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이무기가 용이 될 때 (1)
'이대로는 안 된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추후 있을 수많은 암투부터 혈교의 침략과 마교의 도래 나아가 정사대전까지.
나로는 전부 막기 어려웠다. 특히 마교의 경우엔 더더욱.
애초에 주인공이 주인공인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결국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이 백하신에게 있었다.
그냥 알아서 하겠지 싶어 가만히 놔둘 수만은 없다는 뜻.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다.
'백하신을 키워야 해.'
약한 채로는 앞으로의 시련을 이겨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친선교류전은 중요했다.
가장 많은 이들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추후 방학 때 백씨세가에서 백하신을 부르는 이유 중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기연을 얻을 수 있는 에피소드로 여기서 어긋나게 되면 훗날 성장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우선 이탈한 것들을 다시 꿰맞춘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백하신을 대표로 돌려놔야겠지.'
내 두 눈빛이 가라앉았다.
* * *
"이봐."
내가 찾은 이는 대표를 호명할 때 네 번째로 불렸던 오초삼이었다.
낭인 출신으로 이렇다 할 문파 없이 입학한 청년이기도 했다.
"이거, 전 수석 아니십니까? 무슨 일로 오신 건지?"
오초삼이 나무 위쪽 기둥에 누운 채 이쪽을 넘겨다 보았다.
이름대로 수수한 얼굴과 체격을 한 생도였다. 기껏해야 10대 후반 정도로 보일 법한 외모.
"대련이나 하지."
"부족한 검으론 어려울 듯한데요. 제가 치료비가 없어서요."
"이 정도면 되나?"
내가 전표를 두어 장 꺼내 들자 오초삼의 눈빛이 변했다.
"그런데 제가 수석님과 대련이 되겠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직 부족한 듯해서요."
말꼬리를 늘리는 것에서 몸값을 올리려는 수작이 엿보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조건을 추가해 주었다.
"그럼 세 초식만 어울리도록 해라. 그 뒤부터는 추격전으로 바꾸도록 하지."
"음, 추격전이라… 무서운데요?"
"내가 발이 느린 건 아침 훈련으로 잘 알려졌을 텐데? 설마, 도망치는 것도 못 한다고 하진 않겠지?"
그 말과 함께 추가로 전표 한 장을 더했다.
총 300냥. 어지간한 중소 문파 무인의 월봉에 달하는 금액이다.
낭인 출신의 생도에겐 과하게 많은 편.
어차피 도적 떼를 턴 후라 여윳돈은 꽤 됐다.
금지령 때문에 당분간 외출도 할 수 없었으니 이런 데라도 쓰는 편이 나았다.
"뭐, 그러죠."
오초삼이 나무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껄렁한 태도와는 달리 바닥에 닿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역시 보통내기가 아냐.'
"대련은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 했으면 하는데."
"아, 물론입죠."
녀석이 태도를 확 바꿔 공손히 대꾸했다.
대련 한 번에 월봉 수준을 걸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이내 우리가 목표한 지점으로 향했다. 연무장을 지나, 학원을 둘러싼 산세를 지나자 인적이 드문 대나무 숲이 나타났다.
입학시험을 치를 때 온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바람에 장대가 일제히 휘어지고 긴 잎맥들이 마른 파도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그냥 붙기엔 재미없으니 내기 하나 하지."
"네?"
"이기는 쪽은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 중 하나를 가져가는 거 어때?"
내가 품속의 전표 다발을 보여 주며 제안했다.
현금을 뭉치로 들고 있는 나와 남루한 차림의 오초삼.
누구에게 더 좋은 제안인지는 명확했다.
녀석이 흔쾌히 답했다.
"그러죠. 근데 잘못하다간 후회하실 건데요?"
"걱정하지 마라. 난 손해 보는 일은 안 하거든."
그리 말하며 계속 걸어 나갔다.
보폭을 이어 갈수록 점점 대나무 숲이 깊어진다.
머리 위로 내리쬐던 햇빛이 촘촘한 녹색 줄기들에 점차 가려지더니 얼마 안 가 사방이 청록색으로 가라앉았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속, 끝없이 안쪽으로 들어가는 모양새에 오초삼이 농담처럼 물었다.
"천우 공자님. 듣기론 진법을 쓰신다고 했는데. 설마 여기에 진법을 쳐 둔 건 아니겠죠?"
어느새 우리 둘뿐이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있어도 넌 상관없을 텐데?"
"네?"
"이런 뜻이지."
곧장 손끝을 튕겼다.
화륵!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격발된 불꽃.
하지만 연기가 피어오른 자리에 상대는 이미 없었다.
"이거…. 신묘한 수를 쓰신다더니."
어느새 저 뒤로 물러나 있는 오초삼. 하지만 도망치진 않았다.
"이걸로 일초인가요?"
꽤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 하지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도 지금뿐이다.
"아직."
짧게 대꾸함과 동시에 바람을 일으켰다.
쏴아아-
사방에서 대나무 잎이 비수처럼 흩날리며 몰려들었다.
마치 태풍처럼 회오리를 일으키며 오초삼을 둘러싸는 죽엽도(竹葉刀)들.
순식간에 사위를 장악당한 녀석.
눈앞의 광경에 상당히 놀란 듯했지만 이내 표정을 굳히며 검을 뽑았다.
"이런 걸로…."
그래봐야 고작 나뭇잎일 뿐이다. 신묘하지만 별다른 위협은 아니다.
맞는 말이었다. 이젠 아니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지."
나는 씩 웃으며 손끝을 튕겼다.
화르륵!
일순 쏘아지는 죽엽들을 집어삼키고 타오르는 불길.
한순간 열염을 일으키며 쇄도해 오는 화마를 마주한 오초삼의 신형이 사라졌다.
찰나의 변화를 포착한 눈빛이 가라앉았다.
'령신괴도(靈神怪逃)의 제자답군.'
중원 역사상 손꼽히는 도적 중 하나로 그의 보법이 지닌 은밀함과 쾌속함 때문에 수많은 암살명가들이 탐냈다고 한다.
자신의 존재를 한없이 지워 세상을 주파하는 령신보(靈神步).
다만 여기에도 약점이 있었는데 바로 경지가 무르익지 않았을 땐 오히려 주변의 여파에 휩쓸릴 여지가 많다는 점이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이… 무슨?!"
불길을 뚫고 나온 오초삼이 기우뚱하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당황했다.
어느새 열기가 만든 거센 상승 기류가 휘감듯이 녀석의 움직임을 억제하고 있었다.
"불구덩이를 빠져나올 때 써본 건 처음인가 보지?"
곧장 균형을 잃은 녀석에게 쇄도하며 물었다.
일순 검을 세워 막으려는 오초삼. 반사적인 움직임이었으나 너무 이른 판단이었다.
'역시나 경험이 부족하군.'
달리던 자세 그대로 멈춤과 동시에 무학검에 회전력을 더해 녀석을 향해 던졌다.
"헛?!"
그러자 내지르던 검을 기울여 급소를 지키는 오초삼.
하지만 무학검의 궤도를 완전히 쳐낼 순 없었고, 검 끝은 결국 녀석의 어깨에 박혔다.
"큭!"
그럼에도 오초삼은 멈추지 않았다. 일대일 전에서 검을 놓친다는 건 이런 것이었다.
죽지만 않으면 끝까지 검을 쥔 쪽이 달려들어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어느덧 지척까지 다가온 오초삼의 눈빛이 형형했다.
