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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CJU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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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1

001화 방송 시작

"도네이션 천 원!!"

인생 밑바닥.

"감사합니다!"

나이 창창한 스물 중반에 할 짓이 없어서 게임 방송이나 켜는 인간, 고천수.

인사로 의자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는 그의 방송을 보는 시청자 수는 고작 1명.

그나마 단돈 천 원에도 특급 서비스를 선보이는 그의 모습 때문에 그 1명이나마 남아 있는 것이었다.

쿵!

하지만 그 서비스라고 해 봤자 시답잖은 짓일 뿐.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고꾸라진 고천수는 온몸을 치달리는 고통을 견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족하셨습니까, 형님!?"

그래도 시원스럽게 외치려니 시청자의 답변이 돌아왔다.

-죽었잖아, 너.

그 말 대로였다.

모니터 화면에는 죽었다는 표시와 함께 그의 캐릭터가 바보처럼 늘어져 있었다.

"아하하, 죄송합니다."

그는 바로 캐릭터를 세이브 지점으로 소생시켰다.

그가 하고 있던 건 바로 공포 재난 게임.

그가 주로 하는 장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이브 지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플레이를 시작하려고 하자, 화면 한편에 켜 둔 채팅창에서 다시 메시지가 올라왔다.

-넌 나밖에 안 보는데 재미있냐?

제법 날선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띠우며 답했다.

"형님, 섭섭한 소리 마세요. 형님이라도 있어서 자살 안 하고 삽니다."

잡다한 일은 다 해 봤었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대출 한 번 했다가 인생 말아먹은 뒤로 사는 데 의욕 같은 건 없었다.

인생 뭐 있나. 그 와중에 순수하게 그가 좋아서 돈 보내 주는 건 이 시청자밖에 없었다.

-그럼 난 너로 정할래.

갑자기 뭔 소리인지 모를 말이 올라왔다.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답했다.

"네~. 형님의 원픽, 감사함다."

쿵.

캐릭터가 들고 있던 총을 교체하는 사이, 갑자기 땅에서 울림이 있었다.

"뭐지?"

그가 바닥에 몸을 처박았을 때와는 다른 울림이었다.

콰앙!

"아, 시발!"

갑자기 온몸이 흔들리는 바람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형님, 들었어요? 밖에 뭐 터졌나 봐요."

그러면서 그는 창문을 열어 보았다.

콰앙!

저 멀리서 무언가가 연달아 터지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뭐야."

주변이 뭔가 어수선했다.

사람들은 재난 영화에서나 나왔던 장면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형님, 뭔가 이상...."

모니터를 쳐다보던 그는 말을 멈췄다.

모니터는 꺼져 있었다.

"뭐야, 이거."

본체까지 맛 간 것 같아 몇 번 건드려 보았지만 아예 다시 켜지질 않았다.

"아이 씨."

그는 자취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적어도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라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조심스레 건물 밖으로 나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마침 저만치에서 뛰어오는 여자 한 명.

그는 상황을 물-

"저기요?"

"꺄아아아아아아악!"

-으려고 했으나 그녀는 아무것도 제대로 들으려고 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도망가 버렸다.

순식간에 사라진 그녀.

마치 미친년처럼 뛰어가던 그녀를 고천수가 멍하니 상기하고 있을 때였다.

-이 새끼 뭐야? 딱 봐도 3초 컷 나오누ㅋㅋㅋㅋ

-존나 어벙해 보이네 병쉰ㅋㅋ

-뭐고? 플레이어를 뭔 얼빵이로 잡았냐ㅋㅋㅋ

"!?"

고천수는 곧 자신의 눈 위에 떠오른 채팅 로그를 바라봤다.

"뭐, 뭐야!?"

-뭐, 뭐야? ㅋㅋㅋㅋㅋㅋ엌ㅋㅋㅋㅋㅋ

-얼간이 동기화율 40%! 삐비비비빅!

-스트리밍 5초 만에 얼간이가 된 스트리머가 있다? 삐싱빠싱뿌슝!

"아... 아니! 이게 무슨! 자, 잠시만요. 따라하지-."

-뜨라하지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천수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려 했으나, 시야에 떠오른 채팅창은 마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를 놀리고 있었다.

그는 말문이 막혔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크르르르르륵--!

그는 채팅창에서 이내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크게에엑!

이유?

"저, 저건 또 뭔...!"

그것은 바로 그의 앞에 나타난 괴물 때문이었다.

본판은 인간이지만 온몸이 뒤틀려 피로 얼룩져 있는 존재.

그의 머릿속에서 당장 떠오르길, 그것은 좀비.

-사망각 떴따!!!!!!!!!!

-엌ㅋㅋㅋㅋㅋ 스트리밍 30초 만에 바로 사망각ㅋㅋㅋㅋ

-(대충 고인 이모티콘)

-빨리 다음 플레이어 찾아라. 존내 노잼이다ㅋㅋ

크르르르륵!

"뭐냐고, 이거!"

좀비가 바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며 고천수는 뒷걸음질 치다가 뒤로 엎어졌다.

그사이에 좀비는 고천수에게 달라붙어 그의 목을 물어 버리려고 했다.

"으아아아악! 으아악!"

본능적으로 좀비를 발로 차고 일어난 고천수는 무작정 뛰어갔다.

"시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사방에 좀비들이 가득했다.

크아아아아아!

뒤에서 좀비가 쫓아왔다. 고천수는 양팔을 앞뒤로 흔들며 미친 듯이 속도를 높였다.

그러자 좀비도 괴성을 지르며 뒤로 따라붙었다.

-친구! 친구 하자!

-우리 존나 잘 어울린다궄ㅋㅋ

-손만 잡는다고!

결국 잡혔다. 길거리에서 둘이 실랑이를 이어갔다.

좀비가 계속 고천수의 목을 노리고 송곳니를 들이밀었다.

"개시발...!"

발로 차 버리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고천수는 계속 뒷걸음질 치다가 트렁크가 열려 있는 차에까지 밀렸다.

"으아아아아악!"

힘겨루기를 하다가 고천수는 트렁크에 몸이 밀려들어 갔다.

-엌ㅋㅋㅋ 먹이 수납.

-그러게 친구 하자고 했지...!

-말 안 듣는 아이는 뭐다?

"꺼져...!"

고천수는 좀비의 얼굴을 계속 주먹으로 쳤다.

좀비는 통각도 없는지 그런 그에게 몸을 계속 들이댔다.

거의 트렁크에 같이 올라탈 정도가 되었을 때, 그는 겨우 다시 발을 활용할 수 있었다.

캬악!

배를 얻어맞은 좀비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때, 고천수는 바로 트렁크의 문을 잡아 닫았다.

"하아, 하아."

시야가 어두워졌다. 거친 숨을 고르고 있자니 트렁크를 긁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 있는 좀비가 트렁크를 두드리는 것이었다.

고천수는 깜짝 놀라 주춤대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손을 더듬어 찾을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뒷좌석과 연결되어 있는 작은 문이었다.

곧장 그 문을 열어젖히고 몸이 들어가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부터 뻗었다.

크아아아아!

그러자 뒷좌석에 있던 다른 좀비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마치 금방이라도 그 더럽고 끔찍한 입으로 손을 집어먹을 기세였다.

"으아아아악! 또냐고!"

팔을 붙잡혀서 끌리는 와중에 고천수는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샹크스! 팔이!

-새로운 시대에 두고 오겠다!

고천수는 비명을 지르다가 아예 상의를 벗어서 좀비에게 넘겨주었다.

쿠당!

옷을 넘겨받은 좀비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바로 뒷좌석과 통하는 통로를 닫아 버렸다.

쿵쿵쿵쿵!

양쪽에서 좀비가 트렁크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와중에 앞이 안 보여도 채팅 로그는 전부 보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그는 생각지도 못한 위험에 빠져 있었다.

"하아."

숨이 답답해졌다. 고천수는 다시 주변을 더듬었다.

뭐라도 있길 바랐다.

"왜 시발, 나한테 이런 일이...!"

찾은 건 트렁크를 여는 레버뿐이었다.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후우."

레버를 붙잡고 잠시 심호흡했다. 하나 둘 셋.

쾅!

등을 받치고 트렁크를 열자마자 큰 충돌음이 들렸다.

밝아지는 시야로 확인하니 트렁크 덮개에 맞은 좀비가 비틀대고 있었다.

고천수는 그사이를 틈타 자취방 건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빠르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1층 공동 유리문을 통과했다.

"빨리빨리빨리!"

주문을 걸 듯 외치자 곧 유리문이 닫혔다.

트렁크와의 충격에서 정신을 차린 좀비는 유리문 뒤에 서있는 고천수를 보고 빠르게 뛰어왔다.

유리문은 강화유리로 되어 있었다. 웬만하면 별 일은 없을-.

콰장창!

"시바아아알!"

시원하게 깨지는 유리문을 피해 고천수는 뒤로 물러났다.

크르르르르륵!

좀비가 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고천수를 올려다봤다.

"좀...!"

그는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건물 곳곳에서 비명이 들리고 있었다.

이 사태를 겪고 있는 건 역시 그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

좀비가 너무 빨리 좇아오는 통에 자취방으로 가지 못했다.

계단을 계속 올라 옥상문의 문고리를 잡자니 잠겨 있었다.

덜컥덜컥.

"진짜 미쳐 버리겠네...!"

-용맹하다. 배수진 쳤네. ㅋㅋㅋ

-병신아. 밀지 말고 당겨야지.

순간 고천수는 문을 당겨 보았지만 되지 않았다.

-이 새끼, 우리 채팅 보고는 있네. ㅋㅋㅋㅋ

-난 또 시청자 볼 줄 모르는 스트리머인 줄 알고... 훌쩍.

이 상황이 뇌내 망상이든 뭐든, 실감하고 있는 공포감은 진짜였다.

고천수는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좀비를 보며 문고리를 계속 돌렸다.

삐걱.

어느 순간 문이 열렸다. 그냥 심하게 녹슬어서 잠긴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쾅!

옥상에 발을 디디자마자 문을 세게 닫은 고천수는 굄목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있는 거라고는 고장 난 실외기뿐이었다.

그는 실외기를 끌어와 문 앞에 놓았다.

쾅쾅쾅쾅!

옥상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천수는 잠시 옥상 난간에 몸을 기대고 숨을 고르려고 했다.

크르르르륵!

하지만 모든 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옥상에도 좀비가 있던 것이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모습을 보니 심지어 뚱땡이 집주인 아저씨였다.

미친 듯이 월세를 올려 대더니 진짜로 괴물이 되어 버렸다.

크르르륵!

달려드는 집주인 좀비를 피해 고천수는 옥상을 내달렸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초록색 상자에 발을 걸려서 넘어졌다.

"크악?!"

조금 전까지는 없었다는 변명은 못했다.

틈도 주지 않고 집주인 좀비가 고천수에게 올라타 이빨을 들이밀었던 것이다.

-좆됨.

-햄버거 게임 하려나 봄.

-근데 저거 보급함 아님?

"끄아아아악!"

집주인 좀비는 미친 듯이 무거웠다.

고천수는 위에서 발버둥 치는 집주인 좀비를 겨우 버티다가 순간 넋을 놔 버렸다.

-아, 황천각 떴죠.

-쌌네.

쌀 뻔하긴 했다. 순간 온 힘을 다해 집주인 좀비를 옆으로 밀어냈던 것이다.

크아아아아!

포기하지 않고 집주인 좀비는 다시 달려들려고 했다.

"지랄 맞네, 진짜...!"

고천수는 빠르게 다시 난간으로 향했다.

집주인 좀비는 그런 고천수를 잡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월세나 내려, 미친 새끼야!"

순간 고천수는 집주인 좀비를 피해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집주인 좀비는 그대로 난간에 허리를 부딪치고 앞으로 넘어갔다.

크아아아아!

거대한 뱃살이 출렁이면서 그 몸을 완전히 난간 밖으로 옮겨 놓았다.

크아아아아....

집주인 좀비는 그렇게 난간 밖으로 추락해 사라졌다.

고천수는 그대로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후우... 살았...."

쾅쾅쾅쾅콰앙!

문을 막아 놨던 실외기가 밀려났다.

한 번 돌려 놨던 문고리는 고장 났는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 탓에 그냥 열려 버린 문으로 좀비가 팔을 뻗고 있었다.

"미쳤냐고, 진짜."

재난도 이런 재난이 없었다. 일단은 일어나서 다시 문 앞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못 들어오게 막아야 했다.

등으로 실외기를 밀자니 안에 있는 좀비는 더욱 힘차게 문을 밀었다.

버티고 버텼지만 고천수는 결국 밀려났다.

실외기를 밀고 들어오는 좀비. 한 마리도 아니었다.

무려 세 마리나 있었다. 맨손으로 상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아, 시발. 트라우마 떠오르게 하네.

-3대 1에 옥상이면...!

-찐따 쉑들ㅋㅋㅋ 또 본인들만 아는 거 나왔죠.

어쩌질 못하는 사이 뒷걸음질 치다가 초록색 상자에 발이 닿았다.

고천수는 거기로 시선을 향했다.

"잠깐 이거...!"

순간 스트리머의 감각이 그를 일깨웠다. 아까 전에 누군가 이걸 보급함이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순간 초록색 상자를 열어젖혔다.

그러자 그 안에서 나무로 된 야구 방망이 하나가 나타났다.

"이건...!"

마치 승리를 갈구하던 아서가 찾아낸 엑스칼리버.

-이제 재미 좀 보나요.

쉴 새 없이 올라오는 채팅이 고천수의 시야 한 편을 좀먹었다.

그랬다.

그는 스트리머 고천수였다.

방망이는 곧장 다가오는 3마리의 좀비를 향했다.

002화 데드 보어

"으아악!"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

"시발!"

불행히도 고천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말이었다.

3마리의 좀비에 둘러싸인 고천수는 당장이라도 케밥이 될 처지였다.

방망이를 휘두르며 겨우 좀비들을 떼어낸 고천수는 길 잃은 얼간이마냥 엉거주춤 움직였다.

"이이이익!"

달라붙은 한 마리와 힘겨루기를 하려니 나머지 두 마리가 달려들었다.

순간 몸을 날려 옆으로 피한 고천수는 실수로 방망이를 놓쳐버렸다.

"안 돼!"

잘 쓰지는 못해도 무기는 무기였다.

얼른 기어가 다시 손에 쥐고 일어나 달려드는 좀비들에게 휘적거렸다.

-애쓴다, 시바. ㅋㅋㅋㅋ

-누가 번트라도 가르쳐줘라.(왈칵)

타격으로 상대하는 것은 어려웠다.

생각을 바꾼 고천수는 바로 야구 방망이를 바닥에 내리쳤다.

콰자작!

거칠게 쪼개진 방망이가 고천수의 손에 상처를 입혔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자해용이 아니었다.

크아아아아!

좀비들이 차례 없이 한 번에 몰려든다는 점을 이용, 고천수는 쪼개진 방망이로 좀비들의 목을 한 번에 꿰뚫었다.

크욱. 크르루륵.

서로 몸이 꿰인 좀비들이 어정쩡하게 비틀거리다가 넘어졌다.

-이걸 이렇게?

-이 새끼 생각보다 대담한데?

-설렜다, 방금.

좀비들이 서로 엉켜서 움찔대는 동안, 고천수는 옥상 출구로 달려갔다.

계단에서 언제 또 다른 좀비들이 올라올지 몰랐다.

도망쳐야 했다. 고천수는 자취방이 있는 곳을 향해 서둘러 뛰었다.

"제발, 제발."

3층에 내려와 복도를 살피자 다행히도 좀비가 보이지는 않았다.

고천수는 얼른 도어락을 열고 자신의 자취방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환경을 보자 절로 한숨부터 나왔다.

"하아, 제기랄."

하지만 금세 정신을 차렸다.

상의부터 새로 찾아 입고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상황 때문인지 키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어디 있냐고, 좀!"

늘 두던 데가 있는데 보이질 않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한참을 찾다가 주머니에서 갑자기 묵직한 느낌을 받았다.

"어?"

키가 주머니에 있었다. 휴대폰만 있는 줄 알았더니 착각했던 것이다.

-가스불도 끄고 나가라.

-걱정 마. 형도 요새 건망증 심해. 흑흑.

한숨을 쉰 고천수는 현관으로 가 문구멍으로 밖을 살폈다.

복도에 좀비의 유입은 없었다.

고천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갔다.

건물 밖으로 향하자 그는 자연스럽게 탄식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존나 많네...."

좀비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살아남으려면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몸을 낮추고 천천히 건물 뒤편에 있는 주차장으로 가서 스쿠터 한 대를 찾았다.

고천수는 곧장 키를 꽂고 시동을 켰다.

부다다다.

낡은 스쿠터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르륵?!

소리에 반응한 좀비들도 몰려 있었다.

고천수는 지체할 것 없이 스로틀을 돌렸다.

스쿠터는 시원하게 앞으로 달려 나갔고-

-쿠당탕!

좀비 한 마리와 부딪친 뒤, 바닥에 쓰러졌다.

"아아아아아!"

고천수는 비명과도 같은 탄식과 함께 스쿠터를 일으켜 세웠다.

물론 그사이에 좀비들도 가까이 몰려왔다.

이대로는 빠져나가는 게 불가능했다.

고천수는 자신의 스쿠터를 버리고 다른 쪽으로 달려 나갔다.

주차장의 구석까지 간 고천수는 다른 오토바이를 찾았다.

물론 찾아봤자 키가 없을 거라는 점에서 절망적이었다.

"아니지...!"

옆에 작은 창고가 있었다. 집주인이 쓰던 곳이었다.

안에 집주인의 오토바이와 키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다행히 가벽으로 된 창고 문은 헐거웠다.

몸으로 들이받고 안으로 들어간 고철수는 곧장 키부터 찾았다.

"키...! 키!"

175cm로 성장이 멈췄을 때도 이렇게 키를 외치진 않았다.

절박함에 하늘이 응답했는지 벽에 있는 선반에서 키를 찾아낼 수 있었다.

고천수는 그 키를 가지고 창고 안에 세워져 있던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이거 튜닝돼있는데?

-폭주족이었냐.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하고 달라서 약간 낯설었지만, 어차피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키로 꽂고 시동을 켠 뒤 부서진 문으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그사이에 이쪽까지 좀비들이 몰려와 있었다.

고천수는 주차장 출구가 아니라 옆에 있던 시민 산책길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부아아앙!

오토바이가 산길을 달리며 마구 튀어 올랐다.

"크윽, 시바."

산악용 오토바이가 아니라 몰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산책로로 조성되어 있어서 도망칠 만은 했다는 게 다행이었다.

언제 어느 때에 좀비가 나타날지 모르기에 오토바이를 미친 듯이 몰고 가자 어느 순간 산등성에 있는 동네 체육시설에 다다랐다.

크아아아아.

좀비 소리가 들렸다. 긴장하며 주위를 살펴보자 몇 마리의 좀비가 느릿느릿 다가서고 있었다.

-아이고, 어르신들이네.

-효도 한번 해라!

노인 좀비들이었다. 미안한 일이지만 고천수는 누군가에게 효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다면 백수 스트리머로 살지는 않았을 터.

부아아아앙!

다가서는 노인 좀비를 오토바이로 밀어버리며 고천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캬. 망설임 없이 화끈한 거 보소.

-ㅋㅋㅋㅋ 이 새끼 GTA 좀 한 것 같은데?

-존나 무서워 ㅋㅋ

좀비 앞에 양심의 가책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오토바이로 체육시설들 사이를 통과한 고천수는 시청 쪽으로 향하는 내리막길로 향했다.

덜커덩덜커덩.

금방이라도 오토바이가 넘어질 것 같았지만 더욱 불안한 건 그의 심리 상태였다.

'부모님은...!'

노인들을 보니 나이 든 부모님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여기서는 좀 떨어진 곳에 살고 있기에 당장 실체를 확인하기는 어렵고, 연락이라도 해보아야 했다.

크아아아아.

질리지도 않는지 눈앞에 좀비가 또 출현했다.

하지만 이곳은 내리막길.

밀어서 뛰어넘기에는 아까 전보다 좋은 환경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고천수는 스로틀을 당겼다.

부웅.

그 결과, 실수로 바위를 밟고 높게 뛰어올랐다.

"어?"

방향이 틀어진 오토바이는 길이 아니라 가파른 측면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자, 잠깐! 끄아아악!"

절벽은 아니었지만 오토바이에 맞는 길이 아니었다.

결국 오토바이는 옆으로 굴러버렸고, 고천수는 땅에 쌓여 있던 잎사귀를 씹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덜컥.

어딘가에 오토바이가 걸렸다. 고천수는 홀로 튕겨 나가 작은 계곡 옆에 떨어졌다.

"컥?"

엄청난 충격에 고천수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잠시 동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몇 분 지나고 나서야 제대로 숨을 들이 내쉬며 겨우 정신을 차렸을 뿐이었다.

"...망할."

비틀비틀 걸어가며 상태를 확인했다.

무기가 없었기에 주변에 있던 큰 나뭇가지를 손에 쥔 고천수는 계곡을 따라 걸었다.

부스럭.

예민해진 감각에 고천수는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새가 날아간 것뿐인지 당장 보이는 것은 없었다.

조심스레 폰을 꺼내서 상황을 확인하려고 해봤다.

"아무것도 안 되잖아..."

전화가 걸리질 않았다. 문자 전송 실패란 말은 처음 봤다.

SNS 메신저를 활용해 봤지만 기존에 많이들 쓰던 것은 사용이 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되는 게 딱 하나 있었는데, 라인이라는 메신저였다.

"뭐야.... 어떻게 되는 거야, 이건."

인터넷 포탈도 접속불량이 뜨는 마당에 라인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부모님은 그 메신저를 쓰지 않았다.

"아씨, 그러게 진즉에 이거 쓰라니까. 왜 다 안 쓰냐고!"

답답함에 머리를 쥐어짰지만 이제 와서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메시지는 보내진다고 해도 상대 쪽에서 수신이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부스럭.

다시 한번 들린 소리에 고천수는 고개를 돌렸다.

멧돼지였다.

"아, 난 또...."

좀비보단 낫다며 안심하던 고천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쪽을 보고 있는 멧돼지의 눈이 유달리 붉게 충혈되어 있던 것이다.

"설마...."

-데드 보어 떴다!

-로드킬하더니 로드킬 당하게 생겼네.ㅋㅋㅋㅋ

-뛰어, 얼간아! 뛰어!

주춤대던 고천수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데드 보어를 보며 빠르게 돌아섰다.

"으어아아아아!"

꾸에에에에엑!

데드 보어가 폭주 기관차처럼 뛰어왔다.

고천수는 공기 풍선처럼 휘적거리며 계곡 길을 따라 뛰었다.

첨벙첨벙!

도중에 물에 뛰어들어 데드 보어의 속도를 늦추려고 했지만, 오산이었다.

"아나, 시발!"

데드 보어에게 그런 낮은 책략은 전혀 유효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천수만 속도가 느려졌던 것이다.

-옘병. ㅋㅋㅋ

-산짐승 출신한테 그딴 게 통하겠냐, 인간아.

판단미스였지만 만회할 기회는 있었다.

하류 구간에 갑자기 물이 깊어지는 출입 금지 지역이 있었다.

"따라와! 따라오라고!"

일부러 데드 보어를 도발하며 금지 구역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근처에 말뚝으로 박혀 있던 비상용 밧줄을 풀어서 몸에 메고, 튜브를 찾아 품에 낀 채 일부러 깊은 곳에 뛰어들었다.

스르륵.

