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처럼 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날 좀먹던 불행은 기어이 내 삶을 끝장내고, 전혀 다른 세상에서의 후생에서도 내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라."
최소한 여기서는 쥔 게 있다.
가족, 그리고....
- 몸을 내놔! 살고 싶으면!
- 내놔!
"응, 너나 내놔."
- 끄아악, 안 돼!
진상한테 악착같이 삥 뜯은 힘까지.
"나도 사람답게 살 거야."
[먹방 브이로그] 어쩌다 악마포식자의 악마 먹부림 feat. 들키면안됨
= = = = =
1화. 전생, 그리고 만남
"원장 선생님, 돈 보냈어요."
[보낼 필요 없대도. 너 고생하는 거 다 아는데....]
"보육원 힘든 거 아는데, 어떻게 안 보내요. 전 괜찮아요. 동생들 옷이라도 한 벌 더 사 주세요."
후우.
차가워진 손에 입김을 불어 넣으며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주머니가 구멍 난 패딩이 너무 아쉬웠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많....]
"저 생각보다 많이 벌어요. 열심히 살잖아요."
[그래도....]
"그리고 기원이 병원비 내야 하잖아요. 이제 더는 지원도 안 나올 텐데. 받으세요. 그럼 전 친구들하고 약속이 있어서...."
사실 친구를 만날 여유 따위는 없었지만.
[문호야. 넌 정말 괜찮니?]
"그럼요. 저 한문호예요, 한문호. 걱정 마세요."
언제나처럼 씩씩하게 대답해 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통화 직전에 날아온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출금 2,000,000원
**보육원
잔액 605,532원
아직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월세랑 관리비 나갈 거 생각하면....'
자연스레 한숨만 나왔다.
'오늘 저녁은 라면이군.'
눈 내리는 하늘도 괜히 원망스러웠다.
'내일은 눈이 안 와야 일 나갈 텐데....'
화이트 크리스마스.
정겨운 음악 소리와 행인들의 웃음이 가득히 울려 퍼지는 주변의 환경이 새삼 낯설게만 느껴지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의 환한 미소도 마냥 부럽기만 했다.
'나는 언제 저렇게 웃어 볼까.'
그에게 세상살이는 언제나 너무 힘들었다.
부모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고아 신세.
기껏 열심히 공부해 취직한 회사에서는 턱도 없는 요구를 하는 상사를 들이박았다가 잘려 버렸다.
물론 그 일을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 이래서 군대도 안 갔다 온 고아 새끼는....
험한 세상을 살면서 별의별 인간을 다 만나 봤지만, 고아라서 군대 안 간 사실을 트집 잡고 갈구는 순수한 X발 새끼는 그놈밖에 못 봤으니까.
다만 그 이후로 자꾸만 일이 꼬이다 보니, 새삼 팔자가 더럽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인생, X바....'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세상이 자꾸 "죽어라, 죽어라."하는 느낌.
악착같이 살아가는 자신을 보고 "이래도 버텨?" 하면서 놀리는 것만 같았다.
아직도 가끔은, 보육원을 나올 때 자신에게 손 내밀던 검은 유혹들이 생각났다.
더러운 세상, 똑바로 살아 봤자 나만 힘든데.... 하는 생각들.
하지만 그는 다시 고개를 흔들며 부질없는 생각을 날려 버렸다.
"내가 오기로라도 똑바로 산다, X발. 고개 쳐들고 떳떳하게 살 거다. 그렇게 살아서...."
평소처럼 혼잣말로 각오를 다져 보려는데, 꼭 성공하고 말겠다. 라는 말까지는 차마 나오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품어 왔던 희망은, 살면서 겪어 본 사회의 무게에 짓눌려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잘 살고 만다. 힘내자, 힘."
기댈 가족이라도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힘이 날 텐데, 그 한마디 다짐조차 허망하게 허공에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흐...."
가족 비슷한 정이라도 느끼는 것은 보육원의 선생님들과 동생들뿐.
그나마도 최근에는 사정이 좋지 않아, 그가 계속해서 돈을 보태야 할 형편이었다.
물론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텅 빈 통장을 보니 새삼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그때 성격 좀 죽일 걸 그랬.... 아니, 아니야. 노가다가 좋소기업보다는 돈은 많이 벌어. 헛생각 말자.'
당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먼저다.
그렇게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는 해 뜰 날 오겠지."
이제부터 다시 공부도 하고 기술도 배우며, 꾸준히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여태 그래 왔듯이.
"할 수 있다."
스스로를 다독여 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상념이 너무 길었을까.
문득 고개를 들자, 십여 미터 앞에서 횡단보도의 파란불 신호가 깜박이고 있는 게 보였다.
아차.
'면접 시간!'
정신이 번쩍 든 그는 부리나케 뛰기 시작했다.
저녁 타임 알바 면접이 멀지 않았다.
'꿀알바라던데. 반드시....'
허전한 통장을 보고 느낀 위기감이 발걸음에 더욱 힘을 더하는데.
- 빠방!
갑자기 시야 오른편에 그늘이 생기더니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다.
그제야 보이는 커다란 트럭.
브레이크가 고장 난 듯, 경적만을 다급히 울리는 기사의 놀란 얼굴이 한순간 눈에 들어오는데.
쾅!
소리와 함께, 갑자기 시야가 멋대로 휙휙 돌기 시작했다.
미세 먼지 가득한 서울의 하늘과 커다란 건물들. 그리고 도로, 차 등이 차례로 눈앞을 스쳐 지나가더니.
쿵.
몸이 멋대로 길에 나뒹군다는 생각이 들 때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악!"
"사람이!"
"!@#!...."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의식조차 조금씩 흐려지는 느낌.
본능적으로 이것이 생의 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젠장, 젠자앙...!'
억울했다.
열심히 살았는데.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거라는 믿음 하나로 버티고 또 버텼는데.
'이게 끝이라고?'
나도 남들처럼.
'돈도 많이 벌고, 여가 시간도 갖고, 가족도 만들고....'
언젠가는 그럴 수 있길 바랐지만.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이 순간이 인간 한문호의 인생의 끝이었으니까.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 이런 지독한 운명을 안겨 준 신... 아니, 악마는 한 번의 삶으로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 * *
폐허 속 돌 더미 위에 회색 머리 소년이 주저앉아 있었다.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움직일 생각조차 못 하는 듯, 머리카락과 같은 회색빛 눈동자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소년.
그런 소년에게, 깨어진 갑옷을 입은 상처투성이의 기사가 다가왔다.
안쓰러운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던 기사는 잠시 주저하다 손을 내밀었다.
"얘야. 널 괴롭히던 사람들은 전부 죽... 흠, 흠. 쫓아냈단다. 괜찮니?"
그제야 소년은 멍한 눈을 들어 중년 기사를 바라보았다.
"괜찮...? 나...?"
철그럭.
그런 말을 생전 처음 들어 봤다는 듯, 족쇄를 찬 손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는 소년의 눈동자는 살짝 커져 있었다.
"그래, 너. 괜찮은 거니? 이름은? 이름은 뭐고?"
"이름...?"
끄으응.
아이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머리를 움켜쥐었다.
"내, 이름...."
숫제 땀까지 흘리며 끙끙거리는 소년의 모습에 기사가 당황하는 순간.
"한...문, 호...?"
마치 되묻는 듯한 어조로 짜내듯 대답이 나왔다.
너무 생소한 발음에 기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스 무노?"
"으, 으윽. 내 이름, 문호...."
다시금 생소한 발음이 튀어나왔지만, 기사는 그것이 이 끔찍한 곳에 잡혀 있던 어린 소년의 트라우마 때문일 거라 여겼다.
"저런...."
스스로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에 대한 동정심이 더욱 커져만 갔다.
"그래, '무노'야. 갈 곳이 없다면, 나를 따라오지 않겠니?"
멍한 눈으로 기사를 응시하던 소년은, 이내 그 갈색 눈동자에 서린 따뜻한 빛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며시 손을 내밀었다.
철그럭.
"이 족쇄는, 음.... 일단 이곳을 떠나서 나서 방법을 찾아보자꾸나."
다시 한번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
그 소년의 손을 잡은 기사가 먼저 돌아섰고.
철그럭. 텅.
사지에 회색의 족쇄를 찬 소년은, 작은 덩치에 비해 길기만 한 쇠사슬을 끌며 그 뒤를 따라나섰다.
소년, 무노는 기사의 생각보다 더 특이한 아이였다.
험한 산길을 내려가는 일이 아이에게는 고역이겠다 싶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얘야, 손...."
"저기...?"
"그래, 저기로 가야 해. 위험하니까 손을...."
그가 내민 손을 아이가 멀뚱히 쳐다보던 그때.
촤르르륵.
콩. 콩.
"하!?"
아이의 손발 족쇄에서 이어진 4가닥 쇠사슬이, 마치 의지가 있는 것처럼 움직이더니, 그 끝에 달린 사슬 추로 바닥이나 나무를 짚거나 휘어 감으며 아이의 몸을 아주 쉽게 건너편 바위 아래에 내려놓았다.
"...이게 무슨?"
험난한 세상을 살아오며 꽤나 격렬한 모험을 겪었다 생각하는 그였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내 추론되는 바가 있었다.
인간을 진화시키는 힘 강체술.
신의 기적을 행사하는 성법.
자연의 힘을 사역하는 정령술.
악마의 힘을 행사하는 마법.
그 4대 이능을 벗어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가지고 태어나는 특별한 능력이 존재한다는 얘기를 들어 봤으니까.
'금속을 조종하는 능력이라....'
더구나 그런 힘을 가진 아이라면, 확실히 '그곳'에 있었을 법했다.
그 악마의 종자들은 특별한 제물을 모으고 있었으니까.
혹시나 남아 있을지 모르는 잔당을 뿌리 뽑기 위해 그곳에 들렀던 것이 새삼 잘한 일 같았다.
"안... 와?"
"아. 간다, 가."
기사는 그대로 커다란 바위 아래로 훌쩍 몸을 날렸다.
그는 저런 재주를 부릴 수 없지만, 부릴 필요도 없었다.
쿵.
중갑을 입고 십여 미터 아래로 뛰어내리는 것 정도는, 강체술로 네 번의 진화를 거친 고위기사인 그에게는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아무리 피로가 쌓이고 잔부상이 좀 있다고 해도 말이다.
다만.
"이제, 어디...?"
그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도 어눌한 말밖에 못 하는 아이의 사정이 짐작되어 마음이 무거울 뿐이었다.
"얘야."
"...."
"무노야?"
"응?"
"혹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는 게 있니?"
"그...곳?"
"내가 널 데려왔던 곳. 그곳에서 있었던 일이나, 아니면 그 전의 기억 말이다."
"아...."
아이는 이내 무언가를 떠올리려 하는가 싶더니.
이내.
"아윽...!"
자그마한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아무리 봐도 무언가를 생각해 내려다가 고통스러워하는 느낌인지라.
기사는 바로 아이를 안아 들며 소리쳤다.
"아, 아니다! 생각하지 마!"
"끙. 끙...."
"이런 젠장...."
그러나 아이는 괴로운 듯 계속해서 신음을 흘렸고.
기사는 그런 아이를 안은 채, 잠시 쉬어 갈 만한 터를 찾아 황급히 숲속으로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타다닥.
화르르륵.
해가 저물어 가는 하늘 아래에서 모닥불을 한참 쬔 후에야, 아이는 살짝 눈을 떴다.
"괜찮니...?"
아이의 상태를 살피던 기사는 머리카락과 같은 회색빛의 그 공허한 눈동자를 보면서 새삼 동정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눈빛만으로도 이 아이가 꽤나 모진 고통을 겪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거기다.
"...머릿속에서."
"응?"
"목소리가.... 들려...."
이런 이상한 말까지 하고 있으니.
"애써 생각하지 말거라, 무노. 호흡 크게 하고...."
이 아이가 그 악마의 종자들에게 잡혀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기사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다만.
"살 거야.... 나도.... 잘...."
어느새 다시 눈을 감고 잠든 이 불쌍한 아이가 잠꼬대로 중얼거리는 말들이 너무 신경 쓰였다.
가뜩이나 그에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아들이 있었으니.
'만약 리안이 이런 일을 겪었다면....'
그 아들의 모습이 아이에게서 겹쳐 보이자, 그는 자연스레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 내가 도와주마."
적어도 이 특별한 아이가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싶다고.
"그래도 되겠지, 얘야?"
"끙...."
그렇게 날이 다시 밝아 올 때가 되어서야, 기사는 잠에서 깬 아이의 손을 붙잡고 산을 내려갔고.
그 후로, 10년의 세월이 빠르게 흘러갔다.
2화. 10년 뒤
"공자님, 무노 공자님!"
"듣고 계십니까?"
산맥에 진입하기 직전, 양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듣고, 있어."
후욱.
무노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10년 전 그때의 기억을 털어 냈다.
지금은 추억이나 떠올릴 때가 아니었으니.
지끈.
- 몸을....
'닥쳐!'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따라오는 두통을 간신히 참아 내고는 장비를 점검했다.
적당히 맞춘 가죽 갑옷이 걸리적거리지는 않는지 휘둘러 보고.
모든 것은 내가 모자란 탓이니 남을 원망할 순 없었다.
그렇기에 모자라면 모자란 만큼, 그냥 만족하면서 살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 지독한 인간, 이제 그만 몸을 내놔라!
지끈.
"끙...."
머릿속의 악마.
얼마 전부터 다시 심해지기 시작한 이 끔찍한 두통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모험을 해야 했다.
그게 아무리 위험한 방법이라도 말이다.
- 그래도 반드시 극복해야겠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 고대의 전사들이 쓰던 고전적인 방식대로, 목숨을 건 전투에 몸을 던져 스스로 강체(剛體)의 비결을 깨닫는 것.
- 하지만 굳이 권하고 싶지는 않구나, 무노야.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너는....
'아버지의 말은 항상 옳아.'
아버지를 만난 지 벌써 10년. 무노는 아버지가 틀린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 너는 내 자식이다. 내 보물 같은 아들이다, 무노.
하지만 심해진 두통은 얼마 전부터는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거기다 통증과 함께 이성도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한 것인지, 점차 주변의 목소리가 의식되기 시작했다.
- 바보 입양아가 드라센 가문의 명예에 똥칠을 하고 있다.
- 어째서 영주님은 저런 괴물을....
지끈.
'바보는, 싫어. 더는.'
거기다.
- 몸을 내놔!
지끈.
"큭."
나 자신을 잃는 건 더 싫다.
이 머릿속의 악마는 반드시 쫓아내야 했다.
그렇다고 목숨을 걸겠다는 계획을 부모님께 허락받을 수도 없었다.
그러니.
'그냥 한다.'
또한....
"이번은 어디까지나 탐색 겸해서...."
병사들을 달고서는 모험을 할 수 없다.
이들은 끝까지 자신을 방해, 아니 보호하려 할 테니까.
"쫓아오지, 마."
"...예?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공자님?"
"쫓아오지, 말라고!"
무노는 다리에 힘을 실어 바닥을 박찬 뒤 그대로 앞으로 튀어 나가기 시작했다.
파바박.
"...공자님?!"
의혹이 이는 목소리는 이내, 점점 큰 고함 소리로 변해 갔다.
"안 돼!"
"공자님!!"
"쫓아!!"
파바박.
등 뒤에서 고성이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내달렸다.
그러자 점점 멀어져 가던 목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아예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무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 각성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육체는 이미 보통의 인간을 초월한 것이었으니.
병사들이 단기간에 자신을 따라잡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달린 후, 목표한 지점에 다다랐을 때부터는 발걸음 소리도 줄이며 주변을 살피는 데 감각을 집중했다.
'분명히 이 근처인데....'
출발하기 전에 확인했던 정보를 다시금 떠올리면서, 계속 정신을 집중해서 적을 탐색했다.
분명히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자신이 목숨을 걸 만한, 그러면서도 어쩌면 이겨 낼 수도 있을 만한 적이.
'어디....'
간절한 마음으로 모든 감각을 곤두세웠고, 그중에서도 가장 예민한 후각이 비린내와 노린내가 섞인 불쾌한 냄새를 포착했다.
"찾았다...."
혼잣말이 나오는 순간, 그는 방향을 틀어 숲이 아닌 멀리 드러난 산등성이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예상했던 적이 시야에 들어왔다.
"컹!?"
"캬륵!"
"크르르."
이번 토벌의 목표.
그리고 지금의 그가 목숨을 걸 만한 수준의 적들.
"컹!"
"키야아약!"
"캬악!"
개 머리에 인간형 몸체를 한 괴물인 놀(Gnoll)들의 무리가.
'간다!'
촤르륵.
각오를 다지며 대검을 치켜올리는 순간, 팔다리에 휘감겨 있던 쇠사슬들이 그대로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미, 온갖 흉기를 든 놀들의 무리는 눈앞에 가까워져 있었다.
"컹!"
"캬악!"
개중 작은 놈도 웬만한 인간 장정보다 컸고, 가장 큰 놈은 2m를 훌쩍 넘기는 데다 그 덩치만큼 커다란 도끼창(Halberd)까지 들고 있었다.
인간을 훨씬 능가하는 신체 능력을 가지고 무장한 괴물이 얼추 삼십여 마리.
인간을 진화시키는 비기, 강체술을 터득한 정식 기사라도 혼자서는 처리할 수 없을 괴물 집단을 상대로 무노는 서슴없이 몸을 내던졌다.
- 만만치 않은 무리가 적이라면, 가장 약한 놈부터 확실하게 처리해라!
"으아압!"
"캬악!"
콰직.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 무노의 대검이 가장 작은 놀의 조악한 나무 몽둥이를 부러트리며 그대로 놈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끄륵?"
단말마와 함께 작은 놀이 그대로 풀썩 쓰러지는 순간.
"크롹!"
카카카카쾅!
동시에 사방에서 덮쳐 오는 놀들의 무기는, 그의 사지에서 뻗어 나간 쇠사슬들이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움직이며 모조리 쳐 냈다.
"캬륵?"
"캭!?"
"하!"
겪어 보지 못했을 황당한 상황에 놀들이 당황하는 찰나, 무노의 대검이 다시금 횡으로 휘둘러지며 또 한 놈의 허리를 양단했다.
쩌어억.
"끄, 끄끄르르...."
그 순간.
"캬아아아!"
