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노련한 사냥꾼 (5)
에리카는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눈 상태 그대로 멍하니 에릭을 바라봤다.
푹-.
검날이 목을 파고들었다.
핏방울이 검신을 따라 흐르고 에리카의 손에 끈적한 핏물이 고여 갔다.
"아아-."
시시각각 자신의 손으로 제 목을 베어 내고 있었으나, 에리카는 자신이 살아남을 거라는 믿음을 지녔다.
그녀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모든 기사들도 그러했다.
"-아스티아시여."
황금빛 밀밭이 시시각각 검게 물들어 가고 청명한 하늘에서 빛이 사라졌다.
어둠이 가득해지는, 마치 죽음을 떠올리게 할 법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으나.
"-이 땅에 지고한 신성을 내려 주소서."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등.
금빛 십자가과 함께 나타난 에릭의 존재 덕분에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빛이....'
여전히 검은 것이 세상 전부를 짙은 어둠으로 물들이고 있음에도, 에리카와 근위대 기사단 앞에는 한 줄기 빛이 반짝이고 있었으니.
"-그리하여, 어둠으로부터 당신의 아이들을 지켜 주소서."
세상을 검게 물들이는 무언가를 향해 거대한 성기사의 기도문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거룩하며 신성하고 신실한.
온 힘을 다하여 바치는 간절한 기도였다.
'저렇게 경건한 기도문을....'
에리카는 저렇게 절절한 믿음이 담긴 에릭의 기도문을 처음 들어 봤다.
아직 신성의 기적은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
그런데 그 기도만으로 머리를 가득 메웠던 미혹이 사라졌다.
툭-.
모두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기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일곱 줄을 지닌 검은 것의 권능이 사라졌다.
"쿨럭-."
한 줌 피를 토해 낸 에리카는 제 목에 박힌 검날을 뽑아내고 곧장 에릭을 향해 한발 다가서려 들었다.
하나, 에리카나 다른 기사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키잉-.
공명음과 함께 에릭의 등에서 여섯 개의 금빛 날개가 솟아났고, 그 날개들은 자연스레 검은 것으로부터 모두를 가려 주었다.
'주주라니.'
에릭은 이 땅에 신성을 세우지 않는 한 눈앞의 저것을 해치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에릭 네 기도는 무얼 위해 존재하느냐?"
스승을 따라 전장을 전전하던 시절에도 에릭의 주적은 일개 흑마법사들이었지, 일곱 줄이나 이룬 종말급 흑마법사가 아니었다.
흑법사가 여섯 줄을 이루면 권능을 다루게 되며, '재앙(災殃)'이라 불렸고.
일곱 줄부터는 '종말(終末)'이라 불리며, 그들은 권능을 구체화하여 세계의 법칙을 뒤튼다.
'이제는 내 몫이다.'
지금의 에릭은 지킬 수 있는 힘을 지녔다.
또한 강대한 신성을 억누르기 위해 건성인 기도문을 외울 필요도 없는 상황.
그런 에릭의 기도는 간절했다.
그렇기에 자신의 등을 바라보는 자들이 권능을 떨쳐 낼 수 있게 만들었다.
이제부터 필요한 것은.
'이 땅에 신성을 세운다.'
신의 허가하에 이뤄지는 거룩한 행사로, 신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에릭에게는 불가능에 가깝던 일이었다.
'신의 말은 필요 없다.'
에릭은 스스로의 기준을 세웠다.
그는 소통을 원하지 않는다.
힘의 구현을 바랐다.
자신의 뜻으로 신성을 세워 스스로 증명하겠다는 다짐을 맺었다.
그 기도는 맹세요, 맹약이니.
"저는 한 자루의 검이 되어, 악을 베어 내고 이 땅을 수호하고자 하나니-."
이 땅에 광명(光明)을 내려 주소서.
그리하면, 저는 이 땅에서 검은 것들을 지워 버리겠습니다-.
"멸악의 신념을 바칩니다."
에릭의 기도문이 완성되었다.
여전히 들려오는 신의 대답은 없었지만, 에릭의 몸에 깃든 막대한 신성력을 매개로 지상에 오롯한 신성이 내려왔다.
검게 칠해진 하늘을 가르고 찬란한 빛줄기가 내리꽂혔다.
쿠웅-!!!
천상에서 지상으로.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흑마력의 침식 효과를 지워 냈다.
시종일관 사방을 침식하던 흑마력이 밀려나자, 검은 것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역겹도다."
인간의 형체를 닮은 시꺼먼 무언가의 표면에 일그러진 눈코입의 형상이 나타났다.
검은 것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순간.
"-닥쳐라."
쿵- 묵직한 충격파와 함께 에릭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신성은 세웠다.'
흑마력의 침식은 필드 효과와 비슷했다.
화염 마법사가 대지를 불바다로 만들고 싸울 때 효율이 더욱 좋듯이, 흑마법사도 그러했다.
'죽음이 밀려나는군.'
에릭은 성공적으로 종말급 흑마법사의 힘을 밀어냈다.
신성을 세웠다는 건, 그야말로 신의 힘이 현계에 직접적으로 내려왔다는 의미다.
'그래도....'
문제는 적이 너무 강하다는 것.
일곱 줄을 지닌 흑마법사.
바친 영혼이 백만을 넘었으며, 살아온 세월만 해도 백년은 거뜬하게 지났으니.
"크윽-."
에릭은 신성을 세움과 동시에 검은 것을 향해 달려들었다.
날개를 뽑고 [개벽의 검]을 꺼내 들며 쏜살같이 기습을 가해 본 것이나....
"나약하구나."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일격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막혀 버렸다.
검은 것이 연기를 일으켰을 뿐인데, 에릭의 칼날은 연기에 막혀 오도 가도 못했다.
검은 것이 고개를 기울였다.
"저열한 신의 장난감으로 뭐가 될 것 같았느냐?"
에릭은 입가에 고인 피를 뱉으며, 놈을 노려봤다.
그저 부딪쳤을 뿐이건만....
몸속이 진탕이 된 모양이었다.
에릭은 그런 몸 상태를 숨기며, 덤덤히 말을 이었다.
"주주가 언제부터 활동을 시작한 거지?"
궤멸까지 몰아넣었던 흑마그룹이다.
흑마그룹이 되기 전에는 흑회라는 이름을 지녔던 자들.
'고작 십 년 만에 재기했다고?'
말이 안 되는 일에 당혹감을 느끼던 에릭은 검은 것의 이어지는 말을 듣고서 충격을 감출 수가 없었다.
놈이 말하기를.
"인수 합병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네."
흑마법사가 내뱉을 법한 말은 아니었다마는.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인수 합병 했는가?
'흑마법사가 흑마법사를.'
그 말인즉슨.
'미친 새끼들....'
동족상잔으로 흑마그룹이 단숨에 부활했다는 의미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검은 것이 에릭을 향해 권능을 휘둘렀다.
콰앙-!!
에릭은 그대로 하늘 높이 밀려났다.
그는 허공에서 날개를 펼치며 우뚝- 멈춰 섰다.
"크윽-."
한 수를 주고받으며 느낀 바를 요약하자면....
'괴물.'
신성을 지워 버리고 축복으로 강화된 힘을 가볍게 무시하는.
일곱 줄을 이룬 종말급 흑마법사는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에릭, 권능을 다루는 놈들을 상대할 때 필요한 게 있다."
굳센 마음의 결의며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올곧은 방향성을 띤 자신의 믿음.
이는 신념이다.
'아직도 모자라단 말인가?'
신과 소통이 불가능한 에릭.
그의 신앙은 오직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세워졌다.
'아니다. 내 믿음은 진짜다.'
돈으로 신성력을 사들이고.
돈을 써서 강해지는 에릭이지만.
그렇게 얻은 힘으로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리라.
꾸욱.
에릭이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개벽의 검]을 따라 신성이 쏟아지듯 흘러넘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검은 것이 명령하기를.
"신성의 축을 더럽혀라."
다섯 흑마법사가 고개를 조아리며 빛의 기둥을 향해 움직였다.
그 안에는 에리카와 제국의 근위대가 들어 있었고, 에릭은 그들의 저력을 믿었다.
그렇기에.
"-지켜라."
한마디 전언을 남기고 에릭은 다시 종말을 향해 달려들었다.
놈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저주라도 일으켰다가는....'
종말이 전투에서 학살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제국 남부지역에는 마경이 펼쳐지게 될 터였으니.
콰앙-!
한 줄기 선을 남기며 에릭이 일점으로 쏘아졌다.
검은 것은 또다시 손을 휘둘렀다.
스르륵.
아지랑이 같이 피어나는 검은 연기가 에릭의 검날을 붙잡았다.
그러나 에릭의 신념은 보다 견고하고 단단해지고 있었다.
"아이야, 내 아이는 먼저 떠났단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이가 떠나기 전까지 고통을 나눠 주는 게 전부였어."
"그러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렴. 너는 내 아이와는 다르게 살아남았으면 해."
아픈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는 추억이다.
에릭의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자.
"-개벽."
이 땅에서 악을 몰아내겠다는 신념의 근원이 되는 감정이었다.
에릭의 검이 빛을 토해 냈다.
아지랑이에 붙잡힌 검날이 허공을 가르고.
키이잉――――!!!
쨍한 공명음을 토해 내며 검신을 따라 일점으로 선이 그어졌다.
"아아, 또 이것이로구나."
검은 것이 처음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검의 궤적을 따라 일점으로 그어진 기다란 직선.
[신념을 세워 기적을 이루리라.]
에릭의 머리 위에서는 둥근 고리가 찬연하게 반짝였다.
그리고.
콰앙――――!!!
한발 늦게 굉음이 일어나며, 모든 검은 것들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검의 궤적을 따라 그어진 선.
개벽(開闢), 신성의 세계로 이어진 차원의 균열은 그만큼 선명한 존재감을 보였다.
그에 종말이 피눈물을 쏟았다.
"강림하소서-."
그 한마디 말에 세상에 악마가 강림하였다.
* * *
그것은 용이었다.
일렁이는 검은 불꽃을 피부로 삼은 거대한 용이었다.
그 용은 검은 것으로부터 태어났고, 검은 것을 잡아먹고 지상에 현현했다.
"-이 땅에 종말을!"
용에게 흡수되는 와중에도 검은 것은 자신의 염원을 바쳤다.
쿠어어어―!!!
검은 용이 포효했다.
제 몸을 바쳐 자신을 현현하게 만든, 평생 영혼을 모아 구체적인 형태를 이루게 해 준.
자신의 추종자의 염원에 대답해 준 것이다.
타닥, 타다닥.
용의 불꽃에 뒤섞인 검은 것은 선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게 무슨!"
에릭이 세워 둔 신성의 빛 속에서 에리카는 멍하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근위대와 빙의자들의 싸움은 멈춘 지 오래였다.
"씨발, 어차피 저 위에서 이긴 쪽이 진 쪽 다 죽일 건데, 힘 빼지 맙시다."
두 손을 들며 항복한 빙의자들의 제안.
에리카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사실 흑마법사들은 신성의 기둥 속에서의 싸움을 꺼렸다.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며 싸울 이유도 없었다.
'여기서 뺑이나 치다 튀자.'
이미 다섯 명의 흑마법사들은 마음을 굳혔다.
주주를 소환하고 포탈이나 열라길래 왔더니, 저런 괴물들의 싸움에 휘말리게 될 줄이야....
콰아아아앙-!!!
하늘을 뒤덮는 용을 향해 거대한 성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성기사는 거대했으나, 용은 압도적으로 커다랬다. 그래서 성기사는 아주 작아 보였다.
"대체 존만 한 인간이 어떻게 저런 용이랑 싸우는 거냐?"
빙의자가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검은 용은 아무리 봐도 자연재해처럼 말이 안 되는 존재였다.
그런 것에 검을 휘두르는 성기사라니.
"저게...."
제국 근위대 기사도 빙의자들과 비슷한 의문을 품었다.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한 근위대 기사가 에리카에게 물음을 건넸는데 에리카가 암만 머리를 굴려 봐도 마땅한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신....'
아니, 사실 에리카의 머릿속에는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한 글자가 있었다.
에릭은 신이다.
이 땅에 신성을 세워 어둠을 몰아내고 강림한 악마를 물리치는, 그야말로 신의 현신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에 에리카는 하늘을 보며 무릎을 꿇었다.
"아아-."
근위대 기사들은 등 뒤에 흑마법사들을 내버려 둔 채 무릎을 꿇는 에리카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쿠구구궁-!
저 드높은 창공에서 검은 용이 사방으로 시꺼먼 불꽃을 흩뿌리는 모습에 의지할 누군가를 떠올리고 싶어졌다.
용의 불꽃은 제국의 대곡창 지대를 불태우려 들었으나.
키이잉――――――!!!
어둠을 찢어발기는 선명한 신성의 빛이 그 어둠을 집어삼켰다.
어두운 하늘이 개고 한 줄기 빛이 곡식들을 어루만지는 모습에, 그들 역시 절로 경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고.
"나의 신, 에릭."
에리카의 간절한 기도를 시작으로 근위대의 기사들도 너도나도 바닥에 주저앉아 에릭을 향해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으니.
'저게 열다섯이라고?'
빙의자들은 눈앞의 광경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현지 흑마법사들의 강림은 효율이 많이 떨어지긴 한데, 그걸 감안해도 에릭의 무위는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 주주님이...."
수백 년을 살았고 말 한마디로 자신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강대한 흑마법사가 주주다.
그런 주주가 강림하게 한 악마는 주주를 잡아먹으며 더욱 강력한 힘을 얻었다.
그런데도.
"드래곤 브레스가 잘린다고?"
흑룡의 브레스를 찢어발기며 날아오르는 성기사.
"야, 저 새끼도 팔다리 다 잘렸다. 아직 모르는...."
물론 종말의 힘은 강력했다.
에릭의 몸에도 상처가 거듭해서 늘어났다.
팔이 잘리거나 다리가 타 버리고.
급기야 하반신이 통째로 사라지기까지 했는데.
"저게 말이 되냐? 잘리는 족족 다시 돋아나는데...."
그런데도 주주의 승리를 점치기란 참으로도 어려운 일이었다.
오히려 패색이 짙어 보였다.
"암만 신성력이래도...."
저런 초고속 신체 재생은 주교급 성직자의 힘으로도 하루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일이었다.
"...."
감탄 끝에 침묵이 찾아왔다.
대체 일개 인간이 하늘을 뒤덮는 괴물을 어떻게 이기고 있는 건가?
그 신성이란 게 무엇일까?
그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고.
'대체 빙의자는 뭘 하려고 끌려온 걸까?'
존재론적인 의문까지 들었다.
"아아.... 나의 신 에릭."
그 강직하다는 제국의 기사들이 등 뒤에 적을 내버려 두고 광신도처럼 바닥에 꿇어앉지 않았나?
빙의자들은 이런 일련의 흐름을 토대로 자신들이 할 일을 정했다.
"튀자."
명분은 충분했다.
그 주주가 악마를 강림시키고 도륙당해 죽어 가는 판국에.
오히려 튀면서 정보를 가져다주는 게 회사에 더 이득이 될 터였다.
[길드홈 전이권]
빙의자들은 [인벤토리]에서 티켓을 꺼내 들었다.
마경에 자리한 흑마그룹 지부로 향하는 티켓으로, 가르시안 왕국처럼 들킬 일이 없는 안전한 장소였다.
지익-.
빙의자들이 티켓을 찢었으나.
"어어? 이거 왜...."
"전이 봉인? 이게 무슨 말이냐."
그들은 상태창을 보며 당황한 듯 하늘을 올려다봤다.
마침 에릭 또한 빙의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에릭이 빙의자를 내려다보며 말하기를.
"어딜 튀려고."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신전이 보다 선명해졌습니다.]
[신념을 세워 기적을 이루리라.]
[세계의 법칙을 뒤틉니다.]
[전이 효과가 봉인되었습니다.]
51화 노련한 사냥꾼 (6)
'분명 계획대로였다.'
전심전력으로 내지른 [개벽] 스킬로 종말 본체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에릭의 노림수대로 놈은 강림(降臨)을 사용했다.
빙의자 흑마법사를 상대할 때는, 최대한 강림을 못 하게 하라.
현지인 흑마법사를 상대할 때는, 강림을 유도해라.
에릭은 흑마법사를 사냥하는 데 도가 트인 인물로.
본체에 최대 일격을 가해 강림을 유도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빙의자인 흑마법사들과 달리, 현지 흑마법사들의 강림은 상대하기 쉬운 편이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용이라니.'
막상, 소환된 악마는 에릭의 생각 이상으로 강력했다.
우선 크기가 압도적이었고.
백만 이상의 영혼을 먹고 강림한 놈이었기에, 흑마력 또한 강대했다.
푹-!
용의 움직임 한 번에 팔이 잘렸다.
에릭은 끔찍한 고통을 느꼈으나, 무심한 얼굴로 신성을 휘감아 팔을 재생시켰다.
쿠오오오-.
흑룡이 브레스를 쏘면, 에릭은 신성을 일으켜 그걸 베어 냈다.
최소한의 부위, 요컨대 머리라든가 심장이라든가 이런 부분만 방어하며 공격에 전념했다.
[1만 골드를 사용해 신성력을 Max로 채웁니다.]
얼마나 돈을 썼을까?
가늠이 가질 않을 정도였다.
에릭의 전장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놈도 많이 작아졌군.'
어둠으로 가득했던 하늘에서 반쯤은 청명한 하늘이 돌아왔으니, 이 또한 긍정적인 신호였다.
그 덕분에 에릭은 시간의 흐름을 명확하게 인지했다.
'아직도 지원이 없다고?'
에릭은 슬슬 힘이 부쳤다.
[스킬]의 지속 시간이 끝나고 등에 솟구친 날개가 사라졌다.
'왜 지원이 없는-.'
에릭은 땅 위에서 신성을 쏘아 내며 검은 용과 싸웠다.
'젠장....'
에릭의 힘으로 하늘은 점점 선명해졌다.
밤낮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 아무도 이 전장에 개입하지 않고 있는 상황.
그 말인즉슨.
엘프들이 맹약을 어겼다는 의미이며, 제국의 황실과 아스티아 교단에도 문제가 발생했다는 뜻이다.
'지독하군.'
신체를 잃고 다시 재생하길 수십 번, 수백 번.
에릭이 절망에 빠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으나, 여전히 에릭은 굳건한 눈빛으로 용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아-. 나의 신!"
목이 터져라 자신을 부르짖는 에리카의 목소리 덕분이며.
그녀와 더불어 온 힘을 다해 자신에게 경배를 바치는 근위대 기사들의 기도 덕분이기도 했다.
[신전이 보다 선명해졌습니다.]
[신념을 세워 기적을 이루리라.]
[세계의 법칙을 뒤틉니다.]
[전이 효과가 봉인되었습니다.]
그 덕에 얻은 것들이 많았다.
신전이 선명해졌다는 상태창 메시지가 떠오른 직후, 에릭의 신성력의 밀도가 올라갔고.
신념의 고리는 에릭이 세계의 법칙을 뒤흔들게 만들었다.
'덕분에 몸이 터지지 않았군.'
아직 온전한 [신체(神體)]를 얻기 전인데 이런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이유는.
분명 신념의 고리 덕분이었다.
게다가, 빙의자들의 [아이템] 사용 효과까지 막아 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기도의 효과였는데.
무엇보다.
'덕분에 잘 견뎠어.'
모든 스킬의 쿨타임이 동시에 도는 순간까지 버티게끔 해 준 것이 그들의 간절한 목소리였으니.
"후우-."
에릭이 숨을 내뱉었다.
드래곤, 용종 몬스터를 닮은 악마는 지치는 기색도 없이 자신을 몰아세웠다.
온갖 피해를 입어 가며 맞서 싸우는 게 전부였던 에릭인데.
그의 기도가 사뭇 달라졌다.
'이제는 내 차례.'
모든 스킬의 쿨타임이 돌았다.
에릭은 이번 일격으로 이 전장을 끝낼 생각이다.
스윽.
에릭이 검을 하늘 높이 올려 신성의 구체를 쏘아 냈다. 쿠웅- 대기가 진동하며 드높은 창공에서 유성우가 쏟아졌다.
신성을 담은 운석들은 거대한 용의 피부를 두드렸다.
콰아아앙-!
유성들이 금빛 폭발을 일으킴과 동시에, 에릭이 등 뒤로 날개를 뽑아냈고.
"이 땅에 평화를-."
"악의 멸절을-."
굳건한 신념과 자신이 싸우는 이유를 되뇌며 에릭은 개벽의 검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아스티아식(式), 중검술.
