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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마경으로 (3)

화르륵!

읊조려진 주언과 함께 업화의 송곳니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그리고 피어오른 업화의 파도가 이윽고 주변의 모든 걸 향해 덮쳐 갈 기세로 일어났다.

[끄루룩!]

[끄루루루!]

석권주변적화염(席卷周?的火焰)이 맹렬한 기세로 눈앞에 있는 라듄들을 향해서 쇄도했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였다.

무서운 기세로 치솟은 업화가 갑작스레 역류하며 업화의 송곳니를 쥐고 있는 내 오른손까지 집어삼키기 전까지는.

"이 망할 새끼가...!"

이 현상이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아무래도 업화의 악마는 이번 계약의 대가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더욱더 골 때리는 건, 공정의 천칭 역시도 업화의 악마의 뜻을 받아들였다는 점이었다.

'이래서 악마 새끼들이랑 엮이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말이지.'

일전에 내가 한번 업화의 악마를 등쳐 먹기는 했어도, 본디 악마란 그렇게 쉽게 이용당해 주는 존재가 아니다.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껏 웬만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약식 계약조차도 피해 왔건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망할 업화 놈.'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집어삼키며 물의 보옥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물의 보옥'이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 권능을 발동합니다.]

['물의 보옥'이 '발천적랑화(潑?的浪花)'를 전개합니다.]

치이익...!

내 오른손에 응집된 물보라가 업화에 기화되며 하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업화가 역류하기 무섭게 대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업화의 송곳니를 쥐고 있었던 오른손은 이미 지독한 화상으로 너덜거렸다.

만약 대응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오른손 자체가 업화에 삼켜져서 잿더미가 되었으리라.

"후우...."

아프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은데, 도저히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라서 일단은 애써 삼켜 냈다.

'그나마 재빠르게 수습해서 손을 잃지는 않았다는 게 위안인가.'

비록 더럽게 아프기는 해도 이 정도 부상이라면 물의 보옥의 권능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치유할 수 있었다.

실제로 물의 보옥이 내 손을 치유하고 있기도 했고.

'그러면....'

나는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끄루루....]

[끄우욱.]

오른손까지 계약의 대가로 착실하게 치러 낸 보람이 있었는지 라듄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삽시간에 화마에 휩싸였다.

저대로면 마수 소재는커녕 뼛가루도 건지지 못할 테지만, 어차피 이번 마경 방문의 목적은 라듄 정도 수준의 마수 소재 수집이 아니었기에 나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업화의 마법에서 기인한 화마가 영원의 수해라 불리는 마경의 숲을 게걸스럽게 불태우며 먹어 치웠다.

'이 정도 불길이면 당분간 근방에 있는 마수들의 이목을 확실하게 끌어 주겠지.'

나는 그 틈을 타서 안전지대까지 곧장 이동할 생각이었다.

마경의 특성상 이 불길은 타오르다가 자연스레 꺼질 테지만, 적어도 내가 이동하는 시간 동안은 화려하게 불타 줄 테니.

'마경을 전부 불살라 버릴 수 있으면 참 편할 텐데 말이지.'

뭐, 애초에 단순한 불질로 마경을 모조리 불태울 수 있었다면 제국과 겨울성이 진작 그렇게 했을 테지만 말이다.

마경은 그런 곳이었다.

얼핏 겉으로는 숲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숲이 아닌 장소.

'일단 움직인다.'

예상치 못한 화상으로 인해서 필요 이상으로 시간을 지체했다.

조금 위험할 정도로.

['물의 보옥'의 힘이 사용자에 스며듭니다.]

['물의 보옥'이 사용자를 치유합니다.]

빠르게 라듄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동안 물의 보옥의 권능이 최대한으로 발휘되며 잿더미가 될 뻔했던 오른손의 화상이 조금씩 아물어 갔다.

다행히 고통이 조금 가시기는 했지만, 상태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하루 정도는 오른손은 못 쓸 듯싶었다.

'쯧.'

라듄의 영역이 불길이 번지기 시작하며 망망대해와도 같던 마경에서 마치 등대처럼 빛났다.

벌레들이 불빛을 따라서 달려들듯이 마경에 있는 마수들 또한 마치 부나방처럼 마경에 있는 불꽃을 향해 오기 시작했다.

그오오오오....

우우우우!

메아리를 타고서 음울하게 울려 퍼지는 마수들의 울음은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힘이 있었다.

바로, 공포라는 본능을.

이곳에서 도망쳐야 한다.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본능이 계속해서 그렇게 외쳤지만 나는 가볍게 무시하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더 가면 라듄의 영역을 벗어날 수 있다.

[꾸루루!!!]

멀찍이서 불길에 휘말린 라듄들의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라듄들이 비명을 내지르면 내지를수록, 다른 영역의 마수들의 이목이 저쪽으로 쏠릴 터.

'음?'

그렇게 라듄의 영역을 거의 다 벗어나려던 찰나 어둠 너머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크르르....]

[킁! 킁킁!]

익숙한 짐승의 기척.

불길을 보고 몰려든 다른 영역의 마수들이 분명했다.

다른 마수들이 몰려들기 전에 라듄의 영역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던 것이 원인인 듯했다.

'뭐... 어차피 이 정도는 상정 내야.'

가능하다면 쓸데없는 전투는 피하는 게 좋았으나, 피할 수 없다면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3'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AKR-74 돌격 소총'을 소환합니다.]

푸른 빛무리와 함께 AKR-74 돌격 소총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당장 오른손을 쓰는 게 조금 힘들기는 하지만....'

오른손잡이인 나에게 있어서 오른손의 부자유는 꽤 큰 문제다.

당장 총기를 사용한다고 했을 때 익숙한 오른손 사격과 왼손 사격은 적중률에 있어서 매우 큰 차이를 보일 게 뻔할 정도로.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밀한 사격을 할 때의 이야기고, 지금처럼 무지막지하게 앞에서 달려드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이 불길과 소란이면 마경 내에서 총성이 울려도 별로 상관없겠지.'

적막한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총성은 그 무엇보다도 크지만, 지금처럼 이미 한바탕 소란이 나고 있는 상태라면 총성 하나 보탠다고 해서 큰 변화는 없을 터.

그렇기에 나는 AKR-74 돌격 소총을 쥔 채로 어둠 속을 마주했다.

왼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오른쪽 손목으로 총기를 지탱한 조금 어색한 자세였다.

[크르르!]

[크륵! 크르륵!]

울음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나는 조용히 숨을 죽인 채로 놈들이 사정거리 내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왔다.'

철컥.

타오르는 불길에서 쏟아진 불빛들이 마치 성스러운 기운처럼 어둠을 몰아낸다.

그와 함께 어둠 속에 은밀히 숨어 있던 마수들이 하나둘씩 그 모습을 드러냈다.

[Lv.5]

[아울베어]

[Lv.5]

[아울베어]

[Lv.5]

[아울베어]

5레벨 마수.

예전이었다면 에드릭 없이 홀로 상대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을 마수가 한두 마리도 아니고 무려 세 마리가 나타났다.

'5레벨이라.'

리볼버인 콜트 패리슨 B-09은 4레벨 마수인 라듄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를 뚫지 못했다.

제아무리 라듄이 4레벨 마수 중에서도 가죽이 특히나 질긴 편에 속한다지만, 분명한 건 4레벨 이상의 마수에게는 리볼버 수준의 총기는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보다 훨씬 더 위력이 강한 B686 더블 배럴 샷건이나 AKR-74 돌격 소총 같은 파괴력이 강한 총기는 어떨까?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어.'

공정의 세계 내에서 고레벨 지역에 해당하는 마경에서 총이라는 문명의 이기는 과연 어디까지 통하는가.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5레벨 마수는 상당히 적당한 상대였다.

'아울베어는 5레벨 마수 중에서도 가죽이 꽤 질긴 편이야. 만약 아울베어에게 총기가 통한다면 다른 5레벨 이하 마수에게는 전부 통한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올빼미의 머리와 곰의 몸.

마치 실험실에서 탄생한 기괴한 키메라처럼 생긴 아울베어를 향해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투두두두!

