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회사 회장님은 절대독마 -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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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우주.
다른 차원의 같은 영혼과 만났다.
강호무림의 절대독마.
내가 독마라고?
#현대판타지 #퓨전 #무인 #해결사 #먼치킨 #빌런 #나혼자 #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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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세상의 같은 영혼(1) >
300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변했다.
알 수 없는 물질이 지구의 대기에 스며들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사람들은 그걸 '마나'라고 명명했다.
그 결과 지구 인구의 90%가 소멸하는 악몽을 겪었고.
시간이 지나고 지나 300년 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네 가지로 구분됐다.
첫째,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마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나 거부자', 태어나면서부터 마나가 몸에서 독으로 작용하는 천형을 가진 자들.
마나가 몸에 맞지 않기에 보통 20살 초중반을 넘기지 못하고 내부 장기, 특히 심장이 파열되어 죽어버린다.
이를테면 불가촉천민.
둘째, 마나를 받아들여도 일상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마나 순응자', 일반인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르다.
속칭 생산자 계급.
셋째, 마나로 인해 일반인보다 강한 신체 능력을 가진 '마나 적합자', 신인류.
그들이 마나를 받아들이면 근육이나 혈관, 내부 장기가 튼튼해진다.
또한 각성자의 99%가 마나 적합자에서 나온다. 그래서 예비 각성자라 불리기도 한다.
이들부터 사실상 지배계급.
네 번째가 앞에서 설명한 최상위 계층 '각성자'.
마나와 더불어 과학으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 중 하나.
각성하면 얼굴에 문신이 새겨진다.
시스템과 접속했다는 표식.
그들은 시스템에 의해 강해지고 성장한다.
오직 각성자만이 엘리트 마수와 챔피언 마수들을 상대할 수 있다.
사실 다섯째 유형도 있긴 하다.
'마인'
각성자지만 각성이 잘못된 방향으로 간 놈들.
그러나 마인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으니 논외로 하고.
※ ※ ※
삼한제국.
유라시아 대륙의 신흥 강대국.
300년 전엔 대한민국이라 불렸었다.
지배하는 영토도 광대하다.
그러니 제국이지.
물에 잠겨 영토 절반이 날아간 일본 열도, 넓디넓디 만주 곡창지대와 초록색의 풍성한 몽골 평야와 고비 초원, 공장과 산업시설들이 즐비한 연해주 일대가 제국의 영역이었다.
삼한제국군 소위 김태주는 동부 해안가 '설악산 전초기지' 대청봉 간이 막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시원한 맥주캔을 들이켰다.
"크아!"
이제야 살 것 같다.
시한부 인생에서 이런 게 소확행이다.
"씨발,"
욕이 절로 나온다.
언제 죽을지도 모를 인생.
평화로운 휴양지 같은 곳에서 마지막을 준비하고 싶었는데, 정작 그가 서 있는 장소는 마수와의 전투가 벌어지는 변방.
태주는 마나 거부자다.
그래서 시한부 인생.
마나 거부자로서 태주는 꽤 오래 버틴 편이다.
29살임에도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러나,
"···으으윽,"
태주는 갑자기 찾아온 격통에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제, 제기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발작, 며칠 전부터 더 간격이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끄억! 끄어어어어억!"
침대에 쓰러져 고통에 신음했지만 막사로 들어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이게 하루 이틀인가?
오히려 자신이 죽길 바라는 사람이 더 많다.
자신은 마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쓰레기, 불가촉천민이니까.
그 쓰레기가 삼한제국 소위.
어떻게?
태주의 아버지는 마스터 김웅방 준장이었다.
직접 다스리는 영지도 있었다.
삼한제국 '파주 영지'
부유한 영지는 아니다.
평범하고 작은, 어떻게 보면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파주.
그래도 아버지가 준장, 영지를 가진 권력자인데, 아무리 태주가 마나 거부자라고 하지만, 아들을 변방으로 쫓아내?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파주 영지의 정당한 계승자 김태주.
그러나 안타깝게도 태주의 친모는 그를 낳는 도중에 돌아가셨다.
그 후 아버지는 새 부인을 들였다.
과거 일본이라고 불리었던 땅에 위치한 삼한제국 규슈 영지 지배자의 둘째 딸 혼다 미쯔이를.
그녀는 파주로 시집와서 아들 2명을 낳았다.
그때부터 태주의 위치는 애매해졌다.
태주는 선천적인 마나 거부자.
영지의 계승자로서 치명적인 단점.
그래서인지 새엄마 미쯔이는 태주를 그냥 가만히 내버려뒀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어차피 20대가 되면 죽을 게 뻔하니까.
그렇게 흘러갔으면 미쯔이는 좋은 새엄마로 남았을 테지만 상황이 요상하게 흘러갔다.
20살이 되어도, 25살을 지나, 28살을 넘겼는데도 아직 살아있어?
미쯔이 부인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마나 거부자라도 무조건 죽음을 맞이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매우 희박한 확률로 마나 거부자에서 갑자기 각성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오래 살아남으면 확률은 더 높아진다.
실제로 마나 거부자의 각성 사례를 보면 모두 30대 전후에 각성했으니까.
이러다 태주가 각성하면?
불가촉천민에서 최상위 계급으로 발돋움하면?
자신의 친자들은 하루아침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아닌가.
그래서 남편을 졸라 태주를 설악산 전초기지로 내몰았다.
명색이 장군의 아들, 29살이 되었는데도 집안에만 있으면 어떡하냐고?
밖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마수와 맞서야 각성의 확률도 올라가는 게 아니겠냐고.
아버지 김웅방 준장도 못 이기는 척 수락했다.
사실 진급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자신의 아들, 김태주였다.
마나 거부자인 맏아들.
애비는 마스터인데 아들은 쓰레기.
차라리 마수와 싸우다 죽는 게 나았다.
군사 작전 중 사망하면 무공 훈장이라도 받을 수 있을 터.
그럼 자신의 진급에 도움이 되니까.
결과적으로 태주는 쫓겨났다.
설악산 전초기지로 말이다.
"후우."
다행히 심장 통증이 잠잠해진다.
오늘도 견뎌냈다.
순간!
"김소위, 안에 있나?"
태주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위 김태주!"
자신의 직속상관 장인동 중위의 목소리였다.
"멸마!"
"멸마."
간단한 경례를 나누고.
"좀 전에 신음 소리가 들리던데, 아픈 데는 없나?"
"아! 괜찮습니다. 이젠 나아졌습니다."
"그래, 그렇게 버텨야지. 살아남으면 기회는 오기 마련이야."
장인동 중위는 몇 안 되는 태주의 우군.
처음 설악산 전초기지로 왔을 때부터 자신을 토닥여주고 보살펴준 상관.
"그런데 무슨 일로···?"
장인동 중위의 표정이 좋지 않다.
"보직이 변경됐다."
"변경이라뇨?"
"행정에서 야전 쪽으로, 상부에서 작전 투입 명령 떨어졌다."
"···갑자기요?"
태주의 소속은 제국군 51연대 3대대 전투 지원 중대.
몸 상태가 거의 장애 수준이라 주로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야전 작전 투입이라니.
"나도 알아봤는데, 이건 거부할 수 없어. 육군 참모본부에서 직접 하달된 명령이야."
"···."
이거 혹시?
새엄마 미쯔이의 의지가 작용한 걸까?
하긴!
29살임에도 안 죽고 살아있으니.
"장군님 입김도 안 통하는 모양이더라."
아니, 아버지가 직접 나선 것일 수도 있다.
장군의 자식이 작전 중에 사망했다.
얼마나 그림이 좋은가?
그러니 명예롭게 죽어라.
"아직 전투는 무리니까 정찰 임무부터 수행해보자. 지휘는 무리고, 소대원들 붙여줄 테니까 따라만 다녀."
어쩔 수 없다.
자신도 군인.
무조건 명령을 따르는 수밖에.
"혹시 알아? 각성의 기회를 잡을지. 드물지만 거부자도 각성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며 따뜻하게 말을 건네는 장인동 중위, 그는 마나 적합자이자 각성자이다.
얼굴에 각성자임을 보여주는 문신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 언젠가는 자신도 장인동 중위처럼 얼굴에 문신이 새겨질 날이 오겠지.
버티고 버티다 보면 말이다.
다음 날.
소대원들과 함께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 태주.
주요 정찰 지역은 대청봉에서 조금 떨어진 중청봉.
고영호 하사가 손짓하며 태주에게 말을 건넸다.
"저 밑이 오크 부락이 있는 지역입니다."
설악산에서 가장 흔한 마수는 오크, 원래 멧돼지였던 놈들이 마나의 영향을 받아 걸어 다니는 돼지가 되었다.
그것이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오크와 비슷해 그냥 그 이름 그대로 불렸고.
"여기 오셔서 쌍안경으로 보시지 말입니다."
태주는 쌍안경으로 오크 부락을 관찰했다.
설악산 전초기지 제국군의 임무는 오크의 개체 수를 조절하고 놈들이 부락을 통합하지 못하게 감시하는 것.
"아직은 번식기가 아니라서 안전합니다."
"그렇군."
오크 정도야 그냥 쓸어버리면 되지 뭐하러 그러냐고?
대규모 전투는 부담이 있다.
제국이 오크를 토벌하려고 시도하면 저놈들도 뭉치게 된다.
부락 수준의 오크는 무섭지 않지만 통합된 오크 왕국은 제국으로서도 엄청난 부담이 된다.
'흐음, 별다른 동향은 없네.'
사실 간단한 정찰 임무다.
쌍안경으로 관찰하고 드론을 날려 찍은 영상을 첨부해 보고하면 끝.
"드론은?"
"날릴까요?"
"어."
철커덕!
등 뒤에서 들리는 기계음.
바로 그때!
뜨끔!
"윽!"
등뒤에 뭔가 뾰족한 것이 닿였다.
멈칫! 굳어버리는 몸.
"뭐, 뭐야?"
"움직이면 큰일나지 말입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장검을 태주의 등에 대며 비릿하게 웃음 짓는 고영호 하사.
"걱정마십쇼. 칼로 찌르진 않습니다. 김태주 소위님께서는 정찰 작전 중에 발을 헛디뎌 추락 사고로 뒈지실 겁니다."
"뭐···?"
"저도 명령대로 하는 거라서."
"며, 명령?"
"넵! 소대장께서 친히 내리신 명령입니다."
소대장이라면, 장인동 중위가?
"쓰레기 치우랍니다. 사실 소대장님도 하청받은 거지 말입니다. 저희는 하청의 하청."
제기랄!
결국 배신을 당해?
태주는 죽고 싶지 않았다.
시한부 인생이지만 끝까지 살아남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어이없이 이렇게 죽는다고?
소대원들의 싸늘한 눈빛.
다 한통속.
"좆까! 이 개새···,"
"아이고, 힘도 없는 양반이."
애써 허리춤에 찬 마나건을 뽑아 들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빼앗겨 버렸고.
"자, 쓰레기 분리수거 들어갑니다. 멸마!"
"야이, 개새끼야!!!"
고영호는 태주의 몸을 발로 걷어찼다.
퍽!
태주의 몸이 절벽으로 굴러떨어졌다.
※ ※ ※
잠시 후 슬며시 눈을 뜬 김태주.
어둑하다.
밤인가?
"끄응,"
온몸의 뼈가 다 부러진 것 같다.
'여긴···,'
절벽 중간쯤이었다.
굴러떨어지다 커다란 나무에 걸려 멈춘 모양.
'움직여야 해.'
여기서 죽어줄 줄 알고?
무조건 살아남는다.
그러나!
"허헉!"
갑자기 심장에서 전해지는 격통.
또 마나 거부자의 천형이 발동했다.
"끄억, 끄어어억! 끄극!"
이번엔 심상치 않다.
고통의 수준이 달랐다.
'이, 이런 씨발!'
눈앞이 캄캄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이제 죽는 건가?
'···안돼!'
몸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초점을 잃은 태주의 눈동자.
죽을 때가 되면 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지.
진급에 대한 욕심으로 자신을 외면한 아버지, 악귀 같은 새엄마 미쯔이, 그리고 항상 자신을 업신여기며 괴롭히던 배다른 동생들.
왜 저런 얼굴만 떠올라?
죽기 전에 엄마 얼굴이라도 보였으면.
어차피 기억도 못 하지만.
그때였다.
환영처럼 또 하나의 사람이 보였다.
'응?'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채 앉아있는 머리 허옇게 센 노인.
저 사람은 누구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왜 머릿속에서 떠올려지는 걸까?
'···환각인가?'
그런데 희한하다.
보면 볼수록 낯이 익다.
대체 누구?
순간 눈을 번쩍 뜨는 노인.
동시에 자신을 바라봤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 바라만 봤다.
마치 영혼이 통하는 듯한 느낌.
마침내 노인이 빙그레 웃음 지었다.
뭔가를 안다는 눈빛.
태주도 깨달았다.
그 사람이 누군지.
'···당군악?'
저 사람의 이름.
하지만 그것보다.
노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넌···.'
들리진 않았지만 태주는 노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나로구나. 다른 세상의 나.'
맞다.
노인은 또 다른 자신.
영혼이 같은 동일인.
이름은 당군악.
그가 사는 다른 세상은 강호 무림.
그리고 강호에서 그의 별호는 절대독마(絶代毒魔)였다.
< 다른 세상의 같은 영혼(1)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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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세상의 같은 영혼(2) >
절대독마(絶代毒魔) 당군악.
저 멀리 신장으로부터 마교가 강호를 침범했을 때 그는 사천당가(四川唐家)의 소가주였다.
마교의 대대적인 발호.
놈들의 교주 천마(天魔).
강호는 마교에 의해 파죽지세로 썰려 나갔다.
당가(唐家)도 예외는 아니었다.
멸문의 위기에 처해 동쪽으로 피신한 가솔들, 그 와중에 당가의 가주이자 당군악의 아버지는 목숨을 잃었다.
중원 변두리로 피신한 당군악은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 노력했다.
못으로 만든 침상에서 자고, 입으로는 극독의 단장초(斷腸草)를 씹어 삼켰다.
그리하여 이룬 독마의 경지.
결국 천마를 한 줌의 독수(毒水)로 녹여버리면서 복수에 성공하고 강호를 구했다.
그때 얻은 별호가 바로 절대독마(絶代毒魔)
당군악은 식솔들을 이끌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침내 사천당가는 멸문을 극복하고 강호 최고의 가문이 되었다.
모든 걸 다 이뤘다.
자식에게 가주의 자리를 물려주며 뒷방으로 물러났다.
이제 남은 건?
독마의 경지를 넘어서는 것.
암기와 독술로 유명한 사천당가.
그래서 정파임에도 불구하고 무림인들은 자신들을 천시했다.
특히 도가 계열의 무당이나 화산에게 사파 비슷한 취급을 받아왔다.
자신들은 도의 길을 걷는 고매한 도인들이라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신선이 되어 우화등선한다고?
그래.
나도 한번 우화등선해보자.
자신이 말코 도사 놈들보다 못한 게 뭐 있나?
도가의 책도 구해 읽어보고, 배교의 술법, 서장 밀교의 경전, 서역에서 들어온 비전도 참고해서 연구도 하고,
당군악은 참오하고 또 참오했다.
세상의 이치는 무엇인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방식으로 운행되는가?
하지만 그저 잠만 올 뿐이었다.
솔직히 당군악도 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독물과 암기.
최대한 빠르게, 많은 사람을 효율적으로 죽이는 방법.
이런 게 도(道)라는 것과 관계가 있을 리 없다.
정녕 우화등선은 선승(禪僧)과 도인(道人)들의 전유물인가?
그래도 끝까지 가보자.
독마 당군악은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다.
폐관수련실에서 곡기를 끊고 면벽과 명상을 하면서, 몸이 망가질 정도로 수련을 거듭하는 중이었는데.
'응?'
당군악은 느꼈다.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혹시 피곤해서 생긴 현기증? 아니면 우화등선에 대한 간절함이 만들어낸 환상?
다만 확실한 건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
정신이 어디론가로 쭉 빨려 들어가는 기분.
그리고 알아챘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희한한 복색을 입고 있는 젊은 남자였다.
신선일 리는 없을 테고.
눈과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깨달았다.