거대한 몬스터를 때려잡기 위한 검술에 [개벽]이라는 스킬 모션이 더해졌다.
쿵-!!!
묵직한 발돋움에 에릭을 중심으로 땅이 푹- 파였고.
부서지는 대지를 발판 삼아 에릭이 드높은 창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리고.
키잉――――――!!!
기다란 흰색 선이 어둠을 반으로 갈라 버렸으니.
강림한 흑룡의 몸 중앙에 흰색 금이 그어졌다.
"아아아-!!!"
땅에서 하늘로.
천지를 가르는 일섬(一閃)에 아득한 찬사가 터져 나왔다.
* * *
"세계수의 총애를 받는 하이엘프, 신궁 유렌 님을 뵙습니다."
"인사는 됐으니, 상황 보고부터 부탁할게요."
세계수의 가장 높은 나뭇가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엘프가 아주 먼 지평선을 바라보며 눈가를 좁혔다.
하이엘프 유렌, 그녀는 세계의 두 번째 빙의자다.
'대체 뭘 소환한 거지?'
제국 남부, 대곡창 지대의 수호를 맡은 그녀였다.
유렌은 무언가가 소환되는 이펙트를 발견했다.
그와 동시에 강대한 신성의 기척을 감지했고 세계수의 가장 높은 가지에 올라 제국 쪽의 상황을 살폈다.
그런 유렌에게 세계수의 전령이 다가와 보고하기를.
"제국과의 맹약을 후순위로 미루셔야 할 것 같습니다."
"황제와의 맹약은 절대적입니다."
맹약은 어지간해서는 어길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예외가 존재하긴 하는데-.
"지금은 예외에 해당하는 상황입니다! 다크엘프들이 뿌리를 타고 넘어와서-."
"수호자들은요?"
"그들은 소환된 악마들을 도맡아서 현재 여유 인력이 없습니다."
"악마까지...."
유렌이 눈을 감았다.
[천리안] 스킬이 발동되고.
감은 눈 속에서, 저 먼 곳의 전장이 흐릿하게 드러났다.
'대곡창 지대에 흑마법이라니.'
일반적인 흑마법사들 사이로 이질적인 무언가가 보였는데.
그것이 무언가 수작을 부렸는지, [천리안] 스킬로도 명확히 전황을 분석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유렌의 눈에는 검은 것들 사이로 또렷한 한 줄기 신성이 보였다.
'저 신성....'
분명, 일반적인 신성력은 아니었다. 최소한 주교급 이상의 성직자가 펼치는 힘이었다.
'시간을 벌어 줄지도.'
제국과의 맹약이 있다마는....
이 맹약에는 예외라는 게 존재했고, 지금은 그 예외에 해당하는 상황이 분명했다.
그 말인즉슨.
자신의 왕국, 어머니 세계수가 습격을 당했다는 의미다.
'우리 왕국이 위험하다.'
유렌은 엘프 왕국의 하이엘프다.
왕국의 위협에 나서는 건 당연지사요, 추후 제국 측에 꼬투리를 잡히지 않게끔 상황을 분석하는 것도 필요했다.
생각을 마친 유렌이 눈을 떴다.
'최소한 대주교급의 힘.'
[천리안] 스킬을 해제했으나,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한 줄기 빛이 반짝였다.
최소한의 여유는 있어 보였다.
우선 왕국을 먼저 지키고, 제국은 나중에 해결해야지.
'어쨌든 개입만 하면, 맹약은 이행한 것과도 다름없어.'
그게 유렌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다.
유렌은 빠르게 다크엘프를 정리하고자 몸을 움직였다.
자칫 늦었다가는 제국의 대곡창 지대가 오염될 가능성이 있었기에-.
휘익.
가장 높은 가지에서 가장 낮은 뿌리로 유렌이 뛰어내렸다.
낙하하는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세계수의 가지가 길을 터 주고 이파리가 좌우로 갈라졌다.
유렌은 수직으로 뚫린 시야를 바라봤다.
"이 배신자들-!"
시꺼먼 피부를 지닌 다크엘프들이 세계수의 뿌리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어둠에 물들어 어머니를 저버린 악종들.
그게 다크엘프다.
쐐애애액-!
유렌이 [연발화살]을 날렸다.
화살에 각종 부가 효과가 깃들고 유렌이 직접 수련한 정령술까지 더해졌다.
유렌은 [3차 전직]을 마친 궁수요, 세계의 두 번째 빙의자였으니.
살아온 세월만큼 강함을 쌓아 왔다.
"역겨운 놈들."
흑마법과 어둠의 정령을 다루는 다크엘프를 처치하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유렌 님! 악마가!"
다른 하이엘프들은 세계수의 뜻을 따라 동족을 찾아 떠난 상황이었고, 맹약으로 묶인 그녀만이 지금 이 땅을 수호할 수 있는 유일한 강자였다.
유렌은 곧장 다음 상대를 해치우러 떠났다.
최소 재앙급 흑마법사가 소환한 악마들이 세계수를 향해 저주를 뿌려 댔다.
[궁극기- 필살(必殺)]
유렌은 효율을 위해 24시간의 쿨타임을 가진 궁극기까지 사용했다.
세계수의 위기는 맹약의 예외에 해당하는 상황이었으나, 그럼에도 유렌은 황제와 맺은 맹약을 중히 여기고 있었다.
'...후환이 두렵군.'
제국의 황제는 엘프 자치령을 통째로 지워 버릴 수 있는 지고한 강자다.
그러나 그녀가 정작 두려워하는 인물은 따로 있었으니.
"에릭은 신의 총애를 받는 내 제자다. 내가 사라졌다고 맹약을 어겼다가는 다 자란 에릭이 그 대가를 치르게 할 테지."
리페로제 아스티아.
웬 정신 나간 꼬마를 데리고 와서 자신에게 맹약을 강제한 존재였다.
그 꼬마가 지금은 리페로제의 순례자 지위를 이양받았다고 그러는데, 유렌은 과거의 짧은 만남에서도 에릭의 인간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지금이 열다섯이랬나?'
엘프 자치령에도 에릭의 소문은 익히 들려왔다.
그렇기에 유렌은 최대한의 힘을 발휘해서 왕국에 닥친 고난과 역경을 모두 물리치고 제국 남부 대곡창 지대로 향했다.
"허어...."
그곳에서 유렌은 커다랗게 자란 에릭을 만났다.
'괴물이구나.'
순례자에, 성자라더니.
에릭은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가 되어 천상을 누비고 다녔다.
그저 감탄과 경외심만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열다섯에 저 강함.'
유렌이 도착한 순간 목격한 광경은 이러했다.
용의 형태를 취한 끔찍한 악마가 하늘을 가득 메웠고.
에릭이 그 용을 향해 신성력을 담은 메테오를 흩뿌리더니, 검을 내질러 그 거대한 용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그 검의 궤적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이어지는 신성의 빛을 남겼다.
그리고.
키잉――――!!!
공명음을 토해 내는 검의 궤적을 따라 거대한 흑룡이 빨려 들어가는 상황.
싸아아아아아.
유렌의 앞에 푸른 하늘이 보였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느 때와 똑같은 제국의 대곡창 지대 풍경이 펼쳐졌다.
바람을 따라 고개를 흔드는 황금빛 곡식들.
세계수, 어머니의 은총으로 자라난 그런 대자연의 은혜.
그 이질적임에.
'어떻게 이토록 강할 수가-.'
유렌은 탄식을 내뱉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섯 날개를 펼친 거대한 성기사가 서서히 자신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유렌은 처음 봤을 때와 달리 엄청나게 커다래진 에릭을 보며, 짧막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저런 인간 말종이 성자라니-."
* * *
홀로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에 광명을 찾아온 성기사가 세상을 오시하는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 눈빛에 유렌은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에릭이 말하기를 수호의 의무를 어겼다가는 세계수를 장작으로 써 주겠다는구나."
어릴 적, 작은 꼬맹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엘프들의 어머니.... 세계수에게 그런 말을-!"
"영락한 엘프들이 뭘 어쩔 수 있겠나? 그리고 나는 그저 말을 전했을 뿐이다."
그때 유렌은 리페로제를 보며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꼬맹이가 리페로제에게 한 말이 있었는데....
"스승님, 두식이 선물이나 하나 해 줄 겸 가지 하나만 꺾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의 말에 세계수가 스스로 가장 두꺼운 뿌리를 들어 올렸고, 에릭은 그걸 주워 들며 비릿하게 웃었었다.
그리고 그 연놈들이 뭐라 했더라?
"몽둥이로 만들면 아주 좋겠습니다."
"호오, 몽둥이 모양의 스태프라, 두식이에게 참으로 잘 어울리겠구나."
어머니의 가지를 뽑아 들고, 이러니저러니 한참을 떠들었었다.
대뜸 패드립을 갈기는 꼬마와 그를 두둔하는 그의 스승을 보며 유렌은 저런 놈이 성직자로 대성할 리가 없다고 여겼으나-.
'...저런 괴물이 됐단 말인가?'
지금의 에릭을 보면, 세계수를 장작으로 만든다는 것이 허언은 아닐 것만 같았다.
유렌은 침을 꿀떡 삼켰다.
연녹색 머리칼을 질끈 묶으며, 에릭을 마주할 각오를 다졌다.
쾅-!
유렌이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에릭이 유성처럼 하늘에서 떨어졌다.
묵직한 발걸음을 내디디며 에릭이 유렌의 코앞으로 다가서더니, 유렌의 턱을 붙잡고 강제로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가 분명 말했던 것 같은데?"
광오한 금빛 안광이 유렌을 관통하듯이 내리꽂혔다.
유렌은 그 안에 담긴 것이 진한 분노라는 걸 여실히 깨달았다.
쿠웅.
신성의 힘이 유렌을 옥죄었다.
실로 간만에 신성력에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며 유렌이 고개를 푹- 내리깔았다.
'저, 저놈이, 어머니를....'
어머니 세계수께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을 건네던 꼬마가.
다 자라서, 그것도 순례자에 성자라는 지위를 얻고서.
똑같은 말을 내뱉으면 어쩐단 말인가?
유렌은 그것이 참으로도 두려웠다.
'신은 인간의 편.'
세계수는 세상 모든 것을 품어 주지만, 천상의 삼신은 오직 인간만을 보살핀다.
그 예로, 어머니의 인정을 받은 하이엘프 유렌조차 저 성직자들 앞에만 서면 한낱 빙의자로 치부되지 않던가?
유렌은 그것이 두려웠다.
"세계수를 장작으로 만들어 줬으면 좋겠나?"
그녀가 우려했던 대사가.
에릭의 입에서 내뱉어졌으니.
"성자님, 부디 그런 끔찍한 일은 참아 주셨으면 합니다.... 맹약을 어긴 죄는 제가 다 감당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어머니 세계수만큼은-."
유렌이 구구절절한 핑계를 늘어 두는 와중에도 에릭의 시선은 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그 방향의 끝에서는.
파르르르르-.
푸른 잎을 부들부들 떠는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엘프들의 고향이며, 대자연의 어머니요, 세상 만물에 풍요를 가져다주는 은혜로운 존재였으나.
[세계수]
에릭의 눈에는 그저 [세계수]라는 재료 아이템의 수급처일 뿐.
게다가 빙의자 유렌의 눈에도 동일하게 보일 것은 분명했다.
에릭은 자신을 대신해 미궁에서 고생하고 있을 장두식을 떠올리며,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두식이 몽둥이를 새로 뽑아 줘야겠군."
52화 사냥의 전리품 (1)
'대체 두식이가 뭐라고 또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유렌의 초록 눈망울이 흔들렸다.
스승의 손을 붙잡고 왔던 작은 에릭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 세계수를 모욕하는 거친 입담과는 다르게 어린 에릭은 말도 안 되는 귀염 상의 아이였다.
'엄청 귀여운 꼬마였는데....'
그 꼬마가 자라나서는.
신성함으로 빚어낸 얼굴이 되었고 거기에 더불어 압도적인 피지컬까지 지니게 되었다.
생긴 건 전혀 달라졌지만, 어릴 적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에릭의 외모는 현실적이지 못한 수준으로 빼어났다.
'진짜 신이 있다면 이럴지도.'
유렌은 에릭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어린 에릭과 지금의 에릭이 동일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었는데.
"두식이 몽둥이를 새로 뽑아 줘야겠군."
그런 그녀의 기대와 달리, 에릭은 또다시 세계수의 가지로 무슨 몽둥이를 만들겠다는 황당무계한 말을 내뱉었고.
그에 유렌은 그놈의 두식이가 뭔지 알고자 질문을 건넸다.
"...대체 두식이가 뭐길래, 매번 그런 소리를-"
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툭- 하고 에릭의 몸이 쓰러지는 게 아닌가?
쩌엉―!!!
쓰러지는 에릭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고리가 산산이 부서졌다.
[성유물: 신념의 고리(파괴됨)]
유렌의 눈에는 부서진 고리의 정체가 선명하게 보였다.
'성유물 등급 템이 부서져?'
차분하기로 정평 난 유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 있자니.
"아아-! 에, 에릭-!!!"
에릭의 뒤에서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한 여인이 다급하게 달려들었다.
에릭의 몸이 땅에 닿기도 전에, 여인의 손이 그를 붙잡았다.
"나의 신께서!"
오러를 둘러 달리는 모습과 입고 있는 황금 갑주로 보아하건데, 분명 황실 근위대가 분명했다.
황급히 뒤따라온 다른 자들도 같은 모습이었고.
그런데....
"에리카 단장님, 그분은?"
"무, 무사하시다. 숨을 쉬고 계심이 분명해."
"아아, 우리를 구하시느라...."
황제를 찬양해야 할 근위대가 에릭을 두고 애절한 믿음을 내보이고 있었으니.
'제국에는 국교가 없을 텐데?'
그 이질적인 광경에 유렌의 마음 속에 의문이 피어났다.
그리고 한발 늦게.
"내, 내가 죽어?"
"아니야. 분명 환상...."
"마, 맞아. 환상이야. 분명, 흑마그룹에서 우리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준댔어."
"환각일 리가. 분명 엄마가 나를...."
"나, 나도 진짜 엄마였는데...."
알만정교회 로브를 두른 다섯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전전긍긍해하며 에릭을 바라보았다.
'흑마법사들이 왜?'
유렌은 빙의자이되 정령의 힘을 얻은 존재다.
소드마스터 잭슨이 순수 수련으로 그런 경지에 올랐듯이, 유렌 또한 스스로 노력해서 정령왕과 계약을 맺었다.
그래서 빙의자들의 본질을 꿰뚫어 봤다.
'죽여야-.'
유렌은 무심코 등에 멘 활에 손을 얹으려 했으나.
스릉.
"감히-! 신성의 주인 앞에서 무기에 손을 얹으려는 건가?"
적발의 기사가 대뜸 검을 뽑아 들며 그녀를 막아섰다.
유렌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나를 무슨 몬스터처럼 대하는....'
검을 뽑아 들기 직전 아주 정중하게 조심스러운 손길로 에릭의 머리를 내려놓았는데, 막상 자신을 대할 때는 몬스터를 대하는 것처럼 적대적이었다.
유렌은 일단 침착하게 적발 기사의 뒤를 가리켰다.
"저 흑마법사들이 왜 알만정교회의 로브를 둘렀는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만."
여전한 적대감에 유렌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 예의가 없었군요. 저는 유렌이라 합니다."
유렌은 제국의 귀족들처럼 통성명이라는 걸 시도해 봤다.
잠시간의 침묵이 일고.
"...에리카다."
적발 기사가 자신을 소개했다.
'저 흑마법사들.'
에리카는 등 뒤의 흑마법사인 빙의자들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분명 놈들이 에릭 님의 신전을 봤다고 했지.'
그들의 허무맹랑한 주장일 수도 있으나, 에릭을 신처럼 받아들인 에리카에게 있어서는 간과할 수 없는 말이었다.
생각을 마친 에리카가 유렌을 바라보며 통보하기를.
"저들의 처우는 에릭 님께서 정하실 거다."
에리카는 문득 눈앞의 여인의 외모에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굴곡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호리호리한 몸매.'
지나치게 차분한 초록빛 눈동자.
말총머리를 한 연녹빛 머리카락과 자신의 키만큼 커다란 장궁.
'분명....'
게다가 유렌이라는 이름 또한 어딘가 귀에 익은 느낌이었고.
에리카는 눈앞의 존재를 떠올려 냈다.
'신궁 유렌.'
엘프 왕국의 왕족이라 불리는 하이엘프.
신궁이라는 이명을 지닌, 세계수의 수호자.
그리고.
"맹약을 저버린 배신자."
에리카의 눈빛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
성난 고양이에서 호랑이는 돼 보이는 느낌.
"맹약의 배신자 유렌, 이제 와서 시체라도 건질 생각이었나?"
에리카는 광신적인 기질을 지녔다. 그녀의 본질은 제국의 귀족이자, 황제 폐하의 검이다.
지금은 에릭에게 그녀의 광신적인 면모가 대부분 쏠려 있다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근원이 뒤바뀐 건 아니었다.
표독스럽게 쭉- 올라선 에리카의 눈꼬리를 보며, 유렌이 허탈한 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변명은 필요 없겠지요."
휘이이-.
한 가닥으로 묶은 유렌의 연둣빛 머리칼이 흩날리고 그 너머에서 나뭇잎 한 장이 나풀거렸다.
"어머니께서 그분과 대화를 나누고자 하십니다."
"세계수의 잎사귀...."
"아마도 이번 사태에 대한 충분한 해명이 되겠지요."
대지모신(大地母神)으로 불리는 세계수의 초대장을 보며 에릭카가 에릭을 감싸 안았다.
―Ep. 12 사냥의 전리품
제국과 삼왕국.
아스티아 교단, 알만정교회, 루-솔라스교.
국가와 종교를 불문하고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인 재앙이 터졌다.
"황도에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루-솔라스여!! 마경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아아, 알만 신이시여. 어찌 이런 시련을...."
"미궁의 보스 몬스터가 왜 이런 농가에 나타난다는 말입니까?"
"마경이...."
빙의자들에게 듣던 대격변패치라는 것이 일어났다.
그런데 문제는.
패치가 시작됨과 동시에 대륙 전체에 재앙이 펼쳐졌다는 것.
게다가 한 국가당 하나의 재앙이 아닌, 여러 개씩 겹친 경우가 많았다는 것.
대륙에서 가장 강한 제국에는 최악의 형태로 재앙이 찾아왔다.
"제3구역, 미궁 입구에서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제국 수도 한복판에 미궁의 계층주가 나타났다.
보고 내용에 따르면 20계층의 계층주가 미궁을 열고 튀어나왔다고 하는데‥….
그것도 열댓 마리가 동시에.
'희생자 수가 일만은 넘겠군.'
툭툭-.
옥좌를 두드리는 황제의 손끝에서는 대륙 곳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이 전달되고 있었다.
[가르시안 왕국, 식량 생산지에 마경 발생.]
[태양왕국 수도, 태양성도에 미궁 10계층의 계층주 다수 출현.]
[아스티아 교단의 교황청 인근 마경에서 몬스터 웨이브 발생. 대형종 몬스터가 다수 발견.]
'대륙 전체로 따지면.... 백만, 아니 천만이 넘을지도 모르겠구나.'
황제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며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제국의 정점은 끔찍한 재앙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는 법.
또한 자신이 맡은 제국 신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
황제가 굳건한 목소리로 재상에게 묻기를.
"수도의 피해 상황은?"
"다행히도-."
그런데 어째 재상의 말이 황제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시작되었다.
'다행?'
수도 한복판에 미궁 중층의 계층주가 나타났다는데.
그러고도 다행?
"르웰 사제님이 관리하는 아스티아 교단의 교회와 고아원에서 피난민을 수용한 덕에 대부분의 신민들이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황제의 의중을 헤아린 재상은 재빠르게 보고를 이었다.
"그, 뭐어라?"
재상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재상의 말을 요약하자면.
"교회와 고아원으로 제3구역의 신민들이 피난을 갔단 말인가?"
이상한 말이었다.
제국의 치안청도 아니고, 하물며 국가 기관도 아닌....
고작 교회랑 고아원이라니.
"방어 마법과 신성의 힘으로 버텨 주고 있답니다."
"재상, 그러니까 일개 교단의 교회와 고아원에 제3구역의 신민들이 대피했다는 말인가?"
그 에릭의 교회며 고아원이다.
그렇기에 방어적인 측면이 뛰어나다는 건 인정하는 바였다.
그런데도....
황제의 귀에는 제국 수도의 주민들이 교회랑 고아원으로 피난을 간다는 말이 너무나도 이상하게 들렸다.
