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보스 잡고 게임 속 죄수
1화 프롤로그
불가능.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아니, 나 또한 한때는 그렇게 여겼던 적이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쿠르릉!
쾅! 콰콰쾅──!
하늘에서 모든 것을 불태우는 영겁의 업화가 쏟아지고, 갈라진 땅에서 용암이 치솟는다.
하나하나가 캐릭터를 일격에 죽음에 몰고 가는 즉사기에 가까운 말도 안 되는 패턴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들을 간발의 차이로 아슬하게 피해 내며, 놈의 역린을 향해서 신검 레바테인을 찔러 넣었다.
푸욱!
[3,421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치명적인 일격에 성공하였습니다! 피해량이 200% 증가합니다.]
무려 신검이라 불리는 무기로 멸망룡에게 있는 유일한 약점을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들어가는 대미지는 그리 크지 않다.
하물며 이미 마법의 대가로 치를 수 있는 건 모두 치렀기에, 그 어떤 기적도 일으킬 수 없는 상황.
'그래도... 조금만 더 하면 돼.'
공정의 세계 온라인(World of Justice Online).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다는 것을 모토로 삼은 중세 판타지 배경의 온라인 게임.
비록 엄청나게 성공한 게임은 아니지만, 특유의 게임성으로 인해서 전 세계적으로 마니아층이 매우 탄탄한, 내가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미친 듯이 빠져 있었던 게임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공정의 세계에 멸망을 선고한 존재를 바라보았다.
약속된 파멸.
묵시록의 붉은 용.
죽음의 인도자.
그 외에도 놈을 부르는 이름은 무수히 많지만, 그중에서도 놈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이름은 따로 있다.
멸망룡(滅亡龍) 티아매트(Tiamat).
이 세계에 피할 수 없는 파멸을 불러온다는 예언의 멸망룡.
멸망룡이 등장한 이후, 지금껏 티아매트를 잡기 위해서 공정의 세계에 있는 온갖 세력이 나섰다.
징벌 교단의 성전 기사단, 복마전, 심지어 제국 같은 굵직굵직한 세력들은 모두 나섰다.
그러나 지금껏 멸망룡 사냥을 성공한 곳은 없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약속된 멸망을 가져온다는 이름마따나, 멸망룡은 사냥하는 게 불가능한 존재처럼 보였다.
"멸망룡은 잡을 수 있는 마물이 아니에요. 자연재해처럼 이 세계에 피할 수 없는 멸망을 가져오는 일종의 현상으로 봐야 합니다."
멸망룡 레이드를 주도했던 성전 기사단장이 했던 말이다.
그 말을 증명하듯이 멸망룡은 조금씩 행동 범위를 넓히며 대륙의 모든 걸 파괴해 나갔다.
그렇기에.
나 또한 몇 번이고 포기하려고 했다.
정녕 멸망룡을 사냥하는 게 가능한 일인지 의문을 가졌던 적도 많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를 붙잡았던 건, 매번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못 잡으면... 영원히 못 잡아.'
멸망룡 솔로 레이드라는 말도 안 되는 과업에 도전한 지도 어느덧 열두 번째.
비록 내가 이번 솔로 레이드를 위해서 전설의 영약인 엘릭서를 비롯한 온갖 소모품과 장비 등 엄청나게 많은 것을 준비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준비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라 여기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서비스 종료.
사람에게 죽음이 있다면 공정의 세계 온라인(World of Justice Online) 같은 온라인 게임에는 서비스 종료가 있다.
3달 전, 공정의 세계 온라인 공식 홈페이지에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한 줄의 공지 사항이 업데이트됐다.
멸망룡의 등장과 서비스 종료.
하나만 있어도 난리가 날 대형 업데이트도 모자라서, 3달 후에 공정의 세계의 서비스를 종료한다는 충격적인 소식.
당연히 공정의 세계 유저들은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공정의 세계가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한 게임은 아닐지언정, 특유의 게임성 등으로 인해서 상당히 탄탄한 유저층을 자랑하는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무슨 서비스 종료를 초대형 업데이트랑 같이 하냐? 그냥 멸망룡 자체가 서비스 접는 구실 아니야?"
"하긴, 그러면 멸망룡은 못 잡는 몹인가 보네. 이번에 오성도 실패했다던데."
과거 온라인 게임 중에는 세계를 멸망시키며 자연스럽게 서비스를 종료하는 방식도 있었던 터라, 매우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하지만 가설은 가설일 뿐.
그 어떤 공식적인 입장도 나오지 않은 채로, 온갖 소문만이 무성한 가운데 어느덧 서비스 종료를 고작 하루 앞두게 되었다.
멸망룡의 존재 자체가 공정의 세계에 피할 수 없는 멸망을 가져온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미 정해진 끝을 두고서 더 이상 내가 가진 것들을 아낄 필요가 없어졌고, 나는 내가 지니고 있었던 모든 걸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엘릭서가 필요하면 창고에 있는 온갖 고가 물품들을 처분해서라도 마련했고, 마법의 대가가 필요하면 이제껏 올린 소중한 능력치를 대가로 바쳐서라도 사용했다.
"좀... 뒈져라, 좀!"
내 간절함이 닿은 걸까.
아니면 멸망룡의 모든 패턴을 파훼한 보람이 있었던 걸까.
[계약 마법, '영구동토 재림(永久凍土 再臨)'을 발동합니다.]
[공정한 계약에 따라, '혹한의 악마'에게 마법의 대가로 '왼발의 모든 발가락'을 지불합니다.]
[치명적인 신체 결손을 입었습니다! 이동속도가 크게 하락하며, 지속적으로 HP가 감소합니다.]
그것도 아니면 캐릭터에게 가해질 엄청난 페널티를 감수하고서 온갖 마법을 사용한 덕분일까.
['영구동토 재림(永久凍土 再臨)'의 효과로 멸망룡 티아매트의 움직임이 둔화됩니다.]
[8,421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치명적인 일격입니다! 피해량이 500% 증가합니다.]
비로소 나는 멸망룡 레이드의 클리어를 코앞에 두게 되었다.
"드디어, 드디어...!"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고 여겼다.
나조차도 불가능할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럼에도.
[0%]
나는 마침내 해내고야 말았다.
[약속된 파멸, 멸망룡(滅亡龍) 티아매트(Tiamat)가 영면에 빠져듭니다.]
[피할 수 없는 파멸을 극복하였습니다! 운명의 초침이 당신을 가리킵니다.]
멸망룡 티아매트.
라크나 대륙을 멸망시킨다던 예언의 붉은 용이, 마침내 쓰러졌다.
"하아...."
도대체 얼마나 집중했던 건지는 몰라도 마우스를 쥔 손이 땀범벅이었다.
흥분 때문인지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이 도통 진정이 되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멸망을 유예하였습니다!]
[특성, '멸망 유예자'를 습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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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유예자]
등급 : EX
유형 : 패시브
멸망에 대적할 수 있는 이여.
마(魔) 속성을 지닌 상대에게 절대적인 상성 우위를 지닌다.
명경지수의 마음을 지니게 되며, 모든 종류의 정신 공격에 대해서 면역이 된다.
또한, 해당 특성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무효화하거나 제거할 수 없다.
──────────────
"...미친."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EX급 특성.
사실상 이제껏 공정의 세계에서 최고 등급으로 치부되던 특성의 등급이 S급 특성이다.
당연하게도 S급 특성들은 모두 하나같이 사기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강자로 군림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S급도 아닌 무려 EX급 특성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실제로 그 능력 역시도 EX급 특성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수준이었다.
'마 속성에 대한 절대적인 상성 우위라니.... 거기다가 정신 공격 면역? 개 미쳤네.'
공정의 세계에서 마(魔) 속성을 지닌 대상은 하나같이 굵직굵직한 보스 몬스터 또는, 악마 같은 초월적 존재들뿐이다.
그런 존재에 대해서 절대적인 상성 우위를 점한다는 건, 특히나 마법이나 기술 간 상성이 중요한 공정의 세계에 있어서 엄청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특성 무효화 면역이라고? 이것도 말도 안 돼.'
공정의 세계에 있는 무수한 마법 중에서 가장 치명적이고 상성상 우위를 점하는 마법을 꼽으라면, 역시나 정신 공격과 관련되거나 특성을 무효화하는 마법들이다.
그런 마법들을 모조리 무효화한다니....
보기만 해도 입을 떡 벌릴 정도였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EX급 특성을 얻었다는 기쁨은 잠시 미뤄 둘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천천히 멸망룡의 사체를 향해 다가갔다.
'과연 뭐가 나올까....'
멸망룡을 사냥한 뒤에 얻을 보상에 대해서는 무수한 추측들이 오갔었다.
이제껏 등장하지 않았던 신화급 아이템을 준다는 소문부터, 현재 최고 등급인 S급 특성을 넘어선 EX급의 특성을 준다는 추측까지.
놀랍게도 그중 한 가지 추측은 사실이었으니, 나머지 추측에 대해서도 충분히 기대를 걸어 볼 만했다.
그런데.
"...음?"
멸망룡의 사체를 확인한 나는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있는 건 신화급 아이템도, 심지어 전설급 아이템조차 아니었기 때문이다.
[승천석]
예상했던 엄청난 보상 대신 있는, 승천석이라는 이름의 처음 보는 아이템 하나.
이것이, 멸망룡을 잡고서 드롭된 보상의 전부였다.
"...이게 뭐야?"
공정의 세계의 썩은 물 중의 썩은 물인 나로서도 처음 보는 아이템.
하지만 무려 멸망룡을 잡고서 나온 보상인 만큼 범상치 않은 아이템임이 분명했다.
'확인해 보면 되겠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던가.
굳이 망설일 필요 없이, 나는 곧장 승천석의 정보를 확인했다.
────────────
[승천석]
분류 : 소모품
등급 : ??
■■■ ■■■ ■■■ ■■■ ■■ ■■
────────────
"...뭐야, 이건?"
등급 미상.
마치 노이즈가 낀 것처럼 보이지 않는 아이템 설명.
그나마 알 수 있는 정보라고는 소모품이라는 사실 한 가지뿐.
그게 바로 승천석이라는 아이템에 나타난 모든 정보였다.
'대체 어디다 쓰는 물건이지?'
무려 멸망룡을 잡고서 나온 보상이다.
거기에 더해서 승천석이라는 이름이나, 등급이나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만 봐도 이게 범상치 않은 아이템이라는 건 확실하다.
문제는, 이게 소모품이라는 점.
용도를 모르는 채로 상황에 맞지 않게 사용했다가, 아이템이 허무하게 소모되어 버린다면?
'...아니. 아니지.'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공정의 세계의 서비스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하루.
설사 승천석이 허무하게 소모된다고 해도,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좋아.'
내가 승천석을 사용하려던 그 순간.
[승천석을 사용할 시, 캐릭터가 지닌 모든 레벨, 능력치, 스킬, 특성, 아이템을 잃습니다.]
[승천석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 / N]
갑작스레 나타난 알림.
그것도, 쓰여 있는 내용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았다.
대체 승천석을 사용한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길래, 지닌 아이템은 물론이고 레벨까지 가져간단 말인가?
사실상 캐릭터 초기화나 다름없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이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뭐... 어차피 이젠 끝이니까."
공정의 세계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던 그런 시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러한 세월을 마무리하기에 승천석이라는 아이템은 더없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공정의 세계에는 아주 강력한 대원칙이 존재한다.
그것을 아주 조금 어기는 것조차도 세계의 법칙을 바꿀 정도의 위업으로 취급받는, 아주 강력한 대원칙이.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승천석이라는 아이템이 지닌 가치가 어떨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모든 것을 잃게 만든다.
공정의 세계에서 그 말은 곧 모든 것을 얻을 수도 있다는 말과도 같았으니까.
"...좋아."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내가 곧장 승천석의 사용 버튼을 향해서 손을 옮긴 순간.
[승천석을 사용합니다.]
승천석에서 뿜어지기 시작한 찬란한 빛이 순식간에 모니터를 완전히 집어삼키고.
「버려야 한다면, 전부 버리겠다.」
귓가에서 나지막이 들려온 알 수 없는 목소리와 함께, 모니터에서 뿜어진 빛이 나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2화 죄수
덜컹, 덜컹─
바닥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진동.
마치 기름칠을 덜한 듯이 무언가 삐걱거리는 듯한 소리.
"으...."
더없이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고 나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갈라진 창살 틈새로 쏟아져 내리는 빛이었다.
철컹!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무언가가 다리에 걸렸다.
"...아."
자연스레 시선을 내린 나는 이내 동상이라도 입은 듯이 붉게 달아올라 있는 발등과 그 위의 발목에 묶여 있는 강철 족쇄를 보았다.
나는 묶여 있었다.
"...."
너무나도 현실감 없는 풍경에 혹시 내가 꿈이라도 꾸는 건가 싶었으나, 이윽고 발목과 손목에서 느껴지는 스산한 촉감이 나를 일깨웠다.
"여, 팔자 좋게 늘어지더니 드디어 일어나셨나?"
어디선가 들려온 이죽거림.
자연스레 무거운 머리를 들고, 시선이 맞은편으로 향한다.
어깨까지 늘어선 산발 머리.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게 무성히 자란 수염.
얼굴 곳곳에 보이는 흉터.
알 수 있는 사실은 그가 나이가 적지 않은 남자라는 것뿐.
그나마 지금 내가 저 흉터 사내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던 건, 사내의 팔다리에 매달린 족쇄 덕분이었다.
나와 같은.
"...여긴 어디지?"
