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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이세계의 병사가 되었다.

1화.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다.

체이서가, 아니 최이서가 전생한 뒤에 했던 첫 생각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바쁘게 사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사회 분위기가 종용하는 경쟁과 재촉 속에서 나름대로 중간을 지켜나가며 착실하게 살아가던 그는, 꼬마 아이를 구하는 대신 트럭에 치였다.

그리고 바하무트 제국의 청년에 빙의됐다.

시골 농부 체이서.

그게 그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이번에도 최선을 다해서 살자."

그의 좌우명은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였다.

그에 따라, 주어진 삶. 새로운 인생도 부끄럽지 않게 살 생각이었다.

"오늘도 저에게 행운을 주시길."

"그러지 말라니까."

"하루 한 번씩 할 거야. 널 이뻐하시는 신님이 나도 봐주실 수도 있잖아?"

지나가던 친구 매튜가 체이서 앞에 서서 기도를 올리고 지나갔다.

체이서는 환생 특전이라고 생각되는 가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환생자의 정신」이었다.

「환생자의 정신」 [S]‗‗‗‗‗‗‗‗‗‗‗‗‗

이세계 여행을 버틴 영혼은 단단하므로 대다수의 정신적인 피해를 무효화한다.

‗‗‗‗‗‗‗‗‗‗‗‗‗‗‗‗‗‗‗‗‗‗‗‗‗‗‗‗‗

시골 사람들에게 「가호」란 신의 축복과 동의어였다.

하지만 체이서에겐 크게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농부답게 평범한 몸을 가지고 있었고, 가전 무공도 없었으며, 마법적 재능도 없었다.

외모는 대한민국으로 온다면 핫한 아이돌의 비주얼 담당이 되어 얼굴만으로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였으나, 이 세상은 잘생기고 이쁜 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단지 검은 머리가 좀 희귀해서 눈길을 끌 뿐,

체이서는 그저 농사꾼이었다.

단단한 정신력과 타고난 성정은 그를 한적한 시골 생활에 익숙해지게 만들었다.

마음이 평온하고 현재에 만족하니 외부로 눈을 돌릴 일이 없고, 그에 따라 매일 같은 날이 느긋하게 흘러갔다.

기껏 이세계로 왔지만 체이서에게 모험을 할 운명은 없는 것으로 보였다.

터진 전쟁이 늘어지기 전에는.

옆 나라 피스가이아 왕국과 전쟁이 벌어지고, 그 전쟁이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변두리 농민까지 차출되었다.

물론 농사지을 사람을 전부 끌고 가진 않았는데, 체이서가 있는 작은 마을 같은 경우엔, 한 명 또는 많아야 두 명 정도만 데려갔을 터였다.

그러나 담당관은 체이서를 콕 집어서 징집했다.

"자네가 가호를 지녔다는 자가 맞나?"

"그렇습니다."

"흐음. 역시 전시란 말이야. 이런 곳에서 가호를 지닌 자를 찾다니."

그러게요. 별로 필요성도 못 느끼던 능력이 결국 이렇게 발목을 잡는군요.

체이서가 가호를 가졌다는 사실은 마을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최이서가 빙의하기 직전에 체이서가 지독한 열병에 걸려 앓아 누웠는데

마을을 지나치던 신관이 치료해주면서, 이 청년에겐 '우주신의 가호'가 있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이미 체이서란 농부의 영혼은 죽고 없었다.

이세계에서 온 최이서의 영혼이 안착해 새로운 생명을 얻었을 뿐.

이 세계관에서 가호란 세계의 애정을 받는 자들, 그러니까 메인 스트림에 속한 자들이나 갖는 거다.

마을 사람들은 동네 청년 체이서가 고위 귀족이나 왕족들, 이야기 속 영웅이나 갖는 특별한 무언가를 가졌다고 이해했다.

그렇기에 성스럽고 귀하게 대했다.

덕분에 마을 처녀들에게 인기가 많아진 데다 어르신들도 묘하게 태도가 좋아져서 편했었는데, 이렇게 되니 그 입 싼 신관이 조금은 원망스러운 체이서였다.

"자네를 차출하는 대신 이 마을에선 더는 징집하지 않겠네."

"역시 체이서는 우리 마을의 보물이요."

"체이서 자네의 희생은 잊지 않겠네."

체이서는 마을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징집관을 따라나섰다.

그러나 가호의 영향은 끝이 아니었다.

그의 인생의 방향에 계속해서 영향을 끼쳤다.

시골 촌부들과 도시 장교들이 가진 가호에 대한 인식은 많이 달랐다.

시골에서야 성스러운 축복이지만, 도시에선 그저 유용한 개성이었다.

유용한 개성인 만큼 인재를 탐내는 자들에게 수요가 있었고, 그에 따라 체이서는 꽤 특별한 취급을 받으며 병영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다른 병사들은 곧장 아무 천막이나 배정받아 즉시 훈련에 들어갔으나, 체이서는 높으신 분들 앞에 서서 면접을 빙자한 품평을 받았다.

"자네가 체이서인가?"

"네! 그렇습니다!"

"가호가 있다니. 자네 그래도 운이 좋구만."

"칭찬 감사합니다!"

그는 2회차 신병이다.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제대.

인생의 자랑거린 아니지만, 자존감의 2% 정도는 채워주는 업적을 지닌 자로서, 병영에 와 태도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치욕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군기가 든 척을 했으나.

"훈련도 안 받은 녀석이 벌써 저러는 건 또 특이하군."

"하하하! 타고난 군인인가 보네."

"가호를 지닌 자 중에는 유독 특이한 사람이 많다더군."

"자자. 이제 저 녀석을 어디로 보낼지 결정하자고."

크게 이득을 보진 못했다.

이윽고, 이 높으신 세 지휘관은 체이서를 보낼 부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포병으로 보내지? 신관의 말에 따르면 정신력이 강한 가호라고 하잖나? 쾅쾅 터져나가는 폭발 속에서도 침착하게 조준해서 쏠 수 있지 않나?"

"아니지. 그렇다면 마법병단으로 보내는 게 낫지 않겠어? 그쪽은 전쟁 중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팡팡 터진다고. 괴팍하고 괴물 같은 자들이 많아서 병사들이 못 버틴다던데."

"으음···. 그렇지. 마법사들의 괴상한 실험과 잔혹한 성정이야 유명하니까. 평범한 심줄로는 못 버티긴 하지."

"그곳 보내면 실험체나 되게? 나는 특수전대가 좋겠네."

"특수전대? 거기는 좀···. 소문만 많고 구체적으로 뭘 하는 곳인질 모르겠군. 그런 곳에 보내기엔 능력이 애매하지 않겠나?"

"뭐 어떤가? 원래 각지에서 가호가 있는 병력이 생기면 그쪽으로 보내는 게 지침이잖나? 더군다나 가호의 등위 자체는 높다고 했으니 오히려 좋아할지도 몰라. 거기로 보내면 이것저것 지원받기 좋을 걸세."

이내 장교들은 체이서의 부대를 특수전대로 확정지었다.

"특수전대? 그곳이 어딥니까?"

체이서는 갸웃했다.

포병과 마법병단은 딱 들으면 알지만 특수전대는 영 모르겠다.

"아, 나도 잘은 몰라."

당신이 모르시면 누가 압니까?

"전쟁 전에 변수를 지우는 곳이라더군. 자네에게 아주 딱 맞는 곳일 거야."

"그래. 가서 잘 해보게나. 소문을 듣자 하니 그곳은 진급도 빠르다더라고."

진급이 빠르다?

그거, 윗사람이 빠르게 죽어 나간단 소리 아닌가···?

아니겠지?

장교들은 종이를 꺼내 이런저런 글을 적더니, 자신들의 인장을 꾹꾹 눌러 찍었다.

그렇게 체이서는 지방 귀족 출신 장교 셋의 인장이 찍힌 「추천서」와 역참을 이용할 「마차 이용증」을 받았다.

"그럼, 가보게."

체이서가 나가는 뒤로 군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호를 지닌 병사를 보냈으니 주문서를 몇 장 받을 수 있겠군!"

"혹시 모르지. 능력이 마음이 쏙 든다면 이쪽 창고 하나를 통째로 채울 수 있을지도."

"지방군은 이래서 문제야. 건수를 만들어서라도 제국 중앙군에 뭔갈 줘야 지원을 받아낼 수 있으니."

"그래도 가호를 지닌 연고 없는 평민은 꽤 높게 쳐준다더군. 역시 오래 사니까 이런 운도 있군그래. 다음 보급물자를 기대해보자고."

체이서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가호가 있다는 이유로 다른 부대로 비싸게 팔려가는 것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체이서는 마차에 익숙해졌다.

널리 퍼진 마공학 기술은 군부 소속 역참의 마차에도 영향을 끼쳐 나름의 평형 장치를 달았다.

그 덕분에 체이서도 상당히 편안하게 왔다.

오히려 멈추는 일이 없이 꾸준하게 달리는 통에 현대의 기차와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기술력으로 따지면 이미 자동차를 만들고도 남을 수준인 것 같은데.

뭔가 기술 방향성이 특이하네?

고삐에 새겨진 마법이 말의 체력을 꾸준히 채워주고 있었고, 마부를 위한 투명한 바람막이는 오랜 마차 운전에도 덜 지치게 했다.

그래봤자 자동차가 나오면 다 압살당하겠지만.

체이서는 마차가 수도에 당도하자 상당히 놀랐다. 자신이 제국 수도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던 것.

자신이 점점 내륙으로 들어가는 것에 이상하다 싶었는데, 특수전대 본부는 수도에 인접해 있었다.

때아닌 수도행이네.

고지대 언덕에서 내려가는 마차.

저만치 제국의 수도가 보였다.

나름 번화한 풍경에 세상이 달라 보인다.

원근감을 무시하는 드높은 마천루와 반짝거리는 건물의 유리벽을 보니 이 세계도 마냥 미발달된 것은 아님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계급사회 특유의 지방 소외와 황도 집중 개발로 인해 지금껏 체이서가 발전된 문명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수도 정문으로 향하던 대로에서 왼쪽의 오솔길로 방향을 튼 마차는 이내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다.

-덜컹덜컹

이윽고 고지대에 있는 경비초소를 지나, 한 병사가 대기하고 있는 장소에서 멈추었다.

[신병 안내소]

체이서가 마차에서 내리자 마부가 눈인사를 하더니 돌아갔다.

TMO. 일종의 역참에서 운행하는 병력 수송 덕분에 편하게 왔다.

체이서가 예비군에 온 듯한 기분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대기 중이던 병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체이서 신병?"

"네 그렇습니다."

"좋아. 이쪽으로 오게."

***

이 와중.

그를 구경하는 존재들이 있었다.

-얘는 전생해놓고 아직도 땅 파고 있네?

-야, 제대로 안 파냐? 거기 덜 파였잖아?

놀리고.

-ㅋㅋㅋ 됐다.

-드디어 시골 촌구석에서 나가는 건가?

-개 웃겨. 보통 그 발전된 현대에서 왔으면 이런 푸세식 화장실이 있는 지역에선 지가 스스로 도망쳐 나가려 하는 게 정상 아니냐?

-얘가 정상은 아니지.

농담하고.

-이야 좋다! 포병. 기껏 중세 비슷한 세상으로 왔으니 클래식한 전쟁 영화 한 편 찍자고!

-마법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지.

-마법! 전쟁! 그 무궁무진한 전략에서 피어나는 무수한 변수! 예상치 못한 마법의 포화와 괴팍한 마법사들 사이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체이서! 재밌을 것 같아!

-특수전대는 뭐야?

-나도 모르겠는데?

-잠깐만. 찾아보니까 여기도 재밌겠다.

과장하고.

-마력과 영력의 불안정 기류 때문에 일어나는 괴이한 일들을 「미궁」이라고 하는데, 그걸 처리하는 부대라고 하네?

-TMI 아웃.

설명하고.

그들은 체이서의 행동을 보며 웃고 즐겼다.

그렇게 넉넉한 시간을 녹이기를 아까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 무언가를 선물하기도 했다.

채널. 이 역시, 전생자의 특전이었다.

-체이서? 대답 좀 해줄래?

2화. 창고에 들어갔다.

2화.

-야 근데 꾸준하다.

-그치? 이렇게 우릴 무시하는 사람은 쟤가 처음이야.

-ㅋㅋㅋ 말 한마디를 안 해.

-그게 신기해서 보는 사람도 있잖아.

도착한 특무부대.

깔끔한 부대 건물들이 체계적으로 늘어서 있었는데, 그 크기만 해도 체이서가 살던 마을보다 두 배는 컸다.

마법과 권력욕 덕분에 기이하게 발달한 건축 기술은 현대와도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버티는 게 가능할까 싶은 수준의 위태로운 형태의 건축물을 잘도 세우는 세계였다.

이 부대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죄다 도시적인 형태의 신식 건물인데, 한 건물만 유독 중세풍으로 화려하고 고풍스럽단 거였다.

"저게 이곳 행정부인가?"

그런 것 치곤 좀 작은 데다 구석에 치우친 감이 있는데.

그 건물은 산과 딱 붙어 서 있었다.

인접한 산까지 해당 건물과 연결된 것으로 보였다.

여러모로 특이한 건축물이다.

어쨌든 체이서는 자신이 앞으로 일할 부대를 보며 전체적인 첫인상에 합격점을 주었다.

군인이 되었으니 오지에서 고생하며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줄 알았는데, 이런 부대에서 수도 근무를 하게 된다면 오히려 좋지.

-과연 좋을까?

-차라리 전쟁이 낫지 않을까 ㅋㅋ

-크 아직도 아쉽네! 마도 병단의 예술적인 폭발! 처절한 생존과 바뀌어 가는 견장의 계급!

-여기 전쟁 언제 끝난대?

-모르겠는데? 일단 억지로 전쟁 상황을 늘리려는 자들이 있는 것 같아.

-그럼 체이서도 전쟁 경험할 수도 있겠네. 일단 명목상은 군인이잖아?

-근데 수도 군인이잖아. 저 시대상 수도 군인은 좀 다르다고.

경비대 병사의 안내에 따라 담당관 사무실로 들어갔다.

들고 온 추천서를 읽어본 담당관이란 자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호오.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정신적인 문제가 없다는 거로군?"

그러나 목소리는 묘하게 기뻐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에 쓰시려고 저러시나.

불길하네.

담당관을 본 뒤 체이서의 근무지가 특무부대 본부로 확정됐다.

그렇게 체이서는 바하무트 제국의 특무부대 소속 말단병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특별취급'을 받았다.

대륙 각지에서 온 병사들은 이미 훈련을 시작했는데, 체이서 홀로 대기발령으로 있다가 개인 임무를 받은 것이다.

"신병. 오자마자 일이로군."

"네 가비 상병님."

이 국가의 병사 체계는 대개 현대적이지 않았다.

그저 선임과 후임이 있을 뿐인 부대가 태반.

그러나 그건 지방군일 경우였다.

지방에서 영주의 명령에 따라 불려온 병사들에겐 마땅한 계급이 붙지 않았다. 그저 선후임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여긴 다르다. 엄연히 제국의 황실 직속 부대.

명징하게도 말단부터 병사의 장까지, 그리고 그 위로 지휘관 계급까지 세세하게 분화되어 있었다.

좋은 것은, 이 계급이란 것을 받으면 나라에 기록되면서, 시민의 자격이 주어진다는 거다.

체이서 역시 변방의 자유민이었던 과거보다 신분이 한 단계 오른 상태였다.

병사 계급은 다음과 같다.

-신규병사, 일반병사, 상급병사, 병사장.

이를 신병, 일병, 상병, 병장이라고 지칭했다.

그렇게 체이서가 신병이란 계급을 받고 처음 배정받은 임무는, 부대 창고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조심해. 그곳은 저주가 넘쳐나는 곳이야. 취급 주의 딱지가 붙은 데다 웬만한 마도사들도 들어가길 주저하는 곳에 왜 갓 들어온 신병을 들여보내는지 모르겠네."

가비 상병은 담당관의 일을 돕는 행정병이었다.

다짜고짜 교육도 안 된 신병을 위험한 창고로 들여보내라는 스펜서 담당관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누락된 부분이 많겠지만, 이 책자에 창고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긴 해. 근데, 읽고 들어가라고 하기는 좀 미안하거든. 네가 판단해. 읽고 들어가든 그냥 들어가든. 안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말한 상병은 사선으로 매는 가방을 제공했다.

"자, 풀어봐."

"네 상병님."

풀어본 가방 안에는 다음과 같은 물품이 있었다.

「발광석」 x10

「나침반」

「부싯돌」

「라이트 주문서」 x2

「특수전대 신분증」

「전투식량」

"발광석은 표시할 때. 예를 들어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왔는지 잊지 않기 위해 쓰거나, 다소 출력은 약하지만 어두운 곳에서 빛을 밝힐 때 쓴다."