"미궁 광장 근처의 주민의 수가 만에 달하거늘."
"르웰 사제님의 교회는 예배실에만 최대 3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지녔습니다."
거기까지 설명을 듣자 황제는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회를 습격 중인 계층주 오거 20개체, 토벌 완료.]
툭툭-.
때마침 황제에게 반가운 보고 내용이 들어왔다.
재앙이 벌어진 즉시 황제는 황도군을 보내 제국의 문제를 정리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약 한 시간 만에 문제가 해결되었다.
황제는 안도하며 재상에게 이러한 흐름을 알려 주었다.
황제의 말에 재상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폐하 이제 한숨 돌려도-."
툭툭-. 뚝!
그때 옥좌를 두드리던 황제의 손짓이 거칠어졌다.
재상은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채며 황급히 입을 꾹- 다물었다.
"재상, 그 입을...."
황제의 투박한 손등 위로 핏줄이 솟구쳤다.
[북부 마경에서 몬스터의 범람 발생, 언데드 사태로 시급한 지원을 요망. 현제 북부 대공이 단독으로 진군 속도를 늦추는 중.]
[남부 대곡창 지대에서 흑마력의 침식 효과 발생.]
[제국 남부 지역으로 전이마법진 사용이 불가해짐]
[라핀 공작의 마탑에서 다급한 지원 요청]
.
.
.
끝도 없이 늘어지는 보고에 황제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본래 대격변패치란 예기치 못한 재앙이었으나, 이제부터는 타당한 이유가 생겨났다.
"재상, 늘 그 입을 조심하라 하지 않았나?"
"폐하, 이건 제 탓이-."
"재상 네놈이 그런 말을 하면 늘 문제가 더 커지지 않나? 이쯤 되면 재상 그대가 흑막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군."
말을 마친 황제가 우뚝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 어디로-."
"남부에는 성자 에릭이 있다지?"
황제는 북부로 행선지를 정했다.
제국의 일인자가 국란의 위기에 몸소 앞장서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
"재상, 국정은 맡기지."
황제는 시종들이 건네준 거대한 은빛 갑주를 걸쳤다.
그 위대한 제국의 정점, 황제의 출정은 마중하는 이가 재상 하나뿐인 조촐한 행사였다.
* * *
―너의 신전.
―너의 신성.
―너의 세계.
미궁에 입장할 때 들려오는 기이한 목소리를 들으며 에릭이 정신을 차렸다.
'여기는....'
과한 신성을 탐했으니, 몸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몸이 가벼웠다.
아니,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힘이 충만한 느낌으로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너만의 신념을 세워라.
또 한 번 미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뇌리에 때려 박히는 음성에 에릭은 눈을 번쩍 떴다.
'신성력이 가득한 공간.'
사방에서 신성의 물결이 요동쳤고 그 중심에는 어딘가 뭉뚱그려진 형태의 신전이 보였다.
'나만의 신념을 세우라고?'
환상이나 꿈일지도 모르는 현상이었지만, 에릭은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했다.
파앗-!
[에릭 - 3티어 신성력]
[보유 스킬: 개벽, 광휘의 날개, 유성우]
[보유 골드: 230,506,500]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
여전히 너덜너덜하고 필수적인 스탯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현실이라는 근거로는 충분했다.
에릭의 영혼과 동화된 상태창은 현실에서만 나타나니까.
현실임을 자각한 직후, 그의 머리가 바삐 굴러갔다.
'너의 신전, 너의 신성, 너의 세계.'
강렬한 직감.
혹은 충동.
에릭은 홀린 듯이 신전을 향해 걸었다.
사방을 둘러싼 신성의 물결 사이로 신전은 오롯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폴리곤이 뭉개진 그래픽 같군.'
형태만 있다 뿐이지 디테일은 상당히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다만, 그 안에 담긴 신성력은 가히 대해(大海)와도 같았고.
'내 힘인가?'
에릭은 어딘지 모를 친숙함을 느끼며 신성을 움직여 봤다.
스르륵.
신전을 둘러싼 신성력의 구름이 제 뜻대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에릭은 정체 모를 현상에 처했으나, 지독하게 차분했다.
'어쩌면....'
그는 위기에 강한 사내다.
침착함을 유지하며 신성력을 이용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보았고.
그 결과.
'3티어, 내 힘의 총량만큼만 동시 운용이 가능하다.'
이 장소의 모든 신성은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한 번에 쓸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정해져 있었는데, 마치 하루 이체 한도가 정해진 통장이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게 다 돈으로 사야 쓸 수 있는 거잖아?'
[신체(神體)]를 얻어 4티어를 개방해도 이토록 많은 신성력을 다루기란 요원한 일로 보였다.
그 말인즉슨.
무조건 5티어 이상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돈이 정말 천문학적으로 필요하겠군.'
교회의 십일조.
제국 황제에게 받을 보상.
그리고 엘프들의 계약 위반으로 얻어 낼 배상금.
이번에 인수하게 될 자동화 공장에서 만들어 낼 신성 마도구 사업 등등.
'거기다가 성물도 사서 팔고.'
에릭은 구체적인 미래를 기획했다.
성자가 된 직후, 제국의 대곡창 지대를 재앙급 흑마법사로부터 구원한 게 아니던가?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옥좌.... 아니, 신좌인가?"
신전 중앙에 놓인 황금색 신좌(神座)가 눈에 띄었다.
에릭은 성큼- 발걸음을 내디디며, 의자에 몸을 얹었다.
마치 꼭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에릭이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신전 정면으로 보이는 기둥 사이의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스르륵- 신성의 구름이 걷히며 이질적인 광경이 드러났다.
그것은.
'...지구.'
이질적이었지만 한때는 아주 친숙했던 그런 풍경이었다.
"박지훈, 이 나쁜 놈."
몇몇 여인이 박지훈의 영정 사진을 보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에 에릭은 관자놀이를 질끈 붙잡으며, 철없던 지구에서의 삶을 잠시나마 반성했고.
'...그래도 많은 사람이 와 줬군.'
그 반성이란 건 순식간에 끝을 맺었다.
자신 스스로가 환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던 에릭이었기에 금세 털어 낼 수 있었다.
지구에서의 30년과 이쪽 세계에서의 15년을 비교해 보자면.
'밀도가 다르다.'
삶의 질은 한없이 떨어졌지만, 살아가는 밀도는 아주 짙었다.
갓난쟁이부터 죽을 위기를 겪었고, 10살이 될 때까지 전장을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지독하게 보내 왔으니까.
"후우-."
에릭은 손을 슥- 움직여서 지구에서의 풍경을 지워 버렸다.
"어-."
파스스스스스.
하나, 그런 에릭의 의도와는 다르게 갑작스레 공간 자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신성으로 가득한 신전이 서서히 입자처럼 변하고, 이윽고 에릭의 몸 또한 먼지처럼 바스러졌다.
"윽-!"
놀란 에릭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을 때.
'내 몸이....'
에릭의 사지는 거대한 나무줄기에 결박된 상태였고.
"일어나셨군요."
그런 에릭을 웬 이상한 나무 인간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나무가 말하기를.
"당신의 세계수랍니다."
53화 사냥의 전리품 (2)
'거, 뭐냐. 탈출 비석이 왜 뻘겋게 변한 거지?'
장두식은 에릭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빙의자들을 데리고 미궁 2층의 히든피스를 회수하고 3층과 4층에 숨겨진 튜토리얼 히든 보상까지 얻어 냈다.
그야말로 대성공.
그런데도 장두식의 반삭 머리 사이로 식은땀이 삐질삐질 배어 나왔다.
'밖에서 하루가 넘게 지났-.'
[레벨 업 영약]을 잔뜩 얻었으면 뭐 하나?
미궁을 못 나가는데.
"빙의자들아,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장두식이 투박한 나무 몽둥이로 자신의 손바닥을 때리며 세 명의 빙의자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세 빙의자들 중 두 사람이 나머지 한 명을 향해 시선을 옮겼고.
"...장두식 부국장님. 아마도, 시즌-."
눈가를 잔뜩 구긴 박창호가 장두식의 질문에 대답하자니.
그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빠악-!!
"억!"
장두식이 몽둥이를 어깨에 걸치며 말하기를.
"나는 에릭 형님의 오른팔이다."
"오른팔 장두식 형님, 호칭 문제로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눈치 백단 박창호는 재빠르게 장두식의 기분을 풀어 주었다.
'저 개새끼. 에릭 국장이 없어지니까 쉴 새 없이 패대네.'
속으로는 장두식을 열심히 씹어 댔다.
그러면 뭐 하나?
저 반짝이는 축성된 장두식에게 벗어날 방도가 없는데....
'이미 니시다 료가 튀다가 잡혔지.'
박창호가 니시다 료를 흘겨봤다.
퉁퉁 불어 터진 얼굴의 니시다 료가 박창호를 보며 입모양으로 묻기를.
'뭘 봐?'
미친 새끼.
박창호가 눈을 질끈 감으며, 얼마 전에 있었던 니시다의 도주극을 떠올렸다.
"직접 저 땅을 파야 레벨 업 영약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니시다 료는 장두식이 2층의 히든피스를 회수하는 사이에 도주를 택했다.
"노란 따까리야, 저거 튀는 거냐?"
땅을 파던 장두식이 퉁퉁- 뛰는 소리를 듣자마자 박창호를 향해 물었고, 박창호는 죄송하다는 대답을 건넸었다.
"베리어-."
장두식은 도망치는 니시다 료를 향해 베리어 마법을 사용했다.
번쩍-!
금빛으로 빛나는 마력 구체가 니시다 료를 가두었고, 니시다 료는 신성이 뒤섞인 마력을 벗어날 수 없었다.
"번쩍번쩍 모드가 왜 이렇게 안 끝나는 거지?"
축성이 유지되는 것에 장두식에게 여러 궁금증이 생겨났으나.
'거, 뭐. 형님이 뭘 했겠지.'라고 중얼거리더니 세 빙의자를 모아 두고 개 패듯이 팼다.
"빙의자는 패야 말을 듣는다더니, 진짜였구만."
아무튼, 니시다 료 그놈 탓에 장두식의 매타작이 시작된 것이다.
고개를 내리깐 박창호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자니.
휘익-빠악!
또다시 머리 위로 몽둥이가 또 날아들었다.
"끅-!"
"그래서 대답은 안 하냐?"
박창호는 정수리를 문지르며 장두식의 질문을 떠올렸다.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었지.'
탈출 비석이 먹통이 되고, 미궁의 지형지물이 변화하는 등.
그들은 안전지대에 숨어서 탈출 비석의 활성화를 기다리는 상태였다.
박창호는 재빠르게 이 상황을 설명했고.
"시, 시즌 패치가 시작돼서 그렇습니다!"
빠악-!
몽둥이에 또 맞았다.
"시즌 패치? 빙의자들이 아는 말로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듣겠냐?"
장두식이 몽둥이로 미궁의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래서 그게 뭐길래 탈출 비석이 죄다 먹통인 거냐?"
"...그."
박창호는 최대한 짧고 정확한 답변을 생각해 봤다.
머리통이 저릿저릿한 게 몇 대 더 맞았다가는 진짜 두개골이 깨질 판이었으니.
'저 빡대가리 깡패한테 대체 뭐라고 설명하지?'
보통 게임에서 대규모 업데이트를 할 때는 그럴싸한 이름이 붙이곤 한다.
이곳은 현실이지만, 빙의자들에게는 게임적 요소인 상태창이 딸려 왔고.
상태창의 최상단에는 버전을 뜻하는 표기와 함께 이번 시즌의 주제가 쓰여 있었다.
[ver.666 대격변]
본래는 [ver.665 프리시즌]이었으나, 미궁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태창의 표기가 바뀌었는데.
이는 곧 새로운 시즌의 시작을 의미했다.
시즌 패치란 [대격변] 패치가 이 세계에 적용된다는 의미다.
'그렇게 설명했다가는 처맞겠지.'
박창호는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말했다.
"...세상이 완전 개박살 날 겁니다."
그 짧고 간단한, 수많은 생략이 들어가서 건성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설명에-.
"오오, 그러냐?"
장두식이 납득했다.
* * *
대지에 축복을 내려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 주는.
풍요와 사랑의 상징 세계수.
자신을 세계수라고 소개한 여자는 그런 수식언에 걸맞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세계에 사랑과 풍요를.
그 몸으로 증명이라도 하듯이 세계수는 굴곡지면서도 매우 풍만한 몸매를 지녔다.
'너무 자극적이군.'
대지모신(大地母神)이라는 이명에 걸맞게, 비옥한 흙색을 닮은 연갈색 머리칼과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 에릭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그 세계수의 강렬한 눈빛에 에릭이 눈가를 좁혔다.
"이건 좀 풀어 주고 얘기하시죠."
에릭은 나무줄기 같은 것에 온몸이 결박된 상태였다.
거대한 원통 속에 갇혀 몸이 묶여 있는 건 매우 불편했다.
아마도, 세계수의 몸속이 아닐까?
아이템 수급처를 상징하는 [네임태그]가 선명하건만.
'재료 아이템 수급처가 아니라, 인격체였다고?'
분명 세계수는 말을 하고 의지를 지닌 존재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에릭은 줄기에 묶인 팔에 슬쩍 힘을 주었다.
뜨득.
"아앗-!"
세계수가 아찔한 비명을 질렀다.
에릭은 몸에 힘을 풀고 세계수를 바라봤다.
힘으로 뜯어내려면 언제라도 뜯어낼 수 있겠지만, 눈앞의 세계수는 말 그대로 나무 인간이었기에-.
'다리가 나무뿌리랑 연결되어 있다니....'
게다가 옷도 나무껍질이다.
다른 곳은 인간이되, 나무의 특징으로 중요 부위만 가린 그녀를 에릭은 나무인간이라 여겼고.
"그래서 안 풀어 줍니까?"
혹여, 자신이 세계수를 다치게 할까 봐 배려의 말을 건네 본 것이다.
에릭의 사려 깊은 질문에 세계수가 답하기를.
"당신의 세계수랍니다."
또 같은 말을 내뱉었다.
'나무 인간이라서 지능이-.'
에릭이 엘프들의 신을 향해 불경한 생각을 품으려던 순간.
촤르륵-.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나무뿌리들이 뱀처럼 미끄러지듯 사라졌고, 세계수는 싱긋 웃으며 에릭을 향해 다가섰다.
"신전을 보셨지요?"
에릭은 좀 전에 겪은 일들을 떠올렸다.
'너의 신전, 너의 신성, 너의 세계.'
생각에 잠긴 에릭을 향해 세계수가 코앞까지 다가섰다.
툭- 하고 몸이 닿았다.
세계수는 까치발을 들고 에릭의 귓가에 속삭이려 했으나, 그러고도 높이가 맞지 않아 나무뿌리를 단상처럼 솟구치게 만들었다.
"너의 세계수, 랍니다."
세계수가 에릭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나의?"
"네."
에릭은 잠시 고민을 해 봤다.
'조금 맛이 간 존재지만....'
느껴지는 힘은 아득했다.
말 그대로 세상 만물에 풍요를 안겨 주고도 남을 정도의 힘으로.
'저런 힘을 가지려면 분명 세계수급은 돼야 가능하겠지.'
즉, 눈앞의 이상한 여자는 진짜 세계수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도 지적 생명체로서의 사고가 가능한 존재.
그런데 왜 [세계수]라는 아이템 판정인....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에릭은 번득- 그녀를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감을 잡았다.
"나의 세계수가 되면 엘프들은 어떻게 되지?"
에릭은 세계수를 다루기 위해 자연스레 반말을 선택했다.
또한 말을 건네며 제게 바짝 붙은 세계수를 슬쩍 밀어냈다.
툭- 그녀가 나무 기둥 같은 곳에 부딪혔다.
"아아...."
눈앞의 여인이 제게 바라는 것은 그런 대우였다.
신전에서 박지훈의 마지막을 본 덕에, 지구에서의 감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묘리로 에릭은 눈앞의 여인의 심중을 헤아렸으니-.
"제 아이들 또한 당신의 것이 될 거예요."
세계수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내리깔았다.
'엘프는 세계수의 자식이라는 설정이었지.'
에릭은 맛이 간 세계수의 발언에서 중요한 부분을 찾아냈다.
'세계수는 나의 것.'
그리고 좀 전에 본 자신의 것으로 추정되는 신전.
"내가 신인가?"
에릭이 한발 세계수를 향해 다가섰다.
세계수가 벽에 쿵- 부딪혔다.
"...예."
목소리가 떨렸다.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처럼 에릭의 가슴도 떨려 왔다.
'내가 신이 된다고?'
그도 그럴 것이.
신이 된다는 게....
이 얼마나 대단한 말인가?
지상의 삼신은 세계를 떠나 천상에 기거하고, 교리와 신성만이 남겨진 상황.
거기서 유일하게 현신한 신이 에릭이 되는 것이다.
'진짜 그렇게 되려면.... 얼마나 더 강해져야 하는 거지?'
물론, 말이 그렇다 뿐이지 갈 길이 멀었다.
그런데도 에릭은 아주 흡족한 기분을 느꼈다.
왜냐?
'정확한 방향성을 찾았다.'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 상태창.
신과 소통 없이 신성력을 다루는 자신의 존재.
또한 빙의자에게 신성력이 먹히게끔 개변하는 능력.
자신의 특이한 능력에 대한 의문이 해소된 것 아닌가?
십오 년을 품고 산 의문은.
'내가 신이 될 자라서 그런 거였군.'
아주 거대한 답을 남긴 채 단숨에 해소되었다.
에릭이 후련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말했잖아요?"
세계수가 산뜻하게 다가왔다.
다가선 그녀에게서는 흙냄새와 풀냄새가 담긴, 순수한 자연의 향기가 풍겨 왔다.
"저는 당신의 세계수랍니다."
에릭은 세계수의 말에 순수하게 궁금증이 생겨났다.
'말은 저렇게 해도....'
세계수를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만든단 말인가?
막상 세계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고 생각해 보니, 도통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여 묻기를.
"내 신전으로 세계수를 분갈이하면 되는 건가?"
그의 질문에 세계수가 탄성을 내뱉었으니.
"아아-!"
대자연의 섭리가 담긴, 말 그대로 세계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대단한 존재가 세계수다.
'분갈이라니-.'
그런 세계수를 한낱 애완용 식물 취급을 하며, 분갈이라 표현한 것에 세계수는 전율했다.
세계수는 에릭의 말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모두가 받들어 모시는 제게.
'화분 취급이라뇨.'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스르륵.
얼굴을 붉힌 여인이 나무의 벽면으로 스며들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진도가 너무 빨라요-."
* * *
에릭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자신이 보았던 신전의 정체를 확인하고, 대자연 세계수의 비호가 따를 거라는 확신을 얻었다.
'진도가 빠르다는 말은.'
아마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의미겠지.
세계의 강자들은 정신에 나사가 빠진 부류가 대부분이었다.
에릭은 개떡 같은 세계수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문제는....'
세계수가 사라진 직후, 에릭을 가두고 있던 벽이 개방되었다.
둥근 원통형 공간은 예상했던 대로, 세계수의 몸속이었다.
다만 문제는 에릭이 밖을 나선 순간부터 시작되었는데....
"아아-!!! 나의 신!"
에리카를 필두로, 근위대 기사단이 온몸을 바닥에 눕혀 제게 광신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에리카 공녀님."
에릭은 오래전, 예절 교육을 하던 때처럼 에리카를 불렀다.
바닥에 몸을 붙인 에리카가 파르르- 몸을 떨었으나,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한 광신을 유지하며 에릭을 찬양했다.
"신이시여-. 제게 하대를 해 주십시오."
에릭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신 나간 세계수를 만나고 왔더니, 광신도가 된 에리카가 자신을 반기는 게 아니던가?
게다가 그녀 혼자만이 아니다.
"아아-. 그 끔찍한 어둠을 몰아내 주신...."
다른 근위대는 어떤가?
얘들은 더 맛이 가 버렸다.
'루-솔라스교 신도도 아니고....'
태양성왕이 이끄는 태양성국의 국교 루-솔라스교의 광신적인 면모를 쏙 빼닮은 모습.
'이대로는 안 된다.'
에릭은 에리카의 머리칼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흐익-!"
에릭은 그녀를 번쩍 들어서 바닥에 세워 놨다.
에리카는 불경함을 저질렀다는 듯이 고개를 조아렸다.
"어쩌다, 이렇게 망가졌습니까?"
종말급 흑마법사의 권능.
어쩌면 그것이 이들의 머리를 망가트렸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들어왔다.
그런 에릭의 염려와는 다르게.
