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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여왕(4)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가 물어왔다.

[어찌 대답이 없지? 그대는 여가 존엄하다 해놓고 무례를 범하려 하느냐?]

"아닙니다. 불멸의 여왕이시여."

일단 그렇게 답하긴 했지만···.

난처하다.

곤란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한단 말인가!

고민하던 나는 결국 성녀에게 떠넘기기로 했다.

'애초에 이렇게 판을 벌리길 원한 것도 당신이니 일정 부분 책임을 져줘야겠습니다.'

그때 바닥에 내려놓은 성유물이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뱀파이어 성녀가 거기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어색한 미소가 지어졌다. 서둘러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지금부터 터무니없는 뻥을 좀 쳐야 했기 때문이다. 뱀파이어 성녀가 내가 할 말에 어찌 반응할지는 짐작도 안 됐다.

하지만 대화의 마지막에 불멸의 여왕의 의표를 찌르기 위해선 이 방법이 유일했다.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한 나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사실은 이유가 있습니다. 불멸의 여왕이시여. 제가 섬기는 성녀는 질투심이 아주 심합니다."

[음···, 질투라? 신자가 적어서 그런 건가?]

"사실 그게··· 이런 말씀 드리기 민망하오나 성녀는 저를 어엿한 남성으로 여기고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신좌에 오른 위대한 존재를 집착녀로 매도해 버렸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을까?

불멸의 여왕은 말이 없었다.

[······.]

숨 막히는 분위기가 깊은 침묵 속에서 이어졌다.

나는 스스로 벌인 일에 자각이 들었다. 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것만 같았지만 언데드라 이마가 촉촉하게 젖어 들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이미 기호지세다. 여기서 멈추면 더 이상해진다.

"불멸의 여왕이시여. 이런 이유로 개종한다면 제가 감히 감당키 어렵습니다."

내 말에 잠자코 있던 드라큘라가 참지 못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허허! 자신의 첫 번째 사도와 금단의 사랑을? 호색한인 이 몸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인데···. 아아, 대단하구나. 뱀파이어 성녀여! 이 정도로 절제심 모르는 사랑이라니!]

그때 내 뒤에서 뭔가 요란한 기운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땅에 내려놓은 성유물에서 갑자기 불빛이 막 깜빡이고 있었다.

'!'

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파란색인 걸 보니 경고나 다급함인 것 같았다.

반짝! 반짝! 반짝!

하지만 저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쪽 분위기가 세상 진지했기 때문이다.

[여가 다시 묻겠다. 그대는 진솔하게 답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은 성녀가 그대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이더냐?]

신과 사도의 사랑이란 게 이토록 대단한 건가? 게임에는 신과 연애 루트란 게 구현돼 있지 않아서 생각을 못 했는데, 반응을 보니 장난이 아니군.

'이러면 더더욱 이제 와서 뻥이었다고 못하지.'

나는 의지를 애써 다잡고는 말을 이어갔다.

"물론입니다. 모든 연인이 다 그렇지만 헤어질 때는 지저분하고 난장판이 되기 마련입니다. 성녀를 떠난다면 그 꼴이 아름답지 못할 텐데 어찌 개종하겠습니까?"

이에 불멸의 여왕은 흥미를 드러냈다.

[아니, 그 아이가 진정 그대에게 빠졌다는 건가? 태양 교단의 성녀였던 시절에는 다른 인간에 대해 흥미를 가지는 모습을 본 적이 없거늘···.]

"송구하오나 저는 성녀의 인간 시절은 잘 모릅니다."

[여가 아는 그 아이는 복수심으로 불타는 태양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소녀처럼 질투하며 자기 사도에게 집착한다라? 듣기 민망하고 쉬이 믿기도 어렵노라.]

대신격이나 되는 존재가 이게 뭐냐는 듯 난감한 목소리를 냈다.

이제 내 뒤에 있는 성유물은 무슨 휴대폰처럼 진동하기 시작했다.

부우웅! 부우웅!

부우우우웅!

그 진동에서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마치 그건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겠다는 집요한 여친 같았다.

뭐랄까, 그 진동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명백히 분노였다.

'이 사태를 수습해도 성녀가 날 가만 안 두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할 때 여태 가만히 있던 녹색 연기 형체를 한 신이 입을 열었다.

[저자가 거짓을 말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판별하실 수 없는 것인가요?]

몹시도 차갑고 깨끗한 여성의 음성이었다. 이걸로 작은 단서 하나가 생겼다.

'여신이군. 그것 가지곤 누군지 알기 어렵지만···.'

어디 여신이 한둘이어야지. 다만 굉장히 쌀쌀맞은 느낌이라 겨울의 여신 같은 걸 떠올리게 했다.

[판별할 수 없다. 저자는 단순한 필멸자가 아니다. 첫 번째 사도이니 그 지위가 특별하다. 신과 첫 번째 사도의 관계는, 다른 신의 내밀한 면을 함부로 엿봐선 안 된다는 일과 다름이 없다.]

[당신의 힘이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위대한 어머니시여.]

[규칙을 어기며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다.]

불멸의 여왕은 뜻밖의 모습을 보였다. 의외로 대신격답게 관대한 게 아닐까?

[······.]

그렇게까지 말하자 녹색 연기 형태의 여신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날 보는 눈길이 더욱 집요해졌다.

'뭐 하는 신이지?'

점점 더 궁금해졌다. 그때 불멸의 여왕이 내게 말했다.

[여는 그대의 말을 이해했노라. 첫 번째 사도가 섬기는 신에 대해 그 정도의 거짓을 입에 담을 리가 없지.]

저 말로 미뤄볼 때 신들은 자신의 사도에 대해 상당히 보수적인 관점을 가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하나 그것이 개종하지 못할 이유는 될 수 없다. 설령 둘이 애모하는 사이라 해도 여와는 관계없는 일. 설마 그 감정이 여의 체면보다 중하다는 건 아니겠지?]

생각 이상으로 강하고 집요하게 나오네. 바로 전에 관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걸 취소해야겠군. 하지만 나도 할 말이 있다.

'여기까지 와서 일 처리에 실패할 수는 없다.'

사실 연인이니 뭐니 지껄인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뜻밖이지만, 불멸의 여왕과 사랑이란 개념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불멸의 여왕이시여. 제가 듣기로는 당신께선 영원하고 진정한 사랑의 수호자라 했습니다. 사랑을 돌보는 이께서 어찌 이 관계를 파탄 내려 하십니까?"

생각지도 못한 지적인 듯 불멸의 여왕은 작게 감탄사를 흘렸다.

[오호, 어찌 여가 사랑의 영역을 담당하고 있는 걸 알고 있는 건가?]

언데드와 죽음의 여왕인 카라즈라는 사랑의 수호자기도 하다. 다들 안 믿겠지만 그녀는 진짜로 사랑이라는 영역을 갖고 있다.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긴 세월 동안 잊혔을 뿐이다. 솔직히 너무 안 어울리기도 했고.

'실제로 여왕은 사랑과 관련된 힘을 한 번도 행사하지 않았으니까. 알고 있던 이도 오래전에 여왕이 그 영역을 힘을 잃었다고 여겼겠지.'

드라큘라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랑을 관장하셨습니까? 허허! 제가 어리석어 오늘 그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드라큘라는 뱀파이어 성녀보단 선배긴 하지만, 그 역시 아직은 역사가 짧은 신이다. 모르는 게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나도 게임에서 겨우 발견한 사실이니까. 딱히 도움은 안 됐는데 이렇게 써먹네.'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가 물어왔다.

[여는 언데드와 죽음의 여신이다. 어찌 사랑이란 감정을 돌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 이치를 모른다면 그대의 말은 궤변에 불과하다.]

딱 잡아떼는 불멸의 여왕에게 나는 한 가지 사례를 들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부패의 신이란 존재가 있었습니다. 위대하신 분께선 그 부패의 신이 생명의 신도 겸하고 있었음을 알고 계실 겁니다. 부패와 생명. 상반되는 개념이나 사실은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도 합니다."

생물이 죽어 부패함으로 미생물이 번성하고 땅도 비옥하게 만든다. 즉, 부패란 위대한 생명의 순환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부패의 신은 생명의 영역도 갖고 있었다. 나는 이런 점을 설명했다.

"역설적임에도 결국 서로 연결된 개념이지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죽음조차 극복하는 것. 위대한 사랑이란 죽음의 너머에서도 존재하는 것. 그렇기에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죽음의 개념과 함께 붙어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말에 이곳의 모든 신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신께선 죽음으로 사랑을 갈라놓기도 하지만, 죽음을 극복하는 사랑의 수호자기도 합니다."

나는 불멸의 여왕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청컨대, 오래간 잊고 계시던 의무를 떠올리시고 연인을 지켜주십시오. 당신께서는 필멸의 영역 너머의, 죽음까지 지속하는 사랑을 축복하는 존재입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슬쩍 뒤를 봤다. 우리 사장님 반응이 궁금했던 거다. 다행히 성유물을 보니 더는 진동하지 않았다. 대신 일정한 규칙으로 빛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빛이 퍼졌다, 사라진다.

빛이 퍼졌다가, 다시 사라진다.

뭔가 익숙한 박자였다.

'저거? 심장 박동 아닌가?'

다소 빠르긴 하지만 분명 심장이 뛰는 속도랑 같았다.

두근! 두근! 두근!

'역시 너무 화가 나서 혈압이 오른 걸까?'

슬슬 멋대로 지껄인 것에 대한 후폭풍이 두렵긴 했다. 하지만 개종만은 피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충성심 같은 게 아니라 뱀파이어 성녀야말로 내 공략의 핵심이었으니까. 여기서 개종하면 다 조진다.

한데 그때쯤 성유물에서 반응이 사라졌다.

[재밌는 소리를 해주는군. 성녀의 사도여.]

한동안 침묵하던 불멸의 여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뭐라고 답할지 긴장감에 가슴이 조여 왔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불멸의 여왕이 결론을 냈다.

[여는 그대의 말이 옳음을 인정하노라.]

아···, 다행이다.

깊은 안도감이 날 사로잡았다. 불멸의 여왕이 물러난 것이다. 보복 때문에 자신의 일을 저버리는 게 더 큰 불명예였으니 당연한 결정이었다.

'이겼다. 이제 불멸의 여왕은 화를 낼 명분을 잃어버렸다.'

더 이상 트집을 잡는 것도 치사한 짓이라 못할 거다. 더군다나 지켜보는 다른 신들도 있잖은가?

[이만 돌아가겠다.]

불멸의 여왕은 미련 없이 후퇴를 택했다. 그녀같이 지엄한 존재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 것이다.

이번 일은 호사가인 드라큘라가 보았기에 소문이 돌 거다. 성녀의 바람대로 된 것이다.

불멸의 여왕이 현현한 형체인 검은 연기가 점점 흐릿해져 갔다. 나는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렇게 그냥 가나 했는데···.

[앞으로 둘의 관계를 지켜보겠다. 후일 연인이 아닌 게 밝혀진다면 그대는 감당하지 못할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나중에 또 구라 좀 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저 대신격은 내 생각 이상으로 쪼잔했다.

[거짓이 아니어야 할 거다. 다시 만날 때는 여가 제대로 된 의지를 가지고 내려올 테니. 설령 그때는 규칙을 어기더라도 진실과 거짓을 간파하겠다.]

헉. 뭐라고? 아까 규칙을 어길 수 없어서 판별 안 한다고 하지 않았나?

'빈정 상하네.'

이대로 그냥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대신격이란 작자가 저리 나오니 배알이 꼴렸다. 그래서 기어코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랑의 수호자이신데 그냥 가십니까?"

내 말에 주변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이대로 정리되는 분위기였는데, 기어코 내가 눈치 없이 대신격을 붙잡은 것이니까. 하지만 제대로 빈정 상한 나는 멈출 생각은 없었다.

"여왕이시여. 사랑이란 때론 비밀스러운 법입니다. 신격과 사도의 사랑 같이 열정적인 부류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그럼에도 존엄하신 분의 제안에 무례를 범할까 싶어 밝혔습니다."

내 말투에 묻어나는 감정을 느낀 걸까. 드라큘라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아니, 젊은 뱀파이어여.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답했다.

"거짓이면 벌을 내리는 게 맞다면, 진실은 축복해야 맞지 않겠습니까? 한데 어찌 대신격께선 벌에 대해서만 얘기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 노골적인 비아냥에 드라큘라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에···.]

나는 기세를 몰아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에게 고했다.

"여왕이시여. 저는 아단이란 거짓된 인재가 공양을 빌미로 존엄하신 분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을 처단하였습니다."

내 말에 입을 다물고 있던 불멸의 여왕이 물어왔다.

[그래서?]

"이 작은 공로로 말미암아 청컨데, 부디 축복을 내려주십시오."

지금 내 행동은 정신 나간 짓 같아 보인다. 아니, 정신 나간 짓이 맞다. 하지만 대신격의 입장에서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내가 틀린 소리 한 건 아니니까. 심지어 옆에서 지켜보는 다른 신도 있으니 아무리 불멸의 여왕이라도 자기 성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무슨 축복을 원하는 건가?]

말투에 은은한 노기가 가득 묻어났다. 하지만 나는 겁먹지 않았다. 벌벌 떨 거였으면 그냥 계속 고개나 박고 있었어야지.

"제 주인에게 신력을 내려주십시오."

신력이란 신의 근본을 이루는 힘이다. 부족해지면 신이라고 해도 존재가 흩어져 버린다. 숭배 받지 못하는 신이 자연적으로 사라지는 건 그 때문이다.

'마침 성녀도 위태위태하겠지.'

뱀파이어 성녀의 신도는 나 혼자. 개업빨로 버티고야 있지만, 지금 상황이 계속된다면 우리 사장님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신력이 남아도는 불멸의 여왕에게 그걸 요구한 것이다.

'저쪽은 넘치지만 이쪽은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다.'

언제 흩어져 버릴지 모르는 뱀파이어 성녀의 입장을 고려해 볼 때 최고의 선택이라 하겠다. 불멸의 여왕도 이런 사정을 삽시간에 파악했을 터.

[꽤나 머리가 잘 굴러가는구나. 뱀파이어.]

"과찬이십니다."

[좋다. 그대의 원대로 해주지. 하지만 알아두라. 여에게 고한 것이 거짓이라 하면 훗날 지금 베푸는 은혜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겠다.]

불멸의 여왕은 분노로 으르렁대고 있었지만 나는 두렵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신과 필멸자 간에 어떤 규칙이 적용되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차후에 불멸의 여왕이 속 좁게 자신의 신도를 시켜 보복해 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것조차 기회와 발판으로 삼을 자신이 있었다.

"기꺼이 그리하십시오."

[흥, 건방진 놈···!]

불멸의 여왕은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듯한 기색과 함께 사라졌다. 옆에 있던 녹색 연기의 여신도 뒤따랐다. 드라큘라만이 남아 있다가 말을 걸어왔다.

[자네, 보통이 아니군. 아까 개종을 권했는데 내가 감당할 인재인지 모르겠어.]

"과찬이십니다. 그냥 정신 나간 놈입니다."

[크하하핫. 정말 재밌군! 앞으로 지켜보겠네. 그리고 그 사랑, 전력으로 응원하지.]

뭐랄까, 드사장은 심심하던 차에 막장 드라마를 보고 신난 아저씨 같은 말투였다.

그렇게 모든 신들이 사라졌다.

"후우."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고 내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실감했다.