"네 알겠습니다."

"나침반은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는 이걸 보면서 방향을 잡는 거야."

"알고 있습니다."

"오, 그래? 그럼 편하지. 부싯돌은 알 거고, 라이트 주문서는 빛의 구를 불러내는 마법이 담긴 건데, 급하게 시야를 확보할 때 쓴다. 사용법은 찢으면 돼. 참고로 엄청 비싼 거야."

가비는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특수전대 신분증. 이건 네가 우리 부대의 병사임을 인정해주는 증서야. 보통은 일병부터 나오는데, 이유는 알지? 신병들은 곧잘 도망가거든. 어쨌거나 네게 이걸 준 것이 잘하는 건가 싶긴 하다. 도망가란 이야긴가?"

"네?"

"뭐, 일종의 보상이라고 보면 되겠지. 이거 들고 있으면 출입이 자유롭다. 바로 코앞에 수도 있는 것 알지? 거기서 놀다 오거나 이것저것 사 들고 들어와도 되는 자유 외출증이지. 이게 있으면 외부에 숙소를 잡아도 된다. 수도 물가에 가능할까 싶긴 하다만."

말을 마친 가비 상병은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돌아갔다.

"그럼, 힘내라 체이서 신병. 다시 볼 수 있었음 좋겠군."

체이서는 가비 상병이 상당히 착하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는 신병을 이렇게나 걱정해주다니 천사 아닌가?

하지만 그의 경고가 크게 와닿진 않았다.

이런 멀끔한 부대에 있는 창고가 위험해 봐야 얼마나 위험하겠는가.

문제의 창고는 처음 들어왔을 때 홀로 튀던 그 고풍스러운 건물이었다.

체이서는 창고로 쓰기엔 화려하고 커다란 그 건물에 진입했다.

그리고, 자신은 아직 이 부대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

창고 내부는 어둑했다.

체이서는 배낭을 뒤적여 지원받은 주문서를 꺼내 들었다.

전부터 찢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군용이라고 적힌 주문서는 알아볼 수 없는 그림과 문자로 빼곡했다.

체이서는 제 손에 들려있는 주문서를 보며 새삼 이곳이 상급부대임을 느꼈다.

나를 이 부대로 보냈던 지휘관이 이런 마법 주문서를 지원받을 수 있다고 좋아했었지.

근데 여기선 병사에게 제공한다.

주문서를 찢자, 빛의 구가 둥실 떠올랐다.

머리맡에 떠서 체이서의 시선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시전자의 눈에 직접적인 빛을 쏘이지 않기 위해 시전자의 사각으로 움직이는 것.

이 세상은 마법 발전 정도만 보면 근대 정도는 된다고 했다.

사실상 미래에 쓰일 기술 대다수가 이미 이론적으로 정립이 된 상태라고 보면 된다.

현대 지구에서도 당장 당시 쓰이던 기술 체계의 이론 대다수는 이미 근대일 때 발견되고 정립되었다고 하니까. 그렇게 크게 차이나는 건 아닌듯싶다.

근대에 접어들었다는 건, 머지않아 눈부신 발전을 할 거라는 것과 같은 말이니까.

발전은 점점 속도가 붙어 가속하는 성질이 있지 않은가.

-우웅

이 시대의 발전 정도를 보여주는 깔끔한 마법을 보며 체이서는 적잖은 감동을 느꼈다.

마법.

이게 이 세상의 주요한 특징이다.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것을 본 감상은, 묘한 즐거움을 주었다.

이게 그 정신적 희열이라는 것인가?

시골에서 농사지을 때는 마법이란 걸 볼 기회가 없었기에 다른 세상에 왔다는 것을 체감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젠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는 이세계에서 두 번째 삶을 얻었다.

변방 농사꾼에서 마법을 쓰는 군인이 되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도록 하자.

-ㄹㅇㅋㅋ

-왜 결론이 저래?

-그냥 체또최임.

-인생 모토가 최선을 다하는 거래.

체이서는 밝아진 창고 내부를 둘러보았다.

회색빛 바닥과 벽은 일견 평범했다.

상당히 거대한 건물인데, 위로 3층 지하로 5층이나 된다고 한다.

파괴하기 힘든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크게 지었다고 했다.

그런 것 치곤 통로가 묘하게 좁아 보이는데···?

체이서는 손에 들린 책자를 보았다.

「제국 위험물 창고 일람 – 글로든 바머 저(著)」

책 이름은 '일람'이지만, 사실상 창고의 정보에 대해 제일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책자라고 한다.

창고의 역사나 구조에 대한 정보는 그다지 없고, 대다수가 창고 내부에 있는 물건에 대한 정보다.

그러나 글로든 바머란 사람이 작성한 부분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창고 내부에 새 물건이 들어오며 종이를 덧붙여 책자도 두꺼워졌지만, 차라리 없는 게 이 책자의 완결성을 높여줬을 것이 확실했다.

바머란 자가 저술한 부분 뒤로는 난장판이었기 때문이다.

글씨체도 설명 방식도 중구난방이다.

쭉 훑어보기 좋게 간단하게 수록한 책이라는 의미에는 맞지만, 창고를 정리하려는 사람에겐 도통 도움이 되기 힘들어 보였다.

그림도 없고 묘사만 있거나, 묘사 자체도 엉터리여서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글귀거나.

최악은 그냥 슥슥 휘갈긴 문장이었다.

[7월 3일 늑대의 심장 미궁에서 뽑아옴.]

이런 식이었다.

빠진 부분은 내가 채워야 한다고 했지.

체이서는 책자를 덮고는 걷기 시작했다.

적막한 복도에서 뚜벅거리는 소리가 창고를 울린다.

창고 입구 근처는 거의 놀려둔 느낌이라고 느낄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체이서가 땅에 덩그러니 놓인 열쇠를 발견했다.

꽤 화려한 황금색 열쇠였다.

체이서가 눈에 보이는 열쇠를 집어 들자, 열쇠가 움찔하더니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열쇠는 땅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곧바로 눈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뭐야!

체이서는 온 힘을 다해서 고개를 틀어 이마로 받았다.

-콱

열쇠가 이마 중앙을 거세게 찔러 상처를 냈다.

체이서는 연신 이마를 쑤시는 열쇠를 붙잡아 바닥에 내팽개친 뒤 잠시 멍해져 있었다.

뭐지 저건?

-ㅋㅋㅋㅋ 혼자 생쇼를 한다.

-웃기네 진짜.

-아 저런 창고를 정리한다고? 난 또 기껏 시골에서 나와놓고 또 잡일이나 하는 줄 알고 실망했지 뭐야.

-쟤 참고로 정신력 좀 강한 것 빼고는 무능력자다. 전생자 치고는 정말 위태로움.

-그래서 긴장감 넘치잖아. 열쇠에 맞아 피흘리는 인간이라니 얼마나 파릇파릇한 거냐고.

체이서는 책자를 뒤적거렸다. 저 열쇠가 뭔지 봐야 한다.

「마법사를 해체하는 열쇠」.

여기 있네.

다행스럽게도 깔끔하게 정리된 부분. 책자 초반부에 적힌 물건이었다.

이름도 무섭네.

체이서는 열쇠를 흘끗 쳐다보고는 다시 열쇠에 대한 설명을 확인했다.

「마법사를 해체하는 열쇠」---------------

결계를 해제하는 역할을 하던 고대 아티팩트가 마법사의 심장에 깃든 고리를 해제하면서 문제가 되었다.

체내에 마나를 저장하는 써클을 강제로 열어버리니 마법사의 체내에서 급격한 마나 반응이 일어나 신체를 폭발시켜 버린 것.

그 폭발은 마법사의 몸을 핏방울 한 점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소멸시켰지만, 정작 외부엔 별다른 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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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든 바머가 적은 만큼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간추리자면, 이 열쇠는 오랫동안 들키지 않은 채 연구실 마법사를 전부 행방불명으로 만들어버렸다는 모양이다.

[이유를 알 수 없다. 동료들이 전부 사라지고 있다.]

책에 덧붙여져 있는, 해당 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쪽지에 적힌 문장이었다.

책자에는 저 쪽지 외에도 구구절절한 사연이 적혀 있었는데, 말미에는 연구소에서 발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 기괴한 물건은 결국 억울하게 죽은 마법사들의 영력을 머금고 변질하여 일대에 미궁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연구소 인근에 일종의 '마법사 살인지대'를 만들어낸 것.

활발히 연구하던 마법사 단체가 통째로 자취를 감춘 데다, 해당 지역에 들어선 마법사들이 돌아오지 않는 일이 늘어나면서 특무대원들이 파견됐다.

그렇게 해결한 뒤에 이 창고에 보관됐다는 건데.

"이걸 왜 보관해···?"

딱 봐도 저주 아이템 특유의 공격성을 잃지 않은 듯 보였다.

내버려 두면 희생자를 만들 터무니없는 물건인데···.

일단 체크하자.

체이서는 자신이 챙겨온 노트를 꺼냈다.

열쇠의 위치를 느긋하게 적은 뒤 이마에 손을 댔다.

알싸하게 아팠다.

저걸 다시 쥐고 싶지 않았다.

저건 두고 다른 것부터 정리하는 게 좋겠군.

체이서는 홀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팽개친 열쇠를 그대로 두고 걸음을 옮겼다.

-제대로 일 안 하죠?

-들어와서 한 거라곤 공책에 적은 몇 문장밖에 없네?

-너무 맵다. 대신 가서 싹 없애주고 싶네.

-그걸 무슨 재미로 봄? ㅋㅋ

그가 조금 걷자, 드디어 창고가 넓어졌다.

아, 내부와 외부의 크기가 다른 이유가 있었구나.

탁 트인 해외 대도서관의 로비.

비유하자면 그런 느낌이었다.

-저기, 공간확장 마법이 걸려있네?

-꽤 잘 지었는데? 저곳에도 쓸만한 마공학자가 있구만!

마법의 힘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널찍한 공간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렇게 탁 트인 공간은, 거의 대강당처럼 드넓었고, 무수히 많은 선반이 존재했다.

벽에 위치한 책꽂이 형태의 선반에는 한 칸 한 칸 빼곡하게 물건이 들어차 있었다.

그러나 창고 바닥에 비치된 8단 선반의 물건은 어딘가 흐트러져 정리되지 않아 보였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물건 역시 상당히 많았다.

"앞으로 할 일이 많겠네···."

체이서는 그 방대한 일거리에 대한 감상을 남기더니, 시선을 돌려 바닥을 쓱 훑었다.

떨어진 것을 선반에 채우고 기록해보기로 한 것.

얼어붙은 얼음 속에 든 알록달록한 개구리 모형. 나중에 정리하자.

개구리의 눈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 영 찜찜했다.

가시가 달린 공. 역시 나중에 보자.

찔릴까 봐 걱정이었다.

보라색 액체가 들어있는 해골 모양 유리병. 역시 나중에.

저것도 손대면 즉시 중독될 것 같은 찜찜한 외형이었다.

위험해 보이는 것은 일단 보류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본인 앞에 서 있는 귀여운 토끼 인형. 저걸 정리하자.

체이서는 토끼 인형을 건들기에 앞서, 책을 펴 들고 토끼 인형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3화. 채팅이 보인다.

3화.

「아이슨의 애착인형」--------------------

결투의 신이라 불리던 자.

아이슨과의 결투가 예정되었던 귀족은 전의를 잃고 그에게 암살자를 보냈다.

아이슨이 암살로 인해 사망했을 때, 그의 영은 떠나지 않고 침대맡에 놓여 있던 인형에 깃들었다.

이 인형은 자신과 결투하는 자들을 생전 아이슨이 가장 혐오하던 부류인 겁쟁이로 만든다.

!이 인형과 전투한 자는 영원히 전의를 잃는다. 싸우지 않길 권고함.

‗‗‗‗‗‗‗‗‗‗‗‗‗‗‗‗‗‗‗‗‗‗‗‗‗‗‗‗‗

별거 아니네.

체이서는 토끼 인형을 주워들고 적당히 빈 선반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토끼 인형은 체이서의 손길이 닿기 무섭게, 느닷없이 움직여 보디블로를 때렸다.

"커억!"

적절한 타점과 완벽한 자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그러나 인형의 주먹에 있는 것은 단단한 뼈가 아닌 솜이었다.

하지만 체이서는 재빠르게 뒤돌아 달렸다.

공격하는 물건이라니!

하나면 모를까, 벌써 두 번이었다.

이렇다는 건, 이 창고에 지닌 물건 대다수가 저렇게 위험한 물건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런 경각심과 함께, 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의 타격이 오자,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한참을 달리던 체이서가 뒤를 돌아보자, 낡은 토끼 인형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체이서는 놀라지는 않았지만 위협을 느꼈다.

그의 신체 능력은 썩 좋은 편이 아니어서, 인형에게 따라잡힌 듯싶었다.

'맞는다!'

생각보다 빠른 인형은 다시 그 완벽한 자세로 빙글 돌더니, 체이서의 등과 옆구리를 연달아 가격했다.

-폭 폭

그림 같은 콤비네이션 킥이었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랐다. 완벽한 무방비에 얻어맞은 처음과는 달리, 체이서는 자신이 맞을 것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 결과, 움츠려서 방비한 체이서의 몸은 솜다운 물리력만을 받았다.

한 마디로, 전혀 아프지 않았다.

세찬 공격과 묘한 압박감으로 도망 다녔던 체이서도, 첫 기습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아프지 않으니 용기가 솟았다.

-타닥

체이서가 제자리에 선 뒤 뒤돌았다.

마찬가지로 코앞에 있는 인형.

상대가 맞대응할 것 같자, 토끼 인형이 뎀프시롤과 비슷한 자세를 취하며 접근했다.

뒤쫓는 인형을 마주한 체이서는 그 모습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재롱 피우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기습적인 보디블로가 상당히 아팠다고 하나, 상대가 저런 귀엽기 짝이 없는 인형임에야!

질 수 없지.

체이서의 눈빛에 전의가 타오르고, 주먹을 굳게 말아 쥐었다.

"이야아!"

아이슨의 체술을 지닌 토끼 인형은 묘한 탄력성을 발휘해 먼저 뻗기 시작한 체이서의 공격을 손쉽게 따라잡았다.

마침내.

토끼 인형의 주먹과 체이서의 주먹이 맞닿았다.

-포옥

안타깝게도, 그 타격력은 썩 좋지 않아 상호 받은 피해는 미약했다.

-투덕투덕

창고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이윽고.

"헥헥··· 이겼다."

결국 토끼 인형이 움직임을 멈추고 자리에 누웠다.

마지막까지 서 있는 것은 체이서였다.

물론 체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저 토끼 인형이 승리했을 확률이 높았다.

토끼에 깃든 저주는 「전의 상실」이다.

저 저주로 인해 모든 전의를 잃으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도망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그러다 쓰러지면, 아무리 솜이라지만 일방적인 공격에 노출되는 것이다.

심지어 저 인형은 결투의 신이라 불리던 아이슨의 체술을 지녔다.

치명적인 관절기 역시 지니고 있다는 뜻.

졸리거나 꺾여 죽는 일도 있을 법한 일이다.

설사 도망에 성공했다고 해도, 저주를 지우기 전엔 전투할 수 없는 겁쟁이가 되었겠지.

하지만 체이서는 특별한(?) 가호를 지닌 자.

「환생자의 정신」에 의해, 인형에 깃든 저주에도 그의 전의는 전혀 상하지 않았다.

체이서는 자신에게 패배한 토끼 인형을 당당히 집어 들고는, 창고 구석에 놓인 테이블 위의 선반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테이블 위에 사각거리며 붉은 글귀가 새겨지기에 흘끗거리며 읽었다.

-이곳은 지옥이다.

-지옥도 현실보단 낫더군.

-어서 오게.

뭐야?

체이서는 시답잖은 말이 책상에 새겨지는 걸 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아이슨의 애착인형」을 어떤 물건 근처에 놓았는지 간단한 메모를 덧붙이기 위해, 해당 테이블의 명칭을 찾아보았다.

「마지막 사령관의 테이블」---------------

'저들을 전부 청소하지 못한 게 한이로군.'

멸망한 왕국. 마지막 사령관이 쓰던 책상은 본래 친하던 마법사가 선물한 '스스로 정리하는 책상'이라는 아티팩트였다.

*책상 위에 '청소 시작!'이라는 글귀가 적히면 아무것도 건들지 마세요.

*'청소 끝!'이라는 글귀가 적히면 사용해주세요.

사령관이 패배 직전 자살한 후, 막대한 사념이 테이블에 깃들어 문장을 바꾸었다.

이 미궁은 일대 병력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는데, 자그마치 3개 대대가 자신의 무기로 죽어 나갔다.

미궁의 핵이 되었던 이 테이블에 새겨진 글귀를 읽는 자에게는 테이블의 주인이 느꼈던 막대한 절망감을 선사해 자살을 유도한다.