총구에서 불을 뿜으며 쏟아진 7.62×39mm 탄 세례가 단번에 아울베어의 겉가죽을 파고들었다.

AKR-74 돌격 소총은 분당 약 600발의 총알을 쏟아 낼 수 있다.

그 무지막지한 연사력을 증명하듯이 탄창에 있는 30발의 탄을 모두 쏟아 내는 데는 말 그대로 숨 한 번 쉴 시간이면 충분했다.

[크라라라!]

순식간에 살아 움직이는 과녁판 신세가 된 아울베어들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아울베어들의 전신에서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왔으나, 가죽과 근육층이 워낙 두터운 탓인지 치명상으로 작용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실제로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듯이 세 마리의 아울베어 중에서 쓰러진 아울베어는 한 마리도 없었다.

'역시 가죽과 근육이 두꺼운 몸통을 노리는 건 그리 효과가 없나.'

아니나 다를까, 첫 탄환 세례가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통에 몸부림치던 아울베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고정되었다.

이런 밤중에 올빼미의 머리를 닮은 생물체가 일제히 바라보니 솔직히 말해서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크르르르!!!]

[크르륵!]

쿵!

쿠웅!

아울베어들이 땅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나에게로 달려들었다.

놈들과의 거리는 기껏해야 30m 남짓.

아울베어의 몸집과 속도를 생각한다면 치이는 순간 트럭에 치이는 것과 같겠지.

'순순히 오게 할 생각은 없지만.'

물의 보옥과 낙스의 유산이 동시에 권능을 발하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지직──!!

흩뿌려진 물보라를 타고서 번진 전격이 마치 전기 장막처럼 방호벽을 형성했다.

당연히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아울베어들은 내가 펼쳐 놓은 전기 장막에 몸을 들이박았고, 예상치 못한 전격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크라라락!]

[카르륵!]

마치 트럭처럼 달려들던 놈들이 모조리 멈춰 선 채로 몸을 부르르 떤다.

비록 이 자체로는 아울베어들에게 치명적인 공격이라 할 수 없었으나, 분명한 건 이게 틈을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지금.'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2'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B686 더블 배럴 샷건'을 소환합니다.]

나는 왼손에 있던 AKR-74 돌격 소총을 내던지고는 새로이 등장한 B686 더블 배럴 샷건을 다잡았다.

B686 더블 배럴 샷건의 총구가 향한 곳은 아울베어의 눈동자.

제아무리 아울베어가 튼튼하다 해도 눈알까지 튼튼할 수는 없다.

타아아아앙!!!──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아울베어 한 마리가 눈이 터져 나감과 동시에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눈과 연결된 뇌까지 곤죽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한 마리 더.'

곧장 총구를 돌린 나는 다시금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

아울베어 한 마리가 또다시 생을 달리하며, 이제 남은 아울베어는 한 마리가 되었다.

이로써 나는 현재 내가 지닌 총기들이 5레벨 마수의 가죽을 뚫고서 치명상을 줄 정도는 아니나, 적어도 급소를 노려서 생을 끊을 정도는 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나머지 한 마리는....'

물의 보옥과 낙스의 유산이 만들어 낸 틈은 여기까지였는지 두 마리의 동료를 잃은 아울베어가 곧 정신을 차리고는 흉성을 토해 냈다.

[크라라라락!!!]

만약 오른손이 멀쩡했다면 이러한 틈조차도 놓치지 않고서 빠르게 B686 더블 배럴 샷건을 재장전했을 테지만, 아무래도 오른손이 부자연스럽다 보니 빠르게 재장전을 할 수가 없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아울베어가 거침없이 달려온다.

[크르르!!!]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아울베어가 나를 덮쳤다.

눈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주마등이 스쳐 지나갈 법도 한 광경이었지만, 나는 주마등을 보는 대신에 하이마의 펜던트의 권능을 발동했다.

꾸득, 꾸드득...!

전신에 핏줄이 일어난다.

하이마의 펜던트와 더불어서 발휘된 마기의 육체 강화 효과가 나에게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힘을 부여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그대로 몸을 크게 돌렸다.

그와 함께 회전한 칼날 흑까마귀의 망토가 그대로 겁 없이 달려든 아울베어의 얼굴을 후려쳤다.

깃털 하나하나가 명검에 버금가는 강도와 날카로움을 지닌 칼날 흑까마귀의 망토는 본래의 목적인 방어구 외에도 이런 공격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크락!]

순식간에 안면이 뜯겨 나가다시피 한 아울베어가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나름대로 작지 않은 피해를 입히기는 했으나, 저 정도로 아울베어를 죽일 수는 없었기에 나는 왼손으로 업화의 송곳니를 뽑아 들었다.

'왼손은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나는 그대로 업화의 송곳니를 쥔 채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울베어의 눈을 내리찍었다.

[크루룩!!!]

"이크."

아울베어가 날뛰었으나 그보다 업화의 송곳니에서 치솟은 업화가 아울베어를 향해 뿜어지기 시작한 게 더 빨랐다.

내가 업화의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서 업화의 송곳니에 부여한 마법은 송곳니에 닿거나 부여된 업화에 한정해서 그것을 통제하는 마법이다.

업화의 송곳니에서 넘실댄 불꽃이 아울베어의 눈을 타고서 시신경과 뇌를 모조리 구워 버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크우우우....]

쿠웅!

아울베어의 거체가 쓰러졌다.

무려 5레벨 마수 셋을 사냥했지만 객관적인 소모값은 그리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병기 소환 특성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조금 기다리게 된 것 정도.

비록 겉으로 보이는 레벨이나 능력치는 그리 대단치 않아도 확실하게 예전에 비해서 강해진 것이 느껴졌다.

'이제 레벨만 올리면 되는데... 이놈의 레벨 업이 늘 문제라니까.'

공정의 세계는 레벨 업에 있어서 상당히 하드코어 한 게임이었다.

공정의 세계의 레벨 업 방식은 다른 게임처럼 몬스터를 사냥해서 경험치를 모으는 게 아니라 그 레벨에 걸맞은 무언가를 손에 넣어야 해당 레벨로 올라설 수 있는 시스템이었으니까.

말하자면 레벨은 그 자체로 어떤 강함을 부여한다기보다는 일종의 측정기와도 같았다.

'더 강해져야 해.'

애초에 그걸 위해서 마경까지 온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면....'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울베어를 처리하기는 했지만 안전지대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우우우우....

칵! 카악!

불길이 마경 안에서 춤을 추고 있는 동안에도 마수들은 여전히 요란하게 날뛰고 있었다.

마치 이 기회에 마경 내의 영역을 새로이 재편하려는 듯이.

그때였다.

'음?'

날뛰는 마수 사이에서 묘하게 눈에 익은 형체가 드문드문 보였다.

처음에는 평범한 이족 보행형 마수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윤곽이 점차 선명해지자 나는 그것을 더 이상 마수라 치부하지 못하게 되었다.

저건 마수가 아니었다.

나는 저런 형태를 지닌 포유류를 무어라 부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인간?'

마경 심층부.

그곳에 사람이 나타났다.

76화 마경으로 (4)

설마하니 마경 내에서 마수 말고 다른 생물체를 마주할 줄은 몰랐기에 아무리 나라도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였다면 마수들만 득실댔을 이곳에서 사람이 나타났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마경 심층부에 인간이라니.... 정말로 인간이 맞나?'

혹시 새로 등장한 변종이 고도의 기만 작전 같은 걸 펼치는 건 아닐까?

잠시 그런 의심이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거리가 상당했던 탓에 비록 얼굴까지는 보이지 않았으나, 수풀 사이로 얼핏 보이는 행색과 장비의 수준이 꽤 높았기 때문이다.

길을 잃고서 얼떨결에 마경까지 온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라는 소리.

'그렇다면.'

마경에서 인간을 만날 확률은 극히 낮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마경을 찾아올 만한 인간이 딱 한 부류 있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웬만한 위험은 기꺼이 감수하는 이들.

동시에 마경 내에 있는 경계의 길을 이용할 줄 알 뿐만 아니라 안전지대의 유무까지 알고 있는 이들.

마지막으로 마경 심층부까지 마치 제집 안방처럼 드나들 수 있는 강함을 소유한 이들.

