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의 스킬이 너무 화려하다
1화 비폭력주의
절뚝이며 걷는 발치에 껍데기만 남은 라면 봉지 따위가 걸리적거린다.
어두운 방.
암막 커튼은 제 역할을 충분히 다하고 있었고 전등은 제 역할을 하지 않은 지 제법 오래된 그런 방.
발에 걸리는 쓰레기들을 대충 구석으로 밀어 넣고 다시금 움직이는 걸음걸이는 절뚝절뚝 부자연스럽다.
"후우··· 이 썩을 게임,"
힘겹게 컴퓨터 앞에 앉은 현승의 입에서는 한숨과 함께 나지막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벤타이얼 온라인.
5년 전 반짝 유행했었던 온라인RPG 게임.
이 빌어먹을 망겜은 엉망진창이 된 현승의 인생에 불쑥 찾아왔고 홀린 듯 빠져들었다.
단순히 빠져들기만 한 것이 아니다.
현승에게는 재능이 있었고, 집념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1위. zl존☆천마★
모니터 위에 떠 있는 한 줄의 자부심.
동시접속자 수십만 명도 찍었었던 RPG게임. 그리고 그런 게임 속 부동의 1위 랭커.
현승의 캐릭터인 '지존 천마'는 그의 도피처임과 동시에 또 다른 삶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럼 뭐하냐. 망할 대로 망했는데."
비록 아주 잠깐이기는 했지만, 벤타이얼은 갓겜이라 불릴 정도로 흥한 적이 있었다.
이전의 틀에 박힌 게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높은 자유도.
정말 살아 있는 것 같은 다채로운 반응의 npc.
레벨이 없는, 특성과 스킬을 갈고 닦는 신선한 방식의 전개.
그런 것들이 어우러져 한때는 갓겜이라 불릴 정도로 인기가 있던 게임이었건만.
"염병하네 진짜."
현승이 지금 접속해 있는 게임은 과거 그 대단했던 게임과 같은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이나 처참한 모습이었다.
웅장하고 화려해 많은 유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황성은 불타고 무너진 지 오래라 그 형체를 찾아보기도 힘들었고.
조용하고 평화로워 유저들이 종종 힐링하러 들렀던 시골 마을은 괴물의 식량창고가 되어버렸으며.
아니, 그런 걸 떠나서 npc가 다 죽어버린 게임에 무슨 컨텐츠가 남아 있겠는가.
"이 미친 운영자 놈들은 적당히를 모르나···."
높은 자유도? 물론 좋다.
근데 적당히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어비스가 열리고 악에 물든 괴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마을이 초토화되고.
내분이 일어난 제국이 그걸 막지 못하고 무너지고.
버티고 버티던 유저들 마저도 죽고 살아나면 다시 죽고···.
이게 대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냔 말이다.
"뭐, 이런 상황에도 안 접는 놈들이 진짜 미친놈들이지."
꿈도 희망도, 심지어 재미도 없는 게임이지만, 분명히 플레이하는 유저는 있었다.
게임이 막 출시되었을 시점부터 결코 변하지 않던 다섯 명의 랭커.
그들 역시 현승과 마찬가지로 개판이 된 게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남아 있는 것이다.
원래 미친놈들은 이름만 봐도 즐겁다고, 접속 중인 이름을 확인한 현승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미친놈들. 오늘 서버 마지막 날인데도 당연하다는 듯이 접속하네."
한때는 서로 반목하며 미친 듯이 싸운 적도 있었지만, 게임 속 세상이 요지경이 되고부터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던··· 말하자면 미운 정이 들 대로 든 놈들.
그건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정모를 제안한 놈도 있었지만, 현승은 단칼에 거절했다.
게임 속에서는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절대자이지만, 현실은 다리 병신이 된 패배자일 뿐인 까닭이리라.
"이제······ 뭐하지."
벤타이얼을 하고 있을 때만큼은 괴로운 기억을 잊을 수 있었다.
끔찍한 패배감과 자괴감 대신에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오늘로서 마지막이었으니.
"이 정도면 오래 버텼지."
오늘이 벤타이얼 온라인의 서비스 종료 날이기 때문이다.
게임 속 세계자체가 망했는데 서버를 닫지 않고 1년 정도를 더 이어갔다.
심지어 플레이 하는 유저도 거의 없는 게임을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였다.
지존 천마와 나머지 랭커들이 분투했지만, 이 세계는 완벽하게 망했다.
세계관 최강이라 평가받던 절대자 npc.
제국의 황금 사자라든가 서쪽 바다의 지배자라든가.
대륙에 악명을 떨치며 공포의 상징이었던 흑아의 길드장 역시 결국에는 죽었다.
이제는 정말이지 답이 없는 것이다.
- 곧 벤타이얼 온라인의 테스트 서버를 종료합니다.
잿빛 밖에 남지 않은 배경 위로 운영자의 메세지가 떠올랐다.
- 마지막까지 노력해주신 유저분들께 감사드리며.
한 줄씩 떠오르는 운영자의 메세지.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는 현승의 심장박동은 커져간다.
바로 다음의 문장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까닭이었다.
- 랭킹 일만 등 내의 유저는 정식 벤타이얼 서버에 입장하게 됩니다.
이때까지 한 것이 테스트 서버였다니?
무슨 테스트 서버를 5년이나 운영한단 말인가.
아니, 사실 그딴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직 지존 천마는 끝난 게 아니었으니.
"랭킹 일만 등까지 정식 서버에 입장이라!"
이 얼마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말인가.
- 정식 서버 속 날짜는 테스트 서버가 시작되던 날짜로부터 2년 전의 세계이며 유저들은 모든 능력을 리셋한 채 처음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심지어 같은 세계관 속에서 2년이나 일찍 시작한단다.
이는 어마어마한 혜택이며 숨겨져 있던 히든 피스를 쓸어담을 수도 있고 그 정도로 힘을 기른다면 예정된 멸망을 막을 수도 있으리라.
- 모든 능력이 초기화되는 대신, 랭킹 1위부터 10위까지는 차등으로 특별한 혜택이 주어집니다.
현승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특별한 혜택!
그것도 차등으로!
아주 약간의 차이만 있더라도 자신은 수월하게 선두로 치고 나갈 수 있다.
현승에게는 그럴만한 센스와 경험이 있었으니.
"짜식들. 속 좀 쓰리겠네."
차등으로 주어진다면 분명 자신이 가장 좋은 혜택을 받을 것이다.
수년 간 1위 자리를 놓친 적 없던 부동의 랭커였으니.
"어떤 걸 주려나? 아티팩트나 스킬도 좋지만······ 역시 최상위 특성을 준다면 좋겠는데."
현승이 그런 생각을 하며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는 사이, 화면에는 운영자의 메세지가 계속해서 떠오른다.
다른 녀석들도 분명 같은 메세지를 보고 있을 것이다.
- 그럼 곧바로 정식 서버로의 이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자신과 같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모니터 앞에 앉아있겠지.
- 5
- 4
- 3
···
역시 미친 게임을 운영하는 운영자답게 화끈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5년을 함께한 세계인데 마지막 인사라든가 감성적인 말조차 한마디 없이 바로 넘어간다니.
그런 현승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 1
운영자는 꽤 담백한 마지막 인사를 남긴다.
- 힘을 키우세요.
미약한 모니터의 빛이 급작스레 밝아진다.
방안을 가득 메우고, 집안을 가득 메울 정도로.
그 환한 빛은 마침내 현승의 세상을 가득 채울 정도로 밝아지고.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 그리고 살아남으세요.
마지막 문구가 가슴 깊숙한 곳에 틀어박혔다.
실내를 가득 채우던 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예의 그 어두컴컴한 방으로 돌아왔고 그와 같은 시각.
전 세계에서 동시에 1만 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 신경 쓰지 못했으니.
- 긴급재난안내 :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현재 미확인 괴생명체가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도시를 파괴하고 있으니······.
대격변의 시작이었다.
* * *
눈을 뜨니 보이는 것은 울창한 나무, 길게 자란 풀.
숲 속. 멀리 보이는 작은 굴뚝과 피어오르는 연기.
정신을 차림과 동시에 직전의 일을 기억해낸 현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훑었다.
습관적으로 한 손은 허리춤을 훑었지만, 역시나 잡히는 무기 따위는 없다.
······납치? 어떻게?
'아니, 이제 와서 왜?'
이미 폐인과 다름없어진 자신을 이제와서 찾을 이유는 무엇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였다.
현승이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본 것은.
"이게 왜······ 멀쩡히······?"
낯선 곳임을 인지하자마자 몸에 새겨진 습관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거치적거리는 것은 없었다.
······망가진 다리였다면 분명 일어나지도 못하고 볼썽사납게 넘어졌을 텐데 말이지.
"이게······ 정말? 왜? 어떻게?"
오른쪽 다리가 제 뜻대로 완벽하게 움직인다.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하고 꿈이 아니라기에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현승이 혼란에 휩싸여 있는 사이.
「벤타이얼 정식 서버로 이전이 완료되었습니다.」
눈앞에 나타난 메세지에 현승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벤타이얼···?
너무도 낯익은 이름이지만, 여기서 볼 수 있을만한 이름은 또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문구가 현실처럼 눈앞에 나타나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일이었고.
「'zl존☆천마★'님의 특성과 스킬이 모두 재설정됩니다.」
···꿈이다.
말로만 듣던 루시드 드림 같은, 그런 꿈.
오직 그것만이 현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었으니.
현승이 제 볼을 강하게 꼬집는다.
"아야 x발!"
더럽게 아프다.
「설정 중······」
······꿈이 아니다.
통증 외에도 모든 감각이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꿈 따위가 아닌, 진짜 현실이라고.
'그렇다는 말은······.'
현승이 눈앞에 떠오른 문구를 노려봤다.
「설정 중······」
설정 중이라는 메세지.
벤타이얼 온라인의 테스트 서버 종료와 동시에 잃어버린 의식.
마지막 기억 속에서 환히 빛나던 모니터의 불빛.
가장 먼저 보인 문구. 벤타이얼 정식 서버로 이전이 완료되었다는 말.
갑자기 멀쩡해진 다리.
그리고······.
띠링-
「특성의 재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설정이 완료되었다는 메세지.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봤을 때 나오는 결론은 단 하나뿐이었다.
'정식 서비스라는 것은 가상세계로 플레이하는 것. 혹은······.'
진짜 현실과 다름없는 다른 세계라는 것.
"하, 하하하하···."
둘 중 무엇이 진실이든, 믿기 힘든 진실이었기에 현승은 영혼 빠진 웃음을 흘렸다.
「바뀐 특성을 확인하십시오.」
그러는 사이 다시금 떠오른 메세지.
"그래. 뭐가 됐든 간에 벤타이얼과 관련 있다면······ 이게 가장 중요하지."
벤타이얼 온라인이 여타 RPG게임과 차별화된 점이 이것이다.
가장 처음 캐릭터를 만들 때 주어지는 세 가지의 랜덤 특성과 스킬.
레벨을 올리면 자연스레 스킬을 얻는 다른 게임과는 달리 벤타이얼 온라인에서 스킬을 얻기란 무척이나 어려우며 처음 주어진 특성은 그 캐릭터의 전부라 할 수 있겠다.
특성의 종류가 얼마나 방대한지 각 캐릭터마다 비슷한 특성은 있을지언정 완전히 같은 특성은 아예 없었으니.
어떤 특성을 처음에 얻느냐에 따라 성장 방향, 속도, 속하게 될 집단 등이 갈리는 것이다.
최하위 특성이 연속으로 세 개가 뜬다면 아무리 전 랭킹1위의 고인물이라 할지라도 복구가 불가능한 것이 벤타이얼의 특징이다.
이게 망겜이 된 큰 특징 중의 하나기도 했고.
"···일단 확인해보자."
반짝이며 점멸하고 있는 「특성 확인」창을 향해 현승이 손을 뻗는다.
"뭐가 뭔진 모르겠다만··· 제발 좋은 특성 떠라."
이게 정말 아직 게임인지. 게임처럼 로그아웃할 수 있고 이전의 세계와 왔다갔다할 수 있는지.
그런 게 궁금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눈앞에 떠오른 이 특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구가 더욱 컸다.
5년 동안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인생을 벤타이얼에 쏟아 부은 자신이 아니던가.
현승에게 이건 거의 본능이나 다름없었다.
"후우··· 제발······."
떨리는 손으로 「특성 확인」 창을 누르자 가장 먼저 나타난 「주 특성창」
「주 특성 - 마력 감응의 천재」
「마력 감응에 다시는 없을 재능을 타고났습니다.」
「마력 관련 작업에 최고의 효율을 가집니다.」
현승이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인다.
"음······. 나쁘지 않네."
주 특성은 합격이라 할 수 있겠다.
기본적으로 '천재'라는 이름이 붙은 특성은 무척이나 희귀한 특성이다.
그 분야에서는 최고의 특성이었으니.
다만, 마력 감응이라는 것이 이 세계에서는 그다지 쓸모가 없다.
오직 특성과 스킬, 그리고 그것을 활용한 무예가 전부인 곳.
RPG의 꽃이라 불리는 마법사라는 직업이 존재할 수 없는 세계관인 까닭이다.
그렇기에 얼핏 보면 굉장히 좋은 특성 같지만, 최상위급의 특성은 아니었다.
'지배자 특성이 떴다면 최고였겠지만······.'
최상위급 특성이라 평가받는 것은 '지배자'란 이름이 붙은 특성들.
예를 들어 지존 천마가 가지고 있던 화염의 지배자 특성은 말 그대로 화염을 지배하며 다루는 특성.
그러한 특성이 이곳에서는 최상위급 특성인 것이다.
'뭐, 마력 감응이 좋으면 스킬을 발전시킬 때는 최고니까.'
이만하면 충분히 좋은 특성이다.
현승은 개판 나버린 세상 속에서 굳건히 랭킹 1위를 유지하던 고인물이 아니던가.
이 정도의 특성만 나와준다면 이번에도 무리 없이 선두로 치고 나갈 수 있으리라.
'이 정도만 나와라 이 정도만···.'
손을 아래로 내려 「주 특성」 밑의 「부 특성」창을 눌렀다.
「부 특성 - 간지 없이는 못 살아!」
「멋을 중시하는 당신! 간지 없이는 못 사는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스킬의 발동 이펙트가 극적으로 화려해집니다.」
「정신계열 스킬에 높은 내성을 지닙니다.」
자연스레 와락 구겨지는 인상.
"x발 뭔··· 이딴 특성도 있었어?"
욕이 절로 나오는 특성.
한마디로 꽝이었다.
벤타이얼에 수없이 많은 특성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름도 같잖은 이딴 특성이 있을 줄이야.
그리고 그게 하필 내가 걸릴 줄이야.
"······뭐, 정신계열 스킬 내성은 쓸만하니까."
상대가 정신 공격 스킬을 가질 확률은 낮지만, 그만큼 만난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이 정신계열 공격이다.
스킬이 화려해진다는 효과는 전혀 쓸모없지만, 정신 내성은 진짜 아주 엄청 가끔씩이나마 쓸모는 있는 것이다.
"주 특성은 괜찮고 부 특성은 꽝이라······."
아직까지는 감당 가능한 범위다.
어떻게 세 가지 전부가 좋은 특성이 뜨겠나.
이 정도의 특성으로도 단숨에 치고 나가줘야 진정한 고인물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마지막은 제발 좋은 걸로 떠라.'
그래도 기왕이면 상위 특성이 뜨는 것이 좋지.
그런 생각을 하며 현승이 마지막 「보조 특성」을 눌렀다.
「보조 특성 - 모든 게 두 배!」
「특성의 모든 효과가 두 배로 작용합니다.」
「페널티 또한 두 배로 작용합니다.」
"······떴다."
마지막에 대박이 떴다.
보조 특성에서 뜰 수 있는 것 중에 가히 최상위라 할 수 있는 특성.
주 특성은 캐릭의 아이덴티티.
부 특성은 주 특성과 어우러지며 방향을 잡아주고.
보조 특성은 위의 두 특성을 말 그대로 보조해주는 특성이다.
그런 관계로 모든 특성 효과가 두 배라는 말은 보조 특성 중에서도 최상위 특성이라는 말이었다.
"대박 하나, 꽝 하나, 보통 하나······ 이 정도면 충분하네."
꽝 하나가 제법 뼈아프기는 하지만, 어쩔 수 있나.
모든 것이 랜덤인 시작지점에서 이만하면 잘 나온 편인 것이다.
"이제 스킬을 확인해 볼······ 응?"
꽤 기꺼운 마음으로 스킬을 확인해보려던 현승의 눈앞에 새로운 메세지가 나타났다.
「랭킹 1위부터 10위까지의 플레이어에게는 차등으로 혜택이 부여됩니다.」
「플레이어 이현승, 'zl존☆천마★'의 랭킹은 1위입니다.」
「1위의 보상, '히든 특성'이 부여됩니다.」
메세지를 차근차근 읽어내려가던 현승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게 정말 벤타이얼의 세계라는 것을 확신시켜주는 메세지.
그리고 그것보다 중요한 '히든 특성'이라는 단어.
"히든 특성이라니······."
벤타이얼에 관해서는 많이 안다고 자부했건만, 처음 들어보는 특성이었다.
자연스레 히죽 올라가는 입꼬리.
1위에게만 주어지는 혜택.
그렇다는 말은 2위도, 3위도, 그 밑의 다른 누구도 받지 못하는 것이 히든 특성이라는 말이었다.
"······마냥 헛되지는 않았나···."
5년 간의 방구석 폐인 인생.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는 없었다.
방에 틀어박혀 오로지 벤타이얼에만 쏟아부은 5년의 시간.
사람인 이상 잠을 자야 했고 게임 속 세상에서 벗어나 잠에 들려고 할 때면 어김없이 현실의 자신과 마주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더욱 게임에 몰입했고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 때까지 플레이한 것이리라.