"그것은 검은 용이었다. 하늘을 어둠으로 물들이고 대지의 생기를 빼앗아 가는 그런 용이었다. 용이 세상에 어둠을 흩뿌렸을 때, 한 줄기 빛이 천상에서 내려왔나니-."
에리카는 아스티아 교단의 성전을 읊조렸다.
"하늘에 가득한 어둠을 빛의 일섬이 가르니, 어둠은 사라지고 이 땅에 평화가 도래했노라-."
어?
에릭의 말문이 막혔다.
성전을 줄줄이 외고 다니는 건 아니지만, 르웰이 좋아하는 구절 정도는 기억하고 있는 에릭이었기에-.
'이거 마치....'
제국의 남부 대곡창 지대에서 벌인 자신의 전투가 꼭 이렇지 않았던가?
재앙은 검은 용이었고.
그걸 개벽으로 베어 없앤 건 자신이었다.
에릭은 황당한 표정으로 에리카를 바라봤다.
"당신은...."
에리카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어릴 적에는 자신의 방만함을 일깨워 주고 교정했으며, 다 자라서는 세상을 어지럽힐 악을 없애 주었다.
"아니, 저는...."
에리카가 말을 이으려던 순간.
"크흠."
옆에서 한 엘프가 헛기침을 했다.
그에 모두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렸다.
'어떤 새끼가-.'
에릭이 가장 싫어하는 것들 중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으로.
그는 대화의 흐름이 강제로 끊기는 상황을 질색했다.
에릭은 발끈해서 고개를 돌렸다.
"아-."
초록빛 머리칼과 눈동자.
그리고 연필처럼 호리호리하게 길쭉한 몸매.
등에 맨 커다란 활.
[성유물: 필중(必中)의 활]
[세계수의 가장 굵은 뿌리를 압축해 만든 활.]
에릭이 성큼- 다가섰다.
"오랜만이군."
유렌은 갑자기 다가온 거대한 에릭을 보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흉포한 기세에 무심코 등에 걸린 활을 뽑아 들 뻔 했다.
그녀의 행동을 본 에릭은.
"뽑아 보지 그러냐."
이를 들이대며 유렌을 위협했다.
에릭은 단순히 말을 끊어서 화가 난 게 아니다.
'맹약을 저버리고.'
저 나태함.
[링링 – 그랜드 마스터 아처]
그리고 스승과의 맹세를 저버린 빙의자.
"3차 전직을 했군, 링링."
에릭의 묵직한 중저음에 유렌은 훌쩍- 뒤로 [백스탭]을 사용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멀찍이 거리를 벌린 유렌은 세계수의 가지에 올라 에릭에게 활을 겨누며 말했다.
"그 이름은 버렸다. 나는 유렌이다."
그때, 휙- 가지가 휘더니 유렌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고.
쿵-!
"어, 어머니시여-."
유렌은 황망하게 세계수를 올려다봤다.
그런 유렌에게 다가서며 에릭이 말하기를.
"내 세계수가 왜 네 어머니지?"
54화 사냥의 전리품 (3)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군요."
마키아 장첸, 흑마그룹의 대표가 자신의 얼굴을 쓸며 한탄했다.
"대표님, 너무 걱정 마시죠. 이번 주주총회에서 대표 해임안은 나오지 않을 듯합니다."
그녀의 비서 토마스가 안도의 말을 건넸으나.
"-제 해임안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 회사의 주주님이...."
그녀의 투명한 유리 같은 피부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검은 눈물과 절규하는 탄식.
"아아, 어쩌다.... 가여운 노조 직원들까지 가 버렸어요."
회사의 주주가 죽었다.
거기다가 노조를 만들어 시위를 벌여 대는 빙의자 흑마법사들의 연결까지 끊긴 상황.
대표의 무능을 탓하기에는, 천재지변과도 같은 일이었다.
대격변 패치는 흑마법사들에게도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으며, 그로 인해 황제가 직접 움직이고 성자가 제국 남부를 지킨다는 것은 절대로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표님 잘못이 아닙니다."
토마스의 다정한 말에도 마키아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왜냐?
이 모든 것이 대표의 지시로 이뤄진 일이었기에.
그녀가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었기에-.
"수습도 제가 해야겠지요."
마키아는 눈물을 멈추고 토마스를 바라봤다.
결의에 찬 눈빛.
'우리 대표님은 내가 챙겨야지.'
마키아 장첸의 볼을 따라 검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눈물 자국을 닦아 주며 토마스가 고개를 조아렸다.
숙인 고개 아래로 새하얀 손등이 나타났고.
쪽-.
토마스는 손등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지시를 기다렸다.
토마스의 입술에 닿은 차가운 피부가 멀어져 가고, 대표의 말이 시작되었다.
"에릭, 성자랬죠?"
신의 총애를 받는 존재요,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휘두르는 괴물.
그러나 주주도 성자 못지않은 괴물이었다.
"아무리 성자래도 고작 열다섯의 성자가 주주님을 죽였다는 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백만이 넘는 생(生)을 바쳤고.
백년이 넘는 삶을 살아왔다.
게다가 그 모든 것을 바친 강림(降臨)까지 이뤄졌다.
'살아온 세월과 쌓아 온 노력을 무시하는 신의 자식들.'
성자라는 게 참으로도 불합리한 존재가 아닌가?
생각을 마친 마키아 장첸이 입을 열었다.
"신을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저는 흑마법사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녀의 눈빛이 침전하듯 깊어지고, 짙은 어둠이 일렁였다.
신살(神殺)의 비원.
토마스는 그녀의 꿈을 이뤄 주기 위해 살아간다.
그렇기에 그녀의 진심을 알았다.
진중하게 경청하는 토마스를 향해 마키아 장첸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과거 제국이 일으킨 전쟁에서 양친을 잃고, 소년병으로 전장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그때 그녀가 속한 곳은 '루-솔라스교'가 운용하는, 태양신성군의 징벌병이었다.
그저 부모 잃은 어린 소녀였을 뿐인데.
"신을 믿지 않는 죄인."
그녀는 일명 '창받이'라 불리는 죄수로 이뤄진 보병대에 끌려갔다.
"곱상한 년이 여길 오네? 특식인가?"
살인자와 약탈자로 이뤄진 진짜 죄수병들에게 그녀는 숱한 수모를 겪어야 했다.
"죽어-!"
그녀는 자신을 겁탈하러 온 병사를 찔러 죽이며 밤을 이겨 냈다.
그러고 아침이 밝아 오면, 적군의 창을 받아 내기 위한 징벌병이 되어 전장으로 향했다.
"살인귀 년."
불과 몇 달 만에, 마키아의 처소를 찾아오는 죄수들은 사라졌다.
대부분은 죽어 없어졌고, 살아남은 놈들은 고자가 되어 다음 날 전쟁터에서 창받이로 죽어났다.
그때쯤부터 마키아 장첸은 이 세계를 증오했다.
"태양신 루-솔라스 님을 모시지 않는 자에게 구원은 없다."
총 열 번의 전장을 거치고 그녀가 태양신성군에게 죄수병 신분을 벗겨 달라 애원했을 때 들은 말이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신성을 다루는 저들은 그녀를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아, 차라리 누가 죽여 줬으면 좋겠어."
금제(禁制)에 걸려 자살도 할 수 없는 처지.
그녀는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전쟁터로 향했다.
"이 땅에 강림하소서-."
그런 그녀에게도 구원이 찾아왔으니.
어느 화창한 날, 하늘에 짙은 어둠이 내려왔다.
루-솔라스의 태양빛은 어둠에 밀려났고, 신을 경배하는 성도군은 전장을 피해 후퇴했다.
그리고 남겨진 일반 병사와 죄수병들은 모두 제물이 되었다.
"증오가 깊구나."
하나, 마키아 장첸은 살아남았다.
한 노쇠한 흑마법사가 그녀를 살려 주었기 때문.
"성전, 신의 이름으로 대규모 살인을 벌여 대는 존재들이 증오스럽지 않더냐?"
마키아 장첸은 그 노인의 손을 붙잡고 흑회(黑會)라는 집단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지금의 그녀가 된 것이다.
"대표님...."
토마스는 마키아 장첸의 일대기를 들으며 눈물을 쏟아 냈다.
그가 존경하고 사랑하며 경애하는, 그녀의 인생은 참으로 애절하며 슬픈 이야기였다.
이런 얘기를 토마스에게 해 줬다는 의미는.
'대표님께서 나를 진심으로 믿어 주시는 거야.'
신뢰였다.
토마스는 존경을 담아 한쪽 무릎을 굽힌 채 마키아의 발치에 꿇어 앉았다.
그 모습만 보자면, 기사 서임을 받는 주인과 기사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으나-.
"신성은 어둠의 천적입니다."
내뱉는 말은 그렇지 않았다.
마키아 장첸은 기존의 계획을 모두 철폐했다.
세계가 변했으니, 흑마그룹의 행동 지침도 변해야겠지.
"신을 죽일 순 없지만, 신의 자식들을 줄일 수는 있겠지요."
성자와 성녀.
그저 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압도적인 힘을 휘두르는 자들.
마키아 장첸은 그런 불합리한 존재를 없애려는 마음을 먹었다.
"우리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낼 거예요."
흑마법사는 악마를 숭배하나, 제물을 바치고 흑마력을 다루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악을 행하고 악을 추종하며, 마음속에 그 악의 대의를 품어야 비로소 진정한 흑마법사가 되는 것이니까.
"나의 토마스, 신의 종들을 상대할 비책이 필요합니다."
그 노력의 끝에 성자와 성녀를 죽이리라-.
"이 땅에 살아 있는 성자와 성녀를 멸절하는 것."
그렇게 탄생한 흑마그룹의 차기 사업.
일명, '신의 자식 죽이기'.
"대격변 패치가 이뤄졌습니다. 아마 종교들도 미궁으로 성자 성녀를 내세운 조사단을 파견할 겁니다. 뭐, 미궁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요."
토마스의 눈이 빛났다.
그는 명석하게 머리를 굴렸다.
"토마스, 미궁을 노리면 위험하지 않겠어요?"
"아마, 그 척살자도 미궁의 변화로 활동을 멈췄을 겁니다."
미궁에서 살아간다는 척살자의 존재.
토마스의 말대로 그가 활동을 멈췄다면, 흑마그룹이 판을 뒤엎을 수 있는 기회임은 분명했다.
* * *
"...내 세계수라니 그게 무슨-."
유렌의 얼굴에 경악이 가득했다.
그녀는 하려던 말도 잊은 채 멍하니 세계수를 바라봤다.
푸르르르르-.
거대한 나무가 숫제 지진이라도 난 듯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게다가 하늘 위에서는 세계수의 사과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기뻐하셔?'
빙의자 유렌은 참된 의미로 세계수의 아이였다.
빙의자임에도 은총을 받아 세계수와 소통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리페로제 아스티아가 그녀를 살려 준 것이다.
그런 유렌은 세계수의 기분을 명확하게 인지했다.
'조금 부끄러워하시면서도 기뻐하시는 감정이 분명해.'
유렌이 서서히 고개를 돌려 에릭을 바라봤다.
황금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동자의 주인이 말하기를.
"세계수는 내 거다."
아주 당연하다는 말투.
마치 진짜 자신의 소유물을 지칭하는 듯이 자연스러웠다.
"그, 그게...."
유렌은 뭐라도 부정을 하고 싶었는데, 파르르- 떨리는 세계수를 바라보니 도통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유렌을 향해 에릭이 점점 다가왔고.
"맹약의 배신자, 유렌."
유렌의 초록 눈망울은 세계수를 바라봤다.
그 눈동자에는 어머니의 구원을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였으나-.
뚝-.
세계수는 그녀를 외면하였다.
유렌과 연결된 세계수의 연결이 끊겼다.
그에 에릭이 조소를 머금은 채 유렌에게 물었는데.
"버림받은 자식인가?"
그 말에 유렌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런 미친 상황은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해서, 아무런 대처법이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그런 유렌의 심정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이, 에릭이 그녀에게 성큼 다가서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엘프 왕국에서 이 사태에 대한 배상금을 받아 갈 생각이네."
무슨 삥 뜯는 것도 아니고.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동전 모양을 만들며 말하는 에릭의 모습에 유렌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액수는 10억 정도면 충분하겠군."
부유한 제국의 속국이 엘프 왕국이다.
일종의 자치령으로 분류되어 문화와 문물에 대한 간섭은 없었지만, 경제적인 부분만큼은 제국의 뜻을 따라야 했다.
"엘프 왕국이 세계수의 어린잎을 팔아서 돈을 꽤나 벌었다고 들었지."
물론, 이는 엘프 왕국을 풍요롭게 만들어 줬다.
세계수 옆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숲속의 주민들이 제국에 속하면서, 수많은 문화혁명이 일어났다.
그 선두에는 빙의자 유렌이 있었다.
"유렌, 네가 엘프 왕국의 교역과 개발을 주도했다고 들었네."
그 덕에 유렌은 엘프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존재가 되었다.
중국의 부잣집 딸이었던, 링링 시절의 삶을 잊지 못한 탓이었다.
'젠장....'
링링은 어린 시절부터 유학을 떠나 타국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중화사상에 덜 물들었다.
그런데도 중국의 당 간부였던 부모의 돈맛에 절여져 살아왔으니-.
"엘프 왕국을 무슨 차이나타운처럼 만들어 놨구나."
에릭의 눈은 세계수에 가려진 엘프 왕국의 뒷부분을 향해 있었다.
'정신 나간 빙의자에 그걸 방치하는 미친 세계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엘프 왕국의 모습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새였다.
리페로제와 함께 유렌을 보고 떠난 지 십 년.
에릭이 다섯 살 때 보았던 엘프 왕국은 그야말로 숲속 주민 수준의 문명을 지녔었으나.
'고작 십 년 만에....'
지금은 지구촌 어디에서라도 볼 수 있는, 붉은색이 가득한 차이나타운이 펼쳐져 있었다.
에릭은 혹시라도 엘프들이 중화사상에 찌들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짜 중국을 만들어 놨네.'
세계수의 뒤편으로 보이는 풍경이 그러했다.
좌우로 늘어선 중국식 목조 건물들 그리고 건물들 앞에는 기다란 줄에 연등이 매달려 있었는데.
화염의 정령을 담아 붉게 빛나는 연등이 중국 특유의 느낌을 잔뜩 주었다.
게다가 건물 지붕이 중국식 기와라든가, 가장 큰 대저택은 붉은 기둥이 세워진 채 황금 기와로 덮여 있는 것이 꼭 자금성을 빼닮은 모양새였으니까.
"빙의자들 말로는 이럴 때 사상 검증을 해 봐야 한다더군."
에릭이 [개벽의 검]을 뽑아 들고 허공에 신성의 검기를 그려 냈다.
썩- 잘 그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추어치고는 제법이다 싶은 인물 초상화가 그려졌다.
'주, 주석님?'
황금색으로 빛나는 노란 곰돌이 캐릭터를 닮은 누군가를 보며 유렌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런 유렌에게 에릭이 말하기를.
"개새끼라고 해 보게."
* * *
'실로 충격적이군.'
에릭은 좀 전의 일을 떠올렸다.
망설임 없이 자신이 그린 초상화에 화살을 갈기며 쌍욕을 내뱉는 유렌의 모습.
"퉤엣-! 이 개새끼!"
사상 검증의 결과가 너무나도 깔끔했기 때문에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진 일은 더욱이 현실적이지 못했으니, 에릭은 될 대로 되라며 마음을 놓아 버렸다.
"세계수님의 뜻대로, 저희는 언제나 에릭 님을 따를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그러게."
하이엘프, 엘프들의 왕족은 세계수와 연결되어 있다.
대체 세계수가 뭐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금성 한복판에서 엘프의 국왕이 자신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상황에.
에릭은 '그래, 그깟 사상이 뭐가 문제냐.'라고 생각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엘프 자치령에서 어지간해서는 나오지도 않는 놈들이 자신을 수장처럼 모시겠다는 게 아닌가?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이야.'
엘프의 국왕은 하이엘프 중에서도 세계수의 은총을 가장 많이 받은 존재로.
엘프들의 최종 병기라 불리는 괴물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런 국왕이 왕국을 통째로 제게 바치는 것에 에릭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이쪽이 보물고입니다."
엘프들은 맹약을 저버렸으나, 이를 에릭이 대신 이행해 줬다는 쪽으로 합의를 보았고.
에릭은 10억 골드라는 자산을 확보했다.
본래 더 많은 돈을 챙길까도 싶었던 그였으나-.
"현금이 생각보다 적군."
얼추 10억 골드 언저리밖에 없는 엘프들의 금고를 보며 에릭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에 동족을 찾아 떠난 왕족들의 지원에 많은 예산을 투입했습니다. 원하신다면 그들을 다시 불러와서-."
"그럴 필요는 없네."
세계수를 이고 지고 세계를 떠돌던 엘프들은 제국에 터를 잡았다.
오랜 세월 떠돌이 생활을 한 탓에 엘프들은 곳곳에 흩어져 살게 되었고, 그로 인해 다크엘프라 불리는 배신자들까지 늘어난 상황.
'엘프들도 기구하네.'
게임 속에서는 '엘프 왕국의 부활'이라는 이름의 퀘스트를 줬던 자들.
에릭은 간만에 옛 기억을 떠올리며, 엘프들의 왕국을 바라봤고.
더 이상 게임과 비슷한 전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어 냈다.
'왕국이 있으니까.'
이미 엘프들은 왕국을 부활시켰다.
제국의 속국이라는 형태여도, 자치령으로 분류돼 자신들만의 고유의 것들을 지켜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며.
꽉 막힌 엘프들의 사상은 유렌의 차이나타운 건설로 많이 개방적으로 변했다.
일종의 완성된 형태의 왕국을 제 아래에 두게 된 에릭은 가볍게 앞으로의 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1. 동탄 미시룩 사태를 일으킨 후작에 대한 참교육.
2. 라핀 공작의 마탑을 접수.
3. 대격변 패치로 일어난 제국의 정세 변화 확인.
4. 흑마그룹에 대한 대대적인 견제 시작.
그중 1과 2는 당장에라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에릭은 엘프의 국왕을 보며 물었다.
"같이 라핀 공작의 마탑을 들르는 건 어떻겠나?"
국왕의 뒤로는 호위처럼 유렌과 몇몇 세계수의 수호자들이 서 있었는데....
'정녕 어머니 세계수가 저놈의 것이란 말인가?'
다른 수호자들은 별생각이 없어 보였어도, 유렌만큼은 초록빛 눈동자를 마구 굴려 대며 이 상황에 못마땅함을 드러냈다.
'게다가.... 제국 남부를 넘어서 간다는 건.'
이는 맹약 위반에 해당한다.
이미 제국 남부를 지키지 못한 엘프들이, 허가된 영역 밖으로 나가는 건 더욱 문제일 터.
그런 유렌의 복잡한 생각과는 달리, 국왕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주 심플했다.
"준비하겠습니다."
목적도 묻지 않는다.
그저 세계수의 주인의 말을 따를 뿐.
세계수의 주인이 나타났을 때, 모든 엘프들은 그의 뜻을 받들라.
엘프 왕가에서 고대부터 내려져 온 말이었다.
'역시, 뭔가 있는 모양이군.'
에릭은 그런 자세한 사정을 몰랐으나, 나름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핀 공작에게 받아 낼 것이 조금 많이 늘어난 참이었으니까.
'남부에 그 사달이 났는데, 마탑주란 놈이 잠수를 타?'
55화 사냥의 전리품 (4)
파벌의 수장은 그 휘하의 귀족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뭐, 어느 단체든 책임자가 아랫것들을 챙겨 주고 보호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진짜로 집행부로부터 나를 지켜 주시겠다는 건가?'
그래서 아론 후작은 최후의 보루로 자신의 비밀을 공유한 라핀 공작에게 연락을 보낸 것이며, 운 좋게도 공작은 후작을 비호해 주겠다며 그를 반겼다.
"일단, 자네를 그냥 보호해 주는 건 아닐세."
공작은 대뜸 계약서를 들이대며 후작에게 서명을 요구했고.
후작은 망설임 없이 일필휘지로 공작이 내민 '지분 양도 계약서'에 서명을 마쳤다.
그제야 후작은 제 상황을 입에 올렸으나.
"공작 각하, 갑자기 집행부가-."
"쉿."
공작은 후작의 마나 서클을 파괴한 뒤에 재갈을 물리고 결박하여 바닥에 버려 뒀다.
공작의 눈은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향해 있었다.
'성자 에릭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마도 연합의 3인자인 후작을 비호해 주는 것보다, 공작은 에릭과의 친분을 우선시했다.
