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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게임을 하게 되면 대부분 사람은 주인공에 이입하기 마련이다.

멋진 주인공과 주인공들을 믿고 따르는 동료들.

활기차며, 어둡지만 한 줄기의 빛을 찾기 위한 모험.

최종 보스를 죽이고 나오는 엔딩 크레딧과 카타르시스.

하지만 정진혁이 이입하는 대상은 사뭇 달랐다.

주인공들과 대립하는 존재들.

흔히 악역이라고 부르는 쪽이었다.

비살상 신념을 가진 박쥐 인간보다는 미치광이 광대가.

붉은 강철 갑옷을 두르고 있는 재벌 과학자보다는 아프가니스탄의 테러리스트 보스 쪽에 이입하는 인간이었다.

최종 보스나 악역들은 주인공과 색다른 임팩트가 있었다.

주인공과 사뭇 다르게 무게를 지니고 있으며, 그 스토리 또한 파고들면 선역보다 인상적인 경우가 많았다.

진혁은 그런 악역을 동경하며, 악역의 스토리에 몰입하여 주인공을 플레이했다.

하지만 그런 진혁도 유일하게 이입하지 못한 보스가 있었다.

"이거 너무 쓰레기 같은 캐릭터 아냐?"

리드 아델하이츠 로톤

게임 이름의 메인인 일곱 가지의 재앙을 만들어 낸 장본인!

판타지 게임, <디재스터7>의 마지막 보스이자, 페이크 보스!

하지만 동시에 악역을 좋아하는 정진혁마저 고개를 젓게 만드는 악역남.

그리고 악역을 좋아하는 정진혁을 난생처음으로 질리게 만든 희대의 쓰레기였다.

"아무리 그래도 마지막 보스가 이런 식이면... 좀 그렇지 않나?"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중얼거리는 정진혁.

<디재스터7>의 메인 악역 보스는 절대악 쪽인 캐릭터였다.

절대악은 고전 게임에서 레퍼토리로 나오던 것이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진혁은 리드 아델하이츠 로톤에게서 느낀 절대악이 뭔가 시원치 않았다.

그는 애정 결핍과 세뇌를 통해서 괴물을 만들었으며, 그 괴물들이 후반까지 진혁을 찝찝하게만 했다.

후반에 색다른 반전을 기대하고 몇 번이나 플레이했지만, 그런 건 없다는 듯이 찌질하게 끝나기만 했고, 결국 터져 나온 말이 '너무 쓰레기 같은 캐릭터 아냐?' 하는 물음이었다.

'이게 어떻게 메인 보스로 채택되었을까?'

게임사에서 머리가 없는 듀라한들이 8할이 넘는다거나, 잦은 크런치에 직원들이 실성해서 마지막 보스를 CEO에 이입했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매력적이지 않은 악역은 관심이 없었기에 얼마나 명작이든 간에 다시 손대지 않는 게 진혁의 철칙이었다.

그런데도 진혁은 이 게임을 다섯 번이나 다시 하는 중이었다.

이 찌질한 마지막 보스를 제외하면 다른 악역들이 너무나도 인상적이기 때문이었다.

'죄다 불쌍하네.'

악역의 시선으로 보지 않아도 안타깝기 그지없는 캐릭터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마탑이 만들어 낸 일곱 개의 재앙이 특히 그러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해 절대악과 손을 잡은 여검귀.

종족 차별에 극한의 절망에 치달은 오크 투사.

리드는 그런 이들의 어둠을 이용하여, 그들을 괴물로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단연코 가장 불쌍한 존재라고 한다면.

"진짜 마지막 보스지."

리드 아델하이츠 로톤이 만들어 낸 궁극의 괴물, '코드 네임 : 코스모'.

설정상 나이는 17살이며, 7살 때부터 리드의 각종 고문과 세뇌를 거쳐서 만들어진 괴물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죽지 않는 리드의 머리통을 반으로 쪼개 버리며 등장한 뒤, 주인공과 그 파티를 위협한다.

-죽인다. 모조리 죽일 거야.

-인간들은 죽어야 해. 오크도, 엘프도, 드워프도, 고블린도! 모두! 모두! 지상에 있는 생명들은 모두 파멸시킬 거야!

-하하하하!!!

등장 처음부터 끝까지 꺼림칙한 여성의 보이스로 광소를 터트리는 마지막 보스.

진혁은 그러한 마지막 보스에 정감이 갔다.

리드가 운영하는 탑을 점령하고 그 기록을 읽어 보면, 코스모에 관한 이야기들을 엿볼 수 있었다.

악역 리드 아델하이츠 로톤이 만들어 낸 궁극의 괴물이자, 의도된 실패작.

스스로 실패한 것이 아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실패작이었기에 더욱 정감이 갔다.

'내가 악역이었다면, 이 애를 좀 더 멋지게 만들어 줄 수 있었을 텐데....'

잘못된 사람에게 거둬져 잘못 키워진 소녀.

재능이 있었지만, 그 재능을 시기, 질투했고, 결국 코스모나 리드나 끔찍한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진혁은 그 스토리가 싫었다.

뒷일이 찝찝한, 후회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일들을 좋아할 리가 없을 것이다.

"하으으으.... 잠이나 자자."

진혁은 한숨을 내쉬며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밤이 깊었기에, 이제 잘 시간이었다.

* * *

"탑주님...."

....

"탑주니이임~."

속삭이는 목소리가 진혁의 귀를 간지럽힌다.

꿈에서 들리는 목소리인가 무시해 보려 하지만.

"탑주님, 아침이에요오오...."

목소리는 점차 또렷해졌다.

꿈이 아니라는 걸 인지한 순간 진혁이 눈을 번쩍 떴다.

고개를 돌리자, 황금색 도마뱀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는 게 보였다.

"으헉!"

"으하앗!!"

진혁이 소스라치며 놀라자, 덩달아 놀라는 여인.

자신의 원룸에 없어야 할 의문의 여인이 서 있었다.

"누, 누구야!?"

"네, 넷?! 피비입니다!"

"아니, 당신 왜 내 방에 있냐고!"

"아, 앗!! 죄송합니다! 탑주님의 침소에 마음대로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며 사죄하는 여인.

탑주? 지금 나보고 탑주라고 한 것인가?

"...뭐야 이거?"

그 말에 여인을 보던 진혁의 시야가 확장되었다.

진혁이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작은 원룸이 아니었다.

책상 한 대와 침대 하나, 그리고 다섯 달 치 월세만 한 가치가 있는 컴퓨터.

거기다 바닥에 이틀 치 입은 옷들을 널브러뜨려 놓으면 그것이 바로 정진혁의 방이다.

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아무리 봐도 정진혁의 방이 아니었다.

진혁의 방 10개를 합친 크기의 방에 진혁의 방 사이즈만 한 침대, 그리고 대리석을 깔아 놓은 바닥.

'호텔방?'

진혁은 평생 발도 들이지 못할 5성급 호텔방이었다.

'뭐야, 이거 설마 몰래카메라?'

그런 것치고는 뜬금없었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반인들이 휘말리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게다가 이 방 구조.... 어디서 한번 본 것 같은데....'

진혁과 연관성이 하나도 없는 풍경이었지만 익숙하다.

그것은 단순히 지금 진혁이 보고 있는 방만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 옆에 있는 이 여자....'

거슬리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금발 머리에 금색 사안(蛇眼)까진 그러려니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에 달린 이질적인 뿔 한 쌍까지 더 해지자, 그의 머릿속에서 아주 익숙한 인상의 여인이 되었다.

분명 현실에서는 어깨너머로도 본 적이 없을 만한 여자임에도 지금 쩔쩔매고 있는 것조차도 익숙했다.

"우으읏, 죄송합니다, 탑주님. 요즘 피곤하신 것도 잘 알고 있는데, 너무 일어나지 않으셔서, 아침 일과가 엉망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그만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침소에 들어와 깨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니, 죽이지 말아 주세요! 죄송합니다아!"

평소에는 늘어지는 말투지만, 정신없을 땐 말을 속사포처럼 내뱉는 여자.

겁쟁이처럼 벌벌 떠는 엉뚱한 성격.

'성격이나 외모.... 설마....'

진혁은 머릿속에 걸려 오는 이름을 그대로 내뱉었다.

"피비 아스테리아 로톤...인가?"

"넷! 넷! 맞습니다! 피비입니답! 악, 내 혀...."

흥분한 나머지 자기 혓바닥을 깨물었다.

그녀의 이름이 정답이긴 했지만, 진혁은 등골이 싸늘해졌다.

'뭐야 내 목소리?'

처음에는 목소리가 잠겨서 그런가 했지만, 기침을 연달아 해 봐도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았다.

'피비 아스테리아 로톤이 나를 탑주라고 부른다는 그 말은....'

진혁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단어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다급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을 들여다본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이런 미친...."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진혁이 생각하는 그대로였다.

최악의 악역, 리드 아델하이츠 로톤이 서 있었다.

#2화. 리드 (1)

"뭐야, X발...."

입에서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육두문자.

그곳에는 검은 머리에 덜 깎아 지저분한 수염을 가진 20대 남성이 아닌, 여성처럼 길게 늘어트린 회색 머리를 가진 청년이 서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회색 머리, 각진 눈매와 그 속에 들어 있는 황금색 눈동자.

무게감 있는 중후한 목소리.

그리고 반룡인(半龍人)을 비서로 삼고 있는 탑주.

진혁은 이 모든 사항을 더해서 보았다.

'의심할 여지가 없어.'

정진혁은 리드 아델하이츠 로톤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런 씨발."

다시 한번 더 육두문자를 뱉는 진혁.

다섯 번이나 재탕할 만큼 애정이 깊은 게임인 <디재스터7>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가슴을 뛰게 했다.

그리고 항상 동경하던 악역의 자리라는 것에 더욱 흥분했다.

하지만.

'<디재스터7> 중에, 많고 많은 악역 중에 하필이면 이 개쓰레기의 몸이 되다니!'

리드 아델하이츠 로톤이라는 사실이 그에겐 분노로 작용했다.

"저... 탑주니임?"

고개를 돌리자, 화장실 문틈으로 빼꼼 고개를 내미는 금발 머리가 보였다.

리드의 충직한 조수, 피비가 겁먹은 강아지처럼 말을 더듬으며 이어 간다.

"혹시 뭔가 잘못되셨나요오? 제, 제가 뭐라도 해 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혹시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다면, 사사사, 사과를...."

횡설수설 우왕좌왕.

딱 그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그녀는 당황하고 있었다.

'진정하자, 정진혁.'

진혁이 하는 행동들은 모두 리드 아델하이츠 로톤과 반대였다.

그러니 지켜보고 있는 피비의 입장에선 당혹스러운 일이리라.

진혁은 최대한 진중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가 보도록."

"앗, 그, 그렇다면 저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빼꼼 내밀던 얼굴이 쏙 들어가더니, 문 닫히는 소리가 이어 들린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그럭저럭 잘 넘어간 것은 틀림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른 방향으로 인상 깊은 자식이었으니까.'