목이 쉰 건지 아니면 오랜 시간 물을 마시지 못한 건지는 몰라도, 목소리를 내기 무섭게 혀에서 비릿한 쇠 맛이 느껴졌다.
"어디긴, 크로이츠로 가는 호송 마차지. 빌어먹을 겨울성 말이야."
"...겨울성?"
겨울성 크로이츠.
나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귀에 익은 이름.
그렇기에, 지금 같은 상황에서 듣기에는 더없이 현실감 없는 단어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이 겨울성이라고? 북부 요새?"
"겨울성이 거기 말고 또 있나? 쯧쯧, 심문관한테 어지간히도 당했나 보군. 보통 겨울성에 보낼 죄수를 등신이 될 정도로 고문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야."
흉터 사내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더없이 익숙하게 들려온다.
"설마... 심문관이라면 징벌 교단의 이단 심문관을 말하는 건가?"
"그래, 안 그래도 쓸모없던 네 머리통을 고철 덩어리로 만들어 주신 그 잘나신 이단 심문관이지."
물론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정확히는, 그래서는 안 되는 사실.
"...말도 안 돼."
나는 그제야 지금 내가 듣고, 내뱉고 있는 언어가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언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낯선 언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그 내용은 알아들을 수 있었기에 미처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다들 그렇게 말하지. 나는 죄가 없고, 억울하다고.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런 법 아니겠어? 사연 없는 무덤은 없는 법이야."
흉터 사내가 낄낄 웃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하나같이 웃어넘길 수 없는 이야기들뿐이었다.
"...."
겨울성 크로이츠.
이단 심문관.
악명 높은 북부 요새.
나는 그 모든 단어를 알고 있다.
아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도저히 믿을 수는 없지만, 이 모든 정황이 가리키는 단 한 가지의 결론.
공정의 세계.
나는 그곳으로 들어왔다.
그것도, 겨울성 크로이츠로 끌려가는 죄수가 된 채로.
'대체... 어떻게?'
게임 속으로 들어왔다.
그 말도 안 되는 현실 속에서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당연히 의문이었다.
'분명히... 멸망룡으로부터 얻은 승천석이라는 아이템을 사용했고, 빛이 번뜩였어.'
내 기억은 그게 전부였지만, 그 승천석이라는 정체 모를 아이템이 나에게 일어난 모종의 사태와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대체 그 승천석이라는 아이템은 무엇인가.
대체 무슨 물건이기에, 한낱 모니터 속의 가상에 불과했던 게임 속 세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가.
당연하게도 답은 알 수 없었다.
"거기, 뭐가 그렇게 재밌어서 떠들어? 뒈지러 가는 게 그렇게 좋나? 설마 겨울성이 어느 곳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때 들려온 가느다란 목소리.
죄수 호송 마차 안에 있는 죄수는 나와 사내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포함한 총 네 명의 죄수.
처음 나와 대화를 나누었던 맞은편의 흉터 사내, 내 오른쪽에 있는 하얀 머리의 사내. 그리고 대각선에 있는, 후드로 전신이 가려진 터라 얼굴을 알 수 없는 여자까지.
그중에서 지금 말을 걸어온 건 내 오른쪽의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비쩍 마른 하얀 머리의 남자였다.
"그럴 리가 있나? 살아서 나온 자가 없다는 겨울성의 악명 정도는 알고 있지. 오죽하면 우리 같은 죄수를 그곳으로 끌고 가겠어?"
"알면서도 그렇게 히죽거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실력에 자신이 있나 본데."
"그런 편이지."
"그 혓바닥만큼이나 실력도 매끄럽기를 바라지."
비쩍 마른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는 슬쩍 나를 흘겨보았다.
"뭐, 뒈질 놈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 같지만."
그 순간.
덜컹!
갑작스럽게 일어난 진동과 함께 마차 안이 크게 들썩거렸다.
원래도 탑승감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조금 전에 느껴진 충격으로는 흡사 큰 돌부리라도 걸린 것 같았다.
"마차 한번 더럽게 험하게 모는군!"
흉터 사내의 말에 하얀 머리의 사내가 정정했다.
"아니, 마차 때문이 아니다."
"뭐?"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크우우우우...!]
그와 함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바깥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이건....'
평범한 짐승의 울음이 아니다.
이건, 마수의 울음소리였다.
-마수다! 전투 준비!
-빨리빨리 움직여!
마차 바깥에서 들려오는 외침.
정황상, 이 죄수 호송 마차를 이끄는 병사들의 외침이 틀림없었다.
겨울성 크로이츠.
다른 말로는 북부 요새라고도 불리는 그곳은, 마경(魔境)과 인접한 제국의 핵심 전선이었다.
즉, 겨울성으로 향한다는 이야기 자체가 마경으로 다가간다는 뜻과도 같다는 소리.
마수들의 출몰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다.
"...아무래도 상황이 더럽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은데?"
흉터 사내의 말에 하얀 머리 사내가 비릿하게 웃었다.
"과연... 마경으로부터 제국을 지키는 방패라더니, 시작부터 보통이 아니군."
"그렇게 여유를 부릴 때인가?"
"왜, 자신만만하더니 이제 와서 겁이라도 나나 보지?"
"흥... 그럴 리가. 하지만 꼴이 이 모양이라."
흉터 사내가 팔에 매달려 있는 쇠사슬을 들어 보였다.
그 말마따나 아무리 실력에 자신이 있어도 이 꼴로는 그 실력의 일 할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마수가 나타났다면 우리로서는 나쁠 게 없지."
"그게 무슨 뜻이지?"
"쯧쯧, 머리가 그렇게 둔해서야. 미련한 곰같이 생겼더라니, 딱 생긴 대로 노는군."
"그 아가리가 찢어져도 똑같이 말할 수 있나 한번 볼까?"
흉터 사내가 으르렁대자, 하얀 머리 사내가 비릿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지금이 저 빌어먹을 겨울성으로 끌려가기 전에 탈출할 마지막 기회라는 건 알고 있겠지?"
"...진심이냐? 이 호송대에서 탈옥이라도 하자고? 실패하면 즉결 처형일 텐데?"
"어차피 겨울성에 가면 죽는 건 마찬가지야. 그 전에 뭐라도 해 보고 뒈지는 게 낫지 않겠어?"
"흠... 그렇긴 하지."
마수들의 습격이라는 사건 속에서 사내들이 탈옥 계획을 세우는 동안에도 나는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비현실이 현실이 된 작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만약 이곳이 정말로 공정의 세계가 맞는다면....'
나는 조심스레 왼쪽 귀를 만졌다.
공정의 세계에서 정보 창을 확인할 때 캐릭터가 취하는 모션이었다.
[정보 창을 열람합니다.]
──────────────
이름 : 벨 블랙우드
레벨 : 1
체력 : 1
근력 : 1
정신력 : 1
특성 : [멸망 유예자(EX)], [병기 소환(??)]
기예 : ─
마법 : ─
──────────────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정보 창.
생각했던 대로 이곳은 공정의 세계가 맞았다.
"...."
참으로 간결하기 짝이 없는 정보에 잠시 얼이 빠질 뻔했으나, 애써 정신을 차렸다.
'...형편없군.'
능력치가 기본 능력치 세 개뿐이고, 그나마도 있는 모든 수치가 1이다.
공정의 세계에서 막 캐릭터를 생성했을 때와 같은 상태.
승천석을 사용하며 지니고 있는 모든 레벨과 능력치 그리고 특성과 아이템이 초기화된다는 게 이런 의미였던 걸까.
한때 최강이라 자신하던 찬란한 능력치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거기다가 벨 블랙우드라는 캐릭터 이름은 나로서는 더없이 낯선 이름이었다.
'그런데....'
분명히 모든 레벨과 능력치 및 특성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본디 나에게도 없었던 특성이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눈에 들어왔다.
멸망 유예자는 멸망룡을 사냥한 뒤에 얻은 특성이고, 특성 무효화 면역 기능이 있었으니 승천석 사용에 사라지지 않은 건 이해가 된다.
문제는 나머지 하나의 특성.
'병기 소환이라고?'
그 이름만으로는 도통 무슨 특성인지 알 수 없었기에, 나는 곧장 해당 특성의 정보를 확인했다.
──────────────
[병기 소환]
등급 : ??
종류 : 액티브
레벨 : 1
병기를 소환한다.
레벨에 따라서 소환할 수 있는 병기의 종류가 증가한다.
현재 소환 가능한 병기 종류 : 1
──────────────
'병기 소환이라....'
사실, 능력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특성이었다.
병기를 소환한다는 무척이나 직관적인 능력을 갖춘 특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역시나 ??로 표기된 특성 등급이다.
등급 미상.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게 뭐지?'
레벨이라고?
이윽고 떠오르는 한 가지 추측.
'설마... 성장형 특성?'
본디 특성은 처음 획득한 등급 그대로 고정이 되어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거기에 레벨이 달려 있다면, 또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게 만든다.
본디 자신의 등급 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특성.
'...과연.'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내가 승천석으로 모든 것을 잃은 대신에 얻은 게 무엇인지.
병기 소환이라는 이름의 특성이 지닌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캬오오오오오!!!]
[카악, 카아악!]
그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마차 바깥에서 마수들의 괴성과 고함이 울려 퍼졌다.
-진형을 갖춰라!
-수가, 수가 너무 많습니다!
-놈들이 호송 마차로 갑니다!
애석하게도 더 이상 생각을 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쾅─!
콰드드득!!!
어느새 마수들이 죄수를 가두기 위한 호송 마차의 단단한 뒷문을 뜯고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런 X발! 마두견이잖아!"
흉터 사내가 근육질에 어울리지 않게 호들갑을 떨어 댔다.
아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Lv.1]
[마두견]
얼핏 레벨만 보면 고작 1레벨이라고 할 수 있으나, 마두견의 두려운 점은 그 숫자와 특유의 호전성에 있다.
하물며 이곳에 있는 죄수들은 모두 팔과 다리가 묶여 있는 상태.
"이 X새끼들이...! 들어와! 이 X새끼들아! 다 처죽여 줄 테니까!"
상대적으로 마차 입구와 가장 가까운 흉터 사내가 흉성을 토해 내며 어떻게든 마두견들의 접근을 막아 내기 위해서 발길질을 해 댔다.
[캐갱!]
몇몇 마두견은 그 흉포한 발길질에 맞고서 나가떨어졌으나, 단지 그뿐.
철컹!
"...이런 X발."
죄수라는 신분을 증명하듯이 발목에 단단히 묶인 족쇄는 흉터 사내가 그 이상 날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흉터 사내는 보이는 모습 그대로 강건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지만, 팔과 다리가 쇠사슬에 묶인 상태로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캬아아악!]
콱! 콰악!
"끄아아악!"
마두견이 흉터 사내의 팔을 단번에 물자, 흉터 사내가 악을 쓰며 어떻게든 마두견을 떨어뜨려 놓기 위해서 발버둥 쳤다.
"떨어져! 좀, 떨어지라고, 이 X새끼야!"
사방에 피가 난자하는 풍경 속에서 나를 포함한 다른 죄수들의 사정 역시도 여의치 못했다.
[크르르....]
[크릉!]
어느새 다른 마두견들이 마차 안을 향해서 다가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크르르릉!]
마두견들이 들이닥친다.
한 마리도 아닌, 무려 세 마리가.
"이봐, 덩치! 더 버텨!"
"팔이 뜯겨 나갈 것 같은데 버티기는 지랄! 너도 거들어!"
하얀 머리 사내와 흉터 사내가 악을 쓰며 밀려드는 마두견들과 맞섰다.
그중 한 마리의 마두견이 나를 포착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에 가까울 것이다.
[크르릉....]
'...이런 X발.'
상황이 다급해졌다.
팔과 다리는 묶여 있고, 당연하게도 주위에 무기 따위는 없다.
[캬오오!]
마두견이 달려든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드는 그 순간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행위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이것밖에는 없어.'
특성을 어떻게 발동하는지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1' 병기가 소환됩니다.]
내가 지닌 모든 것을 바쳐서 얻어 낸 특성이 발휘되며, 손아귀에서 빛무리가 일었다.
나는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부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무기가 등장하기를.
그리고 나는 보았다.
"...어?"
[병기, '콜트 패리슨 B-09'을 소환합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내 손아귀에 잡혀 있는 한 자루의 총을.
3화 죄수 (2)
묵직하고 서늘한 촉감.
나는 이 촉감을 이미 알고 있다.
비록 세세한 종류는 다를지언정, 군 시절에 숱하게 느껴 왔던 촉감이었으니까.
"...."
총.
화약을 이용하여 발사체를 발사하는 무기로, 발명 이후 전쟁과 사냥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 무기.
그만큼 총이라는 물건이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콜트 패리슨 B-09.
공정의 세계 세계관에서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리볼버 한 자루가 내 손에 잡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무리 판타지라고 해도 공정의 세계의 시대적 배경은 중세에 가깝다.
우리가 판타지라고 떠올리면 가장 흔하게 떠오르는 그러한 세계관 말이다.
그런 세상에서 총이라니?
아무리 공정의 세계가 검과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더 이상 그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어느새 다다른 마두견이 당장이라도 내 목을 물어뜯을 것처럼 흉포한 기세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캬오오오!]
[카아악!]
망할....
이후에는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철컥-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단지 그것뿐인 행동.
그러나 효과는 확실했다.
풀썩!
콜트 패리슨의 총구에서 불꽃이 뿜어지기 무섭게 당장이라도 내 목을 물어뜯을 것 같던 마두견이 너무나도 쉽게 나가떨어졌다.
