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0

213화. 타인의 희생 (3)

모든 것이 끝났다. 힘겨웠지만 해냈다. 이제부터 당분간은 지루하지만 섬세함을 요구하는 뒷정리의 시간이 펼쳐지겠지.

'이 많은 언데드를 전부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라키엘은 전장을 지나치며 무의식중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마침내 흑마법사를 처리한 지금, 후련함보다는 명치가 답답하게 콱 막혀 왔다. 크라노스 시의 성벽 바깥 평원을 온통 배회하는 언데드 때문이었다.

"구우우, 구워어...."

한때는 살아서 미소 짓고 사랑을 나누었을 이들. 그러나 지금은 지휘자인 흑마법사를 잃고서 그저 초점 없는 눈동자로 전장을 배회하고 있었다. 흉성? 터뜨리지도 않았다. 단지 의미 없는 신음소리만 내며 천천히 걷고 있을 뿐.

덕분에 저들은 이제 존재만으로는 거의 해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숫자가 물경 2천이 넘는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아무래도 저 좀비들을 모조리 방치하기엔 좀... 그렇겠지.'

다른 문제보다 일단 위생적인 점이 제일 컸다. 저 좀비들이 썩어가는 몸뚱이로 도시 주위를 몇 날 며칠이고 배회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온갖 잡균이 도시 주위에 팍팍 뿌려지는 셈이니까.

게다가 저들은 따지고 보면 대부분이 한때 크라노스의 시민들이었다. 즉, 성벽 안쪽에 가족과 친지가 있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한곳에 모아서 화장이라도 치러주는 편이 좋겠지. 그래야 유족들도 조금은 위로가 될 테니까.'

물론 2천 구가 넘는, 심지어 걸어 다니는 시신들을 얌전히 모아서 화장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터다. 하지만 방치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이제부터 더 바빠지겠네.'

잠시나마 잊고 있던 피로감이 한숨에 섞여 흘러나왔다. 솔직히 당장 뜨끈한 물로 샤워 한 번 때리고선 소파에 누워서 넷x릭스나 뒤적거리다가 잠들고 싶었다. 물론 그게 불가능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지만.

"일단은 닥친 일부터 빠르게 처리해야겠지. 그렇지 않나, 세르지오?"

"예, 전하. 오늘은 정말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쪽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특근대의 최연장자 세르지오. 한때 고참 검투사였던 그가 까슬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웃었다.

"아까 흑마법사의 소굴 전체가 함정이자 미끼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정말 아찔했는데 말입니다."

"그랬나."

"예.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크라노스가 함락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랬다면 큰일이 났겠지. 시민들이 모조리 당했을 테니까."

"예, 전하. 그러지 않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세르지오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자신이 모시는 주군,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새삼스러운 존경심이 들었다.

그는 확신했다. 이 모든 승리가 황태자의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사실만은 확실하다. 따지고 보면 아까 흑마법사의 수작을 가장 먼저 간파한 이도, 크라노스로의 급속 회군을 명령한 이도 황태자였으니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태자는 크라노스에 돌아온 후에도 전장의 모든 판세와 흐름을 자신의 의지와 뜻대로 조율했다. 자신은 그 모습을 모조리 곁에서 지켜보았다. 지금도 그 과정들을 돌이켜보자면... 절로 전율과 소름이 함께 피어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나는 역사에 길이 새겨질 위대한 분을 모시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군.'

세르지오는 새삼스러운 감격을 남몰래 곱씹었다. 아마도 자신의 추측이 맞을 것이다. 황태자는 결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니까. 이대로 성장한다면 반드시, 제국의 역사를 찬란하게 빛낼 인물로 거듭날 테니까.

'그저 지하 검투장에서 썩어가던 내가... 허허, 허허헛.'

이렇게 출세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새삼스러운 감격과 자부심이 생겨났다. 앞으로 더더욱 황태자를 잘 모시고 지키겠노라 다짐하였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어? 저건 뭡니까?"

곁의 특근대원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뭘까. 세르지오는 반사적으로 동료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 좀비 하나가 있었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좀비였다.

그저 반쯤 썩어 있고, 진물을 흘리며, 의미 없는 신음을 흘려대는... 적어도 외양으로만 보면 너무나 평균적이고 보편적인 좀비의 정석 같은 모습이었다.

한데, 행동이 조금 특이했다.

"저놈, 갑자기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는데 말입니다?"

"떨기 시작했다고? 조금 전까진 안 그랬나?"

"예. 방금 막 저러기 시작했습니다."

"...."

세르지오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좀비를 훑어보았다. 과연 동료의 말대로 좀비는 온몸을 격렬하게 떨어대고 있었다. 아니, 제자리에서 팔다리를 마구잡이로 부들거리고 있었다. 그 기세가 사뭇 기형적이고 기괴했다. 저러다가 콱 발작하며 달려드는 건 아닐까.

"다들 경계."

수십 미터쯤 멀찍하게 떨어진 거리이기에 크게 위험하지는 않으리라. 평범한 좀비 하나쯤 기습적으로 달려들어 보았자 이쪽의 철통 같은 호위를 뚫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경계를 하여 손해 볼 것은 없다.

세르지는 그렇게 판단했고, 황태자 주위를 둘러싸며 함께 걷던 특근대원들의 대열을 약간 더 밀집시켰다.

그 사소한 판단이 황태자를 살렸다.

...후우욱?

온몸을 떨어대던 좀비가 폭발한 것은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부들거리던 근육이 급속도로 수축했다. 흑마술로 이루어진 마나가 순간적인 막대한 흡인력을 행사했다. 좀비의 전신이 '한 점'을 향해 모였다. 밀집했다. 수축되고, 압축되었다. 찰나에 응축된 에너지가 흑마술을 통해 폭발적으로 발산되었다.

기습적인 시체 폭발이었다.

후콱-!

수십 미터 거리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맹렬한 폭발. 최초로 폭발한 좀비는 하나였다. 그러나 그 곁에 나란히 함께하던 좀비들이 있었다. 그 숫자가 약 20구에 달했다. 최초의 폭발의 기세가 20구의 나머지 좀비들을 덮쳤다.

연쇄폭발이 일어났다.

...투화학!

제일 먼저 일행을 덮친 것은 폭발의 기세가 밀어내며 압축시킨 공기의 벽, 충격파였다. 음속을 돌파하며 날아온 충격파가 특근대원들을 후려쳤다.

그러나 이미 그 순간, 특근대원들은 대응하고 있었다. 마침 부들거리는 좀비를 주시하고 있던 까닭이었다. 그렇기에 좀비가 폭발하는 모습을 모두가 두 눈으로 보았다.

동시에 반응하였다. 오랜 시간 검투사로 살아오며 시시각각 생명의 위기를 넘나들었던 본능이 발휘되었다.

"...!"

누가 무어라 외쳤는지 제대로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모두는 그 외침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했다.

전하를 지켜라.

모두가 똑같은 의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충격파와 마주한 쪽의 특근대원들은 몸을 움츠리지 않았다. 오히려 방패와 무구를 앞세우고서 버티려 애를 썼다. 그렇게 1차 충격을 걸러주는 사람의 벽이 세워졌다.

반대편의 특근대원들은 일제히 황태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황태자를 붙잡았다. 지면으로 내리눌렀다. 그 손길은 지극히 다급하고, 그만큼 거칠었으며, 무례했고, 우악스러웠다. 하지만 덕분에 황태자는 반항할 틈도 없이 바닥에 깔릴 수 있었다.

"...큭!"

그 순간 라키엘은 보았다.

자신을 내리누르는 특근대원들. 달려드는 특근대원들. 모두가 몸으로 자신을 덮어오고 있었다. 세르지오의 다급한 눈길이 보였다.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의 눈빛이 저런 건가. 소름이 돋았다.

뒤이어 몰려온 것은 끔찍한 충격이었다.

...!

소리도, 섬광도, 진동도.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어두워졌고,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마치 거대한 비명과 함성으로 버무려진 드럼통 속에 던져진 것만 같았다. 드럼통이 1초마다 수십 바퀴씩 굴러가며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뒤섞이는 기분.

암흑과 섬광의 난투.

비명과 침묵의 협정.

그 끝에 찾아온 것은 귓가를 거세게 울리는 이명이었다.

"...으, 읍."

라키엘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아니, 자신이 고개를 들긴 한 걸까. 눈을 떴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마구잡이로 뒤섞여 반짝이는 반딧불이 수백 마리를 눈앞에 풀어놓은 것만 같았다.

제대로 들리는 것도 없었다. 삐- 하는 가느다란 소리만이 청각의 존재를 간신히 알려주고 있었다.

고개를 흔들었다.

땅을 짚었다.

짚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그 감각이 소름 끼치도록 낯설었다.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살긴 한 걸까. 다른 이들은? 세르지오는? 특근대원들은?

'모두....'

괜찮은 걸까.

그 생각을 가까스로 떠올리던 무렵, 갑작스럽게 감각이 살아났다. 제일 먼저 몰려온 감각은 통증이었다.

"...큽?"

모든 관절이 다 쑤셨다. 아니, 조각조각 부서진 뼈마디를 마취 없이 못질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마치 수십 미터 사이즈의 망치에 전신이 으깨진 느낌이었다.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라키엘은 바닥을 짚은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고통은 익숙했다. 검정색 가시로 스스로를 찔러대던 덕분일까. 오히려 눈을 부릅떴다. 파들파들 떨리는 눈꼬리의 느낌을 자각하며, 비로소 주위의 상황을 온전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바닥에 널브러진 환상종 뽀복이였다. 특유의 널따란 지느러미를 활짝 펼친 채 눈을 까뒤집고서 죽어 있었다.

그 뒤편으로, 뽀복이와 이쪽 사이에 쓰러진 사람들이 보였다. 방패를 앞세우고서 충격을 막아 냈던 특근대원들이었다. 모두가 의식을 잃은 걸까.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바로 곁에 혼절해 있는 세르지오 등이 있었다.

"...."

