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

6화 수행평가

다음날, 일요일.

고태산은 수행평가 때문에 또다시 천유라와 만나기로 했다.

토론 대사를 맞춰 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어제는 온종일 영어 대본만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반도 제대로 못 외웠다.

기본 문법도 제대로 모르고, 암기력도 떨어지는데 5분 동안 토론할 분량을 달달 외우는 것은 그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화낼 거 같은데.'

벌써 싸늘한 반응을 보일 천유라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바짝 쫄아서 카페에 들어서자 이번에도 먼저 도착해서 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고태산은 오늘도 약속 시간 보다 30분 먼저 나왔다.

얘는 대체 얼마나 일찍 다니는 거지?

[우리 유라가 날 닮아서 뭐든 일찍 움직이는 습관이 있거든. 성공하는 사람들의 필수 조건이지.]

함께 따라온 천강태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태산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안녕, 오늘도 일찍 왔네?"

"응. 앉아."

애써 반갑게 인사했는데 오늘도 굳은 표정이다.

"다 외웠어?"

"어제도 종일 매달리긴 했는데...."

"일단 해 봐."

그들이 정한 토론 주제는 '게임 셧다운제'였다.

심야 시간에 청소년들의 게임 이용을 제한하는 제도에 대한 찬반 토론.

천유라와 고태산은 둘 다 해당 안건에 반대 입장이었지만, 의견이 갈려야 하기에 천유라가 찬성 측을 맡았다.

"What do you think about the game shutdown system?"

(게임 셧다운 시스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천유라가 유창한 발음으로 물었다.

"이, 인 마이 오피니언...."

고태산이 떠듬떠듬 외운 대사를 뱉기 시작했다.

* * *

"후우...."

예상했던 것보다 천유라의 표정이 더욱 좋지 않다.

"영작도 내가 해 줬고 외워서 말하기만 하면 되는데 이게 그렇게 어려워? 일부러 문장도 단순하게 적어 줬는데?"

뛰어난 영어 실력을 가진 그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계속 연습했는데 진짜 잘 안 되네...."

천유라한테 피해 주기 싫고 미안한 마음에 정말 애썼다.

하지만 고태산의 CPU는 의지만으로 어떻게 될 수준이 아니었다.

"더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이젠 네 몫이야. 네가 말이 막히면 토론 자체를 할 수가 없지."

천유라의 준비가 완벽하다고 해도 고태산이 말을 못 하면 토론이 진행될 수 없다.

"이건 뭐 연습이 안 되네."

천유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함께 잘해야 하는 조별 평가가 이래서 싫다.

"당장 내일인데 어떡할래?"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외워서 너한테 피해 안 가게 할게...."

"그 말 꼭 지켜라."

"...응."

[흐음.]

옆에서 냉랭한 상황을 지켜보는 천강태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천유라와 단둘이 식사 자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런 분위기라면 좋지 않다.

"난 갈게. 이 상태론 같이 있는 의미가 없어."

천유라가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태산아!]

그 모습에 천강태가 다급히 고태산을 불렀다.

"저, 저기!"

고태산이 막 일어서려는 그녀를 멈춰 세웠다.

"왜?"

"아니, 그, 내가 뭐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너 혹시 민재희 좋아해?"

"...뭐?"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천유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민재희.

세계적인 여성 피아니스트.

천유라는 초등학교 때 아빠의 손에 끌려 그녀의 공연을 직관하고는 완전히 반해 버렸다.

민재희의 카리스마, 퍼포먼스, 아름다움 등 어린 그녀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것 좀 봐 볼래?"

고태산이 자신의 휴대폰을 건넸다.

폰을 건네받은 천유라가 큰 눈을 깜빡거린다.

"어...?"

민재희가 편한 복장으로 식사를 하는 사진이었다.

"더 넘겨 봐."

고태산의 말에 천유라가 그의 다른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조금 전까지 굳어 있던 그녀의 표정이 뭔가에 홀린 듯 변하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 도도한 천유라가 이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아네.'

[끌끌, 내가 말했지? 민재희라면 눈 뒤집어질 거라고.]

'참 신기한 애네.'

보통 이 나이 때 여자애들은 아이돌이나 배우에 열광할 텐데 피아니스트를 이렇게 좋아하다니.

민재희는 워낙 신비주의에다가 무슨 사정이 있는지 벌써 몇 년째 활동을 쉬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사진은 그녀에겐 엄청난 희귀템이었다.

해당 사진은 천강태 회사의 프랜차이즈 중 하나인 이탈리아 음식점에 방문한 민재희를 직원이 찍은 것이었다.

어찌어찌 천강태에게까지 이야기가 전해져 딸인 천유라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받아 놨던 것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그의 건강 문제가 터지며 전해 줄 겨를이 없었다.

이들의 작전은 메일함에 보관돼 있던 이 사진들을 미끼로 천유라와 식사 자리를 만드는 것.

"너, 이 사진들 어디서 났어?"

사진 속 그녀의 자연스러운 일상 모습에 천유라는 눈을 반짝 빛냈다.

"그건 비밀. 이게 얼마나 귀한 사진인 줄은 잘 알지?"

고태산이 그녀로부터 휙 하고 폰을 회수했다.

"아...."

천유라답지 않은 아쉬운 탄성이 흘렀다.

"이 사진 가지고 싶어?"

"물론. 그런데 그냥 줄 것 같지는 않은 분위긴데? 원하는 게 뭐야? 돈이야?"

"돈이라면 얼마 줄 건데?"

그저 호기심에 고태산이 물었다.

"장당 10만 원."

"허어...."

사진은 13장이다.

그럼 총 130만 원인데....

아무리 잘 산다고 하지만 이깟 사진이 뭐라고 그런 큰 비용을 주면서까지 가지고 싶은 건가. 놀랍다, 정말.

"부족해? 더 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돈은 필요 없어."

"그럼 원하는 게 뭐야?"

"큼큼... 그게."

말하기 쑥스러워 잠시 뜸을 들인 뒤 힘들게 본론을 꺼냈다.

"내, 내가 하는 요리 한번 먹어 주면 줄게."

"...뭐?"

천유라가 고운 이마를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밖에서 사 먹는 것도 아니고 네가 해 준 요리를 먹어 달라고?"

"으, 응."

"황당하네. 요리를 어디서 해 줄 건데?"

"우, 우리 집에서...."

"단둘이 너네 집에 가자고?"

"어, 어...."

이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천유라가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나 같은 놈이 이런 제안을 하니.

[걱정하지 마. 민재희 사진을 믿어. 유라는 넘어올 거야.]

민재희를 동경하는 천유라이기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

"너희 집에 가서 둘이 식사를 하자고...."

살짝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에 고태산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이내 앵두 같은 천유라의 입술이 벌어진다.

"내가 미쳤냐?"

* * *

"아저씨 뭐예요.... 먹힐 거라면서."

[크흠, 얘가 이제 좀 컸다고 좀 변했나....]

고태산과 천강태가 천유라와 헤어진 뒤 잠시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았다.

- 지금 나한테 수작 부리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고 집에 가서 대본이나 외워.

천유라의 표정은 어이없음의 정점을 찍은 듯했다.

"괜히 찝쩍거리는 거로 오해만 받았네.... 아 쪽팔려...."

작전이 성공했어도 오해는 받았겠지만, 저승코인을 받을 수 있기에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작전은 실패했다.

천유라가 이걸 다른 애들한테 말한다면 찐따가 주제도 모르고 들이댔다고 또 난리를 치겠지.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가 밀려온다.

"영어 대본은 또 어떻게 외우지...."

이런 상황에서 내일 수행평가는 어떻게 될까.

과연 오늘 밤새 붙잡고 있어도 제대로 외워 말할 수 있을까?

높은 확률로 망쳐서 천유라의 분노를 살 테고, 그럼 아저씨의 한을 푸는 건 더더욱 어려워지고....

"끄어어...."

답이 없는 상황에 고태산이 의자에 기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좀비 울음소리를 냈다.

[지금 상황에선 일단 내일 수행평가를 잘 마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다시 계획을 세워 보자.]

"하아... 힘드네요. 과연 될까요. 제가 외국어 능력이 너무 부족해서...."

[넌 외국어 능력뿐 아니라 암기력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

아니, 위로는 못 할망정 팩폭을....

[본래 이런 방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어쩔 수 없지. 내일 수행평가 망치면 유라에게 요리를 해 주기 더욱 힘들어질 테니.]

"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고태산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태산아, 수행평가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놀아. 거저먹게 해 줄게.]

* * *

"I disagree with your...."

"Air pollution in Seoul is serious."

영어 시간을 앞둔 점심시간.

평소 같으면 밥을 먹고 쉬고 있을 아이들이지만, 오늘은 대부분 토론 수행평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유라야, 돼지랑 준비 잘했어?"

천유라 친위대, 짙은 눈화장의 김가애가 자리에 앉아 있는 고태산을 바라보며 물었다.

"전혀. 떠먹여 줘도 못 해."

천유라는 이번 수행평가를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고태산의 실력으론 어제 아무리 노력했다고 한들 무리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래? 쟨 진짜 잘하는 게 뭐야? 어라? 저 돼지 엎드려 자는데?"

그 말에 천유라가 고태산을 돌아봤다.

"...."

할 말이 없네.

지금 대본을 달달 외워도 모자랄 판에 처자고 있다?

어제 자신에게 피 터지게 노력해서 피해 안 주겠다고 했던 자식이....

'끈기도 책임감도 없는 놈이었어.'

천유라는 그전까지 고태산을 그저 참 답답하게 사는 찐따정도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냥 최악이었다.

못하면 자신만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닌 타인도 피해를 보는 팀 평가에서 결국 저렇게 포기하다니.

저런 놈이 뭐?

자기네 집에 가서 단둘이 밥을 먹자고?

기가 막힌다.

솔직히 민재희 사진 때문에 순간 혹하긴 했지만, 저런 녀석과 사적인 시간을 보내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한심한 새끼.'

됐다. 토론이고 뭐고 어차피 저 자식은 쩔쩔거릴 게 뻔하고, 그냥 혼자 말하면서 시간 채워야겠다.

* * *

"자, 모두 준비는 잘했겠지? 1조부터 나와."

이내 영어 수업시간이 시작되고, 토론 수행평가가 진행됐다.

"얘는 잘 준비했는데 네가 막혀서 토론이 제대로 진행이 안 된 거야. 75점."

영어 선생은 토론이 끝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점수를 공개했다.

파트너 때문에 낮은 점수를 받은 애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자, 다음 조는 6조 고태산, 천유라."

이내 그들의 차례가 왔다.

둘이 교실 앞으로 나섰다.

"크크, 천유라 개빡칠 모습이 눈에 훤하다."

"고태산 중간고사 때 영어 30점 맞은 놈이잖아."

"쯧쯧. 천유라는 뭔 죄냐. 저 변태 때문에 수행평가도 조지게 생겼네."

반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너희 조는 주제가 뭐니?"

"게임 셧다운제 찬반 토론입니다."

천유라가 답했다.

"좋은 주제네. 잘해 봐. 시작해."

"네."

천유라와 고태산이 서로를 마주 봤다.

'응...?'

순간 천유라는 살짝 당황했다.

고태산의 표정이 이제껏 본 적 없는 당당함을 풍기고 있었다.

이 새끼 뭐지?

"시작하자, 유라야."

얼씨구? 뭐가 이렇게 자신만만해?

황당함과 함께 천유라가 토론을 시작했다.

"What do you think about the game shutdown system?"

(게임 셧다운 시스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천유라가 매끄러운 발음으로 물었다.

그러자 고태산이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Game shutdown system? Um... I am opposed to the policies."

(게임 셧다운 시스템? 난 그 정책에 반대해.)

원어민도 놀랄 만한 발음, 억양, 악센트로.

7화 다신 병신같이 안 살아

'응...?'

고태산의 유창한 스피킹에 순간 당황한 천유라.

어제 카페에서 만나 버벅거렸던 그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고태산을 무시했던 반 아이들 역시 놀라며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Why do you think so?"

(왜 그렇게 생각해?)

천유라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토론을 이어갔다.

"There are many reasons for that. First of all, I think it is a violation of juvenile autonomy."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그건 청소년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것이라 생각해.)

다시 한번 이어지는 그의 유창한 스피킹과 자연스러운 바디 랭귀지에 천유라를 포함한 반 아이들의 놀라움은 더욱 커져 갔다.

'으하하, 대박이다.' 영어 토론을 하고 있는 고태산은 속으로 크게 웃었다.

자신의 입에서 이렇게 유창한 영어가 나오다니.

저 도도한 천유라의 당황한 눈빛을 보는 것도 참 재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바로 성불 서포터즈의 능력인 망자와의 빙의를 써먹은 것이었다.

즉, 지금 영어 토론을 하는 이는 내가 아닌 나에게 빙의한 천유라의 아버지, 천강태다.

[태산아, 수행평가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놀아. 거저먹게 해 줄게.]

어제 천유라에게 개무시를 당하고 그가 내게 했던 말.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빙의해서 대신 토론해 줄게.]

"네? 아저씨 영어 잘하세요?"

[미국, 호주 호텔에서 16년을 근무했다. 회사를 차린 이후에도 외국 거래처들과 통역 없이 미팅했고.]

"헐...."

[이대로면 우리 딸에게 더 미운털 박혀서 안 되겠어. 내가 도와줄게.]

이렇게 된 거다.

빙의는 어렵지 않았다.

신체를 접촉한 상태에서 빙의 의지만 가지면 끝이다.

그렇게 전날 빙의 테스트를 마치고 지금 토론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게임 셧다운제는 청소년들의 수면권 보장을 위해 실시된 정책이야. 국가는 청소년의 건강권 보장 등 복지 향상을 위해 노력할 의무를...."

"청소년의 건강을 위해 게임 시간을 제한한다? 그렇다면 독서실이나 학원 셧다운제도 실시해야 하지 않을까? 공부로 밤새는 건 괜찮고 게임은 안 되는 거야? 그렇다면 프로게이머가 꿈인 학생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앞선 조와는 다른 높은 수준의 영어 토론이 이어졌다.

본래 고태산의 영어 실력 때문에 단조롭고 쉬운 구성으로 토론 대본을 작성했었는데, 천강태로 인해 높은 수준의 어휘를 구사하고, 논지를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천유라도 본 실력을 발휘하여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토론의 질이 높아졌다.

"게임의 중독과 청소년 범죄 및 폭력성의 상관관계는 이미...."

"그만."

처음부터 흐뭇한 표정으로 토론을 지켜보던 영어 선생이 천유라의 말을 끊었다.

열띤 토론으로 예정된 5분을 훨씬 넘은 시점이었다.

"둘 다 진짜 대단한데? 유라는 원래 잘하는 거 알고 있었는데 고태산? 2반에 이렇게 영어를 잘하는 학생이 있었나?"

영어 선생은 평소 이름도 몰랐던 조용한 학생의 영어 실력에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아, 아닙니다."

고태산이 쑥스러운 듯 고개를 긁적였다.

자신은 가만히 꿀만 빨았을 뿐.

"다른 반까지 포함해서 가장 높은 수준의 토론이었어. 고생했어. 고태산, 천유라 100점!"

반 아이들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 * *

"너, 어떻게 된 거야?"

"응, 뭐가?"

영어 시간이 끝나고 천유라가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고태산은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방금 토론. 어떻게 된 거냐고. 네 실력에 말이 안 되잖아?"

"내가 어제 말했잖아. 어떻게든 노력해서 너한테 피해 주는 일 없게 하겠다고."

"...그래서 하루 만에 이렇게 늘었다고? 심지어 내가 적어 준 대본보다 훨씬 풍부하고 수준 높은 문장들이었어."

"응. 더 잘하고 싶어서 내가 좀 수정했어."

"아니, 대체 이게 말이 돼?"

천유라는 혼란스러웠다.

영어 유치원 어린이 수준도 안 되던 고태산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실력이 늘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크크크, 이거 재밌네.'

고태산은 그저 이 상황이 즐거울 뿐이었다.

이렇게 된 거 멋있는 척이나 한번 해 볼까.

"난 너한테 어떻게든 피해 주지 않겠다고 했고, 결국 뱉은 말을 지켰어. 그게 전부야."

"...."

고태산의 당당함에 천유라는 할 말을 잃었다.

맞는 말이다.

그에게 잘 좀 하라고 해 놓고, 예상보다 너무 잘하니깐 이제 와선 왜 이렇게 잘했냐고 따지는 꼴 아닌가.

그녀가 생각해도 참 억지스러웠다.

"나 때문에 많이 답답했지? 고생 많았어."

그의 말에 천유라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낮게 말했다.

"너도 수고했어."

고태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수행평가 대 성공이다!

[재주는 귀신이 부리고 폼은 고태산이 다 잡는구나.]

빙의를 해제한 천강태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저 찐따 새끼가....'

그리고 그 모습을 고깝게 보는 한 학생이 있었다.

영어 수행평가에서 한마디도 못 해 빡빡이 숙제를 받은 장민석이었다.

* * *

'음, 대체 어떻게 해야 천유라와 자리를 만들 수 있을까.'

고태산은 수업 시간에도 계속해서 이 생각뿐이었다.

어서 빨리 아저씨의 한을 풀어서 저승코인이란 것을 얻고 싶은데 이거 참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네.

"주번은 뒷정리 잘하고 가고, 내일 보자."

결국, 수업이 끝날 때까지도 이렇다 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집에 돌아가서 아저씨랑 방법을 강구해 봐야겠다.

"너 영어 과외받아?"

"응?"

고태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한 여학생들이 다가와 물었다.

"분명 영어 못했던 거로 아는데, 갑자기 실력이 엄청 좋아졌잖아. 과외? 학원? 비결이 뭐야?"

비결? 영어 잘하는 귀신과 빙의하면 돼.

"아, 그런 거 없어. 그냥 달달 외워서 말한 거야."

"에이, 완전 레벨이 다르던데 뭘. 선생님 공유 좀 해 줘."

"정말이야. 그리고 우리 집은 사교육 해 줄 형편이 안 돼."

"아... 그래? 미안. 난 또 고액 과외라도 받는 줄 알았어."

고태산의 말에 여학생은 머쓱해했다.

"그냥 언어 머리가 좋은 거였네."

"그러니까. 노력 많이 했나 봐."

"난 영어 잘하는 사람 보면 멋있더라."

여학생들의 긍정적인 오해가 시작됐다.

"아냐, 나 진짜 영어 못해. 오늘은 그냥 운이 좋았어."

"너무 겸손해도 재수 없는 거 알지? 너 다시 봤어."

"아, 아니...."

고태산은 몹시 당황했다.

천강태와 빙의를 한 것 뿐이기에 이들의 칭찬이 부담스러웠다.

본 실력이 들통나는 건 시간 문제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 좋다.'

태어나서 이런 관심은 처음이다.

다수, 그것도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여 칭찬을 받으니 짜릿한 무언가가 온몸을 감쌌다.

내 인생에 이런 순간이 다 있네.

"다 나와 봐."

그 순간, 기분을 확 잡치게 하는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민석이었다.

그는 여자애들을 밀치며 고태산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이야, 고태산이 영어 공부 좀 했나 봐?"

"아니 뭐...."

실실거리는 녀석의 말에 좋았던 기분이 확 다운된다.

'이 새끼 때문에....'

천유라 사건이 아직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분이 가시질 않는다.

"영어가 나한테 빡빡이 시켰거든? 너 영어 잘하니까 나 좀 도와주라."

"...."

뭐야? 퍽 당황스럽다.

말이 도와달라는 거지 지금 숙제 셔틀을 시키겠다는 뜻이다.

나는 비록 찐따지만, 운 좋게도 양아치들의 타깃이 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유는 모르겠지만 장민석이 나를 찍었다.

"왜 대답이 없어. 좀 도와달라니까."

장민석이 전과 같이 고태산의 어깻죽지를 꽉 잡았다.

어투는 부탁인데 눈빛은 살벌하다.

'하.'

또다시 공포가 밀려온다.

당연히 거절해야 하지만 녀석의 두꺼운 팔을 보니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야, 지금 내 말 씹냐?"

고태산이 대꾸가 없자 장민석이 목소리를 쫙 깔았다.

그의 손아귀에 더욱 강한 힘이 실린다.

"으윽!"

고태산이 통증에 낮은 신음을 흘렸다.

거절해야 한다는 이성이 공포심에 약해져 간다.

여기서 알겠다고 하면 셔틀 인생 시작이고, 싫다고 하면 더 심한 괴롭힘을 당할 것이다.

'시팔, 어떡하지....'

그렇게 막막해하던 찰나, 저 창가에서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천유라와 시선이 마주쳤다.

- 병신.

- 그렇게 살면 안 답답해?

- 만약 네가 잘나진다고 해도 그렇게 최소한의 배짱도 없다면 그 찌질한 내면은 변하지 않을 것 같은데?

천유라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때 이 말을 듣고 분명 저승코인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변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랬는데?

막상 며칠 전과 같은 상황에 닥치자 또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이번에도 장민석 새끼한테.'

이 자식 때문에 변태 오타쿠로 몰렸는데, 이제는 아예 셔틀로 부리려고 한다?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

갑자기 화가 치민다.

내가 뭘 어쨌다고 지랄이야.

이 같은 생각이 들자 녀석에 대한 공포가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결과.

"네 숙제는 네가 해야지. 내가 왜 도와줘."

고태산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용기를 내었다.

"뭐, 뭐...?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장민석은 어찌나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이내 찐따한테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그의 눈에는 핏발이 서렸다.

그 모습에 고태산은 움찔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죽었을 때의 감정을 잊지 말자. 2번째 인생은 다르게 사는 거야.'

고태산이 장민석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의 팔을 뿌리쳤다.

"네 숙제는 네가 하라고."

"이런 씨팔놈이!!"

퍼억!

장민석의 발이 고태산의 가슴팍을 강하게 밀어 찼다.

어찌나 세게 찼는지 고태산은 뒤로 쭈욱 날아가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끄으...."

고태산이 고통에 명치를 움켜잡았다.

크읍, 아프다....

그런데... 자존심 상하는 것보단 안 아픈데?

"아 놔, 개 어이없네? 야, 돼지. 미쳤냐?"

"쿨럭, 아니 전혀."

"하하! 이 변태 오타쿠 새끼가 날이 더워서 처 돌았나."

"...변태 오타쿠? 네가 뒤에서 미는 바람에 내가 실수한 거잖아... 이 시발놈아!"

고태산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울분을 토했다.

"네가 단단히 미쳤구나. 너 좀 맞자."

흥분한 장민석이 고태산의 멱살을 잡고선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퍼억-!

"끄으으...."