저 먼 세상에서 만난 또 하나의 젊은 자신.
'넌 나로구나.'
심령의 연결.
비로소 마주한 영혼과 영혼.
서로의 경험과 지식이 교류를 시작했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 ※ ※
설악산 중청봉 인근의 절벽.
삐져나온 나무에 걸려있던 김태주.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다른 세상의 늙은 자신.
다중우주, 멀티버스 그런 건가?
나이가 들면 저 모습이 될까 싶을 정도로 똑같이 생겼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의식 안으로 온갖 기억들이 밀려 들어왔다.
찰나 간에 이루어진 연결, 하지만 절대독마(絶代毒魔)의 인생 전체를 생생하고 온전하게 경험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천마를 독으로 녹여버린 강호무림의 최강자.
그가 이뤄낸 독공(毒功)의 성취.
독정(毒精)을 연성해 궁극의 경지, 독령(毒靈)으로 진화하는 혼원무상독령공(混元無常毒靈功).
혈인독장(血印毒掌), 탈백지(奪魄指), 파독수(破毒手), 절혼도(絶魂刀), 혈접(血蝶), 비폭일섬(飛瀑一閃), 무형독(無形毒), 만천화우(滿天花雨) 등, 수많은 암기술과 독술.
환영미리보(幻影迷理步), 암향추혼(暗香追魂), 금정신법(金鼎身法), 귀식대법(龜息大法), 잠행술(潛行術) 등등 신법과 보법.
무공의 초식과 운용술, 독 제조하기, 암기를 다루고 만드는 방법, 심지어 당군악이 최근에 이뤄낸 깨달음까지.
모조리 싹 빨아들였다.
머릿속에 쏙쏙 각인됐다.
'어어···,'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다.
심령이 연결되는 순간 저절로 이뤄졌다.
이래도 되나?
지적 재산권 강탈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최소한 물어는 봐야 하는데.
그런데 마치 태주의 생각을 안다는 듯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이는 절대독마.
'아!'
그래도 된다는 승낙의 의미였다.
※ ※ ※
강호 사천당가 폐관수련실.
당군악은 기분이 좋았다.
'당연히 되고말고!'
우리가 남이가?
할 수만 있다면 가진 것 모조리 퍼다 주고 싶다.
100년 가까이 쌓아온 내공은 물론, 지금까지 수집한 여러 독물, 각종 신병이기(神兵利器), 금은보화, 줄 수만 있다면 그리할 것이다.
'허허, 밑천까지 다 털리는구나. 그래, 싹 가져가게나.'
그럼에도 당군악은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싹 마른 솜에 물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깨달음을 쏙쏙 흡수하고 있었다.
영혼이 같다는 것이 이런 결과를 보여줄 줄이야!
그래서 절대독마 당군악은 흐뭇하다.
비전을 넘겨주는 것이 즐겁기까지 했다.
더불어 젊은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전해지는 생전 처음 보는 문물, 문화, 학문, 새로운 지식, 이런 걸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지구, 강호와는 전혀 다르군.'
큰 변화가 생겼다가 기적적으로 생존한 세상이었다.
'전지전능하고 영험한 존재가 개입을 했고.'
각성, 그리고 시스템.
저곳에도 무림인들이 있었다.
'마수라, ···요괴 같은 거군.'
발전의 방향이 전혀 다른 세상.
'재미있구나. 너도 그렇지 않은가?'
저쪽에서 그런 것 같다.
자신도 재미있다고, 강호라는 세상이 신기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고.
당군악은 슬며시 눈을 감았다.
평생을 독과 암기 연구에만 매진하며 살아온 세월.
천마를 쳐죽이며 천하제일의 자리에 올라왔다.
그게 이룰 수 있는 전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우물 안 개구리였다.
'우화등선은 개뿔!'
이렇게나 넓은 우주인데.
그에 비하면 자신이 사는 세상 티끌에, 티끌, 그 티끌에, 티끌보다도 못한 곳.
어쩌면 선계보다 더 크고 넓은 세상이 있을지도 모른다.
선계(仙界)도 강호나 지구처럼 한낱 티끌일 뿐일 터.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던 순간.
당군악은 우화등선했다.
※ ※ ※
설악산.
김태주는 절대독마 당군악에게서 받은 지식들을 곱씹고 있었다.
싹 다 받아냈다.
그야말로 영혼의 복붙.
절대독마 당군악의 영혼을 자신의 머릿속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과 같았다.
'독술과 암기술이 이렇게 대단할 줄이야.'
단순한 무공이 아니다.
독술을 지구의 학문과 비교하면, 화학, 생물학, 약학, 의학 등을 섞어놓은 것과 같다.
암기술은?
금속 합금과 제련, 엔지니어 디자인, 유체역학···.
'혈인독장(血印毒掌)은 장법인가?'
초식을 어떻게 펼쳐 내야 할지 다 안다.
몸이 근질근질하다.
'혈접(血蝶)은 암기술.'
환영을 일으키며 나비처럼 나풀나풀 날아 목표물에 적중하는 혈접.
'무형독(無形毒)은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는 극악의 독이고.'
가장 무서운 독.
무색무취.
아마 과학적 방법으로 조사해도 나오지 않을 터.
'혼원무상독령공(混元無常毒靈功)은···.'
절대독마의 기본공이자 독술의 모든 것.
이것부터 대성해야 한다.
'그리고 만천화우(滿天花雨).'
하늘에 만개한 암기의 꽃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수법.
그 꽃잎들은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것처럼 시전자의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
즉 수천수만 개의 유도미사일을 부릴 수 있는 것, 물론 그렇게 하려면 혼원무상독령공을 대성해 독령의 힘을 빌려야 하지만.
절대독마가 이룬 성취는 깊고도 깊었다.
그걸 노력도 없이 받아먹었으니.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아!'
갑자기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다.
'이런···.'
더 이상 그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심령의 연결이 끊긴 모양.
'아쉽네.'
그냥 보고 느끼는 게 전부였다.
대화라도 나눠봤다면 좋았을 텐데.
'그건 그렇고.'
서둘러야 한다.
자신을 걷어찬 놈이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올지도 모른다.
'끄응.'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다.
절벽에서 떨어지다 나무에 걸렸지만 그 충격으로 몸이 성치 않다.
그나마 괜찮은 곳은 오른쪽 팔과 왼쪽 다리뿐.
그때!
'음?'
코끝을 간지럽히는 알싸한 향기.
많이 맡아본 냄새다.
'···더덕이구나.'
확실하다.
냄새만 맡아도 안다.
그러나 몸에 좋고 맛있는 약초가 아니라, 마나의 영향을 받아 유전자가 변이되어 사람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품은 독더덕.
'운이 좋군.'
혼원무상독령공(混元無常毒靈功)을 얻은 이상, 자신에게서 독은 식량이요, 영약이다.
킁킁.
태주는 독더덕의 냄새를 쫓아 정신없이 땅을 팠다.
'찾았어.'
실한 놈이다.
'100년 이상 묵은 것 같은데.'
이 정도 크기라면 성인 남자 한 명쯤은 혼수상태로 보낼 독을 품고 있을 터, 사실 100년 정도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
태주는 천천히 혼원무상독령공을 운용하면서 독더덕을 씹었다.
쓰읍!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쓰다.
그러나 억지로 씹어 삼켰다.
'우욱!'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격통.
거기에 심장까지.
참는다.
독은 쓰지만 그로 인한 열매는 달콤할 것이다.
'더 있나?'
절벽 틈으로 피어있는 풀뿌리들.
'오!'
독더덕이 널렸다.
군락지였던 모양.
정성스레 뽑아서 흙만 툭툭 털어내고 자근자근 씹었다.
몸 전체로 독물이 흐른다.
혼원무상독령공.
구결의 흐름에 따라 혈맥이 기운으로 충만해졌다.
솟아나는 활력.
근육에도 힘이 들어갔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걸로는 부족해.'
독정(毒精)을 만들기 위해선 최소 백 뿌리 이상의 독더덕이 필요하다.
'다른 곳으로 가볼까?'
오른쪽 팔과 왼쪽 다리는 멀쩡하다.
그렇다면 벽호공(壁虎功).
절벽을 탈 수 있는 범용 무공 중 하나.
단전에 독정이 연성되지 않아 내공이 부족하지만도 흉내 정도는 낼 수 있다.
태주는 절벽을 타고 옆으로 이동했다.
동시에 주위에 널린 독초들을 탐색했다.
절대독마의 경험과 지식을 온전하게 받아들인 이상, 독을 품은 식물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독도라지네.'
엄청 많이 모여있다.
크기도 매우 크다.
최소 2, 300년.
'일단 하나만···.'
사실 아무리 독공을 익혔다고 해도 이렇게 한꺼번에 독을 섭취하는 건 자살행위, 독의 대종사, 절대독마라 하더라도 말이다.
질겅질겅, 씹어 넘겨 혼원무상독령공을 운용하면서 내기로 전환시키고, 나머지는 모조리 캐서 주머니와 품안에 보관.
힘이 났다.
이 힘을 이용해 다시 절벽을 탔다.
순간!
'음?'
어디선가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아직 못 찾았어?"
"분명 이쪽으로 굴러떨어졌는데 말입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고영호 하사와 소대원들이었다.
'어떡하지?'
숨어야 한다.
지금으로선 놈들을 이길 순 없다.
태주는 절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혼원무상독령공으로 실낱같은 내력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힘은 충분했다.
쉽게 찾을 수는 없을 터.
그리고 동시에.
'귀식대법.'
신체의 신진대사를 조절해 기척을 없애는 기술.
태주는 천천히 가수면 상태로 접어들었다.
"이 새끼 어디로 간 거야? 오크들이 끌고 갔나?"
"아닙니다. 드론 정찰 결과 오크 부락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바로 죽여버릴 걸 괜히···."
절벽에서 굴러떨어졌다.
마나 적합자라도 무사하지 못할 터.
김태주는 마나 거부자.
일반인보다 더 못한 신체 능력.
죽지 않더라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어야 정상.
"사고사로 처리하면 딱 좋은데. 곱게 뒈져주시지."
가장 좋은 시나리오.
정찰 중 발을 헛디뎌 순직한 청년 장교.
위에서도 그걸 요구했고.
"조금 더 찾아보고 복귀하자."
태주는 그들의 목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멀어지는 말소리.
다행히 위기를 넘겼다.
'씨발, 개새끼들!'
몸만 회복되면···.
'다 죽여버린다.'
그때였다.
쉬쉭! 쉬쉬쉭!
불길한 소리와 함께 코끝으로 전해지는 비릿한 냄새.
'이거 설마?'
귀식대법으로 꼼짝 않고 있는 태주의 눈앞에 까맣고 길다란 무언가가 나타났다.
섬뜩한 눈, 삼각형의 머리, 몸통엔 무시무시한 무늬.
마치 보아뱀처럼 거대한 크기의 변종 칠점사였다.
그것도 마나 변이로 인해 더더욱 강해진 독을 품고 있는 독사.
위기는 계속 이어졌다.
< 다른 세상의 같은 영혼(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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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정(1) >
독의 종류는 크게 4가지로 구분된다.
동물독, 식물독, 광물독, 그리고 인공적으로 만든 화학독.
뱀독은 동물독이며 강력한 신경독, 혹은 출혈독을 가지고 있다.
변종 칠점사는 둘 다 있다.
물리면 출혈로 죽거나, 신경 마비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죽거나.
'이건 뭐.'
갈수록 태산.
크기가 작은놈도 아니다.
마나로 인한 유전자 변이 때문에 몸통이 웬만한 남자 허벅다리만 하다.
쉬쉿! 쉿!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라 소름 끼치는 혀를 낼름거리며 천천히 다가오는 거대 변종 칠점사.
완벽한 귀식대법이라면 그저 통나무 정도로 인식해서 그냥 지나갈 터, 그러나 지금은 대법이 완전치 않다.
체온과 호흡이 가장 큰 문제.
완전한 귀식대법은 이마저도 지우겠지만.
'제발 그냥 지나가라.'
독을 기반으로 하는 혼원무상독령공을 익혔다.
그러나 현 상태에서 저놈의 독은 너무 강하다.
모든 경우가 그렇듯, 처음부터 강한 독으로 수련하는 건 금물.
독공의 매카니즘은 단순하다.
적응.
약한 독부터 시작해 신체를 강한 독기에도 견딜 수 있게 천천히 개조시키는 것, 그러기에 이 변종 칠점사의 독을 받아들이는 건 무리.
태주는 실눈을 뜬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번 위기만 지나가자.
독정(毒精) 정도는 생성할 수 있는 시간을 주라.
그렇게 해주면 나중에 마주치더라도 넌 살려줄게.
하지만 지울 수 없는 호흡과 체온.
놈은 자신을 인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걸 먹어야 할지, 무시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
'돌아버리겠네. 지나가 주면 안 되겠···, 이런!'
결국 먹기로 결심한 모양.
취리릿!
놈이 머리를 세웠다.
동시에 날카로운 독니로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오는 변종 칠점사.
'제기랄!'
태주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놈의 입을 막았다.
아그작!
콰직!
'끅!'
그나마 성한 오른 팔뚝도 부러졌다.
하지만 문제는 부러진 팔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독니에서 주입되는 끈적한 액체.
순식간에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흘렀다.
'으흡!'
비명이 절로 나왔지만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소리가 나면 놈들에게 발각될 수 있으니까.
대신 내부 장기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끔찍한 뱀독이 혈관을 타고 돌며 장기를 녹여댔다.
변이된 독사가 가진 변이된 독.
그 짧은 시간에도 몸이 많이 망가졌다.
붉게 핏발이 선 태주의 눈동자.
참을 수 없는 고통,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다.
이대로 죽으라고?
어림도 없다.
자신이 누군가!
절대독마(絶代毒魔).
비록 육신은 허약하기 짝이 없지만, 영혼만은 천마도 녹여 죽인 당군악의 또 다른 영혼,
태주는 혼원무상독령공을 운기했다.
현재 그가 가진 리스크.
하나는 초반에 너무 강한 독을 받아들였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안전한 장소가 아닌 절벽에서 혼원무상독령공을 운기해야 한다는 것, 게다가 마수의 공격을 감내하면서
지극히 위험하다.
자칫 잘못하면 놈의 뱃속에서 생을 마쳐야 한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
리스크가 큰 만큼 주어지는 이익도 클 터.
그의 머릿속엔 당군악이 평생 수련했던 혼원무상독령공의 묘리가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독(毒)의 대종사.
천년 묵은 이무기의 독도 간식 삼아 먹었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까짓 칠점사 따위가 자신을 어떻게 한다고?
김태주는 자신의 혈관에 들어온 뱀독을 이끌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읊어지는 혼원무상독령공의 구결.
'단전으로···,'
옥당혈과 거궐혈을 열어, 천돌혈을 차단하고, 중완혈로 이끈 다음 기해혈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크윽!'
순순히 당해주지 않겠다는 듯, 거세게 저항하는 변종 칠점사의 독, 겨우 이걸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니.
수치스럽다.
부끄러워 미치겠다.
다른 세상의 자신, 절대독마 당군악에게 면목이 서지 않았다.
'이런 씨발! ···사람 쪽팔리게.'
잠시 주춤해지는 독기.
기회는 이때!
단전에 들어온 독기를 압축해 혼원무상독령공의 기본, 독정(毒精)을 만든다.
변종 칠점사의 공격도 거세다.
약해빠진 먹잇감인 줄만 알았는데 감히 반항해?
거대한 칠점사가 태주의 몸을 휘감았다.
뿌드득!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 어깨뼈? 척추뼈?
그러다 태주를 감은 채 절벽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혈관을 녹여내는 무시무시한 독.
점점 심장이 굳어져 호흡하기도 힘들었다.
희미해지는 의식.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주는 혼원무상독령공의 운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극한의 대결.
이제 남은 건 하나.
놈에게 먹히느냐, 아니면 독기(毒氣)를 다스리고 독정(毒精)을 생성하느냐.
태주는 버티고 또 버텼다.
뿌득!
칠점사의 힘도 더 강해졌다.
※ ※ ※
고영호 하사는 결국 허탕을 치고 대청봉 전초기지로 돌아와 장인동 중위를 만났다.
김태주의 시신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는 장인동.