손을 내밀었다. 세르지오의 목덜미를 짚었다. 미약한 맥이 느껴졌다. 죽지 않았다. 마음이 놓였다. 더듬더듬 기었다. 다른 이들도 차례로 살펴보았다. 다행히 모두가 큰 충격을 감당하느라 혼절하여 있을 뿐, 죽은 이는 없었다.

비로소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모두가 나를 살리기 위해 몸을 던졌구나.'

이쪽을 내리누르고 몸으로 뒤덮던 세르지오와 특근대원들. 그들이 나를 살렸다.

환상종 뽀복이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깨닫지도 못하는 틈에 제일 앞장을 서서 충격과 폭발을 감당했다. 그리고 죽었다. 덕분에 충격을 1차적으로 저지하는 방파제 역할을 해 주었고, 특근대원들도 혼절하는 정도로 그쳤겠지.

딩동!

[불사복치 뽀복이가 스킬 <부활! (Lv. 1)>을 시전합니다.]

[불사복치 뽀복이의 거대화 1 스택이 적립되었습니다.]

"...뽀보!"

뽀복이의 까뒤집혔던 눈이 반짝 뜨였다. 넝마가 되었던 지느러미가 복구되며 불꽃이 되살아났다. 잠깐 철렁했던 마음이 놓였다.

데미안이 다급한 걸음으로 달려온 것도 그때쯤의 일이었다.

"전하!"

녀석이 황망한 눈초리로 이쪽을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우선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여기에 안전한 곳은 없다."

"...예?"

데미안은 의아함을 느꼈다. 황태자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혹시 머리를 다친 건 아닐까. 흑발의 호위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려던 찰나.

라키엘이 이를 갈았다.

"집단 시체 폭발이라."

한 번의 연쇄 폭발.

뜻밖에 입은 충격.

덕분에 상황을 선명하게 간파한 라키엘의 입가에 난폭한 미소가 맺혔다.

"...끝끝내 귀여운 뒤끝으로 직접 손을 쓰게 만드는구만."

물론, 그는 이 상황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정확히 알았다.

214화. 지키고 싶은 사람들 (1)

"집단 시체 폭발이라."

흑마법사 카르투. 놈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겠다. 설마하니 이런 수법을 쓰다니. 대량의 질소 기포로 인한 급성 잠수병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그런 짓이 가능하다니. 한편으로는 그 집요함에 감탄이 나왔다.

'혈전 때문에 분명 뇌경색이 왔었는데. 이게 된다고?'

이건 상식을 뛰어넘은 정신력이다. 실화라면 가히 괴물이라고 불러도 되겠다. 조금은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지금은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기도 하다.

"데미안. 놈은? 죽었나?"

"아닙니다. 아직 살아 있습니다."

흑발의 호위는 대답하며 후회했다. 문득, 자신이 실수를 한 건가 싶었다. 흑마법사의 목을 베고 뛰어왔어야 했나 싶었다.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폭심지 근처에 황태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직후, 만사를 제쳐놓고 황태자의 안위부터 살피러 뛰어왔던 것이 잘못된 판단이었던 걸까.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판단 잘했어. 놈이 죽었으면 일이 더 꼬였을 테니까."

"...예?"

"그랬다면 놈이 준비하던 명령이 한꺼번에 전달됐겠지. 우선 부축부터. 놈에게 가자."

"아닙니다, 전하.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지금 여기서 안전한 곳은 없어."

라키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데미안을 빤히 쳐다보았다.

"전장에 남겨진 언데드의 숫자가 2천이 넘는 상황이다. 그 숫자가 한꺼번에 폭발하며 증폭되면 위력이 어느 정도일까."

"그건...."

"개활지라면 살상 반경만 수 킬로미터에 달하겠지. 크라노스의 성벽은 물론이고 시가지도 절반쯤은 거뜬히 날아갈 테고. 그러니까 결론은 하나야. 도망치려 아무리 애를 써도, 시간 안에 살상 반경을 벗어날 수 없겠지."

그것이 정답이다.

솔직히 지금 당장에라도 언데드 군단 전체가 전술핵에 버금가는 위력의 일제 폭발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머리칼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도망?

불가능하다.

어설프게 도망을 치려 든다면, 반드시 죽는다. 크라노스의 시민들은 물론이고 전장에 있는 모든 이도 마찬가지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겠지.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

죽고자 사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으리라.

라키엘은 문득, 이순신 장군의 명언을 떠올렸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상황임 또한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폭발에서 무사할 방법은 없다. 도망은 반드시 죽는 길이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흑마법사, 그놈의 명령을 취소해야 해. 시간이 없다. 어서."

"...알겠습니다."

데미안은 그의 뜻을 깨달았다. 황태자를 업었다. 흑마법사가 있는 장소를 향해 전력으로 뛰었다.

그동안 흑발의 호위는 느낄 수 있었다.

'전하께서는 많이 떨고 계시구나.'

업힌 채 자신의 등에 기댄 황태자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착각? 아니, 확실했다. 너무나 가볍고 메마른 황태자의 몸이 확연히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어깨를 잡은 두 손도. 등에 맞닿은 가슴도. 그 속에서 뛰는 심장까지 모두 그랬다.

어째서일까. 아까 폭발을 겪은 후의 충격 때문에?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마 다른 이들이라면 충분히 그렇겠노라 여기겠다.

하지만 자신은... 잘 모르겠다.

'의외로 신체적인 충격은 적게 받으셨어. 특근대원들 덕분이겠지. 황태자 전하께서는 지금 단지... 두려움에 떨고 계신 건지도.'

사람이 얼마나 무서우면 이렇게 온몸을 떨게 될까. 그렇기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태자는 도망 대신 흑마법사에게 달려가는 길을 선택했으니까. 그럼에도 표정 하나, 목소리 한 올조차 흐트러지지 않았으니까.

'두려움에 몸을 떠는 당신. 표정만큼은 흐트러지지 않는 당신. 어느 쪽이 진짜 당신일까.'

어쩌면 둘 모두인지도.

그렇기에 황태자는 결국,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면서도 특별한 존재인지도.

"...."

새삼 데미안은 절감했다. 깨달았다. 자신이 그동안 황태자를 오해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그저 기이한 의술과 행동만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나름 애를 쓰는 사람이었다. 평범하니까. 보통 사람이니까. 그래서 더욱 애를 쓰고, 기를 쓰고, 겉으로나마 태연하려 버둥거리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남들처럼 두렵지만. 죽을 뻔한 폭발을 겪으며 충격을 받고선 숨길 수 없이 온몸이 떨리지만. 그럼에도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며 흑마법사에게 달려가고 있다. 어쩌면 가장 위험할 곳에 스스로 뛰어들고 있다.

어째서?

왜?

'황태자이기 때문에?'

신분이 주는 책임감이 이 사람의 등을 떠미는 것일까.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질문을 할 수도, 대답을 들을 수도 없었다.

어느새 흑마법사가 널브러진 곳에 도착한 까닭이었다.

"...그읏."

라키엘은 다짜고짜 데미안의 등에서 내렸다. 순간, 폭발의 충격이 남은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당연한 일이었다. 가벼운 교통사고, 후방추돌을 당해도 몸살이 나곤 하는 게 사람의 몸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사소한 근육통 따위에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죽기 싫어.'

살고 싶다.

살아야 한다.

한낱 음습한 흑마법사 놈의 물귀신 수작질에 말려들어서 죽자고 지금껏 열심히 살아온 게 아니다. 그딴 식으로 죽으면 너무나 억울하다. 반드시 살아남을 거다. 그래서 초 럭셔리 프리미엄 만수르 황족 라이프를 평생 즐기고 말 테다.

'그러니까!'

흑마법사 놈에게 달려갔다. 놈의 상태부터 살폈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마치 배를 까뒤집고 폐사한 물고기처럼 축 늘어진 모양새였다. 딱 봐도 그리 행복한 상태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당장 죽지만 않으면 돼.'

...콰아앙-!

전장 어떤 곳에서 한 무리의 좀비들이 또 폭발을 일으켰다. 제법 먼 거리에서의 폭발임에도 충격파가 훅 몰려와서 머리칼과 옷자락을 서슴없이 헤집었다. 아까의 죽을 뻔했던 경험 때문일까.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 떨렸다.

새삼스럽게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흑마법사 카르투.

이놈이 지금 당장 죽으면 안 된다.

놈이 죽는 순간, 놈이 준비하고 있는 자폭 명령이 전장의 모든 언데드에게 일제히 전송될 거다. 그럼 결과는 위력을 가늠할 수 없을 끔찍한 일제 폭발이겠지.

"...."

집중하자. 소름 따위는 털어내고 집중부터 하자.

'경혈 스캐닝.'

키이이잉-!

경혈 스캐닝부터 발동했다. 카르투의 신체 내부를 살폈다. 평소와 같은 건강 진단을 위한 스캔은 물론 아니었다. 찾는 것이 따로 있었다.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찾았다. 놈이 응축하고 있는 흑마술의 마나.'

눈썹 사이.

미간에 응축된 검고 작은 덩어리의 마나가 보였다. 신체의 경혈에 깃든 정상적인 형태의 마나가 아니었다. 전에 본 적이 있었다. 툴룬 상단장 좀비의 이성을 되찾아 주는 시술을 할 때 흑마법사가 좀비의 신체에 심어두었던 마나와 같은 형태.

흑마술의 구체였다.

라키엘은 구체가 지금 하는 역할을 단숨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이게 일종의 신호 발신 장치인 거구나.'

인터넷 공유기가 와이파이 신호를 뿌리듯이, 놈의 미간에 생성된 흑마술의 구체가 좀비들에게 자폭 명령을 뿌리고 있는 거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츠즛...!

카르투의 미간에 응축된 검은 구체가 미세하게 요동쳤다. 작은 마나의 줄기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 직후....

투콰아학-!

"...!"

전장 한쪽에서 또 일어난 집단 폭발. 뒤이어 그쪽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아우성.

동시에 라키엘은 깨달았다.

'내 추측이 맞았다. 할 수 있겠어.'

그는 손을 뻗었다. 카르투의 미간을 짚었다. 아까 데미안에게 여기로 오자고 했던 때부터 떠올렸던 가능성. 어쩌면 이 상황을 해결할 유일한 해법.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하였다.