소용돌이 같은 물살이 몸을 휘감는 게 느껴졌다.

공포심이 심장을 옥죄었지만 지금은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꾸에에에에엑!

멍청한 데드 보어는 그대로 고천수가 있는 쪽으로 뛰어들었다.

"제발... 제발...!"

데드 보어는 물살을 이기고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남은 거리는 고작 1m 남짓이었다.

"으아아아아악!"

버둥거리며 데드 보어에게 물장구 공격을 먹이는 순간이었다.

데드 보어가 갑자기 밑으로 끌려들어갔다.

꾸억....

발버둥 치던 데드 보어의 몸이 소용돌이에 올라탔다.

꾸르르.

물속에서도 미쳐버린 식탐에 고천수의 발목을 물어버리려고 했다.

그때마다 고천수는 발을 들어 올려 어떻게든 공격을 피해냈다.

꾸르르륵....

결국 데드 보어는 깊은 수심 속으로 끌려들어가 버렸다.

"하, 하아아."

고천수는 그제야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야, 이거....

-좀 감탄했다.

-판단력 오졌다.

고천수는 밧줄을 천천히 끌어당겨 물 위로 올라왔다.

"하아하아."

온몸이 물에 젖었더니 더 힘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고천수는 튜브를 벗고 밧줄을 푼 뒤, 옷의 물을 짜내서 다시 입고 고목 옆에 몸을 눕혔다.

크아아아아....

"아, 망할. 진짜 돌아버리겠네."

산 위에서 만났던 좀비들이 내려오는 소리였다.

할 수 없이 다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그가 알기로 시청에 재난 시 피난구역이 마련되어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 기억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곳으로 향해야 했다.

몸을 피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공공장소가 거기뿐이었다.

"응?"

내려가다가 공기 펌프기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노즐의 끝에 있는 손잡이형 밸브가 주유기처럼 생긴 물건으로,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몸에 붙은 것을 털어내라고 설치해둔 것이었다.

크아아아아!

"으악!"

갑자기 나타난 좀비에 고천수는 펌프기의 공기를 바로 쏴버렸다.

치익!!!

순간 얼굴 피부가 일렁인 좀비가 잠시 주춤거렸지만, 그뿐이었다.

크아아아아아!

"쫌!"

달려드는 좀비의 입에 밸브를 쑤셔 넣고 공기를 미친 듯이 쏘아댔다.

치익! 치이이익!

밸브와 함께 그의 손을 씹으려는 좀비가 압축되어 있던 공기에 밀려 번번이 공격에 실패했다.

"꺼지라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뒤, 고천수는 바닥에서 일어나려는 좀비의 입에 밸브를 끼워 넣었다.

치이이이익!

크륵, 크르우으으윽!

열어서 고정해둔 상태의 밸브 때문에 좀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발버둥 쳤다.

-번지점프 간접 체험. ㅋㅋㅋㅋ

-이 집 공기 맛집이네.

좀비가 공기나 처먹고 있을 때가 기회였다. 고천수는 빠르게 장소를 벗어났다.

"헉, 헉...."

군대에서도 이렇게 많이 뛰어본 적은 없었다.

여러모로 한계가 찾아올 때쯤, 아래에 있는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청, 시청이다...!"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괜찮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뭔가 이거...."

불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지키고 있으면 누군가 있어야 할 텐데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왜 아무도 없는 거야."

시청 주차장까지 다다랐지만 몇몇 개의 차들만 보일 뿐이었다.

심지어 남아 있는 차들은 문이 대부분 열려 있었다.

피가 흩뿌려져 있는 것이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쾅!

순간 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웬 좀비 하나가 차에 몸을 처박고 쓰러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고천수를 보고 달려오다가 흥분해서 저런 모양새가 된 듯했다.

문제는,

이잉이잉이잉이잉!

부딪친 차에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는 것.

"나한테 왜 이러냐, 진짜!"

고천수는 절망에 빠져 소리치며 시청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003화 헬 프로그 (1)

문을 걸어 잠그자 그 앞으로 좀비들이 달려들었다.

크어아!

크아아아!

여기도 유리문이었기 때문에 그리 안전해 보이지는 않았다.

-시장님! 문 열어 주세요!

-만날 이렇게 걸어 잠그실 겁니까!

이 정도는 아직 걸어 잠근 것도 아니었다.

고천수는 비상 레버를 찾아 문 안쪽의 방화벽을 내려 버렸다.

"후."

시야가 가려져 좀비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위험이 사라졌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고천수는 천천히 걸어가 벽에 걸려 있는 시청의 내부 안내도를 살폈다.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왜 없지?'

피신할 수 있는 곳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각 부서가 어디에 위치한다는 정도의 정보밖에 없었다.

바스락.

조금 걸어가자 잔해들이 발에 걸렸다. 난리가 났던 흔적이었다.

'뭔가 있나?'

중앙 문만 걸어 잠근 것이기 때문에 어딘가로 좀비가 들어올 수도 있었다.

고천수는 천천히 1층을 살폈다.

"음...."

전등이 전부 들어와 있어서 어둡지는 않지만, 창문은 전부 닫혀 있었다.

사람들이 나가기 직전까지 시청의 모든 곳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럼...."

잔해는 모두가 이곳에서 도망치면서 남긴 흔적.

애초에 여기엔 피신할 곳 따윈 없었다.

"젠장."

머리가 아팠다. 그렇다고 주저앉지는 않았다.

전등이 들어온다는 건 아직 전기가 끊기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고천수는 지역 예비군으로서 유사 시 근처 변전소를 지키는 임무가 있었다. 동지들이 현역 부대와 함께 거기로 이동했을 테니 갈 곳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청에 있는 건설도시국 부서로 향해서 자료를 뒤적거렸다.

평소에 말만 들었지 변전소가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멀잖아."

지도를 확인해 보니 지금 상황에서 걸어서 갈 수 있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어차피 나만 갈 수도 없다지만....'

여기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부모님의 집을 찾아가야 했다.

문제는 거기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냐는 것이었다.

-레알 영혼 나간 표정.

-휴강인지 모르고 학교 나간 아싸 같자너. ㅜㅜ

제대로 된 위로는 없었지만 주목할 만한 점은 있었다.

-근데 이놈은 왜 시장실은 안 가냐?

-그러게. 시장이 여기서 보고 받았겠냐?

번뜩 정신을 차린 고천수는 그 길로 시장실로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시장의 업무 책상에는 여러 가지 자료가 올라와 있었다.

"이건...."

그중에서 가장 시선이 쏠린 것은 조금 전에 보았던 것과 같은 지도.

다만 ×와 화살표가 가득 그려져 있었다.

딱 봐도 가도 되는 곳과 안 되는 곳을 구분지어 놓은 것이었다.

'좋아, 챙겨 가....'

띠디디디딕!

순간 들린 소리에 고천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각 기관에서 지정한 대피 공간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장실에 걸려 있던 TV였다. 책상 위를 만지다가 리모컨을 눌러 버린 것일 터.

심장이 떨어질 뻔했기에 고천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전 세계에 동시 다발적으로 재난이 속출하고 있으며, 돌발 상황이 많아 향후를 예측하기 힘든 상태입니다. 정부는 최선을 다해 국민을 보호할 것만은 약속드립니다.』

비상 방송이었다. 사람도 없이 목소리만 새어나오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도처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종류의 괴물들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관계 기관의 지시에 따라....』

고천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존을 위해서는 꾸물대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도를 챙기고 나가 다른 방에서 백팩 하나를 획득했다.

지하실로 내려가니 구내식당이 있었다.

주로 자판기에 있던 과자나 음료를 챙겨서 가방에 넣고 다시 1층으로 향했다.

창문을 몇 개 살피자니 좀비들이 몰려 있지 않은 곳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빨리빨리.'

조용한 움직임이었지만 걸음만은 서둘렀다.

주차장에 있는 차가 아직도 경보음을 울리고 있으니, 좀비들이 더 몰려들기 전에 빠져나가야 했다.

시청 아래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려니 아파트 단지를 맞닥뜨릴 수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악!

뭔가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긴 아냐.'

고천수는 발길을 돌렸다.

사람들이 많은 쪽이 오히려 눈에 띄기 쉬웠다.

"후욱, 후욱."

달리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애초에 백수기는 해도 체력 하나는 나쁘지 않았다.

"저건...?"

가다 보니 자동차 판매 지점이 보였다.

일단은 무작정 그 안으로 들어가 봤다.

'혹시 키만 있으면...!'

서랍이 있을 만한 곳이면 다 뒤지고 다녔다.

하나쯤은 발견될 만하거늘,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덜커덩!

그 와중에 빼 놓았던 서랍이 떨어지는 소리에 고천수는 감전된 것처럼 몸을 움찔했다.

-번개 맞은 줄.

-아, 아까부터 진짜ㅋㅋㅋㅋ

-놀라는 거 귀엽네.

고천수는 채팅창을 보며 중얼거렸다.

"뭔지 모르겠다, 진짜."

처음 말 걸었을 때 놀려 대기만 하기에 애써 무시하고 있었지만, 역시 신경이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었다.

-뭐, 우리?

-ㅜㅜ 슬프다. 시청자 모르는 척.

-익명성을 훼손하지 마라! 방송이나 잘해라! 우우!

역시 답을 얻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고천수는 혀를 찬 뒤 사무실을 뒤져 진귀한 물건을 하나 찾아냈다.

"이건...."

전동 킥보드였다. 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출퇴근용으로 쓰던 것이라면 납득이 됐다.

바로 나가 킥보드를 타고 이동을 시작했다.

소음도 별로 없는 것이어서 이동용으로 완전히 안성맞춤이었다.

"이쪽으로 가서 다리를 건너면 된다는 거지...?"

지도에서 봤던 길을 기억하고 그쪽으로 킥보드를 몰았다.

지금 부모님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음?"

다리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몇몇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여기야, 여기!"

"이쪽으로 가자고!"

"서둘러!"

멀쩡한 사람들을 보니 반갑기도 했지만 동시에 불안감이 솟구쳤다.

고천수는 등골이 서늘한 것을 느끼고 서둘러 킥보드를 멈췄다.

그리고 근처에 숨어서 사람들을 바라봤다.

"다들 빨리... 컥?"

한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 고천수는 눈을 크게 뜨고 상황을 살폈다.

"뭐, 뭐야. 앞에 방금... 끄아아악!"

"괴물이다! 도망쳐!"

"꺄아아아악!"

사람들은 무언가에 꽂혀 하나씩 사라져 버렸다.

고천수는 주먹으로 벽을 팍 쳤다. 여기도 안전하지는 않았다.

'진짜 되는 일이 없네.'

봤던 것부터 떠올렸다. 사람들을 끌고 간 것은 기다란 창 같은 것이었다.

-방금 그거 혀 아니었냐?

-아, 나 뭔지 알겠다.

'혀? 꼬챙이 같았는데?'

고천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좀 더 살펴보기 위해 고천수가 얼굴을 앞으로 내밀자 반응이 더 쏟아졌다.

-야, 병신아. 그거면 혀 길이만 10m니까 고개 처넣어.

-갑자기 다 아는 척 오지죠. ㅋㅋ

-뭔 다 아는 척이야, 개새꺄.

-저 혀는 회전 잘 안 된다고. 줄자나 다름없어서 정면으로 마주치지만 않으면 된다고. ㅇㅋ?

저들끼리 싸우는 꼴을 보고 고천수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여기 있으면 안전하다고?'

말만 들어보면 자신이 모습을 보이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머물러있을 수는 없었다.

고천수는 킥보드를 밀면서 조심스럽게 앞으로 전진했다.

'약점이... 있는 거면....'

반드시 여기를 통과해야 했다. 다른 길로 우회할 수 있지만 시간이 너무 걸렸다.

그렇게 되면 어차피 안전한 곳은 없어질 터.

휘릭!

혀, 라고 한 분홍색 꼬챙이가 순간 앞에서 무언가를 꿰뚫고 가져갔다.

고천수가 멈칫하고 잠시 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괴물이 하나 있었다.

"개구... 리?"

길이가 3m는 될 법한 이족보행 개구리였다.

눈알이 기괴하게 돌아가고 있는 그 개구리는 곧장 시선을 고천수에게 향했다.

타악!

혀가 날아오는 찰나, 고천수는 바닥을 박차고 골목 사이로 몸을 날렸다.

"크으으윽!"

킥보드가 고천수 대신 박살 났다. 그도 몇 번 구르게 되면서 충격이 가해졌지만 바로 일어나 달렸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다시 마주치면 이쪽이 꼬챙이에 꿰이게 될 수도 있었다.

'일직선을 피하라는 거지?'

고천수는 한 길로만 달리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

키레레레렉!

쫓아오는 괴성을 듣고 새롭게 방향을 잡기를 수 번, 커다란 철제 쓰레기통을 발견하고 고천수는 그 안에 몸을 숨겼다.

키레렉!

근처로 놈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상대할 엄두는 안 나지만 여기까지 유인하기는 했다.

틈을 봐서 좀 이따 다리 앞으로 먼저 가면 분명히 통과할 수 있을 터.

키레레렉!

하지만 어째서인지 놈이 완전히 멀어지질 않았다.

'설마....'

일정 범위 이상 움직이지 않는 거면 곤란했다.

여기서 쓰레기통을 열고 나가면 다시 따돌리기는 어려울 게 뻔했다.

탁.

고천수는 품안에 있는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담배는 끊었어도 비상용으로 항시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순순히는 안 죽는다.'

쓰레기통 안에는 가연성 물질이 잔뜩 들어 있었다.

무기가 없는 만큼 화상이나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이 안에서 농성을 해야 했다.

키륵.

놈은 마침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왔던 길을 향했다.

고천수에게는 정말이지 짜증 나는 일이었다.

"후."

일정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개구락지.

상대하기 어려운 것은 맞지만 고천수도 배운 것이 있었다.

"일단 여기까진 온다는 거지."

한 번 뛴 것으로 길도 외웠다. 맵을 스캔하는 것은 게임 방송인의 기본.

똑같은 시도를 반복하며 이기는 것에도 자신이 있었다.

고천수는 안전을 확인한 뒤 밖으로 나와 쓰레기통의 쓰레기봉투들을 근처 골목의 사각에 몰아놓았다.

기름이 좀 필요했는데 그렇게 멀리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작은 철물점이 보이기에 펌프 기름통과 도구 몇 개를 구한 뒤에 버려진 차 밑에 들어갔다.

연료 게이지 센서를 뜯어내고 그 구멍으로 펌프를 이용해 기름을 쉽게 뽑아냈다.

-뭐 하는 거야?

-얘, 설마.... 진짜 대단한 놈이네.

뽑은 기름은 가져가서 쓰레기봉투와 바닥에 많이 뿌리고, 나머지는 분리수거 쓰레기통에 있던 소주병들에 넣었다.

거기에 심지를 만들어 화염병을 생산하자니 다들 감탄했다.

-그사이에 타개책 찾은 거 아냐.

-헬 프로그 약점까지 파악한 거면 너는 내가 인정한다.

잠시 본 개구리, 헬 프로그는 꼬챙이처럼 펴지는 혀와 달리 피부는 점액질로 야들야들했다.

그건 분명 피부 호흡의 증거. 숨구멍을 막아 버리는 데 이것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덕분이다.'

시끄럽게 떠드는 이놈의 시청자들이 힌트를 준 덕분에 일단 피하고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네.'

관객이 많다는 건 머리가 많다는 것이었다.

걸러 들을 수만 있다면, 이만한 정보 창구도 없었다.

"준비는 마쳤고."

고천수는 천천히 몸을 풀었다. 긴장한 상태로 달리느라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니었다.

최상으로 달리기 위해서는 약간의 스트레칭이 필요했다.

좌우 무릎을 한 번씩 쫙 펴고 일어난 고천수는 다시금 다리 앞으로 향했다.

"어디 한번, 해 보자."

004화 헬 프로그 (2)

시작은 일단 꼬였다.

골목길을 조심히 빠져나가는 와중, 다른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던 것이다.

"으아아악!"

"살려 줘!"

얼른 큰 길 쪽으로 나가니 헬 프로그가 사람들을 공격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무슨...!"

헬 프로그는 사람을 혀로 꿰어서 당겼다가 그냥 뱉어 내고 있었다.

먹는 것도 아닌 단순한 살육에 불과했다.

"진짜 뭣 같은 놈이네."

당장에라도 처리하고 싶었지만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헬 프로그의 집중력이 분산되고 있어 유인이 어려웠다.

"그래, 시발. 계획대로만 될 리가 없지."

다른 사람들이 희생되는 동안 다리 쪽으로 갈 수 있는지를 살폈다.

하지만 우회하는 도중에 헬 프로그가 저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끝장낸다면 도루묵이었다.

어중간한 상황에서 적을 맞게 되는 것만큼 좋지 못한 일도 없었다.

"야아아아아아!"

그래서 소리쳤다.

골목길 입구 안쪽에서 머리만 밖으로 내민 채로.

"여기다아아아!"

다른 사람을 돕겠다는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시간 낭비를 하고 있을 틈이 없을 뿐이었다.

키르륵?

다행히도 헬 프로그의 관심을 끌었다.

진짜는 이제부터였다.

"후."

짧게 숨을 끊어 쉬는 순간, 헬 프로그가 걸음을 옮겼다.

"참자, 참자."

고천수는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헬 프로그의 혀 길이는 10m. 다른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장면을 통해 시각적으로 그 거리가 어떻게 판단되는지도 확인했다.

가능한 가까이에 끌어들여서 아까 전과 비슷하게 뛰어야 했다.

-얘, 정신병원에서 나왔냐?

-석고상 되어 버렸누.ㅋㅋㅋㅋ

-이걸 버틴다고?

무섭긴 하지만 잘못돼서 죽는 건 더 무서운 일이었다.

고천수는 일의 경중을 따지고 인내심을 발휘할 줄은 아는 인물이었다.

"지금이다!"

이러단 피가 안 통하겠다 싶을 정도로 주먹을 꽉 쥐며 버틴 고천수는 순간 달음박질했다.

뒤통수로 혀가 스쳐 간 싸늘한 느낌이 남았다.

"으아아아악!"

그제야 비명 한번 질러 주고 아까 전에 내달렸던 길을 지나갔다.

여기서 왼쪽, 저기서 오른쪽.

긴장 때문에 조금 헷갈리기는 했지만 문제는 없었다.

남은 것은 자신의 대범함을 한 번 더 믿어 보는 일뿐.

타악!

골목을 돌면서 마침내 점프를 시전했다.

아까 전에 사각지대에 깔아 놨던 쓰레기를 뛰어넘은 것이었다.

그대로 더 달려간 고천수는 바닥에 놓여 있던 화염병에 불을 붙였다.

"간다."

저 멀리 다가오는 괴성 소리를 듣고 높게 화염병을 투척했다.

중요한 건 타이밍.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원하는 결과 따위는 구경도 할 수 없었다.

파창!

화염병이 조금 일찍 바닥에 닿았다.

"젠장."

일을 망쳤나 싶을 때, 헬 프로그가 나타나 쓰레기 더미에 몸을 박았다.

화르르륵!

지금 막 일어나고 있던 기름 화염에 놈이 둘러싸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키레에에에엑!

헬 프로그가 고통에 발버둥을 쳤지만 아직이었다.

"그 몸뚱이로 벌써 뒈지진 않겠지...!"

고천수는 나머지 화염병에도 모두 불을 붙였다.

남은 것은 투척하는 일뿐이었다.

파창! 파창!

헬 프로그의 몸에 화염병이 몇 개나 더 직격했다.

키레레렉!

헬 프로그가 몇 걸음 내딛으며 고천수에게 혀를 뻗었다.

"헉!"

순간 배를 뒤로 물렸지만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살이 더 쪘어도 찔렸을 터.

"이 새끼가...!"

고천수는 다시 화염병을 집어서 헬 프로그에게 던졌다.

파창!

키레에에엑!

온몸이 쓰레기와 기름 화염에 뒤덮이면서 헬 프로그는 고통에 몸을 떨었다.

그 와중에도 혀를 몇 번 앞으로 쏘긴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그에게 닿진 않았다.

"하아하아."

화염병의 정확도 때문에 멀리 떨어질 수는 없었다.

그러니 도박수나 다름없었지만 손톱만 한 차이로 잡아내고 말았다.

키에엑....

헬 프로그가 눈을 뒤집어 까며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게... 환경 오염의 힘이다."

불과 함께 뻗어 나가는 유독성 연기에 뒤덮인 헬 프로그는 결국 바닥에 철퍼덕 늘어졌다.

-와 씨, 양철 인간인가.

-이렇게 겁 없는 놈 처음 보는 듯.

-마이 엑시트(My Exit)에 이단아가 나타났다?

인정받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시청자가 하나일 때는 몰랐던 다채로움도 느끼고 있었다.

'근데 뭐야. 마이 엑시트는.'

물어보지 않아도 답은 돌아왔다.

-이단아 정도냐. 이 게임 이렇게 초반에 잘하는 놈 없었어.

-글쎄. 그렇게까지는...

-재미지기는 한 거 맞음.

게임.

그 단어만큼은 고천수에게도 분명히 들렸다.

'게임이라.'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과 변해 버린 주변인들.

원래 세상에 덧입혀진 것인지 아예 현실을 모방한 다른 공간인지는 몰라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상상을 초월하기는 했다.

'남의 목숨 가지고 게임이라고 하는 건가?'

헛웃음이 나왔지만 이러한 불합리에서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채팅창은 지들 멋대로라 통제가 불가능했다.

다만 이용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난 멍청하게는 안 죽어.'

백수에 밑바닥에서 방송하던 스트리머라고 해서 머저리는 아니었다.

유일한 시청자였던 누군가도 분명 그로 정했다는 소리를 했다.

버텨 내는 만큼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때까지는 오기로라도 살아남을 것이었다.

덥석.

마지막 남은 화염병을 들고 쓰러진 헬 프로그 쪽으로 갔다.

"왤케 역겹냐, 너...."

타면서 나는 냄새가 심상치 않았다.

불길이 너무 강해서 근처에 있던 철제 쓰레기통을 밀고 왔다.

바퀴가 달려 있는 덕에 조금씩 움직여서 불길을 밀어낼 수 있었다.

"후."

그렇게 고천수는 여유롭게 헬 프로그를 지나쳐 걸어가다가 흠칫했다.

"어?"

헬 프로그가 있었다. 분명히 방금 전에 해치운 그 헬 프로그가.

"시발?!"

정면이 아니라 측면에서 마주쳤기에 바로 혀에 꿰뚫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시간문제였다. 헬 프로그가 고개를 돌리기 전, 고천수는 급하게 들고 있던 화염병에 불을 붙였다.

키륵?

그리고 헬 프로그가 입을 벌리자마자 화염병을 던져 넣었다.

콰창!

입 안에서 먼저 터진 화염병 때문에 헬 프로그는 혀도 못 내밀고 포효했다.

키레레레게!

고천수는 재빨리 허리띠를 풀어 손에 쥐며 헬 프로그의 등에 올라탔다.

"아오, 진짜아아아아아!"

헬 프로그의 정면에 서면 언제 혀에 꿰뚫릴지 몰랐다.

헬 프로그의 등은 미끄러웠지만 마침 그의 허리띠는 마찰력이 큰 직조벨트였다.

"크으으으윽!"

양손에 쥐어 잡고 버티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로데오 그 자체였다.

키레에에에엑!

버티고 버티고 버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천수는 결국 나가떨어졌다.

"컥?"

위험했다.

헬 프로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고천수와 눈을 마주쳤다.

"아."