"오크들이 잡아갔을 확률이 가장 높다고?"
"떨어진 곳이 절벽이었지 말입니다. 거기로 굴러떨어진 이상 절대 무사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마나 거부자의 몸으로···."
"만약 살아있으면?"
"네?"
"책임질 거야?"
"그, 그건···."
사고사로 치워버리는 것이 제일 깔끔하다.
마나 거부자 쓰레기라 하더라도 놈은 장군의 자식.
타살 의심을 받으면 매우 곤란해진다.
물론 저 위쪽에서 막아주겠지만.
'이대로 처리를 할까?'
안 된다.
기껏해야 탈영, 혹은 미복귀.
부족하다.
찾아내야 한다.
김태주가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 말이다.
'어쩔 수 없군.'
직접 움직일 수밖에.
혼다 미쯔이.
삼한제국 규슈 영지의 둘째 딸, 군부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김태주의 확실한 죽음을 원하고 있다.
오크에게 잡아먹혔다면 남은 흔적이라도 가지고 와야 한다.
"지금 당장 소대원들 소집해. 입 무거운 놈들로만."
"네, 알겠습니다."
※ ※ ※
어릴 땐 자애롭기 그지없는 아버지였다.
'내가 반드시 널 고쳐주마. 최소한 애비보다 오래 살아야지.'
하지만 재혼하시고 배다른 동생들이 태어나고 장성하자,
'입대해라. 설악산 전초기지로 가.'
'언제까지 백수처럼 밥만 축내고 살 거냐. 내 부대장에게 잘 이야기 해뒀으니 행정업무만 열심히 해. 마수와 마주칠 일은 없을 거다.'
싸늘한 아버지의 시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해한다.
마나 거부자로 태어나 언제 죽을지 모를 아들인데, 차라리 정을 떼는 것이 낫지.
또한 새어머니 미쯔이 부인도.
'태주야. 걱정하지 마. 영원히 있으라는 것도 아니야. 전역하고 다시 돌아오면 되잖아. 네 집은 언제나 여기니까.'
그녀가 보여줬던 자애로움이 다 가식이었다는 건 최근에 알았다.
하긴!
20살이 되면 죽을 줄 알았던 배다른 자식이 29살이 되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고 있으니.
규슈 영지의 딸.
육군 참모본부 안에 일본계 장성들이 꽤 있다.
외가, 미쯔이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고.
자신이 설악산 전초기지로 배정받은 배후엔 그녀가 있었다.
문득 목이 마르다.
태주는 눈을 번쩍 떴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는 새벽녘.
'살았구나.'
혼원무상독령공으로 칠점사의 독에 저항하다가 정신을 잃은 것 같다.
꼼짝없이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무의식중에서도 운기가?'
태주는 슬며시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힘없이 팔에 붙어 딸려 올라오는 변종 칠점사의 대가리.
'뱀은 뒈졌네.'
원기를 빨아 먹힌 듯 바싹 말라 있었다.
손으로 걷어내니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러고 보니,
'팔이 멀쩡해.'
부러진 거 아니었나?
어디 왼팔뿐인가.
절벽에서 떨어지고 칠점사에 휘감겨 온 뼈마디가 조각이 났었다.
'설마 다 나은 건가?'
태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 상태는 더없이 가뿐했다.
다만 전신에서 풍기는 악취 때문에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지만.
'이 정도면 다치기 전보다 훨씬 나은데.'
그리고 느꼈다.
단전에서 콩알만 한 크기로 뭉쳐있는 기운을.
'아!'
독정(毒精).
비록 크기는 작지만 존재감은 확실했다.
기어코 해냈다.
혼원무상독령공의 성취는 전체 10성으로 구성되어있다.
경지가 올라갈수록 독정(毒精)은 농밀해지고 더 커진다.
그렇다면 독령(毒靈)은?
이건 깨달음의 영역이다.
10성에 올라도 독령의 경지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다.
혼원무상독령공 10성은 독령에 이르기 위한 디폴트값.
겨우 첫발을 내디뎠다.
1성의 경지는 겨우 삼류 무사 수준.
최소 5성 이상은 되어야 절정의 무위를 갖추게 된다.
이제 뭘 해야 하나.
답은 정해져 있다.
'일단 살아남고 보자.'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이 있다.
장인동 중위?
그저 하청업자일 뿐.
배후는 새엄마 혼다 미쯔이.
그리고,
'아버지는···,'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만 한다.
아버지가 자신의 죽음을 지시하진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의 인륜은 믿기로 했다.
'독정을 만들었으니.'
그걸 쓸 수단인 무공.
뭐가 좋을까?
'혈인독장(血印毒掌)은 무조건 대성해야 해.'
절대독마가 근접전을 주로 사용했던 장법.
독기를 발출하고 거둘 수 있기에 언제 어디서나 유용하다.
'암기술은···,'
하나만 익혀 집중하는 게 낫다.
'비폭일섬(飛瀑一閃), 이걸로.'
그리고 환영미리보(幻影迷理步).
혈인독장과 비폭일섬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보법.
사실 당군악이 익혔던 수많은 무공 구결들이 뇌리에 똑똑히 각인되어있지만 현재로선 이 세 가지만 익힌다.
'해보자.'
아무리 절대독마의 진전을 고스란히 받아왔지만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과 몸으로 체득하는 건 천지 차이.
태주는 환영미리보부터 펼쳤다.
보법을 밟아가며 혈인독장을 시전하고.
휘릿!
손을 내지를 때마다 알싸하게 풍겨 나오는 독의 향기, 독기를 발출하고, 다시 수습하고.
여긴 나무가 많다.
그것도 마나에 의해 철판만큼 단단해진 껍질.
혈인독장의 위력을 시험에 보기에 안성맞춤.
손바닥이 원을 그린다.
단전으로부터 독기가 실타래처럼 이어져 손바닥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
퍼억!
그대로 나무줄기를 가격했다.
껍질을 파고 들어가 선명하게 찍힌 다섯 손가락.
'괜찮네.'
제 위력이 발휘되면 독장이 적중하자마자 말라 시들어 죽는다.
그래도 처음 펼쳐낸 무공이 이 정도 위력이라니, 물론 당군악의 성취가 일종의 버프로 작용했을 테지만.
'뭐, 독기는 제대로 방출했어.'
다음은 비폭일섬(飛瀑一閃).
초식은 단 두 가지.
비폭(飛瀑)은 광역, 일섬(一閃)은 단일.
절대독마가 쓰는 암기들은 죄다 평범하지 않다.
혈접을 펼치기 위한 나비 모양의 암기, 비늘이 달린 가느다란 세침,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비쭉 나온 돌멩이인 휘금석, 유엽비도···,
비폭(飛瀑)도 특수한 암기가 있어야 펼칠 수 있다.
현재 사용 가능한 암기 비슷한 것은 발목에 차고 있는 군용대검과 주머니 속에 든, 삼한제국의 신수(神獸) 삼두백호(三頭白虎)가 그려진 500원짜리 동전 몇 개뿐.
'일섬(一閃)밖에 없구나.'
암기가 더 필요하다.
시간을 내서 암기를 제작해야겠다.
물론 여기서 살아남고 나서.
츠핏!
섬전처럼 잔영을 남기며 날아가는 대검.
푸욱!
나무줄기에 손잡이까지 박혔다.
손목이 시큰거린다.
일섬(一閃)을 펼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날아가는 속도도 중요하지만 던지는 동작을 최대한 없애야 한다.
어깨를 젖히는 식으로 던지는 자세를 취하면 암기술이라고 할 수 있나?
그냥 투척술이지.
오로지 손목만을 사용하는 일섬.
적은 언제 암기가 날아왔는지도 모르고 당하게 된다.
'한 번씩 펼쳐봤으니까.'
숙련도를 올린다.
군용대검을 나무에서 뽑아 소매 속에 감추고
태주는 몸을 움직였다.
환영미리보를 시작으로 혈인독장을 펼친 후, 자연스럽게 소매 속에서 대검이 미끄러져 나오면···,
츠피릿!
퍼억!
'다시.'
각 무공의 연계가 중요하다.
몸으로 완벽하게 체득할 때까지.
'한 번 더!'
< 독정(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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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정(2) >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각 무공의 한가지 초식들만.
깨달음은 충분하다.
모자라는 건 몸의 숙련, 그리고 공력.
영혼은 천하제일 절대독마 당군악, 육체는 마나 거부자였던 쇠약한 김태주, 둘의 간극을 최대한 좁혀야 한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렇게 육체를 쓴 적이 있었던가?
마나 거부자로 태어난 이후 처음이었다.
천형 때문에 몸을 격렬하게 움직이면 심장에 무리가 와야 정상.
'···다 나았나?'
순간!
"큭!"
찢어질 듯한 심장.
변하지 않았다.
독공을 익혀도 천형은 극복하지 못한다는 말?
태주는 결국 땅을 짚고 엎드렸다.
"으으으···,"
그러자 변화가 일어났다.
단전에 자리 잡은 독정(毒精).
독기가 혈관을 통해 이동한다.
무의식적으로 운행을 시작한 혼원무상독령공.
영혼에 새겨진 본능적 행동.
독기가 타고 흐르자 점차 가셔지는 고통.
"휴우."
완전하게 낫지는 않았지만 효과가 있다.
'결국 답은 독공이었어.'
독공이 원숙해지면?
이 지긋지긋한 천형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
'수련이나 계속하자.'
복수도 하고 싶지만···.
그 대상이 새엄마.
아버지가 연관되었을 수도 있고.
'···아니야. 아버지는 아닐 거야.'
버려졌다고 해도 아버지는 아버지.
그에게 사랑받았던 어릴 적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는 판에.
'쯧.'
복수는 접어야겠다.
대신 홀로 자리를 잡는다.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고.
어떻게 보면 그게 효도지.
새롭게 이룬 단란한 가정에서 자신은 빠져주는 거.
그리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고 싶다.
최소한 남의 눈치는 보지 않으면서.
그러려면 힘을 가져야 하고.
태주는 조금 전에 캐놓은 독초들을 주머니에서 꺼내 모조리 입에 넣었다.
칠점사 독으로 독정(毒精)을 만든 이상, 그보다 약한 독들은 자양 강장제 수준일 뿐, 널린 게 영약이다.
'몇 개 더 캐서 먹어볼까?'
그럼 독기도 소폭 강해질 터.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설악산을 빠져나간다.
독도라지를 씹어 삼키고, 초식 연계 수련을 계속 반복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갈수록 영혼과 육체의 격차가 좁혀졌다.
갑자기!
바스락!
멀리서 들려오는 기척.
'흠?'
스슷!
저쪽에서도.
부스럭!
이쪽도.
자신이 서 있는 장소를 향해 서서히 좁혀들어오고 있는 누군가.
'포위당했군.'
누구겠나?
고영호 하사와 소대원들.
고영호는 마나 적합자, 소대원들은 마나 순응자.
독정을 형성해둔 터라 놈들을 상대하는 건 행정실 서류 작업보다 더 쉽다.
'그놈들만 왔다면 좋을 테지만···,'
장인동 중위.
그가 함께 왔을 수도 있다.
마나의 축복을 받은 시스템 각성자.
피하느냐, 아니면 맞서느냐.
사실 결론은 이미 나 있었다.
피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절대독마 당군악이 땅을 치고 통탄할 것이다.
다른 세상의 나 자신이 저렇게 심약한 놈이냐고.
무공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성장하는 것.
한번 피하기 시작하면 다음에도 같은 선택을 할 터.
'여기서 죽인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첫 살인.
행정 서류 업무만 맡았던 반쪽짜리 군인으로선 부담스럽지 않을까?
'···절대 아니지.'
자신은 제국군 소위 김태주이자 절대독마 당군악이다.
역대 강호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자가 누구겠나?
수천, 수만 번의 살인.
정파 출신임에도 별호에 마(魔)가 붙은 이유.
목적 달성을 위해 뭐든지 다 했다.
처음부터 협객행(俠客行)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고매한 검술로 죽이나, 비열한 독으로 죽이나, 뭐가 달라?
심지어 같은 편에게도 욕을 먹었다.
잔인, 음흉, 사악, 교활, 파렴치.
그러나 당군악은 거리낌이 없었다.
이기기 위해 음식이나 차에 독을 섞었다.
우물에 독을 푼 적도 있었다.
얼굴도 내비치지 않고 몰래 숨어 암기만 날려 사람을 죽였다.
손을 맞잡는 척하고 반지에 달린 작은 독침으로 중독시킨 일도 많았다.
따라서 태주도 사람을 죽이는데 어떠한 거리낌도 없다.
어떻게 하면 잘 죽일 수 있을까 고민될 뿐.
마나 적합자이자 시스템 각성자 장인동 중위.
독공을 시험해 볼 기회.
'새엄마 혼다 미쯔이에게 복수하는 건 어려울지라도 저놈만은 죽이고 떠나야지.'
태주는 대검을 오른쪽 소매 속에 갈무리하고, 500원짜리 동전 3개를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 ※ ※
마나 적합자.
비록 각성하지 않더라도 일반인들보다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살고, 신체적으로도 월등히 뛰어난 자들.
하지만 시스템과 연결되는 각성은 또 다른 문제.
받아들이는 걸 너머 마나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인동 중위는 운이 좋은 편.
마나 적합자로 태어나 각성까지 이뤄냈으니까.
그러나 부족하다.
각성자의 수준 차이.
시스템이 정해주는 단계가 있다.
초기 각성자가 되면 '유저(user)'로 명명이 된다.
마나를 몸속에 저장하고 이용해 신체를 단련할 수 있다는 의미.
그리고 각성자만의 고유한 특성이 생겨난다.
특성의 종류는 문신을 보면 판별할 수 있고.
장인동의 경우 <물리>와 <맷집>
유저를 넘어서면 다음 단계는 '비기너(beginner)'
스킬 사용이 가능하다.
스킬 개수가 늘어나고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으면 '레귤러(regular)'
위관급 장교로는 유저, 비기너 혹은 레귤러 단계면 충분.
영관급 장교의 조건은 익스퍼트(expert), 즉 숙련가.
익스퍼트의 단계는 세분화되어 있다.
주니어 익스퍼트(junior expert), 미들 익스퍼트(middle expert), 슈페리어 익스퍼트(superior expert).
그리고 장군, 별을 달려면 반드시 올라야 하는 경지, 마스터(master).
장인동은 마스터까지 바랄 생각이 없다.
그럴 능력도, 자신도 없다.
그저 익스퍼트의 경지에만 올라서는 것.
하지만 그에겐 재능이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한계는 딱 비기너까지.
물론 방법은 있다.
영약을 복용하면 된다.
엘리트 마수의 에너지 결정체를 재료로 만든 영약, 복용하면 신체를 재구성해주어 단번에 주니어 익스퍼트 경지로 끌어 올려준다.
문제는 그걸 구할 방법이 없다는 것.
가격도 가격이지만 극히 희귀해서 시장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임관해온 장교 하나.
바로 김태주 소위였다.
마나 거부자인 쓰레기.
그러나 아버지가 파주 영지를 이끄는 김웅방 준장.
놈의 환심을 사다 보면 뭔가 떨어지는 게 있겠지.
놈이 부러진 사다리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알고 보니 내놓은 자식 아닌가.
그래도 겉으로는 잘 해줬다.
괜히 괴롭히다 보면 아버지에게 일러바칠지도 모르고, 또 좋게 대해준들 손해 볼 일도 없으니까.
그런데 저 위쪽에서 제안이 왔다.
장교 하나를 치워 달라고.
잘 처리하면 엘리트 영약 하나를 대가로 주겠다고.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예전부터 눈꼴이 시렸다.
마나 거부자 주제에 부모 잘 만난 덕택으로 장교로 복무하는 쓰레기.
중대 전체를 동원하면 중대장 귀에 들어갈 지도 모른다.
대신 고영호 하사를 포함해 쓸만한 부하 5명을 데리고 왔다.
자신까지 총 6명.
살아있다는 걸 가정하고 떨어진 절벽 밑을 중심으로 수색 작전을 펼쳤다.
군데군데 파인 땅, 배고파서 풀뿌리라도 캐 먹었나?
멍청한 놈.
이곳 뿌리 식물 중, 독이 있는 것들이 태반인데.
"전방에 누군가 있습니다."