'엄청난 마력 파장이로군.'
공작은 제국 남부에 나타난 재앙급 흑마법사의 존재를 알아챘다.
그런 와중에 대격변 패치가 벌어졌다.
대격변 패치가 일어날 거란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었으나, 이렇게까지 갑작스레 일어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거기에 거대한 흑룡까지 나타나다니.
'강림까지 했단 말인가?'
라핀 공작은 마탑의 최상층에서 에릭의 싸움을 지켜봤다.
여차하면 도움이라도 줄까 싶었으나.
'신의 힘이라-.'
하늘을 검게 물들이는 흑마력 속에서 한 줄기 빛을 피워 내는 에릭을 보고, 공작은 그야말로 모든 행동을 멈춘 채 창세기에서나 일어날 법한 성자의 위용을 바라봤다.
그 결과 재갈이 물린 아론 후작은 에릭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방치되었다.
[황도에 미궁 계층주 출현]
[황제 폐하 북부 출정, 언데드 사태 발생]
[금주 주말, 제국의 국란 회의 개최]
공작은 식음을 전폐한 채 에릭의 모든 싸움을 지켜봤고.
그사이 정보부에서는 제국의 상황이 전달되어 왔다.
공작은 이 또한 슬쩍- 확인만 해 두고, 계속해서 신성의 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광경을 바라봤다.
'신성에 마력을 섞는다.'
황실 마탑주가 워-메이지의 형태로 신성과 마력의 조화를 꿈꾸듯이, 라핀 공작은 마도구를 이용해 이를 구현하고 싶었다.
그런 마도공학적인 욕망이 공작을 지배했다.
공작은 삼 일이 지나고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본 뒤에야 눈앞에 후작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직후 내뱉은 말은.
"아론 후작, 미안하게 됐네."
"-읍, 읍븝븝-!!"
재갈이 물린 채, 마나 서클을 파괴당한 상태로 후작은 바닥에서 몸을 떨었고.
"내 마탑에서 후작의 지분이 30% 정도였나?"
라핀 공작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후작을 내려다봤다.
"지금 대격변 패치가 일어났다는데, 파벌이 뭐가 중요하겠나?"
쭉- 째진 공작의 실눈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빛났다.
후작은 억울함에 어찌할 바를 몰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분 양도에 대한 계약서는 후작 자네가 보호를 대가로 서명했으니 문제는 없을 걸세. 내 마탑은 오롯이 내 것이야 하니까. 이해해 주면 고맙겠네."
공작은 후작의 대답을 바라지 않았기에, 그의 재갈을 풀어 주지 않았다.
그저 하고픈 말을 멋대로 내뱉을 뿐.
"흐음, 그런데도 자네를 왜 살려 두는지 궁금하나?"
'읍-!' 후작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성자 에릭이 자네를 내놓으라더군."
후작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자네도 그 재앙을 없애는 걸 보지 않았나? 그 괴물 같은 놈이 고작 열다섯이네. 그놈이 자네를 내놓으라 했으니, 내 어찌 방도가 있겠나?"
후작 또한 마탑의 창 너머로 비추는 전장의 모습을 보았다.
그 힘의 주인이 자신을 잡아 오라고 했다니....
후작의 몸부림이 멈췄다.
'설마, 그 옷을 선물한 게 문제가 된 건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린 후작을 바라보며, 공작이 말하기를.
"대체 르웰 사제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그가 그토록 화를 내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공작은 말끝을 흐렸다.
그의 분노가 자신에게 튀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
"자네도 귀족이라 알지 않는가? 가문과 가족의 모욕은 곧 나의 모욕과도 같다는 것을. 그리고 지킬 힘이 있는 자의 가족은 건드려서는 안 되는 법일세. 잘 가게, 후작."
후작은 아직 살아 있었으나, 공작은 이미 죽은 자라는 듯이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그때.
뿌우―――――.
희미한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이 창가를 내려다보니 저 멀리 지평선을 가르고 거대한 녹색의 흐름이 보였다.
공작의 실눈이 더욱 작아지고.
저 먼 지평선의 풍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에릭이 엘프를 끌고 나왔다?"
최선두에서 칼을 뽑아 든 에릭은 마치 대장군을 방불케 하는 위용을 보였고.
그 뒤를 따르는 엘프들의 군대는 목숨을 건 투사의 기도를 내뿜었다.
그에 공작이 죽은 사람 취급하려던 후작을 바라봤다.
"후작, 자네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건가?"
* * *
"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유렌은 실로 당혹감을 느꼈다.
엘프의 군대가 동원된 것은 제국에 합병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엘프군으로 제국의 마탑을 공격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최선두에서 검을 뽑아 든 에릭의 위용은 대단하였으나, 그와 별개로 유렌은 이 미친 짓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항명의 말을 내뱉은 것인데.
"유렌, 어머니의 뜻을 어기려는 것인가?"
국왕이 유렌을 노려봤다.
그 옆에 선 다른 수호자들도 마찬가지였고.
"세계수의 뜻을 어기는 하이엘프라-."
에릭이 가볍게 턱을 쓸며 유렌을 향해 중얼거리자.
"제 교육이 부족했던 탓입니다."
국왕이 고개를 조아렸다.
세계수의 주인이면, 국왕보다 높은 인물임은 당연지사.
게다가 어머니의 뜻이 내려왔다.
"내 세계수가 자식 교육에 애를 먹은 모양이군."
유렌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닫았다.
'다들 정신이 어떻게 된 거야.'
이 미친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이 정상인인 기분이 들었다.
그녀도 세계수를 지지하고 무한정 따르는 입장이었으나, 그럼에도 타 종교 집단의 성자를 따르라는 명에는 쉬이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다른 자들은 죄다 그대로 받아들인 상황.
"유렌, 우리는 충분히 네 의견을 수용해 왔다. 그 차이나타운이라는 도시 건설까지도 이해를 해 줬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용납하기 어렵구나."
오히려 유렌이 이상한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자신을 키워 준 원로 엘프가 그리 말할 정도였으니까.
유렌은 억울하였으나 이를 해명할 방법도 딱히 없었다.
'저런 미친놈이....'
세계수를 장작으로 써 버리겠다는 에릭의 발언을 떠올리니 유렌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어머니 세계수시여, 대체 무슨 생각을-.'
그런 놈을 자신의 주인이라고 말하셨기에, 어머니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지만....
"유렌, 저 최상층으로 활을 한 발 쏘아 보게."
여상하게 이어지는 에릭의 발언에, 유렌은 활을 뽑아 들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거절했다가는 내가 미친년이 되겠지.'
유렌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유지하며 에릭을 바라봤다.
진짜 쏴?
그런 표정이었고.
"안 쏘고 뭐 하나?"
에릭은 그런 유렌에게 독촉의 말을 건넬 뿐이었다.
"아! 아래쪽은 공장 설비가 있으니 조심하도록."
여기까지 말이 이어지자, 유렌은 이 상황의 심각성을 여실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엘프군이 제국의 마탑에 선공을 한다고?'
뭐, 생각은 생각이고.
일단 유렌은 활시위를 놓았다.
아니, 놓쳤다.
에릭이 신성력을 흩뿌려 은근히 압박을 주었고.
'앗-! 따거.'
실로 오래간만에 [고통 내성]을 뚫고 다가온 아픔에 유렌은 당긴 활시위를 놓쳐 버렸다.
쐐애애애액-.
특별한 스킬을 담지 않은 화살이 똑바르게 라핀 마탑의 최상층을 향해 쏘아지고.
파칭- 하는 마력의 파장이 일며 화살이 허공에서 소멸했다.
"역시, 방어력이 제법이야."
제국 남동부를 지키는 라핀 공작의 마탑.
말이 마탑이지, 실상은 자동화 설비를 지닌 대규모 마도구 생산 공장이나 다를 게 없었다.
에릭은 그 공장의 방어력을 시험해 본 셈.
"이번에는 그 힘을 써 보도록."
에릭은 유렌에게 스킬의 사용을 종용했다.
'그 힘'이라는 단어에 유렌이 눈을 질끈 감았다.
유렌이 빙의자라는 사실을 아는 건 어머니 세계수와 순례자 리페로제 그리고 에릭이 전부였다.
'약점을 잡는 건가.'
에릭은 별생각 없이 해 본 말이지만, 유렌의 입장에서는 강력한 압박처럼 느껴졌다.
에릭이 신성력이라도 일으켰다가는 유렌은 활활 타 버릴 것이며.
그 광경을 본 다른 엘프들은 그녀를 배신자로 여길 것은 분명하였다.
다크엘프들 중 반수는 유렌과 비슷한 빙의자들이었으니까.
유렌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활시위를 당겼다.
패앵-.
[필중(必中)] [관통의 대가] [속성 부여] [소닉 애로우]
진짜 제국의 마탑을 부숴 버렸다가는 큰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유렌은 적절히 힘 조절을 해서 스킬을 조합했다.
활시위가 놓아지고.
쐐애액-.
또 한 발의 화살의 마탑의 최상층에 날아들었다.
파칭- 하며 마력 방어막이 겹겹이 뚫리고 결국 마탑의 표면에 화살이 닿았으나.
화살은 닿은 즉시 소멸했다.
"특별히 방어력에 신경 쓸 부분은 없겠어."
에릭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짓을 더 시키지는 않겠지.'
유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마탑쪽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우우웅-.
푸른 빛무리와 함께 마탑의 1층 정문이 개방되고 라핀 공작과 지팡이를 든 마도사들이 에릭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로는 온몸이 묶여 있는 한 사내가 보였다.
최선두에 선 라핀 공작은 옷매무새를 만지며 엘프 국왕을 향해 나긋하게 손을 흔들었다.
"국왕, 오랜만이군."
국왕은 공작에게 마주 인사하는 대신 에릭을 바라봤고.
"공작, 제국을 배신했더군."
에릭은 성큼- 국왕의 앞에 나서서 공작을 마주했다.
왕의 앞을 막아서는 에릭의 무례와 제국을 배신했다는 충격적인 말에 공작의 실눈이 반쯤 커졌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공작은 뜬금없는 상황에 당황했지만, 명석하게 머리를 굴려 지금의 상황을 분석했다.
'엘프의 국왕이 에릭의 밑이다.'
영문은 모르겠으나 이 자리의 주인이 누구인가는 명확했기에, 공작은 황급히 수하에게 지시해 아론 후작을 앞으로 데려왔다.
그러고는 변명을 늘어 두기 시작했으니.
"숨겨 준 게 아니네, 그 재앙급 흑마법사의 전장에서 후작을 건네줄 짬이 있었겠나?"
그런 라핀 공작에 변명에 에릭이 코웃음을 치면서 날카로운 기세를 일으켰다.
쿠웅-.
내려앉는 신성의 힘에 공작은 맞대응을 해야 하나 고민이 들었지만.
이어지는 에릭의 한마디 말에, 공작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걸 다 보고도 구경만 해?"
에릭에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공작을 배신자처럼 생각하는 게 아주 당연했다.
'전이가 막혔어도 블링크로 단번에 달려올 수 있는 거리.'
에릭은 라핀 공작이 자신의 싸움을 구경만 하고 있었음을 확신했다.
코앞에 있으면서도 삼 일 내리 지켜만 보았다는 게,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으니까.
"...그, 그게."
공작은 나름의 변명을 생각해 보았지만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연구를 위해 성서를 본 적이 있던 공작은 창세기에서나 벌어질 법한 신화적인 싸움에 눈길을 빼앗겼고.
그로 인해 신성력과 마력을 섞는 위대한 대업을 떠올리며 그 전장을 바라봤다.
'뭐라 말해도....'
그 결과 공작이 내린 결론은.
구구절절한 사정과 자신의 개인적인 심정을 토로해 봤자, 그 모든 행위가 '구경'이라는 두 글자로 내려쳐질 것이 분명했다는 사실이며.
'저 군대는 나를 노린 거였구나.'
라핀 공작은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
"내 사과하겠네."
황제보다 오래 살아온 라핀 공작은 황제 외의 존재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엘프 국왕에게도 고개를 빳빳이 치켜드는 라핀 공작이.
"...."
에릭에게 허리까지 접어 가며 사과의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그에 에릭은 관대함을 내세워 공작에게 용서의 말을 읊조렸다.
"공작의 마탑을 준다면 충분히 용서해 줄 수 있지."
* * *
기존에 계약은 신성 마도구 사업의 순수익 50%를 에릭에게 지급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마탑의 지분 50%라는 것이 추가되었다.
사주(四柱)라 불리는 공작가의 세율은 0%로, 마탑 지분에 걸맞은 배당금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면.
'안정적으로 큰돈을 얻어 낼 수 있겠어.'
에릭은 라핀 공작의 현명한 판단에 커다란 만족감을 느꼈다.
'사실 삼 일 내리 구경만 한 것치고는 싼 대가지.'
에릭이 이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으면, 공작가 전체에 불똥이 튈 법한 일이었다.
그걸 알기에 라핀 공작도 별다른 저항 없이 에릭이 내건 조건을 수용한 것이니까.
"우리의 앙금은 이제 없는 것입니다."
마탑은 높은 언덕 위에 지어졌다.
마탑 앞의 언덕은 대곡창 지대를 배경으로 삼아 자연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명당이다.
그 앞에서 라핀 공작과 에릭이 마탑 지분 양도에 대한 계약서를 들고 손을 맞잡았다.
찰칵-!
마력 수정구가 그 장면을 기록하여, 공식적인 증거 자료로 만들었는데.
기록된 영상에서 엘프군은 병풍처럼 에릭의 뒤를 장식했으며, 엘프의 국왕은 이 거래의 증인으로 등장하였다.
"그래서 어쩌다 엘프들이 에릭 님을 따르게 된 겁니까?"
에릭은 전과는 달리 말을 편하게 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어린 나이가 발목을 잡지 않게끔, 자신의 위치를 보다 공고히 다지려는 것이다.
"세계수가 내 것이더군."
"...예?"
에릭의 말에 공작이 한참을 머뭇거리다 의문을 토로하였고.
그게 사실임을 증명하듯이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세계수가 잎사귀를 흔들며 에릭을 향해 선선한 바람을 보내 주었다.
"귀족의 작위로 따져 보면 남부 대공 정도가 되는 게 아닐까 싶군."
"나, 남부 대공 말입니까?"
북부 대공은 들어 봤어도 남부 대공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엘프 자치령 내에서 엘프들의 왕은 국왕이었으나, 제국을 기준으로 보면 공왕(公王)이라 불리었다.
이를 대공으로 칭한다는 것은 엘프들이 오롯이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성자 에릭 님께서 제국의 남부 대공을 해 주신다면, 황제 폐하께서도 아주 든든하실 겁니다."
라핀 공작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에릭의 행동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으니.
'제국을 진정한 하나로.'
56화 장두식 구출 작전 (1)
쩝쩝, 후루룩.
"거참, 르웰 누님이 만든 도시락이 아주 일품이구만."
몬스터의 사체로 얼룩진 미궁 바닥에 철퍽 들어앉은 장두식이 허겁지겁 도시락을 까먹기 시작했고.
"...쩝."
그 모습에 세 빙의자는 입맛을 다셨다.
'뭔 냄새가 저렇게 좋냐.'
코를 간지럽히는 육즙 가득한 고기의 향기.
그 아래로는 갓 지은 쌀밥과 달콤짭짤한 소스가 버무려진, 스테이크 덮밥이 장두식의 식사였다.
온도를 유지해 주는 고급 아공간 주머니에 보관해서 모락모락 김까지 피어나고 있었으니.
'쌀이라니....'
한국인 둘과 일본인 하나로 이뤄진 빙의자들의 눈이 돌아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시간만큼은 세 빙의자가 일치단결하여 장두식을 보며 군침을 흘려 댔으니까.
듣기로는 자비로운 사제님께서 빙의자 셋의 몫까지 도시락을 챙겨 주셨다는데.
'개새끼.'
장두식은 세 빙의자에게 맛대가리 없는 마력 동결 군용 식량을 내밀었다.
제국군이 원정을 떠날 때나 먹는다는 맛을 철저하게 배제한 채 영양만을 챙긴 식량으로.
"그, 저, 저희도 도시락을 먹으면 안 됩니까!"
니시다 료가 인내력을 상실할 만큼 맛이 끔찍했다.
'저 새끼는 깡이 좋은 건지....'
몽둥이 찜질을 당하고서도 저런 용기를 보이는 니시다 료를 보며, 박창호는 이루 말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그렇게 맞고도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뭐랄까?
이제 멍청함을 넘어서 대단함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으니까.
빠악-!
"나도 그러고 싶은데, 형님이 네놈들은 도시락에 손도 못 대게 하라 하셨다."
나랏님 없는 곳에서는 황제 흉도 본다던데.
저 장두식은 철저하게 에릭에 대한 충의를 지켰다.
말을 전하는 것조차 존대를 잊지 않는 맹목적인 믿음.
그 광신적인 장두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풍호가 가녀린 팔을 들어 올렸다.
"쩝쩝, 넌 또 뭐가 문제냐?"
아름다운 단발머리 미녀 강풍호의 얼굴은 니시다 료 이상으로 퉁퉁 불어 터져 있었다.
'또 뭔 개소리를 하려고....'
여자라서 멀찍이서 볼일을 보겠다며 체면치레를 하던 강풍호가 몬스터에게 산 채로 잡아먹힐 뻔 한 게 불과 한 시간 전이었기에.
유일하게 제 모습을 유지한 박창호는 앞으로 이어질 매타작을 대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본질이 남자여도 가녀린 여자가 얻어맞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여자가 돼서 좋은 건 알겠는데, 한 번만 더 볼일 보겠답시고 몬스터룸을 건드렸다가는 뒈질 줄 알아라."
거참, 모험가들만 해도 성별을 따지지 않고 가시거리 내에서 모든 걸 해결하면서 안전을 챙기는 판국에.
좁밥 빙의자 따리들이 어쩌고저쩌고.
장두식의 잔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저 깡패 놈은 매타작만 잘하는 게 아니라, 잔소리 실력도 아주 뛰어났다.
'풍호야, 니시다야. 제발 입 좀 닥쳐 줘라-.'
박창호가 마음 속으로 기도하고 있자니.
"모험가들도 다 도망갔는데, 두식 오빠도 우리를 버리고 혼자서 버티는 게 더 낫지 않나요?"
예상과는 전혀 다른 질문이 들려왔다.
'저런 진지한 질문을 한다고?'
처음이었다.
미궁이 폐쇄되고 몬스터에게 쫓겨다닌지도 벌써 십여 일째.
강풍호의 입에서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건설적인 대화가 시작된 것이 아닌가?
"뭐?"
그 이상 현상에 장두식이 화들짝 놀라 도시락 통을 놓칠 정도였다.
그런데 어째 개소리를 하던 때보다 장두식의 모습이 더욱 화가 나 보였다.
'왜, 왜 더 화가 난 거지?'
장두식은 벽에 세워 둔 몽둥이를 들고 강풍호한테 다가갔다.
장두식의 반짝거리는 반삭 머리 아래로 두피가 잔뜩 일그러졌다.
'젠장, 단체 체벌을 받겠네.'
니시다 료가 도망쳤을 때만큼 분노한 장두식의 모습.
박창호는 두려움에 떨었다.
'딱히 화날 말은 아닌....'
그러면서도 이번만큼은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강풍호가 맞을 만한 말을 많이 하긴 했어도, 이번 건 좀 아니지 않나?
솔직히 지금 미궁의 상황을 보면 그랬다.
'고위 모험가들은 죄다 위로 도망쳤으니까....'
미궁이 잠기고 하루가 지난 뒤부터 끔찍한 지옥도가 펼쳐졌다.
모든 몬스터가 생명의 기척을 찾아 돌아다녔고, 보스룸에 잠들어 있을 계층주가 스스로 보스룸을 나와 앞장서서 인간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제국군은 계층주를 상대한다. 다른 생존자를 챙길 여력은 없다!"
미궁에 파견된 제국군은 국가 수호의 의무를 위해 가장 위험한 적을 붙들어 놓으러 떠났다.
'하급 모험가는 벌써 다 죽었겠지. 제국군은 계층주를 사냥하느라 여유가 없고.'
무리를 이룰 수 없는 상황에서는 7서클 마도사인 장두식이 홀로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 더욱 유리할 터였다.
아니, 장두식 정도의 마법사라면 제국군에 합류해 계층주를 상대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테지.
'그런데도 우릴 왜 챙겨 주는 거지?'
빙의자들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건데, 사실 이대로 가다가는 넷 다 개죽음당할 것이 자명해 보였으니까.
'아무리 축성된 7서클 마도사 장두식이어도 너무 무리수가 아닌가?'