무리의 두목으로 보이는 엄청난 덩치의 놀이 발작하듯 고함을 지르더니, 한순간 무방비 상태가 된 그의 전방을 향해 도끼창을 벼락처럼 휘둘러 왔다.
떨어지는 방향은.
'머리 위 왼쪽, 비스듬히.'
판단이 서는 순간, 무노는 그대로 놈의 오른쪽을 향해 내던지듯 몸을 날렸다.
촤르륵.
동시에 그의 팔다리에 연결된 네 가닥 사슬이 놈의 사지를 결박했고.
뛰어들 때부터 치켜들고 있던 대검으로 놈의 심장을 찔러 갔다.
여태 몬스터 사냥에서 수도 없이 행해 온 필승의 패턴.
그런데.
"캬악!!"
검이 놈의 피부에 닿기도 전에.
촤륵.
사슬의 속박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번개처럼 움직인 놀 두목의 무릎이 그의 복부를 후려쳤다.
뻐어억.
'컥!'
정신이 번쩍 드는 충격에 지독한 두통마저 잠시 가시는 순간, 커다란 도끼날이 이미 무노의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의 몸을 튕겨 냄과 동시에 휘두른 듯한 놈의 도끼창.
그야말로 번개 같은 공격에, 쇠사슬들은 본능적으로 뭉쳐 들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동시에.
우웅.
그의 '능력'이 작용하여 도끼창의 궤도를 살짝 비틀었다.
하지만.
꽈아앙!
쿵.
"컥!"
그래 봤자 몸이 두 쪽 나는 걸 간신히 면했을 뿐, 아찔한 충격과 함께 바닥으로 처박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캬아악!"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화가 났는지, 놀 두목이 괴성을 지르며 다시 연달아 도끼창을 내려찍었다.
아직도 저릿한 통증이 채 가시지 않은 무노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발 대신 네 개의 쇠사슬로 바닥을 짚고 황급히 몸을 움직였고.
그렇게 비켜난 자리에 다시 도끼창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쾅!
"캬아악!"
또다시 목표를 놓친 놀 두목이 타오를 듯한 붉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포효하자.
"컹!"
"크르르."
사방으로 물러나 있던 다른 놀들이 무노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찔한 위기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죽는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만나길 기대하고 뛰어든 전투긴 했지만, 막상 닥치는 순간에는 손발이 더 굳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몸이 굳어 버린 그 찰나에도, 쇠사슬들은 생존 의지에 반응해 놀들의 공격을 쳐 냈다.
촤르륵.
타다당! 탕!
번뜩이는 무기들이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야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 기사는 물러서지 않는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떠오르자, 수없이 쌓아 온 그의 전투 경험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하압!"
타탕!
쩌어억.
콰득.
쇠사슬로 공격을 튕겨 내고, 연이어 대검을 휘둘러 놀들을 쓰러트렸다.
그리고.
콰아아앙!
그새 코앞까지 다가온 놀 두목의 도끼창을 가까스로 비껴 내는 순간.
촤르르륵.
네 가닥의 쇠사슬이 그대로 놈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달리, 한꺼번에 놈의 목 하나만.
다행히 놈도 이번에는 무시하지 못했다.
"캬아아악!"
쿵. 쿵.
"컥!"
더욱 붉어진 눈으로 발악하는 놀 두목이 도끼창을 휘두를 때마다, 쇠사슬과 이어진 무노의 몸은 가까스로 치명상을 피해 가면서도 산등성이의 울퉁불퉁한 바닥에 연거푸 패대기쳐졌다.
쾅. 쿵.
쿵.
'끄으윽.'
강렬한 충격과 함께 시야가 어지럽게 휙휙 돌아가는데.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이 아찔한 경험이, 왜인지 어디선가 겪어 본 것처럼 느껴졌다.
- 나도 사람답게 살고 싶었....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고.
"캬아아악!"
발악하는 놀 두목과, 일제히 몰려드는 다른 놀들의 모습이 시야를 메워 가던 그때.
다시금 아버지의 목소리가 뇌리에 떠올랐다.
- 삶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다.
- 넌 그 끔찍한 경험 속에서도 살아남은 빛나는 생명이다, 내 아들아.
-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다, 무노.
...할 수 있다.
그 순간 그는, 정신을 잃을 것 같은 통증 속에서 놓쳐 버린 대검 대신 주먹을 움켜쥐었다.
콰드드득.
동시에 쇠사슬을 움직여 놀 두목의 머리 위로 자신의 몸을 끌어당겼고.
"캬아악!"
- 몸을 내놔! 살고 싶으면!
"닥...."
슬슬 입에 거품을 물어 가는 커다란 놀의 아가리를 그대로 무릎으로 찍었다.
"...쳐!"
쾅.
그리고 자신을 노려보는 그 붉은 눈을 향해 정신없이 주먹을 뻗었다.
퍽. 퍽. 퍽.
눈앞의 놀 뿐만 아니라,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악마마저도 패죽여버리겠다는 생각으로.
"죽어!"
우드득.
"죽어!!"
주먹질을 할수록 전신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과 함께 이상하게 점차 몸에 힘이 붙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캬아아...."
하지만 놀 두목은 붉은 눈으로 연신 핏줄기를 뿜으면서도 끝내 쓰러지지 않았고, 다른 놀들까지 하나둘씩 다가오고 있었다.
더욱 강해지는 위기감 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와 낯설면서 익숙한 목소리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 무노, 너 자신을 믿어라.
- 몸을 내놓...!
"닥쳐!!!"
의지가 확고하게 성립되는 순간, 머릿속을 울리던 사이한 목소리는 단숨에 흐려져 갔고.
그 위로 익숙한 목소리들만이 자리 잡았다.
- 삶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다.
-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다, 무노.
- 나도 사람답게 살고 싶었....
'그래, 할 수 있다!'
쾅. 쾅. 쾅.
움켜쥔 주먹에 점점 더 강한 힘이 들어간다 싶더니.
몸 안에서 끓어오르는 피가 이내 머릿속까지 점령하는 느낌이 들었고, 이내 '뚝' 소리와 함께 그의 이성이 새하얗게 날아갔다.
- 쾅!!!
그리고 얼마 후.
"공자님!!?"
"저런!"
"모셔라!"
뒤따라온 기사와 병사들이 무노를 발견했을 때, 그는 전멸한 놀 떼들 가운데에서 쓰러진 커다란 놀 두목의 사체 위에 기절해 있었다.
몸이 확 자란 모습으로, 쇠사슬과 머리카락까지 '검게' 물든 채로.
3화. 쇠사슬을 찬 공자?
"흠."
상인, 릭이 상처 난 놀 가죽이나 짐승의 가죽들을 살펴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모습에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가죽 상인이 혀를 찼다.
"이곳 드라센 영지에서 이보다 좋은 가죽을 구할 수는 없을 거요."
"...그렇습니까."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릭의 말투에 가죽 상인이 다시 한번 살짝 인상을 구겼다.
"당연하지! 몬스터 웨이브 시즌도 아닌데, 양질의 가죽 구하기가 쉬운 줄 알아!?"
"흠. 혹시 내성에는 그래도 좋은 가죽이 있지 않을까요?"
"예끼, 이 사람아! 어딜 외지인이 바로 영주님 가문과 거래를 트려고 그래?"
"그래도 이런 품질이 최고라면 실망인데...."
"어허, 진짜! 사기 싫으면 관두쇼! 내 참, 대낮부터 재수 없게...."
투덜거리며 돌아서는 가죽 상인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쉰 릭은 이내 남쪽의 내성을 흘깃 바라보았다.
성이라기보단 전투용 요새에 가까운 이 작은 성의 내성.
영주 일가족과 그 가신들만 살고 있다고 알려진 곳.
그쪽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찰나, 멀지 않은 북문 쪽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었다.
"비켜! 비켜라!!"
드라센 영지의 북문을 통해 일단의 병사들이 요란스레 뛰어 들어왔다.
말이 끄는 수레 위에는 검은색의 족쇄와 쇠사슬을 찬 검은 머리 청년이 누워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는 노예와 같은 행색이었지만, 수레를 호위하는 병사들의 태도는 마치 귀중한 사람을 보호하는 듯했다.
'오호?'
릭의 눈이 빛나는 순간.
머리 위에 짐을 얹은 채 내성으로 향하던 아낙네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에구머니나!? 저 쇠사슬! 대공자님!?"
그 말에 릭의 시선이 대번에 돌아갔다.
대공자, 쇠사슬.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두 단어.
"대공자요? 노예 아닙니까?"
"아니, 무슨 헛...."
슬그머니 끼어든 목소리에 아낙네가 깜짝 놀라 한 발 물러서더니, 이내 순박한 인상의 릭을 위아래로 훑고는 혀를 찼다.
"...아, 외지인이시구만. 그럼 모를 수밖에. 저분은 이 영지의 대공자님이세요. 우리 영지민들한테도 유명하신 분이고."
"예? 쇠사슬을 찼...는데요?"
"예끼! 모르는 소리 말아요. 우리 대공자님은 저 쇠사슬로 몬스터를 사냥한단 말이지! 몬스터 토벌을 기사님들보다 자주 나가셔서 우리 영지민은 다 알아요!"
그 말에 릭의 눈이 다시 한번 빛났다.
"호오. 쇠사슬을 차고 무기로 쓰는 귀족이라니, 신기하군요.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이...."
"아. 그게, 우리 대공자님은 조금 출신이 남달라서 그럴 거예요."
"출신?"
"으음, 이건 외부인에게 말하기 좀 그런데...."
내성에서 일하는 것으로 보이는 아낙네가 말끝을 흐리자, 릭은 그녀에게 빛나는 은화를 은근슬쩍 찔러 주었다.
그러자 아낙네의 눈이 슬쩍 커졌다.
"이건 너무...."
"아, 제가 궁금한 건 못 참아서 말입니다."
더해진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아낙네는 이내 그에게 다가와 귓속말하듯 작게 속삭였다.
"사실 이건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인데, 영주님께서 10년 전에 백작님 휘하에서 사교 토벌을 나섰을 때 데려오신 거랍디다. 양자라는 거죠. 그것도 출신이 불분명한."
"...사교?"
"아 그 왜, 10년 전쯤에 사람들을 납치하고 제물을 바친다느니 했던 악마들 있잖아요."
"아, 들어 봤습니다."
"거기서 데려온 아이를 양자로 삼으신 거예요. 어디 가서 소문 퍼트리지 마슈. 공식적으로는 친척 아이를 입양한 것으로 하셨으니까. 아, 그나저나 많이 다치지 않으셨어야 하는데...."
아낙네의 시선이 걱정스러운 마음을 담아 수레의 뒤를 쫓는데.
"어라? 근데 검은색이...? 잘못 봤나?"
릭은 아낙네의 마지막 중얼거림을 한 귀로 흘리며 멍하니 수레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수레가 사라진 직후에나 조용히 헛웃음을 흘린 그의 눈빛이 다시 차갑게 물들었다.
'이상한 소문을 듣고 확인차 와 본 것뿐인데.... 정말 그 실험체가 살아 있었다고?'
접대용 미소가 사라진 자리에 나타난 음침하고 서늘한 미소.
하지만 지나간 수레의 뒷모습을 지켜보기 바쁜 대다수의 영지민들은 그런 외지인의 모습을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두두두두.
"문 열어!!"
"대공자님께서 쓰러지셨다!!"
"뭐!?"
그그그그극.
내성 문을 고함 한마디로 열어젖힌 병사들은 다급히 영주의 관저를 향해 수레를 끌었다.
드드드드득.
돌바닥이 긁히면서 나는 듣기 싫은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그렇게 정신없이 달리는 병사들의 앞을, 중갑을 입은 기사가 갑자기 막아섰다.
"호오, 무노 공자가 쓰러졌다고?"
진한 붉은색 머리칼을 가진 사나워 보이는 인상의 기사.
그에 전진하던 병사들이 억지로 수레를 멈춰 세웠다.
"일라이 경!"
"거참. 내 경고를 무시하고 나서더니 꼴 좋... 크흠. 아, 그런데 무노 공자 머리 색은 왜 이런가? 저 쇠사슬도 그렇고, 무슨 몹쓸 것이라도 묻은 거 아냐?"
그 말에 수레를 호위하던 병사들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러자 성격 급한 이들이 무슨 사고를 치기 전에, 선임 병사 롬이 먼저 한발 앞으로 나섰다.
"대공자님의 상황이 급합니다, 일라이 경. 길을 비켜 주십시오!"
"흐, 누가 보면 내가 길을 막기라도 한 줄 알겠군. 자네들이 나를 향해 온 건데 말이야."
영주 관저로 향하는 좁은 길의 중앙을 떡하니 막고 서서 하는 말이 어이가 없었지만, 병사들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놈은 행동은 양아치 같았지만 엄연한 기사였으니까.
그리고 기사라 함은 강체술을 익혀 '진화(進化)'를 한 번 이상 거친 초인이라는 뜻이었다.
준귀족이라는 신분 이전에, 무력적으로도 병사들이 상대가 될 리 없다는 것.
분한 마음에 롬이 이를 악물었다.
"상황이 급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그래, 마음 넓은 내가 이해해야지. 좋아, 지나가게."
기사 일라이는 그러면서도 속 터지는 느긋한 걸음으로 천천히 길가로 비켜섰다.
그러면서 툭 한마디를 보탰다.
"영주님께는 내가 보고할 테니, 바로 침실로 모시게나."
시간은 시간대로 지체시켜 놓고 윗사람에겐 자기가 생색을 내겠다는 소리.
하지만 마음 급한 롬과 병사들은 그저 일라이에게 고개를 숙이며 그대로 수레를 끌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수고가 무색하게.
"그냥 잠드신 겁니다."
영지의 의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가장 좋은 소식을 전했다.
* * *
- 으아아앙!
- 아기, 내 아기...!
- ...의 핏줄. 전부 죽여라. 아기만 살려서 실험체로....
- 죽지 않을 정도의 상처는 감수한다. 할 수 있는 실험은 다 하도록.
- 정신이 망가져도 상관없다.
가끔씩 떠오르는 끔찍한 기억이, 유난히 생생하게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분명히 이미 지난 일인데. 다 사라진 놈들인데.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며 주먹을 뻗으려다가.
"으음...."
신음을 내는 즉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온몸을 감싸는 포근함.
거기에 만성적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두통 역시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마지막 싸움의 기억을 떠올린 무노가 눈을 번쩍 떴다.
"흡!?"
동시에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키는데.
그 순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익숙한 형태의 방이었다.
'여긴...?'
어떤 실내 장식도 없이 딱 실용적인 물건만 갖춰져 있는 방.
가벼운 잠옷 차림으로 침대 위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자신.
"고, 공자님?"
그리고 익숙한 얼굴의 시종 하나.
"...에스나?"
"고, 공자님, 맞으신 거죠?"
주근깨 가득한 갈색 머리 소녀가 다소 겁먹은 얼굴로 조심스레 물어 오자 쓴웃음이 나왔다.
"뭔 뜬금없는 소리야, 에스나."
"다, 다행이다.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너무 오래 주무시고 계셔서...."
에스나답지 않은 이상한 반응이 마음에 걸렸지만,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얼마나?"
"예?"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냐고."
"그, 그 병사들이 모셔 오고 나서 사흘이나 흘렀어요. 마님이나 리안 공자님, 영주님도 몇 번이나 왔다 가셨어요. 다들 걱정이 너무 많으셨는데...."
그렇군.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무노의 표정은 밝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사히 '진화(進化)'를 끝내고 나니 10년간 시달렸던 두통이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사흘 만에 일어났다는데 배조차 고프지 않았고 오히려 힘이 넘쳤다.
'진화'를 통해 머릿속의 '악마'를 제거... 아니, 잡아먹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맑은 정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얼마 만인가.'
전생의 한문호 시절의 기억부터 암울했던 현생의 어린 시절 기억의 파편들까지, 너무 잘 떠오를 정도였다.
뿌드득.
끔찍한 기억에 생각이 닿는 순간 자연스레 이가 갈리는데.
그 순간 에스나가 다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그녀에게서 본 적이 없는 낯선 반응.
"아. 너한테 화낸 거 아니야, 에스나."
쓴웃음을 흘리며 무노가 바로 손을 내저었는데, 철그럭 하는 소리와 함께 팔에 채워진 사슬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흠.'
현생의 끔찍한 기억이 남겨 준 족쇄.
'이건 또 왜....'
검은색으로 변했을까?
궁금했지만, 뭐 이제 와 색깔이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악마가 남긴... 이젠 유산이라 해야 하나. 흐.'
딱 보기에는 평범한 쇠사슬이었지만, 아버지가 애검 '슬레이어'로 잘라 내려 했을 땐 고스란히 고통이 느껴졌을 정도로 그의 몸과 일체화된 이상한 금속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음을 먹는 순간, 늘어져 있던 쇠사슬들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 반응은 성에 차지 않았다.
'생각보다 쉽지 않네....'
끙.
좀 더 정신을 집중하며 애를 쓰는데, 어느 순간.
'촤르륵' 소리와 함께 솨사슬이 확 줄어들었다.
팔에 달려 있던 족쇄와 쇠사슬은 순식간에 팔목에서부터 팔꿈치까지를 감싸는 보호대로, 발목의 그것은 정강이를 보호하는 금속질 각반으로.
검은빛 윤택이 감도는 그 매끄러운 보호대들은 팔다리에 이질감없이 딱 달라붙었다.
"호오...."
그 광경은 무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만들어 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꽤나 무서워 보인 것 같았다.
"히이익!?"
우당탕탕.
"고, 고, 공자님? 저, 정말 우, 우리 공자님. 마, 맞으시죠?"
화들짝 놀라 뒷걸음치다가 주저앉은 에스나가 울상을 지으며 고함을 질렀지만, 무노는 쇠사슬이 변한 검은 보호대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정도가 한계인가.'
기왕이면 장갑이나 신발 같은 형태로 만들어서 세밀한 조정을 하고 싶었는데, 그건 아직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게 어디인가. 족쇄와 쇠사슬을 달고 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좋아.'
"공자니이임...?"
웃으면서 고개를 돌려 보니, 그제야 에스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주근깨 가득한 귀염상의 얼굴이 겁먹어 일그러져 있는 걸 보니 괜히 미안해졌다.
"나 맞아. 무노. 말 안 더듬는다고 대접이 너무한데?"
"아, 아닌데, 너, 너무 다른데.... 사슬이...."
