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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 - 1 >

요 사흘간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고속도로 등 외곽으로 빠지는 곳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때로는 육공트럭이 도로를 틀어막은 곳도 있다고.

사람들이 항의하면 군인들은 윗선의 지시라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단다.

형준 형은 다행히도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지 않은 지방도를 통해 돌아왔다.

그는 딸내미가 그새 아빠를 서먹해 하더라며 섭섭해 했다.

"그건 그렇고 오는 길에 와, 장난 아니더라. 애들 눈에 독이 올랐어. 어제만 해도 애들이 좀 유순했는데."

"그새 무슨 소리를 들었나 보네요."

"내말이. 근데 기장에서 나하고 같이 들어온 사람이 그러더라. 원전에 군인들 배치됐다고."

"기장 발전소요?"

"어."

"정전된 게 그거 때문인가 모르겠네요."

"나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또 어떤 사람은 울산에서 그런 방송을 들었다던데. 그 석유단지 주변에 사는 사람 우선적으로 대피하라고."

"인구가 얼마인데 그걸 대피시키네···"

"전쟁 아니면 쿠데타인데 완전 미친 거지. 그거 다 어떻게 복구시키려고 그러냐?"

"···형님, 만약에 말입니다···복구할 필요가 없으면요?"

형의 눈빛이 흔들렸다.

"좀비 그거 말이냐?"

"언제 일어나는지는 모르지만, 대충 느낌이 그렇잖아요? 기간시설에 병력 배치하는 건 그렇다 쳐도, 예비군 소집도 안하잖습니까."

"나는 민방위도 끝났는데."

"예, 하여튼요."

"오는 길에 동사무소 들러봤는데 다들 집에 가고 없더라."

"그럼 맞네요. 좀비 사태 그거 때문에."

대통령은 계엄령을 펼쳐서 정돈된 종말을 맞으려 하고 있었다.

원자력 발전소를 셧다운 시키고, 석유화학단지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대피시킨다.

그 외에도 조치는 많이 있을 것이다.

도시가스를 완전히 차단한다든가.

형은 간이부엌에 가서 밸브를 열고 가스렌지를 켰다.

역시나 불은 켜지지 않았다.

"도시가스까지 차단했네. 와 씨발 우리 어떻게 살라고 이러냐. 구청에 쳐들어가?"

쳐들어가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때 경훈과 보라가 돌아왔다.

둘은 자못 흥분된 얼굴이었다.

"밖에 분위기 장난 아니던데. 군인들이 막 밀치고 그래요."

"진짜요?"

"예. 아무래도 통제에 안 따라주는 사람들이 있다 보니까. 아니 이유를 말하고 통제를 해야지 꽉 틀어막으면 어쩌자는 거야."

"엄청 위험한 상황이긴 한 모양이던데."

이윽고 미경과 유현까지 들어왔다.

둘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집안사정인 것 같으니 여기선 입을 다물어야지.

형준 형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일단 모여 봅시다. 성호···도 어떤 면에선 우리 멤버니까 들어보고."

경훈은 그 말에 이견이 있는 것 같았지만 굳이 꺼내지는 않았다.

형과 옥신각신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약간 떨어져 형의 이야기를 들었다.

"저기 김해 쪽에서 오다가 들은 얘기도 그렇고, 여러 사람들 말을 들어봐도 그렇고. 지금 대형사고가 나긴 한 모양입니다. 전기, 가스, 인터넷, 아무것도 안 되니까 아포칼립스라고 봐도 무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사람들이 동의하자 형은 입술에 침을 발랐다.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

"좀비 사태가 언제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계획대로 행동합시다. 사전에 짜둔 거 있잖아요? 식사당번, 청소당번 뭐 이런 거요. 식사량 제한을 해야 될 거고···또 수도가 될 때 물도 받아놔야죠."

"지금부터요?"

미경이 묻자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지금부텁니다. 좀비만 없지 아포칼립스나 다름없는 상황이잖아요? 이 상황이 언제 풀릴지 모르는데 무작정 식량을 축낼 수는 없습니다."

"맞아요."

보라가 동감을 표시했다.

바로 내일 상황이 풀린다.

풀린다기보다는 더 악화된다고 봐야겠지만 어쨌든.

회의가 끝났고 다들 덥다고 투덜거렸다.

한여름인데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이 있으니 땀이 줄줄 흐른다.

다들 티셔츠 앞섶을 풀풀 털며 투덜거렸다.

"와 더워서 돌아가시겠네."

"습도가 높아서 그런가 완전 찜통이에요."

나는 즉석에서 튜토리얼 공략법을 써서 형을 불러내 보여주었다.

난이도가 낮아진 걸 감안한 공략이다.

쪽지를 본 형의 눈이 커졌다.

"이거···"

"영상 본지가 좀 오래돼서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맞을 겁니다. 초반에 탈출해서 도망가는 루트는 장소에 따라 다르니까 유의해야 하고요. 튜토리얼이 끝나면 아이템이 하나 리젠되니까 그거 꼭 챙기셔야 합니다."

"아이템이 뭐 어쩐다고?"

"게임 상에서는 근처에 아이템이 하나 생기더라고요. 장소는 랜덤이니까 직접 찾아가야 하고요."

"허 참.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아이템이 나타난다 이거지?"

"고블린도 그렇게 나타났잖습니까."

"···하긴 그렇다."

이젠 판타지 세계의 마법사나 용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

형은 쪽지를 꾹 쥐더니 내 어깨를 두드렸다.

"고맙다. 사실은 고민 많이 했거든. 이 애가 튜토리얼 영상은 봤다는데 공략법 좀 알려달라고 해야 되나."

"그래도 제가 형님을 모른 체하겠습니까. 아는 게 이거뿐이라서 죄송하고요."

"죄송하긴 뭘 죄송해. 나중에 뭐, 식량 떨어지면 나한테 와라."

"예. 살아있으면요."

"그래···"

나는 밖으로 나오며 생각했다.

이게 최선이다.

형에게 내 능력을 알리고 합류할 경우 확실히 편해지긴 할 것이다.

하지만 생존하기는 더 힘들어진다.

난이도가 내려간다지만 여전히 좀비들은 무서운 상대다.

거기에 강화 좀비가 드문드문 섞여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했다.

나 같은 놈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뭔가 해서 보니 문신남의 견인차가 뒤에 사람들을 태우고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다른 차가 없으니 도로가 뻥 뚫려서 아주 시원할 것이다.

군인들이 호루라기를 불었지만 차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다.

적재함에 타고 있던 모자남이 나를 보곤 침을 퉤 뱉었다.

"나중에 보자, 씹새꺄! 하하하!"

그래, 내일 보자.

.

.

.

나는 집에 돌아오면서 군인들의 재촉을 받았다.

빨리 집에 들어가라는 거다.

며칠간 빡세게 굴렀는지 말에 가시가 돋아 있는 상태였다.

이럴 때 개기다간 욕 좀 듣는 걸로 끝나진 않겠지.

2층에 올라가는데 1층 비워둔 곳에 수연이 숨어 있었다.

"수연씨?"

"쉿. 군인 아저씨들 지나갔죠?"

"그렇긴 한데 여기는 어쩔 일이세요?"

"얘기해드릴 게 있어서요. 시민공원 있잖아요? 거기 지하주차장에서 공사를 하고 있더라고요."

"공사요?"

"인부하고 자재가 막 들어가더라고요. 며칠 전에 집에서 망원경으로 보니까."

"지금도 공사 하고 있겠네요?"

"아뇨. 다 끝났어요. 진짜 빠르죠?"

그녀는 혀를 내둘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공사인지는 몰라도 사흘 안에 후다닥 끝내는 게 말이 되나?

"뭐라 설명을 못하겠는데, 되게 급하게 진행하는 것 같았어요. 그 주차장이 꽤 넓은 편인데 인부하고 자재가 끝도 없이···나중에는 윙바디 트럭이 막 들어가더라고요. 안에 중요한 거 실었나봐."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쉘터다.

"쉘터라도 만드나보네요."

"네. 그래서 막 우리끼리는 정치인들 전용 쉘터 만드는가보다 했거든요. 원래 위험한 건 귀신같이 잘 아는 양반들이니까."

"이렇게 빨리 끝낸 걸 보면 뭔가 일이 터지긴 하는 모양이죠?"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하아···생각 같아서는 그냥 빨리 터졌으면 좋겠어요. 이게 뭐하는 짓이야."

"좀비 안 된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너무 답답해서 그래요. 가끔 그럴 때 있잖아요? 뭐하나 제대로 된 게 없고 지지부진할 때, 빵 터져라 이런 기분?"

화끈한 누님이시구만.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저한테 이런 거 가르쳐주시는 이유가?"

"그냥···이라고 하면 좀 이상하죠? 왠지 느낌이 있어요, 성호씨는."

"무슨 느낌요? 그냥 덩치 좀 큰 남자일 뿐인데요."

"전에 철물점 앞에서 말씀하셨잖아요. 워 클럽 그게 좋다고. 제가 따로 정보를 찾아봤는데, 이 포자란 게 좀비의 두개골 안에 자리를 잡는가 봐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한번 자리 잡은 포자는 노출에 취약해지고, 두개골도 약해져서 구멍을 뚫으면 빨리 무력화된다고 하던데 사람들이 그걸 안 믿더군요."

"정보가 하도 많아서 사람들이 뭘 믿어야 할지 모르죠."

권씨가 몇몇 정보를 올리긴 했지만 나한테 당하고 나선 죄다 삭제해 버렸다.

결과적으로 며칠 전까지 각성자 커뮤니티는 검증되지 않은 온갖 팁으로 오염된 상태였다.

그중에는 일부러 엿 먹으라고 사실을 왜곡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수연은 주먹으로 손을 딱 치며 말했다.

"그때 성호씨가 말씀하신 그게 생각나는 거예요. 돌기가 있는 무기가 좋다고. 상점 열리고 초반에 살 수 있는 흑단목 몽둥이에도 돌기가 있다면서요?"

"그···렇죠? 영상에서 본 기억이 있는 것 같긴 해요."

나는 일부러 애매하게 말했다.

수연의 안경알이 반짝였다.

"관장님한테서 들은 좀비 피하는 법을 봐도 그렇고, 성호씬 확실히 뭔가 다른 것 같아요. 저희 팀 남자들이 성호씨 같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팀 사람들이 어떤가요?"

"제가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욕심이 엄청나죠. 하여튼 성호씨하고 친해져서 나쁠 건 없는 것 같아요. 제가 부담스러우신 건 아니죠?"

"부담스러울 게 뭐 있습니까. 혹시 살아남으면 서로 돕고 지내는 거죠."

"그거 듣기 좋은 말이네요."

수연이 정보를 가져왔으니 나도 뭔가를 줘야겠지.

쪼그려 앉아 쪽지에 뭔가를 쓰고 있으려니 수연이 옆에 쪼그려 앉았다.

"뭐 쓰세요?"

"튜토리얼 공략요."

"어? 성호씨 게임 안 해봤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영상은 봤거든요. 미튜브 김밥조아꺼. 기억이 정확하진 않으니까 완전 믿진 마세요."

그녀는 기쁜 듯 손바닥을 짝 쳤다.

"와···이거 가져가면 저 인기인 되겠는데요?"

"지금도 의사분이시라 인기 있지 않아요?"

"에휴. 안 그래요. 각성자 아니라고 은근히 따돌리는 분위기가 좀 있어요. 전투에는 도움이 안 되니까."

"초반에 싸울 생각하면 크게 혼날 텐데."

"그러게요. 가서 설득해야겠어요."

그녀는 청바지를 탁탁 털며 일어섰다.

그리고 내 손바닥에 뭔가를 썼다.