이대로라면 차후 불멸의 여왕과 마주칠 때까진 무조건 뱀파이어 성녀와 진짜로 연인이 되어야 했다. 거짓말이 들통난다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올 거다.

문제는 성녀랑 어떻게 사귀냐는 거다. 그녀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할지는 별개의 문제다.

가장 큰 난관은 뱀파이어 성녀가 어디에 사는지조차 모른다는 것.

만나기는커녕 대화조차 불가능한 먼 존재라 원거리 연애라는 개념조차 성립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뱀파이어 성녀가 어찌 나올지도 문제군.'

불충한 첫 번째 사도가 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연인 선언을 해버렸다.

하룻밤 자고 나면 천상의 신들이 이 모두 소문을 알게 될 거다. 게다가 드라큘라의 반응을 미뤄보아 신과 사도의 사랑은 뭔가 배덕감 가득한 금단의 사랑이란 느낌이었다.

뭐랄까, 성녀님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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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신도들(1)

***

뱀파이어 성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집 다 갔다'라는 관용구를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그녀는 인간이던 시절부터 엄숙하고 종교적인 삶을 살아왔다. 하여 누군가와 사귀거나 사랑하는 관계가 되는 걸 생각도 해본 적이라곤 없었다.

한데 지난 공양 의식 때문에 자신의 사도와 금단의 사랑을 나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평범한 사랑도 낯선데···.'

마땅한 거처가 없어 바위틈에 쪼그려 앉아 있던 뱀파이어 성녀는 아연실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주변에서 몰아치는 바람이 비웃어댔다.

"성녀님! 타락해 뱀파이어가 되셨으면서 사도와 붙어먹다니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겁니까?"

"욕먹을 사랑!"

"이럴 때면 신도가 없는 게 좋아! 모시는 신의 추문에 놀라지 않아도 되니까!"

그들은 이 황량한 암석 차원에 토박이인 사악한 정령이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성녀의 주위를 리카온처럼 맴돌고 있었다. 직접 성녀를 사냥할 힘은 없었지만, 신도가 없는 성녀가 점점 약해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빈궁한 성녀는 충분히 약해지면 사악한 정령들에게도 기회가 올 터였다.

신을 포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모두를 흥분시켰다. 그렇기에 더욱 악랄하게 성녀를 조롱해댔다.

뱀파이어 성녀는 바람의 정령들에게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신 무릎을 모은 채, 거기 턱을 괴고 가만히 있었다.

'괜히 날뛰면 배만 고픈 거예요···.'

언젠가부터 팔다리가 반투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뱀파이어 성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악착같이 힘을 모았다. 다음번에 사도가 낙인으로 요청하면 능력을 주기 위해서다.

"신이 처지가 참 빈궁하네. 거룩함에도 재물이 필요한가 보다!"

"성녀님! 이 기회에 가난뱅이 신으로 직업을 바꾸는 게 어떤가요?"

주변에서 조롱이 계속됐다. 그러던 도중 갑자기 하늘이 열렸다.

쿠아아아앙!

황량한 차원을 덮은 갈색의 두꺼운 구름층에 구멍이 나며 저 너머의 우주가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언가 운석처럼 지면으로 내리꽂혔다.

한 줄기 빛이 사선으로 대기를 가로질렀다.

콰아아아앙!

뱀파이어 성녀의 수십 킬로미터 앞쪽에서 그것이 땅에 추락해 폭발을 일으켰다. 그녀는 궁금증이 일어났다.

살짝 눈을 깜빡이자, 다음 순간 뱀파이어 성녀는 무언가 떨어진 거대한 크레이터 한가운데에 나타났다.

아직 거대한 열기가 주변을 태우고 있었지만 성녀의 머리칼 하나 상하게 하지 못했다.

그녀는 크레이터 가운데서 검은 상자를 하나 발견하고는 열어봤다. 안에는 쪽지와 신력이 이글거리는 커다란 오브가 한 개 들어 있었다.

"이건?"

쪽지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사도를 참 잘 뒀더구나.>

의아함만 몰려온다. 의식의 마지막쯤에 뱀파이어 성녀는 힘이 떨어져 더 이상 보질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렌이 빈정 상해 벌인 일을 몰랐다.

다만 그녀는 통찰력이 있었기에 쪽지와 신력이 든 오브 등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추측할 수 있었다.

"아아, 사도여."

센스가 넘치는 선물에 뱀파이어 성녀는 감격했다. 그녀의 사도는 자신이 신력 부족으로 고생하는 걸 알고 이걸 받아낸 게 틀림없었다.

'걱정만 했는데 이쪽 처지까지 헤아려주다니···.'

감동도 이런 감동이 없다. 뭐랄까, 교회에서 쫓겨나고 자신을 이렇게 생각해 주는 존재는 처음이었다.

이제 한동안은 존재가 사라질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사악한 바람의 정령들이 금방 성녀를 쫓아 왔다. 다들 무슨 일인지 궁금한 것 같았다.

"움직일 힘이나 있었습니까? 퇴물!"

"쫓겨난 거지 성녀!"

"가엾다! 구걸해 봐라. 빵이라도 주마! 케케케케!"

다시 쏟아지는 조롱에 성녀는 힐끔 그들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을 얼음처럼 차가워 보였다. 그녀는 오브에 담긴 신력을 흡수하며 대꾸했다.

"왜 모르는 건가요? 조롱이란 금세 비명으로 바뀌곤 하는 법인데."

그와 함께 뱀파이어 성녀는 닥치는 대로 주변의 정령들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케에에에에! 갑자기 힘을!"

"도망쳐! 케케에에! 저년이 미쳤다!"

바람의 정령들의 고통에 찬 비명과 성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한동안 황량한 차원을 가득 채웠다.

* * *

아단이 일으킨 사건은 무사히 끝났다. 하지만 며칠 동안 나는 거처에 박혀서 나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떨어질까 싶어서다. 위기를 잘 해결했다지만 그 과정을 뱀파이어 성녀가 어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였다.

열 받은 직속 상관이 서류더미를 던지는 것처럼, 하늘에서 뭐가 떨어질 확률이 충분했다.

"주인님."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에레미나가 찾아왔다. 꼬맹이는 이번에 내 권속이 됐다.

그런데 뾰족하게 길어진 송곳니 빼곤 달라진 티는 별로 안 났다. 원래 창백한 녀석이었으니까.

망가진 두 팔은 아단이 신체 개조에서 쓰던 수복재를 이용해 복구한 상태였다.

"오. 꼬맹이 왔냐?"

나름 반가움을 갖고 물었는데 어째 녀석의 표정이 미묘하다. 원체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긴 한데, 같이 지내다 보니 미세한 변화를 알아채게 됐다.

'이건 불만이다.'

뭔가 잘못한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자 짚이는 점이 있었고, 다시 녀석을 불렀다.

"왔느냐. 나의 권속 에레미나여."

그러자 꼬맹이의 입가가 살짝 꿈틀거렸다. 누가 봐도 이번엔 기뻐하고 있었다.

"네, 좋은 밤입니다. 주인님. 주제넘습니다만, 주인님이 걱정되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며칠째 두문불출하시어···."

"아, 미안하군. 신경 쓰게 했구나.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거짓말이었다. 사실 성녀 때문에 쫄아서 숨어있었던 건데, 날 존경하는 에레미나에게 사실대로 말한 순 없는 노릇이지.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에레미나는 양손을 꽉 쥐며 말해왔다.

"주인님께선 근심하실 게 없습니다. 직접 당당히 선언하신 대로 성녀의 연인이 되면 그만입니다."

"내가 어찌 여신을 연인으로 삼겠나?"

"왜 안 되겠습니까? 제가 볼 때 주인님께선 뱀파이어 성녀에 비해 부족한 점이라곤 없습니다."

"고평가 해주는 건 고마운데, 나는 보잘것없는 필멸자에 불과하다."

내 말에 에레미나는 빨간 머리가 크게 찰랑거리도록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닙니다. 주인님은 대단하십니다. 제겐 신보다 더 훌륭한 존재입니다. 제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어떤 신도 절 구해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인님께선 손을 내밀어주셨잖습니까?"

에레미나의 말투에서 기묘한 열기와 진지함이 느껴졌다.

"주인님께선 위대한 정복자가 되실 겁니다. 필요하다면 여신이라고 해도 정복하실 수 있습니다."

작은 녀석이 세상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귀여워서 살포시 웃음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애써 표정을 수습하며 물었다.

"그래?"

"네, 주인님께선 원하는 걸 모두 가질 수 있습니다. 여신조차 예외는 아닙니다. 설령 성녀가 주인님을 거절한다면, 제가 어떻게든 그녀를 주인님의 소유로 만들겠습니다."

에레미나의 태도에서 무언가 종교적인 광신이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고개를 갸웃하게 했지만 아직은 알 수 없는 문제였다. 그보다 일부러 찾아와 이렇게 격려해주는 게 무척 고마웠다.

'그래, 내 유일한 권속이 이리 응원해주는데 계속 숨어있을 수는 없지. 할 일을 해야겠군.'

무엇보다 이번에 공을 세운 에레미나에게 상을 내릴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 점을 얘기하자 에레미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보상은 충분합니다. 주인님의 권속이 됐으니 이것은 일생의 영광입니다. 이제 나약한 인간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오크에게 복수할 힘을 얻게 됐으니까요."

"그래도 뭔가 말해봐라."

내 말에 에레미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한 가지를 물어왔다.

"주인님··· 혹시 제가 죽은 네크로맨서의 서책을 봐도 좋을까요?"

"오,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이냐?"

"네, 어릴 적에 수도원에서 어떤 분께 글을 배웠습니다."

들어보니, 수도원에 사냥감을 몰래 주고 가끔 도서관에 들락날락했다고 한다. 수도승들이 몰래 고기를 먹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어쩐지 말하는 게 사냥꾼의 딸 같지 않다고 했다. 좋다. 아단이 남긴 책은 뭐든 열람해도 좋다. 다만 마도서의 경우는 주의해야 한다. 네크로맨서의 물건이니 저주가 걸린 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생기면 즉각 보고하겠습니다."

"좋다. 어차피 나도 마도서를 봐야 한다. 아단에게 배운 마법을 계속 익혀야 하니까. 겸사겸사 네게도 마법을 알려주지."

"정말이십니까? 제가 마법을!"

"놀랄 것 없다. 너도 이제 어엿한 뱀파이어잖냐. 당연히 마법은 교양으로라도 익혀야 하는 학문이다. 우리는 스승이 없으니 함께 토론하며 익혀보자."

"좋습니다! 주인님!"

내 제안에 에레미나는 드물게 밝은 표정이 되더니 고개를 숙여왔다.

"마법까지 알려주시다니 제게 늘 과분하게 베푸십니다. 더 바랄 게 없을 정도입니다. 아직 미욱하지만 주인님께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는 에레미나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니 어쩐지 본가에서 키우던 고양이가 떠올랐다.

'잘 지내려나?'

괜히 녀석이 생각나 에레미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 * *

그날 이후로 다시 활동에 들어갔다. 뱀파이어 성녀의 의중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한테 벼락을 던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차분히 하나씩 처리하자.'

먼저 인신공양이 벌어졌던 지하실로 가보기로 했다. 에레미나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주인님, 저는 아단의 약초밭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놈이 약초를 많이 길렀는데 한눈에 봐도 귀한 게 많았습니다."

"좋아. 사냥꾼의 딸이었으니 잘 알겠군. 어떤 게 있는지 정리해서 보고해."

"넵, 맡겨주세요."

에레미나와 헤어진 뒤 지하실로 갔는데, 당시의 참상이 그대로였다.

아단 역시 한쪽 구석에 처량하게 쓰러져 썩어가고 있었다.

"삼촌, 그렇게 좀비를 부리더니 본인도 그런 꼴이 됐군요. 쯧쯧."

나는 그의 물건을 회수한 뒤에 화장해줬다. 아단에게서 회수한 물건 중에 중요한 건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달의 펜던트였다.

5대 아티펙트라 불리는 강력한 물건으로, 아단과 함께 우연히 발견한 고대 유적에서 얻었다.

이 펜던트는 사용자의 마법 능력을 올려주고, 상대의 마법을 먹어치우는 힘을 가진 막강한 물건이다.

두 번째는 아단이 쓰던 지팡이로, 검은 해골 지팡이라 불렸다.

네크로맨서 지팡이 중에는 상위권에 위치한 물건이다. 사악한 마법에 대한 능력 보너스를 주고, 두 가지의 능력을 발동할 수 있다.

[시체 일으키기]와 [괴사의 광선]이다. 둘 다 유용한 기능이었기에 지팡이는 내가 들고 다니기로 했다.

'그나저나 달의 펜던트와 검은 해골 지팡이로 받는 보너스를 생각하면 마법을 혼자 익히기 수월하겠군.'

어차피 아단에게 기초는 배웠다. 나머지는 장비빨로 익혀가면 된다. 중급 이상으로 갈 때는 스승이 필요하겠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고.

그 외에도 아단이 남긴 많은 재산이 내 것이 됐다. 모두 이 골짜기에 나만의 왕국을 건설할 밑거름이 될 터였다.

"자, 이제 피의 제단을 만들 차례인가."

뱀파이어가 건설할 신전겸 본거지에서 중핵이 되는 게 바로 피의 제단이다.

다행히 준비된 게 있었다. 죽은 아단이 의식을 위해 붉은 대리석으로 고급진 제단을 만들어놨기 때문. 그대로 전용해서 쓰면 그만이다.

문제는 제단의 중심에 안치할 타락한 성유물이다. 나는 바닥에 놓여 있는 성유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기다란 수정 안에 성녀의 잘린 손가락이 들어가 있었다.

'이제부터 이걸 타락한 성유물로 만들어야 한다.'

타락시키는 작업은 어렵지 않다. 성유물을 준비한 뒤에 뱀파이어 성녀에게 기도하면 알아서 처리해 주니까.

'본래라면 말이지···.'

지은 죄가 있는지가 다소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성유물을 앞에 두고 뱀파이어 성녀에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고결하신 성녀시여. 부디 어둠의 축복을 청하오니···."

***

이틀 뒤.

결국 성유물 타락 시키는 일은 성공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으으···윽."

이틀간 갖은 애를 썼기에 온몸이 부서지는 것처럼 힘들었다. 그래도 잘 끝났기 때문에 보람은 있었다.

성녀의 손가락은 어느새 사이하고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는 물건이 됐다.

'이제 타락한 성유물을 가지고 피의 제단을 만들어야···.'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갑자기 심한 한기와 어지럼증을 느꼈다.

"···뭐지?"

팔다리가 무겁고 온몸이 늘어지는 기분이다. 곧 오한과 떨림까지 이어져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

"주인님!"

근처에 있던 에레미나가 놀라서 날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좀 누워야겠··· 으윽···."

이후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보니 석재관 안에 누워 있었다. 흙냄새가 잔뜩 나는 이 관은 어제 에레미나가 새로 파냈다고 했다.

"주인님, 어떻게 된 건가요?"

에레미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옆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 곧 알게 됐다.

"몸살이다······."

"네? 뱀파이어가 몸살에?"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럴 리가 없지."

뱀파이어는 초자연적인 존재니 몸살에 걸릴 리가 없다. 하지만 예외는 존재하는 법.

마법이나 저주, 기타 특별한 증상에 의해 몸살이 난 것처럼 쇠약해질 수 있다.