이대로 살을 주고 뼈를 칠 생각인 듯했다.
당장이라도 상대의 검격이 발산될 법한 간극. 그 긴장된 사이를 일순 섬광이 메웠다.
파직!
창졸간 내 손끝에 전격이 맺혀 있었다.
'재빠른 놈을 제압하기엔 이것만 한 게 없지.'
푸른 섬전이 여러 갈래로 튀어 오르며 녀석에게 쏘아졌다.
"커헉!"
폐가 오그라들며 숨 빠지는 소리와 함께 오초삼이 자리에 쓰러졌다.
이런 건 처음 겪어 봤을 거다.
"내가 이겼군."
바닥에 뒹굴고 있는 오초삼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읊조렸다.
"그나저나 이긴 측이 상대가 가진 것 하나 가져가기로 했었지."
"어떤 걸…."
내가 지척까지 다가가자 오초삼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백하신이 대표 선정에 떨어졌다고?
그렇다면 이를 해결할 방안은 간단했다.
"제, 제갈천우 공자!"
후보자를 떨어뜨리면 된다.
백하신이 대표로 선정될 때까지 계속.
"끄아아악!"
잿더미가 가득한 대나무 숲 한가운데서 오초삼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뭔 엄살이야?"
녀석의 벌어진 입 안에서 손가락을 꺼내며 힐난했다.
어금니 쪽에 연결된 줄을 끌어당기자 방수포로 감싸진 쇳덩이가 하나 튀어나왔다.
"어, 어떻게 그걸?!"
오초삼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절대 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아연한 기색이었다.
나는 대답 없이 열쇠를 살폈다.
한철을 비롯한 합금으로 정교하게 세공한 물건이었다.
'파천마의 무덤으로 가는 열쇠.'
오초삼이 이곳에 입학한 이유기도 했다.
'학원 부지에는 파천마의 무덤이 숨겨져 있다.'
물론 나중에야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지금으로는 쓸모없는 정보야. 이 열쇠도 마찬가지.'
다만 중요한 건 지금 오초삼은 이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이 열쇠를 아주 중요하게 여길 터.
"돌려받고 싶나?"
열쇠를 흔들자 오초삼이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조건이 셋 있다."
"셋이나요?"
"싫으면 말고. 가문의 감정사에게 맡기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군."
내 말에 오초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로서는 가장 꺼려지는 결과일 터.
어차피 아쉬운 쪽이 접고 들어와야 하는 법이다.
학원에 들어온 이유인 이 열쇠를 잃는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을 거다.
"아, 아닙니다."
잠자코 있는 오초삼을 향해 말했다.
"첫째, 내게 보법을 알려 줄 것."
"예? 굳이 제 것이 아니더라도 비급서고에…."
녀석이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수석 지위를 박탈당해 비급서고에 출입할 수 없다는 걸 방금 떠올린 모양.
이에 신경 쓰지 않고 답했다.
"네가 선보인 바로 그 보법이 필요해."
아무리 파천마라 할지라도 모든 무공을 빼앗을 순 없었다. 중원은 넓었고, 아무리 천하제일인이라 해도 결국 개인일 뿐이었으니까.
상당수의 사특한 무공이나 숨겨진 비급 등은 여전히 비급서고에 없는 경우도 많았다.
령신보(靈神步) 역시 그러한 종류의 무공 중 하나였다.
삼재심법 수준의 내가기공만으로도 운용이 가능한 몇 안 되는 상승 보법. 지금 내게 필요한 무공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공 자유화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무공은 여전히 귀했다. 령신보처럼 후계 사이에서만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무공이라면 더더욱.
"이건 필요 없나 봐?"
하지만 가치란 언제나 상대적인 법. 내가 열쇠를 들어 올리자 오초삼이 침음성을 내뱉었다.
"완전히 익히도록 가르쳐 달라는 게 아냐. 당장에 기초적인 진기 운용법을 알려 주고 그 시범만 보이면 된다."
"…그러죠."
하는 수 없이 오초삼이 자리에서 비척대며 일어섰다. 여전히 전격의 충격이 남아 있는지 여전히 몸은 부자연스러웠지만 보법 하나 행할 정도의 여력은 있는 듯했다.
"대신 나머지 조건들을 듣고 나서 알려 드리죠. 무엇보다 그 물건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해 주세요."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바로 조건을 쭉 나열했다.
"둘째로 이번 친선전에서 대표 자리를 포기할 것."
"…제 자의적으로 사퇴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요."
"부상을 입었다고 해. 원한다면 도와주지."
"아뇨, 그러나 수련 중 다쳤다고 하기엔 공연히 의심만 살 테니 대련 중 다쳤다고 해야 할걸요?"
은근히 돌려서 내게 책임을 지우려는 모양새였다.
"내 이름을 대도 좋다."
"그러죠."
어차피 나에 대한 악평은 자자했다. 이제 와서 조금 더 심해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요 근래엔 오히려 이를 이용할 생각도 했기 때문에 차라리 잘됐다.
"세 번째는요?"
오초삼의 물음에 내가 마지막 조건을 내걸었다.
"이 물건을 사용할 때 나도 함께할 것."
"그건 안 됩니다."
그러자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줄 알았다. 내가 덧붙였다.
"만약 내가 이 물건의 사용법을 알고 있다면?"
"예?"
오초삼은 지금 이 기물의 활용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한참은 지나야 파악할 수 있는 사용법이니 의아할 수밖에.
"그렇다면 합작을 허락할 수 있겠나?"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오초삼이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며 물었다. 그에 나는 답했다.
"이 열쇠의 쓰임새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말도 안 돼…."
설마 열쇠라는 걸 들킬 줄 몰랐다는 듯 오초삼이 반신반의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증명하지."
검지 크기만 한 쇳덩이를 잡았다. 열쇠라고 했지만 그 실체는 달랐다.
자격을 지닌 자들만 일깨울 수 있는 종류의 기물.
마력을 살며시 불어넣었다. 역천심법을 익힌 나이기에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기물을 어떻게 작동시킬지 말이다.
'원래라면 극상의 공력이 필요했겠지만.'
파천마의 정통 후계자인 내겐 달랐다. 열쇠를 쥔 채 천천히 역천심공을 운용하며 마력을 일으켰다.
심법이 새겨 놓은 기혈을 따라 올라가며 그 심득을 잡아먹는 탐욕스러운 힘이 손바닥에 맺히며 열쇠를 물들였다.
우우웅-
일대에 공명하는 기파. 이윽고 한철로 만든 쇳덩이의 틈새가 벌어지더니 그 안에서 오색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뭐야…?"
오초삼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오고, 어느새 내가 쥔 열쇠가 한 조각씩 분해되어 검의 형상으로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공명과 진기가 틈 사이를 전류처럼 메우며 섬광을 내뿜는 모습은 신화 속 성검을 보는 듯했다.
곧바로 기운을 갈무리하자 검의 조각들이 저마다 살아 있는 듯 짜 맞춰 들어가며 내 손아귀로 회수됐다.
정적이 내려앉은 대나무 숲 한가운데. 침묵을 깬 건 이쪽의 한마디였다.
"이 정도면 합작할 만하지. 안 그래?"
34화 이무기가 용이 될 때 (2)
오초삼이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떠듬떠듬 중얼거렸다.
"어째서, 이런 게 가능한 거죠?"