그런 현승에게 나타난 한 줄의 메세지는 단순한 알림이 아니었다.
그간의 노력에 대한 인정이었다.
「가진 특성을 종합하여 최적의 히든 특성을 설정 중······」
그러니 잔뜩 기대어린 눈으로 메세지를 쳐다본다.
심지어 최적의 히든 특성을 설정한다지 않나.
기대가 안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들리는 경쾌한 알림음.
띠링-
「히든 특성의 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현승은 잽싸게 손을 뻗어 새로 열린 「히든 특성」창을 눌렀다.
물론 잔뜩 흥분한 콧바람이 뿜어지고 있는 채였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지성을 가진 모든 생명체에게 폭력을 행해서는 안 됩니다.」
「육체적인 상처를 입히거나 피해를 가할 경우,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페널티 - 모든 스킬의 삭제」
"음?"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읽어내려간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지성을 가진 모든 생명체에게 폭력을 행해서는······.」
말이 안 되지 않은가.
벤타이얼의 기본은 RPG게임.
레벨은 없지만, 몬스터가 존재하고 전쟁이 벌어지는 세계이다.
폭력 없이는 불가능할 터.
거기다 육체적인 상처를 입히거나 피해를 가할 경우 모든 스킬의 삭제?
무슨 이런 말 같지도 않은 페널티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여기가 정말 벤타이얼의 세계 속이라면.
이런 페널티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밸런스를 무너트릴 정도로 강력한 힘에 반드시 따라오는 강력한 페널티.
"······침착하자."
늘 그랬듯 침착하게 파악해보자.
우선 떠 있는 알림창을 이리저리 눌러본다.
그러다 눌러본 히든 특성의 제목.
그리고 나타나는 숨겨진 창.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0 / 1000)]
드러나는 히든 특성의 진정한 효과.
「인내력을 목표치까지 달성할 시, 히든 특성의 보상 -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가 주어집니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 스킬의 이펙트가 거짓이 아닌 실제가 됩니다.」
「그에 맞춰 스킬의 등급이 재조정되며 스킬명이 변경됩니다.」
「보상으로 진화한 스킬은 삭제되지 않습니다.」
2화 비폭력주의(2)
한적한 시골 마을.
기껏해야 한 달에 한두 번 여행자들이 거쳐 가는 그런 작은 마을.
동네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의 죽마고우이며 한 집에서 부부싸움이라도 일어난다면, 하룻밤 새 마을 모두가 알게 되는 그런 시골 마을.
그곳의 유일한 여관 겸 식당에는 건실한 청년 한 명이 살고 있다.
"하하하하! 오늘도 날씨가 좋구나! 모두들 안녕?"
금방이라도 비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이 흐리고 습한 날씨에도 눈이 삐어버린 건지 호탕하게 웃는 청년의 이름은 히오.
본래의 이름은 현승.
마을 사람들에게 현승이라 소개했으나 발음이 어려운 탓에 히온쑤웅이라 불릴뻔한 걸 간신히 히오로 바꾼 사내였다.
여관 앞에서 빗질하며 인사를 건네는 히오에게 마을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간다.
"이야! 히오다! 히오!"
"마을 제일의 호구!"
"안 돼. 그렇게 부르면 엄마한테 혼나!"
"하지만··· 호구를 호구라 부르지 뭐라고 해?"
"음······ 병신?"
꺄르륵 웃는 아이들을 보며 히오 또한 활짝 웃어 보인다.
"하하하하! 요 장난꾸러기들! 어른을 놀리면 못쓴다? 저기 가서 마저 놀으렴. 하하하!"
"싫어! 이 호구야!"
"호구 주제에 명령하지 마시지!"
"우에! 호구래요! 호구!"
히오의 이마 위로 힘줄이 빠직 튀어나왔지만, 여전히 웃는 얼굴로 아이들을 상대하는 히오.
그렇게 한참을 둘러싸여 놀림을 당한 후에야 히오는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후우··· 인생 참."
한숨을 푸욱 내쉬며 털래털래 들어오는 히오의 앞에는 붉은색 머리칼의 소녀가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왜 그렇게 매일 당하고만 있는 거야?"
마을 아이들보다는 성숙하고 히오보다는 나이가 어린 소녀의 이름은 클레어.
클레어는 히오를 거둬준 여관 주인의 하나뿐인 딸이었다.
"뭐, 일종의 수련이라고 볼 수 있지."
히오는 대충 그렇게 둘러대고 가게 내부 청소를 시작했다.
히오··· 아니 현승이 이 마을에 정착한 지도 어느새 2년이 지나간다..
그렇게나 지났으니 슬슬 벤타이얼 온라인의 테스트 서버 시점 스토리가 진행되고 있건만, 현승은 2년 전과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깨달은 것이라고는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폭력없이 산다는 것은 힘들다는 것.
그리고 더럽게 오르지 않는 인내력.
그것 정도가 2년 동안 깨달은 것이었다.
"수련은 무슨, 저항할 용기가 없는 거겠지."
테이블을 닦는 히오를 바라보며 클레어가 나지막이 말한다.
"한심해."
히오의 손이 잠시 우뚝 멈췄지만, 곧 다시 움직이며 청소를 이어간다.
못 들었다는 듯이 말이다.
"너도 그러고 있지 말고 청소나 좀 도와. 가게 열 준비해야지."
"흥. 가게는 무슨, 손님도 없는데. 나는 이런 시골 마을에서 청소나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헹. 또 그 소리냐? 아카데미로 가겠다고?"
클레어의 꿈은 이런 시골 마을에서 벗어나 제국 수도로 상경하는 것이었고.
히오는 클레어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같잖다는 듯 코웃음 쳤다.
"야야. 주제에 맞게 살아야 된다. 주제에 맞게."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꿈이지 않나.
이 세계의 주민들 역시 타고난 특성이 있고 그 특성에 맞춰진 스킬이 있다.
다만 빙의자와는 달리 자신이 타고난 특성과 스킬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대다수의 이 세계 주민들은 죽을 때까지 본인의 특성과 스킬을 깨우치지 못하고, 다루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말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클레어가 저리 기고만장해하는 것도 이해는 한다.
클레어는 일 년 전, 스스로 본인의 스킬을 깨우치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나는 너 같은 겁쟁이랑은 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클레어의 손끝에 조그마한 화염이 일렁인다.
"화염 속성은 파괴력이 엄청 뛰어난 속성이랬어! 깨우친 자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타고난 특성이란 말이야."
"그거 저번 달에 온 여행자들한테 들은 거지? 그 녀석들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그러네."
클레어가 도끼 눈을 뜨며 히오를 노려본다.
"너, 너 같은 겁쟁이가 뭘 안다고 그래!"
그렇게 버럭 소리 지르고는 2층으로 뛰어 올라가 버리는 클레어.
사실 클레어의 말은 크게 틀린 게 없다.
스스로의 특성과 스킬을 깨닫고 그것을 활용하는 자. 속칭 '깨달은 자' 중에서도 화염 속성은 강한 파괴력으로 유명하였으니 말이다.
다만······.
'고작 그거 하나만으로 시골 소녀가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결국 스킬도 갈고 닦아야만 한다.
그리고 특성과 스킬의 고점을 확인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구에서 끌려온 일만 명의 빙의자들이야 본인의 상태창을 열어 확인할 수 있다지만, 이곳이 현실인 주민들에게는 그런 편리한 방법이 없는 탓이었다.
힘들게 갈고 닦았는데 그 특성과 스킬의 고점이 매우 낮은 것이라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검증된 자들만 입학할 수 있는 것이 제국 아카데미였다.
'그리고 그 엄청난 학비를 감당할 수도 없고 말이야.'
설사 클레어의 특성과 스킬의 고점이 높다 치더라도 먹고사는 게 빠듯한 이런 시골 여관의 수입으로 어찌 억 소리나는 제국 아카데미에 갈 수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라도 계속 말하며 스스로 포기하도록 하는 건 히오 나름대로의 배려인 것이다.
"에휴······. 예전에는 클레어도 참 착했었는데."
오빠 오빠 하며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아이가 2년 사이에 쑥쑥 커서 이젠 자신을 한심한 백수 취급하지 않나.
······뭐, 크게 틀린 말이 아니기에 더 마음이 아프다.
"저 꼬마 아가씨는 여전히 활기차네."
한숨쉬며 걸레질하는 히오의 등 뒤로 웬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가게 내에는 클레어와 히오 외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
그리고 그게 가능한 사람은 한 명뿐이다.
"제이슨이냐?"
"그래, 제이슨이다. 나 말고 친구도 없는 놈이 왜 맨날 물어보냐?"
"······앉기나 해."
걸레를 대충 던져놓은 히오가 테이블에 앉자 제이슨이라 불린 사내가 맞은 편에 털썩 걸터앉는다.
연갈색 머리카락에 입가의 흉터가 인상적인 사내.
가게 안으로 들어온지는 꽤 됐지만, 클레어는 눈치조차 채지 못한 은신술의 귀재.
벤타이얼 온라인을 어느 정도 해봤다 하는 유저라면 모를 수가 없는 네임드 npc.
제이슨 클라록.
암살 길드와 정보 길드의 장.
암흑가의 지배자.
"네가 말한 정보 취합해서 가져왔다. 네 말대로 그 교수 역시 빙의자였어."
그런 거물과 히오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히오의 노력 덕분이었다.
게임 속에서도 유난히 알려진 정보가 없던 제이슨 클라록.
그가 온전한 암흑가의 지배자가 되기 전, 한창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을 당시에 이곳 델피르 마을을 대피처로 삼았다는 사실을 히오는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마침 멀지 않았던 이곳을 첫 시작 지점으로 잡았다.
몇 달을 투자하더라도 이 마을에 있을 만한 가치가 제이슨에게는 있는 것이다.
다만 상처 입고 쓰러진 제이슨을 구출한 것만큼은 운이 따라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며칠 함께 지내며 히오는 제이슨에게 미래의 정보를 은근슬쩍 푼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제이슨이었지만, 곧 히오의 정보 대부분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그덕에 한층 수월하게 두 개의 길드를 장악하고 현재의 이런 관계가 된 것이다.
뭐, 어차피 종내에는 스스로 극복하고 암흑가의 지배자가 됐겠지만, 히오의 정보 덕에 쉬워진 것은 틀림이 없었다.
물론 제이슨 자체가 암흑가의 거물답지 않게 의리와 신용이 두텁다는 것과 그것을 히오가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방법이리라.
다른 거물 npc들에게는 애초에 접근조차 불가능하니 제이슨은 히오의 유일한 동아줄이자 2년 동안 이룩한 최대의 아웃풋인 셈이었다.
"역시··· 녀석은 분명 최상위 실력자 중 한 명이야."
제이슨에게는 빙의자에 관한 것도 털어놓았다.
그에게 많은 정보를 풀수록 관련된 정보는 몇 배가 되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곳이 게임이었다는 말은 하지 않고 그저 다른 세계의 강자들이 이곳 세계로 빙의했다··· 정도로만 설명한 것이다.
"최상위라면··· 혜택까지 받고 이 세계로 넘어왔다는 강자들?"
"그래. 그 아카데미 교수는 그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놈."
"고작 교수가 그 정도로 거물이었다고······."
"그러니 관심 가지고 지켜봐. 그놈은 인맥 넓히기에 혈안이 된 놈이니까. 쓸모가 있을 거야."
랭킹 1위였던 자신을 제외하고 혜택을 받은 나머지 아홉 명의 랭커들.
그들은 분명 어떤 식으로든 두각을 드러낼 것이다.
모든 특성이 리셋되고 새로 설정되었기에 누구라고 특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워낙 유별난 놈들이었던 탓에 몇몇은 누군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카데미의 교수로 들어갔다는 저놈처럼 말이다.
"제정신 아닌 놈들도 있었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이런 망겜에 인생을 갈아 넣은 놈들이 아닌가.
나머지 랭커들에게 그 사이 어떤 변화가 생겼을지 모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리라.
"그래. 알겠다. 아, 그리고 요즘 모험가 길드에서 이상한 말이 나오더라···."
"이상한 말?"
고개를 끄덕인 제이슨이 기억을 끄집어내려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뭔 생전 처음 듣는 단어였는데··· 지줜 천마? 뭐 그런 놈을 찾는다고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더라고. 빙의자들 하고 관련된 단어가 아니겠냐?"
"······몰라······? 그건 됐고 온 김에 술이나 한잔하고 가라."
"됐다 인마. 나 바쁘다."
애써 표정관리에 성공한 히오가 대충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암흑가의 지배자가 예까지 직접 행차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다.
그만큼 제이슨도 빙의자에 대한 정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신과의 관계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겠지.
"나 간다. 그리고 아까 보니까 또 호구소리 듣고 있던데."
"신경 꺼."
"가끔씩은 화도 내고 위협도 하고 좀 그래라. 그래야 호구 소리 안 듣는다."
"비폭력주의자라니깐."
히오의 대답에 피식 웃은 제이슨이 대충 손을 흔든다.
"그래 뭐, 알아서 하고. 조만간 또 올 일 있을 테니까 그때 보자고."
그러자 곧 흐릿해지며 사라지는 그 신형.
'언제봐도 신기하다니까.'
대충 공간계열 특성과 은신 스킬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확실한 조건은 알 수 없다.
게임 내에서도 소문만 무성할 뿐, 직접 마주하기는 무척 어려운 것이 제이슨이었으니.
"후우··· 다들 2년 사이에 엄청나게 강해졌겠지."
멈춰선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리라.
그것도 1위 특전인 이 히든 특성 때문에.
"······상태창."
▶이름 : 이현승(zl존☆천마★)
▶근력 : 10
▶민첩 : 10
▶체력 : 10
▶마력 : 10
눈에 띄는 것은 2년 내내 변함없이 그대로인 스탯.
레벨이 없는 벤타이얼의 특성상 명성을 드높이고 업적을 쌓아야 그 포인트로 스탯을 올릴 텐데 히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히든 특성.
[주 특성 : 마력 감응의 천재]
[부 특성 : 간지 없이는 못 살아!]
[보조 특성 : 모든 게 두 배!]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721 / 1000)]
"···이 썩을 것."
그 옆에 있는 인내력 수치.
무려 2년이다.
2년 동안 저 인내력을 모으기 위해 별의 별 짓을 다했었다.
다만··· 여러가지를 실험하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없고 폭력이라고 판정되는 순간 모은 인내력 또한 초기화 될 것이다.
그리고 조금의 실수는 곧 모든 스킬의 삭제로 연결되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킬이 삭제되면 정말로 끝이다.
정작 인내력을 다 채워도 진화할 스킬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그렇다고 지금 단계에서 스킬북을 구할 수도 없고··· 막막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2년 동안 모은 게 고작 721일 정도.
화를 참거나 인내할수록 잘 오르는 것 같기는 한데 그런 상황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어디 이동하는 것도 쉽지 않다.
자칫했다가 몬스터라도 만난다면.
둘중에 하나를 택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죽거나, 스킬을 전부 잃거나.
'그래도 이제 일 년 정도면 다 채울 수 있겠지.'
딱 그 정도만 더 참아보자.
"특성 때문에 스킬 쓰는 것도 쉽지 않고."
랜덤으로 부여받은 세 가지의 기본 스킬.
보통은 이 기본 스킬을 발전시키거나 상성이 좋으면 융합하여 사용한다.
보유한 특성과 너무 맞지 않으면 명성과 업적을 쌓아 어울리는 스킬북을 구매해 발전시킬 수도 있다.
히오 역시 받은 기본 스킬은 세 가지.
[스파크]
[삼연격]
[육체 가속]
그야말로 기본 중의 기본 스킬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부 특성 : 간지 없이는 못 살아!]
부 특성.
효과는 스킬 이펙트가 극적으로 화려해지는 효과.
그게 끝이 아니다.
[보조 특성 : 모든 게 두 배!]
본디 대박 중의 대박이었을 이 보조 특성이 부 특성의 효과마저 두 배로 만들어 안 그래도 극적으로 화려한 스킬이 거기서 두 배로 화려해진 것이다.
대충 표현하자면 극적극적으로 화려해진 수준.
처음에 별생각 없이 스킬 '삼연격'을 시전했다가 얼마나 놀랐던가.
어떤 무기를 들고 있든 세 번 빠르게 내려치는 스킬인 삼연격.
테스트 서버 시절에 사용해본 적 있는 스킬이었기에 아무 생각 없이 나뭇가지 하나 주워서 썼다가 진짜 기절하는 줄 알았다.
무슨 등 뒤에서 커다란 노인이 튀어나와서 산이라도 갈라버릴 기세로 함께 검을 세 번 내려치는 게 아닌가.
물론 실제 효과는 내가 나뭇가지로 휭휭휭 휘두른 게 전부이지만, 노인의 그 흉흉한 눈빛과 기세 만큼은 밑에서 올려다본 나조차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서 펼쳤음에도 마치 신처럼 나타난 노인의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기겁했고 한동안 신의 분노라느니 천벌이라느니 난리도 아니었기에 자연스레 스킬을 봉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번 더 펼쳤다가는 단체로 짐 싸들고 마을을 떠나기라도 할 기세였으니까.
"인내력을 채우기만 하면······."
쓰읍.
군침이 절로 돈다.
하지만 오를 생각을 안 하는 인내력을 보고 있으면 또다시 한숨이 나온다.
"에휴··· 청소나 하자."
그렇게 한숨을 푹푹 내쉬며 청소를 이어가고 있자니 문득 바깥이 소란스러워진 것이 느껴졌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는 듣기 어려운, 혈기왕성한 사내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목소리.
이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하다.
'여행자가 왔구나.'
마을에서 유일한 여관이자 주점이자 식당인 이곳이 수입을 낼 수 있는 날.
히오는 걸레를 구석에 집어 던지고는 활짝 웃으며 여행자들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곧이어.