진혁이 싫어하는 멋대가리 없는 악역이었던 만큼, 그 정보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분수에 맞지 않게 권위적인 태도.

그거면 대부분은 리드처럼 보일 수 있었다.

실제로도 통했고 말이야.

"후우... 일단 진정하자."

당황하는 모습도 이제 그만.

진혁은 이렇게 도피하고 있어 봐야 풀리는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놈이 가장 먼저 도태된다.

그것은 모든 악역의 법칙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일단 최대한 리드 아델하이츠 로톤에 대해서 알아 간다.'

허세든 뭐든 일단은 리드답게 살면서 주변을 파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산해진 가운데 진혁은 세면대에 기대어 자신의 얼굴을 다시 한번 더 살폈다.

'지금 나이는... 주인공과 조우할 때보다 한참 전이겠군.'

주인공이 리드와 조우할 당시에는 45세에 접어드는 중년으로 주름살이 자리를 잡을 나이였다.

보통 회색 머리라면 노안으로 보일 법도 한데, 깔끔하게 관리한 탓인지 20대 중반의 청년처럼 보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잘생기기도 했다.

'내 몸 상태도 볼 수 있나? 이게 정말 게임이라면, 분명히 상태창도 있을 것 같은데...?'

띠링!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진혁의 앞에 상태창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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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리드 아델하이츠 로톤

직업 : 적막의 탑주

나이 : 35세

성향 : (알 수 없음.)

체력 : 1,432/1,432

스태미나 : 340/340

마나 : 4,982/4,982

[특성]

「적막의 탑주」,「인재를 보는 눈」,「아델하이츠의 혈통」, 「에스콜레이아 차석 졸업자」

[능력치]

<마법 Lv. 4>, <연금술 Lv. 3>, <제작 Lv. 3>, <마도학 Lv. 4>, <마나 감응 Lv. 4>, <원소 감응 Lv. 4>, <정령 감응 Lv. 4>... 외 1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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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치를 레벨별로 나누며, 특성 칸이 존재하는 것.

진혁이 보고 있는 것은 <디재스터7>에서 나오는 캐릭터 상태창이 확실했다.

'완성형 캐릭터 같은데 스펙이 생각처럼 좋지가 않네.'

완성형 캐릭터는 말 그대로 더 이상 발전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캐릭터를 의미하며, 초중반에서만 맹활약할 수 있는 반짝 뜨는 조연급 캐릭터다.

페이크 보스이긴 하지만, 그래도 최종 보스에 못지않게 능력을 지닌 남자였다.

'초월이 하나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능력치의 레벨은 보통 5가 한계이며, 특정 조건을 만족할 경우 초월이라고 하여 레벨을 7까지 올리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보통 초월은 주인공 캐릭터조차도 한 개밖에 올릴 수 없으며, 주인공의 옆에 붙어 있는 주조연급이 아닌 이상 레벨 5가 한계라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레벨이 5가 끝인 세계에서 레벨 4는 결코 무시할 만한 수치는 아니었다.

게다가 리드의 능력치는 마법에 있어서 모든 것을 마스터했다고 무방할 정도로 다양하기에 만능 마법사로서 활약할 수 있을 만한 스펙이었다.

'탑주라는 면에서 또 다르지만....'

레벨 4만 해도 몬스터 한 무리를 쓸어버릴 수 있는 상위 20% 안에 드는 마법사이지만, 탑주가 되면 기본으로 마법은 5를 찍고 가야만 한다.

<마법> 레벨이 5가 되지 않는다면, 다른 것에서라도 장점을 얻어야 하는데, 마나 총량과 회복 속도에 관여하는 <마나 감응>도 4이며, 원소 마법에 필요한 <원소 감응>, 정령술의 기초인 <정령 감응>조차 4였다.

'뭐 적막의 탑주라고 생각한다면, 또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지.'

붉은 장막이라 하여 적막(赤幕)의 탑이라고 불리던 곳이 바로 리드 아델하이츠 로톤의 본거주지.

하지만 많은 마법사가 그의 탑을 아무도 오지 않아서 '적막이 흐르는 탑'이라 부르며 비꼬고 있었다.

그 탑주인 리드의 스펙을 보니 놀림거리가 되는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진혁은 좀 더 실마리가 될 만한 정보에 집중했다.

나이였다.

주인공에게 죽기 10년 전... 즉, <디재스터7> 게임 자체가 시작되기도 전이라는 뜻이었다.

<디재스터7>의 이야기는 엔딩까지 3년이란 시간이 흐르니, 지금은 게임이 시작되기 7년 전인 셈이다.

"10년...."

진혁은 무심코 그 단어를 중얼거렸다.

<디재스터7> 게임 속에 들어온 거면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왜 하필이면 10년 전의 리드로 온 것일까?

* * *

일반 마법사들은 로브를 입는다.

단순한 판타지 세계의 법칙이기도 하지만, <디재스터7>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설명되어 있었다.

검사들의 무기는 검이며, 궁수들의 무기는 활과 화살이다.

마법사의 궁극적인 무기는 바로 '비밀'에 있다.

자신이 어떤 마법을 숙지하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그리고 비장의 수단은 무엇인지는 설령 등을 맞대는 파티원이라도 알려 줄 수 없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는 휴대하고 있는 마법 도구나 서적 등이 기후에 영향을 받으면 성능에 이상이 갈 수도 있었기에 보호하기 위한 차원으로 입기도 했다.

그러한 이유들이 있기에, 탑주들의 경우는 일반 마법사들과 복장이 다르다.

마법사가 비밀을 중시하면, 탑주는 탑의 명성을 중시한다.

그렇기에 옷은 로브같이 자신을 감추는 것이 아닌 귀족들 같은 제복을 입었다.

리드의 경우에는 적막의 탑주 마크가 새겨진 금색을 곁들인 붉은 제복.

현대식 정장과 별반 다른 것은 없었기에 입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똑똑-.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확인하며 마무리하고 있을 때 들리는 노크 소리.

진혁은 목청을 가다듬고 최대한 '리드'를 연기했다.

"들어오라."

조심스럽게 문을 열며, 들어온 것은 피비였다.

"타, 탑주니이임, 준비되셨나요오?"

바깥에서 어리바리한 목소리가 겁먹은 강아지처럼 울린다.

'개라고 생각하니까 진짜 개처럼 보이네.'

새끼 강아지 얼굴을 하고 덩치만 커다래진 골드 리트리버 같은 느낌이었다.

볼살을 잡으면 쭉 늘어날 것 같은 찹쌀떡.

고지식하고 권위적인 인물이 바로 리드였기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면 무게를 잡는 게 중요할 것이다.

"그래."

"...엣?"

강아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뭔가 잘못되었다는 듯한 신호를 보낸다.

'내 연기가 잘못되었나?'

어디가 잘못된 거지?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피비가 이빨을 딱딱거리며 물었다.

"저, 저 오늘 서고 정리 내역이나 마나 베슬 관리 요령에 대해서는 안 물어보시나요오?"

"...."

'그게 뭐야?'라고 반사적으로 물을 뻔했다.

다섯 번이나 정주행한 게임인데도 리드의 머리에도 물음표가 띄워질 정도로 쓸모없는 정보들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리드를 연기하는 데 반쯤 실패한 상황이었고, 수습해야만 한다.

"매일같이 그런 걸 체크할 시간은 없다."

"그, 그치만 언제나 이런 걸 까먹으면 안 된다고 늘 30분 정도는 제가 열창하게 하신...."

"실랑이를 계속하고 싶냐?"

이 불편한 대화를 더 잇고 싶지 않아, 짜증 나는 어조로 그녀를 쏘아붙였다.

그게 정답이었는지, 어리바리하던 피비의 목소리가 바짝 잡혔다.

"아, 아닙니다! 탑주님께서 그러시다면, 그런 거지요오!"

탑주의 말은 진리다.

까라면 까야 하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가져온다.

권위적인 면모가 이럴 때는 편리했다.

그래도 이렇게 끝내면 찝찝하다 싶은지, 리드는 말을 덧붙였다.

"가끔씩 물어볼 테니, 늘 숙지는 해 두도록."

"옙!"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하는 피비.

흠, 좋아.

이걸로 말투나 대화 느낌에선 대충 감을 잡았다.

"가자, 집무실로."

리드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안내하게끔 유도했고, 피비는 리드의 집무실까지 안내했다.

* * *

리드가 있는 장소는 적막의 탑.

적막의 마탑이라고도 부르며, 마법사들이 마법을 연구하며 학문을 넓히기 위해 모이는 마법사들의 집단이었다.

리드는 그곳의 주인으로 사람들은 적막의 탑주라고 부른다.

적막의 탑은 총 82층.

게임 초창기 기준으로 마탑 문하생 120명, 수습 마법사 50명, 중견 마법사 30명, 수석 마법사 5명으로 소규모로 운영되는 마탑이었다.

'게임 속이랑 똑같, 아니 게임 속보다 더 디테일하네.'

게임으로 접했을 때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낼 수 있는 디테일에 한계가 있었다.

현실 그래픽으로 보니 더욱 웅장하고 고요한 곳이었다.

마석으로 움직이는 승강기를 타고 간 곳은 기다란 탑의 꼭대기 층.

탑주의 집무실이었다.

하얀 대리석 바닥에 붉은 돌로 벽을 장식하고, 그 벽에는 유물과 보물 들이 걸려 있었다.

고목으로 만들어진 집무실 책상은 스마트 스크린처럼 조작할 수 있는 패널들이 보였다.

수납 마법에 호출 마법, 마나 조정 관리 마법 등등, 탑 관리에 필요한 모든 패널이 있었다.

"흠...."

리드는 그 패널들을 섣부르게 건드리지 않고, 몸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푸른 하늘과 아래에 구름이 걸려 있는 커다란 산.

그 밑으로 펼쳐져 있는 푸른 숲과 초원. 그리고 작은 마을들.

<디재스터7>의 판타지 세계를 고스란히 담아 놓은 모습이었다.

'아니, 고스란히는 아니지.'

재앙이 등장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황폐화되고, 절규만이 가득한 평야가 되어 버린다.

이러한 풍경도 아주 극초반에 한해서일 뿐이다.

"10년 전의 풍경은 이렇단 말이지...."

진혁은 리드의 몸으로 빙의했다.

그것도 10년 전으로.

"10년 전...."

그 10년 전에는 틀림없이 의미가 있었다.

단지, 기억의 상자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듯 손에 걸리지 않아서 답답할 뿐이었다.

"탑주님, 계신가요오?"

고열을 가한 찹쌀떡처럼 늘어지는 듯한 피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화장실에 있을 때처럼 고개를 빼꼼 내민 채로 이곳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이걸 전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사뭇 밝아 보이는 표정에 총총걸음으로 다가오는 피비.

그녀의 손에는 소중한 보물처럼 제본된 종이가 들려져 있었다.

그 제본지를 건네받는 순간, 리드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프로젝트 : 플라워 가든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리드는 눈에 힘이 들어가고, 반사적으로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탑주님께서 주신 자료들을 이용해서 이번 회담에 쓰일 발표 자료들을 한 번 더 정리해 왔습니다아, 헤헤...."