‗‗‗‗‗‗‗‗‗‗‗‗‗‗‗‗‗‗‗‗‗‗‗‗‗‗‗‗‗

체이서는 책에 적힌 정보를 뒤늦게 확인했기 때문에 글귀를 읽어버렸으나, 그의 정신 방어력은 굳건해서 어떠한 감정적 변화도 없었다.

평온한 얼굴로 책상에서 거리를 벌린 뒤, 「아이슨의 애착인형」을 「마지막 사령관의 테이블」 근처에 두었다는 메모를 적은 후, 다시 치울 물건을 물색했다.

"아니, 이걸 어떻게 정리하라고!"

다만 끝까지 평온할 수는 없었다.

뱀 모양 목걸이가 팔을 타고 올라와 목에 감긴 채 끈덕지게 달라붙는 데에는 체이서도 짜증을 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물건을 주워다 일정한 장소에 잘 두려는 간단한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멀쩡한 선반을 놔두고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는 이유라도 있다는 듯, 심하게 반항하는 물건들이 태반이었다.

체이서는 자신의 목을 졸라오던 뱀 모양 목걸이를 겨우 떼어내 근처의 선반 위에 두고는, 거리를 벌린 채 숨을 골랐다.

"후아아!"

물론 움직이는 물건만 문제가 아니었다.

가만있는 물건도 뭔가 기이한 일렁임이 느껴지는 것이, 딱 봐도 불길했다.

앞에 놓인 밧줄.

손을 대면 보라색 기운이 흘러나오고, 손을 떼면 보라색 기운이 사라진다.

"위험해 보이잖아···."

괴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벽을 바라보게 놓아둔 게 딱 봐도 눈을 마주치는 순간 움직일 것 같은 생생한 석상 하며.

방금 묻은 듯 피를 뚝뚝 떨구는 검.

근처에 가지도 않았는데 어두운 기분을 흩뿌리는 반지와, 누더기처럼 각종 천으로 덧댔으면서도 정작 마감이 깔끔한, 창고에 처박혀있었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먼지 하나 없는 드레스 등등.

먼지가 없다는 건, 분명 스스로 움직였다는 것을 뜻하겠지.

체이서도 슬슬 이 창고의 물건들을 보는 눈이 생기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돌아보자.

체이서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가짐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창고 속에서 헤매던 그는 발견하고야 말았다.

붉은 구역.

지금껏 물건이 이상했지 창고는 일반적인 건물이었지만, 이 구역부터는 아니었다.

얼마나 넓은지 반대편 벽이 시야에 닿지 않았다.

불그스름한 바닥에 괴상한 풀들이 자라 있었는데, 체이서가 내딛는 발걸음의 진동을 느낀 듯이 꿈틀거렸다.

이상한 느낌을 주는 홈이 얇게 파인 벽과 바닥에 핏빛 액체가 졸졸 흘렀다.

그 미세한 선은 흡사 혈관처럼 박동했다.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이지만 그것이 영광되어 보이지 않고, 음습하고 사이하게 보였다.

체이서가 정신적 타격에 면역을 지닌 사람임을 생각하면, 그에게조차 이상한 느낌을 준다는 것은 상당히 강력한 정신적 저주를 발산하고 있다는 뜻이다.

저 벽에 그어진 선들을 마주하는 것이 지성체에게 무척이나 위험하다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체이서는 그 붉은 구역에 발을 내딛을까 말까 고민했다.

-들어가! 들어가라고!

-모험이야? 나도 구경할래.

-저기 들어가는 건 조금 이른 것 같다.

-와 섬뜩하게도 생겼네.

-절대 들어가면 안 돼....

체이서는 괜히 주변을 둘러봤다.

어, 저게 뭐지?

붉은 구역에 가까스로 넘어가지 않은 부분.

낡은 금속제 상자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글로든 바머」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체이서의 흥미를 끌었다.

본래라면 닫힌 상자의 뚜껑을 여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 붉은 구역으로 넘어가는 것을 미루려는 의식적인 판단으로 인해, 체이서는 이 창고의 책자를 만든 저자의 이름이 새겨진 그 상자를 열고야 말았다.

***

이 와중, 농사꾼 체이서가 아닌 신병 체이서의 이야기가 되면서 채널 시청자가 늘어있었다.

그리고, 인원이 많아진 만큼 꽤 오래된 의문이 불거졌다.

저 전생자는 채널은 열어두면서 채팅에 대답하지는 않는다.

컨셉이 저런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것인가.

오랫동안 봐온 자들도 떡밥을 물었다.

당장 흥미로워 보이는 사건을 앞에 두고도 자신의 요구 사항이 전달되지 못하는 답답함 때문이었다.

-근데 정말 우리 말 못 보는 거 아냐?

-그럴 리가. 지금까지 그런 영웅은 없었잖아?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우리 말을 본 것처럼 행동한 적도 있잖아.

-그건 그렇지.

-잠깐. 가능성 있다.

-뭐가?

-쟤 보면 이세계로 전이해 오면서 받은 능력이 영혼 강화 하나뿐이잖아? 이번에 싸우는 걸 보면서 드러났지만 신체 능력도 최악이야. 그걸 보면 채널을 읽는 눈도 받지 못했을 수도 있어.

-하긴. 채널을 보려면 어느 정도 해석 레벨이 필요하지?

-와, 체이서에게 애정과 관심이 얼마나 없었으면 그렇게 아무것도 안 주고 보내놓냐···.

-요새 영웅이 엄청나게 늘어나긴 했으니까. 그냥 툭하면 이세계로 보내잖아. 기대감이 없을 수도 있지.

-우리를 눈치채고 있다고 오해받은 행동도, 우리가 보는 상황과 체이서가 보는 상황이 같으니까 우연이 겹쳐서 생긴 해프닝일 수도 있겠네.

-그럼 지금까지 무시당한 게 아니라 그냥 못 본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거네?

-아아! 체이서와 대화할 가능성이 사라진 건가?

그 순간이었다.

"뭐야 당신들?"

채팅창?

왜 내 눈에 채팅창이 보이는 거지?

그리고···. 채팅하는 자들이 왜, 날 보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거지?

체이서의 당혹한 눈초리에, 시청자들 역시 뒤집어졌다.

-와 뭐야!

-지금 우리 보고 말한 거 맞지?

-ㅋㅋㅋ 나 참, 채널에서 채널 주인이 말 거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호들갑이냐. 반갑소 체이서.

-저 렌즈. 꽤 고급품이네.

-가장 먼저 인사하는 주제에 호들갑이래.

-체이서! 우리가 보여?

농담 속에서 유의할 정보가 있었다.

체이서가 그걸 보고 물었다.

"이 렌즈를 압니까?"

체이서의 눈이 금빛으로 빛났는데, 그 빛이 어둑해서 사이해 보였다.

-모르지. 근데 그 렌즈를 착용하면서 채널이 보인 거지? 꽤 상위의 해석 능력이 들어간 물건 같은데?

-저주는 어때? 쫄보인 네가 그걸 스스로 찼을 리는 없고. 이번에도 범인은 손인가?

물론 체이서가 스스로 렌즈를 착용할 리는 없었다.

그가 「글로든 바머」의 상자를 열자 두 개의 얇은 반구형 겔 형태의 물건이 있었다.

그 물건은 어떻게 보나 현대의 렌즈와 다름없었다.

이게 이 시기에 나올만한 물건인가···?

체이서가 잠깐 딴생각을 하던 사이, 렌즈는 눈 깜짝할 새에 체이서의 눈동자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렌즈가 지닌 상위 레벨의 해석 능력에 의해, 앞에 두고도 볼 수 없었던 「채널」이 체이서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체이서는 채팅의 조언에 따라 책을 확인했다.

다행히 이 렌즈에 대해선 어느 정도 정보가 적혀 있었다.

「나른한 학자의 눈동자」-------------

집요하게 눈에 들어가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저주 아이템.

착용자가 죽기 전엔 빠지지 않는다.

시력을 좋게 한다는 의견과 진리를 보여준다는 의견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착용자는 모든 의욕을 잃고 죽음에 이른다.

!나태의 저주로 의심됨.

‗‗‗‗‗‗‗‗‗‗‗‗‗‗‗‗‗‗‗‗‗‗‗‗‗‗‗‗‗

"나태의 저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좋아. '나태'라면 어느 세계건 꽤 상급 저주일 텐데, 영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거라 오히려 아무 영향도 없나 보네.

-그나저나 해석 아이템이면 꽤 유용하겠는데?

"해석 아이템이요?"

-다른 물건 봐봐. 채널만 보이진 않을 거 아냐.

그 말에 따라 체이서가 눈을 돌리자, 신세계가 펼쳐졌다.

4화. 담당관과 독대하다.

4화.

「물어뜯는 방패」

「죽은 신의 성물」

「만 마리의 쥐가 묻힌 흙」

날카로운 이가 빼곡히 달린 충격적인 형태의 방패.

생김새에 압도되어 근처에 갈 생각도 하지 않았던 방패의 위로, 「물어뜯는 방패」라는 아이템의 명칭이 떠올랐다.

그 외에도 벽을 보고 있던 생생한 석상의 이름이 「죽은 신의 성물」이라는 것과, 왜 있는지 모를 커다란 화분이 「만 마리의 쥐가 묻힌 흙」이라는 것을, 책을 보지 않고도 즉시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아래로 보이는 글귀는 해당 물건의 세세한 정보인 것 같았다.

이건 오히려, 책자에 적힌 정보보다 나았다.

"이름과 설명이 보입니다."

-역시. 해석 능력이 오르면 본질을 파악하기 쉬우니까.

-그럼 업무 속도가 좀 빨라지려나?

-그래. 빨리 익숙해져서 모험하라고.

그들의 말에, 퍼뜩 무언가를 깨달은 체이서가 거칠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왜 절 구경하고 계신 거죠? 보지 마세요! 전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체이서는 「채널」을 끌 방법을 찾았다.

-절 보지 마쉐요~

-ㅋㅋㅋ 다들 봐달라고 안달인데 얘는 대체.

-혜택을 알려줘야지.

-맞아. 솔직히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지는 것 자체는 그다지 메리트가 아니잖아.

"혜택이요? 아무리 좋은 혜택이 있어도 저는 제 몸을 전시할 생각이 없는···."

-채널 우측 하단에 숫자 보여?

체이서의 눈이 그곳으로 향했다.

반투명한 채팅창.

그 우측 하단에 적힌 숫자.

[1329TP]

"천 삼백이십구요."

-1329? 생각보단 많은데?

-이래도 반응 없냐며 1000포인트 던진 애 있었잖아.

-ㅋㅋㅋ 그때 웃겼지. 1000개 던진 놈 무시하고 한다는 게 강아지 밥 주기였으니.

-어이쿠 주인님 보고 싶었어? 황구야 밥 먹자~

-맥이는 거였지 그냥.

그 숫자는 뭐였냐면.

-자네의 언어로 말하면 수명이야.

"수명."

-네가 목만 안 날아가면 거기 적힌 숫자만큼 산다는 뜻이다.

-1포인트당 네가 사는 세상에서의 1년으로 교환된다.

1329. 그가 지금까지 받은 '수명'이었다.

이것은 체이서가 다른 외적인 이유로 사망하지 않는 한, 그의 삶이 유달리 길어질 거라는 뜻이었다.

-노화가 진행되는 시기부터 거기에 적힌 수명이 먼저 쓰이기 시작해.

즉 젊음이 유지되는 기간이기도 하다.

"본인 수명을 나눠주는 거예요? 왜죠?"

-그야 줄 만하니까 주지.

-우린 안정된 세상에서 사는 강자야. 전생자 빙의자 환생자 등은 일종의 예비 영웅이고.

-너희가 여행하는 걸 보는 건 꽤나 즐거운 유희지. 세상이 불안정할 때, 우리가 해왔던 일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당장 응원하면서 쫄깃한 긴장감도 느낄 수 있고.

-그치. 웬만해선 긴장감을 못 느끼는데, 몰입해서 채널을 보다 보면 저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쥔다니까.

-후원해서 키우기도 하고. 미션 걸고 모험을 종용하기도 하고.

-다양한 세상에서 채널은 일종의 후원 창구가 되는 거지.

-우리 정도 되면 시간 아니면 가치 있는 게 그다지 없기도 해. 화폐로 사고팔기엔 취급하는 물건이 좀 많이 비싸. ㅎㅎ

-시간은 그나마 모두에게 공평하지.

-공평하게 가치가 있지.

-재미만 있으면 뭔들 못 해주겠나. 「채널」에서 통용되는 재화는 하나. '시간 포인트'일세.

-포인트로 이것저것 살 수도 있어. 상점 없어?

"안 보이는데···."

흐릿한 채팅창엔 상점 탭으로 보이는 어떤 그림도 없었다.

-흐음. 얘 진짜 애정없이 전생했네. 뭐 제대로 되는 게 없어?

-ㅋㅋㅋㅋ 오히려 짠해서 귀엽자너.

-힘내라. 채널이라도 있는 게 어디냐. 그냥 받은 만큼 묵혀두면서 오래오래 재미 줘라.

한 마디로, 수명을 거래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들이 지켜보는 곳이 '채널'이란 이야기였다.

채널을 켜두면 수명이 늘어난다.

이걸 켤래 끌래 물으면 사람마다 다른 대답을 하겠지만, 체이서의 선택은 '꺼둔다.'였다.

천년. 이미 넉넉하게 느껴졌다.

죽을 때가 되면 또 마음이 바뀌어서 켤 수도 있겠지만, 뭐 어떤가. 천년 뒤의 일인데.

"근데 상점이 그렇게 좋은가요? 뭘 팔길래."

-상점에서 파는 거라. 나는 거기서 쓸만한 장비를 많이 샀단다. 내 아이들에게 줄 무기가 많이 필요했거든. 내 생명력은 넉넉하기도 해서, 생명의 나뭇잎 서른 개를 써서 무장시켰지. 덕분에 요샌 아주 안심하고 지내지.

-나뭇잎을 말하는 거 보니 위그드라실이네.

-세계수였구만.

나무가 채팅하고 있단다.

-나는 천무심결을 팔았다. 내 흑역사거든.

-오 선배님. 저는 천마군림보를 팔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걸음을 멋있다고 생각했는지···.

-핫하하 자네 중2병을 이겨냈군!

어디서 들어본 듯한 무공 이름이 올라온다.

-각종 골렘 공기계랑 마공학 물품 올려놨음. 아직도 팔고 있음.

-'내가 네 주인이다.'라고 말하면 평생 말 잘 듣는 깡통 생기는 그거? 편하게 잘 쓰고 있다.

-어이쿠 고객님이 계셨네.

-마공학K 님이신가? 저는 공성 망치 잘 썼습니다. 숨어 사는 놈들 성문 깨부술 때 편하더라고요. 얼마나 단단한지 운석을 떨궈도 안 깨지던 것이 공성 망치 하나면 뚝딱 열리던데.

···마음을 바꾸었다.

체이서는 채널을 켜두기로 했다.

말만 들어도 상점이란 게 뚫리는 순간 인생 역전임이 보였다.

그럼 천이 뭐냐. 일만이라도 부족하다.

많을수록 좋은 돈처럼 생각하자.

"그나저나, 이 시대에 렌즈가 말이 되나요?"

-왜 안돼? 지구에서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안경보다 먼저 고안한 게 렌즈인데?

-마법이랑 엮이면 좀 이르게 등장할 법도 하지. 눈에 영향을 덜 줄 수 있으니까.

순식간에 올라오는 답변.

이거 완전 지식인 저리 가라잖아?

대체 몇 사람이 보는지는 모르겠으나 편리하긴 했다.

-알지? 물건이 나오지 못하는 문제는 대개가 가격 문제인 거.

-네가 쓴 렌즈는 아티팩트인데, 그 정도 물건을 만들 정도면 상당히 부자란 거지.

제대로 된 렌즈를 만들려면 안경보다 수백 배는 값비싸므로 상용화만 못됐을 뿐,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물건이 렌즈라는 것 같다.

흐음. 궁금증은 해결.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일단, 이 렌즈. 외부론 반출 불가인 거 아시죠?"

한 몸처럼 체이서의 눈에 착 달라붙어 있지만 나갈 때는 떼어내야 한다.

어디까지나 이 물건은 부대의 재산.

비록 부대는 부수지 못해 안달이지만 어쨌든 정당한 소유권 이전이 없는 한, 이 물건은 안전한 창고 속에서 잠자고 했어야만 했다.

"들어오면 다시 착용할게요."

체이서는 눈에서 렌즈를 뽑아내려 했다.

그러나, 뽑히지 않았다.

-ㅋㅋㅋ 그렇게 맘대로 꼈다 뺐다 할 수 있으면 저주템이 아니지.

-안 뽑히나 본데?

-어쩔 수 없지. 그냥 가져.