"나도 알아."
"오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설령 오크라도 상관없다.
몇 마리쯤은 혼자 감당할 수 있다.
"고영호 하사."
"네!"
"뒤쪽으로 가서 포위망을 좁혀. 너희들은 저쪽으로, 퇴로 차단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이윽고.
숲속 작은 공터 안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사람.
"김태주 소위!"
드디어 찾았다.
대답도 안 하고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놈.
"관등성명도 안 하나?"
"우리 사이에 무슨, 내가 아직도 당신 부하야?"
장인동 중위는 황당했다.
저 쓰레기 놈이 뭘 믿고?
"껄껄껄, ···뭐, 이해해. 이 상황에서 고운 말이 나올 리 없겠지."
"나한테 왜 그랬지?"
"에이, 쓰레기 치우는데 이유가 있나? 보기 싫고 냄새나면 알아서 치우는 거지."
태주도 씨익, 웃었다.
역시 놈은 방심하고 있다.
자신을 빙 둘러싸고 있는 고영호와 4명의 소대원도 마찬가지, 총구도 겨누지 않은 채 비웃음만 날렸다.
"하나만 더 물어보자."
"곧 죽을 놈이 궁금한 것도 많네."
"혼다 미쯔이가 뭘 약속했어? 돈? 영약?"
"···천한 놈이 감히!"
"영약이겠지. 네 허접한 재능을 채워줄 수 있는."
장인동 중위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잘 들어. 병신 쓰레기야. 먼저 네 팔다리부터 꺾을 테다. 그러고 나서 다시 절벽 위에서 떨어뜨려 주지."
"해봐. 할 수 있으면."
솔직히 긴가민가했다.
놈의 태연한 눈빛과 태도.
설마 각성이라도 했나?
하지만 각성의 흔적은 없다.
각성했을 때 무조건 새겨지는 얼굴의 문신이 보이지 않았다.
무장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아니잖아?'
어서 끝내고 들어가 쉬자.
눈치 빠른 고영호 하사가 물었다.
"저희들이 처리할까요?"
"아니, 구경이나 하고 있어."
파밧!
장인동은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뒈져!"
그런데?
스슷!
마술이라도 부린 듯, 김태주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장인동은 깜짝 놀랐다.
"헉!"
뭐지?
어디로 간 거야?
동시에 가슴팍으로 다가오는 새하얀 손,
퍼억!
"큭!"
그 충격에 한 발짝 뒤로 밀려났다.
방심의 대가였다.
뒤로 한 발짝 밀려난 장인동.
솔직히 많이 놀랐다.
마나 거부자가 내지른 손바닥에 밀려나?
그것도 황당한 판에 놈은 아예 몸을 돌려버렸다.
"감히···,"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한방이면 충분하다는 건가?
저렇게 뒤통수를 훤히 내보이면서 자신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있었다.
'죽인다!'
장인동은 허리춤에 찬 장검을 빼들었다.
그리고는 놈의 등짝에다 찔러넣으려고 하는데,
"···어?"
비틀!
앞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급기야!
푸욱!
입에서 분수처럼 쏟아지는 붉은 선혈, 빙빙 돌아가는 시야, 흐려지는 의식. 호흡은 가빠왔고, 결국은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털썩.
일단 한방.
특별히 독기를 진하게 농축해서 밀어 넣었다.
전체 기운의 50% 정도?
그런 이유로 독기가 대폭 빠지긴 했지만.
태주는 이걸 싸움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각성자에게도 자신의 독공이 통하는지 알아보기 위한 실험.
하나는 처리했고.
두 번째는 고영호 하사.
자신을 절벽 밑으로 밀어뜨린 놈.
각성자는 아니지만 마나 적합자.
태주의 눈과 고영호의 눈이 마주쳤다.
뭔가 불안함을 느낀 듯, 서둘러 허리춤에서 마나건을 빼 들었지만,
"이 쓰레기 새끼가···,"
츠피릿!
섬전처럼 쏘아진 군용대검.
은빛 잔영을 남기며 고영호의 심장을 파고 들어갔다.
푹!
"끅!"
방탄, 방검조끼도 소용이 없었다.
고영호 하사는 몸부림치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고, 고하사님."
"으아아아!"
태주의 움직임에 깜짝 놀란 소대원들.
"미, 미친!"
"···저, 저 새끼 뭐야?"
"빨리 쏴버려! 쏴! 쏘라고···,"
소대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소총을 들고 앞으로 겨눴지만 방아쇠를 당기지도 못했다.
그때!
츠팟!
허공에 잔영을 남기며 길게 그어진 은빛 실선.
푸악!
하나의 동전이 소대원의 머리를 파고들면서 뇌를 휘젓고 관통했다.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환영미리보에 이은 일섬(一閃).
몸에 체득된 연계 동작.
마나 순응자, 일반 군인들은 절대 태주를 감당할 수 없었다.
동전 3개를 순차적으로 날렸다.
가까운 거리, 빗나갈 리 있나.
츠핏! 핏! 피핏!
사이좋게 머리에 하나씩.
푹! 푸푹! 푹!
"끅!"
"아악!"
"···."
한 10초 걸렸나?
모두 죽였다.
이제 남은 건 쓰러져 헐떡이는 놈.
"커헉! 너, 뭐, 뭐야?"
장인동은 얼굴이 새파랗게 변색된 채 허리춤을 더듬고 있었다.
권총이라도 꺼내려는 모양.
아니면 해독제를 찾거나.
아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것이다.
호흡도 곤란할 것이고.
태주의 단전에 있는 독정은 변종 칠점사로 만든 것.
각성자에게도 여지없이 독이 통했다.
"어때? 맘에 들어?"
"···너, 가, 각성했구나."
"각성은 무슨."
장인동은 태주를 보며 힘겹게 입을 뗐다.
"사, 살려줘."
"입장 바꿔 보자고, 너 같으면 날 살려줬겠어?"
"···그, 그동안 자, 잘해줬잖아."
"내가 장군의 아들이어서가 아니고?"
"아, 아니, 오, 오해···."
울컥!
장인동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선혈.
달콤한 독의 향기도 같이 흘러나왔다.
"누군가를 죽이려 마음먹었다면,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걸 각오하고 왔어야지."
태주는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제에발, 제, 제발···, 끄어어, 끄으으으···."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이 끊어진 장인동.
놈을 이렇게 쉽게 죽일 수 있었던 이유.
첫 번째는 방심, 처음부터 스킬로 덤벼왔다면 어려웠을 터.
두 번째는 놈의 단계가 겨우 비기너라는 것.
세 번째는 결국 독공(毒功).
태주도 괜찮은 건 아니었다.
조금 전부터 또 고통이 시작됐다.
"하아, 씨발."
지금도 필사적으로 혼원무상독령공을 운기하고 있었고.
"···여유가 없네."
그때였다.
"쿠오오오오!"
"카아아아아!"
설악산을 뒤흔드는 마수의 포효, 바로 오크들의 함성이었다.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번식기가 시작됐군.'
태주는 고영호의 가슴에 박힌 대검을 뽑았다.
번식기의 오크.
먹이 활동이 가장 활발해지는 시기.
아마 이곳에 널린 시체들도 싸그리 다 먹어 치울 것이다.
혈흔, 혹은 시체 조각 몇 개만 남아있겠지.
그렇게 태주는 홀로 설악산 전초기지로 복귀했다.
< 독정(2)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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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역, 그리고 자유도시 구례 >
이대로 떠날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러면 탈영병 신세, 제국군 헌병대에 쫓기기는 싫다.
마무리는 지어줘야지.
그래서 설악산 전초기지로 돌아왔다.
중대장 황재철 대위와의 면담부터.
"···진짜냐?"
"네."
"고영호 하사가 널 죽이려고 했다고?"
"절벽으로 절 걷어찼습니다. 절벽 중간 나무에 걸려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끄응."
느닷없는 태주의 보고에 황재철은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하필 하극상 사건이라니.
"넌 아무 말 말고 영내에서 대기하고 있어. 고영호와 소대원들이 돌아오면 진상을 파악해 볼게."
"네, 알겠습니다."
사실일까?
사실이면 안 된다.
전초기지 본부에서 자신의 지휘 책임을 물을 터, 진급은 물 건너가는 거지.
'어떻게든 무마시켜야 해. 그건 그렇고, 장인동 이 새끼는 어디 간 거야?'
다음 날.
비로소 알게 된 장인동 중위를 비롯한 소대원 5명 부대 미복귀, 그리고 수색대에 의해 발견된 시신.
부대 안으로 소문이 쫙 퍼졌다.
번식기에 접어든 오크에게 당한 것으로 추측되는 죽음의 흔적.
발견된 군번줄, 혈흔과 살 조각.
결국 이 사건은 중대장의 손을 떠났다.
상부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김태주 소위와 고영호 하사의 이야기가 나왔고, 당연히 전초기지 헌병대에서 조사가 이뤄졌다.
헌병 수사관 중사에게 심문을 받는 태주.
"전후 사정은 들었습니다만···, 어떻게 돌아오신 거죠? 몸도 편찮으신 분이."
"마나 거부자는 돌아다닐 힘도 없답니까? 조심조심 절벽에서 내려와 바로 부대로 돌아왔습니다."
"왜 직접 헌병대에 신고하지 않으셨습니까?"
태주는 픽, 하고 비웃으며 말했다.
"하사 따위가 절 죽이려고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지시를 받았다는 뉘앙스도 풍겼고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누굴 믿어요?"
"···."
"솔직히 전 헌병대도 못 믿습니다."
헌병 수사관은 표정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고영호가 김태주 소위님을 죽이려 했다는 증거는요?"
"있을 리가 있나요? 고영호 하사가 살아난다면 모를까? 그럼 대질 조사라도 벌일 수 있겠죠."
"후우, 장인동 중위와 소대원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정말 모릅니까?"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저도 오크에게 당했다는 소식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헌병 수사관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영호와 소대원들은 그렇다 치고, 장인동 중위는 각성자.
오크에게 쉽게 당할 리가 없는데.
최소한 도망은 쳤어야지.
일단 김태주 소위는 군인들을 죽일 능력이 없다.
마나 거부자 주제에, 일반인도 못 당하는 허접한 신체 능력.
게다가 각성한 것도 아니고.
사실 가장 큰 문제는 각성자를 포함한 군인 5명의 죽음이 아니다.
하사 따위가 장군의 아들이자 제국군 장교를 죽이려고 했다는 당사자의 증언.
만약 이 보고가 상부에 올라가면?
전초기지 헌병대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게 된다.
육군 본부에서 직접 수사관을 내려보낼 것이고, 군검찰이 나설 것이며 이에 연루된 자들은 줄줄이 옷을 벗게 되겠지.
태주의 증언이 허황된 것도 아니라는 건 수사관도 알고 있다.
파주 영지 계승자, 새로운 부인, 배다른 자식, 영지를 둘러싼 권력 암투, 김태주 소위의 죽음을 바라는 사람들.
'암살 시도가 정말일 수도 있어.'
신빙성이 있다.
행정 장교였던 김태주.
그런데 갑자기 장인동 소대장에게 정찰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건 중대장도 모르는 사실.
장인동이 독단으로 처리했을 리 없을 테고···,
"하지만 소위님의 증언도 확실하지 않아서."
"압니다. 증거가 없죠."
태주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전 이 사건 공론화시키고 싶진 않습니다."
"···네?"
"그냥 덮죠."
"아아, 저, 정말이십니까?"
"중사님 말대로 증거가 없잖아요. 저도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니진 않을 테고. 고영호 하사도 죽어버렸으니까."
헌병 수사관의 표정이 밝아졌다.
상부에서도 원하는 바였으니까.
시간이 흐른 후, 실제로 장인동 중위를 비롯한 소대원들의 죽음은 작전 중 순직으로 처리됐다.
그리고 태주는 바로 전역 신청서를 제출했다.
막는 사람도 없었다.
암살위협이 사실이라면?
김태주 소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군에서 내보내는 것이 더 낫다.
신청서는 즉시 수리되었다.
※ ※ ※
파주 영지 지배자 김웅방 준장은 의자를 피곤한 듯 의자를 뒤로 젖히며 손으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난데없이 전해 들은 아들의 전역.
하지만 달리 소식도 없었다.
전화를 걸어봤지만 없는 번호라는 메시지만 나올 뿐.
대체 전역을 결심한 이유가 뭘까?
그 이유는 부관이 대신 말해줬다.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태주님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암살?"
"네, 같은 중대원인 고영호라는 하사와 오크 부락 정찰을 나가는 도중에···,"
"잠깐! 정찰 임무라니? 걔는 행정 보직 아니었나?"
"그, 그게 갑자기 보직 변경 명령이 내려와서."
"···."
김웅방 준장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마나 거부자라고 해도 아들이다.
그래서 행정 장교로 보직을 정해줬다.
"대체 누가? 명령권자는?"
"육본에 알아본 결과 보직 변경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실제로 확인 결과, 명령은 없었습니다."
"그럼 정찰 임무 지시는 누가?"
"태주님과 함께 근무하는 장인동 중위입니다."
"그놈이 수작을 부렸다는 말이야? 무슨 이유로?"
"사, 사실 미심쩍은 부분이 있긴 합니다."
"뭔가?"
"얼마 전부터 장인동 중위가 육군 참모본부 내 일본계 장교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던 걸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일본계 장교라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
자신의 아내, 태주의 배다른 동생인 태평과 태천의 엄마 혼다 미쯔이.
아내라면 동기도 있고 그럴 능력도 된다.
규슈 영지는 파주 영지보다 더 크고 부유하다.
자신도 처가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고.
파주 영지.
과거 비무장지대라는 마수 위험 지역과 맞닿은 곳.
삼한제국 황제께서 친히 이 영지를 하사하셨다.
마수를 토벌해 제국민들을 보호하라고.
하지만 영지의 형편이 좋지 않았다.
마수를 사냥해 얻는 부산물로 영지를 운영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사병들을 훈련시키고 조직하는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드나.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부인 미쯔이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영지에서 아내의 파워는 계속 커져 나갔고.
'설마 아내가···,'
그렇게 위협이 되었나?
마나 거부자인 아들놈을?
하긴!
29살이 되어서도 아직 죽지 않고 버티고 있으니.
아마 불안했을 것이다.
제 배에서 나온 자식에게 파주 영지를 물려주고 싶어 했을 테고.
"제가 따로 좀 더 조사해보겠습니다."
심사가 복잡하다.
머릿속은 오만가지 생각으로 뒤죽박죽.
하지만 이럴 땐 단순한 것이 제일.
"아니, 됐어. 여기서 끝내게."
"네? 하, 하지만···."
"괜히 들춰서 뭘 하나. 아들은 살아있고, 전역까지 했으니. 그 문제는 내가 처리하지."
"알겠습니다."
더는 파볼 것도 파볼 필요도 없다.
예전부터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들이다.
아들이 죽지 않았으니 그걸로 된 것.
더구나 자신에게 언질도 주지 않고 마음대로 전역 신청을 했다.
파주로 돌아오지도 않고, 연락도 끊겼고.
'인연을 끊겠다는 말이냐?'
아니면 새엄마를 의심하고 있거나.
'후우, 그래, 차라리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29살의 젊다면 젊은 나이.
아픈 손가락이자 자신의 치부였다.
사람들이 아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호부견자.
아비는 호랑이인데 자식은 개.
어떻게 마스터 각성자에게서 마나 거부자가 태어나?
그래도 끝까지 자식을 사랑하겠다고 마음먹어왔다.
실제로 애지중지, 금지옥엽처럼 보살펴왔고.
새 부인 미쯔이에게서 두 명의 연년생 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태평이와 태천이는 마나 적합자.
아직 각성하지 못했지만 마나 적합자는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각성시킬 수 있었다.
비록 큰아들 태주의 죽음은 안타까우나, 영지를 이을 후계자는 태평이, 혹은 태천이가 될 터.
"태주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나?"
"설악산 전초기지에서 나간 이후로는 행방이 묘연합니다. 찾아볼까요?"
"아니, 그것도 됐어. 찾지 말게."
새부인 미쯔이에게도 태주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또한 자신에겐 마나 적합자인 아들 둘도 있었다.
큰아들을 대신할, 든든하고 믿음직한 아들들이 말이다.
