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후우."
욕탕에 몸을 담근 강엽이 길게 한숨을 흘렸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간 몸에 쌓인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노예상인에게 잡혀서 산장에 팔리고, 흡혈귀가 되고, 중경에 왔던 과정을 돌이켜보면 참 용케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금부터가 진짜 문제인데.'
당장 피를 구하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은 문제였다.
흑포무인을 죽이고 놈의 피를 흡입한 덕에 한동안은 잘 버텼지만 어느덧 그것도 한계에 달했다.
오는 길에 산짐승 몇 마리를 잡아서 피를 마셔봤지만 흑포무인의 피를 마셨을 때와 같은 효과는 없었다.
짐승의 피도 효과가 있다면 심산유곡에 은거해서 살 텐데, 사람의 피만 먹어야 한다니.
'도시는 사람의 피를 구하기 가장 좋은 곳이야. 하지만 무턱대고 사람을 잡으면 소문이 나. 그럼 모산혈조의 귀에도 들어갈 수 있고... 그렇지 않아도 정체를 들킬 가능성이 커.'
사람의 피를 빠는 괴물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그걸 잡으려 하는 사람도 있을 터.
협객을 자처하는 무림인들이 찾아온다고 상상하면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그 꼴을 보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소문이 퍼질 구실을 만들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면서 사람의 피를 구하는 것이 어디 쉽겠나.
정 안 되면 거지들에게 돈 좀 쥐여주고 피를 받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것도 안 좋은 소문이 나는 것은 매한가지일 터.
생각하면 할수록 조건이 까다로웠다.
'사람의 피를 구할 수 있고, 밤에 할 수 있으며, 결정적으로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일.'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칼밥을 먹고 사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강호인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이 빌어먹을 흡혈귀의 삶이 그를 막다른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게다가 칼밥을 먹고 산다고 해도 어디에서 일거리를 찾는단 말인가?
'모르면 물어볼 수밖에.'
강엽은 점소이를 불렀다.
"호, 혹시 물이 더 필요하십니까요?"
점소이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강엽의 몸에 뗏국물이 그득했던 탓에 물을 여러번 갈았던 것이다.
점소이가 간절한 눈빛으로 제발 해방시켜달라고 호소하자 뻔뻔해지기로 한 강엽도 살짝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먼산을 돌아봤다.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부른 거니까 겁먹지 마라."
옆에 둔 전낭에서 은전을 꺼내자 점소이가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안색이 밝아졌다.
"어, 얼마든지 물어보십쇼!"
"중경에서 얼마나 살았지?"
"태어난 곳은 좀 멀리 떨어진 산골마을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쭉 여기서 살았습니다요."
"그럼 중경에 대해 빠삭하겠군."
"구석구석 모르는 데가 없습죠. 쇤네가 이래봬도 점소이계의 마당발입니다요!"
"오호라."
강엽이 입가를 올렸다.
다소 과장이 섞였다 할지라도 이만큼 자신감이 넘친다면 아는 것이 많겠다 싶었다.
"중경에 무림인을 고용하는 곳이 있을까?"
"무림인... 말씀입니까요?"
"그래."
"표국이나 상단이 있긴 합지요."
강엽이 고개를 내저었다.
표국이나 상단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밤에 할 수 있는 일이어야 했다.
하물며 피를 구해야 하는데, 표국이나 상단에 들어간다고 매일 싸울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다른 건 없고?"
"그, 글쎄요. 쇤네도 잘...."
"마당발치고는 모르는 게 많은걸."
강엽이 은전을 넣으려고 하자 점소이가 기함했다.
"자, 잠깐만요! 방파! 흑도방파도 있습니다!"
"자세히 말해봐."
"...정말로요?"
점소이가 떨떠름해했다.
흑도라면 대개 뒷골목의 무림을 일컫는 말인데, 흑도방파치고 제대로 된 곳은 찾기 힘들었다.
흔히 백도 무림인들은 흑도와 얽히는 것만으로도 오물이 묻은 것마냥 불쾌해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말하지 않은 건데....
"정말로 괜찮으니 말해봐라."
"그, 근자에 여러 흑도방파들에서 칼잡이들을 구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요. 흑도방파들끼리 영역싸움을 한다고 하던데... 좀 큰 곳은 낭인전(浪人殿)의 낭인들을 고용한다는 소문도 돌구요."
"낭인전?"
"모르십니까요?"
점소이가 눈을 껌벅였다.
마치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표정에 강엽은 살짝 울컥했다.
외인이 중경에 있는 무림 문파를 모를 수도 있지, 그걸 모른다고 저런 표정을 짓는단 말인가?
"내가 멀리서 와서 그래."
"하지만 쇤네가 듣기로는 낭인전은 대륙 전역에 분타가 있다고...."
"...."
강엽의 눈매가 얇아지자 뒤늦게 분위기를 살핀 점소이가 식은땀과 함께 비굴한 웃음을 흘렸다.
"헤헤헤! 다른 지역에선 낭인전이 유명하지 않나 봅니다."
"됐고, 낭인전에 대해서나 말해봐라."
점소이의 말은 이러했다.
낭인전은 이름 그대로 낭인들이 모이는 방회인데, 일정량의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낭인들에게 일거리를 알선해준다고 한다.
"중경뿐만 아니라 사천의 웬만한 도시들엔 낭인전의 분타가 하나씩 있습죠. 거기선 낭인들 실력에 맞는 일거리를 준다고 합니다."
"일종의 거간꾼이로군. 보수는?"
"객잔에 들르는 낭인들 말로는 꽤 쏠쏠하다던데요."
일거리를 입맛대로 고를 수 있고, 매번 싸움에 나설 수 있으니 강엽의 입맛에 딱 맞았다.
"어디 가면 찾을 수 있지?"
* * *
바로 낭인전을 찾지는 않았다.
목욕을 끝냈을 때는 막 동이 터오를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강엽은 창문을 모두 닫아 어두컴컴해진 방에서 몸상태를 점검했다.
흑포무인을 죽인 이후로는 사람을 습격하지 않았기에 피를 거의 마시지 않았다.
흑포무인을 죽이고 남은 피를 물주머니에 담아서, 갈증이 날 때마다 조금씩 홀짝거린 게 전부였다.
사실 피는 오래되면 굳거나 썩기 마련이지만, 혈공진기를 흘려넣으면 피가 신선하게 유지되었다.
'아마 혈공진기에 피의 성질에 간섭하는 특성이 있는 거겠지만... 나도 이건 잘 모르겠군.'
그러나 조금씩 아껴가며 마신 피도 중경을 목전에 뒀을 무렵엔 완전히 바닥나버렸다.
'하루는 버틸 만해. 하지만 그게 이틀, 사흘이 되면... 스스로를 통제하기 힘들어지겠지.'
그러니 오늘밤엔 반드시 낭인전을 찾아가야 한다.
밤이 오자마자 객잔을 나선 강엽은 곧장 남쪽으로 향했다.
점소이의 말에 따르면 중경에 있는 낭인전은 남쪽 외곽의 유흥가에 자릴 잡았다.
머지않아 유흥가에 도착한 강엽은 온갖 군상들이 모인 불야성을 둘러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칼을 찬 무림인들과 호객을 하는 장사꾼들, 남정네들을 꾀는 기녀들, 그 꾀임에 얼굴을 붉히는 순진한 유생들, 행인들의 전낭을 호시탐탐 노리는 소매치기까지.
마치 세상사 모든 군상들을 한 곳에 모아둔 것 같지 않은가.
하나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엔 문제가 생기기 마련.
유흥가가 워낙 복잡한 탓에 길이 헷갈린 강엽이 상인에게 정확한 방향을 물으려고 했을 때였다.
"이 새끼! 눈깔 똑바로 안 뜨고 다녀!?"
칼을 찬 무림인과 어깨를 부딪쳤다.
'이건 뭐 하는 병신이냐?'
조금 어이가 없었다.
세게 부딪친 것도 아니고 살짝 닿은 걸로 욕을 퍼붓다니.
아무리 봐도 일부러 시비를 건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지만, 같이 다니는 남자들까지 덩달아 당황했다.
"이봐. 의뢰 뺏겨서 화난 건 이해하는데 애꿎은 사람한테 화풀이하는 건 좀 아니잖아."
"미안하우, 형씨. 대신 사과할게. 이 친구가 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흥분했수다."
오죽하면 동료들이 말릴까.
흥분해서 강엽에게 달려들려고 했던 남자는 동료들한테 붙잡히고 나서도 한동안 씩씩거렸다.
그때 강엽이 불쑥 물었다.
"낭인전인가?"
말린 사람의 입에서 의뢰라는 말이 나왔다.
이들의 무기와 복장이 제각각이고, 근처에 낭인전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아마도 낭인전 소속일 터.
"...그건 왜 묻지?"
"낭인전을 찾고 있는데 길을 몰라서."
"아, 의뢰인인가 보군. 낭인전은 저쪽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돌아 건물 세 개를 지나치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청송객잔이라고 있어. 바로 거기야."
강엽의 차림새가 단촐한 데다 무기도 휴대하지 않아서 의뢰를 맡기러 왔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굳이 정정해줄 이유가 없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가려는데 조금 전에 시비를 걸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냥 우리한테 맡기면 되지 않나?"
"...?"
강엽의 걸음이 뚝 멈추었다.
애당초 의뢰주도 아니니 맡길 의뢰도 없지만,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이다.
다른 낭인들도 기함했다.
"그게 뭔 소리야!"
"왜, 내가 못할 말이라도 했어? 분타주 그놈이 맨날 거지같은 의뢰만 주잖아!"
"그야 우리가 신참이니까 그렇지. 좀만 참아봐. 우리도 상위 의뢰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이런 씨발, 잘도 받겠다!"
아무래도 남자는 분타주의 일처리에 불만이 있는지 분타주를 잘근잘근 씹었다.
강엽이 혀를 차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의뢰인이 아니라서. 일거리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을 것 같다."
"뭐?"
황당해하는 낭인들을 뒤로한 채 강엽은 행인들 틈바구니를 빠져나가면서 사라졌다.
바로 앞에 있던 사람이 바람처럼 사라지는 광경에 거리에 남은 낭인들은 얼이 빠졌다.
3화. 낭인 (2)
작고 허름한 객잔이었다.
건물을 둘러본 강엽은 입구 위쪽에 붙은 청송객잔(靑松客棧)이라는 현판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묵은 데보다 더한 것 같은데....'
강엽이 묵은 객잔도 그리 정갈하지는 않지만, 청송객잔의 외관을 보고 있노라면 비교하기가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청송객잔은 칠이 벗겨진 것은 물론이요, 위치도 안 좋아서 햇볕이 전혀 들지 않을 것 같았....
'잠깐. 햇볕 안 드는 건 좋은 거 아닌가?'
강엽의 표정이 얼떨떨해졌다.
지금 머무르는 객잔의 방도 그늘진 구석에 있지만, 볕이 아예 안 드는 것은 아니었다.
창문을 닫고 피풍의로 가려도 해가 가장 높이 뜬 중천 무렵엔 볕이 강하게 들이쳤다.
한데 청송객잔의 건너편에는 고각대루가 앞을 막고 있고, 삼면에도 비슷한 높이의 건물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이런 구조라면 볕이 들이칠 여지가 없다고 봐야 했다.
'...객잔, 옮겨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웬 거구의 사내가 주렴을 헤치고 나오다 강엽을 보고 멈칫했다.
눈을 가늘게 뜬 거한이 물었다.
"의뢰를 맡기러 왔소? 아니면 받으러 왔소?"
"후자입니다만."
"...들어오시오."
"혹시 분타주 되십니까?"
"객잔 점소이요."
"...."
강엽은 점소이를 자칭하는 거한의 험상궂은 면상에서 그 어떤 진상손님이든 다소곳이 만들 수 있는 패기를 느끼고 전율했다.
뭔 점소이가 곰도 때려잡게 생겼단 말인가?
"분타주님, 손님 오셨소."
"손님?"
"의뢰를 받으러 오셨다던데."
"저놈이야?"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대머리 남자였다.
방금 주방에서 나왔는지 헝겊으로 물기를 닦은 분타주는 강엽의 시선이 자신의 맨들맨들한 머리로 향했다는 것을 알고 발끈했다.
"탈모 아니다! 이건 민 거라고!"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젊은 나이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남자를 잠시 측은하게 본 것은 사실이었지만.
분타주가 볼멘소리를 중얼거리는 사이 강엽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이들을 빠르게 훑었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않더라도 슬금슬금 눈알을 굴리거나 귀를 쫑긋 세우는 게, 새로 들어온 얼굴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의뢰를 받으러 왔다고?"
"...그래."
초면에 반말을 지껄이기는 좀 그렇지만, 나이도 비슷하고 상대가 먼저 말을 놨으니 괜찮지 않을까.
다행히 분타주는 사소한 걸로 꼬투리를 잡는 성미는 아닌지 시원하게 넘어갔다.
"낭인으로 일한 적은 있고?"
"없다."
"하아, 막 출도한 놈이었나. 이 바닥이 얼마나 험한지 아냐?"
"내 인생보다 험하진 않겠지."
아무렴 낭인으로 사는 게 험하더라도 지난날 겪은 지옥에 비할까.
강엽의 입가에 메마른 웃음이 번지자 분타주가 말없이 얼굴을 찡그리더니 코웃음을 쳤다.
"착각하지 마라, 애송이. 자기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냐? 내가 이 바닥에서 일하면서 너 같은 놈들 얼마나 많이 봤는 줄 알아?"
"나 같은 놈 보지는 못했을 텐데."
흡혈귀가 발에 채일 만큼 많지 않고서야.
물론 강엽도 분타주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못 미더운 건 알겠는데, 적어도 능력을 증명할 기회는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증명할 건데?"
"동전 있나?"
"나참."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도 분타주는 주머니에서 철전 한 닢을 꺼내 던졌다.
강엽은 철전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웠다.
악력을 이기지 못한 철전이 엿가락처럼 구부러지자 분타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철전이 얇다 해도 동네 무관에서 한두 수 배웠다고 나도 무림인입네 하고 뻐기는 놈들 따위가 할 수 있는 짓거리가 아니었다.
"말라깽이처럼 생긴 놈이 힘은 장사구만. 이름이 뭐냐, 애송이?"
"강엽."
"나는 장경이다. 저기 있는 점소이놈은 전강이라는 녀석이지. 낭인전 중경 분타는 우리가 전부라고 보면 돼."
엄밀히 말하면 낭인들은 낭인전에 속했다기보다는 계약 관계라고 보는 게 맞았다.
여타 무림 문파들과는 달리 낭인전은 가입과 탈퇴가 자유롭고, 조건 또한 없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신입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아. 뭘 믿고 신입에게 대뜸 중요한 일거리를 맡기겠어?"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쟁자수."
간혹 갑자기 일감이 폭증한 작은 표국들이 낭인전에 임시 쟁자수를 의뢰하는 경우가 있었다.
임시라서 계속 고용할 필요가 없으니 품삯을 아낄 수 있고, 유사시에는 칼을 보탤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웬만한 표사들만큼 일당을 쳐주기 때문에 따로 하는 일이 없다면 단기의뢰로 나쁘지 않았다.
다만 당장 오늘 밤에 마실 피가 급한 강엽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그런 식으로 표국에 들어갈 거였다면 낭인전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개인사정 때문에 오늘 밤부터 일하고 싶은데."
"오늘 밤부터?"
"위험한 일이라도 상관없다."
"...쩝, 죽어도 난 모른다."
머리를 벅벅 긁은 장경이 어디론가 가버리더니, 웬 하얀 종이를 들고 나타났다.
"원래 일을 맡은 놈이 앓아누워서 못 나가게 됐거든. 줄 테니까 한번 읽어봐."
"의뢰 내용이군. 소가방이란 곳의 의뢰인가? 하명패라는 다른 흑도방파와 영역다툼을 하는데 쓸 만한 낭인을 한 명 빌려달라... 보수는 은전 열 냥."
"오호라, 까막눈은 아니군. 가산점 십점을 주마."
"가산점?"
"낭인전의 낭인들은 등급이 있거든. 의뢰를 많이 할수록 점수가 쌓이지. 근데 낭인들 중엔 지 이름도 쓸 줄 모르는 천치들이 많아. 이에 낭인전주이신 낭왕께서 탄식하며 가로되, 글을 깨우친 놈들은 가산점 십점을 주라 하셨지."
"...."
등급이 있다는 건 그렇다 쳐도 글을 안다고 가산점을 받을 줄이야.
강엽이 할 말을 잃고 침묵하자 장경이 낄낄거렸다.
"십점이면 웬만한 의뢰 한 건이지. 축하한다. 칼도 휘두르지 않고 십점을 벌었구만."
"등급이 높아지면 뭐가 좋지?"
"의뢰비가 높아지지. 의뢰 건수도 늘어나고. 낭인이라고 괄시받지 않고 대접도 받고. 하지만 가장 좋은 건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거다."
"...무공을 배운다고?"
"제대로 무공을 익힌 낭인놈들이 얼마나 되겠냐? 하지만 자비로우신 낭왕께선 공적만 쌓으면 누구나 무공을 익힐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지. 가장 낮은 등급만 되어도 꽤 괜찮은 무공을 배울 수 있을 거다."
그러려면 의뢰를 완수해야 한다.
강엽이 낭인전에 들어올 수 있는지는 첫 의뢰의 성패에 달렸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군. 참고하지."
의뢰를 받았으니 완수하는 일만 남았다.
종이를 챙긴 강엽이 몸을 돌리자 장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가야 할지는 알고?"
"모른다. 길잡이를 고용할 생각인데."
"자, 다들 들었지? 누가 저 애송이에게 길을 알려줄 거냐!"
"뭐?"
강엽이 황당해하며 고개를 돌리자 낭인들이 밥 먹다 말고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은전 두 냥!"
"이 양심뒤진 씹새야! 뭔 길안내 가지고 두 냥이나 처받아!? 이보쇼, 형씨! 한 냥만 주이소!"
"난 반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멍한 표정을 된 강엽의 어깨를 장경이 툭툭 쳤다.
"길안내도 의뢰니까. 이번엔 네가 의뢰주지. 목적지가 멀진 않으니 반냥이 적당하다고 본다."
"...."
결국 강엽은 의뢰를 받기에 앞서 의뢰를 맡기는 신세가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길을 모르는 이상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 * *
강과 접한 포구엔 물건을 보관하기 위한 대형 창고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강엽이 받은 의뢰 장소는 그중 하나였다.
"자, 여기가 사빈로요."
여기까지 안내한 낭인이 손을 내밀었다.
강엽이 은전 반냥을 올려두자 낭인은 짐짓 과장된 기색으로 감사를 표했다.
"이용해주셔서 고맙소, 손님! 좋은 밤 보내쇼!"
"...그쪽도."
낭인과 헤어진 뒤에 좀 걷고 있자니 모닥불을 쬐고 있는 칼잡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칼과 몽둥이 등으로 무장한 그들은 강엽이 오자 인상을 험악하게 치떴지만 그걸로는 강엽의 발걸음을 늦출 수 없었다.
"소가방인가?"
"그러는 그쪽은?"
"낭인전에서 왔다."
의뢰서를 꺼내서 보여주고 나서야 소가방의 칼잡이들은 경계를 풀고 무기를 내려놓았다.
수염이 수북하게 난 털복숭이 사내가 이죽거렸다.
"반갑수다. 내가 소가방주요. 오는 길이 복잡했을 텐데 용케 찾아오셨구만."
"...어떻게든 방법이 있더군."
길을 몰라서 길잡이를 고용했다는 말은 차마 말하지 못하고 목구멍으로 삼켰다.
"의뢰 내용이야 대충 아시겠지만 오늘 밤 하명패 개잡놈들과 싸울 거요. 아마 쪽수는 대충 비슷할 텐데, 그짝도 고수를 고용했을 테니 마음 단단히 잡수쇼."
소가방이나 하명패나 뒷골목 하류인생들의 방파였다.
가진 재산도 넉넉지 않은 삼류방파들이 데려온 고수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겠나.
숙지해야 할 사항을 모두 들은 강엽은 소가방과는 외따른 곳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오늘 하루 충분히 휴식을 취한 덕에 흡혈을 하지 못했음에도 몸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싸우는 중에 흡혈욕이 폭주하는 일만 없다면 첫 의뢰는 무사히 마칠 수 있을 것이다.
"형님, 저놈 정말 믿을 수 있을까요? 멸치처럼 생겨가지고 어째 영 믿음이...."
"쓰벌, 이제 와서 별 수 있것냐. 이미 돈까지 냈는데... 저눔아가 잘 싸우길 빌어야지."
소가방의 칼잡이들이 수군거렸다.
강엽이 비쩍 마른 몸으로 잘 싸울 수 있을지, 혹시 그들이 사기를 당한 건 아닌지 걱정됐다.
흡혈귀의 초감각을 지닌 강엽은 당연히 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멋대로 떠들도록 놔뒀다.
어차피 싸움이 벌어지면 저런 소리는 쑥 들어갈 테니 굳이 지적할 필요가 없었다.
"온다."
수십 개의 기척들이 다가왔다.
강엽이 벌떡 일어나서 시선을 멀리 향하자 소가방의 칼잡이들도 자연스럽게 그가 바라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들이 도착했다.
"하하! 오랜만이구나, 소가야!"
저편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터졌다.
"맹가놈이 기가 살았구만."
소가방주가 콧방귀를 킁 뀌었다.
얼마나 대단한 고수를 데려왔는지 두고 보자는 투였다.
하지만 막상 하명패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근육질의 거한이 하명패주 옆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저 덩치는 대체 뭐여?"