"에덴 빌라 302호예요. 만약에 제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면, 안에 꺼 다 가져가세요."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건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팀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내가 소문을 듣는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나를 믿기에 비축해둔 물자를 써주길 바라는 것이겠지.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꼭 살아서 나중에 봅시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파우치를 건넸다.

전에 받았던 진통제 항생제 팩이군.

"왠지 성호씨는 잘 싸우고 잘 다치실 것 같아서 더 준비해봤어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봐요."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몸을 돌리곤 떠나갔다.

.

.

.

좀비 사태까지 20시간.

나는 이계의 숲에 들어가 창고 정리를 하는 등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해자 완공은 아직 멀었지만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내일 루팅할 때는 여기에서 먼저 열고."

동굴 앞 공터에 장소도 미리 지정했다.

아무래도 당일에는 숨도 못 쉬고 뛰고 돌아다녀야 하는데 정리할 시간이 없기 때문.

"루팅할 곳이 너무 많은데···금속하고 약품 우선으로 해야겠다."

나머지는 차후에도 루팅할 기회가 있으니까 미뤄도 괜찮다.

나는 지도를 들여다보며 동선을 짰다.

5시간 안에 루팅을 끝내고 철사병과 튜토리얼 준비를 해야 한다.

"6레벨···그래도 폭렙할 찬스가 있지."

사태 당일, 철사병이 닥칠 때에만 쓸 수 있는 방법이다.

잘만 하면 레벨이 단숨에 오르고 포인트도 대량 획득할 수 있다.

"가능성은 충분해."

나는 대충 정리를 끝내고 딩고와 함께 숲을 정찰했다.

내일 큰일이 있기에 오늘은 가능하면 체력을 소진하고 싶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고블린 놈들만 안 나타나면 좋을 텐데.

딩고가 냄새를 킁킁 맡으며 앞서가다가 나를 어딘가로 인도했다.

"이거 처음에 발견했던 거구나."

놀랍게도 내가 딴 가지에 또 태양사과 두 개가 열려 있었다.

지구력 회복 효과를 가진 채로.

"···이상하네."

한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렇게 자랐나?

아무리 봐도 옆의 태양사과와 크기차이가 나지 않았다.

"뭐 이렇게 빨리 자라지?"

몬스터가 튀어나오고 이상한 옵션이 붙은 작물이 있는 숲이니까 그러려니 하자.

나는 태양사과 두개를 배낭에 넣었다.

"단순히 땅이 좋아서 이렇게 빨리 자라지는 않을 텐데."

어쩌면 이 숲 전체가 마법에 걸린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텃밭을 만들어서 작물을 재배해도 빨리 자랄까?

"확인할 필요가 있어."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상황이 안정되면 해볼 만했다.

비료는 모아놓은 것도 많이 있으니까.

나는 농사에는 일자무식이지만 기초농법 등 서적도 있고 영상도 갖고 있다.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나는 쉘터 주변을 돌아다니며 혹시 고블린이 함정 파놓은 게 없나 찾았다.

역시, 있군.

딩고가 킁킁거리며 앞발로 땅을 팡팡 두드렸다.

모종삽으로 파헤치자 땅이 움푹 꺼졌다.

바닥에 나무창 몇 개가 박혀 있었다.

나름 신경을 쓴 함정이긴 한데···

"나는 덩치가 크다고, 이 얼간이들아."

맨발도 아니라서 이런 거 밟아봐야 상처 입을 일도 없다.

뭐 고블린들이 만드는 함정이 다 이런 식이다.

나는 나무창을 부러뜨리고 흙을 덮었다.

"19시간 남았나···"

이제 차분히 좀비 사태를 기다릴 때다.

나는 쉘터로 돌아와 동선을 점검하고 튜토리얼 공략 영상을 반복 시청했다.

"난이도가 낮아져서 별로 어려울 건 없겠네."

포인트를 얻는 방법을 업데이트 했다는데 그게 뭔지 궁금했다.

"내일 되면 알겠지."

나는 딩고와 함께 2층집으로 건너갔다.

이제 진짜 얼마 남지 않았다.

.

.

.

자정.

딩고와 함께 2층집의 옥상에 올라왔지만 기대와는 달리 쪄죽을 지경이었다.

"열대야 장난 아니네."

올해 여름이 40년 이내에 최악의 폭염을 기록할 거라던 기상청의 보도가 떠올랐다.

뭐 걔네들은 항상 그러지만.

딩고는 이제 내게 붙으면 더운 걸 알았는지 조금 떨어져 있었다.

매정한 녀석.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금쯤 미군이 운석군 요격 준비하고 있겠지?"

글쎄, 모를 일이다.

모든 정보가 차단되어서 외국은커녕 정부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판에.

내가 알고 있는 건 부산 일대에 군인이 깔렸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이제 13시간 남았다.

처음 각성하고 사태를 인식했을 때가 떠올랐다.

32일간 정말 많은 준비를 했지만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다.

놓친 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게 나중에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회는 안 해."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며 붙잡으려 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내게 필요한 건 그저 달리는 것뿐이었다.

"···"

바람이 거칠게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이상한 예감에 일어섰다.

북서쪽 밤하늘이 붉게 빛났다.

붉은 물감이 도화지를 물들이는 듯했다.

그리고.

"아."

수백 개의 선이 밤하늘을 긋고 지나갔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은잠비 운석군이 지구에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미군이 요격에 실패했다.

"드디어···"

종말의 날이 코앞에 다가왔다.

< D - 1 > 끝

< 종말의 날 - 1 >

20일 아침은 여느 때와 같이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밖으로 나와 거닐었고, 때로 차량이 지나가기도 했다.

거리에 삼삼오오 사람이 모였다.

군인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걔들도 가족은 봐야 하니까···"

지난 며칠간 고생했으니 최후의 몇 시간은 가족과 있게 해줘야지.

수도꼭지를 돌렸지만 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제 도시는 완벽한 마비상태가 되었다.

"딩고, 밥 먹게 이리와."

나는 묻어둔 생닭을 반으로 턱 갈라 딩고에게 먹였다.

녀석은 지난 2주일간 무럭무럭 자라 어지간한 비글 정도로 커졌다.

하지만 아직 새끼 특유의 동글동글함은 벗어던지지 못했다.

"넌 이거 먹고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

같이 활동하고 싶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딩고는 큰 도움이 못된다.

녀석이 가지는 강점인 후각, 추적 능력이 완벽하게 봉쇄되는 환경이 펼쳐질 테니까.

까드득 까드득.

딩고는 무념무상으로 닭을 씹어 먹었다.

나도 밥이나 먹자.

움직이기 전 배를 든든히 채워둬야 한다.

그렇다고 많이 먹으면 힘드니까 적당히.

버너에 코펠을 얹어 전투식량을 데우고 있으려니 뜬금없이 전기가 들어왔다.

오잉?

티비가 켜지며 대통령 할아버지의 초췌한 모습이 나타났다.

"며칠 사이에 얼굴이···"

사람이 엄청 고생하면 며칠 사이에도 늙는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다.

단정한 수트의 대통령은 어디 가고 와이셔츠 차림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가 말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 대통령 장원택입니다. 이 방송을 들으시기 전,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티비를 보게 해주십시오. 다시 말씀 드립니다···

밖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티비 보래요!"

"다들 티비 봅시다!"

"전기 들어왔소오오!"

나도 한 목소리 보탰다.

몇 분쯤 시간이 흐르고, 대통령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대통령 장원택입니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영문을 모를 통제로 상심이 심하셨을 줄 압니다. 제가, 모든 것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드디어 사태의 진상을 밝히려는 건가.

거리는 한산해졌고 나는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비빔밥을 떠먹었다.

"맛있긴 한데 좀 짜네."

땀을 많이 흘릴 것을 가정하고 만든 건가 보다.

이런 걸 먹다간 갈증이 장난 아니겠는데.

나야 숲이 있으니 큰 상관은 없지만.

―며칠 전, 저는 계엄령을 지시했습니다. 대한민국 육군이 언론사와, 기간시설을 장악했고 주요 도로도 폐쇄했습니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대통령이 담배를 붙여 물었다.

헐.

대국민담화에서 담배를 피우다니.

이제 종말이 코앞에 다가왔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긴 4시간밖에 안 남았네."

그는 한 모금을 길게 뿜었다.

―하하···야당에서 봤으면 제발 대통령의 품위를 지키라고 여러 소리 들었겠군요. 어쨌거나 계엄령을 지시한 이유는, 정돈된 종말을 맞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단어가 나왔군.

대통령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디데이까지 혼란을 막아야 할 테니까.

―저는 명령을 내려 통신을 끊었고, 전력선도 차단했으며 원자력 발전소를 셧다운 시키도록 했습니다. 도시가스는 물론이고 화학공업단지 주변의 주민들을 대피시켰지요. 정돈된 종말, 그것이 제가 바라는 바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

대통령은 담배연기를 길게 뿜어내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

―새벽에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미군이 은잠비 운석군 요격에 실패했습니다. 운석군은 오키나와 근해에 떨어졌고, 오키나와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지금 현재, 일본인들이 좀비로 변하고 있습니다. 예. 눈을 까뒤집고 생명체를 공격하는 그 좀비 말이지요. 일본 열도가 좀비 포자에 집어삼켜지고 있습니다. 현재는 가고시마가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지요. 일본은, 확실하게 종말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조금 있으면 그렇게 된다.

밖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좀비 사태가 오늘이었냐며 사람들이 당황한 게 느껴졌다.

대통령은 물을 조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데드라인은 7월 20일, 오늘 오후 1시입니다. 일본 열도를 감염시킨 좀비 포자가 한국에 상륙할 것입니다···방금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공기정화시설을 갖춘 쉘터의 사람도 감염되었다는군요.

"야이 개새끼들아아아아!"

웬 아저씨가 우렁차게 욕하는 게 들렸다.

뒤를 이어 사람들이 욕을 내뱉었다.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겠지.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게 최선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며칠간 가족과 함께 했으니까.

그 결정을 내리고 감독했을 사람들은 오늘 새벽까지 뛰어다녔을 텐데.

―확실한 건 우리도 좀비 사태를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살아남을 겁니다. 각성자, 또 일부의 사람들···그들을 위해 준비해둔 것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장소를 잘 기억해두십시오.

대통령은 서울과 광역시를 포함한 몇 개 도시의 장소를 나열했다.

수연이 말한 바 있던 지하주차장 쉘터인가 보다.

―이상의 장소는 현재 콘크리트와 복합 플라스틱으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습니다. 타임캡슐이라고 해도 되겠군요. 1년 후 봉인이 자동으로 풀립니다. 그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물건이 있습니다. 식량, 생수, 옷, 휘발유, 경유, 기초생필품, 서적···

이건 적어둬야겠군.

대통령은 피해야 할 곳도 나열했다.

주로 원자력 발전소와 화학단지였다.

―각 지점 20km 내로 접근하지 마십시오. 특히 원자력 발전소는 매우 위험합니다. 며칠 전 셧다운 시키고 긴급냉각절차에 들어갔습니다만, 지금도 노심엔 잔열이 있으며 꽤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 어쩌면 노심용융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것을 대비해 여러 조치를 취했습니다만, 완벽하진 않습니다.

알아서 피해라 이거지.

기장 발전소는 여기에서 제법 떨어져 있지만 안심할 순 없었다.

방사능에 노출되면 입안에서 피 맛이 난다고 하던가?

"몸으로 느끼다 죽는 거 아니야?"