쉭.

헬 프로그에게서 혀가 뻗어 나왔다.

키륵.

하지만 고천수의 옆에 늘어졌을 뿐이었다.

헬 프로그는 몸을 떨다가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와, 이건 운 아니냐?

-딱 재봤다. 10분 버텼다.

-10분?! 운빨이 아닌데?

고천수는 기진맥진해서 바닥에 늘어졌다.

10분이긴 해도 운이 좋은 것은 맞았다.

이 정도의 덩치를 가진 녀석이 그 정도로 죽은 건, 화염병의 불길이 목구멍의 엄한 데로 흘러들었기 때문이리라.

"죽는 줄 알았네...."

고천수는 숨을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을 살피니 이 헬 프로그는 먼저 죽였던 그놈과는 다른 녀석이었다.

"여러 마리는 역시 곤란해."

난리가 있던 만큼 다른 개체가 또 올 수도 있었기에 고천수는 발걸음을 옮겼다.

[띠링! 반복된 도발의 성과! 스킬 '어그로와 기록 누적'을 확보했습니다!]

"뭐야."

그때, 뭔가를 얻었다는 알림이 떠올랐다.

-벌써 이걸 건졌나?

-경력직마냥 속전속결이네.

"경력직...?"

백수가 됐던 그에게는 참으로 아픈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참나."

그딴 건 상관없고 스킬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이런 것도 있다면 진짜 게임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으니까.

혼란스러웠지만 다시 걸음을 옮겼다. 뭐가 됐든 얻으면 좋은 거고, 갈 길은 계속 가야만 했다.

"스킬창."

물론 그냥 모른 척할 수는 없어 말을 꺼내 보려니, 네모난 창이 하나 나타났다.

거기에는 방금 획득했다던 스킬이 적혀 있었다.

"허어, 이것 참."

손으로 만져서 창의 스크롤을 내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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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kill

* 어그로(10분) : 자신을 노리는 몬스터가 많을수록 강해집니다. 마릿수마다 본래의 자신을 기준으로 신체 능력이 10% 추가 상승. 발동하고 나서 종료 시점까지 마릿수는 누적으로 계산됩니다.

* 기록 누적 : 종료된 최고 어그로 기록에서 해당 상승분의 10%는 기본 신체 능력으로 합산됩니다. 즉, 본래의 자신이 강화되며, 이 수치는 기록이 바뀔 때마다 경신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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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장난치는 건가...?"

호랑이굴로 들어가라는 식의 스킬이었다.

관종 스트리머에게 딱 맞는 것 같기도 하지만, 보니까 괜히 진땀만 날 수밖에 없었다.

"흐음."

일단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스킬창'을 외쳐 꺼 버리고 다리로 향했다.

안 그래도 머리 아픈데 괜히 지금 활용성을 따질 필요는 없었다.

코앞에 다다르자 처참한 광경을 마주칠 수 있었다.

"사람.... 다 죽었네."

아까 전에 목격했던 사람들 중 살아 있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걸 보자 상황이 더욱 실감됐다.

'어떤 세계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이게 이토록 실감이 난다는 게 문제였다. 부모님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고천수는 바로 다리 위에 올랐다.

다행히도 가는 도중에 새로운 괴물을 만날 일은 없었다.

"젠장."

피로가 몰려왔다. 쉴 곳이 좀 필요했다.

다리를 건너면서 지도를 펼쳐 보았다.

파출소 하나가 눈에 띄었다.

"여기다."

공권력이 살아 있다면 여기만큼 증거가 남아 있을 곳이 없었다.

몸이 힘든 김에 겸사겸사 뭐라도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생존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좀 을씨년스러운데?"

그렇게 막상 도착한 파출소는 썩 분위기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경찰차도 없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전부 출동을 나갔다면 이해는 됐다.

고천수는 조심스럽게 파출소의 문 앞으로 향했다.

여기도 전등은 켜져 있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 안을 살폈다.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시청에서처럼 뭔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컸다.

책상을 뒤지고 다니던 고천수는 뭔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음?"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자니 기척이 더 커졌다.

-존나 불안한데.

-모 아니면 도여.

우려는 좀 있었지만 파출소에서는 챙길 게 많았다. 무기고도 살펴야 하는 만큼 이대로 그냥 나갈 수는 없었다.

"뭐야."

그리고 맞닥뜨린 건 전혀 예상외의 상황이었다.

"사람?"

웬 남자 하나가 목격된 것이다.

"엇."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외쳤다.

"사, 사람이다!"

이쪽과 똑같은 반응이었다. 그는 '철창'을 손으로 잡은 채 순간 환한 표정을 지었다.

"살았다! 살았다아!"

"닥쳐요!"

고천수는 유치장 앞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다시 낮추며 윽박질렀다.

"지금 여기가 어떤지도 모르는데 소리 지르고 지랄이에요, 지랄이. 죽고 싶어요?"

"죽어? 아 진짜 뒈질 뻔했지."

남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겨우 지갑에 손 좀 댔다고 날 여기에다 가두고 말이야."

"갇힐 만했네."

고천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잘 들어요. 괜히 엄한 거 끌어들여서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있어요, 알겠어요?"

"뭔데. 밖에 진짜 뭔 일 있는 거야?"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고천수는 그를 놔두고 유치장 앞에 있는 책상 서랍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이, 이봐. 뒤지는 김에 여기 열쇠도 찾아 주는 게 어때. 뭐, 재난이라도 난 거면 서로 돕자고."

나름 괜찮은 제안이라도 했다고 생각한 것일까.

고천수는 헛웃음을 흘리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신분증 줘 보세요, 그럼."

005화 최단 시간

"신분증?"

남자는 당황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뭐 하려고?"

"그냥 보고 확인이나 해 두려고요. 이름이나 주소 같은 거 보면 좀 믿음이 갈 테니까."

"아, 그런 거면."

남자는 자신의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 고천수에게 건네주었다.

"어디 한번 확인해 봐. 확실히 이 지역 사람이니까."

"네, 뭐. 그렇네요."

이름은 유영재. 나이는 서른둘.

대충 내용을 확인한 고천수는 신분증을 다시 돌려주었다.

"찾다가 열쇠 같은 거 나오면 도와드릴게요."

"아, 진짜? 고마워. 그, 허영웅 순경인가 하는 놈 자리에 가면 있을지 몰라."

"허영웅 순경?"

"마지막에 여기 남아 있었던 경찰이야."

그 말에 고천수는 사무 데스크가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유영재라는 이름으로 컴퓨터 파일 검색부터 해 보자니 금방 조서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캬. 그놈 정체 금방 들통 나는 거 보소.

-존나 허술해ㅋㅋㅋㅋ

컴퓨터에서 얻을 건 얻었으니 다시 서랍을 뒤질 때였다.

눈에 보이는 곳은 다 열어 봤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유일하게 허영웅이라는 경찰의 서랍에만 열쇠 꾸러미가 들어 있었다.

"이봐! 찾았어?!"

유치장 쪽에서 외침이 들렸다. 분명 소리치지 말라고 했을 텐데도 사람을 열 받게 하는 걸 보니 어떤 성격인지 알 만했다.

열쇠 꾸러미에는 친절하게 유치장이라고 붙어 있는 열쇠 하나가 포함돼 있었다.

일단 그것만 빼서 따로 뒷주머니에 넣은 채 꾸러미를 가지고 유치장 앞으로 돌아갔다.

"엇! 이봐! 찾은 거야?"

"네. 유치장 표식이 있었으니 이 중에 여기서 내보내 드릴 열쇠가 분명히 있겠죠."

"줘 봐!"

유영재는 철창 밖으로 손을 내밀며 열쇠 꾸러미를 낚아채려고 했다.

"아, 근데요."

고천수는 열쇠 꾸러미를 잡지 못하게 하며 물었다.

"제가 함부로 드리면 안 되지 않을까요? 경찰도 아닌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유영재는 황당한 표정으로 손을 휘적거렸다.

"그 녀석들은 다 다른 데로 가 버렸어. 집결지가 생겼다면서 날 버려 두고 갔다니깐."

"집결지?"

"그, 그래. 명서 초등학교인가. 거기로 갔다고."

쓸데없이 잘 알고 있었다. 밖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는 것치고는 말이다.

"예, 아무튼 좀 돌아다니다가 도와드릴 테니까, 조용히 하고 계세요."

"이, 이봐!"

"조용히 하시지 않으면 도움은 없습니다."

경고를 한 번 해 준 뒤 고천수는 무기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열쇠 꾸러미의 열쇠를 사용해 보려고 했으나, 맞는 게 없었다.

"하긴 쉬울 리가 없지."

유치장과 마찬가지로 철창에 가로막혀 있는 무기고는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

-개가 사료통 보는 것 같음.ㅋㅋㅋ

-보급함이라도 좀 찾아봐. 이런 데 하나씩 있잖아.

그냥 넘길 수 없는 충고였다. 고천수는 바로 쭈그려 앉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게임에서는 대개 시야를 얼마나 넓히느냐가 승패를 갈랐다.

"그렇지."

그 방식은 여기서도 적용됐다. 시선을 내려 다른 사각지대를 살피니 근처 벽에 구멍이 하나 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손으로 대충 크기를 가늠한 뒤 몸을 집어넣었다.

포복으로 몇 번 기어서 가자니 무기고와 통하는 곳이 보였다.

"예스!"

쾌재를 불렀지만 절망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무기고로 난 구멍은 고작해야 팔만 통과할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쾅! 쾅!

주먹으로 조금 쳐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고천수는 쓰라린 고통을 맞보며 손을 털어야 했다.

"후. 기껏 왔는데 아무것도 못 가져가나...."

애초에 무기만 건져 가려고 이곳에 온 건 아니었지만 아쉽긴 했다.

고천수는 구멍에 눈을 가져가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팔을 안으로 쑥 뻗었다.

달그락.

손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와라... 좀!"

달그락. 다글다닥.

마침내 끌려온 것의 정체는 바로 곤봉이었다.

"슈밤...."

기껏 손에 넣은 게 곤봉이라니 실망스러웠지만 이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곤봉을 사용해 늘어난 리치로 바닥에 또 떨어져 있던 방검복을 손에 넣었다.

괴물들한테 큰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방어력은 손에 넣었다.

"이거면 됐어."

무기고 바닥에 물건들이 떨어져 있다는 게 심상치 않았다.

이 파출소에서는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

방검복을 입고 곤봉을 든 채 유치장으로 돌아가자 유영재가 또 호들갑을 떨었다.

"이봐! 이제 열어 줄 때도 되지 않았어?"

"당신은 이제 슬 눈치 챌 때가 되지 않았어?"

긴급 재난이 발생하면 경범죄자 정도는 진즉에 풀어 줄 수 있다.

게임 말고 이런 잡다한 정보를 공유하는 스트리머가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덕분에 고천수는 유영재가 일반 범죄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진즉에 눈치 챘다.

"조서를 보니까 무려 살인미수 혐의로 잡혀 왔던데, 아니라면 아니라고 해 보든가."

고천수의 말에 유영재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

그러더니 가쁜 숨을 내쉬며 철창을 세게 쥐어 잡았다.

"아, 아니야! 그냥 겁만 주려고 했을 뿐이야!"

"겁만?"

"나랑 사업 끊으려고 하기에 그냥 겁만 주려고 칼 좀 가져갔을 뿐이라고!"

"그걸 왜 가져가."

본인이 찔릴 일도 없었다면 진즉에 다 털어놨을 것이었다.

고천수는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뗐다.

뒤에서는 유영재의 외침이 계속 들렸다.

그건 마치 괴물들을 끌어들이는 경보음과 같았다.

크아아아아아!

뭣도 말하면 온다더니, 돌연 좀비 한 마리가 고천수가 있는 곳까지 달려왔다.

[어그로 1 - 09:59]

갑작스러운 공격에 고천수는 유치장이 있는 곳까지 밀려나 몸을 박았다.

짤랑.

열쇠 꾸러미가 유치장 앞에 떨어졌다.

"이 자식이...!"

고천수는 좀비를 붙잡고 엎치락뒤치락했다.

어그로 발동으로 신체가 아주 약간 더 강해졌지만, 당장 그걸 세세하게 따져 볼 여력은 없었다.

그사이에 유영재는 철창 사이로 손을 뻗어 열쇠 꾸러미를 유치장 안에 끌고 들어갔다.

"유치장...! 열어!"

고천수가 피신처를 확보하기 위해 외쳤으나 유영재는 묘한 쾌감이 깃든 얼굴로 말했다.

"내가, 왜?"

"이 새끼가...!"

고천수는 좀비를 발로 세게 걷어찼다.

그렇게 좀비가 화분에 부딪혀 발버둥 치는 사이 유치장으로 달려갔다.

유영재는 유치장 문에서 떨어지며 미소를 그렸다.

"열어!"

그는 고천수의 외침을 철저하게 즐기고 있었다.

"열어 봐. 어디 열어 보라고."

그가 조롱의 수위를 높여 가는 동안 고천수는 유치장 문만 붙잡고 얼굴이 사색이 되어 갔다.

그때, 화분에 처박혀 있던 좀비가 일어나 유치장으로 달려왔다.

고천수는 유치장 문을 붙잡고 비명을 지르다가,

덜컹.

순간 열어젖혔다.

"어...?"

유치장 문이 열리자 유영재의 표정이 달라졌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다음 상황이었다.

크아아아아!

"으아아악!"

뛰어들던 좀비가 그대로 유치장 안으로 쏙 들어갔다.

"으악! 으아악!"

유영재는 좀비의 팔에 붙잡혀 벽으로 밀려났다.

고천수는 유치장의 문을 닫아서 잠그며 말했다.

"휴. 열었다. 봤지?"

"이 새끼!"

유영재는 유치장 구석으로 밀리면서 소리쳤다.

"어떻게 한 거야! 이 시발 새끼야!"

빼돌리고 있던 열쇠로 진즉에 문은 땄다.

연기를 조금 했을 뿐이었다.

"사, 살려 줘! 잘못했어! 살려 줘!"

힘이 달리는지 유영재는 비명과 함께 소리쳤다.

"싫어."

고천수는 담담하게 대꾸하고는 파출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명은 그를 잠깐도 망설이게 하지 못했다.

-인. 과. 응. 보.

-상. 남. 자.

-(대충 폭발을 등 뒤에 둔 짤)

부스럭.

하지만 나오자마자 들린 소리에 고천수는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쫄보여 강심장이여.ㅋㅋㅋ

-ㅋㅋ 예측이 안 되냐, 이놈은.

빠르게 주위를 살피자 푸른색 제복을 입고 있는 이가 눈에 띄었다.

"...경찰?"

둥근 안경을 쓰고 있는 어리바리한 느낌의 남자로, 딱 봐도 혼자 남겨져 있던 인상이 강했다.

"저기...."

부르려고 하자 남자는 놀란 표정으로 이내 달아나 버렸다.

"뭐야."

경찰이 시민을 보고 달아나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유영재가 언급했던 순경이었던 것 같지만 더 이상 확인은 불가능했다.

주변이나 더 둘러보자니 파출소 옆에 자전거 한 대가 보였다.

타고 갈까 했지만 아무래도 쫄보 순경의 것인 듯해서 양심상 끌고 갈 수가 없었다.

다시 경찰서 안에 들어가서 포스트잇에 문구 하나를 적어서 자전거에 붙이고 왔다.

내용은 '제가 대신 처리했으니 안전한 곳으로 가세요.'였다.

유영재가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면 더 이상 그럴 일은 없으리라.

[어그로 1 - 종료.]

덕분에 스킬 체험도 끝냈다.

약간이나마 도움이 됐던 힘이 아주 일부만 남기고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고천수가 중얼거렸다.

"찝찝하구먼."

다른 게 아니었다. 물을 짜내긴 했어도 옷이 아직 젖어 있던 것이다.

마침 근처에 옷가게가 보여서 쇼핑을 하기로 했다.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으니 마네킹이 입고 있던 아웃도어룩으로 바로 갈아입었다. 방검복을 다시 덧입고 곤봉을 든 채 거리를 걸었다.

희한한 일이지만 차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하나쯤 있으면 좋으련만.'

이미 갈 사람은 다 어디론가 가 버린 모양새였다.

폰을 열어서 부모님에게 한 번 더 연락을 시도해 보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연락은 닿지 않았다.

"음?"

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앞을 봤을 때였다.

바닥에 초록색 선 하나가 횡으로 그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뭐야, 이건."

밟게 빛나고 있는 것이 마치 방사선이라도 보는 느낌이었다.

"아 씨."

정체를 모르니 지나가도 될지 아닐지를 알 수 없었다.

약간 눈치를 보고 있으려니 답답함이 깃든 시청자들로부터 답이 돌아왔다.

-이런 건 또 겁나 조심스럽네.

-쫄보 확정임.

반응을 보니 대충 답은 알 수 있었다.

침을 꼴깍 삼키고 고천수는 발을 뻗어 초록색 선을 넘어갔다.

[튜토리얼 구간을 벗어납니다.]

'튜토리얼 구간?'

고천수는 놀라며 자신이 지나온 길을 돌아봤다.

'튜토리얼이라고?'

[지금부터 정보창을 활용하여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습니다. 최후의 1인까지, 건투를 빕니다.]

문구는 금방 눈앞에서 사라졌다. 고천수는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좆됐네.'

뭔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런 패턴은 극단적인 생존 게임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 번의 미션 성공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끝까지 모든 단계를 돌파하는 방식이었다.

'뭐냐고 대체.'

일단 입으로 발음해 보았다.

"정보창."

그러자 앞에 스킬창과는 다른 것이 하나 나타났다.

[정보 1 : 명서 초등학교에 있는 경찰서장 보호 필요. 오늘 밤 위기에서 사망 시 도시 치안이 급격히 악화.]

마치 퀘스트와 같은 것이 나타나 있었다.

"하...."

무시가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그랬다간 자신에게 돌아올 후폭풍이 예상이 된다는 게 문제일 뿐.

'정보 1'이라고 한 것을 봤을 때, 나중에는 더 다양한 정보도 동시에 획득 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이제 튜토리얼을 벗어났다니."

이 세상이 어떤 식으로든 게임일 거라고는 이미 추측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이제 튜토리얼을 통과했다는 말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뚜벅뚜벅.

물론 그게 충격인 것은 그렇다 치고, 고천수는 일단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튜토리얼을 통과했다면 이제부터는 더욱 힘든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지부진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와, 씨바. 나 방금 소름 돋음.

-뭐야, 뭐야. 뭔데.

-얘, 최단 시간 튜토리얼 통과임.

스트리머가 어떤 상황이든 뭐든 기록 갱신에나 신경 쓰는 시청자들은, 웃기지만 지나치게 그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었다.

"후. 형님들."

이런 불합리는 익숙하다 못해 친근했다.

피할 수 없다면 노답 백수답게 즐긴다. 결심이 선 고천수는 손목으로 코밑을 슥 닦고 말했다.

"지금부터 부탁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밑바닥 스트리머, 고천수.

이제부터 제대로 On Air였다.

006화 지나가는 경찰

-나 말이야?

스위치는 켜졌다.

고천수가 부탁으로 특정 대상을 호출하자, 하나의 채팅로그가 올라왔다.

-나랑 얘기하고 싶다고?

대화명이 없는 채팅방.

하지만 고천수는 지금 대꾸를 한 이가 누구인지를 단박에 눈치 챘다.

"네, 형님. 제 유일한 시청자였던 분 말입니다."

지금 정상적인 세계에 있지 않다는 건 확실히 깨달았다.

그렇다면 좀 더 확실하게 상황을 납득하고 갈 필요가 있었다.

-다른 시청자 무시하냐!

-우리도 권리가 있다!

-잠깐 진정해 봐.

유일했던 시청자, '온리원'은 다른 존재들을 토닥였다.

-알고 싶다잖아.

-알기는 개뿔.

-이미 대충 설명 받았을 거 아냐.

설명. 그딴 건 듣지도 못했다. 고천수는 어느 순간 이런 상황에 내던져졌을 뿐이었다.

-뭐야, 설마 아무 말도 없이 네가 집어 처넣은 거야?

-미친.

-그냥 어벙했던 게 아니라 진짜 안 알려 준 거라고?

존재들은 갑자기 서로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약간도? A little?

-그럼 이 새끼는 여태 어떻게 움직인 거냐?

그야 방송인 본능이었다. 고천수가 멀뚱히 서 있자니 존재들은 헛웃음을 써 내렸다.

-ㅋㅋㅋㅋ 야, 잠만. 이거 대박인데.

-아, 시발. 존나 재밌는 상태였는데 제대로 몰랐어.

-야, 얼간이. 너 진짜 몰랐어?

그렇게 물어 봤자 의미 불명이었다.

-진짜인가 보네. 개쩜.

-우리 놀이터에서 날뛰면서도 그걸 몰랐다고?

-클리어하면 뭐 주는지 알고는 있을라나.

그런 것도 알 리가 없었다.

-그냥 모르게 놔둘까? 얼굴이 존나 웃김.ㅋㅋ

-클리어하면 네가 원하는 대로 세계 재편해 줌.

-아, 이 망할 새끼. 고새 말해 버리네.

잠시 동안 소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온리원이 갑자기 다시 말했다.

-보상은 지금 다른 시청자들이 말한 대로야. 하지만 네가 지금 당장 궁금한 건, 이 세계가 뭐냐는 거겠지.

"...네."

-실제 네가 살던 세계야. 현실이지. 다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게임 시스템 중 하나인 '마이 엑시트(My Exit)'를 적용해서 개변시켰을 뿐이야.

"게임 시스템?"

-그래. 하지만 명심할 게 있어. 이 게임의 플레이어는 너뿐이야. 우린 한 명만 관전하는 걸 좋아하거든. 넌 선택된 주인공이고, 지금 유일하게 우리를 직접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거야.

플레이어는 하나뿐. 고천수가 숨을 삼키며 그 말을 곱씹는 사이 온리원이 설명을 이었다.

-너 외의 사람들은 이 세계의 진실을 몰라. 심지어 다들 게임 설정에 맞게 다시 조형된 NPC가 되었어. 대부분 엑스트라지만, 너에게 도움이나 위협이 될 네임드도 잔뜩 있지.

"NPC라니...."

-그래도 네가 미리 알고 있던 사람들의 정보는 웬만하면 그대로 유지시켰어. 눈치껏 판단 재료로 써. 그리고 플레이어가 겪는 시련 자체가 재미라 다들 스포일러를 좀 꺼리긴 하지만, 네가 잘 구슬리면 순간순간 시청자들도 진행을 도울 거야.

안심하는 용도로 삼기에는 온리원이 던지는 멘트 하나하나가 너무나 묵직하게 어깨를 짓눌렀다.

-아, 근데 너도 잘 알지? 시청자는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거.

게임 방송을 할 때 들어오는 시청자 중에는 게임 스토리를 잘 꿰고 있는 사람, 어설프게 알고 있는 사람, 아예 모르는데 훈수만 두는 사람, 진짜 모르는 사람, 그 밖에도 아주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긴장하진 말고. 우리도 네가 아는 시청자와 그렇게 다를 건 없으니까.

그 말에 고천수가 마른침을 삼켰다. 하는 짓은 비슷할지 몰라도, 확신하건대 존재의 규격이 달랐다.

'신 같은... 존재들인 건가?'

혼란스러운 마음에 고천수가 물으려고 했지만, 온리원은 잔인하게도 게임 클리어를 실패했을 시 따라오는 고통에 대해서 알렸다.

-근데 게임 못 깨면 이 세계는 이대로 흘러가는 거야.

세계는 이미 비틀렸다.