"우리도 어렵게 모신 분이지. 인사드려라, 거산중권(巨山重拳) 어른이시다."
"음, 기억이 날 듯 말 듯...."
"이런 무식한 놈을 봤나. 석년에 중경 뒷골목을 피로 물들였던 고수 말이다."
"...!"
그제서야 기억이 난 건지 소가방주와 칼잡이들의 얼굴이 물에 빠져죽은 시체마냥 창백해졌다.
물론 이제 막 무림에 발을 들인 강엽은 거산중권의 이름을 들어도 큰 감흥이 없었다.
생각보단 꽤 유명한 고수가 왔나 보다 여길 뿐.
"저자가 누구지?"
"예, 예전에 악명높았던 흑도의 고수요. 이 바닥에선 유명한 양반이었는디 어느 날 돌연 사라졌수."
"그런데 몇 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는 거군."
"내 기억이 맞다면 객잔에서 웬 공자와 시비가 붙어 그와 호위들을 죽여버린 일로 현상금이 붙었수. 부잣집 아들이었나 그랬을 텐데...."
한마디로 수배자라는 뜻.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거산중권은 실로 거만한 얼굴로 수염을 쓸며 거드름을 피웠다.
"거산중권 어르신이 오신 이상 싸움은 해보나 마나지. 얌전히 말할 때 우리 밑으로 들어와라, 소가야."
하명패주가 능글맞게 입을 놀렸음에도 소가방주는 붉으락푸르락 변할 뿐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평생을 일군 방파를 원수 같은 놈에게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손발이 덜덜 떨렸다.
"항복하긴 일러.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지."
강엽이 나서자 장내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됐다.
다른 이들을 전부 무시한 강엽은 곧장 거산중권에게 시선을 돌렸다.
"현상금이 붙었다고?"
"네놈은 누구냐."
"소가방에 고용된 낭인이다."
"낭인이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누가 하룻강아지인지는 견주어보면 알 수 있겠지. 말싸움할 시간이 아깝다. 덤벼."
어차피 목적은 흡혈이었다.
오늘밤을 넘기려면 소가방주가 항복한다고 해도 싸워야 한다.
다만 앞서 현상금을 언급한 것 때문에 칼잡이들은 강엽이 현상금에 눈이 멀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강엽은 소가방의 칼잡이들이 찢어죽일 듯이 노려보는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3화. 낭인 (3)
거산중권은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중경을 오래 떠나긴 했구나. 한낱 낭인놈이 감히 내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다니."
물론 그 역시 뒷골목에서 굴러먹은 흑도 나부랭이였으니 낭인보다 더 나을 것은 없는 처지였다.
하물며 목에 현상금까지 걸렸으니 백주에 당당히 다기니는커녕 현상금을 노리는 낭인들이나 정파의 협객들에게 쫓기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나 거산중권 역시 아무 생각도 없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중경을 떠나있는 동안 그의 무공은 더욱 깊어졌다.
지금이라면 과거 자신을 죽이겠다고 쫓아왔던 놈들을 모조리 피떡으로 만들어줄 자신이 있었다.
"네놈의 목을 따는 것부터 시작하마. 이후 지난날 날 죽이겠다고 쫓아왔던 놈들을 찾아갈 것이다!"
흉흉한 살기가 바람을 타고 쏟아지자 소가방의 칼잡이들은 물론 한편인 하명패의 칼잡이들까지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덤벼라, 애송이! 네놈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이 거산중권이 뼈에 새겨줄 터이니!"
그래도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선공은 양보한 모양이다.
강엽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럼 사양 않고 가지."
강엽이 두 팔을 늘어뜨렸다.
다리를 벌린 채 오른손은 중단에 올리고, 왼손은 옆구리에 붙인 거산중권에 비하면 편한 자세였다.
하지만 한 걸음을 내딛자 분위기가 변했다.
거산중권은 마치 굶주린 맹수가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낸 듯한 느낌을 받고선 미간을 찌푸렸다.
찰나 강엽의 신형이 사라졌다.
"헉!"
칼잡이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아무도 강엽의 움직임을 쫓지 못했다.
거산중권은 깜짝 놀라서 선공을 양보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도 잊고 주먹을 내지를 뻔했다.
그 약간의 시간차가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강엽의 손톱은 땅을 박차는 것과 동시에 한 뼘이나 길어졌고, 거산중권이 가까스로 강엽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아갔을 땐 이미 코앞까지 온 뒤였다.
거산중권이 팔뚝을 교차시켜 급소를 가렸다.
스가악!
열 줄기의 빛살이 밤하늘을 찢어발겼다.
"크으읍!"
화끈한 통증에 거산중권의 눈에 핏발이 섰다.
간발의 차로 방어했기 때문에 강엽의 손톱은 그의 몸통에 닿지 않았으나, 공격을 막은 팔뚝은 뼈가 드러날 만큼 깊은 상처를 입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죽었으리란 생각이 들자 체면이고 뭐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죽어랏!"
필사의 의지가 담긴 일권이 허공을 꿰뚫었다.
강엽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느리군."
목내이나 모산혈조, 빙오선은 말할 것도 없고 아설하나 흑포무인도 거산중권보다 훨씬 빨랐다.
그들에 비하면 거산중권은 거북이였다. 흡혈귀의 초감각이라면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을 정도로.
허공으로 뛰어오른 강엽이 거산중권의 배후를 점하면서 손톱을 내찔렀다.
순간 아찔한 예감을 느낀 거산중권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고, 그 위로 강엽의 손톱이 들이닥쳤다.
거산중권이 한 바퀴 돌면서 다리를 내질렀다. 주먹질이 특기였지만 발길질도 예사롭지 않았다.
한번 접었다 핀 다리가 채찍처럼 휘어지며 마치 칼날을 내치는 것 같은 예기를 동반했던 것이다.
'이건 피해야 한다.'
흡혈귀의 재생력이 있으니 맞아도 죽지 않겠지만, 이 자리엔 수많은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괜히 재생력을 드러내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강엽이 훌쩍 뛰어오른 찰나.
거산중권의 발끝에서 터진 발경 경파가 작렬했다.
콰아아아앙!
경파를 맞은 건물 벽돌들이 산산조각 박살나서 떨어졌다.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말로만 듣던 거산중권이 이토록 고강할 줄은 몰랐거니와, 거산중권에게 상처를 입힌 강엽의 무공은 아예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었다.
"소가방주!"
입을 헤 벌린 소가방주가 강엽의 일갈을 듣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 말씀하십쇼!"
눈앞에서 강엽의 무공을 봤기 때문에 소가방주의 말투도 달라졌다. 원래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것이 흑도의 생리였다.
"내가 싸울 동안 보고만 있을 건가?"
그러면서 하명패주를 가리키자 소가방주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면서 애병인 두 자루의 식칼을 탕탕 부딪쳤다.
거산중권이 나타났을 때야 이름값에 압도되어 벌벌 떨었지만 강엽이 그를 상대한다면 걱정할 게 없었다.
"아그들아, 하명패 잡것들을 싹 쓸어버려라!"
"와아아아아아!"
소가방의 칼잡이들이 용기백배하여 달려들었다.
강엽이 예상 외로 선전하는 모습이 그들로 하여금 잊고 있던 악과 깡을 되찾게 해주었다.
소가방이 달려오는 광경을 벌레 씹은 표정으로 본 하명패주가 마주 외쳤다.
"우리도 질 수 없지. 전원 돌겨어억!"
하명패의 함성도 소가방에 지지 않을 만큼 우렁찼다.
창고 건물들 사이로 양측의 패거리가 충돌하고 무기를 부딪치자 여기저기서 악다구니와 비명이 터졌다.
두 세력이 얽히고설킨 광경을 힐끔거린 강엽이 고개를 돌렸다.
"애송이놈이 감히...!"
어느새 그와 동일한 높이에 올라온 거산중권이 까득 이를 갈고 있었다.
강엽이 피식 웃었다.
"이빨 닳겠군. 나이 들면 어쩌려고?"
"닥쳐라!"
거산중권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확대되었다.
하체에서부터 끌어올린 발경을 담은 쇳주먹이 강엽의 머리를 노렸다.
고개를 틀어 주먹을 피한 강엽이 눈매를 얇게 떴다.
'이건 어떻게 하는 거지?'
목내이에게 혈공진기를 물려받긴 했지만 경혈이나 경맥의 원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강엽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아설하나 흑포무인도 무기만 달랐을 뿐 비슷한 수법으로 그를 괴롭혔었다.
강엽은 의뢰를 마치면 자신이 모르는 것들을 꼭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장은 눈앞의 거산중권을 치우는 게 먼저였다.
투학!
밤하늘에 핏줄기가 튀어올랐다.
"크억!"
등짝이 찢긴 거산중권이 이를 물었다.
아무리 그가 무공으로는 강엽과 비교도 안 되는 경지에 올랐어도 맞히지 못하면 무소용이었다.
반면 강엽은 자세는 어설퍼도 흡혈귀의 신체능력으로 공방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싸우면서 상당량의 혈공진기를 쓰긴 했어도 아직까진 그럭저럭 여유가 있는 상태였다.
지난날 흑포무인을 죽이고 얻은 선천지기가 그만큼 컸던 것이다.
'주먹을 뻗는 자세, 발을 딛는 자세, 호흡, 근육의 움직임... 그 모든 게 어떤 규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강엽은 그가 내뱉는 호흡을, 근육의 움직임과 자세를 뇌리 한켠에 단단히 새겨두었다.
거산중권의 무공은 다채롭진 않아도 견실하고 단단했다.
벌써 수십 차례나 권각을 질렀음에도 지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놈, 진지하게 싸우지 못하겠느냐!"
강엽의 의도를 거산중권이라고 모를까.
그는 강엽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수치심에 휩싸였다.
강엽이 알 바는 아니었다.
"더 없나?"
"뭣이?"
"더 써먹을 만한 무공이 없냐는 말이다. 뭐랄까, 아까부터 너무 같은 동작이 반복되던데."
"...!"
"여러 동작을 섞어 쓰는 건 좋았다. 같은 동작을 조금 다르게 쓰는 것도 좋았고. 내 빈틈을 유도하려는 건지 속임수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았어."
"...."
"그런데 그게 전부인가?"
"이, 이놈...!"
세상에 이런 굴욕이 어딨을까.
낱낱이 파훼당한 거산중권의 얼굴은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벌게졌다.
몇 년간 뼈를 깎는 노력을 쏟아부은 그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도발이었다.
"이 육시를 할 놈이... 죽여버리겠다!"
걸레짝이 된 옷가지를 찢어버리자 탄탄한 대흉근과 뚜렷하게 갈라진 복근이 드러났다.
거산중권이 숨을 깊게 들이쉬자 근육이 부풀고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핏줄이 뺨을 타고 눈가의 동자료혈(瞳子?穴)까지 올라가자 정수리에서 허연 김이 올라왔다.
"이것만은 쓰고 싶지 않았거늘... 네놈이 명을 재촉했으니 죽어도 날 원망하지 말거라."
처음부터 쓰지 않은 것은 부작용 때문이었다.
잠력을 격발시킨 대가로 며칠간 앓아누워야 하기에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중경을 떠난 동안 기연을 만났지. 이걸 쓴다면 원수놈들을 죽일 때나 쓸 줄 알았다."
단지 몸집만 우락부락해진 게 아니라 내뿜는 기세가 맹수처럼 난폭해졌다.
강엽도 더 이상은 여유를 부릴 수 없다는 걸 알고 거산중권을 교보재로 삼겠다는 마음을 버렸다.
어쨌든 거산중권이 전력을 드러낸 이상 방심은 금물이었다.
"크어엉!"
잠력을 폭발시킨 거산중권의 움직임은 이전과는 격이 달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강엽의 앞까지 도달한 거산중권이 주먹을 내뻗었다.
가히 소리보다 빠른 주먹이 뻗어지자 강엽은 얼어붙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못한 듯했다.
이 괴물같은 놈을 비로소 죽였다는 확신에 거산중권이 저도 모르게 입가를 길쭉하게 찢었을 때.
"어딜 공격하는 거냐?"
"엇!"
알아차렸을 때는 너무 늦었다.
강엽이 쭉 뻗은 손톱에 목이 꿰뚫린 뒤였으니까.
확신을 담아 내뻗은 일권은 강엽의 어깨 위쪽으로 빠져나왔을 뿐.
목에 바람구멍이 뚫린 거산중권의 입에서는 가래 끓는 소리만 나왔다.
강엽이 손톱을 빼내자 거산중권이 상처를 틀어막으며 켈룩거렸다.
"고통을 덜어주지."
거산중권의 머리가 몸통과 분리되어 데구르르 굴렀다.
강엽은 그제서야 숨을 골랐다.
'암신(暗身)을 터득하지 못했다면 위험했겠어.'
암신은 흑포무인의 피를 마시고 얻은 능력이었다.
피에 깃든 선천지기를 혈공으로 갈무리한 뒤 강엽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게 됐는지 깨달았다.
쉽게 말하면 어둠과 동화되어 상대의 감각을 속이는 능력이었다.
존재감도 불문명해지기에 바로 앞에 있어도 거리감을 잃어버린다.
하루는 굶주린 곰과 마주쳤는데, 암신을 펼치자 곰은 눈앞에 강엽이 있는데도 엉뚱한 곳을 공격했다.
야생의 맹수조차 속을 만큼 암신의 효능은 탁월했던 것이다.
"새끼들아, 봤냐?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고!"
"와아아아아!"
강엽이 아래를 힐끔 나려다보았다.
거산중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안 하명패주가 도주하고 있었다.
잡자면 못 잡을 것도 없겠지만 귀찮고 피곤했다.
어차피 의뢰 때문에 싸웠을 뿐 하명패주와는 아무런 은원도 없는 사이였다.
"이제 계산을 해볼까?"
갑작스런 말에 함성이 뚝 끊겼다.
승리의 기쁨도 잊은 소가방주가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옆에 있는 칼잡이를 툭 쳤다.
칼잡이가 거산중권의 시체를 가리키며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소가방주도 강엽의 말뜻을 깨닫고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하, 하하... 거산중권의 시체는 당연히 낭인님의 것입지요. 쇤네들은 하명패의 영역을 접수하는 것만도 바빠서 말입니다... 헤헤."
"그래, 고맙군. 그럼 가봐."
"예! 아, 그, 그런데 혹시 다음에도 쇤네들과 같이 일해보시지 않겠습니까?"
강엽이 없었다면 오늘 싸움은 이기지 못했을 터.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소가방주는 자존심을 팔아서라도 강엽을 모시고 싶었다.
강엽이 실소했다.
"조건만 맞으면 괜찮겠지."
피를 구할 수만 있다면 고사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강엽도 헐값에 힘을 빌려줄 생각은 없기 때문에 오늘보다는 더 큰 금액을 불러야 할 것이다.
소가방이 동료들의 시체를 수습해서 물러난 뒤 강엽은 거산중권의 시체를 챙겼다.
목에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피를 마시고, 남은 피는 물주머니에 담아두었다.
이후 시험 삼아서 죽은 하명패 칼잡이들의 피를 마셔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피라고 다 같은 피가 아니군.'
지난날 흑포무인의 피를 마셨을 때와 같은 고양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명패 칼잡이들의 피는 거산중권의 피보다도 효과가 떨어졌다.
'아마 강한 무인일수록 피에 깃든 선천지기가 강한 거겠지.... 이러면 일반 양민들의 피는 거의 효과가 없다고 봐야겠어.'
굉장히 중요한 발견이었다.
목숨을 연명하려면 지속적으로 무인들의 피를 마셔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물론 일반 양민의 피라고 효과가 없진 않겠지만, 동일한 효과를 내려면 더 많은 피를 마셔야 했다.
아마 흡혈귀가 많이 살았던 먼 옛날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지 않았을까.
강엽은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달밤 아래를 거닐었다.
4화. 보표 (1)
"전강아."
"말씀하시오, 분타주님."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내가 잠기운 때문에 헛것을 보는 것 같거든? 허벅지 좀 꼬집어봐라."
"분부대로 꼬집어드리겠소."
전강이 정말 살을 세게 꼬집자 장경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전강의 등짝을 때렸다.
"씹! 아프잖아, 인마!"
"꼬집으라고 해서 꼬집은 건데 문제라도?"
정작 전강은 별 타격이 없는지 무덤덤하게 물었기에 장경은 입맛을 다셨다.
"하여튼 이놈은 매사 너무 진지해서 재미가 없단 말이야.... 근데 그 거짓말 진짜냐?"
거짓말이면 거짓말이지 진짜냐고 묻는 건 뭔가.
장경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탁자에 올라온 머리를 가리켰다.
천자락으로 감쌌음에도 단면에서 흘러나온 피가 탁자를 적셨지만 그딴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네가 정말 거산중권을 잡았다고?"
강엽에게 물은 건데 답은 전강이 했다.
"거산중권 맞소. 분타주님도 몇 년 전에 그 작자가 석신로에서 사람들 피떡으로 만드는 걸 보지 않았소. 이가장의 공자와 시비가 붙으니 그 자리에서 호위들까지 몽땅 죽여버렸지. 기억 안 나시오?"
"씨바, 기억이 나니까 문제지. 와, 이거 실화냐. 거산중권이 새파란 신입한테 죽었다니 말이 안 나온다."
둘 다 오랫동안 이 거리에서 살았기 때문에 거산중권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다.
뒷골목에서 굴러먹었어도 나름 알아주는 고수였다.
"믿기지 않으면 소가방주에게 확인하든지."
"아니, 뭐... 믿지 못하겠다는 건 아니야. 소가방 놈들이 떼거지로 덤빈다고 거산중권이 죽을 놈도 아니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일관성이 없군."
"그만큼 놀랐다는 거다. 거산중권이 죽었단 말이지... 이가장주가 이 소식을 들었어야 했는데."
이가장주는 살해당한 공자의 부친이었다.
백주에 아들을 잃은 그는 복수를 부르짖으며 수많은 무림인들을 고용해서 원수를 쫓았지만, 이미 그때쯤 거산중권은 중경을 내빼버린 뒤였다.
"아들의 원수를 잡지 못하자 이가장주가 홧병으로 누웠지.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 얼마 뒤에 죽어버렸고.... 당시 거산중권이 죽인 사람들 중에 애꿎은 양민들도 많아서 관부에서 현상금을 걸었지. 누구든 거산중권의 목을 가져오면 은전 이백 냥을 하사하겠다고 말이야."
사실 은전 이백 냥은 거산중권 같은 고수의 목숨값으로는 애매했다.
수십만 냥, 수백만 냥도 아니고 고작 이백 냥 때문에 누가 멀리 도망친 인간을 쫓아서 중원 천지를 이잡듯이 뒤지겠나.
거산중권이 몇 년 만에 돌아왔지만, 설령 그가 강엽에게 죽지 않았어도 현상금 때문에 그를 찾아갈 사람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의 은원 때문에 찾아갈 사람들은 많았겠지만 말이다.
"그럼 이 목을 들고 관청에 찾아가면 되나?"
"그럴 필요까지야. 현상금을 대신 받는 것도 낭인전의 업무 중 하나인데."
강엽의 허락이 떨어지자 장경이 전강에게 고갯짓을 했고, 전강이 보자기로 수급을 감쌌다.
전강은 사천성 전역에 지점을 보유한 성도전장의 전표와 의뢰비인 은전 열 냥을 가져와서 강엽에게 주었다.
"일단 우리 쪽에서 먼저 준 거야. 현찰을 선호하면 은전으로 바꿔줄 수도 있고."
"아니. 나도 이쪽이 편하다."
산장에서 약탈한 게 있어서 당장 돈이 급하진 않았을뿐더러, 은전은 많을수록 가지고 다니기 불편했다.
"성도전장은 사천 제일의 전장인 만큼 신용은 확실해. 각지에 지점이 있어서 낭인전의 낭인들도 많이 이용하는 편이고."
아예 전장에 돈을 맡겨놓고 목돈이 필요할 때만 전장에서 돈을 찾는 낭인들도 많았다.
"그러면 나도 낭인전의 낭인으로 인정받은 건가?"
"후, 그래. 다른 놈도 아니고 거산중권을 죽였는데 인정해줄 수밖에 없지. 낭인전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낯선 신입이여."
요란한 입단식 같은 것은 없었다.
대신 장경은 나무를 깎아만든 목패를 내밀었다.
"처음에 왔을 때 말했었지? 낭인전엔 등급이 있다고. 총 아홉 단계로 나뉜다. 일단 금은동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천지인 삼재로 세분화되지."
이를테면 가장 낮은 등급은 동인패였고, 가장 높은 등급은 금천패였다.
당연히 등급이 높을수록 대접도 좋아지기에 야심찬 낭인들은 승급에 목숨을 걸었다.
"왜 내 건 목패지?"
"그건 임시 낭인패. 조만간 정식 낭인패가 나올 거다. 그때까진 그걸 신분패로 삼아."
간혹 의뢰주가 혹시 사칭은 아닌지 의심하기에 낭인패는 신분을 증명하는 요긴한 수단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강엽이 낭인패를 챙기자 장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음 의뢰는 어떻게 할 거냐?"
"내가 낮에는 다른 일을 해서. 웬만하면 밤에 하는 의뢰만 맡고 싶은데."
"밤에만 하는 의뢰라... 기억해두지."
처음 만났을 때 이 말을 했다면 씨알도 먹히지 않았겠지만 이젠 강엽도 어엿한 낭인전 소속인 만큼 장경도 강엽의 의향을 존중할 의무가 있었다.