말을 채 잇지 못하는 그를 보며 준비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래 보여도 제갈세가의 정통 혈족이다. 기물(奇物) 정도는 구분할 줄 알지."
"말도 안 돼! 내로라하는 전문 감정사도 파악하지 못한걸!"
"내가 좀 특이한 체질이거든. 아까 싸울 때 못 느꼈나 봐?"
뼈저리게 체감했을 것이다. 아직도 마지막 수에 직격당한 관절 마디가 미친 듯이 아파 보였으니까.
"그렇게 싸우는 이는 처음 봤죠. 과연 자격을 갖춘 이만이 알아볼 수 있다더니…."
오초삼이 전신에 묻은 흙먼지와 잿가루를 털어 내며 고개를 들었다.
"알려 드리죠."
그가 령신보의 진기 운용법과 구결을 알려 주었다.
상승 보법이라 그런지 꽤 복잡하면서도 신통한 구석이 있었다.
'유령처럼 기척을 지워 움직이는 기예로 신기에 이르는 보법이라.'
그리 생각하며 발 한 걸음을 뗄 때였다. 뒤에서 오초삼의 부연 설명이 더해졌다.
"쉽지 않을 거예요. 입문부터가 난해한 보법인지라. 주변의 기와 자신의 기파를 느끼고 융화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타앗-
한순간 내 신형이 흐려지더니 저 앞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네 말이 맞군. 확실히 쉽지 않아."
"...."
굳어 버린 오초삼의 모습에도 아랑곳 않고 느낀 바를 이어서 말했다.
"용천혈에 진기를 내뿜는 게 아닌 공(空)의 상태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로군."
진기로 마찰을 줄이거나, 가속하거나 하는 역할 외에도 주변에 녹아들어 일체화하거나 아예 빈 상태로 만들어 전신 자체를 가볍게 만드는 것이었다.
고수가 나뭇가지 끝에 한 발로 서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좋은 걸 배웠어."
감사의 인사에도 오초삼은 그저 불공평하다는 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 * *
"들었나? 이번에 오초삼이 생도 대표 자격을 포기했다더군."
"제갈천우 때문이라지? 아무리 대련 중의 일이라지만 그 포악한 손속은 여전하군."
"소문으로는 이번에 수석 지위를 잃고 마지막으로 호명된 것에 앙심을 품어 습격한 거라고 하더군."
"허, 자격에 걸맞지 않으면 자신의 손으로 떨구겠다. 이건가?"
여느 때처럼 나에 대한 소문이 무르익고 있는 오후였다.
내가 슬며시 건물 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떠들던 생도들이 헛숨을 삼켰다.
"헙!"
그러자 입을 꾹 다문 채 두 눈만 뒤룩뒤룩 굴리는 두 생도들.
"그런다고 숨이 멈추나."
그들의 위로 차가운 어조의 힐난이 떨어졌다.
"애초에 그럴 수 없지. 입을 닫는다고 내뱉은 말을 거두어들일 수 없는 것처럼."
"죄, 죄송…."
"저희가 실언을…."
상대의 변명을 일축하며 물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더군. 내가 자격을 논하며 같은 생도를 베는 광인이라고?"
"그런, 그런 게 아닙니다!"
"부디 용서를…!"
기세를 일으키자 울상이 되는 그들. 검집까지 매만지자 기겁하며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 어리숙하기만 했다.
"허억!"
이어진 겁박에 몸을 움츠리는 생도들. 그들의 앞섬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다가가려는 그때.
"그만하지?"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맞은 타이밍. 의협심으로 가득한 음성에 내 고개가 돌아갔다.
"네가 끼어들 재간이 아닐 텐데?"
어느새 바로 뒤까지 다가온 백하신을 보며 물었다.
이 학원의 특징은 참견쟁이들이 많다는 거다. 일부러 소란을 일으킨 보람이 있었다.
"아무리 언행을 과하게 했다 하더라도 그리 겁박하는 건 과해."
"무인을 모욕하면 객사할 각오를 해야지. 여기가 중원이었다면 진작 혼쭐이 났을 거다."
"그래도 입학한 이상 같은 동문이잖아."
"동문이라…."
실소를 머금으며 차갑게 말했다.
"동문의 호승심을 뒤에서 헐뜯는 게 동료애인 줄 몰랐군. 그럼 마땅히 보답해야지. 이렇게 말이야."
슬며시 검을 뽑으며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네 말대로라면 이리 검을 뽑는 것도 친교의 증거겠지?"
"…잘못을 다스리는 방식을 논한 것이야. 저들의 무례를 옹호하거나 네 심정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어."
과연 주인공다운 말투였다. 곧고 맑았다. 그러니 이렇게 반응할 수밖에.
"아니면 네가 그 동료애란 걸 보여 주지 그래? 핍박받는 동료 대신 검이라도 들 텐가?"
"…그걸로 네 심정이 풀린다면."
"호오."
확실히 협객다운 느낌이 들었다. 위기에 처한 동료 생도를 위해 이렇게 나설 수 있다니.
잘못이 있으니 자업자득이라며 남 일 보듯 지나치는 다른 생도들과는 달랐다.
나름대로의 이타심을 관철할 줄 알았다.
"따라오도록."
우리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 어느새 다른 하급생도와 교관까지 엿보였다.
'아주 구경거리로군.'
일부러 이런 판을 만든 거긴 하지만 말이다.
'백하신을 생도 대표로 만들기 좋은 판이다.'
현재 친선 교류전의 한 자리가 공석이 된 상황이다.
이때 오초삼을 쓰러뜨린 내가 백하신과 비등한 전투를 보인다면 교관들은 어떻게 나올까?
당연히 백하신을 대표로 선정할 여지가 높아지는 거다.
물론 이 경우 백하신이 그만한 무위를 보일 때를 전제로 말이다.
'그러니 대충할 순 없어.'
어느 정도 밑밥은 깔아 둘 테지만 나는 대련에 사력을 다할 생각이었다.
'애초에 본래 잠재력만 따지자면 이런 식으로 맞붙는 게 불가능한 녀석이니 말이지.'
무학검을 뽑아 들며 운을 뗐다.
"매 순간 최선의 수를 보여야 할 거다. 오래 끌면서 적당히 마무리 짓는 건 내 성미에 안 맞거든."
이렇게 말했지만 워낙 기맥이나 육체의 강도 자체가 약한지라 오래 싸울 순 없었다.
날 약골로 만드는 디버프 중에서는 [장기체력저하]나 [내구약화] 등도 있었으니까. 전력으로 붙는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허장성세가 통한 모양인지 백하신이 긴장한 낯빛으로 검 손잡이를 쥐었다.
명검 특유의 청아한 검명과 함께 하얀 검신이 뽑혀 나오더니 시야를 슬쩍 밝혔다.
순백의 기파가 은은하게 느껴졌다.
백룡성천검.
백씨세가의 상승 무공이 엿보였다. 이대로 검술로만 맞붙으면 이쪽의 필패겠지.
하지만 약한 척할 순 없었다.
은근히 마력을 끌어올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호흡이 선명해지며 시간의 고요한 흐름이 느껴졌다.
주변 풍경이 평소보다 선명하다.
"선공을 양보하지."
명백히 하수를 대하는 자세. 하지만 지금 나는 명색이 전 수석이다. 이 정도 허장성세는 보여 줘야 했다.
다만 의외인 건 백하신의 태도였다.
그는 하수로 취급당한 불쾌한 기색보다 오히려 진지하게 이쪽의 틈을 노리고 있었다.