'플레이어.'

나와 마찬가지로 어느 날 갑작스레 공정의 세계로 떨어진 비운의 주인공들.

바로 그들 말이다.

'물론 아직은 저자가 정말로 플레이어인지는 확신할 수 없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정황상 플레이어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건 사실이었다.

플레이어가 아니고서야 홀몸으로 마경 심층부까지 올 만한 이유도, 능력도 찾기 어려웠으니까.

'일단 한번 지켜봐야겠어.'

나는 조용히 숨을 죽인 채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지켜보았다.

저 사내가 플레이어인지 아닌지는 곧 일어날 전투를 지켜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칵! 카악!]

[크루루루!!]

마수들의 수준은 대략적으로 4레벨에서 5레벨 사이.

지금껏 내가 상대했던 마수들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수준이었으나, 문제는 그 숫자가 월등히 많다는 것이다.

'최소 스무 마리 이상.'

설사 플레이어라 할지라도 저 정도 수의 마수를 한 번에 상대하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일전에 베른하르크에서 보았던 뇌제 정도 되는 플레이어라면 문제가 될 것이 없으나, 그런 수준의 플레이어가 흔한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뭐... 마경에 홀로 들어와서 사냥하고 있을 정도면 진짜로 그 정도 수준일 수도 있지만 말이지.'

생각은 길지 않았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마수들이 그를 향해서 일제히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크오오오!]

[카악! 카아아악!!!]

처음에 달려든 건 4레벨 마수 네 마리였다.

과연 어떻게 대처할까 궁금하던 찰나, 사내의 손에 쥐인 창이 번뜩였다.

스르륵.

번뜩인 창과 함께 4레벨 마수 두 마리의 목이 한 번에 떨어졌다.

총알조차 들어가지 않는 4레벨 마수의 가죽과 근육을 창날로 단번에 베어 버린 것이다.

'깔끔해.'

마치 에드릭을 보는 듯한 귀신같은 솜씨.

저 정도 솜씨로 창을 다루는 이는 흔치 않을 텐데... 과연 겁도 없이 혼자 마경에 들어올 만했다.

[크루루!]

제 동족들이 맥없이 쓰러지자 나머지 마수들이 잠시 움찔하며 물러났다.

본능적으로 상대가 포식자임을 느낀 것이었다.

그러나 놈들의 운명 또한 앞선 마수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서걱─

다시금 휘둘러진 창과 함께 4레벨 마수 두 마리의 목이 잘려 나가며 피가 솟구쳤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4레벨 마수 네 마리를 정리했으나, 사내가 한숨을 돌릴 틈은 없었다.

그를 포위하고 있던 5레벨 마수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르륵....]

[그륵! 그르륵!]

5레벨 마수 열 마리.

4레벨 마수 두셋 정도를 상대하는 것과 5레벨 마수 열 마리를 상대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제부터가 진짜라고 볼 수 있지.'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다시금 유려하게 창이 번뜩이며 피가 솟구쳤으나, 조금 전처럼 단번에 마수들의 목을 날리지는 못했다.

4레벨과 5레벨의 차이.

레벨은 단순히 숫자가 아니다. 그 단순명료한 진리는 사내에게도 분명하게 통용되고 있었다.

유려하게 휘둘러진 창이 크게 한 바퀴 돌면서 마수들을 압박했으나, 5레벨 마수들은 잠시 주춤했을 뿐 곧장 흉성을 토해 내며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촤악!

창날이 마수 한 마리의 가슴을 베어 갈랐으나, 완전히 베어 가르는 것에는 실패했는지 그대로 가슴에 창날이 박혀 버렸다.

사내가 그것을 빼내려고 했으나 다른 마수들이 덮쳐 오는 게 더 빨랐다.

'도와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스르륵....

익숙하고도 낯선 기운이 사내에게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불길함을 가득 지닌 채로 꿈틀거린 검은 기운은 불쑥 자라나더니 이윽고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이며 주변의 마수들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콰득!

콰드득!!

대체 저 광경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달리 설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검은 뱀은 흉포한 기세로 주변의 마수들을 말 그대로 먹어 치웠다.

[크오오오!]

[크락! 크라락!]

검은 기운이 뿜어진 시점을 기점으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위기라고 생각했던 사내는 오히려 검은 기운을 휘두르면서 차례로 마수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5레벨 마수.

공정의 세계 내에서 절대로 약하다고 볼 수 없는 마경의 마수들이 그럴듯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검은 기운에 물어뜯기고, 사내가 휘두른 창에 심장을 꿰뚫렸다.

만약 겨울성의 누군가 본다면 쉽사리 믿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기기깃...!

푹! 푸푹!

스무 마리가 넘었던 마수들의 숫자가 어느덧 한 자리로 줄어들었다.

남아 있는 마수들도 마기가 뿜어내는 위세를 느꼈는지 주춤거리면서 점차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사실상 전투가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다 보니 비로소 확신이 든다.

'역시, 확실해.'

나는 저 검은 기운을 알고 있다.

아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마기.'

이 세계에서 마(魔)를 다룰 수 있는 존재가 극히 드물다는 걸 떠올린다면 저 사내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

저 사내는 나처럼 이 세계에 떨어진 플레이어가 분명했다.

'거기다가 기가 형상화되어서 자체적으로 공격까지 할 정도라니....'

내가 지닌 마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수준의 마기였다.

이를 바꿔 말하자면, 저곳에 있는 이가 지금껏 흡수한 승천석 파편 또한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는 뜻과도 같았다.

'이 정도까지 승천석 파편을 흡수한 플레이어가 없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지금껏 내가 이 세계에서 마주했던 플레이어들은 나보다 상대적으로 레벨은 높았을지언정 승천석 파편을 많이 모은 이들은 아니었다.

아이추웡이나 익명999 모두 마기를 사용하지 않았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나타난 이는 아니었다.

대체 승천석 파편을 얼마나 모은 건지는 몰라도 드러난 마기의 수준이나 마기를 통제하는 능력 모두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 정도면 4레벨 혹은 5레벨 권한에 닿지 않았을까?

'그건 그렇고....'

사내와 마수들의 싸움은 어느덧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마수들은 이미 전의를 잃었고, 남은 건 내 선택뿐이었다.

'접촉해야 하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플레이어와의 접촉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게 마경처럼 누구 하나 죽어도 시체 하나 남지 않는 곳이라면 더욱더.

'하지만....'

어째서인지 몰라도 내 본능은 저 사내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건 아마 멀찍이서 보이는 사내의 모습에서 드문드문 기시감이 느껴졌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어딘가 익숙한데... 내가 아는 사람인가?'

애석하게도 그걸 확인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현재 나와 사내의 거리는 절대로 가깝다고는 할 수 없는 거리였다.

그렇기에 더 자세히 보려면 지금보다 거리를 좁힐 수밖에 없는데, 그랬다가는 사내에게 내 존재를 발각당할 수도 있었다.

'으음.'

쉽사리 결정을 못 내리던 그 순간.

[크루루!]

뒤쪽에서 느껴진 기척에 나는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Lv.4]

[라듄]

아무래도 제 영역을 잃고서 방황하던 라듄이 나와 마주친 모양.

'쯧.'

나도 모르게 시선을 너무 오래 빼앗긴 듯했다.

[쿠루루!!!]

라듄이 달려들었다.

지금 내 손에는 그 어떤 총기도 없었지만, 고작 라듄 한 마리를 상대로는 상관없었다.

화르륵...!

왼손에 쥐인 업화의 송곳니에서 업화가 넘실거린다.

내 어설픈 움직임으로 라듄의 급소에 이것을 꽂아 넣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다행히도 나에게는 내 움직임을 보조해 줄 것들이 많았다.

['물의 보옥'이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 권능을 발동합니다.]

['물의 보옥'이 '흉용적파도(洶涌的波濤)'를 전개합니다.]

물의 보옥에서 발한 권능이 파도가 되어서 라듄을 덮쳤다.

콰콰콰콰!!!

[크락!]

라듄이 그대로 파도에 밀려서 나가떨어지고, 그 위로 한 줄기의 섬광이 스쳤다.