"아, 이거? 시련을 겪으면서 성장한 것뿐이야. 알잖아? 보기엔 이래도 나도 너랑 같은 16살이라고."
"마, 말씀도 너무 잘하시고, 우리 공자님이.... 아니, 어떻게 이런...."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 에스나를 보니 한숨만 나왔다.
"그냥 아버지부터 불러 줄래?"
겁먹은 에스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더니 방을 빠져나갔다.
그러다 방문이 닫히는 즉시, 정신없이 내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당탕탕.
- 무노 공자님이...!!
"헐...."
황당한 와중에도,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청이 참 에스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많이 당황스러운 반응이었다.
'악마를 처리하고 두통이 없어졌으니, 자연스레 말도 안 더듬게 된 것뿐인데....'
그래도, 쇠사슬의 색이 변하고 사라지는 거는 좀... 놀랐으려나?
'그래도 왜 저렇게까지.'
자연스레 의문을 떠올린 그의 시선이 문득 거울을 스쳤다.
이내 무노는 다시 쇠사슬을 움직여 탁자 위에 있던 거울을 코앞으로 가져왔다.
촤르륵.
그리고 깨달았다.
에스나가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허...."
원래의 회색은 어디 갔는지, 단순히 까만 것을 넘어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듯한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
검게 변한 것은 쇠사슬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익숙하다 못해 그리운 형태의 변화이긴 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전생의 그때를 떠올리며 한동안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게 될 정도로.
"...내가 뭐 하는 건지."
자각하는 순간 헛웃음이 나와 거울을 내려놓고는 쇠사슬을 다시 회수했다.
촤르륵.
쇠사슬을 몇 미터나 뽑아냈는데도 변치 않는 팔목 보호대의 형태.
그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새로 생긴 이 능력을 활용할 여러 가지 방법이 생각났다.
'쓸 만하겠어.'
어쨌건 지금의 그는 한문호가 아닌 무노 드라센이니.
기왕 이런 황당한 세상에 환생한 이상, 힘은 강할수록 좋았다.
'아무튼 잘됐어.'
그동안 자신의 존재를, 생명을 위협하던 머릿속 악마가 사라졌다.
이제야 비로소 평범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기본이 마련된 것이다.
'미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전생의 힘들었던 삶과 현생의 유년기에 겪은 그 끔찍했던 경험들. 그 모든 것을 딛고 서서, 이제야 처음으로 긍정적인 미래를 개척할 바탕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그가 방 안에서 홀로 웃음 짓던 순간.
- 대공자님 방으로!
두두두두.
밖에서 요란한 소음과 함께 몰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중에는.
- 무노가...?
그에게 아주 익숙한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무려 4번의 진화를 거친 4성(星)의 기사, 이 드라센 남작령의 최강자이자 주인.
그리고.
'아버지.'
무노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4화. 악마포식자
쾅!
"이게 전부냐! 무노!"
꽈아아앙!
눈앞으로 쇄도하는 대검을 가까스로 피해 내는 순간, 옆쪽의 돌바닥이 터져 나갔다.
뭉툭한 철검으로 내려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파괴력.
거기다.
"이리 와라!"
"억!"
아버지가 한쪽 팔에 감긴 검은 쇠사슬을 끌어당기는 순간, 간격을 벌리던 무노의 몸은 속절없이 다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강자에게 함부로 쇠사슬 감지 말라고 했지!?"
쩌어어어엉.
맞으면 절대 경상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공격이 이어지자 쇠사슬로 겨우 막아 냈지만.
"컥!"
그대로 튕겨 나간 몸이 바닥에 나뒹굴게 되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네 가닥 다 썼잖...!"
"시끄러!"
쾅!
"아씨, 진짜!"
네 가닥의 쇠사슬은 이전에 비해 훨씬 자유롭게 움직였으며 두 배는 더 강해진 힘을 자랑했지만, 그 모두를 뭉쳐도 아버지의 팔 하나조차 봉쇄하지 못했다.
결국.
'제엔장!'
무노는 네 가닥 쇠사슬의 보조를 받아 가며, 그저 공격을 피해 다니는 데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촤자작.
길게 뻗어 나온 사슬들은 또 다른 팔다리가 되어 그의 입체적 기동을 도와줬다.
연무장의 천장과 벽, 바닥을 두 다리와 네 가닥의 쇠사슬로 미친 듯이 움직여 보지만, 아버지의 검을 간신히 피하는 것이 고작.
꽈아아앙!
"잘도!"
콰아앙!
"피하는구나!"
꽝!
"네 녀석이 거미냐!"
꽈아아앙.
아이고. 연무장 다 박살 납니다, 아버지.
"하압!"
꽝.
"컥!"
어쩌다 한 번씩 쇠사슬과 철검으로 공격을 막거나 반격해 보기도 했지만, 부딪치는 순간 쇠사슬과 함께 몸이 통째로 날아가기 일쑤였다.
간신히 쇠사슬로 벽이나 바닥을 짚고 날아가려는 몸이 받은 충격을 분산시키는데.
그것만으로도 온몸이 저릿저릿하고 혼이 빠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아버지가 방에 찾아오시던 그때.
- 아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 아버지 덕분에....
무노는 이런 감동적인 재회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현실은 전혀 달랐다.
- 멀쩡해 보이는구나. 대련 한번 하자.
방문을 열자마자 그의 전신을 아래위로 쭉 훑어본 아버지가 내뱉은 말.
그것이 이 사단의 시작이었다.
"이거 잘못 막으면 죽는다. 잘 피해라!"
"아버지!?"
꽈아아아아앙!
진화한 능력으로도 아버지를 상대하기엔 한참 모자랐다.
우르르르릉.
"아니, 진짜! 이게 뭐 하는...!"
크게 휘둘러진 검을 간신히 피해 낸 무노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몸을 종잇장 간격으로 스치듯 지나간 일격이었다.
'정말 뒈질 뻔했다.'
연무장의 한쪽 벽이 통째로 날아가고 아버지가 들고 있던 철검이 반쯤 깨지고 휘어졌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철검으로 벽을 날려 버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건지, 아찔한 상황에 간담이 다 서늘했다.
그런데.
"다행히, 마기는 느껴지지 않는구나."
아버지의 그 한마디에는 힘이 쭉 빠질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인지 대번에 이해가 갔으니까.
하지만 억울함에 다시금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거 확인하려고 이러신 겁니까!? 말로 해도 되잖아요!"
"네가 악마에게 먹힌 거라면, 말을 먼저 들어서 뭐 하겠느냐? 사람 홀리는 소리만 할 텐데."
"그런...."
혼신의 힘을 다해 피하기만 했는데, 기력이 떨어져서 손발이 덜덜 떨려 왔다.
"충분히 다른 방법도 있을 텐데요! 아 진짜!"
그 대련의 목적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억울한 건 억울한 거였다.
하지만.
"그래도 더듬거리지 않고 제대로 따지는 모습을 보니 좋구나. 무노, 내 아들. 악몽에서 벗어난 것을 축하한다."
씩 웃으며 양팔을 벌리는 갈색 머리 중년인의 모습에는 이상하게도 웃음만 나왔다.
"하. 진짜...."
결국 그는 미소을 지으며 아버지의 거친 포옹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뒤쪽에서는.
- 영주님!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울분에 찬 포효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 * *
또르륵.
부드럽게 따라지는 찻물이 따스한 향을 풍길 때.
그 향과 함께, 푸념 섞인 목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굳이 연무장을 부술 필요가 있었습니까, 영주님?"
아까 하늘이 무너질 듯 고함을 질렀던 이와 동일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차분한 목소리.
내성의 유일한 집사이자 내정관이면서 행정관이기도 한 노신사, 팔머의 말에 라이언 드라센이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아. 하. 하. 그게, 그.... 아들이 강해진 모습에, 흥이 나다 보니까 말일세. 하하."
"도련님도 한잔 받으십시오."
"감사합니다."
또르륵.
무노가 말을 더듬지 않고 또렷한 발음으로 인사하자, 팔머는 외눈 안경 속 눈을 빛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뭐, 도련님 모습을 보니 정말 잘된 일입니다만...."
첫 번째 진화, '각성'을 한 무노는 덩치까지 확 자라 있었다.
드물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각성을 하면 몸이 한 번에 크게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듣긴 했다.
그렇게 자란 무노의 키도 기사치고는 크지 않은 180cm가량이었으니, 그리 위화감이 들지도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키나 덩치보다, 또렷해진 눈빛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다만.
"하하. 그렇지? 이해해 주는 거지?"
그런 아들의 모습에 주접을 떠는 영주에게는 사나운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럼에도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수리비 때문에 저는 내년 봄까지 고기 한 점 못 먹겠군요."
"으.... 그냥 내 식비를 줄이게. 그게 예산에 제일...!"
"폭식의 강체술을 익히신 분의 식사를 줄이라? 영지 최대 전력의 힘이 줄어들면 이제 곧 다가올 몬스터 웨이브에 영지민이 몇이나 더 죽어 나갈까요?"
또르륵.
또박또박 따지면서도 팔머는 금세 비워진 라이언의 찻잔에 정확하게 차를 따랐다.
"...미안하네."
영주이자 영지 최강의 기사.
4번의 진화를 마친, 4성의 강체술사는 두 손을 들며 항복을 표했다.
하지만 팔머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런데 혹시 도련님도 폭식의 강체술을...?"
"아니,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진화인자(進化因子)에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저는 가문의 강체술을 정확히 운용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렇군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리 말하면서도 안도하듯 가슴을 쓸어내리는 팔머.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기에 무노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다만.
"머리가 좋아지는 쪽의 진화를 하신 거라면, 혹시 제 일을 도와주실 수...."
이어진 팔머의 말에는 정색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절대, 절대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냥 '부작용'을 치료한 정도라서."
"그렇습니까."
한숨을 푹 내쉬는 팔머의 표정을 보니 괜스레 미안하긴 했지만, 어렵게 각성한 마당에 업무에 시달리게 되어선 곤란했다.
다행히 아버지도 그를 거들어 주었다.
"무노가 강해진 만큼 이번 겨울의 토벌은 더욱 쉬워질 걸세. 그럼 전리품도 많아지겠지. 그게 더 좋지 않나?"
"하긴 그렇습니다만...."
못내 아쉬운 듯 눈길을 던지는 팔머. 그를 보며 무노가 조심스레 말을 잘랐다.
"저, 팔머 집사님. 아버지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좀...."
"아, 예. 알겠습니다. 기왕이면 제 후임에 관한 대화였으면 좋겠습니다만."
"...아니, 그건 아닙니다."
"저런, 안타깝군요."
팔머는 농담을 하며 물러섰지만, 무노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드라센 영지에 몇 안 되는, 예전의 자신에게도 편견 없이 잘 대해 준 사람.
하지만 그런 팔머를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할 얘기는 아버지하고만 나누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건,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얘기였으니.
"그 악마에 대해서냐?"
후르릅.
팔머가 방을 나선 직후, 차를 마시던 아버지 라이언이 짐작한 듯 먼저 말을 꺼냈다.
"예, 비슷합니다."
다른 이가 듣는 앞에서는 '부작용'이라며 얼버무렸던 문제.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이미 다 털어놓았던 얘기였다.
- 머릿속에 악마가 있다느니, 그런 말은 절대 하지 말거라. 특히 그 사슬에 대해서 누가 묻는다면 그냥 모른다고만 해.
과거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 무노는 쓴웃음을 지으며 운을 떼었다.
"아버지께서 주신 폭식의 진화인자 덕분에, 저를 잡아먹으려던 악마를 제가 역으로 잡아먹었습니다."
"푸흡!"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그 말에 아버지의 입에서 찻물이 뿜어져 나왔다.
쿨럭. 쿨럭.
"잡아먹었다고? 악마를? 막아 낸 게 아니라?"
사레가 들린 듯 연거푸 기침을 토해 낸 아버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무노가 어리둥절했다.
"...예."
"어떻게?"
"어떻게라뇨? 아버지께서 강체술의 진화는 육체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폭식의 진화인자와 제 능력을 결합, 극대화해서 그냥 집어삼켰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아버지의 표정이 이상해지는 것을 보며 말끝을 흐리는데.
아버지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내가 그리 얘기한 것은, 뇌를 진화시키면 정신력과 육체 장악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면 악마가 포기하고 떠날 줄 알았던 건데...."
"예?"
"...사슬이 몸에 연결됐다 느꼈을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나. 하지만, 어떻게 이런...."
아버지가 멍하니 중얼거리는 말에 무노도 덩달아 멍해졌다.
"헐...."
"...대체 어떻게 한 거냐?"
"하. 그게, 저도 잘...."
당혹스러운 마음에 자연스레 진화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저 살기 위해, 악마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온몸과 마음을 집중해서 발악했던 그때를.
- 나는 사슬의 악마, '&%@#'. 속박하고 억압하는 자.
속박, 억압.
10년 전 그날부터, 한문호와 무노의 두 인생에 걸친 트라우마를 자극해 오던 악마.
- 웃기지 마라! 내가 널 속박하고 억압해 주마. 아니, 아예... 잡아먹어 주마!!!
- 어떻게...!? 아, 안 돼...!
- 돼!!!
콰드득.
그래, 기억나는 건 그 정도가 전부였다.
"그 과정은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악마가 금속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아시다시피 제 능력이...."
"금속을 조종하는 능력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이렇게 되나? 차라리 그 특이한 이능력을 가진 네 혈통에 뭐가 있다고 보는 게...."
혈통.
아버지의 그 말에, 무노는 반사적으로 유아기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 땅에 환생했다는 걸 깨달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때.
처음으로 '부모'라는 사람들의 온정을 온몸으로 느끼던 그때.
갑자기 들이닥친 재앙을.
- 으아아앙!
- 아기, 내 아기...!
- ...의 핏줄. 전부 죽여라. 아기만 살려서 실험체로....
까드득.
"...왜 그러냐?"
"아, 아닙니다. 그놈들에게 납치되었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뭐?!"
"아, 아니 명확히 다 기억나는 건 아닙니다. 거기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것들이 대부분 안 좋은 기억이라서...."
사실이었다. 대략 15~6년 전으로 추정되는 그의 오래전 기억은 드문드문 끊겨 있었으니.
게다가 그놈들에게 납치된 후의 기억 중에는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 죽지 않을 정도의 상처는 감수한다. 할 수 있는 실험은 다 하도록.
- 정신이 망가져도 상관없다.
지독한 고통, 낭자한 피.
그 흐릿한 장면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속 분노가 들끓어 오르는 듯했다.
확실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 고통과 분노에 관련된 기억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그놈들이....
지끈.
"으...."
다시금 찾아온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 쥐는데.
"그만! 애써 생각할 필요 없다, 무노."
어느샌가 아버지가 어깨를 잡아 흔드는 것을 인식하고 나서야, 무노는 자신의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흐, 후우. 흐...."
"됐다. 애써 떠올리려 하지 마라. 어차피 그놈들은 다 처리했으니, 괜히 좋지 않은 과거에 집착할 이유는 없어."
후우우.
"...예."
한숨과 함께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문득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말과 자신의 경험 사이에서 무언가 괴리가 느껴진다고 할까.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지끈.
"으음...."
괜히 생각하려 하니 다시 두통만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그가 머리를 감싸 쥐자 아버지가 바로 화제를 바꿨다.
"아무튼 네 말이 맞다면, 네 진화는 강체술의 한계를 뛰어넘은 게 틀림없다. 하지만.... 하필 그 능력이 악마포식자(惡魔捕食者)라니, 이건 철저히 숨겨야겠구나."
그리고 그 화제 역시 절대 가벼이 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무노의 머릿속에 악마가 있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으니.
"아.... 마법사들 때문이겠죠?"
"그래."
마법사(魔法師).
악마의 힘을 빌려 기적을 행사하는 이능력자들.
정령의 탑의 정령사들이나 신전의 성기사와 사제들을 제치고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집단을 이루고 있는 권력자들을 말함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악마를 외신(外神)이라 칭하며 숭배하는 이들이다. 너를 납치하고 우리 왕국에서 큰 분란을 일으켰던 그놈들 역시 마법사지만, 마도 제국에서는 쫓겨난 사이비 취급을 받았을 뿐이다."
그의 원수들이기도 했다.
"명심하거라. 이 순간 이후, 그 누구에게도 그 능력에 대해 말하지 말거라. 알겠느냐?"
아버지는 결연한 표정으로 당부했고.
"...예."
다시 들끓기 시작한 분노를 삼키느라, 무노의 대답은 조금 느리게 나왔다.
5화. 일라이 (1)
- 정령의 탑이나 신전에서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호의적으로 나와 준다면 좋겠지만.... 널 이용하려 할 수도 있어. 절대, 절대 숨겨야 한다.
- 언제까지....
- 적어도 네가 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제국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를 때까지는.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화나네."
탁.
그 생각에 자연스레 걸음이 멈춰졌다.
몸 안의 우환을 제거하고 나니, 이번엔 외부에 걱정거리가 생겼다.
물론 전생의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역시나 이 세상도 쉽게 꿀 빨며 살아가기에는 글러 버린 듯했다.
진짜 인생....
'죽기 싫어서라도 죽어라 노력해야겠네.'
이놈의 팔자는 전생이나 현생에나 사납긴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내 인생은 진짜 왜 이러냐...."
하지만 그래도 현생에 좋은 것은 있었다.
-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아버지?
- 뭐가 말이냐?
- 머리가 좋아진다고 없던 지혜가 생기는 것은 아닐 텐데, 제가 갑자기 말을 너무 잘하는 거 말입니다.
- 음? 그게 뭐 어때서 그러느냐? 넌 원래 똑똑했어. 말이 어눌했을 뿐이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헛소리를 신경 쓰고 있었더냐?
자신의 말에 오히려 고개를 갸웃하던 아버지를 떠올리면 미소가 나왔다.
그의 양부는 그런 사람이었다.
항상 자신을 믿고 아껴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니까....'
모두가 버리고 가거나 죽이려 했던, 출신도 모르는 수상한 꼬마를 자신의 아들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 네 어머니와 리안에게도 변한 모습 보여 주거라. 좋아할 거다.
새삼....
'...감사합니다, 아버지.'
울컥한 마음에 눈물을 참느라 하려던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돌아 나왔지만.
그 기억만으로도, 아무리 험난한 세상이라도 힘내서 헤쳐 나갈 자신이 생기는 듯했다.
'그래, 힘내자.'
아무리 막막해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며 살았다는 게 한문호 인생의 유일한 자랑이었다.