키이이이잉-!

두 갈래의 마나 써클이 거센 역회전을 감행했다. 특유의 흡인력으로 외부의 마나를 끌어당겼다. 목표 대상은 카르투의 미간에 응축된 흑마술의 구체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흑마술의 구체 또한 마나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압수.'

간단하다.

놈이 응축한 흑마술의 구체를 빼앗으면 된다. 이쪽이 날름 집어삼켜 버리면 된다. 그 후에 소화를 하듯이 조각조각 찢어서 몸속의 마나에 보태면 된다. 갈래갈래 흩어진 마나 조각들은 더 이상 예전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테니까.

'신중하게....'

키이잉-!

라키엘은 보다 정신을 집중하였다. 폭탄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펄펄 끓는 매생이죽을 떠먹을 때처럼 신중하게. 흑마술의 구체에 접근했다. 끌어당겼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구체가 금방 반응했다.

츠츳...! 츳츠!

'된다!'

역시나.

라키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뒤부터는 쉬웠다. 의외로 구체는 별다른 저항 없이 아스라한 심법의 인도에 이끌려 카르투의 미간을 벗어났다. 이쪽의 손가락을 타고 들어왔다. 손목과 팔뚝, 어깨를 거쳐 역회전 중인 써클에 실렸다.

동시에 써클에 실린 흑마술의 구체가 어떤 구조와 배열을 이루고 있는지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간단한 배열, 딱 한 가지의 명령문을 담고 있는 마나의 덩어리였다.

한데 그 간단한 명령문의 내용이....

- 폭발하라.

...였다.

'쯧.'

라키엘은 혀를 찼다. 이렇게 간단하니까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도 마법의 발현에 어찌어찌 성공을 한 것이었구나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일단은 별 탈 없이 삼키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니 이제는, 소화를 해서 완전히 녹여 없앨 차례다.

키이이이잉-!

라키엘은 두 갈래 써클의 회전을 엇갈리게 하였다. 하나는 정방향으로, 하나는 역방향으로. 엇갈린 두 써클의 회전 속에 흑마술의 구체를 밀어 넣었다. 세차게 돌아가는 분쇄기에 낡은 캐비닛을 던져 넣는 기분으로.

콰콰콰콰콰-!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두 써클의 엇갈리는 세찬 회전 속에 흑마술의 구체가 갈려 나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구체가 곧바로 탈출을 시도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어?'

라키엘은 흠칫했다.

두 써클 사이에서 갈리나 싶었던 흑마술의 구체가, 곧바로 날뛰기 시작했다. 써클의 통제와 흐름을 벗어났다.

"...으읏!"

붙잡아두려 했지만 늦었다. 구체가 순식간에 혈류를 타고 움직였다. 써클을 벗어나 어깨로, 팔뚝을 거쳐 손목으로.

그 뜻은 명확했다.

'카르투에게 돌아가려 하고 있어.'

깨닫자마자 다시 두 써클을 역회전시켰다. 아까처럼 흡인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구체의 탈출 속도가 흡인력을 능가했다. 소름과 함께 깨달았다. 붙잡아둘 수가 없다. 놓친다. 실패다.

'미친.'

마음이 급해졌다.

이대로 구체가 카르투에게 돌아가면, 그땐 자폭 진행을 멈출 수 없게 된다. 다 죽는다. 그건 싫다. 그러니 뭐라도 해야 한다.

자각과 대응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구체가 자신의 손바닥을 지나 손가락으로 향하는 찰나의 틈새. 그 순간 라키엘은 반사적으로 기민하게 반응했다. 아스라한 심법의 흡인력을 거두었다. 대신 심법의 기세를 날카롭게 벼렸다. 바늘처럼. 구체를 찔렀다.

...콰작!

아까 이중 써클 분쇄기 속에서 잠깐이나마 갈렸던 덕분일까. 약해진 구체 겉면에 균열이 생겨났다. 그 속으로 이쪽의 마나를 극소량 밀어 넣었다. 무엇을 위하여? 구체에 담긴 자폭 명령을 어떻게든 바꾸기 위해서였다.

'제발. 랜덤의 신이시여.'

그런 신이 있다면 지금 내 소원을 들어주소서.

라키엘은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구체를 놓쳤다. 구체가 검지로 흘러갔다. 손가락 끝마디를 벗어났다. 카르투에게 쏘아졌다. 놈의 미간에 박혔다. 동시에 카르투의 눈이 새하얗게 까뒤집어졌다.

"...끄흐으."

입에 거품을 물며 부들부들 떠는 카르투. 생명의 마지막 불꽃이 발악을 하고 있었다. 그 발악처럼 돌연, 놈의 미간에 박힌 구체가 섬뜩한 빛을 토해냈다.

파핫!

수천 줄기의 명령이 일제히 전송되었다. 전장의 모든 좀비에게 뿌려졌다.

"구륵?"

"...구워억?"

도합 2,500구에 달하는 좀비가 똑같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저마다 방금 받은 명령을 받들었다. 그들이 받은 명령. 라키엘이 필사적으로 변질시킨 명령문. 그렇게 뒤바뀐 내용은 바로....

- '내게로 와서' 자폭하라.

"구륵!"

2,500구의 좀비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놈들의 시선이 카르투에게 꽂혔다.

215화. 지키고 싶은 사람들 (2)

- '내게로 와서' 자폭하라.

"구륵!"

전장을 의미 없이 배회하던 2,500구의 좀비들이 움찔했다. 불현듯 전달된 명령.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돌렸다. 흐리멍덩하지만 명확한 목적을 담고 있는 2,500줄기의 시선. 그 모든 시선이 모인 곳에 카르투가 있었다.

흑마법사 카르투.

자신들의 창조자.

창조자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한데 방금 창조자가 명령했다.

'자신에게 와서' 자폭하라고.

"...구르륵! 구륵!"

좀비들이 일제히 몸을 돌렸다. 카르투를 향해서였다. 좀비들이 일제히 걸음을 옮겼다. 카르투를 향해서였다. 모두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뜀박질로 바뀌었다.

"쿠르르륵! 쿼어억!"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맹목적이고도 절대적인 복종을 위해 기꺼이!

투두두두두!

2,500구 시체들의 진군이 전장의 지축을 울리기 시작하였다.

라키엘도 그걸 느꼈다.

아니, 방금 흑마술의 구체를 끝끝내 잡지 못하고 손끝으로 떠나보낼 때, 자신에 의해 랜덤으로 바뀐 명령문의 내용 또한 느꼈다.

'내게로 와서 자폭?'

분명 그러했다.

혹여나 착각인가 싶었는데, 지금 좀비들의 행동을 보니 자신이 느낀 게 맞다.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다. 무엇을 위해? 뻔했다.

'명령을 보낸 건 카르투니까. 전장의 모든 좀비가 카르투에게 와서 자폭하려는 거구나.'

그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라키엘은 즉각적인 대응에 들어갔다.

"우루스!"

근처에 있던 우루스를 불렀다.

우루스가 오는 사이에 손을 뻗었다. 늘어진 카르투를 붙잡아 억지로 일으켰다. 부축했다. 다가온 우루스에게 건넸다.

"이놈 업어!"

"...누우?"

"얼른! 나도 같이!"

거의 죽어가는 카르투를 붙잡고서 함께 우루스의 어깨에 올라탔다. 타자마자 우루스에게 재빨리 말했다.

"잘 들어. 이제부터 좀비들이 우리에게 몰려올 거다. 정확하게는 여기 이 흑마법사 놈에게 다가오려 할 거야. 그러니 우리는 이제부터 달린다. 좀비들이 흑마법사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대신 좀비들이 우리를 놓치지는 않을 적당한 속도와 기세를 유지하면서. 그리고 데미안?"

"예, 전하."

"너는 우루스와 나란히 달리며 가까이 다가오는 좀비를 저지하도록. 대신 너무 심하게 박살 내지는 마. 다리를 자르지도 말고."

"어째서입니까?"

"너무 심하게 박살 내면 그 자리에서 폭발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다리가 잘리면 그 자리에서 버둥거리다가 나중에 터질 수도 있으니까. 놈들이 엉뚱한 곳에서 터지면 안 돼. 한곳으로 몰아야 해."

"설마...."

이쪽을 올려다보는 데미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좀비들을 한 장소에 몰아넣고서 폭발을 일으킬 생각이신 겁니까?"

"어."

"하지만 전하."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안다. 다른 놈 시키라고? 시간 없어. 근위대원들은 오크 전사들과 섞여 있고, 특근대원들은 전부 혼절했고. 게다가 우루스는 내가 아닌 다른 자의 명령을 듣지 않아."

"제가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널 같이 데려가는 거지. 시간 없어. 몰려온다."

적당히 거짓말로 둘러대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이 역할을 맡기고 싶었다. 명령문의 내용에 따라 카르투에게 몰려들어 자폭하려는 좀비들. 그 상황을 깨닫자마자 떠올린 대응책은 바로, 카르투를 데리고 달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좀비들이 무지성으로 따라오게 될 것이다. 카르투와 접촉해야 자폭할 수 있으니까. 그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르는 쥐 떼처럼 몰려오겠지.

'마침 놈들을 안전하게 터뜨릴 장소가 떠올랐거든.'

긴뿌리 감초를 탐색하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 크라노스 서쪽으로 제법 떨어진 곳의 협곡을 지나친 적이 있었다. 제법 깊은 협곡이었다. 그곳에 좀비들을 모조리 몰아넣고 폭발을 유도한다면? 이곳 전장과 도시에 피해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방금 떠올린 계획이었다. 위험한 계획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카르투를 잡고서 뛰어가며 좀비들을 유도해야 하니까. 그 역할을 맡기는 싫었다. 하지만 맡길 사람이 없다. 진짜다.

'근위대원? 못 와. 다들 너무 흩어져 있어. 좀비들이 먼저 올 거야. 특근대원? 전부 쓰러졌고. 오크 전사? 우루스와 소통이 불가능해. 데미안은? 사실은 최적의 인물이기는 한데... 녀석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넣는 건 피하고 싶고.'