['낙스의 유산─전(電)'이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 권능을 발동합니다.]

['낙스의 유산─전(電)'이 '비뢰(?雷)'를 전개합니다.]

파지직!

물의 보옥과 낙슨의 유산의 연계에 라듄이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단번에 전투 불능이 되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마수의 시선 위로 업화의 송곳니가 내리꽂히고, 불꽃이 넘실거렸다.

이제껏 그랬듯이 업화의 송곳니를 타고서 일어난 불꽃이 안구를 타고서 뇌까지 바짝 익혔다는 뜻이었다.

[크르륵!]

애석하게도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조금 전의 소란 때문인지 주변에 있던 다른 마수들이 이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쿵!

쿵쿵!

마수들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한두 마리가 아니야.'

그때 느껴지는 기척에 나는 바로 몸을 틀어서 나를 향해서 덮쳐들던 마수의 아가리를 피했다.

하마터면 오른팔이 뜯겨 나갈 뻔했다.

[스스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Lv.5]

[변이된 나팔 덩굴]

[Lv.5]

[자라나는 가시 덩굴]

마경의 수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식물종까지 등장했다.

서서히 조여드는 포위망 속에서 나는 조심스레 업화의 송곳니를 어루만졌다.

'어쩔 수 없나.'

악마와의 계약은 늘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른다.

그렇기에 지금껏 악마와의 계약을 피해 왔으나, 이제 더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촤악!

업화의 송곳니로 손가락을 베기 무섭게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하이마의 펜던트의 저주가 출혈을 가속화하고, 물의 보옥의 권능이 흘러내린 혈액을 통제하며 육망성의 형태를 그려 나간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음?'

그 순간.

쐐애애애액!!!──

강렬한 파공음과 함께 어디선가 날아든 창 한 자루가 단번에 나를 덮치려던 마수의 머리를 꿰뚫었다.

털썩.

창에 머리가 꿰뚫린 마수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내가 이 창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리가 만무했다.

'결국 들킨 건가.'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창의 주인이 서서히 이곳을 향해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이제 나는 선택해야 했다.

플레이어인 것이 확실한 사내를 먼저 기습할 것인지.

아니면 일단 대화를 나눠 볼 것인지.

'상대는 나보다 명백한 강자다. 만약 내가 먼저 공격당한다면 위험해.'

그렇기에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내가 먼저 기습을 하는 선택지가 옳았다.

상대의 의중을 알 수 없는 이상 위험을 배제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었으니까.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지금 내 몸 상태로 과연 상대를 기습해서 제압할 수 있을지였다.

나는 상황을 진단했다.

'당장 나는 총기를 소환할 수 없는 상황이다. 만약 급발적인 전투가 일어난다면 병기 소환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기다릴 여유는 없어.'

'그렇다면 총기 없이 기습해서 제압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상대의 수준을 보았을 때 업화의 악마와의 새로운 계약이 불가피하다. 그리고 그 계약은 약식 계약 정도로는 어림도 없겠지.'

'문제는, 그 모든 걸 감당하더라도 기습에 실패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괜히 벌집을 건드리는 꼴이 될 수도 있어.'

결국 이 문제는 상대에게 적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문제로 갈 수밖에 없었다.

쉽사리 내릴 수 있는 판단이 아니었기에 역설적으로 나는 이 판단을 온전히 직감에 맡기기로 했다.

때로 직감이란 이성보다도 더욱더 옳은 판단을 내리곤 하니까.

기습이냐, 대화냐.

나는 머릿속으로 무수한 경우의 수를 떠올리면서 점차 다가오는 사내를 마주했다.

그런데....

"괜찮으세요?"

악의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 순진무구한 얼굴을 본 순간.

"...하하."

나는 그대로 웃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77화 마경으로 (5)

선인(善人).

세상에는 태생적으로 선량함을 타고난 이들이 있다.

누군가는 선량함을 약자가 지닌 일종의 방어기제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간혹 진실한 의미로 선의로 똘똘 뭉친 것 같은 이들이 있다.

요한 또한 그중 하나였다.

「카인 형! 안녕하세요!」

요한은 내가 옛날에 잠깐 몸담은 적 있었던 길드의 소속원이었다.

평소 길드 채팅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던 나조차도 알고 있을 정도로 인사성이 참 밝았던 녀석이었는데, 밝은 인사성만큼이나 실제 성격도 매우 좋았다.

「다들 계시네요! 안녕하세요!」

「아, 이번에 새로 오신 분인가요? 그거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디서 만날까요?」

「그거 제가 도와드릴게요.」

요한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본인이 지닌 기독교적인 세계관 때문인지는 몰라도 늘 선을 베푸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선의는 자연스레 같은 길드원이었던 나에게까지 닿았다.

「카인 형, 오늘도 접속하셨네요! 안녕하세요!」

「ㅎㅇ」

처음에는 덤덤히 반응했다.

요한의 성격이 좋건 말건 나와는 그리 상관없는 일이었고, 당시 나에게 있어서 사람과의 관계란 귀찮은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에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원체 나는 길드 채팅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었고, 애초에 길드에 가입한 것 또한 길드 시스템이 가져다주는 혜택에 주목했기 때문이지 친목 도모를 하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던 날이었다.

평소처럼 사냥을 하려고 자주 가던 사냥터로 향했는데, 처음 보는 무리가 사냥터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천(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현재 이곳은 통제 중입니다. 다른 사냥터로 가 주시죠.」

「통제?」

당시의 내가 그 단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사람과 엮이는 게 귀찮아서 친목 도모도 하지 않았는데, 그 귀찮은 사람이 나에게 불이익을 주려 한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당신 뭐야? 지금 뭐 하는...!」

괜히 고레벨 지역 사냥터를 통제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는 듯이 그들의 수준은 꽤 높았으나, 그래 봤자였다.

「뭐야, 저 미친 새끼는!」

「지원! 지원 불러!」

공정의 세계에서 살인은 꽤 페널티가 있는 행위지만, 그것도 상황과 장소에 따라서 다르다.

당시 사냥터였던 마르카스 토굴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금역 중 하나였고, 당연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은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와... 감사합니다. 진짜 강하시네요. 안 그래도 쟤네들 사냥터 막고 있는 게 눈꼴시려웠는데.」

「인정.」

그렇게 간단하게 그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후, 언제나처럼 나는 사냥을 이어 갔다.

우리 길드장에게서 다급히 연락이 온 건 그 이후였다.

「카인 님, 혹시 천랑 길드랑 무슨 일 있으셨나요?」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어... 그러면 혹시 마르카스 토굴 쪽에서 어떤 분들이랑 분란이 있으셨나요?」

「아, 예. 사냥터 입구를 막고 있길래 시비가 붙었습니다.」

「이런....」

그때 알게 되었다.

당시에 마르카스 토굴의 입구를 막고 있었던 게 천랑이라는 이름의 대형 길드였다는 걸.

천랑(天狼).

당시 공정의 세계 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던 대형 길드로, 사냥터 통제 및 무분별한 PK로 악명이 높았던 길드였다.

대형 길드와의 마찰.

그 마찰의 불길은 곧 내가 속해 있었던 길드까지 번졌다.

당시 내가 있었던 길드는 중소 규모에 불과했던 친목 길드였고, 도저히 대형 길드의 보복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아, 천랑 또 저 새끼들이야.」

「진짜 못살겠네.」

「죄송합니다. 저는 이만 길드에서 나가 보겠습니다...」

천랑의 보복을 견디지 못한 길드 탈퇴자가 속출했다.

자연스레 길드 내에서는 내가 책임을 지고서 천랑에 사죄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다.

「이거 카인 님이 나서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솔직히 저희는 너무 버티기 힘듭니다. 카인 님이 천랑 측에 따로 사과를 하시는 게 어떨지....」

「카인 십새끼 사고 치고 암것도 안 하네 ㅋㅋ ㅈ같은 새끼. 난 길탈함 ㅃㅃ」

길드장에게 따로 연락이 온 것도 그쯤이었다.