- 고아 새끼가....
- 저거 언제 범죄 저지를지 몰라.
- 독한 것 좀 봐라. 눈빛 한 번....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이 많을수록, 언제나 고개 쳐들고 떳떳하게 살려고 노력했었다.
어쩌면 불행한 삶을 타고난 탓에 괜한 오기가 발동했던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저 알량한 자존심에 불과할지도 몰랐지만.
현생이라고 해도 그 결심은 달라지지 않는다.
적어도 전생보다는 지금의 환경이 훨씬 낫다.
'나도 사람답게 살아 보는 거야. 나를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난, 할 수 있다."
한문호가 항상 되뇌던 주문을 다시 한번 외워 본다.
'그러자면 이제부터는....'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짜증 나는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무노 공자. 진짜 확 변하긴 했군요. 머리 색도 그렇고, 그 꼴 보기 싫은 쇠사슬도 안 보이고.... 그런데 그거 영주님도 못 떼 내는 거 아니었나?"
어느새 눈앞에는 사나운 인상의 붉은 머리 기사가 다가와 있었는데.
그를 보자 자연스레 인상이 찌푸려졌다.
"...일라이."
"일라이? 경이라는 호칭은 까먹으신 모양이군요, 무노 공자."
싸가지 밥 말아 먹은 시비조에 무노의 얼굴에도 썩은 미소가 걸렸다.
"보는 사람 없다고 주군의 아들에게 반말 찍찍 내뱉는 놈한테 기사 자격이 있긴 한가?"
그 말에 웃으며 다가오던 일라이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의외라는 생각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놈.
"말이... 호오. 설마 머리가 좋아지는 진화라도 한 건가? 푸흐흐. 흠, 그런데 뭔가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무노 공자."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 일라이가 이내 썩은 미소를 보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난 엘리나 마님을 모시는 트리안 백작가의 기사이지, 드라센 남작가의 기사가 아니라는 것을요."
흥.
"그 말, 아버지께 그대로 전해 줄까? 사고 쳐서 쫓겨 온 기사가 충성심도 없는 것 같다고?"
허세를 그대로 비웃어 주자 삐죽이 웃던 놈의 표정이 완연하게 굳었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어 보인 일라이는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정말 머리가 좋아지는 쪽으로 진화한 것 같군요. 허 참, 그 똥멍청이가...."
길을 막고 대놓고 시비를 거는 놈.
신분만 기사일 뿐이지....
'양아치지, 이놈은.'
이놈이 왜 이렇게 자신에게 적대적인지는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그 똥멍청이에게 당해서 바닥을 구르던 기사도 있었지. 대체 그놈은 어느 정도 X신인 걸까?"
그 말에 일라이의 얼굴이 한순간에 머리 색깔만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감히!"
2성의 기사가 면전에서 자욱한 살기를 뿜어냈지만, 무노의 썩은 미소는 진해지기만 했다.
"감히?"
일라이는 3년 전쯤 드라센 영지로 파견을 왔다.
트리안 백작가에서 사고를 쳤었다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당시 기분이 최악이던 일라이는 이곳저곳에서 분란을 일으켰고.
끝내 무노에게까지 시비를 걸다가 비참하게 털렸다.
그의 금속 조종 능력과 쇠사슬은 정석적인 결투만 해 온 젊은 기사에게 그야말로 상극이었으니까.
그 일에 자극받아 2성에 도달한 걸 보면, 오히려 무노를 은인으로 여길 만도 한데.
이놈은 그때의 망신을 잊지 않은 듯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더는 트러블을 일으키지 말라는 아버지의 지시에 아둔하게 따르던 무노가 웬만한 상황을 다 먼저 피해 줬는데도, 끝없이 시비를 걸었었으니까.
바로 지금처럼.
"어디서 굴러먹다 온 지 모를 천출 양자 새끼 따위가 순혈의 귀족한테 시비를 걸어? 정말 죽고 싶은 거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누가 들을세라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소곤거리는 주제에.
"야."
무노는 곧바로 놈의 목을 붙잡고 눈을 노려봤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는지, 놈의 당황하는 표정이 보이는데.
무노는 그 얼굴을 보며 싸늘히 미소 지었다.
"내가 언제까지 네놈의 짓거리를 봐주리라 생각하는 거냐?"
"뭐?"
"이번까지만 봐준다. 주둥아리 단속 잘해라. 다음은 없어."
"이익...!"
그 말에 이를 악문 일라이의 얼굴이 더욱 붉게 달아오르는데도, 조금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진짜 손을 쓸 리 없었으니까.
물론 덤벼 온다 해도.
'지금 내가 당할 리도 없고.'
다만.
'아...?'
녀석을 보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예전의 무노는 그냥 무턱대고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시비를 피했을 뿐이었고, 일라이의 생각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아니었다.
명백히 이상한 부분이 있었으니까.
"네놈이 계속 이러는 거 어머니도 알고 계시냐?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 말에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던 일라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머니한테 알려 볼까? 네놈이 당신의 이름으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네놈...!"
"입조심하라고 했다, 일라이."
싸늘하게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려던 놈의 고함을 틀어막았다.
멈칫하는 놈의 모습을 보며 무노는 차갑게 웃었다.
"아무리 억하심정이 있더라도, 아무리 원래의 주군이 있더라도, 제대로 생각을 할 줄 아는 기사라면 감히 영주의 아들에게 시비를 걸지는 못하지...."
더구나 순수한 드라센 영지 출신의 기사가 아니라면, 영지에 자리 잡기 위해 더욱 트러블을 피하려고 노력해야 할 터인데.
"나는 왠지 네가 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아셔도 무마할 수 있는 배경이 있어서 이러는 것 같은데 말이야."
말이 이어짐에 따라, 붉어졌던 놈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 갔다.
"그럼 역시 트리안 백작가? 백작가의 누가 날 쳐 내라고 하더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놈의 태도가 충분한 답이 됐다.
"왜지? 어차피 난 양자인데? 드라센의 적통인 데다 트리안 백작가의 핏줄까지 이어받은 리안이 다음 대 영주가 되는 건 이미 결정된 수순이다. 어눌했던 나는 후계에 관심도 없었고. 그런데 왜 날 건드리지?"
흔들리는 눈동자와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이 이번에도 대신 대답을 해 주는 듯했다.
"하.... 모르네. 모르는구나, 네놈. 개털이 입만 털고 있었네. 짜증 나게. 너 진짜 X신이냐?"
"네놈이...!"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다만.... 네가 날 쳐 낼 수 있다 쳐. 그럼 넌 무사할 거 같아?"
"나는 그저 내 명예를 지키...."
"명예는 지랄. 진짜 똥멍청이 새끼가 제 무덤을 파고 있었네. 상대할 가치도 없다. 꺼져라."
뺨을 툭툭 치고 쿨하게 돌아서자, 등 뒤에서 놈이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솟구치는 살기.
하지만 그때, 돌아선 무노의 얼굴에도 살기 어린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래, 덤벼라.'
그의 팔다리의 보호대가 아무도 모르게 살짝 꿈틀거리기 시작하는데.
까드득.
"두고 봅시다, 무노 공자."
결국, 낚시는 실패했다.
'쯧.'
슬쩍 돌아본 곳에는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일라이의 뒷모습만이 보였다.
"흠...."
미끼를 박살 내면 낚시꾼이 손이라도 집어넣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다음을 기약해야 할 듯싶었다.
* * *
똑, 똑.
"어머니, 무노입니다."
- 들어와.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끼이익 문을 열었다.
그러자 너른 방 안에 보이는 것은, 새파란 물결이 치는 듯한 푸르고 긴 머리의 귀부인과 그새 방문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환한 미소의 소년이었다.
"형니...이임?"
자신을 향해 뛰어오던 소년, 리안이 일순간 주춤하더니 삽시간에 눈이 가늘어졌다.
"뭐냐, 네놈?!"
챙.
순식간에 허리춤에서 작은 검을 꺼내 겨누는 기세가 제법 살벌하니.
도무지 조금 전까지 활짝 웃던 그 소년 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자신에게 달려오던 리안이 순수한 아이 같았다면, 지금은 작지만 완연한 전사의 모습.
전생의 사회였다면 사이코패스나 이중인격으로 의심받을 만한 급격한 태세 전환이었지만, 이곳의 귀족 아이로서는 아주 잘 교육받은 모습이라.
무노는 피식 웃었다.
"나 맞다, 리안. 내가 좀 변했다는 말 못 들었니? 나 기절했을 때 안 왔었어?"
"어, 어? 가긴 갔었는데. 아...?"
리안 드라센.
이 드라센 영지의 정당한 후계자이자 무노의 동생인 그는 슬쩍 뒷걸음질을 치다가.
"정말 형님?"
어정쩡하게 칼을 집어넣지도 못하고 휘두르지도 못한 채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누워 있던 모습을 한번 봤다곤 해도, 키가 확 크고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전부 바뀌었으니 여전히 어색하고 낯설기만 할 테니까.
그래서.
촤륵.
"엇!?"
가볍게 뽑아낸 쇠사슬로 동생의 검을 잡아들고는 다시 허리춤에 꽂아 넣어 준 무노는.
"그래. 나 이제 말 더듬지 않지?"
당황하는 동생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준 뒤, 뒤편의 중년 부인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어머니."
그에 흔들리던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서른 즈음으로 보이는 귀부인이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말, 정말 무노니?"
"예, 어머니."
그녀를 바라보는 무노의 눈빛은 따스하기만 했다.
엘리나 트리안.
에녹 트리안 백작이 가장 신뢰하는 기사에게 시집보낸 그의 셋째 딸이자, 이 영지의 안주인.
열 살 넘게 차이나는 남녀가 정략혼으로 맺어진 거였지만, 엘리나와 라이언 부부의 사이는 좋기만 했다.
그리고.
- 괜찮아요, 여보. 리안에게도 형제가 있었으면 했는데요. 동생이 아니라 형이 생긴 건 좀 의외지만. 호호. 무노, 엄마라고 불러 줘.
- 고마워, 무노. 말 잘 듣는 큰아들 덕에, 리안이 크는 것도 기대가 되네.
- 동생 잘 보살펴 줘야 해? 알았지?
무노에게 그녀는 가족의 따스함을 알려 준 또 한 사람이기도 했다.
"말을 더듬지도 않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무노와 보호대를 툭툭 건드려 보더니.
"그 보호대. 하, 족쇄와 쇠사슬보다는 훨씬 보기 좋구나. 잘됐어. 잘됐구나, 우리 아들."
이내 빙그레 웃으며 그를 꼭 안아 주는 '어머니'.
전생에서는 기억에도 없었고 현생에서는 유아기에 안타깝게 떠나보낸 친모의 온기를 모두 보상해 주는 따스함이 이곳에 있었다.
"...감, 사합니다. 어머니."
새삼 콧날이 시큰해지는데.
"이제 성인이라고, 엄마라고도 안 하는 거니? 좀 서운한데."
"이제 어른이니까요."
현생의 나이 고작 열여섯(아마도).
여전히 키도 덩치도 더 클 시기지만, 이 레이안 대륙의 기준으로 열여섯은 성년 되는 나이였다.
그리고 두통에서 벗어나 온전히 맑은 정신을 되찾은 무노에게는 그 사실이 오히려 기꺼웠다.
하지만.
"오, 그럼 이제 거슬리는 족쇄도 없앴겠다. 우리 아들 사교계 데뷔해도 되겠네?"
이런 전개는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
"예?"
"어차피 성년식 파티도 해야 하고. 네 아버지가 일찍 결혼 못 해서 한이 맺힌 사람이잖니. 뭐, 나 만나고 차라리 잘됐다고 하긴 했지만."
"...예?"
"아들들은 빨리 장가보내고 싶어 했는데, 이제 걸림돌이 없어졌어. 참 잘됐다."
"어...?"
"아니다, 이참에 그이한테 빨리 준비하라고 해야겠다."
"저기, 어머니...?"
여전히 과분한 애정을 베푸는 어머니였지만.
지금은 조금 당혹스럽기만 했다.
6화. 일라이 (2)
[성년식 파티 얘기는 들었겠지, 일라이 경.]
"...예."
통신구 속 흐릿한 얼굴이 내뱉는 말에 대답하는 일라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애초에 자네가 뿌린 똥물이야. 닦아 내야지?]
"알고 있습니다."
[안다. 알고 있다라.... 정말? 알면 그러고 있을 리가 없는데?]
"...."
비꼬는 듯한 말에도 일라이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무노의 이름이 주변 영지에까지 퍼지게 된 건 바로 각성하기도 전에 자신과의 대련에서 이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각하께서 놈을 주목하고 계시다.]
이어진 말에는 그도 침착할 수가 없었다.
"예!?"
[예는 무슨! 불과 열여섯에 각성한 인재를 각하께서 그냥 두고 볼 것 같으냐!? 덕분에 열 살 때 네놈을 이긴 사실까지 이제 트리안에 알려졌다!]
그땐 열 살이 아니라 열세 살....
초라한 변명을 차마 내뱉지도 못하고 있던 그때, 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이젠 일이 더 커졌다. 각하께서 대공녀께 하잘것없는 남작가의 파티에 참석하라 명하셨단 말이다!]
"예!? 그겐 무슨...!?"
[성년식 파티도 하기 전에 각성한 인재니까! 더구나 드라센 남작은 각하께서 아끼시는 인물이다. 영지의 최북방을...!]
머릿속이 하얘진 일라이에겐, 이어진 말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대공녀. 트리안 백작의 첫 번째 손녀이자 트리안 영지에 속한 모든 젊은 기사들의 선망의 대상.
그가 이 험한 드라센 남작령으로 쫓기듯 파견 온 것도 그 대공녀에게 '연서'를 전했다는 '실수' 때문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는 당시의 소녀를 아직 잊지 못했다.
15살에 이미 미모가 만개했던 그 소녀를.
'성년이 되기 1년 전이었다고, 겨우!'
우드득.
그 사건을 아는 자들은 자신을 혐오스러운 변태 취급했지만, 그는 억울하기만 했다.
결국 그 소녀는 백작령 전체 기사들의 로망이 되지 않았는가.
- 그나마 편지로 그친 것이 네 목숨을 살렸다. 재능이 있어 보여 아꼈더니....
-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라. 추악한 놈.
- 드라센 영지로 가라. 그리고 다신 기어 나오지 마라.
- 하지만 만약 이 일과 관련해서 헛소문이라도 퍼지면, 네놈은.... 더 말 안 해도 알겠지?
본래 그의 주군이었던 대공자의 말.
60대의 나이에도 정정한 백작 때문에 마흔이 넘어서도 여전히 대공자의 호칭을 달고 있던 주군은, 자신의 실수에 극도로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죄를 지으려 한 게 아니었는데.'
차기 트리안 백작이 될 주군의 차가운 눈초리가 다시금 떠오르며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언제고 다시 돌아가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증명하고 싶었는데.
'트리안의 꽃을 내가 먼저 알아본 것일 뿐이라고....'
그런데 그런 공녀가 고작 이런 시골구석, 똥멍청이 무노의 성인식 파티에 온다고?
그 의미를 알기에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더불어 얼마 전 번들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건방진 그 자식의 눈동자가 떠오르며 그 분노를 부채질하는 듯했다.
"그놈은 그냥 머리가 좋아지는 진화를 한 병...."
[시끄럽다!]
"아니, 전...."
[내가 라이언 드라센의 이름에 똥칠할 사건을 만들라고 했지! 그랬더니 네가 그 말도 제대로 못 한다는 양자 놈을 얘기했었고!]
"...예."
[그런데 그거 하나 못 해서 일을 이렇게 만들어!? 바보 어린애 하나 X신을 만들거나 추문을 퍼트리는 게 그렇게 어려웠나?! 네놈이 2성급 기사가 맞기는 해!?]
화가 났다.
내가 왜 이딴 소리를 들어야 하지?
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 어린놈한테 패배했던 것은 엄연히 니까.
더구나 지금은.
"드라센 남작이 놈을 싸고도는 터라...."
명분을 만들려 해도, 놈이 시비를 받아 주지 않았다.
그 현실적인 사정을 말하려 하는데.
[시끄러!! 네놈의 무능을 포장하지 말란 말이다! 결과로 말해!]
통신구 속 상대는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각하께서 이번에야말로 중앙에 진출하실 생각이란 말이다. 그러면 결국 대공자께서 실질적으로 영지의 모든 것을 이어받으실 것이다. 그때 그 오른편에 설 자는 내가 되어야 해. 쓸데없이 힘만 센 드라센 남작 따위가 아니라!]
"...처리, 처리하겠습니다."
[어떻게?]
"예?"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말이냐?]
추궁이 이어지자 일라이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일단 어떻게든 시비를 걸어서 결투를 하겠습니다. 팔 하나라도 잘라 내면...."
긴장한 탓에 아무 말이나 뱉어 놓고 보니, 너무 억지라는 생각이 뒤늦게 드는데.
상대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고작?]
'고작...이라니?'
일라이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무슨 뜻이지?
[생각을 그것밖에 못 하나?! 이 머저리 같으니!!]
치욕적인 추궁에도 일라이가 할 수 있는 말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입술을 꽉 깨문 그가 억지로 고개를 숙이는데.
상상도 못 할 말이 이어졌다.
[놈을 내게 데려와라. 병신이 되어도 좋으니, 목숨만 붙여서 데려와! 강제로라도.]
"예!?"
자신도 모르게 눈이 부릅떠졌다.
적대국이나 적대 영지의 인물도 아니고, 같은 트리안 백작령 산하 다른 영주의 아들을?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면, 여태까지 자신은 괜한 시비를 만든 셈이다.
설령 무노를 정말 납치할 수 있다고 해도, 놈이 갑자기 사라지면 의심을 받을 사람은 자신뿐일 테니까.
"갑자기, 왜...?"
하지만 상대방은 자신의 의문을 풀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상황이 달라졌다. 어떻게든 데려와. 목숨만 붙어 있다면 어떤 상태라도 괜찮다. 알겠지?]
오히려 더욱 말도 안 되는 소리만 늘어놓는데.
그 순간 일라이는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미친 소리! 내가 똥물을 다 뒤집어쓰게 될 거고, 더욱이 라이언 드라센 남작이라면 대륙 끝까지 날 쫓아올 거야.'