"...."

"다방면으로 보는 것도 좋을 거 같아 제가 정리한 건 참고용으로만 보시구, 한 번만... 의견을 말씀해... 주시면... 저·····."

칭찬이라도 해 줄까 하는 마음에 헤실 웃더니, 그 웃음이 점차 멎어 들어갔다.

뒤늦게 리드의 안색을 살피면서, 그의 미간이 내 천 자를 그린 채로 인상을 쓰고 있는 걸 본 것이다.

틀림없이 자신의 독선적인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저, 저 탑주니이임... 마음에 안 드시나요오...?"

"...."

"다시 해 올까요오??"

"...응? 아니다, 나가 보도록 해라."

"네, 네에...."

피비는 겁먹은 표정으로 집무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리드는 그런 피비의 상태를 신경 쓰지 않았다.

한순간이었지만, 리드를 연기해야 한다는 생각도 잊어버릴 뻔했을 정도로 당황하고 말았다.

그 '프로젝트 : 플라워 가든' 때문에.

'왜 10년 전으로 왔는지 알 것 같네.'

신이 몰래 중얼거렸던 말을 듣고 소원을 들어준 것일까?

멋대가리 없는 악역의 몸에 빙의되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자신을 괴롭히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프로젝트 플라워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리드의 생각은 바뀌었다.

'모든 이야기의 시발점.'

리드가 악당일 수밖에 없는 이유.

주인공이 모험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

즉, <디재스터7> 게임의 존재 의의나 다름없는 프로젝트였다.

#3화. 리드 (2)

마나를 다루는 것은 선천적인 재능이다.

평생을 마나와 연이 없이 사는 것이 인간들 중에서 8할.

그 2할마저도 각성하는 단계에서 난항을 겪는 이들이 대다수이다.

어떤 이들은 이유식을 먹기도 전에 마나를 다루는 법을 익히는가 하면, 죽기 직전에야 겨우 마나를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기에 마법학에 대해서 저명한 교수조차 이렇게 말했다.

-개인이 마법으로 이룩할 수 있는 경지는 오로지 신만이 알고 있다.

배움으로 시작하여, 배움으로 끝나는 것이 바로 마법.

그 한계는 결코 없다는 마음으로 많은 마법사는 끊임없이 배우고 후대에 지식을 전수하여 지속해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리드는 그런 것을 싫어했다.

내세보다는 현세를 사랑했으며, 뭐든 자신이 두각을 보일 수 있다는 믿음과 욕심을 지닌 남자였다.

하지만 그는 가장 중요한 재능이 없었다.

그 한계를 명확하게 만드는 것은 리드의 마나양이었다.

온갖 수법을 다 써 봤음에도, 그는 천재들이 지닌 마나양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모든 마법들이 최대치인 5가 아닌 4에 머물렀다.

결국, 그는 천재를 향해 노력하는 범인이었을 뿐이었다.

한계에 부딪힌 리드는 절벽 끝에 내몰렸고, 좌절하였다.

그러한 절망과 절실함이 그의 목을 죄어 올 때, 그의 머릿속에서 회생할 기회가 번뜩였다.

-내 마나양을 늘릴 수 없다면, 다른 천재의 마나를 가져오면 어떨까?

제국이 산 높은 곳에 있는 호수의 물을 끌어오듯이 링크를 걸어 버려 인간을 자신의 마나통으로 삼는다.

그것에 도전하는 것이 바로 '프로젝트 : 플라워 가든'이었다.

-인간 하나를 완전히 마나 탱크로 취급해 버린다.

그 개념 자체는 누구나 한 번씩 생각해 보는 것이긴 하지만, 정립해 본 사람은 없었다.

리드는 프로젝트 : 플라워 가든을 통해서 개념을 완전히 정립시켜 버렸다.

천재를 향한 갈망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내려 준 기회.

인간들에게 재앙을 남겨 주는 그 프로젝트가 마침내 완성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리드가 죽게 되는 이유다.'

진혁이 아닌 리드로서, 그 운명이 정해지는 결정적인 프로젝트가 지금 진행 중이었다.

시기상으로 두고 보면, 프로젝트의 공식 따위는 이미 모두 만들어졌고, 적용하는 일만 남았을 터.

'첫 성공이 리드를 완전한 괴물로 만들어 버리지.'

프로젝트 첫 번째 대상이자, 마지막 보스인 코드네임 : 코스모.

그것이 만들어지고 난 이후로 다른 재앙들을 만드는 데 박차를 가한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게 바로 일곱 가지의 재앙, 게임 원제인 <디재스터7>의 주요 보스들이다.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한다...?'

리드는 피비가 정리해 둔 노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펼칠 생각은커녕 손댈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마치 금단의 과실에 손대는 아담과 이브처럼 이 노트를 보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노트가 그의 손가락에 닿는 순간.

"탑주니이임~."

찹쌀떡 같은 피비의 목소리가 다시 울린다.

리드는 고개를 들어 피비를 보았다.

"무슨 일이지?"

"그게, 손님이 찾아오셨어요오."

"손님?"

"네에, 이번 프로젝트에 쓰일 물건들을 찾아오셨다고 하시던데요오?"

리드는 그 물건이 어떤 건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에 쓰일 물건이라면 틀림없이 아이들일 것이다.

잠재력이 개화되지 않은 어린 소년소녀들을 실험용 쥐처럼 사용할 것이다.

본래 리드였다면 틀림없이 반겼겠지만, 진혁의 정신이 들어간 리드는 달랐다.

"나는 관심 없...."

돌려보내려던 순간 말문이 막힌다.

방금 중대한 실수를 할 뻔했다.

'리드는 프로젝트의 첫 대상자를 성공적으로 개조하는 데 성공한다.'

그 말은 즉, 이 이벤트에서 최종 보스인 '코드네임 : 코스모'를 만날 수 있단 뜻이었다.

"에, 돌려보낼까요오?"

꺼려 하는 표정을 읽고 묻는 피비.

"아니."

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들어오라 전해라."

* * *

들어오라고 지시하고 10분 후, 리드는 마석으로 작동하는 승강기를 타고, 32층으로 이동했다.

적막의 탑 32층에는 응접실이 있었다.

문이 열려 있는 응접실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마법사와 거리가 먼 사내가 일어나 있었다.

아니, 인간이 맞나 싶은 첫인상이었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탑주 나으리, 키히히."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날카로운 음성.

'나 겁나 비열해요.'라고 알려 주는 듯한 전형적인 대사와 포즈였다.

리드는 이 남자를 잘 알고 있었다.

외눈박이 쥐새끼, 레토.

툭 튀어나온 앞니에 구부정하게 서 있는 자세가 마치 서 있는 쥐새끼처럼 느껴졌다.

거기다가 한쪽 눈을 잃고, 검은 안대를 끼고 있어 외눈박이 쥐새끼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었다.

"레토...로군."

"키히히, 외눈박이 쥐새끼라고 부르셔도 됩니다요. 외눈이든 쥐새끼든 맘대로 부르십시오. 레토라는 이름은 높으신 분들께선 안 부르시니까 말이지요."

그렇긴 하다.

주변 NPC들이 레토를 취급하는 것을 보면 '쥐새끼'에서 떨어지지 않으니, 그게 익숙할 것이다.

여기서 악역이라면 어떤 대사를 할까?

잠깐 생각하던 리드가 대답했다.

"나한테 명령하지 마라, 레토."

"아이구, 무슨 명령입니까요! 하찮은 쥐새끼가 말입니다."

생리적 혐오감을 드러내자, 그가 겁먹은 듯한 얼굴로 주춤거린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감정 표현이 풍부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리드는 레토라는 인물이 얼마나 계산적인지 알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 하멜의 지하에서 살고 있으며 주로 정보와 심부름을 통해서 지하에서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남자였다.

인신매매, 도박, 밀수 등등....

빛의 아래에서는 할 수 없는 악행들을 일삼으며 생을 연명하는 게 그의 일과였다.

위치로 치면 방관자.

오로지 돈을 위해서만 움직이기에, 돈만 준다면 적들에게도 정보를 파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선역이든, 악역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정보 출처나 내용 자체도 믿을 만한 인물이고.'

가까이하되 물들어선 안 되는 그러한 인물이었다.

리드는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준비한 물건은 가져왔는가?"

"물론입죠! 선생께서 좋아하실 만한 물건들입니다요!"

비열하게 웃으며 하이 톤으로 목소리를 내던 레토가 무거운 목소리로 문밖에서 외쳤다.

"빨리 들어와, 이 돼지들아!"

그 물건을 보는 순간 리드는 말문이 턱 하고 막히고 말았다.

아니,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문명인의 눈으로 보기엔 꺼려지는 광경이었다.

쇠사슬로 묶여 비엔나 소세지처럼 줄줄이 딸려 오는 아이들.

몰골은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야위었고, 눈빛에 생기가 돌지 않았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온 아이들은 총 30명.

몰래 행해지는 인신매매치고는 아이들 숫자가 아주 많았다.

"어후, 죄송합니다요, 탑주 나으리. 냄새가 많이 심하시지요?"

"...상관없다."

레토는 그 표정이 소년·소녀들에게서 풍기는 악취 때문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단지 문명인으로 있으면서 이런 현장을 보는 게 익숙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레토는 손바닥을 비비며 리드에게 말했다.

"어떻습니까요? 주문하신 뒤탈 없이 처리할 수 있는 아이들입니다요, 키히히."

"어떻게 하면 뒤탈이 없을 수 있지?"

"이 녀석들은 모두 왕국과 제국에서 문제만 일으키는 골칫거리들을 잡아들인 것들입니다요. 치안 유지 겸 겸사겸사 뒤를 봐주고 있지요."

쓰레기 같은 놈들이군.

고아원을 운영해도 모자랄 판인데 말이야.

'따지고 보면 그런 고아들을 이용하는 리드도 마찬가지로 쓰레기지.'

변명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레토가 마탑에 발을 들이게 했으니 리드는 할 일을 하기로 했다.

'플라워 가든은 어디까지나 재능이 있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

싹조차 보이지 않는 이들이나, 애매한 능력치를 지닌 사람들은 프로젝트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프로젝트를 과감하게 진행하며 성공시킨 것은 리드가 가지고 있는 능력인 「인재를 보는 눈」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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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를 보는 눈」

타입 : 액티브

상대방의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방되지 않은 특성과 올릴 수 있는 레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인의 잠재력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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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 얼마나 성장할지 알고 있고, 그걸 지켜볼 수 있다.

리드의 열등감을 가속화시킨 그의 저주스러운 특성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눈이 있기에 플라워 가든이라는 과감한 프로젝트를 진행시키는 것이고....'

재앙이라고 불리는 일곱 명과 코드네임 : 코스모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뒤틀린 성격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빛날 만한 악역이 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리드는 그 스킬을 이용해서 쓱 훑어보았다.

인재를 보는 눈이 발동되면서 아이들의 등 뒤에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게 보인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을 집중하면, 리드의 앞에 뜨듯이 상태창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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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알 수 없음.