[키에엑... 케엑.]
마차 안에 내팽개쳐진 마두견이 미간에 피를 흘리며 몸을 들썩이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마수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마두견이 얼마나 끈질기고 집요한지 아는 이라면 직접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마법? 너, 마법사였군!"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총이 지닌 특유의 굉음과 불꽃은 감출 수 있는 게 아니었는지, 흉터 사내가 외쳤다.
"어떻게 마봉석(魔封石)에 묶인 채로 저 정도의 마법을.... 버러지인 줄 알았더니 보통 마법사가 아니었군."
하얀 머리의 사내 역시도 한마디 거들었다.
당연히 틀린 사실들이었지만, 나는 굳이 그 오해를 정정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때로 어떤 오해들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꽤 도움이 되기 마련이었으니까.
콜트 패리슨을 쥔 나는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봐! 마법사! 이쪽도 좀 도와주는 게 어때? 이 X새끼가! 어딜!"
[크르릉!]
조금 전에 내가 쏴 죽인 마두견을 제외하고서도 여전히 마차 안에는 세 마리의 마두견이 각각의 죄수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상황이 다급한 만큼 저들을 도와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지만, 문제는 내 사정 역시도 그리 여의치는 않다는 점이다.
'마차 안에 남은 마두견은 셋. 남은 총알은 다섯 발.'
총은 과연 총이라는 건지 콜트 패리슨 B-09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소문난 마두견조차도 일격에 침묵시켰지만, 마차 바깥에도 마두견들이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섣부르게 마차 안에 있는 마두견을 모조리 쏴 죽일 수는 없었다.
고작 다섯 발.
나는 이제 다섯 발밖에 남지 않은 리볼버를 들고서 이 지랄맞은 상황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아무리 총이 있다고 해도 혼자서 마두견 무리의 습격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어.'
호송대 병사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어도, 죄수 호송 마차 안까지 마두견들이 들이닥친 지 시간이 꽤 됐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병사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보건대 썩 좋은 상황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마냥 외부 지원을 바랄 수는 없다는 이야기.
거기에 더해서 바깥에서 들려오는 괴성으로 짐작하건대, 죄수 호송대를 습격한 마두견 무리는 최소 스무 마리 이상이다.
내가 아무리 명사수라고 해도 지금 지닌 총알로는 어찌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숫자인데, 하물며 나는 그런 명사수조차 아니다.
조금 전에 일격에 마두견을 침묵시킨 것 역시도 거의 우연에 가깝다고 해도 무방했다.
비록 군 시절에 만발 사수로 포상 휴가도 몇 번 받기는 했지만, 침착하게 조준을 하는 사격과 실전에서 하는 사격이 같을 리가 없다.
'거기다가, 묶여 있기까지 하지.'
어찌 보면 이 점이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일단, 이 족쇄부터 어떻게 해야 해.'
하얀 머리 사내는 이 사슬을 마봉석이라고 말했다.
만약 이게 정말로 내가 아는 마봉석이라면, 등급과 순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웬만한 방법으로는 파괴할 수 없다.
아무리 총이라고 해도 말이다.
'노려야 할 건 쇠사슬과 연결되어있는 연결부 부분.'
아무리 죄수 호송 마차가 튼튼하다고 해도, 마차 전체를 마봉석으로 만들 수는 없다.
아무리 등급이나 순도가 낮은 마봉석이라 할지라도 그 가격이나 가치는 보통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마봉석 사슬과 호송 마차의 벽 부분에 연결된 경첩을 겨누었다.
'제발....'
마음속으로는 간절한 바람을 지닌 채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요란한 격발음과 함께 귀가 먹먹해졌다.
최악의 경우 사슬에 맞고 튕겨 나간 탄이 도탄이 되어서 나에게 맞을 수도 있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으...."
총성으로 인해 먹먹해진 정신을 간신히 차리고서 앞을 보자, 총격에 의해서 박살 난 경첩의 모습이 보였다.
짤랑....
그와 함께 갈 곳을 잃고서 허무하게 흘러내리는 쇠사슬.
앞선 우려들이 무색할 정도로 쉬운 성공이었다.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된 내가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간신히 마두견을 제압한 흉터 사내가 나를 보며 외쳤다.
"오, 오오! 역시 마법사 양반이군. 좋아. 그러면 이제 내 것도 좀 풀어 줘!"
"멍청하긴."
"뭐?"
그때 끼어든 건 다름 아닌 하얀 머리의 사내였다.
저 빈약한 몸으로 어떻게 마두견을 제압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하얀 머리 사내의 발밑에는 마두견 한 마리가 깔려 있었다.
오만한 태도에 걸맞은 실력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강력한 마법은 그만큼 강력한 대가를 치른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이미 저 정도로도 엄청난 대가를 치렀겠지. 그런 마법을 너 따위를 위해서 써 줄 수 있을 것 같나?"
"제기랄, 그러면 어쩌자고!"
하얀 머리 사내가 흉터 사내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봐, 마법사. 아무리 네가 강력한 마법을 가지고 있어도, 그 정도의 마법을 저 머저리를 위해서 쓸 생각은 없겠지. 대가가 엄청날 테니까."
하얀 머리 사내는 마법에 대해서 꽤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거기에 더해서, 내가 사용하는 게 마법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사용 횟수에 제한이 있다는 본질을 꿰뚫어 보기까지 했다.
당장 나에게 남은 총알은 이제 고작 네 발뿐이었으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이렇게 하자고. 지금 마차 밖으로 가서 병사가 가지고 있는 마봉석의 열쇠를 가져와. 그리고 우리를 풀어 주고 사이좋게 이곳에서 탈출하는 거지. 어때? 나쁘지 않은 제안일 텐데."
얼핏 듣기에는 합리적인 제안이다.
한 가지 함정을 제외한다면.
"내가 뭘 믿고?"
지금 이곳은 죄수 호송대 한복판이다.
그것도 마경과의 국경 지대인 겨울성 크로이츠로 끌려가는 호송대.
즉, 이곳에 묶여 있다는 것 자체가 중죄를 저지른 범죄자라는 이야기다.
아무리 상황이 다급해도 저런 중범죄자를 믿는 건 여러모로 쉽지 않은 일이다.
"신뢰라.... 그 또한 중요한 문제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라는 걸 알 텐데?"
하얀 머리 사내가 비릿하게 웃었다.
묘한 여유까지 느껴지는 그 모습 속에는 내가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어려 있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거절한다."
나는 범죄자 따위는 믿을 생각이 없다.
하물며 그게 이런 지옥 같은 상황에서라면 더욱더.
"...뭐? 잠깐!"
나는 그 외침을 뒤로한 채로 마차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하얀 머리 사내의 탈출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간단했다.
겨울성 크로이츠로 가는 길목.
이곳이 그 길목 중에서 정확히 어디쯤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으나, 마두견 무리가 나타났다는 것부터가 마경과 상당히 인접해 있다는 강력한 증거다.
섣부르게 길을 벗어났다가는 마수 무리에 습격당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오히려 대부분 1레벨 개체로 이루어진 마두견 무리와 마주친 건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만약 운 좋게 이 지대를 벗어나서 겨울성 크로이츠로 향하는 여러 도시 중 한 곳에 도착한다고 한들, 애초에 나는 범죄자 신분이다.
분명한 신분이 없는 상태에서는 도시에 들어갈 수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신분이 들통나서 죽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내가 이 죄수 호송대에서 이탈해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도, 겨울성 크로이츠로 가는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야.'
겨울성 크로이츠.
마경으로부터 제국을 지키는 방패로 명성과 악명 모두가 자자한 겨울성은 더없이 위험하지만, 동시에 더없이 많은 기회가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1레벨의 최약체인 지금의 내가 당장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곳에 몸을 의탁하는 게 그나마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
"...이런 씹."
그렇게 큰 결심을 마치고서 마차 밖으로 나서기 무섭게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건 온갖 고성과 비명이었다.
[크르르릉!]
[캬오오오오─!]
죄수 호송 마차 바깥의 상황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심각했다.
구슬리는 피와 끔찍한 냄새가 공기 중을 감돈다.
어떤 병사들은 눈을 한 번도 뜨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났고, 어떤 병사들은 비명과 함께 고통에 찬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 고통 혹은 분노가 물결치듯 남아 있었다.
이제부터 나는 눅눅한 흙과 섞여 검붉은색으로 변한 이 지옥 같은 장소에서 살아남아만 했다.
"놈들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다! 방어망을 형성하고, 침착하게 대응해!"
"수가 너무 많습니다!"
"고작해야 마두견일 뿐이야! 침착하게 대응하면 돼!"
그 와중에 이제 열 명도 채 남지 않은 병사들이 상처를 입은 채로 마두견 무리에 포위되어 있다.
포위한 마두견들의 숫자는 대충 봐도 서른 이상.
얼핏 보면 할 만해 보일 수도 있었으나, 바닥에 쓰러져 있는 병사의 수와 마두견의 숫자가 비슷한 것으로 보았을 때 이제껏 이뤄진 교전에서 병사들과 마두견의 교환비가 썩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마두견이라 할지라도 이 정도 규모의 병력이 쉽게 당할 리가 없는데....'
상식으로 생각했을 때, 마경과 인접한 겨울성으로 죄수를 호송하는 병사들의 수준이 낮을 리가 없다.
아무리 마두견이 집요하고 까다로운 상대라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는 저 정도 규모의 마두견에게 밀릴 리가 없다는 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세에 몰리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설마....'
썩 좋지 않은 가능성이 떠오른다.
그리고.
[우우우우우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선가 불길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망할... 놈이다."
"X발, X발...."
그와 함께 마두견과 대치하고 있던 병사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쿵─
쿵!
분명히 그럴 리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마치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니었다.
[크르르르....]
이윽고, 마두견 사이에서 다른 마두견보다 월등히 덩치가 큰 개체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Lv.2]
[물어뜯는 하락카]
네임드 개체.
마두견의 우두머리가 나타났다.
4화 죄수 (3)
물어뜯는 하락카.
그저 겉으로 보기만 했을 뿐이지만, 놈이 어떤 유형의 네임드 마수인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우두머리형 네임드.'
네임드로 분류되는 마수들은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이 되는데, 그중에서 이런 저레벨 구간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유형 중 하나가 바로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형 네임드였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기본적으로 우두머리형 네임드는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있는 데다가, 통솔 효과까지 지닌 탓에 일반적인 무리보다 훨씬 더 상대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약점이 없지는 않아.'
우두머리형 네임드가 이끄는 무리를 상대하는 건 매우 까다롭지만, 만약 우두머리를 처치할 수만 있다면 대장을 잃은 나머지 무리는 길길이 날뛰다가 알아서 자멸한다.
일단 우두머리 마수를 잡을 수만 있다면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이야기.
그러나 이론과 실전은 분명히 다른 것이었기에,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후우...."
흔히 말하길, 멧돼지 정도 되는 짐승이라면 설사 총을 맞는다고 해도 멈추지 않고서 돌진을 해 온다고 한다.
워낙 가죽 자체가 두꺼운 데다가 지방과 근육층이 단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수는 어떨까?
대충 생각해 봐도 마수가 짐승보다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물론 앞서서 나는 이미 마두견을 총알 한 발로 일격에 침묵을 시킨 적이 있었으나, 내 생각에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에 가깝다.
거리가 워낙 가까웠던 데다가, 마두견 역시도 자신의 급소를 거리낌 없이 노출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런 요행을 또다시 바라는 건 그리 현명한 생각이 아니었다.
'남은 총알은 네 발뿐.'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였지만, 애석하게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크르르....]
물어뜯는 하락카가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마두견 무리의 포위망이 서서히 좁혀 들었다.
"이런 X발...."
"다들 침착해! 기껏해야 마두견 무리일 뿐이야! 여기까지 와서 X새끼들 밥이 되고 싶은 건 아니겠지?"
"하... 대장이 그렇게 말하니까 포기할 수가 없네. 좋수. 끝까지 해봅시다!"
"다들 준비해!"
그나마 불행 중 다행히 죄수 호송대를 이끄는 대장은 제법 유능한 이였는지 병사들의 사기를 돋울 줄 아는 이였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전력의 열세가 쉽게 극복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알고 있다.
이대로면 전멸을 피하기 어렵다는 걸.
이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할 수 없나.'
나는 하락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크르르....]
하락카는 여전히 직접 나서지 않고서 오만한 태도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커헝!]
하락카의 신호와 함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포위한 마두견 무리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온다.'
본능적으로 손아귀에 쥔 콜트 패리슨을 꽉 다잡았다.
멸망 유예자 특성 덕분일까.
본래였다면 두려웠어야 할 상황일 텐데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더없이 마음이 침착했다.
[캬오오─!]
[컹! 컹!]
과거에 호랑이 사냥을 하던 포수들은 호랑이가 눈앞에 와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침착함을 잃는 순간이, 바로 목숨을 잃는 순간이었으니까.
비록 내가 호랑이를 잡는 포수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 자세만큼은 한번 본받아 보고자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개 같은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
"후우...."
최대한 심호흡을 한 나는 두 손으로 콜트 패리슨을 쥐고서 선두에 선 마두견을 보았다.
철컥─
콜트 패리슨을 겨눈 총구가 가느다랗게 떨린다.
조심스레 숨을 멈춘다.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착각 속.
마침내, 떨림이 멎었다.
타앙!!!────
총구가 번뜩이며 오만한 자세로 인간들을 내려다보던 마두견의 몸이 크게 튕겨 나갔다.
