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대수림(2).
대수림에 짙은 여명이 내려앉았다.
파드득! 파드드드득!
'와! 이게 하늘을 나는 기분이구나!'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도 아니고, 낙하산을 메고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조금 힘겹긴 하지만 난 지금 거신목 사이를 날고 있었다.
장벽 너머로 오기 전 사마귀 꼭두각시의 등에 숨겨진 날개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운명의 실을 날개에 추가해 꾸준히 비행 훈련을 시켰다.
덕분에 꼭두각시 레벨도 많이 올랐고, 이렇게 영혼 이동(lv.2)을 통해 직접 공중 정찰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대 행동반경은 350m, 그나마 운명의 실타래(lv.2) 레벨이 올랐기에 조금 늘어난 것이었다.
'연습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영혼 이동에 겨우 성공했지만, 사마귀(lv.7) 꼭두각시의 몸에 적응하는 데 30분이나 걸렸다.
그동안 운명의 실로 꾸준히 움직임을 제어하고, 지켜봤기에 몸에 적응하는 시간은 의외로 짧았다.
문제는 시각이었다.
사마귀 괴수의 시각은 인간과 완전히 달랐다.
인간처럼 눈으로 보고 바로 물체를 식별하는 것이 아니라, 큰 겹눈으로 주변 배경을 먼저 한쪽 눈에 담고, 고개를 돌려가며 3개의 홑눈으로 움직이는 물체나 크기 변화가 있는 물체를 확인해 입체적으로 사물을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괴수답게 야간 시력이 월등했기에 칠흑 같은 어둠에서도 사물을 쉽게 식별할 수 있었다.
파다다닥! 탁!
거신목에 붙어 고개를 돌려가며 주변을 살폈다.
놈은 불침번이 가장 피곤한 새벽녘에 움직였기에 지금쯤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이제 표범 괴수가 움직이기만 하면, 바로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
다만 시간이 부족했다.
수색이 가능한 시간은 30분.
'이 근처에 있어야 할 텐데······.'
야영지는 넓었고, 이곳이 아니면 수색 위치를 바꿔야 했다.
몇 분 후 다른 거신목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별다른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제법 큰 나뭇가지 위에 앉았다.
인간형과 달리 사마귀 꼭두각시는 영혼 이동 성공 확률도 낮아서 언제 다시 수색할 수 있을지 몰랐기에 더 꼼꼼히 살폈다.
다시 몇 분을 더 지켜봤지만, 꽝!
다른 거신목으로 이동하려 했을 때였다.
"그르르릉!"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천천히 고개를 몸 뒤로 돌렸다.
그러자 나뭇가지 사이에서 뭔가 커다란 실루엣이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점점 그 모양이 선명해진다.
'허! 이 새끼 봐라!'
찾았다!
표범 괴수는 나뭇가지 사이에 엎드려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었다.
이곳은 야영지와 겨우 100여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아예 사냥터로 자리를 잡았네.
이 괴수는 이미 인간 사냥에 도가 텄다. 다시 출발해도 전진 기지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 행렬을 계속 쫓아올 것 같았다.
그러니 여기서 꼭 잡아야 했다.
숨어 있는 곳을 알았으니, 이제 놈을 유인할 차례.
천천히 다가간다.
부스럭!
이런! 다리가 여섯 개라 실수로 나뭇가지 끝에 살짝 걸렸다.
"크릉?"
표범 괴수가 슬그머니 한쪽 눈을 떴다.
난 그대로 얼음이 되어 움직임을 멈췄다.
난 나뭇가지다! 난 나뭇가지다!
들키지 않으려고 주문을 외웠다.
놈이 눈동자를 한번 굴리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사마귀 괴수의 장점은 은신.
몸길이가 10미터가 넘는 성체 사마귀 괴수도 거신목 사이에 가만히 숨으면 인간의 눈으론 찾기 힘들다고 했다.
다행히 눈앞에 표범 괴수도 사마귀 마법인형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다시 기척을 죽이고 아주 천천히 놈에게 다가갔다.
30cm의 크기라고 얕보지 마라, 그동안 갈고 닦은 날카로운 앞발이 있으니까.
사마귀 앞발톱의 길이는 7cm, 인간이라면 모를까 3미터 크기의 괴수에게 치명상을 입힐 순 없었다.
하지만 몹시 아프겐 할 수 있지.
난 놈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열 좀 받을 거다!'
그리고 콧등을 사정없이 찔렀다.
파팟!
"크앙!"
놈이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탁! 다다닥!
순식간에 뒤로 물러섰다.
표범 괴수가 고통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고, 발등으로 아픈 코를 연신 문질렀다.
놈은 눈을 번뜩이며 무슨 일인지 파악했다.
그리고 자신을 공격한 날 발견했다.
"크르르릉!"
벌게진 콧등과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놈은 털을 곤두세우고 날 죽일 듯이 노려보며 한 발짝씩 다가왔다.
난 앞발을 세우고 방어태세를 갖췄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놈이 몸을 날려 날 덮쳤다.
팟! 파드드득!
하지만 난 날 수 있지.
날개를 파닥거리며 땅으로 도망쳤다.
그러자 놈도 거신목에서 쏜살같이 내려와 날 쫓아왔다.
겨우 30cm밖에 되지 않은 내게 당했으니, 얼마나 열이 받을까?
난 날개와 4개의 다리를 이용해 도망쳤다.
놈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날 바짝 추격했다.
그러다!
"크앙?"
푹! 쿠웅!
땅이 꺼지며 놈이 사라졌다.
'걸렸구나!'
함정에 빠진 괴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암살자! 공격해!'
함정 주변에 숨어 있던 암살자 꼭두각시가 할버드를 들고 뛰어들었다.
부웅! 쩍!
쉐엑! 푹! 푹!
암살자가 도끼날로 사정없이 내려치고, 창끝으로 표범 괴수를 찔렀다.
난 함정 아래를 내려다봤다.
'휴! 끝났구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표범 괴수는 병사들이 함정 밑에 박아 놓은 뾰족한 나무 창에 목과 몸통이 네 군데나 뚫려 있었고, 내 암살자 꼭두각시의 도끼에 목이 반이나 잘렸다.
더는 살아날 기미는 없었기에 암살자(lv.6)를 위로 올렸다.
내 암살자 꼭두각시의 레벨은 아쉽게도 6에서 완전히 멈췄다.
꼭두각시는 생전 신체 능력을 넘어서지 못한다.
레벨이 더 안 오른다는 것은 이미 생전의 실력까지 올랐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 어서 자동인형으로 만들어야 했다.
표범 괴수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그 순간 아까 괴수의 콧등을 공격할 때 연결한 운명의 실이 검은색으로 변했다.
'기사회생!'
스킬을 사용했다.
이건 인형술사의 조건반사.
인형술사는 마법인형이 많을수록 좋았기에 기회만 보이면 운명의 실을 연결했고, 검은 실만 보이면 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하지만 곧 운명의 실이 끊어졌다.
아쉽게도 표범 괴수를 마법인형으로 만들려는 것은 실패.
역시 괴수는 인간과 형태가 달라서인지 기사회생 스킬 성공률도 현저히 낮았다.
사마귀 새끼 괴수도 십여 마리를 죽이고 겨우 하나 만들었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표범 괴수를 잡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크르르릉!"
"끼익?"
나도 모르게 사마귀 신음을 흘렸다.
함정 반대편에서 또 다른 표범 괴수가 이빨을 드러내며 우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한 쌍이었어?'
두 마리가 동시에 나타난 적이 없었기에 여태 한 놈인 줄 알았다.
게다가 체격도 비슷했고.
"끼릭!"
나도 모르게 사마귀 욕설이 튀어 나왔다.
역시 세상일은 쉽게 가는 법이 없다!
그때 갑자기 현기증과 함께 시야가 흐려졌다.
'어?'
어느 순간 난 본체로 돌아왔다.
영혼 이동 시간이 다 된 것이다.
'전투 모드! 피하면서 놈과 싸워!'
쾅!
난 꼭두각시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마차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마차 옆에 세워둔 할버드를 하나 들었다.
"중위님, 뭐 하시는 겁니까?"
모닥불 앞에서 벌레를 쫓던 글래디스와 큰 소리에 잠이 깬 병사들이 날 쳐다봤다.