"그보다 무공을 배울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거산중권과 싸우면서 무공의 필요성을 절감한 강엽이다. 낭인패니 의뢰니 하는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장 낮은 등급만 되어도 썩 괜찮은 무공을 배울 수 있다고 장경 본인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배울 수 있지. 미리 말해주자면 동패와 은패, 금패 때 배울 수 있는 무공이 달라. 하지만 거산중권을 죽일 정도면 동패무고에서는 배울 게 없을 텐데?"
"그래도 한번 봐서 나쁠 건 없겠지."
"음, 그래. 동패무고는 크지도 않으니 둘러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겠지."
은패무고나 금패무고와는 다르게 동패무고는 분타에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 들어갈 수 있었다.
비로소 무공에 입문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강엽의 입가에 웃음기가 번졌다.
* * *
동패무고는 분타의 지하에 있었다.
전강을 따라서 지하에 내려온 강엽은 열 평 남짓한 공간을 차지한 서가를 보고 눈을 빛냈다.
"뭘 읽어도 좋고 얼마나 오래 있든 상관없소. 다만 책을 외부로 반출하는 건 안 되오. 가장 낮은 동패무고라도 엄연히 낭인전의 자산이니까."
유출된다고 해도 별 피해는 없겠지만 규칙은 규칙이었다. 강엽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두겠습니다."
"말씀 놓으시오."
"...?"
"분타주님께는 그러지 않소."
"장경은 저랑 연배도 비슷하고 그쪽이 먼저 말을 놔서 반말을 하는 겁니다."
하지만 전강은 그보단 나이가 많았다.
강엽도 여러 일을 겪으며 천성이 변했지만 자신을 정중히 대해주는 사람에게까지 무례하게 굴긴 싫었다.
"장경이나 다른 낭인들이 당신을 어떻게 대하든 전 이게 편합니다."
"...보통은 반대일 텐데."
전강이 쓴웃음을 지었다.
"편한 대로 하시오. 서가는 각 분야에 따라 분류해놨으니 원하는 무공을 찾는 게 어렵진 않을 터. 권장지각부터 십팔반병기, 보신경, 심법까지 구색은 갖춰놨으니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오."
멀어진 전강을 뒤로한 강엽은 서가를 둘러보며 눈에 띄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골랐다.
일단 자신에게 맞는 무공을 찾기보다는 무고의 비급들을 두루 섭렵하며 무공 지식을 쌓을 생각이었다.
무공 비급뿐만 아니라 황제내경을 비롯한 의서와 유불도의 경전들까지 있었기에 중원 무공의 근간을 이루는 철학과 사상들에 대해서도 두루 공부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모산파의 술법서를 익히면서 도가 경전을 공부할 생각도 했던 강엽에겐 좋은 기회였다.
힘든 싸움을 치렀음에도 간만에 흡혈을 해서 그런지 책내용이 눈에 쏙 들어왔다.
그날부터 강엽은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어스름이 지면 청송객잔에 가서, 밤새 책을 읽다가 동이 트기 전에 돌아간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그날 읽은 책을 복기하고 종이에 자신이 이해한 바와 의문점들을 적어나갔다.
덕분에 방값보다 종이값이 더 들어갔지만 지금은 하나라도 더 배우는 게, 강해지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한 강엽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오죽하면 객잔을 오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아예 청송객잔으로 옮길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시끄럽지만 않으면 옮겼을 텐데.'
볕이 들지 않는 것치곤 관리를 세심하게 했는지 생각보다는 청결했다.
문제는 낭인들이 툭하면 술 처먹고 떠들거나 쌈박질을 해대서 시끄럽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태양볕을 피해야 한다지만 소음까지 참고 싶지는 않았다....
"넌 전생에 책을 못 봐서 뒈졌냐?"
하도 무고에 들락거리다 보니 장경은 강엽이 찾아오면 질린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전강은 익숙해진 건지 이제 묻지도 않고 무고로 가는 계단문을 열어줄 지경이었다.
"혹시 무고에 있는 비급을 다 읽을 작정이냐?"
"그럼 안 되나?"
"안 되는 건 아닌데... 비급이 좋아도 너처럼 탐독하는 놈은 처음 본다."
"말하는 걸 보니 다른 용건이 있나 본데."
앞서 찾아왔을 때와 다른 분위기였다.
변죽은 그만 올리고 본론이나 어서 말하라는 눈빛을 보내자 장경이 헛웃음을 흘렸다.
"눈치가 백단이구만."
"그래서 뭔데."
"두 가지 용건이 있어. 일단 거산중권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걸 알려주는 게 첫 번째고."
일전에도 말했듯 거산중권이 제법 유명한 흑도의 고수였기 때문에 소문이 퍼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소가방의 칼잡이들을 통해 소문이 퍼진 것도 있지만, 장경 역시 소문을 퍼뜨리는 데 일조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어딘들 안 그러겠냐만 이 바닥에선 명성이 곧 실력이지. 네가 거산중권을 죽인 건 그의 이름값을 빼앗은 거다."
무명이었던 강엽이 일약 거산중권을 죽인 고수가 된 것이다.
거산중권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제 강엽을 만나거나 그의 이름을 들으면 그 사실부터 떠올릴 터.
비단 장경의 장담이 아니라도 강엽은 객잔에 들어왔을 때부터 식당 안의 낭인들이 자신을 힐끔거리며 수군거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왜 저러나 싶었는데 거산중권을 죽였다는 소문이 난 모양이다.
재밌는 건 낭인들의 반응이었다.
눈을 내리까는 놈이 있는가 하면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놈들까지 다양한 게 아닌가?
산뜻하게 무시한 강엽이 다시 장경을 돌아보며 물었다.
"두 개라고 했었지. 다른 하나는 뭐지?"
"의뢰야."
물론 강엽의 요구대로 밤에만 하는 의뢰였다.
강엽 역시 일전에 얻은 피가 다 떨어지기 전에 미리 채워둬야 후환이 없기 때문에 장경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두 개가 들어왔다. 하나는 저번처럼 뒷골목 싸움에 힘을 보태달라는 거고. 소가방과는 다른 곳이지."
문제는 다른 하나였다.
강엽이 얼른 말하라고 종용하자 장경이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이건 좀 장기 의뢰인데 괜찮겠냐?"
"들어보고 결정하지."
"운화장이라는 장원이 있다. 평범한 장원처럼 보여도 중경에서는 가장 유명한 투기장이야. 거기서 보표를 구한다더라."
"그런 것도 의뢰로 치나?"
"뭐, 우리한테 쓸 만한 낭인 있으면 소개 좀 시켜달라는 거지. 마침 투기장은 밤에만 열리니까 네 성향에도 맞을 거고. 대신 오래 일해야 하겠지만."
"보표라... 구체적으로 뭘 하면 되지?"
피를 구할 수 없다면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니, 그럴 바엔 뒷골목 싸움이나 하는 것이 낫다.
"아무래도 손님들 지키는 게 주 업무지. 그 투기장은 좀 특이해서 무림인만 참가할 수 있는데, 재수 없으면 관객석에도 불똥이 튀니까.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아, 그래. 시체 나오면 그것도 처리해야 할걸."
전자는 몰라도 시체 처리는 아무리 시체에 익숙한 낭인이라도 꺼릴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강엽의 생각은 달랐다.
매장을 하는지 화장을 하는지는 직접 겪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갓 죽은 따끈따끈한 시체라면 피를 구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둘 다 할 수 있을까?"
"뒷골목 싸움은 내일이고, 투기장은 사흘 뒤에 찾아가면 된다. 근데 정말 다 하려고?"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투기장은 수습을 거칠 거야. 정식으로 채용되면 적어도 몇 달은 일해야 하니 알아둬."
오히려 강엽에게도 그편이 나았다. 생각과 다른 곳이면 금방 그만둘 수 있으니.
"투기장이라."
예전이었다면 군자가 걸음할 곳이 아니라며 관심도 갖지 않았겠지만 강호에서 살아가는 지금은 어떤 곳인지 궁금해졌다.
4화. 보표 (2)
"낭인전에서 왔다고?"
운화장의 총관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낭인전에 쓸 만한 인력을 보내달라고 했건만 막상 온 놈은 깡마르고 얼굴도 햇볕을 못 보고 산 놈처럼 창백했다.
낭인보다는 병자라고 해야 어울릴 것 같은 면상을 가진 놈이 보표일을 하겠다고 왔으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물론 강엽의 신분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거짓부렁을 늘어놓았다면 장원 대문을 지키는 보표들 선에서 정리되었을 터.
"의뢰서와 낭인패는 갖고 왔겠지?"
"여기 있습니다."
나무로 만든 임시 낭인패라고 해도 진짜와 가짜는 확연하게 구분된다.
이름이 적힌 하단에 분타주의 직인이 찍혀 있었에 위조는 거의 불가능했다.
"강엽, 강엽이라... 들어본 이름이군. 자네가 거산중권을 죽였다는 그 친구인가?"
거산중권이 죽었다는 소문으로 온 거리가 들썩였기 때문에 운화장의 총관도 강엽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 의뢰서까지 지참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차 물어본 것이다.
"대문의 칼잡이들은 못 믿더군요."
"의뢰서와 낭인패가 없었다면 나도 안 믿었을 걸세. 사실 자네가 거산중권 같은 고수를 어찌 죽였는지 모르겠군."
강엽이 비겁한 수로 거산중권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걸까?
당사자의 입장에선 불쾌한 질문이었지만, 강엽은 감정을 앞세우는 대신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운화장의 외관은 호사스러워도 정작 총관의 집무실은 소박했는데 필통만은 매우 비싸 보였다.
검은 빛깔이 도는 것이 단단하기로 유명한 자단목 중에서도 최상급의 자단목을 쓴 것 같았다.
"이 필통 얼마나 합니까?"
"알면 뭐 하려고?"
"부수면 물어드려야 할 테니까요."
"후후, 베는 것도 아니고 부수겠다... 당연히 무기는 안 쓰겠지? 물어내라는 말은 안 할 테니 해보게."
자단목은 물에 넣으면 가라앉을 정도로 속이 꽉 들어찬 단단한 나무였다.
운화장의 다른 보표들도 못하는 일을 하겠다고 나서니 총관은 강엽이 가소로워 보였다.
꼴에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자단목을 아는 모양인데 그의 자단목 필통은 다른 자단목보다 몇 배는 더 단단했다.
자단목 필통으로 벼루를 내려치면 벼루가 두 쪽으로 갈라질 정도였다.
강엽이 지필묵을 빼고 한 손에 자단목 필통을 들었을 때까지도 총관은 강엽이 허세를 떤다고 생각했다.
손으로 자단목을 부서뜨린다면 상당한 내공을 지녔다는 뜻인데, 그런 사람은 애초에 보표 따위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곧이어 강엽의 괴력을 못 버틴 자단목 필통이 안쪽에서부터 빠그러지는 소리를 내자 도리어 그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 그만!"
콰직!
결국 자단목 필통이 우지직 부서지자 총관은 자신이 했던 말을 후회했다.
대체 자신은 어쩌자고 저 필통을 부수어도 된다는 말을 했던 것일까?
일각 전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자신의 멱살을 붙잡고 당장 집어치우라고 말하고 싶었다.
강엽이 담담히 말했다.
"이만하면 증명은 된 것 같습니다만."
"...내가 실언을 했구만."
이래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되는 것이다.
나라 잃은 사람처럼 우울해하는 총관의 모습에 강엽도 살짝 미안해졌다.
신분을 증명해도 신경을 살살 긁는 바람에 짜증나서 이 방에서 가장 귀한 물건을 부순 건데, 미리 양해를 구했다지만 저렇게 낙담할 줄이야.
'설마 꺼지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자네를 보표로 채용하겠네. 한데 보표 말고 다른 일은 관심 없나?"
막상 자단목을 부순 걸 보니 보표로 쓰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일이라면 어떤 것 말입니까?"
"내 개인호위. 돈은 보표보다 많이 주겠네."
"감사한 말씀이지만...."
총관의 목을 노리는 살수가 매일밤 찾아온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할 이유가 없었다.
"제가 낮에는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총관님의 제안은 거절해야 할 것 같군요."
"...그렇군."
강엽의 목소리에서 단호한 의지를 감지한 총관은 입맛을 쩝 다셨다.
"한 달은 수습이야. 이건 운화장의 방침이라 실력과 상관없이 지켜야 하네. 대신 수습이라도 봉급은 정식 보표들과 똑같이 쳐주지."
그 외에 근무시간과 근무일자, 업무 등등 자세한 것을 말해주고 나서야 총관은 축객령을 내렸다.
강엽이 밖으로 나가자 총관은 얼른 바닥에 쪼그려앉아 자단목 조각들을 줍고는 울상을 지었다.
"나쁜 새끼, 이렇게 부수면 아교로도 못 붙이는데...!"
* * *
그날부터 강엽은 보표로 일했다.
중경에서 가장 유명한 투기장답게 운화장은 여러 전각들로 구성되었다.
운화장의 사람들이 쓰는 전각들뿐만 아니라 투사(鬪士)들의 숙소나 싸움을 구경하러 온 관객들을 위한 편의시설들이 다양하게 마련되었다.
심지어 개중엔 도박장도 있었다.
관객들은 경기에서 누가 이길지, 몇 합 만에 이길지를 두고 내기를 벌였다.
안전하게 돈을 따기 위해 배당이 낮은 투사를 고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탕을 위해 배당이 높은 신참 투사에게 돈을 거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쪽이 옳다고는 할 수 없다. 도박판에서는 돈을 따는 놈이 갑이고 정의였으니까.
운화장의 보표들이 입는 흑색무복으로 갈아입은 강엽은 관객석 뒤편에 자릴 잡았다.
"와아아아아아!"
수백 명의 함성이 전각을 흔들었다.
그들이 응원하는 투사가 상대를 무참히 박살내고 두 팔을 번쩍 든 채 포효했던 것이다.
권각술을 쓰는 남자인데 키는 작지만 몸이 다부지고 날래서 상대의 공격을 요리조리 잘 피했다.
상대도 만만치 않아서 남자의 공격을 상쇄하고 역으로 반격했지만 결국 기량에서 밀렸다.
'저만하면 거산중권과 붙어볼 만하겠는데.'
투기장의 수준이 예상 외로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판이 권사의 팔을 잡고 높이 치켜들자 관객들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승자는 관객들의 찬사를 받고, 패자는 그에게 돈을 걸었던 사람들의 욕받이가 된 채 들것에 실려 나간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이 처량했지만 강엽은 패자를 동정하지 않았다.
그도 이전까진 사람들의 박수와 함성 속에서 승리를 맛봤을 테니까.
오늘 이겼다고 내일도 이길 거라고 장담할 수 없고, 오늘 졌다고 내일도 질 거라고 재단할 수 없는 곳이 강호였다.
"좀 보니까 어때?"
강엽과 함께 일하는 보표가 물었다.
아직 모르는 게 많은지라 강엽은 그를 따라다니면서 일을 배우고 있었다.
"배울 게 많은 결투였다. 특히 저 권사의 몸놀림은 대단히 인상적이었어. 감각적이더군."
"원공권(猿公拳)의 고수라더라."
원숭이들이 나무에서 다투는 모습을 보고 창안했다는 형산파의 상승권법.
아직 강호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강엽은 형산파의 이름은 몰랐지만, 원공권의 초식에서 거산중권의 권법과는 다른 의미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물론 상대도 만만찮았지. 보신경이 투박해도 도끼술은 일품이었으니까. 하지만 원공권이 한 수 위였던 거야."
보표들도 무림인이었다.
관객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을 우선했지만 한편으로는 패자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대입해봤다.
자신이라면 어떻게 싸웠을지 말이다.
'무학의 세상은 대륙처럼 광활하고, 심해처럼 깊으며, 창공처럼 아득하다....'
동패무고의 비급에서 읽은 구절이다.
강엽은 막연하게 여겼던 구절의 참뜻을 투기장에 와서야 체감했다.
원공권의 권사가 승리를 거둔 이후로도 투기장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잡부들이 투기장의 피를 깨끗이 닦고 사라지자 사회자가 또 다른 결투를 고지했다.
"금일 이차전의 결투는 사전에 알려드린 대로 열화장과 광효의 대결입니다! 뜨거운 박수로 용맹한 투사들을 맞이해 주십시오!"
"열화장! 열화장!"
"광효! 광효!"
관객들이 각자 응원하는 투사들의 이름을 연호하자 양 투사가 보무도 당당하게 등장했다.
사회자가 양 투사들의 경력을 밝히자 관객들의 공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음, 이 열기. 가끔은 궁금하단 말이지. 저기서 응원받는 기분이 어떨지...."
"궁금하면 참가하면 되잖나."
"에헤이, 그건 아니지. 투기장에 있는 것 자체가 인생 막장이라는 건데."
"무슨 뜻이지?"
투사들에게 사연이 있는 걸까?
강엽이 의아해하는 시선을 보내자 보표가 노골적으로 비웃는 표정으로 투사들을 내려다봤다.
관객석과 투기장은 창살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흡사 뇌옥을 연상시켰다.
"이 투기장의 주인이 누군지 아나?"
"태화문(太和門)이라고 들었다."
태화문은 사천 동부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흑도 문파로, 지닌 바 전력이 사천삼패인 당문, 아미, 청성에 필적한다고 알려진 대방파였다.
강엽은 의뢰를 맡기 전 장경으로부터 운화장이 태화문의 사업장 중 하나라는 말을 들은 상태였다.
"저놈들은 태화문에게 약점이 잡힌 놈들이야."
빚을 졌든 죄를 졌든 정상적인 방법으론 태화문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는 무림인들이 투사로 전락했다.
투기장이야말로 더 이상 도망칠 구석이 없는 무림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전장인 셈.
"물론 자진해서 투사가 되는 놈들도 있긴 하지. 싸움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투귀들. 저기 광효 같은 놈이 그런 부류야."
그 말에 강엽은 이족 청년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보표의 말이 사실인지 모르겠으나 이족 청년은 매서운 살기를 뿜어내며 입술을 핥고 있었다.
"그럼 상대인 열화장은?"
"빚을 졌다고 하더군. 태화문 휘하의 염왕채에서 어마어마한 돈을 빌렸다던데. 한데 갚지도 않고 튀니 태화문의 고수들이 열받아서 쫓아간 거지."
중원은 넓으니 숨으면 못 찾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세상엔 수백 수천 리를 도망친 사람을 좇는 추종술의 전문가들이 존재한다.
태화문은 그런 추종술의 전문가들을 다수 보유한 방파였다.
"넌 투사에 관심 없나? 거산중권을 잡은 실력이면 투기장에서도 제법 먹힐 텐데."
"그 소문이 보표들의 귀에도 들어갔군."
"이 거리에 그 소문 못 들은 사람이 어딨다고. 그런 친구가 왜 보표나 하고 있는 거야?"
"호기심이랄까?"
굳이 보표의 말이 아니어도 투사가 될 생각은 없다.
피를 구하는 게 더 중요할뿐더러, 자칫 결투에서 다치기라도 하면 끝장이었다.
만인의 앞에서 상처를 재생한다면 소문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지금은 결투나 보자고."
콰앙!
열기를 내뿜는 중년인과 구릿빛 피부의 이족 청년이 부딪치기 시작했다.
강엽이 투사들의 결투를 심도 깊게 관찰하는 동안 그의 무공관(武功觀)은 차츰차츰 넓어져갔다.
* * *
강엽은 첫날부터 시체 처리를 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투기장의 결투가 격렬해도 날이면 날마다 사망자가 나오진 않을 테니까.
결과만 놓고 말해서 예상은 빗나갔다.
"열화장이 죽었다."
"예?"
"광효에게 당한 내상이 심각했던 모양이야. 의원을 불렀는데도 결국 숨이 끊겼다더군. 사이준, 네가 저 친구와 함께 가라."
사이준은 강엽에게 일을 가르친 보표였다.
퇴근할 기분에 신났던 사이준은 시체를 처리하라는 말에 얼굴이 흙색이 되었지만 거부하진 못했다.
"아, 알겠습니다. 시체만 처리하면 되는 겁니까?"
"그래. 처리하면 바로 퇴근해라. 대신에 꼼꼼이 처리하는 것 잊지 말고."
태화문의 힘과 인맥 덕분에 관부도 쉬쉬하고 있지만 본디 투기장 사업은 불법이었다.
공개적으로 장사를 지낼 수는 없기에 사망자의 시신은 남들 몰래 처리했다.
"들었지? 열화장을 배웅해주러 가자고."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밀하게 처리해야 하는 만큼 두 사람은 운화장의 무복이 아닌 본래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시체는 어떻게 처리하지?"
"가악산에 묻을 거야."
가악산이 아주 크지는 않아도 사람 몇 명 묻는 걸로는 티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야밤에 사람 묻으러 가는 게 기꺼울 리는 없었기에 사이준의 안색은 굉장히 나빴다.
"힘들면 나 혼자 해도 된다."
"...젠장. 그래도 이번엔 내가 같이 가야지. 적어도 길은 알려줘야 할 거 아니냐고."
하지만 사이준은 강엽이 들어왔으니 이 일도 조만간 졸업할 거라 생각했다.
원래 시체를 처리하는 일은 갓 들어온 신입이 도맡는 게 운화장 보표들의 관례였으니까.
자신이 요령을 알려주면 그 다음부터는 강엽이 알아서 해내야 했다.
멍석을 뒤집어쓴 열화장의 시체를 달구지에 싣은 두 사람은 운화장이 비밀리에 만든 비탈길로 올라갔다.
4화. 보표 (3)
두 사람이 가는 길은 일반 산객들은 모르는 길이었다.
삼십여장 쯤 되는 석굴을 통과해서 건너편으로 빠져나오면 울창한 숲이 나오는데, 워낙 응달진 곳이라 산객들이 다니는 곳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다.
