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9

#70화. 화령검절 청풍

#70화.

"그 검, 우리 화산에 넘겨주십시오. 본래 화산의 것이 오해로 인해 그리 흘러간 듯합니다. 다른 명검을 고르신다면 값을 대신 지불하겠습니다."

나는 화산의 무인을 마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닌 홍색 검집에 가있었다.

그래도 대문파이자 메가콥의 무인치고는 정중했고 나름 예의있는 제안이었다. 허나 숨길 수 없는 화산파 특유의 날카로움이 무인의 기세에 깃들어 있었다.

보통 기업도 아니고 하필 화산 그룹.

무림에서 나를 죽였던 노괴가 떠오르려한다.

내가 광선의 홍색 검집을 툭툭 치며 물었다.

"지금 이 검을 달라는 겁니까?"

"맞습니다. 칼드락 스미스에서 제작한 그 검 말입니다."

다짜고짜 칼을 내놓으라는 놈이 아주 당당하다.

만개한 매화처럼 붉어진 저 무인의 눈을 보아하니, 이쪽에서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나간다고 하여 검을 순순히 포기할 생각은 없을 듯했다.

그렇기에 나는 딱 잘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사정은 딱한데, 못 넘겨주겠습니다."

그러자 화산의 무인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전보다 조금 더 구구절절하고 장황한 설명을 덧붙여서.

"형장의 칼에 들어간 금속 우리 화산그룹의 물건으로 구두 약조와 함께 칼드락 스미스에 넘긴 것입니다. 좋은 매화검을 만들기 위해서지요. 중간에 일이 꼬여 이렇게 된 것은 유감이나, 그만큼 귀한 것이라 다시 화산의 품으로 돌려주셔야겠습니다. 대신 화산의 부주의함을 인정하고 다른 좋은 명검으로 배상토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무인의 말투 하나만큼은 정중했다.

옛날 같았으면 상상조차 못할 대접이군.

이제 내 위치가 시티에서 어느정도 되는 거지?

정크타운 때였으면 바로 주먹부터 날아왔을 듯 한데.

절정 경지의, 한창 심장이 뜨거울 때의 화산 검수가 저리 정중히 나오다니. 신세가 많이 발전했다.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하다, 일단 미뤄두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길까지 들여놓은 놈이라. 못 돌려줍니다."

대답은 당연한 거절이다.

광선은 벌써 생사를 함께해온 애병이 되었다.

이걸 넘겨주면, 친우를 팔아넘기는 것과도 같다.

"형장, 다른 명검으로 충분히 배상토록 하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화산의 무인은 답답한 얼굴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부담스럽게 형장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나 보기보다 어립니다. 그리고 선약이 있어서 이만 가야겠는데, 비켜주시지요."

"잠깐 멈추시오. 이리 가시면 어쩐단 말입니까?"

내가 발걸음을 돌려 대장간으로 들어가려 하자, 화산의 무인이 끈질기게 들러붙으며 따라왔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연신 설왕설래가 오고갔다.

그러다 결국, 서로 말끝이 짧아지기 시작했다.

"좋게 말로할 때 돌려주면 고맙겠소."

"귓구녕이 막혔나. 안 주겠다니까."

"하아, 도무지 못 알아 먹는군."

대화중에 나와 놈의 간격이 점점 가까워진다.

펄럭-

슬금슬금 다가오던 그가 위협적으로 허리춤의 의복을 제쳤다. 그러자 화산이 자랑하는 매화검이 슬며시 위용을 드러냈다.

나 메가콥 화산에서 나왔으니, 뒤지기 싫으면 내놓으라는 말을 직접 입으로 하기는 자존심이 허락치 않아 에둘러 위협하는 방법. 시비가 붙으면 무림에서도 자주 저랬다.

상대가 보통 화산임을 알면 한 수 접어주니까.

그것은 어떻게 그때와 다른 점이 없군.

여튼, 저렇게 나오면 나도 삐딱해질 수 밖에.

"그리도 억울하면 뒤통수를 친 대장간에 들어가서 따질 것이지. 애먼 내게 이 무슨 추태인지. 뒤통수 처맞은게 자랑인가?"

"······."

화산의 검수임을 명확히 드러냈음에도 별 개의치 않는 내 모습에, 무인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급하게 선을 넘지는 않았다.

"대체 어디 소속이기에 그리 뻣뻣하시오?"

족보나 출신같은 것을 들이밀며 한번의 확인 과정을 더 거치는 것이다. 여긴 무인들의 세력이 크지 않은 알 헤임달이니.

"발할라 마탑."

마탑이라는 대답에 무인이 사납게 반박했다.

"마탑? 어느 누가 보아도 무인의 검인데."

"호신용."

"말장난은 그쯤 하는게 어떠신가?"

"그러려고. 헛소리에 어울려주는 것도 힘들군."

"······나는 분명 예의를 갖추어 부탁했소만. 헛소리라."

이제, 양쪽의 인내심은 한계에 봉착했다.

사내들간의 치졸한 입씨름은 더 이상 없었다.

무릇 무인은 기백과 눈빛만으로 뜻을 나누는 법.

점점 좁혀지던 놈의 인영은 벌써 일 장 앞까지 드리워졌다. 그러니 이미 저 화산의 절정 검수와 나는, 말대신 검으로 교분을 나누기로 약속한 것과 다름없다.

이쪽으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 화산파의 검수의 기백이 날카로워졌다. 놈은 소속도 명확치 않아보이는 내가 대단한 명검을 들고 있으니, 적당히 실력을 내보여 눕히고 가져갈 심산인듯 보였다.

무인은 매화검을 검집째로 끌러 쥐곤 말했다.

"화산에 법도가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너는 네 뒤에 화산이 버티고 있음에 감사해라."

"······입이 방정이군. 후회하지 마라!"

탓!

검집을 쥔 무인이 바닥을 박찬다.

그의 굵은 손목으로 경력이 밀려 들어간다.

나는 저 초식의 첫 전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목숨을 걸고 싸워보았던 상대가 화산의 노괴니까.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낙매분분(落梅紛紛).

눈을 어지러이 만들고 허초와 살초가 섞인 환검.

동시에 그윽하고 청아한 매화향이 사방을 잠식했다.

곧, 절정에 이른 화산파 무인이 검집을 강하게 내뻗었다.

이번 생에 본 것중, 가장 제대로 되어 먹은 검법이었다.

그러나.

전생에 매화 노괴와 검을 나누었을 때를 회상하면 아직 부족한 곳이 많은 일검이다. 매화검수라고 불리기에는 조금 처지는군.

나는 몇 보 앞으로 가볍게 이동한 뒤, 그 환검의 중심에 광선을 찔러넣었다.

이윽고 캉, 하는 소리와 함께 검집이 통째로 부러졌다. 환검을 빗겨낸 나의 검이 무인의 목덜미에 놓여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무인이 손을 파르르 떨었다.

부러진 검집을 허탈히 잡고있던 무인이 말했다.

"아니 이게 왜······."

"극성까지 익혀서 다시 찾아와라."

상대의 뒷배를 열심히 봐가며 전전긍긍하던 때와는 주변이 많이 변했다.

이곳은 다르간트가 기거하는 칼드락 대장간 앞이며, 일레힌 마탑의 구성원으로 인정까지 받은 마당이다. 갓 시종에서 벗어났을 때보다 조금은 덜 쩔쩔매도 좋았다.

특히 선공까지 취해준다면, 검을 휘두름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데 이자가 알 헤임달에 왔다는, 화 무슨 검절인가 하는 놈이 맞는가?

그렇다기엔 어딘가 살짝 모자란 듯 싶은데. 절정경지를 지난 무인이긴 했으나 그런 별호까지 붙을 정도는 아니다.

아니면 그간 너무 대단한 거물들만 마주하는 바람에 주제도 모르고 눈이 높아진 걸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목에 칼을 댄 채 손을 뻗었다.

"매화향이 참 좋더군. 어디걸 쓰나?"

"······그것은 건들지 말아주시오."

"싫다."

뚜둑-

내가 무인의 허릿께 어딘가에 달린 작은 호리병같은 걸 뜯자, 거기서는 그윽하며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매화향이 흘러나왔다. 엠비언트 라이트로 장식된 호리병은 지금도 매화향을 내뿜고 있다.

무공이 고절해 매화향을 빚어낸 게 아니라, 그윽한 매화향을 내주는 디퓨저를 사용한 것이다.

애시당초 화산에 잘 나지도 않는 매화를 왜 이리도 좋아하는지.

나는 디퓨처를 대강 치우고 놈을 향해 물었다.

"이름."

"화산그룹의 매화검수 청명이오."

"매화검수에 이름은 청명이라?"

그렇게, 이름을 되물을 때였다.

주변의 군중들을 누군가 밀치며 다가왔다.

"혼자 화산 망신은 다 시키는구나 아주. 야 인마 청궁!"

갑자기 군중속에서 튀어나온 한 사내가 땅에 떨어진 검집을 잡아 자연스럽게 무인에게 넘겨주었다. 기골이 꽤 장대해 기개가 있는 사내였는데, 하는 말본새가 가벼운지라 그 몸뚱이와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사내는 무인의 목에 걸려있는 내 검을 손가락으로 슬쩍 치우며 말했다.

"어이쿠, 우리 다혈질 사제가 실수를 했나보네요. 창피하게 뭐하냐 인마? 청명같은 소리. 져놓고선 애먼놈 이름 팔아먹지 말고 일어나라 빨리."

튀어나온 그 사내는, 넘어진 놈의 엉덩이를 툭툭 차며 기립시켰다. 아무래도 저 무인의 사형인 듯 싶었다.

"······사, 사형 오셨습니까."

곧, 청명이라 자신을 소개한 무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세상에 팔아 먹을 게 없어서 사제의 이름을 팔아먹었단다. 만약 이곳이 무림강호였으면 턱주가리를 몇 번 돌려도 시원찮은 짓이었다.

놈을 기립시킨 사내는 곧장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뽀얀 얼굴은 히죽 웃음을 띠고 있었는데, 가벼운 태도와는 어울리지 않게 생긴 것은 또 헌앙하게 생긴 사내였다. 여인 꽤나 울릴 정도로.

사내는 석탄 먼지가 가득 쌓인 어깨를 대강 털더니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강호 초출인지라 많이 부족하지만, 수르트 안에서는 화령검절이라는 부끄러운 별호로 불리고 있습니다. 청풍이라 합니다."

이자가 화령검절(花靈劍絶)이군. 거짓은 아니다.

기운으로 보아, 별호가 부끄러울 정도는 아닌듯 하니.

누구의 피인지 모를 흔적이 화령검절의 의복을 수놓고 있었다. 사람이든 좀비든 몇이나 죽여야 저리 피로 물드는지 모를 일이다.

"청명, 어쩐지 저런 놈에게 붙여주기는 아까운 이름이더군."

"······."

전투에서 승리한 내가 그의 사제를 마음껏 비아냥대자, 화령검절은 화도 내지 않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저딴 놈 이름이 청명이든 청궁이든 거 무슨 상관이겠소! 형장, 저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좋은 술집이 있는데 나랑 같이 가서 술이나 한잔 빱시다."

덥썩.

백주대낮부터 술이나 하자며 붙임성있게 들러붙는 화령검절.

그래도 저 청명인지 청궁인지보다 강한 것만은 확실했다. 어깨를 슬며시 붙잡은 이자의 악력에 뼈가 아려올 정도였다.

나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며 자리를 옮겼다.

화령검절 청풍과 나는 이내, 적막한 골목길에 이르렀다.

사내가 둘이나 들어가기엔 조금 좁은 골목.

보일러 배관같은 황동 파이프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있고, 배양 과일을 파는 상점 딱 한곳을 빼고는 모든 창문이 철창으로 막혀 있었다. 전형적인 흑도 뒷골목이었고, 술집은 없었다.

나는 광선의 검병에 슬쩍 손을 올려놓았다.

슥슥.

그런데 그가 돌연 품속에서 명품 반지갑을 꺼내더니, 크레딧 현물지폐를 두둑히 꺼내어 과일 상점의 주인장에게 내밀었다. 못해도 2천 크레딧은 되어 보였다.

잽사게 돈을 받아 챙긴 주인이 물었다.

"샷따 내릴까요?"

"하하, 괜찮습니다. 과일들은 다 싱싱한 거죠?"

"그럼요."

뽀도독.

화령검절은 좌판의 자두를 몇 개 입에 넣고 씹었다.

헌데 그걸 보니, 나도 갑자기 새콤한 것이 당겨 같이 자두를 집어먹었다. 달콤함은 현대에서 먹던 것보단 부족했으나 솔직히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그렇게 화령검절 청풍과 나는 나란히 좌판앞에 서서 맛있게 과일을 씹어먹었다. 그는 메가콥의 무인치고 격의랄 게 없는 사내였다. 속내를 숨기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나도 마침 전생자 치고는 격의가 없는 편이라, 그와 대강 어울릴 수 있었다.

"어우, 달고 새콤하니 맛있네."

"이 집 과일 잘하네. 맛이 정갈하네."

"형장, 우리 죽이 꽤 척척 잘 맞는 것 같소."

우적.

과일을 먹던 청풍이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그런데 그 훌륭한 검은 얼마나 주고 샀소? 검 주무르는 실력은 기가 막혀도, 무인들에게 검을 잘 안 내어주기로 이름난 야장인데 말이오."

우물대는 그의 입가에는 끈적한 과일즙의 자국이 가득했다.

나는 자두를 입에 가득 집어넣으며 답했다.

"목숨 값으로 샀지."

아힘사가 되기 전, 목숨을 건 앙굴리마라와의 전투.

큰 위험을 감수하고 구사렴에게 데려가 생명까지 붙여 놓았으니 내 목숨값도 되고, 아힘사의 목숨값도 된다.

"목숨 값이었소? 많이 아쉽구려. 마공학 대장간이 그리도 대단하다하여 명숙들의 눈초리를 무릅쓰고 힘들게 걸음했건만."

그는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며 포기하는 듯 보였다.

확실히 아까 그 꼴통보다는 말이 통하나 싶었다. 그런데 그러던 그가 자연스레 화제를 돌려 다른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파란 사과를 베어물며.

"그나저나 발할라 마탑 소속이라 하셨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화령검절이 웃으며 품속을 뒤적였다. 뭔가를 꺼내려는 듯했다.

"참, 연이란 게 이리도 신기하오. 내가 무학관에 있을 때 발할라로 견학을 간 적이 있었소. 거기서 절세가인이라는 말로도 모자란 여인을 만났는데, 몸이 멀어 그 뒤로 만나지 못하였소. 그리고 이제는······사정이 생겨 평생 못 만나게 되었소."

"안타깝군. 죽었나?"

"······비슷하오."

이윽고, 화령검절이 품 속에서 꺼낸 사진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 사진이라는 것이.

"자 어떻소. 만나지도 못하는 여인을 평생 그리워하는 것도 낭만있지 않소?"

"!?"

반 루벤카가 아카데미 생도 때 찍어둔 사진이었다.

저거, 반 바이오의 저택에서도 분명히 본 적이 있다.

이 년이 저 품속에서 왜 기어나와.

화령검절 딴에는 친한 척 신변잡기를 늘어놓으며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 보려는 속셈이었던 듯 싶은데, 나는 루벤카의 얼굴을 보자 확 달아나며 더이상 과일을 입에 대고 싶지 않아졌다.

입맛이 급격하게 떨어져버린 것이다.

"형장, 왜 그러시오? 표정이 안 좋소."

"이 여인을 어디서 만났다고?"

"과거에 무학관의 기재들과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 생도들간의 모의 대련······."

"이제 그만 들어도 되겠군. 자두는 맛있게 잘 먹었다."

나는 먹던 과일을 급히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화령검절이 기운을 내뿜어 나를 붙잡았다. 가타부타 없는 본론이 드디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형장, 조만간 연방의 영토 수복 발표가 있을 거요. 그래서 좋은 검이 절실히 필요하오. 적운철(赤隕鐵)이 형장의 손까지 어찌 흘러 들어갔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어주면 나중에라도 빚은 톡톡히 갚겠소. 한 삼십 년이 지나면 화산이 다 내 꺼요."

"그것보다 연방이 망하는게 더 빠르겠군."

"하하하! 농이 지나치시오. 이 청풍이 있는데 세상이 망하긴 왜 망하오?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해도 나름 무림에서 촉망받는 놈이라."

화아악—

그 말을 한 화령검절이 순식간에 검을 뽑아 초식을 펼쳤다.

매화가 흩날리며 춤을 추듯, 화산의 정수가 담겨있는 검무.

아까의 한 치가 부족한 매화검수와는 차원이 다른 검이 펼쳐졌다. 초절정? 아니, 아직까지는 절정에 머무르고 있다. 루벤카와 비슷한 또래에 저 정도의 성취라면 에센스를 물처럼 퍼마셔도 쉽지 않다.

오성과 재능이 비할데 없이 출중함이 틀림없다.

내가 스승 밑에서 이립을 넘어 초절정이었다.

영약도 꽤 처먹은 채로.

헌데 저 놈은 아직 그 나이가 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저 가벼운 깃털같은 화산의 검수가 불세출의 천재이자 무림계에서 기대를 거는 후기지수라는 뜻이 된다.

무림계의 미래가 내 앞에 있었군.

화령검절이 검을 납검하자, 나는 진심을 담아 칭찬을 건넸다.

"대단하군."

"이제 그 말도 지겹소. 무학관에는 나보다 오성이 더 뛰어난 이도 있었소."

"그런데 저 사진 속의 여인과도 붙어보았나?"

화령검절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공식적으로는 패했소."

"그 실력으로 패했다?"

"승리했다 하여 딱히 얻는 것도 없었던 지라."

그냥 져줬다는 얘기.

화령검절은 베어문 사과를 몇 번 던지고 받다 내려놓더니, 장난기를 쫙 빼고는 내 광선을 쳐다보며 말했다. 말로는 괜찮다고 했으나, 그에게는 이 검의 행방이 심히 간절한 사안인 듯 보였다.

"아무튼 형장, 그냥 주기는 아무래도 싫을 테니 우리 사내답게 비무로 결정하는 것은 어떻겠소? 형장이 받아들이시지 않으면 나는 그냥 과일이나 더 먹다 물러가겠소. 싫다는 사람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사내답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싫다는 사람 안 붙잡아.

아닌 척하며 무인의 자존심을 슬쩍 긁는 삼박자가 모두 맞아들어간 명문이었다. 크게 놓고보면 나름 정중한 비무 요청이지만, 만약 거절했다간 배짱도 없는 똥자루가 되는 것이다.

강호 초출의 무인치고는 심계가 치밀하다.

여기서 확실하게 단도리치지 않으면, 계속 거머리처럼 붙어 떨어지지 않으리라. 그리고 타고난 성정이 워낙 호탕하고 격의랄 게 없어보이니 저 약속마저 어기진 않을 것이다.

나는 결국, 광선을 건 화령검절과의 비무 요청을 승낙했다.

"좋습니다. 그럽시다."

"고, 고맙소 형장! 형장은 진정한 사내요!"

그리고 잠시 뒤.

"······."

흉흉한 검기가 일렁이는 두 개의 명검은 아직 서로의 사이에서 힘대결을 하고 있었으나, 매화검절의 두 허벅지는 골목의 흙바닥에 처박혀있었다.