"젠장! 한 놈이 더 있었어!"
"네?"
"병사들을 이끌고 따라와!"
난 함정이 있는 곳으로 먼저 달렸고, 글래디스와 같이 함정을 준비했던 할버드병들이 뒤를 따라왔다.
'젠장! 벌써 팔 하나를 잃었어.'
팔이 잘린 것이 아니라 왼쪽 팔에 큰 충격을 받으며 운명의 실이 끊어진 것이다.
이대로 놈이 도망치면 같은 함정에 걸리지 않을 가능성이 커지고, 다시 잡기는 더욱 요원해진다.
'조금만 더 버텨라!'
그래도 사마귀가 공중에서 놈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있었기에 암살자가 몸을 날리며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숲으로 조금 달리자, 표범 괴수와 내 꼭두각시들이 보였다.
"정지!"
한 손을 높이 들고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글래디스가 신호를 확인하곤, 병사들과 멈춰 섰다.
"헉! 그 표범 괴수가 아닙니까!"
글래디스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말했다.
"한 놈은 함정에 빠져 죽었어. 그런데 한 놈이 더 있었다. 이번에 저놈을 놓치면 다시 잡기 힘들어져."
"그런데 저기 싸우고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내 정보원."
"네? 정보원도 대수림에 데리고 오신 겁니까?"
다행히 주변이 어둡고, 사마귀 괴수는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 병사들과 앞뒤로 포위해서 놈을 공격해."
"네! 맡겨 주십시오."
글래디스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녀는 병사들과 표범 괴수를 향해 달려갔다.
"공격해라!"
"잡아라!"
"와아아아!"
글래디스와 십여 명의 병사들이 할버드를 들고 괴수에게 달려들었다.
폰급 기간트라도 있었다면 어렵지 않게 처리하겠지만, 그럼 놈은 바로 도망칠 가능성이 컸기에 함정 근처엔 두지 않았다.
그러니 이 병사들로 어떻게든 잡아야 했다.
"크아아앙!"
괴수가 앞발을 마구 휘두르며 병사들의 접근을 막았다.
3미터의 괴수라고 해도 두 그룹의 병사들이 앞뒤로 뭉쳐서 창을 찌르고 휘두르자,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게다가 공중에선 사마귀 괴수가 앵앵거리며 빈틈을 노리고 날아다녔다.
"내가 놈의 시선을 끌겠다! 뒤에서 다리를 공격해!"
숨 막히는 대치 상황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글래디스였다.
"으아아!"
그녀는 기합과 함께 키 185에 근육질 몸으로 할버드를 찌르며 접근했다.
표범 괴수는 조금씩 뒤로 밀리는듯하다가 갑자기 몸을 튕기며 앞발로 창을 후려쳤다.
"크아앙!"
콰직!
할버드 창 머리가 부러지며 땅에 떨어졌다.
그녀는 놀라 뒤로 물러섰다.
'뭐야? 몸이 굳었어!'
방금 글래디스가 좋은 기회를 만들었지만, 뒤에서 창을 겨누는 병사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괴수를 보면 몸이 굳는 것이 일반적이다.
병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기 병사들 대부분이 전진 기지로 교대하러 가는 신병들이었기에 괴수와 전투 경험도 전무했다.
그리고 내 암살자 꼭두각시는 병사들이 괴수와 뒤섞여 있었기에 조금 전부터 어떻게 공격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이런 복잡한 협공 상황은 아직 훈련이 더 필요했다.
젠장!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섰다.
그나마 전투 경험이 많은 것이 나니까.
"글래디스! 한 번 더 주의를 끌어!"
"네!"
시간이 지나면 소란한 소리를 듣고, 기간트나 병사들이 몰려올 것이다. 그럼 괴수는 도망치고, 또다시 이런 기회를 만들기 힘들었다.
글래디스가 부러진 창을 버리고 허리춤에서 장검을 꺼냈다.
"이 새끼! 덤벼라!"
그녀는 손에 익은 무기를 휘두르며 다시 접근했다.
괴수는 앞발을 휘두르며 그녀의 접근을 막았다.
빈틈을 포착!
놈의 뒷다리를 향해 할버드를 힘껏 찔렀다.
다닥! 푹!
"크앙!"
'성공이다!'
그 순간 뭔가 시커먼 것이 날아왔다.
창을 들어 막았······!
쾅! 콰직!
괴수의 앞발에 창대가 부러지며 몸이 뒤쪽으로 붕 떠올랐다.
순간 숨이 턱 막히며, 하늘이 노래졌다.
쿠웅!
"커헉!"
막혔던 숨이 터졌다.
고개를 숙이자, 가슴팍에 옷이 찢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옷 사이로 조끼가 보였다.
괴수의 발톱에 닿은 것이다.
하지만 난 거의 다치지 않았다.
조끼를 믿고 용기를 내 덤빈 거지만 정말 효과가 이 정도로 뛰어날지는 몰랐다.
수만 골드의 값어치라고 하더니 그 값을 톡톡히 했다.
그리고 이제야 전생에 왜 괴수를 마법인형으로 만들지 않았는지 알았다.
괴수는 가까이 접근하는 것 자체가 너무 위험해 운명의 실을 연결하기가 힘들었다.
놈들은 무조건 그냥 죽여야 하는 존재.
그리고 나는 인형술사.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보단 마법인형을 조종하며 싸운다.
그게 안전하고, 또 효율적이었다.
"중위님, 괜찮으십니까?"
글래디스가 소리쳐 물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저놈을 잡아!"
"네!"
뒷다리를 다쳤기에 놈도 이제 도망치지 못한다.
"창을 찔러라!"
"하아!"
내가 소리치자 병사들이 창을 찌르며 사방에서 압박했다.
'지금이다! 사마귀, 눈을 노려!'
패앵! 푹!
"쿠아아아!"
창을 피하다 기습적으로 왼쪽 눈을 찔린 표범 괴수가 괴성을 질렀다.
놈이 뒤늦게 앞발을 휘둘러 보지만 사마귀는 이미 날아가 나무 위에 붙었다.
내 사마귀 꼭두각시는 치고 빠지는 것이 특기.
"으아아아!"
푹!
글래디스가 한쪽 시야를 잃은 표범 괴수의 왼쪽 옆구리를 검으로 찔렀다.
"크아아앙!"
고통에 찬 괴성!
뒤늦게 표범 괴수가 몸을 틀면서 앞발로 공격했지만, 글래디스는 이미 뒤로 몸을 피한 상태였다.
다다닥! 푹!
"크아앙!"
이번엔 내 암살자 꼭두각시가 반대쪽 옆구리를 할버드로 찔렀다. 하지만 한쪽 팔로 찔렀기에 깊이 박히진 않았다.
"지금이다! 모두 달려들어라!"
내 명령에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이런 개새끼!"
"죽어!"
부웅! 쩍! 쩌쩍!
병사들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할버드 도끼날을 마구 내려쳤다.
한 병사가 괴수가 휘둘린 앞발에 맞고 뒤로 쓰러졌지만, 병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그동안 잡아먹힌 동료 병사들의 복수를 하고, 정신을 옥죄어 오던 공포심을 날려버리려 하는 것 같았다.
"멈추지 말고 계속 공격해!"
난 뒤에서 크게 소리쳤다.
괴수라 생명력도 질기네!
조금 전에 내가 창으로 괴수의 뒷발을 찔렀을 때, 습관적으로 운명의 실을 연결했다.
그런데 아직 운명의 실이 검은색으로 물들지 않았다는 것은 놈이 살아 있다는 증거!
그러니 계속해서 공격해야 했다.
그 순간 운명의 실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됐다! 모두 뒤로 물러서라!"
놈은 죽었고, 전투는 끝이었다.
기사회생(lv.2) 스킬을 사용했다.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았······.
[허수아비(lv.1) 마법인형을 만들었습니다.]
어? 됐어? 됐네!
생각지도 못한 3미터 크기의 표범 괴수 마법인형이 생겼다.
14. 대수림(3).
14. 대수림(3).
"하아!"
커널 대령의 한숨이 깊다.
그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새벽같이 장교들을 불러모았다.
"피해는?"
"아직은 없습니다. 오늘은 그냥 넘어갈 것 같습니다."
"그럼 좋으련만······."