이 숲이 죽은 투사들을 매장하는 공동묘지였다.
어디에 시체들을 묻었는지 표식을 꽂아두었기에 혹시라도 이미 시체가 묻힌 곳을 다시 파낼 염려는 없었다.
적당한 곳을 고른 사이준이 신호를 보냈다.
어서 삽질이나 하자는 뜻이다.
만약 강엽이 어리버리한 신입이면 혼자 시키고 자신은 딴청을 피웠겠지만,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강엽에게 일을 독박시키고 혼자 탱자탱자 놀 만큼 사이준은 간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강엽이 일할 생각은 안 하고 열화장의 시체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자 깊은 빡침이 몰려왔다.
얼른 이 기분 나쁜 곳에서 나가고 싶은데 딴생각이나 하다니?
"뭐해? 얼른 파자니까."
"...."
강엽은 말없이 삽을 가져왔다.
열화장의 시체에서 어떻게 피를 구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차라리 사이준이 자기가 선배랍시고 거들먹거리면서 게으름을 피웠다면 못 이기는 척 넘어가줬을 텐데, 이놈은 자신이 무서운지 괜히 눈치를 보며 좋은 선배인 양 행세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피를 취하기에 좋은 날은 아닌 듯싶었다.
'다음에 혼자 일할 때나 시도해봐야겠군.'
한동안 묵묵히 삽질만 했다.
그렇게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덩이를 만들었을 때였다.
강엽은 문득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분명히 공종묘지엔 그와 사이준밖에 없는데, 어디선가 그들을 지켜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던 것이다.
귀신이 나타난 게 아니면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건데....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을 가늠한 강엽이 불쑥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혹시 죽은 척하는 무공도 있나?"
"뭐?"
사이준이 멍하니 되물었을 때였다.
달구지에서 덜컹 소리가 들리더니 거적때기를 뒤집어쓴 열화장의 시체가 퍼뜩 솟구쳤다.
죽은 사람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자 사이준은 귀신을 본 것마냥 혼비백산했다.
"뭣...!?"
"피해, 병신아!"
통나무처럼 뻣뻣해진 사이준을 걷어찬 강엽이 바로 암신을 펼쳐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한 박자 늦게 들이닥친 장풍이 그들이 파고 있던 구덩이를 쾅 뒤집어놨다.
이글거리는 열기가 사방으로 뻗치자 공기마저 후끈 달아올랐다.
"난 눈치 빠른 애송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열화장이 중얼거린 직후였다.
열기마저 찢어발길 정도로 날카로운 빛줄기들이 짓쳐들었다.
열화장은 피하기는커녕 대노하며 쌍장을 내밀었다.
"어딜!"
뻐어엉!
혈공진기와 열양지기가 충돌하자 화탄이 터진 것처럼 요란한 충격이 두 사람을 덮쳤다.
흙과 풀쪼가리들이 흩날리고 불씨가 튀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눈앞에 대적을 둔 두 사람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문득 열화장이 말했다.
"귀식대법(龜息大法)을 알아보다니 눈썰미가 좋구나."
"귀식대법이라...."
거북이처럼 느린 숨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나 의미를 헤아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걸로 사람들을 숨겼군."
"내게도 도박이었지. 네놈들을 속이겠답시고 이 악물고 수련했다. 다 빠져나온 시점에 들킬 줄은 몰랐구나."
"나도 거의 속을 뻔했다. 분명 처음 뵜을 땐 시체였는데 말이야."
"그게 귀식대법의 공능이다."
다만 귀식대법엔 큰 약점이 있었다.
귀식대법을 펼치는 동안은 꿈쩍하지 못할뿐더러, 정해진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자력으로 깨어날 수도 없는 것이다.
강엽에게 들킨 것은 땅을 파던 중에 귀식대법이 풀렸기 때문.
그때도 죽은 척을 했지만 결국 강엽의 감각을 속이진 못했다.
열화장이 뜻밖의 제안을 던졌다.
"거래를 하지 않겠나? 날 이대로 보내다오. 하면 나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마."
"대가?"
"너희들의 목숨."
그렇게 말하는 열화장의 얼굴엔 마음만 먹으면 두 사람 따위는 얼마든지 죽여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강엽으로선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였다.
"거절한다. 당신의 제안은 수지가 안 맞아."
"살 길을 일러주었거늘 걷어차다니...."
못마땅하게 중얼거리는 열화장의 전신에서 활화산 같은 기세가 뿜어져나왔음에도 강엽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어차피 당신은 날 못 죽여."
순간 발바닥의 용천혈(湧泉穴)로 혈공진기를 인도한 강엽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한순간에 치달은 강엽의 속도에 깜짝 놀라면서도 열화장은 두 팔을 교차해 주먹을 비껴냈고, 강엽을 노려보며 짧게 끊어친 단타를 연속으로 퍼부었다.
하지만 때리는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암신의 환술에 현혹되어 타점이 빗나간 것이다.
바로 역습이 시작되었다.
"헛!"
강엽의 다리가 채찍처럼 휘어지자 대경한 열화장이 철판교의 수법으로 허리를 눕혔다.
거산중권의 각법을 기억했다 따라해본 건데, 혈공진기에 흡혈귀의 괴력이 합쳐진 탓에 무공의 원 주인이 썼던 것 이상의 위력이 나왔다.
두꺼운 소나무가 일격에 잘려나가자 열화장이 눈썹을 치떴다.
"한낱 보표의 무공이 아니구나!"
그는 강엽의 비범함을 알아봤다.
강엽 정도의 실력이면 투기장의 투사들 중에서도 상위권이었다.
그런 놈이 왜 보표를 하는 건지는 몰라도 열화장은 강엽을 떨쳐내는 것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더 강하다!"
철판교를 펼칠 때부터 열양지기를 모았던 그는 장심을 내밀어 강엽의 턱주가리를 올려쳤다.
강엽이 그보다 키가 큰 탓에 얼굴을 공격하려면 팔을 올려야만 했다.
"이야아아아!"
그때 사이준이 달려들었다.
열화장이 강엽에게 집중하는 사이에 열화장의 뒤를 치겠다는 속셈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한 강엽이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기습할 거면 소리 지르지나 말든가.'
제딴에는 자기보다 강한 고수에게 덤빈답시고 용기를 낸 것 같은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열화장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건방진 애송이놈이...."
강엽과 달리 그가 귀식대법을 펼쳤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 놈이었다.
그런 주제에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꼴이라니.
"흥, 죽여주... 욱!"
말하다 말고 열화장이 각혈했다.
이미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귀식대법을 펼쳤고, 다시 강엽과 싸웠기 때문에 내상이 도진 것이다.
사이준은 거기까지 생각이 못 미쳤으나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칼을 찔렀다.
그러나 열화장 역시 고이 당해주진 않았다.
대저 장법을 익힌 이는 손바닥뿐만 아니라 손 전체가 무쇠처럼 단단하기 마련. 급격하게 몸을 비틀면서 곧게 세운 손날로 사이준의 목을 노렸다.
순식간에 치달은 죽음을 직감한 사이준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강엽이 빈틈을 파고든 것은 그때였다.
흡혈귀의 초감각은 열화장의 손날이 사이준의 목을 끊어놓으려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했다.
마치 시간이 얼어붙은 것처럼 그들의 움직임을 느릿하게 인식한 강엽은 열화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쩌다 보니 사이준이 열화장의 옆구리를 베고, 열화장은 사이준의 목을 노리며, 강엽은 사이준을 살리기 위해 열화장을 덮친 모양새가 됐다.
쩌어엉!
둔중한 굉음이 메아리쳤다.
"크헉!"
"아악!"
두 사람이 목구멍을 쥐어짰다.
사이준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 어깨뼈가 부서졌고, 열화장은....
"쿨럭! 쿨럭! 우웨엑!"
강엽의 무릎을 맞고 내동댕이쳐져서 피를 한 됫박이나 토하고 있었다.
"하긴. 원래 내상을 입었지. 생각지도 못하게 부활해서 잊고 있었어."
열화장이 왜 거래 운운하면서 싸움을 피하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까무러친 사이준을 흘깃한 강엽은 열화장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엎드린 채 웩웩 피를 게워냈던 열화장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전에 강엽의 발길질에 채여 허공을 날았다.
"커억!"
"계획과는 달라졌지만 감사하마."
눈엣가시 같은 사이준이 기절했으니 흡혈을 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는 셈.
아무래도 강엽도 죽은 사람의 피보다는 살아있는 사람의 피를 마시는 게 덜 역겨웠다.
점점 거리를 좁히는 강엽에게서 소름끼치는 살기가 흘러나오자 열화장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쿨럭, 쿨럭! 이거 광효보다 더한 놈이었군...."
오늘 그의 대전 상대였던 광효는 남만의 밀림에서 자란 전사 출신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전쟁터를 전전했는데, 그 때문에 몸에 살기가 배어서 손속이 잔혹해졌다.
그러나 그 광효조차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강엽의 눈에선 묘지의 음기보다도 싸늘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난 아직 죽을 수 없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억울하면 염왕채를 쓰지 말았어야지."
고리대로 빚쟁이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염왕채를 좋게 볼 순 없으나 돈을 빌린 주제에 잠적했다는 열화장 또한 좋게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그게 얼마인지 아느냐!? 그걸 갚으려다간 죽을 때까지 저 빌어먹을 투기장을 나갈 수 없단 말이다!"
물론 강엽이 알 바는 아니었다.
말없이 열화장을 노려보자 그가 움찔했다.
"...거, 거래! 거래를 하자!"
"이번엔 또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려고."
"이번엔 진짜다. 너한테도 도움이 될 얘기다! 내가 어떻게 귀식대법을 익혔는지 궁금하지 않나?"
기심이 엄엄한 주제에 너무 말을 많이 했다.
피를 웩 토한 열화장이 애원했다.
"제, 제발... 뭐든, 끅... 알려줄 테니...."
"뭐든 알려주겠다고."
"그, 그래. 나 좀 살려다오. 이제 내게...."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져서 잘 들리지도 않자 이쪽으로 와서 들으라는 눈빛을 보냈다.
강엽이 다가가자 열화장이 번개처럼 일장을 내쳤다.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한 구명절초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살려달라고 애원한 주제에 손을 뒤로 감췄으니 꿍꿍이가 뻔히 들여다보였다.
열화장은 선택을 했고, 이젠 그 선택에 따른 대가를 치를 차례였다.
빠르게 장풍을 피한 강엽이 열화장의 손목을 잡아 수수깡마냥 가볍게 부러뜨렸다.
이어 머리채를 잡고 무릎으로 찍어버리자 놈의 안면이 함몰되었다.
빠각!
"...."
강엽은 열화장을 쓰레기마냥 던졌다.
곤죽이 됐음에도 열화장은 용케 죽지 않고 간질 걸린 병자처럼 경련만 했다.
이대로 놔둬도 죽겠지만 강엽은 열화장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생피를 흡혈할 요량이었다.
"굳이 깨물 필요는 없겠지."
피를 짜낼 방법은 많으니까.
강엽은 바닥에 떨어진 사이준의 칼을 주워서 열화장을 향해 겨누었다.
* * *
"어찌된 일인가?"
운화장의 총관이 물었다.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힐난의 어조였기에 보표대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열화장이 귀식대법을 썼습니다."
"귀식대법?"
"쉽게 말하면 가사 상태에 이르는 무공입니다. 호흡을 멈추고, 체온이 떨어지고, 심장 박동이 느려지기 때문에 의원도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무공이 있었구만."
"송구합니다."
아무 데서나 배울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보표대주도 귀식대법이란 게 있다고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 본 적이 없었기에 당혹스러웠다.
"강엽의 말로는 열화장이 일년간 귀식대법을 수련했다고 합니다. 결정적인 한방을 위해 지금껏 참고 기다린 듯합니다."
"그랬겠지. 그나저나 강엽이 열화장을 죽였나?"
"예. 다만 사이준이라는 녀석과 같이 갔습니다."
"첫날부터 신고식 한번 거창하게 치르는구만. 한데 열화장이 그냥 죽어줬을 리는 없을 텐데... 두 사람의 상태는 어떤가?"
"사이준은 어깨뼈가 부러져서 당분간은 복귀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강엽은...."
강엽을 떠올린 보표대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구역질이 치밀 정도로 피냄새를 풍기며 돌아온 강엽의 얼굴이 머릿속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아무런 상처도 없습니다."
"상처가 없어?"
"옷이 좀 그을린 것 빼고는 괜찮습니다. 본인 입으로 오늘 밤에도 출근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에잉, 역시 보표로 두기는 아까운데...."
총관이 혀를 내둘렀다. 다른 일을 맡기고 싶어도 본인이 한사코 싫다고 하니 방법이 없었다.
"알겠네. 이 건은 내 따로 장주님께 말씀드려야겠군."
운화장주는 투기장 사업의 책임자이니 당연히 이 소식을 알고 있어야 한다.
총관은 어쩌면 장주가 이 소식을 듣고 흥미로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5화. 산적 (1)
사건이 종결되고 두 달이 흘렀다.
운화장은 사건을 공표하진 않았다. 자칫하면 투사들이 동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문은 알음알음 퍼졌기에 보표들은 일하는 와중에도 강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정작 강엽은 무관심했다.
'음... 투로를 저런 식으로 연결할 수도 있었군?'
투사들의 싸움을 구경하는 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적수공권을 쓰는 자들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눈이 빠지도록 자세히 관찰했다.
열화장과의 싸움으로 무공에 더 열의를 갖게 된 것이다.
힘과 속도에서 앞섰는데도 내상을 입은 열화장을 압도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돌이켜보면 거산중권이나 빙궁의 아설하, 모산혈조를 따랐던 흑포무인도 마찬가지였다.
흡혈귀의 능력만 믿고 싸우기엔 강호무림에 너무나 많은 강적들이 살고 있었다.
강적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도산검림에서 살아남으려면 한시도 안주해서는 안 된다.
더 많이 배우고 강해지기 위해서 투사들이 주먹을 쥐는 자세, 손을 뻗는 방향, 무릎의 각도, 발을 내딛는 법 등등 가리지 않고 탐욕스럽게 흡수한다.
그들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왜 그러한 선택을 내렸는지, 후속대처는 어떤 식으로 하는지.
운화장에 출근한 지 어언 두 달.
그동안 강엽은 투사들의 싸움을 보면서 그들의 무공을 훔쳐배우고 있었다.
남의 무공을 본다고 따라하거나 터득하는 것은 비상식적이지만, 강엽은 비상식적인 짓을 태연히 저지르고 있었다.
물론 본 것을 모두 터득하지는 못한다.
다만 그 안에서 배울 만한 것들을 간추려서 남몰래 연습하고 있었다.
이는 강엽이 흡혈귀라서가 아니라, 진조의 후예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산혈조의 술법서를 봤을 때도 느꼈지만, 목내이에게 물려받은 진조의 영성은 그에게 무궁무진한 재능을 안겨주었다.
지식을 갖추고 견문을 넓히는 것만으로도 강해질 정도로.
이제 강엽은 피를 먹을 때를 빼면 자나 깨나 무공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부족해. 시습(時習)이 필요한 시점이다.'
배우면 실천하라는 논어의 구절이다.
실전을 겪어봐야 실수를 깨닫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법.
강엽은 당장 투기장에 뛰어들어 투사들과 무공을 견주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지만, 그전에 사회자의 일장연설이 투기장을 울렸다.
"아쉽지만 금일 결투는 이걸로 마무리됩니다! 내빈 여러분께서는 귀중품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시고, 보표들의 안내를 따라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투기장이 파하고, 관객들은 아쉬움을 삼키며 자리를 떠난다.
오늘은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강엽 역시 다른 때보다 일찍 퇴근할 수 있었다.
"드디어 휴식기로군.
"한동안은 푹 잘 수 있겠어."
투사들도 휴식이 필요하거니와, 운화장 역시 새로운 투사들을 들여와야 하는 시점이다.
관객들 역시 같은 사람이 계속 싸우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지겨움을 느끼기 때문에 새로운 투사들을 들여오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이 휴식기가 거의 보름이나 이어지기 때문에 그동안은 보표들의 업무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보표들은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강엽만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휴식기엔 투사들의 싸움을 견식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피를 구하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다들 힘들어하는 분위기에서 투덜대자니....
'그건 내가 너무 쓰레기 같지.'
강엽은 쓰게 웃었다.
그러나 피를 구할 수 없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장경에게 말은 해뒀지만 조건에 맞는 의뢰를 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으니까.
장경 역시 시일이 걸릴 수 있다고 한 만큼, 강엽은 여차하면 다른 분타로 가는 것도 염두에 뒀다.
* * *
늦은 새벽에도 장경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문득 강엽은 장경이 언제 쉬는지 궁금해졌다.
전강과 함께 일하니 번갈아가며 쉬는 것도 아닐 텐데 쉬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혹시 낮엔 객잔을 닫나?"
"뭔 뜬금없는 소리여?"
"밤에 일하면 낮엔 쉬는 건가 싶어서."
오자마자 이상한 소리부터 하는 강엽의 모습에 이놈이 뭘 잘못 먹었나 고개를 갸웃했던 장경은 그제야 강엽의 말뜻을 알아듣고 피식 웃었다.
"뭐, 낮엔 쉬지. 그땐 다른 점소이 녀석이 객잔을 본다. 그래봤자 간단한 음식만 팔지만."
어차피 낮에 파는 음식이래봤자 허여멀건한 닭죽이 전부라서 어지간히 돈이 없는 게 아니면 굳이 객잔에서 밥 먹는 사람이 없었다.
"참고로 나도 낮엔 우리 객잔 밥 안 먹는다."
"...참 자랑이다."
객잔의 주인장이란 놈이 자기네 객잔밥이 맛없다고 대놓고 떠벌리다니.
강엽이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보는데도 장경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지 당당했다.
"그래도 밤엔 제대로 된 음식이 나와. 왜냐하면 전강이 요리하니까!"
자기 객잔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지 아닌지 헷갈리는 태도였다.
헛웃음을 흘린 강엽이 화제를 바꿨다.
"의뢰는?"
"아, 그것 말이지."
장경이 식당에서 밥 먹는 누군가를 불렀다.
"이봐, 기다리던 사람 왔다!"
그 말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던 낭인들 중에 한 명이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뭐냐."
"뭐겠냐. 이쪽으로 와달란 뜻이지. 흑풍사우(黑風四友)가 낭인들을 모집하고 있어."
"잠깐. 흑풍사우라면...."
중경 분타에 속한 낭인들은 많다.
하지만 흑풍사우는 강엽도 몇 번이나 들어본 이름으로 전원이 은패급의 낭인들이었다.
가장 낮은 은인패조차 강호에서는 일류고수로 대접받으며, 실제로 그만한 실력을 지녔다.
흑풍사우는 대형인 흑풍도 흑수양이 은지패의 실력자였고, 나머지는 전원 은인패였다.
"일단 가봐. 네 구미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거절하더라도 들어는 봐야 할 거 아냐?"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강엽이 떫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흑풍사우가 앉은 탁자로 자리를 옮기자 손을 흔든 중년인이 쾌활하게 웃었다.
"하하. 드디어 만나는구만. 자네 소문은 많이 들었어. 거산중권을 잡았다지? 아, 서 있지 말고 앉게. 난 흑수양이라고 하네. 낭인전의 친구들은 과분하게도 흑풍도라는 이름으로 불러주고 있지."
연배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흑풍사우의 대형인 흑수양은 까마득한 선배였다.
그럼에도 흑수양은 소탈한 태도로 강엽의 손에 잔을 쥐여주고 손수 술을 따라주었다.
잠시 상대를 어찌 대할지 고민했던 강엽은 술잔을 내려놓고 정중하게 공수의 예를 취했다.
"...강엽입니다."
뒤이어 흑풍사우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자 다들 짧게 자기 이름을 내뱉었다.
"호종산이라고 하는구만."
"...막도희."
"문경우다."
개성적인 조합이었다.
호종산은 낭인답지 않은 통통한 체구에 큼직한 도끼를 낀 채 술을 마시고 있었고, 흑풍사우의 유일한 홍일점인 막도희는 활과 화살통을 메고 있었다.
그나마 가장 나이가 어린 문경우만 흑수양과 비슷하게 유엽도를 패용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강엽이 다시 흑수양에게 시선을 보내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을 나갔다고 들었는데 배가 고프진 않나? 넉넉하게 시켰으니 같이 들어도 되는데."
"괜찮습니다."
흡혈귀가 된 뒤로 입맛이 변했다.
단맛이나 짠맛 등 맛을 느끼는 미각은 그대로이되, 강엽은 더 이상 다양한 맛이 자아내는 즐거움을 찾지 못했다.
오로지 선천지기가 충만한 고수의 피를 마실 때만 고양감과 같은 쾌감을 느낀다.
'먹을 수는 있고 소화도 할 수 있지만... 먹어봤자 내 몸에 아무런 효과가 없지.'
고기나 쌀밥을 먹어도 피를 마시지 못하면 결국 갈증에 시달리다 흡혈욕이 폭주할 뿐.
이미 자신의 몸으로 겪어봤기에 강엽은 요 두 달간 피 말고는 아무것도 입에 댄 적이 없었다.
강엽의 목소리에서 단호한 거절의 의사를 감지한 흑수양은 입맛을 다시면서 용건을 꺼냈다.
"장 분타주가 잠깐 얘기한 것 같지만 다시 설명하겠네. 얼마 전부터 우린 낭인들을 모으고 있네."
흑수양의 설명은 이러했다.
인근을 지나는 상인들을 통해 소문이 퍼졌다.