직업 : 고아

나이 : 알 수 없음.

성향 : 혼돈·중립

[특성]

「재빠른 손놀림」

[능력치]

<소화 Lv. 1>, <은신 Lv. 2>, <화술 Lv. 1>

[해방되지 않은 특성 & 능력]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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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가 아우라가 전혀 보이지 않는 아이를 살펴보자, 해방되지 않은 잠재력이 없었다.

말 그대로 F급인 인재였다.

그들 사이에서 특출 나게 진해 보이는 이들을 몇 명씩 살펴보았지만, 「상인의 재력」이나 「검귀」처럼 마법과 거리가 먼 특성과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리드가 바라고 있는 그런 인재와는 거리가 먼 종류였다.

가장 웃긴 것은 여기 모여 있는 소년, 소녀 중에는 외눈박이 쥐새끼, 레토보다 잠재력이 뛰어난 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리드는 거기서 이상한 것을 느꼈다.

'분명 플라워 가든 1호 대상이 코스모였을 텐데....'

<디재스터7>의 최종 보스이자, 리드의 뒤틀린 애정으로 만들어진 괴물.

그 괴물이 완성되면서, 플라워 가든 계획에 박차를 가하였고, 다른 재앙들이 만들어졌다.

"흐음...."

리드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등받이에 기대자, 레토가 그 모습을 귀신같이 체크한다.

눈칫밥을 먹고 자란 만큼, 이대로 가다간 뼈도 못 추린다는 사실을 직감한 것이다.

"아이쿠, 나으리, 아직 인재가 더 있습니다요. 계속 보시겠습니까?"

"...그러지."

레토가 눈치를 쓱 주자, 그 부하들이 선두에 서 있는 노예 소년을 이동시켰다.

잠시 후, 다른 30명이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 인재들도 마찬가지였다. 쓸모없는 능력에 쓸모없는 태생들.

"다음."

세 번째가 되자, 이제는 대충 눈으로 훑어 잠재력의 크기만 보고, 바로 다음을 불러 댔다.

다섯 번째가 되었고, 총 150명의 노예 소년, 소녀를 보았다.

'없다.'

리드가 찾던 코드네임 : 코스모는 보이지 않았다.

하물며 그 능력의 근처에 가는 아이들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눈에 띄는 인재였으면, 진작에 누군가가 입양했을 테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토에게 그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지금은 화를 낼 타이밍이었다.

"쥐새끼."

"예?"

리드가 팔걸이에 손을 얹으며 주먹으로 턱을 받친다.

"넌 그것밖에 되지 않는 사낸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다른 놈들처럼 나를 만만하게 보는 것이냐고 묻는 거다."

그렇게 묻자, 레토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마법사를 얕보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레토는 그 말에서 죽음을 직감했다.

리드가 눈살을 구기자, 레토는 쥐새끼처럼 비열하게 웃는 것을 멈췄다.

눈치가 빠른 만큼, 리드가 얼마나 짜증 났는지 알 터.

레토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아, 아이고, 무, 무슨 그런! 제가 어떻게 탑주님을 얕잡아 보고 이러겠습니까요...!"

"네놈의 쓰레기 컬렉션은 다른 놈들에게나 보여 줘라. 나는 적막의 탑주, 리드 아델하이츠 로톤이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요...!!"

레토가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사죄한다.

'이쯤 하면 됐겠지?'

조금은 탑주로서 위엄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제 자비를 베풀어 그를 다시 돌려보내면 되리라.

'그런데 석연치가 않군.'

150명.

정확하게 150명만 데려와 보여 줬다는 것이 리드의 마음에 걸렸다.

보통은 그런 식으로 숫자를 딱 맞춰서 데려오는 것은 불가능하니 말이다.

그렇기에 리드는 레토에게 마지막이라는 생각과 함께 질문을 던졌다.

"더 없나?"

"더... 있긴 합니다만...."

"뭐지?"

레토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탑주님이 바라시는 그러한 물건은 아닐 것 같아서 말입니다요. 제가 따로 빼 두었습니다."

"빼 두었다? 몇 명이나?"

레토가 손가락 한 개를 펼쳐 보인다.

"그... 한 명입니다."

#4화. 리드 (3)

한 명.

그 말에 리드는 다리를 꼬며 말했다.

"데려와라."

"그런데 정말 보잘것없는 물건입니다...."

"판단은 내가 한다. 한 번 더 말하게 하지 마라."

레토는 더 이상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부하에게 눈짓했다.

150명이나 봤는데, 따로 빼 둔 한 명을 마음에 들어 한다?

그럴 일은 사실 있을 수가 없다.

레토도 결코 허투루 일하는 인간이 아니었고, 상품을 보는 눈이 있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법이지.'

하지만 그것도 상품의 겉 가치만 알고 있을 뿐이다.

레토가 단순히 상자를 보고 있을 동안, 리드는 그 상자의 안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이 아이입니다."

풍성한 하얀 머리에 멍한 듯한 표정.

자신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 건지조차 모르는 듯한 순진무구한 소녀였다.

"일곱 살배기에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미숙아입니다."

레토는 별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소개했다.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리드는 그런 레토의 표정과 정반대로 눈에 힘이 들어갔다.

'아우라로 방 전체를 메워 버릴 줄이야....'

「인재를 보는 눈」을 통해 보이는 그런 순진무구한 얼굴과 다르게 아우라는 미쳐 날뛰고 있었다.

이 방 전체를 집어삼키는 듯한 무시무시한 잠재력이었다.

리드가 그녀를 가만히 응시해 스펙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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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알 수 없음.

직업 : 고아

나이 : 7살

성향 : 혼돈·중립

체력 50/50

스태미나 50/50

마나 : 40/40

[특성]

「없음.」

[능력치]

<소화 Lv. 1>, <순수 Lv. 5>

[해방 되지 않은 특성 & 능력]

「마법의 지배자」, 「적응의 대가」, 「이터널 홀」

<마법 Lv. 7>, <마도학 Lv. 7>, <마나 감응 Lv. 7>, <정령 감응 Lv. 7>, <정신력 Lv. 6>... 외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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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에 시작해 17살 때 완성되어 버린 괴물.

틀림없다.

'이 아이가 코드네임 : 코스모다.'

리드는 표정 관리를 하기 바빴다.

순진한 얼굴 속에 감춰 둔 경이로운 스펙에 쩍 벌어질 것 같은 입을 슬쩍 들어 올린 검지를 깨무는 것으로 해소한다.

'예상은 했지만, 사기적인 능력이구만....'

마법에서 최고로 쳐준다는 특성인 「마법의 지배자」.

모든 교육을 2배 빠르게 흡수하는 「적응의 대가」.

개화하기만 하면 마법의 정점에 선 블루드래곤보다 마나양이 월등히 앞서게 되는「이터널 홀」.

심지어 주인공을 마법 캐릭터로 해도 이 특성을 얻기 위해선 몸을 비틀고 비틀어야만 겨우 얻을 수 있는 EX등급의 능력들만 갖추고 있었다.

'거기다가 거의 모든 마법 관련 능력치가 초월할 수 있는 상태다.'

후반부에 주인공과 세계를 애먹이는 와일드카드다웠다.

이런 괴물 같은 아이를 여태까지 어떤 마법사도 거둬들이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역시 그냥 보면 둔재처럼 보일 수밖에 없네.'

체력도 적고, 스태미나도 적으며 마나는 더욱 적다.

한 대만 잘못 쳐도 죽는 개복치 같은 소녀였다.

언뜻 보면 마법사로 육성할 만한 인재가 아니라고 여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습니까요? 역시 다른 아이들을 다시 불러들여서-."

"얼마지?"

"예, 옛? 이 아이를 사실 생각이신지요?"

레토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리드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리드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노려본다.

레토는 다시 말하게 하지 말라는 그의 경고를 다시 떠올린다.

"그, 500유피입니다요...."

레토는 본래 100유피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리드의 태도를 보고 다른 노예들과 똑같은 가격인 500유피를 불러 버리고 말았다.

"주도록 하지."

"저, 정말입니까?"

쿨하게 승낙해 버리는 리드.

레토가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500유피라고 부른 건 네놈이다. 그만한 값어치가 있으니 그런 거지 않나?"

"아암요! 다, 당연한 말씀입죠! 장사꾼이 신뢰가 없으면 뭐로 먹고산답니까~! 감사합니다요."

손바닥을 비비며 비열하게 웃어 대는 레토.

그의 왼쪽 눈은 '돈 냄새를'이란 글귀가, 오른쪽 눈에는 '맡았다'라는 글이 보일 정도로 기분 좋은 얼굴을 하는 게 보인다.

리드도 그가 비싸게 불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호구 잡았다는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 정도의 밑 작업은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정보원으로 레토를 쓰기 위해서니까, 이 정도는 쿨거래 해야지.'

탑주인 리드에게는 500유피가 크지도 않았다.

레토의 입장에서도 앞으로 거래를 통해서 더 많은 이득을 챙길 테니, 서로 이득이다.

리드는 피비를 불러 500유피를 지불하게 했다.

은화 5냥을 건네받은 레토는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키히히."

마지막까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나가는 레토.

리드는 바깥 풍경을 보았다. 레토가 끌고 온 노예들을 실은 마차가 멀어지는 게 보였다.

'저 아이들에겐 어차피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괜스레 동정을 베푸는 건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다.

책임지지 못하면 어차피 다시 노예사냥꾼들에게 잡히거나, 레토보다 더욱 지독한 놈에게 잡힐 테지.

리드는 고개를 돌려 소파 위로 시선을 던졌다.

꾀죄죄한 옷에 떡 진 백발, 코 흘린 자국이 선명한 인중.

유일하게 빛나는 것은 순수를 담은 붉은 눈동자.

붉은 눈, 적안은 마가 낀 눈이라 하며, 저주의 징표로 여긴다.

하지만 잘 가공한 루비 같은 이 눈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리드는 무릎을 꿇으며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녀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당황해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았다.

<순수>라는 능력치가 있다는 건 말 그대로 어디에도 물들이기 쉬운 상태라는 뜻.

<순수>가 있는 한 그녀의 성향과 능력치는 교육자와 환경에 따라 움직이며, 머리가 굳으면서 <순수>가 사라진다.

고아로 살아오면서 7살이 될 동안 <순수>의 스텟이 깎이지 않았다는 게 리드에겐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순수한 아이를... 그 지경으로 몰고 갔단 말인가.'

리드는, 아니 정진혁은 리드가 더욱 혐오스러워졌다.

리드는 천재가 되고 싶었던 범재였다.

재능이 없다는 그 한계는 리드를 절망 속으로 몰고 갔고, 끝에는 열등감에 잡아먹힌 괴물이 되었다.

소녀에게조차 질투의 마수를 뻗었고, 플라워 가든이라는 계획으로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용서받지 못할 짓을 했다.

리드는 고개를 들어 다시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멍하니 앉아 있던 소녀가 고개를 돌리며 리드와 눈을 마주쳤다.

순수한 천재와 뒤틀렸던 범재.

그 둘은 서로를 보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

리드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고갯짓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누구세요?'가 아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라는 것을.