자칫 녀석의 내면에서 지극히 위험한 존재가 각성해 버릴 수도 있다. 그건 최악이다. 결국, 모든 후보를 제외하면 남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

"...."

까드득!

라키엘은 이를 갈았다. 안 내키지만 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

"우루스! 달려! 서쪽으로!"

"누우-!"

우루스가 포효하며 땅을 박찼다. 이쪽을 설득하려 애쓰던 데미안도 어쩔 수 없이 체념한 얼굴로 곁을 따랐다.

서쪽으로 달렸다.

그쪽 방면에서 몰려오던 일군의 좀비들이 반갑게(?) 포효했다.

"구르르워억!"

"궈어억!"

생각보다 열렬한 환영이었다. 이쪽이 데리고 있는 카르투가 가까워지는 게 그렇게나 반가운 걸까. 명령을 실천할 수 있다는 기쁨의 포효인 걸까.

알 수 없었다.

관심도 없다.

지금은 그저 돌파할 뿐.

"뚫어!"

"누우우-!"

우루스가 더욱 맹렬히 달리며 두 팔을 휘둘렀다. 팔뚝에 얻어맞은 좀비들이 훨훨 날아갔다. 그 와중에도 몇몇 좀비들이 우루스의 공격을 피하고는 틈새로 접근해 왔다. 하지만 놈들은 데미안의 검집 씌운 검과 맞닥뜨려야 했다.

...빠박!

"궈억?"

몇 줄기의 섬광이 번득였다. 검집째 휘둘러진 데미안의 검이 좀비들의 머리통을 빠갰다. 갈빗대를 통째로 박살 냈다. 날카로운 베기가 아닌 묵직한 타격. 그 충격력 자체가 강력한 저지력을 발휘하며 얻어맞은 좀비들을 순식간에 밀어냈다.

"쿼으억!"

"구륵!"

사방에서 넘실거리는 악다구니.

밀어내고, 치고, 튕겨내고, 받아 버리며 돌파했다. 수십, 수백 마리의 좀비들이 앞을 가로막고, 짐승처럼 포효했다. 뚫어내고, 돌진했다. 파도를 부수며 전진하는 전함처럼. 장애물을 짓밟으며 진군하는 전차처럼. 무소의 뿔처럼. 우직하게. 단단하게. 거침없이.

마침내 길이 열렸다.

"가자!"

"누우우!"

눈앞에 뻥 뚫린 공간. 탁 트인 황야. 매캐한 흙먼지 바람 속을 내달렸다. 휘날리는 머리칼 아래 목덜미로 까닭 모를 전율이 돋았다. 뒤에서 몰려오는 좀비들의 물결이 감미로운 진군가처럼 느껴졌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이런 짓거리. 이상하게도 피가 끓었다. 나도 모르게 외쳤다.

"전부! 따라와, 이 자식들아!"

"...그르워억!"

내 함성과 좀비들의 포효. 뒤섞였다. 함께 내달렸다. 멈춤 없이. 거침없이. 서쪽으로 하염없이. 내달리고, 또 내달린 끝에 마침내 협곡의 입구에 다다랐다.

"전하!"

나란히 달리던 데미안이 외쳤다.

"무슨 상황인지 알겠습니다! 흑마법사가 미끼인 거라면! 제가 그놈을 넘겨받겠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거절한다!"

"어째서입니까?"

"나 혼자 빠져나갈 방법이 없으니까!"

힘껏 외쳤다. 사실이었다. 이미 협곡에 들어온 마당이다. 협곡은 깊고 좁았다. 양쪽으로 우뚝 솟은 절벽은 거의 90도에 가까웠다. 게다가 협곡 입구는 무지성으로 몰려오는 좀비 군단에 의해 막혀 버렸다.

즉, 혼자서 협곡 밖으로 나갈 방법이 없다.

"우루스와 함께 돌아가십시오! 충분히 돌파하실 수 있을 겁니다!"

"기각! 그럼 네가 못 빠져나오잖나!"

"전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다고 인간아!"

아무리 데미안이라도 우루스 없이 여길 빠져나갈 수는 없다. 돌파? 어느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결국엔 힘이 빠질 거다. 협곡 위로 등반? 쉽지 않다. 즉,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다 함께 무사히 살아서 나가려면 무조건 뭉쳐야 한다.

"그러니까 잔말 말고 계속 달려!"

데미안의 주장을 격퇴했다.

우루스를 독려하였다.

"누우우! 푸륵!"

협곡을 내달리는 미노타우로스의 눈동자에 독기가 배어났다. 사실은 협곡 입구를 보자마자 남몰래 흠칫했던 우루스였다.

잠시 악몽 같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자신을 유인했던 인간 사냥꾼 무리. 사로잡혀 있던 아기 미노타우로스 송아지. 아기를 구하기 위해 서슴없이 협곡에 들어갔던 자신. 기다렸다는 듯이 협곡을 붕괴시킨 인간들.

세상을 뒤덮을 듯 무너져 내려오던 바윗더미. 깔려 울부짖던 자신. 품에서 죽어가던 아기. 그때의 무력감과 절망. 가슴마저 무너져 내렸던 아픈 기억들.

'...푸르륵!'

우루스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각오하며 다짐하였다. 오늘은 다르리라고. 자신의 친구가 되어준 황태자를 반드시 지켜내겠노라고. 두 눈에 결의를 담고서 더욱 맹렬히 땅을 박찼다.

좁은 통로 같은 협곡 바닥의 길.

내달리고, 전진했다.

마침내 가장 깊은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막다른 골목 같은 지형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카르투를 우루스의 어깨 밖으로 밀어냈다.

"...끄흐으."

죽어가며 인사불성인 흑마법사. 놈이 뜻 모를 신음을 희미하게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기분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쪽이 스스로 만든 상황이다. 인과응보라고 여기고 달게 받아들여.'

선을 그을 때는 그어야 한다.

힘껏 밀었다.

떠밀린 카르투가 협곡 막다른 바닥에 툭 떨어졌다.

"데미안! 타!"

이쪽의 뜻을 깨달은 데미안이 즉시 움직였다. 우루스도 즉각 몸을 돌렸다. 이제는 역으로 돌파하며 탈출할 때다.

"누우우우오오-!"

우루스의 전신 근육이 불끈거렸다. 힘찬 역주행을 개시했다.

콰드드드드!

협곡 출구를 향하여. 거침없이. 지금까지 유인을 위한 돌파가 솜방망이였다면, 지금은 철퇴를 돌리듯 전력으로 뿔을 휘둘렀다. 얻어맞은 좀비들이 십수 미터씩 날아가 협곡 벽면에 틀어박혔다.

그럼에도 강물처럼 몰려오는 언데드 군단. 놈들을 순식간에 100여 미터쯤 돌파했을 때, 라키엘이 외쳤다.

"저쪽!"

그가 협곡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 상대적으로 그나마 완만한 비탈이 있었다. 아까 협곡으로 들어오며 미리 봐두었던 지형이었다.

"올라가자!"

"누우!"

우루스의 맹렬한 도움닫기!

콰아앙-!

단숨에 날아올라 비탈면에 착지했다. 다시 박찼다. 경사 60도 정도의 험난한 비탈을 마구잡이로 뭉개며 위로, 또 위로 올라갔다.

라키엘의 입가에 비로소 미소가 배어났다.

'됐다!'

이만하면 됐다. 충분히 올라갈 수 있겠다. 대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협곡 위로 올라갈 수 있으리라.

가슴속에 피어나는 희망처럼 현실이 이루어졌다. 시시각각 협곡이 아래로 쭉쭉 멀어져 갔다. 그만큼 협곡 꼭대기가 가까워졌다.

대폭발이 일어난 것은, 그 순간이었다.

"...구르륵!"

라키엘이 협곡 막다른 지점에 던져놓은 카르투. 빈사 상태의 흑마법사에게 선두의 좀비가 마침내 달려들었다. 온몸으로 뛰어서 덮쳤다. 끌어안았다. 좀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 어려웠던 과정들을 극복하고서 마침내 창조자의 명령을 이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 내게로 와서 자폭하라.

"구륵!"

예!

좀비가 힘차게 외치는 순간, 썩어가는 몸속에서 시체 폭발 마법이 발동되었다.

후우욱?

마나가 응축되었다. 거의 동시에 다른 좀비들도 온몸으로 달려들었다. 좀비에게서 다른 좀비에게로. 시체 폭발의 프로세스가 순식간에 전염되듯 번져나갔다. 일제히. 일사불란하게. 창조자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하여. 더없이 충실하게.

폭발했다.

...!

2,500구의 일제 폭발이었다.

새하얀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카르투의 빈약한 육신은 섭씨 수만 도까지 치솟은 폭발 중심부의 열기에 흔적도 없이 증발되었다. 거대한 화구가 지름 50미터 범위 내의 모든 물질을 플라즈마 상태로 만들었다.

끔찍한 복사열이 모든 방향으로 퍼져 나갔다. 복사열에 노출된 협곡 벽면의 암석이 열기에 노출되며 유리 결정으로 변했다.

뒤이어 거대한 충격파가 음속보다 빠르게 질주하였다. 충격파에 얻어맞은 협곡에 초국지적 지진이 발생했다. 협곡 전체가 맹렬히 흔들렸다. 붕괴했다. 우루스가 오르고 있던 비탈도 예외가 아니었다.

"누우?"

...콰하학!

미노타우로스의 왕은 기겁했다.

거대한 충격파가 전신을 때려 왔다. 먼발치에서 몰려오는 끔찍한 열기가 간접적으로 느껴졌다. 구불구불한 협곡의 구조 덕분에 복사열에 직격되는 신세는 면했지만, 삽시간에 달구어진 주위의 열기만큼은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더욱 큰 문제는, 오르고 있는 비탈이 위에서부터 무너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우우! 누우! 푸륵!"

우루스의 두 눈에 독기가 서렸다. 선연히 떠오른 과거의 악몽. 눈앞으로 쏟아져 내려오던 바윗더미. 그때의 기억이 지금 눈앞의 광경에 겹쳐 보였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때와는 다르리라. 반드시!