중경에서 팔백 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팽수현(彭水縣)에 커다란 산적 소굴이 들어섰다는 것이다.
팽수현엔 묘족이나 투가족 등 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힘없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산적들은 그 점을 노려 마을을 점거하고 패악질을 일삼고 있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잔인하게 죽인다고 하더군. 살인, 약탈, 강간... 그놈들은 도를 넘었네. 문제는 그놈들이 무공을 익혀서 토벌하기 어렵다는 거야. 특히 우두머리의 무공이 상당하다고 들었네."
"그래서 실력 있는 낭인들을 모은다는 겁니까?"
"그렇지."
"의뢰비가 감당이 된답니까?"
산적들의 폭거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하는 것은 분명히 정의롭고 가치있는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낭인들은 협객이 아니다.
"산골 마을이라면 가진 재산이 넉넉하지 않을 터. 그나마 있는 것도 산적들에게 다 빼앗겼을 겁니다. 낭인을 얼마나 모으려는 건지는 몰라도 마을 사람들의 재산으로는 의뢰비를 못 맞출 것 같습니다만."
"걱정하지 말게. 그런 일은 없을 테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걸까.
어차피 강엽은 돈 때문에 낭인을 하는 건 아닌 만큼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은 없었지만, 흑수양은 엄지를 척 치켜들더니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왜냐하면 내가 낼 거거든."
"...어째서 그런 일을?"
가장 낮은 동인패의 낭인을 고용하려고 해도 은전 열 냥이 깨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 위의 동지패와 동천패쯤 되면 두 배, 세 배로 뛰니 보수적으로 잡아도 수백 냥이 깨질 각오를 해야 한다.
흑수양이 은패 등급의 낭인으로서 재산을 꽤 모았다고 해도 상당한 지출일 터.
굳이 사비를 내면서까지 낭인들을 모집하고, 산적들을 치려고 한다면 그 이유는 아마....
"내 고향이거든."
"산적들이 점령한 마을이 말입니까?"
"거기 말고 다른 곳. 하지만... 그 마을도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 멀진 않지."
산적들이 마을을 가리지 않고 난장을 피웠다면 흑수양의 고향도 화를 입었을 것이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고향이 위험에 처했다는 걸 뻔히 아는데도 모른 척할 만큼 흑수양은 매몰차지 못했다.
"게다가 나도 슬슬 낙향할 생각이거든. 애먼 놈들이 고향을 짓밟으면 내 야무진 은퇴 계획이 망하지 않겠나?"
흑수양의 뜻은 알았다.
그가 왜 금전적인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낭인들을 모집하는지까지도 이해했다.
"전 동인패입니다만."
"거산중권을 잡은 동인패지. 그만하면 사실상 은패급이라고 봐도 무방하네."
"낭인은 몇 명입니까?"
"자네까지 포함하면 열하나. 좀 더 모으는 대로 출발할 예정이야. 의뢰비는 은전 백 냥씩 주겠네."
예상했던 것보다도 후한 의뢰비였다.
이만하면 은퇴 후 낙향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작정하고 돈을 풀었다고 봐야 하리라.
그러나 강엽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이어도 낮에 싸우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감안하면 섣불리 확답을 줄 순 없었다.
그러자 흑수양이 기억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깜빡할 뻔했군. 당연히 우리도 대낮부터 공격할 생각은 없네. 날이 저물면 기습할 거야. 충분한 인원이 모이면 함께 중경을 나가서...."
"팽수현에서 합류한다면 의뢰를 받겠습니다."
야음을 틈타 이동한 다음 적절한 시기를 봐서 합류하면 산적 토벌에 참가할 수 있으리라.
만약 흑수양이 거절한다면 강엽은 미련없이 다른 의뢰를 알아볼 작정이었다.
"신입 주제에 건방지네."
흑풍사우의 다른 사람들이 불쾌감을 표했다.
말한 것은 막도희였지만, 호종산과 문경우도 싸늘한 안광을 피워올리며 강엽을 노려봤다.
"거산중권을 잡았다지만 아직은 동패급. 의뢰에 조건을 붙이는 게 좋아보이진 않은걸."
"이 녀석들아,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왜 그래?"
흑수양이 말렸어도 흑풍사우의 삼인방은 강엽을 향한 무언의 압박을 거두지 않았다.
이제 막 낭인전에 들어온 신입이 은전 백 냥짜리 의뢰를 받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그들이 그만한 의뢰를 받기까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일 년이 걸렸다는 걸 감안하면 강엽이 받는 대우는 후하다 못해 파격적이었다.
"다른 낭인들과 같이 출발하는 건 원활한 토벌을 위해서야. 네가 신입치고 강하다는 건 알겠지만... 혼자만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럼 협상은 결렬이군."
강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햇볕이 극독이나 다름없는 그에게 있어 낮에 다 함께 이동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으니까.
다만 흑풍사우는 강엽이 일말의 미련도 없이 자리를 박찰 줄은 몰랐던지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다.
"토벌 얘기는 안 들은 걸로 하지. 서로 조건이 안 맞는데 어쩌겠나."
의뢰가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정 안 되면 다른 분타로 가버리면 그만이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산적 소굴로 들어가서 한 명만 슬쩍 빼내도 괜찮고.'
몸을 돌리려는 그때였다.
"잠깐만."
흑수양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약간은 가벼웠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기에 강엽도 매정하게 뿌리치진 못했다.
"조건을 받아들이겠네."
"대형!"
"형님! 어찌...!"
흑풍사우의 삼인방이 눈을 부릅뜨고 만류했어도 흑수양의 의지는 바뀌지 않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경이 자넬 추천했고, 전강 역시 자네가 가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했네."
장경은 그렇다 치고 전강까지 그런 말을 했을 줄이야.
무엇보다 흑수양쯤 되는 낭인이 전강의 말을 귀담아들었다는 게 의외였다.
"그 두 사람이 자네 실력을 보장했다면 나 또한 자네를 믿어보지. 아무 이유 없이 단독행동을 하겠다는 건 아닐 테니까."
사실 합류지점에 제때 도착하기만 한다면 단독행동을 허가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강엽이 혹여 산적들과 마주쳤다가 토벌 작전이 새진 않을지 우려했을 뿐.
"내가 자넬 믿는 만큼 자네도 나를 실망시키지 말게."
강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5화. 산적 (2)
"얘기는 해봤냐?"
"의뢰를 하기로 했다."
강엽은 흑수양과 나눈 얘기를 들려주면서 궁금한 점을 물었다.
"넌 그렇다 치고 전강도 많이 신뢰받던데."
전강이 평범한 점소이가 아니라는 건 바윗덩이처럼 잘 짜인 거구의 근육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은패급 낭인이 그 정도로 굳건히 신뢰할 만큼 고강할 줄은 몰랐다.
"흐흐, 전강이 난동을 피우는 놈들을 제압한 적이 있거든."
대부분의 낭인들은 제멋대로다.
전부가 그렇진 않더라도 그런 부류가 많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하고, 제대로 말하면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은 일단 들이받고 보는 미친놈들이었다.
"아까 흑풍사우랑 말다툼을 벌였다고 했지? 그 정도면 굉장히 온건한 편이야."
인내심이 짧은 낭인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실제로 많은 낭인놈들이 자기가 무시받았다고 생각하면 주먹부터 날리지. 맛간 놈들은 분타주고 뭐고 들이받고 보는 거야."
"너한테도 그런다고?"
아무리 낭인전의 규율이 느슨하다지만 분타주에게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강엽이 할 말을 잃자 장경이 킬킬거렸다.
"뭣도 모르는 애송이들이지. 그런 짓을 한 놈들은 전강이 죄다 제압해서 저 너머로 던져버리는데 말이야."
장경은 그렇게 말하며 입구를 가리켰다.
"...오늘은 안 보이는군."
"잠깐 일이 있어서 말이야."
고개를 끄덕인 강엽이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의뢰를 나가있는 동안 집을 알아봐줄 수 있나?"
처음엔 언제 중경을 떠날지 몰라서 객잔을 잡았지만, 객잔에서 장기 투숙을 하는 건 생각보다 불편했다.
일단 공간이 협소해서 수련하는 게 여의치 않았다.
낮에도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룬다.
무엇보다 나갈 때마다 혹시 좀도둑이 들어와서 방에 숨겨둔 모산파의 술법서를 훔쳐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정말 도둑이 들어온다면 술법서보다는 푼돈을 노리겠지만 말이지.'
어쨌든 당장 떠나지 않을 거라면 월세라도 집을 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장경에 부탁을 한 것이다.
분타주의 업무는 낭인들에게 의뢰를 알선하는 것이지만, 낭인들이 의뢰에만 집중하도록 편의를 제공하는 역할도 맡고 있으니까.
당연히 공짜는 아니었다.
"돈만 낸다면야 뭔들 안 될까. 수련할 공간이 딸린 집이 필요하겠지? 월세?"
"그래."
"흠, 크기나 위치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은전 서른 냥은 든다고 보면 돼. 귀신 나오는 집이라고 소문난 데는 그보다 싸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집은 좀 그렇지?"
"연공실만 있다면 상관없어."
과연 귀신이 나와도 흡혈귀를 위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모산파의 술법에 귀신을 다루는 것도 있는 것 같던데....'
술법만 쓸 수 있다면 귀신 나오는 집에 살아도 나쁘지 않았다.
장경이 두터운 턱을 쓸었다.
"매물이 좀 있긴 한데... 나도 자세히 아는 건 아니라서 한번 알아봐야겠다."
"부탁하지."
강엽은 당부의 말을 남기고 객잔을 나왔다.
* * *
강엽이 중경을 나온 건 다음날 날이 저물 무렵이었다.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면서 강엽은 이전과는 달리 당당히 중경의 성문을 통과했다.
중경의 관병들은 강엽을 제지하지 않았다.
단지 무더운 여름에도 얼굴을 제외한 전신을 두꺼운 흑의로 감싼 강엽을 이상하게 쳐다볼 뿐.
강엽은 구구절절 변명하는 대신 죽립을 머리에 쓰고 관도를 따라 밤길을 거닐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멀어졌을 무렵 달리기 시작했다.
중경에서 팽수현까지는 팔백 리.
'제때 도착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말을 타면 시간을 아낄 수 있겠지만, 그는 가난한 유생이었는지라 기마술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도 흡혈귀의 육체능력을 십분 활용한다면 웬만한 준마보다 빠르게 내달릴 수 있었다.
강엽은 이것도 수련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동패무고에서 읽은 경공 비급의 구결을 떠올리며 혈공진기를 발바닥의 혈자리로 인도했다.
처음엔 어설퍼도 하면 할수록 익숙해져서, 한 시진이 지날 때쯤엔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지면을 쭉쭉 미끄러지고 있었다.
심지어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암신을 같이 쓰면 어떻게 될까?'
암신은 상대의 감각을 현혹하는 환술이다.
하지만 그건 결과적으로 그런 식으로 작용할 뿐, 상대를 속이는 것은 암신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둠과 동화되는 것이야말로 암신의 본질이다.
과연 암신과 경공을 같이 펼치면 어찌 될지 자못 궁금해진 강엽은 호기심을 참지 않았다.
암신을 펼친 그의 몸이 시커먼 어둠에 녹아들었다.
이전과는 다른 감각이 느껴졌다.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와중에도 기감이 한층 예민해지며 멀리까지 감각이 닿았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범위가 넓어지고 있었다.
오 장, 십 장, 그 너머까지...!
'최대 이십 장. 지금은 이게 한계인 것 같군.'
그 이상은 감각이 닿지 않는다.
그러나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감각할 수 있는 것은 대단히 큰 이점이었다.
달리는 와중에 기습을 받는다고 해도 순간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는 와중에도 강엽의 경공은 매끄럽게 이어졌기 때문에 웬만한 준마보다 빨리 달리고 있었다.
중간중간 쉬는 시간을 빼면 모조리 경공을 쓰며 내달린 강엽은 세 시진이 지나서야 이름 모를 깊은 야산으로 들어갔다.
적당히 응달진 곳을 찾아서 푹 쉬었다가 날이 저물면 다시 내달릴 생각이었다.
물주머니에 담은 피를 조금씩 마시면서 볕이 들지 않는 바위 틈새를 찾아 몸을 뉘였다.
그리고 적당히 쉬다가 가부좌를 틀었다.
목내이가 물려준 혈공진기는 특별히 운기조식을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알아서 경맥을 주천한다.
말하자면 동공(動功)이라 할 수 있었다.
알아서 움직이니 구태여 따로 운기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강엽은 틈이 날 때마다 혈공진기를 운기했다.
내부의 경맥을 관조하면서 혈공진기를 갈고 닦을수록 진기를 다루는 기감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반사신경이나 육체를 통제하는 감각 역시 함께 발전했다.
기실 흡혈귀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강엽은 몸 쓰는 재주가 일절 없는 몸치였다.
하지만 흡혈귀가 되고, 혈공진기를 수련한 뒤로는 어떤 어려운 동작이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때론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알아서 기민하게 반응했다.
'너무 달라져서 내 몸 같지가 않단 말이지.'
예전에는 할 수 없던 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건 엄연한 현실이었다.
피를 마시는 괴물이 된 대가로 괴물같은 재능을 얻은 것이다.
흡혈귀가 되면서 많은 것을 포기했으니 이 정도쯤은 해줘야 덜 억울했다.
그렇게 수련하기를 한참.
정확히 여섯 시진이 지나서 사위가 어둑해질 무렵 강엽은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팽수현은 운남의 운귀고원에서 발원한 오강이 지나는 곳에 자릴 잡고 있었다.
산길을 주파했던 강엽은 어느 순간 눈앞에 나타난 넓은 물줄기를 보고 직감적으로 오강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뒤부터는 강변을 끼고 움직였다.
오강이 이정표가 되어준 덕에 방향을 잡기는 쉬웠다.
덕분에 동이 트기 전에 합류하기로 약속한 한가진이라는 마을에 한달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딱 봐도 마을 분위기는 흉흉했다.
가까운 곳에 커다란 산적 무리가 떡하니 자릴 잡고 살인과 약탈을 일삼으니 좋을 수가 없었다.
'내가 먼저 도착한 건가?'
하긴 흑풍사우는 낭인들을 모은다고 했으니 출발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만나기로 한 객잔에 들어간 강엽은 볕이 적게 드는 방에 짐을 풀고 한숨 늘어지게 잤다.
그렇게 한창 자고 있자니 별안간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강엽은 누군가 접근한다는 것을 알고 눈을 떴다.
창문에 암막을 쳐서 바깥은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씩 볕이 들이치는 걸로 봐서는 아직 한낮이리라.
"문경우다. 대형께서 널 부르신다. 아래로 내려오도록."
이틀 전 청송객잔에서 만난 흑풍사우의 막내였다.
강엽은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하며 말했다.
"알았어. 곧 간다고 전해라."
실내이기는 해도 창문을 통해 볕이 들이치는 만큼 강엽은 옷을 단단히 둘렀다.
목 위쪽까진 완전히 가리고, 손에도 장갑을 끼고, 마지막으로 피풍의에 달린 두건을 눌러써서 피부가 햇볕에 닿지 않도록 했다.
'끄응, 이렇게 해도 완전히 막진 못하니....'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의뢰는 이래서 불편하다.
완전 무장을 한 강엽이 일층의 식당으로 내려가자 무기를 휴대한 무리의 시선이 모였다.
청송객잔에서 몇 번 봤던 낭인들의 면면을 확인한 강엽은 흑수양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창 단잠을 자던 것 같은데 깨워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한데 이게 전부입니까?"
흑풍사우와 강엽을 포함해도 스무 명 가량이었다.
짧은 시간에 급히 사람을 모으다 보니 이 정도가 한계였던 모양이다.
흑수양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됐네. 좀 더 시간이 있었으면 이보단 많이 모았겠지만...."
하나 아무리 급해도 이미 의뢰를 하고 있는 사람이나 어중이떠중이를 데려갈 수는 없지 않나.
따지고 보면 낭인전에 들어오자마자 거산중권을 잡은 강엽이 비상식적인 거지, 원래 동인패급의 낭인들은 무림인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부류였다.
"아니, 시벌! 우리면 충분하지! 산적 나부랭이쯤은 몇 놈이든 거뜬하다고, 흑 선배!"
"고럼! 그 말 취소해라, 애송이!"
낭인들이 이죽거리며 야유를 퍼부었다.
흉악한 산적들을 상대하는데도 여유로운 게 비슷한 의뢰를 해본 경험이 많은 것 같았다.
더러는 강엽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나저나 저 친구가 거산중권 그 씹새를 죽였다고? 생각보단 비리비리하게 생겼는걸."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야. 소문으론 그 인왕(仁王)이 추천했다고 하던데...."
"인왕?"
강엽이 처음 듣는 별호에 고개를 갸웃하자 흑수양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전강 그 친구의 별명이지. 장 분타주가 곤란을 겪거나 청송객잔에서 싸움질이 벌어질 때마다 전강이 나타나서 진압해버렸거든."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처럼 분타주와 청송객잔을 지킨다고 하여 붙은 별명이었다.
"게다가 누가 욕을 하거나 시비를 걸어도 절대로 화를 내지 않고, 싸움이 나더라도 상대방이 다치지 않는 선에서만 제압하지. 인왕이라는 별명이 붙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야."
"그렇군요."
아무래도 자신이 막연히 생각하던 이상으로 전강이 굉장한 고수인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날 인정해줬단 말이지....'
거산중권을 죽여서 그런 걸까?
강엽은 나중에 청송객잔에 돌아가면 꼭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짝짝!
박수와 함께 흑수양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다들 날 따라와줘서 고맙네."
흑풍사우, 특히 은지패인 흑수양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경력이 길었다.
강엽은 몰랐지만 중경 분타의 낭인들 중에 흑수양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다들 크고 작은 빚을 진 만큼 같이 산적들을 토벌하자는 요구에 흔쾌히 응했다.
일부는 원래 하기로 했던 의뢰를 미루거나 취소하면서까지 달려온 마당이었다.
"우리는 저 무릉산맥의 어딘가에 똬리를 튼 산적놈들을 박멸할 걸세. 일전에 말했듯 놈들은 죄없는 사람들을 해치고 이 주변을 약탈했네."
모든 낭인들이 협을 추종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돈만 준다면 위험한 격전지에 기꺼이 몸을 던질 수 있는 게 낭인이라는 족속이었다.
하물며 흑수양은 그들을 여러모로 도와준 선배였던 만큼 돈은 필요없다고 한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흑수양은 그들이 사양한다고 해서 돈을 떼어먹는 성정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후배 낭인들의 존경을 받지 못했으리라.
"평범한 산적들이 아닌 만큼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게야. 그래도 힘을 모으면 이길 수 있을 터. 난 우리가 승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네."
"당연하고말고! 우리가 누구인데! 선배랑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수다!"
"오오!"
낭인들이 환호한다.
이제 합류한 강엽조차 흑수양이 낭인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런 점은 본받을 만하군.'
흑수양처럼 살겠다는 뜻은 아니다.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품은 그로서는 다른 낭인들과 함께 일하는 것부터가 고역이었으니.
다만 낭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면 훗날 도움을 받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다.
괴물이 되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해서 세상을 홀로 살 필요는 없었다.
5화. 산적 (3)
흑수양은 서둘렀다.
마을에 도착한지 한 시진도 안 되어 커다란 배를 수소문해서 오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붉게 물든 노을을 배경으로, 옥색의 강에 부딪친 햇살이 별빛처럼 부서지는 광경은 그 자체로 넋을 잃을 만한 절경이었다.
하나 그걸 즐기는 사람들은 없었다.
싸울 때가 다가왔음을 직감한 낭인들은 풀잎을 질겅질겅 씹거나 면사포로 칼날을 닦을 뿐.
일부 말 많은 작자들조차도 지금 이 순간만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침묵에 동참하고 있었다.
강엽은 그들보다 더 심했다.
머리까지 두건을 푹 눌러쓰고 죽립까지 뒤덮은 행색으로, 그나마 볕이 덜 드는 뱃전 구석에 구겨지다시피 처박혀 있었으니까.
그 모습을 몇몇 낭인들이 해괴하게 바라봤지만, 강엽은 변명을 주워섬길 정신머리도 없었다.
옷을 몇 겹이나 껴입고도 인두로 지저지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일전에 햇볕에 노출되었을 때처럼 연기가 나진 않았지만 화상을 입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그나마 혈공진기가 성장해서 이렇게라도 버티는 거지.'
처음에 햇볕에 노출되어 부상을 입었을 땐 혈공진기를 깨우치지도 못한 상태였다.
모산혈조를 따른 흑포무인을 죽이고 그 피를 흡혈했을 때 비로소 혈공진기를 깨우쳤다.
중경에 와서 낭인전의 낭인으로 활동한지도 어언 두 달.
꾸준히 무림인들의 피를 마셨기 때문에 단전에 깃든 혈공진기는 많이 성장했다.
치이익!
'그래도 아직은... 많이 멀었어.'
예전에 비하면 조금 나아졌지만 햇볕을 극복할 정도는 아니다.
"이봐, 괜찮나?"
"끙끙 앓는 것 같은데."
나름 참는다고 참았는데도 가까운 곳에 있는 낭인들은 들은 모양이었다.
"괜...찮다."
괜찮은 사람의 목소리가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낭인들은 흑수양에게 말해야 할지 헷갈렸다.
강엽이 다시 말했다.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져."
"뭐 배탈이라도 났나 보구먼."
이를 악문 강엽은 고문과도 같은 시간이 끝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다행히 태양이 서녘으로 기울고 있는 데다 산들이 햇볕을 가려준 덕에 밤은 금방 찾아왔다.
