

진철이 중얼거렸다.

"염병, 여긴 또 콘크리트로 만든 구조물 같네···"

부두는 지금까지 지나온 원시림과는 어울리지 않게 매끄럽고 단단한 회색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물론 여기저기 잔뜩 깨지고 움푹 팬 곳도 많았지만, 적어도

배를 댈 수 있을 정도의 모양이었다.

진철은 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투카이에게 다시 물어봤지만 지금까지 선

조 대대로 써온 부두라는 대답 외에는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캄포니들과 그는 싣고 온 짐을 정리하고 불을 피우며 야영지를 만들었다. 모

닥불이 피어나자 식사가 준비되었다. 그렇게 캄포니들이 뜨끈한 잡탕 죽으로

식사를 시작할 때,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죽을 떴던 토비는 그 죽이 바닥으로

흐르는 것도 모르고 멍하니 진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떠나?"

"어? 내가 말 안 했냐?"

"안 했어!"

"아투카이한테는 전에 한 것 같은데."

"나한텐 안 했잖아! 지금 처음 듣는단 말이야!"

진철은 어깨를 으쓱이며 죽을 떴다.

"그럼 지금 말했네. 난 내일 그 바이카라는 상인들을 따라갈 거야."

"왜, 왜에?"

"친구들 찾으러."

정확히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였지만, 진철은 더 자세

하게 설명하기보다는 배부터 채우고 싶었다.

"우, 우리도, 나도, 진철 친구잖아···"

하지만 그 맑은 눈동자를 일렁거리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말티즈를 무시할 순

없었다.

"···물론 너도 친구지. 내가 여기 와서 제일 먼저 사귄 친구, 서로의 목숨까

지 구해준 친구."

"응, 응! 그럼-"

"하지만 난 여기에 어울리지 않아. 이 숲은 캄포니의 것이니까."

어딘가 단호한 진철의 말에 토비의 입이 다물어졌다. 녀석은 그렇게 입을 꾹

다문 채 물기가 일렁거리는 눈으로 진철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휙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죽만 퍼먹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삐진 모습이었다.

"하이고···"

진철은 골이 아파오는 걸 느끼며 아투카이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좀 해보라는

시선이었다. 물론, 아투카이는 빙긋 한 번 웃는 낯을 보여주고는 식사에 열중

할 뿐이었다.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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