끝내지 못하는 이상, 이게 현실이었던 것이다.

"형님, 대체 정체가 뭐죠."

-약간 웃기는 질문이네.

온리원은 자애로우면서도 소름끼치는 말을 했다.

-네가 했던 게임에서도, 캐릭터가 그렇게 물었나?

순간 고천수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뭐, 이것만 알아 둬. 난 네 근본 없는 쇼맨십이 좋아.

"그럼...."

-그래, 마음에 드니까 이렇게 오래 응해 준 거지.

고천수가 1인 방송을 할 때부터 확실히 위압감은 있었다.

보통의 시청자라고 하기에, 온리원은 남달랐다.

항상 고천수를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천수는 그에게 악의가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온리원은 보상을 주는 것에 철저한 시청자였다.

적든 많든 고천수를 공짜로 다루려고 하지는 않았다.

-너도 잘 알 거야. 나 뒤통수치지는 않는 거.

믿기 힘든 얘기들뿐이라고 하더라도 신뢰를 가질 수 있는 내용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니까 한번 깨 봐. 우리들이 건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킨다.

최악과 최선의 약속이 동시에 맺어졌다.

고천수는 이 존재들에게 유희를 제공하기 위한 플레이어로 선택된 것이었다.

"백수한테 참 과분한 미션을 주셨네요."

달리 고를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은 잘 알았다.

종료 불가인 방송에서 스트리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힘껏 발버둥 치길 바랄게. 그게 네 매력이니까.

따릉!

온리원이 대화를 정리하기 시작하자마자 들린 소리가 있었다.

고천수가 고개를 돌리자 멀리서 웬 자전거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시도 쉴 틈이 없는 걸? 뭐, 죽지는 않겠지.

순간 온리원이 그대로 물러났다. 갑작스러운 끝맺음이었다.

찝찝한 형태였지만 다른 존재들은 도리어 기다렸다는 듯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존나 지루했네. 훈화 말씀인 줄.

-편애가 심한 거 아니냐. 앞으론 적당히 하자.

-야, 근데 저거 아까 그놈인데?

숨을 고르며 서 있는 고천수의 눈에 보이는 건 자전거에 타 있는 순경이었다.

"타이밍 죽이네...."

기껏 불러내서 애기를 하고 있었는데 방해당한 느낌이었다.

'뭐, 됐어.'

어차피 이런 불합리에 대한 하소연이나 하자고 호기롭게 말을 건 게 아니었다.

떼써서 되는 게 없는 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충분히 경험했다.

이럴 땐 주먹부터 꽉 쥐고 즉각 현실과 대면해야 하는 법.

따릉따릉!

자전거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저, 저기!"

익숙한 얼굴. 분명 파출소에서 마주쳤던 그 순경, 허영웅은 자전거를 멈춰 세우자마자 입을 열었다.

"쪽지 남기신 분 맞죠?"

"네, 맞는데요."

그다지 적의는 보이지 않아 고천수가 즉답하자니 오히려 허영웅이 당황했다.

"호, 혹시 어디로 가시나요?"

시작부터 어설픈 질문이었다. 보통 처음 만나면 서로 통성명부터 하는 게 정석이지 않은가.

고천수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모님 집이요."

"부모님 집이라면 어디...."

"저기, 잠시만요."

고천수는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쪽지에는 분명히 안전한 곳으로 가라고 적어 두었다.

쫓아오라고 한 적은 없었다.

만약 같이 가려고 하는 거면 곤란했다. 고천수는 지금 파티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따라오신 건지 먼저 물어봐도 될까요?"

"아, 그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고천수의 반응에 허영웅은 얼굴을 긁적거렸다.

"유치장에 갇혀 있는 사람 때문에 어디 못 가고 있었거든요. 출동한 분들은 돌아오지도 않고...."

"그래서요?"

"덕분에 이젠 저도 피난해도 될 듯해서요. 근데 갈 곳이 마땅치 않거든요. 통신도 안 터지고."

그런 걸 일반 시민한테 물어보다니 답도 없었다.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명서 초등학교로 가 보세요."

"명서 초등학교요?"

"저도 자세히는 못 들었는데 그쪽으로 경찰들이 간다는 것 같았거든요."

"정말요?"

순수하게 해 주는 말을 다 믿는 걸 보고 고천수는 눈썹을 살짝 움찔거렸다.

"허 순경님, 초면에 좀 그렇지만 충고 하나 할게요."

"네? 어떤...."

"너무 다 믿지 마세요."

유치장에 있는 놈을 버리지 못하고 온 것도 아직 너무 때가 묻지 않아서일 가능성이 컸다.

고천수는 물건으로 따지면 빈티지인 단계도 오래 전에 지나쳐 있었다.

그냥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악독한 사람들을 많이 경험해 봤던 것이다.

"제가 해 준 말도 곱씹어서 필요하다 싶으시면 소화하세요."

때 묻지 않은 인간을 보면 고천수는 왠지 억울해졌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허영웅은 난감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도 친절하게 쪽지까지 남기고 가셔서...."

"뭐, 알겠습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고천수는 명서 초등학교 방향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알겠으니 먼저 가세요. 저는 부모님을 찾고 갈 테니까."

"제가 도울 일은...."

"없습니다."

"타실래요?"

허영웅이 자전거를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일반 자전거도 아니었다.

바퀴에 끼워져 있는 탈부착식 기기를 보니, 전기 자전거였던 것이다.

"네, 그럼 내리세요."

"아, 아뇨. 아뇨! 뒷자리에 타시라는 거였어요!"

허영웅은 손사래를 쳤다.

"이건 싫으신가요?"

"괜찮긴 한데, 어디까지 같이 가려고요."

부모님 집은 명서 초등학교와는 거리가 있었다.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제 발로 호구 되려고 왔네.

-이게 바로 그 청. 년. 경찰인가.

-야야, 얘 허리에 권총 찼다.

고천수는 허영웅의 허리춤을 살폈다.

'음?'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잠깐... 이거 좀 위험한가?'

서늘함을 느낀 그는 뒤늦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혼자 갈 테니 괜히 저 따라오지 마세요."

"태워다 드릴 수 있는데요?"

"됐습니다."

고천수는 매몰차게 돌아서서 혼자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허영웅이 자전거를 타고 슬슬 따라왔다.

"혼자 가시면 위험해요."

"그럼 내려서 자전거라도 주세요."

같이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고천수의 요구에 허영웅은 낮게 침음했다.

"도와드린다고 하는데도 그러시니...."

"도와주고 싶으면 자전거만 달라고요."

잠시간의 대치가 계속됐다. 허영웅은 말없이 고천수와 시선을 마주보다가 결국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요."

허영웅은 자전거에서 내리더니 고천수에게 밀어 주었다.

"타고 가세요."

"정말로요?"

자전거를 받고도 고천수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허영웅은 주춤거리면서 고천수에게 손짓했다.

"네, 정말 드릴 테니까 타고 가세요."

"...."

"안 가시나요?"

"갈 건데, 순경님 먼저 가세요."

고천수는 결코 먼저 발을 떼지 않았다.

허영웅은 이유를 모르겠는지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움직였다.

"아, 네.... 그럼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네, 몸조심하시고요."

"그쪽도요."

겨우 인사를 나눈 허영웅은 고천수를 남기고 떠나갔다.

고천수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뒤늦게 한숨을 쉬었다.

-진짜 쌉호구 같은데 왜 총은 그대로 들려 보내냐?

-도와줄 거면 총도 주세요! 라고 해야지 새꺄!

-허 순경, 10분 안에 뒈지겠네.

"형님들, 진짜 그렇게 생각합니까?"

허영웅의 허리춤을 잘 봤다면 그딴 소리는 하지 못할 것이었다.

"저 놈, 바지가 안 맞았다고요."

허리춤이 안 맞아서 억지로 벨트로 조인 흔적이 역력했다.

파출소에서 허영웅의 사진도 확인하지 않았으니....

-아, 슈바, 소름!

-왜왜, 진짜가 아니야? 어?

확답은 할 수 없었다. 자전거를 주고 간 걸 보면 진짜 호구일 가능성도 있었다.

"모르겠네요. 괜히 신경 안 쓰렵니다."

시야에서 벗어났으니 뭐가 됐든 지금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아, 시바."

그런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은 고천수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 잡을 수밖에 없었다.

"명서 초등학교로 보내 버렸네...."

어떤 놈인지도 모르는데 장소를 잘못 추천했다.

"내가 미친다, 진짜."

고천수는 허영웅이 향한 곳을 다시 쳐다보았다.

지금이라면 쫓아가서 정체를 파헤쳐 볼 수 있었다.

아직은 서로간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

"잡아? 말아?"

상대는 총을 가지고 있었다.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장난감이 아니라면 지금으로서는 상대하기 어려웠다.

꾹.

팔을 힘을 좀 줘 봤다.

애초의 고천수의 신체 능력을 1이라고 정해 두면 기록 누적 스킬 효과로 강화된 지금의 수치는 1.01이었다.

이런 완력으로는 아무것도 무리할 수 없었다.

"에라이,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자."

명서 초등학교에는 신분이 확실한 경찰들이 있을 터였다.

부모님을 찾고 그 경찰들과 빠르게 합류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허영웅은 탈것 없이 걷고 있으니, 그다지 조급해 할 필요는 없었다.

"다들 기다리세요."

고천수는 곧장 자전거를 몰았다.

***

"뭐야."

하지만 고천수를 기다리고 있던 건 기대하던 광경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부모님이 사는 단독주택에는 도착했다.

하지만 바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 집 과자로 만듦?

-근처에 도로시 있었냐. 회오리 처 맞은 거 보니까.

-ㄴㄴ 상어임. 샤크 스톰.

거대한 무언가가 뜯어먹은 듯, 이빨 자국과 함께 반쯤 사라진 단독주택.

고천수는 잠시 굳어 있다가 재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어머니? 아버지?! 천수 왔어요!"

남아 있는 장소를 뒤지며 고천수는 크게 소리쳤다.

"다들 어디에 있어요!"

불행히도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뭐야, 시발...!"

기껏 찾으러 왔더니 두 분 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몬스터가 잡아갔다고 하면 빨리 쫓아가야 했다.

-이미 먹힌 거 아냐?

-선 넘네. 그냥 미국 갔다고 하자.

잠시 열불이 났지만 화난다고 해서 어찌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고천수는 흔적부터 다시 찾아보기로 했다.

평소 부모님은 기록을 잘 남기는 편이었다.

TV나 냉장고에 아무 말이나 적어서 남기고는 했으니까.

"없나...!"

평소 포스트잇을 붙이던 장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집이 반파됐을지언정 사람이 당한 흔적도 없었다.

"내 방?"

고천수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떠난 지 오래됐지만 여전히 잘 정리돼 있었다.

"찾았다!"

방 안의 책상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 적혀 있는 내용은-.

007화 불청객

"-군 부대하고 떠났다고?"

쪽지에는 부모님이 이곳에 들른 부대와 함께 떠났다고 되어 있었다.

----

사랑하는 아들.

우리는 이곳에 들른 군인들과 함께 떠난다.

부디 무사히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하마.

ps. 이 부대는 7.5사단 직할대라고 하더구나. 더 많은 걸 적지 못해 미안하다.

----

내용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손에 힘이 들어간 고천수는 쪽지를 살짝 구겨 버렸다.

'7.5사단?'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아들 두고 떠난 거 실화?

-버려졌네.

-7.5사단은 어디여.

필체는 분명 아버지의 것이었지만 내용에는 위화감이 있었다.

고천수는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했다.

'벌써 떠나셨을 리 없어.'

부모님의 성격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들이 올까 봐 자리를 뜨지 못할 것을 알기에 더 서둘러 온 것이었다.

'설마 후순위로 밀린 건가?'

키드냅, 즉 납치 이야기 구조와 비슷했다.

중요 인물을 맨 뒤에 구하거나 찾게 하는 루틴인 셈.

이런 식으로 판이 깔린 게임에서는 마냥 조급하게 굴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제기랄."

고천수는 쪽지를 접어서 품에 넣고 자신의 서랍을 뒤졌다.

"형님들, 보셨죠? 당장은 영문 모를 소리밖에 없어요."

기껏 여기까지 왔으니 파밍이나 하는 게 나았다.

첫 번째 서랍에서는 손목시계가 나왔다.

톡톡.

건드려도 초침이 움직이지 않았다. 두 번째 서랍에서 나온 약을 갈아 끼워 줬지만 소용이 없어서 다시 내려놓았다.

"다른 건...."

잡동사니 상자에서 망치를 찾아냈다.

얼른 챙기고 고천수는 부엌으로 향했다.

"배고프니까 뭐라도 먹고 가야겠어요."

이곳저곳 소리를 치긴 했지만 아직 괴물, 즉 몬스터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가도 될 것이었다.

-야, 너무 여유 부리는 거 아냐?

-부모님 사라졌는데?

-7.5사단 분명 실험 단체일 듯.

존재들이 하는 소리에 고천수는 헛웃음이 나왔다.

'선 넘는 놈들 제재할 수도 없고.'

7.5사단이 이 근처에 있는 부대가 아니란 것도 알고, 부모님이 사라진 게 결코 가볍게 치부할 만한 일이 아니란 것도 알았다.

다만 고천수는 어린아이처럼 질질 짜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만난다.'

그렇게 짜여 있기만 하다면 문제는 없었다.

"좋아, 참치는 다 두고 갔어."

찬장을 열고 찾은 통조림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있을 때였다.

땡그랑!

어디선가 난 소리에 고천수의 고개가 돌아갔다.

"뭐야?"

살짝 중얼거린 고천수는 칼집에 꽂혀 있던 식칼 하나를 빼어 들었다.

분명히 아까 살펴볼 때는 집에 아무도 없었다.

"설마...."

고천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부엌에서 거실 쪽을 내다봤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땡그랑!

"헉?"

똑같은 소리가 또 들렸다. 고천수는 이곳저곳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어디서 나는 거야...!"

땡그랑!

밖이었다. 바깥에서 소리가 나고 있었다.

"망할!"

방으로 다시 돌아가 창문부터 열어젖혔다.

크아아아아!

순간 좀비 한 마리가 팔을 내밀었다.

찌익!

옷소매가 붙잡혀 찢어졌다.

[어그로 1 - 09:58]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고천수는 급하게 창문을 닫고 숨을 골랐다.

"아직은 한 마리인가?"

땡그랑! 땡그랑!

밖에 있는 깡통들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소리가 반복됐다.

한 마리는 아니었다.

-딱 봐도 웨딩카네.

-신혼인데 문 열고 축하나 해 주라고~!

고천수는 거실로 가 창문에 쳐져 있던 커튼 사이를 살폈다.

"하나... 둘... 셋."

일단 보이는 건 다섯이었다. 추가적으로 몇 마리가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상대할 수 있나?'

미약하지만 본래 신체가 강화돼 있기도 하고, 열만 어그로를 끌어도 이 몸을 총 출력 200%까지 또 끌어올릴 수 있었다.

"아냐."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어중간한 능력을 믿을 수는 없었다.

몬스터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열이나 되는 좀비들에게 둘러싸이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무기가 더 필요해...!"

창고 방으로 들어가 공구 상자를 꺼냈다.

거기에는 못 총이 들어 있었다.

-존나 강력한! 대화의 수단!

-이런 거 두고 뭐 했냐.

미안하지만 평소엔 아버지 물건에 손대는 일이 없어 잊었던 것뿐이다.

고천수는 못 총을 들고 안에 들어 있는 못의 개수를 확인했다.

"10개 정도인가...."

이런 걸로 머리를 정확히 맞추기는 어려웠다.

크아아아!

좀비가 거실로 들어선 소리가 들렸다.

고천수는 일어나 방 문을 닫았다.

쾅쾅쾅!

좀비가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려 댔다.

"왜 여기 와서 지랄이야!"

좀비들이야 언제 어느 때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긴 했지만, 갑자기 여기에 이렇게 몰려드는 건 예상외였다.

"제기랄!"

어쨌거나 일단은 좀비를 상대해야만 했다.

덜컹!

문을 열자 좀비가 달려 들어왔다.

"어딜!"

옆으로 물러서며 고천수는 좀비의 엉덩이를 차 버렸다.

콰당탕!

구석에 처박히는 좀비를 보고 고천수는 다시 문을 닫았다.

"스파링 한판 뜨자 새끼야."

못 총은 잠시 내려놓았다. 대신 들고 있는 것은 가방에서 꺼낸 망치였다.

-어이! 상대는 맨. 손. 이라구!

-링 위에서 무기를 꺼내들다니, 네 녀석!

저런 게 맨손이면 지뢰밭도 맨땅이다.

고천수는 망치를 높게 치켜세웠다.

크아아아!

좀비가 일어나 달려들자 고천수는 그 망치를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뚝배기!"

크아악!

옆머리를 얻어맞은 좀비가 휘청거렸다.

"더 있어, 인마!"

고천수는 전진하며 망치로 좀비의 이마를 때렸다.

콰직!

좀비는 휘청거리더니 뒤로 나자빠졌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콰직! 콰작!

좀비 한 마리를 끝장내느라 방 안이 온통 지저분해졌다.

고천수는 숨을 크게 내쉰 뒤,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래, 다 박살 내면 되지."

여기까지 오면서 경험도 쌓였다. 지금은 무기도 있겠다, 겁먹을 게 전혀 없었다.

"하나씩 끌어들여서...."

그렇게 여유로운 생각을 한 게 화근이었다.

문을 다시 열자 좀비 수마리가 밀고 들어왔다.

[어그로 4 - 06:45]

"이그그극?!"

좀비들에게 밀려서 뒷걸음질 치던 고천수는 순간 움찔하고 이를 악물었다.

140%.

콰작!

"이 집에서!"

콰직!

"나가란!"

꾸적!

"말이야아아!"

각기 머리를 한 대씩 얻어맞은 좀비들이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못 총...!"

고천수는 몸을 날려 못 총을 다시 집어 들었다.

크아아아아!

"뒈져!"

푸슛!

달려오다 대못에 머리가 뚫린 좀비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크어아아!

크아아아!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나머지 두 마리도 고천수에게 달라붙었다.

"으아아아아!"

푸슛! 푸슛! 푸슛!

누워서 몇 발이나 쏘았지만 제대로 적중하지 않았다.

"좀!"

결국 좀비 두 마리가 한 번에 이빨을 들이밀 때, 팔뚝을 얼른 횡으로 세웠다.

목을 팔뚝으로 밀어내는데도 두 마리는 신경도 안 쓰고 고천수의 얼굴을 뜯어먹으려고 했다.

"이제 좀, 저승으로 가자!"

푸슛! 푸슛!

이번엔 단 두 발이면 충분했다.

머리에 아예 들이밀고 쏜 대못에, 두 마리의 좀비가 축 늘어졌다.

-잘 거 아니면 얼른 일어나자.

-또 온다!

고천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망치를 들고 거실로 향했다.

좀비 세 마리가 더 들어와 있었다.

[어그로 7 - 04:52]

"너넨 다 뒈졌다."

장전된 걸 다 써 버린 못 총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170%의 인간이 든 망치 하나면 충분했다.

"으아아아아아!"

크아아아!

고천수는 가장 먼저 다가온 좀비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크륵?!

강력해진 타격에 좀비의 머리통이 찌그러졌다.

콰당탕!

"자, 다음!"

그러자 차례대로 달려온 나머지 좀비들도 각자 두개골 함몰 진단을 받게 되었다.

크아아악!

바닥에 쓰러져 단말마처럼 괴성을 내지르는 환자를 보며 고천수는 망치를 다시 고쳐 잡았다.

"조용히! 하세요!"

퍽! 퍽! 퍼억!

소란스럽던 거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고천수는 망치를 든 손을 늘어뜨리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후우, 빨리 움직여야겠네."

반파된 집이다 보니 몬스터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부엌으로 다시 향하던 고천수는 순간 멈칫했다.

덜컹.

그쪽에서 다시금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테이블에서 식사 기다리고 있나 봄.

-ㅋㅋㅋ 혹시 통조림 참치 아니냐?

-과연 누가 식사가 될 것인가....

고천수는 조심스럽게 부엌으로 접근했다.

망치를 쥔 손에 자연스럽게 힘이 더 들어갔다.

[어그로 7 - 02:13]

어그로가 끌린 숫자가 8로 바뀌는 순간 적이 달려들 것이었다.

'2분 내로 끝장낸다.'

효과가 남아 있을 때 속전속결로 마무리 지어야 했다.

움찔.

그렇게 부엌에 뛰어든 고천수는 망치를 휘두르지 못하고 멈칫했다.

'뭐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떨어져 있는 참치 캔 하나가 보이긴 했다.

"뭐...?"

하지만 부엌에 숨을 공간은 없었다.

굳이 찾자면 테이블 밑이 있긴 한데, 거기에 좀비가 들어갈 일은....

"흐악!"

짧은 비명. 고천수 또한 놀라 물러섰다.

"뭐, 뭐야."

방금 그건 분명 좀비가 낸 소리가 아니었다.

고천수는 다시 조심스레 테이블 밑으로 시선을 향했다.

거기에는 웬 젊은 남자가 겁을 집어먹은 채 웅크려 있었다.

***

"누구?"

남자는 '명서 중국집'이라고 쓰인 티를 입고 있었다.

장갑까지 끼고 있는 것으로 봤을 때 배달원처럼 보였지만, 그건 고천수가 알 바 아니었다.

"누굽니까, 당신?"

고천수가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남자는 마른침을 삼키고 답했다.

"저, 저 밖에서 들어온...."

-이 새끼였네.

-좀비 몰고 라이딩했나.

고천수는 테이블 다리를 붙잡고 고개를 안으로 들이밀었다.

"정말입니까?"

"예, 예?"

"좀비들 몰고 들어왔냐고요."

그 말에 남자는 제대로 대꾸하지 못했다.

고천수는 눈썹을 움찔거렸다.

"덕분에 뒈질 뻔했습니다. 똑바로 대답 안 하면 케이블 타이로 깡통 묶어서 내보낼 테니까 입 좀 뻥긋하세요."

"저, 저저저저 너무 무서워서 그만!"

남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외쳤다.

"그릇 수거하러 왔다가 괴물들이 몰려 와서요! 내내 계속 도망치다가 여기가 보여서...!"

"여기가 왜 보입니까."

"보, 보인다기보다는 누가 소리치는 게 들렸어요! 그쪽 소리가!"

고천수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들렸을 정도면 굳이 이 남자가 아니었더라도 좀비가 몰려들긴 했을 것이다.

-ㅋㅋ 양심에 찔리는 듯.

-그냥 몰아세워. 어차피 어리바리구만ㅋㅋ.

"어쨌든!"

고천수는 남자의 멱살을 붙잡아 끌어냈다.

"여기는 저희 부모님 집이고, 그쪽은 불청객입니다. 나가 주시죠."

"예?!"

남자는 고천수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아, 안 돼요! 안 돼요!"

"안 되긴 뭐가 안 돼요."

"밖에는 괴물들이 돌아다닌다고요!"

남자는 고천수에게 호소했다.

"그쪽 실력은 조금 전에 봤어요! 저 좀 도와주시면...!"

"도와주긴 뭘 도와줍니까."

그러자 남자가 고천수의 손에 뭔가를 쑤셔 넣었다.

"뭐죠, 이건?"

"저희 자장면 집 탕수육 쿠폰인데, 선물이에요. 나중에 주문하실 때 쓰시면...."

"골 때리네."

고천수는 쿠폰을 구겨 버리면서 소리쳤다.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쿠폰을 어디다 써요? 예?"