콰앙-
부서질 듯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네 명의 사내.
팔과 어깨, 얼굴 등 칼자국이 나있는 사내들은 마치 얼굴에 '나 용병이오'라고 써놓은 듯한 모양새로 가게로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물론 비폭력주의자 히오는 더욱더 허리를 바짝 수그리며 그들을 맞이했고.
사내들은 그런 히오를 쳐다도 보지 않고 껄렁이며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야!"
"예?"
"예? 이런 얼빵한 새끼가. 손님이 왔으면 바로 술이랑 음식을 내와야 할 거 아냐!"
"아, 옙!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빠릿하게 움직이며 주방으로 들어가는 히오.
언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냐는 듯 그 표정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주머니가 없어서 다행이지.'
여기는 치안 좋은 대한민국이 아니다.
힘과 권력이 전부인 곳.
고작 저런 저급한 용병 네 명이라 할지라도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추고 있다면 몸을 바짝 낮춰야만 한다.
"하아··· 이런 촌구석까지 우리가 와야 돼?"
"어쩔 수 없잖아. 당분간 몸 좀 사려야지."
"요양 왔다 생각하자고. 계집질이나 하면서 말이야."
"이런 촌구석에 계집은 무슨······."
용병들의 대화를 들으며 히오는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아무래도 녀석들 질이 상당히 좋지 않아 보인다.
이런 작은 마을에는 저런 놈들을 제지할만한 수단도 없고.
마을 청년들이야 있지만, 그 숫자가 적고 싸움이라고는 어린 시절 투닥거린 것이 전부인 순박한 청년들이다.
거친 용병들의 기세와 날 선 무기를 상대로 싸움이 될 턱이 있나.
그리고 자신은······.
'x발. 비폭력주의.'
폭력은 안 된다.
어떻게 참아온 2년인데. 이대로 모은 인내력과 그나마 가지고 있는 스킬을 전부 날려버릴 수가 있겠는가.
'바짝 엎드리자. 바짝.'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린 히오가 술과 음식을 들고 테이블로 향했다.
"저희 가게에서 가장 맛있는 메뉴입니다! 그럼 맛있게 드십쇼!"
절도 있게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찰나.
"야 이 새끼야."
네 명의 용병 중 가장 인상이 더러운 놈이 히오를 불러세웠다.
눈 옆에 흉터가 있는 놈이었다.
"예! 부르셨슴까!"
"웃지 마. 이 새끼야."
"예? 잘못들었슴다?"
"······하, 이리 와봐."
히오가 가까이 다가가자 용병이 그의 뺨을 툭툭 친다.
"계집도 아니고 사내새끼가 기분 나쁘게 실실 쪼개지 말라고. 죽여버리고 싶으니까."
낮게 속삭이는 그 목소리에 허세가 잔뜩 끼어있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히오는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질이 좋지 않은데다가 본인들의 위치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녀석들이 실제로 어떤 놈들이든 간에, 이곳에서는 그들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알고 있는 와중에 상대가 저자세로 나오면 그들은 더욱 흥분하고야 만다.
확인하고 싶어한다. 뽐내고 싶어한다.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그렇기에.
짜악-!
"이 새끼 그래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네!"
녀석들은 고개 숙인 히오의 뺨을 때리고.
"하하하하! 야 이 새끼야 운 좋은 줄 알아!"
빠악-!
뒷통수를 후려갈기며.
"오늘은 우리가 기분이 좋아서 넘어가지. 바깥이었으면 바로 죽여버리는 건데!"
끊임없이 조롱하는 것이다.
"예··· 감사합니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722 / 1000)]
그럼에도 히오는 인내한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뺨이 벌겋게 달아올라도.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724 / 1000)]
뒤통수를 얻어맞아 계속 고개가 아래로 처박혀도. 수치심이 몰려와도.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725 / 1000)]
인내하고 또 인내한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게에는 그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뭐 하는 짓이야!"
한창 본인의 특별함에 취해 있는 소녀.
눈에 띄는 적색의 머리칼과 시골에서 보기 드문 미모.
용병들의 눈이 돌아가기에는 충분한 조건이었다.
그리고 클레어의 눈은 다른 의미로 돌아버리기 직전이었다.
"이··· 이······ 쓰레기 같이 나쁜 놈들!"
외지인을 만날 일이 거의 없던 이 순수한 소녀에게 질 나쁜 용병들이란, 거의 동화 속 마왕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아······.'
히오는 입술에 묻은 피를 닦으며 탄식을 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귀찮게 됐네.'
3화 비폭력주의(3)
폴케, 하만, 파울로, 도리스.
이 네 명은 원래 한 용병단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의뢰인을 죽이고 도망친 범죄자 신분이다.
상단의 호위 임무 도중 맞닥트린 몬스터 무리.
본디 그 정도 숫자의 몬스터가 나올만한 장소가 아니었건만, 예기치 못한 몬스터의 등장에 용병단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와중에 살아남은 도리스와 그를 따르던 세 명의 용병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아직 갈 길이 먼 목적지.
부족한 호위의 숫자와 반비례하는 값비싼 물건, 재화.
야밤을 틈타 의뢰인과 나머지 용병들을 죽이고 비싼 물건을 챙겨 달아난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고민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도리스는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사내였다.
모두 죽였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조금만 조사를 해보면 사라진 물건과 용병단에 이름이 올라간 자신들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
그러니 쉬지 않고 멀리 도망쳤다.
그렇게 도망치다가 발견한 시골 마을.
영역상으로 달튼 자작령에 포함되어 있는 마을이지만, 그것은 그저 허울뿐인 것.
이런 작은 마을 따위는 자작가에서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이곳에서 당분간 몸을 숨기며 지낼 생각이었다.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을 정도로 작은 마을.
어찌 보면 화전민 마을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곳은 몸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고 그렇기에 큰 소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한데···.
"이 나쁜 놈들아! 히오 때리지 마!"
소리를 빽 지르며 위층에서 내려오는 붉은 머리칼의 소녀.
갓 성인이 된 듯 보이는 나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음에도 빛이나는 외모는 곱게 자란 귀족가의 영애 못지않다.
결코 이런 작은 마을에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못한 소녀의 등장에 잠시 넋을 놓았던 도리스가 곧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이러면······ 얘기가 좀 달라지지."
적당히 무력을 과시하며 마을에서 놀고먹을 작정이었건만, 저 외모를 보고 나서야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약간의 소란이야 일겠지만, 저 여자에게는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실제로 칙칙했던 실내가 소녀의 등장만으로도 환해진 느낌이었으니.
"으흐흐흐."
도리스를 따르는 세 명의 용병들 역시 비슷한 생각인지 눈동자를 위아래로 바삐 움직이며 음흉하게 웃는다.
"형님. 저거 물건인데요?"
"이런 생각지도 못한 횡재가."
그들이 그런 말을 주고받는 것도 모른 채 위층에서 내려온 소녀, 클레어는 히오의 곁에 서서 양어깨를 잡고 얼굴을 들여다봤다.
"바보같이 왜 맞고만 있어!"
그러고는 고개를 홱 돌려 도리스를 쏘아보는 클레어.
"너희들 뭐야! 너희 같은 손님 필요 없으니까 당장 우리 가게에서 나가!"
하지만 그 눈빛과 앙칼진 목소리에도 도리스의 미소는 더욱 짙어져만 갔다.
"흐흐흐··· 네 남편이라도 되냐? 그 허약한 놈 말고 우리한테 오지그래? 우리는 진짜 즐겁게 해줄 수 있는데 말이야."
"그래! 그런 사내구실도 못하는 녀석보다야 이쪽이 훨씬 낫지!"
"게다가 우리는 네 명이라고."
"네 배로 즐겁다는 말이지!"
클레어의 축객령에도 오히려 기분 나쁜 웃음과 함께 조금씩 다가오자 그제서야 몸을 움찔 떠는 클레어.
"오, 오지마!"
물론 도리스 패거리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어···!"
조금씩 뒤로 물러나던 클레어의 손끝에서 기어이 작은 화염이 터져 나온다.
돌연 치솟은 화염을 확인하고서야 놀란 듯 걸음을 우뚝 멈추는 도리스.
"멈춰! 그대로 통구이 되고 싶지 않으면!"
물론 클레어의 말처럼 통구이로 바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크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저 뜨거운 불은 진짜이고 조금전처럼 방심하며 다가갔다가는 크게 다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거··· 더 탐나는데. 스킬 사용자라."
"어떡할까요 형님?"
"그냥 데리고 가버리죠? 보아하니 이제 막 깨우쳐서 잘 다루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그 독촉에도 도리스는 신중했다.
"흠······."
가게 바깥에서 많은 사람의 발소리가 이곳을 향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만과 파울로도 뒤늦게 그 소리를 들었는지 가만히 도리스를 쳐다봤다.
잠시 생각하던 도리스가 클레어를 바라보며 히죽 기분 나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억지로 하려면 못할 것도 없다.
바깥에 사람이야 많다지만, 무장을 갖추지 않은 일반인.
눈앞에 두 명을 빠르게 제압하고 밖으로 끌고 가며 몇 놈 본보기로 칼침 좀 놔준다면 금세 저항할 의지를 잃고 와해될 놈들이다.
"쩝···. 운 좋네."
"스킬 사용자만 아니었어도···."
"흐흐흐. 그래도 다음에 또 볼 수 있을 거야?"
다만 문제는 스킬 사용자인 클레어.
도리스의 목적은 클레어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멀쩡히 데려가는 것이었으므로 클레어가 거세게 저항한다면 시간이 끌리고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밖에 모인 사람들을 감당하기 쉽지 않아지는 것이다.
다른 쉬운 방법이 여럿 있는데 굳이 당장 억지 부릴 필요는 없으니.
"조만간 보자고. 흐흐흐흐···."
그대로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도리스 패거리.
- 뭘 봐! 용병출신 처음 봐?
- 하만, 너무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친하게.
- 저희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그냥 얘기만 좀 나눈 건데 왜들 이렇게 몰려와서는······.
열린 문틈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여유롭게 말을 건네며 사라지는 도리스 패거리가 보인다.
"얘들아! 괜찮니?"
그리고 그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중년의 여인.
이 가게의 주인이자 클레어의 모친인 셀리였다.
"들어오려고 하는데 누가 맞는 듯한 소리가 나서 사람들을 불러······ 어머! 히오야! 이 상처 좀 봐. 어떡해!"
벌겋게 뺨이 부어오르고 입술이 터진 히오를 뒤늦게 발견한 셀리가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
"클레어! 어서 쏘이꽃잎이라도 따오렴!"
"하하하··· 아주머니 저는 괜찮아요."
히오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당연히 짜증이야 상당히 났지만, 성과가 없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734 / 1000)]
녀석들이 오고 인내력이 무려 12나 올랐다.
이 정도면 마을 아이들에게 족히 몇 달은 놀림 받아야 올릴 수 있는 수치인데···.
그만큼 참고 또 참았다는 말이었지만, 어쨌든 당장의 기분은 꽤 괜찮은 것이었다.
"괜찮기는! 클레어 뭐하니! 어서 다녀오지 않고!"
물론 이를 알 리 없는 셀리에게 등짝을 한 대 얻어맞아야 했지만.
* * *
"멍청이."
쏘이꽃잎을 모아다가 즙이 날 정도로 빻으면 상처에 나름 효과가 있다.
"한심해."
게임으로서 플레이할 때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이곳이 정말 살아 숨 쉬는 세계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정보 중 하나.
"그렇게 맨날 당하기만 하면 억울하지도 않아? 되든 되지 않든 저항이라도 하란 말이야!"
신경질적으로 입가에 약을 치덕치덕 바르는 클레어.
그 덕에 히오의 입 주위는 쏘이꽃잎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상처에 비해 치료가 너무 과한······."
"시끄러! 한심하게 반항도 못하고 얻어 맞기만 한 게 뭘 잘했다고!"
"클레어."
씩씩거리는 클레어를 보며 히오는 진지하게 말했다.
"폭력은 안 된다."
"변명하지 마!"
"응."
클레어는 남은 쏘이꽃잎즙을 히오의 벌건 뺨에 바르며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다짐했어. 나는 아카데미에 반드시 갈 거야."
왠지 평소보다 더욱 진중한 분위기에 히오는 가만히 그 말을 듣고만 있는다.
"힘들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돈도 열심히 모을 거고 능력도 계속 연습하고 있어. 이제 제법 잘 다루는 것 같기도 하고."
클레어는 진취적이다.
확실히 이런 시골 마을에 어울리는 소녀는 아니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나고 자란 이 작은 마을이 세상 전부이며 그 이외의 것은 그야말로 미지의 영역.
두려울 법도 하건만, 클레어는 오로지 자신이 정한 목표를 위해 생각하고 행동한다.
"정확히 돈이 얼마나 필요하고 얼마 만큼의 실력이 필요한지는 몰라. 혹시··· 히오는 알고 있어?"
"······아카데미라."
물론 대략적인 것은 알고 있다.
플레이어 출신, 즉 빙의자들에게는 그닥 필요한 과정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중요한 기관이고 거물 npc가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아마 아카데미 교수로 들어갔다는 그 빙의자 역시 그런 거물과 안면을 트기 위해 들어간 것일 테다.
잠시 생각하던 히오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됐어. 히오가 알 리가 없지."
클레어가 먼저 그 대답을 막았다.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한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셀리와 클레어는 히오의 과거를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대충 사연이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지만, 사연 없는 이가 어디 있겠나.
그런 생각으로 아무것도 묻지 않고 히오를 받아주었다.
하지만 이곳 변두리 마을에서 제국의 수도에 위치한 아카데미까지는 멀어도 너무 멀었기에 클레어는 당연히 히오 또한 근처 시골 마을 출신일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자, 다 발랐다. 붓기 가라앉을 때까지는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릇을 챙겨 방을 나가려는 클레어를 히오가 불러세웠다.
"클레어."
"응?"
잠시 망설이다 그냥 고개를 가로저어버리는 히오.
"아니다."
"······싱겁기는."
클레어가 나가고 히오는 그대로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녀석들이 또 오긴 올 텐데 말이야."
번듯한 용병이라기에는 어딘가 켕기는 게 많아 보이던 네 명의 용병.
녀석들이 클레어를 위아래로 훑던 그 눈빛은 너무도 노골적이어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뭐, 그런 걸 경험해보지 못한 클레어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지만 말이다.
"그런 놈들이야 뻔하지."
너무 노골적이어서 생각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마을 근처 어디에서 야영하다가 한밤중이 되면 몰래 들어오리라.
"저녁쯤부터 대기해야겠네."
녀석들이 다시 마을에 들어오기 전에 손을 쓸 작정이다.
물론 폭력적인 짓은 못하니 적당히 위협만.
히오의 스킬은 그 스스로가 보기에도 오금이 저릴 정도이니 저런 밑바닥 놈들이야 알아서 꽁지를 말고 도망갈 것이다.
사람을 많이 죽여본 놈들일수록 얼마나 죽음이 쉽고, 또 가까운지 알 것이기에.
"쫓아내기 전에 인내력 올릴 수 있으면 좀 더 올려놓고."
인내력을 올리기란 정말로 어렵다.
고작 아이들의 놀림을 하루하루 참는 것으로는 기별도 가지 않는다.
인내력은 진심으로 폭력을 참고 화를 견뎌내야만 오르는 것이었으니.
이 순박한 마을 사람들이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다른 마을로 건너가는 것 역시 무리다.
"음. 역시 녀석들을 이용해서 인내력을 좀 더 올리고 쫓아내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히오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창밖으로 뉘엿해지는 해가 보이는 시간.
히오는 얼굴에서 굳어버린 쏘이꽃잎즙을 떼어내고는 기지개를 켰다.
"슬슬 가볼까."
녀석들이 어디에 머물고 있을지 예상해 놓은 곳이 몇 군데 있다.
마을 근처의 지형은 빠삭하기에.
"아주머니.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아래층에는 셀리와 마을 어른 몇 명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 식사는 이곳에서 해결할 모양.
자주 있는 일이기에 히오는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어? 히오 밖에 나간 거 아니었니?"
"저 위에서 약 바르고 잠깐 졸았어요."
셀리의 물음에 대충 대답한 히오는 그들을 지나쳐 가게의 문을 향한다.
"그래? 난 또 클레어랑 너랑 둘 다 안 보이길래 밖에서 노는 줄 알았지."
순간, 히오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클레어가······ 여기 없다고요?"
"응. 좀 전에 방에 가봤는데 없었어."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자신에게 약을 발라줄 때만 하더라도 하루종일 능력을 갈고닦아 꼭 아카데미에 갈 것처럼 굴던 클레어가 아니었나.
그런데 셀리가 시킨 것도 없는데 밖에 나갔다?
마을 아이들은 수준이 맞지 않다며 방에 틀어박혀서 나가지도 않는 애가?
"음··· 산책이라도 나갔나 보네요. 제가 찾아올게요."
번져가는 불안감을 밀어넣은 히오가 셀리에게 그리 말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클레어는 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낑낑대며 능력 수련을 일삼는 것이 클레어의 하루 일과였으며 밖에 나가 수련은 결코 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 능력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셀리와 히오 그리고 클레어 본인밖에 없는 탓이다.
스킬 사용자라는 것이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는 사실을 이상할 정도로 잘 알고 있는 셀리와 클레어였으니.
그런데 그런 클레어가 하필 이 타이밍에 밖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로 단순한 산책일 수도 있긴 하지만······.
'······.'
그렇다면 저 멀리 피어 오르고 있는 검은 연기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4화 비폭력주의(4)
클레어는 눈치가 빠르고 상황 파악 능력이 뛰어나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그 능력을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을 뿐.
게다가 그 네 명의 나쁜 놈들은 대놓고 또 보자는 말까지 했지 않나.