불침번을 더 많이 배치하고 기간트도 3교대로 최대한 빈틈없이 배치했지만, 지금까지 매일 한 명의 병사가 어김없이 사라졌기에 천막 안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오늘은 제발 병사들이 무사해야 할 텐데······.'
커널 대령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젊은 장교가 말했다.
"이대로 기다릴 수만 없습니다.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펼쳐야 합니다."
"맞습니다. 병사들의 사기가 너무 떨어지고 있습니다. 어서 잡아야 합니다."
커널 대령과 황립 사관학교 동기지만 나이가 5살이나 많은 라그르 중령이 인상을 찡그리며 장교들에게 말했다.
"어허! 누가 그걸 모르나 잡을 방법이 없으니까 그렇지! 놈이 귀신 같아서 기간트만 있으면 그 근처엔 나타나지 않아."
그때 한 젊은 장교가 손을 들고 말했다.
"차라리 야영지 주변 나무를 모두 베어버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뭐?"
"괴수가 번번이 나무 위로 올라가 놓치고 있으니, 아예 주변 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면 도망갈 길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놈이 숨어 있을 장소도 사라지고요."
몇몇 젊은 장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커널 대령은 짧은 한숨을 내 쉬며 말했다.
"여기 나무는 높이가 2, 300미터에 지름이 10미터가 넘는다. 게다가 대수림의 나무는 단단하기가 강철에 버금간다고 하지. 여기 있는 기간트가 모두 달려들어도 나무를 베고 치우는데, 며칠은 걸릴 거야. 그리고 그건 전진 기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마석 배터리를 다 쓰자는 말이고."
기간트가 그냥 걷는 것과 전투나 도끼질 같은 격렬한 활동을 할 때 마석 배터리 소모량은 천지 차이였다.
방금 젊은 장교가 말한 것은 빈대를 잡자고 초가집을 전부 태우자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커널 대령은 이런 걸 일일이 말해줘야 하는 부하들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대부분 동부 전선에서 자기 밑에 있던 기간트 장교들이었기에 전투 경험은 많았지만, 대수림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대수림 경험이 있는 장교는 라그르 중령뿐이었다.
그때 참모인 호프만 대위가 말했다.
"함정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함정?"
"땅을 파고 함정을 곳곳에 만들고, 미끼를 두는 겁니다."
갑자기 라그르 중령이 발끈했다.
"뭐라? 지금 병사들을 미끼로 쓰자는 말인가?"
"아니요. 우리에겐 마차나 수레를 끄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을 미끼로 쓰고 근처에 잠복해 있다가 괴수가 함정에 빠지면 사방에서 달려드는 겁니다."
"하지만 놈은 지금까지 인간만을 사냥했네. 말을 사냥하지 않으면 헛수고가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나마 호프만 대위의 방법이 괜찮았는지 커널 대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호프만 대위의 방법대로 해봅시다."
물론 괴수가 함정에 걸릴지는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안 되면 다른 표지석을 찾아 이동하는 게 어떻습니까?"
라그르 중령이 물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지."
"네. 사령관님."
라그르 중령은 깍듯하게 대답했다.
커널 대령은 동기인 라그르를 인간적으론 좋아하지만, 그처럼 되고 싶진 않았다.
나이도 5살이나 많고, 진급도 동기생 중에서 가장 느렸다. 게다가 그는 기간트 기사들이 모두 기피하는 장벽 너머 전진 기지에 10년 이상 근무했기에 세상 물정에 어두웠고, 사교성도 떨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 대수림 길 안내자이자, 전진 기지에서 자신을 도와줄 부관으로 임명됐다.
보통은 동기생의 부관이 되는 치욕을 맛보기 전에 지방 영지군으로 전역하거나 아예 군을 떠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는 넉살 좋게 동기생과 함께 대수림으로 가게 돼서 다행이라며 흔쾌히 허락했다.
커널 대령은 라그르 중령이 고맙긴 한데,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대수림에서 딱 3년만 버티자.'
자신은 황립 사관학교 출신에 남부 드와이트 대마경에서 활약하고, 동부 전선에서 윌리엄 중장 밑에서 착실하게 경력을 쌓았다.
동기들이 하나둘 별을 달았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도 곧 자기 차례가 올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가 차고, 룩급 기간트를 몰 수 있음에도 장군 진급은 하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윌리엄 중장 라인이 썩은 동아줄인 것을 알았다.
물론 자신은 가문도 변변치 않고, 오리지널 기간트에 탈 실력도 부족했기에 라인을 옮길 선택지는 없었다.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윌리엄 중장이 제국의 실세들만 갈 수 있다는 헬다임 장벽 사령관이 되었다.
이건 기회였기에 부하들과 윌리엄 사령관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오자마자 정말 기회를 잡았다.
전진 기지 사령관은 고되고 힘든 자리였지만, 3년 이상 근무한 전임 사령관들은 모두 별을 달았다.
교대하고 장벽으로 돌아가면 고생했다는 의미로 황제께서 별을 달아 주는 것이다.
그러니 전진 기지에서 3년만 버티면 별을 단다.
그런데 부임하기도 전에 최하급 괴수 한 마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줄은 몰랐다.
"와아아아!"
갑자기 병사들의 함성이 들리고, 천막 밖이 소란스러웠다.
"무슨 소리야?"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라그르 중령이 일어섰다.
"아니, 같이 나가지."
커널 대령이 지휘관들을 데리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밖엔 많은 병사가 이곳을 향해 몰려들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때 젊은 중위와 여 하사관이 커널 대령에게 다가왔다.
"충! 타일러 빈스 중위 보고드립니다."
"자네가 무슨 일인가?"
커널 대령은 눈앞에 젊은 장교를 탐탁지 않아 하고 있었다.
정보국의 정보를 이용해 암살미수 사건을 해결한 것이 뻔했지만, 윌리엄 사령관은 이 장교를 너무 믿고 있었고, 이번엔 중요한 비밀 임무까지 맡았다.
게다가 황립 사관학교 출신의 엘리트도 아니고, 기간트도 타지 못하는 놈이 4개월 만에 중위라니!
분명 남부의 명문가인 빈스 가문이 뒤에서 움직였을 것으로 생각했다.
"괴수를 잡았습니다."
"뭐?"
그때 병사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작업용 기간트와 십여 명의 병사들이 죽은 표범 괴수를 질질 끌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커널 대령은 눈이 똥그래졌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여기 병사들과 힘을 합쳐 놈을 잡았습니다. 원래는 두 마리였는데, 하나는 죽였고, 다른 한 마리는 치명상을 입고 도망쳤으니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걸 자네들끼리 했다고?"
괴수를 잡은 건 장교와 하사관 한 명, 열세 명의 할버드병이 전부였다.
수십 대의 기간트도 하지 못한 일을 겨우 열다섯 명이 해낸 것이다.
그때 글래디스가 나섰다.
"모두 타일러 중위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중위님께서 함정을 만들고 전투를 지휘했기에 괴수들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타일러의 공을 빼놓지 않았다.
커널 대령이 타일러 중위를 빤히 쳐다보자, 타일러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병사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가만있을 순 없었습니다. 허락 없이 병력을 움직인 것은 죄송합니다."
"아니야. 잘했네. 전진 기지에 도착하면 참여한 병사들 모두 포상을 내리지."
"충! 감사합니다."
보고가 끝나자, 글래디스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타일러의 팔을 잡고 죽은 표범 괴수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녀는 타일러의 손을 번쩍 들었다.
"타일러 중위님께서 괴수를 잡았다!"
"타일러 중위님 만세!"
"와아아아아!"
병사들이 타일러를 향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커널 대령의 눈빛이 흔들렸다.
생각해보니, 윌리엄 사령관도 황립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었고, 기간트도 타지 못하는 참모 출신이었으며, 가문도 변변치 않았지만, 중장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이고, 지금은 제국의 실세 중의 하나인 장벽 사령관이 되었다.
오늘 문뜩 정보국 장교에 불과한 타일러의 활약을 보고, 자신이 라인을 잘못 타서 별을 달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부족했던가······.'
그리고 커널 대령은 눈앞에 젊은 장교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
닷새 후 거짓말처럼 강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얕은 시냇물 수준이었기에 기간트의 도움을 받고 손쉽게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긴 행군이 시작됐다.