"그, 그러지 말고요."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다니는 것도 귀찮은데 혹까지 매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살려 준 거로 만족하고 가시죠. 비켜요."

남자를 밀어낸 고천수는 다시 부엌 찬장을 열고 뒤적거렸다.

부모님이 남기고 간 게 많았다. 자취방에서 챙기지 못한 것들을 이곳에서 차례차례 가방에 넣었다.

달그락.

그때, 남자가 가스레인지 위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불을 켰다.

"뭐야."

고천수는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뭐 하는 겁니까?"

"제, 제가 해 드릴게요."

"예?"

"저 요리할 줄 알거든요."

남자는 고천수를 쳐다보며 절박한 표정을 지었다.

"저 원래 주방 인원이에요. 배달은 갑자기 인원이 빠져서...."

"누가 이력 알고 싶대요?"

"배고프시죠?"

남자가 고천수의 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태 많이 싸우면서 오신 거잖아요. 꼬르륵 소리 나요!"

"...."

"해 드릴 테니 데려가 주세요! 혼자서는 안전한 곳으로 못 갈 것 같아요!"

그러더니 남자는 찬장과 냉장고에서 재료를 끌어 모아 마파두부를 만들기 시작했다.

"...뭐."

일반적인 마파두부는 아니었다. 프라이팬에 불이 타오르는 장관을 보고 고천수는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았다.

"음."

-이 새끼 뭐 하냐?

-여태 제대로 못 먹어서 좀 기대하는 듯.

-아니, 진짜 쌍으로 돌았나.ㅋㅋㅋㅋ

"저기, 이름은 뭐죠?"

부드러워진 고천수의 물음에 남자가 화색이 돌며 대답했다.

"정민규요! 명서 초등학교 앞 중국집에서 일하는!"

008화 빅 헤드

"그러니까... 명서 초등학교까지 빠르게 돌아갈 수 있다고요?"

끝내주는 마파두부 식사를 마친 고천수는, 참치 캔들을 가방에 챙기면서 물었다.

"네, 길은 빠삭하게 알고 있으니까요."

"오토바이를 타고 갈 때 말이겠죠?"

"네네."

그 오토바이가 문제였다.

"오토바이는 어디에 뒀는데요?"

"그게...."

정민규는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여기 근처 세탁방 아시죠? 그쪽 도로 달리다가 넘어졌는데, 괴물들이 달려들어서 버리고 왔어요."

"하아."

고장 났을지도 모르는 물건이었다. 고천수는 빠르게 포기하기로 했다.

"저한테 자전거 있으니까 뒤에 타기나 하세요."

"그걸로 될까요?"

이상한 질문이었다. 고천수는 여기까지 자전거를 타고도 잘만 들어왔으니까.

"별문제는 없겠죠. 왜요. 뭐라도 있습니까?"

"그게...."

정민규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전 봤거든요. 그거요."

"네? 뭘요."

"머리가 엄청 큰 괴물이요."

그 말에 고천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리 큰 괴물?"

"네. 제가 나가려고 하니까 그 괴물이 미친 듯이 쫓아왔었어요."

정민규는 소름이 끼치는지 양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 쥐며 부르르 떨었다.

"크으윽! 얼마나 끔찍하게 생겼던지...!"

"으음."

그건 아직 고천수가 발견하지 못한 몬스터였다.

"어쨌든 피할 수는 있던 거 아닌가요? 살아계신 걸 보면."

"운이 좋았어요. 그 녀석, 도중에 보이는 다른 괴물들도 집어 먹더라고요. 덕분에 피할 수 있었어요."

"엄청나게 신경 쓰이네요, 그거."

고천수는 거실로 나가 집의 부서진 부분들을 가리켰다.

"설마 이것도 그 녀석이 먹은 거려나요?"

"아, 아마도요?"

그것 참 비보가 아닐 수 없었다.

"근데 정민규 씨는 왜 여기로 온 거죠? 그게 여기에 아직 있을지도 모르는데."

"한바탕 먹고 간 곳이면 없을 테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고천수는 가방끈을 꽉 붙잡았다.

"아무튼 한번 노려지면 피하기 쉽지 않은 녀석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네네. 그래서 제 오토바이가 필요해요."

있으면 좋겠지만 괜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정민규 씨가 미끼라도 되면 생각해 보죠."

"네에?! 그, 그건...!"

"그럴 생각 없으면 그만두라고요."

조용히 빠져나가면 그만이었다. 속도가 얼마나 빠르든지 간에 들키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빅 헤드면 그 대가리 큰 놈 말하는 건가?

-초반부터 겁나 성가신 녀석 나왔네.

튜토리얼이 끝나고 나서부터는 난이도 조절이 정확히 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다.

고천수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것 없이 밖으로 나왔다.

"정보창."

[정보 1 : 명서 초등학교에 있는 경찰서장 보호 필요. 오늘 밤 위기에서 사망 시 도시 치안이 급격히 악화.]

아직 별다른 내용이 추가된 것은 없었다.

명서 초등학교로 가야 하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뭐 해요, 안 오고."

정보창을 끄고 뒤를 돌아보자 정민규가 부리나케 뛰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네네! 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만 오고 있는 게 아니란 데 있었다.

땡그랑! 땡땡그랑!

-좆됨.

그거야말로 고천수의 심경을 대변해 주는 채팅이었다.

"이런 시발!"

고천수는 자전거에 올라타 바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살려 줘요!"

뒤에서 정민규의 외침이 들렸다. 하지만 고천수는 그를 구하러 가지 않았다.

이미 늦었던 것이다.

"끄아악! 끄아아악!"

정민규를 집어 든 것은 다름 아닌 머리가 집체만 한 인간 형태의 괴물이었다.

"안 돼에에!"

빅 헤드.

총 크기가 6m는 되어 보이는 그 뒤틀린 거인은 정민규를 붙잡고 입에 넣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악!"

하지만 머리가 커서 결국 정민규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그냥 입을 들이밀었다.

"살려줘!"

그 입에서 도망치며 정민규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무시무시.

-도와주면 같이 좆된다.

그딴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고천수는 자전거 페달을 빠르게 돌렸다.

시속 25km로 제한된 이 전기 자전거의 자체 동력으로는 도망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런 판단이었다.

쿵쿵.

정민규의 비명이 사그라졌다. 대신 땅을 울리는 진동이 고천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어그로 1 - 09:58]

"망할...!"

페달을 미친 듯이 밟았지만 뒤로 쫓아오는 빅 헤드의 속도도 어마어마했다.

"왜 이렇게 빨라 저거!"

뒤를 살짝 돌아보자 빅 헤드가 거대한 머리를 흔들며 풀어진 눈으로 이쪽을 쫓고 있었다.

"생긴 것도 뭣 같이 생겨가지고는!"

자동차 대시보드에 올려놓는 스프링 인형같이 생긴 게, 빠르기는 정말 빨랐다.

쿵쿵쿵쿵.

진동이 가까워질수록 고천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

"헉헉."

현재 기록 누적 효과로 강화된 신체의 수치는 1.07.

어그로 효과로 지금 그 신체의 10%가 추가로 강해져 도합 110%의 출력을 내게 되었다고 해도, 고작일 뿐이었다.

"저딴 걸, 어떻게 상대해!"

헬 프로그 때와는 달랐다. 이번 녀석은 기지로 상대할 수가 없었다.

-뭐 여기까지였던 거지~.

-빅 헤드 식사 장면까진 보고 가자.ㅋㅋㅋ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하지만 이런 얘기를 듣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은 없었다.

"시바! 형님들, 판돈 올리십쇼."

고천수는 빅 헤드를 힐끗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저 고천수, 쉽게 안 죽습니다."

이대로 죽을 거면 정민규를 구하는 척이라도 하다가 뒈졌을 것이다.

그를 놔두고 여기까지 온 건,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어떻게....'

빅 헤드는 크기도 큰 주제에 속도도 빨랐다.

약점이라고 해 봤자 불균형해 보이는 저 몸뿐-.

"-아!"

고천수는 일단 자전거를 골목으로 끌고 들어갔다.

콰아아앙!

빅 헤드가 뒤를 무식하게 따라왔다.

어딘가에 부딪힐 걸 피하지도 않고 꼿꼿하게.

"그래, 새끼야. 어디 한번 해보자!"

고천수는 의도적으로 구조물이 많은 곳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빅 헤드는 머리를 이곳저곳에 살짝 부딪치면서 뒤뚱거렸다.

그때마다 목이 위태위태하게 꺾였다.

"찾았다!"

세탁방 앞. 정민규가 말했던 오토바이가 한 대 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어그로 3 - 05:58]

주변에 좀비 두 마리가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미끄러지듯 멈추고 자전거를 버린 뒤,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타다가 넘어졌다고 했으니 키는 확실히 꽂혀 있었다.

"제발...!"

멀쩡해야 도망칠 수 있었다. 시동을 다시 켜고 스로틀을 당겼다.

바퀴가 빠르게 돌아갔다.

부아아아아!

오토바이가 달리기 시작하자 좀비 두 마리가 그대로 쫓아왔다.

크아아아, 커!

하지만 금방 빅 헤드에 짓밟혀서 토마토처럼 터져 버렸다.

빅 헤드는 관심 없다는 듯 계속 고천수만 노렸다.

부우우아아앙!

오토바이의 속도는 점점 높아졌다.

빅 헤드의 속도도 더욱 빨라졌다.

직선 구간에 들어서자 완전히 레이싱이 되어 버렸다.

쿵쿵쿵쿵쿵.

진동이 점점 멀어졌다.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오토바이가 속도에서는 더 우위에 있었다.

슥.

그래서 고천수는 스로틀을 살짝 풀어 주었다.

-뭐 하는?

-설마 속도 낮추는 거?

그 말대로 오토바이는 점점 느려졌다.

쿵쿵쿵!

빅 헤드가 손을 뻗을 때 고천수는 다시 스로틀을 확 당겼다.

부아아앙!

빅 헤드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고천수를 놓쳤다.

다시금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가 반복됐다.

-뭐 하는 겨. 식은땀 흘리면서.

-이 새끼 쫄보면서 하는 짓은 쌉고인물.ㅋㅋㅋㅋ

고천수는 완전히 사색이 된 표정으로, 하지만 빅 헤드와의 술래잡기는 끝내지 않고 계속 도발했다.

'여기서 끝내면 어차피 또 오는 거잖아...!'

당장 도망만 가는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신의 집을 뜯어먹은 저 괴물에게 인과응보를 가르쳐 줘야만 했다.

쿵쿵쿵쿵쿵!

준비는 다 됐다. 고천수는 빅 헤드를 데리고 계속해서 도로를 달렸다.

목적지는-.

"-따라와! 이 새끼야!"

앞에는 암벽을 통과하는 터널이 있었다.

통과 높이는 분명, 5m 미만.

꾸우우우.

여태까지 괴성을 내뱉지 않던 빅 헤드가 몸을 뒤틀며 속도를 더 높였다.

빅 헤드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상관하지 않았다.

고천수는 바로 그 지능을 이미 확인했다.

부우우웅!

고천수의 오토바이가 먼저 터널로 들어갔다.

빅 헤드는 엄청난 속도를 줄이지도 않은 채 그대로 꼿꼿이 터널의 입구로 발을 옮겼다.

터엉!

콰자작!

그다음으로 일어난 건, 충돌음과 함께 빅 헤드의 약한 목이 바스러지는 일이었다.

***

명서 초등학교 앞.

동명의 이름을 쓰고 있는 중국집에서는 돌아오지 않는 직원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민규, 안 오는데?"

"뭔 일 난 거 아닐지 모르겠어."

주인과 주방장이 서로를 돌아보며 한숨을 쉬었다.

바로 앞 도로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다들 초등학교 안으로 들어오세요!"

경찰들이 피난 온 사람들을 초등학교 안으로 들이는 중이었다.

딸랑딸랑.

중국집 안으로 들어선 경찰 한 명이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인과 주방장에게 말했다.

"다들 이제 그만 나오세요. 초등학교 근처로 방호벽을 세울 겁니다."

"아직 직원 한 명이 오질 않아서요."

주인이 난감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경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미 죽은 겁니다. 그만 가시죠."

"뭐라고?!"

주인은 경찰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알아! 여기서 오래 일했던 놈이라고!"

"아니, 그건 아는데...!"

"코앞인데 뭐 어때! 좀만 더 기다리다가 가겠다는데!"

그러자 경찰도 이마를 눈썹을 움찔거리며 소리쳤다.

"아니, 그럼 여기 오면 알아서 초등학교로 오겠죠! 예? 방호벽 바깥에 있다가 공격당하셔도 책임 안 집니다!"

"자자."

주방장이 둘을 말리며 주인에게 말했다

"일단 넘어가자고."

"뭐?!"

"자네도 알잖아. 그 친구 살 길은 잘 찾아서 오는 거."

주방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여기에 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잖아. 초등학교 입구에 서 있으면 우리 보일 테니까, 가자고."

"...후우."

너무 흥분한 건 맞았다. 주인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경찰에게 말했다.

"그럼 좋아. 대신 그럼 부탁 좀 하지."

"뭡니까?"

"올 때 오토바이 타고 올 테니까 오면 말이나 해 주쇼."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듯 경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좋습니다. 그럼 이제 가시는 거죠?"

"알겠네."

주인이 경찰을 놓아 주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주방장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경찰에게 멋쩍은 듯 웃어 보였다.

"이해해 주쇼. 우리끼리는 워낙 친하게 지내서."

"아, 예."

"나는 주방에서 음식 좀 챙겨 나가도록 할 테니까, 먼저 가 계시겠소?"

"도중에 다른 데로 빠지거나 그러시진 않겠죠?"

경찰의 우려에 주방장은 헛웃음을 뱉었다.

"뭐, 그럴 이유가 있나. 근데 피난민 모으는 데 엄청 열심인 것 같은데, 윗사람이 신경 쓰시나?"

"말도 마세요."

이번엔 경찰이 한숨을 쉬었다.

"서장님이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최대한 구하라고 해 놓은 상태여서요. 다들 애쓰고 있습니다."

"좋은 분이구먼."

"뭐, 좀 불안하긴 하지만요."

그 말에 주방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알아서 좀 이따 오세요."

경찰은 그렇게 밖으로 나갔다. 주방장은 잠시 의문스러워하는 표정을 짓다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가져갈 것은 잔뜩 있었다.

다 팔기도 전에 이런 사태가 일어났으니까.

"말세야, 말세."

뭐만 일어나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했지만 진짜 말세가 올 줄은 몰랐다.

수레에 대강 식료품을 싣고 바깥으로 나갔다.

와글와글.

사람들이 경찰의 검문을 받으면서 하나둘씩 초등학교 입구를 통과하고 있었다.

"아, 이쪽으로 오세요!"

아까 보았던 경찰이 손짓했다.

"식료품입니다! 더 빨리 들어갈 수 있게 다들 협조해 주세요!"

그가 다른 사람들을 물려준 덕에 주방장은 더 빠르게 입구를 통과할 수 있었다.

"아, 고맙소."

주방장은 안내받은 대로 식당을 향해 이동했다.

그러다가 들었다.

"어?"

낯설지 않은 소음을.

부아아아아.

어디선가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확실했다.

"설마...!"

주방장은 수레를 내팽개치고 다시 입구로 향했다.

거기에는 이제 막 오토바이를 멈춰 세우는 한 명의 남자가 있었다.

"민규야! 살아 있었...."

하지만 주방장은 그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009화 명서 초등학교

"이, 이봐, 저거 뭐야?"

"사체?"

"괴, 괴물의 손가락이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우르르 뒤로 물러섰다.

오토바이에서 내린 고천수는 뒤에 줄로 매달려 있던 빅 헤드의 손가락에 살짝 시선을 던졌다.

-이놈 이거 완전 관종이네.

-손가락이 무슨 전리품이냐?

-사람들 눈깔 튀어나오려는 거 보소.ㅋㅋㅋ

정답이 있었다.

전리품이었다. 다만 의도는 있었다.

"미, 민규는?"

입구를 지키는 경찰과 제일 먼저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웬 중년 남자가 고천수에게 먼저 다가섰다.

"민규?"

듣자마자 누군지 바로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게 꽤나 강렬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던가.

'아는 사람인가.'

한숨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굳이 숨길 것도 없었다.

"죽었습니다."

"주, 죽어?"

"네."

"주, 죽다니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지금은 바빠서 실례하겠습니다."

고천수는 남자 뒤에 있는 경찰관에게 다가갔다.

"여기, 책임자 계신가요."

"책임자?"

서로를 돌아보던 경찰들 중에, 한 명이 나와서 고천수 앞에 섰다.

"총책임자라면 따로 있지만, 입구만이라면 접니다."

무궁화 세 개, 계급은 경정이었다.

"경비교통과 과장 이서준입니다."

"고천수라고 합니다."

바로 통성명을 해 오기에 응해 줬다.

이서준은 고천수의 뒤를 흘낏 보며 말했다.

"깜짝 놀랐습니다. 저 사체 부분은 설마 머리 큰 그 녀석 겁니까?"

"네, 알고 계십니까?"

"알다마다요."

이서준은 굳은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 때문에 동료들이 몇 죽었습니다."

"과장님도 마주친 적이 있는 겁니까?"

"마주쳤다기보다는 멀리서 봤죠. 도와주러 가지도 못했습니다."

이서준이 고천수에게 바로 관심을 보인 건 다름이 아니라,

"그런데... 어떻게 죽인 겁니까, 저 괴물은?"

그런 무지막지한 녀석을 어떻게 없앴는지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역시.'

고천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 가져오길 잘했네.'

말로만 전해 봤자 믿지 않을 사람이 있을 것이기에 챙겨 온 것이었다.

"제가 해치웠습니다."

"예?"

이서준은 바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해치웠... 다고요?"

"말도 안 돼."

"그런 괴물을?"

줄 서 있던 사람들도 놀라서 함께 반응했다.

"본 분들이 좀 있나 보네요."

고천수는 그렇게 말하며 오토바이에 매달려 있는 손가락으로 다가갔다.

"이거."

고천수가 쭈그려 앉으며 그걸 만지자 사람들이 기겁하며 움찔했다.

"걱정 마세요. 죽은 거니까. 다만 제가 직접 죽이진 않았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이서준이 다가와 묻는 말에 고천수는 이번엔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

"스스로 처박고 죽었어요."

"네? 스, 스스로 처박다니."

"자세한 건 조금 이따가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고천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여태 옷에 묻어 있던 먼지를 뒤늦게 털어냈다.

"저도 여기 들어오려고 온 거라."

"아."

이서준은 흠칫하며 줄을 돌아보았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검문을 받고 있었다.

"머, 먼저 하라고 해요."

"네, 그 괴물을 죽였다잖아!"

"사냥꾼 같은 사람이네! 얼른 넣어요!"

눈치를 보던 시민들이 서둘러 절차를 양보했다.

-이야, 영웅 납셨네.

-솔직히 빅 헤드 자연사한 거 아님?

-맞아, 런닝하다가 죽으면 자연사지.

웃기는 채팅에 웃어 줄 틈도 없었다.

고천수는 경찰의 소지품 검사에 응하다가 순간, 그 이름을 떠올렸다.

'영웅?'

그러고 보니 먼저 그놈이 여기에 왔을 것이었다.

"저, 과장님."

"네?"

"혹시 여기 허영웅이라는 경찰 있습니까?"

그러자 이서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허영웅?"

"도중에 만난 파출소 순경인데, 이쪽으로 온다고 했습니다."

"음...."

이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곧장 그쪽으로 발령 난 순경인 것 같은데, 그럼 모릅니다. 전산을 살펴보면 정보는 알 수 있겠지만요."

"지금은 불가능하겠네요. 알겠습니다."

확인 절차를 마친 고천수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여태 멍하게 있던 중년 남자가 순간 달라붙었다.

"이, 이봐, 잠깐만. 민규는 진짜 죽었나?"

"...죽었다고 했을 텐데요. 혹시 아시는 분인가요?"

반문하자 중년 남자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난 민규가 일하던 중국집의 주방장이네...."

"아아."

고천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만나서 같이 오려고 했는데, 저 괴물 때문에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랬나. 그럼 오토바이는...."

"예, 그분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줘서 타고 온 겁니다. 절대 뺏어 타고 온 건 아니니 걱정 마세요."

증거라면 이게 확실할 것이었다.

"그 분이 마지막으로 해 준 마파두부, 기억에서 잊지 못할 겁니다."

"아...."

-이 새끼, 협박으로 얻어먹은 거나 다름없으면서.ㅋㅋㅋㅋ

-민규 지옥 문 박차고 나올 듯.

-진짜 인성ㅋㅋ 오지네.

기억에서 잊지 않는다는 건 진심이었다.

생전 그렇게 맛있는 마파두부는 먹어 본 적이 없으니까.

"민규 씨 덕에 살아 나온 거니 아시는 분이 있다면 대신 감사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고천수는 남자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크윽."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고천수가 손을 떼고 가려고 하자 남자는 그제야 입을 다시 열었다.

"장만철. 난 장만철이네."

"예?"

"그 녀석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인데, 이름은 서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해서."

"그렇군요."

고천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전 고천수입니다."

"고천수...."

"그럼."

대화를 끝마치고 고천수는 바로 학교의 본관으로 향했다.

'허영웅, 여기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더욱 수상해졌다.

"정보창."

[정보 1 : 명서 초등학교에 있는 경찰서장 보호 필요. 오늘 밤 위기에서 사망 시 도시 치안이 급격히 악화.]

경찰서장의 보호가 필요한 건 다름 아닌 오늘밤이었다.

'벌써 해질 시간이 다 됐는데....'

그놈이 진짜 빌런이면 곤란했다. 이곳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뭐라도 몰고 오면 큰일이었으니까.

"형님들, 일단 경찰서장부터 만나겠습니다."

고천수는 운동장에 있는 이들을 헤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근데 그냥 여기서 도망치는 게 더 낫지 않냐?

-그러게. 괜히 꼬리 잡히는 거 아니냐.

그렇지 않았다. 이런 류의 게임에서 도시 치안이 약해진다는 건, 인간 빌런들이 늘어남을 의미했다.

잘못하면 도시를 빠져나가는 데 심각한 장애를 얻을 수도 있었다.

"형님들 함정 장인들이네요."

이미 이 게임을 자주 봐 왔다는 존재들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걱정 마십시오, 재미없지는 않을 테니까."

"여러분! 식사 제공할 테니 모이세요!"

운동장의 단상에 올라 소리치는 경찰이 있었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한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대략 150명쯤 될라나...."

인원을 파악한 고천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정도로 많은 인원을 무력화시키고 경찰서장을 공격할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아, 거기!"

단상에 올라가 있던 경찰이 고천수를 보고 외쳤다.

"식사 드릴 테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거기는 본관이에요!"

"됐어요."

고천수는 손을 살짝 흔들었다. 지금 식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본관 앞으로 걸어가니 이번엔 그 입구를 지키고 있는 문지기 경찰이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시죠?"

"경찰서장을 만나러 왔습니다."

고천수의 말에 문지기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경찰서장님이요?"

"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게...."

문지기는 한숨을 쉬었다.

"답변 드리기 곤란합니다."

"왜죠?"

"답변 드리기... 곤란하니까요?"

딱 봐도 중요한 정보가 이곳에 있었다. 고천수는 문지기의 허리춤에 있는 무전기를 가리켰다.

"저한테 알려 주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경비교통과 과장님한테 무전해 보세요."

"네?"

"고천수가 경찰서장님 찾는데, 말해 줘도 되냐고 물어보십시오."