당장은 사람들이 많이 몰려왔기에 물러갔지만, 사람들이 없는 시간이 되면 분명 다시 돌아와서 위해를 가할 것이다.
녀석들이 무엇을 원하는 건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세상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탓이다.
하지만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그 불쾌한 눈빛과 행동.
그것만 봐도 결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에 클레어는 집을 나섰다.
'마을에 들어오기 전에 막아야 해.'
사람들을 우르르 끌고 갈 수는 없다.
명분도 없거니와 자신에게는 그럴 권한도 없었으니.
그래도 먼저 가지 않으면 결국 당하는 것은 자신일 거란 사실은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나쁜 놈들!'
아래층이 소란스럽기에 방에서 나왔다가 얼마나 놀랐던가.
연신 죄송합니다 거리며 가만히 맞고만 있는 히오와 그런 히오를 낄낄거리며 거침없이 때리는 네 명의 험상궃은 사내들.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할 법도 했건만, 클레어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뛰어 내려가 히오를 지켰다.
그리고 녀석들은 자신의 화염을 보고서도 겁먹지 않았다.
겁먹기는커녕, 오히려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바라봤으니.
'위험해.'
그런 녀석들이 다시 한번 갑자기 쳐들어온다면 그때는 정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으리라.
클레어 혼자라면 모를까.
히오와 셀리는 아무런 능력도 없으니 크게 다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보 같애."
생각이 히오에게 닿자 자신도 모르게 한숨 섞인 중얼거림이 새어나온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어린아이들이 선을 넘는 말을 하며 놀려도 그저 허허 웃고 마는 바보 같은 사람.
아니, 그냥 바보.
오늘처럼 그렇게 구타를 당했음에도 짜증 한번 내지 않는 그 모습이 예전에는 신기했다면 지금은 그저 한심할 따름이다.
이전에야 그저 성격 좋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지난 2년간 지켜본 바로는 그 스스로가 화내기 무서워하는 그저 겁쟁이였다.
마치 저항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은 사람처럼.
"그래도 좋은 사람이니까 내가 지켜야 돼."
클레어의 스킬은 꽤 발전한 상태이다.
아무런 기초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매일 같이 연구하고 연습한 결과.
목표한 지점에 화염을 날릴 수 있는 경지까지 이뤄낸 것이다.
그러니 이런 계획도 할 수 있는 것이었고.
'일단 녀석들을 발견하면 멀리서 계속 불을 던지는 거야.'
혹, 녀석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다가온다면 똑같이 도망가며 던지면 그만이다.
타격을 입은 녀석들은 결국 겁먹고 도망칠 수밖에 없겠지.
세상에 불을 무서워하지 않는 생물은 없으니까 말이다.
"음······ 분명 이쪽 방향으로 갔는데···?"
클레어의 발걸음이 마을에서 점차 멀어져 간다.
* * *
녀석들을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꽤 지난 후였다.
역시나 다른 마을로 간 것이 아니라 인근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구태여 모습을 숨길 생각도 없는 듯 길과 인접한 곳에 자리 잡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도리스 일행.
클레어는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며 심호흡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이 능력이 사람을 향하는 것은 처음이다.
심장이 콩닥거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다.
'진짜로 불에 맞으면 분명 겁먹고 도망칠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클레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재능있고 영리하며 눈치가 빠르지만, 세상 일은 그것만으로 해결되지 않음을 아직 몰랐으니.
"······간다."
결심을 굳힌 클레어의 손 위로 주먹만한 화염 두 덩이가 빠르게 생성되었다.
화염구 하나는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의 다리로.
나머지 하나는 위협용으로 다른 녀석의 바로 옆을 향해 던졌다.
클레어의 생각대로 빠르게 날아가는 두 개의 화염구.
"응?"
그리고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도리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는 이미.
"끄악! 뭐, 뭐야!"
바로 앞에 당도한 주먹만한 화염이 그의 바지에 옮겨붙어 버린 후였다.
"불, 불이다!"
"갑자기 뭐야!"
덩달아 놀란 나머지 세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주위를 경계했고 곧바로 이 사건의 원흉을 발견해내었다.
"계집! 스킬 쓰는 계집이 왔다!"
"이런 정신나간년이···!"
클레어도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는 이미 새로운 화염구 두 개가 그 작은 손 위에 떠오른 채였으니.
"나쁜 놈들아! 이거나 먹어!"
화염구는 정확히 하만과 폴케를 향해 날아가지만.
"뭐야 이 느려터진 건."
용병으로서 나름 노련한 그들에게는 그저 같잖은 짓거리일 뿐이었다.
제법 빠르게 날아온다고는 해도 거리가 있고 자신을 향해 똑바로 날아오는데 피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나.
놀랐던 마음을 진정하고 사태가 파악되자 도리스를 포함한 네 명의 입가에는 진득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흐흐흐흐. 제 발로 찾아오다니···."
"이런 횡재가!"
"밤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잖아?"
도리스의 바지에 붙었던 불도 어느새 꺼진 후였다.
아직 클레어의 화염은 그 정도인 것이다.
흙으로 대충 비비면 꺼지는 빈약한 화염.
도리스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으며 클레어를 바라본다.
"혼자 왔니?"
클레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뭔가 잘못됐다.
첫 공격에 상대는 놀라며 허둥댈 것이라 생각했다.
두 번째 공격에는 불을 보고 겁을 집어먹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상대의 대처가 너무 빠르고 정확하다.
첫 실전을 겪는 소녀와 노련하다 못해 비열하기까지한 용병들의 차이인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클레어는 지체없이 등을 돌렸다.
"잡아!"
"으흐흐흐. 어디 가니?"
"너도 내심 우리랑 놀고 싶었구나!"
도망치며 화염을 만들어내어 쫓아오는 놈들을 향해 지체없이 던진다.
하지만, 역시나 소용이 없다.
"아가야. 우리가 깨우친 자를 몇 명이나 만나본 줄 아냐?"
"그런 괴물들도 만나봤는데 우리가 겁먹을 줄 알았나 본데."
"너 같은 햇병아리는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목소리에 클레어는 입술을 짓씹었다.
혼자 수련할 때는 스스로가 천하제일이 된 것만 같았었다.
불을 계속 만들어내며 그것을 멀리 날릴 수 있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혼자 수련할 때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사실.
느리고 위력이 약하다.
당연하게도 그것을 더 빠르게, 더 강하게 하는 법 따위는 알지 못한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기에 스스로 깨닫는 수밖에 없다.
허나 그것을 생각하기에는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도 급박했다.
"오, 오지 마!"
만들어낸 화염을 녀석들에게 뿌린다.
"으하하하! 네가 먼저 와놓고 우리보고는 오지 말라니?"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더욱 가까워져 있다.
더 빠르게, 더 강하게 해야만 한다.
재차 만들어진 화염이 다시금 클레어의 손 위로 떠오른다.
'더 빠르게···!'
화염구의 속도를 빠르게 하는 법 따위는 모른다.
그렇기에 그저 속으로 강하게 염원하며 날릴 수밖에 없다.
"······음."
"반항하기는······."
자신의 이마를 향해 정확하게 날아오는 화염구를 간신히 피해내며 도리스와 하먼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당황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화염이 날아오는 속도가 이상하게 빨라진 것 같았지만······ 이는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배운 적도 없고 깨우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게 몇 번 만에 스스로 그 방법을 깨달을 리가 없지 않나.
'······거리가 가까워졌으니까 그런 거겠지.'
잠깐의 놀람을 그렇게 무마시키며 계속 클레어의 뒤를 쫓는다.
"······."
하지만 저 앞에서 다시 생겨나기 시작하는 화염을 보고 있자니 문득 위화감이 들고야 마는 것이다.
'벌써?'
화염이 만들어지는 시간이 더 짧아진 것 같다.
처음만 하더라도 화염을 집어던지고 조금의 집중 후에 다시 생겨나는 듯했는데 이제는 피하자마자 고개를 드니 바로 이글거리는 화염이 눈에 들어오지 않나.
그리고 위화감의 정체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저리 가라고 했어!"
클레어의 외침과 함께 날아오는 화염구.
본디 주먹만 했던 그 크기가 분명하게 더 커져 있다.
"······!"
순식간에 코앞에 당도한 화염구를 고개를 숙여 간신히 피해냈지만, 화끈한 열기가 얼굴에 훅 불어닥친다.
그제서야 도리스는 확신하는 것이다.
눈앞의 계집은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
"조심해! 뭔가 이상하다!"
도리스가 그렇게 경고했지만, 이미 거리가 좁혀진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그저 검을 조금 더 몸에 바짝 붙이고 경계심을 키우는 것.
그리고 그 경계심이 절정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클레어의 화염구는 완성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이전보다 조금 더 커진 크기로.
이전보다 조금 더 빠른 빠르기로.
"날아온······!"
그렇게 날아오는 화염구를 도리스는 피했지만, 파울로는 그러지 못했다.
그렇기에 검으로 막아내려 했지만.
퍼엉-!
검과 닿은 화염구가 폭발할 줄은 누가 알았겠나.
"크악!"
비록 작은 폭발에 불과했지만, 정면으로 들이박은 그 반발력이 더해져 뒤로 나뒹구는 파울로.
그것을 확인한 도리스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이 계집이······!"
남은 폴케와 하만 또한 웃음기를 거두고 긴장을 끌어올린다.
클레어와의 거리는 이제 불과 수 미터.
저 화염을 두 번 정도만 더 피해낼 수 있다면 도리스의 승리이다.
하지만 거리가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말은 더욱 피하기 어려워졌다는 말과 같았으니.
"집중해! 또 온다!"
다시 생겨난 화염구가 이번에는 도리스의 양옆에 있는 두 사람에게 쏘아진다.
그에 폴케와 하만은 잔뜩 긴장하면 피할 준비를 마쳤지만···.
퍼엉-!
콰앙!
두 개의 화염구는 그들을 직접 타격하는 것이 아닌, 두 사람의 발밑에 내리꽂히며 폭발을 일으켰고.
"으악!"
"크윽!"
전혀 예상치 못했던 폭발에 폴케와 하만은 달려가는 방향 그대로 허공에 붕 떠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 계집년이 감히!"
자신의 화염이 폭발하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클레어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도망치면서도 성장하는 스킬도 그렇고 빠른 판단과 실행력도 그렇고.
보통내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쫓아가는 것을 멈출 수도 없었으니.
마을과의 거리가 제법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클레어가 이대로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면 상황이 제법 심각해진다.
네 명 중 세 명이 부상을 당한 상태.
마을 사람이 몰려온다면 적어도 수십 명은 몰려올 것이고 부상을 입은 모습은 그들에게 이전과 같은 위협을 주지 못하리라.
클레어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겁먹은 마을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두들겨 맞아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썩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서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건만, 그보다 눈앞에 화염이 만들어지는 속도가 더욱 빠르다.
거의 코앞인 만큼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x발!'
오랜시간 용병으로 구른 도리스는 빠르게 판단했다.
거의 다 잡은 계집을 포기하는 것은 아깝기 그지없지만, 냉정하게 자신이 클레어를 잡는 것보다 저 화염이 먼저 자신에게 닿는다.
일단 멈춰 서서 저것을 피한 다음, 나머지 세 놈을 챙겨 몸을 숨겨야 하리라.
'그리고······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
이제는 단순한 욕망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을 이토록 짜증나게한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하리라.
그렇게 도리스가 이를 빠득 갈며 멈춰 서려는 찰나.
"으윽······."
이글거리며 커져가던 화염이 돌연 픽하고 꺼져버린다.
그와 동시에 비틀거리는 클레어.
도리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하, 하하하하! 마력이 다 떨어졌구나. 계집!"
깨달은 자들이라고 해서 자신의 스킬을 무한정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마력이라는 게 있어 그것을 전부 소모하면 힘을 잃고 탈진한다고 들었다.
물론 그런 현상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단박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클레어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화염이 사라지고 혼자 비틀거리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으니.
"하하하하! 이 썩을년!"
그 붉은 머리칼이 도리스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은 금방이었다.
"저리 가······ 이 나쁜······."
도리스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머리채가 잡힌 클레어가 중얼거리지만,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 그 말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시야가 어지럽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런적은 처음이었다.
화염구는 수십 번을 써도 멀쩡했었는데······.
"큭큭··· 드디어 잡았다."
한 손으로는 클레어의 붉은 머리칼을, 다른 손으로는 클레어의 양 뺨을 쥐고 그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는 도리스.
"네년을 어찌해줄까."
그 표정에는 정복감이 진하게 퍼져 있었다.
제 발로 굴러들어온 클레어를 쉽게 보고 쫓아갔으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격렬한 저항.
그에 포기하려던 찰나 갑작스런 마력 탈진으로 운 좋게 잡아냈으니 그 기쁨이 배가 되는 것이다.
"크으··· 형님. 그 계집년 한 대만 때려도 됩니까?"
"이 개같은 년이 감히······."
화염구를 맞고 나가떨어졌던 나머지 세 녀석도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합류했다.
화염구를 검으로 막았던 파울로는 곳곳이 검게 그을렸고 바닥을 나뒹굴었던 폴케와 하만은 흙투성이에 절뚝거리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결코 큰 부상이라 할 수는 없었으니.
클레어의 어지러운 시야 속에서 그들은 절망이 되어 다가오는 것이다.
"어찌할까요 형님."
"일단 이년 끌고 짐 챙기고 야영지 옮겨야지."
"그전에 몇 대만 때려도 됩니까? 이 쪼끄만 계집 때문에 다리가 욱신거리는데."
"맘대로 해라. 얼굴은 때리지 말고."
"예. 흐흐흐."
클레어가 중얼거린다.
"오지 마······."
당연하게도 세 사람은 신경 쓰지도 않는다.
"일단 거추장스런 옷은 다 벗기고 가죠."
"그게 좋겠다."
"크흐···.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으니 우리가 실컷 봐주마."
그 끔찍한 대화를 들으며 클레어는 다시 한번 입을 연다.
"오지 말라고··· 제발······."
그 목소리에 세 사람은 물론, 도리스까지 코웃음을 친다.
"아까는 그렇게 상황 파악을 잘하더니 이제 와서 오지 말라고?"
"하하하! 걱정 마라. 살살 할 테니."
"저리 가······ 오지 마······."
세 명이 거의 코앞까지 다가왔음에도 클레어의 중얼거림은 멈추지 않는다.
"오면 죽어······ 멍청아."
그 말의 대상이 세 사람이 아닌 까닭이었다.
흐릿한 시선은 세 사람이 아닌, 도리스의 뒤쪽을 향해 있다.
"겁쟁이가······ 여긴 왜 와······."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 초점이 잘 잡히지 않지만, 그럼에도 알 수 있다.
지난 이 년간 매일을 함께 했던 사람이기에.
저벅저벅 다가오는 그 모습이 어쩐지 평소와는 조금 다르지만, 클레어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혼자 온단 말인가.
가뜩이나 겁도 많은 사람이.
당장 말려야 하건만 양 뺨이 붙잡혀 있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기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손을 들어 올렸다.
바들거리는 손을 간신히 내젓는다.
오지 말라고.
들키기 전에 도망치라고.
클레어가 그렇게나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야."
낮게 깔린 익숙한 목소리가 기어이 들려오고야 만다.
도리스 일행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하고.
"손 떼라."
고개를 돌린 그들의 시야에 담긴 것은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한 사람.
그리고.
"진짜 죽여버리고 싶으니까."
그 뒤로 보이는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
5화 비폭력주의(5)
거칠게 잡혀 있는 클레어의 붉은 머리칼.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740 / 1000)]
반쯤 감긴 눈으로 이곳을 향하는 시선.
파들거리는 손으로 간신히 내젓는 손동작.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755 / 1000)]
차마 입에 담기도 끔찍한 망언을 내뱉으며 클레어의 주위에 있는 네 명의 사람. 아니, 짐승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770 / 1000)]
그 모습을 눈에 담고도 저벅저벅 걸어가는 것은, 그야말로 인내하기 위함이다.
이대로 뛰쳐 갔다가는 특성이고 나발이고 참지 못할 것만 같았기에.
"손 떼라. 진짜 죽여버리고 싶으니까."
살기가 짙게 배인 낮은 목소리에 도리스 패거리의 시선이 히오를 향한다.
"뭐야 저놈."
흠칫 놀란 것도 잠시, 그 얼굴을 확인한 네 명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 비실이잖아?"
"꼴에 남자라고 따라왔네."
"진짜 남편이라도 되는 거 아니야?"
입으로는 낄낄거리며 비아냥대면서도 도리스의 눈은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없다.
마을 사람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놈은 진짜 혼자서 온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도리스는 더욱 세게 클레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이 년 찾으러 왔냐? 그런데 이거 어쩌지. 얘는 우리가 좋다는데."
클레어의 얼굴 옆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대며 히죽 웃는 도리스.
그렇게 머리칼을 마구 잡아당기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저항감이 없다.
처음 겪는 마력 탈진으로 한계까지 버티던 클레어의 의식이 결국 끊어지고 혼절한 탓이었다.
"이런······ 깨어 있었으면 좋은 구경 했을 텐데 아쉽네."
클레어가 기절한 것을 알아차린 도리스가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아쉬운 대로 네가 우리 화풀이 대상 좀 되어줘야겠다."
도리스는 일말의 의심조차 품고 있지 않았다.
녀석은 평범한 시골의 평범한 여관 직원일 뿐이다.
자신들의 행패에도 아무 말 못하고 그저 맞고만 있던 약해빠진 머저리.
그렇기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마디 대꾸도 없이 다가오는 그 모습이.
"야, 너 돌았냐? 상황파악이 안 돼?"
분노로 정신이 어떻게 되어버린 것인가.
벌벌 떨며 그냥 놓아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정색하는 표정이 상당히 이질적이다.
"뭐, 이 계집이 그럴만한 얼굴이긴 한데······."