※ ※ ※
그것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불쑥 다가왔다.
2023년 어느 날.
마나의 침범.
그로 인해 사람들의 몸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마나가 나타난 원인?
아무도 모른다.
지금도 알 수 없다.
2027년.
마나, 대기에 스며든 희한한 물질, 자연환경에 심각한 피해를 끼쳤다.
마나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식물과 동물도 마찬가지, 죽거나 아니면 변이되거나.
인류는 절망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벌써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
2050년.
지구 인구 약 절반 가까이 사라졌다.
탈출구가 없었다.
제법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지하 벙커로 숨었지만 그도 소용없었다.
살려면 호흡을 해야 했고 공기에는 마나가 스며들어 있었으니까.
2100년.
살아남은 사람, 약 30%.
생존자들은 직감했다.
인류 멸망은 피할 수 없을 거라고.
2123년.
남은 인구 약 20%.
그즈음에서 서서히 변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인간을 비롯해 살아남은 생명체들은 이해하기 힘든 적응력으로 삶을 유지했다.
적응의 시작.
적응이라기보단 마나가 일으킨 변화.
진화는 아니다.
마나가 DNA를 변이시켰다.
즉 유전적 돌연변이.
인간도 그렇지만 동식물에서 그 변화가 더 거세게 일어났다.
신식물, 신동물, 마나에 적응한 채로 태어나는 지구의 새로운 주인들.
하지만 위험한 돌연변이도 생겨났다.
일명 '마수'라고 불리는 생명체들이 인간을 위협했다.
그리고 각성.
시스템의 출현.
적합자와 각성자로 대표되는 신인류.
시스템이 나타난 이상 마나의 출현은 우연이 아니게 됐다.
대체 누가?
외계인이거나 혹은 신(神)이겠지.
2200년.
인류는 융성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끈질긴 생존력과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면서 이어져 온 과학기술.
과학자 집단에서 마나 에너지를 바탕으로 신기술을 발명해냈다.
새로운 문명 탄생의 서막이었다.
처음, 발전은 느렸다.
하지만 어느 지점에 올라서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마나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한 철통같은 요새인 도시가 만들어졌고 세계는 서로 소통했다.
각성자들의 역할이 컸다.
마수들에게서 인류를 보호하는 그들.
바닥을 쳤다.
앞으로 올라갈 일만 남았다.
인류는 다시 힘을 얻었다.
2323년 현재.
마나 침범 후 300년.
과거 찬란했던 문명이 거의 복구됐다.
지구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마나 침범 외에도 인류를 위협한 것은 또 있었다.
기후 변화.
마나 때문에 그 변화는 더더욱 가속화됐다.
지구 인류의 90%를 절멸하는데도 한몫했고.
기후가 300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전체적으로 따뜻해졌다고 해야 하나?
지금은 삼한제국에 복속된 옛 일본 열도는 절반 가까이 바다에 잠겼다.
규슈가 작은 섬이 될 정도로 말이다.
한반도도 사라진 땅들이 많다.
주로 서남해 해안선 도시들.
동해안도 피해를 입었다.
태주가 근무했던 설악산 전초기지도 바다와 맞닿아 있을 정도.
그런 이유로 현재 삼한제국의 수도는 과거 중국이란 나라에 속했던 만주 지역에 있다.
수도의 이름은 뉴서울.
나름 살기 좋다.
만주 벌판은 평균 기온도 따스하고 강수량도 풍부해서 제국 전체의 식량을 책임지는 곡창지대.
특히 마나 벼가 잘 자란다.
원래 있던 벼의 품종은 마나의 침범 이후 거의 사라져버렸고, 변화한 세상에 걸맞게 돌연변이 된 품종만이 살아남았다.
마나가 스며들었다는 걸 제외하고는 기존의 쌀과 거의 비슷한 맛.
모든 농축산물이 그렇다.
마나에 적응된 생산물.
그런데 태주의 목적지는 만주 뉴서울이 아니다.
북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최종 목적지는 '자유도시 구례'.
한반도 남부지역의 음습한 아열대 기후, 제국의 공권력이 제일 적게 미치는 지역 중 하나, 더불어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시.
구례 바로 위에 위치한 '지리산 어둠숲' 때문이다.
평범한 숲이 아니라 울창한 밀림이 형성되어 있어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아 항상 어두운 곳.
"드디어 왔구나."
여기서 자리를 잡아보자.
굳이 지리산으로 왜 왔겠나?
이 위험한 곳으로.
지리산 밀림에 존재하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독사와 독충, 독초와 독버섯, 그야말로 천국 아닌가?
'절대독마 김태주'에게 말이다.
< 전역, 그리고 자유도시 구례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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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마는 해독제를 만드는 게 특기. >
인구 200만의 자유도시 구례.
도심지엔 높은 빌딩이 곳곳에 세워졌을 정도로 번화했고, 인구로 보나 발전 규모로 보나 태주가 살았던 파주보다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도시.
하지만 구례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마수 웨이브의 부담을 감당해야 한다.
지리산 밀림은 타 지역에 비해 마수들의 밀도가 유독 높다.
다른 지역과 다르게 심심하면 마수 웨이브가 터진다.
공권력이 약해서 치안도 별로 좋지 않아 별의별 인간 군상들이 넘쳐난다.
빚을 지고 도망간 채무자, 채무자를 쫓아 온 빚쟁이, 수배를 피해 도망 온 범죄자, 한탕 크게 해 먹어 보려는 도박꾼, 이런 모두를 상대로 장사하는 상인···.
그래도 사람 살만한 동네.
도시 자치 위원회가 구성되어 부족한 치안을 보충해주고 있고, 상업 활동도 활발해서 열심히 노력하면 풍족하게 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 있다.
삼한제국에서 생산되는 마수 부산물의 20%가 자유도시 구례 한곳에서 나온다.
마수 종류도 많고 숫자도 엄청나다는 의미.
수십 개의 오크 부락을 위시해 칼날이빨 담비, 폭풍 족제비, 독발톱 삵, 붉은 털 늑대, 자이언트 반달곰, 강철 깃 수리부엉이···.
제국으로선 부담이 되는 위협 요소.
지리산 마수 웨이브를 틀어막기 위해 지리산 북쪽 산청시, 함양시, 남원시에 각각 제국군 마수 방어 군단이 포진되어 있다.
하지만 방어만 해서는 답이 안 나온다.
지속적으로 마수의 숫자를 줄여줘야 한다.
그런 이유로 제국 황실은 지리산 남쪽 지역 구례를 자유도시로 지정했다.
사냥 부산물 판매에 한정해 세금을 감면하고, 도박과 매춘 허용, 공권력도 최소화하면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군 소속이 아닌 민간 각성자들이 많이 몰렸다.
마수 사냥으로 시스템 등급을 올리고, 부산물을 채취해 돈도 벌고.
태주가 구례 자유도시에 자리를 잡기 위해 해야 할 일.
사냥?
아직은 때가 아니다.
고작 1성 경지의 혼원무상독령공, 강한 마수를 만나면 위험하다.
또한 독으로만 마수들을 상대할 수 있나?
암기도 있어야지.
독과 암기.
그 둘이 보여주는 시너지.
함께 해야 비로소 완벽해진다.
하지만 암기는 매우 많은 비용이 든다.
특성상 주문 제작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럼?
먼저 돈을 벌어야지.
현재 빈털터리 신세.
암기 구매나 제작은 꿈도 못 꾼다.
숙소도 정해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하고, 스마트폰 개통도···.
원래 있던 건 버려버렸다.
낡기도 했고, 번호도 바꿀 생각에.
또한 작게나마 가지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미련도 함께 버릴 목적.
잠자는 데야 공원이나 기차역에서 노숙하면 되지만 문제는 배고픔.
사람이 독만 먹고 살 수 있나?
그래서 시작한 것이 사냥 서포터.
서포터, 그냥 짐꾼이다.
보통 짐꾼은 마나 순응자 일반인들.
마나 적합자도 서포터이긴 하지만 그들은 짐꾼이 아닌 전투 보조요원.
당분간 짐꾼을 하기로 했다.
전투 보조요원은 너무 눈에 띈다.
어쩌면 비기너, 아니 레귤러보다 강한 자신인데.
겸사겸사 구례와 지리산 밀림의 분위기도 파악하고.
어둑한 새벽녘에 지리산 밀림 초입, 인력시장에서 기다리면···,
"칼날이빨 담비 구역 짐꾼 셋!"
"손손!"
"저요! 저저···,"
"짐꾼 경험 118회, 베테랑입니다."
일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번쩍번쩍 손을 든다.
그러나 일꾼도 나름의 기준이 있다.
"이거 들어보슈."
"이까짓 배낭쯤이야···, 어헉! 이, 이렇게 무, 무거워?"
"쯧쯧, 거부자도 아니고, 이걸 못 들어? 가서 힘이나 더 길러오쇼."
커다란 배낭을 메고 최소 8시간은 돌아다닐 수 있는 체력이 있어야 짐꾼 일도 할 수 있다.
당연히 태주는 통과.
그래서 일당 20만원, 짐꾼으로 지리산 밀림 마수 레이드에 참가했다.
보통 15명으로 구성되는 레이드 막공팀.
그중에 3명이 짐꾼, 마나 적합자로 구성된 전투 보조요원 7명, 그리고 각성자 5명.
칼이나 창, 활, 총기를 소지한 자들은 마나 적합자와 각성자, 그리고 배낭을 멘 이들은 마나 순응자, 짐꾼들이다.
그중에서도 얼굴, 특히 측면 부분에 손바닥 절반 크기의 문신이 새겨져 있으면 시스템 각성자고.
각성자 문신의 모양과 크기는 각양각색이다.
그래서 가짜로 문신을 그려놓고 사기 치는 놈들도 있다.
레이드 팀이 사냥으로 얻는 주요 부산물은 마수 머리에 있는 에너지 결정체, 가죽이나 이빨, 발톱, 간이나 쓸개 같은 장기.
처음 짐꾼으로 따라간 사냥은 안정적이었다.
각성자도 제 목숨 귀한 줄은 알아서 무리한 사냥은 절대 하지 않으니까.
일은 편했다.
배낭 메고 따라만 다녔다.
독공으로 강해진 육체.
물론 아직 마나 거부자의 천형은 계속됐지만.
"수고했어요. 여기 일당 받아요."
"감사합니다."
"내일부터는 일용직 인력시장에 오지 말고 이 번호로 직접 연락해요."
꽤 잘 보였나 보다.
하긴! 그 큰 배낭을 메고도 밀림을 활보하면서 지친 다른 짐꾼을 도와주기까지 했으니.
그렇게 번 돈으로 밥도 사 먹고, 허름한 여관에 달방을 구해서 임시 숙소도 마련하고, 스마트폰도 마련하고.
남는 시간엔 혼원무상독령공을 수련했다.
독초야 널리고 널렸으니.
꼬박 보름을 일꾼으로 살았다.
그런 와중에 발견한 사실.
'이거 돈 되겠는데?'
마침내 찾아냈다.
큰돈을 벌 방법을.
아울러 구례에서 기반을 세울 수단을.
※ ※ ※
지리산 밀림엔 각성자들도 꺼리는 장소가 있었다.
심지어 마수도 가까이 가지 않는 곳.
그곳은 바로 지리산 '지옥늪'이었다.
태주는 해가 떠오르는 새벽녘에 지리산 지옥늪으로 갔다.
에엥, 에에엥,
늪 근처에 도착했는데 벌써 난리.
'미쳤네. 저게 다 모기야?'
모기떼.
멀리 보이는 늪지대는 모기로 온통 새까맣다.
일명 변종 3줄 무늬 모기.
놈들은 지옥늪에서 짝짓기하고 알을 낳는다.
먹이 활동은 지리산 밀림 전역.
역시 마나로 변이된 종.
그러나 크기는 보통 모기와 똑같다.
대신 특별한 능력이 하나 추가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변종 3줄 무늬 모기의 독(毒), 마나 적합자와 각성자들을 엄청나게 괴롭힌다.
이 모기에 물리면 몸에 힘이 빠지고, 슬슬 잠이 오게 된다.
많이 물리면 물릴수록 증상이 더 심해진다.
그리 강한 독이 아니라 하루 이틀 지나면 멀쩡하게 회복이 되긴 하지만.
하지만 희한하게도 마나 순응자, 일반인들에겐 아무런 해가 없다.
물리면 그저 가려울 뿐.
오직 마나 적합자와 각성자에게만 영향을 미친다.
그들이 마수와의 전투 과정에서 모기들에게 물릴 때 상당히 위험해진다.
한낱 모기 때문에 전투 능력이 떨어지고 심하면 큰 부상이나 죽음을 초래하기도 한다.
더더욱 큰 문제는 약도 없다는 것.
그리고 웬만한 살충제도 듣지 않는다.
매년 방제 작업을 하고 있지만 도무지 그 숫자가 줄어들지 않아 지금은 거의 손을 놓고 있는 실정.
따라서 최대한 물리지 않게 하는 방법밖에 없다.
즉 방충복 착용하기.
온몸을 감싸서 모기가 물 수 없도록
그래서 지리산 일대에서 각성자와 마나 적합자들은 아열대의 끈적한 무더위에도 방충복으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마수 사냥에 나선다.
그게 얼마나 미치고 환장할 노릇인지 방충복을 한 번이라도 입어본 사람은 다 안다.
그 작은 모기 때문에 사냥 효율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지긋지긋한 놈들 불로 지져 싹 태우고 싶지만 숫자는 또 얼마나 많은지.
그런데 만약 이 모기를 퇴치할 수 있는 수단이나 해독제를 찾아낸다면?
'떼돈 버는 거지.'
태주는 홀로 지리산 지옥늪으로 간 이유.
가까이 가자 이게 웬 떡이냐는 듯 달려드는 독모기들.
에에엥, 에에에에에엥!
하지만 쫓지 않았다.
모기들이 물도록 내버려 뒀다.
'아하, 이 느낌이구나.'
물려보니 알 것 같다.
왜 몸에 힘이 빠지는지.
혼원무상독령공으로 이룬 독정(毒精).
또한 자신과 같은 영혼인 절대독마 당군악이 가진 경험.
그것들을 기반으로 독의 종류를 유추해보면···,
'역시 산공독(散功毒)이었어.'
산공독(散功毒).
마나를 비롯한 신체 기운을 흩트려 버리는 독성분.
그다지 강하지 않아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소되겠지만 그래도 많이 물리면 전투에 커다란 지장이 생긴다.
당연히 태주는 모기에 물려도 멀쩡했다.
그의 에너지는 바로 독이니까.
태주는 선 채로 혼원무상독령공을 운기했다.
독기를 몸 전체로 돌리니.
후두둑, 후두두두둑.
힘없이 땅으로 떨어지는 모기들.
약한 독은 강한 독에게 굴복한다.
'먹어 볼까?'
손으로 휘휘 저어 날고 있는 모기 몇 마리 잡아 입으로 가져가 씹었다.
맛을 보면 더 확실해진다.
계속 모기를 먹었다.
일부러 모기에 물리기도 했고.
혼원무상독령공의 묘리.
경험한 독의 성질을 몸으로 체득하고 파악한다.
'어떤 독인지는 알겠고.'
이젠 중화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독제독(以毒制毒).
독은 독으로 다스린다.
'해독할 수 있는 독을 찾아야 하는데···.'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절대독마의 경험으로 판단하면 독이 있는 곳에 해독제도 같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지옥늪 주변에서 독초를 뽑아서 맛을 보고.
찾던 건 아니지만 쓸만한 독초는 배낭에 집어넣고.
'진짜 지리산 밀림은···,'
천국이다.
만지기만 해도 중독되는 독초들이 사방에 널려있다.
절대독마 당군악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군침을 흘릴까.
독초를 씹으며 탐색을 계속하는 태주.
많이 먹으면 안 된다.
몸에 부담이 올 수 있다.
천천히, 조금만, 맛만 볼 수 있게끔.
'이건 아니야.'
변종 3줄 무늬 모기독과 반대되는 성질을 가진 걸 찾아야 한다.
'이것도 아니고.'
독(毒)과 약(藥)은 한 끗 차이.
독이 약이 되기도, 약이 독이 되기도 한다.