안 알려 주면 안 알려 주는 대로 정보를 캘 생각이었다.

문지기는 떨떠름한 얼굴로 무전을 걸었다.

"예, 과장님. 아, 알려 주라고요?"

그리고 문지기는 사정을 설명하고 고천수가 원하는 답을 받아왔다.

"과장님이 알려 주라고 하시던데... 혹시 괴물이라도 잡고 오셨나요?"

"예."

"아, 어쩐지...."

문지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능력이 좀 있으신 분은 채용하려고 그랬거든요."

"무슨 일이 있는데요?"

"경찰서장님이 실종되셨어요."

실종. 그 단어에 고천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밖에 나가셨다가 없어지셨어요. 돌아온 인원들하고 수색을 계획 중이에요."

"그랬군요. 수색은 언제 나갈 예정인가요?"

"도와줄 인원 몇 명을 추린 뒤에 갈 거라, 저녁 이후가 될 것 같아요."

이미 경찰서장은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었다.

고천수는 문지기에게 추가로 더 물었다.

"지금 당장 수색을 하지 않는 이유는 뭐죠?"

"그게... 경찰서장님만 없어지신 상태에서 어느 정도의 인원을 수색에 투입해야 할지 정할 수가 없어서요."

현재 이 초등학교에 몰려 있는 일반인들의 수는 경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문지기는 고천수에게 그러한 사실을 설명했다.

"저희 경찰 인원은 지금 30명이에요. 어중간하죠."

-엄살은.

-30명이면 충분하지.

-무기도 들고 있을 거 아냐?

그렇지 않았다.

'30명이라....'

고천수는 운동장 쪽을 돌아보았다.

총을 든 인원 몇이 많은 수의 일반인을 통제하는 건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권총 외에 전문적인 무기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부족했다. 30명은 수색을 하는 인원과 통제하는 인원으로 나누기에 명백히 모자란 수였다.

"괜찮다면 경찰서장님이 원래 계셨던 장소를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임시 집무실 말입니까? 하지만 들어가셔도...."

"이제 저한텐 숨길 것 없지 않습니까. 같이 수색을 나갈 건데."

"그, 그런가."

또다시 당황한 표정을 짓는 문지기를 고천수가 몰아붙였다.

"시간이 없습니다. 혼자 있을 때 어떻게 움직이실지 알려면 저도 정보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네요."

문지기는 슬쩍 자리를 비켜주며 말했다.

"하긴 사실을 모르는 사람만 막으라고 했으니까요. 올라가서 교장실이라고 적힌 곳에 가 보세요."

"감사합니다."

고천수는 그 길로 곧장 본관 안에 발을 옮겼다.

-어리바리하네.

-이렇게 쉽게 열어 줘도 되나?

어차피 임시 집무실이라고 그랬다.

흔적이라고 해 봤자 별로 있는 것도 없을 테고, 뭣보다 수장이 없는 상태니 얼이 빠질 수밖에 없는 거야 당연했다.

"속이 타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적극적인 사람을 말릴 여유가 없을 만큼, 정신이 없는 것이었다.

"솔직히 영혼 없이 매뉴얼대로만 행동하고 있을 걸요?"

머리가 없는 상태에서 핀치에 몰리면 결과야 뻔했다.

"잠깐."

고천수는 경찰서장 집무실이라고 조악하게 적혀 있는 문 앞에 도착했다.

"집무실이에요. 형님들도 뭐 볼 거 있으면 잘 봐 두세요. 제가 도움 좀 받게."

채팅창이 '싫어ㅋㅋㅋ'으로 가득 찼지만 고천수는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야."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테이블과 소파 세트랑 집무실 책상뿐이었다. 굳이 더 추가하자면 벽의 게시판 정도.

"그래도...."

책상 위에는 지도가 한 장 있었다.

빨간색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 지역을 보니, 고천수가 집 때문에 다녀왔던 곳 근처였다.

"단서가 있긴 있네."

왜 거기에 갔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빅 헤드를 해치우고 왔으니 이제 수색에 별 탈은 없을 터.

'어딘가에 살아 있는 경찰서장만 데려오면....'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천수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똑똑똑.

"누구십니까?"

고천수는 천천히 걸어가 문 앞에 섰다.

경찰서장이 없는 걸 아는 경찰이라면 문을 두드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올 수 있는 사람은 자신 외에 경찰밖에 없을 것이었다.

"누구시냐니까."

『허영웅 순경 찾으셨다면서요?』

문의 불투명하고 작은 창을 통해 경찰복이 흐릿하게 비쳤다.

『답 없으시면 들어갑니다.』

010화 머리 쓰게 하지 마

무작정 들어온 남자를 보고 고천수는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은...."

남자는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경위 계급의 경찰이었다.

"진짜 누구죠?"

그 질문에 남자는 살짝 웃어 보였다.

"파출소장입니다."

"...파출소장?"

"영웅이가 있던 남부 파출소장이요."

그 말에 고천수는 손뼉을 탁 쳤다.

"아! 파출소장님."

늦었지만 허영웅의 관계자가 나타났다. 몬스터에게 다 당하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이다.

"진짜 파출소장님이세요? 만나서 반갑기는 한데."

"네, 진짜입니다. 뭔가 경계심이 많은 분이군요."

그야 순경 한 명만 거기에 버리고 이곳에 온 파출소장이라고 하면 의심부터 하는 게 정상이지 않은가.

"네, 뭐. 근데 허영웅 씨를 언급하는 거 보니까 다른 분께 얘기 좀 듣고 오셨나 보네요?"

"네, 과장님한테 들었습니다."

남자는 대답하며 고천수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그보다 먼저 인사부터 제대로 하죠. 진경호입니다."

"아, 예. 고천숩니다."

맞잡고 나니 남자, 진경호는 갑자기 손에 힘을 빡 주었다.

"그래서, 영웅이는 어디서 보신 거죠?"

-힘겨루기 하면 우리 고천수가 빠지지 않지!

-역관광 가즈아!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강한 상대였다.

"크윽!"

고천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진경호를 쏘아봤다.

"손 박살 낼 거 아니면 놓으시죠."

1.07의 신체로는 그의 근력에 당해 낼 수 없었다.

"놓아 드릴 테니 잘 알려 주시겠습니까?"

"네, 기꺼이."

만약에 놓지 않는다면 지금 책상에서 집어 든 볼펜을 목에다 쑤셔 박아 줄지도 몰랐다.

"자."

그러자 진경호는 손을 풀어 주고 다시 물었다.

"영웅이, 어디서 보셨습니까?"

"어디서 보긴요. 파출소에서 봤지."

물론 그 이후에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그것까지 가르쳐 주고 싶진 않았다.

"혼자만 거기서 떠돌고 있던데, 혹시 두고 가신 거 아닙니까?"

날 서게 묻자니 진경호가 살짝 흠칫했다.

"두고 가긴요. 그 친구가 거기에 남겠다고 자원한 거지."

"자원?"

"거기 있는 범죄자 하나 그냥 두고 갈 수는 없다고 남았던 놈입니다. 연락도 안 되고 해서 어떻게 됐나 했더니 아직도 거기 있었나 보네요."

한숨을 짓는 진경호를 보며 고천수는 의문을 표했다.

"혹시 다시 데려올 생각입니까?"

"예, 뭐. 여유가 되면 다시 데려와야죠. 다만 이쪽 일이 해결되면요."

쉽게 순경 하나 찾으러 갈 수는 없다는 뉘앙스였다.

하긴 경찰서장과 순경을 저울에 달자면, 어느 쪽이 기울어지는지는 뻔할 것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당장이라도 구할 것처럼 힘 빡 주시던데요."

"제가 약간 과했네요. 그래도 역시 신경은 쓰여서 말이죠."

사과의 의미인지 진경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제가 좀 무례했습니다. 이해해 주시면 좋겠군요."

"예, 뭐."

"저희를 도와 경찰서장님을 찾는 걸 도와주시기로 하셨다는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진경호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거, 또 힘겨루기하자는 건 아니죠?"

고천수가 게시판에서 압정을 하나 떼어내 손에 올렸다.

"손이 아파서 살짝만 부탁드립니다."

"하하, 이것 참."

진경호는 멋쩍은 웃음을 뱉었다.

"기분이 안 풀리셨나 보군요."

"아뇨, 풀리긴 했는데 혹시나 해서요."

고천수는 압정을 내려놓고 다시 손을 내밀었다.

"압정 하나 더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니 주의하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물론 압정이 없는 것을 확인한 진경호는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그럼 저는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좀 이따 소집 때 뵙죠."

"그러죠."

고천수는 나지막이 답했다. 진경호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좀 거슬리는 놈이네.

-없애 버릴까?

-어이, 참아. 또 하나의 나.

"형님들, 진정하십쇼."

파출소장에 투자할 시간은 없었다.

"남부 파출소에서 온 사람이 더 있는지부터 찾아보죠."

***

밖으로 나간 고천수는 본관 앞에 서 있는 문지기 경찰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요?"

"아, 깜짝이야."

문지기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답했다.

"뭡니까. 뒤에서 오셔서 놀랐잖아요."

"뭣 좀 물어보려고요."

"뭔데요."

고천수는 운동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저 멀리의 진경호를 가리키며 질문했다.

"혹시 남부 파출소에서 온 다른 인원이 있습니까? 파출소장님 말고요."

"그건 왜요?"

"제가 그쪽 방향에서 와서요. 얼마나 왔나 궁금해서."

그러자 문지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라면 어디 가서 또 묻지 마세요. 거기 몰살당했어요."

"몰살?"

"초등학교까지 오면서 다 사망했다고 하더라고요. 거리에서."

"거리라...."

오면서 그런 흔적은 본 적이 없었다.

고천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덕분에 도움이 됐네요."

"그럼 다행이고요. 가서 이제 저녁이나 드세요. 시간 끝나 가요."

중국집 직원이었던 정민규가 만들어 줬던 식사가 아직 고천수의 배 속에 남아 있었다.

'존나 양심 찔리네.'

하지만 그가 게임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이 지옥도 종료되지 않았다.

반대로 클리어만 할 수 있으면 모든 걸 뒤집어놓을 수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은 생존해야 했다.

"꺄아아아악!"

갑작스러운 비명에 고천수가 운동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식사를 받고 있던 한 남자가 온몸을 뒤틀며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괴, 괴물이야!"

"도망쳐!"

"으아아아악!"

사람들은 남자에게서 급하게 달아났다.

"저, 저거!"

문지기도 총을 빼어 들고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뭐야."

고천수는 비어 버린 본관의 정문을 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이렇게 쉽게 비워 두고 가도 되는 거야?"

문지기가 당황한 건 이해가 갔다. 안쪽에서 몬스터들이 생겼다간 걷잡을 수 없어질 테니까.

"에휴."

고천수는 망치를 꺼내들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도와야지 어쩌겠냐."

크아아아아!

그사이 좀비들의 수는 족히 열이 넘게 늘어나 있었다.

주변에 비명도 늘어났다.

"살려 줘! 끄아아악!"

희생자가 발생한 상황에 경찰들도 우왕좌왕했다.

"다, 다들 물러서요! 총을 쏠 수가 없잖아!"

"비키라고!"

"총 대신 곤봉 들어요!"

그때, 고천수가 망치로 좀비 한 마리의 머리를 때리며 외쳤다.

"못 쏘겠으면 곤봉이라도 들라고!"

-뭔 놈의 어리바리밖에 없냐.

-천수, 소지품 검사에서 망치 안 뺏긴 거 실화임?

-사냥꾼이니까 놔둔 거지.

그 말대로 고천수는 경찰들이 곤봉을 빼어 들기도 전에 빠르게 좀비를 사냥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던 주방장 장만철도 튀어나왔다.

"이보게, 친구! 우리도 도움세!"

그의 종용에, 옆에 있던 명서 중국집의 주인은 겁먹고 물러섰다.

"아, 안 돼! 괴물들이잖아!"

"저 새끼들이 우리 민규를 죽인 거라고!"

엄밀히 말하면 다르긴 했지만 장만철에겐 그 사실이 무의미했다.

일단 저게 사람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게 중요했다.

"죽어라, 이 괴물들아!"

장만철은 땅에 떨어져 있는 프라이팬 하나를 들고 고천수의 곁으로 달려갔다.

까앙!

그렇게 좀비 한 마리의 머리를 치자 고천수가 이쪽을 돌아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고천수는 다시 좀비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망치를 고쳐 잡은 그는 좀비를 한 마리씩 끝까지 족치지 않고, 모조리 머리를 한 대씩 치고 돌아다녔다.

"뭐, 뭘 하는 거지?"

장만철은 의문을 표하다가 곧 깨달았다.

머리를 조금이라도 얻어맞은 좀비들은 타격을 입은 채 오랜 시간 뒤뚱거렸다.

그랬다. 고천수는 지금 사냥보다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벌어 주는 것이었다.

"아."

장만철이 탄식하는 순간, 경찰들이 일반인들과 좀비들 사이에 성공적으로 끼어들었다.

퍽!

누군가 울린 곤봉의 타격음을 시작으로,

퍽퍽퍽퍽!

그야말로 난타전이 시작됐다. 좀비들이 경찰들의 곤봉에 하나둘씩 넝마가 되어갔다.

"여, 여기도...!"

그럼에도 안심하지 못한 사람들이 곳곳에서 소리쳤다.

"여기도 괴물들이 들어오잖아!"

몇몇이 탈출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자 수십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그 뒤를 쫓았다.

입구에는 이서준 과장이 서 있었지만 제 발로 나가는 이들을 막지는 못했다.

"아, 시발."

그 광경을 보며 고천수는 이를 갈았다.

"이거 어떤 새끼냐."

좀비는 지금 밖에서 밀고 들어온 게 아니라 이곳에서 발생했다.

물린 이가 입구에서부터 걸러지지 않은 탓에 이런 사태가 생긴 것이었다.

'좆같네, 진짜.'

물증은 없지만 심증만은 확실해졌다.

이곳에 몰려 있는 경찰들 중에 미친 새끼들이 섞여 있었다.

-이번에도 그놈이 빌런?

-그런 건 랜덤 아님? 수상한 놈이 한둘이 아닌데.

-그냥 이 참에 탈출하라니까??

할 때 하더라도 이렇게 소득 없이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적어도 정보 2 정도는 오픈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야 다음 행선지로 방향을 잡을 수 있었으니까.

"형님들, 저 머리 아픈 거 못하겠습니다."

이젠 누가 어떤 역할인지 찾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선역으로 확정돼 있는 사람만 데리고 오면 그만 아닌가.

"저기, 아저씨!"

다들 혼란에 빠져 있을 때, 고천수는 장만철을 부르며 곁에 다가갔다.

"나, 나 말인가?"

"그럼 누가 있겠나요.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고천수의 말에 장만철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뭘 말인가?"

"저 없는 동안 여기 순찰 좀 해 주세요."

경찰들에게는 아무것도 부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마파두부의 인연을 믿는 편이 나았다.

"경찰들 중에 수상한 짓하는 사람 있으면 살펴봐 달라는 거예요."

"가, 갑자기 무슨. 내가 그런 걸 왜...."

"설득할 시간 없어요. 경찰서장님 구하러 가는 파티에는 절대 참가하지 마시고요. 알았어요? 정민규 씨 은혜 갚을 테니까."

고천수는 장만철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살고 싶으면 제 말대로 하세요."

그러자 장만철의 두 눈이 크게 커졌다.

고천수는 그의 눈빛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뗐다.

좀비들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누구도 고천수를 신경 쓰지는 못했다.

"고천수 씨! 어디 갑니까!"

입구 쪽에 다다르니 그제야 고천수를 붙잡는 소리가 있었다.

"같이 하기로 한 게 있는데 도망치는 겁니까!?"

진경호였다. 고천수는 헛웃음과 함께 그 외침을 무시했다.

"고천수 씨!"

입구를 빠져나가려니 이서준도 고천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가지 마세요!"

"내부나 더 신경 쓰시죠!"

고천수는 그 손을 치워내며 오토바이로 향했다.

다행히 아직까지 그곳에 세워져 있었다.

부릉.

시동이 걸렸다.

오토바이는 시원스레 달려 나갔다.

***

목적지는 지도로 확인한 곳이었다.

고천수는 경로를 떠올리며 오토바이의 핸들을 꺾었다.

"이미 죽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좀 불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난이도 조절이 망가졌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야, 방금 뭐 스쳐지나가지 않았냐?

-안경 쓴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천수야, 채팅 좀 보자ㅋㅋ

뭐가 됐든 간에 경찰서장을 구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지역을 돌면 대충 답이 나올 것이었다.

-뒤! 뒤!

뒤늦게야 채팅을 본 고천수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저 멀리서 누군가 손을 들고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누구?"

잠시 오토바이를 멈춰 세운 고천수는 그 사람이 올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그렇게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에야 고천수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허영웅?!"

둥근 안경을 쓴, 바보같이 생긴 그 순경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헉헉! 저기요!"

허영웅은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그, 그분 맞죠! 전기 자전거!"

"뭐야, 대체."

고천수는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다.

어디서 길을 잃고 헤맨 것인지 허영웅의 몸은 완전히 엉망이 되어 있었다.

"자전거 주고 가서 엄청 고생했어요! 도와주세요!"

잡힐 것 같았기에 고천수는 오토바이를 약간 앞으로 이동했다.

"가, 가지 마세요!"

가까이 올 때마다 조금씩 더,

"기다려 달라니까요!"

핸들의 스로틀을 당겨서 계속 거리를 벌렸다.

-아니, 인성 미쳤나.ㅋㅋㅋㅋ

-표정은 심각한데 하는 짓이....

인성이고 뭐고 고천수는 허영웅의 허리를 보며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바지부터 해명하시죠."

011화 후원자

"바지요? 웬 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허영웅이 자신의 바지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엔 제가 챙겨 온 무전기들이랑...."

"아뇨, 허리 사이즈요."

"네? 사이즈요?"

"네, 그거."

아직 순경밖에 안 되었으니 체형이 급격하게 바뀌었을 리도 없었다. 바지가 안 맞는 건 말이 안 됐다.

"뭘 해명하면 되나요?"

"안 맞잖아요. 누구 거 뺏어 입은 거예요."

"예?!"

허영웅은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뺏어 입다뇨."

"아, 예. 그럼 안녕히 계세요."

고천수가 다시 오토바이를 출발시키려고 하자 허영웅이 대뜸 바지를 풀어 내렸다.

"여, 여기 보세요! 제 신분증!"

그는 허벅지에 동여 메고 있던 신분증을 풀어 내 흔들었다.

"제 신분을 의심하는 거죠? 이거 보면 되잖아요!"

"아, 씨."

고천수는 오토바이를 멈추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갈 길도 바쁜데 못 볼 꼴 보네."

"자요! 확인해 보세요!"

허영웅은 달려와 고천수의 면전에 신분증을 들이밀었다. 고천수는 그에게서 신분증을 받아서 살펴보았다.

'진짜네.'

위조한 흔적은 없어 보였다. 시간상 이 정도의 정교한 위조는 할 수 없을 테니 진짜라고 봐도 무방했다.

"아니, 그럼 바지는 왜 그 모양이에요."

"출근했을 때 입고 있던 바지가 찢어졌거든요. 다른 사람 거 여유분 빌려 입어서 그런 거예요. 바지 또 찢어질까 봐 신분증은 이렇게 보관했고요."

설명에 막힘은 없었다. 고천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 데려가.

-뭔 솔? 짐짝 들고 갈 필요는 없지.

-고기 방패 하나쯤은 필요하잖아.

데려갈지 고민이 됐지만 채팅창의 의견을 들으니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됐다.

"알겠습니다. 데려갈게요."

미끼로 쓸 만한 인간이 하나 있으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채팅창의 의견을 들으면 헛소리만 내뱉는 게 아니었다.

-탁월한 선택임.

-진짜임? 난 좀 헷갈리는데....

-초보 시청자 존나 많네, 이 방.

시청자 중에서도 분명 고인물이 섞여 있었다.

몬스터와는 다르게 인물에 대해서는 스포를 피하려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귀 기울이면 충분히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허영웅, 넌 진짠가 보네.'

고천수는 오토바이의 뒷자리로 이동하며 허영웅에게 운전석을 가리켰다.

"허 순경님, 오토바이 운전 좀 하실 수 있습니까?"

"운전이요?"

"못 하시면 두고 갈 겁니다."

그러자 허영웅이 부리나케 운전석에 앉으며 말했다.

"하죠! 네!"

"그럼 지금부터 제가 안내하는 대로 가 주세요."

직접 운전하는 게 좋겠지만, 아무래도 등을 허락할 수는 없었다.

"근데 이쪽은 명서 초등학교로 가는 방향이 아닌데요?"

고천수가 가야 하는 곳을 가리키자 허영웅이 바로 토를 달았다. 고천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거기에서 나온 길입니다."

"명서 초등학교에서요? 왜요? 무슨 일 있나요?"

"급하니까 일단은 좀 달리면서 얘기하는 게 어떨까요?"

부드럽지만 뼈 있는 반문에 허영웅이 당황하며 스로틀을 당겼다. 오토바이가 미끄러지듯 출발했다.

"허 순경님, 운전 실력은 썩 나쁘지 않네요."

"그래서, 거기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허영웅의 음색이 조금 달라졌다.

'경찰들이 거기 있다고 들어서 그런가.'

고천수는 장난하지 않고 진지하게 답변을 해 줬다.

"좀비들이 나타났거든요. 지금 거기 장난 아닙니다."

"예?! 좀비들이 거기에...."

"문제는 거기서 사람들을 통제해야 될 경찰서장님도, 실종돼 버렸다는 거죠."

그 말에 오토바이가 잠시 흔들렸다.

"허 순경님, 이해는 하지만 사고는 안 나게 부탁드립니다."

"아, 죄송해요. 그 얘기, 좀 더 자세히 해 주실 수 있나요?"

순경에게 말해 봐야 뭔 이득이 될까. 하지만 목적지도 안 듣고 달리고 있는 이 착실한 인간을 보니, 고천수는 굳이 숨길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경찰관들이랑 같이 순찰 나갔다가 실종된 것 같던데요."

"괴물한테 당한 건가요...?"

"그렇진 않을 걸요."

아직 살아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지만, 고천수는 그걸 허영웅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저희가 지금 가는 곳이 바로 그 경찰서장님이 없어진 장소입니다."

"네? 정말요?"

"네. 정말이니까 진정하세요."

경찰서장이라고 해도 남일 뿐이었다. 세계가 이렇게 된 마당에 뭘 그렇게 놀라나 싶었지만, 고천수가 다음에 들은 답변은 굉장히 외의의 것이었다.

"아, 죄송해요. 그분, 제 친척이니까 아무래도 엄청 신경 쓸 수밖에 없어서요."

"친척? 경찰서장님이 친척이라고요?"

"네, 제 큰아버지예요."

움찔.

고천수는 눈을 크게 떴다.

'큰아버지라고?'

설마 그런 연관성이 있을 줄이야. 하지만 일단 시야가 트인 게 중요했다.

모아 두고 있던 퍼즐 조각이 빠르게 맞춰졌다.

'아아.'

순간 판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깨달았다. 고천수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이제야 알겠네!"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천수는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저기요. 고새 다 왔네요."

어차피 할 일은 똑같이 정해져 있었다.

***

장소에 도착하니 주변은 컨테이너 박스로 가득했다.

"여기서 실종되신 거예요?"

허영웅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물었다.

고천수는 대답하지 않고 똑같이 주위부터 살폈다.

'일반 컨테이너 박스들이 아닌데?'