기절한 클레어를 힐끗 내려다본 도리스가 스스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사내라면 홀릴 수밖에 없는 외모.
촌구석의 투박한 여인네들 사이에서 더욱 압도적이었을 테니 녀석이 저리 사리분별 못하고 달려온 것도 얼추 이해는 간다.
"새끼, 너도 남자긴 남자구나? 그래 알겠으니까 그쯤에서 멈추고 싹싹 빌어봐."
도리스의 말에 낄낄거리던 하만 등이 옆에서 거든다.
"혹시 아냐? 네가 진짜 맛깔나게 빌면 우리가 봐줄지도?"
"크크크. 우리가 이 계집한테 바짝 약이 올라 있는 상태라 웬만한 재롱으로는 봐주기 힘들지."
"네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서 한 일주일 정도 데리고 놀다가 보내 줄 수도 있고."
그런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히오의 인내력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는 사실을 도리스 일당은 알 턱이 없었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773 / 1000)]
여러 조롱과 협박이 담긴 말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그저 걸어오기만 하는 히오.
자신들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무시하는 듯한 히오의 태도에 네 사람의 인상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이 새끼가 좋게 말해주니까···."
파울로가 대표로 검을 움켜쥐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다리를 다친 하만, 폴케와 달리 파울로는 그을리기만 했을 뿐, 딱히 다친 곳은 없는 탓이었다.
"형님, 이 새끼 완전 정신 나간 것 같은데 그냥 빨리 죽이고 가죠?"
히오를 친히 마중 나가던 파울로가 고개를 돌려 도리스에게 말했다.
"별 재미도 못 볼 것 같은데."
녀석은 분노로 정신이 나가버린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혼자서 저리 겁 없이 다가올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그러니 그냥 빨리 죽여도 되냐는 허락을 구하기 위해 도리스를 돌아봤건만······.
"······파, 파울로······."
도리스의 반응이 뭔가 이상하다.
아니, 도리스 뿐만 아니라 그 옆의 하만과 폴케의 반응 역시 도리스와 똑같았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크게 확장된 동공.
자신이 아닌 뒤쪽을 향해 있는 시선.
조금씩 뒷걸음치는 걸음.
"에? 형님?"
단언컨데 도리스의 그런 표정은 파울로조차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들이 함께한 세월이 얼마던가.
용병으로 온갖 짓거리를 해온 경험이 얼마였던가.
닳고 닳은 그들을 놀라게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드문 것이었다.
'응? 그러고 보니 언제 이렇게 어두워졌지?'
파울로가 앞으로 걸어가다 말고 뒤를 돌아본 짧은 시간.
10초도 되지 않을 그 짧은 시간에 해가 저물기라도 한 것마냥 주위가 어둑해져 있다.
놀라서 주춤거리는 도리스.
급작스레 어두워진 하늘.
파울로가 재차 뒤를 돌아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
그 역시 도리스와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 멈춰선 채 입을 쩍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태양을 집어삼킨 먹구름.
그 사이에 번뜩이는 스파크.
내려치는 벼락과
콰앙-!
그 아래 있는 한 사람.
이전과 다름없는 표정과 걸음걸이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그 사람을 본 파울로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사내의 주위에는 하늘에 번뜩이는 벼락과도 같은 스파크가 미친듯이 번쩍이고 있었기에.
"뭐, 뭐야!"
이런 스킬은 들어본 적도 없다.
날씨를 바꾸고 벼락을 떨어트리는 인간이라니.
그런 걸 더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혀, 형님··· 이게 대체······?"
상식을 벗어난 일에 파울로는 습관적으로 도리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혀, 형님?"
보이는 것은 전속력을 다해 도망치고 있는 도리스의 뒷모습뿐이었다.
"저도 가, 같이···!"
파울로가 허겁지겁 그 뒤를 따르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야."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저음의 목소리가 그 바로 뒤에서 들려온다.
온몸에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을 느끼며 파울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히익!"
바로 뒤에서 고개를 바짝 들이밀고 있는 히오를 보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 그게······ 자, 잘못 했······."
저게 정녕 사람의 모습이란 말인가.
몸 주위에는 끊임없이 스파크가 튀어 오르고 그 눈은 이미 번개로 물든 듯 새하얗게 타오르고 있다.
그 뒤로 보이는 하늘에는 마치 비처럼 번개가 쏟아지고.
꽈앙-!
때마침 들려온 천둥소리에 놀란 파울로의 몸이 크게 떨린다.
"죽여버리고 싶은데. 어찌해야 할까."
눈에 벼락이 가득 담긴 채로 진심으로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히오를 보며 파울로는 그저 비는 수밖에 없었다.
"사, 살려······ 잘못 해, 했습니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찌르르 떨린다.
어느새 자신의 몸에 스파크가 번져 튀고 있는 것이었다.
그저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럴진데 저 몸에 닿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한줌 재가 되어 뼛가루도 남기지 못할 것만 같다.
"죄, 죄송합니다··· 제, 제발······."
몸에 튀는 스파크로 인해 말조차 잘 나오지 않는다.
그 찌릿함과 공포심에 지려버렸는지 바지가 축축하지만, 그딴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자는 인간이 아니다.
벼락의 신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되지 않나.
날씨를 바꾸고 벼락을 다루며 몸에서 그것을 뿜어대는 인간이라니.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용병으로서 수많은 전장을 누볐고 수많은 의뢰를 수행하며 수많은 깨달은 자들을 보았다.
그런 그들도 눈앞의 이 괴물에 비한다면 한낱 인간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파울로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게 네가 말한 맛깔나게 비는 법인가."
마치 사신과도 같은 그 목소리와 함께.
콰앙-!
다시 한번 벼락이 내리친다.
파울로의 몸이 크게 들썩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
"죄, 죄송하, 합니다······. 몸이 찌, 찌릿거려서 말이 잘 아, 안 나와서······ 죄, 죄송······."
덜덜 떨며 고개를 숙이는 파울로에게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는 히오.
새하얗게 타오르는 그 눈을 마주친 파울로는 공포심에 눈물까지 흘리며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저 몸에 자신의 몸이 닿을까 봐 미친 듯이 두렵다.
닿는 순간 끔찍한 고통과 함께 잿가루가 되어버릴 것이기에.
"······꺼져라. 그 하찮은 목숨, 연명하고 싶다면 얼씬도 하지 말고."
"예, 예. 가, 감사합니다···!"
파울로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기어가다가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풀려 중간에 넘어지기도 했지만, 온 힘을 다해 다시 몸을 일으켜 전속력으로 도망가는 파울로.
왜 저런 말도 안 되는 괴물이 이런 촌구석에 처박혀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저것은 진짜 재앙이다.
콰앙-!
"히, 히익!"
당장이라도 저 벼락이 자신에게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기에 파울로는 축축한 바지를 부여잡고 미친 듯이 도망가버리는 것이었다.
* * *
히오는 바들 거리며 안간힘을 다해 도망가는 파울로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짧게 중얼거렸다.
"x발. 깜짝이야."
뭔 천둥소리가 그렇게 큰지.
파울로가 고개 숙이고 있지 않았다면 덩달아 놀라서 움찔거리는 히오의 모습을 목격했을 터였다.
"어우 씨···. 더럽게 요란하다니까."
그저 몸 주위 일정 반경에 스파크가 튀기는 게 전부인 개쓰레기 스킬.
다만, 이 쓰레기 같은 스킬도 이펙트만큼은 미친놈이 따로 없다.
'이건 폭력으로 인정 안 되는 걸 아니까 통한 방법이지.'
녀석을 해할 목적이 아니라 단순 몸에 스파크를 두른 것이었고 이 히든 특성도 유도리가 있는 놈인지 이런 종류는 폭력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실수로 다른 사람과 부딪쳐 그 사람이 다쳤다고 해서 폭력을 행한 게 아닌 것과 비슷한 맥락인 것이다.
"······뭐, 어쨌든 다시는 올 생각 못하겠지."
덕분에 인내력도 크게 올렸고 클레어도 지켜냈다.
다만, 갑자기 내려치는 벼락에 놀랐을 마을 사람들이 걱정이기는 한데······.
"한동안 또 난리 치겠네."
갑작스런 이상 현상은 순박한 사람들에게 크나큰 공포일 테다.
"일단······ 돌아갈까."
기절한 클레어를 조심스레 안아 들고서는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히오.
언제 천둥 번개가 몰아쳤냐는 듯, 어느새 하늘은 깨끗해져 있었다.
* * *
예상대로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웅성이고 있었기에 기절한 클레어를 몰래 데리고 들어오기가 쉬웠다.
침대에 눕혀놓고 의자를 끌어와 그 옆에 앉았다.
'녀석들, 좀 다쳐 있었지.'
클레어의 스킬 위력은 잘 알고 있다.
아직 대단한 힘을 지니지는 못한, 그저 불을 일으키는 게 전부일 뿐인 스킬.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코 녀석들에게 그만한 상처를 입히지 못했을 테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그 짧은 순간에··· 발전한 건가.'
클레어가 녀석들과 만나고 전투가 일어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의 짧은 실전에서 스스로 깨닫고 성장했다라···.
'아카데미로 보낼 방법을 알아봐야 하나.'
이 정도의 재능이라면 혹, 스킬의 고점이 낮다 하더라도 스스로가 극한까지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극한까지 발전한 스킬은 최상위 스킬에도 결코 밀리지 않는다.
'클레어···.'
벤타이얼을 게임으로 즐기던 시절에는 듣지 못한 이름.
이곳은 게임이 아니다.
현실이다.
그런만큼 클레어 같은 사람도 많을 것이고.
"이제 슬슬 어비스가 나타날 텐데."
다른 랭커들이 잘 대비하고 있을지.
침식에 대한 해결방안은 찾았을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이는 제이슨을 통해서도 알아내기가 힘들다.
"뭐, 일단 힘부터 기르는 게 우선이니."
가장 가까운 목표인 인내력은 드디어 700대 후반으로 진입했다.
정말로 이제 목표치에 가까워져 가는 것이다.
'······2년을 인내했는데 제발 무사히 목표치에 도달하게 해주세요.'
갑작스레 사고가 터져서 이걸 다 날리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그렇게 혼자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자니.
"으음······."
문득 느껴진 클레어의 뒤척임에 상념에서 깨어났고.
"오지마······ 겁쟁아······."
악몽이라도 꾸는 듯 인상을 찌푸린 클레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 저리가 제발······."
그 붉은 머리칼을 쓱쓱 쓸어넘겨 주자 한결 편안해진 클레어의 표정.
'······기도는 개뿔. 나 답지 않게.'
신 같은 건 믿어본 적도 없다.
언제나 믿었던 것은 스스로의 능력뿐.
그것이 다리 병신이 되기 전의 이현승이었고.
지금 자신 역시 사지 멀쩡한 사람이다.
혹여나 사고가 생겨서 인내력과 스킬을 다 날린다?
그럼 뭐 어떻단 말인가.
인내력이 없으면 다시 처음부터 모으면 되고.
스킬이 없으면 까짓거 검이라도 들면 되지 않겠는가.
"겁쟁이 히오······. 내가 지켜줘야 돼······."
가만히 있어봐야 닥쳐올 것은 이 세계의 멸망 뿐이기에.
6화 폭력, 주의
"······이제 어떡하죠 형님."
"나도 몰라 이 새끼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 도리스 일행의 몰골은 처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클레어의 뒤를 쫓다 흙바닥을 나뒹굴고, 불에 그을리고.
물론 그중에 가장 끔찍한 것은 역시나 파울로였다.
눈물 콧물 다 흘린 것도 모자라 주위에는 지린내가 가득했으니.
"그딴 시골 마을에 스킬 사용자가 두 명이나 있었다니···."
도리스와 하먼, 폴케는 그야말로 본능적으로 도망쳤다.
용병으로서의 직감이 강하게 경고했기 때문이다.
저건 여태 보았던 깨달은 자들보다 더한 괴물이라고.
먹구름을 불러오고, 천둥 번개를 동반하며 그 자신이 마치 벼락처럼 번쩍거리는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본능에 따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발치에 기절해 있는 클레어나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는 파울로 따위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도망가지 않는다면 죽는다는 본능만이 머릿속에 가득했었으니.
"하아··· 저만한 마을을 찾기도 힘들 텐데."
"식량도 거의 떨어졌는데 어떡합니까 이제."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 마을에 들렸을 때 식량이라도 넉넉하게 훔쳐오는 건데.
언제든 올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방심했다.
"그러고 보니까 저희··· 그 식당에서 죽을 뻔한 거 아닙니까···?"
폴케의 말에 세 사람의 몸이 흠칫 굳었다.
처음 방문한 식당에서 그 괴물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뺨을 때렸지 않나.
돌이켜보니 진짜 미쳐도 단단히 미친 짓이었다.
"그런 괴물이 대체 왜 힘을 숨기고 시골에 박혀 있는 거야."
"낸들 아나. 악취미도 진짜 끔찍한 악취미네."
"에휴······ 모르겠다. 일단 좀 쉬자."
얼마나 열심히 도망쳤는지 여기가 어디쯤인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렇게 그들이 어딘지도 모를 풀숲에 널브러져 있을 때.
딸랑-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종소리.
딸랑- 딸랑-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그 종소리에 도리스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딸랑-
용병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떠돌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어나. 어서!"
악인들에게만 찾아온다는 종소리에 관한 전설.
어찌나 신출귀몰한지 수십 년째 제국과 반목하면서도 그 꼬리조차 잡지 못했다는 기이한 단체.
악인의 낙원.
악인들의 성지.
대륙 최악의 범죄집단.
흑아(黑牙).
그들이 등장할 때면, 언제나 소름 끼치는 종소리가 함께한다고 한다.
"용병 도리스, 용병 하만, 용병 폴케, 용병 파울로."
종소리 사이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발터 용병단 소속이었으나 같은 소속 용병들과 의뢰인을 살해. 재화를 들고 도주. 그전에도 강간, 살인 등의 범죄를 남몰래 저지르고 다닌 것으로 확인······."
목소리와 함께 낯선 모습의 다섯 명이 마치 안개처럼 도리스의 눈앞에 나타났다.
"맞나?"
온통 검은색인 로브를 뒤집어쓴 다섯 명의 복면인.
그것을 확인한 도리스는 재빨리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혹시 흑아에서 오셨습니까···?"
도리스의 물음에도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는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맞나?"
"아, 예! 맞습니다!"
비열한 놈들 답게 눈치 하나는 재빨랐던 나머지 세 명이 도리스를 따라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저희가 한 것이 맞습니다!"
어느새 짙게 깔린 안개.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괴한 종소리.
음산한 흑의인의 모습과 음성.
"흑아에서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
그 말에 바짝 엎드린 도리스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스스로가 악인임을 알고 있는 마당에 이보다 더 달콤한 말이 있을까.
흑아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더이상 도망 다니지도, 숨어 다니지도, 먹을 것을 걱정하며 짜증 내는 일도 없으리라.
"영광입니다! 꼭 흑아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도리스의 말에 나머지 세 명 역시 기쁨에 가득한 목소리로 한 마디씩 거들었다.
"흑아에 충성하겠습니다!"
"목숨 바쳐 따르겠습니다!"
그런 그들을 내려다 보는 흑의인의 음성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배어있지 않았다.
"흑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증명해야 한다."
"증명하겠습니다!"
"어떤 시련이든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저 떠도는 이야기로만 듣던 전설적인 단체, 흑아에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에 네 사람의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갔지만.
"오면서 보니 근처에 마을이 하나 있더군."
곧 이어진 흑의인의 말에 순간 머릿속이 하얘질 수밖에 없었다.
"마을의 주민을 모두 죽이고 불을 질러라. 그리고 너희의 이름을 똑똑히 새겨놓아라. 그것이 흑아의 시험이다."
흑아의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고 결속이 단단한 이유였다.
흑아에 들어오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 악명을 널리 떨쳐야만 했으니.
제국의 힘은 강대하고 악인에 대한 자비는 결코 없다.
이렇게 대놓고 악명을 떨치면 이제는 뒤가 없어진다는 말이었다.
오로지 흑아에 충성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법이라는 것.
"그······ 혹시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히오에 대한 공포심이 가장 큰 파울로가 용기를 쥐어짜내 물었고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굳이 우리의 목격자를 살려두지 않는다."
즉, 거절하면 이 자리에서 모두 죽는다.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도리스가 최대한 조심스레 흑의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마을에는······ 스킬 사용자가 두 명이나 있습니다. 저희도 방심하고 갔다가 조금 당하는 바람에······."
"그래서, 못하겠다는 말인가."
"아,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못하면 죽는다.
공포스러운 분위기와 흑의인의 모습에 압도된 도리스는 도저히 다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 너희 수준으로 스킬 사용자 두 명은 힘들겠지. 그 두 명은 우리가 맡겠다. 단, 주민들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워야 하며 너희의 이름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새겨놔야 할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도리스의 대답에 흑의인은 품에서 어떤 물건을 하나 꺼내 도리스의 머리 옆에 툭 던졌다.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진 종이었다.
"준비되면 종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 번 울려라. 찾아오겠다."
"예, 예···. 감사합니다······."
도리스의 감사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한동안 그렇게 있던 도리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어느새 안개와 함께 흑의인 또한 사라진 채였다.
발걸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말이다.
"······후우···."
"형님··· 진짜 어떡합니까?"
"그 마을에 괴물이 있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 한심한 모습에 돌연 짜증이 치솟은 도리스가 버럭 소리 질렀다.
"멍청한 놈들아! 우리한테 능력이 없다고 떠들고 다닐 거냐!"
"하, 하지만 진짜 거기엔 괴물이······."
"그래. 그놈이 문제지. 그래도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놈만 없으면 된다는 거 아니겠냐."
그 괴물 같은 놈만 어떻게든 다른 곳으로 유인하고 그 사이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죽인다.