고태산의 안경은 날아가고 입안에선 피가 흘러나왔다.

반 아이들은 어쩌지 하면서도 누구 하나 장민석을 말리려고 나서지 못했다.

"야, 돼지. 이제 정신 좀 돌아와?"

고통스럽다.

고태산은 그동안 맞는 것이 두려워서 죽어 지내느라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맞아본다.

입안이 터지고 정말 너무너무 아프다.

"더 맞을래, 아니면 내 숙제 해 올래."

장민석이 다시 그 큰 주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으으...."

싫다고 하면 또 엄청 맞겠지.

지금도 굉장히 고통스럽고 두렵다.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을 해서일까?

마음은 굉장히 후련하다.

역시 안 되겠다.

"조까, 이 쓰레기 새끼야."

이미 한번 죽었던 몸.

다신 병신같이 안 살아 씨댕아.

뒷일은 나도 몰라.

"이 새끼가 진짜... 너 오늘 한번 죽어 봐."

장민석의 분노가 극에 달하여 전보다 더 크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가 고태산의 안면을 가격하려는 찰나.

턱!

장민석보다 더 커다란 손이 그의 주먹을 잡았다.

"고태산 깡 좀 있네."

같은 반 종합격투기 선수 표승권이었다.

8화 그의 요리

"뭐, 뭐야?"

장민석은 한 덩치 하는 자신보다 더욱 큰 표승권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표승권.

188cm, 88kg. MMA 선수.

일진들도 건들지 못하는 포스의 소유자.

장민석은 처음에 그와 같은 반이 되면서 꽤 걱정했지만, 그는 조용히 지내며 반에서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게 반에서 대놓고 애들을 괴롭히진 않았다.

'시발....'

그런데 결국 고태산을 패면서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다.

"뭐긴. 너 지금 뭐 하냐?"

표승권이 차가운 눈빛으로 장민석의 주먹을 꽉 잡았다.

'크읍....'

엄청난 악력에 장민석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굳이 싸워 보지 않아도 안다.

이 녀석은 진짜다.

"네가 상관할 일 아니야."

장민석이 그에게 잡힌 주먹을 휙 빼며 말했다.

지금은 교실의 반 애들이 보고 있다.

찐따 고태산이 기어오르고 있는 상태인데 표승권한테까지 깨갱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2반에서 자신의 입지가 위험해지니까.

어차피 녀석은 격투기 선수기에 일반인에게 주먹을 휘두를 수 없다.

어느 선까지는 조금 세게 나가도 될 것이다.

"장민석."

"뭐, 왜?"

"뒈질래?"

콰악-!

순식간에 표승권이 장민석의 멱살을 세게 움켜잡았다.

"케켁! 너, 너 격투기 선수가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냐?"

"나 아직 프로 아니어서 상관없어. 애초에 그런 거 신경 쓰지도 않고."

"그, 그런...."

"그동안 많이 깝치고 다녔지? 귀찮아서 놔 뒀는데 안 되겠다."

"아, 아니... 스, 승권아...."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장민석이 태세를 전환했다.

"딱 한 대만 맞자."

"...!"

펑!!

발목부터 회전력을 실은 표승권의 펀치가 장민석의 복부를 찌르듯이 강타했다.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 장민석이 바닥에 얼굴을 비비며 침을 질질 흘렸다.

"끄어어...."

"앞으로 나대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 다음엔 이 정도로 안 끝낸다. 억울하면 네 친구들 데리고 오던가."

표승권이 시선을 내리깔며 경고했다.

'와... 존멋....'

고태산은 갑자기 나타난 흑기사의 포스에 깊이 감탄했다.

"저기, 고마워 승권아."

미친 듯이 발악하긴 했지만 표승권이 없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그는 고태산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한마디 했다.

"됐다. 화장실 가서 씻고 집에 가서 연고 발라라."

"으응, 고마워."

고태산은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주워 쓰곤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표승권은 처음부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천유라에게 다가가 슬쩍 말했다.

"너, 나한테 하나 빚진 거다."

그 말에 천유라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으...."

화장실에서 고태산이 세수를 하며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입안은 찢어지고 붓고 난리도 아닌데 얼굴은 살이 많아서 그런지 겉으로는 좀 빨개진 거 말고는 멀쩡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다.

엄마는 모르고 넘어갈 수 있겠다.

[에휴... 태산아, 고생 많았다. 아저씨가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이거 어쩜 좋아.]

천강태가 옆에서 안타까운 눈으로 고태산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저씨가 도와줄 수 있는 일도 아니었잖아요."

[에효, 나쁜 자식. 그래도 그 커다란 친구가 도와줘서 천만다행이야.]

"그러니까요."

같은 반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표승권에 대해 잘 모르지만, 남 일에 나설 성격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암튼 엄청 고맙네.

나중에 이 은혜는 꼭 갚아야지.

어느 정도 씻고 다시 교실로 들어섰는데, 그새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유라야, 아직 안 갔네?"

"...."

천유라는 그저 고양이 같은 큰 눈을 하고선 고태산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다.

"혹시 나한테 할 말 있어...?"

고태산이 느낌상 자신을 기다린 듯한 분위기에 물어봤다.

"너 갑자기 사람이 변했네?"

"아... 아까 일 말하는 거야?"

"뭐."

"네가 그랬잖아. 그렇게 살면 안 답답하냐고. 배짱 좀 가지라고 말야."

"...그랬지. 그런데 이렇게 단기간에 사람이 극단적으로 바뀔 수 있나?"

천유라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 혹시 나 좋아하냐?"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서 나한테 잘 보이려고 밥 먹자고 하고 변하려고 노력하는 거 아냐?"

얘가 진짜 중증이네.

"네가 했던 말이 내 정신을 깨워 준 건 맞는데 그런 이유는 절대 아니야."

"흠, 그래? 그럼 나한테 뜬금없이 요리해 주겠다고 한 건 뭐야?"

"그, 그건...."

이건 충분히 오해할 만하다.

음, 음... 뭐라고 하지?

"그냥 내가 요리를 좀 배우고 있는데 다른 사람한테 한번 평가받고 싶어서...."

에라이, 대충 둘러대자.

"전혀 친하지도 않은 나한테?"

"난 친구가 없으니까...."

아이 씨, 변명하다가 괜히 씁쓸해지네.

"흐음."

천유라가 턱을 괴고 또다시 고태산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리고 곧 짧은 한마디를 던졌다.

"한번 해 줘 봐."

"응?"

"해 달라고. 네 요리. 평가해 달라며."

예상치 못한 말에 고태산과 천강태 둘 다 놀라 눈이 커졌다.

"가,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뀐 거야?"

저번에 물어봤을 땐 내가 미쳤냐면서 완강하게 거절해 놓곤.

"뭐, 수행평가도 그렇고 조금 전 모습도 그렇고 오늘 아주 쬐끔 감명받았달까. 보답으로 나랑 밥 한번 먹을 기회를 주려고."

"아... 하하. 그래, 고맙다."

살짝 어이가 없긴 하지만 어쨌든 성공이다!

엉겹결에 천유라와 자리를 만들었다.

이제 아저씨와 빙의해서 음식만 만들어 먹이면 미션 클리어!

"그럼 언제 먹을래?"

고태산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오늘."

* * *

"정말 집에 아무도 없는 거 맞지...?"

"몇 번 말해. 엄마 출장 가서 오늘 아무도 없다고. 아까 전에 그 깡은 어디 갔어."

고태산은 지금 천유라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 그녀가 당장 요리를 해 달라는 말에 난처했다.

아직 식재료도 준비 안 되어 있고, 엄마와 여동생도 곧 집에 올 시간이니까.

그러자 천유라는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집도 비었고 어지간한 식재료는 있다고.

그리하여 그녀의 집에서 요리를 하게 된 것이었다.

"들어와."

"우와...."

현관에 들어서자 고태산의 입이 떡 벌어졌다.

드넓은 거실에 통유리 밖으로 한강이 보인다.

잘은 모르지만, 가구며 건축 자재며 굉장히 고급져 보였다.

이런 집은 대체 얼마나 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 온 남자애는 네가 처음이네?"

"아, 그래?"

"재밌네. 어쩌다가 널 우리 집까지 데려오게 됐을까. 어제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할 일이었는데."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천유라가 미소를 지었다.

고태산 역시 그가 청명고 여왕 천유라의 집에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 옷 좀 갈아입고 올 테니까 주방 한번 둘러보고 있어."

"응."

그가 주방으로 향했다.

"와, 무슨 냉장고가 네 개나 있어요?"

[나는 집에서 요리를 안 했어도 와이프는 신경 많이 쓰거든. 저쪽 냉장고 한번 열어 보자.]

천강태의 지시에 따라 냉장고와 찬장 등을 확인했다.

다양한 식자재들과 조리 기구들로 가득하다. 확실히 예사롭지 않은 주방이었다.

[음, 좋아.]

한동안 이런저런 식자재를 살펴본 천강태가 말했다.

"메뉴 정하셨어요? 더 사올 건 없나요?"

[응, 이 정도면 충분해.]

천강태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요식업계의 왕 같은 분이라고 하니 나도 그의 요리가 기대된다.

"준비됐어?"

"아, 응."

편한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은 천유라가 다가와 물었다.

"무슨 요리 해 줄 건데?"

"음...."

[그냥 이것저것 해 준다고 해.]

"그냥 이것저것 해 줄게. 앉아서 기다려."

"자신 있나 보네? 요리는 언제부터 했는데? 학원 다닌 거야?"

"아니... 그냥 집에서 취미로...."

사실 라면 말고는 요리해 본 적 없어.

"풉- 넌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 집이 요식업 회사를 하고 있어. 우리 아빠는 엄청 유명한 요리사였고. 어지간한 음식으로는 나 만족 못 시킬걸? 내 성격 알지? 평가해 달라고 했으니 정말 솔직하게 말할 거야."

천유라가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과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 한번 평가해 봐라.

너가 방금 말한 엄청 유명한 셰프의 요리를 말이야.

[시작할게.]

천강태가 고태산의 등에 손을 얹었다.

고태산은 그의 의지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러자 천강태의 영혼이 고태산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으으... 기분 이상해.'

온몸의 신경에 무언가 차오르는 듯한 느낌.

아마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

[자, 이제 시작할게. 태산이 넌 가만히만 있으면 돼.]

'알겠습니다.' 천강태가 움직이는 고태산이 각종 조리 기구와 식재료 등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사골 육수에 버터 조각을 넣고 끓이고, 김치만두에서 만두피는 버리고 소만 대야에 담아 두고, 황도를 잘라 설탕을 뿌려놓기도 하는 등.

고태산으로서는 당최 무슨 요리를 하려는 지 감도 잘 오지 않았다.

넓은 조리대가 금방 복잡해졌다.

"흐음."

천유라는 영 못 미더운 표정이었다.

보니까 여러가지 음식을 동시에 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식자재들을 보니 간단한 요리도 아닌 것 같은데, 이건 숙련된 요리사들도 힘들 터.

정식으로 요리를 배운 것도 아니고 혼자 취미로 좀 했다는 고태산에게 가능한 영역이 아니었다.

'이거 갑자기 자신감이 넘쳐도 너무 넘치는 거 아냐?'

그래도 전보다 훨씬 보기 좋다.

천유라는 그저 말없이 고태산이 열중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맛없으면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지.

[기본 세팅 끝. 이제 본격적으로 한번 가 보자.]

고태산이 식칼의 날을 한번 쓱 훑고는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천유라가 속으로 피식하던 찰나,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닥!

고태산이 엄청난 스피드로 도마 위의 대파를 때리기 시작했다.

'우왓!'

마치 자신의 손이 모터가 달린 듯하다.

긴 대파가 순식간에 일정한 크기로 잘려 나갔다.

"어어...?"

놀란 건 천유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입이 절로 벌어진다.

탕탕탕탕탕!

휘익- 휘익-

치이익! 치익!

후라이팬의 고기와 야채가 공중에서 뒤집히며 타지 않게 볶아지고, 양념이 골고루 배었다.

김치만두 소만 따로 담아 놨던 것은 파와 버무려 전자레인지에 돌렸던 치킨의 살과 껍질 사이에 넣는다.

버터와 달걀을 으깨서 반죽을 만들어 아까 준비했던 황도를 담그기도 했다.

상판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던 식재료들이 굉장히 빠르고 간결하게 컨트롤 되고 있었다.

가스 불 위에 놓인 냄비 두 개, 프라이팬 하나와 구이기, 튀김기를 동시에 사용하며 극강의 멀티태스킹을 선보였다.

집안에 달콤하고, 고소하고, 매콤한 향기가 가득 풍겼다.

이내 식탁 위에 아름답게 플레이팅 된 네 가지 요리가 차려졌다.

[후우, 요리 끝.]

천강태는 요리를 마치자마자 빙의를 해제했다.

오랜만에 하는 요리라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히 결과물은 만족스럽다.

고태산도 천강태가 성공적으로 요리를 완성했다는 생각에 흐뭇했다.

그 반면에 천유라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는 아직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넋이 나가 있어? 어서 먹어 봐."

고태산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천유라에게 포크를 건넸다.

"어? 어어...."

그녀가 네 가지 요리 중 하나인 뉴욕식 버터 치킨을 한 조각 입에 넣었다.

몇 번 오물거리더니 이내 또다시 커지는 그녀의 눈.

"이, 이게 말이 돼...?"

9화 그대가 있었기에

천유라의 반응에 천강태는 물론, 고태산 역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요리는 뭐야?"

"그게...."

[뉴욕식 버터 치킨이야. 치킨 껍질 안에 김치만두 소를 넣은 다음....]

"뉴욕식 버터 치킨이야. 치킨 껍질 안에 김치만두 소를 넣은 다음 사골육수와 버터를 넣고 끓인 뒤 오븐에 구운 거야. 겉은 바삭하고 씹으면 안에서 육즙이 터져 나올 거야."

고태산이 천강태의 설명을 그대로 전했다.

[우리 딸이 버터를 좋아하거든 허허.]

천유라는 누가 봐도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치킨을 한 점 더 집어 먹었다.

"맛이 어때?"

"하... 어떻게 네가 이런...."

"맛있다는 뜻이지?"

"...응."

천유라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맛이다.

어지간한 맛집에서도 쉽게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이 감탄할 정도라니.

"다른 것도 한번 먹어 봐. 이건 한국식 김치 탕수육. 소스를 김칫국물과 오미자 진액을 섞어 만들어 봤어. 삼겹살과 김치도 같이 볶아 넣었지."

"음... 어머!"

[딸이 또 매콤, 새콤한 걸 좋아하거든. 이것 역시 취향 저격.]

일류 요리사가 먹는 이의 취향을 고려하고 마음을 담아 만들었으니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 취미로 연습한 요리 실력이 이 정도라고?"

"아, 뭐, 응. 맛이 괜찮아?"

"솔직히 너무 맛있어... 우리 아빠가 만들었다고 해도 믿겠어."

맞아. 너희 아버지가 하신 거야.

"맛있다니 다행이다. 많이 먹어."

"너도 같이 먹어."

"그럴까."

고태산도 천강태가 만든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

'우와....'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과연 정말 대단한 맛이다.

분명 여러 요리를 동시에 빠르게 만들었는데 맛에서 깊은 풍미 같은 것이 느껴진다.

사뚜기 3분 요리에 길들여진 그의 저렴한 혀가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너 웃긴다. 네가 만들어 놓고 뭘 그리 감탄해?"

고태산의 놀란 반응을 보곤 천유라가 피식하며 물었다.

"아... 하하, 내가 만들었지만 진짜 맛있어서...."

고태산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이상했던 게, 너 요리하면서 스스로 뭘 그렇게 놀라워해?"

"으응? 내가?"

"어. 칼질도 파바박 하고 프라이팬 휙휙 돌리면서 표정은 마치 다른 사람이 요리하는 거 보는 것 마냥 뭘 그렇게 신기해했냐고."

"아...."

그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이었다.

귀신과 빙의를 했어도 고태산 역시 자신의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천강태가 자신의 몸을 사용하는 데 지장 없게끔 몸에 힘을 뺐으나, 미처 얼굴 표정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다.

아마 엄청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겠지.

"그, 그게... 넓은 주방에서 좋은 기구로 요리하니깐 훨씬 잘 되더라고. 칼도 어찌나 잘 들던지 깜짝 놀랐어."

"흐음, 그래?"

천유라는 조금 의아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오늘 참 놀랄 일 많이 일어나네."

"뭐가?"

"너 말이야, 고태산 너. 수행평가도 그렇고, 장민석한테 굽히지 않는 것도 그렇고, 지금 이 요리들도 그렇고. 이래서 사람은 겪어 봐야 안다는 건가?"

"그전에는 어떻게 생각했는데?"

"말하면 상처받을 텐데?"

"...그럼 하지 마."

"푸흐흐."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식사를 이어갔다.

둘의 분위기는 오늘 하루 만에 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도도하고 까칠한 천유라가 편하게 웃고 대화하는 상대는 많지 않다.

그중 한 명이 고태산이 될 줄이야.

지금 이 모습을 보면 놀랄 아이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음식을 반 이상 먹었을 때쯤, 천유라가 말했다.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응? 뭔데?"

"너 계란볶음밥 할 줄 알아?"

"계란볶음밥?"

"응. 그냥 계란이랑 파 좀 썰어서 넣고 간장이랑 볶는 거."

그녀의 말에 천강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예전에 아빠가 자주 해 주던 건데 그게 그렇게 그립네. 내가 아무리 해봐도 그 맛이 안 나. 네가 한번 해 줄 수 있어?"

천유라의 눈빛이 아련하다.

[태산아, 한 번 더 부탁할게.]

"물론이지. 잠깐만 기다려."

고태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천강태가 그의 몸에 다시 빙의했다.

[이건 정말 간단해.]

먼저 올리브유를 두른 뒤 프라이팬에 총총 썬 대파와 계란 두 개를 깨트렸다.

[그 다음 맛소금을 조금 뿌려 주면서 휘저어 주고.]

계란이 노릇하게 스크램블이 된 후 밥을 퍼 올렸다.

그리곤 구워진 파와 계란과 함께 골고루 볶았다.

[꾹꾹 누르지 말고 그냥 고루 풀어 준다는 느낌으로. 그래야 밥이 고슬고슬해지거든.]

'음, 진짜 간단하네요? 딱히 특별한 건 없는 거 같은데요?' 아무리 천강태가 일류 요리사라곤 해도 이런 간단한 요리는 누가 해도 비슷한 맛이 나지 않을까?

[여기서 나만의 비법이 있어. 유라는 간장을 넣는 거로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 굴 소스를 사용했거든.]

아, 그래서 천유라가 아빠가 한 맛이 안 난다고 했던 거구나.

[굴 소스 한 스푼을 프라이팬 구석에 뿌려 줘. 굴 소스가 지글거리며 눌어붙을 정도로 끓인 다음 볶아 주는 거야. 그럼 불맛이 나는 거지.]

오호, 꿀팁이다. 집에서 해 먹어야지.

요리는 금방 완성되었다.

다시 빙의를 해제한 고태산은 계란볶음밥을 천유라의 앞으로 가져갔다.

"주문하신 계란볶음밥 나왔습니다."

"고마워."

"어서 먹어 봐봐."

"응. 비주얼이랑 냄새가 아빠가 한 거랑 굉장히 비슷한데?"

천유라는 기대감에 재빨리 한 수저 푹 뜨고 후후 불어 입에 넣었다.

"음...."

그녀가 입을 오물거리며 침음하더니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어, 어떡해...."

그녀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왜 그래?"

"이, 이거 어떻게 한 거야? 아빠가 해 준 계란 볶음밥이랑 똑같아...."

고개를 들어 올린 천유라는 어느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천유라가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다니.

"그래? 다행이다."

고태산이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게 얼마나 그리웠는데 이렇게 먹게 되네.... 나한테는 이게 최고의 요리야."

천유라가 눈시울을 붉히면서 계란 볶음밥 한 숟갈을 더 떴다.

그녀의 모습에 고태산 또한 숙연해졌다.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음식이 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하굣길에 먹었던 떡볶이, 군대 훈련소 취침시간 때 몰래 먹던 건빵, 연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고 담배 연기와 함께 마신 아메리카노 등.

천유라에게 있어 아빠의 계란볶음밥은 그런 음식이었다.

'또 계란볶음밥이야! 다른 것 좀 해 줘! 그놈의 계란볶음밥! 짜증나!'

'이 기집애야! 아빠 어제 4시간밖에 못 잤어! 바로 출근해야 되는데 이렇게 해 주는 것도 감사하게 생각해!'

'몰라! 나 영양실조로 쓰러지면 아빠 때문인 줄 알아! 맨날 일밖에 몰라!'

'야야! 천유라! 밥은 먹고 가야지 임마!'

천유라와 천강태는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겼다.

왜 그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해 준 아빠에게 짜증을 부렸을까.

왜 그땐 하나뿐인 딸이 먹는 음식에 더 신경 써 주지 못했을까.

'아빠, 많이 힘들지? 이리 와 봐, 딸내미가 다리 주물러 줄게. 고집불통인 딸 키우느라 고생이 많아.'

'아빠는 우리 딸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이 해 주고 싶어서 이렇게 일하는 거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딸인데 행복하게 해 줘야지.'

'생일 축하합니다! 이건 내가 용돈 모아서 산 아빠 조리화. 이게 발이 그렇게 편하대. 어때, 좋지?'

'해피 뉴 이어! 올해도 아빠랑 투닥거리면서 잘 지내 보자!'

함께 했던 지난날들이 떠오른다.

밖에서는 도도한 천유라지만, 아빠 천강태에겐 어려서부터 응석도 부리고 애교도 부릴 줄 아는 귀여운 딸이었다.

가슴이 절절하고 울렁거리며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려왔다.

그때였다.

『망자 천강태의 성불 계약 조건이 이행되었습니다.』

『성불이 진행됩니다.』

"응?"

고태산이 허공에 뜬 푸른 문자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바로 성불이 진행되는 거야?

[하하, 이제 정말 끝인가 보네.]

계약서에는 망자의 한이 풀리면 성불이 진행된다고 했다.

지금 천강태의 한이 풀린 것이다.

안타까운 고태산의 마음과는 달리 천강태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는 잠시 지그시 천유라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태산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그대로 유라에게 전해 줄래?]

고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있었기에.]

'응?' 이걸 따라 말하라고?

예상치 못한 낯부끄러운 문장에 고태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천유라한테 갑자기 그대라고 어떻게 말해.

미친놈처럼 볼 텐데.

[부탁할게, 태산아.]

천강태가 쭈뼛거리는 고태산에게 간곡하게 재차 부탁했다.