리드는 담담하게 자신이 할 말을 이어 갔다.

"넌 나를 모르지만, 나는 너를 알고 있단다. 그리고 너와 내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두 알고 있지."

훗날, 리드는 이 소녀에게 죽는다.

뒤틀리게 될 관계, 후회만으로 가득할 삶.

소녀는 모르는 미래, 오직 리드만이 알고 있는 미래.

"하지만 그 미래는 없을 거다."

그것을 바로잡는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어지지 않을 망상이 되어 버릴 추억.

이 순진무구한 소녀는 플라워 가든의 희생자인 코드네임 코스모가 아닌.

"넌 이제부터 내 딸이 될 테니까."

적막의 탑주의 양녀가 될 운명이니까.

리드는 소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소녀의 시선이 리드의 손으로 내려갔다.

흙과 먼지 범벅인 손과 다르게 새하얗고 고운 손이었다.

리드가 한 말은 모두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진심은 통한다는 사실.

이 사람이 진심으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소녀는 자신의 손을 붙잡은 리드의 손에 다른 손을 포개었다.

양손으로 감싼 그녀가 고개를 들어 리드와 다시 눈을 마주쳤다.

"히히히."

소녀가 웃었다.

태양보다 따스한 웃음이다.

* * *

코드네임 : 코스모를 입양하고 난 뒤로 리드는 가야 할 길을 확실히 정했다.

'페이크 보스, 리드의 인생을 바꾼다.'

멋대가리 하나 없는 찌질한 악당 리드에서, 적어도 누군가의 인상에 남을 수 있는 남자 리드로 말이다.

그러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리드는 하나씩 메모해 보기로 했다.

'우선 프로젝트 : 플라워 가든은 폐기한다.'

1. 플라워 가든을 폐기한다.

프로젝트의 첫 번째 대상인 코드네임 : 코스모가 실험체가 아닌 양녀로 거두어졌으니, 똑같은 전철을 밟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생리적으로도 무리야."

누군가의 증오를 부추기며, 괴물로 만드는 것은 리드의 타입이 아니었다.

2. 탑주로서 역할을 다한다.

리드는 언제나 적막의 탑주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다.

그는 탑을 벗어나 <디재스터7>의 대륙인 클라우드 대륙을 집어삼키고 싶다는 야욕을 항상 품고 있었다.

그 야욕 때문에 오히려 모든 것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었고, 끝내 리드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탑주의 역할이 무엇이냐....'

탑은 마법을 발전시키고, 탑의 높이로 마법의 위상과 명예를 과시하는 마법사들의 자랑거리다.

물론 거기서 끝은 아니다.

탑을 세우고 왕국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소마을을 보호하며, 주변에 서식하는 몬스터와 마나에 이변이 생기지 않았는지 감시하고, 그 이변을 분석하며 평화와 안녕에 이바지하기 위해 힘쓰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그러한 자경단의 임무를 맡은 것이 탑의 마법사들이었다.

'...그리고 허구한 날 터지기 바쁘지.'

판타지 세계관이 늘 그렇듯이 그 위상과 명예가 부서지면서 시작된다.

부서지고, 부서지고, 또 부서진다.

마치 하나씩 빠지고 빼며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다가 젠가처럼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듯이!

적막의 탑 또한 다른 마탑들처럼 무너져 내릴 운명이었다.

다만, 적이 아닌 주인공의 손이라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탑을 지켜야 해.'

리드가 가지고 있던 잔재 의식이 남아 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반사적인 판단이었다.

다음으로 마지막 할 일을 메모했다.

3. 인재들을 모집한다.

리드의 특성 중 가장 빛나는 것은 역시 「인재를 보는 눈」이었다.

10년 전의 세계인 만큼 재능이 있는 이들이 모두 자신의 재능조차 못 알아보고 방황하고 있을 터.

"흠...."

그 조항에선 두 가지로 나뉘게 된다.

3-1. 양녀로 거두어 둔 코드네임 : 코스모를 교육하는 데 집중한다.

3-2. 코스모가 아닌 다른 재앙이 될 재목들도 모아 둔다. 다다익선이다.

펜대로 메모지를 톡톡 치던 리드가 고심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1번이겠군."

우선은 한 우물부터 지긋하게 파는 것.

가장 훌륭한 인재인 코드네임 : 코스모조차 제대로 키우지 못한다면, 그건 이미 실격인 셈이다.

'아버지가 되어 준다고 했으니까.'

연구자와 실험체가 아닌 아비와 딸로서, 그녀의 능력을 키운다.

아버지로서나, 양육자로서나 모든 것에서 초보나 다름없는 그에겐 지금 당장 그 소녀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다.

처음엔 욕심을 죽이고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는 게 가장 맞았다.

"아."

그렇게 생각하자, 리드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가 번뜩였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3번의 다음을 떠올리고 그대로 써 내려간다.

4. 나도 마찬가지로 강해진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리드에겐 틀림없이 적이 많을 거야.'

그 성격을 두고 적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게다가 지금 생각해 둔 인물들도 모두 악당들이고.'

리드가 앞으로 모집할 인재들은 아무래도 악당의 운명인 사람들이 대부분.

그런 인재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감정을 품고 있고,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언젠간 코드네임 코스모도 자신을 능가하는 마법사가 될 것인데, 그것에 대해서 충분히 대책을 세워 놓지 않으면 분수에 맞지도 않는 지위를 노리는 격이 될 것이다.

거기서 리드는 한 가지 문제에 더 직면하게 된다.

'얘는 이미 완성형 캐릭터란 말이지....'

마법에서 모든 분야에 접근했고, 그 한계에 부딪혔기에 프로젝트 : 플라워 가든이라는 극단적인 수를 통해 더 큰 힘을 얻으려고 했던 놈이었다.

'일단 만능인 점에서 선택 폭이 넓다.'

리드 아델하이츠 로톤은 일대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고화력을 요구하는 마법들을 사용하는 건 무리겠지만, 그 이하로는 모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만능형 캐릭터였다.

'역시 선택하라면 이 능력인가?'

리드가 보고 있는 능력은 원래 리드의 머릿속에서 깊숙한 곳에 봉인해 뒀을 만한 것이었다.

<마도 공학 Lv. 4>

마석과 마법 주술 따위를 기계에 접목시켜 힘을 끌어내는 기술이었다.

예를 들자면, 마탑의 승강기나 집무실 책상의 스크린 마법도 모두 마도 공학을 통해서 이뤄 낸 것들이다.

하지만 리드가 봉인시켜 둘 만큼 이 능력에 대해선 상당히 취급이 좋지 않았다.

마도 공학의 발전이 순수 마법학을 해친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결국 <디재스터7> 스토리 도중에선 마도 공학을 인정하고, 그 힘을 빌려서 재앙을 물렸지.'

부족한 능력을 보충하는 데 가장 탁월한 기술이었다.

뭐든지 애매하기 그지없는 리드의 능력을 살리기엔 마도 공학이 제격이었다.

필히 리드도 그 사실을 알고 견습 시절부터 단련했을 터였다.

하지만 결국 가장 바라던 것은 순수 마법이었다.

편법을 사용하는 것은 결국 범재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고, 탑주가 되면서 마도 공학은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순수를 좋아하는 다른 마법사들조차 마도 공학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돼.'

그런 미래가 장담된 세계에서 굳이 고집이 필요할까?

'마도 공학을 파고들면, 다른 마법들을 5까진 끌어올릴 수 있어.'

능력만 더 된다면, 초월이라고 불리는 6단계까지도 가능할 수 있었다.

이것은 오직 디재스터7을 해 본 리드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5화. 로자리아 (1)

"탑주니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딱 정하고 나니, 피비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다만, 평소처럼 늘어지는 목소리가 아니라 빠릿빠릿해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자, 피비의 머리에서 물기가 막 마른 흔적이 보였다.

"분부대로 아가씨를 씻기고 왔습니다아."

개운한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소녀와 함께 들어온다.

꾀죄죄한 모습조차도 인상적이었던 소녀는 어느새인가 빛이 나고 있었다.

막 삶은 명주실을 뽑아낸 것처럼 가느다랗고 윤기가 도는 백발과 촉촉한 루비석 눈동자.

가벼운 하얀 원피스까지 입히니 인형이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옷은 어디서 구했나?"

"인형이 워낙 많아서, 헤헤.... 아가씨 사이즈에 딱 맞더라고요오."

"흠...."

인형이라 느껴진 게 괜히 그런 게 아니었군.

"잘했다. 앞으로 이 탑에서 지낼 테니, 다른 옷도 부탁하마."

"네, 넷! 맡겨만 주세요오!"

"이제 나가 보도록 하거라."

잘했다는 한마디에 헤실헤실 웃는 피비.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러났고, 다시 리드와 소녀 둘만이 방에 남았다.

"어, 음...."

"...."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을 모르는구나."

"...."

"네 이름이 뭔지 알고 있니?"

"...?"

그녀가 조심스럽게 리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내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일단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게 보인다.

코드네임 코스모였던 만큼, 코스모라는 명칭이 친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최종 보스인 미쳐 버린 여자였을 때의 이름이었다.

아니, 이름도 아니었지.

코드네임은 말 그대로 코드네임일 뿐이다.

애정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단순한 글자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녀의 이름은 무엇이 좋을까?

'사실 미리 생각해 뒀지.'

<디재스터7>의 마지막 보스를 생각하면서, 만약 자신이 코드네임 : 코스모를 키웠더라면 뭐라고 불렀을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이름으로 불러 보았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로자리아다."

그 선언과 함께 그녀의 눈이 한층 더 커진다.

마음에 들었다는 신호처럼 리드의 앞에 메시지가 떴다.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 알 수 없음. → 로자리아 아델하이츠 로톤]

[직업이 변경되었습니다. 고아 → 적막의 탑주의 양녀]

변경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그녀의 직업마저 변경되었다.

이걸로 완전히 리드 자신의 딸이 된 셈이다.

'그런데... 자기 이름조차 모르는 애가 이걸 알아들었을까?'

말을 하지 않으니 아직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로자리아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며, 리드의 집무실을 살펴보았다.

"로자리아."

"...?"

다시 고개를 돌려 리드를 보는 로자리아.

확실해졌다. 그게 자신의 이름이라는 걸 아는 것이었다.

"그래, 네 이름은 로자리아란다."

리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자리아는 가만히 웃었다.

* * *

클라우드 대륙의 마법 분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제국 혹은 왕국에 소속되어 있는, 이른바 공방이라고 불리는 마법사들.

그리고 지맥에서 마나를 끌어와 마법 연구와 주변 치안에 신경 쓰는 탑의 마법사들.

둘 다 마법의 안녕과 발전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지만, 그 발전에서 목적이 상당히 차이가 난다.

공방의 마법사들은 인간들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치유 계열과 방어 마법에 치중한 백마법을 중시한다면, 탑의 마법사들은 저주와 공격 계열에 더 비중을 둔 흑마법을 중시하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디재스터7>에서는 탑이 상당히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편이었다.