"이걸 어쩌지?"

체이서는 고민해봤으나, 답이 없었다.

렌즈를 떼어내는 것은 원래도 조심스러운 작업이다.

근데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걸 억지로 힘을 가해 떼어낸다?

가뜩이나 특출나지 않은 몸뚱이.

눈이라고 강철같을 리가 없다.

이건 그냥···.

보고해야겠다.

체이서는 「나른한 학자의 눈동자」를 뽑아내는 걸 포기했다.

대신이라고 할까.

「붉은 구역」을 조금 진입해서 둘러보았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말하기에 이런 무시무시한 공간에 대한 경험이 괜찮은 변명이 되어주겠지 싶었다.

조금의 과장을 덧붙이면 이 저주 어린 물건을 어쩔 수 없이 반출한 것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만큼 위험해 보이는 공간이었다.

저만치 바닥에 이슬 같은 형태로 빼곡히 맺힌 핏빛 슬라임이 보인다.

그 너머에는 어둠이 뭉쳐 생긴 것 같은 그림자 괴물들.

-그림자 괴물 ㅋㅋㅋ

-저건 도플갱어네.

정정. 도플갱어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저거 덤벼들면 어쩔려고 돌아다니냐?

-ㅋㅋㅋ 하여튼 배짱만 보면 영웅이 맞아.

-「환생자의 정신」 덕분에 현대인들이 이세계로 넘어갔을 때 잔혹한 상황에서 잘 버텨낼 수 있는 건 맞지.

-근데 쟤는 침착함이 좀 남다르잖아?

-그건 그렇지 ㅋㅋ 침착맨인가?

-그걸 드립이라고 쳤냐?

-눈을 의심했다.

체이서는 곧 탐색을 마무리 짓고 창고 입구로 돌아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제 손에 들린 책자를 모두 읽어보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그의 손에 들린 책자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그는 벌써 몇 번은 죽었어야 정상이었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부딪칠 게 아니라, 도대체 어떤 물건이 있는지 어느 정도 숙지를 한 뒤 돌아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체이서가 출구로 돌아왔다.

아직 일과 시간이니 창고 밖으로 나가긴 뭐하지.

출구 앞 바닥에 앉아서 「제국 위험물 창고 일람」을 펴들었다.

사락사락하는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 시간이 흘렀을 때, 체이서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굉장히 당당한 표정이었다.

***

그가 나왔다는 소리를 들었는지, 담당관이 즉시 호출했다.

"충성!"

"그래, 여기 와서 앉게."

전체적으로 화려한 고급스러움이 돋보이는 실내장식이다.

담당관의 커다란 책상 위에 놓인 마력석 명패만 봐도, 그가 꽤 부자란 걸 알 수 있었다.

특무대 담당관 「제라딘 스펜서」.

명패에 새겨진 그 글귀 안쪽으로 마력석 특유의 푸른 빛이 은은하게 뿜어지면서, 이 부대의 대소사를 담당하는 그의 위치를 돋보이게 했다.

성이 있으니 귀족이겠지.

그래서 그런지, 행동에 여유가 넘쳤다.

체이서를 자리에 앉혀놓고선, 차가 나올 때까지 한마디도 안 할 정도였다.

스펜서는 그저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체이서의 자세와 분위기, 특히 눈동자를.

-딸칵.

가비 상병이 들어와 둘 앞에 차가 놓이자, 그제야 입을 연다.

"과연. 멀쩡한 것 같군."

"네?"

"그곳에 들락날락하던 병사는 어김없이 이상 현상을 보였거든."

"···그랬습니까?"

이해가 됐다.

담당관은 자신이 미쳤는지 확인하느라 관찰했던 것이었다.

창고의 위험성을 알기에 나오는 행동.

체이서가 창고에서 나오면서 당당했던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정독한 책에 적힌 아이템에 대한 설명은, 왜 가비 상병이 '읽고 들어가라 하긴 미안하다.' 했는지 알 수 있게 했다.

근처에 가는 것만으로 영혼에 타격을 주고, 귀신에 씌거나, 미쳐버리거나, 피를 탐하거나, 자해하거나, 검귀가 되어 학살을 일으키거나 하는 등 문제가 많은 물건만 가득한 곳인데.

성실한 제국 시민을 저런 곳에 보내놓고 나오지도 못하게 한다?

바로 신고해야 했다.

"그래. 역시 자넨 대단한 능력을 지녔군. 무적의 정신 방어력이라니 최고야."

그는 여상히 칭찬하면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물었다.

"그래서, 어땠나?"

담당관의 사막여우 같은 얼굴에 호기심이 깃든다.

그의 요구에 따라 체이서가 창고 내부에 관해 입을 뗐다.

잠깐이었지만 너무도 특별한 경험이라 따로 되새길 필요도 없었다.

전부 기억에 각인되어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으니까.

체이서는 열심히 과장도 좀 해가면서, 자신은 이 일을 하기 싫은, 할 수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이마에 새겨진 상처와 배에 든 멍, 목에 남은 사슬 자국이 그의 말을 상당히 신빙성 있게 만들었다.

-그렇게 말한다고 되겠냐고 ㅋㅋ

-아주 유능함을 몸소 뽐내고 있네.

-무능하지만 온갖 위험을 헤쳐나온 역전의 용사입니다. 뭐 이런 건가?

잠시 뒤. 체이서가 벽에 새겨진 붉은 혈관이 너무나도 공포스럽던, 갑자기 변해버린 창고의 인테리어와 그 내부에 존재하던 이상한 괴물체들에 대해 '악몽의 한복판과 같았던 광경'이었다며 설명하던 와중, 드디어 스펜서가 체이서의 말을 끊고 질문했다.

"거길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녔어?"

체이서는 억울했다.

"분명, 저는 죽을 위기를 느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경청하는 것 같더니 숫제 연기였나?

제대로 듣지 않은 것 같다.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녔다니. 그게 자신의 설명을 듣고 할 말인가?

"아니지. 자네 설명에 따르면 미궁화가 이미 진행된 것 같은데···. 살아서 나온 거면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닌 거나 다름없지."

"미궁화요?"

"아, 자넨 교육보다 먼저 미궁을 보게 된 거군. 아무리 그래도 부대 내 창고에 미궁화가 진행됐을 줄이야."

스펜서는 말을 이었다.

"그 창고는 대마법사가 지었다는 안전한 보관소야. 다른 건물은 새로 지어져도 그 건물은 몇백 년간 그대로였지. 현대 건축술로 짓는다면 억만금이 들 창고인데 부술 수가 있나."

"왜 그런 창고가 있습니까?"

"위험한 물건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그걸 숨길 장소가 여기였을 뿐이네. 제국 이전 바하무트 왕국이었던 시절에도 이곳은 비밀 부대의 군사지역이었지. 지금이야 특무부대라고 드러나 있긴 하지만, 이곳에서 뭘 하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몇 없으니 다를 것도 없나."

그는 그렇게 말을 맺고는, 미궁에 대해 말을 이었다.

5화. 결국 체이서가 필요하다.

5화.

"미궁. '우리의 주적은 무엇인가.'를 물으면 다른 군인들은 피스가이아 왕국 놈들이라고 말할 테지만 우리는 미궁이라 말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마력과 영력이 진득하게 고여서 막대한 에너지가 생겼을 때.

근처에 있던 아이템이나 아티팩트 등이 그 에너지를 머금고 변질해 일대에 이상 현상을 일으키는 것을 미궁이라 말했다.

"아이템과 아티팩트는 이미 마력을 품고 있지. 새로운 에너지를 흡수하기 딱 좋은 물건이란 말이야."

던전에서 나타난, 인간이 만들지 않은 마법 물품인 아이템과, 인간이 마공학 기술력으로 만들어낸 마법 물품인 아티팩트.

에너지를 담을 그릇이 되기 좋다고 한다.

이때, 마나는 동력을. 영력은 사념을 통한 방향성을 제공해 마법 물품을 변질시킨다.

"그렇게 변질한 아이템을 「미궁의 핵」이라고 한다."

미궁의 핵은 억울하게 죽은 인간의 영혼이 뭉쳐 생긴 영력으로 인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대개 반영구적인 저주를 품게 된다.

미궁의 핵 개개의 특징과 발현되는 저주는 수많은 인간의 개성처럼 각기 다르나, 대개는 인간을 해치는 방향으로 생겨난다는 것.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으로, 어마어마하게 단단해진다고 한다.

"단단해져요?"

"말 그대로, 여간해선 부서지지 않네. 그러니 어쩌겠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어딘가에 숨겨둬야지."

그렇군. 체이서는 드디어 이해했다.

위험한 물건들을 왜 굳이 보관해두냐는 의문에 대한 답.

그저 저 물건이 굉장히 단단해서 부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미궁을 해결하고 미궁의 핵을 치워 격리하는 것이, 이 부대의 주된 역할이네요."

그 역할에 상당히 큰 중요도를 차지하는 게 저 견고한 창고였다.

결국 저 창고가 없다면 당장 골칫덩이 저주 아이템. 「미궁의 핵」을 처박아둘 공간이 없으니까.

그런데 이렇게도 취급이 안 좋은 것은, 앞서 언급했듯 저 창고가 너무나도 오래도록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문제가 없었으니 앞으로도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좀 대충 처리하지 말고 착실하게 위험도에 따라 배치한 뒤에 보고서도 작성해달라 요청했지만, 그들은 바쁘다는 이유로 고개를 젓기 일쑤였네."

선배들이 이렇게 한다는 이유로 계속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이미 안전 불감증에 걸려버린 거다.

현 담당관인 체이서가 발령되어 오기 전부터 그렇게 대충 밀어 넣고 나오길 반복했다고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선 어떻게든 정리하려 했으나 당연히 창고를 정리하겠다고 나설 지원자는 없었고, 이내 전쟁마저 터져서 후순위가 되었다.

모르면 몰랐지, 알게 된 이상 해결은 해야 한다.

스펜서는 이곳 특무대 담당관이 되기 이전에도 행정부 장교로 상당한 커리어를 쌓아왔었고, 거기엔 그의 병적인 '관찰욕'이 한몫했다.

자신이 존재하는 부대를 확실히 관찰해 실시간으로 변동 사항을 인지해야 마음이 놓이는 자.

그의 가호는 「내려다보는 눈」으로, 한 번 정보를 기재하고 나면, 내려다보는 시야. 특정 반경의 수치적 변화를 실시간으로 확인, 수정할 수 있었다.

-모바일 게임 재화 파악하는 감각으로 행정업무를 하는 거네.

-유능해 보이긴 해.

그가 이 부대에 배치받은 지 10년.

여전히 창고 내부는 알 수 없는 공간인 채로 오랜 기간이 흘렀다.

결국 불발탄을 안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왔었다.

마땅히 방법이 없어 미뤄두고 있었는데, 제라딘 스펜서에겐 커다란 스트레스였다.

그렇다고 행정업무를 총괄 중인 담당관이 직접 창고에 들어갈 순 없지 않은가.

저주 저항력이 강한 것도 아니고, 부대 담당관으로서 할 일이 넘치는데.

그런 상황에서, 자그마치 '정신 방어력이 강한' 가호를 지닌 병사가 등장했다고 하니, 얼른 들여보낸 것이다.

본인도 가호가 있고 가호의 대단함을 알고 있으니, 가호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기에 밀어붙였던 투입이었다.

물론 그 기저에는 만에 하나 잘못되어도 신병 하나 정도는 적당히 무마할 수 있다는 의식이 깔려있었으나-

성공적인 인선이었다. 자신이 들여보낸 병사는 성공적으로 창고 내부를 탐색한 뒤 복귀했으며, 아무런 부작용도 없었다.

다만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미궁이 생겼다고?

"게으른 '해결사' 녀석들 때문에 골치 아프게 됐군."

"해결사요?"

"미궁을 처리하는 자들을 해결사 또는 픽서라 한다네. 던전을 처리하는 자들을 사냥꾼 또는 헌터라고 하듯이."

담당관은 해결사들의 무신경함을 탓하곤 걱정의 말을 흘렸다.

"으음···. 안 그래도 전쟁 때문에 바쁜데···."

체이서가 깊은 생각에 빠진듯한 스펜서에게 질문했다.

부대의 일에 대해 이해는 했지만, 본질적인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전쟁통에 차출되어 왔다. 그리고 담당관도 전쟁에 대해 걱정한다.

그러나 미궁과 전쟁이 서로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이 부대는 전쟁과는 크게 관련 없지 않습니까?"

"아니. 미궁은 대륙 곳곳에 있어. 근데 인간이 드문 곳엔 더 많겠지. 발견되지 않은 미궁이 제거되지 않은 채 오랫동안 존재해왔을 테니까."

미궁으로 인한 피해는 전쟁 중에 제일 많다고 했다.

이곳저곳 사람이 다니지 않던 지형에 수많은 병사를 몰고 들어가니, 외딴곳에 있던 미궁에 자꾸 걸려드는 것.

이러면 무수한 사령관이 세웠던 전략이 단숨에 어그러지고, 병사와 인재, 군사 장비까지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

주변에서 사람이 행방불명이 된다거나 괴물이 산다거나 하는 위험한 소문이 도는 곳을 확인해보면 대개 미궁이 있다.

평소엔 차근차근 처리해갔지만, 전시가 되면 이제 어디가 작전 구역이 될 줄 모르기 때문에 특무부대가 급해진다.

미궁이 발견되는 양은 늘어나고, 일도 늘어나고. 평소 쓰지도 않던 땅을 전쟁하겠다고 정리하라는 거다.

그야말로 '변수 제거.'가 업무.

제국은 군사력에 어마어마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변수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러니 특무부대가 전쟁과 관련이 없다고는 볼 수 없지."

"과연 그렇습니다."

체이서는 이 부대와 자신이 맡은 업무에 대해서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지금, 이 상황은.

"미궁을 없애는 부대에 미궁이 생겨버린 겁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스펜서 담당관의 태도가 묘하게 변했다.

뭔가 속에서 결론을 내리는 듯하더니, 다시 '신병을 보는 태도'로 돌아와 말했다.

"자넨 이제 됐네. 돌아가도 좋아."

체이서가 일어나자, 담당관이 말을 덧붙였다.

"미궁이 있다는 걸 알게 해줘서 고맙군."

스펜서는 이렇게 말단병사에게 시간을 길게 쓰는 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체이서에게 이렇게 자세한 설명을 해준 이유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눈에 달라붙은 미궁의 핵은 내 권한으로 자네에게 배정하겠네."

체이서는 내부 사정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눈에 달라붙은 「나른한 학자의 눈동자」 역시 언급해두었다.

떼어낼 수가 없어서 그냥 나왔다고.

"일람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외부에 별다른 피해는 끼치지 않겠군. 그러나 눈에서 떨어지는 순간 다시 창고로 돌려놔야 하네."

"알겠습니다."

지금도 충분한 호의를 갖고 있긴 했다.

스펜서는 인재에겐 후한 자다.

그리고 그 안에서 체이서는 인재였다.

그러나 태도가 변한 이유는, 가치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체이서가 없어도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미궁이 생겼으니 특무부대의 전투원들. 미궁 해결사를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체이서는 스펜서에게 해결사를 불러들일 명분을 주면서 스스로의 가치를 훼손한 셈이었다.

그러나 상관의 평가와 태도 변화는 체이서에겐 의미 없었다.

그는 지금의 상황에 대만족했다.

첫 임무를 성공리에 완수했다. 더불어 그 창고에 다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체이서가 담당관실로 들어오며 원했던 조건은 모두 충족됐고, 더는 바랄 게 없었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충성!"

-뭐야. 저렇게 끝이라고?

-계속 안 시켜?

-글쎄. 아마 머지않아 다시 부를 것 같은데?

체이서가 담당관실에서 나가자, 스펜서는 즉시 상부로 보낼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부대 '위험물' 창고 내 생성된 미궁을 파훼할 실전팀 파견 요함.]

스펜서는 요함 앞에 '시급히'를 추가한 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 뻣뻣한 전투 요원들이 저곳을 뒤집어엎을 수밖에 없겠지.

그럼 이 부대에서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은 없는 셈이다.

***

"팀장님. 여기 들어와 보신 적 있으십니까?"

"당연하지. 미궁 부수고 「미궁의 핵」을 버리는 공간이 여긴데."

"스펜서 담당관의 말에 따르면 안으로 들어갈수록 굉장히 위험할 거라던데, 깊은 곳도 보신 적 있으십니까?"

"깊이는 들어가 본 적 없어. 넓은 공동이 나오면 들고 들어온 「미궁의 핵」을 집어 던지고 얼른 나오라고 들었거든. 깊이 들어가봤자 괜히 아까운 저주 방어 아티팩트만 낭비된다고."

"하긴. 저주 아이템들 한복판에 있는 거니까 저주 방호벽이 급속도로 깎이겠군요."