비무가 시작하자마자, 내가 그의 발을 마력으로 잡아당겨 바닥 속에 처박아버린 것이었다.

이를 지그시 악문 화령검절이 입을 열었다.

"······아니, 정말로 마탑 출신이었소?"

#71화. 본래의 의도대로

#71화.

쾅! 쾅! 쾅!

흉흉한 광선의 검날이 머리통을 쪼갤듯 떨어진다.

화산 그룹과 무림계의 미래이자 걸출한 후기지수. 화령검절이라는 별호까지 받은 사내는 지금, 흙바닥이라는 모루에 단단히 박혀 속절없이 단조당하고 있었다.

나는 기수식을 취할 때부터 보란듯이 검기를 피워 올리고, 검이 맞부딪칠 때를 노려 마력을 끌어올렸다. 불세출의 천재고 나발이고 미래라도 보지 않는 이상에야 대처가 힘들 수밖에.

화령검절은 비무의 시작부터 흙바닥에 다리가 묶인 채, 화산이 자랑하는 보신경인 암향표(暗香飄)조차 선보이지 못하고 있다.

"······."

카앙! 카앙!

그래도 별호가 이유없이 붙은 것은 아닌지, 이를 악문 화령검절은 실로 귀신같은 검법으로 벌써 열다섯 합째를 버텨내고 있었다. 검이 굉장히 신속해 검막이라도 펼치는 듯 보였다.

'잘 버티는데?'

막상 검을 내려치고 있는 내가 놀랄 정도였다.

골목 위로 먼지바람이 휘몰아칠 정도로 강하게 공격하는데, 움직임도 없이 제자리에서 달랑 검 한자루만으로 저리 막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본도 탄탄했고, 대단한 수준의 실력이었다.

"형장, 이제 그만하시오. 내가 졌소."

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땅바닥에 못박힌 화령검절이 패배를 인정하며 비무는 끝이 났다. 제아무리 7레벨에서도 끝자락 경지에 가까운 무인이라도 발이 묶여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니 일방적으로 패하고 만 것이다.

자존심이 꽤 상할 텐데도, 화령검절은 쥐고있던 매화검을 즉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검이 문제가 아니었군. 형장의 검이 내 수중에 들려있었다 해도, 이 비무는 나의 패배였을 거요. 그러니 더 이상 염치없이 욕심내지 않겠소."

이로써 광선은 완벽히 나의 것이 되었다.

사실 이 싸움이 생사결이었다면 화령검절도 팔 한짝 내어줄 각오로 어찌 헤쳐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이것은 목숨을 건 생사결이 아니라 비무.

그것도 화령검절이 간곡히 요청하고, 내가 대인배의 풍모를 보이며 조건없이 받아들인 덕에 성사된 비무다.

그럴진대 어떻게든 이겨먹겠답시고 전력으로 검기를 뽑아 죽일듯 덤벼들 수야 없었을 것이다. 추하게 발악하지 않고 적당히 패배를 인정하는 게 옳게된 도리였다.

- 세상에.

마침, 과일상점의 주인장도 턱이 빠져라 구경하고 있으니.

나는 광선을 납검하며 말했다.

"수르트 시티의 무학관이 비무의 기본 소양은 잘 가르쳐둔 모양이군."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것만큼 추한 행동이 없소. 그런데 형장, 나 좀 꺼내주시겠소?"

"그러지."

후두둑.

내가 마력으로 끌어 올려주자, 그는 대충 의복을 털었다.

처음에는 무릎 위까지 박혀 있었는데, 열 합 넘게 검을 틀어막느라 점점 못마냥 땅을 파고 들어간 탓에 사타구니까지 석탄재와 흙이 묻어있었다. 게다가 머리는 산발로 풀어 헤쳐져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고, 손바닥은 아귀가 찢어져 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형장같은 사람은 내 생전 처음 봤소."

흙바닥에서 빠져나온 화령검절은 질린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의 매화검이 검집으로 스르륵 딸려 들어갔다.

"아까 입도 뻥긋하지 않고 마법을 사용하던데, 필시 그쪽으로도 보통이 아닌 성취를 이루었을 테지.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의 수준높은 생도들도 마법을 그리 간단히 구사하진 못했거든. 형장은 대체 그걸 다 어디서 익힌 거요?"

"말했잖아. 발할라 마탑 출신이라고."

"······."

황당해하는 화령검절의 표정이 보인다.

"형장, 그야 역용술로 정체를 감춘 마당에 당연히 아무렇게나 둘러댄 건 줄 알았지 누가 그걸 철썩같이 믿겠소? 그리고 어떤 마탑이기에 무공도 가르치오?"

역용술로 잠시 외형을 비튼 것도 알고 있었나.

아무래도 급히 사용한 탓에, 온전히 흔적을 감추지는 못했나보다. 그래도 역용술에 관해서는 그다지 신경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다음부터는 사람 말을 귀 기울여 들어라."

"화산의 검수임을 알고도 동요하는 기색이 일절 없기에 비슷한 무가의 제자인 줄로만 알았소. 내 사제와 검을 나눌 때도 화산의 이십사수매화검법을 간단히 파훼하지 않았소? 당연히 무인이었어야지!"

하하하—

아쉽다는 듯, 그리 말한 화령검절이 호탕하게 웃었다.

"무학관도 넓은 세상인 줄 알았거늘, 나는 아직 우물 안 개구리였구려."

화령검절은 내가 대답하지 않는데도, 씁쓸한 얼굴로 연신 혼잣말을 해댔다.

"화산에 돌아가면 당분간 주위를 살펴며 걸어야겠군. 적운철을 고스란히 내주었으니, 윗 배분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화산의 야장들이 뭐가 부족해서 마공학 대장간까지 기어가냐며 그리도 타박했는데. 쯧!"

어찌 되었건, 결과에 깔끔하게 승복한 화령검절은 과일 몇 개를 더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또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비무의 승패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헌데 마법은 그렇다 치고, 방금은 무슨 검법이오? 정파의 검은 아니었소."

"······."

나는 몸을 돌려 조용히 걸음을 재촉했다.

"여하튼 대단하시오. 내 살다 살다 경지에 이른 마검수를 실제로 볼 줄이야. 수르트 시티넷에 천하무림(天下武林)이라는 가상현실 비무 대회가 있는데 거기서나 보았지······."

아삭.

화령검절은 먹던 사과를 베어물며 마치 일행이라도 되는 양, 입을 놀리며 졸졸 따라왔다. 발놀림이 굉장히 표표한 것을 보아하니, 아까 다 못보인 암항표를 지금에서야 보여줄 생각인가 보다.

"형장, 연배가 어떻게 되시오? 아무리 역용술로 골근을 만진다 한들 내 눈썰미가 얼마나 좋은데 검을 나눈 상대의 연배까지 몰라보겠소. 손등도 깨끗하고 허여멀건 한 것이 필시 고생 한 번 안해본 공자일 거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서 더 자신 있게 비무에 나섰소. 나와 비슷한 연배에서는 평생토록 적수가 없었으니."

"알았다. 이제 그만 떠들고 갈 길 가자."

화령검절이 너스레를 떨며 손을 저었다.

"나도 마침 그쪽으로 가는 길이라."

"그러니."

"그렇소. 내 자랑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아무래도 이 얘기부터 하지 않을 수가 없겠소. 내가 무학관에서 수학하던 시절······."

그놈의 형장은 언제까지 이어지는가.

이놈, 아까부터 느낀거지만 상당히 말이 많다.

화산과 같은 무림계 대문파에서 재능이 출중한 놈들은, 어릴 적부터 주변의 질투와 시샘을 받으며 자라기에 말을 아끼고 몸가짐을 바로하는 법을 먼저 터득한다. 굳이 설쳐서 위아래로 밉보일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데 이놈은 보통 천재가 아니라 그런가 말이 많다.

하기야, 어느 분야든 독보적인 천재는 굳이 주변인의 한심한 시샘 따위를 신경쓸 필요가 없긴 하지.

그렇다고 무력을 써서 떼어 놓을 수도 없었다.

7레벨 끝자락의 검수에게, 한 번 썼던 방법이 다시 통하지는 않을 터라.

* * *

"청풍 사형!"

내가 화령검절과 대장간 앞에 이르자, 그 앞에 망부석마냥 서있던 청궁이 다가왔다.

나는 따라온 화령검절에게 빼앗았던 매화향 디퓨저를 돌려주었다.

"네 사제의 물건은 돌려주마. 다음에는 이런 거 말고 실력으로 피워보라고 해."

"그리하겠소."

"···음?"

청궁놈의 시선은 곧바로 내 검집으로 향했다.

홍색의 검집은 내 허리춤에 아주 잘 매달려 있었다.

그런 관계로, 놈의 구겨지는 표정이 아주 볼만했다.

"······설마 사형도 패하셨습니까?"

화령검절이 질 것이라 상상조차 않았던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만한 실력을 갖춘 사내가 어디가서 패배를 맛보겠는가? 심지어 루벤카마저도 일전에 한 번 이겨먹었다는데.

빠악-

화령검절은 청궁의 정강이를 까며 신경질을 냈다.

"뭐라? 설마 사형도 패하셨습니까? 인마! 남들 다 보는 길바닥에서 남 때려주겠다고 까불다가 검집도 날려먹고 애먼놈 이름까지 팔아 처먹은 네놈과 내가 같아?"

"······."

"넌 알 헤임달 역까지 올 것 없다. 화산까지 걸어서 와."

"······."

청궁에게 그리 일갈한 뒤 다시 웃으며 고개를 돌린 화령검절은, 갑자기 또 뜬금없는 소리를 해왔다. 그런데 그 말에 마침내 칼드락 스미스에 들어가나 싶던 내 발걸음이 또다시 멈추었다.

"형장. 그렇다면 형장도 이번 영토 수복전에 발할라 시티 소속으로 나서시오?"

"발할라 시티 소속?"

화령검절은 이번 연방의 영토 수복에 대해 무언가 아는 바가 있는 듯했다.

무림계 메가콥인 화산 그룹쯤 되면 연방이 무엇을 공표할지도 대강 알 방도가 있나보군.

"비무에서 보기 좋게 패했으니 알려드리겠소. 그냥 가볍게 흘려들으시오. 개요는 연방군과 무림, 마법계가 힘을 합쳐 잃어버린 도시를 되찾자는 걸 거요. 마지막에 빼앗긴 연방의 거대 도시를. 연방 정치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문 어른이 그리 말하는 것을 내 똑똑히 들었소."

"······."

마지막에 빼앗긴, 잃어버린 거대 도시.

현재 연방은 크게 일곱 개의 거대도시로 이루어져 있다.

오딘, 수르트, 발할라, 발두르, 알 헤임달, 로키, 프레이야.

그런데 연방이 수복할 만한 거대 도시라면······비교적 최근에 무너진 도시일 것이다. 아직 기반시설이 전부 다 망가지지는 않았을 테니, 만약 수복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인류의 터전을 크게 넓힐 수 있겠지.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길 수 있다. 게다가 전투에서 활약할수록 공적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라 강한 세력들의 참여도도 높을 터. 서로 으르렁대는 마법와 무인도 크레딧과 부동산, 명예 앞에서는 평등할 테니까.

그것이 정치 백단 구렁이들이 모여있는 '연방 정치계' 에서 흘러나온 소식이라는 게 약간 걸리지만 말이다.

헌데 화령검절의 저 말이 맞다면···.

"하하하! 형장, 어쩌면 우리 금방 다시 볼 수도 있겠소! 자 이제 사내끼리 검도 나눴겠다 같이 술도 한잔 나누러 갑시—"

스르릉.

나는 웃으며 또 자연스레 들러붙는 화령검절을 보다가 검을 뽑았다. 놈은 흠칫 놀라 물러섰는데, 검집에서 뽑혀나온 광선을 빙글 돌려 놈에게 건넸다.

"?"

"잡아봐. 아쉬울 텐데 한 번 잡아보긴 해야지."

"형장, 갑자기 무슨 소리요? 과일먹다 체하셨소?"

내가 의아한 기색의 화령검절을 향해 말했다.

"네가 특히 마음에 든다. 기운이라도 한 번 불어 넣어봐. 운이 좋다면 검이 너를 선택할지도 모르는 노릇이지."

"······형장의 뜻이 정 그렇다면 내 한번 잡아보기만 하겠소."

곧.

감탄하며 기운을 슬쩍 불어넣던 화령검절은, 이내 꺽! 하는 비명을 지르며 광선을 내던졌다. 다르간트의 말대로, 주입한 기운이 역류한 것이다. 역시 나만의 에고소드, 광선이로군.

내가 공중에 뜬 광선을 잡아 납검하자, 저릿한 손을 털던 화령검절이 푸하하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비무에서 이긴다고 하여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군! 차라리 미련도 사라지고 이게 더 낫소!"

호탕한 녀석이었다.

같은 메가콥의 무인인 당절이라는 미친놈과는 또 다른 느낌이군.

저놈이 화산에서도 특히 유별난 걸 수도 있겠지.

나는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그런데 아까 사진으로 보여준 반 루벤카라는 여인, 혹시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나?"

"······."

그러자.

밝았던 화령검절의 표정이 짐짓 어두워졌다.

"내 많이 연모했으니, 여즉 그리워하고 있지 않겠소. 그런데 형장은 어째 이름까지 아시는구려. 마법계에서 한때 유명했던 여인이라더니 정말인가 보오?"

"······."

장차 화산 그룹을 이끌어갈, 젊고 출중한 기재.

액면가만 보아도 좋다며 들러붙는 여인들이 아주 줄을 설 텐데, 보는 눈은 더럽게 없군. 하필 악독한 반 루벤카년에게 푹 빠져있다니. 불쌍하기가 그지없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뜯어말리고 싶군.

"그래서 루벤카를 뭐 어쩔테지? 참고로 파혼 경력도 있다."

"발할라에 적을 두었다면 형장도 알고 있겠지요. 그 여인은 당가와 좋지 못한 일로 도주하는 중이라 들었소. 내가 관여하여 될 일이 아니지. 하지만 사내가 되어 마음에 둔 여인하나 지키지 못함에야 어디다 써먹겠소? 내 장차 화산의 장문인이 될 사내인데 이번 수복전에서 공을 세워 당가와 담판을······."

개소리를 하는 화령검절 청풍.

그는 당가를 그리 좋게 보지 않는듯하다. 뭐 사천당가는 같은 무림계에서도 원래 호의적은 취급을 받는 이들은 아니니까.

[ 삼십 년만 지나면 화산이 다 내꺼요. ]

생각해보면 참 웃긴 놈이다.

근데, 그거 이미 일레힌 포이체카가 다 했어.

아직 루벤카가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건 모르는군.

나는 오랜만에 무인다운 무인을 본 듯해 기분이 좋아졌다. 여인 보는 눈이 없는 탓에 모의대련에서 보았을 루벤카를 그리워하는 것만 제외하면, 성정도 호쾌하고 그다지 나무랄 곳이 없는 사내였다.

"청풍, 다음에 보면 술이나 같이 하자."

"!"

내 말에, 당가와 담판을 짓겠다던 화령검절이 급히 반색하며 답했다.

"하하하! 나야 좋습니다 형장.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 만날 테지요. 그때는 적운철값 대신 형장이 술 사시오."

"그러마."

"이만 말 많은 불청객은 사라져 드리겠소. 청궁, 빨리 인사 올려라."

표정이 썩은 청궁이 포권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형장."

"그래라. 매화향 디퓨저는 앞으로 적당히 쓰고."

"······예."

화령검절 청풍과 청궁은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전생에 만났던 화산의 노괴처럼 세월에 깎이고 패인 느낌은 없었으나, 잘 다듬는다면 정말 다음 세대의 무림 제일인이 될지도 모를 일이지.

* * *

나는 그렇게 화령검절을 겨우 떼어놓고 칼드락 스미스 대장간에 들어왔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칼드락은 나를 보더니,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귀찮은 것들을 잘 떼어놓고 왔구나. 노야의 검을 하사받았으니, 그 정도는 해줘야지. 안으로 들어가 봐라."

용광로와 화마의 열기로 가득한 대장간의 안쪽.

드워프 다르간트는 사흘 전과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였다.

"때를 정확히 맞추어 도착했구나."

다르간트는 한풀 지친 기색으로 망치를 던지더니 화로 앞에 주저앉았다. 그는 데워둔 주전자를 들어 끓는물을 얼굴에 콸콸 부어대며 물었다.

촤아아악—

"이번에 언데드를 잡는데 쓸 예정이라지?"

"예, 들으셨습니까."

드워프 다르간트는 노곤한 얼굴로 말했다.

"좋다! 이제야 본래의 의도대로 쓰이게 되었구나. 이 다르간트의 나약한 미련과 여한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떨쳐낸 게야."

나는 다르간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을 감고있는 아힘사의 모습이 보였다.

구사렴이 갈아 끼웠던 파츠들와 중고 부품들은 죄다 대장간의 땅바닥에 팽개쳐져 있었다. 다르간트가 전부 갈아 끼워 아예 새 파츠로 교체한 듯했다.

아힘사의 외형은 그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멀쩡한 외관을 다 뜯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텁!

그때, 다르간트가 두꺼운 손으로 벽면에 걸려있던 검을 잡아 허공에 던졌다. 한눈에 보아도 값비싼 명검이 확실했다.

이윽고.

자색빛의 동공을 번뜩 치켜뜬 아힘사의 팔에서 튀어나온 블레이드가, 칼드락이 만들었을 대단한 명검을 수수깡마냥 잘라낸 뒤 아예 철가루로 갈아내버렸다. 기이잉—하는 기계음이 섬찟하게 울려 퍼지며, 못해도 천만 크레딧 이상을 호가할 명검이 철가루로 변해 흩날렸다.

하하하하—!

그에 다르간트는 통쾌하게 웃고는, 곧 눈을 감았다.

죽어버린 것은 아니고, 사흘간 잠들지 못하다가 이제야 작업을 마치고 편히 잠든 것이다.

"······."

나는 곧, 아힘사에게 다가가 회중시계를 건넸다.

아힘사는 그 회중시계를 소중히 받아들어, 시곗줄을 채우고는 환하게 웃어보였다.

"고맙습니다. 레반."

이제 발할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72화. 아카데미 교수 저택

#72화.

세상은 예상치 못한 '갑자기'의 연속이다.

갑자기 나타난 화산제일의 노괴가 칼질을 해대고.

갑자기 나타난 8위계 마법사가 운석을 떨어뜨리고.

얼굴만 반반한 놈을 죽였더니 갑자기 9레벨 인형사의 저주가 튀어나오고, 갑자기 남쪽의 어머니라는 좀비가 상위 존재로 거듭나겠답시고 개척자들을 습격해 잡아먹고, 갑자기 배가 고프고, 갑자기 나타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그리고, 이런 것도 갑자기에 포함되는 일이다.

"나랑 약혼할래? 결혼 말고 약혼."

발할라 시티로 향하는 개인 캐리어 안은 어수선했다.

뾰족귀를 가진 누군가가 한을 마구 토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금 저 갑작스러운 약혼 신청은 엘프 마법사, 슬레모킨의 말이었는데 나는 곧장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답했다.

"아, 저는 괜찮습니다."