클라우드 대륙에는 총 13개의 마탑이 존재한다.

매달 '탑주회담'이라는 것을 열어, 공방 마법사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정보들을 공유하며,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한 일을 한다.

공방과 탑 사이의 갈등이 강할수록 탑주회담을 통해서 유대를 확인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지금 같은 시기에선 결석 자체가 금기나 다름없었다.

고풍스러운 가구로 꾸며진 회담 장소.

클라우드 대륙의 지도가 새겨져 있는 커다란 원탁 테이블을 13개의 의자가 삥 둘러싸고 있었다.

하지만 13탑주들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는 12명만 앉아 있는 상태.

빈자리는 '리드 아델하이츠 로톤'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의자였다.

"로톤은 오늘 결석인가?"

거구의 사내가 빈자리를 슬쩍 보며 운을 뗀다.

그러자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한마디씩 더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번 회담의 주인공이라고 할 사람이 오지 않다니, 의외네요."

"프로젝트 이름이 플라워 가든이던가요? 풍문으로 많이 들었습니다만, 상당히 만족스러운 아이디어라고 자옥의 탑주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어머~. 무슨 말씀을 그리하세요. 설레발친 건 녹목의 탑주님이시지 않나요?"

친목 겸 정보 교환이라는 명목으로 모이긴 했지만, 살벌한 기 싸움이 오가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거구의 사내는 이어지려는 싸움을 중재했다.

"나이를 그렇게 먹고도 유치하게 말싸움이나 할 생각인가?"

"실례했습니다."

"아무튼, 적막의 탑주 결석 사유가 뭔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거구의 사내의 말에 모두가 침묵한다.

리드 아델하이츠 로톤은 적막의 탑주. 적막의 탑은 모든 탑을 통틀어서 가장 약한 탑이었다.

리드가 먼저 손을 뻗고, 인맥을 넓히려 들기도 바쁜 위치인데, 또 리드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굽힐 때 굽힐 줄을 모르며, 할 말을 해야 할 때 할 말을 할 줄 모르는 뒤틀린 인간이었다.

그러니 그런 적막의 탑주와 의사소통을 하는 인간은 물론, 현황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을 터.

...라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이번 프로젝트 엎어졌다고 하더라."

그 말을 꺼낸 쪽으로 시선이 집중된다.

그곳에는 10대 초반대의 소녀만 한 체구를 지닌 여자가 앉아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매사가 귀찮다는 듯한 건방져 보이는 표정.

다른 탑주들처럼 정갈한 제복이 아닌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있으며, 원탁에 발을 올리는 무례한 행동을 하고 있음에도 아무도 질책하지 않고 있었다.

흑천의 탑주, 프리지아 불칸 다크사이더.

"흑천의 탑주께선 뭔가 아시고 있나 보군요."

"별로 알고 싶었던 사실은 아니었지만, 적막의 탑에서 일하는 애송이 하나가 말해 주더라고."

"프로젝트가 엎어졌다고?"

"그래, 적막의 탑에서 근무하는 애송이가 말해 주더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든 이론을 정립해 놓은 프로젝트를 갑자기 폐기했다고 말이야."

"폐기를 했다는 것은... 실속이 없는 프로젝트라는 뜻이겠군."

"혹은 거짓말이거나요."

마법 연구에 관련된 프로젝트는 탑에 그만한 정보와 돈이 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탑주인 자신의 위상을 보여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모든 탑주들은 언제나 장기간이든 단기간이든, 1~2개씩 프로젝트를 두고 있으며, 실패하든 성공하든 어떻게든 결론을 짓기 마련이다.

늘 있는 일이긴 했지만, 적막의 탑의 경우엔 사뭇 다른 이야기였다.

다른 탑들보다 층수도 낮으며, 인력도 적고, 그나마 있는 것이라곤 돈밖에 없는 최하위 탑주.

그런 탑주가 자신의 명성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있는 말, 없는 말 다 끌어내 '프로젝트 : 플라워 가든'으로 재기의 도약을 하려는데 그게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기대한 만큼 반감이 들어 오히려 나락에 처박히는 꼴이 된다.

"로톤도 드디어 끝물인가 보군."

모두가 생각하고 있지만, 함부로 뱉을 수 없었던 말.

그렇게 무언의 동의를 하고 있던 찰나.

"리드 로톤이 그럴 인물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철면피가?"

반박하는 이가 나왔다.

푸른 머리의 마탑주가 일어서며 반문했다.

훤칠한 키에 정갈한 제복에 어울리는 무게감 있는 몸짓.

날카로운 눈매 속에 감춰진 푸른 눈동자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벽린의 탑주, 돌로레스 제이드였다.

"그럴 인물이 아닙니다. 그 인간은 악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인물이죠. 간악하고, 영악하며, 사악한 인간이지요."

"에스콜레이아의 수석 소꿉친구가 변호에 들어갔군."

프리지아가 빈정거리며 낄낄 웃기 시작했다.

돌로레스는 반대편에 앉아 있는 프리지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런 별명은 그만두라고 했을 텐데요, 흑천의 탑주? 동기라는 걸 제외하면 접점이 하나도 없는 분입니다."

"늬예, 늬예, 미안합니다. 이러면 되나?"

푸른 머리의 탑주가 사납게 노려보지만, 프리지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건성으로 사과를 건넨다.

"그래서 벽린의 탑주는 뭔가 다른 생각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자신의 명성을 내걸고 홍보했던 플라워 가든을 발표하는 것을 포기할 만큼 위험한 마법을 발견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로 경솔한 생각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리드는 그런 경솔한 생각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인간이었다.

"하긴 적막의 탑주 성격으로 플라워 가든을 엎어 버렸다면...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생겼다고 볼 수밖에 없네요."

"흑천의 탑주는 더 아는 것이 없습니까?"

"내 배때기에 만능 정보 주머니라도 달아 놓은 것도 아닌데,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알아?"

적막의 탑에 근무하는 마법사라고 해도 프로젝트 : 플라워 가든의 정확한 내용에 접근할 만큼 실력이 있는 이는 아니었기 때문이었기에 정확한 사정은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모두가 침묵한다.

더 이상의 추측은 뱉지 않았다.

그들은 돌로레스가 한 말에 집중했다.

만약 그 말대로 위험한 마법을 발견한 것이라면?

'오히려 더 궁금해지는군.'

'틀림없이 실속이 없을 것 같은데도 말이야.'

프로젝트 플라워 가든에서 느낀 반감과 배신감보다는 적막의 탑주가 숨겨 놓은 정보가 무엇인지 더욱 궁금해져 버리고 말았다.

* * *

한편, 탑주회담에서 그런 대화가 오가는 그 시각, 적막의 마탑.

리드가 하고 있는 것은 비기를 연마하는 것도, 금지된 흑마법을 연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게 무슨 단어인지 알겠니?"

"바람!"

"이건?"

"사과!"

로자리아의 언어 교육을 직접하고 있었다.

리드가 그녀를 양녀로 들였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탑 내부에서도 아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주된 업무 자체는 크게 없었고,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을 때만 해도 운영을 피비가 도맡아서 했었기에, 리드는 할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리드는 탑주의 서재에서 로자리아의 언어를 교육했다.

리드가 여태까지 가르친 모든 단어들을 완벽하게 흡수했고, 대답했다.

단, 하나만 제외하고.

"자, 그러면 마지막 문제. 나는 누구지?"

"아뿌아!"

"내 이름 말이야."

"아뿌아!"

유독 리드 자신을 가리킬 때만큼은 그녀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 특유의 뭉개지는 발음에다가 해맑게 대답하니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웃는 얼굴에 침을 어떻게 뱉을 수 있겠는가?

"그래, 아뿌아다, 아뿌아."

"히히."

방실방실 웃는 로자리아.

순수한 루비석 눈동자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녀가 읽는 것은 클라우드 대륙의 만물들이 기록되어 있는 백과사전.

마법을 연구하는 마탑에 동화나 영웅전기 같은 소설은 없었다.

그중에서 그림과 글이 가장 많은 책은 그 백과사전뿐이었다.

'설마 일주일 만에 말이랑 글자를 깨칠 줄이야.'

딱히 빡빡하게 가르치거나 하진 않았고, 리드도 특별히 교육법이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리드가 책을 펼치고 그림을 보여 주면, 그 그림이 뭔지 말한다.

그런 식으로 물 흐르듯이 말과 글자를 가르쳤다.

'내가 개떡같이 말하는 거 같은데 찰떡같이 알아듣는단 말이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리드가 말을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던 소녀라고 믿기 힘들었다.

'「적응의 대가」가 발현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란 말이지?'

리드는 혹시나 자신이 놓쳤나 싶어 「인재를 보는 눈」을 통해서 다시 한번 더 로자리아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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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로자리아 아델하이츠 로톤

직업 : 탑주의 양녀

나이 : 7살

성향 : 혼돈·중립

체력 70/70

스태미나 60/60

마나 : 40/40

[특성]

「없음.」

[능력치]

<소화 Lv. 1>, <순수 Lv. 4>

[해방되지 않은 특성 & 능력]

「마법의 지배자」, 「적응의 대가」, 「이터널 홀」

<마법 Lv. 7>, <마도학 Lv. 7>, <마나 감응 Lv. 7>, <정령 감응 Lv. 7>, <정신력 Lv. 6>... 외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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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발현되지 않았어.'

당연한 일이었다.

마법에 관련된 일을 여태까지 한 적이 없는데 갑자기 마법이 발현되는 건 하늘에서 금화가 떨어지기 바라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마법 교육도 하긴 해야 할 때지....'

언어도 어떻게든 교육하는 데 성공했지만, 마법은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일주일 동안 고민해 보았지만,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서 리드는 일부러 탑주회담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탑주회담에 참여하는 건 이도 저도 못하게 되는 최적의 상황을 만드는 일이지.'

회담 전에 미리 밑 작업을 해서 다른 탑주들을 기대하게 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기대를 하게 만든 만큼 반감이 온다.

리드는 그 마음을 알고 있었고, 탑주회담에서 공식적으로 사과하여 어른처럼 대응해야 한다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뭐, 회피한 덕분에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교육하는 데 성공했지....'

어른스럽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로자리아가 일주일 만에 문자를 익히는 것은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리고 이제는 다음 단계에 들어설 차례였다.

"로자리아."

"응?"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로자리아가 고개를 돌려 보았다.

"마법을 배우고 싶지 않느냐?"

리드의 물음에 적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나기 시작했다.

#6화. 로자리아 (2)

"배울래."

순수한 동경이 담겨 있는 한마디.

마법의 지배자를 가지고 있는 소녀답게 열의가 넘치는 표정이었다.

"그럼 배워 볼까?"

"응!"

로자리아를 가르치기 위한 것도 있지만, 가장 큰 목적은 역시 자신도 마법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탑주가 마법을 쓰지 못한다.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농사지을 줄 모르는 농부, 명예를 모르는 기사이며, 영토와 군대가 없는 왕처럼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이다.

'상태창도 있고, 다 있는데... 마법 스킬창만 없단 말이지.'

<디재스터7>의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스킬창.