어느새 전투에 몰입한 모습이었다. 그의 잠재력을 알고 있는 입장으로서는 섬뜩할 지경.
백하신의 깊으면서도 맹금 같은 눈빛이 가라앉았다.
일순 백하신의 전신이 사라졌다.
눈앞을 덮친 건 잔상으로 남은 찬란한 일섬. 곧 파공성과 함께 일대에 기파가 울려 퍼졌다.
본능적으로 치켜올린 무학검 위로 백색의 검신이 집어삼킬 듯 쇄도해 있었다.
'빌어먹을, 최소 일류급인가?'
심후한 공력에 손목부터 어깨까지 떨려 왔다.
오초삼의 경우에는 약점과 허를 찔렀기에 쉬웠지, 실상 이런 상위급 실력자와 정면으로 맞붙기엔 아직 난 부족한 구석이 많았다.
마력으로 강화한 근력과 미리 앞에 깔아 둔 그리스(Grease) 마법을 써 백하신을 밀쳐 냈다.
마치 압도한 것처럼 보이도록.
너무도 가볍게 밀려나자 백하신이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사량발천근?"
넉 량으로 천 근의 힘을 낸다는 기예다. 가해진 힘에 비해 쉬이 떠밀린 걸 보고 그렇게 판단한 듯했다.
'얘도 은근히 허당끼가 있네.'
아무래도 굳건한 내 모습에 착각한 모양. 잔뜩 긴장한 표정이 무슨 심후한 공력이 깃든 절초를 본 듯한 반응이었다.
그저 마법일 뿐인데 말이다.
'저리 나와 주면 나야 좋지.'
되려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이 뇌까렸다.
"이게 네 가문의 검법인가? 약하군."
일순 백하신이 발끈했다.
"가문을 모욕할 셈인가?"
"네 부족함을 가문의 탓으로 돌리는군. 상승의 검법이라 해도 누가 사용하는지가 중요하지. 그 차이를 보여 주마."
그러면서 은근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입을 털었다.
"이번 대련에서 쓸 무공은 삼재검법으로만 한정하지."
사실 이것밖에 못 쓰지만.
하지만 그런 내 선언에 주변이 술렁였다.
오대세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백씨세가 역시 상당한 명문가. 이리 무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물론 내 본신의 비기를 더해서 말이다."
한 손으로 품 안에 숨겨 둔 부적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제부턴 돌이킬 수 없다.
'본격적으로 실력을 드러낸다.'
마력을 일으키자 불길과 함께 부적이 타올랐다.
동시에 내 검에 맹렬한 불길이 맺힌다.
단지 화염 마법으로 태운 것뿐이지만 주변의 반응은 격렬했다.
"화공!? 아니, 부적이다!"
"기이하구나. 진법만 뛰어난 줄 알았는데 저건 주술의 경지 아닌가?"
"오히려 사술 아닌지? 사사로이 기물의 힘을 빌리다니."
마법을 처음 목도한 이들이 경악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정작 이를 상대해야 할 백하신은 침착한 얼굴이었다.
그 역시 놀랐지만 지금이 비무 상태인 걸 깨닫고 금세 평정을 찾은 것이다.
다만 짧지 않은 감상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제갈세가의 기이한 술법이라, 무인은 검으로 말하는 법이야. 삼재검법 정도로는…."
"매여 있군."
"뭐?"
난데없는 단언에 백하신이 되물었다.
"형(形)이니 식(式)이니 결국 무라는 근본은 같을진대, 신출내기 주제에 벌써 틀에 얽매여 있다는 뜻이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염화로 휩싸인 검을 휘둘렀다. 마력으로 피어오른 홍염이 파도처럼 백하신을 향해 몰아쳤다.
화악-!
그가 내지른 백룡성천검이 하얀 섬광과 함께 불덩이를 꿰뚫었다.
"이런 잡기 가지고…."
백하신의 말이 흐려졌다.
시야가 가려진 찰나를 노린 내가 어느덧 검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재검법 제2식 횡소천군(橫掃千軍). 평범한 가로베기가 백하신의 목을 노렸다.
"큭!"
고절한 무공답게 유연하고도 신속하게 공세를 막아 낸 백하신이 꼬이는 진기에 침음성을 냈다.
불길 바로 다음 이어지는 검기를 두른 일격이라니.
'그래도 이제부터는 내 차례다.'
설마 제갈천우가 검기를 써 댈 줄은 몰랐으나 그뿐이었다.
검을 맞댄 순간 삼재검법 특유의 투박한 검격을 직감했다. 이리 근접한 이상 상승 무공의 묘리로 대처할 수 있었다.
그리 생각했다. 눈앞의 상대와 시선이 마주치기 전까지는.
"시야가 좁군."
작은 중얼거림. 하지만 그 뒤에 벌어진 현상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화륵-
섬뜩한 감각과 함께 등 뒤에서 불길이 몰아쳤다.
백하신이 그대로 경파를 일으켜 제갈천우를 밀어내고는 한쪽 다리를 축으로 반 바퀴 돌아 불길을 베어 냈다.
"뭣?"
믿기 힘든 광경에 백하신이 두 눈을 부릅떴다.
불길은 흩어지지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오히려 여전히 허공에서 길게 와류를 타고서 채찍처럼 넘실거리더니 자신을 덮치려 했다.
'피해야 한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백하신이 일단 거리를 벌리려 하는데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보나?"
곧장 떨어지는 일섬. 삼재검법 제1식인 종단베기였다.
너무나도 정직한 검로다. 동네 놀이패와 다를 바 없는 검. 다만 이 경우 다른 점이 있다면 검기를 두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키잉!
검명이 울리고, 백하신이 진탕하는 내기를 다스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직 검기를 쓰지 못하는 그에게 있어 검기의 공세는 독과도 같았다.
처음에 내비친 자신감과는 달리 지금 백하신은 낭패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건 일반적인 대련이 아니었다.
'마치 여럿과 싸우는 것 같다.'
검을 피하면 불이 날아오고, 불을 가르면 또 다른 불길과 검이 날아오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느새 휘말리고 말았어.'
고작 삼재검법일 뿐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밀린 건 자신이었다.
물론 검기나 불길 역시 활용하곤 있었으나 그 각자가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검기를 둘렀다 하더라도 불안정했기에 상승 무공의 묘리로 정확히 반격한다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불길을 일으키는 것 역시 그 자체로는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사술 혹은 잡기로 여겨질 만한 수준 정도였다.
하지만 제갈천우는 그러한 요소 하나하나를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전투를 지배해 나갔다.
'괴물이로군.'
어쩌면 그의 진짜 재능은 주술이나 검술이 아닌 판 자체를 만드는 능력일지도 몰랐다.
'얽매이지 말라고 했지.'
새삼 그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상대를 바라보는 백하신의 시선이 진지해졌다.
35화 이무기가 용이 될 때 (3)
이무기 설화가 있다.
천 년간 수련한 이무기가 승천하기 전 마주친 사람에 의해 용이라고 불리면 용이 되고, 뱀이라 불리면 승천에 실패한다는 이야기.
하지만 고작 인간의 한마디가 그런 영향을 미친 걸까? 그것도 신령하다는 이무기한테 말이다.
나는 지금 그 옛말을 떠올리고 있다.
이 세계에서 백하신이야말로 진정한 잠룡이자 이무기였으니까.
'이런 애가 가문에서 썩고 있었다고?'