이런 증상을 보통 '블러드 칠'이라 부르는데, 회복까지 꽤 고생하게 된다.

"내가 블러드 칠에 걸린 건 아마 공양 의식 때문일 거다. 본디 신적 존재는 우리 같은 이에게 무리를 주니까."

흔히 무속에서 말하는 신열이나 신병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쪽 세계도 비슷하다. 격이 높은 신격과 마주한 대가였다.

"이후에 성유물을 이틀간 붙들고 있었으니··· 몸살이··· 나는 것도 당연하겠지."

"주인님, 어찌해야 합니까!"

"너무 걱정할 건 없어···. 가만있으면 낫긴 해."

하지만 이것저것 할 게 많은데 계속 뻗어있을 수는 없는 노릇. 별다른 조치를 안 하면 꼬박 한 달은 정양해야 했다.

'안 되지. 안 될 말이야.'

가장 간단한 방법은 블러드 칠에 효과적인 약물을 먹는 거다. 하지만 갑자기 약물이 있을 리도 없고, 만들려고 해도 오래 걸린다.

'찾아보면 다른 방법이 있긴 할 것 같은데···.'

일단 에레미나에게 아단이 남긴 마도서를 뒤져보라고 했다.

"블러드 칠에 대한··· 해결책이 분명 있을 거다. 찾아서······ 가져와라."

"네. 맡겨주십시오!"

에레미나는 비장한 얼굴을 하더니 아단의 서재로 떠났다.

그 후 얼마나 지났을까? 혼몽한 기운에 시간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생각하던 그때, 에레미나가 밝은 목소리로 돌아왔다.

"주인님.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오··· 정말이냐?"

"약물 대신 바로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에레미나는 마도서를 펼쳐서 내게 보여줬다. 마도서에는 재밌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알몸의 사내가 땅에 파묻혀 있었고, 그 위로는 온갖 약초가 심어진 모습이다. 에레미나는 그게 뭔지 설명해줬다.

"땅속에서 기력을 회복하는 방법입니다. 땅을 파서 마법진을 그리고 그 위에 뱀파이어를 눕힙니다. 이후 햇빛이 들어가지 않게 흙을 덮은 후, 사용할 마법의 약초들을 땅에 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약초의 기운들이 마법진에 이끌려 아래로 흘러내리는데, 그게 뱀파이어를 회복시키게 됩니다."

"괜찮은데···?"

게임에선 없던 방법이지만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약물보단 좀 더 원시적으로 보이나 당장 시도해 볼 수 있는 게 장점이다.

"마침 아단의 약초밭에 필요한 약초가 충분합니다. 주인님."

"좋아, 그러면··· 한 번 해보자."

그날 밤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아단의 약초밭으로 이동하자 온갖 허브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사방에 가득한 약초들은 한눈에 봐도 값비싼 게 가득했다. 다시금 떠난 삼촌에 대해 감동이 피어올랐다.

"이렇게까지 남겨주시다니. 크흑···."

에레미나는 가져온 삽으로 약초밭 한가운데를 팠다. 초인적인 근력을 가져서 그런지 삽시간에 누울 자리를 만들었다. 녀석은 마도서에서 본 것처럼 마법진을 그렸다.

"주인님, 준비됐습니다."

"그래···, 고맙다."

"한데 약초가 일부 없어진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확인하러 왔을 때부터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정신이 없어서 거기까지 신경 쓸 수 없었다. 몸이 아프니까 얼른 치료 절차에 들어가고만 싶었다.

"음, 지금 그런데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일단 이것부터 하자···."

"알겠습니다."

팬티만 남기고 탈의한 채로 구멍에 몸을 뉘었다. 의복이 약초의 기운을 흡수하는 데 방해됐기 때문이다.

"묻겠습니다."

에레미나가 내 위로 흙을 덮기 시작했다. 뱀파이어인 탓에 질식사할 일도 없었다. 나는 차가운 흙의 감촉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후 일이 어떻게 진행된 건지 신경 쓰기 힘들었다. 워낙 기운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한 기운이 전신으로 내려오는 게 느껴졌다.

뭔가 파스를 여기저기 붙인 것 같았는데 기분이 꽤 괜찮았다. 후끈후끈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한, 그런 느낌 속에서 나는 눈을 감은 채 푹 쉬었다.

'꼬맹이가 제대로 했군. 빠르게 블러드 칠을 벗어날 수 있겠어.'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모르겠다. 한데 갑자기 위쪽이 수선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삽질을 하는 소리까지 들렸다.

'어? 뭐지? 아직 다 안 나았는데.'

잠결에 나는 에레미나가 치유되는 시점을 잘못 계산하고 날 파내려는 건가 싶었다. 그래서 얼른 텔레파시를 보냈다.

-권속이여? 아직 때가 아니다.

하지만 답이 없었다. 몇 번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에레미나와 내 거리가 꽤 떨어져 있다는 소리다.

'그럼 누구야?'

정신이 점점 깨어나자 위에서 뭐라 뭐라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약초가 제법 크다. 스에에!"

"조심해서 캐라. 뿌리가 끊어지면 기운이 세어 나가기 쉽다!"

"스에! 두 번째로 털러 오길 잘했다. 경계가 소홀하다!"

대체 무슨 일이지? 저들은 누굴까?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약초의 기운에 취한 것 같았다.

그냥 더 자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방해를 받았다.

푹!

무언가 정강이를 찍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그게 삽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악!"

아파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흙무더기가 무너지면서 약초밭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밤의 차가운 공기와 허브의 온갖 냄새가 날 맞아줬다. 하지만 제일 인상적인 건 따로 있었다.

다리가 짧은 도마뱀 인간 몇이 삽은 든 채로 날 보고는 굳어 있었던 것.

"······."

"······."

얼어붙은 것 같은 침묵이 일대를 무겁게 짓눌렀다. 놈들은 당황한 얼굴로 눈알만 또르르 굴리고 있었다. 나는 곧 그들의 누군지 알게 됐다.

'스킨크족이잖아?'

스킨크들은 일곱 봉우리의 주민으로 이 골짜기랑 비교적 가까운 곳에 사는 놈들이다.

즉, 이웃사촌인 셈.

한데 놈들은 손에는 남의 귀한 약초를 잔뜩 뽑아 들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내릴 결론은 단 하나였다.

'도적놈들이군.'

그때 스킨크 한 놈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뭔가 서로 간의 오해가···."

들을 필요도,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바로 주먹부터 나갔다.

"이런 시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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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신도들(2)

약초밭을 털러 왔던 스킨크족 다섯은 내 분노한 주먹에 차례로 쓰러져 모두 붙잡혔다.

현재 스킨크들은 지하실로 끌려온 상태로, 모두 도축 당하는 짐승들처럼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사냥꾼의 딸인 에레미나의 솜씨였다. 녀석은 그 옆에서 혼자 뭐라, 뭐라 중얼거리며 칼을 갈고 있었다.

"주인님의 회복을 방해하다니··· 주인님의 재산을 훔치다니··· 정말 괘씸해서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에레미나는 드물게 노기를 드러낸 얼굴이었다.

"나의 권속이여, 칼은 왜 가는 것이냐?"

"주인님. 스킨크의 가죽은 제법 쓸 만한 물건입니다. 제가 모두 껍질을 벗겨버리겠습니다. 주인님께선 의자에 앉아 편히 지켜보시면 됩니다."

에레미나의 말이 충격이었을까? 눈치를 보며 매달려 있던 스킨크들이 격렬히 바동거렸다.

"스읍!"

"읍! 스읏!"

입을 막아놔서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에레미나는 신경질적으로 일어나더니 근처에 있는 몽둥이를 잡고 스킨크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범죄자는 매가 약입니다! 감히 분수도 모르고 위대하신 주인님의 재산을 탐하다니요! 죽을 때까지 두들겨 주겠습니다!"

에레미나 녀석, 화나니까 무지 살벌하구나···. 이대론 진짜 다 패죽일 것 같아서 서둘러 말렸다.

"권속이여. 그 마음은 고마우나 놈들을 신문해야 한다. 대체 왜 약초를 훔친 건지 알아내야지 않겠느냐."

"이런, 제가 분노에 눈이 멀었던 것 같습니다. 주인님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몽둥이를 내린 에레미나는 화가 덜 풀린 건지 콧김을 성대하게 내뿜고는 다시 칼을 갈아댔다. 그 모습에 스킨크들의 눈이 격렬하게 떨렸다.

나는 일단 이 오인조 도적단 중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의 재갈을 벗겼다.

"이름."

짧게 묻는 내 말에 녀석이 서둘러 답했다.

"스칼릭스다."

그 말에 얌전해졌던 에레미나가 다시 몽둥이를 쥐었다.

"건방집니다! 감히 존귀한 주인님께 반말을! 뼈를 분질러서 그 버릇을 고쳐야 하겠습니까?"

다시 출동한 에레미나를 보며 스칼릭스라는 소스라치는 얼굴을 하더니 얌전히 존대로 바꿨다.

"스칼릭스라고 합니다!"

"흥. 봐주는 건 이번만입니다."

에레미나가 물러나자 다시 심문이 시작됐다.

"좋아. 스칼릭스. 대체 왜 약초를 훔치러 온 건가?"

"그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생각보다 스칼릭스는 완고한 태도였다. 겁먹은 것과 별개로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져서 신기했다.

"죽이려면 죽이십시오···."

결국 에레미나가 칼을 들었다.

"좋습니다. 잘 말해주셨군요. 이제부터 당신들 몸에 돋아난 수많은 비늘을 하나하나 후벼 파고 떼어내겠습니다. 과연 언제까지 버티나 보겠습니다."

스칼릭스는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다른 스킨크들도 결연한 표정이다.

'뭐지?'

호기심이 불쑥 생겼다. 본래 이 스킨크란 놈들은 이 미혹의 산에서 최약체에다, 겁도 많은 종족이다.

한데 대체 무엇이 저런 각오를 하게 했는지 궁금했다. 나는 막 나서려는 에레미나를 말렸다.

"권속이여. 의욕은 좋으나 뱀파이어에겐 좀 더 세련되고 훌륭한 방법이 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가혹한 고문이 이어지겠지만, 뱀파이어는 그럴 필요가 없다. 바로 특유의 매혹 능력 덕분이다.

"지금부터 이들을 매혹해서 모두 하인으로 삼겠다. 그렇게 하면 뭐든 토설하겠지."

"하인으로 만드는 것입니까? 주인님, 제가 어리석어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주인님이 제게 베푼 은혜인 '권속'과 지금 하려는 '하인'은 무슨 차이입니까?"

"간단하다. 권속은 가족이고, 하인은 그냥 노예 같은 거다."

뱀파이어가 흡혈해서 또 다른 뱀파이어를 만들면 이걸 '권속'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건 생각보다 부담이 크고 어려운 행위다. 안 그랬으면 지금쯤 이 세계는 뱀파이어로 가득했겠지.

뱀파이어가 희생자를 물어 뱀파이어를 만들고, 또 그 뱀파이어가 희생자를 물어 뱀파이어를 마구 만들 테니, 세상은 좀비 아폴칼립스보다 더한 곳이 됐을 거다.

하지만 인간이 낳을 수 있는 아이가 한정적이듯 뱀파이어도 자기 권속을 만드는 데 제약이 크다. 나는 이런 점을 에레미나에게 설명해줬다.

"그렇기에 너는 내 하나뿐인 가족이다."

내 말에 에레미나는 감동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가족이군요. 주인님, 무언가 가슴에서 벅차오릅니다."

"기뻐해 주는 것 같아서 기분 좋구나."

반면 하인은 뱀파이어가 가진 타고난 매혹 능력으로 홀려서 쓰는 노예다.

"하인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제압한 적의 피를 잔뜩 빨아내 빈사 상태로 만든다. 그리고 그 피의 체질을 분석한 뒤 매혹 능력을 써 완전히 세뇌하는 것이다."

"무슨 개념인지는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런데 저도 할 수 있을까요?"

"뱀파이어라면 누구나 가능하다. 에레미나, 너는 내 권속이므로 완전하고 흠 없는 뱀파이어다. 능력을 쓰는데 전혀 문제없단 소리다."

"오···!"

"마침 잘 됐군. 이참에 놈들을 상대로 매혹을 쓰는 법을 연습하자."

좋은 교보재를 두고 놀릴 순 없지.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주인님!"

"다섯 마리 중 한 마리를 내어주마."

나는 잠시 코를 킁킁거리며 스킨크들을 살폈다. 이것은 피의 품질을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한 암컷 스킨크가 매우 괜찮다는 걸 알아냈다.

"이 녀석을 주지. 지금부터 흡혈에 들어간다."

"츄릅···. 넵. 알겠습니다."

배가 고팠던지 에레미나는 입가를 소매로 쓰윽 닦고는 끄덕였다. 사실 우리는 짐승피 말고 제대로 먹질 못하고 있으니 저럴 수밖에. 성장기의 어린이에게 품질 좋은 피를 제공할 수 있어 다행이다.

"스에에! 끼에에에!"

"읍! 스읏!"

놀란 스킨크들은 다시 바둥거렸지만 봐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왜 도둑질을 해서 말이야. 나는 주저 없이 스킨크들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콰직!

날카로운 송곳니가 파고들자 피가 쏟아졌다. 몹시 맛이 있었는데, 마치 이건 뜨끈한 선지해장국을 먹는 것 같았다. 든든하구만.

꿀꺽꿀꺽.

한참 그렇게 피를 빨자 놈은 피골이 상접해서, 과장 좀 하면 마른 멸치 같은 꼴이 됐다. 나는 놈을 향해 손을 뻗으며 에레미나에게 설명했다.

"매혹을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약해진 상대를 정서적으로 지배하면 된다. 그리고 그들의 욕망을 네가 모두 통제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

"네, 시도해 보겠습니다. 주인님."

에레미나는 흡혈한 대상을 노려보기 시작했는데, 별다른 시행착오도 없이 금방 성공했다.

'과연 전설급인가.'

녀석은 뭐든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나 같은 경우는 직접 써본 적이 없지만 매혹의 개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간단히 성공했다.

이렇게 다섯 스킨크는 모두 우리의 하인이 됐다. 매달려 있던 걸 내려주자 그들 모두 복종하는 태도로 고개를 땅에 박았다.

"위대하신 분, 저희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부터 지성으로 섬기겠습니다."

그들의 태도에 나는 만족해서 끄덕였다.

"좋아. 왜 왔는지, 너희 스킨크가 무얼 꾸미고 있는지 남김없이 내뱉어 봐라."

* * *

스킨크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놈들은 생각보다 과감한 짓거리를 벌이고 있었다.

'미혹의 산을 전체를 뒤흔들 내용인데···.'

미혹의 산은 넓은 장소다. 그저 커다란 산 하나 달랑 있는 곳을 생각하면 맞지 않다.

미혹의 산은 일곱 개의 봉우리가 있고, 금과 은, 철광과 구리까지 온갖 지하자원이 풍부해서 온갖 종족이 몰려와 자리를 잡았다.

고블린, 드워프, 놈, 오크 등등 많았다.

이들은 산지의 광산을 차지하기 위해 긴 세월 동안 끝나지 않는 투쟁을 벌여왔는데 세간에선 이걸 '일곱 봉우리의 전쟁'이라 칭했다.

스킨크족은 그 중 최약체였다. 나름대로 일곱 봉우리 중에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점점 다른 종족과의 경쟁에서 밀렸다.