그 '폭식의 기사'가 광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쫓는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말도 안 됩니다! 그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2성의 기사가, 막 각성한, 그것도 네 말대로라면 두뇌 개발 쪽으로 추정되는 진화를 한 놈을 어쩌지 못한다는 거냐?]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대체 왜 갑자기...!"
[흥. 넌 내게 맹세를 했다. 그때를 기억하겠지?]
그 말에 일라이는, 트리안에서 쫓겨나던 날 은밀히 찾아온 그가 구원해 주겠다는 말과 함께 내민 약속을 떠올렸다.
또 그것을 믿고 충성의 맹세를 하던 순간도.
"하지만...."
이건 너무 무리한 일이다.
그렇게 애써 거부하려 했는데.
[그 맹세를 지킬 때다, 일라이 베논. 무노 드라센을 내게 데려와라.]
그 목소리가 수정구를 넘어 묘한 파동을 싣고 울려 퍼지는 순간, 일라이는 머릿속이 멍해지고 눈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나, 나한테 무슨, 짓을...."
안개가 낀 듯 머릿속을 흐릿하게 만드는 그 기운을 2성에 이른 기사의 정신력으로 극복해 보려던 순간.
[무노 그놈이 트리안의 꽃을 얻게 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건가, 일라이?]
'대공녀.... 대공녀가 무노와?'
가슴 한편에 담아 두었던 아리따운 소녀의 얼굴이 떠오르더니, 억지로 눌러 왔던 가슴속 분노에 불이 붙으며 급격히 이성이 흐려져 갔다.
결국.
"...무노 드라센을...."
[내게 데려와라. 가능한 한 빨리.]
"...데려가겠습니다."
멍해진 눈의 일라이가 명령을 받아들이는 순간, 통신구 속 상대가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사용할 놈은 아니었는데. 쯧쯧.... 나를 원망 말거라.]
통신구 속에서 피어오른 붉은 연기 같은 기운이 그대로 일라이의 코 속으로 스며들었고.
[네놈이 애초에 그놈이 10년 전 토벌에서 데려온 실험체라는 것을 말해 주기만 했어도, 진작에 내가 처리했을 것이다.]
그 말이 이어진 순간에는 붉은 연기가 더욱 진해지며 통신구의 표면에 쩌저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드라센의 하녀조차 아는 정보를 여태 내게 알리지 않은 죄. 제대로 속죄하도록.]
일라이의 이성이 멀쩡했다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어찌 말하냐 반발했겠지만.
그는 이번에도 붉은 두 눈을 멍하게 뜬 채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서는 일라이의 뒤쪽에서.
그가 드라센에 몰래 숨겨 온 주먹만 한 통신구가 그대로 파스슥 부서져 내렸다.
* * *
촤르륵.
허공을 꿈틀거리는 검은 쇠사슬은 거의 생각과 동시에 움직였다.
파아아아앙!
휘두르는 대검이 쇠사슬의 움직임을 못 따라갈 정도였는데.
무노는 구슬땀을 흘리며 쇠사슬의 속도에 검의 속도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 좋은 수련 지표가 되겠구나.
- 네 검도 쇠사슬처럼 의지에 따라 곧바로 움직일 때까지, 끝없이 노력해라.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내주셨던 숙제는 각성하면서 조금 더 어려워진 것 같았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쇠사슬의 움직임은 더욱 빠르고 자유로워졌고 심지어 길이마저도 두 배 이상 늘어났지만, 그만큼 그의 육체 능력 또한 비슷하게 상승했으니까.
'그저 아직 내 정신이 강해진 육체에 익숙해지지 않은 것뿐이야.'
그러니까, 더 열심히.
쾅!
촤르륵.
왼발에 육중한 무게를 실어 한 걸음 내딛자, 발목의 쇠사슬이 가상의 적 하체를 후려갈겼고.
반대편 손에 들고 있던 검은 쇠사슬은 그 반동을 이어받아 오른쪽에서부터 적의 몸통을 갈라 갔다.
파아아아앙!
뒤이어 작은 여자 키만 한 수련용 대검이 휘둘러지며 공기를 터트렸고.
팔다리에 달린 채 움직이는 쇠사슬들과 합을 맞추며, 사방에 존재하는 가상의 적들을 사정없이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방.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무노는 팔다리의 쇠사슬을 다시 보호대로 변화시킨 상태로 대검만 휘두르기 시작했다.
- 예전에는 숨길 수 없었지만, 지금은 가능하지 않느냐?
- 너에 대해 모르는 적과 상대할 때는, 쇠사슬을 숨겼다가 비장의 한 수로 사용하는 것이 더 효과가 좋을 것이다.
쇠사슬을 안 쓴다 해도 전투력이 크게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파아아아앙.
팔목과 정강이 보호대로 변한 쇠사슬은 여전히 잘 제련된 강철 이상의 강도를 자랑하며 적의 공격을 막아 내 줄 것이니.
무노는 그때부터, 팔다리의 보호대로 적의 공격을 흘려 내거나 막아 내며 검을 휘두르는 수련을 이어 갔다.
'이것도 꽤 괜찮겠는데?'
평범한 강철 갑옷이라면 화살은 막을지 몰라도, 거대 몬스터나 강체술사의 강력한 둔기 타격을 맞기라도 하면 오히려 뼈와 살이 같이 으스러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하박과 정강이에 딱 붙어 있는 보호대는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쇠사슬이 변형된 것이었으니.
그 착용감부터가 여느 갑옷과는 다르게 부드럽기만 했다.
금속이면서도 금속 같지 않은 느낌.
우웅.
의지에 따라 곧바로 튀어나오는 10m 길이의 쇠사슬.
그만한 금속이 작은 면적에 압축된 보호대인 만큼, 웬만한 충격은 표면을 진동시키는 것으로 흩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쓸 만해.'
파아아아앙!
팡.
쾅!
새로 생긴 무기를 테스트하며 정신없이 검을 움직이니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래, 이거지.'
성년식 파티를 연다느니 초대된 영애들 가운데에서 약혼자를 골라야 한다느니, 갑자기 벌어진 생각지도 못한 일들에 받아 왔던 부담감이 점점 흐려져 갔다.
주변에서도 워낙 소란을 떠는 바람에, 예법 연습이나 파티 준비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결국 이 밤중에나 수련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역시, 사람은 몸을 움직여야 돼.'
머리가 맑아지며 전생과 현생 사이에서 느꼈던 괴리감도 조금은 덜해지는 같았고.
현생의 유년기에 겪은 끔찍한 경험, 아직 완전하게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대한 답답함도 해소되어 가는 듯했다.
"합!"
쿵.
파아아앙.
점점 정신을 집중해 가던 무노는 이내 그 미련한 잡념마저도 털어 내 버린 채, 휘두르는 검에 온전히 빠져들었다.
어느덧 이 드라센 대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지 10년.
하지만 몸에 거추장스러운 쇠사슬을 달지 않고 순수하게 검만 휘둘러보는 것은 그로서도 처음인 것이다.
- 재밌다.
자연스레 무노의 얼굴에 미소가 걸릴 때.
갑자기 머릿속으로 벼락같은 영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한순간의 일이었다.
쿵.
쩌저저적.
이제까지 중 가장 큰 힘을 담은 진각에 연무장의 바닥에 금이 퍼져 나가고.
후읍.
급격히 체온이 올라가며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더니, 이내 그 끓어오르는 에너지가 한곳으로 몰렸다.
우드드드득.
등 뒤로 넘긴 두 손으로 대검을 꽉 부여잡은 그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며, 온몸의 근육과 뼈가 쥐어짜듯이 고통스러운 소음을 만들어 냈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열량이 일시에 소모되며 그 힘이 온전히 전방으로 풀려나왔다.
번쩍.
스각.
은빛 검날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날카로운 소음만을 내며 번개같이 허공을 양단했다.
그리고 그 직후.
콰아아아앙!
공기가 터져 나가는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거친 바람이 몰아쳤다.
콰콰콰콰.
우우웅.
"후우우우...."
거칠게 진동하는 대검과 파르르르 떨리는 근육을 심호흡과 함께 진정시키는 순간, 무노의 얼굴에 자연스레 미소가 걸렸다.
흐.
'이게 되네....'
드라센 대검술 비기, 바람 가르기.
본래대로라면 폭식의 강체술로 2성 이상의 진화를 이루어야 구사할 수 있다는 가문의 비기 중 하나가, 처음으로 자신의 손에서 풀려나왔다.
'그다지 배가 고파지지도 않고.'
- 드라센 대검술의 비기는 하나같이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한다.
- 폭식의 강체술을 익혀 에너지를 축적해 두지 않는다면, 한두 번 쓰는 것만으로도 관절이나 근육이 박살 나거나 말라 죽게 될 것이다.
- 아쉽지만 너는....
- 가르쳐야 주겠지만, 쓸 수 있게 되더라도 절대 남발하지는 말거라.
아버지의 말이 처음으로 틀렸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그의 몸에서 소모된 열량이 생각보다 작았던 것이다.
마치 열량 대신 다른 것이 소모된 느낌.
그것이 무엇인지는 대충 느낌만으로도 알 것 같았다.
'아버지께 보고할 게 하나 더 늘었네.'
그것도 아주 좋은 일로.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예상보다 덜하더라도 몸에 무리가 간다는 것은 사실이다.
'오늘은 이만해야겠군.'
수련의 피로감이 한순간에 확 몰려왔다.
'난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 하는 양자. 내 몸이 유일한 재산인 건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수련도 상태 봐 가면서 해야지.'
다만 전생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이 세상에는 육체의 힘만으로도 성공할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이었다.
힘을 길러서 부모님께 은혜를 갚은 다음, 나만의 삶을 개척할 것이다.
그렇게 앞으로의 각오를 다시 되새기는 순간, 갑자기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음!?'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지만.
푸우욱.
어느새 그의 왼쪽 옆구리에는 은빛 장검이 뚫고 나와 있었다.
"큭...!"
자연스레 돌아간 시선이 어둠 속에서 복면을 쓰고 나타난 괴한의 눈과 마주치는데.
"죽어!!"
이놈이?
촤르르륵.
두 눈을 커다랗게 뜬 놈이 더 이상 검을 움직이기도 전에, 무노는 쇠사슬로 그 장검과 놈의 손과 목을 한순간에 휘감아 끌어 올렸다.
콰드드드득.
"커, 커흑!"
비명을 지르는 적의 모습을 보며 무노는 이를 갈았다.
"이, X발 새끼가...!"
퓨숙.
옆구리에 박힌 검을 뽑아내는 순간 핏줄기가 솟구쳤다.
"짜증 나게...."
악마를 먹으며 진화한 육체가 스스로 근육을 조여 그 핏줄기를 금세 멈추게 만들긴 했지만, 꽤나 큰 상처가 그것만으로 아물 리가 없었다.
"...아프네. 흐?"
상상치도 못한 상황에 생긴 부상에 무노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정신이 나갔구나. 네놈."
누군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콰드득.
"끄르륵."
몸부림치는 복면인의 붉은 눈은 너무나도 익숙했으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확장된 놈의 동공을 보며 무노가 이를 드러냈다.
"이제 봐주지 않는다고 했지, 일라이!"
무노의 검은 눈동자가 스산한 살기를 머금을수록.
우드드드득.
검은 쇠사슬에 담긴 힘은 더욱더 강해져만 갔다.
7화. 마법?
"막 나가는 것도 정도가 있지...."
콰드드드득.
"끄, 그르륵."
일라이의 붉은 눈이 공포에 물들어 가는 것을 보며 무노는 비릿하게 웃었다.
뚫린 옆구리의 화끈한 통증이 머릿속에서 분노가 되어 끓어올랐고.
촤르륵.
검은 쇠사슬은 그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들여 일라이의 몸 전체를 서서히 조여 갔다.
콰드드드득.
"끄아아...!"
흐, 시끄럽게 비명은.
촤륵.
"...흡!? 흡!"
콰득.
쇠사슬이 끝내 놈의 입까지 막아 버리자, 그 붉은 눈에 담겨 있던 저열한 악의가 공포로 바뀌어 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 모습이 분노로 달아올라 있던 머릿속을 조금은 식혀 주는 것 같았다.
'단숨에 죽이지는 말자. 천천히, 가장 고통스럽게. 손끝부터 으스러트리면서.... 아니, 불로 지지는 것부터 시작할까?'
화상이 제일 괴롭다던데....
온갖 잔학한 상상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던 그 순간.
무노는 복면인의 붉은 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사람을 온갖 방법으로 괴롭히다 죽이는 상상을 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그 표정은 정말....
'...추하다.'
이게 나라고?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고, 자연스레 쇠사슬에 힘이 살짝 빠졌다.
쿵.
"끄윽. 끅...."
숨통이 조금 트였는지, 온몸이 묶인 채 바닥에 나뒹구는 일라이의 입에서 피거품과 함께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론 그렇다고 동정심이 들리는 없었다.
간신히 근육을 조여 출혈만 멈춘 옆구리의 통증은 여전했으니.
까득.
쿵.
"네놈의 처분은 아버지께서 결정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일라이의 가슴을 지르밟은 무노는 공포에 질린 일라이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그 안에서 차분해진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시 놈의 몸을 들어 올렸다.
촤르르륵.
"...팔다리 정도만 부숴 주마."
"끄흑."
네 가닥 쇠사슬이 허공에 끌어올린 놈의 사지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조이며 꺾었다.
콰드드득.
"끄아아아악!"
그 비명이 다시금 가슴속 살의를 자극했지만.
'죽이지는 않겠다. 하지만....'
좀 전에 본 섬뜩한 자신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 스스로 제한을 두었다.
하지만 쇠사슬은 여전히 그 살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사지를 잡아 뽑을 듯이 사정없이 당겼다.
우드드득.
"끄아아아악!"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연무장이 피바다가 되고 놈은 몸뚱어리만 남은 시체가 될 판이라.
'그만.'
쿵.
무노는 사지의 뼈가 부러진 일라이의 몸을 연무장 바닥에 내던졌다.
그런데 그때.
"형님?!"
연무장 입구 쪽에서 놀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귓전을 때리는 익숙한 목소리.
"리안?"
돌아본 곳에는 왜인지 시종도 없이 야참을 들고 서 있는 동생이 있었다.
"하...."
X 됐다.
'어린애한테 내가 뭘 보여 준....'
속으로 자책하려는 찰나.
리안의 시선이 피가 흘러나오는 그의 옆구리를 훑었고.
"습격!? 어떤 X새끼가 감히!!?"
챙그랑.
식기를 내동댕이친 리안은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든 채, 나뒹구는 일라이를 향해 그대로 달려들었다.
뜻밖의 반응에 순간적으로 멍해 있던 무노는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아, 이런 세상이었지....'
그리고.
탕.
한발 먼저 움직여, 일라이의 목에 칼을 꽂으려던 동생의 칼을 막았다.
"억?"
쇠사슬에 가볍게 튕겨 나가는 칼을 리안이 멍하니 바라보는 순간.
바로 거리를 좁힌 그가 피식 웃으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욱하는 성질 좀 죽여, 리안. 그런 것까지 아버지를 닮을 필요는 없어."
"하, 하지만, 형님을 습격한 놈인데...."
그러니까 자기가 죽이겠다?
피식.
참으로 이 시대의 귀족다운 녀석이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귀여운 동생일 뿐이었다.
"죽이기 전에 알아볼 게 있어."
"예?"
"저 녀석, 일라이다."
"예에!?"
촤르륵 움직인 쇠사슬이 쓰러진 놈의 복면을 벗겨 냈다.
단순히 열두 살짜리 어린애가 사람을 죽이는 꼴을 보기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일라이 경이 왜...?"
"2성 기사가, 갑자기 나를 암습했어. 말이 안 되지."
머리가 차가워지고 나니 뭔가 분명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무리 날 싫어한다 해도, 죽이려고까지 해?'
인간의 증오를 얕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통은 그보다 욕심을 앞세우기 마련이다.
그러나 무노는 일라이가 자신을 죽여 얻을 이득이 무엇일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간 보아 온 일라이의 성격을 보면, 그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듣고 있겠지? 일라이."
쾅.
우드득.
"끄아악!"
내리찍은 발에 허리가 부서진 일라이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흐릿해져 가던 놈의 눈동자에 약간의 빛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무노가 슬쩍 웃었다.
"역시...."
그 상황에 리안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무슨 속셈이지, 일라이? 왜 나를 암습한 거냐? 이렇게까지 머리가 나쁠 거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말이다."
고개를 숙여 놈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는데.
"무노, 드라센을, 데려와라.... 목숨만 붙여서...."
"뭐?"
놈이 흐릿한 붉은 눈으로 뱉어 낸 말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야, 이놈.'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멍하니 풀린 눈을 들여다보던 무노는 다시금 무언가가 자신을 자극하는 느낌을 받았다.
놈의 붉은 눈에서 슬쩍 비쳐 보이는 검은 빛이, 끝없이 불쾌하면서도 탐스러운, 이율배반적인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탐스러운? 뭐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스멀거리는 음습한 살의와 폭력성이 다시금 꿈틀거리기 시작하는데.
'이상하다.'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무노의 의식이 어느새 둘로 갈라졌다.
'음?!'
새하얀 의식의 공간 속에서 그는 둘로 갈라진 자신의 모습을 인식했다.
'호오? 이게... 되네.'
그다지 낯선 경험은 아니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이 세상에 환생한 직후부터, 그는 짧은 행복을 지나쳐 긴 세월 고통의 시간을 겪었었다.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아기는 끔찍한 환경 속에서 세뇌를 피해 스스로 자아를 분리하는 방법을 깨달았고.
결국 이성적인 자아를 의식 속에 격리해 둔 채, 외부로는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에게 분노를 표출할 뿐인 최소한의 지능만을 드러내기 시작했었다.
지금에서야 그럴듯하게 표현하는 것이지, 사실 그것은.
'정신 분열과 트라우마가 혼재된, 미쳐 버린 상태...였겠지.'
원래라면 심각한 정신적 혼란을 겪으며 자멸했어야 할 그 자아는, 양부모의 따스한 보살핌 속에서 서서히 회복되어 왔다.
다만 그때부터는 머릿속에 심어진 악마와의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한문호의 자아가 그 내면의 싸움을 도맡는 동안, 최소한의 인지 능력만을 가진 무노의 자아가 외부로 드러나 모자란 모습을 보여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머릿속 악마까지 먹어 치우면서 의식이 완전히 통합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여전히 온전히 떠올리지 못하는 끔찍한 기억의 단편. 그 부분 때문일까 싶었는데.