그의 영혼이 푸른 입자 형태로 허공에 날리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에잇!'

사라지기 전 딸에게 하는 마지막 말인데 이 정도는 해 드리자.

고태산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그, 그대가 있었기에..."

"뭐...?"

그 말에 천유라가 숟가락질을 멈추고 고태산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아, 되게 민망하네....'

고태산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기왕 하는 거 아저씨의 마음이 전달되게 확실히 하자.

감정 잡고 진지하게....

[하잘것없는 것들도 모두가 특별하였고.]

"하잘것없는 것들도 모두가 특별하였고."

"어...?

천유라가 화들짝 놀라며 고태산을 바라봤다.

[일상처럼 평범한 것들도 모두 빛나 보였고.]

"일상처럼 평범한 것들도 모두 빛나 보였고."

"아, 아...."

그녀의 큰 눈망울이 흔들린다.

"보잘것없는 것들도 모두 신비롭더라."

"어, 어떻게...?"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오른다.

"그대가 없다는 생각만 해도 내겐 한 우주가 무너지는 것이더라."

"아, 아빠...!"

결국, 천유라의 양 볼에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이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생전에 우리 딸에게 종종 읽어 주던 시 구절이었어.]

천강태도 눈물을 글썽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정말 고맙다, 태산아. 이 은혜는 내 영혼에 평생 새길게.]

그의 표정과 말에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앞으로 우리 유라 잘 부탁해. 알고 보면 정 많고 착한 애야.]

고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답답했다.

[아빠가 맛있는 거 많이 못 해 줘서 미안해.]

천강태는 천유라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어느새 그의 영혼이 대부분 사라졌다.

[우리 딸 항상 행복하렴. 이제 정말 헤어질 시간이 온 것 같다. 사랑한다, 하나뿐인 내 딸 유라....]

그는 결국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푸른 입자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응? 아빠...?"

그 순간 천유라가 웅크렸던 몸을 펴고 눈물범벅인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 살폈다.

천강태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렸던 것일까.

그녀는 한참이나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천강태는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렇게 그와 그녀는 영원한 이별을 맞이했다.

10화 저승코인

"너... 대체 뭐야?"

천유라가 눈물을 닦고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한 뒤 날카롭게 물었다.

"응?"

"방금 말했던 그 시 뭐냐고. 그거 우리 아빠가 가장 좋아하던 시였어. 그리고 이 계란볶음밥. 아빠 거랑 완전 똑같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게 말이지...."

그녀가 충분히 의심할 만하다. 안 하면 그게 이상한 거지.

일단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하긴 했는데, 뒷감당은 순전히 내 몫이구나.

고태산이 저성능 짱구를 빠르게 굴린 뒤 말을 이었다.

"일단 시는 어떻게 널 위로해 줄까 하다가 내가 평소 외우고 있던 시를 말한 것뿐이야."

"...."

"그리고 계란볶음밥은 일반적인 레시피에 간장 대신 굴 소스를 넣어서 볶은 게 다야. 인터넷에서 봤거든. 보아하니 너희 아버지도 굴 소스를 사용하신 것 같네."

고태산이 당당하게 말했다.

아무리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고 한들 어쩔 건가.

내가 그렇다는데.

천유라는 한참 동안 날 뚫어지게 쳐다본 뒤 입을 열었다.

"하, 그래. 그럴 수 있겠네...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왜, 무슨 생각을 했는데?"

"우습지만 순간 어떤 생각을 했냐면, 우리 집에 있는 아빠의 영혼이 너한테 들어간 줄 알았어."

"뭐, 뭐...? 아하하! 상상력이 푸, 풍부하네."

"그러니까. 나답지 않게 이런 엉뚱한 생각을 다 하네."

아니, 아주 정확한 게 너다운 현명한 판단이야.... 촉이 장난 아니네.

"암튼 고마워. 오랜만에 아빠를 느낄 수 있었어. 계란볶음밥 레시피도 알게 됐고."

"뭘, 도움이 된 것 같아 나도 좋네."

"너한테 빚 하나 졌어. 나중에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어지간한 건 다 들어줄게."

"아냐,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나 빚지고는 못 살거든."

"오늘 고마웠어. 여기서 있었던 일은 어디 가서 말하지 말고."

천유라가 현관문 앞에서 고태산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나 친구 없어."

"풉- 걱정 없네."

"갈게. 학교서 보자."

인사를 마치고 고태산이 엘레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고태산...."

그의 퉁퉁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천유라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 * *

후다다다닥!

아파트 현관을 나오자마자 고태산이 서둘러 빈 벤치를 찾아 앉았다.

"과연...."

처음으로 망자를 성불시켰다.

그 대단한 저승코인이라는 것이 지급되었을까?

"정산되는 데 시간이 걸리고 그런 건 아니겠지?"

흥분되는 마음에 얼른 폰을 꺼내 성불 서포터즈 어플에 접속했다.

바로 팝업이 떠오른다.

『축하합니다. 처음으로 망자를 성불시켰습니다.』

『저승코인 사용페이지가 활성화됩니다.』

『저승코인 60개가 지급됩니다.』

『저승코인은 성불 난이도, 망자가 이승에 머문 시간 등, 내부 규정에 따라 차등 지급됩니다.』

"오오오! 들어왔구나!"

고태산이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캬, 역시 입금은 신속 정확해야지!

어플에 [저승코인 사용] 버튼이 활성화되었다.

바로 페이지에 접속하니 두 가지 항목이 보인다.

[스펙 업그레이드]

[망자 능력 랜덤 뽑기]

"응? 망자 능력 랜덤 뽑기?"

스펙 업그레이드는 예상했는데, 이건 뭐지?

말 그대로 성불시킨 망자의 능력을 얻는 건가?

이런 개꿀....

"일단 하나씩 살펴보자."

먼저 [스펙 업그레이드]를 클릭했다.

[스펙 업그레이드 Ver.1]

▶"외모"

얼굴 / 피부 / 골격 / 키 / 모발....

▶"운동능력"

근력 / 순발력 / 유연성 / 동체 시력....

▶"두뇌"

암기력 / 집중력 / 수리력 / 사고력....

▶"감각"

시각 / 청각 / 후각 / 미각....

▶"신체기능"

관절 / 장기 / 면역 / 재생....

"지져스...."

심장이 점점 거세게 뛴다.

총 다섯 개의 대분류 항목에 따른 다양한 세부 스펙들이 보인다.

"미친, 실화야?"

완전 기대 이상이다.

저승사자 아저씨 말이 사실이었어!

이 정도면 나라는 인간을 아주 끝장 나게 재구성할 수 있다.

저승코인만 있다면 말이지.

게다가 페이지 상단에 Ver.1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향후 업데이트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다.

업그레이드 가능한 스펙 항목이 늘어날 수도 있겠지?

좋아서 환장하겠네.

"다음 것도 확인해볼까."

[스펙 업그레이드]를 어느 정도 파악한 고태산은 이번엔 [망자 능력 랜덤 뽑기]를 클릭했다.

[망자 능력 랜덤 뽑기 Ver.1]

- 성불시킨 망자가 보유한 평균 이상의 능력 중 하나를 랜덤으로 부여합니다.

- 구매 가격 : 저승코인 20개.

"허어."

이것 역시도 완전 사기잖아!

비록 랜덤이긴 하지만 평균 이상의 능력 중 하나를 준다고 하니 정말 엄청난 보상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경우는 일류 요리사인 유라 아버지를 성불시켰기 때문에 운이 좋다면 그의 요리 능력을 얻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 능력 하나만으로도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없겠는데?

이 자리에서 바로 탑급 셰프가 되는 거잖아?

"이, 이것부터 먼저 해 보자."

고태산은 격한 감격에 뭔가에 홀린 눈을 하고선 바로 능력 뽑기에 저승코인을 사용했다.

『망자 능력 랜덤 뽑기를 진행하시겠습니까?』

"Yes!"

『저승코인 20개가 소모됩니다.』

『망자 천강태가 보유한 우수 능력들을 탐색합니다.』

『총 4개의 능력이 확인되었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폰 화면에 룰렛판이 등장했다.

4개의 칸으로 분할 돼 있고 모두 '?'로 가려져 있다.

『능력 뽑기를 시작합니다.』

룰렛판이 돌아간다.

드르르르르륵-

"제발 요리 능력 나와라."

고태산이 주먹을 꽉 쥐며 화면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띵!

이내 룰렛판이 멈췄다.

요란한 음악과 함께 선택된 능력이 공개됐다.

과연?!

『축하드립니다! 망자 천강태의 <영어 능력>에 당첨됐습니다.』

"큭! 젠장!"

안타깝게도 요리 능력은 얻지 못했다.

너무 아까운 마음에 고태산이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고태산 님에게 망자 천강태의 <영어 능력>을 전송합니다.』

"음?"

순간 메시지와 함께 고태산의 머리에 청량감이 들면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영어 능력>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벌써?"

순식간이었다.

"딱히 달라진 건 잘 모르겠는데?"

이상한 느낌이 잠깐 들었다가 사라졌을 뿐, 머리에 영어 지식이 들어온 건 잘 모르겠다.

고태산은 확인차 폰으로 해외 신문 기사를 검색해서 클릭했다.

"오잉?!"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전문 용어로 가득한 빽빽한 미국 경제기사가 마치 한국말을 보듯이 편하게 슥 읽혔다.

"이럴 수가."

요리 능력을 놓쳤다는 아쉬움은 사라지고,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에 크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Now I come to think of it... It might be better than cook."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영어 능력이 요리보다 나을 수도 있겠는데?)

혀가 절로 미국식 영어 발음에 맞게 웨이브를 친다.

"헉!! 나 지금 영어로 말한 거야?"

고태산은 저도 모르게 영어로 중얼거린 뒤 또다시 화들짝 놀랐다.

"쥑이네...."

다시 생각해 보니 현재 상황에선 요리 능력보다 영어 능력이 훨씬 도움이 된다.

영포자였던 나는 이제 영어 공부 안 해도 만점이다.

게다가 영어 특기생으로 상위권 대학에 입학할 수도 있을 것이다.

"Great!"

크크, 수행평가 때 보여 줬던 영어 실력은 이제 진짜 내 것이 되었다.

"이제 남은 코인은 40개."

자, 미칠 듯이 뛰는 마음을 좀 진정시키고 이번엔 스펙을 올려 보자.

다시 한번 스펙 항목을 쭉 훑었다.

정말 매력적인 스펙들이 많다.

하지만 처음의 마음과 같이 지금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바로....

"외모지."

누군가는 어리석다고 하겠지.

학생 신분에 공부도 못하니 일단 지능에 투자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암기력, 수리력, 사고력 등 일단 수능에 적합한 능력들을 올려 좋은 대학을 목표로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응, 근데 난 아냐.

저승코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슈퍼 로또를 맞았는데 일반적인 노선을 탈 필요가 있나?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 살아도 저승코인만 꾸준히 모으면 충분히 잘 먹고 잘살 것 같은데?

그리고 그간 이 외모 때문에 당한 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도 이제 존잘 좀 돼 보자!"

고태산은 외모 카테고리를 살폈다.

얼굴 / 피부 / 골격 / 키 / 모발 등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도 우선순위를 뽑자면.

"일단 얼굴부터. 그다음엔 키다."

고태산이 주저 없이 '얼굴'을 클릭했다.

그러자 바로 폰 화면에 머리카락 하나 없는 내 얼굴이 덩그러니 떴다.

"아, 씁! 깜짝이야!"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덥수룩한 머리카락도 없고 두꺼운 뿔테 안경이 없으니 참 낯설었다.

『얼굴은 부위 별 디자인이 가능합니다.』

[눈 - 10코인]

[코 - 10코인]

[턱 - 10코인]

[광대 - 10코인]

[이마 - 5코인]

[눈썹 - 5코인]

[치아 - 10코인]....

화면 좌측 메뉴를 눌러보니 대략 20개는 넘어 보이는 얼굴 부위들이 쭉 늘어졌다.

이거 이거, 저승 성형외과가 따로 없다.

"그런데 이렇게 살이 디룩디룩 찐 상태라 어떻게 디자인을 하라는... 오호!"

고태산이 머라 중얼거리며 페이지를 살펴보던 중, 딱 필요한 기능을 발견했다.

[체지방 설정]

- 원활한 디자인을 위해 체지방량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체지방은 15% 정도로 설정해 보자."

이 정도가 일반적으로 가장 보기 좋은 지방량으로 알고 있다.

해당 숫자를 입력하자 바로 화면 속 내 얼굴이 해당 체지방에 맡게 살이 쪽 빠졌다.

"...깝깝하네."

한숨이 절로 나온다.

못났다 정말.

투실투실한 살이 걷어지니 작고 처진 눈에 밋밋한 코, 비뚤어진 턱이 아주 도드라진다.

"일단 눈이랑 코, 턱은 무조건 바꾸고. 그러면 남는 10코인은...."

내 얼굴을 다시 면밀히 관찰했다.

저승코인을 탈탈 털어서 최대한의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 눈썹이랑 이마를 바꾸자."

흐릿한 눈썹과 넓은 이마.

너희로 정했다.

5코인씩이니 딱 40코인이다.

"좋아, 시작해 보자."

일단 눈부터.

『눈 디자인에 10코인을 사용합니다. 수정이 가능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화면 속 내 얼굴에 눈 주위가 붉게 변했다.

수정 가능 범위를 나타낸 것일 터.

화면 하단에는 갖가지 버튼이 활성화됐다.

마치 사진 보정 어플과 비슷했는데, 구성이 훨씬 다양하다.

"어디 보자."

고태산은 하나하나 버튼을 확인해 가며 자신의 눈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조작이 굉장히 쉽고 편했다.

"눈 크기는 이 정도면 됐고, 미간을 좀 좁혀 볼까... 오, 좋아!"

일단 크기만 좀 키우고 위치만 조금 옮겼는데 느낌이 완전 다르다.

속눈썹 수정 버튼도 있네?

크으, 속눈썹이 풍성해지니 눈매가 또렷해지고 그윽한 포스를 풍긴다.

이래서 남자 아이돌이 눈 화장을 하는구나.

동공 사이즈도 키우고, 눈매도 교정하고....

고태산은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며 최고의 디자인을 위해 집중했다.

"휴... 눈은 이게 베스트다."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이마에 땀을 닦았다.

어느덧 1시간이 훌쩍 넘었다.

"이젠 코를 바꿔 보자."

하지만 그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바로 다음으로 넘어갔다.

* * *

"크- 좋다 좋아."

벤치에서 엉덩이 한번 안 떼고 4시간이 막 지났을 때, 고태산이 화면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깊이 감탄했다.

넓은 이마는 반듯하고 황금비율로 수정했다.

흐릿한 눈썹은 그림으로 그린 것만 같다.

작고 처진 눈은 크고 깊은 눈망울을 가진 순정만화 주인공 스타일로.

밋밋한 코는 손을 대면 베일 듯이 높고 샤프하게 변했다.

또 비뚤어진 턱은 좌우 대칭이 완벽하고 갸름해졌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연예인은 바를 수 있겠는데? 흐흐흐."

고태산은 매우 만족해하며 적용 버튼을 클릭했다.

『수정한 이미지를 고태산 님의 얼굴에 적용합니다.』

『적용을 시작합니다.』

『변화의 폭이 크므로 완전한 적용까지 약 20일이 소모될 예정입니다.』

"뭬야?!"

바로 바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다.

순간 짜증이 났지만,

"어차피 살도 빼야 되고...."

게다가 하루아침에 바뀌면 주변에서 의심을 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잘됐다. 그동안 살이나 빼고 있자."

금세 다시 기분이 좋아진 고태산이었다.

앞으로 하루하루 변해 갈 자신의 모습이 너무 기대된다.

"오늘부터 다이어트 시작이다."

현재 시간 12시 20분.

그의 집까지 거리 약 7km.

고태산은 운동화 끈을 질끈 묶은 뒤 집까지 뛰기 시작했다.

11화 누가 귀신이야?

"아으으...."

잠에서 깬 고태산이 끙끙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아오, 죽겠다아...."

어젯밤 집까지 뛰어오느라 다리 근육이 욱신거리고 온몸이 묵직하다.

대체 얼마 만에 한 운동인지.

스스로의 의지로 한 적은 거의 처음 아닌가.

저승코인 뽕 맞고 흥분해서 너무 무리했네.

"공휴일인 게 천만다행이다."

이 컨디션으로 학교에 갔으면 보통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읏샤."

고태산은 스트레칭을 한 뒤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봤다.

날씨 좋다.

오늘따라 하늘이 높고 푸르다.

"아저씨는 어디로 가셨을까."

고태산이 어젯밤 일을 상기했다.

귀신 천강태는 그의 한을 풀고 성불했다.

그럼 그 후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정말 천국 혹은 지옥에 가는 건가?

아니면 무(無)로 돌아가나?

그것도 아니면 환생?

지금으로선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성불 서포터즈를 계속하게 되면 사후 세계의 비밀에 대해서도 좀 알 수 있으려나?

왠지 알기 무서우면서도 굉장히 궁금하다.

뭐, 어쨌든 간에.

"아저씨,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길 바랍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고태산이 천강태의 명복을 빌었다.

"아! 좀 변했나 볼까?"

고태산이 후다닥 책상 위 거울을 집었다.

어제 디자인한 얼굴로 변하기까지 20일이 소요된다고 했다.

계산해보면 하루에 5%씩 변하는 셈이다.

지금 약 12시간 정도 지났으니 조금은 변하지 않았을까?

고태산이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휙 올린 뒤 거울에 비친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오?!"

변했다!

미묘하지만 스스로는 느낄 수 있었다.

눈썹이 한 5가닥 정도는 더 생긴 것 같은데?

개미 눈꼽 만큼이지만 분명 본래 얼굴보다 잘생겨졌다.

"오예!"

신나는 마음에 고태산이 방문을 열고 나갔다.

거실에서 그의 엄마 박유란과 동생 고아린이 TV를 보고 있었다.

"아들, 일어났어?"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어머님."

고태산이 씩 웃으며 박유란에게 과하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또 왜 저래, 아침부터."

고아린이 그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하, 우리 아들 뭐 기분 좋은 일 있어?"

아들의 밝은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박유란이다.

"아니 뭐 그냥... 엄마, 혹시 나 좀 변한 거 없어?"

"변한 거? 음, 글쎄?"

박유란이 유심히 고태산을 바라봤지만, 전혀 달라진 점을 찾지 못했다.

"얼굴이 좀 나아지지 않았어? 자세히 봐 봐 엄마."

고태산이 대놓고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네. 요즘 살 좀 빠졌니? 더 잘생겨졌네?"

그녀가 포근한 미소로 답했다.

하지만 속으론,

'뭐가 달라졌다는 거지?'

솔직히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고태산의 활기찬 얼굴은 그녀에게 있어 정말 잘생긴 얼굴이었다.

"아, 엄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리 자식이라도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 진짠 줄 안단 말야. 돼지 너는 아침부터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옆에서 고아린이 경기를 일으키며 소리쳤다.

"아린아. 너 오빠한테 말 함부로 하지 말랬지."

"아침부터 괴상한 소리를 하니깐 그렇지. 쟤 요즘 진짜 이상해졌어."

고아린이 질색을 하며 짜증을 부렸다.

그 모습을 보며 고태산이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너 긁지 않은 복권이라고 들어 봤냐?"

"하아, 이건 또 무슨 어처구니없는 소리지? 응, 들어봤는데 왜? 설마 본인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음, 글쎄?"

고태산의 말에 고아린이 리얼 황당하단 표정이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릴 하는 거야? 요즘 진짜 이상해. 괜히 상처받지 말고 먹을 거라도 마음껏 먹으면서 살아."

고아린이 한숨을 퍽 쉬며 말했다.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지?

좋아하는 여자라도 생겼나?

그런 거라면 결국 현타만 세게 맞을 텐데.

가족으로서 이런 건 솔직하게 말해줘야 한다.

자신의 오빠는 외모로는 가능성이 없다. 아... 다른 것도 마찬가지네.

"그래? 그럼 나랑 내기할까?"

고태산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뭔 내기?"

"내가 만약 살을 뺐는데 당첨 복권이면 어떡할래?"

"에휴...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게."

"진짜지? 약속 꼭 지켜라? 그럼 나도 내가 지면...."

"네가 지면 나한테 아무것도 해 줄 필요 없어. 그냥 멘탈이나 잘 챙겨."

고아린이 고태산의 말 허리를 자르며 손을 휙휙 저었다.

"그래? 좋아, 콜."

고아린, 넌 죽었다.

어디 한번 두고 봅시다.

* * *

한강 조깅 코스.

"저 사람 봐. 어우, 보기만 해도 쓰러질 거 같애. 이 날씨에 미쳤어."

"그러게. 얼굴에 땀 좀 봐.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네."

한 커플이 헉헉거리며 뛰고 있는 남성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에 접어들진 않았지만, 낮 기온 29도에 남성은 비닐 재질의 재킷과 긴바지를 입고 열심히 뛰고 있었다.

남성은 긁지 않은 복권, 고태산이었다.

"흐어억... 흐어억...."

머리서부터 떨어지는 땀이 입 밖으로 반쯤 튀어나온 혀를 적신다.

하지만 그는 짠맛을 느낄 겨를도 없이 계속해서 달릴 뿐이다.

"우욱-!"

후로 30분 정도 더 지났을까.

고태산은 오바이트가 나오기 직전 런닝을 멈추고 잔디밭에 벌렁 누웠다.

"크허어어헉, 헉헉헉...."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오늘 오전에 간단하게 우유와 삶은 계란만 먹고 벌써 3시간째 뛰는 중이었다.

빠른 속도로 뛰진 않고 중간에 여러 번 쉬었지만, 이 정도 운동 강도면 보통 사람들도 충분히 힘들어할 정도다.

그걸 고도비만에 운동과 담쌓은 고태산이 한 것이었다.

예전의 그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저승코인으로 인해 그는 변하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어느 정도 호흡이 돌아오고 갑갑한 재킷을 벗으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상쾌함이 느껴진다.

"아, 좋다."

성취감도 들고 기분이 좋다.

앞으로 원하는 몸매를 만들 때까지 계속 뛸 생각이다.

처음엔 헬스클럽을 다닐까 하다가 돈도 돈이고, 이렇게 사람 많은 곳을 뛰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밖에서 뛰다 보면 귀신을 발견할 확률이 높을 테니까.

살도 빼고 귀신도 잡고. 일타이피란 말이지.

"그런데 생각보다 귀신이 없는 것 같네."

처음 저승사자를 만났을 때 그가 하도 바쁘다고 해서 귀신이 굉장히 많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내 예상보단 훨씬 적다.