'그래서 결국 무리수를 둔 건가.'

스킨크족 수뇌부는 부족의 암담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궁리를 하던 중 한 가지 희망을 발견했다.

그건 자신들이 점유한 산자락을 끝없이 파 내려가면서 발견한 비밀스러운 고대 유적이었다.

"유적은 어떤 장소였나? 생김새라던가?"

내 물음에 스킨크 오인조의 리더인 스칼릭스가 답했다.

"정체불명이었습니다. 다만 모두가 말하길 바라보기만 해도 심장이 멈춰버릴 만큼 두려운 장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발굴을 계속하셨다?"

"···넵. 부족회의에선 거기에 있는 게 보물이든, 고대의 사악한 힘이든, 일족의 생존에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사실 다른 해결책도 없었고요."

그 유적이 뭔지 짐작이 됐다. 분명 고대신과 관련된 유적이겠지.

"그래서?"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유적을 탐사해 가던 중 커다란 벽에 부딪친 거죠. 갑자기 나타난 마법적인 독가스 지대를 돌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일족의 주술사가 나서 해체해 보려 했으나 고대의 마법은 그 수준이 아득히 높았단다. 결국 고민 끝에 독가스를 감수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단 결론에 다다랐다고.

"그걸 위해 강력한 해독초가 필요했습니다. 어지간한 고급품으론 어림도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아단 삼촌의 약초밭을 노렸다?"

"네, 부족회의에선 그런 최고급 약초가 어디에 있나 찾아왔습니다. 그러다 발견한 게 네크로맨서 아단님의 약초밭입니다."

이후 스킨크족 부족회의는 아단에게 조심스럽게 거래를 제안해 봤다. 하지만 일언지하로 거절당했다.

심지어 보냈던 사절은 언데드 재료가 돼버렸다나?

'아단, 이 미친놈···.'

부족회의는 분노했지만 가뜩이나 세력 싸움에서 밀리는 이때 아단과 척을 질 수도 없어서 포기했다고 한다.

"네크로맨서 아단님은 일곱 봉우리의 다른 종족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존재였으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안타깝게 시간만 보내고 있었는데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얼마 전 주술사가 아단의 기운이 사라졌다는 걸 감지했던 거다. 이에 부족회의는 고민 끝에 스킨크 다섯을 선발해 약초를 훔쳐오라고 파견했다고.

"이번이 두 번째라고 했지?"

"네, 첫 번째에 해독초를 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어째서인지 약초밭을 보호하던 마법이 모두 사라져서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나는 검지와 엄지로 콧잔등을 집었다. 아단을 죽인 게 생각지도 못한 문제로 이어진 것이다.

"가져갔으면 됐지 왜 또 왔어?"

"약초를 받은 부족회의에서 그 가치에 눈이 돌아가서입니다. 지키는 이도 없는데 닥치는 대로 뽑아오라는 명령이···."

"허허! 이 새끼들 진짜!"

역시 한번 얕보이면 골수까지 빨아먹으려고 드는 게 이 세계의 생리였다. 상황을 파악한 나는 이들을 데리고 가서 피해 보상을 빌미로 스킨크를 잔뜩 뜯어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겠군.'

더불어 고대 유적 건도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아직 확고한 결론이 난 건 아니지만, 그게 고대신과 관계된 거면 진짜 위험했다.

그 문제는 스킨크족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내가 자리 잡은 미혹의 산 전체를 뒤덮을 대재앙으로 번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

* * *

다음날 밤.

이런저런 고려 끝에 스킨크들을 데리고 놈들의 둥지로 향하기로 했다.

"권속이여. 집을 잘 보고 있도록."

에레미나에겐 무슨 사정인지 잘 설명해줬다. 그리고 녀석이 하인으로 부릴 수 있게, 직접 매혹했던 암컷 스킨크는 내버려뒀다.

"네, 맡겨주세요. 주인님의 물건은 작은 것 하나 없어지지 않게 지키겠습니다."

"특히 성유물을 잘 지켜야 한다. 돌아오면 피의 제단의 마무리 작업을 하겠다."

타락한 성유물은 아단이 만들어 놓은 제단에 이미 안치 과정에 들어간 상태. 며칠 정도 걸리니 스킨크들을 보고 오면 끝나 있을 거다. 이후 간단한 마무리만 하면 드디어 피의 제단이 완성된다.

"가자."

"네, 위대하신 분."

스킨크 넷을 이끌고 바로 길을 나섰다. 뱀파이어가 된 탓에 따로 밥 같은 건 안 챙겨도 됐다. 이 스킨크 놈들이 도시락이나 마찬가지니까.

다행히 스킨크 둥지는 내 골짜기에서 별로 멀지 않았다. 하루가 더 지나자, 한밤중에 스킨크족의 터전에 도착한 것이다.

"여기가 바위 봉우리군."

스킨크족은 일곱 개의 봉우리 중 바위가 유난히 많아 '바위 봉우리'라 불리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봉우리의 수많은 바위 틈새 중 어딘가에 놈들이 머무는 산속의 굴로 가는 입구가 있다.

입구는 교묘하게 숨겨져 있어 스킨크족이 아니라면 찾을 수 없다. 심지어 주기적으로 새로운 입구를 뚫고 기존의 입구를 폐쇄한다고 하니, 알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터진 탓이다.

쿠아아아아앙―!

마치 핵폭탄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폭음이 일대를 둔중하게 울렸다. 그리고 마치 산이 무너질 것 같은 지진이 이어졌다.

그와 함께 숨겨진 입구 여기저기서 수많은 스킨크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산사태다! 끄악!"

"도시에 괴물이! 괴물이!"

"다 잡아먹혔다! 끄엑!"

달빛 아래 스킨크족들이 개미 떼처럼 바글바글거렸다. 하지만 놀랄 일은 지금부터였다.

스킨크족이 빠져나왔던 굴의 입구들에서 거대한 촉수 가닥이 튀어나오더니, 도망친 스킨크족을 휘감아 도로 끌고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놀란 스킨크족들은 비명을 질렀고, 산 곳곳에 촉수 다발이 꿈틀거렸다.

"살려줘! 형제! 나 좀―!"

"끄아아아! 괴물이 모두 먹었다!"

"유적을! 유적을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어! 족장이 실수했다!"

가히 지옥에서 볼 것 같은 끔찍한 광경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상황을 짐작했다.

'우려하던 일이 터졌네. 해독초를 가져가더니 기어코 봉인된 고대신의 조각을 건드려버렸군.'

이건 뭐랄까, 일곱 개의 봉우리가 통째로 사라질 만한 사달이 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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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신도들(3)

고대신이란 지금 패권을 잡고 있는 신들과는 다른 부류다.

태고의 혼돈과 어둠, 광기에서 태어났다고는 하는데, 상세한 지식은 금기에 가까웠다. 많은 고대신이 지금의 신들에게 패퇴해 사라졌다고 한다. 물론 그 흔적은 아직 세계 곳곳에 남았다.

미혹의 산 지하 깊은 곳에는 '조각난 자, 룩스 움브라'라는 고대신의 일부가 봉인돼 있었다.

룩스 움브라는 마지막까지 지금의 신들에게 대항했던 고대신 가운데 하나로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명대로 육체가 조각, 조각이 썰려서는 여기저기 봉인돼 버렸던 것.

미혹의 산 지하에도 그 조각 중 하나가 있는데 스킨크족이 그걸 건드린 게 틀림없었다.

"···와, 진짜 좆됐네."

나는 바위 봉우리에서 벌어지는 혈투를 보며 혀를 찼다. 부족민들이 도망치는 동안 스킨크족의 전사와 주술사들이 룩스 움브라의 거대한 촉수를 상대로 분투 중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별 소용이 없었고 희생자만 늘어나고 있었다.

급기야 룩스 움브라는 둥지 밖으로 몸을 일부 빼내기 시작했다. 30미터가 넘는 몸통이 땅 밑에서 억지로 빠져나오자 바위 봉우리 일부가 무너졌다.

와르르르르! 콰아앙!

그야말로 대재난이었다. 무너진 토사와 바위 때문에 앞에서 싸우던 스킨크 전사들 중 일부가 피할 틈도 없이 깔려 죽었다.

"스에에에!"

"쓰에에!"

낙석을 피한 자들은 더 싸울 생각도 못하고 허겁지겁 달아났다. 룩스 움브라는 도망가는 스킨크를 쫓지 않고 달빛을 내리쬐기 시작했다. 그래서 잠시 전투는 소강상태가 됐다.

'마력을 보충하려고 멈췄군. 내버려 두면 큰일 날 텐데···.'

하필 저 고대신의 조각이 스킨크 둥지의 지하에 있을 줄이야.

미혹의 산 지하 어딘가에 룩스 움브라의 봉인지가 있긴 하지만, 예측이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게임에선 위치가 무작위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디에 봉인지가 있느냐에 따라 진행 방향이 확연히 달라지는 게 특징이었다. 이번엔 그게 스킨크족의 거처 밑이었던 거다.

'그건 그렇고, 해독초를 가져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봉인을 깨고 이 난리가 나다니···.'

아무래도 스킨크족은 유적에 진심이었던 것 같다. 그들이 찾고자 했던 힘이나 보물이 거기 없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유적의 저주가 임했다! 스에엑!"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을 느꼈다! 하지만 족장이 말을 듣지 않았다!"

"큰일이다! 동족들이! 비늘 털린 비참한 꼴로···! 쓰에에!"

스킨크 하인들이 놀라서 방방 뛰고, 난리였다. 하지만 섣불리 뛰쳐나가진 않는다. 이제 그들에게 제일 중요한 문제는 내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큰일이군. 룩스 움브라가 너무 일찍 깨어났어.'

게임으로 치면 지금은 초반부다. 이 타이밍에 룩스 움브라가 깨어난 건 나도 처음 본다. 아직 제대로 대응할 수단이 적다는 걸 고려해 보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저놈,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제대로 두들겨 놓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답이 없는데···.'

사실 가장 안전한 해결책은 간단하다. 이대로 뒤도 안 돌아보고 튀는 것이다. 그리고 에레미나까지 챙겨서 미혹의 산을 영영 떠나면 된다.

하지만 그건 미래를 박살 내는 행동이었다. 지금 내 목표는 명확했다. 미혹의 산에 자리 잡고, 일곱 봉우리의 패자가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훗날 태양 교단과 싸움을 힘을 얻으려는 거다.

도주를 택한다면 그건 다 물거품이 된다.

'물러날 수 없다. 싸우자.'

물론 나 혼자 저 괴물을 쓰러뜨리진 못한다. 그건 따로 많은 준비가 필요한 일이고, 일단은 내 지식으로 놈을 격퇴해 회복에 차질을 주는 게 목표였다.

'놈이 타격을 입고 굴 안으로 도망치게 하면 한동안 시간을 벌 수 있다.'

결심을 한 뒤 하인들에게 말했다.

"저 괴물을 격퇴하고 스킨크들을 구할 방법이 있다. 족장에게 안내해라."

내 말에 하인들은 반색했다. 이들은 함부로 나서진 않았지만 속으로 애가 탔던 모양이다.

"이쪽으로!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스엑!"

스킨크 정찰병인 차라가 나섰다. 녀석을 따라가 보니 저 앞에 딱 봐도 족장과 원로들로 보이는 무리가 있었다.

지금은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차라를 따라 이동하자 저 앞쪽에 딱 봐도 족장이나 원로로 보이는 무리가 있었다. 머리에 깃털을 꽂거나 뼈 장식을 올리는 등 복장이 남달랐다.

'제대로 차려입고 지팡이까지 든 걸 보니 도망치기 전까지 유적을 건드리고 있었나 보군.'

그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상황을 통제하려 노력 중이었다.

"족장님!"

차라의 외침에 족장으로 보이는 자와 원로 몇몇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차라? 아니? 어찌 뱀파이어와 같이 있는 거냐!"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특유의 기운 때문인가 내가 뱀파이어인 걸 바로 알아보는군.

"네놈은 뭐냐!"

족장 같은 놈은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비늘도 화려했다. 얼굴에는 노기가 가득해 당장이라도 들고 있는 창을 휘두를 것만 같았다. 그러자 내 스킨크 하인들이 우르르 막아섰다.

"족장님, 자중하십시오!"

"맞습니다. 저희를 구해주실 분입니다!"

"존귀한 분이니 무례하게 구시면 안 됩니다!"

족장이 이들이 내 하인이 된 걸 몰랐기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동족이 뱀파이어를 감쌀 줄은 몰랐을 테니까.

"대체 이자가 누구기에?"

상황이 정리되자 앞으로 나섰다.

"나는 아단의 조카, 소렌이다."

"아단이라고!"

과연 대마두의 이름은 강력했다. 족장의 태도가 변했다.

"아단의 조카 소렌이여, 대체 무슨 일이오. 지금은 한시가 급하오."

"저 촉수 괴물이 뭔지 안다. 룩스 움브라라고 불리는 고대신의 조각이지. 일시적이긴 해도 놈을 격퇴할 방법도 안다."

"뭐라! 정말이오?"

"그렇다. 서둘러야 한다."

"어서 말해보시오!"

내가 말한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웠다. 룩스 움브라의 몸통에는 코어가 있는데,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지금은 코어를 둘러싼 껍질이 물러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

"코어는 몸통 위쪽에서 찌를 수 있는데, 그것만 성공하면 놈이 큰 피해를 받고 땅속으로 도망갈 거다."

"말이야 쉽지. 누가 저 거대한 몸통에 기어올라 코어를 찌르겠소!"

"내가 하겠다."

단호한 내 대답에 족장은 눈이 커졌다.

"스엣? 그게 정말이시오?"

"그렇다. 박쥐로 변해 놈의 위로 간 뒤, 떨어져 내려 찌르겠다."

"참으로 대담무쌍하군!"

"대신 내가 낙하하는 동안 너희가 시선을 끌어줘야 한다."

"어려운 역할을 해주겠다니 기꺼이 지원하고 싶소. 하지만 계속 지리멸렬하고 있으니 제대로 시선을 끌 수나 있을지···."

"걱정 마라. 방법이 있다."

나는 손을 뻗어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계곡물이 거칠게 흐르고 있었다.

"주술사들을 통해 저 물을 쏟아부어라. 룩스 움브라가 격통에 휩싸일 거다."

내 말에 족장뿐 아니라 대화를 듣고 있던 원로들도 의아함을 드러냈다.

"겨우 물로···?"

누군가 한 말이 그들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솔직히 황당하게 들리는 게 당연하겠지.

"이해하기 어려운 건 안다. 하지만 룩스 움브라의 조각이 막 봉인에서 풀려났다는 걸 놓치면 안 된다."

물은 순수함이나 생명과 관련이 있어 혼돈과 사악함으로 가득한 룩스 움브라의 특성에 피해를 줄 수 있는 성질을 가졌다. 물론 이런 방법도 봉인 해제 후 며칠 정도만 먹힌다. 아직은 자신과 반대되는 성질에 대해 방호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직 봉인의 석주를 건들지 않았군.'

나는 서둘러야 한다고 그들을 재촉했다.

"지금 룩스 움브라가 가만있는 것으로 보여도 마력을 끌어모으는 중이다. 그게 끝나면 더 큰일이 벌어질 테니 어서 움직여야 한다. 물에 관해서라면 어차피 방법도 없으니 시도나 해보면 되지 않나. 이번 일에 가장 위험한 게 나인데, 설마 거짓을 말할까?"