그것만 재빠르게 할 수 있다면 자신들은 흑아에 소속되어 안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곳도 아니고 흑아잖아. 방금 그 다섯 분이라면······ 그 괴물도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확실히··· 진짜 말로만 들었지 무서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사람인지 귀신인지··· 게다가 다섯 분이나 오셨으니 진짜 해볼만 할지도······."
벼락을 다루던 그 괴물도 괴물이었지만, 귀신처럼 나타난 흑아의 사람들 또한 그에 못지않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쪽은 무려 다섯 명이 아닌가.
"절대 안 됩니다 형님! 다들 그 괴물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닥쳐라 파울로! 그럼 여기서 우리가 다 죽었어야 했냐고!"
"그, 그건 아니지만······."
"어차피 선택지는 없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음 단단히 먹어라. 흑아다. 제국에서도 잡지 못하는 단체, 흑아라고."
"······예."
도리스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스산하게 번뜩인다.
뒤가 없는 자의 눈빛.
마음 단단히 먹은 것이다.
"엎질러진 물이다. 그 괴물은 흑아에 맡기고 여차하면 그 계집까지······."
* * *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이틀전, 몰아쳤던 벼락세례 이후로 쭉 날씨는 맑았고 그에 마을 사람들의 불안도 조금씩 사라지는 중이었다.
"호구다!"
"이야! 호구야아!"
히오는 아이들에게 여전히 최고의 장난감이었으며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히오는 몰려든 아이들을 쳐내지 않았다.
적응된 탓에 이제 이 정도의 놀림으로는 인내력이 오르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도 이제 목표치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시달리다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면 뾰로통한 표정의 클레어와 마주하는 것까지 평범한 일과였다.
"마음에 안 든다니까."
"뭐가. 왜 또."
"그 겁많은 성격 좀 고쳐볼 생각 없어?"
"누차 말하지만, 나는 겁이 많은 게 아니라 비폭력주의자일 뿐이야."
심지어 이런 대화마저도 지극히 일상적이다.
다만 여기서부터는 조금 다르기는 했는데.
"······그래. 그렇다고 쳐줄게."
클레어의 반응이 이틀 전의 사건 이후로 사뭇 달라진 것이다.
"응? 그게 끝이야?"
"그, 그럼 뭐."
"아니 평소 같으면 헛소리하지 말라느니. 겁쟁이, 한심하기는, 멍청해 등등··· 이런 말이 나올 차롄데?"
"······됐어! 나 올라 갈 거야."
괜히 소리를 빽 지르고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클레어.
마력 탈진으로 기절했다 깨어난 클레어에게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가 그 못된 녀석들을 쫓아냈다고 말했다.
잠시 미심쩍어하기는 했지만, 클레어는 금세 수긍하고 말았다.
그야 겁쟁이 히오가 혼자서 그 녀석들을 물리칠 수 있었을 리는 없었으니까.
물론 클레어가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본다면 바로 들통 날 거짓말이다.
하지만 클레어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알기에 할 수 있는 거짓말이기도 했다.
그야 클레어는 이 마을의 제일가는 아싸였으니.
스스로는 본인이 따돌리고 있는 거라 말하고 다니지만, 그게 그거였다.
결국 친구는 없다는 말이었으니까.
어쨌든 그날 이후로는 겁쟁이라는 말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는 게 보인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왔다고는 하지만, 클레어의 눈에 보인 것은 오로지 히오 혼자였으므로.
그 겁많은 히오가 자신을 위해 선두에서 달려왔을 거라는 생각에 괜스레 마음이 이상해지는 것이었다.
'흥! 마을 꼬맹이들한테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거기는 또 어떻게 왔대?'
그런 생각과 함께 쿵쿵 발소리를 내며 위로 올라가는 클레어.
그리고 그런 클레어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 히오.
"에휴··· 청소나 하자."
사춘기가 늦게 온 건지···. 도통 저 변화무쌍한 감정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래도 그놈들은 여기 얼씬할 생각도 못하겠지.'
스스로가 보기에도 말도 안 되는 스킬 이펙트였다.
게임의 극후반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그런 효과.
저런 질 낮은 놈들일수록 제 목숨은 끔찍이 여기기에 이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이다.
'혹시 모르니 제이슨이 오면 부탁은 해놓자.'
그래도 뒷맛이 찝찝한 것도 사실.
조만간 제이슨이 다시 방문하기로 했으니 그가 왔을 때 녀석들의 확실한 마무리를 부탁할 작정이다.
'그리고 인내력을 다 채우면··· 떠나야겠지.'
머지않은 시기에 인내력이 목표치인 1000에 도달할 테다.
그럼 마을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해야 하리라.
어디로 향할지는 진작에 정해놓았다.
'마지막 마법사의 무덤···.'
인내력을 다 채우면 히오가 반드시 들려야 할 곳.
이 마을에 온 것은 오로지 제이슨 때문만은 아니었다.
초창기에 구석구석 안 가본 곳이 없던 지역 중 하나였던데다가 오직 그만이 알고 있는 던전이 근처에 있는 탓이었다.
- 마지막 마법사의 무덤
그 던전은 게임 초창기에 히오가 발견하고 빼먹을 건 다 빼먹은 뒤에 폐쇄했으니 아는 사람은 없을 터.
그렇기에 마을을 나온 다음, 첫 목적지로 정한 것이다.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 그곳에는 존재했었으니까.
"자, 일단 청소부터!"
스스로 기합을 바짝 넣은 채 열심히 걸레질하는 히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2년을 인내했고 앞으로 겨우 몇 달.
순박한 마을 사람들과 헤어지게 되는 건 아쉽지만, 이는 이들을 지키고자 하는 행동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나름 평화로운 이 시간을 딱 몇 달만 더 만끽하자.
···분명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불이다! 불!"
"저, 저게 뭐야!"
"부, 불이야!"
마을이 불바다가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7화 폭력, 주의(2)
"아이고 이게 뭔 일이래."
"저거 여기까지 번지면 일 나는 거 아니여?"
"이럴 게 아니라 남자들은 물 길으러 갑시다!"
다행히도 불이 난 곳은 마을 안쪽이 아닌, 조금 떨어진 바깥쪽이었다.
히오가 있는 가게와는 정반대 편으로 제법 뛰어가야 하는 거리.
"불이 마을까지 오기 전에 빨리 가봅시다!"
"어서! 거기 히오 총각도 좀 거들어주게!"
"아, 예."
농사짓는 빌의 손짓에 히오는 얼떨결에 따라가면서도 은연중에 의문이 피어오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불···? 갑자기?'
이곳이 현대 사회도 아니고 저만한 불이 마을 바깥에서 날 일은 거의 없다.
기껏 해봐야 여행자들이 실수로 불을 내는 경우··· 아니면.
'스킬 사용자.'
클레어와 같은 화염스킬 사용자가 내는 불.
하지만 클레어는 조금 전까지 자신과 같이 있었다.
'일단 가볼까.'
스킬 사용자들끼리 싸움이라도 붙은 건지.
아니면 정말 단순한 사고인지.
어찌 됐건 불이 더욱 커진다면 마을까지 옮겨붙을 것이 분명해 보였기에 일단 가서 끄기는 해야 했다.
* * *
"뭐야!"
"아무도 없잖아?"
마을에서 그나마 젊은 남자들과 함께 도착한 현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커다란 불이 타닥타닥 타오르며 그 크기를 조금씩 키워가고 있을 뿐.
"이 망할 여행자들이 불 내놓고 도망갔구나!"
"괘씸한 놈들."
"며칠 전에 왔던 그 험악하게 생긴 그놈들이 틀림없어!"
불은 났지만, 불을 일으킨 범인이 보이지 않았기에 마을 사람들은 분개했다.
허나 분개하고만 있어서야 상황은 악화될 뿐이었으니 움직여야 한다.
"일단 움직입시다!"
"그래도 번지는 속도가 그리 빠르지는 않아요."
"개천도 그리 멀지 않고. 어서 갑시다!"
마을 남자들과 함께 움직이면서도 히오는 여전히 의문에 휩싸여 있었다.
불은 났는데 불을 피운 흔적이라고는 없다.
그렇다고 스킬을 사용했다기에는···.
'마력의 흔적이 없다.'
히오의 주 특성인 '마력 감응의 천재'는 처음 생각보다 훨씬 훌륭한 특성이었다.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마력.
그것을 다루고 느낄 수 있는데에 최상위 특성이었으니 남은 마력의 흔적 등으로 스킬을 사용했다면 반드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느껴지는 마력의 흔적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자연적으로 일으킨 불이라는 뜻.
하지만 야영의 흔적이나 불을 지핀 자국도 없다.
마치 일부러 불을 내버린 것만 같은 위화감.
개천을 향해 달려가던 히오의 발걸음이 천천히 늦춰진다.
상황자체가 너무도 어색하지 않나.
갑자기 일어난 불. 허나 전혀 남지 않은 흔적.
마을에서, 그것도 히오가 있는 가게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
이곳에 집중된 시선.
이 부자연스러운 상황에 한 가지 가정을 더하면 아주 자연스러운 상황이 된다.
누군가 히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질렀다.
'···목적은?'
뻔한 것이다.
'클레어.'
설마 그 정도의 위협에도 다시 돌아올 정도로 클레어가 탐이 났던 것인가.
······실수다.
완전히 걸음을 멈춘 히오가 다시 왔던 길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앙-!
저 멀리 마을 안에서 들려오는 폭발음.
어쩐지 익숙한 그 소음에 히오는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내팽개친 채 마을을 향해 뛰어간다.
* * *
"그 괴물은··· 분명히 갔겠지?"
도리스가 재차 물었고 하만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형님. 불이 난 곳으로 뛰어가는 걸 분명히 봤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서야 어수선한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네 사람.
도리스 일행이었다.
"지, 진짜 형님. 흑아에서 오신 분들이 그 괴물을 이길 수 있겠죠···?"
"다, 당연하지 새끼야! 딱 보면 몰라? 너 그렇게 귀신처럼 움직이는 사람 봤어? 아무리 그놈이라도 결국 스킬은 하나뿐이겠지. 무조건 흑아가 이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에 땀이 차오르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귓가에 쩌렁하게 울리던 우레와 벼락이 당장에라도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기에.
"그럼, 부른다. 다들 준비해."
도리스가 품속에서 검은색 종을 꺼내 흔들기 시작했다.
딸랑-
한 번,
딸랑-
두 번.
딸랑-
세 번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흔들었고 종소리는 묘한 울림을 품은 채 멀리 퍼져나간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
"오, 오셨습니까!"
예의 그 검은 로브와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다섯 명의 흑의인이 어떠한 기척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
그들의 앞에 곧장 무릎을 꿇는 도리스 일행.
"준비 끝났습니다! 당장이라도 증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흑의인의 대장 격인 존재는 그런 도리스를 한 차례 훑어보고 마을을 바라본다.
"시작해라."
"예!"
몸을 벌떡 일으킨 도리스 일행이 마을을 향해 뛰어가고 다섯 명의 흑의인이 그 뒤를 유령처럼 따른다.
"준비한 대로 움직인다! 위치로 빨리 움직여!"
"예 형님!"
흑아에서 지켜보고 있다.
증명에 성공한다면 흑아에 소속되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고 성공하지 못한다면 당장 저 흑의인의 손에 유명을 달리하리라.
그렇기에 도리스 일행도 나름 필사적인 것이었다.
"예상대로 놈들이 모여 있다! 불 지르고 모여!"
이틀 동안 머리를 최대한 쥐어짜 낸 작전이다.
마을 바깥에 불을 지르면 그 괴물을 포함한 다수의 남자들이 그곳으로 향할 것이고 그 소란에 마을 사람들은 한데 모여 웅성일 것이 뻔했다.
괴물이 없는 틈에 미리 준비된 불을 지르고 힘없는 노인과 아녀자들을 포위하듯 둘러싸 한 번에 처리한다.
와중에 스킬 사용자인 클레어가 포함되어있다면 역시 빠르게 처리한다.
도리스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부, 불이야!"
"너희 뭐······! 끄아악!"
한 명씩 마주치는 주민들은 가차 없이 베어버렸고 그 모습이 중앙에 모인 사람들에게도 비춰졌지만, 이미 늦어버린 후였으니.
"꺄아악!"
"도적, 도적이다!"
마을 주요 길목에는 불이 거세게 타오르고 도리스 일행이 피 묻은 검을 들고 사방을 포위하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작 네 명이다.
하지만 네 명 모두 사람을 죽여본 경험이 많은 용병이라는 점.
하필 젊은 남자들이 모두 불을 끄기 위해 나갔다는 점.
남은 사람들의 손에는 그럴싸한 무기 하나 쥐어져 있지 않다는 점 등이 합쳐져 숫자가 무색한 전력차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괴물이 오기 전에 전부 다 죽이고 계집을 찾아!"
나무 몽둥이 하나 들고 있지 않은 노인과 여인, 아이들은 그저 비명을 지르거나 눈을 꼭 감는다거나,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도 변수는 존재했으니.
"이··· 이 나쁜 놈들이 또 왔구나!"
마을 중앙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클레어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본래라면 이 정도의 소란에도 잘 나오지 않는 클레어였으나 창밖으로 히오가 뛰쳐나가는 모습을 봤고 그에 따라나갔다가 마을 중앙에 있게 된 것이었다.
"다들 가만히 있으세요! 저놈들 엄청 나쁜 놈들이에요!"
클레어가 마을 사람들을 제치고 겁도 없이 앞으로 나섰다.
"크, 클레어···."
"그냥 들어오렴······!"
클레어가 스킬 사용자임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작게 말렸지만,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사방에서 타오르는 불길과 피 묻은 검을 들고 다가오는 네 명의 사내가 너무도 무서웠기에.
클레어 역시 그 이상의 것은 기대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작은 외침을 무시하고 더욱더 앞으로 나선다.
마치 자신만 보라는 듯이.
그리고 그 전략은 꽤나 유용해, 도리스 일행의 시선이 모두 클레어에게 틀어박혔다.
"계집!"
"저거 먼저 잡아!"
"저년이 저희가 말한 스킬 사용자 중의 한 명입니다."
도리스가 소리도 없이 뒤따르고 있는 흑의인을 향해 말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두 명도 아니고 한 명이니 알아서 처리해보라는 뜻.
집나간 괴물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 초조한 도리스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흑아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으니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만이 방법이었다.
"너만 순순히 이쪽으로 오면 뒤에 마을 사람들은 살려주지."
도리스가 클레어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너만 오면 된다. 그렇다면 뒤에서 오들오들 떠는 불쌍한 놈들은 모두 살 수 있을 거야."
앞에서 시선을 끌고 조용히 접근 중인 하만과 폴케가 뒤를 덮친다.
와중에 마을 놈들과 클레어를 갈라놓는 발언은 덤이었다.
"속을 줄 알고!"
하지만 클레어의 눈치 또한 평범한 소녀의 그것은 아니었으니.
이글거리는 화염을 양손에 띄운 채 오히려 도리스에게 돌진하는 것이었다.
도리스 일행은 무조건 자신을 먼저 쫓을 것이다.
그렇다면 있는 힘껏 시선을 끌고 그 사이에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것.
그리고 포위당하지 않게 한쪽으로 먼저 치고 나갈 것.
이것이 짧은 순간에 클레어가 내린 판단이었고,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결단이었다.
"모두 도망쳐요!"
이틀전보다 더 커진 화염을 도리스에게 뿌리며 클레어가 외쳤다.
"빨리! 도망쳐요!"
하지만 그런 클레어의 노력에도 한데 뭉친 마을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공포와 혼란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도리스는 클레어의 화염을 피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콰아앙-!
"이··· 계집년이······!"
고작 이틀 전이건만, 그때보다 더욱 위력이 강해진 것 같다.
이틀이 아니라 삼 일 후에 왔다면 그만큼 더 강해져 있었겠지.
이젠 그 반반한 얼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알아차린 것이다.
저건 작은 괴물이다.
이제 갓 깨달은 어리숙한 스킬 사용자가 아니다.
몇 주만, 아니 며칠만 더 지나더라도 자신은 상대조차 할 수 없으리라.
"반드시 죽여놔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까지는 빈틈이 많이 보이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화염을 날리는 것이 전부였으니.
네 명이서 덮친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콰앙-!
몸을 굴려 가까스로 피한 자리에 폭발이 일어나며 불길이 높이 치솟는다.
피하지 못했다면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 분명한 위력.
하지만 그것은 전투 경험이 미천한 클레어의 실책이었고 도리스 일행에게는 기회였으니.
"지금이다!"
"덮쳐!"
고작 이틀 새 그만한 위력으로 진화한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었지만, 대신 화염의 개수는 하나뿐이었고 방금 그것을 도리스가 피해냈다.
그리고 세 방향에서 동시에 덮쳐들기 시작하는 나머지 세 명.
"칫!"
바로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클레어가 거리를 벌리며 작은 화염을 두 개씩 만들어 날린다.
"거리를 벌려!"
타겟이 된 걸 확인한 폴케와 파울로가 거리를 벌리며 그 화염을 피해내고 다시 도리스와 하만이 달려간다.
클레어는 다시 화염을 만들어 도리스와 하만에게 쏘아내고 겁도 없이 달려드는 것처럼 보였던 도리스와 하만은 기다렸다는 듯 거리를 벌리며 피해냈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폴케와 파울로.
클레어는 화염을 만들어내고, 쏘아낸다.
폴케와 파울로는 달려오는 척 하다가 피해내고 다시 도리스와 하만이 달려든다.
지난 경험으로 이들은 아는 것이다.
클레어의 마력이 그리 많지 않음을.
조금만 시간을 들여 공략한다면 손쉬운 상대임을.
언젠가 다시 돌아올 그 괴물이 신경 쓰이지만, 그렇다고 클레어를 무시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렇게만 간다면 녀석이 돌아오기 전에 충분히 저 새끼 괴물을 죽일 수 있을 테니.