대부분 창문과 현관문이 달려 있었다.

컨테이너 하우스였던 것이다.

'잠깐 머물렀던 건가....'

사람들이 있던 흔적이 있었다. 진지 같은 것으로 활용하려고 했을지도 몰랐다.

"저기, 고천수 씨?"

오토바이를 멈추기 전에야 통성명을 나눴던 허영웅이 고천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여기서 실종되신 거 맞나요?"

"...아마 그럴 거예요."

어디서 실종됐는지를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지만 이 부근인 것만은 확실했다.

"허 순경님은 경찰서장님의 흔적이 있나 좀 찾아봐 주세요. 저보다 잘 알 테니."

"고천수 씨는요?"

"저는 저 나름대로 찾을 게 있습니다."

허영웅은 의문스러운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곧 걸음을 뗐다.

"알겠어요. 위험하니 혼자 너무 멀리 가지는 마세요."

누가 할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혼자 남은 고천수는 다시 눈에 불을 켜고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어떤 몬스터냐.'

경찰서장이 함정에 당했다면 역시 몬스터에게 몰렸을 가능성이 있었다.

근처가 엉망이 된 것을 보니 다들 급하게 이곳을 떠난 게 분명했다. 뭔가에 쫓겼다는 얘기였다.

-왤케 땅바닥만 보고 다님?

-동전 주우려고?

아니었다. 보고 있는 것은 발자국이었다.

"사람들 발자국만 가득하네요."

비틀린 보폭을 가진 발자국이 많았다.

"일단은 좀비인 것 같고."

좀비에게 물렸다면 수색대를 보내 변이한 경찰서장을 발견하고 사살할 수 있었다.

민간인 몇을 수색대에 포함시키는 건, 경찰서장을 죽여야만 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남기기 위함일 터.

"하지만 안 물렸어도 물렸다고 보게 할 만한 방법이...."

고천수는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런가."

공포인가.

명서 초등학교 내부에 그런 상황이 발생한 이후니, 경찰서장에게 눈에 띄는 부상만 있어도 충분히 몰아세울 수 있었다.

거기 있는 빌런들은 그냥 미친 광견이 아니었다. 꽤나 치밀했던 것이다.

"형님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입니다."

수색을 계속하던 고천수가 시청자들에게 물었다.

"보급함은 왜 더 안 나오는 겁니까?"

컨테이너 박스들을 보다 보니 그런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처음 보급함이 나타난 이후로, 똑같은 걸 구경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문득 뇌리를 스친 것이다.

-보급함?

-너 보급함 먹기 싫은 거 아니었어?

굉장히 뜬금없는 답변에 고천수가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예? 먹기 싫다니, 피망 싫어하는 꼬맹이도 아니고. 뭔 말입니까?"

-너야말로 뭔 말이냐. 보급함은 유료 콘텐츠잖아. 푼돈이라도 있어야 보임.

-그래, 체험판으로 준 1젠 기억 안 나? 그걸로 한 번 보고 열었음서.

-ㅋㅋㅋ 난 알고 있었는뒈~. 보급함 찾아보라고 눈치도 줬는데~.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고 있을 때, 한 채팅이 올라왔다.

-우리 채팅창 누르고 아래로 내려 봐.

급하게 시키는 대로 해보니 '$' 표시가 눈에 보였다. 누르자 'Cash Chat - Off'라는 상태 메시지가 떠올랐다.

"뭐야, 이거. 설마...."

고천수는 Off를 눌러보았다.

그러자 Off가 즉각 On으로 바뀌었다.

[띠링! 온리원 님이 1젠 후원! - 정식 지갑 오픈 축하해.]

[띠링! 한도초과 님이 1젠 후원! - 아, 난 안 연다에 걸었는데.]

[띠링! 니목에혓바닥 님이 1젠 후원! - 낼름.]

순식간에 3개의 알림 메시지가 나타났다.

"아."

고천수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대차게 머리를 쥐어 잡았다.

"아, 형님들!!"

허영웅이 멀리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랑곳 않고, 고천수는 그저 길게 울분을 토로했다.

"이런 걸 숨기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방송인에게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바로 이 후원 시스템이었다.

그것도 보급함이 나타나게 하려면 이걸로 최소한의 금액을 모아야 한다니 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보급함마다 열 수 있는 가격도 다를 것이 아닌가.

"안 그래도 설명도 못 듣고 플레이 시작했드만!"

-ㅋㅋㅋㅋㅋㅋㅋㅋ

-밥상 있었으면 엎었다, 이 새끼.

-얼굴 참 못났다ㅋㅋㅋㅋ

분노하는 얼굴을 보고도 존재들은 상황을 즐기기나 할 따름이었다.

열불이 나긴 했지만 고천수는 애써 입술을 비틀려 웃었다.

"예, 형님들. 사나이 고천수. 고작 이거 가지고 삐지겠습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캐시 챗(Cash Chat)을 올리는 걸 보고도 약이 안 오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고천수는 온리원이 꾸준히 자기를 지켜봐 주고 있다는 것과 함께 한 가지 더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고정 팬, 이거 중요하다고.'

익명 채팅만으로는 거물급 팬을 생성하고 관리하는 게 어려웠다.

하지만 후원과 동시에 닉네임이 나타난다면 상황은 달랐다.

"후."

한숨과 함께 고천수는 평온을 되찾았다.

"저 뒤끝 없습니다. 다들 아시죠?"

-앞끝인 듯.

-눈에 진심 다 보이거든.ㅋㅋㅋㅋㅋ

뭐라고 하든 더 휘둘릴 생각은 없었다.

"온리원 님, 한도초과 님, 니목에혓바닥 님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천수 씨!"

순간 다가온 허영웅 때문에 고천수가 크게 움찔거렸다.

그 때문에 고천수의 채팅창이 'ㅋㅋㅋㅋ'으로 도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허영웅은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예? 뭐, 뭐가요?"

"빨리 합류하러 안 오시기에...."

"아니, 뭐. 신경 쓰지 마세요. 전 원래 뭉그적뭉그적하는 편이니까."

얼토당토않은 설명에 허영웅이 잠시 난감한 표정을 그렸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아무튼 고천수 씨! 찾았습니다."

"예? 뭘요? 경찰서장님을?!"

"아뇨. 그건 아니고...."

허영웅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경찰서장님 물건을 찾았어요. 저기서요."

망설일 것 없었다. 고천수는 그에게 안내를 부탁하고 곧장 그곳으로 가 보았다.

"한바탕 했었나 본데."

땅바닥에 흩어진 핏자국을 본 고천수는 다시 허영웅에게 물었다.

"물건들 찾은 곳 더 있습니까?"

"네, 이쪽으로 가면 더 있어요."

고천수는 그를 따라 계속 이동했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많은 물건들이 떨어져 있었다.

'쫓아오라는 건가?'

무슨 의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중요한 단서임에는 틀림없었다.

'뭐야, 이거.'

어느 순간 물건들이 사라졌다. 두 개의 길이 있는 갈림길 앞에서였다.

고천수가 가만히 서 있자 허영웅이 먼저 나서서 설명했다.

"여기까지였어요. 더 이상 없었습니다."

"흐음...."

하필 양쪽이 다 수풀길이라 발자국을 살피기 어려웠다.

수풀이 누워 있는 흔적은 두 길 다 비슷했다.

"허 순경님, 감으로 잡히는 데 없습니까?"

이럴 때는 친척 찬스를 사용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허영웅은 여전히 어수룩한 얼굴로 난감한 표정만 그렸다.

"글쎄요. 어디로 가셨을지는 모르겠어요. 둘이 나눠서 찾아볼까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갈림길에서 그딴 소리를 하면 불안하기 마련이었다.

'루트 선택 같잖아.'

약간의 찝찝함이 있었기에 고민하던 고천수는 순간 미소를 그렸다.

"고천수 씨?"

"잠시만요."

바닥에 쭈그려 앉은 고천수는 채팅창을 보며 중얼거렸다.

"형님들. A or B. 갈림길 생존 미션 받습니다."

012화 240%

-미션?

-A or B라니?

시청자들은 즉각적으로 의문을 표시했다.

하지만 실제로 무슨 말인지 몰라서 그러는 것은 아닐 터였다.

"형님들, 순진하게 이러지들 맙시다."

방송에서 시청자가 스트리머에게 미션을 주는 일은 흔했다.

그리고 미션에는 당연히 보상을 걸게 되어 있었다.

"이 고천수, 형님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가 드리겠다는 겁니다."

여기까지의 흔적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경찰서장을 찾으라는 신호였다.

다만 그 신호가 이렇게 티 나게 끊겨 있는 것은 함정일 가능성이 컸다.

"일단 어느 곳을 원하십니까? A or B."

그리고 이렇게 시청자의 반응을 유도하면 어느 쪽이 함정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우리 천수, 장난질 치네. ^^

-이렇게 해도 우린 어디 가라고밖에 안 할 건데?ㅋㅋ

-투표로 하자, 투표.

"에이."

맥 빠지는 반응에 고천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미없게 됐네."

그러고는 아무 생각 없이 B 쪽으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A.

누군가 끼어들었다.

[띠링! 한도초과 님이 1젠 후원! - 기왕 후원 튼 거, 재미라도 좀 봐야지.]

묵직한 보상심리가 느껴지는 알림이었다.

고천수는 '대놓고 함정으로 밀어 넣잖아.'라고 도배되는 채팅창을 무시하고 양손으로 A를 만들어 보였다.

"A, 받았습니다."

하지만 미션에는 내용과 보상이 있어야 했다.

"구체적인 지시나 보상은?"

-후원은 이미 했으니까 보급함에 관련된 정보 하나 더 푼다. A로 가서 경찰서장 구할 때까지 생존.

땡잡았다.

"좋습니다!"

원래는 본격적으로 후원을 받기 위해 물꼬만 틀 생각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다면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가시죠, 형님들!"

"저기, 고천수 씨?"

뒤에 있던 허영웅이 다가오며 식은땀을 흘렸다.

"왜 굳은 것처럼 쭉 가만히 서 계시는지...."

"예? 가만히 서 있어요?"

중얼대는 것까진 알 테니 뭐라 하면 기도라도 한다고 하려고 했건만.

-네가 우리한테 말할 땐,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자동으로 보정돼.

친절한 시청자의 설명 덕분에 어떻게 됐는지 알았다.

우연히 득한 정보에 고천수는 환한 웃음을 그리며 몸을 돌렸다.

***

루트 A.

당연한 얘기지만 이 길은 함정이었다.

"허 순경님."

입구부터 대나무가 자라 있는 스산한 풍경을 보며, 고천수가 허영웅에게 물었다.

"무전기들 챙겨 왔다고 그랬죠?"

"무전기요?"

허영웅이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허리를 내려다보았다.

"네, 있어요."

"무전기'들'이라고 한 걸 보니까 세트인가요?"

"아, 네."

허영웅은 허리춤에서 두 개의 소형 무전기를 들어 보였다.

"2명이서 근거리 통신할 때 쓰는 무전기예요. 제 개인 물품이었는데, 이것밖에 없어서 챙겼죠."

"하나 저 주세요."

고천수가 손을 내밀었다.

"지금 써야 할 것 같거든요."

"저랑 따로 가시려고 하나요?"

허영웅의 얼굴에 불안감이 깃들었다.

"네. 허 순경님 먼저 이쪽으로 가세요."

고천수는 그런 그에게 A 루트를 가리켰다.

-아, 이 새끼!ㅋㅋㅋㅋㅋ

-당했다. 허 순경만 보내려고 한다!

-야 이, 갸놈아!

시청자들이 난리를 쳤지만 전부 다 오해였다.

고천수는 해명하지 않고 허 순경에게 설명했다.

"사실 경찰서장님을 위험에 빠뜨린 사람들이 오고 있거든요."

"예? 그게 무슨 말...."

"그 사람들이 쫓아오면 저희 그대로 당할 수도 있어요."

그렇기에 망을 볼 사람이 필요했다.

"저는 여기서 그 사람들을 막을 테니까, 허 순경님은 경찰서장님을 찾아보세요."

"하지만...!"

"허 순경님."

고천수는 허영웅의 어깨를 붙잡았다.

"경찰서장님은 친척이시잖아요. 아직 살아 있을 테니 빨리 찾아보세요. 뒤는 제가 맡겠습니다."

"고천수 씨...!"

허영웅의 잠깐의 의문을 접고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염병하네ㅋㅋ

-야, 미션 건 놈 어디 갔냐.

-난데. 나 설마 이용당한 거?

허영웅은 무전기를 하나 고천수에게 건넸다.

"이게 통화 버튼이에요. 주파수는 맞춰 놨으니까 그냥 누르고 얘기하시면 돼요."

"거리는?"

"5km밖에 안 돼요."

아주 길지는 않지만 그렇게 짧지도 않았다.

고천수는 무전기를 받아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가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브리핑해 주세요."

"네네."

순진하게 대답한 허영웅은 그 길로 A 루트에 발을 올렸다.

"고천수 씨도 무슨 일이 있으면 무전해 주세요!"

그런 그에게 고천수가 해 줄 일이라고는 손을 흔드는 것뿐이었다.

"자, 갔네요. 형님들."

고천수는 무전기를 쥐어 잡고 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야, 완전 악마 아니냐?

-미션도 어기고 대박이네 진짜ㅋㅋ

"형님들, 저는 미션을 어긴 일이 없습니다."

A 루트로 가겠다고 했지 가장 먼저 발을 들이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정보를 모으고 움직이려는 것뿐입니다. 어차피 나중에 가도 위험한 건 매한가지잖아요?"

다만 어떤 몬스터가 나오고 수가 얼마나 될지가 중요했다.

도심지에 대나무들이 있는 건 뜬금없었다. 확실하게 그쪽에서 몬스터들이 출현할 것이었다.

『고천수 씨?』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 무전이 왔다.

"네, 허 순경님. 거기 어떤가요."

『잘 모르겠는데 근처에 괴성이 몇 들려요. 고천수 씨는 괜찮은가 해서요.』

"저는 아직 괜찮습니다. 다만 조심하긴 해야겠네요."

고천수는 고개를 돌려봤지만 아직 근처로 모이는 몬스터들은 없었다.

"괴성을 뭐가 지르는지는 확인하셨습니까?"

『아뇨. 근데 좀비 같긴 해요. 좀 빨리 이동해야겠어요.』

무전기로 허영웅이 헉헉대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따라붙고 있어요!』

"좀비가요?"

『네, 그런 것 같아요! 저, 저 앞에 다른 컨테이너 박스들이 보여요! 경찰서장님은 아마 저기에...!』

치이이익.

통신음이 안 좋아졌다. 고천수는 무전기를 얼굴 가까이 하며 물었다.

"허 순경님? 허 순경님?"

『지금... 잘... 통신이....』

"몇 마립니까? 거기 좀비 얼마나 있어요?"

무전기는 계속 깨진 전파음을 내보냈다. 고천수가 낭패라고 생각하며 인상을 구기는 사이에 다시금 말이 들렸다.

『...2, 30마리!』

거기까지였다. 이후로 무전은 더 없었다.

"형님들, 돌아가죠."

고천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채팅창이 다시 어지러워졌다.

-A.

-A.

-A.

대학교 시험도 이렇게 올 A는 못 맞아 봤다. A로 가라는 수많은 채팅을 살펴보며 고천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사지로 보내고 싶으십니까?"

-사지. 그곳은 어디인가.

-한도초과 : A 가라거! 미친놈아!

-근데 한도초과 이대로 먹히는 것도 꿀잼일 듯.ㅋㅋㅋ

중간에 한도초과가 자신의 닉을 적고 말했다.

물론 후원을 하지 않는 이상 저 인물이 진짜 한도초과인지 알 길은 없었다.

"진짜 한도초과 님 맞나요? 뭔가 이상한데."

[띠링! 한도초과 님이 1젠 후원! - 가라거! 미친놈아!]

참지 못한 한도초과가 또다시 후원까지 하는 모습을 보고 고천수는 웃음을 흘렸다.

'아, 적당히 해야지.'

보급함에 필요한 자금이 모이는 것은 좋았지만, 이대로 시청자를 농락하기만 하면 다음 후원이 없을 수도 있었다.

고천수는 가방에서 망치를 꺼내며 목을 풀었다.

"걱정 마세요. A 갈 거니까."

허영웅의 말만 들었을 때는 역시 좀비만 있는 게 틀림없었다.

무전기 너머로 들린 괴성 또한 다른 몬스터의 것이 섞여 있지 않았다.

허영웅이 그 좀비들까지 싹 다 도발해서 어디 컨테이너 박스에라도 들어갔다면 상황은 더 좋았다.

고천수는 몹몰이가 된 좀비들을 상대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자, 출발."

잠시 B로 향하고픈 마음도 들었지만, 오히려 그쪽은 검증되지 않은 길이었다.

고천수가 갈 길은 이제 A뿐이었다.

"확실히."

스산하다고 했던 허영웅의 말대로 길 자체가 함정이나 다름없었다.

주변에 있는 대나무 숲은 많은 좀비들이 몰려오는 것을 감췄을 터.

"형님들, 조금 천천히 이동하겠습니다."

소리에 좀 더 의지할 필요가 있었다. 고천수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그러던 중 근처에서 대나무가 떨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 시발. 깜짝이야."

고천수가 움찔거리며 멈추는 것을 보고 채팅창이 비웃음으로 가득 찼다.

-난 천수 이러는 재미로 봄ㅋㅋ

-뭘 그렇게 놀라냐, 별것도 아니고만.

-그러게. 귀엽지 않냐?

몬스터를 대하는 반응이 아니었다. 고천수는 대나무 옆에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야, 저건."

곰 인형이었다.

정말 뭐라 표현할 것도 없는, 30cm 정도 될 만한 곰 인형 하나가 그곳에 있던 것이다.

"함정인가?"

고천수는 몸을 돌려세우며 주변을 확인했다.

허영웅이 전해 준 말에는 저런 곰 인형 따위 있지도 않았다.

누군가 미끼로 갖다 놓은 것이라면 곤란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바스락.

순간 곰 인형이 스스로 움직였다. 고천수가 또 한 번 움찔거리는 사이, 곰 인형은 어딘가로 뒤뚱뒤뚱 걸었다.

"와 씨, 세상에...."

고천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형님들, 저거 뭡니까? 저런 몬스터도 있는 겁니까? 대체 뭐예요? 빨리 대답햇!"

-미쳤나ㅋㅋㅋㅋㅋㅋ

-그라데이션 분노ㅋㅋㅋ

-미션에 관련된 거라 지금 답변 못 함.

미션.

그 말에 고천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 저거. 한도초과 님이 알려 줄 정보에 포함돼 있는 겁니까?"

그렇다면 보급함과 관련된 것이었다.

'약간 감이 오긴 하는데....'

괜히 지금 얘기해서 김을 뺄 필요는 없었다. 미션을 수행하고 시청자들을 매료시키는 것 또한 고천수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다시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가던 대로 갈게요."

그렇게 몇 걸음 움직이자 이젠 괴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나무 숲도 끝나고, 고천수의 시야에는 이제 컨테이너 하우스들이 즐비한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오호라."

좀비들은 죄다 그곳에 몰려 있었다.

허영웅이 대나무 숲의 좀비들을 죄다 몰고 간 것이었다.

"저거인가."

유독 한 컨테이너 하우스에 좀비들이 잔뜩 달라붙어 있는 상태였다.

창문이 커튼으로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안에 허영웅이 있을 거라고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경찰서장도 저 안에 있는 거 아냐?

-아닐걸.

-있으면 어쩔?

있거나 없거나 확실하지 않다면 고천수가 선택할 길은 두 개였다.

'확인할까 말까.'

허영웅이 좀비를 다 몰고 갔기 때문에 굳이 이곳을 확인할 게 아니면 그대로 두고 가도 무방했다.

고천수는 멀리서 컨테이너 하우스에 몰려 있는 좀비의 수를 세어 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허영웅이 말했던 대로 수는 제법 되어 보였다.

하지만 아주 많지도 않았다. 대략 스무 마리 정도였다.

'1.2인가.'

전부 도발해서 잡으면 고천수가 도달할 수 있는 성장치였다.

나쁘지 않았다.

다만 한 번에 도달할 필요는 없었다.

고천수는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꺼내들어 1분 후를 알람을 맞췄다. 이걸 던져두고 사각에서 접근해 한 마리씩 꿰어 낼 참이었다.

그때였다.

부아아아앙!

지프차였다. 갑자기 나타난 차에 당황한 고천수가 움찔하며 물러났다.

콰앙!

지프차는 좀비들을 몇 치며 멈춰 섰다.

크아아아.

놀란 좀비들이 고개를 돌리며 괴성을 질렀다.

"저건...."

운전자가 보였다.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경찰이었다.

"진경호."

허영웅이 근무했던 곳의 파출소장이었다.

부아아아앙.

도우려고 나타난 게 아닌지 지프차는 금세 장소를 빠져나갔다.

크아아아.

차가 빠져나가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 좀비들은 뒤에 있던 고천수를 발견했다.

[어그로 14 - 09:59]

"아, 시발."

이로써 진경호는 미친 경찰 중 하나로 확정이었다.

"일 좀 망쳤나, 이거."

실수였다. 장소를 특정한 걸 보니 무전기를 도청한 게 틀림없었다.

"서로 돕자고 하는 일인데 손발이 안 맞아버렸네, 허영웅."

도청 방지가 안 되어 있던 사실을 둘 다 몰랐다. 고천수는 쓴웃음을 한 번 짓고는 얼른 대나무 숲으로 달렸다. 좀비들은 그런 고천수를 차례대로 따라 들어왔다.

"드루와, 드루와!"

고천수는 다가오는 좀비들에게 망치를 휘둘렀다. 머리를 맞은 좀비들이 하나둘씩 옆으로 쓰러졌다.

"몰려들면 너희만 유리한 줄 알아?"

고천수는 뒷걸음질로 달렸다. 원래대로라면 불가능하겠지만, 근력뿐 아니라 감각까지 예민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너희 사람 잘못 골랐다."

240%.

013화 500%

"뭐야, 저 새끼."

지프차 안에서 진경호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친놈 아니야?"

망치 하나 들고 고천수는 무쌍을 찍고 있었다. 생긴 건 좀비들한테 밀리게 생겼는데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직접 쳐 버려야겠어."

세계가 뒤집힌 마당에 아직도 경찰 노릇을 기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경찰서장은 그에 부합하려고 했지만, 진경호는 아니었다.

"방해하는 놈은 다 죽여 버릴 거야!"

덜컥덜컥.

기어를 바꾼 진경호는 차를 다시 발진시켰다.

목표는 당연하게도 고천수였다.

부아아아앙!

미끄러지듯 출발한 지프차가 곧장 고천수를 향했다.

"시발!"

고천수가 차를 보고 한쪽으로 몸을 날렸다. 마치 스프링처럼 튀어나가는 고천수를 보며 진경호는 눈을 크게 떴다.

"뭐냐고, 이 새끼!"

조금 전의 모습은 명백하게 이질적이었다. 저 몸을 가지고 저렇게 차를 피하는 건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걸로 끝날 줄 알고...!"

진경호는 차를 다시 뒤로 뺐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고천수에게 차를 향했다.

"완전히 밟아 줄 테니까!"

콰직!

뭔가 완전히 밟히는 소리가 났다. 진경호는 순간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그렇지!"

일반적인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여기서 완전히 묻어 버리고, 자신은 돌아가서 명서 초등학교를 장악하면 되는 것이었다.

"어디 한번 꼬락서니 좀 볼까?"