"그 소름 끼치는 물건들이 잔뜩 쌓인 곳에 미궁이 생기다니. 좀 불길하긴 합니다."

"그래봤자 창고잖아? 우리 서른 명이면 못할 일이 없다고!"

"내가 맡은 첫 '지휘관'으로서의 임무다. 해당 미궁을 가볍게 부수고 우리 팀의 첫 커리어로 삼는다. 가자!"

"오우!"

***

"후,후퇴한다."

"저주 방어 아티팩트가 너무 빠르게 소진돼. 이제 더는 못 버텨."

"여긴 지옥이야!"

"팀장님! 「귀환 주문서」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살려주십시오!"

"저건 네 엄마가 아니라고! 그냥 드레스잖아! 정신 차려!"

"나 먼저 가네."

"팀장님이 자살했어! 저 책상 뭐야!"

"문장 읽지 마!"

"우리. 살 수는 있는 거겠지?"

"꺽···. 꺼억."

"저 인형. 아직도 쫓아와. 나,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싸우고 싶지 않아."

"차라리 괴물들이 나았어. 전투하면 전의를 잃고, 바라보면 자살하고 싶어지는 적이라니···."

"이렇게 있을 수는 없지. 우리라도 나가자. 나가서 알려야 해. 이 창고는 최악이야. S급 미궁이라고!"

***

[미궁 해제 실패 보고] - 확인

[미궁 해결사 재파견 요] - 반려

"반려? 반려라고?"

스펜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종이에 적힌 글을 다시 읽었다.

[반려 명령서]-------------------------

현재 전쟁 지대 확대로 인해 전투 병력이 부족한 상황임.

더군다나 보고에 의하면 파훼가 까다로울 뿐, 당장 피해자를 만들어낼 상황은 아닌 것으로 판단됨.

해당 창고는 0등급 안전지대로, 'F급 미궁'에 의해 무너질 가능성은 없음.

그에 따라 해당 미궁 공략은 후 순위로 미루기로 한다.

‗‗‗‗‗‗‗‗‗‗‗‗‗‗‗‗‗‗‗‗‗‗‗‗‗‗‗‗‗

스펜서는 다소 놀랐다.

A급 이상의 해결사. 그러니까 단신으로 들어가서 미궁을 해결하고 나올 만한 능력자가 투입될 거란 예상을 깨고, 신임 팀이 파견되었을 때는 그냥 갸웃했다.

새로 만들어진 팀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해결사라 불릴만한 베테랑 전투 요원이 이끄는 소대가 파견되었다가 팀이 와해했을 때는 안타까운 결과에 한숨을 쉬었다.

세 명만 겨우 도망쳐 나와선 횡설수설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는 드디어 제대로 된 병력을 보내줄 줄 알았다.

그 너덜거리는 생존자들을 끌고 가서 「위험물 창고 미궁」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을 전쟁부가 반려라는 결론을 내린 건 명백히 이상했다.

하지만 당장 스펜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담당관이다. 특무대 본부의 본부대장인 발터 공작의 보좌이나, 발터 공작이 일선에 나가 전투 지휘관으로 활동함에 따라 특무대 본부의 행정업무를 대리하고 있을 뿐이지, 실질적 계급은 그가 지닌 권한에 비해 그리 높지 않았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젊은 나이에 비하면 높은 지위이지만, 저기 제국 전쟁부에서 내려온 명령에 반항할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면 별수 없군.

-삑

스펜서가 호출기를 눌렀다.

"부르셨습니까 담당관님."

"어, 가비. 체이서 신병 뭐 하고 있나?"

"그는···."

***

체이서는 창고 임무에서 빠진 순간부터 훈련병 신분으로 되돌아갔다.

따라서 지옥 훈련. 신병들이 받는 훈련에 참여하게 되었다.

"열주웅 쉬어!"

-차차차착

"오늘 들어온 체이서 신병보다 못하면 어떡하나! 정신 안 차려!"

6화. 신병들은 체이서가 부럽다.

6화.

체이서는 군 생활 2회차였다.

그 덕분에 제식 훈련은 에이스였지만.

"달린다! 더 빠르게 달린다! 체이서 신병! 그게 최선인가!"

이 몸은 오히려 현대의 몸뚱어리보다 약했다.

고된 농사일로도 키워지지 않은 노동 근육.

그는 타고나길 근육이 잘 잡히지 않은 몸이었고, 체력 역시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약골인 것에 비해선 어디 쑤시거나 골병든 부위가 없었지만, 이젠 알았다.

그건 그에게 주어진 「시간 포인트」. 채널에서 제공한 부가 수명 덕분이었다.

그것이 그의 몸이 닳거나 노화하는 것을 막아주고 있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현상 유지만 해줄 뿐, 그 밖에 다른 영향은 주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악착같이 노력해도 신체의 근육은 변화할 기미가 없었다.

이것은 그저 재능 문제였다.

-채엥!

휘릭대며 날아가 훈련장 바닥에 널브러지는 검.

"한 합에 검을 놓치는 건 조금···."

"손아귀에 힘이 없군. 기초운동부터 시작해야겠는데···."

"순발력이 없다시피 한데? 눈치는 빠르고 침착하긴 하지만, 그에 반해 움직임은 한참 느리군."

"몸이 따라주지 못하는 거로군. 오히려 슬픈 일이다. 차라리 눈썰미가 저만큼 문제였다면 실전과 체계적인 전투법으로 보완할 텐데···."

-ㅋㅋㅋ 체이서 야케요.

-와 신병 사이에서도 하위 1%라니.

-혹시 몸에 이미 저주받은 거 아니냐? ㅎㅎ

교관들은 곧 체이서의 전투력을 올리기 위한 고민을 그만두었다.

"체이서는 아무래도 잠입술이나 은닉술 훈련 위주로 하는 게 좋겠군. 차분해서 잘할걸세."

"아니면 담당관님이 이뻐하시는 것 같은데, 행정병이나 공관병도 괜찮을 것 같군요. 농민 출신답지 않게 영리한 것 같습니다."

단 며칠. 그가 비전투원 취급을 받게 된 기간이었다.

식사 시간.

체이서는 밥을 받아 식당에 앉아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징집 기간 5년. 저 시간만 버티면 제대가 가능했다. 아니면 기간을 연장하면서 직업 군인이 되던가.

물론 체이서는 직업 군인까진 생각하지 않고 있었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병과를 찾아 성실하게 근무를 마친 뒤 제대할 생각이었다.

행정 병과를 노려볼까? 그렇다면 가비 상병에게 조언을···.

-툭

"응?"

그때, 무언가가 체이서의 등에 날아와 맞추었다.

체이서가 뒤를 돌자, 세 병사가 앉아있었다.

그들은 체이서를 거의 인생의 원수를 만난 느낌으로 노려보았다.

대체 이유가 뭐야?

체이서는 그들의 적의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 이유는 단순하게도 부러움이었다.

체이서라는 신병이 담당관에게 이쁨받아 훈련을 빠지고 창고 정리같은 잡일을 했다는 소문(?)을 들은 병사들은, 시기와 질투를 어김없이 표출했다.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어쨌거나 배치와 재배치 사이, 근 보름의 훈련을 홀로 빠진 데다, 교관들도 유독 체이서에게만 친절하게 굴지 않나.

담당관의 '인재 사랑'을 아는 교관들이 지레짐작하고 행동한 것임을 아는 신병은 여기 없었다.

"이 고통스러운 훈련을 저 녀석은 계속해서 빼먹었겠다."

"저거 봐. 힘이 남아돌아서 저 혼자 쌩쌩해!"

"뭐 좋은 거 받아먹은 거 아냐?"

체이서는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리는 훈련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을 혹사하는 것은 괴롭고, 그건 체이서로 하여금 밝고 맑은 정신만큼이나 깨끗한 고통을 겪게 했다.

지쳐 쓰러져 잠드는 남들과 달리, 체이서는 지쳤으나 쓰러지지 않았다.

그게 다 체이서의 가호 「환생자의 정신」 덕분이었다.

그러나 다른 병사들이 그걸 알 리가 없다.

체력이 좋은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운동 능력은 이미 다 들통난 상태.

그러니까 꼿꼿한 저 자세는, 결국 그동안 농땡이 피면서 쉬었기 때문일 것이다.

체이서를 질투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단정 짓고는, 그에 대해 나쁜 말을 수군거렸다.

-실제로 틀린 말도 아니지.

-ㅋㅋㅋ 담당관이 보상 차원에서 일주일이나 휴식을 줬으니···.

-훈련 기간 날로 먹었지.

눈에 띄는 체이서는 힘든 마음을 투사하기 위한 희생자. 공공의 적으로 삼기 딱 좋은 상태였다.

그러나 체이서의 정신력은 상당해서, 뒷담화엔 아무런 심적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 것으로 힘들어할 심줄이었다면, 이미 제 손을 탄 온갖 「미궁의 핵」들.

저주 아이템과 얽힌 이야기를 보면서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그런 아무렇지 않은 태도가 신병들의 심기를 계속해서 긁는 와중.

금일의 힘든 훈련마저 비교를 당했다.

못하는 건 어설프게 넘어가면서 잘하는 건 칭찬받고!

저 녀석 뭐냐!

터질 일이 터졌다고 볼 수 있었다.

땅에 떨어진 투척물과 자신을 노려보는 신병들.

물론 체이서도 이렇게까지 되면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왜 하필 식당에서!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던데.

체이서는 지레 눈에 힘을 주고는 자신을 노려보는 병사들에게 을러대려 했다.

"뭐야?"

"그게 내 능력. 빵 만들기의 가호다."

퉁퉁해 보이는 병사의 손가락이 바닥을 가리켰다.

체이서의 등을 때렸던 무언가가 땅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주 먹음직스러운 빵이었다.

저걸 그냥 만들어낸다고?

"워. 엄청나잖아?"

저도 모르게 감탄해버렸다.

이런 반응이 나온 이유는, 체이서가 애초에 상처받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대에 대한 적의보다 특이한 가호에 대한 놀라움이 더 크다 보니, 저도 모르게 대치하는 상황에 맞지 않은 추임새를 넣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체이서의 진심이기도 했다.

빵을 만드는 가호란 엄청나지 않은가?

의식주 중에 식을 해결하는 능력이었다. 그것도 평생!

그런 체이서의 태도에 상대방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목소리에 열기가 빠지고, 대신 투덜거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무얼. 나는 이런 쓰레기 같은 능력이어서 홀대받고 있다. 너는 대체 무슨 능력을 가졌기에 특혜받지?"

입을 비쭉 내밀며 말하는 녀석 옆에는 눈이 커다란 녀석이 있었다.

집요하게 체이서를 들여다보더니,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한다.

"뭐야 지갑에 돈이 한 푼도 없네~ 예상외로 가난뱅인가? 부자라서 윗사람들에게 돈을 잔뜩 뿌린 줄 알았는데!"

"너는 또 뭔데?"

"나는 투시의 가호를 가졌어. 하지만 이런 변태적인 능력으론 인정받지 못해."

눈이 커다란 녀석은 개구리처럼 생겼는데, 묘하게 귀여우면서도 이상했다.

행동이 배우처럼 과장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역시, 절망한듯한 표정과 그렁그렁한 눈동자에 절로 동정심이 들 정도였다.

"엄청 좋아 보이는데···."

"부러워. 부럽다고, 너는 분명 엄청난 S급 가호를 가졌을 거야. 그렇지?"

시비 거는 일당답지 않은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체이서가 당혹스러워하는 동안, 그 왕눈이 옆에서 한숨 쉬는 녀석이 있었다.

입을 우물쭈물하는데, 그 역시 성깔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아주 착해 보였는데, 복실한 머리카락과 푸근한 얼굴상이 이미지로 보면 펭귄 같았다.

다만 다소 우울해 보였다.

그가 할 말이 많아 보이기에 체이서가 먼저 질문했다.

"넌 말 안 해?"

"난 여기선 보일 수도 없는 가호를 가졌다."

"무슨 가호인데?"

"난 물 위를 걷는다. 정말, 무의미한 능력이지."

체이서는 이마를 탁 짚었다.

아무튼 엄청나신 분들이 날 질투하고 있었다. 하지만 괴롭힘을 당하는 건 가만히 넘길 수 없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창고 작업. 그걸 할 수 있다면 돌아가면서 하고 싶다."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나?

체이서는 저들의 순박함이 읽혔다.

여긴 군대이고, 윗사람이 시키면 하는 공간이었다.

꿀보직을 맡는 자가 1시간만 일하고 나머진 개인 정비로 시간을 보내도, 9시간 이상 노동하는 병사가 어떠한 불만도 표할 수 없는 공간이 군대였다.

물론 현대 한국은 조금씩 달라지고야 있었지만, 그래도 배치된 업무의 강도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아무리 변명해봐야 바쁜 처부는 매일 야근이었고, 느긋한 처부는 일찌감치 스포렉스로 운동하러 나갔으니까.

하물며 여긴 인권이 강한 현대도 아니다.

전시 상태인 바하무트 제국의 군대가 평등할 거란 기대는 버리는 게 좋았다.

군대의 부조리함은 작은 사회와 같아서, 비록 한 부대에 있더라도 모두의 위치는 달라지게 되어 있었다.

결국 이건 저 젊은 청년들이 아직 부대에 적응하지 못해서 생긴 오해였다.

더불어 누군가가 상황을 만든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일행이 누군가에게 시비를 건다는 건 이상했다.

지금도 스스로 만든 빵 쪼가리를 맞춘 이후로, 아무런 위협을 가하지 못하고 있다.

-네 예상이 맞아. 빵 던진 거 쟤들 아님.

-지나가던 놈이 저 뚱보 식판에 올려져 있던 빵을 집더니 던지고 가던데.

역시. 그렇다면 저들과 언쟁해서 이겨봤자 바보가 되는 거다.

던진 건 다른 놈인데 무고한 녀석들과 다투는 걸 보면 이 상황을 만든 녀석들이 얼마나 비웃겠는가.

퉁퉁한 제빵사는 땅만 보고 있다.

투시 능력을 지닌 왕눈이는 이젠 거의 울고 있었고.

물 위를 걷는 펭귄맨은 한숨만 푹푹 쉬고 있다.

괜히 노려본 행동을 후회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자신이 해줄 말은 간단했다.

"힘내라."

창고 일은 내가 원해서 한 것도 아니고, 그걸 말해봐야 윗사람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내게 투덜대봐야 아무 소용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나는 이제 창고랑 아무 관련도 없다.

너희와 같은 일개 훈련병일 뿐이다!

이런 조언을 건네볼까 생각해봤으나, 상황이 맞지 않았다.

체이서가 식당을 둘러보자, 수많은 시선이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담긴 것은 힘든 마음이었다.

욕구 불만과 어딘가에 분풀이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그러니까, 고된 훈련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쌓여있어서 체이서가 어떤 변명과 주장을 하든 반박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라는 것.

생각해보니까 굳이 설득할 필요는 없겠다.

아니, 설득해도 소용이 없겠다.

이런 생각에 건넸던 체이서의 '응원'은, 신병들에겐 다소 의외였던 것 같았다.

차갑던 분위기가 확 풀려버렸으니까.

-드르륵

그때, 정적을 깨는 소음이 들려왔다.

가비 상병이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온 거다.

"무슨 일이지?"

가비 상병은 체이서를 찾고는, 세 명의 신병과 대치하고 있는 상태로 시선이 몰려 있는 상황을 보곤 이상함을 감지했다.

"별일 아닙니다."

"별일 아니긴. 딱 봐도 별일인데."

그가 되묻자, 신병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신병 브레드입니다. 창고 정리 저도 잘할 수 있습니다. 지옥 훈련보다 편할 게 분명합니다. 일하다가 힘들면 빵도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손에서 뿅 하고 빵이 생겨난다.

엄청 맛있어 보인다.

"신병 더글라스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투시 능력으로 꼼꼼히 청소할 수 있습니다."

그의 커다란 눈에서 빛이 일렁였다.

확실히 눈이 좋아 보이긴 해.

창고에 보면 밀봉된 상자가 여럿 놓여 있어서 뭐가 뭔지 모를 물건도 많았다.

만약 재고 정리를 하게 되면 그것도 다 뜯어야 할 텐데, 저 능력이 있으면 유용하긴 할 거 같다.

"신병 워터맨입니다. 저도 물청소는 잘할 수 있습니다만···. 미끄러지지 않고 안전하게···."

무리수다. 물 위를 걷는 대단한 능력을 물청소 도중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쓴다니 터무니없는 낭비였다.

"푸하하하하!"

가비 상병은 그들의 말을 듣고는, 상황을 이해했는지 크게 웃었다.

"너희들 얘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구나."

자그마치 전투팀이 들어가서 세 명만 살아남은 미궁을 홀로 탐사하고 생환한 용사인데.

특무부대의 유능한 전투원을 지칭하는 '해결사'란 단어에 가장 가까운 신병이 그였다.