"이······ 비겁한!"
클레어로서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격하지 않자니 바로 당할 것이고.
공격하자니 상대가 맞아주지 않는다.
자신의 마력만 뭉텅이로 깎여가는 게 느껴진다.
이제 몇 번 남지 않았다.
위력과 속도를 높였지만, 그만큼 마력의 소비 또한 커졌으니.
'어떻··· 어떻게 해야······!'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시간을 끌어도 도와줄 사람은 없고 마을에서 가장 강한 것은 자신이었으니.
스스로가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건만, 방법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다.
게다가 녀석들은 새로운 놈들까지 데려오지 않았나.
저 뒤에 유령처럼 서 있는 다섯 명의 흑의인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이 네 명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놈들이라는 것을.
점점 머릿속은 새하얘지고 손발이 어지러워진다.
마력은 점점 떨어져 가는데 생각은 더욱 복잡하게 꼬여간다.
거머리 같은 이 네 명을 어떻게 떨쳐내야 할지.
저 뒤에 소름 끼치는 유령 같은 놈들은 대체 무엇인지.
가게에 있을 셀리는 괜찮을지.
중앙에 모인 사람들은 왜 도망가지 않고 저러고 있는 건지.
그리고······.
'히오는······ 오고 있을까.'
왜 이 상황에서 그 겁쟁이가 떠오르는 것인지.
이틀 전, 비슷한 절망 속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 히오였기 때문일까.
'오지 말아야 할 텐데······.'
겁많은 그 성격답게 마을에 피어난 불길을 보고 그대로 도망쳐야 할 텐데.
그런 생각과 함께 비틀대던 클레어의 몸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이틀 전 겪었던 증상과 같은 증상.
마력 탈진 증상이었다.
탄식하는 마을 사람들과 환호하는 도리스 일행.
"크크크크···. 별것도 아닌 게 말이야."
"그날도 그 괴물만 아니었으면 넌 죽었어."
웃으며 다가오는 네 명의 발소리를 들으며 클레어는 의문을 품었다.
'그 괴물?'
하지만 그런 의문은 금방 집어넣어 버리고 다시 집중력을 끌어올린다.
'이건··· 예상했던 대로.'
급격히 소모된 마력으로 어지러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완전한 마력 탈진은 아니었다.
이건 미끼다.
스스로를 미끼로 네 명을 불러들인다.
"흐흐흐··· 계집. 안타깝지만, 이번에는 못 살려주니까 기대는 하지 말라고."
마지막 남은 마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떠올린 것은 치솟는 화염.
자신의 전후좌우를 감싸는 불의 벽.
친절한 화염은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것만으로도 그 부탁을 들어준다.
'그러니··· 이번에도 제발······!'
눈을 감은 채 가까워지는 네 개의 발소리를 듣는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리고 지금.
"······죽어!"
눈을 번쩍 뜬 클레어의 주위로 폭발하듯 화염이 거칠게 치솟는다.
집채만큼 높게 치솟은 화염과 훅 뿜어져 퍼지는 뜨거운 열기.
그토록 거센 화염에 클레어는 마지막 계획이 성공이라 생각했으나······.
"······와, 이 미친년."
"진짜 괴물은 괴물이네. 이 어린년이 생각하는 게 전장에서 만난 놈들이랑 비슷하니···."
"형님 말씀대로네요."
불의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이제는 귀에 익은 목소리.
도리스 일행 역시 클레어를 인정하고 끝까지 방심하지 않은 것이다.
본래 깨달은 자들은 항상 마지막 한 수를 숨겨놓고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탓이었다.
"하, 이 끈질긴년. 이제 진짜 끝이네."
적은 마력으로 태웠던 마지막 불꽃은 허망할 정도로 쉽게, 빨리 사라졌고 남은 것이라고는 흐릿한 시야와 다가오는 네 명의 사람.
그리고.
"저 아이는 살려둬라."
어지러운 와중에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음산한 목소리.
"······예?"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저 아이는 쓸모 있어 보이니 데리고 간다."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닌, 마치 지옥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음울한 울림.
그걸 듣는 순간 클레어는 저항할 의지를 완전히 상실하고야 말았다.
저건 진정 대적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어설프게 깨달은 자신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
까마득한 격의 차이가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저런··· 괴물이 득실거리는데······ 나 같은 게 뭐가 특별하다고······.'
고작 불 따위를 휘두른다고, 아직 제대로 배우지 않았으니 제대로 배운다면 분명 엄청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멍청한 착각 같은 건, 한순간에 무너지게 할 정도로 흑의인의 존재감이 커다랗게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마을 사람들이 왜 꼼짝도 못하고 있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움직이지··· 못한 거였구나.'
이것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흑의인이 손을 쓴 것이리라.
저벅저벅 다가오는 네 개의 발소리가 들린다.
클레어는 눈을 뜨는 것도 포기한 채 바닥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이젠 전부 끝이다.
"이 계집년을 끌고 가고 불을 더욱 크게······ 지를 필요는 없겠네. 남은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라!"
"예 형님!"
그 끔찍한 명령을 들으면서도 클레어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무기력하게 누워있을 뿐.
움직일 힘도 없고 움직이고자 하는 마음도 들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곧 칼에 찢겨져 한명씩 죽을 테고 자신은 어딘지도 모를 곳에 끌려가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음에도 무언가 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느낀 압도적 격차가 저항할 의지를 완전히 없애버린 것이다.
'······히오를 다시 만나면······ 사과해야겠네.'
매일같이 한심하다고, 저항이라도 해보라고 말하던 자신이었지 않나.
그런데 정작 그 꼴이 되어보니 저항이란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 난 겁쟁이가 아니라 비폭력주의라니까?
클레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비폭력주의는 무슨, 그런 건 힘 있는······ 저 검은색 유령 같은 놈이나 쓰는 말이지.'
- 그래도 있잖아. 클레어. 폭력은 안 되긴 하지만······.
분명, 언젠가 했던 히오의 말이 이제와서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 나도 때가 되면 폭력을 쓰는 날이 오지 않을까?
늘 일상처럼 떠들던 대화 속, 한 귀로 듣고 흘렸던 그 말이 왜 이제야 떠오르는 것일까.
이래서야 마치 자신이 히오에게 의지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 뭐, 그때가 되면 모든 걸 다 포기하고 다시 시작해야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왜.
"······."
주위는 정적에 휩싸인 것인가.
자신도 모르는 새 기절해버린 걸까······ 라고 잠시 의심했지만, 그러기에는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불의 소리가 선명하다.
헌데 왜 이리도 조용한 것일까.
마을 사람들의 비명, 용병들의 거친 목소리,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발소리 따위가 일절 들려오지 않는다.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것 같은 느낌에 클레어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러자 눈에 보이는.
"와, 왔다!"
하늘을 가득 메운 검은 먹구름.
"괴, 괴물이 왔다!"
그 사이로 빛나는 번뜩임.
"도, 도와주십시오! 저 녀석은······ 정말로 상식 밖의 놈입니다!"
쿠르릉- 화를 꾹꾹 누른, 짐승같이 낮게 울리는 우레.
예의 그, 전의를 상실케 하는 흑의인의 목소리.
"······너희는 빠져있어라."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
그곳에서 걸어오는 익숙한 실루엣.
너무도 익숙해서 오히려 낯선 목소리.
"이 x발 새끼들이."
폭력주의자의 등장이었다.
8화 폭력, 주의(3)
불은 마을 전체를 집어삼킬 정도는 아니었지만, 착실히 그 덩치를 불려 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느껴지는 익숙한 마력.
클레어가 스킬을 쓸 때 생기는 낯익은 마력이 계속해서 느껴진다.
마을 초입에 다다랐을 때는 후끈한 열기가 피부에 닿을 정도로 불길이 거세진 이후였다.
그 사이를 걷는 것은 히오에게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 끄아아악!
- 엎드려! 빨리 엎드려!
- 다, 다리, 다리가!
이미 수년도 더 지난 일이건만, 그 끔찍한 경험은 아직까지도 정신 한구석에 자리 잡아 그를 괴롭히고 있었기에.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801 / 1000)]
그럼에도 나아간다.
그것은 과거이고 자신은 현재에 있었으니.
이 앞에는 지켜야 할 사람이 너무 많은 탓이었다.
"끄으으······."
옆구리가 깊게 베여 피를 한가득 흘리며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농사 짓는 빌의 아내였다.
지나가다 한번씩 마주치면 품에 빵을 한아름 안겨주던 마음씨 좋은 사람.
하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의식도 없는 듯하고 치료할 수단도, 시간도 없었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870 / 1000)]
그러니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걸음의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지만,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있을 테니.
그렇게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달려나간다.
그럼에도 쓰러진 마을 사람들이 한 명씩 시야에 들어오곤 하는 것이다.
목을 찔린 저 아낙은 베를 짜는 솜씨가 좋아 자신의 옷도 몇 번인가 수선해준적 있는 사람.
심장을 찔린 저 아이는 아이들이 자신을 놀릴 때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소심하게 말리던 아이.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919 / 1000)]
그리고 저 멀리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녀는 자신을 겁쟁이 취급하지만, 이곳의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걱정해주던 소녀.
"······클레어."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1000 / 1000)]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다.
한계를 넘은 인내력이 이성을 집어삼키고 사건의 원흉을 찾는다.
폭력을 종용한다.
띠링-
「축하합니다! 히든 특성 '폭력은 안 돼!'의 목표치를 달성하였습니다. 히든 특성의 숨겨진 보상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듣는 알림음과 메세지에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았으니.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 스킬의 이펙트가 거짓이 아닌 실제가 됩니다. 그에 맞춰 스킬의 등급이 재조정되며 스킬명이 변경됩니다.」
「보상으로 진화한 스킬은 삭제되지 않습니다.」
「보유한 스킬 중 하나를 택하십시오.」
그토록 고대하던 알림인 탓이었다.
허나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다.
기묘한 마력이 마을 사람들을 묶어놓고 있고 클레어를 향해 그 짐승들이 다가가고 있었으니.
「스킬 : 스파크」
「스킬 : 삼연격」
「스킬 : 육체 가속」
히오의 손가락이 신중하면서도 빠르게 움직여 스킬 중 하나를 선택했다.
「스킬 - '스파크'를 선택하셨습니다.」
「특성과 연계된 스킬 - '스파크'의 이펙트를 분석합니다.」
히오가 택한 것은 스파크였다.
삼연격 역시 그 이펙트가 엄청나기는 했다.
태산만한 노인이 등뒤에 나타나 자신과 함께 검을 휘두르는 것이 실제가 된다면 그 파괴력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
허나 그래서야 아군이고 나발이고 모조리 쓸려나갈 게 분명했다.
한마디로 지키는 싸움에는 최악이라는 말.
그런 의미에서 육체가속도 탐나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 활용이 좋은 것은 아무래도 스파크일 테다.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스킬 - '스파크'에 히든 특성의 보상 -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가 적용됩니다.」
「스킬 - '스파크'의 등급이 최상위로 향상됩니다.」
「스킬 - '스파크'의 스킬명이 스킬 - '뇌제(雷帝)'로 변경됩니다.」
「스킬 : 뇌제(雷帝)」
「벼락의 군주. 천둥을 다스리는 이.」
「번개를 불러오고 낙뢰를 떨어트립니다. 스스로 벼락 자체가 되어 힘을 행사할 수도 있습니다.」
「보유한 마력량에 따라 지속시간이 변경됩니다.」
스킬을 빠르게 훑어 내린 히오는 감탄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동안 참고 참은 인내력이 이미 한계에 달한 것이다.
눈앞의 광경이 처참한 탓이었다.
그렇기에 그저 말없이 걸음을 옮겼고.
"······."
그 뒤를 짙은 먹구름과 번뜩이는 벼락이 따른다.
* * *
공포의 경중을 비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때는 이것이 더 두려웠다가도 막상 눈앞에 다른 공포가 닥치면 그것이 더 두려운 것 같기도 한 마음.
그게 인간의 간교한 마음인 까닭이다.
하지만 두 가지 공포가 공존하며 선택을 강요한다면 어떤가.
이성은 갈등할지 몰라도 본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더욱 짙은 공포를 가려낼 것이다.
지금, 도리스 일행이 그러하듯 말이다.
"괴, 괴, 괴물······."
어둑해진 하늘과 쿠릉- 낮게 울리는 천둥.
거센 불길마저도 한낱 조연으로 만들어버리는 백색의 광휘.
그것을 온몸에 두른 채 다가오는 사내는,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서 살아 움직이는 공포 그 자체였다.
"너희는 빠져 있어라."
그렇기에 평소였으면 소름 끼쳤을 음산한 목소리가 구원의 목소리처럼 달콤하게 들려왔다.
"예, 예!"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등을 돌려 흑의인의 뒤로 도망가는 도리스 일행.
흑아에서 나온 다섯의 흑의인은 유령과 같은 걸음으로 나선다.
"아무것도 없는 이런 시골에 어찌 너 같은 존재가 숨어 있느냐."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감정이란 것이 배제된 그 목소리는 조금 전까지는 일대를 압도하는 것이었건만, 벼락과 함께 걸어오는 사내에 비한다면 위엄이 부족하다.
백색으로 뒤덮인 히오의 눈이 다섯의 흑의인을 훑었다.
"흑아에서 왔나."
짧지만 강한 한 마디.
순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정체를 꿰뚫어 보는 자.
'······정체가 대체 무엇이기에.'
감정이 제거된 채 수년을 살아온 그였지만, 눈앞의 존재에게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내가 아타올프, 놈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라."
아타올프.
세간에는 검은 안개로 알려진 흑아의 수장.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지극히 제한적이어서 흑아 내에서도 간부들만이 알고 있는 이름.
흑아의 수장이 어떤 사람이던가.
대륙의 최강자를 거론할 때면 절대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인물 중 하나.
'그런데······.'
그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르며 놈이라고 낮잡아 부르기까지 하는 사내는 대체 무어란 말인가.
흑아의 간부, 마이더츠는 즉시 결단을 내렸다.
'우리의 상대가 아니다.'
자신이 감히 대적할 수 있는 급이 아니다.
그렇다면 돌아가서 정보를 전달한다.
그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자신의 능력은 그 무엇보다 은밀하고 신속할 것이기에.
'돌아간다.'
마이더츠가 작은 수신호와 함께 스킬을 발동했다.
아니, 발동하려고 했다.
꽈앙-!
그 머리 위로 한 줄기 벼락이 떨어져 내리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도망가려고?"
그 벼락의 주인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마이더츠는 치밀어 오르는 의혹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타올프님과 연이 있으신 분이셨습니까."
"연이라···. 뭐, 없지는 않지."
"저희가 존귀하신 분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이대로 보내주신다면 흑아에서 사죄와 함께 막대한 보상을······."
"아, 근데 악연이라서 말이야."
"······."
히오의 손이 까닥인다.
"죽어."
꽈앙-!
벼락이 내리치고 그들을 둘러싼 검은 장벽에 금이 간다.
"쿨럭!"
뒤에 선 흑의인 중 한 명의 복면이 피로 젖어간다.
한계를 넘어선 힘을 막아낸 탓에 몸에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몇 번은 버틸 수 있으니 그 틈에 얼른···.'
뒤에 버티고 있는 네 명을 전부 소모한다면 자신이 도망갈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으리라.
계산을 마친 마이더츠가 재빨리 능력을 발현하려 했지만.
"······아."
어느새 눈에 띄게 밝아진 주위에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고서야 깨달았다.
온 하늘을 가득 덮은 먹구름.
그리고 그 아래를 유유히 유영하는 수십,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 가닥의 뇌전.
그 모든 뇌기가 오롯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그 광경은 두려움을 넘어선 경외.
무뎌진 감정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한 이적.
마이더츠의 세상은 곧 새하얗게 물들었고.
"······아름답구나."
수십의 뇌전이 동시에 떨어지는, 대기가 찢어지는 듯한 굉음.
꽈아아앙-!
그것이 떨어진 자리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섯 명의 흑의인.
그들의 능력도, 생각도, 육신도.
모든 것을 순식간에 태워버린 벼락.
그 자리에는 그저 새카맣게 그을린 자국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새하얀 공포를 온몸에 두른 히오의 시선이 이번에는 도리스를 향한다.
"꺼, 꺼헉······."
도리스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 숨만 간신히 들이마실 뿐이었다.
의식은 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애초에 눈으로 쫓을 수도 없는 벼락을 상대로 어디로 도망간단 말인가.
그를 따르던 세 명의 용병은 질릴듯한 공포에 이미 혼절해버린 상태였다.
도리스는 차라리 그것이 부러웠다.
저 백색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기에.
"내가 경고했지 않나. 얼씬도 하지 말라고."
꽈아앙-!
도리스의 근처에 떨어진 낙뢰 하나.
놀란 도리스의 몸이 크게 들썩이고 또 그 덕에 고개를 약간이나마 움직일 수 있었다.
낙뢰가 떨어진 곳은 폴케가 혼절하여 누워있던 자리.
그리고 그곳에 남은 건 그저 새까만 잿가루.
자신의 오랜 동료 중 한 명이 사내의 눈짓 한 번에 죽어 새까만 가루가 되어버린 것이다.
도리스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사, 사, 살려······."
꽈아앙-!
다시 한번 떨어진 낙뢰에 놀란 몸이 펄떡 뛰어오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돌아간 고개.
파울로가 있었을 자리에 보이는 것은 역시 타버린 잿가루뿐.
뼛가루조차 남기지 않는 진정한 벼락.
꽈아앙-!
또 한 번 내려친 벼락에도 이번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제 자신의 차례임을 아는 까닭이었다.
눈물 콧물 할 것 없이 쏟아져나오고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의식하지는 못했다.
"다음 생에는······."
히오의 백색 눈이 그의 눈앞에 있었으니.