"알겠소. 설령 물이 안 먹힌다면 다른 방법으로 주의를 끌어보지."

"좋다."

나는 족장에게 들고 있는 창을 빌려달라고 했다.

"놈의 코어를 찌를 강력한 무기가 필요하다."

족장이 가진 건, '뱀의 송곳니'라 불리는 전설적인 무기다. 과거 스킨크가 번영하던 시절 그들의 전설적인 영웅이 들었던 창인데 족장에게 대대로 내려왔다.

족장이 이 무기의 진정한 주인은 아니었다. 언젠가 선택받은 자가 나타나 창을 쥐게 된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족장은 창을 보관하는 역할이었다.

"이건···."

워낙 중요한 물건이라 족장은 갈등했지만 금방 결정을 내렸다.

"좋소. 이깟 무기를 주기 망설여서 부족민을 죽게 할 수 없지. 하나라도 더 구할 수 있다면 이 창이 아깝지 않을 거요. 가져가시오."

나는 뱀의 송곳니를 받은 뒤,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공중에서 박쥐로 변신했다.

퍼엉!

빠르게 날갯짓해서 상승했다. 점점 엉망이 된 산지 전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또한 저 룩스 움브라의 조각 놈이 얼마나 거대하고 말도 안 되는지 절감하게 됐다.

'무슨 괴물 문어같이 생겼군.'

참으로 해괴한 광경이었다. 바위산 위에 문어를 닮은 시커먼 고대신의 조각이 꾸불텅하고 있는 꼴은.

"스에에에에!"

"가자! 전사들이여!"

아래쪽에선 족장으로 명령으로 스킨크 전사들이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마법과 투사체가 앞으로 날아들자 마력을 끌어모으던 룩스 움브라가 반응했다. 놈은 사납게 촉수를 놀려 주변을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놈의 바로 위쪽으로 날아갔다. 내려다보니 둥그런 몸체의 중앙부에 내가 찾던 코어가 보였다.

그것은 사이한 붉은색으로 맥동하는 심장 같은 형체였다. 코어 위로는 반투명한 껍질이 덮여 있었다.

저게 며칠만 지나도 단단하게 굳고, 코어는 보이지도 않게 된다. 그때 가면 정말 손도 못 쓰고 당한다. 이번에 반드시 코어를 터뜨려 놔야 했다.

일단 목표 지점에서 빙글빙글 비행하며 머물렀다. 저 아래서 스킨크 주술사들이 내 요구대로 물대포를 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다행히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족장이 있는 대로 긁어모은 주술사들이 계곡물을 끌어와 쏘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촤아아아아!

물대포가 주변의 생명체를 탐욕스럽게 낚아채고 있던 룩스 움브라의 촉수에게 쏟아졌다. 그 효과는 확실했다.

쿠우어어어어어!

산 전체가 울리는 것 같은 비명이 터지더니 기둥처럼 굵직한 촉수들이 고통에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깨끗한 물은 마치 산성처럼 사악한 촉수를 녹이며 연기를 일으켰다. 격통을 느끼는 듯 촉수들은 마치 불판 위의 꼼장어처럼 미친 듯이 꿈틀거렸다.

"효과가 있다! 더욱 퍼부어라!"

격앙된 족장의 외침에 주술사들은 모든 힘을 끌어냈다. 다행히 며칠 전에 비가 와서 계곡의 유량은 풍부했다. 엄청난 물세례가 쏟아졌다.

촤아아아아!

이게 내게 허락된 유일한 틈이었다. 나는 각오를 다지고는 변신을 풀었다.

펑!

다시 뱀파이어로 변한 나는 룩스 움브라의 코어를 향해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왼손에는 아단이 남긴 검은 해골 지팡이를 들었고, 오른손에는 뱀의 송곳니를 들었다.

쌔애애애앵!

바람이 미친 듯이 얼굴을 할퀴기 시작했다. 마치 면도날 수백 개가 긁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낙하 공격을 위해 200미터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건, 아무리 내가 뱀파이어라도 신체개조가 없었다면 꿈도 못 꿀 짓이었다.

부욱. 찌이익.

공기저항 때문에 결국 망토의 연결 부분이 떨어지더니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손에 든 무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엄청난 악력이 필요했다.

"그으으으윽!"

악을 쓰느라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떨어지던 중간에 룩스 움브라가 이상을 눈치챘으니 말이다.

이 민감한 괴물은 물에 의해 격통을 겪으면서도 머리 위의 위협을 알아채더니, 날 향해 수십 가닥의 촉수를 쏘아 올렸다.

저 아래서 시커먼 기둥들이 줄줄이 올라 오는 게, 마치 대공미사일이 잔뜩 발사되는 것만 같았다.

'이런 젠장!'

낙하 속도를 고려하면 저 굵직한 촉수와 충돌만 해도 몸이 터져나갈 거다. 나는 죽음의 위기 속에서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막 뾰족한 촉수가 날 관통하려는 순간 허리를 틀어 간발의 차로 그것을 피해냈다. 그리고 허공에서 한 바퀴 돌며 기둥 같은 촉수의 측면을 두 다리로 안착해서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촤아아아!

촉수 기둥 위를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가자 점액질이 좌우로 갈라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다른 촉수들이 그걸 두고 보질 않았다. 뾰족한 촉수들이 빠르게 찔러 들어왔고, 나는 재빨리 옆으로 뛸 수밖에 없었다.

퍼억! 퍽!

방금 전까지 내가 미끄러지던 촉수가 다른 촉수들의 공격에 터져나갔다. 놈은 자기 몸도 공격하고 있었다.

터진 촉수에서 혈액과 점액질, 깨진 잔가시들이 허공에 무수히 뿌려졌다.

옆으로 뛴 나는 간신히 다른 촉수에 창을 꽂아서, 목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걸 피했다. 박힌 창촉 때문에 룩스 움브라의 촉수 하나를 길게 찢으며 아래로 계속 떨어졌다.

박쥐 변신은 쿨타임이 있어서 어떻게든 뱀파이어 상태로 끝을 봐야 한다. 지금은 뱀파이어의 초인적인 운동신경을 믿어볼 때였다.

그때 다시 촉수들이 몇 가득 쏘아져 왔고, 간신히 촉수에 터지는 꼴은 피했지만, 충격 때문에 제멋대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이번에 운이 좋았다. 튕겨 나가던 중 근처에 있던 촉수가 발판 역할을 해줬던 것. 나는 날아가던 기세로 측면으로 촉수에 달라붙었다가, 굽혔던 무릎을 피며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제대로 방향을 잡았다. 이대로 떨어지면 룩스 움브라의 코어와 일직선이었다. 나는 왼손에 든 검은 해골 지팡이로 괴사의 광선을 쏘아냈다.

불길한 녹색 광선이 내리꽂히며 아직 여물지 않은 코어의 껍질을 흐물흐물하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오른손에 쥔 뱀의 송곳니를 꽉 쥐었다. 이대로 껍질을 관통하면 된다.

하지만 그 마지막 순간, 촉수로는 더 이상 날 저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룩스 움브라가 아직 다 끌어모으지 못한 마력을 써서 강력한 파괴 마법을 발동했다.

괴물의 코어에서 마치 붉은 레이저 광선 같은 마법이 피할 틈도 없이 작렬했다. 그 마법은 문외한이 봐도 엄청난 위력을 담고 있었다.

원래라면 내 필살의 공격은 그 마법에 의해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아단 삼촌이 남긴 가호가 하나 있었다.

바로 함께 유적에서 찾은 5대 아티팩트 중의 하나인 달의 펜던트였다. 이 아티팩트는 상대의 마법을 흡수하는 힘을 가졌다. 다만 특이한 건 달의 위상 변화에 따라 그 능력이 달라진다는 것.

다행히 오늘은 보름달이었다.

5대 아티팩트인 달의 펜던트가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는 날이다. 그것은 룩스 움브라가 쏘아낸 파괴마법을 고스란히 흡수해 버렸다.

그것만으로 달의 아티팩트는 흡수 능력을 다 쓰고, 과부하로 터질 듯 진동했지만 충분했다.

이미 다음 순간 나는 창을 찌르며 룩스 움브라의 껍질을 관통하고 있었으니까.

와장창!

어쩐지 두꺼운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몇 겹이나 되는 껍질을 대번에 박살 내고 나는 룩스 움브라의 거대한 코어로 파고들었다.

푸욱!

창과 한 몸이 된 나는 룩스 움브라의 코어를 깨고 한가운데로 진입했다. 온몸이 박살나는 것 같은 통증이 뒤따랐다.

"크윽!"

안쪽은 진득진득한 액체로 가득 차 있어 마치 다이빙을 한 듯한 느낌이었다.

사방이 붉은 액체로 가득한 그곳에서 나와 뱀의 송곳니는 해로운 이물질이었다. 급기야 뱀의 송곳니의 창촉에서 시커먼 독액이 뿜어져 나와 주변을 오염시키기 시작했다.

뱀의 송곳니란 이름답게 이 창은 맹독을 뿜어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코어는 더 이상 충격을 견디지 못했다. 맹렬하게 요동치더니 결국 폭발을 일으켰다.

퍼어어어어엉!

나는 끈적한 액체에 휩싸여 공중으로 치솟았다. 한참을 솟았다가 그대로 추락해 바닥을 흐르는 코어의 액체와 함께 산지를 미끄러졌다.

"아아악! 아윽!"

체감상으로는 수백 미터를 액체와 함께 흘러내린 것 같다. 그러다 결국 어느 순간 바위에 걸려 멈췄다.

주변으로는 붉고 슬라임처럼 끈적끈적한 액체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위에 기댄 나는 붉은 액체로 완전히 절여져 있었다.

"하아! 살았군."

다시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최고였다. 코어가 터진 룩스 움브라가 괴성을 지르며 보름달 아래서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다.

크아아아아아!

한때 신이었던 저 끔찍한 살조각은 온몸을 뒤틀더니 결국 견디지 못하고 땅 밑으로 다시 도망가 버렸다. 놈이 자기 힘을 되찾는 과정은 아주 대차게 꼬인 셈이다.

'시발, 해냈다.'

초장에 심대한 타격을 줬으니 이제 룩스 움브라를 공략할 길이 열렸다.

'아니, 결국 날 위해서긴 하지만 너무 대출혈 서비스 아닌가? 스킨크 놈들에게 제대로 뜯어내야겠군.'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스킨크들이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놀란 눈을 감추지 못한 채 날 향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모두 경건하기까지 한 태도였다.

이윽고 족장과 원로들까지 뛰어왔다. 나는 족장을 향해 들고 있던 창을 던져주며 웃어 보였다.

"어떤가? 믿어보길 잘하지 않았나?"

뱀의 송곳니를 돌려받은 족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의 원로들과 눈빛을 교환하더니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왔다.

"왜? 말이 없어?"

쟤가 왜 저리 무게를 잡나 했는데 족장은 무릎을 꿇더니 창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내게 바쳐왔다.

"이제야 저희가 이 창의 주인을 찾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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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신도들(4)

* * *

스킨크들은 땅굴을 잃어버렸기에 산 밑쪽으로 이동해 임시로 머물 곳을 만들었다.

챙겨온 살림살이도 없고, 재산과 가족을 잃었다. 다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들 일족은 이천여 명이었으나 이번 사태의 생존자는 반절뿐이었다. 나도 속으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피해다.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죽은 놈들이 많은가 보군.'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다들 희망을 잃지 않은 얼굴이다. 그건 얄궂게도 내 존재 때문이었다.

"뱀의 송곳니의 새로운 주인!"

"저분이 우리를 인도하실 거다. 스에에!"

스킨크들은 날 보면 숭배를 감추지 않았다. 부족회의에 참석한 나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족장이 설명해왔다.

"당신께선 분명 전승의 영웅이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족장의 말투도 극히 공손해져 있었다.

"내가?"

"네, 전승에 의하면 일족을 구원할 자가 뱀의 송곳니로 영웅적인 업적을 달성할 거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영웅이라 칭하니 스킨크를 번영으로 이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거 가지고? 이 창으로 뭔가 해낼 이는 나 말고도 있을 텐데."

나는 선물 받은 '뱀의 송곳니'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그러자 족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천 년이 지나도 그와 같은 무용을 보일 이는 없을 겁니다. 그렇기에 모두 확신하고 있지요."

"음··· 확실히 미친 짓이긴 했지."

공중에서 수직 낙하해서 코어를 타격하다니, 목숨이 몇 개라도 부족할 짓거리였다. 그냥 떨어져도 어려운데 중간에 촉수의 방해까지 받았다. 다시 생각해도 대체 어떻게 성공했는지 모를 지경이다.

"제 생각에도 당신께선 창의 주인으로 어울립니다. 부디 환난을 겪고 있는 일족을 구원해 주십시오."

나는 솔직히 족장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놈은 진짜로 날 전승의 주인으로 여기는 걸수도 있고, 답 없는 상황에서 강력한 뱀파이어인 날 끌어들이고자 이빨을 터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내가 스킨크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할 일은 하나지.

"룩스 움브라를 물리칠 방법이 있다. 대신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말씀해 주십시오.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가르침을 구합니다."

"간단하다. 너희 일족은 새로운 신을 받들어야만 한다. 그분은 '핏빛 새벽의 여신'이라 불리는 존재시다."

스킨크들의 본심이 뭐든 간에 이참에 놈들이 성녀를 믿게 만들면 내겐 개이득이다.

파리만 날리는 성녀의 교단에 드디어 입교자들이 잔뜩 들어오게 되는 것이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신은 신도가 늘어날수록 강해진다.

'크흐흐흣, 성녀가 강해지면 첫 번째 사도인 내가 제일 혜택을 받는 법이지.'

한데 족장은 내 제안에 난처한 기색이 됐다.

"영웅이시여. 우리는 오래간 섬긴 분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문제는 영웅의 뜻을 따를 생각이 있습니다만, 종교의 문제는 쉽게 결정할 수 없습니다."

종교 얘기는 어느 세계든 민감한 법이다. 하지만 내가 괜히 권한 게 아니다.

"너희가 섬기는 신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죽지 않았나?"

스킨크가 섬기는 신은 '수정유물의 주인 사르자스'라 불리는 중신(中神)으로, 무지갯빛 비늘을 가진 파충류 신이다.

스킨크족 외에 여러 파충류 종족에게 인기를 끈 신인데 모종의 사건으로 사망했다.

이후 그를 섬기던 파충류 종족들은 대부분 배교했지만 스킨크는 여전히 그들의 신앙을 지켰다.

"그분께선 부활할 것입니다. 본디 신이란 불멸자가 아닙니까!"

자기 신이 죽었다는 말에 내내 공손하던 스킨크 족장도 다소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틀린 소리는 아닌데, 언제 부활하냐가 문제지. 확률상 너희 종족이 다 망한 뒤쯤이지 않겠냐?"

"크으윽!"

족장은 분한 표정을 지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이번 일을 처리하는데 내가 섬기는 성녀님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 역시 목숨을 걸어야 하고.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없던 이야기로 하지. 어차피 이 모든 건 너희 종족의 일이니."

나는 구구절절 설득하는 대신 그냥 맘대로 하라고 했다.

"영웅이시여. 그 창의 주인이라면 이건 남의 일처럼 말하시면 안 됩니다. 오늘 수많은 이들이 죽었거늘!"

족장은 노기를 들어냈지만 내겐 공감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서 딱 잘라 말했다.