[깨앵!]
적중이었다.
이것으로 마두견을 죽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내 목적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켕! 켕!]
[크르르....]
마치 벼락이 치는 것 같은 총성의 굉음과 함께 선두에 선 마두견이 당하자, 마두견 무리 전체가 움찔하며 멈춰 섰다.
생각 이상의 효과였다.
다만, 그 와중에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면, 내가 움찔하게 만든 게 비단 마두견들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갑자기 무슨 벼락이...."
"저쪽이다! 저쪽에서 벼락이 쳤어!"
"벼락이라니...? 잠깐, 설마 마법? 죄수다! 죄수가 탈출했다!"
"죄수라고?"
"제기랄! 마법사가 탈출했다!"
"마봉석을 대체 어떻게...!"
잠시 잊고 있었다.
내가 상대해야 할 적은 단순히 마수 무리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마법사! 얌전히 다시 마차로 돌아가라!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죄수 호송관의 권한으로 즉결 처형 하겠다!"
"잠깐."
날이 잔뜩 서 있던 병사를 제지한 건 호송대 대장이었다.
"대장?"
"상황을 보아하니, 탈출하거나 싸우려는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호송대 대장이 그렇게 말하고는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용건이 뭐지?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해서 탈옥에 대한 죄는 따로 묻지 않을 테니, 얌전히 마차로 돌아가라."
"돕겠습니다."
"돕는다고? 죄수가 우리를? 우리가 너를 어떻게 믿지?"
"그러지 않으면 전부 죽을 테니까요. 아닙니까?"
호송대 대장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내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알아들은 것이다.
"과연.... 알았다. 만약 무사히 겨울성에 도착한다면, 네 공에 대해서는 따로 보고하지."
"좋습니다."
냉철한 상황 판단과 타협.
이미 알고 있던 대로 호송대의 대장은 상당히 유능한 자였다.
'거기다가, 탈옥에 대한 죄를 묻지 않는 건 물론이고 이번 일에 대한 공까지 잊지 않겠다고 했다. 이건 따로 안전장치를 두었다고 보는 게 옳겠지.'
지금 호송대의 입장에서는 마법사로 판명된 내가 반란을 일으키거나 탈옥을 시도한다면 크게 곤란해진다.
그렇기에 호송대 대장은 공이라는 이름의 미끼로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해서 나름대로 대책을 세운 것이다.
내 입장에서도 어설프게 반란을 일으키거나 탈출을 시도하는 것보다는, 겨울성 크로이츠로 가서 이번 일에 대한 공을 인정받는 게 웬만하면 상황이 좋을 테니까.
그 순간.
[크오오오오오!!!]
하락카의 포효와 함께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마두견들이 다시금 달려들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하락카 역시도 함께였다.
'직접 나서야 한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더없이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각자 위치로!"
"위치로!"
죄수 호송대의 병사들 역시도 나름대로 진형을 갖춰서 대응하기 시작했다.
[카아아악!]
"이 X새끼들이 감히!"
죄수 호송대 병사들과 마두견 무리가 부딪치며 본격적인 난전이 시작됐다.
"이 X새끼가!!"
[깨갱──!]
그 치열하기 짝이 없는 난전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명료했다.
'우두머리를 노린다.'
앞서 말했듯이, 우두머리형 네임드가 이끄는 무리는 위협적인 동시에 약점 역시도 명확하다.
그렇기에 나는 병사들을 방패 삼은 채로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바로, 하락카가 모습을 드러낼 때를.
[아우우우우우───!]
멀찍이서 들려온 짐승의 울음.
그와 함께 마두견 사이로 물어뜯는 하락카가 보였다.
[컹! 컹컹!]
하락카 역시도 나를 보았는지, 놈이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해서 곧장 달려들었다.
'온다.'
하락카와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진다.
200m, 150m, 100m....
하락카의 덩치나 달려오는 속도를 생각한다면, 당장 내 앞에 있는 병사들은 방패막이조차 되어 주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해야 해.'
어느덧 하락카와의 거리가 50m 안쪽까지 다다랐다.
저 흉악스러운 이빨이 내 목에 닿는다면, 나는 조금도 버티지 못하고 죽어 버리겠지.
스으읍....
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숨을 멈춘다.
호흡과 함께 이어지던 손끝의 가느다란 떨림이 멎었다.
하나, 둘, 셋.
마침내 총구 위의 작은 조준선 두 개가 겹쳐지며, 그 안에 하락카의 모습이 담겼다.
하락카와의 거리는 이제 20m 남짓.
그 순간, 어째서인지 당장이라도 내 목을 물어뜯으러 달려들 것 같던 하락카가 발걸음을 멈칫했다.
마치 겁이라도 먹은 듯이.
하락카가 어째서 그러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몰라도, 나에게 있어서는 기회였다.
'지금.'
철컥─
방아쇠가 당겨지고.
타아아아앙!!!───
총성이 전선에 울려 퍼지며.
[카학!]
사방에 핏방울이 비산했다.
['멸망 유예자(EX)' 특성 효과로, 마(魔) 속성을 지닌 대상에게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1,000%의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네임드 마수, '물어뜯는 하락카'를 처치하였습니다!]
풀썩─
그와 함께 미간에서 피를 흘리며 힘없이 쓰러지는 하락카.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정신력이 상승합니다. (+1)]
[1 → 2]
그 모습을 본 나는 잠시 얼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뭐야?"
고작 총알 한 발.
그것뿐이었음에도 네임드 개체인 물어뜯는 하락카가 허무하게 쓰러졌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야 뻔했다.
'...마 속성이라고?'
공정의 세계에서 마 속성은 매우 희귀하다.
공정의 세계에 있는 많고 많은 존재 중에서 마 속성을 지닌 건 손꼽히는 강력한 보스 몬스터들이나, 악마 같은 초월적인 존재들뿐.
그런데 고작 마두견의 우두머리에 불과한 하락카가 마 속성을 지녔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카악! 카아악!]
[컹! 컹컹컹!]
우두머리가 쓰러지기 무섭게 겁을 집어먹은 마두견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뒤돌아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놈들이 도망친다!"
"다 잡아 죽여!"
잔뜩 흥분한 병사들이 도망치는 마두견들의 뒤를 쫓으려 하자, 호송대장이 외쳤다.
"쫓지 마라! 진형을 유지해!"
"대장! 하지만 지금 쫓으면 다 죽일 수 있습니다!"
"진형을 유지해라! 명령이다!"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힌 병사들이 추격을 포기하고서 진형을 지켰다.
병사들이 추격을 포기하자, 죄수 호송대를 포위하고 있던 마두견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조리 사라졌다.
놀라울 정도로 쉽게 상황이 정리된 것이다.
"...끝난 건가?"
"긴장 놓지 마. 언제 놈들이 다시 올지 몰라."
아니, 오지 않을 것이다.
우두머리를 잃은 무리는 뿔뿔이 흩어져서 새로운 우두머리가 나타나기를 기다릴 뿐이니까.
"바로 떠날 준비를 해라. 피 냄새가 났으니, 곧 이곳에 다른 무리가 몰려들 수도 있다."
"하지만 사체들은...."
"전부 태워."
호송대장은 이 상황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자였다.
"빨리빨리들 움직여!"
"곧 날이 저문다! 그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그렇게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호송대장이 내 옆에 다가왔다.
"...정말 엄청난 마법이더군. 마법사들은 많이 봤지만, 그런 마법은 처음 봤어."
호송대장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경계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라도 그 위협적인 마법이 자신들을 향할 경우, 상황을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아, 이번 일에 대해서는 겨울성에 가서 잘 말해 줄 테니 걱정할 필요 없어. 자네 정도의 마법사라면 겨울성에서도 충분히 대접을 받을 수 있겠지. 비록 지금은 죄수 신분이기는 하지만, 겨울성에 도착한 뒤로는 정식으로 입영 절차를 밟게 될 테니."
"알겠습니다."
"그러면 쉬게."
호송대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병사들을 지휘하기 위해서 사라졌다.
죄수 신분인 나에게 다시 마봉석을 채우지조차 않는다라....
아마, 그 자체가 상당히 위험부담이 크다고 여겼을 확률이 높다.
괜히 나를 자극했다가는 하락카를 단번에 없애 버린 마법이 자신들을 향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호송대장이 제멋대로 한 착각이지만,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그러면....'
병사들이 분주히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하락카의 사체로 발걸음을 옮겼다.
네임드 개체 정도라면 사체 부산물을 잘 찾아보면 제법 쓸 만한 게 있기 때문이다.
'음?'
살며시 하락카의 사체를 살피던 나는 하락카의 몸에 박힌 묘한 광석 하나를 발견했다.
묘하게 낯이 익은 색.
나는 이러한 묘한 빛깔을 띠는 광석을 하나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설마....'
나는 곧장 하락카의 몸에 박혀 있던 돌의 정체를 확인했다.
────────────
[승천석 파편]
분류 : 소모품
등급 : ??
────────────
'...승천석 파편이라고?'
일개 마두견의 네임드 개체에 불과했던 하락카는 어떻게 마 속성을 띠고 있었는가.
지금, 그에 대한 이유를 알아 버린 것 같았다.
멸망룡이 품고 있었던 승천석의 파편이라면, 그것을 지닌 것만으로도 마 속성을 지닐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대체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내가 사용한 뒤에 사라졌을 터인 승천석은 대체 왜 이곳에 있는가?
그것도 원본 그대로도 아닌 파편이라는 형태로 말이다.
모든 게 수수께끼투성이였으나, 애석하게도 당장 내가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그 대신, 나는 당장 알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소모품이라....'
내가 이 세계에 오게 된 계기는 승천석을 사용하면서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 승천석 파편이라는 물건을 사용한다면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승천석 파편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 / N]
'...좋아.'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는 손해 볼 것도 없었기에 나는 과감히 승천석 파편을 사용했다.
[승천석 파편을 사용합니다.]
[위대한 하늘에 이르는 길에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
.
.
[접속 승인 완료.]
[게시판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현재 게시판 레벨은 'Lv.1'입니다.]
...게시판이라고?
더없이 익숙하고, 동시에 낯선 개념의 등장에 나는 잠시 얼이 빠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공정의 세계는 게임이었지만,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건 명백히 현실이었으니까.
────────────
[접근 가능 게시판 목록]
[익명 게시판] [Lv.1]
────────────
"무슨...."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듯이 익명 게시판을 눌렀다.
[익명 게시판에 접속합니다.]
이 세계에 대해서 미처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었다.
-기사단장임 : 기사단원 모집 중. 대우 확실.
-익명7454 : 집에 가고 싶다...
-익명148 : └ 아직도 포기 못 함? ㅋㅋ 뉴비인가 보네.
-뉴들박77 : 저번에 온 뉴비 본 사람 있음? 며칠 전부터 안 보이는데.
공정의 세계(World of Justice)는.
아니, 공정의 세계 온라인(World of Justice Online)은.
-섭종기원341일차 : 이 존망겜 대체 언제 망함? 개X발 진짜.
-익명575 : └자살해, 븅신아 ㅋㅋ
-익명12 : ㄹㅇ ㅋㅋ
온라인 게임이었다는 사실을.
5화 익명 게시판
-회사짤린듯 : 이제 진짜 회사 가야 하는데 X발... 짤린 거 아니야?
-개꿀딱 : ㅋㅋㅋ 븅신들, 그냥 여기서 살아. 좋기만 하구만.
-익명55 : ㅇㅈ ㅋㅋ
익명 게시판 속에는 혼란과 절규, 절망 그리고 혼돈이 가득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게 대체...."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동시에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이 빌어먹을 세계에 떨어진 게 나뿐만이 아니라는 일종의 안도감이었다.
공정의 세계에 떨어진 건 나 혼자만이 아니다.
이곳에는 이미 나뿐만이 아니라 적지 않은 유저가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익명651 : 하물람의 둥지 위치 아는 사람?
-돈좀주세요 : 1골만 빌려줄 사람 없음? 진짜 2주 동안 굶었다...
-뉴들박77 : 저번에 글 올린 뉴비 있음? 도와줌 ㅇㅇ 비밀 댓글 남겨.
-개미핥Gi : 제국 남서쪽 사는 애들 조심해라. 이번에 좀 심상치 않다.
익명 게시판의 형태는 본디 공정의 세계인 게임 내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과 같았다.
실제로 올라오는 내용 역시도 특정 주제의 글이 조금 많다 뿐이지, 결국 공정의 세계 게시판에 올라오곤 했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공정의 세계를 할 때 늘 보았던 게시 글들과 같은 질문 글과 아무런 의미 없는 뻘글 같은 것들 말이다.
"아."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것도 잠시.
나는 당장 이 익명 게시판에서 무엇을 얻어야 할지 알았다.
정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이 빌어먹을 세계에 대한 정보였다.
'어쩌면, 이 상황에 대해서 무언가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내가 어째서 이 세계에 오게 되었고, 또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는지.
생각을 마친 나는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대부분 별 영양가 없는 뻘글이나 헛소리였으나, 그렇지 않은 정보들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양질의 정보가 모여 있는 곳이라 하면, 역시나 추천 글이었다.
[추천 글]
추천 글은 게시판 내에서 일정 수치 이상의 추천과 조회 수를 받아야만 등록될 수 있는 곳이다.
일종의 베스트란인 셈.
당연히 이런 곳에 올라올 정도의 게시 글이라면 상당한 정보를 지녔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면....'
그렇게 추천 글에 들어가기 무섭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시 글이 있었다.