진행되는 상황을 보며 얼마나 놀랐던가.

그는 스펜서 담당관의 직속 병사로서 「위험물 창고 미궁」에 대한 보고서도 볼 수 있었다.

왠지 간추려서 위험성을 축소한 느낌이지만, 자신이 들어갔다간 즉시 미쳐서 돌아오지 못할 마경임은 분명했다.

가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더니 체이서의 등을 '탁'하고 쳤다.

"담당관님이 다시 찾으신다."

"알겠습니다."

가비 상병은 고개를 돌려 신병들에게 말했다.

"오해하는 것 같아 오늘부로 임무 명칭을 바꿀게. 체이서는 '창고 정리'가 아니라 '미궁 척후' 임무를 받았었다."

가비 상병은 병사들의 의문점을 빠르게 해소해줬다.

"너희가 피복과 장구류를 받은 그런 일반적인 창고가 아니라, 「미궁의 핵」을 보관하는 위험물 창고다. 그곳 내부에 미궁이 생겼고."

순간 식당이 웅성거렸다.

7화. 담당관은 통이 크다.

7화.

신병들은 훈련과 동시에 온갖 정훈교육을 받고 있었다.

부대 특성상 가호가 있거나 신체적으로 특별한 녀석들이 많다.

가호가 있는 자는 귀족 출신이 많았지만, 전시에 차출되던 도중 가호가 드러나 끌려온 평민 또는 자유민 출신도 꽤 있었다. 심지어 노예 출신도 있었다.

그러니 신병 교육을 위해서 지식을 쑤셔 넣고 있었는데, 미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가르친 상태였다.

"미, 미궁이라고요? 그 괴물이 나온다는 곳?"

"거기선 물건도 막 저 혼자 움직여서 사람을 죽인댔는데···."

가비 상병이 체이서 앞에 서 있던 세 병사를 보며 씩 웃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뻔했다.

분명 체이서에게 불만을 표했겠지. 힘든 마음은 이해하나 분출 방법이 잘못됐다.

"일종의 그러니까, 월반이라는 거지. 왜, 체이서랑 같이 미궁 탐사 임무에 들어가고 싶어?"

세 병사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흘끔거리며 체이서를 보는 것이, 미궁 탐사를 나선다는 그에게 상당히 미안한 표정이었다.

그들이 배운 바로는, 미궁이란 공간은 베테랑도 삐끗하면 죽어 나가는 위험천만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훈련 열심히 해. 그게 너희를 살릴 거다. 너희는 미궁 모르지? 거기 처음 들어가면 진짜 최소 기절에 피똥 싼다. 신고식이 아니라 진짜 죽어 나가는 일이야···."

가비의 말을 뒤로하고, 체이서가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의 얼굴에 금칠하는 탓에, 이젠 좀 부끄러웠다.

그러나 가비 덕분에, 신병들이 체이서를 보는 눈빛이 그새 많이 달라져 있었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을 하다 왔나 보네."

"그래. 방금 대응하는 걸 보면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아."

물론 여전히 비웃음을 보이는 녀석도 있었다.

저런 녀석이 가능하다면, 자신 역시 해낼 수 있을 거란 맥락 없는 자신감을 가지는 것.

"뭐야, 쟤가 미궁을 돌다 왔다고? 사실은 미궁도 별거 아닌 거 아냐?"

"그렇지. 뭐든 신입에겐 겁부터 주고 보잖아. 딱 봐도 그런 건가 보네."

체이서를 놀잇감으로 삼으려 한 녀석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평판에 대한 위기 상황을 체이서가 흐지부지 빠져나가자 굉장히 아쉬워했다.

"쳇, 멍청이들 좀 부추겨서 대체 어떤 놈인지 좀 구경해보려고 했더니만···."

"도미닉. 쟤가 그렇게 궁금해?"

"괜히 우리에게 올 시선이 분산되잖아. 저런 녀석은 일찌감치 파악해 둬야 해."

경쟁심을 불태우는 녀석도 존재했다.

어느 단체에서나, 경쟁심이 강하고 높이 올라가고 싶어 하는 자는 있게 마련이었다.

그들은 창고 정리를 하는 체이서에겐 관심이 없었으나, 일찌감치 특무대 주요 업무에 편성됐었다는 체이서에겐 관심이 아주 많았다.

"결국 저 녀석이 앞서나가고 있다는 거네."

어찌 됐건 그들이 맡은 임무는 착실히 훈련받는 일이었다.

그들은 일병조차 아닌, 그저 신병이었으니까.

갖가지 감정을 내비치는 신병들을 뒤로하고, 체이서가 담당관실로 향했다.

그곳엔 그를 위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 다시 일해줘야겠군."

체이서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그 창고에 가는 것을 생각하니 그리 내키지 않았던 것.

-ㅋㅋㅋ 역시 그 창고과 인연이 있을 줄 알았다니까.

-그게 운명이야. 받아들여.

-한가로운 삶을 살기엔 너무 이르구나 체이서.

스펜서 담당관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농민 출신 병사의 표정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보이는 그대로 관심이 없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의 무표정은 타고난 성정 탓이었고, 오히려 상당히 신경 쓰는 중이었다.

***

스펜서 가문은 대대로 상인 가문이다.

가문의 셋째 아들 제라딘 스펜서 역시 가문의 행정 업무에 한 몫을 담당하고 있었다.

상인으로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선 유능함을 뽐냈다.

그러나 전쟁이 터진 제국은 귀족 가문에도 입대를 종용했고, 가장 상재가 없던 제라딘이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제라딘 스펜서는 행정에 뛰어난 「내려다보는 눈」이란 가호를 지녔다.

수준급의 행정관이었을 텐데도, 인간인지라 막히는 일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군대에서 높이 올라가려면 명예운이 필요하다는 말이 왜 있겠는가.

행운이 넘치는 인간이 아닌 한, 결국 해결하지 못할 일이 생기기 마련이라 그렇다.

그러나 스펜서는 한 가지 특기를 더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제국 1위 재벌 가문. 스펜서 가(家)의 일원으로서 지닌 막대한 재산이었다.

그는 막히는 일이 있을 때는 가문의 금전을 투입해 일을 처리했다.

그리고 100% 성공해버렸다.

결과론적인 시선으로 인재를 보는 바하무트 군부는 성적 1위, 근무평정 1위인 제라딘 스펜서를 특진시킨 뒤 비밀 전투 부대. 특무부대에 배치했고.

그곳에서 비밀 임무를 총괄하던 소꿉친구 발터 공작을 만났으며, 서로를 익히 아는 탓에 발터 공작까지 그를 적극적으로 밀어주면서 단기간에 진급을 거듭했다.

발터 공작은 중령이 된 스펜서를 자신의 담당관으로 세워버린 뒤, 마음 편히 행정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그리고 본인의 힘을 제대로 쓸 수 있는 곳. 미궁으로 떠났다.

대장을 대리하게 된 스펜서.

그는 분명 쾌속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가호는 무적이며 돈은 신이다.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특무부대의 한 오래된 창고. 그것을 알게 되면서.

드디어 돈으로 안 되는 일을 맞닥뜨렸다.

미궁의 핵을 보관하는 창고만은 계속 어둡다.

그의 가호 「내려다 보는 눈」으로 확인하는 부대 전경에서 유일하게 안개로 덮혀 있는 곳은 그의 신경을 계속해서 긁었다.

요구한 인력 파견을 번번이 거절 당한다.

그러나 그의 담당 업무엔 「위험물 창고 관리」가 떡하니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모순을 이겨내기 위해선 결국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번에도 그는 자신의 다른 특기를 꺼내 들었다.

"내 자네에게 이러한 보상을 주겠네. 그러니 그곳을···."

수천만에서 수억 골드까지. 땅과 농지, 사업장 등등.

터무니없는 대가를 약속하고 해당 업무를 자처하길 요구해 들여보낸 나름의 가호를 갖춘 병력들.

스펜서의 눈에 '인재'로 보이던 그들은 위험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창고에서 근무하길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뛰쳐나와 일을 관두거나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주요한 증세는 '광증'이었다.

공포, 이명, 환상 등으로 고통받는 것이 대다수.

창고는 점점 더 기피 장소가 되어갔다.

그러나 스펜서는 그곳을 정리해야만 했다.

그게 그가 맡은 임무였기 때문에.

임무를 완수한다. 내 관리 지역에 「전장의 안개」는 필요 없다.

스펜서는 「미궁의 핵」을 가지고 온 해결사들에게 제대로 된 운반과 보관을 요구했다.

아주 집요할 정도로.

"창고에 들어가자마자 저주 방호구가 5칸이 깎였어."

"와 미쳤군요.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가란 게 말이 안 되네요."

"그렇지. 양심이 없는 거지. 이건 억만금을 준다 해도 될 일이 아니야. 그 마경에서 살아나왔는데 고작 창고에 물건 옮기다 죽어야겠어? 사막여우 같은 얼굴로 유능한 척 당당하게도 지껄이지만 결국은 책상물림이라 이거지. 전방에 나가 싸우는 해결사들의 고충은 전혀 모른다고."

"엇, 스펜서 중령입니다."

"얼른 움직여. 또 잔소리하실라."

"자네들. 창고 일람에 적은 내용이 이게 뭔가. 제대로 보관한 뒤 꼼꼼히 작성하라고 하지 않았나?"

"다음번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음번이라고 제대로 할 리 없었다.

나중엔 들어간 지 5분 만에 덜렁 나와버리는 해결사마저 나오기 시작했다.

"중사. 자네를 처벌하겠네. 죄는 명령 불복종이고···."

"하하. 스펜서. 조금만 참아줘."

발터 공작. 스펜서의 소꿉친구이자 순수 능력만으로 최연소 스타를 단 초강자.

특무부대를 사실상 이끄는 존재인 그는 일선에서 무수한 미궁을 부수고 있다.

대외적 신분은 소드마스터 공작님이자 모험가.

실질적 직위는 특무대장. 계급은 준장.

그리고 특무부대 최강의 해결사.

그가 와서 처벌을 막았다.

"중사 벌 그만 주고 얼른 올려 보내줘. 전방에 병력이 부족하다고."

여기서 전방이란 미궁이 생긴 곳을 말했다.

소문을 파악하고 진원지를 탐색한 뒤 사지로 진입해 미궁을 해결하려는 전장은 어디든지 전방이다.

"창고 정리가 필요해."

"그 건물 알잖아? 0등급 안전지대로 지정된 공간이잖아. 몇천 년간 아무 일도 없었고, 지금까지 멀쩡해. 거기보다 안전한 곳이 없다고···. 당장 무슨 일 난 거 아니면 답답해도 좀 참아주라."

"으음···."

"실제로 네가 거기 치우겠다고 난리 피우던 게 벌써 몇 년이나 지났지만, 결국 아무 일도 안 생겼잖아?"

"배치했던 녀석들이 죄다 쓰러진 것만 봐도 서둘러 정리해야 한다. 제대로 된 기능을 못 한다는 거잖나."

"들어간 녀석들이야 픽픽 쓰러졌어도 당장 창고 밖까지 무슨 일이 나진 않았잖아. 전쟁 끝날 때까지만 좀 미루자고."

역시 불만스러워하는 스펜서.

발터가 문득 이마를 찡그리더니 말을 이었다.

"아 갑자기 나도 감이 좋지 않네. 어쨌거나 미안하지만 그 중사는 바로 보내줘. 창고 문제로 처벌한다는 소문 돌면서 너에 대한 평판도 지금 최악이라고. 친구 욕먹는 게 나라고 좋을 것 같냐?"

"알겠습니다. 대장님."

"에이 왜 또 존댓말이야. 너무 삐지지 말고. 나 그럼 또 전방으로 간다. 본부는 잘 부탁해!"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미루던 때.

부대에 체이서가 온 것이다.

이후로는 알 것이다.

그는 창고를 탐색한 뒤 무사히 돌아왔고,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와서도 멀쩡했으며, 내부에 미궁이 있는 것까지 알아냈다.

미궁이 있다는 걸 보고하고 해결사를 지원받았으나, 해결사마저 공략 실패.

이후 재파견 요청은 반려되었다.

그리고 지금.

스펜서는 자신 앞에 있는 저 병사를 설득해야만 한다.

그리고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는 데는, '돈'만 한 것이 없지.

***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가 이 창고 정리를 거부한다면 난 강요할 수 없네."

사실 체이서를 창고에 배치하는 것은, 스펜서 개인적인 바람이다.

군부에선 명확하게 '창고에 대해선 차후에 따지자.'며 미루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기에 저 병사가 온 힘을 다해 거부한다면, 자신은 강요할 수 없다.

또 문제의 창고 정리는, 싫어하는 자를 억지로 밀어 넣어서 될 일이 아니다.

내부에서 노닥거리면 어찌할 건가.

괴롭혀서 하게 만들어?

그 시간과 심력 소모가 더 손해다.

"그러니까 대가를 지불하지."

"무슨···."

체이서는 당황했다.

갑자기 무슨 대가?

자신은 그냥 내키지 않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했을 뿐이다.

그러자 차를 홀짝이며 깊은 생각에 빠지더니, 대뜸 대가를 주겠단다.

멋들어진 제복을 입고 있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흐트러진 모습이었다면 바본가 싶을 정도였다.

현대의 군대를 겪은 체이서에겐 결국 대한민국 군인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사고할 수밖에 없다.

그가 생각하기에 장교가 병사에게 명령하는 데 대가를 주는 것은 명백히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국가에 김영란법은 없다.

고로 군 내부에서 저들끼리 돈을 주고받는 것은 문제 될 게 없다.

중요한 것은 결과다.

바하무트 제국은 과정보단 결과를 중시했다.

과정이 아무리 우수했어도 결과가 나쁘면 죄인이요, 과정이 쓰레기 같아도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

돈 한 푼 안 받아먹고 쓰레기 같은 납품 업체와 계약해 방산 문제가 생겼다?

사형.

돈 수천만을 받아먹고 좋은 납품 업체와 계약해 국방을 강화했다?

진급.

그래서 이 세계의 공직자들은 스스로 조심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지간해선 올바른 선택을 한다. 올바르지 않은 선택을 했을 땐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각오도 한다. 그렇기에 이 국가는 현질 효율이 나쁜 모바일 게임처럼 뇌물 효율이 좋지 않았다.

다시 이 상황으로 돌아와서, 지금 스펜서란 고위 장교가 말단병사에게 '대가를 지불한다.'고 했다.

이건 문제가 되는가?

문제가 될 때까진 문제없다.

일만 잘하면 되고 사건만 안 터지면 된다.

터져도 알아서 마무리만 한다면 터치 안 한다.

결과만 좋으면 진급도 한다.

그러니 이 둘 사이의 계약이 딱히 불법은 아니다.

그냥 외부에서 보기에 스펜서가 멍청이라고 불릴 수는 있겠다.

-그냥 직위로 찍어 누르면 될 걸 무엇 하러 무지렁이 신병에게 돈까지 줘가며 부려? 그냥 적당히 어르고 달래면 되잖아?

-수년 동안 해결 못 한 일을 해결할 방법을 찾으면 뭐 억만금도 지급할 수 있지.

-쟤도 대륙 제일 부자 가문이라잖아. 총 재산 가치를 따지면 우리 보물 하나가 더 귀하지만, 당장 동원할 수 있는 현금만 따지면 우리보다 많을 텐데?

체이서는 이 국가의 법률을 몰랐지만, 이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니, 산간벽지에서 갓 상경해온 신병에게 임무를 주면서 무슨 보상까지?

그는 이래 보여도 인생 2회차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사람 사는 곳이라지만 여긴 계급 사회 속의 군대고, 오히려 강압적일 줄 알았건만.

"수도의 저택. 어떤가?"

왜 저렇게 부드럽단 말인가.

담당관의 제안을 곱씹던 체이서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저택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제라딘 스펜서의 약점이자 강점.

그는 너무나 부잣집의 도련님이었기 때문에, 가치에 관한 판단에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다.

대상인의 집안에서 유일하게 군인이 된 이유가 있었다.

분명, 거래로 따지면 명백한 실패다.

그만큼 주지 않아도 체결할 수 있는 거래였으니까.

그러나 스펜서에게 수도의 저택 정도는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는 수준의 재산에 불과했다.

반면 스펜서의 제안을 받는 자들에겐 달랐다. 그의 제안이 인생의 기회로 보일 정도의 막대한 보상.

그렇기에 강점이기도 했다.

그의 제안은 여간해선 거절당하는 일이 없었으니까.

그는 이전에도 창고로 보내려는 인재들에게 저런 거금을 약속했었다.

죄다 죽어서 제대로 지급은 안됐지만.

체이서에게 수도의 집은 인생을 바꿀 어마어마한 재산이었다.

그는 전생을 떠올렸다.

서울에 집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던가?

여기라고 다를까?