단축키로 등록해 버튼만 누르면 알아서 스킬이 발동되는 그 창만큼은 없었다.

그러니 능력이 있어도 사실상 제로인 상태.

'이럴 줄 알았으면, 마법사 캐릭터라도 좀 열심히 할 걸 그랬나?'

마법사 캐릭터는 육성도 어렵고, 부각되는 면이 별로 없기에 다섯 번 중에서 딱 한 번만 했던 유형이었다.

리드는 슬쩍 고개를 내렸다.

반짝반짝.

백과사전을 처음 읽을 때만큼 지식에 대한 욕구가 충만한 표정이었다.

리드는 뒤에 쫄래쫄래 따라붙는 로자리아를 데리고 서재를 뒤지기 시작했다.

마법사에게 서재는 일종의 발자취이며, 그 사람의 정보가 담긴 곳이다.

로브로 몸을 감싸 비밀을 유지하듯이 탑주의 서재는 오로지 탑주만이 출입할 수 있으며, 그 이외에 외부인들은 사실상 출입이 금기시되는 장소였다.

외부와 단절되어 있기에 권위적인 면모를 조금 내려놓기 편한, 로자리아를 교육하기에 가장 최적화된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이 고급 서재에 내가 찾으려는 게 있을까?'

그러한 우려도 잠시 뒤에 사라졌다.

국립도서관처럼 넓은 서재를 뒤지다가 마침내 발견할 수 있었다.

미처 마법으로도 벗겨 내지 못한 손때 흔적이 보이는 양장본이었다.

리드는 그 책을 뽑아 들어 보았다.

[기초 마법에 대한 이해]

귀퉁이에는 마나펜으로 '리드 아델하이츠'라고 이름을 기재해 놓은 것이 보였다.

'공부한 흔적이 엄청나네.'

형형색색으로 붙여 놓은 라벨.

그 책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령 친화를 위한 쉽고 빠른 가이드]

[원소개론학]

보기만 해도 어질어질하게 느껴지는 전공 서적 따위가 하단부를 꽉 채우고 있었다.

'기초 마법 서적들이 다 있을 줄이야.'

추억으로 남겨 둘 만한 외진 장소에 리드가 공부했던 흔적이 남겨진 책들이 보였다.

'찌질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도움은 되는구나.'

진심으로 감사하는 리드.

그렇게 장서를 펼쳐 보았다.

-이 교재는 단순한 교양 과목에 속하는 기초적인 교육에서 한 한기만 사용하게 될 것이지만, 모든 마도학을 걷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숙지해야 할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클라우드 대륙에 분포된 대기 중 20%가 마나이며, 이 마나를 어떻게 끌어들여 사용할 것인가에 따라서 우리들은....

'이런 개....'

초장부터 수면 마법과 인지 저해 마법이 들어간 문장이 반긴다.

'대학교 이후로 전공 서적이랑은 영영 안 만날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법책이야?"

로자리아의 물음에 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도 아빠가 아무래도 이걸 읽어야 할 거 같아. 조금만 기다려 주겠니?"

"응!"

로자리아는 그동안 읽던 책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리드도 천천히 마법서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외계어가 섞인 지루한 문자 덩어리들을 읽어 나가면서 리드는 한 가지만큼은 알 수 있었다.

리드가 얼마나 노력하던 인물이었는지 말이다.

필기와 이해되지 않는 부분.

그리고 그 이해되지 않은 부분을 풀어내어 해설해 놓은 것.

아주 꼼꼼하게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쌓아 올린 것이 있는 만큼, 절망 또한 깊었으리라.

2시간에 걸쳐서 읽은 끝에 리드는 마나를 발현하는 방법을 감 잡을 수 있었다.

어려운 서적이었지만, 리드가 공부한 흔적을 따라가면서 이해하려고 하니 충분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한번 해 보자.'

리드는 책을 덮었다.

마법사가 마나를 느끼는 방법은 까다롭다.

그중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심장박동을 느끼는 것이다.

'심장박동을 느낀다.'

리드는 그 말을 듣고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모든 감각을 자신의 심장, 그리고 귀에 집중했다.

쿵- 쿵- 쿵-.

미약하게 살을 두들기는 촉각.

멀리서 울려 퍼지는 듯한 심장의 소리가 고막을 두들긴다.

'그 소리에 맞춰 호흡을 시도한다.'

습- 하. 습- 하.

잠시 후, 거짓말처럼 리드는 몸에서 무언가가 돌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체내의 마나가 돌기 시작하는 순간, 눈을 뜨고 의식을 풀어도 한동안은 자신의 전신을 헤엄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몸이라는 바다.

그 속에서 헤엄치는 수천 마리의 물고기들.

자유롭되, 의식의 통제에 따라온다.

호숫가에 먹이에 홀려 몰려드는 잉어 떼처럼 리드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보통 이 정도로 자유롭다고 설명되어 있진 않은데....'

마나를 느끼는 그 순간이 <마나 감응 Lv. 1>

그리고 체내에 돌고 있는 마나를 통제할 수 있을 때부터가 <마나 감응 Lv. 2>에 해당한다.

리드는 단숨에 Lv. 2의 스텝을 밟고 있는 중이었다.

리드가 이렇게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틀림없이 <마법>과 <마나 감응>이 이미 레벨 4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었다.

리드가 좌절했던 흔적들을 생각하면, 두어 번 정도는 실패하리라 생각하고 시도한 것이었다.

"흠...."

스텝 2까지 아주 쉽게 도달했다.

그다음도 할 수 있지 않을까?

'Lv. 3.'

리드는 자신의 손에 그 감각을 집중시켰다.

수억 마리의 물고기들이 헤엄쳐 와 그 손에서 모여든다.

"뿜어낸다."

발산한다.

꽉 찬 보가 터져 버린 것처럼 리드의 양손에서 새파란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단순히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방출된 그 마나들을 다시 손 주위로 응집시킨다.

그것은 마치 1에서 10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행동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통제한다.

공중에 흩날리던 마나들이 인력을 느끼며 끌어당겨진다.

리드는 보이지 않는 공을 양손으로 쥐듯이 허공을 감싼다.

그 가운데에서 푸른 마나가 소용돌이치며 구체의 형태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사이즈는 야구공 하나만 하며, 아주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경이롭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흡!"

정신력의 한계를 느끼고, 리드가 집중을 멈췄다.

뭉쳐 있던 마나가 방 곳곳으로 흩어졌다.

마나로 움직이던 샹들리에의 불빛이 깜빡거리더니, 곧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리드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뼈를 두들기며, 항의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집중했더라면, 혼절해 버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순간이었다.

'이게 <마나 감응 Lv. 4>에 도달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단계....'

Lv. 1 체내에서 느낀다.

Lv. 2 체내에서 통제한다.

Lv. 3 체외로 발산한다.

Lv. 4 체외에서 발산된 마나를 통제한다.

<마나 감응 Lv. 5>에 도달하게 되면, 그 마나 구체를 다시 몸으로 흡수할 수 있다.

리드는 구체를 만들 수 있는 레벨 4에서 막혔기에, 흡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리드는 마나 잔량을 확인해 보았다.

[마나 : 3,982/4,982]

'이 구체 만드는 거로 마나가 1,000이나 나갔구나.'

무속성 공격 마법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마법은 '마나 애로우'로, 마나 소모량은 50 정도.

리드가 만들어 낸 그 구체는 마나 애로우 20발의 소모량을 잡아먹는 물건이었다.

'꽤 위험했겠네.'

순수한 마나라고 해도 휘발해 버리는 게 아니라 폭발해 버린다면, 리드 자신은 물론, 로자리아도 위험했었을 것이다.

리드는 슬쩍 고개를 돌려 로자리아를 보았다.

그런 우려를 하고 있던 것과 다르게 로자리아의 표정은 반짝반짝하기 그지없었다.

"와아...."

로자리아는 입을 벌리며 감탄사를 연신 흘려 댔다.

그녀의 표정이 공감되는 순간이었다.

'나도 신기해 죽겠는데, 얘는 더 그렇겠지?'

손에서 뭔가 튀어나와 동그랗게 말리다가 사라졌으니, 현실 세계였다면 마술을 보는 것처럼 신기할 것이다.

리드는 그런 로자리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게 뭐 하는 건지 알 것 같니?"

"몰라!"

해맑은 표정으로 대답하는 로자리아.

"마법의 기초 중에서 마나를 발현시키는 거란다. 이 정도는 해야지 마법사라고 부를 수 있는 거지."

"나도 해 봐도 돼?"

그 말을 듣고 몸이 움찔했다.

설마 그걸 보고 단숨에 이해했단 소리인가?

"한번 해 보렴."

리드는 나름 기대하며, 그녀에게 시켜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로자리아는 리드가 취했던 자세를 그대로 따라 했다.

그러고는-.

"흡!"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껏 힘을 준다.

로자리아가 힘을 주고 열심히 해 보지만, 리드처럼 마나 구체가 형성되지는 않았다.

'될 리가 없지....'

로자리아의 특성은 아직 아무것도 개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리 글자를 빨리 습득하는 천재 기질을 보인다 해도 마나를 발산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무작정 힘을 준다고 되는 게 아니란다."

"어떻게 해?"

"아직 로자리아한테는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네."

"부으, 나도 공 만들어 보고 싶은데...."

부풀려졌던 볼이 힘 빠지는 소리와 함께 줄어든다.

리드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자리아도 언젠간 공을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열심히 공부하자, 알겠지?"

"응! 공부 재밌어!"

'요 깜찍한 것.'

열성을 지닌 학생을 보는 학부모들이 이런 기분일까 하는 마음으로 흐뭇하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똑똑-.

누군가가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저, 탑주니임."

늘어지는 말투에 묘하게 피곤함이 묻어 나왔다.

분명 탑 운영과 다른 탑주들의 눈치를 받느라 그런 것이 틀림없으리라.

그렇기에 리드는 눈치채지 못한 척 담담하게 그녀에게 물었다.

"어쩐 일로 여기에 왔느냐?"

"탑의 마나가 많이 흐트러져서요. 탑의 기둥을 세워야 해서요오...."

"탑의 기둥?"

"네에.... 탑의 마법사들 능력을 측정할 겸해서 모두 기둥 세우기에 들어갔는데, 관심이 있으신가 해서요오."

기둥 세우기?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탑주로서 그게 뭐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상태를 좀 보도록 하지."

결국, 그녀가 뭔 소리를 하는 건지 파악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서재를 나오자 그녀는 안내라 할 것 없이 한 곳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키는 것은 탑 내부의 난간 너머에 있는 빛의 덩어리들이었다.

그제야 무슨 소리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모든 마탑은 가운데가 뻥 뚫린 도넛 같은 고리 형태로 층층이 쌓여 있다.

지맥에서 끌어올린 마나를 탑의 위층까지 쏘아 올리기 위해 가장 최적화된 구조로 설계된 것이었다.

그 쏘아 올린 마나를 바로 기둥이라고 부른다.

탑 내부를 밝히는 푸른빛이자, 마법 연구에 쓸 마나를 보충하는 연료, 그리고 모든 마도 공학의 산물들을 움직이는 데 쓰이는 전기인 셈이다.