그에 슬레모킨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무슨 길거리에서 전단지 돌리는 거 거절하는 것도 아니고, 멘트가 왜 그래? 누가 진짜로 약혼하자고 했어? 그냥 흉내만 내달라는 거잖아 흉내만."

"전 정말 괜찮아서 그렇습니다."

"갑자기 말은 왜 높여? 거리감 느껴져."

"이제부터 갑자기 높여보려고 합니다."

"전처럼 편하게 해. 괜히 불편하잖아."

"알았다."

"되게 편해졌네. 이제 내가 편한가 봐?"

— 크르륵.

머리가 지끈거려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바로 앞으로는 눈을 꼭 감은 아힘사가 보였다.

회중시계만 내내 쳐다보던 아힘사는 캐리어에 오르자 미동도 없는 '비행기 모드'에 진입했다. 쓸데없이 소모되는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효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덕분에 이 캐리어 안에서 슬레모킨과 말이 통하는 상대가 나 말고는 없기에, 그녀의 신세 한탄에 맞장구를 쳐주는 상대로 낙점되었다.

그래서 무려 반나절 가까운 시간동안을 이러고 있었더니, 이제는 속이 메스껍다. 석탄에 태운 빵과 과일잼이 그리워진다.

"들어봐. 볼 때마다 혼인을 대체 언제 하냬! 언제까지 홀몸으로 나돌거냐고 잔소리만 엄청 듣고 왔거든? 더 이상 못 참겠어. 거짓으로 약혼이라도 해야 조금 잠잠해질 것 같은데, 네가 좀 도와줘."

"아니, 그걸 왜—"

"내가 서른 살짜리 애도 아니고!"

싫다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옆자리에 붙어 앉은 슬레모킨은 길길이 날뛰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남쪽의 어머니에게 마공학 샷건을 갈길 때보다 지금이 더 흥분한 상태였다.

"응? 도대체 왜 다들 내 인생에 관여하지 못해서 안달이야? 발할라 마탑까지 도망 왔는데도 아직 포기할 마음이 없나봐. 집이랑 평생 연을 끊고 살아야 하나."

내가 알 헤임달 남부 장벽 근처의 숙소에서 휴식을 취한뒤 화산의 젊은 검수 둘과 두터운 교분을 나누고, 칼드락 대장간에 들러 아힘사까지 데려오는 동안 슬레모킨은 그녀의 부모와 대면을 하고 온 듯했다.

묘왕 우륵바갈이 그녀를 단박에 알아보고 토퀸타이아의 딸인 슬레모킨이라 부른 만큼, 슬레모킨의 부모는 엘 헤임달의 거물 엘프임이 확실하다.

그런데 그 엘프 거물이 꽤나 꼰대인 모양.

그녀에게 약혼이니 혼인이니 하며 압박을 넣는 듯하다.

엘프들은 인간보다 수명이 길고 부족 중심의 사회이니, 늙을수록 뇌가 굳어 보수적으로 변해가기 마련이지.

슬레모킨은 처음 보는 표정으로 열변을 토했다.

"벌써 60년째 이런 잔소리를 듣고 있어. 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가보니까 자기들끼리 정혼자까지 멋대로 정해 놓았더라. 인간이 취향이라고 말해도 씨알도 안먹혀."

60년이면 솔직히 그쪽도 많이 참기는 했군.

아무튼 나는 슬레모킨의 징징거림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대강 계산을 마쳤다.

이 엘프 마법사는 적어도 백년은 살았을 것이다.

음, 백 년쯤 살았으면 다르간트더러 아저씨라고 불러도 이상한 점이 없지. 일레힌 마탑의 2인자 슬레모킨은 일견 젊어 보이는 외형과 달리 살만치 산 엘프였던 것이다.

그리고 독신의 몸으로 세월의 풍파를 오래도 견딘 그녀는, 지금은 부모로부터 오는 풍파와 압박을 추가로 견뎌내고 있었다.

그간 슬레모킨과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면······.

묘왕이 그녀에게 충고하길, 몸가짐을 바로 하라.

다르간트가 나를 일컬어 여기 두 번째로 데려온 인간.

그녀가 첫 번째로 대장간에 데려온 이는 다르간트의 발언과 슬레모킨의 반응으로 보았을 때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이 확실하다.

헌데 슬레모킨은 어째서인지 루베르겐의 이름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킬 만큼 싫어한다. 일레힌 포이체카가 주입한 청록빛의 마력이 작용하여 구성원간에는 자연스레 호감을 느끼게 만드는데도.

알 헤임달의 4대 마공학 대장간 주인, 칼드락과 다르간트는 엘프 마법사 슬레모킨에게 병기를 만들어줄 정도로 막역한 사이고 로키시티 상공 근처에서 뷔에탕의 꼭두각시들을 박살냈던 루베르겐 집행관의 그 무기 역시 보통 병기가 아니다. 필시 수준 높은 재료와 더불어 명인 수준의 마공학 기술이 접목되어 있겠지.

그런 정황들을 간단히 종합해 보았을 때.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은 슬레모킨과 적어도 연인 사이였던 거로군.'

그게 위장이었든 진실이었든 말이다.

지금은 무슨 일이 생겨 틀어진 거겠지.

"막내, 여기서 뛰어내리고 싶어?"

내가 그리 생각을 정리하는 도중에, 슬레모킨이 미간을 와락 좁히더니 빤히 노려봤다.

"그런 거 아니야."

"허허."

"늙은이처럼 이상하게 웃지 말고, 언제든 뛰어내리고 싶으면 말해."

잔뜩 성이 났는지 하늘로 치켜 올라간 뾰족귀.

내 생각을 어떻게 읽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초고급 캐리어 밑으로 까마득한 구름이 보인다.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은 없기에 고개를 저었다.

설마하니 루베르겐 집행관의 다음 타겟이 나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며.

"그런데······묘왕님이 우리 막내를 괜찮게 보셨다더라. 묘인들이 말을 잘 해줬나봐. 시간나면 밥 한 번 먹게 데리고 오래. 다음에 같이 가볼래?"

"······."

"왜 그래. 싫어?"

"······."

"싫냐니까."

* * *

기에에엑!

발할라에 처음 당도했던 그때처럼, 장벽 밑으로 몰린 좀비들을 일순간에 몰살하며 7레벨의 마법사들이 나타났다.

— 통과하시면 됩니다.

변수는 없었다.

우리는 무사히 발할라 스테이션에 도착해 내렸다.

슬레모킨은 발할라 스테이션의 검문을 통과하자마자, 칼드락 스미스에서 제작한 마공학 병사들의 장비를 시험해봐야겠다며 일레힌 마탑으로 먼저 올라갔다.

"나는 가볼게. 발할라 시티 구경이나 하고 와."

가짜 약혼을 거절한 탓인지 이번에는 나를 태워주지 않아, 졸지에 나는 아힘사와 발할라 산맥 밑둥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레나라도 보고 올라가야겠군."

그러던 나는 문득, 레나가 잘살고 있나 궁금해졌다. 얼굴을 보지 못한지 고작 나흘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어쩐지 마음이 그러했다.

또한, 다르간트가 무려 사흘간 심혈을 기울여가며 재창조한 아힘사의 능력을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다.

본래도 7레벨급의 전쟁병기.

그런데 오랜 세월 숙성된 장인의 미련이 녹아들었다.

미련과 여한을 모두 덜어낼 정도라고하니 보통은 아닐 테지.

아힘사의 칼날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욱 예리하게 벼려졌다. 단일 전투를 상정하여 탄생한 병기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일대일 전투에서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는지는 알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걸 확인해보겠답시고 얼마 뒤면 전장에서 굴러야 할 마탑의 마법사들을 상대로 시험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레나 옆에 붙어있을, 루벤카가 제격이다.'

마침 할 일도 딱히 없으며 크게 다쳐도 상관없고 더럽게 강하기만한, 완숙한 7레벨의 상위마법사를 상대로 어느 정도의 성능을 낼 수 있을지가 참으로 궁금했다. 화령검절 청풍의 밝은 미래를 위해 실수로 죽여버리면 더 좋고.

나는 아힘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그렇게 물끄러미 쳐다봅니까? 레반."

"별것 아니다."

아힘사 자신도 얼마나 바뀌었는지 파악하지 못한다.

제작자인 다르간트가 사흘간의 밤낮없는 작업을 마치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대장간의 주인인 칼드락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 보는데, 그걸 감히 깨워서 꼬치꼬치 캐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무책임하게 입을 열었다.

"뭐, 루벤카한테 가서 한번 확인해보면 알겠지."

그렇게 명검 한 자루를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업그레이드된 아힘사와 나는, 발할라에 도착하자마자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가 있는 소도시 '레베라크' 로 행선지를 정했다.

* * *

해발고도 5천 미터.

발할라 산맥의 중턱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소도시 레베라크는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의 존재 하나만으로 돌아가는 동네다.

쓰레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길거리가 보였다.

생도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파는 잡화점, 외출 나온 생도들을 위한 식당들. 교육 분위기에 방해되지 않도록 사창가같은 유흥거리는 허락하지 않기에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아카데미의 교수들이나 아카데미에서 일하는 자들을 위해 조그마한 술집만 몇 개가 있을 뿐.

유명한 마법사들이 후학을 키우는 동네 답다.

마탑은 완성된 마법사들이 오는 곳이라면, 아카데미는 재능있는 유망주들을 깎아내고 다듬어 세상에 배출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온갖 재능있는 마법사들이 이곳으로 몰려든다.

게다가 발할라 시티 차원에서 지원하고 밀어주는 교육 사업인지라 대기업의 자제들까지도 많이들 입학한다고 들었다. 혹여 재능이 없더라도 어릴적 인맥을 쌓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던가.

— 확인되지 않은 차량은 진입할 수 없습니다.

레베라크 소도시의 길거리에서는 팔에 완장을 찬 아카데미 경비병들이 돌아다니며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모습이 보인다면 다같이 달려들어 몰매를 놓을 듯했다.

그들은 손에 기다란 창자루를 들고서, 가끔가다 창끝으로 땅바닥을 퉁퉁 때리며 외부인들에게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잠시만요. 어디서 오셨습니까?"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레이더망에 나와 아힘사가 정확히 걸렸다. 불시에 하는 검문인 듯했다.

경비병들은 각자 풍기는 기운이 나름 강했다. 그들은 우리를 본 뒤부터 쭈욱 경계하고 있었던 듯했다.

나는 입가에 옅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마법사, 반 루벤카를 찾아왔습니다."

"반 루벤카를 어째서 찾는 겁니까?"

"친합니다."

"흥, 거짓말이군."

무슨 말 같잖은 개소리를 하냐는 듯한 경비원의 표정에 내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게 아닌가.

"반 루벤카 생도와 친하다고? 내가 레베라크에서 경비병을 몇 년이나 했는데 그런 사람은 생전 본 적이 없다! 당장 정체를 밝혀라—!!"

아.

그럴 만도 하지. 루벤카 그년이라면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대단했다. 그간 얼마나 개판을 쳐뒀기에, 그저 찾기만 했는데도 경비병이 저리 의심하며 수상한 놈 취급을 하겠는가.

하지만 다행히도 그 길로 쫓겨나거나 유치장에 감금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엇?"

내가 일레힌 포이체카의 청록빛 마력을 슬쩍 꺼내어 보여주자, 창을 높이 든 경비병은 곧장 의심을 거두고 비켜섰다.

"여섯 번째 봉우리,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에서 오셨군요!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발할라에 도착한 뒤 계속 마탑 안에서만 있어서 몰랐는데, 다른 마탑들에 비해 세력이 약한 여섯 번째 마탑임에도 발할라 마법계에서의 그 지위는 상상 이상이었다. 경비병의 태도를 보고선 새삼스레 실감이 났다.

"하하, 시립 아카데미의 교수진에는 마탑에서도 활동하는 마법사분들이 두루 포진되어 있답니다. 여러 이유때문에 다들 어느 마탑인지는 절대 비밀에 부치시지만요."

창잡이 경비병은 생각보다 친절했다.

오해가 풀리자, 우리는 호의가 깃든 경비병의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반 루벤카 양을 찾는 자들은 대부분 좋지 못한 이유로 찾는 이들입니다. 암살자거나, 자객이거나, 살수거나, 히트맨, 칼 든 빚쟁이죠. 때문에 저희도 그 이름이 나오면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지라."

"괜찮습니다. 그 심정, 저도 십분 이해합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전에는 심각할 정도였는데, 요즘은 이상하게 루벤카 양을 찾는 이가 없었어요. 문제가 잘 해결된 것이겠지요."

"······."

거의 이 소도시 전체에 민폐를 끼쳐왔던 거군.

하기야 당가의 감시자들을 몇 명이나 죽였다 했으니.

어째서 아카데미의 교수들과 학장의 비호를 받는 루벤카가, 여기에 숨어 살다가 일레힌 마탑으로 도망치듯 올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재능이 출중하든 대단한 인재든 싫어하는 인간들이 반드시 생길 수밖에.

"안내 고맙습니다."

반 루벤카는 어떤 아카데미 교수의 저택에서 방을 하나 얻어 머물고 있다고 했다.

저택은 반 바이오 회장의 저택보다도 규모가 컸다.

저 뾰족하고 높게 솟아있는 저택의 주탑은, 이 도시 내에서의 부유함과 권위를 나타낸다. 주탑의 높이가 상당히 높았다. 그리고 안쪽으로는 큰 정원이 딸려있는 걸 보니, 확실히 입지가 대단한 교수의 사택인 듯했다.

—딩!

내가 정문의 초인종을 누르자, 누군가 안쪽에서 절도있는 걸음걸이로 걸어나왔다. 단정한 복장에 하얀 콧수염을 기른 전형적인 집사의 외형이었다.

"이 저택에는 무슨 연유로 방문하셨습니까?"

집사로 보이는 이가 곧바로 방문 이유와 이름을 물었다.

반 루벤카와 레나를 찾아왔노라 말하니, 그는 잠시 기다려달라며 말하고는 다시 저택으로 들어갔다. 몇 분이 지나자 집사가 다시 나와 조심히 문을 열었다.

"이쪽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나는 집사를 따라 저택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택 내부는 전체적으로 상류층의 분위기가 났다. 귀족같다고 할까.

저택 주인의 취향이 백분 반영되었는지, 반들한 유리창이든 천장의 샹들리에든 모두 옛되고 고급스러웠다. 훌륭한 질감의 카펫과 깨끗한 유리 진열장에 전시된 골동품 유물들이 눈에 들어왔고, 가치있는 미술품들이 양쪽 벽면을 멋들어지게 장식하고 있었다.

저택의 주인은 예술과 미술품에 관심이 많은 부호로군.

그나저나 집사가 미리 언질을 주었는지, 레나는 저택의 입구에서 서성이던 중이었다.

"레, 레반! 아힘사도 같이 왔구나!"

곧, 나를 발견한 레나가 반가워하며 달려왔다. 레나는 자연스레 품에 안겨들었는데, 이상하게 레나를 보자마자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이 들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

아무래도 캐리어 안에서 슬레모킨과 나눈 대화가 어지간히 버거웠던 모양이다.

"레나. 그런데 그 옷, 바깥에서도 많이 본 것 같은데."

"이 옷?"

레나가 입고 있는 옷이 특이했는데, 시립 아카데미의 생도들이 입는 의복과 같은 것을 알고는 꽤나 놀랐다. 레나는 며칠 사이 시립 아카데미 소속의 학생이 되어 있었다.

"나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에서 마법 교육을 받게 됐어. 언니가 따로 과외를 해주기도 하고······다행히 사람들이 재능이 있는 편이래. 다들 좋아해주고 있어."

아마 입학에 관해서는 루벤카와 그녀에게 호의적인 교수들의 입김이 작용했겠지. 과거 시립 아카데미 전체 수석이었으니, 당가라는 위험성이 사라진 이상 아끼는 혈육을 아카데미에 밀어 넣는 것쯤이야 얼마든 가능했을 것이다.

그때, 레나가 자랑할게 있다는 듯 나를 이끌었다.

"아 그리고! 레반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잠시 뒤.

레나가 머무는 방에 이르자, 어떤 화면들이 보였다. 이리저리 요동치는 차트들과 그 옆을 장식하고 있는 창들.

"주식?"

"레반, 한 번 얼마인지 확인해볼래?"

당당한 레나의 말에 화면으로 고개를 돌리자.

"······?"

정크타운에서 고작 몇만 크레딧으로 시작했던 예수금이, 어느새 백 만 크레딧을 훌쩍 넘어 미친듯이 불어있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연방증권 트레이딩 툴에 찍혀있는 금액은 분명 그랬다.

···그렇다면 수익률이 대체 몇 퍼센트란 말인가.

일레힌 마탑을 나와서 고작 며칠이나 됐다고?

약간은 부끄러워하며, 생글생글 웃는 레나를 보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저 정도라면 앞으로 연방이 망하지 않는 한, 먹고살 걱정은 없겠다고.

그렇게 내가 레나와 그간의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있던 도중이었다. 어디엔가 다녀온 루벤카년이 난입해 말을 가로챘다.

"뭐야? 너 왜 왔어 또?"

메리와 같이 도착한 반 루벤카는 아니나 다를까 인상부터 팍 찌푸렸다. 루벤카의 고운 눈가에 주름이 자글하게 생기며 불편한 심경을 대변했다.

내가 친히 도발적인 언사를 할 필요도 없었다.

"영영 보지 말고 각자 알아서 살자니까 여기까지는 왜 찾아왔냐? 붕어도 아니고 그새 까먹었을 리는 없고—"

루벤카는 당연하단 듯 마력을 끌어올리려했으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아힘사의 전신에서 뿜어진 방해 역장이 저택을 단숨에 잠식하며 루벤카의 마력을 흩어버렸다.

누가 말리기도 전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곧, 루벤카의 앞에 선 아힘사가 입을 열었다.

"위험한 마력이 느껴집니다. 조심하십시오."

"······."

루벤카조차 말문이 막히고 당황을 금치못할 정도의 방해 역장.

"······뭐야 이 역장은. 당장 안 풀어?"

물론, 루벤카는 아는 교수의 저택이니만큼 전력을 다하지 않았고 아힘사도 주무기인 블레이드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둘의 움직임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체감할 수 있었다.

방금 아힘사가 마음을 먹었다면, 루벤카의 목은 반드시 떨어졌으리라.

"풀어."

"싫습니다."

스아아아.

평소처럼 얼굴에 악귀가 든 루벤카는 저택 안의 마나를 죄다 빨아들이며 마력을 점점더 강하게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아힘사의 방해 역장이 일으키는 파장도 점점 강해졌다.

그렇게, 방해 역장과 루벤카가 일으킨 마력이 엉켜 저택 내부를 가득 메운 시점이었다.

"여긴 휴식하고 쉬는 곳이지, 싸우는 곳이 아니랍니다."

어디선가 들려온 우아한 말투에 그 살기등등한 기운들이 일시에 사라지며, 계단 위로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연회장에서나 입을 법한 긴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인이었는데, 행색으로 보아 이 저택의 주인인 시립 아카데미의 교수가 확실했다.

빨간 코피를 줄줄 흘리는 루벤카가 분노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카산드라 교수님, 민폐 끼쳐서 죄송해요. 제가 금방 내보낼게요."