강호의 사천 당문이 의가(醫家)로도 유명한 이유.
'이거 괜찮네.'
기어코 발견해냈다.
푸른 얼룩 버섯.
마나를 응고시켜 마나 로드를 막히게 하는 성질의 독을 품고 있는 독버섯
모기독은 마나를 흩트려 버리는 것, 푸른 얼룩 버섯은 마나를 응고시키는 것, 성질이 다르다.
'하나 찾았고.'
이걸로는 부족하다.
태주는 늪 주변을 중심으로 탐색을 계속했다.
여긴 모기 때문에 안전한 곳.
마수도, 사람들도 거의 없다.
수십 종의 식물들을 채집했다.
걔 중엔 독초뿐만 아니라 약초도 있었다.
독의 성질을 변화시키기 위해선 필수적인 풀.
'가지고 가서 실험해봐야지.'
배낭에 든 온갖 독초만 생각하면 뿌듯하기만 하다.
독을 약의 성질로 변화시키려면 법제(法製)가 필수적, 쓸데없는 독성은 제거하고, 독 기운을 줄여 자극을 최소화시킨다.
하지만 그냥 먹으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여러 독 기운에 한꺼번에 중독되어 뒈지는 거지.
약의 재료와 성분이 같아도 효과가 천차만별인 이유가 바로 법제에 있다.
법제가 잘못되면 약은 독으로 변한다.
그래서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신약을 만들어 내는 건 매우 어렵다.
하지만 자신이 누군가?
독의 성질을 파악하고 성질을 변환할 수 있게 해주는 혼원무상독령공을 익힌 절대독마.
걸림돌이 있긴 하다.
해독제를 만들어 내기엔 독공의 경지가 너무 낮다.
고작 1성의 혼원무상독령공.
'최대한 빠르게 3성으로 가야 해.'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가봤던 길이니까.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흐른 뒤.
마침내!
'3성이구나.'
여기까지 오는 데 꼬박 한 달.
낮에는 짐꾼, 밤에는 수련.
아무리 독공의 기반이 되는 독초가 널렸다고 하지만 성취가 엄청나게 빠른 편.
이상한 일도 아니다.
독공의 대종사 절대독마 당군악과 같은 영혼에, 그의 경험과 지식을 고스란히 가진 태주인데.
혼원무상독령공 3성.
독정(毒精)의 크기도 2배 이상 커지고 농밀해졌다.
펼칠 수 있는 무공의 숫자도 늘어났고.
무엇보다 변종 3줄 무늬 모기독의 해독제를 만들 수 있다.
해독제의 재료가 되는 독초들은 꽤 많이 확보해놨다.
그가 기거하는 숙소의 방이 가득 찰 정도로
모두 맛을 보고 성질을 파악했고.
이제 어떤 약초들은 가루를, 일부는 헝겊에 싸서 즙을, 일부는 그냥 잘라 각각의 용기에 담은 후, 화장실 커다란 욕조에 용량을 나눠 넣고 물을 부었다.
태주는 욕조 물에 손을 넣고 혼원무상독령공을 운기했다.
독정을 이용해 독기를 흡수하고, 성질을 온순하게 한 다음 내뱉고, 다시 흡수하고 내뱉고.
굉장히 섬세한 작업.
그래서 혼원무상독령공 3성의 경지가 필수.
태주의 몸 안은 제약회사 연구소 실험대나 마찬가지.
1차적으로 변종 3줄 무늬 모기 독을 단전의 독정(毒精)에서 추출한다.
동시에 푸른 얼룩 버섯을 비롯한 여러 독의 정화를 뽑아 서로 섞어 반응을 살핀다.
몇 개는 버리고, 몇 개는 사용하고, 섞는 비율도 정해보고.
이 독은 더 많이, 이 독은 조금만.
절대독마가 가진 독에 대한 지식.
물론 강호와 지구의 독 성분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모기독이 산공독(散功毒)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해독해야 하는지 잘 안다.
이틀 내내 일도 안 나가고, 식음도 전폐하고 이어진 중화 작업.
결국 만들어 냈다.
부작용을 없애버린 변종 3줄 무늬 모기독 해독제를 말이다.
< 독마는 해독제를 만드는 게 특기.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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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스 드럭샵 >
자유도시 구례엔 도시 기반시설이 꽤 잘 갖춰져 있지만 부족한 것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병원.
병원이 별로 없다.
의사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구례가 아니더라도 안전한 도시에서 의료 행위로 돈을 벌 수 있는데 왜 굳이 위험한 이곳까지 오나?
여기 있는 의사들은 실력이 떨어지거나 의료사고를 내고 도망쳐온 사람들이 대부분, 그래서 병원은 미덥지 못하다.
대신 도시 곳곳에 드럭샵, 약국들이 널려있다.
구례에선 약사가 처방을 내려도 무방하다.
그래서 장사가 꽤 잘된다.
미덥지 못한 병원 가는 것보다 효과가 검증된 약을 사 먹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니까.
태주는 아침 일찍 도시에서 나름대로 평판이 괜찮은 중형 드럭샵으로 갔다.
약국의 이름은 백스 드럭샵.
그곳의 사장은 흰머리 군데군데 보이는 50대의 백홍표.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순간 지혈제? 마나 회복제? 종합 해독제? ···아니면 진통제나 각성제?"
보통 제국 식약처에서 허가된 약을 파는 것이 원칙이지만, 자유도시 자치위원회에서 따로 허가를 내주기도 한다.
임상실험?
아주 간소하다.
효과만 좋으면 뭔들 못 팔겠나?
마약도 파는 마당에.
"사러 온 게 아니고 팔러왔습니다만."
"···네?"
떨떠름한 표정의 백홍표.
이런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어디서 이상한 약 들고 와서 효과가 있느니, 몸에 좋은 영약이라느니.
"관심 없으니 돌아가세요. 보아하니 외부에서 여기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돈을 벌고 싶으시면 인력시장에 가서···,"
태주는 품에서 10ml 용량의 작은 시약병 3병을 꺼내 매대 위에 놓았다.
툭!
"변종 3줄 무늬 모기 해독제."
"안 살 거니까 그냥 가요. 해독제든, 영약이든···, 응! 뭐, 뭐라고? 모기?"
"복용 방법은 음용, 미리 마셔도 돼요. 최대 10시간 약효가 지속되고."
"모, 모기 해독제라고? 허허, 멀쩡한 양반이! 사기를 치려면 골라서 쳐야지···."
"시험해보고 관심 있으면 연락하세요."
태주는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도 함께 올렸다.
"시간은 오늘 밤 자정까지, 그 후에 연락 안 오면 다른 약국으로 넘깁니다."
그대로 백스 드럭샵을 걸어나가는 태주.
백홍표는 황당했다.
매대 위에 올려진 시약병 3개.
'변종 3줄 무늬 모기 해독제?'
어디서 이런 구라를.
세상에서 제일 만들기 어려운 약이 바로 해독제 종류.
이 샵에도 해독제를 팔고 있다.
광범위 종합 해독제.
그러나 독을 해독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시간 억제해 병원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 위한 시간을 벌어주는 용도.
물론 특정 독을 완전하게 해독시키는 약도 있긴 하다.
표적 해독제는 당연히 매우 비싸다.
게다가 지리산에 서식하는 독초, 독충, 독마수들이 어디 한둘인가?
현재로선 해독할 수 있는 독보다 해독할 수 없는 독이 더 많다.
"참나! 기가 막히는군."
아침 일찍이라 직원들이 아직 출근을 안 해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던 참이었다.
삼한 제국 최고의 제약회사들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모기 해독제를, 저렇게 당당하게 가지고 왔다고?
마수 공략대에게 변종 3줄 무늬 모기는 매우 성가신 해충.
물리면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고 흩트려놓는다.
한두 방 물리는 거야 상관없다고 하지만 지속적으로 물리면 사냥을 포기하고 도중에 돌아와야 할 정도로 심각해지고.
마나 회복제를 복용하면 뭘 해?
생성되는 마나도 흩어지는데.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진다지만, 꼬박 하루, 심하면 이틀을 공쳐야 한다.
다행히도 구례시엔 변종 3줄 무늬 모기들이 없다.
모기도 마수.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지리산 마수들은 그들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마수 웨이브가 일어나면 또 얘기가 다르지만.
'이게 만약 진짜 모기독 해독제라면?'
백홍표는 슬며시 시약병 하나를 손에 쥐었다.
매대 밑에 놓인 약물 판별 키트를 꺼내 병에 담긴 액체를 몇 방울 떨어뜨렸다.
인체에 해로운 성분이 있으면 키트 판별지가 붉은색으로 변할 터.
하지만,
'색깔은 그대로군.'
먹어도 괜찮다는 결과.
다시 시약병을 들고 제조실로 들어가는 백홍표.
제조실 안엔 '긴꼬리 쎅토끼' 한 마리가 든 강철 케이지가 있었다.
너무나 약해 생태계 최하에 위치한 동물.
마나 변이로 모든 동식물이 다 괴물처럼 변하는 건 아니다.
긴꼬리 쎅토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변이됐다.
왕성한 번식력.
밥 먹고 하는 짓이 그 짓.
한 쌍의 쎅토끼가 특정 지역에 자리를 잡으면 불과 보름 만에 100마리로 늘어난다.
하지만 생존 능력은 최하.
툭, 건들어도 죽는다.
그냥 진통제 같은 약을 먹여도 그대로 기절하는 놈인데.
그래서 긴꼬리 쎅토끼는 동물 실험 용도로 널리 쓰이는 종.
백홍표는 케이지 안 물그릇에 시약병을 부었다.
홀짝홀짝 물을 마시는 쎅토끼.
1시간 정도 기다리니.
'멀쩡하네.'
소독약 섞인 물을 조금만 먹어도 시들시들 쓰러지는 쎅토끼도 괜찮다.
마지막으로 시약병 밑에 깔린 액체를 손바닥에 떨어뜨려 혀끝으로 살짝 맛봤다.
'그냥 맹물인가?'
어떤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기를 치려면 그럴듯하게 쳐야지, 향료라도 타서 가져오던가, 이건 숫제 맹물이다.
그때였다.
"백사장님! 아침 일찍 문을 여셨습니다?"
손님 하나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박진수 프로. 오늘도 사냥 가시나 봅니다."
'프로'는 주로 각성자에게 붙이는 호칭.
"놀면 쓰나요? 부지런히 벌어야죠. 마나 회복제 두 병만 주세요."
"알겠습니다. 여기···."
박진수는 레귤러 등급의 각성자.
별명이 약쟁이일 정도로 약에 의존한다.
그런 박진수에게 매대 위 시약병이 눈에 들어왔다.
"백사장님, 이 약은 뭡니까?"
"아! 이거,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떤 미친놈이 변종 3줄 무늬 모기 해독제라고 가지고 왔는데, 완전히 맹물이에요."
"엉? 와! 구라가 너무 심했다."
"그렇죠?"
박진수는 물끄러미 시약병을 바라봤다.
이게 진짜 해독제라면 얼마나 좋겠나.
지독한 모기 새끼들.
그놈들만 없어도 사냥 효율이 두 배로 늘어날 텐데.
슬쩍 시약병 하나를 손에 든 박진수.
그러자 백홍표가 웃으며 말했다.
"그거 쎅토끼에게도 먹여봤는데 멀쩡하더라고요. 보통 약도 반응이 오는 놈이잖아요."
"그래서 맹물이란 말인가요?"
"나도 먹어봤어요. 아무런 맛도 안 났어요."
"흐음."
곰곰이 생각하는 박진수 프로.
"마침 목도 마른 데, 이거 제가 먹어봐도 될는지."
"으흠, 저기 정수기 물이나 마셔요."
"돈 드릴까요?"
"어허, 내가 돈이 욕심나서 그러나?"
"그럼 공짜라는 말씀이시죠?"
"버릴 거예요."
백홍표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진수는 시약병 뚜껑을 따고 바로 꿀꺽 마셔버렸다.
"어이쿠! 마셨어요? 참나, 그렇게 약 함부로 먹다 보면···,"
"괜찮습니다. 쎅토끼도 멀쩡했다면서요."
"맞긴 한데."
백홍표는 선반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박진수에게 줬다.
"이거 종합 해독제 한 병 챙겨요. 나중에라도 혹시 잘못될 수 있으니까."
"하하하! 좋네요. 맹물 한잔 먹으니 종합 해독제도 생기고."
박진수는 종합 해독제와 마나 회복제를 챙기며 말했다.
"백사장님, 수고하세요. 피드백은 사냥 끝나고 와서 할게요."
"박프로도 약 믿지 말고 방충복 꼭 챙겨입어요."
"넵! 대박 나십시오."
백홍표는 약에 대한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어떻게 믿어?
수많은 제약회사가 개발하려다 실패한 약이 바로 변종 3줄 무늬 모기 해독제다.
박진수가 나가고 난 뒤, 백홍표는 남은 시약병 하나를 휴지통에 버렸다.
"사장님, 저 왔습니다."
"저도요."
"그래, 좋은 아침이다. 어서들 오렴."
직원들이 출근했다.
아빠처럼 푸근한 미소로 맞이하는 백홍표.
손님도 하나둘 씩 오기 시작했다.
모기독 해독제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렸다.
※ ※ ※
박진수도 솔직히 모기 해독제 따윈 믿지 않았다.
쎅토끼도 아무 일 없다고 해서 그냥 충동적으로 마신 것일 뿐.
그래서 두꺼운 방충복을 입고 사냥에 나섰다.
온몸을 꽁꽁 싸맸다.
지리산 변종 3줄 무늬 모기도 마수인지라 피를 빠는 입술침도 제법 강하다.
심지어 기다랗기까지 하다.
그래서 약한 재질의 방충복은 금방 뚫려버린다.
작은 구멍 하나라도 있으면 거길 통해 모기침이 들어온다.
이곳에 사는 대형 마수종도 이 모기 때문에 진화했다.
모기 입술침을 방어할 수 있는 긴 털이 나 있다든지, 두꺼운 가죽을 가지고 있다든지,
모기를 막을 수 있는 방법?
주니어 익스퍼트(junior expert) 이상의 각성자면 가능하다.
모기 입술침이 피부를 뚫지 못하니까.
하지만 익스퍼트가 그렇게 흔한가?
지리산 밀림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민간 각성자들은 거의 유저, 비기너, 레귤러 등급.
"씨발! 땀이 폭포처럼 흐르네."
오늘따라 유독 덥고 습하다.
이런 날은 모기들이 극성을 부린다.
"어후, 박프로님! 오늘은 대충 사냥하다 돌아가요."
"맞습니다. 너무 더워요."
"마수 잡다가 쪄 죽게 생겼네."
레귤러 등급의 각성자이자 레이드팀의 리더인 박진수는 팀원들을 다독였다.
"한 마리만 더 잡고 빠지자고."
"···쯧, 그래요. 돈은 벌어야 하니까."
그들이 사냥하는 건 칼날이빨 담비.
담비 주제에 크기가 송아지만 하다.
물리지만 않으면 꽤 쉬운 마수.
탱커가 방패로 주둥이를 봉쇄하면서 딜러들이 옆구리나 아랫배를 날붙이로 찌르면 그걸로 끝.
박진수는 노련한 탱커였다.
하지만 무더위에 습도까지 높은 날엔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안 하던 실수도 하게 되고.
"크르릉!"
돌진해오는 칼날이빨 담비의 대가리를 방패로 후려쳤지만.
퍼억!
힘이 모자랐는지 담비가 방패 공격을 옆으로 흘려버리며 박진수의 가슴팍으로 이빨로 물어버렸다.
콰악!
"으윽!"
탱커라 몸이 단단하고 튼튼한 방어구도 입었다.
그러나 문제는 방충복.
담비도 늦지 않게 처리했지만···,
"케엑!"
찌이익!
방충복이 그만 세로로 길게 찢겨나갔다.
"제기랄!"
공기가 통해서인지 순식간에 시원해진 몸.
그러나 방충복이 망가졌다.
게다가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
담비가 죽으면서 지른 비명으로 주의를 끌어 한꺼번에 3마리의 다른 담비들이 더 나타났다.
"김프로, 장프로, 한 마리씩 맡아. 적합자들도 전투 보조하고."
달려드는 팀원들.
"잡아!"