「카인 님, 죄송하지만 이 상황에 대해서 나서 주셨으면 합니다.」

「어떻게요?」

「정말로 죄송하지만, 저희 길드를 떠나 주셨으면 합니다. 카인 님이라면 몰라도 천랑과의 분쟁은 저희 길드와 길드원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상황은 대충 내가 길드에서 강퇴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면 안 되죠!」

그때 길드 내에서 목소리를 높인 게 요한이었다.

「카인 형이 잘못한 게 뭔데요? 천랑에서 사냥터를 통제한 게 잘못 아닌가요?」

당연히 반발은 적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가 피해를 받잖아! 괜히 벌집을 들쑤셔서.」

「함께 맞서 싸우라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지는 말아야죠. 잘못된 건 천랑이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고? 그냥 이대로 당하고만 있자고?」

「함께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떠올려야죠. 잘못된 건 천랑이에요.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돼요.」

정론에는 힘이 있다.

특히 요한은 예전부터 길드 내에서 올곧은 자세를 유지해 왔기에 그 말에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물론 옳은 소리를 하는 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적을 만들기 마련.

천랑의 집요한 괴롭힘과 PK에 누군가 요한의 이름을 천랑에 팔았고, 어느 순간부터 요한은 천랑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그러한 보복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단 한 번도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많은 걸 잃었음에도 요한은 단지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내가 천랑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때쯤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천랑 정도의 규모를 지닌 길드와 홀로 대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행했다.

쉽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여타 온라인 게임들이 그렇듯이 플레이어는 NPC와는 달리 사망해도 많은 걸 잃을 뿐, 결국에는 다시 부활한다.

그렇기에 천랑과의 전쟁은 매우 귀찮고 지루한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으나, 나는 그 과정을 기꺼이 감내했다.

당장 있는 귀찮은 과정이 훗날에 있을 더 귀찮은 과정을 확실하게 줄여 줄 테니까.

즉, 이 과정을 통해서 공정의 세계 전체에 본보기를 보여 줄 생각이었다.

나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카인이 누구인지 말이다.

「미친....」

그렇게 천랑은 궤멸했다.

정확히는, 도저히 길드를 해산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아주 박살을 내 주었다.

「진짜 카인카인하더니 이 정도였는 줄은 몰랐네 씹 ㅋㅋ」

「죄송합니다 진짜 한번만 봐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ㅈ 같은 겜 접음 ㅅㄱ」

「너 나중에 두고 보자.」

천랑이 해체되고, 길드 역시도 평화를 되찾았으나 애석하게도 이미 많은 게 바뀐 뒤였다.

안 그래도 영세했던 길드는 사람이 거의 남지 않게 되었고, 사실상 유령 길드처럼 변했다.

「새로 오신 분인가요? 환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변하지 않았다.

천랑에게 무수히 괴롭힘을 당하고, 가진 아이템을 모두 잃은 것도 모자라서 레벨까지 내려갈 정도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때가 되니 나도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요한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 자신의 선의를 포기하지 않는가.

그에 요한이 답했다.

「그냥, 좋잖아요, 사람들 웃고 좋아하는 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대답을 납득하지 못했지만, 요한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확실히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냥 그런 사람이구나.

어이가 없을 정도로 사람 좋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스스로 길드를 탈퇴했지만, 이후에도 요한과는 꽤 괜찮은 형 동생 관계로 지냈다.

비록 요한의 객관적인 레벨이나 수준이 높지는 않았어도, 그런 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요한이 내 눈앞에 있었다.

비록 내가 알던 모습과 조금 다르기는 했어도 요한이 분명했다.

홀로 외딴 섬에 떨어진 것 같은 쓸쓸한 풍경 속에서 비로소 아는 이가 나타난 것이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세요?"

요한이 지은 더없이 사람 좋은 미소는 타인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강력한 효과가 있었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설령 지금 눈앞에 있는 요한이 내가 알고 있던 요한이 맞는다 한들, 그때의 요한과 지금의 요한이 같을 리가 없다는 걸.

환경은 사람을 바꾼다.

하물며 갑작스레 외딴 세계에 떨어져 버린 이 빌어먹을 상황에서 제아무리 요한이라 한들 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지금 요한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가 아닌가.

그렇기에 나는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른 반가움을 쓸어내리며 덤덤히 말했다.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일단 저것들부터 같이 정리해요."

스스스....

요한은 그렇게 말하고는 아까 마수들을 제압했을 때처럼 마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마기를 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꺼낸다라.... 내가 플레이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조금 전에 이미 들켰다고 생각해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과 별개로 몸은 빠르게 움직였다.

'일단 총기 사용은 배제한다.'

지금 몰려드는 마수들의 숫자를 생각한다면 총기 사용은 불가피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한에게 총기의 존재를 감추기로 했다.

[캬오오!]

"조심해요!"

다급히 외친 요한이 나를 향해 달려든 마수 앞에 끼어들었다.

나로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기습이었으나, 그 사실을 모르는 요한은 내가 위험하다 판단한 듯했다.

'이것 참... 여전하다고 해야 할지.'

적어도 지금까지 본 요한의 모습은 내가 알고 있던 것처럼 여전히 사람이 좋았다.

혹여나 요한이 변했을까 우려했던 것이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로.

스스스...!

그러한 성격과는 달리, 요한이 뿜어낸 마기의 뱀은 더없이 사나운 기세로 주변의 마수들을 또다시 물어뜯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전투로 인해서 꽤 힘을 소진했는지 비록 아까보다 크기나 기세가 조금 줄어들긴 했어도, 여전히 위협적인 기운이었다.

나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업화의 송곳니를 다잡은 나는 마기의 뱀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무력화된 마수들의 급소를 찔렀다.

[끼에에에엑!!!]

급소를 파고드는 업화의 기운에 마수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절명했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나 화상은 크지 않을지언정, 내부가 완전히 숯검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제아무리 수가 많다 한들 기껏해야 4레벨에서 5레벨 사이의 마수들이다.

마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일신의 무력 또한 만만치 않은 요한과 내가 공동전선을 펼치자 열댓 마리가 넘었던 마수들이 모두 싸늘한 사체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후우... 이제 끝난 것 같네요."

"그런 것 같군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이럴 때마저도 또 남 걱정이라니... 이미 알고 있었지만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손으로 닦아 낸 요한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러면 언제 마수들이 또 올지 모르니 일단 이곳을 벗어나요. 제가 이 근처의 안전지대 한 곳을 알고 있어요."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경계심 없이 나올 줄은 몰랐지만, 나는 애써 플레이어가 아님을 연기했다.

"안전지대? 마경에 안전한 장소가 있다는 소립니까?"

"응?"

그에 요한이 무척이나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어... 혹시 플레이어 아니셨나요?"

78화 마경으로 (6)

세상에는 호인과 호구가 있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는 이 둘의 차이는 바로 선의의 주체가 어디에 있냐는 건데, 호인 같은 경우는 자신의 의지로 선의로 베푸는 것이라면 호구는 타의에 의한 선의로 결국 강제로 빼앗긴다는 점이 다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요한은 호인은 맞았으나 결코 호구는 아니었다.

요한의 베풂은 늘 스스로 선택한 선의(善意)였고, 거기에는 단 한 조각조차 타의(他意)에 의한 것은 없었다.

즉,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과는 별개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신의 정체를 밝힐 정도로 순진무구하지는 않다는 이야기다.

'무슨 생각이지?'

예전부터 느끼지만, 나는 가끔 요한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건 아마 나와 요한이 지닌 가치관의 차이가 그만큼 크다는 거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 요한이 적의를 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 지금껏 내가 보아 온 요한이라는 사람에 대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이상하다...."

"무엇이 이상하다는 겁니까?"

"아, 다른 건 아니고 마경에서 다른 분들도 몇 분 뵌 적 있는데 전부 플레이어셨거든요. 애초에 플레이어가 아니고서야 마경에 혼자 올 이유가 없기도 하고요."

요한이 내린 근거는 내가 처음에 요한을 보고서 플레이어라 짐작한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경은 인간에게 있어서 금역 중의 금역이었고, 인간의 기준에서 그런 곳을 단신으로 드나들 만한 괴짜들은 플레이어 말고는 거의 없었으니까.

지극히 합리적인 추론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맞습니다, 플레이어."