루벤카는 아힘사의 방해 역장에 대응하느라 마나 회로를 꽤 혹사한 듯했다. 흐르는 코피를 닦는 그 모습이 퍽 우스웠다.

하지만.

"정말 아름답네요."

"······."

어느새 교수는 계단을 날듯이 내려와 아힘사의 앞에 자리했다. 교수는 아힘사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마치 미술품을 감상하듯 연신 흠···을 연발하더니,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흡족한 표정이었다.

가치 있는 예술품이 아니라, 그저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건가.

루벤카를 여기에 머무르게 해주는 이유도 알겠군.

들어본 적이 있다. 시립 아카데미의 '론 카산드라'

아카데미 교수중에서도 꽤 이름있는 축에 속한다.

드르륵-

곧이어, 우리의 중간에 길다란 식탁이 생겨났다.

카산드라 교수는 이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시립 아카데미 교수, 카산드라입니다.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에서 나온 레반이죠?"

"교수님께서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일레힌 가의 마력은 남다르니까요."

이윽고.

카산드라 교수가 교양있게 손짓하며 자리에 앉았다. 교수는 웃음으로 딱딱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입을 열었다.

"마침 궁금한 게 있었는데 정말 잘됐네요. 루벤카를 통해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요즘 시립 아카데미 교수들 사이에서, 레반이라는 인물의 존재가 단연 화제랍니다."

#73화. 카산드라와의 첫 만남.

#73화.

카산드라 교수의 저택에서는 음식을 준비하는지 각종 음식이 좋은 향들이 풍겨오고, 클래식한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륵-

나는 착석하며 카산드라 교수에게 물었다.

"어째서 제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까?"

"그건 말이죠."

교수는 교양있고 차분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께서 다행히도 건강을 되찾았다고 들었답니다. 누구에게도 손을 벌리지 않고 자력으로 말이죠. 물론······이제 아카데미 교수들 사이에서 자력 회복이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답니다. 레반이라는 인물 덕분에요."

조금은 놀랄만한 소식이었다.

그 사실이 벌써 이렇게 퍼져나갔나?

나는 적당히 발뺌하며 입을 열었다.

"마탑주께서는 아직 휴양중이십니다. 헛된 소식에 교수님들이 넘어가신 듯합니다만."

"과연 그럴까요? 몇 년간 풀 죽어있던 일레힌 가문의 수뇌들이 요즘따라 웃음이 많아졌답니다. 최근 일레힌 그룹 내에서도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대대적인 성과급 잔치를 벌였다네요."

"뭐, 그룹 내에 큰 경사가 있었나 보군요."

···그 가문도 참, 푼수떼기들이 따로 없군.

곧 알려질 수밖에 없는 일이라 해도 그렇지.

아무튼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연방의 여타 명사들처럼 명예나 부귀영화를 바라는 것도 아닌데, 발할라 시티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는 아카데미 교수들의 입방아에 올라서 좋을 게 없다.

괜히 일레힌 포이체카의 기적같은 회복과 엮여서 언론이라도 타는 날에는, 원하지도 않던 명성과 함께 귀찮고 더러운 시선들이 들러붙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너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러나 카산드라 교수는 사정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가볍게 후후- 웃었다.

"시립 아카데미의 교수라면 사회적으로도 큰 인정을 받는, 아주 명예로운 자리거든요. 입이 가벼운 집단이라고 소문이라도 난다면 일신상 좋을 게 없겠죠? 생도들 보기가 부끄러울 거에요. 그러니 이 비밀은 교수들 선에서 잘 간직하고 있을게요."

저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는 않는다.

둘 이상이 아는 비밀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라.

그래도 교수직에 걸린 명예와 일신상의 체면을 운운하니, 그래도 이른 시일 내에 퍼져나갈 일은 없겠지. 해봐야 루벤카 근처와 아카데미의 윗선에서 나도는 정도.

그동안 이 거대한 발할라 시티에서는 언제든 더 큰 이슈가 생겨나줄 테니 괜찮을 것이다.

"다들 서있지 말고 앉도록 해요."

드륵.

아힘사와 레나, 루벤카는 일단 카산드라 교수가 권유한 대로 길다란 식탁에 앉았다.

규모있는 연회홀에서나 볼법한 길고 화려한 식탁은 상석이 비워진 채 양쪽으로 마주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카산드라 교수의 목전에 앉은 나는, 교수의 시선을 견뎌내고 있다. 마치 예술품을 품평하는 듯한 눈빛에 지우지 못한 호기심에 담겨 있었다.

"화제의 인물인 레반을 내가 가장 먼저 볼 수 있게되어 행운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이 기회를 만들어준 루벤카에게도 고마워 해야겠네요."

카산드라 교수가 희미하게 웃었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집사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카산드라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침 잘 됐네요. 우리 간단하게 먹으면서 얘기를 나눠볼까요?"

"예, 식기를 추가로 준비하겠습니다."

이윽고, 입맛이 돋는 음식의 향이 저택을 메웠다.

중년의 집사와 메이드들이 잘 구운 스테이크와 샐러드, 와인등을 가져와 절제된 움직임으로 내려놓고는 고급스러운 식기를 주르륵 깔았다.

나는 그렇게 식기가 세팅되는 와중에, 교수를 훑어보고 있었다.

경험상 완벽주의 혹은 미(美)의 가치에 유난히 집착하는 부호들은 대다수가 종잡기가 힘들고 어디로 튈 지 모른다는 단점이 있었다.

장점은 자신의 가치에 부합하는 것을 보면 사족을 못쓴다는 것 정도.

음식과 식기들이 화려한 식탁에 가득 깔리자, 카산드라 교수는 먼저 아힘사를 항해 뇌쇄적인 눈빛을 던졌다. 그것은 훌륭한 예술품에 매료된 눈이었다.

"······7레벨 마법사의 마나 흐름마저 역류시켜버리는 방해 역장은 흔치 않을 거랍니다. 그것도 저 작은 몸 속에 집어넣으려면 극도로 소형화를 시켜야 하는데······그러러면 자금이 천문학적으로 들기에 부유하고 여유롭던 먼 과거에나 시도해볼 법한 방식이죠."

역시 알고 있는 지식이 많다. 아카데미 교수라 그런가.

하기야 아힘사가 방해 역장을 그리 대놓고 펼쳤으니, 코앞에서 보고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도 이상하겠지. 다행히도 적대적인 감정은 전혀 없어 보인다.

슥.

카산드라 교수는 나이프를 집어들고는 말했다.

"앞으로 나이가 많은 마법사 앞에서 방해 역방을 사용하는 것은 자제하는 게 좋겠어요. 분명 정체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랍니다? 나는 역사적인 골동품이 망가지는 걸 절대 원치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나요?"

번쩍-

샹들리에의 빛을 반사하는 은색 나이프의 면.

어쩐지 아힘사를 나보다 더 위하는 것 같기도 해서, 교수의 기세에 순응하며 적당히 알았노라 답했다.

"예, 노력해보겠습니다."

"좋아요."

대답에 흡족해진 얼굴의 카산드라 교수는 나이프로 눈 앞의 스테이크를 조심스레 썰어 입에 넣었다. 그녀는 그러다 다시금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이제 다른 얘기를 해볼까요? 현재 잘나가는 마법사인 '레반' 은 고작 1년 전만 해도 마법계 오너 일가의 하인 출신이었다죠."

"······."

어이가 없군.

시작부터 관자놀이가 지끈거려 찢어질 듯했다.

나는 집어든 식기를 탁, 내려놓고 곧장 되물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또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글쎄요. 기억이 잘 안나네요."

교수는 모르는 척 와인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누군지는 뻔하지.

빨간 식탁보를 잡아 몰래 코피를 쓱쓱 문질러 닦는 저 빌어먹을 루벤카년말고 누가 더 있겠는가.

— 헹.

아쉽게도 루벤카는 목이 아직 붙어 있었는데, 진득한 코를 팽 풀며 나더러 어쩌라고? 라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에 아힘사가 조금 더 힘을 내서 목을 쳤다면 좋았을 텐데. 살인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 별 도리가 없군.

우두둑!

그렇기에 나는 다시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든 다음, 핏기있는 스테이크를 통째로 좍좍 난도질하며 입을 열었다.

"교수님, 혹 화령검절 청풍이라고 아십니까?"

"······!"

'뭐 어쩌라고 개새끼야' 에서 '저 개새끼 또 뭐하려고 그러는 거지?' 라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는 루벤카의 표정.

자존심 하나는 끝내주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거다.

곧, 카산드라 교수는 과거를 추억하며 입을 열었다.

"화령검절은 모르겠지만 '청풍' 이라는 이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죠. 여기 있는 루벤카가 아카데미의 생도이던 때, 모의 대련 상대였답니다. 저는 그때도 교수였던 만큼 직접 참관했거든요."

와인에 취했는지, 아니면 그때의 추억에 취했는지 카산드라 교수는 잠시 눈을 감고 기억을 음미하다가 말을 덧붙였다.

"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운 아이."

청풍의 재능과 자질에 대한 감상이었다.

"무림계, 넓게보면 연방의 미래를 무학관의 어린 아이에게서 보았어요. 지금은 어엿한 성인이 되었겠네요."

나는 스테이크를 계속 썰며 고기 대신 루벤카를 씹었다.

"이번에 그 청풍과 우연히 만났는데, 듣자 하니 루벤카가 너무 한심하게 약해서 그냥 져줬다고 하더군요. 그 충격적인 얘기가 설마 사실입니까?"

"······."

그러자 카산드라가 와인잔을 내려놓더니,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짓궃은 구석이 있네요. 꼭 누구처럼."

하지만 카산드라 옆의 루벤카는 웃지 못했다.

묻어뒀던 추억을 강제로 끄집어내져 박박 긁힌 루벤카가 눈동자에서는 시뻘건 홍염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로써 화령검절 청풍에게는 잘 된 일이다. 치졸한 이간질로 사이가 멀어지면 더 좋고 참한 신붓감을 찾아가겠지.

내가 이 정도로 속정이 깊은 사내다.

그때, 머릿속으로 루벤카의 스산한 음성이 울렸다.

— 야, 진짜 미쳤냐? 왜 여기까지 와서 이상한 얘기는 꺼내고 지랄이야. 그냥 빨리 처먹고 좀 나가라고. 나 여기서도 쫓겨나면 니가 다 책임···.

"루벤카?"

카산드라 교수의 물음에, 루벤카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답했다. 방금 전까지 스산한 전음을 보내던 때와는 딴판인 목소리로.

"아 네, 교수님. 음식이 맛있네요."

"그렇죠?"

"너무 맛있어요."

루벤카는 샐러드를 우걱우걱 퍼먹었다.

아카데미 교수한테는 찍 소리도 못하는군.

하기야 본가는 무너지고 약혼자와는 파혼에······발할라 시립 아카데미가 유일하게 비빌 언덕이지. 교수들은 각계각층에서 한 자리씩 해먹는 이름 높은 마법사들이고, 시립 아카데미의 학장이나 명예 학장의 경우에는 거의 마탑주와도 동등한 취급을 받을 정도니까.

루벤카가 입을 꾹 닫은 뒤로, 몇 분간의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조용한 분위기를 깨뜨린 것은, 이번에도 카산드라 교수였다.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최근 연방이 계획하는 일에 시립 아카데미도 손을 거들 예정이랍니다. 물론 가능하다면 말예요."

"······."

저거 연방의 영토 수복전을 말하는 듯 한데—

이쯤 되면 뭐, 사실 모르는 세력이 없는 거 아닌가?

하지만 마탑, 화산 그룹,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라는 거대 세력인지라 뭐라할 말이 없었다.

약간의 호기심이 생긴 내가 교수에게 물었다.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의 교수들과 생도들은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후학 양성에만 몰두하는 기관 아닙니까?"

"마법사 양성이 본 목적이지만, 후방에서 도움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답니다. 그리고 참여의 범위가 넓게 허락된다면, 무림계의 무학관들은 물론이고 발할라 내의 다른 아카데미들마저 대거 참여할 텐데, 시립 아카데미의 체통을 지킨다며 뒷짐만 지고 있다가는······우습게 여길 이들이 꽤나 많답니다. 상징적인 사건일 테니까요."

발할라 내의 정치적인 얘기로군.

나와 교수는 그 이후로도 약간의 얘기를 더 나눴고.

탁.

이 불편한 자리에 더 있어야 할 이유는 없기에, 나는 그만 식기를 내려놓고 일어날 채비를 했다. 레나도 봤고, 청풍이의 미래도 살렸고, 아힘사의 능력도 어느 정도는 보았으니.

"아무튼 교수님과의 식사 자리, 영광이었습니다. 실례겠지만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이만 마탑으로 돌아가야 해서요."

내가 마탑을 운운하며 일어나자, 카산드라 교수가 또 후후 웃었다.

"아쉽네요. 저는 레반과의 대화가 한참 재미있었던걸요. 마탑에 급한 일이 있나요?"

"보아하니 쉽게 안 보내주실 것 같아서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죠?"

"아닙니까? 말이 점점 겉도는 게, 아까 전의 시종 얘기를 더 나누고 싶어하시는 듯 한데."

나의 그 말에.

"······!"

저 옆에서 루벤카의 귀가 쫑긋거리는 게 보였다.

상식선에서 이해를 포기했다고 떠들고 다니면서도, 관심이 지대한 걸 보면 못내 실체가 궁금하긴 한 모양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맞아요."

카산드라 교수는 세심하게 입을 닦더니 아까부터 꼭꼭 숨겨왔던 본론을 꺼내놓았다.

"간단하게 대답만 해주겠어요?"

"예, 가능하다면 하겠습니다."

"나는 레반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인격 메모리칩이, 내가 알던 인물이 남긴 물건이 아닌가 해요."

"······."

"이전 세대의 칠좌(七座). 현재는 실종 상태인 체슈탈 아스파로프의 인격 메모리칩이 아닐까 해서요. 혹은 아스파로프, 그 자체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대뜸.

교수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발할라 시티의 현자(賢者), 체슈탈 아스파로프.

더해서, 과거의 칠좌중 한 명.

이 세계에서 쓰이는 전뇌 컨트롤 칩 기술을 한층 더 진일보시켜 토대를 닦은 역사적인 인물이자, 마법적인 소양과 지식이 대단하여 마법계에 큰 족적을 남긴 마법사다.

다만 오래 전 장벽 밖에서 실종되었고, 지금은 사실상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카산드라 교수님께서는 그분을 잘 아십니까?"

"조금요."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 대단한 전설의 기억을 이어받았다면, 뭐하러 바닥에서 굴렀겠습니까. 기술과 기억, 심득뿐만 아니라 인격과 성정의 일부분도 같이 물려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방금 교수가 한 말은, 너무도 큰 비약이기에.

애당초 말이 되는가. 십이제도 아니고, 무려 칠좌의 위에 앉아있던 전설이다. 그런 자가 남긴 인격 메모리칩을 한낱 시종이 무슨 수로 얻을 수 있겠는가.

"확실히 아닙니다."

내가 손까지 저으며 부정하자, 카산드라 교수가 아힘사를 지그시 바라봤다.

"자그마치 백 년은 된 골동품을 더욱 강하게 개조하셨네요. 그것도 1년 전만 해도 시종이었던 분이 말이죠. 우연이 너무 많이 반복되면 필연 아닐까 싶어요."

"교수님께서는 과한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레반이 조금 해명해줄 수 있겠어요? 나는 식사자리에서 무언가를 꼬치꼬치 캐묻는, 격 떨어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답니다."

"······."

허나 설명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하필 아힘사까지 곁에 둔 통에, 애초에도 하던 의심이 이 자리에서 더욱 짙어져 확신처럼 변한 듯싶었다. 연방에서 앙굴리마라를 섹스토이로 개조한다음 원 제작자의 업그레이드까지 거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죽어가는 마탑주를 뚝딱 고쳐 놓았으며, 무공도 쓰고 마법도 쓰는 이상한 놈.

그게 지금 내 포지션이다.

내가 입을 닫자, 카산드라 교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스파로프의 열렬한 팬이었답니다. 강하고, 빛났으며, 아름다웠거든요.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치밀하고 연기와 발뺌에도 능통한 인물이었답니다."

"교수님, 아쉽게도 저는 무공에도 조예가 깊습니다."

"그래서 더 의심이 깊어지고 있답니다. 체슈탈 아스파로프는 무림계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라서요. 그가 실종된 뒤로, 세월이 꽤 많이 지났어요."

"······."

아주 가지가지 했군.

하필 시종으로 태어난 덕에 끝까지 속이 썩는다.

시작부터 메가콥의 오너 일가였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인격 메모리칩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는 기색이다.

여기서 아니라고 부정해봤자 믿을 기색도 아니고, 나중에 해명하기가 더 복잡해 질테니······인격 메모리칩은 인정하되 다른 건 확실히 뭉개고 넘어가는 게 맞겠군.

"체슈탈 아스파로프는 아닙니다."

"······."

심유한 카산드라 교수의 눈빛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음악으로 마나를 연주해요. 정신적인 수양이 경지에 이르지 못한 생도들은 가끔 당황하곤 하죠."

"?"

탁탁.

교수가 품위있게 박수를 두 번 치자, 식사를 하던 레나와 얘기를 엿듣던 루벤카의 눈이 찰나간 스르륵 감겼다.

홱!

그러나 루벤카는 즉시 머리를 떨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

루벤카가 다시 감기던 눈을 부릅뜨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눈꺼풀이 감긴 걸 보면 분명 홀리긴 했다.

"···?"

그리고 같은 자리에 앉아있던 레나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당황하는 자매의 면면이 보였다.

'클래식 음악.'

저택의 분위기와 어울려서 다들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음악에 카산드라의 마력이 섞여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카산드라가 생각하는 나를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버린 듯 하다.

"이번에도 또, 레반만 당하지 않았죠. 이 마법은 분명 대중에 공개된 적이 없는데. 마법적인 지식과 정신적인 수양조차 평균치를 한참 상회하네요."

"······."

"놀라워라."

이제 나도 뭐 더 할 말이 없군.

나는 더 이상의 변명이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교수의 저 초롱초롱하고 흥미 가득한 눈을 보라.

그냥 솔직함을 뽐내는 게 차라리 더 낫겠군.

"레반, 아까부터 당해줄까 말까 속으로 고민했죠?"

이것도 맞다.

진즉에 눈치채고 어찌 할까 고민했으니.

론 카산드라, 괜히 명망높은 교수가 아니다.

"레반은 지금, 두려워하거나 위축되지 않았어요. 아마 당장 전투가 벌어져도 자신있어 할걸요?"

"일레힌 마탑의 권위를 믿고 있을 뿐입니다."

"숨겨둔 실력을 믿고 있는 거겠죠."

뜻과 고집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인다.

명예로운 아카데미 교수직이라는 명함에 갇혀,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고위급의 마법사라는 본질을 잠시 망각했는지도 모르겠군.

조로록—

이윽고, 집사가 다가와 와인을 따랐다.

카산드라는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투명한 와인이 잔 안에서 빙빙 흔들려 파도를 만들어낸다.

"나의 의심이 불합리한가요?"

카산드라 교수같은 경우 하필 레나, 루벤카를 곁에 두고 온갖 얘기들을 전해들은 덕에 자신만의 의심을 확신 단계까지 발전시켰으니, 쉽게 거두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교수님의 의심하시는 것처럼 대단한 '그분' 은 아닙니다만, 충분히 합당합니다."