"멋대로 내게 의무를 지우려 하지 마라. 이 창은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으니까. 너희가 날 영웅이라 하든 말든, 입교하지 않는 한 내게는 남 일일 뿐이다. 다만 측은한 마음으로 조언을 하나 해주면, 둥지를 점령한 고대신만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무슨 소리십니까?"

"다른 봉우리의 종족들이 이번 일을 알게 되면 가만있지 않을걸? 아마 당장 우르르 몰려와 너희를 노예로 잡으려 할 거다. 둥지를 잃어 방어할 장소도 없는데 놈들을 어찌 감당하려는 거냐? 가뜩이나 일곱 봉우리에서 최약체면서."

내 말에 족장과 원로들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이미 놈들에겐 성녀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스스로 정하라. 죽은 신을 계속 섬기고 파멸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신과 미래를 열 것인가."

"······."

"내 사실 너희가 죽은 사르자스를 계속 섬기는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모든 파충류 종족이 그를 버렸으니, 의리를 지켜 훗날 부활했을 때 가장 큰 은총을 받기 위함이 아니냐?"

요컨대, 약소종족이 들어놓은 보험겸 로또인 셈이다.

"우리는 그런 속물이 아닙니다!"

"뭐, 변명은 아무래도 좋아. 다만 그것 때문에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면 몰락 밖에 더 남겠나?"

부족회의는 깊은 침묵에 잠겼다.

"······."

"······."

역시 종교 문제라 그런가 이런 상황이 됐음에도 쉽게 결정을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일족의 운명을 맡겨보겠다는 건 흰소리가 아니었던 듯 족장은 논의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잠시 저희끼리 얘기해 보겠습니다."

"좋다. 하지만 새벽이 오고 있으니 빨리 정해야 할 것이다. 뱀파이어에게 밤은 길지 않다."

"알겠습니다."

이후 놈들은 격렬한 논의에 들어갔다.

"수정유물의 주인 사르자스 님을 섬기는 건 우리의 유산이자, 삶의 방식이오. 어찌 함부로 저버리겠소?"

"그것이 우리 아이들의 생존과 번영보다 중요합니까?

"냉정하게 생각하시오. 우리가 뱀파이어 성녀라 불리는 신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하지만 다른 선택이 없잖소이까! 그대는 죽음을 선택하고자 하시오? 하면 홀로 가시오. 일족의 미래와 함께 뛰어들지 말고!"

"아니, 말이 지나치지 않소!"

한창 논쟁이 이어졌는데 결국 족장이 한 마디가 모두의 마음을 흔들었다.

"나는 계속 일족과 살아가고 싶소. 아이들의 웃음, 광부의 근면함, 갱도의 물소리··· 그 모든 건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오. 그러니 삶을 원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생각하오이다."

듣던 원로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후 결론이 나오기까진 의외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족장이 모두를 대표와 내게 왔다.

"입교하겠습니다. 부디 우리를 멸망에서 구해주십시오."

다행히 어리석은 판단을 하지 않았다.

"잘 생각했다. 다만 입교를 조건으로 신성한 맹세를 해야 한다. 정당한 이유 없는 배교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

이놈들이 이번 일만 해결하고 입장을 달리할 수 있기에 맹세는 필수였다. 아무리 이 세계의 신들이 지상에 관여하지 않아도 맹세로 직접적인 관계가 되면 또 얘기가 다르다. 제재가 가능해지는지라 겁나서 쉽게 말을 바꾸지 못한다.

"부족은 그 요구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정말 저 사악한 고대신을 물리칠 수 있단 말입니까?"

"물론이다. 어차피 물리치지 못한다면 너희가 그걸 이유로 교를 떠나고자 할 테니 말이다."

신이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는 건 배교를 위한 정당한 사유가 된다. 나는 사도이니 신의 대행자다. 내가 나서서 하는 약속은 신이 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분을 믿어보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 신이 될 것이다."

이후 스킨크들이 기원할 상징을 만들기로 했다. 신이 직접 모습을 드러낼 수 없으니 시각적인 상징은 매우 중요한 법이다.

내가 선택한 것은 깃발이었다. 커다란 깃발에 뱀파이어 성녀의 문장을 그려 넣었다. 다행히 나는 원래부터 그림을 잘 그렸기에 아주 그럴싸한 게 나왔다.

'가만···.'

문장을 완성하고 나니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추가적인 작업을 해나갔다.

완성된 문장 옆에 스킨크의 형태를 한 성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일종의 현지화 전략이지.'

나는 스킨크화된 성녀의 뒤로 무지개를 그렸다. 이것은 계산된 노림수였다. 과거 스킨크들이 섬기던 수정유물의 주인 사르자스가 찬란한 무지개색의 비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특징으로 친숙함 준 것이다.

또한 성녀의 몸 또한 도마뱀처럼 길쭉하고 꼬리를 갖게 그려졌다. 척추의 선을 따라 가시를 넣고 의복은 족장의 것을 따라 했다. 물론 더더욱 화려하게 말이다.

완성된 모습에 나도 감탄할 정도였다.

'누가 봐도 스킨크의 수호자야.'

스킨크로 재탄생한 뱀파이어 성녀의 모습은 기이했지만 고결해 보였다. 그리고 이것은 스킨크들에게 극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몰려든 모두는 깃발에 그려진 신성한 모습에 감동해서는 무릎을 꿇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외쳤다.

"핏빛 새벽의 여신을 숭배하라! 이분께선 너희의 새로운 어머니가 되실 테니!"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 스킨크들이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 * *

뱀파이어 성녀는 자신의 황량한 차원에서 지금 상황을 모두 보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생긴 500여 명의 신도들과 그들의 열정적인 찬양에 전율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갑자기 불을 지피고 광기 어린 종교의 장이 된 산지의 모습에서 뱀파이어 성녀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목청이 터져라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건 그녀의 첫 번째 사도가 즉석해서 가르친 것이었다.

"새벽의 부드러운 포옹이여! 우리 어머니, 은총의 핏빛 여신이여. 신성한 여명의 입맞춤이여.

돌보소서, 밤의 장막이 사라지는 곳에서 우리가 춤추고 당신을 숭배하리라."

그 찬송가의 운율은 몹시 장엄하고 아름다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사도가 음악에도 재능이 있었나? 이 정도라니?'

사실 이 찬송가는 그녀의 사도가 지구에 있던 시절 좋아하던 노래를 개사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뱀파이어 성녀는 그 수준 높음에 연신 감탄사만 뱉었다.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였다. 새로 생긴 신도들의 신앙에 덕에 뱀파이어 성녀에게 새로운 힘이 생긴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휘감고 있는 충만함 속에서 근처의 바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바위가 깎이고 쌓아지더니, 근사한 석재 저택이 하나 창조됐다.

비록 그 크기가 크진 않았지만, 여태 지붕도 없이 바위틈에서 거지처럼 지내던 처지를 생각해 볼 때 놀라운 발전이었다.

"집이라니···!"

반신격이 된 이래 노숙이 삶이었던 뱀파이어 성녀는 처음으로 갖게 된 아담한 집에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뱀파이어 성녀는 자신이 하인을 창조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명색이 반신격인데 옆에서 도와줄 사람 하나 없던 처지를 벗어나게 된 것이다. 뱀파이어 성녀는 손을 뻗어 명했다.

"나오세요. 충실한 하인이여."

신의 명령과 함께 새로운 존재가 창조됐다. 그것은 자신의 신을 닮은 근사한 존재였다.

"주인이시여, 당신의 부름에 응하나이다. 저는 새벽의 시종 세티스입니다."

새벽의 시종 세티스는 은색 자수가 들어간 검붉은 로브를 입은 여성 뱀파이어였다. 등에는 박쥐와 같은 날개가 돋았다.

키가 크고 우아했으며 무척 신비한 분위기였다. 다만 밋밋한 은제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진 않았다.

"여신이시여. 언제든 원하는 바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 모습에 뱀파이어 성녀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에 빠졌다. 이제 외로울 때 말을 걸 존재가 생긴 것이다.

'더 이상 혼잣말하지 않아도 돼···.'

정서적인 걸 떠나 실리적인 부분도 있었다. 하인으로 인해 사도를 지원할 방법이 생긴 것이다. 신인 자신이 물질계로 나갈 수는 없다. 하지만 하인이라면 이런저런 조건만 맞으면 보낼 수 있다.

'이젠 사도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겠어요.'

연이어 기쁨을 맛보던 뱀파이어 성녀는 이 모든 게 첫 번째 사도 덕임을 알았다. 그녀는 미안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신으로서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

사도가 청할 때마다 뭔가 내려주긴 했지만 쥐어짜서 준 거라 그리 대단한 능력도 아니었다.

산을 부수는 권능도 아니고 기껏해야 박쥐로 변하거나 의지로 권속을 만드는 정도.

성녀 입장에선 얼마 없는 재산을 퍼부어준 것이었지만 사도를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늘 마음이 무거웠다. 매번 자신이 정말 별 볼 일 없는 신이라는 뼈저린 자각도 함께했다.

그런데 많진 않아도 신도 500명 분의 힘이 생겼다. 첫 번째 사도에게 보답해줄 필요가 있었다.

뱀파이어 성녀는 남은 힘을 모두 모아서는 새로운 신성마법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위해 성녀의 힘에 새벽의 기운을 섞었다.

"사도여. 이건 좀 제대로 된 거예요.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성녀는 눈을 감고 조심스레 신성을 직조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부드러운 금빛이 파장처럼 주변에 발산됐다.

처음 사용해 보는 신성마법의 창조였다. 성녀는 자신의 첫 번째 사도를 생각하며 정성을 다했다.

그녀의 앞에서 신성의 파편이 별가루처럼 반짝이며 뭉쳤다. 그것은 점점 어떤 형태를 갖추더니 정교하고 아름다운 기호로 완성됐다. 신성마법이 탄생한 것이다.

"아···!"

눈앞에 떠있는 신성한 기호를 보며 성녀는 흡족해졌다. 그래도 혹여나 문제가 없을까 싶어 하얀 손길을 뻗어 쓰다듬어 봤다.

완벽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그녀의 첫 번째 사도만이 쓰게 만든 유일한 신성마법이었다.

뱀파이어 성녀는 이걸 의식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주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극적인 분위기가 연출되길 바라며 성녀는 신성마법을 첫 번째 사도에게 하사했다.

그러자 한창 종교행사 중인 산지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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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신도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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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에선 한창 종교의식이 진행 중이었다. 재난을 맞아 도망 온 상황이라 뭔가 격식을 차릴 수는 없었지만, 스킨크들은 새로운 신에게 열정을 다했다.

"구원해 주십시오! 스에에!"

"이 고난을 이겨낼 힘을!"

모두가 뱀파이어 성녀에게 바라는 바는 명확했다. 이번 사태의 해결이다. 만약 결과가 시원찮다면 이들은 순식간에 믿음을 잃게 될 터였다. 하지만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아니, 뭐··· 룩스 움브라 퇴치하면 그만이잖아?'

공략법은 이미 알고 있다. 솔직히 예상도 못한 타이밍에 튀어나와 당황스럽긴 하지만 나 같은 공략쟁이에겐 감당할 만한 일이다.

무엇보다 아단 삼촌의 신체 개조가 크다. 비약적으로 강해진 탓에 앞으로 벌어질 다양한 전투가 두렵지 않달까? 나는 감사한 마음에 불티가 날리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삼촌··· 보고 계십니까?'

감수성에 젖어 있던 중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밤하늘 일부가 점점 환해졌기 때문이었다.

'뭐야? 아직 낮이 오려면 시간이 남았는데!'

식겁해서 튀려다가 곧 저게 태양빛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밤하늘의 어둠을 밀어내는 색깔은 붉었기 때문이다.

색조는 다양했는데, 선홍색부터 진홍색까지 마치 그라데이션이 진 것 같았다. 밤하늘에 붉은 벨벳처럼 드리워지는 게 오로라 같기도 했다.

'아름답군.'

뱀파이어에게 빛이란 꺼려지는 것이지만, 저건 달랐다. 오히려 바라볼수록 충만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

웅성웅성.

기이한 사건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자 나는 왼손을 들어 모두의 입을 다물게 했다.

'이건 기적이네. 빼박이다.'

분명 뱀파이어 성녀가 기적을 행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염려가 됐다.

'아니, 살림살이도 궁색하실 텐데···.'

종교의식에 신이 호응해주는 건 무척 고마운 일이다.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 같았으면 신도 500명 정도론 작은 반응도 안 보였을 거다.

한데도 직접 기적까지 일으켜 주니 이게 영세한 개인사업자를 섬기는 맛이랄까?

문제는 그 사장님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점에 있다. 의욕을 내는 것도 좋지만 덜컥 걱정부터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신도 수만큼 신력(神力)이 약간 늘어났을 텐데, 아끼시지. 보니까 나한테 뭐 주려는 거 같은데···.'

딱 봐도 이번 기적은 '하사'였다. 그렇다고 거절하는 건 다시 없는 무례. 기왕 주는 거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하늘의 붉은 오로라에서 거대한 힘이 내려와 날 휘감은 것이다. 주변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스에에에!"

"스엑! 스에에엑!"

놀란 스킨크들이 집단으로 발작을 일으켜댔다. 처음 보는 기적에 단체로 난리가 난 것이다. 나는 기적을 받아들이며 슬쩍 한쪽 눈을 떠서 놈들을 살폈다.

'다들 경외감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군.'

집단적으로 숨을 헐떡이며 방방 뛰고 있었다. 확실히 의식이 진행될 때 기적이 임하니 효과가 아주 제대로다.

이제 스킨크들은 한동안 자신들의 새로운 어머니를 열심히 부르짖을 터였다.

잠시 뒤에 기적이 끝나자 나는 모두에게 외쳤다.

"보아라! 이처럼 우리 어머니께서 함께 하신다! 둥지의 탈환을 준비하라!"

모든 스킨크들이 방방 뛰며 그러겠다고 소리쳐댔다.

* * *

둥지 탈환을 천명했지만 당장 되는 건 아니다. 일단 아침이 오고 있었기에 근처의 바위굴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뱀파이어는 관이 없으면 점점 약해지는데 나랑은 이제 별 상관없는 문제였다.

아단의 신체개조 5단계가 바로 '불면불휴'였기 때문. 덕분에 특별히 빠르게 회복해야 하는 게 아니면 관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고, 심지어 잠도 잘 필요가 없었다.

솔직히 새로 얻은 능력 때문에 들떠서 잠이 안 오기도 했고.

'대박이로군. 성녀가 이 정도로 힘을 써줄 줄이야.'

뱀파이어 성녀가 내린 것은 유니크 신성마법 '새벽의 손길'이었다. 진짜 뱀파이어 성녀란 존재에 어울리는 능력이라고 할까?

이것은 강력한 치유마법이다. 어느 정도냐면 추기경급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 거다.

죽은 자도 일으킨다는 교황과 성녀의 치유력을 제외하면 끝판급이었다. 어지간한 주교나 교구장 같은 놈들의 치유력도 이것에 못 미쳤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있는데, 뱀파이어는 어둠과 죽음의 존재라는 것이다. 생명력을 촉진하는 치유마법을 맞게 되면 오히려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즉, 이런 이유로 이것은 강력한 대(對) 뱀파이어용 공격마법이기도 한 것이다. 언데드인 뱀파이어에게 추기경급 회복력을 발휘한다? 이건 거의 사망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아단이 만든 내 형제들과 싸울 때 아주 유용하겠어.'