우린 카야킨 전진 기지로 가는 가장 안전하다고 알려진 루트로 이동했지만, 중간에 거대 뱀 괴수와 고릴라 괴수를 만나 싸우기도 했고, 성인 머리통만 한 수백 마리의 벌레 떼와 싸우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십여 명의 병사가 죽고, 비숍급 기간 한 대와 폰급 기간트 몇 대가 상했다.
난 평소 주변에 있는 기간트 장교들과 운명의 실을 연결해 놓은 상태였다. 혹시나 전투 중 기사가 죽으면 마법인형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어차피 전사한 사람을 다시 쓰는 일이니,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사는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기간트는 너무 튼튼했기에 마나를 품은 마법인형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다.
그리고 병사들의 수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끔찍한 더위를 버티지 못하고 열사병으로 죽고, 독충과 독사에 물려 죽고, 물을 잘못 마셔 죽고, 괴수에 잡아 먹히고, 이름 모를 병으로도 죽었다.
난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시원한 조끼도 있었고, 전생처럼 뿌연 방사능 낙진과 화산재는 없으니까.
그래도······.
"하아! 시원한 콜라 한 잔 마시고 싶네."
지금 기분이면 2리터짜리 페트병도 단숨에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얼음 가득한 팥빙수나 아이스크림이라도······.
전생 때도 쉽게 접할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모든 것이 풍족했던 시대가 있었고, 모두 살아 있었을 때가 있었다.
그때가 때론 사무치게 그립다.
쿵! 덜컹! 덜컹!
마차의 흔들림이 심해지는 것이 길이 점점 더 험해지는 것 같다.
'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냥을 한다는 거지?'
이정도 대규모의 기간트 부대가 함께 해도 하루에 5km를 전진하기 힘들었다.
그만큼 대수림은 극악의 환경이었고, 그나마 카야킨 전진 기지까진 괴수의 출몰이 뜸한 지역이라고 했다.
그럼 카야킨 전진 기지보다 더 멀리 있는 전진 기지론 어떻게 가고, 또 어떻게 괴수를 사냥하고 부산물까지 챙기는지 의문이었다.
'이번에 장벽으로 돌아가면, 한 1년은 대수림으로 오지 않는 게 좋겠어.'
엄살이 아니라, 어제 난 벌레에게 물려 죽을 뻔했다.
볼일을 보려고 엉덩이를 깠는데, 풀숲에서 팔뚝만 한 독지네 한 마리가 급습했다.
다행히 혹시 몰라 배치한 사마귀 꼭두각시가 지네를 재빨리 낚아챘기에 정말 살짝 물렸다.
하지만 엉덩이가 얼얼하고 알싸한 그 고통은 아직도 남아 있었기에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심히 괴롭다.
어서 빨리 임무를 끝내고, 헬다임으로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당분간 사용할 꼭두각시 마법인형은 충분했다.
인형의 집을 열었다.
[암살자(lv.6) 꼭두각시]
[사마귀(lv.7) 꼭두각시]
[표범(lv.5) 꼭두각시]
휘릭! 탁!
'오! 좋은데!'
암살자가 던진 단검이 구석에 세워둔 나무토막에 정확히 박혔다. 이젠 제법 숙달됐기에 7미터 안이라면 100발 100중이었다.
암살자 꼭두각시의 레벨은 6에서 멈췄지만, 다른 무기를 배워두면 실전에 유리했기에 단검 투척술은 물론이고 검과 창까지 틈틈이 훈련하고 있었다.
암살자는 나와 영혼 이동 싱크로율도 좋고, 지금 내 꼭두각시 중에서 자동인형으로 업그레이드할 가능성이 컸지만, 아직 각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기에 더 많이 굴러야 했다.
굴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영혼 이동을 자주 하는 것이기에 틈나는 대로 스킬을 사용했고, 덕분에 나도 전투 감각을 조금씩 끌어 올렸다.
사마귀 꼭두각시 역시 레벨 7에서 성장이 멈췄다.
그랬기에 날아다니며 칼날 같은 두 앞발을 휘두르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사마귀는 저번에 표범 괴수를 잡는데, 유인도하고 눈을 찔러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공중에서 적을 기습하는 스킬을 연마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표범 꼭두각시가 좁은 방을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었다.
표범 괴수는 몸 길만 3미터에 앞발의 크기가 사람 얼굴만 하다. 이놈의 앞발에 맞고도 멀쩡한 내가 대단······, 아니 조끼가 대단하다.
난 그날 표범 괴수를 허수아비로 만들자마자, 인형의 집에 넣었다.
주변은 어두웠고, 사체는 감쪽같이 사라졌기에 괴수가 크게 다치고 도망쳤다고 둘러댔다.
표범 허수아비는 몸이 너무 많이 상했고 덩치가 커서 그런지 완전히 치료되는 데 일주일이나 걸렸다. 그리고 곧바로 꼭두각시로 만들었고 지난 몇 주간 훈련했다.
하지만 아직 레벨은 5.
지금 내 인형의 방 한쪽 길이가 7미터로 3미터 크기의 표범 괴수가 달리고 훈련하기엔 턱없이 좁았기에 제대로 된 훈련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괴수를 풀어놓고 훈련할 수도 없고.
'언제 전생처럼 대궐 같은 인형의 집을 만들까······.'
어서 표범 꼭두각시가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큰 인형의 집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도 이놈이 내 마법인형이 되었기에 이제 누구든 날 상대하려면 최소 분대 병력은 보내야 할 것이다.
게다가 표범은 성장 가능성이 아직 많이 남았기에 레벨이 지금보다 배 이상 올라간다면 소대 병력도 충분히 씹어먹을 수 있었다.
'크크큭!'
흐뭇한 웃음이 지어졌다.
괴수 마법인형이 이렇게 좋을 줄 알았다면, 전생에도 시도해볼걸.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쿵! 쿵!
천장에서 두드리는 소리.
"타일러 중위님!"
"뭔데?"
"카야킨 전진 기지가 보입니다."
"뭐? 도착은 저녁이라며?"
"일단 올라와 보십시오."
서둘러 마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나무들 사이로 정말 거대한 나무가 우뚝 솟아오른 것이 보였다.
"허! 저게 산이야? 나무야?"
"다들 오해하는 것이 대수림의 나무가 크다고 다 거신목이 아닙니다. 저 나무처럼 수만 년은 자라야 진짜 거신목이라 부를 수 있는 거죠."
"수만 년?"
대체 높이가 얼마나 될까?
아직 대여섯 시간은 더 가야 했기에 여기서는 높이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럼 카야킨 전진 기지가 저 나무 근처에 있다는 건가?"
"아니요. 저 거신목 속에 있습니다."
"뭐? 나무 속에?"
글래디스가 말하길 카야킨 전진 기지는 2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곳이라 했다.
원래 마석 광산이 있던 자리였는데, 파도 파도 계속 마석이 나오자 아예 기지로 만들었고, 입구는 좁고 거신목이 워낙 크고 단단해 괴수로부터 침입도 막아주기에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누구는 끔찍한 감옥이라고 말하지만, 제가 볼 땐 거긴 안식처입니다. 지상보다 덜 덥기도 하고, 술집도 있고, 여관도 있고, 심지어 여자도 있죠."
"여자?"
"수천 명이 사는 곳에 여자가 없겠습니까. 그냥 하나의 도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 어서 뜨끈한 물에 담그고 싶네요."
글래디스는 벌써 목욕할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하긴 나도 제대로 씻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냥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을 닦는 것이 유일한 청결 활동이었고, 여자도 예외는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나도 이제 곧 목욕물에 몸도 씻고, 시원한 방에서 잠도 편히 잘 수 있겠지······.
***
[카야킨 전진 기지]
거신목 아래 드러난 2개의 거대 뿌리 사이, 높다란 검은 벽이 세워져 있었다.
그 벽 가운데 있는 커다란 성문 앞에 선두 기간트가 도착했지만, 어쩐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거대한 공터에 마차들이 속속 도착하고, 영지의 기간트와 병사들도 입구에 도착했다.
하지만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간 글래디스가 돌아왔다.
"무슨 일이야? 왜 안 들어가는 건데?"
"전임 사령관과 기간트 장교들이 요새 문을 닫고 농성 중이라고 합니다."
"뭐? 농성?"
"자신들은 새로운 사령관이 온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기지를 비워줄 수 없다고, 그냥 장벽으로 돌아가라고 한답니다."