카산드라 교수는 그제야 싱그러운 웃음을 띠며 말했다.

"고마워요. 그 말이 듣고 싶었어요. 이제부터 레반은 나의 저택에 언제든 방문해도 좋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아도 좋아요. 대신, 가끔 여기서 나랑 같이 식사나 해요."

그게 그냥 또 오라는 얘기 아닌가.

식탁에서 일어난 교수와 나는 드넓은 저택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저택의 정원을 바라보던 카산드라 교수가 말문을 열었다.

"아스파로프의 목표가 뭐였는지 알아요?"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언데드를 멸살하고 인류의 강역을 되찾는 거였어요. 이렇게도 각박한 세상에······아름다운 이상을 가진 동화속의 용사처럼요. 훌륭하죠?"

나는 대수롭잖게 대답했고.

"헌데, 아쉽게도 실패했나 봅니다."

카산드라 교수는 후후 웃었다.

"대신 그의 유지를 잇는 자가 또 다시 나타날 거라고 믿어요. 내가 교수직을 유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또 봐요 우리."

그것이 카산드라 교수와의 첫 만남이었다.

* * *

얼마 뒤.

나는 마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탑에서 십 여일이 쏜살같이 흘렀다.

마탑주가 말했던 보름의 기한이 눈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74화. 그럼, 다 같이 한 번 죽어보자

#74화.

알 헤임달 행과 카산드라 교수와의 만남 이후, 마탑에서 십여 일이 빠르게 흘렀다.

즉, 마탑주가 예언했던 보름이 목전에 다가왔다.

지금 일레힌 마탑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장내를 달구고 있었다.

— 연방의 공표가 오늘이죠?

— 그런 것 같군요. 다들 확신하고 있어요.

— 마찬가지로 우리 가문도 금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나는 마탑의 거대한 홀에 비치된 벤치에 앉아 있었고, 카페 주변과 홀로 마탑의 마법사들이 점점 나타나 모여들고 있었다.

늘 피곤한 기색으로 기어나와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던 마법사 역시, 오늘만큼은 상태가 멀쩡했다.

연방의 공표가 있는 날이 바로 오늘이라는 소식이 시티넷에 쫘악 퍼졌기에.

지금, 내 옆에는 아힘사가 당당히 서있었고···.

"보내주십쇼. 형님!"

루돌프 이 새끼는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늘 이렇다.

놈은 무릎을 꿇고 앉아 거의 바닥에 드러눕기 직전이었다. 건조한 눈을 짜내며 억지 눈물을 만들어 보인 루돌프놈은, 이제 정크타운으로라도 가겠다며 땡깡을 피웠다.

나는 최대한 자애롭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돌프야, 너 혼자 자꾸 어딜 가겠다는 얘기니."

"시종 체질이라 마탑 생활이 아무래도 안 맞는 것 같습니다."

"다른 마법사들이 침실까지 가서 괴롭혔니?"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놈은 무려 보름간이나 마탑의 침실에 갇혀있었다.

이제는 정신이 반쯤 나갔는지 제발 레나에게 보내달라고 들러붙는 걸 꾸준히 두들겨 진정시켜 놓았는데, 외공의 성취로 맷집이 좋아져서 그런가. 포기가 상당히 더딘 모습이다.

하여간 루돌프의 그 한심한 모습에.

"······흉하네요."

이 군상을 구경하던 팔찌 세 개의 마법사가 못 보겠다는 듯 힘겹게 고개를 돌리고는, 품위있게 손수건을 꺼내 코를 막았다.

"세상에, 어쩜 저렇게도 흉할 수가."

그 마법사의 어조는 기품있고 단정했다.

나는 마탑에서도 드레스 차림을 고집하는 의문의 마법사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일단 눈물 콧물을 짜대는 루돌프놈의 뒤통수를 후렸다.

억-

헌데 경지가 이전보다 높아져 그런 걸까.

힘 조절을 꽤 했는데도 북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지랄을 떨던 루돌프놈은 그대로 엎어져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어쩜 저렇게 흉한 놈' 이 엎어지자 고아하게 후후- 웃어 보인 드레스 차림의 마법사가 조신히 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 이것이.

"다음에 또 보자는 게, 마탑에서였습니까."

"레반은 예상하고 있었나요? 그리 놀라는 기색은 아니네요."

"저번에 저택에서 입었던 드레스잖습니까."

"그랬나요?"

"관심이 필요하십니까?"

시립 아카데미, 카산드라 교수와의 두번째 만남이었다.

저명한 마법사인 론 카산드라 교수는, 놀랍게도 여섯 번째 봉우리 마탑의 구성원중 하나였다.

드레스에 관해서는 시치미를 뚝 뗀 그녀는, 벤치에 다소곳이 앉아 침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번과는 정반대가 되었네요. 혹시 팔찌 세 개라고 무시하는 건 아니겠죠?"

와득.

나는 과자를 까먹으며 고개를 돌렸다.

설산목 껍데기를 갈아 만든 발할라 유명 메이커 과자였는데, 질겅이는 맛이 일품이었다. 카산드라의 저택에서 먹었던 스테이크보다 이게 더 나았다.

"이름있는 교수니까 여기저기 듣는 귀가 많은 줄로만 알았지. 알아도 너무 잘 안다 싶었습니다. 우리 그때가 첫 만남은 맞습니까?"

내가 돌연 그리 묻자.

카산드라 교수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반가워야 할 만남이 조금 아름답지 못했죠? 레반도 알고 있겠지만, 팔찌 세 개와 네 개의 구성원 사이에는 크나큰 벽이 있답니다. 쉽게 다가가기가 힘들죠."

우리는 다른 마법사들의 눈과 귀를 피해 조용히 대화했다.

내가 팔찌 네 개를 차고 있는지라 호기심 많은 마법사들의 은근한 시선들이 계속 따라붙었기에, 목소리를 높일 수는 없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중앙 홀에 마법사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시립 아카데미 교수들 사이에 내 소문을 흘린 것도 교수님이십니까."

"마탑주께 미리 허락을 받은 일이랍니다. 발할라 시티의 상징적인 자리에 있는 거물이 몇 년간이나 칩거하다가 기별도 없이 완전한 상태로 나타난다면, 그간 괜찮았으면서 고의적으로 마탑을 방치했다는 사람들의 눈총을 받을 수도 있거든요."

일레힌 포이체카와 입을 맞춰서 일부러 풀었군.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레반이라는 인물을 통해 소문을 흘려 마탑주의 회복에 개연성을 부여하고, 모나지 않게 마탑주 지위에 복귀함을 예고한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아카데미 근처에서 우리를 불시에 검문한 창잡이 경비병의 재잘거리는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아카데미 교수들님 중에서는, 마탑에 소속되어있는 교수들이 많답니다. 다들 절대 비밀에 부치시지만요. ]

사실이었군.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물었다.

"그런데 아스파로프 얘기, 마탑주께서도 압니까?"

나의 질문에.

카산드라 교수는 얼굴을 손수건으로 가리며 속닥거렸다.

"······둘 이상이 알고 있는 비밀은 언젠가 바깥으로 흘러나가기 마련이라서요. 나만 알고 있고 싶기도 하고. 앞으로도 나만이 알았으면 좋겠고······."

"······."

어차피 마력의 운무 때문에 얼굴의 형태가 잘 보이지도 않지만, 어쩐지 소녀처럼 쑥쓰러워 하는 듯한 기색의 교수를 본 나는 조금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집착과도 비슷한 행동이 전부 진심인 듯해서.

곧이어 내가 일레힌 마탑에서 나간 루벤카와 레나가 교수의 저택에 식객으로 들어가 있는 것도 연관되어 있냐 묻자.

"그건 정말 신기하게도 우연이었답니다."

"그러면 레나좀 잘 봐주십시오."

"시립 아카데미에서 특별 대우는 따로 없는걸요."

"그래도 각별하게 대우를 좀 해주십시오."

"왜죠?"

"돈을 잘 법니다. 착하고."

"······?"

"수복에는 일레힌 마탑 소속으로 참여하십니까."

"아쉽게도 시립 아카데미 소속으로 참가한답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과자를 까먹었다.

그럼 앞으로 더 볼 일은 없는 여자겠군.

"······그나저나 아스파로프께서는 저번과는 또 달라지셨네요. 어떤 변화가 생긴 걸까요?"

아스파로프.

카산드라 교수는 이제 멋대로 내 이름까지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도 그녀의 머릿속에선 정답이 정해져 있는 듯하니, 나는 이제 대응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레나를 돌봐주시는 건 감사하나, 이만 가십시—"

헌데, 교수를 저 멀리 쫓아내려던 순간이었다.

"하면, 이 물건은 필요 없겠네요? 아쉬워라."

카산드라 교수는 희미하게 웃으며 뭔가를 꺼내놓았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것은 웬 작은 나무 지팡이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겉면에 새겨져 있는 걸 보면, 아마 교수의 저택 유리관에 전시되어 있던 골동품. 그 물건들 중 하나인 것 같은데······.

"뭡니까?"

"현자 체슈탈 아스파로프께서 사용하시던 신병이랍니다."

내 물음에 당황스러운 교수의 대답이 돌아왔다.

갑작스러웠다.

"······."

저 낡은 나뭇대가, 칠좌가 쓰던 무기라고?

내가 그 나뭇대를 뚫어져라 바라보자, 카산드라 교수가 보란 듯이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낡은 나뭇는 순식간에 변화를 거듭하며 작은 권총과도 비슷한 외형으로 바뀌었다.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이 쓰던 것처럼 거대하지는 않았으나, 그 나뭇대는 어찌 설명할 수 없는 현기를 풍겨대고 있었다.

나는 그 나뭇대에서 풍기는 기운을 느낀 즉시.

"결국······."

뭔가 있는 척하며 고개를 가로로 절레 저었다.

장단을 좀 맞춰 달라하시니, 내가 맞춰드려야지.

속정이 깊기로 유명한 사내가 바로 나니까.

"예술에 조예가 깊으신 분이라 그런가 눈썰미가 대단하십니다. 사실 제가 아스파로프입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후훗."

카산드라 교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녀의 반응에, 아무렇게나 나오는 대로 뱉었다.

"그 나뭇대 이름, 막 기억이 났습니다. 슈파로프 2세던가."

"그런 유치한 이름은 아니랍니다."

"아무튼 그것이 왜 교수님 손에 있습니까?"

"저택에서 보셨다시피 제가 돈이 좀 많아요. 하나뿐인 취미로 예술품이나 골동품을 모으는데, 이건 그중에서도 굉장히 힘들게 구한 물건이랍니다."

"그렇군요. 많이 고생하셨겠습니다."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의 팔찌 네 개.

나를 해코지할 마법사는 여기에 없다.

아카데미 교수고 뭐고, 뭐 될 대로 되라지.

손을 슬며시 내밀었다.

"이제,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셔야겠습니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스파로프는 절대 아니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사인해드립니까?"

카산드라 교수는 곧장 쓰던 손수건을 내밀었다.

"······여기다가 해주시겠어요?"

"그럽시다."

카산드라 교수는 실제로 대충 끄적인 내 사인을 받아 갔다. 그냥 평범하디 평범한 무공 구결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내 흡족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마법사라 한들 분명 모르지는 않을 텐데.

나는 어찌 되었든 뻔뻔한 태도를 유지했다.

"잘 쓰겠습니다. 옛날처럼."

"네."

"······."

사실 카산드라 교수는 내가 아스파로프든 아니든 별 상관이 없거나, 아주 크게 확신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도 둘 중에는 후자의 경우에 극히 가까우리라. 대단한 아스파로프의 신병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게 넘겨주는 걸 보면.

그렇게, 그 유물을 소중히 받아 챙긴 그때였다.

"막내, 그새 애인이 생겼어?"

슬레모킨이 청록빛 괴물과 함께 다가왔다. 그녀는 카산드라 교수의 손목을 한 번 흘깃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

카산드라 교수는 밖에서 보았을 때 기품이 넘치고 우아했으나, 저 세 개의 팔찌가 그 기품을 깎아 먹는 듯했다. 슬레모킨이 당당하게 걸어와 옆자리를 차지하자, 벤치 가장자리로 밀려난 카산드라 교수는 결국, 자리를 피해야만 했다.

"그럼, 이만."

저 기품과 우아함을 잃지 않는 걸음걸이.

나의 훌륭한 보물 상자가 멀리 떠나가고 있다.

그때, 교수의 음성이 머릿속을 고요히 울렸다.

— 아스파로프님의 물건은 이제 더 없답니다. 아쉽게도.

그나마 다행이로군.

적당히 기분이 좋아진 나는, 설산목 과자를 까먹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카산드라 교수는 나를 이미 아스파로프로 확정 지어두었다. 별 지랄을 하며 아니라 부정해도 뜻과 고집을 굽히지 않았으니, 앞으로 일이 틀어질 염려도 없을 듯했다.

나는 자못 당당하게 전음을 보냈다.

— 또 있으면 구해다주십시오.

— ······네.

뜻밖의 수확으로 손끝이 떨려 당장이라도 나뭇대를 사용해보고 싶었으나,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곧, 뒷춤에 나뭇대를 조용히 찔러넣으며 입을 열었다.

"착하고 순한 마법사를 왜 쫓아내십니까?"

"반말."

"왜 쫓아내."

"내가 쫓아낸 거 아닌데. 자기가 알아서 가고 있잖아. 안 보여?"

"······."

그거야 팔찌 네 개를 차고 청록빛 괴물을 앞세워 위압적으로 걸어오니,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닌 이상 누가 멀쩡히 남아있을 수 있겠나. 그것도 이 마탑에서.

"그런데 저 마법사랑 왜 둘이 속닥거려?"

"제 팬이랍니다."

"나중에 돈 빌려달라 그러겠다."

"돈이 꽤 많은 마법사입니다. 집도 넓고."

"그래?"

이내, 카산드라 교수는 다른 마법사 무리에 끼어들었고.

나는 슬레모킨과 신변잡기를 나누며 마탑의 홀을 둘러보았다.

마탑의 구성원들은 삼삼오오 홀에 모여, 역사적인 연방의 수복 공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시티 대항 크리켓 결승 경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들은 기대감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하고 어떻게든 오디오를 채워댔다.

이윽고.

탁!

마탑을 우주선처럼 밝히던 모든 조명이 일시에 꺼지며 하나의 큰 화면이 마탑 천장에 나타났다. 연방이 모든 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띄우는 라이브 영상이었다.

화면이 점차 밝아지자, 마법사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만이 고요해진 마탑의 홀을 메웠다.

모든 넷, 모든 포털의 메인을 장식할 연방 정부의 실시간 라이브 화면.

이름만 대도 알만한 거물들이 연단의 뒤에 엄숙히 앉아 있었고, 한 명의 사내와 또 한 명의 여인이 연단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저만한 자리에 당당히 섰다면, 현 연방을 지탱하는 초월자들이 확실했다.

슬레모킨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계는 카시오페아 파냐탈루가 아니라 로라 마르티네즈네? 무림계는 무당의 도사가 나왔구나."

십이제의 일 인. 마법계 발의 공동대표.

『 로라 마르티네즈 』

십이제의 수좌. 무림계 발의 공동대표.

『 진공진인(震工眞人) 』

그리고.

그들의 사이로 걸어나온 늙은 안경잡이, 연방의회 의장의 긴 인사말과 서두가 있었다. 인사말이 끝나자, 그는 연단의 마이크를 툭툭 치며 목을 가다듬었다.

[ 톡톡. ]

"벌써 지겹군."

"막내, 조용."

[ 사랑하고 친애하는 연방의 주민 여러분. ]

'나다.'

[ 우리 위대한 연방은, 지금까지 장벽 밖의 존재들에 의해 너무도 큰 위협을 받아 웅크려있었습니다. 지난 시간 연방 정부는 이 사태를 타개하고 극복하기 위하여 여러 정책을 시행하고 유지하는 데에 전념했으나, 당초 기대했던 효과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끝끝내 위기와 악순환만이 거듭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지금이라도 실감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도약하지 않는다면, 다시 돌이킬 수 없을 것입니다. 절박히 그 필요성을 강조할 때입니다. ]

'내가 쭉 보니까, 더 늦으면 슬슬 좆될것 같더라.'

[ 우리 연방은, 오늘 자정을 기하여 과거 연방의 8번째 도시였던 '라그나로크 시티'를 수복할 것임을 선포하는 바입니다. ]

'그래서 라그나로크 수복하려 한다.'

[ 이제는 온 총력을 기울여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연방의 주민 여러분께서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거대한 연방을 떠받치고 이루는 모든 세력과 집단, 주민의 자발적인 참여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자체적인 대개척을 준비하는 알 헤임달을 제외한 연방의 모든 도시는 강역 수복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미래를 열어가야 할 것입니다. 만약 연방과 공고히 협력하여 책임을 성실히 다해야 할 자들이 그것을 감히 등한시하고 불응한다면, 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강력하게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

'내 밑으로 네 위로 전부 필참. 열외 없다.'

[ 존경하는 연방의 주민 여러분. 우리를 둘러싼 여건은 냉엄하며 극히 차갑습니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현상만을 유지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당당히 나아가 주민들의 터전을 수복하는 것이 역사적인 사명이라고 믿습니다. 많은 아픔이 따를 것입니다. 심한 고통이 따를 것입니다. 그에 연방 정부와 주 정부, 계획의 중추이자 핵심이 될 연방군은 라그나로크 수복에 어떤 방식으로든 중점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모두의 고통을 분담해 반드시 끌어안을 것임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전하는 바입니다. ]

'연방군 세다. 빵빵하게 지원해줄게.'

[ 마치며, 우리는 전력을 다해 라그나로크를 수복해낼 것입니다. 악한 존재들의 마수 앞에 소모적인 계파간의 갈등을 잠시 멈추고, 터전을 되찾고, 강역을 수복해 넓혀나가야 할 것입니다. 희망과 용기를 가집시다. 위대한 연방의 강토 수호를 위하여, 분골쇄신해 먼저 흙으로 스러져간 과거 전사들의 영령(英靈)들이 우리를 든든히 지켜줄 것입니다. 현재 연방은 역사의 틀을 만들어가는 새시대의 출발점에 서있습니다. 오늘이 숭고한 역사를 지켜온 연방이 재도약하는 시작점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그럼, 다 같이 한 번 죽어보자.'

[ 누구에게나 첫걸음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연방을 이끌어갈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과거가 될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혼신의 노력을 다합시다. 이상으로 우리 연방은 주민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할 것임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씀드리며, 이 사실을 엄숙히 선포합니다. ]

'다들 뺑이 까라.'

그 장황한 수복 연설이 드디어 끝나자.

내가 설산목 과자를 까먹으며 입을 열었다.

우적 우적-

"요약하니까 별말도 아니구만, 뭐 저리 길게 해."

"그러게나 말입니다. 형님."

어느새 일어난 루돌프가 맞장구를 쳤고.

홀에 모인 마탑의 마법사들은 저들끼리 격렬한 토론을 나누었다. 꽤 역사적인 수복 공표였기에, 분위기는 한층 더 열기를 더해갔다.