지금 시점에서는 요한에게 수상해 보여서 좋을 게 없었다.

당장 요한은 나보다 명백한 강자였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요한과 굳이 적대 관계를 형성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짓은 관계를 파탄 내고, 파탄 난 관계는 어지간해서는 수복되지 않는 법이었으니.

이건 어찌 보면 내 욕심이기도 했다.

외롭고 또 외로운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다시금 옛 인연을 되찾기를 바라는, 그런 욕심 말이다.

"아... 역시! 혹시 제가 착각했나 해서 식겁했네요 하하...."

"저도 마경에서 사람을 볼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놀라게 해 드렸나 보네요. 죄송해요.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스레 주변을 살핀 요한이 말했다.

"그러면 일단 가면서 얘기하시죠, 슬슬 마수들이 다시 올 것 같으니."

"예."

그 말마따나 잠시 여유가 생기긴 했으나 본질적으로 이곳은 상당히 위험한 장소였다.

물론 마경 내에서 안전한 곳이 몇이나 되겠냐마는 그걸 감안해도 이곳은 빨리 벗어나는 게 좋았다.

"이쪽이에요. 아, 발밑 조심하세요. 프렉 거미의 체액이라 밟으면 엄청 끈적거리거든요."

마경에서 생면부지의 타인을 만난 것치고는 어딘가 과할 정도의 친절함이었으나, 이미 요한에 대해서 알고 있는 나로서는 납득이 되는 일이었다.

요한은 그런 사람이었다.

올곧고, 선의를 잃지 않는 사람.

"마경이 익숙하신 것 같네요."

"네? 아아, 아무래도 몇 번 온 적이 있다 보니...."

요한이 옅게 웃으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지금까지 요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겠지.

이 세계는 그런 곳이었다.

단순히 선량함 하나만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곳.

그렇기에 요한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나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그렇게 요한을 따라서 마경을 걷다 보니 주변의 풍경이 뭔가 익숙했다.

'이 길은....'

내가 알기에 이 길을 따라서 나오는 안전지대는 한 곳뿐.

예전에 내가 요한에게 알려 준 마경의 안전지대 중 한 곳이 분명했다.

설마하니 요한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 줄은 몰랐기에 나는 어딘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때, 요한이 말했다.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괜히 저 때문에 휘말리신 것 같아서."

"그게 무슨 말인지?"

"제가 이번에 마수 하나를 사냥하려다가 꽤 소란을 떨었거든요. 아마 마수들이 갑자기 날뛴 것도 그것 때문일 거예요."

아, 그런 얘기였나.

확실히 처음 라듄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 무언가 일이 이상하다 싶더라니, 아무래도 그 원인이 요한이었던 듯했다.

"괜찮습니다, 마경에서 그 정도 일이야 당연히 있는 일이니."

"그래도 저 때문에 괜히 곤란해지신 것 같아서요. 다시 한번 정말 죄송해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마치 미로처럼 나 있는 나무들 사이를 지나서 안전지대에 거의 다다르자, 그제야 한숨을 돌린 요한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요한이라고 합니다."

이미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을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새삼 느낌이 달랐다.

지금 내가 마경에서 만난 이는 그저 닮은 모습을 한 이가 아니라 정말로 요한이 맞았다.

"루크라고 부르십시오."

"루크 님이셨군요."

내가 요한에게 카인의 이름은커녕 벨 블랙우드의 이름조차 밝히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여전히 요한이라는 사람을 믿고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요한이 이 세계에 떨어져서 겪어 왔을 시간까지는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간은 많은 걸 바꾼다.

제아무리 요한이 선의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고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특히 지금도 요한에게서 넘실거리고 있는 마기가 요한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인 만큼, 가급적이면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 루크 님도 변종 때문에 마경으로 오신 건가요?"

요한은 자신의 목적을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더 무언가 숨기는 것이 아닌가 싶었으나, 그거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 정도 티가 날 터.

"뭐... 그 이유도 있긴 합니다."

"그렇다면 잘됐네요."

"무슨 뜻입니까?"

"아아... 사실은 제가 아까 잡으려다가 실패했던 마수가 꽤 고레벨 변종이거든요. 아무래도 저 혼자서는 힘들 것 같아서 고민했는데, 루크 님과 함께면 가능할 것 같아서요. 혹시 도와주실 수 있나요?"

변종 사냥이라....

요한이 품고 있는 마기를 봤을 때부터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요한은 승천석 파편을 모으고 있는 듯했다.

"변종 사냥이라면, 혹시 파편을 노리는 겁니까?"

요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그렇죠. 그런데 플레이어라면 다들 그렇지 않나요? 목적은 달라도 거기에 파편이 필요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렇긴 하죠."

파편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파편을 모을수록 플레이어에게 있어서 여러 이점이 생긴다는 건 분명한 사실.

그렇기에 많은 플레이어가 지금도 변종 사냥 혹은 다른 수단을 이용해서 파편을 모으고자 한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파편은 플레이어에게 마냥 이롭기만 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 힘이 위험하다는 것 역시도 알고 있습니까?"

요한은 마기를 다루고 있었다.

그것으로 보건대 이미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파편을 흡수했다는 뜻인데, 그것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큰 이상은 없어 보였지만, 만약 이 이상으로 파편을 흡수한다면 요한이 감당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어요. 저도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정당화하고 싶지는 않지만, 파편은 그 자체로 목적이기도 하거든요."

비록 많은 대화를 나눈 건 아니나, 그것으로 나는 요한에게서 한 가지 생각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돌아가고 싶은 겁니까?"

"...모두가 그럴 거예요."

"아닌 사람도 있는 것 같던데."

나는 익명 게시판에서 보았던 무수한 이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중에는 분명히 이곳에서의 삶에 만족하는 이들 역시도 있었다.

"설령 그런 이들이 있다 한들, 결국 이곳은 저희가 살아갈 곳이 아니에요. 우린 이곳에서 이방인이고, 이곳에서 살아왔던 이들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겠죠. 그 문제는 언젠가 곪아서 터질 거예요."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을 전혀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당장 먹고사는 게 우선인지라 깊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냥 넘길 문제도 아니지.'

플레이어들은 이 세계의 원주민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마 누군가는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여길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저 NPC로 여길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저 개인의 가치관 정도로 넘어갈 수도 있으나, 진짜 문제는 바로 플레이어들에게 힘이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제대로 뭉친다면 웬만한 왕국은 물론이고 제국마저도 능히 전복할 수 있는 압도적인 힘을 말이다.

당장은 길드 정도로만 뭉쳐 있지만, 만약 대형 길드들이 본격적으로 연합하기 시작한다면 전혀 없던 새로운 형태의 세력이 생겨날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있어서 그 사안이 우선순위에 있지 않은 건 거기까지 도달하려면 지금부터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꽤 나중의 일까지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아뇨... 그렇게까지 먼 이야기는 아닐 거예요. 이미 여러 차례 본 적이 있기도 하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요한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았으나, 아무래도 내가 미처 모르는 모종의 사건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 도착했네요. 이곳이 안전지대예요. 꽤 괜찮죠?"

요한이 옅게 웃으면서 말을 돌렸다.

더는 말하고 싶지 않은 기색에 나 또한 더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요한이 그렇게 결심했다면 내가 억지로 묻는다고 해서 답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나저나 안전지대라....'

안전지대의 풍경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마경의 다른 장소와 비교해도 겉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안전지대 자체가 특수한 장소라기보다는 여러 조건이 우연히 겹쳐서 만들어진 곳이기에 더욱더 그러했다.

"시간이 늦었네요. 밤의 마경은 위험하니 슬슬 쉬는 게 낫겠어요."

"그러시죠."

"아무래도 따로 불은 못 피울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그 정도 준비는 하고 왔으니."

"다행이네요."

마경의 밤은 만만치 않지만, 어차피 나에게는 영구 온열 기관이나 다름없는 업화의 송곳니가 있었으니 추위에 떨 걱정은 할 필요 없었다.

잘 준비는 크게 어려울 것 없었다.