번뜩이는 안광과 몰입에 접어든 기세. 한 호흡도 흐트러짐 없이 이쪽을 견지하고 있었다.
'상상 이상이로군.'
앞서 말한 형식에 집착하지 말라는 조언은 본래 다른 백하신이 생도 대표전에서 겪어야 했던 깨달음이었다.
'혹시 몰라 지금 해봤는데 설마 될 줄이야.'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안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안광을 빛내는 백하신을 보며 검을 다잡았다.
기풍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는 듯. 정적으로 정제되어 있던 기파가 한 가닥씩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있었다.
그 광경이 마치 승천하기 직전의 이무기와 닮아 있었다.
'어쩌면 용과 이무기를 가르는 차이는 사소한 것일지도 몰라.'
이무기 설화는 여러 해석을 만든다.
먼저 말이라는 것, 규정이라는 것의 무서움.
다음은 용 자신의 문제, 누가 봐도 용이었다면 용이 될 수 있었을 거라는 능력이나 외견의 중요성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천 년간 수련해 온 이무기에게 부족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결국 자신이었다.
만일 이무기에게 확신이 있었다면 달랐을 거다.
타인의 규정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바로 섰다면 말이다.
'온다.'
곧 하얀 검광과 함께 쾌검이 쏘아졌다. 충돌의 순간 묵직한 감각이 손아귀에 전해졌다.
'뭐야?'
이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검격.
검을 타고 넘어오려는 백하신의 돌진을 화염 마법으로 견제했다.
바로 뒤통수에 대고 불길을 쏘아 낸 거다.
서걱!
그러나 백하신은 이를 예상했다는 듯 검로를 수정해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불길을 베어 넘겼다.
그 광경에 일순 미간을 좁혔다.
'마력의 구성 핵심을 베였어?'
이전까지는 마력의 형태만 베어 낸 터라 남은 마력의 잔불을 태워 원거리 추가 공격을 했었는데 이제는 아예 그 마법의 핵 자체를 베어 버렸다.
'장난 아니군.'
소름 끼치는 재능이다. 하지만 그런 자질이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만일 그에게 더 맞는 무공을 익혔다면 수석의 지위가 달라져 있었을 테니까.
본디 백룡성천검은 반쪽짜리 무학이다.
그 자체로도 상승 무공이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대성하기 어려울뿐더러, 그 최후의 구결마저 실전된 불안정한 무공.
이는 백하신의 상황과 닿아 있다.
가문에 내쳐져 있기에 가문에 붙어 있고자 하는 모습.
그는 사라진 유대를 대체하기 위해 가문의 검에 매진해 온 것이다.
어머니와 가문, 유대와 인정. 가지지 못했기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아이처럼.
그렇기에 백하신은 가문의 검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것이 그가 진정으로 강해지는 길이자, 한 무인으로 홀로 선 채로 강해지는 법이었다.
'내가 널 자유롭게 해주마.'
검기를 한계까지 응축시킨 검날이 백하신의 쾌검을 밀어냈다.
검명과 함께 충격파가 흩뿌려지고 우린 서로 두 걸음씩 물러났다.
애써 검기로 중검의 묘리를 흉내 내 상성빨로 백하신의 쾌검에 대응하고 있었지만, 이것도 임시방편일 뿐.
실시간으로 강해지고 있는 백하신을 상대하긴 역부족이었다.
마력을 끌어모으는 시간을 벌 겸 입을 열었다.
"너에겐 그 무공이 맞지 않는군."
"오지랖이야. 네가 뭘 안다고."
"가문이 가문이다 보니 분석에는 능하거든. 네게는 패도적인 무공이 어울려. 네 성정을 무시하고 무공에 몸을 맞추니 약한 거다."
툭 던지듯 용건을 말하고 검을 세웠다.
'한 방으로 끝낸다.'
백하신을 상대로 화염 마법을 쓰고, 검기를 둘러 기습해도 소용없었다.
위기 상황을 만든다 해도 그때마다 번뜩이는 감각으로 쳐냈으니까.
역시 무재로는 작중에서 손꼽히는 괴물다웠다.
그러니 남은 마력과 모든 기운을 이 일격에 담을 생각이었다.
우우웅-
검 끝이 맑게 울린다. 마력과 진기를 극한까지 담아낸 검기 위로 마력으로 형성한 불의 소용돌이가 덧씌워졌다.
모든 걸 빨아들이고 태워 낼 듯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
"무슨?!"
"염화공의 극의인가!"
주변의 경악성이 풍압에 흩어지고 검이 서서히 위로 올라간다.
최후의 일격이라는 걸 눈치챘는지 백하신의 검 역시 옅은 하얀 기운으로 넘실거렸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서로 한 발을 내디딘다.
삼재검법 제1식 종단베기.
감히 천(天)을 뜻하는 일검이 화염과 함께 내리꽂힌다. 마치 유성우처럼.
형과 식은 결국 일통(一統)한다.
이 순간 마법도, 무공도 결국 무라는 이치 앞에 하나의 선으로 수렴했다.
내 일격이 이제 막 각성을 시작한 천재의 검 위로 작열했다.
* * *
"이거… 놀랍군."
정묵 교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연무장 한가운데 마력을 태운 불길이 사방을 메우고서 흩어진다.
사그라든 열화, 그 중심에서 드러난 것은 서로를 스쳐 지나간 채 서 있는 두 무인이었다.
동시에 내 어깨 안쪽과 백하신의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봐준 건가?"
세상의 소리가 사라진 것만 같은 고요 속에서 백하신의 음성이 나지막이 들려왔다.
어쩌면 녀석의 입장에선 여유를 둔 것으로 보이겠지. 마지막 순간에 검력이 약해졌으니까.
하지만 내 체력적인 부분 때문이라는 걸 모른다.
"너도 마찬가지면서."
어깨와 옆구리. 얼핏 보면 어깨 부상이 더 약해 보이지만, 한 치만 더 옆으로 베었으면 목이었다.
백하신의 쾌검이 마지막 수에서 좀 더 유연했다면 쓰러진 건 이쪽이었다는 의미다.
'그래도 어쨌든 이 상황까지 만들었군.'
나는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마력도 내기도 모두 소진했다. 더구나 피를 봤고 서로 보여 줄 수 있을 만큼 보여 줬다.
생사결이 아닌 이상 이 이상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태연한 척, 여유를 가장하며 파리한 입술을 열었다.
"비무는 무승부로 하지."
그 말이 떨어지고.
"와아아아!"
일순 장내에 함성이 쏟아졌다.
다만 열렬한 환호를 감당하기엔 지금 내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무리해서 운용한 탓에 혈도는 꼬이고, 서클 역시 텅텅 비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상황.
그럼에도 마무리는 지어야지.
"내가 해준 조언 명심하도록. 강해지고 싶다면 말이다."
재수 없어 보일지라도 강조해야 했다. 갑자기 시비 건 주제에 훈계질이나 하는 소문 안 좋은 망나니로 찍힐지라도 말이다.
'이렇게 보니 완전 미친놈이군.'
생각해 보니 호감도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
그 예상대로인지 백하신은 말없이 목례만 하고는 돌아섰다. 다만 슬며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한 수 배웠어."
옅은 감사 인사. 어쩐지 후련한 기색이 느껴지는 어투였다.
'뭐 나쁘진 않네.'
결과적으로 백하신의 각성도 유도하고, 모두의 앞에서 무위도 선보였다.