"발목을 자르라고."
"뭐해? 보조 팀도 총으로 갈겨!"
그리하여 벌어진 난전.
정신이 없었다.
방충복이 찢겨나가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레이드팀을 구성하면서 각성자는 3명만 데려왔다.
비기너 1명과 유저 2명.
때문에 담비 무리를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무리.
그래도 박진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명색이 레귤러 등급인데.
푸욱!
"깨앵!"
악전고투 끝에 한 놈 죽이니 조금 여유가 생겼다.
"빠르게 마무리!"
콰직!
"끽!"
"끼이이잉···,"
기어이 3마리 다 죽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캬오오!"
"크르륵!"
또 나타난 2마리의 담비.
"···후우, 이런 씨발!"
어쩔 수 없다.
잡아야지.
숨돌릴 틈도 없이 재개된 전투.
하지만 레이드 팀원들이 입고 있던 방충복들이 거의 걸레처럼 변했다.
이걸 놓칠 모기들이 아니다.
전투에 신경 쓰느라 모기들이 무는 걸 피하지도 못하는 팀원들.
박진수도 마찬가지.
벌써 몇 방 물렸는지 세지도 못했다.
'이거 위험한데?'
레이드팀 각성자와 적합자들의 몸놀림이 눈에 띄게 느려지고 있었다.
아마 모기독의 영향을 받고 있는 모양.
'이대로 가면···,'
분명 사상자들이 나온다.
박진수는 방패와 검을 있는 힘껏 움켜잡았다.
팀의 리더로서 사명을 다해야지.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박진수는 미친 듯이 날뛰었다.
방패로 찍고, 검으로 베고 찌르고···.
그런데 희한하다.
'뭐지? ···힘이 빠지질 않아.'
분명 모기에 물렸다.
지금도 맨살이 드러난 팔뚝에 모기 몇 마리가 앉아있다.
모기독이 주입되고 있을 텐데 왜 아무렇지도 않지?
'이거 설마···,'
효과가 있는 건가?
백스 드럭샵에서 마신 그 모기 해독제가?
그 이유 말고 뭐가 있나?
지금도 팀의 각성자와 적합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효과도 없는 마나 회복제를 연신 들이키고 있었다.
그러나 오로지 자신만은 아무렇지도 않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마나의 힘.
'···일단 잡고 나서 보자.'
박진수의 손에 들린 검이 마나의 기운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 ※ ※
그리고 그날 저녁.
"백사장님, 백사장님!!!"
"어? 박프로."
"모, 모기독 해독제 말입니다."
"해독제라니···, 아하! 아침에 그거? 근데 왜···?"
"이거 더 없어요? 가격은 얼마나 해요? 내가 다 사겠습니다."
"뭐, 뭐라고요?"
그렇다는 말은?
"효과가 있었습니까?"
"엄청납니다. 모기에게 수십 방 물렸는데 멀쩡했어요! 심지어 가렵지도 않고. 이거 진짜 끝내주는 약입니다. 어디서 이 기막힌 약을···,"
"어어어."
백홍표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효과가 있다고?
'진짜?'
백홍표는 서둘러 휴지통을 뒤졌다.
다행히 남아있었다.
직접 확인해보자.
< 백스 드럭샵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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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매 개시(1) >
태주는 오늘 하루 쉬기로 했다.
해독제 만드느라 요 며칠 잠도 제대로 못잤다.
계약을 염두에 둔 드럭샵에도 다녀왔고, 이제 그쪽에서 연락이 오기만 기다리면 될 터.
오지 않으면?
다른 드럭샵과 거래해야지.
그래도 왔으면 좋겠다.
백홍표가 사장으로 있는 백스 드럭샵은 도시에서 평판이 가장 좋은 상점, 사실 그 양반은 구례에서 인덕이 높기로 유명한 사람, 그동안 구례에 있으면서 많이 들었다.
태주는 허름한 여관 숙소에서 혼원무상독령공을 수련했다.
수련의 주요 목적은 독정(毒精) 안정화 작업.
너무 빠르게 3성에 올랐다.
그래서 속도 조절 또한 필요하다.
무작정 독만 흡수하다 보면 어떻게 될까?
제어하지 못하는 독기는 터질 위험이 있다.
일반 내공으로 따지면 주화입마 같은 것.
자칫 잘못하면 독기가 역류해서 도리어 제 몸이 상한다.
독정(毒精)을 압축해서 안정시켜야 한다.
'당분간 독은 끊어야겠네.'
무리하게 키운 독정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뭐, 3성이면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건 충분하잖아.'
천천히 가자. 천천히.
물이 끓어야 쌀이 익지.
혼원무상독령공 3성의 경지를 시스템 각성자와 비교하면 최소 레귤러 이상.
1성일 때도 비기너인 장인동을 죽였다.
놈이 방심한 탓도 있지만.
그리고 경지가 오름에 따라 쓸 수 있는 무공 초식도 늘었다.
무공 하나하나가 스킬이나 마찬가지.
수련을 마치고 태주는 오후에 숙소 밖을 나섰다.
'외출이나 해볼까?'
마침 가볼 데도 있다.
식당에 들어가 간단한 요기를 한 후, 지나다니는 전차에 요금을 내며 올라타고.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구나. 확실히 돈이 많은 동네야.'
자유도시 구례.
면적은 그리 크지 않다.
대신 오밀조밀하게 모여 사는 사람들.
있을 건 다 있다.
시청을 비롯한 관공서, 공항에 기차역, 마수 결정체를 이용한 전기 에너지 발전소, 아파트가 모인 주거촌, 슬럼가.
이처럼 누구나 자유롭게 다닐 수 있지만, 반면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된 구역이 있었다.
저기 보인다.
멀리 보이는 중세풍의 성채.
'진짜 성벽이네. 2323년에 성이라니.'
인공호수 너머에 세워진 거대한 장벽.
일명 캐슬이라고 부르는 특별 주거 지역.
저곳에 들어가려면 배를 타야 한다.
거주민 증명이 반드시 필요하고.
캐슬에 사는 이들은 구례시 부유층과 고등급 각성자, 고위 관리, 자치위원회 의원과 그 가족들이다.
그중에서도 자치위원회.
구례시를 운영하고 책임지는 핵심.
자치위원회 구성원들은 지역 토호 및 유지들.
23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위원장은 없지만 상임 위원이 3명 있다.
노고단 길드 이정학 길드장, 천왕그룹 민동열 회장, 그리고 제국 내무청에서 파견 나온 2급 사무관 지광인.
구례 자유도시의 굵직굵직한 정책은 이 3명의 상임 위원 의사결정에 따라 이루어진다.
'캐슬이라.'
저기 살려면 성안에 집이 있어야 한다.
작은 평수의 아파트라 해도 최소 100억 이상.
그마저도 매물이 나오지도 않았다.
구례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이니까.
설령 마수 웨이브가 일어난다고 해도 캐슬만은 안전하다.
'돈을 벌면 저기서 살아볼까?'
그러나 돈만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건 아니다.
그에 걸맞은 힘도 갖추고 있어야 하고, 연줄도 필요하고.
전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섬진강 줄기 따라 구례장터, 삼한제국 전체에서 손꼽을 정도로 규모가 큰 시장.
뭘 사러 온 건 아니다.
먹고살 돈도 부족하다.
그냥 구경만 하는 거지.
특히 마수 부산물로 만든 장비 같은 거.
'휘황찬란하네.'
마나 거부자로 태어나 군대 입대 전까진 파주 영지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큰 시장도 처음.
적합자, 각성자 전용 섹터에 들어서니 온갖 아이템들이 자태를 뽐내며 진열대에 그득하다.
물건의 가격은···,
'뭐 이리 비싸?'
아이템 가격의 최소 단위가 백만 대.
천만, 억 단위도 널렸고.
기성품만 파는 게 아니다.
주문 제작도 가능하다.
그래서 시장 주변엔 수제 공방들도 즐비했다.
'역시 주문 제작이 낫겠지?'
자신과 영혼이 같은 강호 무림의 절대독마 당군악.
그는 항상 발목까지 오는 화려한 장포를 입고 다니는 걸로 유명하다.
장포 안엔 셀 수 없이 많은 주머니가 달려있었고, 그 안에 각종 암기와 독물들을 휴대하고 다녔다.
뿐인가?
허리띠, 손목 팔목 보호대, 신발, 장갑, 장비란 장비에 죄다 주머니를 만들었다.
싸우다가 암기가 모자라면 안 되니까.
그런 의미에서 독술과 암기술은···.
'진짜 돈이 많이 드는 무공이야.'
하지만 지금 태주는 가난뱅이, 조잡한 단검 하나 사지 못한다.
눈앞에 보이는 가죽 공방.
그곳에 걸린 회색 빛깔 롱코트.
'환상 여우 가죽으로 만든 코트라고?'
시베리아 온대림 마수 밀집 지역에서 사는 환상 여우의 가죽, 코트의 가격은 30억, 주문 제작 필수.
기본적인 방어력도 갖추고 있으면서 여름에 입으면 시원하고 겨울에 입으면 따뜻하단다.
'탐나네.'
가죽 공방에서 환상 여우 가죽으로 풀세트 방어구를 주문하면 돈이 얼마나 나올까? 최소 50억은 줘야 할 터.
다음은 금속 공방.
검이나 칼, 투척 무기등을 판매하는 곳.
유엽비도나 수리비도, 철환 같은 것도 각각 최소한 100개씩은 가지고 다녀야 하고, 가느다란 세침 또한 1,000개 이상 필요한데.
독물은 직접 제조하면 된다.
하지만 무기는 어쩔 수 없이 돈 주고 사야 한다.
강호의 절대독마 당군악이야 사천당가에 소속된 대장장이에게 '몇 개 만들어다오.' 라고 지시만 내리면 즉시 대령해 주겠지만 삼한제국의 절대독마 김태주는 개털 신세.
그림의 떡.
그저 다음에 돈 있으면 사야지 하면서 발길을 돌릴 수밖에.
기성품 판매장도 존재한다.
주로 돈이 쪼달리는 적합자와 각성자들이 이용하는 매장.
그러나 이곳에서도 주문 제작 공방 뺨을 후려칠 정도로 비싼 물건들이 있었다.
프리미엄 마법 매장.
그렇다.
말 그대로 마법.
가격표는 붙어 있지도 않다.
오파츠라고 할까.
지구의 마나 과학 기술로는 해석이 불가능한 아이템들.
예를 들어 자동 방어막을 사용할 수 있는 팔토시.
불덩어리를 하루 3번 쏠 수 있는 반지.
휘두를 때마다 번개 줄기를 뿜어내는 검.
무한히 들어가는 아공간 가방.
어디서 나온 물건인지 모른다.
누가 만들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엄청난 금액으로 팔린다는 것만 알 뿐.
'아공간 가방 하나만 있으면 딱인데.'
그러나 아공간 아이템은 구경도 못 해봤다.
여기 구례 시장에도 없다.
그저 5천억에 팔렸다는 소문 정도는 듣긴 했다.
자신의 아버지인 김웅방 준장도 아공간 가방은 소유하고 있지 않을 터.
'그만 갈까?'
여기 있다간 눈만 높아질라.
순간!
지이이잉!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응?'
이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짐꾼 일 구할 때 친분이 있던 중개인, 아니면···,
"여보세요."
- 백홍표입니다. 그, 그분 맞으시죠? 모기독.
입질이 왔다.
효과를 알아본 모양.
- 전화 괜찮으시면···.
"만나서 이야기하죠. 아까 보니까 드럭샵 앞에 카페가 하나 있던데."
해독제 팔러 가자.
※ ※ ※
"정식으로 인사 드리겠소. 백홍표라고 합니다."
"김태주입니다."
'백스 드럭샵' 맞은편 카페.
태주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자마자 백홍표는 다급하게 물었다.
"해독제 제가 모조리 사겠습니다. 물량은 어떻게 됩니까?"
"효과가 있었나 보죠?"
"당연합니다. 이건 지리산 마수 사냥에 혁명을 가져올 약입니다."
잔뜩 흥분한 백홍표.
"무, 물량은 충분하게 있습니까?"
"네. 원액이 있거든요. 20L들이 물통 10개, 정제수에 희석해서 10ml 시약병에 담아서 복용하면 됩니다."
"···희석 비율은요?"
"3 대 1, 한 6만 병 정도 나오겠네요."
"오! 혹시 다 팔면?"
"즉시 추가 생산 가능하고요."
백홍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물량이 부족하면 헛빵이다.
이제 가격 이야기.
자신이 직접 파트너로 선택한 백홍표 사장.
그에게 물어보자.
"제가 이쪽 분야는 잘 몰라서···, 이걸 얼마에 팔아야 할까요? 백사장님께서 조언을 주세요."
잠시 고민하는 백홍표.
그리고 입을 뗐다.
"저···, 병당 제조 원가는 어떻게 됩니까?"
백홍표의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이는 태주.
'제조 원가라.'
뭐, 정제수와 물통? 거기에 자신의 노동력.
얼마를 책정할까.
"병당 만 원 정도?"
"아! 그렇군요."
사실은 100원도 안 할 테지만.
그의 말에 백홍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약의 수요자는 마나 적합자와 각성자들입니다. 일반인들에겐 변종 3줄 무늬 모기 독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맞다.
산공독 종류라 마나를 가진 사람에게만 작용하는 독.
"물론 각성자, 적합자는 벌이가 괜찮아서 해독제가 있다면 사서 쓰겠지만···, 너무 비싸면 차라리 방충복 입는 걸 택할 겁니다."
모기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
방어구를 착용했지만 맨살이 드러나는 곳은 방충 장비를 그 위에 껴입는 식, 지금까지 그래왔다.
그러나 지리산 일대는 아열대 기후.
엄청나게 덥다.
모기 피하려다 쪄 죽을 판.
"이 해독제는 마수 사냥의 부담을 덜어줄 거라는 건 분명합니다. 가격만 적당하면 무조건 사겠죠."
"그래서 얼마에 팔면 적당하겠습니까?"
"5만 원 정도면, 사람들이 부담 없이 지갑을 열겁니다."
5만 원.
모기를 피하기 위해, 그 정도는 감수할만한 가격.
초기 물량이 약 6만 병이니까, 5만 원이면 30억.
이게 지리산 밀림에 한 번 나가서 채집한 독초를 이용해 만든 원액.
돈 벌기 쉽다.
역시 사람은 기술을 배워야 한다.
"세금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세금?"
"마수 사냥으로 얻은 부산물 판매에 대한 세금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2차 가공으로 유통하는 상품에 대한 세금은 일괄적으로 순이익의 10%입니다. 공급자, 판매자에게 모두 적용됩니다."
30억 팔면 세금이 3억이란 말.
얼마 안 되는 돈이다.
역시 자유도시 구례.
"판매 허가 절차는 어떻게 됩니까?"
"간소한 편입니다. 인체에 무해하다는 사실만 확인되면 되거든요."
남은 건 공급가를 결정하는 것.
백홍표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도매가 3만 9천 원이나 4만 원 정도면 저도 이익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이면···,"
태주도 잠시 고민하다가.
"혹시 약물 판매 허가 절차를 대행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구례엔 연고도, 아는 사람도 없다.
이것도 행정 절차이니 구례에서 오래 산 사람일수록 유리하겠지.
"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약물 특허권 등록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치위원회 약품 허가부서에 아는 사람도 있어서."
"그리고 약물을 제조할 공간도 필요합니다. 되도록 은밀하고 조용한 곳이면 좋겠네요."
"적당한 장소가 있습니다."
"또 차후에 생겨날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데 도움을 주셔야 하고···, 제가 여긴 처음이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죠."
백홍표는 나름 구례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
그래서 태주가 그를 선택했다.
"그럼 3만 5천 원에 공급하는 걸로 합시다. 1년간 독점 판매권도 드리죠."
"···네?"
깜짝 놀라는 백홍표.
"아니, 굳이 그렇게 안 하셔도···."
모기약 해독제,
시판되면 무조건 팔리는 약.
사실 드럭샵 입장에서 공급가 3만 5천 원이면 많이 남겨 먹는 거, 4만 원에 공급한다고 해도 얼씨구나 한다.
그런데 거기에 1년 독점 판매권까지.