연방 정부의 라그나로크 수복 연설은, 그날로 모든 시티넷과 포털을 장악하며 대대적으로 공표되었다.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연방 정부는, 그다음 날까지 연방 집행관이라는 전령을 이용해 연방의 정식 공문을 각 기업과 세력들의 본거지에 차례대로 송달했다.

다음 날.

일레힌 마탑에도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이 봉인된 연방의 공문서를 가지고 직접 방문했다.

일레힌 포이체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은 봉인된 공문을 천천히 열더니,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 여섯 번째 봉우리의 마탑이 과거 연방에 보여준 모범적인 정성과 지원을 잊지 않으며, 장래에도 길이 변함없기를 기대하는 바. 연방의 행사에 현명한 판단과 아낌없는 협조가 있을 것을 확신해 마지않습니다. 명예로운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의 건투와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겠습니다.

— 강제성이 없으므로,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참여 거부의 뜻을 넉넉히 밝힐 수 있으며, 표기된 시일 내에 참여 혹은 정확한 대안과 함께 불참 의사를 밝힐 것을 알립니다.

—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 편제.

— 라그나로크 북부 원자력 발전소 탈환 및 9레벨급 네임드 '녹량백량' 책임 궤멸조.

연방군 제3 기계화보병사단.

연방군 특수작전항공여단 예하 4대대.

수르트 시티. 사천당가 코퍼레이션.

발할라 시티.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

오딘 시티. 루 막슨 컴퍼니.

수르트 시티. 화산 그룹.

— 추신.

— 불참 의사를 밝힐 시 타당한 이유, 구체적인 대안과 함께 표기된 다섯 개의 임의 이메일로 하루 속히 연락주십시오. 참여시 해당 없음.

— 무각대사. Sorim88931

— 로라 마르티네즈. Fukx you4444

— 슈나우젠 하비에르. poHub

— 진공진인. Mudangsambong

— 카시오페아 파냐탈루. Yuryungsang A

"연방 집행관. 유크 루베르겐 대독."

#75화. 베이스캠프로

#75화.

마탑주의 서재.

"······이상입니다."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은 들고온 연방의 공문을 전부 읽고는 조용히 내려놓았다. 공문 안에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하나 두 개가 아니라, 일레힌 포이체카는 잠시 사색에 잠겨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지금 서재에는 총 여섯의 마법사가 있었다.

마탑주 일레힌 포이체카와 엘프 마법사 슬레모킨,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 그리고 나와 팔찌 네 개를 차고있는 마법사가 둘.

마탑의 중요 구성원인 팔찌 네 개의 마법사들만이, 마탑주의 서재에 자리해 연방의 공문을 전해 들은 것이다.

곧, 일레힌 포이체카가 입을 열었다.

"북부 원자력 발전소 탈환 및 '녹량백량' 궤멸조, 라그나로크 수복전의 편제 중에서도 핵심 타격대에 가깝겠군."

루베르겐 집행관이 짧게 대답했다.

"예."

라그나로크 북부 원자력 발전소 탈환.

9레벨급 네임드 시체 '녹량백량' 책임 궤멸.

말자하면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이 소속된 편제는, 이번 수복전에서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타격대라는 소리.

연방군 제3 기계화보병사단.

연방군 특수작전항공여단 예하 4대대.

수르트 시티. 사천당가 코퍼레이션.

수르트 시티. 화산 그룹.

오딘 시티. 루 막슨 컴퍼니.

발할라 시티.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

무림계 메가콥 두 개와 마법계 대기업 한 곳. 연방의 제3 기계화보병사단 전체와 일레힌 마탑까지 한 편제에 몰아넣은 걸 보면 똑똑히 알 수 있다.

'쉽지 않다는 거겠군.'

순위권의 메가콥 두 곳과 발할라의 마탑, 화력이 대단한 연방군 기계화보병사단이 통째로 차출되어야 할 임무라면 분명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난이도일 터.

하지만 그 이전에.

"하필 당가와 같은 편제인가? 상당히 껄끄럽겠어."

사천당가의 직계들만 익히는 비전심법을 들고서 마탑을 방문한 당가주의 아들 당절이 수치스럽게 쫓겨난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반 바이오의 망령들을 더 이상 쫓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당절은 몸 성히 풀려나긴 했지만, 사그라들지 못한 감정이 충분히 남아있을 수도 있다.

허나 마탑주는 이것을 꽤 낙관적으로 판단했다.

"연방의 전력이 모두 집결한 곳에서도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지는 못할 테지. 껄끄러운 것만 제외한다면 그리 나쁜 일은 아니겠군."

저 말이 맞다.

목숨이 오고가는 전장에서 아군에 당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온갖 기상천외한 독과 비수, 각종 암기를 기가막히게 쓰는데다 은밀한 정찰에도 큰 쓰임새가 있고, 각종 의술까지 두루 섭렵해 무림계 전체에서도 알아주는 수준이다.

게다가 자금력까지 갖추어 수복전에 대한 본문의 지원과 사후보급도 완벽할 터. 적일때는 실로 최악이지만 아군일때는 또 당가만큼 든든한 놈들이 없을 테니, 마냥 싫어하기도 힘들 것이다.

당가를 머릿속에서 지운 나는, 공문의 내용을 조용히 곱씹었다.

'오딘 시티의 루 막슨 컴퍼니, 저놈들도 끼어있군.'

루 막슨.

발두르에서 상선의 의뢰를 받아 루 막슨 출신의 정치인을 암살했던 기억이 있다. 아힘사와 함께. 그것은 악연이나 다름 없기에, 어딘가 꺼림칙한 것도 사실.

더해서 화산그룹도 마탑과 한 편제다.

여기도 꽤 변수인데, 그들이 모두 화령검절 청풍같은 무인이라 단정할 수 없다. 무림계 미친놈들의 대명사가 당가라서 그렇지, 본래 화산도 그리 만만치 않은 놈들이다. 전생에 당가에 죽은 적은 없어도 화산에 죽은적은 있지 않은가.

이윽고, 한 마법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매일같이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가득 받아가던 마법사였다.

"9레벨급의 네임드 녹량백량은 독과 산을 쓰는 언데드라 당가를 배정한 듯 하고, 사이하며 공격적이고 쾌속한 검법이 특기인 화산의 검수들은 적극적인 탈환과 궤멸전에 쓰이기 퍽 적합해 보입니다. 무림계와 마법계를 적절히 섞어놓은 것은 부족한 부분을 상호보완하고 돌발 행동을 감시하기 위함입니다. 다만 두 무림계 메가콥의 힘과 세력이 대단한 만큼, 마탑은 원거리와 공중에서 지원을 맡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늘 피곤한 기색으로 비척대던 마법사.

에스프레소 마법사의 분석은 꽤 정확했다.

생각해보면 당절이 그 일행들과 마탑에 예고도 없이 등장했을 때, 당절의 기운을 가볍게 누르고 돌아갈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가 저자였지.

그 에스프레소 마법사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마탑주께서 당가와의 공동 작전이 정 껄끄러우시다면, 공문에 적힌대로 직접 이의를 제기해 편제를 바꾸거나 아예 수복전에 참여하지 않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 말에 루베르겐 집행관의 존재 자체가 못마땅한지, 내내 팔짱을 끼고 있던 슬레모킨이 답했다.

"하지만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겠지."

"맞습니다."

편제좀 바꿔주세요, 같은 말은 사실 불가능하다.

연방정부와 연방군에서 긴 전략회의를 거쳐 정한 편제이기에 지금와서 바꿀 수 없다. 마탑주와 당가주가 뺨이라도 때리며 싸우지 않는 한에야, 하늘이 두쪽나도 당가와 같이 가야한다.

더해서.

"진짜로 이의를 제기하라고 만든 임의 이메일이 아니야. 그냥 말 안듣는 놈 매달아서 혼내줄 생각이겠지."

이메일을 표기해둔 다섯을 모두 설득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 한 일이다.

소림의 전대 방장, 무각대사.

십이제(十二帝)마녀, 로라 마르티네즈.

십이제(十二帝)수좌, 무당의 진공진인.

십이제(十二帝)유령상어, 카시오페아 파냐탈루.

마지막으로.

"슈나우젠 하비에르까지 팔을 걷었다면, 저 임의 이메일의 주인공 다섯 명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 마법계 전체에 몇이나 될까 궁금하네. 두 번째 봉우리의 마탑주님쯤 된다면 또 모를까."

[ 슈나우젠 하비에르 ]

10레벨의 대마법사이자 칠좌(七座)의 일 석을 차지하고 있는 전설. 연방 1위의 장벽보안 기업, 인터네셔널 앱솔루트 코프의 회장으로 연방 도시들의 방벽 마법진을 설계하고 유지함과 동시에, 현 연방 정부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중 한 명.

저럴진대 불참한다는 말이나, 이의제기 따위를 감히 시도할 수 있을 턱이 없다. 만약 하더라도 몇대 거하게 처맞고 반려되겠지. 임의로 적어둔 이메일부터가 벌써 잔뜩 화나있지 않은가.

무려 여섯 거대 도시에서 참가하는 수복전이다.

이미 강력한 기업과 집단 세력은 적당히 묶여 수십 수백개의 편제로 나뉘었을 거다. 타격 정찰 개척 저격 궤멸 보급 말살 정리 화력지원······

무력이 강한 실력자가 없어 전장에 내보낼 수 없는 기업들에게도, 모두의 고통 분담을 강조한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크레딧 지원과 보급품 징발등의 선택지를 던질 테지.

무림계, 마법계의 거물들까지 전면에 내세워가며 작정한 일이니 어지간해선 불만을 제기할 수 없다. 그저 연방에서 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상책.

어차피 힘이 있는 세력들은 전부 수복전에 참여해 전공을 세우려 할 것이다.

연방에서도 크게 지원을 한다는 약속이 있었고,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에 성공한다면 기여도에 따라 정당한 콩고물을 뜯어먹을 수 있을 테니까. 목적이 무려 시티의 수복이니, 과거부터 간간이 이어지던 네임드 시체 토벌전보다 더욱 콩고물이 클 것이다.

"윤곽이 나왔군."

잠시 조용하던 마탑주는 테이블을 두들기며 말문을 열었다.

"수복전에 참가하는 것과 편제는 확정이다.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 이제 마탑 내에서 누가 수복전에 참여할지만 정하면 될 일. 연방의 공직자인 집행관을 제외하고, 팔찌 네 개의 구성원은 모두 참여한다."

스아아······

연녹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그의 전신으로 마력이 모여들었고.

곧이어, 마탑 전체에 일레힌 포이체카의 음성이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

[ 기업과 공직에 소속된 자들은 기업 소속으로 전장에 나설지, 아니면 나의 마탑 소속으로 전장에 나설지 금일 내로 결정하도록. ]

* * *

라그나로크 시티.

연방의 전(前) 8번째 도시.

좀비놈들에게 빼앗긴지는 꽤 됐다.

내가 이세계에 태어나기 전의 과거사다.

마탑주의 서재에서 빠져나온 나와 슬레모킨은 이번 연방의 수복전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라그나로크 수복군의 집결지는 로키 시티.

"먼저 로키 시티에서 전부 집결하는 건가?"

"거리를 따지자면 로키 시티와 가장 가까워서. 연방군의 핵심 베이스캠프도 로키 시티에 안쪽에 만들 것 같더라."

"그렇군."

로키는 각종 군벌과 온갖 세력이 전쟁을 벌이며 땅 따먹기를 하고 있는 도시. 뷔에탕같은 괴물들이 내가 왕입네 하며 여럿 나뉘어져 있다. 그러나 라그나로크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덕에, 연방군의 베이스캠프가 자리할 예정이다.

"대신 로키의 세력과 부딪칠 일은 없을 거야. 연방쪽엔 연방군이랑 메가콥이 여럿 있는데다 연방이 강력히 지원하는 행사라 감히 훼방을 놓지는 못할 테니까. 베이스캠프를 차리는 데 필요한 장벽 근처의 땅과 건물을 내주고 조용히 물러나겠지."

로키의 군벌과 세력들도 뇌는 있다.

연방군의 목표는 좀비로터 라그나로크 시티를 탈환하는 거지, 군벌 학살과 토벌이 아니기에 괜히 우리를 자극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터다. 로키에서 난장을 피우고 있는 집단과 세력들은 똘똘 뭉쳐서 납작 엎드려 숨만 쉴 것이다.

간단히 슬레모킨과의 대화를 마친 나는, 마탑의 전송진을 이용해 설산으로 나왔다.

내 지난 십여 일간의 모든 흔적이 여기 남아있다.

"빙하가 곧바로 생겨나는 건 아닌가보군."

봉우리 위 절벽. 평소처럼 거대한 고드름은 찾아볼 수 없었고, 절벽은 검기에 파헤쳐져 위태롭게 그 형체만 유지하고 있다. 깊은 검흔과 발자국은 강력한 눈보라에도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탓!

나는 바닥을 강하게 딛고 뛰어 올랐다. 순식간에 지면이 멀어지며 높은 절벽 틈에 이른 나는, 주변의 새하얀 정경을 눈에 담았다.

지난 십여 일간 경공역시 집중적으로 단련했다.

지옥에서는 무력이나 힘보다는 생존력과 빠른 발이 조금 더 중요하다. 아포칼립스에서 단단히 배워둔 사실이다.

나는 절벽 위에서, 에센스를 꺼냈다.

9레벨 우르드의 에센스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묘왕으로부터 건네받은 8레벨의 에센스 병은 대략 절반 정도가 비어 있었다. 지난 십여 일에 걸쳐 흡수하고 내공으로 소화시켜 버렸다.

"······아까워서 정신이 나가버리겠군."

정기신의 균형이 틀어졌고, 마음에 드는 경지에도 아직 이르지 못했으나 큰 전투를 앞두고 이 귀한 것을 계속 아껴두기만 할 수는 없었다.

아끼고 아끼다 픽 뒈져버리면 그대로 끝이니까.

속된 말로 아끼다가 똥 될까, 8레벨의 에센스나마 울며 겨자먹기로 처먹고 소화시켜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내공으로는 7레벨의 초입에 머물던 나는 이전보다 완숙해지고 넉넉해진 단전을 품을 수 있었다.

스윽-

이윽고 나는, 품속의 나뭇대를 꺼냈다.

카산드라 교수에게 건네받은 전 칠좌, 체슈탈 아스파로프의 신병이 어떤 무기인지 수복전이 시작되기 전에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나는 곧장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런데 우습게도, 나뭇대 따위와 꽤 씨름하며 애를 먹어야했다.

카산드라 교수는 실제로 내가 아스파로프의 현신이라고 생각하기에, 딱히 사용법 따위를 알려주지 않았다. 혹은 교수도 사용법을 모를 수도 있다. 신줏단지 모시듯 유리관 안에만 처박아 두었을 테니.

"이렇게 사용하기 어려울 줄이야."

마력을 강하게 끌어올려 불어넣어 봤으나, 회로 4개의 마력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듯 놈은 미동도 없었다. 나는 결국 마력에 더해 공력까지 불어 넣고 나서야 나뭇대를 권총의 모양으로 변환시킬 수 있었다.

"흠."

그런데 문제는 마력과 공력을 잡아먹은만큼 대단한 위력과 현기를 풀풀 풍겨대긴 하는데, 막상 방아쇠를 당겨보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고 포기해버릴 생각은 없었다.

결국 나는 그 후로 몇 시간이나 더 끙끙대고 나서야, 이 나뭇대의 사용 방법과 주의사항을 온 몸으로 터득할 수 있었다.

첫째, 변환된 뒤에도 유의미한 공격을 하려면 강한 마력 혹은 공력이 더 쏟아 부어 주어야 한다. 7레벨인 내가 거의 절반 이상의 마력과 내공을 써야할 만큼, 막대한 양을 들이부어야 사용할 수 있다.

둘째, 작은 나뭇대 권총에 모인 무형의 기운은 한 점에 극한까지 압축되면 자동으로 쏘아진다. 무형의 기운은 원형으로 작게 뭉쳐져 도깨비불처럼 일렁이며 나아간다. 허나 속도가 화살보다도 한참 느리다. 아주 한참.

셋째, 원형으로 뭉쳐진 무형의 기운은 외력으로 쉽게 막을 수 없다. 오색검기를 두른 광선으로도 쳐낼 수 없었고, 오히려 검이 튕겨져 나가며 내 손아귀가 다 찢어졌다.

넷째, 이 나뭇대의 재료와 작동하는 원리와 구조, 매커니즘을 지금 내 수준으로는 정확히 이해하고 알아낼 수 없다. 그저 기운을 주입만 할 수 있을 뿐, 결계라도 있는 듯 내부까지 기운이 파고들어가지 못한다. 나는 겨우 작동만 시키는 수준에 불과하다.

다섯째, 쏘아진 원형의 기운 덩어리는 생명체에 유효하다. 만약 적중하면 생명체는 생기를 급속도로 잃는다.

푸스스스—

나는 나뭇대 권총에서 쏘아진 원형의 기운에 닿은 뒤, 바짝 쪼그라들어 부스스 흩어지는 설산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람처럼 기괴한 울음을 토하며 경련하던 설산목은 점점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주륵. 주륵.

설산목을 지탱했을 기운이 뭉쳐져 밖으로 질질 새어온다. 나는 그 모습이 배가 갈려 내장을 흘리는 인간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흘러나온 기운은 나뭇대 권총 속으로 자연히 빨려 들어온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던 나뭇대가 그 기운을 되새김질하더니, 맛이 없다는 듯 그대로 대기에 흘려 보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나뭇대를 뒷춤에 욱여 넣었다.

"······이건 절대 쓰면 안되겠군."

총평.

"신병(神兵)이 아니라 마병(魔兵)이다."

체슈탈 아스파로프가 흑마법의 길을 걸었던가?

그 전설적인 현자의 물건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마치 흡성대법처럼 생명체 속의 기(氣)를 빼내 처먹는 꼴을 보아하니, 연방이 금지한 사술을 쓰는 흑마법사등으로 몰려서 뒈지거나 탐욕스러운 자에게 빼앗기기 딱 좋다.

이건 함부로 사용해서 될 물건이 아니다.

누군가 보는 앞에서라면 더더욱.

* * *

사흘 뒤.

발할라 시티 스테이션.

물경 수백만은 되어 보이는 발할라의 주민들이 스테이션의 근방에 운집해 허공으로 사라지는 캐리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발할라 스테이션의 밝은 조명도, 산맥 위로 새카맣게 모여든 발할라의 주민들을 모두 밝히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의 동경과 경외어린 시선을 받으며.

연방의 미래를 결정지을 '라그나로크 수복전' 에 참가하는 고강한 마법사들이, 줄지어 연방군 수송기와 캐리어에 오른다. 강대한 기운을 지닌 발할라의 마법사들은 현재 스테이션에 다 모여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뒤로도, 끝없이 이어지는 마법사들의 행렬.

여섯 번째 봉우리 마탑의 구성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 길고긴 행렬을 새치기 하듯 스테이션을 순식간에 통과한 마탑의 마법사들은, 당당히 기다리고 있던 연방군의 의전기에 탑승했다.

그렇게.

— 로키 시티, 베이스캠프로 출발하겠습니다.

9레벨 마법사 한 명.

8레벨 마법사 세 명.

7레벨 마법사 서른과 기타 인원을 태운 연방군의 마탑 의전기가 먼 하늘로 빛살처럼 쏘아졌다.