가이거 계수기를 구해봐야 못 쓰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대통령의 발언이 계속 이어졌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비록 모자람이 많은 사람입니다만, 그래도 최후의 순간에 해야 할 것은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남은 것은 생존자들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비는 것뿐이겠지요. 디데이의 정확한 일시를 알려주신 어떤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합니다. 그 분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지금쯤 대혼란에 빠져 있었겠지요.

"감사의 인사를 들을 정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대통령에게 감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종말이 다가오는데도 묵묵히 대통령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했으니까.

역시 나 같은 놈과는 다르군.

그 때 비서실장이 귓속말을 했다.

―곧 모든 화력발전소가 셧다운 될 겁니다. 관리자들도 가족을 만나봐야 할 테니까요. 이 방송을 보진 못하겠지만···협박해서 미안합니다. 뜻에 따라주지 않아 감금된 장군들에게도 유감의 말을 전합니다. 노인네가 주절주절 말이 길었군요. 마지막으로 초반에 나오는 몬스터에 대한 공략 정리입니다. 우리 살아서 다시 만납시다.

그 말을 끝으로 화면이 고정되었다.

좀비와 고블린, 코볼트, 본 크리퍼 등의 특징과 약점, 대책방법 등이 나와 있었다.

"고인물이 썼네."

정부에 신병을 의탁했나보다.

그 용기에 감탄하는데 화면이 일그러지더니 전기가 나가버렸다.

대한민국이 완전한 종말을 맞았다.

.

.

.

반응은 즉각적,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

몇 명이 밖으로 뛰어나와 소리를 질렀다.

비명과 욕설이 주택가를 가득 메웠다.

아저씨 한 명이 웃통을 다 벗고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이 씨발새끼들아아!"

"다 집어치워!"

와장창!

여기저기에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광기가 거리를 지배했고 어디선가 비명소리도 들렸다.

며칠간 사람들을 눌러왔던 인내심이 드디어 증발한 모양이었다.

"사형선고가 내려진 거니까."

나는 차분히 창문을 몇 겹의 널빤지로 가리고 미리 준비해 둔 벽돌을 쌓기 시작했다.

2층집은 위장에 가깝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방어는 해야지.

"계단도 막아놓고···

그 다음엔 어디로 출입하느냐.

바로 건물 뒤쪽이다.

화장실엔 제법 큰 창문이 달려 있고 밖을 보면 담장이 서 있다.

워낙 좁고 어두워서 사람들이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었다.

담장 위로 조금만 걸으면 거리로 나갈 수 있다.

꽤 높아서 좀비가 올라가긴 힘들다.

"인간은 가능하지만 관심이 있을 리가."

나는 가구와 잡동사니를 몽땅 1층 계단으로 밀었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어설픈 바리케이드가 만들어졌다.

벽돌을 쌓아 계단을 완전히 막는데 밖에서 차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난리도 아니구만."

몇 시간이면 저 소란이 잦아들까?

여기저기서 싸우는 소리도 들렸다.

법도 공권력도 사라졌다.

사람들의 원초적인 폭력성을 제어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별거 아닌 시빗거리가 싸움을 불러온다.

바로 지금처럼.

"좀만 조용히 합시다! 세상 끝난 거 아니잖아요?"

"끝났어, 병신새끼야! 다 끝났다고!"

"아저씨, 말 함부로 하지 마십쇼."

"뭐 어쩔 건데? 쳐봐! 쳐봐!"

"이 좆만한 씹새끼가."

"억!"

"뒈져, 개새끼야. 뒈져!"

퍽퍽 누군가가 맞는 소리가 들렸다.

사소한 말다툼에 며칠 참아왔던 울분을 폭발시킨 모양이었다.

"누가 좀 말려 봐요!"

소용없을 겁니다.

나는 벽돌을 다 쌓고 구석구석 몰탈을 두껍게 칠했다.

천천히 말라도 상관없다.

여기를 쓰는 것은 튜토리얼 이후가 될 테니까.

"입구는 이 정도면 됐고."

나는 오토바이를 끌어내 오함마와 산소절단기를 동여맸다.

산소절단기의 노즐을 조절해 라이터를 켜니 불꽃이 시원하게 쏟아졌다.

이거면 어지간한 건 죄다 절단해버릴 수 있다.

오토바이를 숨겨놓고 옥상으로 올라가니 거리가 난장판이었다.

폭력과 혼돈, 광기가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날뛰고 있는 놈은 얼마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다.

양아치들이 모는 견인차가 급가속, 급제동을 반복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심지어 피할 생각이 없던 어떤 사람을 치기도 했다.

차에 치인 사람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나가 떨어졌다.

양아치들은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바로 출발시켰다.

"공권력이고 뭐고 없다 이거지."

니들도 곧 그렇게 될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라.

망원경으로 헬스장을 보니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저기는 형준 형이 알아서 하겠고···

시계를 보니 11시였다.

두 시간 동안 루팅을 하는 것도 좋겠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피하는 게 좋다.

"사람은 무섭거든."

1시가 되면 좀비 때문에 나에게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몸무게를 재보니 92kg이었다.

숲에서 구른 덕분에 살이 쏙 빠졌다.

"빠진 게 이 정도라니."

최소 5kg은 더 빼야 한다.

나는 옥상에 올라가 종말을 기다렸다.

비행기 한 대가 지나가더니 웬 종이가 우수수 쏟아졌다.

잡아서 보니 대통령이 언급한 쉘터와 피해야 할 장소, 몬스터의 공략이 쓰여 있었다.

"대단한 사람들이야."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아포칼립스도 지낼만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나 같은 놈과 온갖 트롤들로 가득하겠지.

나는 종이를 구겼다.

.

.

.

12시 59분.

나는 눈을 떴다.

거친 바람이 머리카락을 세게 흔들었다.

불길한 위화감이 거리를 휘어 감았다.

도로를 마구 뛰어다니던 사람이 지쳐 쓰러졌다.

그는 헐떡대다가 갑자기 헉 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크아아어허허헉!"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는 온 몸을 뒤틀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푸른 반점이 얼굴 피부에 천천히 번졌다.

그를 시작으로, 아스팔트에 누워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좀비로 변했다.

시작이다.

나는 밑으로 내려가 자물쇠를 풀고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철사병 도달까지 5시간.

최대한 빨리 루팅을 끝내고 차원문 위치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철사병이 숲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부르릉!

시동을 걸었지만 좀비들은 나를 눈치 채지 못했다.

스로틀을 열며 클러치 레버에서 발을 떼자 오토바이가 움직였다.

거의 동시에 거리의 좀비들이 나를 획 돌아봤다.

눈자위는 번득거렸고 입에서는 침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움직이진 못했다.

"가자."

첫 번째 목표는 약국이다.

나는 좀비들을 무시하며 달렸다.

아직까지는 괜찮다.

포자가 뇌를 지배하고 몸을 움직이기 전까지는 5분에서 10분의 시간이 있다.

그 전까지 약국에 들어가야 한다.

"산 사람은···"

페달을 밟으며 주위를 대강 훑어봤지만 죄다 엎어져 있는 좀비뿐이었다.

감염되지 않은 사람은 없는 건가?

나는 이를 악물고 약국으로 향했다.

마침 앞에는 아무도 없었고 셔터는 내려져 있지 않았다.

나는 오함마로 유리문을 깨버렸다.

와장창!

그리고 오토바이를 안으로 들이고 셔터를 내렸다.

"차원문 열어."

다음으로 할 일은 진열대에 있는 모든 것을 쉘터로 옮기는 것이다.

유달리 더운 여름이고 셔터까지 닫아놓으니 안은 완전히 찜통이었다.

하도 바쁘게 움직이다보니 금방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땀이 솟았다.

방검복을 벗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순 없지.

"뭐가 이리 많아?"

약국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안의 창고까지 뒤집으니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아예 진열대를 기울여 와르르 쓸어 넣었다.

약국을 거의 텅 비워가고 있을 무렵, 누군가가 셔터를 쾅쾅 두드렸다.

사람인지 좀비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는 마지막으로 주사기 뭉치를 왕창 던지고 셔터를 통통 두드렸다.

크워어억!

"나는 별로 안 반가운데."

한둘이 아닌데 이를 어찌 한다···

"일단은 오토바이 방향을 돌려놓고."

셔터를 연 순간 뛰쳐나가는 건 좀비들에게 잡힐 수 있어 위험하다.

여기선 차근차근 해치우는 편이 낫다.

나는 차원문의 위치를 다른 창고로 옮기고 메이스와 방패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셔터를 올리며 방패를 내밀었다.

좀비 네 마리가 나를 봤지만 방패에 막혀 허우적거렸다.

카아악!

익숙한 풍경, 익숙한 반응이었다.

나는 방패를 회수하며 앞에 선 좀비의 대가리에 메이스를 꽂았다.

"덤벼. 새끼들아."

< 종말의 날 - 1 > 끝

< 종말의 날 - 2 >

좀비와 싸우는 건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무기만 있으면 한두 놈과 붙어서 쓰러트릴 수 있다.

하지만 좀비가 한둘이 아니라서 문제다.

놈들과 싸우다보면 시끄러운 소리가 나기 마련이고, 곧 좀비들에게 둘러싸이게 된다.

도시라서 장애물도 많아 걸려 넘어지기가 일쑤였다.

한번 넘어지면 그걸로 끝이다.

"그래서 장소를 잘 선택해야지."

무대를 좁은 공간으로 한정한다면 승산이 있다.

좁은 골목, 복도, 문 같은 장소 말이다.

이 때는 방패 하나만 있으면 좀비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

강화 좀비가 아닌 이상 1:1을 해가면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팰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나는 좀비 한 마리가 들어오도록 한 뒤 메이스로 후려쳤다.

뻑!

놈은 자기가 어떻게 당하는지도 모르고 허물어졌다.

그렇게 하나씩 후려치다보니 네 마리가 다 쓰러져 있었다.

「8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헉, 헉···이거 장난이 아니네."

어제만 해도 이렇게 덥진 않았는데 갑자기 왜 이래?

조금만 움직여도 땀으로 샤워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땀을 식힐 시간도 없다.

나는 메이스와 방패를 차원문에 넣고 오토바이에 몸을 실었다.

부르릉 소리를 내며 오토바이가 힘차게 달려 나갔다.

그아아아―

곳곳에서 좀비가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아직은 포자에 완전히 지배당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움직임이 굼떴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고 에너지를 섭취한다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 때가 되기 전 자리를 잡고 튜토리얼을 맞아야 한다.

나는 이리저리 오토바이를 움직여 좀비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높아진 인지 스탯과 지형감지 스킬 덕분에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

"한 명도 없는 건가···"

어느 주택 옆을 지나가는데 좀비가 누군가를 덮치는 게 보였다.

"아아악! 살려줘요!"

나는 스로틀을 풀지 않고 속도를 유지했다.

여기서 멈춰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가까스로 철물점에 도착하긴 했는데 튼튼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젠장."

나는 곧장 산소절단기를 내려 자물쇠를 절단하기 시작했다.

좀비들이 사방에서 몰려드는 게 느껴졌다.

마침내 자물쇠가 떨어져 나갔다.

나는 셔터를 올리며 낡은 문을 몸으로 밀고 들어갔다.

철물점 안은 좁아서 오토바이를 들일 공간이 없다.

셔터를 닫자 텁텁한 공기가 나를 감쌌다.

쪽방에 있던 주인아저씨, 아니 좀비가 천천히 나왔다.

그어어어.

하지만 공간이 협소하고 물건이 많아 내게 제대로 접근하질 못했다.

이리 부딪치고 넘어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미안합니다."

나는 메이스로 좀비의 머리를 박살냈다.

밖에 있던 녀석들이 셔터를 두들겼다.

"좀 참으라고."

다음은 닥치는 대로 쓸어 넣어야 한다.

그런데 철물점에 있는 물품이 한둘인가.