그제야 한숨을 돌린 강엽은 고통이 완전히 가라앉고 나서야 두건과 죽립을 벗었다.
검게 물든 강과 밤하늘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후...."
강엽이 다시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만졌다.
좀 전까지 화상을 입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매끄러운 피부가 느껴진다.
다만 식은땀에 절어있는 데다 얼굴은 허옇게 질려있고, 눈가는 퀭해서 병자처럼 보인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때 흑수양이 다가왔다.
"괜찮나?"
강엽이 아프다고 생각한 낭인들 중 한 명이 쪼르르 달려가서 미주알고주알 떠든 것이다.
"부상을 당한 것 같진 않은데...."
"문제 없습니다."
따끔한 고통이 조금 남아있긴 해도, 숨 몇 번 쉴 동안에 강엽은 신색을 되찾았다.
"아프면 돌아가는 게 어때?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끼치지 말고."
흑풍사우의 막도희가 비아냥거렸다.
첫 만남부터 미운털이 박혔기에 꼬투리를 잡을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흑수양이 타박했다.
"넌 또 왜 그러는 게야?"
"제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요. 뭘 잘못 처먹었는지 몰라도 아프면 쉬어야죠."
흑수양은 부정하지 못했다.
가시가 돋긴 했어도 막도희의 말 자체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배 위에 있었다.
이미 절반 이상을 건넜는데 이제 와서 배를 돌리는 것은 말도 안 되지 않는가?
"강엽."
"전 정말 괜찮습니다. 의뢰를 수행하지 못할 만큼 아프면 알아서 빠지겠습니다."
결국 자기 몸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
머리가 약간 젖은 것 말고는 무탈한 것처럼 보였기에 흑수양도 강엽을 말리지 못했다.
게다가 한 명의 전력이 아쉬운 상태에서 강엽이 빠지는 것은 정말로 큰 손실이었다.
"...알겠네. 하나 돈 때문에 괜한 고집은 부리지 말도록. 싸움이 시작되면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강엽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흑수양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흑풍사우의 다른 이들은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반대를 하진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별안간 흑수양이 눈을 빛냈다.
"도착했군."
* * *
그들을 태운 배는 돌아갔다.
오강을 오가며 사람들을 싣어나르는 배는 원래 이 밤에 강물을 거슬러 오를 계획은 없었다.
그저 흑수양이 객잔에 쉬고 있는 뱃사람들을 찾아가서 정중히 부탁했기에 들어준 것뿐.
산적이 활동하는 영역과 뱃사람의 영역이 다르긴 해도 그들 역시 수적에게 뜯긴 경험이 있는 데다 흑수양의 부탁이 워낙 간곡했기에 들어준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산적들이 점거한 마을로 들어간다."
낭인들을 모은 흑수양이 말했다.
"소문에 따르면 산적들의 머릿수는 최소한 백여 명. 어쩌면 그보다 많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개개인의 실력은 우리가 훨씬 강하다고 믿네. 게다가 야밤에 기습하니 산적들 역시 허를 찔릴 터."
이제부턴 도보로 가야 하는 거리였다.
마을까지의 거리는 삼십 리쯤.
무릉산맥의 줄기를 두고 작은 마을들이 띄엄띄엄 있었는데, 산적들이 점거한 마을은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릴 잡고 있었다.
야밤에 산길을 타는 게 위험하긴 해도 이쪽이 고향인 흑수양은 비교적 안전한 길을 알고 있었다.
그의 인도 하에 낭인들이 산길을 타니 사경 무렵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기슭을 계단처럼 깎은 논밭 위에 백 호쯤 될 법한 제법 큰 마을이 있었다.
나무를 잘라만든 목책이 마을을 두르고 있었으며, 침입자를 감시하기 위한 망루까지 곳곳에 있다.
목책이라면 산짐승을 막기 위해 만들 수 있다고 쳐도 망루까지 있는 건 상식적이지 않았다.
필시 산적들이 토벌대를 염려하여 만들었을 터.
"보초를 세워뒀군...."
흑수양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긴 목책과 망루를 만들었는데 보초를 세우지 않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별로 졸려하는 기색 없이 똑바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졸음을 쫓기 위해서인지 다른 보초들과 얘기를 나누긴 해도 경계를 소홀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대형, 어찌하오? 놈들이 졸 때까지 기다리우?"
흑풍사우의 둘째인 호종산이 물었다.
흑수양은 고민에 잠겼다.
'보초들을 처치하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망루에 있는 인원까지 합치면 숫자가 많다.'
자칫 실수하면 들킬 판이다.
혹여 토벌대가 왔다는 소식이 산적들의 귀에 들어갈까 봐 서둘러서 왔는데, 겨우 문전을 앞두고 기습의 이점을 포기할 순 없었다.
"대형, 제가 망루에 있는 놈들을 쏠게요."
"들키지 않고 전부 죽일 자신 있느냐?"
막도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고작 백 호 남짓한 마을을 둘러싼 목책에 망루가 네 개나 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궁의 달인이니 야음 속에서도 멀리 있는 보초를 화살로 쏴맞힐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보초가 소리를 낸다면?
그땐 다른 보초들까지 적이 왔음을 알고 산채에 그 사실을 알릴 것이다.
그 시점에서 기습의 의미는 사라진다.
"그럼 어떡할거요, 선배?"
다른 낭인이 물었다.
흑수양은 고민하는 것처럼 턱을 긁적이다 낭인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내가 한 놈 정도는 암기를 던져서 죽일 수 있을 것 같네. 자네들 중에 암기에 능한 사람이 있나?"
"...."
다들 눈치만 볼 뿐 손을 들지 않았다.
그들이 숨은 논두렁에서 목책까지의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았다. 이 거리에서 암기로 적을 죽이라는 것 자체가 무리한 요구였다.
흑수양도 답답한 마음에 물어봤지만 암기의 명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때 뜻밖의 인물이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강엽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은신술을 쓸 줄 압니다."
암신을 쓰면 어렵지 않다.
어둠과 동화되어 몰래 접근하면 보초들의 멱을 따는 건 일도 아니다. 다만 암신의 효능을 일일이 설명할 순 없으니 은신술로 퉁쳤다.
"...증명할 수 있나?"
지금 여기서 해보라는 뜻이다.
강엽이 암신을 펼치자 낭인들은 괴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분명히 그들의 앞에 강엽이 있는데도 보이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마치 밤의 어둠과 섞여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예 숨은 건 아닌데?'
존재감이 흐려졌으나 시야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막도희가 코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별거 없잖아. 별 이상한 잡재주로...."
빈정거림은 이어지지 않았다.
싸늘한 한기가 뒷목에 닿는 순간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말끝을 흐렸다.
"계속 떠들어보지 그러나?"
"헙!"
온몸의 솜털이 쭈뼛 곤두섰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강엽을 뻔히 보고 있던 낭인들 모두가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헛숨을 삼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앞에 있었던 강엽이 어느새 막도희의 배후로 돌아가서 그녀의 목에 화살촉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갖고 있던 화살이었다.
"어, 언제...!"
"처음부터. 그래도 한 명쯤은 간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군."
강엽이 생각한 사람은 흑수양이었다.
하나 흑수양조차 막도희의 뒤에 나타난 강엽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강엽이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아무도 그의 살수를 막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방금 그게... 자네 은신술인가?"
"이 정도면 대답이 됐으리라 생각됩니다만."
대답이 되었다 뿐일까.
바로 앞에 있었던 강엽의 움직임을 놓친 시점에서 낭인들은 이의를 제기할 자격을 잃었다.
흑수양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럼 부탁하지."
앞서 얘기한 대로 그와 막도희가 각각 한 명씩 맡기로 했다.
강엽도 굳이 자기가 다 하겠다고 하진 않았다.
조용히 어둠 속에 녹아든 채 경공을 전개해 단숨에 목책을 넘어 망루에 올랐다.
막도희가 그랬듯 망루를 지키는 보초는 바로 뒤에 강엽이 있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
강엽은 길게 자라난 손톱으로 보초의 목을 그었다.
"...!"
부지불식간에 닥친 죽음의 손길에 당황한 보초가 발버둥친다.
그러나 우악스럽게 입을 틀어쥔 손으로 인해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속에서만 메아리쳤다.
강엽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보초를 뉘이고, 곧장 옆의 망루로 이동했다.
그리고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때맞춰 흑수양이 던진 암기와 막도희가 쏜 화살이 망루를 지키는 보초들을 꿰뚫었다.
두 사람 모두 첫 공격으로 보초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문제는 막도희가 맡은 보초였다.
가슴에 화살을 맞았음에도 즉사하지 않은 것이다.
보초가 떨리는 손으로 화살을 잡고 답답한 신음을 토하다 망루 아래로 떨어졌다.
"앗!"
실수를 저지른 막도희가 저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뱉을 때였다.
두 번째 보초를 해치운 강엽이 떨어지는 시체를 낚아채서 조용히 땅에 내려놨다.
목책에 가려졌기 때문에 막도희는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입구를 지키는 보초들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런 감정도 잠시였다.
강엽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막도희의 심사는 복잡해졌다.
첫 만남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여지껏 시비를 걸었던 놈에게 뒤를 잡힌 것도 모자라 도움까지 받다니.
이래서야 업계 선배를 자처할 자격이 없지 않나.
강엽이 그동안 속으로 자신을 얼마나 비웃었을까 생각하니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빌어먹을....'
* * *
입구를 지키는 보초들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강엽은 그들이 미처 눈치채기도 전에 은밀히 배후를 점하면서 한 놈의 목을 틀어쥐었다.
뼈가 뚝 부러지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보초가 허물어지자 옆에 있던 동료가 식겁했다.
그제야 적이 왔다는 것을 알고 호각을 꺼냈다.
그렇게 호각을 불려는 찰나.
쐐액!
밤하늘을 가르면서 날아온 화살이 몸통에 꽂히면서 보초가 크게 주춤거렸다.
"커헉!"
강엽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단숨에 뛰어들어 주먹을 꽂는다.
딱히 힘조절을 하지 않았기에 흡혈귀의 괴력을 고스란히 맞은 보초의 안면이 참혹하게 뭉개졌다.
주먹에 묻은 피를 힐끔거린 강엽은 낭인들을 등진 채 입가를 훔치는 척 피를 핥았다.
거산중권이나 열화장의 피보단 못해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뒷골목에서 굴러먹은 칼잡이들보단 선천지기가 풍부했다.
'그놈들보다는 강한 건가?'
강엽이 낭인들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입구를 제압했다는 뜻이었다.
5화. 산적 (4)
스무 명의 낭인들이 도둑놈마냥 슬금슬금 마을에 들어왔다.
그 사이 강엽은 근처에 산적들이 있나 살펴봤다.
만약 산적들이 어슬렁거린다면 발각당하기 전에 먼저 해치울 심산이었다.
'지금쯤이면 다들 자고 있을 테니 거의 없겠지만....'
목옥 안이나 뒤져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유독 냄새나는 곳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나온 장한이 기지개를 쭉 켜는 게 아닌가.
그러다 뒤늦게 강엽을 발견하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어엉?"
"하필이면 변소였나?"
어쩐지 냄새가 지독하더라니.
쓴웃음을 흘린 강엽이 한 발을 내딛는 순간, 그의 신형이 장한의 전면으로 들이닥쳤다.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장한이 주먹을 들어올린 찰나, 둔중한 충격이 장한의 머리통을 휩쓸었다.
대뜸 전면으로 뛰어든 강엽이 뺨을 후려친 것이다.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가 꺾인 장한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직후 강엽의 손에 머리채가 잡힌 장한의 고개가 쑥 내려가더니 강하게 올려친 무릎팍과 부딪쳤다.
빠각!
그걸로 끝이었다.
단 두 방으로 숨통을 끊어버린 강엽이 시체를 내려놨다.
그때 몇 명의 낭인들이 달려왔다.
공교롭게도 막도희가 낭인들을 이끌고 있었다.
강엽의 얼굴을 보자마자 움찔한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놈은 뭐야?"
"우연히 마주쳤다. 소리치기 전에 죽였지."
"...산적은 맞겠지? 대형께선 마을 주민들이 산적들과 섞여있을 수도 있다고 하셨어. 조심해야 해."
"명심하지."
그러나 마을 사람이라면 감시하는 인원이 따라붙었으리라.
기실 강엽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아도 막도희 역시 죽은 시체가 마을 주민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대충 봐도 얼굴에 흉터가 많은 게 산적같이 생겨먹었으니까.
"일단 우리는 같이 움직일 건데... 너는?"
아까 전이었다면 이런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을에 진입하면 은패급인 흑풍사우가 각각 낭인들을 이끌고 산채를 들쑤시기로 합의했으니까.
하지만 강엽에게 명령을 내리자니 과연 그가 자신의 뜻대로 따라줄지 걱정되었다.
"난 혼자 움직이겠다."
강엽 역시 다른 낭인들과 같이 움직이는 것보다는 혼자 싸우는 것을 선호했다.
막도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음대로 해."
그녀는 낭인들을 이끌고 다른 목옥에 들어갔다.
자는 와중에 소란을 듣고 깨어난 산적이 무어라 외쳤지만 낭인들은 대비할 틈새를 주지 않았다.
"이런 시팔! 네놈들은 뭐...컥!"
"닥치고 뒈져, 개새끼야."
막도희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산적이 누워있는 침상 옆에 알몸의 여자가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능욕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있는 여자는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온몸이 피멍투성이였다.
마을 주민들 중에서도 여인과 노인, 아이들은 폭력에 저항할 최소한의 힘조차 갖지 못한 약자였다.
산적들의 수중에 떨어진 마을 주민들의 운명이 어찌되었을지는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일.
하지만 예상보다 더한 참상을 보니 산적을 최대한 잔인하게 죽여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산적이 죽고 나서도 몇 번이나 단검을 찌른 막도희의 모습에 낭인들까지 혀를 내둘렀다.
"이미 죽었다, 막도희."
"그쯤 해두라고. 죽일 놈들은 많으니까."
막도희가 한숨을 내며 떨어졌다.
아무래도 그녀 역시 여인이다 보니 죽은 여인에게 감정이 몰입되어 평소보다 손속이 잔혹해졌다.
비참하게 죽은 여인의 시신을 피 묻은 이불보로 감싼 막도희가 일어서며 말했다.
"다른 놈들 죽이러 가자."
낭인들의 말마따나 죽일 놈들은 많다.
하지만 다른 목옥으로 쳐들어간 그들은 이미 죽어나자빠진 산적들을 보고 아연해졌다.
머리나 심장 등이 함몰되거나 날카로운 칼날로 그어버린 것처럼 목이 잘려 있는 게 아닌가?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는 뻔했다.
"하... 다른 곳으로 가라니까 그 새끼가...."
막도희가 어이없어하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 * *
'살수를 했어도 먹고 살 만했을지도.'
강엽은 자신의 재능을 새롭게 발견한 기분이었다.
어둠에 녹아드는 암신의 공능이 암살에 도움이 되리란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효과적일 줄이야.
어쩌면 낭인이 아니라 살수를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이 들 정도였다.
강엽이 쓰게 웃었다.
'별로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낭인 역시 그리 깨끗한 업은 아니나 살수는 숫제 돈을 벌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까지 해치는 자들.
비록 피를 마시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강호에 몸을 담긴 했지만 마음속에 그어놓은 선을 넘고 싶진 않았다.
이 선을 넘어버리면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괴물이 될 것 같아서.
푸학!
잠든 산적의 목에 손톱을 박는다.
손톱에 집중된 혈공진기가 경동맥을 자르자 산적은 자신이 죽는지도 모르고 삼도천을 건넜다.
분수처럼 뿜어지는 신선한 피를 손바닥에 담아 입에 가져가면서 강엽은 결심을 되새겼다.
피를 마시는 건 어디까지나 적으로 만난 무림인이나 이미 죽은 시신에 한정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마음속에 그어놓은 최소한의 선이니까.
낭인이 되었을 때 세운 결의를 새삼 다시 한번 되짚은 강엽은 다음 목옥으로 향했다.
그렇게 문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쾅!
문이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
산산조각난 파편 사이로 튀어나온 큼직한 막대가 강엽을 쫓아왔다.
난생 처음 보는 무기였다.
하지만 그 형태는 동패무고의 비급에서 봤다.
무림에서 사용되는 기문병기 중의 하나.
뒤로 물러난 강엽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편곤(鞭棍)?"
길쭉한 장대 위에 곤봉을 매달아놓은 무기였다.
"바깥이 시끄러워서 뭔 일인가 싶었는데... 쥐새끼들이 들어왔구나."
장대를 꼬나쥔 텁석부리 사내가 살기를 뿜었다.
원심을 그리며 돌아가는 곤봉을 당장이라도 강엽의 머리를 향해 내던질 듯한 사내가 문득 물었다.
"어디서 온 놈들이냐?"
"낭인전."
"뭣이?"
사내의 미간에 주름이 패였다.
깜짝 놀랐다기보다는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낭인전이 이런 궁벽한 촌구석에 뭐하러 왔단 말이냐?"
"뭐하러 왔긴. 의뢰를 받았으니까 온 거지."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기도 하고.'
그럼에도 낭인전에서 왔다는 말을 한 것은 사내의 반응이 궁금해서였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일신의 무력에 자신이 있다는 방증.
사내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크흐, 어떤 놈팽이가 의뢰했는지는 몰라도 낭인전의 낭인들이 왔단 말이지...?"
말이 끝나자마자 사내가 편곤을 찔렀다.
사내가 움직이는 것을 미리 포착한 강엽은 한 걸음 옆으로 움직여 편곤을 비껴냈다.
그리고 곧장 사내의 안면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손톱을 찔러갔다.
"건방진 새끼!"
그 순간 뒤로 삼보 물러난 사내가 능숙한 자세로 편곤의 아랫부분을 내렸다가 다시 퍼올렸다.
무턱대고 손을 찌른다면 장대가 팔목 아래로 파고드는 절묘한 한 수였다.
장대가 닿기 직전, 강엽은 손을 활짝 펴서 장대를 막는 한편 사내의 옆구리를 향해 우각을 날렸다.
그러자 사내 역시 위치를 바꾸면서 강엽의 다리를 쳐내고, 장대를 끌어당기는 동시에 팔꿈치로 강엽의 늑골을 겨냥했다.
지근거리에서 한방 먹여줄 생각이었다.
강엽은 장대를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팔꿈치를 쳐내면서 장대를 뒤로 밀어냈다.
퍼버버버버벅!
붙은 상태에서 펼치는 초근접 박투술이었다.
장대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팔다리가 끝도 없이 부딪쳤다.
예상보다 강한 반탄력에 묵직한 통증을 느낀 사내는 입술을 짓씹고 강엽을 노려봤다.
강엽이 편곤을 놔주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박투로 붙긴 했지만 손해를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 또 다른 산적이 강엽의 뒤를 노렸다.
"죽엇!"
소란을 듣고 온 것이다.
역수로 잡은 칼을 강엽의 등짝에 찌른다.
구태여 죽으라고 소리친 것은 자신이 뒤를 칠 테니 강엽을 꽉 붙잡고 있으라는 의미였다.
물론 그런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이미 배후의 적을 눈치챈 강엽은 당황하지 않았다.
몸을 틀어 등짝을 노리는 칼날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우고 단단히 꽉 조인다.
그리곤 장대를 놓고 팔꿈치를 크게 휘둘러 산적의 관자놀이를 찍었다.
눈이 게게 풀린 산적이 풀썩 쓰러진다.
동시에 자유를 되찾은 사내가 편곤을 회수하면서 강엽의 머리를 때렸다.
강엽 역시 예상했기에 몸을 비튼 상태에서 철판교의 수법으로 허리를 뒤로 뉘였다.
장대 끝에 연결된 곤봉이 아슬아슬하게 스치면서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편곤을 회수한 사내가 이번엔 다른 각도로 그의 사각(死角)을 노린다는 것을.
놈이 원하는 것은 공간을 제압하고 마음껏 무공을 휘두르는 것.
그걸 깨달은 강엽은 스스로 균형을 무너뜨리고 한 팔로 땅을 짚으면서 몸을 반전시켰다.
몸을 반전시키는 그 찰나에 편곤이 그가 서 있던 땅을 휩쓸듯 지나갔다.
그러나 세 번 연속은 없었다.
사내가 편곤을 휘두르려는 그 순간, 강엽은 장대가 한 바퀴를 돌기 전에 땅을 박찬 것이다.
혈공진기를 머금은 일권이 상대의 명치를 향해 쇄도하자 사내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불안정한 자세에서도 다리를 쭉 뻗었다.
"하압!"
거산중권과 열화장 이후 간만에 싸워보는 고수였다.
지금까진 허무하리만치 쉽게 죽어나간 산적들보다 월등히 강하다.
열화장과 싸웠을 당시의 자신이었다면 초감각을 동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암신까지 써야 했을 터.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부앙!
"엇?"
사내가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 보여준 몸놀림은 속임수였다는 것처럼 강엽이 한번 더 가속한 것이다.
타격 직전에 팔괘 중 태괘(兌卦)의 방위를 밟으며 몸을 급격하게 틀고.
그로써 상대의 역습을 무위로 돌리면서 훤히 드러난 빈틈을 향해 일권을 꽂는다.
다리를 지지대로 삼아, 대퇴의 족척건에서부터 끌어올린 힘을 온전히 담아내는 일권.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사내 역시 이를 꽉 물고 타격점인 복부에 내공을 집중했다.
피할 수 없다면 버틸 수밖....
터어엉!
"커억...!"
발경(發勁) 권력(拳力).