3년 동안 귀신이었던 유라 아버지도 마주친 귀신이 20명 정도라고 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나는 반경 10m 이내의 귀신만 감지할 수 있는 제약도 있어 더 발견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하긴 귀신이 그렇게 많으면 이런 식으로 성불을 도와주진 않겠지."

귀신이 가득한 세상이라면 여러 면으로 이승의 인간들에게 피해를 입힐 것이다. 그 외 다른 문제들도 많을 것이고.

그렇다면 저승에서도 이렇게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성불을 돕는 것이 아닌 강제적으로 소멸시키지 않을까 싶다.

물론 추측이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조금 더 쉴 겸 잠시 인터넷에 접속했다.

"헉! 이거 개봉했어?!"

포털 실시간 검색어를 확인한 고태산은 깜짝 놀랐다.

『반지로 세상을 흔들어 개봉』

"와, 까맣게 잊고 있었네."

'반지로 세상을 흔들어'는 고태산이 완결까지 읽은 몇 안 되는 웹소설이다.

그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어 오늘 개봉한 것이다.

처음 영화화 확정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손꼽아 기다렸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 잊고 지냈다.

"바로 보러 가자."

굉장히 좋아했던 소설이었던 만큼 기대 만땅이다.

빨리 집에 가서 씻고 영화관으로 달려가야지.

"가자!"

고태산이 다시 왔던 길을 뛰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돌아갈 법도 한데 살을 빼고자 하는 그의 의지는 무척 강했다.

* * *

L시네마 영화관.

작지 않은 상영관 안에 관객들이 가득하다.

[나는 이 나라에서 헬조선이란 단어를 지워 버릴 것이다.]

'캬, 죽인다. 역시는 역시 역시군.' 고태산이 홀로 영화관 구석에 자리해 콜라와 팝콘 대신 지방 분해에 좋은 녹차를 마시며 영화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배우들의 연기력도 좋고, CG도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우연히 얻은 이능을 활용해 헬조선을 개혁하는 내용이다.

대한민국 사회에 불만이 많았던 고태산이었기에 큰 대리만족을 느꼈었다.

[머지않은 미래. 헬조선이란 단어는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루할 틈 없이 금세 2시간이 지나 영화가 끝났다.

'크, 잘 만들었다. 기대 이상이야.'

긴 분량의 원작을 짧은 러닝타임 안에 잘 녹여 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이 정도면 훌륭하다.

나중에 VOD 나오면 또 봐야지.

"괜찮은데? 연출을 되게 잘했다."

"응, 기대 이상이었어."

"영화로 보니까 또 다르네. 나중에 한 번 더 봐야지."

관객들도 대체로 만족하는 반응을 보이며 퇴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태산은 자리를 지키며 스크린을 계속 바라봤다.

그는 영화를 볼 때 스크린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보는 스타일이다.

엔딩 크레딧을 보는 것도 재밌고, 가끔 쿠키 영상을 첨부하는 작품도 있기 때문이다.

"흠, 쿠키 영상은 없네."

고태산은 스크린이 완전히 꺼지고 나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객 대부분이 극장을 나간 상태였다.

우우우우우우웅-!

응?

순간 갑자기 휴대폰 진동이 강하게 울린다.

분명히 무음으로 해 놨는데?

설마...?

고태산은 떨리는 마음으로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반경 10m내 망자 감지.』

'오! 귀신쓰?! 아싸!'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고태산이 활짝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정말 반가운 알람이다.

귀신을 무서워하던 고태산은 이제 없다.

이제 그에게 귀신이란 저승코인이다.

저승코인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게 된 지금은 귀신이 나타나면 뽀뽀라도 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이번에 얻는 코인으로는 키를 키워야지, 크크.

'그런데 누구지?'

지금 극장 안에는 3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 2명과 귀신 1명이겠지.

"흐음."

겉모습으론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하여간 성불 서포터즈 어플 되게 불친절하다니깐.

명확하게 누가 귀신이라고 콕 집어 주면 얼마나 좋아?

"나 독서실 맞다고! 잠깐 편의점 나온 거야!"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성이 통화를 하며 짜증을 낸다.

"독서실 입실 체크를 깜빡하고 못 해서 그런 거라니까! 엄마 진짜 나 못 믿어?"

그래, 쟤는 아니네.

귀신이 전화하며 독서실이라고 뻥 칠 일은 없을 테니.

'그럼 남은 건.'

예쁘장한 젊은 여성과 근육이 우락부락한 중년 남성이다.

둘 중 누굴까.

음, 애매하네.

스윽.

잠시 그들을 관찰하던 중, 둘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케이.

유라 아버지 때를 생각해 보면 허공에 발이 떠 있는 걸 보고 귀신인 줄 알았지.

고태산이 그들의 뒤를 따라붙었다.

자, 발을 보자.

누가 귀신이니.

"응?"

그런데 이거 웬걸?

두 명 다 바닥에 발을 딛으며 출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12화 반전이네

"어, 어...?"

이럴 수가.

둘 다 사람처럼 걷고 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긴, 생각해 보니 귀신이 허공을 떠다닐 수 있더라도 걷지 말란 법은 없었다.

고태산은 당황해하며 순간 어찌할 줄 몰랐다.

그사이 그들은 영화관을 벗어나고 있었다.

안돼! 내 저승코인!

일단 서둘러 그들을 따라나섰다.

출구를 나오니 여성은 손거울로 얼굴을 보면서 걸어가고 있었고, 남성은 복도 벽면에 걸린 개봉 예정 영화 포스터를 훑고 있었다.

'귀신이면 화장에 신경 쓸까?'

아니, 애초에 귀신이 화장할 수 있기는 하나?

음... 잘 모르겠네.

하지만 지금 분위기를 보면 근육남이 귀신일 거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아 씨, 어떡하지.'

다가가서 뭐라고 하지?

만약 아니라면?

빨리 확인해야 했다.

근육남이 귀신이 아니라면, 여성이 귀신이기에 눈앞에서 사라지기 전에 잡아야 한다.

'에이, 모르겠다.'

저승코인 앞에 그 어떤 것도 주저할 수 없다.

그냥 가서 귀신이냐고 물어보자!

아니면 또라이 취급받고 마는 거지 뭐.

고태산이 거침없이 근육남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 실례합니다...."

"네?"

영화 포스터를 보며 천천히 걷고 있던 근육남이 걸음을 멈췄다.

약간 마동식 느낌이다.

인상 살벌하시네.

'아닌가?'

말을 걸었을 때 근육남은 전혀 놀라지 않았기에 귀신이 아닐 것이란 예감이 든다.

귀신이라면 사람인 고태산이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에 대해 당황했을 테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해 보자.

"호, 혹시 귀신... 아니시죠?"

"귀신?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요?"

"아... 아닙니다."

"이거 뭐 하는 놈이야? 너 이리 와 봐."

근육남이 인상을 확 구기며 다가왔다.

윽! 아닌가 보다.

"죄송합니다!"

고태산은 꾸벅 사과한 뒤 재빨리 자리를 떴다.

"야, 사이비 짓거리하고 다니지 마라. 그러다 뒈진다!"

뒤편에서 근육남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사이비 아닌데요....

후... 큰일 날 뻔했네.

'당신이 귀신이구나.'

그렇다면 저 여성이 귀신이다.

그녀는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섰고, 고태산도 빠르게 뛰어가 그녀의 뒤에 섰다.

'일단 따라가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말을 걸 수는 없었다.

뒤를 쫓으며 기회를 보자.

그나저나 되게 특이하네.

그냥 날아다니면 되지 에스컬레이터까지 타고 다닌대?

또각또각.

그녀는 쇼핑몰 2층에 있는 서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서점 구석에 위치한 장르 문학 코너로 향했다.

방금 영화도 그렇고, 장르 소설을 좋아하나 보다.

나랑 같네.

'확실해.'

조금 거리를 두고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니 귀신임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지금 10분이 넘도록 책을 펴 보지 않고 둘러보기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점에 왔는데 책을 펴 보지 않는다?

귀신이라 책을 만질 수 없는 것이겠지.

'흐음.'

30분은 더 지난 것 같은데 좀처럼 나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지겹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

귀신이 확실하니 조용히 말을 걸어 봐야겠다.

고태산은 이어폰을 끼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렇게 하고 말하면 다른 사람이 볼 때 통화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톡톡.

고태산이 손가락으로 여성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휘익-!

여성은 깜짝 놀란 듯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뭐, 뭐예요?]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몹시 당황해한다. 반면 고태산의 입꼬리는 씩 올라갔다.

'그래, 귀신이라면 이런 반응이어야지.'

사람이 귀신을 건드렸으니 놀라는 게 당연하다.

고태산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잠깐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 좀 할까요?"

* * *

고태산은 자신에게 엄청난 호기심을 보이는 여성 귀신과 함께 건물 밖으로 나왔다.

[여기서 할까요?]

여성 귀신이 벤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고태산이 얼굴을 붉혔다.

목적어를 빼고 말하니 좀... 큼큼.

"그, 그래요."

둘은 살짝 거리를 두고 벤치에 앉았다.

[정체가 뭐예요?]

귀신이 옆에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가까이서 보니 되게 예쁘게 생겼네.'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태산이 입을 열었다.

"저는 청명고 2학년 고태산이라고 합니다. 특이사항으로는 보시다시피 귀신을 보고 만질 수 있어요."

[사람 맞나요?]

"네. 한번 죽었긴 했지만, 사람 맞습니다."

뭔가 말이 이상하다.

[와, 신기하네요.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죠?]

"설명을 드리자면...."

고태산은 이러쿵저러쿵해서 성불 서포터즈가 되었고, 주어진 임무는 어쩌고저쩌고 등을 말해 줬다.

[그런 게 있어? 대박이다! 진짜 다행이다.]

그녀가 굉장히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갑자기 말도 편하게 하면서 텐션이 높아졌다.

[난 스물둘, 지하율이라고 해.]

"반갑습니다. 하율이 누나."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 너도 편하게 말 놔."

"아... 그럼 그럴까?"

이미지와는 다르게 굉장히 털털하고 친화력이 좋았다.

조금 전 모습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꺄하하, 그래서 아까 엉뚱한 사람한테 사이비 취급받은 거야?]

"응, 하마터면 진짜 맞을뻔했어. 그 사람 팔뚝이 이만하더라고."

고태산은 그녀에게 접근하기까지 상황을 설명했다.

"근데 왜 걸어 다녔던 거야? 휙휙 날아다니지 않고?"

그것만 아니었으면 마동식 닮은 남자한테 귀신이냐고 안 물어봤을 텐데 말야.

[난 그런 거 못 해.]

"응? 귀신이면 다 하는 거 아냐?"

[그건 아니야. 우리한텐 '귀신력(鬼神力)'이라는 게 있어.]

"귀신력?"

[응. 이승에 머문 시간이 길수록 귀신력이 강해져. 귀신력에 따라서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이승의 물건을 만지거나 할 수 있어. 나도 얼마 전에 마주친 귀신한테 들은 거라 최근에 알았어.]

"아, 그렇구나."

그래서 누나는 사람처럼 걸어 다녔던 거였어.

유라 아버지는 귀신이 된 지 3년이 지났기에 공중을 떠다닐 정도의 귀신력이 있었나 보다.

[지금 내 귀신력으론 옷차림, 화장, 간단한 소품같이 머릿속으로 이미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을 구현화 하는 정도야.]

신기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귀신들이 옷을 입고 있는 것 자체가 미스테리긴 했지.

다 귀신력으로 직접 구현한 거구나.

그런데 귀신력이 낮다는 건....

"누나는 귀신이 된 지 얼마 안 된 거야?"

[응, 이제 두 달 좀 넘었어.]

"아...."

고태산은 그녀가 밝고 경쾌해서 귀신이 된 지 좀 된 줄 알았다.

하지만 겨우 두 달이란다.

이 나이에 죽은 것이라면, 사고일 가능성이 크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물어봐도 될까?"

혹시라도 큰 상처를 건드리는 건 아닐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교통사고였어. 새벽 두 시에 길을 건너다가 차에 치였거든.]

"...."

역시, 사고구나.

뭐라고 말을 건네야 할지 잘 모르겠다.

지하율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상대방은 음주 운전한 30대 남성이었어. 빨간 불임에도 속력을 줄이지 않고 나를 박아 버린 거지. 어찌나 빨리 달렸던지 내 몸이 한참을 날아가더라.]

"그런 개자식이."

고태산의 이가 갈린다.

그런 이유로 앞길이 창창한 젊은 여성이 목숨을 잃다니.

음주운전은 정말 처벌이 너무 약하다.

그의 생각엔 음주 운전은 사고를 내지 않아도 살인 미수다.

윤창호법으로 형사 처벌 기준이 강화되긴 했으나, 아직 멀었다.

음주운전으로 징역?

허울뿐이다.

살면서 음주운전으로 징역 갔다는 사람은 몇 들어 보지도 못했다.

벌금 좀 내고 심해야 면허정지다.

후, 우리나라 사법계의 너그러움에 감탄밖에 안 나온다.

"그래서 가해자에 대한 원한 때문에 이승에 남아 있는 거야?"

가해자야 어떻게 되었을지 뻔하지.

대한민국은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죽여도 살인죄가 적용되지 않는다.

스물둘 청년 윤창호를 죽인 만취 운전자가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그것도 국민의 공분과 대통령까지 나서 윤창호법이 신설된 후에 내려진 형량이다.

진짜 대단한 나라다.

지하율을 죽인 가해자도 마찬가지겠지.

이름도 모르는 꽃다운 나이의 여성을 살해했지만, 잘해야 징역 몇 년 살다가 다시 사회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것이다.

아마 출소하자마자 고생했다며 술 한잔하겠지?

시발.

[그건 아냐. 왜냐면 가해자도 죽었거든. 나를 치고 나서 전봇대를 들이박았어.]

고태산의 예상이 빗나갔다.

가해자도 바로 죽었단다.

"혹시 같이 죽었으면 그 사람 영혼을 봤어?"

사고 장소에서 함께 죽었으면 가해자의 영혼을 만났을 것이다.

[아니, 나는 사고 현장에서 병원으로 실려 간 뒤 다음날에 죽었고, 그 개자식은 바로 즉사했어.]

"아...."

[만약 살아 있었다면 복수하기 위해 남아 있었을 텐데 그 대상이 없네.]

밝은 표정을 유지하던 지하율의 얼굴에 순간 씁쓸함이 번졌다.

'난 내 실수로 죽었을 때도 미칠 듯이 괴로웠는데 음주운전 피해자로 죽은 누나는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까.'

감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그 가해자는 제발, 꼭! 지옥에 가길 빈다.

"그럼 혹시 성불하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

유라의 아버지, 천강태는 사망 후 44일이 지나면 귀신은 스스로 성불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두 달이 지난 지하율은 성불을 못 하는 게 아닌 안 하는 것이다.

어떤 사정이 있는 거지?

[혹시 웹소설 좋아해?]

이승을 떠도는 이유를 물었는데 뜬금없이 웬 웹소설?

고태산은 일단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응, 완전 좋아하지. 방금 본 영화도 웹소설 원작을 보고 난 뒤에 본 거야."

다른 애들 연애하고 밖에서 놀 때 나는 집에서 웹툰, 웹소설에 빠져 살았다.

한때 유료 결제하려고 알바까지 뛰었을 정도다.

어디서 꿀리지 않는 깜냥이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이 영화 본 사람들이 대부분 원작보고 온 거니까.]

"누나도 웹소설 좋아하지?"

서점에서도 장르소설 코너에 머물렀으니까.

[응, 많이. 사실 내가 글을 좀 썼었거든. 아마추어긴 하지만.]

"오, 그래? 혹시 미스틱에서 연재했어?"

미스틱은 아마추어 여성 작가가 주로 연재하는 곳 중 가장 큰 웹소설 플랫폼이다.

[아니, 사자후에서 했어.]

"뭐?"

고태산이 놀라 되물었다.

미스틱이 아닌 사자후라고?

사자후는 남성향 소설이 주를 이루는 곳이다.

여성이 그곳에서 글을 썼다라....

독특한데?

"장르는?"

[현대 판타지였어.]

"우와...."

[나는 로맨스랑 안 맞어. 그런 쪽이 더 잘 맞더라고.]

"혹시 필명이 뭐였어?"

['야생마'라고. 아마 모를 거...]

"뭐? 야생마?!"

고태산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야생마라면 내가 아는 그 야생마가 맞는 건가?!

"작품명 <너의 강냉이를 털어 줄게> 맞아?"

[꺄아! 너 나 알아?!]

지하율이 기쁜 듯 손바닥으로 고태산의 몸을 짝짝 때리며 되물었다.

"알고말고! 맙소사...."

예전에 굉장히 즐겨 보던 소설이 있었다.

야생마라는 굉장히 마초적인 필명을 쓰는 작가의 <너의 강냉이를 털어줄게>라는 작품이었다.

왕따 고등학생이 어느 날 레전드 격투가 영혼들의 후원을 받아 그 능력으로 인간쓰레기들의 강냉이를 털어 버리는 내용이다.

10대 감성에 단순한 플롯이지만, 작가 개성이 뚜렷하고 사이다가 팍팍 터져 상당히 재밌게 본 소설이었다.

와...

당연히, 무조건 남성 작가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걸 눈앞의 여리여리한 스타일의 지하율이 쓴 거라고?

"진짜 반전이네."

13화 닮은 사람?

"그런데 왜 이후로는 글 안 썼어? 내가 야생마 필명을 얼마나 많이 검색했는데."

고태산은 해당 작품 완결 이후 작가 야생마의 후속작을 애타게 기다렸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록 신작은 없었다.

[미안. 학과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었어.]

"무슨 과였는데?"

학과 공부 때문에 그 정도로 시간이 없다는 건 오바 아닌가?

좀 핑계 같다.

대학생이면 시간 많잖아. 방학도 길고.

[의대였거든.]

"허억!"

미친! 의대생이었다고?

"하, 학교는 혹시 어디야?"

[고연대.]

"커걱!"

아... 사기네.

미끈한 외모, 최상위 스펙에 장르 소설에도 재능있다고?

생태계 파괴의 주범이다.

저승코인 없이도 이런 스펙의 사람이 있구나.

"그럴 만도 했네. 의대생이면 맨날 공부해야 하지 않아?"

[뭐, 예과 때는 시간이 있었는데 본과 들어가니까 진짜 버겁더라고.]

"...그랬구나."

고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과? 본과?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암튼 엄청 바빠졌다는 뜻이겠지.

[나도 소설이 너무 쓰고 싶었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열정을 가지고 했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도저히 상황이 안 되더라고.]

지하율의 표정에서 아쉬움이 드러났다.

"혹시 의대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는 없던 거야?"

[응. 그냥 제도권 하에 열심히 공부하라고 해서 했을 뿐이고, 부모님의 바람대로 의대에 진학했던 거야.]

그녀는 시키는 대로 공부만 하다가 대학에 가서야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은 케이스였다.

"그랬구나."

고태산은 당시 야생마 작가의 남긴 말과 댓글 등에서 글을 굉장히 즐기면서 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작년에 고민 끝에 휴학했어. 글 한번 제대로 써 보고 싶어서.]

"와, 큰 결심 했네."

의대생의 휴학은 일반 대학생과는 다르게 많은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그녀의 웹소설에 대한 열정은 절대 작지 않았다.

[휴학하고 정말 미친 듯이 웹소설에 대해서 공부했어. 기성 작가한테 일대일로 지도도 받고 말야. 퍼니북스 웹소설 공모전을 준비했거든.]

"아아, 그거 나도 알아. 1등이 1억이지?"

[응, 맞아.]

수개월 전 국내 최대 웹소설 플랫폼 퍼니북스에서 웹소설 공모전을 개최했다.

1등 상금이 1억이고, 입상자 20명을 선정해 각종 부상을 준다.

작가 지망생뿐 아니라 기성 작가들도 참여하기에 경쟁이 치열했다.

[정말 열심히 준비해서 공모전에 작품은 제출했어. 그리고 사고로 3일 뒤에 이렇게 됐지.]

"아...."

[아까 왜 이승에 남아 있냐고 했지? 이미 죽음에 대해선 받아들였어. 다만,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정을 가졌던 웹소설 공모전 결과는 꼭 확인하고 싶었어.]

"그랬구나...."

[발표까지 이제 5일 남았네. 난 공모전 결과만 확인하고 바로 성불할 거야.]

지하율이 애써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모습에 고태산의 마음이 아렸다.

[그래서 아쉽지만 네가 딱히 도와줄 건 없어.]

맞는 말이다.

이번엔 망자의 성불을 위해 고태산이 나설 일이 없었다.

공모전 결과만 확인하면 그녀는 알아서 성불할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때까지 기다리기 심심한데 말동무나 좀 해 주라. 공모전 결과 확인한 뒤에 성불 계약해 줄게. 어차피 성불할 건데 너 저승코인 얻을 수 있도록 간단한 조건 걸어 계약하지 뭐.]

"오, 정말?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완전 개이득!

근데 과연 이렇게 해서 저승코인을 얼마나 받을지는 모르겠다.

코인의 수량은 망자의 한을 풀기 위해 내가 투자한 시간, 노력 등을 반영하여 정해지니까.

그래도 수량이 얼마가 됐던 거저 받는 건데 당연히 땡큐다.

[그럼 공모전 결과 나올 때까지 너한테 붙어 있어야겠다.]

"음... 계속 같이 있는 거야?"

[응, 물론이지.]

"그, 그럼 혹시 잘 때도... 같이 있을 거야?"

고태산이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귀신이긴 하지만 예쁜 20대 여성이다.

밤에 자신의 방에 함께 있는 상상을 하니 기분이 묘했다.

[왜에? 그러면 안 돼~?]

지하율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콧소리를 냈다.

"아, 아니 안 되는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퍼엉-!

"헉!"

순간, 지하율의 모습이 변했다.

캐쥬얼한 차림에서 짙은 화장에 미니스커트, 하이힐을 신은 모습으로 말이다.

꿀꺽- 고태산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은 삼켰다.

[그게 왜 궁금한데~?]

이번엔 요염한 표정으로 그의 귓가에 속삭인다.

"아... 음...."

처음 겪는 상황에 귀까지 뜨거워지는 게 느껴진다.

[푸하하하! 역시 아직 어린애야! 너 나랑 같이 있으면 떨려서 잠이나 잘 수 있겠어? 애기네, 애기야!]

지하율은 그런 고태산의 모습을 보고 빵 터졌다.

우씨, 놀린 거야?

"끄응...."

[걱정하지 마. 늦은 시간에는 나가 있을 거니까. 피 끓는 청춘인데 사생활은 지켜 줘야지. 근데 뼈 삭으니까 무리하진 말고.]