최대한 금속 위주로 넣으려 했지만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진열대를 쏟으려 해도 무거워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천천히, 천천히."

나는 침착하게 마음을 다스렸다.

여기 있는 물품은 지금이 아니면 못 구하는 것들이다.

시간을 많이 쓰는 한이 있어도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게 좋다.

"이거를 끝낸 다음에는."

바로 경찰서로 달려가 털기로 했다.

캠핑용품점은 거리도 있고 워낙 커서 마지막에 가야 할 것 같았다.

다른 장소는 시간이 되면 가는 걸로.

이마와 목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오토바이 헬멧을 벗고 헉헉거리며 작업을 계속했다.

"아 진짜."

도저히 못해먹겠네.

밖에선 좀비들이 셔터를 쾅쾅거려 시끄러웠고 몸은 더위에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새벽에 할 걸 그랬나?

하지만 사람들의 신경이 곤두서 있는 마당에 자칫 걸릴 위험이 있었다.

차원문이 있으니 큰일은 없겠지만 시선을 끄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말년병장은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한다고 하지 않던가?

좀비 사태를 앞두고 최대한 조용히 있고 싶었다.

나는 차원문을 열고 숲에 들어갔다.

시원하다 못해 싸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아···좋다···"

딱 1분만 있자.

쉘터 앞 공터에 나와 있던 딩고가 나를 향해 짖었다.

땀이 증발해 모락모락 솟아오르자 놀란 모양이었다.

"쉿. 여기서 좀 놀고 있어, 알았지?"

나는 녀석을 쓰다듬어 준 다음 아쉬움을 달래며 철물점으로 나갔다.

한겨울에서 갑자기 한여름으로 바뀌었다.

"얼리고 녹이네. 내가 무슨 황태냐."

그래도 1분이나마 찬바람을 쐬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곧 땀으로 질척해지겠지만 오토바이를 타면···

쿵쿵쾅쾅!

셔터가 부서질 듯 들썩거렸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물건을 집어던지기에 바빴다.

새삼 느낀 건데, 철물점엔 무거운 물건이 엄청 많다.

종류가 다양하기도 해서 내가 집은 게 뭔지 구별도 되지 않았다.

"으라차차!"

시멘트 포대 수십 개를 던지고 나자 현기증이 몰려왔다.

나는 차원문에 머리를 집어넣고 식혔다.

이런 것도 되는구나.

"아···시원하다···"

쿵! 쿵!

좀비들이 하도 두들기는 통에 셔터가 거의 부서지기 직전이 되었다.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내다본 나는 기절할 뻔했다.

"뭐 이리 많이 모였어?"

좀비 다섯 마리가 나를 포착하고 셔터가 부서져라 두들기고 있었다.

나보다는 다른 식량을 찾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냐?

10분만 기다리면 식량을 찾으러 떠나겠지만 내게는 시간이 없었다.

여기서 또 한바탕 해야겠군.

나는 미리 주머니에 넣어둔 태양사과 조각을 씹어 삼켰다.

지구력이 회복되며 흐릿하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그리고 헬멧을 착용하고 메이스와 방패를 들었다.

망가진 셔터를 올리자 세 마리가 휘청했고 다른 둘이 내게 이빨을 드러냈다.

"죽어보자 자식들아."

.

.

.

나는 좀비를 처치한 뒤 오토바이에 무거운 몸을 싣고 경찰서로 향했다.

너무 덥고 지쳐서 태양사과를 아무리 먹어도 별 효과가 없었다.

회복해주는 지구력에 한계가 있나보다.

탈진에 걸려 생존갈망이 활성화되었다.

덕분에 경찰서에 도착할 때쯤엔 몸이 매우 가벼워졌다.

"빨리 루팅하고 쉬어야···"

입구에 오토바이를 내팽개치고 산소절단기를 내리는데 안에서 총성이 들렸다.

젠장, 누가 온 건가.

어차피 철사병 때문에 얼마 쓰지도 못하는데 왜 여기 왔지?

아니면 원래 있던 경찰인가?

"집에 있는 것보다는 안전하다고 판단한 거겠지."

왜냐면 여기 지구대엔 무기고가 있으니까!

문제라면 나도 무기고가 탐나서 여기로 왔다는 점이다.

"어쩔 수 없지."

나는 경찰서 입구가 보이도록 차원문을 연 다음 그대로 뛰어들었다.

총성을 들은 좀비들이 사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젠장, 일이 어려워지는데."

나가서 도와주는 건 바보짓이다.

좀비와 사람, 둘을 동시에 상대해야 되기 때문.

재수 없으면 눈먼 총알에 맞아 죽는다.

숲의 차가운 공기를 만끽하고 있으려니 좀비들이 꾸역꾸역 입구에 들이닥쳤다.

탕! 탕! 탕!

좀비 두어 마리가 피를 뿜으며 나가떨어졌지만 숫자는 거의 줄지 않았다.

오히려 총소리에 주변의 좀비들이 몽땅 몰려드는 지경.

"분명히 공략을 봤을 텐데."

초반의 좀비는 시각과 청각에 예민하다는 걸 모르나 보다.

총을 쏜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가 밑을 내려다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좀비가 없는 쪽으로 떨어지면 도망갈 수 있다고 판단했겠지.

조심조심 난간에 매달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키가 큰 좀비 하나가 그의 바짓단을 끌어당겼다.

"악!"

그는 버둥거리다가 결국 떨어지고 말았다.

좀비들이 괴성을 지르며 덮쳤고,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젠장."

나는 잠시 차원문을 닫았다.

잠시 기다리면 녀석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것이다.

"시간이 별로 없는데···"

더 지체하면 다른 장소에 갈 시간이 없다.

10분이 지난 후 나는 차원문을 열었다.

지구대 앞을 점령하고 있던 좀비 떼는 2층에 올라가 있었다.

방금 죽은 사람이 비축한 식량을 축내나 보다.

당장이라도 쫓아 올라가 차지하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양은 그리 많지 않을 테고, 좀비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할 테니까.

잠시 후 좀비들이 내려와 경찰서 밖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지구대 주차장에는 차량과 좀비들에게 뜯겨 엉망이 된 시체만이 존재했다.

나는 시선을 돌리며 남자가 떨어트린 리볼버를 주웠다.

젠장, 피 냄새가···

너덜너덜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은 난장판이었다.

"무기가 이거밖에 없어?"

남자가 처음 총을 쐈던 곳에 가보니 38구경 실탄 15발과 K2소총 한 정, 5.56mm 실탄 20발이 나를 반겼다.

무기고엔 총기 한 정 남아있지 않았다.

"이거 미리 빼돌렸네."

민중의 지팡이가 이래도 되는 건가?

하긴 나도 그 민중의 지팡이를 털러 왔으니 거기서 거기다.

"일단 이거라도 옮기자."

나는 무기고 안에서 차원문을 열어 총기 두 정과 실탄 35발을 집어넣었다.

위층으로 올라가보니 좀비들이 식량을 마구 파헤쳐서 엉망이었다.

"이걸 다 처먹었네."

좀비의 식성은 유명하니까.

그래도 경광봉과 테이저건 3개, 무전기 등은 꽤 유용할 것 같았다.

나는 장비를 챙기고 밖으로 나섰다.

오토바이를 몰고 도로를 달리니 여기저기서 좀비들이 달려들었다.

그워어억!

별로 안 반가우니까 꺼져.

간신히 오토바이점 앞에 도착한 후 상황을 보니 난감했다.

가게가 완전히 노출되어 있어 좀비의 시선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남아있는 것도 스쿠터와 ATV 한 대뿐이었다.

나는 재빨리 가게 안에 들어가 ATV로 문을 틀어막고 서랍을 뒤졌다.

"열쇠가···열쇠가···"

크아아악!

그 와중에 나를 발견한 좀비 몇 마리가 ATV를 넘어오려 애썼다.

나는 메이스를 한 손으로 잡고 놈들을 밀며, 다른 손으로는 서랍을 뒤지는 곡예를 펼쳐야 했다.

열쇠꾸러미 발견!

나는 볼 것도 없이 메이스로 좀비들을 후려갈겼다.

두 마리가 그렇게 쓰러지자 차원문을 열어 열쇠꾸러미와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집어던졌다.

좀비가 모여들었다.

바삐 움직인 덕분에 숨이 차올랐다.

헬멧과 방검복에 땀이 가득해 질척거렸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적이었다.

나는 차원문을 열고 함께 들어가 헬멧을 벗고 숨을 돌렸다.

좀비들은 마치 벽에 부딪친 듯 차원문을 두드렸다.

설마 이거 깨지진 않겠지?

나는 초조하게 좀비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캠핑용품점에 가야 되나···"

지구대에서의 루팅이 아쉬웠다.

총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실탄을 더 확보하고 싶었는데.

인근에 있는 보병대대로 갈까?

하지만 한 명이라도 무장하고 있을 경우 나는 총격전을 치러야 한다.

"탄약고를 점령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승산이 없다.

차원문에 숨으면 무장병이 언젠가 모습을 드러내겠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나는 태양사과 반쪽을 우걱우걱 씹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때마침 거리를 달려오던 오토바이가 나를 발견하고 멈췄다.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쪽방에 숨었다.

"씨발새끼, 잘 만났다."

빌라 패거리의 문신남과 홀쭉이가 오토바이에서 내려 가게 안으로 석궁을 겨눴다.

텅,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볼트가 쪽방에 틀어박혔다.

"너 이 새끼, 반드시 잡아서 좀비한테, 던져주고 만다, 이 호로새끼야."

숨을 거칠게 내뱉는 걸 보니 덥긴 덥나보다.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말하자 문신남이 ATV를 훌쩍 뛰어넘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몰라서 묻냐? 내가, 훅, 씨발 침을 발라뒀는데 그걸, 그걸 데려가?"

"당사자 입장도 고려해야지."

"당사자는 지랄. 내가 가자면, 가는 거야, 개새끼야. 빨리 튀어나와라. 눈알에 볼트 박아버리게. 아니면 전기구이 해줄까?"

전격계 능력자가 확실하군.

나는 차원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쪽방으로 접근한 문신남은 문을 활짝 열고는 당황해 했다.

"어? 이 새끼 어디 갔어?"

"형님 없습니까? 좀비들 옵니다!"

"야, 밖에 찾아봐라! 이 새끼 이거 각성자였나?"

문신남이 등을 돌리고 빠져나가려는 찰나였다.

나는 메이스를 들고 튀어나가며 녀석의 어깨를 힘껏 후려쳤다.

콰직―

불길한 소리가 나며 문신남이 주저앉았다.

"끄아아악!"

"쉿."

나는 쓰러진 놈의 대가리를 후려쳤다.

비명이 멈췄고 나는 석궁과 볼트집, 배낭을 루팅해 차원문에 숨었다.

"혀, 형님!"

밖의 똘마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내가 튀어나가면서 쏜 석궁에 맞았다.

"끄억!"

좀비들이 그를 덮쳤다.

나는 차원문에 숨어 숨을 돌렸다.

"휴···"

「5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이게 유저···사람을 죽인 결과다.

튜토리얼이 시작되지 않았기에 나는 살인자 시스템이 활성화되진 않으리라 추측했다.

또한 살인자 시스템은 1명으로는 발동되지 않는다.

3명부터는 무조건이지만 2명까지는 애매한 판정조건을 가지고 있다.

직접 죽였느냐, 죽음에 얼마나 간섭했느냐를 따지는 듯하다.

하여튼 문신남을 죽였음에도 그 특유의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몇 시간 안으로는 사람을 죽여대도 페널티를 받지 않는다는 소리.