#76화. 로키 시티, 베이스 캠프

#76화.

로키 시티.

연방은 어느 세력의 구역 전체를 양도받았다.

힘으로 빼앗거나 협상한 것이 아니라 '선물'을 받았다.

연방 정부의 대대적인 라그나로크 수복전 공표 후, 로키 시티에서 끝없는 구역다툼을 벌이던 군벌 세력들은 이례적으로 합심하여 장벽 근처의 한 세력을 통째로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땅을, 연방군 앞에 넙죽 갖다 바쳤다.

선물로 드릴 테니 우리끼리는 건드리지 맙시다. 하며.

그리하여 8레벨급 강자가 이끌었다던 로키의 한 세력은 단 하룻밤 사이에 핏자국만 남긴 채 깡그리 지워졌고, 텅 비어버린 건물과 부지만이 남았다.

그 위에 세워진 것이 연방군 주둔지이자 베이스캠프.

— 착륙합니다.

며칠간 베이스캠프의 풍경은 몰라볼 정도로 바뀌었다. 본래는 군벌세력의 근거지로 칙칙한 빛만 뿜어냈을 곳이 이제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티의 중심가에서나 보던 네온 라인이 바둑판 모양으로 깔려 도로와 건물의 경계를 정확히 나누었다.

낡은 건물과 상가들은 연방의 공병부대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격납고와 탄약고를 비롯한 조립식 가건물들이 차곡차곡 세워졌다.

베이스캠프는 연방군 부대들이 사용하는 기지 구역, 그리고 군이 아닌 자들의 구역으로 나뉘었다. 연방의 공문을 받은 기업등의 세력은 각 편제 별로 주둔지와 숙소를 배정받았으며, 그것 역시 바꿀 수는 없었다.

휘이이이—

수송기에서 내리자 면전으로 불어오는 강풍.

로키 시티의 베이스캠프를 천천히 둘러보던 레반의 눈에 가건물 수백 채가 오차 없이 주욱 늘어서 있는 것이 들어왔다.

보통 4개의 세력이 한 편제를 이룬다.

저 사람 백 명은 지낼 수 있을법한 조립식 가건물. 동서남북 방향에 하나씩 세워진 네 개의 건물은 회(回) 구조로 서로 마주보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저 회(回) 구조마다 한 편제가 들어가는 듯했다.

그리고 건물들의 중앙에는 연무장처럼 널찍하니 모래를 깔아둔 땅이 있었다. 마치 현대의 학교처럼.

다 같이 캠프파이어나 하라고 깔아준 것은 아닐 테고, 공놀이나 하라고 깔아둔 것은 더더욱 아닐 터.

그 익숙한 구조를 본 레반이 고개를 저었다.

"어서 치고박고 친해지라고 판을 아예 깔아 뒀군."

만약 싸울 거라면 저 모래바닥에서 치고받으라는 뜻이다.

전장에 나가야할 아군끼리 실력을 믿지 못하거나 갈등이 생기는 것만큼 좆같은 일이 없으니, 그 전에 미리 몸을 풀어두라는 갸륵한 연방의 배려가 되시겠다.

출신과 도시가 모두 다르고 각자 개성이 강한 세력들이 강제로 한 편제 아래 묶였다. 그것도 죄다 자기 도시에서 어깨에 힘좀 주고 다녔던 놈들뿐. 마법계와 무림계는 역사적인 견원지간인데 전장에서의 상호보완을 위해 섞어 놓았으니···.

수복전이 시작되기 전에 이 주둔지에서는 별달리 할 일도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저 모래 연무장에서 벌어질 일은 뻔했다.

— 마법사가 그리 싸가지가 없다던데, 사실이었구나! 아주 죽여주마.

아니나 다를까, 온지 얼마나 됐다고 모래 연무장을 절찬리에 써먹는 이들이 나왔다. 웬 무인과 마법사가 연무장으로 날듯이 들어오더니, 서둘러 친해지기 위해 서로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 ······더미는 뒤로. 나는 앞으로. 발은 위로.

— 주둥이가 그리 느려서 싸우겠냐?

모래 바닥을 밟고 총탄처럼 쇄도한 무인이 주먹을 내뻗자, 공력이 가득스민 권풍이 일었다. 쾌속한 주먹이 권풍을 갈랐다.

쾅—!

음성 영창을 하던 마법사의 얼굴이 뭉개지며 날아갔다.

모래 연무장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는 마법사의 신형을 확인한 무인은, 이두박근에 힘을 주며 부푼 근육을 과시했다.

팔에 퍼런 핏줄이 솟아나자, 무인은 핏줄에 입을 맞추고는 우렁차게 소리치며 광소했다.

— 크하하하! 이 몸 낙승!

마탑의 마법사들과 레반은 교분을 나누는 그들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 와중에 어떤 마법사는 쪽팔리게 무림계 놈들한테 처맞냐며 혀를 쯧쯧 차기도 했다.

"형님, 저쪽 편제는 벌써부터 지랄났네요."

그 광경을 보던 루돌프, 밴스의 빨간 장미 문신이 사시나무 떨듯 부르르 떨렸다.

"그러게."

레반이 별 대수롭잖게 답하자.

밴스가 기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 무인들한테 시비라도 걸리면 어떡하죠?"

"너도 좋은 외공을 익혔잖아. 이제 무인이다."

"형님, 저 마탑 소속으로 왔잖아요."

"그래도 자신감을 가지렴."

"존나 쎈 마법사도 얼굴이 저렇게 뭉개졌는데요?"

밴스의 말에 레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얼굴 뭉개지는 거, 네놈이 봤다고?"

"당연한 거 아닙니까."

거의 7레벨에 가까운 무인의 움직임이었다.

외공의 성취가 빠르다지만, 벌써 그 정도인가?

"피 안 나는 것도 봤냐."

"예?"

"그 정돈 아니군."

레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 튕겨져 날아갔던 마법사가 갑자기 무인의 뒤에서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 마법사는 입을 놀려 영창을 완성시켰고.

— 너는 아래로.

쾅!

신나서 광소하던 무인이 바닥에 처박혔다.

무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두 발목이 거꾸로 돌아간 듯 보였는데, 연방군 기지에 의무대가 있으니 서둘러 데려가면 괜찮을 것이다.

마법사는 형편없이 기절한 무인을 대충 연무장에 버려두고 자신의 가건물로 들어갔다.

그 가건물에는 소속 기업명이 적혀있었다.

『 콜라코 컴퍼니 』

콜라코.

마법계 시가총액 상위권에 늘 위치하는 대기업.

취급하는 상품은 콜라 독점과 자체 개발한 탄산음료.

레반은 흡족한 얼굴로 그 마법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콜라를 만드는 놈들도 왔군. 연방에 가장 필요한 존재지."

"형님, 지금 콜라가 중요한 게 아니고요. 저 어떡합니까 진짜. 여긴 저같은 놈이 오면 안 되는 곳이잖아요."

밴스가 계속 질척대자, 레반이 귀찮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돌프야, 무림계 놈들과 시비가 붙으면 연방군 소속이라고 해라. 관과 무림은 불가침이다."

희망적인 조언에 밴스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캬! 세상에 그런 게 있었습니까? 그거 다행이네요."

"여기선 없을 수도 있다. 나도 잘 몰라."

"······."

그러나 금세 다시 어두워졌다.

"······형님이 억지로 데리고 오셨잖습니까. 책임을 지셔야 할 거 아닙니까. 딱봐도 저같은 좆밥은 살아남지도 못할 분위기잖아요!"

"아는척 말고 저 멀리 떨어져서 걸어라. 마탑이랑 관련 없는 것처럼 행동해."

"아니, 제가 이런 대접 받으려고······."

"시끄럽습니다."

그때, 아힘사가 얼굴 피부를 와락 찌푸리며 말했다.

"······."

동시에 목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밴스가 고개를 슬쩍 내리자, 어느새 실처럼 얇은 칼날이 목에 낚싯줄처럼 걸려있었다.

그간, 레반의 행동을 학습한 아힘사였다.

* * *

"네임드 녹량백량은 북부 원자력 발전소 주변과 발전소 내부를 근거지로 삼고 있습니다. 군은 놈이 발전소에서 머무르는 이유가 흘러나오는 오염수나 폐기 방사능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하고 있습니다."

별 두 개가 달려있는 어깨 견장.

연방의 장군, 제3 기계화보병사단장의 설명이었다.

홀로그램으로 생성된 원자력 발전소의 내부 설계 구조도면이 입체적으로 일어나 허공을 밝힌다. 마치 실제로 그 공간안에 들어온 듯했다.

3사단장은 당가의 가건물 지하 한켠에 마련된 통제실에서 편제의 작전 계획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사단장과 세력의 수장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이 작은 공간에 같은 편제를 이루는 마탑과 무림계 메가콥 두곳, 마법계의 수장이 한 자리에 모였다. 무림계 메가콥 두곳은 화경의 경지에 이른 무인들이 장문인과 가주의 권한을 각각 받아 참가했다.

9레벨. 사천당가의 원로. 당명.

9레벨, 화산 그룹의 장로. 선운자.

9레벨, 여섯 번째 봉우리의 마탑주. 일레힌 포이체카.

8레벨, 루 막슨 컴퍼니 회장. 루 막슨.

그리고 연방군 소장인 3사단장까지.

대단한 초인들이 한 자리에 모이자, 자리에만 앉아 있음에도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기백이 보통이 아니었다. 연방 장군쯤 되니 그 거물들의 앞에서도 꿋꿋이 말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녹량백량도 죽여야 하나, 목표는 무사히 원자력 발전소를 탈환하는 것이기에 무작정 포격을 쏟아부어선 안 됩니다. 탈환 후 시티에서 사용하는 전력 대부분을 담당할 곳입니다."

3사단장은 설계, 구조도면의 한 곳을 짚었다.

"때문에 외부에서 발전소 포격은 불가하고, 이 입구를 통해 내부로 진입해 작전을 진행해야 합니다. 우선 기계화보병들이 앞장서 발전소 안으로 진입하고 진입로의 방해물을 정리할 겁니다. 그런 뒤에-"

그때, 당가의 원로 당명이 말을 가로챘다.

"녹량백량을 바깥으로 끌어내달라는 건가?"

"예. 끄집어내든 유인을 하든, 뭐든 좋습니다."

"우리 당가라도 9레벨급 시체가 거미줄을 쳐둔 굴에 대가리를 들이밀 수는 없겠는데."

"원자력 발전소의 입구는 오로지 한 곳입니다. 먼저 진입한 제 부하들이 희생양이 되어 녹량백량을 입구까지 유인할 겁니다. 거미줄은 연방군이 끊어두겠습니다."

3사단장의 말에 당명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그들은 전뇌 칩이 박힌 생체기계들 아니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고 연방의 군인입니다. 명령에 의한 통제를 조금 더 잘 따르는 군인. 애석하게도 이번엔 미끼가 되라는 명령을 받아 그걸 담담히 실행에 옮길 뿐입니다."

"장군께서는 웃기는 재주가 있군. 정녕 그것들을 인간이라 부를 수 있겠소? 인간의 향을 풍기는 고기 방패겠지. 연방은 고기 방패를 내밀며 생색을 내는데, 당가는 가인들의 목을 걸어야 하나?"

턱.

당명이 상황을 비꼬자 사단장은 연방군의 워터마크가 박힌 문서를 내밀었다. 연방 정부의 협조 공문. 3사단장의 세로로 길게 그어진 얼굴 흉터에서는 절절한 기운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미리 언질을 받으셨잖습니까. 이 편제의 지휘 권한은 제게 있습니다. 이 점 유의해 사령부 지시에 따라 협조해주십시오."

"······."

당명은 심히 불편한 기색이었으나, 토를 달지는 않았다.

'쯧.'

연방군이 명목상 희생양까지 자처해가며 지휘, 통제권한까지 운운한다. 화산의 장로 선운자와 마탑주까지 다 보고있는 판국에 작전의 핵심인 당가가 뒤로 빠져 관망한다고 말하기에는, 차마 자존심 강한 당명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연방군 3사단장은 신중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9레벨급 네임드 녹량백량은 맹독과 산을 무기로 사용하며, 지능이 극도로 높습니다. 허나 여기 자리하신 분들 모두가 네임드 토벌전을 겪은 경험이 있으실 터라 괜한 걱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또한."

3사단장은 당가의 원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녹량백량이 과거 '당문의 일원' 이었다 해서, 손속에 사정을 두는 일은 없어야 할 겁니다."

당명이 불쾌한 얼굴로 맞받아쳤다.

"당문? 직계도 아닌 떨거지였다. 문의 규율조차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나간 쓰레기가 어째서 당문의 일원이지?"

"아무튼 부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당가의 원로 당명과 3사단장의 실랑이가 이내 매듭을 지었고, 작전 설명과 회의가 길어졌다.

그러던 어느 시점,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루 막슨의 회장이 입을 열었다.

"허면······."

루 막슨의 회장은 뛰어난 마공학 기술로 얼굴의 절반을 사이버웨어로 대체한 마법사였다. 그는 오딘 시티 내에서도 꽤 입김이 강한 마법사였으나, 이 편제 안에서는 다른 초인들에 의해 그 빛이 바랬다.

"라그나로크 수복은 언제, 어떤 식으로 시작하는 겁니까."

그런 루 막슨 회장의 질문에—

"라그나로크 시티 남서쪽 2km 지점, 소형 전술핵을 투발해 남쪽의 장벽을 녹여버리고 주변의 시체들을 태워버릴 겁니다. 그것이 수복전의 신호탄입니다."

3사단장의 입에서, 폭탄과도 같은 발언이 터져 나왔다.

"······전술핵?"

* * *

한편 그 시각.

레반은 마탑이 배정받은 주둔지를 둘러보고 있었다.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은 연방군에서 직접 의전용 수송기를 보낸 만큼, 꽤 으리으리한 가건물에 짐을 풀 수 있었다.

물론, 건너편에 보이는 화산과 당가의 가건물도 마찬가지로 웅장했다. 주둔지인데도 무슨 호텔이 따로 없을 만큼 지어주었다.

마탑, 무림계 메가콥 둘, 마법계 순위권 대기업 하나.

하나같이 면면들이 극히 화려하고 워낙 고고하신지라···.

근처를 지나가는 이들은 유독 거대한 가건물 네 채가 우뚝 서있는 편제 구역을 힐긋대며 지나갔다.

몇 시간 전, 수르트 시티의 사천당가는 전용 캐리어를 이용해 가장 먼저 로키에 도착했고 의전기에 올랐던 마탑이 그 다음으로 이곳에 도착했다.

화산 그룹과 루 막슨 컴퍼니도 얼마 지나지 않아 편제 구역에 도착했다.

곧, 네 개의 세력이 주둔지에 모였다.

원래 이 편제의 주둔지는 일레힌 마탑의 마법사들이 도착할 때 까지만 해도 조용했다.

허나, 현재는 각 세력이 전부 도착했고 수장들은 자리를 비웠다.

듣기로 그들은 연방의 장군과 작전 회의를 하느라 당가쪽 가건물 지하에 모여있었다. 그렇게 수장들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피가 뜨겁게 끓는 놈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마침, 중앙에 넓은 모래 연무장이 있지 않은가.

이윽고.

편제의 모든 세력이 모여들자, 이것만 기다려왔다는 듯 조용하던 당가쪽에서 급작스레 그 첫 시작을 끊었다.

"거기 지팡이쟁이들, 나와서 나랑 한판 붙을 사람?"

사나운 기세의 무인이 당당히 걸어 나왔다.

저쪽도 다들 수준 높은 정예들만 뽑아 보냈을 터.

실력에 크게 자신이 있는 만큼 호승심이 일 것이다.

그러나 마탑의 마법사들은 그 도발에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마탑주의 명령 없이 멋대로 먼저 움직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

속으로는 저 입을 꿰매버리고 싶어 하는 마법사가 한둘이 아니겠으나, 비대한 자존심과 자긍심을 꾹꾹 눌러 인내하며 제각기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죄다 쓰레기 같은 놈들뿐이네. 딱 봐도 싸워보라고 판을 깔아뒀구만, 여기서도 쫄아서 저러는 놈들이랑 같이 어떻게 전장에 나가? 저것들이 제일 먼저 콱 뒈질 놈들이군."

"······."

휴식을 취하려고 했었다.

* * *

연방의 장군이 자리를 뜬 뒤 세력의 수장 넷이 남았다.

먼저 당가의 원로, 당명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도시 몇 개가 날아간 뒤로 핵은 전부 폐기했다더니."

과거의 대전쟁과 테러리스트에 의한 핵 테러로 몇 개의 도시가 폐허로 변한 사건, 그리고 핵 프로젝트와 관련된 몇 명의 인물이 변절한 이후, 연방군은 보유한 핵무기를 전량 폐기했다고 발표했다. 핵무기의 제작 개발과 관련해 수많은 제재법안이 상정되었고 실제로 실행되었다.

그런데 연방군이 정말 작정이라도 한 듯, 이번 수복전에서 다시 전술핵을 꺼내든 것이다.

"그때 테러를 계획한 놈들이 모두 죽었다는 보장이 없는데, 연방군은 간도 크군."

강력한 시체를 상대하기에 좋은 수단.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가 어느 정신나간 종교 단체의 해킹 공격과 무력 테러로, 연방군 핵기지가 폭발해 도시 전체가 지워졌다. 폭발 반경에 있던 주민들은 전부 증발했고, 8레벨급의 강자 한 명만이 그 도시의 유일한 생존자로 남았다.

그런 과거사가 있기에 작은 장벽 안에 갇혀 살아가는 인류에게 핵무기란, 그저 강력한 자멸수단이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에 불과했다.

전술핵의 존재를 이제야 인지한 수장들이 침음을 흘리던 그때였다.

넷 중 누군가가 돌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바깥이 조금 소란스럽지 않습니까?"

와장창!

유리창이 깨져나가는 소리를 보면, 소란이 분명했다.

벌컥.

더 경시할 수 없는 소란에 당명이 통제실의 문을 열자,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사람의 신형이 입에서 피를 주르륵 흘리며 풀썩 쓰러졌다.

당가의 무복을 입고 있는 젊은 여인이었는데, 맹독이 잔뜩 섞인 피가 부글부글 끓었다.

그것을 본 당명의 얼굴이 즉시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무슨······."

얼굴을 굳힌 당가의 원로 당명의 뒤를 따라, 일레힌 포이체카가 계단 위로 올라오자.

무인과 마법사들이 흉흉한 기세로 모래 연무장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마법사와 무인들 여럿이 흉한 꼴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며.

현재 모래 연무장 중앙.

검집에서 피를 털어내고 있는 '마법사'가 보였다.

그 마법사는 어깨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는데, 일레힌 포이체카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마탑에서 검을 쓰는 마법사는 딱 한 명이었다.

"······저기서 여기까지 사람을 던졌다는 말인가?"

헛숨을 들이킨 당가 원로, 당명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고.

피식 웃어보인 일레힌 포이체카는, 연무장 위로 급히 뛰쳐 올라가는 당가의 무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따라 올라온 화산의 장로, 선운자가 그런 광경을 한심하게 여기며 오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한심하기 그지없군. 대체 끓는 혈기조차 주체 못하는 아해들을 누가 전장에 데리고 온 겐지."