단순히 내공을 때려박는 게 아니라 세심하게 통제하면서 위력을 극대화시키는 수법.
강엽은 거산중권이나 열화장 등의 고수들과 싸우면서 경력을 체감했고, 그날의 싸움을 몇 번이고 곱씹은 결과 어떻게 해야 경력을 다룰 수 있는지 감을 잡았다.
뿐만 아니라 투사들의 싸움을 견식하며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경력을 다루는지도 공부했다.
그 결과 경력의 이치를 깨우쳤다.
'그 다음부턴 쉬웠지.'
혼자서 이것저것 시험해보며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해선 안 되는 일을 구분했다.
이전엔 그저 혈공진기를 팔다리 등에 무식하게 때려박아 휘둘렀다면, 이젠 같은 양의 힘으로도 훨씬 강한 위력을 낼 수 있었다.
굳이 발경을 쓰지 않아도 고수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던 강엽이었다.
그런 그가 이전보다 더욱 강한 힘을 손에 넣었으니 그 위력은 가히 발군이었다.
정타를 허용한 사내는 목옥의 벽을 부수고 반대편까지 튀어나왔다.
'이제는 적들도 알았겠지.'
곳곳에서 소란과 비명이 일고 있었다.
무기가 충돌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외곽의 목옥들은 그저 그런 산적들이 차지하고, 안쪽은 제법 강한 산적들이 차지했던 것이다.
아마 채주는 가장 깊숙한 곳에 있으리라.
입가에 피를 게워내는 사내의 뒷목을 밟아서 확실히 끝장내버린 강엽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카아앙...!
소란 속에서도 귓가를 또렷이 파고드는 파찰음.
"대장전(大將戰)인가?"
마침내 흑풍사우의 대형인 흑수양과 산적들의 채주가 무기를 맞대기 시작한 것이다.
5화. 산적 (5)
"으랏챠!"
호쾌한 기합과 함께 양날도끼가 떨어졌다.
쩌억!
한 번의 도끼질에 지붕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전에 지붕에서 벗어나며 안전하게 땅에 착지한 흑수양은 도끼날의 무식한 위력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강하다고는 들었지만....'
팽수현에도 무림 방파는 있었다.
인원이라고는 쉰 명 남짓밖에 안 되는 군소방파였지만, 문주는 제법 명성을 떨친 사람이었다.
어지간한 도적 무리는 무찌를 수 있을 만큼 강했다.
하지만 문주를 포함한 주요 제자들이 눈앞의 비웅채주(飛熊寨主)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흑수양 역시 낭인업계에서 인정받는 은지패의 낭인이었음에도 쉽사리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비웅채주 역시 마찬가지.
흑수양은 그가 혼신을 다해 휘두른 도끼의 궤적을 미리 예측한 것처럼 능란하게 대처했다.
흑풍사우의 둘째이자 채주와 마찬가지로 쌍도끼를 쓰는 호종산과 수없이 대련해본 경험 덕이었다.
두 사람의 무공도, 도끼의 크기도 다르지만 똑같은 쌍도끼다 보니 비슷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못 막을 일격은 깔끔하게 피하면서 때론 과감하게 급소를 노리자 비웅채주가 짜증을 냈다.
"이런 씨부럴 쥐새끼 같은 놈이...!"
급한 대로 도끼날로 튕겨보려 했지만, 내공이 듬뿍 담긴 칼날은 비웅채주의 도끼날을 비스듬히 타고 올라와서 목을 노렸다.
비웅채주로선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하지만 비웅채주가 히죽거리는 순간, 흑수양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칼의 방향을 바꿨다.
따앙!
어둠 속에서 쏘아진 비침이 도면에 막혔다.
그 틈에 비웅채주가 쌍도끼를 휘두르자 흑수양은 급히 좌장을 뻗어 장풍으로 견제하며 쭉 밀려났다.
비웅채주가 놀라워했다.
"대단한걸! 어떻게 안 거지?"
"...경험이지."
사실 반쯤은 운이었다.
비웅채주의 눈동자가 슬쩍 오른쪽으로 향했다는 걸 눈치채자마자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만약 비웅채주가 좀 더 고단수였다면, 혹은 비침이 막기 어려운 곳을 노렸다면 당했을 것이다.
'그래도 불리한 건 여전하군....'
만만치 않은 비웅채주를 상대하면서 어둠 속에 숨은 암습자를 신경써야 하니까.
강엽이라면 암신을 써서 암습자부터 죽이고 비웅채주를 상대했겠지만, 흑수양에겐 강엽처럼 사람의 감각을 농락하는 재주가 없었다.
만약 그가 암습자부터 처리하려고 든다면 비웅채주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비웅채주부터 공격하자니 언제 다시 비침이 날아올지 모른다.
이번엔 운 좋게 막았어도 다음엔 어떨까?
'그렇다고 도움을 청하기엔....'
흑풍사우의 삼인방처럼 흑수양도 몇 명의 낭인들을 이끌고 산채를 들쑤시고 있었다.
하나 그들은 비웅채주의 처소를 지키는 산적 두 명한테 발목이 묶여 있었다.
마치 판에 박은 것처럼 똑같이 생긴 쌍둥이였는데, 훨씬 많은 낭인들에게 둘러싸였는데도 오히려 한 몸처럼 연수하며 그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흑수양이 굳은 얼굴로 입술을 잘근 깨물자 비웅채주가 광소를 터뜨렸다.
"크흐흐, 어떠냐. 이젠 아무것도 못하겠지? 그러게 왜 주제도 모르고 덤비냐고, 이 새끼야!"
노호성을 토한 비웅채주가 몸을 날렸다.
양손에 든 양날도끼가 신들린 듯이 춤을 추며 흑수양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흑수양은 비침이 날아온 방향을 염두에 두며 비웅채주의 공세를 피해 이리저리 위치를 바꿨다.
어둠 속의 암습자가 함부로 비침을 쏘지 못하도록.
"대형!"
문경우가 낭인들과 함께 달려왔다.
흑수양이 비웅채주와 싸우는 것을 보고 돕기 위해 온 것이다.
흑수양이 대경해서 외쳤다.
"조심해라! 살수가 있다!"
"...!"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낭인 한 명이 윽 하고 목을 잡았다.
바늘처럼 가느다란 비침이었기에 처음엔 따끔한 정도였다. 하지만 급속도로 안면이 굳어가더니 달리다 말고 맥없이 고꾸라졌다.
게거품을 문 낭인의 모습에 문경우가 신음처럼 목구멍을 쥐어짰다.
"독...!"
사색이 된 낭인들이 흩어졌다.
비침을 막을 수 있는 기둥과 건물 뒤에 숨었다.
"빌어먹을! 어쩌지?"
"저놈부터 잡아야지. 비침이 날아온 방향을 보면 지붕 위에 숨어있을 거다. 내가 놈을 잡을 테니 너흰 대형을 도와드려."
"저 망할 놈의 침은 어쩌려고?"
"누구 방패 가진 사람... 젠장, 우리 중엔 없지. 저기 부뚜막에서 솥뚜껑이라도 가져와 봐."
낭인이 솥뚜껑을 가져오자 문경우는 긴 가죽끈으로 솥뚜껑과 팔을 여러번 묶어 고정시켰다.
경험 많은 은패급 낭인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우는 임기응변에 익숙했다. 흑수양 등 여러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배운 지혜였다.
"발판 부탁한다."
두 명의 낭인이 서로의 손을 교차해서 발판을 만들자 문경우는 지체없이 그 위로 뛰어올랐다.
비조처럼 허공에 솟구친 그가 지붕에 착지하자 암습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비침을 쏘았다.
솥뚜껑으로 비침을 막은 문경우가 암막새 뒤에 쪼그려앉은 암습자를 발견하고 눈을 부라렸다.
입에 대롱을 대고 있는 암습자는 문경우가 솥뚜껑을 방패로 써먹을 줄은 몰랐는지 당황했다.
"죽었다고 복창해라, 새꺄."
그러나 암습자는 문경우를 정면에서 상대할 생각이 없는지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어딜 도망가!?"
하지만 암습자의 발놀림이 더 빨랐다.
암기술과 경공만 죽어라 익혔는지 문경우가 전력으로 질주하는데도 거리는 점점 벌어진다.
그러다 문경우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주저없이 대롱을 불어 비침을 쏘고 있었다.
문경우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죽여버리겠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암습자가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이며 피식 웃었다. 마치 그 정도로는 자신을 쫓아오지 못한다는 듯이.
문경우가 발끈해서 재차 달리려는 그때.
갑자기 지붕 아래에서 솟구친 채찍이 그의 발목을 잡아채서 밑으로 잡아끌었다.
쿠웅!
"꺼어...!"
속절없이 끌려가서 내동댕이쳐진 문경우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낙법도 취하지 못하고 높은 곳에서 떨어졌으니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한 노릇.
전신을 내달리는 둔중한 통증에 입을 떡 벌린 그의 귓가에 여인의 교소가 들렸다.
"푸훗! 멍청한 놈이 덫인 것도 모르고 유인당했구나."
산적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행색의 여인이었다.
홍등가의 기녀처럼 어깨와 가슴골을 드러낸 여인이 쓰러진 문경우의 모습을 비웃었다.
그 앞에 내려선 암습자가 경박하게 손을 비볐다.
"헤헤, 감사합니다. 누님 덕분에 살았습니다요."
"그래. 본녀가 아니었다면 죽었겠지. 보아하니 낭인전에서 온 모양인데... 은패놈들이 몇 놈 낀 것 같더구나. 아마 저놈도 은패일 게다."
"엇, 그렇습니까?"
은패급의 낭인은 정도 차이는 있어도 일류 이상으로 취급되기에 얕볼 수 없었다.
문경우가 암습자에게만 집중하느라 주변 경계에 소홀해지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런 식의 기습은 먹히지 않았을 공산이 컸다.
"막내야!"
공교롭게도 문경우가 떨어진 위치는 흑수양이 비웅채주와 싸우고 있던 곳과 지척이었다.
막내가 만신창이로 당한 모습에 흑수양은 자연히 동요할 수밖에 없었고....
"이놈! 어딜 보는 것이냐?"
분노한 비웅채주가 쌍날도끼를 던졌다.
연속으로 회전하며 공기를 가른 도끼날이 섬찟한 파공성을 일으켰다.
흑수양이 급히 고개를 숙이자 쌍날도끼가 그대로 목옥의 외벽을 산산조각 박살내버렸다.
그 와중에도 구르다시피 파편 세례를 피한 흑수양은 새로 나타난 여인을 노려봤다.
여인은 한 손으로 채찍을, 다른 손으로는 누군가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있었다.
익숙한 사람의 머리였다.
"둘째!"
흑풍사우의 둘째인 호종산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듯 악귀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는 머리가, 여인의 손에 데롱데롱 들려 있었던 것이다.
"둘째 형님...!"
중상을 입은 문경우도 호종산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눈을 부릅떴다.
두 사람의 반응을 즐긴 여인은 호종산의 머리를 떨어트린 뒤 발을 들어올렸다.
"아, 안 돼!"
"되고말고."
콰직!
내공을 싣어 호종산의 머리를 짓밟았다.
깨진 수박처럼 으스러진 호종산의 머리에서 피와 뇌수가 줄줄이 흘러나와 당혜를 적신다.
아연실색한 흑풍사우의 두 사람을 번갈아본 그녀가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환하게 웃었다.
"어머, 이거 어쩌지? 신발이 더러워졌네."
"이 개 같은 년아아아아아!"
그렇게 외친 것은 흑수양도, 문경우도 아니었다.
지붕에서 떨어진 막도희가 화살을 역수로 쥔 채 여인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흥!"
여인이 뒤로 훌쩍 물러나면서 일장으로 후려쳤다.
막도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깨 너머로 장력을 흘린 그녀가 안쪽으로 파고들면서 화살을 고쳐잡았다.
투창을 하듯 내쏜 화살이 여인의 뺨을 스쳐지나가자 비웅채주가 대경했다.
"요살!"
그 말에 흑수양의 안색까지 변했다.
"요살? 설마 요살마녀?"
* * *
요살마녀(妖殺魔女).
그녀는 채양보음술과 주안술을 익힌 요녀였다.
과거 귀주와 호남 일대에서 젊은 남자들을 꾀어 정기를 갈취하며 악명을 떨쳤다.
겉으로는 묘령으로 보이나 실제 나이는 육순을 넘긴 노파가 그녀의 본모습이었다.
그녀에게 희생된 남자들은 마치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빼앗기듯 고목나무처럼 말라죽었다.
사실 그런 요녀들은 의외로 많은 편이었다.
천하가 얼마나 넓은데 남자를 홀려 정기를 갈취하는 요녀가 요살마녀 하나뿐이겠나.
그러나 요살마녀가 악명을 떨친 것은 그렇게 죽인 남자들 중에 명문의 제자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명문의 제자라 하나 아직은 젊고 미숙한 청년들.
어지간히 정신 수양이 깊지 않고서야 남자 꾀는 데 이골이 난 요살마녀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다.
그런 식으로 명문의 제자들을 사냥한 요살마녀는 젊고 아리따운 외모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구파의 주력 고수들에 육박하는 내공을 지녔다.
하지만 무림맹이 공적으로 선포한 뒤엔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몇 년 만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한동안 소식이 안 들려서 객사했겠거니 했는데....'
흑수양은 긴장했다.
둘째 아우인 호종산이 당한 것도 당연했다.
설령 방심하지 않았더라도 상대가 요살마녀인 것을 알지 못했다면 허를 찔렸을 테니까.
막도희도 흑수양의 외침을 듣고 움찔 떨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이 감히 본녀의 얼굴에 상처를 내다니."
뺨에서 피가 흘러내린 요살마녀의 눈이 광기로 희번뜩거렸다.
호종산의 죽음에 분노한 막도희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킬 만큼 지독한 살기였다.
그때 흑수양이 소리쳤다.
"셋째, 그는 어디에 있느냐!"
흑수양이 묻는 사람은 강엽이었다.
비웅채주와 비침을 쏘는 암습자에 요살마녀까지 있다.
문경우는 전력에서 이탈했고 그가 데려온 낭인들은 다른 낭인들과 함께 비웅채주의 쌍둥이 부하들과 싸우느라 손을 보탤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강엽이 있어야 했다.
"그, 그게...!"
막도희도 당혹스러웠다.
강엽이 오지 않은 까닭은 간단했다.
편곤을 쓰는 고수를 쓰러트린 뒤에 수십이나 되는 산적들과 맞닥렸던 것이다.
본래는 그녀 역시 강엽을 도우려고 했으나, 도중 호중산의 시신을 발견한 뒤 낭인들의 허락을 받고 흉수의 흔적을 따라 이쪽으로 온 것이다.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
"크하하! 누가 또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그놈이 오기 전에 네놈들은 전부 죽을 거다."
비웅채주가 사납게 일갈했다.
"젖비린내나는 계집, 넌 특별히 산적들의 노리개로 만들어주마. 죽여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굴려주지."
요살마녀가 조소를 터뜨렸다.
"어렵게 돌아갈 거 있습니까? 어이, 너희들. 움직이지 마라. 이놈 뒈지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암습자가 문경우의 머리채를 들어올리고는 목에 비수를 들이댔다.
"큭! 대형! 누님...! 전 신경 쓰지 마십시오!"
다른 낭인들 같았으면 인질 따위 무시했을 테지만 우애가 깊은 흑풍사우는 그럴 수 없었다.
호종산이 죽은 마당에 문경우까지 잃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세 명이 나란히 죽을 판이었다.
아니, 요살마녀가 막도희는 살려주겠다고 했으니 그녀만은 죽진 않겠지만, 대신 죽는 것만도 못한 꼴을 당하리라.
그때였다.
서걱!
"어?"
암습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뭐지?'
세상이 기울어진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더니 자신의 몸이 보인다.
암습자의 몸은 목이 잘려나간 단면에서 검붉은 피를 간헐천처럼 뿜고 있었다.
그렇게 숨을 거둔 암습자의 뒤편에서 나직한 발걸음과 함께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등장했다.
가까스로 풀려난 문경우가 남자를 불렀다.
"강엽...!"
5화. 산적 (6)
수십의 산적들을 죄다 쳐죽이고 온 강엽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들의 피와 살점으로 칠갑을 한 강엽이 장내를 둘러보다 한 곳에 시선을 주었다.
본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진 머리.
다만 튀어나온 안구나 머리카락 등으로 그게 사람의 머리라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강엽은 요살마녀의 당혜에 묻은 핏물로 대강의 사정을 짐작했다.
하나 그녀나 비웅채주에게 달려들지 않는다.
대신 다른 상대를 향해서 몸을 날렸다.
낭인들에게 합공당하고 있는 쌍둥이였다.
월등히 많은 낭인들에게 포위당한 상태에서도 그들은 끈끈한 협력으로 버텨냈다.
형이 위험해지면 아우가, 아우가 위험해지면 형이 돕는다.
비웅채주와 요살마녀가 흑풍사우를 상대하는 동안 떨거지들을 막는 게 본인들의 임무임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흑풍사우를 쳐죽이면 이놈들을 죽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쌍둥이에게도 있었다.
휘릭!
강엽이 난입하자 비등했던 국면에 균열이 일어났다.
'위험하다!'
오싹함을 느낀 쌍둥이는 다른 낭인들을 무시하고 기습부터 막았다.
쌍둥이 중 형이 강엽의 일권을 하박으로 막았다.
그가 강엽의 얼굴을 확인하고 비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멍청한 놈!"
쌍둥이는 외공의 고수였다.
근육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몸이 바위처럼 단단해지며, 일격의 위력이 무거워진다.
이토록 많은 낭인들한테 둘러싸이고도 여태껏 살아남은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엇?"
자세가 무너졌다.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일권에 실린 경력이 단단한 피부를 뚫고 근육을 터뜨리자 저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형님!"
쌍둥이 중 아우가 새된 비명을 지르면서 강엽을 향해 뒷꿈치를 후려갈겼다.
부채꼴을 그린 회축이 안면부를 노리고 짓쳐들자 강엽은 살짝 무릎을 굽혀 무게중심을 낮춘 뒤, 양팔을 교차시켜 막아냈다.
둔중한 충격이 팔목을 강타한다.
그러나 놀란 것은 쌍둥이였다.
콰앙!
제자리에서 버틴 강엽이 금나수로 발목을 으스러뜨리고는, 백이십 근은 족히 넘는 그의 몸을 그대로 내던진 것이다.
"동생아!"
이번엔 형이 아우를 부르짖었다.
"이 자식!"
쌍둥이가 주춤한 틈을 타서 강엽이 낭인들에게 말했다.
"한 놈은 팔이 망가졌고, 다른 놈은 다리 병신이 됐다. 이만하면 이길 수 있겠지?"
팔다리에 장애가 생겼으니 실력이 이전만 못할 터.
이만하면 자신이 전부 처리하지 않아도 낭인들 선에서 무난하게 정리될 거라고 판단했다.
"어, 그, 그래... 고맙다."
낭인들도 경황이 없었다.
자신들과 같은 동패급인 강엽의 말에 누구도 반발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동안 강엽이 쭉 보여주었던 모습들이 그리 만든 것이다.
* * *
강엽이 쌍둥이를 상대하고 있을 때쯤엔 이미 네 사람의 싸움이 재개된 뒤였다.
강엽이 문경우를 구해주었기에 흑수양과 막도희는 거칠 것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호종산을 잃은 슬픔과 분노가 그들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지 않게 만들었다.
'설사 내가 죽더라도 너만큼은 반드시 죽이겠다!'
들불같은 기세였다.
흑수양과 대등하게 싸웠던 비웅채주는 물론, 막도희보다 고수인 요살마녀도 당혹스러워했다.
상대가 죽자고 달려드니 기세에서 밀렸다.
'이럴 때 저놈까지 합류하면...!'
그들은 강엽을 염두에 두었다.
갑자기 나타난 강엽이 암습자를 죽였을 땐 얼마나 경악했던가?
만약 강엽이 그들부터 노렸다면 어찌 되었을까.
불길한 상상이 그들로 하여금 아껴두고 있던 최후의 힘을 꺼내게 만들었다.
"으아아아아아!"
비웅채주가 괴성을 토했다.
거침없이 밀어붙였던 흑수양은 비웅채주의 기세가 변하자 당혹감을 드러냈다.
비웅채주의 기파가 강렬해졌다.
단지 분위기만 변한 게 아니라 탁한 핏빛을 띠는 음산한 기운이 쌍날도끼를 감싸기 시작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리는 기운.
흑수양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마공...!"
상리에 어긋난 무공.
인륜을 저버리는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해야 비로소 연마할 수 있는 무공을 마공이라 부른다.
강호인들은 마공을 수련한 자들을 사마외도라 멸칭하며 두려워했다.
경파로 흑수양을 날려버린 비웅채주가 짓씹듯 이를 갈았다.
"쓰벌, 교의 신공을 이딴 놈들에게 써야 한다니...."
산적질을 하다 보면 토벌대가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시기가 예상보다 빨랐다.
무엇보다 협행에 미친 백도 정파도 아니고 돈벌레 같은 낭인들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낭인들이 궁핍한 산골 마을에서 뭐 주워먹을 게 있다고 목숨을 걸고 싸우겠는가?
"네놈들 때문에 애써 만든 기반이 다 날아갔다. 그 죄는 목숨으로 갚아라!"
최대한 빨리 흑수양을 죽이고 강엽을 상대할 작정.
전력을 발휘한 비웅채주는 이제까지 밀린 게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흑수양을 압박했다.
당황한 흑수양이 수세에 몰렸다.
곡예를 하듯 흘리고 피했으나 상황은 그에게 불리했다.