그러다 이내,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그의 자아는 무노와 한문호로 나뉘어진 것이 아니었다.
한쪽은 본연의 모습 그대로 회색 머리, 회색 눈동자를 가진 무노.
하지만 다른 한쪽은.
- 크르르르.
머리카락과 눈동자뿐만 아니라 온몸이 검게 물든 모습으로 이빨을 드러내는 또 다른 자아.
폭력성과 살의가 뭉쳐진 것 같은 그 모습은 차마 자신의 것이라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정체가 무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악마포식자.'
그가 악마를 잡아먹게 만들어 준 특성이자, 진화의 방향성.
아버지조차 강체술의 한계를 뛰어넘은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이라 표현하던 힘이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결국 자신이 겪어 온 인생의 한 부분이자.
'또 하나의 나.'
...였다.
그렇게 인식하는 순간, 살기를 뿜어내던 검은 자아가 이내 이빨을 드러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르륵.
그 순간 두 자아가 한데 섞이며, 다시 검은 머리 검은 눈인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무노는, 두 개의 자아에게서 각기 다른 느낌을 받았던 것이 특정한 기운 때문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좀 전에 느꼈던 불쾌감의 정체이자,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탐스럽게 느껴졌던 기운.
'...마기(魔氣)?'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무노는 새하얀 의식의 공간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형님? 이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요?"
어리둥절한 동생의 눈동자가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데.
"어? 어, 어. 그래, 누가 봐도 그렇겠지."
다행히 시간이 거의 흐르지 않은 것 같았다.
새삼스레 일라이를 내려다보니, 놈의 눈 속에 보이는 희미한 기운이 확실하게 구별되었다.
-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에너지. 그러니, 내가 먹어 치워야 할 힘.
아직은 낯설지만 익숙해질 것이고, 익숙해져야만 하는 기운의 정체.
또 다른 자아, 악마포식자는 그것을 말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그렇다면 이것은....
"...마법?"
"마법이요!?"
가만히 듣고 있던 리안이 펄쩍 뛰며 놀랐다.
하지만 대답해 줄 정신은 없었다.
설마 마법사가 이 일과 관련이 있다고?
'왜 하필 나를?'
순간 섬뜩한 예감이 들며 등줄기에 한기가 흘렀다.
- 네 특성은 마법사들이 알면 안 된다. 절대로.
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데.
"형님, 정말 이게 마법이에요? 대체 어떻게 아신 거예요? 어떻게 마법사가 우리 영지에...."
다시금 동생의 다급한 목소리가 멍해진 정신을 깨웠다.
리안이 놀랄 만도 했다.
이곳 아이언 왕국은 마도 제국의 대표적인 적국으로, 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도 처형을 하는 나라니까.
'그래.'
그 생각이 다시 그를 침착하게 만들었다.
오직 아버지에게만 얘기했던 자신의 특성이 벌써 외부로 새어 나갔을 리 없다.
그리고 이 일에 마법사가 연관되었다는 사실은 꼭 불길하게 생각할 것만은 아니었다.
"리안."
"예, 형님."
"아버지께는 네가 보고해라."
"예? 제가요?"
"그래. 이놈 처분은 아버지께서 결정하실 일이니까."
무노는 그리 말하며 발끝으로 일라이를 툭 차 보였다.
"무노 드라센을 데려...."
같은 소리만 반복해서 지껄이는 맛이 간 놈의 중얼거림을 한 귀로 듣고 흘린 채로.
"그럼 형님은...?"
"나는 따로 이놈의 뒤를 조사해 보려 한다. 흔적이 다 사라지기 전에."
지금도 그에게 느껴지는 마기의 흔적은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동생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 흔적이요?"
무노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마법사가 얽힌 일이라면,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는 거라면.
'마법사를 상대하는 데는 내가 아버지보다 나을 수 있어.'
준비된 마법사는 어떤 이능력자보다 무서운 상대라는 것이 이 대륙의 상식.
상황에 따라서는 4성의 기사인 아버지도 하위마법사한테 낭패를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은 다를 것 같았다.
- 넌, 마법사의 천적이 될 것이다.
"무노 드라센을...."
무노는 쇠사슬을 움직여 다시 놈의 몸을 휘감았다.
그러자 이번엔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놈의 머릿속에 남은 옅은 마기가 그대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데려...? 커흑!?"
계속 같은 소리만 지껄이던 일라이의 눈이 한순간 커지더니.
"끄르륵"
놈은 이내 부르르 몸을 떨면서 입에 거품을 문 채 털썩 고개를 떨궜다.
"형님, 심문하라고 하시더니 왜 그냥 죽이...?"
"아냐!"
이 녀석이 날 뭘로 보고.
"마법은... 내가 처리했다고 아버지께 전하고."
"형님, 마법도 아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니다만. 그냥 그리 말하면 아실 거다."
"우와...."
무노는 반짝이는 동생의 눈빛을 슬쩍 외면하며 바닥에 널브러진 일라이를 노려보았다.
마법에 걸렸다곤 해도, 습격을 자행한 일라이의 죄가 없어질 수는 없다.
마도 제국에나 있다는 고위마법사가 아니라면, 종의 한계를 뚫고 진화한 강체술사인 기사들을 강제로 세뇌할 수는 없을 테니까.
- 마법사들이 주로 쓰는 암수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어두운 부분을 자극해 조종하는 것이다.
- 그렇기에 우리 왕국은 마법사를 경멸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이 녀석에게 나를 증오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은 애초부터 넘쳐 났을 거야.'
다시금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 무노가 일라이를 일견하며 바로 돌아섰다.
"그럼 부탁한다, 리안. 이 밤이 가기 전에 다 처리해야 돼."
"예."
어쩌면 아직 마법사가 영지에 있을지도 모른다.
비장한 마음으로 일라이가 남긴, 아니 마기가 남긴 옅은 흔적을 좇는데.
다시금 리안의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형님, 근데 저...."
"음?"
"...그럴 상황이 아닌 건 알지만, 말씀은 전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뭔데?"
"어머니께서 형님을 찾으세요. 파티 준비해야 하는데 자꾸 도망 다니신다고. 그래서...."
"음!? 아, 저기 흔적이...!"
파바박.
무노는 그 순간, 바로 전력을 다해 마기의 흔적을 쫓아 연무장 밖으로 내달렸다.
"...제가 온 것인데... 헐."
리안의 목소리가 남긴 울림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8화. 추적
연무장을 벗어난 무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 못 들은 거다. 음, 절대 못 들은 거야.'
파티 예절이 어쩌니, 신붓감을 선택해야 한다느니 하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머릿속을 스치지만.
'어우....'
처음 보는 사람들과 서로 얼굴에 금칠해 주며 하하 호호 웃는 일은 정말 체질에 맞지 않았다.
'차라리 싸우는 게 낫지.'
그 순간.
욱씬.
"아, 씁...."
칼에 관통당한 왼쪽 옆구리의 통증이 다시금 분노를 불러일으키며 잡념을 날려 버렸다.
'역시 일라이 그 개자식의 멱을 딸 걸 그랬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상처를 살펴보니, 흘러나오는 피의 양이 벌써 상당히 줄어 있었다.
무려 칼에 꿰뚫린 상처인데, 벌써 자연적으로 회복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느낌상 적어도 내일 아침쯤에는 완전히 아물 것처럼.
'...확실히, 이것도 정상은 아니지.'
정상적인 인간의 회복력이 아니다.
그것은 강체술사라는 기준으로 봐도 그랬다.
'회복에 특화된 이도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자신의 특성은 그런 쪽도 아니었는데 이 정도라니.
심지어 자신이 '바람 가르기'를 성공시켰을 때 소모된 기운도, 대부분은 열량이 아닌 다른 기운이었던 것 같았다.
'아마도, 마력이겠지.'
악마의 힘. 정확히는 이 세상을 이질적으로 변화시키는 부정형의 힘.
자신의 몸은, 이상할 정도로 뛰어난 회복력에 더해 그 특별한 에너지까지 품고 있는 것이다.
- 강체술은 육체의 진화에 간섭하는 것이다. 정신이 진화된 이도, 따져 보면 뇌가 진화한 거지.
- 그런데 너는 엄연히 다른 차원의 영적인 존재, 악마를 집어삼켰다. 분명히 강체술의 한계를 벗어난 일이야.
- 그러니 더욱더 조심하거라. 마법사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그리고....
'...그 힘에 먹히지 않도록.'
꾸욱.
가볍게 쥔 주먹에도 강력한 힘이 느껴지는데.
과거에도 제법 강했던 육체가 이제는 그 잠재력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진화했다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뭐, 어쨌든 잘된 거지."
솔직히 현생에서도 드라센 영지에 오기 전까지는 너무 안 좋은 일을 겪었다.
더구나 이 판타지 세상의 삶은 전생에 비하면 빈말이라도 편하다 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편한 것투성이지만.
그래도 이 세상이 좋은 점이 있다면, 스스로가 단련함에 따라 초인적인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지금 자신이 얻은 힘은, 강력한 강체술사인 아버지조차 유래를 알 수 없는 특별한 것이라 표현할 정도였으니.
'내가 바라는 삶을 살기 위한 지름길이 내 안에 있었다.'
그러니 당장은 그 힘에 먹힐 수도 있다는 경고가 신경 쓰이기보다, 강해진 육체가 마냥 기꺼울 뿐이었다.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는 일라이에게 막 공격받았을 당시에 미친 듯이 솟구치던 그 살의 정도.
지금도 부상의 고통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마다 다시 돌아가서 일라이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솟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얻은 힘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부작용일 뿐이었다.
'컨트롤만 잘하면 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애초에 의식을 둘로 나누는 게 익숙한 자신에게 그 정도는 큰 문제도 아니었으니.
악마포식자라는 진화특성은 오히려 전생부터 갈망해 오던 것을 얻게 해 줄 최고의 패였다.
'이번엔 전생에서와는 다르게, 무력한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어.'
그 사실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유.
이 세상에서는 강력한 '힘'이 바로 그럴 수 있는 저력이 될 테니까.
이제부터 리안이 정식 후계자가 될 때까지 수련을 통해 힘을 기르면서, 가문의 은혜에 보답할 길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는 이 넓은 세상을 둘러보러 떠날 생각이다.
'사람답게 사는 삶의 시작은, 여행부터....'
여행 경험.
그것은 한문호가 보통 사람과 자신을 구분 지었던 두 가지 큰 차이점 중 하나였다.
전생에는 그토록 바랐지만 한 번도 하지 못했던 긴 여행을 통해 세상을 둘러보고 나서, 그다음 삶의 목표를 정해 보련다.
그러자면 성년식 파티는 몰라도 약혼 같은 건 절대로....
'아,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마기의 흔적이 갑자기 흐릿해지는 게 느껴지자, 상처 하나에서부터 이어져 온 그 긴 상념이 깨어져 나갔다.
"정신 차리자."
짝.
무노는 스스로 가볍게 뺨을 두드린 뒤, 다시 마기의 흔적을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연무장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오긴 했지만, 흔적이 보인다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으니.
실제로 일라이의 머리에서부터 이어진 마기의 흔적은 놈이 지나온 길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마법에 걸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마법사가 정말 존재한다면 가까이 있는 거야. 집중하자.'
흔적이 더 흐려지기 전에 추적을 마쳐야 한다.
무노의 몸이 일라이가 지나온 길을 따라 그대로 내달렸다.
내성의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 그중에서도 보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만 절묘하게 지나쳐 온 것을 보니, 과연 성의 내부자가 기습을 위해 선택할 만한 길이기는 했다.
그런데 결국 그 종점에 있는 것은.
'저택?'
그리 넓지 않은 드라센 성의 내성에서도 영주 관저보다 더 넓은 공간이 할애된, 작은 영지에 어울리지 않은 저택들을 아홉 채나 지어 놓은 기사 관저였다.
아버지의 의사에 따라 내성에서 별도로 독립시킨 기사들만의 공간.
'집에서 바로 나를 습격하러 나왔다고?'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되돌아갈 순 없었다.
그런데 그때, 야간 경계를 서던 병사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냐! 멈춰.... 억!?"
누군가 접근하는 것을 보고 버럭 고함을 지르려던 고참 병사가, 횃불 아래 드러난 공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황급히 말끝을 흐렸다.
무노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최근 토벌을 몇 번이고 같이 나간 병사, 롬.
"여,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공자님?"
"좀 전에 일라이가 이쪽으로 나오지 않았나?"
"예? 아, 아닙니다."
그가 기사의 이름을 막 부르자 롬이 당황하는 것이 보였지만, 알 바 아니었다.
지금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아니라고?"
"예. 야간 당직이신 로드니 경을 제외하고는, 한 시간 전부터 아무도 저택에서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흥, 병사들도 모르게 나오셨다?
"내가 확인해 보지. 비켜라."
"아, 안 됩니다. 공자님."
"안 돼?"
"예. 기사 관저는 기사님들의 전용 공간으로, 영주님께서도 함부로 들어가지 않으십니다. 필요하시다면 허가를 받아 오셔야 합니다."
병사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완고하게 무노의 앞을 막아섰다.
"근데 무노 공자님이 말을...?"
"그러게? 머리 색 변하더니 똑똑해지셨나?"
"그 각성이라는 게 설마 머리도...."
다 들린다, 이 인간들아.
무노는 뒤쪽의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에도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방금 롬이 말한 드라센 영지의 특수성을 다시 떠올릴 뿐.
'그랬었지.'
쯧.
아이언 왕국 북부. 그중에서도 반쯤 마역(魔域) 취급을 받는 북부 산맥에 가장 인접한 드라센 영지는, 성 밖에서 농사를 짓는 가구를 통틀어도 인구가 고작 천 호(戶)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영지들처럼 기사들에게 따로 장원과 인력을 하사할 여유가 없었는데.
그러면서도 기사 인력은 많이 필요하니, 아홉 명의 기사를 책봉하기 위해 대도시에서나 볼 법한 3층짜리 저택을 아홉 채나 지어 놓아야 했던 것이다.
그들의 공간에 대한 자유까지 줘 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고려해야 할 상황이 아니었다.
"일라이 경이 조금 전 연무장에서 나를 습격하다 잡혔다."
"예!?"
"그런데 자네들은 일라이를 본 적이 없고, 심지어 내가 수색하는 것도 방해하겠다고?"
"그, 그런...?"
무노가 날 선 어조로 대꾸하자 병사들의 얼굴이 한순간 파랗게 질렸다.
그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말이 나온 것이다.
그때,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일라이 경이 당신을 습격했단 말입니까?"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엄청난 덩치의 중무장한 기사가 어둠 속에서 서서히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로드니?"
"'경'이라고 정확히 호칭을 붙여 주셨으면 합니다, 공자. 영주님께서도 지키고 계신 예의입니다."
거대한 할버드를 든 2m쯤 되어 보이는 커다란 덩치의 기사.
그를 보는 무노의 얼굴이 더욱 차가워졌다.
"그거야 네놈이 트리안의 기사 신분을 고수하며 드라센에 충성 맹세를 안 하고 있으니까 그런 것이지. 나는 충성 맹세도 안 하고 돈만 받아 챙기는 놈에겐 존칭을 해 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거든."
그 말에 로드니의 곰 같은 얼굴이 씰룩였다.
"머리가 좋아지는 쪽의 진화를 하셨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성격까지 더러워지셨다는 것은 지금 알았군요. 변한 머리 색깔처럼 말이죠."
역시나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다.
이 녀석 역시 트리안 영지에서 1년 전쯤 파견 왔는데, 일라이와 마찬가지로 무슨 사고를 쳤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다만 일라이가 무노에게 한 번 깨진 이후로 주기적으로 시비를 걸어 왔었던 것에 비해, 드라센에 올 때부터 2성의 기사였던 이 녀석은 아예 그를 무시해 왔었다.
물론 두 놈이 서로 친하다는 건 비밀도 아니었으니, 무노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도 없었다.
"주군의 아들한테 말하는 꼬라지도 그렇고 말이야. 너 혹시 일라이와 함께 일을 꾸민 거냐? 2성 기사 둘을 한 번에 쳐 내면 나도 좀 귀찮아지는데."
그 말에 로드니의 얼굴이 다시 한번 씰룩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자님은 지금 큰 실수를 하고 계신 겁니다."
이를 악물며 씹어뱉듯 나온 말에 무노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그렇습니다. 말씀을 그대로 옮기자면 일라이 경을 혼자 힘으로 제압하셨다는 건데, 그것부터 말이 안 되니까요."
지극히 상식적인 대답이었지만, 지금 여기서 로드니를 상대로 괜히 무력시위를 할 시간은 없었다.
"이걸 보고도?"
무노는 수련용 경장 갑옷의 옆구리를 열어 상처를 보여 주었다.
그 자신감 넘치는 행동에 로드니는 눈가를 다시 씰룩였지만, 이내 상처를 보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긁힌 상처가 2성 기사의 '습격'을 받은 증거라면, 저는 이 자리에서 십여 개는 더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만."
그 말에 자연히 놈을 따라 자신의 옆구리로 시선을 옮긴 무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
상처가 거의 아물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속은 욱신거리는데 말이다.
'젠장.'
한숨이 나왔지만, 더 이상 길게 시간 끌기도 싫었다.
이 순간에도 마기의 흔적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으니.
"상황이야 직접 보면 알 일이고, 나는 일라이의 저택을 확인해 봐야겠다. 만약 내 말에 거짓이 있다면 차후에 책임을 지지. 비켜."
그런데.
"그럴 수 없습니다."
"뭐?"
"공자님은 지금 영주님이 허락하신 기사들만의 공간을 침범하고 계시며, 일라이 경의 명예까지 모독했습니다. 후에 책임지겠다는 말로 넘어가실 수는 없습니다."
이 곰 새끼가 말을 들어 처먹지를 않았다.
그 순간에도 마기의 흔적은 점점 흐려져 가고 있었기에 마치 마법사가 눈앞에서 도망가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쯧.'
원래부터 그리 마음에 드는 놈도 아니었으니.
"잠깐 쉬라고, 로드니."
촤르르륵.
"핫!?"
발목에서부터 풀려나간 검은 쇠사슬이 로드니의 발목을 휘감고 균형을 무너트리는 순간.
무노의 주먹이 그대로 놈의 턱을 강타했다.
뻐어억.
충분히 기절시킬 만한 힘을 실었는데.
"감히!"