— 나랑 청궁이는 또 형장에게 전부 걸었소! 하하하!

"······."

허나 저 연무장 어딘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입을 닫은 선운자의 얼굴도 다른 이들처럼 무표정히 바뀌었다.

#77화. 제가 졌어요

#77화.

연무장 위로 올라온 당가의 도발.

빌어먹을 놈들이니···겁만 더럽게 많은 지팡이쟁이들이니···하는 꼴이, 꽤 아기자기 했다.

그러나 나는 저런 허접한 도발에 넘어가 칼부터 꺼내들 사내가 아니다. 가끔 때에 따라 뽑을 때도 있긴 하나, 뭐 옛날 루돌프놈처럼 내 얼굴에다 칼질을 한 것도 아닌 이상에야.

남들이 저리 다 보는 앞에서 비무를 벌이는 것도 취향에 맞지 않는다. 연방군이 그것을 적극 장려하며 싸움판을 깔아놓긴 했으나, 굳이 나가서 설칠 이유가 없다.

이 자리에 있는 그 어떤 마법사보다 당가를 꺼려하는 사내가 바로 나다.

게다가 큰 전투까지 앞두고 있지 않나.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실전에 가까운 것을 선호한다. 적어도 팔이나 손가락 몇 개쯤은 썩둑썩둑 잘라내야 성에 차는 탓이다.

헌데 저 당가 놈들의 팔을 썩둑 잘라버렸다간, 전장에서 내 뒤통수에 독묻은 비수가 꽂혀들지도 모를 일 아니겠는가!

그래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가만히 있었다.

루돌프놈더러 네가 일레힌 마탑을 대표해 한번 나가보라고 등도 떠밀면서.

툭툭.

"형님, 암만 그래도 제가 저 새끼랑 어떻게 싸워요······아 계속 밀지 마시라고요."

"좋은 경험이 될지도 모르는 거 아니겠니."

"···쟤들은 맹독 쓰는 새끼들이잖아요."

"돌프야, 너는 좋은 외공을 익혔잖아."

그 말에 루돌프놈이 버럭 역정을 냈다.

"아니 그래서 뭐 대체 얼마나 좋은 겁니까? 형님이 매번 좋다고만 하고 넘기시니까 헷갈리잖아요. 구체적으로 뭘 말해주셔야 저도 알죠. 이거 당가 독도 막아요?"

저 외공이, 당가의 독을 막을 수 있나?

솔직히 그것까진 나도 잘 모르겠군.

나는 정말 모르겠기에, 모르겠다고 말했다.

"모르겠는데."

"그것 보십쇼!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또 아까는 마탑이랑 관련없는 척하라고 했잖습니까. 같이 다니기 쪽팔리다고. 왜 이제와서 절 찾으세요?"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큰 소리야."

"······."

"그리고 솔직히 같이 다니기에 창피한 건 맞잖아. 내 말이 틀려?"

"······."

"쯧, 왜 이리도 쪼잔해? 사내놈이."

꼰대처럼 기어오르는 루돌프 놈을 갈구다보니 몇 분의 시간이 금방 지났다.

마탑쪽에서 연무장에 오르려는 마법사는 아직도 없었다.

"끝까지 아무도 안 나오나? 발할라 시티의 마법사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마탑이라해 내 아주 기대했는데 한심한······."

반응이 시원찮자, 당가의 무인은 끝내 마탑까지 입에 올리며 발할라 전체를 욕보였다. 도발 수위가 용인되는 정도를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자리에 화산 그룹과 마탑처럼 마법계인 루 막슨 컴퍼니도 있는데, 희한하게 마탑만을 목표로 찍어내는 걸 보아하니······.

'당절인가 하는 놈이랑 연관되어 있겠군. 마탑한테 개쪽 한 번 당했으니 화풀이라도 하겠다 이건가?'

나는 눈대중으로만 봐도 저자가 어느 수준인지 대강은 찍어낼 수 있다. 지금 막 연무장 위로 올라온 당가의 무인은 7레벨 초입쯤의 무인이다.

대강 적당한 놈을 선봉으로 내보내 마탑을 판떼기로 끌어들이고 모두 앞에서 두들기는, 아주 허술하고 뻔한 계획인 듯한데······.

그게 또, 마법사들한테는 꽤 잘 먹힌다.

"안되겠습니다. 입을 닥치게 해야겠어요."

선 넘은 도발이 이어지자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데다, 대단한 마탑의 구성원이라는 자긍심으로 똘똘뭉친 마법사들이 더이상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다녀오겠습니다."

다른 마탑 마법사들의 긍정과도 같은 묵인 아래, 마탑의 한 마법사가 마침내 연무장에 올랐다.

일단 우리쪽에서 올라간 일레힌 마탑의 마법사는 완숙한 7레벨급. 정련된 마력이 느껴진다. 저 당가의 무인이 비무 수준에서 금지된 독이라도 쓰지 않는 한, 마법사의 승리다.

쾅!

승부는 역시나 마법사의 승리로 돌아갔다.

여기까지는 예상한 결과.

애초에 당가의 무인들은 일대일 비무에서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놈들은 아니다. 극독과 집요한 암기술, 대량 살상쪽으로 워낙에 특화된 무공은 살상의 제약이 풀릴수록 큰 힘을 내기에.

허나 그 비무가 끝나기 무섭게, 당가쪽에서 약속이나 해둔 듯 이전의 무인보다 배분이 높아 보이는 무인이 걸어나왔다.

그는 시작부터 의복의 앞섬에 두 손을 넣어둔 자였는데, 나 비수 던진다! 라고 아주 미간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다.

눈빛이 형형한 것이, 자신감이 넘치는 그 무인은 연무장에 올라오며 앞으로의 비무 방침을 선포했다.

"당가에는 훌륭한 의원들이 동행했습니다. 혹시나 중독되어도 해독제가 있어 곧장 해독이 가능합니다. 전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의원이 살려줄 거라 독까지 그냥 쓰겠단다.

비무 단계에서 의원까지 필요한 맹독을.

하여간 정신 나간 새끼들.

"···그러든지 말든지."

하지만 마법사도 물러서지 않았다.

저기서 모양 빠지게 꽁무니를 빼며 '아 그래도 독은 좀······' 하는 건 김도 샐뿐더러, 이토록 많은 이들 앞에서 마탑의 위신을 상하게 하는 행동.

결국 까불던 놈만 패고 돌아올 예정이던 마탑의 마법사는, 물 흐르듯 올라온 당가의 무인을 또 상대해야 했다.

'한두번으로 안 끝나겠군.'

마법계를 대표하는 마탑과, 무림계 메가콥인 당가의 비무는 점점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갈 징조를 보인다.

그렇게—

둘이 연무장에서 강하게 맞붙은 순간이었다.

"아니!?"

"?"

누군가 반가운 소리를 지르기에 고개를 돌렸더니, 아릿한 매화향과 함께 기골이 장대한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알 헤임달 시티에서 대충 묶고다니던 산발 머리는 어디가고 단정하게 매화건을 둘러 정리한, 진정으로 헌앙하고 잘생긴 화산의 검수가 내 눈앞에 서있었다.

장차 화산 그룹과 무림계를 이끌어갈 후기지수.

화령검절, 청풍의 재등장이었다.

"아니 형장께서 어찌 여기에 계시는 거요!"

* * *

당가와 마탑에는 8레벨의 강자도 몇 명씩 있었으나, 보통 8레벨쯤 되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지라 혈기를 온전히 다스릴 줄 안다.

게다가 8레벨급이 여기서 싸워댔다간, 공병대에서 힘들여 조립해둔 주변의 가건물들이 남아나지 않을 거다.

그러한 이유로 싸움은 7레벨 내외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상황에서, 장차 화산 그룹과 무림계를 이끌어갈 천재 후기지수 청풍은—

"빨리들 거시오! 이러다 시작하겠소."

"······."

"청궁 인마! 꾸물대지 말고 빨리 돈부터 걷어라."

비무의 승패에 돈을 걸고 내기 도박을 하고있다.

처음에는 소액으로 시작한 놈들의 승자 맞추기 판돈이 매판 커져 벌써 몇만 크레딧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이번엔 마탑에 5천 크레딧!"

"아니지 아니지. 난 이번에도 당가에 3천 걸지!"

"마법사의 기세가 보통이 아닌데? 1만!"

"난 당가에 1만. 저자는 독자령이라는 절정의 무인인데, 무학관 출신이라 기본기가 아주 좋고 탄탄해."

저 내기도박의 참여자들은 흥미롭게 마탑과 당가의 싸움을 불구경중인 루 막슨과 화산 그룹이었는데, 그 중심에는 화령검절 청풍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 보기에도 당가의 무인이 더 뛰어난 듯싶소. 2만 크레딧 밀어넣겠소."

심지어 청풍은 한 번도 틀리는 법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 그만. 내려가겠다.

마탑이 연속으로 패했다.

전투 중이던 마법사가 신음을 흘리며 내며 팔을 들었다.

무슨 독에 중독되어 팔이 슬슬 썩어들어가고 있었는데, 저 정도면 당가 기준에서는 평범한 독이라 달리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이미 '독 써도 오케이' 를 해버렸기도 하고.

"하하하! 어떻소!"

"대단하구나! 역시 화산의 미래다!"

청풍은 또 묘한 매력이 있어 화산 그룹을 벌써 휘어잡았는지, 청풍보다 배분이 높은 화산의 검수들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아무리 세속에 찌들었다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화산은 도를 닦는 도가인데 당당하게 내기 도박이라니.

"근데 도박을 왜 내 옆에서 하지?"

내 말에 청풍이 못 들은척 말했다.

"형장, 이리 다시 보니까 정말로 좋소! 여섯 번째 봉우리의 마탑 소속이셨소? 발할라에 마탑만 다섯이라던데, 그중 형장이 있는 마탑과 화산이 같은 편제라니. 어찌 이런 인연이 있소!"

그러던 화령검절 청풍은 곧 화제를 바꾸어 속닥였다.

"그런데 형장이 나서면 저놈들 정도는 한주먹거리 아니오? 어찌 뒤에서 가만히 보고만 있소?"

— 다음은 누구냐!

때마침, 마법사를 중독시켜 내보낸 당가의 무인이 누가 자신의 상대냐며 실실 웃었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저 멍청한 비무에 나설 마음이 없었으나.

— 거기, 제일 뒤쪽에 빠져있는 마법사 놈.

방금 승리한 덕에 고무된 당가의 무인은, 굉장히 한심해하는 표정으로 가장 뒤쪽에 빠져 숨을 죽이고있던 나를 정확히 지목했다.

"···저요?"

— 마법사가 검은 왜 차고 있지? 쥐새끼마냥 숨어있지 말고 앞으로 나와라. 나와서 싸우지 못할 거라면, 너같은 등신은 전장에 필요 없으니 마탑으로 돌아가든지.

"여기가 무슨 호스트바도 아니고, 비무에 지명제도 있습니까?"

내가 슬쩍 말을 돌리며 거절하려 하자.

아직 위장약혼 거절로 인해 앙금이 남은 듯한 얼굴의 슬레모킨이 나를 지그시 노려봤고, 비무 내기로 판을 점점 키워가던 청풍도 눈을 번쩍 빛내며 말했다.

"형장, 나는 이제부터 무조건 마탑쪽에 걸겠소."

"······."

그래.

나름 마탑의 막내인데, 계속 엉덩이 깔고 앉아있는 것도 좀 그렇군. 안 그래도 마탑이 밀리는 형국에 지명까지 당했다. 여기서 마탑 위신 떨어지게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

"청풍."

"부르셨소 형장?"

"이 크레딧, 마탑에 좀 걸어줘라."

"하하하! 내 반드시 그리하겠소!"

나는 청풍에게 여분의 크레딧을 죄다 쥐어주며 엉덩이를 일으켰다.

—그리된 일이다.

비무는 굉장히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삼 분 정도 걸렸나.

[ 끅. ]

나를 처음 지명했던 놈은 암기를 단검마냥 들고 설치다가 광선과 부딪쳐 손목이 아작났고, 그 다음으로 나온 당가의 무인은 설욕을 위해 신중히 잠행술까지 써가며 꽤 분전했으나, 내 귀신같은 금나수(擒拿手)에 발목이 붙잡혀 그대로 으스러졌다.

"손맛이 좋군."

독도 쓰는데 손발목 분지르는 것 정도야.

— ······.

그러자 당연하게도 기세등등하던 당가쪽은 합죽이가 되었고, 루 막슨 컴퍼니와 화산 그룹의 구경꾼들이 치열하게 토론하며 내 정체를 유추하기 시작했다.

— 저 새끼 저거, 마법사 맞아? 무공을 쓰는 것 같은데······.

—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아무래도 마법사가 아닌 것 같다. 일레힌 마탑에서 치사한 수를 쓰는군.

— 금나수를 저리 극성으로 쓰는데, 척 봐도 무인이잖아.

— 내공의 분배가 훌륭하고 하체가 단단하다. 근접전의 기본기도 잘 잡혀있고 눈이 좋다. 발할라의 기사 가문 출신이겠어.

— 기사였을 수도 있겠군!

그리고 지금 앞으로 나오는 저 여인이 세 번째 상대 되시겠다.

"령이라고 해요."

령이라는 이름의 당가 여인은 완숙한 7레벨 이상으로 상당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

손속이 얼마나 거칠고도 은밀한지 전투중에 내 팔뚝에 하독(下毒)까지 성공해냈다.

여태껏 싸워본 당가의 무인 중 가장 강했다.

치이이익······.

나는 나노로봇의 재생 속도보다 더 빨리 썩어들어가는 팔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긁힌 환부에서 고약한 냄새와 함께 독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포기하세요. 약하지만 내공을 금제하는 독도 조금 섞어놓았어요. 이제 팔과 내공을 전부 쓸 수 없을 겁니다."

당가의 령이라는 여인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포기를 권유했고.

"순수한 몰타의 빛이여!!!"

"······?"

나는 대답 대신, 약식 성호를 그으며 영창했다.

거세게 일어난 공력과 마력이 중독된 팔로 몰리더니, 기혈로 퍼지려는 독기를 막고 꾸역꾸역 밀어낸다.

쿨럭-

상처를 좀먹어가던 독은 다시 꿀럭거리며 혈액과 함께 환부 밖으로 빠져나왔다. 영창은 사실 필요없는 요식행위인데, 속으라고 지랄 한번 해봤다.

그리곤 나는 곧바로 공력을 끌어올려 오형검의 일 초식을 취했다.

'출(出).'

쾅!

극히 찰나간 뻗어진 빛살의 궤적이 여인을 후려쳤다.

미처 정비하지 못하고 직격당해 공처럼 데굴데굴 굴러간 여인은, 가건물의 유리창을 다 깨부수고서는 어떤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여인이 날아간 궤적에 펄펄 끓는 독혈이 흩뿌려졌다.

와장창!

벌써 세 명째.

— ······.

연무장을 두르고 있던 이들이 조용해졌다.

몇 합 나누지도 않고, 당가의 무인을 연달아 셋이나 날려버렸다. 한 두어 번째 놈을 날릴 때까지만 해도, 저런 모습들은 아니었는데.

— 마, 마법도 잘 쓰는데?

— 허면 하이브리드인가보군.

— 위계가 높은 정화 계열의 마법이라도, 그 짧은 순간에 당가의 독을 어찌 해독한단 말인가?

— 해독한 게 아니라 혈액과 함께 밀어낸 거다.

— 그게 말처럼 쉽게 가능한 일인가? 세맥이 다 뚫려있어도 힘들텐데?

— 임독양맥이라도 뚫었나보지.

— 방금 그 검법, 제대로 견식한 사람 있나?

7레벨의 구경꾼들은 저들끼리 시끄럽게 떠들고, 8레벨급 강자들의 눈초리가 점점 경악과 의아함으로 바뀌어 갈 때 즈음.

적당히 악에 받친 당가의 한 무인이 연무장으로 급히 뛰어 들어왔다. 이전과는 다른, 무려 8레벨을 목전에 두었을 무인이었다.

그와 동시에 방금 여인이 날아간 곳에서, 거대한 기운을 지닌 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네 세력의 수장이 구경꾼 무리에 추가된 것이다.

— 나랑 청궁이는 또 형장한테 다 걸었소! 하하하!

와중에 청풍은 눈치 없이 내게 또 돈을 걸었다며 크게 고함쳤다. 뻐근한 어깨를 돌리던 나는 절레 고개를 저었다. 분명 천재이긴 한데 아직 어려서 그런지 눈치가 좀···.

여튼, 튀어나온 당가의 중년인은 굉장한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이 당모가 오늘 한 수 배워도 되겠소?"

청풍보다도 경지가 높을 듯한 무인이었다. 거의 8레벨이라 봐도 무방한, 초절정의 경지를 목전에 두고 있는 고수. 아마 뛰어난 당가의 직계임이 분명했다.

세력의 수장들까지 보고 있는 판에, 더 이상 처참하게 패배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생각으로 급히 뛰어 올라온 것이다.

"그럼, 시작하겠소."

당가의 중년인이 정중히 포권을 풀었고.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가 기세부터 졌습니다. 나의 패배요."

"!?"

나는 미련없이 패배를 시인하며 기권했다.

몸을 돌린 내가 휘파람을 불며 내려가려했다.

뿌득. 뿌득.

그에 당가의 중년인이 다급히 쇄도해 나의 검집을 덥썩 잡았다. 힘을 주며 부들대는 것이 나의 손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당가의 중년 무인은 꽤 노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건가? 포기한다고?"

"예. 제가 졌어요."

"······."

저 무인이 미처 생각지 못한게 있었다.

나는 다른 마법사들처럼 모양이 빠진다며 질 때까지 미련히 서있을 사내가 아니다. 달면 삼키고 조금이라도 쓰면 뱉는, 그런 사내. 마탑주가 나와서 보든 누가 보든 나는 별 상관이 없었다.

"놓아주시죠. 검집이라도 부수려고 하십니까."

세 명을 연달아 깨부순 내가 너스레를 떨며 연무장 밖으로 내려가려 하자, 당황한 당가의 고수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어 수군거렸다.

- 부끄럽지도 않은가! 이리 많은 이들이 보고 있는데도!

듣자 하니, 이미 놓아버린 체면을 본인이 주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자기 체면을 좀 살려달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가차없이 손을 내저었다.

"싫습니다. 그냥 밖에서 지켜볼게요."

"······밖에서 지켜본다니, 그게 무슨."

"당가 얘들은 대체로 개념이란 게 없네. 저번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

7레벨을 상대로 8레벨급이 기어 나왔다.

그렇다면 마탑쪽에서도 명분이 생겼다는 뜻.

내가 간단히 포기하자, 마탑쪽에서는 뾰족한 귀를 가진 누군가가 정신이 나갔냐는 듯한 표정을 하고는 연무장 위로 올라왔다.

철컥.

8레벨의 엘프 마법사 슬레모킨.

어디선가 커다란 펌프액션 샷건을 꺼내 들고 연무장으로 올라온 슬레모킨은, 스산히 샷건을 장전하며 입을 열었다.

"그 체면, 내가 살려줄게요. 우리 '막내' 는 내려가."

"예."

나는 휘파람을 불며 연무장을 내려왔다.

#78화. 처음이군

#78화.

Next chap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