하지만 나는 빌라 패거리를 제외하곤 선제공격을 할 의사가 없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

차원문이라는 엄청난 능력이 있긴 하지만 눈먼 화살은 못 이긴다.

누가 나를 공격하면, 나도 반격한다.

그리고 나를 공격한 놈은 반드시 죽인다.

밖의 좀비들이 질척거리며 몰려와 두 명의 시체를 뜯었다.

젠장.

나는 욕지기를 참으며 녀석들의 머리에 메이스를 날렸다.

그리고 ATV와 양아치들이 타고 온 오토바이를 낑낑거리며 옮겼다.

철사병까지 1시간 40분 남았다.

< 종말의 날 - 2 > 끝

< 종말의 날 - 3 >

오후 4시 30분.

뜨거운 열기는 여전하고 좀비의 기세는 더 강해졌다.

이제 놈들은 제각기 움직이는 게 아니라 군집을 이뤄 다니기 시작했다.

두개골 안의 포자가 그렇게 명령을 하는 것이다.

뭉쳐 다니면 생존확률이 올라간다고.

덕분에 나는 캠핑용품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토바이를 수납해야 했다.

"저기를 어떻게 뚫는다···"

골치 아프게도 캠핑용품점 안에는 이미 생존자들이 들어가 농성하고 있었다.

밖에선 좀비 수십 마리가 안에 진입하기 위해 아우성쳤다.

유리창이 깨지며 화살이 몇 발 튀어나왔지만 좀비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에서 더 몰려드는 느낌이었다.

"혹시 안에 사람이 많나?"

원래 한 팀은 아니었을 테고, 캠핑용품점 털러 왔다가 갇혔을 확률이 높았다.

화살을 보면 영문도 모르고 봉변을 당한 게 아니라 미리 준비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양보할 마음이 없을 테니 얼마 못가 싸움이 일어나겠군.

아니나 다를까 깨진 유리창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 나가!"

"지금 장난해? 우리가 먼저 왔는데!"

"확 문 열어버린다!"

"열어봐! 열어!"

극한상황은 부정적인 감정을 증폭시켜 서로 싸우게 만든다.

지금 저들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악에 받힌 상태였다.

안에서 서로를 겨누고 있을 테고, 실수로 발사라도 하는 날에는···

"아악! 저 새끼 쐈어!"

"우리도 쏴, 씨발!"

"시, 실수였어! 실수였다고!"

쏜 다음에 실수였다고 하면 되나.

"죽인 다음에 말해야지."

나를 적대시하는 놈에 한해서지만.

그건 그렇고 저렇게 떠들어서야 좀비들이 떠나진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근처 건물 옥상에 올라간 뒤 사태가 끝나길 기다렸다.

"1시간 20분 남았나···"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니 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거 열지 마! 다 죽는다고!"

"니들이 먼저 쐈잖아! 그냥 다 죽자고!"

거의 악에 받친 소리였다.

잠시 후에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좀비들이 그걸 눈치 채고 뒷문으로 몰려들자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뛰어! 뛰어!"

역시 싸우는 것보단 도망이 우선이지.

수십 마리의 좀비들이 뒷문으로 몰려가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마치 하나의 군체가 되어 꾸물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2층에서 뛰지는 않고 얌전히 내려왔다.

그리고 좀비가 얼마 없는 정문으로 접근했다.

"흡!"

몇 마리의 좀비를 해치우며 단단한 유리문을 오함마로 깨버렸다.

그리고 안에 들어가 주변을 살폈다.

안에 있던 생존자들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고 좀비들은 그들을 따라 나간 상태였다.

있는 놈들이라 해봐야 넷 정도?

"니들도 따라 나갔어야지."

좀비들이 나를 잡겠다고 앞을 다투어 걸어왔다.

아직까지는 여유롭구만.

튜토리얼이 끝난 뒤에는 주위에 강화 좀비가 리젠되니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옆으로 스텝을 밟으며 메이스로 대가리를 깨버렸다.

좀비를 족치는 것보단 빨리 뒷문을 닫는 게 중요했다.

한 놈의 대가리를 깨버리고 얼른 뒷문으로 달려가 쇠사슬을 걸었다.

으어어어―

좀비 세 마리가 나를 포위하며 걸어왔다.

입이 묘하게 비틀려서 갇혔으니 못 나가겠지? 하고 웃는 것처럼 보였다.

"틀렸어. 니들이 나하고 갇힌 거야."

나는 메이스로 좀비 세 마리를 두들겨 깨고 포인트로 환산시켰다.

"빨리 챙기고 뜨자."

가능하면 중장비 업체까지는 루팅하고 싶었다.

군침 도는 장비가 아주 많았거든.

차원문을 열고 허겁지겁 캠핑용품을 던져 넣다 보니 더운 날씨에 머리가 핑 돌았다.

이럴 땐 차원문에 머리를 넣고···

"아···시원하다···"

딩고는 내 머리가 수증기를 뿜자 멀리 떨어져서 왕왕 짖었다.

이 꼴이라서 미안한데 조금만 참아줘.

나는 정신을 차리고 캠핑용품을 무차별로 넣었다.

텐트, 침낭, 코펠, 식기, 접이식 테이블, 의자, 난로, 화로, 로프 등등등!

"끝이 없구만!"

그나마 다행인 건 품목별로 차근차근 정리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해서 나는 비싸 보이는 몇 개만 넣고 다른 섹터로 향할 수 있었다.

티타늄 코펠 세트는 확실히 탐나는 물건이지만 그게 몇 개씩 있을 이유는 없다.

"도자기 세트도 챙기고."

아무렇게나 집어넣다가 더위를 식히러 차원문 안에 들어가니 아주 가관이었다.

그 넓던 공터에 내가 루팅한 물자가 꽉 차 있었다.

딩고는 동굴 입구로 도망간 상태였다.

한 시간 남았나···조금만 더 힘내자.

"휴우···죽겠구만."

태양사과도 이제 없다.

마지막 힘을 짜내서 캠핑용품점을 한 바퀴 돌았을 때, 밖에서 누가 셔터를 올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

어두운 곳에 있어서 눈이 부셨고 너무 지쳐있어서였다.

셔터를 연 사람들은 잔뜩 지친 기색의 남자 둘, 여자 하나였다.

아까 도망간 사람들인가 보다.

그들은 나를 보곤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뭐, 뭐야? 언제 들어왔어?"

"아까 걔들이 아닌데?"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곤 머리를 흔들었다.

"···보시다시피 그냥 사람입니다. 안에 물건 많으니까···가져가세요."

내 손에 들린 건 세라믹 식기 세트뿐이다.

그들은 나를 흘끔거리며 속삭였다.

"여기 도자기 세트 없는데? 누가 가져간 거야?"

"저 사람이 가져간 거 아냐?"

"배낭도 없는데 뭔 소리야. 빨리 물건이나 챙겨."

이제 40분 남았다.

적당히 루팅도 했고 장비업체에 가야겠군.

나는 눈치를 보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다른 생존자들은 물건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 명이 끝까지 나를 힐끔거렸다.

"저 사람 그냥 놔둘 거야?"

"그럼 어쩌자고? 죽일까?"

"그딴 생각할 시간에 빨리 챙기는 게 이익이야."

잘 생각하신 겁니다.

나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오토바이를 꺼내 장비업체로 달렸다.

뜻밖에도 좀비는 거의 없었다.

아마 허기를 느끼고 식량을 찾으러 갔을 것이다.

이 거리에는 먹을 거라곤 거의 없으니까.

나는 산소절단기로 자물쇠를 따고 안에 있던 장비와 소모품을 쉘터로 옮겼다.

"헉, 헉, 진짜 죽겠네."

이러다가 철사병이 오면 뛰지도 못하고 눕겠는데?

조금 쉴까 했지만 바로 옆의 농약사가 너무 탐이 났다.

비료포대와 농약, 비닐을 포함한 자재, 씨앗···모두 놓칠 수 없었다.

"이건 넣어야 돼."

나는 간신히 차원문에 넣고 축 늘어졌다.

남은 시간은 20분.

고개를 드니 원룸촌이 보였다.

이 부근은 월세가 저렴해서 근처 대학에 다니는 대학생들이 주로 이용한다.

"방학이니 집에 갔겠지?"

내가 노리는 건 PC에 달린 하드디스크다.

아무래도 학생들이 쓰던 것이니 드라마, 영화, 음악 같은 컨텐츠가 많을 것이다.

20분 만에 대단한 걸 루팅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두어 집은 털겠지.

나는 1층 창문의 쇠창살을 절단기로 뜯어내고 오함마를 집어던졌다.

와장창!

무거운 몸을 간신히 투룸에 집어넣고 보니 빙고.

데스크탑과 네트워크 저장장치인 NAS가 있었다.

"케이스가 비싸 보이네."

좋은 컴퓨터에는 좋은 데이터가 많겠지.

나는 조심조심 컴퓨터 세트를 차원문 안에 넣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1층 투룸 하나를 더 턴 뒤 차원문 입구를 쉘터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로 옮겼다.

혹시 포자가 묻어 쉘터의 금속을 박살내면 죽도 밥도 안 되기 때문이다.

못을 차원문 밑에 넣어두고 출입하면 철사병이 숲에 들어오는지 확인이 될 것이다.

그리곤 차원문 안에 모든 것을 집어넣고 계단에 앉아 기다렸다.

6시가 되자 지진이라도 온 듯 땅이 흔들렸다.

쿵!

"왔다."

나는 재빨리 원룸 건물 밖으로 나가 도로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철사병이 닥치면 모든 금속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금속이 없는 공터가 제일 안전하다.

쿵! 쿵! 쿵!

굉음이 연속으로 귀를 먹먹하게 했다.

멀리에 있던 빌딩이 와지끈 내려앉았다.

"허···"

쿠르르르―

굳건히 서 있던 아파트 단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려 진동과 먼지구름을 만들어냈다.

충격파가 여기까지 퍼져 눈을 뜨지 못할 정도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요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인류문명이 종말을 고하는 소리.

모든 금속이 바스러지는 소리.

그리고···진정한 아포칼립스가 열리는 소리.

자동차를 구성하던 프레임과 외장이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내려앉았다.

빌라의 가스배관이 와장창 무너졌다.

곳곳에서 가로등이 형체를 잃었고 가게의 간판에 부서져 흩어졌다.

나는 가까이에 떨어진 금속 파편을 만졌다.

엄지손톱 크기는 되던 금속이 모래알처럼 잘게 부서졌다.

내가 알던 철사병과 같다.

일정 크기 이상의 결합을 방해하는···

건물을 자세히 살펴보니 여기저기 얼룩이 져 있었다.

"부식···은 아니네."

이 짧은 시간에 아파트가 무너진 걸 보면 입자선이 확실한 것 같다.

용케 인체에는 해를 안 끼치는 게 특이하구만.

지금 이 순간에도 주위의 건물에선 요란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아주 자그마한 충격에도 금속이 부서지니 연쇄충격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튜토리얼 할 때는 철문이 있었는데."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연출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연출은 다음에 있었다.

몸을 못 가눌 정도의 바람이 불어오더니 멀리에서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게 아닌가.

"뭐, 뭐야?"

순간 핵폭탄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의 엄청난 폭발이었다.

하지만 부산에 그런 게 있을 리가.

그리고 저 거리에서 터졌다면 나는 지금쯤 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건···

"탄약고에서 터진 거네."

방향도 보병대대가 있는 쪽과 같았다.

탄약고의 포탄 외피가 산산이 부서져서 금속 스파크를 일으켜 화약을 점화시켰다면?

탄약고 전체가 대폭발을 일으킬 것이다.

"군부대 갔으면 완전 작살날 뻔했어."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원룸 건물에 들어가 차원문을 열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못은 멀쩡했다.