가장 많은 추천 수를 기록해서 상단에 있는 데다가, 제목부터가 사람의 이목을 확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뉴들박77 : [Tip] 뉴비 필독 사항.txt [★]
제목 옆에 있는 별 표시가 해당 게시 글이 얼마나 많은 추천과 조회 수로 추천 글 최상단에 자리를 잡았는지 말해 주었다.
나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이 그 게시 글을 눌렀다.
──────────────
반갑다. 여러분의 친구 뉴들박77이다.
처음 낯선 세계에 오게 돼서 엄청 당황스러울 텐데, 일일이 질문 글에 댓글 달기 번거롭기도 하고 해서 대충 내가 아는 것들이랑 여기에 알려진 사실 몇 가지 씨불여 봄 ㅇㅇ
1. 너희도 알겠지만, 여기는 공정의 세계 온라인과 같은 세계다. 실제로 로그아웃을 제외한 시스템 창도 작동하니, 사실상 게임 속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
2. 아마 지금 네가 빙의한 몸은 네가 마지막으로 플레이 하던 캐릭터일 거임. 가끔 마지막에 부캐로 접속해서 부캐로 된 놈들 있다고 억울해하던데, 혹시 아닌 사람 있으면 제보 바람.
3.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이 세계에 도착한 시기는 다 다르더라. 그런데 출발한 시간대는 다 비슷한 듯? 이유는 모름.
4. 웬만큼 자신 없으면 게시판에 자기 신분 함부로 흘리지 마라. 쥐도 새도 모르게 뒤질 수도 있다.
5.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적어도 죽은 놈들은 아무도 안 돌아왔다. 여기도 죽으면 로그아웃하는 거라고 믿는 놈들 많던데, 그럼 자살하셈 ㅇㅇ 안 말림.
6. 당연히 부활도 없다. 물론 이거 써 놓는다고 해도 뉴비들이 맨날 핑프 짓 할 텐데, 이 글 봤으면 자제해라.
7. 가끔 여기에서 신분 까고 노는 고닉들 있는데, 걔네한테는 웬만하면 깝치지 마라. 진짜 무서운 사람들임 ㅇㅇ
8. 웬만하면 악마랑 계약하지 마라. 니들도 알겠지만 마법 몇 번 잘못 쓰면 폐인되는 거 순식간이다. 명심해라. 여긴 더 이상 게임이 아니다.
9. 이제 몇몇 네임드나 보스는 마 속성을 띤 놈이 많다. 옛날 생각 하고 괜히 덤비다 죽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 또 조심.
10. 멸망룡 어디갔는지 아무도 모르니까 그만 좀 물어봐라.
이상 모르는 거 있으면 댓 ㄱㄱ 아는 건 답변해 줌.
──────────────
-마법사114 : 마지막 경고 개무섭네 ㄷㄷ
-익명21 : 뉴비 사냥꾼 소문 어떻게 생각함?
└뉴들박77 : [비밀 댓글입니다.]
└익명111 : 비댓 머임.
└익명55 : 딱 보면 모름? 뉴들박이 뉴비 사냥꾼이잖아 ㅋㅋ
-뉴비15 : 뉴들박 님 접니다... 얼마 전에 도와주셔서 간신히 살았습니다. 진짜 ㄱㅅㄱㅅ 꿀팁도 굿굿.
└익명675 :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다면 토끼 이모티콘을 그려 주세요.
└익명54 : ㄹㅇ ㅋㅋ
-섭종기원341일차 : 믿고 보는 뉴들박 팁.
-기사단장임 : 흠.
-익명64 : 신분 까지 말라는 게 뉴비 사냥꾼 때문임?
└뉴들박77 : [비밀 댓글입니다.]
└익명111 : 비댓 그만해~~ 궁금해 죽겠네 ㅅㅂ
"...."
뉴비 필독 사항을 읽은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새삼스레 내가 온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이제야 피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뉴들박77.'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런 게시 글을 작성해 준 부분에 대해서는 감사함을 표한다.
만약 뉴들박77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러한 정보를 찾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를뿐더러, 혹시라도 그게 늦어져서 죽었을지도 모르니까.
'거기다가 멸망룡이라....'
내가 이 세계에 온 계기에 멸망룡과 승천석 파편이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정체 모를 현상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는 멸망룡과 승천석 파편에 대해서 알아보는 게 좋을 듯했다.
'일단 몇 개 더 찾아볼까.'
대충 보니 뉴들박77이라는 친구가 참 친절하게 정보 글을 작성하는 걸 보니, 이 친구 게시 글을 중점으로 살펴보는 게 효율적일 것 같다.
[작성자 검색 : 뉴들박77]
나는 곧장 뉴들박77이 작성한 글을 검색했다.
-뉴들박77 : 뉴비44 님 어디 갔는지 보신 분?
-뉴들박77 : 아... 저번 뉴비 안 보이는데 설마 죽었나.
-뉴들박77 : [Tip] 저렙으로 생존하는 방법.
대부분 쓸데없는 글이었으나, 한 가지 게시 글이 내 눈에 띄었다.
-뉴들박77 : (장문 주의) ■■■ 파편에 대해서...
내가 무언가에 홀린 듯이 해당 게시 글을 누르려던 순간.
"곧 떠날 테니 준비하게."
나를 현실로 돌리는 목소리와 함께 나는 눈앞을 바라보았다.
호송대장이었다.
"...아, 예."
게시판에 얼마나 빠져 있었던 건지, 어느덧 호송대가 정리를 마치고서 곧장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네는 어떻게 갈 텐가? 원래 타고 있던 마차에 오를 텐가?"
원래 타고 있던 마차라 하면 당연히 죄수 호송 마차를 말하는 것일 터.
"그냥 걸어도 됩니까?"
"마음대로 하게. 부상자도 많은데, 자네 정도의 마법사가 나서 준다면 안심이지."
죄수 호송 마차로 돌아가기에는 영 찝찝해서 한 말이었건만, 다행히 호송대 대장은 나에게 그 정도 편의는 봐주었다.
거기에는 아마 부족한 병력과 통제할 수 없는 위험한 마법사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섞여 있겠지만, 나는 그런 세세한 생각은 잠시 접어 두었다.
당장 나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 파편이라고?'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르지만, 왜인지 그 노이즈 낀 부분에 들어갈 단어를 알 것 같았다.
'승천석 파편과 관련이 있는 건가?'
적어도 내가 알기에 승천석은 나를 이 세계로 인도했고, 그러한 승천석의 파편은 나에게 게시판 기능을 활성화시켰다.
그렇다면 뉴들박77이 말하던 ■■■ 파편의 정체 역시도 승천석 파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하지만 어째서 승천석 파편이 아니라 저렇게 부르는 거지?'
추측할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
아무래도 나머지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뉴들박77이 작성한 나머지 게시 글을 확인해 봐야 할 듯했다.
"출발한다!"
호송대장의 외침과 함께 이제 반 이하로 줄어 버린 죄수 호송대가 다시금 출발을 알렸다.
"대체 대장께서는 무슨 생각인지. 저렇게 위험한 마법사를 마봉석도 안 채우고 풀어 두다니...."
"쉿! 조용해, 마법사가 들을라."
호송대의 병사들이 슬금슬금 나를 피하며 뒤에서 수군거렸다.
아무래도 본의 아니게 이목을 끌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나로서는 그에 대해 신경을 쓸 여유 따위는 없었지만 말이다.
"...쯧."
승천석 파편, 익명 게시판, 뉴비 사냥꾼.
게시판에서 보았던 온갖 글자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당장 이 세계에 나뿐만이 아닌 다른 유저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기뻤지만, 동시에 익명 게시판에서 보이던 그 오묘한 분위기는 나를 착잡하게 만들었다.
낯선 세계에 떨어진 이방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익명 게시판 속 유저들은 은연중에 서로를 경계했다.
그에 대한 가장 큰 증거가 바로 그들 스스로 내세우고 있는 익명성이었다.
'분명히 뉴들박77은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함부로 밝히지 말라고 했지.'
그리고 그 배경에는 아마 뉴비 사냥꾼이라 불리던 괴담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뉴비 사냥꾼.
마치, 이 세계에 도착한 다른 유저들을 사냥하러 다니는 누군가가 있다는 소리 같지 않은가.
'하지만 대체 왜?'
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사이에도 여정은 계속되었다.
걸으면서 스마트폰을 보는 행위가 위험하듯이 공정의 세계에서 플레이 도중에 게시판을 보는 건 매우 위험한 행동 중 하나였기에 나는 게시판을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중간중간 틈이 날 때마다 게시판을 보려고 했으나, 겨울성으로 향하는 길의 지형 자체가 워낙 험한 터라 그럴 만한 여유를 내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들 힘내라! 이 고개만 넘으면 겨울성이다!"
"예!"
여정이 계속됐다.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 눈길이 쌓인 산을 넘고, 얼어붙은 강을 건넜다.
그리고....
"저기가 겨울성이다!"
겨울성 크로이츠.
마침내, 북부 전선에 도착했다.
6화 겨울성 크로이츠
멈추지 않고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겨울성 크로이츠.
늘 끊이지 않는 전투가 벌어지며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 나온다는 악명 높은 북부 전선이자, 마경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수들로부터 제국을 지키는 방패.
바로 그 겨울성 크로이츠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겨울성을 눈앞에 두니 기분이 착잡해졌다.
어쩔 수 없었다.
겨울성의 악명은 유저들 사이에서도 자자한 편이었고, 그런 곳을 1레벨로 들어섰다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만큼 겨울성 크로이츠가 지닌 가혹한 기후나 처해 있는 상황이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더라도, 이 상황이 나에게 달가울 리가 만무했다.
[호송대를 도와서 무사히 겨울성에 도착하였습니다!]
[겨울성 내 평판이 상승하며, 관련 인물들이 당신을 호의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호감이나 매력 같은 건 직접 정보 창에는 드러나지 않는 능력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일단 있어서 나쁠 건 없다는 소리.
"드디어 도착했군. 고생했네."
내가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호송대장이 다가왔다.
"호송대장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약속했던 대로 자네의 활약에 대해서는 겨울성 측에 전해 둘 테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고맙지. 자네가 아니었다면 모조리 전멸이었을 테니."
"호송대장님께서 이끄는 호송대라면 충분히 이겨 낼 수 있었을 겁니다."
"겸손하기는. 자네랑 말하다 보면 늘 자네가 마법사라는 생각을 잊게 된단 말이지."
호송대장이 껄껄 웃었다.
호송대장은 처음에 나를 향한 경계심을 거두지 못했었지만, 여정이 이어지며 함께 고생하다 보니 묘한 동질감이 피어오른 건지 몰라도 이후에 꽤 친근하게 다가왔다.
나로서도 죄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호송대장이 이런저런 편의를 봐주었기에 그러한 친근함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
본래의 목적지였던 겨울성에 도착한 이상, 우리의 인연도 여기까지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자네와도 여기까지인 듯싶군. 몸조심하게. 이미 알고 있겠지만 겨울성은 만만한 곳이 아니니까. 뭐... 자네 정도 마법사라면 그것도 기우일지도 모르겠네만."
"바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자네와 또 보기에는 어려울 거야. 겨울성에 도착하는 즉시 자네는 바로 훈련소로 갈 테고, 나도 이곳에서 할 일이 있으니까."
"그렇군요."
왜일까.
이 순간, 군대에서 훈련소 동기들과 헤어질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드는 건.
물론 나도 안다.
훈련소를 수료할 때 동기들과 헤어질 때는 정말로 전우를 잃는 기분이지만,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잊힌다는 걸.
호송대장과의 인연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이 열립니다!"
"좋아, 다들 준비해!"
호송대장이 시원하게 외치기 무섭게 그토록 굳건하던 겨울성의 성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유능한 호송대장답게 미리 전령을 보내 놓은 덕분에 이 날씨에 밖에서 길게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 들어가지."
"예."
성벽을 관리하는 경비대장과 호송대장은 서로 아는 얼굴이었는지, 서로 익숙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살아 있었군. 이거 오늘도 술값은 내가 내야겠는걸."
"또 내 목숨으로 내기한 거야?"
"내기뿐이겠나?"
호송대장과 경비대장이 서로를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훈련 중대장님은?"
"훈련장 쪽에. 그나저나 이번에 온 신입들 상태는 어때? 겉보기에는 비리비리해 보이는데."
"기대해도 좋아. 엄청난 마법사가 있거든."
"흐음,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괜히 기대되는데? 어서 가 봐."
"밤에 늘 마시던 곳에서 보자고."
"그러지."
"아, 그리고 저기 있는 친구는 비록 죄수긴 하지만, 오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고, 대단한 마법사니 잘해 보라고."
"...지금 죄수한테 마봉석도 안 채우고서 함께 왔다는 소리인가?"
"내가 말한 마법사가 저 친구네."
호송대장이 껄껄 웃으면서 경악한 경비대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 혹시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질 테니."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일단은 알겠지만... 겨울성 내에서는 정식 절차를 밟아야 해. 그 정도는 이해하겠지?"
"물론이야."
호송대장은 죄수들을 겨울성 경비대장에게 인수하고는 나에게 눈짓했다.
"잘해 보게."
그게, 호송대장이 나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이었다.
"빨리빨리들 움직여!"
마침내 들어선 겨울성의 풍경은 뭐라고 해야 할까... 매우 정신없었다.
"북동쪽 성벽에 화살 멀었나?!"
"서둘러!"