"이런 미친! 두 달 동안 힘들게 왔는데, 그냥 돌아가라고?"
그동안 대수림에서 고생했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깊은 빡침이 몰아쳤다.
"그리고 커널 대령님께서 찾으십니다."
"알았다. 바로 가자."
주먹을 불끈 쥐고, 곧바로 커널 대령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15. 할 수 있겠나?
15. 할 수 있겠나?
기간트에서 내려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커널 대령과 지휘관들.
그들도 지금 나처럼 빡쳐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커널 대령이 손짓했다.
"타일러 중위, 이리 오게."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다른 장교들이 날 따가운 시선으로 쳐다본다.
이건 내 탓이 아니었다.
내가 표범 괴수를 잡은 후부터 중요한 회의가 있을 때면, 커널 대령은 날 참석시켰다.
그리고 내 의견을 항상 물어봤기에 부하들이 지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라그르 중령, 계속하게."
"사령관님도 아시겠지만, 프랭크 대령은 출세에 눈이 먼 놈입니다. 절대 성문을 열지 않을 겁니다."
라그르 중령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더 생각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냥 확 밀어 버리시죠!"
"중령님 말이 맞습니다. 동부 전선에서 쌓은 우리 실력을 보여줄 때입니다!"
"대 기간트 전투라면 자신 있습니다. 제가 선봉으로 나서겠습니다."
젊은 기간트 장교들도 잔뜩 흥분해 나섰다.
우리가 대수림을 어떻게 뚫고 왔는가!
지난 2달을 힘들게 왔는데 그냥 다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짜증이 치미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참모, 호프만 대위까지 합세했다.
"저기 우측 뿌리라면 기간트도 충분히 기어 올라갈 수 있을 겁니다. 그곳으로 넘어가 성문을 연다면 충분히 놈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공격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다들 흥분해 있었지만, 커널 대령은 턱을 쓰다듬으며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날 쳐다봤다.
"자넨 지금 무슨 일인지 궁금할 거야?"
"네? 네."
"지금 카야킨 기지의 전임 사령관인 프랭크 대령이 아주 무모한 짓을 하고 있어."
커널 대령은 지금 상황을 친절히 설명해 줬다.
그는 전임 사령관이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프랭크 대령은 카야킨 전진 기지에서 2년 7개월을 복무했다.
그러니 이제 5개월만 더 복무하면 별을 달 수 있었다.
물론 부하 기사들도 1계급 특진이고.
하지만 갑자기 헬다임 장벽 사령관이 바뀌었고, 전진 기지 사령관은 장벽 사령관이 임명하는 것이 관습이었기에 물러나야 했다.
이때 한 가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것이다.
우릴 다시 장벽으로 돌려보내는 것.
어차피 대수림에선 마나 통신기도 작동하지 않았고, 워낙 험해 명령서나 전령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었다.
물론 명령서는 커널 대령이 가지고 있었지만, 저렇게 성문을 닫고 버티면 아예 보여줄 수도 없다.
만약 우리가 이대로 돌아간다면, 장벽으로 가는데 최소 한 달 보름이 걸리고, 도착하고 다시 정비하는데 최소 1개월 이상, 그리고 다시 이곳까지 오는데 한 달 보름을 소진해야 한다.
또 이번처럼 강이 생기거나 하는 문제가 생겨 발목이 잡힌다면,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우릴 돌려보내고 어떻게든 5개월만 버티면 별을 달 수 있다는 계산이었고, 그 과정에서 병사들이 얼마가 죽든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아! 이기적인 새끼!'
어떤 상판대기인지 당장 옥수수를 모두 털어버리고 싶었다.
아니! 내 표범 괴수인형을 보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먹어치우게 하고 싶었다.
"대수림에선 힘이 곧 법이고 실세야. 제국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자주 일어나지."
"그렇군요."
"보다시피 부하들은 바로 실력행사를 하라고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커널 대령이 내게 뭔가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부담스럽게······.
나도 지금 기분 같아선 확 그냥 밀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 두 달 동안 보아온 커널 대령은 신중한 사람이었고, 머리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가 지금 공격을 결정하지 못하는 걸 보면, 뭔가 걸리는 게 있는 것 같았다.
차분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성벽 위엔 기간트가 지키고 있고, 성문은 너무 단단해 보이고.'
유일하게 당장 공격 가능한 곳은 호프만 대위가 말했던 우측 뿌리 쪽이었다.
땅에 박힌 커다란 뿌리가 우측 성벽 위까지 거의 맞닿아 있어, 기간트로 접근하면 성벽 위로 올라갈 수 있어 보였다.
하지만 길이 좁고, 경사가 있어서 기간트는 한 대씩밖에 올라가지 못했고, 그건 상대 기간트가 앞을 막는다면 쉽게 뚫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저들도 그걸 알고 있기에 우측 성벽에 기간트가 5대나 배치되어 있었다.
'지키는 게 너무 유리해. 쉽지 않은 싸움이겠어. 이기면 다행이지만 진다면······.'
그건 정말 생각하기 싫은 일이 된다.
잘못해 시간만 축내다가 정말 장벽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당장 떠오르는 건 두 가지 방법입니다."
"두 가지?"
"하나는 장벽으로 돌아가는 척하며 근처에 숨어 있다가 불시에 기습하는 방법입니다."
"그건 힘들 거야. 저들도 바보는 아니라 우릴 끝까지 미행할 거네. 당분간 성문을 열지도 않을 거고."
"네."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방법은?"
"그냥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뭐? 그냥 있으란 말인가?"
"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네."
대답을 들은 커널 대령은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었고, 젊은 장교들은 냉소를 흘렸다.
"왜지?"
"시간은 우리 편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자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야. 저들은 안전한 전진 기지 안에 있고, 우리는 언제 괴수가 출몰할지 모르는 밖에 있네. 그리고 아픈 병사들도 있고, 다들 지쳤으니 시간이 갈수록 병사들의 사기는 더 떨어질 거네. 거기에 다른 영지의 사냥팀들은 우리가 빨리 되돌아가기를 바랄 거야. 그래야 자신들만이라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커널 대령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특히 영지의 사냥팀은 자신들과 상관없는 힘 싸움에서 누가 이기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나도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은 아니었다.
"우리가 힘들여 가져온 것이 뭡니까?"
"보급 물자 말인가?"
"물자도 있지만, 편지도 있습니다. 두 수레에 가득 담긴 고향에서 보내온 편지와 소포는 저 안에 사는 사람들에겐 무엇보다 소중한 것들입니다. 반년에 단 한 번 오는데, 그것을 받지 못한다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 천 명의 병사는 모두 교대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 말은 안에 있는 천 명의 병사는 바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걸 저들이 막고 있으니, 당장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음. 그건 일리 있는 말이군."
커널 대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라그르 중령이 나섰다.
"그건 타일러 중위가 이곳을 잘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나 병사들은 우리가 온 지도 모를 겁니다. 기지 안에 사람들은 거신목 밑에 지하 도시에 살고 있고, 외부를 볼 수 있는 거신목 상층부는 기지 사령관과 장교들만 살기에 기지 입구를 막고 두세 군데 통로만 막으면 외부 정보를 완벽히 막을 수 있습니다."
"제가 듣기론 이미 물자와 편지가 한 달이나 늦어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안에서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라그르 중령이 고개를 흔들었다.
"대수림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아. 오다가 문제가 생겨 돌아갈 수도 있고, 교대 인원이 전멸했다고 해도 믿을 수밖에. 그리고 강력한 괴수가 출몰해 입구를 폐쇄했다고 말하면 누구도 밖에 나갈 생각을 못 하네."
대수림과 전진 기지에 관해서는 그가 전문가였다.
그는 이곳 전진 기지에서 10년 이상 근무했다고 들었다.
그러다가 프랭크 대령이 기지 사령관으로 오자, 헬다임과 카야킨 기지를 오가며 물자나 나르는 신세가 됐지만.
커널 대령이 고민하자, 라그르 중령이 말했다.
"사령관님, 정 전투가 부담스러우시면 다른 전진 기지를 통해 들어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지하 통로 말인가?"
"그렇습니다. 땅굴 벌레 괴수가 파 놓은 곳을 기간트로 다져서 만든 길입니다. 지상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이동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전진 기지도 여기서 보름 거리가 아닌가. 왕복하면 한 달이고······."