"크, 좋고."

차원문 안의 세계는 철사병에 영향 받지 않는다는 게 드러났다.

그럼 무서울 게 없지.

나는 허겁지겁 차원문의 위치를 쉘터로 옮겼다.

오토바이···는 이제 쓸 수 없다.

"쓸 수 있는 게 활하고 워 클럽 정도구만."

그렇다면 전에 들여온 100파운드 리커브 보우가 좋다.

화살은 카본촉으로 100발을 준비했기에 모자라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금속이 없는 배낭에 식량과 생수, 구급약, 폭죽 등 필수적인 것들을 챙겼다.

이제부터 이게 생존배낭이 된다.

"차원문이 항상 열린다곤 보장 못하지···"

만약 서바이벌 라이프의 제작진이 이 사태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면.

유저들을 엿 먹일 시스템을 패치로 넣어놨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은 변태니까."

아이템의 효과를 봉쇄하는 강화 구울이 튀어나온 적도 있으니 방심은 못한다.

나는 내 장비에 금속이 있나 살폈다.

옷의 지퍼 등도 미리 끈으로 바꿨기에 금속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딩고가 내 옆에 와서 왕왕 짖었다.

"너는 위험한데."

나는 어흥, 하며 좀비 흉내를 냈지만 녀석은 물러서지 않고 짖어댔다.

몇 시간 동안 혼자 있어서 심심했나보다.

"알았어, 같이 가자."

나보다 잽싼 녀석이니 좀비에게 붙잡히지는 않겠지.

나는 녀석과 함께 차원문을 넘었다.

곳곳에서 건물이 무너져 뿌연 먼지구름이 사방을 뒤엎고 있었다.

"분위기 죽이는구만."

아포칼립스 냄새가 물씬 풍겼다.

나는 딩고와 함께 식자재마트로 향했다.

.

.

.

좀비 사태가 터지면 마트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가 된다.

안에 있는 음식물을 먹으러 주변의 모든 좀비가 몰려들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의 식자재마트도 좀비로 가득 차 있었다.

"누가 보면 마트 세일하는 줄 알겠어."

나는 상가에 숨어 길 건너 마트를 훔쳐봤다.

속의 철근이 죄다 바스러졌을 텐데도 하중이 크지 않은지 멀쩡했다.

마트 안은 진열대가 모두 무너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여 마리 이상의 좀비가 몰려들어 꾸역꾸역 뭔가를 먹어댔다.

주차장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수십 대의 차···아니, 차였던 잔해가 널브러져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금속이 바람에 충격을 받아 간헐적으로 내려앉곤 했다.

"기름은 충분한 것 같은데···좋아."

철사병 때문에 연료통도 박살나 주차장은 기름과 금속으로 뒤섞여 있는 상태였다.

차 한 대당 대략 수십 리터의 기름이 쏟아졌으니 저렇게 될 수밖에.

휘발유가 섞여 있어서 누가 불만 당겨주면 활활 타오를 것이다.

나는 다시금 동선을 되새겼다.

"왼쪽으로 들어가서 좀비를 몰고 오른쪽으로 나오면서···"

미리 폭죽을 준비해야 한다.

시선을 끌고, 심지가 다 타기 전에 점화.

"녀석들을 적당히 끌면서도 포위당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야겠구만."

나는 좀비와의 거리를 완벽하게 재고 컨트롤로 농락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건 토끼공듀와 오리궁뎅이의 특기다.

하지만 이 정도는 나도 해볼 만했다.

"딩고 넌 여기 있어."

뛰어다니는 놈이 둘이나 있으면 좀비들이 헷갈려 하니까.

딩고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자리 잡았고 나는 폭죽을 두개 꺼냈다.

성냥으로 하나를 켜고···뛰세요!

나는 좀비 한 마리를 뒤에서 받아버리고 주차장을 향해 뛰어갔다.

좀비들의 머리가 나를 향해 획 도는 모습은 언제 봐도 공포영화가 따로 없다.

뭐 이제 현실이 공포영화지만.

"여기야! 여기라고!"

카아악!

나는 이를 드러내며 접근하는 좀비를 슬쩍 피한 다음 마트 안을 향해 폭죽을 흔들었다.

니들이 원하는 움직이는 식량이 여기 있다!

"먹고 싶지? 나와, 나오라고!"

좀비를 꾀어내는 데에는 자고로 시끄럽게 떠들고 불을 켜는 게 최고다.

후각은 완전 맛이 갔지만 시력과 청력은 비교적 멀쩡하거든.

내 움직임과 폭죽에 매료된 좀비들이 일어서서 따라 나왔다.

순식간에 수십 마리가 주차장으로 나왔다.

나는 최대한 기름이 없는 쪽으로 뛰었다.

혹시 불똥이 튀어 불이 붙으면 나만 죽으니까.

"이야아아!"

무작정 달리는 나를 수십 마리가 달라붙었다.

이거 완전 피리 부는 사나이로구만!

쥐들이 강에 도착했을 때, 나는 주차장에서 벗어나 폭죽을 집어던졌다.

휘발유와 경유가 잔뜩 퍼진 맨바닥에 불길이 확 일어났다.

"와!"

거칠게 솟아오른 불길이 좀비들을 뒤덮었다.

좀비들이 입고 있는 옷이 순식간에 타올라 불길에 휩싸였다.

크어어어―

좀비들은 허우적대며 나를 쫓았지만 하나둘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너진 좀비가 방해물이 되어 다른 좀비를 넘어뜨리고,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되었다.

이제 주차장은 캠프파이어를 피우는 것처럼 붉게 타오르며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동시에 내 시야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벨이 11로 올랐습니다」

「포인트를 104 획득했습니다」

「10레벨이 되어 특성에 추가 효과가 붙습니다」

「차원 슬롯」

나는 정신없이 마트 안으로 달렸다.

좀비 태반이 사라진 덕분에 안이 휑했다.

차원문을 열고, 바닥에 쏟아진 식료품들을 열심히 집어던졌다.

초콜릿, 껌, 사탕, 젤리···혼자선 최소 몇 개월 먹을 양이었다.

"헉, 헉···"

탈진과 생명갈망이 동시에 적용되었다.

지금 도망가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

나는 덮쳐오는 좀비들을 피해 밖을 향해 달렸다.

딩고가 나를 쫓아왔다.

< 종말의 날 - 3 > 끝

< 튜토리얼 - 1 >

"어구구구···"

나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동굴 안 매트리스에 몸을 뉘었다.

공터에 엄청난 양의 물자가 널브러져 있지만 지쳐서 신경도 쓸 수 없었다.

일단 윤형철조망이 잘 막아 주리라 믿고···

"조금만 쉬자···"

눈이 거의 감기려는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났다.

조금 있으면 튜토리얼인데 여기서 자면 큰일이지.

그나저나 춥고 배고프군.

겨울이라 동굴은 냉장고를 연상케 했다.

"어으, 춥다."

나는 옷을 껴입고 화로에 불을 피웠다.

몇 시간 동안 고생했으니 맛있는 거 먹어도 되겠지.

메뉴를 고르려는데 딩고가 작게 짖었다.

"왜? 밖에 뭐 있어?"

그런 거라면 CCTV가 먼저 알람을 보내야 하는데···

나는 무심코 문을 열었다가 당황했다.

동굴 앞에 더덕으로 보이는 뿌리가 2개 덩그러니 놓여 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보니 풍뎅이들이 2마리 1조로 들고 있었다.

"웬 더덕?"

더덕치고는 어째 많이 큰데···

그것보다 니들 도둑질하다가 도망간 거 아니었어?

녀석들은 영차영차 더덕을 들고 와서는 스윽 내밀었다.

"···이거 혹시 사과의 의미냐?"

이렇게 말해봐야 알아들을 리가 없지.

대체 풍뎅이하고 뭘 대화하겠다는 거야.

녀석들은 더덕을 바닥에 놓더니 좌우로 물러났다.

그리고 대장···으로 보이는 큰 녀석이 나뭇가지를 가져와 땅에 그림을 그렸다.

"허."

풍뎅이가 그림 그린다!

나는 당황해서 잠시 말문을 잊었다.

근데 이 녀석 꽤 잘 그리잖아?

정교하진 않았지만 대충 젤리 포장이라는 건 연상이 되었다.

대장 풍뎅이는 앞발로 젤리를 가져가는 자세를 취했다.

"그랬지. 니들이 이거 훔쳐갔어. 그리고?"

녀석은 포도알을 하나 그리곤 물러났다.

그 모습은 이거 놓고 갔으니 괜찮지 않아? 하고 묻는 것처럼 보였다.

이 녀석들 선 넘네.

"야, 젤리를 가져가려면 포도알 하나가 아니라 한 송이를 들고 와야지."

나는 다른 나뭇가지로 포도 한 송이를 슥슥 그렸다.

녀석들은 포도 그림과 나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앞다리로 더덕을 가리켰다.

그럼 저건? 하고 묻는 건가.

"저만큼 크면 맛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더덕을 들고 킁킁거리니 와, 향이 아주 예술이었다.

이만한 자연산 더덕이면 산삼도 부럽지 않다고 하던데.

"이거면···오케이."

나는 대장 풍뎅이가 그린 젤리 옆에 더덕과 포도 한 송이를 그렸다.

녀석들이 그림 주위를 둘러싸곤 머리를 끄덕거렸다.

거참 신통방통한 놈들일세.

대장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정말로 이거면 돼? 하고 묻는 듯했다.

"그러니까 거래를 하자는 거지?"

나는 젤리 몇 개를 가져가 바닥에 늘어놓았다.

풍뎅이 네 마리 모두 고구마 맛을 찍었다.

"좋아. 이걸 원한다면 너네도 뭘 가져와. 꼭 먹을 것이 아니어도 돼. 신기하고 특이한 것이라면."

나는 에메라스 덩이를 조심조심 가져와 보여주었다.

대장 풍뎅이가 에메라스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걸 찾을 수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이쯤해서 호의를 보여주는 게 좋겠지.

식자재마트에서 쓸어왔기에 풍뎅이들과의 거래에 쓸 젤리는 많다.

나는 고구마 맛 젤리를 대장에게 건넸다.

"이건 그냥 선물. 앞으로 좋은 거 가져와 달라는 의미에서 주는 거야."

풍뎅이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녀석들은 물러갔고 나는 상념에 잠겼다.

마법이 걸린 숲에 지능이 있는 풍뎅이라···

"이거 완전 공포영화인데."

자는 틈을 타서 해코지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진짜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진작 저질렀을 것이다.

젤리 도둑 행세를 하는 게 아니라.

나는 풍뎅이들을 믿어보기로 했다.

"이거 더덕 비슷한 맛이 나려나."

과장 좀 보태서 애기 팔뚝만한 더덕이다.

이게 맛이 없으면 좀 억울하겠지.

나는 더덕을 깨끗이 씻어 껍질을 벗겨내고 망치로 쾅쾅 두들겨 넓게 폈다.

동굴에 더덕향이 물씬 풍겼다.

크···좋다.

"더덕은 역시 고추장 양념이지."

찹찹찹 양념을 바르고 석쇠에 올려 구우니 정말 행복했다.

역시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 거야.

"이건 밥 두 그릇 뚝딱이다."

햇반을 물에 끓여놓고 딩고의 밥 준비를 했다.

녀석은 자글자글 구워지는 더덕구이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고추장 양념을 코에 조금 발라주자 기겁하고 도망갔다.

"매우니까 넌 먹으면 안 돼."

나는 딩고와 함께 밥을 먹으며 문신남에게서 루팅한 것들을 살폈다.

"석궁···기성품이네."