뒤로 넘어가려는 듯하던 로드니가 억지로 자세를 잡더니, 눈이 반쯤 뒤집힌 상태로 할버드를 휘둘러 왔다.
파아아앙!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온 거대한 도끼날.
'이 새끼가?'
꽝!
그에 무노는 그대로 대검을 뽑아 들어 할버드를 쳐 낸 다음, 놈에게 달려들어 명치에 무릎을 꽂아 넣었다.
뻐어어억.
"끄으으...."
제대로 들어갔다.
할버드를 잡은 놈의 손에 힘이 풀리는 것을 보며 바로 돌아서려는데.
"우워어억!"
"흡!?"
로드니가 그대로 달려들어 오더니 무기를 놓아 버린 손으로 허리를 껴안았다.
우드득.
미친 듯이 밀어붙이면서 허리를 조여드는 손에 괴력이 실리는데.
통증이 느껴지는 순간, 다시 무노의 머릿속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 죽여, 죽여 죽여!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친 그 분노가 그대로 적을 분쇄해 버릴 것은 요구해 왔다.
'닥쳐!'
하지만 무노는 충동에 따라 로드니의 등에 대검을 꽂아 버리는 대신, 이를 악물며 놈의 뒤통수를 팔꿈치로 후려 갈겼다.
쾅!
"끄...."
마치 거대한 둔기끼리 부딪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무노를 밀어붙이던 로드니의 몸이 흘러내리듯 그 자리에 쓰러졌다.
털썩.
"하...."
그리고 그 순간이 되어서야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 공자님!?"
"로드니 경!?"
"요란 떨지 마라. 기절했을 뿐이니까. 너희들도 비켜. 책임은 내가 진다."
"하지만...."
"적을 놓치면 너희들에게 책임을 묻겠다!!"
짜증이 솟구쳐 버럭 고함을 지르는데.
"끄, 끄윽...."
분명 쓰러졌던 인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다시 들려왔다.
섬찟하여 돌아본 공간에는 다시금 비틀비틀 일어서는 로드니가 보였다.
"아이씨...."
이건 진짜 곰인가.
새삼 아직은 2성의 기사가 쉽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다시 한번 손을 쓰려다가.
"원칙은 원칙...."
거의 완전히 뒤집힌 눈으로 그런 말을 흘려 내는 놈을 보니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한패는 아닌 거 같은데....'
괜히 자신이 악역이 된 기분이라.
칫.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오든가."
무노는 신경질적인 말을 뱉어 내고는 일라이의 흔적이 느껴지는 저택을 향해 돌아섰다.
촤르륵.
그리고 병사들이 뒤늦게 문을 열려 하는 동안, 사지의 쇠사슬을 뻗어 그대로 담벼락 위에 걸었다.
파박.
팔다리보다 더 빠르게 의지에 반응하는 길고 뭉툭한 쇠사슬 네 가닥이 그의 몸을 담장 위의 허공으로 힘차게 쏘아 올렸고.
"헛!?"
"어떻...."
병사들의 놀란 목소리를 허공에서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저택 지붕에 착지한 무노는, 마기의 흔적이 느껴지는 건물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파바박.
'차라리 처음부터 이럴걸, 젠장.'
이미 소란을 피울 만큼 피운 상태지만, 혹시나 마법사가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가 일라이의 방까지 들어서서 확인한 것은.
주먹만 한 수정구가 부서진 흔적에서 흘러나온, 옅은 마기뿐이었다.
9화. 준비
기사가 대공자를 습격하다 잡혔다!
하룻밤 사이 드라센 영지에 퍼진 소문은 큰 파장을 만들어 냈다.
"기사가 대공자를? 왜?"
"나야 정확히는 모르지."
"대체 무슨 일이래?"
"그러게. 곧 몬스터 웨이브 시즌인데."
영지의 기사가 영주의 아들을 습격한 초유의 사건.
그것은 겨울을 맞는 드라센 영지민들의 불안감을 자아냈다.
거기다.
"대충은 안다는 말 아냐? 뭔데? 말해 봐."
"그게, 내가 들은 얘기인데...."
어디서 흘러나갔을까.
기사가 마법에 홀려서 대공자님을 습격했다.
"마법에 홀려?"
"큰일 나는 거 아냐?"
"아니, 이 시기에...."
사건의 구체적인 정황까지 전해지며 영지에 불길한 소문이 더 크게 번지려 할 때.
대공자가 마법에 홀린 기사를 단숨에 제압했다.
성년식 이전에 각성을 한 천재 대공자.
대공자의 성년식 파티를 위해, 주변의 귀족들을 전부 초청했다.
영주 관저에서 나온 공식 발표가 영지민들의 불안감을 그나마 잠재웠다.
"아, 그 쇠사슬 공자님?"
"그래. 그분이라면...."
최근 몇 달간 열심히 몬스터 토벌에 나서던 무노.
그 모습을 기억하는 영지민들은 불길한 소문을 듣고도 긍정적인 면을 더 크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겨울을 맞은 드라센의 영지민들에겐 영주의 발표가 특히 달가울 수밖에 없었다.
무노의 성년식 파티에 귀족들이 모여든다면, 그들이 혼자서만 오지는 않을 테니까.
"귀족들이 많이 온다면...."
"올겨울은 쉽게 지나가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어. 용병들도 예년보다 꽤 많이 모여드는 것 같으니...."
"그 공자님이 참말로 복덩이일세, 정말."
"그렇지."
대다수의 영지민들이 무노 드라센의 이름을 다시 호의적으로 각인할 때.
정작 그 당사자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왜 나를 습격했을까?'
쉽게 생각하자면, 그저 마법에 당한 일라이의 마음속에 자신에 대한 분노가 있었기에 재수 없게 걸린 거겠지만.
그렇다면 마법사가 굳이 일라이에게 수작을 부린 이유가 의문으로 남는다.
'그게 부서진 통신구라던데....'
통신용 수정구는 귀족가에서만 사용하는 값비싼 물건. 심지어 휴대용이라면 그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비쌀 것이다.
그런 통신구를 소모해 가며 원거리에서 마법을 걸었다면, 분명한 목적이 있었을 터인데.
그리고.
- 무노, 드라센을, 데려와라.... 목숨만 붙여서....
일라이 놈이 지껄이던 소리를 생각하면, 자신을 죽이려던 건 아니었을 거다.
'그렇다면 납치? 나를 왜?'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에 자꾸 인상만 찌푸려졌다.
그 때문인지 간밤에는 이상한 꿈까지 꾸었으니.
- 이놈은 왜 이래?
- 세뇌가 잘 안 돼....
- 대주교께서 어찌 생각하실지....
- 차라리 제물로....
'왜 다시 그 꿈을....'
유년기의 끔찍한 기억. 그 일부가 간밤의 꿈을 통해 선명하게 떠오른 것이다.
'예전보다 조금 더 명확했어. 목소리도 기억나. 일부는 얼굴까지.... 왜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계기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있다고 해 봐야, 왜 마법사가 자신을 노렸는지에 대해 고민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했다는 점. 그리고....
'그때 마기를 조금 흡수했다는 거 정도?'
정말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악마를 잡아먹은 뒤 시간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무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의미 없는 일.'
10년 전 토벌에서 다 죽어 버린 원수들의 기억을 애써 떠올리려 하는 것도 허망했다.
그리고 마법사가 자신을 노린 이유도 결국 조사해 보면 나올 것이다.
그렇게 무노는 불쾌한 꿈을 털어 버리고 커다란 문 앞에 섰다.
"아버지, 무노입니다."
- 들어와라.
* * *
"그러니까.... 로드니 경을 두들겨 패고 병사들까지 강압해서 길을 열었는데, 얻은 게 이 통신구 조각뿐이다?"
혼란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간신히 상황을 정리한 아버지, 라이언 드라센이 이미 보고받은 내용을 다시금 읊었다.
"네."
"마기는 뭐, 당연히 흩어졌을 테고."
"...네."
그 대답에 아버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일라이가 저를 습격한 것은 사실입니다. 제정신이 아닌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니까...."
"알아. 네 조치는 적절했다. 의심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 왜...?"
"증거가 아무것도 남지 않았잖느냐. 뭐 마법사 놈들 일 처리야 항상 음흉하지만, 이래서야 우리 기사가 멍청하게 마법에 당한 꼴밖에 되지 않아. 아니면, 단순히 일라이의 배덕이었거나."
마법사를 혐오하는 왕국의 문화를 떠올린 무노가 그제야 함께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뭐, 그래도 백작 각하께서는 내 말을 믿어 주셨다. 다만 증거가 너무 없어서 문제지. 감히 내 영지에서 내 아들에게 개수작을 부린 놈을 쫓을 방도가 없으니까 말이다."
이어지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서야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일라이는 트리안 백작가 본성에서 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놈에게 마법사와의 연결 고리가 있다면, 백작께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시지 않을까요? 저희는 트리안 백작가의 조사 결과를 기다리면 될 것 같습니다."
백작가에는 마법사만큼 귀하다는 정령사나 사제들도 있을 터이니, 마법사에 대한 추적이나 조사도 쉬울 것이다.
'왜 나를 노렸는지도 알아내겠지.'
그런데 아버지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하필 지금 그러면 곤란하단 말이다."
"예?"
"트리안의 꽃이라 불리는 대공녀가 너의 성년식 파티에 참석하기로 했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진 탓에 다시 생각해 본다는구나. 이 아비는 그게 아쉽구나."
"예에!?"
그 말에 눈이 살짝 커진 무노는 이내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씨, X바. X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약혼 당할 뻔했네.'
내가 생각이 없으면 뭐 하는가. 혹시라도 백작가의 대공녀가 '너 마음에 들어.' 하는 순간 선택의 여지는 없어질 텐데 말이다.
'...신분제가 참 X 같은 거긴 해.'
공식적인 촌수로 따지자면 사촌지간이기도 하지만, 신분이 다르다.
게다가 자신은 양자. 아마 자기주장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새삼 이 판타지 세상에서 불합리한 점 한가지가 와닿았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 너무 티가 났을까.
"왕국 북부 최고 미녀가 못 올지도 모른다는데, 오히려 좋아하는 거냐?"
"아, 아닙니다."
"아니긴, 표정에 뻔히 보이는구만."
갑자기 짓궂은 표정을 지은 아버지가 불쑥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너 이 녀석, 설마 다른 데 관심 있는 건 아니겠지?"
"그건 또 뭔 소립니까?"
그에 미심쩍은 표정으로 응수하자마자, 헛소리가 이어졌다.
"예를 들면 남자라거나...."
"에이씨!!! 진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자신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지르는데, 아버지는 계속 실실 웃으며 변죽을 울렸다.
"어허, 이 녀석 봐라? 강한 부정은 오히려 긍정의 뜻이라던데?"
"아뇨, 그냥 그만큼 싫단 소립니다. 이상한 소리 하는 사람 좀 멀리하시죠, 영주님."
"어허. 부모 자식 간에는 솔직히 털어놔도 된다. 이 아비는 열린 사람이야."
"처음 뵙겠습니다, 아저씨."
"...."
"...."
흥.
장난이 먹히지 않자, 아버지가 그대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런 것도 아니면, 왜 그렇게 거부하는 거냐? 듣자 하니 파티 준비도 거부하고, 예절이나 춤 교육도 아예 안 들으려고 도망 다닌다면서?"
"아니, 전 그냥 리안이 성년이 되면 자유롭게 세상 구경이나...!"
아차.
아버지의 페이스에 휘말려 솔직한 마음이 튀어나와 버렸다.
"...갈 수도 있는 거고. 뭐, 미래는 모르는 거니까요."
황급히 수습해 보지만, 이미 아버지의 표정이 굳어 버린 뒤였다.
"세상 구경이라.... 떠돌이가 되고 싶다는 거냐?"
한숨이 나왔지만, 어차피 언제고 해야 했을 이야기인지라.
무노는 이참에 확실히 자신의 뜻을 전하기로 했다.
"그게 아니라, 견문을 넓히고 싶다 이거죠."
"흐음. 각성하더니 아예 생각까지 바뀐 건 아쉽구나. 예전에는 울면서 가족끼리 영원히 같이 살자더니."
어린 시절의 흑역사가 들춰지는 순간 무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릴 때 한 말 가지고...!!"
"이 험한 세상을 홀로 떠도는 것보다는 가정을 꾸리고 정착하는 게 훨씬 낫다, 아들아."
"그 험한 세상을 직접 눈에 담아 보고 싶다는 겁니다. 제대로 본 적이 없으니까요."
"험한 꼴을 제대로 겪어 보면 가족이 그리울 텐데?"
"그때는 다시 돌아오죠, 뭐. 안 받아 주실 건 아니죠?"
잠시간 눈이 마주친 부자가 이내 피식 웃었다.
"머리가 좋아져도, 똥고집은 어디 안 가는구나. 막무가내로 우기기만 하던 놈이 이젠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는 걸 보니 참 기분이 묘해."
"그러니까 그 파티 좀 어떻게 해 주시죠, 아버지. 어머니는 저를 정말로 장가보내고 싶어 하신단 말입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만?"
"...."
무노가 할 말을 잃고 입을 뻐끔거리자.
이내 피식 웃은 라이언이 벌떡 일어나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하지만 강요하지는 않으마. 성년식 파티는 예정대로 치르되, 그 안에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없다면, 네 뜻대로 하거라."
"아버지...."
"그러니 더는 피하지 말고 엄마한테 가 보거라. 네 엄마는 정말로 기대하는 눈치니까. 지금 한 얘기는 절대 하지 말고."
"예! 가, 감사합니다. 아버지!"
감동한 표정으로 돌아선 무노가 그대로 방을 돌아 나섰다.
그리고.
쿵.
방문이 닫히자마자, 라이언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근방의 미녀들이 몰려오는데, 혈기 왕성한 10대가 어찌 안 넘어가고 배길까. 흐흐, 이놈아. 세상 구경은 무슨...."
그와 같은 나이를 지나온 중년의 남자가 음흉한 미소로 아들의 미래를 축복(?)했다.
* * *
"아우씨, 약혼은 무슨...."
무노는 아버지의 집무실을 빠져나오는 즉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실 그가 약혼을 거부하는 건 구속받지 않은 자유로운 삶에 대한 열망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여자가 싫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 세상의 여자들이.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 세상의 '더러운' 여자들이 싫었다.
'웬만해선 씻지 않는 이 판타지 세상의 문화가 문제지....'
맨날 격하게 훈련하고 싸우는 게 일인 기사들조차 일주일에 한 번 목욕할까 말까 하는 게 현실이었으니.
게다가 사람들은 그 악취를 덮기 위해 독한 향수를 뿌리기까지 했는데, 역한 암내에 섞인 향수 냄새는 안 그래도 후각이 뛰어난 그에겐 거의 테러 수준이었다.
'으. 생각만 해도 토 나와....'
사내놈들이야 가까이 오면 패 버리면 되지만, 여자는 그럴 수도 없었다.
양어머니인 엘리나 트리안만 해도 그랬다.
그가 막 이 집안에 왔을 때, 아직 아기였던 리안이 갑자기 아프기 시작하던 어느 날이었다.
- 무노! 뭐 하는 짓이니!?
- 아, 아기, 따뜻한 물에 잘 씻겨야, 아, 안 아파...요.
- 뭐?
- 자주 씻어야, 병 안 걸려...요.
-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처음으로 정색한 표정을 보이며 그의 손에서 아기를 빼앗았던 어머니.
하지만 그녀도 언젠가 아기 리안과 함께 크게 앓았을 때, 무노가 따뜻한 물에 씻기고 간호한 아기가 병을 털어 내는 것을 보고서야 생각을 바꿨었다.
자주 씻으면 오히려 병을 만들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미신은, 그때가 되어서야 드라센 일가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는 짜증 나는 냄새가 가득했다.
현생의 육체, 사춘기의 왕성한 성욕까지 박살 내 버리는 지독한 냄새가.
그리고 그가 알기로, 이 문화는 아이언 왕국 전체에 만연해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무노에겐 성년식 파티에 대한 기대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암내와 향수. 끔찍한 조합의 냄새가 서로 섞여서.... 으....'
상상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설령 파티에 자신의 완벽한 이상형이 온다 해도, 그 3m 안에 접근 안 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다 보니 다시 또 울적해졌다.
전생에도 모태 솔로로 생을 마감했었는데 현생에도 상황이 이따위여서야, 팔자가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문호가 보통 사람과 자신을 구분 짓던 두 가지 차이점 중 나머지 한 가지가 바로 연애 경험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번 생에도 그쪽에 애로사항이 많을 것 같았다.
"에혀...."
그러나 완전히 좌절할 필요는 없다.
무노가 아는 것만 해도 이 세상은 엄청나게 넓으니, 마도 제국이 있는 남쪽 혹은 아예 대륙 동부나 서부로 가면 분명 깨끗한 목욕 문화를 가진 나라도 있을 것이다.
만약 자신이 결혼을 한다면, 반드시 그런 문화권의 여자를 만날 것이다.
반드시.
그러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첫 번째 목표를 이뤄야 했다.
"세상 한번 돌아봐야지...."
몬스터 웨이브에서 활약하거나 가문을 위해 큰 공훈을 세워서 어느 정도 은혜를 갚은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세상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계급제가 남아 있는 등, 여러모로 불편한 것투성이인 판타지 세상이지만.
'무력만 있다면 어디서든 대우받을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니 결국 어디서 자리를 잡건, 일단은 살 만한 곳을 스스로 찾아볼 것이다.
'사람답게, 자유롭게 살아 봐야지.'
전생의 빡빡하고 외로운 삶, 현생의 유년기에 겪은 불행.
자신이 바라는 자유로운 삶이, 진정 그 모든 불행한 기억을 떨쳐 낼 해방감을 줄 수 있을까.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면서, 무노는 자유를 꿈꿨다.
그리고 이내.
"드디어 왔구나, 아들!"
"...예."
반색하며 자신을 맞이하는 어머니에게 바로 구속되었다.
"자, 일단 옷부터 맞추자. 그리고 파티 예절은 아는 거 있어?"
"어...."
"그래, 없겠지. 엄마가 다 가르쳐 줄게. 하나부터 열까지."
"으...."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아들. 참한 색싯감만 데려와."
짝.
등짝을 때리는 그 손길에는 따스한 정과 함께 무시할 수 없는 압박이 담겨 있었다.
'난 누구? 여긴 어디?'
어머니를 만난 지 5분 만에 다시 도망치고 싶었지만.