"푸르륵!"

더욱 맹렬히 비탈을 올랐다. 꼭대기가 멀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박차고, 오르고, 뛰었다.

"누우-!"

마침내 협곡 꼭대기를 향한 마지막 도약을 감행했다. 떨어져 내려오는 바위 하나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바위 뒤편으로 드러난 파란 하늘이 시야를 꽉 채웠다. 우루스의 두 눈에 환희가 서렸다.

하지만 그 순간.

...빠악!

돌연, 등 뒤에서 불길한 소리가 터졌다.

무슨 소리일까.

우루스는 순간 의아했다. 그 사이, 마침내 협곡 꼭대기에 올라섰다. 붕괴 영역에서 탈출하기 위해 다시금 달리려 했다. 그때에야 비로소 사태를 깨달을 수 있었다.

데미안의 다급한 외침 덕분이었다.

"...전하!"

"누우?"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로소 목격했다.

황태자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협곡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날아온 파편에 맞은 걸까. 그래서 의식을 잃어 가고 있는 걸까.

"크읏!"

데미안은 다급히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뻗어 가는 곳. 그곳에 황태자가 있었다. 눈을 감은 라키엘이 멀어지고 있다.

'제발.'

조금만 더.

간절하게.

손을 뻗었다. 붙잡으려 했다. 닿을 것 같다. 잘만 하면. 손끝이....

...츳.

닿았다가 멀어졌다.

스치듯이 허망하게.

미처 잡아줄 틈도 없이.

"...!"

데미안은 눈을 부릅떴다. 세상의 모든 풍경이 일순간 느려지는 기분이었다. 그토록 기이한 감각 속에서 황태자가 멀어지고 있다. 핏방울을 점점이 뿌리며. 폭발과 붕괴가 일어나는 협곡 아래로. 하염없이 떨어지며.

멀어진다.

영원히 붙잡을 수 없는 곳으로.

'안 돼.'

나는 아직 당신에게 받은 것을 보답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비로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참인데. 뒤늦게야 당신을 지켜주고 싶노라고, 진심으로 느끼기 시작했는데.

그런데 어째서.

...두쿵!

심장이 한 차례 요동치는 순간, 데미안은 라키엘을 향하여 몸을 던졌다.

216화. 지키고 싶은 사람들 (3)

눈을 부릅떠 본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일순간 느려지는 기분. 그토록 기이한 감각 속에서 협곡 꼭대기가 멀어지고 있다. 점점이 뿌려지는 내 핏방울 사이로. 폭발과 붕괴가 일어나는 아래를 향하여. 하염없이 떨어지며.

멀어진다.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안 돼.'

라키엘은 멍하니 생각했다. 머리가 너무나 아팠다. 파편에 맞은 걸까. 혹은 어딘가에 부딪힌 걸까. 알 수 없다.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혹시 나는 기절하고 있는 걸까. 그런 것 같다.

이런 상황, 기분, 낯설지가 않았다. 그 언젠가 겪어본 적 있는 느낌이었다. 언제? 이제는 조금 아득해져 버린 기억 속의 어느 페이지. 그래. 서울. 양화대교. 몹시 추웠던 겨울밤. 그날.

'나는....'

술에 취했더랬다.

끝내 망해 버린 한의원이 내 인생의 모습인 것만 같아서. 앞으로가 더 막막해서. 조금 취한 채로 택시에 탔던가. 불쑥, 충동적으로 양화대교 한복판에서 내렸던가.

그저 걸었다. 하필이면 바람도 차가웠다. 무심결에 짚고서 올라탄 난간의 감촉도 그랬다. 무어라 외쳤던 것도 같다. 그러다가 그만 균형을 잃어버렸다.

'뛰어내릴 생각까지는 아니었는데.'

실수였다. 순간 기우뚱 기울어졌던 균형. 몸을 가누질 못했다.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 떨어진 것이었다.

그때도 이랬다.

멀어지던 그날의 난간. 멀어지는 지금의 협곡 꼭대기. 점점이 뿌려지던 그날의 눈발. 점점이 뿌려지는 지금의 내 핏방울. 시린 강물을 향하여. 폭발이 일어나는 아래를 향하여. 하염없이 떨어졌다. 하염없이 떨어진다.

'나는....'

그때 혼자였다.

아무도 떨어지던 나를 붙잡아주지 않았다. 근처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내 곁에 누구도 있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지금도 그럴까. 끝내 나는 그때처럼 홀로 추락하고 마는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전하!"

거짓말처럼 청각을 두드려오는 목소리. 아득해져 가는 시야 속에서 다가오는 실루엣. 뻗어오는 손길.

데미안이었다.

"...!"

녀석이 손을 뻗어오고 있다. 다급한 몸짓으로. 그보다 더욱 절박한 눈빛으로. 우루스의 등을 박차고서. 몸을 날리고 있다. 아니, 추락하는 나를 향해 뛰어 내려오고 있다. 온몸을 던지며.

'이 멍청아.'

네가 그러면 안 되는데.

넌 무조건 안전해야 하는데.

끝까지 온실의 화초로 남겨두고 싶었는데.

'그런데 왜.'

거기까지였다.

의식이 급속도로 흐려졌다. 세상이, 눈앞이 어두워졌다. 이럴 수는 없다고. 여기서 눈을 감아선 안 된다고. 끝까지 정신 차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향해 외쳤다.

소용이 없었다.

온 세상이 어두워졌다.

다음 순간, 내가 느낀 감각은 내 손을 붙잡는 손길이었다. 양화대교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사실은 그토록 바랐던, 끝내 아무도 내밀어 주지 않았던 온기였다.

...이거면 된 걸까.

모르겠다.

그것이 의식을 잃기 직전, 라키엘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데미안이 손에 힘을 주었다. 간신히 뻗어 맞잡은 황태자의 손. 끌어당겼다. 황태자의 가벼운 몸이 부딪쳐 왔다. 단단히 붙잡았다.

그는 아래를 보았다.

...투확!

연달아 일어나고 있는 폭발. 섬광이 두 눈을 찔렀다. 끔찍한 열기가 솟구치며 파멸의 몸짓으로 이쪽을 환영했다. 반대로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솔직히 자신이 없다.

저곳까지 떨어진다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무사하진 못할 것 같다. 어느새 혼절한 황태자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겠지.

그건... 싫다.

까드득!

황태자. 아직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다 모르겠다. 어째서 내가 당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몸을 내던진 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어쩌다 보니 충동적으로 당신을 따라 뛰어내려 버렸으니까.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나는 당신을 살리고 싶다.'

쾨쾨한 검투장까지 내려와 능청을 떨던 당신의 모습이. 내 등을 지지며 농담이나 지껄이던 당신의 모습이. 암울한 구렁텅이에서 날 구해준 것이었으면서도 서로의 이득을 위한 거라며 딴청을 부리던 당신의 태도가.

사실은 고마웠다.

언제나 날 곁에 두려고 애썼던 날들도. 조사관에게 추궁당하던 나를 옹호해 주던 당신의 말들도. 소드마스터에게 죽을 뻔했던 나를 구하려고 위험을 무릅썼던 당신의 용기도.

솔직히 고마웠다.

그럼에도 언제나 침착한 척하던 당신의 태도가. 실은 남들보다 두려움에도 매번 그걸 애써 감추려던 당신의 본심이. 끝끝내 미처 숨기지 못하여 못내 떨리던 당신의 손끝이.

항상 안타까웠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지키고 싶다. 이런 곳에서 허망하게 스러지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겠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을 살려내고야 말겠다.

'그 어떤 대가를 바쳐서라도!'

스칵!

다른 손을 뻗었다. 번득이는 검광. 절벽을 찔렀다. 검이 절반 이상 암석을 파고들었다. 혼신의 힘으로 더욱 찌르고, 버텼다.

카드드드드득!

검이 암석을 갈랐다. 그만큼 추락의 속도가 늦추어졌다. 잠시 피어나는 희망의 불꽃. 그러나 현실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깨달아야 했다.

츠캉!

"...!"

검이 부러졌다.

암석을 가르던 검날이 저 위쪽으로 멀어졌다. 손아귀에 남은 검은 반토막. 다시금 잔인한 추락이 이어졌다. 검을 버렸다. 맨손을 뻗었다.

콰자자작!

"...!"

손가락이, 손바닥이 통째로 불에 지져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감각마저도 곧 사라졌다. 속도가 줄어들지가 않았다. 붙잡히는 것도 없었다. 협곡 바닥이 삽시간에 다가왔다. 아래는 폭발의 열기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추락의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까. 설령 그걸 견딘다 한들, 저 폭발의 열기와 위에서 붕괴하는 수만 톤의 암석 사이에서 버텨낼 수 있을까.

섬뜩했다. 절망적 감각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이대로 끝인 걸까.

그 순간이었다.

"누우우우우-!"

돌연, 우렁찬 외침과 함께 압도적인 그림자가 위쪽을 뒤덮어 왔다. 깨닫자마자 거대한 미노타우로스의 전신이 이쪽을 확 감싸 안았다.

"우루스 경?"

"누우!"

이쪽과 황태자를 아울러 감싸 안은 우루스가 특유의 커다란 눈을 끔벅끔벅 떴다. 마치, 이제는 안심하라고 타이르는 듯한 눈길이었다. 혹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주겠노라 결의를 다지는 것도 같았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같은 마음이니까.

"...누우!"

우루스가 스스로를 격려하듯 포효했다. 데미안과 황태자를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과거의 절망과 현재의 염원이 눈동자 가득 명멸했다. 협곡. 쏟아져 내려오던 암석. 품에서 죽어가던 어린 목숨. 그 순간의 무력했던 자신.

그러나 지금은 같지 않으리라.

그때와는 다르리라.

"누우우!"

제대로 된 착지를 위해 균형을 잡기는 늦었다. 대신 우루스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콰드각!

추락의 충격이 엄습했다. 우루스의 의식을 때리고 뒤흔들었다. 끝내 버텨냈다. 대부분의 충격을 감당하고, 흡수했다. 대신 큰 대가를 받아야 하였다.