'빛이 많이 흩어졌구나.'

가지런히 정리된 탑의 마나는 순수하게 기둥의 형태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지금 하늘을 찌르고 올라가는 것은 드라이아이스처럼 흩어져 가는 빛 안개 덩어리라고 하는 게 옳았다

"기둥을 얼마나 정리할 수 있는지 마법사들이 한 명씩 해 보는 중인데, 탑주님께서도 한번 보러 가시겠어요?"

"아니, 지금은 집중해야 할 일이 있다."

"엣? 아, 알겠습니다아."

피비는 별일이라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전까지의 리드였다면,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기둥 세우기에서 반드시 참여했을 터였으니까.

하지만 리드는 지금 사정이 있었다.

'그거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데, 참여하면 어떤 일을 당할 줄 알고?'

프로젝트 플라워 가든이 엎어지면서 내부에서도 불만이 섞인 원성이 높아진 상태였다.

어설프게 참여했다가 휘말려서 실수로 힘을 과시해야 할 상황이 온다?

'그러면 끝장이야.'

반기를 들 만한 대의명분을 찾게 둘 수 없었다.

그렇기에 리드는 마법을 완전히 익히진 못하더라도 익숙해질 때까지는 모습을 보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생각과 다르게 로자리아는 순수했다.

로자리아가 리드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보러 갈래."

지식욕이 많은 만큼 새로운 것들을 보고 싶어 하는 욕구도 가득하다.

일주일 동안 리드의 말을 들으며, 서재와 식당, 그리고 자신의 방 세 곳만 왔다 갔다 했으니, 어느 정도 염증이 난 상태.

기둥 세우기라든가, 탑 구경도 해 보고 싶으리라.

리드는 마침 잘됐다는 듯이.

"그럼 피비, 네가 로자리아를 데리고 다녀오너라."

"앗! 그럴까요? 아가씨는 어떠세요?"

"좋아!"

매번 로자리아를 씻겨 주고, 침소까지 함께 가는 보모 역할을 했으니, 피비에게 거부감이 없었다.

피비와 로자리아는 손을 나란히 잡고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그럼 그동안 몰래 마법 연구나 좀 더 해야겠네.'

교육에서 해방되어 순수하게 공부할 수 있는 시간.

귀하기에 헛되이 쓰고 싶지 않았다.

조용한 개인 서재에 마음을 가라앉히는 편안한 냄새와 밝은 등불.

누가 더 뭐라 할 것 없이 최적의 조건이었다.

픽-!

...라고 생각하던 순간, 샹들리에의 불빛이 나갔다.

"엥?"

당황스러운 나머지 바보 같은 소리를 내뱉어 버리는 리드.

무슨 일인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서재 밖을 더 나갈 필요도 없이 무슨 이상이 생겼는지 알 수 있었다.

나올 때까지만 해도 보였던 빛의 기둥.

그게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7화. 로자리아 (3)

리드가 새로운 공부를 하려고 하는 그때, 피비와 로자리아는 1층에 도달했다.

1층 홀은 기둥 세우기를 하려는 마법사와 구경 나온 이들로 가득했다.

마나의 냄새가 코를 마비시키는 이곳에서 즐길 만한 컨텐츠였으니까.

기둥 세우기.

말하자면, 마법사들의 차력쇼라고 할 수 있는 컨텐츠였다.

마치 해머를 쳐서 줄에 끼워진 볼로 끄트머리에 걸린 종을 울리는 게임처럼 자신의 마나 센스가 얼마나 좋은지 보여 주는 일종의 테스트였다.

주기는 마나 기둥이 흐트러지는 한 달에 한 번.

정리하기 전에 한번 모여서 자신의 힘을 시험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을 멍하니 지켜보던 로자리아가 손가락으로 인파가 몰려 있는 장소를 가리키며 물었다.

"누구야?"

"탑의 마법사들이에요아. 이 탑에서 근무하고 무려 탑주님의 부하랍니다아!"

부하라는 말에 좋아할 줄 알았던 것과 다르게 로자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탑쭈?"

"탑주는 그... 로자리아 아가씨의 아버지 되는, 아니 아빠 되는 사람이에요오!"

"아뿌아가 탑쭈야?"

"네에."

잠시 생각하는 로자리아.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며·

"좋은 거야?"

"제일 좋죠오."

그러자 로자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금 당장 어려운 건 모르겠다.

좋으면 좋은 거지!

"아, 이제 시작해요오. 한번 보세요오!"

"그치만 안 보이는걸...."

로자리아의 작은 키로는 발버둥 쳐도 그 쇼를 볼 수가 없었다.

"앗, 그렇다면...."

피비는 자신의 생각을 짧았음을 깨닫고 그녀를 잡아 들었다.

피비는 로자리아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집어넣고 목마를 했다.

"웃챠! 이러면 잘 보이실.... 아앗! 뿔 만지면 안 돼요, 아가씨이!"

"히히히."

로자리아는 해맑게 웃으며 피비의 양 뿔을 잡으며 균형을 잡았다.

피비는 더 쓴소리하지 못하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가라앉았고, 기둥 세우기가 시작되었다.

홀 가운데에 새겨진 마법진 안으로 들어간 사내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다.

마법진이 그 집중에 반응하며 새하얀 빛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부우웅-.

공진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잠시 후 플로어에 흩어져 있던 푸른 빛이 모여들었다.

1층이 단단한 기둥이 된다.

그리고 온도계처럼 점차 뚜렷한 빛의 기둥이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그렇게 올라가던 빛의 기둥이 마침내 탑의 절반쯤에서 멈춘다.

"한스 45층!"

"야, 46층에 조금 걸쳤잖아? 사사오입으로 46층으로 해."

"그렇게 날먹하고 싶냐, 인마?"

"쪼잔하게 100유피가 아까워서... 떼라, 인마."

소소하게 내기를 하면서 자신의 힘을 측정하는 마법사들. 정리한 기둥은 다시 본인이 흩어 놓아 버린다.

그런 식으로 본인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서로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어떠세요? 재밌겠죠?"

피비의 물음에 로자리아가 뿔을 잡으며 말했다.

"나도 해 봐도 돼?"

"해 보시려고요오?"

"해 볼래!"

어린 만큼 의욕이 넘치는 로자리아.

그러자 로자리아가 허공에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아뿌아처럼 공 만들고 싶어. 파란 공!"

"파란 공... 말인가요오?"

"막 갑자기 손에서 나왔어! 신기했어!"

피비는 로자리아가 하는 말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기둥 세우기를 해 보고 싶다는 말이었으니, 그것만 집중했다.

피비가 보았을 때는 그녀가 기둥 세우기에 들어가는 건 무리였다.

'마나가 안 느껴지는걸....'

마법사들이 은은하게 뿜어내는 마나의 오라조차 없는 순수한 아이.

기둥은커녕, 마나를 느낄 수는 있을까 싶었다.

보통이었다면, 넌 안 되니 다음을 기약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럼 한번 해 보도록 하죠오."

하지만 피비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해 보고 싶다는데 한 번 정도는 해 보게 둘 수도 있지 않은가?

기둥 세우기는 말 그대로 주변의 마나를 끌어모으는 <마나 감응>의 힘을 테스트하는 것.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다지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실례합니다아~."

피비 특유의 늘어지는 목소리로 로자리아를 데리고 인파를 뚫고 간다.

"저 아이는 누구야?"

"누가 데리고 온 거야? 외부자는 탑에 들어오면 안 되는 거 몰라?"

"도대체 누가... 헉!"

마법사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한마디씩 하다가, 그 데려온 인물을 보고 말문이 턱 하고 막히고 말았다.

"타, 탑주 대리님?"

탑주, 리드의 비서이지만, 리드 대신 여태까지 운영을 모두 도맡아 탑주 대리라는 명칭에 익숙해진 마법사들이었다.

권력은 물론 마법사로서의 능력도 탑주에 못지않게 강한 서열 2위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피비가 나서며 그들에게 해명했다.

"아, 이 아이는 탑주님의 아이예요."

"탑주님? 그 탑주님에게 아이가 있었다고요?"

"피가 이어진 건 아니고, 그 뭐라 하더라... 아, 양녀예요!"

"그 탑주님이?"

전속 비서인 피비의 말이었기에 사실이겠지만, 그들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피비를 보았다.

아무래도 리드 성격으로 양녀를 들였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피비는 곤란한 듯 로자리아의 반응을 살폈지만, 그녀는 애초에 관심도 없는지 기둥을 세우는 장소를 빼고는 다른 곳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피비는 다음으로 올라설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깐 아가씨가 기둥 세우기에 관심이 있으셔서, 해 보고 싶으시다는데 해 봐도 될까요오?"

"아, 네넷! 탑주 대리님이시라면 상관없습니다."

빠릿빠릿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남자.

피비는 헤실 웃으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오. 아가씨, 저기에 올라가셔서 하시면 될 거예요오."

"응!"

서너 명 정도가 하는 걸 지켜본 로자리아였으니, 그들을 흉내 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로자리아가 짧은 다리로 마법진의 한가운데에 섰다.

그녀가 올라가는 모습을 본 마법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런 꼬마가 기둥 세우기를 한다고?"

"귀여워라. 한 번씩 해 보니까 자기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 아닐까?"

"그냥 해 보고 싶다는 거니까 시켜 보는 거지."

"난 1층도 못 쌓는다에 건다."

과감한 도전에 귀엽다는 소리도 오가긴 했지만, 철없는 소녀의 단순한 유희처럼 느낀 이들은 대부분 로자리아를 곱게 보지 않았다.

로자리아는 그 가운데에 섰다.

기둥 세우기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집중하면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이 그 집중에 응하며, 흩어져 있는 마나를 끌어모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마나를 끌어모은다. 그리고 위로 쏘아 올리며 쌓는다.

그것이 기둥 세우기의 기본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로자리아는 그런 개념을 언뜻 듣지도 못했다.

다른 마법사들처럼 정좌를 틀고 눈을 감으며 집중하는 것도 아니었다.

집중조차 하지 않았으니, 마법진이 반응을 할 리는 만무.

기본조차 되지 않은 그녀에게 기대를 건 이들은 없었다.

로자리아는 은은하게 빛나는 푸른 마나 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빛의 안개 덩어리들이 넘실거리며 천장까지 솟아나 있는 것이 보인다.

넘실거리는 푸른 안개들이 그녀의 눈 속에서 화려하게 춤을 춘다.

그 마나의 무용을 보는 로자리아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의 생각만이 자리 잡았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 준 리드가 만들어 낸 공.

양손에 감싸여 아름답게 회전하며 뭉쳐졌던 푸른색 공.

로자리아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실처럼 나풀거리는 그 마나들을 뭉치고 싶었다.

뭉쳐서 자랑하고 싶다.

칭찬받고 싶다.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그녀의 모든 것인 그 일념이 바로 그녀의 재능을 일깨웠다.

그녀가 양손을 하늘로 향해 뻗었다.

"파란 공!"

마법진이 폭발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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