-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없다면, 네 뜻대로 하거라.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이 또한 지나가리....'
무노는 그날부터 귀족가의 예절과 춤, 그리고 파티 준비에 대해 귀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기분이 들 때까지 듣고 또 들어야 했다.
고작 남작가 양자의 성년식일 뿐인데 트리안 백작령 소속의 모든 귀족들이 모여드는, 그 파티의 당일까지도.
10화. 리안 드라센
"어머니, 또 형님 예절 교육 봐주시려는 거에요?"
리안이 웃으면서 그리 묻자, 어머니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리안, 형이 어머니라고 한다고 너도 그러니? 넌 아직 그러지 마. 자, 다시 해 봐. 엄, 마."
"히히, 형님이 존칭은 존중하는 마음을 담은 좋은 거라고 했어요. 저도 어머니라고 할래요. 어, 머, 니."
"아니, 그렇게 빨리 안 커도 되는데...."
어머니는 잠깐 서글픈 표정을 짓다가도, 이내 슬쩍 미소를 지으며 그를 꼭 안아 주었다.
"이 엄마는 참 행복해요. 이렇게 생각 깊은 두 아들을 둬서."
"헤헤. 저도요."
"미안해, 리안. 요즘 엄마가 형 성년식 준비 때문에 바빠서 조금 소홀한 거."
"괜찮아요. 저도 이제 열두 살인걸요. 다 컸어요."
"으이구. 우리 아들 말도 잘하고.... 그럼 오늘 일정은?"
"오전에 검술 수련 후, 팔머 행정관님과 공부요. 열심히 할게요."
"그래, 리안. 믿는다~!"
다시 한번 그를 꼭 안아 주고 돌아서는 어머니.
그 온기를 가슴 깊이 받아들이며 리안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순간적으로 나이답지 않은 싸늘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표정은, 그가 방문을 열고 나설 때에는 이미 흔적조차 없었다.
"공자님, 오셨습니까."
"그래."
리안이 검술 수련을 위해 연무장에 도착하자마자, 기사 래리가 그를 반겼다.
보통 때라면 바로 수련을 시작했겠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래리, 조사는 끝났지?"
"예."
건장한 체구에 비해 아직은 어린 얼굴의 하늘색 머리 기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무노 공자님에 대해 험담을 퍼트린 놈은 기사, 로이더와 펄슨입니다. 심지어 마지막 출행 때는 파악된 놀 떼의 규모를 무노 공자님께 축소 보고 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새끼들이 감히...."
뿌드득 이를 가는 리안의 얼굴에는 도저히 열두 살 소년이라 보기 힘든 살벌함이 있었다.
"평기사들 전부 소집해."
"예!"
쿵.
열아홉의 나이에 각성해 1성 기사가 된 래리는 스무 살이 된 지금도 드라센 평기사 6인 중 막내였지만, 그 대답에는 작은 머뭇거림조차 없었다.
* * *
"리안 공자가?"
"왜?"
"나도 모르지."
"하, 참. 꼬맹이가 소집을...."
"말조심해. 차기 주군이 될 사람이니."
"알긴 알지만...."
드라센의 평기사들은 느닷없는 소집 명령, 그것도 이공자의 명령에 의아해하면서도 연무장에 모여들었다.
"어린애가 병정놀이라도 하고 싶은 거겠지."
"적당히 맞춰 주자고."
그들 중 고참이라 할 수 있는 30대 후반의 기사, 로이더와 펄슨이 웃으며 동료들을 다독일 때.
연무장 안으로 리안과 래리가 함께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로이더는 그런 래리의 모습이 거슬렸다.
'어린놈이....'
물론 저놈이 스무 살도 되기 전에 각성한 건 엄연한 사실이다.
'언젠가는 나보다 앞서가겠지.'
하지만 저렇게 차기 영주의 옆에서 알랑방귀를 뀌는 꼴을 보니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아니, 벌써부터 아첨질만 하고 있으니 저놈도 어쩌면 한 번의 진화를 끝으로 10년, 20년이 지나도록 성장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 저주를 담아 놈의 수더분한 얼굴을 바라보는데,
눈이 마주친 순간, 놈이 피식 웃음을 짓는 것이 보였다.
'저 새끼가...?'
자연스레 눈썹이 꿈틀거리는데, 옆을 돌아보니 동료인 펄슨 역시 자신과 비슷하게 불쾌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저 새끼, 한번 손봐 줘야겠어.'
'그래. 적당히 만져 주자고.'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 온 전우이자 친구인 그는 눈빛만으로도 뜻이 통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애송이 자식이.... 감히.'
어려서부터 용병 생활을 해 오며, 업계에 도는 싸구려 강체술을 주문 삼아 외우고 다니기를 십수 년.
서른이 다 되어서 죽을 고비를 한번 넘긴 다음에야 간신히 진화를 겪고 강체술사로 거듭날 수 있었다.
진화를 거치면서 체격에 비해 과도하게 부풀어 오른 두 팔은 일상 생활에서는 약간의 불편함을 주었지만, 적어도 전투에서는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남을 만한 장점이 있었다.
거대한 투핸드 소드를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며 하찮은 몬스터들을 학살할 때면, 자신이 절대자가 된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으니까.
다만, 로이더는 강체술사가 되어 기사 자격을 얻고 나서도 그 눈에 띄는 신체적 변화 때문에 좋은 영지에 임관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친구인 펄슨 역시 마찬가지.
자신의 두 팔처럼 부풀어 오른 녀석의 두 다리도, '싸구려 강체술'을 익힌 티가 많이 난다는 한계가 있었다.
딱 봐서는 외형적 변화가 별로 없는 다른 강체술사들에 비해, 그들은 전투 지속력이나 향후 발전 가능성을 낮게 평가받기 일쑤였던 것이다.
임관을 거절하던 이들은 하나같이 인성이나 신뢰를 언급하며 핑계를 댔지만, 결국 문제는 그거였다.
'그래 봤자 단기 결전에서는 우리가 더 강할 텐데.'
하지만 일반적인 인식이 그랬기에 그들이 이 변방의 시골까지 와서 기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긴 용병 생활을 청산하고 정착하기 위하여.
물론 겨울마다 꽤나 거친 전투를 치러야 하는 영지이긴 했지만, 용병 시절에 비하면 급여나 대우 그리고 신분까지 모든 것이 좋았다.
다만 가끔씩, 좋은 환경에서 재능을 꽃피운 녀석들을 보면 배알이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말도 더듬는 주제에 몸뚱어리 하나만큼은 타고나서 각성을 하기도 전에 평기사들을 가지고 놀던 그 괴물, 무노 드라센처럼 말이다.
'양자 새끼가....'
그리고 운 좋게(?) 험한 환경에서 병사 생활을 하다가 각성한 건 저 래리 녀석도 마찬가지.
이 드라센 영지의 병사들은, 로이더가 용병 생활을 할 때 주워들은 잡동사니에 비할 수 없는 제대로 된 강체술을 배우며 훈련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싹수가 보이면 군터 경 같은 기사가 진화인자를 전해 주기도 하니, 래리 놈이 타고난 재능에 비해 훨씬 어린 나이에 각성한 것도 그 덕이었다.
자연히 질투가 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이런 환경에서 자랐으면....'
그런데 상념이 너무 길었을까.
갑자기 시야 아래쪽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그렇게 노려보지?"
시선을 내려 보니, 어느샌가 다가온 이 영지의 이공자 리안 드라센이 그를 차가운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공자님."
"뭐가 아닌데?"
...이 어린놈이 왜 이럴까.
짜증이 났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이놈은 그 무노와는 다르다.
이곳의 영주인 라이언 드라센 남작의 친아들이자 에녹 트리안 백작의 외손주.
장차 드라센의 영주 자리를 이어받을, 이 땅의 차기 주인이었으니까.
그리고 어린 나이에도 검술이나 강체술에 재능을 보여 왔으니, 원래는 그 괴물 무노보다 더 빨리 각성할 것으로 기대받던 인재이기도 했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다 갖춘 엘리트.
생각만으로도 배알이 꼴렸지만, 이 어린놈은 장래에 자신의 주군... 아니 고용주가 될 몸이다.
"...잠시, 공자님이 저희를 왜 부르셨을지를 생각 중이었습니다!"
"왜 불렀을 것 같은데?"
놈이 귀염상의 얼굴로 애써 위엄 있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있자니 속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솔직히 이상하기도 했다.
'얘가 대체 뭘 보고 이러는 걸까?'
사실상 드라센에 있는 9명의 기사... 아니, 이제 8명이 된 기사들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군터 경조차 자신들을 이렇게 소집한 적은 없었는데.
뭐, 어차피.
"...잘 모르겠습니다."
어린애 장난이겠지만.
로이더는 내뱉을 수 없는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이유는 간단해. 내가 좀 어처구니없는 소식을 들어서 말이야."
씩 웃는 어린 녀석의 얼굴을 보니 왜인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예?"
"요즘 내 형님 일 때문에 떠들썩한 거 다들 알고 있지?"
"예!"
기사들의 대답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보는 어린 공자의 얼굴은 차갑기만 했다.
"형님께서 몇 달 전부터 열심히 몬스터 토벌을 다니신 것은 다들 잘 알 거야. 여기 있는 모두가 자기 임무도 몇 번씩 형님한테 '양보'했었잖아. 그렇지?"
양보.
유독 강조하며 내뱉은 그 단어에 기사들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실상은 양보가 아니라, 떠넘기기였으니까.
아무리 양자라도 명목상 영주의 큰아들인 놈이 적극적으로 몬스터 토벌을 원한다길래, 가뜩이나 맡기 싫었던 임무를 저마다 몇 번씩 대공자에게 미뤘던 것이다.
'설마....'
가장 적극적으로 그리했던 로이더의 가슴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명색이 영지의 대공자가 적극적으로 토벌을 나서는데, 기사들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임무를 미루... 흥. 양보한 것까지야 이해는 해 볼 수 있어. 형님의 뜻이기도 했고...."
도무지 어린애 같지 않은 서늘한 시선이 기사들의 얼굴을 슥 훑는데.
"...결국 형님께선 스스로 선택한 위난을 극복하시고 고작 열여섯의 나이에 각성을 하셨지. 정말 잘됐어. 잘됐으니까, 그건 그냥 넘어가겠어."
...잘 안 됐으면?
모두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맴돌았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 이 꼬마가 성내의 하인들에게도 예의 바르기로 유명한 이공자, 리안 드라센이 맞나 싶을 때.
"...하지만!"
까드득 이를 가는 꼬마의 얼굴은 이제는 확연하게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형님께선 말이 어눌하셨을 뿐, 나이답지 않게 현명하고 인자한 분이셨다. 형님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다 알아! 그런데!"
정말 나이답지 않은 모습으로 고함을 지르는 어린아이.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에 딴지를 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고작 말투! 그 '작은' 단점 하나 때문에 형님더러 바보라고, 드라센의 수치라 하며 그 험담을 내외부에 퍼트린 개자식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로이더는 자신도 모르게 옆의 동료 펄슨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
스르릉.
리안이 갑자기 작은 검을 꺼내 들었다.
왜인지 서늘한 느낌이 들었지만.
'증거는 없어. 증거는.'
로이더는 필사적으로 초조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자 다시 한숨을 내쉰 리안이 안타깝다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특별히 직접적인 해는 안 끼쳤으니까, 여기까지도 넘어갈 수 있어. 죄에 비해 너무 과한 처벌은 질서를 흐트러트리고 조직을 붕괴시킨다. 그래, 그렇게 배웠으니까. 참아야지. 그래, 참아야 하는 거야."
작은 검의 옆면으로 스스로 머리를 탁탁 두드리며 기사들의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꼬마.
그러면서 일그러진 표정으로 과격하게 중얼거리는 말은 그 귀여운 외모와 대비되어 기괴해 보였다.
그러다가.
"그래도 말이야...."
로이더의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갑자기 히죽 웃는 리안의 모습은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그 개자식들이.... 형님이 토벌 나간 몬스터 무리 규모까지 일부러 축소 보고를 했다네? 이건 명백히 해를 끼친 거잖아? 그치? 이건 그럼 안 참아도 되는 거잖아? 그렇지 않아, 로이더 경?"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어디서 들킨 걸까.
"뭐,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그렇지 펄슨?"
"마, 맞습니다 공자님! 설마...."
다급해진 로이더는 말까지 더듬으면서도.
'그래 봤자, 그 사소한 일로 처벌할 수 있는 근거는 없어. 그래, 아무리 영주라도 그럴 수는 없지.'
속으로는 당연한 상식을 되뇌며 자꾸만 움츠러들려는 마음을 다독였다.
그래, 아직 어린 이공자가 뭘 어쩌겠는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일부러 그랬을 리가 없잖습...."
푸우욱.
"...아아악!"
그 순간, 리안의 서늘한 검날이 그의 다리에 틀어박혔다.
"공자님!?"
"로이더 경!"
"고, 공자님. 이러시면...!"
"전부 시끄러! 래리, 반항하는 놈들은 그대로 족쳐!"
"예, 공자님!"
쿵.
래리가 대검을 치켜들고 리안의 옆으로 나서자, 다가오던 평기사들이 움찔하며 다시 물러섰다.
평기사들 중에서 가장 어리지만 압도적인 실력을 가진 래리의 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그들 역시 리안을 뭘 어찌하겠다는 뜻은 없었으니까.
물러서는 기사들의 모습을 훑은 리안은 서늘한 표정으로 로이더의 허벅지에 박아 넣은 검날을 비틀었다.
"끄아아악! 고, 공자님! 잘못, 잘못했습니다!"
비명을 지르는 로이더. 그리고 그 옆에 서서 파랗게 질린 펄슨의 얼굴을 보며 리안은 차갑게 웃었다.
"아무리 용병 출신이라 해도, 인성에 조금 문제가 있다 해도.... 그 실력이 영지에 도움이 된다면 거둘 만하다. 아버지의 말씀이지. 나도 그건 동의해. 하지만...."
콰직.
"끄아악! 요, 용서를...."
조금의 자비도 없이 검날을 과격하게 뽑아 내자 핏줄기가 마구 솟구치는데.
리안은 그 핏줄기를 피하거나 바닥을 나뒹구는 로이더를 살피지도 않은 채, 붉어진 얼굴로 검을 들어 올렸다.
"내 기준에, 너희들이 한 짓은 인성에 조금 문제 있는 게 아니거든?"
시뻘건 피를 뒤집어쓴 채 서늘하게 웃는 모습.
그 누구보다 인성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 어린 공자의 말이었지만, 기사들은 모두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그리고 펄슨은 창백한 얼굴로 그 거대한 다리를 굽혀 무릎을 꿇었다.
쿵.
"고, 공자님! 요, 용서를...."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작은 검이 그의 옆구리에 박혀 들었다.
푸우욱.
"끄아악!"
"죄를 지었으면, 처벌을 받아야지. 안 그래?"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차갑게 웃으며 칼을 꽂아 넣은 꼬마의 모습.
하지만 그 엄청난 통증 속에서도, 펄슨은 절묘하게 내장을 피해 틀어박힌 검날의 방향을 느낄 수 있었다.
"끄으으...."
우연일까? 아니, 그럴 리가.
코앞에서 마주친 푸른 눈은 이 와중에도 놀랍도록 차갑기만 했다.
즉, 이 '괴물'은 애초에 자신들을 죽일 생각이 없는 것이다.
"끄으윽. 죄, 죄송합니다."
"뭐, 나는 좋아. 너희가 이런 동기를 계속 만들어 주면 나도 당당히 피를 볼 수 있으니까. 다만...."
콰득.
"끄아악!"
"다음에는 이 정도로 안 끝나겠지. 알아들었나, 펄슨?"
"끄으윽! 예, 예!"
"로이더!?"
"끄흡! 예, 예! 알아들었습니다!"
허벅지에서 터져 나온 핏줄기를 정신없이 틀어막던 로이더마저 기겁을 하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 앞에서.
푸슉.
펄슨의 옆구리에 박힌 검을 뽑아 낸 리안이 이내 두 죄인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물론 나는, 너희가 다음번에도 이런 짓을 저질렀으면 좋겠어. 무슨 말인지 알려나?"
냉막한 얼굴에 그어진 한 줄기 섬뜩한 미소에 둘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리안의 얼굴은 다시 차갑게 굳었다.
"쓸모를 증명해라, 쓰레기들. 내가 너희를 죽여 버리지 않도록 말이야."
챙그랑.
"정리해, 래리."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작은 검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진 리안은 그대로 연무장 밖으로 나서려다가, 이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아, 그리고 오늘 일은 전부 비밀인 거 알지?"
"...예?"
"몰라? 만약 오늘 일이 어디선가 새어 나가서 아버지나 어머니, 형님께서 알게 되시면...."
리안의 섬뜩한 눈빛이 평기사들을 슥 훑는 순간.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어, 어? 로이더 경과 펄슨 경의 대련이 좀 과했습니다."
"구, 굳이 피를 볼 거까지야! 너무 과격하게 대련하셨네요."
즉석에서 한 편의 시나리오가 뚝딱 만들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돌아선 리안은, 준비된 천으로 자신의 몸에 묻은 피를 꼼꼼히 닦아 낸 뒤 연무장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가운 얼굴을 마주했다.
"형님~!"
"으.... 리안."
"역시 예절 교육은 힘드시죠?"
"말도 마라. 체질에 너무 안 맞.... 잠깐, 뭐야. 웬 피 냄새?! 어떤 놈이 감히...!?"
갑자기 표정을 구기고 자신의 어깨를 잡으며 정색하는 형의 모습을 보고서야 리안은 아차 싶었다.
형님이 냄새에 유난히 민감하다는 걸 깜빡한 것이다.
"아, 연무장에서 기사들 대련을 봤어요. 근데 피가 좀 많이 튀어서...."
"대련? 근데 피가 튀어? 그것도 이렇게 많이?"
"로이더 경과 펄슨 경이 좀 많이 다쳤더라고요."
"아.... 거, 적당히 좀 할 것이지. 아님 나를 부르든가."
"형님은 이제 평기사들과 대련할 레벨은 아니잖아요."
"그냥, 스트레스가 쌓여서.... 크흠, 아니다. 그래, 너도 기사들 대련은 위험하니까 좀 떨어져서 보고."
"예, 조심할게요."
그렇게 방긋 웃는 리안에겐, 연무장에서 보인 그 살벌한 소년의 모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11화. 카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