비웅채주의 기운이 너무나도 패도적이어서 도끼날이 춤출 때마다 일진광풍이 불었다.
'셋째는... 나보다 더 심각하군.'
안 그래도 근접전에 약한 막도희였다.
화살을 던지거나 활대를 휘둘러서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부상을 피하진 못했다.
무공의 고하도 고하지만 상성이 최악이었다.
아예 먼 거리에서 화살을 겨눈다면 몰라도, 애매한 거리에선 요살마녀가 윗줄이었다.
그래도 처음엔 어느 정도 몰아붙이는가 싶었는데 요살마녀가 침착하게 대응하자 막도희는 속절없이 밀렸다.
강엽이 합류한 건 그때였다.
"헛!"
비웅채주가 헛바람을 삼켰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다섯 줄기의 칼바람이 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자 욕설이 터졌다.
"이익...! 교위(敎尉), 겨우 그거 하나 제대로 못 막아!?"
요살마녀였다.
비웅채주가 무작정 피하는 바람에 한껏 치켜올린 그녀의 채찍이 찢겨나가고 말았다.
위기에서 벗어난 막도희가 싸움에 합류한 강엽을 향해 고맙다는 눈짓을 보냈다.
이미 그에 대한 반발심은 사라졌다.
강엽이 말했다.
"흑풍도를 도와줘라."
"혼자서 요살마녀를 상대할 셈이야?"
"상성상 그게 맞아."
강엽의 손톱은 요살마녀의 천적이다.
막도희 역시 그걸 모르진 않았지만, 호종산의 원수를 앞에 두고 물러나는 게 내키지 않았다.
강엽이 뒷말을 덧붙였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주지. 됐나?"
"...그래. 부탁해."
한숨을 내쉰 막도희가 흑수양을 돕기 위해 빠지자 강엽이 자연스레 그녀의 자치를 대신했다.
요살마녀는 억지로 입꼬리를 당기며 웃으려고 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강엽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가 심신을 옥죄였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이깟 애송이는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거늘...!'
"호호홋!"
요살마녀는 기어이 웃음을 흘렸다.
염기가 배어나오는 간드러지는 미소였다.
그녀가 익힌 환희요오공(歡喜妖娛功)은 주안술이자 사내의 정기를 갈취하는 사공이기도 하며, 동시에 이성을 현혹하는 미혼술이었다.
소위 정공을 익혔다고 알려진 명문의 제자들도 그녀의 환희요오공에 당하면 정신을 못 차렸다.
그런데 강엽은 달랐다.
"미쳤나?"
"뭣이?"
"왜 싸우다 말고 처웃고 지랄이야."
"...!"
요살마녀와 시선이 마주쳤는데도 강엽의 눈빛은 요지부동이었다.
당황한 요살마녀가 기운을 더 강하게 끌어올렸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요살마녀의 기운은 그의 정신을 침범하지 못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혈공진기가 외부의 기운이 강엽의 뇌로 침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요살마녀의 기운을 몰아내며 역으로 그녀의 기운을 헤집고 타격을 입히는 게 아닌가?
"아악!"
요살마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진한 피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 * *
강엽이 벼락처럼 덮쳤다.
요살마녀가 심령에 타격을 입은 지금이야말로 그녀를 끝장낼 절호의 기회였다.
"오, 오지 마!"
요살마녀는 겁에 질렸다.
강엽의 안광이 뇌리를 헤집은 순간 거대한 괴물의 손아귀에 잡힌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녀는 즉시 줄행랑을 쳤다.
치맛자락을 펄럭이면서도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지붕 위로 오르며 바람처럼 내달렸다.
모름지기 강호의 공적이 살아남으려면 다른 무엇보다 도망치는 실력이 출중해야 하는 법.
그러나 강엽 역시 경공은 자신 있었다.
팽수현으로 오는 동안 암신과 경공을 같이 쓰는 법을 터득하지 않았던가.
어둠 속에 녹아든 강엽이 달리기 시작했다.
요살마녀의 경공이 바람처럼 표홀하다면 그의 경공은 유령처럼 은밀했다.
일절 기척을 내지 않고 따라붙자 요살마녀가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봤고....
강엽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쉬악!
손가락을 휘두르자 다섯 줄기의 조풍(爪風)이 요살마녀의 등짝을 향해 날아갔다.
요살마녀가 구르다시피하며 피하자 조풍이 지붕 뒤에 있는 나무를 난상으로 잘라버렸다.
강엽이 아직 따라붙고 있음을 알아차린 요살마녀가 표독하게 외쳤다.
"이...! 내가 뭘 했다고 이러는 거야!?"
강엽은 대꾸하지 않았다.
요살마녀가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든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
촤아악!
어둠 속에서 빛살이 번뜩였다.
요살마녀는 기겁하며 지붕 아래로 떨어졌다. 그 앞에 마을을 빙 두른 목책이 있었다.
그 뒤에 야산이 있다는 것을 아는 그녀는 날 듯이 목책을 넘었다.
온갖 지형지물이 복잡하게 얽힌 숲속에 몸을 숨길 작정이었다.
밤의 어둠과 빽빽한 나무들이 그녀를 추격자로부터 숨겨주리라.
강엽이 요살마녀의 노림수를 모를 리 없었다.
'헛짓거리를.'
흡혈귀의 기감은 어둠 속에서 극대화된다.
지금도 요살마녀의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나름 강엽을 따돌리겠답시고 갈 지(之) 자로 복잡하게 숲속을 누비고 있었는데, 그래봤자 강엽의 기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몸에선 짙은 피냄새가 풍겼다.
강엽은 나무에서 나무로, 때론 바위를 박차고 화살처럼 쏘아지며 숲속 곳곳을 종횡무진 누볐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 끝에 요살마녀의 등이 보였다.
위로 틀어올려 비녀를 꽂았던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궁장 역시 찢겨지며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조풍에 베이면서 벌어진 상처는 지금도 피를 울컥 토해내고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강엽에게는 요살마녀의 되도 않는 미혼술보다는 넋을 잃을 만큼 황홀한 피냄새가 더욱 치명적이었다.
거산중권이나 열화장보다 강한 선천지기가 그녀의 피에 깃들었다는 증거였다.
자칫 피냄새에 취해서 정신줄을 놓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강엽은 요살마녀에게 접근했다.
어둠에 녹아들었기 때문에 강엽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요살마녀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는지 소스라치게 놀라며 위로 솟구쳤다.
그러면서 일장을 내뻗었다.
지긋지긋한 추격전을 끝내고 싶었던 강엽은 장법을 피하지 않고 맞섰다.
투학!
혈공진기가 응축된 권파가 장풍과 부딪쳤다.
서로 버티어 대항한 두 힘이 터지자 충격이 그와 요살마녀를 똑같이 밀어냈다.
"악!"
요살마녀가 뾰족한 비명을 질렀다.
충격에 휘말린 그녀는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그러나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그녀는 삶의 의지를 내려놓지 않았다.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으윽...!"
"겨우 잡았군."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침을 꿀꺽 삼킨 요살마녀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재생력으로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강엽이 있었다.
흉하게 벌어진 상처가 시간을 되돌리듯 원래대로 돌아가는 모습에 요살마녀는 전율했다.
눈앞에 있는 것이 상리를 벗어난 괴물임을 깨닫는다.
"무, 무슨...."
"넌 여기서 죽는다."
무슨 짓을 해도 도망칠 수 없다고.
담담히 말하는 강엽의 모습에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요살마녀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닥쳐, 이 새끼야아아!"
찰나 그녀가 십이성의 공력을 담은 일장을 후려쳤다.
큼지막한 아름드리나무 세 그루가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그러나 강엽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동시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 배후에서 다가와 하얀 목덜미를 붙잡는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요살마녀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자, 잠깐!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
울고 불고 애원하였으나 흡혈귀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콰직!
5화. 산적 (7)
강엽은 요살마녀의 피로 갈증을 채웠다.
피냄새가 어찌나 달콤한지 이성을 유지하느라 진땀을 뺐다.
정신줄을 놓았다면 짐승처럼 게걸스레 피를 탐했을 것이다.
'그런 만큼 효과는 탁월하지만.'
요살마녀의 피를 마신 것만으로 단전의 내공이 두 배로 늘어났다.
수십 년간 수많은 사내들의 정기를 빼앗은 요살마녀의 선천지기는 동급의 고수들을 능가한 것이다.
강엽은 요살마녀가 어떤 방법으로 이토록 많은 선천지기를 이룩했는지 몰랐으나, 그녀의 무공과 관련이 있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그가 사람의 피를 마시고 혈공진기를 수련했듯 요살마녀 역시 수많은 업보를 쌓은 것이리라.
'어떻게 보면 나나 그녀나 다를 게 없을지도 모르지.'
타인의 악행을 보면서 자신은 그런 쓰레기는 아니라고, 혼자만 깨끗한 것처럼 변명할 생각은 없다.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그 역시 인륜을 저버린 비인외도의 마인일 테니까.
다만 목적과 수단은 구분해야 할 터.
흡혈은 어디까지나 생존 수단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는 흡혈을 함으로써 강해질지라도, 본래의 목적을 혼동해선 안 된다.
힘과 쾌락에 취해 아무나 죽이고 피를 빨면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내다버린 괴물로 전락할 뿐.
그런 삶은 강엽 자신이 바라는 게 아니었다.
'피를 마시되 이미 죽은 시체나 적의 피만 마신다.... 원칙을 견지하는 게 중요하겠지.'
요살마녀의 목을 베고, 시신은 적당한 곳을 찾아서 경파로 흙을 파낸 다음 묻었다.
마을로 돌아갔을 땐 싸움이 끝났는지 살아남은 낭인들이 땅바닥에 누워서 쉬고 있었다.
곳곳에 피웅덩이가 지고 시체가 널브러졌지만 피로에 지친 낭인들은 신경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강엽을 발견한 몇 명만 손은 흔들어 아는 체를 할 뿐, 대부분은 대 자로 뻗은 채 피로에 허덕인다.
낭인들 사이를 지나친 강엽은 흑풍사우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한바탕 사투를 치른 그들의 꼬락서니는 말이 아니었다.
머리가 풀어진 것은 물론, 옷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상처 부위엔 피가 흐른 자국이 역력했다.
강엽은 요살마녀의 피를 마신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흑풍사우의 몸에서 나는 피냄새로 인해 현기증이 났을 테니까.
요살마녀의 목을 보여준 뒤에 말했다.
"약속 지켰다."
"아... 고마워."
막도희는 기뻐하지 못했다.
흑수양도 마찬가지였다.
이겼다는 기쁨보다, 복수했다는 기쁨보다 호종산을 잃은 슬픔이 더 컸기 때문이다.
심지어 문경우의 상태도 심각했다.
지붕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다리뼈가 박살났는데, 허리까지 좋지 않았다.
어쩌면 부상을 치료하더라도 더 이상 무공을 쓸 수 없거나 장애가 남겠지.
강엽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암울한 분위기를 감지했지만 어설프게 위로하는 대신 궁금한 점을 물었다.
"산적 두목은?"
"그놈은 죽었네."
흑수양이 아쉬워했다.
"사로잡았다면 정체를 추궁했을 텐데...."
그럴 기회도 있었다.
막도희가 먼 거리에서 화살로 지원한 덕에 상대하는 게 한결 수월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순간, 비웅채주는 살기를 포기하고 동귀어진의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렇게 되자 흑수양과 막도희 역시 비웅채주를 생포하겠다는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얘기에 강엽이 입맛을 다시자 흑수양이 의미심장한 얘기를 꺼냈다.
"그래도 단서가 없는 건 아니네."
"그런 게 있습니까?"
"놈이 마공을 썼을 때 교의 신공 운운했거든. 요살마녀도 놈을 교위라고 불렀고."
모두 교(敎)라는 말이 들어간 게 우연일 리가 만무했다.
"아마 마교도였을 게야."
"마교... 말입니까?"
"아는지 모르겠지만 옛날엔 마교라 불리는 놈들이 꽤 많았네. 그중 혈교라는 족속들이 있었지."
"...!"
강엽은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을 느꼈다.
설마 흑수양의 입을 통해 혈교의 이름을 들을 줄이야.
"내가 알기로 교위는 혈교의 직위 중 하나일세. 수많은 마교 중에 혈교만이 교위라는 명칭을 썼지."
혈교가 창궐했던 시기는 흑수양의 어린 시절이었다.
흉흉한 시절이라 그가 살았던 산골 마을에도 혈교에 대한 풍문이 끊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말을 안 들으면 혈교의 마귀들이 잡으러 올 거라고 겁을 줬을까.
"그럼 이해가 되지. 한낱 산적 소굴에 어찌하여 이토록 많은 고수들이 있었는지, 무림공적인 요살마녀가 산적들과 동행하는 것도...."
다만 석연치 않는 부분이 있긴 했다.
"문제는 혈교는 패망했다는 것일세. 삼십여 년 전의 일이지."
간혹 혈교의 후신을 자처하는 놈들이 나타나서 소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진짜 혈교의 마공을 쓰는 고수들은 나타난 적이 없었다.
"이놈들도 그런 부류라고 보십니까? 아니면 혈교가 부활했다고 보십니까?"
"글쎄...."
흑수양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강엽은 후자를 의심했다.
그를 흡혈귀로 만든 원흉인 모산혈조가 혈교의 장로 아니던가.
당시 모산혈조를 보좌한 자들 중에 엄청난 고수는 없었지만, 모산혈조가 혈교의 인물인 이상 비웅채의 일을 가볍게 볼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이렇다 할 말을 못 찾고 무거운 침묵에 빠져있을 때였다.
"흑 선배, 마을 사람들 찾았수다!"
한 낭인이 중요한 소식을 가져왔다.
* * *
모든 산적들이 죽기를 각오한 건 아니었다.
잡졸에 불과한 자들은 요살마녀가 도망치고, 비웅채주가 죽자 전의를 잃고 항복했다.
항복한 자들은 비웅채주의 정체를 몰랐다. 심지어 요살마녀에 대해서도 거의 몰랐다.
비웅채주가 주변의 작은 산채들을 굴복시키면서 지금의 비웅채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비웅채주의 입장에서 그들은 부리기 편한 장기말일 뿐, 뜻을 같이하는 동료는 아니었으리라.
산적들 역시 두령이 죽자 목숨을 구걸하며 마을 주민들이 잡혀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산 속에 있는 작은 동굴이었다.
일종의 뇌옥이었는데, 산적들의 안내를 받아 그곳을 찾아간 낭인들이 구역질을 할 정도로 끔찍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흑수양도 착잡함을 금치 못했다.
"악귀 같은 놈들 같으니...."
마을 주민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노인들은 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여인들은 산적들의 노리개가 되어 학대당했으며, 사내들은 요살마녀의 먹잇감이 되어 죽을 때까지 정기를 빼앗겼다.
아이들 역시 목숨을 연명할 정도로만 숨을 붙여뒀다.
"심문 끝났어요, 대형."
막도희가 살벌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그녀는 산적들이 마을 주민들을 어떻게 짓밟았는지 심문하고 있었다.
그 심문이 과격했음은 그녀의 얼굴에 튄 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새끼들, 부모는 죽이고 애들은 노예상인에게 팔려고 했어요. 그 뒤엔 다른 마을로 가려고 했고요."
강엽이 물었다.
"산적들은 어떻게 했지?"
"전부 죽였어."
항복한 이들을 죽이는 건 지탄받을 일이지만, 그녀는 짐승만도 못한 놈들을 인간 대접해줄 생각이 없었다.
흑수양 역시 미간을 좁히기는 했지만 특별히 나무라지는 않았다.
막도희가 죽이지 않았다고 해도 어차피 관부에 압송할 생각이었다. 마을 주민들을 해친 산적들은 재판 끝에 사형에 처해졌을 터.
"근데 마을 주민들은 어쩌실 거예요?"
"당연히 구해줘야지."
엄밀히 말하면 산적들을 토벌한 시점에서 의뢰가 끝난 셈이지만, 측은함을 느낀 낭인들은 군말없이 마을 주민들을 구했다.
피골이 상접한 마을 주민들은 산적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구,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로 나온 중년인은 무장한 낭인들을 보고 겁을 먹으면서도 용기를 내서 예를 갖추었다.
흑수양이 물었다.
"당신이 촌장이오?"
"...아버지께서 촌장이셨지요."
중년인이 울적해했다.
애써 슬픔을 참는 표정만 봐도 촌장의 운명을 짐작할 수 있었다.
"춘부장의 일은 유감이오."
흑수양은 중년인이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주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앞으로 더 큰 시련이 닥칠 것이다.
산적들이 미곡은 물론 소돼지까지 죄다 잡아먹은 바람에 식량이 바닥난 것이다.
산에서 나물을 캐거나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걸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낭인들이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흑수양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나 역시 근처 마을에서 나고 자란 몸. 고향 사람들에게 말하면 약간의 도움은 받을 수 있을 거요."
"그, 그렇습니까?"
중년인의 안색이 밝아졌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감내하기도 전에 앞으로 어찌 살아갈지 걱정해야 했는데, 흑수양의 말 덕분에 희망이 생긴 기분이었다.
물론 흑수양이 말한 대로 그의 고향 사람들이 도와줄 수 있을지는 몰랐다.
그의 고향 역시 산적들에게 수탈당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흑수양이 산적들을 토벌했음을 알리고, 그걸 구실로 협력을 부탁하면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흑수양은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낭인일을 때려치우고 고향에 내려갈 생각이었다.
고향 사람들도 마을에 강한 무인이 있다면 쌍수 들고 환영할 테니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리라.
* * *
강엽은 하루 뒤에 마을을 떠나겠다고 통보했다.
흑수양은 아쉬워했지만 붙잡지는 않았다.
이제는 강엽이 할 만한 일이 없었다.
학대당한 마을 주민들을 보살피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된다.
그저 밤이 찾아왔을 때 조용히 불러 술잔을 나누었다.
비웅채주의 목옥에서 술을 찾았던 것이다.
흑수양이 엷게 미소 지었다.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토벌은 실패했을 거야."
강엽은 부정하지 않았다.
비웅채주만 있었다면 모를까, 흑풍사우의 힘으로 요살마녀까지 처리하는 것은 무리였으니까.
그래도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덕분에 저도 얻은 게 많습니다."
요살마녀의 피를 마시면서 내공이 두 배로 늘어났다.
'그것뿐만이 아니지.'
흑수양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강엽은 요살마녀가 쓴 걸로 짐작되는 거처에서 비급을 입수했다.
환희요오공이라 적힌 비급.
미혼술이나 채양보음 같은 것은 배울 가치가 없지만 강엽은 진조의 영성으로 환희요오공의 구결에서 새로운 무학의 이치를 느꼈다.
'잘하면 혈공진기에 적용할 만한 부분이 있을지도.'
아직은 미지의 영역이다.
하지만 강엽은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는 목내이가 물려준 진조의 영성을 믿었다.
환희요오공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빼내서 적용시킨다면 혈공진기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을 터.
어쩌면 요살마녀의 피를 마신 것보다 더 큰 수확이 아닐까.
하나 저간의 사정을 알지 못한 흑수양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요살마녀의 목에 걸린 현상금을 말하나 보군."
지난날 요살마녀의 악행으로 제자를 잃은 문파들에서 그녀의 목에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던 것이다.
"현상금은 수수료가 들지 않지. 다만 실적에 반영되지는 않네."
낭인전의 실적은 의뢰에 걸린 돈으로 매겨진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하찮은 의뢰라도 의뢰주가 거액을 걸면 점수가 높다.
반대로 걸린 돈이 많지 않다면 점수가 짜다.
낭인전에게 있어 의뢰는 사업일 뿐, 협행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번 의뢰는 어떤 것 같습니까?"
"하하, 동지패로 올라가기엔 충분할 걸세."
물론 강엽의 실력은 동지패 정도가 아니다.
흑수양은 강엽의 실력이 은지패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자네 실력이라면 나 정도는 금방 추월할 거야. 어쩌면 금패에 닿을지도...."
대륙 전역에 분타를 둔 낭인전이지만 금패급의 낭인은 한 줌에 불과하다.
사실 금패급쯤 되면 구대문파나 팔대세가의 최정예 수준이었다.
"나는 은지패지. 하지만 그건 내가 오랫동안 낭인전에 몸 담았기 때문일 뿐. 순수하게 실력만 놓고 보면 나보다 강한 놈들이 수두룩해."
하물며 한 단계 윗줄인 은천패나 그 이상인 금패급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화산파에 매화검수라는 자들이 있네."
구파인 화산파의 일대제자들 중 무력으로 손에 꼽히는 고수들.
"과거 금인패의 낭인 하나가 매화검수와 겨룬 적이 있었는데, 천 초를 겨루어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더군."
금패급에서 가장 약한 금인패가 매화검수와 동수를 이루었는데 금지패나 금천패는 얼마나 강하겠는가?
"금지패쯤 되면 사실상 구파의 장로급, 그리고 금천패급 되면 장문인과도 비벼볼 수 있다고 하더군. 물론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지. 어디까지나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얘기일 뿐이니까."
"그렇군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네. 낭인전의 정점에 군림한 낭왕께선 천하팔존(天下八尊), 즉 천하에서 가장 강한 여덟 명의 절대고수 중의 한 분이라는 것."
"...."
천하팔존이니 구파 장문인이니 하는 얘기를 들어봤자 실감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강엽의 가슴에 강한 울림을 주었다.
"자네가 어디까지 오를지는 모르겠지만, 풍파에 휩쓸리는 사람이 되지 말게. 차라리 풍파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게나. 중심을 단단히 잡기만 하면, 그게 무엇이든 자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테니."
6화. 정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