게다가 이 병사들을 전부 다 데리고 간다면 시간은 더 늦어질 것이다.
그리고 프랭크 대령이 지금처럼 지하 통로 입구를 막고 버틴다면 어차피 전투는 피할 순 없었다.
그때 커널 대령이 날 빤히 쳐다봤다.
"무슨 하실 말씀이?"
"혹시 자네가 할 수 있겠나?"
"······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우리가 이곳에 왔다는 소식 말이야. 자네가 기지 내부로 전할 수 있겠나?"
능구렁이가 따로 없군.
커널 대령은 내 정보원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는 윌리엄 사령관의 최측근이니까.
그들은 내 암살자 꼭두각시를 기간트와 병사들이 지키던 살루스 야영지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증거물까지 가지고 나온 잠입에 능한 정보원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표범 괴수를 잡은 사건도 글래디스에게 보고를 받았을 테니, 내 정보원이 함께 대수림으로 온 사실도 알고 있을 것이고.
"포상은 걱정하지 말게. 두둑이 챙겨 주지. 그리고 이번 일만 성공한다면 앞으로 자네가 하는 일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거야."
이번에 맡은 비밀 임무에 성공하기 위해선 커널 대령의 조력이 필요했다. 물론 윌리엄 사령관에게 받은 명령이 있으니 협조는 해주겠지만, 그건 자신의 임무는 아니었기에 적극적이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럴 때 도움을 준다면 앞으로 내 임무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이다.
특히 살루스 기지에서 드워프를 구한다고 해도 장벽을 통과할 때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일에 실패해도 나에게 큰 리스크는 없었고.
무엇보다 우릴 막고 있는 새끼들에게 나도 한 방 먹이고 싶었다.
"포상은 필요 없습니다. 대신 성공하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무슨 부탁인가?"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주지. 그거면 됐나?"
"네! 감사합니다."
커널 대령의 약속을 받아냈다.
"일단 하루만 시간을 주십시오."
"알았네."
"그리고 라그르 중령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 말인가?"
라그르 중령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난 카야킨 전진 기지의 한 선술집 앞에 섰다.
라그르 중령이 그려준 약도가 비교적 정확했기에 2번째 영혼 이동 만에 장소를 찾았다.
[트라스의 개]
'무슨 술집 이름이 이래?'
간판도 작고 입구에 마석 램프도 아니고 오래된 기름 램프만 하나 걸려 있어, 너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가뜩이나 지하 도시라 어두운데, 선술집은 인적이 뜸한 구석 골목에 있었고, 들어가는 입구도 건물의 지하였다.
영혼 이동 스킬 유지 시간은 최대 1시간.
내가 무슨 재주로 이 짧은 시간에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전진 기지에 소문을 퍼트릴 수 있겠나?
그래서 생각한 것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라그르 중령이 알려준 술집의 간판만 봐선 사람이 많을 것 같지 않아 살짝 고민됐다.
'그나저나 아슬아슬하게 걸렸네.'
[운명의 실타래(lv.3)]
그동안 주변 사람들과 운명의 실을 계속 연결한 상태로 이동했고, 꼭두각시들을 계속 훈련했기에 스킬 레벨이 올랐다.
이제 내 꼭두각시의 최대 행동반경은 400m, 그리고 운명의 실타래는 500개까지 쓸 수 있었다.
그 말은 암살자 꼭두각시가 내 본체에서 400m를 벗어나면 연결이 끊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결이 끊어진 꼭두각시는 그냥 나무토막이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직선거리로 380m쯤에 선술집이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입구와 간판은 허름한데 내부는 제법 넓었고, 꽤 많은 사람이 삼삼오오 모여 술과 음식을 먹고 있었다.
'뭐야? 여기 맛집인가?'
라그르 중령이 이곳을 추천한 이유가 있었네.
기지 안으로 들어오면 한번 맛보러 와야겠다.
난 카운터로 향했다.
30대 초반 정도 됐을까?
눈이 크고 상당한 미모의 여주인이 카운터를 정리하고 있었다.
'왜 손님이 많은지 알겠네!'
사내 녀석들이란······.
똑똑!
테이블을 두드렸다.
"저기, 주인장."
내 말투가 이상했는지, 여주인이 눈을 흘긴다.
사실 나도 암살자의 말투가 영 어색했다.
그동안 영혼 이동에 성공할 때마다 꾸준히 연습했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발음은 아니었다.
"누구지? 못 보던 얼굴이군."
"여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렇소. 말 좀 물읍시다."
"물어보슈."
"짹이 누구요? 친구가 이곳에 가면 짹이 있을 거라고 하던데······?"
"찾는 사람이 짹이 확실하슈?"
"그렇소."
고개를 끄덕이자, 여주인이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어이! 여기 이 사람이 짹을 찾는데?"
"크크큭!"
"푸하하하!"
험상궂은 사람들이 이쪽을 돌아보며 일제히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이! 내가 짹이다!"
"나도 짹이지!"
"아니야! 내가 짹이라니까!"
서로 자신들이 짹이라고 말했다.
여주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짹은 용병을 뜻하는 은어요. 트라스의 개는 100여 년 전에 이곳에 정착한 용병대의 이름이고, 이 용병대를 만든 사람이 짹 블랙이오. 우린 짹을 기리기 위해 항상 짹에게 건배하고, 서로를 짹이라 부르오. 그러니 이곳에서 짹을 찾는다는 것은 용병을 찾는다는 뜻이지."
"아!"
소문을 내기 위해 용병을 고용하라는 말이었군.
이제야 라그르 중령이 이 곳에서 짹을 찾아보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럼, 용병대장은 누구요?"
"난데."
"······?"
"짹 블랙은 내 고조할아버지고, 지금 트라스의 개를 이끄는 건 나 타냐 블랙이지."
이렇게 가냘프게 생긴 여자가 용병대장이라고?
오늘 여러 번 놀라는 일이 생겼다.
"고생한 부하들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것은 내 취미지. 그보다 누가 여길 알려줬지?"
탁!
질문과 동시에 타냐 블랙이 서슬 퍼런 단검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이 기지에 웬만한 사람은 모두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데, 그쪽은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얼굴이란 말이야. 게다가 손을 보니 오랜 기간 검을 단련한 흔적도 보이고. 혹시 오크 패거리가 고용한 암살자라도 되는 거야?"
"뭐요? 암살자?"
살짝 뜨끔했다.
그녀가 턱짓하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용병들이 하나둘 일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난 급히 라그르 중령의 이름을 꺼냈다.
그런데!
"아하! 그 인간이 우리에게 떼먹은 돈을 가지고 온 건가?"
"뭐요? 떼먹은 돈?"
뭐지? 용병을 고용하라는 게 아닌가?
그럼 라그르 중령은 왜 여길 가르쳐 준 거야?
서둘러 본론을 말했다.
"라그르 중령은 새로 부임한 전진 기지 사령관과 지금 기지 밖에 있소. 그런데 전임 사령관과 부하들이 성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소. 난 그 소식을 전하려고······."
"하하하! 지금 우리더러 그런 헛소리를 믿으라고?"
어느새 내 주변으로 거구의 용병들이 둘러쌌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것이 곧 무자비한 폭행이 이루어질 것 같았다.
네다섯 정도는 나 혼자 어떻게 해보겠지만, 어림잡아도 스무 명 이상.
위층에 더 있을지도 모르고······.
"어서 대답하시지? 너 누구야?"
긴장했는지 손에 땀이 흐른다.
그렇다고 이들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표범이나 사마귀 꼭두각시를 꺼내 싸울 수도 없고.
특히 표범 괴수인형은 아직 힘 조절을 하지 못했기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다.
'이거 그냥 암살자를 인형의 집에 넣어야 하나?'
암살자 꼭두각시와는 영혼 이동 싱크로율이 너무 좋았기에 처맞는 고통을 느끼고 싶진 않았다.
"어?"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땅이 푹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연결이 끊겼다.
영혼 이동 스킬 유지 시간은 아직 많이 남은 상태인데, 왜지?
설마, 내 본체가 공격받은 것인가?
지금처럼 영혼 이동 스킬이 강제로 해제된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글래디스가 지키고 있었지만, 마음이 다급했다.
눈을 떴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럼 왜?