"아, 뭐래!"

[아하하하!]

여리여리한 외모에 속았다.

야생마란 필명으로 활동한 작가다운 짓궂음을 가진 그녀였다.

* * *

"여기가 우리 집이야. 들어가자."

고태산이 귀신 지하율과 함께 집에 도착했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7시가 넘었다.

현관문을 여니 좁은 거실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고 있는 박유란과 고아린이 보인다.

"다녀왔습니다."

"아들 왔어? 밥은?"

"저녁은 안 먹으려고. 나 다이어트 중이잖아."

"배고플 텐데. 조금이라도 먹어. 그러다 병나."

"괜찮아."

박유란은 생으로 굶는다는 아들에게 계속해서 먹을 것을 권유했다.

"냅둬 엄마. 어차피 결국 현타 맞고 또 엄청 먹어 댈 거야."

소파에 누워 있는 고아린이 조소를 날렸다.

[어머니랑 동생이 되게 미인이다. 어머니 피부 좀 봐.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겠어! 동생도 어쩜 이렇게 늘씬할까. 얼굴도 주먹만 하고.]

지하율이 모녀를 보며 감탄했다.

고태산이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박유란은 40대 초반이지만, 얼굴이며 몸매며 조금만 꾸미면 세련된 20대 후반 여성처럼 보인다.

홀로 두 자식을 키우느라 힘든 일을 많이 했음에도 항상 고운 외모를 유지했다.

거기에 고아린은 그런 엄마의 외모를 쏙 빼닮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비주얼로는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

나쁜 기집애... 좋은 건 저 혼자 다 가져갔어.

'진짜 원망 많이 했지.'

왜 나만 이따구로 생겼을까.

분명 어렸을 때 우리를 버리고 간 아빠란 자를 닮아서 이런 거겠지.

그의 얼굴은 모른다.

엄마는 나와 아린이에게 아빠에 대한 정보는 일절 말한 적이 없다.

그저 최악의 사람이니 궁금해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마음이 넓은 엄마가 그 정도로 독하게 말할 정도면 정말 인간 말종이란 뜻이다.

난 내 외모가 구린 것도 짜증나지만, 그런 사람을 닮았다는 게 굉장히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정말 스트레스를 받아 왔는데 뭐, 이제는 상관없다.

저승코인으로 이제 곧 나도 싸악~ 변할 테니까.

<다음 소식입니다. 국내외 차명계좌 운영으로 세금 1,200억 원 탈루 혐의를 받은 신화 그룹 고두호 부회장이 오늘 재판에 불출석하였습니다.

고두호 부회장 측 변호인은 모든 재판 준비를 마쳤으나 갑작스런 지병 악화로 인해 오늘 오전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다고 전했습니다. 이에 재판부는....>

잠시 대화를 멈추고 모두가 거실 TV에 시선을 모았다.

"와, 세금이 1,200억이면 대체 버는 돈은 얼마라는 거야?"

고아린이 입을 떡 벌렸다.

"국내 재계 순위 1위 기업의 부회장인데. 숨만 쉬고 있어도 상상도 못 할 돈을 벌겠지."

고태산은 인터넷에서 신화 그룹 고기영 회장이 보유한 주식 가치만 15조에 달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그의 아들인 부회장은 재산이 그 정도는 아니지만, 어차피 그 돈이 그 돈이지 뭐.

가늠이 안 되는 재산이기에 부러운 마음도 들지 않는다.

"진짜 개부럽다. 근데 저 사람 뭔가 너 닮았다? 살 빼고 나이 먹으면 딱 저 얼굴일 것 같은데? 푸하하, 진짜 똑같아."

TV 화면에 확대된 고두호 부회장의 얼굴을 보며 고아린이 낄낄거렸다.

고두호 부회장은 모든 걸 가졌지만 인물은 영 아니었다.

"죽을래?"

그 말에 고태산이 발끈했는데,

'좀 비슷한 느낌은 나네.'

동생의 말이 영 없는 소린 아니었다.

이목구비랑 전체적인 느낌이 뭔가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때였다.

박유란이 티비 채널을 휙 돌리며 싸늘한 표정으로 고아린을 바라봤다.

"고아린, 너 오빠한테 자꾸 말 함부로 할래?"

"으, 응?"

갑작스런 그녀의 정색에 고아린은 물론 고태산 역시 화들짝 놀랐다.

"열심히 노력해서 변해 보려는 오빠를 자꾸 놀리기나 하고 말야. 네 오빠가 어딜 봐서 방금 그 사람이랑 닮았니?"

"아, 아니 그냥 평소처럼 장난 좀 친 건데...."

엄마가 오늘따라 갑자기 왜 이러지?

고아린은 머리에 물음표가 한가득 떠오르며 익숙하지 않은 엄마의 정색에 진땀을 흘렸다.

* * *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올게요."

"응, 우리 이쁜 아들, 딸 잘 다녀와!"

다음날 아침, 박유란은 오늘도 어김없이 환한 미소로 고태산과 고아린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제 엄마 진짜 무서웠어."

고아린이 전날 박유란의 분노한 모습을 떠올리며 양팔을 문질렀다.

"엄마 그렇게 화난 모습 진짜 오랜만이었어. 나도 깜짝 놀랐네."

평소 온화한 성격의 박유란이었기에 어제 그녀의 꾸중은 상당히 매서웠다.

본래 안 그러던 사람이 화내면 더 무서운 법이니까.

"대체 왜 그렇게 화를 낸 거지? 너한테 고두호 닮았다고 한 게 엄마가 그렇게 화 낼 일인가?"

"...보통은 오빠한테 너너 거리는 거 자체가 혼날 일이야."

"네가 오빠다워야 오빠라고 하지. 아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퍽!

"아아!"

고아린이 주먹으로 고태산의 팔을 세게 때렸다.

'...살 빼고 나면 넌 죽었다.'

고태산은 욱신거리는 팔을 주무르며 이를 갈았다.

자신이 긁지 않은 복권이라면 뭐든 다 해 준다고 했던 고아린이다.

다이어트를 더욱 빡세게 진행해야겠다.

"돼지, 나 먼저 간다."

"잘 가라."

고아린의 학교 버스가 먼저 도착했다.

"아린아, 안녕."

"응, 안녕."

그녀가 버스에 탑승하자 같은 학교 애들이 인사를 건넸다.

"방금 옆에 있던 사람 너네 오빠야?"

"응."

아침부터 껌을 질겅질겅 씹는 한 여학생이 물음에 고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 너랑 완전 딴판이다. 어쩜 이렇지 다르지? 그 누구야, 어제 뉴스에 나오던... 잠깐 있어 봐."

껌녀가 폰으로 고두호의 사진을 검색하여 친구들에게 보였다.

"아하하! 그러네? 대박이다."

"저 오빠랑 똑 닮은 듯. 크큭."

주변 애들이 공감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껌녀의 말에 주변 애들이 공감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야."

"...응?"

고아린이 서늘한 눈빛으로 일행들을 훑었다.

"계속 지껄여 봐."

"아, 아니...."

"...."

그녀의 기세에 낄낄거리던 애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을 닫았다.

"이것들이 죽고 싶나. 돼지... 아니, 우리 오빠가 살이 쪄서 그렇지 살만 빼면 완전 장난 없어. 너희들이 뭘 알아?"

"그, 그럴 거 같아. 우리가 잘못 봤네."

"맞아...."

고태산을 비웃던 여중생들은 고아린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야 했다.

14화 점심시간

[고등학교 진짜 오랜만이다. 와, 쟤들 머리 색 봐. 나 때는 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많이 좋아졌네.]

"누나, 졸업한 지 2년밖에 안 됐으면서 아저씨 같은 말투 하지 마."

고태산이 다니는 청명고에 들어선 지하율이 추억을 떠올리며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하고 있었다.

"어이, 고태산."

교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민석이었다.

이틀 전 고태산에게 시비를 걸다가 표승권에게 참교육을 당했던.

그가 아침부터 담배 냄새를 풀풀 풍기며 고태산 앞에 다가섰다.

"표승권 빽 믿고 깝치다가 진짜 죽는 수가 있어."

"...."

고태산은 순간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대체 언제, 무엇을, 어떻게 깝쳤다는 말인가.

"너, 내가 지켜본다."

장민석이 가뜩이나 험악한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그는 현재 자존심이 굉장히 많이 상한 상태였다.

반에서 한껏 힘주며 실세 노릇을 하며 지냈는데 잠자던 사자 표승권을 건드려 바로 깨갱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밥이라고 생각했던 고태산이 기어오르기도 했고.

당장이라도 이 투실한 돼지를 두들겨 주고 싶지만, 괴물 같은 표승권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그저 이렇게 몰래 겁 좀 주는 것이 상처 입은 그의 가오를 치료할 최선의 행동이었다.

이렇게 화풀이를 하니까 좀 낫네.

"시발 새끼야, 앞으로...."

"지랄하고 자빠졌네."

장민석이 더욱 거세게 몰아치려던 찰나 고태산은 그의 말을 딱 잘랐다.

"...뭐, 뭐?"

"지켜보긴 뭘 지켜봐. 변태야?"

"이, 이 찐따 새끼가... 진짜 죽고 싶나."

예상치 못한 고태산의 반응에 장민석이 당황하더니 이내 분노에 눈이 벌게졌다.

"죽여 봐. 네까짓 게 죽는 게 뭔지나 알어?"

고태산은 확실히 변했다.

그날, 처음으로 장민석이라는 졸렬한 힘 앞에 용기를 내어 반항했던 시점을 기준으로 말이다.

비록 반 애들이 보는 앞에서 맞았지만, 남자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것보단 훨씬 덜 아팠다. 이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새끼한테 굴복하는 일은 없다.

그렇게 센 척을 하더니 표승권 몰래 같잖은 협박이나 하고 있네.

죽어 본 적도 없는 게 어디서 자꾸 죽인다 거리고 있어?

[어후, 속이 다 시원하다. 멋있다! 고태산!]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대충 관계를 파악한 지하율이 고태산에게 환호를 보냈다.

"자신 있으면 한번 건드려 봐.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이상으로 갚아 줄 테니까."

"시, 시발놈이...."

허세가 특기인 장민석은 고태산의 표정에서 이 말이 허세가 아닌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힘자랑하고 싶으면 표승권한테 해라. 엄한 애들 건들지 말고. 븅신 새꺄."

그 말을 끝으로 고태산은 장민석을 휙 지나쳤다.

장민석은 그저 뭐 씹은 표정으로 고태산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꺄아! 태산 오빠 완전 멋져! 반전 매력 짱!]

'후우, 아오... 그래도 좀 쫄렸네.' 계단을 올라가는 고태산의 다리가 살짝 후들거렸다.

장민석에게 강하게 나갔지만, 속으론 언제든 주먹이 날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식은땀을 흘렸다.

맞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는 것보단 낫다는 거지,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잘했다 고태산. 넌 변하고 있어.'

고태산이 스스로를 칭찬하며 교실로 향했다.

한편 같은 시각.

2층 교실 창문 밖으로 고태산을 지켜보던 학생들이 있었다.

천유라와 표승권이었다.

둘은 창가에서 얘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조금 전 모습을 보게 되었다.

"사람이 저렇게 확 바뀔 수도 있나?"

천유라는 아침부터 또다시 고태산에게 놀랐다.

"음, 내가 쟤를 잘 모르긴 하지만 저런 성격은 절대 아니었는데."

"완전 소심하고 호구 같은 애였지."

"아무리 내가 경고하긴 했어도 장민석한테 저런 깡을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말야."

고태산에게 별 관심이 없던 표승권이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틀 전 장민석으로부터 고태산을 도와준 건 천유라의 부탁 때문이었다. 뭐, 평소 장민석이 거슬리던 것도 있었지만.

"재밌네."

천유라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 * *

"으아, 배고파 뒈질 뻔."

"오늘 메뉴 뭐야?"

"탕수육!"

"오예!"

"빼갈은 안 나오냐, 크크."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되자 모두 활력이 넘친다.

무려 탕수육이란다.

신나는 마음으로 삼삼오오 모여 급식소로 향했다.

물론, 고태산은 홀로.

[태산아, 너 진짜 친구 없구나....]

"응."

고태산이 낮게 대답했다.

보통 이 나이 때 혼밥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에겐 별일 아니었다.

"조금만 주세요."

"조금만 줘? 다른 애들은 더 달라고 난린데."

"괜찮아요."

평소라면 환장할 탕수육이지만, 그는 빨리 살을 빼야 한다.

밥도 이전의 반 정도만 담고 빈자리에 앉았다.

툭.

바로 밥을 한 숟가락 뜨는데, 바로 앞에 누군가 식판을 내려놨다.

"표승권?"

"같이 먹자."

"어어...."

살짝 당황한 고태산의 얼굴을 보며 표승권이 씩 웃었다.

몇 테이블 떨어진 자리에서 천유라가 그 모습을 바라봤다.

"너희끼리 먹어. 나 자리 옮긴다."

"엉? 유라야 어디가?"

"유라야!"

천유라는 자신의 식판을 들고 고태산의 옆으로 향했다.

"여기 앉아도 되지?"

"응?"

그녀는 자연스럽게 고태산의 옆자리에 앉았다.

'뭐지...?'

고태산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얘들이 갑자기 왜 이래?

"야, 저기 봐. 저거 무슨 조합이냐? 우리 학교 대장이랑 여왕이 웬 찐따랑 같이 있네?"

"봤어? 천유라가 먼저 다가가서 옆에 앉는 거?"

"뭐지.... 천유라 취향이 혹시 오덕인가...?"

그 광경을 보며 주변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저 새끼...."

그리고 장민석은 이를 갈았다.

아침에는 하도 황당해서 그냥 넘어갔지만, 어떻게 조질까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저 찐따가 표승권이랑 천유라랑 저렇게 가까운 사이였나?

'그래서 그때 표승권이 나선 거였어.'

이러면 고태산을 어찌할 수 없다. 건드렸다간 표승권한테 정말 뒈지게 맞을 테니까.

장민석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너 왜 밥 그거 밖에 안 먹어?"

식판에 머슴밥을 퍼온 표승권이 물었다.

"아, 나 지금 다이어트 중이거든."

"그래? 살 좀 빼려고?"

"응. 아주 확 뺄 거야."

그 말에 천유라가 고태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왜 그래...?"

인형 같은 얼굴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니 긴장되고 부끄럽다.

"지금 보니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그래?"

"응. 살 빼면 봐 줄 만할 것 같네."

"하하, 고마워."

아주 깜짝 놀라게 해 줄게.

고태산의 얼굴은 이 순간에도 천천히 변하고 있었다.

아직 많은 살로 덮여 있지만, 점점 저승코인으로 디자인한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너 좋아하는 운동 있냐."

"중학교는 어디 나왔어?"

"형제는 어떻게 돼."

식사를 하며 둘은 고태산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호구조사 당하는 기분인데.'

하지만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다.

누군가에게 이런 관심을 받는 적이 처음이라 굉장히 신선한 기분이다.

그렇게 즐겁게 식사를 이어 가던 중이었다.

쿵-!

"꺄아-! 선생님!!"

"채, 채 선생님!"

고태산의 바로 옆쪽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던 교직원 채동훈이 갑자기 바닥에 쓰러졌다.

"정신 차려 보세요! 왜 그러세요!"

"어, 어떡하죠?"

"일단 119에 전화해!"

채동훈은 바닥에 쓰러져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딱 봐도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커, 커헉...!"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는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입 밖으론 피가 흘렀다.

당장 위험해 보이는 상태에 한 중년 교직원이 구급법을 실시했다.

[태산아, 나랑 빙의하자.]

지하율이 남성의 상태를 살피더니 보더니 다급히 말했다.

마, 맞아. 누나가 의대생이었지.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하율과 빙의했다.

"잠깐만요! 제가 좀 볼게요!"

"헉헉, 응? 넌 뭐야! 저리 가!"

지하율이 빙의한 고태산이 쓰러진 채동훈에게 다가가자 심폐소생술을 하던 교직원은 방해하지 말라며 소리쳤다.

어디 이런 위급한 상황에 애가 끼어들어?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고요!"

"어어?"

고태산은 결국 교직원을 밀치고 채동훈의 상태를 살폈다.

"너 지금 뭐 하는...."

교직원은 당황해하며 뭐라고 하려고 했지만, 고태산의 진지하고 능숙한 손놀림에 어찌할 줄 몰랐다.

'입안에 출혈, 거친 호흡, 나이는 대략 환갑쯤?'

"어쩌다 이렇게 되셨죠?"

"그, 그게... 식사를 마치고 사탕을 드시다가 혀를 깨무셨어. 조금 뒤에 갑자기 헉헉거리시더니 이렇게...."

고태산의 물음에 여성 교직원이 떠듬떠듬 답했다.

'혀를 깨물어? 혹시...?'

잠시 뭔가 생각을 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분 당뇨를 앓고 있나요?"

"어? 어! 당뇨약을 꽤 오래 드신 거로 알고 있어."

역시!

"저혈당 쇼크 증상 같습니다! 이대로 두면 위험합니다. 승권아! 숟가락에 물수건 감아서 하나만 가져와 줘! 빨리!"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표승권은 그의 말에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고태산은 한 손으로 쓰러진 채동훈의 고개를 세우고 다른 손으로 그의 입안에 손가락을 넣었다.

입속에 크고 동그란 사탕이 만져진다. 목에 걸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빼서 바닥에 버렸다.

"여기 숟가락!"

표승권이 금세 주방에서 물수건을 감은 수저를 가져왔다.

고태산은 그것을 헉헉거리는 채동훈의 입에 물렸다.

"하악, 하악! 하악, 하악... 하아- 하아- 하아."

그러자 당장이라도 넘어갈 것 같던 호흡이 어느 정도 안정되며 채동훈의 표정도 편해졌다.

"어어?"

"괜찮아지신 것 같은데?"

사람들이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장담할 순 없지만, 부족한 당을 보충하시려고 사탕을 드시다 혀를 깨문 뒤 저혈당 쇼크가 온 것 같습니다. 일단 기도 확보는 됐으니 한숨 돌렸습니다."

고태산이 상황을 설명했다.

어느새 주변엔 상황을 지켜보는 학생들로 빡빡했다.

"기도가 막히면 산소 공급이 안 되서 짧은 시간에도 뇌 손상이 올 수도 있고,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 자신을 가로막았던 중년 교직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으음...."

중년 선생은 침음을 흘렸다.

물론 이 사람이 악의를 가지고 한 일은 아니지만, 긴급 상황에선 신속 정확한 판단이 필수다.

어린놈이 뭘 알아? 같은 편견은 버려야 한다.

"...."

천유라는 멍하니 반쯤 입을 버리고 고태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조금 전까지 저 찐따는 뭐냐며 비꼬던 아이들도 이 광경을 보고 굉장히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구급대입니다! 비켜 주세요!"

그때 구급대가 도착했다.

그들은 간단하게 정황을 듣고는 채동훈을 싣고 병원으로 이송했다.

"저혈당 쇼크라면 포도당 주사 맞고 금방 회복하실 겁니다."

"그, 그래?"

놀란 교직원들의 걱정을 덜어 준 뒤 지하율은 고태산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귀신이 한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

"그런데 넌 이런 걸 어떻게 알았어?"

처음 구급법을 실시한 교직원이 감탄한 표정으로 고태산에게 물었다.

음... 뭐라고 하지?

에라, 모르겠다.

"그냥 O튜브에서 봤어요."

"뭐, 뭐?"

나 아무래도 조금 뻔뻔해질 것 같다.

15화 어디서 봤더라?

종례시간.

"오늘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은 다들 알지?"

"네에-"

"정말 다행히도 우리 반의 훌륭한 학생 덕분에 큰 사고를 면할 수 있었다. 병원 측의 말로는 채 선생님은 응급처치가 늦었다면 생명이 위험했을 거라고 한다."

담임 장철주의 말에 교실이 웅성거렸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한 학생에게로 향했다.

그는 요즘 이슈를 몰고 다니는 아싸 고태산이었다.

"태산이 일어나 봐."

담임의 말에 고태산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우리 반에 이런 학생이 있다는 게 정말 자랑스럽다. 영웅이 별거냐? 이런 게 영웅이지. 대견하다 태산아. 모두 박수!"

짝짝짝!

"하하...."

고태산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인생 참 오르막 내리막이다.

저번 주엔 변태 오타쿠였는데, 지금은 영웅이란다.

날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전에는 경멸이 느껴졌다면 지금은 호기심의 느낌이 강하다.

크크, 영어 수행평가 때도 느꼈지만 이런 관심은 역시 기분 좋다.

게다가 이번에도 난 아무것도 안 하고 하율이 누나가 다 했을 뿐이다.

완전 개이득.

"선생님도 이번에 정말 다시 봤다. 다들 태산이를 본받도록. 그럼 종례 끝."

[이열, 학생 영웅 고태산!]

"덕분에 영웅 됐네. 고마워 누나."

[뭘.]

고태산이 지하율과 학교를 나섰다.

다이어트를 위해 집까지 걸어가는 중이었다.

우우웅.

반 정도 지났을 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 혹시 고태산 학생 번호가 맞나요?

젊고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다.

"네, 누구세요?"

-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학생분이 구해 주신 채동훈 선생님 아들 채한길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 상황 설명 듣고 이제야 연락 드립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태산 학생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 들었어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아버님은 괜찮으신가요?"

- 네. 검사 결과 이상 없고 푹 쉬고 내일 퇴원할 예정입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 덕분입니다. 그래서 약소하지만 성의를 표하고 싶은데, 혹시 언제 시간 되시나요?

"네? 성의요? 아니, 무슨...."

고태산이 살짝 당황하며 허공에 팔을 저었다.

- 생명의 은인이신데 이대로 넘어가는 건 도리가 아니죠. 시간 많이 안 뺐겠습니다. 꼭 뵈었으면 합니다.

"아... 음...."

어떻게 성의를 표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고태산은 망설였다.

게다가 자신이 한 것이라곤 지하율에게 몸을 빌려준 것이 끝 아닌가.

칭찬이야 그러려니 넘어가도 물질적인 뭔가를 받기엔 마음이 찝찝하다.

지하율은 그의 속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옆에서 한마디 했다.

[네 빙의 능력이 없었다면 내가 그분을 구할 방법이 없었어. 네 역할이 정말 컸어. 그러니 당당하게 만나. 저 사람 입장에선 은인을 그냥 넘길 수 없는 거고.]

음,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내가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었네?

고태산은 그녀의 말에 단번에 설득당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오늘 볼까?

"그, 그럼 혹시 오늘 시간 되시나요?"

- 물론입니다.

* * *

오후 7시.