아무도 생각 못할 거다. 뱀파이어가 사제도 아니고 치유마법을 쓴다는 걸. 방심하고 있던 놈들에게 갈기면 그냥 뒤질 테지. 그야말로 회심의 한 수다.

"크흐흐흐."

내 입에서 음침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서 뱀파이어 놈들에게 치유력을 발휘해 주고 싶었다.

'어디 길 가던 뱀파이어 없나?'

물론 나도 조심해야 한다. 이걸 자신에게 썼다가는 반송장이 될 테니까. 세포를 산산조각으로 분해해 버리는 극악의 고농도 방사선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새벽의 여신이란 칭호에 걸맞게 이 능력은 새벽녘에 제일 강해진다. 해가 떠서 타죽기 전의 아슬아슬한 순간에 최고조를 찍는 것.

또한 피와 관련된 속성도 있는데, 사용자의 피를 소모해서 위력을 가중시킬 수 있다.

특히 품질 좋은 피를 흡혈한 뒤에 쓰면 새벽의 손길은 더욱 강해지는 것.

'잠재력과 활용 방법이 큰 신성마법이군. 신경 많이 써줬네.'

아무래도 신도가 생긴 게 어지간히 기뻤는지도 모르겠다.

* * *

태양 교단은 왕국 전체에 걸쳐 있지만 서부는 특히 격렬한 시련의 장소였다.

서부에는 아직 교단을 받아들이지 않은 야만인이 많았고, 오크 역시 강성한 세력을 유지했다. 또한 뱀파이어가 가장 득세한 곳도 서부였다.

이래저래 포교에 있어 힘들 수밖에 없었고, 서부를 담당하는 추기경 막시밀리언은 늘 골머리를 앓았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훨씬 더했다.

항시 어려 있는 짜증을 훨씬 넘어선 심각한 얼굴에 급히 소집된 교단의 인물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는 세속성기사 발레나 공녀도 있었다. 이 얼음처럼 차가운 인상의 여성은 뱀파이어 소렌과도 인연이 있었다.

일전의 토벌 작전 때 갑자기 나타난 뱀파이어 소렌에게 성녀의 손가락을 빼앗긴 게 발레나기 때문이다. 당시에 소렌이 성유물을 파괴하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다시 접촉해 봐야 할 텐데요.'

성유물 때문이라도 발레나는 소렌을 만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바쁜 교단 일 때문에 좀처럼 시간이 나질 않았다. 그러다 최근 간신히 여력이 생겼는데 추기경이 모두를 소집했다. 발레나는 마음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 무슨 일인지···.'

물론 겉으로는 아무 감정이 없는 것처럼 무표정했다.

"크흠! 모두 듣게."

추기경 막시밀리언이 꺼내놓은 얘기는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었다.

"모두 미혹의 산을 알 걸세. 뱀파이어 블라르가 다스리는 어둠의 숲 너머에 있는 광대한 땅이지. 이곳에는 일곱 개의 봉우리가 있고 온갖 천박하고 야만적인 종족이 개미떼처럼 바글거리네."

태양 교단은 미혹의 산에 묻혀 있는 부가 탐나긴 했지만,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거리도 멀고 그곳에 자리 잡은 놈들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정이 변했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극비니 모두 발설하지 않도록 하게. 최근 우리는 미혹의 산에서 고대신의 조각이 봉인을 풀고 튀어나왔음을 알게 됐네."

추기경 막시밀리언의 말에 회의장이 술렁였다. 고대신이란 태양의 신을 숭배하는 그들 입장에선 반드시 제거해야 할 적이었으니까.

"그게 정말입니까?"

"대체 언제부터? 상황이 심각합니다."

다들 근심 섞인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추기경 막시밀리언도 이 문제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아직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았네. 미혹의 산까지 당도할 시간을 고려해 보면 즉각 원정대를 파견해야만 해."

추기경 막시밀리언의 말에 회의에 참가한 사제 하나가 물었다.

"그냥 놈들이 스스로 처리하게 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미혹의 산까지 원정대를 파견하는 건 지나치게 위험합니다."

추기경 막시밀리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끼어드는 건 불가피하네. 일곱 봉우리의 천박한 놈들이 조각을 처리하는데 실패해도 문제고, 성공해도 문제니 말일세."

추기경 막시밀리언의 설명에 의하면 고대신의 조각은 내부에 신력을 품고 있다고 했다. 본체에 비하면 극히 일부긴 하지만, 몸이 조각날 때 일부가 딸려온 것.

"신력이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신의 힘이야. 일곱 봉우리의 책임감 없는 것들이 일부나마 신력을 손에 넣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나? 그것은 마치 아둔한 이의 손에 칼을 쥐어주는 것 같네."

"확실히···."

"우리는 그들보다 뛰어난 인간족이자, 진정한 신을 섬기는 선택받은 자들답게 책임감을 갖고 이번 일을 처리해야 하네. 신력은 우리 같이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의 손에 들어와야 제대로 관리될 수 있어! 그것이 이 땅의 평화와 정의를 위한 길임을 확신하네."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는 추기경의 태도에 발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지는 걸 참았다.

'이 자, 신력을 탐내고 있군요.'

발레나는 단순히 평화와 정의 따위가 아니라 더 복잡한 문제가 이번 일에 개입해 있음을 알게 됐다.

'고대신의 신력을 어디에 쓰려고 하는 걸까요?'

발레나가 곰곰이 생각하는 사이 추기경 막시밀리언이 계속 열변을 토해냈다.

"만약 일곱 봉우리의 놈들이 고대신의 조각을 처리하는데 실패해도 문젤세. 사악한 고대신의 조각은 그들을 잡아먹고 힘을 불리겠지. 그 후에는 건드릴 수조차 없을 터. 결국 우리는 책임감 있는 고등종족으로서 그들을 구해줄 의무도 있는 것이지. 다들 이 일이 얼마나 숭고한지 알겠나?"

발레나는 자신이 숭고함이란 단어를 잘못 알고 있나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지만 이번 임무에선 빠지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이 막시밀리언이 그대들에게 진심으로 호소하네. 그러니 가장 엄숙하고 훈련된 자들을 모아 원정대를 파견하겠네. 태양신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추기경 막시밀리언은 원정대 파견을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잠시 의견을 묻는 듯했지만, 교황의 사촌인 그를 거스를 이는 없었다.

결국 다음날 발레나 공녀를 포함한 성기사, 이단심문관, 사제, 수녀 등으로 구성된 21명의 원정대가 미혹의 산으로 향했다.

***

바위굴 속에서 나는 생각을 정리 중이었다. 몇 시간 뒤면 스킨크 부족회의가 다시 열린다.

거기서 룩스 움브라를 처리할 구체적인 작전을 내놔야 했다. 일단 성녀의 기적으로 스킨크들의 민심이 떡상하긴 했으나 룩스 움브라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말짱 꽝이다.

'스킨크족에게 핏빛 새벽 교단이 뿌리내리기 위해선 이번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사실 계획은 이미 나와 있었다. 나는 게임에서 룩스 움브라를 처리해본 경험이 많다. 이렇게 이른 시점에선 처음이긴 하지만 나 같은 고인물에게 못할 건 없었다.

지금 생각에 잠겨있는 것도 디테일한 부분을 다듬기 위해서일 뿐이다.

"음···?"

한창 머리를 굴리던 도중 몸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나쁜 게 아니라 좋은 쪽으로 말이다. 나는 급히 스스로를 관조했고 한 가지 사실을 명확히 알게 됐다.

'뭐야? 보유한 마력이 늘어났는데? 그것도 엄청?'

기적이니 뭐니 정신없어서 이걸 이제야 알게 됐다.

놀랍게도 뱀파이어 성녀는 단순히 '새벽의 손길'이란 마법 하나만 내린 게 아니었다. 그걸 무리 없이 쓸 수 있도록 마력량도 대폭 확장해줬다.

'아니, 이 세심한 배려심 무엇···.'

보통 다른 신이면 능력은 줬으니 마력은 알아서 하라고 할 게 뻔하다. 그렇지만 성녀님은 달랐다. 솔직히 감동이었다.

기뻐하던 나는 몸 안의 마력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던 중 생각지도 못한 일을 맞이하게 됐다.

갑자기 손가락 끝에서, 작지만 푸른 불꽃이 피어오른 것이다. 나는 보자마자 그게 뭔지 알고는 눈을 부릅떴다.

"영혼의 불꽃!"

그렇다. 아단 삼촌이 반신격에 오르고자 평생을 바쳐 연구한 그 노력의 결정체가 지금, 작게나마 실체화된 것이다.

라이터의 불처럼 작은 크기였지만 영혼의 불꽃이 틀림없었다.

"아니, 이게 벌써?"

솔직히 기대도 안 했다. 왜냐하면 영혼의 불꽃은 아단의 신체개조 중 10단계인 끝판왕 기술이기 때문이다. 아직 신체개조를 6단계까지 밖에 쓰지 못하는 입장에서 막막하기만 했다.

물론 언젠가는 되겠지라고 막연히 생각은 했다. 다만 이 신체개조는 게임에선 겪어보지 못한 영역이라 구체적인 사안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성장하면 가능할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눈앞에 실마리가 출현하자 흥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왜 갑자기?'

고민하던 나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이건 분명 뱀파이어 성녀 덕에 늘어난 막대한 마력량과 관련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충분한 마력이 확보되면 영혼의 불꽃도 사용 가능해지는 건가?'

그렇다면 일이 재밌게 됐다.

뱀파이어 성녀는 '새벽의 손길'을 마음껏 쓰라고 마력을 늘려준 건데, 생각지도 못하게 아단 삼촌이 남겨준 문제를 해결할 단서를 얻게 된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길이 보이자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왜냐하면 이 영혼의 불꽃만 있으면 태양 교단의 성직자와 성기사를 쓸어버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태양 교단 놈들은 껍질 단단한 거북이 같은 것들이다. 각종 버프와 갑옷빨로 엄청난 방어력을 자랑하기에 나 같은 뱀파이어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영혼을 직접 타격할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건 단단한 껍질 안의 살을 구워버릴 수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실로 감격적인 혁신이었고, 아단 삼촌의 자애로움에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체개조로 평범한 뱀파이어였던 나를 역대급으로 근본부터 바꿔주시더니···.

아단이 개조한 다른 뱀파이어라는, 히든 보스 개방으로 향후 성장의 발판을 마련해 주고···.

마지막에는 영혼의 불꽃으로 악랄한 태양 교단과 싸울 능력까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단 삼촌, 당신은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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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방(1)

***

영혼의 불꽃 관해서는 돌파구를 찾았으니 꾸준히 연습할 작정이었다. 가까운 미래에 태양 교단 놈들에게 불지옥을 보여줄 날이 올 것 같았다.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동굴을 나서 스킨크 부족회의에 참가했다. 룩스 움브라를 퇴치할 방법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서다.

"다행히 우리에겐 시간이 있다. 지난번에 제대로 타격을 준 덕이지. 독까지 더했으니 회복하려면 애를 먹을 거다."

내가 호언장담하자 스킨크 족장이 물어왔다.

"사도님, 그게 어느 정도입니까?"

"대략 일주일 정도로 본다. 그동안의 대처에 따라 너희의 운명이 결정될 거다."

내 말에 부족회의에 참가한 모두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들을 대표해 족장이 다시 물어왔다.

"놈이 아무리 조각이라곤 하나 저희 힘으론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사도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있다. 해결책이."

내가 단언하자 모두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스에에! 대단하십니다!"

"역시 어머니의 첫 번째 사도!"

모두 당장이라도 골치 아픈 일이 해결될 것처럼 들썩였다. 하지만 룩스 움브라를 퇴치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다. 미리 함정을 설치하고, 룩스 움브라를 밖으로 끌어내어 퇴치한다."

작전은 간단하지만, 실행은 어려운 일이었다. 나를 포함한 여기 모두가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족장이 물어왔다.

"놈을 어찌 밖으로 끌어내야 합니까? 지난번에 일 때문에 쉽사리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본디 상대를 끌어내기 위해선 상대가 원하는 걸 줘야 하는 법이다. 하면 묻겠다. 지금 말썽을 일으키는 놈이 무엇인가?"

"···조각난 존재긴 하지만 일단 신이지요?"

"그래, 그렇다면 신이 원하는 걸 줘야 해."

나는 이게 낚시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했다. 먹음직스러운 미끼로 무언가를 낚는다는 점에선 똑같았다.

"신이 무엇을 좋아할까? 간단하다. 필멸자의 숭배다."

"설마 거짓된 숭배로 놈을 낚자는 이야기입니까?"

"맞다. 놈에게 제사를 지내자. 룩스 움브라가 좋아하는 제물을 잔뜩 바치고 그를 찬양하여 관심을 끌겠다."

"과연 그런 노골적인 계책이 통하겠습니까?"

"통하니까 걱정하지 말도록. 지금 룩스 움브라는 그저 옛 고대신의 조각일 뿐이야. 제대로 된 지성도 없고 오직 본능으로 움직이지."

"이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나는 놈을 끝장낼 수 있는 함정에 대해 설명했다. 그것은 뱀파이어 성녀의 힘을 빌려야 하는 일이었고, 내겐 상당한 위험이 따랐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일단은 룩스 움브라를 둥지 밖으로 끄집어낸 뒤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룩스 움브라에게 치명타를 가할 함정은 내가 책임지고 준비하겠다. 지금 제일 중요한 문제는 제사에 올릴 제물이다."

제물이란 말에 족장을 비롯해 원로들이 대번에 걱정스러운 얼굴이 됐다.

"제물이라 하심은···? 혹시 부족민들을?"

인신공양을 얘기할까 봐 난처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들은 탐욕을 채우기 위해 뭐든 하는 인간과 다르게 동족을 꽤 아끼는 편이다. 하물며 지난 사건으로 반절이나 죽었으니 저런 태도일 수밖에.

"아니다. 룩스 움브라는 산제물 보다는 보석을 좋아한다. 많은 양의 보석을 공양한다면 놈의 관심을 끌기 충분하다."

"보석이라···. 불행 중 다행입니다만, 어지간한 양으론 안 될 텐데 대체 어디서···?"

스킨크들은 둥지에서 쫓겨나서 가진 게 별로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방법은 하나다. 일곱 봉우리에 있는 다른 종족의 보석을 털겠다."

"아니, 정말이십니까!"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달리 방법이 있나?"

"하지만 만약 들켰다가는 놈들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올 것입니다."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설령 나중에 알게 된다고 해도 그건 그때 문제다. 눈앞의 룩스 움브라를 해결하지 못하면 너희 종족의 미래는 없는데 벌써 그것까지 걱정하는가?"

결국 부족회의는 다른 종족의 보석을 턴다는 내 대담한 제안을 받아들였다. 문제는 어느 종족의 금고를 목표로 삼느냐였다. 이 부분에 관해선 의견이 갈려 족장과 원로들이 갑론을박을 이어갔다.

"스엑! 고블린을 노리는 게 맞겠소."

"아니지. 아니야. 그 녹색 피부 놈들의 보석 광산은 고갈된 지 오래야. 코볼트 놈들이 적당해!"

"그것보다 오크의 허를 찌르자."

"그 괴물들을?"

"대신 놈들은 둔하고 경계가 소홀하잖나!"

"아냐! 노움으로 가세!"