"그냥 태어나지 말아라."
꽈아아앙-!
도리스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아마 마이더츠와 비슷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 * *
온몸을 뒤덮는 탈력감.
'아슬아슬했네.'
히오의 마력은 고작해야 10.
흑아의 녀석들과 용병 놈들을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1분이 채 되지 않았다.
흑아의 간부로 보이는 녀석과 짧은 대화를 나눈 뒤에 시간 끌 것 없이 바로바로 죽여버렸음에도 아슬아슬했다.
'그래도 과연 히든 특성이라 이건가.'
고작 10이다.
이만한 스킬을 기초마력으로 1분 가까이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불공평한 능력인지.
'······피곤해.'
전능한 것만 같던 힘이 사라지고 마력 탈진 증상이 함께 찾아왔지만, 당장에 쓰러질 수는 없다.
아직 마을 곳곳에는 불길이 번져가고 있었고 부상자들도 있을 것이기에.
백색의 뇌전이 사라진 세상이지만, 아직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은 그대로였다.
그것이 단순 스킬의 이펙트가 아니라 실제라는 의미.
그리고.
'불을 끌 필요는······ 없어졌나.'
투둑투둑 떨어지더니 곧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비.
비는 타오르는 불꽃 위로, 충격에 빠진 마을 사람들 위로.
클레어의 붉은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 사이로 떨어져 내린다.
"······음···."
그리고 그런 장대비 사이에서 클레어와 눈을 마주친 히오는 뒷머리를 긁적이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
클레어의 붉은 눈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열기를 담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에.
띠링-
「업적달성! - 산골짜기 영웅」
「업적 달성으로 7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델피르 마을 주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명성 증가로 9포인트를 획득합니다.」
「포인트 상점을 이용해 스탯과 스킬 등을 강화해보세요!」
9화 zl존☆천마★
첫 기억은 이런 시골 마을이 아니었다.
클레어의 고향은 도시 바데론.
제국 남부의 유명한 도시.
유복하지는 않았어도 부족한 건 없던 어린 시절 첫 기억은 무척이나 환상적인 것이었다.
- 클레어. 이리 와보렴.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 흐릿한 얼굴.
어렴풋이 떠오르는 다정한 목소리.
그 목소리를 따라서 달려가면 물건을 손에 쥔 아버지가 다정하게 웃고 있다.
- 짠! 신기하지?
- 우와아아!
클레어의 아버지는 스스로의 능력을 깨우친 스킬 사용자.
뭐, 그리 대단한 스킬은 아니었다.
손에 든 물건을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다섯 살 된 딸아이의 눈이나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능력.
-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이란다?
하지만 그런 초라한 능력일지라도 어린 클레어의 눈에는 그 무엇보다 대단한 스킬이었다.
그러니 자랑스럽다는 듯이 동네 꼬마 아이들에게 떠벌리고 다녔으리라.
- 우리 아빠는 스킬 사용자야!
왜 그랬을까.
- 물건을 막 사라지게 하고 다시 나타나게 만들어!
스스로 내뱉었던 그 말은, 아마 평생 가슴을 짓누르며 사라지지 않을 테다.
동네 꼬마들의 감탄과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제 아비에 대한 자부심이 커져갔고 그만큼이나 소문은 빨리 퍼져갔다.
도시 바데론의 어두운 뒷골목까지 말이다.
그저 물건을 안 보이게 할 뿐인 하찮은 능력.
하지만 온갖 불법적인 일을 하는 뒷골목에서는 상당히 쓸모있는 능력이었고 그 불길한 손길이 클레어의 아비에게 뻗쳐온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버지의 귀가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아예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어린 클레어라도 알 수 있었다.
그야 몸에 티가 날 정도로 피멍과 상처가 생겨났었으니.
그럼에도 정확히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힘없이 웃으며 그저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만 했었기 때문이다.
다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선 집 근처에서.
- 어머머 끔찍해라.
- 이게 무슨 일이래···.
- 뻔하지. 또 그 뒷골목 갱단 놈들이······.
잔인하게 찢겨나간 시체 한 구를 발견했을 때.
- 클레어? 세상에 클레어구나.
- 이를 어쩌면 좋아······.
그 시체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았을 때.
힘없이 웃던 그 표정이 아닌, 고통과 괴로움으로 잔뜩 일그러진 그 마지막 표정을 보았을 때.
클레어는 깨닫고야 마는 것이다.
자신의 작은 과시욕이 부른 끔찍한 결과를.
힘없는 자에게 행복이란 결국 언젠간 무너져내리고야 마는 모래성이라는 것을.
그것을 더욱이 확신하게 된 것은 도시의 주인, 영주의 한 마디에 모조리 붙잡혀 성문 높은 곳에 효수되어버린 뒷골목 놈들을 보았을 때였다.
클레어와 같은 일반 시민들에게는 공포의 대상. 감히 복수를 꿈꾸지도 못하고 원통한 울음을 삼켜야만 했던 재앙 그 자체.
하지만 그놈들도 영주의 말 한마디에 무기력하게 죽어버리고 마는, 그런 것이다.
그렇기에 클레어는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갈 거야.'
그 누구도 자신을 내려다볼 수 없도록.
무기력하게 당하는 존재가 아닌, 저 높은 하늘 위에서 악인들을 마음대로 쥐락펴락 할 수 있는 그런 존재.
그것은 클레어의 목표이자 삶의 원동력이었다.
핏기가 쭉 빠진 채 효수된 범인들의 얼굴을 본 그날 이후로 끊임없이 바랬던 목표.
너무나도 멀어 어떻게 가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던 그 길에 처음으로 빛이 보인다.
벼락처럼 눈부신 빛이.
그 빛은 클레어가 목표하던 이상향의 모습 그대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악인을 벌하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화신.
하늘에서 내려온 것만 같은 벼락의 신처럼 말이다.
"······너는 대체······."
궁금하고 묻고 싶은 것은 엄청나게 많다.
대체 정체가 무엇인지.
왜 힘을 숨기고 이런 시골에 숨어 있던 것인지.
동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전설적인 단체, 흑아와는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강해질 수 있는 것인지.
하지만 물을 수는 없었다.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혹, 대답을 듣더라도 그 순간부터 엄청난 일들에 휘말릴 것만 같은 예감이 든 까닭이었다.
"나도··· 나아갈 거야."
그럼에도 클레어는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목표가 눈앞에 살아숨쉬는 것을 본 이상에야 더욱 그 의지가 타오르는 것이다.
건조하게 타오르던 불에 히오라는 기름이 잔뜩 끼얹어진 꼴이었으니.
"······가자."
베낭 가득 짐을 쑤셔 넣은 클레어가 조용히 방문을 열고 집을 나선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제법 쌀쌀한 새벽녘이었다.
* * *
"······가야지."
씁쓸한 미소를 띤 채 히오가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갈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눈물의 송별까지는 아니더라도 따스한 배웅 속에서 마을을 떠나게 되리라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과는 제법 정이 많이 들었었으니까.
하지만 '뇌제'의 힘을 마을 주민 모두가 목격한 이상에야.
히오는 이제 그들의 상식 밖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손가락 한 번 까딱하면 그들 모두를 죽일 수 있는 재앙.
마을을 구한 공포의 상징. 두려운 영웅.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그들의 눈에 담긴 공포를 읽어낸 히오는 곧장 떠날 결심을 한 것이다.
"그래 뭐, 어차피 인내력만 채우고 떠날 생각이었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한 뒤, 스킬창을 펼쳐본다.
「뇌제(雷帝)」
텅 비어버린 스킬창.
진화한 '뇌제'를 제외하고는 폭력의 패널티로 모두 삭제되어버렸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스킬이긴하지만.'
무려 최상위 등급의 스킬이 아닌가.
스킬 하나를 최상위 등급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몇 년의 세월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다.
아니, 몇 년이 흘러도 진화하지 못할 수도 있고.
게임이던 시절에도 몇 없던 게 최상위 등급의 스킬인데 인내력만 쌓으면 그런 스킬을 계속 찍어낼 수 있는 것이다.
사라진 두 개의 스킬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혜택.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번에는 포인트 상점을 열어본다.
「포인트 상점」
「체력+1 : 10pt」
「근력+1 : 10pt」
「민첩+1 : 10pt」
「마력+1 : 10pt」
···
「남은 포인트 : 16pt」
레벨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벤타이얼에서 핵심은 이 포인트 상점이다.
스탯부터 시작해서 스킬, 스킬의 강화와 온갖 종류의 아이템까지 없는 것이 없는 포인트 상점.
다만 포인트를 얻는 방법이 업적과 명성을 쌓는 방법뿐이라 결국 구매하는 물품은 한정된 것이다.
스탯 아니면 스킬.
'스킬은 보자······.'
「포인트 상점」
「스킬 - 육체 가속(최하위) : 1200pt」
「스킬 - 근력 강화(최하위) : 1200pt」
「스킬 - 마찰력 강화(최하위) : 1000pt」
···
「남은 포인트 : 16pt」
역시나 정신 나간 가격이다.
포인트를 얻을 수 있는 수단에 비해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격.
최하위 스킬이기에 천 단위인 것이지 그 위로 가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그렇기에 랭커들 중에서도 상위 스킬을 구매하기보다는 스탯을 구매해 본신의 강함을 꾀하려던 놈들도 꽤 많았었다.
'하지만 그건 한계가 있지.'
포인트 상점으로 올릴 수 있는 스탯은 한계가 있으며 종내에는 모두 같은 스탯을 가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결국에는 상위 스킬을 얻어야 한다.
스탯의 강화만으로는 후반부의 괴물들을 결코 상대할 수 없을 테니.
필요한 건 업적과 명성.
이번에 잡은 흑아 출신 다섯 명.
그중에 한 명은 간부급인 것 같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나름 거물이다.
여기가 아니라 어디 사람 많은 도시에서 잡았다면 백 단위 포인트를 벌 수 있었을 정도의 거물.
하지만 여기는 주민의 숫자가 적은 시골 마을이었기에 얻은 포인트가 고작 16뿐인 것이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스탯 '마력'을 10pt로 구매합니다.」
「스탯 '마력'이 +1 상승합니다.」
「남은 포인트 : 6pt」
작디작은 마을에서 얻은 것 중에서는 최대치로 얻은 셈이다.
게다가 여기 주위에는 히오가 계속해서 벼르고 있던 그곳.
'마지막 마법사의 무덤'이 있지 않나.
"그대로 있겠지?"
마법사의 무덤을 반드시 들려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스킬북이다.
물론 하위등급의 스킬북이지만, 그 정도만 해도 이 세계에서는 성물 취급받고 있었으니.
아니, 스킬북 자체가 신의 도서라 불리며 부르는 게 값일 정도이니 반드시 들려서 얻어야 할 것이다.
"심지어 두 개잖아."
게임으로 즐기던 시절에 찾은 스킬북은 두 개.
하나는 팔고 하나는 비상용으로 사용하면 될 것이다.
"······가자."
얼마되지 않는 간촐한 짐을 챙긴 히오가 집을 나선다.
동이트기 직전의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 * *
두 사람이 마주친 것은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을의 출구였다.
간촐한 짐의 히오와 제 몸통만 한 배낭을 멘 클레어.
황당한 표정의 히오와 강한 결심을 품은 클레어.
먼저 입을 연 것은 히오였다.
"너 뭐하냐?"
자신이 오늘, 그것도 이 새벽에 떠날 거라는 건 어떻게 알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건지.
아무튼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히오는 클레어를 바라봤다.
"······나도 데려가."
클레어는 나름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온 듯했지만, 히오는 단호했다.
"안 돼."
당장 스스로의 앞가림도 힘든데 클레어를 어찌 데리고 다닌단 말인가.
물론 클레어의 엄청난 재능은 인정하지만, 2년이나 뒤처진 만큼 빠르게 달려가야 할 히오에게 클레어는 짐이다.
설마 이렇게 단칼에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잠시 당황하던 클레어가 어렵사리 입을 연다.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절대 거슬리지 않게 있을 테니까······ 나도 데려가면 안 돼?"
"내가 널 이렇게 데려가면 셀리 아주머니가 날 어떻게 생각하겠냐."
셀리에게 클레어는 그야말로 전부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남편을 잃고 클레어를 제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으니까.
"편지는 남겨놨어. 엄마도 분명 날 이해해줄 거야."
"고집부리지 말고 안 된다면 안······."
고개를 절래 젓던 히오의 표정이 흠칫 굳더니.
"후우···. 일단 따라와 봐."
작은 한숨과 함께 클레어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제 곧 동이 틀 테고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올 것이기에 일단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이야기할 셈이었다.
그리고······.
"거기 있는 거 아니까 너도 나와."
'마력 감응의 천재' 특성에 아주 희미한 마력 사용의 기척이 잡혔으니.
"아하하··· 진짜 어떻게 아는 건지 신기하다니까."
마을 밖으로 일단 나온 것은 클레어의 바로 옆에서 불쑥 나타난 제이슨 때문이기도 했다.
"뭐···!"
허공에 솟아난 듯 나타난 제이슨에 클레어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쳤지만, 눈을 한 번 찡끗하고는 히오에게 시선을 돌리는 제이슨.
"며칠 사이에 마을에 뭔 일 있었나 봐? 불탄 흔적이랑 난리도 아니던데?"
"흑아 놈들이 왔었어."
"엥? 그 미친 유령들이?"
그 말과 함께 히오의 차림새와 클레어의 배낭을 번갈아 본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떠나려고? 이 아가씨까지 데려가는 건 의왼데 말이야."
"데려가긴 무슨. 안 데려간다."
뭐가 뭔지 혼란스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보던 클레어가 정신을 번뜩 차리고 말한다.
"나도 데려가!"
"······너는 빨리 돌아가서 짐 풀고 아주머니 허락부터 받아."
"싫어! 나는··· 나는 반드시 강해질 거야! 히오 너처럼!"
"하아······."
그런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제이슨이 재미나다는 듯이 웃었다.
"아하하하! 나도 모르는 이 녀석의 본모습을 아가씨가 봤나 본데······ 그러지 말고 좀 데려가 주지 그래?"
"넌 조용히 하고. 후우······ 클레어."
히오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클레어를 쳐다봤다.
무엇이 그리도 서글픈지 클레어의 눈망울이 촉촉하다.
히오를 놓친다면 자신의 평생 목표가 영영 이뤄질 수 없을 것 같았기에.
나름 엄청난 결심을 가지고 나왔건만, 정작 히오에게 받는 취급은 어린아이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게 못내 억울한 것이다.
엄마의 허락이나 맡으라니.
억울하고 무어라 항변하고 싶지만,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게 히오의 시선에서 보자면 자신은 그저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보일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는 것일 테다.
"나는······ 나는 어린애가 아니란 말이야···. 나도 너처럼 강해져서 언젠가는······."
그러니 이렇게나 서러운 것일 테다.
눈망울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눈물이 기어코 뚝뚝 떨어져 내린다.
한번 흐르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밀려 들어온다.
"······내가 지켜주겠다고······ 했을 때 얼마나 우스웠을지······ 그, 그래도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정리되지 않은 말과 감정을 두서없이 뱉어내다 결국 진짜 어린애처럼 울기 시작하는 클레어.
스스로의 그 모습이 너무도 초라해서 더욱 서러움이 치밀어 오른다.
"야, 야야··· 왜, 왜 울어."
"으아아앙! 몰라 이 나쁜 놈아!"
당황한 히오가 서럽게 우는 클레어의 곁으로 가서 토닥였다.
"아니,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일단 집에 가서 아주머니 허락 맡으라고······ 아카데미로 보내줄 테니까."
"크흥······응?"
클레어가 눈물을 뚝 그치고 코를 훌쩍이며 히오를 올려다본다.
그 모습에 히오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피식 흘렸다.
데려가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 아카데미에 보내는 것 정도야 못할 건 없다.
클레어의 빛나는 재능을 알아본 마당에 이런 시골 마을에서 썩힌다는 것은 너무도 아깝지 않나.
뭐, 사실 당장은 아니고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알아보려고 했지만······ 저렇게 간절한 모습을 봤는데 조금 무리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아, 아카데미···?"
"응. 꼭 갈 거라며."
"저, 정말?"
"그렇다니까?"
"하, 하지만 거긴 학비도 엄청 비싸고 이름난 귀족도 함부로 못들어가는 곳이라고······."
기쁜 와중에도 아주 현실적인 클레어의 말에 히오는 고개를 돌려 제이슨을 쳐다본다.
그에 어깨를 으쓱하는 제이슨.
"아무리 나라도 아카데미는 안 돼. 로비나 청탁도 힘들고 설사 되더라도 대체 얼마나 돈이 들지···."
"아니, 그거 말고 다른 부탁 하나만 하자."
"다른 부탁?"
고개를 끄덕인 히오가 잠시 눈을 감는다.
이걸 사용하는 건 어쩌면 조금 이른 판단일지도 모른다.
허나 언제까지고 안전하게만 있어서야 5위 안쪽의 랭커놈들은 결코 따라잡을 수 없을 터.
"그놈 있지. 내가 최상위권이라 확신했던 그 교수."
5위 안쪽의 랭커 중, 이상할 정도로 공감능력이 뛰어났던 녀석.
그렇기에 당시는 npc에 불과했던 것들을 끔찍이도 아꼈던 기이한 놈.
지금 시점에서 굳이 아카데미의 교수로 들어가 인맥을 쌓을 놈은 그 녀석 하나뿐이다.
랭킹 5위.
곧휴가 갑니다.
"네 부하들 시켜서 그놈에게 말 하나만 전해주면 돼."
녀석은 그 한 마디에 전율할 테니.
2년이면 오래 참았다.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생각을 못했던 부동의 1위.
"zl존☆천마★가 널 찾는다고 말이야."
그 이름이 다시금 세상에 드러난다.
10화 zl존☆천마★(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