"...누욱!"

왈칵!

부러진 갈빗대가 허파를 찔렀다. 비명의 끝자락에 선혈이 묻어났다. 그럼에도 우루스는 자신의 안위보다 품속부터 먼저 살폈다.

품에 안긴 데미안이 보였다. 데미안에게 안긴 황태자가 보였다. 둘 모두 숨을 쉬고 있다. 죽지 않았다. 다친 곳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거면 됐다. 예전과 다르다. 다행이다. 해냈다. 지켜냈다.

"누우...!"

우루스의 입가에 힘겨운 미소가 맺혔다. 오랜 시간 품어온 응어리 하나가 간신히 풀어졌다. 긴장의 끈도 함께 풀어졌다. 그것이 우루스의 마지막 의식이었다. 힘겹게 들이마시는 공기 속의 끔찍한 열기를 느끼며, 우루스가 눈을 감고 쓰러졌다.

"...커윽!"

데미안은 우루스의 품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힘겹게 황태자를 빼냈다. 밭은기침을 내뱉었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사방에서 엄습하는 초월적 열기. 대폭발이 남긴 초열적 잔향이 전신의 피부를 지지는 듯했다.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이대로는... 다 죽어.'

자신도.

우루스도.

황태자까지 모두.

1분도 버티지 못하리라.

비단 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당장 머리 위에서 협곡 전체가 무너지며 쏟아져 내려오고 있으니까.

...투콰가각!

그저 많은 바윗덩이?

단순한 산사태?

아니었다.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아예 협곡 전체가 붕괴했다. 수십만 톤의 바위와 토사가 모조리 무너져 내려오고 있다. 이쪽을 향하여. 빠져나갈 그 어떤 빈틈조차 없이. 희망의 어떠한 여지와 편린조차 보여주지 않으며. 압도적 절망의 커튼으로 시야의 모든 방향을 뒤덮어 오고 있다.

'나는....'

데미안은 눈을 부릅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일순간 느려지는 기분. 그토록 기이한 감각 속에서 모든 하늘이 사라지고 있다. 빛이 가려지는 사이로. 쏟아져 내려오는 거대한 죽음의 물결에 의하여. 하염없이 허우적거리듯.

희망이 멀어진다.

영원히 붙잡을 수 없는 곳으로.

'안 돼.'

데미안은 주먹을 쥐었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나는 굳어 버린 걸까. 혹은 암담한 무력감에 짓눌린 걸까. 알 수 없다.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혹시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하려는 걸까. 그건....

'싫다.'

내게 기댄 황태자. 쓰러진 우루스. 모두가 내 어깨에 얹혀 있다. 지금 이 순간, 움직일 수 있는 이는 내가 유일하다. 나만이 모두를 지켜내고, 살릴 수 있다.

그러니 뭐든지 해야 한다.

그 어떤 짓이라도.

설령 그것이 금지된 행동이라 하여도, 반드시.

...키아아아아악!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 각오가 새겨지는 찰나. 전신의 모든 마나가 역행을 개시했다. 정해진 순리를 저버렸다. 심장과 근육, 뼈와 피부, 가슴과 마음속 모든 곳에서 마나가 역방향으로의 질주를 시작했다.

- 약속해. 마나를 역행하는 그 심법, 다시는 쓰지 않겠다고.

기억을 스치는 황태자의 당부. 그러겠노라 고개 끄덕였던 한때의 자신.

'죄송합니다, 전하.'

지금은 이럴 수밖에 없겠습니다. 당신을 지키고 싶으니까. 오직 그것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최선이니까. 내가 당신 곁에 머물러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니까.

'그러니까...!'

츠크가가각-!

데미안의 체내에서 모든 마나가 파멸적 격류를 생성했다. 돌이킬 수 없는 역행의 금기를 깨부수었다. 끝없는 증폭을 시작했다. 혈맥이 부서지고, 재구성되며, 전신의 모든 세포가 태초의 포효를 부르짖었다.

이전, 소드마스터 쟈빌론과 대적하던 때를 능가하는 역행의 폭류가 심장을 휩쓸었다. 미증유의 두근거림이 가슴을 채웠다. 황태자가 걱정하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 너, 그거 함부로 쓰다간 진짜로 큰일 난다.

설령 당신의 말이 진실이라도. 끝내 돌이킬 수 없을 일이 일어난다 하여도.

지금은 당신만을 위하여.

나는.

이렇게.

...!

소리도 없었다.

압도적 산울림이 모든 소리를 뒤덮었다. 그것은 단 한 번의 심장 박동이었다.

두쿵.

역혈의 마공, 리베르사.

금단의 결의가 불러온 초월적 울림이 가슴을 채우는 순간, 데미안은 눈을 떴다. 동시에 미증유의 존재도 흡족하게 눈을 떴다.

- 마침내 준비가 되었구나. 나의 화신체. 그릇이자 검이여.

217화. 나락 속의 진실 (1)

- 마침내 준비가 되었구나. 나의 화신체. 그릇이자 검이여.

금단의 결의를 품은 순간이었던가. 독한 결의와 함께 마지막 걸음을 내디딘 직후였던가. 초월적 울림이 가슴을 채웠다. 그와 동시에 미증유의 존재가 흡족한 눈을 떴다. 내면에서. 영혼의 영역 한곳에서. 이쪽을 바라보며.

'...!'

데미안은 흠칫했다.

방금 자신이 들은 목소리는 무엇일까. 환청? 착각? 아니다. 그런 것 따위가 아니라는 건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다. 모든 의식을 압도하는 위압적 존재감. 그때도 똑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체도 모를 내면의 무언가에 신경을 기울일 때가 아니다. 고개를 들었다. 쏟아져 내려오는 절벽의 잔해. 한때는 우뚝 서 있던 절벽 전체가 무너져 내려오고 있었다.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족히 수십만 톤은 넘을 바위와 토사의 물결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사나운 웃음이 배어났다.

어째서?

모르겠다.

내가 웃은 건지.

내면의 무언가가 웃은 것인지.

그 순간이었다.

- 걸음마는 언제나 즐거운 법이지.

내면의 존재가 되뇌었다.

역류하는 심장으로부터 대량의 마나가 전신을 침범해 들어왔다. 그러했다. 그것은 침범이었다. 혈관이 반응하고, 근육이 경련했다.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신체의 가장 작은 단위와 조각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

저도 모르게 몸을 숙였다. 어느새 뽑아든 허리춤의 단검. 위를 향해 휘둘렀다. 최후를 앞두고서 보이는 발악의 움직임? 아니었다. 단검을 휘두르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어떤 행위라도 다 이룰 수 있겠노라고.

느낌은 현실로 변했다.

투확-!

내가 이렇게 강렬한 검기를 뿌려본 적이 있던가. 없다. 결단코 없다. 그저 허공을 향해 단검을 그었을 뿐인데. 그 경로를 따라 해일이 쏟아져 나가는 듯했다. 선두에서 쏟아져 내려오던 수십 덩이의 바위가 증발했다.

아니, 그것은 해일이 아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시커먼 격류였다. 오러? 비슷하지도 않았다. 소드마스터의 오러에 지옥 마귀들이 내지를 법한 비명성이 깃들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못했으니까.

내면에서부터 건네어 오는 달콤한 물음이 있다는 이야기 또한 들어보지 못하였으니까.

- 마음에 드는가?

'....'

누구야, 너.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절대로 환청 따위가 아니다.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 거칠게 뛰는 심장. 그 박동을 관장하는 또 다른 존재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강렬한 확신. 섬뜩함을 억누르며 물었다.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 너의 창조자.

'뭐?'

- 연옥의 주인이자 마계의 지배자. 마경의 창조주. 그리하여 너를 빚어내고, 너를 키워내고, 마침내 너를 그릇으로 삼아 이곳으로 강림할 지배자.

고요한 대답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순간이었다.

돌연, 눈앞의 시야가 사라졌다.

온 세상이 새카맣게 변하였다.

이윽고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광경. 검은 불꽃으로 채워진 대지. 해도, 달도 없는 세상. 하늘조차 존재하지 않는 마경. 타락하고 저주받아 배회하는 영혼의 물결. 그들을 포식하는 초차원적 존재들.

그들의 왕.

마경의 폭군.

지배자의 눈길이 이쪽을 향하였다.

"...!"

눈길이 마주쳤다.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저자다. 저 존재가 바로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자다. 어째서? 왜?

'나는....'

데미안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눈앞을 채우던 환각이 사라졌다. 현실의 풍경이 돌아왔다. 방금 휘둘러 증발시킨 바윗더미. 그 뒤로 계속해서 쏟아져 내려오는 거대한 붕괴의 물결이 보였다.

보자마자 다시 움직였다.

투콱-!

땅을 박찼다. 황태자의 주위로 떨어지는 바위를 연달아 쳐냈다. 그때마다 심연을 닮은 흑색 기파가 쏟아져 나갔다. 바위를 증발시켰다. 아무런 열기도, 굉음도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때마다. 기파를 뿜어내는 찰나의 사이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빠르게 연속적으로 눈을 깜빡이면 이러할까. 언뜻언뜻 시야를 지배하는 검은 커튼. 그 틈새로 엿보이는 마경의 권좌. 도사리듯 앉아 이쪽을 향해 미소 짓는 존재.

섬뜩했다.

그런데 낯설지가 않았다.

언젠가 저 미소를 본 적이 있다.

언제?

- 비로소 떠올렸구나. 네가 탄생하던 순간을.

그렇다.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던 탄생의 기억이 비수처럼 망각을 뚫고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아기도, 어린아이도 아니었어.'

지금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이 불과 10년 전이었다. 어디에서? 저 마경의 권좌에서. 저곳이다. 저 권좌가 내가 만들어진 장소다.

무엇을 위해?

화신체가 되기 위하여.

저 존재의 강림에 쓰일 그릇이 되기 위하여.

"...."

거짓말.

- 정녕 그렇게 생각하는가?

아니다. 저건 조작된 기억이다. 분명하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사람이니까. 울고 웃으며 살아왔으니까.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왔으니까. 어린 시절부터의 추억과 기억이 그 모든 시간을 증명하니까.