활에 비해 관통력은 좋지만 장전에 시간이 더 걸린다.

대신 크기가 작으므로 숨어서 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건 내가 써주지."

볼트는 약 30발로 당분간 쓰기에는 문제가 없다.

배낭에는 뭐가 들었나···더덕구이를 씹으며 탈탈 터니 잡동사니가 쏟아져 나왔다.

"제법 준비했잖아?"

식량과 물, 세라믹 나이프, 도기, 성냥, 휴지 등 생존에 필요한 것들로 가득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생존에 없어선 안 될 필수품이다.

"근데 하나를 잊어버렸네. 함부로 약탈자 흉내를 내지 말라는 마음가짐."

아포칼립스에서는 약탈자가 되기 쉽다.

하지만 잘 따져보면 약탈은 생존확률이 상당히 낮은 방법이다.

약탈은 싸움을 부르고, 먼치킨이 아닌 이상 언제나 싸움에서 이길 확률은 적다.

자잘한 상처를 입다 보면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마음이 피폐해진다.

더불어 나 같은 놈을 적으로 만든다는 리스크도 있다.

"튜토리얼만 끝나면 다 죽여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라."

빌라 양아치들을 다 죽여놔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시계를 확인하니 7시였다.

튜토리얼이 언제부터 시작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칠흑 같은 밤인 것은 확실했다.

1시간쯤 쉬다가 집으로 가면 되겠지.

나는 약간 탄 더덕구이를 호호 불며 입에 넣고 씹었다.

이거 죽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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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레벨 10을 넘었으니 상점을 열 수 있다.

"상점창."

눈앞에 푸른 화면이 나타나더니 아이템 목록이 주르륵 나열되었다.

게임에서 계속 보던 것과 차이가···

"있네?"

아이템 값이 왜 이렇게 비싸진 거야?

정확하게 얘기하면 초반용 아이템은 저렴해졌다.

흑단목 몽둥이나 치료붕대 같은 것.

다만 비쌌던 무기가 더 비싸졌다.

"미스릴 나이프 150 포인트? 장난하나?"

안하던 잠수함 패치를 한 걸까?

노트북으로 영상을 살펴보는데 내가 별 언급을 하지 않고 지나간 문구가 보였다.

여기서 화면 정지.

「매직 메탈을 사용한 무기는 지나치게 강력하다는 점에서 형평성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무기를 상향시키기 보다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균형을 맞추고자 합니다. 매직 메탈 무기를 좋아하시던 유저 분들은 조금 더 까다로운 선택이 필요하실 겁니다」

"미친놈들아."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새로운 방식의 균형은 개뿔이고 결국 가격을 높여서 너프하겠다는 거잖아?

공지했으니 잠수함 패치는 아니란 건가.

이런 사악한 놈들.

"키보드 마우스 패치는 죽어도 안하더니···"

투덜투덜해봐야 소용없다.

나는 공지사항을 자세히 살폈다.

튜토리얼 버그까지 고친 건 아니겠지?

"얘네들 잠수함 패치는 안 한단 말이지···"

패치를 했다면 확실히 고지한다는 점만은 장점이다.

볼 사람이 없어서 문제였지만.

"일단 그 버그는 남아있는 것 같네."

튜토리얼이 시작될 때 유저 근처에 리젠되는 초반용 공격 무기.

패치로 흑단목 몽둥이로 바뀔 텐데 거기에 버그가 있다.

빛에 휩싸여 리젠될 때 재빨리 루팅하면 하나가 더 생긴다는 것.

다른 이벤트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튜토리얼만의 버그였다.

이걸 아는 사람은 나를 포함한 고인물 몇 명밖에 없다.

내구력 튼튼한 무기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니 초반에 아주 좋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헬스장 사람들과 수연에게도 이걸 가르쳐줬다.

김밥조아의 개꿀팁이라고 하면서.

리젠 장소를 좁혀놓고 매의 눈으로 주시해야 한다고까지 적어놨는데 실패하진 않겠지.

"실패해도 난이도가 낮아졌으니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튜토리얼의 난이도가 지랄 같은 건 준비도 안 됐는데 좀비 수십 마리가 덮쳐온다는 압박감에서 기인한다.

조작에 익숙해진 사람조차 어버버 하다가 둘러싸이기 일쑤다.

하지만 좀비의 유기물 추적 능력이 저하된다면 도망갈 틈이 생긴다.

"포인트 획득방법 다양화는 아직도 모르겠네···"

튜토리얼을 하다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배낭에 생존물품을 챙겨 넣었다.

어두운 밤에 좀비를 피해 도망가야 하므로 필요한 것들이 꽤 많다.

도망간 거리를 판정하므로 차원문에 숨으면 자칫 리셋될지도 모른다.

"튜토리얼 보스는 강화 좀비였지."

보통의 강화 좀비와는 뭔가 좀 다른, 특수한 능력을 가진 녀석이었다.

시도할 때마다 다른 능력을 갖고 나오는데 이번에는 어떨지.

나는 상점에서 발광석과 포션을 골랐다.

"6번, 11번."

잠시 기다리자 바닥에 아이템이 나타났다.

게임에선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막상 현실로 나타나니 조금 떨떠름했다.

"이런 건 누가 만들고 리젠시키는 거야?"

제작진을 붙잡고 물어보지 않는 한 알 도리가 없다.

100포인트 이상의 아이템은 당장 쓸모가 없다.

주위의 시선을 끌게 되고, 흑단목 몽둥이로도 초반은 헤쳐 나갈 수 있으니까.

"여기까진 오케이."

나는 새로 얻은 특성 효과를 확인했다.

「차원 슬롯」

이건 또 어떻게 불러내야 하나···

"차원, 슬롯."

몇 가지 단어를 말해봤지만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가만.

서바이벌 라이프에서 인벤토리는 번호로 지정되어 있었지.

혹시 숫자와 슬롯을 조합하면.

"1번 슬롯."

그렇게 말한 순간 왼쪽 아래에 반투명한 상자 같은 것이 나타났다.

"아···이게 퀵슬롯 역할을 하는 건가?"

포션을 놓자 상자가 사라졌다.

다시 1번 슬롯을 읊자 상자가 나타났다.

"이거 좋은데."

일종의 아공간 주머니라고 할 수 있겠다.

투명화나 투영만큼은 아니지만 아이템을 쉽게 수납할 수 있으니 꽤 유용하다.

5번까지 열리는 걸 보니 나머지는 레벨을 더 올려야 하나 보다.

"이제 차원문 열고 더듬거리지 않아도 되겠네."

뭘 어디에 넣었는지 기억해두면 바로 꺼내 쓸 수 있다.

"그렇다면 1번에 활을 넣고···"

나는 5번까지 아이템을 저장했다.

아쉽게도 한 상자에 아이템 두 개는 수납되지 않았다.

"깐깐하기는."

나는 차원문을 열고 밖의 상황을 살폈다.

어둑어둑하지만 완전한 밤은 아니었다.

잠시 후에 나가면 될 것 같아 루팅한 PC를 살펴보기로 했다.

"NAS를 쓸 정도니 좋은 거 많이 모아놨겠지?"

드라이버로 케이스를 분리하니 하드디스크가 6개나 나왔다.

본체에 3개, NAS에 3개.

다른 컴퓨터의 하드디스크까지 꺼내니 총 80개였다.

"6개가 3테라 짜리네. 이 친구 무슨 서버라도 돌렸나."

외장하드에 넣어서 하나씩 확인하니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이거지."

영화, 드라마, 음악, 소설 등 내가 원하던 컨텐츠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 외에 남자에게 필요한 것들도.

걸그룹과 댄스팀 직캠도 엄청났는데 죄다 고화질이었다.

나는 무심코 하얀 피부 어쩌고 하는 제목이 끌려 클릭하고 말았다.

본심은 아니고 실수다.

이윽고 화면이 나왔고 나는 경악했다.

카메라가 포커싱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미경이었던 것이다.

"헐."

얼굴이 다소 낯설었지만 아담한 체구와 하얀 피부는 똑같았다.

지금은 단발인데 저 때는 머리카락이 길었구나.

그녀는 카메라를 보고 웃으며 시종일관 즐겁게 춤을 췄다.

"예전에 춤을 췄다고 했었지···"

그런데 너무 야한 춤이었다.

골반을 마구 털어대는데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나는 멍하니 직캠을 보다가 정신 차렸다.

"곧 튜토리얼인데 뭐하는 거야."

이럴 땐 팔굽혀펴기를 하면 좀 나아지지.

뺨도 좀 치고.

짝짝!

좋아, 가자.

나는 딩고를 쓰다듬고 차원문을 넘었다.

누구의 집인지도 모를 공간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고요하다 못해 침묵이라는 늪에 빠진 것 같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던 곳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거 너무 어두운데."

이럴 땐 그늘포도를 먹어야지.

몇 알을 먹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효과:야간시야 상승」

「그늘포도의 효과로 인해 약간의 야간시야가 상승합니다」

조금 기다리니 주위 사물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우으으―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멀리 떨어져 있음이 분명한데도 코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튜토리얼 시작이다.

< 튜토리얼 - 1 > 끝

< 튜토리얼 - 2 >

서바이벌 라이프의 특징 중 하나라면 이벤트가 벌어진다고 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중에 가서야 그게 이벤트였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식이다.

초보들이 자주 겪는 튜토리얼 난이도도 상당수는 여기서 기인한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갑자기 좀비 수십 마리가 몰려오니 당황하는 것.

하지만 그런 이벤트를 수십, 수백 번 겪다 보면 싫어도 느끼게 되어 있다.

나는 빈 공간을 노려봤다.

길쭉한 몽둥이 하나가 천천히 리젠되었다.

"일단 하나."

재빨리 몽둥이를 집어 드니 다시 하나가 리젠되었다.

이 버그 안 고쳤구나.

덕분에 흑단목 몽둥이 두개를 획득했다.

"너도 참 오랜만이네."

짙은 검갈색의 표면.

적당한 무게와 훌륭한 그립감.

끝에 뾰족 솟은 돌기와 미친 듯한 내구력.

초반에 좀비 대가리 부수기에는 이만한 무기가 없다.

고인물들이 새로 튜토리얼을 시작하면 포인트를 모은 후 어김없이 이걸 든다.

"쇠몽둥이보다 더 튼튼한 것 같단 말이지."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금속무기도 쓸 수 있는데 고인물들은 이걸 애용한다.

두들겨 패는 맛이 있다고.

나는 몽둥이 하나를 배낭에 넣고 하나는 들었다.

초반에는 도망가야 하기 때문에 다른 무기는 안 드는 게 좋다.

입을 다물고 밖의 소음에 귀를 기울이니 좀비들 특유의 질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조금만 더 올라오면···

으어어어―

왔다.

나는 거실에서 나가 계단을 살폈다.

좀비가 무리를 이뤄 줄줄이 올라오고 있었다.

포자의 몸 지배가 끝난 때문인지 행동은 비교적 민첩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이쯤 됐으면 나를 보고 이빨을 드러내야 하는데?

유기물 추적능력 저하라는 게 이걸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쁠 거 없지.

나는 창문을 통해 밑으로 뛰어내렸다.

바닥이 푹신한 흙이었기에 충격은 크지 않았다.

입구에 몰려들던 좀비들이 나를 발견하고 팔을 뻗었다.

크어어어!

"확실히 쉬워졌네."

초반 버전에선 숨도 못 쉴 정도로 좀비들이 몰아쳤는데 이 정도면 할 만하지.

내가 정원 밖으로 뛰쳐나가자 좀비들이 일종의 벽을 형성했다.

저 특유의 좀비 벽은 전혀 변하지 않았군.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장벽이다.