진경호는 차를 뒤로 물렸다. 그러자 차에 치였던 좀비 몇이 질질 끌려나왔다.

"어?"

하지만 고천수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진경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차를 더 빼도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자 진경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크아아아아.

유리창으로는 비틀비틀 일어나는 좀비들만 보일 뿐이었다.

턱!

그때였다. 운전석 창문에 누군가 달라붙었다.

"흐악!"

그건 다름 아닌 풀떼기에 뒤덮인 고천수였다. 깜짝 놀란 진경호는 차를 더 후진시켰다.

쾅! 콰직!

고천수가 차를 쫓아오며 운전석 창문에 팔꿈치를 휘둘렀다.

"흐아아악! 이 새끼 뭐야!"

콰창!

마침내 창문이 깨지고 고천수의 손이 들어왔다. 자신을 잡으려고 하는 고천수의 손을 어깨로 쳐 내며 진경호는 허리춤을 뒤적거렸다.

"놔! 놔아!"

그는 당황하며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꺼져!"

바로 한 발 쏘았지만 그새 고천수가 차 밑으로 사라졌다. 진경호가 고천수를 밀어 버리려고 바로 핸들을 잡는 사이 고천수는 다시 창문 옆에 나타나 팔을 내밀었다.

"와아아아악!"

그의 팔을 재차 걷어 내며 진경호는 완전히 질린 표정을 지었다.

고천수는 그가 상상하던 것보다 무서운 사람이었다.

탕!

총을 쏘는 순간 또다시 고천수는 차 밑으로 사라졌다. 진경호는 차를 빠르게 뒤로 물렸다.

이번엔 전속력이었다.

부아아아아앙.

뒤를 보면서 후진을 하다가 다시 앞을 바라보니 멀찍이서 뛰어오는 고천수가 보였다.

고천수의 표정은 완전히 열 받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새끼...!"

자신이 겁에 질렸다고 느끼자 진경호는 반발심이 일었다.

"지금 누굴 상대로!"

상대할 방법은 있었다. 이곳에 미리 함정은 파 둔 상태였다.

고천수가 계속 쫓아온다는 것을 안 진경호는 빠르게 차를 후진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고천수는 득달같이 차를 따라왔다.

부아아아아.

진경호는 대나무 숲을 거꾸로 빠져나오자마자 점찍어 둔 컨테이너박스로 차를 몰았다.

"내가 똑똑히 가르쳐 주지!"

그리고 컨테이너 박스로 고천수가 따라붙을 때쯤 글러브 박스에서 버튼 하나를 꺼내 눌렀다.

덜컹.

신호를 받은 컨테이너 박스가 문을 개방했다.

크아아아아아.

그 안에 있던 것은 다량으로 모여 있던 좀비들이었다.

"후회해도 늦었다...!"

진경호는 비열하게 웃음을 흘리며 장소를 빠져나갔다.

남은 것은 수많은 좀비들과 고천수뿐이었다.

-당했네.

-야, 이게 다 몇이냐.

-천수야, 안 될 것 같으면 그냥 뛰어라.

그의 눈앞에 채팅창이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고천수는 망치를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2분 내에 조집니다."

[어그로 40 - 02:03]

500%.

***

세상엔 이런 말이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크어아아.

입에 망치가 낀 좀비가 어물쩍하게 괴성을 뱉었다. 고천수는 팔뚝에 힘을 주고 망치를 빼냈다.

콰작!

입이 아작 난 좀비가 이리저리 비틀대다 쓰러졌다.

고천수는 엎어지며 좀비의 머리통에 망치를 박아 넣었다.

사살 완료.

크아아아아.

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좀비들의 수는 많았다. 물량으로 밀고 들어오는 좀비를 보며 고천수는 이를 악물었다.

'불리해!'

힘은 강하지만 부상을 입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지키기 어려웠다.

고천수는 좀비들을 밀쳐 내다가 눈을 크게 떴다.

지프차가 시야가 닿는 곳에 멈춰 서 있었다.

이쪽이 좀비에 당하는 것을 구경이라도 하려는 듯.

[어그로 40 - 00:45]

어그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이 종료되어도 다시 어그로가 켜지긴 하겠지만, 고천수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저 새끼부터... 조진다!'

어그로 상태가 최상일 때 잡아야 했다.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이 두 다리에 담겼다. 종아리와 허벅지가 터질 듯이 근육을 움찔거렸다.

500%.

폭발적으로 성장한 신체가 마침내 뛰쳐나갔다.

100m 14초. 고천수의 원래 달리기 기록은 무의미했다.

그가 있던 곳에서 지프차가 서 있는 곳까지는, 지금 단 몇 초에 불과했다.

"잡았다...!"

도달. 질주를 마친 고천수는 운전석 옆에 미끄러지며 섰다.

"어, 경찰서장 명서 초등학교에서 옮... 뭐야!"

장거리 무전기로 뭔가를 지시하던 진경호가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이 새...."

진경호는 무전기를 놓치고 급하게 다시 총을 들어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고천수가 창문 안에 몸을 집어넣는 속도가 더 빨랐다.

"끄, 끄아아아아악?!

진경호의 손은 고천수에게 붙잡혀 비틀렸다.

-천수야, 다른 손!

채팅 하나를 확인한 고천수가 진경호의 다른 손을 붙잡았다.

그가 전기 충격기를 꺼내들려고 하고 있던 것이다.

"진경호. 네가 이길 수 있을 줄 알았어?"

고천수의 말에 진경호는 완전히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뭐, 뭐야. 너 도대체 뭐야!"

"스트리머."

고천수는 진경호의 양손을 구겨 버리며 말했다.

"형님들한테 잔뜩 사랑받고 있다고."

"끄아아아아아악!"

진경호가 고꾸라지는 사이 뒤에서는 좀비들이 몰려왔다.

[어그로 22 - 10:00]

어그로가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수치가 경신된 것을 보며 고천수는 운전석 안에 아예 몸을 들여놓았다.

"내가 운전할 거니까 꺼져."

고천수는 거의 기절 상태인 진경호를 조수석에 옮겨 놓고 자신이 운전석에 앉았다.

"일만 복잡하게 만들고 말이야."

머리를 쓸어 올린 고천수는 차에 기어를 넣고 액셀을 밟았다. 4륜구동의 차체가 힘 좋게 바퀴를 굴렸다.

"쇼타임."

콰앙! 쾅! 쿠웅!

지프가 괜히 지프가 아니었다. 남아 있는 좀비들은 차와의 정면 승부에서 전부 튕겨져 나가거나 요철이 되어 버렸다.

부아아아아아아.

하나하나 볼링 핀처럼 좀비들을 쓰러뜨린 고천수는 그대로 차를 몰고 대나무 숲으로 향했다.

"이 양반 살아는 있나 몰라."

안전하게 혼자 컨테이너 하우스 안으로 들어갔으면 모르겠지만, 안에 좀비라도 딸려 들어갔다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끼이익.

목적지에 도달한 고천수는 차 안에 수갑을 찾아냈다.

-그거 차려고?

-양손에 차고 여기서 빠져나가면 2젠 줌.

-나도 1젠 걸음.

"아니, 형님들."

그딴 짓을 할 만큼 여유롭진 않았다.

"차라리 발목에 차 보라고 하죠, 왜."

헛웃음 한번 흘려 주고 다음 순번으로 넘어갔다.

고천수는 진경호의 손목에 수갑을 채워 조수석 손잡이에 달아 놓았다.

"뭐, 이럴 필요도 없나?"

진경호의 손은 완전히 만신창이였다. 솔직히 수갑을 채웠어도 뼈가 다 부서졌으니까 빼낼 수 있을 정도였다.

"하나 챙기고~!"

어차피 저 손으로 차는 운전 못 한다. 고천수는 진경호에게서 총과 전기 충격기를 챙겼다.

불행히도 총은 딱 한 발 남아 있었다.

역시 기본적으로는 망치를 써야 했다. 차에서 내린 고천수는 망치를 들고 컨테이너 하우스 앞으로 향했다.

똑똑똑.

"허영웅 씨?"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저, 고천수입니다."

신분을 밝혀도 변화는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문고리를 잡아 보았다.

살짝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고천수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다.

"허영웅 씨?"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띠링! 니목에혓바닥 님이 1젠 후원! - 낼름.]

"아, 낼름 님 감사합니다."

고천수는 무심코 큰 소리로 내뱉고는 이내 인상을 구겼다.

"아, 정말. 낼름 님, 저 빡 집중하고 있는데 인사하게 만들고."

-시청자 혼내는 거야?ㅋㅋ

-심지어 이름도 틀림ㅋㅋㅋㅋ

-ㅋㅋㅋㅋ 미친놈.

숨을 가라앉힌 고천수는 얼굴에 자본주의적인 미소를 띠었다.

"낼름 님한테 빡 집중하고 있었다고요. 예? 1젠 감사합니다."

또 이름을 틀렸다며 채팅창이 난리가 났지만 지금은 정말로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고천수는 검지를 세워 입술에 붙였다.

"쉿."

안에서 뭔가 소리가 들렸다. 고천수는 귀를 기울였다.

'설마 좀비가 된 건 아니겠지?'

망치를 높이 치켜들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어그로가 더 끌리면 바로 그가 좀비가 됐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부스럭.

하지만 고천수가 확인한 건 커다란 상자 하나였다.

"뭐야, 이거."

고천수가 다가가 박스를 발로 차자 안에서 새된 비명이 새어 나왔다.

"흐아악!"

"허영웅 씨."

상자 뚜껑을 연 고천수가 헛웃음을 흘리며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기서 뭐 하고 있습니까."

허영웅은 상자 안에 웅크린 상태로 있었다. 어디서 찾아낸 건지 털모자까지 눌러 쓰고 있어서 소리를 제대로 못 들은 듯했다.

"나오세요."

고천수에게 끌어올려진 허영웅은 상황을 확인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 고천수 씨. 어떻게 여기에...."

"다 쓸어 버리고 들어왔죠. 이렇게 겁먹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뭐, 멀쩡하니 다행이지만."

"으, 으음."

허영웅은 신음처럼 내뱉었다.

"무서웠거든요. 총알도 다 써 버려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일단 빨리 나오시죠. 시간은 없거든요."

고천수는 허영웅을 밖으로 끌고 나왔다.

함께 차에 타던 도중, 조수석에 먼저 타 있던 진경호를 확인한 허영웅이 화들짝 놀랐다.

"아니, 소장님!"

손이 박살 난 채로 기절해 있는 진경호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허영웅이 물었다.

"대체 소장님한테 무슨 일이 있던 거죠? 좀비! 좀비인가요?"

"...."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어.... 대체 무슨 일이."

"일단 타시죠."

고천수는 기어를 잡은 채로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됐는지 설명을...."

"타세요."

"뭐가 대체...."

"허영웅 순경님."

고천수는 차분히 뒷좌석을 가리켰다.

"거기 앉아서 물어도 늦지 않아요."

심정은 이해하지만 빨리 떠나야 하는 판에 진정할 시간을 따로 내어줄 수는 없었다. 이 정도는 경찰다운 담력으로 넘길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고천수가 그렇게 우선순위를 정리해 주자, 허영웅은 머쓱한 표정으로 일단 뒷좌석에 올라탔다.

"설명은 가면서 해 줄 테니까."

탑승을 확인한 고천수가 차를 출발시켰다.

'여기에 경찰서장은 없다.'

운 좋게도 진경호가 하는 말을 주워들었다.

진경호가 손에서 무전기를 곧장 놓았기 때문에 명서 초등학교에 얼마나 상황이 전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야, 근데 경찰서장 구해야 알려 주는 거야?

-그러게 곰 인형 여기에 있잖아.

-한도초과 : 근데 미션 아직 성공을 안 해서;

"괜찮습니다, 형님들."

지금 당장은 괜찮았다.

어차피 명서 초등학교에 첩보원을 남겨 놓고 있었다. 당장은 그걸로 충분했다.

"고천수 씨."

차가 도로를 달리기 시작하자 허영웅이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가요? 소장님 괜찮으신 거예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소장은 경찰서장을 배신했다.

수장을 쳐낸 뒤에 경찰 조직을 먹고 다른 사람 따위는 돕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진경호 이 사람이 다른 경찰들과 짜고 경찰서장님을 쳤어요."

"네?!"

"그러니까 패실 거면 지금 좀 때려 놓으세요. 기절해서 몇 대 더 쳐도 몰라요."

복수는 이제 시작됐다.

"나머지는 제가 다 조져 놓을 테니깐."

014화 재진입

명서 초등학교.

좀비 사태를 수습한 사람들은 여전히 뒷정리를 하는 중이었다.

"이 지랄이 났는데 쟤들은 뭐 하는 거야."

"믿어도 되는 거야, 이거?"

"경찰서장도 없고...."

경찰들만 따로 모여 얘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 여기저기서 불안감이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이, 장 씨요."

학교 근처에서 장사를 하던 이들이 명서 중국집 장만철에게 달라붙었다.

"이거 괜찮은 거 맞는기요?"

"그러니깐. 엄청 불안하다구."

"뭘 나한테 묻소."

장만철은 한숨을 쉬며 답했다.

"나도 아는 것 하나 없구만."

"우리가 뭐 자네한테 정답 들으려고 그러나."

"그래, 민규도 죽은 판에 자네는 불안하지도 않아?"

그 말에 장만철은 인상을 팍 구겼다.

"민규 얘기는 왜 하나?"

"아니, 그렇잖아. 무조건 우리 여기다 욱여넣기만 하고!"

"구해 주지도 못했던 거잖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기에 모여 있는 경찰들은 괴물들을 충분히 막아 낼 정도의 병력은 아니었다.

하물며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구해 낼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여기서 나가야 하는 거 아냐?"

"민규 대신 그 괴물을 잡아 준 사람도 나갔잖아."

"그래, 맞아."

사람들의 말에 장만철은 잠시 침음했다.

정민규를 잡은 그 남자, 고천수가 분명히 뭔가를 부탁했다.

그리고 그 내용은....

'감시를 해 달라고 했지.'

장만철은 저 멀리에 있는 경찰들을 내다보았다.

'대체 뭘 봐 달라는 건지....'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경찰들은 저들끼리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토로하고 있었다.

"어떻게 좀비가 생긴 거야? 검사 제대로 안 한 거야?"

"뭔 소리야. 검사는 제대로 했어."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이 난리가 났는데."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통제도 겨우 했다. 생존자들은 현재 상황에 대해 의구심과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든 상태였던 것이다.

"다들 진정하지."

그때, 경비교통과 과장 이서준이 말했다.

"일단 문에서 문제가 일어났을 리는 없어. 내가 맡고 있었으니까."

그는 경찰서장 다음으로 이곳에서 높은 사람이었다. 비슷한 직급들은 생존해서 이곳에 오지 못했다.

경찰서장까지 실종됐으니 사실상 그가 이곳의 전권을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인물이 입구를 맡았다.

그걸 강조한 이상, 누구도 더 이상 출입구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고 의견을 제시할 수는 없었다.

"문제 해결은 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다들 사람들 진정시키는 데 주력해."

차분한 이서준의 말에 다들 분위기가 좀 진정됐다.

그랬다.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은 경찰이었다.

당황스러운 상황은 많이 경험했다. 이 정도에 무너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한번 다시 잘해 보겠습니다."

"액땜한 걸로 칠 수 있겠죠."

"맞습니다. 괜히 호들갑 떨 건 없을 거예요."

의지를 다지는 그들의 모습에 이서준이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나는 경찰서장님이 계시던 곳에서 찾아볼 게 있으니까. 자네들한테 잠시 맡기지."

"네, 저희한테 맡기십쇼."

"잘해 보겠습니다."

확답을 받은 이서준은 다른 경찰들을 남기고 학교의 본관으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그새 본관 앞으로 돌아온 문지기 경찰이 있었다.

"과장님."

문지기가 입을 열자 이서준이 거기에 멈춰 섰다.

"뭐지. 진경호한테 연락이라도 왔나?"

"네. 경찰서장을 옮겨야 한답니다."

그 말에 이서준은 한숨을 쉬었다.

"대체 뭐야?"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에만 경찰서장을 옮기기로 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기가 쉽지 않아서 신중하게 행동하고 있건만, 왜 이렇게 상황을 어렵게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진경호가 누군가에게 쉽게 당할 인물은 아니었다. 고천수라는 이름의 남자를 생각이 신경이 곤두섰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처음부터 심상치는 않은 놈이라고 생각했건만...."

어쨌거나 지체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혹시나 일이 틀어지면 써먹을 데가 있을까 싶어 경찰서장을 살려 뒀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처리해 버릴 수도 없었다. 누구도 찾지 못하게 빼돌려서 없애야 했다.

이 명서 초등학교는 자신이 먹는다.

경찰들의 위에 서서 외부에서 들어온 인원들까지 전부 하나씩 밑에 둘 생각이었다.

"일단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그렇게 알아 둬. 알지? 우리 셋, 한 배를 탄 거. 집중하자고."

진경호는 그렇게 본관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거기서 다른 층으로 이동하진 않았다.

뒷문으로 나온 진경호는 남들 모르게 별관으로 향했다.

그때, 본관의 앞쪽 수풀에는 장만철이 숨어 있었다.

'뭐야...!'

내용을 다 엿들은 장만철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새끼들 진짜 뭔가 있는 거였어!'

따라가야 했다. 눈치를 보던 장만철은 문지기가 본관 문 앞에서 떨어져 이동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쪽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장초를 주우려고 하는 것이었다.

'지, 지금이야.'

장만철은 몰래 본관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서준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썅...!"

조용히 욕지거리를 내뱉던 장만철은 뒷문이 살짝 덜렁거리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곧장 그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리고 별관으로 향하는 이서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한 번 살핀 장만철은 그렇게, 이서준을 따라갔다.

***

명서 초등학교가 저 멀리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정보창."

고천수의 말에 따라 정보창이 나타났다.

[정보 1 : 명서 초등학교에 있는 경찰서장 보호 필요. 오늘 밤 위기에서 사망 시 도시 치안이 급격히 악화.]

"하, 시바."

중요한 내용이 앞에 있었다.

"왜 이걸 진즉에 몰랐을까."

'명서 초등학교에 있는'이라는 표현은 괜히 있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허영웅 씨!"

어쨌거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었다.

진경호 덕분에 알았어도 순서만 조금 바뀔 뿐이었다.

"이제 곧 명서 초등학교에 들어갈 겁니다. 지금부터 잘 들어 두세요."

끼익.

그 말과 동시에 차를 세운 고천수가 곧장 밖으로 나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여기서부터 운전은 허영웅 씨가 할 겁니다."

"예? 제가요?"

"네."

고천수가 몰고 들어가도 의문만 쏟아질 게 뻔했다.

그걸 일일이 다 해명해 줄 시간은 없었다.

"들어가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묻거든 그냥 불한당들에게 당한 거라고 해 주세요."

"불한당...."

"명심하세요. 내막을 다 파헤치기 전까지는 제가 말한 내용에 대해 모른 척해야 합니다. 허영웅 씨는 치료하는 척 진경호를 잘 잡고만 있으면 돼요."

진경호 혼자 일을 벌이지 않았다는 것쯤은 고천수도 잘 알고 있었다.

공모자가 더 있을 테니 자신은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고 일을 처리하는 게 나았다.

"으음."

허영웅은 조수석에 앉아 있는 진경호를 바라보며 신음했다.

"정말 괜찮을까요?"

"나약한 마음은 고이 접어 두세요."

진경호는 경찰서장을 해치려고 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허영웅 본인도 죽을 뻔했지 않은가.

"허영웅 씨가 시선을 끌면 전 알아서 진입할 테니까 이쪽으로 옮겨 오세요."

-진경호 움찔대는데?

-깨어나는 거 아님?

고천수가 시선을 돌리자 과연 진경호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었다.

이럴 때 해야 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고천수는 조수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형님들, 선택지 드립니다. 1번. 말로 다시 자라고 타이른다. 2번. 전기 충격기로 꿀잠에 인도한다."

-1.

-1.

-1.

"예, 2번."

덜컥.

조수석 문을 열자 진경호가 실금같이 뜬 눈으로 중얼거렸다.

"너, 이 개새... 끄루우우우루루룩?!"

따다다다다닥! 따다닥! 따다다닥!

전기 충격기의 소리와 함께 진경호가 몸을 들썩거렸다.

-부정투표 ㅅㅂ

-진경호 자반고등어 같당.

"이럴 땐 그냥 고등어라고 하셔야죠."

진경호는 물가에 튀어나온 싱싱한 생선마냥 팔딱대다가 곧 조용해졌다.

"형님들, 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승산 좀 있겠습니까?"

-너 하기 나름이지. 부정투표 새꺄.

-진경호 잡았으니까 한 발만 잘 꽂으면 될 듯.

-들어갈 때 동쪽 개구멍 추천. 거기 개꿀임.

역시 시청자들은 그냥 스트리머를 놀려먹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몰입하면 허무하게 끝나는 거 겁나 싫어하거든.'

직접적인 스포일러는 하지 않아도, 이제 단서는 반드시 뿌리게 되어 있었다.

고천수는 씩 미소를 그린 뒤, 다시 뒷좌석으로 향했다.

"허영웅 씨. 저희 빠르게 좀 진행하죠."

"아, 아아. 네."

진경호를 대하는 것에 놀라 있던 허영웅이 서둘러 운전석으로 옮겨 왔다.

"그럼 아까 말씀하신 대로 하면 되는 거죠, 고천수 씨?"

"네, 잘 부탁합니다. 저도 바로 들어갈 테니까."

담담하게 대답하는 고천수를 본 허영웅은, 이제야 결심이 섰는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뒤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덜컥.

기어가 들어가는 것을 본 고천수가 차에서 물러났다.

허영웅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를 몰아 명서 초등학교로 향했다.

"그럼 형님들, 저희도 슬슬 진입해 보죠."

***

부아아아앙.

명서 초등학교로 지프차 한 대가 돌진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찰들은 놀라 물러섰고, 안에 있던 사람들도 예상치 못한 소동에 혼비백산했다.

"접니다!"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은 한 명의 젊은 경찰관, 허영웅이었다.

"남부 파출소 순경, 허영웅입니다!"

"남부 파출소?"

"생존자가 더 있었다고?"

눈을 크게 뜨며 그의 주위로 다른 경찰들이 몰려들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거기 전원 몰살 아니었나요?"

"그러니까 말이야."

"근데 이 지프차는...."

진경호가 타고 나간 차라는 것을 안 경찰들이 서둘러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니, 소장님!"

그 안에는 진경호가 실신한 상태로 늘어져 있었다. 경찰들은 서둘러 조수석 문을 열고 진경호의 상태를 살폈다.

"뭐, 뭐야. 수갑을 차고 있어!"

손이 박살 났기 때문에 열쇠 없이도 빼낼 수는 있었다.

진경호를 조수석에서 내려 땅바닥에 눕힌 경찰들은 허영웅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완전히 박살이 나 있는데?"

허영웅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차를 발견했을 때부터 이런 상태였어요."

"뭐라고?"

"대체 누가...."

경찰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허영웅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명서 초등학교에 있던 일반인들도 이 광경을 보며 불안에 떨고 있었다.

"저기, 다들. 일단은 치료를 위해 옮기도록 하죠. 다들 보기도 하고 있고...."

허영웅의 말에 경찰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돌렸다.

"그, 그래, 일단 옮겨야...."

"다들 도와!"

그렇게 경찰들은 진경호를 데리고 발을 뗐다.

허영웅은 그들을 쫓아가면서 어딘가로 시선을 보냈다.

'고천수 씨, 지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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