마땅한 결론이 안 나는 건 사실 일곱 봉우리에는 만만한 종족이 없어서다. 어디든 쉽지 않았다. 내가 묵묵히 듣고만 있자 족장이 의견을 구해왔다.

"사도께서는 어디가 맞다고 보십니까?"

부족회의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나는 눈을 마주하며, 그들이 지금껏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언급하지 않으려 했던 종족을 꺼냈다.

"드워프. 이번 일은 드워프의 금고를 털어야 한다."

내 단호한 선언에 부족회의의 모두가 경악했다.

"아, 아니! 그건!"

"스에에!"

하나 같이 충격과 당혹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드워프는 일곱 봉우리에서 최강의 종족으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워프는 가장 진보된 기술을 가지고 있다. 또한 개개인이 숙련된 전사이자 장인이며, 다른 종족은 흉내도 못 낼 수준 높은 무구를 갖추고 있다. 전쟁이 장비빨임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은 최고의 병사들이었다.

또한, 타고난 근력과 인내심이 그들을 강인한 싸움꾼으로 만들어줬으며, 원한은 절대 잊지 않고 보복하는 옹졸함이 모두가 드워프를 꺼리게 했다.

사정이 이러니 일곱 봉우리 최약체인 스킨크들에게 드워프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모두가 경악 속에서 침묵하자 족장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드워프를 상대한다는 건 몹시 위험합니다. 사도께서 지혜로운 걸 알지만 그들을 과소평가하고 있는지 우려됩니다."

"날 보는 눈빛에 불신과 불안이 가득하군."

"그것이···."

"이해한다. 일족의 운명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이니 쉽게 결정할 수 없겠지. 하지만 내가 드워프로 정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들어보도록."

내 목표는 드워프왕의 보물창고가 아니다. 거길 들어가려면 드워프를 몰살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노리는 곳은 드워프 광산에 딸린 금고다.

"광산에 있는 금고는 가공되지 않은 보석의 원석을 보관하는 곳이다. 원석은 도시의 장인에게 보내기 전에 거기서 머물지."

"그런 곳이 있습니까?"

"그래. 상대적으로 보안이 허술한 편이다. 룩스 움브라는 보석을 좋아하긴 하지만 딱히 가공된 걸 선호하지 않는다. 보석을 깎고 다듬는 건 어디까지나 우리 같은 자들의 감각에 불과하다."

"스엑! 그렇군요."

"룩스 움브라에겐 보석의 크기와 순수한 성질이 더 중요하다. 그런 면에 있어서 드워프 갱도에서 나오는 보석들은 충분한 가치가 있지."

심지어 내가 그곳을 털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고 하자 부족회의의 분위기가 한 번 해보자로 달라졌다. 좋은 흐름이었다.

'드워프를 털면 나도 한몫 크게 챙길 수 있지.'

드워프의 광산 금고에는 가공되지 않은 보석뿐 아니라, 자연상태의 금덩어리도 상당히 보관돼 있다. 간 김에 그것도 챙기면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을 터.

'드워프제 마법주머니도 유명하니, 그걸 얻어서 금을 잔뜩 넣어와야겠군.'

다량의 금을 얻으면 앞으로 신전을 짓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단 삼촌께서 약초나 책은 많이 남겨놨지만, 평소에 하도 돈지랄을 많이 해서 현금으로 쓸 금은 부족했으니까..

"사도시여. 하면 저희가 어떤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까? 광산을 공격하고자 하십니까?"

족장의 말에 검지를 세워 흔들었다.

"어림없는 소리 마라. 광산 금고가 상대적으로 허술하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드워프 기준이다. 다른 종족의 금고보다 방비가 확실하다. 정면으로 들이받았다가는 드워프의 전쟁 기계에 수도 없이 갈려 나갈 거다."

"끔찍하군요······."

"보석을 터는 일은 내가 직접 나설 것이다. 몇몇 인원만 지원해 주면 된다."

"정말 그것이면 가능하겠습니까?"

"그렇다. 그동안 너희는 내가 지시한 대로 제사 준비에 들어가면 된다."

이번 일은 보람이 있을 것 같다. 탐욕스러운 드워프 놈들의 금고를 터는 건 가히 일곱 봉우리를 위한 부의 재분배라 할 수 있으니까. 짠돌이 드워프 놈들에게 베푸는 미덕에 대해서 손수 알려줄 계기가 되기도 할 거고.

'아마 놈들은 텅 빈 창고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되겠지.'

* * *

뱀파이어 성녀는 자신의 작은 돌집에서 사도가 벌이는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혜로웠기에 사도가 잠깐 언급했던 '함정'이 뭔지 알아챘다.

'초대규모 신성마법을 전개하려는 거군요.'

사도에겐 여러 가지 특권이 내려진다. 초대규모 신성마법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건 신출내기 신격인 뱀파이어 성녀는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구체적인 방법을 몰랐기에 난처했다. 그럼에도 성녀는 의지를 다졌다.

'사도의 기도에 제대로 응답해야 해요.'

열심히 하는 사도를 실망시킬 수 없었다. 뱀파이어 성녀는 결국 집을 나섰다.

"세티스, 한동안 나갔다 올게요."

"네, 여신님."

자그마한 돌집을 시종에게 맡기고 성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는 차원을 가로질러서 한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은 신들의 도시라 불리는 '아룬델'이라는 장소였다.

거대하고 아름답고, 신성하며, 퇴폐적인 신들의 도시. 그곳에는 온갖 차원에서 몰려든 신들로 북적이는 장소였다.

이전에는 차원을 이동할 신력이 없어서 감히 와볼 생각도 못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젠 달랐다.

뱀파이어 성녀는 곧장 아룬델의 대도서관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분명 사도를 위해 초대규모 신성마법을 발동하기 위한 방법이 있을 터였다.

대도서관으로 향하는 동안 도시의 환상적이고 이국적인 풍경이 성녀의 눈길을 온통 사로잡았다. 신좌에 오른 뒤로 줄곧 홀로 지내왔던 지라 눈앞의 광경은 너무나 신기했다.

도시 곳곳에는 화려하고 장엄한 건물들이 많았는데, 모두 각 차원의 만신전을 위한 회관이었다.

-올림포스 향우회.

-북구신들의 벌꿀주 사교회.

-라와 이시스의 아이들.

그 건물들은 황금과 대리석, 또는 전체가 크리스탈로 만들어져 번쩍번쩍했다.

건물 앞에는 사치스러운 차림이 신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며, 여러 시종을 거느리고 있었다.

뱀파이어 성녀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신의 처지를 확인했다.

옷은 단 벌이고 가진 재산은 돌집이 전부다. 신이라고 하긴 너무나 단출했다. 그리고 성녀는 어떤 만신전에도 소속되지 못한 외톨이 신이었다.

순간 성녀는 자신이 신들의 세계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깨닫고 부끄러워졌다. 의욕을 내며 왔지만 시무룩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때 성녀의 배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꼬르륵!

허기로 인한 소리에 그녀는 민망해졌다. 다행히 듣는 이는 없었다. 아니, 보잘 것 없는 신인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처량하게 걷다가 노점에서 파는 신들의 음료인 넥타르를 보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몹시 달콤하니 맛있어 보이네요.'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이 도시에서 화폐로 쓰는 신력의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노점상을 하고 있던 요정이 물어왔다.

"아름다운 여신님. 한 개 드릴까요?"

뱀파이어 성녀는 거의 네, 라고 답할 뻔했다. 하지만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괘, 괜찮아요!"

그리고 도망치듯 거기를 떠났다. 인간 시절부터 달콤한 걸 좋아하던 그녀에겐 너무 큰 유혹이었기 때문이다.

'대도서관에서 한 권의 책이라도 더 빌리려면 돈을 아껴야 하니 어쩔 수 없어요.'

성녀는 가진 돈을 모두 대도서관에 쓰기로 했다. 음료를 하나 사 먹다가 필요한 책을 한 권이라도 못 빌리면 낭패였다. 사도의 요구에 응해 초대규모 신성마법을 완벽히 발동해야 한다.

'아껴야 잘 사는 법입니다.'

최근 약간 살림살이가 풀렸다지만 그래 봐야 신도 500명에 불과했다. 수십만, 수백만 신도를 거느린 부유한 신들과 비교하면 아직도 비렁뱅이 수준이었다.

꼭 필요했기에 시종인 세티스를 만들긴 했지만, 성녀는 인건비로 나가는 신력이 늘 걱정이었다. 가난한 1인 사업자에겐 그 정도도 쉬운 게 아니었으니까.

'아무래도 좀 더 허리띠를 조여야겠어요.'

이후 그녀는 대도서관의 입구에서 가진 돈을 상당히 내고서야 간신히 입장했다.

그곳에 쌓인 책장은 하늘 끝까지 높이 치솟아 있었다. 그 압도적인 광경 속에서 성녀는 의지를 다졌다.

'그래. 해보는 거예요.'

이후 성녀는 책의 바다에 빠져 지냈다. 한 권, 한 권 빌릴 때마다 화폐로 쓰는 신력이 소모됐기에 신중히 골라서 열심히 탐독했다.

그 과정에서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신인 그녀에겐 의미 없었다. 여기서 아무리 긴 시간을 보내도 자기가 돌집을 나섰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었으니까.

뱀파이어 성녀는 일단 책을 하나 잡으면 망부석처럼 움직이지 않고 그걸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완독을 한 뒤 다음 책을 잡기까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곧 대도서관에서도 유명해졌다. 특히 사서들은 이런저런 얘기를 쑥덕거렸다.

"저 여신은 책 하나를 고를 때도 왜 저리도 신중을 기하는 것이오? 그냥 슥 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른 책을 집으면 그만인 것을."

"나도 그게 궁금해서 조심스레 여쭤봤더니 대여비가 부족하다더군."

"뭐? 신이 그렇게 가난할 수 있단 말이오? 생긴 건 다른 여신들이 모두 고개를 숙일 만큼 아름답기에 어떤 귀한 대신격의 따님인 줄 알았소."

"소속된 만신전도 없다더군."

"허허······."

뱀파이어 성녀는 그런 소리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사도의 의지에 제대로 응답하는데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두 달이 흐르자 그녀는 많은 걸 익혔다.

이번 초대규모 신성마법뿐이 아니라 향후 사도가 요구할 만한 것들도 모조리 익혔다.

"후훗, 해냈습니다."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돌집으로 돌아왔다.

"세티스!"

"돌아오셨습니까? 여신님."

"저기, 저 좀 바로 도와주세요. 지금부터 마법진을 그려야 해요!"

"네, 기꺼이."

둘은 밖으로 나가 황량한 차원의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나스카 지상화처럼 거대한 규모였다.

여신의 하얀 성의는 금방 더러워졌고, 고운 얼굴과 손에 흙이 잔뜩 묻었다. 그럼에도 뱀파이어 성녀는 멈출 줄 몰랐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세티스가 물었다.

"그냥 신력을 써 마법진을 그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여신님."

"제가 직접 뛰면 신력을 아낄 수 있는 걸요."

"하지만 여신의 체통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꼴이 말이 아닙니다."

"괜찮아요! 이 신력은 제가 잘나서 얻은 게 아니에요. 사도가 발로 뛰어 벌어다 준 거니 함부로 쓸 수 없어요."

이후 밤샘 작업이 계속 이어졌고 거대한 마법진이 완성됐다. 뱀파이어 성녀는 기쁜 마음에 씩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세티스는 홀린 듯 바라봤다.

"웃는 게 마치 태양처럼 찬란하고 아름다우시군요. 여신님."

"그런가요? 그런 칭찬은 조금 부끄럽네요. 헤헤."

세티스는 이후 주인을 위해 마법진을 점검하다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세상에!'

분명 그녀의 주인인 성녀는 반신격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려진 마법진의 정교함은 가히 중신격의 솜씨 이상이었다.

새벽의 시종 세티스는 성녀에 의해 탄생했지만 마냥 무지한 존재는 아니었다. 시종으로 봉사하기 위해 신들에 대한 지식을 갖고 태어난 까닭이다. 그래서 성녀가 가진 놀라운 재능을 알아봤다.

'반신격이 맞긴 한 건가?'

하지만 성녀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잘 모르는 눈치였다. 오히려 처음 해본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잘 작동하겠죠?"

성녀의 물음에 세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주인은 아직 모르는 듯했지만, 이 마법이 발동하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터였다.

"네, 이 기적이 발동하면 모든 신들이 여신님을 달리 볼 겁니다."

* * *

결국 내 주도로 드워프 광산 금고를 털기로 결정됐다. 이를 위해 나는 스킨크 중 넷을 선별했다.

그중 차라, 스칼릭스, 디커트란 세 녀석은 약초밭 도둑놈 출신으로 모두 내 하인이었다.

네 번째 스킨크인 아타르는 주술사로 이전에 어버버하던 족장 대신해 나섰던 현명하고 차분한 자다. 아타르만이 유일하게 하인이 아니었다.

거기에 나까지 더해 총 다섯이 광산 금고를 터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됐다.

나름 정예가 모이긴 했지만 무시무시한 드워프 소굴로 들어가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번 작전은 내 지식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됐다.

물론 자신 있었다. 드워프 광산 금고는 게임을 하면서 수시로 들락날락하던 장소니까.

"모두 긴장할 거 없다. 우리는 놈들이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남김없이 털어먹을 테니까."

재산을 훔치겠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그제야 스킨크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는 떠나기 전 족장에게 둥지 근처에 있는 '봉인의 석주'라는 걸 절대 건들지 말라고 했다.

"그게 무엇인데 그러십니까? 생각해 보니 정체불명의 돌기둥이 몇 개 있긴 합니다만···."

"옛 유적인데, 룩스 움브라를 억누르는 역할을 해준다. 만약 봉인의 석주가 파괴되면 룩스 움브라는 지금보다 더욱 강해져."

"그런 문제가! 알겠습니다! 석주에 경비병을 배치하겠습니다."

이후 우리는 바로 출발했다.

목적지는 드워프가 점령한 봉우리로, 놈들의 본진이 아닌 '철구덩이'라 불리는 광산마을이다.

우리는 밤에만 이동했고 여정은 이틀이 걸렸다. 철구덩이는 주변의 산악지형과 드워프의 건축술이 멋지게 결합한 장소였다.

'망할 드워프 놈들. 무슨 광산마을도 근사하게도 만들어 놨네···.'

대개 광산마을이라 하면 너저분한 작업의 현장이기 마련인데, 드워프들은 달랐다. 잘 방비된 요새를 방불케 해서 감히 누구도 저곳을 털 엄두를 못 낼 것 같았다.

'하지만 난 다르지.'

철구덩이를 터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도둑기술을 배워 두고두고 노래될 업적을 세우기 위해 침투하는 것이나, 마법의 도움을 받는 법, 신분을 위장해 잠입하는 법, 드워프들도 당황시킬 노움의 기술을 동원하는 것까지 선택은 다양하다.

각기 장단점이 있는데, 현재 내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은 따로 있었다. 마침 늙은 스킨크 주술사 아타르가 궁금증을 표해왔다. 나는 그런 그에게 물었다.

"사도께서는 어떻게 저 광산마을을 공략하실 생각입니까?"

"아타르, 단단한 적을 무너뜨릴 때 가장 효과적인 게 뭔지 아나?"

"무엇입니까?"

그 말에 나는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답했다.

"바로 내부의 배신자를 이용하는 것이다."

조직에 불만이 있는 인물을 회유해 배신하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 주특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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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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