유저들은 좀비 벽을 피해 정해진 장소로 이동해야 하고.

거기서 보스를 쓰러트리고 좀비의 포위망을 벗어나면 튜토리얼이 끝난다.

물론 무쌍을 펼치면서 좀비 벽을 부수는 방법도 있지만···

"목숨은 하나잖아?"

게임에서야 온갖 미친 짓을 해도 재도전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 목숨은 하나다.

그렇다면 도망가는 수밖에!

나는 좀비 벽을 피해 달렸다.

높아진 야간시야와 지형감지 스킬 덕분에 바닥의 장애물이 비교적 생생하게 보였다.

좀비에게 압박감을 받지 않고.

넘어지거나 맨홀 같은 구멍에 빠지지 않으면 튜토리얼은 무난하게 깰 수 있다.

주택가로 접어들자 좀비들이 마치 양을 모는 것처럼 나를 한쪽으로 몰았다.

도착한 곳은 이름 없는 3층짜리 꼬마빌딩이었다.

약간 기울긴 했는데 아직 무너지진 않았다.

여기가 체크포인트다.

좀비들이 쉴 틈을 준다고 해서 우리는 체크포인트라고 부르곤 했다.

실제로 저장이 되지는 않는다.

아무튼 여기서 좀 쉬다 가자.

2층으로 올라가던 나는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나와 거의 똑같은 복장을 한···미경이었다.

그녀는 흑단목 몽둥이를 내게 들이댔다가 화들짝 놀랐다.

"아, 아저씨!"

"쉬잇."

이 아가씨가 좀비 불러들일 일 있나.

내가 기겁하며 입에 손가락을 대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따라오세요."

우리는 3층으로 이동했다.

밑을 내려다보니 좀비들이 우글거렸다.

잠시 후에 덮치겠다 이거지.

그때까지 쉴 생각에 몸을 추스르는데 시야에 특이한 게 보였다.

내 특성.

전용 차원문 개방에 빗금이 쳐져 있었다.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지?

.

.

.

미경은 내가 밑만 쳐다보고 있자 안절부절 못했다.

일단 여기선 자리를 피해서 시험해봐야겠군.

나는 실드를 열고 그녀에게 속삭였다.

"좀비들이 잠깐 소강상태니까, 여기 쳐다보고 있으세요."

"아저씨는요?"

"잠깐 급해서, 화장실 좀."

"네, 네. 저 여기서 보고 있다가 좀비들 올라오면 알릴게요."

"부탁할게요."

나는 화장실에 들어간 뒤 차원문을 열었지만 열리지 않았다.

「특성 봉쇄 효과가 적용되어 있습니다」

상태창을 불러 보니 정말 효과에 특성 봉쇄가 나타났다.

뜬금없이 이게 나타났다는 건···

"빌어먹을 강화 좀비."

서바이벌 라이프에서 강화라는 이름이 붙으면 상대하기가 조심스러워진다.

단순히 육체적 능력치가 상승하는 몬스터도 있지만.

투명화나 환각 등 특이한 패턴으로 공격하는 개체도 존재했다.

이번 강화형은 유저의 특성을 봉쇄하는 타입인가 보다.

"원래는 이런 거 없었는데."

나는 입맛을 다셨다.

서바이벌 라이프에선 유저에겐 특성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안심했는데 그걸 봉쇄당할 줄이야.

"이건 일시적일 거야."

특성을 아예 없애버렸다면 전용 차원문 개방이라는 문구 자체가 사라졌을 것이다.

강화 좀비를 죽이면 해결될 확률이 높다.

"놈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찾아야겠군."

찾은 다음에 죽이면 그만이다.

특성 못 쓴다고 튜토리얼 좀비한테 당할 거면 고인물 그만둬야지.

"1번 슬롯. 이건 또 되네."

차원문 자체는 안 열리는데 추가효과는 되다니 뭐가 이래.

하여튼 안 되는 것보다는 낫지.

나는 창가로 다가가 미경의 어깨를 톡톡 쳤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입을 틀어막았다.

"미경씨, 잘 들으세요.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됐는지는 나중에 이야기해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건 튜토리얼을 깨는 겁니다. 아시죠?"

"네. 알겠어요."

"지금 이 상황 자체가, 공략하고는 좀 다른데 상태창에 뭔가 이상한 거 보이세요?"

"자, 잠시만요. 상태창."

그녀는 눈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갑자기 크게 부릅떴다.

"블링크에 빗금이 쳐져 있어요···이거 어떻게 해요?"

"그걸 저한테 물어보면···아무튼 능력을 못 쓴다 이거죠?"

"확인해볼게요. 여기서."

그녀는 블링크를 시도하다가 울상을 지었다.

"안 돼요···특성 봉쇄 어쩌고 메시지가 떴어요···"

"특성 봉쇄···? 미경씨 잘 들으세요."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낮게 이야기했다.

"김밥조아님 영상에서 그런 말을 들었어요. 강화 좀비는 여러 능력을 가진다고. 그 중에서 특성을 봉쇄하는 게 있을 겁니다."

"서바이벌 라이프에 특성이···있었어요?"

"그건 모르겠고요. 뭐 패치로 업데이트 했을 수도 있고. 아무튼 실제로 능력을 못 쓴다는 게 중요하잖습니까."

내가 둘러대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참 잘 속는 아가씨로구만.

"미경씨, 봉인 풀리면 특성 쓸 수 있죠?"

"블링크요?"

"예. 10m정도는 이동할 수 있다고 했었잖아요. 지금 할 수 있겠어요?"

"어떻게 하시게요?"

나는 미경의 귀에 속삭였다.

"잘 들으세요. 저 밑에, 미경씨 능력을 봉쇄하는 어떤 좀비가 있을 겁니다."

"네, 네."

"그놈을 죽이면 미경씨 능력도 돌아올 확률이 높아요."

"누가 죽여요?"

"제가요."

"아저씨 위험해요···"

"저는 걱정 마시고요, 그래서 제가 저 좀비와 싸우는 동안에 다른 좀비의 시선을 끌어야 됩니다. 할 수 있겠어요?"

그녀는 고민하더니 말했다.

"가, 가능할 것 같아요···"

"가능한 게 아니라 해야 됩니다. 까딱 잘못하면 미경씨가 위험하니까. 좀비의 시선을 끌면 녀석들이 어떡하겠어요? 옥상으로 올라오겠죠? 그 시간을 끌라는 겁니다."

"어···"

"할 수 있겠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해보는 수밖에.

나는 미경을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평소라면 굳게 닫혀 있었겠지만 철사병 때문에 문이 박살난 상태였다.

그녀가 초조하게 말했다.

"아저씨 낮에 그 소리 들으셨어요? 쾅하는 거···"

"그거 아마 군부대 탄약고 폭발 소리였을 겁니다."

"탄약고요?"

"외피가 부서지면서 화약하고 마찰을 일으켰나보죠."

"경훈 아저씨가 핵폭탄 터졌다고 빨리 도망가야 된다고 그러던데···"

그 허세꾼은 여전하구만.

나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밑의 좀비들을 살폈다.

머리가 특이하게 변형된 좀비가 있었다.

저게 특성 봉쇄 능력을 주위로 퍼트리는 안테나 역할을 하나 보다.

미경이 내 곁에 엎드려 물었다.

"아저씨 뭐가 보이세요?"

"쉿. 목소리 너무 높아요. 저기 특이한 놈 보여요?"

"어디요?"

"머리 특이하게 생긴 놈이요."

"어···자, 잘 안 보여요···"

그녀가 말꼬리를 흐렸다.

하긴 나도 그늘포도를 먹지 않았다면 마찬가지로 까막눈이었을 것이다.

나는 배낭에서 폭죽과 성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거 받으시고, 제가 밑에 내려가면 이 위에서 폭죽 터트려서 좀비들 유인하세요. 그 동안에 능력 봉쇄가 풀릴 겁니다."

"···그···아저씨가 혹시···"

"제가 저 좀비를 죽일 겁니다. 그럼 미경씨도 건너편 빌딩으로 도망갈 수 있겠죠?"

"너무 위험해요오···"

"괜찮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한 거, 잘 생각해서 대답하세요. 못하겠다고 하면 다른 방법 쓸 테니까."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게요."

맹한 구석은 있어도 그리 겁쟁이는 아닌 모양이다.

"좋아요. 제가 내려가면 타이밍 보고 바로 폭죽 터트리는 겁니다, 알겠죠? 늦으면 제가 좀비에게 둘러싸여요."

끄덕끄덕.

그녀는 몇 번이고 성냥을 그어 심지에 불을 붙이는 연습을 했다.

뭐 그걸 연습까지.

"근데 좀비들이 여기로 올라오긴 올까요? 만약에 안 오면···"

"올라갈 겁니다. 좀비들은 더 큰 자극에 약하거든요."

코앞에 식량이 있어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람이 뛰어다니면 망설임 없이 일어나는 게 바로 좀비다.

유기물 추적 능력이 낮아진 만큼 좀비들은 날 보지 않고 폭죽을 쫓아갈 것이다.

미경이 나를 배신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글쎄, 매우 낮다고 봐도 좋다.

그녀는 내게 협력하지 않으면 자력으로 여기를 빠져나갈 수 없으니까.

"제가 2층에서 뛰어내리면 바로 심지에 불붙이세요."

"네, 네."

"그럼 갑니다."

나는 계단을 통해 2층으로 내려갔다.

창문을 열고 밑을 내려다보니 좀비들이 슬슬 올라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쉬는 시간 다 줬다 이거지? 나도 그래.

나는 건물 옆의 창문을 열고 2층에서 뛰어내렸다.

"욱!"

흙으로 뛰어내리는 것과는 천지차이구만!

내가 다리를 주무르자 위에서 폭죽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야아아! 여기야!"

소리 지르란 말은 안 했는데.

덕분에 좀비들이 자극을 받아 비틀비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슬롯에서 활을 꺼내 강화 좀비를 겨냥했다.

평소에 쓰던 60파운드가 아닌 100파운드 활이다.

어두운 가운데 녀석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강화 좀비의 능력은 신체를 보면 안다.

육체계라면 근육이 크게 부풀어 오르고.

은신계라면 색이 현란하게 바뀌는 식이다.

이 놈은 머리에 와이파이처럼 돌기가 솟았다.

능력을 퍼트린다는 걸 의미했다.

즉 특성 봉쇄의 주범은 이 녀석이란 얘기.

시위를 힘껏 당기자 메시지가 떴다.

「근력이 1 올랐습니다」

한 달 내내 숲에서 구른 결과가 이제야 나타났다.

시위를 놓자 좀비의 상체가 휘청했다.

놈이 나를 쳐다보고 입을 쩍 벌렸다.

언제나 얘기하는 거지만 니들은 입 벌리고 포효하는 것부터 집어치워야 돼.

뭐 나로선 여유가 생겨서 좋지만.

나는 활을 슬롯에 놓고 흑단목 방망이와 방패를 꺼내들었다.

캬아악!

와이파이 좀비가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녀석의 공격을 옆으로 피하며 방망이를 후려쳤다.

"특성 같은 거 없어도."

퍽, 퍽!

와이파이 좀비는 특수 능력을 가진 대신 육체능력은 크게 높지 않았다.

일반 좀비보다야 강하겠지만, 강화 구울들과 싸워온 내게는 역부족이었다.

"니들쯤은."

나는 방패로 좀비의 팔을 막은 후 방망이로 턱을 쳐올렸다.

뻑!

좀비의 이빨이 허공으로 튕겨져 올라갔다.

위에서 미경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흑단목 방망이가 와이파이 좀비의 대가리를 짓뭉갰다.

하지만 녀석은 아직 살아 있었다.

< 튜토리얼 -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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