혹시 모를 마수의 침입을 대비해서 경고 용도의 간단한 덫을 만들고, 우리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서 경매장에서 구한 고레벨 마수의 말린 분비물을 안전지대 경계에 살짝씩 뿌렸다.

이 정도면 안전지대의 특성상 웬만해서는 마수들이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여 오더라도 소리로 인해서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렇게 대충 모든 취침 준비가 끝나자 요한이 조금 놀란 얼굴로 말했다.

"...굉장히 익숙해 보이시네요. 마경에는 자주 오시나요?"

"몇 번 온 적이 있긴 합니다."

"그렇군요....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무언가 다르긴 하더라고요."

요한이 주변을 슬쩍 훑어보며 말했다.

"그래도 꼭 안전한 건 아니니 불침번을 서긴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하실래요?"

"제가 먼저 서겠습니다. 두 시간마다 교대하는 걸로 하시죠."

"그러면 그럴까요?"

요한은 순순히 내 제안에 응하고는 곧장 침낭 안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아, 그 전에, 변종의 정확한 정보가 어떻게 됩니까?"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기로 한 건가요?"

"일단 조건을 맞춰 봐야죠."

"조건이요?"

"우선 변종에 대한 정보부터 말씀해 보시죠, 그걸 들어야 판단이 될 것 같으니."

"어... 네."

요한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6레벨 네임드 개체예요. 워낙 변형이 많이 되어서 정확한 종이나 타입은 모르겠는데, 주변에 무리가 없던 걸로 봐서 적어도 우두머리형은 아니었어요."

"7 대 3."

"네?"

"제가 7이고, 그쪽이 3. 이 정도면 꽤 합리적인 것 같은데요."

"...네?"

요한의 얼굴이 그대로 뜨악한 표정으로 물들었다.

79화 마경으로 (7)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신을 차린 요한이 항변했다.

"그건... 좀 그런데요.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파편이 필요해요. 5 대 5로 가시죠. 그게 공평하잖아요."

"7 대 3."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요한이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리 제가 도와 달라는 입장이기는 해도 7 대 3은 너무 과해요. 제 사정도 좀 봐주세요."

"변종은 위험한 존재입니다. 무엇보다도 변종의 타입은커녕 종조차도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면 위험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제 요구가 무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목숨이 걸린 일 아닙니까?"

"그래도 7 대 3은 과해요. 목숨을 걸고 있는 건 저 또한 마찬가지잖아요."

"7 대 3. 그 이하는 안 됩니다."

"이런...."

요한이 애원하듯이 말했다.

"정말로 안 되는 건가요?"

"안 됩니다."

"이렇게 부탁하는데도요?"

"저도 부탁드립니다."

"아니, 진짜...."

내 제안이 무리한 요구라는 건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사안이었지만, 나는 일부러 요한을 떠볼 요량으로 더욱더 억지를 부렸다.

혹시라도 요한이 내 억지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요한과의 동행을 끝낼 생각으로 말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당황하고 있지.'

이것으로 요한이 한 제안이 어떤 함정이 아니라는 건 대충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연기일 가능성이 있긴 했으나, 만약 요한 같은 사람이 그렇게까지 변했다면 뒤통수를 맞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요한이 굳은 결심을 마친 듯한 얼굴로 말했다.

"후... 6 대 4. 그 이상은 저도 양보 못 해요. 저도 진짜 중요해요."

"좋습니다."

협상이 타결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5 대 5까지는 기꺼이 양보할 생각이었지만, 요한이 먼저 한발 물러난다면 나도 굳이 사양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시점에서는 그게 더 수상해 보일뿐더러 무엇보다도 요한에게 이 이상 파편을 넘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괜찮아 보이지만, 이 이상 요한이 마기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

마기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아무리 플레이어의 육체가 강인하다고 해도, 언젠가 그 선을 넘는 시점이 올 터.

나는 요한이 그렇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요한은 몰라도 여전히 나는 요한을 친한 동생으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잘해 보죠."

"예,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억지를 부린 게 기분이 나쁠 법한데도 요한은 웃으면서 나에게 악수를 건넸다.

"정말 쉽지 않네요. 보통 이렇게까지 말하면 한발 물러나 주던데."

"쉬운 부탁은 아니니까요."

"그것도 그렇긴 하죠."

요한이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 내저었다.

"말하는 게 꼭 제가 아는 분을 닮았네요."

"아는 분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요한은 그렇게 말하며 옅게 웃었다.

"시간이 늦었네요. 그러면 이만 먼저 자 보겠습니다. 시간 되면 깨워 주세요."

"예."

침낭 자리를 정리한 요한은 그대로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내일 사냥이 무사히 끝났으면 좋겠네요."

"괜찮을 겁니다."

"그렇겠죠?"

지금 요한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걱정과 우려가 섞인 얼굴이 아닐까.

"주무세요, 잘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으니."

"아, 네. 그러면 이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요한은 새근새근 잠들었다.

도대체 생전 처음 보는 타인을 어떻게 저리 쉽게 믿는 건가 싶었으나, 그거야말로 나와 요한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일 테니 굳이 억지로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요한 나름대로 나를 판단해서 믿을 수 있다고 여겼거나, 여전히 믿고 있지 않지만 내가 암습을 해도 상관없다고 여기고 있을 수도 있겠지.

믿음이냐, 자신감이냐.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당장 내가 요한을 적대할 생각은 없었으니 결과적으로 요한의 판단은 옳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면....'

불침번을 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업화의 송곳니로 인해서 추위에 떨 걱정도 없었을뿐더러 안전지대에 다가오는 마수들의 기척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하물며 그런 평화 속에서 그저 땅만 쳐다보고 있어야 한다면 모를까, 지금 나에게는 익명 게시판에 있었다.

불침번의 가장 큰 적인 지루함을 물리쳐 줄 아주 좋은 친구라고 할 수 있겠다.

[익명 게시판에 접속합니다.]

익명 게시판에 들어간 나는 언제나처럼 추천 글부터 살폈다.

다수의 유저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현재 익명 게시판 내의 화젯거리나 주요 정보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는 단번에 이목을 끄는 제목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이버렉카9 : 게시판 전통 괴담 뉴비 사냥꾼에 대해서 [★]

사이버렉카9는 최근 들어서 등장한 네임드인데, 주로 이슈가 될 만한 정보나 논란이 될 만한 화젯거리를 전달한다.

얼핏 보면 기자와 역할상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가장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역시나 사이버렉카9의 게시 글은 그가 원본이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사이버렉카9는 그 이름마따나 익명 게시판 혹은 다른 게시판에 있는 게시 글 중에서 상대적으로 관심을 못 받은 게시 글을 재조명하는 역할을 주로 했고, 그렇기에 몇몇 게시판 유저들은 사이버렉카9를 좋지 않게 보았다.

-익명55 : 이 새끼 또 불펌질이네.

-개미핥Gi : 이거 쓴 사람한테 허락은 받은 거임?

-익명21 : 받았겠음? ㅋㅋㅋ 렉카 수준 닉 하나는 기깔 나게 지음 ㅋㅋ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사이버렉카9의 게시 글은 대부분 추천 글에 올랐다.

그 출처가 어디든지를 떠나서, 사이버렉카9가 가져온 정보들은 일단 화제가 될 만한 것들이었으니까.

'뭐, 그건 그렇고....'

사이버렉카9가 어떤 인물인지는 차치하고서, 그가 올린 게시 글의 제목이 심상치 않았다.

'뉴비 사냥꾼이라....'

여타 추천 글이 그렇지만 이번 게시 글은 특히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게시 글이었다.

뉴비 사냥꾼의 존재는 익명 게시판 유저들에게 있어서 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같은 것이었으니까.

나는 곧장 사이버렉카9의 게시 글을 눌렀다.

──────────────

뉴비 사냥꾼은 익명 게시판 유저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유명한 괴담의 주인공이다.

뉴비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 뉴비 사냥꾼이 곧 찾아간다는 이야기.

실제로 그러한 괴담을 증명하듯이 멋모르고 익명 게시판 내에서 신분을 밝혔다가 사라진 뉴비들이 많은 건 사실이다.

뉴비 사냥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를 떠나서 게시판 내에서 어설프게 신분을 노출하는 게 위험한 건 분명하다는 소리다.