"위급한 부상자다! 바로 호송해!"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만 나올 수 있다는 악명답게, 겨울성 크로이츠는 이 순간에도 호시탐탐 제국을 노리는 마경의 마수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비록 겨울성의 남쪽 성문인 이곳에서는 전투 장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성벽 위에 보이는 분주한 병사들의 움직임만 보아도 겨울성의 상황이 어떤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죄수들을 내려라."
경비대장의 말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죄수 호송 마차의 문이 열렸다.
경비병들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죄수들의 팔과 발목에 새로운 마봉석 수갑을 채운 뒤, 기존에 있던 마봉석 수갑을 벗겨 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함이었다.
그런 병사들의 능숙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호송 마차에 타 있던 죄수들 역시도 크게 반항하지 않고서 순순히 호송 마차를 내렸다.
"거기, 너도."
"예."
나 또한 그동안의 자유를 잠시 반납하고서 순순히 마봉석 수갑을 찰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나한테 총이 있다고 해도, 여기서 쓸데없는 반항을 해 봤자 단숨에 목이 잘릴 것이다.
겨울성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요새였고, 당연히 전반적인 수준 역시도 매우 높았다.
"으...."
"...결국, 크로이츠로 왔군."
오랜만에 빛을 본 죄수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같은 죄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특별 취급을 받아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전에 내가 저들의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대단한 마법사인 줄 알았더니, 주인 앞에서 꼬리 흔드는 것만 할 줄 아는 X새끼더군."
"흥, 동감이다. 겁쟁이 같으니라고."
백발의 비쩍 마른 사내, 흉터 사내가 차례로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몰라도, 마지막으로 있는 로브로 전신을 가리고 있는 여자는 나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정확히는, 나를 포함한 이곳에 있는 그 무엇에도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뭐, 상관없겠지.'
저 여자가 매우 수상한 건 사실이었지만,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나도 굳이 신경을 쓸 생각은 없었다.
겨울성으로 끌려오는 죄수 중에서 사연 없는 자가 있겠는가.
저런 것에 일일이 신경을 쓰기에는 내 코가 석 자였다.
'겨울성이라....'
마침내, 겨울성에서의 날이 본격적으로 시작을 알렸다.
* * *
"본격적인 입영 절차는 내일부터 진행이 될 예정이니, 오늘은 이만 쉬도록."
아직 입영 절차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사실인지, 우리가 머무는 곳은 군인들이 머무는 병영 같은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감옥이었다.
아직 죄수 신분이라는 뜻.
그나마 다행인 사실이 있다면, 호송대장이 나에 대해서 말을 꽤 잘해 주었는지 내가 머무는 곳은 감옥 내에서도 독실로, 나름대로 볏짚도 두툼하게 깔려 있는 특실이었다.
얼마 전의 나였다면 이러한 호사로도 잠을 설쳤겠지만, 지금의 나는 이미 며칠간의 강행군과 야영을 거친 뒤다.
당연히 이 정도면 감지덕지였다.
'이번 기회에 승천석 파편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해.'
늘 그랬듯이 고된 여정으로 피곤해서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오늘이 아니라면 또 언제 시간이 날지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몰려드는 졸음을 애써 이겨 내며 이를 악물고서 익명 게시판에 접속했다.
승천석 파편은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나를 이 세계로 인도하고, 또한 게시판 기능을 부여하는가.
일전에 확인했던 뉴들박77의 게시 글에는 분명히 그에 대한 단서가 있을 것이다.
비록 뉴들박77이 언급하던 ■■■ 파편이 승천석 파편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일단 가능성은 높았으니까.
[작성자 검색 : 뉴들박77]
무수한 게시 글 속에서 나는 일전에 봐 두었던 게시 글을 다시 찾아냈다.
-뉴들박77 : (장문 주의) ■■■ 파편에 대해서...
나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뉴들박77이 작성한 ■■■ 파편에 대한 게시 글을 눌렀다.
──────────────
우선, 이 게시 글은 내 뇌피셜대로 싸지르는 글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반박 시 니가 맞음.
우리 게시판 유저라면 다들 ■■■ 파편에 대해서는 대충 알 거다.
알 수밖에 없지, ■■■ 파편이 있어야 게시판에 들어올 수 있으니까.
일단 ■■■ 파편의 가장 큰 특징은 지닌 마수들이 마 속성을 띤다는 거다.
그러니까 괜히 ■■■ 파편 달고 있다고 막 들이받지 마라. 기본적으로 마 속성 지닌 놈들은 상대하기 까다로우니까.
아무래도 ■■■ 파편에 무슨 비밀이 있는 것 같음 ㅇㅇ
두 번째 특징은 ■■■ 파편을 손에 넣게 되면 게시판 기능이 활성화된다는 건데, 이후에 ■■■ 파편을 일정 개수 이상으로 손에 넣게 되면 게시판 레벨이 올라가는 걸로 알고 있음(참고로 나는 2레벨).
■■■ 파편이 뭔지 아직 모르지만, 일단 중요한 템인 건 확실한 거 같음.
그리고 이건 내 뇌피셜인데...
■■■ 파편을 전부 모으면, 혹시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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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겨울성 크로이츠 (2)
■■■ 파편을 전부 모으면,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일개 개인의 추측성 게시 글에 불과했으나, 그에 대한 파급력은 댓글에서 나타났다.
-익명99 : 간만의 괜찮은 추측 글인듯?
-기사단장임 : 흠.
-구사다 : 근데 너무 뇌피셜이긴 하네. 지금까지 확인된 건 게시판 레벨 높여 주는 게 전부잖아.
└추측성뇌피셜3 : 그게 어떤 의미로 보면 현실과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함.
└익명99875 : 그럴듯한데?
-익명8 : ■■■ 파편 모으러 갑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난데없이 이 세계로 끌려온 이들 입장에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수단이라는 건 늘 흥미를 끌기 마련이었으니까.
-회사짤린듯 : 혹시 뉴비 사냥꾼이 그래서 뉴비들 잡고 다니는 거 아니냐? 파편 먹을라고.
└익명55 : 그러면 아무리 봐도 뉴들박이 뉴비 사냥꾼 맞는 거 같은데?
└익명111 : ㄹㅇ ㅋㅋ
└뉴들박77 : [비밀 댓글입니다.]
└익명55 : [비밀 댓글입니다.]
└익명111 : 또또 비댓질이네. 그럴 거면 아예 니들끼리 살림을 차려 그냥~~
-익명12 : 시험해 보게 혹시 ■■■ 파편 저한테 줘 보실 분?
└하킴 : 나. 어디서 만날래?
└익명12 : ㅈㅅ 마음 바뀜.
└익명111 : ㅋㅋㅋㅋ 개 웃기네.
뉴들박77의 게시 글과 더불어서 댓글까지 마저 보니, 마침내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저들이 말하는 ■■■ 파편은 승천석 파편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내게는 분명히 보이는 승천석이라는 글자가 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가?
'설마, 승천석을 쓴 게 나라서?'
그럴듯한 가설이다.
실제로 그 누구도 사냥하지 못했던 멸망룡을 홀로 잡아 내고서 승천석을 사용한 건 나니까.
'물론 지금 저들이 가지고 있는 파편이 내가 사용한 승천석의 파편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황상 무언가 관계가 있는 건 분명해.'
내가 이 세계로 온 계기는 멸망룡 티아매트를 사냥한 뒤에 나온 승천석을 사용하면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오직 나에게만 승천석 파편의 이름이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승천석이라....'
뉴들박77의 게시 글을 댓글까지 싹싹 훑어본 나는 게시판에 승천석과 ■■■ 파편에 대한 정보를 더 검색했다.
[제목 검색 : 승천석]
[제목 검색 : ■■■]
[제목 검색 : 파편]
그러나 아쉽게도 당장 익명 게시판에서 알 수 있는 승천석 파편에 대한 정보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다른 게시 글을 검색해 봐도, 이미 뉴들박77이 언급했던 내용들 외에 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익명23 : ■■■ 파편 이거 머임? 이거 어디서 먹음?
-익명99 : (추측 글) ■■■ 파편에 대해서...
-사고팔아요A : ■■■ 파편 팝니다. 제국 금화로만 받아요. 가격 문의.
기껏해야 유저들이 써 놓은 온갖 추측 글 정도가 그나마 흥미롭다면 흥미로운 수준.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지.'
정신없이 익명 게시판을 보다 보니 어느덧 한 시간가량이 훌쩍 지났다.
내일부터 겨울성에서의 혹독한 일상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컨디션 관리를 해 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곳은, 정말로 한 걸음만 잘못 내디뎌도 죽을 수도 있는 곳이었으니까.
게시판을 끄고 눈을 감기 무섭게 수마가 나를 반긴다.
워낙 몸과 정신 모두 피곤했기에 잠에 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 * *
"이것들 봐라? 팔자가 아주 늘어지셨네. 아직도 처자고 있어? 당장들 일어나!"
이른 아침 단잠을 깨우는 건 늘 듣던 알람 소리 따위가 아닌 겨울성 병사의 고함이었다.
본래였다면 긴장으로 인해서 잠이라도 설쳤어야 정상이지만, 멸망 유예자 특성 덕분인지는 몰라도 아침이 상당히 개운했다.
'확실히 정신력과 관련된 특성이 좋긴 좋아.'
일반적으로 이런 식의 정신력류 특성은 맨몸으로 부딪치는 게임의 초반부보다는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더 가치를 발하는 특성이다.
아무래도 게임이 후반으로 갈수록 정신에 개입하거나 영향을 끼치는 적들이 늘어나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러나 멸망 유예자 특성은 EX 등급 특성답게 초반부터도 아주 유효한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과연 EX급 특성.'
애석하게도 내 감탄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른 병사가 거칠게 감옥 문을 열고서 나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빨리빨리 움직여!"
그렇게 정신없이 감옥을 나서니, 다른 방에서 나오는 죄수들과 눈이 마주쳤다.
함께 호송 마차를 탔던 죄수들이었다.
하얀 머리 비쩍 마른 사내.
흉터 근육 사내.
로브 쓴 여인.
비록 이름은 몰라도, 그 특징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명확해서 쉽게 잊을 수 없는 이들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하얀 머리 사내와 흉터 사내는 마치 나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노려보았다.
만약 이곳에 병사가 없었더라면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내 물음에 병사가 말했다.
"정식 입영 절차를 밟으러 간다."
"정식 입영 절차를 밟은 뒤에 겨울성의 군인이 되는 겁니까?"
"그래."
"그렇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듣던 대로 마법사답지 않군."
앞으로 전우가 될 거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고운 말에는 곱게 답해 주는 성격인지는 몰라도, 병사는 꽤 친절하게 내 질문에 답해 주었다.
병사가 나와 다른 죄수들을 데려간 곳은 겨울성 내에 있는 훈련장이었다.
이곳에서 입영 절차를 밟는 모양.
늘 병력 부족에 시달리는 터라 매일같이 병사를 모집하는 겨울성임에도, 이번에 입영하는 이는 이번에 도착한 나와 다른 세 명의 죄수들뿐이었다.
"데려왔습니다."
"그래? 고생했어. 그러면 그쪽부터 바로 시작하지."
본의 아니게 가장 먼저 입영 절차를 밟는 건 내가 되었다.
이 또한 호송대장의 배려였던 건지 아니면 단지 우연인지는 몰라도, 첫 번째 순번이라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거기다가... 척 봐도 3레벨 이상이군.'
지금의 처참한 내 수준을 생각한다면 상대적으로 어마어마한 강자인 셈.
그런 이가 직접 전장에 서는 게 아니라 고작 입영 담당 행정직이나 보고 있을 정도로 겨울성의 평균적인 수준은 매우 높은 편이었다.
"어디 보자... 이름 벨 블랙우드, 22세, 고아 출신이군. 죄명은... 응? 뭐야, 이게."
입영 담당관은 나와 관련된 서류를 읽으며 무언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다시금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신경 쓸 것 없다."
나는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벨 블랙우드라는 인물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으니 무엇을 물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자네 소속은 오늘부터 제4 특무대다. 다음!"
입영 절차는 놀라울 정도로 간결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다른 죄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4 특무대. 다음!"
"다음!"
"네가 마지막인가? 제4 특무대다."
제4 특무대에 막대한 결원이 발생하기라도 한 걸까.
나와 함께 온 죄수들 모두 나와 같은 소속의 제4 특무대가 되었다.
우연치고는 기가 막힌 수준이었다.
"잘됐군. 언제 한번 손봐 주고 싶었는데."
"동감이다."
나와 같은 부대 소속이 된 죄수들이 나를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예전 같았다면 내심 긴장을 감추지 못했을 테지만, 어째서인지 마음이 더없이 평온했다.
'음... 근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평온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특성 부작용 같은데.'
그렇게 혼자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던 순간.
"아, 오셨습니까."
"이 녀석들인가."
입영 담당관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새로 온 군인을 맞이했다.
얼핏 보면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중년 남성처럼 생겼으나, 곳곳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범상치 않았다.
"제법 쓸 만한 마법사가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
"예.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흐흠, 확인해 볼 가치가 있겠어."
느껴진다.
오직 강자만이 풍길 수 있는 위험한 분위기.
'최소 6레벨.'
아무리 제국의 방패라 불리는 겨울성이라 할지라도 6레벨 이상의 강자는 흔치 않을 터.
"반갑다. 오늘부터 제4 특무대장을 맡게 될 에드릭이라고 한다."
제4 특무대장 에드릭.
어쩐지 기세가 심상치 않다 싶더라니 오늘부터 내 직속상관이 될 자였던 모양이다.