오늘 일은 교관들에게 인상 깊게 남았을 터.
하급생도 대표가 한 자리 공석인 상황에서 오초삼을 쓰러뜨린 전 수석과 비등하게 싸운 백하신을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다.
'그 밖에도 성취가 있었고 말이야.'
슬며시 눈을 감고 체내의 꼬인 혈도를 살피는데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삼재심법을 대성(大成)했다.'
이번 비무에서 깨달음은 백하신에게만 온 것이 아니었다.
백룡성천검의 고절한 무공을 직접 맞받아치는 경험은 내게도 값진 시간이었다.
한 천재의 무아지경에 다다른 성장을 목도하며 실시간으로 대응했던 것 자체가 내게 최후의 벽을 넘는 영감을 줬다.
무극지체의 재능이 천재의 깨달음과 맞물려 개화한 것이다.
'놀랍군.'
나는 전보다 튼튼해진 기혈을 느끼며 눈을 떴다.
물론 아직 천성적인 한계와 디버프가 존재했지만 이전보다 훨씬 나아진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 성장의 여운을 느끼고 있던 차에 나는 두 쌍의 열렬한 시선을 감지했다.
"…뭐냐?"
"엄청난 무위였다!"
"대단하오! 대협!"
언제부터 있었는지 이희문과 구동이 내려와 내 옆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그 왜 있잖나. 정색할 만큼 싫지는 않은데 피곤해서 만사가 귀찮아질 때 말이다.
지금 내가 딱 그 꼴이었다.
"치료받으러 간다."
그리 말하며 생도들을 지나칠 때였다. 그를 부르는 낮은 음성이 있었다.
"방금 그건 주술인가?"
이번엔 정묵 교관이었다.
"가문의 일인지라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미리 준비한 변명을 꺼내자 주변의 이들이 웅성거렸다.
"어쩐지, 제갈세가의 비술이었나?"
"부적을 태운 거잖아. 사술일지도 모르지."
"저런 기물로 싸운 것도 쳐주는 건가?"
왜 저 말들이 안 나오나 했다. 마력으로 청각을 강화하자 여러모로 웅성대는 것이 들려왔다.
여론을 보니 잘 모르겠다가 반, 남은 이들 간에서도 용납할 수 없다와 괜찮지 않냐가 또 반반이었다.
형평성의 문제다. 쉬이 넘길 수 없는 논란이었다.
논쟁이 격화될 기미가 보이자 정묵이 이를 일축했다.
"부적이든 주술이든 본신의 힘으로 발현한 거라면 상관없다. 몸을 망치거나, 타인을 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술이라 할 수 없지."
무림학원은 중원의 모든 무공을 다루고 연구하는 곳. 정도(正道)를 넘어선 사술이 아니라면 도전할 수 있는 배움과 시도의 장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으나 이쪽에 도움이 됐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묵에게 묵례를 하고는 재빠르게 인파를 빠져나왔다.
회복을 겸해 의료원으로 향하자 고원태가 혀를 끌끌 찼다.
"또 다쳐서 왔는가."
"얼마나 걸릴 듯합니까?"
어깨의 치료를 맡기며 물었다.
다음 주에 친선 교류전이 있다. 그 상대는 중급생도의 정점들. 최상의 상태로 임해도 모자를 터인데 부상을 안은 채 싸울 순 없었다.
"생각보다 깊진 않네. 금창약을 발랐으니 열흘 정도 걸릴 걸세."
느리다. 그때까지 회복을 기다릴 순 없다.
"달리 방도는 없습니까?"
"치유력을 높여 주는 공법을 단련하거나, 영약을 먹거나 하면 가능하지."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이제 보상을 받을 차례다. 치료가 끝날 즈음에 이쪽에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약조한 것을 받으러 왔습니다."
"…잠시 기다리게."
고원태가 품 안에서 목함을 하나 꺼내 내게 내밀었다. 건네는 쭈글쭈글한 손길에서 얼마나 애지중지 보관했는지가 느껴졌다.
목함을 열자 청아한 향기가 일대에 은은하게 퍼졌다. 내부엔 딸기만 한 붉은색의 환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여기서 복용하는 게 나을 걸세. 당분간 근처에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
풍기는 향취에서부터 영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고수가 득실대는 학원에선 이만한 물건은 지닌 것만 해도 위험 요소였다.
"괜찮습니까? 근래에 영약을 과하게 먹었는데."
"내공 증진이 아닌 체질의 개선이라 그 작용이 다르네. 거기다 생각보다 정순하게 잘 제조됐으니 상관없을 걸세."
저래 보여도 실력만 따지면 중원 어디에도 꿇리지 않는 능력자다. 이런 곳에서 일한다는 게 의아할 만큼.
'믿어도 되겠지. 공략에서도 이걸로 문제가 생겼다는 언급은 없었으니.'
잠깐의 망설임 끝에 환약을 집어삼켰다. 구체를 입 안에 집어넣는 순간 신령한 기운이 사그라들듯 녹아들었다.
파도치듯 정제된 원기가 밀려드는 영약과는 달랐다.
느릿하면서도 섬세하고 부드럽게, 마치 봄철의 산들바람처럼 혈맥을 적셔 나갔다.
그 간질간질한 감각에 곧장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과도한 성장으로 자잘한 상처를 지녔던 기맥이 회복되고, 선천적으로 얕은 기혈막이 더 탄력적으로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대성한 삼재심법이 의념과 반응해 체내의 변화를 보조했다.
삼재심법은 애초에 천지인 묘리에 따라 육신을 다지는 심법.
쇠약한 체질을 개선하는 영약과 만나 그 효과를 최대로 끌어냈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
몰입의 순간, 나는 다음 경지로 나아갈 수 있음을 직감했다.
본능적으로 역천심법을 운용해 대성한 삼재심법을 집어삼켜 나갔다.
내기의 독특한 역행에 진기가 터져 나갈 것 같다.
그 어떤 고수가 봐도 지금 상태는 주화입마에 임한 듯 보일 터. 그럼에도 기적 같은 내기 통제력이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서게 했다.
괴물 같은 진기 운용법이었다.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 모든 지점에 대한 통제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극한의 기교였다.
[무극지체]의 재능만으로도 모자라 서클이 맹렬히 회전한다. [절대마도]의 초월적인 감각이 역류하는 기혈을 중, 상단전에서부터 통제한다.
절대적인 재능이 삼재심법의 모든 기도를 역산한다. 기혈, 세맥, 경맥의 순리를 모조리 해체하고 흡수한다.
터질 듯 맥동하던 혈도가 어느 순간 무저갱에 빨려가듯 팽팽히 당겨진다.
상중하, 모든 단전이 역천심법을 따라 저마다 삼재심법이 쌓아 온 심득을 집어삼킨다. 의념을 담아 단전 깊숙이 존재하는 신백에 각인한다.
명경지수의 순간. 소주천의 세계가 멈추고 나는 갓 세상에 나온 아이처럼 조심스럽게 두 눈을 떴다.
'됐다.'
드디어 처음으로 역천심법을 통해 다른 심법을 완전히 흡수했다.
마치 벌모세수를 한 것처럼 혈도가 깨끗하다.
이것은 기초다.
기혈을 단련하는 수단이자 재능이란 원석을 극한까지 벼리는 연마이기도 했다.
"…곧 죽을 놈인 줄 알았더니 터무니없는 기인이었나."