황제가 사는 도시다. 자그마치 '황도'라고 불리기도 하는 곳.

그곳의 그냥 집도 아니고 '저택'.

이건, 이세계의 농부로 전생한 체이서에겐 거부할 수 없는 거래였다.

"하겠습니다. 맡은 바 임무. 최선을 다해 해결하겠습니다."

체이서는 최대한 유능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목소리로 깍듯하게 말했다.

"좋군. 바로 그 자세를 원했네."

둘은 순식간에 의기투합했다.

8화. 드디어 창고지기가 되었다.

8화.

기왕 '돈 많은 고용주'와 '능력 있는 고용인' 신분이 된 이상, 서로 친해지는 게 좋았다.

그렇기에 스펜서는 신병에게 꽤나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자넬 해칠만한 물건은 거의 들어있지 않을 거야. 너무 걱정하진 말게."

사실 누군갈 폭력적으로 해칠 수 있는 저주 아이템은 오히려 만만하다.

"그건 저주라기보단 그냥 물체에 담긴 영의 물리력 투사일 뿐이니까."

"전 그거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체이서의 말에도 담당관 스펜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를 괴롭혔다는 물건들. 그것들의 주 능력은 고작 체이서같은 일반인에게도 제압될 꿈틀거림이 아니었다.

바로 강력한 저주.

닿든 보든 일정 반경 내로 접근하든.

저주를 걸어 고통을 주고 목숨까지 앗아가는 게 문제였다.

의념이 담긴 가벼운 「미궁의 핵」 정도는, 어느정도 능력 있는 마도사나 기사라면 부술 수 있다.

그렇기에 창고 내에 많지도 않고, 몇몇 위험한 '움직임'을 보이는 물건은 지하 구석에 꼼꼼히 봉인해둔 기록도 잘 되어있다.

문제는 정신적인 저주를 주는 물건들이다.

전투원들도 부담을 느껴서 창고 입구 근처에다 대충 던져버리고 '빌어먹을 저주템들!'이라 욕설하며 나오게 만드는 문제의 물건들!

"그러나 자네에겐 영향이 없으니 꾸준히 살펴보도록 하면 되겠지. 아무리 대단한 창고라도 미궁인 상태로 영원히 버텨주진 않을 테니까 조치를 하긴 해야겠네."

"그렇습니다···."

"어차피 혼자서 하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곳이야. 내가 원하는 건 따로 있어. 정리는 부차적인 문제고, 당장 그 안에 무엇이 얼마나 들어가 있는지. 그 현황 파악이 우선이네."

스펜서는 아티팩트를 꺼냈다.

「고대 최신 기록 장치」

"이름이 이게 맞습니까?"

"맞아. 고대에서 '최신 기술'이라 광고했던 아티팩트라더군. 정리가 엄청 편해서 전부 수집해 우리 가문 비서진들에게 제공하고 있지."

"그렇군요."

"어쨌거나, 이 물건을 잘 다룰 수 있도록 노력해줘야겠네."

엄숙하게 말했지만, 체이서는 아무 부담 없이 끄덕였다.

「고대 최신 기록 장치」.

그 직사각형 디바이스는 현대의 테블릿과 비슷하게 생겼고, 잠깐 만지작거리자 인터페이스 역시 별다른 바 없었다.

그냥 안드로이드 쓰다 애플 쓰듯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세계의 OS도 나름의 직관성을 지닌 훌륭한 OS였다.

그럴 수밖에. 결국, 이 마법 물품을 만든 자도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였을 것 아닌가.

"천재는 통한다."

-ㅋㅋㅋ 뭔데 갑자기.

-갑분천?

-저거 신났네. 하긴, 현대인이 스마트폰 비스무리한 걸 찾았으니 ㅎㅎ

"뭔가 사용이 익숙해 보이는군?"

물론 스펜서에겐 신기한 광경이었다.

나름 배웠다고 한 가문 행정관들도 처음엔 낯설어했던 물건인데.

아날로그가 더 편하다고 거부하는 자도 있었다.

정말 이상하군. 농민 출신 같지 않아.

타인의 감상과 평가는 뒷전인 체이서는, 새 스마트폰을 샀을 때처럼 흥미롭게 기기를 만지작거리며 이런저런 기능을 파악해나갔다.

"오 카메라와 서식 기능 외에 에너지 탐지기능까지 있네요."

마력이 일정 이상 담긴 물건이 근방에 있다면 숫자를 매기고 빈 서식을 띄우도록 했다.

서식도 현대의 행정 작업의 기억을 떠올려 즉시 만들었다.

텍스트 상자 세 칸. 이거면 충분하지.

각 칸 내부에 명칭과 사진, 간단한 설명을 기재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세팅했다.

"기능은 다양할 걸세. 나도 아직 완벽하게 다루진 못해. 그건 그렇고, 「미궁의 핵」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모르는 것이 문제로군."

스펜서는 고민했다.

체이서가 저 장치를 이용해 「미궁의 핵」의 명칭과 외형을 담는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저주를 품고 있는지 알 방도가 없다는 게 걸렸다.

"뭐 별수 있나. 책자에 있으면 옮겨 적고, 없다면 간략하게 특징이라도 적게."

"네. 문제없습니다. 전에 허가해주신 이 렌즈가 도와줄 겁니다."

「미궁의 핵」에 대한 정보는 체이서의 눈에 아직도 달라붙어 있는 렌즈. 「나른한 학자의 눈동자」가 알려줄 거다.

스펜서는 렌즈의 능력에 대해 듣고는 눈을 빛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저건 체이서의 가호가 하나 더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의 안에서 체이서에 대한 평가가 한 단계 올라갔다.

체이서는 뭔가 일이 진전되어감을 느꼈다.

그 커다란 창고를 대체 어떻게 정리하고 정보를 정리하라는 건가 의문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체계 없는 책자를 들고 다니며 기록하라는 건 아니었나 보다.

이런 기록장치가 있다면 차근차근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부에 거대한 선반이 가득하다고 들었는데, 물건을 그곳에 옮겨놓고 위치 기록까지 해주면 고맙겠어. 물론 무리하진 말고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게."

"알겠습니다."

"위험하지만 미궁에 대한 감시도 부탁하네. 달리 돌아다닐 사람이 없어. 그냥 변동 사항이 있는지만 슬쩍 보고 와주면 돼."

"네. 문제 없습니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요청하게. 창고 관련되어선 자네가 최고 관리자야. 그래. 명칭도 넣지. 직관적으로 「창고지기」가 좋겠군."

창고 관리병, 보급병 따위가 아닌, '창고지기'란 명칭은, 체이서의 권한을 그만큼 높게 치겠다는 의미였다.

더불어 명칭 앞에 '미궁의 핵'이란 대외비 단어를 제거한 것이었고, 실 명칭은 다음과 같았다.

「특무부대 미궁의 핵 창고지기」

"사후 보고도 허가하며 다른 훈련과 임무에선 제외하지. 내 직속으로 넣을 테니 타 장교의 명령은 거부해도 좋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보고는 일주일에 한 번으로 하지."

스펜서는 자신의 「고대 최신 기록장치」를 꺼냈다.

조금 더 사용감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사용 중인 물건으로 보였다.

"매주 보고받을 때 이 장치에 자네가 모아온 정보를 복사할 거야."

체이서는 스펜서의 설명을 들으며 생각했다.

이것으로 할 일이 분명해졌다.

그럼, 하면 되지.

***

이 시각.

전쟁부의 한 회의실.

시원하고 밝은 데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하 강의 정경이 훌륭한 공간에서 몇몇 인물들이 대화하고 있었다.

그 광경만 보면 악당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그저 열심히 회의하는 군인들로 보일 뿐.

"체이서란 병사는 그대로 둬도 되겠나?"

"괜찮습니다. 그곳을 아무렇지 않게 드나드는 가호는 놀랍지만, 정작 미궁을 해결할 능력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신체 능력이 준기사급도 되지 못합니다. 그 정도로는 미궁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미궁 바깥. 창고 내부의 물건들을 정리해서 기록하는 정도의 일뿐이 못합니다. 신경 쓰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그렇군. 그 미궁은 무조건 그곳에서 터져야 하네. 지금보다 더 크고 강력해진 상태로. 특무부대를 전부 잡아먹어야 해."

***

"그래서, 병사에게 수도의 저택을 주기로 했다고?"

싱글거리며 놀리는 목소리에도 스펜서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상인의 핏줄! 대단한 거래를 했네? 나중에 만나봐야겠다."

놀리듯 말하는 남자의 말에, 스펜서가 그를 빤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발터. 그를 해결사로 만들어 데려갈 생각은 하지 말게."

"어허, 협박이야? 어딜 공작님한테!"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인 발터가 다시 실실 웃으며 소파에 등을 파묻었다.

이미 30년지기 친구였다.

재력도 권력도 무의미한 그런 사이.

"안 데려가. 그냥 얼굴이나 봐두려는 거지."

"굳이 왜?"

"그냥. 뭔가 느낌이 오거든. 그 녀석이 엄청난 거물이 될 것 같은 예감이야. 나보다 더 높아질 것 같은? 그건 말이 안 되는데 이상하지?"

발터는 자유로운 늑대 같은 이미지였다.

그러나 야성적인 회색 늑대라기보단, 신비적인 느낌의 하얀 늑대.

그에 걸맞게 멋들어진 바람머리도, 상당한 마법 술식이 깃든 아티팩트 코트도 티 하나 없는 순백이었다.

"더군다나, 그 녀석이 온 뒤로 창고를 생각할 때마다 좋지 않던 느낌이 싹 사라졌어. 아주 편안하거든."

"네 감이라면 틀림없겠군. 그렇다면 더 당당할 수 있지."

스펜서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발터 공작이 배를 잡고 웃었다.

"역시 그 거래를 신경 쓰고 있었던 거지?"

"그거야, 가문 사람들이 집요하게도 손해 본 거래라며 한마디씩 하니까 어쩔 수가 없더군. 하지만 이젠 상관없다."

스펜서는 뻔뻔하게 말했다.

"그 녀석이 네 감대로 거물이 된다면, 난 고작 집 한 채로 거물의 환심을 산 거니까. 이건 성공적인 투자지."

"어차피 5년 뒤에 제대하고 떠나면 무용지물인데?"

"집도 주고 돈도 주고 장비도 주고 명예도 줘가면서 이곳을 떠날 수 없게 만들어 마구 부려먹어줄 계획이다."

그 말에 발터가 되물었다.

"아예 이곳에 정착시켜버릴 생각이야?"

"그래. 그 녀석도 가족과 기반이 수도에 다 있게 된다면, 평생 군인으로 살겠지."

"체이서란 녀석도 잘못 걸렸네? 집요한 여우 때문에 전역이 힘들겠구나."

그렇게 말하던 발터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근데 이번 일은 어떻게 된 거야?"

"뭐가."

"그 창고. 미궁이 생겼는데 해결사 파견이 안 됐다고?"

"그래. 전쟁부 선에서 보류되었다."

"흐음, 이상한데? 나도 시간 나면 들어가서 확인해봐야겠다."

"내가 그렇게 창고 정리할 병력 달라고 할 때는 무시하더니."

발터는 멋쩍은 듯 눈을 피했다.

"그거야 미궁이 생길지 몰랐으니까 그랬지. 지금 얼마나 바쁜데 본부 편제를 늘려? 신병도 얼른 훈련 시켜서 보내줘야 하는 상황인데."

변명하는 발터를 보던 스펜서가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보고 마쳤으니 돌아가겠습니다 대장님."

"벌써 가게?"

"바쁘시다면서요? 얼른 복귀하시죠."

"에이 삐진 거 아니지?"

스펜서는 고개를 젓더니 카페를 나섰다.

잠시 앉아서 차를 홀짝이던 발터 역시, 금방 일어나 카페를 나섰다.

"하아."

발터 공작이 나가는 걸 확인하자 긴장을 푼 사람이 있었다.

후드를 눌러쓴 여성.

그녀는 눈을 빛내며 새로 알게 된 인물의 정보를 생각했다.

체이서 신병. 그가 자신을 도울 수 있을까?

그녀가 찾는 물건이 있을 만한 곳은 이제 '특무부대 위험물 창고'밖엔 남지 않았다.

오랜 기간에 걸쳐 이곳을 알아냈을 때는 이제 목표에 다 온 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의 실력으로도 문제의 창고를 뚫어내긴 어려웠다.

그녀는 이미 한 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온갖 저주를 안고 돌아와 해제하는 데 애를 먹었다.

오히려 쓸만한 마법 재료를 해주하는 데에 소모하며 큰 손해를 보았다.

그래서 수도에 머무르며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오늘 유의미한 성과를 얻었다.

그녀는 '체이서'란 자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문이 닫히며 딸랑하는 방울 소리가 사라지기 전, 그녀가 모습을 감추었다.

***

체이서는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벽에 핏줄기가 새겨지는 '미궁 구역'부터는 극히 조심해서 조금씩 진입해 둘러본다.

별달리 변화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엔, 정리된 선반을 돌며 여러 저주 아이템에 번호를 매기고 기록한다.

일종의 데이터 베이스 작업이다.

[A구역 3-13]

구역은 알파벳으로 나누었는데, 대도서관급의 넓은 공간마다 입구에서 가까운 순서로 A, B, C 등의 알파벳을 매기고, 내부에서 또 가까운 순서로 선반에 숫자를 표기했다.

선반에 적힌 고유한 숫자 덕에 생각보다는 번거롭지 않았다.

창고를 만드셨다는 대마법사님께 감사를.

-심심하다 체이서.

-와 딴 채널 갔다 왔는데 아직도 열일중이네.

-노동을 사랑하는 듯.

이미 정리되어 있는 물건들의 정보를 테블릿에 옮기는 쉬운 작업이 끝나면, 이제 다시 힘든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정리되지 않은 선반을 돌며, 주변에 널브러진 「미궁의 핵」을 주워 선반에 옮기고 테블릿에 기록하는 작업이다.

「비행마의 발굽」 체크.

체이서의 군복에 어지럽게 찍힌 말발굽 자국과 흙먼지에, 드디어 민심이 반전한다.

하지만 채널의 인원들이 웃고 떠들건 말건, 체이서는 꼼꼼히 사진을 찍고, 그걸 테블릿의 서식에 붙여 넣은 뒤, 자신의 눈에 보이는 정보를 기기로 옮기는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물론 모든 물건을 거리낌 없이 만지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고르고 골라, 만만해 보이는 걸 찾아서 정리했다.

"저게 좋겠다."

-쫄보.

-ㅋㅋㅋㅋ 회중시계가 만만해?

이전과는 다르게 성큼성큼 걷는 폼에 자신감이 묻어났는데, 그것은 스펜서 담당관이 제공한 「귀환 주문서」 덕분이었다.

지정된 장소로 순식간에 이동하는 「귀환 주문서」는 상당히 귀해서 아무나 갖지 못하는 물건인데, 위험도를 인정해 최대한 지원하겠다는 스펜서 담당관이 통 크게 배정해주었다.

그 덕분에 체이서의 품 안에는 창고 입구로 이동 가능한 귀환 주문서가 있어서 마음을 든든하게 했다.

"이 일도 하다 보니 익숙해지네?"

체이서는 발버둥 치는 별 모양 회중시계에 팔을 꺾이며 말했다.

-그는 고통에 익숙해져 가는가.

잠깐 실랑이 뒤에, 「밤다운 아픔」이란 회중시계를 선반에 두고 기록을 마친 체이서는 일과 시간이 끝났음을 알고 칼같이 퇴근했다.

뿌듯한 하루였다.

-더럽게 재미없는 하루겠지.

-일상도 이런 일상은 거절이야···.

조금은 이른 식사를 마치고 복귀한 체이서의 방은 4인실이었지만 혼자서 사용 중이었다.

훈련받는 신병들이 훈련 막사에서 생활하면서, 아직 방 배정을 안 했기 때문이었다.

휑해야 했을 숙소. 그러나 불청객이 있었다.

"고양이?"

"야옹."

고양이는 대답하듯 울더니, 순식간에 커다래졌다.

체이서는 즉시 품에 있는 귀환 주문서를 잡았다.

외부로 따라 나온 미궁의 핵인가?

아니면 미궁에서 빠져나온 괴물?

"체이서님 안녕하세요?"

그러나 커다래진 고양이는 괴물도 저주 아이템도 아니었다.

고양이는 어느덧 마녀가 되어있었다.

"아까운 주문서는 찢지 마세요."

그녀의 말에, 체이서가 질문했다.

"누구시죠?"

마녀가 싱긋 웃었다.

"의뢰인이랍니다."

9화. 마녀의 의뢰를 받았다.

9화.

-화내지 마. 마녀다.

-찾아온 이유부터 물어보고 차근차근 가자.

체이서는 그 말에 따랐다.

괜히 불법 침입에 대해 화내기보단, 차분히 자기소개를 요구했다.