늦은 시간임에도 아직 해가 지지 않는 걸 보니 본격적인 여름에 접어드나 보다.

"후... 덥다."

고태산이 집 근처 대로변에서 더위에 티셔츠를 펄럭였다.

자신을 픽업하기로 한 채한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우와, 저 차 좀 봐."

[크으, 포르쉐 파나메라네. 너무 예쁘다.]

저 앞에 신호 대기 중인 하얀색 포르쉐가 그들의 시선을 잡았다.

"누나, 차 좀 아나 봐? 비싼 거야? 엄청 좋아 보이긴 하는데."

[한 1억 6천 정도 할걸?]

"뭐? 얼마?! 미쳤다...."

자동차 한 대가 소도시의 아파트 한 채 값이다.

[저런 차는 구입가도 문제지만 유지비 때문에 사는 게 정말 어려워. 카푸어들은 꿈도 못 꾸고 진짜들만 타는 차지.]

"그렇구나."

나도 언젠가 저런 차를 한번 타 볼 수 있을까?

예전 같으면 이뤄질 수 없는 바람이지만, 저승코인으로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는 현재 나에겐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바로 그 포르쉐가 고태산의 앞에 멈춰 섰다.

이어 차 안에서 20대 중반쯤 보이는 훤칠한 남성이 내렸다.

"고태산 학생?"

"네? 아, 네."

"안녕하세요. 채한길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부러워하던 차 주인이 만나기로 한 남성이었다니.

고급차 오너에 어울리는 탄탄한 몸매와 부티 나는 얼굴이 인상적이다.

근데 어디서 본 것 같은 인상인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소고기 스테이크 잘하는 레스토랑 예약했는데 괜찮아요?"

"스테이크요? 조, 좋아요...!"

소고기 스테이크라니.

과연 이게 어른들의 세계인가?

사뚜기 함박스테이크밖에 먹어 본 적 없는 고태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이어트 중이지만 오늘 밤은 예외다.

가끔은 치팅데이도 있어야지.

"그럼 타시죠."

"아, 네."

고태산은 기스라도 갈까 봐 조심스럽게 조수석 문을 열고 탑승했다.

지하율은 슥 문을 통과해 좁은 뒷자석에 앉았다.

포르쉐가 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그들은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잠실 L타워 81층에 있는 굉장히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었다.

"7시 반에 예약한 채한길입니다."

"반갑습니다. 이쪽으로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잘 차려입은 점원의 안내에 걸음을 옮겼다.

아싸 고딩 고태산은 럭셔리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쭈뼛거리며 뒤를 따랐다.

"스페셜 A코스 2인분 부탁드려요."

채한길이 이름만 들어도 비쌀 것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크으, 기대된다.

창밖으로 펼쳐진 광경도 죽이네.

손님들도 기품 있어 보이는 게, 내가 주로 이용하는 레스토랑인 김밥극락과는 분위기가 매우 다르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의사도 크게 놀라더라고요. 고등학생이 그런 상황에서 완벽한 대처를 했다는 것에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아니에요... 운이 좋았습니다."

"잠시만요. 아버지가 만나면 전화 좀 해 달라고 했거든요. 잠시 통화 괜찮죠?"

"네."

채한길은 채동훈에게 전화를 걸어 고태산에게 넘겼다.

- 정말 고마워. 그때 경련을 일으키면서도 학생이 응급처치해 주던 순간은 똑똑히 기억나. 내 생명의 은인이야.

"큰일 없으셔서 다행입니다."

- 내가 우리 아들한테 당장 가서 보답하라고 했어. 받은 은혜에 비해선 약소하지만 사양 말고 받아 줘. 우리 아들이 주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마. 걔 돈 잘 벌거든.

현재 교직에 몸담고 있는 채동훈이다.

아무리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지만, 같은 학교 학생에게 적지 않은 금품을 사례로 주는 것은 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아들인 채한길이 대신 자리를 마련했다.

실질적인 사례도 돈 잘 버는 그가 하기로 했고.

짧은 통화를 마치자 음식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일단 좀 드세요."

"네, 잘 먹겠습니다."

고태산이 눈앞의 이름 모를 음식을 집어 입에 넣었다.

'맛있어....'

무슨 고기인지는 모르겠는데 너무 맛있다.

다이어트 중에 먹는 터라 그런 것도 있고, 과연 비싼 음식이라 다르다.

"입에 좀 맞아요?"

"어우, 너무 맛있습니다."

"다행이네요. 많이 먹어요."

"네. 그런데 아까부터 드는 생각인데 형 얼굴이 낯이 익거든요. 혹시 연예인이세요?"

채한길은 확실히 어디선가 본 얼굴이다.

젊은 나이에 돈도 많고 외모도 출중하니 연예인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TV에서 봤나? 모델? 배우?

"하하, 아니에요. 저 O튜버예요."

"O튜버...? 아! 한길TV!!"

"맞아요."

의문이 풀렸다.

구독자 130만의 O튜브 채널 한길TV 운영자 채한길. 26세.

남성 패션, 뷰티를 주 컨텐츠로 시작하여 자동차, 운동, 건강 관리, 사회 이슈 등 굉장히 광범위한 컨텐츠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고태산이 자주 보는 채널은 아니지만, O튜브 알고리즘으로 인한 추천 영상으로 몇 번 본적이 있었다.

"와, 이거 엄청 유명하신 분하고 제가 식사를 하고 있네요."

"유명하긴요. 아직 한참 멀었죠."

"실물이 훨씬 낫습니다. 형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럴까? 그러지 뭐."

뭔가 흥분되는 고태산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130만 구독자 O튜버는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파급력이 크다.

이런 엄청난 셀럽과 함께 밥을 먹다니.

신기하면서도 괜히 뿌듯한 기분이다.

한결 편해진 분위기 속에 채한길과 고태산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즐겼다.

그렇게 두 시간 가까이 식사를 하고 다시 고태산의 집으로 돌아왔다.

잠시 정차한 차 안에서 채한길이 고태산에게 두툼한 봉투를 하나 건넸다.

"태산아, 약소하지만 이거 받아 줘."

"어... 음."

약소하지 않은 거 같은데?

봉투 속 살짝 비치는 오만원권이 보인다.

그리고 굉장히 두껍다.

이게 대체 얼마야?

예상보다 훨씬 큰 보답에 고태산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속을 많이 썩였거든. 운이 좋아서 이제야 여유가 생겼는데 하마터면 제대로 효도도 못 하고 울 아버지 보낼 뻔했어. 그걸 네가 구한 거야."

채한길이 고태산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올리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마음 편히 받아. 어떤 일이든 간에 내가 필요하면 연락하고."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거절할 수는 없지.

빨리 집에 가서 얼만지 세 봐야겠다.

"들어가서 푹 쉬고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종종 연락하자."

"네, 형.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렇게 그와 헤어지고 고태산은 후다닥 집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잠그고 봉투에서 현찰을 꺼냈다.

[우와아.]

"우와!"

지하율과 고태산이 둘 다 동시에 감탄사를 뱉었다.

황금빛 오만 원 권이 아주 두툼하다.

[한 200장 될 것 같은데?]

"하나, 둘, 셋, 넷...."

고태산은 바로 손가락에 침을 묻히고 지폐를 세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만지는 큰돈에 눈빛이 번쩍거린다.

"...이백 장."

지하율 말대로 오만 원권 200장이었다.

"처, 천만 원...!"

[꺄아!]

머리가 어질거린다.

천만 원이라니.

"우하하하!"

지금의 기분을 표현하자면, 단연코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 돈 가지고 뭐 할 거야?]

"음, 일단 엄마한테 300만 원 정도 줘야지. 고아린은 중딩이니까 50만 원이면 충분하겠지?"

항상 홀로 두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하는 엄마와 까불긴 해도 하나뿐인 동생에게 나눠 줘야지.

물론 나머진 순전히 내 몫이다.

[올, 뭐라고 하면서 주게?]

"솔직하게 말하면 되지 뭐. 좋은 일 하고 떳떳하게 받은 거니까. 울 엄마 성격상 내가 받은 돈 뺏어갈 분이 아니거든."

보통 부모들 같으면 학생이 관리하기 큰돈이니 맡아 준다는 명분으로 가져갈 것이다.

하지만 고태산의 모친 박유란은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중1 때 병원에 입원하셨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주신 200만 원도 일절 터치 안 하신 분이다.

"한동안은 용돈 걱정 없겠다."

[그동안 갖고 싶었던 거 뭐 없어? 하나 사도 되잖아.]

"음. 나도 조던 운동화 한번 사볼까? 옷이야 어차피 몸매가 바뀔 거니까 지금 살 이유도 없고."

[좋지.]

옷은 나중에 저승코인으로 키 좀 키운 다음에 사는 거로 하고, 신발을 하나 사야겠다.

좋은 신발은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고 하잖아.

혹시 알아?

좋은 운동화가 날 귀신이 있는 곳으로 잘 데려가 줄지.

16화 증거가 없어

"29만 7천 원입니다."

"후우... 네, 여기...."

점원에게 카드를 건네는 고태산의 손이 살짝 떨린다.

일요일 오후 1시.

오전 운동을 마치고 지하율과 함께 백화점으로 쇼핑을 나왔다.

채한길에게 받은 사례금으로 예쁜 운동화나 하나 장만하려고 말이다.

지금껏 3, 4만 원대 신발만 신다가 큰맘 먹고 조던 신상 하나 지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내가 30만 원짜리 신발을 사다니....'

사례금에 비하면 비해 그리 큰 비용은 아니지만, 의류에 이런 거금을 써본 적이 없는 터라 가슴이 떨렸다.

참고로 박유란과 고아린에겐 각각 300만 원, 50만 원씩 줬다.

처음에 그들은 고태산이 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받게 된 경위에 대해 믿기 어려워했다.

박유란은 혹시 아들이 이상한 일에 손을 댄 건 아닌지 걱정했다.

급식소에서 저혈당 쇼크로 쓰러진 교직원을 살리고, 유명 O튜버인 그의 아들에게 천만 원이라는 사례를 받았다고?

단번에 '그랬구나~'하고 믿는 게 비정상일 터.

하지만 고태산이 직접 채한길과 영상통화를 함으로써 그녀의 의심을 싹 날려 버렸다.

그제서야 박유란의 태도는 다시 우리 아들 최고로 바뀌었고, 고아린은 한참을 얼떨떨해했다.

[잘 샀어. 예쁘다.]

"그러게. 진짜 다르긴 하다."

고태산이 구입한 신발로 갈아신고 매장 밖으로 나왔다.

확실히 이런 신발을 신으니 뽕이 차오르는 기분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좋은 옷을 입으려고 하나 보다.

"누나, 뭐 먹고 싶어?"

[비싼 것도 상관없어?]

"그럼. 아무거나 말 만해."

대화가 조금 이상했다.

고태산이 귀신인 지하율에게 뭘 먹고 싶냐고 묻는다.

그녀도 자연스럽게 대꾸하고.

[그럼 저기 가도 돼?]

지하율이 한 가게를 가리켰다.

<랍스터 무제한, 성인 1인당 17만 9천 원.>

이라는 현수막이 눈에 띈다.

"콜, 가자."

[올- 돈 많이 쓰네?]

"괜찮아."

고태산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율은 퍼니북스 공모전 결과만 확인하고 성불하기로 했다.

그리고 해당 결과는 내일이면 발표된다.

그 말인즉슨, 그녀와 이제 헤어질 시간이라는 뜻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말도 잘 통하고 계속 붙어 다녔기에 꽤 정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뭔가 해 주고 싶었다.

테스트 결과 빙의를 하면 고태산의 모든 감각을 귀신도 공유했다.

즉, 지하율이 고태산에게 빙의를 한 뒤 음식을 먹으면 인간일 때처럼 맛과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고태산은 이 방법으로 지하율에게 먹고 싶은 음식이라도 마음껏 먹이고 보내고 싶었다.

애초에 사례금 천만 원도 그녀 덕분에 얻은 거였으니 아까울 게 뭐가 있겠나.

* * *

"와, 죽인다."

[어머, 너무 맛있어 어떡해....]

구석 자리에 앉아 큼직한 랍스터를 우적 씹으며 고태산과 지하율이 동시에 탄성을 뱉었다.

한 사람 요금으로 둘이 즐기는 참 가성비 좋은 방법이다.

"그나저나 공모전에 제출한 작품은 어떤 거야?"

식사를 즐기며 고태산이 낮게 물었다.

이제 보니 누나가 그토록 기다리는 공모전에 출품한 작품이 뭔지도 안 물어봤네.

빙의 상태인 지하율이 고태산의 머릿속으로 대답했다.

[첫 작품과 마찬가지로 현대 판타지야. 제목은 '골로 가도 욜로'.]

"오, 제목부터 쌈박한데? 무슨 내용이야?"

[노력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그냥 오지게 놀기로 마음먹은 주인공의 이야기야.]

"오호! 각 나오는데? 완전 내 스탈이야."

[히히, 그래?]

소재만 들어도 땡긴다.

요즘엔 저런 게 먹히지.

소설 속 주인공만큼은 그냥 좀 놀게 놔 두란 말이다.

"몇 화나 적은 거야?"

[공모전 분량인 50화까지 작업했어. 계속 수정하는 바람에 마감일에 겨우 맞췄네.]

"진짜 고생했겠다. 그런데 작가한테 지도받았다는 건 무슨 말이야?"

[아, 그건....]

전에 듣기론 기성 작가한테 지도를 받았다고 했다.

뭘 배웠다는 거지?

[요즘엔 웹소설도 사교육이 많거든. 학원도 있고, 개인 강습도 많이 하고. 기왕 하는 거 효율적으로 하고 싶었어.]

그렇구나.

하긴 어떤 업계든 시장이 커지면 그것에 따른 사교육도 발전하지.

그만큼 웹소설 시장이 뜨겁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나는 개인 강습을 받은 거야?"

[응. 레슨 진행하는 작가님들 쭉 알아보고 한 분을 선택했지. 너 혹시 '사신'라는 필명 들어봤어?]

"사신?"

[그분한테 배웠거든.]

유명 작가들은 이름이라도 대충 안다.

하지만 처음 듣는 걸 보면 그리 인지도 있는 작가는 아닌 것 같은데.

"잘 나가는 분이야?"

[솔직히 그건 아냐. 그런데 여러가지 조건이 잘 맞은 분이었어. 문의했을 때도 굉장히 체계적이고 말도 요목조목 잘했고. 레슨은 굉장히 만족했어.]

하긴, 선수로서의 능력과 지도자로서의 능력에 차이를 보이는 경우는 굉장히 많다.

맨유의 퍼거슨 감독도 세계적인 명장이었지만, 현역 시절 뛰어났던 축구선수는 아니었으니까.

"근데 뭘 배우는 거야? 누나 첫 작품도 굉장히 잘 썼었는데 배울 게 있었어?"

진심이었다.

가독성 좋고, 대사도 잘 치고, 캐릭터 설정도 좋아서 신인 작가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너무 좋게 봐 준다. 배울 건 엄청 많았지. 기본적인 장르문학에 대한 이해부터 전개 방식, 캐릭터 조형 등 정말 광범위하게 많이 배웠어.]

"그래?"

[공모전에 제출할 원고에 대해 감평도 받았어. 엎기도 정말 많이 엎었지. 한 10번은 될걸?]

"캬, 빡세다. 만만한 곳이 아니네."

창작도 분석이 필요한가 보다.

그냥 삘 꽂히는 대로 쓰는 줄 알았는데, 들어 보니 진짜 머리 아플 것 같다.

난 독자로 편하게 살아야지.

"진짜 기대된다. 첫 작도 좋았는데 작정하고 쓴 글은 얼마나 완성도 있을까."

[음... 솔직히 재수 없게 보이겠지만, 이번 작품은 꽤 잘 썼다고 생각해. 히히.]

"올, 자뻑."

이렇게 자신감이 있으니 죽어서도 공모전 결과를 확인하고 싶은 것일 테지.

아 씨....

고태산은 안타까운 마음에 순간 울컥했다.

후우, 진정하자.

"그런데 만약 공모전에서 우승해도 상금은 못 받지?"

"응, 맞아."

공모전은 단순히 1위로 뽑혔다고 해서 상금이 지급되지 않는다.

선정된 작품으로 그들의 플랫폼에 연재를 진행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지하율의 작품은 작가가 죽어 버렸으니 불가능했다.

[입상 여부만 확인하면 돼. 대한민국 최고 웹소설 플랫폼의 평가가 궁금한 거니까.]

"꼭 입상했으면 좋겠다. 가능할 거야. 야생마 작가의 광팬으로서 응원합니다."

[고맙습니다, 독자님.]

그렇게 떠들면서 랍스터를 몇 번이나 리필했는지 모르겠다.

둘은 이후에도 이것저것 엄청 먹고 해가 저물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 * *

컴퓨터로 영화를 보고 있는 지하율 옆에서 고태산은 침대에 누워 빵빵한 배를 문질렀다.

"웹소나 볼까."

폰으로 웹소설 플랫폼 사자후에 접속했다.

요즘엔 볼 만한 게 없네.

아까 하율이 누나를 지도했다던 작가 작품이나 봐 볼까?

'사신이랬지.'

그는 호기심에 사신을 검색했다.

꽤 많은 작품이 나왔다.

그런데.

"어...?"

순간 고태산은 눈을 의심했다.

뭐, 뭐지...?

그의 작품 중에 있어선 안 될 작품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골로 가도 욜로」

이, 이거 아까 누나가 공모전에 제출했다는 작품명인데...?

클릭해 보니 10일 전부터 연재를 시작했고, 벌써 30화까지 업로드된 상태였다.

[왜 그래?]

놀란 고태산의 모습에 지하율이 물었다.

"누, 누나. 이, 이것 좀 봐 볼래...?"

떨리는 손으로 그녀에게 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설마... 아니겠지.

어쩌다 보니 제목만 같은 거겠지?

지극히 낮은 확률이지만, 제발 아니길!

[....]

작품 소개란을 확인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눈빛이 정말 오싹할 정도로 서늘했다.

[1화 들어가 봐.]

꿀꺽.

갑자기 으슬으슬한 건 기분 탓인가?

고태산은 그녀의 지시대로 옆에서 화면을 넘겨줬다.

1화, 2화, 3화....

아무 말도 없이 텍스트를 훑는 그녀의 표정에 엄청난 분노가 서렸다.

[이런... 개자식이!]

"어, 어?"

순간, 지하율의 머리카락이 공중으로 서서히 떠올랐다.

휘이이이이익-!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강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크윽!

고태산이 고통에 인상을 확 찌푸렸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하다.

귀신이 분노하면 이런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하는 건가?

으으, 이러다가 얼어 죽겠네.

"누, 누나! 진정해!"

고태산이 힘겹게 소리치며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아악!"

어깨에 손을 대자 드라이아이스를 만지는 것처럼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너무 차가워서 뜨겁게 느껴진다.

손을 떼고 싶어도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으아아악! 누나 그마안!!"

[...!]

고태산의 고통스러운 외침에 지하율이 화들짝 놀라며 그제야 기운을 거뒀다.

"으으윽...."

고태산이 이제야 떨어진 손을 부여잡으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꺄악! 태, 태산아 괜찮아?!]

* * *

[진짜 미안해.... 좀 괜찮아?]

"응, 별거 아냐."

화장실 대야 속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근 채 고태산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10분 정도 지났는데 아직도 꽤 얼얼하다.

"근데 저거 누나 작품 맞아?"

[하아... 맞아. 이번에 공모전에 낸 작품이야. 토씨 하나 안 바꾸고 자기 작품으로 올렸네.]

"미친놈! 이 사람이 누나 원고는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야?"

[그거야 강습 때 항상 원고를 건네고 시작했으니까....]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지?

"다시 한번 봐 보자."

[아직 빼면 안 돼. 더 담그고 있어.]

"지금 내 손이 문제야?"

고태산이 대충 손을 닦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손바닥이 아직 쓰리긴 했지만,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기가 막히네."

골로 가도 욜로.

현재 무료 연재 소설 중 랭킹 2위.

조회수며 댓글이며 어마어마하다.

화면을 보는 지하율이 얼마나 분했는지 이가 빠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또 고태산에게 피해를 줄까 봐 가까스로 감정을 컨트롤하고 있었다.

"바로 신고하자. 성불 계약 맺으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성불 서포터즈는 계약을 하지 않고 망자를 돕는 행위를 금지한다.

그녀와 성불 계약을 해야만 내가 증거를 제시하여 사신 작가를 조질 수 있었다.

"누나 증거 있지?"

[이 작품을 공모전에 접수한 내역이 있어.]

그녀의 신상 정보로 <골로 가도 욜로> 작품을 퍼니북스 공모전에 접수한 사실은 확실한 증거다.

"확인해 보자."

고태산이 지하율의 이메일에 접속했다.

[홈페이지에서 바로 지원했고, 지원 확인 메일을 받았었는데... 그거다!]

퍼니북스가 발신한 메일을 찾았다.

지하율 님의 작품이 성공적으로 접수됐다는 내용이 적혀 있고, 상세 지원 내역을 확인할 수 있는 링크가 첨부되었다.

"클릭."

...을 했는데.

"응?"

[뭐야 이게?]

『지원 내역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떴다.

"누나, 이거 뭔가 잘못된 거지...?"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저번에 확인할 땐 상세 내역이 떴는데?]

고태산이 몇 번이나 클릭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지하율은 크게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일단 이거는 내일 퍼니북스 측에 확인해 보고 다른 증거를 찾아 보자."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 해결할 방법은 없으니 다른 증거들을 모아야겠다.

[....]

하지만 고태산의 말에 그녀는 대꾸가 없었다.

"왜 그래?"

[없어....]

"뭐가?"

[이거 말고는 내 작품임을 입증할 증거가 없어....]

지하율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17화 얼굴 좀 보자

증거가 없다니?

"아니, 컴퓨터에 작업 내역 있지 않아?"

[사고가 났던 그 날 들고 있던 노트북과 휴대폰도 망가져서 이미 처분했어....]

지하율이 고개를 푹 떨궜다.

"그럼 이 작가한테 작품 관련해서 레슨 받은 증거는? 뭐 메일 주고받은 거 없어? 폰 메시지 같은 거 있지 않아?"

[하아, 없어. 주로 만나서 진행했고, 딱히 증거가 없어....]

"아, 아냐 있을 거야. 한번 차분히 잘 생각해 봐 누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의 메신저, 메일 등 증거가 나올 만한 곳은 다 뒤졌다.

하지만 지하율이 해당 작품을 썼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어떡해....]

'그 개자식....'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밝은 모습만 보였던 지하율이다.