[암살자(lv.6) 꼭두각시가 자아를 각성했습니다.]
[자동인형(lv.1)이 만들어졌습니다.]
16. 자동인형.
16. 자동인형.
꼭두각시에서 자동인형으로 각성은 이렇게 불현듯 찾아온다.
암살자 마법인형과 연결된 50개 운명의 실이 하나로 뭉쳐지며,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건 랜선으로 연결되어 있다가 와이파이로 연결된 것과 같았다.
그리고 지금 사라진 운명의 실타래는 영구결번이다.
[첫 번째 자동인형을 만들었습니다.]
[인형술사 레벨이 대폭 올랐습니다.]
[lv.6 -> lv.11]
[인형술사 클래스 등급이 올랐습니다.]
[F등급 -> E등급]
[운명의 실타래 레벨이 올랐습니다.]
[운명의 실타래(lv.3) -> 운명의 실타래(lv.4)]
기분 좋은 알람이 연이어 올라왔다.
그동안 암살자 꼭두각시에게 집중적으로 영혼 이동 스킬을 사용한 보람이 있었다.
전생에 내 첫 번째 자동인형은 헌터 각성 5년 만에 만들었는데, 지금은 겨우 3개월 만에 뚝딱 만들어졌으니, 초대박이었다.
'뭐야? 어디로 가는 거야?'
내가 상태창을 보고 있는 사이에 암살자 자동인형이 빠르게 이동했다.
아마도 용병들에게 도망치는 중일 것이다.
'허! 늦었네!'
인형의 집에 넣으려는 순간 암살자가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내 운명의 실타래 범위를 벗어난 것이다.
'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암살자 꼭두각시가 자동인형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은 대박이었다.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도 꼭두각시처럼 가만히 서 있다가 당하진 않을 것이다.
자동인형의 가장 특별한 능력은 자주성과 확장성!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마법인형니까.
지금도 스스로 상황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본능적으로 도망친 것일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오래 떨어져 있어도 운명의 실타래 범위 안에 들어오면 와이파이처럼 자동으로 연결됐기에 허수아비나 꼭두각시처럼 다시 신체를 접촉해 연결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지금 갑자기 각성했으니, 자아에 혼란이 왔을 수도 있었기에 걱정이 앞섰다.
'제발, 무사히 돌아와라.'
꼭두각시가 한계가 정해진 인형이라면 자동인형은 성장하는 마법인형.
자동인형의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했기에 무사히 돌아오길 빌었다.
똑똑!
"실례합니다."
글래디스가 마차 문을 열었다.
"뭐지? 내가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자동인형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글래디스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커널 대령님께서 지휘 천막으로 오시랍니다."
"아! 미안하군."
그러고 보니 벌써 약속한 하루가 됐다.
전진 기지 안에서 우리가 온 소식을 모른다면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서둘렀고, 나와 암살자 싱크로율이 좋았기에 하루면 시간이 충분할 줄 알았다.
하지만 처음에 연속으로 영혼 이동에 실패하며 페널티를 받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버렸다.
"바로 가지."
***
"타일러 중위, 어떻게 됐나?"
커널 대령은 날 보자마자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내부로 소식은 전했습니다."
"오! 정말인가?"
커널 대령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옆에 있던 라그르 중령은 의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날 노려봤다.
"중위! 거짓말이라면 지금 말하는 게 좋아. 성벽 높이가 50미터야. 인간이 기간트도 올라가기 힘든 성벽을 넘어서 삼엄한 경비를 뚫고, 기지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불가능한 일이다."
"저는 라그르 중령님의 의도가 의심스럽습니다."
"뭐?"
"중령님이 말한 트라스의 개는 술집이 아니라 용병대였습니다."
"······어? 어어!"
라그르 중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게다가 중령님께선 그 용병대에 많은 빚까지 지셨더군요. 그 때문에 제 정보원이 지금 곤란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헉! 정말 전진 기지 안으로 들어갔군!"
라그르 중령은 입을 떡 벌렸다.
"전 누구처럼 거짓말은 안 합니다."
"험! 그건 내가 미안하게 됐네. 내부에 믿을 만한 사람이 그놈들밖에 없어서······."
커널 대령이 끼어들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않나. 기지 안쪽에 소식이 전해졌다니, 곧 우리가 왔다는 소문이 퍼지겠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정보원 말이 용병들이 전혀 믿지 않는 눈치라고 했습니다."
"그럼 다시 연락해서 여기저기 소문을 퍼트리라고 하게."
"지금은 연락이 끊겼습니다.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알았네. 자네 정보원이 내부 잠입에 성공했다면 며칠은 더 기다릴 수 있지. 아주 고생했어!"
커널 대령이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다독였다.
고생이야 내 마법인형이 했지만,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 일만 잘 마무리된다면, 대수림 전진 기지에도 든든한 조력자를 얻는 셈이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계속 수고해주게."
내 자동인형이 걱정됐기에 서둘러 마차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경례하고 밖으로 나가자 라그르 중령이 따라왔다.
"타일러 중위, 나 좀 잠깐 보지."
"네."
"자네와 자네 정보원의 능력을 의심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저도 중령님 입장이었다면, 믿지 못했을 겁니다."
"자넨 배려심도 깊군. 사실 내가 그 용병들의 아지트를 알려준 것은 나쁜 의도는 아니었네. 타냐 블랙은 빚진 돈을 받기 위해서라면 지옥 끝까지 쫓아올 여자지. 그러니 내가 왔다고 말하면 돈을 받기 위해서라도 정보를 꼭 확인할 거로 생각했네."
"이해는 갑니다. 그런데 왜 그런 자들에게 돈을 빌리신 겁니까?"
라그르 중령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주제넘은 질문이었습니다."
"괜찮네."
라그르 중령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지 안에 들어가면, 사과의 뜻으로 내가 거하게 한잔 사지."
"네, 감사합니다."
난 라그르 중령과 헤어져 서둘러 마차로 돌아왔다.
아직 암살자 자동인형과는 연결이 되지 않았다.
'괜찮겠지?'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 마음이 이럴까?
지난 3개월간 신경 쓰며 키웠고, 이 세계 내 첫 번째 마법인형이기도 했고, 영혼 이동을 통해 처맞는 고통도 느꼈기에 암살자 자동인형은 특히 애정이 있었다.
현재 내 유일한 인간형 마법인형이기도 했고.
'어? 연결됐다!'
순간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 자동인형이 거신목 중간에서 포착됐다.
그런데 아직도 쫓기고 있는지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안전하게 인형의 집에 수납하려 할 때였다.
[마스터, 기다려 주십시오.]
'어? 벌써 의식을 전달할 줄도 아네!'
꾸준히 영혼 이동 스킬을 써서 훈련한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기다리라니?
인형의 집에 넣지 말라는 건가?
'너!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용병들을 유인하고 있습니다.]
'뭐? 유인?'
그때 자동인형의 격렬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싸우는 중이야?'
[병사를 처리 중입니다.]
'뭐야? 병사를 처리해?'
더는 대답이 없었지만, 전투 상황이라는 것을 느낌상 알 수 있었다.
꼭두각시라면 다시 영혼 이동 스킬을 써서 확인할 수도 있지만, 자동인형의 유일한 단점은 자아가 있기에 영혼 이동 스킬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자동인형이 분신인형으로 업그레이드하면 병렬사고(lv.1) 스킬을 써서 확인할 수 있었지만, 방금 자동인형이 됐으니 그건 아직 먼 이야기였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자동인형을 인형의 집에 넣는 것뿐이었다.
그때 암살자가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꼭두각시를 보내 도와줄까?'
[필요 없습니다. 나 혼자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이번 자동인형은 자주성이 강하네.
말투도 좀 건방지고.
자동인형의 자아나 성격은 내가 강제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긴 전생엔 징그럽게 말 안 듣는 중2병 자동인형도 있었고, 무대포 걸크러쉬 자동인형, 인형의 집에서 나가기 싫어하는 은둔형 외톨이 자동인형도 있었으니, 이정도 성격이면 무난한 편이다.
[마스터, 임무를 완료했습니다!]
'임무라니 아까부터 무슨 말이야?'
[방금 용병들이 장교 식당 창문을 통해 전진 기지 입구에 도착한 병력을 확인했습니다.]
아!