"할 말이 많지만, 시간이 없으니 바로 시험을 진행하겠다. 마침 숫자도 딱 넷이군."
에드릭이 말했다.
"지금부터 둘로 나눠서 각각 싸워라. 패배한 쪽은 이틀간 금식이다."
에드릭의 말이 채 끝나기 무섭게 하얀 머리의 비쩍 마른 사내가 나에게 다가왔다.
"안 그래도 벼르고 있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가 왔군."
자연스레 흉터 사내의 상대는 로브 여인이 되었다.
"지금 나보고 여자랑 싸우라고?"
"참아, 덩치. 이 X새끼만큼은 내 손으로 직접 손봐 주고 싶으니까."
"자신 있어?"
"네가 직접 시험해 보겠나?"
하얀 머리 사내에게서 흘러나오는 기묘한 기세 때문일까.
흉터 사내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됐어. 쓸데없이 힘을 뺄 필요는 없겠지."
"잘 생각했다."
하얀 머리 사내의 시선이 다시금 나를 향했다.
"그러면 놀아 볼까? 몇 군데 부러뜨리는 정도로 봐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손을 들고 에드릭을 바라보며 말했다.
"죽여도 됩니까?"
그 말에 하얀 머리 사내의 입가가 비릿한 미소로 비틀리며 파르르 떨렸다.
어지간히도 내 말이 거슬리는 모양.
내 질문이 의외였는지, 에드릭이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겨울성에 무능한 쓰레기는 필요 없지만, 전우를 죽이면 쓰레기조차 되지 못한다. 불허한다."
예상했던 답변.
그렇다면 내 대답 역시도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면 기권하겠습니다."
"...뭐?"
하얀 머리 사내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8화 겨울성 크로이츠 (3)
에드릭이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싸워 보지도 않고서 기권이라.... 진심인가?"
"예."
"알았다. 승자는 알비노다."
아무래도 하얀 머리 사내 이름이 알비노였던 모양.
그렇게 에드릭의 선언과 함께 허무할 정도로 쉽게 승자가 된 알비노의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X새끼가... 지금 이게 무슨 개수작이야?"
"수작이랄 것까지야."
나라고 해서 굶는 게 좋아서 기권을 한 건 아니다.
단지, 정말로 죽일 게 아니라면 꽤 위험한 마법사처럼 보이는 알비노를 상대하는 게 그리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총은 위험한 무기다.
특히 그 대상이 알비노처럼 육체적 능력이 그리 강해 보이지 않는 상대라면 더욱더 말이다.
팔이나 다리 같은 부위를 노려서 제압을 시도할 수도 있겠으나, 그 정도로는 상대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을지도 의문인 데다가, 자칫 잘못하면 상대의 반격을 허용할 수도 있었다.
알비노가 지닌 마법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만약 위험한 마법이라면 내가 죽을 수도 있는 거였으니까.
그렇기에 알비노를 상대할 거라면 정말로 죽일 각오로 단번에 제압해야만 한다.
그 모든 상황을 고려했을 때, 지금은 기권을 하는 게 최선이었다.
괜히 싸워서 다쳐 봤자 나만 손해였으니 말이다.
이를 악문 알비노가 지나가며 말했다.
"네가 강력한 마법을 지닌 건 안다. 하지만 강한 마법에는 그만큼 강한 대가가 따르지. 너, 곱게 죽지는 못할 거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공정의 세계에서 강력한 마법은 대개 그만큼 강력한 대가를 요구하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강력한 마법을 소지한 마법사들의 최후는 대개 뻔한 편이었다.
"명심하지."
뭐, 어차피 내가 사용하는 건 마법 따위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굳이 같은 부대의 병사가 될 이들과 나쁘게 지낼 필요는 없었지만, 이미 첫 단추부터 단단히 잘못 꿰여 버린 터라 이 관계는 되돌리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제 알비노와 나 사이에는 감히 메꿀 수 없는 깊은 골이 생겨 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고, 알비노와의 골은 그 사이에 생겨난 어쩔 수 없는 리스크다.
언젠가 이에 대해서 나도 정면으로 부딪쳐야 할 때가 올 것이다.
한편, 그사이에 흉터 사내와 로브 여인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로브 여인 쪽이 나처럼 기권을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로브 여인은 흉터 사내와 맞섰다.
로브 여인이 흉터 사내보다 약해 보여서가 아니라, 왠지 승패 따위에는 그리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봐, 그냥 항복하는 게 어때? 나도 여자와 싸우는 취미는 없어."
"...."
"무시인가. 뭐, 좋아. 상황이 이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흉터 사내가 흉포한 기세를 뿜어내며 로브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척 봐도 몸 싸움은 상대조차 되지 않을 텐데도 불구하고, 로브 여인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흉터 사내의 우악스러운 손이 로브 여인을 덮치려던 그 순간.
번쩍!
어디선가 솟구친 섬광과 함께 일대가 빛무리로 물들었다.
나 또한 갑작스러운 섬광에 눈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빛무리가 한차례 지나간 이후에 나타난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로브 여인의 발이 흉터 사내의 목을 짓밟은 채로 완전히 제압을 한 것이다.
"결정 났군. 승자는 알리시아다."
에드릭의 선언과 함께 두 번째 싸움의 승자가 결정되었다.
늘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기에 숨겨 둔 한 수가 있는 자라고는 생각했지만, 저 덩치를 단번에 제압하다니...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으으...."
흉터 사내는 목을 어루만지면서 금세 정신을 차리고서 일어났다.
단번에 제압이 된 만큼 큰 부상은 없었다.
"대충 끝난 것 같군. 큰 부상자는 없으니, 따로 치료받을 필요는 없겠어."
에드릭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말했던 대로 패배한 두 명은 이틀 동안 금식이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오늘의 패배에 대해서 상기하도록."
이틀간의 굶주림이라....
비록 자의적으로 내린 선택이기는 해도, 이 선택이 좋을 리가 만무했다.
"원래였다면 정규 훈련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현재 전선의 상황이 상황인 만큼 너희는 기초 훈련만 받은 뒤에 바로 투입될 것이다. 질문 있나?"
알비노가 손을 들었다.
"제4 특무대라고 했는데... 제4 특무대는 우리가 전부인가?"
"그렇다. 이번에 새로 신설된 부대다. 그리고 상관에게는 존중을 표하도록, 알비노. 너는 오늘부터 크로이츠의 자랑스러운 군인이니."
그와 함께 에드릭에게서 흉험한 기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알비노 또한 숨겨 둔 한 수는 있는 마법사처럼 보였지만, 최소 6레벨 이상의 강자로 추정되는 에드릭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과연. 명심하지."
"다른 질문이 없다면, 시간이 없으니 바로 훈련을 진행하겠다."
에드릭이 고개를 까딱했다.
"우선... 저쪽에 있는 기동부터 찍고 돌아오도록. 아, 참고로 선착순 한 명이다."
이런 X발.
* * *
"허억, 허억...."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혀에서는 비릿한 쇠맛이 난다.
전신에서는 땀이 비 오듯 오고, 구역질이 올라온다.
기초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에드릭의 체력 훈련은 최악의 몸뚱어리를 지닌 나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았다.
당연하게도 치열하기 짝이 없는 선착순 경쟁 속에서 나는 당당히 꼴찌를 차지했다.
혹시 알비노 정도는 어찌저찌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알비노는 저 깡마른 몸으로 의외의 육체 능력을 보여 주었다.
이곳은 공정의 세계.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강함과 신체 능력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마법사라서 그런가? 보기와는 다르게 영 허약하군."
흉터 사내, 콘란이 가뿐히 나를 앞질러 가면서 가볍게 비웃었다.
이로써 나는 함께 죄수 호송 마차에 올랐던 이들의 이름을 모두 알게 되었다.
하얀 머리 사내는 알비노.
흉터 사내는 콘란.
로브 쓴 여인은 알리시아.
당연하게도 저 중에서 나보다 체력을 비롯한 육체적 능력이 약한 이는 없었다.
"고작 그 정도였나."
알비노 역시도 슬쩍 나를 흘겨보며 비웃고는 먼저 앞서 나갔다.
보통이었다면 이쯤에서 화라도 날 법했건만, 멸망 유예자의 특성이 나에게 냉철함을 부여했는지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아니, 화낼 기운조차도 없었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다. 막사 위치는 저곳에 있는 훈련 담당관이 안내해 줄 거다."
첫 훈련 시간이 끝난 우리에게는 막사와 일종의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그 누구도 우리를 감시하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단지, 다음 날 아침까지 정해진 곳에 집합하면 될 뿐.
제아무리 우리가 겨울성의 정식 군인으로서 입대하게 되었다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 우리의 신분이 죄수였음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파격적인 대우였다.
'뭐... 그럴 수밖에 없긴 하지.'
어차피 홀로 탈영을 해 봐야 겨울성에서는 갈 곳이 없다.
기껏해야 겨울성 주위를 배회하며 사냥이나 하다가 마수 무리에 걸려서 죽거나, 얼어 죽겠지.
겨울성의 가혹한 환경 자체가 죄수 출신 군인들에게 있어서는 천연의 감옥이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그나저나, 그런 훈련을 했는데도 능력치가 오르지 않는 건가.'
아무리 고작 하루라고 해도, 그렇게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는데도 능력치는 전혀 오르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대로, 공정의 세계에서 성장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정의 세계에서 강해지려면 훈련을 지독할 정도로 하거나, 특별한 일을 겪어야 한다.
'최대한 빠르게 강해져야 해.'
겨울성은 혹독한 곳이다.
아무리 나에게 사기적인 특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본격적으로 전선에 투입된다면 언제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루가 다르게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겨울성에서 안일하게 있다가는 언제 눈먼 돌팔매질에 생을 달리할지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아니면 알비노한테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겠지.'
물론 일단은 같은 부대 소속이라는 방패가 있으니 대놓고 나오지는 않겠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그런 상황인 만큼,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당연히 강해지는 것이었다.
공정의 세계에서 강해지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단련을 통해서 능력치를 얻거나 올리는 것.
두 번째는 강력한 장비를 손에 넣는 것.
세 번째는 특수한 업적이나 경험을 통해서 특성 같은 것을 얻는 것.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바로 악마를 비롯한 존재들과 황금률에 따른 공정한 계약을 맺고서 마법이나 기적을 얻는 것이다.
'물론 나 같은 경우는 병기 소환 특성의 레벨을 올리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건 아직 특성에 대해서 더 알아봐야 해.'
현재까지 내가 알아낸 건, 현재 1레벨인 병기 소환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약 30분 정도라는 것뿐.
아직 특성의 레벨 업 조건이나 다른 조건은 알아내지 못한 상태였다.
하다못해 소모한 총알을 수급하는 방법이라도 생겼으면 좋겠지만, 현재로서 유일하게 총알을 수급하는 방법은 30분의 대기 시간을 거쳐서 무기를 재소환하는 방법뿐이었다.
'그 외에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단련이긴 한데... 영 쉽지 않단 말이지.'
첫 번째 방법은 기본적인 방법인 만큼 가장 효과적이지만,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반대로 세 번째 방법인 악마 혹은 다른 존재와의 계약은 방법은 꽤 쉬운 편이지만, 위험부담이 말도 안 되게 크기에 일단은 미뤄 두었다.
공정의 세계가 게임일 때야 손가락이 없어지든 발가락이 없어지든 죽고 다시 부활하면 생겨났지만, 지금 이 세계는 더 이상 게임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두 번째인가.'
좋은 장비를 구하는 것.
이건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임과 동시에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현재의 내가 사용할 수 있으면서도 쓸 만한 수준의 장비.
겨울성이라는 위치.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정보.
그 모든 조건을 생각한다면, 당장 내가 구할 수 있는 장비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역시 그것뿐인가.'
물의 보옥.
착용자를 수호한다는 전설 속 보물.
나는 그걸 구할 것이다.
9화 물의 보옥
당장 해야 할 목표가 정해졌다.
바로 겨울성과 인접한 마경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물의 보옥을 구하는 것.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었다.
'물의 보옥은 그 위치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아이템이지만, 지금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어.'
이 세계에 있는 공정의 세계 유저는 나뿐만이 아니다.
익명 게시판 너머에 존재하는 수백 명은 거뜬히 넘어 보이는 유저들이 이 세계에서 숨 쉬며 살아가고 있다.
곧, 만약 그들 중에서 물의 보옥의 존재를 알고 있거나 이미 그것을 얻은 자가 있다면, 나는 고생해서 헛걸음을 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지금이 공정의 세계에서 어느 시점이냐는 건데....'
그 말마따나, 지금이 어느 시점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지금 시점이 언제인지에 따라서 내가 지닌 정보들이 쓸모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한번 찾아볼까.'
다행히도 나에게는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보를 찾아볼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
[익명 게시판에 접속합니다.]
[제목 검색 : 물의 보옥]
[검색 결과 없음.]
다행히도 익명 게시판에는 물의 보옥에 대한 게시 글이 단 하나도 올라와 있지 않았다.
적어도 물의 보옥의 존재가 대중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아직 안심할 수는 없어.'
물의 보옥은 공정의 세계 내에서도 단 하나밖에 없는 고유 아이템이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이미 손에 넣고서 정보 공유 없이 홀로 사용하고 있다면 최악의 경우 나만 헛걸음을 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는 몇 가지 키워드를 더 검색했다.
[제목 검색 : 물의]
'물'만 검색했다가는 무수한 검색어를 마주할 테니, 나름대로 고르고 골라서 내린 선택지가 '물의'다.