그녀는 자신을 마리나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백색 숲의 마녀로, 아티팩트를 만들기 위해 재료 하나를 찾으러 움직이다가 이 부대에까지 흘러들어왔다고 말했다.

"무얼 만들 건데요?"

"「별무리」라는 비약이에요."

그녀가 만들 아티팩트는 「별무리」라는 시약병으로, 가진 지식량에 비례한 마력을 일시적으로 제공해주는 특수한 비약이 담겨있다.

시간이 흐르면 내용물이 다시 차오르기 때문에 아티팩트 취급이다.

자그마치 아카식 레코드에 연결하는 과정이 필요하므로, 재료로 높은 가치의 정보가 담긴 마법 물품이 필요했다.

관념적이지만, 필요한 물건의 조건은 이랬다.

'드러났을 때 한 세계를 격변시킬만한 정보가 담겨있는 기록물.'

그것을 찾기 위해 오래 떠돈 그녀는, 한 양피지를 찾다가 미궁에 대해 알게 되었고, 미궁이 해결되면 그 부속물 「미궁의 핵」이 한 부대의 창고에 들어간다는 것을 조사해냈다.

부대는 손쉽게 뚫어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신병과 조교, 행정관 위주로 있어서 그런가 보네요. 들어가는 데 어렵진 않았답니다."

그렇게 홀로 들어갔다가, 포기하고 뛰쳐나왔다.

"「마법사를 해체하는 열쇠」가 왜 입구 근처 복도에 놓여 있었나 했더니. 마녀님 작품이었네요."

그 물건은 본래 선반에 잘 놓여 있어야 할 물건이었다.

바머가 정리한 물건은 대개 어디에 놓여 있는지도 기록되어 있었고, 그렇게 적힌 물건은 제자리에 있는 게 많았다.

"죄송합니다. 워낙 좋은 물건이라 챙겨 가려다가 도망치면서 두고 간 거예요."

"혹시 인형도?"

"그건 건들지 않아도 쫓아오더라고요."

마녀는 강력한 봉인을 여는 그 아이템의 가치를 알곤 챙기려 했으나, 마법사에게 최악인 저주까진 알지 못했다.

「마법사를 해체하는 열쇠」답게 그녀의 심장 속 마나홀을 해제하려는 강력한 저주를 발했고, 그걸 막아내는 데 상당한 심력을 소모했다고 했다.

열쇠의 저주 외에도 온갖 물건이 저주를 걸어오는 통에 생명에 위협을 느꼈다는 듯하다.

그건 수백 년을 사는 마녀에겐 상당히 낯선 경험이었다.

그 넓고 위험한 창고를 돌아다니며 양피지 하나를 찾기는 그녀에게도 힘들어 보였다.

결국 탐색을 포기하고 나올 땐 집요하게 쫓아오는 「아이슨의 애착인형」으로 인해 죽을 위기를 겪었다고 했다.

"그 열쇠를 다시 만질 수가 없었어요. 그럼 제 마나홀도 허무하게 사라졌을 거예요."

그녀는 본론을 말했다.

"의뢰하고 싶습니다. 제가 찾는 물건. 「호펜의 양피지」를 가져다주세요."

체이서는 의뢰를 받을지 말지 결정해야 했다.

물론, 채널을 보는 시청자들은 의뢰받길 원했다.

그동안 유유자적하게 창고를 정리하는 꼴이, 그들의 기대와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 창고 일만 해서 언제 부자 되냐! 의뢰도 받고 그래야지!

-확 저질러버려!

-이럴 땐 남자답게 콜 외치고. 보상도 챙기고 하는 거야.

-의뢰 해결하면 100포인트.

-오! 포인트 미션은 사실상 처음 아니야?

-그냥 담당관한테 허가받고 하면 되잖아.

체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허가를 받으면 된다.

체이서는 태블릿을 꺼냈다.

그리곤 메신저 기능을 열었다.

해당 물건은 같은 기종끼리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는 기능이 있었는데, 이는 현대의 코코아톡과 다를 바 없었다.

열린 메신저는 뭔가 휑해 보였다.

이 기기에 저장된 연락처는 오직 하나.

'제라딘 스펜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담당관님.

-무슨 일인가 창고지기.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미궁의 핵을 요구하는데, 들어줘도 됩니까? 사용한 물건은 확실하게 소멸한다고 합니다.

-초반부터 꽤 어려운 요청을 하는군.

스펜서는 고민하는 듯 꽤 오래 답장하지 않았다.

이윽고, 답장이 왔다.

-확실히 파괴만 한다면 괜찮네. 파괴할 수 없어 보관하는 거니 대신 치워준다면 고마울 뿐이지. 다만, 그걸 가져가서 악용하고, 빼돌린 게 드러나면 문제가 되겠지.

-그렇습니다.

당연한 소리였다. 그건 위험물을 관리하는 부대에서 위험물을 유출한 것과 다름없다.

현대로 치자면 핵미사일 폐기물 따위를 핵기지에서 유출하는 것이다.

처리가 극도로 힘든 방사능 폐기물 특성상 완벽히 처리해준다는 '믿을만한' 사람이 나타나면 돈을 주고라도 넘겨주겠지만, 그게 무기화되거나 일반인에게 해를 끼쳐 사고를 일으키면 관리자든 지휘관이든 심각한 중죄로 엮이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스펜서는 자신이 말했던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라.'는 것을 지킬 생각인 듯했다.

-앞으로도 미궁의 핵을 부수는 일에 한정해서는 외부 반출을 허가하지.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외부에 문제를 일으키거나 사고가 터지는 순간 바로 금지야. 한 번은 사고에 대한 책임도 막아주도록 하겠네.

-의뢰는 문제없습니까?

-개인 의뢰를 받는 것? 그걸 금지하긴 그렇군. 나도 당장 자네에게 개인 의뢰를 했다네.

그렇군. 체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담당관이 자신에게 얼마나 편의를 봐주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자네는 평민이니 실수는 곧 군 법원행일 걸세. 나도 그런 상황은 원치 않으니 외부 의뢰는 잘 생각해서 받게.

-네 알겠습니다.

-일단 사업 기안서를 하나 만들어놔야겠군. 명칭은 「미궁의 핵 폐기 계획」 정도로. 자넨 이 업무에 담당 병사로 낀 거네.

명목상이나마 미궁의 핵을 취급할 권한 자체를 주려는 모습이었다.

설사 일이 터져도 사고에 대한 벌은 받겠지만, 적어도 무단으로 저질렀다고 하진 않게 만들 생각인 듯했다.

-미궁의 핵을 치우는 데 성공할 때마다 그에 대한 보상을 추가로 주겠네.

-감사합니다.

이 의뢰로 미궁의 핵 하나가 사라지면, 마녀뿐만 아니라 담당관에게도 보상을 추가로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자, 그럼 허락은 받았고. 마녀님을 믿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자 마리나가 「마나의 맹세」를 했다.

순식간에 푸른 빛이 흐르고, 그녀의 심장에 자물쇠가 채워지는 듯한 효과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건 호들갑 떠는 '시청자'들 덕에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와 쿨하네.

-그만큼 급하단 건가?

-더 뜯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다 마녀 화나면 체이서 큰일 남 ㅋㅋ

"그러니까, 제게 받은 「호펜의 양피지」를 확실하게 없애지 않으면 마녀님이 죽는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아니 왜 그렇게 위험한 짓을···?"

"이게 가장 빠르게 믿음을 줄 방법이거든요."

체이서가 얼떨떨해하는 가운데, 그에게 가호가 하나 늘어났다.

자신의 시야 하단에 하얀 나무 아이콘이 생겨났다 흐려지는 것을 확인한 체이서가 당황했다.

「백색 숲의 가호」 [C]------------------

백색 숲은 마녀와 마녀를 위하는 자, 마녀의 맹세를 받은 자, 마녀에게 맹세한 자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마력에 대한 지배력이 일정량 상승한다.

‗‗‗‗‗‗‗‗‗‗‗‗‗‗‗‗‗‗‗‗‗‗‗‗‗‗‗‗‗

체이서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니 당장 큰 의미는 없는 가호였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의뢰를 무르기도 뭐했다.

양피지를 찾아주는 건 나름 일이겠지만, 대가만 괜찮다면야.

"그래서 성공 보수는요?"

그 대가로 마녀가 제시한 보상은 놀랍게도 「아공간 주머니」였다.

"제가 만들어 파는 마법 물품 중에 최고로 귀한 거예요. 운과 소유자에 따라서 결과물이 조금 달라지긴 하는데, 당신에겐 어떨지 모르겠네요."

많아 봐야 1년에 한 번 정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재료를 구하기 힘들다고.

하지만 그런 설명이 없더라도 어쨌든 탐났다.

인벤토리와 아공간 주머니는 판타지 속 주인공들이 가지는 필수품 아닌가?

개인차가 있든 없든 유용할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다.

그것을 대가로 받을 수 있다면야, 무조건 해야지.

더불어 스펜서 담당관에게도 「미궁의 핵」 소멸에 대한 보상을 따로 요구할 수 있다.

확정 보상 하나와 랜덤 보상 하나.

그리고 채널 미션으로 포인트까지.

이정도면 갑작스러운 의뢰를 받을 만하고도 남았다.

"그럼 부탁해요. 호펜의 양피지입니다. 검은색 양피지에 읽을 수 없는 글귀가 붉은색으로 적혀 있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체이서가 먼저 한 일은, 바머의 창고 일람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책자에는 양피지에 관한 내용이 없었다.

영락없이 직접 찾아야겠네.

-모험이다.

-드디어!

체이서는 차분히 아직 돌지 않은 구역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마리나가 말한 물건은 기억 속에 없었고, 채널에서도 별다른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쳐서라도 봤으면 누구 한 명 정도는 아는 티를 냈을 터였다.

-내 생각엔 미궁 구역에 있을 것 같은데?

-그 붉은 구역?

-ㅇㅇ 거기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 본다.

-아카식 레코드에 연결할 제물로 쓴다고 했지. 그 정도 물건이면 깊은 곳에 있겠네.

-그렇지. 유독 위험한 물건은 그나마 창고 깊이 밀어 넣었다고 했으니까.

아니, 불길한 소리나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길한 소리만은 아니지.

저들은 이세계의 강자들이라고 했다.

고인물이나 베테랑, 고수 등으로 불릴 자들.

그들의 감이건, 논리적 판단이건 다수가 옳다고 한 방향이라면 그 말이 맞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A구역의 선반을 먼저 살폈다. 미궁이 아닌 곳에서 찾을 수 있다면 베스트였기 때문.

그러나 역시, 「호펜의 양피지」는 찾을 수 없었다.

물론 체이서도 아무 생각 없이 의뢰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일단, 바머가 적은 창고 일람에 없다는 것은 아쉽기만 한 일이 아니었다.

바머가 적었다는 것은, 그가 살아있을 적. 아주 오래전에 창고에 들어왔다는 거고.

그렇다면 지하층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가져올 수 있을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그건 도리어 최악의 상황이다.

스펜서 담당관이 말하길, 물리력으로 위험한 미궁의 핵은 지하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차라리 상층은 괜찮다.

그곳에 놓인 물건은 「마지막 사령관의 테이블」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아이슨의 애착인형」과 「마법사를 해체하는 열쇠」는 근접해야만 저주를 걸지만, 문제의 테이블은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자살하게 만든다.

「누군가가 버린 어머니의 드레스」 역시 마찬가지.

시야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부모님을 그리며 오열하게 만들고, 자신의 죄를 전부 토해내게 만드는 상태 이상을 건다.

그리곤 그 물건을 지키겠다며 옆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것만으로 지독한 저주를 거는 심각한 물건들을 봉인할 수 있도록, 2층에는 선반 형태로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방이 있어 그 안에 보관한다고 했다.

바머의 일람에 적혀 있는 상층에 대한 경고는 그렇듯 무시무시하지만, 도리어 체이서에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실제로 그런 물건들은 오히려 움직임이 없고, 반항하지도 않다 보니 체이서에겐 편했다.

움직일 힘까지 저주 스탯에 몰빵한 느낌.

당장은 우선순위에서 밀려 그냥 두지만, 나중에는 격이 높은 그 물건들을 2층으로 옮겨두어야 한다.

그런 물건들이야말로 스펜서가 했던 걱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상층에 있어야 할 물건들이 1층에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어서, 이유도 모른 채 저주 방호구가 뭉텅이로 깎여나가는 걸 경험하게 되면, 두렵든 찝찝하든 아까워하든 더 깊이 들어가기 싫었을 것이다.

점점 창고 입구 근처 A구역에 「미궁의 핵」이 쌓이게 됐겠지.

그것은 창고 관리를 힘들게 만드는 주범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바머가 적은 일람에 기록된 정보가 없다는 건, 그의 사후에 들어왔다는 것이 된다.

시기상 그때부턴 해결사들도 1층에서 더 깊숙한 곳에 보관하지 않았다.

기록도 대강하는데 보관이야 신경 썼겠는가? 대충 빈자리에 넣거나 내팽개치고 나왔을 것이다.

다만 위험도가 높은 물건을 입구 근처에 놨다간 아직 강하지 않은 해결사가 휘말릴 수 있으니, 어느 정도 품을 들여 1층 치고는 깊은 곳에 두었을 것이다.

체이서가 매긴 명칭은 'D구역.'

그리고 그곳은 지금 '붉은 구역'이 되어있다.

이 일련의 생각으로 체이서는 깨달았다.

자신이 아무리 피해봤자, 시간만 낭비될 뿐 「호펜의 양피지」는 붉은 구역에 있을 것이다.

-ㅋㅋㅋ 얼른 들어가~

-그러라고 힌트 준 거야. 언제까지 태초마을에서 버틸 거야?

-초보존에서 나가자.

체이서는 결국 붉은 구역 앞에 섰다.

미궁이 되어버린 창고.

체이서는 품속에 지닌 「귀환 주문서」를 한 번 만지고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보니까 일정 반경에 괴물이 몰려 있네요?"

-100%네.

-ㅋㅋ 저기 깊이 들어가면 미궁의 핵이 있을 거야.

"미궁의 핵이요? 그건 여기저기 널려있는데요?"

-창고 내 미궁 말이야. 앞으로 창고 내의 미궁을 '붉은 구역'이라고 하자.

-창고에 붉은 구역을 만들어낸 원흉이 있을 거라는 뜻이야.

-물론 스스로를 지키려 나름의 방비가 되어있겠지만.

-저 괴물들도 방비 중 하나겠지.

"그럼 돌아서 가죠?"

체이서는 별 고민 없이 외곽으로 둘러서 돌아다녔다.

바닥에 놓인 괴식물들과 핏줄 같은 기괴한 선들은 체이서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주지 않았다.

드문드문 돌아다니는 도플갱어와 붉은 슬라임을 피해서 선반을 살폈다.

검은 양피지에 붉은 글씨.

특징적인 생김새여서 보이면 바로 알 수 있다.

다른 「미궁의 핵」들도 개성적인 생김새가 많아서 거르기 쉬웠고.

다만 불편한 것은 어둑한 그림자에 가려진 공간이었다.

라이트 주문서를 쓸 수 있으면 좋았을 테지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괴물들 탓에 일일이 접근해서 확인해야 했다.

붉은 구역에 놓인 선반 위를 차분히 살피며 전진했으나, 시간이 지나도 양피지는 나오지 않았다.

공간은 넓고, 미궁의 핵도 많다.

이렇게 무작정 찾는 것은 효율이 높지 않았다.

"왠지, 붉은 구역의 핵일 것 같네요···."

「호펜의 양피지」가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라면, 이 창고에 생긴 미궁. 붉은 구역의 핵이 되어있을 확률이 없지 않을 것이다.

순간 체이서의 뇌리에 스쳐 지나는 생각이 있었다.

마리나가 미궁을 본다면 무언가 알 수 있지 않을까?

체이서는 붉은 구역을 한 바퀴 돌면서 태블릿을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체이서가 복귀한 뒤, 그를 기다리고 있던 마리나에게 미궁의 광경을 보여주었다.

"벽에 새겨진 이 형태. 문자 같네요? 암호화되어 있지만요."

마리나는 체이서가 찍어 온 사진을 보고는 확답했다.

"아무래도 창고 내의 미궁. 그 핵이 「호펜의 양피지」일 확률이 높겠어요."

체이서는 곧바로 미궁 깊숙이 들어가고 싶었지만, 힘들었다.

시청자들의 조언을 받아 안전한 루트를 찾아 움직이면서, 다음 날엔 더 안쪽을, 그다음 날엔 더 안쪽을 탐사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결국 그날이 왔다.

"얼른 보고 나오죠."

창고 미궁의 깊은 곳으로 진입하기로 한 체이서.

그는 이렇게 된 이상 먼저 붉은 구역의 핵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로 했다.

10화. 미궁 속으로 들어갔다.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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