그런 그녀의 절망하는 모습을 보니 고태산은 화가 치밀었다.

뺏을 게 없어서 자신에게 가르침을 받고 억울하게 죽은 작가의 작품을 가로채?

쓰레기란 말도 아깝다.

"누나, 포기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내일 바로 퍼니북스에 확인해 보자. 공모전 지원 내역만 있어도 확실히 입증할 수 있어."

[갑자기 지원 내역 확인이 안 된다는 게 이상한데.... 설마 사신 작가가 무슨 수를 쓴 거 아닐까? 그럼 진짜 방법이 없는데....]

지하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가 말하길 사신 작가는 굉장히 철저한 성격이라고 한다.

쉽게 꼬리 잡힐 일을 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에이! 야생마가 갑자기 왜 이렇게 쳐졌어? 그 개자식 어떻게 해서든 조져야지! 저렇게 놔두고 성불할 거야?"

[그건 절대 안 돼....]

"그래! 충격받은 건 아는데, 이럴 때일수록 멘탈 잡아. 누나 인생 마지막 작품인데 그딴 새끼한테 뺏기면 안 되잖아."

고태산은 스스로 말하면서도 놀랐다.

소심한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하다니.

참 많이 변했다.

지하율은 눈물을 흘리며 고태산을 바라봤다.

[태산아, 날 도와줘.]

애처로운 목소리.

"물론이야."

꽁으로 저승코인 먹으려 했었는데 노선 변경이다.

저승코인은 양아치 작가 한 명 잡은 대가로 받아야겠다.

사신 작가, 넌 뒈졌다.

* * *

다음날, 월요일 아침.

"일단 성불 계약부터 하자."

[응.]

성불 계약을 하지 않고 망자를 돕는 행위는 성불 서포터즈 규정상 금지되어 있다.

고태산은 성불 서포터즈 어플에 접속해 성불 계약서를 띄웠다.

지하율은 천천히 내용을 확인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나 지하율은 성불 서포터즈 고태산과의 성불 계약을 진행한다. 그가 '내 작품의 진실을 밝히고, 사신 작가가 합당한 응징 받는다면' 상기 본인은 자동 성불 시스템에 저항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일 것을 맹세한다.]

합당한 응징이라.

당연히 그래야지.

고태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계약을 승인하자 폰 화면이 푸른빛을 발산하며 허공에 문자를 띄웠다.

『성불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된 거야...?]

"응. 심플하지?"

[그러네. 잘 부탁해 태산아.]

"최선을 다할게."

1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

고태산은 학교 건물 구석의 조용한 자리로 향했다.

그리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감사합니다. 퍼니북스 고객센터입니다.

"안녕하세요. 공모전 관련해서 문의 사항이 있어서요."

- 네, 무슨 일이신가요?

"공모전에 작품을 제출했는데 갑자기 지원 내역 확인이 되질 않습니다."

- 음, 접수가 확인된 작품들은 접수 완료 메일을 보내 드리고 있습니다. 지원 확인 메일을 못 받으신 건가요?

"아니요. 메일은 받았고 확인 링크를 클릭하니 지원 내역을 확인할 수 없다고 나옵니다."

- 어... 그런 경우는 처음 들어봤는데... 잠시만요. 지원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지하율입니다."

- 실례지만 지원자분 본인 맞으신가요?

"어, 음, 네."

아니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맞다고 했다.

- 생년월일 앞자리가 어떻게 되시나요?

[991029이야.]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지하율이 말했다.

"991029입니다."

- 991029... 아, 확인되셨습니다. 음, 그런데 지원한 분은 여성분이신데 전화 주신 분은 남성이시네요?

"아, 그게...."

젠장, 목소리에서 걸렸다.

- 죄송하지만 본인이 아니면 답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당사자가 통화할 상황이 되지 못합니다. 왜 공모전 지원 확인이 안 되는지 알 수 없습니까?"

- 죄송합니다. 본인이 아니면 규정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니, 지금 어쩔 수 없이 제가 대신 확인해야 할...."

띵동댕동-!

안된다는 상담원에게 고태산이 끈질기게 매달렸지만, 수업 시작종이 울렸다.

- 죄송합니다.

고태산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고 교실로 돌아가야만 했다.

[후우....]

지하율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안타까운 상황에서도 항상 밝은 모습만을 보이던 그녀였기에 지금 심적으로 얼마나 힘든지 잘 느낄 수 있었다.

'안 되겠어. 직접 가 보는 수밖에.'

고태산은 통화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사신 작가의 작품 도용을 입증하려면 지하율이 퍼니북스 공모전에 해당 작품을 제출했다는 증명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 우선 더 왜 그녀의 공모전 지원 내역이 확인이 안 되는지 밝혀야 한다.

고태산이 책상 아래로 폰을 만지작거렸다.

'퍼니북스 본사... 판교에 있네.'

그리 멀지는 않다.

하지만 학교 끝나고 가면 아무리 빨라도 오후 7시다.

'음, 할 수 없지.'

* * *

"많이 아파?"

"네... 아까도 화장실에서 계속 토했거든요.... 어지럽기도 하고 등에 식은땀도 나고요."

고태산이 쉬는 시간에 바로 담임을 찾아가 아픔을 호소했다.

"그래? 어제 뭐 잘 못 먹었나?"

"해산물을 먹었는데 그게 좀 잘못된 거 같습니다... 쿨럭!"

"에휴, 녀석. 많이 아픈가 보네. 알겠어. 조퇴시켜 줄 테니까 오늘은 병원 갔다가 푹 쉬어."

"감사합니다...."

담임은 바로 조퇴증을 끊어 주었다.

상습적으로 꾀병 부리는 학생도 아니고 며칠 전 학교 교직원을 구한 고태산이었기에 담임의 신뢰는 높았다.

"오케이, 성공."

[나 때문에 조퇴까지 하네. 미안하게....]

"뭐가 미안해. 수업도 안 듣고 좋지 뭐. 어차피 공부도 잘 안 하는데."

미안해하는 지하율에게 고태산이 씩 웃었다.

그는 교실로 돌아와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응? 너 어디가?"

그 모습을 본 천유라가 다가와 물었다.

"아... 몸이 좀 안 좋아서 조퇴하려고."

"뭐? 어디가 아픈데?"

"식중독에 걸린 것 같아."

"그래? 어디 봐."

"어, 엇!"

천유라가 갑자기 고태산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이마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보드라운 손길과 은은한 장미향의 핸드크림 냄새로 인해 고태산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빨개졌다.

"응? 갑자기 얼굴이 빨개졌네? 땀도 많이 흘리고?"

"아... 그, 그래?"

"많이 아픈가 보네? 빨리 병원 가 봐. 푹 쉬고."

"응. 내일 보자...."

고태산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나저나 천하의 천유라가 지금 내 걱정을 해 준 건가?'

기분 묘하네.

* * *

고태산과 지하율은 학교를 나서자마자 바로 버스를 타고 퍼니북스 본사에 도착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1층 데스크 안내원이 물었다.

"안녕하세요. 이번 웹소설 공모전 담당자분과 만날 수 있을까요?"

"무슨 용건이시죠?"

안내원은 교복을 입은 학생이 느닷없이 찾아와 공모전 담당자를 만나고 싶다고 하니 살짝 어이가 없었다.

얘, 너 학교 땡땡이쳤니?

"이번 공모전에 지원한 작품에 문제가 발생해서요. 갑자기 지원 내역 확인이 안 됩니다. 저한테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 담당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잠시만요."

자신이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뭐라 이야기를 나눈 뒤 대답했다.

"저기 라운지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곧 담당자가 내려온다고 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후우, 다행이다.

무시할까 걱정했었는데, 젊은 회사라 그런지 이런 막무가내 방문에도 잘 응대해 주는구나.

역시 전화보단 이렇게 직접 움직이는 게 낫구만.

10분 정도 지났을까.

캐쥬얼 차림에 사원증을 건 남성이 다가왔다.

"공모전 관련하여 방문하신 분 맞으신가요?"

말투는 공손했지만, 표정엔 살짝 짜증이 보였다.

바빠죽겠는데 웬 고삐리가 학교는 안 가고 날 찾아?

"예, 맞습니다."

"콘텐츠기획팀 주관호 PD라고 합니다. 안으로 자리를 옮기죠."

둘은 2층 미팅실로 이동했다.

"용건이 뭔가요?"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물었다.

"갑자기 공모전 작품지원 내역 확인이 되질 않습니다."

"지원자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지하율입니다."

그 말에 주관호 피디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똑바로 고태산을 바라봤다.

"본인 작품인가요?"

그가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그건 아닙니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곤란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작자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네?"

"사고로 두 달 전에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남자친구인 제가 대신 나설 수밖에 없고요."

모솔 고태산은 이번 일에서 자신을 지하율의 남자친구로 하기로 했다.

고민해본 결과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포지션이었다.

주관호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만, 세상을 떠난 여자친구분의 공모전 지원 내역은 왜 확인하려는 거죠?"

"실은 여자친구의 작품이 다른 작가에 의해 도용당했습니다. 타 사이트에서 연재 중이죠. 도용된 사실을 증명하려면 여자친구가 퍼니북스 공모전에 지원한 내역이 필요합니다."

고태산이 차분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작품명이 뭐였죠?"

"골로 가도 욜로입니다. 필명은 야생마이고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결국, 주관호는 알겠다며 자리를 떳다.

다시 돌아오는 데 오래 걸리진 않았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문의하신 작품은 최근 타 플랫폼에 연재 중임이 확인되어 심사 자격이 박탈됐습니다."

"아."

그래서 지원 내역 확인이 안 된 거였나.

"지금 연재를 하는 사람이 바로 제 여자친구의 작품을 훔쳐 간 작가입니다."

고태산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자식 때문에 지하율의 작품이 공모전 심사에 제외됐다니.

분노가 치민다.

"저희도 사전에 미심쩍어 확인을 해 봤는데, 사신 작가는 반대로 그의 수강생이었던 지하율 씨가 자신의 작품을 훔쳐 공모전에 접수했다고 합니다. 저희가 연락을 하기 전까지는 몰랐다고 하고요."

"뭐라고요...?"

[말도 안 돼!!]

이런 개 같은!

지하율이 옆에서 소리쳤다.

철저하다는 지하율의 예상대로 사신 작가는 이미 손을 써 놓은 상태였다.

"쌩 거짓말입니다! 그건 제 여자친구 작품이에요!"

"그 부분에 대해서 저희가 관여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실을 밝힐 방법도 없고 말이죠."

"아, 아니...."

이렇게 되면 지하율의 공모전 지원 내역은 무용지물이다.

지원 내역을 들이밀어도 사신 작가 측에서 지하율이 자신의 작품을 훔쳐 지원했다고 주장할 테니까.

그녀에겐 이렇다 할 다른 증거도 없다.

제대로 당했다.

"제가 바로 회의가 있어서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그럼."

주관호 피디는 그 말과 함께 바로 휙 자리를 떴다.

"...."

이거 대체 뭔 상황이지.

[하아,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사신 작가가 뭔가 수를 썼을 것 같다고 했잖아....]

지하율의 표정이 다시 절망으로 가득 찼다.

[공모전은 아예 물 건너갔네....]

그녀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죽은 뒤에도 공모전 결과 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외로운 시간을 보냈는데 그 결과가 이거라니.

사신 작가... 이 정도로 추잡한 인간이라 이거지.

"직접 만나 봐야겠어. 방법 있어?"

[그 사람 사무실은 알아. 거기서 레슨을 했으니까.]

"바로 가 보자."

[만나서 어떡하려고?]

"몰라. 그런데 이렇게 가만 있을 순 없잖아? 직접 만나 봐야겠어."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으니 몸으로라도 때우자.

일단 어떻게 생겨 먹은 인간인지 한번 보게.

18화 그녀의 남자친구

"남자친구가 찾아왔다고?"

살이 뒤룩뒤룩 찐 중년 남성이 전화를 받으며 언성을 높였다.

- 네. 방금 전에 만났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 심사는 탈락했고 우리 회사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라고 했죠.

남성의 통화 상대는 조금 전 고태산과 만났던 퍼니북스 주관호 피디였다.

"그러니까 순순히 물러서?"

- 어쩌겠습니까. 방법이 없는데. 멍 때리길래 두고 올라왔습니다.

"음, 남자친구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 심지어 고딩입니다, 형님.

"뭐? 고딩이라고?"

어이없는 소리에 남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 암튼 알아서 잘 챙겨 주실 거라 믿습니다. 형님.

"알겠어. 고생했다."

그가 전화를 끊고는 의자에 육중한 몸을 푹 묻었다.

"고딩 남친이 찾아왔다고? 풉-"

상황을 떠올리니 픽 웃음이 나왔다.

이 남성의 정체는 지하율의 작품을 훔쳐간 작가 사신, 장도환이었다.

"당사자는 죽고 내가 다 손을 써 놨는데 어떻게 증명하시려고. 고삐리 새끼가."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 *

5개월 전 웹소설 커뮤니티를 통해 만난 지하율.

의대생인데 휴학하고 글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래, 콜! 시간당 2만 원씩!

15년 경력 작가의 지식과 노하우를 얻는 대가로는 싸지.

장도환은 본래 글로 밥벌이할 급은 됐지만, 시간이 흘러 이제는 틀딱 소리나 듣는 40대 웹소설 작가였다.

더는 글만 써서 먹고 살 정도가 되질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작가 지망생을 대상으로 한 웹소설 개인 강습이었다.

웹소설 시장이 커짐에 따라 지망생들은 많았고, 강습료는 현금으로 받기에 꽤 쏠쏠했다.

지하율은 지갑 사정도 괜찮아 보였고, 의지도 다분하여 단번에 두 달 코스로 꼬셨다.

- 배울 게 많을 겁니다.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끝도 없어요. 두 달 코스도 짧죠. 15년 작가 노하우는 그 양도 방대하니까요.

그런데 이거 웬걸? 그녀는 상당한 재능충이었다.

개떡 같이 말해도 철떡 같이 알아들으니 2주 정도 지나니까 딱히 가르칠 게 없더라.

되려 장도환이 많은 영감을 얻었다.

글에 묻어나는 특유의 감성은 독특하면서 세련됐고, 몰입력이 상당했다.

딱히 해 줄 말이 없어서 원고에 괜한 트집을 잡으며 수정 뺑뺑이나 시켰다.

하지만 다음날이면 훨씬 좋은 원고로 되돌아왔다.

확실히 난 사람이었다.

그렇게 두 달간의 강습 끝에 그녀의 작품 <골로 가도 욜로>가 50화까지 집필됐다.

필히 그녀는 이 작품으로 확 뜰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런 그녀의 스승이란 타이틀을 내세워 더 많은 지망생들을 꼬실 수 있을 것이다.

땡 잡은 거지.

그렇게 지하율이 작품을 공모전에 제출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부고 알림.

지하율 씨가 영면하였음을 알립니다.

상주: 지동우.

빈소: 대한장례식장, 3층 301호.

발인: 6월 3일.]

장도환은 부고 문자를 받고 몹시 당황했다.

장례식장에 방문하니 교통사고로 죽었단다.

'그럼 작품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는 지하율의 죽음 앞에서 안타까운 마음보다 작품 생각이 먼저였다.

그녀는 종종 말했다.

자신이 웹소설을 쓰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고.

아직은 부끄럽기에 어느 정도 성적이 나오면 주변에 밝힌다고 했다.

그 말은 즉, 그녀가 죽은 지금 <골로 가도 욜로>의 원작자를 아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먹어?'

그녀의 원고를 보며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렇게 스토리를 이어간다고?

억지스러워 보였던 전개가 이런 식으로 개연성 있게 풀리네?

어떻게 캐릭터를 이토록 입체적으로 부각하지?

다 떠나서 그냥 굉장히 재밌다.

잘만 하면 메가 히트 각이다.

'그래. 원작자는 죽었고 작품에 내 기여도도 상당하잖아? 이대로 작품이 묻히는 건 지하율도 원치 않겠지.'

작품을 훔치겠다는 마음을 먹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장도환은 장례식장 육개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지하율이 지원했던 퍼니북스 공모전 기획팀장 주관호 피디였다.

장도환의 매제이기도 했다.

"주 서방 바쁘지? 다름이 아니라 내가 간단한 부탁 하나 할 게 있는데 말야."

지하율의 발인 날, 그녀의 작품은 장도환의 지시를 받은 주관호 피디에 의해 공모전 지원이 캔슬됐다.

* * *

"분명 웹소설 쓰는 건 아무도 모른다고 했는데 남자친구가 알고 있었다라."

궁금하긴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남자친구고 나발이고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지하율이 집필한 50화 이후로 자신이 이어 80화까지 집필한 상태다.

그리고 나서 열흘 전에 연재를 시작했는데 반응이 아주 폭발적이었다.

요새 잘 나가는 작품 대다수를 발라 버렸다.

커뮤니티에선 퇴물 작가 사신이 각성했다며 열광했다.

그에게 <골로 가도 욜로>는 작가로서 명예와 막대한 수익을 안겨 줄 황금 동아줄이 되었다.

"누가 뭐래도 이젠 내 작품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필사적으로 지킬 것이다.

띵동-!

그때, 사무실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이 시간에 방문할 사람은 딱히 없는데?

장도환이 현관문을 여니 교복 입은 남학생이 서 있다.

혹시?

"누구세요?"

"실례지만 사신 작가님 맞으신가요?"

"네, 그런데요?"

어린 녀석의 눈빛이 곱지 않다.

아마 예상이 맞는 것 같다.

"저는 지하율의 남자친구 고태산이라고 합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이유는 아실 거라고 생각되네요."

고태산이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일단 들어와요."

공격적인 고태산의 태도에 장도환이 언짢은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당신이 누나 작품을 훔쳐 갔다 이거지.'

관상은 볼 줄 모르지만, 눈매가 찢어지고 볼살이 두툼한 게 사기꾼의 냄새가 물씬 난다.

[나쁜 자식.]

지하율이 그의 얼굴을 보며 이를 갈았다.

"앉아요."

장도환이 소파에 털썩 앉고는 손짓했다.

표정에서부터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지하율 씨의 남자친구라고요?"

"네."

"하하, 하율 씨한테 이런 어린 남자친구가 있는지는 몰랐네요."

장도환이 고태산을 훑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 잘난 애가 무슨 이런 찐따 고삐리랑 만나?

이 새끼 구라 치는 거 아냐?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시죠."

지금 장도환이 무슨 생각을 할지 예상이 되는 고태산이었다.

잡설은 집어치우고 싶었다.

"큼. 그래, 무슨 용건이죠? 그리고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하율이 누나가 두 달 동안 글을 배운 곳 아닙니까. 남자친구인 제가 모를 리가 없죠."

"흐음. 하율 씨는 분명 자신이 웹소설을 쓴다는 건 아무도 모른다고 했는데요?"

"누나가 비밀로 했었는데 같이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됐습니다."

"...."

장도환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뭐 어쩔 건데.

"암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누나의 작품을 사신 작가님이 연재하신 걸 보고 찾아왔습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설마 <골로 가도 욜로>를 말하는 거예요?"

"그것밖에 더 있습니까. 하율이가 작가님께 배우면서 준비한 바로 그 작품이요."

"하아, 이거 참.... 당황스럽네요. 그건 제 작품이고 하율 씨가 제 작품을 도용해서 공모전에 지원한 사실은 알아요?"

장도환은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당당하게 거짓말을 뱉었다.

[야 이 개새끼야!]

지하율이 그 모습에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동시에 또다시 한기가 일었다.

"응? 뭐지?!"

갑작스러운 냉기에 장도환이 팔을 문지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에어컨은 꺼져 있는데, 뭐지?

'누나, 진정해.'

고태산이 그녀에게 진정하라는 눈짓을 줬다.

[후우우....]

다행히 지하율은 어제 고태산에게 피해를 준 것을 떠올리곤 감정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뭐야...?"

공기가 원래대로 돌아오자 장도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곤 이내 말을 이었다.

"흠흠, 아무튼 피해자는 접니다. 그건 제 작품이고 오히려 제가 도용을 당한 거죠."

"누나가 해당 작품을 집필할 때 저도 읽어 봤습니다. 제 의견을 반영하여 수정한 부분도 있고 말이죠."

"하율 씨는 분명 부끄러워서 저 외엔 아무에게도 작품을 보여 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만?"

"처음엔 누나도 싫다고 했지만, 여자친구가 웹소설을 쓴다는 걸 알게 됐는데 제가 안 볼 수가 있겠습니까? 저도 웹소설 좋아하는 독자이고 말이죠."

거짓말하는 장도환에게 거짓말로 응수하는 고태산이다.

"퍼니북스 측에서도 누나가 작가님의 작품을 훔쳐 지원한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더군요."

"저도 최근에야 알았죠. 퍼니북스에서 연락이 와서요. 제 작품이 지하율 이름으로 공모전에 지원된 상태라고 말이죠. 정말 화가 나고 기가 막히더군요."

장도환의 거짓말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어쩜 이런 인간이 있을 수가 있지...]

지하율은 억울함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대체 누나가 어떤 방법으로 작가님의 작품을 가로챘다는 거죠?"

"제가 '골로 가도 욜로'를 집필할 때 반응을 보기 위해 그녀에게 원고를 몇 번 보여 줬죠. 훔치기는 쉬웠을 겁니다. 자리 비웠을 때 제 노트북에서 파일을 옮기기만 하면 되니까."

사신 작가의 입에서 준비된 듯한 답변이 술술 나왔다.

"하아, 돌아 버리겠네."

고태산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돌겠는 건 납니다. 가뜩이나 하율 씨한테 배신감 느끼는데, 남자친구란 사람은 찾아와서 되려 사람을 모함하고 말야. 어디 한참 어른한테 눈을 부릅뜨면서."

아까부터 심기가 불편한 장도환은 이제는 반말을 섞어 가며 불쾌감을 표했다.

[하아아....]

지하율은 정말 답답한 듯 자신의 가슴을 퍽퍽 쳤다.

"내가 말이죠. 하율 씨는 다른 수강생보다 열정을 다해서 가르쳤거든요. 그런데 지금 내 심정이 어떻겠어? 후우...."

장도환은 담배까지 물고는 고태산 쪽으로 연기를 뿜는다.

고태산은 옆에서 억울해하는 지하율과 장도환의 빈정거리는 태도를 보니 속이 끓어올랐다.

"그리고 진짜 하율 씨 남자친구 맞아? 아무리 봐도 못 믿겠는데. 나이야 그렇다 쳐도 영 급이 안 맞잖아?"

뭐하나 빠지지 않는 지하율이 이런 별 볼 일 없는 고삐리와 만난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장도환은 고태산이 어디서 냄새를 맡고 자신에게 접근한 사기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쪽이야말로 다른 사람 평가할 급은 아닌 것 같은데."