물론 이마저도 충분하지는 않았다.
-김박사 : (알아 두면 쓸데없는 잡지식) 물의 특성에 대해서...
-구사다 : 거물의 등장
-익명651 : 물의 악마 어딨음?
심지어 이런 게시 글까지 있었다.
-익명55 : (사과문) 물의를 빚어서 죄송합니다... 다시는 어그로를 끌지 않겠습니다.
"...."
검색어가 검색어인 만큼 원하는 걸 찾는 게 쉬울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물의를 빚는 건 뭔지....
비록 내가 익명 게시판을 오래 본 건 아니지만, 익명55라는 친구... 왠지 사고뭉치 스타일 같다.
'그건 그렇고....'
게시판 눈팅이 늘 그렇듯이 잠시 삼천포로 빠질 뻔했으나, 나는 본래의 목적을 잃지 않고서 검색어를 바꿨다.
[제목 검색 : 보옥]
그리고, 한 가지 결과가 나왔다.
-아이추웡 : 겨울의 보옥 이거 대체 어떻게 얻냐? 근처만 가도 얼어 버릴 것 같던데.
겨울의 보옥.
적어도 내가 알고 있기에 겨울의 보옥이라는 아이템은 없다.
'미발견된 아이템인가? 아니면....'
피어오르는 의문 속에서 나는 아이추웡의 게시 글을 눌렀다.
──────────────
얼마 전에 마경 쪽에서 우연히 신기한 템을 봤는데, 근처에만 가도 전부 얼어서 가까이 갈 수가 없더라
생긴 게 딱 봐도 속성 보옥 같던데, 이거 어떻게 얻는지 아는 사람 있냐?
──────────────
-섭종기원79일차 : 어디임?
└아이추웡 : 마경 쪽. 그 이상은 ㄴ
-구사다 : 겨울의 보옥도 있었음?
-늅늅이 : 마경 쪽이면 고렙이신가 보네... 그러면 혹시 저 좀 도와주실 수 있나영?
-익명1356 : 제가 먹으러 갑니다 ㅅㄱ
└아이추웡 : 찾아보든가 ㅋ
-기사단장임 : 내가 먹으러 갈까 했는데 마경 쪽이면 힘들겠네.
└아이추웡 : 마경이 넓긴 함 ㅋ
-헤슨 : 걍 거따 불 지르면 안 됨? 따뜻해지고 좋을 거 같은데.
게시 글의 내용을 확인한 나는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찾았다.'
물의 보옥.
지금 아이추웡이 말하는 겨울의 보옥은 물의 보옥이 분명했다.
그에 대한 근거는 간단했다.
지금 마경에 있는 물의 보옥은 혹한의 환경으로 인해서 본래의 힘을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렇기에 지금의 내가 노려 볼 만한 것이기도 했고.
일단 아이추웡이 물의 보옥, 아니 겨울의 보옥을 손에 넣지 못했다는 사실은 나로서는 꽤 좋은 소식이었다.
'그런데 냉기를 풍기고 있다라.... 원래 그 정도는 아닐 텐데.'
앞서 말했듯이 본디 물의 속성을 지닌 물의 보옥이 냉기를 풍기는 이유는 마경의 혹독한 환경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본래의 힘을 약화시킨 것이기에 그 정도로 강력한 냉기를 뿜어내지는 않는다.
물론 그 정도만으로도 맨손으로 만지거나 한다면 단번에 동상을 입을 정도겠지만, 다가가는 것조차도 어려울 정도는 아닐 터.
'단서가 더 필요해.'
나는 아이추웡이 작성한 게시 글을 검색했다.
[작성자 검색 : 아이추웡]
아이추웡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활동한 유저였다.
곧, 이 세계에 온 지도 최소 1년 이상 되는 중견 유저인 셈.
-아이추웡 : X발X발X발X발X발X발X발X발X발.
-아이추웡 : 뜨끈한 국밥 먹고 싶은데 국밥집 하는 사람 없음? 하면 히트 칠 거 같은데.
-아이추웡 : 저번에 누가 제대로된 방한 장비랑 화염 속성 지닌 물건 들고 가래서 그래서 해 봤는데 그래도 안 됨;;
-아이추웡 : 오늘은 꼭 뚫는다.
-아이추웡 : 아 X발 ㅊㅏ가워. 동상 입은 것 같다 ㅜㅜ
다행히도 겨울의 보옥에 대해서 언급한 날 이후 아이추웡이 작성한 게시 글에서 겨울의 보옥을 얻었다거나 하는 뉘앙스의 글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끝내 겨울의 보옥을 얻지 못해서 점점 지쳐 가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추웡 : 진짜 오늘 존나 춥다... 디질 것 같아.
그 게시 글을 마지막으로 아이추웡의 게시 글은 또 올라오지 않았다.
그게 두 달 전 게시 글이었으니, 아마도 아이추웡은 죽었거나 게시판조차 접속할 수 없는 환경에 처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물론 단순히 게시판을 접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낯선 세계에 떨어진 이방인의 입장에서 익명 게시판은 단순한 커뮤니티가 아니다.
안식처. 혹은 도피처.
낯설기 짝이 없는 이 세계에서 공감을 나눌 수 있는 곳이 바로 게시판이라는 이야기다.
'그런 게시판을 떠났다면, 사실상 죽었다고 보는 게 옳겠지.'
사람이 죽은 건 안된 일이지만, 사실 이는 나로서는 무척이나 잘된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만약 다른 이의 손에 물의 보옥이 들어갔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을 테니까.
'일단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대략적인 확인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어떻게 하면 물의 보옥이 잠들어 있는 마경까지 무사히 가느냐.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떠오르는 방법들은 하나같이 위험부담이 상당한 것들이다.
물론 물의 보옥은 그러한 위험부담을 감당하고서라도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템이지만, 목숨은 모두에게나 하나뿐이다.
실제로 마경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것처럼 보이던 아이추웡 역시도 끝내 물의 보옥을 얻지 못한 것처럼 보였으니, 나도 만반의 준비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거기다가, 겨울성을 나가는 것도 쉽지 않으니....'
사실 이미 비밀 통로 몇 곳을 알고 있는 내가 겨울성 자체를 나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문제는 맨몸으로 혹독하기 짝이 없는 북부 영토에 나갔다가는 딱 얼어 죽거나 마수들의 밥이 되기 좋다는 거다.
거기에 더해서 일정 시간 이상 자리를 비우게 되면 탈영이 되어서 발각된다면 즉결 처형을 당할 수도 있다.
즉,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나 정식으로 제4 특무대장인 에드릭의 허가를 받고서 외출을 하는 것이다.
만약 그게 된다면 겨울성으로부터 일정 부분 지원도 받을 수 있을 테니, 현재로서는 최선이었다.
'일단 상황을 봐야겠지.'
생각을 마친 나는 눈을 감았다.
수마는 금방 찾아왔다.
* * *
다음 날이 됐다.
아침이 되기 무섭게 나를 찾아온 건 배에서 느껴지는 공복이었다.
그런 훈련을 시켜 놓고 이틀 동안 금식은 조금 너무한 것 아닌가.
"으으...."
마찬가지로 나와 함께 굶게 된 콘란의 상태 역시도 썩 좋지 않아 보였다.
특히 저 덩치를 유지하려면 많이 먹어야 할 텐데 말이다.
"과연 겨울성이야. 아침부터 고기가 들어간 수프를 줄지는 몰랐어. 누구 덕분에 아주 호강하는군."
아침 식사를 마친 알비노가 식당을 다녀오며 동물의 뼈로 보이는 것으로 이를 쑤시고 굶고 있는 나를 비웃었다.
예상했던 일이기에 별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가려는데, 정작 화를 낸 건 다른 쪽이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와 함께 굶고 있는 처지의 덩치, 콘란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너도 있었군. 하도 자신만만해하길래 한가닥 하는 줄 알았더니, 별것 없던데?"
"한 마디만 더 해 봐, 그 입 찢어 줄 테니까."
"그 정도 실력으로 되겠어? 아주 형편없던데."
"오냐, 한번 보여 주지."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둘이서 잘 붙어먹더니, 범죄자들 의리가 그렇듯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뭐, 애초부터 저 둘이 서로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한테는 잘됐지만.'
언제 저 둘이서 손을 잡고서 내 뒤통수를 칠지 몰랐는데, 저렇게 저 둘 사이가 틀어진다면 나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집합!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던 알비노와 콘란의 대치는 에드릭의 집합 소리와 함께 끝이 났다.
"운 좋은 줄 알아라."
"누가 할 소리를."
곧이어 제4 특무대원들이 모두 훈련장에 집합하자, 제4 특무대장 에드릭이 말했다.
"다들 잠들은 잘 잤나?"
"예!"
"목소리가 좋아. 크로이츠의 군인으로서의 정신 무장이 갖춰지고 있다는 증거겠지. 어제의 훈련이 효과가 있어서 매우 기쁘군."
듣는 우리로서는 무슨 개소리냐 싶었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이는 없었다.
"오늘 훈련은 기초적인 무기술 훈련이다. 다들 자신 있는 무기를 고르도록."
나는 훈련용 무기가 진열된 진열대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검, 창, 도끼, 둔기 등등....
이미 총이 있는 나에게 이런 게 필요할까 싶기도 했으나, 언제까지고 총에만 의지할 수는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이게 좋겠어.'
고민을 마친 나는 진열대에 있는 목검을 잡았다.
아무래도 검이라는 무기 자체의 태생 자체가 전쟁에서는 보조 무장에 가까웠다 보니, 나에게 딱 맞는 것 같아서였다.
"다들 고른 것 같군."
슬쩍 다른 특무대원들의 무기를 살피니, 알비노와 알리시아는 검, 콘란은 도끼를 고른 듯했다.
"훈련에 앞서서 자네들의 무기술 수준을 알아보는 게 좋겠지."
에드릭이 말했다.
"덤비게, 전부."
"마법도 써도 됩니까?"
에드릭이 눈을 부라렸다.
"불허하네. 순수한 무기술로만 덤비게. 자네 마법은 특히 위험하더군."
혹시 이 기회에 에드릭에게 한 방 먹여 줄 기회가 아닌가 했건만, 에드릭은 철저했다.
'6레벨 이상의 강자에게 총이 통하는지 확인해 볼 좋은 기회였는데....'
나로서는 썩 아쉬운 소식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특무대원들은 좋은 기회라는 듯이 각자 쥔 무기를 다잡았다.
"이 기회에 우리 대장이라는 양반의 실력을 확인해 보는 것도 좋겠지."
"동감이다."
"...."
알리시아까지도 자세를 취한 걸 보니, 아무래도 제대로 해볼 생각인 모양.
나도 빠질 생각은 없었기에 목검을 다잡았다.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에는 조금 그렇지만, 이 몸은 한때 공정의 세계 최강의 검사로 불렸던 몸.
...지금에 와서는 그리 의미가 없을지는 몰라도,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도 있듯이 조금은 기대해 볼 법했다.
"으랴압!"
콘란을 선두로 제4 특무대원들이 일제히 에드릭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어디 실력들 한번 볼까!"
에드릭이 사납게 웃으면서 마치 춤을 추듯이 특무대원 사이를 누볐다.
결과는 참패.
우리는 에드릭의 옷깃 하나도 제대로 건드리지 못했다.
레벨 간의 격차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충격이었다.
"다들 고생했네."
"으으...."
"팔이, 팔이 안 움직여."
알비노와 콘란이 끙끙 앓고, 알리시아는 소리를 죽이며 신음했다.
그 정도로 압도적인 패배였다.
"흠."
그런 움직임을 보였음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에드릭이 쓰러져 있는 나를 바라보며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하군."
"...뭐가 말입니까?"
"분명히 어눌하기 짝이 없는데... 명백히 강자의 검술이란 말이지. 누가 자네에게 이런 오만한 검술을 가르친 건가? 자네 수준으로 이런 검술을 펼쳤다가는 마수들이 먹잇감이 되기 딱 좋아."
"...."
솔직히 말해서 조금은 자신이 있었건만, 그 기대는 에드릭의 신랄한 평가와 함께 깨졌다.
하긴, 그저 단편적으로 보았던 겉모습만 흉내 내서 휘두르는데, 잘되면 그게 더 이상했다.
에드릭 정도의 강자의 시선에서는 그 검술이 어눌하고 어색해 보이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너무 실망하지 말게. 자네 수준에 맞지 않다 뿐이지, 검술 자체는 매우 훌륭하니."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이었지만, 딱히 화 같은 건 나지 않았다.
현재 내 수준이 처참하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길을 잃지 말게. 내가 보기에 자네가 가는 방향은 틀리지 않았어. 중심을 잡는다면 틀림없는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거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틀리지 않았다라....
에드릭 정도 되는 강자의 조언은 나에게 있어서 꽤 의미 있게 들려왔다.
당장 내가 흉내 냈을 뿐인 검술의 정수조차도 에드릭은 일부나마 꿰뚫어 보았다는 뜻이었으니까.
"자, 그러면 훈련을 계속하지."
에드릭의 선언과 함께 특무대원들이 앓는 소리를 했으나, 물러나는 이는 없었다.
다들 에드릭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독이 바짝 오른 것이다.
"이번에는 저 양반 얼굴에 그럴듯한 훈장이라도 하나 만들어 주자고."
"호오, 그것참 괜찮은 생각이군."
끄덕.
알리시아조차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으니, 저들이 얼마나 약이 바짝 올랐는지 알 수 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번 해보자고."
10화 물의 보옥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