몬스터 웨이브는 계속 몰려오고.
생존자가 줄어감에 따라 장두식 일행이 상대하는 적은 점점 늘어만 갔다.
본래 하루에 한 번씩 몬스터가 리셋되는 미궁인데, 대격변 패치 이후로는 시간 단위로 리셋이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
"에릭 형님은 아우를 버리지 않으신다. 그리고 형님은 네놈들을 다 잘 살려서 데려 나오라 하셨다."
그런 상황에 장두식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온 것이니....
'거칠어서 그렇지.'
장두식이 대단히 의리 있는 사내라는 건 익히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박창호는 괜스레 진한 감동을 느꼈다.
'모험가 길드로 묶인 놈들도 아랫사람을 죄다 버려 대는 판국에-.'
계층 이동이 불가능한 저층 모험가들은 버려졌다.
장두식은 계층주 공략 경험이 없어 5계층 위로 도망가는 건 불가능했지만, 자력으로 생존을 도모할 정도의 무력은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들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니.
"...시키는 건 뭐든지 다 따르겠습니다."
박창호의 마음속에 충심 비슷한 감정이 피어났다.
그 감격에 겨운 말에 장두식이 답하기를.
"아무튼 우리는 에릭 형님이 오실 때까지 최대한 버틴다. 거, 뭐냐. 그래도 도시락은 안 되니까 그런 줄 알아라."
―Ep. 13 장두식 구출 작전
공작과 에릭은 제국 정세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았다.
아직까지 미궁에서 돌아오는 사람이 없다거나, 북부에서 언데드 사태가 터졌다거나.
수도에서 계층주가 튀어나왔다는 얘기들을 나누었다.
"그... 르웰 사제님의 교회가 습격받은 셈인데 걱정되지는 않으신지요?"
"훌륭한 번견을 세워 뒀으니 괜찮다."
대화는 에릭이 공작의 정보를 듣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에릭은 이에 화답하듯이 자신이 겪은 일들을 알려 주었고.
"...그러니까 세계수의 주인이 되셨고 그래서 엘프들이 성자 에릭님을 따르게 되었다는 말 맞으십니까?"
공작은 그 작은 실눈이 평범한 크기로 변할 만큼 크게 놀랐다.
"뭐, 요약하자면 그렇게 되겠군."
스스로 겪은 일이었음에도, 말로 뱉고 보니 말이 안 되는 수준으로 얻은 것들이 많았다.
"게다가 마탑까지 얻었지."
반이긴 하다마는.
반이라도 이 자동화 생산 공장을 얻었다는 것은 대단한 업적이다.
'제국 최대 마도구 생산지.'
마도 연합이라는 이름하에, 전 제국에 독점적으로 온갖 마도구를 공급하는 것이 라핀 마탑의 실체다.
그 대단한 것을 얻은 셈이니, 에릭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지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지위적인 우위까지 고려한다면, 실소유주는 자신이라 봐도 무방할 테지.
"공작, 조만간 대륙 전쟁이 일어날 거네. 당장 생활 마도구의 생산을 중단하고 전쟁 마도구에 모든 투자를 감행해야 한다."
에릭은 마탑에 대한 주권을 행사했다.
반이 자신의 것이니 당연한 권리였으나.
막 지분을 양도한 공작의 입장에서 보자면, 숫제 정신 나간 소리나 다를 게 없었다.
'고작 열다섯 짜리가 대륙 전쟁을 논하는 건가?'
저 말투도 그렇고.
애초에 체구부터가 열다섯이라기에는 좀....
"크흠."
라핀 공작은 지금의 상황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에릭이 대단한 사람인 건 충분히 이해하겠으나.
나이에 걸맞지 않은 언행이라든가, 세계의 이변을 보자마자 대륙 전쟁급의 말을 입에 올린다는 것이....
"왜 대답이 없지?"
하물며, 제국의 공작인 자신을 자연스레 하대하는 것은 어떤가?
'마지 저렇게 태어난 존재 같구나.'
성자 성녀가 괴물 같다는 말은 익히 들어 왔는데, 직접 상대해 보니 더욱이 실감 나는 대목이었다.
단순히 가진 힘만을 논하는 게 아닌.
사고방식이나 행동 원리 같은 것들이 평범한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느낌이었으니까.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공작은 에릭의 독촉이 이어지지 않게끔 최대한 에둘러 자신의 뜻을 알렸다.
"평민들의 생활이 무너질 겁니다. 라핀 마탑에서 생산하는 생활 마도구는 전 제국민의 80%가 사용하기 때문에-."
에릭은 손을 들어 공작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대륙 전쟁이 나면 생활 마도구가 대수겠나?"
"온건파와 마도 연합이 건재하니 폐하께서 독단적으로 전쟁을 치를... 허어."
공작은 문득 지금까지의 에릭의 행적이 떠올랐다.
'전쟁은 무조건 일어나겠구나.'
그래서 대륙 통일 전쟁이 재개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론 후작이 잘려 나갔으니.'
마도 연합의 삼인자가 떨어져 나갔다.
거기다가 엘프를 등에 업은 에릭은 누구의 편이던가?
아스티아 교단에 적을 뒀다지만, 에릭은 엄연히 황제 폐하의 명을 받은 황제의 사람일 터.
'장두식이라는 수하와 황녀 전하 사이에 혼담이 오간다고 그랬지.'
제 마탑의 지분을 반이나 가져가고도 자신의 편이라 볼 수 없는 존재.
'그 모든 것이 예정된 일이었구나.'
허어-.
라핀 공작은 일련의 흐름을 보고서 성자라는 괴물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공작이 생각건대, 에릭은 이 모든 흐름을 예견하고 있었지 않나 싶었다.
'마치 미래를 아는 것 같구나.'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행적이 그러했다.
빙의자 관리국을 맡았더니, 빙의자 수가 수십만으로 불어났다.
황제의 만찬 직후 성자가 되었으며, 같은 날 저녁 그의 수하와 황녀의 혼담이 오갔으니.
'게다가 그가 마탑에 방문한 직후 재앙급 흑마법사가 강림했군.'
이 모든 것이, 철저한 계산하에 이뤄진....
에릭의 금빛 눈동자를 보니, 공작의 등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아론 후작은 함정에 빠진 게 분명하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고.
에릭을 바라보는 라핀 공작의 눈빛이 바뀌었다.
'세월을 무시한다는 게 단순히 힘만을 뜻하는 게 아니었군.'
어린놈이 심계(心計)가 보통이 아니다.
그런 공작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나는 전쟁에 찬성표를 던질 거네."
에릭이 담담히 선언했다.
공작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의견을 피력하기까지 하였으니.
그에 공작은 망설임 없이 미련을 털어 냈다.
"모든 생활 마도구의 생산을 멈추겠습니다."
대세(大勢)를 만들어 내는 자가 있다면,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당연지사.
그게 노회한 귀족의 대처법이다.
* * *
'만족스럽군.'
에릭의 입가에 싱그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라핀 공작이 한껏 몸을 낮춘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단단히 자신을 오해한 듯싶었다.
공작이 생각한 모든 것들은 우연히 때가 맞아서 그렇게 된 것이지만, 에릭은 구태여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 덕에 에릭은 별다른 잡음 없이 자신이 계획한 바를 이루었다.
'공작의 착각이 크게 도움이 됐지.'
에릭은 그런 오해마저 철저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빙의자였기에 가능한 일들이 전부 '성자'의 위업처럼 치부되고 있으니까.
'미리 조심해 두는 게 좋겠지.'
50만 명의 빙의자들 중에는 분명 에릭을 기억하는 자가 존재할 터였다.
작금의 상황들이 맞물리다 보면, 누군가가 에릭을 빙의자라며 트집을 잡더라도 그 의혹을 지워 내기 쉬워질 것이며.
이는 곧 자신의 지위를 보다 견고하게 만들어 줄 성벽이 되어 줄 거였다.
'10억 골드 확보, 마탑에서 전쟁 물자 생산, 엘프군 차출.'
그런 안전책에 더불어 에릭은 목표한 바를 전부 이루었다.
강림한 재앙급 악마를 단독 처치한 보상은 따따블 이상으로 수익을 거두지 않았던가?
'이제 가야겠군.'
에릭은 목적을 이룬 즉시 라핀 마탑을 떠나려 했다.
"벌써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공작은 성큼- 나가는 에릭을 가로막으며, 다급히 그를 불러 세웠으나.
"갈 곳이 많다."
단호한 에릭의 어조에 공작은 그를 붙잡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세에는 대세를 따르라.'
에릭이 참으로 두려웠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르웰 사제의 교회가 습격을 받은 데다가 그의 수하가 미궁에 갇혔다고 그랬던가?'
교회의 위기는 끝이 났다고 들었지만, 미궁의 상황은 현재 제국 정보부에서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다.
미궁이 닫혔다.
이 사실은 곧 미궁에 들어간 모든 자들이 나올 수 없다는 의미로.
'쉽게 말해 기한 없는 감금이지.'
최상층이 공략될 때까지 미궁의 탈출구가 열리는 일은 없을 터였다.
과거부터 전해져 온 미궁의 이변에는 생존자가 극히 드물었으니까.
공작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공략은 된다.'
에릭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공작, 금방 돌아올 것이니 쓸데없는 마음 먹지 말도록."
그렇기에 라핀 마탑의 문을 활짝 열며, 공작에게 작별의 말을 고했으니.
쿵-.
문 앞에 묵직한 발자취를 남긴 에릭은 마탑을 에워싸고 있던 엘프군에게 시선을 돌렸고.
"국왕, 엘프군을 이끌고 서쪽에 있는 알만정교회 인사들을 체포해 오게."
엘프군을 꺼낸 본 목적을 내뱉었다.
싸아아아아―
그 즉시 저 멀리서 세계수가 보내온 푸른 바람이 에릭을 배웅했으며, 그 바람은 이내 엘프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안내했다.
'재앙급이 들어온 경로를 샅샅이 뒤져야 한다.'
얻은 것도 많았지만,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도 많았다.
재앙급을 상대하느라 [신념의 고리]를 잃었고, 며칠이라는 시간을 고독한 전투로 보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지독한 고통을 감내하는 경험까지 했으니.
'복수는 백 배로.'
에릭은 자신의 행동 원칙에 맞게 모든 흐름을 정리했다.
"에리카, 저 흑마법사 빙의자들은 전부 황도로 압송해라."
그 뒤 에릭은 가장 큰 죄인, 아론 후작을 바라봤다.
'아론 후작이 모든 책임을 져도 충분하겠군.'
그의 눈빛이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르웰에게 건네준 옷을 떠올리면, 당장이라도 놈을 손수 처벌하고 싶었지만....
'이런 재앙 속에는 책임질 놈들이 필요한 법이지.'
에릭은 대의를 위해 참아 냈다.
자연재해여도 수많은 국민이 피해를 본 상황이다.
분명 황제는 이를 책임질 자들을 만들어 낼 거였다.
"아론 후작도 흑마법사랑 함께 이송하도록."
"신의 지고한 임무를 목숨 걸고-"
광신적인 에리카의 답변이 시작되자, 에릭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이의 기적]을 시전했다.
키잉-.
허공을 가르고 떠오른 금빛 십자가.
에릭은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우선적으로 확인할 것은 분명했다.
'르웰 사제님께 별일은 없겠지?'
57화 장두식 구출 작전 (2)
제국 수도에서 가장 핫한 인물을 고르라고 한다면, 명실상부 한 명의 여인이 꼽힐 것이다.
아스티아 교단의 사제요, 지고한 미모를 지닌.
"아아-! 르웰 사제님!"
"여, 여기를 봐 주세요!"
그리고 제국 신민들의 우상이 된.
'아! 이런 인기라니-.'
르웰은 자신을 찬양하는 목소리에 아찔한 쾌감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이에 분노하게 될 에릭을 떠올리며, 묘한 기대감을 품었으니.
"여러분-! 황도군이 몬스터를 전부 해치웠답니다!"
르웰은 에릭의 분노는 무시하고 있는 그대로 인기를 받아들였다.
본디, 미모의 사제로 유명했던 그녀였으나, 지금까지 르웰은 예배 시간에만 얼굴을 보여 왔다.
그런 그녀가 수도의 시민들을 교회에 수용해 지켜 준 상황이 아니던가?
열광하는 제국민들을 향해 르웰이 손을 흔들자.
"와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에 교회가 들썩거렸다.
'황도군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군.'
황도를 지킨다는 황도군이 미궁에서 튀어나온 계층주를 전부 해치웠다.
황도군(皇都軍)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들은 전부 진은(眞銀)으로 만들어진 갑주를 입었고 달빛을 머금은 검을 휘둘렀다.
그 위용이 아주 대단하였으나.
"르웰 사제님 만세-!!!"
교회에 들어선 시민들은 모두가 르웰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에 황도군 장군이 '허어-!' 허탈하게 웃음을 내질렀다.
'성자의 여인인가?'
에릭이 그토록 끼고 도는 교회와 고아원은 제국의 핵심 인사들에게도 익히 알려졌고.
아론 후작의 사태로, 에릭이 유독 아낀다는 르웰의 이름은 더욱 유명해졌다.
"세월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외모로군."
소드마스터를 넘어선, 격을 쌓은 강자가 그리 말하며 잭슨을 바라봤는데....
'미치겠네.'
잭슨은 흉터를 마구 일그러트리며, 황도군 장군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소드마스터 잭슨은 눈앞의 사내에게서 아무런 힘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말인즉슨.
'헤아릴 수 없는 강자가-.'
이름 모를 장군이 상식을 초월한 강자라는 의미였다.
소드마스터는 헤아릴 수 있기에, 이름이 존재한다.
하나, 격을 쌓은 지고한 강자들은 헤아릴 수 없으니, 딱히 부르는 명칭이 없었다.
'뭐, 개별적인 명칭은 존재하지만.'
요컨대.
황제니, 북부 대공이니, 교황이니, 성자니.
혹은 황도군의 장군이라거나.
그런 무시무시한 이름들을 떠올리며 잭슨이 묵묵무답을 유지하자.
"재미없는 사내군."
황도군 장군은 그대로 르웰의 교회를 벗어났다.
삐이이이이이.
-제국 신민들은 안전하다. 이를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보장하니, 모두 생업으로 돌아가 삶을 이어 나가도 좋다.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수도 전체에 울려 퍼지는 황실 마탑의 확성 마법이 수도에 닥친 위기의 종결을 알렸다.
치안청은 피난 온 신민들을 인도하고, 근위대는 수도의 빈민가부터 황궁까지 이어지는 구역을 점검했으며.
"당분간 미궁 입구는 황도군이 수비한다!"
미궁의 입구는 은빛 갑주를 입은 황도군이 틀어막았다.
"아아아-!!! 사제님!"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르웰의 교회에서 목숨을 구한 신도들은 그 감사함에 보답하고자 매일매일 교회를 찾아왔다.
'큰일이군.'
한데, 잭슨이 보기에 저놈들은 태반이 르웰 사제님의 미모를 보고자 방문하는 것이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찬양.
식지 않는 르웰의 인기를 보며 잭슨의 근심이 깊어만 갔다.
[제국일보]
[제국 남부에 일어난 전이 불가 현상 해결. 그 원인은 재앙급 흑마법사?]
헌금함이 가득 차고.
새로운 헌금함이 반쯤 찼을 무렵, 희소식이 들려왔다.
연락이 두절되었던 제국 남부의 상황이 전달되었다.
"그래서 그 재앙급 흑마법사가 에릭한테 죽었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사제님."
재앙급 흑마법사의 강림.
이를 에릭이 해결했다는 소식이었다.
"흥흥, 우리 성자님이 오겠네."
르웰은 한껏 기분을 내며,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을 꺼내 입었다.
'젠장....'
그 모습을 본 잭슨은 차라리 교회 지하실에 내려가 몸이라도 숨기려고 하였지만.
키잉-!
그의 예상보다 한발 빠르게 교회 앞으로 금빛 십자가가 생겨났고.
쿵.
묵직한 발걸음과 함께 [전이의 기적]을 뚫고 에릭의 거대한 신형이 드러났다.
"에릭-!"
"사제님-!"
두 사람이 서로를 반기며 한껏 기쁨에 겨워 있던 순간.
"와아아아아-!!! 르웰 사제님!"
교회의 담장 너머로 수많은 신도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그에 에릭이 인상을 잔뜩 구긴 채 기둥 옆에 서 있던 잭슨을 노려봤다.
그리고 묻기를.
"잭슨, 내가 신신당부했던 것 같은데?"
* * *
적당한 타이밍에 르웰이 중재를 해 준 덕분에 잭슨의 위기는 끝이 났다.
"뭐, 생각해 보니까 이만하면 다행인가 싶군요."
생각 외로 에릭의 납득 또한 빨랐다.
'에리카가 그 모양인데....'
제 전투를 본 에리카의 반응으로 보아, 제국 신민들이 르웰의 비호를 받고 저런 상태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찬양받을 법한 미모의 소유자.
하물며, 교회의 신성 방어 체계는 르웰의 기도문에만 반응하게끔 설정되어 있었으니.
'그야말로 사제님이 지켜 준 모습이겠군.'
교회에 담긴 막대한 신성은 에릭의 힘이었으나, 이를 다루는 건 르웰이었다.
그러니 이런 대우는 당연한 거였다.
"...에릭?"
그 모든 것을 에릭이 납득했음에도, 르웰은 무언가 불만이란 듯이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 네가 어떻게...."
에릭은 르웰이 입은 동탄 미시룩을 보며 눈썹이 자꾸 좁혀지는 걸 억지로 참아 내는 중이었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짓궂은 얼굴로 몸을 낮춰 르웰의 귓가에 속삭였다.
"무슨 문제가 있으신지요?"
일부로 무심한 척 반응을 억제했는데, 참는 만큼 내면의 분노는 깊어져 갔다.
'아론 후작 이 새끼.'
지금쯤 에리카가 마탑의 전이 마법진을 이용해 황도로 아론 후작과 빙의자 흑마법사들을 압송해 오고 있겠지.
당장 손수 처벌하고 싶은 죄인들이었지만, 에릭은 대의를 위해 참아냈다.
그들은 공개 재판을 통해 공식적인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기강이 서지.'
이 야만적인 세계에서는 공개재판과 공개처형이 가장 큰 유희거리였으니까.
에릭이 그런 생각에 잠겨 있자니.
"자꾸 표정 관리 하면, 확- 언더붑인지 뭔지 입어 버린다!"
르웰이 허리에 손을 얹으며 선언했다.
그에 에릭의 무표정이 무너졌다.
아니, 언더붑이라고?
'그건 또 어떤 새끼가....'
잔뜩 구겨진 미간.
한껏 올라선 눈썹.
"하아-. 제발 옷 좀."
그리고 시작된 잔소리.
"지구에서 그런 옷차림은 평민층이나 입습니다. 무릇 귀한 신분이나 고위층 인사들은 부르카라든가, 차도르라는 이름의 전신을 가리는 로브를 입는데-."
에릭은 평소와는 다른 방향의 잔소리를 내뱉었다.
신을 모시는 사제가 옷차림을 경건하게 해야 한다거나, 혹은 유교적인 관점을 들이대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세계가 다른 탓이다.
그래서 노선을 틀어 봤다.
"진짜 명품은 전신을 가리는 법이지요."
디자인적으로 상당히 발전한.
그리고 르웰의 취향인 빙의자들의 복식을 조금 뒤틀어 본 것인데.
"-그래서 있는 자들은 전부 부르카니 히잡이니 이런 걸 두르고 다닙니다."
장황한 설명을 마친 에릭이 팔짱을 끼며 르웰을 바라봤으나.
'...어딜 저런 뻔한 거짓말을.'
르웰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애초에 그녀는 빙의자들의 의복과 문화를 아주 잘 알았다.
심지어 르웰의 첫 명품은 고아원의 1기 졸업생이 만들어 준 샤닐백이었다.
"샤닐, 에루미스, 구치, 드레스반노트 등등. 에릭, 너랑 살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는지 아니? 애초에 방금 말한 차도르니 뭐니 하는 복식은 이교도들이 입는 거라며!"
"...하아."
에릭은 관자놀이를 질끈 눌렀다.
십 년 넘게 붙어 지내면서 르웰에게 너무 많은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조금 후회가 되는군.'
어릴 적에는 이런 소통을 할 상대가 필요했고, 믿을 수 있는 르웰과 리페로제에게 지구에서의 얘기를 많이 해 줬었다.
한데,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니 아주 심란했다.
장두식을 구하러 미궁에 들어가면, 앞으로 얼마나 그 안에 있게 될지 모르는데....