"...뭐?"

고태산의 당돌한 대답에 장도환이 퍽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율이 누나가 얼마나 그 작품에 공을 들이고 애정을 가졌는지 당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뭐, 당신? 이 어린 놈의 새끼가 말하는 것 봐라?"

장도환이 눈을 번뜩였다.

덩치도 있고 인상도 더러워서 제법 위협적이다.

예전의 고태산 같으면 겁을 먹었을 것이다. 애초에 이런 말도 못 했겠지.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이야기다.

'누나가 믿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다.'

약한 모습은 보이면 안 된다.

뭐, 별로 무섭지도 않고.

"양심도 없고 연기도 잘하시네. 어쩜 사람이 이렇지? 차라리 배우를 하시지. 아, 인물이 지저분해서 그건 안 되겠구나."

"뭐? 이 새끼가 진짜...."

고태산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얼마 전 장민욱에게 맞서 싸울 때처럼 과거였으면 참았을 상황에서 하고 싶은 말을 뱉으니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기분이다.

혹시 숨겨진 파이터의 피가 흐르는 걸까?

"수강생 작품 도둑질할 정도로 실력이 없으면 딴 일을 알아봐야지. 안 그래?"

거침없이 현재의 감정을 뱉어냈다.

"너 미쳤냐? 어린놈의 자식이 쳐 돌아 가지고."

"말 함부로 하지 마쇼. 도둑놈 주제에."

"이 새끼가!"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장도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고태산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살집이 있어서 그런지 힘도 좋네.

그의 표정은 고태산을 잡아먹을 듯하다.

"요즘엔 멱살만 잡아도 100만 원이라던데. 시원하게 쳐 봐. 용돈 좀 벌게."

"이 또라이 새끼...."

장도환은 잠시 망설이더니 결국 고태산을 밀쳐냈다.

"싸가지 없는 미친 고삐리 새끼. 커서 뭐가 되려고. 꺼져라."

그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 손을 휙휙 저었다.

고삐리한테 막말을 들어 화는 치밀지만, 한창 잘나가고 있는 이 시점에 문제를 일으키면 안 된다.

"...."

고태산은 구겨진 교복 목깃을 정돈하면서 장도환을 노려봤다.

일단은 이쯤 할까.

어떤 인간인지는 이제 확실히 알았다. 돌아가서 방법을 찾아보자.

"당신 각오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실을 증명할 거니까. 그날로 당신 작가 생활은 끝이야."

그 말에 또 뭐라 뭐라 욕을 지껄이는 장도환을 무시하고 고태산은 사무실을 나섰다.

19화 누렁이 독자의 의견

[너 좀 다시 보인다.]

거품 물고 지랄하는 사신 작가를 뒤로하고 지하철역으로 가던 중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걷다 지하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뭐가?"

[조금 전에 말이야. 되게 듬직하던데?]

억장이 무너지지만, 지하율의 목소리는 그 쓰레기한테 닿지 않는다.

그런 그녀를 대신해 그와 싸워 준 고태산의 모습은 큰 위로가 되었다.

"에이, 뭘."

[그런데 정말 밝힐 수 있을까.... 필사적으로 부정할 텐데.]

"어떡해서든 입증해야지."

[그 인간 전과는 완전 딴판이야. 저런 인간일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당시 레슨을 진행할 때 사신 작가는 다정하고 진실되어 보였다고 한다.

쯧, 역시 사람 속은 모르는 거다.

지하율은 조금 전 상황으로 그가 단단히 작정하고 일을 벌였음을 확실히 느꼈다.

그에 반해 자신은 죽은 몸이고, 증거는 없다.

자신감이 점점 없어진다.

"누나."

그런 그녀의 표정을 읽은 고태산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응.]

"지금 상황, 우리가 좋아하는 웹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클리셰 아냐?"

[...그렇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마치 억울한 상황에 처한 주인공 일행 같다.

"소설에서 사신 작가 같은 놈은 결국 어떻게 되지?"

[주인공한테 당하지.]

"그래 맞아. 인실X 되는 거야."

[풉-]

고태산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 목을 긋는 제스쳐를 취하자 지하율이 피식 웃었다.

"할 수 있어. 힘내자, 야생마 작가와 웹소설 덕후가 힘을 합쳐 그 뻔한 클리셰 한번 만들어 보는 거야. 콜?"

[...콜.]

* * *

'끄응....'

고태산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괴로워하는 지하율 앞에서 개폼을 잡긴 했는데, 진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온 뒤 계속 인터넷으로 지적재산권 도용에 관한 법률과 사례 등을 알아봤지만, 지금 그들의 상황에서는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없었다.

이 바닥에선 워낙에 표절, 도용 등은 입증이 어렵다.

소송을 한다고 해도 막대한 비용과 오랜 기간이 걸릴 터인데, 원작자는 죽었고 증거는 없다.

돌겠다.

[태산아, 피곤할 텐데 어서 자.]

"아냐, 아직 괜찮아."

어느덧 자정이 넘었다.

고태산의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애써 웃어 보였다.

솔직히 겁나 피곤하다.

안 쓰던 머리를 쓰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니 죽을 맛이다.

하지만 자신이 자면 혼자 답답한 마음으로 긴 밤을 지새울 지하율이 마음에 걸린다.

좀만 더 고민해 보자.

고태산은 한번 기지개를 켜곤 웹소설 플랫폼 사자후에 접속했다.

"응?! 누나! 지금 누나 작품 1위야!"

[정말?]

지하율의 소설 <골로 가도 욜로>가 무료연재 순위 1위를 기록했다.

[꺄아! 정말이네?]

"애매하긴 한데 이거 축하할 일인 거 맞지? 대단하다 누나."

비록 사신 작가가 도둑질하여 올린 것이지만, 그녀의 작품이 이렇게 인정을 받았다.

현재 31화까지 업로드가 되었는데 총 조회수가 무려 150만을 넘었다.

이 정도면 1티어 작가들도 힘든 성적이다.

진짜 누나의 재능이 대단하긴 한가보다.

[댓글 한번 봐 보자.]

"응."

지하율 역시 원하던 방향은 아니지만, 일단 자신의 작품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회차마다 댓글 수도 상당했다.

많은 화는 400개까지 달려 있었다.

- 주인공 캐릭터 진짜 확실하게 잡았네ㅋ 연참 좀 해 줘용!

- 필력 좋고 개연성 좋고! 간만에 웰메이드 현판 나왔네.

- 이번 편 지렸습니다. 기저귀 좀 갈고 올게요ㅜ

- 뻔한 소재인 듯한데 뭔가 다르다?

- 몰입력 장난 아니다ㅜㅜ 간만에 수작 나왔네.

- 조오오오온나 꿀잼!

"댓글 반응 좋고~"

[히히.]

물론 어느 작품에나 있는 밑도 끝도 없는 악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댓글이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비록 공모전 심사에서 제외됐지만, 이 정도면 누나 작품은 충분히 인정받은 거야."

[그렇겠지?]

"그러엄! 솔직히 공모전 입상한 작품 중 막상 연재해서 잘된 작품이 얼마나 돼? 다 망하잖아. 누난 공모전보다 더 확실하게 실력을 증명한 거야. 조회수랑 연독률 봐. 크, 예술이다 진짜. 누나 천재 아냐?"

[비행기 태워 주긴.]

살짝 귀가 빨개진 지하율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좀 전보다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물론 일시적인 거지만.

"보고 있어 봐. 나도 누나 소설 한번 읽어 봐야겠다."

[아, 부끄러워.]

"이런 대작을 안 읽어 볼 수가 있나. 그리고 글 안에서 단서가 나올 수도 있잖아."

"음, 알겠어."

고태산은 휴대폰을 들고 침대 위로 누웠다.

지하율은 컴퓨터 앞에 앉아 댓글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녀의 귀신력으로 마우스 스크롤 정도는 움직일 수 있었다.

'오, 진짜 괜찮은데?'

고태산은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부터 느낌이 빡 왔다.

군더더기 없는 담백한 문체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주인공은 피나는 노력 끝에 사법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검사가 되었고, 장미빛 인생을 꿈꾸며 행복에 빠져든다.

하지만 첫 출근 전날, 자고 일어나니 고1로 회귀해 버렸다.

- 으아악! 이게 대체 뭐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개팅도 잡았는데!!

"크크, 어이없어."

보통은 억울하게 죽은 주인공이 회귀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주인공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때 밑도 끝도 없이 과거로 돌아갔다.

주인공은 가까스로 멘탈을 다잡고 오랜 시간 열심히 노력하여 다시 검사가 되었다.

첫 출근도 무사히 마치고, 행복해하며 잠에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이번엔 중1로 회귀했다.

- 끄아아악!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크하하!"

주인공의 억울하고 비참한 심정이 느껴지는데, 웃음이 나왔다.

- 엿 같은 세상! 다 필요 없어! 또 당하면 병신이지. 이제부터 난 존나 놀기만 할 거다. 골로 가도 욜로야! 시바아알!!

아, 진짜 겁나 재밌네.

딱 내 스타일이다. 객관적으로 봐도 띵작이고.

사신 작가가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이 작품을 먹으려고 하는지 이해는 간다.

아까 사신 작품을 몇 개 훑어 봤는데 녀석은 절대 이런 글을 쓸 실력이 못 된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글 스타일이 너무 구려.

* * *

"응...?"

[잘 잤어?]

알람 소리에 눈을 뜨니 지하율이 인사를 건넸다.

"아... 내가 언제 잠든 거지."

기억이 없다.

누나의 소설을 보다가 잠든 것 같다. 한 30화까지는 읽은 것 같은데.

[피곤할 만했지. 나 때문에 미안하네.]

"아, 아냐. 무슨 소릴."

[아니긴. 태산아 오늘은 학교 빠지지 말고 잘 갔다 와.]

"응? 누나는 같이 안 가?"

[응. 나는 사신 작가 좀 지켜보다 올게. 혹시 모르니까.]

그녀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사신 작가의 곁에서 뭐라도 건질 만한 게 없는지 알아봐야겠다.

"아, 그래. 알겠어. 저녁에 집에서 봐."

[응. 학교 잘 다녀와.]

지하율은 그렇게 먼저 집을 나섰고, 고태산은 간만에 홀로 학교로 향했다.

"응?"

교실 문을 연 고태산은 바뀐 환경에 잠시 머뭇거렸다.

"자리 바뀌었어."

"아, 그래?"

그의 뒤로 다가온 천유라가 말했다.

고태산이 조퇴를 했던 어제, 담임의 지시로 교실 전체 책상 배치가 바뀌었다.

한 명씩 떨어져 앉던 배치에서 두 명씩 책상을 붙였다.

"네 자린 저기 정하민 옆이야."

"아, 고마워."

"몸은 어때?"

"이젠 괜찮아."

"다행이네."

천유라가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 알쏭달쏭한 얼굴을 하곤 자리로 돌아갔다.

'정하민이 옆자리라.'

바뀐 자리 옆에 앉아 있는 새로운 짝이 보인다.

비쩍 마르고 두꺼운 안경에 어딘지 과거 고태산과 비슷한 분위기의 남학생.

같은 반임에도 한 번도 말을 나눠 본 적이 없었다.

"안녕."

고태산이 자리에 앉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

정하민이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

"...."

그리고 찾아온 침묵.

최근 많이 변했다곤 해도 고태산은 아직 낯을 많이 가린다.

정하민 역시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아싸의 길을 걷는 자다.

"흠흠... 뭐, 뭐 보는 거야?"

고태산은 정말 할 말이 없었지만, 이 전과는 다른 교우 관계를 위해 힘들게 말을 이었다.

"웹소 좀 보고 있었어."

"오?! 너 웹소 좋아해?"

"응. 너도?"

"그럼. 완전 좋아하지."

지금도 그놈의 웹소설 때문에 아주 고생하고 있는걸.

공통의 관심사를 찾아서 다행이다.

분위기가 한결 편해졌다.

"뭐 보는데?"

"<골로 가도 욜로>라고 알아?"

"하하... 알고말고."

정말 어지간히 인기이긴 한가보다.

하긴 엄청난 성적의 1위 작품이니 웹소 좀 좋아하면 한 번씩 읽어 보겠지.

"그래? 태산이 너도 봤구나. 이 작품 완전 대박이던데."

"그렇지? 완전 잘 썼어."

"응. 그런데 많이 이상하더라."

"뭐가?"

"사신 작가가 이 작품을 썼다는 게 말야. 개인적인 생각에 이건 사신 작품이 아냐. 많이 양보해 줘도 공동 작업 작품?"

"...그래? 왜?"

그 말에 고태산이 귀를 쫑긋 세웠다.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소설을 읽었거든. 완전 누렁이고."

누렁이는 작품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다 읽는 독자를 말한다.

활자 중독인 정하민은 대여점 시절부터 꾸준히 소설을 읽어 왔다.

"사신 작가 것도 많이 읽었지. 그래서 <골로 가도 욜로> 읽으면서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냐."

"그게 뭔데?"

"필력, 전개 방식, 대사, 캐릭터 조형 등 그냥 작법의 모든 요소가 전과 너무 달라. 신인 작가들이야 발전 속도 때문에 빨리 바뀌긴 하지만 10년 넘은 기성 작가가 이렇게 확 달라질 수가 있나?"

"그렇지. 그런데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

고태산은 일부러 사신 작가의 입장을 대변했다.

최대한 날카로운 그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

"맞아. 흔치 않은 일이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지.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감성이야."

"감성?"

"응. 이 작가는 모든 작품이 거칠고 남성향이 강했어. 그런데 이 작품은 아니야. 부드럽고 서정적인 부분이 많고 여성 캐릭터 대사도 생동감 있어. 마치 젊은 여성 작가가 쓴 것 같아."

"오...."

상당히 예리하다.

고태산이 낮은 감탄사를 흘렸다.

"올드한 스타일의 40대 작가가 갑자기 이런 세련된 감성을 낸다? 믿을 수 없어."

정하민은 쑥스러워하던 조금 전 모습과는 다르게 또박또박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중간중간 검지로 안경을 스윽 올리는 모습에서 마치 웹소설 평론가 같은 포스가 풍긴다.

"그리고 내가 가장 확신하는 부분은 따로 있어."

"뭔데?"

"<골로 가도 욜로> 16화를 보면... 잠깐만."

정하민이 폰으로 해당 편을 검색했다.

16화? 무슨 내용이었더라?

어제 나도 읽었던 편인데. 거기에 확신하는 부분이 있다고?

"여기 봐 봐."

"아, 기억난다."

세상을 등진 조연 캐릭터에게 주인공이 일침을 가하는 내용이다.

근데 이게 왜?

"이 부분에서 나는 이건 사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확신했지. 왜냐하면...."

고태산은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이내 그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사신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 어...?"

정하민의 의견을 들은 고태산은 멍한 표정으로 골똘히 뭔가 생각했다.

어라...? 이거 혹시?

"태산아 왜 그래?"

"아, 아냐. 아무것도. 너 진짜 짱이다. 신빙성 있어 정말."

"헤헤, 아냐 뭘."

정하민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고태산 역시 미소가 그려진다.

조금 전 정하민의 이야기를 듣고 번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지하율에게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지만.

'이거 잘하면 사신 놈을 보내 버릴 수 있겠어.'

20화 내 별명이 뭔지 알아?

[시발 새끼....]

본래 말이 고운 지하율의 입에서 계속 욕설이 나온다.

아마 그녀와 같은 상황이라면 수녀라도 쌍욕을 뱉을 것이다.

그녀가 있는 곳은 사신 작가 장도환의 허름한 사무실.

지하율은 아침부터 곁에서 그를 주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풉헤헤, 아주 난리구만!"

장도환이 컴퓨터 앞에 앉아 털이 수북한 뱃살을 벅벅 긁으며 행복한 웃음을 터트린다.

- 아직도 욜로 안 본 흑우 없재?

- 이 정도 성적이면 거의 역대급 아니냐? 사신 작가 개떡상이네.

- 이래서 기성 작가 경력은 무시 못 하는 거다. 한 방에 터진다니까? 존경스럽다.

- 골로 가도 욜로가 진짜 대단한 게 뭔지 아냐?

"크크크."

웹소설 커뮤니티는 사신 작가에 관한 글로 가득했다.

웹소설 플랫폼 사자후에서 랭킹 1위를 기록한 후로 기세를 타고 조회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이 페이스라면 유료 연재 시에 얼마나 많은 수익이 발생할지 몹시 흥분됐다.

물론 지하율이 집필한 분량은 50화까지기에 그 이후로는 온전히 자신이 써야 한다.

하지만 워낙 초반 설정, 전개가 탄탄하고 지하율 살아생전에 후반부 스토리까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렇기에 틀딱 작가 장도환이 어영부영 작품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제 나도 장가도 좀 가야지."

맨날 좁은 곳에 처박혀서 변변치 않은 글만 쓰다 보니 마흔이 넘도록 여자도 제대로 못 만났다.

이번에 제대로 한탕 당기고 젊고 삼삼한 애로 좀 주물러 봐야겠다.

"그나저나 이제 올 시간이 됐... 아, 왔나 보네."

사무실 유리문 밖으로 비치는 실루엣이 보인다.

이어 깔끔하게 차려입은 젊은 여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UX미디어 신은주 주임입니다."

대형 웹소설 매니지먼트 UX미디어에서 <골로 가도 욜로> 계약 건으로 친히 방문한 것이었다.

"어이구,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장도환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아마 이미 여러 매니지에서 좋은 조건으로 제안 많이 받으셨을 거라 생각해요."

여직원이 장도환이 내온 차로 목을 축인 뒤 용건을 꺼냈다.

"하하, 다들 좋게 봐 주셔서 연락은 좀 받았습니다."

그답지 않게 겸손 모드다.

왜냐면 UX미디어야 말로 현재 가장 파워 있는 매니지이자 전부터 그가 꼭 함께 일하고 싶은 곳이었으니까.

"작품이 워낙 좋으니 다들 혈안이 되어 있겠죠. 저희 회사도 꼭 작가님을 모시고 싶고요."

"기분 좋네요."

"그렇다면 경쟁력 있는 제안을 드려야겠죠? 계약 조건은 이렇습니다. 정산 비율 8:2, 매출 3억이 초과 시 9:1로 전환. 선인세 1억. 추가로 판타지랩에서 웹툰 제작에 들어갑니다."

꿀꺽-!

급이 다른 화끈한 제안에 장도환이 마른 침을 삼켰다.

"연재는 당연히 K플랫폼에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저희 회사가 K플랫폼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거 알고 계시죠? 프로모션은 타 매니지와는 비교가 안 될 겁니다. 큰 이변이 없다면 상위권에 알박기할 겁니다."

"그, 그렇겠죠."

이미 검증된 작품을 UX미디어에서 작정하고 밀어준다면야 그 화력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게다가 웹툰 명가 판타지랩에서 웹툰 제작을 맡는다면 그것의 파급력도 엄청날 것이고.

수억? 아니, 잘만 하면 수십억을 벌지도!

"아시겠지만 이런 조건은 이례적입니다. 저희 소속 작가님들이 알면 기겁을 하실 거예요."

"그렇죠. 저도 작가 경력이 꽤 되다 보니 얼마나 좋은 조건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저희와 함께하시겠어요? 아니면 좀 더 고려해 보셔도 됩니다."

여직원이 싱그러운 미소로 물었다.

대형 기획사라 그런지 일하는 사람도 참 곱네.

조금 더 딜을 해 볼까 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차라리 충성스러운 이미지로 가서 자연스레 떡 하나 더 주고 싶게 만드는 게 낫겠다.

"아니요, 결정했습니다. 부족한 저를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장도환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크크크크."

그렇게 장도환은 UX미디어와 작품 계약을 체결했다.

너어~무 행복하다.

이런 조건으로 계약을 하다니.

꿈에도 그리던 스타 작가가 되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스타 작가 되는 법을 가르쳤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말하지 않았다.

"좋은 작품 하나 잘 쌔비면 끝이지, 크크."

사실 스타 작가 되는 방법은 나도 몰라.

돼 봤어야 알지.

이번 작품을 잘 마무리하고 후에 이 커리어를 내세워서 웹소설 강의로 지망생들 돈까지 쪽 빨아먹을 것이다.

얼마 전 남자친구란 놈이 거슬리긴 하지만 고삐리 주제에 뭘 어쩌겠어?

"푸헤헤헤!"

가래 낀 웃음소리에 사무실이 쩌렁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지하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후우...."

오후 4시쯤 사무실에서 나와 저녁이 다 돼서야 고태산의 집에 도착했다.

귀신이 된 후로 신체적인 피로를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은 굉장히 지친다.

터벅터벅 벽을 통과하여 고태산의 방에 들어갔다.

"누나!"

애타게 그녀를 기다리던 고태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태산아, 잘 다녀왔어?]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기다렸잖아."

[미안. 어쩌다 보니 좀 늦었네.]

"혹시 알아낸 건 있어?"

[아니.... 그 자식이 얼마나 쓰레기인지 더 확실히 확인했어.]

"에휴, 표정을 보니 오늘 하루 어땠을지 대충 짐작이 되네. 고생했어."

지하율이 몹시 힘들어하는 듯하다.

그런 그녀의 손을 고태산이 잡아끌었다.

"잠깐 이리 와 봐."

[응?]

둘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늘 새로운 짝 정하민이 언급한 내용에 관해 확인할 점이 있었다.

제발... 내 예상이 맞기를!

"16화에서 이 부분 말이야. 이것도 누나가 창작한 거 맞아?"

[아, 응 맞... 어?]

순간 지하율의 눈이 번뜩 떠졌다.

"이거 내가 봤던 그거 맞지? 누나 어릴 적 사진 속에 있던."

전날 증거를 입증할 만한 자료를 찾던 중 그녀의 SNS에서 봤던 사진.

[어, 어... 맞아. 그러고 보니....]

반쯤 얼이 나간 지하율을 보며 고태산이 쾌재를 불렀다.

"됐다!! 다행이야! 예상이 맞았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드디어 찾았다!

하율이 누나가 원작자라는 증거!

[그, 근데 이걸로 사신 작가가 내 작품을 훔쳤다는 걸 입증할 수 있을까?]

지하율이 기대 반, 걱정 반의 목소리로 물었다.

"가능할 것 같아. 일단 크게 공론화시켜야지. 그리고 녀석을 공개 처형하는 거야."

[어떻게 공론화를 시켜...?]

"누나 잊었어? 130만 구독자를 보유한 O튜버 한길이 형이 있잖아."

고태산이 입꼬리가 나이키를 그렸다.

* * *

avataravatar
Next chap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