- 정녕 그리 생각하는가?

과연 어느 쪽이 조작일까.

나는. 모르겠다.

내가 어째서 저 존재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 그 이유조차도 모르겠다.

'마계왕, 아케로스....'

- 그래. 훌륭하구나. 나의 그릇이여.

마계왕, 아케로스가 흡족하게 웃었다. 소름이 돋았다. 내가 태어나던, 아니, 만들어지던 때에도 저 존재가 저렇게 웃었다는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인생은?

지금까지 품어왔던 내 기억은?

어린 시절, 그토록 힘겹게 지냈던 날들은?

'그 모든 게 만들어진 기억이었다고?'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나는!"

투확-!

소리쳤다.

들러붙어 오는 진실을 떨쳐내듯 단검을 휘둘렀다. 다시금 수십 톤의 바위가 증발되었다. 쉼 없이 땅을 박찼다. 모래 알갱이 하나조차 떨어져 내려오지 못하도록. 그리하여 황태자가 무사하도록. 오직 그 목표에만 집중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 잘하고 있구나.

"...!"

마계왕이 더욱 기뻐하고 있다. 내가 힘을 개방할수록. 역혈의 마공을 사용할수록. 이 힘에 익숙해질수록 만족하고 있다.

그 사실이 알려주는 날카로운 진실은 뻔하다.

'이 힘이 완성되는 순간....'

마계왕이 내 육신을 통해 지상에 강림하리라. 내 육신을 빼앗으리라. 내 영혼은 흔적조차 남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이 힘을 거두어야 할까.

역혈의 심법을 중단하여야 할까.

"...."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쓰러져 있는 황태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도 협곡의 붕괴는 끝나지 않았다. 그 사실들이 알려주는 미래는 명확했다. 지금 내가 힘을 거두면, 심법의 사용을 중단하면 황태자는 죽는다.

그건, 싫다.

...까드득!

단검 손잡이를 더욱 거칠게 움켜쥐었다. 비로소 선연한 깨달음이 뒤늦게야 떠올랐다.

'전하. 당신은... 설마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겁니까?'

힘을 사용할수록 마경의 초월적 광경이 시시각각 심장에 깃들어 왔다. 비로소 완연히 알 수 있었다.

언제나 나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안전하게 두려던 황태자. 언제나 은근히 나를 보호하려 들던 황태자. 검투장에서 만났던 때에도. 미노타우로스의 왕과 맞서던 날의 밤에도. 쟈빌론에게 죽을 위기에 처했던 때에도.

항상.

언제나.

황태자는 일개 호위에 불과한 나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돌아왔다. 몸을 던졌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도 여겼다.

한데 아니었다.

틀린 건 나였다.

오해를 품은 이도 나였다.

'이래서였어.'

다시는 역혈의 마나 심법을 사용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황태자. 그의 과잉보호에는 이유가 있었던 거다. 지금과 같은 사태를 예방하고자 했던 거다.

'몰랐습니다. 설마 당신이 그런 마음이었을 줄은.'

진심으로 나를 걱정했던 걸까, 황태자는. 그랬음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챙겨주었던 걸까.

고마웠다.

한편으로는 고마움의 크기만큼 의문도 떠올랐다.

'전하. 당신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던 겁니까. 그리고 이 사실들을... 어떻게 알고 있던 겁니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시시각각 의식이 흐려져 갔다. 역설적인 기분이었다. 몸은 강대한 힘을 뿌려대며 날뛰고 있는데. 반대로 정신은 몽롱해져 갔다.

'나는....'

이대로 의식을 잃을 수는 없는데.

더 알고 싶은 것들이 많은데.

여기서 굴종하고 싶지 않은데.

...투콰학-!

눈앞의 초월적 광경이 거짓말 같았다. 손짓 한 번에 수십 톤의 질량이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설마 꿈일까. 내가 만드는, 혹은 앞으로 만들게 될 또 다른 재난의 한 자락을 들추어 보는 것만 같았다.

그 속에서 외쳤다.

나는 인형이 아니라고.

한낱 그릇도 아니라고.

만들어진 존재 따위는 더더욱 아니라고.

외치고, 또 외치며 기억을 붙들었다. 그것만이 나를 비로소 나로 존재하게 해줄 유일한 희망의 끈이었다.

기억과 추억들. 어린 시절 뒷골목의 풍경. 하수도. 냄새. 신발조차 없던 나날. 앞에 세워두곤 했던 나무 그릇. 누군가가 던져주던 동전. 기쁨. 어머니. 눈발 날리던 날. 내뱉던 기침. 핏자국. 애써 숨기시던 몸짓과 표정. 눈물. 서리처럼 번지던 입김. 마지막 숨결. 유언까지.

'그것들이 만들어진 기억이라고?'

거짓말.

아니다.

어머니의 당부. 내 손을 꼭 쥐던 감촉. 앙상하고. 버석하고. 차갑고. 그러나 간절하여 뜨겁기만 했던 그날의 눈물까지.

'나는....'

그날 후로 매일 울었던 것 같다.

골목 밖의 세상을 향해 그렁그렁한 눈길을 던졌던 것 같다. 부러웠다. 나와 상관없이 행복해 보이던 사람들. 어째서 나는 저들처럼 될 수 없나.

그럴수록 웅크렸다. 가난하여 따스한 점도 있다고. 마음은 더 풍족하다고. 궁핍과 만족의 비애를 애써 가난과 행복의 역설로 치환했던 날들. 그렇게 간신히 버텼던 나날들.

그런데 그게 거짓이었다고?

- 그래.

거짓말.

아니다.

'나는!'

외치고 싶었다. 온몸으로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몸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이미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몸은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었다. 떨어지는 바위. 붕괴하는 절벽.

아니, 이미 붕괴는 끝났다.

더는 떨어지는 바위가 없다. 굉음도 없다. 그럼에도 거칠어진 숨결이 가라앉지가 않는다. 또 다른 파괴의 대상을 찾아 눈길을 번득인다. 주위의 모든 것. 어떤 것이라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과연 나일까.

소름이 돋았다.

멈추고 싶었다.

그런데 불가능했다.

이미 의식이 흐려지고 있다. 추억의 끈을 간신히 붙드는 것도 한계였다. 절망감이 몰려왔다. 역혈의 심법을 이러려고 쓴 것은 아니었는데. 최후의 의식마저 이렇듯 사라져 버리면, 다시는 나로서 눈을 뜨지 못하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 후의 나는 내가 아닌 거겠지. 두려웠다.

그래서였다.

마지막을 직감하며 혼신의 힘을 모았다. 모든 영혼의 밑바닥까지 긁어내듯 저항했다. 최후의 목소리로 외쳤다.

"전하!"

도망치라고.

내가 내가 아니기 전에.

어서 깨어나서 뛰라고.

멀리 달아나라고.

뒷말까지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더는 외침이 나오지 못했다. 대신 쓰러진 황태자를 향해 돌진했다. 단검을 치켜들었다. 설마 이대로 내리치려는 걸까. 내 손으로 황태자를 죽이게 되는 걸까.

한데 그 순간이었다.

와락-!

얌전히 누워 있던 황태자가 돌연, 눈을 번쩍 뜨며 일어났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손을 뻗었다. 그 손에 검정색 가시가 들려 있었다. 가시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막을 틈도, 피할 틈도 없이, 정수리에 꽂혔다.

톳!

"...!"

돌이킬 수 없을 기세로 역류하던 마나의 역행이 거짓말처럼 중단되었다. 동시에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의식과 자아를 잠식해 들어오던 마계의 지배자, 마계왕이 처음으로 당혹감을 머금게 되었음을.

218화. 나락 속의 진실 (2)

난리가 났다.

정말로 잠깐 사이에 난리가 났다.

라키엘은 떨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설마하니 데미안 이 녀석....'

혼절하며 추락하던 나를 따라 녀석이 정말로 뛰어내렸을 줄은 몰랐다. 날 지키겠다고 이런 짓을, 협곡 전체를 날렸을 줄은 몰랐다.

어떻게?

뻔하다.

'리베르사 심법.'

역혈의 마공. 마계왕이 녀석에게 심어둔, 녀석에게만 허락된 최강이자 최흉의 심법. 그걸 발동해 버린 거다. 아예 전력으로, 한계까지.

...꿀꺽.

무의식중에 마른침을 삼켰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아까 파편에 맞은 걸까. 얼굴 절반을 뒤덮고 있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거슬렸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쓸 틈은 없었다. 손끝에 힘을 주었다. 꼭 쥐고 있는 검정색 K맛 가시. 그 끄트머리가 간신히 데미안 녀석의 두피를 파고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손이 떨렸다.

가시를 밀어내려는 어마어마한 반발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절대로 밀려나선 안 된다. 여기서 손을 멈추면, 정말로 끝이다.

'이 녀석, 벌써 각성의 끄트머리에 다다랐어. 거의 마지막 선을 넘기 직전이야.'

라키엘은 재빨리 데미안의 얼굴을 살폈다. 이미 표정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아니, 어찌 보면 우는 것 같았다. 달리 보면 일그러져 있는 듯도 했다. 어떻게 보면 서글픈 느낌도 났다.

그러나 녀석의 눈동자.

눈동자만큼은 달랐다.

'....'

저런 눈빛은 살면서 처음 봤다.

사람의 눈빛이 아니다.

마치 끝이 없는 바닥, 무저갱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눈길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가장 깊은 심연의 악몽 속에서 허우적거리고야 마는 기분이 든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마계왕.'

소설 마검황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 속의 최종 보스에 해당하던 빌런. 통곡의 벽과도 같았던 절대 강적. 마계왕을 묘사하던 내용이었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죽거나 미칠 수 있다고 했지. 인간의 영혼이 감당할 수 없을 깊이의 심연과 대면하게 되고, 그것만으로도 정신과 신체 모두에 돌이킬 수 없을 타격이 가해진다고 했던가.'

그랬던 것 같다.

지금 데미안의 눈빛이 거의 그러했다. 멍한 듯한데 섬뜩했다. 심지어 한 번 마주친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도 없게 됐다.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전신에서 식은땀이 삽시간에 배어났다.