"걱정 마! 평소에는 시스루 사제복만 입으니까."
그런 에릭의 걱정을 알아챈 르웰은 제 나름의 타협점을 제시했다.
"그 깡-. 아니, 두식이도 에릭 네 사람이잖아? 구하러 가야지."
"...배려 감사합니다."
에릭은 시스루 사제복에 타협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마지못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내가 뭐라고 옷으로 지적하냐 하면 할 말이 없겠지만....'
그런데도 받아 주고 은근하게 즐기는 르웰이었다.
이는 두 사람이 가족이라는 의미다.
에릭은 돌아올 곳을 두 눈에 담으며 예배실을 빠져나갔다.
"다들 주목-!"
에릭의 다음 행선지는 고아원.
어린 아이들이 계층주의 습격을 받은 셈이니, 그들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겠지.
우웅-!
"와 씨, 이거 봐. 반짝거라는 게 두식 아저씨 머리통 같다."
아이들은 고아원에 마련된 마도 연무장에서 전쟁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후웅-!
"아.... 괜히 오러 배워 가지고. 내 건 푸른색이라 멋이 없어."
윙윙-! 웅웅-!
아이들은 두 개의 팀으로 나뉘어 금빛 신성과 푸른빛 오러를 뽑아 들며 서로의 검을 겨누었는데.
화르륵-.
"작열!"
뒤에서 원거리 딜러들이 각기 맡은 팀을 보조하는 방식이었다.
에릭이 알려 준 가벼운 전쟁놀이였다.
쿠웅-.
"다들 주모옥!"
에릭은 놀이에 정신이 팔린 아이들을 불러 세웠다.
"어! 에릭 형이다."
"재앙급 흑마법사랑 싸웠다면서! 어땠어?"
"진짜 막 엄청 세?"
에릭이 연무장 위에 우뚝- 서서 아이들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허접이다. 너희도 자라기만 하면 손쉽게 이길 수 있을 테지."
에릭은 아이들의 '기준'을 상당히 높게 만들어 키웠다.
무릇 교육에 있어 꿈과 포부를 크게 만들어 주는 것이 교육자로서의 일이겠지.
그런데 어째 꿈은 키워 주는데 애들은 그대로인 모습이었다.
'애들이 안 자라는 건가?'
자신은 열 살쯤부터 달에 10cm씩 자랐던 것 같은데, 고아원 아이들은 키가 자라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 달 동안 10cm도 안 크는 게 말이 되나?'
식단을 고단백, 고칼슘으로 바꿔야겠군.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에릭은 아이들에게 자신이 없는 동안 완수해야 할 숙제를 덤덤히 읊조렸고.
"...두, 두식 아저씨가 두 자릿수 곱셈 몰라도 마법사 할 수 있댔는데."
"아스티아 교단 검술은 성직자만 쓸 수 있다던데! 제국 검술에 그거까지 하면 잠은 언제 자!"
수학은 두 자릿수 곱셈까지.
검술은 아스티아식 경검술.
마법은 4서클 마법 아이스 필드.
신성력은 교회 전이 좌표를 암기해 전이의 기적을 사물에 구현하는 것.
"-각자 잘하는 걸 위주로 숙제를 내 줬으니, 꼭 다 해 두도록."
지금의 아이들은 르웰 고아원의 2기생들이다.
"너, 너무 많은...."
반장 엘리제가 손을 들며 항명을 하였으나.
"1기 때, 내 동기들은 너희들의 배 이상 되는 숙제들을 매일매일 해야 했지."
에릭은 냉정하게 이를 저지했다.
그 대신, 조금 껄끄러운 존재들을 언급했다.
"당분간 너희의 선배, 1기 졸업생들이 나 대신 수업을 맡을 거다."
지금의 아이들이 아주 어릴 적에 본 적 있던, 에릭의 고아원 동기들.
'분쟁 지대에서 만난 인연.'
조금 복잡한 사이들이었기에.
에릭의 승모근이 들썩거렸다.
* * *
"신성한 공간에서 소란은 자제해 주시죠."
거대한 성기사가 교회 정문을 열고 나와서는 몰려든 신도들에게 위압적인 말을 내뱉었고.
평소라면 수려한 외모와 압도적인 체구에 감탄했을 사람들이, 그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지레 겁을 먹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간만에 조용해진 교회를 바라보며, 잭슨이 에릭의 오른쪽에 다가섰다.
"그, 보스. 진짜로 동기분들을 부릅니까?"
"...내키지는 않는다만, 미궁에서 언제 나올지를 모르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지."
"예, 보스."
잭슨은 우직하게 에릭의 명을 받들었다. 그러고는 몇 마디 보고 사항을 읊었다.
"-보스가 알려 주신 스킬트리가 아주 대단하더군요."
"수호기사에 올방트리가 지키는 데는 최고지."
"제가 소드마스터가 아니었으면, 조금 답답했을 뻔했죠."
"어땠지?"
에릭은 교회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며, 자신이 추천한 스킬트리에 대한 감상을 들었다.
"올방에 스탯 비율로 방어력이 올라가는 스킬이 더해지니까, 계층주 공격에는 별 타격도 없더군요."
"그 정도였나?"
"예, 게다가 건물을 보호 대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게-."
잭슨의 말은 간단했다.
[수호기사]는 방어력 스탯을 중심으로 스킬트리가 짜이는데.
'스킬 레벨 × 방어력 스탯'이라는 곱 비율이기 때문에 올방트리를 탄다면, 수성에서는 비빌 구석이 없을 만큼 사기적인 성능을 보인다.
'보호 대상을 사람으로 하면 효율이 더 좋지.'
에릭은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해서 잭슨의 스킬을 추천해 준 것이다.
시스템의 도움 없이 스스로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잭슨이었기에, 올방이라는 극단적인 스킬트리를 타고도 제 성능을 내보일 수 있는 거였지만.
'게임이었으면 그냥 예능이었지.'
에릭이 짠 예능 스킬트리도 현실에서 쓰면 사기였다.
"-크으, 보스. 더 열심히 보필하겠습니다."
잭슨 또한 에릭처럼 이 세계를 현실로 받아들인 자였지만, 그와 별개로 빙의자에게 있어 게이머적인 감성은 숨길 수 없는 본능과도 같았다.
에릭이 그랬듯이, 아니 대다수의 빙의자들이 그렇겠지.
"그래, 궁극기 타이밍만 잘 재면 황제의 일격에도 죽지는 않을 거다."
좀 전까지 잔뜩 일그러졌던 에릭의 얼굴이 산뜻하게 밝아졌다.
그 이유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하나는 교회 주변에 숨어든 불순분자들이 모두 도망갔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순찰을 도는 동안 잭슨이 제 스킬트리에 아주 큰 만족감을 내보였기 때문이다.
"교회 순찰은 지금의 동선대로 진행하도록."
"예, 보스."
그 밖에 에릭은 몇몇 당부를 더 전했다.
"예! 보스-."
한층 경건해진 잭슨의 답을 끝으로, 에릭은 발걸음을 옮겼다.
"잭슨 뒤는 맡기마."
골드, 엘프, 세계수, 마탑 등등.
이런 것도 에릭이 챙길 것이지만, 르웰과 고아원 아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챙겨야 할 것들이었기에.
'이제 챙길 건 다 챙겼군.'
에릭은 충직한 수하 장두식을 구하러 가기 전 최대한 시간을 내 본 것이다.
이제 할 일은 간단하다.
'두식아, 내가 간다.'
58화 장두식 구출 작전 (3)
"두식 오빠-!"
장두식 일행은 미궁 5계층으로 향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도망쳤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
"-불의 축복!"
미궁 5계층은 이름 모를 고대 도시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필드다.
게임 속에서는 튜토리얼로 불리고, 현실에서는 저층이라는 이름에 묶여 있는 장소로.
5계층은 장두식 일행의 최후의 보루다.
계층주 공략 없이 이동할 수 있는 마지막 층으로, 더 이상 오도 가도 못한다는 의미다.
콰아아아앙-!!!
강풍호의 신호에 맞춰 장두식의 마법이 작렬했다.
투박하고 거대한 벽돌 위로 빙의자의 [스킬]과 현지인의 마법이 뒤섞였다.
강풍호의 [파열]이 장두식의 마법에 반응해 불타는 함정이 만들어졌다.
"후우-. 이제 한숨 돌리겠네요."
땀에 젖은 단발머리를 차분하게 정리하며, 강풍호가 뒤를 바라봤다.
두 남자가 그녀에게서 애써 눈을 돌리고 있었으니.
"왜요?"
화장실 사태 이후로 강풍호는 여느 모험가들처럼 행동했다.
장두식의 몽둥이찜질 덕분에 그녀의 행동이 교정된 것이다.
"지금까진 남자 취급하더니 옷차림 좀 바꿨다고 이러기예요?"
그 말인즉슨.
모든 걸 일행들 옆에 붙어 해결했다는 의미로.
옷을 입는 것 또한 그러했다.
지금 그녀가 입은 옷은 모험가들이 주로 입는 '원피스 형태의 일체형 잠옷'이다.
이 세계에는 딱히 속옷이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풍호야, 제발, 그만-."
땀에 젖은 얇은 원피스는 강풍호의 몸매를 부각시켰다.
보는 사람이 민망할 지경.
박창호는 두 손으로 눈을 가렸지만, 니시다 료는 위풍당당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지구에서도 속옷이 등장한 건 백 년도 안 됐다고 들었는데... 어차피 우리도 여기서 살아야 하는... 그러니까 당당하게 받아들이자고!"
온갖 서브컬처에 통달한 일본인 오타쿠답게 니시다 료에게는 잡학다식한 정보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지구의 역사를 들먹이면서 당당하게 바라보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박창호 역시 손가락 사이로 눈을 뜨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니시다 료에 대해 어딘지 모를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에릭이 그런 쪽으로 깐깐한 느낌이었지? 어쩌면 저 깡패도-.'
박창호는 그런 심경을 토로하듯이 장두식을 바라봤으나.
"거, 에릭 형님도 르웰 사제님이 아니라면 옷차림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시니 보든 말든 별 상관은 없을 거다."
장두식은 그의 예상과 다른 말을 내뱉었다.
"오빠들, 너무 노골적으로 보지만 마."
뭐, 당사자가 저렇다는데.
박창호가 불편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잠깐의 이슈가 끝나고 네 사람은 본론에 들어갔다.
"입구를 불바다로 만들어 놔서, 이제 잠을 좀 잘 수 있겠네요."
그들은 고대 건축물 내부에 은신처를 만들었다.
미친 듯이 몬스터가 밀려오는 와중에도 잠잘 곳은 필요하지 않나?
그래서 입구를 마법과 스킬로 틀어막은 채, 최소한의 수면 공간을 확보한 것이다.
"난 먼저 잔다. 크어어-."
눕자마자 잠든 장두식을 뒤로하고 세 빙의자는 잠시 잡담을 나누었다.
"이거 사람이 사는 집 맞지?"
"그럴걸? 미궁이 과거를 재현했다는 썰이 있으니까. 그러면 고대인들은 대체 키가 얼마나 큰 거냐?"
"야, 피라미드 생각해 보면, 평범한 사람들 갈아 넣어서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마법이니 오러니 있는데, 저만한 사람도 있지 않겠어? 그 에릭 국장이 아직 성장기라면, 5미터까지 커질지도 모르잖아."
"미친. 에릭 오빠가 5미터? 아무리 잘생겼어도 그건 좀...."
평균 신장 5미터는 되는 사람들이 살 만큼 커다란 집에서 세 빙의자의 토론이 이어졌고.
"그, 그래도 열다섯이면 더 크지 않나?"
2미터가 훌쩍 넘는 에릭의 존재는 그들로 하여금 이 세계에는 5미터짜리 사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합리적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불침번은 누가 설레?"
짧은 잡담이 끝났으니.
이제 남은 건 순서대로 숙면을 취해 주는 것뿐인데-.
"젠장. 잠은 다 잤다."
박창호의 [제육감]이 발동했다.
미궁에 갇힌 뒤로 100%에 적중률을 보였던 그의 특성은 일행들로 하여금 절대적인 믿음을 얻어 냈다.
"...그, 두식 형님은 누가 깨우냐."
"거, 일어나 있다."
박창호의 특성은 장두식도 믿을 만큼 절대적인 적중률을 보였다.
니시다 료의 [즉사 감지]는 에릭 한정으로만 유효했는지, 미궁에서 딱히 큰 도움이 되지 않았으나-.
"다, 당장 나가야-!!!"
이번만큼은 달랐다.
평소와 달리 육수를 흘려 가며 몸을 덜덜 떠는 니시다 료의 모습에 모두의 발걸음이 다급해졌다.
네 사람이 황급히 건물 창문으로 탈출한 직후.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건물이 무너져 버렸고 무너진 건물 뒤로 이질적인 무언가가 나타났다.
"...저, 저거 계층주 아닌가요?"
게임 속에서 익히 보았던.
5계층의 계층주, 놀 킹이 장두식의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씹.... 저거 키가 5미터는 돼 보이는-."
놀 킹은 구부정한 개를 닮은 이족 보행 하는 몬스터로.
모니터 속에서는 평범한 사람 크기에 튜토리얼의 허접 보스라는 멸칭을 지닌 나약한 존재였다.
그런데.
"무슨 최종 보스 같은...."
"계층주가 저렇게 몰려다닌다고?"
그 면면들이 아주 흉악했다.
컹컹――!!!
5미터 정도의 크기를 지닌 놀 킹은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침을 질질 흘려 대며, 네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봤고.
핏발 선 눈동자의 동공은 흐리멍텅하여 더욱 두려운 느낌이 들었으나.
"거, 뭐. 개새끼가 개떼처럼 몰려온다고 쫄 거 있냐?"
장두식은 여느 때와 똑같은 어조로 몽둥이를 붙들 뿐이었다.
하나, 그 역시 속으로는 이 상황이 평범치 않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고 있었으니.
'제국군이.... 거, 뭐. 형님이 미궁 저층의 군인들보고 물로켓이라 할 때 알아보긴 했수다.'
계층주의 필드 이동은 곧 계층주를 도맡은 제국군의 패배를 의미했다.
* * *
'두식이가 뒈진 건 아니겠지?'
에릭은 미궁 2계층의 고블린 숲을 거닐었다.
나름 7서클 마법사인 장두식을 믿고 있긴 했으나, 외운 마법밖에 못 써서 범용성이 떨어지는 장두식인지라 걱정 아닌 걱정이 든 것인데....
아니, 걱정할 만큼 미궁 상황이 심각한 수준이긴 했다.
"서, 성자님이시다!"
에릭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2계층의 계층주를 죽이러 향했다.
고블린 숲의 계층주는 숲속 동굴에서 나타나는데, 그 앞에서 제국군의 군영(軍營)을 마주쳤다.
'군인들이 고블린에 처발려?'
부상자가 태반이었고, 기사라는 놈들은 검과 갑옷이 너덜너덜한 상황이었으니.
"-광역 치유. 설명을 부탁하지."
에릭은 그들을 치유해 주고 미궁 내부의 상황 브리핑을 요구했다.
제국의 군인들답게, 설명은 핵심만 요약한 채로 간결하고 정확하게 진행되었으나.
"...그러니까, 시간 단위로 계층주가 리셋이 되고 있는데 하루가 지날수록 나타나는 계층주의 수가 늘어난다는 말 맞나?"
에릭은 들은 말을 확인하기 위해 구태여 한 번 더 되물을 필요가 있었다.
'이게 말이 되나?'
미궁의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으니까.
"예."
그렇게 들려온 기사의 답변.
에릭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긴, 그러니 이 꼴들이겠지.'
미궁 2계층의 계층주는 고블린 킹과 퀸이다.
그렇게 강력한 존재는 아닌지라, 기사 전력이 있는 제국의 군대로 충분히 상대할 법했다.
그런데도 상처투성이에 전사자까지 속출한 제국군을 보며 에릭은 의문을 느낀 거고.
막상 설명을 듣고 보니, 미궁의 상황은 에릭의 예상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다.
'이 제국에서 뇌물로 기사가 됐을 리는 없으니까.'
에릭이 겪은 바.
황제는 성군이라 부를 법한 존재였다.
그러니 병사의 질이 낮아서라기보다는 미궁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가 더 옳은 표현이었다.
'한 달쯤 지났으니, 시간당 30쌍의 계층주가 나타난다는 말인가?'
24시간이면....
게다가 계층주가 두 마리니까.
제국군이 하루에 1,440마리의 고블린 킹과 퀸을 죽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몬스터 웨이브도 몰려왔겠군."
게다가 2계층에 생존자라고는 여기 모인 제국군과 일부 모험가가 전부였다.
계층주 등장에 따른 몬스터 웨이브도 그들끼리 처리했겠지.
오러를 다루는 기사에 마법사가 혼재된 제국군이라도 사망자에 부상자가 속출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50레벨에 준하는 보스에 30렙짜리 고블린.'
현실의 난이도를 고려해 보면, 오히려 이만큼 살아남은 게 대단할 지경이다.
포션은 소모품이고 체력은 영원하지 않으니까.
"미안하지만, 나는 위로 가야 한다. 같이 갈 생각이 있나?"
제국군은 에릭에게 함께 버티자는 제안을 건넸으나, 에릭은 단호하게 이를 거절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그, 수하분께서 살아 있다고 믿으시는-."
"두식이는 고작 이 정도로 죽지 않는다."
"죄, 죄송합니다."
미궁 2계층, 미궁관리군의 기사 칼이 고개를 조아렸다.
에릭의 눈빛이 어딘가 살벌했기 때문.
"살 생각을 해야 산다."
에릭은 모두를 바라보며, 덤덤히 그리 말했고.
당연한 듯이 읊조리는 그 한마디 말에 제국군의 마음 속에 불씨가 되살아났다.
콰르르릉-!!!
얼마 지나지 않아 고블린 숲이 요동치며, 몬스터의 리젠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계층주 역시 마찬가지.
2계층의 계층주가 나타나는 동굴은 [파괴 불가]인 지형이었는데, 그 벽면에서 미끈한 막이 생겨나더니 거대한 고블린의 형체로 부풀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륵.
장장 5미터에 달하는 고블린 킹과 퀸이 그 정체였다.
"대형 준비이-!!!"
미궁을 지키는 제국의 미궁수비병단은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잡으려 들었으나-.
"몬스터 웨이브만 부탁하지."
에릭은 단호하게 그들을 막아섰다.
"성자님, 계층주가 30쌍이 나타나는 건-."
"잘 알지. 그러니까 그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말이다."
2계층을 관리하는 미궁군 4군단의 3중대장은 에릭의 위용을 떠올리며, 군대를 재편했다.
'폐하의 영광을 받은 분.'
그리고 아스티아 교단의 성자.
이름값이 톡톡했다.
"전원 주모옥! 우리는 몬스터 웨이브를 방어한다-!!!"
제국군은 계층주의 동굴 앞에 거대한 방진을 만들었다.
에릭이 무너진다면, 그대로 마법병단이 계층주의 습격을 받을 만큼 극단적인 진영이었다.
"중대장님, 괜찮겠습니까?"
"폐하의 영광을 믿어 보지."
소대장들의 걱정에도 중대장은 이런 극단적인 진형을 고수했다.
그 이유는 뒤를 걱정하지 않는 배치가 섬멸에 가장 좋은 진형이기 때문.
계층주만 없이 몬스터 웨이브만 막는다면, 제국군의 입장에서 어려울 것도 없었으니까.
"수, 숲이 움직입니다-!"
때마침 척후병의 보고가 들어왔다.
그의 말대로 저 멀리서부터 고블린 숲의 수풀들이 들썩거리기 시작했으니.
끼예에에에에엑――!!!
사방을 뒤흔드는 고블린들의 괴성이 시작되고 초록색 소악마들의 행렬이 제국군을 향해 돌진했다.
마치 숲 전체가 움직이는 느낌.
"최대한 체력을 보존하라-! 우리는 이번 전투가 끝나는 즉시 3계층으로 올라간다!"
고작 고블린이다.
하나, 미궁의 고블린이다.
계층주는 에릭이 맡아 준다고 하지만, 일반 고블린도 크기가 2미터에 달한다.
"으으, 징그러운 놈들."
그렇다고 기사나 마법병단이 애를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이미 한시도 쉬지 않고 수십 일을 싸운 탓에 육체는 한계까지 몰린 상황이다.
게다가 정신적 피로감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제국군의 전장이 시작되었다.
'흠.'
반면, 동굴 속에 홀로 남은 에릭은 큰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5미터짜리 고블린이 60마리가 되니까....'
계층주 단독 공략에 따른 보상이 늘어난 보스의 수로 적용될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뿐.