이제 보니 암살자 자동인형은 용병들을 기지 입구가 잘 보이는 장소까지 유인한 것이었다.
'그래도 머리가 좋은 놈이네!'
이건 내가 영혼 이동 스킬을 통해 원래 하려 했던 일을 자연스럽게 임무로 받아들인 것이었고, 아주 깔끔하게 완수까지 했다.
이제 기지 안에서 우리가 온 것을 확실히 알았을 테니, 시끄러워질 것이다.
'잘했어!'
난 곧장 암살자 마법인형을 인형의 집에 넣었다.
[자동인형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자동인형(lv.1) -> 자동인형(lv.2)]
'벌써? 레벨업을 했다고?'
조금 전에 통로를 지키는 병사들을 해치우고 경험치를 꽤 많이 얻은 것 같았다.
[자동인형(lv.2)의 획득 경험치가 인형술사에게 정산됩니다.]
순간 내 경험치도 올랐다.
자동인형의 가장 큰 장점은 이것이었다.
내 운명의 실타래 범위를 벗어나 경험치를 올리거나 레벨을 올려도, 인형의 집으로 돌아오면 내 경험치도 오르기에 자동인형을 자동사냥 인형이라고도 불렀다.
'어서 와! 인형의 집은 처음이지?'
내 첫 번째 자동인형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조용히 구석 벽에 기대앉았다.
내 레벨과 헌터 등급이 오르며 인형의 집 넓이와 폭, 높이가 20미터로 대폭 확장됐다.
하지만 3미터짜리 표범 꼭두각시가 사방으로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사마귀 꼭두각시는 공중을 여기저기 날아다니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암살자 자동인형은 차분히 앉아 있었다.
'내게 묻고 싶은 거, 뭐 없어? 자신의 존재 이유 같은 거 말이야?'
[없습니다.]
'그래?'
너무 쿨한데?
그리고 입으로 말을 해도 될 텐데, 계속 의식으로 전달하네.
무슨 컨셉이지? 말하기 싫은가?
일단 자동인형이 됐으니, 계속 암살자라고 부를 순 없었다.
이름을 지어줘야 했다.
바로 한 가지가 떠올랐다.
'짹! 네 이름은 앞으로 짹이다.'
[짹, 알겠습니다.]
트라스의 개 용병대와 인연이 있었기에 초기 용병대장의 이름을 붙여 줬다.
절대 귀찮아서 대충 붙인 건 아니고.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없습니다.]
'알았다. 쉬어.'
[네, 마스터.]
원래 암살자 출신이라 그런가? 과묵한 놈일세.
내 마법인형이었지만, 자동인형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래도 모든 마법인형은 인형술사에게 절대복종했기에 별 상관은 없지만.
짹은 벽에 기댄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 녀석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아가 생겼으니, 지금 상황이 혼란스럽고 복잡하겠지.
내 경험상 이럴 땐 시간이 필요했다.
***
짹을 전진 기지 내부로 잠입시켰다.
'거기 분위기가 어때?'
[거리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만, 특별히 시위나 행동에 옮기진 않고 있습니다.]
'그래? 계속 소문을 퍼트려.'
[네, 마스터.]
짹의 노력으로 새로운 카야킨 사령관과 교대 병력이 보급품을 가지고 기지 앞에 도착했다는 소문은 쫙 퍼졌다.
문제는 당장 폭발할 줄 알았던 민심이나 병사들의 반발이 예상외로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전진 기지를 점거하고 있는 전임 사령관과 기간트가 무서워서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지 안에 병사들이 전부 달려든다고 해도 기간트 몇 대만 나서면 끝날 테니까.
'그럼 기간트보다 무서운 걸 보여줘야겠군.'
추가 계획을 실행할 때였다.
[영혼 이동(lv.3)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의식이 흐려진다.
스킬 성공률은 무려 60%.
하지만 이건 인간형 꼭두각시에게 해당하는 것이었고, 괴수 꼭두각시의 스킬 성공률은 현저하게 낮아진다.
그래도 몇 번 하다 보면 되겠지······.
[표범(lv.6) 꼭두각시로 영혼 이동에 성공했습니다.]
[남은 시간 – 00:59:59]
오! 단번에 성공했다.
오늘은 운이 좋은데!
어두웠던 시야가 순식간에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크릉?"
표범 괴수의 야간 시력이 좋은 건 알았지만, 이정도로 좋을 줄은 몰랐다.
어둠 속에서도 사물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좋아! 이제 제대로 날뛰어 볼까!'
운명의 실타래 범위 안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큰 골목 끝에서 한 사내가 날 발견했다.
"으악! 으아아아!"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끼아아! 괴수다!"
"도망쳐!"
거리에 사람들이 날 발견했고,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난 성난 울음을 울었고, 거리에 있던 테이블과 의자를 앞발로 박살 냈다.
괴수의 등장에 사람들은 혼비백산했고,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다.
두려움에 그 자리에서 기절한 사람들도 보인다.
"저기다!"
"저기에 괴수가 있다!"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하지만.
"크아앙!"
커다란 앞발을 휘두르자, 감히 달려들지 못했다.
몸을 바들바들 떨고 오줌을 지린 병사도 있었다.
"기, 기간트!"
"기간트를 불러와라!"
병사들을 지휘하던 장교가 소리쳤다.
잠시 후 길 끝에서 5미터 크기의 폰급 기간트 한 대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굳이 상대해줄 필요는 없지.
가까운 건물 지붕을 향해 힘껏 뛰어올랐다.
팟! 탁!
단 한 번 도약으로 9미터 높이의 건물 지붕으로 올라왔다.
엄청난 점프력에 나도 놀랐다.
[표범 마법인형의 도약(lv.1) 스킬을 익혔습니다.]
[도약(lv.1) - 순간적으로 하체 근육의 힘이 2배로 상승해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다.]
뭐? 지금 내가 괴수 마법인형의 스킬을 배운 건가!
전생에도 마법인형이 배운 마법이나 스킬을 내가 배웠기에 크게 놀랍진 않았다.
다만 괴수가 원래 가진 특별한 신체 능력을 스킬로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훗! 벌써 스킬을 배우다니!'
지금까진 인형술사의 능력만 있었다면, 이제 헌터의 능력이 추가된 것이다.
이러다가 이 세계 먼치킨이 되는 거 아냐?
물론 기간트와 괴수는 제외하고.
17. 납치.
17. 납치.
끼이잉! 쿵! 쿵! 쿵!
[건물을 포위해라!]
도끼를 든 폰급 기간트가 바로 건물 밑에 도착했다.
전투형으론 가장 작은 기체지만, 높이가 5미터에 마석 배터리 3개에서 나오는 출력은 소형 괴수의 힘을 압도한다.
하지만 지붕 위에 있는 날 어쩔 건데?
이건 대수림에서 표범 괴수가 우릴 골탕 먹였던 그 방법이었다.
창을 들었다면 닿았겠지만, 도끼라 거리가 짧다.
기간트가 도끼를 휘두를 자세를 취했다.
건물을 부술 생각인가?
다닥!
'도약!'
팟!
뒷다리에 힘이 넘치고 몸이 가볍다!
단숨에 여기보다 높은 옆 건물 지붕으로 넘어갔다.
방금은 단순히 영혼 이동을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진짜 표범 괴수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 싱크로율이면 표범 괴수의 다른 스킬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 사마귀 괴수의 능력도 스킬로 배울 수 있는 거 아냐?
그럼 스킬 이름이 당랑권인가?
잠시 두 개의 단도를 들고 어렸을 적에 봤던 무협지의 당랑권을 흉내 내는 나를 떠올렸다.
"저기다! 쏴라!"
피슉! 피슉!
팅! 팅!
궁수들까지 우르르 몰려와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어느새 폰급 기간트와 할버드병도 내가 있는 건물 주변을 포위했다.
시민들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날 두려운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가장 안전해야 할 전진 기지 주거지에 괴수가 출몰했으니 얼마나 무섭겠는가!
이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괴수를 보여주고, 그들의 공포감과 불만이 극에 달해 전진 기지를 지키는 책임자들을 향해 폭발하길 바라는 의도였다.
'이 정도 했으면 난리가 나겠지!'
이제 사라질 시간.
사람들 시선을 피하고자 다른 건물 지붕으로 연이어 이동했고, 마지막으로 인형의 집으로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