'젠장. 어쩌다가 이런.'

까드득!

이를 갈며 필사적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정신 차리자, 라키엘.

넋 놓지 말자, 이한.

그러니까 눈을 돌리자.

'이건... 건물주다!'

자고로 임대료가 간당간당할 때는 건물주와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다. 복도에서 딱 마주쳤더라도 건성으로 '응능흐스요' 인사하며 걸음을 2배속으로 돌려야 한다. 당연히 그 와중에 눈이 마주치면 절대로 안 된다.

설령 마주쳤더라도, '내가 당신을 굳이 껄끄러워하는 건 아니'라는 느낌의 자연스러운 시선 회피 스킬이 필요하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산다.

내게는 이미 그러했던 경험이 있다. 심지어 제법 많이!

'...큽!'

과거의 경험을 떠올렸다. 혼신의 의지로 눈길을 돌렸다. 가까스로 성공했다. 비로소 영혼의 속박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풀려나자마자 경혈 스캐닝부터 발동했다.

키이이이잉-!

시야가 변했다. 데미안의 전신 경혈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녀석의 내부에서는 말 그대로 난리가 나 있었다.

'뭔... 경혈 움직임이....'

날뛰고 있다.

방향이 없다.

단순한 역행?

차라리 그 정도라면 나을 텐데, 이건 아예 수백 번 흔들었다가 뚜껑을 열기 직전의 맥주병 내부 같은 느낌이었다. 건드리면 터지는 탄산, 아니, 폭탄. 그걸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는 병뚜껑이 바로 정수리에 꽂힌 검정색 가시였다.

'....'

만일 녀석의 정수리 백회혈에 가시를 1초만 늦게 꽂았더라면? 탄산이 터졌겠지. 폭발적인 각성의 기세가 임계점을 넘었겠지. 돌이킬 수도, 막아낼 수도 없는 마계왕의 강림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생각하니 소름이 죽 돋았다.

'소설에서는... 마계왕이 데미안의 몸에 강림한 것만으로도 그 지역 일대가 아예 소멸했지.'

반경 수십 킬로미터의 지대가 말 그대로 사라졌다. 향후 수백 년 동안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전락했다.

여기서도 그럴 것이다.

저 병뚜껑, 아니, 검정색 가시가 밀려나면.

'그건 안 돼.'

꽈악!

더욱 힘껏 가시를 눌렀다.

마치 터지기 직전의 콜라병 주둥이에 억지로 손가락을 욱여넣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탄산의 압력이 너무 강해서 손가락이 밀려나는 중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타앗!

다른 손을 움직였다. 안주머니에 남아 있던 가시를 모조리 움켜쥐어 꺼냈다. 확인했다. 검정색 가시 3개. 고작 이게 나한테 남은 마지막 무기이자, 멸망을 막을 최후의 도구다.

'...x발.'

무서워서 절로 욕설이 나왔다. 하지만 반대로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톳!

제일 먼저 찌른 곳은 입술 아래에서 턱으로 내려가는 수직선, 그 중간 어름의 오목한 자리에 있는 경혈, 임맥의 승장혈(承漿穴)이었다.

자고로 승장혈은 얼굴이 퉁퉁 붓는 부기가 올라왔을 때, 부기를 빼주는 데에 특히 좋은 효험이 있는 자리였다. 이곳을 꾹꾹 지압하면 아침에 부어 있는 얼굴을 어느 정도는 수습(?)할 수 있다.

그럼 지금은?

마찬가지다.

'지금 데미안의 몸속에 차오르고 있는 날뛰는 마나의 흐름... 이게 가장 많이 올라오는 곳이 바로 얼굴이니까.'

얼굴, 머리로 올라오는 마나의 격렬한 흐름. 이게 정수리의 백회혈을 끊임없이 두드리고 있다. 엄청난 압력으로 백회혈에 꽂힌 검정색 가시를 밀어내려 들고 있다.

이게 뚫리면?

그래서 백회혈이 열리면?

'백회는 하늘의 기운과 맞닿아 있다고 하지. 그곳이 뚫린다는 건 즉, 마계왕의 의식체가 데미안의 내부로 들어오는 길이 열린다는 뜻이고.'

데미안이 육신을 빼앗길 것이다. 마계왕의 완벽한 화신체로 거듭날 것이다. 그걸 저지하려면, 백회혈로 치고 올라오는 마나의 격류부터 막아야 하리라.

'이렇게!'

꽈악!

승장혈에 꽂은 가시를 지그시 누르며 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녀석의 날뛰는 기운을 누그러뜨리는 정확한 보사법(補瀉法)으로 혈을 자극했다.

적절한 자극이 주위에 영향을 퍼뜨렸다.

...덜컥!

모이고 적체되어 얼굴을 붓게 만드는 노폐물처럼. 백회혈을 향하여 얼굴로 모이던 마나의 격류가 일순간 중단되었다. 방향이 바뀌었다. 아래로. 노폐물이 내려가고 부기가 빠지듯. 슬며시 물러나기 시작했다.

'된다!'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정말로 해낼 수도 있겠다. 희미하게 엇비치는 희망을 엿보며 지체할 틈도 없이 손을 움직였다.

다음 가시로 찌른 곳은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위의 위쪽 승모근이었다. 흔히 뭉쳤다며 주무를 때 손가락으로 강하게 누르면 가장 아픈 자리, 족소양담경(足少陽膽經)의 견정혈(肩井穴)이었다.

토돗!

평소에 피로가 쌓이면 목과 승모근부터 뭉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이곳에 자리한 견정혈이 전신에 기를 분배하여 주는, 일종의 와이파이 공유기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견정혈이 속한 족소양담경은 신체에서 가장 긴 경혈이지. 발바닥 아래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인체의 거의 모든 주요 부위를 따라 이어져 있어.'

그 모든 부위에 기혈의 기운을 1차적으로 분배하는 곳이 바로 일명, 생명지정(生命之井)이라 불리는 견정혈이었다. 그러니 피로와 스트레스가 누적된 신체는 견정혈부터 풀어 주면 큰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데미안의 몸에는 각종 혼란한 기운이 얽히며 엄청난 스트레스가 쌓인 상태였다. 하여 견정혈을 다스렸다. 매우 강력하고, 단호하게.

'이렇게!'

꾸듯!

이번에는 반시계 방향으로 가시를 돌리며 보사법을 발휘하였다. 긴장되어 있던 데미안의 견정혈이 뚫리며 무장해제 되었다.

그 순간이었다.

- 감히.

"...!"

머릿속에 커다란 음성이 울렸다. 누군가가 영혼을 직접 때리듯이 던져 오는 말소리였다. 듣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마계왕이다.

대답할 틈도 없이 마계왕의 나직한 호통이 들려왔다.

- 이 세상에 속하였으나 남의 몸을 빌린 자여. 감히 내 길을 막아서려는가?

"...."

대꾸할 필요가 없다. 대답하면 안 된다. 아까처럼 눈도 마주치지 말고. 마지막 가시부터 꽂자. 다짐하며 세 번째 가시를 들었다.

그때였다.

덥석!

"큽!"

돌연 데미안이 두 손을 뻗어왔다. 녀석의 손이 내 목을 움켜쥐었다. 숨이 컥 막혔다. 압도적인 완력. 압도적인 살의. 폭주. 장악. 목이 통째로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흐, 흡! 큽!"

버둥거렸다. 소용이 없었다. 공업용 프레스에 목이 끼면 이럴까. 가슴이 쿵쿵 뛰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보고야 말았다. 내 목을 조르는 데미안. 녀석의 눈가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미 육신을 거의 지배당하고 있는 거다. 마계왕의 완전 강림까지 마지막 한 걸음만을 남겨놓은 거다. 내가 막을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목이 부러지는 건 아닐까. 무섭다.

- 부당하게 빌린 육신은 무의 공허로. 그것이 순리인 법.

"...!"

영혼을 뒤흔드는 준엄한 목소리. 신화적 존재의 일갈.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오기가 솟아났다.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 싫다. 그러기엔 너무 억울하다. 이러자고 여기까지 달려온 게 아니다. 방금 들은 비난 또한 억울하다. 다른 놈은 몰라도, 마계왕에게 저런 소리를 듣는 것만은 못 참겠다.

'그쪽도 남의 몸뚱이나 빼앗으려 드는 주제에.'

이를 갈며 되뇌었다. 손을 뻗었다. 데미안의 뻗어온 팔뚝 사이로. 내게 남은 마지막 가시를 뻗었다. 목표는 팔꿈치 안쪽 면. 위팔뼈 위관절융기(epicondyle of the humerus) 부위. 부딪히면 전기가 느껴지는, 뼈가 볼록 솟은 어름.

그곳에 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의 소해혈(少海穴)이 있었다.

톳!

평생 해냈던 것 중에 가장 정확한 시침이었다.

동시에 나는 보았다.

- ...!

눈이 마주쳤다. 마계왕의 부릅뜬 눈. 육신의 눈이 아니었다. 초월적 존재의 눈동자가 나를 주시했다. 덜컥, 전신이 굳었다. 내 영혼의 밑바닥에 쩌적 균열이 새겨지는 것 같은 기분. 섬뜩했다. 지금껏 꾸어본 그 어떤 악몽보다도 더.

- 끝내 대적을 선택하겠다는 것인가. 타차원의 티끌이여.

'....'

눈길을 피할 수가 없다. 아까처럼 되지가 않는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럴수록 더욱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소해혈에 살짝 꽂힌 가시. 그 끄트머리를 붙들고서. 내 남은 모든 걸 끌어모아서.

눌렀다.

돌렸다.

그것이 나의 대답이었다.

대답을 받은 마계왕이 웃었다. 무저갱의 나락이 열리는 듯한 미소였다. 그것이 내가 완전히 의식을 잃기 직전에 보았던, 마지막 광경이었다.

아니.

어쩌면.

허물어지던 나를 데미안이 받아주었던 것도 같다.

부디, 그랬으면 한다.

부디.

219화. 기적 같은 기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