옆에서 고원태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화입마에 이른 듯 보였는데 느닷없이 기파가 변하더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극상의 성취가 이어졌다.
마치 오기조원을 보는 듯했다. 물론 그 수준은 절대 아니었지만, 고원태가 느끼기론 그랬다.
"덕분에 기연을 얻었군요. 조금만 더 호법을 서주시겠습니까?"
그에게 나직이 청했다. 은근히 묻어 나오는 패도적인 기백에 고원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두 눈이 감기고, 전신을 관조했다.
완벽하게 닦인 기혈과 역천심법으로 한계까지 비워 낸 혈도.
여전히 쇠약한 기맥은 여전했지만, 이전에 비해선 확연히 나아진 성취였다.
기틀이 마련되었으니 슬슬 다른 심법을 익힐 차례다.
'육합공.'
나는 다음 단계에 있는 화산파 심법의 구결을 떠올리며 새로운 무학에 빠져들었다.
36화 새로운 검법 (1)
'확실히 다르네.'
느리지만 정양한 진기가 체내에 모인다. 축기보단 신체의 정순함을 중시하는 심공다웠다.
맹하, 맹동이 일러 준 대로 기맥을 대주천한 후 서서히 눈을 떴다.
눈꺼풀 너머의 세상이 달라 보였다. 해상도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오감저하]로 낮아진 시력과 청각 등의 감각이 전보다 향상된 것이 느껴졌다.
"끝났나? 벌써 저녁일세."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열린 창으로 밖을 보니 어느덧 주위가 어둑해져 있었다.
'대체 얼마나 집중한 건지.'
묘한 기분으로 있자니 자연스레 다가온 고원태가 혈맥을 짚었다.
"…과연, 효능이 있구먼. 이거라면…."
그가 뒷말을 삼키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네. 덕분에 내 오랜 연구에 진척이 생겼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상호 간에 도움이 된 셈.
이런 변수는 언제든 환영이었다.
"다음에 또 일이 있으면 연통 주시죠."
그리 인사 후 의료실 밖을 나섰다. 숙소로 향하는 인적 드문 길 어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떠오른 별이 유난히 영롱하게 반짝이는 밤이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나는 체내에 확실히 자리 잡은 마나 서클과 단전을 체감하며 만족스러움을 만끽했다.
마법도 무공도 겨우 출발선에 선 것이다.
그리 가벼운 걸음을 이어 나가던 와중. 문득 전방에 심어진 나무 아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마력의 기파를 거두지 않은 채 용무를 묻자 상대가 나무 그늘에서 벗어나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유명하시더군요. 이야기나 한번 나눌 수 있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찢어진 눈의 사내, 백라욱. 그가 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됐네."
슬쩍 주변을 살핀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마침 널 찾고 있었거든."
어느새 뽑힌 검이 달빛에 일렁였다.
안 그래도 항마의 기운. 그리고 녀석의 배후 세력에 대해 궁금하던 차였다.
예상 가는 바가 있으니 이번 기회에 확언을 들을 생각이었다.
"이런, 전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기세를 일으키자 백라욱이 뒤로 물러서며 읊조렸다.
"웃기는군. 너같이 속 검은 녀석을 믿을 수 있겠나?"
그리 말하며 검을 들 때였다.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육합공을 바탕으로 어떻게 싸우더라?'
그러고 보니 육합공의 구결만 배웠지 육합검의 초식은 알지 못했다.
역천심법이 흡수한 삼재심법을 끌어내서 싸울 수도 있으나, 즉각적이지 않았다.
난 아직 파천마처럼 심체합일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비를 가장한 목소리로 검을 내렸다.
"그래도 한번 들어나 보지."
그러자 백라욱이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용건을 꺼냈다.
"그때 백하신과의 비무에서 보여 주신 그 무위, 술법인가요?"
"너 따위가 알 바가 아니다."
떠보는 기색을 냉정하게 일축하자 그가 덧붙였다.
"너무 경계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오늘 일은 제갈천우 님께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무슨 말이지?"
"이번 일로 공자님에 대한 주변의 관심이 지대해졌습니다. 그런 기묘한 술법을 대련에서 쓰셨으니 소문이 날 수밖에요."
공개적인 장소에서의 비무다. 화려하게 저질렀으니 풍문이 돌지 않는 게 이상했다.
"용건만 말해."
"공자님의 둘째 형님께서 찾아올 겁니다."
그 말에 잠시 생각을 더듬다 보니 자연스레 미간이 좁혀졌다.
제갈세가의 둘째라고 하면 한 명밖에 없었다. 제갈패강.
무에 재능이 있어 일찍이 무림학원에 입학했던 다섯 살 터울의 형으로 재작년에 약관을 넘겼다고 했다.
'상급생도로 있다고는 알고 있는데.'
교류가 원체 없어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가 날 찾는다니. 제갈세가의 분위기로 볼 때 좋은 일은 아닐 터.
"아마 기이한 술법에 대해서겠지요. 가문을 거론하셨으니."
백라욱이 답했다. 그 정도는 나도 알 수 있었다. 진짜 고민한 지점은 다른 데 있었다.
"왜 이걸 내게 말해 주는 거지?"
저번에 도소기와 함께 날 공격할 때부터 어렴풋이 제갈패강과 결탁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다.
나에게 원한이 있는 도소기를 굳이 꼬드긴 이유는 그것밖에 없을 테니까.
이를 고려했을 때 백라욱이 내게 경고해 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협력자로 있던 상급생도 제갈패강을 배신하는 행위였다.
이쪽의 물음에 상대가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다. 지극히 인공적인 미소였다.
"그저 호의… 라고만 말하긴 어렵겠죠. 사실 공자님께 관심을 가지신 분이 계셔서 만남을 주선하고자 찾아왔습니다."
"누군데?"
그자가 바로 백라욱의 진짜 배후에 있는 녀석이 틀림없었다.
"직접 만나게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언제든…."
"됐어."
가벼운 말이었지만 그 안에 내포한 의미는 무시무시했다.
학원 내에서 언제든 만날 수 있게 해준다는 뜻은 내부 인물이거나 삼엄한 경비를 뚫고서 침입할 수 있는 고수, 둘 중 하나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아마 이 녀석의 뒤에 있는 자들은….'
그래서 허를 찔러보았다.
"네 가문에서도 알고 있나?"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의문을 표하는 녀석에게 도소기에게서 빼앗은 방울형 검 장식을 들어 올리며 단언했다.
"네가 마(魔)와 연통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순간 백라욱의 실눈이 흔들렸다. 미묘한 차이였지만 마력을 안력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포착할 수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따로 이 물건에 대해 조사해 봤거든. 근데 이 기물의 반응이 아무리 봐도 이상하단 말이야. 술법과 진법을 통째로 일그러뜨리는 기운은 많지 않거든."
백라욱이 고개를 슬쩍 갸웃거렸다. 매우 침착한 연기였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게 저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은근히 공격적인 의문형이다. 그 역시 기껏해야 십 대 중후반의 나이. 발뺌한다 쳐도 티는 나게 되어 있다.
'대놓고 부정해 주니 편하군.'
곧장 확신에 찬 어조로 엄포를 놓았다.
"근데 도소기는 이걸 너한테서 받았다고 하더군."
"...."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침묵하는 백라욱.
그것만으로도 확신을 가지기엔 충분했다.
'때론 침묵만으로도 판단의 근거가 되지.'