뉴비 사냥꾼의 정체에 대해서는 많은 추측이 있다.

첫 번째 가설은 뉴비 사냥꾼이라는 존재 자체가 아예 없다는 가설이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게시판 내에서 뉴비라는 건 상대적으로 이 세계에 대해서 낯선 이일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다. 객관적인 생존율 자체가 낮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뉴비 사냥꾼의 존재는 일종의 확증 편향의 오류에 의해서 탄생한 괴담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 또한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다른 의견 또한 있다.

사실 뉴비 사냥꾼은 특정한 개인이 아닌, 익명 게시판 내에 있는 불특정 다수라는 가설이다.

그에 대한 뒷받침 중 하나는 뉴비 사냥꾼의 활동 영역이 비정상적으로 넓다는 사실이다.

뉴비 사냥꾼은 어디든지 나타난다.

그게 제국의 끝이든, 마경이든, 뉴비가 어설프게 위치와 신분을 노출한다면 말이다.

뉴비 사냥꾼이 홀로 활동한다면 이처럼 광활한 활동 영역을 지니기 어렵다.

그렇기에 분명히 익명 게시판 내의 누군가는 모종의 목적을 지니고 뉴비를 노릴 것이고, 그런 이들이 모여서 뉴비 사냥꾼이라는 괴담 속 존재를 탄생시켰다는 이야기다.

마지막 가설은 뉴비 사냥꾼이라는 존재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가설이다.

사실 이것을 입증하려면 상당히 많은 난관을 거쳐야 하는 게 사실이다.

지금껏 나왔던 희생자들을 생각해 본다면 뉴비 사냥꾼이 아무리 날고 기는 존재라고 해도 혼자 했다고는 믿기 어려웠으니까.

물론 뉴비 사냥꾼이 혼자가 아닌 집단일 가능성도 있으나, 공범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완전범죄 성공률이 극단적으로 내려간다는 걸 생각했을 때 아직까지 뉴비 사냥꾼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건 다소 의아한 일일 수밖에 없다.

다른 가능성 또한 있다.

뉴비 사냥꾼이 실제로 존재하며, 혼자서 그 넓은 활동 영역을 누빌 능력이 있다는 가정 말이다.

이처럼 많은 가설이 있으나, 그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가 뉴비 사냥꾼에 대해서 떠드는 이유는 간단하다.

뉴비 사냥꾼의 존재는 우리 사이에 은연중에 감돌고 있는 공포와 욕망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노린다는 공포.

누군가를 죽인다면 얻을 이득.

그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서 뉴비 사냥꾼이라는 존재를 점차 우리 마음속의 괴물로 만들었다.

그렇기에....

뉴비 사냥꾼이 단수인지 다수인지를 떠나서, 만약 그 괴담의 실체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노리는 건 단 하나뿐일 것이다.

파편.

이 세계에 대한 비밀을 품고 있는 그것을, 뉴비 사냥꾼은 노리고 있을 것이다.

──────────────

-하인베르 : 지금까지 익명 게시판에 나온 내용들 정리 잘한듯.

-김수박 : 킹 렉카.

-응애나애기뉴비 : 근데 뉴비 사냥꾼이 진짜 있긴 한 거임? 진짜 있으면 나 잡으러 와봐라 ㅋㅋ

└익명111 : 뉴비가 아니라서 안 죽일듯.

└섭종기원n일차 : ㄹㅇ ㅋㅋ

-기사단장임 : 흠...

-익명31 : 아직도 이런 거 믿는 사람 있음?

뉴비 사냥꾼이라....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은 게시 글이 아닐 수 없었다.

게시 글에 나왔듯이 누군가는 뉴비 사냥꾼의 존재를 그저 우연의 집합체 정도로 여기고 있었으나, 분명한 건 뉴비 사냥꾼이라는 소문이 생길 정도로 플레이어의 실종 혹은 살해 사건이 잦다는 거였다.

'흠.'

그렇게 익명 게시판을 보다 보니 시간은 꽤 빠르게 흘러갔다.

명색이 안전지대라는 이름이 붙은 장소답게 두 시간 동안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으음... 제 차례인가요?"

"예."

"고생하셨어요. 주무세요."

불침번 교대 후, 나는 의도적으로 한 시간 정도 자는 척을 했다.

수면 시간이 줄어들겠지만 혹시 요한이 다른 마음을 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요한은 나와 별다른 바 없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면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마 익명 게시판 혹은 다른 게시판을 보고 있는 거겠지.

'그러면....'

요한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된 것을 확인한 나는 요한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며시 물의 보옥의 권능을 발동했다.

['물의 보옥'이 착용자를 수호합니다.]

['물의 보옥'이 '정류적수로(停留的水路)'를 전개합니다.]

물의 보옥이 만들어 낸 얕은 장막이 내 주위를 살짝 덮었다.

혹시라도 내가 잠든 사이에 무언가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면 일차적으로 방어를 할 수단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낙스의 유산─전(電)'이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 권능을 발동합니다.]

['낙스의 유산─전(電)'이 '수뢰(守雷)'를 전개합니다.]

정류적수로의 장막을 타고서 옅은 전기가 덧씌워졌다.

이 정도 대비라면 어떤 공격이든 한 번 정도는 막아 줄 터.

'이러고 싶지는 않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지금까지 본 요한의 모습을 보면 내가 알고 있었던 요한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게 사실이었으나, 그게 연기나 기만이 아니라는 보장은 없었다.

최소한의 안전망인 셈.

'쉬어야겠어.'

대비도 해 두었겠다, 앞으로 마경에서 쉴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을 것임을 생각한다면 지금은 쉬어야 할 때였다.

고된 하루였던 탓일까.

수마는 빠르게 찾아왔다.

* * *

"루크 님."

익숙한 목소리.

눈을 뜨니 가장 먼저 보인 건 요한의 얼굴이었다.

"시간이 됐습니까?"

"네. 이제 딱 두 시간이에요."

내 주위에서 정류적수로와 수뢰가 여전히 감돌고 있었다. 만약의 일은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이만 움직여야겠네요."

"더 안 주무셔도 되시겠어요?"

"충분합니다."

말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몸이 매우 개운했다.

하이마의 펜던트의 혈류속도 증가와 물의 보옥의 회복 효과로 인해서 수면 효과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아무래도 주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거든요."

"그렇군요."

그 말마따나 안전지대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심상치 않았다.

비록 안전지대 안까지 들이닥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안전지대 바깥으로 나간 뒤였다.

"이질적이군요."

"아무래도 놈이 이 근방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 같아요."

"놈이라면 변종 말입니까?"

"네. 아까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어제 봤던 변종의 것이랑 비슷하더라고요."

이걸 차라리 잘됐다고 해야 할까.

어제 요한이 사냥에 실패했던 변종은 아무래도 자신 또한 사냥에 실패했다고 여기고 있는 듯했다.

미처 잡지 못한 사냥감을 다시금 찾아다니고 있다고 해야 할까?

'꽤 집요한 놈인가 보군.'

하지만 어떻게 보면 변종을 찾아다닐 수고를 덜었으니 차라리 잘됐다고 볼 수 있었다.

6레벨 네임드 변종.

사실 객관적으로 주어진 스펙만 본다면 내가 감히 비벼 볼 상대가 아니었다.

공정의 세계에서 레벨 하나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라고 볼 수 있었는데, 6레벨이면 지금 나와는 무려 3레벨이나 차이가 나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나에게 부족한 레벨과 신체 능력을 보조할 수 있는 아이템들이 있다고는 해도, 3레벨의 차이는 쉽게 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사냥할 대상이 변종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상대가 일반 6레벨 네임드 개체라면 모를까, 오히려 변종이라면 나로서도 충분히 해볼 만했다.

"그러면 이만 가실까요?"

요한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출발하기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요?"

아까 익명 게시판에서 본 사이버렉카9의 게시 글 때문일까.

평소였다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왜인지 모르게 지금 요한에게 물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혹시 뉴비 사냥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습니까?"

"어... 뉴비 사냥꾼이요?"

잠시 떨떠름해하는 표정을 지었던 요한이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요."

80화 마경으로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