위협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느려 터졌군.'
다만, 조금 답답함을 느꼈다.
몬스터 웨이브보다 계층주가 늘어나는 속도가 더뎠으니까.
60마리를 한 번에 죽여야 보상이 더욱 커지지 않을까 싶어서, 에릭은 모든 계층주가 리젠되는 걸 기다리는 중이다.
챙-퍼엉!
"죽여!!!"
"2열 1열 교대!"
동굴 입구로 들려오는 제국군의 고함을 듣고 있자니, 마침내 눈앞에 모든 계층주가 리젠되었다.
'끔찍하군.'
그 광경에 에릭의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녹색 피부에서 노란 진액을 흘려 대는 5미터짜리 고블린이 60마리나 되는 상황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취와 역겨운 몰골에 신경이 곤두서는 것도 당연했다.
그에 에릭은 신성력을 일으켰다.
* * *
"이 지긋지긋한 고블린 놈들!"
수백 수천 수만에 달하는 고블린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기사와 병사들은 검을 휘둘렀고 마법사들은 뒤에서 원거리 공격을 퍼부었다.
그런데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그, 동굴이 너무 조용하지 않습니까?"
끝이 보이지 않을 뿐이지, 2미터짜리 고블린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중대장과 소대장 간에 회의가 진행되었다.
스걱.
"아무리 성자님이셔도 한 번에 소탕하는 건 무리지 않을까요?"
물론, 회의는 전투를 하는 와중에 이뤄졌다.
"음. 소문만 들었을 때는 나이 때문에 실감이 안 났는데.... 저 덩치를 보아하니 일거 소탕도 가능하시지 않을까 싶더군."
소대장의 의문에 중대장은 있는 그대로 느낀 바를 읊조렸고.
그와 동시에.
쿠웅―――――――!!!
보스룸 안에서 거대한 굉음이 들려왔다.
단순 소리만이 아니었다.
대지를 흔드는 거대한 울림.
"따, 땅울림?"
마법사들은 혹시라도 어스퀘이크 마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호들갑을 떨었으나.
몇 초 뒤.
싸아아아아아―.
동굴 안에서 뿜어지는 선명한 금빛 기둥에 안도감을 품어 낼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아아...."
강렬한 신성의 빛에 모두가 정신을 빼앗겼다.
"중대장님 말씀이 맞군요."
그야 말로 신의 힘이리라.
기사도 병사도 마법사도.
저마다 들고 있던 창과 검, 지팡이를 내려놓고 동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의 군인이 신에게 경의를 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어둠을 몰아내는 신성의 빛이라니...."
"우리는 돌아갈 수 있는 건가?"
누구라도 이 힘을 보았다면, 절로 고개를 조아렸으리라.
모든 병사들은 싸움을 멈췄다.
아니, 싸울 필요가 없어졌다.
굉음과 함께 동굴을 뚫고 나온 신성의 빛은 고블린 숲 전체로 퍼져 나갔고.
끼예에에에에엑-!!!
사방에서는 신성에 타들어 가는 몬스터의 괴성이 가득했다.
"...2계층이라도 그렇지, 계층주 60마리를 한 번에 죽이고 몬스터 웨이브까지 지워 버린다는 게 말이 되는 겁니까?"
연신 불만을 토로하던 소대장이 입을 쩍- 벌린 채 허탈한 듯이 물었다.
대단하고 압도적이며 가히 장엄하다 할 수 있는 힘이었기에.
'보고도 믿기지 않나 보군.'
그런 마음에 공감하는 중대장은 덤덤하게 십 년 전 전쟁에서 보았던 장군들의 위용을 떠올렸으니.
그가 말하기를.
"보고도 믿기 어려운 존재들이 진정한 강자라고 하더군."
59화 장두식 구출 작전 (4)
생존의 위기에 몰린 인간은 상상을 초월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무너진 터널 속에서 식량과 식수 부족에 시달리며 수십 일을 살아남은 사람이라든가.
건물 붕괴 현장에서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톤 단위 무게의 벽을 지지하며 어린 자식을 지켜 낸 어머니라든가.
"거, 한계까지 쥐어짜라! 그러면 없는 마력도 생기는 거다!"
그런 기적은 미궁 속에서도 일어났다.
"으어어-!!! 도, 도발-!"
[상태창]에 마력이 0이라고 표기되어 있던 니시다 료의 방패에서 붉은 빛이 피어났다.
[도발] 스킬의 발현.
마나가 없이 스킬이 발동되는 건 빙의자들에게는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나.
"됐다! 실드 차지-! 이, 이건 왜 안 되지?"
지금의 그들은 그런 상식 밖의 일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에릭 형님 말로는 기합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 했다-!!"
"흐아아아-!!! 실드 차지-! 돼, 됐다!"
그만큼 장두식 일행의 상황이 녹록지 않았으니까.
"저기 또 큰 개새끼가 오는 구만. 빙의자들아, 뒤는 맡긴다."
5계층의 생존자가 터무니없이 줄어들었는지, 계층주를 포함해 셀 수 없이 많은 몬스터가 그들을 향해 몰려들었다.
'거, 형님 축성 덕에 버티고 있수다.'
장두식이 홀로 계층주를 사냥하는 동안, 세 빙의자는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 내야 했다.
3미터에 달하며 이족 보행 하는 늑대인간.
통칭 놀이라 불리는 몬스터가 그들의 적인데, 빙의자들 입장에서는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니시다! 상위종은 도발이 안 먹혀! 창호 오빠, 빨리-."
홉고블린과 고블린처럼 개채별 크기 차이가 없는 탓에.
놀의 상위종은 일반 놀 사이에서 몸을 숨기다가 기회를 엿보곤 했다.
"강풍호, 엎드려!"
그렇기에 단독으로 그레이 놀을 상대할 수 있는 박창호가 가장 바빴다.
"흐익-!"
박창호가 강풍호의 등 위로 날아올랐다.
에릭의 추천대로 스킬 초기화 후 새로운 스킬셋을 적용한 덕에, 박창호의 몸은 날아오를 듯이 가벼웠다.
[검기 Max] [찌르기 Max] [연격 Max]
엑티브 스킬 3종 세트의 발동.
박창호의 기다란 레이피어에 검기가 맺히고 찌르기 스킬과 연격의 조합 그리고 펜싱 선수로서의 경험이 조화를 이루어 순식간에 연속기가 이뤄졌다.
푹푹! 푸북-!
강풍호의 앞에서 거대한 늑대인간 여럿이 구멍이 숭숭 뚫린 상태로 쓰러졌다.
그녀는 곧장 활을 들어 차징했던 스킬을 니시다 료의 방향으로 쏘아 냈다.
"충격 흡수-!"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않는 광역기 속에서 니시다 료는 체력을 보존했다.
[고통 내성] 스탯 덕분에 아프지도 않았다.
그저 상태창에 보이는 체력 수치를 보며 포션을 마실 타이밍을 재는 게 전부.
상황이 일단락되고.
"개새끼야."
박창호가 니시다 료를 거칠게 밀쳤다.
"-절대 안 해!"
한참 전부터 그들의 사이에 균열이 생겨 버렸으니.
"너도 에릭 국장님 추천대로, 스킬 다시 찍으라고!"
"...씨발, 그걸 말이라고! 어? 강풍호는 한 대 맞으면 뒈지고 너도 비슷하잖아? 난 절대 싫다."
[고통 내성]이 아니었다면, 니시다 료가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란 매우 힘들었을 거다.
그런 심정을 백분 이해하는 박창호였으나, 지금은 고통을 감내하더라도 효율을 추구해야 하는 순간이다.
박창호는 고심 끝에 니시다를 움직일 말을 꺼내 들었고.
"병신아, 너 진짜 손해 보는 거라고."
"소, 손해?"
그의 예상대로, 니시다 료가 잠시 머뭇거렸다.
곰곰이 생각을 하는 듯했다.
"진짜 에릭 국장님 말대로만 해 봐. 세상이 달라진다."
박창호의 말은 과장 하나 없는 진심이었다.
진짜로 에릭의 추천 스킬셋은 말도 안 되는 성능을 지녔으니까.
"아픔은 참으면 그만이지, 고통 내성 같은 쓰레기 스탯은 당장 내다 버려라."
"백스텝? 병신 같은 이동기는 다 지우고,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공격 스킬에 투자해라."
"기동력이 딸린다고? 그건 올민 스탯과 패시브 스킬 조합으로 해결된다."
1레벨당 얻을 수 있는 스킬 포인트는 2개.
현재 44레벨이 된 박창호는 4개의 스킬을 Max로 만들었고, 남은 하나에 8포인트를 투자했다.
[노련한 전사 Max]
[제국 제식 검술 8]
검술 따위는 마지막에 배워도 그만이라는데, 실로 그랬다.
'몬스터 잡는 데 검술이 제일 쓸모가 없네.'
박창호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자니.
"그, 그래도 아픈 건 좀...."
니시다 료가 완고하게 고개를 뒤흔들었다.
"씹새야. 후우. 야, 날 봐! 허공답보랑 백스텝 없이도 날아다니잖아? 니시다 네가 찍은 성능 구린 4포인트짜리 도발 때문에 우리가 다 죽게 생겼다고!"
박창호는 다시금 그를 설득하려 들었으나.
"거, 병신도 아니고 그런다고 되겠냐?"
주어진 기회는 끝이 났다.
툭툭- 몽둥이로 손바닥을 두드리며 장두식이 다가와서는.
"내가 스킬인지 뭔지 몰라서 간섭을 안 하고 있었는데, 대충 돌아가는 꼴을 알겠구만."
싸늘한 한마디 말을 읊조렸다.
"지금부터 형님이 시킨 대로 바꿀 때까지 팰 거다."
후웅- 빠아악!
무호흡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 * *
"이게 얼마 만에...."
제국군과 살아남은 일부 모험가들은 수십 일 만에 처음으로 평온한 순간을 마주했다.
숲을 가득 메웠던 고블린들이 소멸해 버렸고.
에릭이 뿜어낸 신성의 빛은 모두의 피로를 씻어 주고 상처를 치유해 줬다.
"아아-."
경의와 경탄, 그 어떠한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감동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런 찬양 일색의 순간.
보스룸이 있는 동굴에서 신성을 휘감은 에릭이 나타났고.
"전체 차렷-!"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제국군은 최고의 군례를 준비했으니.
"에릭 국장님께 경례!"
제국군은 일사불란하게 검날을 하늘 높이 올리고 손잡이를 가슴에 붙였다.
두 다리를 붙이며, 허리를 바짝 펴고 하늘 높이 고개를 들었고.
쿠웅- 한 발을 내리찍으면서 동시에 소리치기를.
"충-!"
짧고 굵은 한 글자의 말이었지만, 그만큼 강렬한 감사의 마음이 담긴 군인만의 인사법이었다.
사뭇 장엄하기까지 한 제국군의 군례를 본 에릭은 무심한 표정으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가 묻기를.
"계단은 어디지?"
수많은 사람을 구하고서도, 묵묵히 다음 생존자를 찾고자 하는 에릭의 모습은 제국군들에게 또 한 번 커다란 감동을 안겨 주었다.
"충! 4군단의 3중대장, 메시라고 합니다. 제가 안내를...."
그렇게 중대장이 직접 에릭을 수행하고자 나섰는데, 그는 말끝을 흐리다가 충격적인 한마디 말을 내뱉었고.
"...거, 검은 상자!"
그 말에 이곳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에릭의 왼팔에 들린 상자로 향했다.
'계층주 단독 공략에 따르는 보상.'
소위 전설급 보상을 주는 [흑색 상자]로 알려진 물건이었다.
랜덤 보상이라지만, 흑색에서 나오는 것들은 최소치부터가 궤를 달리했기에 욕심을 낼 법도 했건만.
"축하드립니다!"
그 누구도 그런 마음을 품지 않았다.
구원자에게 그만한 보상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법.
'미궁이 침묵했어도 보상은 나오는군.'
대격변 패치가 진행되는 중이라 그런지, 미궁의 알림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나, 제대로 된 보상이 주어졌다.
그것도 추가된 계층주의 숫자에 걸맞은 비율로.
"역시, 대단하십니다!"
스륵-.
다만, 과한 시선에 에릭은 [인벤토리]로 [흑색 상자]를 수납했다.
그리고 독촉하듯이 중대장을 바라봤다.
"아-! 이쪽입니다."
제국군은 군인이다.
그것도 나름 체계적으로 굴러가는 제대로 된 군인.
그들은 에릭 덕에 몸을 회복했고 잠시의 여유가 생겼다.
제국군은 그 틈에 재빠르게 군영을 정리해 뒀고, 그래서 에릭은 곧장 다음 행선지로 갈 수 있었다.
'역시 제국이 답이었어.'
에릭은 오랜만에 스승과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3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교황청은 별로라고?"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살고 싶진 않습니다만."
"가르시안 왕국은 왜?"
"돈만 주면 죄다 귀족이 되서 노예까지 살 수 있는 쓰레기 국가가 아닙니까?"
리페로제와 르웰은 전쟁터에서 모은 아이들을 데리고 정착할 나라를 찾았다.
그렇게 선택한 제국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여기가 어디쯤이지?'
계단을 올라선 에릭이, 변한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3계층 호수 지형입니다!"
제국군이 재빠르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현실의 미궁은 엄청나게 커다래서, 지형지물을 파악해 방향을 잡는 게 기본이다.
미궁을 일터로 삼은 군인들은 이런 쪽에 아주 빠삭했다.
"계층주는?"
"북동쪽으로 추정됩니다."
에릭은 앞장서서 걸었다.
오늘따라 오른쪽이 휑-한 기분이 들었다.
'두식이는 잘 있군.'
미궁에 들어온 직후 이유는 모르겠지만, 장두식이 살아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아마, 그 신전을 본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자니.
"그, 혹시 3계층의 병사들까지...."
에릭의 오른편으로 메시 중대장이 다가왔다.
질문은 아니지만,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고.
에릭은 뭘 당연한 걸 묻냐는 투로 중대장을 빤-히 바라봤다.
"크흠, 죄, 죄송합니다. 제 와이프도 군인이라서-."
"걱정 마라."
에릭은 장두식을 구하기 위해 미궁에 들어왔으나, 거기까지 가는 동안 손이 닿는 사람들까지는 구해 줄 생각이다.
'전장에서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구하자.'
오래전 스스로가 맺은 다짐.
그때와 지금은 키도 다르고 가진 힘도 달라졌으니, 구할 수 있는 범위도 커졌다.
당연한 거였다.
"그, 국장님. 모험가 파티가 합류를 요청했습니다."
"거절할 이유가 있나?"
에릭의 일행은 미궁 3계층을 거닐면서 점점 커져 갔다.
거대한 황금빛 휘광을 내두른 성기사가 제1선을 담당하고 있는데, 생존자들 입장에서는 황금 동아줄과 다를 게 없었다.
'이쪽은 사정이 다른 모양인데.'
에릭은 나름 중급 모험가가 뒤섞인 안정적인 집단을 바라봤다.
계층주를 제국군이 상대해 주니, 남은 몬스터 웨이브 정도는 충분해 보였다.
'문제는 모험가들은 기본이 각자도생이란 말이지.'
살놈살, 살 놈만 살자.
미궁 속 모험가들의 철칙이었다.
한데, 모험가들의 '살놈살'의 범주는 아주 좁았다.
'파티 혹은 클랜' 단위로, 많아야 스무 명 남짓한 인원이 전부.
'모험가 길드도 어떻게 하긴 해야겠지.'
일전의 흑마법사 사태로 모험가 길드를 압박했던 에릭이다.
지금에 와서는 조금 더 구체적인 실행안까지 떠올랐다.
'자유로워야 모험가랬나?'
그가 보건대.
자유라는 건 필요 없는 허상에 불과했다.
미궁을 공략하려면 자유보다는 규칙이 중요했으니까.
'엄격한 규율과 체계를 짜야-.'
나름 큰 그림이 완성될 즈음.
"저, 저기 군영이 보입니다!"
에릭은 3계층의 계층주를 도맡은 제국군을 마주쳤다.
미궁관리군의 모습을 본 에릭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에릭은 뒤를 돌아봤고, 그쪽에는 뒤늦게 합류한 모험가들이 모여 있었는데, 오며가며 모인 수가 백을 넘었다.
에릭이 그들에게 묻기를.
"...너희는 저걸 도울 생각은 안 들었나?"
잔뜩 일그러진 얼굴.
꿈틀거리는 승모근.
누가 봐도 분노한 모습이었다.
* * *
"중대장님! 중급 포션의 재고가 동났습니다."
미궁관리군 4군단 2중대의 상황은 처참했다.
3계층은 계층 전체를 사 분할 한 땅에 호수, 사막, 늪지대, 산으로 이뤄진 개별 지형이 존재하는 장소다.
미궁의 계층주는 산에 있다.
"어중간한 부상자에게는 포션을 아껴라."
"이미 그러고 있는 상황입니다."
산 중턱에 마련된 군영에서 수뇌부는 곤혹스러운 상황을 겪었다.
각 구역별로 테마가 존재하는 덕에, 미궁 속 자연 광물을 다양하게 얻어 낼 수 있는 곳이 미궁의 3계층이다.
그래서 나름 중층 수준의 모험가들도 제법 많았다.
하나, 계층주를 상대하는 이들은 전부 제국군이었다.
'제국법이 이럴 땐 원망스럽군.'
중대장은 다소 불경한 마음이 들었다.
모험가들의 자유를 보장한다.
이를 황가 아르만의 이름으로 선언하니.
모험가들이여, 모험을 꿈꾼다면 제국으로 와라!
90%가 중급과 하급 모험가에 머무른다지만, 남은 10%는 미궁 상층을 누비는 강자인 집단.
그게 모험가 길드다.
게다가 그들은 미궁이나 마경을 드나드는 것을 업으로 삼아서 도시에 있을 때는 엄청난 소비력을 자랑한다.
"폐하의 혜안에 제국의 부(富)가 넘쳐흐르는구나!"
시간비가 다른, 미궁에서 겪은 고난만큼 지상에서 보상을 얻고자 하는 심리를 잘 아는 황제였기에, 그는 모험가들을 이용해 제국의 경제를 부흥시켰다.
그 대가는 자유였다.
'이런 재난 상황에서도 자유를 들먹일 줄이야.'
세월이 지나고 나니.
자유라는 범위가 다소 과한 게 아닌가 싶었다.
적어도 2중대 중대장, 쟈스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 계층주도 30기가 동시에 나타나겠지."
하다못해 물자라도 지원해 줬다면.
소드마스터가 있는 자신의 중대만으로도 한 달은 충분하게 버텼을 거다.
"각자도생이 모험가 길드의 철칙이요."
"우리 클랜원 챙기기에도 빠듯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모험가들은 냉혹했다.
무력 지원은 꿈도 꾸지 못했고, 물자 지원은 끽해야 하급 포션 몇 개가 전부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건가?'
미궁의 변화.
앞으로 어떻게 될 줄 알고 물자를 지원하라고 강요하겠는가?
제국군과 모험가는 같은 제국 땅에 살아도 입장이 전혀 달랐으니까.
"후우.... 내가 가마."
소드마스터, 중대장 자스민이 긴 머리를 하나로 묶으며 초소 밖을 나섰다.
"포션 먹어라. 여기서 더 버티면, 나중에 자르고 재생해야 할지도 모른다."
"으으... 돼, 됐습니다. 저 말고 칼질 잘하는 놈들이나 주시죠."
시간 단위로 리셋이 이뤄지는 미궁. 촉박한 전투 속에서 병사들은 스스로가 최선의 선택을 해 왔다.
최고의 선택은 불가능했으니.
그나마 최선을 고른 거겠지만.
"이번은 장교들끼리 처리한다. 병사들은 쉬어도 좋다."
자스민은 한계에 다다른 군(軍)을 정비하고자, 다소 무리수를 두려 했다.
'조금 위험할지도....'
소드마스터여도 체력에 한계가 존재하는 법.
계층주야 1:1로는 얼마든지 찢어 죽일 수 있다만, 30마리가 동시에 나오는 건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산꼭대기를 향해 발길을 옮기려 들었다.
그때였다.
"그렇게 비장한 표정 지을 것 없다."
쿠웅.
묵직한 신성력이 내려앉음과 동시에 찬란하게 빛나는 거대한 존재가 나타났으니.
'...엄청나군.'
찬란한 얼굴과 위압적인 체구.
그리고 순식간에 부상자들을 완치시키는 웅혼한 신성력.
자스민이 고개를 숙였다.
"빙의자 관리국장, 성자 에릭님을 뵙습니다."
60화 장두식 구출 작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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