"고아원 운영하시잖아요. 약국에서 나는 순이익은 거의 고아원 운영에 쓰인다고 들었는데,"
"어어어, 아, 알고 계셨군요."
"구례에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저도 돕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백스 드럭샵과 백스 고아원.
약 팔아서 고아 돌보는 백사장.
그가 평판이 좋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
"그리고 부탁드릴 게 있는데,"
"뭐든 말씀해주세요."
"수익이 나면 최대한 제 몫을 빨리 댕겨주실 수 있나요? 필요한 곳이 있어서."
백홍표는 기분이 좋은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가능합니다. 돈이 들어오는 대로 즉시 입금하겠습니다."
거래가 끝났다.
태주도 만족했고 백홍표도 그랬다.
그리고 약 보름이 지난 후.
자치위원회에서 판매 허가가 떨어졌다.
300년 전이라면 무슨 동물 실험이니, 임상 실험이니 여러 단계를 거쳐야 시판 허가가 났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특히 자유도시 구례에선.
지긋지긋한 모기 독을 해결할 수 있다는데,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있나?
그리하여 백스 드럭샵에 붙은 광고 문구.
<모기독 해독제 판매 개시!>
<단돈 5만 원으로 변종 3줄 무늬 모기에서 해방되세요.>
6만 병이 다 팔리는 데 채 열흘도 걸리지 않았다.
< 판매 개시(1)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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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매 개시(2) >
잘 팔리긴 할 거라 확신은 했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하겠지.
입소문이 번지려면 최소한 한 달은 지나야 할 터.
그래서인지 첫날은 해독약이 100개도 팔리지 않았다.
그것도 한 사람이 50개 이상 사 갔다.
한번 효과를 경험한 사람.
정식 출시되길 오매불망 기다리던 각성자 박진수 프로.
다음날, 갑자기 손님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판매 개수는 300개.
3일째.
전날과 비슷했지만.
4일째.
그때부터가 전쟁이었다.
"내가 먼저 왔어! 왜 저놈부터 주는 건데?"
"넌 두 번째잖아! 20병씩이나 사가는 새끼가 말이 많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양보할 줄 알라고."
"여기서 한판 뜰까?"
"조용히 해라! 방해하지 말고 당장 나가! 밖에서 죽이든지 살리든지 알아서 해!"
"진짜 이거 만든 사람 제국 은성 훈장 줘야 한다."
"은성 가지고 되겠어? 금성 훈장 줘라."
드럭샵을 가득 채운 고객들.
직원들은 응대하고 판매하느라 바빴다.
"싸우지들 마세요!!! 물량 충분합니다."
이날 팔린 해독제만 무려 3000여 병.
한번 거하게 전쟁을 치렀으니 다음날은 소강상태에 접어들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20병 아니 30병 주슈. 이러다 물건 동나면 안 되잖아. 미리 챙겨둬야지."
"아니, 물량은 충분···,"
"난 50병!"
"어어, 다들 진정해."
이거 불안하다.
물량이 충분할 것 같지 않았다.
5일째 하루에만 8000병이 팔렸다.
이때부터 구례 자유도시에 퍼지는 소문.
효과 확실한 변종 3줄 무늬 모기독 해독제가 백스 드럭샵에 있다.
물 한 모금보다 더 적은 양이지만 지속시간은 무려 10시간이다.
사냥하기 전에 미리 마시면 모기에게 100방을 물려도 끄떡없다.
가격은 겨우 5만 원
그 정도 투자해서 사냥의 효율이 높아진다면야 얼마든지 쓴다.
큰 손들이 뭉텅이로 사 가고 있다.
아마도 곧 완판될지 모른다.
인구 200만의 도시가 술렁였다.
7일째.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백홍표.
황급하게 태주에게 전화해서.
"벌써 3만 병이 팔렸다고요?"
- 내일이나 모레쯤엔 품절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아아, 일단 알겠습니다."
- 죄송하지만 추가 물량 가능하겠습니까?
"···노력할게요."
밤새워서라도 원액을 만들어야지.
재료는 넘치도록 많다.
해독제 l0ml 용량의 성분 중 99%가 정제수.
사실 약제를 준비하는 과정이 오래 걸리지, 원액을 제조하는 시간은 금방.
현재 약물 제조 작업실은 백스 고아원 안에 있다.
몬스터 웨이브에 대비한 지하 피신처가 바로 그곳.
백홍표가 고아원을 지을 때부터 만든 시설.
구례시엔 이런 지하 은신처들이 꽤 많다.
돈이 엄청나게 들어 대출까지 받아 지었단다.
아이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백홍표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
태주 이외의 사람들 출입을 엄금했다.
독을 다루는 일이라 누구도 오지 못하게.
그래서 서로 간의 대화도 스마트폰으로.
- 물량도 물량이지만 사재기 때문에···.
"계속 꾸준히 공급된다고 말씀하셨죠?"
- 네! 그렇게 공지했습니다. 그런데 모기 해독제가 필요한 곳이 우리 구례뿐만이 아니라서요.
지리산을 둘러싼 여러 도시.
하동, 산청, 남원, 함양···.
그곳에서도 해독제가 필요하다.
예상치를 훌쩍 벗어나 버린 수요.
"구매 수량 제한을 걸어요. 인당 2병까지."
- 네, 저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폭발적인 인기.
- 이렇다 보니 생각보다 빠르게 카피약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아!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해독제에 들어간 재료를 다 알아도 만들어내지 못할 터.
혼원무상독령공으로 법제해 약 성분을 뽑아냈다.
결코 똑같은 성분을 추출하진 못할 것이다.
물론 지구의 과학기술도 만만하지 않기에 언젠가는 비슷한 약을 제조할 순 있겠지.
만약 성공적으로 카피하면?
다른 약 만들어 팔면 된다.
약국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람들이 해독제만 사가나?
약국에 온 김에 외상 치료제, 진통제, 소염제, 마나 회복제, 전투 각성제···, 이런 약들도 동이 날 지경.
드럭샵 직원들도 이런 경험은 처음.
몸은 힘들지만 기분은 좋았다.
직원들 모두 백스 고아원 출신들.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장님이 대박을 터뜨리는데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예상치도 못했다.
모기 해독약이 이렇게나 절실한 거였나?
그동안 얼마나 시달렸길래.
결국은 추가 물량이 공급되기도 전에 품절 팻말을 걸어야 했다.
"아, 아니 벌써 다 팔렸어?"
"그러기에 되팔이 새끼들 잡았어야지."
"이게 뭐야? 정상 고객들만 피해 보고."
"자자, 언성 높이지 말고, 아무튼 백사장님, 재입고는 언제 됩니까?"
손님들을 진정시키면서 말하는 백홍표.
"내일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인당 2병 제한을 걸 겁니다."
"2병은 조금 야박한데? 3병까지···,"
"시끄럿,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수량 제한이 걸린 거야."
제한을 걸었지만 새로운 물량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다음 날 아침 오픈런까지 일어났다.
그야말로 폭발적인 반응.
때문에 방충복을 파는 상인들이 피해를 봤다.
어쩔 수 없는 일.
변화하는 세상에 발을 맞춰야지.
이제 방충복을 벗고 사냥할 수 있다.
단지 옷 하나 벗어던지는 거지만 그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사냥의 효율이 2배, 아니 3배로 늘어났다.
그동안 변종 3줄 무늬 모기 때문에 구례시를 떠났던 민간 적합자와 각성자들이 다시 돌아왔다.
모기만 없으면 세금 감면 혜택으로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구례 아니었던가!
모기 해독제의 광풍이 도무지 수그러들지 않았다.
재료를 채집하고, 원액을 만들고.
급기야!
- 군에서 납품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제국군에서요?"
- 네, 초도 물량 50만 병 주문입니다.
"···하아."
- 힘드시겠죠?
"네, 일단 거절하세요. 물량이 충분치 않다고. 여유가 생기면 그때 가서 이야기해보자고,"
- 알겠습니다.
사실 핑계다.
그깟 50만 병 못 만들겠나?
현재로선 제국군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
※ ※ ※
해독제를 판매한 지 약 두 달여, 해독제의 열기가 살짝 식고 있었다.
시중에 충분한 물량이 풀렸으니까.
현재 태주의 계좌에 들어있는 돈은 약 150억.
하지만 돈이 계속 들어온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백홍표 사장도 신이 났다.
돈이 들어오자 제일 먼저 그가 한 일은 고아원 아이들에게 스마트폰 한 대씩을 선물한 것.
고아라고 해서 스마트폰 가지지 못하나?
학원도 보내고, 놀러도 다니고, 좋은 신발과 옷도 사 입히고.
현재 태주의 거처는 구례시에서도 제일 비싸고 시설이 좋은 5성급 호텔 스위트룸, 하룻밤에 5백만 원 정도 한다.
한 달이면 1억 5천이지만 깎아서 월 1억에 투숙하고 있었다.
굳이 비싼 방에서 지낼 필요가 있냐고 하겠지만 독공 수련을 위해선 방해받지 않는 안전한 장소가 필요했다.
룸서비스로 식사도 방에서 해결하고, 전담 버틀러가 있어 간단한 심부름도 시킬 수 있고.
쓸 때는 시원하게 쓰자.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보겠나.
그리하여 순조롭게 익히고 있는 혼원무상독령공.
이제 단전에 있는 독정(毒精)도 안정화됐다.
그리고 마나 거부자의 천형도 완전하게 사라진 것 같고.
3성이 되니 독기가 마나를 이겨버린 듯.
하지만 암기술은 아직 수련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다 던진다고 다 암기술인가?
암기술에 걸맞은 무기들이 필요하다.
그래야 마수 사냥도 시도할 수 있는 거고.
또한 방어구 없이 맨몸으로 나가는 것도 무리.
약한 놈들이야 대검 하나로 충분하다지만 엘리트, 혹은 보스급 마물들과 맞닥뜨리게 되면?
본격적으로 플렉스해보자.
호텔 스위트룸 따위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태주는 따로 시간을 내 구례시장 공방 거리로 갔다.
아직 30억짜리 북극 환상 여우 가죽 코트는 팔리지 않은 모양.
'다행이네.'
팔렸으면 어떡할 뻔했나.
"이 코트 아직 안 팔렸죠?"
"그럼요, 워낙에 비싼 거라."
"제가 살게요."
"네? ···이, 이리로."
가죽 코트는 완성품이 아니다.
체형에 맞게 다시 수선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머니를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럼 추가 비용이 발생해서···,"
"괜찮아요. 똑같이 만들어만 주세요. 그리고 손목 발목 보호대와 허리띠, 조끼와 바지도 주문하겠습니다. 물론 북극 환상 여우 가죽으로."
"아이고! VIP가 오셨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몸 치수부터 잴게요."
그러더니 태주를 슬며시 보면서 입을 여는 공방 주인.
"주문 제작이라 선금은 미리 주셔야 하는데요."
"얼마나요?"
"최소한 물건 가격의 20%를."
"드릴게요. 계좌 이체하면 되죠?"
"하하하! 알겠습니다. 계약서부터 먼저 쓰시죠."
여우 가죽 코트와 각종 장비를 합한 금액은 약 43억.
계약서 쓰고 선금 8억 6천만은 입금하고.
일주일은 걸린단다.
그 정도는 기분 좋게 기다린다.
다음은 금속 공방 거리.
무기도 주문 제작.
암기와 비슷한 물건들이 기성품으로 나와있긴 하다.
가장 대표적인 무기가 스로잉 나이프.
당군악이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유엽비도(柳葉飛刀)와 비슷하게 생겼다.
마수 중 하나인 강철 부리 오골 투계의 뼛가루가 금속에 섞여 있어 가격이 꽤 나가는 투척용 나이프.
그러나 이건 너무 크다.
더 작아야 한다.
"이런 모양과 크기로 100개 주문하겠습니다."
"···100개라고요?"
"네."
"자, 잠시만요. 재료가···, 아! 죄송합니다. 마강철 주괴가 모자라서, 재료 주문을 넣어야."
"다른 것도 주문할 것이 많습니다만."
"헉! 지, 지금 당장 필요하십니까?"
"뭐, 일주일 정도는 기다릴 수 있어요."
"그때까지 꼭 맞춰드리겠습니다."
금속 공방에서도 계약서와 선금을 입금하고.
"보아하니 마나 적합자 분이신 것 같은데, 혹시 검(劍)은 안 필요하세요? 이렇게 작은 무기들로는 마수 상대하기 힘들 텐데."
"주문한 거만 제대로 만들어주세요. 이거 말고도 또 있는데···,"
정말이지 암기술과 독술은 진짜 값비싼 무공이었다.
왜 비싼 암기만 고집하느냐고?
자신의 또 다른 영혼.
강호 무림의 절대독마 당군악은 검을 싫어한다.
정확하게 말해 검 쓰는 새끼들을 싫어한다.
태주 또한 검을 잡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뭐? 검선(劍仙)?
검으로 깨달아 우화등선한다고?
그러면서 암기술은 천박하단다.
검으로 죽이는 건 괜찮고, 암기나 독으로 죽이는 건 안 된다?
고상한 척하는 위선자들.
무릇 무인이라면 검술의 극을 깨달아 이기어검(以氣馭劍)의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는데.
이기어검이 뭔가?
검을 날리는 거 아닌가?
암기도 날리는 거다.
날리면 다 똑같지.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도 마찬가지고.
검으로 죽이나, 암기로 죽이나, 독으로 죽이나.
대체 뭐가 다르다고.
검을 쓰는 족속 중에서 절대독마 당군악이 탐탁지 않아 하는 놈 중 하나가 안휘(安徽)의 남궁세가(南宮世家) 새끼들.
같은 5대 세가의 일원이지만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암기와 독술을 천박한 잡술이라 폄하하며 항상 당가를 무시해왔다.
결국 마교의 발호로 무너졌고.
도(刀)를 주무기로 하는 하북(河北) 팽가(彭家) 놈들도 같잖은 자존심만 내세우는 놈들, 머리가 돌로 된 놈들이라 무식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도 남궁세가보다는 낫다.
가장 최악은 섬서(陝西) 제갈세가(諸葛世家).
얄팍한 머리 굴림으로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놈들.
당군악이 직접 그들을 멸문시켰다.
천마(天魔)가 강호를 휩쓸 때, 제일 먼저 마교에 투신한 놈들이 제갈세가였기 때문이다.
제갈세가 가주였던 제갈천은 천마를 보좌하며 강호를 배신했다.
당시 제갈천의 별호가 뇌마(腦魔).
뭐? 뇌마(腦魔)?
어디 잔머리만 굴리는 새끼가 마(魔)자를 붙이고 지랄이야.
천마와 함께 사이좋게 황천으로 보냈다.
5개 세가 중에서 절대독마 당군악과 가장 친했던 사람들은 진주(晋州) 언가(彦家) 일원들이었다.
왜냐하면 동병상련의 아픔을 함께 겪어왔기 때문이다.
권을 주 무공으로 하는 언가.
하지만 그들의 특기는 독술과 마찬가지로 고매한 무인들에게 천대받았던 강시공(僵屍功)이었다.
강시는 강호의 유서 깊은 장례 문화.
외지에서 죽은 이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스스로 움직이는 강시로 만든다.
두 발을 모아 콩콩 뛰어다니는 강시.
고향까지 뛰어가는데 꽤 긴 시간이 필요하다.
시체를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약물과 술법으로 강시의 몸을 단단하게 만들어야 했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진주 언가의 외공(外功)인 강시공.
더불어 강력한 외공을 바탕으로 한 권법.
사천 당가와 진주 언가는 긴밀한 교류를 통해 서로 발전해왔다.
강시공에 필요한 약물들을 공급해주고, 외공에 대한 묘리도 가르침 받고.
절대독마 당군악의 독문 무공 중 암기 없이 펼치는 무공도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혈인독장(血印毒掌).
진주 언가의 권공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것.
현재 태주의 혼원무상독령공은 3성.
당군악을 통해 알고 있는 무공들은 굉장히 많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펼치는 것은 엄청난 차이.
슬슬 때가 됐다.
실전을 통해 무공의 숙련도를 높여야 한다.
그럼 그 대상은?
당연히 지리산 마수들이지.
그 전에 주문한 장비들을 빨리 받았으면 좋겠다.
< 판매 개시(2)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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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가 싸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