이미 도소기는 약물을 비롯한 모든 것을 흑시(黑市)에서 구했다고 증언한 바가 있다.
원래대로라면 백라욱과의 관계를 의심할 근거가 없는 게 맞다. 이쪽에서 그저 원작 내용을 바탕으로 허장성세를 부린 것일 뿐.
다만 너무나도 자신 있게 물어보니 순간적으로 들켰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일말의 의심이 침묵을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판단에 확신을 줬다.
"답하지 않아도 좋아. 근데 너무 티 내고 다니지 말고 조용히 다녀라. 너를 비롯해 네 식솔까지 화를 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리 말하며 백라욱을 지나쳤다. 충격이 컸는지 자리에 선 채로 굳은 녀석. 그런 상대를 향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앞으로 백하신은 허락 없이 함부로 건드리지 말도록."
될 수 있으면 백하신에게는 성장에 도움될 시련만 유도할 생각이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달빛이 흐드러진 학원 내에서 나지막한 발소리만이 멀어질 뿐이었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기초 훈련 후에 단련 시간이 되자 다른 이들처럼 나 역시 무학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부터 화산의 검을 쓴다.'
파천마의 두 번째 성장 단계인 육합공의 심법을 익혔으니, 이를 기반으로 펼치는 육합검의 초식을 배워야 했다.
문제는 지금 내가 무공서가 있는 비급서고에 들어가지 못하는 입장이라는 것.
'결국, 그 녀석에게 가야 하나?'
사정이 궁해지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백청. 물론 육합검을 연구 및 숙달한 교관에게 찾아가는 방안도 있겠지만, 역시 이런 건 미래의 매화검수이자 직계제자를 찾는 편이 훨씬 나았다.
'저번에도 찾아오라 했으니 말이지.'
그리 생각하며 연무장 한쪽에 그림처럼 선 채로 긴 머리를 묶는 미청년을 향해 발길을 옮기는데 곧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무슨 일이야?"
어느새 백청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싱글거리는 입매가 묘하게 정감이 가면서도 개운치 않은 느낌을 주는 녀석이었다.
일부러 기척을 냈다 해도 이쪽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상당한 기감이었다.
살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재빠르게 답했다.
"육합검의 초식을 배울 수 있을까 해서."
"응? 아하하! 그래, 그랬었지. 난 또 백하신 때처럼 대련이나 하자고 온 줄 알았지."
'다들 날 대련에 미친놈으로 보는 건가?'
앞서 비무를 벌인 오초삼이나 백하신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런 오해를 사기엔 충분했지만 내심 억울한 감이 있었다.
누구보다 평화롭게 살고 싶은 건 이쪽인데 말이다.
비록 과격하긴 하지만 [시한부] 디버프 때문에 성장하지 않으면 말라 죽게 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이런 푸념이나 할 순 없지.'
"그래서 도움을 받을 수 있나?"
"물론이지. 육합검의 초식이라고 했지?"
백청이 환히 웃으며 검을 쥐었다. 유려한 걸음, 곧 어깨와 손목을 따라 검날이 서서히 떠올랐다.
"화산을 검을 보통 화려함을 겸비한 쾌의 묘리라고 하지만 그 모든 기교는 결국 여섯의 합에서부터 시작해."
단단히 선 자세를 바탕으로 창천에 끝을 향한 검이 내리꽂힌다.
간결하면서도 묵직한 일 합.
"앞을 지배하고."
이어지는 횡의 검격.
"옆과 뒤를 비호하며."
정오의 햇살에 잔상처럼 번뜩이는 검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친다.
"상하를 이어 결을 맺지."
베고, 찌르고, 막는 기본 검형을 여섯의 방위로 합한 것. 그렇기에 육합(六合)이다.
"기본에 충실한 검이야. 물론 그래서 파고들수록 심후한 무학이기도 하지."
백청의 설명이 이어졌다.
초식 하나하나를 눈에 새기며 차근차근 육합검의 이치를 익혀 나갔다.
'비슷하면서도 달라.'
방위의 개념과 공방의 검형이 더해지니 그 심후함이 달랐다.
삼재검법이 나를 중심으로 세상과 대치하는 평면의 세계를 논했다면.
육합검은 나를 포함한 세계, 타인을 포괄한 입체의 공간계를 논했다.
'역시 대문파 화산의 기본공인가.'
검을 내지르는 움직임 하나하나에 묘리가 담겨 있었다.
[무극지체]의 재능 덕분인지 초식을 볼 때마다 심공을 어떻게 운용할지가 잡힐 듯 다가왔다.
"이게 육합검의 초식이야."
마침내 내지른 검 끝을 멈춘 백청이 이쪽을 돌아봤다.
"고맙다."
내가 정중히 감사를 표하자 백청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별거 아닌데 뭘. 그런데 내가 검을 봐줘도 될까? 겸사겸사 초식을 견주어 보기도 하고 말야."
은근히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매서웠다. 역시 꿍꿍이가 있었다.
'무공에 미친놈이니. 그럴 수밖에.'
나는 말없이 검을 뽑았다. 앞서 일러 준 육합검의 초식들이 하나씩 뇌리에 떠올랐다.
몸의 움직임과 검의 경로가 한 줄기의 선으로 수렴했다. 유려한 궤적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검풍조차 일지 않았다.
마치 수년간 연습하기라도 한 듯 깔끔한 형.
'부족해.'
그럴듯한 건 겉모습뿐. 그 심후함이 부족했다.
주변에서 시선을 모으고 있는 주변 생도들의 감탄을 뒤로한 채 호흡을 깊이 내뱉었다.
감각이 정렬된다.
무학검의 손잡이를 쥐던 파지법의 중심이 미묘하게 변했다.
찰나에 손가락 하나하나의 압력을 재조정해 폭발하듯 검을 내질렀다.
검 끝이 번뜩이며 심법의 운용과 묘리를 발현했다.
마치 비상하듯 솟구친 검날이 뒤늦게 미묘한 검풍을 일으켰다.
예리함이 부족한 것도, 힘이 넘친 것도 아니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검로의 끝맺음. 합이었다.
"이렇게 하면 되나?"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에게 물었다.
어느덧 이쪽을 바라보는 백청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37화 새로운 검법 (2)
"너…."
백청에게서 무어라 말이 나오기도 전에 나는 검을 집어넣었다.
"수업이 있어서 이만 물러나지."
방금 시연으로 내기와 심력을 상당수 소모했기 때문.
'얻을 건 다 얻었어.'
체내의 기를 일주천하는 와중에 떠오르는 심득에 맞춰 기의 형질을 재구성했다.
육합검을 다루는 동안 체득한 기연이었다.
'백청을 찾아오길 잘했어.'
육합검의 이치를 꿰뚫고 있는 백청이기에 이런 번뜩임을 얻을 수 있었다.
만일 다른 교관이었다면 달랐을 테지.
'물론 저 시선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지금도 백청의 눈빛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귀찮아질 것만 같은 예감.
이후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으니 망정이지 자칫하다간 저 무공 덕후에게 얽힐지도 몰랐다.
원작에서도 그는 백하신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들러붙는 조연 중 하나였으니까.
'괜한 생각이겠지.'
그리 생각하며 강의실로 향했다.
"…아름다워."
백청의 감탄한 목소리가 미풍에 흩어졌다.
"관심이 가는데."
그리 말하는 백청의 시선이 제갈천우의 등에 꽂혔다. 그 뒷모습이 건물에 가려 사라질 때까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